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그날로부터 1개월 전
코인 쪽으로 시중 자금이 급속도로 몰리며 과열 현상을 보이자, 그동안 추진한다고 소문만 무성하던 거래소 관련 법안이 줄줄이 통과되었다. 은호는 해당 기사를 쭉 훑으며 코인 거래소 B-gate 투자를 철회한 윤재의 안목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데스크 위에서 충전 중이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모니터에 붙어 있던 시선이 빠르게 액정 화면으로 옮겨갔다.
“아… 선배.”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시끄러운 배경음이 목소리와 함께 쓸려 들어왔다. 바깥인가? 은호는 엄지로 음량을 낮추며 비서실 밖으로 걸어 나가 출입구 근처에 있는 센서에 팔을 미리 휘휘 저어 출입문을 열었다.
- 너, 퇴근 몇 시지?
“여섯 시요. 왜요?”
- 나 곧 너희 회사 가거든. 한영철 대표 인터뷰 있어서.
“아, 이거 선배가 오는 거였구나.”
안 그래도 3시에 경제신문사 인터뷰가 있다고 박 비서에게 들었는데, 그게 혁필 선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은호는 엘리베이터를 지나 세로로 긴 통창 앞에 서서, 건물 아래 깨알같이 보이는 도로와 지나가는 행인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았다.
- 인터뷰 끝나면 5시쯤 되거든, 근처 카페에서 자료 정리해서 교열팀에 보내면 되니까 퇴근하고 한잔할래?
“좋아요. 주소 보내 주세요.”
말이 길어지는 줄 알고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왔건만 짧게 끊어진 대화에 호주머니로 휴대폰을 밀어 넣은 은호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왼쪽, 오른쪽 허리를 돌리며 평소 안 쓰던 근육을 모두 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출입문이 열리며 울리던 구둣발 소리가 뚝 끊어졌다.
“어…….”
“허리 아프구나.”
흐트러짐 하나 없는 쭉 뻗은 정장 차림의 최윤재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무표정이 은호를 보자마자 사르르 걷히며 맑은 미소를 짓는다. 멍하니 무방비 상태로 지켜보던 은호는 그의 미소에 따라 웃었다.
“잘 풀고 들어가요. 나는 병원 들렀다 들어갈 테니.”
최 회장 문병이 예약된 날은 각자 퇴근하는 공식이 생겼다. 윤재는 주차장에 홀로 은호를 두고 병실로 올라가고 싶지 않아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윤재는 끝나고 연락하겠다는 듯 휴대폰을 귀에 대는 자세를 취했다. 애정이 담긴 그의 손짓에 은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어깨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윤재의 모습이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은호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쓱쓱 문대며 출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해가 길어진 탓인지 퇴근 시간인데도 바깥이 한낮처럼 밝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혁필이 알려준 주소로 향하는 은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는 3층짜리 건물의 간판에서 원하는 상호를 확인한 은호는 입구를 찾아 지하로 내려갔다. 펍의 문을 열자마자 상큼하게 터져 나오는 최신 아이돌 팝 음악에 절로 고개가 끄떡거렸다.
카운터를 지나 테이블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저 멀리서 혁필이 손을 흔들었다. 이미 500ml 한 잔을 비우고 추가로 시키는 모양새가 일을 끝마쳐 회사로 들어갈 일 없다고 미리 선포하는 것 같았다.
“수영이한테 들었다. 너 최 전무랑…….”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혁필이 톤을 한껏 키워 말하는 통에 깜짝 놀란 은호는 생각할 새도 없이 손부터 먼저 내보냈다. 혁필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다그치듯 눌러 말했다.
“여기 직장이랑 가깝거든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아직은 비공개 연애여서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사내 커플로 연결되어 결혼까지 골인한 경우가 손에 꼽는 것도 있지만, 상대가 무려 자신의 상사이고 포털 화면에서 이름만 검색해도 바로 뜨는 기업인이라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최윤재의 지칭을 ‘그분’으로 입막음한 은호는 막 주문해서 나온 맥주와 치킨 안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후. 나는 그 새끼 차버린 게 속이 다 시원해.”
현준이란 이름 대신 어느새 그 새끼로 통하는 이 상황이 우습고도 씁쓸했다. 현준과 사귀고 반년 정도 되었을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 같이 본 적이 한 번 있었다. 그 당시 혁필은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현준과 대화조차 잘 섞으려 들지 않았다.
혁필이 현준을 싫어하는 이유를 짐작했기에 은호는 내심 서운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현준이 그때부터 공무원 준비를 한다며 은호를 갉아 먹고 있었으니 선배 입장에서는 안타까웠던 게 당연했다.
“수영이한테 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그때 다 같이 만나 봤잖아. 걔 눈빛이 그냥 썩었어.”
“선배는 진작부터 안 거예요?”
“그냥 그런 촉이 왔어. 그 새낀 그렇게 해선 평생 못 붙어. 이제라도 손절 했으니 다행이야.”
은호가 맥주를 물처럼 마시자 혁필이 천천히 마시라며 톡 쏘아 댔다. 은호가 맥주잔 대신 포크를 집어 들고 치킨 조각을 찌르니 혁필이 그건 퍽퍽살이라고 무심한 척 다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혁필은 눈매를 축 내리고 은호를 딱하게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너는 왜 이리 가시밭길만 골라 선택하냐. 그분은… 잘해 주긴 해?”
마지못해 묻는, 부정 가득한 의문문. 다양한 의미가 내포된 말투에 은호의 눈꼬리가 따라 올라간다. 이번에도 영 불편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혁필의 시선에 은호는 묘한 오기가 생겼다.
“네. 제가 미안할 정도로 잘해 줘요.”
현준과 다른 뉘앙스의 부정이긴 했지만 어쨌든 혁필의 기준에 윤재가 불합격에 속한 게 속상했다. 은호는 그가 정한 합격선 위로 윤재를 올려놓고 싶었다. 아니, 선배가 얼마나 잘났길래 불합격이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겨우 밀어 넣었지만 거짓말을 못 하는 눈이 불꽃을 쏘자 혁필이 피식피식 웃는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네.”
혁필이 잔을 들며 사과의 건배를 하자 입술을 삐쭉 내민 은호는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 잔을 콩 찍었다.
“그분은… 너의 어느 부분이 그리도 좋대?”
“글쎄요.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물어봤네요.”
뭔가 정곡을 찌른 것처럼 아차 싶었다. 생각해 보니 가지고 노냐, 만만해 보이냐는 말만 물었지 정작 자신의 어디가 좋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나면 물어야겠다고 머릿속에 고이 집어넣고 있는데 다소 딱딱한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요즘 유성그룹이랑 신경전 벌이는 건 알아?”
“네, 대충요.”
혁필은 알고 있어 다행이라는 듯 반쯤 비운 맥주의 표면에 서린 물방울을 무심하게 내려보며 말을 이었다.
“노파심에 하는 소린데, 솔직히 그분은 받쳐 주는 사람이 없잖아.”
“…….”
“지금이야 워낙 잘나가고 있지만,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거든. 재계 혼맥이 괜히 있겠어? 다 자기 세력 확장하려고 그런 거지.”
혁필의 묵직한 말이 은호의 사고를 옭아맸다. 사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최윤재의 배우자 자리로 일반인보다는 재계의 인물을 예측하는 게 당연지사였다. 은호도 이런 이유로 윤재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계속 밀어냈다. 나를 가지고 노냐, 만만해 보이냐도 그런 이유로 쏟아낸 말이었다.
“적당히 마음 줘. 나중에 상처받지 말고.”
잊고 있던 생각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혁필의 말에 은호는 고개를 조용히 아래로 떨구었다.
‘선배, 나도 안다고요.’
혁필은 푹 가라앉은 은호를 보며 조용히 잔을 비웠다.
버스를 타고 가겠다며 설렁설렁 뛰어가는 혁필 선배를 보내고 택시를 잡아탄 은호는 창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불빛에 잡념을 섞었다.
창 쪽으로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워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부재중 전화나 메시지는 없었다.
‘아직 병원인가? 오늘은 오래 있나 보네.’
은호는 옆으로 세워둔 노트북 가방에 휴대폰을 밀어 넣고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주는 사랑이 호기심, 혹은 일회성이 아님은 정확히 알고 있지만 지속성은 은호조차 판단이 어려웠다. 평범한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가 굳건하게 사랑을 준다고 하더라도 주변의 변수로 지속성 유지가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벌써 그런 생각을 하냐. 김빠지게.”
택시에서 내려 오피스텔로 걸어가면서 은호는 늘어진 톤으로 중얼거렸다. 알고 시작한 거잖아. 가는 데까지 가 보다 안 되면 할 수 없지.
한 번 이별을 겪어 봤으니 이쯤은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며 씁쓸함을 삼키던 은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통로를 돌다 집 앞에 주저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보곤 발걸음을 멈췄다.
이성과 본능이 몸을 돌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시 걸어가라고 신호를 주었다. 하필 그때 노트북 가방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거대한 그림자처럼 움직임이 없던 인영이 소리를 듣고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공포감을 느낀 은호가 그대로 뒤를 돌아서는데,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지저분하게 울렸다.
“은호야.”
현준에게 손목이 붙잡혀 몸을 돌리게 된 은호는 소름이 돋았다. 분명 몇 달 전만 해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스킨십을 나누던 상대였는데 미움, 혐오가 가득 섞인 마음 때문인지 보기만 해도 환멸이 났다. 팔을 빼내려고 격렬하게 흔들자 마지막 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더욱 옭아매던 현준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내… 내가 잘못했어. 그때는 내가 뭐에 홀렸나 봐.”
그사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운동복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와도 몸만큼은 늘 청결하게 다듬었는데, 지금은 거뭇하게 수염 자국이 난 데다가 머리는 떡지고 옷은 얼룩져 있었다. 흡사 길거리에서 며칠 숙식이라도 한 모양새라 입이 안 다물릴 정도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응?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온 마음을 다 담은 애절한 몸짓. 현준의 혼탁한 눈동자 위로 흔들리는 자신의 얼굴이 투영되자 정신을 차린 은호는 단호하고 매정하게 말했다.
“나 호구로 3년 부려 먹었으면 됐잖아.”
첫 연애라는 단어가 너무도 특별한 나머지 서운하게 행동해도 다 받아 줬다.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나중에는 잘해 주겠지. 그렇게 보낸 세월이 자그마치 3년이었다.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다고 마음이 흔들리는 건 쓸데없는 동정이다. 하지만 너는 동정조차 줄 수 없어. 그럴 만한 값어치조차 없으니까. 은호는 차갑게 잘라냈다.
“또 호구 짓 하라고?”
은호의 냉랭한 말투에 꽉 붙잡고 있던 현준의 손이 움찔거렸다. 얼마나 억세게 잡았는지 손목이 붉게 물들고 시큰거렸으나 아프다고 표시조차 내고 싶지 않았다.
“당장 꺼져.”
생각해 보니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내 집을 내가 왜 못 들어가고 돌아 나가야 하는데. 은호는 손목이 나가든 말든 신경질적으로 붙잡힌 팔을 확 잡아 비틀어 뺐다. 은호의 서릿발 같은 말투에 충격을 받은 현준이 멍하니 무릎을 꿇고 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악.”
순식간에 목덜미가 잡히면서 붕 뜬 은호의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노트북 가방 안에서 쉼 없이 울리던 휴대폰 진동 소리가 동시에 끊어졌다.
바닥에 처박힌 은호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축축하고 습한 페로몬이 전신에 끼얹어지며 현준이 몸 위로 올라탔다.
“뭐? 꺼져?”
형형하게 날이 선 안광에 은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상체에 올라탄 현준은 체중으로 찍어 누르며 고압적인 시선으로 은호를 내려다봤다. 무서웠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도망갈 방법을 찾지 못한 은호가 주먹을 휘둘렀다. 첫 번째는 빗나갔고, 두 번째 휘두른 주먹이 현준의 턱을 때렸지만 이번엔 양손이 붙잡혔다. 손목뼈를 으스러뜨리려 하는 것처럼 악력이 말도 못 하게 억세, 고통에 끓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말해봐. 꺼지라고?”
당장에라도 죽일 것처럼 달려드는 현준의 눈빛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살려줘. 제발. 은호는 저도 모르게 윤재를 찾고 있었다. 바닥에 처박힐 때 휴대폰이 같이 꺼져 버려 공포감이 극에 달했다. 속으로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무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현준의 등 뒤로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빛이 들이쳤다.
상황이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은호는 그저 육중한 무게로 짓누르며 버티고 있던 현준이 어느 순간 시야에서 벗어나 멀찌감치 떨어져 나가는 걸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현준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패대기에 가깝게 던져진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복도 전체에 무겁고 짙게 깔린 페로몬이 현준을 압박하자 눈앞의 상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두려움이 응축되었다.
현준 앞에 선 윤재가 고개를 돌려 천장 위에 달려 있는 CCTV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현준을 내려다보았다. 윤재의 시선을 따라가다 덩달아 CCTV를 확인하게 된 현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도, 주변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체불명의 우성 알파가 눈앞에 있다는 것도 현준에겐 모두 위협적인 일이었다.
“경찰서로 갈까?”
바닥에 깔리는 낮고도 서늘한 음성에 현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버벅댔다. 상대가 누군지 전혀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있어야 할 자는 아니라는 걸 본능으로 터득한 몸이 빠르게 대처했다.
“죄… 죄송합니다.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왜 나한테 사과하지?”
폭력적으로 쏟아진 페로몬이 현준의 목을 조였다. 윤재가 손목을 걷어붙이려고 하자 지레 겁을 먹은 얼굴이 몸을 돌려 은호에게 사정했다.
“미안해, 다…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게.”
은호는 볼품없이 구겨져 있는 전 애인의 꼴을 보고 있자니 허탈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인간 말종이었다니.
다시금 현준에게 가까이 다가간 윤재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고개를 숙이고는 지독한 음성을 뱉어냈다.
“꺼져.”
현준은 말도 더 꺼내 보지 못하고 윤재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기어가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1층을 향해 내려가는 걸 지켜보고 나서야 은호를 일으킨 윤재는 몸 이곳저곳을 확인하며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했다. 양 손목이 붉게 물든 걸 보니 내일 아침이면 새파란 멍이 들 모양새였다.
“하… 좀 더 빨리 올걸.”
죄책감이 잔뜩 응어리진 말투에 은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태풍이 한 번 쓸고 간 뒤 폐허만 남은 것처럼, 머릿속이 지저분하게 흐트러졌다.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병원 들렀다가 생각나서.”
윤재가 붉게 물든 손목을 조심히 만지자 은호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리다 만다. 아픈데도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는 은호의 표정에 윤재는 더욱 마음이 조였다. 윤재는 착잡한 기분에 혀로 마른 입술을 쓸다가 턱에 힘을 주며 이를 질끈 문 뒤에 말했다.
“미안한데, 우리 집으로 가요.”
“…….”
“불안해서 여기 두질 못하겠어.”
최 회장의 병문안을 마치고 운전대를 잡은 윤재는 휴대폰이 방전되어 꺼져 있는 걸 확인한 후 충전 케이블을 연결한 채 은호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최근 들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부쩍 늘어 살짝 경계를 늦춘 게 화근이었다. 조금이라도 충전이 되면 바로 전원을 켜야 하는 걸 깜빡한 윤재는 은호의 오피스텔에 다다르고 나서야 전원을 켰고, 쏟아지는 부재중 통화 기록과 문자 메시지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현준이 파크타워 오피스텔에 와 있습니다. 오후 8:03
여기 유은호 씨 집인가요? 막 유은호 씨가 로비에서 올라가던데. 오후 8:34
메시지를 보는 순간 정신이 나가 엘리베이터 출입구로 질주하며 은호에게 연락을 취했다. 은호가 전화를 받지 않는 찰나의 시간에 무수히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갔다. 하필 엘리베이터에서 신호가 끊겨 초조하게 전자 계기판만 쳐다보던 윤재는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은호의 모습에 눈이 뒤집혔다.
