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새로운 시간의 시작
점심을 먹은 직후여서 그런지, 회의실 안은 졸음을 이기기 위해 각자 챙겨 온 커피로 그윽한 향이 진동했다. 회사의 실적이 점점 높아지는 만큼 투자 문의가 줄을 잇자, 인력 충원과 새로운 팀 개설이 이어지며 비서팀도 확인해야 할 업무가 급격히 늘어났다.
은호의 옆자리에 앉은 한 비서는 생크림 가득한 캐러멜마키아토를 휘휘 젓다 말고 은호의 한쪽 어깨를 툭 건드렸다. 윤 실장이 들어오기 전까지 삼삼오오 모여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다른 비서들과 달리 은호는 보고서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무님은 좀 괜찮아지신 거지?”
“……네. 어제부터 ……많이 ……좋아졌어요.”
수치를 다시 확인하느라 한 비서가 물어본 질문의 답이 뚝뚝 끊겼다.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보내야 할 자료가 중요한 문서다 보니 손으로 모니터를 눌러 가며 다시금 체크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비서는 자신이 오전에 부탁한 자료를 은호가 꼼꼼하게 처리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고맙다는 제스처로 커피 컵을 건배하듯 툭 건드렸다.
“안 좋다면서 회의는 다 들어오시고, 아무튼 전무님도 못 말려.”
일 중독자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전 오후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여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화상을 연결한다고 회의실에 들락날락했던 한 비서는 기존에 하고 있던 업무를 계속 끊어서 하느라 3일 내내 불만을 토로했다. 은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 마시듯 삼키던 박 비서가 두 사람의 대화에 스리슬쩍 끼어들었다.
“유 비서는 전무님 집에서 3일 내내 있었던 거예요?”
“……아니요, 전무님 집으로 출퇴근했죠.”
은호는 살짝 찔리긴 했으나 선의의 거짓말이라 생각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굳이 3일 내내 집에도 못 가고 전무님 옷을 뺏어 입으며 곁에 있었다는 세세한 이야기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비서실 게시판에 보고서 올라오는 거 보면, 쉬는 텀도 없어 보이던데.”
예리하게 묻는 박 비서의 질문에 뜨끔한 은호는 대충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하긴, 윤재가 3일 내내 집 밖으로도 못 나가게 하는 바람에 퇴근 시간에도 보고서를 정리해 올리는 등 출퇴근과 무관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런 걸 따질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게 박 비서였다니.
“거, 적당히 눈치 보면서 해. 자기가 너무 잘하면 우리가 상대적으로 일 안 하고 노는 것처럼 보여.”
“……그럴 리가 있나요.”
한 비서는 못 말린다는 투로 은호를 쿡 찔렀다. 실제로 윤재의 비서는 은호와 한 비서 둘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적으로 은호가 윤재의 전방위를 담당하고 한 비서는 은호의 서포트를 하고 있었다. 최근 은호가 최윤재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며 상대적으로 업무가 없어진 한 비서는 매주 주간 보고서에 공란을 메우지 못하고 난감해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은호는 한 비서가 할 일을 나누어 그가 업무를 가져갈 수 있도록 했지만, 그는 그 일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다시금 은호에게 일이 넘어오고 있었다.
“에이, 그렇다니까. 좀 쉬엄쉬엄해.”
한 비서의 업무로 올라가는 보고서 중 은호가 도와주는 게 한두 건이 아니었다. 솔직히 남의 일을 처리하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다. 은호도 남의 일까지 처리하는 건 업무 과중이라 번번이 한 비서의 업무까지 떠안는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남는 것도 아니고, 늘 쫓기듯 하지만 보고서의 맨 마지막 확인자가 최윤재다 보니 은호는 허술한 리포트를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한 비서가 올리는 보고서는 윤재가 보기 힘들어할 뿐만 아니라, 실수가 잦아 뒤늦게 이중 확인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박 비서는 타이밍을 재다 잠깐 대화가 끊기자 은호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 비서, 거기 머리카락 붙은 거 같은데?”
“여기요?”
은호가 왼쪽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니. 거기 말고.”
그 자리가 아니라고 세밀한 방향을 알려 주던 박 비서는 답답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은호의 왼쪽 목덜미에서 머리카락을 떼 바닥에 버렸다.
“됐어요.”
은호가 확인할 틈도 없이 바닥으로 사라진 머리카락은 사실 거짓이었지만, 은호는 눈치채지 못했다. 고맙다며 웃어 보인 은호는 이어지는 한 비서의 질문에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전무님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지 않아?”
“그런가요?”
“응 티가 나잖아. 웃는 모습 간만인 것 같은데, 오늘 아침부터 내내 그러시네. 무슨 좋은 일 있나?”
처음에는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지만, 한 비서의 말을 다 듣고 보니 며칠 전 윤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네 앞에서만 다정하고 잘 웃는 거라고, 다른 직원들은 자신을 여전히 냉랭하고 차갑게 인식한다던 그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자 은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용솟음쳤다.
“투자처 중에 실적 대박 난 곳 있는 거 아냐?”
“전체적으로 좋은 상태잖아요.”
“아니면 배당금이 대박 터지셨나?”
“원체 돈 많으신 분이 그런 거로 갑자기 웃겠어요?”
은호를 사이에 두고 근처에 있던 비서들이 의기투합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의 주제로 모여들었다. 이런저런 의미 있는 의견이 하나둘 흘러나왔지만, 전부 이유가 아닐 것 같다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잘라내던 박 비서가 반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삼키며 별안간 의미심장한 투로 말을 던졌다.
“혹시, 애인이 생긴 걸까요?”
그의 마지막 말에 뜨끔한 은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직원들이 박 비서의 의견에 ‘그럴 수도 있겠다’와 ‘자는 시간도 모자랄 만큼 바쁜데 연애할 시간이 있겠냐’며 양분된 반응을 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윤 실장이 들어왔다. 직원들은 윤 실장의 눈치를 보며 후다닥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은호는 박 비서의 마지막 말이 회의 내내 마음에 걸렸다. 화끈하게 달아오르던 주제는 윤 실장으로 인해 여름철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지만 언제든 수면 위로 올라올 이슈였다.
‘오늘 내내 웃었다고?’
은호는 한 비서의 말을 곱씹으며 윤재의 오후 스케줄을 쫓아다니고 나서야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공감했다. 회의에서 늘 표정이 없던 그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인사팀에서 올라온 총괄 투자본부 최종 면접자 이력서를 일괄 정리해 윤재에게 보낸 은호는 미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그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신 건가요?”
“아니.”
말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지만 입꼬리는 여전히 내려오질 않는다. 엊그제부터 쭉 그래 와서 이상하다 감을 잡지 못한 은호는 이곳이 회사라는 것을 상기하자, 확실히 그의 행동이 평소보다 조금 들떠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웃고 있잖아요.”
“…웃으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은호가 변명 아닌 변명을 찾아내느라 버벅대는 사이 윤재는 팔을 뻗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어 넣었다. 중구 필동…?
“여긴 어디예요?”
“오랜만에 생각나서.”
“……아아.”
오랜만에 생각났다는 말과 주소지를 더해 보니 한정식집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은호는 기분 좋게 시동 버튼을 누르며 운전대를 돌렸다.
지상으로 올라가자 빌딩 숲 사이로 반짝이는 태양이 은은한 기운을 내뿜으며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쌕쌕 내쉬는 은호의 숨소리에 감기 기운이 섞여 있음을 눈치챈 윤재는 조용히 에어컨 바람을 줄이며 시트에 등을 붙였다.
사실 어젯밤 격정적인 정사를 나눴는데, 한참 몸이 달아오를 때 에어컨 온도를 맞춘 상태로 곯아떨어져 옷을 벗고 잠든 은호가 그대로 감기에 걸려 버렸다. 아침부터 미열이 있는 것처럼 얼굴에 붉은 기가 돌더니, 오후 들어서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생각해 낸 곳이 한정식집이었다. 메뉴 중 보양식 코스가 있어 제대로 먹이고 좀 쉬게 하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신호가 걸려 차가 멈추는 걸 확인한 윤재는 손을 뻗어 은호의 볼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우려했던 열은 없었다.
한정식집에 도착하자마자 룸으로 들어간 윤재는 원하는 코스로 주문한 후, 앞에 놓인 수국차를 은호의 빈 컵에 반쯤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인위적이지 않은 단내가 올라오자 군침이 도는지, 은호는 두 손으로 찻잔을 붙잡고 후후 불어가며 차를 마셨다. 윤재는 은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고정했다.
“둘이 함께했던 첫 식사 자리였지 아마.”
윤재는 그날을 회상하는 듯 말을 꺼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감상에 젖은, 낮고 그윽한 투에 그날의 시간으로 기억을 되돌리던 은호는 바람 빠진 콧숨을 내쉬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는 그의 질문에 은호의 눈빛이 포물선을 그리며 윤재에게 도달했다.
“그날 비 왔던 거 기억하세요?”
“식사 후에?”
“네.”
그날 많은 감정이 교차했었다. 가시방석에 앉혀 놓고 냉하게 구는 그의 태도 때문에 여길 데리고 온 그의 수고가 의미 없이 지나갔다.
“전무님 뒤쫓느라 심장이 얼마나 쫄깃했는지 몰라요.”
“아…….”
“비 맞으면서 차 쪽으로 어찌나 빨리 걸어가던지. 전무님 옷 젖을까 봐 급하게 우산 펴고 뛰었거든요.”
은호가 정색하며 고개를 내젓는 동안 상 위로 화려한 색감의 음식이 빼곡하니 채워졌다. 은호는 지난번과 다른 메뉴를 확인하며 무음의 탄성을 뱉었다. 인삼 타락죽을 한 입 떠먹던 은호는 앞접시에 떡갈비를 얹어 주는 윤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미친놈이라 생각했겠네.”
“……그 당시에는 전무님이 어렵더라고요.”
불과 8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당시의 일이 1년은 훌쩍 넘은 것처럼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사건도 많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예전에 모시던 전무님은 연세가 있으셔서 틀에 박힌 패턴이 있었는데, 전무님은 이리저리 튕겨 나가서 애를 좀 먹었죠.”
나이 든 전무를 대할 때는 명확히 그어 놓은 선이 있었다. 암묵적 합의처럼 개인사를 절대 묻지도 터치하지도 않았으며, 출퇴근 시간이 확실해 그의 스케줄러 노릇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일을 하며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이던 은호가 비서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직업에 대한 혼돈이 온 건 윤재와 함께 온 한정식집부터였다. 보통은 회사 근처에서 밥 한 끼 먹으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업무 방향을 체크하는 걸로 환영식을 마치는 게 일반적이다. 비즈니스 접대로 유명한 곳에 굳이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이고,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이어서 윤재가 작업을 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래서, 싫었어?”
“싫다기보다는 …신선했어요.”
“그때 나름 잘 보이려고 데리고 온 거였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나. 회사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타락죽을 비우고 윤재가 건네준 떡갈비를 한 입 문 은호는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고기를 꼭꼭 씹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것도 좀 먹어봐, 여기 잘해.”
윤재는 김이 오르는 신선로에서 야채와 산적을 국자로 떠서 은호 앞에 내려놓았다. 새삼 그때와 달라진 그의 행동이 눈에 띄었다. 내 사람을 챙긴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은호는 상을 가득 채운 음식 중 삼색 새우구이와 송이버섯을 집게로 집어 윤재 앞에 내려 뒀다.
“전무님도 드세요.”
서로를 챙겨 주다 상 위에서 팔이 꼬인 두 사람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키득거렸다. 포만감을 가득 채워 주는 그의 사랑에 은호는 벌써부터 배가 불렀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천히 먹다 보니 두 사람은 평소 식사량의 두 배에 가까운 음식을 섭취했다. 후식으로 나온 차까지 남김없이 마시고 나온 둘은 뒤뜰에 이어진 숲으로 향했다. 근처 산에서 불어오는 호젓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유유히 지나갔다. 저 멀리서 들리는 한정식집의 가야금 소리가 귓가를 적시며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윤재는 은호의 손을 깍지 끼고 천천히 대나무 숲을 걸었다.
“은호야.”
윤재는 아까부터 은호만 바라보고 있었다. 숲의 아름다움 따위는 은호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은호의 정갈하게 정리된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인다. 손을 들어 곱게 매만져 주던 윤재가 낮고도 작게 속삭였다.
“곁에 남아 줘서 고마워.”
그럼 늘 곁에 있지 어딜 떠날까 봐요? 라고 삐죽한 답을 내놓으려던 은호는 그의 축축해진 눈시울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울컥 흔들렸다. 안도하는 듯한 말 한마디가 왠지 모르게 너무도 애달프게 들렸다. 은호는 갑자기 찡해지려는 코끝을 훌쩍이다 말고 고개를 숙여 그를 껴안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고생했다고, 이제 괜찮다고.
***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은호가 같이 자고 싶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하고 싶은 게임이 있는데, 늦게까지 할 수도 있으니 같이 자자는 말에 윤재의 입이 귀에 걸렸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운전대를 잡은 은호는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허파에 바람이 가득 차 조금씩 빼내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웃어 윤재의 의문이 증폭되었다. 무슨 게임이길래? 뭔데? 물어도 알려 주지 않던 은호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의문의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러브 …젠가?”
보드게임을 모르는 사람조차 젠가만큼은 익히 알고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쇼핑백 안에 같이 든 투명 스티커를 꺼내자 윤재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이게 뭐야……. 19금, 29금, 39금, 49금?”
며칠 전 은호는 수영에게 애정 전선 확인용이라며 게임을 하나 추천받았다. 수영의 성화로 얼떨결에 러브젠가를 산 은호는 미션 스티커를 확인하자마자 모든 피가 얼굴에 쏠리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수영은 게임을 두고 식어가는 애정에 기름을 붓는 용도로 탁월하다고 칭찬을 아까지 않았지만, 은호와 윤재 사이에는 애정이 식을 새가 없다는 게 함정이었다. 매일 불타오르는 바람에 일부러 수위를 조절해도 부족할 판에, 이건 흡사 등유 한 통을 들이붓는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생각만으로도 부끄럽고 낯간지러웠지만, 이걸 접할 윤재를 떠올리니 그의 반응이 너무도 궁금했다.
윤재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둔 식사를 하면서도 젠가용 미션 스티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은호의 예상대로 연신 웃다가 심각해졌다가를 반복하던 그는 종내 사레에 들려 앉은자리에서 물 한 컵을 비웠다. 윤재는 신문물을 접한 것처럼 몇 번이나 감탄사를 쏟아내고는 미션 스티커에 묻고 싶었던 질문이 다 있다며 좋아했다.
