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신이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미자를 발견했다. 돌아보는 얼굴을 확인하니 아무래도 저를 기다린 눈치였다. 어젯밤에 그 예주인지 뭔지 하는 아이에게 다녀온 것 같은데 일이 잘 안된 건가. 가까이 다가가니 미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태는 안에서 뭘 하는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왜 나와 있어?”
“영신이 너한테 물어볼 것도 있고… 할 말도 있고….”
미자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하면 주로 제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혹시 제 혈육을 찾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게 아닌 듯싶었다.
“뭔데.”
미자가 흘깃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다. 누가 봤다고 해도 귀신인 제 말을 들을 리가 없을 텐데,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인물이 사람은 아닌 듯했다.
“예주 말이야. 네가 돈 돌려준다고 했다며….”
“그래.”
“고마워.”
“그럴 필요 없어. 더는 찝찝하기 싫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뿐이야.”
“뭐가 찝찝한데?”
영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자에게 유일한 혈육이 하나 있었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하면…. 그래,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그냥, 이것저것 다.”
“그렇구나….”
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예주에게 갔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덕이가 그 사진들을 넘겨 주었는데 예주가 아버지께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확인하려고 아침까지 기다렸으나 집 안에 불은 켜지지 않았다.
“어쨌든 고마워. 네 덕분이야.”
“차라리 구덕이한테 인사해. 걔가 하도 사고를 치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도 있으니까.”
그 말에 미자가 웃더니 머뭇머뭇한다. 영신이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나 모아둔 돈 얼마나 돼?”
영신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미자와 인태가 일하는 거에 따라 돈을 받긴 했는데, 인태는 그걸 거의 집으로 보내는 편이었고, 미자는 가족이 없어 통장에 쌓여가고 있었다. 나중에 가족을 찾으면 준다고 했지만, 영신은 알고 있었다. 미자가 그 돈을 쓸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이미 몇 년째 가족을 찾는 중이었는데도 나오는 게 없었다.
“그걸 왜 물어.”
“혹시… 2억 돼?”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정확히 2억이라고 찍어 말하는 걸 보니 그냥 묻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미자야.”
“덕이 줄게.”
“뭐?”
“그 돈 덕이 줄 테니까… 걔 좀 놔줘.”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미자를 쳐다봤다. 모아둔 돈이 꽤 많으니 그 돈을 쓰는 건 미자의 마음이긴 한데, 하필 그게 왜 구덕이인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혹시 그새 정이라도 쌓인 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그 돈 줄게. 모자라면 벌어서 갚을게. 어차피 난 쓸 일도 없고. 가족도 없잖아. 솔직히 지금껏 나타나질 않는 거 보면 애초에 나는 가족이 없었던 거 같기도 해.”
그 말을 하며 미자가 애써 웃었다. 부모든 형제든 나타나면 좋겠지만, 꽤 오랫동안 영신이 찾지 못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저는 버려진 사람이었나 보다고, 마음으론 단념한 지 꽤 오래였다.
“…그래서 구덕이를 도와주겠다?”
“어.”
“안 돼.”
“왜?”
“걔 몸값이 얼만 줄 알아?”
“알아. 엄청… 비싸다며.”
“근데 그걸 네가 갚겠다고?”
“너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하면 얼추 갚지 않을까?”
“정신 차려. 그깟 여우 한 마리 때문에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그때 미자의 눈이 커진다. 인기척을 느낀 영신이 뒤를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덕이가 둘 뒤에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영신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빌어먹을, 하필 지금 나타나서는…. 다 들었나 싶어, 슬쩍 보니 얼굴이 꽤 지친 모양새다. 집에 가만히 있으랬더니 어딜 다녀오는 거야. 한마디 하려는데 문 앞까지 걸어간 덕이가 먼저 고개를 홱 돌리며 영신을 향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미안하다, 등신아! 그깟 여우라서!”
영신이 룸미러로 흘깃 뒤를 쳐다봤다. 뒷좌석에 앉은 덕이가 오이를 들고 아작아작 씹으면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급하게 집을 옮기느라 대충 짐을 챙겨 나오긴 했는데, 덕이는 잔뜩 골이 나서는 보조석이 아닌 뒷좌석에 타버렸다.
“너 아까 18층 다녀온 거야? 가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한마디 하자 고개를 홱 돌려 외면해버린다. 가뜩이나 천호를 만나서 놀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미자와 영신이 하는 말을 들어버렸다. 그깟 여우라고 했나.
그동안 잘못한 게 있으니 저도 할 말은 없지만, 영신이 제 존재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씁쓸해졌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자꾸만 왜 서운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영신에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강지훈이 의뢰인이고, 아주 위험한 놈이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 알리면 뭐가 달라질까? 이미 돈을 받고 저를 넘기기로 한 이상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의뢰인이 누군지 알게 됐다고 가격을 더 올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결론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꼬리가 생겼다고 호국으로 도망칠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그랬다간… 박영신은 죽어.]
영신이가 죽는 건 싫은데. 작게 한숨을 내쉬니 영신이 다시 룸미러로 흘깃 쳐다본다. 덕이가 오이를 입에 문 채로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도망치면 영신이 죽고, 남으면 내가 죽는다는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다.
지켜보던 영신이 다시 말을 건넨다.
“무슨 일 있어?”
영신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덕이가 대답했다.
“없어.”
“근데 왜 자꾸 한숨이야.”
“내 마음대로 한숨도 못 쉬어?”
“무슨 일 생긴 거면 나한테 말해. 나중에 뒤통수쳐서 사람 환장하게 하지 말고. 경고하는데 도망칠 생각으로 그러는 거라면 꿈도 꾸지 마.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잡아올 테니까.”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제 확인한 제 능력을 생각하면 영신이랑 일대일로 싸워도 크게 질 거 같진 않은데. 문제는 힘 조절이 되느냐 하는 거였다. 공원에서도 그렇고 차 안에서 악귀를 물리친 것도 그렇고, 제 의지가 아니었다. 힘은 생겼지만, 그걸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했다.
“어차피 너도 나한테 다 말하지 않잖아.”
“뭘.”
“미자.”
“미자가 왜.”
“그때 나랑 같이 갔던 무덤, 미자였지? 근데 넌 나한테 모르는 사람이라고 거짓말했어.”
영신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미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미자가 기억을 찾으면 비석에 이름이라도 새겨주려고 했는데, 그 잃어버린 기억이란 건 도통 돌아오질 않았다. 아니, 돌아오지 않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덕이는 오이를 한입 베어 물고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지는 나한테 사실대로 말해주지도 않으면서. 불공평해!”
“설마, 너. 거기 갔던 거 미자한테 말했어?”
“안 했어. 내가 바본 줄 알아?”
영신이 소리 없이 웃었다.
“바보잖아.”
“아니거든!”
“하여튼 그 얘긴 하지 마.”
“왜? 미자는 자기가 누구였는지 궁금해한단 말이야.”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진실도 있어.”
“거짓말! 너 혹시 미자를 돈벌이로 이용하려고 속이는 거야?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말은 제대로 하자. 널 속인 적 없어. 분명 정기를 준다고 했고, 네 꼬리가 나오면 돈 받고 판다는 것도 미리 말했잖아.”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구구절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팔아도 좋으니 정기를 달라고 한 건 저 아니던가.
“그랬는데도 좋다고 한 건 너였어. 그리고 미자는….”
영신이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덕이는 오이 먹는 것을 멈추고 영신을 빤히 바라봤다. 룸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신호가 바뀌고 차는 건널목 앞에서 멈췄다. 영신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지하철역 입구에 엎드려 구걸하는 사람이 보였다. 초라한 행색으로 지하철역 계단 앞에 누워있는 그를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외면했다. 덕이에게 말을 해도 될까. 이 바보 같은 여우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미 궁금해하기 시작한 이상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말해주는 게 낫겠다 판단했다.
“저 사람 보여?”
덕이가 영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봤다. 한 사내가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 앞에는 돈을 담을 수 있는 작은 통이 보였다. 한여름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그의 다리는 마르고 앙상했으며, 오랫동안 씻지 않은 듯 얼굴이며 몸은 지저분했다.
“…더러워.”
“죽기 전 미자도 저런 삶을 살았어.”
덕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있던 영신을 보는데 신호가 바뀌고 차가 막 출발했다. 덕이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역 앞에서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사내의 등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어디에서도 지금의 미자를 떠올리기 힘들었다. 미자처럼 예쁘고, 밝고, 상냥한 아가씨를….
“말도 안 돼. 거짓말!”
“게다가 멀쩡한 정신도 아니었어. 그렇게 살다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를 낳았는데, 그 애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확인이 안 돼.”
덕이가 충격받은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영신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무연고로 시신이 방치된 걸 찾아내서 거기에 묻어준 게 나야. 배가 고팠는지 쥐를 잡으려고 약을 탄 음식을 먹었다고 하더라. 아이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어. 기록으로 남은 게 없으니까.”
“거짓말…이지?”
“그래. 차라리 거짓말이면 좋겠지? 그러니 말하지 마. 걔를 위해서라도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 그런 것뿐이야. 너라면 감당할 수 있겠어?”
영신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가 보다. 혼란스러워하던 덕이가 먹먹한 얼굴로 창밖을 다시 내다봤다. 아까 보았던 그 사내는 사라지고 길가엔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만 보였다. 영신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
영신이 새집을 둘러봤다. 급하게 얻은 집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래도 빠진 것들이 있나 살펴보는데, 소파 위에 쭈그리고 앉아 기운 빠진 얼굴로 앉아 있는 덕이가 들어왔다. 그쪽으로 다가가니 덕이가 먼저 저를 쳐다본다. 오는 내내 미자가 불쌍하다고 흐느끼더니 결국 눈이 퉁퉁 부어버렸다.
“얼굴이 볼 만하네.”
“저리 가….”
“아니, 이제 네가 말할 차례야. 아까 18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대로 말할까, 수십 번을 고민했지만 도무지 답을 모르겠다. 몸도 섞은 사인데 애정은 아니라도 연민 같은 게 생기진 않았을까? 말은 못돼 처먹게 하지만 팔아넘기겠다는 생각에 조금 변화가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떠보기로 했다.
“영신아….”
“말해.”
“혹시 나를 사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아니.”
표정을 보니 정말 모르는 듯 보였다. 하긴, 알았으면 강지훈한테 그렇게 까칠하게 굴진 않았겠지.
“그게 누구든 너는 상관… 없지?”
“어.”
“말을 할 땐 생각을 하라고 네가 그랬잖아.”
“했어. 근데 없어.”
덕이가 어금니를 꾹 물고 노려보니 영신이 피식 웃는다. 농담인 듯 진심인 듯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쳐다보는데 영신이 한쪽으로 가서 무언가를 꺼내어 들고 나온다. 그걸 확인한 덕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놈의 한약! 지긋지긋해!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먹어.”
빨대까지 꽂아 건네기에 모른 척할 수 없어 입으로 가져가서 물었다. 쭈욱 마시니 쓴맛이 입 안에서 확 퍼진다. 더럽게 쓰다. 꿀꺽꿀꺽 삼키고 나서 인상을 쓰며 영신을 쳐다봤다. 아까 저를 그깟 여우라고 한 것도 괘씸하지만,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뽀뽀.”
영신이 모른 척 돌아서려 하기에 덕이가 재빨리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약속 지켜!”
“지키면 위층에서 있었던 일, 말할래?”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그냥?”
다시 한 번 떠볼까? 잠깐의 고민 끝에 영신의 손을 잡아끌어 제 입 쪽으로 가져갔다. 영신이 인상을 구기며 빼려고 하기에 손가락 하나를 덥석 물어 입 안에 넣고 혀를 움직였다.
