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헝클어지다 못해 쑥대밭이 되어 버린 은호의 긴 머리카락이 베개에 잔뜩 들러붙었다.
어젯밤 급작스럽게 울어 대는 소은이를 데리고 나간 윤재는 30분 넘게 아이를 안고 거실을 누비다 은호와 배턴 터치를 했다. 품 안에서 꼬물거리던 소은이가 깊게 잠든 걸 확인하고 은호에게 분명 넘겨주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시간이면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방긋방긋 웃으며 옹알이를 해야 할 천사가 밤잠을 자듯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윤재가 먼저 잠든 사이, 소은이 잠에서 깨 어젯밤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게 아닌가 싶었다.
아이 방은 말 그대로 희망 사항이었다. 일곱 살이 넘어가야 겨우 자기 방에서 혼자 잘 수 있으려나. 윤재와 은호는 소은이가 태어난 뒤 현실적으로 아이와 떨어져 자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아이 방에서 유아 침대를 꺼내 안방으로 옮겨 놓았다.
윤재는 얼굴이 반쯤 짓눌린 채로 엎드려 있는 은호를 조심스럽게 다시 일으켜 세운 후 정자세로 눕혔다. 은호의 볼 한쪽이 베개 주름 자국으로 빨갛게 변해 있었다. 윤재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낮은 숨을 내뱉었다. 잠에 취해 있는 모습이 짠하기 그지없었다.
소은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은호를 여러 번 곤란케 했다. 입덧도 그랬지만 막달 즈음에는 목에 탯줄을 여러 번 감고 있어 하루하루 불안하게 만들었고, 예정일보다 이른 진통으로 제주도에서 회의 중이던 윤재가 급하게 공항으로 달려가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소은이는 ‘작은 은호’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처럼 은호를 빼다 박았다. 갓 태어났을 때도 그랬지만 몇 시간 후 뽀얗게 살이 펴졌을 땐 은호의 아기 때를 보는 것 같아 윤재는 소은이 너무도 소중했다. 은호는 두 사람의 결실과 같은 존재에 마냥 눈물만 글썽였다.
둘은 아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육아 교육을 받았지만, 은호와 윤재는 막상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3kg밖에 안 되는 여리디여린 생명을 어떻게 안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교육 시간에 제법 안정적으로 아이를 안는다며 칭찬을 받았던 윤재마저 목도 가누지 못하는 여린 소은이를 안을 땐 손이 벌벌 떨려 나중에는 쥐가 날 정도였다.
그런 소은이 이번엔 바뀐 밤낮으로 은호와 윤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100일이 되면 기적처럼 통잠을 잔다는 주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건만 윤재의 기민한 청각 유전자를 가진 거였을까? 소은은 작은 소리에도 금방 깨 정신없이 울었다. 등에 센서라도 달린 것처럼 침대에 눕히면 바로 잠에서 깨어, 부모의 품 안에서만 자려고 해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후….”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피로를 녹인 윤재는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오다가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걸어 나오는 은호와 마주쳤다.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비며 일어난 게 티가 났다.
“……나가요?”
“응, 몇 시에 잤어?”
“5시…….”
“좀 더 자. 소은이는 이 여사님께 맡길게.”
윤재는 혼몽한 정신으로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은호를 팔 안으로 가두어 감싸 안았다. 곧게 뻗은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내리자 자연스럽게 가슴팍에 닿는 뺨이 기분 좋게 비비적거린다.
흐으응. 옅게 내쉬는 은호의 숨소리가 마음을 죄 녹여 버리는 기분이었다. 은호는 짙은 호박빛 홍채를 일렁이며 윤재를 올려다보았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눈빛으로 말을 걸어오는 은호에게 윤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얼른 자, 응?”
윤재의 그윽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촉촉하게 적시자 은호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떡였다. 윤재는 잘 다녀오라는 버드 키스를 남기고 기운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은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잔상이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소은아, 왜 낮에는 잘 웃다가 밤만 되면 울어?”
찹쌀떡같이 뽀얗다 못해 분내가 풀풀 날리는 소은은 은호의 마음도 몰라주고 연신 빵긋빵긋 웃으며 딸랑이 장난감을 흔들었다.