도우미 아주머니의 퇴근 후, 샤워를 마치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은 거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29금 미션 스티커를 젠가에 하나씩 붙였다. 19금은 낯간지러우니 29금부터 하자고 해서 39금과 49금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윤재가 스티커를 붙이면서 이건 꼭 꺼내서 묻는다며 몇 개를 따로 골라 놓길래 은호가 넌지시 눈동자를 굴려 확인해 보니 걸리면 얼굴이 화끈할 만한 멘트였다.
“답을 못 할 때 벌칙은?”
“뭘 했으면 좋겠는데요?”
“보이지 않는 곳에 입술 자국 내기 어때?”
손가락을 깍지 끼고 우두둑 소리를 내며 목과 허리를 돌린 윤재는 작정한 듯 게임에 임할 채비를 마쳤다. 은호는 일밖에 모르는 남자가 게임에 진지해질 때, 일할 때처럼 똑같이 전투 상태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벌칙이 너무 센 거 아니에요?”
“그 정도 해야 재미있지.”
“그럼 쓰러뜨리면요?”
“쓰러트린 만큼 오늘 밤 시도해 볼까?”
마지막 말에 은호의 표정이 파삭 깨졌다. 기승전 19금으로 향하는 그의 말은 게임이 주는 소기의 목적을 이미 달성하는 것만 같았다.
“그냥 소원 들어주기 하죠.”
“어차피 내 소원이 그건데?”
알다마다요. 결국 윤재의 뜻대로 언제 잘 수 있을지 모르는 화끈한 밤을 예약한 둘은 젠가를 반듯하게 쌓아 올렸다. 미션이 보이지 않도록 스티커를 밑으로 향하게 해 무슨 질문이 걸릴지 몰라 더 짜릿하고 두근거렸다. 쉽고 간단한 질문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노골적인 질문이 뒤섞여 있었다.
시작부터 아래층을 노리며 막대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낸 윤재의 입꼬리가 경련이 인 것처럼 바르르 흔들렸다. 도대체 무슨 질문이길래 저리도 좋아할까. 은호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윤재가 든 나무 막대를 확인했다.
“손이 좋아? 입이 좋아?”
처음부터 수위 높은 질문을 들은 은호가 앞니로 입술을 잘근거리며 난처해하자 웃음을 참고 있는 윤재가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말 안 할 거야? 말 안 하면 허벅지 안쪽에 키스해 줄 건데.”
이런 상황을 예상했지만, 게임 시작부터 끈적이고 화끈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술에 취해 있다면 덜 부끄러울 텐데, 맨정신에 말하려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은호는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손이 좋아요.”
“손이 좋다고?”
“……입도 좋긴 한데, 느낌이 너무 세고 부끄러워서.”
실실거리며 웃는 윤재는 회사에서 보던 최윤재 전무와 완벽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아가 둘로 나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은호는 회사 안에서의 리더다운 최윤재도, 둘만 있을 때면 다정하게 돌변하는 최윤재도 모두 두근거릴 만큼 좋았다.
이번에는 은호가 상층부에서 나무 막대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스티커를 보자마자 풋,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어느 자세가 가장 좋아요?”
쑥스러운 질문이지만 게임이라 생각하고 당당히 묻자, 팔짱을 낀 윤재가 잠깐 고민하더니 거침없이 대답했다.
“얼굴 보고 하는 거면 어떤 자세든 상관없어.”
다시 윤재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젠가를 쓰러뜨리기 위해 안달이 난 것처럼 자꾸 하층부에 있는 나무 막대를 건드렸다. 이윽고 나무 막대 하나를 조심히 꺼내 확인한 그가 주먹을 쥐며 포효했다. 미션이 궁금해 곁으로 다가간 은호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홍콩행 티켓〉
선택자가 원할 때 언제든 쓸 수 있다는 단서에 윤재는 오늘 밤이라고 못을 박았다. 은호는 이미 러브젠가를 들고 왔을 때부터 예상했던 터라 기분 좋게 웃어넘겼다.
이번에는 은호가 상층부에서 막대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도 저도 아닌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뿜자, 이번에는 윤재가 다가왔다.
〈앞에 있는 사람 옷 입은 상태로 중요 부위 1분 쓰다듬기〉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윤재가 한참을 끅끅거리다 어디 한번 해 보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적혀 있는 대로 해야 해? 입고 있으면 답답할 거 같은데.”
“룰은 지켜야죠.”
투덜거리는 윤재에게 가까이 다가간 은호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직 세우지 않은 말랑한 녀석을 만지는 건 처음이었다. 위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자 겉에서 보기에도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부피를 키우며 선이 뚜렷해졌다.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성감을 자극당한 윤재는 허스키한 신음을 뱉으며 턱 끝에 힘을 주었다.
“20초도 안 된 것 같은데, 왜 이리 힘들어해요.”
“나 못 참겠는데.”
“……네?”
윤재는 드로어즈 밖으로 곧 튀어나올 것같이 아래를 단단하게 세웠다. 그는 곧 한계에 도달해 천 위를 쓰다듬는 은호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홍콩행 티켓, 지금 쓸래.”
어리둥절한 은호를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윤재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이러려고 오늘 자고 간다고 했냐며 진득하게 이곳저곳을 빠는 소리와 함께 투덕거리는 목소리가 침실 밖으로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
H호텔 비즈니스 스위트룸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는 서령의 심기가 복잡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고객들이 선호하는 호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지금은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로 객실 가동률이 점차 떨어지는 추세였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마감 소재로 오랜 시간 깨끗이 유지되고는 있지만 특유의 클래식함이 요즘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지 않아 큰 문제였다.
파우더룸으로 들어가 화장대 앞에 놓인 어메니티 브랜드를 확인한 서령은 한숨을 폭 내쉬며 곁에 서 있는 호텔 총괄 실장에게 이것저것 개선 사항을 이야기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작은 캐리어를 든 남성이 담당 비서와 함께 서령이 있는 룸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이사벨라 브라운의 대리인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명함을 건넨 후 접견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설치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그녀가 건강 문제로 이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 대신 화상으로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트북 모니터 높이를 서령의 눈높이와 맞춘 남성이 뒤로 물러나자 화면 안으로 이사벨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서령을 응시했다.
백발의 단발머리를 손으로 가지런히 넘기는 그녀는 미국 특유의 짙은 화장법 때문인지 도도하고 날카롭게 보였다. 깊게 팬 주름 없이 잘 정돈된 얼굴은 그녀의 나이를 알지 못하면 자칫 말실수를 불러일으킬 만큼 환갑의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카라가 없는 브이넥 블라우스 위에 에메랄드빛 재킷을 걸친 그녀는 데스크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두 손을 깍지 끼며 정중히 미소 지었다.
- 죄송합니다. 원래는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요즘 몸이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위임장과 함께 대리인을 보냈습니다.
“이렇게라도 얼굴을 뵈었으니 이해합니다. 저 또한 제 동생의 대리인으로 나왔으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동생인 최영재는 불안감이 높아져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만큼, 본인의 의사 결정권이 없는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서령은 미리 준비된 레몬차를 한 모금 입에 물고 내려놓은 뒤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 얹었다.
“유성창투 주식을 공격적으로 사들이던데,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답을 듣고 저와 뜻이 맞지 않는다면 양도를 고민해야 해서요. 아,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온 대화는 함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식을 매입하는 분위기와 에이 세컨드 회사의 방향을 비추어 볼 때, 윤재에게 이로운 회사가 아님은 분명했다. 하나,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유성창투의 주식을 급히 사들이는지 의도가 궁금했다.
- 돈이 되는 곳에 투자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닐까요.
눈치 게임을 하려는 서령과 달리 단호한 인상의 이사벨라는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직선적인 투로 내던졌다. 그녀는 불순한 의도 없이 오로지 투자에만 목적을 두었다고 잘라 말했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시니 더 묻질 못하겠네요.”
서령은 조금 더 캐물으려다 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사벨라의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자태가 날카롭게 다가왔다. 서령은 그녀의 분위기 장악력에 저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수시로 곧게 폈다. 미팅에 오기 전 여러 방향으로 에이 세컨드를 조사해 봤지만, 서령에게 나쁜 조건의 회사는 아니었다. 투자 실적에만 집중해 사고팔기를 반복하는 일명 단물 빼먹는 투자 회사라 윤재에겐 적군이, 반대로 서령에게는 아군일 확률이 높았다.
“얼마큼 원하시는 건가요.”
미팅 전 양쪽 법무법인과 조율을 하고 만나는 자리이지만 서령은 한 번 더 물었다. 에이 세컨드는 시세의 5% 할인된 가격으로 전량 매입을 원했다.
- 전부 내어 주신다면 고맙겠지만, 부사장님의 의견이 중요하니 따르겠습니다.
“시세보다 10%를 더 얹어 주신다면 전량 매각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서령은 시도라도 한다는 마음으로 무리수를 던졌다. 약간의 절충을 요구하는 의미였다. 서령의 터무니없는 제안에 경직된 표정을 짓던 이사벨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깍지 낀 손을 풀었다.
- 저희는 이미 제안 금액까지 말씀드렸기에 수긍하셔서 이 자리에 나오셨다고 생각했는데요.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그만큼의 자금은 어렵습니다. 대규모 블록 딜은 통상 할인을 감안하고 측정해 주시는 게 아닌가요.
필요에 의해 먼저 접근을 했으면서도, 원칙을 고수하는 그녀는 당당했다. 그녀의 회사가 처음으로 제시한 조건은 부분 매각 시 10% 할인, 전량 매각 시 5% 할인이었고 서령은 이에 응해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 이사벨라는 말없이 서령을 지그시 바라보다 수용안을 내놨다.
- 부분 매각하신다면 7% 할인, 전부 매각하신다면 현 시세로 조율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그래도 처음 조건보다는 많이 좋아졌다는 것에 만족한 서령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향후 플랜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 글쎄요. 추이를 지켜본 후 주총에 나타날지 고민 중입니다.
에이 세컨드도 투자 회사이니, 자신의 잇속만 챙기면 그만일 것이다. 서령은 전량 매각 요구 조건에 혹했지만 향후 유성창투의 의결권을 생각해 부분 매각으로 마음을 돌렸다.
“10%만 매각하겠습니다.”
17% 중 10%를 팔게 되면, 세금을 제하고 1800~1900억 사이일 테니 1, 2차 어음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 말씀해 보세요.
서령의 고심하는 눈빛이 이사벨라를 건드렸다. 같은 여자로서 전우처럼 함께하자는 뉘앙스를 심어 주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지분을 계속 모으신 후 주총을 장악하신다면, 최윤재 전무를 꼭 끌어내려 주세요.”
서령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최윤재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령은 자리를 지키고 승승장구하는 최윤재에게 오래전부터 앙심을 품었다. 자라나면서 아버지인 최 회장은 자신과 영재보다 윤재를 더 아꼈고, 늘 비교의 대상처럼 여겼다. 서령은 최윤재의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했다. 윤재를 눈앞에서 사라지게끔 만드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유성창투는 최윤재가 없어도 전문 경영진을 잘 배치하면 지금처럼 충분히 굴러갈 거라고 확신했다.
이사벨라는 초점을 카메라 아래로 내리고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에게는 굳이 잘나가는 회사의 임원진을 갈아치울 이유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최윤재가 유성창투의 핵심이라는 건 주주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 제 권한 밖의 일이군요.
“상황을 몰아갈 테니 주총에서 한 번만 흔들어 주시면 됩니다.”
상황을 몰아간다는 말에 냉담했던 이사벨라가 반응했다.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서령의 매서운 눈동자가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꾸준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 상황을 몰아간다니요. 압박할 카드가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리지만, 사람을 묶어둘 예정입니다.”
묶어 둔다는 표현이 말 그대로 누구 하나를 가둔다는 말인지, 아니면 일을 하지 못하도록 수를 쓰겠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이사벨라는 오로지 투자만을 고려하며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 묶어 둔다니요, 최윤재 전무 말씀입니까?
“최윤재 전무는 아닙니다. 최윤재 전무는 그 자리에 있어야지요. 그가 순순히 나올 만한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엊그제 한 대표를 통해 유은호가 각인을 했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박 비서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며, 전 애인과는 최근에 헤어졌다고 했으니 각인한 상대는 윤재가 틀림없었다. 혹시나 해서 같은 날 미행을 붙인 결과, 그들은 회사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으며, 산책로를 따라 걷기도 했고, 집으로 갈 땐 윤재가 직접 운전까지 했다. 두 사람이 찍힌 휴대폰 영상을 받아 본 서령은 윤재의 애정 행각에 실소가 터졌다.
“주총 즈음 빌미는 제공해 드릴 테니, 그때 가서 흔들어 주세요.”
서령은 자신 있었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준서 때처럼 둘을 이간질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법망을 넘어가더라도 은호를 오랫동안 납치할 계획까지 머릿속에 계산했다. 윤재의 판단력을 흩트려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유도할 참이다. 이사벨라는 침묵을 유지하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시간이 필요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양쪽의 합의서가 변호사를 통해 작성되고 사인까지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동안 최서령은 이사벨라를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포섭 작업에 나섰다. 최근 여러 방면으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아버지처럼, 그와 관련된 인맥도 하나둘 끊기고 있다는 걸 몸소 체감했다.
서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사를 정상 궤도로 올려놓고 싶었지만 경영 사정이 어려워지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곁을 떠났다. 심지어 가까이서 잘 알고 지내던 자들이 등을 돌려 배신감만 계속해서 쌓여 갔다. 서령은 이사벨라를 설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곧 들어올 자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
총괄 투자본부에서 올린 최종 라인업을 훑던 윤재가 테스트하는 것처럼 은호 앞에 스타트업 회사 리포트 세 개를 펼쳤다. 향후 유망한 투자처로 어느 곳이 좋겠냐는 그의 질문에 은호는 몇 번이나 본 보고서임에도 다시 한번 차근차근 훑었다.
스타트업 회사이기에 자본금은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콘텐츠 기획력과 아이디어, 그리고 대표의 마인드를 보고 승부수를 던진다. 콘텐츠가 괜찮다면 자본을 밀어 넣는 순간 회사는 원하는 방향으로 크게 확장된다. 여기서 중요한 게 대표의 마인드인데, 대표가 바르게 서 있을수록 그의 성품에 맞는 인재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온다.
은호는 세 곳 중 하나를 골라 윤재 앞에 들이밀었다. 그의 눈이 평소보다 더 예리하고 냉철하게 움직이더니 다시금 은호에게 향했다.
