01. 만남
하루를 마친 서해의 책상 위에는 여러 국제 학술지의 최신 논문들이 흩어져 있었다. 서해는 뻑뻑해진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그제야 눈꺼풀이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해는 온종일 고개도 들지 못하고 태블릿 속의 PDF와 씨름했지만 결과물은 겨우 몇 줄 추가 인용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런 날에는 정말 기운이 빠졌다. 괜히 워드패드 첫 장부터 화면을 스크롤하며 이때까지 썼던 내용을 훑어 내렸다.
답답한 마음에 의자를 빙글 돌려 연구실 한쪽으로 시원하게 뚫려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학교는 벌써 어두워진 지 한참이었지만 굳이 시간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시간을 확인해 봤자 마음만 조급해질 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중앙로 좌우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술정보원은 지금 시간을 잊은 듯 불이 가득 들어와 있었고. 단과대학 건물에서도 불빛이 드문드문 새어 나왔다.
마주 보는 단과대학 3층에서 자신과 같은 노예 1, 2, 3이 누군가의 손발이 되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개미들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을 저렇게 열심히 할까 잠시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책상에 엉망으로 어질러진 음료와 초코바 껍데기 같은 것들을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연구실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학생이 남아있을 리 없었고 동기들이라면 문을 벌컥 열고 툴툴거리며 바로 들어왔을 터였다.
서해는 서둘러 문으로 달려갔다. 노크 강도와 간격으로 봤을 때 자신의 논문 심사 중 부심을 맡아줄 장 교수임을 알아챘지만 모른 척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이 문을 활짝 열었다.
“네, 권 교수님 연구실입니다.”
“아, 서해야. 아직 연구실에 있었구나. 졸업 논문 진행이 잘 되어가나 싶어서 와봤다.”
“교수님, 여기까지 찾아주시고…. 논문 지도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어떻게 인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서해는 고개를 숙이다 못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장 교수에게 인사했다. 장 교수 뒤편에는 공과대학 소속 중 장 교수 라인을 타고 있는 교수진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함께 계신 줄 몰라뵙고 장 교수님께만 인사드렸습니다.”
“응, 아니야. 이번에 장 교수님께서 서해 학생 졸업논문에 대해 얼마나 칭찬을 하시던지. 궁금해서 와봤어.”
“부끄럽습니다, 교수님. 다 교수님들께서 잘 지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곧 있을 박사 과정 입학 면접에서 뵙게 될 교수진 중 일부였다. 장 교수 라인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한 서해는 지도 교수의 라인과 별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교수진들은 듣기 좋게 포장된 서해의 말 한마디에 엄청스레 좋아했다. 장 교수는 손에 들고 있던 도넛 박스를 서해에게 건네주었다. 요 며칠 사이에 서해에게 자주 찾아와 아메리카노, 도넛 등을 건네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머리 쓰다 보면 당 떨어질 때가 많지. 나도 그맘때 많이 그랬어. 먹고 해, 먹고.”
“교수님, 매번 이렇게 챙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단과대학 브레인인데 이 정도는 챙겨야지. 어서 받아, 팔 아파.”
“잘 먹겠습니다, 교수님.”
“그래그래. 모쪼록 잘 부탁해. 우리 단과대학에서 SCI급 논문 올릴 수 있는 석박은 몇 없으니까. 이학대학에서 어찌나 자랑질해 대는지. 서해만 믿고 이 늙은이들은 퇴근함세.”
“살펴 가세요, 교수님. 내일 뵙겠습니다.”
장 교수 라인은 해외 학술 저널 여기저기를 언급하며 왁자지껄하게 퇴청했다. 혼자 남은 연구실은 조용했다. 복잡한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논문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서해는 더 굴러가지 않을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장 교수가 주고 간 도넛 박스 안에는 고급 제과점에서 만든 것 같은 빵이 가득 들어있었다.
초콜릿 도넛을 손에 쥐고 베어 물던 서해는 상자 안에 가지런히 들어있는 작은 편지를 보고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편지에는 장 교수 연구실에 신입으로 들어온 학생이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며 또박또박 적어놓은 짧은 글이 보였다. 서해는 착잡해진 마음으로 도넛을 씹어 삼켰다. 돈 봉투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 도넛 박스를 건넨 학생과 같은 신세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적어도 이곳 연구실에서 필요한 학생이 되어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문헌 조사에 추가로 인용할 논문을 찾지 못한 서해는 방향을 돌려 데이터 분석 파트를 정리하기로 했다. 문헌 조사에 더 매달리기에는 남은 시간이 촉박했다. 제일 자신 있는 부분을 먼저 해결한 뒤 앞부분은 남은 시간을 나누어 마무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도넛을 씹어 넘기는 서해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엑셀로 만들어진 코딩 시트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수백 개의 인터뷰 응답 표가 보였다. 마치 서해의 성격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란 없이 꼼꼼하게 채워져 있었다.
SPSS 통계 프로그램으로 데이터 분석을 시작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서해는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데이터를 분석했다.
연구 모형의 가설 검정은 성공적이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그제야 웃음기가 돌았다. 각 변수에서 산출된 유의한 데이터들을 보는 서해의 표정이 조금씩 풀려갔다.
데이터 분석 자료를 저장한 뒤에야 깜짝 놀라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지하철을 타려면 아슬아슬했다. 서해는 급히 노트북을 종료하고 가방을 멘 채 뛰어나왔다.
* * *
10분을 내리 멈추지 않고 달렸다. 지하철역에서 겨우 집까지 가는 막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출발하자마자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서해는 1분도 지나지 않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쪽잠에 빠졌다.
내릴 역이 되자 자동으로 눈을 뜬 서해는 부스스하고 지친 표정으로 열차에서 내렸다. 겨울의 새벽 기온은 귀가 아리도록 쌀쌀했다. 코트를 여미고 목덜미를 파고 들어오는 바람을 막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 역에서 15분 정도 걸어가자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주택 거리가 나타났다. 서해는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최대로 키웠다.
이 가난한 동네를 오르는 동안 들리는 싸우는 소리, 우는 소리, 절규하는 소리 등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자신의 처지에 월 8천 원의 결제 금액은 사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석사를 무사히 졸업하고 박사 과정에 입학할 때까지는 투자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고 앞으로 있을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양쪽 어깨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켜올리고 하루를 돌아보았다. 교수진들의 격려가 부담되기도 했지만 응원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일정대로 흘러간다면 박사 과정 진학은 무난히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절로 흘러나오던 서해의 콧노래가 집에 다다라서 우뚝 끊어졌다. 언덕배기에서 갈라지는 삼거리 가운데 위치한 1층짜리 낡은 판잣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문밖에는 새카만 양복을 입은 가드들이 서있었다.
서해는 가방끈을 꽉 부여잡고 자신의 집이지만 자신의 집이 아닌 것 같은 곳으로 걸어갔다.
가드들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서해의 목덜미와 가방 손잡이를 잡아채 질질 끌다시피 해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없이 침대와 책상만 덩그러니 놓인 공간에 고급스러운 그레이 톤의 슈트를 입은 사람이 서있었다. 자신을 후원해 주고 있는 나이브레티 권율기 상무였다.
“씨발, 차도 안 들어오는 싸구려 동네에 이사해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
서해는 갑자기 날아오는 권율기의 두꺼운 손을 피할 틈도 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좁은 방에는 밀려날 공간도 없었다. 그대로 싱크대 옆에 나있는 작은 공간으로 쓸려 들어갔다.
권율기는 서해의 앞에 주저앉아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검고 부드러운 머릿결이 한 손에 들어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가학심이 끓어올랐다. 다시 손을 펴고 서해의 오른쪽 뺨을 연달아 내리치기 시작했다.
“일찍 다녀, 일찍. 내가 이런 곳에서 널 기다려야겠어?”
