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그날로부터 7개월 전
말랑말랑한 혀가 분홍빛 입술 선을 노긋하게 더듬었다.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혀가 볼 안쪽 살과 치아를 건들다 웅크리고 있던 다른 혀를 흡입하듯 감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또렷이 들리자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이 터졌다.
“유은호, 일어나야지.”
은호는 지난밤 현준의 뜬금없는 호출을 받고 이튿날 출근할 옷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현준이 그에게 집으로 와 달라고 한 건 근 두 달 만이었다. 현준은 한번 욕정이 쌓이면 은호를 불러 욕구가 전부 해소될 때까지 괴롭혔다. 마치 페로몬 체증을 일시에 해소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은호가 뒤척이자 두툼한 이불이 흘러내리며 척추 선을 따라 선이 고운 등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암막 커튼으로 바꿔 줄까?”
“됐어. 괜히 잠만 더 자.”
“시간이 애매해서 뭘 먹긴 어렵네.”
은호는 휴대폰을 확인하며 아쉬운 듯 입술을 쫑긋거렸다. 30분만 일찍 일어났다면 씻고 밖으로 나가 뭐든 먹었을 텐데, 지금은 씻고 나가는 것만도 벅찼다. 머릿속 사고는 얼른 일어나라고 재촉했지만 반응하는 몸은 시원찮았다. 이불 밖이 서늘해서 그런지 계속 누워만 있고 싶었다. 몸에 열이 많아 더위를 잘 타는 현준은 12월 중순이 넘어야 보일러를 돌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같이 있으니까 좋다.”
은호는 이불 밖으로 나온 발가락을 다시 집어넣으며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았다. 은호는 현준과 반대로 추위에 약했다. 고질적인 수족냉증으로 가을부터 난방은 필수였고 한겨울엔 핫팩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추위를 많이 탔다. 얼음장 같은 현준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은호는 벌써부터 한쪽 코가 막히고 목이 까슬한 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생수 한 병을 비운 현준은 침대로 다가와 새 물병 하나를 은호에게 건넸다.
“은호야.”
“응.”
“……나 집 월세 좀. 집주인이 어제 찾아와서 이렇게 자꾸 밀리면 방 빼래.”
말을 꺼내면서도 불편해하는 현준과 달리 은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휴대폰으로 월세 금액에 조금 더 돈을 얹어 입금했다. 안 그래도 이맘때쯤 월세를 내야 할 텐데 어찌했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고마워.”
“돈 생각 말고 올해에는 꼭 성공해.”
“그래.”
현준은 돈 버는 애인에게 빌붙어 요리조리 뜯어내는 게 본인 스스로도 치욕스러운지 표정을 풀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은호는 미래의 불안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막막해하는 현준이 너무도 짠하고 안쓰러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스치는 아침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코를 훌쩍이던 은호는 최윤재의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몸살감기약을 사 입에 털어 넣었다.
“10시에 전략 투자 전체 회의가 예정되어 있는데 박 본부장님이 병가를 내셔서 이 팀장님이 대신 들어올 예정입니다. 2시 여의도 T 타워에서 Gee-form과 미팅, 그리고 5시부터 8시까지 선릉에서 DS 포럼이 있습니다.”
몸살 기운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독 최윤재의 페로몬 파동 폭이 크게 느껴졌다. 그는 뒷좌석에 앉자마자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일부러 위협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는 분명 불쾌감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은호는 그가 느끼는 불쾌감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출처를 찾느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골몰했다.
“아…….”
난데없이 차창을 반쯤 열고 얼굴을 돌리는 그를 보며 은호는 아차 싶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페로몬 향에 예민하구나.’
한파가 불어닥친 그의 굳은 표정을 보는 순간 뼛속 깊이 오한이 스며들었다. 나이 든 전무를 대할 때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자꾸 망각했다.
은호는 출근하자마자 서류 가방 안에서 소취제를 찾아 정신없이 뿌려 댔다. 현준과 뒹굴며 난잡하게 섞인 페로몬을 윤재에게 들켰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전 회사 전무는 페로몬을 의식조차 못 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번 전무는 젊은 나이인 데다 ‘차’라는 작고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런 거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수행 비서고, 경영 비서인지. 은호는 빨리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마른 얼굴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소취제 한 통을 다 뿌리고도 혹여 냄새가 남아 있을까 싶어 빌딩 옥상으로 올라가 가을바람으로 냄새를 날려 보냈다. 은호는 몸에 남아 있는 작은 흔적조차 말끔히 지우고 싶었다.
