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9/10)

“그만 좀 울어. 구더기 닮아 가?”

아까부터 눈물을 훔치고 있는 미자를 보며 인태가 구박을 늘어놨다. 운전대를 잡은 영신이 흘깃 룸미러로 미자를 쳐다봤다. 공항에서 예주의 아버지를 만났고, 대충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다. 물론, 100% 진실을 얘기한 건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그걸로 사람을 괴롭혀 돈벌이한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대신 그동안 예주가 처해있던 상황들을 이야기해주고 사진과 여러 가지 증거물들을 넘겨줬다. 통화할 때만 해도 비교적 담담하던 예주의 아버진 멍 자국이 남아있는 예주의 얼굴을 보더니 눈시울이 빨개져 가슴을 쳤더랬다.

엄마 없이 크는 게 안쓰러워 재혼한 게 가장 큰 실수였다고, 예주를 제 자식처럼 아낀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면서 스스로를 자책했다. 오히려 담담한 건 예주였다. 어른스럽게 괜찮다고 아버지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고 영신은 왜 그렇게 미자가 이 아이를 아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그렇게 두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미자는 서운했는지 계속 눈물을 찔끔거렸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는 손부채질을 하며 감정을 애써 삼켜냈다.

“…그만 울어. 이제 다 끝났잖아.”

“나도 모르겠어. 자꾸 눈물이 나네. 진짜 갱년긴가.”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박 대표야. 예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인데 말이지. 돈 돌려줘, 위약금 물어줘, 뒷수습 다 해줘.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죽는다는데, 조만간 영신이랑 나랑 너랑 셋이 일 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미자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인태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인태는 맞은 데를 붙여 잡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너는 그 사람 패는 버릇 좀 고쳐.”

“사람도 아닌 게.”

“그러네.”

“하여튼 영신이 많이 변한 거 같아. 덕이 때문인가.”

“그건 나도 인정. 좀 인간다워졌다고 할까.”

다 들려. 미자가 툭 쳤고, 인태가 목소리를 낮춰 전엔 돈 좋아하는 기계 같았다고 덧붙였다. 영신이 운전대를 빠득 힘주어 잡았다. 이것들은 다 들으라고 속닥이면서 사람 열 받게 하는 데 취미를 붙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아까부터 덕이를 혼자 두고 온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꼬리가 더 나온 걸 모른 척했는데 억지로 깨워서라도 데리고 왔어야 하나. 설마 도망치진 않았겠지. 빌어먹을.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무도 없을 텅 빈 집 안을 상상하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꼬리 아홉 개가 다 나온 걸 알았는데 그 상태로 혼자 두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납득이 되질 않는다. 혹시 시험하고 싶었던 걸까. 어째서. 무엇을.

“그나저나 덕이는 뭐 하고 있을까.”

“모르지. 혼자서 동물로 변신하고 있을지도.”

동물이란 말에 영신의 눈이 다시 룸미러로 향했다. 동물? 하고 묻자 미자가 인태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게 보인다. 인태가 당황해서는 말을 더듬었다.

“그, 구미호가 막 변신술도 쓰고 그러잖아. 그 얘기였어. 하지만 덕이는 아직 여덟 개뿐이니까 그건 못하겠지? 아마도?”

“구미호가 변신술 쓰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미자가 얼른 대꾸했다.

“전에 말했잖아. 광심이 할머니라고! 그 노인네가 말해줬어.”

“맞다! 그 노인네가 구미호에 대해 아는 건 정말 많았지!”

두 사람이 맞장구를 치는 사이에 영신은 기억을 더듬었다. 광심이라는 노인은 처음 구미호를 찾으려고 할 때 미자가 말한 노인네였다. 자식이 길에다 버려 얼어 죽었다는, 반호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심지어 만나기도 했다는 정체 모를 노인.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영신이 다시 물었다.

“그 노인네는 어디 가면 만나는데?”

“전에 기억나? 우리가 이사 오기 전 머물던 아파트 있잖아. 늘 그 주변을 맴돌았어. 아직도 거기 있을지 모르겠네.”

“지박령이라 멀리 가진 못했을걸.”

“정신도 좀 오락가락했던 거 같은데. 나이 물어보면 700살도 넘었다고 하고 말이야.”

미자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갈 일이 없어 그 후론 볼 수 없었지만, 노인은 묘하게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두 사람이 정신 나간 늙은 귀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영신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전대를 집 방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틀었다.

***

커다란 천 가방 안에 오이 몇 개와 돌배 세 개를 집어넣으니 더는 공간이 남질 않았다. 덕이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종이 위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영신아, 미안해. 돈은 꼭 갚을게. 잘 살아. 적고 나서 보니 아무래도 좀 그렇다.

구구절절하게 쓸까 잠시 고민했다가 ‘너 좋아해. 미안해. 나 도망가.’라고 적고 나서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시 ‘영신아.’라고 쓴 후에 한참을 들여다봤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대체 뭘 써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애꿎은 종이만 찢어버렸다. 테이블에 머리를 콩콩 박다가 쌓아놓은 가방을 봤다. 배를 하나 꺼내서 보니 처음 가져왔을 때보다 익은 상태다. 그걸 옷에 슥슥 문지른 다음에 아삭 한입 베어 물었더니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즙이 입 안에 퍼진다.

맛있는 걸 먹는데도 왜 자꾸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대로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찔끔찔끔 울다가 배를 먹다가 또 울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점차 흐르고 있었다. 배 하나를 다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방을 둘러매고 현관 앞으로 가서 집 안을 한 번 휙 둘러봤다. 막상 떠나려고 보니 어질러 놓은 게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인데 대충 청소라도 해두고 갈까. 그동안 고마운 것도 많고, 당장 돈을 갚을 것도 아니니.

그래 일단 청소라도 해주고 가자. 가방을 현관 앞에 내려놓고 어질러 놓은 것들을 치우기 시작하였다. 청소기를 사용할 줄 몰라 이것저것 만지는데 켜지질 않는다. 결국, 물걸레질만 하는데 전에 살던 집만큼은 아니었지만 넓은 집을 혼자서 닦으려니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이거 여간 힘든 게 아니네. 걸레를 한쪽에 버려두고 집 안을 둘러봤다. 아까보단 훨씬 깨끗해졌다. 이번에는 정말 가려고 가방을 다시 둘러맸다. 현관 앞에서 신발 한 짝을 발에 넣고 나니 영신이 자주 신는 흰 운동화가 보인다. 아침 운동할 때 신는 건데.

보고 싶다. 어차피 떠날 걸… 마지막으로 얼굴은 한 번 더 보고 갈까. 꼬리가 다 나온 게 마음에 걸렸지만, 잘만 숨기면 모를지도 모른다. 애초에 알아챘다면 저를 혼자 두고 집을 비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한참을 고민하며 서 있다가 결국 신발을 벗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얼굴만 보고 가는 거야. 얼굴만.”

가방을 던져놓고 소파에 널브러져 누워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그깟 것도 청소라고 움직였더니 피곤하네. 눈꺼풀은 점점 내려앉았다. 혹여 어제처럼 자다 꼬리가 나올까 싶어 옆에 있는 담요를 끌어와 배 위에 덮었다.

***

“여기 근처였는데….”

미자와 인태가 주변을 둘러봤다. 전에 살던 곳 앞 공원에 왔는데 광심이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인태가 벤치 등받이를 툭툭 건드렸다.

“매일 여기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대체 어딜 간 거야.”

“소멸된 거 아닐까? 그 노인네 이승을 떠돈 지도 한참 됐다며.”

“그런가.”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영신이 주변을 살펴봤다. 날이 어둑해지니 숨어있던 귀신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지나가는 여자에게 짓궂게 장난을 걸던 귀신 하나가 영신을 발견하고는 히익, 놀라서 냉큼 달아나버렸다.

그때 인태가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어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미자와 영신이 그곳을 보니 허리가 90도로 굽은 노인네 하나가 공원에 핀 꽃 앞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 중이었다.

“저기 있네.”

“가보자.”

미자와 인태가 앞섰고, 영신이 그 뒤를 따랐다. 가까이 다가가자 광심 할머니는 고개만 돌려 뒤를 쳐다봤다.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빛만은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보통 이승을 오래 떠도는 귀신들은 상태가 안 좋기 마련인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노인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더 신기한 건 영신을 봤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부분 눈만 마주쳐도 도망가는데 말이다.

“할멈. 잘 지냈어? 나야, 미자. 기억하지?”

“노인네, 아직 그대로네. 늙지도 않았어. 하긴 귀신이니 늙을 리가 없겠지만.”

낄낄거리고 웃는 인태를 지나쳐 노인이 영신을 빤히 바라봤다. 회색빛 눈동자는 영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무언가를 살피는 눈치였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치자 노인이 더 가까이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는다.

인태와 미자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영신 또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제 키 반도 안 되는 노인을 내려다봤다. 그때 노인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소리를 질렀다.

“구미호 냄새구나!”

미자와 인태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영신의 눈매가 가늘게 늘어진다. 몸을 섞은 지 며칠이 지나 체취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노인의 회색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영신을 살피더니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봐, 할망구. 우리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말이야.”

노인이 꽃에 코를 대고 흐흡 숨을 들이켰다가 느리게 하아, 하고 토해냈다.

“물어볼 게 뭔데.”

“전에 이야기한 거 있잖아. 반호 말이야.”

노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반호?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딱 봐도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인태가 밉살맞게 얼굴을 구겼다. 미자가 전에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노인은 순순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둘 사이를 가르고 영신이 노인의 앞까지 다가왔다.

“나한테 구미호 냄새가 나?”

“새파랗게 어린것이 반말은. 네가 그 악명 높다는 퇴마사 놈이구나. 딱 보면 알지. 눈깔이 길게 찢어진 게 성질깨나 고약하게 생겼어.”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너야말로 묻고 싶은 걸 물어. 괜히 애먼 귀신 떠보지 말고.”

인태와 미자가 영신의 눈치를 살폈다. 영신이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강지훈의 사진임을 확인한 미자가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사진을 노인에게 디밀었다.

“혹시, 알아?”

미자와 인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덕이에 관해 물을 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18층 사는 퇴마사 사진을 꺼낸 것이다. 노인이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올려 이번엔 영신의 얼굴을 본다. 자세히 보더니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영신이 품 안에서 부적을 꺼냈다. 순식간에 부적에 불이 붙자 노인의 눈 밑이 미세하게 꿈틀 움직인다.

“말하는 게 좋을걸. 아니면 여기서 바로 소멸시켜 줄 테니까.”

“이런 못돼 처먹은 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 노인은 두려운 기색도 불안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평안해 보이는 얼굴에 미자가 노인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할멈. 지금이라도 아는 거 다 말해. 안 그러면 진짜 사라질지도 몰라.”

노인이 미자의 손을 툭 떼어냈다. 회색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며 입꼬리가 피식 올라가는 게 보인다. 보통 영들과 눈빛도 기도 다르다. 이건 인간이 죽어 내뿜는 것이랑은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거기까지 깨달은 영신이 조용히 부적을 없애자 노인이 끌끌 혀를 찼다.

“이제야 눈치를 챘나 보네.”

영신이 노인을 뚫어지게 보며 입을 열었다.

“여우….”

여우? 미자와 인태가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듣던 것보다 법력이 신통치 않구먼. 그러게 돈 좀 그만 밝히고 수련이나 제대로 하지. 타고난 재주 믿고 살더니, 그 잘난 법력도 잃은 게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신이 미자와 인태를 불렀다.

“너희 둘, 저쪽으로 떨어져 있어.”

“왜? 소멸시키게?”

“야, 그러지 마라. 노인네 불쌍하다.”

“잔말 말고 가. 어차피 난 이 노친네한테 손도 못 대니까.”

영신이 이를 까득 갈았고, 미자와 인태가 눈치를 보며 저 멀리 떨어졌다. 영신이 노인을 보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 여우가 혼이 된 거지?”

