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날로부터 5개월 전
다과를 들고 집무실로 들어갔던 김 비서는 어딘가 창문이 열린 게 아닐까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칼바람이 부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흉흉하게 쏟아지는 우성 알파 간의 페로몬 싸움에 베타인 김 비서마저 음습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다기 잔을 든 최서령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윤재를 유령 취급하며 한 대표에게 조소 섞인 투로 말을 걸었다.
“요즘 한 대표님을 난감하게 만든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하하. 최 부사장님,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서령은 이번 투자에 불만이 많은 것처럼 노골적으로 윤재를 몰아세웠다. 그녀의 날이 선 공격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윤재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스튜디오 G에서 로비 받았어? 공들이던 건 버리고 뜬금없이 리스크가 큰 걸 집은 이유가 뭔데?”
“그런 일 없습니다.”
“우리가 B-gate 손절하자마자 제이인베스트에서 거저먹기식으로 투자 들어갔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짓은 하지 마. 2대 주주가 영재야.”
B-gate가 스튜디오 G보다 투자처로 적합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시점 기준일 뿐. 윤재는 다르게 생각했다. 6개월 후 정부의 코인 정책 기조에 악재가 터지며 거래소 시장이 위축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회사 대표가 고객의 예탁금 일부와 투자 금액을 들고 해외로 잠적해 버리는 사태를 겪었던 터라 쉽사리 손이 나가지 않는다.
아직도 믿기 힘들지만 미래를 보고 온 윤재의 입장에서는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과거의 윤재는 한 대표의 적극 추천으로 B-gate에 300억을 투자했다가 위기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는 미처 보지 못한 두 사람의 관계가 눈에 들어오자 윤재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누님이야말로 B-gate에서 로비 받으셨어요?”
“뭐?”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 윤재의 낮은 음성이 최서령의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어 본 것처럼 번뜩였다. 직설 화법의 역공격에 최서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그녀가 들고 있던 잔 속의 녹차가 잔파동을 일으켰다.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여기까지 친히 납신 걸 보면 뭐가 있는 겁니까? 그런 거예요?”
그 당시엔 의견 충돌 없이 투자에 합의해 최서령 부사장이 직접 찾아오는 일도 없었을뿐더러 윤재 역시 한 대표를 믿고 있어 그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방향을 틀기 시작하니 보이지 않던 부분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독기가 잔뜩 오른 서령은 윤재의 공격에 한발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거뒀다.
“하, 한 대표가 많이 힘들겠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서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윤재를 내려다보며 비소를 흘렸다.
“그래, 어디 한번 잘해 봐. 내년 실적 확인해 보면 알겠지.”
“벌써 가시려고요?”
“대표님이 봐도 이 자리가 편한 자리는 아니잖아요?”
한 대표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식사를 하자고 권했지만 서령이 이를 거부했다. 홀로 소파에 앉아 있던 윤재는 손가락으로 가죽 시트를 탁탁 두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를 흐린 건 제가 아닐 텐데요.”
“최 전무!”
윤재가 나른한 눈으로 최서령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윤재의 뜻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눈동자가 숨 막히는 위압감을 품고 날을 세우자, 서령은 기세에 압도당해 말 한마디 뻥긋하지 못하고 차갑게 얼어 버렸다.
중간에서 난처해진 한 대표가 윤재를 다그쳐 보지만 모욕감을 느낀 서령은 곧장 뒤를 돌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황급히 그녀를 뒤따라 나가는 한 대표를 지켜보던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탁탁 털었다.
‘둘이 한패였나…….’
과거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균열 속에서 어떤 것이 새어 나올지 자못 궁금해졌다. 윤재는 자신의 집무실로 이동하는 도중 데스크에 서 있던 윤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윤 실장. 안으로 들어와요.”
분노하는 최서령 부사장과 뒤를 따르던 한 대표를 보았기에 무슨 사달이 일어났다는 걸 예감한 윤 실장은 집무실 로 들어와 문을 닫고 윤재에게 다가갔다.
“윤 실장.”
“네, 전무님.”
8개월의 시간으로 되돌아오기 전, 유동성 위기를 겪던 당시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잘 풀어 보려 했던 사람 중 하나가 윤 실장이었다. 현재 그의 포지션이 한 대표까지 섭렵하고 있기에 조심스럽지만 한 번쯤은 떠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윤 실장을 많이 신뢰하는 건 알고 있죠?”
“……네.”
그는 의도가 분명한 질문에 잠시 텀을 두고 제법 진지한 눈빛으로 답했다.
“윤 실장이 봤을 때… 한 대표와 최서령 부사장과의 관계… 어떻게 생각해요?”
“……확신이 없어 말씀드리기 조금 곤란합니다.”
살짝 선을 긋는 것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윤 실장은 윤재의 흔들리지 않는 곧은 모습에 마음을 먹은 것처럼 목소리를 죽여 조용히 답을 했다.
“하지만 최근 두 분의 회동이 잦았다는 건 사실입니다.”
윤 실장은 양쪽을 모두 쥐는 건 불가능하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고, 현재 잡고 있는 줄에 모험을 걸어 보기로 결심했다.
윤 실장의 눈에 스친 충성의 눈빛을 읽은 윤재는 고개를 끄떡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확신이 서면 나에게 꼭 이야기해 줘요.”
“네.”
“혹시… B-gate에 아는 사람 있어요?”
“네. 재무 쪽 팀장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도 꾸준히 체크 좀 부탁할게요.”
“네, 전무님.”
윤재는 모니터의 암호를 풀고 들어가 문서 파일 하나를 열었다. 이중으로 잠가 둔 암호를 풀고 나서야 화면 가득 드러난 것은 내년 6월까지의 스케줄표였다.
8개월 전으로 돌아온 첫날 은호를 만나며 모든 것이 예전의 반복임을 깨달은 윤재는 그날 내내 기억을 더듬어 8개월간 일어났던 일을 세심하게 적어 두었다. 혹시나 이중 암호화를 누군가 풀 수도 있어 혼자만 이해할 수 있도록 중요 사항은 초성 처리해 두었다.
스케줄러를 다시 확인해 보던 윤재는 기억하던 이벤트가 모두 다시금 일어났다는 사실이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웠다. 현재까진 원하는 대로 잘 흘러가고 있지만 되돌리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생길까 봐 겁이 났다.
***
회의를 마친 은호는 1층 커피숍에서 샌드위치를 구입했다. 한 시간만 참으면 곧 점심이지만 허기진 위가 회의 내내 꼬르륵거려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1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건너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음습한 페로몬이 은호에게 끼쳐 들었다. 은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돌았다. 페로몬의 기운으로 볼 때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거기 잠깐.”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 움츠렸던 몸을 편 은호는 상대를 확인한 후 깜짝 놀라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정체불명의 중년 여성 뒤로 한 대표가 서 있었다.
“어디 소속이죠?”
종합적으로 계산해 봤을 때 앞에 있는 중년의 여인은 비서실 직원들이 말한 최서령 부사장이 틀림없었다. 사원 태그를 훑던 그녀가 소속을 묻자 은호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비서실 유은호입니다.”