10시 회의 5분 전, 준비를 마친 은호가 노트북을 한쪽 겨드랑이에 끼우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출근 때보다는 조금 나아지지 않으려나 했던 은호의 기대는 오산이었다. 윤재는 여전히 냉랭했다.
전략 투자 회의에 참석한 윤재는 내내 날이 바짝 서 있었다. 그는 콘덴서 마이크를 계속 켜 놓은 채 보고서를 훑으며 날카로운 지적과 질문을 퍼부어 본부별 본부장과 직원들을 꽁꽁 얼려 버렸다. 종전 분기보다 낮게 잡은 실적과 다소 느슨해진 본부의 태도가 문제였다. 곁에서 기계처럼 회의록을 작성하던 은호는 재검토를 요구하는 윤재의 낮게 깔린 음성에 손가락을 멈칫했다.
“오늘 전무님 왜 이렇게 저기압이에요? 살얼음판인 줄.”
“지난 분기 어닝 서프라이즈였으면 샴페인 좀 터뜨리고 잠시 숨 좀 골라도 되는데 바로 조이네.”
회의가 끝나고 먼저 나간 윤재의 등 뒤로 직원들의 한탄이 쏟아졌다. 바쁘게 작성한 회의록의 오타를 확인하고 이메일을 전송하던 은호는 가까이 다가온 음영에 고개를 들었다. 이 본부장이었다.
“전무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의 내내 긴장했는지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던 이 본부장은 혼이 빠진 은호를 보며 고생한다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은호는 나름 최윤재 전무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로몬 관리를 하지 못한 탓에 아침부터 묘하게 어긋난 윤재와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점점 벌어지고 갈라졌다. 오늘은 은호의 잘못이 컸다.
최윤재는 오늘만 날을 세웠지, 은호에게 있어 꽤 괜찮은 상사였다. 그동안 지켜본 윤재에 대해 은호 나름의 평가를 해 보자면, 그는 비서실 직원들 말처럼 다정다감하진 않지만 자기 사람을 잘 챙겼으며, 타고난 직무 능력과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나이에 비해 월등했다. 단순히 로열패밀리와 낙하산으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역량이 너무도 우월했다. 회사의 대표가 따로 있음에도 모든 이사진이 한 대표와 최윤재를 동급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은호는 Gee-form 미팅을 앞두고 편의점으로 달려가 핫팩 3개를 사서 양 주머니와 등에 붙이고 운전석에 앉았다. 차 안의 창문을 내내 열어둔 탓에 몸살감기약을 먹었음에도 저조한 컨디션을 끌어 올리느라 고군분투해야 했다.
“상대 쪽 실무진 정보와 회사 재무구조 리포트는 메일로 보냈습니다.”
뒷좌석 문이 열리며 윤재가 들어왔다. 룸미러를 통해 두 시선이 얽히자 꿰뚫는 것처럼 눈빛을 꽂던 그가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네?”
“여의도에 도착하면 퇴근해요.”
나른할 정도로 천천히 내리깔리는 윤재의 속눈썹이 짙고 길었다. 평소 같으면 거절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애인과 잠자리를 들킨 상태에서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 처리당하는 게 부끄러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몸살 기운만 있는 거지 일을 못 할 만큼 힘든 건 아니었다. 또 추위에 약한 건 알아서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은호가 정중히 거절하자 한동안 말이 없던 윤재는 시트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혼자 들어갈 테니 쉬고 있어요.”
여의도 미팅 장소에 도착해 조수석에 둔 노트북 가방을 챙기려는 은호에게 윤재가 따라오지 말라며 단호히 못을 박았다.
멀어져 가는 윤재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은호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시트에 머리를 붙였다.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낸 것만 같아 기분이 자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눈을 감고 있던 은호는 벨트에 기대고 있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지는 순간 낙하감을 느끼며 번쩍 눈을 떴다.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기척조차 듣지 못할 만큼 깊게 잠이 들었다. 전일 현준에게 시달린 데다 몸살감기까지 겹치니 피로가 겹겹이 쌓였다.
뻐근한 목뒤를 주무르며 무심코 창밖을 본 순간, 지하층 로비 출입문이 열리며 윤재가 걸어 나왔다. 손에 종이봉투 같은 걸 들고 있기에 은호는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거.”
그가 내미는 걸 얼떨결에 받아 들어 살피니 따뜻한 유자차와 갓 구운 쿠키가 종이봉투에 들어 있었다.
“조수석으로 가요.”
“네?”
“마시라고. 운전 내가 할 테니까.”
“괜찮…….”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윤재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종이봉투를 든 채 뻘쭘하게 서 있던 은호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조수석에 앉은 은호는 작게 속삭이듯 말하며 봉투에서 유자차를 꺼내 들었다. 따끈하니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열감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뚜껑을 열어 유자차를 후후 불어 마시는 사이 윤재는 매끄럽게 핸들링하며 선릉으로 이동했다.
