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일언반구도 없이 골프장에 찾아온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짙은 눈썹에, 약간 굴곡진 광대, 단단한 턱. 남자 또한 나를 마주 노려보았다. 내 얼굴에 이어서 입고 있는 옷까지 훑어 내리더니, 눈을 빛내며 웃었다.
“이건 뭐, 완전 애새끼가 따로 없네.”
나를 어른 앞에서 재롱떠는 아이쯤으로 여기는 남자 때문에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어쭙잖게 차려입은 슈트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란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렇게 대놓고 비웃음을 사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쪽팔렸다.
목덜미를 덮는 빳빳한 흰색 칼라. 목을 죄는 네이비 색 넥타이. 어깨에 딱 맞춘 재킷까지. 분명 내 몸에 맞춰서 짠 맞춤 슈트인데, 어른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 슈트를 처음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는. 너무 어색하고 낯설어 주뼛대고만 있었다. 한 손에 넥타이를 들고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하다가, 서투른 솜씨로 매듭을 지었다. 어딘가 어설퍼 보여서 몇 번이나 고쳐 매었으나, 왠지 엉성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거울 앞에서 고전하고 있으려니,
‘뭐 하고 있는 거지.’
남자의 한심하단 눈길이 내 얼굴에 붙어 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묘하게 찌그러진 것 같은 넥타이를 목에 걸고 집 밖을 나서야 했다. 차 앞에 대기하고 있던 그의 부하 직원이 문을 열어 주는 뒷좌석에 올라타, 남자와 함께 나란히 골프장으로 향했다. 제 옆에 앉아 있는 날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흥미로움에 번들거렸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남자가 어디서 제 걸 탐하느냐며 지랄이라도 떨었으면 했는데.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더란다.
그리하여 지금 이 꼴이 된 거다.
“이런 옷 저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데다가….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고객 상대를 못해요.”
남자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 행동 자체로만 놓고 보자면 다정하다 느껴지는 게 맞을 텐데. 행위를 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장 대표인지라, 무신경해 보이기만 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고의성 다분하게 내 귓바퀴에 닿았다. 등줄기에 일순 소름이 훅 끼쳤다. 목이 저절로 안으로 움츠러들 만큼.
“으…. 제가 있어 봤자, 골프장 위신만 떨어질 거예요.”
“그럼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건 누구인데.”
“…….”
“고객 아닌가?”
남자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할말 있으면 더 해 보라는 듯한 얼굴이다. 돌로 만든 벽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나는 작게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시 다물어 버렸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 모든 참극을 빚어낸 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인데.
때는 바야흐로, 지금부터 두 계절 전인 작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졸업까지 마지막 한 달만을 남겨 두고 있을 때였다. 강의가 모두 끝나 집으로 돌아가려 단대를 벗어나는데. 휴대폰이 지잉 울렸다. 화면을 보니 학과 사무실에서 도착한 단체 문자가 와 있었다.
「23일 6시에 학교 앞 중화 반점에서 지도 수업이 있을 예정입니다. 불참 시 졸업 인정 안 됨. - 체육교육학과 사무실」
보자마자 눈을 찡그렸다. 못해도 1시간은 소요해야 할 텐데. 모르는 얼굴들 사이에 껴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갑갑하고 기가 빨렸다.
나는 정문을 빠져나와 학교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힐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정각이 되기 5분 전이었다. 중간에 시간이 조금만 떠도 자신 몰래 내가 헛짓거리를 꾸미고 있는 거라 의심하는 남자 때문에 늘 이렇게 제 시간에 맞춰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인적이 그나마 드문 곳, 길 한구석에 정차해 있는 고급 세단이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하아,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탄식했다. 오른손으로 차양을 세워 얼굴을 반쯤 교묘히 가리곤 얼른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음, 여원 씨 왔어요?”
운전석에서 아메리카노를 쪼옥 빨고 있던 김중덕이 내게도 한 잔 건넸다.
“…저는 괜찮아요.”
작게 거절하자, 김중덕은 아무렇지 않아하며 커피를 홀더에 다시 꽂았다. 차를 출발시키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형, 다음엔 좀 더 멀리 있어 주세요.”
“왜요?”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데, 묘하게 손등에 비죽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지나가서요.”
“쳐다본다니. 그럴 리가 있나?”
김중덕이 창문을 내려선 고개를 밖으로 쭉 뺐다. 차에 드리워진 짙은 선팅에, 안에 누가 타고 있는 건지 내심 궁금해하던 사람들이 김중덕의 외모에 학을 떼며 물러섰다.
“아무도 안 쳐다보는데요.”
제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한 아기가 울음을 와앙 터뜨리는데도, 그는 날씨 좋다며 팔 한쪽을 차창에 걸치고는 음흠,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았다. 그의 곰 발바닥 같은 손이 차 문을 가벼이 퉁퉁 두드렸다. 손 문신이 재킷 밑으로까지 내려와 있어 옆 뒤에 있는 차들이 일제히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게 느껴지는데. 김중덕은 아주 뻔뻔했다.
그가 룸 미러로 내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어디로 뫼실까요.”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
룸 미러 속의 흉악해 보이는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왜 저럴까. 나는 왠지 낯부끄러워지는 기분이라,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대표님이야 지금 사무실에 계시죠. 건실한 회사의 잘 나가는 대표이시니까.”
…저놈의 건실한 회사 타령 한번 꾸준하다. 그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휴대폰 화면에 남자의 번호 13자리를 올려놓았다. 그러곤 몇 번이나 전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했다. 바쁜 사람이니 저녁 식사 스케줄은 보통 꽉 차 있는데. 망설이는 내 기색을 읽었는지, 김중덕이 넌지시 한마디 흘렸다.
“곧 새 계약 건 때문에 바빠지실 텐데.”
이미 바쁜 남자인데, 이보다 더 바빠진다고? 하루를 42시간처럼 살고 있는 그 때문에 조금 기가 질릴 거 같았다. 밥 먹고, 자고, 섹스하고, 나와 보내는 시간 외엔 전부 일로 점철되어 있는 삶을 사는 인간. 그에게 저녁 스케줄이 있는지 물어보기나 하자 싶어, 엄지로 전화기 모양 버튼을 꽉 눌러 버렸다.
짧은 연결음 끝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 어, 말해.
“오늘 저녁에 일정 없으시면 같이 식사하고 싶어서요.”
잠시간 휴대폰 위에 마가 뜨더니, 이내 알겠다고 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걸기 전부터 슬슬 차 속도를 늦추던 김중덕이 실실대고 웃었다. 그가 핸들을 크게 돌려 얼른 가는 방향을 틀었다.
“좋은 곳으로 하나 알아보라 해야겠네요.”
김중덕에게 물어서 알아낸 레스토랑은 분위기가 좋았다. 전면의 창으로 보이는 야경은 근사한 데다가, 음식은 꽤 정갈해 남자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표정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남자이나, 분명 만족스러울 때 내비치는 그 미묘한 기색이 있었다.
“오늘은 강의 3개 있는 날이었는데, 점심 먹고도 중간에 시간이 떠서 중앙도서관에서 때우고 있었어요.”
오늘 하루 일과를 읊으며 그의 분위기를 면밀히 살피던 나는, 지금이 절호의 타이밍이라 판단했다.
“대표님.”