“여우라고 죽지 말란 법 있어?”

그 말에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여우는 오래 사는 만큼 죽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죽는다고 해도 혼이 남지 않고 사라진다. 그런데 왜 혼이 되어 돌아다니는 걸까. 대체 왜.

노인은 꽃밭 화단에 쭈그리고 앉더니 영신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영신이 이번엔 다른 사진을 꺼냈다. 덕이였다. 그걸 내밀자 노인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진다.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 반쪽짜리 여우 놈이군.”

“알아보겠어?”

“그래. 이 근처에서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지. 혹시나 하는 기대에 구슬을 빼앗아 볼까 했더니, 구슬조차 없는 놈이더군.”

“구슬을 빼앗아? 왜?”

“반호의 구슬엔 엄청난 힘이 있거든. 그것만 있으면 다시 구미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영신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다시 구미호가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주 오래전, 생각보다 많은 구미호가 인간 세상에 스며들었어. 나름 살 만했지. 인간들 세상에서 인간처럼 사는 것도 말이야.”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진짜 인간이 되어가고 있더군.”

노인의 입가에 기가 막힌 미소가 걸렸다. 영신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뭐? 하고 되물었다. 올라갔던 노인의 입꼬리가 차분히 내려갔고 손은 어느새 한쪽에 핀 꽃들을 만지고 있었다.

“많은 여우가 호국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지. 하지만 이미 능력을 잃기 시작한 여우들은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어. 길을 잃은 게지. 몇몇 여우들은 인간의 정기라도 섭취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어. 아주 오래전이라면 가능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게 변했으니까. 인간도, 여우도.”

“그럼… 너도 인간이 된 채로 죽었다는 건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여우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적적한 마음에 양아들을 들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자라서 성인이 되자 힘없고 쓸모없어진 자신은 버려졌다고. 그렇게 한겨울 차디찬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게 이 늙은 여우의 마지막이었다.

“인간한테 마음을 준 내 잘못이지.”

노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눈가에 회한이 묻어났다. 인간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최후는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했다.

“구슬은 점점 소멸했고, 얼마 남지 않은 여우들은 다른 여우들을 찾아 해치기 시작했어. 구슬을 빼앗으려고 말이야. 하지만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한 여우 구슬에 무슨 힘이 있겠어. 시간을 조금 연장해줄 수는 있어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순 없었지.”

노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영신이 다시 한 번 지훈의 사진을 꺼내 노인에게 바싹 디밀었다.

“잘 봐. 정말 모르는 사람이야?”

“흠.”

“보통 놈이 아니야. 잘 생각해봐.”

가만히 보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표정을 보니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노인이 뜬금없이 덕이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영신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같이 있었으나 도망쳤다고 말이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늘였지만 영신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도망쳤을 수도 있으니 아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

종잇장처럼 뜯기고 구겨져 있던 문은 어느새 감쪽같이 고쳐져 있었다. 인태와 미자가 그 문을 보며 기쁜 얼굴로 쳐다봤다. 영신의 집에 못 들어갈 때는 한번 가보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막상 같이 지내보니 얼마나 잔소리를 하고 다그치는지 없던 스트레스가 생길 지경이었다. 대체 덕이는 저런 거랑 어떻게 같이 사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덕이나 한 번 더 보고 올걸.”

“그러게.”

머뭇거리던 미자가 영신을 보며 물었다.

“저번에 내가 말한 거… 나는 변함없어. 혹시라도 생각이 변한 거면 말해줘.”

미자는 제 돈을 덕이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모자라는 건 벌어서 갚겠다고. 어차피 돈을 보낼 가족도 없다면서 말이다. 영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예주에 관한 조사를 해봤는데, 입양됐거나 한 기록은 따로 남아있질 않았다. 설령 미자의 딸이라고 해도 온전히 그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그 이야긴 끝난 걸로 아는데.”

“혹시나 해서 말이야. 생각해봐 달라고.”

영신이 그만 들어가라고 말하고 나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미자와 인태가 안으로 사라졌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 영신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오는 길에 구덕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질 않았다.

한 번 더 할까 하다 관두었다. 떠났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데리고 나왔어야 했나.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데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완력으로든 뭐든 이제 구덕이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어리석은 여우가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띵, 하고 멈춘다. 문이 열렸고 안쪽으로 들어가던 영신이 멈칫했다. 강지훈이 먼저 타 있었다. 그는 영신을 보고 살짝 놀란 듯하더니 문이 닫히자 입가에 싱긋 미소를 띠었다.

“어쩐 일이에요?”

영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덕이 씨는 잘 있나요?”

“글쎄요. 집에 혼자 두고 왔는데, 모르겠네요.”

“아직 가루가 안 된 거 보니 꼬리가 다 나오질 않았나 보네요.”

“아쉽게도 아직까진 멀쩡합니다.”

“전혀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니고?”

“난 할 만큼 했습니다.”

“하긴. 아무리 반호라고 하지만 그렇게 꼬리가 금세 생길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당신이 노력한 덕분이겠죠.”

영신이 거울에 비친 지훈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옆모습이었지만, 인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다 문득 공원에서 봤던 늙은 여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게 돈 좀 그만 밝히고 수련이나 제대로 하지. 타고난 재주 믿고 살더니, 그 잘난 법력도 잃은 게지.]

빌어먹을. 진짜 못 보는 건가. 심호흡하고 나서 정신을 집중시켰다. 잡념을 떨쳐내고,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제 눈앞에 있는 이놈의 본모습이 무엇인가를. 천천히 눈을 내리감고 나서 집중하는데 킥 웃는 소리가 들린다.

영신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는데 지훈의 등 뒤로 황금색 물체가 흐릿하게 움직였다. 너무 흐릿해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꼬리였다. 흰색도 아니고 황금색이라니. 대체 뭐야. 자세히 확인하려는 순간 몸이 튕겨 엘리베이터 한쪽에 찌그러졌다. 윽. 신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춰 섰다. 문은 열리지도 그렇다고 아래로 내려가지도 않은 채.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몸이 점점 위로 들어 올려졌고, 손끝으로 기를 모으려고 하는 순간 손목이 그대로 뒤틀려 돌아갔다. 아악. 비명을 지르자 지훈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생겼다. 그가 천천히 걸어 영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영신이 온몸에 힘을 주고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지훈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저런. 많이 고통스럽나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빌어먹을. 이 개자식!”

“난 당신 고용인인데 말버릇이 영 마음에 안 드네요. 입을 찢어줄 걸 그랬나.”

검던 눈동자가 회색으로 빛난다. 영신이 그 눈빛을 노려봤다.

“찢어봐, 어디.”

“아직 안 돼요. 댁네 그 어리석은 여우가 나를 찾아오기 전까진 살려둬야지. 당신이 인질이나 마찬가진데 말이야.”

인질이란 말에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몇 번이나 도망칠 기회가 있었는데 구덕이가 도망치지 못한 이유가 어쩌면 저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이 덕이를 만났고, 저를 인질로 삼아 협박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했으면 되잖아. 왜 자꾸 궁금해하고 알아내려고 하지? 내 신경을 거슬러서 당신한테 좋을 게 없을 텐데?”

“너 구덕이를 데려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구슬을 빼앗을 생각인가.”

“무슨 구슬?”

지훈이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입가에 얼핏 미소가 서리는 것도 같아 영신은 그를 노려봤다.

“너 인간이 되어가는 거지? 그래서 구덕이가 가진 구슬이 필요한 거고. 아니야?”

공원에서 본 여우의 말을 종합해보면 가장 근거 있는 추리였다. 하지만 지훈은 다른 구미호들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존재라고 해야 하나. 여태 태연하기만 하던 지훈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지다 제자리를 찾는다. 그가 묘한 얼굴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영신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런.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알아오는 건가. 너의 그 충직한 부하?”

“아니라곤 안 하는군.”

“맞다고 하면 뭐가 달라질까?”

“호국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너 정도면 그곳으로 가는 문 찾는 건 일도 아닐 텐데 말이야.”

흐음. 지훈이 턱을 문질렀다. 이 젊은 퇴마사 놈이 어디까지 알고 있나 가늠하는 눈치였다. 영신이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쳐다만 보자 손을 떼어내고 나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반대편 벽에 기대 팔짱을 낀다.

“나라면 그런 정보들을 주워 모으는 동안 어떻게 하면 남은 꼬리를 나오게 할까 고민했을 텐데. 안타깝군.”

“대답하지 않는 거 보니, 혹시 호국에서 돌아가면 안 되는 사정이 있는 건가. 예를 들면….”

“들면?”

“쫓겨난 몸이라던가.”

펑.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을 비추던 등이 나가버렸다. 지직. 지직, 소리를 내며 불빛이 깜빡깜빡 어둠과 빛을 번갈아 가며 만들어냈다. 하아. 지훈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영신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영신이 이를 악물고 참아 냈지만,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저벅저벅 맞은편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훈이 다시 가까이 다가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영신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때? 아프지? 이제 고분고분하게 말 들을 생각이 좀 드나?”

“씨발.”

드득, 윽. 뼈가 뒤틀리는 소리에 꽉 다문 잇새로 신음이 새어나갔다. 시야가 흐릿해졌고, 숨 또한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빌어먹을. 그 할망구 말대로 수련이나 제대로 해둘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기괴할 정도로 입을 벌린 채 웃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황금색 꼬리 아홉 개가 유유히 움직이며 흔들렸다.

***

소파에 누워 자던 덕이가 한 바퀴 뒹구는 순간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윽. 통증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대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진 저녁이다. 머리맡엔 도망치려도 싸두었던 가방이 그대로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영신이 나간 후로 꽤 많이 흘렀다. 집 안은 잠들기 전처럼 고요했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방 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다.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가는데도 받질 않는다. 또다시 걸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리에 서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럼 전화라도 했을 텐데.

저 빼고 미자랑 인태랑 셋이 놀러 간 건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 입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을. 어차피 갈 거면 깔끔하게 지금 가는 게 낫겠지. 마지막으로 얼굴 더 보면 정말 발길이 안 떨어질지도 모른다.

영신은 강하니까 만약에 천호랑 붙는다고 해도 당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위안하며 소파 옆에 놓아둔 가방을 챙겨 들었다. 집 안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있지도 않은 영신에게 작별을 고했다.

“갈게. 안녕.”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는데 띠릭, 띠릭 도어록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흠칫 놀라 들고 있던 가방을 저 멀리 홱 던져버렸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데 어쩐지 이상하다. 띠띠 버튼을 잘못 눌렀을 때 나는 소리가 난다.

뭐야. 영신이라면 절대 저런 식으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다시 버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찰칵, 문이 열린다. 혹시 도둑일까. 아니면 강지훈이 쫓아온 거 아니야?

두려운 마음에 뒤로 물러서며 방어 태세를 취하는데 문이 열리면서 검은 머리카락에 흰 셔츠를 입은 사내가 보인다. 영신이라고 느낄 새도 없이 그가 안쪽으로 쓰러졌다. 덕이가 놀라 재빨리 다가가서 붙들었다.

순간 낯익은 냄새가 확 풍겨온다. 몸이 움찔 떨렸다. 영신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처음 본 모습에 덕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영신아. 영신아, 왜 그래? 정신 차려.”

흔들고 뺨을 두드렸지만, 그는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뚝, 뚝, 창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어린 영신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 위를 올려다봤다. 창고 안은 귀신들로 득실거렸고, 창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에 기대 흐릿한 시야로 앞을 보는데 발이 허공에 뜬 귀신이 혀를 길게 내민 채 영신을 보며 왔다 갔다 춤을 추듯 움직인다.

며칠 동안 갇혀 있었더니 그 모습도 견딜 만했다. 가만히 노려보자 갑자기 얼굴이 확 다가왔다. 시커먼 눈동자는 마치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어둡고 컴컴하기만 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밑바닥에서부터 두려움이 슬금슬금 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오른다. 눈을 감으려고 하는데 귀신이 영신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도망쳐.]

