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1/14)

05.

1월의 끝자락. 매스컴에서는 이제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라고 떠들어 댔다. 설마 이보다 더 추워질까 싶었는데. 맹추위는 코웃음을 치며 도시를 깊게 파고들어 왔다.

퉁, 퉁, 퉁. 바람이 무섭게 차창을 두드린다. 나는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초점이 흐린 눈으로 창밖을 지켜봤다. 부채꼴 모양으로 소슬한 바깥 풍경이 엿보였다. 바람이 드나드는 길은 휑했다. 공기는 한층 더 냉랭해졌고, 땅을 긁는 바람은 가히 무시무시했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은 두텁게 껴입은 외투에 코까지 묻고 바삐 걸음을 옮겨 댔다. 입술엔 연기 풍선을 하나씩 매달고 있었다.

지나치게 일상적이라 되레 현실감이 없는 장면들이 연속해서 스쳐 지나갔다. 얇은 유리창을 가운데 두고 있을 뿐인데.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

그 비닐하우스에서 내려온 이후로 벌써 이주가 흘렀다.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장 대표에게 그 이상 삼촌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아 달라 했다. 3천이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갚겠노라 계속해서 부탁했다. 틈만 나면 매달리고 애원했다. 제 팔에 붙어 있는 나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장 대표는 이내 삼촌을 근처 병원에다 옮겨 놓았다. 그렇게 조치했다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도 불안해서 남자의 직원을 따라 병원에도 직접 가봤다.

먼발치에서 몸을 축 늘어뜨리고 누워 있는 삼촌을 바라보다가 나왔다.

“…….”

그리고 그 이후로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장 대표가 나오는 악몽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아버지나 삼촌이 나오는 악몽 또한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못 견딜 것 같으면 차라리 잊읍시다.’

버티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잊으라고 말했던 그의 말이 진짜 힘을 가지게 된 걸지도 몰랐다.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감각만큼은 반드시 기억하라던…. 그 목소리를 상기해 내자, 뺨에 뜨거운 열꽃이 피었다.

이젠 악몽을 꾸더라도 더 이상 어둠 속에 혼자 남겨 있지 않았다. 옆에서 자던 남자가 날 안아 왔다. 무심한 손으로 내 뺨을 문지르고, 내게 품을 내주었다.

나는 창문에 비치는 상기된 얼굴이 너무나도 낯설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스레 손이 손목시계로 향했다. 초침이 툭, 툭 소릴 내며 평소보다 약간 빠르게 뛰는 심장과 템포를 함께 했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모든 게 꽝꽝 얼어붙어 있는 바깥을 내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추위가 완벽히 꺾이려면 아직 몇 차례의 고비는 더 넘겨야 할 거라고.

골목 하나를 더 지나고, 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 목에 둘러져 있는 머플러를 한 번 더 확인 후에 내리려고 하는데. 장 대표의 직원이 날 얼른 붙들어 왔다.

“저기.”

“…네?”

“이거 가져가시죠.”

그러곤 보조석에서 과일 바구니를 내렸다. 거대한 크기였다. 크고 단단한 과일들로 꽉 채워져 있는 와중에, 중간엔 복숭아도 엿보였다. 나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요 근처에서 따순 국밥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녀오세요. 나도 이참에 월급이나 날로 먹으려니까.”

직원은 체구만큼이나 커다란 입으로 웃었다. 뒤돌아보자, 담배를 태우다가 내게 손을 흔들어 왔다. 나는 작게 고개를 숙이곤, 얼른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 안은 여느 때처럼 적요하기만 했다.

나는 병실 문 앞에 서서 엄마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온 걸 다시금 고쳐 쥐었다. 발을 움직여 침대 옆에 앉았다.

“…엄마.”

과일 바구니를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품에 넣어 두고 있었던 통장을 침대 위에 잠시 올려놓았다. 이제 잃어버렸던 걸 찾아왔으니 부디 엄마도 헤매고 있는 곳에서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와 줬으면 했다.

1시 정각이 되기 전, 병실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전에 보고 간병인이 아닐까, 했던 그분이었다.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얼굴을 해 보이기에, 얼른 허릴 팍 숙였다.

“안녕하세요. 여기 있는 임선화 씨 조카예요.”

“…어, 그래!”

내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던 간병인은 이내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얼굴 보니까 딱 알겠네.”

언젠가 한 번쯤은 마주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 되리라곤 예상 못한 터라 조금 얼어 있었다. 간병인 분은 얼른 다가오셔서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편하게 있으라며, 의자를 하나 더 내와 나를 거기에 앉게끔 하셨다. 간병인 분이 내 옆에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를 눈짓해 왔다.

“그거 환자분 드리려 가져온 거예요?”

“아, 네.”

“이리 줘 봐요.”

이렇게 귀한 걸 어디에서 가져왔냐며 물으시곤, 배 하나를 깎아 내게 내주셨다.

“그동안 곁 지켜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뭘, 나는 일 받아서 하는 사람인데요. 1인실에 혼자 있느라 적적해서 혼났는데,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

“……네.”

“자주 놀러 와요.”

과육이 꽂혀 있는 포크를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아주머니.”

작게 부르자, 아주머니가 행동을 멈추고 날 돌아보았다. 나는 괜히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자선 단체가 후원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혹시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자선 단체?”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이 아주머니의 고개가 갸울어졌다.

“감사 인사라도 전하고 싶어서요.”

가진 게 없어서 제대로 보답은 못 하겠지만, 최소한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하다못해 전화라도. 아주머니의 얼굴에 미안함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글쎄요. 나는 그냥 우리 업체한테 일 받아서 하는 거라.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네요.”

“…아, 그러세요.”

아주머니가 병실 안을 이리저리 훑었다.

“나는 사실 그동안 아무도 안 찾아오길래 가족들이 너무 바쁜 분들인가 했었어요. 그래서 병원비랑 간병비만 주고 안 오는 건가 했더니.”

아무도 안 찾아왔다고. 순간 명치에 묵직한 타박감이 느껴졌다. 이미 짐작하고 알고 있던 부분인데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까 현실감이 배가 되었다.

“자선 단체에서 후원을 하던 거였구나.”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간병인분의 두 눈동자에 잠시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이내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란 생각으로 가벼이 의구심을 떨쳐 내시고 간병인분은 선하게 웃으셨다.

“이런 큰 병원 1인실에 후원해 줄 정도면 엄청 고마우신 분들일 텐데.”

그건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이 정도 돈이라면 세 명은 족히 더 후원해 줄 수 있는 비용일 텐데. 왜 자선 단체가 양보다 질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감사한 분들이라는 거엔 변함이 없었다.

아주머니가 병실 의자를 하나 더 꺼내 와 앉더니, 과도로 사과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과일 좀 들어요.”

나는 멈칫대다가 두 손을 뻗어 포크를 받았다. 지문엔 이제 흉이 거의 희미해져 있었다. 옷 안엔 아직 자흔이 가득했지만, 처음에 비교하면 모두 색이 현저히 옅어졌다. 곧 없어지지 않을까 기대해 봐도 좋을 정도로. 간병인이 오기 전에 품 안에 넣어 두었던 통장을 괜스레 손바닥으로 느껴 봤다.

***

저녁때야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는데 조용한 집 안에 전화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 소릴 듣자마자, 잘 훈련 받은 개처럼 협탁으로 튀어 갔다. 수화기를 들어 올리기 바로 직전, 손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장 대표 집으로 걸려 온 전화인데. 내가 받는 게 맞는 걸까. 망설이던 사이, 전화가 끊겼다. 그러곤 금세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끊길 줄 모르고 계속해서 길게 울렸다. 내가 받을 때까지 울릴 기세였다. 이 정도의 집착이라면, 이건 분명히 장 대표가 건 전화일 거였다.

- 앞으론 무조건 받아요.

“네.”

- 곧 도착합니다.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물을 틀어 둔 채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눈앞이 어질해졌을 즘에야 정신을 차리곤 얼른 물을 껐다.

나는 샤워 부스에서 빠져나와 가운으로 손을 뻗었다. 벽에 걸려 있는 가운을 내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있는 거울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따뜻한 열에 양 뺨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얼굴은 밀가루 반죽을 치대 놓은 것처럼 하얗고, 입술은 꼭 쥐 잡아먹은 사람의 것처럼 시뻘겠다. 게다가 몸은 벌집을 잘못 건드려 벌떼의 습격을 받은 사람의 피부 같았다. 장 대표가 고깃덩어릴 해치울 때처럼 물어뜯어 대는 탓에 내 목이며 가슴팍이며, 온통 시뻘건 쪼가리로 가득했다. 그는 내 몸 곳곳에 제 흔적을 지장처럼 찍어 놓고 나서야 나를 놔줬다. 나는 하얀 가운으로 몸을 감추고, 끈으로 허리를 꽉 맸다.

“…….”

몸이 따뜻한 물 덕에 나른해졌다. 문밖은 아직 조용했다. 장 대표는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휘이잉. 작게 난 창문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바깥엔 추위가 한창이었다. 남자는 저 추위를 뚫고 이 집으로 돌아올 거였다. 춥겠지. 바늘 하나 뚫지 못할 것 같은 강한 피부를 가진 남자를 생각하며 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욕조로 향했다. 하얀색 욕조 옆에 쭈그려 앉아 물을 받기 시작했다. 콸콸, 쏟아지는 물에 손을 담가 온도를 체크해 봤다.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팔 한쪽을 담근 채로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물은 욕조 안을 착실히 채워 나갔다. 나는 멍한 눈길로 그걸 응시하고만 있었다.

띠리리.

그러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도어 록 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어느덧 물은 순식간에 불어나 범람하고 있었다. 얼른 수채 구멍에서 마개를 들어 올렸지만, 이미 화장실은 물론이고 남자의 방바닥까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막 집에 돌아온 장 대표는 제 방에 벌어진 참극과 그대로 마주하게 됐다.

남자의 미간이 그대로 접혀 들었다. 재킷을 벗어 드레스 룸에 거의 던지듯 해 놓곤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밸브를 잠그더니, 내 손목을 잡아 앉아 있던 자리에서 끌어 올렸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

“욕조 물에 코 박고 뒈지기라도 하려고?”

축축해진 러그와 그 못지않게 흠뻑 젖은 팔다리. 나는 반쯤 젖은 채로 말없이 아랫입술만 물고 있었다. 가운 위로 드러난 얼굴이 쪽팔려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저질러 놓은 실수 때문인지, 아니면 화장실 안의 수증기 때문인지. 자꾸만 양 뺨에 열감이 올랐다.

“뭐 하고 있었던 거냐고 물었는데.”

날이 추워서 당신의 목욕물을 받아 놓은 거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도저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 안 차리지.”

장 대표의 말에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얼른 손을 수건으로 내뻗었다. 그걸로 넘쳐흐른 물을 닦으려고 하는데. 남자가 팔로 내 가슴팍을 뒤로 밀어 냈다.

“어차피 마를 테니까 그냥 둬요.”

나는 그의 팔에 막혀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남자는 피곤한 기색으로 욕조로 다가가 옷가지를 벗었다. 셔츠를 벗어 내고, 벨트를 풀어내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옷들이 바닥 위로 그대로 흩어져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가 욕조 안으로 몸을 들여놓자, 물이 첨벙 넘쳐흘렀다. 남자는 욕조 안에 가슴팍까지 담그곤 젖은 손으로 머릴 쓸어 넘겼다. 왁스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남자의 머리가 자연스레 흐트러졌다.

“…….”

“…….”

나는 나체가 된 장 대표 앞에 서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눈을 당최 어디다가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만 뒤돌아서서 화장실을 나가려다가, 그만 남자에게 손목이 붙잡혀 버렸다.

“서여원 씨 생활비 버느라 온종일 좆 빠지게 일했는데. 시중 안 들어요?”

그러는 게 마땅하단 말투다. 나는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욕조 틀에 걸터앉아야 했다.

나는 속으로 참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며 샤워 볼에 보디 샴푸를 짜서 비벼 댔다. 거품이 불어나는 걸 지켜보다가 장 대표의 가슴팍에 올렸다. 장 대표가 상체를 일으켜 내가 씻기는 것을 도왔다. 갈색 석고상처럼 섬세하게 빚어진 남자의 몸엔 이런저런 흉터들이 많았다. 나는 남자의 어깨와 몸에 난 그것들을 새삼스레 훑어봤다. 모두 만들어진 지 꽤 된 것들 같았지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제대로 아물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오직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와 물결치는 물소리만이 공백을 메웠다. 내 의지완 상관없이 눈이 자꾸만 아래로 이끌렸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검측한 음모 아래에 일자로 뉘어 있는 굵고 긴 성기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가슴과 어깨, 팔만 내리 닦다가 결국 손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마로 장 대표의 시선이 달라붙어 왔다. 욕조 틀을 양팔로 감싸고 군림하듯 앉아 있는 남자가 지껄였다.

“왜 밑은 안 닦아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민망한 소릴 잘도 해 댄다.

장 대표의 두 시선이 내 다리 사이로 붙어 왔다. 나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불편한 자세를 버티려면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일정 이상 벌리고 있어야 했는데. 그 가운 사이로 남자의 것과는 달리 말랑해 보이기만 하는 내 샅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장 대표가 입술에 힘을 풀고 웃었다. 내 아래를 비웃고 있는 얼굴에 나는 조금 절망감을 느꼈다.

“턱에 수염은 납니까.”

“…아니요.”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번엔 소리 내서 픽 웃었다. 그는 내 손에 면도기를 들려 주며 제 턱을 깎아 보라 시켰다.

“제가요.”

면도를 하는 것 자체는 사실 별일이 아니었다. 그저 남자의 얼굴에 직접 손을 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두 번 말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답 없이 바라만 봐 오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화장실 선반에 놓여 있는 셰이빙 폼을 짜 왔다. 잔뜩 손에 짜서 비빈 뒤 약간 까끌거리는 남자의 턱에 묻혔다. 그러곤 그의 날카로운 턱을 손으로 잡았다. 허구한 날 잡혀만 봤지, 턱을 잡아 본 건 처음이라 무척이나 낯설었다. 불문율을 어기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

“…….”

나는 면도날을 장 대표의 턱에 대고 조심스레 굴렸다. 고급 면도기라 베일 일은 극히 드물 테지만 나는 혹여나 예리한 칼날이 갈색 피부를 찢고 들어가진 않을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만전에 만전을 기울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뜨고 남자를 지켜보는 건 거의 처음 같았다. 남자는 눈썹이 짙은 데다가 코가 우뚝해 오만하다는 느낌을 줬으며, 꾹 다물린 입술은 고집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좋은 인상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란 사실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장 대표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그건 정말 갑자기 훅 끼쳐서 들어온 감흥이었다. 나는 그의 이목구비를 뜯어보느라 남자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의 두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만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칼이 남자의 턱에 깊게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

새붉은 피가 장 대표의 벌어진 피부 틈에서 흘렀다. 욕조 물로 뚝뚝 방울져 떨어져선 물감 섞이듯 퍼져 나갔다. 아릿함을 느낀 남자가 제 턱을 손등으로 슥 문질렀다.

“신기할 정도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네.”

손등에 그대로 묻어난 선혈을 바라보다가 허탈한 듯 웃는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대로 쩍 멈춰 있었다.

“얼굴이 왜 그렇게 붉어요.”

장 대표 말대로 얼굴이 터질 것처럼 열을 발산해 대고 있었다. 심장이 아플 만큼 빠르게 뛰었다. 어디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남자에게 혹시 들리는 건 아닐까, 별안간 걱정이 됐다. 나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렇게나 핑계를 지껄여 댔다.

“…혼날까 봐 무서워서요.”

“그럼 혼내기 전에 와서 핥든가요.”

“…….”

장 대표가 내게 제 손등을 내밀었다. 겨울나무의 껍질과 비슷한 색을 띠는 손등 위에 흐르는 새붉은 피. 나는 천천히 다가가서 남자의 손등을 손에 붙들었다. 입술을 약간 벌렸다. 혀를 내밀자, 그 붉은 살덩어리를 본 남자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남자가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거의 아이스크림을 핥듯이 남자의 손을 쪽쪽 빨았다. 쇠 맛이 나다가, 끝엔 남자의 피부 맛이 났다. 남자의 성기를 제외하고 그의 이렇게 피부를 핥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손등을 핥다가, 시선을 올렸다. 장 대표는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따뜻한 물에 감싸여 나른하게 늘어진 남자의 몸, 혀로 문지르고 있는 남자의 피부. 정신이 혼몽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몸이 뒤로 넘어갈 것처럼 휘청댔다.

“턱은.”

“…….”

이번엔 남자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눈을 감고, 남자의 얼굴을 내게로 끌어당겼다.

고갤 비틀어 남자의 턱을 샅샅이 핥았다. 감각이 예민한 혀끝에 틈이 약간 벌어져 있는 상처가 걸리적거렸다. 방금 막 면도를 해서 더 매끄러운 피부를 할짝거리며 핥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분위기가 이상야릇한 데다가 떠다니는 공기가 너무 축축했다. 나는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장 대표가 내 손목을 끌어 당겼다. 그는 나를 본인의 허벅지 위에 앉혀 놓았다. 내 한쪽 발목은 손으로 잡고, 다른 쪽 다리는 욕조에 걸쳐 놓았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 밑이 훵한 상태였다. 밑구멍이 그대로 남자에게 드러났다.