남자가 칼질을 멈췄다. 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나이프를 보다가 조용히 뒷말을 이었다.
“이번 주 목요일에 과에서 일정이 있어서요.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잠깐’ 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남자의 짙은 눈썹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이거 안 들으면 졸업 인정이 안 된다고 해서…. 1시간 정도 밥만 먹으면 될 것 같아요.”
빠르게 설명을 덧붙인 나는 초조하게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간 멈췄던 남자의 칼질이 다시 시작됐다. 크게 지랄 떨지 않는 걸 보니 승낙한 듯하다. 다행이긴 하나, 아직 본론이 미처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이번엔 또 무엇이냐며, 턱을 들어 고갤 뒤로 젖혔다.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일을 해 볼까 하는데요.”
교수님께서 좋은 자리를 추천해 주셔서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대표님과 저의 관계가 조금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미리 준비해 온 뒷말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목 안으로 그대로 삼켜야 했다.
“…음.”
제 목을 울린 남자가 포크와 나이프를 동시에 손에서 놓았다. 땡그랑! 날카로운 날에 접시가 긁히며 신경질적인 소릴 냈다. 신경을 찌르는 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남자는 간결한 몸짓으로 제 앞에 놓인 냅킨을 들어 입가를 훔쳐 냈다. 그가 커다란 두 손을 엮더니 테이블로 상체를 숙여 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테이블 위로 드리워졌다.
“서여원.”
내 이름 석 자를 떨어트린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입술은 웃고 있는데 날 향한 눈빛은 무감, 그 자체였다. 눈과 입술이 빚어내는 그 간극이 묘하게 오싹했다.
“고작 그딴 말 하려고 내게 저녁 같이하자며 아양 떨었어요?”
“…아닙니다.”
남자가 눈썹 한쪽을 추켜올렸다. 지독히도 믿지 않는 눈치라, 나는 지금이 입을 다물어야 할 타이밍임을 알았다.
“분명 좀 전까진 분위기 좋았는데 말이야.”
남자의 굵직한 눈썹 사이에 구김살이 끼어들었다. 기분 잡쳤다는 표정이었다. 속이 바짝 탔다. 왜 제 저녁을 망치냐는 그를 앞에 두고 나는 와인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이 차 안에 흘렀다. 묘하게 냉랭한 분위기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지르자, 김중덕이 룸 미러로 뒤쪽을 힐긋댔다.
오는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물색해댄 김중덕의 수고가 완전히 무색해져 버렸다. 미안해서 그를 보며 어색하게 웃자, 팔뚝이 아프게 잡혔다.
“…아!”
남자가 나를 잡아당겨,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허벅지에 손을 댄 채로 엉거주춤하게 넘어졌다. 남자를 올려다보는데, 그는 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김중덕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룸미러를 두 손으로 잡더니 얼른 옆으로 완전히 꺾어 제 시야를 차단해 놓았다.
나는 당분간은 다시 입에 이 주제를 올리지 않으리라. 그런 다짐을 조용히 머리 한쪽에 새겨넣었다.
***
남자와 내 사이에 흐르던 그 오묘한 기운은 며칠간 우리 곁에 계속 머물렀다. 솔직히 말해, 남자에게 얘길 꺼내 볼 때까지만 해도 되면 좋고 안 되면 말라는 식이었다. 남자가 원치 않는다면, 구태여 그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싫어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는 정말 더럽게도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다만, 여태까지 함께하며 본인도 겪은 바가 있어 이전처럼 제 불편한 기색을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느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바짝 경직되었던 턱이나 통나무처럼 빳빳해진 목덜미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남자는 꼭 제 돈으로 엮어 놓은 둥지에 나를 가둬 기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오한이 전신에 훅 끼쳐 들었다. 남자라면 실제로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오싹했다.
“…하아.”
입 밖으로 한숨이 흘렀다. 교수의 제안은 뭐라 핑계 대고 거절해야 좋을까. 며칠 내내 머릴 싸매고 고민해 보아도 적당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일반 교수의 제안이었다면 그냥 적당히 흘려듣고 말았을 텐데. 전공 교수인지라 혹시나 책을 잡히면 학점에도 영향을 받을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꼬장꼬장한 교수의 얼굴을 앞에 두고, 나는 강의 내내 고민했다. 그러나 그때라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교수의 말에 끼익 의자를 뒤로 끄는 소리가 강의실 안에서 울렸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전공 책을 정리해 넣고 있는데.
“서여원 학생은 잠깐 나 좀 보지.”
대뜸 교수가 내 이름을 불러 왔다.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과 후배가 무슨 일이냐며 물어 왔다. 강의실을 빠져나가며 내 얼굴을 힐끔대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학식당 먼저 가 있을래?”
“알겠어요, 천천히 와요.”
과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알고 지내는 후배, 미현이가 먼저 강의실을 떠났다. 학생들도 모두 자릴 비우고, 단둘만 남은 강의실에서 교수가 물었다.
“생각 좀 다시 해 봤나?”
“…아.”
말을 흐리자 교수가 다시 답을 채근해 왔다.
“괜찮으니까 편히 말해 봐.”
“좋은 기회 주셔서 정말 죄송하지만….”
편히 말해 보라 해 놓곤. 내가 당연히 제 제안을 승낙할 거라고 예상했는지, 교수는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희끗희끗한 눈썹이 약간 구겨지는 걸 보곤, 나는 얼른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저는 그런 쪽으로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다른 분께 기회를 주시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형편없는 변명이었다.
“그럼 생각해 본 쪽은 있고?”
약간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원래는 일반 사무직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도저히 전공을 가르치는 교수 앞에선 그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교수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을 해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인데, 왜.”
그의 말대로 이게 객관적으로 좋은 기회인 건 맞았다.
교수와 친밀히 알고 지낸 덕에 추천을 받아 미리 자리를 알아본 몇몇 학생들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맘때쯤의 사범대생들은 다음 학기에 있을 임용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도 티오가 별로 없어 밥그릇 나눠 먹기 싸움이 치열했고.
나 같은 경우, 숫기가 없어 자릴 추천받지 못했음에도 일찌감치 임용 고시는 치를 생각도 않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아이들 앞에 서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신,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무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남자가 그러도록 해 준다면, 아주 작은 기업에라도 이력서를 넣고 싶었다. 그런 곳이라면 나처럼 사회성 떨어지고, 특이한 과를 나온 사람도 받아 주지 않을까 해서.
교수가 추천해 준 체육 협회 자리라면 전공도 살릴 수 있는 데다가, 일반 사무직에서 받는 것보단 조금 더 나은 페이를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게.”
운은 뗐으나 마땅히 둘러댈 핑계가 없었다. 심신을 의탁하고 있는 남자가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데다가. 그렇다고 그가 아주 헉 소리 나게 부유해 일을 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진 먹고 살 만할 거라 솔직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교수는 꽤 끈질기게 굴었다.
“조금 더 시간 줄 테니, 천천히 생각해 봐. 응? 지도 수업 때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고.”
나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대다가, 이내 알았다고 답하고는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문 앞에 서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미현이가 눈을 약간 크게 뜨고 물어 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학식당으로 향하면서, 지도 수업까지 며칠이나 남았는지 조용히 마음속으로 세어 보았다.
