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그날로부터 6개월 전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자마자 법무팀 최종 자료를 확인하는 윤재의 눈빛이 매서웠다. 주말 사이 투자 계약 조건 일부가 바뀌자 재무팀에서 확정한 금액이 틀어지며 약간의 변동이 생겼다.
“이건 오늘 아침 윤 실장님이 보내 주신 SLC 파트너스 주주 현황 보고서인데 2대 주주의 비율 변동 사항이 있어서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미리 프린트해 온 자료를 하나하나 훑어보던 윤재는 검지 끝으로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다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실수로 잘못 써 올린 게 있나? 은호가 의구심을 품기도 전에 그가 서류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내용을 모두 파악했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신호였다.
은호는 고개를 돌려 창가로 내다보이는 흰 구름에 넋을 놓았다. 유성창투에 합격하지 않았더라면 은호는 지금쯤 유럽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력서 합격 연락이 오던 날 아침까지도 은호는 유럽 배낭여행을 알아보고 있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SLC 파트너스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곧장 회사로 이동했다. 법무팀 직원은 어제부터 미리 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호는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현준에게 잘 도착했다고 안부 메시지를 남겼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SLC 파트너스에 투자하는 금액은 SGD(싱가포르 달러)로 약 1,300만 달러로 원화 기준 110억 정도의 규모였다. 같은 시간 미국으로 간 한 대표의 투자금액이 USD로 2,800만 달러, 한화 약 317억 기준인 것을 생각하면 적은 금액이긴 하나 무시 못 할 집행 자금이기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양사 실무진이 만나 구체적인 투자 협의안과 각종 법적 이슈가 오고 가는 동안 은호는 바짝 긴장한 채 윤재의 대화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마라톤 회의는 도착 후 세 시간이 지날 즈음 가닥이 잡혔다. 법무팀이 마지막으로 최종 검토를 마치고, 윤재가 사인을 하고 나서야 모든 게 끝이 났다. 어느새 빌딩 통유리창 밖으로 붉은 노을이 마지막 불씨를 틔우듯 크게 일렁였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어느덧 풍경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어스름한 상태였다. 창밖으로 알록달록한 도심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은호의 눈동자에 고적함이 쌓여 갔다. 짓무른 눈가를 쓸어내리며 중요 서류를 윤재의 침실 금고 안에 잘 챙겨 두고 자리를 뜨려 할 즈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윤재와 마주쳤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걸어 나오는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부드러운 파동의 페로몬이 흘렀다.
하얀 샤워 가운이 물기를 털어낼 때마다 양옆으로 조금씩 벌어져 뚜렷하게 갈라진 가슴팍이 드러났다. 타고나길 몸이 좋은 건지, 아니면 열심히 가꾸는 건지는 몰라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은호는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계약서는 금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비밀번호는 전무님 내선 번호 여덟 자리로 설정해 두었습니다.”
은호의 날연한 숨소리에 작게 미소 짓던 윤재는 건넛방으로 들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저녁 주문할 건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요.”
은호는 캐리어를 들고 거실 맞은편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혼곤한 정신을 가다듬고 들고 온 짐을 일부 정리한 뒤 샤워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겨울보다는 여름을 선호하지만 습기 많은 여름은 은호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가벼운 면 티로 갈아입고 샤워실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거실 온도에 셔츠를 좀 더 두꺼운 거로 바꿔 입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은호가 남은 짐을 마저 풀고 거실로 나왔을 땐 어느새 벨보이가 왔다 갔는지 테이블 위에 여러 가지 음식들이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윤재는 자리에 앉기를 권유하며 와인 오프너로 마개를 열었다.
“와인 한 잔?”
“네.”
볼이 깊은 잔에 와인을 반쯤 따른 그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유려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오늘 고생했어요.”
은호는 테이블에 차려진 메뉴를 확인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호텔은 랍스터구이로 꽤나 유명한 곳이고, 이전에 한 비서에게 전달받았던 최 전무 기호 음식 리스트에는 해산물 음식이 즐비했었다.
“해산물 좋아하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여기 랍스터가 유명하다고 들었거든요.”
테이블 위의 메뉴는 샐러드, 구운 야채, 스테이크가 전부였다. 사면이 바다인 싱가포르에서 그 흔한 칵테일 새우가 들어간 음식조차 없어 놀라울 정도였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지 않아도 정수리로 날아드는 시선이 느껴졌다.
“좋아해요.”
“근데 왜?”
두꺼운 접시 위를 긁는 나이프 소리가 멎었다. 은호가 고개를 들자 단조로운 웃음을 흘리던 그가 다시금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며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앞에 두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네?”
“갑각류 못 먹잖아.”
그는 말을 뱉어 놓고 ‘아.’라는 짧은 감탄사를 던지며 이마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은호는 짧게 고민했다. 갑각류 알레르기에 대해 이력서에 적은 기억은 없고, 윤 실장님께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분명 최 전무에겐 이야기한 기억이 없는데. 주어는 없지만 그가 말하는 대상이 자신임을 안 은호는 눈매를 둥글게 키웠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래 보여서.”
더는 묻지 말라는 듯 윤재가 식사에 집중하자 은호도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들어 따뜻한 양송이수프부터 조금씩 떠먹었다. 이곳에 온 이후 첫 식사라 그런지 수프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식욕이 샘솟듯 폭발했다.
“내일 확인할 회사는 중요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사이 단조로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은호는 내일 방문해야 할 회사 리포트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오랫동안 신경 쓴 곳 아닌가요?”
“마음이 바뀌어서. 투자할 생각은 없는데 마지막 검토차 방문할 거예요. 그렇게만 미리 알고 있어요.”
확고한 걸 보면 뭔가 찜찜한 구석이 생겼거나 투자 가치가 부족하단 거겠지. 은호는 말없이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피곤해서 그런지 와인이 잘 들어갔다.
한 잔 더 마시고 숙면을 취해야겠다는 다소 당돌한 생각까지 할 수 있었던 건 맞은편에 앉은 윤재의 태도 때문이었다. 날이 선 모습은 사라지고 피로가 풀려 미소 띤 모습이 한껏 여유로웠다. 은호는 식사를 마치고 다시금 잔을 가득 채운 와인을 입 안에 넣고 혀로 굴리다 통유리창 너머 반짝이는 화려한 야경에 넋을 놓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그의 깊이 있는 울림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취기가 올라오는지 생각과 달리 몸의 반응이 느렸다.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돌린 은호는 남은 와인을 마시며 속삭이듯 말끝을 흐렸다.
“……이것저것요.”
현준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아무리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한들 메시지 한 줄 정도는 주면 좋았을걸. 답변의 부재가 아쉬운 은호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떼며 작게 웃었다.
“고민이 있을 때는 혼자 안고 가지 말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서 털어낼 수 있으면 털어내요.”
“……그렇게 보여요?”
“고민 많아 보이거든. 그러다 병나.”
취기 때문인지 상대가 상사임을 점점 망각한다. 긴장이 풀린 몸과 마음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말해 봐야 제 살 깎아 먹기여서요.”
“부모님 일은 아닌 거 같고, 애인?”
“독심술로 절 파악하는 건가요?”
“뭐…….”
윤재는 젖었던 머리가 마르며 부스스해지자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빗질하듯 뒤로 넘겼다. 은호의 눈길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그의 손가락 궤적을 따라갔다.
“전무님은 고민 없어요?”
“……없지는 않지.”
“그럼 공평하게 서로 한 가지씩 이야기할까요?”
은호는 말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속으로 미쳤다고 욕을 했다. 취기에 사고가 마비된 게 아닐까, 은호는 술김에 한 말이니 기분 나빠도 참아 달라는 것처럼 남은 와인을 단번에 삼켰다.
“저부터 말할게요. 요즘 권태기가 왔나 봐요.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뒷바라지하느라 지쳤네.”