“전무님도 드실래요?”
“괜찮아요. 식기 전에 먹어요.”
어깨를 휘감은 슈트가 정석처럼 매끄럽게 떨어졌다. 흐트러짐 없이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스타일은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은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운전에만 몰두하는 윤재를 보며 입술을 쫑긋거렸다.
상대를 배려해 주고 있음에도 그만큼의 빛을 보지 못하는 건 그의 무뚝뚝함 때문이었다. 아무리 잘해 줘도 무정한 시선 하나로 모든 게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러는 걸까? 아니다. 그는 모를 리가 없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이 이걸 모를 리가 없는데 꼭 모르는 것처럼 군다.
LV 타워에 도착하자마자 은호는 노트북 가방을 챙겨 들고 그의 곁에 섰다. 호텔 연회장으로 들어가 지정된 VIP 좌석을 찾는 동안 윤재는 경제계 인맥들과 가볍게 칵테일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말주변이 없다고 생각했던 은호의 추측을 깡그리 무너뜨릴 만큼 회사에 있을 때와 달리 꽤 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DS 포럼은 국내외 투자를 위한 목적으로 투자사들 앞에서 스타트업 회사 대표가 자기 PR을 하는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최윤재는 투자사 대표로 자리에 참석했다. 연단 위에 올라 자사 프로젝트를 알리는 A 스타트업 대표의 연설에 은호는 중간중간 필요한 정보를 노트북에 기록하며 흥미롭게 관찰했다.
“뭘 그렇게 적지?”
“나중에 필요할지 몰라서요.”
느른하게 콧숨을 던지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윤재를 보자 은호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야. 평소 좀처럼 잘 웃지 않는 그가 오늘 이 자리에서만 벌써 몇 번째 웃는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찬바람 쌩쌩 불던 모습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얇게 펴며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보니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1부가 끝나며 술을 포함한 가벼운 다과가 준비되었고, 뒷자리는 작은 파티 형식으로 탈바꿈했다. 은호는 운전을 해야 하기에 술 대신 과일주스와 카나페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유성창투는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메이저 투자 회사라 스타트업 대표들에게는 간택 당하고픈 선망의 투자사였다. 윤재의 주변은 온통 스타트업 대표와 투자사 대표로 가득했다.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손목을 살피는데, 소맷단에 기름진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음식을 집다 묻은 건지, 물티슈로 닦아 보아도 오히려 번지기만 할 뿐 잘 지워지지 않아 은호는 홀을 빠져나와 화장실을 찾았다.
“……!”
은호는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폐부 깊숙이 들이치는 알파의 진한 페로몬에 놀라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소리 없이 닫힌 문 너머에서 러트가 온 알파의 헐떡임이 희미하게 들렸다. 은호는 본능적으로 화장실에서 멀어지기 위해 휙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잠시만.”
별안간 뒤에서 확 팔을 비틀어 잡아당기는 악력에 뒤를 돌아본 은호는 경악에 찬 눈빛 그대로 얼어 버렸다. 화장실 안에서 맡았던 페로몬의 남자였다. 눈까지 벌겋게 충혈된 남자는 무작정 은호를 끌어당겨 화장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거 놔요!”
“잠깐이면 돼.”
사람 많은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이곳만 뚝 떨어진 외딴섬처럼 고요했던 이유는 러트 온 남자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은호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발버둥 쳤다. 페로몬으로 상대의 정신까지 해제시키려 드는 걸 보니 우성 알파였고, 아마도 이름이 꽤나 알려진 남자 같았다.
쉭쉭거리는 뜨거운 숨이 얼굴 위로 흩뿌려지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두둑 셔츠 단추가 볼품없이 떨어져 나가며 셔츠가 찢어졌다. 사력을 다해 벗어나려고 했지만 힘에 압도되어 순식간에 바닥에 눕혀진 은호는 살려 달라고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아악!!”
그때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상체를 짓누르던 육중한 몸이 보기 좋게 떨어져 나갔다. 은호는 자신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익숙한 인영에 멈추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떨었다.
“뭐 하는 거야!!”
일갈하며 다가오던 검은 그림자는 윤재였다. 음습한 페로몬을 내뿜으며 들어온 그가 러트 온 남자를 끌어낸 후 깔려 있던 은호를 붙잡아 일으켰다. 벽에 밀쳐진 남자는 이를 갈며 소리를 지르려다 윤재를 확인하곤 벼랑 끝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이성을 끌어다가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압도적인 페로몬 파동으로 상대를 찍어 누른 윤재는 블레이저를 벗어 은호를 감쌌다. 충격이 컸는지, 맥을 못 추고 자꾸 무너지려 했다. 은호를 붙잡고 등허리를 감싸듯 끌어안은 윤재는 보폭을 넓히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로비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오니 12월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흩어졌다.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온 은호는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수축된 숨을 골랐다.
