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귀신의 집 앞에서 미자와 인태, 덕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구 위쪽을 쳐다봤다. 보기만 해도 섬뜩하게 걸린 그림들을 보며 덕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며칠 전 TV에서 놀이공원을 봤고 그걸 본 덕이가 재미있겠다며 영신을 졸랐다. 하지만 영신은 퇴원하고 나서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늘어나 덕이와 놀아줄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그가 인태와 미자에게 부탁했고, 셋은 그나마 사람들이 적은 평일을 선택해 놀이공원에 온 것이었다.
인태와 미자는 자신들이 귀신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미친 듯이 놀았다. 그러다 셋은 귀신의 집 앞에 당도했고, 호기롭게 굴던 처음과는 달리 선뜻 누가 먼저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설였다. 덕이가 구석으로 가서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갈까? 무서워.”
“여차하면 변신해. 변신해서 해치우면 되잖아.”
“됐어…. 변신은 무슨.”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했다. 천호와의 싸움에서 기를 너무 소진한 탓인지 그 후로 꼬리 3개가 사라졌다. 우여곡절 끝에 영신이와 짝짓기를 해서 2개는 나왔는데 1개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맞아. 너 이제 구덕이가 아니라… 팔덕이지.”
놀리는 듯한 인태의 말투에 덕이가 눈을 가자미처럼 뜨고 노려봤다. 미자가 그만하고 들어가자고 타박했고, 앞쪽에 있던 직원이 혼잣말하는 덕이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바라에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어졌다. 덕이가 손목에 찬 이용권을 보여주고 귀신의 집으로 들어갔고, 미자와 인태가 아무것도 없는 손목을 직원에게 흔들어 보이고서 그 뒤를 따랐다.
밖과는 다르게 어두컴컴한 실내에선 이상한 소리가 났다. 흐느끼는 소리, 끼히히 하고 웃는 소리. 덕이와 인태가 바싹 붙어 긴장한 얼굴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하얀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옆쪽에서 확 튀어나온다.
으악! 둘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막 달려나갔다. 서로 옷을 잡아당기면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여기저기서 귀신들이 튀어나온다. 덕이가 저리 가라며 팔을 휘저었고 인태도 욕설을 내뱉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뛰다가 걷다가 하다 보니 어느새 둘은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인태야! 진짜 무서워.”
“아, 씨발, 오줌 쌀 뻔했네. 근데 미자 어디 갔냐.”
덕이가 뒤를 돌아봤다. 제 뒤에서 느긋하게 오던 미자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안에서 기절한 게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평소 그녀를 떠올리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출구가 열리더니 미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에서 나온다. 그걸 본 인태가 다가와서는 왜 이제야 나오느냐고 물었다.
“안에서 뭐 했어?”
“그냥 좀 살펴봤어.”
“뭘.”
“대충 어떤 식으로 영업하는지 봐야 할 거 아냐. 근데 별거 없네. 우리가 훨씬 낫다.”
그 말에 인태가 입꼬리를 억지로 당겨 웃었다.
“말이라고 하냐. 별로 무섭지도 않던데.”
“그래? 뒤에서 보니 덕이보다 네가 더 빨리 도망가던데?”
“야. 무슨. 참나. 그냥 구더기한테 장단 맞춰 준 거지. 내가 겨우 저딴 걸로 쫄 거 같아?”
호기롭게 말하는 인태를 보고 덕이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조금 전에 오줌 쌀 뻔했다면서 미자한테는 용감하게 보이고 싶었나 보다. 덕이가 미자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단하다, 미자. 최근에 미자는 항상 기분이 좋아 보였고, 뭐든 열심히 했다. 종종 예주를 보러 다녀왔는데 그 다음 날은 유독 더 기분이 들떠 있었다.
인태는 잘된 일이라고 했지만, 덕이는 기쁘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켠이 조금 아려왔다. 영신은 예주가 미자의 아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강지훈이 천호일 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덕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배고파서 잠깐 다른 생각 했어.”
“그래? 우리 그만 놀고 집으로 갈까?”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잖아.”
“야. 그러지 말고 다음엔 클럽을 가자. 여긴 재미없다.”
인태의 말에 덕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에 우림에게 대충 듣기로는 클럽은 잘생기고 예쁜 청춘 남녀들이 모여서 춤을 추는 곳이라고 했다. 우림은 거기에서 손님들에게 약 같은 걸 팔기도 했었는데, 그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나중에 한번 데리고 간다고 하더니 그 뒤로 얘기가 없었다.
하긴 이젠 죽어버려서 그럴 수도 없겠지만. 옛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미자가 혼자 앞서가는 게 보인다. 보아하니 이번엔 공중에서 360도 도는 놀이기구였다. 인태가 보자마자 헛구역질을 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덕이가 재미있겠다며 뒤쫓아갔다.
***
휴대폰 속 사진을 보는 영신의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덕이가 낮에 인태랑 미자, 셋이서 놀이공원에 다녀왔는데 죄다 혼자 찍은 사진뿐이었다. 옆에 인태랑 미자랑 있다면서 설명해줬지만, 눈에 보이는 건 혼자 즐겁게 웃고 있는 덕이 뿐이었다.
귀신의 집에 들어갔다가 인태랑 비명 지르며 뛰쳐나온 이야기를 하며 덕이가 한 손에 오이를 들고 배를 잡고 뒹굴었다. 영신이 그런 덕이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재미있었어?”
“응. 엄청. 다음엔 너도 꼭 같이 가자.”
“그래.”
선뜻 그러자는 영신을 보며 덕이가 신이 나서는 곁에 바싹 붙어 앉아 몸을 기댔다. 아삭, 오이를 베어 물고 나서 테이블에 놓인 영신의 노트북에 시선을 던졌다. 영신은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거기엔 사람들의 이름과 기타 자세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친구.”
“누구 친구?”
“언제까지 귀신들이랑 지낼 순 없잖아.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법도 배워야지.”
덕이가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영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제 친구를 구하려고 한다는 걸 깨닫고는 눈이 살짝 커진다. 전에 지나가는 말로 친구라도 있으면 너도 좀 낫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렇다고 대답하긴 했는데, 친구를 이렇게 구할 줄은 몰랐다.
“혹시 내 친구 구하는 거야?”
“뭐. 비슷해.”
“얼굴도 안 보고 모르는 사람과 친구를 하라고?”
“최대한 네 성향이랑 맞춰서 골라볼게.”
영신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말 그대로 대행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었다. 덕이에게 사회성을 길러주고 낮에 심심하지 않게 놀아주면 됐다. 천호 때문에 엉망이 된 사업장을 복구하느라 당분간은 같이 있어주지 못할 것 같아 택한 방법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덕이가 노트북 화면을 유심히 바라봤다. 인태와 미자로도 충분한데. 그래도 굳이 있어야 한다면….
“기왕이면 잘생긴 애로 뽑아줘.”
영신의 눈초리가 슬그머니 가늘어진다. 그렇잖아도 훑어보면서 잘생긴 놈은 무조건 걸러 냈는데, 덕이가 그 말을 하니 괜히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를 사귀라고 하면서도 얼굴 잘생긴 놈은 안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얼굴은 봐서 뭐하게. 사귈 것도 아닌데.”
“그래도 잘생기면 좋지….”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너도 잘생겼잖아.”
“친구랑 나랑 같아?”
아삭, 덕이가 오이를 베어 물고 나서 눈을 또 끔벅였다. 뭐가 다른지를 생각하는 표정에 영신이 창을 닫고 나서 노트북을 한쪽으로 치웠다. 갑자기 친구고 뭐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일하는 곳마다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혼자 집에 있는 게 안쓰러워 친구라도 구해주고 싶었는데, 얼굴부터 따지는 거 보니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더 안 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데….”
“됐어. 없던 일로 해.”
영신이 노트북을 밀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덕이가 오이를 든 채로 그런 영신의 뒤를 쪼르르 따랐다. 안방에 들어간 영신이 침대 위에 올라가자 오이를 든 채로 이번엔 냉큼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먹을 거 가지고 올라오지 마.”
우적우적. 덕이가 남아있는 오이를 크게 베어 먹어치웠다. 손은 가벼워졌지만 입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양쪽 볼을 개구리처럼 부풀린 모습에 영신은 조금 전 기분이 나빴던 사실도 잊고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 터지겠다.”
“치구애아구해져.”
친구를 왜 안 구해주느냐고 묻는 게 확실했지만 못 들은 척하고 서랍 쪽으로 손을 뻗었다. 덕이가 입 안에 남아있던 오이를 꼭꼭 씹어 먹어치우자 영신이 곧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덕이에게 내밀었다.
덕이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인간들이 쓰는 신분증이었다. 거기에 구덕이 세 글자와 함께 제 사진이 박혀 있었다. 영신이 만들어준다고 했을 때 냉큼 좋다고 하긴 했는데… 이름이….
“왜 구덕이야!”
“구덕이니까 구덕이라고 했지. 왜? 팔덕이라고 해줘?”
“김덕이라고 해달라고 했잖아!”
“뭐가 달라.”
“아니야. 이건 아니야. 김덕이라고 해줘. 다시 바꿔줘.”
덕이가 울상을 지으며 신분증을 내밀었다. 만들기 전에 이름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어서 김덕이라고 해달라고 했는데, 어째서 구덕이라고 해놨는지 모르겠다. 울상을 지으며 구자가 써진 곳을 손톱으로 긁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진은 왜 이렇게 잘 나왔는지 제 얼굴임을 잊고 잠시 감탄하며 쳐다봤다.
“구덕이 싫어. 이상해.”
“난 마음에 들어.”
“거짓말.”
“진심이야. 내가 제일 많이 부를 텐데, 당연히 내 마음에 들어야지.”
그 말에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인태와 미자도 만만치 않게 많이 부르긴 했지만, 아니 어찌 보면 영신보다 더 불렀다. 특히 인태가 툭하면 구더기라고 놀려서 속상했는데, 영신은 또 괜찮다고, 마음에 든다고 하니 갈등이 생겼다.
“아예 다른 이름을 할걸.”
“괜찮아.”
“네 이름이 박등신이었어도 괜찮아?”
“네가 좋다면 그렇게 불러.”
“거짓말.”
영신이 가볍게 웃었다. 뾰로통하게 나와 있는 덕이의 도톰하고 빨간 입술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확실히 감정을 자각하고 나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신경 쓰였다. 제 옆에 바싹 붙어 앉을 때 내려다보이는 긴 목선이라든가, 티셔츠 안쪽으로 하얀 속살이라든가, 그런 것들.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시선을 느꼈는지 영신에게 기대있던 덕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왜? 하고 묻는 얼굴을 그대로 쥐고서는 살포시 입술로 내리눌렀다. 쪽, 가볍게 부딪혔다 떨어지는 입술을 덕이가 손에 쥔 신분증을 내팽개친 후 바로 잡아 다시 꾹 누른다. 부딪히는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이가 시트에 엎드린 채로 아랫입술을 슥 빨았다. 뒤에선 영신이 제 엉덩이를 양손으로 벌리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애널로 성기가 아닌 혀가 들어오자 저절로 이가 꽉 다물려 졌다.
“으응….”
잇새로 새어나가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돌려 쳐다보니 영신의 얼굴이 제 볼기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축축하고 뜨끈한 혀가 구멍 안을 헤집어 놓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찔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낑낑거리는데 잠시 후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나서 영신이 손가락을 애널 입구에 대고 쑤욱 집어넣었다. 젤이 묻은 건지 축축한 게 안으로 들어가 속살을 적셨다. 찌걱찌걱 손가락을 안쪽에서 움직이며 비벼주니 음란한 소리가 났다.
덕이가 하체를 들썩이며 이번엔 제 손을 뒤로 뻗어 스스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못 참겠어….”
작게 웃는 영신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손가락이 빙그르 한 바퀴 돌며 안쪽 어느 한 곳을 꾸욱 눌러 건드린다. 아으흑, 몸이 앞으로 튕겼고 시트에 비벼지던 성기에서 말간 액이 찔끔 새어나왔다.
덕이가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안쪽의 그 부분을 건드리면 몸이 저도 모르게 자동으로 반응했다. 영신은 심술 맞게도 꼭 그곳을 손으로 눌러 덕이를 괴롭혔다. 눈물을 그렁하게 매단 채로 고개를 돌려 이제 그만하라고 애원을 하니 손가락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구멍은 영신이 발라놓은 타액과 젤로 반질거렸다. 영신이 손으로 제 성기를 움켜쥐고는 입구에 가져다 댔다. 꾹 힘을 주어 누르니 애널이 벌어지며 성기를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검붉은 핏줄이 꿈틀대는 걸 내려다보며 영신이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복숭아처럼 생긴 탱글탱글한 엉덩이가 작게 경련하는 듯 움직이는 게 보여 손을 뻗어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려주었다. 손자국이 발갛게 나자 덕이가 고개를 돌려 눈을 흘긴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엉덩이를 쥐고 비틀었더니 이번엔 상체를 시트에 비비며 다리를 더 넓게 벌린다.