피로감에 짙어진 눈가가 짙은 쌍꺼풀을 만들었다. 은호는 뻑뻑해진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다가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이는 걸 대충 훔쳐냈다. 그의 마지막 말에 감정 이입이 되어 울컥했으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추태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여전히 그 사람만 눈에 보여요? 아니면 의리인가?”
“……반반이요.”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과감히 돌아설 마음은 있고?”
살짝 올라가는 문장의 끝은 결단의 의지가 있는지 묻고 있었다. 은호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고민하다 목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숙였다.
은호는 번번이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막상 현준과 헤어질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물론 새로운 사람에게 빠질 거라는 생각조차도.
“글쎄요. 경험해 보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와 길게 연애해 본 게 처음이었다. 늘 엇갈린 사랑만 하다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상대를 만났는데 그게 현준이었다. 그래서 은호는 현준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두려움이 컸다. 영혼의 단짝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곁에서 사라졌을 때 감정이 없는 껍데기만 남아 버릴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현준이 무관심할 때마다 속으로는 마음을 졸이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며 일부러 시간을 가졌다.
마음은 늘 관심 좀 가져 달라며 징징거리고 싶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 질려 자신을 떠나갈까 두려웠다. 갈증이 일었다. 은호는 마지막 남은 와인을 잔에 모두 부어 버렸다.
“전무님은요?”
은호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져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 제 모습이 얼마나 어이없을지 알지만 이 모든 건 알코올 때문이라며 대충 뭉그러뜨리고 싶었다.
윤재는 은호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답을 했다.
“걱정되는 사람이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안 좋을 것 같거든.”
“…….”
“도와주고 싶은데, 말을 들어줄지 의문이라.”
말투 속에 눅눅한 한숨이 잔뜩 껴 있었다. 답답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시선이 날카롭고 진득하게 은호를 찔렀다. 은호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하고 색채가 짙어 와인 잔으로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잘 설득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죠.”
“좋겠네요, 그분.”
취한 게 분명했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을 필터링하지 않고 바로 던졌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부러워서 은호도 모르게 입 안에 뭉쳐둔 말이 문턱을 넘어섰다.
외로움에 젖은 은호의 입장에선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볼이 둥근 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릴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울렸다.
“그걸 알아야 할 텐데.”
소파에 비스듬하게 등을 대고 있던 윤재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두 팔을 풀고 와인 잔을 들었다. 핏빛 와인이 그의 붉은 입술 너머로 사라질 때마다 목울대가 느릿하게 일렁였다.
은호는 점점 과감해졌다. 평소라면 절대 물어볼 생각조차 못 할 질문을 툭툭 내던졌다. 마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사가 아니라 친구 수영이나 혁필 선배인 것 같았다. 그만큼 거리감이 가깝게 느껴진 건 순전히 와인 탓이었다.
“전무님은 사귀는 분이…….”
“한 달 가까이 봤으면 알 텐데, 있는 것 같아요?”
“아니요.”
말꼬리를 자르며 들어온 윤재가 허탈하게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잔에 남은 와인을 단번에 비우더니, 와인 렉에서 또 다른 와인을 고르기 시작했다.
“10년 정도 되었나? 그 이후로 쭉.”
“……주변에서 전무님을 가만히 둔 게 ……더 신기해요.”
은호는 혀가 천천히 마비되어 가는 것처럼 말투가 느릿하게 변했다. 몽환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시야도 살짝 뿌옇게 일어나는 걸 보니 취기가 제대로 올라오는구나 싶어 은호는 등받이에서 머리를 떼어냈다. 이 시간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윤 실장에게 이야기 들어서 대충 알겠지만 그럴 틈이 없었어요.”
윤재는 마음에 드는 와인이 없는지 할로겐램프 아래 가지런히 놓인 양주 중에 하나를 골라 들고 왔다. 혼자 마시기 좋은 앙증맞은 사이즈였다. 윤재는 애초부터 은호에겐 줄 생각이 없었는지 스트레이트 잔 하나만 들고 와 앉았다.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 숨 좀 돌려 볼까 했는데 끝도 없어. 계속 쳇바퀴 돌리는 기분?”
남들이 우러러보는, 소위 그들만의 리그라고 표현되는 재력가가 하는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솔직 담백했다. 마치 같은 팀 팀장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 동지애마저 샘솟을 뻔했다. 이것도 취기 탓인가.
“외롭지 않으세요?”
무심코 나간 질문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거라고, 그림자처럼 평생 가지고 가는 거니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글쎄, 지금 삶이 익숙해서 솔직히 그동안은 모르고 살았다는 게 맞겠죠.”
스트레이트로 한 잔 입에 머금고 맛과 향을 음미하던 윤재는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몽롱한 의식 속 그의 미동 없는 모습은 잘 깎은 조각상처럼 고혹적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외모가 흐린 잔상을 꿰뚫고 들어왔다.
“외롭다기보다는 점점 지루하고 심심하다고 해야 하나”
“…….”
“요즘은 좀 재미를 찾은 거 같기도 하고.”
“……그럼 다행이네요. …방법을 …찾았으니까요.”
외로움을 해탈할 수 있을 정도면 얼마나 일에 미쳐 있어야 하나. 은호는 지방이 잔뜩 낀 것처럼 비대하고 느려터진 머릿속을 굴리다 이내 포기하고 다시금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맨정신이었다면 그에게 뭔가를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끄러웠을 테지만 배 째라 식으로 구니 별거 아닌 게 되어 버렸다.
“나쁘지 않네.”
“……네?”
시야가 윤재를 중심으로 주변이 뭉그러지듯 번져 갔다. 아무래도 히트사이클을 지연해 주는 주사약과 알코올이 충돌하는 건지, 아니면 하루가 고단했던 건지 평소보다 취기가 빨리 올랐다.
“가끔 술친구 어때요?”
“……제 술주정 …받아 주실 건가요?”
“일단 겪어 보고, 그때 가서 생각하죠.”
은호는 알았다는 듯,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었다. 벨 소리가 울렸다. 식기를 수거하기 위해 호텔 직원이 방문한 게 분명한데, 소파와 딱 붙어 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윤재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손으로 제지하며 출입구로 걸어갔다.
들어와 식기를 수거해 가는 직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호는 안 되겠다 싶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을 한껏 받아 둔 욕조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습한 기운과 함께 귀가 먹먹해지는 게 불안했다. 본능적으로 얼른 방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출장 첫날부터 자신의 상사 앞에서 모양새 빠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은호의 의지와 달리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팔걸이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은호는 중력을 거스르는 몸의 무게감과 빙그르르 도는 시야 때문에 중심을 잃었다.
“괜찮아요?”
단단한 무언가가 가슴팍에서 전해졌다. 허물어지는 은호를 붙들어 세운 건 윤재였다. 고개를 들면 바로 얼굴을 부딪칠 수 있는 거리. 은호는 고개를 숙인 채 팔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다시금 앞으로 걸어가려 노력했지만 눈앞이 점멸하다 말기를 반복했다. 숨이 가빠지고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쏠리듯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는 게 빈혈로 거꾸러지기 직전의 상황과 비슷했다. 윤재는 안 되겠는지 두 팔로 은호를 끌어안았다.
“못 마시는 걸 억지로 마신 건가?”
“……아뇨. 이 정도는 …아닌데.”
방향감마저 상실한 은호가 윤재의 어깨 위로 고개를 툭 내려놓았다. 허탈하게 한숨 쉬던 윤재는 한쪽 팔을 은호의 무릎 아래로 넣어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은호는 순간 허공에 몸이 붕 뜨며 느껴지는 낙하감에 필사적으로 윤재의 가슴팍을 잡고 매달렸다. 눈앞이 핑핑 도는 건 여전했다.
“……죄송합니다.”
시야가 빙그르르 돌더니 뒤통수에서 침구류의 포근함이 느껴졌다. 윤재는 은호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끌어다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쉬어요. 혹시 모르니까 스탠드는 켜 둘게요. 어지러워서 일어나기 힘들면 소리 지르고.”
