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7/10)

덕이가 젓가락으로 반찬들을 깨작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에도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영신이 입맛이 없느냐고 물었고, 덕이가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물잔을 손에 쥔 채 입가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넘기는데 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은 영신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묻는다.

“꼬리는? 나왔어?”

켁. 덕이가 물컵을 급하게 내려놓고 가슴을 퍽퍽 쳤다. 목에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쉴 틈 없이 기침을 해대니 앞에 앉은 영신이 티슈를 뽑아 덕이에게 다정하게 건네준다.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 이걸로 닦아.”

덕이가 그것을 받아 입가에 흐른 물을 닦으면서 슬며시 눈을 피했다. 왜 물어보는 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짓고 고마워라고 대답한 후 손으로는 내려놓은 빈 물컵을 만지작댔다. 거짓말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이번만은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처럼 초조했다.

“아직, 그렇지 뭐.”

“저런. 아쉬워라.”

영신이 식탁에 팔을 대고 손을 깍지 끼더니 지그시 바라보며 웃는다. 덕이가 입꼬리를 억지로 당기며 저도 애석하다는 얼굴로 웃고 곧바로 수저를 들었다. 억지로 밥을 떠서 입 안에 쑤셔 넣고 있는데 영신이 빈 물컵을 챙겨 정수기로 향한다.

덕이가 눈동자만 움직여 그런 영신의 동태를 살폈다. 잠시 후, 식탁 위에 물이 채워진 컵이 놓였고, 영신의 다른 쪽 손이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덕이가 수저를 입에 문 채로 멈칫했다. 톡톡, 긴 손가락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영신이 귓가에 대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많이 먹어. 그래야 꼬리도 얼른 나오지.”

귓가를 간질이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덕이가 앞니로 수저를 꾹 물고 배시시 웃었다. 고, 고마워. 그러다 문득 미자가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예주인가 하는 소녀를 위해 덕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도와달라고 했던 것 말이다. 오늘 같은 날 영신과 종일 마주하고 있는 것도 곤욕일 것 같아 머리를 쓰기로 했다.

“있잖아, 나 오늘 미자랑 인태한테 놀러 가도 돼?”

“왜.”

“집에만 있으니 너무 심심해서.”

“너 아프잖아.”

“아니야. 어제 네 동생 집에 다녀온 뒤론 밤새 속도 편안하고 괜찮았어.”

“그랬어?”

“응….”

“그럼 그렇게 하든지.”

영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 틈을 타 덕이가 물 한 컵을 꿀꺽꿀꺽 다 들이켜고 나서 주먹으로 다시 명치를 퉁퉁 두드렸다. 조금 전 먹은 음식물이 걸려 내려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왜 저러지? 혹시 뭐 눈치챈 건가? 꼬리가 생기긴 했지만, 힘이 달라지거나 한 건 아니라 모를 텐데. 불안한 얼굴로 영신이 사라진 쪽을 보는데 작은방에 들어갔던 그가 뭔가를 들고 나온다. 앞으로 오더니 그것을 내밀었다.

“손.”

쭈뼛대며 손을 내밀자 영신이 덕이의 손목에 무언가를 채운다. 작은 나무 구슬로 만든 팔찌였는데, 손목에 차는 순간 몸의 기운이 요동쳐 저도 모르게 겁에 질렸다.

“이, 이게 뭐야!”

“걱정 마. 너한텐 해 안 끼쳐. 금방 적응할 거야.”

“…뭔데?”

“악귀 막아주는 부적 같은 거.”

“그럼 미자와 인태도 못 보러 가잖아.”

“걔들은 면역력이 생겨서 괜찮아. 게다가 네 몸에 들어갈 일도 없고 말이야.”

빼지 말란 말에 덕이가 팔찌를 내려보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 기특하다는 얼굴로 덕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착하네, 말도 잘 듣고. 그러더니 다시 제자리로 가서 앉는다.

덕이가 눈을 가늘게 늘이고 그런 영신을 쳐다봤다. 박영신이 미쳤나. 갑자기 왜 이렇게 다정하지? 생각해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엄청 다정했다. 그땐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지금도 무언갈 숨기고 있다는 건가?

“왜 그렇게 쳐다봐?”

“…좋아서.”

억지로 웃으려니 볼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아 얼른 수저를 들어 밥을 떴다. 차라리 밥을 먹으면서 얼굴을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야! 구더기! 그만 좀 왔다 갔다 해. 정신없어 죽겠어.”

인태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덕이는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있질 못하였다. 명치를 두드렸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가 혼자 지랄 발광하는 모습에 인태는 드디어 덕이가 맛이 갔다며, 맛 간 여우를 어디다 쓰겠느냐고 놀려댔다.

창가에 있던 미자가 그런 덕이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덕아,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몰라서 물어? 엉덩이가 아프시겠지.”

인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자가 눈을 부라렸다. 그런 소리 하지 않기로, 서로의 사생활은 보호해주자고 약속해놓고 그런 말을 꺼내면 어떻게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미자 또한 영신의 고추가 얼마나 큰지 궁금해 죽겠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데 말이다.

“덕아. 속 시원하게 말해봐.”

“그래, 차라리 말해. 정신없게 그러지 말고.”

덕이가 갈등하며 미자와 인태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이들은 영신의 사람, 아니 귀신들이다. 괜히 말했다가 영신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계획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저번에 말실수하는 바람에 도망칠 계획까지 다 들켜버리지 않았나. 미자는 말하지 않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냥. 최근에 소화도 잘 안 되고 그래서….”

“단지 그것뿐이야?”

“어….”

“혹시라도 우리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 난 네 편이야.”

미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고, 덕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자한테까지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기분이 가라앉아 창밖을 내다보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인다. 인태 역시 덕이와 마찬가지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야. 구더기. 너 오늘은 휴대폰 챙겨왔지?”

아. 덕이가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 네 역할이 아주 커. 알고 있어?”

덕이가 미자를 쳐다보자 그녀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덕이가 그 응원에 힘입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충 듣기론 예주의 새엄마가 바람을 피우는데 그 모습을 몰래 촬영해서 남편에게 보내주라는 거였다.

그렇게 하면 예주도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신에게도 피해가 안 가니 서로 좋은 일 아니냐고 말이다. 이번엔 제대로 성공해서 미자도 기쁘게 해줘야지. 순간 쿠쿵 번개가 쳤다. 덕이가 낑 소리를 내며 소파에 납작 엎드렸다.

미자가 다가와 괜찮다고 머리를 만져주었다. 역시 미자는 착하구나. 죽기 전에 분명 훌륭한 사람이었을 거야. 순간 덕이의 머릿속에서 플래시 터지듯 섬광이 번쩍한다. 그러더니 여러 가지 장면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해바라기 꽃밭에 앉아 처연하게 울고 있는 미자. 기운 없이 걸어 다니는 미자. 배가 불러온 미자. 아이를 품에 안은 미자. 그리고 길가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없는 미자. 그런 미자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

덕이가 놀라서 미자의 손을 떼어내고 쳐다보니 그녀 또한 고개를 갸웃하며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짓는다.

“왜…?”

“어?”

“얼굴이 왜 그래? 아직도 무서워?”

덕이가 눈을 깜박였다. 조금 전 그건 뭐지. 혹시 미자가 기억 못 하는 과거인가.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샛노란 해바라기 꽃 사이에서 서럽게 우는 그녀의 얼굴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얼굴과 겹쳐진다. 갑자기 며칠 전 기억이 떠올랐다.

영신이 누군가의 무덤을 찾아가 노란 해바라기 꽃다발을 주던 모습과 공원에서 해바라기를 보며 좋아하던 미자의 모습이. 혼란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자 미자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덕아, 정신 차려.”

“구더기. 너 다 나은 거 맞아? 완전히 맛탱이가 갔는데.”

덕이가 그대로 미자의 손을 끌어와 제 머리에 다시 대봤다. 이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그건 제 착각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모습이 너무 뚜렷했다. 제가 본 미자의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덕아?”

아, 미안. 덕이가 미자의 손을 놓아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손이 시원해서….”

“바보. 난 귀신이니까 당연하지.”

“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서두르자. 어제 통화할 때 들었는데 오늘 낮에 그 여자가 불륜남 만나러 간다고 했단 말이야.”

덕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제 휴대전화를 챙겼다. 미자가 비가 많이 온다고, 비 맞는 거 싫다며 창밖을 내다봤다. 덕이는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미자의 양팔에 안겨있던 갓난아기는 어디로 갔을까.

“좋아. 그럼 우리 출동해볼까?”

인태가 앞장섰고 덕이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창밖을 내다보던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오니 마침 위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중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발을 떼려던 덕이가 멈칫했다. 강지훈이 위아래로 새카만 옷을 입고 한쪽에 기댄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덕이가 탈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인태가 마뜩잖은 얼굴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미자도 대충 눈인사를 한 후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했다. 아무리 상대가 성품이 좋은 퇴마사라고 하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같이 있는 건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덕이 씨, 오랜만이에요. 셋이 어디 가요?”

덕이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딜 가는데요?”

“몰라도 돼.”

“에이, 섭섭하다. 우리 사이에….”

미자와 인태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방금 말한 우리 사이가 대체 무슨 사이지? 둘 다 궁금해 죽겠는 얼굴로 지훈을 쳐다봤다. 하지만 지훈의 시선은 진득하니 덕이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잔뜩 긴장한 덕이 와는 달리 지훈의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졌다. 한 발 앞으로 다가가니 덕이가 흠칫 놀라서 몸이 굳는다.

“덕이 씨.”

덕이가 몸을 뒤쪽으로 빼며 물러서라고 하자 지훈이 피식 웃었다. 다른 이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한 행동에 미자의 얼굴이 슬며시 구겨졌다. 무슨 똥 매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상대방은 퇴마사 아닌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하는데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면서 미자와 인태가 먼저 내렸다.

“덕아, 가자.”

그들을 따라 내리려는 순간, 탁! 팔이 붙들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미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덕이가 놀라 고개를 홱 돌려 쳐다보는데 지훈이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꼼짝할 수 없었다.

힘을 쓰느라 얼굴이 빨개진 덕이를 보며 지훈이 입술을 움직였다.

“축하해요. 꼬리가 더 생겼네?”

***

택시 운전사가 뒤쪽을 흘깃 쳐다봤다. 가운데 앉은 남자가 아까부터 혼잣말을 중얼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자기가 미친놈을 태운 건가 싶어 긴장하며 운전대를 더 꼭 쥐었다. 뒤에 앉아 있던 덕이가 그런 운전사를 향해 앞차를 따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양쪽에 앉은 미자와 인태가 팔짱을 낀 채 앞에 달리고 있는 흰색 승용차를 노려봤다. 예주의 새엄마인 혜란의 뒤를 밟고 있었는데 꽤 먼 거리를 달렸음에도 차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이러다 우리 집에도 못 찾아가는 거 아니야?”

“어, 저기 멈춘다. 저기.”

“여기서 세워줘.”

덕이가 반말을 하자 택시 기사가 운전대를 잡은 채로 룸미러로 쳐다본다. 역시 미친놈 맞군. 택시비를 제대로 내려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주머니를 뒤적여 지폐를 꺼내더니 계산까지 마친다.

덕이가 그대로 문을 열고 택시에서 내렸다. 혜란의 승용차가 빌라 주차장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서둘러 그쪽으로 걸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니 혜란의 승용차가 보였다. 멀리서 지켜보는데 잠시 후 지하 출입구 쪽 자동문이 열리면서 남자 하나가 걸어 나온다.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혜란의 차로 간다. 덕이가 기둥 뒤로 몸을 숨기고 눈만 내놓고 쳐다봤다. 인태가 툭 치며 얼른 카메라를 꺼내라는 말에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찰칵, 찰칵, 차 앞에 도착한 남자가 보조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미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로는 택도 없겠는데.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차 썬팅도 너무 진해서 보이질 않잖아. 어떻게 하지?”