서해에게 폭력은 늘 익숙했다.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지나갈 일에 죽자고 달려들어 그의 성질을 돋우고 싶지 않았다. 언덕을 올라오며 들었던 마지막 노래를 속으로 따라 부르며 이 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권율기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끊을 때마다 서해의 뺨을 내리쳤다.
“언덕배기라서, 걸어오기도 힘들고, 씨발 와서 보니까, 구두에 흙이, 존나 붙어있는데, 내가 기분이, 좋겠어 나쁘겠어.”
오늘따라 길게 이어지는 폭력에 서해가 몸서리쳤다. 폭력이 익숙하다고 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꽉 깨물려다가 베어 문 입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 박자 늦게 찾아오는 고통이 머리를 뎅뎅 울렸다.
“쿨럭….”
서해는 엉망으로 엉겨 목으로 급하게 넘어간 타액과 피 때문에 반사적으로 기침을 뱉어냈다.
권율기의 재킷 자락에 핏방울이 튀자 마구잡이로 내려치던 손이 순간 멈췄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재킷 자락을 거머쥐고 핏자국을 닦아내려 했다. 길게 뻗은 손끝에는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았다.
권율기는 서해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벽에 붙였다. 그다음에 다가올 순서는 서해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둘러 숨을 들이켜고 입에 남아있던 타액을 삼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짜증 나게 굴어.”
“…으, 웁.”
“씨발. 다 먹어, 먹으라고.”
권율기의 고급스러운 그레이빛 슈트 안에서 시커멓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튀어나와 서해의 입가를 문질렀다. 입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숨을 쉬는 것도, 타액을 삼키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버티며 숨을 들이켰다.
권율기는 서해의 턱과 머리채를 잡아챈 채 손가락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 작은 입을 벌렸다. 이미 터져나간 입가가 강제로 벌어지자 서해의 눈가가 저절로 찡그려졌다. 따끔한 통증을 느낄 틈도 없이 굵은 성기가 입으로 들이쳤다.
“으, 읍.”
머리카락이 뽑혀나갈 것처럼 당겨지다가 다시 벽으로 처박혔다. 목으로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혀가 저절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뱉어낸 권율기는 서해의 머리카락을 쥔 손을 잡아당겨 그의 사타구니로 끌어당겼다. 그는 얼굴에 성기가 비벼지자 반사적으로 기겁하듯 물러난 서해의 뒤통수를 거칠게 잡아챘다.
“컥… 흐, 흡.”
갑자기 목구멍을 열어젖히는 난폭함에 서해가 권율기의 허벅지를 잡고 밀었지만 소용없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로 들어왔고 거친 음모가 아래턱에 잔뜩 비벼졌다.
“씨발, 손 내려. 몇 번이나 가르쳐줘야 알아 처먹을 거야. 입으로 주인님 모실 때는 손바닥을 얌전히 내리라고 했잖아.”
서해는 숨이 막히고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에 겨우 버티며 바닥으로 손을 내렸다. 목 안쪽을 비벼대는 난폭한 손길에 속이 뒤집히고, 혓바닥 전체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몸을 가득 덮었다.
“목구멍 열어. 한두 번도 아니고 씨발, 열라고.”
“흡, 콜록.”
바닥을 긁어내리는 손톱이 하얗게 뒤집혔지만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었다. 입가에는 타액과 피가 섞여 고여 들었지만 권율기의 성기는 사정을 봐주지 않을 기세로 크기를 키워갔다. 목젖 안쪽을 귀두가 툭 하고 건드리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한 번에 귀두까지 입 밖으로 빼낸 권율기는 잠시간의 틈을 주고 다시 목구멍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서해의 머리카락을 세게 쥐어 잡은 채 거센 왕복을 반복했다. 그는 서해의 따뜻한 입속을 마음껏 유린하며 만족스러워했다.
“존나 공부는 그렇게 잘한다면서 이건 왜 맨날 제자리 실력인 건데. 멍청한 새끼.”
“으, 흑, 컥…. 콜록….”
“잘 빨아, 멍청아.”
눈가를 축 내린 채 가만히 순응하는 서해를 보자 아랫배가 찡- 하고 울렸다.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는 서해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권율기는 엉망진창이 된 서해의 이마와 눈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벽으로 밀어 넣을 듯한 허리 짓을 계속했다. 중간중간 서해의 다급한 손이 허벅지와 허리에 닿아올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깊이 찔러 넣을 때마다 생리적인 반응으로 죄어오는 목구멍의 조임이 짜릿했고, 잔뜩 달아올라 붉어진 서해의 눈을 내려다보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귀두가 한계까지 벌어진 목구멍을 벌리고 빠듯하게 움직이는 것을 반복했다. 서해의 입안은 이미 터질 대로 터져 엉망이었지만 숨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권율기는 몇 차례에 나누어 사출했다. 목구멍 깊숙이 박힌 귀두를 빠르게 꺼내며 서해의 얼굴 위로 내뿌렸다. 가지런한 양쪽 눈썹과 단정한 콧대, 엉망으로 터진 입가에 비릿한 정액이 묻었다.
그는 서해의 눈가에 아직 끄덕거리고 있는 귀두를 천천히 문질렀다. 서해의 입에서 기침과 타액이 엉망으로 터져 나와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서해는 눈을 내리감으며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더 떨어져 내릴 곳이 없을 것 같았지만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박사 과정 지원금 취소한다고. 이제 말도 못 알아듣겠어?”
권율기의 비릿한 웃음이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좀처럼 표정이 드러나지 않던 서해의 얼굴에 좌절감, 당황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그는 바지 밖으로 빠져나와 흔들거리는 성기를 서해의 얼굴에 계속 문지르며 말했다.
“재단에서 허가 안 해줄 거야. 너, 혹시라도 허튼짓하다가 걸리면 그땐 진짜 죽고 싶게 만들어줄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사, 상무님. 상무님, 제발. 제, 제발.”
덜덜 떨리는 서해의 손길이 얼굴에 마구잡이로 비벼지던 성기를 양손으로 잡고 정성껏 문지르기 시작했다. 서해의 두 눈에 기어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버텼는지 그가 알 바 아닐 터였다. 권율기는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였고 서해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공부는 그만하면 됐어. 네가 쓰일 데가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
“사, 상무님. 약, 약속하셨잖아요. 약속….”
“무슨 약속. 물에 빠진 새끼 구해 줬더니 정도껏 해야지.”
권율기에게 티끌만 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학교가 서해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게 되었던 그날의 부질없는 약속이 떠올랐다. 유일한 한 가지를 허락받기 위해 감내해야 했지만, 그동안의 노력은 쉽게 뱉어진 말 한마디에 찰나처럼 사라지려 했다.
서해는 하나만 바라보고 있던 것마저 빼앗으려는 권율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 위로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보는 것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문지르던 그의 성기에서 손을 뗐다. 얼굴 앞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간절히 비비며 애원했다.
“상무님,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잘할게요. 정말 잘할게요.”
“글쎄.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들어간 지원금만 얼마인지. 아버지는 무슨 자선 사업을 이렇게도 크게 하셔서는. 난 그런 거 못 봐.”
권율기는 볼일이 끝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낡은 방을 나섰다. 현관 바닥에는 글로벌유니티의 특별 채용 공고가 떨어져 있었다.
“지원해. 네 스펙으로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잔꾀 부리지 말고. 따로 얘기할 때까지 착실하게 다니고 있어. 양심이 있으면 그동안 쏟아부은 돈에 보답해야 할 거 아냐.”
방에 혼자 남은 서해는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서해에게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몇 주간 이어졌지만 그뿐이었다. 죽을 것 같은 느낌만 들 뿐 죽지는 않을 딱 그 정도의 괴로움이었다.
두 달 동안 무슨 정신으로 달려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면 논문을 쓰고, 채용 일정이 다가오면 인적성 시험과 몇 차례의 면접을 연거푸 치렀다.
