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6/10)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쪽으로 길게 늘어선 차들을 바라봤다. 근처에서 사고가 난 건지 아까부터 차가 꽉 막혀서는 도통 빠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조석에 앉은 덕이는 피곤했는지 입까지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고개가 운전석 쪽으로 꺾여서는 점점 옆으로 눕길래 몇 번이나 다시 잡아줬다. 의자를 뒤로 젖혀주는데도 세상 모르게 자는 걸 보고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작은 자극에도 잠들지 못하는 저와 비교하면 부러울 정도로 무딘 성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덕이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꼬리가 생긴다는 사실에만 신이 나 있었지, 그 많은 돈을 받고 저를 넘기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지를. 물론 영신도 의뢰인이 구미호를 왜 필요로 하는진 모른다. 전에 미자가 말한 것처럼 정말 간이라도 빼먹을 생각일까.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최근엔 살짝 궁금해지긴 했다. 과연 구미호를 데려다 뭐에 쓸려고 그 어마어마한 금액을 치르겠다고 했는지 말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차가 점점 빠지기 시작한다.

영신이 속도를 올리는데 뒤쪽에서 낯선 승용차가 아까부터 따라붙는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갑자기 왼쪽으로 차선을 바꿔 좌회전했는데, 역시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노선을 바꾸더니 뒤쫓아오는 게 보였다. 저렇게 티가 날 정도로 미행하다니. 대체 누구지. 가끔 있는 일이라 요리조리 피해 차를 따돌리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상우야, 나야.”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김 실장이었다. 영신을 대신해 거의 실무적인 일을 처리해 주는 사내였다. 영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다 위장이지만. 그에게 뒤 차량 번호를 불러주며 조회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아니야.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 응.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전화를 끊고 나니 덕이가 추운지 몸을 웅크리는 게 보인다. 차량 내부의 온도를 높이고 나서 뒤쪽으로 손을 뻗어 작은 담요 하나를 가져와 몸 위에 대충 덮어줬다. 잠결에 담요에 몸을 파묻으니 조금 전까지 찡그려졌던 얼굴이 펴지면서 곧 평온을 되찾는다.

아까 그 기운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힘이 생겼다는 걸 이 무딘 여우가 아는 걸까. 아니면 아직 사용할 줄 모르나. 정기를 흡수시켜 힘을 키우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구나. 근데 왜 꼬리는 나오지 않는 거지.

“쯧. 쓸모도 없는 귀만 나오고 말이야.”

새카만 머리통에 잠시 시선이 닿았다가 룸미러로 옮겨간다. 여전히 검은 차가 쫓아 오는 중이었다. 노골적으로 따라붙는 차를 따돌리기 위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윽. 이게 뭐야.”

구겨진 인태의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덕이가 놀러 갔다 왔다며 사진 찍은 걸 보여주는데 죄다 동물들이었다. 그러다 다음 사진이 넘어가는데 옆에 있던 미자가 어머머 하고 소리를 질렀다. 코끼리 두 마리가 엉겨 붙어서 짝짓기를 하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찍힌 수컷 코끼리의 성기가 어찌나 큰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야, 꼬리야?”

“꼬리는 엉덩이에 달렸잖아.”

“이거 고추야.”

“악! 씨발! 이렇게 크다고?”

“그러게. 밀림의 왕은 사자가 아니라 코끼리구나.”

세 사람이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덕이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영신이다. 그만 건너오라는 메시지였다. 동물원에서 돌아온 후 씻고 옆 사무실로 놀러 왔기 때문이다. 어쩐지 저를 걱정해주는 것 같은 기분에 뱃속이 근질거렸다.

“뭐야? 둘이 연애해?”

“오늘 영신이가 평소보다 나한테 되게 잘해줬어.”

“바보냐. 그게 다 꿍꿍이가 있는 거잖아.”

“아니야…. 동물원도 같이 가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하자는 대로 다 했다니까.”

그러면서 사진첩을 다시 열어 미자와 인태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영신의 옆모습이었다. 멀리서 찍은 건데도 팔다리가 길쭉하니 광고의 한 장면처럼 나왔다.

“영신이 진짜 잘생겼다.”

“그치?”

덕이가 신이 나서 다음 사진도 보여줬다. 이번엔 뒤통수였다. 그리고 다음 사진은 또 옆모습이다. 각도를 보니 죄다 몰래 찍은 느낌이다.

“너, 영신이 몰래 찍었어?”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가 싫어해서 몰래 찍긴 했는데…. 그 말에 미자가 그럼 안 된다고 말해줬다. 누군가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땐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거라고 말이다. 덕이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 얼굴로 물었다.

“저번에 예주인가 하는 애네 가서도 몰래 찍었잖아.”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맞다, 구더기 너 그거 잘 보관하고 있는 거지? 봐봐?”

갑작스러운 인태의 질문에 덕이가 흠칫 놀랐다. 대답을 못 하자 인태가 한번 보자면서 다그친다. 우물쭈물하던 덕이가 사실대로 말했다. 영신이 지워버렸다고, 그래서 다른 걸로 도와준다고 했다면서 엊그제 벌어졌던 일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듣고 미자가 얼굴을 굳히며 한숨을 쉬었다. 틀렸어. 인태도 그걸 믿느냐고,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했다. 두 사람의 반응에 덕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변했다.

“정말 도와준다고 했단 말이야!”

“영신이한테 낚였네. 박 대표가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니야.”

“영신이… 거짓말 안 해….”

풉. 인태가 노골적으로 비웃었고, 덕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미자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덕이를 다독였다. 괜찮다고, 다른 증거도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집에 다시 침입하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운이 좋아 걸리지 않았지만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오늘 가서 다시 말해볼게. 확인해둘게.”

“소용없다니까. 설사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영신인 절대 고객한테 협박 안 해. 왜냐하면, 이 바닥에서 고객을 협박했다고 소문나면 걔도 이 장사 접어야 할 테니 말이야.”

미자도 그 의견엔 동의했다. 단순히 접는 거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영신이 상대해온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꽤 성공한 이들이었다. 힘과 권력이 있었고, 사람 하나쯤 매장 하는 건 그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사 그것이 박영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영신이 그런 짓을 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동영상을 지웠다고 해서 원망할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도 사정이란 게 있는 거니까.

하지만 덕이는 끝까지 영신을 믿는 눈치였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영신이 좀 성격이 나쁘긴 하지만 거짓말은 안 한다고 말이다. 그 말속에 애정이 담겼다는 걸 알아채고 미자는 한숨을 내쉬었고, 곁에 있던 인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곧 믿는 도끼에 발등이 아니라 대가리가 깨지는 순간이 오겠다면서, 딱한 표정을 지었다.

***

[소유주가 박헌재 앞으로 되어있습니다.]

“박헌재?”

[백무파라고 조직폭력배 행동대장입니다. 혹시 최근에 뉴스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백무파 두목이 피살되었거든요. 사체 훼손이 심했는데 일반적인 조폭들 솜씨는 아니었나 봅니다. 경찰 쪽에서도 다른 원한 관계가 있나 찾는 중이라고 하고요.]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자신이 조폭에게 원한 살 일이 있었던가. 의뢰인을 고를 때 최대한 뒤탈이 없는 사람들을 찾긴 했다. 그랬기에 조폭과 연관된 일은 가능한 만들지 않았다. 최근에 덕이의 뒤통수를 치고 제 돈을 가지고 도망간 우림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찾으려고 사람을 고용하긴 했지만, 그 사람도 조폭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 알아봐. 최근에 누굴 만났는지, 내 주위와 연결된 건 아닌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영신이 전화를 끊고 나서 인터넷을 뒤졌다.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며칠 전 살인 사건에 관한 기사가 떴다. 아무리 읽어봐도 저와 접점을 찾지 못하겠다. 잠시 후 휴대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죽었다는 보스의 사진이었다.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한번 본 얼굴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그였는데 생전 보지 못한 남자다. 대체 누굴까.

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덕이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보니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까 돌아온 후 미자와 인태에게 놀러 갈 때만 해도 좋아서 팔짝팔짝 뛰더니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영신이 모른 척하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고 시선을 주지 않았다.

“왔어?”

풀썩 덕이가 영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덕이가 손바닥을 내민다.

“그거 줘.”

“뭐.”

“그거. 작은 플라스틱 있잖아.”

영신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제 그 USB를 말하는 건가. 신문을 든 채로 빤히 쳐다보는데 덕이는 내민 손을 거둘 마음이 없어 보였다. 영신이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제 방 쪽으로 걸어갔다.

“왜 마음이 바뀌었어? 나한테 맡겨둔다고 했잖아.”

“그냥… 내가 가지고 있을래.”

덕이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태와 미자는 영신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했지만 덕이는 어떻게든 영신을 믿고 싶었다.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방문을 들어서 순간 영신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덕이를 빤히 내려다봤다. 덕이가 그 시선을 가만히 받아내며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물었다.

“지금 할래?”

“뭘?”

“아까 낮에 화장실에서 못한 거 말이야.”

덕이가 입을 벌렸다.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닌가, 잠시 고민했다. 옆에 붙기만 해도 질겁을 하던 영신 아닌가. 왜 그러지. 혹시 저에게 없던 정이라도 생긴 걸까.

“갑자기… 왜…?”

“실은 나도 하고 싶었거든. 동물원에서부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하는 모습에 덕이가 입가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쌀쌀맞게 싫다고 딱 자르더니,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구나. 실실 웃으면서 영신의 목을 팔로 감싸고 눈을 맞췄다.

“그럼… 지금 할까?”

“씻어.”

“오자마자 씻었는걸.”

“그래도 씻어.”

영신이 눈짓으로 욕실 쪽을 가리켜서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튼 더럽게 깔끔 맞다니까. 투덜거리면서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영신이 서랍을 열어 usb를 꺼냈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눈을 가늘게 늘였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나. 평소 같으면 이런 짓은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왜 해준다고 거짓말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아, 젠장.”

툭, usb를 다시 서랍에 넣어두고 나서 몸을 돌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김 실장이다. 영신이 휴대전화를 귓가로 가져갔다.

“그래.”

[찾았습니다. 그 조직의 보스 말입니다. 사망 전날 구덕이 씨를 만났더라고요. 지금 찾고 있는 것도 덕이 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표님 쪽을 미행한 거고요.]

영신이 고개를 돌려 욕실 쪽을 바라봤다. 그때 구덕이는 위층에 사는 놈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혼자 만난 건 아니란 소린데. 닫힌 문틈으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김 실장이 사람을 보내느냐고 묻는다. 그가 보내겠다는 사람들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았다. 괜찮다고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구덕이가 죽은 보스를 만났고, 다음날 남자가 죽었다. 우연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영신이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봤다. 쿵, 쿵, 무언가 내리찧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진다. 18층에서 봤던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살인자라면 죽은 이들의 물건을 보란 듯 진열해 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달칵 문이 열리면서 수증기가 밖으로 새어나온다. 동시에 덕이가 젖은 머리카락과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파다닥 뛰어오더니 영신에게 달려들었다.

“빨리 하자, 응? 빨리.”

허벅지에 올라타고 앉아 엉덩이를 비비며 보채는 바람에 영신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술이 있어야 하는데. 덕이를 떼어내려고 하자 어린아이처럼 안겨오면서 몸을 문지르고 비벼온다. 엉덩이에 눌린 성기가 어느새 발기해선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영신이 작게 헛웃음을 삼켰다. 빌어먹을, 이젠 술을 안 먹어도 서네.

“영신아, 빨리. 응? 얼르은.”

아이처럼 보채며 입술을 빠는 모습에 영신이 덕이를 안아 든 채로 일어섰다. 덕이가 두 다리를 영신의 허리에 감싸며 매달렸다. 침대로 이동하는 사이 영신의 머릿속을 괴롭히던 생각들도 하나씩 날아가고 있었다.

영신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밤새 여우의 꼬리를 잡으러 쫓아다니는 꿈을 꿨다. 생전 꾸지도 않던 꿈을 덕이를 만나고 나서 다 꾸고 있는 듯싶었다. 이마를 짚으며 옆을 보니 덕이가 없다. 관계가 끝난 후 옆에서 자겠다고 하도 난리를 치는 걸 그냥 뒀는데, 어쩐 일인지 눈을 떴을 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6시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와보니 덕이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커다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비가 오는 중이었다. 그걸 쳐다보는 덕이의 표정이 동물원에서 여우를 쳐다보던 얼굴과 닮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이 조금 슬퍼 보였다.

“영신아, 일어났어?”

“거기서 뭐 해?”

“구경.”

“무슨 구경?”

“비 오는 거 보고 있었어.”

목소리가 어쩐지 풀이 죽었다. 영신이 저도 모르게 덕이의 엉덩이 쪽을 살폈다. 그 시선을 느낀 덕이가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안 나왔어…. 오늘도 하나야.”

영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번짼데 꼬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즘 주위에 자꾸 날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얼른 끝내야 하는데.

주방으로 가 커피를 내리고 머그잔에 채워진 커피를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도 덕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창밖만 멍하니 보는 중이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게 어제 본 여우 때문인지 아니면 나오지 않는 꼬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라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거기서 멍 때리지 말고 졸리면 들어가서 자.”

“…안 졸려.”

목소리가 늘어진다. 다리에 뺨을 대고서는 빗소리를 듣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영신이 창가 쪽으로 가서 덕이의 옆에 섰다. 제법 빗줄기가 거세다. 다닥다닥, 창가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뉴스에서 오늘부터 비가 온다고 했던가.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가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입 안에 한 모금 머금는데 다리에 체온이 느껴진다. 한 발짝 정도 떨어져 앉아 있던 덕이가 바로 옆으로 옮겨 와서는 영신의 다리에 바싹 붙어 앉는다. 뭐하는 짓이냐고 밀어내려다 가만 놔뒀더니 이번엔 영신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너도 앉아서 같이 보자.”

“됐어.”

“그러지 말고, 잠깐 앉아봐.”

영신이 버티자 덕이가 옷자락을 힘주어 잡아당긴다.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이번엔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영신이 눈을 흘기며 슬쩍 몸을 피하려는데 끝까지 머리를 비비면서 기대온다.

“떨어져.”

타박에 덕이가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실실 웃는다. 그러더니 곧 표정을 굳히고 나서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식구들은 잘 있으려나….”

푸념처럼 늘어놓는 말에 영신이 멈칫했다. 어제 분명 그러지 않았나. 가족들에게 저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고. 갑자기 왜 어울리지도 않게 분위기를 잡나 했더니 그래도 식구들이 보고 싶긴 한가 보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커피를 마시는데 덕이가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더니 영신이 들고 있는 머그잔을 빤히 쳐다본다.

“그거 맛있어?

“왜.”

“…한입만 줘봐.”

영신이 들고 있던 컵을 잠자코 내밀었다. 전 같았으면 따로 타주든가 아니면 여우 주제에 무슨 커피냐고 타박했을 텐데, 기운이 빠진 채로 있는 꼬라지를 보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덕이가 양손으로 머그잔을 쥔 채로 입가로 가져간다. 영신의 입술이 닿았던 그 자리에 입을 대더니 살짝 혀를 내밀어 맛을 본다. 곧 으엑 하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컵을 돌려줬다. 맛없어. 이렇게 맛이 없을 수가.

그 모습에 영신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럼 커피가 솜사탕처럼 달달할 줄 알았어?”

어제 일을 떠올리던 영신은 죽은 남자를 생각했다. 무슨 조직의 보스라고 했던가. 김 실장에게 듣기로는 덕이가 그의 지갑을 훔쳤고,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치는 바람에 도망쳤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남자가 죽었다고. 그래서 부하들은 덕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웃긴 건 그 자리에 18층에 사는 강지훈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골치 아프게 됐군.”