“혹시 화났어요?”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던 은호가 윤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멍하니 비어 있는 눈동자 속에는 세상만사의 모든 걸 내려놓은 처연함이 담겨 있었다. 은호는 날연한 숨을 뱉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뇨.”
“…….”
“계속 못 볼 꼴만 보여서…… 조금 창피해요.”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부족할 판에 매번 지지리 궁상 같은 상황이 그의 앞에서 연출되었다. 얼마나 질리고 짜증 날까. 은호는 눈을 반쯤 내리깔고 살짝 부은 양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헝클어지고 엉망인 자신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방을 바라보던 윤재가 고요한 적막을 깨고 은호를 두드렸다.
“오피스텔 옮길래요?”
도대체 이 사람은…….
자신에게 질렸을 줄 알았던 그가 외려 걱정을 한가득 담아 의견을 구한다. 은호는 육성으로 짧은 탄성과 함께 막혔던 숨을 탁 터뜨렸다.
“걱정돼요?”
“당연한 소리를 너무 남 얘기하듯 뻔뻔하게 묻네.”
태연하게 미소 짓던 그가 기운을 내라며 손등을 쓰다듬었다. 전해지는 온기가 다친 마음을 다독이는 것처럼 느껴져 은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거봐, 웃으니까 좋잖아.”
대화가 끊기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지만 은호는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풀어낸 페로몬이 폐부를 두드려 텁텁한 숨을 뺏어가고 새 공기를 다시금 주입시켰다.
은호는 윤재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실로 들어갔다. 현준의 흔적이 남은 몸을 씻으면서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연에서 악연으로 바뀌는 게 동전 뒤집듯 이리도 쉽단 말인가. 마지막을 시궁창으로 장식하는 현준을 보니 그동안 뭐에 그리 홀린 건가 싶었다. 이렇게 형편없는 놈을 좋다고 챙겨 줬다니.
은호는 피부가 붉게 일어설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샤워 커튼을 치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자 윤재가 소재가 가볍고 부드러운 옷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은호는 멍하니 서서 선반 위에 잘 개어진 옷을 바라보았다.
“이리 와 봐요.”
다친 부위를 확인하기 위해 짧은 반팔과 반바지를 골라 줬다는 걸 샤워실 문을 여는 순간 깨달았다. 그가 문틀에 기대어 서서 숨어 있는 멍 자국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당시에는 공포감 때문에 바닥으로 패대기쳐져도 아픈 줄을 몰랐는데, 생각보다 여러 군데 상처가 생겼다. 손톱으로 긁힌 목덜미의 자국부터 무릎과 허벅지 그리고 손목에 남은 멍까지. 현준의 힘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흔적을 남길 줄은 몰랐다.
윤재가 약통을 들고 와 앉았다 그가 은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모르니 사진 찍어 둘까? CCTV는 아침에 바로 확보해 둘 거고.”
연고를 조금씩 짜 조심스럽게 펴 발라 주는 윤재의 표정이 어두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작정하고 밟고 싶었지만 은호의 마음이 어떨지 몰라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도 첫 연애 상대인데 눈앞에서 형편없이 짓밟히면 덩달아 침울해질까 걱정되었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밟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윤재는 굳이 은호에게 불편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병원 진단서 떼러 다니고, 경찰서 가서 얼굴 마주 봐야 하는 거잖아요.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은호는 뒤로 숨으려 들었다. 평소 그의 성격답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윤재는 은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물론 앞에서만 수긍하는 척하는 거고 뒤로는 현준을 밟을 생각뿐이지만 말이다.
은호는 고개를 숙이고 낮게 한숨 쉬었다. 시야 안에 들어오는 손목이 시큰거리고 아팠다. 손자국 모양으로 선명하게 갈색 멍이 들었지만, 은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내일 키보드 만질 때 많이 아프겠는데.”
“절 너무 약하게 보는 거 아닌가요?”
은호는 압박 붕대를 감을지 말지 망설이는 윤재를 보며 보란 듯이 손목을 좌우로 돌렸다. 벌써 뻐근하고 시큰거리긴 하나,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이래 봬도 통뼈거든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통뼈? 하나도 안 무겁던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번쩍번쩍 안아 드는 거 가벼워서 드는 거지, 무거우면 들지도 못해. 통뼈 아니야.”
윤재가 코끝을 찡긋거리며 분위기를 풀자 축 처져 있던 은호가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전무님.”
말꼬리가 점점 가라앉는 투로 부르니 윤재가 눈썹을 세우며 할 말이 있냐고 무언으로 묻는다. 은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제발.”
들고 있던 연고를 내려놓은 윤재가 두 손으로 은호의 얼굴을 감쌌다. 내 눈만 바라보라고 일부러 가시거리 안에 얼굴을 밀어 넣은 윤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랬잖아.”
“아니… 그래도.”
“벌을 줘야겠는데,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줄까? 응? 은호를 간지럼 태우려던 윤재는 혹시라도 멍든 곳을 아프게 할까 봐 벌주기를 관두었다.
가벼운 미소를 지은 그가 시선의 초점이 나갈 만큼 가까이 다가가 엄지로 은호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의 흑갈색 눈동자가 은호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두근두근, 귀 끝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은호는 숨을 들이켰다. 그가 은호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삼켰다가도 때로는 매달리듯 입술을 더듬고 빨아 당겼다. 숨이 모자라 입을 크게 벌리면 그는 입맞춤이 깊어지도록 은호의 입술을 한가득 머금었다.
TV를 틀어 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은호가 조용해졌다. 몰입해서 보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어,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히 그를 안아 들었다. 자연스럽게 감긴 은호의 팔이 윤재의 등허리를 더듬었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뭐라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데 귀를 기울여도 은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꿈을 꾸는 건가. 은호를 침대에 눕히고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등을 감고 있던 팔이 풀리지 않는다.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옷을 움켜쥐고 있어 윤재는 은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벌려 떼어냈다.
“후.”
다른 곳은 그렇다 쳐도 손목의 멍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다. 서랍을 뒤져 손목 밴드를 찾은 윤재는 은호의 양 손목에 밴드를 감고 스트랩으로 고정했다.
잠들어 있는 은호의 모습을 지켜보는 윤재의 눈에 애정이 그득했다. 현준에게 붙여놓은 사람에게 연락이 왔을 때, 잠시 잠깐이었지만 눈앞이 하얘졌다. 그는 혹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은호가 다칠까 봐 몸이 달았다. 윤재는 은호가 전 애인과 자꾸 엮이는 상황이 미안해서 움츠러들 때마다 상황을 알고 있어 그런지,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한없이 작아지는 은호를 감싸 주고 싶었다.
어느새 이리 변한 걸까.
윤재는 몇 시간 전의 일로 철렁했던 마음을 쓸어내리며 은호의 보들보들한 손을 엄지로 문질렀다.
작게 숨을 돌린 그가 조용히 방 밖으로 벗어났다. 거실 테라스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자 풀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울렸다. 윤재는 혀로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마지막 메시지 상대에게 통화를 눌렀다.
“접니다.”
- 빨리 오셔서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뛰어나가 말려야 하나, 비상계단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숙이자 앞머리가 흘러내렸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뒤로 넘기던 윤재는 어금니를 으득 갈았다.
“그 친구… 신고하지 못할 선에서 적당히 손 좀 봐 주세요.”
- 알겠습니다.
긁어 부스럼 낼까 싶어 일부러 물러서 있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한번 밟아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합격자 발표일 후, 일주일 뒤에 은호가 사망했다. 그날이 6월 20일. 그리고 오늘이 5월 23일. 앞으로 대략 한 달. 이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윤재는 혼곤한 숨을 허공에 흩날리며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손목 통증 때문에 은호의 입에서 잠결에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때마다 곁에서 같이 잠들어 있던 윤재가 깨어나 손목 밴드를 풀었다 조이며 상태를 점검했다.
은호는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민망함은 물론이요, 잠을 설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무의식중에 끙끙거린 작은 소리마저 잡아낼 줄이야. 그의 밝은 잠귀에 혀를 내두른 은호는 괜찮다며 몇 번이고 말렸지만 윤재는 물러서지 않았다.
출근길의 운전은 자연스럽게 윤재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밀어붙이는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이러면 제 역할이 뭐가 되나요? 입 밖으로 토해내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지만 입술을 모으고 뾰로통하게 시위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은호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차량과 신호등에 넋을 놓고 있자, 그가 은호의 눈앞에서 중지와 엄지를 이용해 손가락을 튕기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메일 하나 보냈는데 한번 볼래요?”
멀뚱하게 쳐다보던 은호가 윤재의 말 한마디에 곧장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에는 오피스텔 주소와 함께 내부 사진이 여러 장 첨부되어 있었다. 오피스텔을 옮기는 이야기의 연장선인가? 은호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확대하며 꼼꼼히 살폈다.
“오피스텔이네요?”
“한 비서가 수행일 때 사택으로 사둔 곳인데, 괜찮으면 이쪽으로 옮기는 건 어떨까 싶어서.”
생각해 보니 한 비서에게 지나가는 말로 사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한 비서는 본가에서 윤재의 집까지 꽤 거리가 있어 자취할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에 윤재가 오피스텔을 마련해 주어 편했다고 했다. 은호 역시도 머물 곳이 필요하면 사택을 요청해 보라고 입사 초기 넌지시 조언하기도 했다.
“전무님 집 근처 대로변에 있는 거죠?”
“응, 걸어서 4~5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꽤 마음에 들었다. 평수는 기존 집보다는 조금 작아지지만, 거의 잠만 자는 곳이니 공간에 큰 의미를 둘 이유는 없었다. 이참에 쓸데없는 짐은 모조리 버리고 다시 한번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관심 있으면, 이따가 퇴근하면서 보여 줄게.”
관심 사정권 안에 있기를 원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은호는 재고 확인할 필요 없이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바로 옮길게요.”
신호가 걸려 잠시 차가 멈춰 서자 윤재가 고개를 돌리고 은호를 비스듬하게 내려다봤다.
“계속 걱정하는 거잖아요.”
은호는 잔잔하게 미소 짓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해도 하필 오글거리게. 부끄러운 마음에 혼자서 땅을 파는데, 곁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윤재는 손을 뻗어 에어컨 버튼을 한 단계 더 올리더니 시트에 다시 몸을 묻었다.
윤재가 출근 후 집무실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윤 실장이 곧장 그를 뒤쫓아 왔다. 꽤나 진지하게 서류철을 들고 있어 그는 묻지도 않고 바로 건네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머지않아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그만큼 매서운 눈빛이 곧장 윤 실장에게 향했다.
“재무팀에서 지분 변동 이슈가 있어 리포트를 올렸는데, 에이 세컨드의 주주 지분이 지난달부터 심상치 않아서요.”
에이 세컨드라.
모니터를 켜고 관련 정보를 뒤져 보지만, 외국계 투자 회사라 국내처럼 자세한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자사 홈페이지와 외국계 기업 조사 사이트까지 확인해 가며 내용을 파악했지만 아시아 부동산 투자와 미국 내 채권, 부동산 투자 외엔 특별한 이슈가 없어 보였다.
“최근까지 1%대 주주들의 주식을 야금야금 사들여서 지난달까지 3%였는데, 어제 주주 중 fn 홀딩스에서 에이 세컨드에 블록 딜로 2% 지분을 모두 넘겨 총 5.1%가 되었습니다. 주식 비중으로 보자면 6번째로 높습니다.”
윤재는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에도 이 일이 있었는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에이 세컨드는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아…….”
그리고 보니 그 당시에는 에이 세컨드 대신 어떤 건설사가 지분을 매입했었다. 주주명부 상위 그룹에서 건설사를 뒤져 보았으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되돌아오면서 생긴 새로운 변수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황이 바뀌었다.
윤재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어내리자 곁에 서 있던 윤 실장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한 대표님과 미디어 스쿱 투자 미팅 들어가는데, 갔다 와서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윤 실장의 말투에는 스케줄을 보고하는 이유 말고도 다른 의중이 섞여 있었다. 염탐을 하고 오겠다는 무언의 눈빛에 윤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고마워요. 윤 실장.”
웃으면서 집무실을 빠져나온 윤 실장은 비서실로 들어오자마자 양손에 회색 밴드를 감은 은호를 발견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걸로 봐선 인대가 늘어난 거 같지는 않은데, 무슨 연유로 이리된 건지 괜히 묻고 싶었다.
“왜 그래요? 팔 다쳤어?”
“…아, 그게… 부딪쳐서 멍들었어요.”
은호가 대충 둘러대 보지만 윤 실장이 그 말을 믿어 줄지 의문이었다. 그가 일하는 데는 문제없다며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움직이자, 조심하라며 눈꼬리를 찡긋거리던 윤 실장이 은호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10시 유성 펀딩 그룹 17호 결성 콘퍼런스 콜 들어가는구나.”
“네.”
“작성하는 대로 나한테도 보내줘요. 나 한 대표님과 미디어 스쿱 투자 미팅 들어가야 해서 못 들어가거든.”
“네, 알겠습니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리를 떠나는 윤 실장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은호는 콘퍼런스 콜 참여자 명단을 조직도에서 긁어 메일을 전송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커피로 각성을 해 두는 편이 여러모로 필요했다. 은호는 비서실을 빠져나오다 복도 끝에 있는 집무실에 시선을 붙잡혔다. 어제 너무 고마웠는데, 감사하다는 표현도 제대로 못 했다. 문을 바라보는 은호의 눈에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어제 쪽잠 자서 피곤할 텐데… 괜찮은가 모르겠네.”
은호는 작게 한숨을 쉬다 몸을 돌려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성 펀딩 그룹 17호 결성 콘퍼런스 콜에 나타난 윤재는 전략 총괄본부 본부장의 브리핑을 확인하며 투자 참여자 수와 인당 평균 액수를 확인했다. 요즘 브랜드 평판이 좋아지면서 고액 투자자들이 늘어나 창립 이후 최단 시간 내 마감이 되었다. 올해 말에나 결성이 될 18호도 투자하고 싶어 하는 대기 고객이 많아 시일을 앞당길 예정이었다.
회의록을 작성한 은호는 콘퍼런스 콜이 끝나자마자 윤재를 포함한 이사진과 윤 실장에게 메일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점심이네.’
이맘때쯤 배꼽시계가 먼저 울려야 하지만 소식이 없어 생각해 보니 평소 먹지 않던 아침을 챙겨 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전무님 집에서 출근했지.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차려 주신 칠첩반상을 거부할 수 없어 남김없이 먹었더니 아직까지 속이 든든했다. 그래도 굶으면 3~4시쯤에 배고플 테니 샌드위치라도 사 가지고 올까 싶었다. 은호는 텅 비어 있는 비서실을 둘러보며 책상 위에 노트북을 내려 두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회사 근처 베이커리에서 마들렌과 샌드위치 하나를 산 은호는 바로 옆에 있는 건강 보조제 가게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유리 벽에 붙은 유명 연예인 광고를 말없이 바라보다, 인지도 하나만을 믿고 문을 열었다. 매장 안에 있던 매니저는 이미 유리문 밖에서 한참 서 있던 은호가 들어올 줄 알았는지 친절하게 다가와 물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음… 멀티비타민 어느 게 제일 좋은가요?”
뭔가 복잡하게 많았다. 건강 보조제를 사 먹어 본 적이 없어 뭐가 좋은 건지 몰라 무난한 멀티비타민을 물어보았다.
“고객님이 드실 건가요?”
“아뇨. 선물할 거거든요. 남자고요. 30대요.”
30대 남자란 소리에 가볍게 미소 짓던 매니저가 진열대에서 두 가지 제품을 골라 은호에게 보여줬다.
“이게 베스트셀러 제품인데, 오메가-3랑 같이 드시면 효과가 가장 좋거든요. 90정이니 세 달 동안 꾸준히 드셔보시면 도움 되실 거예요.”
