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치하던 예주가 욕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요 며칠 잠을 잤더니 그나마 나아지긴 했지만, 얼굴이 푸석하니 영 말이 아니었다. 입을 헹구느라 상체를 살짝 숙이는데 거울 속 예주의 얼굴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다. 눈동자만 밑으로 내려 거울 밖에 있는 예주를 보고 있었다.
예주가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는데 어쩐지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억지로 입을 벌려 웃으니 그 모습마저 다른 사람같이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누가 제 흉내를 내는 듯하여 목 주변으로 소름이 돋았다.
무서운 마음에 바로 외면하고 몸을 돌려 욕실 밖으로 나왔다. 욕실 문을 꼭 닫은 채 방 안을 한 번 빙 둘러봤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스킨을 바르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곧 문이 열리더니 새엄마인 혜란이 나타났다. 그녀가 오더니 예주의 책상 위에 무언가를 툭, 올려둔다.
봤더니 아빠가 보낸 손편지다. 아빠는 해외에서 오래 머무를 때마다 예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메일이 아닌 직접 쓴 손글씨를 통해 멀리서나마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뜯어봐. 뭐라고 적혀있나?”
“...이따가 볼게요.”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니?”
“네?”
혜란은 심사가 꼬였다. 결혼하고 다 누리고 사는 건 사실이지만, 어쩐지 남편의 마음이 온전히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이 여자애 때문이다. 얘만 없으면 모든 게 내 차진데. 남편도 이 집도 재산도. 예주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잠시 살기가 감돌다 사라지더니 곧 손을 뻗어 예주의 뺨을 어루만졌다.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얼굴이 갈수록 안 좋아지네?”
예주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리며 그 손을 떼어냈다.
“그런 거 없어요.”
“있으면 말해. 그래도 내가 네 엄만데, 문제가 있으면 알아야 하지 않을까?”
“......”
“그럼, 자.”
아, 맞다. 나가려던 그녀가 잘 때는 불을 다 끄고 자라고 했다. 요 며칠 불이 계속 켜져 있더라면서. 돈 한 푼 안 벌면서 그렇게 전기를 낭비하면 되겠느냐고 말이다. 예주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가 양쪽 입꼬리를 슥 말아 웃더니 방을 빠져나간다.
탁, 문이 닫히고 방 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예주가 편지를 뜯었다. 보고 싶은 우리 딸로 시작하는 그 편지를 찬찬히 읽고 나서 그대로 접었다. 그러고 나서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엔 어릴 때부터 예주가 모아오던 여러 가지 것들이 다 들어있었다. 엄마가 어릴 때 만들어준, 추억이 담긴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예주의 시선이 문득 어느 한 곳에 닿았다. 오색실로 만들어진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게 여기 있었네.”
잠시 추억에 잠기다가 그대로 편지와 함께 상자 속에 넣고 서랍 제일 아래 칸에 다시 집어넣었다. 툭, 서랍이 닫히고 허리를 펴는데 순간 거울 뒤로 누군가 홱 지나간다. 몸을 돌렸을 땐 아무도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나서 방 안을 살폈다. 침대로 올라가 모서리 쪽에 앉았는데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며칠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었다. 팔에 돋아난 소름을 손으로 문지르고 나서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덮었다.
내일 학교 가려면 자야 하는데. 피곤은 물밀 듯 밀려왔지만 차마 눕질 못하였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나서 그 상태로 있다가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어릴 적 부모님과 갔던 놀이동산에 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제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엄마를 찾으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데 문득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니?”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꿈인가. 잠시 멈춘 듯했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자니? 무의식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그 목소리에 예주가 잠에서 깨어났다.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는 너무 다정해 묘한 이질감을 주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예주가 이불 속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잠잠하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게 느껴졌다. 숨까지 참으며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제발 가. 저리 가.
한참이 지나니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간 걸까. 슬그머니 눈을 뜨던 예주가 흡, 숨을 멈췄다. 바로 눈앞에 저와 똑같은 자세로 누운 여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은 흰자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모두 까맸다. 덜덜 떠는 예주를 보며 여자가 피식 웃었다. 안 잤네…?. 테이프를 늘린 듯 늘어지는 목소리에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공포에 몸이 점점 잠식되어가는 찰나 갑자기 여자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지더니 사라진다.
예주가 헉, 하고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덩달아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불을 켜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오다 그만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엉금엉금 기어가서 불을 켜니 방 안이 훤해진다.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다. 침대로 돌아가려 했지만 한번 풀려버린 다리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멍한 얼굴로 허공만 쳐다봤다.
미자가 팔짱을 낀 채로 짝 다리를 짚고 서서 앞에 서 있는 여자 귀신을 노려봤다. 갑자기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온 귀신은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여자 귀신이 다짜고짜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빽 쏘아붙였다.
“너 누구 허락받고 여길 들어와?”
“참나. 일하는 걸 허락까지 받아야 해요?”
미자가 기막힌 얼굴로 노려봤다. 영신에게 일을 안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선뜻 알았다고 하길래 웬일인가 싶었다. 그새 다른 귀신을 보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알겠다고 말한 게 관둔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긴 박영신이 누군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제 잘못이다.
“하여튼 여기 얼씬거리지 마. 내 구역이야.”
“귀신끼리 무슨 네 구역 내 구역을 따져요. 조폭이야 뭐야. 정규직이라고 유세 떠는 거예요?”
뭐? 미자가 한쪽 팔짱을 풀더니 위압적인 자세로 처녀 귀신에게 다가간다. 처녀 귀신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피했다. 귀신들 사이에서도 성깔 더럽기로 소문난 미자였기에 함부로 굴었다간 뒤끝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경고했다. 다른 데 알아봐. 한 번 더 이 근처에서 내 눈에 띄면, 혼내줄 테니까.”
처녀 귀신이 시무룩한 얼굴로 홱 돌아서더니 그대로 가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미자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2층을 올려다보니 예주의 방 안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봤길래 망정이지.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예주가 침대 구석에 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울었는지 눈이 새빨개져서는. 미자가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인태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하지만 초췌한 예주의 얼굴이 마음에 걸려 도무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예주가 침대로 내려온다. 마음이 좀 진정된 걸까. 옷장을 열더니 그 안쪽 깊숙한 데서 무언가를 꺼낸다. 사진첩이었다. 그걸 보는 미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설마, 내가 정말 쟤 엄만가.
사진첩을 품 안에 꼭 안은 예주가 ‘엄마… 보고 싶어.’라고 말한다. 미자는 마음 한쪽이 콕콕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예주가 침대에 앉아 사진첩을 펼친다. 미자가 천천히 걸어가 그 앞으로 가서 섰다. 고개를 쭈욱 빼고 가만히 내려다보니 사진이 보인다.
어릴 적 예주인 것 같았다. 놀이동산에서 찍은 사진. 공원에서 뛰어노는 사진. 그리고 유치원 발표회 기타 등등. 항상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아니었다.
미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제 딸이라고 하면 반가운 마음보다 이렇게 힘들게 지내는 것에 더 마음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도 누군가에게 가족이었을 텐데.
앨범이 넘어갈수록 예주의 표정이 편안해진다. 미자도 그 옆에 앉아서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예주의 곁을 지켰다.
***
영신아! 영신아, 일어나봐! 영신아!
영신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젠 꿈에서도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건가 싶어서. 그랬는데 꿈이 아니다. 목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부스스 눈을 떠보니 덕이의 얼굴이 보였다. 보름달처럼 환하게 펴져서는 활짝 웃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위로 뻗어 시간을 확인하니 7시다. 하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나 꼬리!”
뭐? 꼬리란 말에 영신이 스프링 튕기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드디어 생겼구나! 활짝 웃는 덕이를 보니 확신이 든다. 그랬는데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니 덕이가 턱을 치켜들며 잘 보라고 한다.
영신이 눈빛을 반짝였다. 드디어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를 보는 건가. 덕이가 합장하듯 손을 모으고 얍! 기합을 넣는다. 그러자 등 뒤로 꼬리 하나가 살랑, 하고 튀어나온다. 덕이가 뛸 듯이 기뻐하며 봤느냐고 물었고 영신의 표정은 바로 일그러졌다.
“뭐야?”
“뭐가.”
“꼬리 나왔다며.”
“이거 꼬리잖아!”
“나머진 어디 갔는데?”
“나머지라니?”
“아홉 개 아니야?”
“아직 한 갠데?”
영신이 욕을 뱉었다. 호들갑을 떨길래 아홉 개라도 생긴 줄 알았더니. 아니 아홉 개까진 아니어도 반이라도 생겨야 하는 거 아닌가. 꼴랑 하나가 말이 돼? 하지만 덕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꼬리를 흔들고 쓰다듬고 얼굴에 문질렀다. 행복해 좋아죽는 표정이었다.
“전엔 어쩌다 튀어나왔는데, 이젠 내 마음대로 나와. 신기하지?”
영신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존나 신기해서 미칠 지경이다. 어제 욕실에서 두 번이나 더 했는데도 꼬리는 하나가 나왔다. 그것도 원래 있던 거. 전엔 의지대로 나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덕이는 아주 신이 나 있었지만 영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게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넌 참 좋겠다.”
“왜.”
“소박해서.”
“난 소박하지만 너의 구박을 견디며 꼬리가 생길 거라는 대박을 꿈꾸고 있지, 예압.”
“뭐냐, 그거.”
“인태가 가르쳐줬어. 랩이래. 나 잘해?”
“닥치고 나가.”
치.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꼬리도 축 늘어진다. 영신이 그 모습을 흘깃 봤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확실히 꼬리에 윤기가 생기고 튼튼해 보이긴 했다. 전엔 비 맞은 개털 같더니.
덕이는 영신의 구박에도 좋아서 꼬리를 만지고 비비고 난리였다. 그러면서 너도 한번 만져 보겠느냐고 묻는다. 영신이 말없이 쳐다만 보자 덕이가 가까이 가서는 꼬리를 영신 쪽으로 움직인다.
살랑살랑 강아지풀처럼 생긴 하얀 꼬리를 보고 있으니 얘가 정말 여우구나, 실감이 났다. 영신이 손을 뻗어 그것을 만졌다. 생각보다 더 부드럽다. 꼬리를 만지니 덕이가 뺨이 발그레해져선 입을 헤에 벌린다.
“표정이 왜 그래?”
“몰라. 성감댄가 봐.”
하아.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들어서는. 손을 떼고 나니 기분이 좋다고 더 만져달라고 안달이다. 매섭게 툭 꼬리를 쳐내자 덕이가 눈을 흘긴다. 좀 더 만져주지! 영신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갔다. 덕이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영신이 주방에서 물을 마시니 아예 턱을 받치고 앉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섰다.
“그렇게 좋아?”
영신의 물음에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오늘 밤 또 하잔다. 아니, 지금 하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많이 할수록 더 늘어날 것 같다고 말이다. 전보다 꼬리도 더 튼튼해진 느낌이고 몸에 힘도 넘치는 것 같다면서. 그러면서 자꾸만 영신에게 들러붙으려고 한다. 영신이 곧바로 이마를 밀어냈다.
“날도 더운데 들러붙지 마.”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냉장고를 열어 덕이가 좋아하는 오이를 꺼냈다. 토스트와 간단한 샐러드로 아침을 해결하려던 참이었다. 몸을 돌리는데 조금 전까지 옆에서 종알거리던 덕이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 갔는지 거실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스마일 소리에 맞춰 덕이가 꼬리를 얼굴에 붙이고 손가락을 브이로 만들었다. 그걸 보는 영신이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여우 주제에 셀카는 무슨.
순간 덕이의 전화벨이 울린다. 오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려던 영신이 멈칫했다. 전화를 어제 사줘서 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아침부터 광고 전화일 리는 더더욱 없고 말이다. 고개를 빼고 그쪽을 쳐다보는데 덕이가 전화를 귀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오이를 한 손에 들고 벽에 기대서서 가만히 쳐다보는데 덕이가 배시시 웃는다.
“너 어젯밤엔 일찍 잔 거야?”
너? 영신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친근하게 통화하는 꼴을 보는데도 누군지 감이 오질 않는다. 인태나 미자는 절대 아닐 테고. 그새 밖에 나가서 친구라도 사귄 건가, 신경이 쓰였다. 누굴 만나든 말든 그건 제 알 바 아니지만 그 일로 인해 영신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그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심히 지켜보는데 그럼 알겠다고 하더니 통화를 마친다. 오이를 든 채로 영신이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
“18.”
“뭐?”
덕이가 검지로 천장을 가리킨다. 18층에 사는 사람. 영신은 기가 막혔다. 가까이하지 말라던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게 분명했다.
“전에 도움받은 게 있는데…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뭘 도와줬는데.”
덕이가 입을 달싹였다. 꼬마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천도시켜준 걸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인태와 미자한테도 말했으니 어차피 나중에라도 알게 될까. 나쁜 일도 아닌데 그거 가지고 화를 내진 않겠지.
“실은 저번에….”
덕이가 사실대로 털어놓으니 영신의 표정이 슬며시 일그러진다. 뒤늦게 덕이가 눈치를 살폈다. 괜히 말했나.