“뭐하는 거야?”
스륵, 손가락이 빠져나갔고, 덕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라며. 이거 했어.”
순간 영신의 얼굴이 슬쩍 굳어지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넘긴다. ‘장난해?’라고 물었고, 덕이가 뭐가 잘못됐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진짠데.”
“그걸 왜 했는데.”
“걔가 해보라고 해서.”
영신이 어처구니없이 웃으며 하란다고 그걸 진짜 했느냐고 빈정거렸다. 덕이는 입을 다물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반항했으면 눈앞에서 잿가루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얘기까진 영신에게 하지 않았다. 오면서 그가 말하지 않았나,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진실도 있다고. 그거라고 해두자. 머릿속에선 여전히 도망칠 것인가, 남을 것인가를 두고 전쟁 중이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니면 천호를 보고 너무 놀라서 그런지 급속도로 피곤함이 몰려왔다.
“졸리다. 자러 갈래…. 방은 어디야?”
하품하고 눈을 비비며 묻는 덕이를 보고 영신이 입 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새초롬한 입술 사이로 보이는 덕이의 새빨간 혀를 보는데 조금 전 손가락에 닿았던 말캉한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빨았단 말이야? 대체 왜. 강지훈이 시켜서? 아니면 강제로? 강제로 한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덕이던가. 아니면 자의로? 그러니까 왜?
“방 어디냐니까.”
덕이의 물음에 영신이 굳은 얼굴로 거실 왼쪽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기. 따로 자.”
“어… 그러려고 했어.”
순순히 그러자며, 태연한 얼굴로 그쪽으로 가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저도 모르게 이를 까득 물고 노려봤다. 이제 꼬리도 거의 나왔으니 뭐 볼 장 다 봤다 이거야? 괜히 기분이 나빠지고, 속이 뒤틀렸다. 쫓아가서 손가락을 왜 빨았는지 더 물어볼까 하다 관두었다.
구덕이가 제 애인도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잠을 자는 사이일 뿐인데 누구랑 뭘 했다고 해서 자신이 참견할 이유는 없었다. 근데 그게 왜 하필 18층 사는 18놈이지. 대체 왜. 기분이 나쁜 게 단순히 강지훈이 싫어서인지 아니면 구덕이가 다른 놈 손가락을 빨아서인지 헷갈리기 시작하였다.
덕이가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였다. 새집인 데다 최근엔 영신과 둘이 자는 날이 많았는데 혼자 자려니 더 그런 듯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풍경도 불안함을 가중시키는 데 한몫했다. 창가에 매달려 저를 보고 활짝 웃던 강지훈의 모습이 생각나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보니 아무것도 없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테이블 위에 돌배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영신이 구해다 준 것이었는데, 익지 않기도 했지만, 아까워서 못 먹고 챙겨둔 것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기를 모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순간 테이블 위에 있던 돌배가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 이번엔 돌배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질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배를 옆으로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공원과 차에서 사용했던 힘에는 터럭만큼도 미치지 못했다. 몇 번 시도하다 관두고는 자리에 누웠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무섭고, 심란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베개를 챙겨 들고 빠져나왔다.
조심조심 소리를 죽여 걷다 보니 어느새 방문 앞에 도착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불빛 한 점 새어나오질 않았다. 벌써 잠든 건가. 슬그머니 문을 밀고 들어가서 뒤꿈치를 들고 침대 쪽으로 갔다.
영신은 벽을 보고 모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올라가서는 최대한 몸이 닿지 않게 누웠다. 꿈쩍도 하지 않는 영신의 널찍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새카만 눈을 깜빡였다. 안고 싶다. 만지고 싶어. 조금만 더 붙어서 잘까?
굼벵이처럼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서 등 뒤로 바싹 붙는데 영신이 으음, 소리를 내며 갑자기 바로 눕는다. 덕이가 흠칫 놀라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숨을 죽인 채 있는데 잠시 후 잠에 취한 영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결국 여기서 잘 거면서….”
그러더니 몸 위로 이불을 덮는 게 느껴진다. 곧 정적이 찾아왔다.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바로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영신의 옆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잠든 모양이었다. 천천히 자는 얼굴을 감상했다.
아무리 봐도 잘생겼단 말이야.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거둬들였다. 영신의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이 제게도 덮여 있는 거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깟 여우라면서 이불은 왜 덮어주는데. 미자의 유골을 수습하고 관리하는 것도, 그 사실을 미자에게 알리지 못하는 것도, 남들은 돈만 아는 나쁜 놈이라고 욕했지만 덕이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만 쳐다보고 자.”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움직이자 덕이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안 잤어?”
영신이 고개를 덕이 쪽으로 돌리며 미간을 잔뜩 구겼다.
“그렇게 쳐다보는데 잠이 오겠냐?”
덕이가 머쓱한 얼굴로 배시시 웃자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반대편으로 돌린다.
“자. 계속 쳐다보면 나가라고 할 거야.”
“영신아.”
“왜.”
“안고 자도 돼?”
“아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덕이가 등 뒤에 붙어서는 영신을 끌어안는다. 지랄할 줄 알았는데 영신이 생각보다 얌전하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손을 점점 아래로 내려 바지 앞섶으로 옮겨갔다. 성기를 슥 만지는데 이미 발기해서는 단단하다. 영신이 몸을 홱 돌려 노려봤다.
“손 치워.”
“너 왜 커졌어?”
영신이 그 손을 잡아떼고서는 홱 던지듯 놔버렸다. 덕이가 몸을 더 밀착하며 비비자 영신이 노려보며 하지 말라고 쏘아붙인다.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 약 먹었으니 뽀뽀해줘. 안 했잖아!”
영신이 인상을 구겼다. 아까 제 손가락을 빨던 게 생각나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정확히는 강지훈 손가락을 빨았다고 하니 자꾸 상상이 가서 그게 싫었다. 그걸 싫다고 느끼는 저 자신이 참을 수 없어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었는데 덕이가 나타나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이다.
“나가.”
“싫어.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서 잠이 안 와.”
그러면서 영신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꽉 껴안는다. 영신이 더는 밀어내지 않고 그 까만 머리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걸 떼버릴까 고민을 하는 사이 덕이가 고개를 살며시 들더니 새초롬한 얼굴로 입술을 뾰족 내민다. 뽀뽀.
기가 막혔다. 시끄러운 제 속도 모르고 그 와중에 뽀뽀 타령을 하는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빨갛고 도톰한 입술을 내밀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영신이 제 입술을 살짝 부딪치며 벌려 물었다.
혀로 슥 핥아주니 덕이가 입술을 벌린다. 그대로 포개서 혀로 안을 문질러주니 몸을 잘게 떨면서 으응, 콧소리를 낸다. 그 상태로 덕이를 눕히고 나서 영신이 몸 위로 올라갔다. 두 개의 혀가 질척하게 비벼지다 떨어지고, 다시 비벼진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입술을 떼는데 덕이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영신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꼬리 때문이다. 이건 다 꼬리를 위해서야. 덕이의 셔츠를 위로 끌어올리고 나서 입술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젖꼭지를 혀로 문지르고 비비자 덕이가 발끝을 오므리며 야릇하게 흐느낀다.
“영신아… 거기… 진짜, 으응, 좋아….”
덕이가 영신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더 해달라는 듯 허리를 들썩였다. 빳빳하게 곤두선 젖꼭지는 침이 흥건할 정도로 물고 빨다 보니 새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젖꼭지만큼이나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덕이가 영신의 뺨을 붙들고 떼어냈다.
“빨리, 해줘….”
애원하는 목소리에 영신이 덕이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셔츠는 목 아래까지 말려 올라가고 아래는 벌거벗은 채 저를 보며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처럼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몇 번 몸을 섞어서 가능한 일인가.
오른손으로 제 바지를 내려 아까부터 발기해있던 녀석을 꺼냈다. 휘청 속옷 위로 튕겨 오르는 녀석을 붙들고 앞뒤로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덕이가 제 손으로 조금 전 영신의 혀가 닿았던 젖꼭지를 문지르고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애널이 드러날 정도로 양다리를 위로 들어 올린 채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영신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녀석을 보고 발정하는 게 아니라 몸이 그 쾌락을 기억하기 때문인 거라고 몇 번이고 핑계를 대며 성기를 붙들고 구멍 입구에 맞추었다.
애널이 뻐끔뻐끔 입을 열며 귀두부터 야무지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꾹꾹 엉덩이에 힘을 주어 앞으로 점점 나아가자 덕이가 영신의 손을 끌어와 제 젖꼭지를 만지게 했다.
“여기… 만져줘….”
빳빳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주자 덕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을 토해냈다. 뿌리까지 완전히 들어간 상태에서 영신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젖꼭지를 다시 혀로 문질렀다. 덕이가 그대로 영신의 머리를 붙들고서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들썩였다. 위아래로 자극되자 참을 수 없었는지 덕이의 성기에서도 말간 액이 줄줄 흘러 배에 고였다.
“…영신, 아…. 움직여… 응? 얼른, 아아….”
최대한 빈틈없이 삽입한 상태에서 영신이 허리를 둥글게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빡빡하게 들어찬 성기가 벽을 긁는 게 아니라 영역을 표시하는 것처럼 안을 헤집어놨다. 참지 못한 덕이가 거기에 맞춰 허리를 움직이며 헐떡이는데 갑자기 명치에서 울컥 구역질이 치솟는다. 급작스레 입을 틀어막으며 욱, 신음을 내자 젖꼭지를 빨던 영신이 고개를 들고 덕이를 쳐다봤다.
“…?”
덕이가 입을 틀어막은 채 나머지 다른 손으로 하지 말라며 흔들었다. 영신이 얼굴을 굳히는 사이 다시 한 번 우욱 소리를 내더니 헛구역질한다. 스르륵, 구멍을 가득 채웠던 성기가 빠져나가고 덕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뛰어가더니 문을 쿵 닫는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발딱 일어선 채 번들거리는 제 성기를 내려다보고 작게 혀를 차는데 어쩐 일인지 구역질 하는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토한다고 해서 먹은 게 나올 리도 없는데, 오늘따라 유독 그 시간이 길었다. 망할 구슬이 안에서 요동이라도 치는 건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 앞으로 갔다. 문을 열려는데 문이 잠겼다. 똑똑 두드렸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똑똑. 역시나다. 얼굴이 굳었다. 혹시 쓰러진 건 아닐까 마음이 다급해져 문을 억지로 열려고 손잡이를 비트는데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열리는 틈으로 초췌한 얼굴의 덕이가 보였다. 세수했는지 얼굴에 물기를 묻힌 채 비척거리면서 밖으로 걸어 나온다.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걸 영신이 가까스로 받쳐 안았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속이, 하아, 다 뒤집히는 거 같아….”
넋이 나간 얼굴로 우는소리를 하길래 부축해서 침대에 데려갔다. 풀썩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지더니 오한이 드는지 몸을 웅크린다. 그 상태로 눈만 움직이며 영신을 쳐다봤다.
“…마저 해야 하는데…. 그래야 꼬리가….”
느리게 깜박이던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더니 새카만 눈동자는 그 속으로 사라졌다. 살 섞는 소리로 요란하던 방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이고 고개를 옆으로 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자?’ 하고 물었는데 입까지 벌린 채 꼼짝도 않는다. 다시 한 번 물었는데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진짜 잠들었군. 추운지 몸을 웅크리는 모습에 영신이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온도를 높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 자는 거지?”