“포장해 주세요.”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은호는 선뜻 카드를 내밀었다. 마음 같아선 백화점 건강보조식품 매장을 쭉 훑으며 가장 좋은 걸 사 주고 싶지만 요즘 주말마다 같이 붙어 있어 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TV 광고에서 꾸준히 나오는 제품이면 괜찮겠지. 은호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 봉투를 받아 들며 기분 좋게 밖으로 나왔다.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은호의 뒤로 익숙한 페로몬이 다가왔다. 뒤돌지 않아도 바로 알아맞힐 수 있는 시원하고 그윽한 우디 향. 은호는 몸을 돌려 이사진 무리와 있는 윤재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 훑던 윤재의 시선이 은호의 한 손에 들린 베이커리 비닐봉지에서 멈추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은호는 뒤로 더 물러서서 이사진부터 챙기고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이 닫힐 때까지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윤재의 시선에 얼굴이 타들어 갈 것처럼 화끈거렸다.
은호는 대체 투자본부에서 올라온 글로벌 부동산 리포트와 관련 인프라 리포트를 하나로 묶어서 메일 수신에 최윤재, 참조에 윤 실장을 넣어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아니면 퇴근 후? 책상 위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은호는 선물 봉투를 집어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노크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뱉고 문을 열자 창가에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딱 벌어진 어깨에 정확히 들어맞는 진회색 슈트는 재단사가 정성 들여 작업한 것처럼 그의 몸에 잘 어울렸다.
“대체 투자본부에서 올라온 리포트가 있습니다. 아시아 부동산 투자 선별 리스트와 관련 인프라 리포트를 정리해서 방금 올렸으니 확인해 주세요.”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팔을 풀더니 성큼성큼 다가온다. 은호의 한쪽 손목을 아프지 않게 붙잡아 올린 후 손목 밴드 스트랩을 벌려 멍 자국을 확인했다. 하루 만에 손목이 짙은 갈색으로 변한 데다가 범위가 어젯밤보다 더 커졌다. 윤재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손목 여기저기를 둘러보자, 은호가 민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긴.”
아프지 않게 다시금 밴드를 조여 주던 그가 못마땅한 투로 채근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어야지, 샌드위치라니.”
“샌드위치 생각보다 든든해요. 아, 그리고.”
은호는 잠시 잊고 있던 선물 봉투를 그의 가슴팍으로 살짝 밀었다. 이건 뭐냐는 의아한 표정에 홍조로 얼굴을 물들인 은호가 덤덤한 투로 툭 내질렀다.
“오는 길에 생각나서 사 왔어요.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꼭 챙겨 드세요.”
리본까지 예쁘게 묶인 포장지를 가볍게 뜯어낸 윤재가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회사만 아니었어도 물고 빨고 다 했을 텐데 그러기에는 장소에 제약이 있었다. 윤재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은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치료의 대가?”
“네에?”
의미를 이해한 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라며 강한 부정의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윤재의 얼굴 근육은 웃음으로 잘게 물결치고 있었다.
“농담이야, 농담.”
“…….”
“고마워요. 잘 챙겨 먹을게.”
은호가 보는 앞에서 뚜껑을 열어 알약을 꺼낸 그가 데스크로 걸어가 컵을 들고 물과 함께 삼켰다. 보란 듯이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은호는 조용히 웃으며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눈을 떴을 때, 평소보다 목덜미가 뻐근하면서도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윤재는 몸을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생수 한 병을 고스란히 비우고 피트니스룸으로 들어갔다. 해외 경제 뉴스를 들으며 러닝머신 위에서 30분 넘게 땀을 쏟아냈지만 이상하게 몸이 풀리는 느낌이 없었다.
지난밤, 은호는 이사 전 집 정리를 하고 싶다며 오피스텔로 향해 윤재의 마음을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사실 은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멀쩡히 자신의 집을 놔두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을 상사의 집에 머물렀으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현준은 낯선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후 그의 부모님이 사는 본가 앞마당에 버려졌고, 그는 이틀째 두문불출했다. 본가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자신의 신상을 전부 알고 있고, 심지어 자신을 때린 상대가 조폭 무리로 보이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덕분에 윤재는 마음 편히 은호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몸이 개운치 않고 어딘가 계속 뻐근했다. 윤재는 휴대폰을 열어 러트 주기를 확인했으나 네 달이나 남아 있었다.
살면서 러트 주기가 당겨진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한 달 범위에서 움직였지, 네 달이나 앞당겨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은호와 자주 살을 맞대고 있어서 주기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윤재는 방으로 들어가 페로몬 테스터기를 꺼내 목덜미의 페로몬 샘에 대고 체크했다.
“…….”
위험 단계는 아니지만 주의 범위에 들어와 있었다. 통상 이 상태에서는 빠르면 2~3일,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 러트가 왔다. 윤재는 점심 즈음 안전하게 병원에 들러 억제 주사를 맞을까 고민하며 오늘 스케줄을 체크했다.
때마침 은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호는 문을 열자마자 평소보다 밀도가 높은 페로몬이 바닥에 얇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알아챘다.
컨디션이 안 좋은가. 은호가 현관 근처에 있는 여벌 셔츠를 챙겨 드는 사이 윤재가 서류 가방을 들고 걸어 나왔다. 은호는 묵례 후 곁눈질로 그를 한번 훑으며 몸을 돌렸다. 간밤에 잠을 설친 것 같지는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살짝 불편해 보였다.
은호가 여유롭게 운전대를 두드리며 차창 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차 문을 열고 들어온 윤재가 목소리를 다듬듯 목을 만지더니 넌지시 물었다.
“혹시 힘들거나 부담스럽지 않죠?”
“네?”
“……페로몬.”
아아. 말뜻을 이해한 은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문제없다는 듯 흘려 넘겼다.
“평소보다 살짝 무겁긴 한데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다행이네.”
시동 버튼을 누르고 주차장을 벗어나던 은호가 룸미러로 윤재를 확인했다. 창밖에서 내리쬔 빛이 그의 재킷 상의와 턱 위로 빛무리를 그리며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페로몬이 조금 짙어진 거 같기도 하고. 신경 써서 맡지 않으면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가 꺼낸 말 때문에 어쩐지 평소보다 예민하게 다가왔다.
“러트… 기간이 다가오는 거죠?”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하던 윤재가 반듯하게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룸미러를 통해 시선이 닿자 턱을 살짝 찌푸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한참 뒤여야 하는데, 조금 이상해서.”
네 달이 당겨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윤재조차도 긴가민가했다. 러트 주기가 비교적 규칙적이던 윤재는 실수해 본 적이 없어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신의 이마를 손끝으로 더듬던 윤재는 가까이 있는 은호가 자신의 페로몬이 짙어진 걸 크게 개의치 않자, 안심하며 메일 내용을 마저 훑었다.
오전, 투자본부 본부장과 함께 3분기 투자 로드맵에 대해 릴레이 토론을 이어가던 윤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굳어지더니 결국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회의장 안에 있는 대다수의 본부장이 알파라 페로몬이 섞여 그의 향을 집어내지 못할 정도로 안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모르게 노심초사했다.
은호는 회의록을 마저 작성한 후 회의가 끝나자 자리로 돌아와 메일 발송 명단을 선택했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짧게 울리다 멈췄다. 은호는 오른쪽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손목이 아직 뻐근한 탓인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병원 가 볼 테니, 오늘 오후 스케줄 전부 취소하세요. 오전 11:44
은호는 메시지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왜 병원으로 갈까, 오메가를 바로 옆에 두고. 혁필 선배 말대로 재계 혼맥을 위해 아껴두는 걸까. 연애 따로, 결혼 따로… 뭐, 그런 거? 모니터가 절전으로 돌아간 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자 점심시간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한 비서가 가까이 다가왔다.
“밖에 나가서 먹을 건데, 유 비서는?”
“…아, 먼저 드시고 오세요. 저 운전해야 할 거 같아서요.”
“최 전무님?”
“네.”
파티션에 두 팔을 걸치고 있던 한 비서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비축해둔 크래커와 음료수를 들고 오더니 은호의 데스크 위에 내려 두었다.
“이거라도 챙겨 먹고 나가.”
은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한 비서는 다른 식구들과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은호는 비서실이 비워지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다 뭔가 결심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재킷을 걸치며 나갈 준비를 마친 윤재와 맞닥뜨렸다.
‘아, 짙어졌구나.’
회의실에서는 몰랐는데 확실히 아침보다는 그의 페로몬이 더 선명하고 진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반응하는 걸 보니 러트가 다가왔음을 오메가의 본능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제가 운전할게요.”
혼자 가겠다는 걸 일부러 고집부려 운전대를 잡았다. 사실 은호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연애와 성 경험을 현준으로 시작해서, 그동안 쌓아 왔던 경험이 평균이자 기준이 되어 버렸다.
러트만 되면 오라고 불러대기 바빴던 녀석과 달리 윤재는 은호를 피하려 들었다. 현준에게 너무 길들여진 걸까. 러트가 돌아오면 애인을 위해 몸을 내어주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던 은호의 입장에서, 관계를 맺는 대신 약으로 버티려 드는 윤재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억척스럽게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건지, 밀폐된 차 안임에도 조금 전 집무실보다 페로몬 농도가 옅게 느껴졌다.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그의 표정에 망설여졌지만 은호는 윤재에게 궁금한 답을 듣고 싶었다.
“전무님.”
뒷좌석에 앉은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경직되어 있던 그가 은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목이 메어 마른기침으로 목울대를 푼 은호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떼어냈다.
“제가 부담스러운… 거죠?”
“그게 무슨 말이지?”
윤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 눈을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은호의 눈빛에 의심과 약간의 체념이 섞여 있었다.
저 오메가인 거 잊었어요? 저를 두고 억제 주사라니요. 은호는 말을 직접 꺼내지 않았지만, 다소 허망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재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은호는 뭔가 대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아… 그런 게 아니라.”
“…….”
“내가 조절을 못 할 거야. 알잖아.”
윤재는 러트가 닥치면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일시에 잘려 나간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은호가 히트사이클이 찾아왔던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러트에 눈이 돌아 오메가를 덮치는 알파를 여러 번 보았던 윤재는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고 있었고, 아직 연애 초기 단계의 은호에게 짐승 같은 행동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에요?”
영 미덥지 않은 건지 은호는 여전히 의심을 주렁주렁 달고 심각한 투로 물었다. 윤재는 혀로 볼 안쪽을 꾹꾹 누르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라니까.”
얼마나 거칠게 다룰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러트가 오기 전 꼬박꼬박 처방을 받은 터라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이걸 오해하고 문제 삼을 줄은 몰랐다.
윤재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오메가는 소비하는 존재가 아닌 보호해야 할 존재로 인식했다. 그 이유로 학창 시절 생일파티에서 누구나 한다는 오메가와의 첫 경험조차도 윤재는 거절했다. 자기가 원해서 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닌데도 알파라는 이유로 그것을 특권처럼 휘두르는 알파들의 작태에 구역질이 났다. 윤재는 그럴수록 자신을 더욱 단속하며 신중하게 행동했다.
천천히 주행 중이던 은호는 억울해하는 윤재를 지켜보다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차를 유턴했다.
“오해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방향 돌리겠습니다.”
“은호야.”
“저 괜찮아요. 아니 당연한 거잖아요.”
은호의 돌발 행동에 윤재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준서와도 러트를 같이 보낸 적이 없어, 얼마나 제어가 되고 안 되는지 객관적 자료가 없었다. 은호는 작정한 듯 차량 디스플레이에 휴대폰과 연동되는 주소록을 띄우고 도우미 아주머니를 찾아 통화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수행 비서 유은호입니다. 곧 전무님 들어가실 텐데 지금 바로 퇴근해 주세요.”
- 네? 지금요?
“네 자리를 비워 주시면 됩니다. 15분 후에 도착 예정입니다.”
- 네, 알겠습니다.
거침없는 추진력에 지켜보던 윤재가 허탈한 웃음을 쏟아냈다. 윤재가 한숨을 뻑뻑 쉬며 외려 불안해하자 운전대를 잡은 은호가 잠깐잠깐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데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조차도 모르는데… 알고는…….”
“걱정 마세요.”
그가 말을 매듭짓기도 전에 툭 자르고 들어온 은호는 감당할 수 있다는 듯 자신했다. 사실 섹스의 강도나 그로 인한 압박감보다는 체력이 안 받쳐 주는 게 문제였다. 심장이 여러 개인 것처럼 종일 달려드는 그를 버텨내는 게 살짝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지난번 히트사이클 때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던가.
은호는 그날을 다시 상기하다 어쩌면 지금 그의 행동이 그때와 결을 같이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은호의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신중한 사람일지 모른다.
“충격받고, 다음 날 사직서 내밀면 반려할 거야.”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가볍게 분위기를 띄워 보지만, 윤재는 은호가 정말 사직서를 낼까 봐 정신이 아찔했다.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들 텐데,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어.”
“전무님.”
“아침에 눈 떴는데 울면서 헤어지자고 그러면 안 돼.”
신호가 걸려 차를 멈춰 세웠다. 한참을 듣고 있던 은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너무도 귀여워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꽤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나름 고민해서 말한 건데도, 은호는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뭔가 상황이 뒤바뀐 느낌에 윤재는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처방 없이 러트를 보내는 건 처음이어서 은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상태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진심이야. 눈 뒤집혀서 각인하면 받아 줄 거야?”
윤재의 진심 어린 경고에 눈꼬리에 주름이 지도록 웃던 은호는 흔쾌히 대답했다.
“일단 같이 눈 뒤집혀 보고 난 뒤에 생각하시죠.”
왜 이리 긴장하는지 모르겠다고 웃으며 넘겼지만 사실 은호도 내심 떨고 있었다. 현준의 러트도 벅차고 힘들었는데 과연 윤재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우성 알파의 러트는 많이 다른가? 은호는 지그시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집으로 다다를 즈음 점점 진해지는 페로몬 때문에 핸들이 몇 번 흔들리자, 윤재는 다시금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정신력으로 버텼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운전석을 빠져나온 은호가 뒷좌석 문을 열고 윤재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얼른요.”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쌕쌕거리며 내뿜는 숨에서조차 묵직한 페로몬이 줄줄 흘러나왔다. 윤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뜨며 손등으로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대충 훔치고 은호에게 붙잡힌 채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은호를 벽에 밀치며 두 팔 사이에 가두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거친 호흡에 입고 있는 스리피스 슈트가 크게 들썩였다.
“내가…….”
윤재는 끊어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아 버티며 미소 지었다. 윤재에게서 발산되는 열이 은호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정신이 나가서 난폭하게 굴면 때리고 소리 질러.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입술이 바싹 마를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은호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잘 익은 과실처럼 빨갛고 촉촉한 혀에 윤재의 입술이 성급하게 다가왔다. 벽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 은호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급하게 입을 맞물린 그는 나머지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다 헛손질하자 힘으로 잡아 뜯어 벌렸다. 후드득 볼품없이 나가떨어진 단추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은호를 벽으로 몰아붙이고 삼킬 듯이 입술을 흡입하는 동안 윤재의 밀도 높은 페로몬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은호는 한여름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윤재의 페로몬에 눈앞이 점멸하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순간 그의 단단한 팔이 등허리를 감싸며 잡아당겨 주저앉는 건 면했지만 윤재의 페로몬에 함락당한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윤재의 정신이 깜빡이는 필라멘트처럼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그는 꾸준히 이성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잠깐 정신이 돌아온 사이, 은호가 흐물거리며 늘어지자 그를 끌어안고 침실로 들어가 뺨을 톡톡 두드리며 흐릿해진 눈을 확인했다.
“……괜찮아?”
페로몬에 흠뻑 취한 은호의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윤재가 흘러내리는 페로몬을 조절하며 주변을 환기하자 은호는 의식이 돌아오는지 손을 뻗어 윤재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끝으로 닦아냈다.
“괜찮아요.”
피식피식 웃는 은호는 자신의 너덜너덜해진 셔츠에 고개를 내저으며 두 손으로 윤재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열었다. 은호의 손길이 몸 구석구석을 스치자 윤재는 다시금 숨이 벅차게 차올랐다. 그는 상의를 벗기는 느릿한 손짓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 벨트를 풀고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침대 아래로 옷가지가 하나둘 떨어지는 사이 방 안은 어느새 윤재가 쏟아내는 페로몬으로 그득 차올랐다.