“네가 그렇게 질투가 난다고 하면 따로 연락하진 않을게.”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질투?
“상관없으니 만나. 잘됐다. 만나서 걔한테도 정기 받으면 되겠네. 꼬리나 빨리 나오게.”
그 말에 덕이가 눈을 길죽하게 접으며 위로 치켜떴다.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화를 낼까 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 같아서 그럼 그러겠다고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아침엔 걔랑 하고 밤엔 너랑 하면 되겠다. 꼬리 금방 나오게.”
“좋은 생각이야.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서 하지?”
“그러지 뭐. 내가 장담하건대 너보단 잘할걸! 혹시 알아? 걔랑 하면 꼬리가 하루 만에 나올지!”
그 말에 영신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태연하게 받아쳤다.
“나야 고맙지. 얼른 가서 하고 올래?”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오이를 덕이에게 건네준다. 아침을 걸렀으니 이거나 먹고 가서 힘내서 하고 오란다. 덕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봤지만, 영신은 대놓고 비웃을 뿐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덕이가 그 오이를 홱 낚아채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영신이 몸을 돌려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럼 열심히 하고 와. 난 아침 먹을 테니.”
순간 탁, 영신의 머리 위로 무언가 날아와 충격을 줬다. 윽. 영신이 인상을 구기며 몸을 돌리니 덕이가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바닥엔 두 동강 난 오이가 나뒹굴었다. 영신이 그걸 확인하고 덕이를 노려봤다.
“너 지금 나한테 오이 던졌어?”
“그래! 이 등신아!”
“이게 진짜. 혼나볼래?”
영신이 위협적인 얼굴로 다가오는데 덕이가 떨어진 오이 반쪽을 재빠르게 주워들더니 그대로 현관 쪽으로 튄다. 잡을 새도 없이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서 현관문을 열더니 눈 깜짝할 새 쾅 닫고 나가버렸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덕이가 사라진 쪽을 노려봤다.
“저게, 진짜.”
드륵, 마침 덕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가만히 노려보고 있던 영신이 상체를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발신자가 강지훈이다. 18층에 사는 그놈 이름인가. 다시 현관 쪽을 쳐다봤다가 인기척이 없는 걸 알고 내용을 확인했다.
[오늘 괜찮으면 점심에 우리 집 와서 같이 식사해요.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
쯧. 짜증 섞인 얼굴로 삭제 버튼을 누르고 남자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러고 나서 전화기를 툭,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
“그만 울어. 또 무슨 일인데 그래?”
미자가 엉엉 울고 있는 덕이를 달랬다. 옆에 있던 인태에게 눈짓을 보내며 네가 좀 어떻게 해보라고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밤새 일 하고 와서 좀 쉬려나 하는데 이 요망한 구미호가 엉엉 울면서 사무실로 쳐들어온 것이다. 신발은 짝짝이로 신고 한 손엔 부러진 오이 하나를 들고서 말이다. 인태는 오이가 왜 아침부터 덕이의 손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혹시 엉덩이에… 에이, 아니겠지.
“으으윽, 박영신 개잡놈 고자새끼이, 으흐흑.”
지켜보던 인태가 시끄러워죽겠으니 그만하라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덕이가 움찔해서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만 들썩이며 흐느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을 보자 미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덕아. 존나 귀여워. 카메라 있으면 나 사진 하나 찍어도 돼?”
지켜보던 인태가 변태 같은 것들끼리 만났다고 혀를 찼지만 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덕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줬다. 그만 울라고 위로해주니 어느덧 울음을 멈추긴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영신이가 너한테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
“그랬겠냐. 꼴을 봐. 들이대다 한 대 쳐 맞은 거지.”
덕이가 어느덧 눈물을 멈추고 오이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어먹었다. 아침부터 눈물을 질질 짰더니 배가 고프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대성통곡을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이를 먹는 모습에 인태가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울다 처먹다… 가지가지 한다.”
슷. 미자가 하지 말라고 인태를 째려봤다. 그러면서 덕이의 등을 토닥여줬다. 먹어야 기운도 나는 거라면서. 그때 현관 쪽에서 띠리릭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남아있던 오이를 손에 움켜쥐고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잽싸게 엎드렸다.
지켜보던 인태가 꼴값한다고 욕을 했지만 그대로 엎드려 누운 채 꿈쩍하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영신이 나타났다.
“아침부터 박 대표가 어쩐 일이야? 혹시 얘 데리러 왔어?”
인태가 손가락으로 소파에 엎어져 있는 덕이를 가리켰지만, 영신은 쳐다도 보지 않고 미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아. 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향했다. 대충 영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현관문이 닫혔다. 인태가 엎드려 있는 덕이를 발로 툭 건드렸다.
“야. 박영신 갔어.”
동시에 덕이가 고개를 삐죽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닫힌 현관문을 한번 슥 노려보더니 손가락 반 마디만큼 남은 오이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어쩌냐. 너 데리러 온 게 아닌데.”
“…나도 아닌 줄 알았어.”
“웃기시네.”
“…진짜야.”
진짜야. 인태가 덕이의 흉내를 내더니 옆자리에 앉아서 현관문을 가만히 지켜봤다. 얘기가 길어지려나. 영신이 미자를 부른 건 아무래도 그 예주인가 하는 여자애 때문일 것이다. 그 일을 다른 데 맡겼는데 미자가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가서 훼방을 놓은 모양이었다. 괜히 싫은 소리 듣는 거 아닐까. 아침부터 마음이 좋지 않아 도무지 현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래서? 관두라고?”
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를 괴롭히는 일을 더는 하고 싶다고 하지 않다고 하자 영신은 알겠다고 하더니 다른 귀신을 보냈다. 왜 그렇게 그 아이가 눈에 밟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아이까지 괴롭혀 가며 돈을 버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영신이 일을 시작할 때도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십 대 중반이라고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돈 때문이면 내 돈으로 대신할게. 네가 그 여자한테 돌려줘.”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아직 어린애야.”
“그래서? 네가 안 한다고 해서 그 여자가 관둘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네가 아니라도 그 여자가 애한테 해코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왜 그걸 생각 못 해?”
미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영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돈을 돌려준다고 해도 여자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예주를 괴롭힐지 모른다. 어쩌면 더 악랄하고 잔인해질지도 모르지. 그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네가 정 하기 싫다면 관둬. 대신 아무것도 하지 마. 전처럼 방해할 생각이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널 이해할 순 있지만 룰을 어기는 건 용납 못 해.”
잠시 망설이던 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곧 무슨 생각에선지 그냥 자신이 한다고 나선다. 다른 귀신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제가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속내를 뚫어 보듯 영신이 미자를 빤히 쳐다본다.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선뜻 그럼 그렇게 하란다.
“그럼 이야긴 끝난 거다? 갈게. 들어가.”
영신이 먼저 몸을 돌린다. 미자가 그런 영신을 불러세웠다.
“박 대표.”
“왜.”
“…혹시… 알아봤어? 내가 전에 부탁한 거….”
영신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젓는다. 알아는 봤지만 별다른 건 없다고 했다. 미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누군지 궁금해서 영신에게 따로 부탁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남아있는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쉽게 찾아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부탁 좀 할게….”
“알겠어. 찾으면 바로 말해주지.”
미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그럼 가보라며 사무실 안으로 슥 들어가버렸다. 그 모습을 영신이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자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제 고객을 실망하게 한 적은 없었다. 일이 틀어지면 평판이 안 좋아지는 건 물론, 괜한 시비에 걸리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집으로 가려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사무실 문을 노려본다. 아까 덕이가 저를 보고 후다닥 소파에 엎드려 모른 척하던 게 떠올라서 기가 막혔다. 잘 먹여야 꼬리도 나올 텐데. 빈속에 오이를 아작아작 씹어 먹던 게 생각나 잠시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러다 곧 관두고는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미자와 덕이가 나란히 붙어 앉아 한숨을 푹 푹 내쉬었다. 인태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자는 영신과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았는지 시무룩해 있었고, 덕이도 눈이 퉁퉁 부어서는 입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너네 그러고 있으니 되게 웃기다.”
“…말 걸지 마. 말할 기분 아니야.”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박 대표가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라고 했지?”
듣고 있던 덕이가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인태가 넌 몰라도 된다고 했더니 덕이가 눈을 하얗게 흘긴다. 맨날 저만 빼고 말도 안 해주느냐면서. 혹시 도와줄 수 있는 거면 제가 돕겠다는 말에 인태가 대놓고 비웃었다.
“돕긴 개뿔. 질질 짜지나 마.”
“…치.”
곰곰이 생각하던 미자가 눈빛을 반짝였다. 영신의 말대로 어차피 그 여자가 예주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이상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게 우선일 듯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혼자 힘으론 어려웠다. 그렇다면….
“덕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기도 해.”
뒤이어 미자가 꺼낸 말에 인태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미자가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인태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며 말렸다. 하지만 덕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모자라 주먹까지 불끈 쥐여 보이며 의지를 불태웠다.
“내가 도와줄게, 미자야!”
“덕아. 고마워.”
“야, 구더기. 넌 나서지 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나서면 괜히 일만 더 망쳐.””
“이번엔 잘할 수 있어. 저번에 그 꼬마도 내가 천도시켜줬다니까.”
“이건 천도의 문제가 아니야. 잘못해서 경찰에 걸리기라도 하면 넌 철창행이야. 네가 사람과 다르다는 걸 그들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걸. 해부한 다음 유리병 안에 네 장기를 넣어두고 전시관에 진열할지도 모르지.”
무시무시한 말에 덕이의 얼굴이 구겨진다. 미자가 하지 말라며 인태의 옆구리를 콱 후려쳤고, 인태가 얻어맞은 옆구리를 붙들고 앓는 소리를 냈다. 덕이의 얼굴이 너무 심각했기에 미자가 선뜻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인태의 말대로 걸리면 자신들은 어차피 귀신이니 상관없지만 덕이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덕아…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미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 그냥 할래.”
“…그래도….”
“네가 나 힘들 때마다 위로해줬으니까, 나도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정말? 미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덕이에게 가서 목을 꽉 껴안아주며 정말 고맙다고,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덕이의 뺨이 발그레해지자 인태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아주 둘이 죽이 잘 맞는구만. 꼬리도 없는 여우가 뭘 돕겠느냐고 빈정거리는데 덕이가 갑자기 미자를 떼어내고 나서 손을 합장하듯 모으고 얍 기합을 넣는다. 순간 덕이의 등 뒤로 꼬리가 불쑥 생겨났다.
“봤지?”
“귀엽다! 꼬리털 하얀 것 좀 봐!”
“에게? 겨우 하나야?”
“겨우라니! 이거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얼마나 뭐?”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떠벌리고 다니면 영신이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으니 세세하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제 꼬리를 뺨에 대고 비비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고기도 많이 먹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참나. 인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미자는 그런 덕이가 사랑스러워 그 꼬리를 매만져줬다.
“꼬리가 있으니 정말 여우 같다!”
“응! 얼른 아홉 개로 늘어났으면 좋겠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인태가 비웃었다. 어차피 꼬리가 늘어나도 넌 자유가 아니라고 못 박는다. 영신에게 빚진 것도 있으니 그가 분명 널 팔아넘길 거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던 덕이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괜찮아. 나도 다 생각이 있거든. 듣고 있던 인태가 무슨 꿍꿍이냐고 물었지만, 덕이는 대답 대신 배시시 웃기만 했다.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영신이 제 차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타려는데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몸을 돌렸더니 18층에 사는 지훈이 어느새 다가와 서 있었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도 보질 못했는데 어디 있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온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네.”
지훈이 영신의 등 뒤쪽을 흘깃 살핀다.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곧바로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시선을 거둬들인다.
“덕이 씨는 오늘 없나 봐요?”
얼마나 봤다고, 친근하게 이름까지 부르는 걸 보니 속이 뒤틀렸다.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저와 같다는 걸 알았지만, 어쩐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건 덕이 때문이 아니라 남자 자체 문제였다.
“없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지훈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곧 무언가를 하나 꺼낸다. 영신이 덕이에게 준 작은 인형이었다. 위치추적기를 붙여놓은 구미호 인형 말이다. 그가 그걸 손바닥에 올린 채 내밀었다. 영신이 말없이 그걸 빤히 쳐다만 봤다.
“며칠 전 저희 집에 왔다가 두고 갔습니다. 찾을 거 같아서요.”
직접 주면 되는 거지 이걸 왜 저한테 주는지 의중을 모르겠다. 영신이 그걸 가만히 보다 손을 뻗어 가져갔다. 전해주도록 하죠. 그대로 몸을 돌려 차 문을 열려는데 지훈이 가지 않고 등 뒤에 서 있는 게 느껴진다. 모른 척 차 문을 잡아당기는데 그가 다시 영신을 불렀다.
“그럼 덕이 씨는 집에 있습니까?”