영신이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올려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여 몸을 뒤틀었다. 온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괜찮아? 하고 묻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언제 왔는지 석현이 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 좀 들어?”

몸을 일으켜 앉는데 신음이 또 튀어나온다. 윽.

“씨발.”

“안 괜찮네. 지금이라도 병원 갈래?”

“너… 여긴 어떻게….”

“덕이 씨가 놀라서 전화했더라고. 형이 아프다고. 얼마나 우는지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왔다니까.”

영신이 방 안을 살폈다. 덕이를 찾는다는 걸 알고 석현이 밖으로 나가 덕이를 불렀다. 잠시 후 석현의 손에 이끌려 덕이가 들어왔다. 눈이 얼마나 퉁퉁 붓고 시뻘겋게 짓물렀는지 아픈 사람은 영신이 아니라 덕이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영신이 일어난 걸 확인하더니 또다시 훌쩍였다.

“덕이 씨, 봐요. 형 멀쩡하죠?”

덕이가 오더니 그대로 영신을 끌어안았다. 허리를 끌어안고 우는 바람에 영신이 차마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석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잇는다

“말도 마. 형 죽는 거 아니냐고 밤새 옆에서 울길래 내가 나가 있으라고 했어. 다행히 열은 내렸고, 몸에 타박상 약간 있는 거 말고는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도 병원에 가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디 가서 맞을 사람도 아니고. 사고 났어?”

영신이 대답도 하지 않고 엉엉 우는 덕이를 내려다봤다. 새카만 머리통을 손으로 만지려다 그대로 거둬들이고 나서 허리를 감은 팔을 풀어 몸에서 떨어트렸다. 고개를 드는 덕이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됐다.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머리맡에 있던 휴지를 뽑아내서 건넸다.

“그만 울어. 누가 보면 내가 죽었는지 알겠다.”

“진짜 죽었는지 알았잖아. 갑자기 쓰러져서.”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알아?”

저 때문에 속상해서 우는 걸 보니 괜히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차라리 그 틈에 도망쳐 버리지, 왜 남아서 제 속을 시끄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지금보단 마음이 편했을까. 강지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나서 어떻게 택시를 타고 집에 왔는지 모른다.

문을 여는 와중에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아무도 없었으면. 돈이고 나발이고 더는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열리는 문틈으로 덕이의 얼굴을 보니 전혀 다른 감정들이 밀려왔다.

왜 그랬을까. 그 순간 왜 안도했을까. 도망가지 않아서? 정말 돈을 벌게 돼서? 아니면 저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하, 씨발. 모르겠다, 진짜.

“지금이라도 병원 갈래? 응급실에 내 친구 있거든. 말해둘 테니까,”

“됐어. 멀쩡해.”

“안색이 창백하니 하는 말이잖아.”

“괜찮으니까 가. 아니면 작은방에서 눈 좀 붙이든가. 밤새 너도 못 잤을 거 아니야.”

“형이 아픈데 내 몸 따위가 대수야? 살신성인으로 돌봐야지. 안 그래?”

석현이 손까지 잡으며 다정하게 말하는 바람에 영신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무슨 꿍꿍인가 싶어 보니 머리맡에 서류가 하나 놓여 있었다. 딱 봐도 그놈의 후원인지 뭔지 하는 서류인 것 같았다.

“징한 놈.”

“누가 해 달래. 좀 나아지면 읽어보기나 하라고.”

“나중에 나 죽으면 무덤에 와서도 돈 달라고 할 놈이야, 너는.”

“에이, 설마. 뭘 그렇게까지.”

영신이 노려보자 석현이 이불을 덮으며 톡톡 두드렸다.

“진정하고, 난 이만 갈 테니 쉬어. 아침 일찍 일이 있어서, 병원 가서 조금이라도 눈 붙이는 게 나을 거 같아. 형도 이따 꼭 병원에 가. 내가 예약해 둘게.”

영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현이 말은 그렇게 해도 저를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귀찮다는 듯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더니 석현은 이제 곁에 있던 덕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혹시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연락해 달라면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석현이 사라지고 나서 방 안엔 정적이 찾아왔다. 영신이 침대에 앉은 채로 덕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이 부어 여우가 아니라 붕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웃어?”

“가서 거울 좀 봐. 네 얼굴 얼마나 웃긴지 말이야.”

“지금 얼굴이 중요해. 네가 죽을 뻔하다 살아났는데.”

“아까부터 죽긴 누가 죽어. 잠깐 정신을 잃은 거지.”

덕이가 입을 달싹였다. 지훈을 만났던 걸까. 영신이 들어오는데 낯익은 냄새가 났다. 전에 지훈을 만났을 때 맡던 것과 같았다. 일어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천호라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영신에게 말하지 않은 건 저 아니던가.

차마 묻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먹는데 영신이 침대에 몸을 다시 누인다. 덕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데 그대로 눈을 감더니 불을 좀 꺼달라고 했다.

“…잘 거야?”

“응….”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잠잠해진다. 덕이가 ‘자?’ 하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다. 나직한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영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간 다음 그의 몸에 바싹 붙어 누워 눈을 감았다. 흐읍, 숨을 들이마시는데 영신의 체취 말고는 이제 아무런 냄새도 나질 않는다.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지운 걸까. 밤새 걱정하고 우느라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하긴 저도 마찬가지였다. 잠들면 안 되는데. 영신이가 또 아프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는 사이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앉았다. 결국 영신의 어깨에 코를 대고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꿈을 꿨다. 천호로 변한 강지훈이 저를 쫓아오며 시커멓게 입을 벌렸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걸음은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느려졌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데 어디선가 영신이 튀어나와 천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뻐할 새도 없이 천호의 날카로운 발톱이 영신의 목을 잘라냈다. 덕이가 울며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는 사이 천호가 이번엔 덕이를 노리며 다가왔다. 악을 쓰며 영신을 불렀다. 제발 죽지 말라고. 일어나라고. 꿈인 줄 알았지만, 모든 게 두려웠다.

“일어나.”

어깨가 흔들렸다.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영신이 서 있었다. 꿈인가 싶어 눈을 비비고 보니 정말로 영신이었다.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보단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았다.

“그만 자고 밥 먹어.”

“영신아. 너 괜찮아?”

“어. 멀쩡해.”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곧 죽을 것 같았는데, 평소의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일어나서 영신의 얼굴과 몸을 살피는데 정말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저도 모르게 덥석 허리를 껴안았다.

“걱정했잖아!”

“걱정하는 녀석이 옆에서 쿨쿨 잘만 자더라?”

덕이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너무 졸려서….”

“됐고, 나와서 밥이나 먹어.”

잠깐이지만 머리 위에 손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진다. 어쩐지 태도가 조금 다정해진 것 같다.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혹시 꼬리가 나온 걸 눈치챘나. 그 생각을 하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영신을 따라 주방으로 가니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자 배 속에서 꼬르륵 요동치고 난리가 났다. 어제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식탁에 앉으며 군침을 흘리는데 영신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을 따라 건네준다.

“많이 먹어둬. 먹고 갈 때가 있으니까.”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던 덕이가 멈칫했다. 갈 때가 있다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입을 달싹였지만,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꼬리가 나온 걸 알아챘을까. 혹시 봤나. 심장이 쿵쿵거리고 손발이 미세하게 떨렸다.

“왜….”

“질문이 이상하네. 어디 가느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덕이를 보고 영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기를 집어 접시에 덜어줬다.

“고모가 부탁한 게 있는데, 그것 때문에 갈 곳이 있어.”

“…아.”

“싫으면 넌 집에 있어도 되고.”

“아니야, 나도 갈래. 나도 갈 거야.”

“그러든지.”

안 가도 된다고 하는 거 보면 강지훈에게 가는 건 아닌 듯싶었다. 속으로 안도하며 입으로는 고기를 씹어 삼켰다. 영신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는데 혈색이 돌아왔다고 해도 어딘가 좀 퀭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근데 너 진짜 괜찮아?”

“별거 아니야.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계단에서 굴렀을 뿐이야.”

“…그래도 병원에….”

“너는 병원 싫어하면서 왜 나더러 가래?”

“그야… 나는 가면 내 정체가 탄로 나니까…. 그럼 잡혀갈지도 모르고….”

그 말에 영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네. 구덕이는 여기서 다치면 병원도 못 가네.”

흘리는 하는 말에 덕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저는 꼬리가 아홉 개라 전처럼 나약하지만은 않다. 아직 힘 조절도 못 하고, 능력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르지만, 전에 비하면 절대 약하지 않았다.

편식하지 마. 영신이 젓가락으로 볶은 버섯을 집어 고기 위에 얹어준다. 덕이가 군말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먹었다. 영신은 저에게 음식을 챙겨줄 뿐 도통 입에 대지 못하였다. 왜 먹지 않느냐고 묻자 뒤늦게 한입 먹긴 했지만 어쩐 일인지 음식을 넘기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

킁, 킁. 미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코를 벌렁거렸다. 인태가 왜 그러냐고 묻자 미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덕이가 왔다 갔나.”

“뭐?”

“엘리베이터에서 덕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왔으면 우리한테 왔겠지.”

인태의 말에 미자가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예주의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돌아간 예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움직여 예주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인태가 멈추라고 미자의 팔을 잡았다.

왜 그러나 싶어 집 쪽을 쳐다보던 미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유혜란이 제 차를 대문 앞에 댄 채 뒷좌석에 상자를 밀어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씩씩거리더니 예주가 사는 집을 독기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이를 까득까득 갈면서 가만두지 않겠다는 둥, 두고 보라는 둥, 악담을 내뱉는 그녀를 보고 인태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꼴을 보니 쫓겨난 거 같지?”

“그러게. 굉장히 열 받아 보이는데.”

차 문을 열던 그녀가 악 비명을 질렀다. 성질 부리다 정성 들여 가꾼 손톱 하나가 부러져 나갔다. 보석이 박힌 손톱이 바닥에 뒹굴자. 그녀가 하이힐 뒷굽으로 그걸 콱 찍으면서 씨발,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이번엔 제 차를 걷어차며 욕을 했다.

“아우, 성질 봐. 무섭다.”

가자. 인태가 입가에 비죽 미소를 걸고 집 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미자는 혜란의 차 옆쪽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돌아보던 인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안 들어가?”

탁, 운전석에 들어간 혜란이 시동을 켰다. 고민하던 미자가 인태를 돌아봤다.

“넌 들어가서 예주 괜찮은지 좀 봐줘. 이따 집에서 만나자.”

“넌?”

“권선징악. 결자해지!”

“결자는 누구야. 미자 친구야?”

“닥쳐. 난 이 성질 나쁜 년 버릇 좀 고쳐놓아야겠어.”

“야, 그러지 마. 영신이가 알면 진짜 난리나.”

“어차피 돈도 돌려줬고, 위약금도 주고 계약서도 파기했다며. 여기서 조금 더 괴롭혀준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잖아?”

잠시 고민하던 인태가 체념한 얼굴로 가라며 손짓했다. 네 마음대로 해. 그러더니 집으로 휙 들어가버린다. 미자가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짓고 혜란의 뒷자리에 올라타 눈빛을 쏘아 보냈다. 출발하려던 혜란이 뒷목을 슥 만지고 나서 몸을 흠칫 떨더니 뒤를 한 번 돌아본다. 곧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한 그녀가 차를 움직여 언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

고속도로는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하기만 했다. 강원도 영월이라는 표지판을 지나자마자 덕이가 뒤를 돌아봤다. 여기 왜 온 거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영신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꽤 초췌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앞머리를 내려서 그런지 더 어려 보이고 순해 보이는 효과는 있었지만, 그래도 제가 알던 영신이 아닌 것 같아 마음엔 들지 않았다.

“영신아. 아직 멀었어? 운전 힘들지 않아?”

“조금만 더 가면 돼.”