글로벌유니티의 2차 면접에는 어이없게도 알고리즘 설계와 간단한 IT 서비스 기획이 제출물로 포함되어 있었다. 박사 과정으로 진학이 꺾였다고 해서 마무리를 엉망으로 하고 싶지 않았던 서해는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던 중에 내던져진 같잖은 과제가 달갑지 않았다.
떨어질 테면 떨어지라는 기분으로 아무렇게나 제출한 과제였지만 서해는 오늘 결국 이곳에 서있었다.
임원 면접 대기 장소
석사 지원 면접을 볼 때 샀던 유행 지난 슈트를 입은 서해는 미소를 띠고 인사하며 들어섰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남자 지원자, 여자 지원자가 한 명씩 앉아있었다. 그들은 고급으로 보이는 선이 유려한 슈트를 입고 단정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임원 면접 예정인 지원자 서해라고 합니다.”
“우와, 외자 이름이신가 봐요. 이영인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문지욱입니다. 반갑습니다.”
임원 면접을 앞둔 셋이었지만 긴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자신 있어 보였고 당당해 보였다. 물론 서해는 그들과 다르게 떨어져도 그만이라는 비뚤어진 마음이 8할이었다.
순서를 기다리고 앉아있던 셋은 서먹함을 날려버리기 위해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아나운서 같은 복장을 한 여성 지원자 영인이 먼저 입을 뗐다.
“글로벌유니티에서 대표의 직속 부서를 만들겠다는 채용 공고는 처음이지 않았어요? 혹시 몇 명이나 채용 예정인지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
“저도 이런 특별 채용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는데 막상 해보니 공채랑 다를 것 없더라고요. 공고상에는 0명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어쩌면 여기 있는 모두가 한 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하.”
“우와,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욱 씨랑 서해 씨? 이렇게 부르면 되나? 하여튼 두 분이랑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니까요. 이런 채용에는 동기도 없어서 입사 후에도 낙동강 오리 알 되기에 십상이고.”
신나게 말을 이어가던 남자 지원자 지욱이 비밀을 얘기하려는 듯 서해와 영인 앞으로 몸을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막말로 대표들이야 2년 단위로 갈려져 나가는 시대인데 직속 부서가 좀 위험하긴 하잖아요. 말단 직원까지 잘라내진 않겠지만 그래도.”
“모르죠. 이번에 한국 지사에 신임되는 분이 미국 본사의 회장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회장님 아들이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헐, 대박. 영인 씨, 그런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요? 대박, 완전 정보통.”
영인과 지욱은 아직 입사하기도 전인 회사 이야기로 마치 어제까지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난 듯 수다를 떨어댔다. 서해는 적당히 웃고 맞장구치며 둘의 대화에 응했다.
그때 영인과 지욱이 갑자기 자기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욱 씨랑 서해 씨는 석박 어디서 보내셨어요? 저는 미국 동부 쪽에 있었거든요.”
“영인 씨, 동부 쪽이면… 설마 C대?”
“어떻게 아셨어요!! 저 C대 HCI 출신이에요!”
“반갑네요. 저는 남부에 있었어요. G대에서 석박 5년 보내고, 다행히 부모님이 영주권자셔서 군은 면제받았어요.”
“우와, 지욱 씨 신의 아들이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영인 씨, 그럼 세부 전공도 이쪽이에요?”
“네, 저는 컴퓨터사이언스 연구실에서 4년 동안 있었어요.”
“스펙 완전 빵빵하다. 영인 씨, 면접관 멱살만 잡고 나오지 않으면 프리 패스일 것 같네요.”
“지욱 씨 스펙도 장난 아닐 텐데 그런 말씀 마세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다 같이 만나면 되죠.”
서해는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그들과 같이 서있는 것은 아니었다.
권율기가 새롭게 골탕 먹이는 방식을 찾아낸 것 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영인의 해맑은 목소리가 서해의 귀를 파고들어 왔다.
“서해 씨는 어디 계셨어요? 저희 둘 다 미국에 있었던 게 너무 반가워서 저희끼리만 얘기한 것 같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디 계셨어요. 같은 지역 출신이면 더 친하게 지내고 좋잖아요.”
“아, 저는… 국내 Y대 토박이라서, 석사 졸업 예정자예요.”
“헐, 국내 출신 석사도 임원 면접까지 올 수 있구나….”
마음에 있던 소리를 무심하게 내뱉은 영인이 뒤늦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임원 면접 대기실에 어색한 기운이 가득 들어찬 뒤였다.
서해가 적당히 웃어넘기며 한쪽으로 비켜 앉자 둘은 작정한 듯 서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을 감으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했다. 어차피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고 부러워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었다.
다만 오늘의 면접에 들러리를 서게 된 것 같아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불합격 소식을 들고 달려올 권율기를 상상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영인 지원자부터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영인이 하이힐 소리를 또각이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면접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서해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두 시간 동안 있었으면 논문을 조금이라도 더 다듬을 수 있었을 텐데,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연구실에 돌아가서 정리할 내용을 천천히 더듬어 내려갔다. 교수님께 박사 과정 진학을 취소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박사 TO를 자신이 잡아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망하실 교수님의 표정이 머리에 그려져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영인이 대성통곡하며 나왔다. 그녀가 임원 면접장에 들어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서해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울고 있는 영인에게 다가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벌써 영인과 가까워진 지욱이 영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영인 씨! 왜 그래요, 면접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흑… 흐윽. 면접관이 제 연구논문과 졸업논문이 엉터리라고, 쏘아붙이는 바람에, 흐어엉.”
지욱과 영인을 바라보던 서해의 표정이 탁- 하고 풀어졌다. 지욱이 영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은 차가웠다. 면접장 안에서 있었던 일을 미리 알고 대비하려는 그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맥이 풀린 서해는 둘과 거리를 벌린 채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사람이 누군데 연구 논문이 엉터리라고 하는 거예요. 학술지에 실린 논문 아니었어요? 영인 씨, 괜찮을 거예요.”
“맞아요. 게재 끝난 논문인데. 진짜 너무해요. 얼핏 보면 우리랑 몇 살 차이 안 나게 생겼는데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아무거나 다 물어보는데 잠깐 대답 막히면 막 쏘아붙여요.”
“여기 물 마시고 진정해요, 영인 씨.”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서해 지원자,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서해는 등 뒤에 정신없는 둘을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단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에 안내자를 따라나섰다. 복도를 따라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에 붙은 A4용지가 보였다.
임원 면접 장소
짧게 두 번 노크한 뒤 방으로 들어서고 바로 90도로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보자 단 한 명의 면접관이 커피 테이블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문에 붙어있던 면접 장소 안내문이 없었다면 또 다른 면접 대기 장소인 줄 착각할 만큼 젊은 외모였다.
당황한 서해가 문 앞에서 가만히 서있자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해 씨? 오늘 면접을 진행하게 된 글로벌유니티 한국 지사 대표 로건 밀러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외국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대표는 분명 한국어를 하고 있었다.
서해는 빠른 걸음으로 커피 테이블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자리 앞에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다.
고개를 들자 단정한 눈썹과 반듯한 이마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눈매와 콧대가 보였다. 잘 갖춘 슈트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쿼터백이나 아이스하키를 했을 것 같은 두꺼운 상체를 숨길 수는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킨 서해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손에 든 태블릿을 좌우로 넘기며 무언가를 살피는 대표를 주시했다. 이런 면접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서해를 쳐다보지 않고서도 당황스러운 그 표정을 읽은 듯한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면접 방식이 조금은 독특한가 봅니다. 모든 지원자가 비슷한 반응인 거 보니.”
“죄, 죄송합니다. 솔직히 면접 자체가 처음이기도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유형의 면접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솔직한 대답이네요. 서해 씨가 제출한 지원서처럼.”
칭찬인 듯 비난인 듯 오묘한 그의 말에 적당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커피 테이블에 금방 침묵이 찾아왔다. 뻘쭘해진 서해는 자신의 앞에 마련된 아메리카노를 들어 목을 축였다. 적당히 따뜻한 음료가 몸에 들어가자 긴장이 살짝 풀렸다.