덕이가 휴대전화를 든 채로 멍한 얼굴로 차 쪽을 쳐다봤다. 옆에서 미자와 인태가 이야기했지만 아침에 있던 일로 제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꼬리가 다섯 개 생긴 것과 위층에 사는 강지훈이 단박에 그걸 알아챈 일들. 그리고 영신이 묘하게 흘리던 말들.

영신도 모르는 걸 강지훈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인태가 영신이 너무 돈만 밝히고 그래서 이제 법력을 잃어버렸다고, 퇴마보단 돈 버는 일에만 급급하니 그럴 만하다고 떠들던 게 생각났다. 정말 그래서일까.

“덕아?”

눈앞에 미자의 얼굴이 가득 찼다. 그녀가 왜 그러냐고 손을 흔들었다. 속이 또 안 좋으냐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까 봤던 미자의 모습이 생각나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야 구더기. 머리 좀 굴려봐. 지금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말이야.”

인태의 말에 덕이가 눈만 끔뻑였다. 여자가 바람피우는 증거가 필요하다는데, 여긴 너무 멀고, 차는 너무 어둡고, 도무지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대답을 기다리던 인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구박을 했다.

“네가 그러고도 여우냐. 무슨 여우가 꾀가 없어.”

“덕이 구박하지 말고 네가 좀 생각해.”

“아, 몰라. 난들 뾰족한 수가 있냐.”

“그냥 가서 확 문 열고 찍을까?”

덕이가 툭 내던진 말에 인태와 미자의 눈이 커졌다. 덕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왜? 진짜 그러자고?

“좋은 생각이다.”

“그래. 여기서 지켜만 보는 것보단 나을 거 같아.”

“아까 보니 앞유리도 썬팅이 진해서 보이지 않았어. 그러니 차라리 문을 열고 공격하자.”

“그럼 누가 하는데? 혹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자와 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 덕이 밖에 없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차까지는 따라가 주겠다는 말에 덕이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할게….”

카메라를 켠 채로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차 쪽으로 다가갔다. 멀리서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차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덕이가 그것을 보고 갸웃했다. 차 안에서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거지.

의문을 품고 인태와 미자를 쳐다봤더니 그들은 다 안다는 눈치였다.

“하나, 둘, 셋 하면 문을 열고 사진을 찍는 거다. 알았지?”

미자의 말에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믿으라며 가슴을 탁탁 두드려 보이고는 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하나, 둘, 셋! 덕이가 그대로 일어서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턱, 문이 잠겨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얼굴로 트렁크 쪽에 서 있던 미자와 인태를 쳐다봤는데 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차 움직임이 멈추고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인태가 앞으로 가서 찍으라며 소리를 질렀다. 막상 앞으로 가니 유리창이 시커메서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안이 안 보여!”

“아, 어떡해.”

안타까운 얼굴을 한 미자의 옆에서 인태가 그냥 튀라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 갈등하던 덕이가 그대로 보조석 문으로 가더니 힘을 모았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이젠 난 꼬리가 다섯 개 달린 오미호다! 으랏차! 힘을 주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시 집중해서 힘을 모으고 잡아당기는 순간 퍽, 문짝이 종잇장 찢어지듯 뜯겨 나갔다. 그 안에서는 놀란 표정의 혜란과 낯선 남자가 옷을 막 추슬러 입는 중이었다. 꺄아악- 찢어질 듯한 혜란의 비명에 덕이가 들고 있던 카메라로 찰칵, 찰칵 사진을 찍었다.

남자가 사나운 얼굴로 바지를 추스르며 차에서 내렸다. 덕이가 뒤로 물러서며 다시 찰칵 찍는 순간 한 대 칠 기세로 다가오던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덕이가 쉬지 않고 그 모습을 담는 사이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한발 물러섰다.

“됐어. 튀자!”

덕이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남자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걸 살필 여력이 없었다. 돌아서는데 보니 미자와 인태도 꽤 놀란 얼굴이었다. 차 문을 그렇게 쉽게 뜯어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그렇게 줄행랑을 치던 덕이를 붙든 건 인태였다. 그가 덕이를 잡아끌고서는 주차장 출구 제일 구석진 안쪽으로 끌고 갔다. 혹시나 남자가 쫓아올까 싶어 덕이가 불안한 얼굴로 돌아봤다.

“인태야, 얼른 도망가야 해.”

“야… 너….”

“너도 봤지? 내가 문짝 뜯어내는 거. 겁나 멋있지?”

미자가 할 말을 잃은 채 쳐다보더니 꼬리… 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덕이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언제 튀어나왔는지 꼬리 다섯 개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튀어나오는지도 몰랐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겁하며 손으로 감싸보는데,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니 쉽게 감춰질 리가 없었다.

대충 솜뭉치처럼 구겨서는 벽에 등을 대고 바싹 붙어섰다. 주차장 쪽을 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너…!”

인태가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봤고, 미자가 신기하단 얼굴로 덕이의 꼬리를 만지려고 했다. 순간 꼬리가 스르르 들어가버린다. 그 모습에 미자가 놀라운 듯 어머머, 탄성을 질렀다.

“완전 예뻐. 하나 갖고 싶다.”

“지금 감탄할 때냐. 대체 꼬리는 언제 생긴 거야? 저번엔 하나였잖아.”

덕이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영신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심했는데, 인태와 미자에게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곤란해 하자 미자가 그런 덕이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슬쩍 말을 꺼냈다.

“다행이다! 이제 구미호가 아니라 오미호네! 어깨 펴고 고향으로 갈 수 있겠어!”

그 말에 인태가 헛웃음을 흘렸다.

“미자야, 네가 아무리 기억력이 나쁘다고 해도 그렇지. 박 대표가 구더기를 팔려고 데리고 있는 건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거니?”

그 말에 미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연다.

“너랑 내가 말 안 하면 모를 거야.”

“야야. 나까지 끌어들이지 마.”

“우린 친구고 한몸이나 마찬가지라고 네 입으로 누누이 떠들었잖아.”

“그래도 그렇지. 박 대표가 알면 우릴 없앨 수도 있어.”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덕이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괜히 저 때문에 아옹다옹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질 않았다.

“일단 그 여자가 나오기 전에 이 근방을 벗어나자.”

셋이 길가를 따라 도망치듯 걷는데 잘 차려입은 아가씨 하나가 곁을 지나갔다. 무슨 일인지 덕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곁에 있던 미자와 인태가 왜 그러냐고 묻는데 대답도 하지 않고 홀린 사람처럼 그 여자를 따라간다.

“덕아, 갑자기 왜 그래?”

여자가 흘깃 뒤돌아 보더니 불쾌한 표정을 짓고서는 걸음을 서두른다. 덕이가 놀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왜. 아는 여자야?”

덕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럼 네 이상형이야?”

“아니.”

“그럼 뭔데.”

“여우야.”

“뭐?”

미자와 인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여우가 또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인간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조금 전 지나간 여자에게선 그 어떤 다른 냄새도 느껴지질 않았다. 게다가 생김새나 옷차림 또한 완벽한 인간이지 않은가.

“네가 착각하는 거야.”

“아니야. 구미호야. 근데…”

“근데?”

생각하던 덕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눈치를 보니 미자와 인태는 제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 지나친 그 여자는 분명 구미호다. 저처럼 반호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들이 사는 이곳에서 저렇게 멀쩡히 다닐 수가 있는 거지. 게다가 예전의 덕이라면 못 알아챘을 정도로 구미호라기보다 인간에 가까웠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

영신이 나무 그늘에 앉아 강아지를 바라봤다. 저번에 덕이랑 올 때 봤던 강아지였는데 오늘따라 유독 반가운 척을 하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흰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 누군가는 제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꼬리 흔들지 마. 너한테 줄 거 없어.”

그때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영신이 고개를 들자 고모인 일월 스님이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 작은 봉투 하나와 호미를 든 채 서 있었다. 밭에 갔다더니 무언가를 캐 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영신의 옆에 앉으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주인이 나타난 게 반가웠는지 녀석은 머리를 파묻으며 아양을 피우고 좋아했다.

“이렇게 애정 한 번 주면 되는걸.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지, 덕구야?”

“이름이 덕구예요?”

“왜? 누가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생각은 무슨. 영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일월이 가만히 미소 짓는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영신에게 건네준다. 영신이 받아서 확인하니 과일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앵두랑 오디, 그리고 작은 돌배 하나가 보였다. 전에 덕이가 지나가는 말로 자기가 젤 좋아하는 게 돌배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 아이에게 가져다줘. 좋아할 거야. 돌배를 더 챙겨 주려고 했더니, 아직 철이 아니라 그런지 설익었더구나.”

“필요 없어요.”

“넌 없어도, 덕이는 필요해. 원래 구슬이 생기고 꼬리가 나올 때가 되면 신 음식이 당기는 법이지. 마치 임신한 여인처럼 말이야.”

그 말에 영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가 덕이를 처음 봤을 때 놀라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혹시 그녀는 전에도 구미호를 본 적이 있는 걸까.

“혹시 말이에요, 고모.”

“응?”

“전에 본 적 있어요?”

“누굴?”

“구미호.”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열 살 무렵에 뒷산에 놀러 갔다가 상처받은 새끼 여우 한 마리를 치료해준 적이 있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여우가 어린 소년이 되어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그 애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웠다고 했다. 생각보다 많은 여우가 사람들과 어울려 몸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됐다고.

“난 그 애를 위해 매일 먹을 걸 날라줬지. 하루는 느이 할머니한테 들키는 바람에 얼마나 모질게 매를 맞았는지 몰라.”

기억을 떠올리던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생겼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영신이 물었다.

“그 여우는 어떻게 됐는데요?”

“말도 없이 사라졌어. 아마 고향으로 돌아갔겠지.”

“배은망덕한 여우네요. 기껏 다친 거 구해줬더니.”

“가족을 항상 그리워했거든. 하지만 난 한 번도 그 애를 원망한 적 없어. 만약 우리가 만나지 못했다면 난 평생 내 운명을 저주하면서 살았을 거야. 그 애 때문에 내가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감사해.”

물론 죽기 전 한번 보고 싶긴 하지만. 일월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눈가에 촉촉한 그리움이 배어 나왔다. 영신은 얼마 전 집에 가고 싶다고 제 품에 안겨 엉엉 울던 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히 짜증이 나서 발끝에 걸리는 돌을 툭 하고 걷어차 버렸다.

***

“그만 먹어. 배탈 나.”

손으로 오디를 집어 먹던 덕이가 멈칫해선 영신을 쳐다봤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와 보니 영신이 어디선가 과일을 잔뜩 따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숲의 향기가 그대로 묻어 있는 과일을 보고 덕이는 허겁지겁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영신의 시선이 덕이의 옆에 놓여 있는 돌배에 꽂히자 덕이가 그것을 집어 들고는 등 뒤로 슬며시 감췄다.

“이건 익은 다음에 먹을 거야….”

그걸 보고 영신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었다.

“야. 안 먹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배야.”

“아니, 왜에? 얼마나 맛있는데.”

그러더니 이번엔 앵두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시큼한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영신은 일월에게 과일을 받아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임신한 아내가 먹는 걸 쳐다보는 남편처럼 구는지 납득이 가질 않아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면서 시선은 덕이의 등 뒤로 향했다. 아침에 보았던 다섯 개의 꼬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영신이 빤히 쳐다보자 덕이가 고개를 돌려 제 뒤를 돌아봤다.

“뒤에 뭐 있어?”

“아니, 그냥. 오늘 뭐 했어?”

앵두를 입에 문 채로 덕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안 했다고 했더니 영신이 그러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저번처럼 또 걸려서 증거물을 빼앗길까 싶은 마음에 제 휴대전화를 미리 방에다 숨겨버렸다.

“속은? 이제 괜찮아?”

“신기하게 병원 다녀온 뒤로 안 아픈 거 있지.”

“다행이네.”

“응. 이제 고기 많이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꼬리는.”

“응?”