누워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부유감이 심해 꿈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뒤돌아서는 너른 등을 보며 괜스레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란 사고가 아직 남아 있던 탓에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이 바닥 아래로 침전됨과 동시에 의식이 꺼졌다.
타는 갈증에 혀로 버석하게 각질이 일어선 입술을 핥다가 눈을 떴다. 어느덧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
몇 시간 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속사포처럼 터지는 말을 뱉던 은호는 이불을 걷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어지럽긴 하나 몇 시간 전처럼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었다.
“…….”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온 은호는 기다란 소파에서 팔짱을 끼고 잠이 든 윤재를 보고 걸음을 멈춰 섰다.
“쉬어요. 혹시 모르니까 스탠드는 켜 둘게요. 어지러워서 일어나기 힘들면 소리 지르고.”
방에 있으면 도와 달라고 소리쳐도 듣지 못할 수 있으니까 거실에 나와 자고 있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멀쩡히 침실을 놔두고 거실에서 불편하게 잠든 윤재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넘어 혼란스러웠다. 미간을 문지르며 한참을 서 있던 은호는 소파로 걸어가 잠들어 있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전무님.”
길게 뻗은 속눈썹이 천천히 허공 위로 들리며 흑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괜찮아요?”
“네.”
“다행이네.”
“들어가서 주무세요.”
피곤기가 가득한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윤재는 은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실 전체를 울렸다. 은호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얼굴을 할퀴며 싸워 댔다.
***
눈두덩이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은호는 벌떡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국은 겨울의 초입이라 아침 해가 늦게 들이치다 보니 방 안 가득 쏟아지는 햇살에 9시가 넘은 줄 알았다. 하지만 시계는 7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멀리서 문을 여닫는 소리를 듣고 방 밖으로 걸어 나가자 트레이닝복 차림의 윤재가 들어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젖은 머릿결에서 은은한 우디 향이 흩날렸다.
“잘 잤어요?”
피트니스 센터를 다녀온 건지 잔뜩 성난 상체와 팔 근육이 얇은 옷 소재를 뚫고 실루엣을 자랑했다. 은호는 정리되지 않은 뒷머리를 손으로 대충 다듬으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커피 드릴까요?”
“괜찮아요.”
은호의 뻘쭘해진 손이 방향을 틀어 냉장고로 향했다. 생수를 꺼내 다시 한번 눈짓으로 묻자 윤재가 달라고 손을 내밀길래 냉큼 건넨다.
“혹시… 어제 제가 실수한 게 있다면 사과드리겠…….”
“그런 일 없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르고 들어온 그의 음성은 꽤 단호했다. 잔잔한 파동이 치는 은호의 눈동자를 고요히 바라보던 그는 생수 한 병을 모두 비우고는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피곤하면 좀 더 자도 되고, 어차피 OSome company 방문은 오후니까.”
“아닙니다. 식사하셔야죠.”
“잠시만.”
거실 소파로 돌아간 그가 노트북을 열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윤재가 흥미롭게 글을 읽으며 은은하게 미소 짓는 걸 본 은호는 뒤늦게 휴대폰으로 그사이 들어온 메일이 있는지 급히 확인했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분명 회사와 관련된 일일 것 같아 떠올려 보니, 미국 핀테크 스타트업 투자 건이 아닌가 싶었다. 은호가 건너편 소파에 앉자 시선이 느껴졌는지 윤재가 노트북 화면을 돌려 보여 줬다. 예상대로 미국 투자 건 관련 메일이었다.
“여긴 준비되지 않은 곳 아닌가요?”
“따로 확인하고 있었어요.”
“아아.”
윤 실장은 최 전무가 투자에 있어 과감한 편이긴 하지만 전략적으로 따져 가며 신중을 기하는 편이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최근 들어 예상치 못한 사업체에 큰 규모로 투자를 감행해 우려스럽다는 이야기를 은호에게 한 적이 있었다. 이번 미국 건도 마찬가지였다. 최 전무가 한 대표를 설득해 투자를 집행했으나 은호가 보기엔 ‘모 아니면 도’일 정도로 도박에 가까운 투자였다.
윤재는 계약 완료된 투자 조건이 만족스러운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프터눈 티 먹으러 갈까요?”
“네?”
윤재의 생뚱맞은 질문에 은호는 한쪽 눈꼬리를 휘며 그를 올려다봤다. 과일 빼고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아 후식으로 나오는 조각 케이크조차 그대로 반납했던 그였다.
“전무님 단 거 잘 안 드시잖아요.”
“갑자기 먹고 싶네.”
흥에 취한 그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애프터눈 티라면 꼭 맛보고 싶었다. 은호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해 자신만의 맛집 지도를 가지고 있을 만큼 디저트에 관심이 많았다.
“준비해서 나올게요.”
눈곱도 떼지 않은 부스스한 차림으로 갈 순 없지 않은가. 은호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샤워실로 들어갔다.
오후에 예정된 OSome company는 말 그대로 방문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손꼽히는 해운 업체의 자회사라 꾸준한 실적이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재는 시큰둥한 반응을 내비쳤다.
요즘 그의 투자 방식이 불안한 은호는 말을 덧붙이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볼 뿐 이었다.
현준은 오늘도 연락 한 통 없었다. 은호는 휴대폰에 신경 쓰기 싫어 서류 가방 안에 넣어 버렸다.
예상보다 한 시간 서둘러 나온 윤재는 렌트한 차에 은호를 태우고 이스트 해변으로 향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폐부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습한 열기로 가득한 바닷바람에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아무리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 한들 습도 97%를 넘나드는 열대성 날씨는 사양하고 싶었다.
“홍콩이 좀 더 안정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중국 때문에 법안 변동이 많아 불안 요소가 높아요. 덕분에 아시아 쪽 투자 자금이 싱가포르와 한국으로 몰리고 있고…… 여긴 부동산, 채권, 주식이 여전히 매력적이지.”
“아시아 무역 허브니까 항만, 해운도 투자로 괜찮지 않나요?”
“현재 국제 정서와 중장기 수익률로 봤을 때 부동산, 장기 채권이 좀 더 괜찮아.”
윤재가 운전대를 잡겠다며 키를 뺏어 가는 바람에 조수석에 앉은 은호는 그가 왜 OSome company 투자를 철회했는지, 그가 생각하는 투자 식견과 원칙은 무엇인지 조목조목 따져 물으며 그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나와 있으니 살 것 같네.”
오른쪽 창밖으로 쨍한 햇살이 녹아내린 에메랄드빛 해변이 그림같이 펼쳐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당장 상의를 탈의하고 바닷물로 뛰어들고 싶어졌지만 차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환상은 깨질 것이다. 푹푹 찌는 한낮의 열기 온몸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은 차 안에서 풍경을 만끽하는 게 최고였다.
윤재는 그간 답답했는지 단정하게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를 푼 뒤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뒷좌석에 던졌다. 손목 위로 솟아오른 굵직굵직한 힘줄이 운전대를 움직일 때마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지평선 위로 일몰이 내려앉을 즈음 둘은 백사장을 걸었다. 공기 중에 뜨거운 열기가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한낮만큼 달아오르진 않았다.
그동안 은호가 곁에서 지켜본 윤재는 일 외에는 흥미를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지독하리만치 목표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그는 부모가 남기고 간 회사를 잘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 외에는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이동한 둘은 서버가 건네주는 메뉴판을 확인했다.
“여기 크랩 유명한 곳인데, 드셔 보세요.”
은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라임 맛이 나는 물 잔을 옆으로 밀며 메뉴를 고르다 윤재의 시선이 정수리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여기저기서 시켜서 무감각해졌어요.”
사실 은호는 테이블마다 주문한 해산물 요리와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특유의 비리고 짠 냄새에 후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윤재는 설익은 미소를 지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근데요….”
“…….”