남자의 굵은 엄지가 구멍으로 불쑥 들어왔다. 일반인들 발가락 굵기의 손가락이 구멍 안을 쑤셔 댔다.

“아흐응!”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런데도 내 입에선 고통을 억누르는 소리 대신 아양 부리는 것 같은 신음이 터졌다. 굵은 엄지가 안을 쿡쿡 쑤셔 댈 때마다 감질 맛이 났다.

음모 밑으로 늘어져 있던 남자의 좆이 복근 위로 바짝 올라와 있는 걸 보곤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곤 남자의 좆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남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걸 만져 댔다. 손끝에 닿아 오는 뜨끈한 체온과 커다란 크기에 절로 몸서리를 쳤다. 이게 어떻게 그 좁은 곳으로 들어왔던 건지 볼 때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핏줄이 바짝 일어서더니, 검붉은 좆이 더 단단하게 부풀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르르 떨다가 삼각형의 갓 모양 귀두에서 프리컴이 질질 흘렀다. 하얀 액체가 찐득하게 늘어졌다.

장 대표가 쉰 목소리로 지껄였다.

“왜. 손가락으론 성이 안 차?”

“…흐윽, 네.”

남자가 내 골반을 잡고는 위로 올렸다. 남자는 날 아이처럼 들어 올렸다가, 한 번에 놓았다. 첨벙! 물이 윤활제 역할을 해 줘 젤 없이도 구멍 안으로 좆이 쉽게 빨려 들어왔다. 남자의 성기가 구멍을 꽉 막았다.

“…하, …하앗!”

엉덩이를 힘껏 움켜 잡히곤, 강하게 박혔다. 좆이 구렁이처럼 안을 가르고 들어와 깊은 곳을 퍽 쑤셨다가, 단박에 빠져 나갔다. 그러곤 다시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안을 팍 쳤다. 나는 정신을 놓고 신음했다.

“…대, 대표님.”

찰박, 찰박. 남자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욕조 물이 함께 빨려 들어왔다.

아, 황홀해. 황홀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미간까지 찌푸리고 허리 짓을 하며 헉헉대던 남자가 물었다.

“…하아, 왜.”

“…더, 더 안쪽.”

나는 장 대표의 목을 껴안으며 더 안까지도 아프게 해 달라고 말했다. 남자는 기꺼워하며 내 몸을 거의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말을 잘못 뱉었음을 알았다. 이 이상은 아프다고 등을 긁어도 남자는 절대 날 놔주지 않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날 붙잡고 헉헉대는 짐승 같은 남자에게 힘껏 매달렸다.

우린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해선 섹스했다. 타일 벽에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헉헉대는 둘의 신음 소리가 튕겨 서라운드가 만들어졌다.

***

다음 날. 퉁퉁 부운 밑이 아팠지만, 로비까지 장 대표를 따라나섰다.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곤, 스니커즈를 대충 꺾어 신어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탔다.

밝은 전등 밑에서 마주한 남자의 턱엔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다. 왠지 혀끝이 떫어서 얼굴을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대표님.”

“왜.”

“출근하신 뒤에 병원에 일찍 가도 될까요?”

장 대표는 무성의한 어조로 그러라고 답했다. 함께 입구로 나아가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 앞에서 남자를 기다리던 직원이 장 대표의 얼굴을 보곤 흠칫 놀라 물었다.

“대표님, 턱이…?”

돈이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장 대표는 곧바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직원이 허둥지둥 뒤따라 운전석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차창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러곤 생색내듯이 제 턱을 손등으로 쓸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차가 떠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더 일찍 불려 다니게 된 직원에게 미안했지만,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을 간병인 아주머니와 교대를 하기 위해서는 별수가 없었다. 장 대표의 허락 없인 병원조차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는 신세였으니 말이다.

오늘도 한파를 뚫고 병실에 도착했다. 간병인 아주머니께 드릴 전병과 음료를 사서 문을 노크했다.

“어, 왔어요.”

아주머니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아주머니께 이제부턴 내가 자릴 지키고 있겠다며, 휴게실에서 쉬다 오라고 말씀드렸다. 아주머니께서는 몇 번 거절해 보이다가, 결국엔 부탁한다며 병실을 떠났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가 침대에 바싹 다가가서 앉았다. 침대 위 엄마는 평온해 보였다. 기계 판 위에서는 가냘픈 세 개의 선들이 바람 밑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롭게 춤추고 있었다. 미약하지만 분명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작은 새처럼 펄떡거리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 미미한 움직임에 희망을 걸고 엄마의 곁을 지켰다.

병실 안은 조용했고, 며칠간 잠자리가 계속 나빴던 탓에 수마처럼 잠이 몰려왔다. 나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머릴 조아리며 잠깐 졸았다.

그러다가 손등에 뭔가가 스치는 기분이 들어 정신이 훅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팍 들고 내 손 근처를 내려다봤다. 엄마의 손이 내 손 근처에 닿아 있었다.

나는 얼른 너스 콜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가 호출에 응답해 오자,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깨어난 것 같다고, 얼른 와 달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의사는 엄마의 몸 상태를 이리저리 진찰해 봤다. 레이저를 엄마의 눈에 쏴 보기도 하고, 턱을 약간 벌려 목구멍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청진기로 가슴 부근도 이래저래 눌러 봤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맞잡고 그에게서 뭐라 말이 떨어지기를 바랐다.

드디어 의사가 안경을 벗으며 내게로 얼굴을 돌려 왔다. 떨어지는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말은 절망적이었다.

“보호자 분, 죄송하지만 환자분에게선 별다른 징후가 없습니다.”

“자고 있었는데 손등에 뭐가 닿는 것 같아서 깼어요.”

“자고 있었을 때요.”

의사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하루에도 몇십 번 상대할 부류의 보호자를 마주하고 있는 의사의 얼굴이었다.

“뇌출혈로 혼수상태. 상황이 상당히 안 좋습니다. 여태껏 이만큼 버텨 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거예요. 깨어나도 눈만 간신히 감았다 뜨는 수준이실 겁니다.”

“…….”

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한 채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어깨에 의사의 손길이 와 닿았다. 가벼이 두드리고 지나가는 손길에 나는 옆으로 툭 무너졌다. 어느새 병실로 돌아와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끌어당겨선 위로했다.

“아이고.”

“…….”

“학생, 임선화 씨 금방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학생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위로해 줬지만, 그 무엇도 귀에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가망이 없다.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엔 큰 구멍이 뻥 뚫렸다. 엄마의 생명 활동이 작지만 분명히 이뤄지고 있는데. 왜 하나같이 입을 모아선 가망이 없다고 하는 걸까.

***

멍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와선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시간을 버렸다.

나는 낮에 받았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의사가 한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대다수의 의사는 가장 최악의 경우를 환자의 부모들에게 알렸다. 혹시 모를 상황에 미리 대비하고 있으라는 뜻에서. 수차례 인터넷 검색을 해 본 이후라, 나 또한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몇 개월 못 산다 들었던 시한부도 몇 년 후 몰라보게 건강해져선 종종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어렵지 않게 봤다. 엄마만 해도 몇 개월 못 버틸 거라 했는데 벌써 1년이 지났잖아? 그것만 해도 희망적인 상황인데.

“…하.”

사고의 흐름을 좋게 돌려보려 해도 자꾸만 최악의 경우만 생각이 됐다.

정적이 흐른다. 똑딱똑딱.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기에 괜히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려봤다. 눈을 내려 시간을 확인했다. 4시. 퇴근 시간으론 너무 이른 시간대다.

오늘은 몇 시쯤에나 올까. 워낙 제멋대로 오가다보니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번 전화해 볼까?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어 남자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뚜루루, 신호음이 울리는 걸 가만 듣고 있다가 불현 듯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지금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이만 끊을까 하려던 참에.

-어.

장 대표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수화기를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을 머뭇대다가,

“죄송합니다.”

비겁하게 사과하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띠리리,

당연지사 바로 전화기가 울려 대기 시작했다. 나는 받기 무서워서, 또 받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전화기 옆에 앉아만 있었다. 전화기는 남자의 성미대로 길게 여러 번 울리다가, 갑자기 뚝 그쳐 버렸다. 나는 뚝 끊긴 전화에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곤 이제 돌아오면 날 몰아붙여 올 남자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장 대표는 평소보다 더 일찍 집에 돌아왔다. 당연히 제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난리칠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그저 눈썹을 찌푸린 채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나직이 물어올 뿐이었다.

“표정이 왜 그따위입니까?”

표정이 왜 이따위냐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하는 거지. 나는 사과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며 고갤 내저었다. 남자는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재킷을 벗어 내게 건넸다.

그러곤 여느 때처럼 씻기 위해 샤워실로 향했다. 한 손에 그의 재킷을 붙든 채로 서 있다가 발을 굴러 내게서 멀어지는 그의 등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남자의 허릴 부여잡았다. 흠칫 멈춘 그의 어깨에 뺨을 묻자, 남자가 나를 돌아봐 왔다.

“…….”

“…….”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건진 나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나는 그저 남자의 등에 뺨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집은 혼자 있기엔 너무 거대했다. 최소한의 가구만 놓여 있는 이 집엔 너무 생활감이 없었다. 그곳에 덩그러니 혼자 놓여 있던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나는 남자에게서 체온을 받으며 그러고 잠시 서있었다.

고요히 침전한 눈동자로 내 의중을 파악하던 장 대표는 이내 내 옷을 벗겨 냈다. 그러곤 샤워실로 들여다 놓고 함께 샤워하며 몸을 섞었다. 뜨거운 입술이 내 턱을 문지르고, 목을 핥고 가슴을 물고 빨았다, 유두에 치미는 찌릿한 통증에 뇌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이내 쾌감으로 씻겨 나갔다.

“아, 흑…!”

밭은 숨을 내쉬며 뜨거운 열을 뿜는 장 대표의 몸에 얼굴을 묻었다. 팔로 목을 꼭 감고 악몽에서 깨어나면 날 안아주곤 하던 품에 얼굴을 문질렀다. 눈앞이 뿌예지더니 곧 코끝이 찡했다.

“……흣!”

흐느끼는 듯한 신음소리가 타일 벽을 울려 댔다. 눈가와 코가 뜨끈했다. 뺨에 흐르고 있는 이게 눈물인지, 물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샤워 중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

“너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장 대표가 돌연 내 뺨을 틀어 잡아왔다. 그 덕에 양 뺨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나는 얼굴을 보이기 싫어 고갤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가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손으로 단단히 내 턱을 고정시켜선 내게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달달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게 잡힌 턱이 악 소리 나올 만큼 아팠다.

“뭐냐고 물었는데.”

“…아파요.”

말끝을 흐리며 턱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장 대표는 내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창피함에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내 입술과 몸을 물어뜯던 남자의 잇새로 “…애새끼.”란 말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내 입술을 다시금 그의 입술이 덮어 왔다.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흩어졌다.

관계 이후엔 축 늘어진 몸으로 침대 위에 누워서 방의 넓은 창을 내다봤다. 송진 가루 같은 눈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몽환 같은 바깥 배경에 나는 또 현실 감각을 잊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엄….”

평소대로 엄마라고 부르려다가, 잠시 멈칫하곤 단어 선택을 달리했다.

“어머니 손끝이 조금 움찔했었어요.”

“…….”

“놀라서 의사를 불렀는데. 의사가 진찰해 보더니 그냥 경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구요.”

“본인 무능력하단 얘기를 잘도 지껄이네.”

장 대표의 낮은 음성이 벽을 나직하게 두드렸다. 의사는 그냥 사실만 전달했을 뿐인데도 남자는 가차 없이 그를 비난했다.

나는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칠기만 한 그의 말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둘로 갈라진 것처럼 아프던 심장을 내내 가슴 안에 담고 있느라 버거웠는데. 이제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남자의 벗은 팔이 내 허릴 감아 왔다. 배려라곤 모르는 남자는 제가 원하는 세기의 힘으로 날 꽈악 죄어 왔다. 포옹이라기보다는 속박이라 이름 붙이는 게 더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속이 갑갑했지만, 뭐라 불평할 수 없는 상황이니 입을 다물었다.

이 품에 안겨 있어서 그런 걸까. 내겐 너무 넓어서 텅 빈 것만 같던 집이 남자가 오니 비로소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눈을 내리감자, 정적이 이불처럼 남자와 나를 덮었다.

***

다음 날 도착한 병원에서 담당의사가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희망이 없을 거라 말했던 의사 대신 새로운 얼굴의 의사가 와선 엄마를 진찰했다. 엄마의 눈꺼풀을 손으로 들어 올려 불빛을 안구 쪽에 들이대 보았다.

“음, 맥박도 이만하면 괜찮고, 호흡이나 체온도 이 정도면 정상 수치입니다. 바이탈 상으론 너무 건강하십니다.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한 쪽에 서서 의사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그제야 긴장을 놓았다. 한껏 참고 있던 숨을 팍 터뜨리곤 얼른 고갤 숙여 인사드렸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툭툭, 어깨가 두드려졌다. 그렇게 의사가 떠나고 아주머니와 병실을 함께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후쯤에 사람 하나가 도착했다.

“여기가 임 선화 씨 계시는 곳 맞나요?”

낯선 얼굴에 경계심을 잃지 않고선 누구시냐고 물었다.

“아, 저 배달하는 사람인데요. 임 선화 씨 앞으로 누가 선물을 보내서요.”

“선물을?”

아주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신이 난 아주머니가 여기 맞다고 대답하자, 병실 안으로 화분과 과일 바구니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게 다 어디서 온 거야.”

아주머니는 일일이 선물을 풀어내며 환한 얼굴로 기뻐하셨다.

텅 빈 것 같았던 병실이 꽉 들어찼다. 썰렁한 느낌이 있던 병실 안에 생명력이 가득 넘실거렸다.

“…….”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병실 한 가운데에 서 있다가 화분 하나에 다가갔다. 거의 내 허벅지까지 오는 화분은 척 보기에도 고급으로 보였다. 나는 손끝으로 길고 강하게 뻗어 있는 잎을 만지작거렸다. 이름 없이 왔다지만, 이 화분들은 출처가 명확했다. 보나마나 그 남자겠지, 뭐. 잎을 조심스레 쓸던 손가락을 떼자, 잎이 부끄러운 듯 퉁 몸을 튕겨졌다.

병실에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예상치 못하게 뒷좌석엔 장 대표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올라타선 허벅지에 올려둔 손끝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틈틈이 힐끔거리며 옆을 곁눈질하다가 그만 장 대표에게 들키고 말았다.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리길래, 얼른 운을 뗐다.

“병실로 보내 주신 거….”

이상하게 배 부근이 간지러워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꿈지락대다가 말을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날 응시하던 장 대표가 눈썹 한 쪽을 추켜올리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시했다.

***

이자와 나의 관계는 상당히 묘해졌다.

그저 스폰 관계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사이가 밀착되어 있다.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떠서 함께 밥을 먹고, 몸을 섞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러다가 악몽을 꾸면 장 대표가 깨워 주었다. 종잇장처럼 나약해진 나는 남자가 곁에 없으면 거의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됐다. 이렇게 될까 봐 약 기운을 빌리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귀찮을 만도 한데. 장 대표는 묵묵히 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날 개 취급하던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병실에 서서 남자가 내게 보낸 화분을 마른 천으로 일일이 닦고 있던 나는 돌연 명치 부근을 부여잡았다.

…아, 또다.

이상하게 마음이 일렁거렸다. 포크로 쿡 찌르면 바삭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던 내 가슴팍에 누군가가 숨을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이 안에서 하느작거리며 물결쳤다. 그 때랑 비슷한 증상이었다. 장 대표의 얼굴을 쥐고선 면도를 하던 그 때와….

그 때의 남자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천을 쥐고 있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장 대표.안하무인에 제멋대로에 개새끼지만, 내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건 암만 부정해 봐야 소용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 관계가 예상보다는 최악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확실히 최악은 아니었다. 언젠가 남자가 나에게도 흥미를 잃게 되는 날까지는, 이 이상한 관계이나마 함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추측과는 달리, 그 평화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

“다녀오세요.”

나는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한 채로 장 대표를 배웅했다. 이 남자의 성미는 어지간하지를 못해서, 이러다간 밑이 터질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 몰아세워 놓곤 본인이 나갈 때쯤엔 꼭 날 현관문 앞에 세워 놓았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서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

“…….”

장 대표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뭐라 제대로 대꾸를 해 주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벽을 일일이 손으로 짚어 가며 남자의 방으로 향했다. 거기가 이 집에서 유일하게 CCTV가 달려 있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

남자로서도 내가 본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 방에서 보내게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거였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남자의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연스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조차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안일을 조금 하다가 창문을 내다보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뿐이었다. 내게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교에 다니고, 학비 때문에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해 댔던 일상이 있었는데. 그런 일상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이젠 그 모든 게 희미했다.