“Y대 출신입니까.”
“네.”
“과에 이런 후배가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내가 석박은 미국에서 따는 바람에.”
“…선배님이십니까?”
“맞습니다. 장 교수님, 권 교수님 다들 잘 계십니까?”
“네, 두 분 다 계십니다. 권 교수님은 제 지도 교수님이시고요.”
“이렇게 후배를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 선배라고 생각하고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서해 씨가 했던 연구 과제나 논문에 관해 물어보고 왜 그렇게 설계했는지만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킹은 부드럽게 진행되었지만 본면접에 들어서게 되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서해는 본인의 연구 과제의 민낯이 벗겨질 만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질문에 여러 차례 얼굴이 붉어졌다. 연구 논문의 프레임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왜 가져왔는지, 가설 검증의 오류는 없었는지 끈질긴 질문이 이어졌다. 자신이 잘 아는 것을 대답하는데도 식은땀을 흘릴 만큼 긴장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연구 논문의 주제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주는 사람을 만난 흥분감이 더해졌다. 면접이라는 것을 잊고 그동안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대표는 서해의 생각이 꺼내질 때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응시했다가 서해의 말이 끝나면 그의 생각도 꺼내 놓기를 반복했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서해와 대표는 면접 마지막에는 연구 주제를 두고 토론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면접이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대표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두고 서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질문만큼이나 집요한 시선이 이어졌다.
대표의 시선을 피한 서해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커피 컵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직전에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더듬댄 자신의 모습이 기억나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대답할 일이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미있네요. 면접자 중에 이런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서해의 표정이 더욱 알쏭달쏭해졌다. 자신과 얘기한 연구 주제는 데이터 분석과 알고리즘 체계만 잔뜩 적혀있는데,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다시 들어 바라본 대표의 얼굴과 상체 뒤로 당당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 같아 살짝 위축됐다.
“지금 당장 채용하겠다고 하고 싶은데, 아쉽게 여기 채용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서해 씨 뒤로 한 명이 더 기다리고 있고 내일과 모레에도 임원 면접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는 자신의 앞에 앉은 말간 얼굴의 면접자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요령 없이 써 내려간 지원서만큼이나 솔직한 지원자였다. 잘 보이려는 노력보다는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이 명확했다.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굽히지 않고 얘기해 나가는 모습은 앞으로 그가 요청할 업무의 적임자로 보였다.
그는 서해를 당장 옆에 앉혀두고 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너무 기다리지는 말아요. 서해 씨 뒤에 더 좋은 지원자가 있으면 연락이 가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들려온 칭찬을 믿을 수 없어진 서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권율기의 강압으로 면접을 진행하게 된 회사였지만 면접관의 마인드나 사고방식 자체가 꽤 비슷하게 닿아있었다. 앞서 진행된 1차, 2차 면접과는 달리 어느 랩실과 조인트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박사 진학이 어그러진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지원한 회사였다면 반드시 입사해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만남이었다.
* * *
글로벌유니티의 특별 채용 절차가 끝난 이후, 서해는 석사 연구실에 복귀해 졸업 논문을 마무리하는 데 올인했다.
학술지에 제출할 수 있는 마지막 논문이 될 수도 있는 졸업 논문에 온 정성을 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해는 평소에도 그랬지만 한 자 한 자 더 공들여 논문을 써 내려갔다.
모든 과정이 작성된 후 마지막 장이 남았을 때, 서해는 이상할 정도로 집중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다잡아가며 겨우겨우 논문을 마무리했다. 20대를 꼬박 바친 공부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쉬워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패배자처럼 돌아서게 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었다.
서해는 자신이 작성한 논문 8만 자를 읽고 또 읽고, 퇴고하고 또 퇴고했다. 오탈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인용된 논문 순서가 어그러지지는 않았는지, 잘못 들어간 내용은 없는지 반복해서 확인했다.
다시 확인할 내용이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봤지만, 손에서 논문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서해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기가 고개를 쑥 빼고 서해를 바라보았다.
“서해야, 너도 아직 볼 게 남았어?”
“아, 응. 발표 자료 워싱하는 중이야.”
“진짜 꼼꼼하다. 나 같았으면 진작에 집에 가서 잤을 거야.”
“다듬어야 할 것 같은 게 계속 보이네. 너는 어때?”
“완전 초치기 중이지 뭐. 제본도 내일 새벽에 들어가.”
“나는 거의 끝났는데, 뭐 도와줄 것 있어?”
“아냐, 피차 힘든 마당에 누가 누굴 도와줘. 너도 참.”
서해는 의자를 마주하고 앉은 동기와 힘 빠진 웃음을 주고받았다. 손가락 사이로 펜을 이리저리 돌리던 동기가 말했다.
“괜찮으면 잠시 음료수라도 먹고 올래? 머리가 굳어버린 것 같아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응, 좋아. 그러자.”
바퀴 달린 의자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뒤에 걸려있던 연구실 후드티를 입고 불 꺼진 복도를 나섰다. 냉랭한 복도에는 슬리퍼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둘은 엘리베이터 앞에 배치된 자판기 앞에 멈춰 섰다. 동전을 밀어 넣고 음료를 선택하자 캔이 퉁-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기는 서해가 건네는 캔을 받아들더니 차가운 음료를 곧장 원샷했다.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는 동안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우리 2년 동안 그래도 진짜 고생 많았다. 그렇지?”
“그러게.”
“쉼표 하나 찍고 다시 박사과정 시작하는 거니까, 너도 나도 조금만 힘내자.”
서해의 손에 있던 캔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논문 발표가 끝나면 동기에게도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깜박하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 미안했다.
“그런데 내일 발표 순서는 어떻게 잡았어? 나 지금부터 정리 들어가야 하는데 감이 안 잡혀서.”
“아, 그거. 나는 간단하게 구성했어. 연구주제 설정하기 전에 가졌던 의문점 먼저 서론에 배치하고….”
서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불이 꺼진 복도에는 서해의 잔잔한 목소리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졸업 논문 최종 발표 날이 밝아왔다. 서해는 단과대 지하에 있는 인쇄소에서 제본한 논문 열 권을 찾았다.
다섯 권은 논문을 심사해 주시는 교수님들께 드릴 예정이었고, 세 권은 연구실에 기증할 예정이었다. 한 권은 자신이 가지고, 마지막 한 권은 어쩌면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글로벌유니티 대표에게 줄 생각이었다. 만약 글로벌유니티의 특별 채용에 합격하게 된다면 그와 졸업 논문에 대해 추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파트가 있었다.
석사 논문 발표장에 들어섰다. 지도 교수를 포함한 다섯 명의 교수진이 강의실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재빠르게 양장된 논문을 교수님들께 돌리며 커피와 다과를 테이블에 세팅했다. 재미없는 8만 자의 중편 소설을 발표하는 동안 인내하고 잘 봐달라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장 교수 라인을 타고 있는 한 교수가 싫지만은 않은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서해는 이런 거 필요 없어. 논문이 재미있잖아, 하하.”
“맞아, 서 교수. 이런 건 안 챙겨도 될 애들이 챙기고, 꼭 챙겨야 할 애들이 안 챙겨서 더 욕을 먹어요. 그렇지 않아?”
“하하. 맞습니다, 장 교수님.”
서해는 밤새 깔끔한 디자인으로 다시 만든 PPT를 오픈하고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리뷰를 진행했다. 잘 웃다가도 금세 심사가 뒤틀리면 앞뒤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다섯이나 몰려 앉아 있었다. 무사히 졸업할 때까지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가설, 연구 모형, 그에 따른 데이터 분석까지 모든 것이 연구 프레임에 딱 맞게 맞춰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허리를 뒤로 젖히고 팔짱을 끼고 보던 교수들도 서해가 분석한 데이터를 설명하고 새로 작성한 알고리즘을 보여주자 책상 앞으로 바짝 몸을 당겨 앉으며 흥미 있게 듣기 시작했다. 교수진은 젊고 파릇파릇하며 천재성을 가진 데다 호감형의 외모까지 가진 학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해의 발표가 끝나자 지도 교수인 권 교수가 만족한다는 듯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치하하는 듯한 그 모습을 꼴 같지 않다고 생각한 장 교수도 겉으로는 축하의 박수를 쳤다. 석사 논문 발표 자리에서 볼 수 없는 굉장히 독특한 모습이었다.