알파에 반응한 은호의 몸이 받아들일 준비를 서둘렀다.
은호의 입 안 구석구석을 빨고 삼킬 때마다, 후각을 자극하는 플로랄 계열의 진한 향이 윤재의 뇌를 마비시켰다. 언제부터인지 은호의 아래는 왈칵왈칵 쏟아진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떨어진 입술을 따라 길게 침이 늘어졌다. 은호의 번들거리는 입술은 거칠게 빨려서 그런지 도톰하니 살짝 부어 있었다.
“흐읏….”
은호의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과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갔다. 그 소리는 윤재의 귀를 파고들어 그를 더욱 자극했다.
귓불부터 목덜미까지 입술로 잘근잘근 씹으며 내려오던 그가 앙증맞게 솟아 있는 유두를 한입에 머금었다. 쪽쪽거리는 물기 젖은 소리가 방 안을 공명한다. 시트 위에서 방황하던 은호의 손이 윤재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침으로 번들번들하게 젖은 연분홍색 유두가 조금 전보다 볼록하게 더 솟아올랐다.
“하아… 너무, 좋아요. 흐흣….”
다시 한번 유두를 빨아 삼키던 윤재는 은호의 허벅지를 양옆으로 가르며 그 안에 자리 잡고 몸을 점차 아래로 숙였다.
그는 빗장뼈의 결을 따라 잇자국을 남기며 배꼽까지 내려와 움푹 팬 골을 혀로 찌르며 빙그르르 돌렸다. 은호가 허리를 들썩이며 움켜쥔 머리카락에 힘을 줬지만, 이성이 끊어진 윤재는 개의치 않고 두 팔로 양 허벅지를 끌어안더니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었다.
“아! 흑….”
윤재는 침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쿠퍼 액을 조금씩 흘리던 은호의 성기를 단숨에 입에 넣어 머금었다. 전신을 꿰뚫듯이 관통하며 밀려드는 쾌감에 은호는 절로 신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오감이 전부 열리며 모든 감각을 받아들인다. 전율하며 자지러진 은호는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이성과 본능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은호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을 뒤덮는 페로몬 샤워에 이성이 저만치 사라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윤재가 뜨겁고 축축한 혀의 까끌까끌한 돌기로 기둥을 흡착하듯 쓸어내렸다. 복부와 안쪽 허벅지 근육에 잔뜩 힘을 주고 버텨보지만 한계에 다다라 은호의 등허리가 허공에 떴다, 풀썩 가라앉았다. 전신을 휩쓴 쾌락의 파도에 허벅지 근육이 경련하며 잘게 튀었다.
“흐윽…, 흐윽.”
뒤로 고개가 젖혀져 반강제적으로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쏟아내고 들이마셨다. 뇌가 녹아내려 시신경이 고장 난 것처럼 눈앞이 눈부시게 하얘지더니 암전이 들이닥쳤다. 귀 끝에서 울리는 이명에 윤재의 폭격하는 페로몬까지, 은호는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상체를 일으킨 윤재가 입술에 묻은 침과 정액을 혀를 내밀어 남김없이 핥았다. 그의 선명하고 날이 선 눈동자는 어느새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이성이 끊긴 윤재는 본능만을 좇다, 은호의 뒤채는 소리에 이성이 잠깐잠깐 돌아올 뿐이었다.
윤재는 은호의 힘없이 늘어진 두 다리의 무릎을 세워 양옆으로 벌리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입구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아… 흐윽.”
이성이 남아 있다면 손가락으로 천천히 풀며 길을 들일 텐데 이미 인내심이 바닥을 친지 오래였다. 그는 말랑한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벌리고 핏줄이 돋아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나마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이성 때문에 윤재는 힘들어할 은호를 위해 급하게 몰아치지 않고 천천히 체중을 실어 밀어 넣고 있었다.
뜨껍고 단단한 윤재의 성기가 끄트머리부터 시작해 뿌리까지,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까끌까끌한 음모가 입구에 닿을 만큼 끝까지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윤재의 목울대에서 울린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은호의 귀 끝을 스쳤다.
“흐응… 천… 천천히. 흐….”
아무리 젖어 있다 한들 러트인 우성 알파는 존재만으로 벅차고 고통스러웠다. 빠듯하게 밀고 들어와 장기를 건드려서 복부가 뒤틀리는 것처럼 통증이 일었다. 은호는 산소가 부족해 물 밖으로 입을 내민 물고기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성기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알파의 페로몬이 같이 스며들며 혈관을 확장 시켰다. 심장이 여러 군데 있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맥이 메아리치며 몸을 흔들어 은호는 절박하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나마 그가 풀고 있는 페로몬이 은호의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며 마취 역할을 하고 있기에 버티는 거지, 아니었으면 몇 번이고 까무러칠 만큼 괴롭고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아… 흣. 천… 천히, 흐읏.”
툭툭 끊어지는 문장 사이에 짙은 호흡이 섞였다.
은호의 허리가 움찔 튕겨 오를 때마다 몸을 적신 땀방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시트에 후드득 떨어졌다. 윤재의 허리 짓이 거세질수록 매끄럽고 하얀 나신이 팔다리가 고장 난 인형처럼 출렁거렸다.
사정감이 목전까지 들이쳤다 빠져나가면 덩달아 윤재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흐윽… 흐윽….”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아침을 거른 데다 점심까지 놓쳤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판판한 복부 위로 사정액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윤재는 계속해서 밀고 들어왔다. 은호의 가슴팍이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체력과 정신을 고갈시키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점심부터 시작된 행위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침대 아래에는 비어 있는 생수병이 옷과 함께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사고가 이어졌다가 끊어지고, 또 끊어졌다가 이어지길 반복했다.
허리는 트럭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몸이 움직일 때마다 뻐근하게 뒤틀렸고, 계속되는 마찰로 인해 부어 버린 입구는 성기가 들락거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을 동반했다. 시트는 두 사람이 쏟아낸 온갖 체액으로 눅눅해진 지 오래였다.
엎드린 채 엉덩이만 들린 상태로 베개에 얼굴이 파묻힌 은호가 불규칙한 호흡을 쏟아냈다. 사납게 내벽을 헤집는 감각에 정신을 차린 은호가 고통을 호소하며 앓는 신음을 흘렸다. 혹사당한 목은 이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부어 있었다. 시트를 힘없이 붙잡고 있는 은호의 손 위로 힘줄이 돋은 마디 굵은 손이 겹쳐졌다. 의식이 오락가락 불분명하지만 허리 아래가 끊어질 듯한 고통 탓에 눈꼬리를 찡그리다 눈을 감기를 반복했다.
“흐으으….”
허리 놀림이 성급해졌다. 다시 그의 성기가 뱃속에서 팽창했다. 은호는 베개를 물고 고통을 삭이느라 끙끙거렸다.
툭 불거진 날개 뼈가 안쓰러울 만큼 왜소해 보였다.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끊어질 듯 신음하자, 체중을 싣던 윤재가 은호의 기도를 확보해 주려고 삽입한 채로 그의 몸을 뒤집었다. 난도질 당하는 것처럼 내벽이 휘저어지자 쇳소리가 나는 비명이 짧게 울렸다.
“흐으….”
그 순간 은호의 몸이 불덩이처럼 절절 끓었다. 윤재의 고농도 페로몬에 장기간 노출되어 은호의 히트사이클이 당겨져 버렸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던 은호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색을 잃었다.
은호는 히트사이클이 오자 마지막 남은 기운을 모두 짜내는 것처럼 사정없이 페로몬을 방출했다. 눈앞에 있는 알파의 씨를 받아들이기 위해 진득하고 달콤한 페로몬을 쏟아내자 윤재의 허리 짓이 더욱 거세졌다.
마찰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엉덩이가 탄탄한 허벅지와 부딪치며 요란하게 흔들렸다. 휘몰아치는 열락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은호는 윤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체를 계속해서 붙이고 끌어안아 달라고 팔을 뻗었다.
반나절을 고통에 시달려 생리적인 눈물로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지만 본능으로 마지막임을 알아챈 은호는 더 몰아치라며 윤재를 부추겼다. 깊이, 더 깊숙이 밀어 넣어 더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곳을 치고 들어온다. 눈앞이 점점 혼탁해지고 가물가물해지는 은호와 달리 윤재의 눈은 점차 선명해졌다. 노팅이 임박했다는 걸 몸이 알아차리는 찰나, 자궁구를 열어젖히며 밀고 들어간 성기가 내벽에 단단하게 결착되었다. 입술을 깨물던 은호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떠느라 은호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해가자 정신이 돌아온 윤재가 급하게 은호의 입을 벌려 숨을 불어 넣었다. 히익, 히익, 비정상적으로 아슬아슬하게 끊어지던 호흡이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되돌아왔다. 입술이 버석하게 메마르고 갈라진 은호는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윤재의 등과 팔뚝에 상처 하나 남기지 않은 대신 입술을 물고 버티느라 번진 피가 이 사이사이로 붉게 번져 있었다.
은호의 숨소리가 비교적 고르게 가라앉자 그의 뒷머리를 받친 윤재가 차분하게 은호를 내려다봤다. 축 늘어진 몸은 여전히 열기가 빠지지 않아 뜨끈했다. 결착된 하체를 그대로 붙인 채 윤재는 은호의 귀에 대고 작게 뭐라고 속삭이더니 바로 아래 페로몬 샘에 이를 세워 넣었다.
탈진한 탓에 아픔을 느끼지 못한 은호는 잠이 든 것처럼 평온했다. 페로몬 샘 주위로 붉게 새겨진 잇자국이 점차 흐릿해지며 푸른색 각인의 흔적을 남겼다.
노팅을 받아낸 몸이 잘게 경련해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용암처럼 절절 끓는 몸이 차분하게 식어가는 동안 은호를 안고 있던 윤재는 가슴의 울렁임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떠나간 짧은 생도, 이후 알게 된 억울한 상황도 너무나 마음이 쓰여 도와주려 시작한 일이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기 싫어 은호를 일부러 그의 곁에 가까이 두었는데 언젠가부터 정이 들고 마음을 주게 되었다.
어느 날 뒤돌아보니, 은호가 윤재의 뭉툭한 감정을 파고들어 하나하나 정교하게 다듬고 있었다.
윤재는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연민에 의한 관심인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 경계가 모호해 오랫동안 선 넘은 관심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또다시 현준에게 얽매이는 은호의 모습에 윤재는 그때 깨달았다. 윤재는 현준을 질투했고, 은호를 잃을까 두려웠다. 연민으로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아닌, 사랑임을 확신한 그는 은호를 지켜 주고 싶어졌다.
체력 소모로 몸이 고단한 것과 별개로 윤재의 정신이 점점 선명해졌다. 깊은 수면으로 침몰하는 은호를 끌어안은 윤재는 그의 귓가에 대고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랑해.
그러니, 내 곁에 남아줘.
***
부유하는 정신이 계속해서 깊은 바닷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한참을 바닥으로 침몰하던 중, 등허리에서 둔통이 느껴지자 가라앉았던 의식이 반쯤 깨며 무겁게 닫혀 있던 눈매가 파르르 떨려 왔다.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은 누군가가 따스한 열로 데우고 있었다.
은호는 그게 누구인지 눈을 뜨고 있지 않아도 대번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꽉 닫혀 있던 눈썹이 부드러운 파동과 함께 천천히 들렸다. 아침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천장 위로 어둑어둑한 밤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뼈마디를 분해했다 다시 이어 붙인 것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힘들지. 쌕쌕 벌어진 입술 틈에서 열기 있는 건조한 숨이 허공으로 번져 나갔다. 입술 주변은 전부 메말라 딱딱한 각질이 잔뜩 들러붙었고, 입 안에서는 왜인지 비리고 텁텁한 맛이 느껴졌다.
수분이 부족했다. 모래알을 한 움큼 삼킨 것처럼 목이 까끌까끌하고 건조해 죽을 맛이었다. 갈색 눈동자를 천천히 좌우로 돌리던 은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던 건지 걱정을 한가득 담은 불안한 눈동자가 은호를 좇고 있었다.
은호는 미처 잠기운을 쫓아내지 못해 몽롱한 눈으로 자신을 안타깝게 내려다보고 있는 윤재를 천천히 담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쉽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숨조차도 쇳소리가 나는 것처럼 퉁퉁 부은 목을 쥐어짜 겨우 뱉어 보지만 말끝이 버석하게 갈라져 형편없었다.
“괜…… 찮아요?”
그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위축되어 있었다. 손등을 쓸어내리던 그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열감이 남아 있는 은호의 이마에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내가 물어야 하는 말이잖아. 괜찮아?”
그의 낮고 단단한 음성이 바닥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목소리를 오랫동안 내지 않은 게 느껴졌다. 코앞에서 눈을 맞추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윤재가 은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넘겨 주었다.
혈색이 빠진 은호의 새하얀 뺨은 보는 이에게 고단함이 전해질 만큼 안쓰러웠다. 은호가 계속해서 눈꼬리를 찡그리며 목을 다듬으려 해 윤재는 은호의 등허리에 팔을 밀어 넣어 상체를 일으킨 후, 근처에 있는 물컵을 입가에 붙여 주었다. 은호는 유리컵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가뭄에 단비처럼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느릿하게 흘러 내려갔다.
바짝 메마른 목이 촉촉해져 침을 꼴깍 삼킨 은호는 자신을 다시금 천천히 눕히는 윤재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금 몇 시예요?”
“열 시 반.”
“얼마… 안 지났구나.”
은호는 의식이 꺼지기 직전, 어둑해지는 창밖으로 정원의 조명등에 불이 들어와 사물을 충분히 구별할 만큼 방 안이 환했던 것을 기억했다. 은호의 느릿느릿 기어가는 말투에 윤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오늘 금요일이야.”
“네?”
“하루 꼬박 잠들어 있었어. 휴가 처리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래서 이렇게 허리가 아픈 건가. 물을 마시느라 살짝 몸을 일으켰을 때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 날처럼 온몸이 쑤셨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뻐근한 둔통이 계속해서 척추신경을 건드렸다. 열감이 심한 아래에서 미끈하고 습윤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윤재가 연고를 발라 놓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손등 위로 작은 밴드가 앙증맞게 붙어 있었다. 은호가 손목을 들어 올려 반쯤 감긴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자 윤재의 손이 창백한 얼굴 위로 가까이 다가왔다.
“탈수 증세가 심했어.”
반나절을 쥐어짜인 탓에 은호의 몸이 허물어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다급해진 윤재는 의료진을 불러 수액을 보충하고 페로몬 돔을 씌우며 밤새도록 회복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워낙 바닥까지 내려간 은호의 체력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아 윤재의 속을 새카맣게 태워 버렸다.
“은호야.”
깊은 울림의 목소리는 그 여느 때보다 부드럽고 달달했다. 은호의 혈색을 확인하는 윤재의 눈빛에는 뭔지 모를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왜 그럴까. 불안함의 출처를 알고 싶은 은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려보려 애를 썼다.
“기억이 좀 나?”
부은 목의 통증에 신음을 흘린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오후부터 체력 고갈로 의식이 일부 끊겼지만 비교적 많은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호는 텁텁한 한숨을 내쉬었다.
러트 기간인 만큼 섹스 한두 번만으로 흥분이 가라앉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의 휴식조차 없이 밤까지 몰아칠 줄은 몰랐다. 사정 후 빠르게 피가 도는지 다시금 부피를 키우고 살 끝을 밀어 넣는데, 쾌락의 극점이 내려오지 못하고 계속 치솟았다. 종내엔 사정액이 투명한 물처럼 변해 버렸고 지속된 흥분은 탈진으로 이어졌다. 윤재는 고개를 끄떡이는 은호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노팅이요.”
“많이 기억하네.”
노팅을 기억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알고 있었고, 크게 놀라지 않는 듯 보였다.
윤재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다, 셔츠 단추를 풀어 은호에게 목덜미가 잘 보이게끔 고개를 반대로 꺾어 보였다. 평소 아무 자국 없이 매끈하던 목덜미 아래에 흐릿한 푸른색 패턴이 인장처럼 새겨 있었다. 은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다.