“정말 밤이 무서워?”
낮에는 순둥이처럼 마음을 훔치는 애교쟁이 천사가 밤만 되면 공포 영화를 본 것처럼 자지러지게 울어 은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소은이를 돌봐 주는 이 여사는 은호의 불안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아기는 어두운 걸 두려워하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초보 부모인 은호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걱정됐다.
“이리 와서 식사 들어요. 소은이는 내가 볼 테니.”
소은이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은호를 구슬려 식탁에 앉힌 이 여사는 자리로 돌아가 아이와 눈을 맞추며 쉼 없이 말을 걸었다. 작은 옹알이 하나에도 큰 동작으로 환하게 웃으며 소은이의 반응을 끌어내는 걸 보면 과연 베테랑은 다르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도 없이 아이를 가졌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육아는 그야말로 최고난도며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소은이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교감하며 가슴 뛰는 사랑을 나누는 게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한 관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시작이며, 앞으로 더한 것이 남았다는 사실을 은호는 소은을 낳고 절실히 깨달았다.
밥그릇을 반쯤 비울 즈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은호는 손을 밀어 넣어 휴대폰을 확인하고 나서야 얼굴 위로 짙게 깔린 먹구름을 지웠다.
피곤해도 식사 잘 챙겨 먹고. 오전 11:51
윤재는 좀비처럼 정신을 반쯤 놓고 다니던 은호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염려를 꾹꾹 눌러 담은 메시지에 괜히 울컥했다. 엄지 아래 살로 화면 속 메시지를 몇 번 쓸다 곧장 통화를 눌렀다.
“안 그래도 지금 점심 먹어요.”
- ……안 잤어?
“한숨 자고 일어났어요.”
한결 산뜻해진 은호의 목소리에 안심이 되는지 흐드러진 콧숨이 스피커로 전해졌다.
윤재는 소은이를 만난 이후 윤 실장과 더욱 각별해졌다. 5개월 먼저 아이를 안게 된 윤 실장은 윤재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육아 선배이자 조언가였다. 틈만 나면 아이의 발달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서로 경쟁하듯 자식 자랑을 하다 보니 윤 실장과 자연스레 사이가 돈독해졌다.
윤재는 육아에 관해 닥치는 대로 습득했다. 이제는 안고, 분유 먹이고, 트림시키는 일에 능숙한 베테랑 아빠가 되었지만, 두세 달 전만 하더라도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아기를 안는 자세가 너무도 서투른 초보 아빠였다.
- 퇴근하고 내가 씻길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윤재 씨 피곤해서 안 돼요.”
- 내일 주말이야. 은호가 평일 내내 고생했으니 이제는 내가 해야지. 몇 시간만 더 버텨.
SH 인베스트먼트는 궤도권에 올라 다시금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투자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사이 유성그룹의 최서령은 두 번의 검찰 불출석과 다섯 번의 출석을 했다. 동생 최영재의 남은 주식을 모두 팔아 2차 어음은 가까스로 막았지만, 회사를 정상화하는 데 결국 실패했다.
유성그룹은 보유한 매물 중 제주도에 있는 리조트를 내놓았는데 부채가 워낙 높아 결국 헐값에 처분하게 되었고, 기회를 노린 것처럼 서인건설이 그 리조트를 사들여 서령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매각 금액이 그동안 리조트에 들인 자금의 4분의 1 수준일 만큼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한시도 쉴 틈이 없다는 걸 깨달은 윤재는 매 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회사와 가정을 완벽히 분리해 둘 중 어느 한쪽에 있을 땐 확실히 그 방향에 온 역량을 쏟아부었다. 은호 입장에서 참 고마운 건, 윤재는 일을 집으로 끌고 올지언정 퇴근 시간은 칼같이 맞추려고 노력했다. 윤재가 육아를 시작하면 은호는 환기 차원에서 윤재의 업무를 일부 도우며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은호는 자기에게 육아를 맡겨 달라고 강력하게 어필하는 윤재를 보며 웃음보가 터졌다.
“남이 들으면 대단한 거라도 하는 줄 알겠다.”