강의실 안에서는 훈훈한 대화가 이어졌다.
“권 교수님, 부럽습니다. 이런 제자가 석사 졸업생이라니요. 박사로 들어오게 된다면 연구실이 든든하겠습니다.”
“아이구, 장 교수님, 아직 부족한 학생입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권 교수님께서 이리 겸손하시니 학생들도 훌륭히 성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교수진들의 화기애애한 반응에 서해는 한숨 돌리고 PPT를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박힌 말이 서해의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스스로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때, 옆 연구실의 장 교수가 서해의 지도 교수에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권 교수님. 서해 논문을 SCI급 학술지에 게재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올해 연구 논문 실적은 걱정 없으시겠습니다.”
“…장 교수! 이 사람, 무슨 그런 말을 학생의 졸업 논문 발표 자리에서 하십니까.”
“아니, 말이 나온 김에… 교신 저자야 권 교수님이 하신다고 해도 나머지 자리는 정해진 게 없는 것 아닙니까. 저희도 좀 살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어허, 장 교수. 학생 앞에 두고. 나중에 얘기하십시다. 오늘 일정 끝나고 한잔하러 가든가.”
서해의 지도 교수인 권 교수는 장 교수를 나무라는 듯하면서도 저절로 올라가는 어깨와 웃음 지어지는 표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푼돈에 불과한 돈 봉투를 들고 와 아양을 떨어대는 평범한 학생 여럿보다 서해 한 명이 남겨준 연구 실적이 백 배는 가치 있었다.
단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해는 감사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속은 씁쓸했다.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자신을 아껴주던 모습이 무임승차를 하기 위한 듣기 좋은 소리였다는 것을 확인한 현실은 슬펐다.
식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해를 단상에 세워둔 채 교수진들은 서해를 나눠 가졌다. 그들은 박사가 된 후 서해가 작성할 논문의 교신 저자 순번을 매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서해는 단상에서 내려와 졸업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는 서명서를 교수진께 차례대로 받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지도 교수의 사인까지 받아든 뒤,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 지도 교수실로 이동했다.
연구실에서 권 교수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서해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얘기하든 권 교수가 많이 실망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박사를 진행하고 낮에는 회사를 다니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 조금 기대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긴장하던 중 문이 열리고 서해의 지도 교수인 권 교수가 들어왔다. 교수실 가운데 어색하게 서있던 서해가 권 교수를 향해 묵례했다.
“서해야, 피곤할 텐데 아직 가지 않고. 어서 가서 쉬어라. 석박사 통틀어 가장 퀄리티 좋은 연구 주제였고 발표 능력도 아주 좋았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음? 학술지 게재 때문이라면 아직 일정이 넉넉하니 조금 쉬었다가 진행해도 될 것 같구나. 너무 연속해서 달려오지 않았니. 다른 학생들처럼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지. 하하하.”
“네….”
실없는 농담을 던지던 권 교수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치고 서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서해의 등을 토닥이며 교수실 가운데 배치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의자 위에 어색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서해의 입술이 몇 차례 들썩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까지 박사 과정 모집일 종료인데, 교학과에서 말하길 서해 네가 아직 지원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석사 논문 일정 때문에 바빠서 그런 것 같은데 오늘 돌아가서 쉬고 내일 서둘러 지원하도록 해. 교수님들이 모두 널 기다리고 계시지만 행정상 절차는 반드시 거쳐야 하니까.”
서해는 책상 아래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타이밍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최악의 반응이 나오지는 않길 바라며 떨리는 입을 열었다.
“교, 교수님. 그게, 사정이 생겨서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 못할 것 같아요.”
연구실에 긴 침묵이 흘렀다. 권 교수는 흥분한 목소리를 누르며 서해에게 차분히 질문했다.
“서해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취업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교수님. 죄송합니다.”
“입학생을 받는 절차를 알면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우리 과 정원은 어찌 채우라고 하는 말이냐. 그것도 신청 마감 며칠 전에.”
서해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취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연구 논문에만 집중해 오던 자신이 뜬금없는 취업이라니.
차분한 척 연기하던 권 교수의 목소리가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서해는 가만히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이고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제야 진짜임을 실감한 권 교수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플라스틱 제본첩과 A4용지를 서해의 얼굴로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날카로운 플라스틱 철이 관자놀이로 날아와 박히는 순간, 서해가 했던 달콤한 상상은 저 너머로 아득히 사라졌다. 파트타임의 수혜가 쉽게 허락될 리 없었다.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아무것도 없는 놈 거둬들여 커리어 쌓아줬더니 이렇게 배신해?”
“…죄송합니다, 교수님. 정말 죄송합니다.”
“괘씸한 놈. 언감생심 파트타임 따위는 생각하지도 마! 애초에 돈 없는 학생은 받는 자리가 아니니 네가 들어올 자리 따위는 없을 게다!”
서해는 2년 동안 애써 쌓아온 공든 탑이 허무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좌절과 실망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익숙했다. 후벼 파듯 아려오는 가슴도 점차 괜찮아질 테고 지나갈 일이었다.
“네놈같이 끈 떨어진 놈이 다시는 학계에 발 못 붙이도록 할 테니 그리 알거라. 네가 잘되게는 할 수 없어도 잘 못 되게는 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
알 수 없는 물체가 서해의 이마와 몸으로 날아왔다. 서해는 난리 통에도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였다. 적어도 지난 2년 동안은 인정받고 다닌 곳이었고 자신에게 진심이었던 스승이었다.
뒤돌아 문을 열고 나서는 뒷머리에 딱딱한 포스트잇 케이스가 날아와 박혔다. 서해는 씁쓸하게 웃으며 권 교수의 방을 빠져나왔다.
권 교수의 연구실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듣게 된 석박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타 연구실 사람들이 서해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서해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서해야, 무슨 일이야. 사고 쳤어?”
“무슨 소리야, 서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권 교수가 뭔가 오해한 거 아니야?”
“서해야, 괜찮아? 얼굴에 핏기가 없는데. 어디 좀 앉아. 곧 쓰러질 것 같아.”
닫힌 문 사이로 신경질적인 권 교수의 전화 통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해가 연구실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권 교수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포닥들이 연구실에 안 보이고 어디 가서 놀고 있어. 당장 들어와! 해외 학술지에 제출할 연구 주제가 나올 때까지 연구실 밖으로 나갈 생각 하지 말고!”
할 말만 뱉어내고 끊어진 전화 소리에 어리둥절한 문밖의 사람들이 서해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서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었으나 속으로는 새로운 가십거리를 물었다는 것과, 상대적인 효과로 자신의 연구실이 조용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이 보였다.
서해는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아 들이쉬고 내쉬던 숨을 잠시 멈추고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이대로 걸어 나가서 학교를 빠져나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허무했다. 자신이 애타게 쌓아온 모든 것이 이렇게도 쉽게 무너져 내릴 모래성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뚫고 나왔다. 공과대학 복도를 달려가는 서해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흐려졌다.
자신에게 남은 건 결국 다시 나이브레티의 권율기 상무였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늘 자신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바닥까지, 한계까지 흔들어대는 그 사람만이 자신의 옆에 남아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오르며 손끝과 발끝까지 맥박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복도를 달려나갔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가득했다.
* * *
서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서해는 애써 끓어오르는 감정을 눌러 내리고 공과대학 연구실로 돌아왔다.
HCI Lab.
2년 동안 문에 붙어있는 것도 느끼지 못했던 명패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서해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문을 열어젖혔다.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연구실의 공간이 보였다.