“담당 라인이?”
“최윤재 전무님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졌지만 은호는 그녀의 웃음이 영 껄끄러웠다. 뭔가 좋은 의도의 탄성이 아닌, 약점을 잡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미동 없는 차가운 눈매와는 반대로 비릿하게 웃는 인상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준서 못 잊었나 보네.”
준서는 누구야. 은호는 스쳐 지나가듯 던지는 서령의 말에 불쾌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명함 있어요?”
“……네.”
명함을 달라고 내미는 손이 반질반질하니 윤기가 났다. 생전 험한 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서령의 단아한 손을 보며 은호는 재킷 속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그녀는 은호를 똑똑히 기억하겠다는 듯 아래위로 훑더니 이내 몸을 틀어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뒤따르는 한 대표의 모습이 오늘따라 초라해 보였다.
퇴근 시간에 맞춰 현준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라 괜스레 반가웠다.
은호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현준이 찍어 준 주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고깃집 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코너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리운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테이블에 다가가 현준의 옆자리에 앉으려고 보니 건너편에 수염 자국이 가득한 상대가 앉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은호는 일단 밥부터 주문했다. 배고프기도 했고, 잘 모르는 사람과 처음부터 넉살 좋게 웃으며 잔을 주고받고 싶지도 않았다.
“한 잔?”
“저는 저녁부터 하고요. 현준이랑 드세요.”
현준의 친구는 호탕하고 유머러스했다. 겉모습과는 달리 대화의 내용이 처지려고 하면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와 칙칙함을 걷어 냈다. 은호는 대화에 기분 좋게 호응하며 수저질을 하다가도 불판에 올린 고기를 뒤집느라 바빴다.
“아니, 현준이 왜 만나요?”
“씹새, 너 그딴 소리 하려거든 가라.”
친구는 은호에게 집게를 달라고 말하며 자신이 고기를 뒤집을 테니 남은 밥을 마저 먹으라고 권했다. 은호는 묵묵히 불판 위의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현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노릇노릇 잘 익은 고기를 현준과 친구의 앞에 옮겨 주었다.
“솔직히 부러워서 그런다. 까놓고 공시생 뒷바라지가 쉬운 건 아니잖아요.”
옳은 소리를 시원시원하게 하니 은호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해서 현준에게 한 소리 해 주는 것만 같아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일부 해소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현준은 듣기 싫은지 귀를 파며 앞에 놓인 술잔을 연거푸 비웠다.
“부럽다. 챙겨 주는 애인도 있고.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얼른 털어야 누굴 만나든 할 텐데.”
“내년엔 두 사람 모두 꼭 붙으면 되죠.”
“그랬음 소원이 없겠네요. 진짜 마음 같아선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은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친구와 죽이 맞아서 대화의 폭을 늘려 갔다. 경직되어 말끝을 흐리거나 대화의 맥을 자르던 현준은 오히려 점점 뒤로 밀려났다.
한참 흥이 붙을 즈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떨려 왔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은호는 빠르게 통화를 눌렀다.
“네. 한 비서님.”
- 유 비서, 어? 밖이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 전무님이 좀 취하신 거 같은데. 어떡하지?
저녁 일정이 없어 칼퇴근한 건데, 뜬금없는 호출에 머릿속이 아연해졌다.
“어딘데요?”
- 주소 찍어 줄게요. 매니저가 내 명함을 가지고 있어서 나한테 연락이 들어왔더라고. 내가 지금 술을 마시고 있어서.
“아…… 바로 갈게요.”
이러려고 술을 미루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은호는 계산서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회사 호출.”
“퇴근했잖아.”
“사정 좀 봐주라. 계산은 내가 할게.”
어차피 이곳에 부른 이유는 뻔했다. 계산서를 손에 들고 살랑이자 살짝 투덜대던 현준은 빨리 가 보라며 손까지 흔들었다.
고깃집 문을 여니 하늘에서 솜 뭉텅이 같은 흰 눈이 펄펄 날렸다. 옷에 달라붙자마자 녹아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은호는 큰길가로 걸어가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빌딩 지하에 위치한 와인 바는 회원제로 운영하는지 문 앞에 경호원이 인이어를 꽂은 채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은호는 가까이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한 비서가 준 매니저의 연락처를 보여 주고 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짧은 통로를 지나 붉은 카펫이 깔린 로비로 향하자 통로에서부터 울리던 첼로의 쓸쓸한 선율이 은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답답해.’
지나칠 정도로 묵직한 선율은 가슴속 깊이 내재되어 있던 우울함을 끄집어냈다. 손끝에 모든 감정을 담아 무반주 첼로를 연주하는 첼리스트를 뒤로하고 매니저가 안내해 주는 룸을 찾았다. 노크를 한 후 잠시 기다렸으나 답이 없었다. 같이 온 매니저가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정중한 멘트를 내뱉고 문을 열었다.
“…….”
디귿 자 모양의 소파 정중앙에 몸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 달린 수십 개의 할로겐 조명이 내뿜는 오로라 빛 색채가 윤재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지만, 그의 안색은 밀랍 인형처럼 창백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던 윤재는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에 기운 없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도로 반쯤 내렸다.
“……여기 …어떻게 왔어요.”
윤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그런지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의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은호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있는 양주를 확인했다. 반쯤 비어 있는 걸 보면 짧은 시간 내 급하게 마신 티가 역력했다.
“한 비서님께 연락이 와서요.”
“어떻게 알았지…….”
절반쯤 뜬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던 윤재는 눈앞의 은호를 느른하게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제가 연락드렸습니다, 전무님.”
가까이 있던 매니저가 나긋한 투로 답을 하자 반 박자 느리게 그의 고개가 움직였다. 취기에 뇌까지 마비가 된 것처럼 느릿느릿했다.
“집으로 가시죠.”
은호는 앉아 있는 윤재의 어깨를 감싸며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인사불성 상태는 아니었지만 중심축이 흔들릴 만큼 몸을 가누지 못해 그를 끌어안고 있던 은호까지 덩달아 휘청였다. 은호가 자신보다 한 뼘 정도 큰 그를 아슬아슬하게 부축하자, 결국 지켜보던 매니저가 경호원을 불렀다. 경호원이 윤재를 등에 업은 사이 은호는 주차장으로 뛰어가 차를 건물 입구에 대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잠시 후 은호는 경호원의 도움으로 뒷좌석에 탄 윤재를 룸미러로 살피며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반쯤 감긴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알록달록한 야경을 의미 없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좀 전에 보았던 첼리스트의 연주처럼 지독하게 외롭고 슬퍼 보였다. 이동하는 내내 대화는 없었지만 불편하지 않은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전무님.”
은호는 정원 쪽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몽롱한 의식을 한 꺼풀 벗은 윤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서 들어가려나.’
쓸쓸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 위로 낮에 보았던 최서령이 교차되었다. 그는 혁필 선배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느라 심적으로 힘든 듯했다. 리더라는 자리가 단순히 사업 하나만 잘 이끌어 간다고 되는 게 아님을 알 것 같았다. 그가 집으로 잘 들어가는지 지켜본다는 게 어느새 그의 뒤를 조용히 밟고 있었다.