“응? 뭐가?”

넌 몰라도 돼. 영신이 머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깨에 붙어 있던 덕이의 머리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덕이가 일어서며 뒤를 졸졸 쫓았다. 왜 그러는데. 뭐가 골치가 아프다는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영신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소용없을 테고, 괜히 더 큰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기 때문이다.

***

예주가 책가방을 메고 2층에서 내려왔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밥을 차려 놓았으니 먹고 가라고 했지만, 어쩐지 식욕이 당기질 않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그럼 우유라도 마시고 가라며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는데 안방 문이 열리면서 혜란이 나온다. 예주가 눈치를 살피며 우유 잔을 받아드는데 그녀가 주방 쪽으로 걸어왔다.

“너 아직 안 갔니?”

“지금… 가려고요.”

잘 먹었습니다. 빈 컵을 아주머니에게 건네는데 컵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쨍그랑하고 깨진다. 어머. 혜란이 비명을 질렀고, 예주가 놀라 급하게 몸을 숙였다. 아주머니가 예주의 손을 먼저 붙들었다.

“아이고, 놔둬. 손 다쳐. 얼른 학교 가.”

뒤에 서 있던 혜란이 혀를 차며 언성을 높였다.

“너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니? 누굴 닮아서 칠칠치 못한 건지. 아줌마, 그건 얘보고 치우라고 하고 나 꿀물이나 타줘요. 속 아파 죽겠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난감해 하자 혜란이 뭐하고 서 있느냐고 빽 소리를 지른다. 곤란해 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예주가 웃으며 괜찮으니 얼른 가보라고 했다.

“두고 학교 가. 내가 사모님 꿀물 타주고 치울 테니까.”

예주가 괜찮다고 몸을 숙여 유리 조각을 줍기 시작하였다. 일단 커다란 유리를 치우고 나서 작은 유리를 빗자루로 쓸려고 하는데 그만 손이 살짝 베고 만다. 아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옆쪽에 서 있던 혜란이 그 모습을 보며 슬쩍 웃다가 표정을 싹 바꾼다.

아무것도 모르는 예주가 유리조각들을 치우는 사이에 미자와 인태가 그 모습을 뒤쪽에서 지켜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어. 설마 박 대표가 진짜 그걸 보냈겠냐.”

“나빴어. 덕이를 속인 거잖아.”

“박 대표 입장도 이해해줘. 녹취하는 건 진짜 최악의 경우에만 쓰려고 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까발려지면 걔도 매장당하는 건 한순간이야.”

미자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서운하긴 하네. 대놓고 안 된다고 하면 될걸, 그 순진한 애를 속이고 상처 주다니.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영신이 조금 얄미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깨진 유리조각들을 치우고 나서 예주가 대충 손을 닦더니 가방을 멘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뒤돌아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미자가 뚫어지게 쳐다봤다. 인태가 그만 가자며 툭 치는데도 시선이 가방에 붙어 도통 떨어질 줄은 모른다.

“왜. 쫓아가게?”

“아니… 가방에 달린 저거 말이야….”

신발을 신는 예주의 등 뒤로 빨간색 가방이 보였다. 가방 고리에 여러 가지 실로 엮어 만든 줄 하나가 달려 있었는데, 미자가 그것을 가리켰다. 인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왜.”

“왜… 낯이 익지…?”

“실 꼬아서 만든 거 아니야? 저런 거 흔해.”

그 말에 미자가 아아, 소리를 낸다. 그래서 낯이 익었구나. 과거에 자신도 저런 걸 만들었을까. 저렇게 가방에 달고 다니는 여학생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을까. 떠오르는 기억이 없으니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 더는 나아가질 못했다.

혜란이 꿀물을 든 채로 천천히 걸어와 예주가 사라진 현관을 노려봤다. 그녀의 눈빛은 살기를 띠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인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거 눈빛 봐라. 눈깔로 사람 죽이겠다.”

미자가 그 앞으로 가서는 혜란의 눈을 손가락 두 개로 마구 찌르는 시늉을 했다.

“나쁜 년. 망할 년!”

“야야, 하지 마.”

이번엔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욕을 퍼부었지만 혜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혜란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번호를 확인하더니 급하게 표정을 바꾸고 나서 콧소리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며 가사도우미를 확인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간다.

인태가 미자에게 눈짓으로 따라들어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고급가구들로 채워져 있었고, 벽에는 혜란과 예주 아버지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예주 아버지의 얼굴을 미자가 빤히 쳐다봤다. 혹시나 과거에 알던 사람일까 싶었지만, 전혀 기억 나는 게 없었다.

안방 문이 닫히고 혜란이 누군가와 통화를 이어갔다.

“자기, 아침부터 웬일이야?”

어제 즐거웠다고,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남편은 아닌 듯싶었다. 미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바람도 피우는 건가.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인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다가 미자에게 눈짓을 한다.

미자도 같은 생각인 건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교태 섞인 웃음소리가 안방 안에 울려 퍼졌지만 미자와 인태는 좀처럼 그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

집을 나와 한참을 달리던 영신의 승용차가 산 중턱에서 멈춰 섰다. 비포장도로였지만 제법 관리가 잘 되어 차가 드나드는 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차가 바뀌어 있었다. 색은 같았지만, 매번 타고 다니던 그 차가 아니었다. 차가 바뀐 것에 의문을 품던 덕이가 밖을 내다보며 주위를 살폈다. 어쩐지 풍경이 익숙했다.

“여기 전에 왔던 곳이지?”

“맞아. 내가 너 붙잡은 데잖아.”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붙잡다니, 내가 무슨 동물도 아니고.”

말하고 보니 우스웠다. 어쨌든 동물은 맞지 않는가. 차에서 내리는데 물에 젖은 풀 냄새, 나무 냄새가 확 느껴진다. 덕이가 흐읍,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커다란 나무들을 올려다봤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녹색의 나무들은 유독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살던 호국의 풍경이 생각나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영신이 말없이 앞서 걷는다. 덕이가 그 뒤를 따랐다.

“어디 가는 거야?”

“가보면 알아.”

“혹시 날 풀어줄 생각인 거야?”

그 말에 영신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떼먹은 돈이 얼마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하여튼 뻔뻔한 여우라고 비아냥대자 덕이가 앞쪽에 있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그 돌멩이가 굴러가서 닿은 자리에 처음 보는 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었다. 하얀 꽃을 보며 덕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 향기를 맡았다.

앞서 가던 영신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뭐 해. 빨리 와.”

“잠깐만.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래.”

다시 흐읍, 하더니 향기를 맡는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작은 꽃 하나를 툭 꺾는다. 영신이 그걸 왜 꺾느냐고 하기도 전에 덕이가 꽃을 귓바퀴에 꽂았다. 어때? 귀여워? 영신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행색인데…. 짐보따리만 하나 껴안고 뛰어다니면 딱 그거네. 미친년.

“그걸 꼭 거기에 꽂아야겠냐…?”

“놀러 온 기분도 나고 좋잖아?”

“놀러는 어제도 갔잖아.”

“거긴 거기고…. 여기 오니까 꼭 소풍 온 거 같다.”

오늘은 놀러 온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산비탈을 오르는데 영신이 한참이나 앞서간다. 가는 내내 산을 떠도는 혼령들과 마주쳤다. 영신을 알아보고 피하는 이도, 호기심에 멀리서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사람과 여우가 함께 다니고 있다!]

그 소리가 영신의 귀에까지 들려오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작은 사찰 하나가 나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승려를 제외하고는 일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덕이가 그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의 기운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안쪽으로 걸음이 옮겨지질 않았다. 덕이가 따라오지 않자 영신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괜찮으니까 와.”

“무서워….”

“저번에 동물병원에서 봤던 분 알지? 내 고모라고 했던….”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었고, 다정했던 걸로 기억한다. 영신이 그녀에 관해 설명해주자 덕이가 조금 안심한 얼굴로 사찰 영역 안으로 발을 디뎠다. 가는 동안 승려 몇 명이 인사를 하자 덕이가 영신의 등 뒤로 슬그머니 숨었다.

더 가다 보니 안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나왔다. 사찰은 밖에서 볼 땐 작아 보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단 규모가 컸다. 커다란 기둥을 지나가는데 저 멀리 수돗가 근처에서 커다란 양동이에 물을 뜨고 있는 승려가 보였다.

영신의 고모인 일월 스님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전에 동물 병원에서 봤던 녀석이란 걸 단번에 알아봤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지 아니면 다친 건지 꼬리 부분이 잘려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일월 스님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영신을 발견하고 놀라기는커녕 이미 올 줄 알았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까치가 반갑게 울어대더니, 우리 영신이가 오려고 그랬나 보네.”

그러더니 뒤쪽에 있던 덕이를 보고서도 똑같이 반가운 얼굴을 한다.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에요.”

다소 겁먹은 덕이가 영신의 등 뒤로 숨어 고개만 빠끔히 내밀었다. 스님의 옆에 있던 하얀 개는 덕이를 보고서도 짖지 않았다.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잠깐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덕이 씨도 들어와요.”

그녀가 앞서 걸었고, 영신과 덕이가 그 뒤를 따랐다. 덕이가 영신의 옷자락을 잡아채며 자긴 들어가기 싫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결국은 근처에 있던 작은 방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덕이가 신발을 벗다가 흰 개와 눈이 마주쳤다. 저한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신기했다.

작은 마루를 지나 들어온 방은 크기가 작고 살림살이 또한 단출했다. 낡은 나무 책상과 그 옆으로 책들이 보였다. 그리고 뒤쪽으로 옷 몇 벌과 수건, 칫솔 같은 개인용품이 다였다. 덕이가 그것들을 살펴보는데 일월이 그들을 향해 앉으라고 방석을 내어준다.

그녀가 한쪽에 있는 다기를 가져와서는 차를 따라줬다. 조금 전 우려둔 거였는데 한잔 마시라면서. 덕이가 연노랑 빛깔의 차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향이 나진 않았지만, 색이 아주 고왔다.

“그래,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로 들른 게야?”

“저번에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저번에?”

“동물 병원에서 하신 말씀이요.”

“무슨 말?”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영신은 그녀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들려주었다.

“법력이 강한 인간이 여우에게 정기를 나눠주면 꼬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영신이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저를 놀리기 위함인 것 같아서였다.

“기억 안 나시면 전 그냥 갈게요.”

“녀석도. 하여간 그 성질머리 고치지 못하면 장가가서 색시가 마음고생 좀 할 거야.”

안 그래요? 그녀가 덕이를 보며 물었다. 연노랑 빛 차를 홀짝이던 덕이가 흠칫 놀라서 응? 하고 되물었다. 토끼처럼 새카만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에 일월이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보이진 않지만 전에 봤을 때보다 힘이 강해진 게 느껴졌다.

그 속내를 읽었는지 영신이 슬쩍 떠보듯이 물어온다.

“보이세요?”

“뭐가?”

“아무거나요. 꼬리든, 구슬이든.”

“글쎄…. 그건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하아. 영신이 절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전에 분명 정기를 주면 꼬리가 나온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일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만….

“왜 그렇게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어? 설마 네가 이 친구한테 정기를 주기라도 한 거야?”

영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데 저도 모르게 귀가 화끈거린다. 하지만 그녀에게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 속내를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었고, 어릴 적부터 영신을 보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꼬리를 만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것까진… 아실 필요 없어요.”

흠.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덕이에게 잠깐만 나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덕이가 우물쭈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내가 말한 정기를 준다는 의미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어.”

“그럼요?”

“마음.”

마음이요? 영신의 얼굴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그런 이야기는 없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설마 육체적인 관계만으로 꼬리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느냐고 도리어 묻는다. 마음 없이 관계를 맺는다면 그게 과연 좋은 관계인지도 말이다.

“아껴주는 마음. 위해주는 마음.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된 거란다. 무슨 말인 줄 알겠니? 꼬리를 나올 수 있게 하는 건 저 애를 진심으로 대할 때 가능한 거지. 그러니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만 괴롭히거라.”

영신이 한 대 맞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일월이 하는 말이 귀에 와서 송곳처럼 박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했던 행동들도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굳어진 그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차라리 살던 곳으로 돌려 보내주는 건 어떠니?”

“저 녀석이 제 돈을 가져갔어요.”

“돈이야 어차피 너한텐 차고 넘칠 정도로 많잖아.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면 놓아주렴.”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덕이를 팔아넘겨 많은 돈을 받을 거라고 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벌써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찻잔을 잡은 영신의 손을 그녀가 가만히 쥔다. 타인의 체온이 닿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영신이었지만 그 손을 뿌리치진 못하였다. 입을 다문 채 내려다보고만 있으니 일월이 영신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는다.

“어릴 때 네 손을 붙들고 내가 한 말을 기억하니?”

영신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웃었다. 하지만 영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본가에 들를 때마다 영신의 양손을 꼭 쥐고서 했던 말. 귀한 손이라고. 사람을 살릴 손이라고. 이 일을 하면서도 그 말은 늘 목구멍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영신을 괴롭혔다.

손을 잡고 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가자 영신은 오히려 더 심란해졌다. 무슨 해답을 찾으려고 여길 왔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짐작하고 있던 거 아닌가. 쉽게 꼬리가 나오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때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사고라도 친 걸까. 영신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와보니 흰 강아지가 덕이의 다리 주위를 맴돌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를 따르는 동물이 신기하고 귀여웠는지 덕이가 쭈그리고 앉아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혀가 닿자 헤벌쭉 웃는 모양이 영신의 눈엔 바보 같기만 했다.

“너는 내가 싫지 않아…?”

싫지 않으냐고 묻는 목소리가 어쩐지 서글프다. 강아지가 대답하듯 왈왈 짖으며 짧은 꼬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웃으며 머리를 두어 번 더 쓰다듬던 덕이가 고래를 들어 이쪽을 본다. 왜 그랬을까. 눈이 마주치자 영신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덕이는 영신의 눈치를 살폈다. 사찰에서 나온 뒤부터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선글라스 안쪽의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춰져 보이질 않았다.

발장난을 치다가 품 안에서 사과 하나를 꺼냈다. 아까 헤어지기 전 스님이 준 것이었다. 아삭, 하고 베어 무니 새콤한 과즙이 흘러나온다. 입가에 흐르는 과즙을 손등으로 닦으며 영신에게 한입 먹을 테냐고 물었다.

“아니.”

“너… 뭐 화났어?”

“아니.”

“하긴… 맨날 그 표정이긴 하지.”

그러더니 다시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 먹는다. 그때 덕이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번호를 확인하는 덕이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영신이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서 귀에 대더니 ‘안녕?’이라고 말한다. 다정하게 말하는 그 모습을 보며 운전대를 잡은 영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밖이야. 당분간 너희 집에 못 놀러 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아쉬운 얼굴로 전화를 끊는다.

“18층?”

“어… 지훈이.”

[아껴주는 마음. 위해주는 마음.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된 거란다. 무슨 말인 줄 알겠니? 꼬리를 나올 수 있게 하는 건 저 애를 진심으로 대할 때 가능한 거지. 그러니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만 괴롭히거라.]

하아, 한숨을 내쉬고 나서 속도를 높였다. 덕이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나서 다시 사과를 먹는다. 앞니로 아삭아삭 베어먹는 모습이 여우가 아니라 꼭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먹더니 이번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어젯밤 잠을 안 자고 창밖만 내다보더니 아무래도 피곤했나 보다. 창에 머리를 쿵쿵대며 자고 있길래 스위치를 눌러 의자를 뒤로 눕혀 줬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검은 봉고차 한 대가 영신을 슝 앞질러 간다. 미친놈, 저러다 죽으려고. 욕을 내뱉는 순간 봉고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끼이-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췄다.