그 말에 영신이 멈칫했다. 휴대폰으로 온 메시지를 지우고 번호까지 차단해버리긴 했는데 어쩐지 쉽게 떨어져 나갈 폼이 아니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저런. 아쉽네요. 점심이나 같이 할까 했는데요. 휴대전화가 생겼다고 메시지가 왔는데 도통 연락이 안 돼서요.”
“그것까진 제가 잘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어쩔 수 없죠, 뭐.”
그럼 가세요. 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영신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운전석에 타서 시동을 걸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덕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어쩐 일인지 받질 않는다. 아침에 그 일 때문에 단단히 열 받았군.
다시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집으로 올라갈까 고민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별일 없겠지. 잠시 망설이다 차를 빼냈다.
코너를 돌아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치는데 지훈이 아직도 서 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 건지 모르지만, 그는 영신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배가 고파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덕이가 거실로 나와보니 인터폰에 지훈의 얼굴이 있었다. 깜짝 놀라서 현관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거지. 가만히 문에 귀를 대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달칵, 잠금쇠를 풀고 문을 여는데 지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가 덕이를 보더니 해맑게 웃음을 짓는다.
“덕이 씨.”
“어쩐 일이야?”
“휴대폰 생겼다고 해서, 오늘 내가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연락을 했는데… 답이 없어서요.”
덕이가 눈을 크게 뜨고 제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 전 영신에게 연락이 온 거 말고는 딱히 메시지나 그런 건 없었다. 물론 그 전화도 일부러 받지 않았지만. 아침에 강지훈한테 정기를 받으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다시 한 번 울컥했다. 그래도 저랑 짝짓기도 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런 소릴 할 수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진짜 확 해버릴까 지훈을 보며 잠시 고민하는 사이 지훈이 점심을 같이 먹겠느냐고 묻는다. 문 앞에 더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영신이 없는 집에 누군가를 함부로 들이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어떤 거 먹고 싶어요?”
“난 다 좋아해.”
“그럼 고기 먹을래요?”
응.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모습에 지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때 사무실 현관을 통과해 나오던 인태와 미자가 둘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아침 내내 사무실에서 울던 덕이가 왜 18층 남자와 같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덕아… 어디 가?”
“나 얘랑 밥 먹으러 가. 너희도 같이… 아, 좀 그런가?”
인태와 미자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영신이 아닌 다른 퇴마사의 존재가 마냥 반가울 리 없었다. 어쨌든 자신들과는 반대이지 않은가. 너나 다녀오라고 우린 괜찮다고 하자 덕이가 다소 시무룩한 얼굴을 한다. 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먹고 저녁까진 와야 해. 오늘 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다 같이 예주인가 그 여학생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귀신의 힘만으론 역부족이었기에 새로운 계획엔 덕이가 꼭 필요했다. 알겠다고 대답하자 인태와 미자가 지훈을 슥 보더니 얼른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덕이의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라왔다. 덕이가 쳐다보자 지훈이 싱긋 웃으며 덕이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했다.
“가요, 덕이 씨. 고기 먹으러.”
덕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어깨에 올라간 그 손이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떨쳐내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그의 차에 올라탔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덕이는 창밖을 내다보느라 분주했다.
한여름 뙤약볕에 사람들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지훈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살짝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새하얗고 단단한 팔이 보였다. 영신과는 다르게 몸의 선이 고왔다.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영신과 비교하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요?”
“아니야…. 아무것도.”
“아. 아침에 그분 봤어요. 박영신 씨요. 덕이 씨가 우리 집에 두고 간 구미호 인형을 전해줬어요. 이따가 저녁에 보면 달라고 하세요.”
아. 영신이를 만났구나. 그나저나 그 인형이 거기 있었군. 없어져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니.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덕이가 또 창밖을 내다봤다.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였는데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르겠다. 버튼을 눌러 차창을 살짝 내렸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린다.
“답답해요?”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덕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티가 났나 싶어 머쓱한 마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아침에 먹은 것도 없는데 체했나. 아, 생각해보니 오이 먹었구나. 그게 얹힌 건가.
괜히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었다. 영신과 차에 둘이 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러는 사이 차는 골목으로 들어가 고깃집 앞에 멈춰 섰다. 언젠가 영신과 왔던 그 고깃집이다. 여기 혹시 퇴마사들 사이에 맛집으로 유명한 곳인가. 문득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차가 주차되고 지훈이 덕이의 어깨에 슬쩍 다시 손을 얹는다. 내려요. 문을 열고 내려 지훈과 함께 고깃집으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차가 보인다.
영신이 차는 아닌데,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고개를 갸웃하고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던 덕이의 시선이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시커먼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무리 지어 있었는데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들을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꽥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앞서가던 지훈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을 때 잔뜩 굳어 있는 덕이의 얼굴이 보였다.
“덕이 씨? 왜 그래요?”
그때 무리 중 하나가 고기를 집어 먹다 덕이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덕이가 뒤로 물러섰다. 사내가 소리쳤다. 그때 그 새끼다! 잡아! 동시에 덕이가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튀어 나갔다.
제기랄 이게 무슨 난리야. 문밖으로 뛰쳐나오는데 누군가 덕이의 뒷덜미를 확 잡아챘다. 히익 소리를 내며 돌아보니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그 사내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돈을 훔쳤던, 그 두목 말이다. 그가 덕이를 보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너, 여기서 만나네?”
덕이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놓으라고 몸부림을 치는데 뒤이어 쫓아온 지훈이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뭐하는 겁니까? 남자가 그런 지훈을 한 번 쳐다보더니 픽 웃는다. 너도 이 새끼랑 붙어 먹었냐?
“놔주세요.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겁니다.”
“불러봐, 어디.”
형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합세한 그의 부하들까지 가게 안에서 뛰쳐나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통유리 너머로 그들을 지켜봤다. 덕이가 놓아달라고 악을 쓰고 팔을 휘젓는데 남자가 그대로 덕이를 바닥에 집어 던진다. 악. 덕이가 바닥에 나뒹굴었고, 지훈이 그런 덕이에게 가서는 몸을 붙들고 일으켜 주려 했다.
“덕이 씨 괜찮아요? 이봐요! 당신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긴. 보면 몰라? 내 돈 훔쳐서 도망간 놈 혼내주는 거잖아. 댁도 조심해. 그 새끼 꽃뱀이야. 남자랑 붙어먹고 돈 갖고 튀는 놈이라고.”
덕이가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다 옆에 있던 돌을 움켜쥐고 그대로 일어섰다. 지훈이 말리는데, 덕이가 그 돌을 사내에게 냅다 집어 던진다. 하지만 사내가 가볍게 피해버리는 바람에 괜히 화만 돋우는 꼴이 됐다. 사내가 이를 까드득 물고 덕이에게 다가왔고, 지훈이 사내를 가로막았다.
“손대지 마요.”
“좋은 말로 할 때 비키쇼. 댁한테는 아무 감정 없으니까. 괜히 열 받게 하지 말란 소리야.”
“경고했어요.”
그 말에 남자가 파하하 하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뒤에 있던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키만 컸지 허여멀건 하게 생긴 사내가 그런 말을 하니 웃음이 터질 수밖에. 한참 웃던 남자의 얼굴이 서슬 퍼렇게 변했다. 한발 한발 위협하며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지훈의 얼굴도 싸늘하게 식었다.
그때 뒤에서 후다닥 소리가 들린다. 사내들이 어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훈이 뒤를 돌아보니 덕이가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다. 앞에 있던 두목이 어서 잡으라고 고함쳤다. 사내들이 덕이를 잡으러 우르르 달려가는 순간 지훈의 얼굴에는 주먹이 내리꽂혔다. 퍽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고, 그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배에도 쇳덩이 같은 주먹이 날아왔다.
윽. 지훈이 배를 움켜잡고 자리에 주저앉자 두목이 이를 까드득 물고 다시 발을 치켜드는데 저 멀리 경찰차가 오는 게 보였다.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두목이 카악 바닥에 침을 뱉었다.
“운 좋은 줄 알아, 새꺄.”
그가 차 쪽으로 걸어갔다. 지훈이 맞은 배를 움켜잡고 멀어지는 두목을 노려봤다. 맞은 턱이 얼얼하고 명치도 아려왔다. 그러다 멀리 달아나는 덕이를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해요, 덕이 씨. 나만 두고 달아나다니.”
아아. 아파요. 지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덕이가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연고를 다시 쭉 짜서 입가에 발라줬다. 온몸에 바르는 것도 아닌데 연고를 얼마나 많이 짰는지 치덕치덕 처발라 놨다. 지훈이 웃기기도 하고 맞은 데가 아프기도 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미안해. 많이 아프지?”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파요. 날 두고 도망이나 가고 말이야.”
“진짜 미안. 하지만 거기 있으면 우리 둘 다 맞아 죽었을지도 몰라. 엄청 무서운 놈들이거든. 내가 도망가면 놈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해서 뛴 거지, 너 맞아 죽으라고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진지한 덕이의 표정을 보고 지훈이 슬쩍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덕분에 놈들이 덕이를 쫓는다고 뛰어갔으니 말이다. 그대로 도망쳐 버린 줄 알았는데 집으로 왔더니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친 얼굴로, 구급함을 품에 안고서.
“점심은 먹었어요?”
지훈의 질문에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가다 힘들어서 혼자 밥을 사 먹었다는 말에 지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여태 굶었는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밥까지 사 먹었느냐고 핀잔을 주자 덕이가 머쓱하게 웃는다.
“나는 배고프면 기절하거든. 어쩔 수 없었어.”
“아쉬워라. 우리 첫 식사였는데. 기회가 날아갔네요.”
“지금 먹을래? 네가 다쳤으니까 내가 밥해 줄까?”
“밥할 줄 알아요?”
“아니.”
“그럼?”
“영신이네 집에서 훔쳐 오면 돼.”
지훈이 웃었다. 덕이가 연고와 밴드를 정리하고 나서 소파에 앉았다. 흰 얼굴에 멍이 드니 유독 눈에 띄었다. 괜히 저 때문에 얻어터진 거 같아서 마음이 좋질 않았다. 정작 얻어맞은 본인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
“완전 큰일 날 뻔했네.”
“그러니까 사람은 죄짓고 살지 말아야 돼.”
“죄지은 적 없거든!”
“그놈 돈을 훔쳐서 달아났다며. 그게 죄야? 얘는 동정심은 흘러넘치면서 양심은 완전 바닥이라니까. 이런 사회 부적응자 여우 같으니.”
인태의 질책에 덕이가 눈을 흘겼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너무 콕 찍어서 이야기하니 얄미운 건 사실이었다. 시무룩하게 앉아 있으니 미자가 와서 어깨를 다독거려준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면서.
“근데 18층 그 사람이랑은 왜 밥을 먹은 거야?”
“나한테 먼저 밥을 사주겠다고 했어.”
“겪어 보니 어때? 내 말대로 착하지?”
“응…. 근데.”
“근데?”
“조금 이상하달까.”
“뭐가?”
“나한테 너무 친절하니까.”
인간 세상에 나와 가장 믿었던 우림에게 배신을 당하고 나서 깨달은 게 있다면 뭐든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전후 사정을 다 아는 미자이기에 그런 덕이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가족끼리도 서로를 해치는 세상이잖아. 사람을 사귀는데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덕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부쩍 다정하게 구는 게 살짝 이상하긴 했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제게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나를 좋아하나?”
그 말에 인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미쳤냐. 박 대표한테 까이고 돌았나 보군.”
“아니야!”
“속셈이 있는 거겠지. 혹시 알아? 그 사람도 네 꼬리가 탐나는 건지.”
흐음. 덕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영신도 첫눈에 제가 구미호인 걸 알아봤으니 그 사람도 알아봤을까. 정말 꼬리가 필요해서 제게 잘해주는 걸까. 영신인 저를 팔아넘기려고 한다지만 그 사람은 왜 구미호가 필요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영신이었다. 그대로 무시하고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쑤셔 넣었다. 지켜보던 인태가 왜 받지 않느냐고 묻자 덕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맘이야.
“밀당이야?”
“그게 뭔데?”
“서로 밀고 당기는 것 말이야.”
“놀이야?”
“비슷해. 이기는 사람이 갑이 되는 거거든.”
“갑은 또 뭔데.”
“아우, 갑갑해.”
“아. 그게 갑이구나.”
“이런 멍청이.”
인태와 덕이가 투닥이는 사이 미자가 창가로 가 밖을 내다봤다. 이미 해는 다 넘어갔고, 어둠에 잠긴 도시들은 자동차와 가로등, 그리고 건물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그래. 나가자. 참, 덕이 너 준비했어?”
덕이가 제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면 돼. 어떻게 쓰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덕이가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 한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건 꽤 익숙했기 때문이다. 가끔 돈을 받고 몸을 팔면서 그걸 우림의 휴대폰으로 찍어 협박용으로 쓰기도 했으니 말이다. 거기까진 말하고 싶지 않아 그냥 관두고는 휴대전화를 챙겨 들었다. 가자.