“세 번째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셋 다 비슷한 콘텐츠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면 다음으로 봐야 할 게 대표 마인드랑 이력인데, 이분이 탁월해 보여서요. 소속 직원도 전부 같은 회사 출신인 거 보니 평판이 나쁘지 않아 보이고요. 큰 회사 박차고 따라 나올 정도면 대표를 그만큼 신임한단 뜻이니까.”
은호가 선택한 회사 대표는 작년까지만 해도 모 포털 회사 쇼핑 개발 본부장을 담당했으며, 현재 데리고 있는 직원 중에는 같은 회사 출신 수석 기획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IT회사 중 가장 큰 곳에서 수년간 다져진 경험이 있으니 자본금만 생긴다면 대표가 데리고 나올 개발 인력도 예상되는 시나리오였다. 윤재는 은호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는지 들고 있던 만년필로 세 번째 회사에 체크 표시를 두 번 그었다.
“전무님은 어느 곳을 선택하셨는데요?”
“나도 같아.”
“첫 번째 회사… 선택 안 하시고요?”
사실 눈에 띄는 건 첫 번째 회사였다. 세 회사 모두 아직 투자를 받기 전이고, 사업 방향이 조금씩 다르긴 하나 근본은 인플루언서 마켓 플레이스였다. 그중 첫 회사는 현재 서비스를 운영 중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총괄 투자본부 내에서도 첫 번째 회사와 세 번째 회사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첫 번째는 왜?”
“조직 구성이 더 많이 보이잖아요. 서비스 플랫폼도 있고, 이미 유저들도 많이 알고 있고요.”
누가 성공할지는 사실 장담할 수 없다. 투자 회사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하는 것이고, 늘 성공의 길만 걷는 것은 아니었다. 스타트업의 경우 시대적 흐름과 트렌드, 운, 자본 삼박자가 맞아야 성공할 수 있다.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포트를 들고 접견 테이블로 걸어갔다. 이리 와서 앉으라며 손짓을 하자 뒷짐 지고 서 있던 은호가 입술을 야무지게 물고 자리에 와 앉았다.
“거꾸로 물을게. 왜 첫 번째 회사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맞춤 재단한 듯한 윤재의 슬림 핏 스리피스 정장은 그의 완벽한 비율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윤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첫 번째 회사 리포트를 앞에 내려놨다. 회사 내 모든 자료를 꼼꼼히 보며 연구한 탓인지 은호의 투자 감이 나날이 발전하는 게 느껴져 투자본부 내 본부장과 비교하며 면밀히 관찰 중이었다.
은호는 첫 번째 회사 리포트의 개발 플랫폼 화면을 펼친 후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짚으며 조목조목 설명했다.
“기획이 좀 아쉬웠어요. 입소문은 이미 났지만, 확장성에서 좀 갇힌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콘텐츠 기획력에 한계가 보였어요. 물론 자본금을 들이부으면 더 훌륭한 기획안이 나올 테고, 확장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하지만 대표의 경력과 인맥이 좀 짧아 보이고, 인력 투자에 아까워하는 게 눈에 보여요.”
은호는 포괄적 시각에서 회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년이 넘는 사이 전문 경영 비서로 손색이 없을 만큼 부쩍 성장한 모습이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윤재는 답변해 줘서 고맙다는 듯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며 모든 리포트를 하나로 모아 겹쳐 내려놨다.
“스타트업은 대표 마인드와 철학이 중요하거든. 사실 첫 번째와 세 번째 회사 대표 이미 만나 봤어.”
“언제요?”
“지난주 목요일, 금요일.”
은호는 눈동자를 굴리다 짧은 단음을 던지며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연이틀 내내 저녁 약속이 있다며 퇴근하라고 먼저 보내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투자 미팅이었다. 윤재는 저녁 미팅은 무조건 은호를 배제했다. 굳이 차 안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미팅을 기다리며 배를 곯게 할 순 없다고 했다.
“세 번째 회사 대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더 탄탄해서 나도 그쪽으로 가닥 잡고 있어. 성공하는 건 그 사람의 몫이겠지.”
윤재는 이미 세 번째 회사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혹시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싶어 여러 의견을 취합하던 중, 은호의 투자 감각 확인을 위해 물었을 뿐이다.
“잠시만.”
대화가 끝난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보려 하는데 뒤에서 윤재가 그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은호의 넥타이를 부드럽게 조여 반듯하게 정리했다. 가까이에서 풍기는 그의 은은한 페로몬이 은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비 온 뒤 더욱 짙어진 수풀의 시원함이 폐부로 스미는 것 같았다.
은호는 복식 호흡하듯 숨을 내뱉고 쉬기를 반복하며 그의 페로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 요즘 따라 몸이 먼저 반응하며 그의 페로몬을 최대한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각인을 하면 원래 이러는 걸까. 은호는 그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본능을 억제하며 이성을 가까스로 되찾았다.
“잘하고 있어서 보기 좋아.”
윤재는 늘 한결같았다. 그의 간질간질하고 말랑했던 반존대 말투는 사라졌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변함없이 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재는 손가락으로 턱 끝을 붙잡고 가볍게 스치듯 입을 맞췄다. 동그랗게 올라간 은호의 볼이 살굿빛으로 물들었다. 은호는 다른 사람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살피고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전무님.”
“응.”
“재무팀에서 오늘 올라온 보고서 보니까 에이 세컨드가 유성그룹 최영재 전무님 주식의 10%를 매입해서 2대 주주가 되었던데요.”
은호는 출근 이후 줄곧 심란했다. 재무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하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윤재에게 이를 갈던 최 회장 일가가 17%의 지분 중 10%씩이나 에이 세컨드에 넘긴 걸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성그룹 자금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정확한 속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성창투 2대 주주인 최영재가 지분 10%를 매각했다는 기사들이 경제 섹션 상위에 종일 노출되었는데, 기사마다 현금 유동성 확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보고를 받는 윤재의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보고하고 나온 윤 실장이 전무님의 속내를 모르겠다며 은호에게 다가와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윤재는 침착의 수준을 넘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여유롭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확인하고 있어. 몇 가지 더 검증 중인데, 정확해지면 알려 줄게.”
윤재는 오히려 은호를 다독였다. 따로 조사에 들어갔다는 그의 믿음직한 말에 한시름 놓은 은호는 하나로 묶어둔 리포트를 윤재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좋은 건 아닌 거죠?”
“좋을지 나쁠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최악은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그때 준 정보 고마워.”
은호는 혁필 선배가 보내준 에이 세컨드 자료를 윤재에게 메일로 보냈다. 내용이 알찼다면 뿌듯하기라도 할 텐데, 몇 줄 안 되는 단서에 차마 정보를 알아 왔다고 말도 꺼내기 민망해서 조용히 건넸다.
윤재는 뒤에서 신경 쓰고 있는 은호가 기특했지만 더는 이쪽 일에 관여하지 말아 달라고 선을 그었다. 안 그래도 가시권에 들어 있는 은호까지 일부러 끌어들여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그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도움 되는 것도 아닌데요, 뭐.”
명확하지 않은 것투성이였다. 혁필 선배를 통해 들은 게 있다 보니 윤재의 앞길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게 억울하고 화가 났다. 왜 이리 사람을 못살게 구나, 나중에는 원망 섞인 푸념까지 나왔다.
***
윤재는 오후 간부급 회의가 끝나자마자 은호에게 먼저 퇴근하라고 메시지를 남긴 후 커피를 챙겨 강태오의 자택으로 차를 몰았다. 종일 떠들썩했던 지분 매각 뉴스 기사 이후 언제쯤 연락이 올까 기다리던 참에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태오에게 바로 답이 날아왔다.
도심은 퇴근 시간도 아닌데 정체가 심했다. 윤재는 피곤이 겹겹이 쌓인 눈가를 문지르며 보조 홀더에 꽂아 두었던 커피를 집어 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액셀을 천천히 밟았다. 커피를 오래 볶은 건지, 오늘따라 탄 맛이 강하게 느껴져 혀끝이 텁텁했다.
“소식 들으셨지요.”
“네, 매입하셨더군요.”
대문이 열리자마자 야외 주차장까지 걸어 나온 태오가 윤재를 반갑게 맞이했다. 막 회사에서 퇴근해 풀 슈트를 입은 그가 윤재와 악수를 나눈 후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감고 현관으로 향했다. 7월 초입에 들어선 날씨는 에어컨 없이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웠다. 윤재는 뒷좌석을 열어 커다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시원하다 못해 싸늘한 냉방 온도에 등줄기에서 솟아오르던 땀이 순식간에 증발해 날아갔다. 미리 언질을 준 건지 식사를 차린 도우미가 조용히 자리를 비워 널찍한 공간에 또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주방으로 넘어가기 전, 복도 쪽 서랍장 위에 놓인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작은 액자가 눈에 띄었다. 윤재는 실례인 걸 알면서도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사진을 바라보다 곁에 있는 태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에이 세컨드 대표이신 이사벨라 브라운이 상무님 어머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사진 속에는 그와 어머니인 이사벨라 브라운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환히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한참 앳된 거로 봐선 10년도 더 된 사진 같아 보였다.
“굉장한 미인이시군요.”
윤재는 사진 속 모자의 화목한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모를 일찍이 여의고 보니, 가족사진을 많이 남기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되었다. 초등학생 때까진 그래도 사진을 많이 남겨 두었지만, 사춘기 이후로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며 부모와 분리된 삶을 원했던 윤재는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처절하게 후회하며 몸부림쳤다.
“아, 그리고 이거.”
윤재는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태오에게 건넸다. 이미 뒷좌석에서 꺼낼 때부터 그 크기와 두께를 보고 무엇인지 짐작했지만, 윤재가 건네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 태오는 상자를 받자마자 리본을 풀어 케이스를 조심스레 열었다. 한이 서린 듯한 짙은 숨이 차가운 공기를 뚫고 흩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전무님께서 가지고 계셨군요.”
그림 두 점을 옆으로 펼치고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수많은 감정이 뒤섞였다. 배우자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그림을 받아 드는 마음이 감히 짐작되지 않기에 윤재는 말을 아꼈다.
“되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눈가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애써 눈물을 감추려는 모습에 윤재는 옅은 미소로 답을 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오늘은 식사 후 차를 내어드리지요. 전달해 드려야 할 내용이 무겁습니다.”
그의 묵직한 예고에 뭔지 모를 불안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윤재는 목울대를 꿀렁이며 그를 곧게 마주 보았다.
“저도, 지난번에 묻지 못한 궁금증을 풀고 싶습니다.”
해소하지 못한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닌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암묵적 합의를 본 것처럼 서로를 신뢰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굳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단단하게 얽혀 버렸다. 태오는 어쩌면 껄끄러운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으나 각오했다는 듯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기꺼이 다 알려 드리지요.”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 그러니까 8개월 전 은호가 사고로 사망하던 날, 강태오는 유성창투 한 대표 집무실에 오전 일찍부터 와 있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강태오 말고도 제인제약 김성호 대표, 유성그룹 최서령 부사장 등 총 네 명이 함께 있었으며, 마침 최윤재는 투자 손실에 대한 다른 투자처를 모색하느라 외근 중이었다.
당시 사건의 시발점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휘청이는 유성그룹, 그리고 곧 불어닥칠 1, 2차 어음. 최서령은 한 대표를 통해 당시 유망했던 코인 거래소인 B-gate에 유성창투가 집중적으로 투자하길 바랐으며, 윤재는 한 대표의 강력 추천과 당시 대세 기류에 맞춰 투자를 감행했다.
B-gate 투자 후 두 달 만에 회사 대표의 횡령 및 해외 잠적, 그리고 정부의 코인 정책 압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유성창투가 혼돈에 빠졌다. 서인건설 강태오와 제인제약 김성호는 그 틈을 타 유성창투 주식을 사들여 주총에서 최서령에게 힘을 실어 주려고 준비했다.
그들이 최서령에게 도움을 주고, 차후 주총이 끝나고 받기로 한 대가는 최초 발행가로의 1:1 유상 증자였다. 현재가가 아닌 최초 발행가면 가만히 앉아 수백 배 차익을 보는 조건이라 두 사람은 최서령의 말을 따르기로 합의를 보았지만, 강태오는 최서령에게 편승하면서도 왠지 모를 찜찜함을 품고 있었다.
그날은 모든 게 어긋나려고 작정한 것처럼 일진이 사나웠다. 아침부터 칫솔이 부러졌고, 출근 전 타이어가 펑크 났으며, 유성창투 지하 주차장에서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다. 강태오는 오늘만큼은 몸을 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대표 집무실을 찾아갔으나, 더 큰 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연락이 안 돼요. 개 같은 새끼.”
태오는 최서령의 입에서 저급한 욕이 튀어나오는 걸 바라보며 그녀도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실소가 터졌다.
그들은 유성창투에서 B-gate에 300억가량의 투자를 집행하면 B-gate 대표가 해외 법인으로 투자 금액을 넘긴 후, 유령 계좌와 카지노에서 돈세탁을 해 다시 유령 회사로 송금, 이후 투자처럼 유성그룹에 돈이 흐르도록 계획했다. 서령이 B-gate 대표와 타협해서 받아야 할 금액은 200억 원이었다. 하지만 B-gate의 대표가 잠적 후 모든 연락을 거부하는 상황이 되자 서령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서령은 잔뜩 날이 선 채로 독기를 내뿜었다. 그녀에게서 퍼지는 노기 서린 페로몬에 눈살이 찌푸려진 태오는 환기 차원에서 창문을 확인했으나, 프로젝트 창이다 보니 각도 제한에 따른 문제로 환기가 잘되지 않았다. 태오는 화장실에 갔다 오는 척 집무실 문을 슬그머니 열어 환기를 시도했다.
화장실에서 막 나와 다시 집무실로 향하는 도중, 흐릿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페로몬 향이 태오를 자극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향이었다. 태오는 후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허공에 흘러 다니는 페로몬을 쫓았다. 비서실 복도를 지나 그가 멈춘 곳은 어이없게도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한 대표의 집무실 문 앞이었다. 그런데 집무실 앞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당신 누구야?”
한 대표 집무실 문틈 사이로 세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남자가 놀라 뒤로 주춤거렸다. 사원 카드와 서류를 들고 있는 걸 봐서는 이 회사 직원이 맞기는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걸 보니 한 대표 담당 직원은 아닌 게 확실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뒤늦게 집무실 안에 있던 서령과 한 대표가 걸어 나왔다. 당황한 남자는 서령과 한 대표를 보자,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리며 도망쳤다. 남자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본 한 대표가 사색이 되어 무슨 대화가 얼마만큼 새어 나갔을지 추측하며 이마를 짚었다.