옆을 보니 덕이는 세상 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욕을 씹어 뱉으며 차량에서 내려 곧바로 앞을 막아선 봉고차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운전을 그렇게 거지같이 하냐고 따지려는데 앞문과 뒷문이 열리면서 사내 여러 명이 동시에 나왔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들을 보고 영신은 어제 저를 미행하던 사람들이라는 걸 대충 눈치챘다. 그들 중 하나가 영신 앞으로 다가오면서 턱을 높이 쳐들었다.

“댁한텐 볼일 없으니 비키는 게 좋을걸. 다치기 싫으면 말이야.”

“하아, 양아치 새끼들.”

양아치란 말에 사내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생긴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진짜 양아치가 뭔지 보여준다며 손을 쑥 뻗어 영신의 멱살을 쥐려고 했다. 영신이 그 손을 가볍게 쳐내니 이번엔 주먹이 날아왔다.

영신이 몸을 숙여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 그대로 남자의 비곗덩어리 같은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억. 남자가 몸을 숙이는 동시에 영신이 발로 복부를 걷어차고 눈 깜짝할 새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 이번엔 머리를 찍었다.

남자의 비명이 텅 빈 도로에 울려 퍼졌다. 피가 낭자한 머리통을 붙들고 남자가 신음하며 일어나질 못하자 주위에 있던 패거리들이 당황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영신이 돌을 든 채로 옷에 튀긴 피를 툭툭 털어냈다.

“씨발. 이거 비싼 옷인데.”

“너! 이 새끼.”

사내중 하나가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시퍼런 사시미를 꺼내 들었다. 영신이 그대로 돌을 집어 던졌고, 남자가 몸을 옆으로 피하는 틈에 날아가서는 발로 얼굴을 가격 했다. 얻어걸렸다고 하기엔 동작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깔끔했다.

지켜보던 사내들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더니 끼이익 멈춰 선다.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차가 멈추자마자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키가 커다란 사내가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를 보는 영신의 인상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되게 빨리 왔다?”

“신호 위반 했습니다.”

뭐야 이 새끼는? 사내들이 새로 나타난 덩치 큰 남자를 보며 주춤거렸다. 어깨가 얼마나 넓은지 로봇 같았고, 골격은 다부지다 못해, 쇳덩이처럼 단단해 보였다. 많은 싸움꾼을 겪은 남자들이 보기에도 보통 사내는 아니었다. 김 실장이 영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더니 손수건을 꺼내 건넨다.

“닦으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영신이 그것을 받아 들고 손과 옷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냈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등장에 조폭 무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심하는 눈치였다. 적당히 겁만 줘서 덕이인가 뭔가 하는 애만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여기서 처리해버릴까요?”

아주 간단한 일처럼 이야기하는 김 실장을 보며 영신이 고개를 저었다.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더니 앞으로 가서는 그중 한 사내에게 건넨다. 사내는 영신이 만만치 않은 상대인 걸 알았는지 처음의 사납던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박찬수한테 가서 전해. 죽은 너희 두목 일 때문이라면 잘못 짚었어. 쟤는 그날 나랑 같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정 의심스럽거든 신고를 하든지 해. 양아치처럼 이딴 식으로 미행해서 사람 빡치게 하지 말고.”

사내가 엉겁결에 명함을 받아들었다. 자신들의 보스가 바뀐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정보에 의하면 그냥 귀신 쫓는 퇴마사 뭐 그런 거라도 하던데. 싸우는 모양새나 다른 걸로 봐선 보통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곧바로 영신이 지갑에서 수표를 끄집어내서 사내에게 건네준다. 아까 자기가 때린 사람 병원이나 데리고 가라면서. 그때 보조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신이 돌아보니 막 잠에서 깬 덕이가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

덕이가 고기를 먹으면서 눈치를 살폈다. 제 앞에 앉은 김 실장이란 사내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돈 가방을 가지고 도망가던 그 날 말이다. 그땐 자세히 못 봤는데, 코앞에서 보니 뿜어내는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때 잡히지 않았던 게 다행이군. 덕이의 시선이 물컵을 쥔 김 실장의 손에 꽂혔다. 손이 얼마나 큰지 물컵이 소꿉처럼 보였다. 저 손에 맞았다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전에 본 적 있지?”

영신의 말에 덕이가 어색하게 손을 들고 ‘안녕?’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기에 얼른 손을 내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어색한 가운데 고기가 익어가자 영신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덕이의 접시에 놓아줬다. 덕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왜 그래?”

“뭐가.”

“왜 고기 줘?”

“언젠 안 줬어?”

그래도 오늘따라 이상한 거 같은데. 덕이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까 절에서 나오고부터 영신이 조금 친절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착해지는 약이라도 먹은 건가.

고기를 한입 먹고 앞에 있는 오이를 향해 손을 뻗는데 김 실장도 오이를 집으려고 손을 뻗는다. 두툼한 손이 닿자 덕이가 흠칫 놀라 얼른 손을 뒤로 감췄다. 김 실장이 너나 먹으라는 식으로 접시를 툭 밀었지만, 덕이는 선뜻 그 오이를 집어 먹지 못하였다. 그렇게 고기가 구워지는 내내 세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근데 그 사람들 거긴 왜 따라온 거야?”

덕이가 슬그머니 오이를 하나 집어가더니 입에 넣으며 물었다. 자다 일어나 봤는데 밖에 웬 사내들과 영신이 서 있었다. 남자 하나는 피 묻은 머리를 붙들고 신음하는 중이었고 영신의 손에도 역시 피가 묻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놈들 두목이 죽었대. 너도 알 거야. 네가 지갑을 훔쳐서 달아났으니까 말이야.”

당연히 넌 몰라도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순순히 말해준다. 덕이가 놀란 얼굴을 했다. 티브이에서 본 게 그 깡패 차가 맞았구나.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근데 왜 나를 찾아와?”

“네가 죽였다고 생각하니까.”

“뭐?”

이번엔 벼락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말도 안 된다면서 오이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저 멀리 식사하던 사람들이 이쪽을 흘깃거렸기에 영신이 그만 앉으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덕이가 말도 안 된다며 중얼거렸다. 자기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살아있었다고 말이다.

“난 안 죽였어!”

“알아. 그때 넌 나랑 있었으니까.”

“그럼 네가 말해줘. 너랑 있었다고.”

영신이 덕이를 쳐다봤다. 덕이는 저와 있었을지 몰라도 18층에 사는 강지훈은 아니었다. 놈의 집에 있던 물건들은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대체 뭘 하는 놈일까. 그러다 문득 아까 덕이가 놈과 통화하던 게 떠올랐다.

“아까 말이야. 강지훈이 너더러 집에 오라고 한 거야?”

“…응.”

“다시 연락해서, 가겠다고 해.”

“뭐? 네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가. 대신, 나도 같이 가는 거야.”

그 말에 덕이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걔를 의심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영신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의심 가는 정황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고기가 익고 있습니다. 드세요.”

앞에 앉은 김 실장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도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덕이는 그 모습이 더 신기해서 계속 흘깃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얼른 피하고 나서 고기를 먹었다. 확실히 무섭게 생긴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고기를 씹었지만, 마음은 심란했다. 처음에 살인자라고 오해하긴 했지만,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번엔 영신이 그를 살인자라고 의심하고 있으니 대체 진짜 정체가 뭘까 궁금해졌다.

***

덕이가 잔디밭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봉긋하게 올라와 있는 묘 주변으로 예쁜 꽃들이 꽂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았지만, 향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꽃잎을 만지작거렸는데 진짜 꽃이 아니었다.

묘 앞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거기엔 사람들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수많은 묘 중 하나 앞에서 영신이 절을 하고 나서 술을 부었다. 꽃을 구경하던 덕이가 그쪽으로 갔다. 영신이 절을 하는 무덤엔 비석이 있었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묘 앞에는 영신이 사온 해바라기 꽃이 한 다발 놓여 있었다. 노란 잎이 탐스러운 해바라기는 영신이 오는 길에 꽃가게에 들러 직접 고르고 예쁘게 포장까지 한 것이었다. 대체 누굴 주길래 저걸 사나 궁금했는데….

“비석에 왜 이름이 없어? 누구야?”

영신이 남은 술을 묘 주위에 뿌리고 나서 빈 병을 챙겨 들었다. 덕이가 무덤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이름이 적혀 있나 한 번 더 확인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왜 이름이 없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영신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는 사람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야.”

그 말에 덕이가 미간을 좁혔다. 모르는 사람 묘에 꽃까지 사 들고 와서 술을 뿌리느냐고 묻자 영신이 그만 가자며 몸을 돌린다. 덕이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궁금한 마음에 몇 번이나 물었지만, 영신은 더는 말이 없었다.

“치사하다. 말해주지.”

걷다 보니 민들레 홀씨가 보여 얼른 꺾은 다음 영신의 등 쪽으로 후우, 하고 불었다. 흰 홀씨가 등 쪽으로 향하다 바람에 훅 방향을 바꿔 날아간다. 아침까지도 비가 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새파랬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등 뒤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차를 타자마자 에어컨을 켜니 덕이가 양쪽 팔을 쓸며 몸을 움츠린다. 영신이 그걸 보며 추우냐고 물었고 덕이가 망설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엊그제부터 몸이 춥고 떨리는 거 같아.”

영신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손을 뻗어 덕이의 이마를 짚고 제 이마를 짚었다. 별 차이가 없는 거 보니 열이 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괜찮다고 하자 덕이는 이마를 다시 디밀며 만져 보라고 보챈다.

“열없어. 멀쩡해.”

“근데… 왜 자꾸 추운 거 같지…. 속도 메슥거리고….”

“임신이냐?”

“설마…. 임신하기엔 난 아직 어린데….”

그 말에 영신이 코웃음을 쳤다. 어린 게 문제가 아니라 남자인 게 문제 아니냐고 물었더니 덕이가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영신을 쳐다봤다.

“…임신이랑 남자가 무슨 상관이야?”

“무슨 개소리야.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해.”

“우리 호국에선 남자도 해.”

영신이 한 대 맞은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만 깜박이며 쳐다보는데 덕이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고 묻는다.

“수컷도… 임신을 한다고…?”

“응. 아주 드물긴 하지만 해. 하지만 난 반호라 절대 아닐 텐데….”

“장난하지 마.”

“진짠데.”

덕이의 표정을 보니 꽤 진지하다. 영신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덕이 안에다 사정하긴 했지만,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설사 됐다고 하더라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혼란스런 얼굴로 쉽사리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데 덕이가 손을 뻗어 영신의 눈앞에 대고 흔든다.

“영신아. 눈 뜨고 자? 얼른 가자. 나 배고파.”

영신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방금 무슨 생각을. 아니야. 그럴 리 없지. 암, 그럴 리 없어. 차를 출발시켰지만, 얼굴에 깃드는 혼란스러움까지 어쩌진 못했다.

***

지훈의 표정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문을 열자 덕이가 보였는데, 그 뒤로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영신이 자신의 집에 온 것도 놀라운데 한 손에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생긋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영신이 집 안쪽으로 들어가며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여전히 향내와 고약한 냄새가 함께 풍겨왔다.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는데 지훈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건네주며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쳤다.

“오는 길에 샀습니다.”

“의외시네요.”

“뭐가요.”

“이런 거랑 전혀 안 어울려서요. 하여튼 감사합니다.”

그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고, 영신과 덕이도 그 뒤를 따랐다. 거실로 들어서던 영신이 집을 둘러보는 척하며 창가 옆 장식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 안을 확인하던 영신의 얼굴이 굳었다. 전에 봤던 그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장식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었다. 작은 주전자와 접시, 동물 모양의 조각품들. 그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주방으로 갔던 지훈이 언제 나왔는지 한 손에 과일칼을 다른 한 손엔 사과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싱긋, 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사과 드실래요? 아님? 다른 거?”

영신이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거나요. 뒤쪽을 보니 덕이는 소파에 앉아 귤을 까서 먹고 있었다. 저 자식이. 오면서 집 좀 둘러보게 강지훈 좀 붙들고 있으라고 했는데, 귤을 까먹느라 약속은 새카맣게 잊어버렸군.

“차도 한 잔 부탁합니다.”

지훈이 대답 대신 영신의 옷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시선을 따라 영신이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봤다. 아침의 그 일 때문인지 옷에 피가 좀 튀어 있었다. 미세한 그 자국들을 한참 바라보다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피인가요?”

“네.”

“누가 보면 사람이라도 죽이다가 온 줄 알겠어요. 하하.”

지훈이 차를 내온다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귤을 까먹고 있던 덕이가 그제야 자신의 본분이 생각났는지 까먹던 귤을 들고 그를 따라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간다. 오늘 뭐 했는지, 자긴 사과보다 배가 더 좋은데 배는 없는지,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묻는 사이 영신이 슬그머니 안방 쪽으로 이동했다.

살짝 열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제 방 구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새카만 그림은 마치 어두컴컴한 터널 안에 서 있는 기분을 들게 했다. 저 멀리 출입구 쪽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는데, 마치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다시 방 안을 살폈지만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은 미리 정리정돈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깔끔했고,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은 없었다. 그때 등 뒤로 지훈이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영신이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방 안을 둘러봤다.

“뭐 하세요?”

그제야 몸을 돌렸고, 지훈을 마주 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씩 웃었다.

“방을 잘못 들어왔네요. 화장실을 찾는 중이었는데 말이죠.”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집 구조도 같은데 화장실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훈은 그러느냐며 나와서 차나 마시라고 사람 좋게 웃었다. 영신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안방 밖으로 나왔다. 소파로 가서 앉으니 그가 내준 차가 보였다. 사람이 의심스러우니 선뜻 찻잔에 손이 가질 않았다.

“안 마시세요?”

“별로. 제가 좋아하는 차가 아니라서요.”

“다른 걸 타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시선이 오고 갔다. 덕이는 옆에서 계속 귤만 까먹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영신은 덕이에게 지훈이 주는 걸 함부로 먹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약속은 까맣게 잊은 듯 보였다. 그때 덕이가 갑자기 생각난 듯 지훈을 향해 물었다.

“아, 지훈아. 너 저번에 봤던 깡패 기억나?”

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깡패요?

“그때 너랑 밥 먹고 있는데 나 쫓아오던 깡패놈 말이야.”

“아아. 그놈들이요. 기억나요.”

“걔네 두목이 죽었대.”

저런. 지훈이 미간을 구겼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어쩌다가 그랬느냐고 묻는다. 덕이는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나서 그놈 부하들이 자기를 의심한다고 말해주었다. 아까도 자길 쫓아 왔다는 말에 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말에 덕이가 흠칫했다. 제게 두려운 존재가 두 가지 있었는데 그건 경찰과 의사였다. 어느 쪽으로 끌려가든 결과가 좋지 않으리란 건 뻔했기 때문이다. 그건 좀 어렵다고 말을 얼버무렸더니 지훈이 싱긋 웃어 보인다.

“하긴 덕이 씨가 여우인 걸 들키면 곤란해질 테니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덕이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알고 있었구나. 영신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 지훈을 가만히 쳐다봤다. 지훈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아직도 꼬리가 없는 걸 보면, 생각보다 박영신 씨가 도움이 못 되나 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신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덕이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 아마 관계를 맺은 다음 날 덕이에게서 제 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

듣고 있던 덕이가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지난번 제 입으로 애인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영신이 있는 앞에서 티를 내니 후환이 두려워졌다.

“아니야! 그런 거!”

“맞습니다, 그런 거.”

영신이 선뜻 인정하자 덕이가 이번엔 영신을 쳐다봤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한 건 영신이 아니던가. 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끝까지 잡아떼도 모자랄 판에 순순히 인정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영신아, 미쳤어?”

“저 사람 어차피 다 알아. 네가 여우란 것도. 내가 왜 여기 왔는지도. 그렇죠?”

