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그날로부터 4개월 전
요즘 은호는 윤재의 선구안에 매일같이 감탄했다. 내기한 지 한 달이 지나갈 즈음부터 스튜디오 G에 대한 기사가 포털을 도배하더니 이젠 사람들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는 주제가 되어 버렸다. 장외 주식인 데다 IPO 공모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멀었지만 주가는 회사가 매입했던 가격보다 이미 3배 이상 치솟았다.
“스튜디오 G 기사 보셨어요? 오픈 베타 동시 접속자 수가 70만이 넘었대요.”
“70만? 이게 그렇게 재미있어?”
“요즘 이거 안 하는 애들이 없을 정도라던데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비서실 안으로 들어오는 직원들이 목소리가 한껏 고양되었다. 제법 큰 규모로 투자를 감행한 곳에서 연일 호재성 기사가 터지니 직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적의 파이가 클수록 연말 인센티브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우리 여기 지분 몇 프로지?”
“얼마더라. 아! 16.5%요.”
“B-gate 투자 안 하고 여기 하길 잘했네. 최 전무님 진짜 안목 하나는 기가 막혀.”
몇 달 전 윤재가 스튜디오 G에 투자할 때만 해도 모든 본부의 이사급 라인들은 그에게 무리수를 둔다고 열렬히 비난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윤재가 탁월한 선택을 했다며 동전 뒤집듯 쉽게 말을 바꾸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은호 입장에선 자신의 상사에 관한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콘퍼런스 콜을 마치고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윤재의 뒤로 은호가 따라붙었다. 그는 한껏 고무된 회사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꽤나 무덤덤해 보였다.
사람들이 모두 빠지고 엘리베이터에 둘만 남자 벽 한쪽에 붙어 있던 은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전무님.”
LED 화면을 바라보던 윤재가 몸을 돌려 은호와 눈을 맞추었다. 무슨 일이냐고 나른하게 미소 짓는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스튜디오 G 투자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결정적인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꽤나 진지하게 묻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윤재는 집무실로 따라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집무실로 들어가 접견 소파에 바로 앉은 그는 은호가 앉기를 기다리며 타이에 손가락을 넣어 느슨하게 풀었다.
“게임 산업은 유저의 반응이 최우선인데, 클로즈베타 때부터 각종 게임 마니아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가장 중요한 콘텐츠 퀄리티가 높았고 인터페이스, 비주얼, 타격감도 좋고.”
“직접 해 보신 건가요?”
“당연히. 데스크톱에 깔아 놨는데, 보여 줘요?”
그쪽으로는 문외한일 것처럼 보이는 그가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기업 탐방 조사 수준을 넘어 직접 체험해 보고 관련 커뮤니티를 드나든다니. 말단 직원도 아닌 리더가 이것저것 살뜰히 확인해 보고 결정지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고도 신기했다.
사실 기업의 대표들끼리 밀실 회의로 향후 자신의 회사 로드맵을 공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보통은 그것만으로 투자가 이뤄지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윤재는 뭐든 허투루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사실 회사가 스튜디오 G에 투자할 시점은 주식 가격이 이미 오른 상태였고, 제가 볼 땐 그 가격에선 메리트가 없어 보였거든요.”
“그때는 그런 분위기였지.”
“전무님 말대로 잘하면 열 배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일부러 져주는 게임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진짜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문득 그가 내기에서 이겼을 때 무엇을 말할지 궁금해졌다.
“누가 이기든 간에 약속 지키는 거예요.”
“네.”
다시 한번 강조하는 걸 보니 소원의 주제가 가벼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퇴사하라는 말만 아니면 못 들어줄 게 뭐 있어.’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윤재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는 키폰을 들어 윤 실장을 호출했다. 이맘때쯤 B-gate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거로 기억하는데 선택을 달리해서 그런지 그쪽 소식이 요원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윤 실장이 윤재에게 다가왔다.
“B-gate 분위기는 어때요?”
“특별히 이렇다 할 진척 상황은 없습니다만, 저희가 투자 철회할 때 제이인베스트에서 투자 들어간다고 설왕설래했었습니다. 그 후로 잠시 보류되는 듯하더니 지금은 투자가 철회될 분위기라고 합니다.”
“이유는?”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B-gate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구주 매입을 원했다고만 전해 들었습니다.”
윤재는 들고 있던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빙그르르 돌렸다.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하자, 흐름이 급변하는 게 느껴졌다. 최서령이 직접 나서서 B-gate 투자 철회에 역정을 낸 걸 보면 분명 둘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보이질 않았다.
윤재는 투자의 방향을 바꿔 위험 요소를 제거했다는 안도감에 숨을 돌리며 통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빌딩 숲 사이에 걸린 회색빛 하늘이 짙은 먹구름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정신을 살짝 놓으려고 할 즈음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바르르 요란하게 울렸다. 윤재는 내내 기다리고 있던 이름이 액정에 뜨자 휴대폰을 낚아채듯 들어 통화를 눌렀다. 한껏 고조된 상대방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귓가에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 증거 잡혔습니다. 사진과 영상 모두 확보했는데 보내 드릴까요?
그렇지, 아닐 리가 없다.
윤재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렸지만 비릿한 웃음까진 감추지 못했다.
“상대는 누군가요?”
- 학원에서 만난 공시생입니다. 전 통화에서 동행자라고 말씀드렸던 그 친구입니다. 사귄 지는 한 달 좀 넘었지만 확실한 물증을 잡고 보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좀 늦었습니다.
“초기 만남부터 사진 가지고 있습니까?”
- 네,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촬영분 모두 보내 주시고, 계속 체크해 주세요.”
- 집 혹은 모텔로 들어갈 때마다 메시지 남겨 드릴까요?
“좋습니다.”
윤재는 통화를 종료하고도 한참 동안 꺼진 액정을 바라보며 미소 짓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과 코트를 챙겼다. 이제야 원하는 대로 퍼즐이 맞춰진다. 퍼즐의 가장자리부터 조각을 짜 맞추다 잠시 정체기를 겪고 멈추었는데, 몇 조각 더 맞추고 나니 보이지 않던 조각이 나타나며 전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집무실을 벗어나자 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따라 나오려 했다. 윤재는 그를 저지하고는 먼저 가 보겠다고 손짓하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운전대를 잡은 윤재는 차를 몰고 한강으로 향했다.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가로수가 오늘따라 무척 쓸쓸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이 시릴 만큼 푸르던 하늘은 색을 잃은 것처럼 회색빛이 감돌았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아진 도심은 윤재의 마음을 더 가라앉혔다.
윤재는 한강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저 멀리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무정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겨울 날씨만큼 차가웠다. 윤재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면 종종 이곳에 들렀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마음마저 저절로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되돌아온 후 회사 업무 외에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한 건 은호밖에 없었다.
단순히 그의 과거를 다르게 잡아 주어 최악의 결론만 나지 않기를 바라는 선의의 의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처럼 쉽게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며 조금씩 집착하게 되었다. 슬슬 오기가 생겼다. 윤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은호는 마치 움켜쥔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계속 죽음 앞으로 걸어가는 듯했다.
윤재가 은호의 삶에 상사의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좀 더 친밀한 관계로 개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부모님의 기일 전후였다. 기일 전날, 힘들어하는 자신을 위로하며 보듬어 주려 했던 마음과 다음 날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겨울 날씨를 뚫고 선산에 찾아와 핫팩을 꺼내 주던 얼굴이 마음속 깊은 곳에 선연히 자리 잡았다. 윤재는 욕심이 생겼다. 등신 같은 애인 놈에게서 은호를 떨어뜨리고 싶었다.
윤재는 싱가포르 출장 전부터 사람을 써서 현준의 뒤를 캐고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과거의 이현준이 얼마나 추접스러운 행동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목적이 변질하였다. 이현준에게 다른 애인이 생겨 그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길 바랐다.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윤재는 그동안 마음에만 담고 있던 은호에 대한 욕심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때가 왔다. 윤재는 직장 상사가 아닌 호감 가는 상대로 은호에게 다가가려 한다.
***
저녁 사줄게 나올래? 술도 한잔하면 좋고. 오후 6:32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비굴해지고 처량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모처럼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한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집으로 가던 은호는 메시지 창을 열고 한참을 고민하다 적당한 말을 골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읽음 표시가 언제 뜨는지 한참을 노려보다 나날이 집착만 깊어지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 짜증이 일었다.
미안한데, 한가하게 그럴 시간 없어. 오후 6:34
하.
이마를 찌푸린 은호는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잡은 물고기라고 너무 방치하는 거 아냐?”
이제 석 달. 합격 유무를 떠나 한 번은 폭발하려고 단단히 벼르는 중이다. 은호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답장에 대화창을 종료한 후 최근 통화 목록을 훑었다. 불금을 맞아 누구든 불러 꼭지가 돌도록 마셔볼 생각이었다.
“아, 진짜.”
통화 목록에는 회사 사람들 이름만 즐비했다. 아무리 ‘누구든’이라고 해도 퇴근 후, 그것도 불금에 회사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이름은 최윤재였다. 회사 사람을 제하니 인간관계가 이리도 협소할 줄이야.
은호는 통화 목록을 아래로 내리다 수영을 찾아 통화를 눌렀다. 하지만 오늘은 뭘 하려고 해도 안되는 날인지,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수영의 까르르 웃음소리에 은호의 기분은 더욱 침체의 늪에 빠졌다.
“카페 아니야?”
- 응, 알바생한테 맡기고 선배랑 저녁 먹는데 왜?
불금인데 애인과 약속이 있는 게 당연하지. 은호는 입 안이 텁텁하게 느껴져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아니야. 데이트 잘하고.”
- 여기 우리가 자주 가던 치킨집인데 올래? 너 여기 좋아하잖아.
“내가 거길 왜 껴. 됐어.”
축축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단번에 촉이 온 수영은 곧장 은호를 붙잡았다. 하지만 은호는 차마 합석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염치라는 게 있지, 커플 사이에 껴 봤자 뭐 해.’
은호는 좋은 시간 보내라며 서둘러 통화 종료를 눌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건만, 기운이 쪽 빠졌다.
“왜 이리 허전한지.”
차라리 솔로였으면 클럽이라도 가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아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한 후, 진한 밤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족쇄를 차고 있어서인지 단지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집 근처에 다다른 은호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가벼운 안줏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걸어갔다. 날이 추워 종종걸음으로 향했지만 발목에 추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은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잠옷을 챙겨 입은 뒤 맥주와 안주를 챙겨 소파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안방에서 이불까지 챙겨와 소파 한쪽에 내려놓고 OTT 플랫폼을 열어 영화 한 편을 골랐다.
“결국은 너뿐이네.”
캔 맥주를 따 입 안을 한 번 적신 후 무릎을 세워 팔로 감쌌다. 은호의 눈동자 위로 영화 속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며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흥미는커녕 따분한 시선으로 영화를 보던 은호는 캔 맥주를 다시 들어 단번에 반을 비웠다.
딩동—
거실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벽에 붙은 인터폰을 살피던 은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벌써 술에 취한 게 아니라면 화면 속의 남자는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최윤재였다.
‘이곳엘 왜? 하필이면 잠옷 바람일 때 찾아오는 건 뭐고.’
은호는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문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에 하는 수 없이 현관문을 조금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전무님?”
갑자기 윤재가 큼지막한 손으로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바람에 현관문 손잡이를 꽉 쥐고 있던 은호의 몸이 순간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은호는 서둘러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뭔가를 붙잡기도 전에 얼굴이 먼저 윤재의 가슴팍에 짓눌렸다.
“여… 여긴 어떻게?”
“주소야 이력서 보고 알았고, 이유는…… 술친구가 필요해서?”
윤재는 은호를 안아 일으키듯 붙잡아 세우고 쇼핑백을 건넸다. 쇼핑백 안에는 리본으로 장식된 샴페인과 다양한 종류의 치즈가 들어 있었다.
은호가 쇼핑백에서 눈을 떼는 찰나 그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슬며시 밀려오는 페로몬이 평소보다 가볍고 부드러웠다.
“여기 계속 세워 둘 거예요?”
“… 제가 집에 없거나 다른 사람이 와 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면…….”
“그럼 그냥 갈까요?”
그는 눈꼬리를 접어 올렸다가 다시 눈썹을 아래로 축 깔았다. 실시간으로 표정이 바뀌는 모습은 간만이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들뜬 마음에 찾아왔다고 얼굴에 쓰여 있는 사람을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그런 말을 뱉기에 편한 관계도 아니었고.
“아뇨. 들어오세요.”
은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윤재를 안으로 안내했다. 어지르고 사는 편은 아니라 천만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쓸고 닦는 깔끔한 성격도 아니어서 살짝 난처했다.
은호는 종종 윤재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난 회사에서 그가 모시던 전무는 공과 사가 확실했는데 최윤재는 그 경계가 간혹 불분명했다. 젊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 한 비서에겐 이런 행동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윤재의 선을 넘나드는 행동은 오로지 자신 한정이었다.
“전무님.”
“네.”
“……아니에요. 앉으세요.”
애인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얼마나 쉽게 생각하면 이러나 싶기도 해 기분이 상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한 소리 할까 말까 재다가 말을 아꼈다. 어차피 술을 들고 집을 찾아왔다는 건 재워 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에 그가 어느 선까지 넘을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묘한 충동이 솟아올랐다.
이건 순전히 현준이 자신을 방치한 탓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오늘은 삐딱선을 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은호의 아담한 투룸에 발을 들인 윤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집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평소 은호가 입고 다니던 모던하고 심플한 모노톤 컬러의 옷처럼 인테리어 역시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가 적당히 배치되었고, 단조로운 무채색 속에 포인트를 준 초록색 관엽수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진회색 패브릭 소파 옆에 놓인 유리 테이블엔 혼자 한잔했는지 캔 맥주와 마른안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은호는 선물로 받은 와인과 모둠 치즈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내 주방으로 가서 접시와 포크, 와인 잔을 챙겨 왔다.
“제가 술친구 하겠다고 할 때 조건을 달았는데.”
“상하 관계를 내려놓자고?”
이미 패브릭 소파에 자리 잡은 윤재는 기억을 되짚으며 선뜻 받아칠 준비를 했다. 은호는 잔을 내려놓기 전 다시 한번 딱 부러진 투로 대꾸했다.
“진짜 그럴 건데, 자신 없으면 커피 내드리고요.”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윤재의 입술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그가 와인 잔을 뺏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은호는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세요.”
윤재의 얼굴 위로 가식 없는 웃음이 흐른다. 무언가를 숨기지 않고 모두 드러낸 천연덕스러움에 도리어 당황한 건 은호였다. 윤재는 당최 무슨 꿍꿍이인지 알다가도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영화예요?”
“모르겠어요. 그냥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서 틀어 놓은 거예요.”
반쯤 따른 와인을 무심하게 받아 든 윤재가 화면 가득 헐벗고 뒹구는 남녀를 보며 마뜩잖게 물었다. 시답잖은 말이 오가다 점화 포인트도 없이 다짜고짜 옷을 벗어젖히는게 딱 봐도 히트작은 아니었지만 섹스 신만큼은 영혼을 갈아 넣은 것 같았다. 적절한 클로즈업과 고막까지 파고드는 농밀한 애무 소리에 볼 안쪽 살을 혀로 느릿하게 문지르던 윤재가 말을 덧붙였다.
“되게 끈적거리는데?”
“아, 죄송해요.”
호기심 있게 물어보는 윤재의 말에 화르르 얼굴이 타오른 은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리모컨을 찾았다.
“집에 오면 조용한 게 싫어서 일부러 틀어 놓거든요.”
구차한 변명이었다. 영화를 틀어 놓는 것이 밥을 먹는 것처럼 은호에게 자연스러운 일상이긴 하지만, 상사 앞에서 생각 없이 보고 있던 건 실수였다. 은호가 영화를 끄려고 하자 윤재가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눈요기라도 하죠.”
허둥거리던 은호는 윤재의 제지에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영화는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와인을 마시던 은호는 반쯤 먹다 남은 캔 맥주가 눈에 띄자 선뜻 손을 뻗었다. 남은 양만큼 차가운 물방울이 표면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섞어서 마시면 금방 취할 텐데, 하나만 마셔요.”
“어차피 집인걸요. 취하면 드러누워 버리죠, 뭐.”
애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상사는 애인처럼 집으로 쳐들어와 신경을 마구 헤집는다. 은호는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에게 쌓인 화풀이를 눈앞에 있는 윤재에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은호의 될 대로 되라지 식의 말투에 웃음이 터진 윤재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에 달라붙은 물기를 엄지로 훑었다.
“내가 알파로 안 보이나 봐.”
“그렇게 따지면 기회는 많았잖아요. 이번에도 전무님이 잘 지켜 주실 거라고 믿을게요.”
“하.”
약한 듯 강한 한 방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허탈한 한숨을 내쉬는 윤재에게 은호는 상큼하다 못해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래도 콜?”
“……콜.”
은호는 일단 소파 아래로 내려가 윤재를 올려다봤다.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을 쏟아내면 필시 그의 표정이 구겨질 게 뻔하기에 저자세로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제안을 수락한 건 윤재이니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거라는 약간의 믿음, 하지만 까마득한 상하 관계의 두려움 속에서 은호는 아슬아슬한 외줄에 올라탔다.
“전무님.”
“네.”
“제가 만만해 보이죠?”
은호를 바라보는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발칙한 질문과는 달리 진지한 은호의 분위기에 여유롭던 윤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나 들어봅시다.”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댄 윤재가 느슨하게 내려다봤다. 은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말을 차근차근 꺼냈다.
“저 애인 있어요. 특히나 오늘은 불금이고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말뜻을 이해하고도 태연자약한 표정을 짓는 윤재를 보며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헛숨을 터뜨렸다.
“집에 애인이 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죠, 근데 알면서도 찾아온 거잖아요.”
“네.”
“네라고요?”
혹시 술 마시고 온 거 아니야? 이미 취하지 않고는 이럴 리가 없는데. 은호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취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아직 그 정도의 강단이 없어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왜요?”
“애인이, 애인 구실 안 하는데 오면 안 돼?”
하.
선을 넘으라고 먼저 부추기긴 했지만 윤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자 머릿속이 아연했다. 평소 회사에 있는 동안 현준과 연락을 주고받은 일이 거의 없으니 근거 없이 넘겨짚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뼈를 때릴 줄은 몰랐다. 불쾌감에 눈살을 퍽 찌푸리자 아차 싶었는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소파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만만하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랬다면 은호 씨 말대로 기회는 많았으니 진작에 덤볐겠지.”
이건 윤재의 말이 맞았다. 마음만 먹으면 휘두를 수 있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심지어 히트사이클 때에도 털끝 하나 건들지 않던 사람이다.
윤재는 답답하다는 듯 정말로 내 뜻을 모르겠냐며 반문했다.
“선택권을 주는 건데 왜 모르는 척할까?”
“……선택권요?”
설마 했더니 정말? 수영이 했던 말이 벼락처럼 뒤통수를 후려쳐 온몸이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은호는 상황을 재편성하느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 사람만 쳐다보지 말아요.”
윤재의 마디가 길고 큼직한 손이 은호의 뺨에 달라붙었다.
하, 세상에. 나한테 관심 있는 거라고? 은호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가… 가지고 노는 거라면… 사양하고 싶은데요.”
“유은호 씨.”
그가 몸을 일으켜 코앞까지 다가오자 은호의 얼굴 위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은호를 꿰뚫을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내가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입니까?”
은호의 시선이 윤재의 얼굴 위를 굴러다녔다. 뜻밖의 고백에 얼굴이 화하게 달아오른 줄도 몰랐다. 다시금 윤재의 손끝이 뺨에 닿았다. 따스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전해진다.
“왜 자꾸 모른 척해. 봐 달라고 손짓하는데.”
진득하게 달라붙는 윤재의 시선이 오늘따라 아슬아슬했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그의 수행 비서로 지내는 동안 과한 친절이라 느꼈던 때가 너무도 많았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실 두려웠다.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 윤재에게 빠져들 것만 같아 경계했다. 그동안 윤재는 부하 직원에게 베푸는 일반적인 친절함을 넘어 연인에게나 할 법안 행동을 종종 시도했다.
