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그날로부터 8개월 전 (2/14)

02. 그날로부터 8개월 전

면접 시간보다 30분 일찍 온 은호는 건물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쭉 빨았다. 제법 큰 빌딩이라 그런지 요즘 인기 있는 베이커리와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이 입점해 있어 은호는 가산점 1점을 부여했다. 물론 이 회사 직원이 된다면 지금처럼 편안한 가죽 시트에 등을 받치고 한가롭게 커피를 홀짝일 여유는 없겠지만, 원하는 취향의 시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시작부터 컸다.

은호는 등받이에 조심히 등을 기대며 옷차림을 점검했다. 스팀으로 한 번 더 다려 빳빳하고 구김 하나 없는 셔츠 깃이 만족스러웠다. 은호는 서류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 최근 이 회사가 투자하고 있는 기업 목록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이전에 근무했던 회사와 사업 분야가 다른 곳이어서 투자 관련 용어를 외우고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확인하느라 은호는 요 며칠 정신없이 바빴다.

“아!”

납작한 빨대로 커피를 쭉 빨아들이다가 셔츠 소매에 한 방울 튀어 버렸다. 면접도 들어가기 전에 이게 무슨. 면접의 불운을 예고하는 전조인가 싶은 은호는 뚜껑을 열어 남은 커피를 급하게 마신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 언제 말려.’

은호는 17층 출입구 옆 통로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소맷단 단추를 풀고 커피가 물든 부분을 물로 지웠다.

‘기껏 다렸더니 공들인 보람도 없네.’

티슈를 여러 장 뽑아 젖은 부위를 대충 닦고 있는 도중, 등 뒤에서 위협적인 페로몬이 훅 끼쳐 들었다. 우성 알파 페로몬을 감지하는 오메가의 본능에 따라 은호는 자극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가까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페로몬이 아지랑이처럼 날아들었다. 아래쪽으로 둔 시선을 흘긋거리자 구김 없는 짙은 회색 정장 아래 클래식한 디자인의 가죽 구두 앞코가 눈에 띄었다.

전 회사의 전무는 우성 알파여도 나이 지긋한 50대라 그런지 페로몬의 위협을 그다지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인가. 발치에 둔 시선을 거두고 손에 쥔 휴지를 쓰레기통에 밀어 넣던 은호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고개를 들다 눈앞의 덩치 큰 회색 정장과 눈이 마주쳤다.

한눈에 봐도 이 회사의 임원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은호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와 그에 걸맞게 딱 벌어진 어깨, 다부진 상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슈트는 마치 남자와 한 몸처럼 완벽했다. 빈틈없이 완벽한 이목구비 속 깊게 팬 눈매는 동양인에게 보기 힘든 골격이었다. 특히 숱이 짙고 긴 속눈썹 아래 깊이감 있는 흑갈색 눈동자는 상대를 압도하는 비밀 병기처럼 예리하고도 날카로웠다.

남자와 의도치 않게 정면으로 시선이 맞닿았지만, 은호는 흐트러진 호흡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무의식적으로 멈추고 있던 숨을 조금씩 흘려보낼 수 있었다.

면접 장소인 17층의 유리 출입문 앞에 서서 방문 초인종을 누르자, 정면의 인포 데스크 직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어떻게 오셨죠?”

“3시 비서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아, 7-1번 회의실 앞에서 대기해 주세요. 오른쪽 통로로 걸어가다 보면 첫 번째로 나오는 곳입니다.”

단체 면접인 줄 알았더니 개별 면접이었다. 복도를 지나 근처 대기 의자에 앉자 회의실 안에서 한창 인터뷰를 진행하는 다른 지원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성창투가 올해 투자하던 곳이 어디였더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실수하면 안 되는데.’

은호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입력해 놓은 것들이 화장실에서 만난 임원으로 보이는 남자 때문에 깨끗이 지워진 것처럼 느껴져 심기가 불편했다.

‘뭐 까짓것 떨어지면 다른 곳 찾으면 되고, 회사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쉽지 않은 척 굴었지만 은호는 내심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국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성그룹 계열사 중에서도 핵심으로 손꼽히는 유성창투. 10대 기업사의 흔한 족벌경영 체제지만 물려받은 자손들이 빈 머리는 아니었는지 3대째에 이르러 사업 규모를 점차 확장하는 추세였다.

“유은호 님 들어오세요.”