꼬르륵, 덕이가 배를 문질렀다. 영신이 흘깃 보더니 속도를 올린다. 곧 앞쪽으로 휴게소가 나타났고, 매점과 가까운 위치에 차를 멈추었다.

“먹을 거 사다 줄 테니 여기 있어.”

“식당 가서 먹으면 안 돼?”

“안 돼. 해 떨어지기 전엔 움직여야 해.”

알았어. 덕이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은 후 매점 쪽으로 향하는 영신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에 턱을 대고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얼굴만 보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돼버렸네. 한숨을 내쉬니 창에 뽀얗게 김이 서린다. 그 위에 손가락으로 ‘영신’이라고 적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부랴부랴 올 만큼 중요한 일이 대체 뭘까. 잠시 생각하는데 저 멀리 영신이 먹을 걸 사서 손에 들고 오는 모습이 보인다. 검은 봉지를 들고 오는데도 얼마나 멋지던지 덕이는 잠시 그 모습에 넋을 놨다.

“똥지게를 져도 우리 영신인 멋질 거야.”

감탄하는 사이 운전석 문이 열리고 영신이 올라탔다. 사온 음식을 덕이에게 건네줬다. 핫도그도 있었고, 호두과자도 있었고, 종류가 다양했다. 처음 보는 것들이라 덕이가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 사이 차가 출발한다.

여러 가지 중 제일 맛있어 보이는 걸 골라 한입 베어 무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안에 든 건 팥인 것 같았다. 미자나 인태가 보면 싫어하겠군. 얼른 하나를 집어 영신의 입가로 디밀었다.

“먹어.”

“됐어. 생각 없어.”

“아까도 안 먹었잖아. 얼른.”

영신이 마지못해 작게 입을 벌렸고 덕이가 그 안으로 호두과자 하나를 쑥 집어넣었다. 입이 다물어지면서 손가락이 잠시 입술에 닿았다. 심하게 아프고 난 후라 그런지 전보다 입술이 마르고 갈라졌다.

그런데도 덕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꼬리도 다 나왔는데 왜 이러지. 슬그머니 손을 거둬 영신의 입술에 닿았던 손가락을 제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아, 뽀뽀하고 싶다. 지금 해달라고 하면 싫어하겠지? 짝짓기도 하고 싶다. 이제 꼬리도 나왔는데, 왜 이럴까.

“무슨 생각 해?”

영신이 갑자기 물었고, 덕이가 머릿속에 떠오른 뽀뽀와 짝짓기 생각을 얼른 지워내며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 경치 좋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데 길옆으로 나무들이 우거진 숲들을 보니 정말 감탄이 나왔다. 몇 시간 전까지 있던 곳은 빌딩과 차들로 빽빽했는데, 이곳에 오니 어쩐지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창문에 뺨을 바싹 대고 밖을 내다보니 영신이 창문을 열어준다.

뜨거운 바람이 훅 들어왔지만,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섞여 심장이 두근거렸다. 덕이가 손바닥을 밖으로 내밀어 경치를 만끽하고 있는데 영신이 덕이의 팔을 잡고 제 쪽으로 살짝 당긴다.

“몸까지 내밀지 마. 그러다 사고 나면 죽어.”

“바보냐. 나는 구미혼데 왜 죽어.”

“팔미호 아니었어?”

아무렇지 않게 묻는 영신을 보며 덕이가 입을 벙긋댔다. 얼른 시선을 피하며 곧 나올 거니 구미호나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귀는 어느새 빨개지고 불안함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등 뒤로 픽, 웃는 소리가 들렸고, 걱정과 달리 영신은 더는 묻지 않았다.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열렸던 창문이 지잉 하고 올라간다. 그렇게 또 달리던 덕이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아까부터 나오는 풍경들이 죄다 비슷비슷했다. 착각인가. 그 길이 그 길 같은데. 같은 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하암. 피곤함에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는데 도로가 좁아지면서 차가 외길로 들어선다. 풀만 없다 뿐이지 차가 다닐 수 있는 곳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울퉁불퉁 난리도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 또한 얼마나 크고 울창한지 만약 안에서 길을 잃는다고 하면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산을 빙빙 돌아 올라가다 보니 길이 끊겼다. 그 앞에 평평하고 작은 터가 있었고, 그 위쪽으로 작고 낡은 사찰이 하나 있었다. 차 시동이 꺼지고 영신이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넌 여기서 기다려.”

“오래 걸려?”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 심심하면 밖에 나와서 구경이라도 하든가.”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저도 데리고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영신이 고개를 저었다. 사찰인 데다 여기 있는 스님이 법력이 강한 사람이라 덕이를 알아볼 거라고 말이다. 자신의 고모인 일월 스님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곤란하게 하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덕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곧 영신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찰 쪽으로 올라가는 영신의 뒷모습을 보며 덕이가 봉지를 뒤적여 아까 먹다 남은 호두과자를 꺼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아무도 없는 시동이 꺼진 차 안에 있으려니 금방 더워지고 답답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소나무 향이 코를 찌른다. 흐읍, 하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호두과자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대체 어디까지 올라온 거야.”

차 뒤쪽으로 가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지나가는 차들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깊은 데도 절이 있구나. 신기해서 둘러보던 덕이의 시선이 맞은편 골짜기에 머물렀다.

“어?”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산 중간에 있었는데 그 모양이 무척이나 특이했다. 바위 위에 작은 바위를 얹어놓은 모양이랄까. 중요한 건 저 바위를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거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쿵쿵 울려댔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영신이 올라간 사찰 쪽을 바라봤다. 한참이 걸린다고 했으니 금방 나타나진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덕이가 꼬리를 꺼냈다. 순식간에 기를 모으자 덕이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서 있던 자리에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생겨났다. 다람쥐로 변해 주변을 둘러보던 덕이의 눈에 오래되고 키가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래. 저기라면 제대로 보일지도 몰라. 빠른 속도로 그 위를 올라가던 덕이가 생각했다. 만약 제 추측이 맞다면 저 골짜기 아래쪽으로 계곡이 흘러야 한다. 이 넓은 땅에 비슷한 곳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계곡 아래 자신이 표시해둔 흔적까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무 제일 위까지 기어 올라갔던 덕이가 반대편을 바라봤다. 바위가 있는 골짜기 아래로 계곡이 있는 게 보였다. 날이 가물어 계곡 물은 거의 마른 상태였지만 그 옆쪽으로 돌을 쌓아 만든 흔적은 또렷이 보였다. 펑. 나무에 매달린 덕이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충격받은 얼굴로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저곳은 분명 호국으로 가는 길목이다. 차를 타고 오면서 표지판에 적힌 글자를 봤을 때도 설마 했다. 그저 근처겠거니 생각했는데, 대체 왜 이곳에 왔을까.

착각인가 싶어 돌탑 위쪽을 살피는데 잣나무 위쪽으로 빨간 끈이 군데군데 묶어져 있는 게 보였다. 혹시라도 나중에 길을 찾지 못할까 봐 따로 표시해둔 것들이었다.

덕이가 아래를 내려봤다. 저 멀리 사찰 앞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도 영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빛은 갈등으로 인해 흔들렸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저 바위를 따라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작은 동굴이 나온다.

그 동굴을 지나쳐 더 올라가면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 나왔다. 산 아래로 절벽처럼 깎인 곳이 있는데 그 앞에 호국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지만, 여우들만 드나들 수 있는 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과 혼란스러움으로 덕이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멀리 막 저물기 시작한 해가 시뻘겋게 죽어가며 산 너머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덕이가 다시 사찰 쪽을 쳐다봤다. 차라리 영신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지만 금방 나온다던 영신은 삼십 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영신이 상의를 탈의 한 채로 누워있었다. 등에는 뜸과 침이 놓여 연기를 피워댔다. 그 옆에는 낡은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 하나가 안경을 코끝까지 내리고 책을 펼쳐 들고 앉아 있었다.

“참을 만하냐?”

고개를 돌리고 엎드려 있던 영신이 감고 있던 눈꺼풀을 올려 떴다. 그의 눈에 방 안 풍경이 들어왔다. 낡은 책상과 책들. 그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방을 밝히는 투박스럽게 생긴 초 두 개. 일렁이는 그 촛불을 보던 영신이 끄응 신음을 냈다. 침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막혔던 혈을 뚫어주느라 뻐근한 느낌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아파?”

“아파요.”

“네 입에서 아프단 소릴 듣다니 별일이구나. 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야. 네가 이 정도 내상을 입을 일이 뭐가 있다고.”

“있어요. 어떤 씨발 새끼 때문에.”

“에라이, 이놈아. 그놈의 입조심 좀 해라. 나이를 먹어도 성질을 못 버려.”

“직접 당하셨으면 그런 소리는 절대 못 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가서 복수라도 해주려고 여긴 찾아온 거야?”

“생각 중이에요. 어쩔지.”

영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영신에겐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이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 그를 소개해준 게 고모인 일월 스님이었다. 인내하는 법과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게 하라면서.

그는 영신의 가슴에 화가 많다고 늘 걱정했다. 그 화가 언젠가 영신을 향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잘 가르친 덕분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철이 든 건지 영신은 생각보단 반듯하게 컸다. 물론, 그놈의 돈벌이를 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직도 그거 하는 거냐. 귀신인지 뭔지 데리고 다니면서.”

“네.”

“그럼 저 밑에 있는 그놈은 누구야. 귀신도 사람도 아닌 이상한 놈 말이다.”

영신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 온 내내 저와 붙어있었으니 해운이 그를 직접 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월보다 법력이 강하고 어쩌면 제 할머니와도 맞먹을 만큼 강한 사내가 덕이를 못 알아봤을 리 없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까부터 알짱거리는데 어찌 신경을 안 써.”

“어차피 곧 사라지고 없을 거예요.”

영신은 단정 지어 말했다. 어쩌면 벌써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공원에 있던 늙은 여우에게 호국으로 향하는 문이 어디 있는지를 묻던 영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이곳에서 묵으며 지낸 적이 있는데 근처에 그런 게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오는 내내 덕이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알아챘을 것이다.

[댁네 그 어리석은 여우가 나를 찾아오기 전까진 살려둬야지. 당신이 인질이나 마찬가진데 말이야.]

하. 인질? 좆 같은 소리 하네. 누가 순순히 인질 따위 되어줄지 알고. 이를 까득 물고 나서 눈을 꼭 감았다. 녀석에게 당한 뒤 몸속 장기들이 다 뒤틀리고 기운 또한 흐트러졌다. 일단은 이걸 제대로 바로 잡는 게 급선무였다.

한 번 더 당하면 그땐 제 몸이 견뎌내기 힘들 게 뻔했다. 망할 여우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으려나. 먹을 걸 많이 사뒀는데 그거라도 챙겨서 도망가지. 배고프면 참지도 못하는 주제에.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자는 거예요.”

“농담이 는 걸 보니 내가 다 기뻐. 일월도 좋아하겠구나.”

그 말에 영신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아직도예요? 아니죠?”

설마 하며 묻는데 해운이 아니라고 펄쩍 뛴다. 소싯적 두 사람이 처음 만났는데 그때는 둘 다 불가에 몸담기 전이었다고 들었다. 고모인 일월을 해운이 쫓아다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영신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적이라 모르지만 모친에게 듣기론 일월이 출가하던 날 그는 술이 잔뜩 취해 집 앞까지 쫓아와 문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도 출가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마음에 품었던 거냐고 물었을 때 해운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런 마음으로 부처님을 모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을 때도 그저 웃었다.

“부처님이 아시면 까무러치실 일이네요.”

그가 부채로 영신의 머리를 툭 쳤다. 입으로 양기가 다 빠져나오니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만 제 속마음을 들킨 게 민망하여 그런 듯했다. 째깍째깍 방 안에 있던 낡은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치이익. 혜란이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끈 원피스만 입은 채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때 뒤에서 남자 하나가 다가오더니 혜란의 몸을 끌어안았다.

“자기야. 그만 열 받아 하고 자자.”