“괜찮아요?”
주차장에서부터 페로몬을 갈무리한 윤재는 은호를 차에 태우고 실내등을 켜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람이 많은 자리여서 조용히 빠져나오는 게 은호에게도 좋을 것 같아 넘치도록 페로몬을 쏟아냈다. 덕분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홀 밖으로 나오지 않아 사고를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찢어진 상의는 그렇다 쳐도 붙잡힌 손목 위로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이 보기 안쓰러웠다. 필시 멍으로 이어질 자국이라 윤재는 문장 사이에 공백을 두며 긴 한숨을 쉬었다.
“퇴근하라 할 때 했으면…… 후…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은호는 답답함이 묻어나는 윤재의 말투에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움츠린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려 왔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 뜻이 아니잖아. 하.”
안타까움에 내뱉은 말을 은호가 오해하고 사과하자 당황한 윤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마를 쓸었다. 러트 온 알파에게 억지로 끌려간 것만으로도 이미 심적으로 무너진 상태일 텐데 위로는커녕 다그치려 했던 것이 뒤늦게 미안했다. 한껏 위축된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찡그리던 윤재는 팔을 뻗어 은호의 두 손을 붙잡았다.
“나 좀 봐요.”
“…….”
“화내서 미안해요.”
윤재의 낮게 울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발치에 머물던 은호의 시선을 끌어 올렸다. 음의 고저가 없는 말투만 쭉 듣다가 감정이 잔뜩 실린 목소리를 들은 은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확인하려는 눈치였다. 그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줄 정말 몰랐다.
“데려다줄게. 집으로 가요.”
“전무님.”
“기사가 곧 올 거니까. 노트북도 챙겨 달라고 부탁했으니 뒷좌석으로 가 앉아요.”
윤재의 말대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이 지긋한 남성이 노트북을 들고 차 근처로 다가왔다. 은호는 러트 사건으로 포럼의 2부를 통째로 날리자 자책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를 귀찮게 하다 못해 훼방꾼 역할까지 자청한 것 같아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은호는 얼굴을 감싸 쥐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휴가 처리 낼 테니, 하루 쉬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 정도는…….”
“내 말 들어.”
은호를 뒷좌석으로 데려간 윤재는 목소리를 낮추며 최대한 은호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한 달 내내 그를 보았지만 오늘만큼 많은 말을 주고받은 건 처음이었다.
“약 잘 챙겨 먹고 쉬어요.”
차가 오피스텔 로비에 다다르자 긴장이 풀린 은호는 느릿한 손짓으로 노트북을 챙겨 문을 열었다. 윤재의 늘 정석같이 반듯하고 쨍한 모습만 보다가 인간미가 엿보이는 호감형 말투를 들으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무리 좋은 사내 복지와 고액 연봉을 제시한다 한들 그동안 봐 온 윤재의 모습 때문에 일에 대한 열정이 쉽사리 생기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에이아이(AI)를 옆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사람 같지 않은 태도에 은근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은호는 비서팀 직원들이 말하던 윤재의 본모습을 드디어 본 것 같아 묘한 희열마저 들었다.
은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이불 속으로 직행했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나서 꿈에서도 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
아침이 되자 은호는 몇 달간 몸에 익힌 습관대로 저절로 눈이 뜨였다.
전일 몸살약을 챙겨 먹은 게 도움이 되었는지, 약간의 근육통을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휴가를 받는 건 살짝 과해 보여 출근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출근을 감행했을 때 말을 듣지 않는다며 윤재가 감정의 날을 세울까 봐 그만두었다. 은호는 대신 수영이 운영하는 카페로 출근했다.
수영은 삼정물산에서 만난 동기로 인재 양성 파트에서 같이 근무하던 비서였다. 그녀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며 1년 전에 퇴사한 이후 그동안 모은 돈으로 대학로 연극가 골목 귀퉁이에 작은 커피숍을 차렸다. 힘이 들어도 아침마다 직접 콩을 볶더니 커피가 맛있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원두를 직접 사 가는 손님이 부쩍 늘어났다. 수영은 타지역 커피숍과도 볶은 콩을 꾸준히 거래하기 시작해서 창업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멍든 거야? 멘탈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네.”
“구해 줘서, 다행히.”