“……각인 …했어요?”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는 자신의 왼쪽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만져지는 건 없지만 약간의 통증이 있는 걸 보아 의식이 끊어진 사이 각인을 했던 모양이다. 은호는 그제야 그가 내내 불안해하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의 평소 성격답지 않게, 상대의 동의 없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으니 그럴만했다.
은호는 기운 없는 투로 작게 툴툴거렸다. 버럭 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각인을 반기고 기뻐할 만큼의 정신 상태도 아니었다. 사실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러트만 잘 넘기길 바라는 마음에 무작정 윤재를 붙잡은 건데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를 쳐 버렸으니.
“사직서 못 내겠다.”
“사직서 반려한다고 했잖아.”
은호를 면밀히 살피던 윤재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은호의 동의 없이 각인을 했기에 그가 주먹을 날리거나 욕을 퍼부으면 무릎 꿇고 마음이 풀릴 때까지 받아낼 참이었다. 하지만 최악까지 고려했던 윤재의 생각과 달리 은호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울면서 헤어지자고도 못 하겠네요.”
“이 말 나올까 봐 각인했어.”
바싹 타들어 가던 마음이 녹녹하게 풀어졌다. 스리슬쩍 농담을 곁들여 미소 짓자, 어이없다는 한숨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윤재는 은호의 한숨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농담… 아니 아예 농담은 아니고.”
진심과 농담이 반반씩 오묘하게 섞인 그의 고백에 주먹을 쥔 은호가 그의 가슴팍을 툭툭 때렸다. 이 정도는 해야 나도 덜 억울하겠다는 보상 심리를 표출하자 말없이 웃는다.
“은호야.”
순간 그의 검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은호의 가슴 한구석에 뭉클한 감정이 차올랐다. 금이야 옥이야, 밴드가 붙여진 한쪽 손을 떠받들고 살살 쓸어내는 손길이 너무도 좋아 정신을 멍하니 놓아 버렸다.
“윤 실장에게만 우리 사이 미리 이야기해 놨어. 아무래도 필요할 거 같아서.”
은호가 꼬박 하루 잠든 사이, 윤재도 휴가를 내고 머릿속을 다시 한번 재정비했다. 윤재의 머릿속 끄트머리에 배치되어 있던 은호는 시간이 되돌아온 뒤로 어느새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각인을 하고 난 뒤 가장 우려되는 건 은호의 마음도 그렇지만 최서령이었다. 서령에게만큼은 일정 기간 은호를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감추려면 가까이서 은호를 지켜보며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인물은 윤 실장이 유일했다.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큰아버지께서 곧 돌아가실 거 같아.”
은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의사가 선고했던 시간보다 훨씬 오래 버텼지만, 최 회장의 목숨이 목전에 다다랐다는 걸 누구나 알 만큼 그의 상태는 위중했다. 덕분에 윤재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 꼼짝없이 불려 갔다.
“다음 주총에서 사명을 바꿀 거야. 지금도 유성그룹과 분리되어 있지만, 큰아버지 돌아가시면 완전히 갈라설 준비를 하고 있어.”
사명을 변경한다는 말에 몽롱했던 정신이 깨어났다. 윤재는 최 회장의 소망과는 달리 서령과 손을 잡지 않을 계획이었다. 서령이 늘 불청객 취급을 하며 윤재를 괴롭혀도 큰아버지인 최 회장 때문에 여태껏 버티고 참았다.
최 회장은 지분의 일부를 자신의 아들에게 넘겼지만, 작정하고 마음먹으면 윤재의 지분을 모두 빼앗을 수도 있었다. 윤재는 자신을 맹수가 어슬렁거리는 밀림 한가운데에 던져두고 홀로 싸워보라고 방치한 최 회장을 원망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에게 감사했다. 덕분에 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지금 그가 몸을 낮추고, 날이 선 최서령을 고분고분 넘기는 건 최 회장의 마지막 길을 최대한 예우해 주기 위해서였다.
은호는 윤재의 향후 계획을 듣고 혁필 선배를 떠올렸다. 사촌 간 경영 전쟁에서 외로운 싸움을 한다더니 사실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런 중요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는 걸까. 자못 궁금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집중하자, 잠시 공백을 만들며 뜸을 들이던 윤재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리가 끝나는 대로 지중해에 있는 카프리섬에서 은호 부모님만 모시고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데.”
꿈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잘못 들은 건가. 다시 한번 묻기 위해 입을 벙긋거리는 은호의 얼굴 위로 윤재의 따뜻한 손바닥이 닿았다.
“대략 석 달 정도 걸릴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잠든 사이에 계획한 거예요?”
은호는 손을 올려 아주 느릿하게 그의 볼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하루 동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한 거예요. 울렁이는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윤재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각인 후 정신이 또렷해지자 엉망이 된 은호가 눈에 들어왔다. 씻기면서 보니 곳곳에 생긴 울혈과 손자국이 어느새 멍처럼 물들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은호의 대처였다. 짐승처럼 군 자신의 몸에 손톱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이 밀려왔다.
“이렇게까지 너를 힘들게 만들 줄은 몰랐어.”
평소 러트가 돌아오면 처방을 받는다 해도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물며 혼자 열을 삭혔다. 짙게 흘러나온 페로몬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한 번 더 단속했다.
러트 기간에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은호가 그를 끌어안았을 때 은호를 가지고 싶어 희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통제 불가능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걱정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윤재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호가 희미한 웃음을 삼키다가 어디가 당기는지 복부를 움켜쥐었다.
“저도, 전무님이 이 정도로 조절 못 할 줄은 몰랐어요.”
은호는 콧등을 찡그리며 살짝 짓궂게 말했다.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처럼 윤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 농담도 못 하겠다.”
목은 여전히 부어 껄끄러웠으나 정신이 깨면서 컨디션이 돌아오고 있었다. 은호는 상체를 일으켜 윤재에게 팔을 내밀었다. 안아줘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몸을 걸치더니 빈틈없이 밀착해서 껴안는다. 그의 페로몬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실 때마다 여기저기 쑤시던 몸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시간을 정해 두지 말고, 원하는 것부터 천천히 진행하세요.”
“은호야.”
은호는 그가 그리는 큰 그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성정상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던 일일 텐데 어긋나서 무너지는 꼴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재무구조는 유성창투가 더 좋을지 몰라도, 유성그룹은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최서령의 동생인 최영재가 지닌 17%의 지분으로 그들은 윤재를 흔들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고 싸워야 할 텐데 각인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급하게 서두르다 일 그르치지 마시고요. 기다릴게요.”
윤재의 등을 붙잡은 손이 그의 옷감을 꾸깃거리다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감아 돌렸다.
“저, 기다리는 거 잘해요. 아시잖아요.”
“내가 못 참아서 안 돼. 그리고 파렴치한이 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고.”
그의 딱 부러지는 말에 은호의 둥그런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윤재는 은호의 등을 쓰다듬다 얇은 옷감 아래로 튀어나온 척추 선을 만지며 몸을 떼어냈다. 그러고 보니 하루 넘게 은호를 굶겼다.
“배고프지? 뭣 좀 먹을래?”
고개를 끄덕이는 은호의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먹은 거라고는 고작 물뿐이라 슬슬 허기가 졌다. 몸이 자꾸 기운 없이 늘어지는 것도 소모할 에너지원이 부족해서 나오는 현상일 테니, 먹고 기운 차려 그와 함께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열기를 느낀 촉촉한 입술이 빼꼼하게 벌어졌다. 입술 새를 가르고 들어온 습기 어린 혀가 숨어 있는 혀를 손쉽게 찾아내어 더듬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호는 밀려드는 숨결과 타액을 삼키며 아득한 착시를 경험했다. 설렐 만큼 좋았다. 그의 자그마한 터치 하나하나가 마음을 툭툭 건드릴 때마다 달라붙고 싶어 어쩔 줄 몰랐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손이 뒷머리를 받치자, 목덜미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윤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페로몬을 은호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윤재는 각인 이후 은호를 더욱 주의 깊게 관찰했다. 때로는 뭐든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평소 하지도 않던 요리를 해 주겠다며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아침저녁으로 연고를 발라 주었으며, 두 팔다리가 멀쩡함에도 자꾸 안고 다니려 했다. 은호는 이제 괜찮다며 딱 잘라 말해 윤재를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윤재는 주말 내내 가벼운 스킨십 외에는 철저히 금욕생활을 고수했다. 윤재는 탈진으로 쓰러지는 은호를 지켜본 이상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기 전까지는 참으려 했다. 고생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커 조심하겠다는 나름의 의지였는데, 은호 입장에서 은근히 심사가 뒤틀렸다.
가벼운 버드 키스만 남기고 떨어지려는 윤재에게 마음이 꽁해진 은호는 일부러 그의 뺨을 붙잡고 격렬하게 입술을 물었다. 조금 더 해도 되는데. 말끝을 흐리며 선을 넘을 수 있게 도와주고 나서야 야금야금 밀고 들어왔지만 윤재는 은호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은호와 진한 키스를 나눈 후 난감한지 샤워실 혹은 피트니스룸으로 들어가 달아오른 욕정을 해소하곤 했다.
평소의 컨디션으로 몸이 돌아온 은호는 아일랜드 조리대 앞에 서서 무얼 만들지 고민하는 윤재를 거실로 멀리 밀어 보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없는 주말 내내 집주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주방에 세워 두는 건 염치 없게 느껴졌다.
생선을 구울까. 생선은 은호도 별문제 없이 먹을 수 있고, 따로 양념을 하지 않아도 훌륭한 밥반찬이니 안성맞춤이었다. 냉장실과 냉동실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생선이 종류별로 있었다. 해동하기 어려운 냉동실 생선은 포기하고, 냉장실에 있던 삼치와 갈치로 선택했다.
“생선 구우려고?”
“네.”
윤 실장과 한참을 통화하던 윤재가 주방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에 스리슬쩍 다가왔다. 손질을 미리 해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열을 가하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조차 뭐가 그리 걱정되는지. 한참을 서서 미간을 좁히고 있던 윤재는 슬쩍 끼어들어 인덕션을 끄더니 오븐 그릴을 들고 왔다. 아차, 오븐에 구우면 되는걸. 은호가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서 있자, 그가 집게로 생선토막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기름 튀면 다쳐.”
곧 주방에서 빠질 테니 염려 말라며 그릴 위에 드문드문 생선토막을 올린 윤재는 온도와 시간까지 조절한 후 주방을 빠져나갔다.
미리 준비된 반찬 정중앙에 잘 구워진 생선을 올려놓으니 그럴싸한 저녁이 마련되었다. 통통한 몸통 부분 한 토막을 앞접시에 옮겨 담아 윤재에게 건네자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가늘게 펴졌다.
회사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은호는 유성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자제했다. 윤재가 들려준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고생을 꽤 했다는 것이 충분히 짐작되어, 은호는 더는 그의 과거를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은호가 다 먹은 그릇을 애벌 세척 하려 개수대 앞에 섰다. 뭘 많이 차리지도 않았는데 그릇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고무장갑을 꺼내는 은호를 붙잡아 돌려세운 건 윤재였다. 소화할 겸 내가 할 테니 쉬고 있으라는 말에 은호는 고무장갑을 내려두고 현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선선한 밤공기가 산책하기 적당한 온도였다. 담벼락 끄트머리에서 울어대는 풀벌레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기척에 위협을 느꼈는지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은호는 발걸음을 돌려 정원 가운데 있는 원목 벤치에 걸터앉았다. 영상통화를 누르고 한참을 기다리자 너무도 그리운 얼굴이 액정 화면 위로 떠올랐다.
“엄마.”
- 아이고 은호야, 이게 얼마 만이야.
새벽에 들어오는 식자재를 확인하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일어난 그녀는 이제 막 씻고 나온 건지 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이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깊게 팬 주름을 보니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수건으로 칭칭 머리를 감은 그녀가 은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은호는 모친의 눈물에 저도 눈물이 나려는 걸 애써 삼키고는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아버지랑 형들은 여전하지?”
- 그럼, 잘 지내지. 너는?
“나도 그럭저럭.”
은호는 각인하고 난 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현실 자각을 하면서부터 마음이 복잡해졌다. 러트를 너무 쉽게 생각했나, 이게 말로만 듣던 메리지 블루 비슷한 건가? 청소년기에서 어엿한 성인이 되었을 때, 혹은 부모님을 두고 홀로 한국 땅을 밟았을 때처럼 뭔지 모를 책임감이 양쪽 어깨 위에 무겁게 얹어진 것만 같았다.
은호는 윤재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같이 붙어 있는 내내 끊임없이 고민했다. 원인은 금방 찾았다. 자신은 과연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 연애와는 또 다른 문제인 결혼 이야기를 꺼내니 현실의 장벽 앞에 걱정부터 앞섰다.
혁필 선배의 말이 자꾸 은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최 전무는 받쳐 주는 사람이 없다, 재계 혼맥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세력 확장이 필요해서 그런 거다. 혁필 선배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윤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각인했다는 그의 고백에 마음 한쪽이 뭉클하게 달아올랐다. 애매한 연애 당시,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와 정말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살뜰하게 챙겨주는 그가 좋았고, 은호 역시도 외로운 그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었다.
- 이렇게라도 보니, 너무 좋구나.
은호의 얼굴을 꼼꼼히 확인한 그녀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각인 이후 걱정으로 가득 찬 은호와 달리 윤재는 막연한 두려움도 불안함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불안해하는 은호를 달래기 바빴다. 그의 말대로 올해 안에 부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엄마가 무척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 우리 엄마.”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함과 포근함, 그리고 그 이면에 들어 있는 막중한 책임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습하게 젖었다. 화면 안에 있는 그녀가 인자한 미소로 은호를 바라봤다.
- 회사에서 휴가 내고 한번 놀러 와, 몇 달 전에 온다더니 매번 영상통화로만 하고.
“올 크리스마스 전에 꼭 가보도록 노력할게.”
크리스마스면 앞으로 반년 정도니, 그때쯤 되면 윤재가 한 약속 중 일부는 정리되어 있지 않을까. 은호는 그가 제시한 3개월보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을 내다보았다. 가까이서 늘 이만큼의 애정만 나눠 준다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었다.
-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엄마.”
은호의 애절한 부름에 그녀의 눈주름이 깊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은 것처럼,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은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랑해요.”
- 나도 사랑한다. 우리 은호.
감정을 오롯하게 담은 말 한마디에 그녀의 눈가도 다시금 촉촉해졌다. 화면이 종료되고도 한참 동안 액정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며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건지 머그잔을 든 윤재가 가까이 다가왔다.
“부모님께 전화 드리는 거면 나도 좀 끼워주지. 인사드릴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었는데.”
윤재는 아쉬워하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 커피도 아니고 따뜻한 우유라니. 피식 콧바람을 흘린 은호는 뜨거운 우유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중에 함께 찾아가서 크게 놀라게 하면 되는데요.”
입술 위로 하얗게 우유 거품이 묻었는지 벤치에 컵을 잠시 내려놓은 그가 은호의 턱을 붙잡더니 상체를 쑥 내밀어 윗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말랑한 살덩이가 닿았다 떨어지자 은호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아직도 불안해?”
“……약간요.”
하나로 연결된 온전한 짝이라는 사실이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윤재의 계획대로 상황이 돌아가기 전까지 회사에 둘의 연애를 함구하기로 했기에, 아무래도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이삿짐은 내일 옮겨 놓을 테니 정리는 천천히 하고, 기존 오피스텔이 빠질 때까지 비용에 관련된 건 내가 전부 처리할게.”
옆자리에 걸터앉은 윤재가 내려둔 머그잔을 다시 들어 천천히 식어가는 우유를 한 모금 삼켰다. 은호는 손을 뻗어 윤재의 허벅지를 꾹꾹 눌렀다. 근육으로 다져진 몸이라 눌러도 잘 들어가지 않을 만큼 허벅지가 단단했다. 윤재의 미소 띤 눈길이 허벅지 위에 있는 손가락에서 은호의 얼굴로 옮겨갔다.