천천히 몸을 포개고 나서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끽, 끽, 영신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침대와 덕이가 동시에 신음을 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자 빡빡하던 안쪽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마치 입 안으로 감싼 것처럼 성기를 담금질했다.
침대에 엎드려 엉덩이만 치켜들고 있던 덕이가 앞쪽으로 손을 뻗어 제 성기를 만지려 했고 이를 알아챈 영신이 그 손을 낚아채 뒤로 당겼다. 조금 더 힘을 주자 덕이가 상체를 들어 올리며 그대로 딸려온다. 동시에 영신이 크게 허리를 뒤로 뺐다가 콱, 하고 박아 넣었다.
“아응.”
신음을 지르며 덕이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영신이 얼른 잡아채서는 이번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게 펴진 등 뒤로 영신의 탄탄한 가슴팍이 와 닿았다. 영신이 손을 앞쪽으로 뻗어 덕이의 상체를 꽉 붙들어 고정하고 나서 허리만 빠르게 움직였다. 애널에 잔뜩 묻혀놓았던 젤이 녹아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덕이가 붙잡힌 손을 빼내어 성기를 다시 잡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영신에게 붙들렸다.
“만지게, 으응, 해줘.”
싫어. 귓불을 핥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니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다. 영신이 손을 아래로 내려 덕이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이미 한 번의 사정을 마쳤는데도 빳빳하게 부풀어 오른 채 맑은 액을 뚝뚝 흘리고 녀석을 가볍게 쥐고 앞뒤로 문질러주자 구멍이 더 좁아지며 성기를 꽉 물어온다. 영신이 윽, 신음을 내며 잠시 허릿짓을 멈췄다.
“너무, 조이면, 못 움직여.”
그 말에 덕이가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영신의 골반에 제 엉덩이를 바싹 붙인 채로 비비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웃었다. 뒤에서 저를 껴안고 있던 영신이 욕을 뱉는 소리가 들리면서 안에 있는 성기도 꿈틀하고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전에 꼬리를 만들기 위해 짝짓기를 할 때 영신은 제멋대로 굴더니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부터는 어쩐지 다정해졌다. 그게 좋으면서도 가끔은 겁이 났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하기도 한다고 인태가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
“지금, 딴생각했지?”
퍽, 영신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허리를 뒤로 확 뺐다가 갑자기 끝까지 쑤셔 넣었다. 덕이가 으응, 신음을 내며 몸을 흠칫 떨었다. 퍽, 퍽, 퍽, 허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성기를 감싸 쥔 손도 조금씩 속도가 빨라졌다.
덕이가 손을 뻗어 영신의 허벅지에 짧은 손톱을 박아넣었다. 고개를 비틀어 영신의 입술을 찾았더니 금세 알아채고 입술을 포개어온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혀를 물고 빠는 사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두 사람은 곧 두 번째 사정을 맞았다.
양치질하던 덕이가 바지를 열고 제 성기를 내려다봤다. 어제 얼마나 혹사를 당했는지 아직도 고추가 빨갰다. 꼬리가 사라진 뒤로 영신은 짝짓기를 열심히 했다. 이제 저를 천호에게 팔아넘길 일도 없는데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싫지는 않아서 저도 같이 맞춰주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무 좋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전처럼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서 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지를 올리고 나서 성기 부분을 탁탁 두드렸다.
“네가 고생이 많아.”
그러고 나서 엉덩이를 두드렸다. 너도. 그때 꼬리가 등 뒤로 생겨나더니 움직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으로 셌지만, 여전히 여덟 개였다. 칫솔을 내려놓고 세수를 한 다음에 수건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언제 일어났는지 영신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가서 껴안으려고 하는데 그가 몸을 돌려 이쪽을 본다.
“응. 아니야. 목요일이 괜찮을 거 같아.”
그래, 고마워. 오후에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더니 팔짱을 낀 채로 덕이를 바라봤다.
“흐음. 왜 꼬리가 안 나올까?”
“그러게.”
기껏 얻은 꼬리가 사라진 게 서운했던 모양인지 덕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영신이 그런 덕이의 뒷목을 살짝 잡아서 주물렀다. 어젯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국들이 목 아래로 선명했다.
“신경 쓰지 마. 나올 때 되면 나오겠지.”
천호와 그 일이 있고 난 후 꼬리가 줄었다. 꼬리뿐 아니라 힘도 약해졌다. 겨우 두 개는 다시 나왔고, 힘도 어느 정도 회복했는데 나머지 하나는 도통 나올 기미가 없었다. 덕이는 꽤 신경 쓰는 것 같았지만 사실 영신은 꼬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나오지 않으니 저를 더 필요로 하는 것 같아 차라리 이대로 나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물론, 구덕이는 상상도 못 할 테지만 말이다.
“역시… 더 해야 하나?”
그 말에 덕이가 기다렸다는 듯 영신에게 달려들었다. 영신이 덕이의 두 팔을 떼어놓고는 어깨를 잡고 거실 쪽으로 떠밀었다.
“일단 밥 먹자. 배고프다.”
“더 해.”
조금 전 고추가 빨갛다고 투덜거리던 것도 잊어버리고 덕이가 더 하자며 매달렸다. 영신이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 제 밑에 매달려서, 그리고 마지막엔 제 몸 위에 올라가서 허리를 요사스럽게 흔들던 덕이를 떠올리니 한 번 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곰 같아도 밤에는 완벽한 여우의 모습을 보여주니 사람이 어떻게 안 미치고 배겨. 여태 그걸 몰랐다는 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일단은 밥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아 단념했다.
“밥 잘 먹으면 생각해 볼게.”
밥 핑계를 대며 주방으로 향하니 덕이가 강아지처럼 쪼르르 따라오며 영신의 등에 찰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이러면 밥 못 해.”
“오늘도 일하러 가?”
실은 오후에 약속이 있었는데, 중요한 일은 아니라 며칠 뒤로 미뤘다. 덕이가 부쩍 심심해하는 것 같아 혼자 두는 게 영 신경이 쓰였다.
“아니. 오늘은 쉬는 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덕이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다. 찰싹 붙어서 등에 얼굴을 문지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람에 영신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등에 얼굴이 새겨지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덕이는 조금 떨어져서 이젠 옆으로 왔다.
“그럼 우리 나가서 돌아다니자.”
응. 포장된 샐러드를 뜯던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이는 어디 갈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샐러드를 덜어 내던 영신이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날 이후로 덕이는 호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전에는 가고 싶다고 울더니, 마음이 바뀐 걸까. 아니면 애써 참고 있는 걸까.
“절에 놀러 갈까?”
“어디?”
“저번에 갔던 데 말이야. 호국으로 가는 문 앞에 있는 사찰.”
아. 뜻밖의 말에 덕이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싫어?”
“거, 거긴 왜. 나 안 가. 안 가도 돼.”
“억지로 보내려는 게 아니야. 그냥 다녀오면 돼. 나는 거기서 머물면서 스승님이랑 있을 테니까 말이야.”
덕이가 살짝 뒤로 물러서 영신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 필요 없어졌으니 쫓아내는 건가. 저번처럼 또 가라고 하는 건 아닐까. 아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고기를 구우려던 영신이 뒤를 돌아보며 다정하게 웃는다.
“도망 안 갈 테니 다녀와.”
“괜찮아. 가서… 반겨줄 사람도 없고….”
“어머니 묘도 가봐야 한다며. 너 아니면 돌봐줄 사람도 없다고 했잖아.”
그거 그렇지만…. 덕이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가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꼬리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이었다. 묘에 들러서 풀도 뽑아주고 무너진 돌들도 다시 쌓아 올려주고 싶었다. 덕이가 입술을 달싹이니 영신이 손을 뻗어 그런 덕이의 머리를 슥슥 문지른다. 조금 짧아져 버린 머리카락 때문에 귀가 시원스럽게 드러났다.
“다녀와. 괜찮아.”
“도망가기 없기.”
“응. 없기. 약속.”
치익, 고기를 올려놓으니 연기가 피어올랐다. 덕이가 맛깔스럽게 익어가는 고기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다가 영신의 옆쪽으로 다시 붙어섰다.
“고마워.”
“별말씀을.”
“갔다가 얼른 올게.”
“천천히 와도 돼.”
“뽀뽀해도 돼?”
그 말에 영신이 고개를 돌려 덕이를 봤다. 갑자기 웬 뽀뽀 타령인가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 꽤 감동한 눈치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입술이 벌써 앞으로 튀어나온 걸 보니 안 된다고 하기엔 이미 틀렸다. 너무 드러나는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라고 고개를 살짝 숙여줬더니 그대로 뺨을 붙들고는 입술을 들이댄다.
***
“앞에 잘 보고 가. 어두워.”
덕이가 주변을 두리번댔다. 영화관에 처음 와본 게 마냥 신기해서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는데 하마터면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고, 영신이 재빨리 뒤에서 팔을 잡아채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구를 뻔했다.
“조심하라니까.”
“미안. 근데 우리 어디 앉아?”
영신이 표를 확인하더니 오른쪽 뒷자리를 가리켰다. 그 옆쪽으로는 여자 둘이 와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저기 보이지? 가서 앉아 있어. 나는 먹을 것 사 가지고 올게.”
“나 오이 싸 가지고 왔는데….”
“…….”
“걱정 마. 네 것도 있어.”
덕이가 작은 가방에서 오이를 꺼내려 하기에 영신이 다시 집어넣었다. 이건 이따 집에 가서 먹으라고 일러줬더니 상당히 아쉬운 얼굴을 한다. 더 맛있는 걸 사다 주겠다는 말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려준 자리로 조심조심 향했다.
자리에 간 덕이는 위로 올라간 의자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몰라 잠시 헤맸지만, 곧 아래로 내려서 얼른 앉았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고 영신을 향해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했느냐고 묻는 거 같아 영신도 그만 웃어버렸다. 저 바보.
제대로 앉는 것을 확인한 영신이 밖으로 나와 팝콘을 주문했다. 영화관에 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10년도 훌쩍 넘은 거 같은데. 중학교 때 친구와 딱 한 번 간 게 전부였다. 연애 같지도 않았던 짧은 만남 중에도 영화를 따로 본 기억은 없었다.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직원의 물음에 영신이 잠시 곤란한 표정을 했다. ‘오이 맛 없나요?’ 라고 물으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구덕이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캐러멜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보니 단것도 꽤 잘 먹던데.
잠시 기다리니 주문한 음료와 팝콘이 나왔다. 그것을 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오던 영신은 저도 모르게 멈칫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보니 덕이가 옆에 앉은 여자의 팝콘을 태연하게 집어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자리를 옮겼나 싶었지만 동그란 뒤통수가 분명 구덕이였다. 기막힌 얼굴로 자리로 가니 덕이가 고개를 돌려 영신을 보고 방긋 웃으며 팝콘을 내밀었다.
“영신아, 너도 먹어. 이분이 주셨어.”
덕이가 옆에 앉은 여자를 가리켰다. 그녀가 수줍은 듯 웃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안녕하세요. 덕이가 태연하게 여자에게 이 영화 본 적 있느냐고 물었고, 여자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는 영신의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갔다. 덕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여자의 팝콘 통에서 제 것인 양 팝콘을 집어 먹고 있었다. 이 뻔뻔한 자식.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영신이 발끝으로 덕이를 툭 건드렸다. 덕이가 왜 그러냐고 고개를 치켜들자 제가 앉으려던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 여기가 네 자리야.”
아. 덕이가 군말 없이 일어나더니 자리를 옮겨간다. 영신이 덕이를 지나쳐 덕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조금 전까지 덕이를 보며 웃던 여자가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영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영신이 못 본 척하고 팝콘을 덕이 쪽으로 넘겼다.
“먹어.”
“와. 이거 많다.”
덕이가 기뻐하며 손을 팝콘 통 안에 집어넣자 영신이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돈 주고 사 먹는 거야. 남의 거 함부로 먹는 거 아니야.”
“먹어도 된다고 했어.”
“아무나 주면 다 먹을래?”
“왜 아무나야…. 이름도 알아. 아까 김윤정이라고….”