“유 비서……. 최 전무 소속인데.”
“뭐라고요?”
평소처럼 집무실 앞 사무 테이블에 앉아 있어야 할 박 비서가 보이질 않았다. 경악한 서령은 휴대폰을 꺼내 출입구 밖, 엘리베이터에서 대기 중인 비서를 호출했다.
“방금 엘리베이터로 나간 새끼 있지? 빨리 쫓아서 잡아 와!”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어쩌면 아침부터 사나웠던 일진은 이곳에 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태오는 순식간에 일이 커지자 그 남자를 뒤쫓았다. 왜 뒤쫓는지, 당시에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로비까지 쫓아 나가는 동안 남자를 쫓는 목적은 화를 내거나 겁박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서령에게 지시를 받고 남자의 뒤를 쫓는 비서를 뜯어말리고 싶었다. 그에게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태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끼이이이익!
태오가 건물 밖으로 쫓아 나갔을 때, 좀처럼 믿기 힘들 만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택시를 붙잡으려 차도까지 뛰어나간 남자가 달려오던 트럭과 부딪쳐 하늘 위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볼품없이 처박혔다. 그의 생이 사그라드는 것과 함께 희미하던 페로몬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태오는 눈앞의 광경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자신이 만약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더라면, 아니면 조용히 그 남자를 붙잡아 당부했더라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진 않았을 텐데. 자신의 말 한마디로 인해 되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폐부 깊숙한 곳까지 지독한 한증이 밀려왔다.
서령은 남자의 사고에 대한 보고를 받은 직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면을 쓰고 평온하게 굴었다. 그 일은 자신과 상관이 없을뿐더러 모르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녀의 말대로 증거는 없다. 위선을 떨며 가증스럽게 다음 일을 도모하는 무리 속에서 태오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말 못 할 죄책감이 온몸을 짓누르며 목을 조였다.
시작은 최윤재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증오였다. 자신이 사랑했던 배우자 이준서가 죽기 직전까지 마음속에 담아둔 사람. 배우자의 자살로 편협한 사고를 하게 된 태오는 한국으로 돌아와 서령을 만나며 다시 한번 갈등을 점화했다.
하지만 그날 은호의 사고로 태오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대표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간 태오는 수소문해서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유은호.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의 이름을 확인한 태오는 장례식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머릿속은 앞으로 향하라고 쉴 새 없이 명령을 해 댔지만, 말뚝이라도 박힌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던 끝에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간 태오는 상주 대신 서 있는 비서실 직원과 가벼운 묵례를 나누었다. 최윤재는 유은호의 장례식장에 앉아 있었다. 소속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허망한 듯 넋이 나가 있었다. 차가운 외모 속에 우수와 고독이 짙게 배어 있어 태오는 일부러 그를 외면했다.
영정 사진은 사원증에 있던 사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 같았다. 인위적인 하얀 바탕 속 은은하게 미소 짓는 얼굴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었다.
사진 속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격통이 가슴을 짓누르며 온몸을 압박했다.
태오는 묵념 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루 동안 벌어진 일에 머리가 어지러워 마지막에는 술로 정신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부하 직원의 장례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최윤재는 그동안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유은호라는 사람의 생을 앗았다는 충격과 자신이 알고 있던 최윤재와 현실 속 최윤재의 괴리감으로 태오는 혼돈을 맞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시간은 8개월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태오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했다. 8년도 아닌, 단 8개월. 태오는 8개월 동안 이전에 후회했던 굵직굵직한 일 위주로 하나씩 주변을 정리했고, 그 과정에는 최윤재와 유은호도 포함되었다.
반려자의 첫사랑이라는 이유로 미워하던 최윤재를 차근히 지켜보며 그가 그동안 일궈온 업적, 가치, 향후 미래를 확인하니 끝을 모르고 자라나던 증오가 서서히 퇴화했다. 증오는 얄팍한 자존심을 멋스럽게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관찰한 탓에, 태오는 윤재의 회귀를 이르게 눈치챘다. 사업 방향이 좀 더 단단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는 은호를 지키려 했다. 태오는 그의 노력에 천천히 마음이 돌아섰다. 하지만 윤재가 회귀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마냥 지켜보는 것보다는 만나서 상의할 게 많다는 걸 깨달았고, 태오는 자연스럽게 마주칠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제약회사 투자 미팅에서 윤재를 만났다.
***
윤재는 8개월 전 은호의 직접적인 사망 이유를 듣고 정신이 멍한지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환기가 필요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걸어가는 뒷모습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태오는 느릿하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 유은호 씨 사고는 제 탓입니다.”
윤재는 그가 처음 이 집을 찾아왔던 날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버틴 이유를 이해했다. 아마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면 윤재는 태오를 지금만큼 신뢰하기 힘들었을 테니, 시간을 끌어 은호의 사고 시점이 무사히 넘어가는 걸 증명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했던 거군요. 최서령 부사장과 손을 잡지 않았으니.”
“……사실 6월 20일에 한 대표 집무실에서 그날처럼 똑같이 모이라는 호출을 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전무님도 일부러 그날 은호 씨 데리고 휴가 내신 것 같던데.”
“그건 누구에게 전해 들었습니까?”
“한 대표에게 지나가듯 들었습니다.”
윤재의 입매가 뒤틀리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주변에서 둘을 바라보는 시선이 꽤 많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확인하니 기분이 언짢았다.
“그보다…….”
태오는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영상 하나를 틀었다. 40여 분 정도의 풀 영상으로 최서령의 꼿꼿한 자태가 담긴 섬네일이 눈에 띄었다. 플레이를 눌러 보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무엇일지는 충분히 예측되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 드릴 테니, 끝까지 봐 주세요.”
태오는 준서의 그림 두 점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2층 어딘가 그의 그림을 따로 보관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시간을 가지게 된 윤재는 플레이를 누르고 근처 소파에 앉아 대화 내용에 집중했다.
최서령이 자신을 미워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말미에 나온 대화 일부가 윤재의 심기를 건드렸다. 휴대폰을 쥔 손등 위로 힘줄이 우뚝 솟을 만큼, 윤재는 어금니를 아득거리며 화를 삼켰다. 영상이 끝나갈 즈음 2층에서 내려온 태오는 음의 고저 없는 투로 사실을 전달했다.
“최서령 부사장이 유은호 씨를 노리고 있습니다.”
윤재는 태오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생각이 폭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최서령은 두 분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아마 혼자 알았다기보다는 한 대표가 알려준 것 같아요. 제게도 말해 주는 걸 보니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서실 직원이겠네요. 저를 감시하는 것보다 유은호 씨가 상대적으로 쉬울 테니.”
윤재는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텁텁한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 대표가 위험인물임을 감지했으면서 그의 비서까지는 계산치 못한 게 실수였다.
“……박 비서.”
윤재는 박 비서를 경계 대상에서 잠시 내려둔 자신을 한탄했다. 현 조직으로는 둘을 분리해야 할 타당한 명분이 없다.
태오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까딱하면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거라는 걸 윤재에게 빨리 인지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대화 내용을 이해하셨겠지만, 유은호 씨를 협박의 빌미로 쓸 분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윤재는 두 손을 기도하듯 포개어 코와 이마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지만, 현재로서는 은호의 안전이 우선이지 다른 것은 논할 가치가 없었다.
“주총 전에 미리 숨겨야겠군요.”
***
다음 주총에서 사명 변경을 하기 위한 밑 작업을 하느라 바쁜 건지, 아니면 투자 미팅인 건지, 윤재는 요즘 들어 예정에 없던 저녁 약속이 부쩍 늘었다. 덕분에 칼퇴근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은호는 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은호는 30분째 휴대폰의 까만 액정을 만지작거리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단문의 메시지를 쳤다가 지우길 반복하던 손가락이 액정 화면 위에서 머뭇거렸다. 미팅 중인데 괜히 신경 쓰게 하는 건가 싶어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방향을 돌려 전송을 눌렀다. 에라, 모르겠다. 미팅 중이면 알아서 넘기겠지. 은호는 신경을 끄는 척 TV를 틀었지만, 시선은 계속 휴대폰에 머물렀다.
리모컨을 들고 무심한 눈으로 채널을 한 바퀴 돌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휴대폰 진동이 길게 이어졌다. 화면 위로 최윤재의 이름이 뜨자 은호는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가져다 댔다.
- 은호야.
귓가로 뜨겁고 습한 숨과 함께 술기운이 한 번에 밀려들어 왔다. 끈적하고도 느릿한 말투는 이미 술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어디예요?”
- ……집.
“지금 갈게요.”
이게 몇 달 만이더라. 작년 겨울, 부모님의 기일 전날에도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마셔 집까지 그를 붙잡고 들어갔었다. 기억을 더듬던 은호는 그가 또다시 말이 끊어질 정도로 술에 취했다는 생각에 불안을 품고 서둘러 집 밖을 나섰다.
후덥지근한 열대야로 인해 콧방울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에 미처 식지 못한 아스팔트의 열기까지 더해지자 조금만 뛰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출입 카드로 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지르며 뛰는 은호의 갈색 머리카락이 뭉쳐지고 짙어졌다.
현관문을 열자 시원하다 못해 차갑고 건조한 온도에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던 땀이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은호는 신발을 대충 벗고 복도를 지나 거실과 주방을 빠짐없이 둘러보다 말문이 막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주방 테이블 의자에 앉아 눈앞의 온더록스 잔에 넋을 놓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의 모습이 너무도 초췌했다.
“……왔네.”
시야 끄트머리에 무언가 막히는 느낌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던 윤재가 은호와 눈을 마주쳤다.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위태로움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혼자서 왜 이리 많이 마신 건데요.”
“……아, 이거… 내가 다… 마신 건가.”
테이블 위에는 바닥을 드러낸 양주 한 병과 온더록스 잔 그리고 얼음통뿐이었다. 안주 하나 없이 술만 들이켠 그는 머리끝까지 취해 있었지만, 술을 마신 이유를 말하기 싫은지 말을 아끼며 눈꺼풀만 천천히 깜빡였다.
“무슨 일 있어요?”
은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내 풀어졌다. 고개를 가로젓는데 몸에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중심축이 흔들리며 휘청였다. 은호는 혹시나 윤재가 의자에서 넘어질까 봐 가까이 다가가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밀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윤재는 남아 있는 정신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몸을 지탱해 보려 했지만, 자꾸 중심이 앞으로 쏠려 비틀거렸다. 은호는 그를 끌어안다시피 질질 끌고 침실로 데리고 갔다.
윤재에게서 흘러내리는 페로몬이 바닥으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윤재를 낑낑거리며 침실로 겨우 데리고 간 은호는 손으로 그의 뒷머리를 받치며 조심히 눕혔다.
반쯤 감긴 눈이 천장에서 방황하다 은호를 찾고는 바로 정착했다. 은호는 흐릿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왜 이리 절절하게 끓어오르는지 몰라 의아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힘들어해요.”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안에 들어 있는 피를 몽땅 뽑아내는 것처럼 온몸이 조여 왔다. 은호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열이 오르는 체온과 달리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윤재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은호의 손을 감싸며 느릿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가 힘들어… 한다고?”
은호는 그게 아니면 이건 뭐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취해 있는 윤재의 상태를 보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초점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은호는 초점의 정중앙에 자신을 담으려는 그의 노력이 너무도 가상하게 느껴져 허리를 굽혀 그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힘들어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어루만지듯, 입술을 포개고 말랑한 혀를 밀어 넣자 쌕쌕거리는 뜨거운 숨결에 독한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은호는 혀로 윤재의 입 안에 남아 있는 알코올을 핥았다. 그는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지는지 눈을 반쯤 감은 채 고개를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은호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이제는 거의 감긴 그의 눈을 확인한 후 상체를 일으켰다.
실내 온도가 너무도 낮아 자칫하면 몸살이 올 것만 같았다. 리모컨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손목이 붙들렸다. 그의 푹 잠긴 목소리가 귓바퀴를 긁어내렸다.
“가지 마.”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그가 올곧게 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습기가 가득 들어찬 눈망울이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너울거렸다.
“……이리 와.”
은호는 리모컨을 찾으려던 생각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윤재의 모습이 아련한 잔상처럼 가슴속에 맺혀 신경 회로가 차단된 것처럼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몸을 뉘자 단단한 팔이 은호를 감싸며 가까이 잡아당겼다. 의식이 또렷해진 것도 아닌데 남아 있는 본능이 갈급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보내기…… 싫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수면 속으로 침잠되어 갔다.
“어디 안 가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귓속으로 파고드는 심장 소리를 듣던 은호가 작게 속삭였지만, 윤재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은호는 그의 마지막 말에 담긴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왜 이리 괴롭고 힘들어하는지 모르는 은호는 그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호흡이 편안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날은 유난히 길고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윤재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수시로 인상을 쓰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늘 숙면을 하던 그가 무엇이 그리도 불편한지 내내 은호를 고쳐 안으면서 잠을 뒤척였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몸을 붙들고 숨통을 조여 왔다.
은호는 얼굴로 쏟아지는 강렬한 아침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손등으로 그림자를 만들며 눈을 가린 은호는 천천히 남아 있는 잠을 쫓아냈다. 잠이 들긴 들었구나. 새벽녘까지 윤재를 다독이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샐 줄 알았건만,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은호는 안구가 뻑뻑해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눌렀음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뻐근해진 목덜미를 좌우로 스트레칭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막 샤워를 마친 윤재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은호를 껴안았다. 그 와중에 운동까지 한 건지 술 냄새는 사라지고, 은은한 보디 워시의 잔향만 코끝을 간지럽혔다.
“잠 못 잤지? 술 냄새 지독했을 텐데.”
“……안 피곤해요?”
은호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윤재의 품 안에서 꿈질거리자 감은 눈두덩에 콧방울을 비비던 그가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호는 윤재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몽롱한 정신을 조금씩 깨웠다.
“꿈을 꾸는 건지, 잠꼬대하던데.”
“……내가?”
“네.”
“…아, 미안.”
윤재는 어젯밤의 기억이 흐릿했다. 완전히 기억이 싹둑 잘려 나간 건 아니지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가물가물한 구간이 있어 말을 삼가고 있었다.
베개에 잔뜩 눌려 삐죽 솟은 머리카락을 대충 손가락으로 빗질하던 은호는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구겨진 이불을 바르게 폈다.
“노트북이랑 옷 때문에 집에 갔다 다시 올게요.”
“그러지 말고, 아침 먹고 같이 가.”