집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 간병인, 가끔가다 남자의 직원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면 나는 온종일 집에서 남자만을 기다려야 했다. 남자가 키우는 개처럼 말이다.

우스운 건 내가 이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거였다. 머리를 복잡하게 메우고 있던 잡념들이 밀어닥쳤던 폭풍우에 휩쓸려 가서일까. 나는 이전보다 평온해졌다.

완벽히 통제되어 있는 주변은 고요했다.

나는 멍한 눈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책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뒤를 휙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아는데도 도둑질을 하는 기분이라 제 발이 저렸다.

침대에 앉아서 조용히 책장을 넘겨 봤다. 그러다가 단시간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활자를 읽어 내렸다. 한창 푹 빠져서 읽다가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얼른 추려서 책장에 꽂아 넣었다.

장 대표가 집을 나서면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책장에 손을 뻗었다. 하루에 한 권이면 딱 좋았다. 남자가 돌아올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하나 남겨 두지 않고 책장에 책을 도로 놓았다. 오늘도 현관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얼른 책장에 책을 돌려 놓으려다가, 그만 남자의 책상에 허벅지를 찧고 말았다. 너무 격하게 몸을 돌린 탓에 꽤 진한 멍이 남았다.

장 대표는 내 생활 패턴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주제에, 집에 돌아오면 꼭 오늘은 뭘 했냐고 물어 왔다. 그에 로봇처럼 읊어 댔다.

“병원 다녀왔다가, 집에 와선 집안일을 조금 했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의 손은 스스럼없이 내 몸을 지분거려 댔다. 허리를 타고 내려간 커다란 손은 내 허벅지에 가서 닿았다. 남자는 내 허벅지에 든 퍼런 멍을 보고는 픽 웃었다.

“애도 아니고 대체.”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책상에 좀 부딪혔다고 이렇게 멍이 듭니까.”

피부가 약해서 그런 건지.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내 허벅지를 주물거렸다. 나는 평소대로 그의 손길에 몸을 고스란히 내주고 있다가 갑자기 드는 이상한 느낌에 이마를 찌푸렸다. 일순 의구심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근데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분명 장 대표의 방 안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내 물음에 남자는 답지 않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광대 부근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나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깨 끝을 으쓱하며 지껄여 댔다.

“서여원 씨가 카메라 있는 곳은 일부러 피해서 다니는 것 같길래 거기에 놓았습니다.”

“…그럼 저 책장 들여놓은 이유가.”

남자는 대답이 없었고, 나는 그의 침묵으로 의심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그러니까 남자는 내가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는 걸 깨달은 바로 다음 날. 책장에 카메라를 붙여 집에 들여왔다. 벌리고 있던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근데 말했으니까 또 책장 피해 다니겠네.”

장 대표가 여상히 웃었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나는 입술 새로 작은 헛웃음을 뱉었다.

“…하.”

그 비스듬한 조소에 되레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씻겨 나갔다.

“왜요.”

“…….”

양심의 가책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가 날 향해 왔다.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을 저질러 놓고 들킨 주제에, 남자는 평온하기만 하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럼 그렇지. 그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갤 내저었다. 원래 저런 남자란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도 명치 부근이 이상하리만큼 쓰렸다. 티내지 않으려 하는데도 눈 꼬리와 입 꼬리가 저절로 아래로 축 쳐졌다.

***

그 다음 날이 되어 병실로 들어온 나는 묘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고갤 천천히 돌려 남자가 내게 보낸 것들을 차례대로 주시했다.

…설마.

나는 일단 과일 바구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것들을 매만졌다. 바구니 안에서 과일들을 모두 꺼내어 안을 더듬었다. 강박적으로 틈 사이사이까지 확인해 보고 나서야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괜한 짓거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화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홀린 듯 다가가선 화분에 손끝을 대봤다. 거친 표면을 일일이 매만졌다. 예민하게 촉각을 세운 손가락에 미끈한 뭔가가 걸려 왔다. 나는 키를 낮춰 그걸 확인해 봤다. 안에서 뭔가가 반짝거렸다.

“…….”

작은 렌즈가 거기 박혀 있었다.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온몸의 피가 차게 식다 못해 싸늘히 굳었다.

이곳에는 부디 없길 바랐는데. 금고에 카메라를 붙여 들여왔던 남자의 과거가 상기됐다. 나는 왜 남자가 변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었는데.

나는 굽히고 있던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화분들을 모두 병실에서 들어내 소각장으로 옮겼다. 그러곤 근처에서 돌을 가져와 화분을 일일이 깨부쉈다.

병실로 돌아와서는 과일바구니들도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아주머니가 왜 멀쩡한 것들을 내버리냐며, 나를 뜯어말렸다. 나는 아주머니의 만류에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남자가 보내온 것이라곤 먼지 한 톨이라도 이 곳에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

그 날 저녁. 나는 내 어깨를 끌어안으려 하는 장 대표의 가슴을 밀쳐 냈다. 밀도 높은 무표정이 드리워져 있던 남자의 얼굴에 쩍 균열이 갔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 말을 하지 않고 쌕쌕 숨만 뱉고 있자, 남자가 혀를 찼다.

“감시당하던 거 여태까지 몰랐던 것도 아니고.”

렌즈를 부수던 내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확인했을 남자에게서 싸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토해 내듯 말했다.

“…적어도 엄마 병실에는 그러지 마셨어야죠.”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 집안 천장엔 그렇다 쳐도, 책장엔 그렇다 쳐도, 거기엔 그러지 말았어야지. 바구니들을 들쳐 보면서도, 화분을 만져 보면서도 부디 그것만은 순수한 호의이길 내내 바랐었다.

내 기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깔아 뭉개버린 남자의 두 눈이 내게로 향해 왔다. 지나치게 새카매 무기질 같은 눈동자엔 딱 평소만 같았다. 진득한 권태만 너울 쳤다. 남자는 순순히 뒤를 내놓지 않고 덤벼드는 나를 성가셔하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이 텅 빈 내 속에 꾸물꾸물 위액처럼 번져 나갔다. 그 잔인한 눈길에 내 속엔 꼭 불이 지펴진 것처럼 쓰라렸다.

“…대표님, 저는.”

무릎 위에 있는 손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대표님의 개나 고양이가 아닙니다.”

장 대표의 미간이 접혔다.

“아니요, 서여원 씨는 내 것이 맞습니다.”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다.

“내가 가져왔으니까.”

지구는 둥글고, 하늘은 파랗다. 그만큼 당연한 진리라는 듯 말을 내뱉는 남자의 입술엔 망설임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

“…….”

장 대표의 손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뿌리치고자 했지만, 남자는 완강했다. 그는 날 제게로 끌어당겨 스스럼없이 내 가운을 뒤로 확 젖혔다. 전등 밑에 맨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남자가 고스란히 드러난 내 몸을 훑어보며 차게 비웃었다.

“몸엔 이런 걸 잔뜩 달고 내 것이 아니라니.”

내 몸은 목덜미는 물론이고 팔목까지 죄다 씹혀 있었다. 모두 장 대표가 만든 자국이었다. 겨우 이딴 걸 달아 놨다고 내 몸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남자에게 나는 완전히 기가 질려 버렸다.

“…저는 대표님의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남자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재차 물었다.

“너 뭐냐고, 서여원.”

“…창놈이요.”

“…뭐?”

장 대표의 미려한 미간 사이에 빗장이 드리워졌다. 공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창놈, 빡통, 걸레요.”

입술로 새어 나가는 단어가 하나씩 늘수록, 남자의 표정은 험상궂어졌다.

“…너 입 안 다물어?”

그가 턱을 움켜잡아 왔다. 손이 워낙 커서 눈만 빼놓고 얼굴의 반이 남자의 손으로 덮였다.

“좆집이요.”

입술이 짓눌린 탓에 발음이 불분명했으나 뜻은 확실히 전달됐다. 그의 입술이 한 치의 틈을 남겨 두지 않고 꽉 다물렸다. 가까이에서 으득, 하는 소리가 났다. 제 분에 못 이겨 꽉 다문 잇새를 가로로 갈고 있는 듯했다. 난 어조 없는 음성으로 지껄였다.

“대표님이 제게 붙였던 이름들이잖아요.”

나는 남자가 왜 불쾌해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본인이 먼저 날 그렇게 칭해 놓고는.

시선이 팽팽히 맞붙었다.

잇따른 고민 끝에 내 마음 한편엔 기대감 하나가 남모르게 자리 잡았다. 장 대표가 내게로 쏟아붓고 있는 그 모든 감정 중에 어쩌면 하나쯤은 호의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장 대표와 나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나 느낄 수 있던 상승감이 날 서서히 채워 왔었다. 그런 부유감에 젖어 있던 나는 갑자기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가져왔으니까.’

나를 물건 취급하는 듯한 건조한 표정과 말투. 나는 그것으로 단박에 꿈결 속에서 깨어났다.

…호의는 무슨.

남자는 겨우 나를 편하게 감시하려고 했을 뿐인데. 예전에 하던 개 취급의 연장선일 뿐인데. 나는 대체 뭐에 속고 있었던 걸까. 나는 남자에게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장 대표란 인간은 원래 이런 남자였는데.

나는 원래 머물고 있던 방으로 향하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평소라면 내 손목을 낚아채 왔을 남자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의 등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호흡을 갈무리하면서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

“…….”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밀어 닫았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 몸을 옹송그려 앉았다.

뱃속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헛된 기대를 걸고 있던 탓일까. 예전보다 더한 상실감이 느껴졌다. 혼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론 내린 그 모든 시간들이 너무 우스웠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남자와 나 사이에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함께 밥을 먹고, 몸을 섞었지만 원래도 없던 대화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는 장 대표가 없을 땐 원래 있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만 지냈다. 악몽도, 환각도 모두 이를 악물고 혼자 버텨 냈다. 몇 걸음만 옮기면 남자가 있지만, 다시는 그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남자를 혐오했던 과거를 계속해서 상기해 내려고 했다.

***

아주머니와 함께 엄마의 곁을 지키고 있다가,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씀드리곤 병실 밖을 나섰다.

“저 잠깐 전화 좀 하다가 올게요.”

전화 부스로 들어와선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엔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숫자 13자리는 이미 내 눈꺼풀 안쪽에 깊이 박혀 있었다. 틈만 나면 끈질기게 전화가 걸려 왔던 터라 외우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외울 수밖에 없었다.

- 네, 달빛 캐피털입니다. 말씀하십쇼.

엄마와 나를 끈질기게 괴롭혀 왔던 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를 향한 생경한 혐오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고 말을 이었다.

“…저 서여원인데요.”

상대방은 바로 아는 척을 해 왔다.

- 어이, 서여원이.

“…….”

- 오랜만이네, 새끼. 요즘 서울에 다니는 학교 다닌다고 했나?

종적도 없이 모습을 감춘 터라 분명 분노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빚쟁이는 반가운 척을 다 해 왔다. 전화상으로 쓸데없는 말이 이어졌다. …서울 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며, 너 같은 시골 촌뜨기는 눈 한 번 깜짝할 새에 코 베이기 십상이니 조심에 또 조심하라는 소릴 했다. 도박 빚을 떠안겨 준 사기꾼 주제에 잘도 떠들어 댔다. 나는 매초마다 팍팍 깎여 나가는 통화 시간을 바라보다가, 이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빚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요. 어디 쪽으로 보내면….”

- 이잉?

괴상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 젊은 놈이 벌써부터 이런 걸 깜빡깜빡하네. 너 인마, 다 변제했잖아.

괴랄한 감탄사에 이어 더 기이한 말이 들려왔다. 나는 전화상으로 들은 말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가, 멍청히 되물었다. 당연히 잘못 들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네?”

- 나는 느네 온 가족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길래 당연 야반도주라도 했나 했지. 그 친척 하나 있는 집 찾아가서 당장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해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데 씨발탱, 진짜 환장하겠더라니까.

카악, 퉤! 묵은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러다가 언제 전화 와서는 네 이름 앞으로 달린 원금이랑 이자 얼마냐고 묻더라고. 소릴 버럭버럭 지르면서 지랄 떨면서 당장 갚으라 했더니 전화가 뚝 끊기데. 그리고 단박에 입금을 쏴서 깜짝 놀랐다는 거 아니야.

전화가 왔었다고? 나는 그럴 리 없다는 걸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 몰라 물었다.

“…제 삼촌이었나요?”

- 얀마, 서여원이. 느네 삼촌 목소리였음 내가 바로 알았지.

“…….”

- 나는 이 새끼가 로또라도 당첨된 건가, 아니면 어디 노래방 보도라도 나가서 봉 잡은 건가 했지. 너는 새끼야, 그런 쪽 나갈 거면 나한테 소개를 받지….

이건 또 뭐지. 나는 전화 부스에 이마를 퍽 박았다. 웬만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끊고 싶었지만. 묻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요?”

- 언제긴 언제야, 인마. 그게 벌써 잠깐만 하나, 둘, 서이, 너이…. 그래,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구만.

머릿속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다섯 달 전을 되짚었다. 손가락을 모두 접어 주먹을 쥔 후에야 손에서 전화기를 놓쳤다. 순간 장 대표의 목소리가 뇌리를 관통했다.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주제에 불쾌해도, 불쾌하다 티도 안 내고.’

남자가 부러 템포를 늦춘다.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과거도 묘연한 게, 사람을 참 궁금하게 만드네.’

***

집에 돌아온 나는 소파에 망부석처럼 앉아서 장 대표를 기다렸다. 거실로 들어오던 남자가 나를 잠깐 흘깃하더니, 방으로 들어서려 했다. 나는 그의 등 뒤에서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 빚쟁이한테 전화해 봤는데.”

남자의 발걸음이 흠칫 멈췄다. 깔고 있던 시선을 올려 남자를 마주 봤다.

“이미 다섯 달 전에 다 갚았다고 하던데요.”

“…….”

“그거 대표님이 갚으신 거예요?”

날 향해 있는 장 대표의 두 눈은 그저 소슬하기만 했다. 다섯 달 전이면 삼촌이 내게서 빚을 갚겠다며 돈을 가져갔을 때다. 나는 그때부터 삼촌에게 이용당한 거였다. 그리고 장 대표에게는 기만당했다. 남자는 이미 내 본명이며, 살던 집이며 모두 알고 있을 때였는데. 파고 들어와서 들킬까 봐 도망간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 쓸데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러신 건데요?”

“원금 사천에 이자까지 합치면 거의 1억이던데. 그걸 서여원 씨가 무슨 수로 갚습니까.”

나는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얼굴을 매섭게 굳히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제가 원하던 게 아니었는데요.”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빚이 하룻밤 만에 탕감됐다는 사실에 잠깐은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한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장 대표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입으로 지퍼를 물고, 아래로 지이익 내렸다. 갈라진 지퍼 춤 사이로 남자의 검은색 드로어즈가 드러났다.

혀로 남자의 드로어즈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축축해질 정도로 핥자, 남자의 그 부분이 부피를 늘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드로어즈를 끌어 내리자, 거뭇한 음모에 가려진 흉물스러운 성기가 퉁 하고 튕겨 나왔다.

턱과 목 사이에 좆을 끼우고 문질렀다. 예민한 살갗에 뜨끈한 좆이 마구 문질러졌다. 남자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

“…….”

그에게 시선을 맞춘 채로 입을 크게 벌려 좆을 입 안에 삼켰다.

머릴 앞뒤로 흔들며 남자의 좆을 빨았다. 양 뺨이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남자의 좆 기둥을 손으로 잡고 혀로 남자의 귀두를 쪽쪽 빨았다. 매끈거리는 귀두가 혀에 철썩 달라붙어 왔다. 오줌과 정액을 분출하는 배설 기구로 쓰이는 요도를 혀를 세워 쿡쿡 찔렀다. 손에 잡혀 있는 남자의 좆 기둥이 부피를 늘리며 불끈거렸다.

“…아.”

장 대표의 혀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타액에 번들거리는 입술이 작게 열렸다. 뜨거운 열감을 뿜는 좆에 비해 날 내려다보는 남자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이지.”

남자가 허릴 튕겨 사타구니로 내 얼굴을 팍 쳤다. 그의 두꺼운 귀두가 내 뒤통수를 뚫을 듯, 강하게 못질했다. 으흐, 윽! 머리를 치는 타격감 때문에 일순 눈앞이 어질했다. 머리 위에서 건조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뭐 하는 짓거리냐고 물었잖아.”

뭐라 대답을 않고 있자, 남자가 손가락을 내 입 안에 밀어 넣어 왔다. 우악스럽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더니 내 뺨을 억지로 벌려 댔다. 우아으, 틈이 크게 벌어진 입으로 남자의 좆이 힘겹게 밖으로 퉁, 튕겨 나왔다. 나는 남자의 좆에 얼굴을 얻어 맞았다.

눈가와 뺨에 홧홧하게 열감이 올랐다.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을 뱉었다.

“…그 돈 이제 대표님한테 갚아야 하잖아요.”

“…….”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의 좆 기둥에 불끈거리며 선 핏대들이 관자놀이에도 돋아났다.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

“그래서 몸으로 처갚겠다고?”

나는 고갤 주억거렸다.