아쉬움 섞인 물음에 대답 대신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영신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자느냐고 물으려다 관두고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와 덕이의 몸에 덮어주며 투덜댔다.
“그래. 자라, 자.”
곧이어 제 가랑이에서 성이 난 채 꺼덕이는 녀석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젠장. 녀석과 함께 조용히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구덕이가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복수를 지금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자는 녀석을 깨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미자와 인태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둘 사이엔 예주가 휴대폰을 들고 앉아 무언가를 보며 아까부터 고민 중이었다. 휴대폰 사진 속엔 혜란의 불륜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을 제 아버지에게 보낼까 말까 고민을 벌써 수십 분째 하고 있었지만, 막상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는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인태가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글렀네, 글렀어.”
“심란할 거야. 그래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냥 놔두면 지 아버지 호구 등신 만드는 거잖아.”
비난하는 인태를 보며 미자가 눈을 흘겼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는데 예주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예주가 흠칫 놀라서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얼굴에 기쁨과 동시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내비친다. 그러더니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로 가져갔다.
“…어. 아빠.”
짐짓 밝은 목소리를 내려는 모습이 안쓰러워 미자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였다. 잘 지내느냐고 묻더니, 여긴 별일 없다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며 아무렇지 않게 한참을 통화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인태가 가슴을 퍽퍽 내려치며 답답해 죽겠다고 했지만 미자는 예주의 심정도 이해가 가서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그때 바깥에서 차 소리가 들려온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인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혜란이 한참 집을 비우더니 돌아온 것이다. 예주가 덕이를 만나는 걸 봤으니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미자가 창밖으로 나간다.
“인태야, 여기 좀 부탁해.”
“어디 가?”
“나쁜 년 혼내주러.”
“야, 잠깐!”
붙드는 인태를 뿌리치고 미자가 아래로 내려왔다. 차는 시동이 켜진 채 대문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확인하니 혜란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서늘했고 눈에 독기가 가득 들어차 있는 걸 보니 조만간 일을 치를 기세였다.
미자가 보조석에 앉아 그런 혜란을 지켜보는데 대시보드 위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는 혜란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어머, 당신.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예주? 별일 없지. 목소리가 안 좋았다고? 글쎄. 아까 감기 기운이 있다더니 그래서 그랬나. 내가 잘 챙길 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렴 내 딸인데 내가 신경 안 쓸까 봐 그래요? 당신도 참.”
애교 섞인 목소리로 호호, 웃으며 통화하다가 전화를 끊는다. 통화하느라 위로 올라갔던 혜란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내려왔고, 눈빛에 다시 살기가 감돌았다. 어금니를 까드득 물더니 휴대전화를 한쪽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씨발, 짜증 나. 이 개 같은 년을 어떻게 하지?”
이를 꽉 물고 후진하여 차고로 들어가는데 후방 카메라 화면에 무언가 잡힌다. 혜란이 그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차를 멈췄다. 뭐야, 저게?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가늘게 늘이며 가까이 확인하는데 화면에 시커먼 물체가 웅크리고 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이상한 마음에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뒤쪽으로 가니 차고 안은 텅 비어있었다. 주변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마음에 운전석에 다시 올라타서는 카메라를 보는데 조금 전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여전히 시커먼 물체가 있다.
혜란이 기겁하며 차 문을 잠그고 아까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주워들고 화면을 노려봤다. 시커먼 물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사람이다. 머리를 커튼처럼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기괴한 움직임으로 일어나더니 화면 밖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저거, 뭐야… 미친년인가.”
혜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손에 쥔 휴대전화로 112를 누르는데 띠리리, 배터리가 방전되며 화면이 어두워진다. 급한 마음에 차량 충전기를 이용하는 사이 어디선가 그드드드, 그드드드,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를 긁는 소리에 오금이 저리고 몸에 난 털이 다 곤두섰다. 후방 카메라 화면을 응시했지만 조금 전 보았던 그 여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이젠 귀 옆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혜란이 눈동자만 슥 움직여 왼쪽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창 밑으로 무언가 꿈틀거리면서 올라온다. 손이다! 기다란 손톱을 가진 그 손이 천천히 천천히 위로 올라오며 창을 긁어댔다.
꺄아악. 혜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는 보조석 쪽으로 몸부림치며 이동했다. 충전이 덜 된 휴대전화를 어떻게든 켜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창을 긁어대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후 시커먼 머리통 하나가 스르륵 올라왔다.
카메라 안에 있던 그 여자다. 혜란이 더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목이 졸리는 기분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끅끅거리는데 창밖의 여자가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웃는다.
흰자에 검은 눈동자는 점처럼 찍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기괴하게 벌린 입은 시커메서 마치 터널 같았다. 손톱으로 창을 긁어대며 입을 뻐끔뻐끔 움직이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었다.
[혜란아. 문… 열어줘.]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혜란이 조수석 쪽에 몸을 웅크리고 제발 저리 가라며 발버둥을 쳤다.
[끼히히히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더니 미친 듯 창을 긁고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문 열어줘. 문 열어줘. 혜란아! 끼히히히히! 문 열어! 끼히히히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차를 긁는 소리, 쿵쿵 머리를 박는 소리가 뒤섞여 지옥 같았다.
저리 가! 저리 가! 아아아악! 미친년처럼 발버둥을 치고 울며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럴수록 여자는 차 안으로 뚫고 들어올 것처럼 머리를 찧고 문을 열어 달라고 악을 썼다. 혜란은 결국 흰자를 허옇게 드러내고 거품을 뿜어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도망간다, 안 간다, 도망간다, 안 간다, 도망간다, 안 간다. 도망….”
덕이가 마지막 남은 꽃잎을 붙들고 차마 떼지 못하였다. 발밑에는 떨어진 꽃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 다른 꽃을 꺾으려는데 뒷짐 진 노인 하나가 다가와서는 들고 있던 등산 스틱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이봐, 젊은이. 뭐 하는 거야? 화단에 있는 꽃을 꺾으면 어쩌나!”
그 말에 덕이가 놀라 꽃과 노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꺾으면 안 돼?”
“안 돼? 이 자식이 혀를 잘라 먹었나, 얻다 대고 반말이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덕이가 눈치를 살피며 떨어진 꽃잎을 쓸어모아 화단 쪽으로 옮기며 구시렁댔다. 몸을 일으켜 집 쪽으로 가려는데 노인이 덕이를 쫓아오며 왜 어른한테 반말이냐고, 몇 살인데 위아래도 모르냐고 야단을 쳤다.
그냥 가려던 덕이가 억울한 마음에 몸을 홱 돌리면서 따져 물었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노인의 얼굴이 불에 타는 것처럼 시뻘게지더니 들고 있던 등산 스틱을 들어 덕이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 자식이 더위를 먹고 처돌았나! 느이 부모가 교육을 그따위로 시키디? 나는 예순다섯이다, 이 새끼야!”
탁, 덕이가 등산 스틱 끝을 손으로 잡아채더니 가자미눈을 하고 노인을 노려봤다. 노인이 흠칫해선 스틱을 빼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덕이가 잡고 있던 스틱을 옆으로 홱 치우면서 쏘아붙였다.
“난 또 백 살이나 처먹었다고! 새파랗게 젊은 게, 어디서 지랄인데!”
노인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붕어처럼 벙긋거리는데 덕이가 흥! 콧방귀를 뀌더니 몸을 홱 돌려 집 쪽으로 가버린다. 폭발한 노인이 쫓아가서는 스틱으로 덕이의 머리통을 때렸고 결국 둘 사이에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어졌다.
뒤늦게 저 멀리서 젊은 경비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고, 복장을 보고 경찰이라고 오해한 덕이는 혹시라도 붙들릴까 봐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노인이 거기 서라며 고래고래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오르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다다랐다. 그 앞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데 마침 문이 열리고 영신이 안에서 나왔다. 덕이가 분한 마음에 냉큼 달려가서는 파르르 떨며 고자질을 했다.
“영신아! 나 밑에서 꽃구경하다가 어떤 놈한테 얻어맞았어!”
울상을 한 덕이를 보며 영신이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아침부터 답답하다고 화단에 가서 꽃구경한다고 가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아 막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다. 어젯밤 그대로 잠들어 욕실에서 혼자 처리한 것도 열 받는데, 어떤 놈한테 맞았다니. 안타까운 마음보단 쌤통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떤 놈인데?”
“새파랗게 젊은 놈.”
“저런. 많이 아파?”
“머리 맞았어. 봐봐. 피나?”
덕이가 머리를 디밀자 영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타깝게도 멀쩡하네.”
그 말에 덕이가 눈을 흘기고 입을 씰룩였다. 영신이 그만 떠들고 들어와서 밥이나 먹으라고 쏘아붙이더니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덕이가 투덜거리며 뒤를 따라가는데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전화가 울린다. 확인한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흠칫 굳었다.
거실 쪽으로 가던 영신이 멈춰 서더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말고 전화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왜 안 받아?”
“어?”
“강지훈이잖아. 왜 안 받아?”
덕이가 휴대폰을 꼭 쥔 채로 대답하지 않자 영신이 오더니 전화를 빼앗으려고 했다. 재빨리 팔을 뒤로 해 감추자마자 전화가 끊긴다. 덕이가 티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매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던 영신의 입가엔 삐뚤어진 미소가 생겨났다.
“궁금하네?”
“뭐가?”
“나 모르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 같은데, 그게 뭘까.”
“그런 거 없는데?”
“혹시 손가락 말고 다른 것도 빨아줬어?”
비죽이며 묻는 영신을 보고 덕이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다른 거 뭐?”
“뭐긴 뭐야. 네가 잘 빠는 것 중에 하나겠지.”
“오이?”
천연덕스럽게 오이라고 대답하는 덕이를 보며 영신의 눈 밑이 슬쩍 구겨진다. 이게 바보인 건지 아니면 바보인 척하면서 사람을 놀리는 건지. 됐다며, 때려치우라고 말하고 나서 몸을 돌리는데 덕이가 졸졸 쫓아오며 그게 뭐냐고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영신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데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
덕이가 오이를 쥔 채 밖을 내다봤다. 잠깐 창을 열었더니 더운 바람이 훅 들어온다. 날씨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처럼 무더웠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건물 밑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오이를 씹어 먹으며 그 광경들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려 소파 쪽으로 갔다. 영신은 아까부터 그곳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슬며시 뒤쪽으로 가서 훔쳐보니 사람들의 얼굴이 프린트된 종이었다.
책상에 펼쳐진 것들은 각자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왜 저걸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자꾸 뒤에서 기웃거리니 영신이 커피 잔을 들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덕이가 소파를 돌아 영신의 앞에 놓인 의자에 가서 마주 보고 앉았다.
“너는 뭐 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들어가.”
“답답해. 미자랑 인태 보러 가면 안 돼?”
“안 돼.”
“왜.”
“꼬리가 다 생길 때까지 여기 있어.”
“그럼 나 정기 좀 줘봐. 꼬리 빨리 나오게.”
영신이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덕이를 쳐다봤다. 앞에 앉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덕이를 보니 어젯밤 화장실에서 혼자 자위하던 게 떠올라 울컥 화가 치밀었다.
“뻔뻔스럽기는. 나한테 맡겨놨어? 공손하게 부탁해도 모자를 판에 대놓고 내놓으라 해?”
“공손하게 부탁하면 들어줘?”
“하는 거 봐서.”
덕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이쿠, 나으리. 쇤네에게 정기 좀 나눠주십시오~ 예이?”
“…뭐 하냐?”
“공손하게 부탁하라며.”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어?”
“예전에.”
“예전 언제?”