“나올 기미가 없어?”

덕이가 앵두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지. 라고 얼버무리며 얼른 앵두 봉지와 배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자, 자러….”

“따로 자게?”

덕이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또 토하면 네가 피곤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따로 자려고.”

“나를 배려해서?”

“그렇지.”

“그런 배려 필요 없으니까 내 방으로 들어가.”

“왜!”

“짝짓기해야 얼른 꼬리가 나올 거 아니야.”

그 말에 덕이는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더니 오늘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영신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말 말고 따라 들어와. 덕이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돌배를 내려다봤다.

짝짓기하다가 갑자기 꼬리가 나오면 어쩌나 그게 걱정됐다. 아니면 솔직하게 말할까. 당장은 아홉 개가 아니니 팔아넘기진 못할 텐데. 그랬는데 낼 아침에 아홉 개가 되면 어쩌지. 일단 미자 일은 해결해 줘야 하는데. 별별 생각을 다 하는데 갑자기 영신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영신이 전화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틈을 타 덕이가 얼른 작은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가버렸다. 문을 잠그고, 배와 앵두를 한쪽에 올려두고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차라리 자는 척을 하자. 그러면 오늘은 내버려두겠지. 아무래도 꼬리가 아직 불안정하다 보니 갑자기 튀어나오고 해서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을 감고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졸음이 몰려왔다.

일 때문에 한참 통화를 하던 영신이 거실로 나와보니 덕이가 보이질 않았다. 작은 방으로 가서 문을 잡아당기니 꿈쩍도 하질 않는다. 하. 이 자식이. 똑똑, 노크했지만 역시나다. 방에서 보조키를 찾아서 나와 문을 열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길래 설마 자나 싶었는데 들어가 보니 정말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던 영신의 얼굴이 굳어졌고, 걸음이 멈췄다. 덕이가 흰 꼬리를 품에 껴안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장실 문틈으로 얼핏 봤을 때보다 더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꼬리가 몸 위에서 같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여우가 맞긴 하군.”

가만히 지켜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이불을 끌어와 배 부분을 덮어주었다. 감겨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며 덕이가 눈을 뜨고 영신을 확인하더니 잠결에 손을 뻗었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다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가 옆에 누웠다. 덕이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와 다시 잠이 든다.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도 모르는 건가. 하긴 알면 이렇게 편하게 못 잘 테지. 아침엔 배신감에 이걸 어떻게 혼내줘야 할까 싶었는데, 지금은 저도 잠이 와서 그런지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는다.

점점 눈꺼풀이 내려앉는데 낑낑, 앓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내려 봤더니 덕이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울먹이고 있었다. 진짜 자면서 정말 별짓을 다 하네. 어쩔까 고민하다 가만히 손을 뻗어 꼬리를 살랑 만져주니 으응, 소리를 낸다. 촉감이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부드럽다. 손으로 연신 쓸어 주자 바지 앞섶에 닿은 덕이의 성기가 꼿꼿하게 발기하는 게 느껴진다.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덕이가 잠에 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더니 영신의 입술을 감쳐 물며 덤벼든다. 영신이 그대로 덕이를 받쳐 안아 제 위에 올렸다. 덕이가 허겁지겁 영신의 입술을 물고 핥아댔다. 제 몸에 꼬리가 나온 걸 모르는 눈치였다.

욕망으로 물든 얼굴 위로 흰 꼬리가 움직이는 게 보이니, 자신이 정말 구미호와 몸을 섞었구나, 비로소 실감이 났다. 영신이 정신을 놓고 있으니 덕이가 보란 듯 영신의 입술을 깨물어 뜯었다. 마치 다른 데 한눈팔지 말고 저만 쳐다보라는 듯.

바지를 내리려고 뒤쪽으로 손을 뻗던 덕이가 멈칫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영신에게서 물러섰다. 순식간에 셔츠 앞섶이 풀어 헤진 영신이 상체를 일으키며 그런 덕이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나온 꼬리에 덕이가 당황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영신아, 이거… 어, 어떻게 된 거냐면.”

가만히 쳐다보던 영신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자게.

“어?”

“자자고.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말해.”

덕이가 다가오지 않자 영신이 침대에 누워서는 팔 한쪽을 뻗는다. 가만히 지켜보던 덕이가 침대로 올라와서는 팔을 베고 누워 영신을 곁눈질로 살폈다.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자려는 모양이었다.

어두워서 꼬리를 못 봤나.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야맹증인가. 불안한 마음에 몸을 뒤척이니 영신이 덕이를 끌어와 제 품 안에 꼭 가둬놓는다. 덕이가 숨을 멈춘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 그런 영신을 봤다. 갑자기 왜 이래. 박영신 돌았니?

무엇 때문인지 꼬리를 들켰을 때보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끙, 몸을 뒤척이던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밤새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더니,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부스스 일어나 옆자리를 보니 영신이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안겨서 잠든 거 같은데, 혹시 꿈인가.

뒤를 돌아봤더니 꼬리가 나와 있다. 아무리 봐도 꿈은 아닌데. 꼬리를 다시 집어넣고 거실로 나와보니 영신이 거실에 앉아 신문을 넘겨보는 중이었다. 흠칫 놀라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 가.”

쭈뼛쭈뼛 돌아보니 영신이 신문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더니 주방 쪽으로 향했다.

“들어가지 말고 이리 와.”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따라가 봤더니 컵에다 무언가를 붓고 그걸 다시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린다. 그게 뭐냐고 물을 새도 없이 영신이 곧 컵을 꺼내서는 덕이에게 건네줬다.

“마셔.”

“뭔데?”

“네 한약.”

“어?”

영신이 눈짓으로 주방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초록색 박스가 두 개 있었다. 전에 갔던 한의원 이름도 적혀 있는 걸 보니 그때 진맥을 보고 지은 약인 듯했다. 덕이가 컵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고약한 냄새가 훅 올라온다. 얼른 떼어내고 인상을 썼더니 영신이 먹으라고 눈으로 압박한다.

“냄새가 이상해.”

“괜찮아. 코 막고 먹어.”

코를 붙들고 컵을 입으로 가져가서 기울이자 쓴맛이 확 느껴진다. 아무리 코를 막았다고 한들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덕이가 먹자마자 헛구역질을 하는 바람에 영신이 인상을 구겼다.

“못 먹겠어.”

“참고 먹어.”

“토할 뻔했어.”

영신이 싱크대 앞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혹시 사탕 같은 거라도 있나 찾아봤지만, 평소에 먹질 않으니 있을 리 만무했다. 냉장고를 열어 입가심할 만한 걸 찾는데 마땅히 눈에 띄는 게 없다. 그나마 보인 게 오이길래 그걸 꺼내 들고 말했다.

“약 먹고 이거 먹어. 그럼 되잖아.”

“안 돼. 그건 오이에 대한 모독이야.”

“그럼? 나를 모독하는 건 괜찮고?”

“내가 언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으니 영신의 입가에 비죽 미소가 걸린다. 오이를 들고 천천히 움직여 코앞까지 다가오자 덕이가 움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더 도망칠 곳이 없나 살피는데 영신이 덕이의 어깨를 잡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너,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꼬리가 생겼으면서 아닌 척 내 뒤통수를 쳐?”

“아휴. 내가 무슨… 그렇잖아도 말하려고 했어.”

“언제? 꼬리 아홉 개가 다 나오면?”

“그렇게 하면 네가 더 깜짝 놀랄 줄 알았지.”

“저런…. 아쉬워서 어쩌지. 꼬리가 다 생기고 네가 튀었으면 더 놀라서 미치고 팔짝 뛰었을 텐데, 너무 일찍 들켜버렸네?”

덕이가 뜨끔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게 아니었다고 변명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이미 영신은 다 아는 눈치였다. 아니라고 말을 얼버무릴수록 분위기만 더 어색해졌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있잖아, 영신아.”

“말해.”

“혹시 내가 너한테 훔쳐간 돈 다 갚으면… 나 보내줄 거야?”

그 말에 영신이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아니. 네가 잊은 모양인데 애초에 이 계약의 목적이 넌 꼬리에 있었고, 난 돈에 있었어. 근데 너한테는 꼬리가 생겼는데, 내 손엔 돈이 없네? 그럼 이 계약이 제대로 이뤄진 걸까?”

“아니….”

“그래. 근데 이제 와 네가 먼저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약속 어길 생각은 없었어….”

“그럼 약 먹어. 그 약이 네 꼬리가 나오는데 보탬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한약이 담긴 컵을 내려다봤다. 나중에 도망칠 생각을 하면서도 영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 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돈을 다시 찾아주고 갈 생각이었는데, 영신은 저를 팔아넘기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니 그게 조금 서운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덕이가 눈을 반짝였다. 여전히 한약이 담겨 있는 컵을 든 채로 영신에게 물었다.

“대신 이거 먹으면 키스해줘.”

뭐? 영신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웃었다. 지금 도망가네, 마네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뜬금없이 키스해달라니.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가 싶어 쳐다보니, 덕이가 안 해주면 안 먹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네가 지금 그럴 처지야?”

“어차피 팔아넘긴다며. 그럼 키스라도 실컷 받고 갈 거야.”

“이 뻔뻔한 게.”

그 말에 덕이가 버럭 성질을 냈다.

“그깟 변변찮은 정기 조금 나눠주고 나를 백억에 팔려는 너도 뻔뻔하긴 마찬가지거든!”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변변찮은 정기라니. 어딜 봐서 변변찮단 거냐고 따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일단은 참자.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 마음대로 물고 빨아봐.”

덕이가 생긋 웃더니 꿀꺽꿀꺽 약을 삼켰다. 지독한 냄새와 맛에 내장이 다 뒤틀리는 거 같았지만 기를 쓰며 참았다. 누가 그러지 않았나.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이제 쓴 걸 맛봤으니 단 열매를 먹으러 갈 차례였다.

그렇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 난 뒤에 바로 영신에게 달려들었다. 영신이 가서 입이나 헹구고 오라고 막았지만 덕이는 막무가내로 덤볐다. 갑자기 달려든 덕이 때문에 영신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쿠당, 졸지에 두 사람이 주방 바닥에 겹쳐져 누워버렸다. 그 와중에도 덕이는 영신의 몸 위에 올라가서는 입술을 포개고 문질렀다. 한약의 씁쓸한 맛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영신이 미간을 찡그렸다.

춥, 춥, 제 혀를 넣어 영신의 혀를 건드리려고 애를 쓰는데 영신이 자꾸만 뺀다. 덕이가 입술을 떼어내고는 위에서 영신을 노려봤다.

“혀 줘!”

“싫어.”

“영신이 너 되게 성의 없다?”

“알았으면 적당히 하고 떨어져.”

“제대로 해. 그래야지 나도 얼른 떨어질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영신이 몸에 힘을 빼자 덕이가 그대로 입술을 겹치면서 혀를 안으로 다시 집어넣는다. 치열을 핥고 혀뿌리부터 문지르면서 비비자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검은색 눈동자가 잠시 짙게 가라앉더니 덕이의 셔츠 안으로 손이 파고 들어갔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한 번 스윽 만져주자 움찔 잘게 떨리는 게 느껴진다.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가 가슴을 만지고 젖꼭지를 엄지 끝으로 비비고 문지르니 덕이가 으응, 콧소리를 내며 하체를 들썩인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가 울린다. 정신을 차린 영신이 입술을 떼어내고 덕이의 어깨를 붙들었다. 덕이가 신경 쓰지 말라며 영신의 뺨을 만지고 다시 입술을 포갰지만 결국 그 손은 붙들려 아래로 내려왔다.

“됐어. 이제 그만.”

영신이 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잠깐이었지만 분위기에 휩쓸릴 뻔했다. 대충 입만 맞춰주고 끝내면 되는 걸 왜 손으로 몸까지 만졌는지 모르겠다. 성기만큼이나 꼿꼿하게 서 있던 젖꼭지의 촉감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덕이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기 위해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앉아 있던 덕이가 못마땅한 얼굴로 일어섰다. 소파 앞에 서서 전화를 받는 영신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그깟 전화가 중요하냐고 투덜거렸다.