지훈의 입가에 삐죽 미소가 생겨났다.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하는 그의 눈빛이 조금 다른 의미로 번뜩였다가 사라진다. 영신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보통 놈이 아니다.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거짓말에 매우 능숙한 놈이라는걸. 왜냐하면 저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놈이니까. 동족을 보는 기분이랄까.

“제 입장을 말해도 될까요?”

“해보세요.”

“일단 그 두목 이야기라면 전 죽이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그리고 당신이 하는 많은 의심 중에 대부분은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영신이 슬쩍 웃었다.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죽이지 않았다고, 오해라고 말하는 남자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꼭 거울을 통해 저 자신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입맛이 써졌다. 어차피 놈은 스스로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으리라. 몸을 일으키며 여전히 귤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덕이를 내려다봤다.

“가자.”

덕이가 귤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지훈이 섭섭하다는 얼굴로 벌써 가느냐고 묻는다.

“다음엔 저희 집으로 초대하죠.”

“차를 드시고 갔으면 좋을 텐데요.”

“뭘 탔을 줄 알고요.”

“하하, 그런가요. 하긴 요즘 세상이 너무 무서워서 말이죠. 이해합니다.”

영신이 나중에 보자며 몸을 돌려 나갔고, 덕이가 강아지처럼 그 뒤를 따랐다.

“덕이 씨.”

지훈이 부르는 소리에 덕이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막 갈아신으려던 영신 또한 움직임을 멈췄다.

“만약 박영신 씨만으로 안 되면 저한테 부탁하세요. 전 언제든 해드릴 마음이 있으니까요.”

생긋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덕이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지가 박영신 대신 나한테 정기를 주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가. 홱 고개를 돌려 보니 여태 유유자적 하게 웃던 영신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

거울 앞에서 덕이가 이마를 문질렀다. 낮부터 춥고 으슬으슬하더니 계속 몸 상태가 나빴기 때문이다. 어쩐지 지훈의 집에 다녀오고 나니 몸이 더 아픈 거 같았다. 영신 대신에 정기를 주겠다는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덩달아 그때 보았던 영신의 표정이 떠나질 않는다. 강지훈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는데, 질투였을까?

“…에이… 설마.”

그런 생각들을 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쳐다봤다. 잠시 후 머리 위로 귀가 생겨나고 등 뒤로 꼬리가 나왔다. 살랑살랑 강아지풀처럼 움직이는 꼬리를 보고 있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동물원에 가서 여우를 본 후부터 이상하게 한 번씩 기분이 가라앉았다. 밉기만 하던 가족들 생각도 나고 자신을 괴롭히긴 했지만, 아주 가끔 걱정하며 챙겨주던 친구들 생각도 나고.

꼬리랑 귀가 생기면 호국으로 돌아가 보란 듯 자랑하려고 했는데, 구슬 살 돈은 사기를 당하고, 나머지 꼬리 또한 언제 나올지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엄마 돌아가신 날이기도 하네.

아버지가 새 아내를 맞이한 후로는 무덤에 한 번도 같이 간 적이 없었고 늘 덕이 혼자 몰래 찾아갔었다. 돌이 무너지진 않았을까. 풀은 무성하게 자랐겠지.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기분은 이제 바닥까지 가라앉고 있었다.

거울을 쳐다보는 덕이의 눈가가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물을 틀어 눈가를 닦아내고 나서 거울을 보고 일부러 씩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다시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새카만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라 뺨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누가 볼세라 닦아내고는 씻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영신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근데 아직도 꼬리가 없는 걸 보면, 박영신 씨가 도움이 못 되나 봐요?]

“개자식.”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생긋 웃던 강지훈의 뻔뻔스러운 낯짝이 떠올라서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거기다 뭐라고 했지. 언제든 해줄 마음이 있으니 연락하라고? 애인 있는 사람한테 꼬리 치는 쓰레기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순간 영신의 생각이 뚝, 멈췄다.

“애인이라니… 누가?”

드디어 미쳤구나.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물 온도를 최대한 낮추자 찬물이 쏟아진다. 얼음물이라도 있으면 그곳에 머리통을 잠시 담가두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씻고 밖으로 나와 물기를 닦아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후 거실로 나와보니 먼저 씻고 나온 덕이가 소파에 엎드려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있었는데 에취, 재채기하더니 몸을 웅크렸다.

뭘 보나 궁금해 가까이 다가가니 휴대폰으로 여우가 나오는 영상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동물원에 다녀오고부터 이상하더니 결국 휴대폰으로 동영상까지 찾아보는군. 혹시 향수병인가.

“들어가서 자.”

에취. 다시 재채기하더니 코를 훌쩍인다. 영신이 인상을 구겼다. 아깐 설마 했는데 진짜 감기라도 걸린 건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이 골고루 다 아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라니까.”

덕이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말간 얼굴로 영신을 올려다봤다. 붉은 입술을 오물오물하더니 같이 자도 되느냐고 묻는다. 영신이 싫다고 단칼에 잘랐더니 곧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다.

“같이 자고 싶어.”

“싫어.”

“추워서 그래.”

“감기 오려고 그러는 거야. 이불 덮고 자. 에어컨도 끌 테니까.”

“안아 주면 좋겠어.”

영신이 다시 한 번 싫다고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고모인 일월 스님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덕이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있었다. 고집을 부릴 것 같은 모습에 영신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일단 머리부터 말려.”

“…귀찮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젠 들고 있던 휴대폰도 옆에다 두고 소파에 축 늘어진다. 영신이 한숨을 쉬며 욕실로 가서는 드라이기를 가지고 나왔다. 전원을 연결하고 테이블에 걸터앉아 소파에 누워 있는 덕이의 머리카락을 드라이기로 말려줬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다가 빠져나간다. 머리채를 잡아 본 적은 있어도 제 손으로 누군가의 머릴 말려주는 건 처음이라 손에 느껴지는 감촉조차 어색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자 덕이가 아예 그대로 눈을 감는다.

“야. 자지 마.”

정말 피곤한 건지 몸이 좋지 않은 건지 이젠 아예 눈을 감고 꿈쩍도 하질 않는다. 머리카락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준 다음에 몸을 흔드니 그제야 눈을 푸스스 뜬다. 잠에 잔뜩 취한 얼굴이다. 어젯밤에도 잠을 못 잔 데다 아침부터 계속 돌아다녔더니 더 힘든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는지 멍한 얼굴로 소파 아래로 내려온다. 스르륵, 귀신처럼 움직이며 영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걸 막아서려다 그냥 놔두고 뒤를 따라 들어갔다.

마치 제 방인 양 침대에 늘어져 눕더니 이불을 끌어와 목 아래까지 푹 덮고 나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영신이 베개를 챙기니 그 와중에도 손을 붙들고서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밖에서 자려고.”

“…여기서 나랑 자.”

“싫어.”

“…그럼 잠들 때까지만 잠깐 옆에 있어줘.”

목소리도 물먹음 솜처럼 늘어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영신이 결국은 침대 위로 올라와 누웠다. 좀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덕이가 그 와중에도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 영신의 옆에 바싹 파고든다. 혹시라도 영신이 가버릴까 싶었는지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싸 안더니 뺨을 어깨 쪽에 파묻은 채 미동조차 않는다.

영신은 그 상태로 천장을 보며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일월 스님이 했던 말, 조폭 두목에 관한 일, 그리고 강지훈까지. 하나씩 정리해가는데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렸더니 잠든 줄 알았던 덕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영신이 당황한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울어?”

“…집에 가고 싶어.”

“뭐?”

“집에, 흐흑, 가고 싶어.”

이젠 엉엉, 소리를 내며 운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다 싶더니 진짜 향수병이라도 걸린 건가. 다신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반겨주는 사람이 없다고 여기서도 잘 지낼 것처럼 굴더니, 사실은 아니었군.

“그만 울어. 시끄러우니까.”

울음소리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졌다.

“야. 그만해.”

“집에, 으어엉. 가고 싶어, 집에, 어엉.”

어쩔 줄 몰라 하던 영신이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운 후 덕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대로 덕이의 몸을 제 쪽으로 끌고 와 품 안에 가두고 아이 달래듯 토닥이자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흐느끼는데 몸이 생각보다 더 뜨겁다.

기분 탓인가 싶어 목 뒷덜미 쪽을 만졌더니 아니나 다를까 불덩이 같다. 이런. 덕이를 떼어내고 보니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다. 여전히 서럽게 흐느끼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에 영신은 명치가 콱 막히는 듯 답답함을 느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무래도 해열제를 찾아 먹이는 게 우선일 듯싶었다. 문제는 집에 해열제가 있느냐 하는 거겠지만.

덕이가 눈을 떴다. 수면 등 때문인지 방 안이 평소보다 밝았다.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을 가지고 노니 영신이 들어가서 자라고 한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여기저기 아팠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다 저도 모르게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영신이 제 쪽을 향해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보니 영신의 뒤로 테이블 위에 작은 대야와 물수건도 보였다.

“…저게 다 뭐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조용히 눕는데 영신은 새근새근 잠들어선 깨어날 줄 모른다. 덕이가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잘 때는 꼭 애기 같네.”

얼굴을 채운 눈 코 입을 하나씩 차례대로 훑어봤다. 눈썹도 길다. 코도 잘생기고, 입술도 예쁘다. 아아, 뽀뽀하고 싶다. 손을 뻗어 입술을 만지려다 멈칫했다. 영신의 눈꺼풀이 움찔 움직였기 때문이다. 덕이가 얼른 눈을 감고서 자는 척 연기를 했다. 쥐죽은 듯 조용한 걸 보니 깨어나진 않았나 보다. 다시 슬그머니 눈을 떴는데 영신이 눈을 뜨고 저를 쳐다보고 있다. 괜히 도둑질하다 들킨 것 같아 깼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대꾸가 없다.

“…영신아?”

영신이 손을 뻗더니 덕이의 이마를 짚는다. 열이 내려간 걸 확인하더니 작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잠깐이었지만 ‘아프지 않아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에 덕이는 잠시 숨을 멈췄다. 심장이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영신아, 자아?”

“……”

“자는 거야?”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손을 뻗어 영신의 새끼손가락을 슬쩍 만졌다. 뽀뽀는 안 되겠지만, 손가락 정도는 괜찮겠지. 손가락도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길고 곧게 잘 빠졌다. 더 만지면 깨서 나가라고 난리 칠 것 같아 더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냥 그 위에 제 손을 올려놓고서는 잠을 청하였다.

***

맛있는 냄새에 덕이가 눈꺼풀을 사르르 올려 떴다. 새벽에 영신의 얼굴을 보고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창밖을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잠결에 보았던 대야와 수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젯밤보다 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가서는 양 손바닥을 모으고 얍, 기압을 넣으니 머리 위로 삐죽 귀가 튀어나오고 등 뒤로 꼬리가 살랑 생겨난다. 잔뜩 기대했는데, 역시나 하나다. 그걸 보는 덕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글렀어.”

한숨을 푸욱 내쉬고 꼬리와 귀를 숨기고 밖으로 나와보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고기다, 고기! 주방 쪽으로 걸음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가서 보니 영신이 고기를 굽는 중이었다.

식탁에는 덕이가 좋아하는 오이와 과일들이 있었다. 치익, 맛있는 소리에 맛있는 냄새까지. 아침부터 이게 웬 진수성찬이람. 오이를 손으로 집어 먹으려는데 인기척을 느낀 영신이 돌아보더니 슬쩍 인상을 구긴다.

“손 닦고 집어먹어.”

덕이가 옷에다 슥슥 손을 닦고서는 오이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 아삭, 시원한 맛에 밤새 아팠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잠시 후 영신이 고기를 접시에 올려 식탁 쪽으로 가져왔다. 고기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구운 야채가 올려져 있었다.

덕이가 식탁에 놓여 있던 포크를 들고서는 고기를 하나 찍었다.

“맛있겠다. 흐흐.”

“몸은? 괜찮아?”

무심한 투로 물었지만 안색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어.”

그러면서 고기를 입에 가져간다. 아아, 크게 벌려 넣으려는 순간 얼굴이 확 구겨지더니 입을 틀어막고 우욱, 소리를 냈다. 괜찮으냐고 묻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욕실 쪽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영신이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썼다. 잘해줘야 꼬리가 나온다길래, 아침도 신경 써서 차려놨는데. 속으로 욕을 씹어 뱉으며 욕실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덕이가 막 입을 헹구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얼굴이 괜찮더니 다시 퀭해져서는 거울을 통해 영신을 바라본다.

“미안해, 영신아. 속이 안 좋아서.”

“됐어. 그럼 고기 말고,”

우욱. 고기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틀어막고 변기로 가서는 또다시 헛구역질한다.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나오는 것도 없었는데, 꼭 임신한 사람처럼 구역질을 해대니 기가 막혔다.

“…괜찮아?”

“어.”

“대체 뭘 잘못 먹은 거야?”

“모르겠어.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아픈 게 덜 나아서 그런 건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면서 욕실 밖으로 걸어 나온다. 길을 터줬더니 문 앞에서 휘청하고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영신이 재빨리 붙들어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품 안에서 늘어지는 덕이를 부축해 거실 소파에 앉혀놓았는데 오 분 정도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표정이 멀쩡해진다. 그러더니 갑자기 영신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홍시! 하고 소리를 지른다. 영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홍시?”

“홍시 먹고 싶다.”

생각하는 그 홍시가 맞나 싶어 다시 물었다.

“물렁물렁한 그 홍시?”

“응. 그 홍시. 갑자기 그게 먹고 싶다.”

“왜.”

“뭐?”

“그게 왜 먹고 싶냐고.”

“몰라. 갑자기 홍시가 생각났어.”

옷자락을 꽉 붙들고서 정말 먹고 싶어 죽겠는 얼굴로 쳐다보는 덕이를 보고 영신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어릴 때 사촌 누나가 임신해서 집에 와 있던 적이 있었는데 꼭 지금처럼 그랬었다. 헛구역질하고, 갑자기 뭐가 먹고 싶다면서 매형을 들들 볶았지.

“영신아? 홍시 없어?”

“......”

호국에선 수컷도 임신한다던 덕이의 말이 왜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다정하게 대해줘야 꼬리가 나온다던 일월 스님의 말과 아침부터 홍시가 먹고 싶다는 덕이의 얼굴이 묘하게 겹치면서 머릿속에서 혼란을 만들었다. 이러다 꼬리가 아니라 애가 생기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쳤지.”

***

“쟤 왜 저러냐.”

젖은 낙엽처럼 소파에 축 늘어진 덕이의 모습을 보며 인태가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을 지었다. 영신이 출근하면서 미자와 인태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고 갔는데 평소와 다르게 기운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덕아, 어디 아파?”

미자도 가까이 다가와서 덕이를 걱정스레 들여다봤다.

“…응. 몸에 기운이 없어.”

“감기라도 걸린 건가.”

미자의 손이 덕이의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열은 없는데. 그 모습을 보며 인태가 투덜거렸다.

“하여튼 멀쩡한 데가 없다니까.”

“약은? 먹은 거야?”

덕이가 세상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딱히 어디가 확연하게 아픈 게 아니니 약을 먹기도 애매했다. 아침에는 홍시가 미치게 먹고 싶더니 지금은 또 아무것도 먹기 싫다. 아무래도 단단히 탈이 난 거 같아 제 배를 슬슬 문질렀다.

“내가 뭘 잘못 먹었나.”

“영신이한테 병원 데려다 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러게. 동물 병원 가면 될 텐데.”

툭. 미자가 인태의 팔을 쳤다. 인태가 틀린 말 했느냐고 어깨를 으쓱했지만 미자는 어쩐지 기운이 없는 덕이가 마음에 걸렸다. 몸을 더 숙여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데 힘들어하는 거와는 다르게 피부는 더 뽀얗게 피고, 생기가 돌았다.