회의실 문이 열리며 앞서 온 면접자가 빠져나갔다. 은호는 회의실 안에서 그를 부르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바로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서팀 실장 윤원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팀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윤 실장이 막 회의실로 들어와 폴더 인사를 하는 은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다소 딱딱할 줄 알았던 면접 자리는 윤 실장이 주도하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정해진 틀 없이 편하게 시작되었다.

은호의 자기소개서를 꼼꼼하게 읽으며 중간중간 흐뭇하게 웃던 그가 이전 회사의 기록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맞댔다.

“첫 회사에서 오래 있었네요. 4년이면 에이아이(AI)처럼 패턴이 다 읽혀서 수월했을 텐데.”

“한곳에 오래 머물렀더니 정체기가 와 고민이 많았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어서요.”

부서 이동 없이 한곳에서만 쭉 4년을 있었단 말에 윤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원 비서였군요. 삼정물산 어느 분 모셨죠?”

“미래전략실 김승우 전무님 모셨습니다.”

은호가 소속을 말하자 잘 모르는 임원이었는지 돌아오는 뒷말이 뜨뜻미지근했다.

은호는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4년 동안 한 임원만 보좌했다. 전략부서라 비교적 젊은 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0대여서 그런지 나이에서 오는 거리감에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권태기도 빨리 찾아왔다. 근무 패턴을 익히는 건 한 달 만에 이미 끝났고, 자잘한 패턴까지 전부 확인하는 데 6개월, 그 이후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먹던 것만 먹고, 가는 곳만 가는 은호의 성격 탓에 4년씩이나 붙들려 있던 거지, 아마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탐험가형이었다면 1~2년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튕겨 나왔을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질 줄 알고 회사 조직도와 투자처까지 외웠건만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었다. 오히려 이력서를 바탕으로 가정사나 과거의 업무 형태를 물으며 성향을 파악하려는 듯 보였다. 다소 싱거운 인터뷰에 안도하면서도 마음에 안 들어 그러는가 싶은 서운함도 들었다.

“어, 전무님.”

별안간 회의실 문이 열리며 화장실에서 느꼈던 페로몬이 훅 하고 밀려들어 왔다. 은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비서실장도 갑자기 찾아온 그의 방문을 예상치 못했는지 옆에 있던 비서에게 부탁해 의자 하나를 더 들고 오라고 지시하며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조금 전에는 스치듯 지나가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회사를 검색하던 중 기사에서 여러 번 마주친 사진 속 인물이었다.

‘설마 내가 들어갈 비서 조직이 총괄 투자본부 최윤재 소속이라고?’

은호는 심리적 압박감에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꼭 쥐었다. 다른 면접자도 있는데 왜 하필 자신의 차례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예고 없이 들어와 비서실장의 자리를 차지한 그가 무정한 눈길로 이력서를 훑어보았다. 은호는 안되려고 하니까 일이 꼬이는 건가 싶어 마른침을 삼키며 표정을 굳혔다. 때마침 시선을 이력서에 고정한 그가 음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스케줄 관리하는 오피스 임원 비서로 알고 왔을 텐데 나는 수행 겸 전문 경영 비서를 원합니다. 어때요, 괜찮습니까?”

추상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요구 조건을 분명하게 말했다. 은호가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정교하게 깎아 놓은 조각상 같은 이목구비가 단순히 멋지다는 단어에서 벗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바짝 긴장한 은호의 입 근육이 바르르 떨렸다.

“아…… 네.”

“근무시간은 기본 9 to 6. 하지만 더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겠고, 물론 그만큼의 성과급이나 금전 보상은 충분히 합니다.”

그는 거침없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니면 떠보는 건지 몰라도 대화 내용만 봤을 때 은호는 이미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전에 있었던 곳보다 회사에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질 거란 이야기죠. 같이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 외부에 자주 있을 테고, 운전도 해야 합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야 합니다.”

“하고 싶습니다.”

은호로서는 그만큼 돈으로 보상해 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어 당당하게 덤벼들었다.

남자의 선이 분명하고 곧은 눈썹 끝이 꿈틀거리며 같은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늘한 인상 속 은호를 올곧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는 뭔지 모를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라는 듯, 다시 만나서 반갑다는 느낌마저 들자 은호는 혼란스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다 할 답변 없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가자 맥을 놓친 비서실장은 어름거리며 형식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은호도 잠시 흔들리는 듯하더니 매끄럽게 답변을 내놓았다.