윤재의 손바닥이 은호의 하얀 뺨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귀를 감쌌다. 은호의 심장이 귓바퀴에 걸린 것처럼 두근두근 요란하게 뛰었다.
“간신히 참고 있는데 오래는 못 기다려요. 때가 지나면 내 마음대로 할지 몰라. 그러니까 은호 씨가 먼저 따라와 줘요.”
“따라가지 않으면 권력 남용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상황 봐서.”
은호의 뺨을 쓰다듬던 큼지막한 손이 귀 뒤로 넘어가더니 머리통을 감싸 쥐며 앞으로 잡아당겼다. 윤재가 몸을 녹여 버릴 것처럼 노곤하게 페로몬을 풀었다. 은호는 눈을 감고 훅하니 끼치는 페로몬을 느끼며 가까이 다가온 윤재의 입술을 더듬었다.
이내 말랑한 입술이 겹쳐졌다. 윤재의 뜨겁고 축축한 혀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은호의 몸은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처럼 축 처졌다. 무거워진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거부했다. 오로지 본능적인 감각 기관만이 살아남아 알파와의 접촉에 미친 듯이 반응했다.
치열을 더듬고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볼살 안쪽 연약한 살을 꾹꾹 누르며 숨을 빼앗아 갔다. 은호는 혼을 쏙 빼놓는 딥 키스도 그렇지만, 윤재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살냄새가 미치도록 좋았다. 문을 걸어 잠그고 주말 내내 원 없이 살을 섞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버렸다.
입 속에서 마구잡이로 섞인 타액에서 와인의 향과 함께 단맛이 느껴졌다. 현준에 대한 죄책감이 커질수록 윤재와 난잡하게 뒹굴고 싶은 충동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서로의 숨결을 삼키던 시간이 지나고 입술 틈새로 산소가 밀려들어 왔다. 끓어오르는 열기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은호보다는 단정했지만, 윤재의 눈동자도 흐릿하니 반쯤 풀려 있었다.
“자요. 이만 갈게.”
은호는 진하게 키스를 나눌 때 허리춤을 밀착하느라 복부 아래에 단단하고 묵직하게 부피를 키운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흥분을 꺼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겠다니. 은호는 옆에 벗어 둔 재킷을 챙기려는 윤재의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사람 흥분시켜 놓고 그냥 간다고요? 술 마셨잖아요.”
“……대리 불러야죠.”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간만 보여 주고 간다고? 태연하게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윤재의 태도에 단단히 약이 오른 은호는 충동적으로 울컥 말을 쏟았다.
“자… 자고… 가요.”
말해 놓고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눈매를 휘어 웃은 그는 재킷을 천천히 내려 두고 가까이 다가왔다.
“제어하지 말라는 건가?”
그의 물음에 잠시 망설여졌다. 애인을 두고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계속 끌린다. 배덕감과 본능이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그의 녹아내릴 듯한 음성이 유혹하듯 귓가를 쓸고 지나갔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
“후회할 것 같으면 시간을 더 주고. 대신 다음번에는 은호 씨가 멈추자고 해도 내가 강제로 붙잡고 안 놔줄 거야.”
표정은 한껏 부드럽고 자상했지만, 욕망의 색채가 짙은 눈빛까진 숨기지 못했다. 은호의 도발을 부추기는 것처럼 그에게서 뜨거운 숨결과 함께 치명적인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은호는 두 팔을 뻗어 윤재의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붙잡고 후회할래요.”
충동적이긴 했으나 근본은 외로움이었다. 은호는 윤재에게서 자신과 같은 지독한 외로움을 분명 보았다. 단지 그는 자신보다 참는 역치가 굉장히 높아 잘 숨겨 온 것뿐.
직장 상사와의 부적절한 관계와 더불어 현준에게 가지는 죄책감이 온몸을 짓누르겠지만, 은호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마음껏 숨을 쉬며 환희를 느끼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이것저것 잴 필요가 없었다. 혹 자신이 그의 마음을 오해한 것일지라도 윤재라면 이것을 약점 삼아 구질구질하게 늘어지진 않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급하게 끌어안은 몸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맞부딪친 몸이 하나가 된 것처럼 밀착되고 더운 숨이 쏟아지자 윤재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은호는 그동안 감추느라 급급하던 페로몬을 최대치로 풀었다. 당신만 유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은호는 고개를 틀어 윤재의 입술을 갈급하게 찾았다.
윤재는 은호의 허벅지 뒤를 받쳐 상체를 들어 올렸다. 집으로 들어올 때 거실 옆 안방의 침대를 눈여겨봤던 터라 그곳으로 데리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은호는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고 두 손으로 뺨을 붙잡았다. 불규칙한 호흡 속에 뜨거운 숨이 서로에게 흩뿌려지는 동안 허리 아래로는 묵직하고 단단한 살덩이가 옷감을 사이에 두고 적나라하게 맞닿았다.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서로를 탐했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야생 동물처럼 다급하게 입술을 더듬고 혀를 섞었다. 은호는 목까지 정갈하게 잠겨 있는 윤재의 셔츠 단추를 풀어 주고 싶었다. 타이는 손가락을 넣어 쉽게 잡아당겼지만, 단추를 풀지 못하고 헛손질만 반복하자 윤재의 입술 틈이 살짝 벌어지며 싱거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게 급해.”
“저만 급한 거 아니잖아요.”
말은 느긋한 척하면서도 정말 급해 보이는 건 오히려 최윤재였다. 늘 단정하고 곧은 그가 성욕에 흠뻑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은호는 그 모습만으로도 드라이 오르가슴이 순간순간 차올랐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윤재의 반듯한 이마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잔뜩 맺혔다. 몸은 진작에 달아올랐으면서 외려 시치미를 떼며 뭐가 그리도 급하냐고 반문하니 기가 차 웃음만 나왔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귓가로 옮겨갔다. 그가 은호의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물며 혀끝을 세워 길게 핥았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축축하고 원색적인 숨소리가 온몸을 전율케 해 은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된 신음을 쏟아냈다.
셔츠 단추를 겨우 푸는 동안 윤재 또한 은호의 잠옷 상의를 거침없이 벗겼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쇄골 위로 그의 입술이 지나갈 때마다 붉은색 울혈 자국이 하나둘 새겨졌다.
“하읏.”
윤재는 혀끝으로 앙증맞게 솟아 있는 유두 주변을 맴돌며 빙글빙글 원을 그리다 한입에 삼켰다. 거침없는 흡입에 허리가 붕 뜨고 시트를 붙잡고 있던 손이 저절로 윤재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뭔가 나오는 것도 없는 가슴을 윤재가 어미젖을 빠는 아기처럼 이를 살짝 세워 쪽쪽 빨았다. 은호는 극렬한 자극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체중으로 몸을 누르고 부피감이 큰 성기가 다리 사이를 마찰할 때마다 촉각만으로도 흥분이 극에 달했다. 그의 몸에서 다급하게 쏟아지는 페로몬 탓에 아래가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윤재는 두 손을 은호의 잠옷 바지와 드로어즈 밴드 속에 슬며시 밀어 넣고 천천히 옷을 끌어 내려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전라가 된 은호는 부끄러움에 몸을 배배 꼬며 근처에 둔 이불을 끌어다 몸을 가리려 했지만 윤재에게 두 팔을 붙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쾌감을 받아내야 했다.
윤재는 가슴을 입술로 애무하다 갈비뼈 사이사이를 혀로 문지르고는, 움푹 파인 은호의 배꼽 위로 위치를 옮겼다. 간지러운 감각에 절로 힘이 들어간 배가 홀쭉해졌다.
“벌써부터 긴장하면 어떡해.”
복부에서 지분거리던 윤재의 입술이 은호의 목덜미로 다시금 올라왔다. 그가 진득하게 간지럽히며 속을 애태우는 사이, 빳빳하게 열이 오른 성기에 윤재의 뜨거운 손마디가 감겼다. 은호는 본능으로 허벅지를 오므리려 했지만 그가 막고 있어 바르작거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아, 거기… 흣, 만지지…… 하아.”
말끝이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고 갈가리 토막 났다. 윤재가 체모가 거의 없는 은호의 매끈한 성기를 쥐었다 풀며 아래위로 천천히 왕복 운동을 하자 귀두 끝에서 투명한 선액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은호는 발끝이 절로 곱아들어 다리를 오므리려 애를 썼다. 윤재는 쾌감에 어쩔 줄 모르는 은호를 괜찮다고 달래면서도 애무의 속도를 서서히 올렸다. 바짝 달아오른 귀두 끝을 엄지로 긁자 은호의 앓는 신음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앗, 으흣.”
첫 번째 절정이 몰아치고 썰물처럼 쾌감이 빠져나간다. 그의 두툼한 손등 위로 점성이 높은 액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은호는 시야가 한 번 점멸했다 뿌옇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득한 감각에 윤재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며 시트 위로 떨어졌다.
“어지러워…….”
첫 사정과 함께 짙게 흘러나온 오메가 페로몬이 방 안을 진동했다. 윤재는 은호가 기운 없이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시트와 뺨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얼굴을 감싸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느긋한 척했지만 은호의 페로몬을 온몸으로 흡수한 윤재는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던 은호는 버클을 푸는 금속성에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단정한 정장 속에 저 큰 게 수납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드로어즈 위로 도드라지게 보이는 성기의 모양은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고 항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드로어즈를 내리자마자 퉁 하고 튀어나와 배꼽 부근에 기립한 성기를 바라보는 은호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현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이즈에 설레는 마음보다는 긴장이 앞섰다.
낯부끄러울 정도로 은호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너른 어깨 아래로 두툼하게 올라붙은 가슴팍, 촘촘하게 짜인 복근도 시선을 강타할 만큼 아찔했지만, 무엇보다 힘줄이 도드라진 윤재의 물건이 제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아 긴장되었다. 살면서 남의 것을 볼 일이 별로 없거니와 우성 알파는 흔치 않아 더더욱 그랬다.
윤재가 은호의 갈빗대 사이를 혀로 쓸어내리며 정신을 빼놓는 사이 그의 검지와 중지가 질척하게 젖어 있는 입구를 천천히 누르며 들어왔다. 은호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아…, 흐…….”
꿈틀대며 들어오는 손마디의 모양에 맞춰 좁은 내벽의 길이 트였다. 검지와 중지만 들어왔음에도 마디가 길어 깊은 곳까지 자극이 가해질 때마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렸다.
뼈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이 내벽을 천천히 휘저었다. 손가락으로 먼저 가고 싶지 않은데 현준과 차원이 다른 손놀림에 목덜미가 뻐근해질 정도로 흥분감이 차올랐다.
“조… 좀 천… 천히. 흣.”
윤재는 작정한 것처럼 굴었다. 약지까지 밀어 넣고 손가락을 굽혀 내부를 긁어내리자 속이 엉망이 된 것처럼 몸이 저렸다. 그가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고 안을 더듬다가 도톰하게 올라선 전립선을 일부러 찍어 누르는 순간, 은호의 허리가 크게 들썩이며 원색적인 신음이 쏟아졌다.
“가… 갈 거 같…, 흐읏…….”
또다시 사정감이 치솟았다. 참고 싶은데 극점이 계속 짓이겨져 이성이 점점 증발했다. 뽀얀 액이 움푹 팬 배꼽 위로 자꾸 고여만 갔다.
“시작도 안 했는데 지치면 곤란해.”
윤재는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이로 물며 피식피식 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는 수건으로 흥건하게 젖은 배를 닦아 주었다. 가만히 누워 숨을 헐떡거리던 은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안아 줘요.”
그의 다부진 가슴팍이 은호의 가슴과 빈틈없이 겹쳐졌다. 그의 말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맞댄 가슴팍에서 평소보다 배로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목덜미에서 조금씩 흘러내리는 페로몬이 서서히 은호의 머릿속을 절여 놓았다. 그를 닮아 가볍지 않은 우디 향이 농밀하게 쏟아질 때마다 허리 아래쪽의 열기 그득한 내부가 질척이는 액을 흘렸다. 은호는 본능적으로 알파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허벅지를 벌렸다. 팔을 아래로 내려 그의 성기를 손에 쥐자 작은 접촉에도 숨을 쉬듯 꿈틀거렸다.
“……넣고 싶어.”
핏줄이 불거진 윤재의 성기를 붙잡고 질척이는 입구에 가져다 놓으며 애간장 녹이는 말투로 칭얼거렸다.
“얼른 넣어 줘요.”
구레나룻까지 스멀스멀 내려온 땀방울이 한데 모여 윤재의 턱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는 은호의 애교 섞인 말투에 작게 미소 지으며, 엄지로 은호의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고마워.”
“네?”
“약속 지켜줘서.”
약속이라니? 은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물음표를 머리 위에 그렸다. 윤재는 홍조 가득한 은호의 뺨을 쓰다듬으며 예쁘다는 말만 나직하게 읊조릴 뿐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미끈거리는 애액 때문인지 성기가 자꾸 옆으로 빗나가며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애가 탄 은호가 재차 기둥을 붙잡고 입구 끝을 맞췄다.
윤재가 허릿심으로 묵직하게 누르자 귀두 부분이 입구에 걸리는 선연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육중하고 저릿저릿한 감각이 순식간에 배 속을 파고들었다.
“흐으, 자… 잠시만, 아, 아흑.”
음절마다 숨을 들이켜느라 뚝뚝 문장이 끊어졌다.
좁은 입구가 그를 버겁게 받아들이며 다급하게 죄어 왔다. 윤재의 성기가 너무 커서, 알파를 원하면서도 반대로 몸이 경계하듯 강하게 움츠러들었다. 장기를 밀고 들어오는 성기의 느낌이 황홀하다기보다는 고통스러워 은호는 뻣뻣하게 목을 뒤로 젖히며 의도치 않게 배에 힘을 주었다.
“숨을 천천히 쉬어 봐.”
경직된 등줄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달래 주고 있지만, 어중간한 상태로 삽입을 멈춘 윤재의 턱 끝이 잘게 흔들렸다. 은호가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아래를 깨물어 버려 흉곽을 키우며 호흡을 조절하는 윤재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아아.”
은호는 수치심도 잊고 윤재가 풀어내는 페로몬을 최대한 흡수하며 허벅지를 더 활짝 벌렸다. 윤재는 은호의 수고를 아는 것처럼 말랑한 엉덩이를 움켜쥐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느릿하게 삽입을 이어 갔다.
알코올에 적셔진 뇌는 진작부터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고, 본능이 모든 걸 컨트롤했지만, 본능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를 받아들이기란 버겁기 그지없었다.
윤재는 성기를 밀어 넣었다 빼내길 반복할 때마다 잡아당기듯 물어 대는 점막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다. 느릿한 속도에 속만 타는 것 같아 골반을 붙잡고 뿌리 끝까지 단번에 밀고 들어가자 은호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내벽이 수축하며 순식간에 좁혀 들었다.
“흐으… 흐으.”
은호의 벅찬 숨소리가 성욕을 부추겼다. 구레나룻까지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 매달렸다가 은호의 가슴팍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유은호.”
이름을 불러도 초점이 나간 것처럼 흐릿해진 눈동자가 윤재를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다. 상체를 수그린 윤재가 은호의 목덜미에 있는 페로몬 샘을 자극했다. 입술을 덧대고 흡착하듯 빨아들이다 이를 세워 살짝 깨무니 정신이 돌아온 은호가 고개를 돌려 윤재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응?”
달게 절여진 윤재의 목소리가 은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은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자신의 페로몬을 풀풀 날렸다. 은은한 플로럴 향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주변에 넘실거렸다.
경직된 몸이 서서히 이완되며 열리자 허리에 힘을 줘 앞뒤로 움직이던 윤재는 은호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더듬었다. 그가 은호의 배 속에 빠듯하게 들어찼다 빠져나갈 때마다 앓는 듯한 신음이 윤재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흐응.”
윤재가 속도를 높여 묵직하게 누르고 들어왔다. 평소 잘 닿지 않던 안쪽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오자 은호의 마른 배가 크게 들썩였다. 깊은 곳까지 여느라 고통스러웠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하며 질척한 페로몬을 쏟아냈고 그만큼 쾌감은 겹겹이 쌓였다. 윤재의 리드미컬한 허리 짓에 은호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치솟는 고양감으로 은호의 인내심이 휘발되었다.
“아… 흐읏.”
은호의 입에서 외설적인 신음이 흘러나오고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졌다. 윤재의 단단한 허벅지가 말랑한 엉덩이를 사정없이 짓이길 때마다 땀에 젖어 철썩거리는 야한 소리가 방 안을 공명하다 귓속으로 재차 파고들었다.
은호는 붉게 달아오른 모습만으로도 색정적이었다. 한껏 흐트러진 상태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 모습은 원색적인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윤재는 치솟는 사정감을 억누르며 더욱더 깊이 파고들었다.
윤재가 양옆으로 벌어진 은호의 다리를 어깨 위로 올리고 상체를 숙여 깊은 삽입을 시도했다. 은호는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온몸이 찌르르 떨려와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는데 그가 한계를 모르고 찌르는 통에 모든 스팟이 짓이겨져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몇 번이고 사정한 은호의 성기가 다시금 탄력을 받아 꼿꼿하게 발기했다. 윤재의 큼지막한 손이 은호의 성기를 감싸고 빠르게 위아래로 왕복 운동을 시도했다. 시트를 쥐고 있던 손이 윤재의 어깨를 절박하게 붙들더니 손톱을 세웠다.
“흐윽… 그… 만!”
처음보다 묽어진 액이 포물선을 그리며 가슴팍에 쏟아졌다. 순식간에 밀려온 쾌락의 파도가 모든 감각을 쓸고 지나가는 사이, 내부가 경련하며 윤재의 단단한 살덩이를 비틀어 짰다. 갑자기 좁아진 내벽에 흥분한 윤재가 사정의 여운이 끝나지 않은 은호의 몸을 붙잡고 격렬하게 마지막 스퍼트를 올렸다.
은호의 앓는 신음이 점점 비명처럼 쏟아졌다.
양 볼기에 힘이 들어가는 동시에 허리가 시트에서 붕 떠올랐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터지며 단단한 살덩이가 숨을 쉬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하아… 하아.”
윤재의 땀에 젖은 판판한 복근이 경련하듯 너울거렸다. 격한 숨을 쏟아내던 윤재가 어깨 위에 올려 둔 두 다리를 내려놓고 체중을 실어 은호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날카로운 쾌감이 쉴 틈 없이 밀려들어 왔다.
“왜…….”
지독한 오르가슴에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현준과 꽤 많은 시간 몸을 섞었지만 정신을 놓고 흥분한 건 처음이었다. 마치 그동안의 섹스가 허구였나 싶을 정도로 급격한 피로와 탈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끊어질 듯 말듯 가늘게 숨을 삼키자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은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왜 울어요.”
“…….”
“울지 마.”
윤재의 뜨끈한 입술이 은호의 눈꼬리에 닿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빨아 삼켰다. 은호는 모든 게 두려웠다. 약간의 오기로 시작한 불장난에 불과했는데 예고도 없이 윤재가 가슴으로 날아와 맺혀 버렸다.
충동은 불시에 찾아와 모든 걸 삼켰다. 윤재를 만나 그가 보여 준 애정이, 전희 없이 욕구만 충족하고 그를 내버려 두던 현준과 너무나도 달라 충격에 휩싸였다. 긴가민가하던 그의 속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은호는 배덕감 속에서 욕망이 끝없이 자라나 자신을 집어삼킬까 봐 두려웠다.
무의식중에 팔을 뻗어 이불을 움켜쥐려는데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은호는 한쪽 눈만 간신히 떴다가, 눈앞을 벽처럼 막은 살색 향연에 눈꺼풀을 급히 들어 올렸다.