까드득. 영신이 사납게 어금니를 갈자 덕이가 입을 다문다. 무섭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영신의 표정은 무섭다 못해 살벌했다. 왜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얻어먹어서 그런 건가.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커다란 화면에서 광고가 시작된다. 덕이가 손에 쥔 팝콘을 영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아, 해.”
영신이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자 덕이가 최대한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면 웃었다. 이렇게 웃으면 어쩐지 영신이 화를 내다가도 기막힌 듯 웃어버렸다. 지금도 역시….
“참 나.”
거봐. 웃잖아. 덕이가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 어쩐지 자신이 영신에 대해 꽤 많이 아는 것처럼 느껴져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른손으로 팝콘을 집어 먹는데 왼손으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내려다보니 어느새 영신의 손이 포개져 있었다.
가만히 쳐다봤더니 이번엔 그 상태로 깍지가 껴진다. 영신이 먼저 제게 깍지를 낄 때마다 어쩐지 저를 놓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뚫어지게 보니 영신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움직인다.
“영화 봐. 얼굴 뚫어져.”
응. 덕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팝콘을 집어 영신의 입에 넣어주니 군말 없이 날름 받아먹는다. 옆에 앉아 팝콘을 나눠주던 여자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한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곧 영화가 시작됐다.
아아. 덕이가 입을 크게 벌린 채 있었고 영신이 그 앞에 서서 입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팝콘을 먹고 나서 자꾸 입천장이 이상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덕이는 아무래도 까진 거 같다고, 징징거렸다.
“집에 가서 약 발라 줄게.”
“혀로 핥아줘.”
영신이 주변을 둘러봤다. 평일인데도 서점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 가운데서 핥아달라고 말하는 용기가 가상했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듯하여 그러겠다는 뜻으로 머리를 슥슥 문질러 주고서는 책이 진열된 곳으로 움직였다.
“책 사도 돼?”
“응.”
“아무거나?”
“읽고 싶은 거 사.”
덕이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책을 살폈다. 그 와중에 부자가 되는 법이란 책 앞에서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는 걸 보고 영신은 간신히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걸 꺼내 들고 잠깐 들여다보더니 제 취향이 아니었는지 금세 제자리에 돌려놨지만 말이다. 덕이가 자꾸 부동산 쪽에서 기웃거리길래 영신이 팔을 붙들어 그 수준에 읽을 만한 책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덕이가 책들을 둘러보다 어린 왕자라고 적힌 책을 집어 들었다.
“이거 재미있어?”
“글쎄. 나도 어릴 적에 읽은 거라.”
“그렇구나.”
덕이가 책을 집어 들더니 중간을 펼친다. 어째서 중간부터 펼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자가 되는 법이란 책보단 흥미가 있는지 몇 장을 넘기면서도 꿋꿋하게 읽는 모습이 대견했다. 애초에 책이 목적이 아니었지만, 꽤 집중하는 걸 보니 데리고 온 보람이 느껴져 그 모습을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그때 덕이가 책에서 눈을 떼고 영신을 찾는다. 영신이 알아채고 바로 옆으로 다가갔더니 덕이가 영신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영신아. 이거 애들 책 맞아?”
“왜?”
“엄청 야해. 짝짓기도 나와.”
영신이 눈 밑을 찌푸렸다. 덕이가 책을 펼치더니 자신이 읽고 있던 부분을 영신에게 내밀었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영신은 다 읽기도 전에 덕이가 어떤 부분에서 야함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길들어진다는 게 뭐야?]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흠….”
“거봐. 진짜지.”
“아아.”
“관계가 짝짓기지?”
“아니야. 그런 거.”
영신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말한 관계란 것에 대해 설명하는데 옆에 지나던 성인 남자가 흘깃 쳐다본다. 다 큰 성인에게 이런 걸 설명하고 있으니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 만했다.
전 같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짜증을 냈을 영신이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른다고 하면 가르쳐 주면 된다. 호국에서 살다 왔으니 당연히 인간 세상에서 모르는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우 나이로 여든아홉이지만 인간 나이로 치면 아직 어린아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잠깐. 그럼 나 어린애랑 밤에 그 짓을…. 젠장. 영신이 얼른 생각을 지우고 설명에 집중했다. 설명을 들은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구나.”
“응. 아니야.”
“그래도 살래.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어쩐지 여기 나오는 여우가 나고 왕자가 너 같아!”
우렁찬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야. 그런 소리는 좀 작게 했으면 좋겠는데. 관계에 대해 물어볼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건 좀 창피하다. 영신이 애써 웃으며 덕이의 어깨를 붙들고는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덕이가 제 손에 쥔 책을 들여다보며 생긋 웃었다.
“우리 책 사고 어디 가지?”
“점심 먹어.”
“점심 먹고 한강에 놀러 갈까? 날씨도 시원한데, 인태랑 미자랑 불러서 놀자.”
“걔들은 빼.”
“왜.”
영신이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름대로 데이트라고 나온 건데 덕이는 그냥 놀러 나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덕이가 반대편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움직이는 오르골 기차가 신기했는지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으며 다가가다 걸음이 멈췄다. 언제 왔는지,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석현이 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영신이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그가 덕이에게 먼저 다가갔다.
“덕이 씨. 여기서 뭐 해요?”
“어! 석현아!”
“형이랑 같이 놀러 온 거예요?”
“어. 나 영신이랑 영화 보고 책도 샀어. 이건데 볼래? 야한 거 같지만 야한 거 아니야.”
전엔 영신이 동생이라고 하더니 그 후로 몇 번 더 봤다고 이젠 이름까지 불러가며 알은척을 했다. 반가워하는 얼굴을 보니 영신의 마음속에서 심술이 삐죽 튀어나오려고 한다. 이러면서 무슨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제 마음을 깨달은 것은 좋으나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옹졸해지고 좀팽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그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뻘건 숯에 고기를 올리자마자 치익- 소리를 내며 먹기 좋게 익어갔다. 그걸 영신이 덕이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앞에 앉은 석현이 그런 둘을 유심히 쳐다보다 영신과 눈이 마주치곤 슬쩍 웃는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그 웃음에 영신은 슬며시 인상을 굳혔다.
“안 바빠?”
“오늘 병원 휴일이야. 왜? 나 쫓아내게?”
“쫓아내면 갈 거야?”
아니. 석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쳤다. 집게를 쥔 영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동안 저한테 받아간 후원금만 해도 꽤 될 텐데, 하필이면 데이트하는 날 눈치도 없이 따라 붙어서 훼방을 놓나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현은 이제 덕이에게 말을 붙였다.
“덕이 씨, 요즘은 헛구역질 안 해요? 속 괜찮아요?”
“응. 요즘은 괜찮아.”
“조금 아쉽네. 그거라도 해야 우리 병원에 놀러 올 텐데.”
“놀러 가서 뭐 해?”
“뭐 하긴. 나랑 노는 거죠.”
툭. 영신이 새카맣게 탄 고기를 석현의 앞에 놓아주었다. 먹어. 석현이 그걸 보고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빨리 꺼지라는 뜻인지 먹지도 못하게 생긴 고기를 던져 준다. 이 얼마나 유치한가.
영신이 제 손으로 고기를 굽는 것도 낯설었지만 귀한 자식 챙기듯 덕이에게 고기 탄 부분까지 가위로 잘라 내 하나하나 놓아주는 건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돈만 좋아하던 사람이 여자도 아닌 사내한테 반하다니. 아무리 집안에서 내놓다 한 자식이긴 했지만, 할머니가 아시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근데 저녁을 왜 이렇게 일찍 먹어?”
“우리 어디 가.”
“어디 가는데요?”
덕이가 입을 떼려다 말고 영신을 본다. 영신이 슬쩍 고개를 젓는 걸 보고 집에 간다고 얼른 둘러댄다. 실은 호국에 잠시 다녀오기 위해 일찍 저녁을 먹고 출발할 예정이었다. 낮이 아닌 밤을 택한 이유는 사람들 눈을 피해 움직이는 게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잘됐네. 나도 같이 가. 오늘 할 일도 없는데.”
“아니. 넌 안 돼.”
“왜? 덕이 씨, 나도 데리고 가요.”
“안 돼. 영신이가 안 된대.”
“에이. 덕이 씨가 조르면 우리 형이 들어줄 거 같은데?”
오늘따라 석현이 왜 이렇게 들러붙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신의 얼굴이 점점 사나워졌기 때문에 덕이는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뒀다간 탄 고기가 아니라 시뻘겋게 달궈진 숯을 석현의 입에 넣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돼. 영신이랑 둘이 갈 거야.”
“너무한다.”
그때 석현의 전화가 울린다. 석현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으며 일어선다. 받자마자 강아지 안부를 묻는 걸 보니 병원에 오는 손님 중 하나인 듯싶었다. 전화를 받으며 안쪽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걸어가는 그를 보며 덕이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영신이 고기 몇 점을 더 접시에 놓아 주었다.
“더 먹어. 오늘 움직이려면 든든하게 먹어둬야 해.”
“아냐. 배가 터질 거 같아.”
“안 먹어?”
“응.”
잘됐네, 그럼. 영신이 집게를 한쪽에 내려놓더니 물을 한 잔 마시고 티슈를 꺼내 입을 닦는다. 덕이가 물을 마시는데 영신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 가?
“가자. 지금 출발해도 늦어.”
덕이가 화장실 쪽을 쳐다봤다. 사라진 석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영신은 이미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덕이가 한쪽에 놓인 계산서를 바라봤다. 이걸 내야 나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입구 쪽에 있던 영신이 손짓을 보낸다. 고민하던 덕이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있던 오이 하나를 챙겨 입에 물고 그쪽으로 후다닥 뛰어 나갔다.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흘깃 보긴 했지만,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던 덕이가 안쪽을 다시 봤지만 석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석현이한테 인사 안 하고 가?”
“메시지 보내 놓을게. 고기 잘 먹었다고.”
먼저 간다고 미안해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했지만 영신은 그런 건 안중에 없어 보였다. 삑. 차 문이 열리고 영신이 운전석에 먼저 올라탔다. 덕이가 보조석에 타면서도 가게를 자꾸만 쳐다봤다.
시동을 거는데 뒤늦게 문을 열고 뛰어 나오는 석현의 황당한 얼굴이 보였다. 순간 영신이 그대로 후진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허리에 손을 얹고 기막혀하는 석현을 룸미러로 확인한 후 영신은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아… 돈이라도 내고 나올걸.”
“됐어. 저 자식이 후원한다고 나한테 뜯어간 돈이 얼만데.”
“그래도 네 동생이잖아. 널 많이 좋아하는데.”
그 말을 하며 덕이는 약간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였다. 자기도 동생들이 있기는 했지만 석현처럼 다정하지 않았다. 서로 투닥투닥 장난을 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리와 어울리며 저를 괴롭히는 일에 앞장섰고, 그러다 보니 동생인데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 서면 늘 주눅이 들었다.
“그만 생각해.”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영신은 덕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더니 뺨을 툭 건드렸다. 덕이가 생각을 멈추고 나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해가 짧아져서 그런지 5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산 뒤로 넘어가는 게 보였다. 다행히 평일이라 그런지 차가 많지 않았다. 차창을 살짝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손을 밖으로 내밀고 강가에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구경했다.
문득 몇 달 전 일이 떠올랐다. 꼬리를 나오게 한다며 영신이 제게 소 생간을 억지로 먹이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이렇게 창밖을 내다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풍경과 지금 본 풍경이 같은데도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그 생각을 하며 흐흐, 소리 내어 웃으니 영신이 슬쩍 돌아본다. 왜 웃느냐고 물었지만, 덕이는 그냥 바람이 시원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가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강원도 쪽을 향해 힘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검은색 승용차가 어둠을 뚫고 달려 도착한 곳은 전에도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차가 멈추자 덕이가 내려 가슴을 쭉 펴고서 폐를 활짝 열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영신이 뒤쪽에서 점퍼 하나를 꺼내 덕이에게 건넸다. 밤이라 좀 추운 탓이었는데 덕이는 군말 없이 그걸 집어 들더니 팔을 집어넣었다.
“아까 말한 거 기억하지? 볼일 다 보고 천천히 오면 돼. 내일 종일 여기에 있을 거니까.”
응.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 막상 그곳에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한 구미호에게조차 기회를 주지 않던 호국이 완전한 인간인 영신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른 올게.”
“천천히 와도 돼.”
“싫어. 빨리 올 거야. 간다.”
“조심해서 가.”