“그때가 언제더라. 내가 어릴 때 잠깐 인간 세상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80년 전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더듬는 덕이를 보고 영신의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80년 전이면 제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자신의 할머니보다 덕이가 더 나이가 많았다. 새삼 느껴지는 나이 차에 기분이 씁쓸해져서는 그만 들어가라며 손짓을 해 보였다.
“가. 정신없어.”
“치.”
정신없는 건 내가 아니라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들 같은데. 덕이가 기를 모으고 그것들을 바라보자 종이들이 위로 뜨더니 차곡차곡 정리됐다. 테이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고, 영신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덕이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활짝 웃고 있었다.
“봤지?”
“너. 꼬리 다 나온 거 아냐?”
하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기에 덕이가 꼬리를 쫙 펼쳐 보였다. 여덟 개의 꼬리가 등 뒤에서 살랑살랑 움직였다. 꼬리가 나오니 확실히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달라진다.
덕이는 웃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힘은 굉장히 위협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영신이 입을 꾹 다문 채로 그 모습을 보며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꼬리들이 몸에 닿자 덕이가 인상을 쓰며 그것을 다시 집어넣는다.
“털 뭉치라 그런지 엄청 더워. 여름엔 못 꺼내놓겠다….”
“넌 다른 생각 말고 꼬리 빨리 나오게 해.”
“나를 못 보내서 안달이구나….”
“너랑 나랑 오래 붙어있어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왜 없어? 난 좋은데.”
“뭐가 좋은데.”
“네가 이불도 덮어주고…. 아프면 신경 써 주고…. 돌배도 구해주고… 또… 짝짓기하는 것도… 기분 좋고… 뽀뽀해주는 것도 좋고….”
“…….”
“난 다 좋은데. 너는 아니야?”
“전혀. 네가 돈이 되니 그런 것뿐이야.”
그 말에 서운하긴 했지만 덕이가 애잔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난 좋아. 태어나서 나한테 그렇게 해준 사람은 없으니까. 네가 처음이야.”
“네 의뢰인은 나보다 더 잘해줄 거야. 그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널 필요로 하니, 오죽 잘해주겠어.”
“그게 아니면…?”
“뭐?”
“나를 죽이려고 찾는 거면…?”
그 말에 영신이 웃었다. 수백억씩 주면서 사들인 여우를 죽이는 게 말이 될까 싶어서였다.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한 값어치가 있으니 찾는 거겠지. 그러다 누군가 떠올랐다. 요즘 자신의 기분을 최고로 거슬리게 하는 그 누군가가 의뢰인이라면. 설마… 아니겠지?
“그렇다고 해도 무슨 걱정이야? 너 정도면 네 몸 하나 보호하는 것쯤 일도 아닐 텐데.”
덕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러게.’라고 짧게 대답한 후 더는 말하지 못했다. 상대가 천호고 저 같은 건 상대도 안 될 만큼 강한 놈이고, 놈이 필요한 게 어쩌면 내 혼일지도 모른다고.
단순히 제 능력이 필요한 거면 강지훈에게 못 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내놔야 하는 거면 그건 싫었다. 무섭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영신이 죽을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니 영신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덕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있으면서 생각을 좀 더 정리하려고 방 쪽으로 가는데 영신이 들고 있던 서류가 눈에 들어온다. 아까부터 그것만 유심히 쳐다보는 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시선이 갔다.
“어?”
서류 위쪽에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머리가 긴 여자였다. 덕이가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하자 영신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 옆으로 가서 앉으며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옆에는 이름과 살던 곳, 사망 사유 등이 적혀 있었다. ‘자살.’
“왜… 어디서 본 거 같지?”
그 말에 영신이 덕이를 바라봤다. 실은 저도 아까부터 이 여자 사진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얼굴은 낯이 익은데 누군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김 실장을 통해 여자의 신원을 좀 더 파악하려고 했지만, 주변에 단서가 될 만한 게 없었다. 여자의 신상이 적혀 있는 서류 또한 일부러 작성한 것처럼 빈틈 하나 없이 깔끔했다.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마치 강지훈의 인적 사항을 살펴볼 때 느꼈던 그것 같았다. 순간 영신의 눈이 커졌다.
맞다! 그 여자다! 동시에 덕이가 여자의 얼굴을 짚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다! 맞지? 강지훈 봤을 때 뒤에 쫓아가던 그 혼령 말이야.”
영신이 사진 속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강지훈을 떠올리다 보니 여자의 실체가 나왔다. 처음 강지훈을 봤을 때 그의 옆에 서 있던 혼령과 같다. 어째서 이 여자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전화가 울린다. 김 실장이다. 영신이 전화를 받으며 일어섰다.
“나야. 말해.”
통화하며 방 쪽으로 가던 그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려 덕이를 바라봤다. 소파에서 여자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덕이도 이상한 느낌에 영신을 쳐다봤다. 영신이 이를 까득 물더니 알겠다고, 곧 그리로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누군데.”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미자한테.”
“왜.”
“아주 대형 사고를 치셨거든.”
“나도, 나도! 같이 가!”
“아니. 넌 여기 있어. 나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또 사고 치면 진짜 화낼 거다.”
영신이 지갑과 차 키를 챙겨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따라간다고 조르려던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서서 다시 소파로 왔다. 조금 전 보았던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
“계속 이러고 있을래?”
인태의 다그침에도 미자는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젯밤 혜란을 겁주고 나서 밤새 예주의 곁을 지키다 돌아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혜란이 누군가에게 연락했고, 곧바로 남자 하나가 차를 몰고 쏜살같이 나타났다.
혜란의 내연남이었다. 혜란은 몸을 덜덜 떨며 그 남자와 사라져 아침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쫓아가서 또 무슨 계략을 꾸미나 알아낼까 했지만, 예주가 걱정이라 쉽게 그러지 못했다.
“일단 가보자. 지금쯤 박 대표 귀에도 들어갔을 거야. 가서 수습해야 할 거 아냐.”
미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켜 그대로 현관 쪽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나가려고 현관 앞에 닿는 순간 몸이 뒤로 튕기더니 저만큼 날아가 떨어졌다. 뒤쪽에 있던 인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미자가 당황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방어진이 쳐진 영신의 집에 들어가려던 그때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을 통해 나가려고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몸이 뒤로 튕겨 날아올랐다.
악! 비명을 지르니 인태가 뛰어와 미자를 부축했다.
“미자야! 괜찮아?”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띠릭, 띠릭,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동시에 뒤를 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영신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집 안을 휙 둘러봤다. 바깥쪽에서 주술을 걸어 뒀으니 당분간 인태도 미자도 이곳에 갇혀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 유유자적한 태도에 미자가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야! 박영신!”
“귀 안 먹었어. 소리 지르지 마.”
“박 대표, 이건 너무하잖아.”
너무하다라. 영신이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유혜란이 깡패 같은 놈들 몇 명을 데리고 김 실장에게 찾아와 다 뒤집어 놓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깟 덩치 몇 놈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혜란은 고객이다. 그런 고객의 뒤통수를 쳤으니 화를 낼 만도 했다. 계약금에 위약금까지 얹어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마음을 풀지 않았다. 고소할 거라고 난리 치는 걸 간신히 어르고 달래긴 했지만 절대로 그냥 물러설 여자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둘 다 천도시켜버리고 싶었는데,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인태와 미자만큼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이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 그동안의 정을 봐서 한 번은 용서하기로 했지만, 당분간은 둘 다 근신이 필요했다.
“내 허락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어기면 강제로 천도시켜 버릴 테니 그리 알아.”
“영신아!”
“박 대표, 이건 아니지! 우리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시끄러워. 내가 너희 때문에 어떤 곤욕을 치렀는지 알아? 알면 둘 다 나한테 너무하단 말 못해. 그러니 입도 벙긋하지 마.”
영신이 손가락으로 둘을 가리키며 경고를 보내고 나서 그대로 홱 몸을 돌려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미자가 뒤쫓아가려고 하자 인태가 그녀의 팔을 먼저 붙들었다. 하지 말라며 눈짓을 보내는 바람에 미자도 더는 영신을 잡지 못했다. 어쨌든 자신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조직에 피해를 준 건 사실이지 않은가. 다만 미자는 영신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나 제 처지보다 혼자 있을 예주가 걱정이었다.
***
덕이가 물에 젖어 축 늘어진 꼬리 여덟 개를 낑낑거리며 들고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커다란 수건을 대여섯 개 꺼내 물기를 제거하고 드라이기를 이용해 털이 바삭해질 정도로 말렸다. 하얗고 부드러운 털이 손가락에 감기니 기분이 좋아졌다.
빗으로 꼬리털을 정성스럽게 빗고 나니 윤기가 반짝반짝 흐르는 게 제법 멋있었다. 어느 정도 꼬리가 마르자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그대로 몸을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화분 두 개가 있는 게 보였다.
미간을 모으고 집중하자 화분이 바닥에서 뜬다. 그걸 내려놓고 이번엔 옆에 있는 조금 더 큰 화분을 들었다. 확실히 꼬리가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힘을 조절하는 게 수월했다. 그 상태로 화분의 자리를 바꿔가며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조금 더 큰 걸 들어볼까 싶어 옆에 있는 커다란 장식장을 들려고 했지만 지지직 바닥에 끌리긴 해도 쉽사리 들리진 않았다. 역시, 큰 건 아직 무리군. 힘을 쓰니 쉽게 피곤해졌다. 터덜터덜 소파로 가서 일자로 길게 드러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흰색 천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굳이 꼬리 아홉 개가 아니어도 이 정도 능력이면 어디 가서 괄시는 안 받을 거 같은데….
“그냥 확 도망가버릴까…?”
도망가는 건 일이 아니었지만, 영신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차라리 같이 도망칠까 생각하는데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꺼내서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강지훈이다.
당장에라도 그가 나타나 무시무시한 얼굴로 저를 몰아붙일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어지더니 안도할 새도 없이 다시 벨이 울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레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나예요, 덕이 씨.]
“….”
[대답해야죠.]
“네….”
[저런. 말 놔요. 불편하잖아요.]
“….”
[집에 없던데, 어디 갔어요?]
덕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집을 옮겼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밖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냐며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언제 오냐고 묻는다.
“글쎄. 잘 모르겠어….”
[박영신한테 사실대로 말했어요?]
영신의 이름이 나오자 덕이가 황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쨌든 그의 관심이 영신에게 가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니! 절대 아니야! 영신인 아무것도 몰라.”
흐음. 이상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이상하냐고 물었지만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겠다며 전화를 끊으려던 그가 다시 묻는다.
[꼬리는 아직인가요?]
“아직… 여덟 개야.”
[노력해봐요. 나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알았어….”
[그리고 얼굴 좀 펴요. 좋은 집으로 옮겨놓고 왜 그렇게 울상이에요.]
“뭐?”
[웃어봐요. 그래야 마지막 꼬리도 나오죠.]
덕이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소리냐고 묻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어느새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소파에서 벗어나 황급하게 창가로 뛰어가서 밖을 내다봤다.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중이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고,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순간 저 멀리 건너편 건물 창가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서 있는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으며 몸을 피했다. 멀어서 형체가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게 강지훈이란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찾아냈을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기어가 소파 밑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영신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야 한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강지훈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도무지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결국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
사무실에서 나온 영신은 본래의 제집으로 들어갔다. 가구와 가전은 모두 그대로였지만 며칠 집을 비운 탓인지 사람 사는 온기는 느껴지질 않았다. 대신 김 실장이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챙겨보는 중이었다.
“오셨어요?”