***
집에 도착해 전공 책을 펼쳐 놓고 들여다보고 있다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보곤 아차 싶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을 줄이야. 보던 책을 덮고 일어났다. 화장실로 향해 욕조 물을 받아 놓았다. 콸콸 밑으로 쏟아지는 물을 바라보다, 욕조 안에 손을 넣고는 휘휘 물을 저었다. 이 정도면 온도가 적당했다.
도어 록이 눌리는 소리가 들려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제 팔 한쪽에 재킷을 걸친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가 목욕할 동안 아주머니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저녁을 차렸다.
남자는 서재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나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빡 졸아 정신을 차려 보니 남자가 소파에 앉아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샤프가 툭 하고 바닥 위로 떨어졌다.
나는 손목에 둘려 있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시침이 숫자 ‘2’ 를 넘어서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날 찾으러 나왔다가 이미 잠들어 있는 날 발견한 듯싶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책을 덮고 일어나, 남자의 침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또한 들어왔다. 매큼한 내가 나는 걸 보니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온 듯했다.
평소엔 셔츠와 넥타이에 가려져 있는 그의 몸엔 갈색 흉터가 가득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 안쪽으로 보이는 쇄골 부근엔 불그스름한 잇자국도 새로이 나 있었다. 며칠 전 내가 힘껏 문 자국이었다. 손길만 닿아도 쓰라릴 것 같은데,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되레 신경이 쓰였다.
시선이 그쪽에 닿아 있는 걸 눈치챈 남자가 나지막이 목을 울렸다. 그러더니 나 보란 듯, 제 커다란 손으로 어깨 부근을 덮는다.
“…음.”
그가 제 어깨를 꽉꽉 눌러 마사지하며 눈썹을 구겼다. 대놓고 생색을 내는 그 때문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바라보기 전까지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으면서. 게다가 그러는 본인은 내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겨선 봄여름에도 긴팔을 아예 못 입게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이갈이를 하는 건지.”
뻔뻔하기 그지없는 남자 때문에 아주 황당하기만 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골프장 직원들이 장 대표를 놓고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던 말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라커룸에 장 대표의 골프 백을 밀어 넣고 있는데. 속닥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대표 말이야.’
장 대표 얘기에 자연스레 촉각이 그쪽으로 곤두섰다.
‘유부남이야?’
‘아니, 내가 알기론 미혼인데.’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길래.’
내 쪽으로 향해 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근데 대표님은 결혼해 놓고도 저럴 것 같긴 해.’
낄낄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주 낯이 다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남자와 내가 무얼 하는 줄 알고 저럴 것 같다는 건지.
물론 그가 외도 정도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저지를 것처럼 생겼다는 의견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외양은 방탕해 보이기 그지없으니까. 실상은 나 아닌 다른 상대에겐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
생각이 거기로 미치자, 갑작스레 목덜미로 열이 훅 올랐다. 누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제 발이 저려서 손등으로 목덜미를 문지르자, 남자가 무어냐는 눈빛으로 날 내려다봐 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릴 흔들어 댔다.
…뭐, 현실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중요한 건,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도 실제 인성만큼이나 추저분하다는 거다.
속으로는 그를 욕하는 주제에, 생색을 내는 그가 신경 쓰여 나는 눈치를 살살 살폈다. 천천히 고갤 숙여 남자의 어깨에 뺨을 댔다.
“내일이 지도 수업 가는 날이에요.”
제 복잡한 스케줄도 머릿속에 모두 정리해 두고 사는 남자인데. 매일같이 반복되는 내 단순한 일상에 달랑 하나 적혀진 스케줄을 잊을 리 없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언질을 주었다.
“처신 잘해.”
나는 손끝으로 잇자국을 하나씩 덧그리며 조용히 답했다.
“…네.”
네 개째 잇자국에 접어들었을 무렵, 돌연 남자에게 손목이 홱 잡혔다. 나는 흠칫 놀라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처신 잘하라고.”
제 시선을 마주 보지 않은 채로 답해 성이 난 걸까. 나는 그를 올곧이 시야에 담으며 분명히 답했다.
“네, 처신 잘할게요.”
마주한 남자의 눈매가 야릇하게 접혔다. 그제야 만족스러워하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져 나갔다. 눈가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매끈한 혀가 내 눈꺼풀을 까끌한 돌기로 핥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시 천천히 눈을 떴을 땐, 어느새 그가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컴컴하게 웃는 낯으로 날 내려다보면서.
나는 새벽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프스단추를 일일이 잠그곤, 검은색 가죽 벨트로 제 허리를 조인다. 그러곤 검은색 바탕에 금박이 들어간 향수병으로 제 손목을 적셔,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어서 남자가 뒤로 몸을 돌리기에 나는 눈을 슬쩍 감았다. 그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곧 남자의 무게에 의해 허리 근처 매트리스가 풀썩 꺼졌다. 얼굴을 그대로 꿰뚫어 버릴 듯한 시선이 느껴지더니, 뺨에 촉감이 내려앉았다. 묵직한 체취가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
“…….”
이윽고 칙, 내 얼굴과 목으로 물방울이 흩뿌려졌다. 동시에 그에게서 나던 묵직한 향기가 훅 퍼져 나왔다.
제 향을 뒤에 남기고, 남자는 떠났다. 나는 손목을 묶고 있는 스타킹을 잡아 당겼다. 어째 풀릴 생각은 않고 손목을 더욱 꽉 조이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어금니로 매듭을 물어뜯어야 했다.
하체를 내려다보자 거기에도 검은색 천 쪼가리가 간신히 허벅지에 달라 붙어 있었다. 남자의 거친 손길에 엉망으로 찢어발겨졌다지만 이것도 원래는 멀쩡한 스타킹이었다.
쯧, 혀를 차며 나는 벗기 편하게끔 침대에서 일어났다. 스타킹 허리 안쪽에 손가락을 걸곤 돌돌 말아 내렸다. 똬리를 튼 스타킹에서 발을 빼낼 땐 굴욕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불현듯 책장에 달린 CCTV가 머릿속에 떠올라 그쪽을 곁눈질했다. 설마 이 모습도 보고 있을까. 헐벗은 몸에 스타킹만 입으라 종용하고, 수치스러워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즐기는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그 자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한데…?
나는 학을 떼며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몸에선 여전히 남자의 향수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도 냄새는 계속해서 날 따라다녔다. 가방을 품에 끌어안은 채,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이동하는데. 한쪽에 서서 담배를 태우던 김중덕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는 걸 보아하니 통화 중인 듯싶었다.
“아가야.”
하아, 그가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월급 따박따박 처받으면서 일을 왜 그딴 식으로밖에 처리 못 해.”
누가 보더라도 그쪽 계통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 외양. 그런 얼굴과 풍채로 입구 앞을 딱 막고 있으니 이목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김중덕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래? 이 빡통 씹새….”
그가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돌연 말을 멈추었다. 휴대폰을 밑으로 내리더니, 몸을 뒤로 홱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멀리 떨어져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내 얼굴을 발견하곤, 선글라스를 코 밑으로 내렸다.
“왔어요?”
그가 사람 좋은 척, 웃으면서 내게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단 몇 초 만에 표정을 바꿔 끼운 그 때문에 전신에 오한이 내달렸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면서, 마지못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잇새로 내뱉는다.