장 대표가 화를 참듯 눈을 꽉 감고는 턱을 꽉 다물었다. 턱에서부터 굵은 목덜미로까지 이어지는 근육이 위압적으로 불끈거렸다. 남자의 아래에 있는 나는 왜 그가 화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있던 빚을 지워 줬으니 그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뿐인데. 왜 또 지랄병이 도진 건지.

후우, 후우. 호흡을 갈무리하던 남자가 제 목덜미에서 넥타이를 뽑아내더니, 스산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이걸로 되겠어?”

내 두 손은 넥타이에 묶였다. 바지만 벗겨진 채로 모서리에 몰려 남자에게 박혔다. 꺼진 텔레비전 화면으로 남자의 등이 보였다. 허벅지까지 바지를 끌어 내리고 엉덩이를 움직이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의 몸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의 어깰 움켜잡은 내 손과 그의 허릴 감싸고 있는 다리만 보였다.

“…내 것이라고 말해.”

나는 잇새를 꽉 물었다. 신음조차 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남자는 허리를 튕기면서 계속해서 종용했다.

“입 열라고.”

얼굴에서 코를 떨어낼 듯 고갤 마구 뒤흔들었다.

“내 허락 없인 어머님도 못 뵈러 가는 주제에. 이젠 나 아니면 기댈 곳도 없어서, 고작해야 약이나 찾았잖아. 약에 손댈 만큼 너 그렇게 멍청한 새끼 아니면서.”

남자가 헉헉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 짓은 더 거칠고 빨라졌다. 곧 구멍 안에 뜨끈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이미 한 발 뺐으면서도 남자는 계속해서 안을 치댔다. 정액에 흠뻑 젖은 안에서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약을 가져갔나, 지켜보려고 했었는데. 한 번 더 나한테 먹였다가는 발목이라도 분지르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걸 본인이 먹을 줄이야. 취해서 품에 안겨 오기까지 했었잖아.”

줄줄이 쏟아지는 남자의 말에 나는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피부밑 벌건 속살을 그대로 남자에게 내보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제, 제가 취해서….”

뒤늦게 변명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코웃음뿐이었다.

“약에 취해 있는 때만큼 솔직해지는 적도 없지.”

나는 꽉 다문 잇새로 말을 씹어뱉었다.

“아니, 아니에요…. 누구라도 그때 곁에 있었다면.”

장 대표가 내 목을 잡고는 벽으로 찍었다. 나는 팔을 버둥거리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입 닥치고 내가 시키는 말이나 해.”

나는 팔을 축 늘어뜨리고,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러자 남자가 내 턱을 아프게 부여잡아 왔다. 아프다고 어깨를 긁어 대자 힘이 빠졌다. 그러나 귓가를 파고드는 남자의 목소리는 멈추는 법 없이 계속됐다. 내 거라고 말해, 내 거라고 말해. 나는 행위 내내 남자의 부름에 응해 준 적 없었다.

***

소파에 빨래처럼 널린 채로 눈을 떴다. 바지는 여전히 허벅지에 걸쳐 있었다. 손가락 하나 꿈쩍할 힘이 없어 그 상태로 눈만 껌뻑거렸다. 손을 소파 아래로 툭 떨어트리자, 시계가 축 늘어졌다. 살이 빠진 탓에 이젠 손목에서 쑥 빠져나올 것처럼 커져 버렸다.

머리맡에 돈다발이 뭉친 채로 놓여 있었다. 제 성질머리를 제가 못 이겨 지갑에서 뭉텅이째 빼서 던지듯 놓고 갔을 장 대표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그 이후로는 몸을 섞을 때마다 화대가 주어졌다. 이번에는 돈으로 받긴 했지만 주로 지폐들이 화대였던 골프장 때와는 달리, 이젠 사치품들이 주를 이뤘다.

값비싼 명품 옷들, 손목에 차고 있는 것보다 더 비싼 시계와 더불어 왜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장신구들….

물론 나는 그것들 모두 거들떠보지 않았다. 저것들도 내가 갚아야 할 것들이라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왔다. 장 대표도 내가 저것들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단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계속해서 헉 소리 나오게 비싼 것들을 내게 보냈다. 내 장기를 모두 뽑아 팔아도 평생 갚지 못할 것들이 이 주에 걸쳐 매일같이 빗발처럼 퍼부어졌다.

어제는 하다하다 외제차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차 키까지 보내 왔다.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장 대표를 불렀다.

‘대표님.’

이 주 만에 거의 처음 입술을 떼는 거였다. 남자의 눈이 내게로 향해 왔다. 어차피 쓰지 않을 거니까 그만 보내라 하고 싶었는데. 괜히 성질을 돋울까 싶어 그냥 뒀다.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던 입술을 다시 다물자, 남자의 시선이 이내 내게서 거두어졌다.

그리고 오늘. 나 혼자 있는 병실엔 무언가가 또 도착했다. 화분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그걸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소각장에 버렸다.

“…….”

저녁이 되어 장 대표가 집에 돌아왔다. 그는 방 안에만 있던 나를 밖으로 끌어내 식탁 앞에 앉혔다. 아침에 아주머니가 차려 놓고 나간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굳이 치울 생각조차 안 했다. 이미 CCTV로 확인해 내가 이걸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차갑게 식은 음식 위로 남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먹어요.”

숟가락을 들어 싸늘하게 식은 국물을 떠먹는 시늉을 했다. 윗부분이 약간 딱딱해진 밥알도 우물우물 씹었다. 요 며칠 잠을 설친 탓일까. 혀끝에 혓바늘이 돋아 입 안이 까슬까슬했다. 더 이상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자, 무서운 눈빛이 내게로 꽂혀 왔다.

“깨끗이 비워요.”

타협은 보지 않겠다는 얼굴. 대체 왜 저렇게까지 밥에 집착하는 걸까. …아, 허리랑 힙 빠지면 가만 안 둔다고 했었지. 비쩍 마르면 제 취향에 맞지 않으니까 억지로라도 먹이려고 거겠지. 씹질에 저렇게까지 열성일 일일까. 속으로 빈정대며 맨밥을 억지로 목구멍 안에 쑤셔 넣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느릿한 손길로 결국 밥그릇을 모두 비워 냈다. 무척이나 엿 같았다. 은연중에 좆같아하는 게 얼굴로 드러났는지, 장 대표가 이맛살을 구겼다.

“웃어.”

그의 말에 입가 근육을 당겨 웃었다. 눈매는 전혀 움직이질 않아, 결과적으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것 같은 애매한 얼굴이 됐다. 남자의 얼굴이 불쾌감에 무참히 일그러졌다.

“눈으로 웃으라고.”

“…….”

이번엔 눈가 근육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이번에도 성에 차지 않는지, 남자가 턱 근육을 씰룩거렸다. 이미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저렇게 언짢아하는 건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묘한 신경전이 이뤄졌다. 팽팽하게 맞붙고 있던 그의 시선이 내 목에서 가슴으로 옮겨 와, 손목까지 타고 내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텅 비어 있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이 집으로 들어온 후. 잠시라도 손목시계를 풀어 놓으면 남자는 불쾌감을 마구 표출해 댔다. 그래서 잘 때도 무조건 차고 있던 건데. 답답한 데다가 꼴도 보기 싫어 풀어 놓은 게 화근이 됐다.

“시계 가져와요.”

장 대표의 말에 의자에서 일어나 머무르던 방으로 향했다. 협탁 서랍에 넣어 두고 있던 시계를 갖고 나오자, 남자가 명령했다. ‘침실로 가서 시계 손목에 채우고 다 벗어.’

“…….”

“…….”

남자의 방으로 들어왔다. 기계적인 손길로 옷을 벗곤 시계만 손목에 채워 침대에 엎드렸다. 장 대표는 그새 샤워를 하고 나와 나체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허리에 타월만 두르고선 내 뒤에 달라붙었다.

그는 내 둔부를 움켜잡고 양쪽으로 찢듯이 크게 벌려 구멍을 들여다봤다. 구멍으로 남자의 성마른 시선이 와 닿았다. 붉은 살점은 잔뜩 부어서 조금만 만져도 괴롭고 아팠다. 그래도 남자가 삽입하길 원한다면 별수 없이 벌려야 하겠지. 체념하듯 몸에 힘을 쭉 풀고 있는데.

장 대표가 협탁 서랍을 뒤적거려, 안에서 구급함을 꺼냈다. 연고를 제 손가락 위에 쭈욱 짠 후에, 반질거리는 손가락을 내 구멍에 넣고 안을 문질거렸다. 손가락이 안을 푹푹 찌르곤 회오리 모양으로 치덕거렸다. 손길이 무척이나 무자비했다. 나는 이불보를 꽉 움켜잡고 머릴 야금야금 집어 삼켜 오는 고통을 참아 냈다.

“…으흑!”

아파서 허리를 비틀자,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서늘한 시선이 귓가와 목에 달라 붙어오는 게 느껴졌다. 잠시 멈췄던 그는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전히 거친 손길이었지만, 확실히 좀 전보다는 조금 유해졌다. 안을 둥글게 문지르자, 차가운 연고가 주름진 내벽 사이사이로 끼어 들어갔다.

내벽 안 깊은 곳까지 쑤시자, 다리 사이에 이상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스멀스멀 개미가 피부 위로 지나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오줌이 마려운 것 같았다. 나는 허벅지 사이를 비비며 그 기묘한 감각을 참기 위해 애썼다.

“발정 난 강아지 새끼도 아니고.”

굵은 손가락 하나가 더 입구를 쑤시며 들어왔다. 한껏 부어올라 예민해진 살점을 푹푹 들쑤셨다. 척추에 오르는 짜릿함에 허리가 절로 아래로 푹 꺼졌다. 남자는 내 허리를 꽉 붙들고 고정시켰다. 구멍을 빠르게 찔렀다가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연고가 딸려 나갔다. 뒤로도 줄줄 싸는 느낌이었다. 머리 뒤에서 상스러운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씨발, 조이는 거 봐, 이거.”

그 천박한 말에 자극당해선 구멍이 움찔거리며 장 대표의 손가락을 야금야금 물어뜯었다.

“서여원, 이제 내가 뒤에 안 쑤셔 주면 사정도 못 하지?”

장 대표는 답변을 강요했다.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고 발가락이 배배 꼬였다.

그렇게 내 자지는 몇 번 볼품없이 까닥거리다가 멀건 액을 찍 뱉었다. 하얀색의 별 냄새도 없는 병아리 오줌 같은 체액. 그걸 내려다보던 남자가 픽 비웃었다. ‘그럼 그렇지’ 내지는 ‘네가 별수 있겠냐’는 눈빛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남자가 내 허벅지 사이를 시트로 대충 문질러 닦았다. 허벅지 사이로 남자의 손길이 오갔다. 나는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모로 누워 있기만 했다. 뒷구멍만 쑤셨는데 사정했다. 그 사실이 날 못 견디게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정말 눈시울이 다 화끈거렸다.

“…….”

“…….”

남자는 내 구멍을 손가락으로 몇 번 쑤셨다. 입맛까지 다셨다. 당연 내 몸에 제 성기를 묻어 올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내 배꼽을 귀두로 툭툭 치며 사정했다.

그러곤 내 등에 자신의 탄탄한 배를 맞댄 채로 누웠다. 우뚝 선 코가 내 뒤통수에 푹 묻혀 왔다. 목뒤로 뜨거운 숨이 와 닿았다. 그 숨결이 닿을 때마다 허리 부근이 간지러웠다. 발가락이 배배 꼬이다 못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잠든 걸까. 그만 딴 방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려고 하자, 뒤에서 손이 나와 내 팔을 홱 채 갔다. 흠칫 놀라 어깨를 수축하고 있는 사이, 내 몸은 다시 침대 위로 빨려 들어갔다. 허리에 남자의 팔이 감겼다. 나는 그걸 풀어내려 버둥거렸지만, 완력 차이가 현저히 나서 별 소용은 없었다. 결국 몸에서 힘을 쭉 뺐다. 축축이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그에게 부탁했다.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갈라졌다.

“…이거 놔주세요.”

남자가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침대 위에서 씹질하는 건 되고, 같이 잠을 자는 건 안 돼?”

고저 없는 목소리는 사정 기운에 평소보다 톤이 낮았다. 귓구멍을 가르고 들어와 달팽이관을 후비는 저음에 나는 그 모르게 몸서리쳤다. 어서 남자가 날 놔주길 바라며 이불보를 꽉 움켜쥐었다.

“예전엔 안 이러셨잖아요.”

기어 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남자가 내 몸을 제 아래로 홱 잡아당겼다. 내 위를 점령한 남자의 굵은 목엔 핏대가 팽팽히 서 있었다. 번뜩, 남자가 돌연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켜 놓은 후레쉬처럼 안광이 빛을 발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카메라 없는 화분 들여놨잖아. 왜 아직도 지랄이야.”

“…….”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말투. 그 앞에서 도저히 실망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외면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

남자는 내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에 코를 묻곤 냄새를 빨아들였다.

“내 좆 빨면서 컥컥대는 게 일상이면서.

나는 남자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로 눈을 내리감았다.

“지금도 내 아래에 있으면서 내 것이 아니라고?”

이 상태에서 침묵하면 그건 긍정이었다. 그래서 난 작게 고갤 내저었다. 남자가 내 손목을 침대에 찍어 누르며 차갑게 욕지거릴 뱉었다.

“개좆같은 소리.”

어물거리는 목소리로 뜨문뜨문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값 치르신 거 제 뼈랑 살가죽뿐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것까지 멋대로 주무르려고 들지 마세요.”

가까이에서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 대표가 날 준열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럼 뭘 해야 하는데요.”

“…….”

무슨 말이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천천히 눈동자를 그에게로 돌렸다. 남자의 두 눈 안에서 열기가 휘몰아쳤다. 날 향한 광폭한 정욕을 그대로 내비치는 눈동자 때문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나는 아랫입술을 혀로 축축이 적셨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숨을 참아 배를 푹 꺼트렸다. 섬뜩한 기운이 명치 부근을 가로질렀다.

“그것까지 내 멋대로 하려면 나는 이 이상 무슨 수단을 써야 하는 거냐고.”

“…아.”

나는 헉 소리 나게 뜨거운 걸 쥔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명치에 묵직한 돌이 떨어졌다. 날 제멋대로 물건 다루듯 하고 있으면서, 이젠 내 감정까지 원한다는 남자의 말에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남자는 내 몸을 저한테 묶어 놓다 못해 이제 내 감정까지 손바닥 위에 놓고 주무르겠다는 말을 해 대고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간신히 말을 뱉었다.

“…아마 대표님은 못 하실 거예요.”

그건 다른 이가 멋대로 주무를 수도 없는 것일뿐더러, 어떤 수단으로서 얻어 낼 수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을 끝맺자, 남자의 얼굴이 야차처럼 사나워졌다. 분노를 여실하게 내뿜어 댔다. 나는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처음 겪는 감정이,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너무나도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주하고 있는 남자 또한 나 못지않게 무질서한 감정에 휩싸인 듯해 보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남자와 나 사이에 휘몰아쳤다. 그게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켜 올 것 같아 나는 힘껏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당연히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남자는 내 위에 올라타 매섭게 밀어붙여 왔다. 내 어깨를 물어뜯으며 분을 터뜨려 댔다.

고개라도 돌리려고 하면, 내 턱을 으스러뜨릴 듯이 잡아 저를 향하게 했고, 눈이라도 감으려고 하면 내 뺨과 입술을 물어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뺨과 입술이 뜯어 먹힌 듯 아려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한 장 대표의 두 눈은 무언가를 내게 갈구하고 있었다. 한껏 성마른 눈동자를 달고서 내 몸 이곳저곳을 씹고 물고 핥아 댔다. 차마 날 고기처럼 먹지 못해 제 품에 끼고 입질이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한들 나한테선 더 이상 얻어 낼 수 있는 게 없는데. 이를 테면…, 내 마음 따위의 것들 말이다.

“…으흐, 흐!”

별안간 머리에서 자신의 것이라 말하라던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텁! 틀어 막았다. 신음과 함께 새어 나오려 하는 말을 힘겹게 막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장 대표가 집을 나선 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그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웬일인지, 침대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이것 때문인가? 손목 시계를 바라보다가 얼른 그걸 풀어냈다. 툭. 금속성 물질이 묵직한 소릴 내며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포승줄에 묶인 사람처럼 몸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잔상처럼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또다시 가슴을 북 치듯이 둥둥 쳐 왔다. 너무 괴로워서, 눈을 질끈 감고 이불보를 꽉 움켜 잡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나를 몰아세우며 무언가를 갈망하던 그의 눈빛은 망막 안에 깊게 박혀 날 떠날 줄을 몰랐다. 내 손목과 발목을 꽈악 옭아맸다. 귓가에 계속해서 남자의 음성이 맴돌았다.

‘내게 안겨 있는 이 감각만은 무조건 기억하는 겁니다.’

나는 장 대표의 품에 안긴 채로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런 내게 남자는 입아귀를 찢어 웃어 보였다. 몸을 새우처럼 말고 오들거리며 떨었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해 놓은 걸까.