덕이가 높다란 담벼락을 올려다봤다. 인태와 미자는 그냥 통과할 수 있었지만 저는 예외였다. 일단은 주머니에서 검은색 복면을 꺼내 얼굴에 뒤집어썼다. 간신히 CCTV가 없는 쪽을 발견하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CCTV가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덕이가 근심 어린 얼굴로 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달리는 것보단 점프를 잘하긴 했지만, 벽이 여간 높은 게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넘어가?”
“여우잖아?”
“하지만 꼬리가 한 개뿐인걸.”
“너 점프는 좀 한다며. 노력이라도 해봐.”
그 말에 덕이가 심호흡을 하더니 멀찌감치 물러선다. 인태와 미자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지켜봤다. 다다다다 뛰어와서는 벽 앞에서 점프하길래 침을 꼴깍 삼켰다. 몸이 날아오른다. 넘어! 어서! 둘의 바람과는 달리 덕이는 어린아이처럼 양다리를 접으며 새색시 뛰어오르듯 했다. 인태의 얼굴이 슬며시 구겨졌다. 지켜보던 미자가 도저히 못 보겠는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저게, 뭐야! 씨발 진짜 더럽게 못 뛰네. 내가 목발을 짚고 뛰어도 너보단 나을 거야.”
“이상하다. 왜 몸이 더 무거워진 기분이지?”
그때 미자가 덕이를 부른다. 덕이가 돌아보니 꼬리를 사용하라고 말해준다. 꼬리를 내놓으면 혹시 능력치가 올라갈지 모르는 일 아니냐고 말이다. 그 말에 인태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덕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 손을 합장하듯 모으고 얍 기를 넣자 등 뒤로 꼬리가 살랑 생겨난다. 미자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쩜 좋아. 다시 봐도 너무 사랑스럽잖아.”
“구데기! 자 이제 뛰어.”
덕이가 꼬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엔 제멋대로 움직이던 꼬리가 이젠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덕이가 꼬리를 몇 번 흔들더니 그대로 도약해서 뛰기 시작했다. 인태와 미자가 침을 꼴깍 삼켰다.
다다다다, 두 다리가 바람처럼 움직이더니 날아오를 새도 없이 담벼락에 몸을 팍 부딪치고 나서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인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봤고, 미자가 쓰러진 덕이를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덕아, 괜찮아?”
윽. 덕이가 부딪힌 몸을 붙들고 신음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인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야. 담을 넘으라고 했지, 몸으로 벽을 부수라고 했냐.”
벽에 부딪혔던 팔을 문지르며 덕이가 일어섰다. 팔꿈치가 까져서 피도 난다. 힝.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나서 담벼락을 다시 올려다봤다. 뛰는 거에만 너무 집중해서 점프하는 타이밍을 놓쳐버린 게 실수였다.
미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으냐고 다시 물었고 덕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아. 많이 아파.
“한 번만 더 해보자. 이번엔 잘할 수 있어.”
“아주 동네방네 담 넘는다고 광고를 해라!”
“너무 그러지 마. 덕이도 나름 노력한 거잖아?”
“편들 걸 들어. 이건 운동신경이 여우가 아니라 무슨 곰 새끼 수준이야.”
“덕아. 힘들면 안 해도 돼. 다음에 다시 해도 되니까 너무 무리할 필요 없어.”
“그래 때려치자. 글렀어.”
인태의 비아냥에 덕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큰 폭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양손을 탁탁 털어내고 나서는 뛸 자세를 잡았다. 인태가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끼었고, 미자가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제발 이라고 외쳤다.
덕이가 다시 뛰었다. 그리고 바로 벽 앞에서 몸을 날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미자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쳐다봤다. 놀라긴 인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홱 담을 넘길래 미자와 인태가 다급하게 집 벽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덕이가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려고 하는 걸 인태가 잽싸게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바보야. 그 상태로 덕이를 벽에 밀어붙였다.
“나 잘했지?”
덕이가 묻자 미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번엔 인태를 보니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대궐 같은 집을 올려다봤다. 1층은 환했고, 2층은 사람이 없는 건지 어두웠다.
사각, 사각, 덕이가 걸을 때마다 잔디 밟는 소리가 났다. 꼬리를 감추고 나서 벽 한쪽에 붙어 섰다. 조금 전 높은 담을 넘어서 그런지 심장이 아직도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낮에 올 걸 그랬나. 다들 외출해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말이야. 그때 와서 차라리 녹음기를 설치해 두고 갈걸.”
인태의 말에 미자가 인상을 구겼다. 그런 걸 왜 지금 말하느냐고 말이다. 어차피 집에 왔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증거를 잡자고 했다. 덕이가 집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2층 끝쪽에 창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리로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집어넣었던 꼬리를 다시 꺼낼까 하다 CCTV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관두었다. 후우, 심호흡하고 나서 벽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미자와 인태가 몸을 띄워 그런 덕이를 쫓았다.
“덕아, 힘내! 파이팅!”
“내가 손에 깁스하고 올라가도 이것보단 빠를 거야.”
“야, 김인태. 닥쳐!”
“둘 다 그만 떠들어, 나 너무 힘들어.”
덕이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위층으로 기어 올라갔다. 2층 창문에 도착해서 몸을 위로 끌어올리고 보니 응접실이었다. 덕이가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땀 범벅이다. 복면을 벗으려고 하자 미자가 그런 덕이를 말렸다.
“안 돼. 쓰고 있어. 들키면 큰일나.”
“더워 죽을 거 같아.”
“그래도 들키는 것보단 나아.”
“자 이제 아래로 내려가서 증거를 잡자.”
살금살금 계단 쪽으로 가는데 아래층에서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인다. 덕이가 난간 뒤로 몸을 숨기고 나서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난간 뒤에 숨어 고개만 쭉 빼고 지켜보는데 여자가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른다. 어려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덕이가 미자를 보며 손짓으로 쟤가 예주냐고 물었다. 미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덕이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너 내가 몇 번을 말해! 내 말이 우습니? 사람을 봤으면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인사했어요….”
“내가 못 들었다잖아. 그럼 다시 해야지.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여자의 말과는 다르게 예주가 기가 팍 죽어서는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 봐, 이거. 어른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죽은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니?”
죽은 엄마 이야기까지 꺼내자 예주가 고개를 들어 혜란을 똑바로 바라봤다.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서는 쏘아보자 혜란이 팔짱을 끼고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어머, 얘 봐. 너 뵈는 게 없구나? 네 아빠가 너 편들어주니까 내가 우스워? 만만해?”
예주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 흉보지 마세요…. 남한테 손가락질받게 가르치신 적 없어요.”
“남? 하아? 너 지금 남이라고 했니? 이게 이제야 본심이 나오네?”
옆에 있던 가사도우미가 이제 그만하라고 말렸지만 그럴수록 혜란은 더더욱 매섭게 다그쳤다. 고개를 들고 있던 예주가 얼굴이 점점 아래를 향한다. 그녀의 신경질적인 화풀이가 끝날 때까지도 예주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젠 익숙한 듯 그저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덕이가 휴대폰에 그 장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덕이와 인태 미자는 지친 얼굴이었다. 덕이가 하아, 하품을 해 보이자 옆에 있던 미자도 덩달아 하품을 한다. 인태도 하품을 하다가 문득 귀신인데 왜 하품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얼른 표정을 감췄다.
“이제 이걸 어쩐담?”
“여자애네 아빠한테 보내야지.”
“어떻게 보내는데?”
대화를 나누던 미자와 인태가 덕이를 쳐다봤다. 덕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예주네 아빠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걸 보낼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게다가 외국에 있으니 언제 올지도 모르고. 집에서 메일주소 같은 거라도 찾아보고 올 걸 그랬다고 인태가 말하자 덕이가 그게 뭐냐고 다시 묻는다.
“있어, 그런 거.”
“그럼 너네가 내일 가서 찾아와. 내가 그리로 보내볼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미자가 막상 보냈는데 예주의 부친이 아무런 반응도 없으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자기 자식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부모가 모른 척하면 무슨 소용이냐면서. 인태가 설마 그러겠느냐고 했지만 그도 확신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 정확한 증거를 찾아볼까? 아니면 때릴 때까지 기다려?”
“아서라. 오늘 그걸로도 충분해.”
세 사람이 어떡해야 할까 고민하며 거리를 걷는데 저 멀리 시커먼 덩어리가 나타났다. 덕이가 먼저 그걸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구름이나 연기처럼 보이는 시커먼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늦게 발견한 미자와 인태가 덕이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자, 얼른.”
“왜. 저게 뭔데?”
“악귀야. 꼴을 보니 아주 몹쓸 녀석인 거 같아. 괜히 말 섞어서 좋을 거 없어.”
“…우릴 자꾸 따라오는데?”
인태가 뒤를 흘깃 돌아봤다. 걸음을 빨리하니 놈도 속도가 빨라진다. 저희를 따라오는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덕이가 목표인 것 같았다. 혹시 몸을 노리는 건가. 그가 덕이를 보며 속삭였다.
“셋 하면 뛰어.”
“나 다리 아파.”
“멍청아, 잔말 말고 뛰어.”
“왜? 니네 둘이 가서 혼내주면 되잖아.”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자칫하다간 너도 위험해진다고. 그러니까 잔말 말고 뛰어.”
“알겠어.”
“하나, 둘,”
셋을 세기도 전에 덕이가 팍하고 튀어 나간다. 어찌나 빠른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태가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저 새끼 저거 살겠다고 뛰는 거 봐라. 아까도 좀 그렇게 뛰지.
옆에 있던 미자가 몸을 돌려 확인하니 조금 전까지 있던 원귀가 보이지 않는다. 인태의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간 거지?”
“일단은 돌아가자. 아무래도 예감이 좋질 않아.”
덕이가 헐레벌떡 뛰어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입구 쪽을 쳐다보며 미자와 인태가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그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덕이가 그 안으로 올라탔다.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누르고 나서 17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스르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덕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멈칫한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의 작은 창으로 어떤 남자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던 사람일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다시 남자의 얼굴이 작은 창밖으로 나타난다. 덕이가 흠칫 놀라서 몸을 뒤로 물렸다. 뭐야? 저게.
주먹을 꼭 말아쥔 채 그쪽을 노려봤다. 쉭, 쉭 엘리베이터가 층을 바꿔가며 위로 올라갈 때마다 남자의 얼굴이 창에 나타났다. 얼굴이 불에 탄 것처럼 시커멨고, 층수가 바뀔 때마다 남자의 표정도 점점 바뀌고 있었다.
덕이가 거울에 등을 붙인 채로 입술을 꾹 물었다.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는데 1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선다. 문이 열리자마자 덕이가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간 손목이 누군가에게 붙들린다. 으아악! 기겁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손을 떼어내는데, 뜻밖에도 영신이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영신이 피식 웃더니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가만히 서서 덕이를 쳐다본다.
“놀랐잖아. 너 여기 왜 나와 있어?”
“너랑 같이 들어가려고.”
아침엔 그렇게 뭐라고 하더니, 별일이네. 덕이가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제 딴엔 그게 마음에 걸렸었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집 쪽으로 걸어가며 조금 전 본 걸 이야기했다. 누가 쫓아와서 무서웠다는 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이상한 걸 봤다는 둥.
하지만 영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띠리릭. 주머니에 있던 카드를 꺼내 문에 대자 바로 열린다. 현관 안으로 한발 딛고 서서 고개를 돌렸는데 영신이 없다. 어라?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이상하다. 주위를 한 번 더 살피는데 영신이 문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뭐야.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눈빛이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 눈동자가 유독 시커멓다고 느끼는 순간 등 뒤로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돌아볼 틈도 없이 몸이 집 안으로 홱 끌려 들어갔고, 균형을 잃은 채 현관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놀라 억 비명을 지르는데 파란 불빛이 눈앞에서 번쩍하더니 문 앞에 있던 영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겁하고 뒤를 돌아보니 영신이 집 안에 서서 차가운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현관 앞을 보니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영신이 보이지 않는다. 덕이가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였다.
“뭐, 뭐야. 이거? 영신아…너 조금 전까지 저기 서 있었는데… 어떻게 집 안에…”
쯧, 영신이 혀를 차더니 현관문을 닫았다. 조금 전 본 악한 기운은 느껴지질 않았지만, 놈이 덕이를 목표로 삼은 이상 당분간은 근처에 맴돌며 기회를 노릴지도 모른다.
몸을 일으키던 덕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어 영신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뭐 하고 다니길래 저런 걸 집 앞까지 달고 와?”
“달고 오다니? 내가?”
“그래. 너 따라온 거잖아.”
그제야 덕이는 아까 길에서 봤던 검은 형체를 떠올렸다. 혹시 그거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등골이 오싹해져서 몸을 움츠렸다. 여태 귀신들을 보긴 했어도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에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이상하다. 왜 나를 따라왔지?”
흐음. 영신이 팔짱을 끼고 그런 덕이를 위아래로 살폈다. 전보다 느껴지는 기운이 조금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덕이는 반쪽짜리 구미호였다. 악귀들은 대게 정신적으로 나약하거나 사악한 인간들의 몸을 탐했는데, 가끔 퇴마사나 법력을 가진 사람들의 몸을 탐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들의 몸과 영혼을 빼앗기만 하면 무서울 정도의 강한 힘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녀석이 노린 건 그것일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혼자 나다니지 마.”