“전무 멋지네. 이름이 뭐라고?”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멍 때문에 의도치 않게 어제의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 꼴이 되었다. 다행히 매장 안은 테이크아웃 손님만 드문드문 있어 대화하기 수월했다. 은호는 수영이 직접 만들어 준 라테를 후후 불며 조금씩 삼켰다.
“최윤재.”
최윤재라고 이름을 말해 주자 득달같이 인터넷 검색으로 얼굴을 확인한 수영은 휴대폰과 은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대박’이라는 짧고 임팩트 있는 평을 남겼다.
“조각이네. 실물도 이래?”
“사진발이 좀 안 받네. 실물이 더 나아.”
“네 상사라고 편드냐?”
무엇이든 거침없어 보였던 그도 카메라 앞에선 보통의 사람이었는지 묘하게 경직된 인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은호는 잇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근데 보통의 상사하고 좀 다른데?”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아냐. 젊어도 안 그러는데, 그 사람이 좀 특이하거나 아니면 너한테 호감이 있든가.”
상사가 비서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을 한다거나 뒷좌석에 태우는 일은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한 달 내에 그런 일이 벌써 두 번째다.
“나 애인 있는 거 알아.”
“그래? 그럼 좀 특이한 사람인가 보네. 아니면 알고도 들이대는 사람이거나.”
수영은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갓 구운 크루아상을 꺼내며 말했다. 오븐에서 갓 나온 크루아상의 진한 버터 향이 실내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런 것 같진 않아.”
“뭐, 아니면 됐고.”
수영은 빵칼을 꺼내 크루아상 한쪽을 썰어 햄과 치즈, 각종 야채를 골고루 섞어 접시에 담더니 무심하게 툭 내밀었다.
버터 향이 가득한 크루아상을 한입 베어 물자 잠기운에 눌려 있던 위장이 일차원적인 욕구를 반기며 아우성쳤다.
“오빠!”
수영이 벼락같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자연스레 수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은호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혁필을 반겼다. 메고 있던 백팩을 빈 의자에 내려놓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는 그에게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느껴졌다.
“은호! 이 시간에 웬일이야. 취직한 지 얼마나 됐다고?”
“휴가 냈어요.”
“잘린 건 아니고?”
짓궂은 농담을 태연자약하게 던지는 그는 한성 경제신문 중소기업부 취재 기자로 3년 전 삼정물산에 출입 기자로 들어왔다가 수영과 취재 자료를 주고받으며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은호가 주먹을 쥐며 팔을 내밀자 주먹으로 콩 하니 맞대응한 혁필은 자리에 앉아 남아 있는 크루아상 샌드위치 반쪽을 입에 물었다.
“많이 바빠요?”
“뭐…… 기자들이 다 그런 거 아니냐. 그래도 사회부 기자보단 덜 바쁘지. 경제부는 회사만 드나들면 되지만 사회부는 경찰서 죽돌이 해야 하니까.”
혁필은 자고 일어나 눈곱만 떼고 나왔는지 눌린 뒷머리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하늘로 향해 있었다. 은호가 뒷머리를 정리하라며 손짓하자 바로 알아차린 혁필은 카운터 개수대로 가 손가락에 물을 묻혀 머리카락을 대충 빗질했다.
“혁필 오빠, 아이스 아메리카노?”
“어, 고맙.”
수영에게 다가간 혁필이 아무렇지 않게 볼을 쓰다듬고 입맞춤을 하는 걸 은호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현준과 사귄 후 첫해만 풋풋한 연애를 했지, 현준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 이후로는 컨디션 편차가 심해 가벼운 스킨십조차 조심스러웠다. ‘부럽다’라는 말이 혀끝에서 뭉쳐 빙빙 돈다. 은호는 왠지 말을 뱉어내면 더욱 초라해 보일까 봐 샐쭉하니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유성창투랬지? 최윤재 전무?”
“네.”
“거기도 전쟁턴데 상관 잘 모셔라.”
“전쟁터요?”
허공에서 혁필과 마주친 은호의 시선이 너울거렸다. 은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두 팔을 테이블에 붙이며 당겨 앉았다.
“거긴 형제 싸움은 아니고 사촌 간 싸움이라 해야 하나?”
혁필은 수영에게 막 받아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 마시듯 꿀꺽 삼키며 테이블로 다시 와 앉았다. 수시로 인터뷰를 하고 타자를 치다 보니 거치적거리는 게 싫어 바짝 자른 혁필의 손톱이 눈에 띄었다.
“유성그룹 최광훈 회장 자식들이 호시탐탐 최윤재 자리 노리잖아. 몰랐어?”
“아, 네…….”