“당분간 일 받지 마. 유혜란 쪽에도 사람 붙여서 감시하고, 이상한 낌새 보이면 그 여자가 사고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 쳐. 우리 쪽에 필요한 증거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요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어디 가서 굿을 하든가 해야지, 원.”
그 말에 김 실장이 웃었다. 굿이라면 질색하는 영신 아니던가. 그가 웃으며 서류 봉투 하나를 영신에게 내밀었다. 영신이 자리에 앉으며 봉투를 집어 들고 안에 내용물을 빼서 확인했다. 강지훈의 사진이었다. 사람을 붙여 그의 뒤를 며칠째 캐고 있지만 특이한 사항은 없다고 했다.
“김 여사는?”
“최근에 만난 사람들 다 조사했는데요, 강지훈과 따로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사진을 살펴보던 영신이 멈칫했다. 김 여사가 차에서 누군가와 만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꽤 으슥한 산 중턱이었는데 위쪽 사찰에 물건을 배달하러 가던 용달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거라고 했다.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김 여사가 분명했다. 영신이 사진 밑에 찍힌 날짜를 계산했다. 덕이의 몸값을 두 배로 올리고 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건 누구야?”
“박성현이라는 남잡니다. 차량 조회를 해보고 주변 탐색도 했는데 이 남자도 나오는 게 없습니다. 가족도 없고, 만나는 친구도 없고, 다니는 회사도 없고. 근데 수십억짜리 집에 살면서 몇억짜리 차를 아무렇게나 끌고 다니고. 이상하죠? 강지훈이랑 똑같지 않습니까?”
강지훈과, 낯선 남자. 그리고 김 여사의 사진을 펼쳐놓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한 사람씩 짚어가며 자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봤다. 두 배로 돈을 올려 달라고 말하고 나서 김 여사의 행적을 조사했을 때 제일 의심이 가는 게 이 남자였다.
그렇다면 박성현이라는 남자는 누구일까. 의뢰인? 아니면 의뢰인의 부하? 그렇다면 강지훈은? 저처럼 고용된 사람일까. 아니면 그가 의뢰인? 문득 강지훈을 보고 무섭다고 몸을 떨던 덕이를 떠올렸다. 영신의 체취에 익숙해져 퇴마사를 보고 겁을 먹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단순한 퇴마사는 아니란 소린데.
[생각보다 많은 여우가 인간 세상에 섞여 산단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나서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만약 강지훈이 의뢰인이면 어쩌지. 아예 그의 존재를 몰랐다면 구덕이를 얼씨구나 하고 넘겼겠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녔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왜 필요하다고 했을까. 의심 가는 정황이 있긴 한데 검사 결과에 분명 인간이라고 나오지 않았던가. 도대체 뭘까. 복잡하게 얽혀드는 생각을 정리하는데 김 실장이 툭 끼어든다.
“꼬리는 나왔습니까?”
“아직. 하나가 덜 나왔어.”
“혼자 둬도 괜찮아요?”
김 실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혹시라도 덕이가 도망갈까 봐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꼬리가 아홉 개 되기 전엔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 녀석이야. 문제는 그게 언제 생기냐겠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생기면요?”
그 말에 영신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는데 언젠가부터 저는 구덕이를 감시하는 일에 소홀해졌다. 사람을 있는 대로 붙여도 모자랄 판에 구덕이보다 강지훈을 더 신경 쓰고 있다니. 혹시 녀석이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가. 어째서?
“도망치면 할 수 없는 거고.”
“진심이세요?”
“왜. 거짓말 같아?”
“네.”
“맞아. 거짓말이야. 도망가면 팔다리를 끊어서라도 다시 데려올 거야. 녀석의 꼬리를 만들려고 내가 어떤 짓까지 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걸.”
슥 입 안을 핥았다. 어젯밤 키스하느라 머금었던 도톰한 입술 맛이 떠올라서 쓴웃음이 났다. 손으로 만졌던 부드러운 살결도 그렇고, 따뜻하고 축축하던 엉덩이 속도 그렇고. 하나씩 떠올리다 기가 막혀 이마를 감쌌다.
“하, 씨발. 왜 지금 생각나서는.”
김 실장이 의문스럽게 쳐다보는데 마침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에 ‘박영호’ 세 글자가 찍혔다. 김 실장의 충직한 부하였고, 일 처리가 제법 능숙해서 뭐든 믿고 맡기는 사내였다. 강지훈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켰는데 아마 그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나다, 영호야.”
상대방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김 실장의 안색이 굳는 게 보였다. 사진을 살펴보던 영신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영신과 눈이 마주치자 김 실장이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짓씹는다. 이상함을 눈치챈 영신이 손을 내밀었다.
“줘.”
머뭇거리던 김 실장이 전화를 건넸고, 그걸 받아든 영신이 제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건너편에서 조용히 숨소리만 들린다. 영신이 들고 있던 사진 중 강지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고, 기다렸다는 듯 지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박영신 씨… 서운하네요.]
“누구십니까.”
[나예요, 강지훈.]
“아. 18. 어쩐 일입니까?”
[우리가 꽤 가까운 이웃사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도 없이 집을 옮겼더라고요.]
“내가 이사하는 것도 댁한테 보고해야 합니까?”
[당연하죠….]
“어째서요?”
[왜냐하면… 음, 우리는 서로를 궁금해하는 사이니까?]
킥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린다. 영신의 얼굴이 굳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굵직한 비명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박영호가 지금 곤경에 처해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전화기를 쥔 영신의 손에 파랗게 핏줄이 돋아났다.
“씨발. 너, 무슨 짓이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너야말로 무슨 짓이지?]
“뭐?”
[내가 너한테 여우 찾아달라고 했지, 언제 내 뒤를 밟아달라고 부탁했던가.]
영신이 한 대 맞은 얼굴로 기가 막힌 표정을 했다.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던 지훈의 사진을 노려보다 그대로 구겼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말 강지훈이 의뢰인이었구나. 빌어먹을 자식. 이를 꽉 문 채 정면을 보는데 김 실장이 다른 쪽으로 가서 어딘가로 연락을 취한다. 강지훈 쪽으로 사람을 더 보내려는 것 같았다. 영신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일단 만나서 얘기해.”
[좋아.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당신 일하는 거 보니 태평하게 기다릴 수가 없겠더라고.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 만나도록 하지.]
“내가 어딨는 줄 알고?”
[17층.]
“……”
[왜? 놀랐어? 설마 너만 날 감시한다고 생각했나?]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10분 뒤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강지훈이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를 보며 영신이 핏대가 설만큼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이 개새끼. 앞에 앉은 김 실장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영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야말로 궁금하던 바다. 대체 이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이다.
***
현관문이 열리고 지훈이 얼굴을 내밀었다.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반말에 목소리도 서늘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긋 웃으며 영신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영신이 까닥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전과 조금 달라졌다. 책과 작은 소품들은 상자 안에 넣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커다란 가구와 가전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살펴보는데 지훈이 한쪽 소파를 가리키며 앉겠느냐고 묻는다. 영신이 그리로 가서 앉았다. 미리 준비했는지 테이블에 갓 놓은 차가 눈에 띄었다. 연노랑 빛의 차는 전에 봤던 것과 같았다.
“어떤 차를 좋아할지 몰라서 제 마음대로 준비했어요.”
“감사합니다.”
“아까 그 남자는 무사히 돌려보냈으니 걱정 마세요. 팔을 살짝 비틀긴 했지만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몰래 내 뒤를 밟았으니 그 정도는 괜찮죠?”
영신은 대꾸하지 않는 대신 강지훈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얼굴은 전보다 더 하얗고 핏기가 없었는데 실내가 전혀 덥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하얀 이마에선 송골송골 땀이 맺혀 나왔다. 뭐지. 몸이 좋지 않은 건가.
“이사한 집이 아주 근사하던데요.”
“별말씀을요.”
“제가 의뢰인이라는 걸 대충 아시는 눈치던데.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네요.”
“솔직히 좋진 않습니다.”
“후회하고 있죠? 좀 더 친하게 지내서 더 뜯어낼걸, 하고 말이죠.”
“이런. 그것도 괜찮은 방법인데 아쉽네요.”
“어차피 다 알게 되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나는 하루라도 빨리 구미호가 필요합니다. 일을 서둘러 진행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영신이 말없이 지훈을 바라봤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의뢰인임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렇다면 왜 구덕이를 필요로 하는 걸까.
“왜 필요한지 물어도 됩니까.”
“계약서에 분명 적혀 있지 않았나요. ‘어떤 경우에도 질문은 사양한다.’라고 말이죠.”
영신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전엔 동등한 관계였다면 지금은 갑과 을이나 마찬가지였다.정체를 묻는다고 해서 순순히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의뢰인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나쁜 놈이든 좋은 놈이든 그저 돈만 주면 그만이라고 제 입으로 누누이 말해왔지 않은가.
“언제쯤 되겠습니까.”
“글쎄요. 제 꼬리가 아니라서요.”
“저런. 대답이 마음에 안 드네요. 아니면 돈이 적은가요? 말해봐요. 얼마가 됐든 난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했다. 말만 하면 두 배가 아니라 열 배라도 지급할 용의가 있다는 듯 그가 웃어 보였다.
“꼬리가 다 나오면 얘기하죠.”
“그땐 얘기할 시간이 없을 겁니다. 꼬리가 아홉 개가 되면 당신이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구덕이가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서 그렇지 제대로 사용하면 당신 같은 퇴마사 하나쯤 가루를 내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저런. 가루가 되기 전에 얼른 팔아 버려야겠네요.”
영신이 코웃음을 치며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훈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잔을 들어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
영신이 집에 도착했을 때 덕이는 소파에 늘어진 채 천장을 보고 잠들어 있었다. 거실에 있던 커다란 화분의 위치가 바뀌어 있어 의아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 옆에 흙까지 쏟아져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없는 사이 덕이가 힘을 사용해 움직인 걸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장식장의 위치도 조금 틀어졌다.
인기척에도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어 그대로 놔뒀더니 잠시 후 끙 소리와 함께 몸을 뒤척인다. 소파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모양새가 불안했다. 안쪽으로 옮겨주려고 손을 뻗었더니 그제야 눈을 부스스 뜬다. 머쓱한 마음에 손을 빼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왜 여기서 자?”
“…언제 왔어?”
“방금.”
“너 기다리다가 잠들었어.”
하암.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잠이 덜 깬 얼굴로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있는다.
“일은 해결했어?”
“뭐… 대충.”
다행이다. 덕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배를 슥 문지른다. 종일 영신을 기다리느라 제대로 먹질 않았더니 허기가 졌다. 냉장고를 열어 꺼내 먹어도 됐지만 혼자 있으면 어쩐지 뭘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영신이 눈치채고 고기라도 구워주느냐고 물었고, 덕이가 잠이 붙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구워줘.”
그 모습이 막 잠에서 깬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영신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곧 웃음을 지우고 주방 쪽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고기를 꺼내는데 덕이가 쪼르르 쫓아와서는 미자 일은 어찌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둘 다 근신이야. 당분간 밖으로 못 나와.”
프라이팬을 전기 레인지에 올려놓고 온도를 높이는 사이 덕이가 냉장고에서 오이와 샐러드를 만들려 채소를 꺼냈다. 고기 굽는 건 못하지만 채소 씻는 건 익숙했기에 물을 틀어놓고 그것들을 담갔다.
“미자가 무슨 사고를 쳤는데?”
“몰라도 돼.”
“그 예주라는 애와 상관있어?”
영신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기를 올려놓았다. 덕이는 어떻게든 미자 편을 들려고 노력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미자는 그 애가 너무 불쌍해서 그랬을 거야.”