“아프면 원래 푸석푸석해야 하는데 덕이는 더 예뻐졌다.”

모공 하나 없이 매끈하고 뽀얀 피부에 감탄하면서 손끝으로 뺨을 문지르니 덕이가 간지러운지 콧등을 찡그린다. 이번엔 미자가 덕이의 냄새를 킁킁 맡는다. 그러고 보니 향기까지 좋아진 것 같다.

“좋은 냄새도 나.”

“정말?”

덕이가 제 팔을 코에 대고 똑같이 킁킁 냄새를 맡는다. 제 체취에 미약하지만 영신의 냄새가 섞여 있다. 시원한 바람 냄새 같기도 하고, 비가 온 뒤 나무에서 나는 향 같기도 했다. 같이 자서 그런 걸까. 곁에 없는데도 꼭 같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인태가 덕이를 불렀다.

“구더기. 너 휴대폰 어디 있어?”

“휴대폰은 왜?”

“이따가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인태의 말에 덕이가 미자를 쳐다봤다. 혹시 예주인가 그 아이에 관한 일인가 싶었는데, 어색하게 웃는 미자의 얼굴을 보니 예감이 맞았나 보다. 하지만 저번에 악령에게 쫓긴 뒤로 영신이 당분간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했지 않은가.

“…오늘은 곤란해. 영신이가 나가지 말라고 했거든.”

“아오. 배신자.”

“인태야.”

“맞잖아. 우리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데. 저 자식이 휴대폰만 안 빼앗겼어도 두 번 고생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어. 인태 네가 그랬잖아. 잘못하면 영신이까지 곤란해졌을 거라고.”

“넌 내가 말할 때마다 꼭 여우 편을 들더라?”

“그야, 너보단 덕이가 귀여우니까.”

“귀여움 앞에선 우정도 뭣도 없다는 얘기구나?”

“없어. 난 귀여운 게 최고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덕이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마주치며 아!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인태와 미자의 시선이 가운데 있던 덕이에게로 향했다.

“차라리 영신이한테 솔직하게 말하고, 도와달라고 하자!”

그 말에 인태가 코웃음을 쳤다.

“박 대표가 퍽이나 도와주겠다.”

“그래. 덕아….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아.”

“아니야. 너희가 몰라서 그래. 요즘 영신이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인태는 이제 대놓고 비웃었다. 전에도 말했는데 이 미련한 여우는 박영신이 저를 좋아해서 잘해주는 것처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몇 번을 말해. 박영신이 왜 잘해주는지 몰라? 네가 바로 돈이기 때문이야.”

“꼭 그런 건 아닐걸?”

“뭐가 아닌데.”

“어제는 아픈데 간호도 해줬어.”

“네가 죽을까 봐 그랬겠지. 돈인데.”

그 말에 덕이는 울컥했다. 분명 어제 새벽엔 영신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는데 인태는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거든! 어제는 달랐단 말이야!”

“아이고, 그러셨어요. 바보 멍청이 같은 구더기. 지가 이용당하는 줄 모르고, 좋다고 들떠서는.”

“인태야, 그만해.”

미자가 말렸지만 인태는 멈추지 않았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덕이는 영악한 듯하면서도 멍청한 구석이 많았다. 그러니 돈도 사기당하고, 박영신한테 붙들려서 꼬리가 나오길 기다리는 거겠지. 꼬리가 나오면 자기 처지가 어떻게 될까,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괜히 헛된 꿈 꾸지 말고 네 살 궁리해. 막말로 영신이가 너 팔아넘긴 다음에 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게 뭐야.”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

“웃기시네. 꿈 깨라, 여우야. 박영신은 살아 있지만 귀신과 다를 게 없는 남자야. 아니 귀신보다 더한 놈일지도 모르지. 감정 따위 없으니까.”

미자가 옆에서 그만 못 두느냐고 쏘아붙였지만 인태는 비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라도 꿈에서 깨어나서 현실을 제대로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는데, 덕이는 화가 잔뜩 나선 씩씩거렸다.

“인태 너 진짜 재수 없어!”

“야. 그래도 나니까 너한테 이런 소리 하는 거야. 그러니 단단히 새겨들어. 좀 잘해준다고 멍청하게 굴다가 당하지 말고.”

“자꾸 멍청하다고 하지 마! 나 화낼 거야!”

“화내면 어쩔 건데. 싸움도 못 하고, 겁도 많은 주제에! 나중에 박영신한테 뒤통수 맞고 질질 짜면서 도와달라고 하지나 마. 알겠어?”

“안 그럴 거거든!”

“퍽이나.”

“진짜야!”

“들었지, 미자야? 나중에 구더기 절대 도와주지 마. 알았어?”

“아, 둘 다 그만하라고!”

미자의 만류에도 인태는 끝까지 덕이를 놀렸고, 참지 못한 덕이가 양 주먹을 꽉 움켜쥔 채 파르르 떨면서 고함을 빽 내질렀다.

“어차피 그전에 도망갈 건데 무슨 상관이야!”

인태와 미자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헉. 덕이가 제 입을 틀어막고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였다. 미자가 놀란 얼굴로 입만 벙긋거렸다. 인태도 기막힌 얼굴로 보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야. 이 여우 새끼. 왜 그렇게 태연한가 했더니…. 너….”

“덕아. 도망칠 생각이었어?”

덕이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젠장, 들켰네. 그때 인터폰이 울린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인터폰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사무실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가까이 가서 확인한 미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거 위층 남잔데?”

그쪽을 보니 정말 인터폰에 지훈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

덕이가 눈치를 살폈다. 미자와 인태를 두고 지훈을 따라 18층으로 올라오긴 했는데, 괜히 께름칙한 마음이 들어 눈을 자꾸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챙겨 온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댔다. 여차하면 영신이한테 전화를 걸 참이었다.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지훈이 차를 내오면서 싱긋 웃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

“아닌데…?”

“거짓말. 불안해했으면서. 내가 죽일까 봐 그래요?”

농담인 듯 진담인 듯한 그 말을 들으며 덕이는 생각했다. 강지훈이 정말 사람을 죽였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점이 꽤 많았다. 전에 진열장에 있던 그 물건들은 뭐였을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데 찻잔이 앞에 놓인다.

덕이가 좋아하는 귤도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귤을 쥐었지만 차는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영신의 말대로 뭐가 들었을 줄 모르니까.

“드세요. 마음을 좀 가라앉혀 줄 겁니다.”

“아니야….”

“속상하네요. 난 그래도 우리가 꽤 잘 통하는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덕이가 지훈을 가만히 쳐다봤다. 핏기없이 하얀 얼굴에 비해 지독하리만치 빛나는 까만색 눈동자가 전과 달리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 거야.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데 머리 위로 그의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내가 말한 건 생각해봤어요?”

“…어떤 거?”

“말했잖아요. 박영신 씨만으로 안 되면 나한테 부탁하라고요.”

덕이가 입술을 달싹이다 손에 쥔 귤껍질에 손톱이 박히도록 꾹 눌렀다. 새콤한 귤 향이 코끝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던 건가.

“너 말이야. 내가 여우인 건 처음부터 알았던 거야?”

“네.”

“꼬리가 없는 것도?”

“그건 좀 나중에?”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너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

“그런 거 없어요. 난 그냥 덕이 씨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에요.”

“왜.”

“왜냐뇨. 난 원래….”

그가 아랫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사람을 돕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 말에 덕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지훈이 다정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덕이의 바로 곁으로 다가와 앉는다. 덕이가 몸을 뒤로 슬쩍 물리려고 하자 그가 손을 뻗어 덕이의 팔을 붙들었다. 보기보다 힘이 얼마나 센지 잡힌 팔뚝이 욱신욱신 아팠다. 인상을 찌푸리며 놓으라고 하는데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지나쳐 덕이의 귓가로 향한다.

“원하면 말해요.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

낮고 음습한 목소리에 덕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진한 향이 풍겨온다. 영신의 몸에서 나는 향과는 대조적일 만큼 머리가 아찔했다. 위험하다. 양손으로 어깨를 밀어내니 웃는 지훈의 얼굴이 코앞에 보인다. 얼굴을 눈에 새길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길래 덕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뒤쪽으로 물러섰다.

“그만 가볼게.”

“더 놀다 가요.”

“아니. 이젠 여기 안 올 거야.”

“왜요. 내가 무서워요?”

“아니.”

“에이. 거짓말.”

“영신이가 싫어하니까 안 오는 것뿐이야.”

“저런. 그 사람 너무 믿지 마세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 오늘은 박영신 험담하는 사람들밖에 없는 걸까. 잘 있으라고 대충 인사를 하고 현관 쪽으로 도망치듯 걸어가는데 갑자기 토기가 치밀어 오른다.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거실에 딸린 욕실 쪽으로 뛰어들어가서는 변기를 붙들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거실에 있던 지훈이 따라 들어 와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덕이가 나가라고 손을 내젓는데 잠시 후 지훈의 손이 등에 닿는다.

“어디 아파요? 등 좀 두드려 줄게요.”

“만지지 마.”

덕이가 그 손을 매몰차게 쳐낸다. 대충 입을 닦고 일어서려는데 그만 현기증과 함께 몸이 휘청, 하고 옆으로 기울어진다. 지훈이 급하게 받쳐 안았지만 덕이는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에 도무지 몸을 제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정신이 아득해지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탓일까, 작지만 큭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던 거 같은데. 아 젠장. 정신 차려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정신을 차리려고 하면 할수록 의식은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오전 내내 하늘이 회색빛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더니 점심이 지나기 시작하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신이 창가 앞에 서서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밖을 내다봤다. 신호가 몇 번이나 울렸지만 덕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있으라고 했더니 답답하다고 징징거려서 사무실에 두고 나왔는데 그 사이 집 밖으로 나간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비가 제법 올 것 같지?”

영신이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김 여사가 차를 내와 테이블에 올려놓는 중이었다. 영신이 집을 한 번 둘러봤다. 전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는데 항상 있던 일하는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닌 어디 가셨어요?”

“내보냈어.”

영신이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왜요?

“편한 건 좋은데 오래 같이 지내다 보니 공사를 구별 못 하더라고. 나 그런 거 싫어하는 거 박 대표도 알잖아.”

영신이 소파에 앉자 김 여사가 찻잔 하나를 영신에게 내준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래서 박 대표 좋아해. 공사 구별 확실하고, 남들은 냉정하다 욕할지 몰라도 일하는 데 있어서 자기만 한 파트너는 찾기 쉽지 않으니까.”

영신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칭찬이에요?”

“그럼 욕일까 봐?”

그녀가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데 영신이 대번 인상을 구긴다. 담배 연기를 유독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김 여사가 금색 케이스에 열어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어때?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야?”

“글쎄요.”

“대답이 신통치 않네.”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영신의 눈동자가 잠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꼬리는 둘째치고 비실거리는 게 영 신경 쓰였다. 헛구역질에 음식을 가리면서 임신한 사람처럼 구는 것도 거슬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슬며시 입술을 깨무는데 김 여사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였다.

“무슨 걱정 있어? 안색이 좋질 않네. 생전 넋 놓고 있는 법 없으면서 말이야.”

“…아니에요.”

“그래서 언제쯤이면 가능할 것 같아? 의뢰인이 슬슬 애가 닳는지 어젠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더라고.”

영신이 몸을 소파에 기대고 허리를 곧게 폈다. 잠시 입을 달싹이며 고민하다가 김 여사를 향해 물었다.

“의뢰인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김 여사가 눈을 크게 뜨고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생전 의뢰인이 누군지 관심 없었고, 저번만 해도 자긴 돈만 있으면 된다더니 왜 마음이 바뀐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영신을 빤히 쳐다봤다.

“생전 안 묻던 걸 물어.”

“그렇게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까지 주면서 구미호를 가지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요.”

어마어마한 돈이란 말에 김 여사가 피식 웃었다. 그 돈을 두 배로 올려 달라고 했던 게 누구더라. 그때의 당참은 어디 가고 오늘 영신은 전과 다르게 수척하고, 피곤해 보였다. 그게 구미호를 찾는 일과 관련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 여사는 직감적으로 일에 차질이 생겼음을 알아챘다.

“설마… 데려다 잡아먹거나 그러려는 건 아니죠?”

영신이 스스로 말해놓고도 웃긴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소, 닭도 아니고, 여우를 잡아먹는다니.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인간에게 여우는 그저 동물일 뿐이다. 소나 닭처럼.

영신을 빤히 쳐다보던 김 여사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를 만들었다.

“왜 필요한가는 나도 몰라. 다만 박 대표와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지. 그러니 너무 알려고 하지 마. 그러다 일이 틀어지면 그들한테 타깃이 되는 건 우리일 테니까 말이야.”

웃으며 농담인 듯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고 영신은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는 알고 있다고 해도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더 묻는다면 괜한 의심만 살 것 같아 이쯤에서 관두기로 했다. 근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졌을까. 의뢰인이 누군지, 구덕이를 데려다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그때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린다. 그녀가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휴대전화를 들고 안방 쪽으로 들어간다. 김 여사의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영신이 소파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가만히 눈을 감고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문득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덕이다. 이 자식이 전화해도 안 받더니.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로 가져가는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온다.

[박영신 씨 전화입니까?]

“맞는데, 누구세요?”

[강지훈입니다.]

영신이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발신자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덕이의 휴대전화 번호가 맞는데 어째서 강지훈이 제게 전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 왜 걔 휴대폰을 가지고 있죠?”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쓰러졌습니다. 의식은 있는데, 계속 잠만 자서요. 오늘은 여기다 재우고 깨면 돌려보내겠습니다.]

뭐? 영신이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앞쪽에 테이블이 밀리면서 충격으로 찻잔이 바닥에 떨어졌고, 쏟아진 차가 바짓단으로 튀어 얼룩을 만들었다. 하지만 영신은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 미친 자식이 지금 뭐라고 했어? 누굴 어디서 재워?

“기다려요. 내가 지금 갈 테니까.”

***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향하는 내내 영신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김 여사 집에서 이곳까지 차를 몰고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오는 내내 명치에 돌이 걸린 것처럼 답답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하고 초조해 하는 자신을 보며 영신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김 여사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도 어이없었지만, 덕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이렇게 서둘러 온 것도 이상하긴 했다. 그 사이 강지훈이 덕이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제 돈이 날아갈까 봐 그런다고 설득하기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으로 오는 내내 지훈이 했던 말이 귓가에 계속 거슬렸기 때문이다.

[만약 박영신 씨만으로 안 되면 저한테 부탁하세요. 전 언제든 해드릴 마음이 있으니까요.]

띵. 18층에서 문이 열리고 영신이 내렸다. 저벅저벅 걸음이 빨라졌고, 곧 1807호라고 적힌 문 앞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니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물기가 묻어 있는 지훈의 얼굴이 보였다.

“금방 오셨네요?”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영신이 안으로 밀고 들어와 거실 쪽을 살폈다.

“어디 있습니까.”

그 모습을 보며 지훈이 슬쩍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계속 헛구역질을 하다가 지금은 방에서 자고 있어요.”

방에서 잠들었다는 말에 영신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간다. 서늘한 얼굴로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덕이가 이불을 덮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속에서 미묘한 파동이 친다. 게다가 언제 갈아입혔는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챘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훈이 말했다.

“제가 갈아입혔어요. 옷이 지저분해졌길래요.”

“그랬군요.”

“건조기에 넣고 돌렸는데 지금쯤이면 다 말랐을 겁니다. 가져올게요.”

“감사합니다.”