가까이 다가온 윤재가 이불보를 대신 붙잡으며 씻고 나오라는 듯 턱짓을 하자 은호가 한 걸음 물러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윤재는 어젯밤 일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면 은근슬쩍 무슨 일이 있어 그런지 물어보려 했으나, 그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굴어 은호는 더 묻지 못하고 해사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요즘 윤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총성은 없지만 전쟁터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세력과 싸우고 있었다. 굳이 상황을 알면서도 들춰 캐묻기보다는 그에게 힘이 되게끔 정을 나눠 주고 힘들어할 땐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그가 흐트러지거나 힘겨워할 때면 걱정스럽기는 하나, 그래도 속내를 내비쳐서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은호는 제가 알던 윤재로 돌아온 그를 보고 밤새 축적된 피곤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인플루언서 마켓 플레이스로 세 번째 회사였던 MPick이 최종 투자처로 확정됨으로써 투자 집행 자금 70억 원이 책정되었다. 한 대표와 MPick 회사 대표가 투자 체결에 사인을 마치고 사진을 남기는 사이, 과정을 지켜보던 최윤재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은호는 법무팀 직원 옆에서 리포트를 정리하다 말고 윤재를 흘끔거렸다. 한 대표를 주시하는 그의 매서운 눈빛은 모든 것을 연소해 재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무섭게 타올랐다.
자리를 먼저 비우는 윤재를 뒤쫓아 가지 않고, 법무팀에서 넘겨주는 자료를 마저 확인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은호는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에 시야가 어두워짐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많이 바쁜가요?”
“…아, 아닙니다. 끝나 갑니다.”
평소 대화할 일이 없던 한 대표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반 박자 늦게 이해한 은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대표는 끈적이는 시선으로 은호의 외향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요즘 최 전무와 고생이 많아요.”
“…….”
“그럼, 수고해요.”
그의 비릿한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자리에 앉아 보고서 수신자를 적으면서도 찜찜한 느낌이 은호를 건드렸다. 한 대표가 최서령 부사장과 가까우니, 최윤재에게 적이 되는 걸까. 이분법으로 갈라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아직 판단이 어려워 은호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몸을 사리기로 했다.
보고서를 모두 올리고 비서실로 들어가려는 도중, 집무실에서 나오는 윤재와 마주쳤다.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우는 거니 따라 나올 필요 없다고 말한 윤재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출입구를 빠져나갔다. 한 시간이면 점심 식사인가 싶었지만, 시계를 확인하니 점심이라기에는 시간이 다소 일렀다.
비서팀에 들어오는 전화를 받고, 재무팀과 실물 투자본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모두 정리한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어 있는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파일철을 책상에 올려 두고 몸을 돌리는데,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재와 마주쳤다. 한 시간이 벌써 지났나,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이 그만큼 흘러 있었다.
“재무팀에서 투자금 집행 준비 완료되었고, 실물 투자본부에서 추가로 올라온 ‘MPick’ 보고서가 있는데 확인 검토 부탁드립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온 눈치는 아닌데, 어디를 다녀온 걸까. 고개를 돌려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자, 등 뒤에서 특유의 중후한 톤이 은호를 불러 세웠다.
“오늘, 퇴근 같이하자.”
그의 표정이 그리 편치 않아 보였다. 미련이 많이 남은 듯한 그의 말투에 은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에 먹먹함이 가득 담겨 있는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기 힘든 은호는 심란함을 간직한 채 자리로 돌아왔다.
어제는 만취로 사람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더니, 오늘은 오후 무렵부터 안갯길을 걷는 것처럼 그의 생각이 읽히지 않는다. 퇴근 후 윤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겉도는 대화 속에 침울하게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을 싸하게 만들었다.
은호는 식사를 마친 후 테라스 창가에 기대어 있는 윤재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바깥은 아열대성 굵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유리 벽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줄기는 누군가의 눈물처럼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먹구름 사이에서 간간이 얼굴을 드러내는 달빛이 발치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윤재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럽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은호를 확인하고는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살결의 감촉이 좋아 엄지로 계속해서 뺨을 쓸던 윤재는 얼굴을 은호에게 가까이 붙여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떼어 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은호는 간단한 그 물음을 열 번, 아니 서른 번쯤 생각하다 처음 꺼내었다. 종일 혀끝에 뭉쳐 있다 삼키길 반복한 말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은호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한 그의 피로도를 충분히 알고 있기에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점점 가라앉는 그의 페로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윤재는 가만히 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 코, 입 어느 한 곳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꼼꼼하게 살피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떡였다.
“……물어봐도 돼요?”
차마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은호를 품에 잡아당겼다. 가슴팍에 손을 얹자, 셔츠 너머로 그의 또렷한 맥이 은호의 손바닥에서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은호야.”
그의 습기 먹은 음성이 귓가에 다다랐다. 은호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과 고심하는 그의 표정이 불길함을 암시하고 있었다.
“잠시만,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
“……네?”
시공간이 멈춘 것처럼, 둘 사이를 흐르던 기류마저도 맥이 뚝 끊겼다. 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표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그는 불과 몇 분 전보다 표정이 더 어두워져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뱉는 그의 뜨거운 숨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최서령 부사장이 우리 둘 사이를 알고 있어.”
“…어 ……어떻게.”
최 부사장이 거론되자 은호는 벙긋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뜻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녀가 둘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윤재에게 미치는 피해가 무엇인지, 파장은 어느 정도인지.
“최근에 박 비서나 김 비서가 평소보다 가까이 다가온 적 있어?”
“아니요. 그런 일 없…….”
생각이 온통 최서령에게 매립되어 그가 한 말을 흘려들을 뻔했다.
“아, 있어요.”
“…….”
“셔츠 깃에 뭐가 붙어서 떼어 준다고.”
윤재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은호는 그가 한 질문을 의미를 이해했다. 뭐가 묻은 게 아니라 어쩌면 각인을 확인하기 위해 셔츠 깃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자 배신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주세요.”
그래서 한 대표의 웃음이 소름 끼쳤던 걸까. 투자 계약서를 쓰고 늘 빠르게 빠져나가기 바쁘던 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온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람인 박 비서 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타 직원에게 관심이 없었다.
“최 부사장이 너를 붙잡아 두고 나를 협박하려고 준비 중이야.”
“네?”
“주총 때 내가 회사에서 물러나길 원하고 있거든.”
그녀와 두 번을 마주쳤지만, 만날 때마다 인상이 좋지 않았다. 사람을 발아래에 놓고 멋대로 주무르려 하는 곱지 못한 성정에 은호는 애초부터 그녀를 좋게 평가한 적이 없었다.
“절 잡아다가,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전무님을 협박한다는 말이죠?”
대화 내용을 요약해 다시 묻자 그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총에 사명을 바꾼다길래 반대 측에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 정도로 지저분한 행동을 준비할 줄은 몰랐다. 허탈한 숨을 내쉰 은호는 머릿속 상념을 모두 걷어 내며 빠르게 태세 전환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할 텐데.”
은호는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먼저 나서며 그의 의중을 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재는 마른 얼굴을 쓸며 어금니를 물었다. 주의한다고 나름 조절했는데 결국 무용지물이 되었다. 윤재는 이런 상황을 만든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부모님 집에 가 있을까요?”
미국이라면 괜찮겠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같은 서울 아래는 너무도 위험했다. 이왕 피해 있을 작정이라면 그들이 찾지 못할 곳으로 멀리 떠나 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회사 입사 당시 부모님 집 주소는 적을 일이 없어 한 번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으니 그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다. 윤재와 인연을 맺는 순간, 은호는 그에 뒤따를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가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빠르게 상황을 인지하고, 미국으로 떠나겠다는 말에 윤재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왜 말을 안 해요.”
이제야 어젯밤 그가 왜 그리 많은 양의 술을 혼자 마시며 취해 있었는지, 취한 와중에도 보내기 싫다며 왜 같은 말을 반복했는지 이해가 되어 목에서 뜨거운 열이 울컥 솟아올랐다.
“왜 혼자 속앓이를 해요?”
왈칵 솟아오른 눈물이 하얀 볼을 가르며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은호의 눈물에 놀란 윤재가 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은호는 그가 혼자 앓던 게 속상하고 화가 나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코앞에서 올려다본 윤재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거칠어서 그냥 얌전히 안겨 속을 다스렸다.
“주총 끝나고, 꼭 찾아갈게.”
주총이 끝날 때까지 앞으로 한 달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비서의 공석으로 고군분투할 윤재를 생각하면 가슴 언저리가 뻐근했다. 은호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깟 한 달 반이 뭐라고. 1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 미안해하지 말아요.”
“1년이면 내가 먼저 죽어.”
은호의 빨갛게 물든 눈시울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을 닦아 주던 윤재는 인상을 쓰며 몇 번이나 울컥 올라오는 슬픔을 삭였다. 은호를 눈앞에 두고도 헤어질 생각에 벌써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 갔다.
“언제 떠날까요?”
“왜 이리 서둘러?”
“급한데, 미안해서 말을 못 꺼내겠다고 얼굴에 쓰여 있잖아요.”
출국 전까지 늘 불안할 것이다. 이런 정보를 누구에게 들었느냐, 직접 확인한 것이냐, 정말 사실이냐, 라고 묻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은호는 자신이 서둘러 빠져 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떠날게요.”
오늘이 수요일이니 이번 주까지 업무를 마무리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출국길에 오르는 게 아무래도 그에게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어차피 주말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문제 될 일은 없을 테니 그 정도 욕심은 내도 된다고 생각했다.
“괜찮은 거죠?”
“……회사는 휴가부터 내고 퇴사 처리할게.”
“퇴사 처리요?”
“데리고 올 때는 배우자로 공개할 거야. 직원으로 남기기 싫어.”
은호의 단정했던 얼굴이 물기로 가득 찼다. 울다 웃기를 반복한 탓에 볼이 눈물로 반질반질하니 엉망이었다.
“그리고.”
윤재가 근처 소파에 걸쳐 두었던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감을 잡은 은호는 손가락을 허공에 휘저었다. 시간이 벌써 그리되었던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설마 오전에…?”
“응, 연락 와서.”
케이스를 열자 로마 숫자로 둘레가 음각 처리된 한 쌍의 반지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윤재는 둘레가 좀 더 작은 반지를 꺼내 은호의 왼손 약지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으며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가장 기쁘고 행복할 때 줘야 하는데, 분위기도 못 맞추고 형편없네.”
은호는 미안함을 담은 그의 솔직한 고백에 코끝이 시큰했다. 설렘과 슬픔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반짝이는 반지를 살피던 은호는 케이스에서 윤재의 반지를 꺼내 그의 왼손 약지에 끼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반지 낀 손을 포개고 있으니 또 하나의 매개체로 둘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 안도감이 차오른다. 그가 이 타이밍에 반지를 꺼내 보여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슬픔에 질식할 것처럼 힘들었던 은호는 똑같은 한 쌍의 반지에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사진을 한번 남겨 볼까?”
윤재가 웬일로 휴대폰을 꺼내더니 포개 놓은 손을 각도에 맞춰 사진으로 남겼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진을 은호에게 먼저 전송해 주고, 잠금 화면의 배경으로 설정하는 것을 보며 은호도 따라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스쳐 지나가는 일분일초가 너무 아쉬웠다.
“왜 손 사진만 찍어요. 찍으려면 얼굴도 찍어야지.”
카메라 화면을 셀카 모드로 돌려 팔을 최대한 뻗은 후, 화면 안에 두 사람을 가득 채웠다. 윤재가 카메라 각도를 확인하더니 등 뒤에서 은호를 끌어안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윤재의 과거 인터뷰 사진을 보면 대부분 인위적인 미소를 짓고 있어 사진 찍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줄 알았는데, 표정이 너무도 편안하고 안정적이라 은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부터 사진을 많이 찍어 놓을걸. 은호는 여러 장을 남긴 후 윤재에게도 사진을 전송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고 싶었던 거 있으면 말해줘. 가능하면 다 해 보게.”
“……매일 같이 있어도 돼요?”
“그럼, 떨어져 있으려고 그랬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해 아쉬워 죽겠는데, 당연히 같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그의 답에 은호가 살포시 웃었다. 매일 보던 얼굴을 한 달 반씩이나 못 볼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 한구석이 저미고 쓰라렸다.
“매일 괴롭혀도 뭐라 안 하기예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슬금슬금 웃고는 있지만, 은호의 눈동자는 여전히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윤재는 시시각각 변하는 은호의 표정을 전부 기억에 담으려는 것처럼 찬찬히 쳐다봤다. 그의 표정에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웃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못하는 윤재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가 마음을 삭이고 있다는 것만큼은 선연히 보였다. 윤재 역시 은호와 마찬가지로 눈망울에 습기를 가득 머금고 어룽거렸다.
은호는 윤재의 눈물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장난치듯 말을 가볍게 던졌다.
“눈 밑 다크서클 내려오게 해도?”
“괜찮겠어? 나는 상관없는데.”
“아, 안 되겠다. 주말로 정정할게요.”
마음만 확인했으면 됐다. 은호는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이미 윤재에게서 자신만큼이나 절박한 심정을 확인했기에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정말 괜찮아요.”
은호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복받쳐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의연해지고 싶었다. 얇은 옷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닿은 살에서 그의 심장이 달음박질했다.
품을 파고드는 은호를 보듬어 안고 등줄기를 쓸어내린 윤재는 테라스 밖, 빗줄기로 아득한 정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름을 스쳐 지나가는 빗소리가 가을비처럼 유난히 애달팠다.
***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손이 사르르 내려오더니 조수석에 앉은 윤재의 손을 붙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무언의 응원 같기도, 또는 나를 봐 달라는 손짓 같기도 했다. 떠날 날이 며칠 남지 않아 그런지 윤재가 뒷좌석에 앉기 싫다며 조수석으로 넘어온 탓에 얼굴 보기가 편해졌다. 은호는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웃는 인상을 남겼다. 윤재는 그런 은호에게 화답하듯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7월의 열대 기온은 이른 아침부터 기세등등하게 뜨거운 열기를 대기에 잔뜩 실어 보냈다. 차를 멈출 때마다 보닛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가 바깥의 무더위를 실감케 했다. 차내에는 단계를 올린 에어컨의 인위적인 바람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서늘한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페로몬이 잔잔하게 섞여들었다.
두 사람은 늘 그랬듯 회사 스케줄을 읊고, 간단한 말장난을 시도하며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을 주고받았다. 습관처럼 굳어진 일상이 오늘따라 특별해 보여 1분 1초가 너무 아쉬웠다. 은호는 마음이 먹먹하게 차오르려고 할 때마다 일부러 신나는 척 운전대에 올려둔 손가락을 톡톡 움직였다.