원체 살 맞대는 걸 좋아하지만, 그의 가슴팍을 뭉개며 잠들었단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윤재는 피곤했는지 베개에 파묻힌 채 깊은 잠에 빠져 미동조차 없었다. 그가 내뱉는 고른 숨이 은호의 얼굴로 흩뿌려졌다 사라질 때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과거 현준에게도 분명 고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윤재의 고백이 낯설고 신기했다. 이제는 현준에게 사랑을 조르고 매달리는 처지다 보니 자존감이 무너져서 그런 걸까. 부족함 없는 사람이 들이대는 게 약간 의심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현준에 대한 죄책감이 부채처럼 쌓여 갔다.
“뭘 그렇게 고민해요.”
“어? 언제 깼어요?”
“방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고개를 들어 윤재의 얼굴을 살피자 반쯤 뜬 눈이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은호에게 향했다. 평소 윤재의 곧은 눈매는 사라지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눈꼬리가 가늘게 접혔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서 몸을 부대끼며 누워 있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멀뚱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마디가 긴 손가락이 다가와 뺨을 문지르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괜찮아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한 은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안 그래도 눈 뜨자마자 개운한 머리와는 달리 허리 아래가 뻐근하게 저렸는데, 걱정하며 묻는 말투가 지난밤의 기억을 모조리 끌어다 놓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러지 말라는 듯 엄지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윤재의 눈동자가 은호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온전히 자신만 바라봐 주는 시선이 얼마 만이더라. 은호는 조울증 환자처럼 수시로 밀려오는 감정의 파고에 이성마저 흔들렸다.
“전무님.”
“둘이 있을 땐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떨까?”
잠긴 목소리마저도 그윽하고 달게 느껴졌다. 상대의 감정을 두드리고 확인하는 그에게서 싱그러운 페로몬이 폴폴 날렸다.
“……저.”
은호는 머뭇거렸다. 벼락같이 찾아온 고백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사람이 다가와 문을 두드렸다. 마음 같아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사람을 붙잡고 싶었으나 애인인 현준이 마음에 걸렸다. 시험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한다면 그동안 해온 현준의 노력을 자칫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을 하더라도 시험은 끝나고 이야기하는 게 오래된 인연에 대한 도리 같았다.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
“아시잖아요. 제 상황.”
은호의 성향을 알고 있는 윤재는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은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선히 그려졌다. 본인이 손해를 볼지언정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덩달아 고민이 깊어졌다.
은호는 분명 시험이 끝날 때까진 말하지 못할 테고, 그랬다간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고 현준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증거 사진을 불쑥 들이밀고 싶진 않았다. 가능하면 은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으면 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요.”
“……그럴게요.”
둥글려서 말을 끝맺었지만 윤재는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과거, 3월 중순쯤. 인천 어느 컨테이너 창고에서 발생한 큰 화재가 종일 뉴스를 도배했던 날, 오전 본부 회의에 들어왔던 은호가 애인의 연락을 받고 급히 휴가를 냈었다.
책임감이 강해 사적인 일로 조퇴하는 일이 없던 그가 애인의 연락 한 통에 서둘러 나가는 모습이 다소 신선하기까지 해 기억에 남았다. 한참 후에 윤 실장을 통해 러트가 온 애인 때문에 조퇴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하긴 했지만 대충 넘겼는데, 사망 후 임신 주 수를 따지고 보니 그날이 맞았다.
윤재는 그날이 다가오기 전에 둘을 갈라놓고 싶었다. 안 된다면 그 시기 즈음 강제로라도 떼어 놓을 작정이었다.
3월 중순까지 앞으로 한 달 남짓. 윤재는 그 안에 둘 사이가 정리되지 않을 것을 은호의 표정으로 알게 되었다.
배덕감에 잔뜩 절어 있는 은호의 얼굴 앞에 당장에라도 애인이 바람피우는 사진을 보여 주며 그럴 가치조차 없는 놈이라고 매도하고 싶었지만, 그로 인해 은호가 받을 충격이 염려되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윤재는 관심을 돌리고자 은호를 부둥켜안으며 등허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혹시 잘 먹는 거라든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봐요.”
뜬금없는 질문에 은호는 미간을 오므렸다. 자고 일어났으니 아침으로 뭘 먹겠냐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윤재는 은호의 가슴팍과 쇄골을 쓰다듬었다. 뼈 위에 얇은 살가죽을 살짝 덮어 놓은 것처럼 볼품이 없었다.
“……너무 말랐나요?”
“체력이 안 받쳐 주니까 쉽게 지치는 거 같아서.”
은호는 체력이라는 단어에 두 뺨이 화끈거렸다. 어젯밤 섹스 한 번 만에 나가떨어진 은호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다 발이 꼬여 엎어진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윤재의 말처럼 체력이 안 받쳐 준 건 사실이었다. 페로몬 폭격을 받은 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전무님이 월등한 거지 전 문제없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충전되는 윤재와 달리 은호는 빠르게 방전되었다. 아마 그가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내달렸다면 은호는 밤새도록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체력이 없는 은호를 위해 일부러 참은 눈치였다. 지난밤 은호가 잠든 사이 홀로 남아 있던 술을 마셨는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알코올 향이 풍겼다.
“잘 먹이고 싶어. 다른 이유는 없어요.”
은호가 못 먹는 음식은 알고 있어도 좋아하는 음식에 관한 정보는 부족했다. 달달한 군것질거리를 좋아한다는 게 그가 아는 전부나 다름없어, 좀 더 정확한 은호의 기호를 알고 싶었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알려 달라고 보채는 윤재를 보며 은호의 마음이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감정이 얼마 만이더라, 풋풋한 연애 초기의 달달함에 두근두근 설레다가도 현준을 떠올리면 절로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린다. 은호는 복잡한 감정을 굳이 윤재에게 드러내며 투정 부리고 싶지 않았다.
“아침 먹으러 가면서 하나씩 알려 드릴게요.”
키스를 해도 될까? 잠시 머뭇거리며 갈등하는 사이 바로 은호의 고민을 감지한 윤재가 먼저 다가와 입술을 붙였다. 그는 나긋한 말투로 먼저 씻고 차로 가 있을 테니 천천히 나오라고 속삭이며 은호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드로어즈 하나만 입은 윤재가 침실 밖으로 나가는 사이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은호는 착잡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사랑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걸까. 배신감을 느낄 현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씻고 먼저 지하 주차장으로 걸어 나온 윤재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과거의 그날을 떠올리며 정확한 날짜를 고민했다. 기억으론 3월 중순. 그날 회의 내용은 얼추 기억이 나지만 도움이 될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B-gate를 포기하고 스튜디오 G에 투자를 감행한 일로 모든 게 바뀌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 전날이나 전주의 뉴스 기사 중 의미 있던 사건을 기억해 내야 하는데 회사, 집 패턴을 반복해서 그런지 특별한 이슈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
컨테이너 창고 화재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 GH 케미컬 계열사 분리와 스튜디오 G의 나스닥 상장 기사로 종일 시끄러웠던 게 떠올랐다. 일단 그날을 기준으로 이삼일 기민하게 상황을 주시하면 되지 않을까.
“…후.”
그날이 돌아왔을 때 현준과 은호의 사정이 과거와 같다면 어떻게든 현준을 은호에게서 떼어낼 것이다. 윤재는 조수석에 둔 서류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 다음 달 중순 스케줄을 확인했다.
***
벚꽃 몽우리가 마른 가지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봄 내음 가득한 아침, 윤재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 날이 돌아왔다.
『GH 케미컬, 글로벌 도약을 위한 배터리 사업 분사』
눈을 뜨면 무조건 아침에 올라오는 뉴스 기사를 확인하던 윤재는 속보로 뜬 GH 케미컬 기사를 보고 이번 주 스케줄을 확인한 뒤 윤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실장, 금요일에 잡혀 있는 제주도 출장 말인데, 수요일로 앞당길 수 있을까?”
- 아, 그게 스케줄 조정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최 의원님과 한성건설 대표님 스케줄 상 유일하게 비어 있는 날이어서요.
윤재의 급작스러운 결정에 윤 실장은 난감하다는 뉘앙스로 상황을 설명했다. 안 그래도 어렵사리 잡은 스케줄이었고, 한번 어긋나면 다시 일정을 잡는 데 2주는 족히 걸릴 문제라 조심스러웠다.
“그러면 일정은 그대로 하고 수요일 티켓으로 앞당겨 줘. 휴가 겸 미리 가서 투자처 확인 좀 하게.”
- 네, 알겠습니다.
“아, 유 비서도 끊어 주고.”
유 비서라는 말에 잠시 고민을 하는 건지 대화 사이에 공백이 생겼다.
- ……네? 유 비서요? 수요일 티켓 말씀하시는 거죠?
“응.”
- 알겠습니다. 전무님.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윤재는 달력 앱을 열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남은 건 컨테이너 창고 화재 사건이 일어나는 그날. 추측으로는 이삼일 뒤,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으니 제주도에 가기 전날부터 은호를 데리고 있어야 했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윤재의 예상대로 은호는 현준에게 이별의 ‘이’ 자도 꺼내지 못했다.
8개월 전으로 돌아오면서 당시 아쉬웠던 투자는 전부 재정비해 원하는 대로 맞춰 놨지만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게 은호의 문제였다. 윤재는 그를 가까이 두고, 위험을 피하고자 일부러 비서실 직원을 수행 비서로 바꾸었다. 과거보다 가까이 지내면서 은호에 대해 좀 더 많은 걸 알게 되고 마음이 깊어지며 둘 사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으나 생각보다 결과물이 시원치 않았다.
아마도 초기 과정에서 뭉그적거린 윤재의 탓도 있다. 시간이 되돌아왔을 때에는 단순히 도와주는 역할만 하고 빠지려 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은호에게 감겨들어 고민하고 방향 설정을 다시 하느라 좀 늦어졌다. 하지만 더는 끌 수 없는 시간이 돌아왔다. 사귀는 건 둘째치고 막아야 할 사건은 어떡해서든 막아야 했다. 그동안의 다른 사건을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듯, 한 번 다른 선택을 하면 완벽하게 미래가 바뀌었다. 은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인의 러트 날만 지나가면 둘 사이는 분명 과거와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은호가 들어왔다. 가지런하게 웃는 눈이 3월의 봄바람만큼 설렜다. 은호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셔츠를 받아서 나가려다, 뒤따라 나오는 윤재를 확인하고 보폭을 맞춰 정원을 같이 걸었다.
담장 아래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와 진달래가 이른 봄을 먼저 알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하니 시선을 빼앗는 꽃을 내려다보는 은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내일모레 제주도 갈 거니까 준비해 둬요.”
“……어? 금요일 아니었나요?”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 수요일부터 가 있으려고.”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은호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급하게 잡은 일정이라 뭐라고 꾸며 말할지 미처 계산하지 못한 윤재는 대충 얼버무린 후 서둘러 다음 말을 꺼냈다.
“준비는 내일까지, 퇴근 후 차 가지고 가서 캐리어 챙겨 와요.”
“내일이요?”
“내일 우리 집에서 자고 같이 출발해요.”
급하게 서두르는 티가 나자 은호가 가볍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번갯불에 콩을 볶는 상황인 데다 뜬금없는 제안까지 하니 은호가 의아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전무님.”
“부탁할게. 응?”
“…….”
“같이 있고 싶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진심이었다. 다만 선의의 목적이 다분한 진심이어서 조금 마음에 걸릴 뿐.
애교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윤재가 투정 부리듯 제안을 하고는 쑥스러운지 콧등을 매만지며 뒤로 스윽 물러났다. 은호는 귀까지 걸릴 듯한 입꼬리를 차분하게 내리며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눌렀다.
“그럴게요.”
속삭이는 말투가 바람결에 나부끼며 둘 사이를 유유히 벗어났다.
스튜디오 G의 글로벌 흥행으로 나스닥 상장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가시화되자 장외에 있던 주식 가격이 두 달 사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사실 윤재는 보름 전 스튜디오 G의 대표를 만나 향후 1년 로드맵을 확인했다. 내용 중에는 차후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진 것도 있고, 윤재가 미처 보지 못한 시간의 일이라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차근히 방향을 잡아 나가면 큰 무리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은호는 기사를 접하고 너무도 놀라 스튜디오 G의 투자 당시의 주식 가격과 현재 모 증권사에서 재무제표를 통해 구체화한 가격을 비교 분석했다. 정확히 열 배가 좀 넘게 뛰었다. 윤재의 농담 같았던 내기가 현실화되자 등줄기에 자르르 소름이 돋았다.
회사 내부는 종일 시끄러웠다. 올 상반기 실적은 어닝 서프라이즈 중에도 최대치일 거라며 회사 창립 이후 최고의 실적을 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한껏 들뜬 회사 분위기와는 달리 정작 투자를 감행한 윤재는 평소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저리 무덤덤하고 차분한지 세기의 미스터리였다. 채권 운용본부에서 올린 감사 보고서를 들고 집무실로 들어간 은호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살피고 있는 윤재를 묘한 시선으로 훑었다.
‘조직의 리더라서 일부러 무게를 잡는 건가.’
은호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신을 쳐다봐 달라는 것처럼 모니터 근처에 얼굴을 살짝 들이밀었다.
“전무님이 이겼어요.”
모니터를 훑던 시선이 포물선을 그리며 은호에게 옮겨갔다. 그는 은호가 말한 뜻을 바로 이해했는지 눈매를 아치형으로 휘며 잔조로운 미소를 지었다.
“소원 말하면 들어드릴게요.”
“……지금 말고, 내가 쓰고 싶을 때.”
승리자라고 하기에는 말끝이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하지만 은호는 그의 눈빛에 담긴 환희를 읽었다. 윤재는 겉으로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반음 올라간 목소리 톤에서 기쁨이 슬며시 묻어났다.
“그러시죠. 아!”
“?”
“대신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어야 합니다.”
윤재는 딱 부러지게 답하고 조용히 뒤를 돌아 나가려는 은호의 손목을 붙잡고 슬쩍 잡아당겼다. 은호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의문에 찬 표정을 지으며 윤재를 돌아보았다.
윤재는 붙잡은 손목을 다른 손으로 덮으며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는 은호에게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했지만, 회사라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고민 좀 해 봐야겠네.”
“소원 정해 두고 내기한 거 아니었어요?”
“응.”
난 또,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베팅하는 줄 알았는데 즉석에서 건 내기였다니. 은호는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윤재가 벌이는 일이 많을수록 은호가 검토해야 하는 이메일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아마 문서로 뽑으면 하루 평균 손가락 세 마디 분량일 것이다. 다른 일 없이 읽고 정리해야 겨우 퇴근 전에 맞출 수 있는 양의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회의와 외부 미팅이 잦아 매번 일을 집으로 가지고 가야만 했다.
퇴근 후 윤재의 집으로 같이 들어간 은호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 준 저녁을 먹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감정의 혼선 한 달째. 마음은 윤재에게 거의 돌아섰지만 아직 입장 정리를 하지 못하고 뭉그적거리는 상태였다.
‘현준의 시험만 아니었어도’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만 은호는 본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굉장히 하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현준과는 이틀 간격으로 의무적인 통화를 주고받을 뿐 이제 거의 남남과 다름없었다. 지난달과 이번 달의 월세와 생활비를 은호가 지원해 줬기에 그나마 이 정도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고, 은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윤재는 은호의 머뭇거림이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끄도록 유도를 할까 하다가, 혹시나 과거와 다르게 날짜가 틀어져 현준의 러트가 다른 날로 변동되었을 상황도 대비해야 하기에 그대로 둬야만 했다.
“중문 쪽에 새로 짓는 카지노 개발 리포트는?”
“지금 취합하는 중인데 한두 시간 정도 걸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식사 후 거실에 앉아 못다 한 일을 처리하는 은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성격이 아닌 데다 윤재까지 곁에 있으니 마음이 급했다.
자판 위를 물결치는 손가락과 모니터를 확인하는 눈동자가 쉼 없이 굴러갔다. 캔 맥주를 들고 거실로 돌아온 윤재는 은호의 노트북 화면을 흘긋 들여다보고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말고 내일 해요.”
“네?”
“급한 거 아니야. 시간은 얼마든지 많아.”
캔 맥주를 옆에 내려놓고 은호를 등 뒤에서 감싸듯 안아 주는 것 같더니, 윤재의 손가락이 터치패드 위로 올라와 하던 작업을 저장한 뒤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은호는 태연하게 노트북을 접는 윤재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일하라고 데리고 온 거 아닌데. 너무 일에만 몰두하네.”
은호는 캔 맥주를 손에 쥐여 주며 쉬라고 하는 그를 삐딱한 눈초리로 올려다봤다. 굳이 일찍 제주도를 내려가는 이유도, 출발 전날 같이 자고 나가자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 최근에는 근무 시간과 개인 시간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윤재가 사적인 시간의 틈을 자꾸 비집고 들어왔다.
“근데요. 이렇게 서둘러 가려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궁금해요?”
“네… 뭐…….”
현준과 관계의 끈이 가늘어졌다고는 하나 아직 끝난 인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재는 시간이 갈수록 현준을 의식하지 않고 멋대로 은호를 휘둘렀다.
단번에 캔 맥주 절반을 삼킨 윤재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진중한 투로 대답했다.
“운명을 바꿀 기회라고나 할까.”
“…운명이요?”
“너무 거창한가…… 음.”
윤재는 딱히 그 단어 외엔 어울리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뜬구름 잡는 듯한 대답에 미간을 좁히던 은호는 그의 뛰어난 예측 능력으로 환상적인 투자처를 찾은 건가 싶어 다시금 말을 붙였다.
“스튜디오 G보다 더 스펙터클 하나 보죠?”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게 아니라 당신 운명이라고.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다시금 목구멍으로 삼키고 의미를 돌려 말하자 잘못 이해한 은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당연히 가야죠.”
윤재는 은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요 며칠 내내 휴대폰으로 들어오는 현준의 뒷조사 결과는 가관이었다. 공부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둘이 붙어 있다는 보고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은호에게 생활비를 받아 배달로 시켜 먹는 음식엔 술이 꼭 포함되어 있었고, 둘은 학원에 있는 시간보다 집에서 뒹구는 시간이 더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은호에게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헤어지라고 권유하고 싶었으나 과거 은호를 생각하면 충격에 굉장히 민감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지난달, 마음만 먹으면 한 번 더 참고 넘어갈 수 있었음에도 마음을 고백했던 이유는 언제가 될지 모르나 은호가 현준의 양다리를 혹 직접 목격하였을 때, 벼랑 끝에 혼자 서 있는 게 아니라 곁에서 손잡아 줄 사람이 있다는 정서적 위안을 주기 위함이었다. 지금 당장은 배덕감에 끙끙거릴 테지만 추후 쓰레기 같은 장면을 목격하였을 때 덜 억울해하길 바라는 일종의 완충제였다.
생각 없이 마시다 보니 각자 마신 술이 세 캔이 넘어갔다. 술에 취한 은호의 몸이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윤재가 은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발그스레한 볼 위로 잔열감이 전해졌다.
윤재는 은호의 등과 무릎 아래에 팔을 밀어 넣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품 안으로 착실하게 감겨드는 몸이 하늘거렸다. 초점이 나가 풀려 버린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게 의미 없는 공간을 훑었다.
윤재는 조용히 침실로 들어가 은호를 눕히고 옆으로 밀어둔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그사이 은호는 눈꺼풀을 감고 고요히 깊은 수면으로 침잠되었다.
“……타이밍이 맞았으면 좋겠는데.”
흐트러진 은호의 앞머리를 정돈하던 윤재는 주문을 외우듯 속삭였다. 시간이 되돌아온 이후 아쉬웠던 일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남아 있는 일정이었다. 부디 예상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며 윤재는 상체를 숙여 은호의 봉긋한 이마 위에 입술을 붙였다.
까마득하게 가라앉은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은호는 손으로 얼굴을 비비려다 뭔가에 묶인 것처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 잠이 든 거지?’
이상하게 윤재와 같이 있으면 쉽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윤재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싶었다. 평소 휴대폰 진동에도 깰 정도로 얕은 잠을 자던 은호가 윤재와 함께 있으면 마취를 한 것처럼 의식이 끊어졌다 되살아났다.