몸에 한기가 흐를 정도로 시린 기류가 장 대표와 나 사이에 흘렀다. 그건 여태까지 없었던 냉전이었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기어코 날 제 옆에 누워 자게 했다. 그러나 오가는 대화 따위는 없었다. 남자와 나는 몸을 섞을 때가 아니면 시선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그렇게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는 며칠이 지났다.

잠깐 잠에 빠져 있다가 옆이 비었음을 깨닫곤 흐르듯이 방을 빠져 나왔다. 테라스에 서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전화를 받는지 한쪽 손엔 휴대폰이 붙들려 있었다. 그의 발치엔 꽁초가 수북했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난간을 두드리는 손끝이 어딘가 그답지 않게 초조해보였다. 그의 머리 위론 손톱처럼 가는 삭이 떠 있었다.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달. 뭔가 불길했다.

***

어딘가 불안한 나날이 계속됐다. 나는 촉을 더듬이처럼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잠깐 의사와 상담을 하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눈들이 하나같이 상단에 붙어 있는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커다란 화면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체 두 구가 어느 산에서 발견됐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위치가 지난번에 장 대표와 갔던 하우스 근처였다. 짐승들에게 산채로 뜯어 먹혀 사체가 훼손될 대로 훼손되어 외관상으론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뭔 일이래, 저건 또.”

“하여간에 말세야, 말세. 요즘 세상 살기 무서워 죽겠다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자극적인 뉴스에 불빛에 모이는 벌레 떼처럼 텔레비전으로 모였다가, 곧 다시 흩어졌다. 이미 흥미를 잃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나는 이미 화면이 전환되어 있는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쫓기듯 얼른 발걸음을 병실로 돌렸다.

…삼촌이 죽었다고? 저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재빨리 병실로 향하는데. 저 멀리서 남자 둘이 엄마의 병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그들에게 붙잡혀 무언가를 답하고 있었다. 남자 둘 모두 체격이 유달리 컸는데, 그럼에도 몸 안에 감춰져 있는 날렵함은 생생히 느껴졌다. 나는 한눈에 그들이 그쪽 계에 몸 담그고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간병인 아주머니의 눈길이 내게로 붙어 오자, 자연스레 나머지 두 남자의 시선 또한 내게로 향해 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서여원 씨 되십니까?”

취조하는 말투라 덜컥 겁이 났지만, 나는 평온함을 유지하려 했다. 그 남자는 내게 경찰 공무원증을 펼쳐 보이며, 자신을 어디 경찰서 소속의 누구라고 소개했다.

…역시. 이미 눈치챘음에도 나는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네, 그런데요.”

남자가 제 품 안에 다시 신분증을 꽂아 놓으며 지껄였다.

“잠깐 얘기 좀 나눕시다.”

이쪽을 흘깃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껴들어 왔다.

“괜찮아요.”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러곤 형사들을 따라나섰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해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텅 빈 계단에 서서 형사 하나가 수첩을 뒤적거리더니, 곧바로 질문을 던져 왔다.

“친부인 서병진 씨, 외삼촌인 임선철 씨가 최근에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사무적인 어조로 말들이 쏟아졌다. 아버지에 이어 삼촌까지 죽었다고…? 처음 듣는 소식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내 얼굴로 벼린 듯 날카로운 시선들이 달라붙어 왔다. 손안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그건 내가 바로 범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남자가 내게 했던 말을 되새겼다. 언제든 이런 일이 들이닥치면, 남자는 어설프게 속이려 들지 말고 있는 사실만 말하라고 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주변 이웃들한테 물어보니까 1년 반 넘는 시간 동안 거의 눈에 안 띄었다던데. 어디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로열 골프장이라는 곳에서 숙식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아버지와 삼촌과는 관계 끊은 지 오래였고요. 죽었다는 소식은 뉴스를 통해 보고 추측만 했습니다.”

음, 목을 울린 형사가 다음 질문을 해 왔다.

“20XX년 1월 25일에 뭐 하고 계셨습니까.”

그날은 거의 하루 종일 병실에서 살다시피 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 병실에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프셔서요.”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사실을 증명해 주실 분이 있습니까?”

“간병인분과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있었으니까 그분이 증인입니다.”

으음, 형사가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을 끌었다. 이미 간병인 아주머니한테서 확인을 끝낸 이후일 거였다. 그럼에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혹여나 이 심장 소리가 그들에게 들릴까, 허벅지가 후들 떨렸다. 그가 몸의 중심을 다른 쪽 발에 옮기며 물었다.

“혹시 아버지와 삼촌 주변에 원한 살 만한 사람 있습니까?”

“워낙 많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형사 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수첩을 덮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며, 수사에 협조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언제든지 생각나는 게 있으면 전화 달라며 내게 명함 한 장을 건네곤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감히 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릴 지배했다. 형사 둘이 병원 출구로 빠져나가는 걸 복도 창문으로 확인하곤 당장 병원에서 나왔다. 입구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나는 병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는 내내 심장이 무서우리만큼 빨리 뛰었다. 뭔가에 쫓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됐다.

***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집 문은 웬일인지, 활짝 열려 있었다. 곧이어 열린 문으로 직원 하나가 내 금고를 들고 나왔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 직원의 등을 지켜보고 서 있다가 신발도 벗지 못하고 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실 정 가운데에 장 대표가 내게서 등을 진 채로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기울어진 해에 맞춰 길게 늘어졌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의 등이 평소와 달리 그늘져 있어, 뭔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남자에게 뛰어가 그의 허리춤을 움켜잡았다. 그러곤 누군가 들을까 싶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언질했다.

“대표님, 오늘 병원으로 형사들이 왔었어요.”

“…….”

“삼촌이 죽었다고 하던데.”

직접 입 밖으로 내뱉자, 그제야 내게 그 사실이 들이닥쳐 왔다. 삼촌이 죽었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너무나도 두려운 문장이었다. 몸을 버티고 있는 다리 안쪽, 오금까지 아프게 저렸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 남자가 삼촌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지 그 여부가 더 중요했다.

“저한텐 그 이상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셨잖아요.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하셨잖아요.”

“병원을 탈출해선 도박장을 전전하다가 쌓인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삼촌다운 죽음이었다. 남자의 입술에서 ‘내가 그랬다.’는 말이 나오면 어쩌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던 나는 얼른 물었다.

“그럼 대표님은 관련 없으신 거죠?”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그 찰나를 이기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관련 없으시잖아요.”

그건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 달라.

“몸이 약해져 있으니까 뒤진 거겠죠.”

내가 배를 갈랐으니까. 남자는 그렇게 덧붙였다. 무서운 말을 눈썹 하나 꿈적하지 않고 하는 남자 때문에 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대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고 있는 나를 두고 장 대표는 목을 울리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내게로 고갤 돌려 온 그는 딴소릴 해 댔다.

“병원과 멀지 않은 곳에 집을 내줄 테니까 거기에서 다니세요.”

“…네?”

남자는 담배를 피우며 이상한 소릴 지껄여 댔다. 그러곤 대답 없이 지갑을 열어 수표 여러 장을 꺼냈다. 그러곤 그걸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것들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껄였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쓰고 있어요. 내 일인데.”

나 때문에 벌인 일인데.

“아니, 이건 내 일이에요. 임선철 씨가 빚을 갚지 않아, 내가 나서서 목숨값을 받아 냈을 뿐입니다.”

…또 그 소리!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상황, 남자의 뜻밖의 말. 눈앞에 들이밀린 상황과는 반대로 고요히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 그는 마치 일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태연자약하게 굴었다. 며칠 전, 테라스에 서서 줄담배를 뻑뻑 피워 대던 남자의 뒷모습이 상기됐다.

설마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당혹스러운 데다 불안해서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장 대표가 내 시선을 오해했는지 이상한 소릴 해 댔다.

“어차피 서여원 씨는 알리바이가 있어서 금방 혐의를 벗을 겁니다. 신경 쓰고 있지 않아도 돼요.”

내게 구태여 병원 사람들에게 모습을 내보이라고 했었던 그이다. 남자는 혹시 모든 혐의점이 자신에게로 향할 것까지 예상했던 걸까. 눈앞이 컴컴해지는 순간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대표님 남 때문에 손해 보고 그러시는 분 아니잖아요.”

남자는 뭐라 답이 없었다. 그저 담배만 뻑뻑 피워 댈 뿐이었다. 그와 대치 상황을 이루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통수에서 제3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준비해 뒀습니다.”

남자가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나를 눈짓했다.

“…저 가기 싫어요.”

“너 때문에 일 뒤얽히면 더 복잡해져.”

“…….”

뱀눈이 날 향해 왔다. 문득 재밌는 걸 떠올렸다는 듯 눈꼬리가 휘어졌다.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즐거운 기색을 얼굴에 띠고는 지껄였다.

“오히려 일이 뒤틀려야 서여원 씨한텐 더 좋은 거 아니에요? 내가 불행해지면 좋겠다면서.”

“…….”

“네가 바라던 대로 됐잖아. 뭐가 문제야.”

그에게 했던 말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당신이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심장이 배 밑으로 쿵 떨어졌다. 즐거운 농담을 했다는 듯이 입술을 길게 찢으며 웃는 남자와 달리, 난 충격에 휩싸였다.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심으로 그의 불행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라도 해야, 그렇게라도 해야 남자의 품에 안기는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남자를 저주했던 것뿐이다. 나는 남자를 혐오하고 있다, 혐오하고 있다. 최면을 걸었던 것뿐이었다. 결단코 남자가 진창에서 구르길 바란 건 아니었다.

“…싫어요.”

나는 계속해서 고갤 내두르며 가기 싫다고만 반복했다. 장 대표가 뒤에 서 있는 직원에게 나를 턱짓했다. 직원이 내 몸을 붙들어 왔다. 커다란 손이 내 팔뚝을 한 번에 덮어 왔다.

“이거 놔.”

나는 그 손을 떨쳐 내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힘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자와는 힘의 크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남자에게 이걸 풀어 달라고 눈길을 보냈지만, 날 향한 눈빛은 그저 무심해 보이기만 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럼 남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덜컥 무서워져서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던 장 대표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바늘조차 뚫지 못할 것 같은 남자의 피부를 코로 푹 찍었다.

“…가기 싫어요. 저 그냥 여기 있을래요.”

바로 며칠 전 밤, 장 대표와 함께 잠들기 싫어 거부했던 일이 무색하게 나는 그에게 여기 같이 있겠다고 매달렸다. 삵처럼 가느다랗던 남자의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다가 점점 무언가로 차올랐다. 뭐라 딱 잘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안에서 넘실거렸다. 건조하기만 했던 두 눈에 끈적거리는 이채가 서렸다. 처음으로 동요를 보인 남자가 내 손목을 잡아채 왔다. 그러곤 손으로 꽉 잡고 있던 무언가를 내 손목에 채웠다. 내가 병원에 가며 풀고 나갔던 손목시계였다.

남자가 명심하라는 듯, 일렁이는 눈동자로 분명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갈 테니 안심하지 말고 있어요.”

그러곤 내 팔목을 놓고 직원에게 지시했다.

“데려가.”

여태까진 장난이었다는 듯, 직원 둘이 본격적으로 힘을 썼다. 내 어깨를 꽉 부여잡곤 나를 집에서 질질 끌어냈다.

“이거 놓으라고!”

장 대표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서 있었다. 그의 등에서 새로운 연기가 하나 더 피어올랐다. 먹구름 같은 담배 연기가 서리서리 위를 타고 올라가, 천장을 가득 메웠다. 그게 마지막으로 본 남자의 모습이었다.

***

나는 혼자만의 집에 갇혔다. 여전히 외출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감금이 그 자체로 목적을 띠고 있었다면, 지금은 다른 이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감금이었다.

식욕, 수면욕, 나는 그것들을 포함한 모든 욕구를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 그저 공허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겹겹이 쌓여 있는 갈비뼈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것 같았다.

나는 병원을 오가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찾는 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남자의 부재는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그사이 형사들이 몇 번 더 병실에 들렀다. 매번 비슷한 질문만 하고는 번번이 돌아갔다. 장 대표의 말대로 알리바이가 너무 견고한 탓에 나는 너무나도 손쉽게 혐의를 벗었다.

이번에도 수첩을 덮고 그만 돌아가려는 형사에게 묻고 싶었다. 장기주,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냐고. 그런데 괜한 말 한마디로 일을 그르칠까 봐, 쉬이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물고기처럼 입만 벙끗대다가 다시 빈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장 대표 집보다 생활감이 없는 새집에는 간간이 직원만 오갔다. 직원들 중에 제일 직급이 높아 보이던 직원이 하루마다 나를 찾아와 내 끼니를 챙겼다. 최근에서야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김중덕, 나이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병원을 오가는 길에 차 뒷좌석에 침울하게 앉아 있는데, 백미러로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앞쪽으로 고갤 돌렸더니 그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내게 그런 정보들을 늘어놓았다. 마치 잠깐이라도 내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해 주려는 것처럼.

부엌으로 들어온 김중덕이 손조차 대지 않은 음식들을 발견하곤 한숨을 푹 내쉰다.

“또 안 드셨네.”

허이고, 탄식하며 짧은 뒷머리를 마구 득득 긁어 댔다.

“오늘은 또 뭐라고 보고해야 하나.”

고뇌에 빠져 있는 김중덕의 뒤에서 나는 입술을 한참 잘근잘근 깨물었다가 간신히 물었다.

“…저기, 대표님은요?”

“대표님 당연히 잘 계시죠.”

내게 장 대표의 명함을 내밀며 건실한 회사라고 소개했던 그 얼굴을 달고선, 말을 줄줄 이었다.

“술도 많이 드시고, 담배도 뻑뻑 태우면서 예전처럼 잘 계십니다.”

그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염치를 무릅쓰고 김중덕에게 중얼거렸다.

“그럼 전화라도…….”

“아, 전화.”

국어책을 읽는 듯이 그가 내 말을 되풀이했다.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

잘 계신다는 사람이 전화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말을 잃고 시선을 내리깔자, 이마로 김중덕의 목소리가 달라붙어 왔다.

“거 왜,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있잖아요.”

“…….”

“그러니까 밥은 좀 드시자고.”

남에게 으름장을 놓는 게 더 어울리는 체구와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다. 바쁠 게 분명한 사람이 고작 내 끼니 때문에 이 집을 오가는 게 죄송했다. 나는 손을 모으곤 목을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곤 힘없이 발걸음을 돌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시간을 솜 인형처럼 침대 위에 널브러져서 보냈다. 매끼마다 직원이 사식처럼 끼니를 방으로 넣어 와도 나는 모르는 척,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장 대표에게서 소식이 들리지 않는 하루, 하루가 늘어날 때마다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삼촌의 죽음 때문인 걸까.

날 찾아오는 주기가 점점 띄엄띄엄 멀어졌던 악몽은 이 집에 온 뒤로 전보다 더욱 극심해졌다. 잠깐 잠에 들었던 나는 허억, 헉 대면서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어둠 속에서 환영을 보았다. 이번엔 피 칠갑을 한 몸뚱어리가 두 구였다. 끔찍한 형상에 나는 침대 헤드까지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한껏 뒤로 물러서서 여러 번에 걸쳐 숨을 짧게 몰아쉬었다.

“…헉, …허억… 하아…….”

툭툭 손목을 쳐 오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시계를 감싸 쥐었다. 초침은 여느 때처럼 뛰고 있었다. 남자가 떠난 이후로 시침은 벌써 백 바퀴 가까이를 이 안에서 돌았다. 나는 그 모든 매시, 매분, 매초를 몸소 느끼고 있었다.

똑딱똑딱. 지금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다른 때라면 장 대표가 무표정한 얼굴을 달고 내 뺨을 어루만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쏟아 내는 눈빛과 말은 매서웠지만, 이상하게도 품만은 따뜻했던 남자였다.

“…….”

똑딱똑딱.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남자의 부재가 늑골이 아플 정도로 느껴졌다. 나쁜 꿈에서 깨어났지만,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적막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밀도 높은 어둠 속에 갇혀 끝없이 침전했다.

***

먹지 않고, 자지 못하는 하루들이 늘어갔다. 내 끼니를 챙기는 김중덕은 이젠 사정해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발 밥 좀 먹으라며, 이러다간 제가 혼난다고 애원을 했다. 그 어느 것 하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가슴에 무릎을 붙이고 쭈그려 앉아만 있었다.

“…….”

한참을 허공만 보고 있는데. 도어 록 소리가 났다. 고개를 홱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대방을 확인한 나는 크게 실망했다. 또 김중덕이었다. 풍채가 집채만 한 그가 내게 잠깐 현관문 좀 잡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문고리로 문을 잡고 있었다. 김중덕이 품 안 가득 무언가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에 몰래 빼 온 거예요.”

…그 망할 놈의 책장이었다.

책장을 내 침대 옆에 붙여 놓은 김중덕은 큰 한숨과 함께 집을 나섰다. 왜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책장을 빼 온 걸까.

…혹시 남자가 내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는 말을 전한 게 아닐까. 나는 그제야 꼴도 보기 싫어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것을 들여다봤다.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 중 하나에 손끝을 대곤 조심스레 훑었다.

“…….”