- 대단한 거 맞잖아. 우리 아이인데.
“알았어요. 그럼 이따 봐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은호는 남은 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들이마셨다. 아무리 바빠도 늘 규칙적으로 연락하고 상황을 확인하는 윤재 덕분에 어렵게 느껴지는 육아의 숨통이 조금씩 트였다.
“소은이 제가 볼게요. 여사님도 점심 드세요.”
이제는 제법 허리에 힘을 주고 아이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5개월 차. 부모를 알아보고 옹알이도 다르게 할 만큼 발달이 빠른 아이가 유난히 잠만 100일 수준의 신생아처럼 예민했다.
“소은아, 아빠가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데 그럴까?”
소은은 아빠라는 단어에 환호하듯 까르르 웃으며 두 팔을 높이 휘젓고 투레질을 했다.
“그렇게 아빠가 좋아? 나 완전 서운해질 것 같은데?”
은호는 손수건으로 소은의 턱까지 줄줄 흐르는 침을 닦아내며 따라 웃었다.
어느새 가을 초입으로 접어든 날씨는 강바람의 온도부터 바꿔 놨다. 가을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얇은 면 셔츠 옷깃을 타고 스며들었다.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슬리퍼를 대충 신고 나와 보니 윤재의 신발이었다. 치수가 커서 걸을 때마다 헐떡였지만 집에 도로 들어가서 바꿔 신기 귀찮아 발가락에 힘을 주고 걸었다.
유모차에 소은이를 태우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사이 낮게 유영하듯 날아다니는 잠자리가 유모차 주변을 배회했다. 소은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잡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잠자리는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약 올리듯 소은의 앞을 계속해서 빙빙 돌았다.
한여름 내내 덥다는 핑계로 바깥출입을 삼갔던 은호는 비강으로 밀려드는 상쾌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유모차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거치대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 가요는 소은이의 정서와 어울리지 않지만, 타협의 마지노선이었다. 거실에서 클래식만 질릴 만큼 들었기에 야외에서만큼은 은호가 듣고 싶은 노래로 선곡했다. 대신 박자가 빠르고 과한 멜로디는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은호는 허리를 살랑이며 무릎을 굽혔다 펴는 가벼운 동작으로 춤사위를 대신했다.
“……어?”
갑자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검은 세단이 정원 쪽 주차장에 멈춰 섰다. 윤재의 퇴근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은호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활짝 웃음 지으며 차 밖으로 나오는 윤재를 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왜 이리 일찍 왔어요?”
“무비 데이인 걸 깜빡했어.”
무비 데이라는 말에 은호는 과거 비서실이 그리워졌다. 회사에서 만든 복지 혜택 중 하나인 무비 데이는 매달 둘째 주 목요일로, 오전 근무 후 별다른 일이 없으면 다 같이 영화관으로 가 최신영화를 한 편 보고 저녁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대표도 포함돼요?”
“대표도 직원이야.”
차 안에서 손 세정제로 손을 소독하고, 물티슈로 다시 한번 닦아낸 윤재가 가까이 다가와 은호를 안고 오른쪽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
촉촉한 말 한마디에 피로를 녹인 은호는 고개를 숙여 유모차 차광막 커버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빠를 엄청나게 기다리더라고요.”
아빠의 깜짝 등장에 벌써 신이 난 소은은 폭풍 옹알이를 쏟아 냈다. 윤재는 유모차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자연스럽게 소은이를 안아 들었다. 까르르 자지러지게 웃던 소은은 아빠에게 영역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윤재의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들었다.
“소은아, 오늘은 아빠가 밤새도록 놀아 줄게. 그러니까 나만 괴롭혀.”
“둘 다 괴롭히지 말라고 해야죠.”
“아직 잘 모르잖아. 아빠가 돌까진 참아 줄게.”
“푸하하.”
은호는 윤재의 가슴에 코알라처럼 찰싹 붙어 있는 소은을 수시로 관찰했다. 아무래도 아이는 어른과 달리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순식간에 하는 터라 아무리 잘 감싸고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주시해야 했다.
“우리도 영화 보러 가야 하는데.”