“저런. 너희가 나도 그렇게 불쌍하게 여겨주면 좋겠는데.”
“농담 아니야. 그 나쁜 여자가 예주라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알 바 아니야.”
“그 애가 미자 딸이면? 그래도 상관이 없어?”
불에 올려놓은 고기가 어느 정도 익자 영신이 그대로 뒤집는다. 치익,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확 풍기자 덕이가 채소를 씻으며 입 안에 고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쳐다봤다. 종일 굶었더니 오늘은 날고기를 준다고 해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딸이면 뭐가 달라지는데? 이제 와 어쩔 거냐고. 데리고 살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덕이가 오이를 박박 문지르며 영신을 째려봤다.
“진짜 냉정하다. 그 어린 게 불쌍하지도 않아? 미자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렇게 따지면 안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어.”
“하긴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으니 나도 팔아넘긴다는 거겠지.”
“야. 애초에 약속했던 거잖아. 이제 와 말을 바꾸잔 거야?”
“그래도! 나는 너랑 잠도 잤고, 뽀뽀도 하고… 그랬는데… 한 번쯤은 고민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몇 번을 말해. 그런 것들이 다 네가 좋아서였을까.”
“그럼 정말 돈 때문이야? 나는 너한테 정말 돈인 거야?”
“그래.”
덕이가 분하다는 얼굴로 채소를 박박 문질렀다.
“샐러드 말고 갈아먹을 생각이야?”
“지금 이깟 풀떼기가 중요해? 넌 바보야. 뭐가 중요한지도 하나도 몰라!”
덕이가 씩씩거리며 노려보더니 채소를 채반에 건져 올려 식탁 쪽으로 가져갔다. 물기를 제대로 빼라고 잔소리를 했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그대로 주방을 빠져나간다. 영신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
“안 먹어. 고기 안 먹어! 쫄쫄 굶어서 나왔던 꼬리도 들어가게 할 거야! 너 엿 먹으라고!”
악을 쓰더니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혼자 남은 영신이 집게를 든 채 황망하게 웃었다. 기껏 저녁을 차리는데 성질을 내고 지랄을 하니 기가 막혔다. 불을 끄고 나서 프라이팬을 내려다봤다. 이 고기도 얼마 전까진 멀쩡하게 움직이던 동물이었겠지. 제 살점이 불판에 구워지며 누군가의 식사가 되리라는걸 예상이나 했을까.
“알면 뭐가 달라져….”
영신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덩달아 식욕이 뚝 떨어져 집게를 옆에 던져 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덕이는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 들어갔나 싶어 확인해 보니 거기에도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다른 방들도 뒤졌지만 마찬가지였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창이 열린 게 보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창을 통해 밑을 내려다봤다. 저 멀리 공원 숲을 가로질러 빠르게 뛰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구덕이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뒤쪽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침대 위에 휴대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는데 이번엔 제 전화가 울린다. 확인하니 고모인 일월이었다. 강지훈과 헤어지고 나서 연락을 했는데 이제야 확인한 모양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로 가져갔다.
“저예요, 고모.”
***
미자가 총알처럼 날아 현관으로 향했다. 퍽! 곧 몸이 뒤로 튕기더니 저만큼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뒤에 있던 인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수백 번도 넘게 미자는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 속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가망 없는 일이라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리는 것뿐이었다.
“그만해. 그러다 천도 되기 전에 가루가 되겠다.”
“젠장! 박영신, 이 망할 자식!”
평소에 영신의 편만 들던 미자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집에 있을 예주가 걱정됐다. 지금쯤이면 혜란이 돌아왔을 텐데, 눈이 뒤집혀 아이에게 해코지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근처에 있으면 자신이 나설 수 있을 텐데. 다시 현관 쪽을 향해 뛰어가는데 띠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온다. 미자와 인태가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덕이가 눈이 시뻘겋게 퉁퉁 부어서는 울면서 들어오는 중이었다.
“야! 구덕이. 너 여긴 어쩐 일이야? 집 옮긴 거 아니야?”
“흐흑, 묻지 마. 영신이 진짜 싫어.”
“야. 간만에 우리 셋이 마음이 찰떡같이 맞는구나. 나도 지금 걔가 존나 싫거든. 미자 너도지?”
“존나는 아니야.”
인태가 눈을 흘겼고, 미자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덕이가 두 사람을 지나쳐 소파로 가더니 철퍼덕 엎드려서는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자가 다가와서는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덕이는 울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울지마, 덕아. 뚝. 그만 뚝 해. 자꾸 울면 머리 아파.”
미자가 덕이를 달래는 동안 인태의 눈은 현관에 꽂혀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구덕이라면 저걸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꼬리가 여덟 개나 있는 팔미호 아닌가. 일단 해보면 알겠지. 인태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번져갔다.
***
[다행이구나. 생각보다 꼬리가 빨리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네.”
영신이 침대에 앉아 구덕이가 두고 간 휴대폰을 만지작댔다. 고모인 일월에게 통화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사라져버린 구덕이의 행방으로 가득했다. 아직 꼬리가 여덟 개니 쉽게 도망치진 않았을 것이다. 도망쳤다고 해도 그 정도 능력이면 어디 잡혀가서 죽진 않겠지. 그러면서도 아까 그렇게까지 하는 게 아니었는데, 적당히 둘러대고 달래줄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됐다.
“고모.”
[말하렴.]
“그때 말씀하신 거 말이에요.”
[어떤 거?]
“구미호들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산다고 했던 거요.”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혹시 그들한테 다른 특징이 있을까요? 인간과 다른 거 말이에요.”
[글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힘이 약해진다는 건 알고 있어.]
“힘이요?”
[그래. 어릴 적 구미호를 만났다고 했지. 그 아이가 그러더구나. 인간 세상에 오래 있을수록 힘이 약해지고 인간처럼 변한다고. 그래서 자긴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아마 갑자기 사라진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거야.]
영신이 덕이의 휴대폰을 꾹 움켜쥐었다. 구덕이도 입버릇처럼 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는데 인간으로 변하기는커녕 점점 더 힘을 얻어 가는 중이었다. 물론 제 정기를 받았으니 가능한 거겠지만.
“그럼 반호는요. 반호도 해당하는 건가요?”
[으음. 글쎄. 반호에 대한 건 아는 게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인간의 피가 섞인 아이니 좀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왜? 덕이가 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
“모르겠어요.”
[아직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니 가고 싶을 거야. 아무리 저를 내친 가족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란다. 핏줄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영신이 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말해. 그 정도는 힘을 보태고 싶구나.]
“그럴게요.”
[더운데 끼니 거르지 말고. 너는 어릴 때부터 신경 쓸 일이 생기면 밥을 걸러서 네 엄마가 무척이나 속상해했어.]
“이젠 다 커서 그러지 않아요.”
영신이 작게 웃었다. 어릴 적 유독 까다롭고 몸이 약해 모친이 힘들어했던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제 운명을 탓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걸 봐버렸고,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진 그런 자신을 볼 때마다 나약한 놈이라고 비난을 퍼붓기만 했었다.
곧 전화가 끊겼고 영신이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덕이의 휴대폰을 켜니 제 얼굴이 메인 화면에 떡하니 있다. 눈을 감고 있는 거 보니 자는 얼굴인 듯싶었다. 대체 이건 왜 깔아 놓은 건지 모르겠다. 씁쓸하게 웃는데 메시지가 들어온다. 저장된 번호가 아니었지만, 내용으로 보아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오빠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
인태가 부서진 현관문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덕이한테 영신이 걸어둔 주술을 풀어달라고 했는데 덕이가 그대로 현관문을 박살 내버린 것이다. 세 사람 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서서 눈동자만 움직였다.
“어떡하냐?”
“다시 붙여볼까?”
“붙겠냐.”
“덕아…. 힘 조절 좀 하지….”
“아직… 거기까진 힘들어.”
“됐어. 잘했어.”
인태가 신경 쓰지 말라고, 괜찮다고 덕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문이야 어차피 다시 붙이면 되는 거고, 지금은 사람 목숨이 달렸으니 그게 더 문제라고 말이다. 떨어진 문짝을 가까스로 입구에 세워놓고 나서 셋은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도롯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서 예주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덕이가 혼잣말을 하는 걸 보는 택시 기사의 안색이 좋질 못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택시비를 지불하고 나서 언덕을 뛰어 올라가 보니 저 멀리 예주의 집 근처에 건장한 사내들이 무리 지어 있는 게 보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들은 집 주변을 돌며 순찰 중이었다.
세 사람이 몸을 숨기고 나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분명 예주의 집이 맞는데. 대체 저 사람들은 뭐지? 그때 미자가 앞으로 나서며 덕이를 돌아봤다.
“덕아, 여기 있어. 인태랑 나랑 얼른 들어갔다가 나올 테니까.”
“…괜찮을까?”
“걱정 마. 어차피 우린 보이지도 않아.”
순간 인태가 미자의 팔을 잡는다. 야, 멈춰. 왜 그러나 싶어 돌아보자 인태가 앞을 제대로 보라며 눈짓을 했다. 인태가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던 미자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예주의 집 대문 앞에 남자 하나가 서서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덩치들과 같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는 평범한 사내가 아니었다. 오른손엔 풀잎이 무성한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있었는데 그걸 흔들면서 집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씨발. 퇴마사잖아.”
“아… 좆됐다.”
덕이가 그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남자도 퇴마사라고?”
“그래. 유혜란 이 년이 아주 작정을 했나 본데.”
“망할 년. 그때 머리끄덩이를 잡았어야 하는 건데.”
두 사람이 혜란을 욕하는 사이 덕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퇴마사라고 다 잘생긴 건 아니구나.”
그 말에 인태가 기막힌 얼굴로 덕이를 쳐다봤다. 이 긴박한 와중에 영신이 잘생겼다고 인정하는 게 어처구니없어서였다. 정신 차리라고 등을 한 대 퍽 때렸더니 덕이가 얻어맞은 등을 문지르며 눈을 흘긴다.
“이제 어쩐담….”
“덕아. 너 휴대폰 가져왔지? 거기 예주 번호 있지 않아?”
“맞다! 저번에 번호 주고받았구나.”
아. 덕이가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울상이 됐다. 급하게 나오느라 영신의 집에 전화를 두고 왔기 때문이다.
“없어. 두고 왔어.”
“…이런….”
“하여튼 구더기 도움이 안 돼.”
“아까 문 부순 게 나거든!”
“그건 인정.”
“둘 다 그만하고 방법을 생각해봐.”
인태가 턱을 문지르며 곰곰이 생각했다. 방법이라….
“일단 저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건 무리야. 그래서 말인데, 구더기 너 혹시 변신술 같은 거 못하냐? 왜 티브이 보면 구미호가 막 변신도 하고 하잖아.”
“그래, 덕아. 지금으로썬 다른 방법은 없을 거 같은데, 일단 그거라도 해볼까?”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인태와 미자를 보며 덕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변신술이라…. 변신술은 구미호 중에서도 상급 구미호들만 쓴다고 들었다. 실제로 쓰는 걸 보진 못했지만, 두 사람이 워낙 간절하게 쳐다보니 일단은 시도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아직 꼬리가 여덟 개라… 안 될 거야. 너무 실망은 하지 마.”
“괜찮아. 솔직히 내가 말했지만, 기대는 안 해.”
“그래. 안 되면 다른 걸 찾으면 되지.”
덕이가 주변을 살피더니 안쪽 구석으로 가서 꼬리를 꺼냈다. 솜뭉치 같은 꼬리 여덟 개가 눈앞에서 움직이자 미자가 와! 하고 감탄을 내지른다. 너무 예쁘다. 인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꼬리를 꺼내는 순간 힘이 달라졌다. 전에 알던 구덕이가 아니었다.