입으론 기계처럼 감사하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게 번뜩였다. 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보이지 않게 웃음을 삼켰다.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서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별말씀을요. 덕분에 덕이 씨 알몸도 봤는걸요.”

덕이를 쳐다보던 영신이 고개를 돌려 지훈을 노려봤다. 말속에 다분히 영신의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냐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더니 이번엔 조금 더 영신을 건드려본다.

“네. 만져보고 싶은 걸 참느라 애먹었어요.”

영신이 그런 지훈을 빤히 쳐다보다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야. 일어나.”

냉랭한 목소리로 부르는데 덕이는 꿈쩍도 하질 않는다. 야. 조금 더 소리를 높이자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손을 뻗어 몸을 흔들어 볼까 하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지훈이 덕이의 어깨 쪽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놓는다.

“덕이 씨. 일어나봐요. 덕이 씨.”

다정한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며 덕이가 비몽사몽 한 얼굴로 영신을 쳐다봤다. 영신이 덕이의 어깨를 잡고 있는 지훈의 손과 멍한 덕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싸늘하게 내뱉었다.

“일어나. 집에 가게.”

으음. 덕이가 눈을 비비더니 그대로 상체를 일으킨다. 단추가 몇 개 채워지지도 않은 셔츠가 스르르 어깨까지 내려가며 한쪽 가슴이 다 드러났다. 영신이 이를 까득 물며 그 옷을 끌어당겨 어깨를 다시 덮었다.

눈을 느리게 끔벅이던 덕이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 영신의 집이 아닌 걸 확인하더니 눈이 곧 커다래졌다.

“…어? 나 왜 여기서 잠들었지?”

그 물음에 옆에 있던 지훈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기억 안 나요? 계속 구역질하다 기절했어요.”

아. 덕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속이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럽더니, 결국 기절한 건가. 자고 일어났더니 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멀쩡해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배도 고팠다.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게 시원한 물이나 아니면 아삭한 오이를 먹고 싶어졌다.

얼른 집에 가서 오이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걷어내는데 아랫도리가 허전하다. 바지는 물론 팬티도 없다. 몸뚱이에 걸쳐진 게 셔츠 하나가 전부라니.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지훈을 보는데 옆에 있는 영신의 얼굴이 살벌하게 굳어진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걷었던 이불을 슥 끌어와 맨다리를 덮었다.

어색한 분위기에도 지훈은 생글생글 웃었다.

“옷 가져다줄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지훈이 방을 빠져나가고 나서 덕이가 슬며시 영신을 쳐다봤다. 눈 떴을 때부터 앞에서 얼마나 노려보는지 얼굴에 구멍이 뚫리는 건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 이해는 됐다. 집에 얌전히 박혀 있으라고 했는데, 말 안 듣고 여기서 자빠져 자고 있으니 열 받을 만도 하겠지.

“…잠깐 올라온 거야.”

웅얼거리며 변명하는데도 영신은 노려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지훈이 다 마른 덕이의 옷을 가져왔다. 그걸 내밀자 덕이가 침대에서 내려와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있던 지훈의 셔츠를 벗는다. 몸이 전보다 더 하얗고 티끌 한 점 없이 매끈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신은 등 뒤에 서 있는 지훈이 신경 쓰였다. 덕이가 뭉그적거리길래 얼른 입으라고 쏘아붙이고 나서 몸을 돌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훈이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여유작작한 얼굴로 덕이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저희는 그만 가볼게요. 오늘 고마웠어요.”

“별말씀을요. 덕분에 난 즐거웠는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쳤지만 덕이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영신이 그만 가자며 지훈을 지나쳐 방을 나섰다. 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보았던 영신의 눈에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자신이 자극제가 된 것 같아 즐거워졌다.

***

덕이가 오이를 문 채로 영신의 방 앞에서 서성였다. 집에 오는 내내 말이 없던 영신은 집에 오자마자 씻는다고 들어가더니 도통 나올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다. 아삭, 아삭, 오이를 먹으며 방문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히익, 놀래서 뒤로 한발 물러서니 영신이 옷을 갈아입고서 얼굴에 물기를 머금은 채 나오는 중이었다. 잠시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덕이가 오이를 입에 물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영신이 그대로 주방 쪽으로 향한다.

덕이가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서 냉장고 문을 여는 영신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영신아. 뭐 해?”

“밥 먹게.”

“…나 배 안 고파.”

덕이가 오이를 아삭 베어 물더니 영신의 등 뒤로 조금 더 붙어 선다. 고개를 옆으로 내밀고 무얼 하나 봤더니 냉장고에서 꺼낸 소고기를 손질하기 위해 포장을 막 벗겨내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뱃속에서 꼬르르 요동을 친다. 덕이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이상하다. 아까는 안 고팠는데.”

“가 있어. 다 되면 부를 테니까.”

“내가 뭐 도와줄까?”

“아니.”

“야채 씻을까?”

“아니.”

“화났어?”

“아니.”

목소리는 분명히 화난 거 같은데, 이상하다. 옆으로 서서 영신의 표정을 보려고 고개를 기울이는데 영신이 슥 쳐다보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순간 영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고기를 자르다 칼날이 손끝을 스쳤기 때문이다.

덕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 소리를 질렀다.

“피다!”

“젠장.”

영신이 물을 틀고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흐르는 물에 시뻘건 핏물이 섞여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어 갔다. 생각보다 칼날이 날카로워 깊숙하게 들어갔는지 피는 도통 멈추질 않았다. 덕이가 좀 보라고 하자 영신이 짜증 섞인 말투로 저리 가라고 말했다.

“봐봐. 내가 봐줄게.”

“네가 의사도 아니고, 보면 알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됐으니까 저리 가.”

“이리 줘보라니까.”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덕이가 영신의 손을 붙들고 제 눈앞으로 가져갔다. 피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보는 덕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많이 베었다.”

“놔, 이제.”

영신이 팔을 빼려는 찰나 덕이가 그 손을 제 입으로 가져가더니 입 안에 손가락을 넣는다. 영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손가락에 혀가 닿더니 젖을 빠는 아이처럼 쪽쪽 빨아먹는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며 손을 빼내려고 하자 덕이가 손을 붙들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뭐 해?”

혀로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손가락을 문지르는 느낌에 영신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 와중에도 끼를 부리나 싶어 쳐다보고 있다가 그만하라며 손을 빼내는데 어쩐지 손끝이 이상하다. 입 안에서 빼낸 손을 내려다보며 영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칼날에 베인 상처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니 덕이가 뿌듯한 얼굴로 브이를 만들어 보인다.

“성공.”

“뭐야, 너?”

“원래 여우는 치유 능력이 있어. 나는 힘이 약해서 별 소용이 없었는데, 너한테 정기를 몇 번 받고 났더니 생겼지 뭐야. 저번에 화단에 말라 죽은 풀이 있었거든. 내가 마음속으로 살아나라 살아나라 하면서 만졌는데, 다음날 보니 살아났더라. 신기하지?”

그 말에 영신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진다.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잖아?”

신이 나서 떠들던 덕이가 당황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그야… 너는 꼬리 말고는 관심 없는 거 같아서….”

“그게 다야?”

“뭐?”

“정말 그 이유가 다야?”

자신을 꿰뚫듯 바라보는 영신을 보며 덕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배시시 웃었다. 그럼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리고 나서 거실 쪽으로 향했다. 아삭아삭 경쾌하게 오이를 씹어먹는 소리가 영신의 귓가에 들렸다.

영신이 조금 전 덕이의 입에 들어갔던 손을 쳐다봤다. 감쪽같이 없어진 상처를 보고 있으니 놀라웠다. 지금도 저 상태면 꼬리가 아홉 개가 되면 어느 정도 힘을 갖게 되는 걸까. 내가 감당할 수 있기는 하게 되는 걸까. 처음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덕이는 소파에 앉아 이쪽을 보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하게 티브이를 켜는 중이었다. 오이를 입으로 먹으면서도 곁눈질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덕이가 아이스크림 통을 든 채 창밖을 내다봤다. 낮엔 비가 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쳐 밤하늘이 맑기만 했다. 창가 앞에 앉아 환하게 보이는 달을 구경하다 밑을 내려다보니 아파트 단지와 조금 떨어진 공원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산책을 하는 게 보였다.

방에서 나오던 영신이 그 모습을 보고 곁으로 다가왔다. 덕이는 저녁으로 준비한 고기와 채소를 가뿐히 먹어치우고 나서 후식으로 과일을 먹더니 이젠 아이스크림까지 통으로 비우는 중이었다.

“그만 먹고 들어가서 자.”

“싫어. 여기서 구경할 거야.”

“그러다 또 아프다고 하려고?”

“아니야. 지금은 괜찮아. 거짓말처럼 멀쩡해졌어.”

“들어가. 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신경 쓰여.”

영신의 다그침에 덕이가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막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간다고 했더니 영신이 포기하고 나서 주방 쪽으로 향한다. 컵에 물을 따라 마시던 그는 창가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덕이를 바라봤다. 어깨를 움츠리고 하늘에 걸린 커다란 보름달을 쳐다보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 맞게 느껴진다. 물컵을 씻어 헹구고는 그쪽으로 다시 다가갔다.

“보름달은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변신이라도 하려고?”

“그게 아니라 달을 보니까….”

“보니까?”

“빵 먹고 싶다.”

“뭐?”

“빵. 동그랗고 하얀 빵.”

보름달을 쳐다보던 영신이 인상을 찡그렸다. 여태 달 보면서 먹을 걸 생각했단 말인가. 아니 그건 둘째치고 여태 먹었으면서 또 먹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배 속에 거지가 들어있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있잖아, 영신아. 나 요즘 이상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막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다니까.”

“너 말이야, 혹시….”

“혹시 뭐?”

영신은 말을 꺼내놓고도 선뜻 묻지 못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사내끼리 그 짓을 해서 아기가 생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덕이가 호국에선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한 게 내내 마음에 걸리고 찜찜했다. 영신이 더는 말이 없자 덕이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밖에 나가고 싶다.”

“빵은 내일 먹어.”

“그게 아니라… 바람도 쐬고, 저기 물가 옆에서 산책하고 싶어.”

덕이가 손을 들어 강가 옆 공원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저도 거기에서 좀 걷고 싶다고 말이다. 영신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바짓단을 잡고 흔들었다.

“가면 안 될까?”

“피곤해.”

“잠깐만 산책하고 오자. 나 요즘 집에만 갇혀 있으니까 너무 심심해. 마음도 울적하고, 몸까지 이러니까 정말 죽겠어.”

덕이의 말을 들으며 영신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고 뺀질거리고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갇혀 있으니 답답하긴 할 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덕이의 몸을 노리던 녀석이 보이지 않는단 거였다. 어디 숨어서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난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으로썬 그 녀석보다 더 위험한 게 18층에 사는 강지훈이었다. 속을 꼭꼭 감추고 자꾸 덕이에게 접근하니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들끓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덕이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제발 나가자며 애원을 한다. 내려다보던 영신이 하는 수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정말? 덕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쁜 얼굴로 웃었다.

“그럼 인태랑 미자도 데려가자.”

“왜.”

“오늘 일 없다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데려가자. 넷이 같이 산책하러 가자.”

덕이는 들떠서 이미 마음이 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된다고 하려 했으나 지나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고, 덕이가 신이 나서는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공원은 밤늦게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신이 주위를 살폈다. 물에 빠져 죽은 물귀신부터 시작하여 온갖 귀신들이 물가 근처에 모여 있었다. 물은 음기가 강하기 때문에 떠도는 영들을 끌어당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이 영신을 보고 피하는 게 느껴졌지만, 영신 또한 제게 해코지하는 게 아니면 참견하고 싶지 않아 그냥 모른 척했다. 며칠 만에 콧바람을 쐬는 게 좋았는지 덕이는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그 곁에는 미자가 동행하며 밤하늘과 경치를 구경 중이었다.

하지만 인태는 이 늦은 밤에 무슨 산책이냐고 입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하여튼 구덕이 저거 사람 귀찮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인태 너도 나오니까 좋지 않아?”

“아니. 안 좋아.”

“영신아, 너는?”

덕이가 고개를 돌려 묻는데 앞쪽에서 자전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해서 영신이 재빨리 가서는 덕이를 잡아당겼다. 가까스로 충돌은 면했지만, 자전거 운전자는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쏘아붙이더니 저 멀리 사라졌다. 그걸 보던 미자가 울컥해서는 욕을 쏟아냈다.

“저 개잡놈의 새끼, 저거! 눈깔을 궁둥이에 달고 다니나. 지가 잘못해놓고 왜 큰소리야, 이 개새끼야!”

뜻하지 않은 미자의 욕설에 덕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자 욕도 잘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제 팔을 붙들고 있는 영신의 얼굴도 보였다. 전 같으면 덕이에게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고 뭐라고 할 텐데, 웬일인지 그는 자전거 탄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태와 미자가 그 모습을 보며 슬며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영신이가 지금 걱정하는 거 같지?”

“설마.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데.”

“아니야. 저 눈빛 봐봐. ”

“조금 그래 보이긴 하네.”

“쉿. 그만하자. 다 들리겠다.”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바로 코앞에서 쑥덕거리면서 다 들릴까 봐 걱정하다니. 망할 것들. 그때 미자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잔디밭 한쪽으로 향했다. 덕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잔디밭 옆으로 해바라기가 잔뜩 피어 있었다. 미자가 그 앞으로 가서는 양손을 모으고 황홀한 얼굴로 꽃을 구경했다.

“예쁘다!”

“미자야. 꽃 좋아?”

“응. 해바라기 꽃 정말 좋아.”

“왜?”

“크잖아.”

“커서 좋아?”

“응. 꽃이나 고추나 일단 크고 봐야 해.”

그 말에 덕이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자는 역시 배운 여성이라고 추켜세우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카메라로 미자의 모습을 찍어주려고 했지만, 사진엔 꽃만 보일 뿐 미자의 모습을 찍히질 않았다.

“사진이 나오질 않네….”

찍어주고 싶었는데. 시무룩한 덕이의 얼굴을 보고 미자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마음만이라도 너무 고마워.”

“그래도 아쉽잖아. 우리… 이거 꺾어갈까?”

“아니야. 꽃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예쁜 법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에 덕이가 감탄한 얼굴로 미자를 쳐다봤다.

“누가?”

미자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어디서 주워듣긴 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덕이도 덩달아 웃었다.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먼 거리에서 지켜보던 인태가 영신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봐, 박 대표.”

“왜.”

“너 저 여우를 어쩔 셈이야?”

“그건 왜 묻는데.”

“꼬리가 생기면 김 여사한테 넘길 거라고 했잖아. 정말 그럴 셈이야?”

“응.”

단호한 대답에 인태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덕이가 얼떨결에 꼬리가 생기면 도망친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딱히 덕이를 위한 건 아니었다. 그냥 찝찝해지기 싫어서였다. 덕이가 뭘 하든 상관은 없지만, 어딘가로 끌려가 끔찍한 일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았다. 물론 미자가 영신에게 알리지 말라며, 말하는 순간 너랑은 절교하겠다고 팔짝팔짝 뛴 게 제일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그때 인태가 걸음을 멈췄다. 영신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가던 덕이가 무언가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는 영신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강아지 두 마리가 서로 엉겨붙어 짝짓기하는 중이었는데, 동물원에서 있었던 그 일이 떠올랐다.

데리고 나온 주인이 난감해 하며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한번 불붙은 녀석은 쉽사리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자는 어머머 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중이었고, 덕이는 입을 헤 벌리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는 중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영신이 인상을 쓰며 그쪽으로 다가가 덕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돌아보는 덕이의 눈이 음흉하게 빛나며 반짝였다.

“영신아, 우리 짝, 읍.”