실크 로브를 걸치고 은호를 끌어안고 잠든 윤재 또한 깊게 잠이 들었는지 은호의 기척에도 반응이 없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의 페로몬이 옅게 넘실거렸다.
“…….”
선명한 이목구비가 보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외모였다. 어깨 한쪽을 은호에게 내어 주어 제법 저리고 아플 텐데도 곤히 잠든 얼굴 위로 불편한 기색이 비치지 않았다. 은호는 근육으로 다져진 가슴팍에 볼을 비비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몸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복잡했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눈을 뜬 윤재가 냉수 한 잔을 들고 느긋이 피트니스룸으로 들어가 TV를 켰다. 출발 시각이 11시 50분이라 평소보다 여유가 있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새벽 한 시 인천 세진 컨테이너 공장에서 시작된 불이 여섯 시간 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헬기까지 동원되어 화재 진압을 하고 있지만 좀처럼 불길이…….]
스퍼트를 올리며 뛰던 윤재는 속도를 다시 내리며 천천히 걸었다. 안타까운 뉴스 기사를 접하는 얼굴 위로 묘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기억의 그 날이 돌아왔다. 그때 은호는 회의 도중에 현준의 연락을 받고 조퇴를 했고, 그 이후 돌이키기 힘든 수렁에 빠진다.
윤재는 다시 속도계를 올리려다 러닝 머신 위에서 내려왔다. 한가하게 운동을 할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트니스룸에서 나와 샤워실로 곧장 들어갔다.
새벽에 잠깐 깼다 다시 잠든 은호는 머리맡을 울리는 진동에 노곤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팔을 더듬어 휴대폰을 집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지.’
평소 자기 전에야 겨우 연락이 닿을까 말까 한 현준이 이른 아침에 먼저 연락을 취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잠기운이 달아난 은호는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현준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지만 자다 깬 상태라 목구멍이 건조해 갈라지는 음성이 새어 나갔다.
- 은호야. 보고 싶어.
“……어?”
- 보고 싶어, …은호야. 얼른 와줘.
“무슨 일인데?”
- …보고 싶어. 제발….
스피커를 타고 들려온 목소리가 너무도 거칠었다. 다급한 숨소리가 찌르듯이 귓속을 파고들자 은호는 무슨 일인가 싶어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 10분,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는 한참 남은 시간.
다급하게 자신을 찾는 현준의 연락이 오랜만이어서 덩달아 흥분한 은호는 손가락을 잘근거리며 고민에 휩싸였다. 오늘 가면 금요일까지 제주도에 머물러야 하는데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춰야 하나. 초조하게 듣고 있던 은호는 캐리어를 찾으러 급하게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만, 기다려 봐. 출발하면서 다시 연락할게.”
거친 질감이 더해진 현준의 애원하는 목소리에 은호는 마음이 급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럴 애가 아닌데.
거실에 세워 놓은 캐리어를 열어 세면도구와 입고 갈 옷가지를 챙긴 은호는 방 안을 서성이다 서둘러 샤워실로 들어갔다.
시간은 촉박한데 뭐부터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은호는 샤워기를 들었다가 도로 내려놨다. 씻고 말리고 하면 20분은 그냥 지나갈 텐데 한가하게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은호는 씻는 걸 포기하고 급하게 세수와 양치질로 마무리 지은 후 옷을 갈아입고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
거실로 나가자 막 씻고 나온 윤재가 은호의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채로.
“뭐 하시는 거예요?”
휴대폰을 뺏어 확인하자 예상했던 대로 현준이었다. 얼마나 급한 일인지 현준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빨리 오라고 은호를 다그쳤다. 그에게 뭐라 답을 하려는 찰나, 손안에서 휴대폰이 사라졌다.
“전무님?”
“…….”
“아니… 뭐 하…….”
재빠르게 휴대폰을 낚아챈 윤재가 말도 없이 통화를 종료하더니 보란 듯이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그의 돌발 행동에 순간 상사라는 걸 망각하고 화를 쏟아부을 뻔한 은호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렇지 않으면 격앙된 말이 그대로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전무님, 휴대폰 주세요.”
“내 소원 들어주기로 했던 거 지금 쓸게요.”
이게 무슨 말이야. 은호는 그가 하는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그가 바지 호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은 후 두 손을 들어 은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의 눈동자에 단호함이 가득했다.
“휴대폰 내가 가지고 있을게요.”
“네?”
“이게 내 소원이에요.”
“전무님!”
윤재는 농담이 아님을 눈빛으로 담아냈다. 소원이라 하면 보통 근사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게 정석 아니던가? 한 사람의 통신 수단을 그것도 며칠이나 차단하겠다는 걸 소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은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뭐라 답을 내릴지 몰라 망설였다.
“부탁이야. 내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들어서 아시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 같은…….”
“러트잖아.”
“……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맘때쯤이 현준의 러트 기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현준은 다른 알파와 달리 주기가 굉장히 길어 러트가 1년 중 한 번 올까 말까 해 굳이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으스대곤 했다.
애인인 자신도 현준이 러트가 온 것을 몰랐는데 목소리 한 번만 들은 윤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걸까. 은호는 현준이 러트라고 하니 휴대폰을 뺏는 윤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이 뒤집히자 전세가 급격히 역전되었다.
“왜 간다고 그랬어요?”
“아니… 그러니까.”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호는 입술을 깨물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한풀 꺾인 기세를 읽은 윤재는 근처에 둔 캐리어를 서둘러 챙겼다.
“휴대폰은 서울로 되돌아오는 날 줄게요, 지금 나가죠.”
“시간 한참 남았잖아요.”
“바로 출발할 수 있는 티켓이 남아 있으면 당장 바꿀 거야.”
지고 싶지 않은 알파 특유의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윤재는 보란 듯이 은호의 캐리어까지 들고 현관 밖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아침을 준비하던 도우미 아주머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차렸던 음식을 조용히 용기에 다시 담았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싸늘해진 공간에 적막만 가득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은호는 서둘러 그를 뒤쫓았다.
“왜 이리 몰아붙이는데요.”
“일단 제주도 도착해서 이야기해.”
운전석으로 가려는 은호를 붙잡아 조수석으로 밀어 넣는 윤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얼떨결에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는 은호는 운전대를 잡고 후진하는 윤재에게 초조한 투로 물었다. 윤재와 현준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진짜… 소원이 휴대폰 압수예요?”
“농담 아닌 거 알잖아.”
“아니, 전무님.”
봐 달라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한숨을 푹푹 쉬는 은호를 일부러 외면한 윤재는 턱 끝에 힘을 주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마음 같아선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고스란히 밝히고 싶었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게 뻔했다. 은호는 다시 한번 답답한 속을 짓누르며 참고 버텼다.
공항으로 가는 도중 제주도행 비행기 시간을 두 시간 앞당겼다. 다행히 평일인 데다 비즈니스 클래스가 남아 있어 변경이 가능했다. 윤재가 장기 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캐리어를 두 개 모두 끌고 성큼성큼 걸어가자 은호는 그를 마지못해 따라갔다. 현준과 윤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름거리다 순식간에 비행기에 탑승한 은호는 간행물을 읽는 윤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한 비서님께 받은 일정으로는 정해진 일이 없던데요.”
“없어요.”
“네?”
“쉬러 가는 거야.”
순간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결국 아침부터 서둘러 비행기를 탑승한 이유는 일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현준의 연락으로 인한 윤재의 반발 심리였다. 심지어 일찍 떠나는 이유가 비즈니스 목적도 아니고 휴식 때문이라니. 은호는 한동안 목석처럼 굳어 있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윤재의 행동을 여러 번 곱씹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이 사달의 시작은 은호 본인이었다. 애인이 있음에도 따뜻한 관심을 주는 최윤재에게 빠져 양다리를 걸친 게 화근이었다. 한쪽을 빨리 정리했어야 했는데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었더니 결국 원치 않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은호는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집어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속 카운터로 향했다. 돌발적인 은호의 행동에 다급해진 윤재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어디 가요.”
“쉬는 거라면서요. 일정 없으면 오늘 하루 연차 내고 올라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윤재에게 무례한 행동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남은 동지애에 가까운 감정이 현준에게 발길을 돌리도록 했다. 연애하면서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다 받아 준 세월이 3년이 넘는데, 구차하지만 마지막에 와서 엉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윤재의 성난 페로몬이 날뛰며 큰 파장을 만들어내자 은호의 페로몬도 덩달아 요동쳤다.
“왜 이러는데.”
“기다려 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앞으로 한 달이면 돼요.”
“유은호 씨.”
“시험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헤어질 거라고요. 그때까지 못 기다려 주시는 거라면 저는 그냥 제자리에 있겠습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팝콘 터지듯 튀어 나갔다. 내뱉으면서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반작용처럼 이상하게 튀었다. 머릿속이 현준에게 가야한다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으로 양분화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유은호!”
되돌아선 은호를 붙잡은 윤재가 작정한 듯 캐리어를 뺏어 자신의 뒤로 감추었다. 그는 할 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표정으로 우뚝하니 서서 버티다, 답답한지 목을 조이던 타이를 거칠게 풀며 혀로 볼 안쪽을 쓸었다.
“왜 너 자신보다 그 사람이 먼저인데.”
“전무님.”
“그 사람이 뭐라고 자신을 희생하냐고.”
양다리 걸친 죄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은호의 죄책감 가득한 표정이 윤재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미친 척 바람피우는 현준의 사진을 모두 보여 주고 그럴 값어치도 없는 놈이라고 말할까, 아니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 현준의 집을 급습할까.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은호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준은 은호와 연락이 끊기자 새로 사귄 애인을 호출했다. 착륙한 후 휴대폰을 켜자마자 현준의 뒷조사를 의뢰한 곳에서 들어온 메시지에는 새 애인이 조금 전 현준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보고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오래 사귄 연인이고, 본인이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니 삼자가 나서서 최악의 꼴을 보여 주는 건 옳지 않아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호가 자꾸 부추기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윤재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런 거 생각하지 않아도 그 친구 잘 먹고 잘 살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요.”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보지만 은호의 의지가 너무도 확고한 탓에 먹혀들지를 않는다. 여기서 언성이 높아지는 순간, 퇴사까지 고려하겠다는 은호의 분위기를 감지한 윤재는 그를 조심스럽게 어르고 타일렀다. 정 안되면 매달려서라도 못 가게 막을 생각이었다.
“올라가서 뭐 하려고.”
“사적인 부분까지 전무님께 보고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무례해 보이겠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은호가 정중히 묵례하며 돌아서자 윤재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목표치 앞에 거의 다 와서 되돌아가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윤재는 애원조로 길을 막았다.
“가지 마, 부탁이야.”
전 애인이었던 준서에게조차 이렇게 매달려 본 적은 없었다. 살면서 무언가를 절박하게 원해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엄청난 노력을 퍼붓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시 스쳤지만 과거로 돌아오기 전 트럭에 받혀 허공 위를 날던 은호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다시금 마음을 붙잡고 포기하지 않았다.
“시험 끝나고 헤어지겠다는 건 결국 나에게 오겠다는 뜻이잖아.”
“…….”
“그때 가서 마음 주지 말고 지금부터 날 잡으라고.”
구애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는 윤재조차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는 비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렸다.
“내가 그 친구보다 그렇게 별로야?”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마지막 비장의 카드인 질투까지 선보이자 은호가 단호하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 타이밍에서 은호가 가만히 있었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알아서 하라고 손을 놔 버릴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자존심의 마지막 선은 지킬 수 있었다.
자칫 체면까지 구겨질 뻔했던 윤재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은호를 바르게 직시했다.
“그럼 가지 마.”
“…….”
윤재가 은근히 붙잡아 주기를 바랐던 걸까? 그의 간절한 말투에 은호도 되돌아가려는 마음이 조금씩 옅어졌다.
윤재는 은호의 손을 붙잡아 엄지로 손등을 문질렀다.
“곁에 있어 줘. 부탁할게.”
죄책감을 줄줄이 달고 있는 은호를 내려다보는 윤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이리 와.”
은호의 등을 쓸어내리며 토닥이자 한참을 망설이던 발걸음이 천천히 움직였다.
윤재는 예약해 둔 차의 조수석에 은호를 태우고 운전석으로 가 나직하게 한숨을 몰아쉬며 차 문을 열었다.
“제가 운전하면 안 될까요?”
“미팅 가는 날에는 은호 씨가 운전하고, 쉴 땐 내가 할게요.”
기세가 한풀 꺾인 은호는 슬슬 윤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음을 돌려세우고 윤재의 입장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니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그인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내가 뭐가 좋다고 붙잡는 걸까?’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은호는 마른세수를 하다 고개를 돌렸다.
“전무님.”
“왜 이리 진지하게 불러, 겁나게.”
진지하게 분위기를 몰아가고픈데 이미 그는 부드럽게 풀리다 못해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근무 시간인 걸 제가 망각했어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몇 번이고 고민하고 내놓은 답변임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은호와 다르게 윤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아, 진짜 분위기 편승해 주면 안 되나? 괜히 말했나 봐.’
은호가 눈살을 구기자 서늘한 분위기를 읽은 윤재가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는 척하며 은호를 내려다봤다.
“미안하면 이곳에 있을 동안 그 생각을 지워 봐요.”
윤재는 하나씩 어긋나게 하다 보면 은호의 운명이 바뀔 거라 굳게 믿었다. 이미 현준의 러트 날 은호 대신 새 애인이 방문했으니 하나씩 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균열은 아주 미세하게 시작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몸집을 부풀린다. 은호의 사건도 미세한 틈을 찾아 천천히 벌리다 보면 결과는 판이하게 바뀔 것이다. 윤재는 뻑뻑해진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운전에 집중했다.
어찌어찌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식사를 마쳤지만 데면데면해진 관계는 밤이 되어서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항공권 발권을 포기한 은호는 마음을 비웠지만 시위하듯 종종 말을 섞지 않고 따로 움직였다. 은호는 잡념을 지운답시고 다음 주 업무 스케줄을 확인하더니 보란 듯이 테이블에 앉아 자판을 두드렸다.
타닥타닥.
건조하고 딱딱한 타자 소리가 공간을 넘나들며 윤재의 귓가에 꽂혀 들었다.
“일하러 온 거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내일 낮에 가 볼 만한 코스 확인해 볼게요.”
단단히 뿔이 오른 건 아니나, 그렇다고 실실 웃어넘기기도 곤란했다. 마음이 심란한 은호는 반 자포자기식으로 포털 화면을 열어 관광 코스를 검색했다.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님 갈 데까지 간 걸까. 명확한 상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를 만만하게 대하게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 윤재도 느끼고 있을 텐데 매번 이해하고 넘어가 주니, 은호는 자꾸 비서로서의 직무 위험 수위를 넘나들게 된다.
“일단 밖으로 나가죠.”
차 키를 꺼내 들지 않는 거로 봐서 윤재는 가까운 산책을 원하는 눈치였다. 은호는 노트북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벚꽃이 벌써 떨어지네요.”
호텔 뒤뜰에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숲길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하얀색 꽃잎이 어깨를 스치고 빠르게 떨어졌다. 은호는 꽃잎을 잡아 볼 요량으로 손바닥을 내밀었고 윤재는 말없이 은호의 행동을 지켜보며 뒷짐 지고 걸었다.
“기분 좀 풀려요?”
그의 느른한 음성에 고개를 돌린 은호가 조용히 멈춰 섰다. 고적한 표정에는 작은 웃음기조차 없었다. 사실 은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윤재는 알 수 있었다. 넘실거리는 그의 페로몬은 달달함은커녕 무향에 가까웠다.
“아직 안 풀렸네.”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애인을 두고 작당 모의를 하고 있다는 배덕감이 은호의 목을 졸랐다. 차라리 현준이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당장에라도 헤어지자고 할 텐데,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삼수생을 단칼에 잘라내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천성이 싸우기를 싫어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지내는 탓이라지만 결국 이것 또한 변명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 복잡한 거 알아요. 그런데…….”
“…….”
“결혼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자책하는지 모르겠어.”
윤재는 은호를 부추겼다. 마치 별거 아닌 일에 시간 낭비를 한다는 듯. 그가 감정을 쏙 빼고 논리정연하게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은호도 덩달아 흔들렸다.
“오래 사귄 거 알아, 근데 내가 하나는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어요.”
“전무님.”
“은호 씨가 너무 아까워.”
“…….”
“아쉬울 게 없어. 도의적인 책임감? 그거 괜한 마음 씀씀이일 수도 있다고.”
땅이 꺼질 것처럼 은호의 긴 한숨이 꽃잎과 함께 흩어졌다. 은호는 한 달째 도돌이표처럼 제자리에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윤재의 말처럼 시험을 핑계 삼지 말고 그냥 끝내 버릴까 고민도 됐다. 솔직히 현준이 수험생이 된 이후 애인보다는 물주의 역할이 컸다.
은호는 발치 아래에 제법 큰 돌이 있어 구두로 슥 밀어내려다가 여의치 않자 손으로 들어 근처 풀숲에 던졌다. 행여 길을 지나던 다른 사람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 나름의 배려였다. 은호는 늘 그랬다. 자신이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남을 우선으로 챙겼다.
호텔 맞은편 건물에 비치된 와이드 전광판의 불빛이 반사되어 바닥이 번쩍거렸다. 그 빛에 고개를 들어 올리니 제주도 홍보 영상 사이사이 단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포털 첫 화면에도 도배됐던 화재 사고였다.
『세진 컨테이너 공장 화재 20시간째 진화 중. 다행히 사망자는 없어』
건조한 봄 날씨여서 그런지 요즘 따라 부쩍 화재가 잦았다.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전광판을 보던 윤재가 독백처럼 작게 읊조렸다.
“있는데… 경비 아저씨.”
경비 아저씨?
은호는 전후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물을까 하다가 신경을 껐다.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도 아니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까지 관여하는 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벚꽃길을 한 시간 가까이 걷고 호텔로 돌아왔을 땐 배가 몹시 출출했다. 하필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 들리게 꼬르륵 소리가 울려 은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윤재는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메뉴판을 펼쳐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내내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배꼽 알람 소리 하나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세진 컨테이너 공장 화재 22시간째 진화 중. 사망자 발생』
씻고 거실로 나와 생각 없이 TV를 틀었는데 때마침 화재 뉴스 기사가 속보로 떴다. 종일 진화되지 않는 불길에 소방 인력이 100명 넘게 투입되었지만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근래에 발생한 산불 중 이토록 잡히지 않는 불은 처음이었다.
규모가 큰 공장이라 그런가, 은호가 생각하던 찰나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은호는 놀라 들고 있던 리모컨을 떨어뜨릴 뻔했다.
[사망자는 컨테이너 공장의 경비원 조 모 씨로, 화재 당시 실종되었으나 건물 2층에서 발견되어 시신을 처리 중인 것으로……]
“전무님!”
은호의 다급한 외침에 막 씻고 나온 윤재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마주친 은호의 눈동자가 TV로 향하자 윤재의 눈길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컨테이너 공장 화재요. 산책 나갔을 때 외벽 전광판 보면서 했던 말 기억하세요?”
“…….”
“경비 아저씨라고 분명 들었거든요. 근데…….”
은호가 그걸 들었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는 일순 정지 영상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그가 느릿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은호를 내려다봤다.
“혹시, 예지 능력 있어요?”
은호는 자기가 말을 내뱉고도 난감한지 어깨를 으쓱였다. 윤재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젖은 수건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한데.”
“…….”
“그럼 어떻게 아신 거예요? 분명히 들었다고요. 경비 아저씨라고 하는 말.”
파우더룸까지 쫓아와 헤어드라이어 코드를 꽂아 주던 은호는 답을 듣고 싶은지 눈동자를 반짝였다. 윤재는 냉풍으로 머리를 말리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냥, 꿈에서 보였어요.”
“……예지몽 말하는 거죠?”
“기시감이 느껴져서 한 말인데 용케 알아들었네.”
있는 대로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뿐더러 믿는다 한들 더 많은 걸 물어보는 순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해질 것이다. 상황을 어물쩍 넘어가려던 윤재는 이어지는 은호의 다음 말에 짤막한 웃음이 터졌다.