“저 월급 받잖아요. 충분하니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러면 제가 곤란해요.”
“…….”
“부탁할게요.”
허벅지를 곱게 쓸어내리던 은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엔 부끄러움을 한가득 담은 애교 섞인 톤으로 바뀌어 윤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은호는 목요일 오후부터 놓친 스케줄을 처리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 민첩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주말 틈틈이 밀렸던 보고서를 처리해 올렸음에도 또다시 들어온 자료가 수필 책 한 권 분량 정도로 쌓여 있었다. 이 말인즉슨, 윤재가 봐야 할 양은 이보다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은호에게 공개되는 서류 말고, 윤 실장을 통해 바로 윤재에게 전달되는 문서도 상당량이었으니.
월간 간부급 정례 회의는 실적 어닝 서프라이즈로 인해 여기저기서 화기애애한 함성이 쏟아졌다. 윤재와 한 대표가 작년부터 투자했던 곳들이 소위 말해 초대박을 쳐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투자 붐이 일고 있었다.
보통 스타트업 벤처 10곳을 투자해 3곳만 살아남아도 괜찮은 평가를 받는데 10곳 중 8곳이 성공한 데다 2곳은 조 단위인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 가능성을 점치는 상황이니, 외부에서는 유성창투가 투자한 곳만 뒤늦게 따라가도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은호는 재무팀에서 올라온 주주 변동 자료를 살피다 에이 세컨드라는 회사의 지분율이 최근 들어 부쩍 상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요즘 워낙 실적이 좋아 투자용으로 매입하는 건지는 몰라도 단기간에 대주주 라인에 들어와 있는 모습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해당 회사를 검색해 보아도 애매하게 포장된 회사 소개뿐,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휴대폰을 쥔 은호는 비서실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갔다.
“선배, 바빠요?”
- 무슨 일인데?
재무팀에서 조사한 회사 정보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아 은호는 혁필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해외 경제신문사와도 연이 닿아 있으니 재무팀보다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혹시 외국계 회사 정보 좀 알 수 있을까요?”
- …확인은 해 볼게. 근데 네가 못 찾는데 나라고 되겠어?
“그래도 한번 부탁드릴게요.”
시끄러운 바람 소리가 섞인 걸 보니 바깥인 것 같았다. 어디를 급하게 뛰어가는지 거칠어진 숨이 스피커 안으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 메시지로 보내놔, 나 지금 취재 가야 해서.
“그럴게요. 고마워요, 선배.”
통화 종료를 누르고 생각 없이 목덜미를 긁적이던 은호의 움직임이 점차 느릿해졌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페로몬 샘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각인 때문일까. 은호는 남들이 볼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미소 지었다. 하나의 끈으로 연결 된 만큼, 은호는 그의 편에 서서 도움이 될 만한 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윤재의 외부 미팅을 핑계로 오후 시간을 통째로 뺀 은호는 오피스텔로 가 옮겨지는 이삿짐을 확인했다. 빌트인 오피스텔이라 큼직한 살림살이라고는 침대와 소파, 그리고 식탁이 전부였다. 다행히 이사 갈 곳도 가전제품이 모두 빌트인이라 추가로 구매해서 넣을 건 없었다.
운 좋게도 이삿날 내놓은 집을 보고 싶다는 세입자가 나타났는데, 딱 원하던 옵션이라며 당장 계약을 원해 이번 달 월세와 복비만 추가로 내는 조건으로 은호는 쉽게 이사를 마무리했다.
윤재는 예정된 미팅 때문에 이사를 챙겨 주지 못하는 미안함에 사설 경호원을 붙여 주었다. 은호는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그가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강경하게 고집해 은호는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왜 이리 빨리 끝났지? 원래 이렇게 빠른 건가?”
- 짐이 얼마 없잖아요.
차량 디스플레이에 있는 시계는 이제 막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3시간 만에 이사가 가능하던가.’
윤재는 깜빡이를 켜고 운전대를 매끄럽게 돌리며 옆 차선으로 들어갔다. 그는 첫 번째 미팅을 마치고 두 번째 미팅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매고 있던 애시 그레이 색 타이를 잡아당겨 뺀 후 조수석 쇼핑백에 대충 집어넣었다. 1시 미팅은 엄숙함이 요구되는 자리라 단정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지만 3시 반 미팅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정리해.”
- 아뇨. 회사로 돌아가려고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요.
회사로 돌아간다는 말에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외근 후 퇴근한다고 말해 놨는데, 왜?”
- 밀린 업무가 많아서요. 그럼 회사로 복귀하겠습니다!
“알았어요.”
은호는 마냥 쉬는 게 내키지 않는지, 단호하게 잘라내며 회사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말투는 장난기 가득, 활기차게 쏘아대 윤재의 입술 끝이 기분 좋게 올라갔다.
통화를 종료한 윤재는 시원하게 트인 눈매로 한 블록 앞의 신호와 앞차의 속도를 확인하며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신호를 대기하며 손끝으로 눈썹 뼈를 문지르던 윤재는 곧 도착할 투자처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검토했던 투자처이자, 투자 회사 사이에서 굉장히 핫한 제약회사였다. 이미 총괄 투자본부 내에서도 여러 번 보고서가 올라온 투자처이기도 했다.
윤재는 제약회사를 투자처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나, 간혹 대표의 마인드와 연구 결과가 확실하다고 판단이 들 경우에는 예외를 두고 거침없이 투자를 집행했다.
지금 윤재가 확인하려는 한성제약은 암세포를 선택적 감염 및 사멸 시키고, 면역 기능을 활성화시켜 암세포를 조직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유전자 재조합 치료제를 개발 중인 제약회사였다.
이곳은 최근 신약 물질 다섯 가지를 확보했으며, 폐암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어 최근 면역 항암 치료제 임상 3상 중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임상 3상 성공을 예측한다면 과감히 투자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리포트를 꼼꼼하게 읽어 본 윤재는 전문 분야가 아닌 데에서 오는 막연함에, 대기업 제약회사 수석 연구원인 동기를 찾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하나씩 체크하며 물었다.
동기는 해당 제약회사에 대해 회의적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연구 결과가 고전의 흔적 없이 완벽한 게 일차적으로 수상쩍었고, 표적 치료 수치가 통상 연구 결과보다 월등히 높다고 했다.
냉정하게 따진다면, 연구 결과가 부풀려졌거나, 거짓일 확률이 높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자면 확실한 거 같기도 하다며 아리송한 답변을 주었다. 하지만 대화의 마지막 말이 윤재의 흔들리는 판단력을 잡아 주었다. 날고 긴다는 대기업조차 현재 복제약을 만드는데, 신약이 정말 개발되었다면 실로 혁신이라는 냉소적인 답변에 윤재는 조금 더 확인해 보겠다며 통화를 마쳤다.
윤재는 한성제약 대표를 직접 만나 3상 중간 결과와 연구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저 멀리 제약회사 빌딩이 보이자 마른 입술을 안쪽으로 집어넣으며 액셀을 밟았다.
1층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물 출입구로 들어서자, 예상 시간보다 일찍 마중 나온 김 대표가 윤재에게 환한 미소를 보이며 검색대를 통과해 가까이 다가왔다. 두 손으로 윤재의 손을 꼭 붙들고 격하게 흔드는 그는 주변 직원들의 흘끔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했다.
“어서 오세요. 최 전무님.”
“안녕하세요. 김 대표님.”
그의 눈빛은 사람의 생명을 중시하며 연구에 매진하는 제약회사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회사 브랜드 가치를 좋은 가격에 팔기 위해 홍보하는 영업맨에 가까웠다.
“요즘 유성창투 소문이 자자하던데. 투자만 하면 족집게처럼 상장기업 만든다고 말이지요.”
“과찬이십니다.”
“유성창투라면 간택당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돌던데 알고 계시는지요.”
대화의 뉘앙스에서 자신의 회사에 투자를 해 줬으면 하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윤재는 그의 입담에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다. 투자 계약서를 쓰려고 온 게 아니라 설명을 듣고 싶어 왔건만 김 대표는 이미 배수진을 치고 윤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최근 최서령 부사장님께서도 투자를 하셨는데, 최 전무님까지 직접 나서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 치 혀를 놀리는 입에 최서령의 이름이 오르자 윤재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유성그룹의 재무제표가 엉망인데도 개선할 방법을 찾지 않고 자꾸 의도가 불분명한 곳에 투자를 하는 모습이 썩 달갑지 않았다.
검색대를 통과한 뒤 빠르게 걸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김 대표는 단정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윤재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말씀드리기에 앞서 양해를 구하자면… 한 분이 더 오시는데 괜찮을는지요.”
윤재의 시야에 난입한 그의 눈동자가 이해를 바라고 있었다. 요즘 기관 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까지 폭을 넓혀 영업하는 그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그를 이리도 급하게 만드는 걸까.
“서인건설 강태오 상무라고, 투자 때문에 오시는데 아시다시피 제가 요즘 투자 미팅으로 시간이 부족해서요.”
서인건설 강태오라는 말에 대리석을 울리던 구두 마찰 소리가 멈추었다. 강태오라면 은호의 장례식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던 미스터리한 인물이 아니던가. 은호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나 접점을 알 수 없으며, 상대는 윤재를 알지만 윤재에겐 일면식조차 없는 남자. 윤재는 눈매를 호선으로 그리며 기분 좋게 수긍했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는데 우연치 않은 기회로 연결되니, 윤재는 투자보다 강태오에게 마음이 기울어 버렸다. 사실 김 대표의 첫인상에서 불합격을 날렸기에 다소 지루할 뻔했던 자리가 강태오의 등장으로 흥미롭게 흘러갈 거란 기대가 생겼다.
집무실로 먼저 들어온 윤재는 김 대표와 가까이 있는 소파에 앉아 비서가 건네주는 차를 들었다. 김 대표는 요즘 물밀듯이 들이치는 투자 물결에 둥그스름한 광대가 내려오질 않고 둥둥 떠 있었다. 연구 결과를 자랑하던 중 비서의 노크와 함께 그가 들어왔다.
“마침 오셨네요.”
김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가자, 윤재도 덩달아 일어났다. 다부진 키와 체격은 윤재와 얼추 비슷했으나 둥그스름한 얼굴 윤곽과 그에 어울리는 댄디컷은 나이에 비해 꽤 어려 보이는 인상을 만들었다. 쌍꺼풀은 없지만 눈매의 폭이 길어 시원스럽게 생긴 외모였다.
“안녕하세요. 강 상무님.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유성창투 최 전무님이십니다.”
김 대표의 대화 내용을 비추어 볼 때, 상대는 윤재가 이곳에 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강태오는 입고 있는 재킷 아랫단을 손으로 눌러 펴더니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강태오라고 합니다.”
“최윤재입니다. 반갑습니다.”
맞붙은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탐색전을 펼치는 건 비단 윤재만은 아니었다. 여유 있는 척, 느긋하게 구는 태오는 윤재의 날카로운 눈빛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파장이 다른 두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조화롭게 섞이지 않고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자,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느낀 김 대표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문서를 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임상시험 계획서와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대해 보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 대표는 각종 논문 발표 자료와 공동임상 시험 결과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표적 치료 결괏값을 A4용지 다섯 장 가득 도표로 보여 주었다. 연구소 연구진과 임상시험 기록에 관한 영상까지, 보고가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의 시선 교차가 리포트를 보는 횟수만큼 많았다는 걸 김 대표는 모르는 눈치였다.
설명의 마무리 단계에 진입할 즈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을 연 비서가 난처한 표정으로 김 대표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대표님, 한세 투자증권 대표님께서 연락을 주셨는데요. 좀 급한 건이라면서 가능하면 지금 연락을 달라셔서…….”
흐뭇하게 미소 짓던 그가 윤재와 태오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우리 회사가 이 정도로 유명하다는 듯 자신감에 한껏 물이 올랐다.
“요즘 하도 연락이 많아 미팅 때는 휴대폰을 꺼 놓는데… 허허… 죄송합니다만 10분 정도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는 여기저기서 투자를 하겠다는 요청에 당장이라도 행복의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함지박 같은 웃음을 지으며 집무을 빠져나가는 김 대표의 뒷모습이 꽤나 희극적이었다.
김 대표가 나가자 집무실은 싸늘한 적막만 감돌았다.
윤재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 놓인 연구 결과 리포트에, 조금 더 범위를 넓혀 기다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있는 맞은편 리포트에, 그리고 종내에는 다리를 꼬고 있는 강태오에게 서서히 도달했다.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페로몬이 집무실을 꽉 채우며 혼탁하게 만들었다가 무언의 합의라도 한 듯 갈무리되었다.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아닌 척 굴던 태오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키며 인상을 살짝 구겼다. 다 식어 빠진 녹차는 밍밍하니 영 취향이 아닌 듯했다. 차분히 그의 눈매를 주시하던 윤재는 적막을 깨는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 입매를 냉랭하게 굳혔다.
“그때보다 투자가 많이 바뀌었네요.”
투자가 바뀌었다라……. 그게 무슨 뜻인가.
그리고 그때는 언제를 말하는 걸까.
윤재는 강태오가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은호의 말을 상기하고 강렬한 불쾌함을 느끼며 눈살을 퍽 찌푸렸다.
“마치… 미리 알고 잘될 것만 고르는 것처럼.”
그의 마지막 말에 혈관 속에서 흐르던 피가 차갑게 식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강태오는 느긋하게 웃고 있었지만, 확인을 요구하는 차갑고 예리한 눈매는 윤재의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덫을 놓고 윤재를 자극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페로몬을 갈무리한 윤재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태오를 직시했다. 고민 없이 방향을 정한 시선에는 낯선 자에 대한 경계 외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팽팽히 당겨진 실이 뚝 끊어져 버린 것처럼 긴장된 공기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흔들리지 않는 윤재의 간단명료한 답에 눈 한번 깜빡이지 않던 태오가 허탈한 숨을 내뱉다 다시 윤재를 반듯하게 쳐다봤다. 페로몬을 갈무리했음에도, 윤재에게서 파생되어 흘러나온 기가 주변 공기의 파장까지 뒤흔들어 놓으며 태오를 압박했다.
“아, 그런가요?”
태오는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리고 눈썹을 도드라지게 올릴 뿐,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윤재는 불쾌감 서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지만 시선은 계속해서 태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태오는 윤재의 표정을 읽으며 난감한 듯,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미안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윤재는 복잡한 사고를 전부 멈췄다.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모든 걸 들킬 것만 같았다. 무슨 의도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묻는 건지는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주의를 요하는 인물임이 틀림없다는 사실이었다. 태오가 사과를 하자 윤재는 일자로 다문 입매를 부드럽게 풀었다. 날을 세우고 있어 봤자 득이 될 게 없음을 간파했다.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자 화제를 돌리려는지 태오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린 그는 좀 전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투로 대화를 유도했다.
“투자 고민하러 오신 거 같은데 최 전무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무님의 혜안을 참고하고 싶어서요.”
태오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윤재는 혀로 볼 안쪽 살을 느릿하게 굴리며 시선을 고정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도 당황스럽지만 이 또한 자신을 테스트하려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 있는 터라 썩 달갑지는 않았다. 대화의 텀이 한참 길어지려는 찰나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낸 윤재가 테이블 가까이 상체를 붙였다.
“투자하시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글쎄요. 저는 마음을 굳히기 위해 왔습니다.”
“좋은 결론은 아니군요.”
“혹, 큰 기회를 놓치는 거라면 제 안목이 거기까지란 소리니까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솔직 담백하게 답을 했지만 조용히 침묵하는 걸 보니 태오는 투자하는 쪽에 마음이 많이 기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윤재에게 투자를 포기하는 이유를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접견실 문이 열리며 김 대표가 들어왔다. 태오는 윤재만 알아들을 만큼 목소리를 작게 낮췄다.
“참고하겠습니다.”
윤재 때문에 투자할 마음이 식어 버린 건지, 연구 결과 자료를 훑어보는 태도가 처음보다 많이 느슨해졌다. 한 시간이 넘는 미팅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이렇다 할 긍정적 투자 뉘앙스가 없자 불안해진 김 대표는 설득과 회유에 나섰다.