윤재는 집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소은이만 바라보는 은호가 안쓰러웠다. 윤재는 이따금씩 한두 시간 정도 여사님께 아이를 맡기고 단둘이 식사하러 나가길 유도했으나, 은호는 부모가 되었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자리 비우는 것을 불안해했다.
“소은이 조금만 더 크면요.”
“집에서 영화 보기도 쉽지 않고.”
“어휴, 스피커 빵빵하게 틀면 놀라서 울지도 몰라요.”
아이가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시간도 지금보다는 자유로워질 테니 조금만 더 고생하자며 은호가 윤재를 위로했다. 안 그래도 다음 달 미국에 계신 부모님이 일주일 정도 한국에 올 계획인데, 그때 반나절이나 하루 정도 둘만의 시간을 가져 볼까 고민 중이었다.
“잔다.”
조용하다 싶더니 소은이 찹쌀떡 같은 볼을 윤재의 가슴에 척 붙이고 곤히 잠들었다. 줄줄 흐르는 침으로 셔츠에 얼룩이 졌지만, 윤재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집으로 들어가면 깰걸요? 어차피 오래 자야 30분이에요. 조금 더 밖에 있다가 들어가요.”
소은이의 솜털 같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은호는 유모차에서 얇은 담요를 꺼내 소은이의 등에 덮어 주었다.
30분 얕은 잠을 잔 소은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귀신같이 눈을 번쩍 떴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전투 육아를 위해 몸을 풀던 윤재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몸을 엎드려 소은이를 올려다봤다. 의미 없는 옹알이가 전부임에도 끊임없이 두 사람의 이름을 알려 주며 소은이 따라 하도록 유도하는 윤재의 근성에 은호는 웃음을 참으며 열심히 영상으로 추억을 남겼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은호인데 하는 행동이나 체력은 윤재 판박이였다. 태어나자마자 우성 알파 판정을 받았으니 타고난 체질 덕분에 밤에 잠이 없는 걸 가지고 뭐라 하면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하필 닮지 않아도 될 유전자까지 물려받는 건지,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가 걱정스러워 오싹하기까지 했다.
월풀 욕조에 소은이와 같이 들어가 한 시간 가까이 놀아준 윤재는 욕실 밖으로 나올 땐 눈 아래에 길게 음영이 드리워졌다. 같이 놀아 주면서도 매 순간순간 집중해서 아이를 관찰해야 하니 피로감이 배 이상으로 쌓인 것이다.
아이 옷과 이유식을 준비하던 은호는 욕실 문이 열리자, 타월에 싸여 윤재에게 안긴 소은에게 다가가 적당량의 로션을 골고루 펴 바르고 빠르게 옷을 입혔다. 처음 소은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날, 소은이를 씻겨준 것은 여사님이었다. 씻기는 건 고사하고 아이에게 옷을 어찌 입혀야 할지 몰라 손을 벌벌 떨며 우왕좌왕했던 걸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씻길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게 보여.”
“쌀미음 지금 줄까요?”
“응.”
배가 고팠는지 소은은 새 부리 같은 입을 쩍쩍 벌리며 윤재가 떠먹이는 미음을 곧잘 받아먹었다. 아이가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몇 번이고 미음을 흘려 옷을 다시 갈아입히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했다.
정량을 먹였음에도 배가 고픈지 우는 소은 때문에 은호가 급히 분유를 타 왔다. 쌀미음을 먹어 봤자 뒤돌아서면 배 꺼진다며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잘 먹네. 이게 그렇게 맛있나?”
“푸하하.”
어찌나 힘이 좋은지, 젖병을 꼭 쥐고 힘차게 빠느라 소은이의 콧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윤재는 한쪽 팔로 소은을 감고 먹기 편하게 상체를 조금 더 올려 줬다.
“이거 먹어 봤어?”
쌀미음은 혀에 닿는 온도를 확인하느라 조금씩 먹게 되니 혹시 분유도 같은가 싶어 묻자 은호가 고개를 끄떡인다.
“담백한 크림 맛?”
“언제 먹어 봤어?”