“또 뭐 본 거 있어요? 로또 번호라든가… 아, 주말이 아니어서 안 보이겠구나.”
“큭.”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끈 윤재가 화장대에 등을 기대고 한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모른다고 고개를 옆으로 젓자 목덜미를 문지르던 은호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무음의 탄성을 던졌다.
“……혹시? 러트도 그래서 아신 거예요?”
윤재는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온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이걸 어떻게 추측한 걸까. 윤재는 머리로는 고민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나 역술인 아닌데.”
“네… 그렇죠.”
미간을 좁히며 말을 아끼던 은호가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허벅지 사이로 손을 끼워 넣고 손가락 끝으로 의자 쿠션을 톡톡 튕겼다.
“좀 이상해서…….”
“뭐가 이상한데요?”
“갑자기 쉬러 내려온 건 그렇다 쳐도 오늘 전무님 행동이 좀…….”
은호는 오늘 있었던 일련의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윤재를 올려다봤다.
“솔직히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전무님은 아쉬울 게 없어요. 오히려 화를 내는 게 옳죠. 그래, 네 마음대로 가. 대신 사표 쓰고 가든가.”
당시 윤재의 페로몬은 급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서 몇 번이나 어지러웠는지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 페로몬 파동이 컸다는 건 화가 난 감정을 계속해서 억눌렀다는 건데 그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화를 쏟아내거나 페로몬으로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지만, 윤재는 이 모든 걸 이용하지 않았다.
“근데 저를 끝까지 설득해서 가지 못하게 막았어요. 마치 돌아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요.”
쉬운 방법을 놔두고 왜 그런 건데요? 재차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질문에 윤재의 이마에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추리 소설 써 보지 그래요. 하면 잘할 거 같은데.”
“농담하지 마시고요.”
윤재가 대충 넘기려고 하자 은호는 원천 봉쇄하듯 길목을 모두 차단했다.
“왜 화를 참으면서까지 절 말리신 거예요?”
“음.”
“꿈속에서 뭘 본 거죠?”
“……날 취조하는 건가?”
수세에 몰리자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윤재가 말끝을 살짝 눌렀다. 은호는 너무 몰아붙였나 싶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 뜻 아닌 거 아시잖아요.”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확실한 답을 요구했다. 윤재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진지하게 답변했다.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우습게 들리겠지만 뺏기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사실이었다. 뺏기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100% 온전한 사랑 때문이라고는 자신하기 어렵지만 은호를 뺏기는 듯한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었다. 윤재의 흔들림 없는 말투에 은호는 미약한 숨소리를 흘렸다.
“할 말 없게 만드시네요.”
은호는 다 가진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그럴까 늘 고민했다. 최윤재가 부담스러운 건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배경과 사회적 지위였다. 적당히 차이 나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은호가 생각하는 기준치를 한참 넘어섰다. 그래서 그가 종종 구애와 같은 말을 내뱉어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지속성이 문제였다.
윤재는 팔짱을 풀고 은호 앞에 다가와 주저앉았다.
“은호 씨 마음 불편할까 봐 엄청 참고 있는데, 너무 몰라 주면 가끔 서운해. 그건 알아요?”
“하, 전무니이임.”
“얼른 마음 정리하고 돌아와요. 기다리다 숨넘어가겠어.”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자 얼추 눈높이가 맞춰졌다. 윤재는 은호의 뽀얀 두 뺨을 붙잡고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손끝에 닿은 피부에서 전달되는 체열과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페로몬으로 그가 오메가를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럴게요.”
그의 진심 어린 말이 결국 은호의 마음을 움직였다. 최근 석 달 가까이 현준과는 흔한 스킨십조차 없이 지나갔다. 시험공부가 이유였지만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은호 또한 모르지 않았다.
언제라고 딱 집어 말하기 곤란하지만 은호는 현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이 이미 떠나 버렸음을 깨달았다. 알지만 애써 부인했고, 그랬기에 더욱 외로웠다. 예고된 이별을 혼자 감내하는 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1%에 희망을 걸며 무작정 시간을 흘려보내는 도중 어느 순간부터 윤재가 자신을 바라봐 주고 있었다. 이제야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올곧게 섰다.
윤재의 말대로 현준이 러트가 온 게 사실이라면 돌아가는 즉시 크게 싸울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헤어질 거 질려서 끝내는 게 빨리 잊는 방법일지도. 은호는 윤재를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윤재는 소파에 기대어 졸고 있는 은호를 조심스럽게 안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따뜻한 체온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은호는 그를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오전에 비해 한결 편해진 은호의 태도에 윤재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은호를 눕히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가슴까지 올렸다. 윤재는 침대 모퉁이에 비스듬히 앉아 곤히 잠든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 은호는 지금과 다르게 오피스 비서로 근무했다. 한 비서가 수행을 담당하면서 리포트 쪽으로 놓치는 구멍이 잦아 추가로 뽑은 인력이었는데, 당시 윤 실장의 안목으로 고른 인재다 보니 윤재는 그를 믿고 메인 업무를 바로 맡겼다. 다행히 은호는 기대에 부응하듯 배운 것들을 빠르게 흡수했고, 입사 한 달 만에 유성창투 사업 전체 흐름을 꿰뚫게 되었다.
사실 첫인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회의 때마다 문득문득 스치는 페로몬 향이 과거 준서를 떠올리게 해 그와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그때 뭔가 감을 잡은 건지, 은호는 어느 날부턴가 베타로 착각할 정도로 향이 빠져 윤재의 곤두섰던 신경은 서서히 가라앉을 수 있었다. 당시 은호는 소취제를 뿌리며 열심히 페로몬을 감추었다.
어느 날 윤재가 예고 없이 비서실 회식에 참석했다. 느닷없는 윤재의 출현에 긴장한 은호는 저도 모르게 주문한 게를 먹었다. 그 직후 그는 두드러기가 올라와, 팀원들이 급히 약을 사 오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은호에게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 줄 몰랐던 직원들은 알았으면 횟집에서 회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미안해했지만 은호는 괜찮다며 대충 웃어넘겼다. 윤재는 그날 은호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달 후 한 비서와 함께 DS 포럼을 간 윤재는 러트 온 알파가 오메가를 취하려던 아찔한 사고를 목격하게 되었다. 심지어 다음 날 회사 건물 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러트와 히트사이클을 최대한 조절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회사나 공식 석상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알파의 러트로 겁탈 사고가 연이어 터지자 윤재는 이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었다.
한 비서와 함께 싱가포르 출장을 떠났다가 업데이트 전 버전의 리포트를 가지고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뻔한 아찔한 사고가 있었다. 은호가 챙겨 줬음에도 열어 보지 않고 기존 것이 최종 리포트라고 착각해 사고가 터졌고, 한 비서는 윤재의 시선 밖으로 서서히 밀려났다. 중요한 자리의 실수를 용납지 못하는 그의 성격 탓에 한 비서는 스케줄 관리까지만 책임지고 그때부터 은호와 일적으로 붙는 일이 잦아졌다.
돌아오는 길에 한 비서가 명품관에서 조용히 지갑 하나를 골랐다. 선물이냐 물었더니 유 비서의 부탁이라고 대답하며, 애인에게 줄 선물이라는 말에 윤재는 고개를 저으며 웃어넘겼다.
회사 내에서 스튜디오 G와 B-gate의 투자 건으로 한참 전략 총괄본부가 바쁘게 돌아갔다. 당시 B-gate에 투자를 감행했는데, 한 대표의 적극 추천도 있었지만 윤재도 가능성을 따져 B-gate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재무제표상으론 흠잡을 곳이 없었고, 사회적 붐이 곧 크게 일어날 분위기였기에 상당히 매력적인 투자처였다.
하지만 예상은 보란 듯이 어긋났다. 투자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던 어느 날, 정부에서 코인 쪽으로 시중 자금이 몰리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질질 끌고 있던 각종 법안을 모조리 통과시켰다. 몇 년째 소문만 무성하고 지지부진했던 법안이 순식간에 통과되자 정치권과의 끈이 약했던 윤재는 뒤늦게 상황을 접한 후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B-gate 회사 대표가 고객 예탁금 및 투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고 잠적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고, 윤재는 막대한 피해를 보전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스케줄은 최적으로 관리하나 투자에 관련된 지식은 기준 미달인 한 비서와 달리, 은호는 총괄 투자본부에 올라오는 투자처를 윤재의 입맛에 맞춰 꼼꼼하게 정리해서 올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의 우선 순서를 정확히 알고 제시간에 맞춰 완벽한 데이터를 뽑아내 윤재도 한 비서보다 은호를 먼저 찾으며 점점 마음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인천 컨테이너 공장 화재 사건 날, 회의에 참석한 은호의 갑작스러운 조퇴에 윤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안 그래도 투자 문제로 한껏 예민해진 상태임을 알면서도 은호가 이렇다 할 이야기 없이 자리를 이탈하자 윤재는 그에게 더는 신경 쓰기 싫어 일에만 몰두했다. 이후 한 비서에게 애인의 급한 호출로 휴가를 냈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그 이유가 러트라는 말에 윤재는 대꾸 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B-gate 대표의 해외 잠적으로 거래소 현금 거래량이 급격하게 줄자 투자 리스크에 대한 계약서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여파는 고스란히 한 대표에게 넘어갔고, 윤재까지 영향권에 들었다. 그사이 윤재는 은호의 애인이 필기 합격 라인에 들어갔다며 축하받는 걸 목격하게 되었다.
상황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최서령이 찾아와 주주총회를 열 테니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나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한 대표와 윤재는 다른 투자처를 물색하며 고객 자금의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윤재는 급변하는 상황에 은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은호가 많이 이상해졌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를 떠나보내고 한 비서가 들려준 내용으로 추측해 보건대 퇴근 후 현준의 집에서 새 애인을 만났을 때, 현준이 적반하장으로 나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거기까지 신경이 미치지 못하고 넘기기를 일주일, 예비비로 묶어 둔 자금을 풀고, 다른 투자처 모색을 위해 미팅을 갔다 온 사이 사고가 터지고 은호를 떠나보냈다.
여기까지가 윤재가 기억하던 그 당시의 사건과 기록이었다.
몇 년을 거스른 것이 아닌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어서, 그가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잘못된 투자와 은호의 죽음이 전부인 상황. 물론 자잘한 이슈나 당시 기억나던 주식 시장 상황은 중간중간 해당 본부에 첨언 정도로 이야기를 건네 괜찮은 실적을 거두었지만 모두 윤재가 움직였던 범위 내에서의 변동 정도였다.
“노력하는 걸 알아달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내 말 좀 들어 줘.”
곤히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도둑 고백하듯 작게 속삭였다. 종일 통통 튕기듯 행동한 은호 때문에 진땀을 뺀 윤재는 꾹꾹 눌러둔 속내를 털며 하루를 무사히 넘긴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스탠드 등 하나만 켜 두고 실내 등을 끄자 은은한 조명 아래 누워 있는 은호가 유독 인형처럼 보였다. 한참을 넋 놓고 서서 지켜보다 몸을 돌린 윤재는 조용히 거실로 나와 휴대폰을 집었다.
“…….”
의뢰한 곳에서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하니 현준은 집 밖으로 나간 뒤 종일 움직임이 없었다. 새 애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는 건가. 마지막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는 윤재의 눈매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후.”
중요한 시점에 둘 사이를 떼어 놓았기 때문에 현준은 은호를 더 봐 주지 않을 테고, 새 애인과 놀아날 것이다. 다만 은호를 물주로 이용하고자 끈을 유지할 텐데 윤재 입장에선 그것마저도 불쾌했다. 제주도에 있는 사흘간 최대한 마음을 돌려 둘 사이를 끊어 놓을 작정이었다.
은호가 더는 끌려가는 일 없도록.
***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건지 은호는 새벽녘부터 몸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열이 나는 건 둘째치고 눈앞이 핑핑 돌아 침대에서 발을 내리다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을 만큼 식은땀이 흘러 옷깃의 목덜미 부분을 적셨다. 은호는 기어서라도 거실로 나가 캐리어에서 구급약을 꺼내 먹고 싶었지만 좀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발이 저리고 덜덜 떨렸다. 은호는 딸려 온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거친 숨을 골랐다.
“…전 …무님.”
말하는 것조차 힘이 들어 목소리가 끊겼다. 문이 굳게 닫힌 데다 야심한 새벽이라 더더욱 들리지 않을 텐데도 너무 아프고 힘들다 보니 절박한 마음에 윤재를 찾았다. 부은 목을 쥐어짜 겨우 말을 밀어내 보지만 시원하게 터지지 않았다.
“전… 무…….”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밝은 빛이 들이쳤다. 문을 열고 침대 위를 훑던 윤재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이불과 함께 엉켜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은호를 발견했다.
큼지막한 손이 등허리로 들어오더니 몸이 붕 떠올랐다. 부유감이 심해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팔이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왜 이래?”
은호를 침대에 반듯이 눕힌 윤재는 푹 젖은 머리칼을 들춰 이마의 열부터 확인했다. 손바닥을 순식간에 달굴 정도로 열이 높자 당황한 윤재가 휴대폰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리… 어에… 약.”
“약으로 안 돼. 잠시만 기다려요.”
펄펄 끓어오른 열이 온몸에서 계속 빠져나가자 은호는 이불을 쥐고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오한이 오는 것처럼 이가 달달 떨리고 머리는 극심하게 어지러웠다. 뇌 일부가 녹아내린 것처럼 사리 판단이 어렵고 시야마저 불투명했다.
“유은호.”
이불을 젖힌 윤재가 은호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후 상체를 일으켜 안았다. 윤재의 어깨 가까이에서 흘러나온 페로몬이 괜찮아질 거라고 위안하는 것처럼 은호에게 천천히 스며들었다. 은호는 그가 자신을 도와줄 거란 믿음 하나로 의식을 꺼트렸다.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지치고 힘들었다.
은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새까만 어두움이 내려앉은 낯선 공간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고민하던 은호는 이내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병원 침대 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열이 한풀 꺾인 걸까. 눈을 떴을 때, 몸 안에 고여 있던 열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느낌은 없었지만 어지러운 건 여전했다. 보통 몸살이 오기 직전, 편두통을 시작으로 몸이 으스러지도록 아픈데, 전조 증상 없이 자는 도중 나가떨어지는 일은 처음이라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팔을 들어 올리려다 낯선 무게감이 전해진 은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미약한 움직임에 손을 붙잡고 엎드려 잠들었던 윤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은호를 살폈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한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꼼꼼하게 자신을 살피고 눈을 맞추는 그에게 마음이 뭉클하게 달아올랐다.
“괜찮아요?”
“네.”
이마를 덮는 손이 아직 찬 걸 봐선 열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몰랐어요.”
정말로 몰랐다고요. 쌕쌕거리며 힘없이 웃으니 이마를 반쯤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어내던 윤재가 가까이 다가왔다. 눈앞이 어두워지며 사물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깜깜해지려는 찰나, 이마 위에서 부드럽고 촉촉한 살결이 느껴졌다. 그가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떼며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더 자요.”
“……전무님이야말로 가서 주무세요. 아침에 제가 알아서 퇴원할게요.”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어둡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병실에 홀로 두고 가라니. 형식적인 말을 뱉으면서도 은근히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마음이 섞였는데, 그는 은호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사람을 나쁘게 만들려는 재주가 있네.”
“…….”
“그렇게 말하면 마음 편한가?”
기운 없는 얼굴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자 윤재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는 수액 줄이 꼽힌 손등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작게 읊조렸다.
“아무 말 말고 자요. 일정 없으니까 미안해 말고.”
속병이 나는 바람에 의도치 않은 휴가를 얻게 된 은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창밖에서 들이치는 달빛이 윤재의 얼굴을 곱게 쓸어내리며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긴 속눈썹만큼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의 눈이 짙고도 깊었다. 은호는 은은하게 미소 짓는 그를 향해 두 팔을 허공으로 뻗었다.
안아 주세요. 말로 표현하지도 않고 팔을 시트 위에서 조금 띄웠을 뿐인데 윤재는 철석같이 알아듣고 등허리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깊고 산뜻한 우디 향이 그의 어깨에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것처럼. 은호는 눈을 감고 그가 푸는 페로몬을 마음껏 흡수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꼬리에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매달렸다.
아침 8시부터 이른 회진을 도는 의사와 간호사 덕분에 일찍 깨어난 은호는 눈가에 피로를 덕지덕지 달고 있는 윤재를 보며 짠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응급실에서 주사만 맞고 돌아갔으면 되는데.”
세수와 양치질만 겨우 하고 나온 그가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급하게 나오느라 여벌의 옷조차 챙겨 오지 않아 불편해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어젯밤 응급실이 얼마나 아수라장이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지.”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은 알지만, 아침이 되면 바로 퇴원할 텐데 1인실은 좀 지나쳤다. 물론 주위 사람 눈치 볼 필요가 없어 편하긴 했지만, 후두염에 가벼운 몸살로 1인실에 입원하는 건 난생처음이라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진 온 의사가 이것저것 물어도 괜찮다고 어물쩍 넘긴 은호는 급히 퇴원 수속을 밟았다.
열은 내렸지만 부은 목은 여전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인상이 써질 정도로 후두가 부어 말을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윤재는 퇴원한 은호를 환자 취급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선을 그어 버렸다.
“조수석으로 가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오늘까지만.”
윤재는 말끝마다 ‘오늘까지만’으로 모든 대화를 종료해, 어느 순간부터 누가 상사고 누가 부하 직원인지 모를 정도였다. 물질적으로 지원을 해 줘야 겨우겨우 현준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던 은호는 일방적으로 퍼 주기만 하는 윤재를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환자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누워만 있었더니 허리가 아파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거실 테이블에 앉는 은호에게 구겨진 포일처럼 인상을 쓴 윤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혹시나 지난번처럼 노트북 종료 버튼을 누를까 봐 겁이 난 은호는 노트북 화면을 접고 뺏기지 않기 위해 품 안으로 넣었다.
윤재는 은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뒤로 다가오지 않고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쪽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그는 상당히 언짢은 듯 보였다.
“인상 좀 풀어 보세요.”
목소리를 쥐어짜 겨우 내뱉은 말에서 쉰 소리가 나자 너무도 짠해 보였는지 그가 팔다리를 풀고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는 너무도 초췌했다. 버석하게 메마른 눈가에 피곤함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확인해야 할 서류, 법무팀에서 최종으로 올린 거잖아.”
“그래도 확인해야죠.”
“내가 확인했어. 그러니 할 거 없다고.”
그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뜰 때마다 숱이 짙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럼 재워 주시든가요.”
약간 막 나가는 투로 미끼를 툭 하니 던지자 덥석 문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은호의 팔을 붙들었다.
“여기 말고요. 전무님 방.”
단순히 자는 걸 지켜보라고 하는 줄 알았던 윤재는 은호의 본심을 읽고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은호의 방보다 윤재 방에 있는 침대 사이즈가 조금 더 컸다. 아무래도 메인룸이라 기반 시설이 잘 갖춰지기도 했지만, 안락한 느낌 또한 윤재 방이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본인의 방으로 데리고 가 재워야만 빠져나오기도 수월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윤재가 자연스럽게 한쪽 어깨를 내주길래 은호는 바로 그의 팔베개를 벴다. 눈꺼풀이 반쯤 내려온 윤재는 은호의 등을 토닥이며 재우려 했지만 열 번이 채 되기도 전에 토닥임이 느릿해지더니 결국 멈추었다. 이마에 닿아 있던 그의 턱이 힘없이 내려갔다.
이렇게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지, 왜 감시하고 난린데. 은호는 10여 분쯤 있다 조용히 빠져나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잔잔하게 울리는 그의 숨소리에 하품이 쏟아져 나왔다. 먹은 약이 독한 건가, 항생제가 포함되어 있으니 그런가 보지. 은호는 몰래 빠져나가려던 마음을 접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붙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제주도 관광 유치 사업의 일환으로 외국인 전용 카지노 건설에 뛰어든 한성건설과 투자사인 유성창투, 그리고 도지사 및 해당 지역구 의원의 만남이 이뤄졌다.