“지금 잠이 오겠어? 썅, 열 받아. 그 여우 같은 년이 지 아빠한테 이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진 안 되는 건데. 이걸 어떻게 혼내준담?”

“포기해. 어차피 증거도 있어서 빼도 박도 못한다며.”

“그럼 어쩌라고! 돈 한 푼 받지 말고 이대로 끝내란 소리야?”

“그동안 빼돌린 거 있잖아.”

혜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빼돌린 거라고 해봤자 명품 가방이나 구두 그런 것들이지 큰돈이 될 만한 건 없었다. 차라리 건물이나 땅이라도 좀 챙겨뒀어야 하는 건데.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손톱을 딱딱 물어뜯는데 남자가 혜란의 팔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남자는 혜란을 침대로 넘어트린 후 목덜미를 진하게 빨았다. 혜란이 간드러진 웃음을 지으며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마앙. 간지러워. 말꼬리를 늘이던 혜란의 눈에 한쪽에 놓인 행거가 들어왔다. 남자의 입술이 목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혀를 뾰족하게 세워 젖꼭지를 누르자 혜란이 허리를 튕기며 신음을 냈다.

“으응, 아앙,”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데 자꾸만 한쪽에 놓인 행거가 거슬린다. 정확히 말하면 거기 걸려 있는 꽃무늬 원피스였다. 대충 짐을 정리하긴 했지만 어쩐지 원피스가 낯익으면서도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저런 옷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는데 남자의 입술이 이젠 아래로 내려가 음부를 집어삼켰다. 황홀감에 젖어 흐릿한 눈으로 그 원피스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원피스 위쪽으로 시커먼 물체가 보인다. 검은 머플러 같기도 하고, 저게 뭐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데 그것이 점점 돌아가며 제 쪽으로 방향을 튼다.

“자기야!”

“좋아? 응? 그렇게 좋아?”

남자가 손가락을 넣어서 음부를 쑤시는 사이 혜란이 입을 벙긋거렸다. 시커멓던 물체는 누군가의 뒤통수였다. 점점 돌아가더니 결국 얼굴이 보였다. 꽃무늬 원피스 위로 입을 귀까지 찢어 웃는 여자의 얼굴이 너무 또렷했다.

“아아악!”

혜란이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음부에 들어갔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발길에 얼굴을 맞은 남자는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윽.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키던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침대 위에 혜란이 사지를 흔들며 저리 가라고 악을 쓰는 중이었다.

“자기야. 이 미친년 좀 떼어줘. 얼른 자기야아아아!”

비명과 울음을 같이 터트리며 제발 떼어달라고 애원했지만 남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건 허공을 향해 몸을 버둥대는 혜란뿐이었으므로.

***

영신이 옷을 갖춰 입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개운했다. 밥을 먹고 가라는 해운의 말에 괜찮다고 마다하고 나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해운이 앞마당까지 따라 나오며 영신에게 비닐에 싼 무언가를 건넸다. 안을 들여다보니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들어 있었다.

“안 먹어요.”

“그래? 잘됐네. 그럼 너희 고모 가져다줘.”

그럼 그렇지. 영신이 눈 밑을 찡그렸다. 애초에 일월에게 가져다주라고 하면 될 것을. 그것을 받아 입구 쪽으로 나오는데 해운이 그를 불러 세운다. 돌아보니 그가 조금 전과 다른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근심과 걱정을 한가득 매달고서.

“내가 일러둔 말 알았지?”

“조심할게요.”

“상대보다 네가 더 치명상을 입을 수 있어.”

“걱정마세요. 여차하면 여기 또 오지, 뭐.”

“이 녀석아, 그런 일로 자주 오는 건 내가 싫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눈길이 싫어 영신은 건성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더는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영신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입구 아래까지 내려오니 저 멀리 제 차가 보였다. 차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를 바라보던 영신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예견했던 일이었고, 스스로도 잘한 짓이라고 납득시켰다. 돈이 아깝긴 하지만, 고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물렀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젠 여우가 필요 없어졌고, 그래서 보내준 거다.

저벅저벅 차로 향하는 걸음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느려졌다. 운전석 문을 손으로 쥐고도 바로 열지 않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당기는데 안쪽으로 덕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차 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타 해운이 준 검은 비닐을 보조석에 내려놓았다. 부릉 시동을 걸고 룸미러로 뒤쪽을 보는 순간 머리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영신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뒷자리에 머리가 산발이 된 덕이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너 뭐야!”

덕이가 울상을 하더니 징징 우는 소리를 냈다.

“금방 온다더니! 이제 오면 어떻게 해.”

눈물이 그렁그렁 한 얼굴은 모기에게 뜯겼는지 울긋불긋 난리도 아니었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이 바보 같은 게 기껏 도망가라고 기회를 줬더니.

울컥 명치에서부터 분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제가 왔던 길도 못 알아본 걸까. 호국으로 가는 길임을 몰랐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덕이가 보조석 쪽으로 넘어온다. 낑낑거리고 넘어오더니 검은 봉지를 챙겨 들고 영신을 쳐다본다.

“자고 올 거면 나도 데려가지! 모기가 얼마나 많았는데!”

하지만 영신은 대답 대신 덕이를 무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곧 그가 차에서 내려 보조석 쪽으로 갔다. 보조석 문이 열리고 영신이 덕이의 팔을 붙들고 안에서 끌어내렸다. 덕이가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왔다.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지만 영신은 대답 대신 덕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덕이가 씩씩거리면서 올려다보는데 영신의 얼굴이 어쩐지 서늘하기만 하다. 그가 덕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너 필요 없어. 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덕이가 영신을 매섭게 노려봤다. 영신이 운전석으로 가기에 얼른 일어나서는 따라가 팔을 붙들었다.

“너 왜 그래?”

“못 알아들었어? 필요 없으니까 가라고.”

“갑자기 왜? 의뢰인이 죽었대?”

“천호가 죽기도 하던가?”

그 말에 덕이가 움찔 떨었다. 영신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지훈이 천호라는 것까지 아는 듯했다. 거짓말한 게 있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하는데 팔을 붙들고 있던 제 손을 탁 떼어놓는다. 운전석 문을 열기에 잽싸게 옆으로 가서는 타지 못하게 막아섰다.

“너… 아팠던 거 강지훈이 그런 거야?”

“말하기 싫으니 비키지?”

“너 이대로 가면 죽어. 나 없는 거 알면 걔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영신이 이를 꾹 물었다. 역시 제 예상대로 덕이를 협박한 모양이었다. 도망가지 못한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걸 확인하니 또다시 명치에서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이건 분노인가. 아니면 다른 감정인가.

후, 숨을 짧게 내쉬고 나서 덕이를 옆으로 밀고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세차게 닫았다. 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룸미러를 통해 보니 이쪽을 노려보고 선 덕이가 들어왔다.

영신이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순간, 차의 핸들이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뭐야?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이 차가 오른쪽에 있던 작은 바위를 들이받으며 멈춰 섰다. 몸이 앞으로 휘청 기울었고 핸들에 머리를 박고 나서 반동 때문에 몸이 다시 뒤로 튕겼다.

윽 부딪힌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드는 순간 덜컥, 왼쪽 보조석 문이 열리면서 덕이가 태연하게 올라탔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덕이를 노려봤다.

“방금 네 짓이야?”

“그러게, 누가 두고 가래?”

“이게 진짜. 내려. 안 내려?”

“또 두고 가면 이번엔 저기 계곡 아래로 굴려버릴 거야.”

눈을 뾰족하게 뜨고 협박하는 모양새를 보니 기가 차지도 않았다. 하. 영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덕이가 지지 않고 노려본다. 내려라, 싫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시간이 지체됐다.

잠시 생각하던 영신이 손을 뻗자 덕이가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쫓기만 해보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상과는 달리 영신이 안전띠를 끌어와 매주자 덕이가 손을 내리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철컥. 벨트를 매고 나서 영신이 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어쩐지 일부러 피하는 느낌이 들어 덕이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 데리고 갈 거야?”

“난 분명히 가라고 했어. 나중에 어떻게 되든 원망하지 마.”

“원망 안 해. 네가 나 살려주려고 한 것만으로도 나는 됐어. 그거면 됐어.”

“너 살리려고 한 거 아니야. 그 개새끼 잘되는 꼴 보기 싫어서 그랬던 거지.”

에이. 아니면서. 덕이가 영신의 옆구리를 꾹 찌르자 영신이 매섭게 쳐다본다. 덕이가 금방 주눅이 들어서는 얼른 창가 쪽으로 몸을 붙이고 쭈그려졌다. 곧 다시 차가 출발했고, 산비탈을 내려온 차는 도롯가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영신은 영신 나름대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함정을 판다고 해도 걸려들 놈이 아니었다. 천 년을 넘게 산 놈인데 얕은꾀가 통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는데. 제아무리 법력을 가진 퇴마사라고 해도 천호를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였다. 골똘히 생각하는 와중에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뭔가 하고 봤더니 덕이가 봉투에서 먹다 남은 호두과자를 주워 먹고 있었다. 입 안에 막 넣으려는 걸 손을 뻗어 얼른 빼앗아 봉투에 다시 집어넣었다.

“먹지 마.”

“배고파.”

“여름이라 상했을 거야. 괜히 탈 나서 고생하지 말고, 말 들어.”

덕이가 봉투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딱히 무슨 냄새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영신이 그렇다고 하니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대로 봉투를 발아래 내려놓고 나서 배를 슬슬 문질렀다.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허기가 졌다.

“배고파, 영신아….”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서 먹고 가.”

“방법 있어?”

“뭐가?”

“강지훈을 어떻게 할지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영신이 입을 열었다.

“구미호 약점 같은 거 있어?”

“약점? 음… 물에 좀 약하긴 한데….”

“물?”

“응. 구미호들은 물에 빠지면 힘이 약해져.”

“천호도?”

“그건 잘 모르겠어. 천호는 워낙… 신 같은 존재라.”

“신은 개뿔. 어차피 지금은 힘도 잃어서 전만 못할 텐데.”

“힘을 잃다니?”

가는 동안 영신이 제가 듣고 겪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덕이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 후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훈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채지 못한 것도, 길에서 여우 냄새가 나는 인간을 만난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 혹시 저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증상이 없으니 그건 나중에 걱정하기로 했다.

“내가 잘 말해볼까? 호국으로 들어가는 문까지 데려다주면… 천호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까?”

“아니. 그놈 호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어째서?”

“쫓겨난 모양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 덕이가 한 대 맞은 얼굴로 말을 잃었다. 호국에서 쫓겨나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호족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아니면 살해하거나. 그게 천호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릴 적 친구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야기가 있었다. 아주 예전에 천호 하나가 우두머리가 되려고 많은 구미호를 학살해 죽였다는 얘기. 단순히 전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천호가 강지훈이 아닐까 추측해봤다.

“그럼… 어쩌지. 내가 싸워볼까?”

“이길 수 있어?”

“아니.”

고민할 것도 없이 없다고 대답하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슬쩍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 왜 따라온 거냐고 물었더니 네가 걱정돼서라고 대답한다. 기가 막혀 웃으니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창문에 얼굴을 문지른다.

“그럼 사자나, 호랑이로 변신해서 잡아먹어 버릴까?”

“그동안 걔는 가만히 있고?”

“아. 그럼 구슬 비슷한 거 구해서 줘버릴까?”

“…바보야?”

히잉. 시무룩한 얼굴로 창에 머리를 박고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영신이 흘깃 쳐다봤다. 안 굴러가는 머리를 굴리고 노력하는 걸 보니 가상하긴 했다. 결과는 죄다 이상한 것들뿐이지만.

그때 영신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강지훈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지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딥니까.]

“알아서 뭐하게.”

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영신의 눈동자가 커진다. 분명 제가 아는 목소리였다. 참을성 많은 김 실장이 저 정도 비명을 지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일단은 차를 급하게 한쪽에 멈춰 세웠다. 옆에 앉은 덕이도 무슨 일이 생긴 걸 직감한 눈치였다.