식탁에 올려둔 오이를 아삭 베어 물고는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조금 전 영신이 만졌던 젖꼭지를 슥 문질러봤다. 영신이 만졌을 때는 찌릿찌릿 전기가 오는 것 같더니 제 손으로 만지니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손을 빼고서 오이를 들고 거실 쪽으로 나가는데 통화를 하는 영신의 얼굴이 어딘가 심각하다.

“알았어. 아침 먹고 갈 테니까 거기서 보자.”

“누구야?”

“넌 몰라도 돼. 밥 먹고 나갔다 올 테니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얼굴이 꽤 심각해 보여 신경이 쓰였지만, 더 묻는다고 해서 대답해 줄 영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 더는 묻지 않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니 영신이 음식을 하기 위해 주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며 덕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한 번 더 찝쩍대볼까, 잠시 고민하다 관두고는 씻기 위해 거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고 있는데 주방에 들어갔던 영신이 휴대폰을 가지러 거실로 다시 나온다. 덕이가 이때다 싶어 엉덩이를 살짝 내밀고 흔들었지만 영신은 본 척도 않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저런 씨.”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욕실로 들어온 후 세면대 앞에 섰다. 양치를 먼저 할까 하다 영신의 입술 맛이 남아있는 것 같아 입 안은 제일 나중에 닦기로 하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물을 틀고 기를 모으자 꼬리가 생겨난다.

꼬리를 감싸 안고 뺨에 문지르고 하며 기뻐했다. 밖에선 영신한테 들킬까 봐 제대로 만져 보지도 못하니 제 몸에 달린 거라도 만날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걸 물에 충분히 적신 다음 샴푸를 손에 가득 짜서는 살살 문질러줬다.

향긋한 냄새가 나자 기분까지 좋아진다. 털을 비빌수록 거품이 생겨나더니 나중엔 욕실 바닥이 거품투성이가 됐다. 그대로 물을 트니 꼬리에 묻어있던 거품들이 씻겨 하수구로 흘러간다. 꼬리까지 모두 씻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물에 젖으니 꼬리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다 씻은 다음 젖은 꼬리를 들고 밖으로 나와 걸레 짜듯 하나씩 붙들고 비틀어 짰다. 꼬리가 생긴 건 좋은데 할 일이 전보다 많아졌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기를 대충 제거한 다음엔 수건으로 탁탁 털어줬다.

대충 마른 꼬리는 전보다 더 윤이 나고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기분 좋아진 덕이의 입술이 위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드라이기를 켜고 꼬리를 털며 말리는데 욕실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영신이 또 통화하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영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굉장히 낯익은 그 목소리에 등골이 조금 오싹해졌다. 문을 반 뼘 정도 열고 밖을 내다보던 덕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예상했던 인물이 거기에 서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덕이 씨?”

생긋 웃는 지훈의 얼굴을 보고 덕이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대체 아침부터 저 인간이 여기엔 무슨 일일까. 그때 코끝으로 이상한 향이 풍겨온다. 여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위험한 냄새다.

덕이가 영신의 뒤에 몸을 숨기고 지훈을 쳐다봤다. 그의 손에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는데 그걸 영신에게 내밀었다.

“박영신 씨 택배가 저희 택배 함에 잘못 들어있더라고요.”

영신이 그 상자를 받아들었다. 책을 한 권 시킨 게 있었는데, 그것인 듯싶었다. 어째서 이게 강지훈 택배 함에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침부터 이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전화를 주셨으면 제가 찾으러 갔을 텐데요. 번거롭게 이곳까지 가져다주셨네요.”

“겸사겸사 왔어요. 덕이 씨 꼬리가 얼마나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영신이 팔짱을 낀 채로 지훈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지나칠 정도로 덕이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무리 뒷조사해도 나오는 게 없어 김 실장에게 더 알아보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조폭이 죽던 날 행적도 알아봤는데, 그날 강지훈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증거가 될 만한 CCTV도 목격자도 있었다. 정체가 뭘까. 혹시 의뢰인이 보낸 녀석일까. 저번에 정기 어쩌고 한 것도 그렇고, 만약 실패할 경우 내 대타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다.

“이제 전해주셨으니 가시면 되겠네요.”

“이런. 너무하네요. 전 차까지 내드렸는데요.”

덕이가 뒤에서 영신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얼른 보내라는 신호였지만, 영신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강지훈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고, 그러려면 증거가 될 만한 게 필요했다.

“그럼 소파에 앉아 계세요. 제가 차를 내드리죠.”

“영신아.”

“감사합니다. 덕이 씨도 앉아요. 며칠 못 봤더니 보고 싶었잖아요.”

능글거리며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덕이가 눈을 위로 쭈욱 찢었다. 그대로 영신의 뒤를 쫓아가려다 말고 지훈의 근처에서 머물며 눈으로 그를 탐색했다. 분명 냄새가 바뀌었다. 아니, 바뀐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런 냄새였는데 감추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위험한 냄새와 익숙한 냄새가 뒤섞여서 머리가 아찔하다. 덕이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근처에서 맴돌자 지훈이 입가를 씩 올리며 웃는다.

“왜요? 나한테서 냄새나요? 씻고 왔는데.”

덕이가 흠칫 놀라서 뒤로 한발 물러섰다. 웃고 있는 얼굴에서 뭔가 모르게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도망치듯 주방 쪽으로 가서 영신의 등 뒤로 바싹 붙어섰다. 흘깃 뒤를 돌아봤더니 지훈이 집 안을 탐색하듯 살피는 게 보였다. 혹시나 거기까지 들릴까 싶어 목소리를 낮췄다.

“영신아…. 쟤 얼른 보내자.”

“왜.”

“냄새가 이상해.”

“무슨 냄새.”

“고약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그 말에 영신이 웃는다. 아까 먹은 한약만큼이나 고약하냐고 묻자 덕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농담이 아니라고 정말 싫으니 얼른 내보내자고 하자 영신이 흘깃 덕이를 쳐다본다.

“전엔 괜찮은 사람이라며?”

“그건 그때고.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나… 쟤 무서워.”

비로소 영신이 덕이의 눈을 제대로 쳐다봤다. 까만 눈동자는 진심으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지훈이 소파에 앉은 채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를 외면하고 나서 다시 덕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서 앉아 있어. 네가 이러는 게 더 무서우니까.”

덕이가 입을 삐죽이며 눈을 흘기고는 거실 쪽으로 다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지훈의 주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니 지훈이 웃으며 돌아본다.

“이제 4개 남았나요?”

“너랑 상관없잖아.”

“내가 도와준다고 할 때 말 듣지. 그랬으면 지금쯤 아홉 개가 다 나왔을 텐데 말이에요.”

“됐어.”

“하여튼 고집은. 그만 살피고 앉아요.”

그러다 지훈의 시선이 덕이가 찬 팔찌에 닿았다.

“그건 박영신 씨가 준 건가요?”

덕이가 제 손을 뒤로 감췄다. 혹시나 귀신이 저에게 해를 끼칠까 싶어 영신이 팔에 채워준 거였는데, 아까부터 지훈이 이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몰라도 돼.”

“덕이 씨는 자신을 너무 모르네요. 그런 거 필요 없을 텐데?”

싱긋 웃는 지훈을 보고 무슨 말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영신이 차를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지훈의 앞에 놓아주고는 다시 주방 쪽으로 사라진다. 지훈이 흰색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다 멈칫했다.

마침 주방으로 들어갔던 영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오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고, 지훈이 한쪽 입가를 삐뚜름하게 올리더니 곧 태연하게 차를 마신다.

“차 맛이 좋네요. 먹다가 죽어도 모를 만큼?”

“다행입니다.”

“하지만 제 취향이 아니라서, 아쉽네요.”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한참을 눌러있을 것 같더니 예상보다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차 잘 마셨습니다.”

차를 잘 마셨다고 했지만, 살짝 입만 댔을 뿐 거의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영신이 그랬던 것처럼, 애초에 차가 목적이 아닌 듯 인사를 한 그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영신이 그를 마중 나가는 사이 덕이가 그가 내려놓은 찻잔을 가만히 살폈다. 입도 안 댔네. 그걸 쳐다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영신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컵에 손대지 마.”

영신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봤더니 라텍스 장갑과 봉투였다. 그 장갑을 끼고서 지훈이 마시고 간 컵 아래쪽을 잡더니 고대로 싱크대로 들고 가 차를 쏟아 버린 다음 컵만 봉투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 봉투 입구를 꼼꼼하게 봉해 버렸다.

덕이가 그걸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하는 거야?”

“확인.”

“어떤 확인?”

“뭐 하는 놈인지.”

영신은 컵이 담긴 봉투를 챙기고 나서 장갑을 벗은 후 손을 닦기 위해 거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슬리퍼를 갈아신고 보니 샤워 부스 안이 난장판이다. 미처 흘러내려 가지 못한 거품이 유리며 바닥에 튄 것도 모자라 세면대 앞까지 흘러왔다.

“이 자식이 진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한숨을 내쉬는데 한쪽에 올려둔 샴푸 통이 보인다. 그걸 짜서 꼬리를 씻은 모양인데,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욕실이 엉망이었다. 이건 여우가 아니라 진짜 애를 키우는 기분이네.

바닥에 뿌려진 거품을 샤워기로 닦아냈다. 어차피 청소야 일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할 테지만, 그 전에 덕이가 거품을 밟고 자빠지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어쨌든 이백억짜리 구미호 아닌가. 절대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대충 치운 후 욕실 부스 밖으로 나오는데 눈에 무언가 들어온다. 흰 털 뭉치였다. 여기저기 흔적을 많이도 남겨놨군. 그걸 치우려던 영신이 잠시 행동을 멈춘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 무슨 생각에선지 주머니에서 남은 비닐을 꺼내 털 뭉치를 그 안에 담았다.

***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덕이가 예주의 집 앞에서 기웃거렸다. 옆에는 미자와 인태도 있었다.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덕이가 모자 아래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는 우편함 근처로 다가가서 우편물을 살폈다. 혹시나 예주의 아버지에게서 온 게 있나 싶어서였다.

“있어?”

미자의 물음에 덕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다는 말에 미자가 가까이 와서는 우편물을 하나씩 눈으로 검사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건 은행에서 온 거고. 그때 뒤에 서 있던 인태가 야. 하고 두 사람을 불렀다. 미자가 손을 내저었다.

“인태야, 잠깐만 기다려.”

“그게 아니라… 뒤 좀 돌아봐.”

당황한 듯한 인태의 목소리에 미자가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왔는지 예주가 책가방을 메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학교에서 끝날 시간이 아닌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 툭, 우편물을 뒤적이는 덕이를 건드렸더니 그가 고개를 돌리다 예주를 발견한다. 미자처럼 처음엔 놀라더니 곧 태연한 얼굴로 한쪽 손을 흔들었다.

“안녕?”

“누구세요?”

“미안. 우리 집인 줄 알았어. 갈 거야.”

그 말에 예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차림이 딱 봐도 수상한데, 자기 집인 줄 알았다니.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자 덕이가 눈만 끔벅였다. 왜 저래? 지금 무서워서 저러는 건가.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너 도와주러 온,”

예주는 듣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 모습에 미자가 한숨을 내쉬며 덕이를 재촉했다.

“얼른 가자. 쟤 경찰에 전화하려는 모양이야.”

경찰이란 말에 덕이가 화들짝 놀라 예주의 앞으로 다가갔다. 야. 잠깐만! 예주가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넘어졌고, 덕이가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는 예주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저, 저리 가!”

“덕아, 그만 가자. 걔가 무서워하잖아.”

“하지만 그걸 얘네 아빠한테 보내야 한다며.”

“바보야. 지금 겁먹었는데 걔가 말하겠냐. 괜히 경찰까지 불러서 일 키우지 말고 빨리 와.”