휘청이는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아 따라간다는 얄팍한 변명 뒤에 숨겨진 마음은 안쓰러움이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밟던 은호는 오른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린 윤재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 빠르게 뛰어가 그를 몸으로 받치며 잡아 주었다. 그의 고적한 시선이 붙잡힌 팔을 지나 은호에게 향했다.
“같이 들어가시죠.”
한강과 가까운 거리라 바람이 유난히 찼다. 은호는 코를 훌쩍이며 윤재의 팔을 세게 감고 출입구로 향했다.
복도와 거실을 지나 침실에 들어선 은호는 윤재를 침대에 앉히고 재킷을 벗겼다.
“따뜻한 물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아요.”
은호를 바라보는 윤재의 눈빛은 마치 매달리듯 어딘가 간절해 보였다. 은호는 그가 왜 그런 눈빛을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그의 눈동자가 스탠드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은호는 윤재를 홀린 듯 바라보다 순간 놀라 어름댔다.
“전무님?”
“…….”
“어디 아프세요?”
윤재의 눈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눈물이 속눈썹을 촉촉하게 적셨다. 윤재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
“…….”
“……잠시만 같이 있어 줄래요?”
그의 낮고도 부드러운 음성이 은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의 눈이 은호의 발길을 막았다. 은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근처에 있는 윙 체어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이야기 들어 줄게요.”
“…….”
“아니면 제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윤재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외로움에 천천히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은호는 그의 쓸쓸한 눈빛에 제 모습을 투영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들어 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윤재가 이야기를 듣겠다고 끄덕이자 은호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의자에 편히 앉았다. 차라리 그가 잠드는 걸 지켜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았다. 윤재는 헤드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희 부모님은 미국에 있어요. 이민자치고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죠. LA 한인타운에서 한식당을 운영하시는데 나름 소문난 맛집이에요.”
기운 없는 그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은호는 침대맡에 힘없이 놓여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따스한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어머니, 아버지, 형 둘 그리고 나. 총 다섯 식구 중 어머니와 저 빼고 모두 알파예요.”
아쉽다는 투로 하소연하듯 말하자 그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은호는 피식, 싱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에 발현했어요. 그전까진 베타인 줄 알고 살았죠.”
“…….”
“그래서 도망쳤어요. 이곳으로요.”
“……만족해요?”
“네, 가족이 없어 외롭긴 한데 그래도 이곳에서의 삶이 좋아요.”
심리 치료 상담사 앞에서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진심을 하나씩 꺼내는 것처럼 말하던 은호는 북받치는 감정이 툭툭 마음을 건드려도 애써 담담한 척 굴었다.
“첫 직장에서 지금 사귀는 애인을 만났어요. 그때 전 너무도 외로웠고,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는 현준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 줄 상대를 만난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
“……지금도 그래요?”
윤재는 고요한 눈빛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은호는 할 말이 많지만 억누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떼길 반복하다 빙긋이 웃었다. 눈가가 점점 시큰거렸다.
은호는 깨끗한 눈을 가졌다. 그의 맑은 눈엔 곧고 바른 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배려심이 많은 만큼 상처도 자주 받았다. 불붙은 사랑은 언제든 식어 뜨뜻미지근해질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요. 1년은 좋았는데, 시험공부 하러 들어가면서 많이 소원해졌어요.”
“……외롭군요.”
“……약간.”
은호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윤재와 시선이 마주쳤다간 왈칵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은호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사이 저도 모르게 윤재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사실 많이 외로워요.”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목소리가 떠밀려 나왔다. 외로움에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고 감정이 자꾸만 울컥 토해졌다.
현준에게 사랑을 기대했다. 은호는 그에게 그리 대단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남들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길 원했을 뿐.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허함만 가득 차올랐고, 이제 은호는 방향을 잃고 길 위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고도 없이 몰아치는 감정이 툭툭 바지 위를 짙게 적셨다. 은호의 얼굴 위로 크고 단단한 손이 다가왔다.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윤재의 손가락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가 아련한 시선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울지 마.”
그의 한마디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픈 충동이 일었다. 부드러운 페로몬이 눈앞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사라질 때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관임을 망각하게 된다.
그가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가 은호의 얼굴 위를 천천히 돌아다니다 시선을 맞댔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귀를 스치고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느새 얼굴이 겹쳐지고 마주 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감겼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심중을 알 수 없었지만 은호는 이 시간만큼은 분위기에 심취해 이유를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가 술에 취했고, 이 모든 것은 취기 탓이니 시간이 지나고 혹여 당황스러운 순간이 와도 모르는 체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온기 가득한 숨결로 은호의 외로움을 어루만졌다. 은호는 뜨거운 숨이 닿은 자리마다 영혼이 치유되는 것처럼 위로를 받고 있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을 때마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터졌다. 은호는 잠깐이었지만 그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며 사랑을 애원하고 싶었다.
은호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법조차 잊어 입 안에 빼곡하게 차 있던 숨을 겹쳐진 입술 틈새로 조금씩 흘려보냈다. 숨이 막혀 벗어나고 싶다가도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기나긴 호흡을 주고받던 짤막한 유효 기간이 지나고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쥔 윤재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지만 은호는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고개를 숙이며 코트를 한쪽 팔에 건 은호는 일부러 윤재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잠시 동조하긴 했지만, 취기 어린 실수였다. 현실을 인지한 은호는 표정을 지우고 뒤로 돌아섰다.
“가지 마요.”
윤재는 자리를 떠나려는 은호를 뒤에서 껴안으며 뜨거운 호흡을 내뿜었다. 목덜미와 어깨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지만 은호는 조심스럽게 그를 떼어 냈다.
“죄송합니다.”
“은호 씨.”
“내일 뵙겠습니다.”
윤재의 집을 빠져나온 은호는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길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스치는 바람이 칼날처럼 온몸을 스쳤지만, 은호는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야만 했다.
냉정한 이성이 외로움에 동조되어 그랬다고 궁색한 변명을 해 보지만 내내 저릿하던 감정이 계속해서 마음을 긁어 댔다. 은호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감정에 휘둘리고 싶었다.
어느덧 눈발은 그치고 길거리엔 잔잔하게 쌓인 눈들이 조금씩 얼어 갔다. 은호는 눈을 밟고 싶다는 핑계로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다음 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들어온 메시지에 은호는 찬 서리를 맞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오늘은 쉴 테니 회사로 바로 출근하세요. 오전 06:02
지난밤 고즈넉한 공간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던 여러 단어와 장면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가 쉬겠다고 먼저 연락을 준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메시지 하나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혹시 어제 일 때문에 그러는 걸까, 술도 안 마셨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지.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그런다고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마음을 접고 회사로 출근한 은호는 비서실 사람들에게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부모님의 기일.
은호는 어젯밤 그의 눈에 드리워진 외로움의 실체를 마주하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채도가 낮은 그의 음울한 눈빛이 계속해서 가슴 언저리를 차갑게 긁고 지나갔다.