윤재와 은호가 발을 들이기 전부터 접견실은 화기애애함이 넘쳐흘렀다. 이후 지역 출입 기자가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며 분위기를 달군 덕분에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고, 본 계약 체결까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었다.
공식 계약 이후 밀실 회담이 오가는지 접견실 문이 굳게 닫혔다. 은호는 다른 수행 비서와 함께 따로 마련된 공실에서 계약 내용과 사진을 모두 정리해 윤 실장과 비서팀에 공유했다.
휴대폰을 뺏긴 지 사흘째. 첫날은 수족 하나가 사라진 것처럼 답답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차츰 적응되었다. 가장 많이 연락하는 윤재가 옆에 붙어 있으면서 회사에서 오는 연락까지 대신 처리해 주니, 현준을 제외하면 따로 연락이 올 곳이 없었다. 게다가 현준을 마음에서 진심으로 내려놓은 건지, 힘들었던 첫날이 지나자 남아 있던 미련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이미 휴대폰을 종료한 순간, 현준과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어그러졌다. 은호는 어떤 방법으로 헤어짐을 고할지 생각이 닿을 때마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윤재는 오찬 회동을 마치고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는 발권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준비 중인 은호 곁으로 다가왔다.
“소원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가 내민 휴대폰을 시큰둥하게 받아든 은호는 전원도 켜지 않은 채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어차피 비행 중에 쓰지도 못할뿐더러, 켜자마자 부재중 알람이 쏟아지면 신경을 곤두세울 사람이 바로 코앞에 있기에 무심한 척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복귀하는 비행기 안에서 은호는 자는 척 눈을 감았지만 끊임없이 현준과 헤어지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며칠간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이참에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은호는 사실 먼저 헤어지잔 소리가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별의 충격으로 현준이 시험을 망친다면 그 죄책감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쌍욕을 날려도 좋으니 현준이 먼저 너에게 대단히 실망했다며 헤어지자고 일갈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착륙 후 장기 주차장에서 차를 꺼낸 은호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제주도에 있던 내내 비서인 자신보다 윤재가 운전하던 날이 더 많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공항에서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운전대를 잡으려고 빠르게 걷는 윤재를 제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짐 가방이 있으니 은호 씨 집으로 먼저 가죠. 거기서부터 운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네.”
“혹시.”
뒷좌석을 두고 굳이 조수석에 앉은 윤재가 시선을 전방에 두고 말을 걸었다.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요. 시간에 구애하지 말고.”
그의 말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윤재는 종종 은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굴었다. 마치 오늘 현준을 만나 이별을 준비하려는 걸 뻔히 읽은 것처럼 말이다.
“네.”
속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3년을 넘게 이어 온 인연을 정리하려고 하니 벌써 목이 조인다.
은호는 오피스텔 근처에 차를 정차하고 운전석 밖으로 나가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 들었다. 조수석에서 나온 윤재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네고 재빠르게 뒤를 돌아선 이유는, 그가 계속해서 붙잡으려고 시도하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틀어진 현준과의 관계를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윤재가 휴대폰을 뺏으면서 이별의 활시위를 당겨 줬으니 과녁을 맞히는 건 은호 본인의 몫이었다.
은호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휴대폰 전원을 켰다. 예상과는 다르게 부재중 통화 두 통 외엔 흔한 메시지조차 없었다. 강한 어조의 메시지가 당연히 와 있을 거라 예상했던 은호는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현준에게 전화를 걸려던 은호는 막상 목소리를 들으면 어름대며 긴장할까 봐 지금 어디냐며, 만나고 싶다고 일단 메시지를 보내 놓고 답을 기다렸다. 메시지를 입력하는 손가락마저도 후들후들 떨렸다.
함께 지내며 두루뭉술하게 사는 삶을 지향하는 은호에게 싸움이나 인연을 자르는 일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게 그 증거랄까. 천성이 모질지 못해 어딜 가든 착하고 배려심 많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나쁘게 표현하면 결국 호구라는 소리였다.
5분이 지나도록 메시지를 읽은 흔적이 없었다. 어차피 저녁이라 자고 있을 리도 없고, 기껏 해 봤자 집 아니면 학원과 독서실 셋 중 한 곳에 있을 것이다.
학원과 독서실은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일단 집으로 찾아가 연락이 닿을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길가에 정차된 택시를 붙잡고 주소를 부르는 와중에도 턱 끝이 떨리고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을 만큼 긴장되었다.
‘나도 할 만큼은 한 거 같은데 더는 못 기다리겠어, 우리 그만 헤어지자.’
은호는 현준과 얼굴을 마주쳤을 때 당황하거나 버벅대지 않도록 문장을 통째로 외웠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고 떨리는지. 두 번 헤어졌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네. 은호는 할 말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마구잡이로 던졌다.
택시에서 내린 은호는 현준이 사는 빌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커피숍을 눈여겨봤다.
‘차라리 저기로 불러서 대화할까? 아니야. 보는 눈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일단 집으로 찾아가고, 만나지 못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은호는 휴대폰을 꺼내 현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어라, 그럼 그동안 휴대폰이 같이 꺼져 있던 건가?’
현준이 메시지를 일부러 씹었다고 생각해 기분이 상했던 은호는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멘트에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무슨 일이 터진 건 아닐까. 윤재의 말에 러트라고 굳게 믿고 있었건만, 만약 그게 아니라 당시 위험에 처한 거라든가 자신처럼 우울증이 심해 연락을 취했던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은호는 발걸음을 재촉하다 결국엔 미친 듯이 뛰었다. 사고가 났는데 외면하고 시간을 흘려 버린 거라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니 현준이 사는 빌라 3층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리고 호흡이 거칠었지만,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도어 록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 오는 난잡한 페로몬에 본능적으로 몸이 뒤로 밀리며 주춤했다. 마치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를 손댄 것처럼.
집 안에 현준과 또 다른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사실은, 둘을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페로몬과 현관 앞에 놓인 낯선 신발로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은호는 이대로 비밀을 묻어 두고 도망가야 할지 아니면 실체를 확인해야 할지의 기로에 섰다.
닫힌 방 안에서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자 머릿속에서 어서 도망가라는 경고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머릿속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목에 무거운 추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아 주춤거리는 사이 방문이 열리며 낯선 남자가 걸어 나왔다.
“……누구세요?”
헐렁한 남방과 반바지를 걸치고 나온 남자는 좀 전까지 벗고 있었던 것처럼 단추를 잘못 끼운 데다가, 그것마저도 두 개밖에 채우지 않아 가슴만 겨우 가리고 있었다. 은호는 정체 모를 남자 뒤로 보이는 옷을 입는 현준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누군데 이 집을 막 들어와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남자는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현준과 은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도어 록을 열고 들어왔다는 건 친분이 있는 사이인데다 은호가 오메가임을 단번에 알아챈 남성은 직감으로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님을 판단했다.
“하…….”
허탈한 마음이 기어코 습한 한숨으로 번져 나갔다. 은호는 현준이 자신과의 만남을 꺼릴 때면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숨겨 둔 애인이라도 있나? 반 농담 삼아 투덜거린 말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펼쳐지자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낯선 남자를 앞에 두고 은호는 뛰어 올라오느라 헐떡이던 숨을 재차 골랐다. 문득 현준에 대한 걱정으로 이곳까지 달려온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은호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오히려 열이 오른 남자가 뒤에 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 현준을 몰아세웠다.
“이 사람 뭐야.”
“아, 그게 그러니까.”
“설마 양다리였어?”
맥락을 보아하니 현준이 솔로라고 속이고 이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된 사이인지 기간은 알 수 없지만 최소 러트 때문에 갑작스럽게 부른 원나잇 상대는 아니었다. 이 집 안을 누구보다 잘 아는 눈치였고, 꽤나 자연스러웠다.
은호의 시선이 현준에게로 옮겨졌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음습한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호와 낯선 남자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현준은 한쪽으로 갈아탈 마음을 잡았는지 앞으로 향하던 시선을 곁에 있던 남자에게로 돌렸다.
“아니야, 양다리라니. 이미 헤어진 사이야.”
이미 헤어진 사이라니. 화가 난 상대를 어르고 달래는 그의 눈빛과 말투가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오래전 연애 초기에 느꼈던 섬세하고 풍부한 질감의 감정이랄까. 아, 너는 그런 놈이었구나.
은호는 돌아가는 이 상황이 마치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닌 막장 삼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화가 나고 비참했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리거나 귀 끝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울리지는 않았다. 그저 눈앞의 쓰레기가 어떤 말을 더 내뱉을지, 그 말에 자신이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근데 왜 여길 들어온 건데? 헤어졌으면 비밀번호는 바꿨어야지.”
낯선 남자는 은호에게 보란 듯 현준을 나무라며 그를 내리눌렀다. 마치 나는 이 정도로 현준을 휘어잡을 수 있으며, 대접받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것처럼. 현준이 시험공부 때문에 바빠서 그랬다며 기어들어 가듯 말꼬리를 내리자 다시금 은호에게 매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당신이 좀 말해 보든가.”
상대는 은호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고, 또한 현준이 은호를 내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속이 풀릴 것처럼 굴었다.
“지훈아, 그러지 말고…….”
“벙어리야? 왜 말을 못 해?”
자칫 싸움으로 판이 커지거나, 아니면 은호에게 날벼락을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현준이 결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 사이의 중심도 아니고 지훈이라는 남자를 뒤로 감춘 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 속에 은호를 향한 미안함이 섞여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은호는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 속에는 미안함을 가장한 나를 이해해 달라는 일종의 자기 회피와 책임 전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여긴 왜 들어왔는데. 나가 얼른.”
말머리는 어수룩하니 흔들렸다. 하지만 말을 뱉기 시작하면서 더는 이어질 인연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건지 두 번째 문장은 단호했다.
“그래. 알았어.”
서늘하게 받아친 은호는 이 상황에 초연한 것처럼 꽤나 덤덤했다. 사실 그간 윤재와 하룻밤을 보낸 일로 부채처럼 죄책감을 안고 있었는데, 이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어 외려 홀가분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귄 연인에 대한 배신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늘 충만하게 품어 왔던 신뢰가 단번에 무너지자 쓰디쓴 웃음이 계속해서 스며 나왔다. 현준은 은호의 표정을 읽다 오싹한 건지 더는 말을 붙이지 않고 초조해했다.
“거기.”
등을 돌리고 나가려는데 상대가 은호의 발목을 붙들었다. 시건방진 말투가 귓가에 꽂혀 들어 은호는 냉기를 품으며 뒤돌았다.
“함부로 무단 침입해 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해? 당신 스토커야?”
“지훈아 왜 그래.”
비소를 품은 은호의 얼굴이 지훈이라는 남자에게 향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무뚝뚝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은호가 말없이 서 있자 중간에서 중재하던 현준이 놀라 꺼내려던 말을 도로 삼켜 버렸다.
와서 정중히 사과하라는 고압적인 남자의 말투에 은호가 느릿한 말투로 답을 했다.
“사과보다는 고맙다고 해야겠네.”
“……뭐?”
“알아서 쓰레기 수거해 줘서 고마워.”
초면부터 반말로 사람을 깔보는 게 거슬렸다.
“그래, 그 쓰레기랑 잘 지내봐.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돈 좀 많이 빼먹는 쓰레기거든.”
무심한 투로 한마디 건네고 다시 뒤를 돌아서는 순간 독한 페로몬이 등 뒤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은호의 말에 격분한 남자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현관으로 쫓아오자 다급하게 현준이 막아섰다.
“뭐라고?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지훈아 참아.”
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철컥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지만 방음이 잘되지 않아 각종 욕설과 말싸움이 고스란히 은호의 귀에 날아들었다.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문이 차단되자 멀쩡했던 몸이 순식간에 덜덜 떨렸다.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나오거나 꼴사납게 펑펑 울어 버릴 줄 알았는데 추한 꼴을 보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긴 은호는 다리를 곧게 세우며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다시는 이 동네 근처조차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다.
후들후들 다리가 떨려 계단 손잡이를 붙잡고 내려오면서도 이곳을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실은 두려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도 담담하게 상대를 엿 먹이고 나왔으니 둘 중 하나라도 쫓아 나와 멱살이라도 잡을까 두려웠다.
빌라를 빠져나오자마자 무작정 큰길가로 걸었다. 쓸쓸한 바람이 앞머리를 계속해서 스칠 때마다 습한 눈물도 쓸려 나갔다. 퇴근 시간의 도로 위는 주차장처럼 차량의 후미등이 붉은 수를 놓고 있었다.
“후아….”
긴 한숨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번져 나갔다. 그들 앞에서 태연한 척 굴었지만, 난잡한 페로몬을 맡은 순간부터 절제된 이성이 날뛰는 감성에 함락돼 엉망진창이었다. 올 때만 해도 푸르렀던 하늘 위로 어느새 붉은 노을이 아스라이 내려앉았다.
택시를 붙잡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계획 없이 무작정 앞만 보며 직진했다. 집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혼자 있다 보면 아까 현준의 집에서 보았던 장면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들쑤실 것만 같았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지만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그를 한 번씩 쳐다보는 걸로 보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나 보다.
한편으로는 현준의 마음을 이해했다. 3년을 봐 왔는데 질렸겠지. 풋풋한 사랑이 더 아삭거리고 감질나겠지. 옛 애인보다 새 애인을 감싸는 것조차 윤재를 떠올리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피장파장이니 억울해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여 보지만 막상 눈앞에서 자신을 헌신짝 취급하는 현준을 보게 되니 눈물이 흘렀다.
누구를 불러야 할지 떠올리기도 전에, 한참 전부터 윤재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진창에 구른 감정으로 그를 불러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머리로 망설이는 사이 손이 먼저 호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목록에 떠 있는 최윤재라는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먹먹해졌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잠긴 목을 풀기 위해 목소리를 다듬기도 전에 빠르게 전화를 받은 그의 긴장한 톤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 지금 어디예요?
다짜고짜 위치를 묻는 그의 말투에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왜 어디 있는지를 묻는 걸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은호는 목소리만 듣고도 울컥하니 끓어오르는 마음을 달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어두움이 내려앉은 길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지나치는 인파로 시끌벅적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머릿속이 텅 비어서 지금 위치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한 자 한 자 말을 끊어가며 침착하고도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 가만히 서서 큰 건물을 하나 찾아요. 건물 옥상 외벽이나 1층 출입구에 보통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까 찾아서 말해 줘요. 혹시 그래도 이름을 모르겠거든 그 건물 내 특이한 상호를 불러 줘도 좋고.
은호는 너울거리는 네온사인의 불빛 속에서 가장 큰 건물을 찾았다. 10m 거리에 있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듯한 건물.
“……미성 cnc 타워.”
- 그 앞에 서 있어요. 곧 갈 테니까.
오겠다는 말 한마디에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움이 뭉클하게 차올랐다. 은호는 그가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여운처럼 귀 끝에 남아 가슴속에 들이쳤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은호는 턱 끝에 힘을 주어 슬픔을 목구멍으로 도로 흘려보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멍하니 서 있던 은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미성 타워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재는 은호와 주말까지 같이 보내면서 현준이 어떻게 나올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호가 혼자 있고 싶다고 시위하듯 무심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그는 적당히 욕심을 내려놔야 했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 인사만 하고 빠르게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은호의 뒷모습에 윤재는 결국 말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기분이 찜찜했다. 도대체 공시생이 맞긴 한 걸까, 이렇게 태만한 상태에서 합격을 한다고? 윤재는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3일째 두문불출하며 애인과 같이 있는 현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제주도에서 3일씩이나 은호를 묶어 두었기에 더 옭아맸다간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까 한 발짝 물러났지만 현준이 오늘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은호가 현준을 만나러 가면 의뢰해 둔 곳에서 곧장 연락이 오도록 조치해 두었기에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나, 그 과정까지가 영 탐탁지 않았다. 사실 은호에게도 사람을 붙일까 고민했지만, 워낙 눈치가 빨라 오해라도 사면 모든 게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버리기에 그 부분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회사에 다다를 즈음 설마 했던 연락이 왔다. 메시지가 아닌 전화였다. 전화를 받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은호가 현준을 찾아갔음을 직감한 윤재는 바로 앞 교차로에서 유턴을 시도하며 통화를 눌렀다.
- 유은호 씨가 막 빌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할까요?
“안에 이현준의 새 애인이 있습니까?”
- 네.
가급적 안 좋은 모습은 보지 않고 헤어지기를 바랐건만, 피하려고 노력해도 셋은 결국 만나고야 마는 운명인 걸까. 윤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운전대를 꽉 쥐었다.
“따라 올라가 보세요. 분위기가 험해지면 문을 두들겨서라도 흐름을 깨 주셔야 합니다.”
-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주소 좀 보내 주세요. 혹시 유은호 씨가 밖으로 나오면 무조건 따라붙으시고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은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두 사람 모두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퇴근 시간대라 도로가 마음처럼 쉽게 뚫리지 않아 조급한 마음만 더해진다. 운전대를 붙잡은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오피스텔 앞에서 조금 더 지켜봤어야 했는데 왜 그리 빨리 벗어났을까. 윤재는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자신을 질책했다.
- 유은호 씨 방금 나왔습니다. 뒤쫓으면 될까요?
도착지까지 10여 분을 남겨 두고 은호가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우려하던 싸움은 없었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계속해서 도로에 뛰어들던 그때의 사고가 아른거려 순간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상태 어떻습니까?”
- 특별히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따라붙으시되 혹시나 차도로 뛰어들거나 위험한 행동을 할 것 같으면 바로 붙잡아 주세요. 곧 가겠습니다.”
모른 척 연락을 할까, 연락해서 뭐라고 물어볼까 고민하며 휴대폰을 드는 찰나 마음이라도 통한 것처럼 액정 위로 유은호의 이름이 떴다. 윤재는 지체하지 않고 통화를 눌렀다. 침착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묻지 말아야 할 말이 먼저 나가 버렸다.
“지금 어디예요?”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한데 섞여 지저분하게 울렸다. 즉각 돌아오는 답이 없어 재차 물어보려던 찰나 불안정한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목소리만 들어도 혼이 나간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혼자 있으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 내고 싶은 의지를 보인 거나 다름없었다. 윤재는 자신부터 주변을 환기시킨 후 침착한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가만히 서서 큰 건물을 하나 찾아요. 건물 옥상 외벽이나 1층 출입구에 보통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까 찾아서 말해 줘요. 혹시 그래도 이름을 모르겠거든 그 건물 내 특이한 상호를 불러 줘도 좋고.”
- ……미성 cnc 타워.
“그 앞에 서 있어요. 곧 갈 테니까.”
도착지를 재검색하니 12분으로 늘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윤재의 생각보다 은호는 더 단단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 내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다행이던지, 윤재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쏟아냈는지 모른다.
“…아.”
거의 다 와서 도로가 말썽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윤재는 마음이 다급해져 은호에게 연락했다. 멍하니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게끔 해 주는 게 필요했다.
“차가 막혀.”
- 어딘데요?
“도착까지 7분.”
푹 가라앉은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조금 전보다는 한결 가벼웠다. 덩달아 한시름 놓은 윤재는 평소의 느슨한 말투로 돌아갔다.
- 제가 전무님이 오는 방향으로 걸어갈까요?
“아니, 그러다 엇갈리니까 가만히 있어요.”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특했다. 평소 같으면 가까이 걸어오라 하겠는데 바깥이 어두워 찾는 게 더 일이었다.
“안 추워? 무슨 옷 입고 나왔어요?”
- 아침에 그 옷 그대로요.
“혹시 추우면 커피숍 들어가 있을래요?”
- 아뇨. 괜찮아요.
소소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생각나는 대로 툭툭 던졌는데도 은호는 곧잘 따라와 주었다. 도착 시간 2분 전,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는데 잠시 대화의 공백이 흐르더니 은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 전무님.
“응.”
은호는 망설이는 것처럼 주저했다. 스치는 사람들의 소음이 크게 들렸지만 윤재는 개의치 않고 볼륨을 크게 올렸다. 날연한 숨이 스피커를 가볍게 스쳤다.