“너… 뭐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지. 왜 여우를 빼돌려?]

“이 개자식.”

[3시간 줄게요. 당장 데리고 와요. 아니면 오늘 이 남자 포함, 우리 아래층 사는 귀신 둘까지 모두 없애줄 테니까. 알았죠?]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핸들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일 듯 앞만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덕이가 손을 뻗어 그런 영신의 손을 감싼다. 이럴 땐 또 눈치가 빨라진다. 누구냐고,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묻지 않았다.

“일단 가자. 여기서 지체할 시간 없어….”

하. 영신이 마음을 추슬렀다. 휩쓸리면 안 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처음 겪어보는 상대에 자꾸만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얼굴을 비비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차를 다시 움직였다.

***

미자와 인태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후다닥 몸을 숨겼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영신도 덕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몸을 숨기긴 했는데, 도대체 누군지 감이 오질 않는다. 잠시 후 문 앞으로 누군가 휘청이며 쓰러졌다.

머리를 빼꼼 내밀던 인태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뒤에 있던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현관 앞에 김 실장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누워있었다. 종종 마주치는 사내이긴 했지만, 이런 몰골은 처음이었다.

인태가 그를 향해 다가가는데 미자가 먼저 인태의 팔을 잡으며 뒤로 당긴다.

“인태야.”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한 인태가 고개를 들었을 때 문 뒤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위층에 사는 퇴마사였다. 그가 둘을 향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눈은 서늘해서 얼음장 같은데 입만 웃으니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뭐… 뭐야.”

“여긴 왜 온 거지?”

두 사람이 뒤로 물러서는데 지훈이 안으로 들어서며 안을 살핀다.

“흐음. 썰렁하네. 내 취향은 아니야.”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덕이를 만나러 온 거면 걔는 여기 없어.”

“알아. 하지만 곧 만나러 갈 생각이지. 그때까지 너희가 내 인질이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인질이란 말에 인태가 발끈해서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미자가 그의 팔을 다시 한 번 붙든다. 그녀의 눈빛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영신과는 전혀 다른 기를 뿜어내는 지훈을 보며 아까부터 온몸의 털이 곤두서 있었다. 인태가 놓으라고 했지만 미자는 그의 팔을 꾹 붙든 채로 지훈을 보기만 했다. 그에 지훈이 만족한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잔뜩 흘렸다.

“아쭈 똑똑한 아가씨네? 암, 그래야지.”

그때 지훈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린다. 영신과 통화를 마친 지 30분 만이었다.

[ooo. 10시.]

하. 너무 뻔히 보이는 속내를 읽고 저절로 코웃음이 쳐졌다. 혹시라도 물이 제게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해서 강가에서 보잔 건가. 귀엽군. 웃으며 휴대전화를 뒷주머니에 넣는 사이 겁에 질린 귀신 둘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김 실장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대로 으스러트릴까 하다 일단은 목숨줄은 붙여놓기로 했다. 일부러 기운을 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럼, 슬슬 출발해볼까?”

***

아. 덕이가 호두과자 하나를 내밀었지만, 영신은 고개를 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식욕이 생기는 거 보면 대단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곧 그의 전화가 울렸다. 김 실장 밑에서 일을 봐주고 있는 사내였다.

[대표님. 지금 김 실장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상태는.”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갈비뼈랑 팔다리에 골절 있고요, 피도 많이 흘려서 조금 더 늦었으면 위험했다고 합니다.]

영신이 눈을 꾹 내리감았다. 제가 믿고 형제처럼 지내는 사람이었다. 괜히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거 같아 마음속에서 분노와 미안한 감정이 들끓었다. 알겠다고, 일단 잘 지켜봐 달라고, 그 주변으로 사람도 더 붙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래 봤자, 강지훈이 마음먹고 덤비면 소용없을 테지만. 그래도 일단 사람이 많으면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할 거라고 여겼다.

전화를 끊고 위쪽을 보니 간혹 차량이 한두 대 지나갈 뿐 딱히 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서울 한복판에서 보자고 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누가 신고라도 해줄 텐데.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았다. 사람들이 있건 없건 강지훈은 제가 마음먹은 걸 시행할 테니 말이다. 애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느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한테 구슬이 두 개면 좋겠다. 그럼 하나 줘버리면 그만이잖아….”

“......”

“방법이 있긴 한 거야?”

“없어. 일단 꼬리가 나오기 전에 먼저 선수 치는 수밖엔.”

“혹시라도… 말이야.”

덕이가 입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영신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다시 말을 잇는다.

“내가 잘못되면… 넌 얼른 도망가.”

그 말에 영신이 웃었다. 저는 도망치지 못했으면서 영신에겐 도망가라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안 그래도 그럴 거라고, 네가 밀리는 거 같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뺄 거라고 하자 덕이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잘 생각했어. 꼭 그래야 해.”

영신이 그런 덕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덕이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영신의 몸이 점점 덕이 쪽으로 기울었다. 덕이가 호두과자 봉지를 손에 꼭 쥐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데 턱, 하고 소리가 난다. 눈을 뜨고 봤더니 영신이 손바닥으로 창문을 짚고 있었다.

“모기가 들어왔어.”

덕이가 실망한 얼굴로 눈을 흘기자 영신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티슈를 뽑아 손을 닦는다. 눈을 왜 감느냐고 물었더니 덕이가 그냥 졸려서 잠깐 눈을 감은 거라고 반박했다.

“있잖아. 어차피 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안 죽어. 싸우면 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뽀뽀라도 많이 해줘.”

“이 와중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했다. 한 번만 해주면 기운 내서 싸우겠다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이가 몸을 기울이며 다시 눈을 감았고, 영신이 가만히 입술 포갰다.

말캉한 혀가 닿자 덕이가 입술을 살짝 벌려 혀를 내밀었다. 영신도 혀를 내밀어 그 안으로 밀어 넣고 나서 덕이의 뒤통수를 감싸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딸려오고 덕이가 보조석에서 운전석 쪽으로 넘어와 영신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았다.

혀 안쪽 뿌리를 건드리자 덕이가 엉덩이를 움직이며 흐음, 신음을 낸다. 열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에 영신이 덕이의 뺨을 잡고 떼어냈다. 숨을 헐떡이는 덕이가 다시 입을 맞추려 하기에 영신이 그만하라고 말했다.

“조금만, 응? 조금만 더 해줘.”

“우리기 여기에 이거 하러 온 거야?”

“어차피 강지훈 올 때까지 시간이 남았잖아. 아니면 짝짓기하고 있을까? 네가 정기 더 나눠주면 내가 힘이 엄청 세져서 강지훈 한 방에 날려 버릴지도 모르잖아.”

“여기서?”

“난 상관없어.”

“야. 나는 있어.”

영신이 버럭 하는 바람에 덕이가 눈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이것 하나 못 들어주느냐고 했지만 영신은 도저히 그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미 덕이는 저보다 힘이 훨씬 강해졌는데 정기를 나눠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야박하게 군다고 투덜거리는 와중에 저 멀리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나 다가온다. 지나가는 차인 줄 알았는데 이쪽으로 내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강지훈인 듯했다.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정말 짝지기를 했으면 큰일 날 뻔했군.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젓고 덕이를 보조석 쪽으로 떠밀었다.

“왔어.”

덕이가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가 얼굴을 굳히고 보조석으로 이동해서는 창밖을 노려봤다. 밝은 라이트 불빛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분명 강지훈의 차였지만 그는 운전석에 앉아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천호라고 하길래 날아서 오는 줄 알았더니 차를 끌고 왔네. 그것도 수입차를. 잠시 후 영신이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넌 여기 있어. 일단 내가 만나볼게.”

“지금?”

“아까 한 얘기 기억하지?”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먹힐까? 물었지만 영신은 확신하지 못했다. 일단 뭐라도 해보는 수밖에는.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동시에 강지훈이 안에서 내리는 게 보인다.

평소와 다르게 슈트를 빼입은 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핏기가 없어 보였다. 힘을 사용해서 그런 건가. 저벅저벅. 그가 흙을 밟으며 걸어오다 운전석 쪽에 있는 덕이를 발견하고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데리고 왔네요? 난 또 그대로 도망친 줄 알았는데. 근데 단둘뿐인가? 난 또 군대라도 이끌고 올 줄 알았지.”

“너 따위 둘이면 충분하거든.”

“곧 죽어도 큰소리는.”

그러면서 지훈이 영신의 몸을 훑는다. 분명 기를 다 틀어놓았는데 얼추 맞춰져 있었다. 게다가 전보다 힘이 강해졌다. 가진 힘에 비해 제대로 쓰질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기를 일부러 막아놓았던 건가.

“재미있네?”

“굳이 김 실장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었잖아?”

“안 그러면 도망쳤겠지.”

“그렇게까지 해서 급하게 날 찾은 걸 보니… 네 목숨줄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네.”

지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다가 곧 처음의 표정을 회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영신을 만난 후 갑작스레 힘을 이용했더니 그 후로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얼빠진 반호와 퇴마사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너는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를 가졌어.”

“내가 정곡을 찔렀다는 얘기군.”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너는 어차피 날 이기지 못해.”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고.”

“대화는 이제 그만. 비켜. 내 목적은 네가 아니거든.”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뭐지?”

“꼭 구슬이어야 하나?”

“뭐?”

“네가 힘을 가질 방법 말이야. 꼭 구슬이어야 하느냐고. 인간의 정기라던가. 그런 건 소용없어?”

생뚱맞은 이야기에 지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무슨 개소리냐고 물었더니 영신이 팔짱을 끼고 여유 낙낙한 표정으로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인다. 지훈의 시선이 그 동작을 따라 이동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가 구덕이에게 정기를 줘서 구미호를 만들었으니, 네게도 정기를 주는 게 어떨까 해서. 대신 넌 나한테 그만큼 돈을 지불하고.”

하. 지훈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그 말인즉 박영신이 저와 짝짓기라도 하겠다는 소린가.

“꽤 흥미롭지만 사양하지. 넌 내 취향도 아닐뿐더러, 그깟 보잘것없는 정기로는 해결이 안 되거든.”

“저런. 안타깝네.”

지훈이 코웃음을 치며 영신을 지나쳐 차 쪽으로 가다 문뜩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보조석에 있던 덕이가 보이지 않았다.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몸에 엄청난 힘이 닿더니 그대로 튕겨 나가 차체에 부딪힌다.

영신이 뒤로 물러서며 인상을 구겼다. 충격이 어찌나 큰지 차의 범퍼가 반이나 먹어들어갔다. 곧바로 부적을 꺼내 주술을 건 다음 그쪽으로 날려버렸다. 부적 수십 장이 지훈의 몸을 감쌌고, 영신이 재빨리 손가락 끝을 붙여 모으고 나서 주술을 걸기 시작했다. 노란색 부적이 파랗게 변하더니 곧 불이 붙은 듯 움직였다.

“지금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덕이가 힘을 모아 다시 지훈을 향해 날렸다. 그런데 순간 차 옆에 서서 주술을 외던 영신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쿵. 영신이 바닥에 떨어졌고, 윽 하는 신음과 함께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영신아!”

덕이가 놀라 기겁을 하고 쳐다보는데 순간 지훈이 끄으으으윽 소리를 냈고 동시에 그의 몸에 붙어 있던 부적 수십 장이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진다. 픽, 덕이의 얼굴이 그것에 긁혀 생채기가 생겼다. 덕이가 쓰러진 영신을 확인하러 뛰어가려는데 지훈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전과 다르게 꼬리 아홉 개가 정확하게 드러났다.

“인사치곤 과격하네.”

덕이가 물러섰다. 꼬리가 나오니 힘의 크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전에 해치웠어야 하는 건데. 뒤쪽으로 영신을 확인했다. 자신이 힘을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영신이 맞았다. 나 때문에.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잘하려고 했는데. 눈물이 그렁해서 쳐다보는데 지훈이 덕이의 뺨을 감싸 쥔다.