꼬리를 꺼낸 덕이가 눈을 감고 힘을 모았다. 지켜보던 미자와 인태가 침을 꼴깍 삼켰다. 1초, 2초, 3초… 10초, 15초, 그렇게 일 분이 다 되어가도 덕이의 눈은 떠지질 않았다. 보다 못한 인태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자냐?”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뜨며 민망한 표정을 했다.
“거봐. 안 된다니까.”
미자가 안타깝게 웃으며 괜찮다고 다른 방법을 찾자고 했고, 인태도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덕이가 멋쩍은 얼굴로 사람까진 아니어도 쥐는 될 줄 알았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덕이의 모습이 눈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미자가 놀란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 꺄악 비명을 질렀다. 발밑에 조금 전까지 없던 쥐 한 마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태도 놀라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이게 뭐야!”
“조용히 해! 근데 덕이 어디 갔어?”
찍찍, 발밑에 있던 쥐가 소리를 내며 갑자기 사람처럼 두 발로 서더니 두 사람을 쳐다보며 손을 흔든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미자가 인태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어, 입만 벙긋거리는데 잠시 후 푸시시 소리가 나더니 눈앞에서 쥐가 덕이로 바뀐다. 놀라움과 경악으로 미자와 인태는 돌처럼 굳어버렸고 덕이는 기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봤어? 나 변한 거 맞지? 쥐로 변한 거지?”
“세상에….”
“말도 안 돼. 구더기가 쥐가 되다니.”
“내가 변신을 하다니! 내가 변신하다니!”
팔짝팔짝 뛰는 덕이를 미자가 붙들고서는 조용히 하라며 입을 막았다. 인태도 합세해서는 정신을 차리라고 야단을 쳤다.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라 예주를 구하러 갈 때라고 말이다. 덕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제 뺨을 두드렸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쥐가 아니라 예주지.
“일단 내가 변신한 다음에 저 집에 들어가서 예주가 괜찮은지 살펴볼게.”
“그러다 퇴마사가 널 알아보면 어쩌지.”
“걱정 마. 힘을 숨기는 건 자신 있으니까. 그럼 이따 보자.”
말리기도 전에 덕이가 다시 작아지더니 쥐로 변한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됐다. 귀를 쫑긋 세우고 긴 꼬리를 이용해 꼬리로 바닥을 짚고 서서 인태와 미자에게 눈을 찡긋 해 보인다. 둘 다 기겁해서는 말을 잇지 못하는데 덕이가 그대로 집 쪽으로 후다닥 달려간다.
크기가 작아져서인지 전보다 움직임도 더 빨랐다. 요리조리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커다란 대문 안쪽으로 눈 깜빡할 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인태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쥐가 됐네….”
“대단해. 쥐가 됐는데도 귀여워.”
“난 징그러워 죽겠는데. 눈알 빨간 거 봤지? 진짜 쥐 같았어. 그나저나 저 자식 가다가 쥐약 같은 거 주워 먹고 확 뒈지는 건 아니겠지?”
“왜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덕이가 잘못되면 좋겠어?”
“하도 엉뚱한 짓을 잘하니까 말이야. 근데 이거… 영신이한테 다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하지 마. 저 정도인 줄 알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야.”
“하긴. 박영신이라면 더 비싼 값에 팔아넘길지도 모르지.”
“이제 우리는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거지?”
“일단은 구더기를 믿고 기다려보자.”
미자가 예주의 집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불이 켜진 2층 창으로 그림자가 보였지만, 그게 예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구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제 처지가 너무나 한탄스러웠다.
미자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있는 인태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들어갔다 나온 덕이는 예주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혜란과 일 해주는 아주머니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벌써 해치운 거 아니야?”
인태의 말에 미자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등짝을 후려갈겼다. 둘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덕이가 제 몸에 묻은 오물을 털어냈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어 하수관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간 건데 몸에 냄새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셋이 합심해 주변을 더 둘러봤지만 예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집에 가서 휴대전화를 찾아 연락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은 택시를 잡자는 마음으로 동네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저 멀리 낯익은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앞서가던 덕이가 흠칫 놀라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안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영신의 자동차와 비슷했다. 덕이가 멈추니 뒤따라오던 인태와 미자가 의아한 얼굴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저, 저거 영신이 차 아니야?”
“설마…. 박 대표가 여길 왜, 어라?”
“…맞네. 영신이네.”
셋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를 쳐다봤다. 혹시라도 잘못 봤나, 비슷한 승용차인가, 셋이 고민하는 사이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키가 훤칠하게 큰 사내가 검은 수트를 입고 내리는 게 보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긴 했지만 그가 박영신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에 선글라스라니. 누가 저를 알아볼까 봐 그런 거겠지만 눈이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어쩐지 더 무섭게 느껴져 셋 중 누구 하나 먼저 발을 떼지 못하였다.
“어쩌지. 여기 쳐다보는 거 아니야?”
“몰라. 일단 가보자.
“싫어. 무서워.”
“튈까?”
“불난 집에 기름 붓게?”
“덕아, 네가 가봐.”
“그래. 너도 꼬리 여덟 갠데 박 대표랑 맞짱 뜨면 밀리진 않을 거야. 여차하면 아까처럼 변신해. 이번엔 호랑이나 곰 이런 거. 지가 사람인데 동물한테 별수 있겠어?”
눈을 끔벅이던 덕이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셋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영신이 천천히 손을 올리더니 셋을 향해 검지를 까닥인다. 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거기엔 많은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눈치만 보던 셋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영신이 선글라스를 낀 채 주변을 한번 살피더니 운전석 쪽으로 간다.
“타.”
뭐야. 화내는 줄 알고 엄청 쫄았는데. 덕이가 얼른 보조석 문을 열고 탔고, 미자와 인태가 우리는 여기서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지만 영신이 사납게 노려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뒷자리에 억지로 들어왔다.
핸들을 급하게 돌리자 차가 골목 아래쪽으로 향했다. 셋 중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덕이가 저기… 하고 나서며 운을 띄우니 영신이 쳐다도 안 보고 이를 까드득 무는 소리가 들렸다.
“닥쳐. 밖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아. 화난 거 맞구나. 눈이 안 보여서 몰랐네. 덕이가 입을 꾹 다문 채로 뒤를 흘긋 돌아봤다. 미자와 인태도 그 사나운 기세 때문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차는 빠르게 움직이며 새로 이사한 집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는데 문틈 사이로 불빛이 보였다. 영신이 켜두고 간 건가 생각할 새도 없이 현관에 놓인 낯선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흰 운동화는 크기가 작고 깨끗했다. 억지로 끌려온 미자와 인태는 영신의 집을 훑어보며 일부러 감탄을 내질렀다.
“세상에. 나 박 대표 사는 데 처음 와봐.”
“그러게. 집 좋다.”
“인테리어 센스가 굉장하네.”
“물론이지. 박 대표가 원래 못 하는 게 없잖아. 정도 많고, 인간성도 좋고, 귀신 귀한 줄도 알고.”
두 사람은 영신의 화를 풀어주려 갖은 아양을 떨었지만 돌아온 건 영신의 매서운 눈초리뿐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던 셋의 걸음이 자동으로 멈추며 눈이 크게 뜨여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소파 위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덕이가 놀라 손가락을 펴며 어! 하고 소리를 지르고 영신을 바라봤다. 놀라긴 미자와 인태도 마찬가지였다. 예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 하세요?”
“뭐야. 여기 있던 거야?”
“아, 그런 줄도 모르고 삽질했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셋이 동시에 영신을 쳐다보는데 영신은 이렇다저렇다 말도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까는 머리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는데 오는 동안 진정이 된 건지 아까처럼 사나운 기세는 아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아까 오빠한테 전화했는데요…. 저분이 받으셔서….”
예주가 굳게 닫혀버린 안방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미자는 혹시라도 예주가 다쳤나 걱정이 됐는지 가까이 다가가서는 몸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눈두덩도 붓고 입가도 터져 있었다. 미자가 이를 까득 물며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망할 년이 기어코 애한테 손을 댔네. 그 와중에 예주가 몸을 슬쩍 떨며 뒷목을 쓸자 미자가 얼른 거리를 벌리고 물러섰다.
“유혜란 이 개 같은 년….”
“참아. 그래도 이만하길 어디야.”
“진짜 다행이다. 영신이가 데리고 와서.”
“그러게. 의외네. 절대로 안 도와줄 줄 알았더니.”
잠자코 듣고 있던 덕이가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거봐. 내가 영신이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고 했잖아.”
“오빠, 지금 이 방에도 귀신 있어요?”
혼잣말하는 덕이를 보며 예주가 경계하듯 물었고, 덕이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말했던 애들이라며 보이지 않는 허공에 대고 하나씩 손으로 짚으며 인사를 했다. 여기는 미자. 여기는 인태. 예주의 시선이 양쪽을 번갈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뭐가 있긴 한 건가 싶어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 숙여 보였다. 어. 안녕. 인태는 어색하게 웃었고, 미자는 울컥한 얼굴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변했다.
“안녕….”
“야, 미자야. 우냐?”
“몰라. 주책이네. 왜 코끝이 시큰해지지. 열 받아서 그런가.”
“갱년기야?”
“닥쳐. 입 때리기 전에.”
미자가 훌쩍이며 코를 문질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영신이 밖으로 나왔다. 덕이는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까 검은색 수트를 입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아주 멋졌는데. 물론 언제 봐도 멋지긴 했다. 옷을 벗고 있으나 입고 있으나, 눈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성질 내고 막말할 때만 아니면 영신은 제가 아는 인간 중 가장 멋있는 사내였다.
영신이 오더니 예주를 보며 덕이가 머무는 방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쪽에서 묵어요. 내일 데려다 줄 테니까.”
그 말에 덕이가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면서 손을 저었다.
“안 돼!”
영신이 그런 덕이를 말없이 쳐다봤다. 아까는 너무 열이 받아 잡히면 강지훈한테 바로 넘겨버리려고 했는데, 막상 그 근처에서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걸 보니 자신이 화났던 이유 중에 하나가 걱정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속이 뒤집혔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덕이는 쭈뼛쭈뼛하며 말을 이었다.
“얘 보내면… 그 여자가 가만 안 둘걸.”
영신은 이번에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대신 옆에서 머뭇거리던 예주가 덕이를 불렀다.
“오빠… 괜찮아요. 저희 아빠한테… 연락했어요….”
“뭐?”
“다… 말했어요….”
미자와 인태 덕이 셋은 놀란 표정으로 예주를 쳐다봤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와중에도 예주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나만 참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요…. 그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그러다 제가 잘못되면 저희 아빠가 얼마나 마음 아플지 생각해 봤느냐고… 저분이 그러셔서… 그래서… 용기 냈어요….”
예주가 말한 저분이 영신임은 분명했다. 제 고객 떨어져 나갈까 봐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것 같더니. 덕이가 아까 난리 친 게 미안해서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영신이 그만 들어가라고 했고, 예주가 너무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더니 덕이의 방 쪽으로 향했다.
혼자 가는 뒷모습을 보며 미자가 영신을 쳐다봤다. 영신이 체념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예주의 뒤를 따라 스르르 들어간다. 그렇게 거실엔 인태와 덕이, 영신만이 남게 되었다. 미자까지 사라지자 혼자 남아버린 인태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돌아가도 될까? 내가 잠자리가 바뀌면 통 눈을 못 붙여서.”
“문짝도 없는 집에 가서 뭐하려고.”
“아… 봤어?”