그의 외로움을 끝까지 감싸주지 못한 미안함이 다시금 겹겹이 쌓여 간다. 평소와 달랐던 그의 행동을 좀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좋았을걸. 은호는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담당 비서로서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오후 반차를 내고 윤재를 찾아갈까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평소보다 늦게 출근한 윤 실장이 코트를 벗으며 자리에 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은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떨어진 그의 파티션 앞으로 걸어갔다.
“실장님.”
“네.”
겨울바람 냄새를 묻히고 온 그가 진득한 눈길로 은호를 올려다보았다. 은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꼼질거리다 가까이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작게 속삭였다.
“혹시 최 전무님 부모님 묘소를 아시는지…….”
“방금 다녀오는 길인데, 왜요?”
제법 당돌한 질문에 눈주름을 긋던 윤 실장은 모니터의 암호화를 풀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가 보려고요?”
“네, 마음에 걸려서요. 오후 반차를 내고 가 보려고 하는데.”
“그냥 다녀와요. 어차피 오늘 특별한 이슈 없잖아.”
“……아, …네. 감사합니다.”
마치 그러길 바랐는데 찰떡같이 알아차리고 왔다는 것처럼 흐뭇하게 미소 짓던 윤 실장은 속전속결로 선산의 위치를 메시지로 넣었다. 은호가 메시지를 확인하며 시간 계산을 하자 유심히 지켜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 갈래요?”
“그래도 될까요?”
“가서 전무님 잘 달래서 집으로 보내드리고 퇴근해요.”
“……네?”
윤 실장이 뜻밖의 미션을 내리자 당황한 은호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었다. 굳이 해석하자면 ‘내가 해 보려고 했는데 안 됐으니, 네가 가서 꼭 성공하고 오길 바란다’였다. 분명 윤 실장은 가볍게 웃고 있는데, 마냥 편하게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은호는 서랍에서 핫팩을 잡히는 대로 집어 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에이, 설마 지금도 밖에 있으려고. 집으로 갔겠지.’
윤 실장의 마지막 말이 돌림 노래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자 몸이 급하게 반응했다. 빌딩 지하 꽃집에서 하얀 국화로 만들어진 꽃다발을 주문하고 서둘러 내려가 건네받은 은호는 빌딩 출구 방향 쪽에 세워진 택시를 잡아탔다.
은호의 방문 목적은 윤재와의 만남이 아니었다. 보좌하는 상관의 부모님에 대한 예우, 중요한 날을 뒤늦게 알게 된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 정도였다. 사실 윤재가 그곳에 없기를 바랐다. 이 추운 날 실내도 아닌 실외에 있는 게 걱정되었고, 마주치면 무슨 위로를 건네야 할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아 고민스러웠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부터 장갑과 머플러로 중무장한 은호는 꽃다발을 들고 서둘러 선산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곳곳에 볕이 들었지만 도심보다 1~2도 낮은 온도 차에 구둣발이 벌써부터 시렸다.
“하…….”
한참을 걸어 올라간 은호는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윤 실장의 예상이 맞았다.
헌화로 가득한 자리 한가운데에 검은색으로 갖춰 입은 그가 앉아 있었다. 늘 패기 넘치고 다부져 보이던 뒷모습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버거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녹지 않은 눈이 살얼음처럼 굳어 뽀드득 소리를 냈다.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은호는 냉큼 뛰어가 그를 껴안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나이와 직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슬픔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 발목을 잡아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윤재가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부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윤 실장이 보냈어요?”
“……아니요.”
“그럼 여기 왜 왔어요?”
“……일에 집중이 안 돼서요.”
하얀 입김을 폴폴 날리며 걸어간 은호는 비석 근처에 헌화를 가지런히 내려놓고, 라이터를 꺼내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잠시 묵념하자 앉아서 지켜보던 윤재가 고개를 떨궜다.
“언제부터 와 계셨던 거예요.”
“글쎄요.”
추위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닐 텐데, 설마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뇌가 얼었나? 은호는 윤재 앞에 쪼그려 앉아 꼼꼼하게 그의 얼굴을 훑었다. 아파서 열이 나는지, 아니면 단순히 추워서 얼굴이 붉어진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윤재는 은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안 추워요?”
“목도리 감고 있잖아요. 전무님이야말로…….”
윤재는 은호의 걱정을 가볍게 넘겼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추위 많이 타잖아.”
윤재는 자신의 목에 두른 짙은 회색 머플러를 풀어 은호가 이미 두르고 있던 머플러 위에 겹쳐 감아 주었다. 그는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은호는 누가 누굴 신경 쓰는 거냐고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빛에 조용히 손을 거뒀다.
은호는 심각하게 윤재를 바라보다 양쪽 주머니에 넣어 둔 핫팩을 떠올렸다. 있는 대로 꺼내 하나씩 뜯어 윤재의 양쪽 코트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는 은호의 행동이 아이들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느껴져 바람 빠진 숨을 토해내고는 느긋한 투로 물었다.
“몇 개나 더 있어요?”
“네 개요. 더 드릴까요?”
쿡. 우스웠는지 미지근하게 웃던 윤재는 은호의 옷깃을 꼼꼼하게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네.”
“……네?”
“여기까지 와 줬는데, 몸살감기로 앓아눕게 할 순 없잖아.”
주변의 경치를 두루 살피던 윤재는 호주머니에서 핫팩을 살짝 꺼냈다 다시 넣으며 고맙다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살짝 보이는 손끝이 빨갛게 얼어 볼품없었다.
“차에 먼저 가 있어요. 10분 정도 더 있다가 갈 테니까.”
“같이 있겠…….”
“내 말 들어요.”
“…….”
“혼자 있고 싶어.”
그의 마지막 말에 더는 토를 달기 어려워 뒤로 물러났다. 차 키를 받아 들고 내려오는 길에 발이 얼음장 같은 걸 깨달았다.
‘잠깐 있었는데도 이렇게 춥고 시린데 몇 시간 동안 어떻게 버티고 있던 거야.’
은호는 호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두 손에 꼭 쥐고 산을 내려왔다. 눈밭인 데다 구두를 신고 있던 탓에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낭패기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디뎠다.
차에 오르자마자 히터를 최대로 올리고 예열했다. 윤재가 기분이 심하게 처져 있으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최악은 아닌 듯했다.
차 안이 훈훈해졌을 즈음 돌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온 그가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죠. 내가 집으로 가야 은호 씨가 편하잖아.”
윤재는 윤 실장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급격한 온도 변화에 몸이 녹으며 저릿한 건지, 윤재는 스트레칭을 하듯 손발을 움직였다. 타고난 체력이 있어 그런 걸까? 그의 몸이 마법처럼 빠르게 회복했다.
“공무원 필기시험이 얼마나 남았죠?”
“……공무원 시험요?”