주인이 없던 책장엔 그새 먼지가 쌓여 있었다. 책들을 하나하나 슬슬 쓸어보던 손이 안으로 곱아들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댔다. 창문을 넘어온 꼭두서니빛 노을이 책장 위로 햇볕 부스러기들을 뿌려 댔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 하루, 하루가 그렇게 쉬이 넘어갔다. 메마른 종잇장처럼 버석거리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이제 더 이상 형사들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남자의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나를 정말 미치게 만들었다. 불안해서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매일 뉴스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산에서 발견됐다는 시체 두 구 이야기는 더 실어 주지 않았다. 하루에도 지독히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사회라, 그 정도의 사건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잊혀졌다.

방 안에서 책장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서여원 씨.”

문밖에서 김중덕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밥시간이 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시하려고 하는데,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건네 왔다.

“어머님 깨어나셨답니다.”

그 길로 바로 병원으로 나섰다. …엄마가 깨어났다고? 나는 두 눈으론 확인해 보지 않고선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옷도 덜 챙겨 입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병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침대를 가운데에 두고 한데 모여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눈에 띄었다. 내게 희망을 걸고 있는 게 좋지 않다고 말했던 의사가 웬일로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침대에 바짝 붙어 섰다.

“…엄마.”

여전히 호흡기를 매단 채로. 침대 위의 엄마는 거짓말처럼 눈꺼풀을 반쯤 뜨고 있었다. 흐릿하지만 분명히 내 쪽으로 향해 오는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내 눈시울 또한 뜨겁게 부어올랐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엄마가 먼저 힘겹게 팔을 올려 내 쪽으로 손을 쭈욱 뻗어 왔다. 나는 이제 흉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손으로 엄마의 손을 붙들었다.

“…엄마.”

나는 엄마의 손에 한참 동안 눈을 묻고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이 연신 내 눈가와 뺨을 쓸어 줬다.

***

엄마는 아주 느릿하게 회복해 나갔다. 하루의 18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다가, 잠깐씩 밥 먹고 바람이나 쐬는 게 전부였다. 거동은 아직 불편해하셔서, 고작해야 서너 걸음 걷고는 다시 휠체어에 앉으셨다. 점심을 함께한 뒤, 엄마를 휠체어에 모시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겨울이 한창이던 바깥엔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해 있었다. 그동안 넋을 빼놓고 살았던 탓에, 발 앞에 성큼 다가온 따뜻한 볕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바람이 조금 차서, 나는 엄마의 외투 단추를 재차 단단히 여며 주고는 휠체어를 밀었다.

우리는 병원 주변을 천천히 돌며 산책했다. 부드러운 봄기운을 흠뻑 들이마시려 산책 나온 환자와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엄마가 뒤에 서 있는 내게 손을 뻗어 오더니, 오랫동안 쓰지 않아 상한 목을 울렸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지?”

봄. 이맘때쯤이면 다음 학기가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는 엄마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가냘픈 몸을 앞에 두고 있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이내 휠체어의 손잡이를 놓곤 엄마의 시선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네.”

마주 보는 엄마의 뺨은 생명이 빠져나갔던 기간만큼 부피가 줄어 있었다. 얄팍한 입술엔 하얀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날 향한 얼굴에 걸린 미소는 예전의 것만큼 환했다. 나 또한 웃으면서 고갤 끄덕거렸다.

“곧 졸업하겠네.”

엄마가 내 뺨으로 손을 뻗으며 내 얼굴을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엄마가 얼른 털고 일어나야 할 텐데. 병원비 많이 나올 거고.”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좋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다행이다, 이 와중에도 병원비 걱정을 하는 엄마의 손등을 쓸어 주었다.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을 맞으며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여상하게 좋은 날씨와 예쁘게 싹을 틔운 꽃에 대해 얘기했다.

마음 아픈 이야기는 전혀 오가지 않았다. 엄마가 깨어나면 이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혹시라도 미움받으면 어쩌지, 놀라시면 어쩌지 싶었는데. 엄마는 병실을 찾지 않는 아버지와 삼촌에 대한 얘기는 일절 묻지 않았다.

우리는 되도록 행복한 것들로만 대화를 꾸려 나갔다. 마치 그러기도 시간이 없다는 양.

***

엄마가 깨어난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병실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밤이 되면 간병인 아주머니와 교대해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곳에도 온기 하나 없는 집엔 마음 둘 곳이 전혀 없었지만…. 혹시나 장 대표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지런히도 그렇게 했다.

벌써 잠에 들지 않은지 나흘째.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지, 잠깐 소파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여지없이 또 악몽의 습격이 가해졌다. 나는 으으 신음을 뱉으며 괴로워하다가, 나도 모르게 손끝을 갈퀴처럼 만들어 옆자리를 득득 긁어 댔다. 손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며 사방을 더듬거렸다. 어느 군데 하나 온기 없이 싸늘했다.

그러다가 온몸이 식은땀 범벅인 채로 꿈에서 확 깨어났다.

“……허억!”

공포심에 확 떠진 눈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뛰어 들어왔다. 끝을 모르게 방대한 이 어둠은 철저히 외로움의 세계였다. 그곳에 맨몸으로 혼자 내던져진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허물어졌다.

…여기엔 나 말고 아무것도 없다.

그 싸늘하고도 잔인한 현실에 공처럼 몸을 말아 자신의 품을 스스로 껴안았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품으로 끌어당겨도 배 안이 텅 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론 턱없이 부족했다. 이미 몸이 남자에게 안겨 있던 그 감각을 뼛속 깊이 새긴 뒤라, 이것으로는 충족되지 않았다.

또 손목시계를 움켜잡았다. 어느덧 시간은 3시. 남자는 오늘도 올 기색이 없었다.

“…….”

…안아 주던 남자가 이젠 곁에 없다.

“…아.”

나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이, 한 번도 불을 밝혀본 적 없는 전구에 빛이 들어오듯이, 그렇게 불현듯 깨달았다. 이토록 많은 악몽이 날 찾아온 건 단순히 집을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게 아니라 남자의 부재 때문이라는 사실을.

“……흐윽.”

각질이 내려앉아 마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내 곁에 없어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인정했다.

내가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간 그를 부정해 왔던 시간들이 나를 매섭게 덮쳐 왔다. 산사태처럼 와르르 무너져 날 짓눌러 왔다. 두 손바닥으로 꽉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울컥 터져 가슴 밖으로 줄줄 범람했다.

분명 시간이 있었는데. 불행하라고 저주했던 말이 사실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할 시간이. 나는 뒤늦은 후회로 흐느꼈다. 흐윽, 흑. 갈비뼈 안 쪽이 쿡쿡 쑤셔서 그 부근을 부여잡았다.

자신의 감정을 토해 내던 남자의 혼란스러운 얼굴이 닫힌 눈꺼풀 안에서 일렁거렸다. 그러는 그조차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왜 날 몰아세우고 있는지 제대로 이유를 모르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저 성마르게 내게 감정을 토해 내라 윽박지를 뿐이었다.

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내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했고, 남자는 제 손에 잡히지 않는 나 때문에 안달 나 했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상태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이제 혼자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삐그덕 대는 것뿐이었다.

“…….”

떠난 남자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가, 내게 감정을 내놓으라며 윽박을 질러 대던 그가 보고 싶었다.

주먹을 꽉 쥔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혼자 흐느꼈다. 한쪽에 있는 책장이 그런 날 내려다보았다.

***

오늘도 병원에 가야 하는데. 밤새 손등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던 바람에 그만 눈이 퉁퉁 부어버렸다. 짓눌려서 새붉어진 눈두덩과 눈을 가리려 아침부터 차가운 물에 연거푸 세수를 했다. 피부를 찢을 것처럼 시린 물로 얼굴을 여러 번 닦고 나서야 김중덕의 뒤를 따랐다. 일부러 시선을 비끼자, 김중덕은 모른 척 운전석에 올라탔다.

“과일이 되게 크고 실하다.”

김중덕이 내 손에 붙들려 보낸 과일 바구니를 본 엄마의 평이었다. 엄마와 나는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복숭아를 깎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과육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까서 한입 크기보다 작게 조각을 냈다. 그중 하나를 들어 엄마의 입에 넣어 줬다.

“엄마가 우리 여원이 가졌을 때, 이 복숭아가 얼마나 입에 당겼는지 몰라.”

엄마가 내 뺨을 어루만져 왔다. 과거를 더듬는 목소리가 점점 느릿해졌다.

“낳아 놓고 보니까 뽀얀 애가 양 뺨만 발간 거 있지.”

엄마의 움푹 들어간 눈매 안에서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애가 언제 이렇게 컸지.”

엄마의 몸은 너무 말라서 병원복의 품이 엄청나게 남았다. 나는 허릴 잔뜩 움츠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다가, 그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통장을 내보였다. 내 손에 들려 있는 통장을 본 엄마는 작게 감탄했다.

“아, 이거. 찾았구나.”

엄마는 통장을 천천히 넘겨 보며 감상에 젖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엄마의 감상에 함께 했다. 엄마는 나를 위해 남겨 놓은 흔적들을 눈으로 하나하나 되짚으며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병원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가 나왔다. 엄마는 내가 먹지 않으면 한 술도 뜨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나오셨다. 하는 수 없이 죽을 떠서 엄마에게 한 입씩 드리면서 나도 내 몫을 조금씩 비워 나갔다.

부드러운 죽조차 쉬이 잘 삼키지 못하는 엄마는 번번이 죽을 흘리셨다. 나는 휴지로 꼼꼼하게 엄마의 입술을 닦아 드렸다. 그렇게 부지런히 그릇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잠시 소화를 위해 산책에 나섰다.

엄마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즐기다가 다시 병실로 돌아가려는 와중이었다.

“……!”

내 시선 끝에 누군가가 걸려 왔다. 남들보다 월등히 큰 체격에 어두운 차림을 한 남자. 휠체어를 천천히 끌던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여원아?”

의아하다는 듯 날 지켜보는 엄마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 엄마. 잠시만요. 저 금방 돌아올게요.”

나는 그 길로 남자를 쫓아나갔다. 제법 거리가 먼 탓에 혹시라도 놓칠까 봐 전력을 다해 뛰었다. 허억, 허억….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키가 월등히 큰 탓에 남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손을 내뻗어 그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

기대하던 이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이었다. 나는 얼른 그의 팔을 놓으며 죄송하다고 고갤 숙여 사과했다. 남자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한 눈길을 내게 던지곤 다시 걸음을 이어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남자의 팔을 잡아챘던 손이 점점 밑으로 하강했다.

나는 움직여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어 병원으로 돌아왔다. 입구에서 걱정스럽게 무슨 일 있냐고 묻는 엄마에게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아, 죄송해요.”

“무슨 걱정 있니?”

아니요, 그런 일 없다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얼굴에서 근심을 지워내지 못하는 엄마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그냥 아는 사람이랑 닮은 사람을 좀 봐서요.”

그러고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곤 병실로 돌아왔다. 이끌고 있는 휠체어 위 엄마의 무게는 가볍기 그지없는데, 왜 이렇게 발걸음이 무거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남자는 이제 장소도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내 안에서 벌컥, 벌컥 솟아났다. 그건 나 혼자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되기도 했고, 그 집에서 병원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가 되기도 했고, 좀 전처럼 엄마와 함께하고 있을 때가 되기도 했다.

“…….”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밀어닥쳐 무서울 정도로 나를 매몰시켰다. 장 대표가 나 때문에 복잡한 일에 뒤엉켰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무력감이 느껴졌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감정들 중, 파이의 몫이 가장 큰 건 불안감이었다. 장 대표가 아직도 날 곁에 두고 싶어 할까, 와 같은 걱정이 하루에도 몇십 번 머릿속에 스쳤다. 나 때문에 지금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 텐데.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고 살던 남자가 유독 나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예외적으로 굴곤 했는데. 이번엔 사안이 컸다.

“…….”

예전엔 내 몸을 자신에게 묶어두려고 하는 남자가 끔찍하게 무섭기 그지없었는데, 이젠 그가 날 더 이상 찾지 않을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남자가 그리웠다. 한 번 그걸 시인하고 나자, 나는 이제 그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

집에 있는 건 그 무엇에도 온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하면. 나는 여느 때처럼 손을 내뻗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책장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불현듯 책 한 권이 눈길을 끌어왔다. 그러고 보니 모두 제대로 꽂혀 있는데, 그 책만 거꾸로 서 있었다.

“…….”

책 제목이 유독 눈에 익었다. 저건 장 대표가 집으로 오기 전까지 내가 시간을 때우려 읽고 있던 그 책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걸 보곤 남자가 그다음 날에 아예 내 몫의 책장을 들여왔었다. 그러니까, 이건 원래 남자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란 말이다. 여태까지 가만히 두고 지켜볼 생각만 했지, 책을 꺼내 볼 마음은 먹지 못하고 있던 나는 홀린 듯이 그 책 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검지로 책을 들어내 손아귀에 쥐었다. 기분 탓인지, 이전보다 좀 더 무게가 묵직했다. 나는 조심스레 책장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내 손 안에서 책장이 부드러이 넘어갔다.

“…….”

이제 막 다음 책장을 넘기는 순간이었다. 책갈피처럼 안에 꽂혀 있던 뭔가가 촤라락 소릴 내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흠칫 놀란 나는 얼른 뒷걸음질 쳤다. 펄럭 소릴 내며 바닥에 흩뿌려진 건 모두 사진들이었다.

…이게 뭐지.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리다가, 사진에 손을 뻗어 자세히 들여다봤다. 색소가 약간 옅은 머리칼에 하얀 얼굴, 시선을 묘하게 내리깔고 있는 남자는 분명 ‘나’였다. 직사각형의 프레임 한 장, 한 장에 모두 크고 작게 내가 찍혀 있었다.

“…….”

나는 사진들을 손끝으로 하나하나 더듬었다. 때와 장소, 그리고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진엔 나로 빼곡했다.

…집 입구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는 나, 병원으로 향하는 나, 엄마와 산책을 나간 나, 홀로 남은 집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

뒤집혀 있는 사진들까지 모두 확인해 봤다. 마지막 장엔 작게나마 웃어 보이는 내가 담겨 있었다. 함께 찍혀 있진 않아도 웃어 보인 상대가 엄마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

헛웃음이 터졌다. 이 정신 나간 남자는 이런 식으로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렸다. 그게 너무 남자다워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주변인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참 지독하게도 렌즈가 가리키는 방향은 고정되어 있었다. 무척이나 일방향인데다가, 무섭도록 집요했다.

나만이 찍혀 있는 사진들. 그 사진들에서 나 몰래 내게 와 있었던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그의 부재를 느끼며 괴로워하는 동안, 그 또한 내 부재를 느끼고 있던 거였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안이 됐다. 퍼석퍼석 말라 가던 나를 위로했다. 나는 한참이나 사진 앞에 앉아 그것들을 만지작거렸다.

***

엄마와 오롯이 둘만 함께하게 된 나는 종종 병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천사 링처럼 드리워져 있는 걸 바라보다가, 저 밑을 눈여겨보았다. 늘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어 추워 보이던 나무에 새순이 돋아 있었다. 곧 봄이 올 것만 같았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뺨을 문지르는 바람을 느꼈다. 아직 찬기가 조금 남아 있는 바람이었지만, 추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여원아.”

넋을 놓고 있는 바람에 뒤에서 엄마가 날 부르고 있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가.”

조금 더 분명해진 목소리에 얼른 고갤 돌렸다.

“…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니?”

기다리는 사람. 엄마의 손이 내 머릴 쓸어 넘기고, 뺨을 매만졌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넋을 놓고 있길래.”

나는 엄마의 말에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이내 나무에 새록새록 피어나 있는 새순을 가리켰다. 새치름하게 아가리를 다물고 있는 게 꽃을 피우면 꽤 예쁠 것 같았다.

“…곧 봄이 올 것 같아서요.”

“새순을 보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보고 있던데?”

엄마의 말에 나는 아니라고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로 있다가,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혼자 남겨져 있을까 봐 무서웠는데.”

“…….”

“함께하고 있는 이가 있었구나.”

함께하고 있는 이. 엄마의 말에 눈앞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입술을 위로 끌어당겨 미소 지었다. 너무나도 어색하게 지은 미소라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엄마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자연스레 드리워졌다.

“다행이다.”

엄마는 그렇게 읊조렸다. 우리는 창문 밖을 응시했다. 손을 겹친 채로 나란히 앉아 따뜻한 봄볕을 얼굴로 맞았다. 병원에 갇혀 있어 답답했는지, 엄마는 탁 트인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몸이 다 나으면, 꼭 그러자고 말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나는 그 창문 앞에 혼자 서서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순만이 돋아 있던 나뭇가지엔 어느덧 푸르른 녹음이 가득했다. 나는 공허한 눈동자로 내게 손을 흔드는 파란 잎들을 응시했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바람과 함께 꽃내음이 곁들어 왔다.

부드러운 바람이 유영하듯 날아가선 뒤에 놓인 침대에 가 닿았다. 이미 온기를 잃은 시트를 간질였다.

텅 빈 침대를 바라보는 내 몸엔 장 대표나 입을 법한 새카만 옷이 걸쳐져 있는 상태였다.