“갑각류 안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은호는 분명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드라이브 내내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다른 사람에게 알린 기억이 없어 그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다.
윤재는 먼저 나온 갓 구운 빵을 올리브 오일에 찍으며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첫날 한정식집에 갔을 때 새우 꼬치, 간장게장에는 손도 안 대길래 대충 감으로?”
은호에게서 무음의 탄성이 흘렀다. 그러고 보면 그날 전골과 해산물 꼬치구이, 간장게장은 건들지도 않았다.
‘그럼 게살죽은 단순히 맛 때문에 바꿨나 보구나.’
은호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웅성거리는 주위의 소음 속에 대화의 타이밍을 쟀다.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어요.”
주문한 생과일주스가 나오자 시원하게 한입 머금은 은호는 둥그런 유리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등 위로 일몰이 불그스름히 내려앉았다.
“열 살 때 부모님이 랍스터를 사 왔는데 그날 배불리 먹고 다음 날 남는 걸 또 먹겠다고 냉장고에서 꺼냈어요. 꺼냈으면 바로 먹었어야 했는데, 게임에 정신 팔려 아무 생각 없이 상온에 뒀다가 뒤늦게 먹었거든요. 처음부터 상태가 안 좋았던 건지, 아니면 그날 상온에 두고 데워 먹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때 잘못 먹고 식중독으로 고생했어요. 그 이후로 갑각류는 먹었다 하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올라오더라고요. 심할 땐 숨도 막히고요.”
“운이 나빴네.”
“가족 중에 저만 그러는 거 보면 운이 나쁜 게 맞네요.”
칠리크랩과 해물 파스타, 그리고 은호를 위해 주문한 치킨 샐러드와 버섯 크림 스파게티가 테이블 위에 하나둘 깔렸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화려하던 에메랄드빛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두움만 넘실거렸다.
은호는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입맛이 까탈스러운 편은 아니라 먹는 족족 마음에 들었다. 다만 섬나라고, 해산물 요리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해 먹을 만한 음식이 제한적인 게 아쉬울 뿐.
“전무님은 여가 시간에 주로 뭐 하세요?”
은호의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정확히 윤재에게 안착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걸자, 크랩을 부수던 그가 잠깐의 고민도 없이 술술 내뱉었다.
“운동 아니면 혼술, 그러다 답답하면 바람 쐬러 나가고…… 뭐 그 정도?”
누군가와 함께 하려는 의지가 없는 건지, 아니면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서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편한 건지. 은호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그의 화려한 이면에 깔려 있는 쓸쓸한 그림자를 알게 된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늘 혼자셨군요.”
“술친구 해 준다면서요.”
잠깐의 공백을 두고 그가 허탈한 투로 말끝을 조였다. 은호는 포크로 빙빙 돌리던 스파게티를 내려놓고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자신 있으세요? 어제 모습 보셔서 아시잖아요.”
“그래서 술친구 해야 한다고.”
“네?”
“어디 가서 그렇게 취하지 마요. 아슬아슬해 보여.”
마지막 말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말속에 섞여 있는 불순함을 눈치챈 은호의 얼굴이 굳어지자, 냉랭한 기류를 느낀 윤재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기분 나쁘라고 한 이야긴 아니에요. 걱정돼서 하는 잔소리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은호는 서늘한 표정을 거두지 않고 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내려 뒀던 스푼과 포크를 다시 들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식사를 계속했다. 오히려 은호의 행동에 당황한 건 윤재였다.
“화났어요?”
“……제가 전무님께 화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잖아요.”
“그렇게라도 말해 주는 게 좋네.”
“앞으로 전무님 앞에서는 마시지 않을게요.”
화를 내거나 인상을 구기지 않고 감정이 뭉툭해진 것처럼 차분한 어조로 말하자 윤재는 고개를 내저으며 짙은 숨을 뱉었다.
“하, 그 소리가 아닌데.”
“…….”
“미안해요. 사과할게.”
스파게티에 초점을 둔 눈동자가 곧장 위로 들렸다. 은호는 사실 그가 사과를 할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던 터라 당황스러움에 어름대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다시 스파게티에 집중했다. 입사 첫날 한 비서가 이야기해 준 말 중 최윤재는 자신의 부하 직원을 함부로 하거나 업신여기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 떠올랐다.
“계속 말 안 할 거예요?”
“화난 거 아니에요.”
식사를 마친 후 은호가 운전대를 잡았다. 전 회사에서 모신 나이 지긋한 전무는 직원에게 실수해도 직접적인 사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치 그 말을 하는 순간 본인이 아랫사람에게 진다는 패배감에 잠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로 최윤재의 행동은 꽤나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은호는 구겨졌던 마음을 풀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혼술하면 회사 일만 떠올라서.”
“…….”
“지겹네.”
윤재는 보이는 거라고는 까만 바탕에 반짝이는 별빛이 전부인 밤하늘을 바라보며 느른하게 눈썹을 내렸다 올렸다. 그의 말에서 진심으로 지루함이 느껴져 은호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술친구 해 달라는 거죠?”
고개를 돌린 그가 은호를 향해 점잖게 웃었다.
“대신.”
“…….”
“술 마실 땐 상하 관계 내려놓고 마시죠.”
“그렇게 해요.”
윤재는 은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괜히 심기가 비틀려 이야기가 한 번 꼬였다 풀어졌다.
뭐가 그리도 급한 건지, 은호가 호텔에 도착해 렌터카를 반납하는 사이 윤재는 호텔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뒷좌석에서 서류 가방을 챙겨 든 뒤 호텔 안으로 따라 들어간 은호는 로비 근처 카페에서 디저트를 살피는 윤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팔짱을 낀 채 허리를 굽혀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먹고 싶어 서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번 골라 봐요.”
“단 거 싫어하시잖아요.”
“비서팀 선물.”
“아.”
유리 진열대 안에는 다양한 맛과 종류의 초콜릿이 먹음직스럽게 세팅되어 있었다. 은호는 한참을 둘러보다 여러 가지 토핑이 섞인 소포장 초콜릿을 선택해 직원 수만큼 요청했다.
쇼핑백 하나 가득 초콜릿을 사 든 윤재는 제일 위에 있던 케이스를 꺼내 은호에게 건네주었다. 뼈마디가 굵고 긴 그의 손에 들린 초콜릿 케이스가 앙증맞아 보였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이동했다. 너른 복도를 타고 흐르는 클래식 교향곡이 운치 있게 느껴졌다.
톡.
카드 키를 넣고 문을 여는데 서류 가방 안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확인하니 현준이었다.
모의고사 준비하느라 바빠. 잘 다녀오고. 오후 8:36
“유은호 씨.”
“네.”
메시지를 읽느라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바로 뒤에 윤재가 서서 대화 내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대뜸 메시지에 답장을 하려던 은호의 손을 붙잡아 거실로 데리고 갔다.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이상했지만, 그의 의도가 뭔지 파악하기 어려워 잠자코 지켜봤다.
“이런 말 하는 내가 우습겠지만.”
“네.”
“이 사람 너무 믿지 마요.”
애인이 보낸 메시지인 걸 윤재는 알고 있었다. 알고도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뭘까, 은호는 진지하게 궁금했다.
“전무님.”
“네.”
“지난번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시는데…….”
한참의 침묵 끝에 물음표를 가득 담은 시선을 고스란히 돌려보냈다. 밑도 끝도 없이 덜컥 믿지 말라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될까요?”
은호는 이해를 할 수 있게끔 알려 달라는 투로 물었다. 윤재의 눈빛이 갈팡질팡하듯 흔들렸다. 무언가를 말해 주려다가 참는 것처럼 입을 뗐다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자 올려다보는 은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쏟아졌다.
“……은호 씨 상처받을 거야.”