차 안 온도에 슬슬 적응할 무렵 코트를 벗어 뒷좌석으로 던지던 윤재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윤재에게 공무원 시험을 말하는 거냐고 재차 물었더니 맞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은호는 윤재가 물어보는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공무원 시험도 워낙 종류가 많아 시험 일정이 제각각인데, 아마도 현준을 두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4~5개월 정도요.”
4~5개월이라. 턱을 쓸어내리며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핑퐁처럼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색함이 묻어나진 않았다.
전날 감정에 북받쳐 나눈 키스는 취기로 인한 우발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은호는 현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용히 넘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뭔지 모를 아쉬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내일 뵙겠습니다.”
“추우니까 차 가지고 가요.”
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은호를 붙잡은 윤재는 뒷좌석에서 코트를 꺼내 차에서 내렸다.
윤재는 대문이 열리고 은호가 운전하는 차가 완전히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누군가를 찾았다.
“접니다.”
- 안 그래도 보고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잡히는 게 있습니까?”
- 말씀대로 계속 주시하고는 있는데, 아직 그렇다 할 정황이 포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낌새도 없다는 이야긴가요?”
- 동행자가 가끔 있긴 한데 단정 짓기 다소 어렵습니다.
“알겠습니다.”
- 확실해지면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윤재는 통화를 종료하고도 한참 동안 정원에 서 있었다. 아직까지 숨겨 둔 애인이 없다라……. 느릿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던 윤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윤재의 예상을 벗어난 일은 없었다. 투자도, 그날그날 뉴스에서 떠드는 사건·사고마저도 8개월 전과 똑같이 흘러갔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현준의 시나리오가 예상보다 느리게 흘러간다. 공무원 시험까지 앞으로 넉 달 반가량. 그리고 한 달 후 필기시험을 합격한 현준은 은호에게 헤어짐을 요구했고, 일주일 뒤 사고가 난다.
문제는 은호의 임신이었다. 당시 3개월 가까이 되었다고 했으니 현준이 시험을 치기 두세 달 전부터 둘을 분리해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텐데 돌아가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면서 생각을 정리하던 윤재는 은호에게 가진 감정부터 하나씩 되짚었다.
사실 8개월 전으로 되돌아왔던 날 윤재는 문제가 되었던 투자를 뒤집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은호는 후 순위였다. 그의 불행한 미래를 내다봤으니 또다시 반복되지 않게끔 그를 가까이 두고 자연스럽게 애인과 갈라놓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시작은 단순했다. 애인에게 버림받아 비참한 결과를 맞을 운명이 안타까워 적당히 관여하다가 말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호를 수행 비서로 두고 가까이서 지켜보던 윤재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며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윤재는 은호에게 애틋한 감정을 넘어 그가 애인과 헤어지게 만들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윤재는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이제는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복잡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호는 윤재의 예상보다 현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했고, 우울증으로 오래전부터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혹시나 강제로 둘을 떼어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 물증을 확보하고자 현준에게 사람을 붙여놨지만 아직 이렇다 할 증거가 나오질 않아 초조했다. 앞으로 두 달 안에 현준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증거를 잡아야 예측하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갈 것이다. 증거가 안 나와도 문제지만 나온다 해도 이걸 은호에게 어떻게 알릴지, 알렸을 때 받을 충격까지는 계산이 서질 않았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온 윤재는 드레스 룸으로 걸어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얇은 면 소재의 옷감이 빼곡하게 들어찬 근육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후.”
윤재는 요즘 들어 날것의 감정을 순간순간 은호에게 보여 주는 자신이 익숙지 않았다. 오랜 시간 회사를 움직이는 결정권자의 위치에 있다 보니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숨겨야 했다. 사실 회사 업무만으로도 너무 바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거니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은 이 생활이 질리고 외로워 벗어나고 싶기도 했지만 세뇌하듯 자신을 채찍질하며 버텼더니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덤덤해졌다.
그리고 찾아온 8개월 전으로 되돌려진 시간.
그는 아직도 되돌아온 시간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더 나은 방향이 있다면 그것으로 교체하고 조율할 뿐.
앞으로 남은 5~6개월.
윤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전에는 놓쳤던 것들을 다시 바로잡아야 했다.
***
오전 내내 보고서를 검토하고 투자처 4분기 예상 실적을 정리하던 은호는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시려다 바닥을 드러낸 빈 컵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씻고 다시 커피를 내리기 위해 탕비실로 걸어가던 중 비서실 안으로 막 들어오는 윤 실장과 눈이 마주쳐 고개를 숙였다.
“은호 씨.”
“네.”
“혹시 지금부터 6시 사이에 스케줄 있어요?”
“아뇨 없습니다.”
“그럼 이것 좀 부탁해도 될까?”
빨리 이쪽으로 와 달라며 손짓을 하길래 은호는 제자리로 돌아가 컵을 내려 두고 윤 실장에게 다가갔다. 그의 책상 위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쇼핑백이 놓여 있었는데, 고가 명품 브랜드 H사의 제품이었다. 턱을 엄지 끝으로 느릿하게 문지르자 윤 실장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는 듯 콧숨을 내쉬었다.
“한 대표님이 놓고 가셨는데 이걸 가져다드려야 하거든. 한 비서는 외근 중이고, 김 비서는 장롱면허고. 박 비서가 돌아와서 가지고 가긴 시간이 애매해서.”
“이것만 전달해 드리면 되죠?”
“응. 그래 주면 고맙고. 전무님껜 내가 이야기해 둘게.”
도착해야 할 위치는 회사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물론 막히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하다 만 일은 오늘 중에만 처리해서 넘기면 되니 갔다 와서 해도 부담은 없었다. 은호는 쇼핑백을 챙겨 지하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갔다.
윤재는 요즘 모든 본부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타고난 추진력, 포용하는 리더십으로 추앙받던 그였지만 요새 들어 독단적 행동이 잇따르자, 주위의 우려 섞인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그가 추진한 일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려면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1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었다. 윤재를 보좌하는 은호의 입장에선 그의 판단이 틀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한강 다리를 건너 윤재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서자 곧바로 바로크식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출입구에서 1차 검문을 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은호는 이미 만석이 된 주차장에 샌드위치 식으로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1월의 차디찬 강바람이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 왔다. 코트를 여민 은호는 휴대폰을 꺼내 박 비서를 찾았다.
“어디 계세요?”
- 출입구 앞에 있는 본관 말고 뒤에 별관이 있어요. 출입 통제 구역이라 문 앞에 가드들이 있을 텐데 그쪽으로 오세요.
고운 입김을 토해내던 은호는 주머니에 휴대폰을 찔러 넣고 쇼핑백을 꺼내 들었다. 칼바람을 가르고 독채 두 동을 지나 별관 건물로 가자 우람한 덩치의 경호원들 사이에서 출입 카드를 들고 있던 박 비서가 호들갑스럽게 뛰어나왔다.
“이거.”
따뜻한 차 안에 있다 밖으로 나와 그런지 코끝이 찡하게 울리며 콧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코를 훌쩍이는 은호를 지켜보던 박 비서는 호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주며 덩치에 맞지 않게 조잘거렸다.
“정말 고마워요. 이걸 놓고 와서 한 소리 들었거든요. 꼭 중요한 날 실수를 해서… 어휴.”