면접이 끝나고 은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어느덧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예상보다 배로 걸린 인터뷰는 호의적인 결괏값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질문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해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은호는 다음 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첫 직장은 공채로 들어가 합격자 발표까지 보름의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에는 상시 채용이어서 그런지 답변이 빨랐다. 정식 출근은 회사에서 지정해 준 건강검진 센터에서 검진을 받고 나서 일주일 뒤에 하기로 날짜를 조율했다.

은호는 센터에서 검진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출근에 필요한 여벌 셔츠를 골랐다. 마네킹에 걸린 신상 정장 세트를 손끝으로 더듬던 은호는 네이비 색상이 마음에 들어 작게 미소 지었다.

공무원 준비로 고시 학원에 박혀 사는 현준이 떠올랐다. 그는 은호의 첫 남자였다. 삼정물산에서 만난 현준은 직장이 적성에 안 맞는다며 1년 만에 회사를 관두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다. 2번이나 미끄러지고 이제 곧 3년 차. 이번에 합격하게 된다면 면접을 위해서라도 현준에게 근사한 정장 한 벌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나 다음 주에 출근해.”

“한 달짜리 백수였네. 축하해. 넌 평생 일해야 하는 팔잔가 보다.”

고시 학원 근처 고깃집으로 불러내자 운동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현준은 불판에 미리 구워 놓은 고기를 쏙쏙 골라 먹으면서 귀찮은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3년 가까이 공부만 하느라 날씬했던 몸은 사라지고 고탄수화물에 찌든 살집 두둑한 몸매로 바뀐 지 오래였지만 은호는 그 모습조차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첫 월급 받으면 뭐 사 줄까?”

“돈으로 줘. 월세 내게. 나 이러다 쫓겨날 것 같아.”

“그냥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안 돼?”

“야, 집으로 들어가면 먹고 놀기만 해서 해이해져. 남은 다섯 달 잠도 안 자고 공부해도 모자랄 판국에.”

현준은 공시 생활이 길어지자 예민하게 굴었다. 하루쯤 머리 식힐 겸 바닷바람을 쐬러 가자고 해도 한사코 거부했다.

“이번에 합격하면 우리 여행 겸 부모님 뵈러 가자.”

“그때 가서 생각해.”

나아지는 결과물 없이 세월만 까먹어 불안감이 극에 달하는 게 곁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말만 허울 좋은 공시생이지, 돈만 축내는 백수나 다름없어 본인 스스로도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은호는 최대한 현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밥을 사 준다는 핑계로 그를 만나고, 가끔 하는 전화 한 통으로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돈 있으면 10만 원만. 밥값 부족해.”

“너무 아껴 쓰지 마. 잘 챙겨 먹고.”

현준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소심하게 툴툴거리자 은호가 알았다며 지갑에서 5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그의 상의 주머니에 조용히 찔러주었다.

“야, 너도 좀 먹어.”

예상보다 추가된 액수에 기분이 좋아진 현준은 집게와 가위를 뺏어 고기를 대신 구웠다.

현준은 시험 준비 첫해에 모아 둔 돈을 모두 소진하고 이후 은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자란 은호는 그런 현준이 안쓰러웠고, 월급의 절반을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은호의 부모님은 미국에서 일찍 터를 잡아, 은호 혼자 한국행을 택했을 때 작은 오피스텔 한 채를 마련해 줄 만큼 상황이 여유로웠다.

구워 주는 고기를 입 속에 집어넣고 오물거리던 은호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5개월 뒤에 있을 현준의 국가직 시험 합격을 꿈꿨다.

***

은호는 입사 첫날 ID카드를 만들기 위해 인사팀 회의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하얀 배경에서 사진 촬영을 마쳤다. 출근하면서 지나치는 사원들의 ID카드를 확인해 보니 무표정보다는 주로 은은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어서 은호도 표준에 맞춰 따라갔다.

법적 용어가 넘실대는 다양한 종류의 비밀 보안 서약서를 작성하고 총무팀에서 사무 장비를 모두 받아 21층 총괄 투자본부로 향했다. 21층 최 전무의 집무실을 가려면 비서실을 거쳐야 하는데, 은호는 출입구 근처로 배치되었다.