“최윤재 전무 아버지 최성훈이 유성그룹 최광훈 회장이랑 형제인데, 최 회장이 동생 사고로 보내고 혼자 남은 최윤재를 잘 케어해 준다는 명목으로 회사 지분 중 일부를 자기 아들에게 돌려놨어. 물론 최대 주주는 최윤재지만 말이야.”
입사 첫날 윤 실장에게 주주 관계도에 대해 들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유성창투 대주주는 최윤재로 총지분 35%. 그리고 2대 주주가 유성그룹 차남 최영재 17%였는데, 돌아가신 최윤재 아버지 최성훈의 지분을 강제 쪼개기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최윤재가 회사를 이끌어가기 너무 어렸고, 유성그룹 최광훈 회장은 윤재와 유성창투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동생 주식의 일부를 자기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말로는 우호 지분이라 하지만 사촌지간에도 경영권 싸움이 빈번하기에 좋게 포장하기 어려운 모양새였다.
“근데 유성그룹보다 유성창투가 더 잘나가잖아. 욕심이 나겠지, 안 그래? 유성그룹이 가진 호텔과 리조트가 실물 자산이긴 해도 모두 상태 안 좋잖아.”
“재무 상태 별로예요?”
“네가 확인해 봐.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야.”
“…….”
“아무튼 최 전무 잘 모셔라. 사람 괜찮던데.”
혁필은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윤재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따져 보면 지금도 큰 조직을 꾸려 나가기엔 어린 나이인데 그가 가진 식견은 지천명을 넘긴 한 대표와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은호는 귓바퀴를 매만지며 혁필을 올려다봤다.
“만난 적 있어요?”
“인터뷰해 봤지. 괜찮은 인재더라. 추진력도 좋고.”
단순히 소문만 듣고 응원하는 건 아니구나. 은호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남은 라테를 후루룩 마셨다.
“그나저나 너희, 올해는 결혼하냐?”
“현준이가 합격하는 게 우선이죠.”
“야, 그 자식은 올해도 떨어지면 잘라. 몇 년째 우렁각시 하냐. 너 호구야, 인마.”
혁필이 직설을 넘어서 독설을 날리니 은호는 괜스레 울컥했다.
“합격이 쉬운 게 아니잖아요.”
은호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현준을 대변하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던 혁필은 뭔가 한 소리 하려는 듯 입을 뗐다가 도로 닫았다. 굳이 앞에 당사자를 앉혀 두고 더 이상의 악담을 퍼부어 봤자 좋을 게 있냐는 듯한 눈초리에 은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알았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문드러진 속은 달랠 방법이 없었다.
사실 올해도 합격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현준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더 흔들릴 것 같아 단 한 번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은호도 차츰 지쳐 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현준은 오늘도 연락이 없었다. 가끔 욕구 불만일 때 호출하는 것 외에는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었다.
은호는 현준을 보며, 본인이 실내에서 키워지는 화분 같다고 종종 느꼈다. 현준이 물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메말라 가는 화분. 물 주는 날짜를 잊은 현준을 기다리며 닫힌 창가 앞에 선 화분은, 바깥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지 못하고 그렇게 메말라 가고 있었다. 창만 열면 언제든 맞을 수 있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채로 말이다.
***
첫눈이 내렸다. 은호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새벽부터 내린 함박눈이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는 풍경을 감상했다.
은호는 어릴 적부터 눈과 비를 좋아했다. 겨울은 싫어했지만 흰 눈이 내리면 중무장을 하고 나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 위의 눈을 밟았다. 쌓인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너무 좋아해 종일 걸어 다니다 손발이 얼어 버린 적도 있었다.
출근길은 폭설로 인해 북새통이었다. 너도나도 차를 가지고 나와 그런지 도로는 주차장이 되었고, 은호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윤재의 집에 10분 늦게 도착했다.
갈색 머리와 남색 코트 위로 금세 쌓이는 흰 눈을 탁탁 털어 내는 은호의 손길이 야무졌다. 주물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관리인들이 길 양옆으로 눈을 쓸고 있었다. 은호는 정원을 가로질러 윤재의 집으로 가 도우미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여벌 셔츠를 들고나왔다.
“몸은 괜찮아요?”
“아……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재가 뒷좌석에 앉는 걸 확인한 은호는 오늘 스케줄을 설명했다. 그러다 문득 혼자만 떠들고 있다는 생각에 룸미러로 시선을 올렸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정도로 슬픔을 드러내지 않은 먹먹한 눈빛이었지만 은호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의 페로몬마저도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침잠하고 있었다. 사연 있는 사람처럼 짙게 가라앉은 눈망울에 마음이 동요되었다.