윤재는 강태오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 줘야 할지 고민하다 최소한의 범위만 알려 주기로 결정했다. 모든 것을 다 알려 줬다가는 걱정거리만 늘어날뿐더러, 의도치 않게 일을 그르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윤재는 선바이저를 내려 부신 눈을 가리며 시트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혹시 서인건설 강태오 상무 명함 가지고 있나?”
“…네? …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와 윤 실장이 연락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그 사람에게 연락해.”
윤재의 입에서 강태오의 이름이 나오자 전방을 주시하던 은호의 눈이 옆으로 급히 돌아갔다.
“강태오 상무님이요?”
긍정하는 짧은 답변 뒤로 갈 곳 잃은 정적이 잠시 찾아들었다 사라졌다.
“……그분, 모르신다면서요.”
“최근에 몇 번 만났어.”
은호는 앞차와 간격을 확인하며 속도를 조절했다. ‘나와 윤 실장이 연락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이라는 부분에서 이미 핀트가 나가 버렸는데, 심지어 그 상황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강태오에게 연락하라니. 의문을 품은 은호는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도와주시는 분인가요?”
“응.”
그의 대충 흘려 넘기는 듯한 대답에 은호의 입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유가 있겠지. 어차피 그럴 일이 없을 테니 짧게 말해 주는 걸지도. 은호는 더 묻고 싶었으나 그를 피로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대꾸 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그리고, 박 비서가 계속 주시하고 있을 거야. 조심하고.”
“네.”
“출국 전까지 혼자 회사 밖으로 외출하지 말고, 내 옆에 붙어 있어. 점심시간은 한 비서와 윤 실장 옆에 붙어 있고.”
갑자기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입술이 꿈질거렸다.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누르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걱정이 과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는 은호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손으로 아래턱을 쓸어내리며 스케줄러를 확인했다.
“오늘 저녁에는 뭐 할까?”
“오랜만에 술 한잔 같이할까요?”
은호의 제안에 윤재는 종종 가던 와인하우스를 떠올리고는 예약을 하려고 휴대폰 통화 목록을 뒤졌다. 그러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휴대폰 위를 덮어 행동을 방해했다.
“아뇨, 집에서요.”
고개를 내젓던 은호가 가볍게 윤재를 제지하며 다시 전면을 향했다.
“맨날 집인데, 안 지겨워?”
“상황도 그렇고, 그냥… 집이 편해요.”
입매를 일자로 굳힌 윤재의 볼멘 투정이 왠지 모르게 귀여웠다. 첫인상 때 감히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술 마시면서 진한 스킨십도 하고 싶다며 애교를 섞어 설득하자, 윤재는 바로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낯을 바꾼다. 은호는 웃음을 삼키며 운전에 집중했다.
은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폴더 정리를 하며 문서 작성 가이드를 만들었다. 자신을 대신해 누가 들어올지는 몰라도, 오자마자 바로 적응하길 바라며 샘플 보고서를 폴더마다 하나씩 넣어 가이드를 따라 하도록 정리해 나갔다.
각종 의견이 오가던 정례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윤 실장이 가까이 다가와 은호의 서류 파일을 하나씩 챙겨 들었다.
“유 비서, 나랑 점심 같이해요.”
윤재의 지령을 받은 건가. 윤 실장의 편한 미소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은호는 서두르라는 눈치에 재빨리 노트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 식당이 아닌 바깥으로 나갈 거라 예상은 했지만, 회사에서 먼 거리의 일식집까지 걸어갈 줄은 몰랐다. 정오의 태양이 정수리에서 내리쬐자 습한 열 기운에 땀으로 옷이 젖었다. 가까스로 일식집에 도착한 후, 예약된 복도 끝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가는 사이 이마에 맺혔던 땀이 차가운 냉기에 천천히 식어 갔다. 은호는 메뉴판을 보며 초밥 정식과 가츠동 정식을 주문하고 뒤집힌 컵을 돌려 뜨거운 녹차를 따라 윤 실장에게 건넸다.
“마음 많이 복잡하죠?”
윤 실장은 무덤덤한 척 말은 꺼냈지만 내심 마음이 쓰이는지 계속 은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복잡한 정도가 아니라 아비규환이라고 하는 게 옳으려나. 김이 나는 녹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머금은 은호는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인수인계도 못 하고 떠나려니, 그게 가장 걸려서요.”
“내가 할 거니까 걱정 마요.”
한 비서가 배당받을 줄 알고 내심 걱정한 은호는 윤 실장이 받는다는 말에 내내 꽉 막혀 있던 숨통이 일시에 터졌다. ‘살았다’라는 날것의 말에 지켜보던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은호는 주문한 음식이 모두 들어오자 젓가락을 들어 덮밥 위에 먹기 좋게 잘린 돈가스를 하나 집었다. 바삭하면서도 촉촉한 식감이 식욕을 끌어 올리기 충분했으나 은호는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음식물을 대충 씹어 삼켰다.
“실장님.”
“응?”
“혹시…… 강태오 상무님에 대해서 아세요?”
참치 뱃살 위에 고추냉이를 얹던 그가 눈썹만 추켜세우며 은호를 직시했다. 윤재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묻는 은호의 떠보기식 질문에 윤 실장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전무님이 어디까지 이야기해 줬어요?”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요.”
“그럼,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요. 나도 계속 확인 중이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적은 아닌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현재 강태오가 서인건설이 아닌, 에이 세컨드로 투자를 하는 이유 또한 자신을 숨기기 위해 하는 행동이기에 최대한 비밀을 유지해 주는 게 서로에게 유리했다.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추후 납치 같은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은호가 아예 모르고 있는 편이 윤재를 도와주는 것이기에 윤 실장 또한 말을 삼갔다.
둘 사이에 대화가 끊기며 긴 공백이 생기자, 문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샤미센 선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은호의 입 안이 꺼끌거렸다. 뭐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윤재와 윤 실장은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떠나면 여기 …휘몰아치는 건가요?”
“아마도. ……그리고 주총이 피크 아닐까?”
겉으로 볼 때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던 기업체가 사실 수많은 사람의 목줄을 쥐고, 쳐 내며 리더의 자리를 유지하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윤재를 보며 배웠다. 그의 삶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늘 가시밭길이었다. 겉으로 볼 땐 화려했지만 속은 곪아 터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도착하면 나한테 연락해요. 당분간은 그게 나을 것 같아.”
“네, 실장님.”
은호는 손을 들어 쇄골 아래쪽에 가져다 댔다. 차마 반지를 끼고 출근할 수 없어 케이스에 같이 들어 있던 실 목걸이에 걸어 목에 티 나지 않게 하고 다녔다. 손끝으로 셔츠 아래 동그란 금속이 느껴지자 마음이 놓였다.
“혹시…….”
“…….”
“최악의 상황은 어디까지 보세요?”
은호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소 진지한 투로 물었다. 남은 초밥을 입에 넣던 윤 실장이 목이 메는지 장국을 들고 마시며 은호를 쳐다봤다. 잇새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그의 눈빛에는 쓸데없는 고민을 사서 한다는 무언의 뜻이 담겨 있었다.
“최선을 봐야지, 왜 최악을 생각해.”
“그래도 ……각오 좀 하려고요.”
각오는 무슨, 윤 실장은 휴지로 입을 닦으며 남아 있는 녹차를 단숨에 비웠다.
“자리에서 물러나겠지. 대주주는 유지하고.”
“그럴 가능성이 있긴 있는 거죠?”
“글쎄, 주주들이 전무님께 호의적이라 가능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패는 까 봐야 아는 거라.”
“…….”
“최 부사장님이 어디까지 손을 뻗쳤는지 우리도 파악 중이라서.”
애초에 최 회장이 윤재의 주식을 건들지 않고 온전하게 돌려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갈취한 일부 주식 때문에 이 사달이 나니 괜스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은호가 얼굴 근육을 잔뜩 웅크리자, 눈웃음을 친 윤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서를 손에 쥐고는 풀 죽어 있는 은호를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전무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니까.”
최윤재는 애초에 질 것 같으면 시작을 하지 않는다. 그는 기다림의 미학을 알고, 즐기는 자였다. 이기는 게임을 하기 위해 그동안 참아 왔고, 그 시기가 도래했을 뿐. 다만 그의 반려가 될 사람까지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 같이 휘말리는 걸 원치 않기에 잠시 떨어지려는 것이라 했다. 분명 그는 잘 해낼 것이고, 이 게임에서 승전보를 울릴 자다. 은호는 윤 실장이 전해준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월요일 아침 비행기로 잡을 예정이고, 내가 데려다줄 거예요. 될 수 있으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움직일 테니까.”
출근하는 척하고 감쪽같이 이곳을 벗어난다. 휴가가 길어질 즈음 박 비서와 한 대표가 눈치채겠지만 그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사이 윤재는 칼을 빼 들 준비를 마치고, 은호는 먼 곳에서 그를 응원하며 지켜보면 된다.
그의 뜻대로 시나리오가 돌아가야 한다.
***
도우미 아주머니를 일찍 퇴근시키고 주방을 점령한 은호와 윤재는 파티라도 하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한 디저트와 음식을 하나씩 깔았다.
“괜찮죠?”
“그럴싸하네.”
도우미 아주머니께 평소의 한식 밥상 대신 스테이크를 부탁해 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베이커리에서 딸기 타르트와 마카롱, 샌드위치를 함께 골랐다. 와인 랙에서 와인과 잔을 들고 와 커트러리 세트 옆에 가지런히 세워 두자, 여느 레스토랑만큼 꽤 근사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윤재는 은호를 생각해서 도수가 낮고 가벼운 와인을 골랐다.
“스파클링 와인 괜찮아?”
“저야 좋은데, 당도 괜찮아요?”
“오늘은 단 게 당기네.”
윤재가 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꺼낸 후 와인을 잔의 2/3쯤 채웠다. 잔을 부딪친 둘은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말없이 서로를 갈망하며 바라보았다. 농염한 과실 향이 입술에 닿고 가벼운 목 넘김으로 이어졌다.
은호는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 한쪽 귀퉁이를 잘게 썰었다. 취향에 맞춰 미디엄 웰던으로 잘 구워진 고기를 천천히 씹던 은호는 덤덤한 척 말했다.
“한국 시간으로 밤에 눈 뜨고 있을 거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영상통화 해요”
아무래도 이곳 상황을 잘 모를 테니, 아무 때나 자신이 연락을 취하는 것보다는 윤재의 연락을 받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하지 않을까. 은호는 이왕 한마디 한 김에 잔소리를 조금 곁들였다.
“식사 거르지 말고요, 전무님 날카로운 인상 지금이 마지노선이거든요.”
“……마지노선?”
“더 빠지면 환자예요.”
큽. 윤재는 와인을 삼키다 사레가 들려 인상을 쓰며 잔기침을 해 댔다. 물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은 윤재는 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엄지로 대충 닦았다.
“은호야.”
“…….”
“내 이름 잊은 건 아니지?”
정곡이 찔린 것처럼 눈치를 보며 사르르 웃은 은호는 애꿎은 스테이크를 계속해서 잘게 잘랐다. 상하 관계가 너무도 크게 차이가 나다 보니 이름을 부르는 게 여전히 어색했다. 애칭 또한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다시 돌아올 땐, 직책 대신 내 이름으로 불러 줘야 해.”
윤재는 서두르지 않고 웃으며 넘겼지만, 다음번에는 기필코 이름으로 듣겠다고 은근하게 강조했다.
“주총만 지나가면 되는 건가요?”
고개를 주억인 은호가 입매를 잘근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이든 결과를 지켜보는 데까지 최소 6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으로 넘어가는 게 정석인데, 한 달 반 만에 지금의 어지러운 상황이 정리될 수 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윤재는 은호가 불안해하는 부분을 정확히 이해했다.
“사실 주총 뒤에 남은 것들이 더 많긴 한데, 그건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서. 일단 주총만 원하는 방향으로 넘어가면 나머지는 문제없을 것 같아.”
강태오와 함께 유성그룹의 주인을 바꾸는 과정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나, 주총이 원하는 대로 넘어간다면 유성그룹을 해체할 신호탄이 되는 건 확실했다. 윤재는 은호가 무사히 미국에 도착하면 강태오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 계획이었다.
은호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미국으로 건너가면 비밀리에 경호원이 따라붙을 것이다. 미리 말해 두면 신경이 예민해질까 걱정되어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다. 위험하다고 감지되면 그림자 경호가 아닌 밀착 경호로 전환될 예정인데, 그때는 주거지 이동도 계산하고 있었다. 최후의 키로 강태오의 모친 회사인 에이 세컨드에 신변 경호 요청까지 마친 상태라 큰 불상사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중 삼중으로 경호할 예정이라 굳이 은호에게 이런 이야기를 미리 들려주어 겁먹게 할 필요는 없었다.
“에이 세컨드가…….”
“…….”
“만약 최 부사장님과 손잡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윤재는 눈썹 뼈를 꾹꾹 누르다 바람을 빼내는 숨을 던지며 작게 웃었다. 그는 와인 잔을 들어 은호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우호 지분이라는 말인가요?”
“응. 그렇게 될 것 같아.”
은호는 마음이 무거워지려는 찰나, 그의 여유 있고 따스한 음성에 안도감을 느꼈다. 2대 주주인 에이 세컨드가 같은 편이라면 나머지 주주들이 모두 반대표를 던져도 51%로 이기는 싸움이었다. 윤 실장의 말처럼, 윤재는 이기는 싸움을 위해 지금까지 몸을 움츠리고 때를 기다려 왔다. 은호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시름 놓은 듯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다행이다.”
“걱정했구나.”
“갑자기 2대 주주까지 올라오니 걱정되는 게 당연하죠.”
국내 회사도 아닌 외국계 투자 회사가 2대 주주로 올라서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주총에서의 횡포였다. 최근 외국계 투자 회사가 국내 대기업 지분을 5% 이상 늘린 후, 경영 일선을 침범해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매스컴을 도배했다. 유성창투도 외국계 투자 회사의 표적이 되었는가 싶어 내내 고민했지만 아니라니 이것만큼 기쁜 소식이 있을까. 윤재가 말을 아끼는 걸 봐서는 최서령 부사장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작전용 대외비 같았다.
“고생하는 만큼 잘 정리해 볼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강태오에 따르면 유성창투로 받은 현금의 일부는 이미 1차 어음을 막는 데 들어갔고, 남은 금액의 절반은 한성제약에 추가 투자로 밀어 넣었다고 했다. 그녀의 결정은 무리수였다.