한 비서는 스케줄 관리 및 각종 문서 작업을 담당하기로 하였고, 은호는 주로 상관을 보좌하며 회의에 참석해 회의록을 작성하거나 각 본부에서 올라오는 자료를 정리해서 일의 순서를 매기고 그에 따라 상황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최 전무가 받는 메일 중 기밀문서를 제외하고, 내부에서 결재 라인을 밟고 올라오는 메일에는 참조자로 은호와 윤 실장이 지정되었다. 회사 전반의 경영 사정을 빠른 시일 내에 터득해야 하는 입장이 된 탓에 은호는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은호가 보좌해야 할 임원은 최윤재 전무로, 유성창투 한영철 대표 다음으로 힘 있는 실세였다. 유성은 호텔, 리조트를 가지고 있는 유성그룹과 투자 부분인 유성창투로 나뉘어 있는데 창업주인 고(故) 최 회장의 첫째 아들 최광훈이 유성그룹을, 둘째 아들 최성훈이 유성창투를 물려받으며 하나의 그룹사가 형성되었다.

최윤재 전무는 고(故) 최성훈의 외동아들로 예정대로라면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본부장부터 천천히 코스를 밟으며 올라가려 했으나, 그의 나이 스물네 살에 불운의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으며 큰아버지인 유성그룹 회장 최광훈의 보호 아래 유성창투를 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윤재는 아직 학생인 데다 나이가 어렸고 회사는 전문 경영인이 필요했다. 최광훈은 한영철을 대표로 올리는 대신, 최윤재가 천천히 경영을 인수하고 당당히 대표 자리에 오르도록 발판을 준비해 주었다. 윤재는 스물여섯에 팀장으로 시작해 서른넷인 지금 전무 자리까지 올라왔다.

은호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윤 실장에게 불려 가 전반적인 그룹사 이야기를 들으며 조심해야 할 부분에 대해 하나씩 체크해 나갔다.

은호의 입사 첫날, 비서팀은 오래간만에 모두 모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한 바퀴 돌았고, 최근 사내 사정 및 조직 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지난번 회사는 좀 정적인 환경이었다면 이곳은 역동적이고 변화가 빠른 분위기였다. 큰 금액이 수시로 들어왔다가 투자처가 생기면 밀어 넣고, 다시 어느 일정 기간이 도래하면 회수하는 과정이 수시로 일어나는 터라 그때의 실적에 따라 회사 분위기가 고무적으로 흘렀다.

“오늘 3시에 KG에셋 대표와 여의도에서 미팅이 있는데 2시 20분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대기하면 될 테고, 관련 자료는 전무님 뒷좌석 서류 가방에 넣어 두면 돼요. 오늘 미팅은 내용을 봐서 알겠지만 투자 미팅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경제 동향을 체크하는 자리라 아래에서 대기하면 되고요. 전무님께서 같이 올라가자고 하면 노트북 꼭 챙기고요.”

붙임성 좋은 말투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한 비서는 두 살 위 선배였다. 그는 최윤재 전무의 수행 비서 3년 차라고 했다. 최윤재 전무의 기호나 취미, 평소 패턴 및 자주 만나는 파트너사의 취향까지, 그는 최윤재 전무와 연관된 모든 것을 꿰고 있었으나 회사 경영 전략은 잘 이해하지 못해 경영 관련 업무는 다른 비서에게 맡기는 일이 빈번했다.

한 비서는 은호가 이 부분을 잘 커버할 거라 믿고 있었다. 이미 입사 첫날부터 쏟아지는 메일을 모두 검토하며 정리하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나 어쩐다나.

“저녁 미팅 자주 있나요?”

“일주일에 한두 번? 근데 혼자 퇴근하실 때가 많아요.”

한 비서에게 들은 최윤재 전무는 부하 직원을 함부로 하거나 업신여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냉철하고 언중한 그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편이었다. 특히 부하 직원이 잘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끌어 올려 표준을 만들고 최적화하는 데에 강점이 있다고 했다.

“그나저나 오피스 비서직으로 알고 들어왔을 텐데, 괜찮아요?”

“네…… 뭐. 근데 공고를 잘못 올린 건가요?”

매번 같은 일상을 쳇바퀴 돌아 그런지 머리가 녹슬어 말이 아니었다. 오피스 비서로 4년을 근무했던 은호는 활동적인 수행 비서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아뇨.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었는데 면접 당일 전무님께서 갑자기 바꾸겠다고 하셔서요. 보통은 미리 언질 주시는데, 근무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 저도 살짝 당황했죠.”

“계획된 게 아니었군요.”

한 비서의 입을 통해 그려지는 최윤재 전무는 철두철미해서 일이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윤 실장님 말씀으론 저와 분기별로 로테이션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적응하기 어려우면 상황 봐서 윤 실장님과 이야기 나눠 보세요.”

“네.”