책상 위는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작은 쿠션이 올라와 있기도 하고, 색색의 텀블러가 종류별로 올라와 있기도 했다. 반대편 책상 위에는 프랜차이즈 커피 컵이 열댓 개씩 올라와 있기도 했고, 과자 박스 안에 달콤한 과자들이 한가득 담겨있기도 했다.
2년 동안 한 자리를 사용했던 서해의 자리는 너무나 단출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모니터, 키보드와 마우스만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책상 한쪽에 마련된 플라스틱 책꽂이에는 서해가 2년 동안 게재한 논문 몇 편과 옥스퍼드 노트, 볼펜 두 자루가 놓여있었다. 정말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은 책상이었다.
서해는 노트북 드라이브에 저장된 자료들을 정리하고, 서랍 안에 한가득 펼쳐진 졸업 논문 참고 자료들을 담담하게 쓸어 모았다. 제법 두툼하게 모인 종이 뭉치들을 책상 위에 내리쳐 튀어나온 모서리들을 정리했다.
연구실 한쪽에 마련된 재활용 더미에 출력물들을 내려놓고 허리를 들어 올리자, 연구실 동기가 문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한 채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거기서 뭐 해, 들어와. 그렇게 보면 나 더 민망해.”
“…서해야.”
서해는 희미하게 웃어 보인 뒤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서랍 가장 아래에 들어있던 박스를 꺼내 자신의 연구 논문 몇 편과 제본된 졸업 논문 양장판 두 권, 그리고 노트와 볼펜 몇 자루를 담았다. 빈 공간에 물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박스 뚜껑을 닫고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의자에 걸쳐져 있던 책가방을 메고 동기를 쳐다보았다. 동기는 수면실에서 자다가 방금 달려온 듯 머리가 엉망으로 뒤집혀 있었다. 2년 동안 연구실에서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서해야, 말도 없이 이런 법이 어디 있냐. 2년 동안 밤낮없이 붙어서 연구하던 사이가 겨우 이 정도야?”
“…그렇게 됐어. 미안해.”
“고민이 있었으면 나랑 술 한잔하면서 얘기라도 하지 그랬어. 너랑 같이 박사 코스 밟으면 걱정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취업한다니 너무 아쉽고 섭섭하다, 정말.”
“혼자서도 잘하면서 엄살은.”
어색하게 웃음 짓는 서해를 마주 보며 연구실 동기는 서해의 책상 위를 쓰다듬었다.
“내일부터 이 자리가 비어있을 거라니, 상상이 안 가네.”
“교수님께서 박사 TO로 누군가 뽑아 주시겠지. 포닥도 여럿 있고. 그리고 네 실력이면 정말 잘해낼 거야. 박사님 되면 축하 파티하자.”
“박사님은 무슨. 아직 입학하기도 전인데 앞날이 요원하다. 아아, 당분간 권 교수님 맞춰 드리려면 장난 없겠다. 지금도 포닥들 달려오고 있다던데.”
“미안해, 정말….”
“아니야, 서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다 자기 앞길 찾아가려고 하는 건데. 아! 연구실 신입들 오기 전에 자리부터 바꿔야겠다. 내 자리는 다 좋은데 낮에는 해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모니터 보기도 힘들고 겨울엔 벽을 타고 찬바람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2년 동안 찬바람 맞은 무릎이 요즘 영 상태가 안 좋아.”
서해는 자신의 자리를 밀고 들어오는 동기를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연구실 안에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은 없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박스를 서둘러 품으로 끌어안은 서해는 동기에게 자리를 내어줬다.
“네가 사용하던 책상으로 옮겨도 괜찮지? 그래도 허락은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이제 내 책상도 아닌데.”
“잘됐다. 노트북이랑 모니터도 바꿔야겠어. 권 교수님한테 노트북 뻑 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네 것만 쏙 바꿔주고 나랑 1년 차 애들 얘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더라고. 내가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진짜.”
“으, 응.”
2년간 서해의 공간이었던 자리 위로 동기의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해는 그동안 자신이 연구실에서 주위 사람에게 이렇게 무심했었나를 돌이켜 보았다. 짚이는 곳은 없었다. 지내는 2년 동안 동기와 후배 모두와 적당히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고 나름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동기가 보여주는 모습이 퍽 생경했다.
“하여튼, 서해야. 이 지옥에서 탈출하는 건 진심으로 부럽다. 난 앞으로 몇 년을 더 굴러야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진짜 부러워!”
서해는 자신에게 아늑한 공간이자 유일한 도피처였던 이 공간이 누군가에게 지옥으로 묘사되고 있음에 슬퍼졌다. 귓가에 동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서해는 조용히 연구실 안을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이곳에서 인정받았던 것만큼 가치 있는 사람으로 빛날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서해는 그런 기회 따위 자신에게 절대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동기는 서해의 웃음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연신 부럽다는 말을 내뱉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교수님이랑 끝은 좀 그렇지만… 졸업 논문도 통과했고 학위는 무사히 땄잖아. 그런 거 보면 너도 참 독해. 교수님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았네. 마치 박사 과정에 입학할 것처럼 교수님을 구워삶고서는.”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사이에 뭘 숨기냐. 이제 속마음 말한다고 누가 교수님께 일러바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텐데.”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알았어, 알았어. 나가서 돈 많이 버는 데 취직하면 나 맛있는 거 사주는 거 잊지 마. 가끔씩 불쌍한 풀타임 박사가 살아있나 확인도 해주고, 고기랑 술도 먹여주고 그래야 해.”
“그래, 연락할게.”
서해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며 동기를 향해 마지막으로 웃어 보였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막말해 가며 작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동기는 서해의 인사치레 말을 진짜로 알아듣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지? 너 약속했다? 내가 맛있는 곳 알아놓을게. 요즘 학교 앞에 새로 생긴 데가 엄청 많거든.”
“응. 나 이만 가봐야겠다. 잘 지내.”
“잘 가, 서해야. 연락할게!”
짧은 인사를 마친 동기는 서해가 연구실 문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등을 돌려 새로운 책상 위에 물건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책꽂이를 오른쪽에 두었다, 왼쪽에 두었다 하며 자리를 살피는 뒷모습에서 들뜬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서해는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공과대학 건물을 빠져나왔다. 석양이 내리고 있는 학교는 평소처럼 아름다웠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중앙로의 흙바닥이 발끝에 부드럽게 감겼고, 좌우로 우뚝 솟아있는 백양목 가지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발길이 가는 대로 교정을 거닐었다. 머릿속으로 지난 7년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지냈던 학부 4년,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던 산업체와 석사 과정까지 20대의 소중한 기억들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 지난 지하철에서 자리는 여유로웠지만, 심란했던 서해는 문 앞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진 화려한 상가 건물을 연속으로 지나고 아파트 단지 몇 곳을 연거푸 지났다. 낮고 낡은 건물들이 뜨막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에야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쳤다는 것을 알아챘다.
다행히 두 정거장만 걸어가면 다시 동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해는 서둘러 지하철에서 내리고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린 길가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박스를 추켜올리고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30분을 쉬지 않고 꼬박 걸은 다음에야 동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매일 오르던 언덕길이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양팔로 끌어안은 박스를 추켜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몇 없는 물건이라 가볍게 생각했는데 한 시간 가까이 물건을 들고 있자 팔이 뻐근해졌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그저 빨리 들어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서해의 발걸음이 툭- 하고 멈춰 섰다. 삼거리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집 앞에 슈트를 입은 사람이 서있었다.
박스를 파고들어 갈 듯한 힘이 손끝을 하얗게 물들였다. 오늘만큼은 권율기를 보고 싶지 않았다. 숨이 저절로 가쁘게 들이켜지기 시작했다. 애써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조절하려 애썼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바라본 서해의 집 앞에 서있는 사람은 권율기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다. 잘 갖춰 입은 슈트를 팽팽하게 당기는 어깨너비와 등허리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슈트 밖으로 딱 맞게 빠져나온 셔츠 길이는 단단하고 긴 팔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시원하게 뻗어진 다리 끝에서 반짝이는 구두가 보였다. 유일한 흠이라면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동안 고급스러운 구두에 묻은 진흙 덩이가 전부였다.