윤재는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말을 던졌다. 미래의 예언과도 같은 답변에 은호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윤재를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극심한 피로감이 온몸을 덮쳐 왔다. 윤재는 뭐가 그리 답답한지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리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애인이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거나, 너무 느슨하게 풀어 주면 의심을 해 봐요. 오래 사귀었단 이유만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지 말고.”
애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으니 의심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도대체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은호는 빙빙 돌려 말하는 윤재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제 애인을 아세요?”
긴장감이 감도는 기류 속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던 그가 한참이 지난 후 눈을 지그시 감더니 습한 숨을 허공에 내뱉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해 줄 수 없어요. 하지만 내 이야기 잘 기억해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오면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요.”
“전무님.”
“네.”
“죄송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직원을 챙겨 주는 것까진 좋았지만 사적인 영역을 멋대로 넘나들며 지적하는 건 용납하기 어려웠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딱 잘라 내자 물러설 것 같지 않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은호는 윤재의 망연한 얼굴 위에 스며드는 짙은 절망을 보았다. 저 표정은 뭘까,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막연한 감으로 훈수 두는 게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막막한 표정을 짓는 그가 당황스럽고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피곤함이 이 모든 걸 내리눌렀다. 귀찮고 신경 쓰기 싫었다. 은호는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씻지도 않고 곧장 침대 위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새까만 어둠이 들이쳤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걸까. 은호는 에어컨의 서늘한 냉기에 몸을 움츠리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다 팔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새벽 1시 12분. 거실에 불을 켜 놓고 들어갔는지 문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은호는 잠에 취해 있던 정신이 좀 더 명확해지자 물을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거실 문을 열고 슬리퍼를 들이밀던 은호는 소파에 앉아 바깥 야경을 바라보는 윤재를 보고 넋이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다 마신 와인 병과 반쯤 채워진 잔이 놓여 있었다.
‘안주 하나 없이 이 시간까지 마신 건가.’
그는 사색에 잠겨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지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범접하지 못할 분위기는 시답잖은 거만함이나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창가에 머물던 윤재의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 창에 반사되는 새로운 인영을 이제야 눈치챈 듯했다.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뒤에 서 있는 은호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늦은 밤에 어울리는 짙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이 시간까지 드신 거예요?”
그의 고적한 눈동자 속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 한편으로 절망적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체념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빛의 밑바탕에는 짙은 외로움이 깔려 있었다. 그의 페로몬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그런지 위의 공기와 아래의 공기 밀도가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를 부르지 그랬어요.”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그래도 부르지 그랬어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불같이 치솟던 화가 눈 녹듯이 사그라드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윤재는 반쯤 남은 와인을 삼키며 시선을 창가로 다시 돌렸다.
“이곳은 눈이 내리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네요.”
심야라 건물의 조명은 대부분 꺼져 있었지만 외벽에 걸린 크리스마스 조명은 곳곳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묵직한 한숨이 은호의 발목을 붙들었다. 은호는 윤재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크리스마스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은호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화려하기 그지없던 미국 본가 앞마당을 떠올렸다. 핼러윈과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가족들은 마치 이날만을 벼르고 있었던 것처럼 대형 마트와 인터넷을 뒤져 각종 신기한 아이템을 구매해 요란스럽게 마당을 채웠었다.
은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던 그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은호 씨는 눈 오는 겨울…… 좋아해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윤재의 목이 잔뜩 잠겨 있었다. 목울대를 긁으며 올라온 말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추운 건 싫은데 눈은 좋아해요.”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던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피곤이 쌓인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전무님은요?”
“……나는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술은 물론이고 분위기에 취해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창밖을 화려하게 수놓는 크리스마스 장식등을 보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너편에서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 한 대가 그대로 돌진해 부모님이 타고 있던 차를 덮쳤어요.”
침묵을 비집고 흘러나온 저음의 목소리가 한 올 한 올 뇌수에 각인하듯 새겨졌다. 그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으며 이제는 제법 무뎌졌다는 것처럼 미소 지었지만 눈빛마저 속이진 못했다. 그의 눈빛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눈이 오면 그날이 떠올라.”
그의 눈동자에 습기가 차올랐다.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있어 그런지 몰라도 물기로 반짝거리는 눈동자 위로 애정이 결핍된 그 시절 윤재의 모습이 겹쳐졌다. 은호는 다가가 손이라도 붙잡고 토닥여 주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윤재는 은호의 눈빛을 읽었는지 미지근하게 웃으며 낮게 숨을 골랐다.
“살면서 무서운 게 별로 없었는데, 트럭이 빠른 속도로 가까이 오면 이제는 좀 겁이 나요.”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아침에 멀쩡하던 부모를 잃었을 그 속이 오죽할까. 심지어 슬픔을 나눌 형제자매도 없으니 그 트라우마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단단했을 거라 추측됐다.
윤재는 천천히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최근에도 트럭 사고로 가까운 사람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 살아 있어요.”
와인 잔에 박혀 있던 윤재의 시선이 은호에게 향했다. 안도와 걱정이 공존하는 미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은호는 회사 직원이냐고 물을까 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의 우선순위가 회사라고는 하지만 가까운 대상이 회사 직원일 리는 없을 터였다.
“다행이네요.”
잔조로운 눈웃음을 짓자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눈동자가 느릿하게 은호의 얼굴을 훑는다.
“이번에는 허무하게 안 보내려고.”
“……네?”
“마냥 두고 보지는 않을 거니까.”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또다시 꺼내자 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다시금 천천히 풀어진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데 대충 넘기지 않으면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 수긍하는 것처럼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말았다.
“들어가 자요.”
“주무세요.”
“그럴게요.”
은호가 비어 있는 잔과 와인 병을 정리하려 하자 제지하는 손이 다가왔다.
“내가 할게.”
그의 잠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은호는 손을 떼고 냉장고로 걸어가 생수 한 병을 들고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멍울멍울한 짙은 갈색 눈동자가 눈을 감아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잠이 달아났다.
***
출국 시간이 오전이어서 눈을 뜨자마자 짐을 꾸려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호텔에서 가볍게 조식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윤재는 평소처럼 말이 없었다. 숙취로 고생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술 냄새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멀쩡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걸어가는 도중 은호는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명품관을 흘긋거렸다.
은호가 들고 있던 작은 캐리어 바퀴의 마찰 소리가 우뚝 멈추자 앞서 걸어가고 있던 윤재가 뒤돌아 다가왔다.
“뭘 그렇게 봐요?”
“지갑 좀 보느라고요.”
은호는 비싸더라도 질이 좋은 걸 한 번 사서 오랫동안 쓰는 성향이라, 지갑이나 가방처럼 오래 쓰는 제품은 선호하는 브랜드가 정해져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매장 앞에 서자 발걸음이 절로 출입구를 넘어섰다.
“골라 봐요.”
“아… 제 것 아니고요. 선물.”
흥미로운 표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윤재는 선물이라는 말에 팔짱을 끼며 작게 한숨을 쉬더니 은호의 손목을 붙들었다. 마치 누구에게 줄지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그의 구겨진 인상이 모든 걸 대변하고 있었다.
“사지 마.”
관여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현재 은호는 업무차 온 것이기에 상사를 내버려 두고 멋대로 개별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 은호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포기하고 돌아서자 의심의 눈초리를 한가득 담은 윤재가 몸을 돌려 게이트 쪽으로 앞서갔다. 왜 이리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지, 한 비서가 있었을 때도 이랬는지 묻고 싶어졌다.
기내에서 카탈로그를 훑기만 해도 눈빛으로 화살이 날아드는 게 느껴져 은호는 마음을 비우고 노트북을 꺼내 투자 계약 건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내일 스케줄을 체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인 있는 티를 내지 말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최윤재의 집요함은 인천공항을 빠져나오면서 극에 달했다. 그는 은호가 중간에 딴 데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차 키를 뺏어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마치 백화점으로 갈 거 다 알고 있으니 이쯤에서 항복하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은호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냅다 집으로 들어왔다.
“……남의 애인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을까.”