“아주 잘 봤어. 걸레처럼 구겨놨던데?”
날카로운 영신의 시선이 덕이에 머물렀다. 어쨌든 문을 망가트려 놓은 건 사실이니 덕이는 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데 영신이 안방 쪽으로 향한다.
“구덕이. 넌 들어와.”
덕이가 인태를 보며 어떻게 하느냔 표정을 했다. 인태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아까는 박영신이 뭐라고 하면 자기가 나서줄 것처럼 하더니 막상 그렇게 되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얄미워 눈을 흘겼다.
잔뜩 기가 죽어 영신의 뒤를 쫓아가는데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쾅 닫힌다. 몸을 홱 돌린 영신이 문을 손으로 짚은 채 사나운 얼굴로 덕이를 내려다봤다.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떨구자 곧바로 턱이 붙들려 다시 들려진다.
뭐, 뭐지, 이 박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눈을 감으면서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하. 기가 막힌다는 웃음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땐 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까만색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영신이 화 많이 났구나.”
“아니, 존나 신 났어. 봐봐, 입도 이렇게 웃고 있잖아?”
억지로 입을 올려 웃는 영신을 보며 덕이가 꼴깍 침을 삼켰다. 저승사자를 본 적은 없지만 혹시 봤다면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아까는 내가 너무 속상해서.”
“뭐가 속상한데.”
“네가 나를 정말… 돈으로만 생각하니까….”
“돈이 아니면 네가 뭔데.”
덕이가 빨간 입술을 깨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잘 모르겠어. 자신이 영신에게 돈이 아니라면 뭘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살짝 기대한 거는 있었다.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모습에 영신 또한 입을 꾹 다물었다. 예주에게 전화가 왔을 때 모른 척하려 했다. 하지만 그 애를 신경 쓰는 미자가 걸렸고, 미자를 신경 쓰는 덕이는 더 마음에 걸렸다.
뭐가 중요한지 모른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걸 생각하면 정말 모르쇠로 일관하고 싶었지만, 어째서 몸이 먼저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저번처럼 불상사가 생길까 싶어 한달음에 달려간 거였다. 가는 내내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 돈인지. 진짜 그게 다인지.
잡고 있던 어깨를 놓아주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덕이가 품으로 파고들어서는 허리를 감싸 안는다. 영신은 그 새카만 머리통을 보며 떼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
“……”
“그리고 너무 고마워. 예주 데리러 가줘서.”
평소와 달리 나직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가슴에 대고 말을 해서인지 근지럽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떼어내려고 하니 이젠 아예 얼굴까지 비벼가며 엉겨붙는다. 그러는 와중에 퀴퀴한 냄새가 나서 영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하수구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덕이의 몸이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 거라고 얼버무리더니 몸을 얼른 떼어내고 욕실로 후다닥 들어간다.
그 뒷모습에서 영신은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였다. 조금 전 덕이의 뺨이 닿았던 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셔츠는 다 구겨놓고, 쯧. 혀를 차며 툭툭 잡아당기는데 가슴 한쪽은 여전히 근지럽고 뻐근하기만 했다.
[그땐 얘기할 시간이 없을 겁니다. 꼬리가 아홉 개가 되면 당신이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생각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애초에 데리고 오지 말걸. 돈 따위 지금도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 더 욕심내지 말걸. 처음으로 제 선택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
“저리 가, 이 바보야!”
동갑내기 아이의 발길질에 덕이가 데굴데굴 굴러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넘어진 상태로 흙을 털어 내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덕이를 빙 둘러쌌다. 거기엔 덕이의 형제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덕이를 모른 척 외면했다. 그중 덩치가 제일 큰 녀석이 앞을 가로막더니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섰다.
“이 밑으로 지나가면 용서해 줄게.”
어린 덕이는 눈이 시뻘게져서 덩치 큰 아이를 노려봤다.
“난 잘못한 거 없어! 너희가 먼저 날 괴롭혔잖아.”
“흥. 반쪽 자리 여우 주제에 우리 모임에 낄 생각을 하니까 그렇지.”
“맞아.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비난과 힐난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덕이는 이를 앙다물고 그들을 노려봤다.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넘어지면서 다친 팔다리도 쓰라리고 억울한 마음이 드니 도저히 참기 힘들어졌다.
코끝이 맵더니 기어코 눈물이 고였다. 훌쩍훌쩍 소리를 내다가 울음보를 터트리니 다들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었다. 덕이가 그들을 헤치고 앞으로 뛰어 나갔다. 등 뒤에서 저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잡아! 잡아서 때려주자! 도망치는 와중에도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다. 이대로 도망쳐 어디든 갈 것이다. 여우들이 없는 곳으로.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저리 가. 쫓아오지 마. 흐흑.”
영신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의자에 앉아 잠시 무언가를 살펴보는 중이었는데 잠든 덕이가 울면서 잠꼬대를 했다. 그냥 둘까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향했다.
이불을 덮어주었는데도 흐느낌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니 곧 잠잠해진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몰라도 꽤 서러웠나 보다.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는데 이불이 들썩하더니 위로 솟아오른다. 뭔가 싶어 이불을 슬쩍 들춰보니 생각지도 못한 꼬리가 튀어나왔다. 깨어 있는 것도 아닌데 꼬리가 나오더니. 신기해서 쳐다보는데 잠시 후 하나였던 꼬리가 두셋으로 늘어난다.
입을 꾹 다문 채 바라보는데 일곱 개, 여덟 개까지 튀어나온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깨워서 다시 집어넣고 자라고 할까, 고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꼬리 하나가 더 생겨난다.
영신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 눈으로 나온 꼬리 개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아홉…! 또다시 세어봐도 분명 아홉 개다. 여덟 개밖에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덕이가 으음, 하고 몸을 뒤척인다. 영신이 재빨리 침대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끙, 하는 소리가 나더니 침대가 살짝 움직였다. 눈을 감은 채 그 소리에 집중했다.
잠시 후 ‘어?’ 하고 놀라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정적이 흐른다. 침대에서 내려가는 것 같더니 조심조심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고, 침실은 고요해졌다. 영신이 그대로 눈을 뜨고 몸을 돌려 뒤쪽을 봤다.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덕이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욕실을 보니 문틈으로 빛이 새어나온다. 분명 거울을 통해 제 꼬리가 나온 걸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게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이 지나도록 덕이는 나오지 않았다. 영신 또한 잠들지 못하고, 그 문을 뚫어지게 바라만 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벌어진다. 영신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조용조용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코앞에서 멈춘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덕이가 여기서 힘을 사용한다면 저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잠시 후 발소리가 나더니 침대가 움직였다.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뜨니 앞엔 아무도 없다. 대신 등 뒤로 바싹 붙는 온기가 느껴졌다. 허리를 팔로 감더니 얼굴을 등에 파묻고 나직하게 숨을 내쉰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동이 틀 때까지도 영신은 쉽사리 잠들지 못하였다.
눈을 뜬 덕이가 기지개를 쭈욱 펴서 몸을 늘렸다. 이불을 끌어안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했지만 밖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졸린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으로 나왔다.
“영신아아.”
아무런 대답이 없다. 다시 불렀는데 마찬가지였다. 어디 갔나 싶어 시간을 확인하는데 벌써 점심이 지났다. 예주라는 아이를 데려다 줄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살펴보니 예주도 미자도 인태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쪼르르 욕실로 가서는 문을 닫고 꼬리를 꺼냈다. 등 뒤로 흰 꼬리 아홉 개가 움직이는 걸 보고 눈으로 개수를 확인했다. 새벽에 악몽을 꾸다 일어났는데 꼬리가 아홉 개로 늘어나 있었다.
너무 놀라 비명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삼켰다. 일단은 꼬리를 집어넣고 자는 척을 했는데 혹시라도 또 잠결에 꼬리가 튀어나올까 봐 불안해서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겨우 아침 해가 뜰 때쯤에 잠들었고, 그 때문인지 평소와 다르게 늦잠을 자 버렸다.
거울에 비친 제 꼬리를 보며 심란한 얼굴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밖으로 나와 침대로 가서는 큰대자로 드러누웠다. 이대로 도망칠까. 어차피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차라리 지금이 기회일지 모른다.
여러 고민 끝에 벌떡 일어나서 안방을 빠져나왔다. 그래, 도망치자.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혹시 모르니 오이 몇 개를 챙겨가야겠다. 저번에 받은 돌배도 챙겨가고. 거실로 나와 주방에 들어갔더니 냉장고에 종이 하나가 붙어있었다.
「밥 먹어. 냉장고에 고기 있으니까 데워 먹기만 하면 돼.」
그 종이를 떼어내고 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구운 고기는 아니었지만, 양념에 재워 조리해둔 고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샐러드도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덕이가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냉장고 문을 닫고 그 위에 머리를 박았다.
[너 대신 박영신이 죽어. 그래도 좋다면 도망쳐봐. 그 버릇없는 자식 사지를 수십 갈래로 찢어서 호국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놓아둘 테니까. 네가 볼 수 있도록 말이야.]
히이잉. 신음과 한숨을 내뱉고선 쪽지를 들고 터덜터덜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그 위에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서는 눈만 끔뻑였다. 도망갈까. 말까. 갈까. 말까. 머릿속은 어지럽고 신경을 썼더니 속도 다시 메슥거리는 기분이었다. 꼬리는 다 나왔는데 이놈의 구슬은 더 클 게 남아있는 건가.
명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확인하고 나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강지훈이다. 이 망할 개잡놈. 욕이 저절로 튀어나올 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가 쪽을 내다보는데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소파 아래로 내려와 최대한 몸을 숨기고 나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덕이 씨, 잘 지냈어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전화기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다시 지훈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꼬리는? 다 나왔어요?]
덕이가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뱉었다. 아니. 짧게 대답하자 아쉬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이상하네?]
“뭐가?”
[내가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덕이 씨 꼬리가 아홉 개가 되었던데?]
저를 떠보기 위함인 걸까, 아니면 뭘 알고서 하는 소릴까. 머리만 삐죽 내밀어 다시 창밖을 살폈다. 이 인간이 저번처럼 어디서 다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아예 소파 밑으로 들어갈 기세로 몸을 움츠렸다.
근데 이상하다. 꿈이라니. 원래 여우는 꿈을 꾸지 않는다. 하지만 저는 예외였다. 그래서 어릴 적 꿈 이야기를 하면 가족들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천호가 꿈이라니. 잠시 생각하는 사이 지훈이 덕이를 부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죠? 도망가면 어떻게 한다고 했나요?]
“도망가지 않아….”
[착하네. 그래야지.]
“근데… 하나만 물어도 돼?”
[뭔데요?]
“내가 왜 필요한 거야…?”
[그건 말해주기 싫은데.]
“넌 천호잖아. 원하면 뭐든 가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대체 내가 왜 필요한 건지 궁금해서 그래.”
[꼬리가 다 생기면 말해줄게요.]
“…죽일 거야?”
[설마. 그러진 않아요. 죽이진 않고 좋은 데로 보내줘야지.]
덕이가 더는 말하지 못했다. 좋은 데? 거기가 대체 어딜까. 전에 우림이랑 일할 때 보니 사람들을 잡아다 배 타는 일을 시킨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그런 건 아닐까. 거기에서 멸치 똥을 딴다고도 했다. 배도 똥도 둘 다 싫은데.
[잘 생각해봐요. 박영신도 살고 당신도 살 수 있는 게 어떤 건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전화가 끊어졌다. 몸에 힘이 쫙 풀리는 기분이다. 소파 밑에 늘어진 채로 앉아 허공을 쳐다봤다. 도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끊어진 전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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