“…응.”
“그리고 전화는 왜 안 받았어? 그럴 거면 다시 내놓든가.”
영신이 휴대전화를 달라며 손바닥을 펼치자 덕이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꼭 쥐었다. 아침에 그러고 나서 엄청 화가 난 거 같길래 일부러 안 받은 것도 있지만, 저더러 다른 놈이랑 짝짓기하라고 해서 성질이 난 것도 있었다.
“다음부턴 받을 거야….”
“일단 내놔.”
“받는다고 했잖아. 줬다 빼앗으면 진짜 치사한 거다.”
“그런 거 아니니까 내놓기나 해.”
덕이가 눈치를 살폈다. 영신의 표정을 보니 정말 빼앗을 마음은 없어 보였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내밀자 탁, 먹잇감 채어가듯 가져가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덕이가 눈을 위로 슥 올렸다. 뭐 해?
잠시 후 휴대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내가 몇 번을 말해! 내 말이 우습니?]
덕이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대폰을 빼앗으려고 팔을 뻗었으나 영신이 한발 빨랐다. 그대로 손을 위로 뻗더니 영상을 노려본다. 덕이가 그걸 빼앗으려고 몸부림쳤으나 역부족이었다.
“야! 줘어!”
영상에선 아까 예주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영신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간다. 여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미자에게 알아듣게 말했는데, 결국 일을 냈군.
쯧. 영신이 휴대폰 영상을 지우려고 하길래 덕이가 다른 쪽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안 돼! 지우면 안 돼! 미자가 알면 속상해할 것도 마음에 걸렸고,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영신아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봐줘. 이거 진짜 중요한 거라 그래. 응? 제에발. 제발.”
그렇게 애걸복걸하는데 영신이 잠시 멈칫한다. 덕이가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영신을 올려다봤다. 제에발.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망설일 것도 없이 삭제 버튼을 툭, 누른다.
덕이의 눈이 커졌다. 이런 망할 개자식. 그대로 점프해 영신의 얼굴을 들이받았지만, 영신의 손이 먼저 머리통을 잡았다. 날뛰지 못하게 꾹 누르자 덕이가 뿔난 황소처럼 전진하며 팔다리를 휘저었다.
“나쁜 새끼! 그걸 왜 지워! 용서 못 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찍었는데!”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는데 덕이의 눈앞으로 무언가 하나가 불쑥 들어온다. 영신의 손이었는데 엄지와 검지에 손가락 반 마디만 한 플라스틱이 들려 있었다. 덕이가 그것을 보다 영신을 올려다봤다. 뭐야? 이게?
“정 필요하면 이걸 써.”
“…이게 뭔데.”
“여자가 의뢰할 때 녹취한 거야. 우리 쪽 목소리는 다 제거됐고, 여자 목소리만 있어.”
그 말에 덕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신이 안 받느냐고 했고, 덕이가 쭈뼛쭈뼛 그걸 받아 들었다. 정말 여기에 그게 다 들어갔다고? 아니 그보다 이걸 왜 주는데? 박영신이 드디어 맛탱이가 갔구나.
“그거 받고, 더는 그 일에 나서지 마. 괜히 남의 집 담벼락 넘는 짓도 하지 말고. 여기 집에 콕 박혀 있어. 알아들어?”
“너… 갑자기 왜 그래? 네가 이러니까 아까 그 악귀보다 더 무섭잖아.”
“이게 잘해줘도….”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하여튼 내 말 들어. 그리고 당분간 나가지 않겠다는 약속은 분명히 지켜. 옆 사무실도 가지 마.”
덕이가 손에 든 작은 플라스틱을 내려다봤다. 그럼 이건 어떻게 전해주느냐고 묻는다. 영신이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줘. 내가 보내줄게. 덕이가 눈을 가늘게 늘였다. 널 어떻게 믿느냐고 했더니 영신이 거짓말이면 제 혀를 뽑아도 좋다고 말한다.
그 말에 덕이가 입술을 꾹 깨물고 그것을 건네줬다. 영신이 싱긋 웃더니 그럼 이건 내가 여학생의 아버지에게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덕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영신이 방으로 들어가고 혼자 남은 덕이가 눈만 깜빡였다. 일이 잘 해결돼 다행이었다. 근데 이 찝찝함은 뭐지.
방으로 들어온 영신이 USB를 툭, 서랍 안쪽에 던져 넣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밖을 내다봤다. 아주 속여먹기 딱 좋은 녀석이었다. USB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냥 굴러다니는 것 중에 하나를 내밀었던 건데 녀석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속아 넘어갔다.
의자에 앉아 조금 전 보았던 악령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빠끔히 문이 열리면서 덕이가 머리를 내민다. 씻고 왔는지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덕이가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놓으면서 입을 뗐다.
“짝짓기할까?”
전 같으면 나가라고 쏘아붙였을 텐데, 잠시 고민이 됐다. 일단 꼬리가 하나 생기긴 했으니 몇 번 더 하면 그래도 더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가 됐기 때문이다. 알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덕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의 손에 술병과 술잔, 그리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얼음이 들려 있다. 영신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서 준비해왔군.
얼음을 잔에 채우고 나서 술을 붓는데 덕이가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영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영신이 그 눈빛을 무시하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보기 좋게 목울대가 움직이자 덕이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다. 영신이 입에 대고 있던 술잔을 덕이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덕이가 제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나는 그것보다 네 입술에 묻은 걸 핥아 먹고 싶은데?”
“꿈도 야무지다.”
“왜에. 어차피 짝짓기도 하는 사이에. 입도 맞추면 꼬리가 훨씬 더 빨리 나올지 알아? 원래 구미호들은 입을 통해 구슬을 꺼내잖아.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기를 흡수할 수 있는 건 내 엉덩이가 아니라 입일지도 몰라.”
“개소린데 아주 그럴싸하다?”
“해보지도 않고 맨날 넌 구박만 하지. 아주 못된 버릇이야.”
탁, 영신이 어느새 비어버린 술잔을 내려놓더니 다시 술을 붓는다. 갈색 액체가 가득 채워졌고, 곧바로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정도로 독한 술이 식도를 뜨겁게 달구며 내려갔다. 덕이가 의자를 슥 옮겨 영신의 곁으로 바싹 붙더니 아예 코앞에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영신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런 덕이를 바라봤다.
“아직 준비 중이야. 저리 떨어져 앉아.”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고, 응? 나 좀 예뻐해 줘.”
덕이가 손을 뻗어 영신의 허벅지를 은근히 쓰다듬는다. 영신이 코웃음을 치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이 앙큼한 여우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영신의 사타구니를 은근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 떼.”
“싫어.”
하아. 영신이 술잔을 그대로 내려놓자 덕이가 더 옆으로 몸을 밀착한다. 영신이 마신 독한 위스키 냄새가 코끝으로 흘러들어왔다. 스킨 냄새와 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개를 가만히 앞쪽으로 빼고 영신과 정면으로 눈을 맞추며 싱긋 웃는데 영신이 제 성기 위에 있던 덕이의 손을 떼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졸지에 갈 곳을 잃어버린 덕이의 손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공에 떠 있었다.
“뭐, 뭐야?”
“테이블 잡고 엎드려. 지금 하게.”
“또 테이블이야?”
“그게 어때서.”
“침대에서 얼굴 보고 하고 싶어.”
“어쩌지. 난 싫은데.”
덕이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안 해.”
그 말에 영신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렇게 지금 배짱부릴 처지는 아닐 텐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아쉬운 사람들끼리 이러지 말지? 서로 기분 좋게 하면 좋잖아?”
“그래서? 안 하겠다?”
“안 해! 아니 못 해! 여우도 인격이 있는데! 이딴 취급을 받으면서는 못 해!”
덕이의 외침에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호락호락하게 굴더니 아침에 있었던 그 일 때문에 그런지 독이 오른 상태였다. 골치 아픈 얼굴로 이마를 짚는데 덕이가 문 쪽으로 걸어간다.
“그럼 잘 자. 나도 자러 갈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영신이 그런 덕이의 팔을 잡았다. 알았어.
“침대로 가서 누워.”
그 말에 덕이의 얼굴이 환해진다.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싶게 침대로 휘릭 몸을 날리더니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에 영신이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곧 옷을 홀랑 다 벗어버린 덕이가 다리를 벌리고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영신에게 손을 까닥였다. 이리와. 영신이 인상을 팍 구기는 바람에 바로 꼬랑지를 내렸지만 말이다.
“얼른 와. 나도 하고 자게. 너무 졸려.”
그 말에 영신이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걸 보는 덕이가 왜 옷을 다 벗지 않느냐고 묻자. 어차피 삽입만 할 거 옷은 뭐하러 다 벗느냐고 받아친다. 그 말에 덕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옷에 쓸리면 아픈데….”
“입 다물고 그냥 해. 지금도 많이 참고 있거든.”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영신이 서랍에서 젤을 꺼낸 다음 바지와 팬티를 골반에 걸치도록 내렸다. 성기만 꺼내 젤을 손바닥에 쭈욱 짰다. 찐득거리는 그 느낌이 싫어 슬쩍 인상이 써졌지만, 바로 그것을 성기에 바르고 앞뒤로 문지르며 자극을 줬다. 덕이가 누운 채로 그런 영신을 쳐다보며 자꾸만 입술을 빨았다.
“얼른 해줘.”
“기다려.”
잠시 후 영신이 탱탱하게 발기한 제 성기를 붙들고는 애널 구멍에 맞췄다. 덕이가 제 양쪽 다리를 손으로 붙들고는 최대한 벌려 구멍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영신은 그런 덕이를 보며 기가 찼다.
보통 이런 자세로 있으라고 하면 수치스러움을 느낄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귀두로 구멍 입구를 꾹 누르자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아아. 덕이가 입을 벌리고 시트를 손으로 꼬옥 움켜쥔다.
영신이 주위를 둘러봤다. 얼굴을 덮어 버릴 만한 걸 찾다가 관두고는 허리를 앞쪽으로 밀었다. 성기가 내벽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고 나중엔 빈틈없이 맞물렸다.
“안아주면… 안 돼?”
쑤욱, 퍽, 영신이 들은 척도 않고 허리를 뒤로 뺐다가 그대로 세게 쳐올리자 덕이가 허리를 들썩이며 몸을 뒤틀었다. 으으응, 이상야릇한 신음을 내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퍽, 퍽 살이 부딪치는데 영신이 벗은 바지가 제 허벅지 뒤쪽에 쓸린다. 덕이가 고개를 들고 영신을 쳐다보며 징징 우는 소리를 냈다.
“바지 때문에, 아으응, 쓰라려.”
“그냥 해.”
“바지, 으응, 아프다고!”
후우,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그냥 확 관둘까 하다 마음을 다잡고는 팔을 위로 올려 셔츠를 벗어냈다. 골반에 걸쳐있던 바지와 팬티마저 벗어내니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각칼로 파놓은 것처럼 지방 하나 없이 탄탄한 복근을 보며 덕이가 입을 헤에 벌리고 쳐다봤다. 그 시선에 영신이 시트를 끌어다 덕이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덕이가 곧 팔을 휘저으며 그 시트를 걷어냈다.
“아씨, 답답해!”
영신이 그 틈에 콱 쑤셔넣자 덕이가 허리를 위로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젖힌다. 아아, 시선만 아래로 내려 영신을 쳐다보는 눈빛엔 물기가 가득 고였다. 벌어진 입가로 침이 흘러내렸는데 어쩐지 그게 전과 달리 야하게 느껴진다.
영신이 최대한 덕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들락이는 성기만 쳐다보면서 행위에 집중하려고 했다. 철썩철썩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덩달아 덕이의 신음도 거세져 갔다.
“으응, 아아, 아아아응.”
덕이가 손을 아래로 뻗어 제 성기를 움켜쥐더니 앞뒤로 문지른다.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녀석의 귀두에서 맑은 액이 뚝뚝 흘러나왔다. 손으로 성기를 문질러 주니 구멍이 더더욱 자극을 받아 입으로 흡입하듯 꽉꽉 조여온다.
영신이 잠시 행위를 멈추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골랐다. 후우. 덕이가 눈을 내리깔고 엉덩이를 영신의 하체에 대고 문질렀다. 얼른. 얼른 더 해줘. 두 다리로 영신의 허리를 감고서 보채자 영신이 이를 까득 문다.
이미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하기 전까진 이걸 왜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면 이러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하는 짓이라고 해도 전과 다르게 여우와의 섹스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덕이가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나 안아줘.”
“…….”
“안아줘, 제발. 응?”
후우. 영신이 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나서 덕이의 어깨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가슴이 맞닿으니 심장이 쿵쿵 울렸다.
덕이가 두 팔로 영신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미칠 것 같았다. 마주 닿은 배 사이에 발기한 제 성기가 낀 채 비벼지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영신이 곧바로 하체를 퍽퍽, 움직이며 거칠게 쑤셔 박았다.
“으응, 으으으응, 아앙.”