“이런. 울려고 하네. 이러면 내 마음이 약해지잖아.”

그의 시선이 탐스러운 아홉 개의 흰 꼬리에 꽂혔다. 일단 흡수해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면 구슬 크기가 충분했다. 입맛을 다시는 순간 그의 모습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키가 두 배로 늘어난다. 입을 귀까지 쫙 찢어 웃는 모습에 덕이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이리 와요. 난 덕이 씨가 필요해요.”

다시 집중한 덕이가 최대한 힘을 모으자 강 주변으로 있던 돌들이 허공에 떠오른다. 그걸 일제히 지훈에게 날려버렸다. 하지만 몸에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서 주변으로 다시 흩어졌다. 뒤쪽을 보니 영신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정말 잘못된 거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지훈이 덕이를 향해 기다랗고 흉측한 팔을 뻗는 순간 주변에 흩어졌던 부적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지훈의 몸을 감싼다. 조금 전까지도 쓰러져있던 영신이 비척거리고 일어나 차에 몸을 기댄 채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영신아, 괜찮아?”

그 말에 영신이 이를 뿌득 갈았다. 강지훈을 맞추라고 했는데 저를 날려버리다니. 아주 잠깐이었지만 저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죽은 줄 알았는데.”

영신이 후우, 숨을 내쉬고 정신을 집중했다. 구덕이한테 얻어맞은 데가 아직도 욱신댔다. 그나마 비켜나가서 다행이었지, 제대로 맞았으면 정말 골로 갔을지도 모른다. 지훈이 영신에게 향하는 순간 부적이 시야를 가린다. 그 부적을 찢어버리자 다른 부적이 또 시야를 가렸다.

“씨발.”

그 순간 덕이가 커다란 바위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그대로 지훈에게 날려버렸다. 하지만 바위가 몸에 닿기도 전에 지훈이 팔을 휘둘렀고,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엔 다른 바위를 던졌지만,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것들을 부숴 나갔다. 컥. 마지막 바위가 부서지자 영신이 목을 붙든 채로 공중에 떠서 발버둥 쳤다. 그 상태로 지훈이 돌아보는 순간 덕이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길.”

어디 숨었을까, 웃으며 덕이를 찾으려고 한발 한발 걸어나가는데 갑자기 강한 힘에 의해 몸이 뒤로 펑 날아갔다. 작은 벌레로 변한 덕이가 지훈의 몸에 붙어서는 한 번에 강한 힘을 발산시킨 덕분이었다.

먼 거리에서 공격할 때랑 바로 몸에 붙어서 공격할 때랑은 그 차원이 달랐다. 지훈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영신이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지훈이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덕이가 이번에도 가차 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곧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그대로 뒤로 접혔다. 아아아악. 덕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팔다리를 덜덜 떨었다. 벌레로 변신해 몸에 붙은 다음 1차 공격을 시도했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을 막 펼치려던 찰나였다.

분명 꽤 충격이 컸을 텐데도 지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짱한 얼굴이었다. 그가 공중에 떠 있는 덕이를 보며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몸을 반으로 접어버리고 사지를 끊어내도 상관없었지만, 산채로 구슬과 혼을 꺼내야 그 효험이 있으니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구슬이 널 살린 줄 알아.”

툭, 덕이의 몸이 풀밭에 젖은 빨래처럼 늘어졌다. 조금 전 충격으로 사지가 벌벌 떨리고 눈에 초점이 흐릿했다. 더는 비명이 나오지 않는 입술을 뻐끔뻐끔 붕어처럼 움직였고, 의식은 잡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영신이.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영신이가 다치는데.

그때 간신히 숨통이 트인 영신이 목을 붙들고서는 비틀거리고 일어나 덕이 쪽을 쳐다봤다. 지훈을 공격한 덕이가 되려 맥을 못 추고 당하고 있었다. 영신이 그대로 몸을 날려 지훈에게 덤벼들었다.

발로 턱을 걷어차자 빠각, 하고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갔던 턱이 제자리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정도 타격은 지훈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질 못했다. 영신의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지며 바위에 가서 부딪혔다. 윽. 등뼈가 으스러지는 기분에 제대로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이봐, 퇴마사 양반. 내가 왜 너한테 일을 맡겼는지 알아? 일 처리 깔끔하고 인정머리 없다고 소문이 자자해서였어. 근데 왜 이렇게 됐을까? 응? 여우랑 붙어먹으니 그새 없던 정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없던 양심이 생긴 건가.”

윽, 영신이 자리에서 비척거리고 일어섰다. 주룩, 코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려 셔츠 앞섶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대충 손으로 닦아냈지만,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뒤쪽으로 덕이를 확인하니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시선을 따라 지훈의 고개가 잠시 돌아갔다가 제자리로 왔다.

“왜? 여우가 걱정돼?”

까닥, 지훈의 고갯짓 한 번에 영신의 팔이 그대로 비틀렸다. 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꽉 다문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갔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부적 수십 장이 다시 날아와 지훈의 몸에 달라붙었다. 지훈의 입가에 픽 미소가 생겨났다.

“어쩌지? 이런 건 나한테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영신이 이를 꽉 문 채로 뒤틀린 제 팔을 비틀어 맞췄다. 드드득, 뼈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눈에 빨갛게 핏줄이 서고 꽉 다문 입술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지훈이 팔을 휘젓는 동시에 부적이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 하지만 곧 부적은 흩어진 조각들을 찾아내 지훈의 몸에 가서 들러붙었다.

“귀찮게 하는군. 널 너무 오래 살려뒀어.”

지훈이 몸에 달라붙는 부적을 떼어내려 힘을 이용하려는 순간 머리가 핑 돌며 눈앞이 흐려졌다. 휘청거린 몸이 옆으로 살짝 기우는 걸 얼른 다리를 내밀어 지탱했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왜 이러지. 그 모습을 보는 영신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생겨났다.

“왜? 어지러워?”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지훈의 시선이 영신에게 닿았다.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활활 끓는 분노와는 반대로 몸의 기운은 잠시 땅으로 꺼지는 듯 훅 아래로 향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안 했어. 걔들이 했지.”

영신이 지훈의 몸에 붙은 부적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지훈의 한쪽 눈썹이 들어 올려졌다. 단순히 저를 제지할 생각으로 그랬다고 여겼는데 알게 모르게 제 몸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나 보다.

팔을 휘두르니 부적들이 다시 수십 갈래로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더니 지훈의 주변을 경계하듯 빙빙 돌며 날아다녔다. 뜨겁게 끓던 지훈의 눈빛이 한여름 서릿발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하. 내가 널 너무 얕봤군.”

“왜? 이제 좀 달라 보여?”

“아니. 네 장기 자랑은 잘 봤어. 이제 조용히 사라질 시간이야, 퇴마사.”

지훈의 입술 끝이 뾰족하게 올라가더니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시뻘건 불덩이가 생겨난다. 그것을 던지자 주변을 맴돌던 부적들에 불이 붙었고, 그것들은 더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영신이 품 안으로 손을 뻗어 마지막 남은 부적을 매만졌다. 제발, 이걸 쓸 때까지만 버텨내길. 놈의 힘을 더 빼놓으려면 덕이가 있어야 하는데. 순간 지훈의 어깨가 뚜둑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기운다.

지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역시나 다리 한쪽도 꺾여 바닥에 꿇어졌다. 영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풀밭에 늘어져 있던 덕이가 일어나서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내뿜어내는 기운에 지훈의 팔다리가 꺾였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요동을 치며 흔들렸다.

지훈이 그 상태로 몸을 돌려 뒤쪽에 있는 덕이를 노려봤다. 이 어린 여우 새끼가. 동시에 덕이의 다리가 우둑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래. 구슬이야 명줄만 붙어있어도 되니까. 숨만 붙여놓고 모조리 다 끊어 놓아 주지.”

으으윽, 덕이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온몸의 뼈를 망치로 으깨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장기를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지훈의 힘을 받아쳐 내며 공격하려니 몸에 한계가 몰려왔다. 영신에게 시선이 가게 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주위를 이쪽으로 고정해야 해.

“누가 네 마음대로 되게 할 줄 알아!”

덕이가 마지막 남은 힘을 폭발시켜 내보내자 거센 흙바람과 함께 지훈의 몸이 휘청하고 뒤로 물러선다. 빌어먹을. 망할 부적에 너무 힘을 빼앗겼나 보다. 박영신을 먼저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래 지금이라도 그놈을 먼저 없애자. 팽팽하게 대치되는 상황에서 영신을 눈으로 좇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덕이처럼 벌레로 변신했을 리도 없을 텐데. 그때 부릉 하고 차 소리가 들렸다. 지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운전석에 앉아 있는 영신이 보였다.

“하. 차로 날 받아버리게?”

운전석에 앉은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창문 4개를 모조리 내리더니 부릉부릉, 위협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댔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덕이가 뒤로 주춤주춤 밀려났다. 한계다. 이젠 진짜 한계야.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질질 새어나왔다. 이 정도면 천호의 힘도 많이 약해졌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힘의 무게가 완전히 기울어지며 덕이가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숨을 헐떡이는 그의 눈에 자동차에 탄 영신과 강가를 등지고 선 채 흉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훈이 들어왔다.

덕이가 나가떨어지자 지훈이 손을 들어 영신에게 까닥까닥 손짓했다. 이미 구덕이는 한계였다. 더는 힘을 쓸 수 없을 테고 그건 이 퇴마사 놈도 마찬가지였다. 차로 받을 모양인데, 얼마든지.

다시 한 번 손짓하는데 차르르륵 소리가 들린다. 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발밑으로 무언가가 감겨든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확인했을 때 그의 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쇠사슬이 뱀처럼 움직이며 제 발목을 감쌌기 때문이다.

쇠사슬은 차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힘으로 풀어내려고 할수록 더 감겨온다. 그제야 덕이가 마지막 힘을 짜내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영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부릉부릉. 운전석에 앉은 그의 얼굴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핸들을 꼭 쥔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있는 대로 밟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어디 끝까지 가보자, 이 씹새끼야!”

부르릉. 지훈이 사슬을 풀 새도 없이 차가 지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훈이 몸을 피하는 순간 차가 난간을 뚫고 강을 향해 날더니 그대로 수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지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씨발! 상황 파악을 한 그가 사슬을 풀 새도 없이 몸이 홱 딸려갔다.

턱, 그가 난간을 잡으며 버텼다. 덕이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창문을 다 열어버린 차는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하였고, 지훈은 더 버티지 못하고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버렸다.

덕이가 다친 몸을 이끌고 강가에 서서 보니 차는 어느새 가라앉았고 영신도 지훈도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백을 셀 때까지 영신이 절대 사슬을 풀면 안 된다고 했다. 집중하자, 집중. 그때 물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음기가 강하게 발동하더니 어디선가 나타난 귀신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사슬에 붙어있던 부적은 귀기를 모으는 힘을 지녔다. 음기가 강한 물속으로 들어가 힘을 내뿜으니 온갖 귀신들이 다 모여들었고 그중엔 악질로 유명한 물귀신이 가장 많았다.

덕이가 애써 힘을 유지하며 그곳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지훈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사슬의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영신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해지고 자꾸만 딴생각이 들었다.

“왜 안 나와…. 왜.”

불안하니 눈알이 뜨거워지고 벌게진다. 하아. 작게 내뱉은 한숨 소리에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흘렀다. 같이 들어간다고 할 걸 그랬나. 끝까지 떼쓸 걸 그랬나. 왜 안 나오지. 영신이 잘못된 거 아닌가. 백번 세라고 했는데. 벌써 다 셌는데 왜 안 나와.

“영… 영신아!”

강을 향해 목놓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물귀신들이 바글바글 모여든 곳에서 순간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찌잉-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빛이 사탕 가루처럼 반짝이며 흩어졌다. 시커멓게 모여들었던 귀신들이 흩어지는 가운데도 영신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영신아!”

