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어제까지만 해도 데스크에 마주 앉아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투자처 물색에 열을 올리던 유은호가 세상을 등졌다.
익숙한 영정 사진 속 그의 잔잔한 미소는 그를 둘러싼 하얀 국화와 어울리지 못하고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입사 당시 사원 ID카드에 넣기 위해 인사팀 회의실에서 찍은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쓸지 누가 상상이나 해 봤을까.
아들의 벼락같은 부고 소식을 접한 은호의 부모는 서둘러 비행기를 잡았으나 거리가 멀어 내일 오후에나 도착한다고 했다. 그의 부모는 이민 2세대로 은호의 가족들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같은 팀이었던 직원들은 그들이 장례식장에 오기 전까지 상주 역할을 대신했다.
윤재는 가슴에 돌덩어리를 얹은 것 같은 극심한 체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장례식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까만 밤하늘 위로 잿빛 구름이 어지러이 흐르며 초승달을 집어삼켰다 뱉길 반복했다.
마치 지독한 꿈을 꾸는 것처럼 아직도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몇 번이고 마른 얼굴을 쓸며 현실을 부정해 보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감정의 파고가 그 어느 때보다 높고 거칠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짧으면 짧다고 느껴질 그의 8개월간 모습이 무성 영화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은호는 기존 근속 연차 높은 비서들보다 회사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고, 비서 역할을 넘어 전략 투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앞으로 가까이 두고 투자 업무를 하나씩 가르쳐 보려 했건만, 최근 들어 실수가 잦더니 급기야 오늘 아침엔 나사 몇 개가 빠진 것처럼 넋을 놓았다. 은호는 업무는 뒷전이고, 감정 기복도 제어하지 못할 만큼 페로몬이 흔들렸다. 보다 못한 윤재가 비서들 앞에서 일갈했고, 은호는 결국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윤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은호는 어떤 충격에 휩싸여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외부 미팅을 마친 후 본사 실외 주차장에 차를 대기 위해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던 중 허겁지겁 건물 밖으로 달려 나온 그가 휴대폰을 들고 찻길로 뛰어드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트럭에 부딪힌 몸이 하늘 위로 붕 떴다 몇 미터 앞으로 날아가 볼품없이 떨어졌다. 괴이하게 꺾인 관절과 머리에서 흘러내리던 붉은 피는 윤재의 기억 속에 평생 잊히지 않을 장면으로 남았다.
은호의 마지막 전화 수신자는 윤재였다. 구급차를 부르느라 옆에 내려둔 재킷 안쪽 주머니를 뒤지는데 부재중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왜 받지 못하고 놓쳤을까. 윤재는 부재중 목록을 보는 순간, 그의 죽음이 자신 때문인 것 같은 죄책감에 몸서리를 쳤다.
“전무님.”
“…….”
“유은호 씨 휴대폰입니다.”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 윤재에게 한 비서가 가까이 다가와 휴대폰을 넘겼다. 범퍼 케이스 때문인지 휴대폰은 겉 부분의 흠집 외엔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다.
“……사실 지난주에 오랫동안 사귄 애인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임신 중이어서 많이 힘들어했었고요.”
“……임신?”
“며칠 전 유 비서가 식사를 통 못하길래 알게 되었습니다. 3개월 가까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한 비서는 동료 입장에서 은호를 대변하고 있었다. 최근 그 일로 많이 힘들어했고, 비록 프로답지 못한 행동으로 윤재의 눈 밖에 났지만 망자가 되었으니 안타깝게 여겨 줬으면 좋겠다는 뉘앙스였다.
습기를 머금은 탄식이 저도 모르게 스며 나갔다. 윤재가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자 한 비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윤재는 홈 화면을 터치한 후 무던한 시선으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휴대폰 패턴 암호를 입력하던 은호의 모습을 곁눈질로 몇 번 본 기억이 있어 그대로 입력하자 잠겨 있던 화면이 열렸다.
통화 목록엔 회사 직원들의 이름이 가득 차 있었고, 군데군데 낯선 이름이 여러 번 껴 있었다. 아마 헤어짐을 통보한 애인이 아닐까. 윤재는 메시지 창을 열어 상위에 올라와 있는 동일 인물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 짙은 한숨을 쉬고 낮게 욕설을 지껄였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메시지 시간 오후 1시 26분. 사고 시간은 오후 1시 40분 정도.