덕이가 소리를 지르며 영신의 허리를 두 다리로 꼭 감쌌다. 영신이 끝내는 덕이의 어깨를 이로 꽉 깨물었다. 신음과 비명이 동시에 들려오는데도 허릿짓을 멈추질 못했다. 마치 제 좆이 뻘밭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쑤셔대도 구멍이 넓어지기는커녕 금세 원래대로 돌아가 더 진득하니 엉겨붙는 그런 기분 말이다. 점점 속도가 빨라질수록 덕이가 지르는 신음의 강도도 거세졌다. 바로 귀 옆에서 내는 신음 때문에 사고가 마비됐다.
“하아, 씨발!”
퍽퍽, 철썩철썩, 퍽퍽, 마구잡이로 쑤셔대니 구멍 입구가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과 쾌감이 마구 뒤엉키니 덕이는 이대로 망가져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해달라고 허리를 움직이는데 어느 순간 영신이 몸을 뚫어버릴 기세로 꽉 쑤셔 받고 숨을 멈췄다.
큭. 그가 참고 있던 신음과 숨을 동시에 토해내자 덕이가 경련하듯 부들부들 떤다. 하아, 하아, 조금 전까지 신음과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하던 공기를 이젠 두 사람의 숨소리가 채웠다.
영신이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덕이를 보니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늘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이며 몸이 땀으로 절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려고 손을 뻗다가 관두었다. 그러자 덕이가 잔뜩 풀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는다.
“…영신아. 힘내서 세 번만 더하자. 응?”
***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버지. 어린아이의 비명이 온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밖으로 나온 다른 가족들이 남자를 말리려 했지만 남자는 어린 영신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면서 집 뒤에 있는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끼이익. 어린 영신의 눈에 그것은 지옥문처럼 보였다. 발을 뒤로 뺄 새도 없이 무지막지한 힘에 이끌려 작은 몸이 그 안으로 나뒹굴었다. 영신이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려다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선다. 아버지가 문 앞에 서서 저승사자처럼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여기서 나오지 말거라!”
“싫어요. 무서워요, 아버지.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사내자식이 그렇게 나약해서 어디다 써. 너 같은 게 내 자식이라니,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구나!”
아버지의 뒤쪽으로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는 할머니와 안절부절못하는 모친이 보였다. 어머니, 어머니, 저 좀 꺼내 주세요. 할머니, 제발 아버지 좀 말려주세요. 울며 밖으로 나오려는데 커다란 창고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닫힌다.
영신은 주먹이 부서져라 창고 문을 두드렸다. 말 잘 들을게요.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을게요. 무섭다고 울지도 않을게요. 제발 열어주세요. 창고는 싫어요! 제발요! 커다란 문은 꿈쩍도 하질 않았고, 밖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절망에 빠진 영신은 문 앞에 기대앉아 다리를 끌어모은 채 흐느꼈다. 스으으, 이상한 소리와 함께 창고 한쪽에서 혀가 길게 늘어진 혼이 하나 나타난다. 영신이 몸을 웅크리며 얼굴을 다리 사이로 파묻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숨 막히는 공포로 인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흐흑. 저리 가. 제발 나한테 오지 마.”
그렇게 나타나기 시작한 귀신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싸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영신은 결국 고개를 파묻은 채 오줌을 지렸다. 보이진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엄마, 무서워요. 나가게 해주세요. 여기 싫어요. 제발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요.
으. 뒤척이던 영신의 팔에 무언가 걸렸다. 고개를 돌려 눈을 떠보니 덕이가 제 눈앞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어젯밤 몇 번의 정사를 더 치르고 나서 방에 가서 자라고 내쫓았는데 언제 침대 위로 다시 쳐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깨워서 내보낼까 하다 관두고 손을 뻗어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9시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살짝 뒤로 물리는데 덕이가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제 옆구리 쪽으로 밀착한다.
발로 차서 밀어 버릴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덕이가 몸을 움직여 제 옆으로 다시 붙어온다. 섹스를 제외하곤 늘 혼자 잤는데 타인의 체온이 닿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잠든 얼굴을 가만히 보는데 입술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꿈에서 뭘 먹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침부터 여우 얼굴이나 감상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갑자기 비어버린 옆자리가 허전했는지 덕이가 힘겹게 눈을 뜬다. 잠이 잔뜩 묻어 있는 눈으로 영신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스르르 감는다.
“깼으면 네 방 가서 자.”
“…아직 안 깼어.”
그러더니 손을 뒤로 뻗어 제 엉덩이 쪽을 더듬었다. 순간 꼬리 하나가 생겨나더니 영신의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덕이가 그 꼬리를 만지며 살짝 실망한 얼굴을 한다.
“…오늘도 하나네.”
영신 역시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이 트기 전까지 한 것 같은데 겨우 하나 생기다니. 빌어먹을. 젠장. 이마를 감싸고 앉아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하는데 덕이가 엇! 하고 소리를 지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던 영신의 눈이 커다래진다. 덕이의 머리 위로 귀 두 개가 쫑긋 올라와 있다. 꼬리와 마찬가지로 흰색이었는데 얼핏 보면 솜사탕 얹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앞뒤로 팔랑팔랑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분명 솜사탕은 아니었다.
“나 귀 생겼어!”
“……”
“영신아! 나 귀 생겼다니까!”
“보고 있어.”
“세상에, 귀가 생기다니!”
“씨발. 생기라는 꼬리는 안 생기고.”
영신이 절망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덕이는 귀가 생긴 게 좋은지 거울 앞으로 가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난리가 났다. 홀딱 벗은 채로 꼬리랑 귀만 달고 있으니 완전 변태 같아 보이는데 저렇게 좋을까. 게다가 귀가 없던 것도 아니고, 원래 있던 귀에 더 생긴 것뿐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귀만 4개네.
“영신아 나 귀 4개야! 신기하지?”
“좋냐? 4개라?”
“나쁠 건 뭐야. 와. 머리에 귀가 붙어 있으니까 엄청 귀엽다!”
자기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거울을 보고 감탄하는 덕이를 보니 영신은 그만 웃음이 났다. 저렇게 자뻑이 심한 여우라니. 그만 떠들고 옷이나 입으라고 옆에 벗어둔 옷을 던져줬더니 덕이가 그것은 본 척도 않고 영신에게 달려와서는 목을 와락 껴안는다.
영신이 인상을 구기며 그 팔을 떼어내려고 하자 이번엔 아예 몸까지 실어와 영신의 몸이 뒤로 확 넘어가 버렸다. 졸지에 덕이가 제 위에 벗은 채로 올라간 꼴이 됐다. 영신이 못마땅한 얼굴로 뭐하는 짓이냐고 묻자 덕이가 해맑게 웃는다.
“영신아, 고마워.”
“뭐가.”
“덕분에 꼬리도 생기고 귀도 생기고 진짜 여우가 됐잖아.”
“진짜 여우처럼 보여? 내 눈엔 변태 같은데.”
“이렇게 생기다 보면 나도 진짜 구미호가 되겠지.”
“어느 세월에?”
“원래 여우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라잖아.”
“입만 살아서는.”
“하여튼 다 고마워. 예주라는 애도 도와준다고 한 것도 그렇고! 남들이 널 개쓰레기라고 했지만 난 아닌 줄 알았어!”
“……”
“맞다! 돈만 밝히는 천하의 개새끼라고도 했었지!”
“이제 그만 내 몸에서 내려가. 침대 밑으로 확 던져버리기 전에.”
스산한 목소리에 덕이가 입을 삐죽이며 침대로 내려왔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상체를 앞쪽으로 숙인다. 막을 새도 없이 영신의 입술에 뽀뽀를 쪽 하더니 영신이 화를 내기도 전에 후다닥 방 밖으로 도망가 버린다.
하아, 저게 진짜. 영신이 인상을 구기며 조금 전 덕이의 입술이 닿았던 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어젯밤 USB를 넣어두었던 서랍으로 향했다. 저 바보 같은 여우가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텐데.
잠시 얼굴에 갈등이 생겼다. 제기랄. 몰라.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래. 영신이 그대로 누워버렸고, 방 안엔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조금 전 덕이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어쩐지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덕이가 영신의 방문에 귀를 대고 서 있었다. 다시 잠들었나 보네. 그대로 또 들어가서 잘까 하다 관두고는 소파로 가서 티브이 리모컨을 찾았다. 팟, 티브이를 켜고 대충 아무 채널이나 맞춰놓고서는 주방 쪽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영신이 사다 둔 고기가 보이긴 했지만 혼자 구워 먹으려니 영 식욕이 생기질 않았다. 제일 아래 칸을 열어 오이 하나를 꺼내 들고서는 와삭 베어 물었다.
[어젯밤 00동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피해자는 50대 김 모 씨인데요. 경찰은 김 씨가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과 사체가 심하게 훼손된 점으로 미뤄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의 소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덕이가 입에 오이를 문 채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티브이에선 사건 현장이 나오는 중이었는데 꽤 익숙한 차가 보였기 때문이다. 룸미러에 걸린 독특한 모양의 장식은 분명 자신이 봤던 것이었다.
“저건, 그 깡패놈 찬데….”
두 눈을 끔뻑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늠하려 했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에이, 설마. 세상에 비슷한 차가 어디 한두 개인가.”
고개를 홱홱 저어 밀려드는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면서 영신이 나타났다. 덕이가 오이를 입에 문 채로 배시시 웃으니 반대로 영신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간다. 피곤해서 더 자려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그게 다 저 여우 때문이었다.
“영신아! 나 오이 먹어도 돼?”
“먹고 있잖아.”
영신이 덕이를 지나쳐 주방 쪽으로 향했다. 덕이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미 꼬리와 귀는 사라졌고, 옷도 입은 상태였다. 영신이 물을 마신 후 컵을 정리하고 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뭘 하나 봤더니 고기를 꺼낸다.
“우리 아침 먹어?”
“잘 먹어야 꼬리가 나오지.”
“그럼 굽는 거 내가 도와줄게.”
덕이가 들고 있던 오이를 식탁에 올려두고 나서 팔을 걷어붙이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위층에 사는 지훈이다. 덕이가 고개를 잠시 갸웃하고 나서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댔다.
[덕이 씨, 좋은 아침이에요. 어디 안 갔어요?]
“어. 나 지금 아침 먹으려고 하는데.”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온도를 올리려던 영신이 그 모습을 흘깃 쳐다봤다. 전화를 받으며 거실로 점점 나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위층에 사는 그놈인가 보다. 하여튼 말 더럽게 안 들어 먹네. 어울리지 마라니까.
“지금?”
덕이가 슬쩍 영신을 쳐다보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더니 숫자 여섯 자리를 읊는다. 628479. 알았어, 곧 갈게. 곧바로 통화가 끊어졌고, 영신이 고기를 올리려는 찰나 덕이가 다급하게 영신을 불렀다.
“영신아!”
“왜.”
“나 위층에 잠깐 올라갔다가 올게.”
“안 돼.”
“왜.”
“어제 잊었어? 당분간 그놈이 근처에서 서성이면서 널 노릴 거야. 번거로운 일 만들지 말고 집에 있어.”
아. 덕이가 어쩔 수 없이 자세한 사정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위층에 사는 지훈이 욕실 문이 잠겼다고 잠깐 와서 밖에서 열어달라고 한다고 말이다. 고기를 올려둔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웃었다.
“부수고 나오라고 해.”
“질투해?”
“질투가 뭔지는 알고?”
“내가 다른 놈이랑 놀면 네 뱃속이 부글거리는 거.”
하아. 웃기고 있네. 질투가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지인이나 아니면 119를 불러도 될 텐데 왜 이른 시간에 덕이에게 연락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틀림없는데, 그게 확 드러나질 않으니 더 경계가 됐다.
“그러지 말고 얼른 가서 도와주고 오자.”
“놔둬. 화장실에 갇힌다고 죽진 않으니까.”
“그럼 나 혼자 다녀올 테니, 고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덕이가 휴대폰을 챙기더니 현관 쪽으로 간다. 저게, 진짜. 영신이 적당히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옮겨 담고 나서는 불을 끄고 집게를 한쪽에 올려두고 나서 그런 덕이를 뒤쫓았다. 너 이리 안 와?
***
덕이가 잠금장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까 통화하면서 지훈이 가르쳐줬는데 어쩐 일인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덕이의 뒤에 있던 영신이 팔짱을 낀 채로 번호 여섯 자리를 불러준다.
“628479. 이 머리 나쁜 여우야.”
덕이가 흠칫 놀라서는 영신을 봤다.
“나, 나도 기억하고 있었어….”
불러준 대로 번호를 누르니 문이 띠리릭 열린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아까 통화하면서 말하는 걸 들었단다. 덕이가 감탄을 하며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영신은 여전히 두어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덕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영신아, 거기 있을 거야?”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너만 다녀와.”
그때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열리는 문틈으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지훈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가 덕이를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덕이 씨! 빨리 왔네요!”
“너 뭐야! 갇혀 있다고 했잖아!”