덕이가 뒤를 돌아보며 혼잣말을 하는 거 보고 예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둑놈인 줄 알았는데 미친놈인가.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무기가 될 만한 걸 찾는데, 잠시 고민하던 덕이가 주머니를 뒤적여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낸다.

예주의 눈이 잠시 그 휴대전화에 머물렀다. 곧 덕이가 사진을 하나 띄워 예주에게 보여줬다. 예주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사진 속에는 자신의 새엄마인 혜란과 웬 남자가 있었는데 딱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예주가 사진에서 눈을 떼고 덕이를 쳐다봤다. 아까는 겁에 질려서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하얀 피부에 눈 코 입이 그려 넣은 것처럼 곱상하게 생긴 사내였다. 잠시 그 얼굴에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물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야! 아저씨라니. 나 아직 여든아홉밖에… 아, 됐어. 하여튼 아저씨라고 하면 너 안 도와준다.”

“날 도와요?”

“그래. 내가 널 도와줄게. 아니, 나랑 내 친구들이.”

덕이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친구들이라고 손짓했지만 예주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지켜보던 인태가 글렀다며 머리를 저었고, 미자가 이마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차에 탄 영신이 신호등을 건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많은 구미호가 제 정체를 숨기고 산다는 일월의 말이 떠올랐다. 저들 중 구미호가 있을까. 구덕이 꼬리가 나오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다른 구미호를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신호가 바뀌었고, 곧 생각을 정리하고 차를 몰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한적한 곳에 있는 카페가 보였다. 그 앞에다 차를 세우고 내려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영신을 반겼다.

“오랜만에 오시네요.”

“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방이 나왔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문을 여니 김 실장이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방은 빛 한점 들어오지 않게 모든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그가 영신이 온 걸 발견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오셨어요.”

“마저 통화하지.”

“중요한 거 아니었어요.”

“누군데.”

“유혜란 씨 말입니다. 그 여학생 의뢰했던.”

영신이 잠시 멈칫했다. 미자가 말했던 그 건이구나. 요즘 잠잠하길래, 다른 팀을 꾸려서 보내라고 했는데, 사사건건 미자가 훼방을 놓은 바람에 시일이 미뤄졌고, 그쪽에서도 애가 타는지 자꾸 연락해온다는 거였다.

“그때 얼마 받았지?”

“다섯 장이요.”

“돌려줘.”

영신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던 김 실장이 멈칫했다.

“진심이세요?”

“위약금 얹어서 줘. 뒷말 나오지 않게 하고, 여차하면 협박해서 떼어내든가.”

영신이 저렇게까지 나오는 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김 실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나이는 좀 가려가면서 받아.”

“네. 주의할게요.”

어떤 의뢰가 들어오든 생전 신경 쓰는 법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곧 직원이 노크하고 들어와 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가게 주인이 직접 키우고 손질해 찻잎을 우려냈는데, 거리가 좀 멀어서 그렇지 한적하고 차 맛도 향도 일품이었다.

영신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사이 김 실장이 옆쪽에 놔두었던 누런 서류 봉투를 영신의 테이블 쪽으로 건넸다. 영신은 찻잔을 내려놓고 대신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쪽으로 손을 넣어 내용물을 꺼내니 투명 파일에 들어간 여러 장의 서류였다. 대부분 경찰에서 빼돌린 자료였다.

“김우림은 일주일 전 사망했습니다. 지내던 오피스텔에서 불이 났다는데 신원은 확인이 어려울 만큼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같이 있던 사내들도 불에 탄 채 발견됐고요.”

“돈은.”

“유흥비로 다 탕진한 것 같습니다. 전날도 카지노에서 조폭들이랑 시비가 붙었는데, 경찰 쪽에선 그들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흐음. 영신이 서류를 하나씩 넘겼다. 불에 탄 사체는 생전에 사람이었다고 보기 힘들 만큼 망가져 있었다. 구덕이가 그렇게 애타게 찾더니, 결국 시신으로 돌아왔군. 영신이 서류를 다시 집어넣고는 손가락으로 톡, 톡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뭐가 말씀입니까.”

“왜 자꾸 주변에서 사람이 죽어 나갈까.”

그 말에 김 실장이 가볍게 웃었다.

“하루에 죽는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알지. 근데 말이야, 왜 이렇게 찝찝한지 모르겠어. 꼭 누가 일부러 죽이는 것처럼.”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검사는?”

“최대한 서둘러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삼일이면 나온다니 너무 염려 마세요.”

“믿고 맡길 수 있는 데야?”

“네. 저한테는 친형이나 마찬가지고,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 했으니까 뒤탈은 없을 겁니다.”

“그럼 됐어.”

“근데 하나는 누굽니까?”

“뭘?”

“구덕이 씨 말고 다른 하나는 누군지 궁금해서요.”

“있어. 어떤 재수 없는 새끼.”

재수 없는 새끼란 말에 김 실장이 저도 모르게 영신을 쳐다봤다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영신이 못마땅한 얼굴로 왜 쳐다봤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다. 영신이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했다가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차의 빛깔이 연한 노랑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걸 보는데 며칠 전 구덕이가 환장을 하고 좋아하던 돌배 생각이 왜 났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가보니 먹지도 않고 방에 모셔뒀던데, 그러다 썩으면 표정이 볼만하겠군.

“왜 웃으십니까?”

“뭐?”

“지금 웃으셔서요.”

영신이 정색하며 언제 웃었느냐고 따졌다. 김 실장이 금방 웃었지 않았냐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어쩐지 영신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물론 본인한테 말했다간 길길이 날뛸 테지만 말이다.

***

한낮이라 그런지 한강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예주가 음료가 든 컵을 만지작대며 덕이를 쳐다봤다. 그는 홍시가 든 음료를 마시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새엄마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신고를 할까, 예주가 잠시 고민하는 틈에 덕이가 음료를 끝까지 다 빨아 먹고 나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옆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자와 인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여기 왜 왔는지 잊어버린 듯하였다.

“덕아. 얼른 본론을 말해.”

미자의 재촉에 덕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가 빈 옆자리를 쳐다봤다가 다시 덕이를 봤다. 진짜 저기에 뭐라도 있는 건가. 최근엔 보이지 않았지만 저도 귀신을 본 적이 있기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진짜… 귀신 보세요?”

목소리를 낮춰 물으니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기에 둘 있어. 미자랑 인태.”

“미자랑 인태요?”

“미자는 되게 예쁘게 생겼고, 인태는… 음… 그냥 귀신같이 생겼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태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고, 미자는 깔깔대고 웃었다. 예주가 흘긋 옆자리를 보더니 팔을 슥 문지른다. 미자가 웃음을 멈추고 그런 예주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태가 그런 미자를 불렀다.

“미자야, 어디 가?”

“멀리 떨어져 있자. 애가 무서워하잖아.”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미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해바라기밭으로 걸어갔다. 인태가 마지못해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전동 보드를 타며 노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 또래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인태가 다시 미자 쪽으로 움직였다.

“가서 구더기 감시하자. 이상한 말 할지도 모르잖아.”

“잘할 거야. 덕이를 믿어보자….”

“믿을 놈이 그렇게 없어?”

그 말에 미자가 웃더니 해바라기 꽃에 코를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아무런 냄새가 느껴지질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잃어버린 기억 중 어딘가에 그 해답이 있을 텐데 말이다.

“꽃이 좋아?”

“예쁘잖아.”

“네가 더 예뻐.”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뱉은 인태의 말에 미자가 슬며시 웃으며 진짜냐고 물었다. 인태가 머쓱한 얼굴로 진짜겠냐고,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꽃 앞에 서서 구경을 하다 돌아보니 덕이가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예주는 아직도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 거 같은데?”

“거봐. 잘할 거라고 했잖아. 덕이도 얼른 나머지 꼬리가 나와야 할 텐데.”

“나오면 뭐해. 어차피 팔려갈 몸인걸.”

미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인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뢰인이 얼마 준다고 했대?”

“난들 아냐. 근데, 영신이가 자기 몸까지 바쳐서 꼬리 나오게 애쓰는 거 보면 한두 푼은 아닐 테지.”

그 말에 미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덕이를 바라볼 뿐.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 그쪽으로 스르르 다가가는데, 저 멀리 승용차 한 대와 봉고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게 보인다.

이 시간에 저런 차가 올 일이 있나. 짙은 썬팅이 된 차를 보며 인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는데 차가 점점 덕이와 예주 쪽으로 다가온다. 먼저 불안함을 느낀 미자가 덕이를 불렀다.

“덕아!”

덕이가 돌아보는 순간 검은 봉고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더니 장정 여럿이 우르르 나왔다. 뒤따라온 승용차 안에 탄 사람은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미자는 그게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혜란이다.

“야, 미자야! 저거 그 여자지?”

“나도 봤어.”

“야! 구더기! 도망쳐!”

덕이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미자와 인태를 쳐다봤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우르르 몰려오는 사내들을 확인했다. 예주가 불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덕이를 쳐다봤다.

“저 사람들 뭐예요?”

“나는 모르지. 너 아는 사람들이야?”

덕이의 물음에 예주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황급하게 다가온 인태와 미자가 도망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도망쳐, 덕아!”

하지만 도망갈 틈도 없이 사내 하나가 달려들어 덕이를 붙들었다. 꺄아악, 험악한 행동에 예주가 비명을 질렀고, 곧 다른 사내가 그런 예주의 뒷덜미를 붙들어 차 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곧바로 미자가 눈에 살기를 띄고 그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낮이면 밤보다 힘이 약해지는 탓도 있었다.

“놔! 이것들아! 놓으라고, 이 등신들아!”

덕이가 몸부림을 치며 발악을 하자 사내가 휘청였고, 곧 다른 사내 둘이 덕이를 에워싸고 차 쪽으로 끌고 간다. 순간 덕이의 주머니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휴대폰을 가져가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덕이가 아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순간 사내 셋이 용수철처럼 튕겨 덕이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덕이가 씩씩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들을 노려봤다. 눈빛이 빨갛게 타올랐고, 등 뒤로 꼬리 일곱 개가 흔들렸다. 미자와 인태가 놀라 쳐다보는데 넘어진 사내들도 기겁하긴 마찬가지였다.

곧 사내들의 사지가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두둑, 두둑, 관절이 꺾이며 그들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질렀다. 흰자위는 터질 것처럼 충혈됐고, 입에선 허연 게거품을 토해냈다. 예주가 놀라 입을 틀어막았고, 그녀를 붙들고 있던 사내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던 미자가 소리를 지르며 덕이를 말렸다.

“덕아, 그만해!”

저 멀리 도로에 있던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이쪽을 쳐다봤다. 몇몇 사람이 휴대폰을 꺼내 드는 모습에 미자가 덕이에게 달려가 그대로 끌어안았다. 인태도 뛰어가서 덕이의 뒤에 섰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 미자와 인태가 보일 리 없었다. 미자가 끌어안고 다독이자 숨을 빠르게 몰아쉬던 덕이가 차츰 진정을 되찾아갔다. 곧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당황하던 인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씨발, 좆됐다.”

***

“아, 그만 좀 울어!”

인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미자가 확 째려본다. 인태가 움찔해서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무작정 도망치긴 했는데, 덕이가 집이 아닌, 전에 꼬마 귀신을 만났던 그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폐허가 된 그곳엔 아직도 김상철의 영혼이 떠돌고 있었다.

찝찝한 마음이 들어 재빨리 피하긴 했지만, 오래 머물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덕이는 아까부터 주저앉아 엉엉 울 뿐,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미자가 그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줬다.

“울지마, 덕아. 네 잘못이 아니야.”

“흐윽, 죽었으면 어떡하지? 아까 보니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거 같았는데.”

“사람은 그 정도로 죽지 않아.”

미자의 위로에도 덕이는 울음을 멈추질 않았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휴대폰을 뺏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사람들이 날아갔다고. 사지가 비틀려서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냥 혼만 내주려고 했다면서 다시 엉엉 운다.