손을 흔들고 숲을 향해 걸어가던 덕이가 다시 돌아와서는 영신의 뺨을 붙든다. 영신이 흘깃 뒤쪽을 돌아봤다. 차 소리가 났는데도 사찰 쪽에서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슬쩍 확인하고 나서는 덕이의 허리를 감쌌다.
“이러다 날 새겠다.”
“가기 전에 뽀뽀.”
덕이가 고개를 쭉 빼고 영신의 입술을 감쳐 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비벼지고 영신의 등이 차에 닿았다. 덕이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만 몸을 밀착하는 바람에 나중엔 영신이 겨우 떼어내야 했다.
“자꾸 이러면 보내기 싫어.”
“가지 말까?”
“가. 얼른.”
덕이가 힝, 울상을 하고 나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단지 하루 떨어지는 건데 왜 이렇게 싫은 건지. 영신이 그런 덕이를 제 품에 안으며 습관처럼 뒷목을 부드럽게 쓸었다.
“다녀와. 네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덕이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영신에게 손을 흔드는데 등 뒤로 꼬리 여덟 개가 활짝 펼쳐진다. 여전히 하나는 없는 상태였다. 입 모양으로 뭐라고 말은 하는데 멀어지니 그것 또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괜히 물어봤다간 또 안 간다고 할까 봐 그냥 고개를 끄덕여 손을 흔들어 줬다.
어느새 덕이는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영신이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슥 핥았다. 키스나 더 하고 보낼 걸 그랬나. 덕이만큼이나 저도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도 한 번씩 호국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걸 모른 척하고 싶진 않았다. 정확히는 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거겠지만.
사찰로 가려고 돌아서던 영신이 흠칫 몸을 굳혔다.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언덕 위에 시커먼 인영 하나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밤손님이 온 줄 알았다.”
“미리 연락했잖아요.”
“혼자 오는 줄 알았지. 이상한 녀석을 달고 오는 줄은 몰랐구나.”
“그냥 끝까지 모른 척해주세요.”
옆에 있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일광의 걸음도 자연스레 영신에게로 향한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사찰은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떨어진 낙엽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소리를 냈다.
“저녁은 먹었고?”
“네. 고기 먹었어요. 스승님 것도 1인분 싸올까 하다 관뒀어요.”
“망할 놈.”
영신이 가볍게 웃었다. 옆에서 걷던 일광이 그런 영신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영신이 왜 웃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영신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박영신이 제 눈앞에 있는 것 같다고 하면 믿을까.
고요한 산중에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렸다. 사찰이 가까워질수록 영신의 걸음도 느려졌다. 입구까지만이라도 데려다 줄 걸 그랬나. 설마 이 바보가 길을 잃진 않았겠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지금쯤 덕이가 있을 만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춥다. 들어가자.”
“…네.”
마지못해 몸을 돌리는 그의 발길이 전에 없이 무거웠다.
***
세수하고 머리를 말리던 영신의 귀에 언덕 아래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줄었다가 커졌다가 하는 걸 보니 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핏 다투는 것 같기도 하고. 특별한 날 아니면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사찰이었기에 평일 낮 아침부터 손님이 오는 일은 드물었다.
귀를 기울이는데 들리던 소리가 순간 멈춘다. 수건을 목에 건 채로 언덕 쪽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아무것도 없다.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숲 안쪽에서 또 소리가 들려온다. 안 된다 어쩐다 하며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다.
영신이 언덕 아래로 내려와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낯익은 목소리는 분명 제가 아는 이의 것이었다. 바삭. 낙엽 밟는 소리에 말소리가 멈춘다. 커다란 나무 뒤쪽에서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데 아니나 다를까 덕이였다.
점심은 지나야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영신의 눈이 살짝 커졌다. 덕이 혼자가 아니었다. 앞에 웬 여자가 서 있었는데 긴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그녀는 보기 드문 미녀였다.
몸에 밀착되는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잘록한 허리선이며 매끈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잠시 시선을 마주쳤을 뿐이지만 영신은 그녀가 구미호라는 걸 알아챘다.
“영신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덕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뒤쪽에 있던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안녕, 난 초아라고 해. 네가 그 인간이구나?”
고개를 바싹 들고 인사하는 그녀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구덕이와 꽤 많이 닮았는데 말투나 풍기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영신이 마뜩잖게 쳐다보고 나서 다시 덕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묻잖아. 왜 이렇게 일찍 왔냐니까.”
“…그냥.”
말꼬리를 흐리더니 더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잔뜩 풀이 죽은 걸 보니 가족들이나 다른 일원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꼬리가 생기면 다들 저를 받아들여 줄 거라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기대처럼 되진 않았나 보다. 그러면 혼자 돌아왔어야지 옆에 서 있는 초아라는 여자는 왜 데리고 나온 건지 모르겠다. 덕이가 그 시선을 알아챘는지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얘는… 내 동생….”
“아.”
“구초아라고 해.”
“네. 만나서 반갑네요.”
전혀 영혼이 실려있지 않은 얼굴로 길에 뒹구는 돌을 쳐다보듯 인사를 하는 바람에 초아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졌다. 호국에서는 구초아 하면 모르는 여우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미모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서 많은 수컷이 그녀에게 구애하고 떠받들어 줬다. 그런 삶에만 익숙했는데 감히 인간 따위가 나를 그렇게 쳐다보다니.
그 사나운 시선에도 영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스승님께 가서 인사를 하고 다시 와야 할 것 같다며 덕이에게 기다리란 말을 했다. 주머니에 있던 열쇠를 건네주고 차에 먼저 타 있으라고 하는데 덕이가 우물쭈물한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평소답지 않게 망설이며 말을 꺼내지 못하는데 초아가 덕이를 살짝 밀치며 앞으로 나선다.
“아우, 답답해. 바보야, 내가 말할게.”
영신이 삐딱한 시선으로 그런 초아를 바라봤다. 자신감이 넘치는 아가씨였는데 어쩐지 슬슬 제 신경을 긁고 있었다.
“구덕이가 너한테 신세를 지고 있다면서. 그래서 내가 그곳에 가볼까 하고 말이야.”
“어째서.”
“그냥 사는 것도 궁금하고. 솔직히 말하면 네가 궁금하기도 하고.”
대놓고 영신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걸 보고 뒤에 서 있던 덕이가 입술을 꾹 깨문다. 영신이 한쪽 입술을 슥 올리면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어쩌지. 난 그쪽을 데려갈 마음이 전혀 없는데?”
그러더니 덕이에게 얼른 타라는 눈짓을 보내고 나서 사찰 쪽으로 움직인다. 영신이 사라지자 초아가 차로 가는 덕이를 냉큼 붙들었다. 덕이가 놓으라고 뿌리쳤더니 바로 따라와서는 끈질기게 늘어진다.
“야. 너 정말 이럴래? 내가 인간 세상에 가는 게 그렇게 못마땅해?”
“돌아가. 부모님이 아시면 걱정하실 거야.”
“참 나. 내 걱정하는 척하지 마. 너 솔직히 말해봐. 저 인간이 나한테 호감 가질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덕이가 뜨끔한 얼굴로 입을 벙긋댔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어릴 때부터 초아를 싫어하는 여우는 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저는 항상 놀림감이었고, 비교 대상이었으니, 영신이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긴 했다.
“…아니야.”
“거짓말. 내가 모를 줄 알아? 너한테서 저 인간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몸이라도 섞은 모양이지?”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영신의 냄새를 잔뜩 묻히고 호국으로 돌아간 것부터가 실수였다. 꼬리가 늘어났지만, 가족들은 저를 반겨주지 않았고, 잘 지내느냐는 인사 한마디 먼저 걸어오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제 문제는 처음부터 꼬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전처럼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그렇게 새벽에 모친의 무덤을 찾아 무너진 돌을 쌓고, 길게 자란 풀을 정리했다. 가족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동이 터 오를 때쯤에 도망치듯 빠져나오는데 초아가 몰래 뒤따라온 것이다. 그녀는 오는 내내 어떻게 꼬리가 생겼는지, 누가 꼬리를 만들게 해줬는지를 캐물었다. 떼어내려고 별수를 다 썼지만, 평소 그녀의 성격답게 끈질기게 따라붙어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다.
“별 뜻 없어. 나도 인간 세상이 궁금할 뿐이야. 오래 머물지도 않을 거야. 3일이면 돼.”
“싫어.”
전엔 제가 하는 말이면 거절을 못 하더니 이젠 싫다는 말을 잘도 한다. 초아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뾰족하게 떴다.
“계속 그러면 호국으로 돌아가서 네 어미의 무덤을 내가 다 파헤쳐 놓을 거야. 다음번에 왔을 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걸.”
까득. 덕이가 이를 세게 물고 초아를 노려봤다. 순간 뿜어져 나오는 힘에 초아가 뒤로 물러섰다. 전엔 꼬리 하나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 반푼이였다면,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힘으로 붙었을 때 초아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 잘하면 너 나 해치겠다?”
“구초아. 거기에 찾아가기만 해.”
음산한 목소리에 그녀가 질렸다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면서 금세 풀이 죽은 얼굴로 변해서는 슬그머니 덕이에게 들러붙는다. 한 번만 데리고 가달라고. 3일 정도만 놀고 구경하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호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이다.
덕이는 그런 초아를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늘 저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그녀였지만, 어린 시절만큼은 누구보다도 덕이를 잘 따랐고 사랑스러웠던 존재였다. 그땐 이렇게 못돼 처먹게 클 줄 몰랐는데.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니 초아가 이때다 싶었는지 더 우는소리로 매달린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동생 소원 하나 못 들어주냐면서. 덕이가 한 번 더 뿌리치고 차로 가는데 그녀가 진드기처럼 따라붙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영신이 언덕을 내려오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로에 길게 늘어선 차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경찰차와 구급차 등이 빠르게 지나가는 걸 보니 앞쪽에서 사고가 난 것 같았다. 영신이 제 옆자리를 보니 덕이가 차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의자를 뒤로 살짝 눕히니 자세가 좀 편안해진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자는 걸 보니 꽤 피곤했었나 보다. 입을 살짝 벌리고 웅크린 그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다가 룸미러로 뒤에 앉은 초아와 눈이 마주쳤다.
덕이가 3일만 데리고 있자고 해서 차에 태우긴 했는데, 영 신경에 거슬렸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녀가 아랫입술을 슥 핥으며 눈을 가늘게 늘인다. 영신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더니 그걸 싫지 않다는 뜻으로 여겼는지 가만히 손을 뻗어 영신의 어깨에 가져다 댄다.
“피곤해? 내가 주물러줄까?”
“손 치워.”
매몰찬 거절에도 그녀의 손은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근히 어깨를 문지르며 노골적으로 목 부분을 슥 건드리기까지 한다. 영신이 왼손을 뒤로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을 낸다. 너도 내가 싫지 않구나? 그녀가 엉덩이를 의자에 걸친 채로 영신의 어깨 쪽으로 얼굴을 디밀려는 순간이었다. 으득. 영신이 눈 깜짝할 새 그녀의 손을 쥔 채로 꺾어버렸다.
꺅! 비명 소리에 잠자던 덕이가 벌떡 일어났고, 동시에 영신이 손을 뒤로 홱 던져 버리더니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어깨를 무심한 얼굴로 툭툭 털어냈다. 놀란 덕이가 주위를 살피자 영신이 다시 자라고 가슴팍을 누르며 토닥토닥 해준다. 신경 끄고 자.
뒤쪽에 있던 초아가 꺾인 손목을 잡고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지만 영신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래도 조금 전 비명에 잠이 완전히 깬 듯해서 영신은 못마땅한 얼굴이 됐다.
“영신아.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글쎄. 어디서 개가 짖었나.”
개? 덕이가 혹시나 개가 차에 치였나 싶어 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정체된 차에 개가 치일 리는 없었다. 창밖을 아무리 내다봐도 특별히 다른 것을 찾기 힘들었다. 뒤에 앉은 초아가 눈에서 레이저를 내뿜으며 영신의 뒤통수를 노려봤지만, 영신은 끝끝내 외면했다.
“더 자. 가려면 한참 남았어.”
다시 자려던 덕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있는 초아를 확인했다. 그녀는 손목을 쥔 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씩씩대고 있었다. 혹시 인간 세상에 갑자기 내려와서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미운 건 미운 거고 살짝 걱정돼서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신경 끄라고 성질을 버럭 냈다. 저 성질머리. 괜히 데려왔어. 덕이가 후회의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사고 났던 게 어느 정도 정리된 건지 꽉 막힌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미자가 팔짱을 낀 채로 소파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덕이와 영신이 하룻밤 외박을 하고 오더니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덕이에게 듣기로는 그녀가 덕이의 여동생이라고 했다.