“그래, 대표님이 아시기 전에 일 딱 잘 처리하고 보고해.”
얼굴에 짓고 있는 표정은 사근사근해 보이기만 하는데. 경고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음산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의 앞에 도착하자, 김중덕이 휴대폰을 접어 제 재킷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뒷좌석을 열어 주면서 친절히 물었다.
“평소보다 일찍 나왔네요?”
“…네.”
나는 작게 답하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체가 부드러이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공간 안에 타니, 몸에서 나던 향수 냄새가 더 신경 쓰였다. 혹여나 내 몸에 밴 향수 냄새가 김중덕에게도 날까 목이 자라처럼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여원 씨.”
찔리는 바가 있어 흠칫 놀라며 룸 미러를 바라보는데. 김중덕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약속이 있다 들었는데.”
“아, 네.”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되는 대로 나와요.”
나는 고민 끝에 말했다.
“매번 죄송해요, 귀찮게 해서.”
음? 김중덕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끔뻑댔다. 그가 창문 밖에 시선을 두며 아아, 말을 끌었다.
“이러면서 나도 농땡이 피우는 거지, 뭐.”
위잉, 위잉. 휴대폰이 그렇게 쉴 새 없이 울리고 있는데, 농땡이라니. 정적이 찾아오자, 진동 소리는 한층 더 크게 들렸다. 김중덕이 제 휴대폰을 꺼내선 전원을 꺼 두곤 조수석으로 던져 놓았다.
“여원 씨는 그런 것까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리 말하곤 또 수더분한 척하며 웃었다. 당장 삽으로 사람 하나 묻어도 이상치 않은 얼굴을 한 김중덕을 본 뒤라,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지도 수업 바로 직전까지 강의가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어, 자릴 대신 맡아 줄 이가 없는 나는 자연스레 남은 자리에 앉아야 했다. 당연히 마지막까지 비어 있던 자리는 학생들에게 가장 불편한 자리, 즉 교수들이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게 일자리를 추천해 준 교수 근처에 앉아야 했다. 그가 조언과 함께 건네는 잔을 거절 한 번 못하고 연거푸 마셔야 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언제 찾아와 줄 것 같아.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귀에 딱지가 얹도록 하는 말에 나는 작게 고개만 주억대고 있었다. 가시방석. 그보다 더 정확하게 이 자릴 표현해 낼 단어가 있을까. 시계를 힐긋댔다. 출석 체크만 하곤 나갈 참이었는데. 교수 때문에 시간이 너무나 지체되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밑에서 김중덕에게 짧게 문자를 보냈다. ‘교수에게 잡혀서 조금 늦을 거 같아요. 죄송해요ㅠㅠ’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교수가 바로 술을 권유해 왔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갈무리해 넣고 술잔을 들어 올려 술을 받았다.
“엄한 곳에 한눈 안 팔고 학업에만 열중하는 게 눈에 들어와서 마음에 들었는데.”
교수의 말처럼 나는 복학한 후에 더욱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 등록금은 오롯이 남자의 지갑에서만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정도 액수야 그에겐 지갑에 있는 먼지 털어 낸 정도에 그치는 수준일 테지만, 어쨌거나 그의 돈이니 나는 함부로 낭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장학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공부에 열을 올렸다. 이전처럼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뺏기지도 않으니 학점 따기는 더욱 쉬웠고.
그간 술이 센 편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안 마시고 살다 보니 주량이 줄었는지, 금세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정신 차려 보면 술잔을 손에 잡고 있었고, 모두 짠 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고갤 뒤로 꺾고 있었다.
입 안에 쓴 액체가 가득 찼다. 더 이상은 알코올을 안으로 들이지 말라 몸이 강력히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윗사람이 술을 권하고 있는 와중에, 몰래 마시지 않는 요령을 피울 만큼 융통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교수는 술이 들어가니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아주 기계처럼 반복했다.
…뚜렷한 비전도, 목표 의식도 없으면서 왜 이런 좋은 자릴 마다하는 것이냐. 보통 끈질긴 게 아니라, 대체 하고많은 학생들 중에 왜 이렇게 제게 집착을 해 대는 건지 이유가 궁금해질 정도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병든 닭처럼 간간이 고개만 끄덕끄덕하던 나는, 교수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흠칫했다.
“그 소식 들었어.”
그 소식이라니. 목적어가 두루뭉술했다. 기껏해야 정원이 20명 남짓한 체교과에서는 소문이 금방 돌았다. 복학하고 돌아오니, 온몸에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나 같은 경우엔 달고 다니는 소문들이 아주 무성했다.
시골에 사 둔 땅값이 급격히 올랐다느니, 주식 투자에 성공했다느니 하는 건 양반 수준이고. 무슨 로또에 당첨됐다느니, 호빠에서 사모님을 잘 만났다느니 하는 얘기도 있었다. 이러니 개중에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특정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미 나를 둘러싼 소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덤덤히 들을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사실도 아닐뿐더러, 내가 부정하면 그만일 테니.
그러나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양친 모두,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며.”
교수가 그 말을 한 순간, 하필이면 술집에 마가 떴다. 조용해진 공간 안에서 힐끔힐끔 내 얼굴로 닿아 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몸속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려 주먹을 쥐었다.
윙, 이명이 고막을 잡아먹었다. 순식간에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분리되었다. 내 몸뚱어리와 내 두 손만 세상에 덩그러니 남은 느낌. 손바닥에 짧은 손톱이 다섯 개 모두 박히도록 꽈악 주먹을 쥐어선, 지문을 가렸다. 아픔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현실감이 더욱 없었다.
잠깐 조용해졌던 술집은 다시금 시끌벅적해졌다. 웅웅대는 소음이 다시 고막 안으로 팍 터져 들어왔다.
“아이고, 그래?”
저희들끼리의 대화에 심취해 있던 교수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려 왔다.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내 왔다. 눈동자에 동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간 내 얼굴을 몇 번 보지도 못했으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그 한마디에 내 처지를 연민하고 있었다.
내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교수가 여태까지 내게 보여 준 선심 또한 저것과 비슷한 알량한 동정에서 유발된 것이겠지.
더 이상 이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아주 약하게만 내 몸을 밀어도, 나는 낫으로 베인 지푸라기처럼 그대로 풀썩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눈앞이 한층 더 어지러웠다. 몸을 휘청대자, 누군가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 왔다. 막 볼썽사납게 바닥 위로 쓰러지려던 찰나여서, 나는 반가워하며 상대에게 몸을 내맡겼다. 정신이 없으나, 상대가 장 대표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괜찮아요?”
“…머리가 아파요.”
“바람 좀 쐴래요?”
바람을 쐰다고? 귀로 흘러들어 온 말은 있으나, 뇌가 일을 더디게 해 문장을 이해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부정의 말도, 그렇다고 긍정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다시 눈을 떠 보니 바깥을 걷고 있었다.
가게 밖으로 빠져나와선, 근처 골목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누군가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근처에서 무어라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하나도 귀에 들리지가 않았다.
“교수님 어떻게 그렇게 무례하실 수가 있죠.”