한성제약이라면 지난번 강태오를 처음 만난 자리이자, 대표가 연구원 마인드가 아닌 영업 사원 마인드로 회사를 운영해 투자를 철회한 곳이 아니던가. 잘되면 소위 말해 초대박, 잘못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만큼 모 아니면 도인 회사를 추가 투자했다는 사실에 윤재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회사의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 그녀의 투자 방식은 초짜들이 하는 자살행위였다.
한성제약이 잘되면 상관없지만 잘못되는 날에는 그녀의 투자는 유성그룹을 더 빠르게 해체할 칼날이 될 것이다. 윤재는 후자를 바라고 있었다. 관련 해외 논문 및 연구 자료를 모두 확인하며 동기였던 제약회사 연구원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은호는 에이 세컨드가 우호 지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긴장이 풀리는지 들고 있던 와인을 모두 비우며 빠르게 허물어졌다. 한쪽 손을 턱에 괴고 비스듬하게 기우는 은호를 윤재가 팔을 뻗어 붙잡았다.
“벌써 취해?”
“오래간만에 마셔서 그런가 봐요. 아니면 분위기에 취했거나.”
실실 웃은 은호는 본인조차 이 상황이 살짝 어이가 없는지 웃음으로 무마했다. 스파클링 와인은 혼자서도 한 병을 비울 만큼 잘 마셨지만, 오늘은 한 잔에 취기가 올랐다. 피곤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긴장해서? 그러고 보니 중앙에 둔 딸기 타르트도 아직 먹지 못했다.
“얼굴도 달아올랐네.”
“그래요? 어? 만취 아니면 잘 안 달아오르는데.”
“컨디션 안 좋은가 보네.”
몸이 평소와 다르게 반응하며 와인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지자, 은호는 정신력 확보를 위해 와인 잔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 한 잔 더 마셨다간 뇌가 절여져 단기간에 기억이 끊겨 버릴 것 같았다.
은호는 어질어질한 기운 때문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빵 칼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보조 접시에 6등분으로 나눈 딸기 타르트를 한 조각씩 나누어 담고 윤재와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말 맛있어요. 여기 맛집인데요?”
“그래?”
생크림 위에 빽빽하게 채워진 생딸기가 입 안을 상큼하고 부드럽게 적셨다. 맛있으니 어서 한 입 먹어 보라며 손가락으로 보채자 온화하게 미소 짓던 윤재가 포크로 타르트 귀퉁이를 조금 잘라 입에 넣는다. 은호의 말대로 맛집인지 입에 감기는 상큼함이 썩 괜찮았다.
스테이크를 절반이나 남겨 내심 걱정했는데 은호는 타르트로 배를 채우려는 듯 앉은자리에서 두 조각을 말끔히 해치웠다. 포만감 가득한 얼굴로 반지르르 미소 짓자 윤재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은호가 그릇을 정리하겠다고 일어나는 걸 윤재가 가볍게 막아섰다. 피로와 취기로 흐느적거리는 은호에게 먼저 씻고 누우라고 말하며 샤워실 문 앞까지 데려갔다.
“후우.”
은호를 샤워실에 밀어 넣은 윤재는 테이블 위를 천천히 정리했다. 접시와 커트러리를 세척기에 넣고 전원을 누른 후, 나머지 것들을 정리했다. 둘이서 와인 한 병으로 끝낸 건 오랜만이었다.
머리에 물기를 가득 달고 터벅거리며 나온 은호는 씻으러 들어가기 전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아 취기는 금세 사라졌으나 피로도가 높은지 나사가 여럿 빠진 것처럼 굴었다. 윤재는 거실에서 서성이며 자신을 지켜보는 은호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왜 거실을 떠돌아.”
“아니, 같이 들어가려고.”
“먼저 누우면 되지.”
“……잠들까 봐요.”
어린아이 투정을 받아 주는 것처럼 등을 토닥이며 침실로 데리고 간 윤재는 은호의 마지막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고적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시선에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졸리면 자야지.”
은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잠들기 싫다는 고집스러움이 밉지 않게 찌푸린 콧잔등 위로 진득하게 묻어났다. 은호를 천천히 눕히자, 어디 가지 말라며 가슴팍을 파고드는 얼굴이 얇은 셔츠에 뭉그러졌다. 옷깃 사이로 은호의 날연한 숨이 가느다랗게 흩어졌다.
윤재의 심장이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쿵쿵 울렸다. 심장의 맥 하나만으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슬픈 영화나 웅장한 오케스트라 협연을 들은 것도 아닌데 벅찬 감정이 온몸을 덮쳐왔다.
“사랑해요.”
그의 셔츠 자락을 옹송그려 쥐며 절절하게 고백했다. 슬픔을 참기 위해 눈을 꼭 감았으나 눈물샘 끄트머리에 투명한 이슬방울이 모여 눈물 띠를 만들어 냈다.
“정말로…… 사랑해요.”
윤재의 가슴팍이 뜨끈하고 축축하게 젖어 갔다.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숨죽여 고백하는 모습에 마음이 바스러진다. 윤재는 펼쳤던 손으로 은호의 툭 불거진 날개뼈를 어루만지며 마른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은호는 애써 괜찮은 척 굴다가도 밤이 되면 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 주었다. 사랑을 나눠 주려 하는 기꺼운 몸짓이 윤재를 계속해서 쥐고 흔들었다.
“사랑해, 은호야.”
윤재는 은호가 서서히 잠들 때까지 계속해서 등을 토닥이고 어루만져 주었다. 둘은 조용히 속삭이기도, 또는 달래 주기도 하면서 쉬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셔츠 자락을 움켜쥔 손이 풀어지며 은호의 사랑 고백이 점차 간격을 벌리다가 고른 숨소리로 바뀔 때까지. 윤재는 일렁이는 목울대를 누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은호의 이마 위에 계속 머물렀다.
윤재는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살아왔다. 외로움을 들키는 순간 그것을 약점으로 삼거나, 혹은 이용하기 위해 다가오는 손길이 진저리가 나 아닌 척 포장하고 감췄다.
그러다 은호를 만났다. 은호는 윤재와 달리 외로움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감추기 급급했던 자신과 달리 감정에 솔직했고, 가끔은 대담하기까지 했다.
은호는 윤재가 꽁꽁 감춰 놓은 결핍을 위로해 주고 충족시켜 주었다. 남들이 보지 못한 미세한 틈을 찾아 천천히 스며들었다. 윤재는 이상하게도 은호 앞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드러내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도 될 것 같은 감정이 은호 앞에만 서면 충동적으로 일었다.
그때마다 은호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모난 감정을 점점 뭉툭하게 만들어 주었다. 결핍을 채워 주었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매복된 감정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렸으며 새로운 싹을 틔웠다. 윤재는 은호에게 서서히 끌려갔다. 무의식과 의식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싶을 만큼 빠져들었다.
***
7월의 장마가 잿빛 하늘을 몰고 와 종일 습기 머금은 비를 흩뿌렸다. 어젯밤부터 창을 두드리며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비는 아침이 되어서도 그칠 줄 몰랐다. 은호는 뻐근한 어깻죽지를 좌우로 부드럽게 스트레칭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꿈결 같던 주말이 지나가고 출국일인 월요일이 돌아왔다.
주말 내내 둘은 대문 밖으로 한 발자국조차도 나가지 않았다. 배달시킨 음식으로 생긴 밀폐 용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분리수거를 하느라 현관 밖을 두세 차례 나간 적은 있으나 그게 전부였다.
출국 전 지칠 때까지 몸을 섞으려던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다. 은호의 컨디션이 계속 엉망인 데다, 잠이 많아진 탓에 타이밍을 맞추기 곤란했다. 윤재는 굳이 저조한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는 은호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몸을 밀착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다. 성적 흥분 없이 가까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페로몬의 교감이 가능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은호에게 좋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은호가 잠든 사이 윤재는 끊임없이 은호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주입했다.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페로몬으로 힘들어하지 않도록 페로몬 돔을 씌우며 은호를 살폈다.
수면제를 한 움큼 삼킨 것처럼 주말 내내 침대와 거실을 굴러다니며 꾸벅꾸벅 졸던 은호는 일요일 밤이 되자 부랴부랴 짐을 싸며 현실 자각을 시작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전부인 드넓은 공간 속에 윤재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 아마 LA 시간으로는 아침 7~9시 사이일 거야.”
새벽부터 찾아온 윤 실장을 앞에 두고도 윤재는 서슴없이 애정 행각을 펼쳤다. 목걸이 펜던트가 되어 버린 반지를 빼내 손가락에 끼워 주며 손등에 입술을 문지르고, 봉긋하고 하얀 이마 위를 입술로 도장 찍기도 하며 은호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상관없으니 연락해. 알았지?”
애써 괜찮은 듯 굴었던 윤재는 떠나는 날 아침이 되자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어놓는 부모처럼 마음이 편치 않고 답답해 혼자 속을 태웠다. 은호는 오히려 의연했다. 걱정 말라며 윤재의 두 손을 붙잡고 똑바로 올려다보는 얼굴은 전날의 눈물 바람이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말 내내 눈만 맞으면 질리도록 부둥켜안았음에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품에 들어와 안기는 몸이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웠다.
“부탁해요. 윤 실장.”
자기 몸뚱이만 한 캐리어를 들고 나가는 게 안쓰러워 윤재가 직접 차 트렁크에 실어 넣었다. 우산도 쓰지 않고 걸어 나가는 바람에 온몸으로 장대비를 맞았지만 윤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뒤늦게 우산을 씌워 주러 따라온 은호가 축축하게 젖은 그의 모습을 보고 기껏 참았던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은호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활짝 웃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떠나가는 차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윤재는 손으로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은호가 쥐여 주고 간 우산 위로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만 윤재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하늘은 색을 잃은 것처럼 흐리고 어두웠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가 이리저리 빗물을 쓸어 냈지만 거칠게 쏟아붓는 빗줄기 때문에 앞차의 붉은 후미등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출국장 앞에 선 은호는 신경 쓸 일이 배로 많아진 윤 실장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 첫 면접 때부터 줄곧 좋게 봐주고 직접 선택까지 해 준 상사라 은호에게는 고마운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도착하면 나한테 먼저 연락해요. 전무님 오늘 바쁠 거라.”
마흔이 넘은 그는 은호가 입사하기 전 늦깎이 결혼에 성공해 곧 첫 아이를 보게 될 예정이다. 윤재는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1년 치 인센티브만큼의 금액을 보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사라며 축하했다. 팀원들끼리 돈을 걷어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선물 꾸러미를 챙겼지만, 은호는 더 챙겨 주지 못한 것에 마음이 쓰였다. 출산 예정일이 주총 이후니, 상황이 괜찮으면 되돌아올 즈음 태어날 아이를 위한 선물을 왕창 들고 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네.”
“아마 은호 씨 신경 쓸까 봐 전무님께서 이야기 안 하셨을 텐데, 상황이 안 좋으면 주변에서 경호원이 나타날 거예요. 침착하게 설명해 줄 테니 그 사람 따라가면 돼요. 경호원 정보는 은호 씨 개인 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해 보고.”
“아, 네.”
얼마나 걱정되면 이렇게까지 할까. 은호는 윤재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하며 캐리어를 손에 쥐었다.
“전무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실장님.”
“어서 들어가요.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
“네.”
은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출국장으로 몸을 돌렸다. 잠시 떨어지는 건데 웬 호들갑이냐며 먹먹한 마음을 최대한 억눌렀다. 살면서 봐 왔던 수많은 사람 중, 최윤재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분명 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은호는 쓸쓸히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
박 비서는 출근하자마자 비서실 안쪽 빈 공간에 흠뻑 젖은 우산을 펼쳤다. 장대비를 맞아 무릎까지 젖은 정장 바지와 구두를 보며 한숨을 폭 내뱉던 그는 보이는 대로 휴지를 뽑아 물기를 닦아냈다. 그냥 두면 꿉꿉함이 오전 내내 이어질 거라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양말을 말려야겠다며 생각하고 있을 무렵, 탕비실 안쪽에서 수군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은호 씨 오늘 휴가라고요?”
“웬일이래, 말도 없이.”
“심지어 일주일 휴간데요? 무슨 일 있나?”
박 비서는 유은호의 휴가 이야기에 놀라 커피를 내리는 척 안으로 진입했다. 스케줄러를 확인하던 김 비서와 이 비서가 들어오는 박 비서와 눈을 맞춘 후 가볍게 묵례를 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평소 책임감 강한 유 비서가 무슨 일이냐며 호들갑을 떠는데, 뒤따라 들어온 한 비서가 탕비실 벽을 노크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굿모닝, 윤 실장님은 외근 중이라 10시에나 들어오실 거예요. 주간 업무 회의는 11시로 밀렸어요.”
“그럼 9시 이사급 회의, 유 비서 대신 한 비서가 들어가요?”
“네, 지금 준비하려고요.”
한 비서는 은호의 부재로 아침부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노트북을 든 채 할 말만 하고 곧장 사라졌다. 박 비서는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하고는 곧장 커피를 들고 탕비실에서 빠져나왔다. 한 비서처럼 9시 이사급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터라 준비할 게 꽤 있었다. 비서실에서 빠져나와 한 대표 집무실 앞 데스크로 돌아온 박 비서는 노트북 전원을 켠 후 비서팀 스케줄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오늘 아침 6시 3분에 휴가 계획서가 올라왔고, 6시 5분, 6분에 윤 실장과 최 전무가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시차 없이 즉각 승인했다. 벼락치기처럼 속전속결로 승인 난 휴가 계획서가 의심스러워 예전 기록을 살펴보는 도중 한 대표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박 비서는 곧장 출근 인사와 함께 그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대표님.”
어제부터 종일 내린 비는 아무리 제습을 돌려도 미세한 물비린내를 만들었다. 뒤따라온 박 비서를 흘긋 쳐다보는 그의 눈매가 영 귀찮은 투였다.
“유 비서가 예고 없이 오늘 아침, 일주일 휴가를 냈습니다.”
유은호라는 말에 콧등 아래로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던 한 대표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임원들마저 병가가 아닌 이상 정시에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 임원을 수행하는 비서의 출근은 필연적인 일이다. 한데 딴 사람도 아니고 최 전무 수행인 유은호가 그것도 출근 전에 장기 휴가를 냈다니 의문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다.
“오늘 월요일이잖아.”
“윤 실장님도 출근이 늦어지는 거로 봐서는 조금 이상합니다. 오전 스케줄이 없었는데 외근이라고 해서요.”
“알았어. 고마워.”
최윤재가 먼저 시동을 건 걸까? 유은호를 뒤로 숨겨 약점이 될 만한 것부터 소거하고 전면전에 나오겠다는 걸까. 한 대표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목록에 있는 윤 실장을 선택했다. 그의 뭉툭한 손끝이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자네, 어딘가?”