덕이에게 여동생이 있다고 한 번 듣긴 했지만, 미자의 기억 속에도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항상 덕이를 괴롭혔다고 했으니 말이다.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인태가 눈치도 없이 헤벌쭉 입이 벌어져서는 미자를 팔로 툭 건드린다.
“진짜 예쁘다. 완전 인형이 따로 없네.”
“예쁘긴. 완전 여우처럼 생겼는데.”
“여우 맞는데, 뭘. 질투하냐?”
그 말에 미자가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질투가 아니라 인형처럼 예쁜 외모와는 달리 전혀 매력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저 덕이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외모를 보고 있으니 조금 신기할 뿐이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덕이가 손에 이불과 베개를 든 채 들어왔다. 영신이 절대 집에선 재울 수 없다고 해서 일단 사무실에 두기로 했다. 전에 살던 곳처럼 옆집에 사무실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미자와 인태가 머물렀기 때문에 조금 미안하긴 했다. 덕이가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있던 초아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뭐야, 그건?”
“네 이불.”
“나더러 여기서 자라고? 너는?”
“난 옆집에서.”
하. 초아가 기막혀하며 눈을 부라렸다.
“나도 거기 가서 잘래. 손님 대접을 왜 이따위로 해?”
손님이란 말에 덕이가 인상을 슬며시 찌푸렸다. 자기가 따라오겠다고 억지 부리고 떼를 써서 와놓고는. 알아서 자라고 이불을 대충 소파에 놓아주는데 그녀가 손으로 그걸 밀어 바닥에 떨어트려 버린다.
“안 잔다고 했잖아! 여기서 이 구질구질한 귀신들이랑 같이 있으란 거야? 짜증 나.”
구질이란 말에 미자의 표정이 삐딱해진다. 덕이만 아니면 한 대 패주는 건데. 그래도 일단은 참아야지. 겨우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달래는데 옆에서 인태는 여전히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한다.
“그래, 여기서 자. 네 오빠 친구들이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친구는 무슨. 머저리들 같은 게.”
그 말에 미자가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야, 불여시. 너 입조심 해.”
“미자야, 그러지 마.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는 거잖아.”
“어리긴 개뿔. 넌 속도 좋다?”
인태와 미자가 옥신각신 다투자 덕이가 그러지 말라며 두 사람을 떼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초아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됐다. 여기에 있어 봤자 분란만 만들고 사고만 치려고 들 게 뻔한데. 내일이라도 다시 데려다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초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구덕이의 팔을 붙든다.
“가서 조용히 있을게. 거기서 자게 해줘.”
“…안 돼.”
“왜.”
“…그냥 싫어.”
초아가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분명 그 박영신이란 사내 때문일 것이다. 오는 도중 잠시 밥을 먹으러 들렀는데도 그는 저한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았다. 오로지 구덕이만 챙기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여태 저를 그렇게 대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분노와 승부욕이 동시에 발동하며 초아는 어떻게든 그를 제 손에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른 방에서 쥐죽은 듯 자면 되잖아.”
“하여튼 안 된다고 했어. 미자야, 인태야. 오늘만 얘 좀 부탁할게. 미안.”
덕이가 정말 미안한 얼굴로 말하자 인태가 걱정하지 말라고 나만 믿으라고 가슴을 툭툭 두드렸고, 미자는 대답 대신 눈만 뾰족하게 뜬 채로 초아를 노려볼 뿐이었다. 아무리 덕이의 동생이고 예쁘게 봐주려고 해도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덕이는 다시 한 번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나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초아가 자존심이 상해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덕이는 끝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테이블에 턱을 댄 덕이가 작은 나무토막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 2주 전 둘이 외출했다가 사 온 젠가였는데, 그걸 하나씩 쌓을 때마다 덕이의 한숨도 쌓여갔다.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온 영신이 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안 자고 왜 이걸 해?”
“그냥… 잠이 안 와.”
“네 동생 때문에?”
“데려오지 말 걸 그랬나 봐. 괜히 미자랑 인태한테 피해나 주고.”
그 말에 영신이 소리 없이 웃는다. 전에는 남한테 피해를 준다는 개념조차 없더니, 많이 컸네. 슥 머리를 헝클고 나서 덕이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금방 갈 거라며. 신경 쓰지 마.”
“너한테도 미안해.”
“됐으니까 들어가서 자자. 일찍 자야 키도 크는 거야.”
응. 대답은 했지만 심란한 마음에 엉덩이가 떼어지질 않는다. 몸을 일으키는 대신 빼곡하게 쌓인 나무 조각 중 하나를 밑에서 툭 건드려 빼냈다.
“나 이거 한 번만 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신이 반대편에 있던 조각 하나를 밑에서 빼낸다. 거친 손놀림에 나무 조각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덕이가 하지 말라고 손을 툭 치자 영신이 빼낸 나무 조각을 덕이가 볼 수 있도록 들었다. 거기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예뻐해 주기]
그걸 덕이에게 건네고 나서 다리를 베고 드러눕는다. 덕이가 제 다리를 벤 영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가슴 위에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방금 막 씻고 나온 탓인지 좋은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뭐 해? 예뻐해 주라잖아. 얼른.”
쳐다만 보고 있으니 영신이 눈을 감은 채 재촉한다. 덕이가 슬며시 웃으며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다 입 안으로 손가락을 꾸욱 밀어 넣었다. 장난을 칠 생각으로 그런 건데 영신이 손을 잡더니 그대로 혀를 움직여 손가락을 핥는다.
“아.”
덕이가 손을 빼려고 하자 이번엔 앞니로 손끝을 꾹 깨문다.
“아파.”
얼른 손을 빼냈더니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영신이 덕이를 덮치듯 밀어트렸다. 중심이 기울어진 덕이가 뒤로 넘어가며 카펫 위에 눕자 영신이 몸 위에 올라타서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머리맡에 흩어진 나무 조각을 위쪽으로 대충 밀어버리고는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덕이의 맨살을 어루만졌다. 젖꼭지를 엄지로 꾹 누르며 위로 튕겨주자 덕이의 입술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으음… 방에서….”
“…두 번 해.”
“안 피곤해?”
“전혀.”
그래도…. 미처 새어나오지 못한 말을 영신이 덥석 물어 삼킨다. 정성스럽게 혀로 입술을 핥아주자 꽃봉오리처럼 벌어졌고 그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구석구석 탐했다. 그 사이 셔츠 안에서 움직이던 손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발기하기 시작한 덕이의 성기가 손에 닿는다. 그걸 움켜쥐고 부드럽게 위아래로 문질러주니 덕이가 발끝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리며 신음을 냈다.
“으응….”
쪽, 부벼지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덕이가 아쉬운 얼굴로 쳐다봤다. 이번엔 영신이 덕이가 입고 있던 흰색 티셔츠를 목 아래까지 걷어 올리고 나서 가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젖꼭지를 문지르고 누르자 성기가 금세 부풀며 맑은 액을 토해내 손바닥을 적셨다.
젖은 손가락을 뒤로 가져가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건드리니 하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꾹 손가락 하나를 입구에 가져다 대고 누르며 젖꼭지를 살짝 깨물자 구멍이 한껏 조여지며 손가락을 압박해온다.
천천히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면서도 가슴에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사나흘 굶은 강아지처럼 집요하게 핥고 빨아대자 작은 젖꼭지가 빨갛게 부풀어 올라 시각을 더 자극했다. 손가락을 하나 더 늘리자 덕이가 가쁜 숨을 내쉬며 엉덩이에 반쯤 걸쳐진 제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끌어내리고 다리를 벌려 세운다.
영신의 팔을 잡아당기며 얼른 해달라고 보채자 영신이 제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성기를 꺼냈다. 저릿할 정도로 발기한 녀석을 붙들고는 채 넓히지도 않은 구멍에 가져다 대고 귀두를 입구에 문질렀다.
투명하게 나오는 액 때문인지 작은 구멍은 금세 젖어들었고, 상체를 내리며 힘을 주니 걱정하던 우려와는 달리 쉽게 앞으로 들어가며 길을 만들었다.
“으응. 아아.”
덕이가 고개를 젖히며 영신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영신이 허벅지에 힘을 주고 끝까지 밀어 넣은 채 가만히 있자 덕이가 안달이 났는지 엉덩이를 스스로 움직였다. 얼굴이 잔뜩 풀어져서 엉덩이를 흔들며 보채는 것은 영신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아무리 해도 영신이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덕이가 몸을 위쪽으로 움직인다. 슥, 엉덩이를 가득 채운 성기가 빠져나갔고, 이번엔 덕이가 먼저 영신에게 달려들어 위로 올라타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그 상태로 엉덩이를 살짝 들고 성기를 쥔 채 천천히 아래로 내리니 영신의 두툼한 성기가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완전히 사라지자 덕이가 만족감을 느꼈는지 작은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영신의 가슴을 손으로 짚은 채 앞뒤로 움직이며 자극을 주자 영신이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덕이가 보채는 거라면 이건 덕이가 좋아하는 자세였다. 다른 것보다 느낌이 더 강하게 온다나.
헐떡이며 엉덩이를 움직이는데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는지 몸을 어찌할지를 모른다. 사정감이 몰려오자 참다못한 영신이 무릎을 세우고 발끝을 든 다음 사정없이 위아래로 쳐댔다.
“으아앙-.”
덕이가 비명과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흔들렸다. 영신이 빠르게 치면 칠수록 덕이의 신음도 거세졌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좋다는 말을 수도 없이 뱉어내며.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던 영신이 덕이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겨 꽉 안았다. 큭. 억눌린 신음 소리에 울컥, 애널 안이 뜨겁게 젖어든다. 영신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덕이의 입술을 찾아 감쳐 물었다. 맞닿은 가슴 사이로 쿵쿵, 심장이 울렸다.
잠결에 들려온 소리에 영신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옆자리엔 덕이가 세상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끌어 덮어주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새벽 어스름이 내려앉아 있었는데 이른 출근을 준비하는 사람들 때문인지 간간이 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침대로 내려와 방 밖으로 나갔다. 탁, 거실 스위치를 올리던 영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리길래 나와 본 건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제집 거실에 떡하니 서 있었다. 한 손엔 물잔을, 다른 한 손엔 구덕이가 좋아하는 오이를 쥔 채 말이다.
“일어났어?”
태연하게 인사하는 초아를 보며 영신이 현관을 바라봤다. 그녀가 어떻게 저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집에 들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인지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너 뭐야.”
“귀신들도 어디로 가버리고, 나 혼자 있으려니 도무지 잠이 안 와서 말이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 남자 귀신이 가르쳐 주던데? 자기가 말한 건 비밀이라면서.”
생긋 웃는 그녀를 보고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인태 이 자식, 오기만 해봐라.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물컵을 내밀었다. 목마르면 마실래?
“됐으니까 치워. 그리고 나가.”
그녀가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걸어왔다.
“왜?”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까지 와서는 오이 끝을 입으로 문 채 혀를 농염하게 움직인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오이를 핥더니 이번엔 영신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다. 영신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입고 있던 옷은 단추가 풀려 가슴골이 온전히 드러났고, 눈빛은 낮에 본 것과는 달리 음험한 습기를 머금은 채 반짝거렸다. 그녀가 입술에서 오이를 떼어내고 나더니 영신의 목에 팔을 감는다. 뜻밖에 영신이 뿌리치지 않고 여전히 내려보기만 하자 그녀가 최대한 가슴을 밀착하며 눅진한 숨을 내쉰다.
“저 멍청한 구덕이보단, 내가 낫지 않아?”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며 웃더니 팔을 목에 감은 채 눈을 응시한다. 달짝지근한 살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보기 드문 미인임은 확실했지만 영신은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비릿한 미소마저 생겨났다.
“글쎄. 내가 관심 있는 건 딱 두 가지라.”
“그게 뭔데.”
“돈. 그리고 네 오빠.”
“나랑 자고 나면 구덕이 같은 거 생각도 안 날걸?”
자신만만한 그녀의 태도에 살짝 올라가 있던 영신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내려온다.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가만히 감쌌다. 그녀가 기대에 찬 얼굴로 붉은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든다. 뜨거운 숨을 내쉬며 영신의 입술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아악!”
몸을 가눌 틈도 없이 영신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고 현관 쪽으로 짐짝처럼 끌고 갔다.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둥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대로 현관문을 열더니 밖으로 내던져 버렸고, 초아가 보기 흉한 자세로 발라당 넘어지며 뒹굴었다.
“무슨 짓이야!”