으으, 게다가 여름인데도 밤이 되니 바람이 추웠다. 작게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거의 몸을 내맡기다시피 한 상대의 목에 뺨을 비비자, 상대의 몸이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
“전에 물었을 땐 여자 친구 없다고 했었잖아요.”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가락에 촉각이 닿았다. 상대방이 내 반지를 쳇바퀴 굴리듯이 돌돌 돌리자, 반지가 빙그르르 돌았다. 원래는 둘레에 맞는 검지에 끼워 놓았다가, 약간의 고집을 부려 약지에 낀 것이다. 이러다간 빠지지 싶어, 나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다음에 흘러나온 물음이 아니었다면, 나는 의심 따윈 전혀 하지 않고 계속해서 상대의 목에 얼굴을 대고 있었을 거였다.
“근데 이 반지는 뭐예요?”
그 질문에 눈이 번뜩 뜨였다. 남자가 할 질문이 절대 아니었다. 얼굴을 팍 들고, 상대를 확인해 보니, 윤미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대고 있던 어깨의 높이가 지나치게 낮았다. 목이 옆으로 거의 꺾이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취기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목 안으로 혀가 말려 들어갈 만큼 놀라서, 얼른 손을 뒤로 얼른 숨겼다. 내 과민한 반응에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윤미현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머릴 아프게 누르던 취기가 두 발을 달고 도망쳤다. 나는 술내 나는 혀를 움직여 중얼중얼 변명했다.
“…미안, 너무 취해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었나 봐.”
미현이가 민망한 듯이 웃었다. 묘하게 씁쓸한 것 같기도 한 건 느낌 탓이었을까. 너무 과하게 반응했던 걸까 싶어 다시금 사과하려 하는데. 미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빠 물 마실래요?”
평소라면 거절하고 나섰을 텐데.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해 부탁한다고 말했다.
“얼른 가져올게요.”
타박타박, 윤미현이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의미 없이 바라보다가, 시야가 다시 희끄무레해지기에 고갤 아래로 푹 묻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주변이 을씨년스러울 만큼 조용한 가운데.
저벅저벅. 내게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밑으로 내리깐 시선으로 상대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당연히 방금 물을 가지러 간 미현이일 거라 생각했다.
곧 내게 다가와 물을 건네줄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근처에 멈춰 서 버렸다. 모르는 이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듯했다. 분명 정수리와 목덜미에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푹 묻은 채로, 미현이를 작게 불렀다. 염치없지만, 물이 급했다. 목 안은 타들어 가는 듯했고 머리는 지끈지끈 울렸다.
“…미현아.”
내 목소리가 작은 골목을 울렸다. 대답 없이 메아리만 울리는 통에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미현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단 걸 눈치채곤 조심스레 고갤 들어 올렸다. 커다란 구두가 먼저 눈에 보였다. 그다음 차례로 짙은 정장 안에 감싸인 긴 다리가 이어졌다. 왠지 모를 기시감에, 나는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목을 한껏 뒤로 꺾으니,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였다.
“…….”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이 남자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그려 내었다. 움푹 들어간 그의 눈매가 온통 까맣게 물들었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날 향해 고정되어 있다는 걸.
울적함이 머릴 짓누르고 있던 순간, 아드레날린이 팍 치솟는 걸 느꼈다. 몸 안에서 무언가 팍 팽창되는 느낌에 놀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이 뒤집혔다. 머리가 아파 비틀대자, 남자가 휘적휘적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손목을 붙잡아 왔다.
“……!”
악 소리도 안 나올 만큼 아팠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일 만큼.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하자, 더욱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차로 이끌려 갔다. 윤미현의 손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한 힘으로 날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긴 남자는 차 조수석에 내 몸을 쑤셔 넣었다.
탕! 차 문이 닫혔다.
하마터면 차 창문에 머릴 박을 뻔했다. 나는 네발로 기듯이 시트에서 균형을 잡고, 차 앞부분을 돌아 운전석으로 오는 남자를 기다렸다. 차 문이 부서져라 닫혔다. 철컥, 소리가 나며 차 안의 모든 문들이 단단히 닫혔다.
그러고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입술을 계속 달싹거렸다. 분명 뭐라 할 말이 있는데. 취기 탓인지 할 말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조각난 파편들을 하나둘 모아 보려다, 이내 포기하곤 조용히 말했다.
“취해서 머리가 아파요.”
“그래서 그렇게 기대고 있었어요?”
기대고 있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남자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좀 전에 윤미현에게 거의 기대다시피 하고 있던 걸 말하는 것이다. …그걸 봤구나. 대체 언제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한동안 안 마시다가 갑자기 들이켜니까 이, 이런가 봐요.”
남자는 음산한 얼굴을 하고서 날 노려보았다. 나는 무슨 변명이라도 대야 했기에, 되는 대로 혀를 굴렸다.
“취해서 어쩔 수가,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취해서라고.”
씨발, 고막 안으로 더러운 욕지거리가 쑤셔 들어왔다. 나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흠칫 튀어 올랐다. 남자는 손으로 그런 내 턱을 쥐었다. 그의 엄지가 내 입술 사이를 둘로 나누며 파고 들어와, 내 치열을 느릿느릿 훑었다. 입 새를 열자, 그가 이번엔 지문으로 내 혀를 문질렀다.
“혀는 꼬여서 발음도 엉망인 데다가,”
손등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눈엔 초점도 없네.”
의미 없이 허공에 두고 있던 시선을 그의 얼굴로 옮겼다. 시야에 윤곽 선명한 얼굴이 가득 찼다.
“누가 이렇게 잔뜩 마시게 했어.”
“…….”
“보통 혼자 있었잖아, 너.”
응?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고 달래는 그의 음성에 왠지 모를 오싹함이 느껴졌다. 취한 와중에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자, 남자가 엄지로 내 입술을 살살 문질러 왔다.
“누구냐니까.”
나는 모른다며 고갤 내저었다.
“아까 같이 있던 윤미현이?”
…흐릿해진 머리에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장 대표가 미현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러나 취기에 제정신이 아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답을 회피하며 남자의 셔츠 부근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곤 시선을 피해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내내 후각을 내리누르는 체향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익숙한 향이 나니 한결 더 잠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 이만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자세를 고쳐 잡자, 정신이 점점 하얗게 날아갔다.
그러다 뒤 머리채가 잡혔다. 고개가 뒤로 확 넘어가고,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가득 찼다.
“묻잖아.”
그가 내 목에 코를 처박았다. 흡, 하고 숨을 빨아들이는 통에 오한이 들었다.
“여자 향수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해.”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에 나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나는 온종일 남자의 향수 냄새밖엔 맡질 못했는데. 여자 향수 냄새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에요….”
변명해 보려 입술을 떼었지만, 내 말은 처참히 묵살당했다.
“이쪽에선 아량 넓게 보내 줬는데.”
“그런 게 아니라….”
남자로 착각했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좋은 말로 할 때 입 닥치고 있어, 화 삭이는 중이니까.”
남자는 그마저도 못 하게 만들었다. 운전대를 한 손에 쥔 남자가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더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에게서 나는 잿빛 연기가 약간 벌어진 창문 틈으로 빠져나갔다. 싸늘한 정적이 차 안에 흘렀다.
“…….”
“…….”