“난 살인자가 되긴 싫어…. 흐윽….”

“정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알아봐 줄게. 죽었나 안 죽었나.”

“정말?”

“그래. 그러니 돌아가자. 응?”

돌아가잔 말에 덕이는 다리를 웅크려 모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드르륵, 드르륵,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아까부터 울리는 중이었다. 영신이 건 전화였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봐봐, 영신이도 너 걱정하잖아.”

“영신이는 나 걱정 안 해. 걔가 원하는 건 꼬리뿐이야.”

“그렇지 않아. 너 만나고부터 영신이가 얼마나 달라졌는데. 그렇지, 인태야?”

“무슨 소리야, 똑같은데.”

저 새끼가. 미자가 슥 노려보자 인태가 바로 깨갱 꼬리를 내렸다. 조금 달라진 것도 같다고 얼버무렸지만 덕이는 아니라며 눈물만 글썽였다. 미자가 뺨에 묻은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는데 덕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고 싶어….”

“어?”

“집에 가고 싶어….”

“그래, 잘 생각했어. 일어나서 얼른 가자.”

“아니… 거기 말고. 내 집….”

“내 집?”

미자가 인태를 쳐다봤다. 놀라긴 인태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도망치고 싶어 하는 줄은 알았지만, 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괴롭힘당하고 차별받던 삶이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집이 그립긴 한가 보네. 괜히 딱한 마음이 들어 미자가 덕이를 토닥여줬다.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덕이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제 등을 토닥토닥 다독이는 미자의 손길이 마치 엄마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 죽은 엄마의 얼굴이 이젠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데,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서럽고 억울한 마음이 드니 가까스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

영신이 휴대전화를 노려보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수십 통이 넘게 해댔지만, 덕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튄 건 아닐까. 하지만 녀석의 성격상 꼬리가 다 나올 때까지 절대 도망치진 않을 것이다. 근데 그 사이 꼬리가 더 나왔으면 어쩌지?

“젠장, 설마 아니겠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소파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소파 앞 테이블엔 오는 길에 고모인 일월에게 들러 얻어온 돌배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여전히 익지 않고 시큼해서 당장은 먹을 수도 없는데 저걸 가지러 왜 거기까지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돌배를 가만히 쳐다보던 영신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곤이 몰려오니 눈알이 뻑뻑했다. 최근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어떻게든 빠진 퍼즐 조각을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단서가 될 만한 건 나오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좀 더 확실해지려나.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린다. 얼른 허리를 바로 세우고 나서 확인하니 김 실장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지금 뉴스 나오는데,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핏 듣기에도 김 실장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영신이 팔을 뻗어 옆에 놓아둔 리모컨을 집어 들고 전원을 켰다. 채널을 돌리던 그의 손동작이 멈칫했다. ‘보셨습니까?’ 라고 묻는 김 실장의 물음에 대답 대신 티브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낮 조폭들이 한강 공원에서 다퉜다는 내용이었는데, 목격한 시민의 인터뷰가 나오자 영신은 들고 있던 리모컨을 떨어트릴 뻔했다.

[한 사람은 꼬리를 달고 있었어요.]

[꼬리요?]

[네, 흰색 꼬리가 여러 개 있더라고요. 허리에 찬 건지 아니면 옷에 꿰맨 것인지 모르겠는데, 모양은 분명 꼬리였어요.]

곧 차량 블랙박스에 찍혀 모자이크 처리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누가 봐도 덕이였다. 영신이 그대로 숨을 멈췄다. 눈가는 경련이 이는 것처럼 일그러졌고 휴대폰을 쥔 손엔 힘이 들어갔다.

[경찰에서 찾고 난리가 났나 봅니다.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일단, 끊어.”

전화를 끊고 나니 손끝이 저렸다. 종일 속이 뒤숭숭하고 불안하더라니, 아주 대형 사고를 쳤군. 다시 덕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한참 신호가 가도 받질 않는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꼬리가 생겨 도망갔을까 봐 머리가 아팠다면 지금은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씨발. 받아라, 좀.”

영신이 휴대전화를 소파에 내동댕이쳤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나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문득 덕이에게 준 구미호 인형이 떠오른다. 최근엔 들고 다니는 걸 못 봤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안방 쪽으로 향했다.

***

밤이 깊어지자 폐허가 된 동네에는 귀신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다. 그중엔 김상철도 있었는데 그는 죽어서도 저보다 약한 귀신들을 괴롭혔다. 그때 모여 있던 귀신들이 삼삼오오 흩어졌다. 저 멀리 시커먼 형태의 무언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문 밖으로 나왔던 미자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안쪽으로 다급하게 들어갔다. 덕이는 울다가 지쳤는지 쭈그린 채 잠들어 있었다. 급하게 들어온 미자를 보고 인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저번에 봤던 그놈이야. 덕이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 같아.”

“뭐?”

“덕아, 일어나. 얼른 가자. 일어나봐.”

“야, 구더기 일어나! 뒈지기 싫으면 눈 떠!”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부스스 떴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데 미자가 그런 덕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결에 마지못해 일어서는데 얼굴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덕아, 얼른 가자. 위험해.”

“…왜?”

“저번에 봤던 악귀 놈이 나타났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

덕이가 놀라 미자를 쳐다봤다가 제 손목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어? 영신이 채워준 팔찌가 없다.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낮에 공원에서 깡패들과 실랑이를 버릴 때 끊어진 걸까. 잘 차고 있으라고,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뭐 찾아?”

“팔찌. 영신이가 준 거.”

“일단 도망가자. 놈이 독이 오른 게 여기까지 느껴져. 그러니 피해야 해.”

덕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유리문 밖으로 슥,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미자가 덕이의 앞을 가로막자 인태가 그런 미자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야, 미자. 너는 튀어. 내가 저 녀석을 막아볼게.”

“인태야….”

“됐어. 감동하지 마.”

“그게 아니라, 비켜. 너 나보다 싸움 못 하잖아.”

“…….”

그림자가 가까워지더니 유리로 된 문이 드르륵 열린다. 미자와 인태가 싸우는 자세를 취하는데 열리는 문틈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나타난다. 영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단정하던 머리도 옷차림도 다 헝클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었다. 미자와 인태가 그런 영신이 반가워서 달려들었지만, 영신은 둘을 뿌리치고 덕이에게 향했다. 뻘쭘해진 인태와 미자가 쩝, 입맛을 다시는 사이 그가 겁에 질린 덕이의 뒷덜미를 잡더니 무지막지하게 끌고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영신아.”

“야, 박 대표. 우리 말 좀 들어봐.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둘 다 입 다물어.”

영신이 덕이를 붙든 채로 눈을 사납게 번뜩였다. 더 변명하려던 미자와 인태가 동시에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영신에게 붙들린 덕이가 풀이 팍 죽어선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영신이 그대로 덕이를 붙들고 밖으로 나오다 멈칫한다.

뒤따라 나오던 미자와 인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동네 귀신은 다 모여든 듯했다. 그들이 집을 겹겹이 에워싸고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 영신이 이를 까득 물며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무리 저라도 법력을 이용해 싸우는 건 한계가 있었다.

이럴 줄 알고 부적을 챙겨오긴 했는데,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노란색 부적 한 장을 꺼내자 화르륵 그 위에 저절로 파란 불이 붙는다. 그걸 본 귀신들이 뒤로 흠칫 물러섰다. 웅성거리는 그들 사이로 시커먼 덩어리가 하나 나타났다.

영신이 그것을 매섭게 노려봤다. 모습을 감췄길래 포기했나 했더니 역시나 구덕이 뒤를 쫓고 있었군. 여기서 가진 부적을 모두 써버리고 법력까지 사용한다면 녀석들을 모조리 태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미자와 인태도 무사하지 못한다. 잠시 고민하던 영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자, 인태.”

“어?”

“너희는 지금부터 앞만 보고 걸어.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차까지 가는 거야. 알았어?”

“그럼 너는?”

“알아서 갈 테니, 너희는….”

“너희는?”

영신이 아무런 말이 없자 인태와 미자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너희는 구덕이를 지켜라, 이건가?”

“설마. 지금 열 받은 거 안 보여? 끌고 가서 죽여버리라고 하는 거면 또 몰라.”

“아니야. 지키라고 말하려는 거 같아. 그렇지, 영신아?”

“아닐걸. 그렇지, 박 대표?”

영신이 그만하고 가라고 손짓을 하자 그제야 인태와 미자가 겁먹은 덕이를 챙겨 마당을 가로지른다. 에워싸고 있던 귀신들이 좌우로 흩어졌고, 악귀도 영신 때문인지 선뜻 덤벼들지 못했다. 집을 빠져나와 골목길을 내려가는 내내 그들은 뒤를 바싹 쫓아왔다.

차를 세워둔 아래까지 다다르자 미자와 인태가 덕이를 차에 밀어 넣고 저들도 올라탔다. 영신이 차를 등지고 서서 품 안에서 남은 부적들을 다 꺼냈다. 순식간에 부적에 불이 붙었고, 귀신들이 도망칠 틈도 없이 영신이 그것을 공중에 뿌렸다. 곧 부적이 활처럼 날아가 귀신들에게 들러붙었다.

몰려 있던 귀신들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며 우왕좌왕했다. 몇몇 귀신들은 몸이 타오르며 소멸했고, 그 모습을 본 나머지 귀신들은 겁을 먹고 달아났다. 영신이 그 틈을 타 운전석으로 뛰어가서는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자동차 굉음과 함께 동네에서 멀어지니 귀신들도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도를 높이던 영신의 눈빛이 순간 어두운 빛을 내며 반짝였다. 룸미러에 비친 뒷좌석 유리창에 검게 그을린 악귀가 매달린 채 시뻘건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영신이 나설 틈도 없이 놈이 팔을 뻗어 뒷유리창 안으로 손을 넣더니 그대로 덕이의 목을 졸랐다. 컥, 덕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하얗게 까뒤집었고, 미자와 인태가 놀라서 그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영신이 급하게 차를 멈추고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끄으으아아아- 악귀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눈앞에서 파사삭, 잿가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법력을 사용하려던 영신이 놀라 얼굴을 굳혔다. 미자와 인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덕이가 숨을 토해내며 조금 전 졸렸던 목을 붙들고 울상을 했다.

“씨이, 놀래라. 갑자기 목을 조르고…. 영신아… 왜 그렇게 쳐다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영신을 보며 덕이가 물었다. 영신은 입을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미자는 입을 틀어막았고, 인태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왜 그래?”

“덕아… 네 꼬리….”

“꼬리?”

“여덟 개가 됐어.”

***

석현이 지친 얼굴로 서서 영신을 쳐다봤다. 한밤중에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초음파를 볼 수 있게 준비를 해달라는 거였다. 거절했다간 후원금으로 또 협박할 것 같아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오자마자 덕이는 익숙한 듯 저번 그 자리에 누워서 배를 걷었다. 하지만 표정이 울상인 데다 살짝 넋이 나간 것처럼 보여 석현은 영신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왜 저래?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얼른 검사나 해.”

찌익. 튜브에서 젤을 짜 배에 바르는데도 덕이는 멍한 얼굴로 허공만 쳐다봤다. 불빛에 눈이 시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자꾸만 눈이 시큰거렸다. 팔등을 눈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초음파 기계가 배에 문질러진다. 잠시 후 어? 하고 놀라는 석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덕이가 팔을 떼어내고 나서 석현을 바라봤다.

“어째서 이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덕이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곁에 있던 영신은 어느 정도 짐작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배꼽 주위에 있던 흰색 동그라미는 이제 명치까지 올라와 있었다. 전보다 모양과 크기가 더 또렷했고, 금방이라도 화면을 뚫고 밖으로 나올 것처럼 흔들리는 게 보였다.

덕이가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진짜 구슬이 생긴 건가.

“대체 이게 뭐야?”