소리를 지르며 발광하는 그녀를 영신이 내리깔 듯 노려봤다.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나한테 개수작 부렸다간 너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릴 줄 알아. 알겠어?”
하. 초아가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인태를 통해 그가 천호를 없앴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었다.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문 천호는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영신이 더 탐났다. 그래서 인태를 구슬려서 집 안으로 들어간 건데.
“이 고자 새끼!”
“오랜만에 듣는 소리군. 그럼 잘 가. 아예 호국으로 꺼지면 더 고맙고.”
초아가 벌떡 일어나 쏘아붙이기도 전에 문이 쿵 닫혔다. 그녀가 닫힌 문을 기막히고 분한 얼굴로 쳐다봤다. 뭐 저런 개자식이.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보니 인태와 미자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초아가 헝클어진 옷을 탁탁 털어내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랬다간 영신이 진짜 저를 가루로 만들 것 같아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이제 오니? 나 들어가게 문 열어줄래?”
영신의 집 앞에 서 있는 초아를 보며 인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지 가르쳐 달라고 해서 알려주긴 했는데, 설마 진짜로 시도했던 거야?
“너 영신이네 집에 갔었어?”
초아가 대답하지 않자 미자가 꼴좋다며 웃었다.
“딱 보면 몰라? 쫓겨났네.”
“세상에, 거길 들어가면 어떡해?”
“영신이 성격에 뒤지게 패지 않은 게 다행이지.”
계속되는 미자의 비아냥에 초아가 혀로 윗니를 슥 핥는다. 비록 꼬리가 하나이긴 하지만 이깟 귀신한테까지 멸시받는 제 처지가 분하고 억울해서 참기가 힘들었다. 성큼성큼 걸어가서 미자의 얼굴에 바싹 들이밀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너. 미자라고 했나? 경고하는데 내 신경 거슬리지 마. 너 같은 귀신 따위 나한테 상대도 안 되니까.”
미자가 콧방귀를 끼며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초아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돌려세운다.
“내 말이 우스워?”
인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야, 왜 그래. 이러지 말자.”
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초아는 끝까지 따라붙으며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인태가 말렸지만, 이미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그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화풀이할 대상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큰소리치더니 내가 겁나나 보지?”
“아니. 개무시 하는 중인데.”
“어디서 족보도 없는 귀신 주제에.”
“이년아, 남들이 들으면 웃어. 귀신이나 짐승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짐승? 너 나한테 짐승이라고 했어?”
“그럼 뭐라고 해. 여우가 짐승이지 뭐야.”
“이게 죽으려고!”
초아가 손을 뻗어 달려들자 미자도 지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인태가 놀라서 둘을 뜯어말렸지만 이미 둘은 머리끄덩이를 잡고 온갖 년을 다 찾아가며 치고받았다.
“야! 둘 다 그만해! 아, 그만하라고!”
***
덕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초아에게 밥을 먹이려고 가져왔는데 그녀가 사무실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태에게 듣자하니 미자와 밤에 한바탕 싸우고 그대로 나가버렸다고 한다.
“어디 간다고 말은 없었어?”
미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태연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인태가 몸서리를 쳤다. 미자가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뜯어말리던 저도 몇 대를 얻어맞았다. 역시 이 구역의 미친년은 미자였다. 불쌍한 초아, 미자가 열 받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미리 말해줄걸. 그랬다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우는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해, 미자야…. 내 동생이 아직 철이 없어.”
듣고 있던 인태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철이 없는 거로 따지면 구덕이도 만만치 않은데,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 오빠는 오빠인가 보네. 덕이의 사과에 미자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조건 받아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가끔은 따끔하게 혼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말에 덕이는 반박할 수 없었다. 평소 미자를 알기 때문인지 오죽했으면 때렸을까 싶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는 사람도 없는 인간 세상에서 혼자 나갔다고 하니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자신도 처음 왔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남자들에게 몸을 팔지 않았던가. 그 기억이 떠올라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단은 나가서 찾아보잔 생각으로 둘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1층에 도착하니 아침 출근을 하느라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들을 지나 초아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저 멀리 등나무 아래에서 무릎을 감싸 쥔 채 혼자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니 그녀가 다리 사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든다. 윤기나던 머리카락은 다 엉켰고, 얼굴도 초췌했는데, 덕이인 걸 알고는 다시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여기서 뭐 해.”
“신경 쓰지 말고 꺼져.”
“들어가서 밥 먹어. 네 것도 가져왔어.”
초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덕이가 그 옆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땅만 쳐다봤다. 가을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한 번씩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에서 수명을 다한 나뭇잎이 떨어졌다. 덕이가 떨어지는 낙엽을 눈으로 새고 있는데 초아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쳐다본다.
“왜 안 꺼져?”
“네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신경 쓰이잖아.”
“흥, 거짓말하지 마. 고소해 죽겠지? 쌤통이다 싶지?”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초아가 말을 삼켰다. 저도 늘 덕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넌 그랬구나.”
“뭐?”
“호국에서 내가 괴롭힘당하고, 무시당할 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
초아가 입술을 꾹 깨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릴 땐 덕이를 꽤 잘 따랐다. 세상에 제 오빠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크면서 저와 다르다는 걸 알고, 조금씩 멀어졌다. 똑같이 외면당하고 미움받을까 봐.
언젠가부터는 자신이 나서서 덕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도 덕이는 꿋꿋했다. 구슬을 찾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갔다고 들었을 때도 제풀에 지쳐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만약 돌아온다면 전처럼 괴롭히진 않을 거라고 잠깐이지만 다짐도 했었다. 하지만 호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만 투정부리고 밥 먹자. 그 후엔 집으로 데려다 줄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덕이가 손을 뻗는다. 어제 미자한테 하도 두드려 맞아서 그런지 초아가 움찔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망설이던 덕이가 그대로 손을 거둬들였다. 어릴 땐 많이 업고 다닐 정도로 예뻐했는데, 이젠 이런 것도 어색한 사이가 됐네. 서글픈 마음이 들어 애써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덕이를 보며 초아가 입을 비죽거렸다.
“넌 같이 안 돌아갈 거지?”
“…응.”
“호국보다 여기가 좋아서?”
“…그래.”
“흥. 그들이 언제까지 널 아껴줄 것 같아? 인간 따위 길게 살아야 백 년이야. 귀신같은 건 없어지면 그만이라고!”
“상관없어. 이젠 그런 건 생각 안 하기로 했거든.”
“분명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할 거야.”
“그래도 좋아. 지금은 여기에 머물고 싶어.”
“…….”
“그러니 너도, 너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
덕이의 말에 초아가 더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모자란다고 구박받던 덕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에 없이 편안해 보이는 얼굴엔 사랑받는 자에게서 나오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꼬리뿐 아니라 모든 게 훌쩍 자라 버린 것 같아 조금 질투가 났다. 초아가 작게 병신이라고 말했지만 덕이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나서 집을 향해 걸어갔다.
2
아침부터 뉴스에서 첫눈이 올 거라고 떠들더니 저녁이 되자 굵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자와 인태가 인파 속에 섞여 길 맞은 편에 있는 카페를 쳐다봤다. 그 안에는 덕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동생인 초아가 돌아가고 얼마 후 덕이는 일자리를 구했다. 영신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 좋아하던 오이까지 끊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일단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덕이가 손님에게 웃는 걸 보고 인태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 평생 박영신 등에 빨대 꽂고 살면 편할 텐데 말이지.”
“덕이가 좋다잖아. 그나저나 앞치마 잘 어울린다. 그치?”
뿌듯한 얼굴로 쳐다보던 미자의 눈이 어느 순간 놀란 듯 커졌다. 그녀가 인태를 끌고서 얼른 건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인태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미자는 대답 대신 손으로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거기엔 익숙한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는데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얼굴은 분명 영신이었다. 지금쯤 한참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인데 왜 저기에서 있는 건지 모르겠다. 덕이가 있는 카페 쪽을 바라보던 영신이 슬며시 웃는 걸 보고 인태가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지금 웃은 거야?”
“그러네. 웃었네.”
“어우, 소름 끼쳐.”
인태가 몸서리를 치며 팔을 쓸었다. 스토커도 아니고 왜 저기서 쳐다보며 웃고 있느냐고 말이다. 미자는 그게 다 사랑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했지만, 박영신과 사랑이란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달리는 차들 사이를 지나쳐 영신의 승용차에 도착했다. 운전석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보니 영신은 카페 창을 통해 보이는 덕이를 바라보며 또 흐뭇하게 웃는 중이었다.
“완전 중증인데?”
“보기 좋다. 눈에서 꿀 떨어지고 있어.”
“우엑.”
그때 고개를 돌리던 영신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흠칫 몸을 뒤로 물린다. 곧 인태와 미자가 차 안으로 스르르 들어와 뒷자리에 앉았다.
“어이, 박 대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
“영신아. 덕이 보러 온 거야?”
“훔쳐보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러고 보니 덕이 퇴근 시간이 다 됐구나.”
대답 대신 영신의 얼굴은 슬며시 구겨졌다. 오늘 덕이를 데리러 온 건 맞는데 끝나고 오붓하게 데이트나 하러 갈까 생각 중이었다. 그랬는데 미자와 인태까지 만났으니 아무래도 계획이 틀어질 것 같았다.
“너희는 여기서 뭐 해. 집에 안 가?”
“안 가. 우리도 덕이 보고 온 거야. 그치, 미자야?”
“그래. 연말이고 한데 우리도 같이 놀자. 노래방 갈까?”
“오오! 좋다. 노래방 가자, 가자!”
오늘따라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가라고 쫓아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카페 문이 열리면서 덕이가 나온다. 조금 전까지 앞치마를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두툼한 점퍼를 걸친 채 목도까지 두른 모습이었다. 차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더니 보조석 문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온다.
“영신아!”
영신을 안으려던 덕이가 뒤에 앉은 미자와 인태를 확인하고는 또다시 반가워했다. 아르바이트하고 나서부터 둘을 만날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보니 좋았다. 하지만 영신은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와 똑같이 반가워하다니.
“너희 어떻게 왔어?”
“그냥 너 일 잘하나 보러 왔지!”
“왔으면 들어오지!”
“됐어. 뭘 그렇게까지.”
세 사람이 웃고 떠들었지만, 영신의 구겨진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룸미러로 잠깐 시선이 마주친 인태에게 그냥 내리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인태는 씨익 웃더니 바로 외면하고 덕이에게 어디를 갈 건지, 뭐 하고 놀 건지 계획을 세운다. 미자까지 합세해서 쿵짝이 맞으니 영신은 도저히 가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괜히 저만 나쁜 놈 되는 것 같고 그래서.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날 뭘 하면 좋으려나. 오붓하게 데이트는 물 건너갔지만 덕이가 좋아하니 오늘만큼은 저도 즐겁게 지내보자고 마음먹었다.
쿵작쿵작 음악 소리에 인태가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영신이 가운데 앉아 맥주를 마시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밥을 먹고 난 후 인태와 미자가 졸라 노래방에 오긴 했는데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덕이는 전에 와본 적이 있다면서 제법 신 나게 놀았다.
노래방이라고 해봤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부르긴 해도 남들 귀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인태와 미자가 주로 불렀는데, 사람들 눈엔 영신과 덕이가 노래만 틀어놓고 앉아서 있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덕이는 어깨만 움직이며 이상한 춤을 추었고, 미자는 팔다리를 움직이며 광란의 춤을 선보였다. 지켜보던 영신이 기가 막힌 듯 웃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모친에게 온 연락이었다. 즐겁게 노는 세 사람을 뒤로 한 채 노래방을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아직은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아서인지 눈은 쌓이질 못하고 내리는 족족 녹아버렸다.
[밥은 먹었어?]
오랜만에 듣는 모친의 음성에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아픈 데는 없느냐고, 혼자 지내도 밥은 잘 챙기라고 그녀는 듣기 좋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할머니는요.”
[여전하시지.]
“다행이네요.”
[혼자 있니?]
“아니요.”
[연말인데 데이트라도 하는 거야?]
“…네.”
순순히 대답하는 바람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속에 자식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혼자 오랜 시간 지내고 누굴 만나는 법도 없더니.
실은 석현에게 영신이 최근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같더라는 말을 얼핏 전해 듣긴 했다. 다 큰 자식인데 너무 간섭하면 안 될 것 같아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영신이 마음을 많이 쓴다는 얘기에 그래도 정 붙일 곳이 생겼구나, 안도했다.
[나중에 엄마도 보여줘.]
“기회 되면요.”
잘 지내라는 말로 통화를 마치고 나서 영신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눈앞에 덕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맥주를 한 캔 먹어서 그런지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히히 하고 웃는다.