서해는 천천히 집 앞으로 다가갔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는 글로벌유니티의 한국 지부 신임 대표 로건 밀러였다.
서해는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눈앞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을 바꾸고 적당히 웃음을 지으며 대표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서해 씨, 그동안 잘 있었습니까.”
“네, 잘 있었어요. 대표님도 잘 계셨어요?”
“한국에 적응하느라 시차가 좀 있었습니다. 업무 파악도 바빴고.”
서해는 자신의 초라한 공간 안에 대표를 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앉아서 대화를 나눌 곳이라고는 바닥이 전부였다. 대표가 자신의 낡은 방에 들어선 것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뜨거웠다.
서해를 난감하게 하려고 방문한 것은 아니었던 대표는 낡은 집 주위를 살폈다. 담벼락도 없었고 방으로 통하는 대문만 덜렁 놓여있었다. 대문의 오른쪽 벽 앞으로 낡은 평상이 펼쳐져 있었다. 다시 돌아본 서해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앉을 곳이.”
“저기 평상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던 대표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평상을 향해 걸어갔다. 지원서에 적혀있는 주소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평상조차 쓰다 남은 나무 조각으로 이어붙인 엉성한 판자때기에 가까웠다. 평소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그는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지원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잠시만요, 대표님. 여기 앉으세요.”
서해는 서둘러 대표 앞으로 뛰어와 평상 한쪽 구석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서해의 베이지색 면바지 왼쪽 주머니에서 검정 손수건이 나왔다. 손수건을 탁탁 털어서 넓게 펼친 다음 평상 모서리에 걸쳐지게 깔았다.
“표면이 거칠어서 슈트에 걸리실까 봐서요. 미리 말씀 주셨으면 장소를 준비했을 텐데.”
“손수건이 검은색이네요?”
서해는 글로벌유니티 대표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왔다는 것에 당황한 나머지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평상 모서리 위에 놓인 손수건이 주름 잡히지 않게 밀어서 펴고 있던 서해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멈췄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손끝이 떨려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면접 때 봤던 집요한 시선이 서해를 마주 보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손수건을 움켜쥐고 등 뒤로 숨기려 했지만 급히 뻗어온 굵고 단단한 손에 막혀 그대로 밀려났다.
“그냥 두세요. 애써 깔아줬는데 서해 씨 호의를 봐서 기분 좋게 쓰겠습니다.”
대표는 검은색 손수건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긴 팔을 등 뒤로 뻗어 평상을 지지하고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서해를 느긋하게 올려다보았다.
흩어진 까만 앞머리 사이로 하얀 이마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동그란 콧대를 지나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다. 평범한 코트 끝으로 나온 하얗고 긴 손가락까지 모두 눈에 담았다. 마주한 시선의 끝에서 맑고 투명한 검은 눈동자가 그를 사로잡았다.
서해의 호흡이 다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존재가 글로벌유니티의 한국 지부 신임 대표라는 것을 잠시 잊을 만큼 긴장했다. 눈앞의 남자는 검은색 손수건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서해는 그가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고 거리를 벌려 멀어졌다.
“왜요. 내가 서해 씨 아우팅이라도 할까 봐 두렵습니까?”
“…대, 대표님.”
“그런 쓰레기는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삼거리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주택가 창문으로 빠져나온 불빛을 서둘러 살폈다.
누군가 듣고 있지는 앉을까. 서해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사용하던 물건이라 앞뒤 잴 것 없이 꺼내놓은 게 실수였다.
손수건에 담긴 기억이 떠올랐다. 권율기는 공포에 순응하는 어린 서해에게 다가서며 네가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는 말을 하거나, 맞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댔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그가 남기고 간 검정 손수건은 SMer였던 권율기의 영역 표시와도 같았다. 어린 서해가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손이 날아온 것만 기억했다.
검정 손수건의 의미가 SMer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개강총회의 작은 클럽에서였다.
몇 잔의 술을 마신 서해는 실수로 손에 술을 쏟았다.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닦는 서해를 보던 클럽 바텐더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학생이 그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서해는 손수건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느냐고 되물었고, 바텐더는 꼬맹이가 작업 거는 데 넘어갈 마음이 없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검정 손수건의 의미에 대해 검색해 본 서해는 서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검정 손수건을 모조리 쓸어 휴지통에 버렸다. 타인의 의지로 고통 위에 쓰러진 서해는 바닥없이 추락하는 비참함에 몸서리쳤다. 기나긴 시간 동안 몸에 새겨진 폭력의 종착역을 넘겨본 것처럼 아찔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서해를 찾아온 권율기는 검정 손수건이 없어진 것을 보고 서해를 무자비하게 때리며 윽박질렀다. 서해의 수준에 딱 맞는 태그를 왜 버렸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의 공포와 폭력이 아로새겨졌다. 결국 검정 손수건은 서해의 주머니로 다시 돌아와 그를 옭아맸다. 강압적이고 지속적으로 새겨진 낙인 같은 태그는 서해가 성인이 되어서도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힘들게 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갈무리되지 못한 초조하고 불안한 서해의 눈빛이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와 마주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숨겨왔던 과거가 헤집어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가슴속에 큰 소용돌이가 생겨나고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어지러웠다.
어떻게 숨겨온 과거인데, 이렇게 쉽게.
“뭘 그렇게 경계합니까.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박스 좀 쓰겠습니다.”
대표는 검은 손수건으로 우연히 마주하게 된 상황 앞에서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길가의 조명을 받은 매끄러운 피부나 그와 잘 어울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똑 부러지는 보고서와 업무 처리 스킬셋만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다른 의미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업무에 시달려 지쳐있던 대표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시선을 내려 엉덩이 아래로 튀어나온 검은 손수건의 모서리를 보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서해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봉지에서 흑맥주 몇 캔과 다듬어진 과일이 담긴 플라스틱 박스를 꺼내어 올려두었다.
칙-
흑맥주 캔이 시원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대표가 그대로 반 캔을 들이켜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젖히고 맥주를 들이켜는 그의 목젖이 아래위로 시원하게 움직였다.
서해의 눈에 면접 때 보았던 대표의 두텁고 단단한 어깨선이 들어왔다. 그와 반대로 얇게 떨어지는 허리선이 슈트에 덮여 있었고, 맥주 캔을 들고 있는 그의 단단한 팔을 감싼 옷감이 멋지게 주름 잡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평상 바깥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긴 다리와 아래로 드러난 발목, 그리고 고급스러운 구두까지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고급 슈트를 풀 세트로 맞춰 입은 그가 앉아있기에 매우 초라한 동네였고, 낡아빠진 평상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매끄럽게 펼쳐진 이마와 시원한 콧대, 보기 좋게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이 차례대로 서해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대놓고 훑어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서해에게 대표가 맥주를 들어 권했다.
“면접 볼 때는 따박따박 대꾸하던 게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습니까. 계속 서있을 게 아니면 이쪽으로 와서 좀 앉아요.”
낮게 읊조리는 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어진 서해는 뭐에 이끌리듯 평상으로 다가가 맥주를 받아들었다.
맥주 캔을 부딪쳐 오는 그의 손길과 분위기에 이끌려 한 모금 들이켜자 시원한 맛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늘 있었던 참담한 심정을 잠시 털어내기에 딱 좋은 정도였다.
서해가 힘겹게 들고 왔던 종이 박스는 둘 사이에서 훌륭한 테이블이 되어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내려놓고 대표가 펼쳐놓은 과일 중 파인애플을 집어 올려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쓴맛을 덮고 입에 퍼졌다.
대표는 서해가 제법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검은 봉지 안에서 맥주 몇 캔을 더 꺼내 올려두었다. 한입에 남은 맥주를 털어 넣은 그는 새로운 흑맥주 캔을 따면서 서해에게 말했다.