은호는 현관문을 닫으며 구시렁거렸다. 같이 있을 때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집에 와서 혼자 짜증 내는 꼴이 우스웠다.
집에 도착했어. 근데 너무 바빠서 지갑을 못 샀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오후 4:15분
한참을 고민한 끝에 메시지를 남겼지만 현준은 확인 후에도 답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백화점을 다녀올까 싶어 지갑을 챙겨 들고 현관문 손잡이를 붙잡을 즈음 들어온 메시지에 은호는 기운이 쪽 빠졌다.
됐어, 바쁘다는데 어쩌겠어. 앞으로는 이런 거로 장난치지 마. 오후 4:17분
“……장난은 내가 친 게 아니라, 내 상사가 쳤거든.”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 데다 비꼬는 듯한 메시지까지 더해져 덩달아 기분이 상한 은호는 거실로 다시 돌아와 휴대폰을 소파에 던지고 짐을 풀었다.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끌려다닐까. 아쉬울 사람은 현준인데 왜 자신이 매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준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뭐 하나 명확하지 않고 미래까지 불투명해 사소한 문제에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은호는 평소 같으면 현준을 쫓아가 기분을 풀어 주며 뜻을 맞춰줬을 테지만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따개를 열고 입에 물었다. 입이 써서 그런지 탄산만 느껴져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개수대에 쏟아 버렸다. 급격한 우울감이 전신으로 밀려 들어왔다.
***
눈을 뜨기 전부터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간헐적인 두통이 밀려왔다. 한쪽 눈만 간신히 뜨고 방 안 온도를 확인해 보지만 평소와 같은 25도였다. 출장 때문에 지연시킨 히트사이클이 되돌아오는 건가 싶어 연차를 내려던 은호는 이 상태로 하루 이틀 지지부진하게 지나간 적도 있어 일단 몸 상태를 지켜보기로 하고 억제제를 복용했다.
“…….”
휴가 신청서 제출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며 미리 준비해 둔 뜨거운 커피를 홀짝였다. 다행히 뜨뜻한 것이 목을 넘어가면서 몸살 기운이 빠르게 소거되었다. 은호는 휴가 신청서 화면과 최윤재의 휴대폰 번호를 번갈아 들여다보다 고개를 내저으며 노트북을 닫고 샤워실로 곧장 들어갔다.
“B-gate를 포기하고 스튜디오 G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요?”
“난들 알아? 요즘 최 전무님 너무 공격 투자하는 거 아냐?”
“이건 공격 투자가 아니라 거의 도박이에요.”
“미국 투자 건도 그러더니 요즘 왜 이런대?”
최윤재 전무가 약 두 달 전부터 네 번의 콘퍼런스 콜과 여덟 번의 회의를 거쳐 투자 확정 분위기까지 몰아갔던 코인 거래소 B-gate를 갑작스럽게 탈락시키고, 보류해 둔 FPS 게임 업체 스튜디오 G를 투자하기로 최종 결론 내리자 사내가 어수선해졌다.
총괄 투자본부 내에서도 최종 결론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고, 한 대표조차 이해할 수 없다며 윤재를 몰아세웠다. 윤재는 하반기 투자 실적에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올 경우 자리를 내놓겠다며 초강수를 둬 겨우 한 대표를 설득했다.
총괄 투자본부 직원들은 이런 결정을 내리는 최 전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B-gate는 이미 천만 고객을 확보한,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코인 거래소였고 하루 현금 거래량이 천억 단위일 만큼 유명한 스타트업 회사였다.
FPS 게임 업체 스튜디오 G 또한 나쁘지 않았으나 초기 투자가 아닌, 이미 가격이 오를 대로 오른 주식을 사들여야 했고, 무엇보다 게임의 흥행은 까 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번에 투자할 금액은 300억 규모. 표면상의 정보만으로는 누가 봐도 B-gate를 선택해야 했다.
비서실도 마찬가지였다. 윤재를 마치 억지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표현하며 그의 선택을 나쁘게 평가했다.
직원들의 분위기를 살피던 한 비서가 은호에게 유유히 걸어와 파티션 위에 팔을 걸친 채 내려다보았다.
“자기는 뭐 아는 소식 있어?”
“아니요. 따로 고민 많이 하신 후에 결정하시는 것 같아요.”
“몇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 당연히 고민 많겠지. 그나저나 본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무시하고 이렇게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적 손에 꼽는데…… 요즘 정말 이상해.”
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씽긋 웃어 보였다. 입사 이후 줄곧 공격적인 투자 방식만 본 은호는 과거 그의 투자 방식이 어땠는지 역으로 궁금했다.
몸살 기운이 잡힌 줄 알고 업무에 몰두하던 은호는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까진 페로몬이 조절 불가능한 단계는 아니니 3시 외부 미팅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은호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 억제제를 한 알 더 삼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비서에게 받은 서류를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시동을 걸고 윤재가 다가오는 걸 확인한 은호는 차 문이 열림과 동시에 훅하고 밀려들어 오는 알파의 페로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본능에 착실한 몸이 흐느적거리며 허물어지고 있었다. 은호는 이를 악물어 봤지만 이성이 이미 절반 이상 날아간 것처럼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다.
“……유은호 씨?”
차 문을 여는 순간 은호뿐만 아니라 윤재도 본능으로 상대가 히트사이클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운전대를 붙잡은 은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확인한 윤재는 상체를 일으켜 은호의 손을 붙잡았다. 알파의 접촉만으로도 민감해진 은호가 파드득 놀라 창가로 몸을 붙였다.
“운전하지 말고, 조수석으로 가요.”
윤재는 뒷좌석 문을 열고 나가 운전석을 열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현기증에 휘청거리면서도 손을 뻗어 건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거친 숨을 고르며 조수석으로 돌아가 앉은 은호는 눈을 감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퇴한다 해도 집까지 가는 길이 막막했다. 페로몬이 새어 나가는 걸 자각할 만큼 점점 상태가 악화되어, 잘못하다간 정신을 잃고 모르는 알파에게 끌려갈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아는 상사에게 부끄러운 낯을 보여주고 마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마친 은호는 턱에 힘을 주며 이를 질끈 물었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집으로 좀…….”
띄엄띄엄 떨어진 문장의 공백 사이로 페로몬의 열기가 느껴졌다. 윤재는 자신마저 덩달아 휩쓸릴 것만 같아 정신을 다잡았다. 휴대폰을 꺼낸 그는 통화 목록을 열어 누군가를 찾았다.
“한 비서, 3시 미팅 취소해야 할 거 같은데 부탁 좀 할게. 이번 주 안 되면 다음 주도 상관없다고, 응, 고마워요.”
통화를 종료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통화를 누르지만 이번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윤재는 하는 수 없이 짧게 메시지를 남긴 후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은호를 감쌌다.
“창문 좀 열게요.”
액셀을 밟고 지상으로 올라가던 윤재는 은호 쪽 창문을 뺀 나머지 창을 반쯤 열었다. 오메가 페로몬에 휩쓸려 자칫 사고로 이어지면 낭패라 어쩔 수 없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지상으로 올라가자 차디찬 바깥 공기가 차 안으로 쏟아지듯 밀려들어 왔다. 은호는 저도 모르게 추위를 피해 보려고 코트에 얼굴을 파묻는 동시에 알파의 체취를 찾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오늘 쉬지 그랬어요.”
“내일 쉬려고 …그랬는데. 하아.”
“…….”
“……죄송합니다.”
후. 그의 긴 한숨이 시끄럽게 부딪치는 바람 소리에 섞였다. 히터를 틀었지만 바깥에서 밀려드는 칼바람이 워낙 세서 코트를 붙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은호는 코트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많이 추워요?”
“……괜찮아요.”
뒷좌석 창문은 모두 닫고 운전석만 남긴 윤재는 은호의 페로몬에 자신도 점점 달아오르고 있음을 깨닫고 하관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하아 여긴 왜.”