“영신아 여기 왜 나와 있어?”
“통화하느라고.”
“재미없지?”
“아니. 재미있어.”
“진짜?”
영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노래방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덕이가 재미있게 노는 것 같아 그건 그것대로 볼 만했다. 인태랑 미자는 보이지 않길래 무얼 하느냐고 물었더니 벌써 노래방에서 빠져나가 클럽에 갔단다.
그 말에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전에 인태가 덕이를 꾀어 클럽에 간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클럽 이야기만 나와도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그때 연락처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에 덕이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연락처를 알려줬고, 다음 날부터 한동안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남녀들에게 전화로 시달려야 했었다. 그 이후로 덕이는 일주일간의 외출 금지와 함께 전화번호까지 바꾸어야 했다.
“클럽, 너도 가지 그랬어.”
“거짓말. 그럼 질투하면서.”
그 말에 덕이가 생긋 웃더니 영신의 팔에 팔짱을 낀다. 말끔한 남자 둘이 그러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온다. 영신이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우산을 펼쳐 들었다. 팔짱을 끼고 걷다 보니 길 곳곳에 트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을 처음 본 덕이가 신기한 얼굴로 쳐다봤다.
“나무에 왜 저렇게 해 둔 거야?”
잠시 고민하던 영신이 크리스마스에 관해 설명했다. 덕이는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내 생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생일에 왜 선물을 주고받는지 말이다. 그러다 문득 제가 영신에게 아무런 선물도 해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저는 영신에게 많은 걸 받았는데.
조금 있으면 아르바이트하는 곳에도 월급도 받으니 뭘 사줘야 할까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지간한 건 다 가지고 있는데, 뭘 해줘야 좋아할까.
그때 저 멀리 인태와 미자가 다시 돌아오는 게 보였다. 덕이가 부르려고 하자 영신이 그대로 덕이의 입을 막은 채 끌고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버린다. 졸지에 끌려간 덕이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구시렁거리는 인태의 말소리와 함께 그들이 골목을 지나쳐 버린다. 클럽 어쩌고 물이 안 좋네,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놀러 갔던 일이 잘 안 된 모양이었다.
영신이 손을 떼어내고 나서 덕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가로등 빛에 얼굴이 더 하얗게 느껴진다. 가만히 입술을 매만지다 살며시 포개니 덕이가 입술을 벌려 겹쳐 문다. 쪽, 쪽, 혀가 얽힐 때마다 단전 아래로 열기가 모였다.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둘의 나직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영신아…. 집에 얼른 가자.”
“그럴까?”
“어….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어.”
덕이가 숨을 헐떡이며 풀린 눈으로 쳐다보더니 가기 전에 좀 더 하자면서 영신을 끌어당긴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진한 키스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
탁, 탁, 덕이가 호박을 써는 걸 보고 영신이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최근에 덕이는 요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였는지 종종 저렇게 나서서 칼질을 했는데 워낙 서툴러 보는 사람마저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마지막 호박까지 썰고 나자 덕이가 헤헤 웃으며 이마를 한 번 훔친다.
“잘 썰었지?”
영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된장찌개에 넣을 채소였는데 감자와 호박이 모두 깍두기보다 큰 크기로 잘려있어 한입에 다 들어갈까 의문이었다.
“크고 먹음직스럽네.”
덕이가 뿌듯하게 웃더니 이번엔 양파를 썬다. 그러다 매운지 코를 찡그리며 눈이 금세 붉어진다. 영신이 잡아당기며 이쪽으로 나오라고 했지만 그는 꿋꿋하게 서서 남은 양파를 마저 썰었다. 후각이 예민한 건지 양파나 파를 썰 때 많이 힘들어했는데 코랑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속으론 자꾸 음험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와. 나머진 내가 할게.”
“그럼 이거 봐줘. 내가 반찬 꺼낼게.”
냉장고 쪽으로 움직이던 덕이가 갑자기 생각난 듯 영신을 불렀다.
“참. 나 내일 조금 늦을지도 몰라.”
“왜.”
“아르바이트 끝나고 다 같이 저녁 먹어.”
그 말에 영신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엔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세 명 더 있었는데 우려했던 거와 달리 덕이는 그들과 제법 잘 어울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무 잘 어울려서 탈이었다.
또래와 어울리며 인간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길 바란 건 사실이지만 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니 그건 그것대로 질투가 났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덕분에 매장 앞으로 데리러 가는 날이 많아졌다.
“아르바이트 재미있어?”
“응. 왜?”
“그냥.”
덕이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저번에도 몇 번 관뒀으면 하길래 싫다고 하긴 했는데, 역시나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설마 관두라고 하려는 건 아니지?”
“아냐. 네가 좋아하면 됐어.”
“정말?”
“그래, 정말.”
반찬을 꺼내 접시에 덜어놓던 덕이가 오이 하나를 집어 아삭 베어 물었다. 더운 여름에 먹는 오이는 시원해서 좋았고, 추운 겨울에 먹는 오이는 더 시원해서 좋았다. 아삭아삭 경쾌한 소리를 내며 오이를 씹다가 슬며시 영신의 곁으로 가서 섰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으면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걸 보고 입맛을 다시니 영신이 이제 고기 구울 준비를 한다.
“영신아, 나 밥 먹고 잠깐 나갔다 와도 돼?”
“이 밤에 어딜?”
“실은 미자와 인태가 부탁한 게 있어서.”
“무슨 부탁?”
덕이는 낮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이 제게 부탁을 했는데 성탄절 선물을 사서 미자는 예주에게, 인태는 제 부모님께 전해달라는 거였다. 미자는 낮에 돌아다니면서 봐둔 게 있다며 매장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그녀는 덕이가 가끔 예주와 연락하고 지내는 걸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전과 달리 아빠와 살며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말에는 감격해 덕이를 꼭 안아주었다.
덕이는 미자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녀가 죽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말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지만, 어쩌면 영신의 말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나름대로 충분히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인태가 부탁한 선물은 건강식품이 대부분이었는데 덕이한테 하루 정도는 본가에 가서 제 부모님을 찾아뵙고 말동무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물었다. 덕이는 서슴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첫 방문 이후로 두 번인가 더 갔었는데 그때마다 인태 부모님은 제 아들처럼 반겨줬기 때문에 덕이도 그곳에 가는 게 싫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신의 선물을 사야 하는데… 덕이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영신이 눈썹을 슥 들어 올린다.
“왜.”
“영신아, 너는 뭐 좋아해?”
“팔덕이.”
고민할 것도 없는 대답에 덕이가 눈을 흘겼다. 그 이후로 꼬리 하나는 나올 기미가 없었는데 덕분에 제 별명은 구더기에서 팔덕이가 됐다. 입술을 삐죽거리자 영신이 웃으며 덕이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친다.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거 말고….”
“말고? 그럼 짝짓기.”
“저질.”
“그런 말 누구한테 배웠어?”
“미자한테.”
“당분간 놀지 마.”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연말이라 그런지 영신의 휴대폰은 쉴 틈 없이 울려댔다. 평소에 보면 사람도 잘 안 만나는 거 같은데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인태 말로는 그게 다 영신이 뜯어 먹을 게 많아서라고 했지만, 덕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거실 쪽으로 나가 전화를 받는 영신의 뒷모습을 보며 덕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영신에게 어떤 선물이 좋으려나. 돈을 좋아하니까 돈을 줄까, 생각했지만 그건 너무 정 없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줄 돈도 없고.
인터넷에 애인이 좋아하는 선물을 검색했는데 지갑이나 시계,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영신에겐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것들이라 그중에 뭘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고민하던 덕이가 작게 한숨을 쉬고 나서 찌개를 한 번 휘저었다. 국물을 떠서 입에 넣으니 맛이 기가 막혔다. 감자를 하나 수저로 뜨는데 크기가 제법 크다. 아니 많이 컸다. 아무래도 너무 크게 썬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수저로 슥 잘라 반으로 만든 후 흡족한 미소 지었다.
***
영신의 눈썹이 팔자로 일그러졌다. 벌써 몇 시간 째 덕이에게 줄 선물을 둘러보는 중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옷이나 시계, 지갑 같은 건 자주 사줬는데 다른 게 뭐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시선이 매장 한쪽에 있는 골드바에 가서 꽂혔다. 차라리 저걸 가방에 한가득 담아서 선물해줄까. 아니면 금으로 오이 모양을 만들어줘? 저라면 기뻐하겠지만, 과연 덕이가 좋아할지 의문이었다. 비싼 시계를 사줘도 그게 왜 비싼지 도통 이해를 못 하질 않았던가. 차라리 어디서 오이 농장을 하나 사서 안겨줄까.
“하아.”
골드바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니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마음에 드시는 게 없느냐고 묻는다. 영신이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마음에 들긴 골드바가 딱 마음에 든다. 선물로 저것만 한 게 없는 거 같은데.
“선물하실 건가요?”
“네. 애인한테요.”
당당하게 애인이라고 대답하는 영신을 보며 직원이 부럽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이렇게 잘생기고 근사한 남자의 애인은 어떤 사람일까 잠시 상상하는 표정이었다.
“반지는 어떠세요? 아니면 팔찌나 목걸이도 괜찮고요.”
“글쎄요….”
영신이 턱을 쓸며 여전히 한곳에 시선이 꽂혀 있자 눈치 빠른 직원이 그쪽으로 가서는 골드바를 꺼내 진열대 위에 올려둔다. 한눈에 봐도 꽤 무게가 나가는 크기였다.
“혹시 이거 녹여서 다른 거 만들 수 있나요?”
“네? 어떤 거 말씀하시는 건지….”
“오이요.”
“네? 오이…요?”
“오이, 채소 말이에요.”
태연함을 유지하던 직원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혹시 먹는 오이 말씀하시는 거냐고 물었더니 영신이 대번 고개를 끄덕인다. 직원이 입꼬리를 힘겹게 당겨 웃으며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만들려면 만들 수 있겠지만, 금덩이를 굳이 오이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냥 오이 농장이 나으려나….”
영신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아까부터 오이 타령만 하는 남자를 보며 직원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 인간 겉만 멀쩡하고 맛탱이는 살짝 간 건 아닐까.
의심 어린 눈초리를 뒤로하고 영신이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뭐 다른 게 있을까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얼핏 근처에서 혼이 돌아다니는 게 느껴졌다. 너무 집중한 탓에 몰랐던 게 어이없을 정도로 익숙한 기운이었다. 뭐지? 이상한 마음에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백화점 유니폼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직원의 얼굴이 슬며시 구겨졌다. 아까부터 웬 사내가 마네킹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구겼다가 폈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가 결국엔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도와줄까 물었지만 돌아온 건 괜찮다는 대답이었다. 정말 괜찮으면 남의 매장 앞에서 저러지를 말든가.
“손님, 정말 도와드릴 게 없나요?”
그 말에 덕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바이트 가기 전 조금 일찍 나와 영신의 선물을 사려고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러다 문득 마네킹에 걸린 빨간색 목도리가 시선을 잡아끌어 그 앞에 멈춰 섰다. 색깔이 얼마나 곱고 예쁜지 당장에라도 빼서 계산해 달라고 하고 영신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영신이 이걸 마음에 들어 하느냐였다. 여태 영신이 빨간색을 착용하거나 사용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부적에 적힌 글씨는 빨간색이긴 했지만.
지켜보던 직원이 목도리를 빼서 덕이에게 건네준다. 한번 둘러보라는 말에 잠시 망설이던 덕이가 제 목에 감고 나서 직원이 이끄는 대로 거울 앞에 섰다.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보이고, 이목구비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다.
“…예쁘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직원이 옆에서 너무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늘어놓는다. 덕이가 머뭇거리면서 정말 괜찮으냐고 물었다.
“…이거 좋아하는 사람한테 선물할 건데… 마음에 들어 할까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제일 먼저 바뀐 게 있다면 이젠 제법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거였다. 전에는 저보다 나이가 적어 보이면 무조건 반말을 해서 오해를 샀는데, 이젠 존댓말을 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럼요. 선물은 마음이에요.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종이 한 장을 주더라도 감사한 법 아닐까요?”
아. 덕이가 감탄한 얼굴로 쳐다봤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선물은 마음이지 가격 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신이를 좋아하고, 위하는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입가에 조금씩 미소가 번져나갔다.
“애인분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엄청 잘생겼어요.”
“아, 잘생….”
“키도 크고, 짝짓기도 잘해요. 거기도 엄청 크고.”