- ……저 …헤어졌어요.
은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제가 이 문제로 전무님을 만나면 좀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윤재는 은호의 차분한 고백에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 그동안 마음고생시켜서 죄송해요.
“마음고생은 무슨.”
저 멀리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은호가 보였다. 볼품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도 윤재의 시야 속 은호는 반짝이며 빛이 났다.
- 전무님 말이 맞았어요.
“…….”
- 저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친구였어요.
비상등을 켜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 외로이 서서 휴대폰 하나에 마음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애가 달았다.
- 내렸나 보다.
조용했던 배경음에 갑작스레 인파의 소음이 섞이자 윤재가 가까이 왔음을 은호도 알아차렸다. 발치에 두었던 시선을 올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전에 저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최윤재가 보였다.
“전무님.”
가까이 다가온다. 가시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어느 순간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가 은호의 팔을 붙잡아 가슴팍으로 당기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듯 몸이 감겼다.
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했다, 헤어지길 잘했다, 힘들지는 않냐.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그의 페로몬이 은호를 편히 감싸 주며 그동안의 아픔을 위로했다. 비로소 깊은숨을 들이마실 수 있게 된 것처럼 은호는 편히 숨을 쉬며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약간요.”
조수석에 앉은 은호의 눈빛이 혼곤했다. 반쯤 넋이 나간 것과 별개로 끔뻑거리는 속눈썹이 곧 잠들 것처럼 느릿하게 나풀거렸다. 은호는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돌려 윤재를 올려다봤다.
“요 근처에 계셨던 건가요?”
“……응.”
기운이 없어 그러는지 왜 이 근처에 있었냐며 물어보지 않고 넘어갔다. 윤재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충격이 크면 저러나 싶어 걱정이 컸다.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는 척 은호를 확인해 보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웅-.
고요하던 차 안에서 묵직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호주머니에서 꺼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은호는 잠깐 망설이다 거절을 누르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뻔한 상대이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려던 윤재는 그 직후 한 번 더 울리는 진동에 전화를 끄거나 차단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입 밖으로 꺼내려다 간신히 참고 넘겼다. 은호의 반쯤 감긴 눈꺼풀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어 말을 아끼며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싶었다.
통화를 거절했더니 이번에는 짧은 진동이 울렸다. 작게 한숨을 폭 던진 은호는 귀찮다는 몸짓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네가 필요한데 연락이 안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오후 8:34
“……끝까지 내 탓이네.”
딱 봐도 짧지 않게 만난 사이였는데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항변하고 싶은지, 아니면 은호에게 금전적인 아쉬움이 남은 건지. 현준의 변명 같지도 않은 구질구질한 답변을 읽은 은호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헤어졌으면 그쪽에 신경 쓰지도 말아요. 정신 건강에 해로워.”
원하는 대로 헤어진 마당에 괜한 말은 간섭으로 들릴까 싶어 말을 아꼈건만 낮게 중얼거리는 은호의 끝말이 신경 쓰여 결국 잔소리가 튀어 나갔다. 무덤덤한 투로 흘리듯 던지니 곁에서 듣던 은호가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은호가 반응하지 않자 또다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신경이 한껏 곤두선 윤재의 페로몬을 감지한 은호는 그의 말대로 통화 거절을 누르고 곧바로 번호를 차단했다.
“불안해서 안 되겠다.”
“…….”
“우리 집으로 가죠.”
반듯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은호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색채가 빠져 있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윤재가 손을 뻗어 은호의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별론가?”
“그게 아니라… 전무님께서 불편하실 텐데요.”
“불편할 게 뭐가 있는데.”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자 표정의 변화가 없던 은호가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은호는 마음이 복잡했다. 헤어진 게 아쉬운 건지, 억울한 건지, 후련한 건지 하나로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뭉쳐진 감정이 거칠게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생채기를 만들었다. 피곤했다. 침대만 있다면 곧바로 누워 곯아떨어지고 싶지만 혼자 있기에는 또 두려웠다.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3년이란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한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허무해 몸의 어딘가가 뜯겨 나간 것만 같았다.
은호의 검은 눈동자가 녹녹하게 젖어 들어갔다.
“우리 집으로 가요. 응?”
윤재가 별다른 이견이 없으면 그리하자고 부드럽게 설득하자 은호는 고개를 순순히 끄덕거렸다.
“……네.”
은호가 진흙탕을 구르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최윤재가 나타났다. 감추고 싶은 부분까지 가감 없이 다 까발려지는 게 때론 부끄러웠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늘 감싸고 덮어 주었다. 은호는 손을 뻗어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등을 쓸었다.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
은호는 현준과 헤어진 후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생각과 달리 몸이 쉽게 따라와 주지 않았다. 머릿속 나사 하나가 풀리다 못해 빠진 것처럼 회의 도중 넋을 놓기 일쑤였고, 내내 힘이 빠져 있었다. 한 번은 감사 보고 리포트를 제시간에 정리해서 올리지 않아 안타깝게 쳐다보는 윤재를 마주해야만 했다.
문득문득 현준의 집 현관에서 있었던 일에 생각이 매몰될 때면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지난주에 윤재와 함께 있으면서 바닥까지 내려앉은 감정은 거의 회복되었으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모난 틀에 맞춰진 몸을 동그란 틀로 옮기려니 모양이 맞지 않아 끼워지지 않는 것처럼, 은호의 상황이 딱 그랬다. 빠르게 사포질해서 둥글게 만들거나, 시간을 벗 삼아 뾰족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마모되어 둥근 틀에 맞춰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새벽부터 내린 봄비는 쉬이 그칠 줄 모르고 점차 빗줄기를 키워갔다. 비서팀은 비도 오는데 굳이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가 점심을 먹어야겠냐는 사내 식당 파와 식당 밥이 물려서 무조건 나가야겠다는 외부 파로 나뉘었다. 사내 식당 파에 속한 은호는 점심 메뉴 중 한식을 골라 자리에 앉았다.
“은호 씨, 무슨 일 있지?”
“아니요. 별일 없는데.”
“그래?”
수더분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무리에서 약간 떨어져 앉아 경청하기만 하던 은호는 앞자리에 앉은 한 비서의 질문에 수저질을 멈췄다.
“근데 왜 이리 식사를 못 해. 봄 타는 거야?”
“요즘 입맛이 없어서요.”
구구절절 말해 봤자 좋을 게 없어 대충 둘러대며 웃고 말자 안쓰럽게 얼굴을 살피던 한 비서는 팍팍 좀 떠먹으라고 은호를 부추겼다. 무얼 먹어도 맛을 못 느낄 정도로 입 안이 까슬하고 썼다.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 은호의 숨결이 더디게 번져 갔다.
“요즘 최 회장님 병세가 더 안 좋아지셨나 봐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가는 도중 건너편에 앉아 있던 김 비서가 대화의 말머리를 틀었다. 샐러드에 머물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로 들리며 김 비서를 향했다.
“암인데 쉽겠어? 고령인 데다 말기니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잖아.”
최 회장이라면 유성그룹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요즘 들어 윤재의 차 내비게이션 최근 목적지에 한국대 병원이 종종 찍혀 있었는데 아마도 그 때문인 듯했다. 췌장암 말기인 최 회장은 항암 치료로 시간을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라 상황이 악화되어 갔다. 요즘 들어 상속 문제가 거론되며 윤재의 법무법인의 출입이 잦아진 건 최 회장의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음을 의미했다.
“최 전무님 오늘 오후 스케줄 어떻게 되지?”
“3시 반에 한성 경제신문과 인터뷰 있고요, 끝나고 최 회장님 병문안 예정되어 있습니다.”
은호는 최 회장 쪽에서 윤재의 호출이 잦아지자 예의 주시했다. 하지만 요 며칠 현준과의 이별로 판단력이 흐려지며 회사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회사 업무에 집중하다가도 어느샌가 생각의 흐름이 다른 길로 급격히 빠져 버렸다.
“전무님이 최 회장님과 최 부사장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쉿, 다 들어요.”
옆에 있던 김 비서가 논란이 될 만한 말을 꺼냈다가 박 비서에게 한 소리를 듣고 꽁무니를 뺐다. 회사의 내부 사정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팀이다 보니 말 한마디가 잘못 번져 나가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지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서령 부사장과 최윤재 전무가 상극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하던 최 회장은 요즘 들어 윤재를 호출해 유성그룹을 위해 힘써 달라는 압박을 넣고 있었다. 현금 자산이 풍부한 유성창투와 달리 자금줄이 꽉 막힌 유성그룹은 현재 기업 대출을 받을 상황마저 여의치 않았다.
자신이 평생 일군 유성그룹이 사지로 내몰리는 게 안타까웠던 최 회장은 윤재를 불러내 단기 숨통이라도 트일 수 있게끔 자금 흐름을 돌려 보려 했지만 엄연히 다른 회사고, 주주가 원치 않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심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은호는 3시 반 인터뷰를 위해 홍보팀에서 올라온 인터뷰 내용을 뽑아 파일철에 끼워 넣었다.
‘아직인가.’
윤재가 점심 약속으로 자리를 비운 집무실 안에는 그가 남긴 페로몬 잔향만 넘실거렸다. 파일철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문을 열고 윤재가 돌아왔다.
“점심은?”
“먹었습니다. 아, 3시 반 인터뷰 내용 확인해 주세요.”
은호는 그에게 걱정거릴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 산뜻하게 미소 짓고 자리를 벗어났다.
‘최윤재야말로 무슨 죄야, 매번 신경 쓰게 만들고.’
은호는 집무실을 나오며 제발 그에게 피해 주지 말자고 속으로 다그쳤다.
재무본부에서 올라온 월말 리포트와 실적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모니터를 뚫어지게 살피던 은호는 어깨 너머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윤 실장이었다.
“유은호 씨.”
“네.”
“홍보팀에서 보낸 인터뷰 최종본 확인했어요?”
좀 전에 전해 드리고 왔는데? 라고 입 모양을 벙긋거리려다 윤 실장의 심각한 표정에서 자신이 뭔가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서둘러 메일함에 들어가니 한 시간 전에 최종본이 올라와 있었다. 마지막 확인을 미처 하지 않고 아침에 온 것을 최종이라 판단한 은호의 실수였다. 심지어 홍보팀에서 보낸 최종본이 업데이트되었다는 알람조차 놓쳤다.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바꾸겠습니다.”
“요즘 이상하네. 정신 차려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윤 실장조차 알아차릴 만큼 실수가 잦아졌다. 그가 자리를 떠나자 은호는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정신 차리라고, 제발. 메일 내용을 내려받아 출력하면서도 은호는 내내 자책했다.
“전무님. 홍보팀에서 필터링한 출입 기자 인터뷰 최종본입니다.”
집무실로 들어가자 마침 인터뷰 내용을 훑던 윤재가 되레 괜찮냐는 표정으로 은호의 얼굴을 훑었다. 최종본 내용에서 삭제된 건 유성그룹과 유성창투 간의 경영 세대교체 및 상속 문제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논쟁이 될 만할 걸 뻔히 알고도 의심하지 않고 넘겼다. 명백한 실수였다.
“잘못 전달해 드려 죄송합니다.”
새것과 기존 파일철을 바꾸는 은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윤재는 자신감이 결여된 은호를 바라보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이번 주만 벌써 세 번째. 다행히 세 번 모두 가벼운 이슈고, 직전에 수습해 문제 된 일은 없었지만 이미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게 곁에 있는 윤재에게 전해질 정도로 은호의 상태가 불안했다.
“인터뷰 끝나면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당분간 운전은 내가 할 테니 은호 씨 손 떼요.”
말꼬리를 자르며 윤재가 막아서자 은호는 움찔하고 뒤로 물러났다. 은호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파일철을 붙잡은 손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는 게 보였다.
“벌써 저승사자와 하이파이브 하고 싶진 않아.”
아차 싶어진 윤재는 농담하듯 대화를 틀었으나 전혀 먹히지를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 말고… 그럼 내가 미안하잖아.”
은호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윤재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원래 사람을 덜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윤재 또한 준서를 겪으며 잘 알게 되었기에 은호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짧은 연애도 아니고, 심지어 첫 연애라고 했다. 불합리한 연인 관계였음에도 첫 연애라 개선될 줄 알고 버티고 있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호의 등을 느릿하게 토닥였다.
“병원 들렀다 찾아갈 테니, 퇴근하면 집에 가서 좀 쉬고 있어요.”
어느새 눈물이 맺힌 눈가가 보기 짠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누르고 눈물을 참는 은호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끄덕였다.
***
은호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에 몸을 녹였다. 따뜻한 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은호에겐 춥게 느껴졌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한 통을 다 비우고 나니 데운 몸이 다시금 으슬으슬해 침대에 폭 파묻혔다.
“공과 사를 구별하라고.”
느슨하게 주먹을 쥐고 이마를 콩콩 때렸다. 하다 하다 회사에서 사고를 치냐? 한숨을 푹푹 쉬며 벽시계를 쳐다보는데 문득 3년 전 현준이 사 줬다는 게 생각이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보이는 김에 정리부터 하자.”
다용도실로 성큼성큼 걸어가 종량제 봉투를 들고 온 은호는 눈에 보이는 것 중 현준이 사 줬거나 함께했던 물건을 샅샅이 찾아내기 시작했다. 휴대폰 사진과 영상은 진작에 삭제했으나 물건은 정리할 생각조차 못 했다. 연애 초나 선물을 주고받았지, 그 이후로는 선물은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어 무언가를 주고받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이거밖에 없나?”
커플 티셔츠 두 벌과 벽시계, 머그잔, 손바닥만 한 테디베어 인형을 모아 놓고 보니 3년의 추억이 더욱 초라하고 허무했다. 혹시 놓친 게 있을까 싶어 집 안을 다시 뒤져보아도 이게 전부여서 20리터 봉투가 넘치기는커녕 남아돌아 민망할 정도였다. 좀 더 채워서 버릴까 하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라 결국 봉투를 묶어 현관 앞에 뒀다. 출근할 때 버리든가 해야지. 은호는 다시금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힘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그날 새 애인 편을 들며 못 볼 걸 본 것처럼 취급하던 눈빛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래, 내가 3년간 사람 하나 구제해 줬다 생각할게. 둘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근데, 나 고생시킨 만큼 시험은 꼭 떨어지길 바랄게. 붙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그동안 들인 돈이 아깝긴 하지만 너 같은 인간은 국가의 녹봉을 받을 자격이 없어. 나쁜 새끼.
쌓아 놨던 말을 줄줄 내뱉어 보지만 속절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미우나 고우나 내 편인 줄 알았건만 그것마저도 허상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잘됐어, 잘된 거야. 은호는 스스로를 달래며 눈을 감았다.
누군가 그랬다. 7년을 사귀었으면 최소 7개월은 잊지 못해 힘들다고. 3년을 사귀었으니 석 달 정도 힘들면 되려나. 근데 석 달도 버거운데, 3일은 안 될까? 아님 3주만. 은호는 혼자 묻고 답하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딩동-.
무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온몸을 덮쳤다. 벗어나려 발버둥을 칠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섬뜩한 감각에 놀라 목청을 돋우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와줘, 제발. 눈물을 쏟으며 목울대를 긁어내고 있을 무렵 아득히 먼 곳에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꽤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은호는 그제야 이곳이 꿈속임을 깨닫고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 올렸다.
“…헉!”
그제야 은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매무새를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홀린 듯 방 밖으로 걸어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철문 밖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은호는 본능으로 그를 확신했다.
“유은호?”
와락 그를 껴안았다. 그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우디 향이 마음을 가라앉히자 다리가 풀리며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의 단단한 팔이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보듬어 안았다.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늘에 천천히 고개를 든 은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굳어진 윤재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디 아파요?”
은호는 고집스레 다문 입술을 열지 않는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그의 몸에 닿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등허리를 꼬옥 껴안았다.
“그럼, 악몽을 꾼 건가?”
흠뻑 젖은 머릿결이 잘게 찰랑거렸다. 윤재는 은호가 자신을 붙들어 놓고 꼼짝도 할 수 없게 떨어지지 않자 난감해졌다. 그는 겨우 은호를 설득해 휴대폰과 서류 가방을 챙겨오라 일렀다.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방에 들어간 은호는 가방과 휴대폰을 들고나와 그의 앞에 섰다.
“이렇게 나가기엔 추워.”
은호가 얇은 잠옷 바람으로 나가려는 걸 도로 붙잡은 윤재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둘러 주었다.
은호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대를 잡은 윤재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상황을 봐서 계속 졸려 하면 데리고 가 바로 재우고, 아니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 줄 작정이었다.
헤드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은호가 창밖으로 줄줄이 늘어선 가로수 등불을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수면 상태가 걷힌 건지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는 매번 안 좋은 모습만 보여 주는데 전무님은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 주시는데요.”
“……무슨 답을 듣고 싶은 걸까?”
해 주고 싶어 그러는 건데, 그게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자 입술을 도드라지게 쭉 내밀다가 도로 집어넣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렇다고 제가 전무님이 원하는 대로 말을 잘 듣지도 않았잖아요. 매번 뒷수습만 하게 만들고.”
“말 잘 듣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시간이 되돌아온 이후, 윤재의 개입도 그렇지만 은호가 전보다 조금 더 주도적으로 움직여 상황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은호는 애꿎은 윤재가 매번 자신의 감정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처럼 느끼는지, 미안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혼자만 너무 잘하니까요.”
“…….”
“맨날 미안하게 만들어.”
쿡,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 다시금 살피니 윤재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사무실에선 다른 직원들 때문에 좀처럼 듣기 힘든 은호의 애교 섞인 말투를 이렇게라도 마음껏 들으니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저 왜 데리고 가요?”
우리 집이 너무 좁은가? 거실 소파 불편해요? 톤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지만 종알종알 떠드는 상태로 보아 낮보다는 기분이 한결 나아 보였다. 이번 주 은호의 컨디션은 보기 안쓰러울 만큼 형편없었다.
“혼자 두긴 싫고, 거기서 자면 출근할 때 곤란해.”
“그럼 저는요.”
“여벌 옷 사 놨거든.”
아득한 눈길로 윤재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은호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윤재의 집에 도착해 차 문을 연 은호는 바깥에서 밀려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집에서 나올 땐 몰랐는데 봄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잔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여린 잎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덮고만 있던 윤재의 재킷에 팔을 끼워 넣고 단추를 잠갔지만 품이 커 옷 속으로 바람이 들이쳤다. 은호는 하는 수 없이 단추를 도로 풀고 몸에 밀착되도록 재킷을 여몄다. 총총걸음으로 바람을 뚫고 현관 앞으로 먼저 뛰어가자 뒤따르는 윤재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잠은 다 깬 거 같은데.”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윤재가 팔을 걷어붙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오후 일정이 병원 방문이었고, 끝나고 바로 온다 했으니…….
“저녁은요?”
“아직.”
이럴 줄 알았지. 사실 은호도 저녁을 굶은 탓에 배가 고픈 찰나였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 놓고 간 음식을 하나씩 열어 보던 윤재가 와인 냉장고 앞에 서서 턱 끝을 문질렀다.
“와인? 맥주?”
“안주는 뭐 있는데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 놓고 간 저녁은 스테이크였다. 한식만 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양식까지 수준급이라 입이 쩍 벌어진 은호는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붙잡았다. 졸지에 남의 저녁을 뺏어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안줏거리라도 만들어 두 사람이 먹을 저녁 양으로 늘려야 했다.
“냉장고 열어 봐도 돼요?”
그가 고개를 끄떡이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어 내용물을 빠르게 확인했다. 하몽과 멜론, 여러 가지 종류의 치즈를 꺼내자 술은 정해졌다.
“와인 마실래요.”
잠옷 바람으로 설치는 게 어색해 주위를 둘러보자 이동 서랍 안에 앞치마가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은호는 앞치마를 냉큼 꺼내 입은 후 도마 위에 멜론을 올리고 칼로 정 중앙 부근에 가져다 대고 힘껏 내리눌렀다.