은호는 창밖으로 육중한 주물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코트를 벗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어름댔다.
“……제 …제 집으로 갈래요.”
안전벨트를 풀려고 하는데 시야가 뿌옇게 번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은호가 계속해서 헛손질을 하자 잠자코 지켜보던 윤재가 벨트를 풀어 주며 짧고 명료하게 답했다.
“아무 짓 안 해.”
“……네?”
“건들지 않는다고. 의사 불렀으니 조금만 참아요.”
그의 진심이 묻어나는 말투에 바짝 날을 세우던 은호가 긴장을 풀며 시트에 뒤통수를 붙였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척척하게 젖을 만큼 알파의 페로몬은 치명적이었다.
은호는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늘어졌다. 윤재의 마지막 말을 신뢰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남아 있던 이성이 통제권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윤재는 축 처진 은호를 붙잡고 정원 돌담길을 걸어 보려 했지만, 그가 바닥으로 꺼질 듯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 하는 수 없이 들쳐 업었다.
윤재는 목덜미에서 울리는 뜨거운 숨소리에 이를 악물고 현관문을 열었다. 예상보다 빠른 귀가는 둘째요, 출퇴근 때마다 보던 비서를 윤재가 등에 업고 들어오니 놀란 보조 도우미가 복도에서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다.
“후.”
윤재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은호를 눕혔다. 덩달아 페로몬이 출렁이며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아 호출한 의사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할 무렵이었다.
“……전무님.”
침대 위를 기던 은호가 윤재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퇴색된 눈빛은 이미 이성이 꺼진 지 오래였다. 통화 종료를 급하게 누를 수밖에 없던 건 은호의 손이 이미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앞섶을 더듬었기 때문이었다.
“유은호 씨.”
벨트를 풀려고 허리께를 더듬거리는 두 손목을 붙들자 손등 위로 뜨거운 뺨이 다가와 달라붙는다. 알파의 몸에 닿으려는 오메가의 본능 앞에 윤재는 미간을 구기며 숨을 골라 보지만, 그럴수록 진득하게 들러붙는 오메가 페로몬에 죽을 맛이었다.
“……주세요.”
페로몬에 절여진 은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앞의 상대가 자신이 그토록 받아들이고 싶은 알파라는 사실만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까스로 흥분을 억제하고 있던 윤재는 은호의 대책 없는 유혹에 기가 차 헛웃음을 쏟아냈다.
“조금만 참아.”
“……넣어 줘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흐으응.”
은호는 콧바람 가득한 말투로 도리질을 치며 사람 속을 바짝바짝 말렸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은호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윤재의 눈빛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러는데 집으로 가겠다고?”
“……넣어 줘, …제발.”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악착같이 버티느라 윤재의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페로몬에 잠식된 은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알파를 유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지만, 또다시 알파의 두툼한 손에 붙들렸다.
“……하아 …갖고 싶어.”
“……지금 말고, 정말 원할 때 …그때 말해요.”
“하아, 지금 해 줘.”
혼탁해진 눈동자엔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윤재는 페로몬을 쏟아붓는 은호를 떼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핏대가 잔뜩 오른 턱 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일어나서 후회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참는 거야. 나도 힘들다고.”
“……주세요.”
때마침 방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한계치에 다다른 윤재는 들어오라고 급히 소리쳤다. 의사가 다가와 진정제와 함께 인공 알파 페로몬을 주입하자 극렬하게 내뿜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점차 수그러졌다.
정신이 혼곤한 윤재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은호의 농익은 얼굴에 넘어가 후회할 행동을 저지를 뻔했다. 한계점을 넘나들다 보니 윤재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나열한 의사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평온해진 방 안은 옅은 오메가의 페로몬이 가늘게 나풀거렸다.
“하.”
윤재는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아 잠들어 있는 은호를 천천히 살폈다. 좀 전의 열기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어지럽게 뭉쳐 있었다. 손가락을 벌려 빗질하듯 위로 쓸어 넘기자 잡티 하나 없는 둥근 이마가 부드럽게 스쳤다.
윤재는 잠들어 있는 은호를 확인하고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과거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아니면 있었는데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그 당시 수행 비서는 한 비서였고, 은호는 비서실에 주로 있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은호를 수행 비서로 세운 후,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윤재는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에 일어난 은호의 교통사고로 애틋한 감정이 저면에 깔린 탓인지, 업무 수행 능력만 평가하던 과거와 달리 그를 좀 더 입체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윤재는 싱가포르 출장에 동행한 은호에게서 그동안 보지 못한 이면을 확인했다. 은호는 정이 많은 만큼 외로움을 많이 탔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윤재가 은호의 감정에 휩쓸려 속내를 털어냈던 건 단순히 취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화를 들어주는 상대가 은호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되돌아와서 현재는 살아 있지만, 혹시나 은호가 과거의 그날처럼 또다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머릿속에 심어진 탓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속내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일련의 감정 교류 과정이 있지 않았다면 윤재는 은호가 히트사이클이 왔어도 한 비서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보냈지, 손수 운전하여 집으로 데리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윤재는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천천히 샤워실로 걸어 들어갔다.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의 페로몬 파동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탓에 허리 아래로 잔뜩 응어리진 열기가 남아 곤욕이었다.
***
은호는 야트막한 진동이 머리끝에서 울리자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촉감과 섬유 유연제의 향, 무엇보다 익숙지 않은 알파 페로몬에 나른하게 꿈지럭거리던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맙소사…….’
침실까지 한 번도 들어와 보진 않았지만 곳곳에 달라붙어 있는 페로몬 향으로 비추어 볼 때 이곳은 윤재가 머무는 곳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경악한 은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에는 얇은 밴드가 붙어 있었다.
“건들지 않는다고. 의사 불렀으니 조금만 참아요.”
은호는 의식이 나가기 직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몸 여기저기를 살펴 보았지만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다. 몇 시간 전 히트사이클에 절어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은 평소의 컨디션과 같았다.
‘미쳤지, 미쳤어.’
은호는 수치스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스스로를 책망하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
방 안은 그렇다 쳐도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어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도우미 아주머니라도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늦은 시간인가? 생각해 보니 시간조차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나왔다. 주방 식탁엔 저녁 식사로 보이는 음식들이 식지 않도록 뚜껑에 덮여 있었다. 정황상 도우미 아주머니의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모양이었다.
통로 끝 방에서 규칙적인 울림이 들려왔다. 독특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익숙지도 않았다. 은호는 방문을 열기도 전에 이곳에 윤재가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의 페로몬이 스멀스멀 방문 틈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제 채널 뉴스를 확인하며 러닝 머신 위에서 땀을 빼고 있던 윤재가 방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요?”
“……네.”
동작을 멈추고 근처에 걸어 둔 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던 그가 은호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은호의 히트사이클에 잔뜩 쌓였던 욕구를 운동으로 푸느라 페로몬을 제어하지 않던 윤재는 은호의 등장에 놀라는 눈치였다.
얇은 반소매 티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자 윤재의 상체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빗장뼈 아래로 벌어진 가슴팍이 숨을 쉴 때마다 들썩거렸다.
“저녁 먹고 가요. 어차피 먹어야 해서.”
주방으로 걸어간 윤재가 테이블 위에 놓인 국그릇 뚜껑을 열었다. 그릇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고기 버섯 죽이 담겨 있었다. 딱 봐도 일부러 부탁해서 만든 티가 났다. 은호는 눈치를 보며 식탁 의자를 당겨 앉았다.
윤재는 컵에 물을 따라 건네며 이마에 맺혔던 땀을 수건으로 훔쳤다.
“입이나 축이고 들어요. 입 안 까슬하잖아.”
은호는 윤재의 노곤한 말투 때문인지 그가 마치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져 마음이 흐트러지려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은호는 양손을 식탁 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윤재는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은호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수저를 모아 쥐는 것을 보았다.