영신이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짓으로 그만하라고 경고를 보내자 덕이가 미간을 좁히며 읍읍, 소리를 냈다. 입을 틀어막은 채로 한 번 더 눈짓했고, 그제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미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왜 말 못하게 해? 짝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영신이 한 번 더 노려보고는 손을 떼었다. 덕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미자는 덕이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견디다 못한 영신이 날도 덥고 습하니 그만 들어가자며 덕이의 팔을 낚아채 재빨리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인태와 미자가 팔짱을 낀 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둘이 했군. 했어.

씻고 나온 덕이가 베개를 끌어안고 영신의 방문 앞에서 알짱댔다. 문은 굳게 닫혀 좀처럼 열릴 기미가 없어 보였다. 산책하다 영신에게 붙들려 집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공원에서 강아지 두 마리가 붙어 짝짓기하는 걸 본 다음부터 하고 싶은 욕구가 들끓었다.

하지만 영신은 잠들었는지 도통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얼른 꼬리가 나오게 하려면 저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천하태평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속도 조금씩 울렁거리기 시작해 낮처럼 또 기절할까 봐 그것도 걱정이었다.

방문 손잡이를 잡아 슬며시 돌리는데 굳게 잠겨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덕이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영신아! 박영신. 역시나 대답이 없다. 손톱으로 문을 드드드 드드드 긁다가, 아이고 나 죽네, 비명도 질렀다가, 별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문 앞에 쪼그려 앉아 베개를 끌어안고 기대 있는데 잠시 후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영신이 잠옷을 갈아입은 채 저를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는 줄 알았잖아.”

“시끄럽게 하지 말고, 네 방 가서 자.”

“너랑 자고 싶어. 안 돼?”

“어. 안 돼.”

영신이 그대로 문을 닫으려 하는 순간 덕이가 그 문을 붙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덕이가 제발 들여보내 달라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애원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아이처럼 엉엉 울던 얼굴이 떠오르면서 겹친다. 영신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덕이가 안으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점프해서 누워버렸다.

어찌나 빠른지 잡을 새도 없었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돌아보니 덕이는 베개를 끌어안고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당겨 덮고는 자는 척을 했다. 밖으로 끌어낼까 하다 관두고는 문을 닫고 침대 쪽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에 덕이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쥐죽은 듯 있었다. 침대에서 영신의 향기가 나서 그런지 울렁거리는 속도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침대가 움직이더니 방 안이 어두워졌다.

살그머니 실눈을 뜨고 보니 영신이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있는 게 보였다. 널찍한 등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등을 살살 만지는데 미동조차 없다. 벌써 자는 건 아닐 텐데, 무시하는 건가. 괜히 심술이 나서 이번엔 손가락으로 꾹꾹 찔렀더니, 잠시 후 영신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만해.”

“영신아… 짝짓기하자.”

“싫어.”

“왜. 얼른 내 꼬리가 나와야 너도 좋은 거 아니야?”

그 말에 영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꼬리가 나올 기미는커녕 자꾸 일이 꼬이는 것 같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등 뒤로 느껴지는 덕이의 끈질긴 시선을 무시한 채 벽에 걸린 그림을 쳐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두면 잘 줄 알았더니 이번엔 허리로 손이 슥 들어온다. 덕이가 등 뒤에 바싹 붙어서는 영신의 허리를 껴안았다. 따뜻한 체온과 쿵쿵 심장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영신아아.”

아양을 떠는 말투에 영신이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나서 몸을 돌렸다. 덕이가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떨어지라고 한마디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지금 하자. 내가 술 가져올까?”

“…….”

“하자아.”

무시하고 다시 돌아누우려는데 덕이가 영신의 몸 위로 냉큼 올라온다. 영신이 노려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버텼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려가.”

“한 번만 하자.”

“피곤해.”

그 말에 덕이가 인상을 구겼다. 하기 싫은 건지 정말 피곤한 건지 모르겠지만, 툭하면 피곤하다고 하니 걱정이 됐다. 막상 하면 엄청 잘하던데.

“…그럼 넌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할게.”

“그만하지? 침대 밑으로 던지기 전에.”

“알았어. 던지더라도 한 번 하고 던져.”

뻔뻔스럽게 말하더니 엉덩이를 영신의 성기에 대고 앞뒤로 비비고 문지른다. 영신이 인상을 구기며 떼어내려고 하자 덕이가 상체를 숙이며 입술을 오므렸다. 영신이 그 입을 손으로 막자 이번엔 덕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뽀뽀해줘.”

“싫어.”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고 하면 꼬리는 대체 언제 만들 건데!”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영신이 입술을 틀어막은 채로 가만히 노려봤다. 한참의 기 싸움 끝에 영신이 손을 떼어내자 덕이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그대로 가볍게 입을 맞추자 엉덩이에 깔린 성기가 점점 빳빳하게 부푸는 게 느껴졌다.

입가에 쪽쪽, 입을 맞추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정성스럽게 핥았다. 영신은 입을 꾹 다문 채 여전히 저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덕이는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몇 번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덕이의 몸이 휘청하고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순식간에 영신이 위로 올라왔다.

덕이가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눈을 깜박였다.

“…놀래라.”

놀랬다는 말과는 다르게 덕이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 나왔다. 영신이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맹해 보이다가 영악해 보이다가.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지 감을 못 잡겠다. 덕이가 손을 위로 뻗어 영신의 뺨을 감싸 쥐었다.

“영신아… 키스해줘.”

“…….”

“키스해줘. 응?”

[아껴주는 마음. 위해주는 마음.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된 거란다. 무슨 말인 줄 알겠니? 꼬리를 나올 수 있게 하는 건 저 애를 진심으로 대할 때 가능한 거지.]

영신이 잠시 갈등하더니 천천히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더는 꼬리가 나오지 않는 거 보면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술을 겹치고 부드럽게 혀로 핥아주니 덕이가 천천히 입을 벌린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유혹하더니 혀가 들어가니 어쩔 줄 몰라 하고 입 안에서 방황하는 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혀를 문질러주고 치열을 핥아주니 으응, 소리를 내며 영신의 팔을 붙들고 몸을 움찔 떨었다.

그 와중에도 손을 아래쪽으로 뻗어 영신의 바지 속에서 성기를 끄집어냈다.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를 꺼내서는 아래위로 문질러주자 영신의 미간이 점점 좁아진다. 포개졌던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서 덕이가 숨을 몰아쉬었다.

태어나서 키스는 처음이었다. 호국에서 뽀뽀는 누구와 해도 상관없었지만, 키스는 특별한 사람과 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저 같은 천덕꾸러기 반호에게 그런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이곳으로 넘어와 몸을 팔면서도 끝까지 입술을 내어주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영신을 보니 갑자기 키스가 하고 싶어졌다. 평소엔 독설을 쏟아내는 입이지만 지금은 아주 부드럽고 며칠 전 먹은 솜사탕보다 더 달콤했다. 잔뜩 풀린 얼굴로 영신을 쳐다보는데 바지가 슥 내려갔다.

그대로 영신이 덕이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더니 제 것도 마저 벗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두 개의 살덩이가 맞닿았다. 영신이 가운데 자리를 잡고 위로 손을 뻗어 서랍 안에 있던 젤을 꺼냈다.

그 젤을 손바닥에 가득 짜내어 성기에 문지르더니 기둥을 붙들고 끝을 덕이의 애널에 맞췄다. 덕이가 양다리를 좌우로 활짝 벌린 채로 영신이 삽입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애널 끝에 귀두가 닿더니 곧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아, 신음을 냈다. 파랗게 솟아오른 핏줄이 내벽을 긁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발가락이 저절로 오므라졌다. 완전히 삽입되어 맞물리자 영신이 상체를 아래로 내려 몸을 포갰다.

천천히 뒤로 엉덩이를 뺐다가 퍽, 하고 박아 넣을 때마다 덕이가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들썩였다. 손을 뻗어 영신의 뺨을 다시 쥐고 애원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영신이 이번엔 선뜻 입술을 포개어온다.

입 안으로 들어온 영신의 혀를 쉴 틈 없이 핥고 비볐다. 꿀이 흐르는 것처럼 달아서 멈출 수 없었다.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때마다 덕이는 다시 영신의 뺨을 끌어다 제 입술을 물게 했다.

“키스, 으응, 너무, 좋아, 좋아, 영신아.”

처음엔 아무런 생각 없이 입술을 핥던 영신의 눈동자가 점점 검은색으로 가라앉았다. 애초에 이럴 마음은 없었는데. 시작은 꼬리가 생기는 것 때문에 마지 못해서였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이 행위 자체를 즐긴다는 걸 깨달았다.

퍽퍽, 성기가 애널에 박히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덕이가 두 다리로 영신의 허리를 감싸며 더해달라고 보챘다. 몇 번이나 좋다는 말을 하면서 영신의 입술을 놓아줄 생각을 않는다. 점점 세게 박다 보니 덕이의 머리가 침대 헤드에 자꾸 부딪혔다.

영신이 삽입된 성기를 빼내고 덕이의 허리를 잡고 아래로 내린 다음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졸지에 엎드린 자세가 된 덕이의 엉덩이를 벌리고, 움질거리는 구멍 사이로 제 성기를 다시 밀어 넣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쑤셔서 벌려놓았는데도 구멍은 처음 성기를 무는 것처럼 빠듯하게 조이며 먹어치웠다. 뿌리까지 깊숙하게 삽입하고 나니 시트에 얼굴을 묻고 헐떡이는 덕이가 보였다. 매끈하게 빠진 등허리부터 시작해 복숭아처럼 솟아오른 엉덩이까지.

양손으로 볼깃살을 꽉 움켜쥐며 그대로 뒤로 한껏 뺐다가 꽉 쑤셔 넣었더니 자지러지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나쁘지 않아 자꾸 같은 짓을 반복하다 보니 속도가 빨라졌다.

“으응, 아아, 영, 신아, 아아.”

끈적한 신음과 살 부딪히는 소리가 정신없을 정도로 뒤섞인 상태에서 속도를 높이던 영신이 덕이의 등에 제 가슴을 밀착하며 숨을 멈췄다. 큭, 짧은 신음과 함께 정액이 내벽 안으로 울컥울컥 쏟아졌다. 동시에 덕이가 침대 시트에 사정하며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둘 다 잠시 숨을 고르는데 몸 아래 깔려 숨을 몰아쉬던 덕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영신이 왜 그러냐고 물을 틈도 없이 덕이가 몸을 위로 움직였다. 스륵, 애널에 박혀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고 덕이가 침대에서 내려와 입을 틀어막은 채 욕실 쪽으로 뛰어갔다.

예고 없이 벌어진 상황에 영신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욕실 입구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욱, 욱,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영신의 얼굴은 점점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

석현은 밤늦게 찾아온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일 동물들과 씨름하느라 지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터였다. 낮에 응급 수술한 강아지가 있는데 위독한 상태라 집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는데, 예상치도 못한 손님이 방문한 것이다. 잠이 묻어 있는 얼굴을 비비며 문을 열어주자 영신과 덕이가 밀고 들어왔다.

“…형,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부탁 하나만 하자.”

다소 심각한 영신의 얼굴을 보고 석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물 병원 의사인 저한테 영신이 부탁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일단 들어오라고 하고 나서 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덕이가 안으로 들어오자 안에 있던 동물들이 난리가 났다. 고양이들은 꼬리를 세우고 하악, 소리를 냈고, 강아지들은 매서운 기세로 짖어댔다. 석현이 물잔을 내려놓고 케이지 쪽으로 가서 동물들은 진정시켰다.

“얘들아, 좀 조용히 하자. 왜 그래? 응?”

덕이가 영신의 등 뒤로 숨었다. 영신이 그런 덕이를 끌고 진료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덕이가 사라지자 동물들도 서서히 진정됐다. 석현이 영문을 모르겠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민한 녀석들은 낯선 이들을 보면 반응하긴 하지만 이렇게 단체로 난리를 피우는 건 드문 일이었다. 자려고 벗어두었던 안경을 쓰고 나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는 영신과 덕이가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일단, 너 이리 와서 앉아봐.”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영신이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마주 잡은 채 잠시 침묵했다. 생전 없던 일이라 석현은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 옆에 앉은 덕이가 눈에 들어왔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영신의 옆에 앉아서는 졸린 지 연신 눈꺼풀을 비벼댔다.

대체 둘이 무슨 사이길래 이 오밤중에도 붙어 다니는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집에 누군가를 들이는 법이 없는 영신이 데리고 있는 것부터가 수상쩍었다. 정말 애인이라도 되는 걸까?

“초음파 좀 찍어보자.”

온갖 상상을 하던 석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초음파? 무슨 초음파?

“동물 배 속 찍는 초음파 있지?”

있긴 하지만 그걸 왜 찾는지 모르겠다. 어디 강아지라도 숨겨서 데리고 온 거냐고 농담을 건넸지만 심각한 영신의 얼굴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 옆에 앉은 덕이를 가리키면서 찍을 수 있냐고 묻는다. 석현이 눈을 끔벅이며 멍청한 얼굴로 어? 하고 되물었다.

“얘 배 좀 찍어봐. 자꾸 속이 메슥거린다고 하는데….”

뭐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석현이 기막힌 얼굴로 영신을 쳐다봤다. 데리고 온 이유가 다름 아닌 배 초음파를 찍기 위해서라니. 저번에 다쳤을 때도 이곳으로 데려오더니,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다.

“형… 여긴 내과가 아니야. 동물 병원이라고.”

“알아.”

“아는데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배만 확인해줘.”

“위장병 같은 걸 초음파로 어떻게 알아?”

“그냥… 배 안에 뭐가 있는지만 봐주면 돼.”

“뭐가 뭔데?”

“하여튼 보기나 해. 더는 묻지 말고.”

석현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한밤중에 동물 병원에 와서 사람 배 속을 봐달라는 것도 기막힌데 아무것도 묻지 말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영신이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기댄다.

“저번에 말한 서류 가져와. 사인해줄 테니까.”

무슨 서류냐고 따지려던 석현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돈다. 그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덕이에게 손짓했다. 조금 전까지 짜증을 내더니 입이 헤벌쭉 벌어지고 있었다.

“일어나요, 덕이 씨. 우리 초음파 찍으러 가요.”

“그게 뭔데… 난 싫어.”

“에이, 별거 아니에요. 금방 끝나요. 얼른.”

석현은 혹시나 영신의 마음이 변할세라 덕이를 재촉했다. 자신이 들르는 몇몇 유기견 센터의 사육 환경이 너무 열악했는데, 제힘으로 거기까지 꾸려가는 건 한계가 있었다. 저번엔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길래 단념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재빨리 움직였다. 그러면서 영신을 향해 확답을 받아놨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일단 찍기나 해.”

덕이가 마지못해 석현을 따라가 보니 쇠로 된 널찍한 판이 있었다. 석현이 그 위를 가리키며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여기에 올라가서 누워봐요.”

덕이가 쭈뼛거리면서 영신을 쳐다봤다. 영신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덕이가 그 위로 올라가 누웠다. 사각 판은 비좁아서 다리를 구부려야 할 정도로 불편했다. 몸을 꿈틀거리고 움직이자 잠시 후 석현이 기계를 켜고 무언가를 꺼내 든다. 그가 장갑을 끼고 튜브를 이용해 젤을 쭉 짜자 덕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야! 엉덩이는 안 돼!”

뜻밖의 외침에 석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엉덩이? 옆에 있던 영신은 낭패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초음파용 젤을 보고 러브젤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덕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려오려고 하길래 영신이 덕이의 팔을 붙들고 다시 누우라고 말했다.

“영신아, 셋이 할 생각이야?”

“하긴 뭘 해. 그만 입 다물고 누워.”

“네 동생은 내 취향 아니야.”