“어허, 멜론을 그렇게 잡으면 어떡해. 그러다 손 다치려고.”
생각보다 칼이 안 들어가길래 손으로 칼등을 때리며 누르니 질겁한 윤재가 은호를 옆으로 밀었다.
“힘이 없으면 요령으로 해야지, 그렇게 하다간 크게 다쳐.”
윤재가 한 손으로 둥그런 멜론을 고정하고 칼날을 세워 천천히 밀어 넣자 단단했던 멜론이 가볍게 반으로 잘려 나갔다. 절반은 랩을 씌워 냉장고에 다시 넣고, 나머지는 위아래를 자른 후 칼날을 옆으로 눌러 껍질을 깎아 내자 조용히 지켜보던 은호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이런 것조차 다 알아요? 전무님, 못하는 게 있긴 한가요?”
윤재는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웃음을 참았다. 아기 새처럼 옆에 착 달라붙어 쫑알거리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윤재는 멜론의 껍질을 모조리 제거한 후 은호에게 칼을 쥐여 줬다.
식은 음식을 마저 데우고 안줏거리로 만든 하몽 멜론과 모둠 치즈까지 곁에 두니 그럴싸한 저녁 식사가 완성되었다. 유려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조각낸 그가 앞접시에 절반을 덜어 은호에게 건넸다. 은호는 반쯤 담긴 와인으로 가볍게 입을 축이고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설마 요리도 잘하는 건 아니죠?”
은호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헛숨을 터뜨리던 윤재가 고개를 저었다. 늘 차려 둔 걸 먹기만 할 뿐, 직접 만들어 먹는 건 손에 꼽힌다고 하자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은호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늦은 저녁인 데다 허기가 져서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샐러드와 모둠 치즈를 포크로 콕 찔러 입에 넣던 은호는 중후한 톤의 울림에 고개를 들었다.
“좀 괜찮아요?”
“네, 뭐… 그럭저럭.”
은호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게 뭐라고 걱정을 해 주는가 싶었다. 윤재에게만큼은 내색하고 싶지 않은데 그가 너무도 세심히 살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일하다 정 힘들면 이야기해요. 괜히 무리해서 하지 말고.”
일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머릿속의 처리 속도가 조금 느려지고, 시간차 오류가 종종 생겼다는 게 은호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은호는 씁쓸하게 웃기만 할 뿐 그러겠다고 답을 주지 않았다.
잔에 남아 있는 와인을 비우고 와인 병에 손을 대려는 찰나, 소파에 올려 둔 휴대폰이 바르르 울렸다. 진동이 짧은 걸 보아서는 메시지인데 이 시간에 연락 올 사람이 누가 있던가.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갔다.
차단했어? 오후 9:02
나를 차? 넌 곧 후회하게 될 거야. 두고 봐. 오후 9:03
합격하면 가장 먼저 너에게 청첩장 날려 줄게. 기대해. 오후 9:03
액정 화면 위로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맞힐 만한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해 있었다. 내용을 확인한 은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혼곤한 숨을 흘리며 멍하니 서 있자 어느새 뒤로 다가온 윤재가 대화창을 보고 휴대폰을 뺏었다.
“보지 마, 이딴 쓰레기 같은 글.”
윤재가 휴대폰을 낚아채서 상대를 차단하는 걸 지켜보던 은호는 화를 내거나 제지하지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번호 차단했는데… 이게 왜 왔지.”
고작 몇 줄의 메시지에 방금 먹은 음식물이 역류할 듯 속이 뒤틀렸다. 은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다가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져 소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잊으려고 하나씩 비우고 있는데 불시에 날아든 적의가 그의 속을 들쑤셨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으려니 아프고 쓰려 울고 싶었다.
고통을 삭이느라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것처럼 숨을 골랐다. 최윤재 앞이야. 더는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자. 제발. 무너진 속을 달래는 은호 곁으로 윤재가 다가왔다. 그는 말없이 은호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였다.
흐으, 흐으. 감정이 격해진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몸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동안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현준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자 믿기 힘들 만큼 괴로웠다. 이렇게 치졸한 인간인 줄 모르고 그동안 감싸고돌며 혼자 애달팠던 게 억울하고, 치욕스러웠다.
은호의 불안정한 호흡이 가라앉지 않고 점차 들썩이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진 윤재가 페로몬을 최대치로 개방했다. 순식간에 고밀도의 페로몬이 쏟아지자 헐떡거리던 호흡이 멈추고 은호가 그대로 윤재의 품에 안겼다.
감정이 버틸 수 있는 어느 한계선을 넘으면 몸을 쥐어짜며 육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윤재는 차마 은호가 그 단계로 넘어가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 은호가 잠이 들도록 안정된 페로몬을 계속 밀어 넣어 나쁜 기억을 희석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수면 상태로 들어선 은호는 코 아래 손가락을 가져다 대야 알아차릴 만큼 호흡이 가늘어졌다. 격하게 뛰던 맥박마저 정상 범위로 돌아오자, 폭증한 페로몬을 갈무리한 윤재는 젖어 있는 까만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살살 닦아내며 은호를 살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상대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페로몬을 멋대로 휘두른 건 사춘기 이후 처음이었다. 윤재는 은호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뒷머리에 손을 넣고 조심스럽게 눕힌 윤재는 목덜미에 팔을 넣어 은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사이 은호의 얼굴 위로 음영이 깊어졌다. 헤어진 내색을 하고 싶지 않은지 타인과 있을 땐 꾸역꾸역 음식물을 밀어 넣었지만, 남들의 시선이 없을 땐 잘 챙겨 먹지 않아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윤재는 좀 전의 메시지 내용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은호의 도움으로 겨우 수혈하며 버텼던 월셋집부터 일단 내쫓고, 그의 대출 기록을 확인해 목을 조일 작정이었다.
눈두덩이 위로 붉은 기운이 너울거렸다. 눈뜬 은호는 눈꺼풀에 내려앉은 곱디고운 햇살에 눈썹을 몇 번 깜빡였다. 어제 어떻게 된 거지? 멍하니 천정에 의미 없는 시선을 남기던 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윤재를 확인하고는 놀라 말문이 막혔다.
“잘 잤어요?”
“……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현준에게 메시지를 받고 소파에 주저앉은 것까진 기억나는데 갑자기 의식이 나갔다. 충격에 기절한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어제…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울다 잠들었잖아.”
은호에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혹시 눈치채면 있는 그대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은호가 모르고 넘어가자 윤재는 남몰래 숨을 돌렸다.
“속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식사 도중 강제 수면 상태를 만들었기에 혹시 소화 문제로 괴롭지 않을까 싶어 밤새 안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상체를 세워 주었다.
은호는 그의 초췌한 민낯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혹시… 못 주무신 거예요?”
“약간.”
충격 여파로 악몽이라도 꾸지 않을까, 페로몬을 재차 풀어 깊고 편안한 수면 상태를 유지한 윤재는 은호를 보듬어 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쪽잠을 청했다. 다행히 윤재의 수고가 먹힌 건지, 푹 자고 일어난 은호는 어젯밤 충격에서 많이 벗어난 듯 보였다.
은호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찾다 근처에 없다는 걸 깨닫고 시간을 물었다.
“지금 몇 시?”
“6시 47분.”
“아…….”
출근까지 시간이 넉넉한 걸 확인한 은호는 침대에서 조금 더 뭉그적거리고 싶어졌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윤재의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자 조용히 지켜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휴대폰 번호… 바꿀래요?”
“……그럴게요.”
은호는 왠지 그의 말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가 한 말 중 틀린 말이 없었다. 연락처에 많은 사람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제처럼 폭탄 메시지에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은호의 이마를 살살 매만지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들고 왔다. 케이스 겉면에 박힌 로고만 봐도 휴대폰인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선물. 대리점 가서 번호 교체하면서 기기도 변경해요. 기존 번호 연결 서비스는 빼달라고 하고.”
은호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자, 윤재는 직접 그의 손바닥을 펴서 휴대폰을 쥐여 줬다.
은호는 문득, 현관 앞에 놔둔 20리터 종량제 봉투를 떠올렸다. 3년을 사귀었지만 남은 거라고는 비닐의 반의반도 채우지 못한 물건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준의 집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의 집 안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은호가 사다 놓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받기만 하던 현준과 너무도 다른 윤재의 행동에 마음이 쓰인다. 은호가 새 휴대폰 케이스를 열어 볼 생각도 않고 만지작거리자 가만히 지켜보던 윤재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나랑 같은 건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의 행동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이 보여 마음이 찡했다. 그에게 잘해 주고 싶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막상 실천한 건 없었다.
“전무님께 아무것도 해 드린 게…….”
“그런 고민은 하는 게 아니야.”
무엇을 말하려 드는지 알기에 말허리를 잘랐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말고.”
큼지막한 손이 은호의 목덜미를 감쌌다. 보들보들한 윗입술에 윤재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았다 뜬 은호는 그의 잔잔한 웃음을 따라 옅게 미소 지었다.
***
최 회장이 한국대 병원 최상층에 머무르기 시작한 이후 벌써 다섯 번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육중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긴 복도를 따라 걷는 구둣발이 차가운 대리석과 부딪치며 서늘한 소리를 냈다. 병실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윤재를 확인하고 바로 노크를 하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그는 조금 있다 들어가겠다는 말로 경호원을 붙잡고는 방향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냉랭한 입매만큼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먼저 든 방문객을 무시하고 들어가는 게 맞는 걸까. 최서령의 페로몬이 복도 전체에 깔리다 못해 닫힌 병실 문틈에서도 간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유성창투 지분을 더 챙기셨어야죠. 왜 영재 것만 챙기셨어요.”
“영재 지분율로도 당시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알지 않느냐.”
“그래도 더 끌어 올렸어야죠. 그때 생각하면 진짜.”
풍채 좋기로 유명했던 최 회장의 몸은 세월과 병마를 거스르지 못하고 앙상한 뼈와 메마른 가죽만 남았다. 생기가 빠져 거무튀튀하고 건조한 피부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듯 애처로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쇳소리가 끊이지 않는 최 회장은 힘겹게 서령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서령아.”
가래가 끓어 헐떡이는 숨이 오늘내일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섬망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 정신이 온전할 때 최대한 하고 싶은 말을 전해야 하는 최 회장은 기운 없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윤재에게 등을 돌리지 마라. 그 아이를… 적으로 두어서는… 안 돼.”
“아버지!”
“영재는 아니야, 그 애는… 그만한 재목이 아니야.”
최 회장은 실무에서 손을 내려놓은 지 오래되어 퇴물 취급을 받았지만 선구안만큼은 여전했다. 그는 유성그룹의 몰락을 예감하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 한때 재계 5위 안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성그룹은 이제 20위조차 간당간당하게 겨우 유지하는 ‘지는 해’에 가까웠다.
쇠락의 길목에 선 유성그룹의 가장 큰 문제는 리더의 조직 장악력 부재였다.
애초에 자식이 아닌 전문 경영인을 상위에 배치했어야 했는데, 권력욕을 놓지 못한 최 회장이 최고 결정권자의 위치에 능력이 부족한 서령과 영재를 배치하며 기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소통 부재, 객관적 통찰력 부족, 방향성 상실. 2대째 내려오던 기업이 3대에서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자, 다급해진 최 회장은 전문 경영진을 사장으로 올리고 서령과 영재를 부사장과 전무로 내렸지만 이미 해이해진 기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서서히 악화되었다.
반면 벤처 기업으로 시작해 이제는 투자 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커진 유성창투. 자금 회전력이나 기업 현금 확보에서 유성그룹과 비교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유성창투는 최 회장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카드이자, 유성그룹을 책임질 구원 투수였다.
“그 아일… 잡아야 해.”
어릴 적부터 윤재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눈여겨본 최 회장은 자신의 동생 내외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남은 그를 시험대 위에 올렸다. 최 회장의 노련한 촉으로 비추어 볼 때 윤재는 타고난 경영인이었다.
최 회장은 윤재가 스물여섯 살이던 무렵 일부러 고립된 위치의 팀장 자리를 주고 어찌 해결하는지 지켜보았다. 그가 참된 재목인지 확실하게 검증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보란 듯이 조직을 하나로 통일하고 주변 조직까지 흡수하며 전력 질주해 나갔다. 최 회장은 그런 그가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자식이 아니어서 아쉬워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윤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흐트러짐 없는 슈트 차림은 겉모습만으로 주변을 압도할 만큼 위협적이면서도 빼어났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내가 불렀다.”
서령이 으르렁거리며 날카롭게 쏘아대자 최 회장이 말리며 손을 내저었다. 정수리를 향해 날것 그대로 꽂히는 서령의 사나운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윤재는 깍듯이 인사 후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시선을 보내는 윤재와 달리 형형한 기운을 쏟아내던 서령은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질끈 물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거친 문소리와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난잡한 소음을 만들었다.
“윤재야.”
“네, 큰아버지.”
요즘 들어 부쩍 최 회장의 호출이 잦아졌다. 상속 문제에선 완벽히 제외되었기에 자주 찾을 이유가 없음에도 최 회장은 수시로 윤재를 불러냈다. 그는 윤재를 통해 유성그룹을 과거 화려했던 전성기로 되돌리고 싶어했다.
“나는 네 아버지가 살아 있던… 시절에도,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단다.”
“…….”
“너는 언제나 영민했었지.”
윤재가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일곱 살 무렵. 교육에 열을 올렸던 서령과 영재와 달리 특별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음에도 어른들의 사업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방향성에 대해 다각도로 질문을 하는 윤재에게 최 회장은 남다른 관심을 가졌었다.
“서령이가 너를 모질게 대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닐 게야.”
윤재를 설득해야 했다. 지금에야 혈연 때문에 그나마 연을 잇고 있지만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윤재는 유성그룹을 끊어낼 것이다. 그 전에 그를 붙잡아야 했다.
그는 발톱을 감추고 있는 맹수다. 굳이 드러내야 할 이유가 없어 숨기고 있을 뿐, 한번 마음먹으면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다.
서령은 늘 윤재를 무시했지만 최 회장이 보는 눈은 달랐다. 그는 일부러 져주고 있었다. 최씨 집안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봐주고 있는 거지, 작정하면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상대를 밟아 버릴 녀석이었다.
“윤재야.”
“네.”
“유성그룹을 놓지… 말아다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이 허공 위로 들리자 윤재가 두 손으로 붙들었다. 온기조차 미미한 손이 윤재의 손을 옭아맸다.
“서령이와 영재가… 나이만 먹었지, 너처럼… 멀리 내다보지를 못해.”
“…….”
“……부탁한다.”
그는 윤재에게 매달렸다. 먹혀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 매달리게 된다. 윤재는 턱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운전 금지령이 떨어지며 퇴근 후 할 일이 줄어든 은호는 수영을 만나기 위해 카페 근처에 있는 작은 펍으로 향했다.
“너 얼굴이 왜 이래?”
살이 빠져 생기마저 흐릿해진 은호의 얼굴을 코앞까지 다가와 훑어보던 수영은 혀를 차며 눈살을 퍽 찌푸렸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면 다이어트 해?”
“헤어졌어, 현준이랑.”
수영은 헤어졌다는 말 한마디에 일시 정지된 화면처럼 굳어 입만 뻐끔거렸다. 할 말이 많지만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수영이 말했다.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새로운 애인이 생겼더라고.”
“야 이 씹, 아오! 그 미친 새끼.”
수영은 현준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는 말 한마디에 들고 있던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는 벨을 눌렀다.
“여기요, 오백 더 주세요.”
헤어진 그날의 막장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자, 수영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지 계속해서 허, 참, 와, 씹 등의 의미 없는 감탄사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그녀는 건조하게 말라붙은 은호의 얼굴을 연신 애처로운 눈빛으로 쓸어내렸다.
“그래서 그 꼴을 보고도 주먹다짐 한번 못하고 나왔다고?”
“그랬다가는 내가 얻어맞았을걸?”
그날 보았던 현준의 새 애인은 은호보다 덩치가 컸다. 오메가 페로몬이 아니었다면 알파라고 느꼈을 만큼 골격이 좋았다. 오메가는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아 뼈마디가 가늘고 선이 부드러운 편인데 그는 운동으로 단련했는지, 보통의 오메가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쓰레기를 수거해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냉소적으로 던졌지만 다시 하라고 하면 오금이 저릴 만큼 상대가 위협적이고 두려웠다.
“야, 주소 불러. 내가 쫓아가서 머리끄덩이라도 잡게.”
“됐어. 다 차단했는데 뭐.”
“아! 그래서 번호 바꾼 거야?”
“응.”
휴대폰 개통으로 새 번호를 받은 은호는 가장 먼저 윤재에게 연락했고, 뒤이어 회사 직원들에게 팀 메시지로 바뀐 연락처를 전달했다. 사원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나니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가족과 친구 몇 명뿐이라 퇴근길 버스 안에서 번호가 바뀌었다며 일일이 메시지를 넣었다.
“고생했네, 에효. 미친 새끼. 그 새끼는 꼭 천벌 받을 거야.”
“연락이나 안 왔음 좋겠다.”
은호는 시켜 놓은 모둠 안주는 먹지도 않고 목마른 뻥튀기에만 손을 댔다.
“네가 그러니까 살이 안 찌는 거야.”
거의 다 비워진 뻥튀기 그릇을 휙 치운 수영은 치킨 다리 하나를 앞접시에 담아 건넸다. 은호는 신경 써주는 수영이 고마워 멋쩍게 웃었다.
“사실, 최윤재 전무가 날 좋아하는 거 같아.”
“거봐! 내 말이 맞지?”
돌아가는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처럼 인식한 수영에게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슬그머니 윤재 이야길 꺼내자 씩씩거리던 수영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대박, 어떻게 된 건데?”
와르르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휴대폰으로 시간을 한 번 확인한 은호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히 풀었다.
“야! 똥차 폐차시키라고 벤츠 왔나 보다. 미친 새끼, 다이아를 몰라보고.”
어쩌면 이 말이 듣고 싶어서 윤재 이야길 꺼냈는지 모른다. 매력 없는 거 아니라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다고.
은호는 말해 놓고도 쑥스러워 들고 있던 맥주를 깔끔하게 비웠다. 하지만 입 안이 쓰다. 뭘 넣어도 쓰고 맛이 없었다. 헤어질 땐 첫사랑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에 힘들더니 어젯밤 메시지 이후로는 불쾌하고 모욕적인 감정이 깊게 자리 잡았다.
“점점 나아지고 있긴 한데…. 후, 모르겠어.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뒤통수 맞아 더럽게 헤어졌는데 왜 힘든 걸까?”
“3년의 세월이 장난이니?”
첫 연애, 첫 이별. 은호는 문득 앞에 들어간 ‘첫’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아깝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첫 번째’라는 단어에 많은 의미를 두어 그동안 힘들고 외로워도 오기로 버텼던 거 같다.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것을, 왜 그리 목숨처럼 붙잡고 조마조마했는지.
“나 혁필 선배 만나기 전에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미친놈 있었잖아. 걔랑도 헤어질 때 엄청 힘들었어.”
“아, 맞다.”
“나 그때 10kg 빠졌잖아. 그리고 보니 그 새끼랑 한 세트네. 양다리.”
삼정물산 입사 후 신규 입사자 OJT에서 만난 수영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던 한 줌 허리의 야리야리한 체형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었다.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오랫동안 사귄 애인과 헤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급격히 살이 빠졌다고 했다.
수영은 식어 빠진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우물거렸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래도 새 애인 생겨서 금방 잊겠네.”
“고마워.”
“근데 최 전무한텐 헤어진 거 티 내지 마.”
“이미 알아.”
“이미 안다고?”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보던 수영은 말끝을 어름대다 맥주로 다시금 목을 축이고는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고도 좋아하는 거면 그 사람도 보통은 아니다.”
“근데, 이젠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려고.”
“야, 그건 아닌 거 같아. 너 인위적인 거 엄청 티 나.”
그러지 말라고 검지를 좌우로 까딱인 수영은 팔짱을 끼고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다정한 시선 위로 해맑은 미소가 은호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냥 네 마음이 가는 대로만 해.”
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그녀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