석현이 자세히 보기 위해 그 부위를 유심히 살피는데 순간 영신이 초음파 기계를 낚아채고 올라가 있던 덕이의 셔츠를 아래로 내린다.

“됐어. 봤으니 이제 갈게.”

“잠깐, 잠깐만. 뭔지 확인 안 해?”

“안 해도 돼.”

“아니, 그래도 일단 확인은….”

“무슨 수로 확인하게? 배라도 가를 거야?”

배를 가른다는 말에 멍하니 있던 덕이가 움찔했다. 덕이가 신발을 제대로 신을 새도 없이 영신이 그만 간다며 잡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낑, 끼잉, 안에 있던 개와 고양이들이 꼬리를 낮추고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전에 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다. 석현이 당황해서 동물들을 달래는 사이 영신이 덕이를 데리고 나와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는 내내 석현의 연락이 왔지만, 영신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덕이는 어쩐 일인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꺼내질 않았다.

[인터넷 뉴스부터 시작해, 동영상 등 모든 게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경찰 쪽도 이상할 만큼 잠잠해졌고요.]

“유혜란은?”

[경찰이 오기 전 그 자리에서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현재 자택에 머무는 중입니다.]

“괜히 일벌이기 전에 수습해. 나머진 아침에 얘기하지.”

영신이 전화를 끊고 나서 거실로 나왔더니 덕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를 갔나 싶어 둘러보는데 화장실에서 우엑, 하고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신이 인상을 구겼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또 시작됐군.

잠시 후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덕이가 핼쑥해진 얼굴로 기어 나왔다. 눈이 퀭해져서는 소파까지 비척비척 걸어와 철퍼덕 대자로 누워버렸다. 영신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데 덕이가 슬쩍 눈치를 살피면서 시선을 피해버린다.

“일어나. 얘기 좀 하자.”

“......”

“쉬지 않고 종알거리더니, 왜 아까부터 입이 붙었어?”

“…속이 안 좋아. 죽을 거 같아.”

“토했다고 죽진 않아.”

진짠데. 힘들어 죽겠는데. 덕이가 마지못해 일어나서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옆으로 축 늘어트렸다. 영신이 의자 하나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차에서 잠깐 꼬리가 나왔을 때는 엄청난 살기가 느껴져서 어지간한 일을 겪은 영신이라 할지라도 머리털이 삐죽 솟아올랐었다. 지금도 꼬리는 없지만 전보다 기는 훨씬 강해졌다.

“네가 오늘 친 사고가 어떤 건지는 알아?”

“…응.”

“그래서 내일 집을 옮길 거야.”

“어디로?”

“이곳보단 안전한 곳으로.”

“왜? 사람들이 내가 여기 사는지 다 알았대?”

“아니.”

“그럼?”

영신이 살짝 위층을 올려다봤다. 현재로서는 추측일뿐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덕이를 숨겨둘 생각이었다.

“하여튼 가서 얌전히 있어.”

“나 혼자?”

“어. 너 혼자.”

“…혼자는 싫은데.”

덕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영신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면서 덕이의 등 뒤를 다시 살폈다. 꼬리가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분명 잠자리 말고 기폭제가 된 게 있을 텐데, 대체 그게 무엇일까. 진심? 하아. 자신이 덕이에게 진심을 준 적이 있던가.

“그 사람들은 괜찮대?”

“누구.”

“공원에서… 나 때문에 다친 사람들.”

덕이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저 때문에 누군가 다쳤다는 사실이 퍽이나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남의 돈은 잘만 훔쳐 가더니. 평소답지 않게 기가 죽어서는 계속 눈치만 살피는 모습에 영신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죽지 않았어. 조금 다쳤을 뿐이야.”

“정말?”

“그래. 정말이야.”

다행이다. 덕이가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앞으로 갔다. 달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 금방 땅으로 내려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걸 보더니 신기한지 입을 벌리고 쳐다본다.

“…밤에도 비행기가 많이 다니는구나.”

영신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덕이는 신기한지 한참을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영신아, 너는 비행기 타봤어?”

“왜.”

“인태가 그러는데 비행기 탈 때는 신발을 벗어서 들고 타야 한대.”

그 말에 영신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인태가 골려주려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맞아. 그리고 볼일을 볼 땐 잠깐 밖으로 나와야 해. 날개 쪽에 매달려서 말이지.”

설마 이걸 믿을까 싶었는데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들어본 거 같다고 대꾸한다. 표정이 진지한 걸 보니 정말 믿는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해줄까 하다 괜히 짓궂은 마음이 생겨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우가 비행기 탈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비행기를 타면 정말 다른 나라도 갈 수 있어?”

“그래.”

“비행기… 진짜 좋은 거구나.”

호국도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점처럼 멀어지는 비행기를 끝까지 쳐다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꼬리가 나오기 시작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부쩍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밖만 쳐다보는데 어깨 위에 손이 올라온다. 어느새 영신이 제 옆에 서 있었다.

“들어가서 자.”

“…같이?”

덕이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여태 영신이 먼저 같이 자자고 한 적은 없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남은 꼬리는 하나. 오늘 밤 그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혹시 도망칠까 봐 그러느냐고 묻자 영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젠 정말 박영신한테 쓸모 있는 여우가 되었구나 싶어서 쓰게 웃었다.

“근데 나 지금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밤새 시끄럽게 굴지도 몰라.”

“상관없어.”

“…조금 속상하다.”

“뭐가.”

“네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좋은데 속상해.”

덕이가 입만 움직여 씩 웃더니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영신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창밖에 걸린 달을 쳐다봤다. 너무 환한 달은 제 속까지 꿰뚫어 보는 기분이라 오랫동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걸 외면하고 몸을 돌려 방 쪽으로 들어가니 덕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활짝 열린 블라인드를 모두 닫으려고 하는데 덕이가 오늘만 열어두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좀 더 달이 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침대 위로 올라가 덕이 쪽을 향해 모로 누웠다. 배를 까고 누워 속이 좋지 않은지 숨을 한 번씩 몰아쉬는 모양새가 정말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납작하고 하얀 그 배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천장을 향해 눈을 감고 있던 덕이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 영신을 쳐다봤다.

“…왜?”

“배 문질러줘?”

“어.”

영신이 덕이의 배를 둥글게 문질렀다. 손이 닿았을 뿐인데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아 덕이의 얼굴도 조금 편안해졌다.

“손이 시원해.”

“자. 계속 해줄 테니까.”

응.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나중엔 감겨 떠지질 않는다. 영신이 그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적당하게 솟아오른 콧대와 긴 속눈썹과 신음을 낼 때 동그랗게 벌어지는 입술, 붉은 입술….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뜨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영신을 본다. 길죽한 눈매는 오늘따라 더 축축하고 물기를 머금은 듯 보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큰한 숨결이 흘러나온다.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을 보고 영신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그쪽으로 가져갔다. 입술이 맞닿으니 덕이가 영신의 목을 끌어안으며 제 쪽으로 당긴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혀가 문질러지고 어느덧 영신이 덕이의 몸 위로 올라왔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덕이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영신을 올려다봤다.

“…영신아.”

“어.”

“지금 이건, 꼬리… 나오라고 하는 거지?”

“…그래.”

덕이가 서글프게 웃더니 다시 영신의 뺨을 잡고 끌어와 제 입술에 포갠다. 성기는 딱딱하게 발기한 채로 덕이의 하체에 은근히 비벼졌다.

영신이 입술을 떼어내고 덕이의 뺨과 귓불을 혀로 핥고 문질렀다. 말랑말랑한 귓불을 입술로 빠니 덕이가 신음을 내며 두 다리를 영신의 허리에 감았다. 얼른 해달라고 보채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덕이가 흠칫 몸을 굳혔다. 창에 검은 형태의 그림자가 달라붙어서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커다란 입을 벌려 웃고 있었다. 입술을 탐하던 영신도 이상함을 느끼고 창가를 봤다. 순간 검은 형체가 흔적도 없이 위쪽으로 홱 하고 사라져버렸다.

***

덕이가 졸린 눈을 뜨지도 못하고 한약 봉투에 빨대를 꽂아 억지로 빨아 먹고 있었다. 등 뒤에서 꼬리 여덟 개가 살랑였다. 갑자기 늘어난 꼬리에 기뻐할 틈도 없이 나머지 하나의 꼬리를 위해 약을 챙겨 먹는 중이었다.

꼬리가 생겼으면 도망가려고 부리나케 눈을 떴는데 예상과는 달리 나오지 않았다. 몇 모금 빨다가 헛구역질을 하려고 하자 영신이 도끼눈을 뜨고 째려봤다. 억지로 꿀꺽꿀꺽 삼키고 나서 입술을 내미니 영신이 모른 척 주방 쪽으로 가버린다.

덕이가 끝까지 따라가면서 어미젖을 달라고 보채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먹을 때마다 뽀뽀해준다고 했잖아.”

“어제 한 걸로 대신해.”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 네가 분명히 먹을 때마다 해준다며!”

하아. 영신이 귀찮다는 얼굴로 돌아보는데 덕이가 꼬리를 집어넣고 그대로 목을 끌어안으면서 입술을 겹쳐온다. 쪽, 쪽, 두 번 입을 맞추더니 여전히 매달려서 눈을 맞추고 웃고 있다. 영신이 괜히 뻘쭘해져서 대충 손을 떼어내고 이젠 됐다며 먼저 몸을 돌렸다.

“아침 먹고 짐 대충 챙겨. 어제 말한 대로 집을 옮길 생각이니까.”

응. 고개를 끄덕이던 덕이가 창가를 내다봤다. 어젯밤 보았던 그건 무엇이었을까. 영신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다급하게 창가로 가서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보는 순간 온몸의 털이 다 솟는 기분이었다. 악귀는 아니었다. 생김새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는데… 그것은 마치….

“알아들었어?”

덕이가 눈을 깜빡였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영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귀를 활짝 열고 들으란 말이야.”

몇 번을 말했는데 딴생각하는 게 얄미워 영신이 덕이의 귀를 잡아 비틀었다. 덕이가 아파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그 손을 간신히 떼어내고 오이 하나를 챙겨 들고 소파 쪽으로 도망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식탁 위에 돌배 2개가 나란히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

영신이 못 본 척 냉장고로 가서 고기를 꺼냈다. 덕이가 사막에서 물이라도 발견한 표정으로 배를 양손에 쥐고서는 환한 얼굴로 웃었다. 아직 덜 익었지만, 조금 더 두었다가 먹으면 꽤 맛이 좋을 것 같았다. 킁킁, 냄새를 맡는데 희미하게 향내가 묻어난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주워왔어.”

“절에서?”

영신이 움찔, 동작을 멈췄다. 슥 봤더니 덕이가 배 냄새를 맡고 있었다. 여우가 아니라 개였군. 대충 오다 얻었다고 둘러댔는데 갑자기 덕이가 배시시 웃으며 영신에게 다가온다.

“나 주려고 절에 다녀왔구나!”

“오다 주웠다고 했잖아.”

“바보. 이건 산에서 나는 거야.”

한마디 더 하려던 영신이 마음대로 생각하라며 몸을 돌려버렸다. 덕이가 후다닥 오더니 배를 쥔 채로 영신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영신이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양손에 배를 꼭 쥔 채 제 허리를 끌어안고서 등에다 얼굴을 비비길래 저리 떨어지라며 몸을 비틀었다.

“영신아, 고마워.”

“뭐가.”

“네 덕분에 꼬리가 나왔으니까.”

“고마워할 거 없어. 그 덕분에 난 돈을 얻게 되니까.”

덕이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목소리에 처량함을 가득 담고 영신의 허리를 더 꼭 껴안으며 등에 얼굴을 문지르며 질척거렸다.

“영신아…. 그래서 말인데….”

“안 돼.”

“야아.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뭐든. 어차피 들어줄 마음 없으니까, 입도 벙긋하지 마.”