***

엄마는 봄에 바다에 뿌려졌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 위에 올린 채로, 얼굴엔 편안한 미소를 달고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혼자 남아 있을 아들이 걱정돼 암흑 속에서 홀로 싸운 여린 몸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밤에 편안히 눈감았다. 고작 2개월을 위해 2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투쟁하다가 갔다.

장례식장은 원래 있던 병원의 뒤편에 있는 건물에 차렸다. 나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서 장례식장을 찾는 몇 안되는 조문객들을 맞아들였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지독히 현실감 없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저 넋만 놓고 있었다. 조문객들이 들어와서 두 번 절을 하고 가는 단 위에 놓인 영정 사진은 총 세 개였다.

“아이고, 여원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나는 천천히 그쪽을 바라봤다. 경희댁 아주머니가 수척한 얼굴로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흠뻑 젖은 손수건을 한 손에 쥐고선 날 보자마자 눈물지으셨다.

아주머니는 연신 내 얼굴을 쓰다듬고, 머릴 매만졌다. 이젠 우는 방법조차 까먹어 버린 나 대신에 아주머니는 울음을 맘껏 토해 내셨다.

“한 번 찾아가야지, 찾아가야지 하고서 당장 나 먹고살기 바빠서 못 가고 있었어.”

“…….”

“그동안 너무 미안했다.”

“아니에요, 아주머니. 저야말로 죄송해요….”

경희댁 아주머니도 근근이 먹고살아 가는 처지였다. 엄마를 완전히 아주머니에게 내맡기고 내쫓기듯 리조트로 들어갔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가끔이나마 들여다봐 준 아주머니에겐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거였다.

“무슨 남자가 하나 와서는 임선화 씨 좋은 곳으로 모셔가려고 온 단체라고 하더라고.”

나는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곤 물었다.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으응, 거기가. 잠시만!”

아주머니가 팔에 매고 온 낡은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다 해진 보급형 스마트폰 케이스에서 명함 하나를 빼 들었다. 나는 경희댁 아주머니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 작은 카드에 적혀 있는 활자를 읽어 내렸다.

“덩치 막 산처럼 커다란 놈이라 처음에는 저쪽 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자기네들 그런 거 안 하고 건실한 회사라면서 우리 애 아빠랑 나랑 해서 명함 한 장씩 딱 주더라고.”

경희댁 아주머니는 한참 내 얼굴과 손을 어루만지다가, 저녁에 식당 일이 있다며 한껏 미안한 얼굴을 지으며 떠나셨다. 나는 멍한 눈길로 떠나는 경희댁 아주머니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내려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명함을 손에 꽉 쥐고 이리저리 오가는 행렬 속에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친척들은 이젠 완전히 천애 고아가 됐다며, 날 안쓰러운 눈빛으로 훑고 갔다.

“여원아, 갈 데는 있니?”

갈 데라. …글쎄. 뭐라 말이 없자, 고모는 초조한 기색으로 물어 왔다.

“고모랑 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날 향해 있던 얼굴엔 내심 다행이라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몸조리 잘해라. 언제든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고모네는 그 한마디로써 모든 죄책감을 덜어 내곤 그렇게 장례식장을 떠났다. 그렇게 손을 내밀 땐 곁에 없더니. 이제 내 뒤치다꺼리 정도는 할 수 있게 됐으니 뒤를 봐준다는 사람들. 그들의 뱃속이 너무 낱낱이 들여다보였다.

새벽이 되자 모두가 빠져나간 장례식장. 내 것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는 신발장. 활짝 열려 있는 문으로 복도가 내다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양쪽에서 나와 먹구름 떼처럼 우르르 지나갔다. 나는 안쪽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곧 찾아오겠다고 하던 장 대표는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나는 다릴 끌어 품에 안고 눈가를 묻었다. 무릎이 곧 뜨겁게 젖어 들어갔다. 그때까지 손아귀에 잡혀 있던 명함이 찌그러졌다. 그러다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표 옆엔 장기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조문객들의 발걸음은 이틀째가 되자 완전히 끊겼다. 나는 예의상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담배 생각이 나서 잠깐 로비에 있는 흡연실에서 두 개비를 피웠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코끝에 뭔가 쾌쾌한 향이 와 닿았다. 담배 향은 아니었다. 담배 향보단 조금 더 진한…. 두 눈이 향이 있는 쪽으로 가서 붙었다.

‘…어?’

몇 번 피운 적도 없는 데다가, 더더욱 오늘은 붙인 적 없는 향에서 하얀 연기가 옅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분향소로 다가가서 향을 손으로 만져 봤다.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잠시 고장 난 듯 제자리에 서 있다가, 얼른 신발을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를 가로질러서, 올라왔던 반대 방향에 있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 늦은 새벽. 인적조차 드문 복도 저 끝에 커다란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을 뱉었다.

“대표님.”

너무나도 작은 목소리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도, 옅게 불어오는 남풍에도 묻힐 만큼 너무나도 미약한 소리였다. 그러나 복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장신의 남자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가 천천히 날 돌아봤다. 달빛이 그의 윤곽 짙은 얼굴에 음영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대표님.”

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주 천천히 시작했다가, 종전에는 속도를 내서 뛰듯이 걸어 남자의 앞에 멈춰 섰다. 나는 그의 허리를 붙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망막 안쪽 깊이 새겨 두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두 눈 가득 담겼다.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희미한 내 목소리에 장 대표의 깊은 입아귀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원래 담배를 태우러 갈 모양이었던지, 하얀 담배 한 개비가 입술 새에 물려 있었다.

“내가 안심하고 있지 말라 했을 텐데.”

잠깐의 침묵이 흐르곤 장 대표의 입술 사이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그가 내 뒤통수를 끌어당기더니 잡아먹을 듯 키스를 퍼부었다.

“흐, 흐읏….”

메말라 있는 내 입술로 그간 분출되지 못하고 켜켜이 쌓여 있던 욕구들이 매섭게 파고 들어왔다. 내 숨을 완전히 채갈 것처럼 구는 장 대표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는 나는 힘겹게나마 그의 혀에 응했다. 작은 입이나마 최대한 크게 벌리자, 성마른 그의 감정이 쏟아 부어져 들어왔다. 남자가 강한 힘으로 내 허릴 끌어당겼다. 나는 속절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두 팔로 남자의 허릴 힘껏 안아 그의 품에 몸을 완전히 묻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깐 떨어졌던 입술이 무섭게 다시 맞붙어왔다. 내 것보다 체온이 높은 뼈와 살가죽이 내 몸을 완전히 덮었다. 그가 기억하라 했던 그 감각이 나를 갑갑할 만큼 감싸왔다.

우리는 혀로 서로의 메마른 입 안을 문지르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

장례식장 삼 일째. 관에 담겨 있던 고인은 땅으로 돌아갔다. 시체를 물어뜯긴 자들은 관에 그대로 영정 사진을 넣어 무덤 속에 넣어 두었다. 발인이 끝나자, 건물 앞으로 차가 한 대 도착했다. 나는 당연히 내게 온 차인 줄 알고 미끄러지듯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아주 얇은 가방만을 가슴팍엔 품은 채로. 텅 빈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벼운 가방엔 엄마가 남기고 간 통장과 장 대표가 내게 건넸던 수표 몇 장만이 들어 있었다. 수표들은 그가 내게 주었을 때의 액수 그대로였다. 나는 십 원 한 장 쓰지 못하고 그걸 손에 갖고 있었다.

가방을 고쳐 쥐자, 손목시계가 출렁거렸다. 예전엔 육중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이젠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원래부터 나의 무게였던 듯, 자연스럽기만 했다.

차창 밖으로 완연히 봄이 들어서 있는 풍경들이 엿보였다. 새 계절은 아직 먼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내 발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를 처음 만났던 것도 봄이었다.

“…….”

그때의 나는 도망치기 위해 정처 없이 집을 떠났었지만, 이제는 목적지가 분명했다. 나를 향한 광적인 욕구를 해소시키고자 나를 한계까지 몰고 간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자에게 가고 싶었다.

사람과 애정을 주고받을 만한 곳에 있지 못했던 남자는 당연히 그걸 남에게 어떻게 줘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 감정을 내게 들입다 퍼부어 댔다. 제 안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감정을 스스로도 제어 못 해 내게 비틀린 방식으로 콸콸 쏟아부었다.

갑작스럽게 치달은 감정에 당혹스러웠던 건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어느 날 내게 그것이 덜컥 들어섰다. 날 습격해 온 그건 불순물이 잔뜩 섞여 있는 애정이었다. 수없이 많은 부정이 이루어진 탓에, 혐오감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탓에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남자에게 간다.

뱀 같은 남자에게 이미 몸이 붙들린 내겐 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 서늘한 눈매를 다시 볼 수 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모르고 있던 새에 벌어진 일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물처럼 질척한 감정이 남자와 나 사이에 벌어져 있던 틈에 콸콸 들이부어져 있었다. 그 오물이 이젠 아주 굳게 양생되어 남자와 나를 한 덩어리처럼 딱 붙여 놓았다. 힘을 주어 떼어 놓으려고 하면 결국 둘 다 바스러지고 말, 우리는 그런 지독하고도 더러운 관계였다.

<끝, 외전에 계속>

외전 1.

01.

기대와 달리 집은 비어 있었다. 나는 방문을 모두 열어 보며 장 대표를 찾아다녔지만, 그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집엔 생활감이 너무 없어서 최소 몇 년간은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 같았다.

…설마 떠난 건가? 심장이 명치 아래로 쿵 떨어졌다. 두려움이 덜컥 숨을 조여 왔다.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니던 나는 다시 신발장으로 향했다. 스니커즈에 발을 욱여넣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장 대표가 들어왔다.

“…….”

“…….”

남자는 문 앞에 벽처럼 서서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져서 음영이 짙게 진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큰 체구가 누가 봐도 남자의 것인데. 그럼에도 나는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맨발로 그에게 바투 다가갔다. 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얼굴이 점점 시야 안으로 박혀 들어왔다. 저음의 목소리가 작은 공간을 울렸다.

“마지막 기회였는데.”

“…….”

“왜 또 시계 풀고 도망가 버리지.”

나는 지금 내 발로 이 집에 다시 돌아왔다. 판잣집 마룻바닥에서 시계가 그렸던 뫼비우스의 띠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그땐 그게 그렇게 끔찍해 보일 수가 없었는데. 나는 내 두 발로, 내 의지로 남자에게 다시 돌아왔다.

날 눈앞에 둔 남자는 시선으로 내 이마에서부터 눈, 코, 그리고 턱까지를 훑어 내렸다. 그가 내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의 얼굴과 몸이 그늘 속에서 햇볕 안으로 들어왔다. 햇볕이 가로지르는 새카만 눈동자엔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이 산란하고 있었다.

“왜 그동안 찾아오지 않으셨어요?”

“그 말, 꼭 나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장 대표의 얼굴엔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의 미소가 덧그려져 있었다. 서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검은색 코트를 손에 움켜쥐었다. 뼈와 살가죽을 동시에 그러쥐곤 남자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받았다.

장례식장에서 재회하고 나서 고작해야 하루 지났을 뿐인데. 자신에게 온전히 돌아오길 기다리며 남자가 내게 준 시간은 고작 하루뿐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남자를 다시 만난 게 혹시 꿈은 아닌가 싶어 계속해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나는 토해 내듯 내 감정을 뱉었다.

“…기다렸어요.”

“왜.”

내 입술은 망설임에 떨어졌다가 다시 붙기를 한참 반복했다. 벌려진 입술 새로 말이 한숨처럼 흘러 나갔다.

“…걱정이 돼서.”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았다. 혹시나 불길한 일이 남자에게 들이닥친 거면 어쩌지. 직원이 대표님에겐 별일 없을 거라 했지만, 그래도 얼굴을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무심한 얼굴로 무자비한 언사를 퍼붓는 남자를 내 눈으로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나는 이름 모를 감정에 몇 번이나 휩쓸리며 남자를 떠올렸다.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해 놓고는. 왜 날 걱정해요.”

남자는 정말로 의문을 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행했으면 좋겠다면서?”

나는 남자의 가슴팍에 이마를 퍽 붙였다. ‘당신이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남자에게 뱉었던 말을 곱씹으며 몇 번이나 후회했었다.

“그거 진심으로 한 말 아니에요.”

남자가 잠자코 내 뒷말을 기다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저 자신이 덜 혐오스러울 것 같아서….”

남자에게 안기는 그 상황이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이 남자에게 기대려고 하는 거지.

남자가 내게 뱉는 거친 언사와 폭력적인 행동들이 혐오스러웠다. 남자가 보인 비이상적인 집착이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사실을 반추하면 반추할수록 속이 역겨워졌다. 그래서 나는 못 박아 두었다. 남자를 혐오하기로.

이미 마음을 그렇게 단단한 껍데기로 굳혀 두었는데. 그 단단하게 다잡은 심정에 변화가 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다정한 손길이 내게 닿아 올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내 심지를 고쳐 잡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 본다 한들, 소용없었다.

“기다렸어요.”

나는 눈 깜짝할 새에 범람했던 욕조 물처럼 남자에게 감겨 있었다. 이 성미 개 같고, 저밖에 몰라 이기적인 데다가 변태적인 성향까지 가진 남자가 그리웠다.

남자의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약간 벌어지더니, 이윽고 내 입술을 집어삼켜 왔다. 척추를 부러뜨릴 듯이 팔로 내 허리를 감고, 내 호흡을 모두 먹어 치울 듯 달려 들어왔다. 우린 서로의 입술을 빨아 대며 코를 비볐다.

“아, 흥….”

장 대표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남자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크게 발기해 있는 좆을 부여잡았다. 뜨거운 열을 뿜으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은 성기를 만졌다. 한 손에 넘치는 기둥을 잡고는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었다. 자위도 제대로 해 본 적 없어 서툴기만 한데, 남자는 허리를 떨며 목 안을 울렸다. 남자가 낮게 밭은 숨을 내쉬며 종용했다.

“더 세게 쥐어 잡고, 빨리 흔들어.”

“…이렇게요?”

굵은 좆 기둥을 감싼 내 손 위로 남자의 손이 겹쳤다. 남자가 난폭하게 손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내 손짓은 애들 장난이라는 듯, 거칠게 흔들었다.

“바지 벗어 봐.”

바지를 벗어서 무릎까지 내렸다. 벌겋게 부어올라 흉하기 그지없는 귀두가 내 허벅지 안쪽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몸체를 꿈틀거리면서 내 얇은 피부 위에 프리컴을 울컥울컥 토해 냈다. 얇은 천을 가운데에 두고 느껴지는 남자의 하체에 전율하면서 나는 남자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 하으, 흑….”

거울로 등이 퍽 떠밀렸다. 선반 위에 있던 작은 장식품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날카로운 소릴 내며 깨졌다.

남자가 제 좆 기둥을 붙잡고 내 아래로 밀어붙여 왔다. 팽팽하게 부푼 귀두는 입구에서 미끄러졌다. 너무 오랜만의 삽입인 데다가, 윤활제도 없어서 넣는 게 어려웠다.

우리는 생식기를 맞대곤 개처럼 헉헉대며 엉덩이를 돌렸다.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남자의 귀두가 내 입구에 걸려 왔는데, 그럴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머리가 녹을 것처럼 짜릿했다. 이윽고 남자가 사정했다. 거울에 달라붙어 있던 엉덩이가 찐득한 소릴 내며 떨어지고, 남자가 내 엉덩이를 세게 비틀었다. 나는 하악! 소릴 내며 남자에게 매달렸다. 뒷머리가 비쭉 곤두설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또 그만큼의 충만감이 날 적셔 왔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허리가 자르르 떨렸다.

나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게 분명한 남자에게선 이를 아득바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허리를 뒤로 물리려는 기색을 보이기에, 안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느낌이 없어지는 게 싫어 얼른 남자를 붙들었다.

엉덩이에 힘을 주자, 구멍이 조여들었다. 남자의 좆 기둥이 내 구멍에 반쯤 걸친 채로 꽈악 조여졌다. 남자는 “아, 씨발.”이라 욕을 지껄이며 내 엉덩이를 터뜨릴 듯 움켜잡았다.

“…빼지, 빼지 마세요.”

남자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지껄였다.

“누가 뺀다고 그래.”

그러곤 반쯤 나갔던 채로 단박에 밀어붙여 왔다. 한껏 예민해진 내벽을 후벼 파고 들어오는 것에 나는 불에 달군 작살에 찔린 물고기처럼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쑤셔 박으려던 건데.”

제자리에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어서, 남자에게 매달렸다. 나는 이지를 거의 잃고 남자에게 담쟁이넝쿨처럼 달라붙었다.

“아, 아아, 아아… 아!”

남자는 작정하고 안을 매섭게 들이박아 왔다. 남자의 허릴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남자의 엉덩이를 내게로 끌어왔다. 남자가 허릴 뒤로 물리자, 그를 뒤따라 쑤욱 뽑혀 나가는 그것을 얼른 달라고 했다.

“어, 얼른… 흣.”

남자가 내 귓불, 뺨, 입술을 정신없이 물고 빨았다.