“근데… 여기서 뭘 하길래 경비가 삼엄해요?”
“미술품 경매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초대받은 몇몇 개인을 상대로 이뤄지는 밀실 경매인 듯했다. 유명 작가의 숨겨진 유작이나 고미술, 문화재가 은밀히 거래되는 자리여서 신원이 확실한 자들만 출입하는 것 같았다.
“구경할 수 있어요?”
“확인해 볼게요.”
사실 구경도 구경이지만 몸이 시려 따뜻한 곳으로 대피하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었다. 경호원에게 이것저것 묻던 박 비서는 출입 카드 한 장을 더 받아 은호의 목에 걸어 주었다. 카드 아래에는 회색으로 LV.1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아마도 구역이나 권한이 제한된 단순한 출입 카드 같았다.
카드로 보안 문을 통과한 후 기나긴 통로를 지나 경매장 입구에 들어서자 또 한 번 경호원에게 가로막혔으나 문밖에 설치한 모니터로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박 비서는 은호가 들고 온 쇼핑백을 들고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은호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경매장 입구에 비치된 도록을 집었다. 경호원이 잠시 눈을 흘겼지만 제지하지 않아 유유히 대기실 쪽으로 걸어가 듬성듬성 배치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경매 도록엔 은호도 알고 있는 고미술 작품이 여럿 있었다. 추정가와 시작가를 살피는데 낮게는 몇백부터 높게는 억 단위까지 다양했다.
“현재까지 6,700만 원입니다. 7,000만 원 없으십니까? 38번 고객님, 6,700만 원으로 낙찰됐습니다.”
근처 모니터에서 흘러나온 경매사의 목소리가 고요한 로비를 뒤흔들었다. 이 정도 구경이면 됐지, 한가롭게 앉아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은호는 박 비서에게 그만 가 보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경매장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여기서 또 보네.”
날을 뾰족하게 세운 목소리가 귓전을 긁고 지나갔다. 은호는 최서령 부사장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지만 불쾌감에 짜증이 솟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오질 않는 건데, 뭘 구경하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함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여긴 무슨 일로 왔지?”
“한 대표님께 전달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랫사람을 사용인으로만 취급하는 그녀의 작태가 꼴 보기 싫었지만 싫은 티를 냈다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라 불편한 표정을 최대한 지우고 옅게 미소 지었다.
“최 전무 수행이라고?”
“네.”
“준서를 못 잊은 거야, 아니면 대용이야?”
도대체 준서가 누구야?
서령은 궁금증 유발을 위해 작정하고 은호의 신경을 돋웠다. 그녀는 윤재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게 뭐든 긁고 싶어 했다. 그녀는 눈매가 굳는 은호를 보며 갸륵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나빠? 기분 나쁘라고 한 얘긴데, 안 그래?”
그녀가 일부러 신경을 긁는다는 생각에 은호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상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태연하게 바라보자 그녀가 턱 근육에 힘을 주며 화를 쏟아내려 했다. 그때 그녀의 앞으로 낯선 남자가 치고 들어왔다.
“유은호 씨?”
“……네?”
서령은 둘 사이를 가로막은 남자를 확인하고는 굳었던 표정을 빠르게 풀었다. 화가 섞인 목소리를 급하게 가다듬는 것이 페로몬 파동으로 느껴질 만큼 조악했다.
“안녕하세요. 최 부사장님.”
“강 상무, 이 아일 알아요?”
“네.”
남자는 흑발의 댄디 커트 스타일 때문인지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그래도 30대 중반쯤은 되어 보였다. 서령에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그는 꽤나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그런데, 이 친구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남자의 정중한 물음에 도리어 뻘쭘해진 서령이 떨리는 입술 끝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남자는 보호막을 치듯 서령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차단하며 은호를 데리고 경매장 로비를 벗어나 출입구 근처의 실내 테라스로 향했다.
“누… 누구시죠?”
“불편한 분위기에서 꺼내 준 건데 너무 경계하네.”
여유 가득한 그와 달리 은호는 정체 모를 남자를 향해 선을 그었다. 그가 자신을 호명한 순간 은호는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초면이었다.
“그야… 제 이름을 알고 있으니.”
“삼정물산 김 전무님 뵈러 몇 번 갔었는데.”
“……아.”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연결 고리를 알았으나 아무리 용을 써도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그런 것까지는 묻지 말고, 여긴 왜 왔어요. 지뢰밭인데.”
“……대표님 심부름 때문에 왔습니다.”
“유성창투?”
“네? ……네.”
상대는 은호에 관해 너무도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한 번 인식하면 좀처럼 뭘 잊어버리는 편이 아닌데 머리가 굳은 건지…….
어느새 은호는 눈앞의 상대에게 말려 얼떨결에 모든 걸 줄줄이 뱉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누구인지, 이름조차 모르면서.
“저분 가능하면 피해요. 은호 씨가 다가가려고 하지도 말고.”
“네?”
“그냥… 저쪽에서 자꾸 건드려고 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
원치 않던 자리를 벗어나게 해 준 건 무척이나 고마우나 과한 참견은 딱 질색이었다. 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우리 회사로 올래요?”
마주친 지 고작 5분 남짓. 의미 있는 전후 맥락 없이 불쑥 튀어나온 제안에 은호는 부담스러움을 떠나 불쾌감마저 들었다.
“……스카우트인가요?”
“지금 얼마를 받고 있는지는 몰라도 거기보다 더 줄게요.”
남자가 진회색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명함을 받은 은호는 이름과 회사 이름을 살폈다.
강태오 상무, 서인건설.
서인건설이라면 전 회사인 삼정물산과 같은 업계이니 그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은호는 명함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정수리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던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머물다 지나갔다.
“죄송합니다만,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저는 현재 만족스럽게 다니고 있어서요. 좋은 조건을 제시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은호는 정중히 거절했다. 만약 명함을 받지 않았더라면 다소 무례하게 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황상 자신이 놓친 사람이 맞고,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이기에 함부로 뭐라 하기 곤란했다. 그가 목에 걸고 있는 출입 카드엔 LV.7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모든 권한이 주어진 카드 같아 보였다. 명함을 돌려주려고 손을 내밀자 그가 받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얼굴을 쑥 내밀었다.
“받아 둬요. 필요한 날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은호의 얼굴이 화끈하니 달아올랐다. 페로몬의 깊이가 남다른 범상치 않은 알파. 은호는 가볍게 묵례 후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분명 기억이 없는데.”
은호는 카드를 반납하고 주차장으로 서둘러 뛰었다. 스치는 바람에 옷깃이 펄럭이자 깃을 세워 목을 단단히 여민 은호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서둘러 시동을 걸고 예열했다.
“준서가 누구야? 기분 나쁘게.”
두 번째 같은 소리를 듣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싱가포르 출장 때 윤재가 이야기한, 헤어진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던 상대가 준서였을까. 은호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윤재의 옛 애인 이야길 듣는 게 몹시 불쾌했다. 더군다나 비슷하다는 말까지 들으니 그녀의 말대로 대용품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회사에 다시 도착했을 때에는 퇴근 시간에 가까워서 그런지 비서실이 어수선했다. 보고를 하기 위해 윤 실장의 파티션 쪽으로 가자 그가 난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왔습니다.”