- 대표님, 회사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짧은 신호 이후, 곧장 전화를 받은 윤 실장의 목소리가 고요한 사위 속에 흐릿하게 울렸다. 목소리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걸 봐서는 블루투스로 연결된 것 같았다. 와이퍼의 요란한 움직임 소리가 통화 속에 밀려들어 왔다.
“외근이라던데.”
- MPick에서 보낸 투자 계획서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 확인하느라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아, 알았네. 천천히 오게.”
한 치의 당황함 없이 줄줄 읊어 대니 뭐라 더 추궁하기 어려웠다. 한 대표는 통화를 끊고 곧장 최서령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확실한 건 아닌데, 유 비서가 잠적한 것 같습니다.”
최서령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는 한 대표는 첫 단추부터 구멍을 잘못 끼운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금주 주말 즈음 유은호를 납치해 한 달간 최윤재를 피 말릴 계획이었지만, 이 쉬운 것조차 벌써 어긋나기 시작했다.
털어 보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는데, 최윤재는 국가가 정해준 사회 규범과 모든 법망을 완벽히 지키는 고리타분한 부류에 속했다. 최서령이 아무리 애를 쓰고 최윤재의 뒤를 캐 봐도 그 흔한 벌금 딱지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로 무결점에 가까웠다. 그의 성격처럼 회사 재무 회계조차 너무도 완벽한 데다, 승계 당시에도 흔한 편법 한번 시도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토지를 팔아 세금을 완납할 정도로 지독했다.
국세청 모범납세 기업으로 십수 년 넘게 이어질 정도니 약점이라고는 최근 그와 각인한 유은호가 유일했다. 한 대표의 첫마디에서 다급한 떨림이 전해졌는지 듣고 있던 서령의 목소리가 팍 가라앉았다.
- 안 그래도, 보고 받았습니다. 해외 출국이에요.
“…해외 출국이요?”
일주일 휴가라 출국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최악으로 사건이 꼬여 간다. 거친 탄식이 허공에 부서졌다.
- 놓쳤어요. 도착지가 LA예요. 바로 다음 비행기로 사람 붙였는데, 혹시 유 비서 본 거주지를 알고 있나요?
유은호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모르는 한 대표는 도착지가 LA라는 말에 인상을 구기며 컴퓨터를 켰다. 인사팀 사내 관리 시스템에 접속해서 유은호를 검색해 봤지만 주소지가 서울로 떴다. 유은호의 목적지가 휴양지도 아닌 예측 불허의 장소라는 것에 당황한 한 대표는 이마를 사정없이 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비서에게 시켜 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스피커 너머 노기 서린 숨소리가 흔들리며 넘어온다. 최서령조차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지난주부터 은호의 뒤를 밟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허점을 잡아내기 위해 집중 관찰하며 납치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뒤통수를 쳐 상황이 어지러워졌다.
- 회의 들어갈 때 최윤재 확인해 보세요. 그 녀석이 숨긴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겨서 유 비서가 돌발 행동을 한 건지.
서령도 아직 정확한 사정을 모른다. 은호의 납치 건은 한 대표와 자신의 최측근만 아는 내용이라 새어 나갈 수가 없었다. 예민한 윤재가 뒤를 밟는 걸 느꼈다 할지라도, 타깃이 은호라는 걸 추측하기는 어려울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 여행이라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기에 과도한 추측보다는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이사급 정례 회의장에 입장한 한 대표가 이사진의 인사를 받으며 안쪽 상석으로 들어왔다. 타원형 라운드 테이블 중심에 앉아 옆자리에 있는 윤재의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지나가는 투로 힐끗 말을 얹었다.
“유 비서가 안 보이네?”
“휴가가 필요해 보여 승인 처리했습니다.”
“이런, 그동안 최 전무 받치느라 힘들었나 보네. 어디 먼 곳으로 간 건가?”
먼 곳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아차, 싶은 한 대표와 의심하듯 서늘하게 바라보는 윤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애매하게 말을 덧붙이다가는 오히려 역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대표는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고 박 비서가 건네주는 노트북에 초점을 두었다. 한 대표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입꼬리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윤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차분했다. 심지어 페로몬조차 완벽히 갈무리하여 파동의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 대표는 살쾡이처럼 캐내려는 마음을 거두고 쓴웃음을 지었다. 솜털 가득한 개호주인 줄 알았건만 어느새 적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 놓을 범이 되었다. 밀리는 싸움은 아닐 거라 판단해 최서령에게 배팅한 한 대표는 판단 실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까딱하다가는 단번에 물어 뜯겨 회생 불가능한 수준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날카로운 예감이 관자놀이를 거세게 찔렀다.
***
윤재는 회의 도중 뒷문을 통해 조용히 들어오는 윤 실장을 확인했다. 가까이 다가오던 윤 실장은 윤재에게 의미 있는 고갯짓을 하며 눈빛을 보냈다. 둘만 알아듣는 무언의 신호. 윤재는 티 내지 않았지만 들고 있던 만년필을 가볍게 돌리며 안도의 숨을 돌렸다.
“……들어가는 거 확인했고, 개인 경호원 신상 정보 알려 드렸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집무실로 따라 들어와서도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는 윤 실장은 한결 가벼운 마음을 내비쳤다. 출국까지 혹시나 문제 되는 일이 있을까, 은근히 마음 졸였는데 탈 없이 지나갔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이제는 도착 확인 연락만 기다리면 된다. 아마도 공항부터 경호원이 붙을 테니 큰일은 없을 것이다.
“은호 씨가 어지간히 걱정되었나 봅니다. 문서 작성 가이드부터 작업 샘플까지 전부 만들어 놨어요.”
정례 회의 중간에 들어간 윤 실장은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은호가 해 놓고 간 작업 폴더를 하나씩 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꽤 많은 비서직 직원을 만나 보았지만, 은호처럼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떠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최윤재가 반려자로 삼은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은호는 그가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주총까지만 부탁해요. 이후에 비서 다시 뽑을 테니. 그리고 인사팀에 유 비서가 본가 주소 남긴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고마워요. 윤 실장.”
한 대표가 눈치챘다. 먼 곳으로 갔냐고 물으면서도 스스로 놀라 떨떠름하게 입매를 가다듬던 그의 능구렁이 같은 눈빛이 어쩐지 꺼림칙했다.
윤재는 최신 통화 목록에서 강태오를 찾았다.
“저녁 약속을 미뤄야겠습니다.”
- ……혹시 상대가 눈치챘나요?
침착하게 말했지만 말머리부터 고민의 흔적이 다분했다. 태오는 약속을 미루는 윤재의 말투에 초조함을 느끼고는 상황을 체크했다.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네요. 예상보다 사람을 빨리 심어 놓은 것 같습니다.”
- 어머니께 미리 말씀드릴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 제가 공항에서부터 붙을 경호원의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미리 조율하셔야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서령이 어디까지 손을 뻗친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라면 은호와 이미 한 비행기에 탔거나, 다음 비행기로 쫓아가려고 계획 중일 수도 있다. 한 대표 입에서 나온 먼 곳이라는 말이 자꾸 거슬렸다. 그게 의미 있는 말이라면 더더욱.
차라리 강태오 모친에게 부탁해 은호가 부모님 댁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해 보였다. 그렇다고 마냥 그와 그녀를 믿고 맡기기에는 곤란하므로, 따로 붙여둔 경호원이 같이 움직여 종합적인 상황을 판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 그럼 일주일 뒤에 뵙는 거로 하고,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영상통화 드리겠습니다.
“…….”
- 제 딸아이를 못 본 지 꽤 되어서요. 사실 오늘 뵈면 일주일간 딸에게 가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태오 또한 아닌 척했지만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회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였던 연대 의식이 둘을 확실히 묶었지만, 무엇보다 윤재의 진정성과 사업 판단력이 강태오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업 파트너로서 이만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확실한 사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가 혹시 사정상 연락을 못 받을 경우 제 담당 비서 연락처를 보내드릴 테니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 저도 미국에 가 있는 사이, 혹시 모르니 담당 비서의 연락처 남기겠습니다.
대화를 나눌수록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하다는 사실 또한 동질감을 형성했다. 윤재는 준서가 왜 강태오를 선택했는지, 시간이 지나며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유은호 씨 놀라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 만나면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은호를 지키려는 사람이 여럿이니 이 정도면 되었다. 윤재는 통화를 종료한 후, 이번에는 연락처를 뒤졌다. 고개를 숙이자 포마드로 단정하게 올린 머리카락이 몇 가닥 앞으로 흘러내린다.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던 윤재는 시끄러운 잡음과 함께 울리는 목소리를 확인하고 목소리를 조금 키워 말했다. 외근 중인지 주변이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신 기자, 접니다.”
- 네, 전무님.
“내일 약속을 열흘 뒤로 미루고 싶은데, 일단 그쯤 제가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약속을 미뤄 죄송합니다.”
- 아, 아닙니다. 그럼 그때 가서 연락해 주십시오.
유성그룹의 수많은 회계 비리를 쥐고 있는 윤재는 오늘 저녁 강태오를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후, 다음날 신 기자를 만나 자료를 뿌릴 시기를 조율하려 했다. 활시위가 팽팽해질 때 화살을 쏘아야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가기에 몇 년에 걸쳐 차곡차곡 자료를 모으고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 시기가 도래했다.
최서령 측에서 사람을 붙여 밀착 감시 중이라는 촉이 선 만큼 며칠간 관리가 필요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달라붙어 있는지, 언제부터인지.
윤재는 오후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회사 일에만 몰두했다. 투자 상품 마케팅 보고서를 확인하고 추가 자료를 부탁하려 키 폰을 눌렀을 때,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멈칫했다.
- 네, 전무님.
매일 듣던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어서 어색하고 생소한 기분에 사고가 멈췄다. 윤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정신을 차리고 필요한 걸 요청했다.
“아, 리테일 마케팅 본부에서 올라온 투자 상품 마케팅 보고서 자료가 부족한데.”
- 지금 정리하고 있습니다. 곧 보고 올리겠습니다.
헤어진 지 고작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기운이 빠진다. 그동안 비서 유은호에 톱니바퀴처럼 맞춰진 패턴이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윤재는 손으로 두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추가 자료 가져왔습니다.”
“괜찮아요. 이리 주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 실장에게 겉으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가슴속은 어딘가 구멍이 난 것처럼 허하고 힘이 빠졌다. 늘 가까이서 챙겨 주던 은호에게 익숙해져 버린 탓에 벌써 허전하고 그리웠다.
일에 집중을 하려고 해도 은호의 도착 확인 연락을 기다리는 머릿속이 일의 우선순위를 멋대로 바꾸었다.
“하아.”
어느덧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결국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호의 도착까지 한두 시간 남짓. 윤재는 은호의 연락을 받기 위해 퇴근을 서둘렀다.
한 비서가 따라붙는다는 걸 거절했다. 은호의 부재로 한 비서의 업무량이 늘면서 아침부터 우왕좌왕하는 걸 지켜본 터라 굳이 퇴근까지 따라붙는 게 부담스러웠다. 지하 주차장에 있는 차를 꺼내 지상으로 올라가자 하늘이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쉴 새 없이 비를 퍼부었다.
한강의 수심이 높아져 잠수교가 통제된다는 내비게이션 알람이 들어왔다. 차도는 정체 구간에 진입했으나 아직 퇴근 시간 전이어서 그런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와 와이퍼가 좌우로 빗물을 쓸어내리는 소리만 자욱이 울릴 뿐 차 안은 적막 그 자체였다.
“…….”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며 와이퍼의 움직임이 느릿해지자 룸미러를 통해 뒤쫓아 오는 정체불명의 검은 세단이 눈에 띄었다. 한 칸 뒤에 있다, 옆 차선으로 빠지길 반복하며 30분째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윤재는 확인차 유턴 자리로 급히 차선을 변경했다. 예상대로 검은 세단이 깜빡이를 켜며 윤재를 따라 차선을 변경했다. 윤재는 볼 안쪽 살을 혀로 지그시 눌렀다. 사람이 붙었다는 걸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아….”
어쩌면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비 때문에 바짝 따라붙어 눈에 띄었을 뿐, 평소에는 간격을 벌리고 따라올 테니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한 확인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테다.
유턴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유턴 자리를 확인하려는데 휴대폰이 연동된 차량 디스플레이에서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윤재는 레버를 누르며 따라오는 차를 계속 주시했다.
- 전무님, 퇴근하셨다고…….
“윤 실장, 사람이 붙은 것 같아”
- ……네? 전무님께요?
다시 차창을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가 거칠어졌다. 와이퍼 속도가 올라가며 쏟아지는 비를 밀어내는 와중에 차 안 유리 벽을 타고 김이 서렸다. 윤재는 에어컨을 차창 방향으로 바꾸는 버튼을 눌러 흐릿하게 번지는 김을 빼냈다.
- 지금 어디신데요?
“집으로 가는 중인데.”
재무팀과 회의를 끝내고 나온 윤 실장은 윤재가 혼자 퇴근했다는 소리에 급히 연락을 넣었다. 한 대표가 주주들을 소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의견을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윤재에게 사람이 붙었다 하니 마음이 다급해진다.
윤 실장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지하 주차장을 뛰었다. 바닥을 무게감 있게 치는 거친 구둣발 소리가 주차장 안을 가득 메웠다.
- 전무님 집으로 가겠습니다.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윤 실장.”
- 네.
빗줄기가 거세서 뒤따라오는 차의 번호판이 뿌옇게 보였다. 윤재는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며 룸미러로 따라오는 뒤차의 번호판을 확인했다.
“차량 넘버 83 너… 3253. 나중에 조회 좀…….”
말을 끝맺으려는 순간, 눈앞이 시릴 만큼 날카로운 빛이 들이쳤다. 룸미러에 가 있던 시선을 전방으로 돌리려는데, 난데없이 건너편 세단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그대로 돌진했다. 윤재는 찰나의 순간 어떻게든 피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른쪽 차선을 확인했지만 약간의 정체 구간이다 보니 간격이 촘촘했다. 윤재는 부딪치는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틀며 차체 각을 틀었다.
- ……전무님?
쾅, 천둥소리처럼 휴대폰 가득 파열음이 울리며 윤재의 목소리가 끊겼다. 휴대폰을 계속 들고 있던 윤 실장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주차장 한가운데 멈춰 섰다. 파열음 후 차창을 두들기는 스산한 빗소리와 와이퍼의 급한 움직임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진 윤 실장은 떨리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윤재를 불렀다.
- 전무님?
“…….”
- 전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