덕이가 슬며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혹시나 저를 놓아줄까 싶어 슬쩍 건드려봤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쉬고 영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고 나서 그 넓은 등짝을 가만히 쳐다봤다. 요걸 어떻게 구워삶는다?

고기를 손질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영신을 보다 소파 쪽으로 걸어가 창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젯밤 보았던 그것으로 생각이 다시 돌아갔다. 위쪽으로 올라갔는데, 혹시 강지훈의 집에서 온 놈인가?

물끄러미 위층을 보는데 테이블에 있던 휴대전화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서 확인하니 발신자에 김 실장이라고 표시되어 있길래 고개를 갸웃했다. 이 양반이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는데 손안에 있던 휴대전화가 홱 빠져나간다.

언제 나왔는지 영신이 한 손에 집게를 들고 서 있었다. 고기 굽는 집게를 들고 있어도 멋지긴 마찬가지구나. 잠시 감탄을 하는 사이 영신이 전화를 받으며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다시 한 번 뒤에 가서 껴안을까 하다 곧 관두고는 무슨 이야기를 하나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그가 통화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오며 바로 안방 쪽으로 향했다.

“고기 구워 놨으니 먹어. 난 잠시 나갔다가 올 테니까.”

“어디?”

“한 시간 안에 돌아올 거야. 딴짓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어디 가는데.”

“말해도 넌 몰라.”

영신이 안방으로 들어가버리더니 잠시 후 편안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혹여라도 같이 가자고 할까 싶었는지 서둘러 집을 나선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집에 혼자 남은 덕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진짜 가버렸네. 같이 밥 먹고 싶었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주방으로 가니 음식이 차려져 있다. 식탁에 앉아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는데 쿵, 쿵, 위층에서 무언가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침 안방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영신이 휴대폰을 두고 갔나 했는데 제 전화다. 방 쪽으로 뛰어가서 발신자를 확인하니 위층에 사는 강지훈이다. 선뜻 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물고 휴대전화를 노려보는데, 전화가 끊긴다. 그대로 내려놓는데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 하나가 들어온다.

[덕이 씨, 혼자 있어요? 시간 나면 나랑 차 한잔 할래요?]

한참을 그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창밖을 다시 봤다. 하늘은 어젯밤 봤던 둥그런 달 대신 작열하는 태양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검은 형체는 무엇이었을까, 쿵. 그 소리에 맞춰 위층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난다. 올라오면 알려주겠노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환하게 웃고 있는 지훈의 얼굴이 왜 어젯밤 보았던 그 얼굴과 겹쳐 보였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지독하고 위험한 냄새가 풍겨 막상 얼굴을 보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지훈이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리 덕이 씨. 왜 이렇게 겁을 먹었을까.”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는 행동에 덕이가 한발 더 물러섰다.

“할 얘기가 뭐야?”

“들어와요. 여기서 할 건 아니고.”

“싫어. 여기서 해.”

“그건 좀 곤란해서.”

지훈이 눈짓으로 복도에 달린 CCTV를 가리켰다. 저게 있어도 괜찮겠냐고 묻는 말에 덕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영신에게 말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됐지만, 이제 와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던 덕이가 멈칫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은 박스 안에 다 담겨 있었고, 작은 소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저거요. 이삿짐을 꾸리는 중이었어요.”

“너… 이사 가?”

“네.”

“왜?”

“서운해요?”

“아니.”

“저런. 조금이라도 서운해할 줄 알았는데. 다른 건 아니고, 하던 일이 얼추 마무리된 거 같아서요.”

“무슨… 일?”

지훈이 대답 대신 덕이의 어깨 쪽을 가만히 본다.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송곳에 찔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생각보다 꼬리가 빨리 나오고 있네요.”

“…그게… 보여?”

“물론이죠. 여덟 개, 맞죠?”

덕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법력으로 따지면 영신이가 더 위 아닌가. 꼬리를 집어넣고 힘을 숨기면 영신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는데 이 작자는 어떻게 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을까. 애초에 아무런 힘이 없을 때부터 저를 여우라고 알아챈 것부터가 신기했다.

그 와중에도 지훈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머리를 어지럽힐 정도로 덕이를 위협해오고 있었다. 숨을 쉬기 힘들어 가쁘게 내쉬니 지훈이 안색을 살피며 근처로 가까이 다가온다.

“안색이 나쁘네. 몸이 좋지 않아요?”

주위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오지 말란 뜻으로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지훈이 뿌듯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뿌리쳐야 하는데 저절로 무릎이 꿇어진다. 놀란 덕이가 힘을 가쁘게 내쉬며 지훈을 올려다봤다. 환하게 웃는 지훈의 얼굴이 낯익다. 어젯밤 창밖으로 보았던 기묘한 얼굴과 자꾸만 겹친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너… 어젯밤에….”

쉿. 지훈이 손을 뻗어 덕이의 뺨을 만졌다. 그 손을 떼어내야 하는데 몸이 의지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꼬리를 꺼내 힘을 이용해 저항하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의지대로 움직이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이 이젠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슬슬 문지르더니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덕이가 그를 죽일 듯 노려봤지만, 저항하면 할수록 몸의 힘은 빠져나갔다. 숨을 내쉬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로 지훈의 입술이 가볍게 닿는다. 젖먹던 힘을 쥐어짜 반항하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입술을 벌리고 제멋대로 들어온 혀가 마구잡이로 안을 헤집었다. 영신과 할 때와는 다르게 구역질이 나고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젠장. 온 힘을 쏟아 앞니로 그 혀를 꽉 물었다. 윽. 지훈이 입술을 떼어내니 살점이 뜯겨 나갔다. 퉤. 덕이가 그것을 바닥에 뱉었고, 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혀를 내밀어 핥자 피가 멈추고 상처는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눈앞에 벌어진 일에 덕이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위협적인 냄새의 정체가 뭔지 그제야 알아챘지만, 충격과 공포로 인해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덕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지훈이 여전히 다정하고 온화하게 미소 지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어?”

***

보조석에 앉은 영신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김 실장을 만나 건네준 서류를 확인하는데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잔뜩 굳은 영신의 얼굴을 보며 운전석에 앉아 있던 김 실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구덕이 씨는 예상했던 대롭니다. 동물과 사람 유전자가 다 나왔으니 그쪽에서도 당황했더라고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입조심시켰으니 탈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같이 의뢰해주셨던 컵에 묻은 DNA를 채취했는데 그건 보통 성인 남성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특이 사항은 없었고요.”

영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제대로 한 거야?”

“네. 아니면 다른 곳에 의뢰해 볼까요?”

영신이 한숨을 내쉬며 차량 시트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착각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감고 강지훈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심 가는 부분은 많은데 밖으로 드러나는 건 흠집 하나 없이 깔끔했다. 역시 괜한 사람을 오해한 걸까.

그때 김 실장이 문 안쪽에서 다른 서류를 하나 꺼내 영신에게 건넨다.

“대표님, 이거.”

영신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안쪽으로 손을 넣어 꺼내 확인하니 종이가 꽤 많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강지훈이 살던 곳 근방에서 자살이나 타살로 죽은 사람들의 리스트를 뽑아달라고 했는데, 그들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혹시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진 않을까. 강지훈의 집에서 본 물건들이 어쩌면 그들의 것은 아닐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이어졌다.

“수고했어.”

“별말씀을요.”

그만 가봐. 영신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덕이에게 연락을 했다. 몇 번이나 신호가 갔지만 어쩐지 받질 않는다. 그새 사고를 쳤나 싶은 불안한 마음에 집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

겁에 질린 덕이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훈의 등 뒤로 태양처럼 환한 황금색 꼬리 아홉 개가 금방이라도 덕이를 집어삼킬 듯 움직였다. 천호다! 눈앞에 천호가 있다. 어릴 때부터 말은 들어봤어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여우는 태어나서 50년마다 꼬리가 하나씩 생기고 아홉 개가 되면 구미호가 된다. 하지만 덕이는 50년이 지나도 꼬리와 귀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 겨우 하나 생겼는데, 그것도 늘 제멋대로라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애초에 인간과 구미호 사이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여우들 사이에서도 반호라는 건 전설에만 나오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덕이가 태어났을 때 온갖 소문이 돌았다. 인간의 피가 섞인 반호는 남다른 힘을 가지고 태어나 나라를 망하게 하거나 아니면 구할 거라고 예언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덕이는 조금 모자란, 아니 그들의 눈엔 많이 모자란 구미호였다. 덕이가 커갈수록 사람들의 두려움은 사라져 갔고, 결국 남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반쪽짜리 여우라는 멸시뿐이었다.

그런 제 앞에 천호가 나타난 것이다. 꼬리가 아홉 개가 된 여우가 그 상태로 천 년을 살면 아무도 대적 못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천호였다. 계급이 없는 호족 사회에서도 그들은 특별한 존재로 추앙받았다.

처음 마주한 엄청난 존재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두려움과 위압감에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덕이의 턱을 붙들어 제 눈을 똑바로 응시하게 만들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어?”

덕이가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겨우 움직여 대답했다.

“…네.”

“좀 더 빨리 눈치챌 줄 알았는데, 꼬리가 없는 탓인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

“그렇게 겁먹지 마. 당장 널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웃음 섞인 목소리에 덕이는 심장이 쪼그라졌다. 당장은 아니라면… 언젠간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인가. 떨리는 기색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겁먹은 눈동자까진 어쩌질 못했다. 그대로 다시 시선을 내리까는데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창가 쪽으로 걸어간다.

황금색 꼬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덕이가 옆에 있던 소파를 짚으며 간신히 버티고 섰다. 대체 그가 왜 여기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창가 앞에 서 있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하나야. 구미호가 될 것. 그다음엔 순순히 내게로 올 것.”

“네?”

무슨 뜻이지. 그러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영신에게 구미호를 찾아 달라고 의뢰한 사람이 강지훈인가. 그걸 깨닫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쿵쿵거렸다. 코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지훈이 창가에 기대서서 덕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한참을 쳐다봤다.

“꼬리가 생겼다고 호국으로 도망칠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그랬다간…”

그가 말을 멈추고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짓는다. 덕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망치려고 하는 걸 알고 있었나. 근데 왜 정체를 드러냈지. 그러면 죽을 힘을 다해 더 도망칠 텐데. 천호가 어째서 저를 필요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간…?

“박영신은 죽어.”

어지럽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방금 뭐라고….

“너 대신 박영신이 죽어. 그래도 좋다면 도망쳐봐. 그 버릇없는 자식 사지를 수십 갈래로 찢어서 호국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놓아둘 테니까. 네가 볼 수 있도록 말이야.”

생긋 웃는 그 얼굴은 여우가 아니라 전에 보았던 악귀를 떠올리게 했다. 목이 졸리는 기분에 덕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상황 파악을 하려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웠다. 도망치면 영신이 죽는다니, 그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영신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그는 결국 사람이다. 천호를 이기진 못한다. 그는 눈빛으로도 박영신의 사지를 찢어 죽일 만큼 강하니까. 겁에 질린 덕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기만 하자 지훈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바로 코앞에 서서 덕이를 내려다봤다.

살기와 광기가 번뜩이는 눈동자가 차츰 가라앉더니 어느새 평범한 강지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가 전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덕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니 잘해요. 박영신 목숨줄이… 우리 귀여운 덕이 씨한테 달렸으니까.”

그의 손가락이 아까처럼 입술을 문지르고 입 안으로 들어와 벌리게 한다. 덕이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가만히 서서 그 행동을 받아들였다. 물기 어린 새카만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었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손가락을 입 안에서 움직이다 킥, 하고 웃는다.

“박영신이 안 가르쳐줬어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새카만 덕이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일그러지더니 곧 혀를 움직여 그 손가락을 핥았다.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내려보다 천천히 입 안에서 손을 빼냈다. 덕이의 침이 묻어 있는 손가락을 제 혀로 길게 핥으며 웃는다.

덕이가 곧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당장 알려야 한다. 박영신에게 당장 알려야 해. 하지만 그랬다간 박영신도 저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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