나는 어찌할 줄을 몰라 조수석에서 얼굴만 붉힌 채로 있었다.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땐, 너무나도 반가웠다. 여러모로 지쳐 있던 터라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있단 사실이 나를 새로이 환기시켰다. 답답했던 가슴에 숨구멍이 생긴 기분이었는데.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도 그의 옆에서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대체 내게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차라리 담배 냄새가 나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해 한 대를 태웠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열기가 머릴 데워 한층 더 취기가 오르는 듯해, 일부러 차가운 물로 머릴 식혔다. 남자가 여자 향수 냄새가 난다던 목덜미를 특히 열심히 닦았다. 햇볕만 조금 쐬어도 달아오르는 피부가 온통 발갛게 변할 정도로 닦은 후에, 화장실에서 나왔다.
“저 몸 씻었어요.”
허리끈을 풀곤, 옷을 내렸다. 사르륵, 몸에서 미끄러진 가운이 툭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뱀 같은 시선으로 내 가슴팍에 이어, 하체 사이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에게 비틀대며 다가가 목덜미를 팔로 감쌌다.
“…깨끗이 씻었어요.”
남자는 한동안 이렇다 할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가 물었다. 내가 누구의 것이냐고. 머리에서 그렇게 답하라고 입력을 하기 전에, 세뇌당한 입술이 먼저 달싹였다.
…대표님의 것이라고.
그제야 남자가 내게 감응해 주었다. 허리가 강한 힘으로 붙들렸다. 몸이 남자에게로 끌려가, 흡착된 것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이전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밑을 씹창 내 버리려 했을 텐데.”
그 술집 골목 어귀라면 간간이 사람들이 오가곤 하는데, 거기에서 남자를 받는다고…?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릴 해 대는 남자 때문에 나는 고갤 홰홰 내저었다.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가까이 선 남자에게선 화를 억누르는 듯한 묵직한 날숨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그에겐 아까 일에 대한 분노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몸이 남자의 밑에 깔렸다. 잡아먹힐 것 같은 관계가 이어졌다. 그는 내 몸에다 대고 연소되지 않은 화를 풀듯이 거칠게 삽입했다. 이렇게까지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건 오랜만이라, 조금 버거웠으나 나는 어떻게든 맞추려 노력했다. 거부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게 뿌려진 향수 때문에 온종일 남자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약 거부당한다면 그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처사였다. 나는 손 안에 쥔 남자를 놓지 않으려, 더욱 힘껏 그에게 매달렸다.
***
그다음 날 눈을 떠 보니 이미 침대 옆은 비어 있었다. 숙취 때문에 둘로 쪼개질 것 같은 머릴 부여잡고서, 나는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남자의 흔적을 찾았다. 샤워실 안도 들여다보고, 테라스 밖도 나가 보고, 원래 내가 쓰던 방문도 열어 보았다. 그 어디에도 남자는 없었다.
강의 시간이 가까워져, 하는 수 없이 그만 찾기를 포기하고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하필이면 어제 그 교수의 수업이 끼어 있던지라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학비를 대고 있는 게 남자라는 사실을 뇌에 되새기며 꾸역꾸역 집 밖을 나섰다.
혹시나 또 쓸데없는 말을 할까 걱정했던 교수는 웬일인지, 강의 내내 내가 앉은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으려 했다. 본인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싶었다.
수업이 끝나 강의실을 옮기는데, 복도에서 윤미현을 딱 마주쳤다. 제 동기와 대화를 나누며 오다가 날 보곤 입술을 딱 다물었다.
“…저기.”
내게 말을 붙여 오려 하는 눈치였다. 나는 눈짓만 가벼이 한 뒤에 빠르게 자릴 피했다. 뒤에서 내 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렇게 서로 인사만 하고 지내는 편이 서로에게 나을 거라 판단했다.
취한 내가 분별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바람에 잠시나마 오해했을 거라 생각하면 너무나도 미안했다. 가볍게라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 어울려 다닐 생각 따윈 하지 못했을 텐데. 어쨌든 늦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유일하게 대화란 걸 하고 지내던 윤미현과 멀어지자,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거의 대화를 않고 살다 보니 입 안에서 버섯이 필 것 같았다.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기분이었으나, 이전과 비교해서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으니 이 정도야 얼마든지 괜찮았다.
남자의 일에 비하면….
남자와 그 사건 이후로 아주 냉랭해졌다. 바쁘다고 들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집엔 드나들고 있었다. 이전과 같이 종종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몸을 섞고 때로는 샤워를 같이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전까지와 그리 크게 다른 점이 없는데.
…문제는 시선을 교환하는 시간이 이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도 그리 대화가 많이 오가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매서운 정적만이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입 닥치고 있어, 화 삭이는 중이니까.’
술김에 들었던 말인데도, 남자가 뇌리에 새겨 놓은 듯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는 아직도 그 화를 삭이고 있는 중인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나는 대체 무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또 한 번 남자에게 손이 내쳐질까 두려워 자꾸만 몸을 웅크리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혼자 강의를 듣다가, 점심을 먹으러 향하는 길이었다. 강의실에서 나가 복도를 내걷다가, 무언가를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멍청함에 한숨을 푹 쉬곤 강의실로 다시 돌아갔다. 문이 오래된 탓에 문고리가 헐거워져선 틈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기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얘기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문장에 나는 문을 열려고 했던 다음 동작을 뚝 멈춰 버렸다.
“부모님도 돌아가셨다면서, 어떻게 입고 있는 옷마다 저렇게 다 명품이야.”
빈 강의실에선 내 얘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엔 이젠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 사람 완전 일반인 그 자체였어.”
“아, 진짜?”
“응. 생긴 건 잘생겨서 눈에 띄긴 했어도, 옷은 진짜 몇 벌로 한 계절 나는 수준이었는데. 복학하고 나선 완전 명품으로 도배질하고 다녀선, 소문 되게 많았잖아.”
제가 없는 자리에서 심심풀이 땅콩 먹듯이 가벼이 하는 대화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저를 두고 하는 뒷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라,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강의실 안에 있는 그들은 무시하고 얼른 휴대폰만 꺼내오자는 생각에 문고리를 반쯤 돌리는데.
그 바로 다음 이어지는 물음에 나는 곧바로 후회하게 되었다.
“설마 사망 보험금 탄 걸로 저렇게 사치 부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잡고 있던 문고리를 손에서 놓았다. 아니, 놓쳤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대로 달음박질쳐서 자릴 떠나고 싶었다. 강의실 안에 있는 게 휴대폰만 아니었다면. 남자가 내게 준 휴대폰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뒤를 돌아 자릴 떴을 거였다.
끼익, 문고릴 잡아 돌리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이쪽을 홱 돌아보기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하며 앉았던 자리로 가선 휴대폰을 집어 올렸다. 그러곤 바로 강의실을 떠났다.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인파 속에 섞여 나는 혼자서 학교를 빠져나왔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 상태는 많이 호전된 편이었다. 과거에 겪었던 환각이며, 수면 장애며, 여러 방면에서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그러나 과거는 분명 내게 생채기를 남겼다. 지금도 이따금씩 세상과 자신이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 어떠한 전조 현상도 없이, 그저 불현듯이 그런 느낌이 내 전신으로 뛰어 들어왔다. 꺼먼 시멘트를 훅 부어 놓은 듯, 세상이 어두워지고 저 혼자만 덩그러니 남고는 했다.
날 두고 사람들이 내뱉었던 말들이 벌레처럼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다. 나를 아주 야금야금 좀먹었다.