은호의 애인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어이없게도 한 장짜리 이미지로 된 청첩장이었다.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 카드 안에는 그 어디에도 은호의 이름이 없었다. 이별을 통보받은 지 일주일 만에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알리는 전 애인의 청첩장을 받아든다면 과연 그 심정이 어떠할까. 심지어 임신 중이었다니.
부채를 떠안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진 윤재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렸다.
은호는 비서팀 식구 중 개인적인 사유로 거리를 둔 직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가장 명석하고 빛이나 일적으로 대화하는 파이가 점차 늘어났지만, 최근 큰 금액으로 집행에 들어간 투자처 한 군데에 문제가 생기며 비상이 걸리다 보니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부하 직원의 고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메시지 창 안에 있는 애인과의 대화 내용은 죽 읽을수록 가관이었다. 애인이 공시생이라고 몇 번 들었는데, 국가고시 합격 전후로 말투가 바뀌며 은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물론 그 전에도 물주이자 호구로서 은호를 대하는 게 말투에서 종종 묻어났다.
요구 조건이 잔뜩 나열되어 있는 대화는 하나같이 다 들어주는 내용뿐이라 헛웃음만 나왔다. 마지막엔 은호도 애인의 바람을 알게 된 것인지 선물해 준 게 왜 다른 사람에게 가 있느냐며 해명하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대화 내용만 보면 삼류 막장에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연락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유를 알고 싶어 은호의 휴대폰을 받았지만, 윤재는 그 어디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되레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은호의 개인사를 확인하면서 그를 몰아세웠던 나쁜 기억이 윤재를 힘들게 만들었다. 윤재는 한 비서에게 휴대폰을 넘긴 후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인명 사고로 인해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중요한 미팅이 이틀 뒤로 밀렸다. 사실 그 자리에 은호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피로에 지친 몸과 달리 멀쩡한 정신을 말소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윤재는 진열대에서 싱글 몰트위스키 한 병을 꺼내 스트레이트로 삼켰다. 좀처럼 체증이 내려가지 않고 꼭 누군가 목을 비틀어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피곤에 짓무른 두 눈 아래 짙은 음영이 졌다. 윤재는 마호가니색 위스키를 의미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사고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트럭의 급정거 소리와 도로 위를 울리던 파열음. 그리고 붕 떠오르던 몸뚱어리. 하얀 얼굴을 뒤덮은, 대비가 강한 새빨간 핏줄기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사고.
윤재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텁텁한 숨을 삼켰다.
***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드는 햇빛 줄기가 눈두덩이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서서히 커지는 알람 소리에 고즈넉하던 방 안이 점차 시끄러워졌다. 윤재는 습관적으로 팔을 뻗어 휴대폰 알람 버튼을 누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창을 뚫고 쏟아지는 햇빛이 눈이 시릴 만큼 강했다.
“……?”
윤재는 화면을 잘못 봤나 싶어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휴대폰 홈 화면에 뜬 현재 시각과 날짜를 확인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오늘은 6월 20일이어야 하는데 작년 10월 20일로 날짜가 설정되어 있었다. 날짜와 시간은 오작동이 일어날 수 없는 부분이다. 윤재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녹음으로 푸릇푸릇해야 할 정원에 울긋불긋 낙엽이 지고 있었다.
아직 꿈인가? 숨을 고르며 거실로 나가자 몇 달 전에 그만두었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따뜻한 수국차를 건넸다.
“혹시 오늘이 며칠이죠?”
“10월 20일일 거예요. 아마.”
난데없이 8개월 전이란 소리에 윤재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어제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휴대폰을 열어 아침에 올라오는 경제 뉴스를 확인하니 작년 10월이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인지. 몇 가지 확인이 필요했다. 윤재는 빠른 손놀림으로 오늘 스케줄을 열었다.
9시: 3분기 연 배당금 관련 임원 회의
11시: 유성 펀딩 그룹 16호 결성 회의
1시 40분: HB 바이오 콘퍼런스 콜
4시: 비서팀 채용 면접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