울먹이며 다시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조용하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꺼내야 해. 물속에 그대로 뛰어들려는 순간 누군가 제 발을 덥석 잡는다. 덕이가 악.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물에 흠뻑 젖은 영신이 천천히 물 밖으로 기어 나오며 손을 뻗었다. 덕이가 그 손을 붙들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윽. 그가 신음을 내뱉었고, 어느새 몸이 뭍으로 올려졌다. 덕이가 그를 끌어안으며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영신아아아아.”

엉엉. 우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덕이를 일단 떼어내고 뒤를 돌아보니 지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수영하면서 나오는데 물귀신들이 아귀처럼 달라붙는 걸 봤다. 물에 들어간 데다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으니 저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수영하면서 나오는 내내 몇 번이나 팔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모른다. 하마터면 저도 물귀신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마주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갈팡질팡하던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 허망한 웃음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

눈을 떴을 때 하얀 천장과 함께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석현이 보였다.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니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구덕이가 보이지 않았다. 살짝 움직이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드려 맞은 것처럼 뻐근하고 아팠다. 어쨌든 병실인 건 확실한데, 왜 팔다리가 무겁지?

“정신 좀 들어?”

그제야 영신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아래를 확인했다. 제 다리와 팔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오른쪽 다리랑 왼쪽 팔에 금 가고 갈비뼈에도 조금 금이 갔대. 당분간은 입원해서 경과 지켜봐야 한다니까 꼼짝 말고 여기 있어야 해.”

“…이런,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밤중에 거긴 왜 간 건데?”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설명할게.”

무심하게 대답한 영신이 누군가를 찾았다. 석현이 알아채곤 반대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 침대가 하나 더 있었고, 덕이는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것도, 그렇다고 특별히 외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다친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울다가 지쳐 잠든 거란다. 다행이다 싶어서 웃으니 입가가 터졌는지 아릿했다.

“윽.”

“지금 웃음이 나와?”

“김 실장은?”

“아침에 중환자실에서 나왔어. 경과가 많이 좋아졌나 보더라.”

“그것도 다행이네.”

“필요한 거 있으면 오른손은 멀쩡하니까 벨 눌러. 아. 큰엄마한테는 말 안 했어. 걱정하실까 봐.”

“잘했어.”

“잘했어? 그럼….”

석현이 가방을 뒤적이길래 영신이 인상을 사납게 구겼다. 이게 죽다 살아난 사람 앞에서 또 후원 이야기를 꺼낼 작정인가. 하지만 그의 가방에서 나온 건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CT 사진을 인화한 거였는데, 대충 봐도 누구 뱃속인지 알 것 같았다.

“애는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기념으로 한 장 뽑아봤어. 선물이야.”

그걸 영신의 머리맡에 한 장 놓아두더니 그럼 저녁에 일 마치고 와보겠다며, 간병인이 있으니 필요하면 벨을 누르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간다.

조용해진 병실 안에 있으니 어젯밤 겪었던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니 덕이는 침대 끝에 매달려서 자고 있었다. 석현에게 옆으로 조금 옮겨달라고 할 걸 그랬나. 입을 벌린 채 눈물 자국이 아직 남아있는 얼굴로 곤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젯밤 물 밖으로 나와 보던 얼굴과 겹치면서 가슴이 눌린 듯 뻐근했다.

“아직 살아있네?”

낯익은 목소리에 영신이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랐다. 천장에 미자와 인태가 매달린 채로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씨, 깜짝이야.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스르르 내려와 침대 옆에 섰다.

“뭐야, 너희들.”

“네 사촌 동생을 따라왔지. 둘이 이야기하는 것 같길래 잠깐 나가 있었어.”

“박 대표 괜찮아? 많이 다친 거야?”

“그 18층에 사는 개새끼 짓이지? 그놈이 구미호였다니. 감쪽같이 속았는걸.”

끄응. 시끄러웠는지 덕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더 둥글게 만다. 영신이 그곳을 쳐다보더니 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가렸다. 쉿. 그 행동에 미자가 눈을 가늘게 늘였고, 인태가 똑같이 따라 하고 나서 우엑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만 가봐. 병원에서 돌아다니지 말고.”

“언제쯤 돌아와?”

“곧.”

“덕이도 데려갈까? 너 귀찮을 텐데.”

영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 같으면 당장 그러라고 했을 테지만, 오늘은 저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이 전투를 치른 의리가 있는데, 혼자만 보내는 건 더더욱 아닌 거 같고. 물론 눈뜨면 조금 귀찮게 굴긴 할 테지만.

“…그냥 둬.”

“알았어, 그럼.”

“몸조리 잘해. 내일 또 올게.”

“오지 마.”

“매정하긴.”

미자와 인태가 병실에서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영신은 덕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 이젠 침대 끝에서 조금 멀어져 천장을 보고 바로 누운 채였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긴장이 풀어지며 잠이 몰려온다. 무더위가 꺾인 탓인지 창가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이 마냥 기분 좋았다.

차에서 나와 헤엄치던 영신의 눈에 천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물속에서도 흉흉하게 번뜩이는 눈빛과 날카롭게 빛나던 이빨. 그리고 갈고리처럼 기다란 손톱. 물귀신들이 모여들어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때에도 그 눈빛은 여전히 영신을 뒤쫓았다.

뭍에 다다르던 순간 몸에서 떨어져 나온 천호의 팔이 영신의 발목을 덥석 붙들었다. 영신이 움찔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천호 대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매달린 덕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영신아.”

다짜고짜 끌어안으니 영신이 윽 신음을 내며 멀쩡한 나머지 팔로 덕이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야, 떨어져. 떨어져, 얼른. 덕이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영신을 바라봤다.

“죽었는지 알았어. 계속 잠만 자서.”

그 말에 영신이 기가 막혀 웃었다. 계속 잠만 잔 게 누군데. 어제 낮부터 오늘 오후까지 덕이는 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사람을 시켜 깨울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자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지 않았던 건데.

“그만 놔주지. 나 갈비뼈 금 갔어.”

“아… 미안….”

머쓱한 얼굴로 떨어지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눈으로 다시 한 번 상태를 살폈다. 기절하기 직전에 봤을 때 꽤 많이 다친 거 같았는데 여우라 회복이 빠른 건지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네가 석현이한테 연락했다며.”

“어. 네 동생 친구들이 금방 왔더라.”

석현의 말로는 119가 먼저 왔다고 하던데 덕이는 그게 석현의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곳에 살려면 가르칠 게 한둘이 아니겠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구덕이가 이곳에 살고 싶어 할까.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고생했어. 네 덕분에 잘 해결했어.”

뜻밖의 칭찬에 덕이의 양 볼이 사과처럼 발그레해졌다. 영신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칭찬을 해주니 기뻤다. 침대가 조금 더 크면 옆에 누우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빈자리를 내려다보니 영신이 그 마음을 알았는지 툭툭 손으로 침대를 두드렸다.

“눕고 싶으면 누워.”

“그래도 돼?”

“안 된다고 하면 계속 그렇게 쳐다볼 거잖아.”

덕이가 그럼 눕는다? 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침대 위로 올라와 눕는다. 영신이 옆으로 몸을 더 움직여 자리를 만들었다. 침대 하나에 성인 남자 둘이서 누워있으려니 비좁았다. 하지만 그래도 덕이는 영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때 머리맡으로 툭 팔이 내려온다.

“좁아서 불편해. 차라리 팔을 베.”

아. 덕이가 고개를 들자 베개 대신 영신의 팔이 목 아래쪽으로 들어왔다. 이상하다. 팔을 베는 건 짝짓기하고 난 다음에 하는 거 아닌가. 꿀꺽, 갑자기 떠오른 짝짓기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눈동자만 움직여 영신을 보니 그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영신아.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 안 해.”

“혹시 목도 다쳤어?”

“아니.”

“근데 왜 나는 안 보고 천장만 봐?”

그제야 영신이 고개를 돌려 제 팔을 베고 누운 덕이를 쳐다봤다. 밀가루처럼 하얀 피부에 새카만 눈동자를 말똥말똥하게 뜨고 시선을 맞춰오는데 어쩐지 귀 끝이 조금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대가리도 다친 건가.

생소한 감정에 기분이 이상해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덕이가 고개를 쭉 빼고 영신의 얼굴을 확인하려 든다.

“뭐야.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야. 저리 가.”

“말을 해야지 알지. 혹시 내가 너 물에 빠졌을 때 바로 안 구해줘서 그래?”

“아니라고. 그냥 졸려서 그래.”

“이상해.”

“됐어. 저리 가서 자. 아무래도 좁아서 불편하다.”

그러더니 덕이의 머리맡에 있던 제 팔을 슥 빼내 가슴에 올려둔다. 여전히 저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던 덕이가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너 속상해서 그러지?”

“뭐가.”

“천호가 죽어서. 돈 받을 때가 없어졌잖아. 그래서 지금 그러는 거지?”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이며 고개를 돌려 덕이를 쳐다봤다. 덕이는 어제 내려갔는지 침대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내 눈은 못 속여.”

이게 가끔 보면 곰 같은 데가….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말인데, 내가 본격적으로 네 일을 돕는 건 어때?”

“뭐?”

“미자랑 인태랑 나랑 셋이서 삼인조로 말이야. 물론 리더는 인태래. 저번에 인태가 그랬어. 인간 세상에선 짬밥이지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이야.”

그 말에 영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에게 빚진 돈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꼭 받아내야지 하는 마음은 없었다. 쉽게 대답을 하지 않자 덕이가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영신은 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끝끝내 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애도 아니고 자기가 가고 싶으면 알아서 가겠지. 이젠 돌아가는 것쯤 일도 아닐 텐데.

“봐서.”

반쯤 떨어진 허락에 덕이가 기쁜 얼굴로 정말이냐고 팔짝팔짝 뛴다. 또 껴안으려고 하는 걸 영신이 팔을 뻗어 제지했다. 갈비뼈. 덕이가 영신의 멀쩡한 손을 잡더니 제 뺨에 비비고 난리다.

그냥 하는 대로 놔뒀더니 이번엔 뺨을 붙들고는 쪽 입을 맞춘다. 터진 데를 건드려서 아프긴 했지만, 영신은 이번에도 밀어내지 않았다. 잠시 입술이 비벼졌다 떨어지고 나서 덕이가 살짝 흥분한 얼굴로 영신을 내려다봤다.

“이상하다….”

“뭐가?”

“구슬도 생기고, 꼬리도 나왔는데… 왜 자꾸 하고 싶지.”

그러더니 옆에 다시 누워서 몸을 비비며 낑낑, 앓는 소리를 낸다. 소리가 마치 신음 같아서 영신은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기분에 그만 자라고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덕이가 한 번 더 보채자 영신이 팔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바싹 끌어안았다. 뺨에 머리카락이 닿으며 살 내음이 진하게 풍기니 간신히 누르고 있던 욕정이 들끓었다. 몸만 멀쩡하면 당장에라도 눕혀놓고 하고 싶었다.

“…나으면 해. 지금은 아파서 안 돼.”

“진짜?”

“그래, 진짜.”

덕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영신이 깁스한 팔을 움직여 손가락에 툭 부딪쳤다. 약속. 작게 웃는 덕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 바보가 참고 있는 걸 알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건드리는 건지.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수십 번도 더 썼다 지웠다 하는 사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줄어들더니 고요해졌다. 힐긋 봤더니 덕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들어 있었다. 천호와의 싸움에서 많은 힘을 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빌어먹을, 아무리 그래도 아픈 몸뚱이에 발기까지 시켜놓고 저는 속 편하게 자다니.

잠든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니 동그란 이마가 나타난다. 어울리네. 퇴원하고 가면 머리를 좀 잘라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참 동안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앞으로 같이 지낼 일이 걱정이긴 했지만, 제 마음을 자각한 이상 조금은 욕심을 부려볼 작정이었다. 물론, 이 천방지축인 여우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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