“쟤도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일단 누워서 윗옷 올려.”

그 말에 덕이가 석현을 흘긋 쳐다보더니 바지도 내리느냐고 묻는다.

“바지는 됐어.”

덕이가 티셔츠를 배꼽 위까지 올린 채로 가만히 누워있자 석현이 조금 전 오간 대화를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물도 아니고 사람한테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젤을 짜서 덕이의 배에 발랐다. 차가운지 덕이가 인상을 구겼다.

“미안해요. 잠깐만 참아요.”

“괜찮아. 영신이 동생.”

영신이 동생은 또 뭐야.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하단 말이지. 초음파 기계를 배에 대고 슬슬 문지르자 화면에 배 속이 나타난다.

“내가 살다 살다 사람 배 속을 이걸로 볼 줄이야….”

“입 다물고 자세히 봐. 뭐 보여?”

“보이긴 뭘 보여. 장기밖에 더 있어.”

“잘 봐봐.”

영신이 눈을 반짝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전에 병원에서 복부 초음파를 한 번 해본 적이 있는데 그거와 별 차이는 없어 보였다. 혹시라도 뭐가 보일까 싶어 눈에 힘을 주는데 초음파 기계가 옆구리 쪽으로 이동하자 덕이가 간지러운지 크큭, 소리를 내며 몸을 비튼다.

“잠깐만요. 움직이시면 안 돼요.”

“너무, 간지러워. 흐흐.”

“좀 참으세요.”

그러더니 다시 위쪽으로 올라와 살핀다. 개나 사람이나 장기에 이상이 있으면 대충 초음파로도 보이긴 할 텐데 덕이의 배 속은 깨끗하기만 했다. 영신이 찾으려고 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종양은 아닌 듯싶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병원에 갔겠지만.

“아무리 봐도 없어.”

“조금 더 아래쪽으로 봐.”

“대체 뭘 찾는지나 말해주든가! 답답해 죽겠네.”

“더, 더 아래쪽.”

“아,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까?”

석현이 모니터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올렸다. 어어? 이상하다는 듯 소리를 내더니 조금 전 배꼽 아래 부위를 다시 기계로 살핀다. 뭔가 콩알만 한 게 보였다. 종양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 또렷하게 동그랬다. 기계를 그 자리에 고정한 채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영신이 저게 무어냐고 묻는다. 아랫입술을 슥 잡아당겼다가 놓으며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는 모습에 석현은 고개만 갸웃댈 뿐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만. 이게… 뭐야? 도무지 뭔질 모르겠네.”

“왜 몰라? 너 의사잖아.”

“말은 바로 하자. 동물 병원 의사거든. 그리고 의사가 신이야? 이거 가지고 다 알게?”

“뭔지 알아내는 게 좋을걸. 아니면 후원금은 없을 줄 알아.”

뜻밖의 협박에 석현이 기막힌 얼굴로 영신을 봤다. 배 속을 갈라본 것도 아니고, 땅콩보다 작은 크기의 저게 뭔지 어떻게 아느냐고 따지며 억울해 했다. 대체 뭘 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더 답답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그래야 내가 의사적 소견으로 말이라도 해줄 테니까.”

그 말에 영신이 입을 다물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석현은 어디 가서 입을 가볍게 놀릴 사내는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 찾아온 것도 있었기에 영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임신.”

기계를 움직이던 석현의 손이 멈췄다. 잘못 들었나 싶은 마음에 영신을 보며 방금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덕이를 쳐다봤다. 덕이는 여전히 모니터 속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이제야 영신이 저를 여기 끌고 온 게 어느 정도 이해되는 눈치였다.

“영신아….”

“임신인지 확인해줘.”

“있잖아, 영신아. 네가 오해하는 거야.”

“아닌 걸 아는데, 그래도 확인이 필요해.”

“무슨 확인을 해. 나는 임신 같은 거 못한다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석현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외계어로 떠드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어린 총각이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왔단 말인가. 아… 하하… 하하하. 미친 듯 웃으니 영신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간다. 석현이 눈치를 살피며 웃음을 갈무리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 진짜… 형….”

“이상한 거 알아. 그냥 확인만 해달라는 거야.”

“확인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혹시 술 먹었어? 덕이 씨, 우리 형 술 먹었죠?”

“아니야. 영신이는 짝짓기할 때 빼곤 술 안 먹어.”

그 말에 석현이 기막힌 얼굴로 웃다가 버럭 성질을 냈다.

“이 사람들이! 장난하나, 진짜!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해!”

“그러니까 확인해 달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아니라고 확신하는 거야? 장담해?”

“왜 이래, 진짜.”

“확실히 말해. 진짜 아니란 거지?”

진지한 영신의 태도를 보며 석현이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돈만 좋아하더니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행색이며 말투, 행동거지도 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근데 어떻게 멀쩡한 정신으로 임신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아아. 뒤통수를 잡고 나서 다시 기계를 들고 아까 그 부위에 가져다 댔다.

“잘 봐봐, 형. 이게 태아처럼 보이는지 말이야.”

영신이 화면 속을 노려봤다. 초음파로 태아를 본 적이 없으니 그게 뭔지 알 리가 없었다. 덕이도 덩달아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작고 동그란 그것은 화면 속에도 너무 뚜렷한 모양이었다.

“참나. 어딜 봐서 이게 태아야? 응? 막 움직이기라도 하면 또 몰라.”

석현이 따지듯 묻다가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억!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초음파 기계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놀라기는 영신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배 아래쪽에 있던 그것이 배꼽 위로 슥 올라갔기 때문이다.

“뭐, 뭐야! 이게!”

화면을 쳐다보는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굳어버렸다.

***

배가 남산만 하게 부른 덕이가 아프다고 울고불고 소리를 질렀다. 영신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덕이가 이동 침대에 실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영신이 초조한 얼굴로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는데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간호사가 흰 천으로 무언가를 감싸서 밖으로 나온다.

“구덕이 씨, 보호자 분.”

네. 영신이 급하게 다가가니 간호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흰 천으로 감싼 그것을 영신 쪽으로 건넸다. 축하합니다. 건강한 딸입니다.

영신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얼마나 작은지 얼굴이 천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것이 진짜 내 아이인가. 떨리는 마음으로 그 천을 살포시 들추는데 새카만 머리 위로 쫑긋 솟아오른 귀가 보인다.

영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머리카락만 새카맣게 있을 뿐 다른 것은 완벽한 여우의 모습이었다. 충격받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데 갓 태어난 새끼 여우가 구덕이를 닮은 새카만 눈으로 저를 쳐다보면서 입을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기어이 소리를 낸다.

“아빵?”

헉. 영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나서 옆을 보니 덕이가 제게 다리 한 짝을 올려놓고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그 다리를 들어 치우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욕실로 가서 찬물을 틀고 몇 번이나 푸우, 푸우, 세수를 했다. 거울을 노려보는데, 몇 시간 사이 수척해진 자신의 얼굴이 들어온다. 수건을 빼서 물기를 대충 닦고 밖으로 나오니 덕이는 빈자리가 허전했는지 몸을 웅크린 채 이불을 끌어안고 자는 중이었다.

“참, 속도 편하군.”

[임신, 말도 안 돼. 정 그러면 피검사라도 해보든가.]

밖으로 나와 소파에 기대앉아 석현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피검사라. 괜히 했다가 일만 더 번거롭게 만들 수도 있었다. 석현은 영신을 술 취한 미친놈 쳐다보듯 하며 임신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건 당사자인 덕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대체 뭘까. 곰곰이 생각하던 영신의 머릿속으로 얼마 전 덕이가 영신의 상처를 치료하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놀이공원에서 잠시였지만 엄청난 힘을 밖으로 내보이던 것도. 혼란스럽던 그의 얼굴이 차츰 굳어진다.

설마, 구슬인가.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영신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구슬이 생겼다면 꼬리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어째서 꼬리가 하나인 거지. 게다가 구슬이 생겼다면 덕이 자신이 제일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본인은 아무런 자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저것은 둔탱이라 모를 수도 있겠군. 아 젠장, 도무지 모르겠다. 이마를 짚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렸더니 덕이가 베개를 끌어안고 방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영신아. 왜 안 자고 있어?”

잔뜩 잠에 취한 얼굴로 걸어와서는 영신의 다리를 베고 그대로 드러눕는다. 조금 전 꿈에서 본 아기 여우의 모습이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다리를 뺄까 하다 관두고는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들어가서 자.”

덕이는 눈을 꼭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말했는데도 소용없길래 눈꺼풀을 손으로 쭉 잡아당겼더니 크흐,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안 자는 줄 어떻게 알았어?”

“그럼 모를 줄 알았어? 들어가서 자.”

“왜 여기 나와 있어? 잠이 안 와?”

“잠깐 깬 것뿐이야.”

“내가 임신이 아니라 실망한 거야?”

“말을 말자.”

“그럼 왜 깼는데?”

몰라도 돼. 조금 전 꿈이 다시 생각나서 뒷골이 당겼다. 손을 목 뒤로 뻗어 주무르며 고개를 위로 향하게 했다.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구나 생각했다. 덕이가 누운 채로 손을 위로 뻗어 그런 영신의 얼굴을 만졌다.

턱이랑 뺨을 문지르는 행동에 영신이 그 손을 잡아서 떼어 냈다. 하지 마. 그러다 문득 덕이에게 묻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여우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 배 속에 들어있는 게 뭔지 말이다. 치유 능력이 생긴 걸 숨겼다는 사실만 봐도 알지 않나. 일부러 속이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 별거 아니라 말하지 않은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네 배 속에 있는 거.”

“응?”

“구슬이지?”

그 말에 덕이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구슬 아니야. 구슬이라면 배에 있는 게 아니었다. 명치 위쪽으로 올라와 있어야 정상인 건데, 제 것은 배꼽 아래에 붙어 있지 않았던가.

“확실한 거야?”

“아무리 내가 반쪽짜리 여우라도 구슬이 어디 있는 건지는 알아.”

“잘 생각해 봐.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진짜 아니거든?”

“맹세할 수 있어?”

“어. 맹세해. 진짜 이게 구슬이면 내가 여우가 아니라 개다.”

“여우나 개나.”

그 말에 덕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어떻게 개와 나를 비교할 수 있느냐고 버럭 성질을 냈다. 파르르 떠는 모습을 보고 영신이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볼 땐 여우나 개나 고양이나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

“그만하고 들어가 자. 난 오늘 여기서 잘 테니까.”

“왜? 같이 자자.”

“생각할 게 좀 있어.”

“그래, 알았어. 그럼… 난 자러 간다.”

어쩐 일로 순순히 베개를 챙기더니 영신의 방 쪽으로 향한다. 당연한 듯 그리로 향하는 모습에 기가 찼지만 별다른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곧 덕이가 사라졌고, 영신이 그대로 소파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들을 떠올리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전화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울린다. 영신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니 김 실장에게 온 메시지였다.

[강지훈 신상 확보하였습니다. 내일 보내 드릴게요.]

***

덕이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인상을 찡그렸다. 덥다. 왜 이렇게 덥지. 게다가 얼굴에 머리카락이 자꾸만 달라붙어 성가셨다. 손으로 문지르는데 어쩐지 간지럽다.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었던가. 잠결에 잠시 생각하다 눈을 떴다.

새벽에 영신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잠들었는데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고 몸을 돌리는데 눈앞으로 무언가 홱 지나간다. 뭐지? 방금 하얀 건. 귀신인가.

고개를 조금 더 뒤쪽으로 돌렸다가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기합을 넣지도 않았는데 꼬리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꼬리의 개수가 어쩐지 이상하다. 잠결에 헛걸 보나 싶어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확인하다가 그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뒤를 돌아보며 조금 전 보았던 것을 다시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세상에, 하나였던 꼬리가 자고 나니 다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뭐지, 꿈인가?”

볼을 세게 꼬집고 머리카락도 잡아 당겨봤지만, 분명 꿈은 아니었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가서는 거울 앞에서 섰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입이 쩍 벌어졌다. 등 뒤로 구름처럼 하얀 꼬리 5개가 살랑이면서 움직였다.

비명이 터져 나올 거 같아 입을 틀어막고서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어젠 분명 하나였는데. 그러다 영신이 새벽에 제게 묻던 것들이 떠올랐다. 진짜 배 속에 그게 구슬이란 말인가.

너무 좋아 양 주먹을 쥔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뛰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신이다. 재빠르게 욕실 문을 닫고서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영신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뚝, 끊긴다. 잠시 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덕이가 문을 두 번 두드리고 나서 불안한 얼굴로 거울을 쳐다봤다. 양손을 모으고 얍, 기합을 넣었는데 무슨 일인지 꼬리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맙소사.”

다시 똑똑, 소리와 함께 영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안에서 뭐 해?]

덕이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나, 나 쉬, 쉬하려고. 왜?”

이상하게도 대답이 없다. 돌아갔나 싶어 문에 귀를 대고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다행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휴우, 돌아갔나 보다. 불안한 눈빛으로 다시 거울을 쳐다보니 조금 전까지 있던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면서도 어쩐지 아쉬웠다. 이따가 영신이 없을 때 제대로 봐야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다가 하마터면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분명 간 줄 알았는데, 영신이 침대에 앉아 제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는데 영신이 일어서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다.

“안 일어나는 것 같길래, 깨우러 왔어.”

“아, 아…. 그랬구나.”

“밥 먹자. 나와.”

영신이 피식 웃더니 거실 쪽으로 나간다. 그가 방 밖으로 나간 후에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아, 놀래라. 기절하는 줄 알았네. 그래도 다행이다. 눈치를 못 챈 거 같으니 말이야.

***

[부모님 돌아가신 거 빼면 특별할 게 없습니다.]

영신이 팩스로 받은 강지훈의 신상을 살폈다. 김 실장의 말대로 깔끔하다 못해 털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외동아들에다 부모가 사망했는데, 주위에 일가친척도 없다니. 군 생활, 대학 생활 동안 접점이 될 만한 동기들을 찾아봤는데 이상하게도 기억하는 이가 없단다. 그 사실에 더 기가 막혔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만들어 낸 것처럼 서류만 있을 뿐 실체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단 전에 살던 곳부터 뒤져봐. 사망한 가족들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

문득, 영신의 걸음이 멈췄다. 제 방으로 막 들어서는데 침실에 있어야 할 덕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욕실 쪽을 보는데 한 뼘 정도 열린 문틈 사이로 흰색 솜뭉치 같은 게 보인다.

아침부터 꼬리는 꺼내놓고 뭐하는 짓이야. 한심하게 바라보던 영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런. 틈으로 보인 꼬리는 얼핏 봐도 하나가 아니었다.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김 실장이 여보세요? 소리를 낸다. 조용히 뒷걸음질 치며 방 밖으로 나가 일부러 소리를 내서 전화를 받았다. 순간 탁, 욕실 문이 닫혔고, 정적이 찾아왔다.

“이따 통화하자. 끊는다.”

그쪽으로 가서 똑똑, 노크했다. 잠시 후 똑똑, 안쪽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진다. 가만히 귀를 대고 안쪽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안쪽에서 덕이도 저와 같은 자세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안에서 뭐 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나, 나 쉬하려고. 왜?]

평소답지 않게 말도 더듬고 목소리도 불안정했다. 다시 침묵이다. 평소라면 문을 벌컥 열고 나와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말이다. 천천히 걸어가 침대에 앉았다. 욕실 문 쪽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덕이가 나온다.

침대에 앉아 있는 영신을 보고 기겁하더니 애써 표정을 수습한다. 눈빛은 갈피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움직였고, 팔다리의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웠다. 그걸 보는 영신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밥 먹자. 나와.”

거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안도의 한숨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왔다. 주방으로 향하는 영신의 한쪽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얼씨구, 요것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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