“미안해요, 은호 씨. 하아.”
다짜고짜 미안하다며 어쩔 줄을 모르는 그의 태도에 은호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 있……?”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턱짓으로 집무실을 가리켰다.
“전무님께 가 보세요.”
무슨 일이냐고 조심스럽게 눈빛을 보내도 잘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인 윤 실장은 한편으론 은호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은호는 집무실 문을 열자 묵직하게 깔리는 페로몬 때문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은호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하자 서둘러 페로몬을 갈무리한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나한테 말하고 가지 그랬어요.”
그는 나무라듯 쳐다보는 건 아니지만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은호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단 입버릇처럼 사과부터 건넸다.
“……죄송합니다.”
윤재의 표정이 조금 더 구겨졌다. 위계에 의한 상하 관계여서 자칫 질책하는 것처럼 들릴 소지가 커 목소리를 다듬어 타이르듯 설명했다.
“화내는 거 아니에요. 은호 씨는 내 담당입니다. 앞으로 한 대표 심부름을 하는 일은 없도록 조치했지만, 혹시 나 모르게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꼭 알려요.”
“네, 알겠습니다.”
한 대표 심부름이 이리도 날을 세울 일이던가.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다녀온 건데. 은호는 담당을 운운하며 경계하는 그의 태도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숫접은 눈망울이 착잡함으로 일렁거렸다. 은호는 윤재가 어색한 분위기로 몰고 가지 않았더라면 묻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
“전무님.”
“네.”
“……아닙니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일자로 다문 입매를 유하게 들어 올리며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숨이 가득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할 말 있는 거 같은데…… 말해요.”
“아닙니다. 5분 후에 내려오시면 됩니다.”
은호는 입 안에서 굴러다니던 말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준서가 누구냐고 묻는 것 자체가 하극상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한편으론 자존심이 긁히는 것 같았다.
퇴근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가 점점 굵어지더니 유리창을 그악스럽게 두드렸다. 요 며칠 눈과 비가 번갈아 오며 날씨의 변동 폭이 컸다. 차내는 빗소리와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 외에는 모든 게 단절된 것처럼 고요했다. 심지어 두 사람의 숨소리마저도 조용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룸미러로 유심히 은호를 관찰하던 윤재가 먼저 정적을 깼다.
“투자본부에서 잡은 투자처 실적 보고서 다 됐어요?”
“아…… 그게 아직 정리하다 말았는데, 집에 가자마자 작업해서 바로 보내 놓겠습니다.”
안 그래도 하다 만 일이 마음에 걸려 클라우드에 자료를 올려놓고 나온 걸 귀신같이 먼저 잡아내 마음이 쓰렸다. 마치 열 번 잘해 놓고 한 번 놓친 걸 들킨 기분이었다.
“내 옆에서 작업하는 건 어때요?”
“네?”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저녁도 같이 먹어 주면 좋겠고.”
“네.”
아무리 야근 수당을 잘 쳐준다고 해도 퇴근 후 스케줄 확인도 없이 무작정 집으로 가서 일을 더 하라는 심보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은호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마지못해 수락했다. 사실 집으로 가 봤자 작업 끝내고 혼술 하며 드라마나 보는 무료한 일이 전부겠지만, 최소한 윤재 옆에 있는 것보단 마음 편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만 잔뜩 들어 있는 것처럼 복잡했다. 원치 않는 감정이 널뛰기하는 것처럼. 정작 애인인 현준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소식이 끊긴 것처럼 굴고, 상관인 윤재는 요즘 현준보다 더한 관심을 나눠준다. 윤재가 일반적인 상사와 직원의 선을 자꾸 넘나들어 은호도 덩달아 휩쓸렸다.
그 결과일까? 은호는 준서를 떠올리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를 자신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사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자꾸 거슬렸다.
은호는 휘파람 불듯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조용히 한숨을 흘렸다.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코트와 재킷만 벗어 두고 저녁을 함께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릇과 수저 부딪치는 소리만 가득하자 주방에 서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눈치를 보다 조용히 퇴근했다.
‘왜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한데? 낮에 경매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분위기를 흐리는 건 분명 은호 자신인데 왜 이리 심사가 뒤틀리는지 모르겠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눈앞 30cm 안에 놓인 밥과 국, 반찬에만 손을 대니 보다 못한 윤재가 팔을 뻗어 반찬을 코앞에 가져다 놓는다.
“골고루 먹어요.”
풉. 팽팽했던 긴장감은 멀리 있는 반찬을 가져다주는 다정한 손과 덧붙인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호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체하니까 잘 씹어요.”
은호는 허탈함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삼키고 조용히 수저질에 집중했다. 체증처럼 쌓여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사라졌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가 노트북을 펼친 은호는 오후에 하다 만 리포트 정리에 열을 올렸다.
“실물 투자본부에서 올라온 보고서가…….”
“지금 정리 중인데, 잠시만요.”
“정리하지 말고 줘 봐요.”
뭘 어떻게 줘야 하냐고 잠시 머뭇거리자 그가 은호의 노트북을 통째로 가져갔다. 터치패드 위에서 현란한 손가락 놀림을 뽐내던 윤재는 숫자 하나하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처럼 집중하더니 고개를 돌려 은호를 빤히 응시했다.
“유은호 씨.”
“네.”
“하고 싶은 말 해 봐요.”
“네?”
“얼굴에 쓰여 있어.”
윤재의 반듯한 시선이 은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 못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빠져나갈 준비를 하던 문장이 결국 새어 나왔다.
“……준서가 누군가요?”
은호는 윤재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질문했다. 이왕 내뱉었으니 시원하게 답을 듣고 상황에 따라 주제넘었다면 정중히 사과하면 그만이었다.
윤재는 음의 높낮이가 없는 은호의 경직된 말투에 윤재의 눈썹을 추켜세웠다.
“최 부사장이 그래요?”
“네.”
“뭐라고 그러던가요?”
“……닮았다고요.”
표정의 변화 없이 듣고 있던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와 볼래요?”
현관 통로와 이어진 피트니스룸 맞은편의 방문 앞에서 윤재가 생각에 잠긴 듯 멈춰 섰다. 불분명한 위치에 초점을 둔 그가 무언가에 대해 짧게 고민하다 허탈한 숨을 뱉으며 방문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도 고민하는 걸까. 얼핏 서재로 보이는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온기가 없었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 맞은편엔 1m 정도 되어 보이는 유화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었다. 윤재는 안으로 들어가 유화 캔버스 앞에 섰다.
“이 친구예요.”
“네?”
윤재는 숨길 게 없다는 듯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 비밀스럽고 은밀한 사연이 있을 거라는 은호의 오해를 뒤집었다.
“은호 씨가 추측하는 대로 오래전 애인.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
“닮았다라.”