“도착하면 윤 실장이 이야기해 주겠지만, 먼저 말하자면 다음 주 싱가포르 투자 계약이 있는데 은호 씨가 같이 가 줬으면 해요.”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쏟아졌다. 안 그래도 지난주에 여권 만료가 언제냐고 물어 넉넉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것 때문일까.
“……윤 실장님이 동행이었던 걸로 아는데.”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어요.”
“네, 알겠습니다.”
은호는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 후 은호는 곧장 윤 실장에게 불려갔다. 윤재가 미리 언급한 대로 싱가포르 동행이 이슈였다.
“다음 주 싱가포르 SLC 파트너스 계약, 은호 씨가 최 전무님 좀 수행해 줘.”
“실장님은요?”
“한 대표님 미국 출장이 갑자기 잡혀서. 최 전무님이 한 대표님 쪽 계약이 더 중요하다고 스위칭하셨거든.”
윤 실장 말로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핀테크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급히 출장길에 오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 전무의 추천이고, 꼭 성사시켰으면 좋겠다고 해서 자신이 합류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만든 자료 넘겨줄 테니 검토해 보고.”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엊그제 안 좋은 일 있었다며.”
“별일 아니었어요. 괜찮습니다.”
“어제 하루 쉬어서 다행이야. 여기도 좀 시끄러웠거든.”
회의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은호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윤 실장의 말에 바닥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화젯거리가 있었다는 말에 반응하자 콧등을 쓸어내리며 조금 망설이던 그가 좋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건물 3층 태광 법무법인에 러트 온 직원이 있었는데, 우리 회사 직원을 붙잡아 겁탈하려고 했거든. 다행히 경호원이 봐서 초기 진압했지만.”
“…….”
“1년에 한두 번씩 이런 사고가 끊이질 않네.”
멀쩡한 몸으로 하루 쉰 게 마음에 걸리던 차에 회사에서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고 하니 휴가를 준 최 전무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히트든 러트든 꾸준히 관리하고 주기에 맞춰 약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환경적 요인이나 크나큰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되면 원치 않게 주기가 변할 수 있어 늘 조심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은호의 히트사이클이 다음 주 싱가포르 출장과 맞물렸다. 깜빡하면 놓치고 지나쳤을 문제를 상기하게 된 덕분에 사전에 차단할 기회가 생겼다.
은호는 생각난 김에 근처 병원에 가서 히트사이클 주기를 미루는 주사를 미리 맞아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며 윤 실장의 말에 말없이 미소 지었다.
싱가포르 출장 회의에 참석해 법무팀과 총괄 투자 실무진 간의 관련 협의를 확인하고, 예상되는 리스크와 계약 조항을 크로스 체크하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은호는 윤재의 오후 스케줄을 확인한 후 미리 다른 비서에게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이야기하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은 어느새 거의 사라지고 길거리는 사람들의 발자취로 녹거나 지저분하게 더럽혀졌다. 은호는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품으로 파고들자 외투 깃을 세워 목을 감싸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원무과에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은호는 휴대폰을 꺼내 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끝나고 강사의 목소리가 울리다 점차 줄어들었다. 무거운 철제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울리는 게 비상구 쪽 계단 같았다. 은호는 아차 싶었지만 모르쇠로 잡아떼곤 하고 싶은 말을 읊조렸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 미리 문자를 남기고 전화해야지. 놀라서 튀어나왔잖아.
“……미안.”
스피커를 통해 흘러들어 오는 현준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그가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쏟아내자 은호는 감정의 궁지에 몰린 것처럼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메시지부터 보내지 않고 연락한 게 그 정도로 큰 죄인가 싶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습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뱉었지만, 현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씩씩대며 화를 토해냈다.
- 뭔데?
“아니야. 끊을게.”
- 말해. 용건이 있으니 전화한 거 아니야.
아연한 머릿속을 붙들고 전달해야 할 말을 겨우 입에 올렸다. 말을 하면서도 썩 중요한 용건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연락한 거냐고 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나 다음 주 월요일에 싱가포르 3박 4일 출장 가.”
- 하. 좋겠네.
최악의 대답은 아니었지만 거의 흡사한 상황에 은호는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현실 비관에 따른 빈정거림 섞인 말투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은호는 그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현준은 곡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하러 가는 거야. 놀러 가는 거 아니라고.”
- 그래도 콧바람 쐬는 거잖아.
은호는 현준의 비꼬는 말투에 한숨만 폭 쉬다 연락을 취한 본질을 찾아 슬며시 내던졌다.
“보고 싶어.”
- 강의 듣다 나왔어. 다시 들어가야 해.
“나 안 보고 싶어?”