‘설마 사망 보험금 탄 걸로 저렇게 사치 부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함부로 날 재단하고 판단하며 낄낄대고 웃는 목소리. 나에 대해 그리 말해 놓고는, 뒤돌아서면 자신이 좀 전까지 뭐라 지껄였나 까맣게 잊고 말겠지.
‘양친 모두,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며.’
알량한 동정심. 혹은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로운 자신에 취해 날 이용한 것일 수도.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던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 놓으니,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한층 더 비참해진 기분이다.
사람들 속에 섞여서 멀쩡하게 못 살 거라는 거,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겪으니까. 날 둘러싸고 있는 벽이 너무나 여실히 느껴졌다. 이미 무뎌진 줄 알았는데.
또 상처가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적막한 차 안. 나는 차창 밖에 시선을 두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5월의 끝 무렵. 햇볕이 내리쬐어 날이 좋은 바깥엔 일상적인 장면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들, 일상에 지쳐 하품을 하는 사람들, 길을 걷는 사람들. 일반인들에겐 지겹도록 매일 같이 반복되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그런 삶. 단조롭기에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물음을 던졌다. …왜 내겐 저런 평범한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걸까. 혹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건가.
“그날 데리러 가겠다고 해 놓고는, 밑에 있는 녀석이 사고를 쳐서 그거 수습하느라 못 갔네요.”
“…….”
“대표님이 데리러 간다고 하셨는데.”
말끝을 흐리며 이쪽을 룸 미러로 힐긋대는 걸 보니, 물어볼 말이 있는 듯했다. 그날부터 남자의 낌새가 이상했을 거다. 보통 그 남자의 기분이 바닥을 쳤을 땐, 나와 사이가 좋지 못했을 때였으니.
“지금 어디 계세요?”
“로열에 계시죠.”
“…기분은 어때 보이세요?”
“으음.”
김중덕이 빙그레 웃으며 고민에 빠졌다. 제 상사를 향한 충성심 하나로 태백산도 무너뜨릴 그가 말을 고르고, 고르다 답했다.
“며칠 밤낮없이 일하셔서 조금 예민하신 상태인데.”
조금 예민하신 상태라는 걸 보니, 모르긴 몰라도 거의 패악에 가까운 지랄을 부리고 있지 않나 싶다.
“로열로 갈까요?”
“네.”
차가 한참을 달리자, 익숙한 도로가 눈에 보였다. 이 끝엔 그곳이 있을 거였다. …로열 골프장.
주차장에 차가 멈추자, 뒷좌석에서 내려 호텔 로비로 향했다. 예전엔 그렇게 건물만 바라보고 있어도 끔찍했는데. 이제는 건물을 봐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감정에 큰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한데 뭉쳐서 지나가던 직원들이 내 쪽을 힐긋댔다. 누가 봐도 대학생 차림을 한 날 보는 그들의 눈동자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누구지? 이미 물갈이가 한 번 된 건지, 대부분 처음 보는 직원들이었다. 남자와 함께 로열로 돌아왔을 때. 이미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놈이며, 이혜원이며 모두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골프장에 있는 그 누구 하나, 그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원래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이곳은 여전히 한없이 폐쇄적이고, 퇴폐적이다. 누구 하나 제 저열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보다 오히려 이곳에서 숨통이 좀 더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모두에게 뒤가 구린 구석이 있으니, 나 하나쯤은 숨어들어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일까. 양지보단 음지에 곰팡이 따위의 균이 더 잘 피는 법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김중덕과 복도를 통과해 1104호 앞에 도착했다. 나는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초인종을 누르곤 안에서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 봐도 안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일이 너무 바쁘신가 보네요.”
난감한 얼굴을 한 김중덕이 애매하게 웃으면서 남자를 대변했다.
“한번 불러 보시는 것은…?”
그의 제안에 나는 조금 자신이 없어져서 물었다.
“문을 열어 주실까요.”
“당연하죠.”
조심히 묻는 말에 김중덕이 큰 입을 벌려 웃었다. 20개쯤 되는 치아를 내보이면서. 그러나 나는 그의 대답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역시 괜히 온 건가. 내 얼굴에 스친 후회의 기색을 읽은 김중덕이 문을 똑똑 노크했다. 절제된 손짓이었지만, 내가 마음을 돌리기 전에 수를 써야 한다는 듯 조금 부랴부랴 행동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대표님, 서여원 씨 왔습니다.”
그의 말에도 정적이 이어졌다. 역시 괜히 왔나 보다 싶은 순간, 두꺼운 문이 안쪽으로 끼익 열렸다. 단추를 두어 개 풀어 헤친 셔츠로 제 상체를 감싸고 있는 남자가 나와선, 날 내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니가 여긴 왜.”
남자의 시선이 나를 넘어 김중덕에게 향했다. 싸늘히 식은 눈이 자신을 향하자, 김중덕이 얼른 허리를 새우처럼 꺾어 보였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시고,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썹을 구긴 남자가 눈을 내게 옮겨 왔다. 일하면서 마신 건지, 테이블 위엔 보드카 몇 병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엔 서류가 수북이 놓여 있었다. 나로서는 알아듣지도 못할 어려운 용어들이 가득히 적힌 종이 뭉치들. 바빴다는 김중덕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제가 방해한 거 같은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제게 바투 붙어 오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병을 응시하며 나릿나릿 말을 뱉었다.
“저도 술 마시고 싶어요.”
나는 입꼬리에 힘을 주곤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금방 근육에서 힘이 풀려나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탐색하듯이 노려보았다. 이기죽거리는 듯한 물음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나서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찾아온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남자를 만나고자 왔을 뿐이다. 순순히 고갤 끄덕이자, 남자가 테이블로 향해선 새 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목을 축였다. 알코올이 조금도 희석되지 않은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배를 활활 태웠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입을 다문 채로, 술을 나눠 마셨다.
“그날.”
그러다가 내가 먼저 입술을 뗐다.
“저는 대표님인 줄 알았어요.”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윤미현도 제법 키가 큰 축에 속하긴 했으나, 장 대표에 비하면 턱없이 작을 뿐이었다. 체구 차이가 그렇게 현격히 나는데, 착각을 하다니. 술에 취해도 너무 취해 있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다.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나 봐요.”
한참 착각 속에 빠져 있다가, 반지에 대해 물어 오기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을 차렸었다. 내가 기대고 있는 상대가 미현이란 사실보단, 미현이가 내 반지를 만지고 있단 사실에 더욱 놀랐다.
나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얼른 손을 뒤로 홱 빼서, 미현이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내 반응에 미현이도 화들짝 놀랐지만, 그 누구보다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살면서 그 정도의 강렬한 감정을 느껴 본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그러나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그때도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당시에 단순히 불쾌감만을 느낀 건 아니었다. 윤미현의 손길은 내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만지고 있던 게 내 몸이 아닌 남자의 반지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나 아닌 다른 이가 남자의 것을 만지는 게 싫었다. 이런 게 남자가 느끼고 있을 독점욕이라 생각하니, 내게 다른 이의 손길이 닿아 오는 걸 경계하다 못해 혐오하는 남자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술자리가 견디기 버거워 피할 때. 남자가 곁에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머리에 스치고 있었다. 그래서 한층 더 판단력을 잃고 그렇게 몸을 기댔었다.