마음을 굳힌 윤재는 비즈니스 미소를 유지하며 좀 더 고민하겠다는 입장만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태오도 검토 후 알려 주겠다며 연구 결과 리포트를 손에 쥐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 나온 김 대표는 아쉬움을 드러내며, 나중에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압박까지 가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비즈니스로 원해서 만난 만남도 아니었기에 특별히 할 말이 없었지만 윤재는 강태오라는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회귀 사실을 아는 것처럼 질문했다. 그 말을 역으로 해석해 보면 태오도 마찬가지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윤재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며 말없이 전자 모니터를 보고 있는 태오에게 건넸다.
“시간이 될 때, 다시 만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최 전무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환영의 의미가 단순 투자 때문인지, 아니면 윤재가 예상하는 뜻밖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러는지 불투명했다. 강태오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곧바로 윤재에게 건넸다.
“그럼 연락 드리겠습니다.”
주차 위치가 달라 로비에서 먼저 내린 윤재는 가벼운 고갯짓을 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때보다 투자가 많이 바뀌었네요.”
“마치… 미리 알고 잘될 것만 고르는 것처럼.”
그가 했던 말들을 몇 번씩 되새김질해 봐도 그는 윤재가 짐작하는 것처럼 회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번째 대화가 나올 리 없었다.
‘만약 그 또한 회귀한 자라면, 그는 내가 회귀한 걸 어떻게 안 걸까?’
강태오가 투자에 관심이 많아 윤재를 주시하고 있었다기엔 윤재가 그를 너무도 모른다. 되돌아오기 전, 강태오가 윤재를 스토커처럼 면밀히 주시했다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랄까.
그렇다면 은호의 장례식은 어찌 온 걸까?
혹시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 두 사람이 비공개 연인 관계였던 걸까. 하지만 당시 윤 실장이나 한 비서를 통해 은호가 현준에게만 목매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태오가 일방적으로 은호에게 관심이 있었더라면, 시간이 다시 돌아왔을 때 태오가 은호에게 꾸준히 대시를 하거나 혹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어야 할 텐데, 은호는 그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스토커인가? 스토커라면 누구의 스토커란 말인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미궁으로 빠져 사고 전체가 흔들렸다. 윤재는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빗질하며 생각을 잠시 접었다. 문득 은호가 보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은호를 떠올린 순간 너무도 보고 싶은 나머지, 이미 회사 쪽으로 운전대 방향을 틀고 있었다.
차량 디스플레이에 휴대폰을 동기화한 후 주소록에서 은호를 찾아 눌렀다. 다섯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은 목소리가 작았다. 빠르게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지 출입문 열림 소리가 들려 윤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퇴근 시간 다 되어 가는데, 퇴근 안 하고 뭐 할까?”
- 하고 있는 거 마저 처리하려고요.
“얼마나 걸리지?”
- 한 30분 정도요.
“그럼… 아래서 기다릴게.”
말로는 기다린다고 했지만 윤재는 당장이라도 비서실로 올라가 은호를 낚아채고 싶었다. 두 블록 앞 신호에서 유턴을 계획하는데 은호가 제동을 걸었다.
- 잠시만요.
“응?”
- 오피스텔에서 봬요. 그게 좋겠어요.
각인 이후 더욱 조심스러워진 은호는 회사에서는 사적인 느낌을 최대한 없애고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선을 명확히 그었다. 윤재는 아쉽지만 은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
생각해 보니 오피스텔을 공실로 비워둔 지 7개월째였다. 가전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하나하나 체크해야 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은호에게 비밀번호를 받은 윤재는 집으로 들어가 현관에서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스위치를 눌러 등의 상태를 체크했다. 다행히 한 비서가 사용하던 당시, 소모품을 몇 번 교체했는지 고장이 나거나 상태가 불량인 건 없었다. 다만 TV를 자주 보는 은호를 위해 와이드 스크린으로 바꿔주고 싶어 윤재는 휴대폰을 꺼내 간단히 메모하고 근처 소파에 앉았다. 포장 이사라더니 생각보다 정리가 잘되어 있어 놀라웠다.
“도대체 뭘까…….”
한숨을 돌리자 또다시 강태오가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회귀는 그렇다 쳐도 강태오라는 사람이 자신과 은호를 잘 알고 있단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질거리는 명함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던 윤재의 눈이 일순간 크게 확장되었다.
“아!”
회귀 전에는 지금과 다르게 주주명부에 대주주로 건설사가 올라와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건설사는 서인건설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이메일에서 윤 실장에게 받은 주주명부를 확인하니 이번에는 서인건설이 빠진 대신 에이 세컨드라는 외국계 회사가 들어와 있었다.
단순 투자인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슨 연유로 서인건설이 주식 매입을 하지 않은 거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윤재는 서둘러 통화 목록을 뒤졌다.
- 네, 전무님.
“윤 실장, 미안한데 혹시 서인건설 강태오 상무에 대해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투자하는 곳, 자주 만나거나 친밀 관계에 있는 파트너사, 그리고 그의 부친까지 가능하면 전부 다.”
- 서인건설 비서실에 아는 후배가 있긴 한데, 확인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
“응, 고마워.”
강태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 뭔가 놓치고 있던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며 농도 짙은 한숨을 몰아쉬는데 그의 뒤로 현관 쪽에서 도어 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윤재는 본능이 좇는 대로 급하게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
문을 열며 해맑게 웃던 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짐승처럼 달려들어 으스러지게 꼭 껴안자 은호는 영문도 모른 채 구두도 벗지 못하고 현관 앞에 가만히 멈춰 섰다.
“전무님?”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허공에서 방황하던 은호의 두 손이 윤재의 마지막 말에 방향을 찾아 그의 등허리를 감쌌다. 미팅 자리에서 안 좋은 일이 있던 걸까? 윤재의 페로몬이 평소와는 다르게 불안정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현관 등 센서가 꺼졌다 켜지길 세 번쯤 반복했을 때 정신을 차린 윤재가 은호를 데리고 거실로 왔다.
그가 소파에 은호를 앉히고 바닥으로 내려가자 은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위로 올라와요.”
“마주 보고 싶어서 그래.”
윤재는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려는 은호에게 미소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은호의 앞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은호야,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강태오 상무에 대해 이야기해 줬었잖아.”
“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은호는 뜬금없이 이건 왜 묻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윤재의 표정과 페로몬이 너무 불안정해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기억나시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한 대표님 심부름으로 비공개 경매에 갔었잖아요.”
“응, 기억해.”
“그때 최서령 부사장님을 뵈었어요. 약간 불편한 자리였는데 그분이 절 빼내 주시더라고요.”
최서령에게서 떼어 냈다라. 윤재의 표정이 굳어지다 못해 심각해졌다. 은호는 윤재가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 없어 덩달아 불안해졌다.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그날 분명 처음 본 얼굴이었거든요. 근데 강 상무님은 절 아시더라고요. 회사며 담당 상관까지도요.”
윤재는 은호의 대답에 다시 한번 강태오의 회귀를 확신했다. 다만, 그가 누구를 초점에 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인건설이 유성창투 대주주에 속했던 걸 보면 정황상 자신이 표적인 게 분명한데, 은호의 장례식에 온 걸 보면 그게 또 아니었다.
“정말, 그날 처음 보는 거였어?”
“네, 저를 잘 알고 있으니 신기해서 여쭤봤는데, 제가 다녔던 전 회사 전무님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삼정물산… 서인건설. 아…….”
은호가 다녔던 전 직장이 건설사였으니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은호와의 최초 접점은 찾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강태오는 존재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은호가 강태오를 만난 적 있다면 그를 분명 기억했을 것이다.
“그때 보좌했던 전무님이 미팅이 워낙 많으셨어요. 미팅에 오셨던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그럼, 강태오 상무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 거지?”
“네, 그렇죠.”
은호도 결국 자신처럼 강태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어떻게 두 사람은 감쪽같이 모르는데 상대는 자세히 알 수 있는 걸까. 그의 신경이 계속 다른 데 가 있자 은호가 손을 뻗어 윤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근데… 강태오 상무님은 왜?”
“그게… 오늘 미팅 자리에서 만났거든.”
“아…….”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거 같은데 뭐라 물어봐야 하나. 은호는 상체를 숙여 윤재와 눈높이를 맞췄다.
“혹시 그분이 무례하게 굴던가요?”
“음… 비슷하지만 설명하기가 어렵네.”
무례하게 굴었나 보네. 얼마나 이상한 말을 꺼냈으면 그러려나. 은호는 윤재의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이유를 대충 알겠다는 듯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등을 토닥였다.
“근데, 저녁 드셨어요?”
“아… 뭐 사 줄까?”
이럴 줄 알았다며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은호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을 열었다. 위치 설정을 체크 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자 윤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삿날에 따로 먹는 음식이 있다는 거 모르시죠?”
“……?”
“중국집이에요.”
은호는 근처 중국집 중에 별점이 가장 높은 곳을 택해 윤재에게 보여줬다. 뒤늦게 아차 하고 뱉은 탄성이 그답지 않게 애교 넘쳤다. 메뉴를 고르라며 휴대폰을 건네 보지만 그는 알아서 고르라며 뒤로 빠졌다. 그 모습에 은호의 한쪽 눈꼬리가 휘어지게 올라갔다.
“혹시 안 드시는 건 아니죠?”
“나도 사람이라 그랬잖아.”
“그럼 시킬게요.”
왜 이렇게 별종 취급하는지 모르겠다고 윤재가 툴툴거리고 나서야 은호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호는 간짜장 두 그릇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거실 바닥에 앉아 은호를 그윽하게 올려다보던 윤재는 흐뭇하게 미소 짓다가도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는 강태오 때문에 표정을 굳히길 반복했다.
평소 은호보다 늦게 잠이 들고 일찍 일어나던 윤재가 오늘은 먼저 잠들었다. 새벽녘 목이 말라 눈을 뜬 은호는 뜨끈하게 자신을 달구고 있는 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벗어나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 나갔다.
많이 피곤한가.
물을 마시고 자리로 돌아온 은호는 머리맡에 앉아 윤재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이마와 뺨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져 위로 올려 주었다. 평소 그는 은호가 이마와 뺨을 만져 주면 잠결에 손을 뻗어 은호의 손등을 조몰락거리거나 입을 맞추곤 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전원이 나가 버린 것처럼 정신없이 잠에 취했다.
그의 진하지 않은 쌍꺼풀은 평소에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다가도 일이 고되거나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할 때면 속 쌍꺼풀처럼 안으로 쑥 들어가 그의 인상을 날렵하고 매섭게 만들었다. 요즘 윤재는 과도한 업무량으로 겉 쌍꺼풀이 속 쌍꺼풀이 되어 눈매가 짙고도 깊어졌다.
은호는 이불을 걷어 하체를 밀어 넣은 후 옆으로 누워 있는 윤재의 품으로 살며시 몸을 붙였다. 매트리스가 출렁이자 무의식중에 팔을 뻗은 윤재가 은호를 품 안으로 당겼다. 살짝 눈을 뜬 윤재는 잠에 여전히 취한 상태였다.
“어디… 가지 마.”
작게 웅얼거리더니 다시 말이 없어졌다. 따끈한 가슴팍에서 규칙적인 맥이 잔잔하게 울렸다.
은호는 이사했으니 이불을 빨아야 한다고 침대에 올라오는 윤재를 두 번이나 말렸지만 그는 이불이 더러워도 상관없다며 그대로 누워 버렸다. 5분 떨어진 거리에 그의 집이 있었다. 좋은 잠자리를 놔두고 왜 그럴까 하다가도,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그가 하고픈 대로 내버려 두고 싶어졌다.
혼자 잘 때는 널찍한 크기이지만 둘이 자기에는 살짝 좁은 침대였다. 다행히 두 사람이 모두 몸을 움직이는 잠버릇도 없는 데다 끌어안고 자느라 공간이 아주 부족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테니 분명 어깨가 저리고 아플 텐데도 그는 은호를 껴안아야 몸이 충전되는 것처럼 잠시만 뒤척여도 팔을 다시 고쳐 안았다.
은호가 자고 일어났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봐선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은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터덜터덜 거실로 나갔다. 거실이 조용해서 그가 집으로 돌아간 건가 싶었지만,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윤재는 욕실에 있는 듯했다.
“먹을 게 하나도 없네…….”
평소 집에서 잘 챙겨 먹지 않아 식자재가 제대로 갖춰져 있을 턱이 없었다. 우유를 사 놓으면 늘 유통 기한을 넘겨, 멸균 우유로 바꾼 지 오래였다. 어차피 옷을 갈아입기 위해 윤재는 자신의 집으로 가야 하니 아침은 거기서 먹겠지만, 은호는 괜히 마음에 걸렸다.
‘우유라도 줘야 하나.’
멸균 우유 한 팩을 들고 냉장고에 넣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문이 열리고 수건으로 허리를 감은 윤재와 눈이 마주쳤다.
“…….”
은호는 얼굴이 불이 난 것처럼 화르르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벌어진 가슴팍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모습이 관능적인 데다, 퇴폐미까지 불러일으켜 은호의 숨은 욕정을 들끓게 했다.
“드…, 드실래요?”
은호가 들고 있던 우유 팩을 그에게 쓱 내밀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가까이 다가온 윤재는 우유 팩을 받아 들다 말고 은호를 살폈다. 그는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오른 은호를 보며 일부러 코앞까지 얼굴을 붙였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그… 그게…… 밖이 환하잖아요.”
밤에는 헐벗어도 어두우니까 괜찮지만 아침은 환해서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펼치며 고개를 휙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른 손이 은호의 목덜미와 뺨을 감싸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질척이는 타액 소리가 맞붙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야릇하게 울렸다.
“시간이 없는 게 아쉽네.”
은호는 제 뺨을 덮은 윤재의 손등에 손을 겹치고 눈을 마주했다. 오롯하게 한 사람만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질거렸다. 은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가벼운 눈웃음으로 답을 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아침 먹어요.”
5분 거리에 있는 윤재의 집으로 이동해 옷을 갈아입은 그는 어제보다 한결 컨디션이 나아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둘은 오늘 회의 전에 검토해야 할 서류를 확인했다.
윤재가 참석하는 회의에 대부분 따라 들어간 은호는 데이터를 수집해 회의록을 작성했다. 회사 창립 이래 최고 실적 갱신으로 고액 투자자의 투자 행렬이 이어져 관련 투자 상품을 연구하느라 상품전략 본부와의 회의가 일주일에 한 번으로 고정되었다.
은호는 투자 상품 기획서를 모두 수집해 윤재와 윤 실장에게 메일을 보낸 후 가장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회의할 때 내용을 놓치면 안 되기에 휴대폰을 무음, 무진동 처리를 해 놨더니 혁필 선배에게서 온 연락을 놓쳤다. 비서실로 돌아온 은호는 노트북을 데스크에 내려놓고 곧장 출입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선배, 미안해요. 회의하느라고 놓쳤어요.”
- 너 바쁜 거 아는데 뭐. 그나저나 별 소득이 없어. 관련 내용은 메일로 보내 놨으니 확인하고.
“고마워요. 선배.”
자리로 돌아온 은호는 개인 메일을 열어 혁필 선배가 보낸 자료를 검토했다.
“아, 뭐가 없네.”
대부분의 정보는 재무팀에서 조사한 자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추가된 내용은 에이 세컨드 대표인 이사벨라 브라운은 한국계 미국인이며, 나이는 58세, 그녀의 아들이 회사 임원으로 활동 중이라는 단서뿐이었다.
은호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정말 단순 투자인 건가, 단순 투자치고는 공격적으로 회사 주식을 사들이고 있는데.
윤 실장도 같은 이유로 에이 세컨드에 주식을 넘긴 주주에게 이것저것 확인했지만, 특이 사항을 포착하지 못해 조사를 중단했다. 뭐라도 나올 줄 알고 기대했던 은호도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조사를 멈춰야 했다.