지훈이 사람 좋게 웃었다. 저게 툭하면 고장이라고, 문을 막 잡아당겼더니 열리더라고, 그래서 이제 막 나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눈에 덕이의 뒤쪽에 서서 무서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영신이 뒤늦게 들어왔다.
“아… 그쪽도 오셨네요?”
말꼬리가 늘어지는 게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다. 영신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라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잘됐다. 그럼 해결됐으니 난 이만 가볼게.”
그대로 가려는 덕이의 팔을 지훈이 붙든다. 영신의 시선이 잠시 그 손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직 아침 전이라고 했죠? 온 김에 같이 먹어요. 저 막 준비하던 참이었거든요.”
그 말에 덕이가 저도 모르게 영신을 돌아봤다. 아침을 안 먹은 건 사실이지만 영신이 준비하다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하려는데 뒤에 서 있던 영신이 먼저 선뜻 그러자고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덕이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영신을 쳐다봤다. 너 왜 그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럼 들어오세요.”
지훈이 사람 좋게 웃었다. 덕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뒤쪽에 서 있는 영신에게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영신이 덕이의 뒤를 따라 지훈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매서운 눈으로 현관부터 찬찬히 훑어본다.
제집처럼 귀신이 드나들 수 없도록 따로 처방하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집 안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향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덕이가 현관문을 연 순간부터 흘러나왔는데, 도무지 그것의 정체를 모르겠다. 께름칙한 마음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라 일단 먼저 들어가겠다고 자처한 것이었다. 향내로 감추고 있었지만 실은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집 안에서 풍기는 냄새와는 다르게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가 들어왔다. 가구며 장식장에 있는 작은 소품들이 집주인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다양했다.
“식사 전에 잠깐 차를 내올게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계세요.”
“도와줄까?”
“아니에요, 덕이 씨. 괜찮아요.”
지훈이 영신을 흘깃 보더니 주방 쪽으로 향한다. 마치 제집인 양 소파에 널브러지는 덕이를 지나쳐 영신이 장식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 앞으로 가서는 가만히 장식장 안을 들여다봤다. 주방에서 저를 쳐다보는 지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척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덕이도 영신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장식장 안을 같이 살폈다. 전에 왔던 거랑 별 차이가 없다고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늘어났네.”
“뭐가?”
“저번에 봤을 때보다 뭐가 늘어난 거 같은데.”
“그래?”
“아닌가. 기분 탓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가락으로 안에 진열된 것들을 하나씩 센다. 그래도 잘 모르겠는지 곧 포기하고는 옆에 다른 것들을 구경했다. 장식장 안은 열쇠로 잠겨 있어서 함부로 열어볼 수가 없었는데, 진열된 것들 또한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작은 손거울도 있었고, 브로치도 있었고, 그리고 보석이 박힌 알 반지도. 덕이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반지는 꽤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저걸 내가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하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지훈이 차를 내와 그걸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중이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있어요?”
영신이 몸을 돌려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고, 덕이가 그 뒤를 따랐다. 소파에 앉는 영신을 보며 지훈이 다소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덕이만 올라올 줄 알았는데, 영신이 따라온 건 꽤 의외였으니 말이다. 영신의 앞에 차를 놓아주자 그가 빤히 그걸 내려다보기만 한다.
“왜 안 마셔요?”
“전 원래 낯선 사람이 주는 건 마시질 않습니다.”
“저런. 그런데 왜 집엔 들어온 거죠?”
영신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꼬리만 슬쩍 당겨 웃었다. 네가 의심스러워서 그런다, 이 새끼야. 집 안을 둘러봐도 딱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욕실에 갇혔다는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컸다.
유독 깔끔한 집 안의 상태나 흠집 하나 없는 가구들을 봐도 그렇고, 툭하면 고장 나는 욕실을 내버려둘 만큼 남자는 게을러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의 얼굴은 욕실에 갇힌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혈색이 돌았다. 갇힌 게 아니라 반신욕을 하다 나온 거겠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에 덕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내가 먹을게! 영신이는 원래 차를 안 좋아해.”
뻔한 거짓말에 영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지훈이 그러냐며 과일도 내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며 다시 주방 쪽으로 향한다. 찻잔을 드는 덕이의 손을 영신이 툭 친다. 먹지 말란 뜻으로 고개를 저었더니 덕이가 알아듣고 시무룩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영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일은 됐습니다. 마침 둘 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서요.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주방에 있던 지훈이 밖으로 나오며 과일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지만, 영신은 무뚝뚝한 얼굴로 괜찮다며 거절했다. 이제 막 과일을 깎으려던 참이었는지 그의 손엔 작은 과도가 들려 있었다. 영신이 아랑곳하지 않고 덕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뭐 해? 안 갈 거야?”
덕이가 마지못해 일어서며 영신의 뒤를 따랐다. 지훈에게 다음에 보자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자 넓은 집 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저벅저벅, 지훈이 칼을 쥔 채로 소파 앞까지 걸어와선 찻잔을 내려다봤다.
“입도 안 댔네. 차가 마음에 안 들었나?”
훗.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손에 쥔 과도를 익숙하게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을 친다. 들고 있던 사과의 끝 부분을 칼로 슥 베더니 그대로 한입 물고서 아삭아삭 씹어 먹는다. 단물이 입 안에 확 퍼지며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주방 쪽으로 가서 입 안에 있던 사과를 개수대에 퉤! 뱉어내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맛없어.”
***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덕이는 영신을 졸졸 쫓아다니며 투덜댔다. 기껏 차도 주고 과일도 주려고 하는데 좀 먹고 오면 안 되는 거였냐고 말이다. 그 말에 영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애초에 문이 잠겼다고 널 부른 것부터가 수상해.”
“질투야?”
“질투 얘긴 집어치우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툭하면 고장 나는 욕실? 웃기지 말라고 해. 결벽증으로 보일 만큼 그 집은 먼지 한 톨 없었어. 물건이 정리된 것만 봐도 거의 강박 수준이었다고. 그랬는데 그런 사람이 망가진 욕실 문을 그렇게 방치한다고?”
흠. 덕이가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가. 저는 그런 것들보다 너무 잘해주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긴 하는데.
“혹시 걔도 내가 여우인 걸 다 아는 거 아닐까. 그래서… 나한테 뭐 얻어내려고 그러는 건 아닐까.”
“저번에 말했잖아. 걘 분명히 알아. 왜 모른척하는진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영신이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멈춘다. 덕이가 먹다 만 오이를 챙겨 들고와서는 한입 깨물려다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영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찝찝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진열장 안에 있던 물건 중 몇 개는 죽은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것들이다. 그것도 편하게 죽은 이들이 아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부정을 씻어낸다고 하긴 했지만 미약하게 남아있던 것까진 어쩌질 못했는지, 보는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대체 그게 왜 그 집에 있는지 모르겠다. 퇴마 의식을 할 때 간혹 죽은 이들의 물건을 쓰기도 하지만 의식이 끝나면 그것들은 대부분 태워 없애는데 말이다.
“하여튼, 나가지 마. 요즘 네 주변으로 이상한 것들이 자꾸 꼬이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 이상한 것 중에 너도 들어가?”
“아니.”
“그렇지만 집에서 혼자 있으면 너무 답답하단 말이야.”
“말 듣는 게 좋을걸.”
“씨.”
시무룩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툭툭, 발을 바닥에 찧는 덕이를 보니 영신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꼴을 보니 못 나가게 한다고 해서 말을 들어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오늘은 나랑 같이 나가든가.”
덕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든다. 정말? 정말이야? 신이 나서는 오이를 든 채로 영신의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다. 욕실로 들어가려던 영신이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오이를 꼭 쥔 손으로 허리를 감싸 쥐더니 제 등에 얼굴을 대고 문지르기까지 한다.
“치워, 좋은 말로 할 때.”
“고마워, 영신아! 진짜 고마워! 우리 재미있는데 놀러 가자!”
그만 떨어지라며 몸을 홱 돌리는데 덕이가 뒤꿈치를 들어 영신의 뺨에 쪽 뽀뽀를 하고 나서는 후다닥 거실 쪽으로 도망간다. 으하하, 또 뽀뽀했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그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잠시 멈칫했다.
욕실 옆에 있는 서랍을 열었더니 어젯밤 덕이에게 줬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usb가 뒹굴고 있었다. 덕이가 사라진 문 앞을 봤다가 다시 그것을 내려다봤다.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선 그대로 서랍을 탁 닫아버렸다.
***
덕이가 입을 댓 발 내밀고 앉아 있었다. 재미난 데 놀러 가는 줄 알았더니 밥 먹고 찾아온 곳이 겨우 한의원이라니. 저번엔 허리가 아파서 진맥은 안 봤는데 이번엔 앞에 앉은 나이 지긋한 한의사가 손목을 붙들고 한참 동안 맥을 짚어보는 중이었다.
한의사가 손을 떼어내더니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보라고 한다. 덕이가 시키는 대로 하니 이번엔 등 쪽을 두드리고 무릎 밑을 꾹 눌러 아픈지 확인했다. 몸을 자꾸 만지고 두드리는 행위를 보며 덕이가 초조한 눈빛으로 뒤에 서 있는 영신을 돌아봤다.
박영신 사촌 동생 박석현 이름으로 진료를 받고 있기는 한데, 혹시 여우인 걸 알아채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침을 꼴깍 삼키는데 한의사가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맥이 너무 약한 데다 전체적으로 기 순환이 안 돼 혈이 다 막혔다고 보시면 됩니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면 꽤 심한 건데.”
영신이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래서 꼬리가 더 안 생기는 건가. 여태 구슬이 없어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몸 자체가 약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몸에 화가 많이 쌓여서 그래요.”
“화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풀지를 못하니까 그게 쌓인 거죠. 보통 우리가 울화병이라고 부르는데,”
덕이가 영신을 쳐다봤다. 너 때문인 거 아니냐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영신은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침 치료를 하셔도 좋고, 약도 같이 쓰면 더 좋겠지요. 이런 경우 보약보단 치료용 한약이 우선이거든요.”
“그럼 해주세요.”
최대한 비싼 재료를 넣어 몸이 건강하게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한의사가 우애가 좋다며 감탄했지만 덕이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침이 아픈 건 아니지만 바늘이 몸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은 별로였기 때문이다.
“난… 싫어!”
“왜.”
“아파.”
징징 우는 소리를 내며 싫다고 했지만 영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치료실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싫다고 했잖아. 넌 왜 내가 싫다는 걸 시키는데?”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아. 그리고 말 잘 들으면 이따가 맛있는 고기 사줄게.”
“그래도 싫어. 아파!”
영신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덕이를 치료실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빠져나가려고 하는 걸 뒷덜미를 잡아채고 신발을 벗겨 침대에 억지로 올려놨더니 눈을 하얗게 흘긴다.
“말 들어라.”
“알았어. 그럼 고기 필요 없으니까 다른 거 해줘.”
“뭔데.”
“어?”
“뭐냐고.”
“해줄 거야?”
“봐서.”
덕이가 새카만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뭘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봤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동물원 가자.”
“어딜?”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물었다. 다른 데도 아닌 동물원이라니. 동물 주제에 동물원에 구경을 가겠다는 게 너무 웃기지 않는가.
“왜? 친구 사귀러?”
어이없다는 듯 웃으니 덕이가 싫으면 말라면서 입이 툭 튀어나온다. 고개를 숙여 제 신발을 찾길래 영신이 발로 재빨리 신발을 치우고 나서 덕이를 눕게 만들었다.
“알았어. 일단 알았으니까 누워.”
“정말이야?”
“그래.”
곧바로 한의사가 들어왔다. 덕이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눕자 한의사가 알콜 묻힌 솜으로 머리와 팔 발등을 문지르더니 은색 침을 하나씩 꽂는다. 침이 들어갈 때마다 덕이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걸 보며 영신은 꼬리가 빨리 나올 수 있도록 엉덩이 주변으로 해서 침을 잔뜩 꽂아달라고 한의사에게 부탁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관뒀다. 침을 다 놓은 후 둘이 남게 되자 덕이가 얼굴에 침을 꽂은 채로 영신을 불렀다.
“영신아.”
“왜.”
“나 사진 좀 찍어주면 안 돼?”
“뭐?”
“이따가 미자랑 인태한테 보여주게.”
“이걸 왜 보여줘?”
“그냥.”
하. 영신이 별짓을 다 한다고 핀잔을 주는데도 덕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영신이 덕이의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낸 다음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찰칵. 예고도 없이 사진을 찍자 그 와중에도 덕이가 예쁘게 다시 찍으라고 난리다.
“어차피 넌 못생겼어.”
“그래도 다시 찍으란 말이야.”
“진짜 귀찮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옆 침대에도 손님이 들어왔다. 쉿. 영신이 이제 조용히 하라고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자 덕이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대로 입을 꾹 다문다. 몸도 제대로 못 움직이고 입까지 다물고 있으려니 졸음이 오는 모양이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창가로 스며들어오는 볕에 꾸벅꾸벅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졸지 않으려고 눈을 억지로 뜨는 모양이 가관이다. 영신이 그 모습을 보며 그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문득 덕이의 머리맡 작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웃는 얼굴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그만 정색해 버렸다.