거기가 크다는 얘길 하면서는 저도 부끄러운 걸 알았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듣고 있던 직원이 당황한 내색을 했다가 얼른 지우고, 좋으시겠다며 웃는다. 덕이가 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다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팔불출처럼 한참 동안 서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
“다 됐다!”
덕이가 마지막으로 트리 위에 커다란 별을 매달자 미자가 아이처럼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항상 거리에서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는데, 덕이 때문인지 올해는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트리 옆으로 가서 스위치를 올리자 전구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정말 예뻐!”
연신 감탄하던 두 사람이 이것 좀 보라며 인태를 불렀다. 테이블에 세팅해 놓은 와인 잔 4개를 바라보던 인태가 고개를 돌렸다. 트리를 보는 그의 표정이 잠시 아련하게 젖어들었다. 살아있을 때는 이맘때 늘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그때 그 시절들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봐줄 만하네.”
“근사하다. 정말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
“팔덕. 박 대표는 언제 온대?”
“차가 막히나 봐. 늦는다고 연락 왔어.”
덕이가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백화점 앞에 커다란 트리가 보였다. 30분 정도면 도착한다던 영신은 차가 막혀 조금 더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빨리 와서 이걸 봤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우리 음악도 틀까?”
“그래, 덕아. 음악 틀자.”
덕이가 휴대폰을 만지며 어떤 음악이 듣고 싶으냐고 물었다. 인태는 캐럴 클럽 버전이 있는지를 물었다. 미자가 오늘 같은 날도 클럽 타령이냐고 구박을 했지만, 인태는 처지는 것보단 그래도 활기찬 노래가 낫지 않겠느냐고 반박했다.
“덕아, 그냥 다른 거 틀어.”
“야, 그래도 찾아나 봐.”
“어? 있는데?”
흩어져 있던 인태와 미자가 덕이에게로 쪼르르 모였다. 정말 있느냐고 묻자 덕이가 휴대폰을 내밀어 확인시켜줬다.
“야, 팔덕아. 노래 틀고, 불 끄고 그거 켜자.”
그거란 말에 덕이가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그거 영신이가 싫어하는데.”
“어때! 오기 전까지만 잠깐 놀면 되지.”
“그래, 덕아. 오기 전까지만.”
인태와 미자의 부탁에 덕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천장에 매달린 미러볼을 올려다봤다. 언젠가 인태의 부탁으로 저걸 매달아 놨는데, 영신이 발견하자마자 떼라고 난리를 치는 통에 곤욕을 치렀었다. 간신히 설득해서 붙여놓긴 했는데, 지금 켜도 되는 걸까.
“음악 켜고, 저거 켜고, 딱 10분만 놀자.”
“좋다. 그러자, 덕아.”
슥, 입술을 핥던 덕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미러볼을 켰다. 반짝반짝 오색 빛깔의 미러볼이 정신없이 돌며 집 안을 비췄다. 거기다 클럽 음악을 틀어 볼륨을 높이고 마지막으로 집 안을 환하게 밝히던 불을 끄고 나니 제법 그럴싸했다.
“야! 죽인다!”
슬슬 리듬을 타던 인태가 광란의 댄스를 선보이며 팔다리를 꺾었고, 미자도 사람들 놀라게 하던 실력으로 사지를 흔들었다. 머뭇거리던 덕이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엇박으로 몸을 흔들었다. 언젠가 영신이 덕이가 춤추는 걸 보고 소리까지 내며 웃었는데 덕이는 처음에 제법 잘 춰서 그런 줄 알고 착각을 했었다. 나중에야 제가 사지 육신이 따로 노는 몸치라는 걸 알게 됐지만.
광란의 댄스 파티를 벌인 지 2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탁, 집 안의 불이 켜졌다. 춤을 추던 셋 은 일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셋 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 저절로 출입구 쪽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거기엔 언제 도착했는지 영신이 기가 막힌 얼굴로 셋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천장에 돌아가는 미러볼에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지기에 덕이가 얼른 미러볼을 끄고 나서 휴대폰 음악도 껐다.
“영신아!”
“박 대표 일찍 왔네. 30분은 더 걸린다더니.”
“그러게. 조금 더 늦게 와도 됐을걸. 우리 한참 물올랐는데. 그치, 덕아?”
“아, 아니. 난 아니야. 영신이 기다렸어.”
혼자 빠져나가려는 덕이를 보며 인태가 눈을 흘겼다. 덕이가 얼른 영신에게로 쪼르르 다가갔다. 그의 양손에 상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걸 받아 들고 테이블로 가서 꺼내보니 하나는 케이크였고, 다른 하나는 와인이었다. 덕이가 쓴 걸 잘 못 먹는 탓에 적당히 달콤한 걸로 골라왔는데, 근데 저러고 놀고 있었다니. 여전히 그의 시선은 미러볼에 꽂혀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걸 내가 부숴버렸어야 하는 건데.”
이를 까득 물던 영신에게로 덕이가 다가와서는 팔을 잡아끌었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엄청 기다렸다고 아양을 부리자 미자와 인태도 같이 맞장구를 쳤다. 기다리다 덕이 턱이 빠져 무릎까지 내려온 걸 자기들이 맞춰줬다면서. 능청스러운 셋을 보며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영신의 기분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셋은 어느새 케이크 앞으로 모여들었다.
“와. 케이크 맛있겠다!”
“역시 박 대표가 센스가 있어!”
“맛있어 보인다. 우리 초 꽂고 소원 빌자.”
“소원은 달에다 빌어. 케이크 따위가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아?”
“기분이지, 이 자식아.”
셋이 아옹다옹하며 케이크 앞에 모여있는 걸 보고 영신이 조금 전 울컥했던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그들 사이에 섞여 앉았다. 초에 불을 붙이고 나서 집 안의 조명을 어둡게 했다. 일렁이는 초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꽤 이상했다.
각자 소원을 빌기로 하고 나서 셋을 센 다음 불을 껐다.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실은 오늘 오붓하게 둘이 보내고 싶었는데 덕이가 먼저 넷이 파티를 하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탐탁지 않았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이야 이따 둘이 가지면 되는 거고, 이렇게 넷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촛불을 끈 덕이가 일어서더니 한쪽으로 쪼르르 간다. 가서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덕아, 그게 뭐야?”
“내가 너희 주려고 선물 샀어!”
선물이란 말에 영신이 슬며시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덕이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꺼내 각자의 앞에 놓아주었다. 영신이 제 앞에 놓인 선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덕이가 미자와 인태의 선물을 대신 풀어준다. 첫 번째로 선물을 확인한 미자가 환하게 웃었다. 멜로디가 나오는 스노우볼이었는데 안에 작은 집이 있었고, 그 집 앞에 여자와 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예쁘다! 진짜 예뻐!”
미자 옆에서 선물을 확인하는 인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괜히 콧등을 찡그리고 나서는 뭘 이런 걸 했느냐고 타박을 놨다. 그건 작은 액자였는데, 거기엔 인태의 부모님 사진이 들어있었다. 집에 들렀을 때 부탁해서 한 장 찍어온 건데, 사진 속 그들은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인태는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맙다, 인마.”
덕이가 배시시 웃더니 이번엔 영신을 쳐다봤다. 어서 뜯어 보라는 표정으로. 영신이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실은 저도 선물을 준비하긴 했는데 집에서 단둘이 있을 때 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남들이 다 보는 데서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막상 받으니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작은 상자에 무엇이 들었을까, 하고 말이다.
영신이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자 검은색 상자가 나온다. 인태와 미자의 시선이 그 상자에 쏠리며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영신이 조심스레 상자를 여는 순간 미자와 인태가 약속이라도 한 듯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목도리였는데, 문제는 빨간색이라는 거였다.
“야, 미자야, 저거 영신이가 제일 싫어, 아윽.”
미자가 인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으며 얼른 말을 돌렸다.
“예쁘다! 영신이랑 잘 어울리네!”
영신이 그걸 꺼내 들었다. 앞에 앉은 덕이가 괜히 머쓱해져서는 뺨을 긁적였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너는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번엔 영신이 목도리를 펼쳤다. 빨간색 캐시미어 목도리는 덕이의 털만큼이나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하지만 영신은 어릴 때부터 빨간색을 싫어했다. 유독 집 안에 붉은색 물건이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크는 내내 빨간색이란 걸 몸에 둘러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색은 자신이 봐온 색 중 가장 따뜻하고 예쁜 색이었다.
“내가 해줄까?”
덕이의 물음에 영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덕이가 일어나 영신에게 다가가 목도리를 둘러줬다. 얼굴이 가까이 닿자 영신이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웃는다.
“고마워.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엄청 고민한 건데.”
“매일 하고 다닐게.”
“응!”
미자는 역시 사랑은 위대하지 않으냐며 감탄했지만 인태는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표정을 보니 목도리가 아니라 뱀을 둘러줬어도 좋아했을 거라면서. 그러다 문득 두 사람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들어올 때 보니 선물은 없었던 거 같은데.
“박 대표, 팔덕이 선물은 없어?”
“그러게. 왜 빈손이야?”
목도리를 내려다보던 영신이 멈칫했다. 실은 오기 전에 집에 미리 들러 놔두고 왔는데, 갑자기 선물 이야기를 꺼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물 상자를 정리하며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뭐야. 선물 안 샀어?”
“그럴 리가. 샀는데 나중에 주려는 거 아니야?”
“아냐. 나는 괜찮아. 영신이가 평소에 선물 많이 해줘.”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봐. 샀지?”
“하긴. 샀는데 안 가져왔겠지. 근데 뭐 샀어? 궁금하네?”
“둘 다 왜 그래. 나는 안 궁금해.”
덕이의 만류에 미자와 인태가 에에이~ 하면서 야유를 보냈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느냐고 저들끼리 영신이 뭘 샀을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미자와 인태의 이야기를 듣던 영신이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리 네들이 떠들어 봐라, 어떤 선물인 줄 상상이나 할 수 있는지.
“돈 아냐?”
“으하하, 설마.”
“아니면 오이?”
풉, 영신이 와인을 마시다 그대로 뿜어 입을 틀어막았고, 그걸 본 인태와 미자가 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영신인 돈 많으니까 그냥 오인 아닐 거야.”
“그럼?”
“황금 오이!”
“하하, 그게 뭐야. 변태냐.”
황금 오이란 말에 덕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그걸 어디다 써. 먹지도 못하는 걸.”
선물을 정확하게 맞춘 것보다 그걸 어디다 쓰냐고 한 덕이의 말이 더 충격이었는지 영신이 와인 잔을 입에 문 채로 그대로 굳었다. 자칫하면 와인 잔을 씹어 먹을 기세였기에 미자와 인태가 배를 잡고 깔깔 굴러다녔다. 뒤늦게 영신은 미자와 인태가 자신이 무얼 사는지 알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거기 있었다는 걸.
이것들을 확 천도시켜 버릴까. 잔을 내려놓고 잇새로 억눌린 숨을 내쉬니 자기들은 이만 놀러 나간다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문이 아니라 창을 통해 도망가는 거 보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둘이 사라진 곳에 영신과 덕이 둘만이 남게 됐고, 영신은 여전히 창밖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진짜… 오이야? 황금 오이?”
영신이 잔을 내려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먹지도 못할걸 사와 버렸네.”
덕이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영신의 옆에 가서 바싹 붙어앉았다. 그런 다음 영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니야. 나 마음에 들어! 황금 오이 멋있어!”
“거짓말.”
“진짜야. 네가 해주는 건 다 좋아. 네가 돌을 줬다고 해도 나는 좋아했을 거야. 왜냐하면 널 좋아하니까.”
덕이가 배시시 웃더니 영신의 뺨을 붙들고 저를 바라보게 한다. 미간에 생긴 주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나서 가볍게 쪽, 입을 맞췄다. 그래도 표정이 나아지질 않아 콧등이랑 뺨에도 연신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이건 뭐야?”
“예쁜 짓. 너 좋으라고.”
생긋 웃는 모습에 영신이 졌다며 고개를 흔든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리모컨을 들어 집 안의 불을 모두 꺼버리고, 커튼도 닫았다.
입술이 포개지고 혀가 얽히면서 몸은 점점 밀착됐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열기가 번져나갔다. 영신이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 둘은 서로 간신히 떨어졌다가 다시 엉겨붙었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영신이 바닥에 눕고 덕이가 그 위에 올라앉은 자세가 됐다.
눈을 맞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으며 다시 입술을 포갰다.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는 트리 너머로 두 개의 그림자가 뒤엉키며 어룽졌다. 그중 하나의 등 뒤로 꼬리 아홉 개가 생겨나며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움직였다.
덕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