“기억이 없어 그러는데, 제가 혹시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 일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건 은호가 처음으로 히트사이클을 겪었던 날 가족들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누군지 분간하지 못하고 울며 매달렸다는 말과 함께 가족이었기에 망정이지, 은호가 낯선 사람과 함께였다면 너무나 겁나고 걱정되었을 거라는 말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우성 알파였다. 조용히 넘어갔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윤재는 은호가 자신의 직원이기에 감싸주고 있었다. 은호가 걱정하는 건 히트사이클로 인한 무례함이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잡히지 않아 초조할 뿐이다.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윤재는 은호에게 히트사이클도 관리하지 못하냐며 타박하지 않고 별일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말라며 무덤덤하게 넘겼다. 은호는 부끄러운 마음에 마주 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감사합니다.”
은호가 다소 위축된 모습으로 앉아 있자 상체를 일으킨 그가 수저를 들어 손에 쥐여 주었다.
“식겠다. 얼른 먹어요.”
언제부터 이리도 다정했던가. 요즘 은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최윤재 전무가 맞는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싱가포르 출장을 다녀온 이후 그 느낌은 확실해졌다. 수영의 말대로 단순한 조직 관리자의 자비로움이 아닌 관심이었다. 문제는 관심의 질이었는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죽 한 그릇을 비우고 물을 마시는 사이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은호는 그의 호의를 가장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데려다줄 테니 잠시만.”
윤재는 거실 서랍에서 차 키를 챙겨 들고는 침실 안에서 은호의 코트와 쇼핑백을 챙겨 나왔다. 아무리 혼자 가겠다고 우겨도 윤재가 먼저 나서서 자동차의 잠금을 풀고 운전석에 앉기에 은호는 발을 동동 구르다 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거리는 온통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했다. 은호는 침묵하며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윤재를 바라보았다. 낮에 있었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니 쉽사리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분명 최악이었을 텐데, 왜 이리 감싸 주는 건지.
“아직 어지러울 텐데 가서 푹 쉬어요.”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윤재는 고개를 돌려 은호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아직 핏기가 돌아오지 않아 창백한 뺨은 온기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은호는 서류 가방을 챙기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가 운전하는 내내 입 안에서 맴돌던 말 중 하나를 골라 꺼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런 일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부끄러움 가득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잡이를 당기려는데 어깨 위로 그의 단단한 손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거.”
“…….”
“얇은 터틀넥인데 추위 많이 타는 거 같아서. 셔츠 안에 입어요. 겨울에는 타이 맬 필요 없고.”
“……네?”
“크리스마스 선물.”
그가 집에서부터 들고나온 쇼핑백은 은호의 선물이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은호의 얼굴에 난감함이 응축되었다. 얼떨결에 받았지만 이걸 왜 주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산타 할아버지는 아니고 그냥 산타’라며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은호의 입 속에 있던 바람이 빠지며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들어가 봐요.”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웃던 그가 갑자기 손을 흔들어서 하마터면 은호도 같이 손을 흔들 뻔했다. 차 문을 열고 나와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사이 그가 다시 시동 버튼을 누르며 운전대를 잡았다. 은호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검은 세단이 모습을 감출 때까지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옹송그려 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최측근 비서여서 챙겨주는 것치고는 그의 배려가 너무도 섬세했다. 그냥 봐도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만큼. 은호는 손으로 이마를 쓸며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의 일부가 잘려 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은호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앞에 내려놓은 쇼핑백으로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쇼핑백에 박힌 로고 때문에 선물 상자를 풀기도 전에 자신이 좋아하고 즐겨 입던 브랜드임을 알게 되었다. 이래서 조직 리더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처럼 보여도 상대의 기호를 빠삭하게 꿰고 있어 할 말이 없었다.
“……딱 맞네.”
마치 매장에서 입어 보고 고른 옷처럼 몸에 착 감겼다. 모노톤을 즐겨 입는 건 또 어찌 알았을까. 화이트, 그레이, 블랙 세 종류나 담겨 있어 돌려 입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은호는 휴대폰을 들어 최 전무를 검색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그냥 단순한 멘트를 담아 보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오후 10:21
선물도 그렇지만 히트사이클로 정신없는 오메가를 구제해 준 거나 다름없으니.
휴대폰을 내려놓고 코트와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 벗으며 세탁실로 걸어가는 도중, 휴대폰이 바르르 울렸다.
잘 자요. 오후 10:23
담백하고 명료한 세 글자에 사심이 깃들어 보이는 건 이미 윤재를 좋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일까. 코앞에서 깊이 있는 목소리로 윤재가 다정하게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았다. 은호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
비서실 내부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겨울바람을 어깨 한가득 묻히고 온 한 비서가 모두 들으라는 듯 목청을 돋우며 파티션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지상 주차장에 최서령 부사장님 오셨어요.”
“최서령 부사장님?”
은호의 옆자리에 앉은 김 비서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 대표 라인이었다.
이곳 비서실은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출입문을 열면 왼쪽은 최 전무, 오른쪽으론 한 대표 집무실이 있고, 그 사이에 인포 데스크 및 비서실이 묶여 있었다. 은호는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에 볼펜 끄트머리로 턱을 톡톡 때리며 김 비서를 올려다봤다.
“……누구?”
“유성그룹 최 회장님 장녀요.”
“아!”
입사 첫 출근일에 윤 실장에게 유성그룹 최서령, 최영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놓치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일까요?”
“그러게, 그냥 들르실 분은 아닌데.”
유성그룹 부사장 최서령과 마케팅 본부 본부장 최영재. 한때 최영재는 유성창투 리테일 마케팅 전무 자리에 있었으나 형편없는 실적으로 2년 만에 옷을 벗었다. 최윤재 전무와 열 살 차이인 최서령 부사장은 처음에는 윤재를 과소평가했으나 그가 점점 두각을 드러내며 리더 자질을 보이자 경쟁자로 취급하며 멀리하게 되었다.
“유 비서.”
“네.”
“최 전무님 오전 스케줄 확인해 봐.”
윤 실장이 급히 다가와 최 전무 스케줄을 물었다. 아무래도 최서령 부사장과의 독대를 위해 시간을 조율하는 분위기라 은호는 스케줄러를 열었다.
“10시에 유성 펀딩 그룹 17호 TF 회의 외엔 없습니다.”
“그거 자기가 들어가서 기록해 놔. 최 전무님 못 들어가실 거야.”
“네.”
내선 번호를 찾아 관련 본부장과 팀장에게 윤재의 회의 불참석 통보를 급히 알리고 회의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은호는 물을 마시기 위해 탕비실로 들어갔다가 한 비서와 마주쳤다. 머그잔에 냉수를 가득 담고 있으니 커피믹스를 뒤적이던 한 비서가 옆에 찰싹 붙었다. 은호는 재빨리 자리를 비켜 주며 넌지시 물었다.
“최서령 부사장님과 최 전무님이요. 사이 안 좋은가요?”
“……겉으로는 웃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해야 하나?”
뜨거운 물을 내려 커피믹스를 녹이던 한 비서는 덩어리진 게 어설프게 남아 있자 스틱 봉투로 휘휘 저었다.
“최 전무님이요?”
“아니 최 부사장님.”
“……아.”
“최 부사장님이 그렇게 대하니 최 전무님이 웃고만 있을 수 있나.”
나이 서열을 무시하지 못할 텐데 열 살이나 어린 최윤재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니 아무리 친인척이라 해도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썩 달갑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길 바라는 건 아닐 테지만.
“은호 씨, 이따 TF 회의 들어가서 회의록 작성해야 한다면서요.”
“네.”
“정리하면 나한테도 보내 줘요.”
은호는 먼저 나간 한 비서를 바라보며 컵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도로 개수대에 부어 버렸다. 카페인이 필요했다. 캡슐 커피를 찾아 추출기 앞에 선 은호는 손톱 안쪽 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며 덩달아 긴장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가 너무나도 걱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