윤재는 틈이 날 때마다 강태오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민했다. 친밀한 몇몇 측근에게 떠보듯이 강태오에 관해 물었지만 워낙 조용한 데다, 파티나 사교 모임조차 즐겨 하지 않아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윤 실장에게 추가 보고를 받아 봐야겠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투자가 목적인 건 확실해 보였다. 과거 유성창투 대주주에 서인건설이 속해 있던 거로 봐서는 투자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유성창투까지 범위가 확대된 게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었다. 그가 회귀 전 윤재가 투자했던 곳들과 회귀 후에 새롭게 투자한 곳을 전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더군다나 그가 과거에 서인건설의 이름으로 유성창투에 투자하기 위해 윤재의 정보를 알아본 것치고는 스토커처럼 너무 과도하다는 것과 당시 수행 비서도 아닌 일반 비서였던 은호를 잘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서인건설이 투자자 명단에서 빠졌다는 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지 궁금했다.
강태오가 윤재의 회귀를 확인하려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
윤재는 윤 실장에게 자료를 받는 대로 강태오를 다시 한번 만날 예정이었다.
퇴근하느라 운전대를 잡은 은호는 뒷좌석에 앉지 않고 조수석에 타는 윤재를 보며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렸다. 손가락으로 내비게이션을 톡톡 찍어 도착지를 설정한 윤재는 안전벨트를 매며 팔짱을 꼈다. 은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여기가 어디예요?”
“가 보면 알아.”
답을 알려 주려 하지 않길래 은호는 알겠다며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핸들을 돌리는 손길이 능숙했다. 코너를 돌며 지상으로 올라가자 길어진 저녁 해로 바깥이 대낮처럼 환했다.
위치로 보면 명품 숍이 즐비한 동네였지만, 가는 길엔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도 있었다. 레스토랑에 가려는 걸까? 음식점으로 목적지의 가닥을 잡았지만 도착해 보니 생각지도 못한 프라이빗 주얼리 숍이었다. 은호가 여길 왜 온 거냐며 손가락으로 주얼리 숍의 방향을 가리키자 잔잔하게 미소 짓던 윤재가 은호를 차에서 빼내었다.
“어서 오세요. 전무님.”
두 사람의 입장을 기다렸다는 듯 바깥이 훤히 비치던 통유리가 어두워지며 바깥 시선을 차단했다. 돔 형식의 홀 중앙으로 걸어가자 마중 나온 매니저가 반갑게 웃으며 둘을 맞이했다. 시간제 예약인지 둘 빼고는 손님이 없어 살짝 움츠러든 은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윤재에게 안기듯이 끌려갔다.
진열장 안에는 눈부신 귀금속이 스타일에 맞춰 눈에 띄도록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심플하고 모던한 스타일이 이 브랜드의 철학인지, 한 세트 한 세트마다 각각의 의미가 적혀 있었다.
“마음에 드는 거 골라 볼래? 아니면 원하는 디자인을 직접 설명해 줘도 돼. 그대로 제작 가능하니까.”
윤재는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는 은호에게 카탈로그를 보여 주었다. 마음에 드는지 근처 소파에 앉아 진중한 표정으로 한 페이지씩 넘긴다. 잘 모르니 알아서 골라 달라고 하면 어쩌나 고민한 것과 달리, 은호는 평소의 직업 정신이 튀어나왔는지 다이아의 크기와 색, 모양까지 확인하며 빠짐없이 체크했다.
책갈피가 있냐는 물음에 곁에 있던 직원이 여러 개를 챙겨서 가져다줬다. 은호는 마음에 드는 페이지마다 책갈피로 표시하며 뒤로 넘겼다. 그는 카탈로그 한 권을 다 보는 데 무려 30분이나 걸릴 만큼 집중했다. 반지를 맞추는 과정 자체가 처음인 은호는 무엇이든 대충 넘기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윤재와 함께하는 거라면 더더욱.
“근데 이거 맞춰도 바로는 못 끼잖아요.”
“세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
아, 세공 시간. 손끝으로 아랫입술을 누르며 끝까지 확인한 은호는 책갈피 책갈피를 끼워 둔 카탈로그를 들고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반지 디자인에 조금 더 얹거나 빼도 되나요?”
“물론이죠.”
은호는 마음에 드는 반지 하나를 고른 후 일부를 직접 종이에 그림으로 그려가며 원하는 디자인을 완성했다. 한 걸음 뒤에서 관조자 역할만 하던 윤재가 스리슬쩍 은호 뒤에 붙어 그가 그려 놓은 반지 그림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제법 그럴싸하게 원하는 포인트를 쏙쏙 그려 놓았다. 굵직한 바디감, 바깥쪽 둘레에 로마숫자로 음각 처리 한 각인 날짜, 그리고 앞에는 작은 다이아를 그려 놓았다.
“어때요? 별로면 그냥 카탈로그에서 고를까요?”
“난 너무 좋은데?”
의미 있는 반지 디자인에 윤재는 확실하게 반응했다. 칭찬을 받아 뿌듯함이 차오른 은호의 갈색 눈동자가 진열장의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솜씨 좋으신데요! 디자이너 하셔도 되겠어요.”
안내하던 매니저가 진심을 담아 환호를 보냈다. 매니저가 두 사람의 반지 사이즈를 확인하는 동안 은호는 그려둔 반지 그림을 사진으로 담았다. 뭐든 함께 하는 건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럼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제작은 한 달 정도 소요될 예정인데, 일정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사인과 결제를 마칠 즈음 입구까지 차를 옮겨 놓은 벨보이가 둘에게 다가왔다. 키를 받은 윤재는 가는 길 운전은 자신이 하겠다며 은호의 찰랑거리는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생각도 못 했는데.”
조수석에 은호를 먼저 태우고 운전석으로 돌아간 윤재는 시동 버튼을 누르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반듯한 얼굴을 살며시 감쌌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은호의 뺨에 입술을 붙인 윤재는 귓가를 간지럽히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서운한 거 있으면 그때그때 이야기해 줘. 내가 몰라서 놓치는 게 많을 거야.”
솜사탕처럼 달콤한 말투에 녹아들던 은호가 잘 다듬어진 눈썹을 가지런히 세우며 윤재를 올려다봤다.
“그런 거 없어요.”
보송보송한 뺨의 볼우물이 깊게 패었다. 늘 가까이에서 챙겨 주고 배려해 주는 것만으로도 은호는 마음이 쓰일 만큼 고맙고 행복했다.
“그냥… 같이 있어 주기만 해도 돼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동자도,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얼굴도 오로지 은호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처럼요.”
윤재는 은호의 뺨을 지그시 누르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겹쳤다. 두 사람의 호흡이 서로의 입 속으로 거침없이 빨려 들어갔다.
***
최 회장이 경영 승계 이후 자리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었지만 임종을 코앞에 둔 탓이었을까. 유성그룹은 회사 경영난과 더불어 침체된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회장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마음의 준비 하셔야겠네요.”
“그렇죠. 병중에 오래 계셔 보는 제가 다 안타까워요.”
부사장실 1인 소파에 앉아 있는 최서령은 맞은편에 있는 제인제약 김성호 이사와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부터 이어보지만, 침울한 회사의 분위기와 맞물려 지워지지 않는 긴장감이 둘 사이를 끊임없이 감돌았다. 최서령의 초대로 방문한 김성호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맞은편 빈자리를 흘끗거렸다.
“한 분은 늦으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곧 오실 겁니다.”
김성호의 불편한 반응에 초조해하던 최서령은 마침 노크를 하고 들어오는 강태오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환대했다.
“어서 오세요. 강 상무. 요즘 왜 이리 바쁘세요?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
“한량이잖아요. 아리따운 아가씨 만나느라 요즘 좀…….”
살갑게 말을 붙였지만, 최서령과 강태오는 지난번 비공개 경매 이후 첫 대면일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부모님 대에서 친분이 두터워 종종 재계 모임에서 인연을 쌓았던 정도이지, 따로 만나 술 한잔을 하거나 마음을 터놓는 사이는 아니었다. 인맥 과시를 하고픈 서령의 장단에 대충 뜻을 맞춰 준 태오는 겉으로는 유순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조소를 품었다.
“안녕하세요. 서인건설 강태오 입니다.”
“제인제약 김성호입니다.”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 앉아 있던 김성호는 가까이 다가와 먼저 손을 내미는 강태오 때문에 급하게 일어나 손을 잡았다. 이해관계로 모였지만 한데 섞이지 못하는 세 사람의 페로몬 파장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흠, 목청을 가다듬으며 이목을 집중시킨 서령은 곧장 본론으로 대화를 넘겼다.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회장님들끼리 오랜 세월 협력 관계에 계셨던 만큼 제가 두 분께 부탁을 드릴까 해서예요.”
태오 또한 서령의 부탁으로 이곳에 오게 된 참이었다. 요즘 유성그룹은 여러 악재로 인해 고립무원 상태였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서령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고 자리에 내려놓았다. 새하얀 피부에 대비가 강한 강렬한 붉은 립스틱은 그녀의 일자 눈매와 맞물려 표독스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회장님께서 회장직을 물러나신 이후 그룹사가 어려워진 게 사실이에요. 지금 리조트와 호텔 쪽 설비 투자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데 자금 흐름이 원만하지 않아요.”
사정이 어렵다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오래전 찬란했던 명성을 잊지 못해 그러는지, 아니면 여기서 더 무너지면 자존심의 나락이라 판단한 건지, 애써 도도하게 구는 그녀의 태도에 양옆에 앉은 두 남자의 표정이 아연했다.
“자금줄을 찾아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유성창투가 요즘 잘나가지요.”
서령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김성호 이사에게 고개를 돌리며 집중했다. 유성창투를 뒤집어엎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을 붙잡아야 하지만, 그중 김성호가 마스터키였다. 현재 서령은 에이 세컨드를 계속 컨택하고 있으나 답변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3분기 주총을 통해 다시 유성그룹으로 편입시키고, 최윤재 전무를 사임하려 하는데 김 이사님 힘이 필요해서 이 자리에 불렀습니다.”
“유성창투는 주인이 다른 회사이지 않습니까.”
편입과 사임이라는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김성호가 불만을 표출했다. 웬만한 기업 중 이 정도로 알짜인 곳이 없는 데다, 승승장구하는 곳을 제동을 걸려 하니 대주주 입장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서령의 검은 속내를 아는 김성호는 인상을 구기며 반기를 들었다. 자금 회전이 안 돼서 다 무너지게 생겼으니 유성창투를 지렛대 삼아 큰 자금을 끌어오거나, 유성창투 현금을 유성그룹에 흘러들도록 하려는 속셈에 기가 찼다. 서령은 대번에 정색하는 김성호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지만 꼭 필요한 사람이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대응했다.
“제 남동생이 최윤재 다음으로 2대 주주인 건 아시잖아요.”
“주주들도 그렇지만 최윤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김성호는 객관적 시선에서 최윤재 편을 들었다. 현재 최윤재는 리더로서의 전성기 시작이었다. 보통 불혹이나 지천명에서 시작되는 전성기를 윤재는 이른 나이에 이루었다. 추측하건대 그의 전성기는 꽤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두각을 드러내더니 이제는 전면으로 나와 포효하는 맹수가 되어 버렸다. 성호는 굳이 잘 달리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질주하는 말을 세우고 싶지 않았다.
“김성호 이사님이 가지고 계신 지분 4%에 확보하신 우호 지분까지 하면 10% 가까이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내 뒷조사를 하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저도 보는 눈과 귀가 있지 않겠습니까.”
날이 선 대화가 오고 가자 페로몬이 덩달아 출렁였다. 서령은 치미는 화를 꾹꾹 눌러 삼키며 찻잔을 들어 대화 사이 충분한 공백을 만들려 했지만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진정되지 않았다. 흥분한 표정을 다시금 지우고 냉정함을 되찾은 서령은 김성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 동생인 영재 지분 17%와 김성호 이사님을 포함한 우호지분 10%을 더하면 27%니, 그 이후는 쉽게 주주들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잘나가고 있는 회사를 굳이 건들고 싶지 않습니다만…. 자칫 같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위험한 도박 아닙니까? 뭐 그에 합당하는 베네핏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간교한 놈 같으니라고. 처음부터 조건을 먼저 물으면 될 걸, 강태오를 앞에 두고 찬물을 끼얹은 후에 조건을 묻다니. 서령은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숨을 고른 후 다리를 꼬고 시트에 등을 붙였다. 상대가 우위를 점하고 협상안까지 제시하는 마당에 구걸하듯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주총에서 과반을 확보해서 유성창투를 유성그룹에 다시 편입시킨다면, 유성창투 유상증자를 통해 현재 지분을 지금의 두 배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발행가는 현재 가치가 아닌, 최초 발행 금액으로요. 그렇다면 앉은 자리에서 수백 배 차익을 보겠지요.”
최초 발행 금액으로 지분을 늘려 주겠다는 말에 김성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성호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최윤재 전무를 밀어내는 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유성창투가 최 전무 때문에 이만큼 커진 건데, 주주들의 반발도 거셀뿐더러 저 또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최윤재는 살리되, 유성그룹 편입은 이 조건에서 동의하시는 건가요?”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 합쳐 27%면 절반을 더 모아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주주가 최 전무에게 얼마나 호의적인데요.”
김성호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게 넘어오지 않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서령만 애가 탔다. 강태오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의 대화 흐름이 끊기기를 기다렸다 차분히 치고 들어왔다.
“저는 이 자리에 왜 부르셨는지 모르겠네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태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자 서령이 작게 탄식을 하더니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강 상무님.”
“네.”
“저희 회사 리뉴얼 중인 피니스트 리조트를 아시지요. 건설 자금이 부족해 개발이 멈춰 있는데, 혹시 강 회장님께 도움을 받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강태오의 눈빛에 자잘한 미동조차 없었다. 공사 대금을 제대로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하다, 리뉴얼을 맡은 건설사도 피해를 입은 상황인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거길 들어오라니. 적막이 스친 후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떼어낸 태오가 시니컬한 웃음을 흘렸다.
“아시다시피 요즘 건설사가 불황이라서요.”
“완공된다면 건설 대금 대신, 객실의 30% 지분권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멀리 내다보면 더 이득일 겁니다.”
이득이라. 리조트 순위에서도 한참 밀린 곳의 30% 지분권을 받아 봤자, 공사 대금만큼 뽑아내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피니스트 리조트는 공실률이 높은 리조트 중의 하나였다. 입지 조건, 편의 시설, 가격 모두 엉망이라 기획부터 전반적으로 다시 확인해야 하는 곳을 어떤 계산법으로 실리 있다고 하는 건지, 태오는 기가 막혔다.
강태오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있을 만큼 편한 자리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와 이리도 똑같은지 우습기 그지없었다.
사고가 꽉 막힌 사람 같으니라고. 이런 자가 기업의 리더로 버티고 있으니 회사가 잘 돌아갈 리가 있나. 자리를 비우려는 태오의 행동에 서령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뒤에서 악담을 쏟아내건 말건 태오는 무시하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서령의 얼굴이 자못 궁금했지만, 그 때문에 눈을 마주치며 마음에도 없는 가식을 떨고 싶지 않았다.
***
콘퍼런스 콜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윤재 뒤로 윤 실장이 바짝 따라붙었다. 뭔가 감이 온 윤재는 손가락을 들어 집무실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전무님. 부탁하신 서인건설 강태오 상무 프로필입니다.”
하얀색 서류 봉투를 받자마자 내용을 확인하는 윤재의 미간이 좁혀진다. 정보가 많지 않아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알려준 상대가 같은 비서실 소속이라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코넬대 NBA 석사.
미국에서 비공개 결혼식 진행.
배우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음.
배우자 사이에 어린 딸이 있으나 뉴욕에 계신 그의 어머니가 양육 중임.
그의 어머니는 서인건설 강 회장의 본처이나 강태오를 낳은 후 성격 차이로 협의 이혼 후 이민.
술 즐겨 하지 않음.
특별한 취미 활동으로는 미술품 수집.
화가 미셸 산드라와 이준서 작품을 주로 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