***
차에서 내리던 영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선글라스를 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마가 벗겨질 것처럼 볕은 따갑고, 비가 오려는지 습하기까지 했다. 이런 날씨에 동물원이라니. 빌어먹을. 덕이에게 돈을 쥐여주며 너나 갔다 오라고 하려고 보니 벌써 신나서 저만큼 앞서가는 중이었다.
“야, 구덕.”
덕이가 뒤를 돌아본다. 덥지도 않은지 싱글벙글 웃더니 손을 흔든다. 초록빛을 머금은 나무 아래로 아이처럼 웃고 있는 그 모습에 영신이 뒷주머니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돈 주고 보냈다가 어디 가서 또 사고라도 치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였다. 됐다, 관두자. 고개를 젓고 나서는 그냥 가라며 손짓을 했다.
우아. 먼저 가서 뭘 하나 봤더니 덕이가 솜사탕을 보고 개뼈다귀를 발견한 개처럼 헥헥거리면서 좋아한다. 그 모습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영신을 보며 두 눈을 반짝거리는 걸 보니 하나 사달라는 뜻이다. 지갑을 꺼내며 솜사탕 기계 앞으로 걸어갔다.
“하나 주세요.”
“넌 안 먹어?”
“어.”
“왜? 이거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
하필이면 주인이 커다란 분홍색 하트 모양의 솜사탕을 만들어 덕이에게 건넸다. 덕이가 그것을 환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걸어가는데 주위의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멀쩡한 사내 둘이 가는데 한 명은 커다란 핑크 하트 모양의 솜사탕을 들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주말이 아니라 다행이지.
덕이는 휴대폰을 꺼내 솜사탕을 찍느라 바빴다. 영신이 그 모습을 보며 한심한 얼굴을 했다. 대체 사진을 찍어 뭐에 쓰려나 모르겠다. 어차피 보여줄 사람이야 인태와 미자밖에 없지 않은가. 아, 이제 하나 더 생겼네. 18층 18놈.
“그만 찍고, 먹어.”
“아깝잖아.”
“두면 녹아. 그냥 먹어.”
그럼 맛만 볼까? 하더니 빨간 혀를 솜사탕에 가져다 댔다. 솜사탕이 혀에 닿자마자 녹았고, 곧 덕이는 신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눈이 커다래졌다. 다시 혀를 대더니 ‘으허헐.’이라고 이상한 소리까지 내면서 감탄한다.
“영신아. 이거 엄청 맛있어.”
“알았으니까 작은 소리로 떠들어. 쪽팔리니까.”
“오이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진짜 맛있다. 나 이따가 하나 더 사주면 안 돼?”
그러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이번엔 저 멀리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우아, 소리를 내며 뛰어간다. 주변을 살피는데 사람들이 동물보다 덕이를 더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얼굴을 가리고 오는 건데. 젠장.
덕이가 뛰어간 곳엔 키가 커다란 기린이 있었다. 나무에 잎사귀를 막 따먹는 중이었는데 혀가 얼마나 긴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영신아, 영신아! 쟤 혀 좀 봐.”
“보고 있어.”
“저번에 본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랑 비슷하다.”
“…….”
“윽. 방금 전에 혀로 코 팠어…. 드러워.”
인상을 쓰더니 다시 솜사탕을 들고 저쪽으로 파바박 뛰어간다. 침 맞을 땐 금방 죽을 것처럼 빌빌거리더니 잘도 돌아다니네. 그래,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어라. 그래야 꼬리도 나오고 나도 고생 좀 덜하지 않겠냐.
느릿느릿 그쪽으로 가보니 이번엔 코끼리 우리다. 하필 코끼리 두 마리가 짝짓기하는 중이었는데 덕이가 그걸 보고는 입을 쩍 벌리고 쳐다본다. 그대로 뒀다간 침까지 흘릴 기세였기에 영신이 툭 턱을 올려쳤다.
“입 다물어. 추해.”
“영신아… 봤어?”
“보고 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봐.”
“고추 크다.”
“입 다물어.”
“우리가 자주 하는 자세랑 비슷하다. 그치?”
“다물라고.”
영신의 구박에도 덕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뺨과 귀가 화끈거렸다. 코끼리가 하는 걸 보는데 왜 박영신이랑 하던 게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니 몸이 슬슬 달아오르고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 흘깃 영신을 쳐다보는데 그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뭘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쳐다봐.”
아, 코끼리 보는 건 아니구나.
“다른 데 가자.”
“짝짓기하고 싶어.”
툭 내뱉은 말에 다른 쪽으로 향하려던 영신의 걸음이 우뚝 멈춘다. 그러더니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옆에 커플이 있긴 했지만 코끼리를 보고 사진을 찍느라 이쪽으론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다.
반쯤 뜯어먹은 솜사탕을 들고 있는 덕이를 보는데 뭐에 꽂혔는지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선 막 입을 떼기 직전이었다. 저대로 뒀다간 또 무슨 말을 떠들지 몰라 손목을 잡아채고선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구석에 밀쳐 넣고서는 노려보는데 덕이가 살며시 고개를 든다. 새색시인 양 얼굴이 빨개져선.
“뭐야?”
“나… 저거 보니까… 너랑 하고 싶어졌어….”
영신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사람들이 야동 보면 땡기는 것처럼 뭐 그런 건가. 동물이니까 동물 짝짓기에 반응하는 건가. 아, 이 대책 없는 여우 새끼. 머리를 짚으며 일단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얼굴이라도 닦고 오라고 했더니 덕이가 영신의 팔을 붙든다.
“하자.”
“미쳤어?”
“나 지금 하면 꼬리 나올 거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손을 뿌리치려던 영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아까 침 맞았으니 뭐 막혔던 기가 뚫리고 그래서 몸의 순환이 제대로 되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더 역정을 내지 못하는데 덕이가 영신의 팔을 붙들고는 다시 보챈다. 하자. 응? 아무 데나 들어가서 하자. 영신이 선글라스를 벗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치겠네, 진짜. 고개를 돌리는데 저쪽에 화장실이 보인다. 그걸 보는 영신의 얼굴이 갈등으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정말 이럴 거야? 넌 지금 꼬리가 나올 기회를 버리는 거라고!”
덕이의 외침에도 영신은 외면한 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놀이공원 화장실에서 그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공중 화장실에 세균이 얼마나 많은데 더럽게. 인상을 쓰며 걷는데 덕이가 근처에 있던 원숭이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조금 전까지 툴툴거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원숭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영신아, 이거 봐! 사람 닮았어!”
원숭이는 나무 위에 앉은 채로 그런 덕이를 보며 으꺄꺄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조롱하듯. 덕이도 지지 않으려 손가락으로 입을 벌려 놀리기도 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때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원숭이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철조망에 매달려 덕이를 한심한 얼굴로 쳐다본다. 덕이가 멈추지 않고 웃긴 표정을 짓는데 갑자기 다가온 원숭이가 들고 있던 무언가를 홱 덕이에게 집어 던진다. 악! 덕이가 얼굴을 부여잡았고, 영신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야. 왜 그래.”
“아이 씨. 쟤가 나한테….”
덕이가 조금 전 원숭이가 던진 것을 내려다봤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지만 아주 작은 땅콩이었다. 작긴 해도 이마에 맞으니 아팠다. 세상에 동물한테 땅콩으로 얻어맞다니. 덕이가 원숭이 우리에 매달려 너 나오라고, 가만 안 둘 거라고 소리를 지르길래 영신이 덕이의 뒷덜미를 잡아채 저쪽으로 끌고 갔다. 원숭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덕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러게 가만히 있는 애를 왜 놀려?”
“쟤가 먼저 놀렸다니까! 저거 실은 사람 아니야?”
“사람은 아니지만 너보다 똑똑한 거는 확실해.”
영신이 쏘아붙이고 나서 앞서 걷는데 어쩐 일인지 덕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몸을 돌려 확인했더니 조금 전까지 뒤에 있던 덕이가 보이지 않는다. 설마 원숭이한테 복수하러 간 건가.
왔던 길을 가는데 문득 걸음이 멈췄다. 덕이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유리 벽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신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넋을 놓고서 손가락으로 유리 벽을 만지고 있었다.
“뭐 해?”
가까이 다가가니 유리 벽 안으로 여우 한 마리가 가만히 서서 덕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리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모습에 덕이는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걸 보는 영신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여우가 여우를 구경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영신의 생각과는 달리 덕이는 어딘가 조금 어두워 보였다. 조금 전까지 원숭이를 보고 웃긴 얼굴을 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새카만 눈동자에 그리움을 잔뜩 묻히고서 여우를 빤히 쳐다봤으니까. 곧 여우가 몸을 돌려 무리 쪽으로 향했고, 덕이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서로 인사라도 나눈 거야?”
덕이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동물과 말을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저와 같은 여우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물원 한쪽에 갇혀 무기력한 얼굴로 있는 여우를 보는 순간 기분이 이상해진 건 사실이다. 어쩐지 저 여우의 모습이 지금 제 모습과 같다고 느껴졌다. 그러면서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도 생각났다. 그들은 덕이가 없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찾지도 않을 테고, 그리워하지도 않겠지.
“그냥….”
“그냥?”
“잠깐 가족들 생각을 했어. 물론 그들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말이야….”
그런 덕이를 보며 영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처지도 다를 게 없으니 위로해 줄 수도 네 한 몸이나 잘 챙기라고 따끔하게 충고해줄 수도 없었다. 어차피 저도 덕이를 이용하려고 데리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입장에서 진심 어린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어나. 여기서 살 생각 아니라면 말이야.”
읏차. 덕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멀어진 여우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도 여우로 변할 날이 오긴 할까.”
푸념처럼 혼잣말을 중얼대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처연하다. 언젠가 덕이가 말해준 게 생각났다. 어릴 때 다른 여우들은 다 여우의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의 피가 섞인 덕이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한 번도 여우인 적이 없었다고. 그래서 무시당하고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꼬리랑 귀 나왔으니 이제 몸만 변하면 되겠지.”
“아까 진짜 나올 거 같은 예감이 들었었는데….”
덕이가 아쉬운 얼굴로 영신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까짓 거 한번 해주는 게 뭐가 어려우냐고 투덜댔지만 영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얼른 가자고 몸을 돌리는 그의 뒤를 덕이가 졸졸 쫓아갔다. 저 멀리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띄었다.
“영신아, 아이스크림 사줘.”
“그냥, 가.”
“사주라.”
“하여튼, 사람 귀찮게.”
영신이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주자 덕이가 그것을 받아들고 매점 쪽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뛰어가는 뒤통수에 대고 네 것만 사라고 말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옆에 있는 헬륨가스 풍선을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작은 풍선에 달린 바람개비를 입으로 후욱 불어보기도 했다.
“애를 키우는 건지, 여우를 키우는 건지 모르겠군.”
곧 아이스크림 두 개를 받아들더니 다시 영신에게 달려온다. 하나는 딸기, 하나는 바닐라다. 두 개를 번갈아 살피더니 어떤 걸 먹을 거냐고 물어왔다.
“난 안 먹어.”
“왜.”
“아까 너 갈 때 말했잖아. 안 먹는다고.”
“못 들었어. 그냥 먹어.”
영신이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단 거 딱 질색인데. 그나마 바닐라가 나을 것 같아 받아 들었다. 덕이가 딸기 아이스크림을 혀로 쭈욱 핥아 먹더니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진짜 맛있다. 너도 빨리 먹어봐.”
덕이가 재촉하는 바람에 영신이 하는 수 없이 아이스크림을 입가로 가져갔다. 살짝 입술로 베어 물고 보니 바닐라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생각보다 덜 달았지만,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엔 두 입 정도 베어 먹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렇게 둘이 걷고 있는데 아이 하나가 엄마한테 매달려서 징징 울고 있는 게 보인다. 손가락으로 나무 위를 가리키길래 봤더니 동물 모양의 헬륨 풍선 하나가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만 울어. 그러게 엄마가 손잡이에 걸어둔 거 빼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엄마의 질책에 아이는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런 모자의 뒷모습을 보며 덕이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멀어지던 아이가 아쉬운지 자꾸만 뒤를 돌아 나무에 걸린 풍선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영신이 그만 가자고 말하는데 덕이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대로 점프한다. 영신의 눈이 커다래졌다.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는 사람이 기어 올라가도 한참을 올라가야 할 높이였는데 덕이가 단숨에 그걸 뛰어오른 것이다.
단순히 뛰어오르는 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뿜어져 나온 기운이 조금 떨어져 있던 영신에게 느껴질 정도로 꽤 컸기 때문이다. 여태 같이 붙어 있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언제 저렇게….
그 상태로 풍선을 잡아채 내려와서는 울면서 가는 아이의 뒤를 쫓아갔다. 아이에게 풍선을 건네주며 웃는 얼굴이 한없이 해맑다. 조금 전 느꼈던 그 기운은 사라졌지만, 어쩐지 덕이의 엉덩이 위로 꼬리 아홉 개가 살랑이는 착각이 들었다. 덕분에 영신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