돌연 남자가 내 얼굴 쪽으로 턱을 기울였다. 내게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벌리는데. 남자의 종착지는 내 목덜미였다. 그가 내 목에 코를 푹 박곤 냄새를 맡아 댔다. 내게서 다른 이의 냄새가 나는 건 아닌지 검사를 해 보는 듯했다. 예민한 피부에 그의 높은 콧대가 비벼지니, 허리가 다 오싹오싹했다. 남자가 내 남방의 단추를 벗겨 냈다. 어깻죽지까지 확 잡아 내리고서는 내 쇄골에 얼굴을 묻어 왔다.
“…음, 청결한 냄새.”
판단을 내린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불룩하게 솟아 있는 남자의 중심부가 시선을 확 가로채 갔다.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또한 평소보다 붉게 물든 눈가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바지춤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지퍼를 풀어 내렸다. 손에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뜨거운 촉감이 와 닿았다.
조용한 가운데. 꿀꺽, 메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꺼내 봐.”
그의 종용대로 바지 안에서 검붉게 흥분한 그것을 꺼냈다. 두꺼운 기둥이 손을 가득 채어 왔다. 위아래로 흔들자, 손바닥 아래에서 핏줄이 돋아나며 꿈틀거렸다.
그가 내 팔을 들어 올리더니, 내 겨드랑이 사이에 제 걸 밀어 넣었다. 이건 뭐지. 당황스러워서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가 끝이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종용했다.
“잘 조여 봐.”
평생 힘 빼 보라는 말만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어 오다가. 처음 듣는 종류의 말에 그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 건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반사적으로 팔 안에 힘을 딱 주었다. 사타구니보다도 더욱 은밀하다고 할 수 있을 곳에 제 좆을 껴 넣은 남자는 허리 짓을 해 대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상태로 겨드랑이 밑으로 연신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굵직한 귀두가 피부에 연신 마찰되었다. 워낙 긴 탓에 귀두 부분이 내 젖꼭지도 쓸어 댔다. 뭉그러지는 작은 살점을 바라보는데, 이상한 기분이 머리를 장식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보는 것조차 꺼려 할 곳인데. 왜 이런 곳에다 대고 좆질을 하면서 흥분하고 있는 건지.
“…음.”
남자의 신음이 귓가를 울렸다. 온몸이 젖는 기분이었다. 이곳이 다른 이에겐 쉬이 보여 줄 수 없는 곳이란 건 남자도 알고 있을 거였다. 이 이상 성욕자 같은 남자가 아니라면 다른 이들은 구태여 궁금해하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다.
나는 고갤 위로 한껏 꺾어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이 비이상적인 도착증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 또한 당신의 독점욕이냐고. 그의 미친 색욕에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날 정확히 직시했다. 그 눈빛이 마치 그렇다고, 내게 대신 답해 주는 듯했다. 그러고 미친 짓거리가 이어졌다.
나는 겨드랑이로 목을 바짝 숙였다. 좁은 구석에 끼워져 있는 성기를 손으로 집어 들어, 남자의 귀두를 혀로 길게 핥았다. 남자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자, 입 안에 가득 들어찬 성기가 입천장 위를 텅텅 두드렸다. 나는 욱욱 토기를 참으며 혀를 놀려댔다. 턱 아래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몸 중에서 가장 음습하다고 할 수 있는 부근에 제 좆을 밀어 넣고 헉헉대는 남자의 것을 핥으며 나는 머리며, 몸이 동시에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런 부위에 이상 집착을 보이고 있는 남자도. 남자가 그런 곳에 이상 집착을 보이고 있단 사실에 흥분하고 있는 나도.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기말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다가, 졸업 자격 인증까지 신청해야 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몸은 좀 피곤했지만, 그 덕에 눈도 마주치기 조금 불편해진 교수며, 뒤엣말 하던 걸 내게 들킨 놈들에게 신경 쓸 시간조차 없어져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학교 건물을 빠져 나왔다. 나오는 길에 소각장을 발견해 전공 책을 버려 버리자, 그제야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이로써 졸업장은 따게 되었으니 속이 시원할 만도 한데. 생각보다는 무덤덤했다.
스니커즈로 바닥을 툭툭 차며 교문을 통과하는데.
‘…어.’
남자의 차가 교문 앞에 정차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뒷좌석 문을 열자, 남자가 턱을 돌려 날 바라봐왔다.
우리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 저번에 김중덕이 알려 주었던 그곳이었다. 남자가 왜 제 저녁을 망치냐며 불쾌해했던 곳. 통째로 빌려둔 건지 딴 자리들은 휑하게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남자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 왔다. 바로 로열을 사들였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처음엔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걸까 싶어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고만 있었다. 남자는 별다른 설명 없이 의뭉스레 웃기만 했다. 휘어지는 그의 눈매를 바라보며 뭔가 섬찟하다고 느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넘겼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눈퉁이를 맞게 됐다. 제 사업 운영하기에도 좆 빠지게 바쁘다던 장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로열의 사장 자릴 내게 넘긴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넘겼다. 기껏해야 월급 몇 푼 받는 사무직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남자가 꽂아 넣은 사장 자리에 앉아 머릴 양손으로 감쌌다.
남자가 사 입힌 몇 천만 원짜리 슈트가 몸을 내리눌렀다.
***
멋들어진 까만 명패에 내 이름 석 자를 금색으로 새겨 넣고, 날 제멋대로 사장 자리에 앉힌 남자가 지껄였다.
“소문 한번 더럽게 나겠네.”
방금 막 룸을 떠난 신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그제야 남자가 부러 신입 보는 앞에서 내 귀를 건드렸음을 눈치챘다.
“…….”
홀을 돌아다닐 때마다 얼굴과 몸에 달라붙어 오는 시선이 얼마나 따가운지, 이 남자는 알 턱이 없다. 직원들이 저를 두고 라커룸에서 뭐라 쑥덕대고 있을진 안 봐도 뻔했다.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대부분은 내 스폰서가 장 대표였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저는 어차피 잃을 게 없어서 괜찮은데, 대표님은….”
내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귀를 은근히 어루만지던 남자가 돌연 내 머리채를 제 손아귀로 움켜잡았다.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이윽고 내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다. 나는 남자를 마주 본 채로 작게 신음했다. 약한 척을 해야 쾌감을 느끼며 봐주는 이상 성욕자 같은 남자이니,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아픈 티를 참지 않고 여감 없이 냈다.
“…아.”
만족한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러난 내 목덜미에 남자의 입술이 닿아 왔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그가 선사하는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만 있는데도, 가슴 한구석에 묘한 충족감이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주욱 평범한 삶을 동경해 왔었다.
훅훅 내뿜는 콧김마다 역겨운 술내가 나는 아버지의 주먹에 뺨을 맞고 이불 속에 숨어들어 훌쩍대면서,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 생각했었다.
냄새가 나지 않는 평범한 아파트 집, 좋은 밥 냄새가 나는 부엌, 그 속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을 사랑해주는 평범한 부모, 자식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품에 안아주는 부모…. 그런 것들을 꿈꾸곤 했었다.
확실히 남자와 함께 하는 삶은 내가 꿈꾸던, 그런 평범한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바라오던 건 평범한 삶이 아니라 내 외로움을 감싸줄 다른 이의 온기,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은 지금.
남자와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모든 게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