“그리고 전무님께서 셔츠를 자주 갈아입으시거든요. 전무님 댁 키 카드인데 은호 씨 이름으로 등록해 놨어요. 매일 확인해서 일하는 아주머니께 말씀드리면 알아서 새 옷으로 챙겨 놓으실 거예요.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그때그때 연락 주세요.”

앞으로 자신이 운전하게 될 차 키와 집 키 카드를 받아 쥔 은호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한 비서와 함께 뒷좌석을 확인하며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숙지했다.

은호는 한 비서가 정리해 준 이번 주 스케줄을 다시금 체크하며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10여 분 후 차에 올라탄 윤재는 말없이 시트에 뒷머리를 기대며 목을 조이던 단추를 하나 풀었다.

면접 날처럼 위협적인 페로몬은 아니었으나 그 존재감은 여전했다. 은호는 조용히 출발하겠다는 말을 흘리며 부드럽게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출근 첫날인데 팀원들은 어떠냐, 예전에 근무하던 곳이랑 많이 달라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냐, 같은 소소한 대화조차 없었다. 내부 직원을 잘 챙긴다는 한 비서의 말이 살짝 거짓처럼 느껴질 만큼 아쉬운 찰나였다.

뒤에 오는 차를 확인하기 위해 룸미러를 보던 은호는 자신을 관통하듯 찔러 오는 시선과 눈이 마주쳐 숨을 멈췄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나 최윤재가 눈썹 한 번 까닥하지 않고 올곧게 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호는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전면 유리에 몰두하다 이따금 룸미러로 뒤를 확인할 때마다 그의 벼락같은 시선이 꽂혀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은호가 여의도 KG에셋 본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트에 붙이고 있던 등을 떼어 낸 윤재가 셔츠 단추를 여미며 넥타이를 매만졌다.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쯤 걸리니 로비 커피숍에서 기다려요.”

그의 시선이 은호의 정수리부터 안전벨트를 푸는 손까지 천천히 동선을 좇았다.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뚜렷해 발가벗겨진 느낌마저 들었다.

뒷좌석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머릿속을 스쳤다. 은호가 재빨리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갔지만, 그보다 빠른 몸놀림으로 문을 열고 나간 윤재가 건물 입구로 향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슈트가 걸을 때마다 유려한 선을 타고 일정하게 주름을 만들었다 펴지길 반복했다. 윤재는 걷는 모습마저도 절도 있고 패기가 넘쳤다. 은호는 로비 출입구에서 그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노트북을 챙겼다.

첫날이라고 분위기 살피며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은호는 커피 한 잔을 시켜 두고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낮 동안 들어온 메일을 확인하는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이곳으로 오면서 연봉이 20% 넘게 올라 기뻐하던 것도 잠시, 업무량을 보니 왜 그리 연봉을 후하게 쳐줬는지 알 것 같았다. 은호는 좀 더 올려 부를 걸 하는 생각에 혓바닥을 튕겼다.

유성창투가 투자하는 벤처 기업만 스무 군데가 넘는다. 부동산, 채권, 주식, 원자재는 두말할 것 없고 영화나 출판 등 손이 안 닿은 분야가 없었다. 해당 조직만 네 개고 공모, 엔젤 펀드 조직만 두 개다.

은호는 빡빡하게 굳은 머리를 기름칠해 가며 굴려야 했다. 피로감은 높지만 오래간만에 긴장하는 맛이 있어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살펴보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테이블을 두드렸다.

“볼 거 많아요?”

“아… 아닙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되었나. 모니터 시계를 확인하니 윤재가 예정된 시간보다 10~20분 일찍 나왔다. 한 시간에 맞춰 알람 설정을 해 놨음에도 불구하고 윤재가 너무 이르게 나와 알람을 해 둔 의미가 없어졌다.

“퇴근 후 약속 있어요?”

“없습니다.”

“그럼 저녁 같이 하죠.”

손바닥을 내밀기에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큼지막하게 뜨자 윤재가 콧숨을 던지며 ‘차 키’라고 덤덤한 투로 말을 건넸다. 은호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호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차 키를 바로 낚아챈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은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상관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재빨리 노트북을 챙기고 다 마신 머그잔을 카운터에 반납했다.

빠르게 뒤쫓는데도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차가 주차된 곳에 은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운전석에 윤재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예상 밖 돌발 행동에 당황한 은호는 조수석에 타는 게 맞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걸 보면 타는 게 맞겠지, 아니면 웃으면서 내리지 뭐.’