“무슨 맛인가 싶어서 가루로 한 스푼 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온도를 확인하느라 한두 방울 찍어서 먹은 게 아닌, 가루로 한 스푼 퍼 먹었단 말에 윤재의 눈이 확장되었다. 은호는 한술 더 떠 분유통을 들고 와 직접 맛보라고 뚜껑을 열었다.
“먹어 볼래요?”
얼어붙은 윤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꽉 채운 분유 한 통을 다 비운 소은은 이제야 만족스러운지 헤벌쭉 웃는다.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은의 몸을 세워 안고 등을 토닥였다. 저녁 식사치고 양이 너무 많아 살짝 걱정된 윤재는 꺽 하는 귀여운 트림을 한 뒤에도 계속 소은을 안고 거실을 빙빙 돌았다.
“내가 볼 테니 얼른 식사해요.”
은호는 윤재에게서 소은을 받아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저물어 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최근에 외운 동요를 반복해서 불러주자, 소은이 손뼉을 치며 옹알이하듯 따라 불렀다. 연갈색 눈동자가 온전히 저 하나만 바라보며 반짝거리자 고되었던 하루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다.
윤재가 식사 후 이를 닦고 다시 소은을 안아 들자, 은호는 옷가지를 챙겨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아침저녁으로 샤워했던 시절이 꿈만 같다. 은호는 소은이 생긴 이후 씻는 시간이 사치스러울 만큼 쉴 틈이 없었다. 눈을 뜨면 소은이부터 챙겨야 했다. 종일 아이를 돌보다 보면, 저녁 무렵 즈음 급격히 체력이 고갈되어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보디 워시 향으로 페로몬이 덮일 만큼 말끔히 씻고 나온 은호는 거실을 둘러보다 쿡 소리를 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소은이를 안고 앞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윤재를 보니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짠했다.
“……응?”
은호가 품 안에 든 아이를 데리고 가자 졸고 있던 윤재가 잠에서 깼다. 반쯤 풀린 탁한 눈동자와 혼곤한 눈매가 보기에도 딱하고 안쓰러웠다.
“눕혀 볼게요.”
깊이 잠든 소은이를 품에 안고 조심히 안방으로 들어간 은호는 부부 침대 옆에 나란히 배치한 유아 침대 위로 아이를 천천히 눕혔다. 놀라지 않도록 가슴을 토닥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슴팍까지 이불을 완벽하게 덮어 주고 나서야 해야 할 일을 다 끝낸 것처럼 뿌듯해진 은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침대에 먼저 누운 윤재가 웃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은호는 이불을 들추고 윤재의 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은호야.”
윤재가 손을 뻗어 은호의 봉긋한 이마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금욕하는 윤재를 늘 붙잡고 흔드는 은호의 아련한 시선. 그의 선이 곱고 단아한 이목구비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참고 있던 윤재의 욕구를 끌어 올렸다.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타고 턱 끝을 쓸던 손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자, 윤재를 올려다보는 은호의 시선에 가냘픈 떨림이 느껴졌다. 윤재는 다물린 입술 틈새로 소리 죽인 웃음을 흘리며 은호의 분홍빛 아랫입술을 쓰다듬었다.
“오늘도 고생했어.”
깊이를 알 수 없는 흑갈색 눈동자가 오로지 은호를 향해 쏟아졌다. 머금었던 뜨거운 숨결이 가까이서 흩어지며 윤재의 얼굴이 다가왔다. 하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말랑한 입술이 은호의 입술 선에 닿자 입이 벌어지며 촉촉한 혀가 매끄럽게 밀려 들어왔다.
은호는 천천히 긴 속눈썹을 펄럭이다 눈을 감았다. 오로지 감각에 의존한 채 그의 입술을,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입술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사이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이 은호의 뒤통수를 감싸며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었다.
“사랑해.”
윤재의 뜨거운 숨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고여 있던 사랑의 감정이 천천히 몰려와 허기진 마음을 빼곡히 채워간다. 은호는 그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에 눈물이 고였다. 윤재는 축축하게 젖는 은호의 속눈썹 위로 입술을 포갰다. 일렁이는 환희를 조절하지 못하는 은호는 오늘도 응축된 언어를 토해낸다.
“진심으로… 사랑해요.”
모든 것엔 끝이 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주는 사랑에는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