비굴하게 굴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어코 말이 튀어 나갔다. 기저에 깔린 그리움을 해소하지 못하고 응축시킨 걸 결국 표출했지만 그의 반응은 냉담했다.
- 또 그러지. 출장 갔다 와서 보든가.
은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현준은 보채지 말라고 하면서도 처음보다는 톤이 많이 누그러졌다. 출장 갔다 와서 보자는 현준의 말 한마디에 은호는 바닥까지 곤두박질친 기분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처한 사정을 최대한 이해하려 들며 오히려 그를 달랬다.
“알았어. 아 참. 면세점에서 뭐 사다 줄까?”
- ……얼마까지 가능한데?
“일단 말해 봐.”
- ……지갑이 낡았는데.
“장지갑? 반지갑?”
- 반지갑.
“알았어.”
- 무리하는 거면 사지 마.
“아니야. 내가 그 정도도 못 해 줄까. 그럼 갔다 와서 봐.”
- 그래.
통화를 종료하고도 반복된 그리움이 줄어들지를 않는다. 보고 싶었다. 그의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궁금했고 묻고 싶었다. 현준은 은호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호흡하듯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억울했다. 먼저 사귀자고 한 건 현준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매달리는 사람은 은호 자신이었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지만 단시간에 너무 많은 감정을 소모한 탓인지 온몸이 쑤시는 것처럼 피곤했다. 날연한 숨을 몰아쉬던 은호는 간호사의 부름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법무팀에서 최종 계약 전 검토 사항 서류가 올라왔는데 기존 것까지 추가해서 메일 드렸습니다. 항공편 출발 시간은 아침 9시 40분이니 월요일은 6시까지 도착하겠습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 버튼을 끄는 은호의 손놀림이 빠릿빠릿했다. 안전벨트를 푸는데도 뒷좌석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은호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던 건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적한 눈빛으로 은호를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뗐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데.”
은호는 자신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윤재에게 허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애인인 현준은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인이 힘들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외면하는데, 되려 무뚝뚝하다고 느낀 자신의 상사가 관심을 두니 둔탁한 날숨이 속절없이 새어 나왔다.
“퇴근 후 약속 없으면 들어와서 식사하고 가요.”
대답 없이 침묵이 이어지자 흐름을 먼저 깬 윤재가 은호를 붙잡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가는 그의 너른 어깨 너머로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은호는 바닥을 치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축 늘어뜨린 어깨를 펴고 절도 있는 걸음으로 그를 뒤쫓았다.
식사 준비를 마친 도우미 아주머니가 퇴근을 앞두고 있었다. 손을 씻고 자리에 앉자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이 은호를 반겼다. 오랜만에 부모님의 집밥을 받아먹는 기분에 마음이 울컥했다. 블레이저만 벗고 나온 윤재는 잘 먹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조용히 식사하는 은호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물을 따라 건넸다.
“애인과 보내야 하는 주말을 내가 망친 건가?”
“아닙니다. 공시생이라 바빠요.”
씁쓸하긴 하지만 공시생을 애인으로 둔 자들이 으레 겪는 우울증을 은호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게 벌써 3년 차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뒷바라지 오래 했나 보네.”
“……그렇게 보이나요?”
은호는 가만히 얼굴을 살펴보는 윤재의 시선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집으로 초대해서 그런 걸까? 평소에는 먼저 말을 걸어오기는커녕 되돌아오는 말도 잘 없어서 뚝뚝 끊기던 대화가 오늘따라 제법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외로워 보여서요.”
외로워 보인다는 말에 수저를 든 손이 잠시 방향을 잃고 허공을 방황했다. 단번에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니 괜히 윤재에게 억하심정만 깊어졌다. 은호는 욱하는 마음에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애인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봐 혀끝에 맴도는 말을 삼켜 버렸다. 밥이 아니라 술이 고팠다.
“저녁이 아니라 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술은 얼마든지 있어요.”
독심술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은호는 밥알을 세고 있던 시선을 들어 윤재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듯하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아닙니다. 마시면 취해서 못 일어날 것 같아서요.”
마음은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선을 그었다. 상사에게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픈 마음은 없었다.
“자고 가도 돼요. 방은 많으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은호는 이대로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는 상사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남은 밥을 입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데려다줄게요.”
“아닙니다. 가 보겠습니다.”
극심한 외로움과 지독한 상실감이 벼랑 끝에 다다랐다. 올해 들어 부쩍 감정의 기복이 널을 뛰었다. 혁필의 말이 신호탄이 된 건지 못돼 먹은 감정에 자꾸 휩쓸린다. 은호는 자신이 드디어 한계에 임박한 제 감정에 솔직해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