조수석 문을 열고 조용히 앉아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윤재는, 은호가 벨트를 맨 뒤에야 느긋하게 액셀을 밟았다.

그가 은호를 데리고 간 곳은 필동에 위치한 유명한 한정식집이었다. 몇 해 전, 이전 회사의 전무님과 법조계 분들의 모임 때문에 장소 확인차 한 번 방문한 곳인데 식사로 입장을 하게 되니 낯설고도 반가웠다.

윤재가 입장하자 생활한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매니저가 화사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룸으로 이동하는 동안 은호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윤재는 늘 먹던 코스를 주문했다. 코스 이름을 새겨들은 은호는 앞에 둔 메뉴판을 슬그머니 들어 가격을 확인하고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놓았다. 한 끼 식사가 호텔 숙박비와 맞먹었다.

“아, 여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윤재가 나가려던 매니저를 급히 불렀다. 미닫이문을 붙잡았던 매니저가 온화하게 웃으며 다시 다가왔다.

“애피타이저, 송이버섯 죽으로 바꿔 주세요.”

“두 분 모두요?”

“네.”

뭘 바꾼 건가 싶어 메뉴판을 열어 확인하니 샐러드와 함께 나오는 죽이 게살 전복죽이었다. 고개를 들자 짙은 갈색 눈과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괜히 바꿨나?”

“……아뇨. 감사합니다.”

한정식집이라 게장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건만 죽부터 게살 전복죽이었다니. 만약 윤재가 바꿔 주지 않았다면 먹어야 할지 말지 고민에 빠질 뻔했다. 은호는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데, 어릴 적 신선도가 떨어진 랍스터를 잘못 섭취한 이후 증상이 생겼다. 게, 가재, 새우 등을 조금만 먹어도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올라오며 붓고, 심할 땐 호흡 곤란이 오는 등 부작용이 심했다. 은호는 그 이후 갑각류뿐만 아니라 해산물 자체를 가급적이면 섭취하지 않게 되었다.

‘게살 전복죽이 그렇게 별론가.’

덕분에 문제없이 애피타이저를 먹게 된 은호는 운치 있게 깔리는 가야금 소리에 맞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윤재의 서늘하고 빈틈없는 태도와 다르게 우수에 젖은 눈빛이 묘하게 은호의 마음을 붙잡았다. 이상하리만치 기억에 남는 인상이다. 은호는 길게 내리꽂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눈을 마주칠 때마다 곧장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라 챙기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사적인 얄팍한 호기심인지. 그것도 아니면, 혹시 오메가라고 장난치는 건 아니겠지?’

하늘 높은 상사가 먼저 저녁을 같이 먹자 권할 때는 부하 직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게 보편적인 그림일 텐데 윤재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은호는 생각했던 모양새가 나오지 않자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갖은 감탄사를 쏟아내며 어색한 흐름을 살리려고 애를 썼다. 맛 표현이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을 정도로 단조로운 패턴이었지만.

처음 먹어 본다, 너무 맛있다, 레시피를 알고 싶다, 야채가 신선하다 등 뱉어 놓고 보니 저렴한 리뷰에 쪽팔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첫날이라 많이 피곤할 텐데.”

“괜찮습니다.”

물어볼 말이 그렇게 없나, 아니면 궁금하지 않은 건가. 그러면서 저돌적으로 쏟는 눈빛은 뭘까?

은호는 도통 윤재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상사와 나이 차가 덜하면 좀 편할 줄 알았던 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불편하다 못해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비 오네.”

제법 굵직한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알알이 부서져 내렸다. 지나가는 소낙비 같지만, 그렇다고 금방 그칠 비는 아니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단풍잎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풍성했던 가을이 비바람을 만나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집 어디예요?”

창밖 운치에 젖어 넋을 놓은 은호에게 낮고 울림이 깊은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대칭이 완벽한 눈매와 마주쳤다. 그는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달게 느껴졌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비 오잖아.”

윤재가 툭 하고 던지는 말투로 물으며 뼈마디가 굵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설마 데려다주겠다는 소리인가. 비서 경력 4년간 상사가 직접 집에 데려다준 경험이 없는 은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썹을 추켜세웠다.

“데려다줄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옷걸이에 걸어 둔 짙은 회색 블레이저를 꺼내 입었다.

“괜찮습니다. 전무님 사시는 곳 확인을 해야 내일 출근 시간 계산도 해 보고…….”