“서해 씨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세요.”
“나랑 같이 일합시다.”
결국, 모든 것이 완벽하게 권율기의 설계대로였다.
종이 박스 옆으로 다 마시고 난 뒤 구겨진 맥주 두 캔이 나뒹굴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서해도 남은 맥주 캔을 비워내고 대표가 올려놓은 새로운 맥주 캔을 땄다. 잠깐 시원했던 맛이 지나가 버리고 움켜잡은 맥주 캔에 맺힌 물방울이 기분 나쁘게 달라붙었다.
“보통의 회사는 합격 통보를 이메일이나 문자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표님께서는 다른 지원자들에게도 이렇게 직접 찾아가십니까.”
“특별 채용에서 합격한 사람은 서해 씨밖에 없습니다.”
“…….”
“면접 때도 느꼈지만, 우리 회사에 지원하고 합격한 게 별로 기쁘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개인 사정이 있어서…. 대표님께서 한낱 지원자에 불과한 사람의 집까지 찾아오신 이유는 뭡니까.”
“나도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원래 성격이 이렇게 직구를 날려대는 스타일입니까?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단도직입적인 성격은 조직 생활에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데.”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배우신 게 공부밖에 없다면 대표님 성격도 썩 좋으신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술기운을 빌려 마구잡이로 내뱉어진 말이 종이 박스 위에 흩어졌다.
대표의 단정한 눈썹이 한쪽으로 밀려 올라가고 서늘한 눈매가 서해를 찍어 누르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대로 합격이 취소되면 더 좋다는 생각으로 막 나갈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했다.
“제 말이 불편하십니까? 아우팅 운운하며 협박하듯 자리를 마련하신 분이 이 정도에 불편해하십니까.”
서해는 차라리 대표가 자신의 말에 화를 내고 자리를 피해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서늘한 표정을 거두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예 대놓고 대표의 직함을 내려놓은 그의 얼굴엔 나른한 쾌감이 올라와 있었다.
“서해 씨,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날 세운다고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을 테니까 발톱 좀 집어넣어요.”
비슷한 부류라는 말이 서해의 머릿속에 날아와 박혔다. 서해는 이렇게 매너 있고 신사적인 그도 어느 순간 권율기처럼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인지, 그 포인트가 어디쯤 있을지 궁금했다.
맥주 캔을 들고 대표를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건 한발 물러서는 말에 서해는 눈을 내리깔고 종이 박스 위의 맥주 캔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례한 건 자신이었다.
한참의 정적이 지난 다음에 서해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실언했습니다.”
“아닙니다.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대표 명함 달고 찾아온 자리인데 내가 모른 척해야 했던 게 맞았습니다. 실수는 내가 먼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박스 안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이렇게 맥주 마시고 있어도 되는 박스입니까.”
“네, 뭐. 이제 상관없어진 물건들입니다. 오늘 졸업 논문 최종 심사 통과하고, 연구실 정리한 박스니까요.”
“그럼 오늘 파티해야 하는 날인데 나랑 이러고 있어도 되나. 약속 없어요?”
서해는 두 번째 맥주 캔을 쭉 들이켜고 빈 캔을 구겨 박스 옆에 내려놓았다. 조명을 받은 맑은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대표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즐거운 날에 마시는 맥주를 쓴 소주 들이켜는 것처럼 마시네요. 그리고 글로벌유니티에서 합격 통보까지 받은 날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입사 조건을 몰라서 아직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인데, 특별 채용인 만큼 보너스 테이블은 별도로 움직입니다. 이 내용까지 듣게 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겠습니까.”
“돈 얼마나 주실 건데요. 저 연구실에서 꽤 인정받는 학생인데요.”
두 캔을 내리 마신 서해의 눈가가 살짝 풀어져 있었다. 어차피 이쪽에서도 맞고 저쪽에서도 맞게 될 거면 적어도 조건 정도는 들어볼 참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밤공기에 어깨를 움츠리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엘리트를 데려오려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죠. 내 밑에 개설된 직속 부서에서 서해 씨가 일해 주면 좋겠습니다. 서해 씨가 특별히 해줄 일이 있습니다.”
“직속 부서요?”
“직속 부서라고 하기 좀 모호한 모양새가 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특별 채용에서 서해 씨 말고는 적합한 인재를 찾기가 어려워서, 시간을 주면 사람은 채용해 줄 테니 도망가지 말아요.”
“저 혼자….”
“끝까지 듣고 얘기해요. 우선 서해 씨의 커리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모두 연관이 될 것 같으니 그동안의 프로파일을 100% 인정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석사 기간과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모두 인정해서, 서해 씨만 OK 한다면 3년 차 대리급으로 입사하게 될 겁니다.”
혼자라는 말에 두려워진 서해가 움찔하자, 대표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인 듯 추가로 사람을 채용해 주겠다는 말을 서둘러 뱉어냈다.
서해는 믿기 힘들 정도로 쉽게 이루어지는 취업에 입을 떡 벌렸다. 대표는 둘째손가락을 들어 서해의 턱을 밀어 올려 닫았다. 얼굴이 붉어진 서해가 입술을 꾹 깨물자 그는 웃으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건당 수임료가 지급될 겁니다. 프로젝트 전체에 할당된 금액에 따라 수임료도 달라질 거예요. 대략 1~1.5%가 될 텐데 이건 그때그때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이 외에는 분기별 보너스가 월급의 500%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기본 연봉 테이블은 본사 지침에 따릅니다. 더 궁금한 것 있습니까?”
흘러나오는 말을 믿기 힘들어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맥주 캔을 쥔 서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프로젝트 수임료라든가 성과와 별개의 분기별 보너스 같은 얘기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서해는 권율기의 압력으로 글로벌유니티에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면 박사 과정만 바라보고 달려온 자신의 인생을 후회할 뻔했다. 금전적, 사회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권율기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으로 심장이 쿵쿵 울려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는 얕은 숨을 집요하게 내려다보던 대표는 손을 뒤로 물리고 서해에게서 멀어졌다. 몸을 물린다고 해서 시선이 거둬지는 것은 아니었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귀티 나는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서해 씨도 글로벌유니티에서 진행하는 공채 오리엔테이션에 함께 참석해서 듣게 될 테니까 그때 물어보세요.”
“대표님,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끝까지 들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까?”
“솔직히… 거절 못 하겠어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감사할 거 없습니다. 어차피 회사란 곳이 돈 주는 만큼 부려먹는 곳인데, 본인이 받아가는 돈 생각해 보고 얼마나 고생할지 걱정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편은 아니어서.”
“대학원에서는 월급도 없이 24시간 일했는데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논문은 나왔습니까? 서해 씨 논문이라면 조금 기대되기도 해서.”
“아, 네. 대표님 드리려고 양장본 하나 더 뽑았어요.”
서해는 맥주 캔과 과일 더미를 내려놓느라 대표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서해가 박스 속에서 양장이 된 졸업 논문을 꺼내어 앞으로 내밀자 그의 표정이 숨겨지며 미소로 덮였다.
“내 것도 준비해 줄지는 몰랐습니다. 이건 술 깨고 맨정신이 되면 재미있게 읽겠습니다.”
“관련된 질문 답변은 언제든 환영이에요. 사실은 대표님이랑 얘기 더 해보고 싶었어요.”
“빨리 읽어 봐야겠습니다. 서해 씨랑 이런저런 얘기를 또 해보려면.”
서해와 대표는 맥주 캔을 들어 맞부딪쳤다. 첫인상과 달리 대표는 붙임성이 좋았다. 신기하게도 그는 서해가 면접 때 잠시 언급했던 논문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의외의 질문들을 받고 깜짝 놀란 서해가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갔다.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들이켠 맥주 한 모금에 복잡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누군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 들키게 되었을 때의 불안감 그리고 무엇보다 큰 자괴감이 서해를 에워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