손끝으로 미간을 문지르는 윤재는 은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휴대폰 있죠? 이준서로 검색해 봐요.”
은호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이준서를 검색했다. 동명이인이 많아 화가로 재검색하자 가까이 다가온 윤재가 휴대폰을 같이 살피며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짚어 줬다.
“닮았어요?”
“……아니요.”
그냥 지나치면 그만일 것을, 괜히 물어 멍청이 짓을 자청했다. 사진 속 이준서는 은호와 전혀 다른 외모를 지녔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일자로 꼬리가 긴 눈매, 높은 콧대와 가는 입술은 보기만 해도 건조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최 부사장이 같다고 한 건, 아무래도 페로몬 때문인 것 같은데.”
“네?”
“은호 씨랑 페로몬 잔향이 비슷해요.”
“아… 네.”
“굳이 따지자면 그것뿐인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여기까지 말해 줬는데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은호는 여전히 의구심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윤재는 한쪽 벽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넌지시 물었다.
“궁금한 거 다 물어봐요.”
“……왜 …헤어졌어요?”
은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윤재를 바라보는 눈빛은 확실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이왕 궁금해서 물어본 거 끝장을 보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굴자 휘파람을 불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던 윤재가 옅게 미소 지었다.
“첫 질문부터 세네.”
윤재는 두 점의 그림 앞에 섰다. 유화 그림과 은호를 번갈아 바라보던 윤재는 아래턱을 매만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그림 볼 줄 모르는데…….”
“편하게 느낀 대로만 말해 봐요.”
다소 감상적인 질문에 당황한 은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림에 집중했다. 추상적인 붓 터치는 거칠고 무거웠으며, 색감은 어둡고 칙칙했다.
“외롭고 고통스러워 보여요. 채도가 낮고 붉은색이 많아서 그런가.”
은호는 자신의 저렴한 감상평에 민망해졌다. 헤어진 이유와 이게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 들으며 그림만 그리던 친구였어요. 대학교 때 처음 만났는데 독특하더라고. 마음에 들면 초상화를 그려 주는데, 그땐 이 그림들과 달리 밝았어요.”
무덤덤한 말투에는 그리움 혹은 애절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10년이면 이렇게 무덤덤해질 수 있는 건가.’
은호는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그림 외엔 관심이 없어 그런지 날 보통의 사람처럼 대하더라고. 두루뭉술한 점도 좋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좋은 관계가 되었죠.”
은호는 근처 1인용 소파에 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렸다. 이야기가 길어질 분위기라 좀 더 집중해서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림이 퇴보했대. 난 잘 모르겠던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의 국내 입지가 계속 추락하고 있었나 봐. 특유의 우울감 짙은 색채가 빠졌다고 해야 하나? 결국 그게 계기가 되어 사이가 멀어지고, 그즈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죠.”
비통한 슬픔이 그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아닌 척했지만 시간이 지났어도 그날을 지우지 못해 힘들어 보였다.
“장례식에도 왔어. 근데 눈빛이 내가 알던 그 친구가 아닌 거야. 그리고 한… 3년이 지났나? 유학 간 건 알고 있었는데 거기서 성공을 했더라고. 뉴욕 갤러리 전속 작가가 돼서 여기저기 이름이 알려지던 중에 어느 날 우연히 그 갤러리에서 마주쳤어요.”
“뉴욕에서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조했던 말투에는 어느새 축축한 감정이 섞여 들었다. 내려 뒀던 무언가를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움켜쥐느라 긴장하는 것처럼.
“50점 정도 되는 작품을 천천히 둘러보는 도중 몇몇 작품에서 부모님 사고가 떠오르더라고. 팸플릿을 확인해 보니 인간의 죽음과 그 굴레에 대한 고찰이라고 써 있었거든… 내가 느낀 게 맞는 거야. 추상화여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까 너무 힘들더라고.”
은호의 가슴 한구석이 스산해졌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나 준서는 윤재의 아픈 기억을 그림에 담아 대중에게 어필하고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윤재에겐 또 다른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준서를 보지 않았어요. 이해할 수 없었어. 왜 그런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지.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
“…….”
“이후로 오랫동안 잊고 지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그림 선물이 와 있더라고. 보고 싶지 않아 현관문 앞에 그대로 며칠간 방치해 뒀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서의 사망 기사가 올라왔어요. 들리는 이야기로는 약물 중독이라던가…….”
은호는 문득 자신의 외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뗏목 하나에 의지해 바다를 헤치고 나왔다. 감정이 결여된 것처럼 무덤덤해진 건 그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가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던 건 표면적으로는 부모님의 사업을 살리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본인이 살고 싶어 더 악착같이 군 것이기도 했다.
“불태워 버리려다, 차마 그러지를 못하고 이 방에 보관하고 있어요.”
이제는 유작이 되어 버린 마지막 그림. 윤재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 그림을 마주하며 가볍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더 묻고 싶은 건?”
“……없어요.”
전 애인과의 사연을 모두 들은 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최서령 부사장 때문에 묘하게 뒤틀렸던 마음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다. 볼 안쪽 살을 잘근거리던 은호는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그가 사르르 팔짱을 풀고 천천히 소파 앞으로 다가왔다. 발치에 윤재의 슬리퍼가 보이고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은호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나도…… 주제넘게 굴 텐데, 뭐. 그 뒤에 죄송하다는 말은 빼요.”
“네?”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굴자 윤재는 환하게 웃으며 은호의 곁에 앉았다. 그는 무릎에 올려 둔 은호의 손 위에 슬며시 자신의 손을 덮었다.
“갑자기 흐름을 끊는 거 같아서 좀 우습긴 하지만…… 우리 내기할까요?”
은호의 귓가로 나직이 스며드는 음성은 부드럽고 아늑했다. 그 전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다 잊어버릴 만큼.
“내기에서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내기 주제가 뭔가요?”
그가 진짜 하겠냐는 듯 묘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길래 은호는 말이나 들어보자며 덩달아 웃어 보였다. 윤재의 진지한 눈빛에는 어서 응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숨어 있었다. 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재는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을 건넸다.
“B-gate를 포기하고 스튜디오 G에 투자 감행했잖아.”
“네.”
“두 달 후에 스튜디오 G 주식 가격이 지금보다 열 배 가까이 뛴다에 내기를 걸어 볼까 하는데.”
“열 배요? 장외 주식인데…….”
상장 주식도 아니고 장외에서도 이미 가격이 오를 대로 오른 주식인데 무얼 믿고 이런 제안을 할까. 만들고 있는 FPS 게임이 초대박 친다는 소리일까.
“무모해 보여요?”
“네. 당연히.”
“그럼 은호 씨는 아니라는 거에 배팅하는 거예요.”
뭐지, 이 당당함은. 이건 무모한 수준을 넘어 일부러 져주기 위해 그러는 거 같은데.
은호는 확률상 자신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데 확신이 들어 배팅에 임했다.
“네. 좋아요.”
“약속 지켜요.”
“네.”
왜 이리 무모한 조건을 내세운 건지 의도가 궁금했으나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이니 차분히 기다려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