윤재는 상대의 의사는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계산서를 들고 휑하니 나가 버렸다. 당황한 은호는 씨근거리는 콧바람을 쏟아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키를 가지고 있는 걸 깜빡했다.

윤재가 쏟아지는 비를 뚫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빠른 걸음걸이에 당황한 은호는 주차관리 요원의 장우산을 빌려 쏜살같이 뒤쫓았다. 그의 정수리와 블레이저가 약간 젖긴 했지만 가까스로 방어에 성공했다. 윤재가 말도 없이 운전석에 타는 걸 보면서도 차마 내리라고 입 한번 뻥긋하지 못한 은호는 출입구로 돌아가 주차 요원에게 빌린 우산을 건네며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뭐야, 완전 제멋대로고.”

아랫사람이 난처해지는 건 생각도 않고 자기 입맛대로 추진하는 스타일인지, 까탈스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은호는 구시렁거리다 바로 옆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검은색 세단을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주소.”

조수석에 타자마자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똑같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은호는 말없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괜찮다고 거절해도 막무가내인 상사에게 굳이 돌진할 이유가 없었다.

와이퍼에 씻겨 내려가는 빗줄기 위로 또다시 도시의 색채를 머금은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해가 떨어지면서 선선해진 날씨는 비까지 더해지자 서늘하다 못해 한기가 차올랐다.

그는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배려해 주려고 나름 노력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방법이 틀렸다. 대화 없이 적막만 가득하니 차를 안 타느니만 못할 만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비 때문인지 오피스텔 1층 대로변에 차를 세우는 대신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윤재를 보며 은호는 눈치껏 벨트를 풀고 내릴 준비를 마쳤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그는 은호가 내릴 때가 되어서야 딱딱하게 굴던 인상을 풀었다. 은은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은호는 할 말을 잊었다. 떠나가는 차의 뒷모습이 완벽히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린 은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전무 자리까진 어떻게 올라간 거지.”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이 형편없었다. 무생물 취급을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르겠다. 섣불리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그가 보여준 오늘 같은 행동이 앞으로 쭉 반복된다면 그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려도 무방할 정도였다.

***

은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한국행을 택했다. 은호의 부모는 낯선 곳에서 생각보다 빨리 터를 잡았고, 사는 데 어려움 없을 만큼 사업체도 확장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셋째의 느닷없는 한국행을 말리지 않고 오히려 이해하고 존중했다.

은호는 3남 중 막내였고, 어머니를 제외한 집안의 유일한 오메가였다. 그의 첫째, 둘째 형은 알파였다. 알파와 한 식구로 오랫동안 지내 알파에 대한 적대감이나 혐오는 보통의 오메가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

인종 중 가장 낮춰 보는 아시안인 데다 오메가라는 형질까지 겹쳐 학교 가는 게 두려웠다. 미국에서는 평균적으로 한 학교당 한 해에 한두 건씩 자살 사고가 잇따랐는데 학업 비관이 아닌 형질 비관 혹은 강간으로 인한 자살이었고, 피해자나 사망자는 늘 오메가였다.

다행스럽게도 은호는 고등학교 끝 무렵에 발현이 되어 큰 불상사는 없었지만, 미국에 살며 인종 차별에 형질 차별까지 이중고를 죽을 때까지 계속 겪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은 미국보다 오메가에게 관대했다. 약자를 보호해 주려는 사회적 인식이 강해서 억제제만 잘 먹고 사이클 주기만 잘 챙기면 문제 될 게 없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9년째, 은호는 혼자 사는 게 익숙하지만 그만큼 외로움도 잘 탔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TV를 켜 놓거나 음악을 틀었다. 이것은 일종의 습관처럼 고착되었는데, 조용할수록 예민해지고 스스로 동굴을 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은호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면 작정하고 시리즈 드라마와 영화를 몰아치듯 봤다. 이것은 그의 외로움을 채우는 일종의 치료제였다.

은호는 하루속히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단단한 가족 공동체를 보면 부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허전한 빈자리를 채우고 싶은 욕구는 현준을 만나며 더욱 커졌다. 그 또한 은호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장편의 미드를 보다 화면도 끄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익숙한 패스트푸드 시엠송에 눈이 떠졌다. 은호는 간밤에 현준에게 첫 출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다가 한 소리 듣고 통화를 끊었다.

현준은 공시 생활 2년을 넘어가자,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끼는지 툭하면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었다. 그래, 5개월만 참지 뭐. 은호는 현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세척 사과를 꺼내 입에 물고 붙박이장을 열었다. 세탁소에서 가져와 비닐도 뜯지 않은 셔츠 한 장을 꺼내 침대 위에 툭 던져 놓은 은호는 아삭아삭 사과를 씹으며 노트북을 서류 가방에 넣었다.

최윤재가 사는 곳은 은호가 사는 오피스텔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한남 오거리에서 내려 주택가로 걸어 들어가자 담장이 높은 집이 줄줄이 늘어섰다.

주물로 된 대문 앞에 서서 한 비서에게 받은 보안 카드를 꺼내 찍자 육중한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혼자 살기에는 너무도 큰 정원과 1층짜리 현대식 건축물 앞에 숨이 턱 막혔다. 넘쳐 나는 게 돈이라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큰 곳에서 비효율적으로 살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은호는 차를 닦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분께 묵례를 건네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은호는 이곳에 있는 관리 도우미 모두 베타가 아닐까 추측했다. 현관문을 열자 쏟아지는 페로몬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인데, 주방에서 나오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표정은 여유롭다 못해 온화해 보였다. 페로몬 영향권에서 완벽히 벗어난 얼굴이랄까.

“안녕하세요. 유은호입니다. 여벌 셔츠 때문에…….”

“비서님, 여기 있어요.”

때마침 단정하게 차려입은 윤재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으로 은호의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확인한 윤재는 재빨리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그동안 이 집을 드나들었던 한 비서조차 베타였던 터라 생각 없이 페로몬을 흘리던 윤재는 은호를 보고 적지 않게 놀라는 듯했다.

은호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서늘한 가을바람에 옷에 밴 페로몬을 날려 버렸다. 매혹적이다 못해 위협적일 만큼 강한 페로몬이었다. 히트사이클에 만난다면 다리를 벌리고 매달릴 만큼 치명적이었다.

몸에 달라붙은 알파의 페로몬이 빠지자 정신이 돌아온 은호는 집 관리사에게 차 키를 받아 운전석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뒷좌석 문이 열리고 윤재가 올라탔다.

“채권 운용본부와 실물 투자본부에서 올린 보고서는 10시 회의에 참고하실 수 있게 묶어 놨습니다. 재무팀에서 금주 중으로 3분기 배당금 관련 주주 명부를 확인해 발송 예정이라는 피드백 확인했고요. 상품 전략본부에서 내년 상반기에 예정된 유성 펀딩 그룹 17호에 관련된 로드맵을 위해 다음 주부터 TFT를 결성한다고 합니다.”

한 번에 습득해야 하는 내용이 너무도 많아 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업무 위주로 빠르게 파악에 나섰다. 은호가 맥락을 적절하게 자르며 조곤조곤하게 설명하자 말투에서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게 읽혔는지 윤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빠르게 터득했군요.”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때그때 지적해 주세요. 개선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상기시키는 역할만 해 줘도 잘하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은호의 빠른 이해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꼬리를 가늘게 접던 윤재는 검지로 반듯하게 선 눈썹을 만지작거리다 룸미러로 눈을 맞춰 왔다.

“아 그리고.”

“…….”

“앞으로 주의하겠지만 아까처럼 내가 모르고 있으면 이야기해 주고.”

“…….”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페로몬을 잘 못 느껴서 잊고 있었어요.”

“네.”

첫날이어서 경계했던 건가 싶을 정도로 오늘 윤재는 말수가 많았다. 은호는 들리지 않게끔 입술을 살짝 떼며 작게 숨을 골랐다. 안전벨트를 매려고 몸을 뒤척이는 도중 허리춤에서 얕은 진동이 울렸다. 은호는 시동 버튼을 누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젯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     오전 8:01

고민하며 보낸 티가 역력한 현준의 메시지를 본 은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미래가 불안정하니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건 알지만 어젯밤에는 조금 많이 서운했다. 은호는 재빠르게 괜찮다며 메시지를 짧게 남기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애인?”

“네? …네.”

은호는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짤막한 단어에 고개를 돌려 윤재를 응시했다. 그가 조소를 흘리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때랑 똑같네.”

은호는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튀어나오지 않고 혀끝에 매달렸다. 상하 관계에서 오는 간극이 너무도 멀었다. 생각을 지우고 운전대를 돌려 출입구를 나서자 그가 다시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흘렸다.

“……애인 …너무 믿지 말아요.”

농담이라기엔 매사 철저하고 언중한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고, 진지하게 생각하자니 더욱 우스웠다. 은호는 가볍게 알겠다고 말을 자르고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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