“떠, 떨어지기 싫어….”

나는 얼른 그에게 따라붙었다. 밀려 나갔던 샅이 다시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왔다. 남자는 저보다 10cm 정도 작은 나를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퍽퍽 살들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찰지게 울렸다. 나는 다리 양쪽이 모두 공중에 뜬 채로 남자의 허리를 꽉 조였다.

“내가 이걸, 진즉에, 죽였어야 했는데.”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는 귓가에 코를 붙였다.

“으흥, 으… 대, 대표님….”

***

옷도 미처 벗지 않은 채로 현관문 앞에서 허겁지겁 남자와 몸을 섞었다. 총 두 번 체위를 바꿔 가며 사정하고 나서야 옷을 벗고 함께 욕조로 들어왔다. 옷가지들을 주변에 엉망으로 늘어 놓은 채, 우리는 따뜻한 물속에 몸을 겹친 채로 누웠다. 나는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의 턱에 뺨을 맞댔다.

고요한 시간이 우릴 에워싸고 흘러갔다.

욕조 틀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이 눈에 들어와, 손끝을 댔다. 그러곤 물에 젖은 그의 피부를 살살 훑었다. 남자의 손가락들은 뼈마디 자체도 굵은 데다가, 길이도 길어 내 손가락들보다 반 뼘 정도가 다 길었다. 특히 반지가 끼워져 있는 약지가 검지보다 월등히 길었다. 나는 약지를 두르고 있는 반지를 슬슬 빼냈다.

물기 탓에 약간 뻑뻑하게 빠졌다. 나는 물에 젖은 손 때문에 미끄러질까, 반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전등에 이리저리 비춰 봤다. 심플하기 그지없는데. 빛을 받으니 반짝거리는 게 제법 괜찮아 보였다.

“이건 언제 맞추신 거예요?”

“성인 되자마자.”

고갤 비틀어 남자를 응시하자, 내 두 눈동자 가득 그가 자리 잡았다.

“운반책으로 써 주던 거래처에서 날 보고 싶어 한다길래 싸구려로 급하게 맞췄습니다. 손가락이 굵어질 거 대비해서 일부러 크게 맞춘 건데.”

이젠 손가락에 자국을 깊게 남길 정도로 조금 작았다. 그 작은 반지 아래에 숨겨져 있던 흉터에 조심스럽게 손끝을 댔다. 흉터를 기운 자국을 살살, 조심스럽게 만져 봤다. 지금도 아플까. 혹시 몰라 남자의 얼굴도 살펴봤다. 그러나 남자에게선 별 반응이 없었다. 남자는 타일 벽에 뒤통수를 대곤 내가 하는 행동을 그저 두고 보고 있었다. 이미 만들어진 지 너무 오래된 흉터라 고통도 느껴지지 않은 듯했다.

남자가 긴 팔을 뻗어 창문을 열더니 욕조 주변에 널려 있는 바지 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곤 그 끝에 불을 붙였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 닥치던 창문 바깥엔 여름 특유의 싱그러운 향취만 가득했다.

“안 아프셨어요?”

남자가 과거를 되짚어 보듯 눈썹 한쪽을 구부렸다.

“아팠지.”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라니. 어딘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는 내 생각을 읽어 내린 듯, 말을 이었다.

“매일 밤 손가락을 잡고 이를 악물고 참아냈습니다.”

“…….”

“열 명 정도가 한방에서 지냈는데. 아프다고 신음 소리라도 냈다가는 그렇잖아도 날 벼르고 있던 새끼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까.”

남자가 욕조 밖으로 담뱃재를 성의 없이 툭툭 털었다. 과거의 잿더미를 입술 새로 뿌리는 남자의 얼굴도 딱 그만큼 건성이었다.

“상상이 잘 안 가요. 대표님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지금은 넘치는 게 돈이니까 모르겠죠. 비참한 과거는 돈으로 덧바르면 되는 겁니다.”

“…….”

제 재력을 자랑하던 남자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날 응시해 왔다. 분위기가 묘해진다 느끼자마자, 바로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붙어 왔다. 그는 정말 다짜고짜 키스해 왔다. 내 뺨을 터뜨릴 듯 부여잡곤, 내 입술에 이어 코도 빨아 댔다. 이를 세워 내 콧방울을 한 번 물고 나서야 날 놔줬다.

아마도 잇자국이 남았을 코끝이 화끈거림과 동시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이대로 물속으로 완전히 잠겨 버릴까, 하다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반지를 내려다봤다. 그러곤 충동적으로 내 손가락에 끼워 넣어 봤다. 남자의 약지를 타이트하게 조이고 있던 반지는 내 검지에 끼우니까 둘레가 딱 맞았다.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해 봤다.

“…대표님.”

장 대표가 왜 부르냐고 되묻는다. 나는 남자에게 내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내보였다.

“이거 저 주시면 안 되나요?”

고양감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눈동자엔 나른한 후희만이 검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눈 그렇게 뜨고 원하는 거 요구하라곤 누구한테 배웠어요?”

날 내려다보는 남자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피해 그의 가슴팍에 뺨을 맞대고 눌렀다. 뺨으로 묵직하고도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다이아 박힌 걸로 다시 맞춰 달라고 해 보는 건.”

“저는 이거면 될 것 같아요.”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별안간 남자가 어이없단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뺨을 간질이던 진동이 한층 더 거세졌다.

머리 위에서 음습한 이끼들이 껴 있는 늪지대처럼 축축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차라리 시계를 풀고 도망가는 게 머릴 더 똑똑하게 굴리는 방법이었을 텐데.”

“그럼 놔주실 거였나요?”

“그땐 발목을 잘랐겠지.”

사람의 발목을 나무 밑동 대하듯 하는 남자 때문에 말문이 순간 턱 막혔다.

“…….”

“그리고 잘린 부분에 GPS를 심었겠고.”

더 이상 웃음 따윈 없었다. 사막처럼 메마른 눈을 달고서 흉포한 말을 지껄이는 남자의 입을 막았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순간 무서웠지만, 나는 그의 말을 흘려듣기로 했다. 도망가면 손가락을 자른다고 협박했어도 결국엔 내 몸엔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남자니까.

“대표님.”

남자의 투박한 손길이 내 이마에 닿아 왔다. 뭘 하려는 건가 했는데. 물에 젖어서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는 머리칼을 넘겨 왔다. 거칠어서 끝이 무딘 손가락들로 남아 있는 몇 가닥까지 모조리 넘겨 주었다. 제 좆을 빨라고 내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채던 손으로 내 이마를 쓸고, 내 귓가를 애무했다. 덩치 큰 남자가 큰 손으로 행하기엔 지나치게 섬세한 손길이었다.

“대표님.”

더 편한 자세를 취하려 몸을 뒤척이자, 욕조 물이 작은 파도와 함께 출렁댔다. 넘친 물이 찰싹, 소릴 내며 타일 위로 쏟아졌다. 나는 자세를 바꿔 남자의 목에 코를 깊게 묻었다. 여러 가지 냄새가 났다. 알싸한 담배 냄새, 옅은 샤워 코롱 냄새, 남자의 하체에서 나던 살냄새.

하도 몸을 섞었더니 이젠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내게서 나는 냄새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사정감이 주는 여운에 취한 나는 탄식하듯이 남자를 불렀다.

“장기주 대표님.”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어요. 이제 고작 스물셋 먹어 놓고.”

나는 고갤 내저으며 한 번 상처를 낸 적이 있던 남자의 턱을 손끝으로 더듬거렸다.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손가락을 굴리다가, 거기에 입술을 맞췄다. 참새가 부리로 모이를 쪼듯이 한 번 짧게. 행위 자체는 그렇게 작기만 했는데. 남자의 타액에 흠뻑 젖어 있던 터라, 내 입술에선 유달리 질척한 소리가 났다. 쪼옥.

“와 주시길 기다렸어요.”

장 대표는 자신에게 방금 막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순간 심장이 수분 쭉 빠진 감자처럼 쪼그라들었지만, 나는 못 본 척, 외면했다. 지금 당장은 남자가 불쾌한 것 따윈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

장 대표는 바지만을 껴입은 채로 테라스에 서서 전화를 받으며 담배를 태웠다. 그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온 나는 집 안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 혼자 머물던 집엔 그동안 살아온 흔적이 전혀 없었다.

러그를 탁탁 털어 먼지를 떨어내고, 장식장에 있는 먼지들도 천으로 꼼꼼히 밀어 냈다.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불현듯 시선이 느껴져 테라스 쪽을 응시했다. 남자가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입술은 움직이고 있는 걸 보니 아직 통화 중인 듯했다.

등에는 내가 박아 넣은 손톱자국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삵 따위 고양잇과 동물이 발톱으로 삭삭 긁어 놓은 듯했다. 그딴 상처를 등에 달고선, 남자가 중지로 창문을 툭툭 쳤다. 점점 빠르고 거칠어졌다.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손짓에 뺨에 화르륵 열이 올랐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외면하고 청소기를 끌며 부엌으로 향했다.

곁눈질로 남자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갑자기 지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다시 테라스로 시선을 붙였다. 담배꽁초가 창문에 짓이겨지고 있었다. 애꿎은 창문에 꺼먼 담배 빵이 났다. 시선 조금 피했다고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남자에게 입 안으로 욕지거릴 뱉었다. …미친놈.

아주머니도 들르지 않았는지, 떠난 날 봤던 음식들이 냉장고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안에 있는 걸 모두 쓸어 내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테라스를 열고 들어온 남자가 뒤로 달라붙어 오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내 뒤로 바짝 붙어 오자, 커다란 그림자가 날 덮쳐 왔다. 육중한 위압감이 덥석 들었지만, 나는 티 나지 않게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동안 아주머니가 안 오셨어요?”

바투 서 있는 남자에게선 씁쓸한 담배 향과 묵직한 체향이 뒤섞여 났다. 평소와는 달리 향수 향도 거의 나지 않고, 남자의 몸에서 나는 체취만이 느껴졌다.

“잠깐 오지 말라 했지. 다른 이가 내 것에 손대는 게 언짢았는데. 기분까지 더러우니까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어련하실까. 남자는 내게 박진경의 손길이 닿았을 때도 매섭게 노려봤었다. 제 고객인데도 불쾌감을 드러내는 데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땐 왜 저 지랄일까 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유가 뻔했다. 남자는 유달리 제 것에 대한 독점욕이 심각해 보였다. 그 무엇도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모두 제 손으로 차차 쌓아 올려 가진 것들이니 그만큼의 소유욕을 드러내는 듯했다.

남자가 내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러곤 영혼까지 들이마실 듯 숨을 들이켰다. 나는 남자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짙은 숨결에 무릎이 조금 덜덜 떨렸다.

“집에 있는 어느 샴푸에서도 이 냄새가 안 나던데.”

“…….”

“살 밑에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거예요.”

남자가 잘근잘근 피부를 씹어 왔다. 결단코 어금니로 찢어서 안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것처럼 굴었다.

“대표님, 저 콩나물국만 할 줄 아는데.”

분위기를 바꿔 보려 일부러 딴말을 꺼냈지만, 남자는 내 몸을 지분거리는 것에만 심취해 있었다. 내 가슴팍을 희롱하곤 엉덩이를 터뜨릴 듯 움켜잡았다. 입술을 들어 올리며 간악하게 웃는 게 영락없는 변태의 낯짝이었다.

“저희 점심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당연히 점심 먹어야지.”

남자가 내 뒷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지껄였다. 휴대폰 화면을 엄지로 몇 번 두드리더니, 그걸 내게 건넸다.

“필요한 거 말해요.”

얼떨결에 건네받아서는 귀 옆에 붙였다.

“콩나물이랑 육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예, 알겠습니다.

삼십 분 후, 김중덕이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눈을 둥글게 휘며 커다랗게 부푼 봉지들을 들어 보이더니, 바닥 위로 내려놨다. 그러곤 실실 웃어 오는 낯짝이 장 대표와는 조금 다른 궤로 무서웠다. 나는 봉지를 하나둘 풀었다. 콩나물이 하나, 둘, 셋…. 총 열일곱 팩이나 있었다. 이번엔 다른 봉지를 열어 봤다. 거기엔 불그스름한 육류들이 한가득이었다. 한우, 한돈, 생닭까지. 총 합해 11kg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봉지엔 온갖 종류들의 주류들, 콘돔이 다섯 박스, 그리고 스타킹들이 종류별로 담겨 있었다. 나는 마지막 걸 봉지에서 꺼내며 의아해서 물었다.

“이걸 왜.”

“미쳤나, 이게.”

남자가 식탁 위에 올려 있는 것들을 팔로 쓸어내린 후, 무미건조한 욕과 함께 바닥에 놓인 스타킹을 발로 찼다.

“저건 왜 준 걸까요?”

“몰라서 묻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장 대표가 쭉 찢어진 눈매를 접었다. 그 묘한 웃음에 나는 모르는 척, 와인병을 땄다. 프라이팬에 와인을 두른 뒤, 마블링 좋아 보이는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최고급 고기라 별 기교 없이도 육즙이 배어 나왔다.

식탁 앞에 앉은 남자가 큼지막하게 고기를 썰었다. 날카로운 칼이 고기를 깊게 파고 들어가 그걸 몇 등분으로 조각냈다. 남자는 그중 한 조각을 입 안에 넣곤 날렵한 뺨을 움직였다. 육식 동물에게 먹이를 갖다 바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요리 솜씨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할 줄 아는 것 없다고 내내 욕만 처먹다가 거의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그가 먹고 있는 걸 보니 나도 오랜만에 식욕이 돌았다. 숟가락으로 막 만든 콩나물국을 조금 떠먹었다. 엄마 어깨 너머로 몇 번 봤던 대로 한 것뿐인데. 맛이 제법 나쁘지 않았다.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고 있는데, 식탁 위로 남자의 면박이 떨어졌다.

“온갖 비싼 걸 눈앞에 갖다 놔도 본체만체하더니.”

그러고 보니 남자와 이렇게 마주 앉아 제대로 된 끼니를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따뜻한 모래알을 씹는 것 같던 예전과는 달리, 이젠 제법 편안했다. 남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 게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직원이 사 온 와인이 아직 몇 병 더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에 남자가 코르크 마개에 오프너를 깊게 박아 넣고는, 돌려 땄다. 선반에서 꺼내 온 와인 잔에 적색 포도주가 담겼다. 남자의 목울대가 꿀꺽거리며 울렸다. 그가 마침내 깔끔히 비운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더니 냅킨으로 젖은 입술을 닦았다.

식탁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이제 남은 얘길 해야 할 참이었다.

“임선철 씨와 내가 있던 비닐 하우스로 탐문 수사를 나갔다고 합니다.”

남자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처음 듣는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임선철 씨가 내게 거액의 노름빚을 지고 있다고 진술했더군요. 그것 때문에 조금 성가셨어요.”

남자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있던 내 손가락들은 안으로 점점 곱아들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혐의점을 벗어냤냐고 묻자, 남자의 입술 새로 여상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얘기에 아연실색하고 있는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기 조각을 하나 더 입에 넣으며 턱을 움직였다.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야 남자는 말을 덧붙였다.

“조금 많이.”

“…….”

“정황상 임선철 씨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천만 원 상당의 돈을 갈취하는 걸 목적으로 본인의 매형을 죽였고, 그 돈도 다 쓰고 나서 본인도 자살을 한 거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임선철 씨를 심리적으로 압박해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사실이나, 그건 어디까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었을 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서 풀려났고요.”

남자의 얼굴엔 표정 변화랄 게 없어서 모르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그가 제3자의 일을 말하고 있는 거라 착각할 법했다.

“그래도 어쨌든 당장엔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니까 서여원 씨는 거기에 보내 놓은 거고.”

“…….”

“덕분에 서여원 씨만 그동안 행복했겠네.”

장 대표가 여유롭게 웃었다. 길게 찢어지는 그의 입아귀에 나는 어렵지 않게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피곤한 과정이었을 게 분명한데도 남자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도 입을 그만 다물었다. 어쨌거나 남자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나는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02.

일에 거의 파묻혀 살다시피 하던 장 대표는 짧은 휴가를 얻었다. 사실 휴가라기보단 잠정적인 은신이라 이름 붙이는 게 조금 더 어울리지만, 어쨌든.

장 대표는 집에서도 쉬는 법 없이 대체로 서재 안에서 일 처리를 했다. 직원이 가져다준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이따금씩 전화를 걸거나 받았다. 남자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상대를 회유하고, 때때로 협박하고, 종종 압박했다. 알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나는 한쪽에 놓인 소파에서 책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읽은 책들을 한 권씩 뒤집어 놓았더니 어느새 마지막 줄을 빼놓곤 모두 뒤집혀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던 남자와 나의 일상들이 점점 한데로 어우러져 갔다.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자연스레 이전보다 남자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아주머니가 말했던 대로 장 대표는 육류를 선호했으며, 밤이나 새벽에 수영을 다녔다. 저 거대하고도 날렵한 몸을 유지하려면 식단 조절과 꾸준한 운동은 필수일 거라 생각했는데. 상당한 대식가인 그는 섭취한 음식량만큼 운동했다. 미친 듯이 지방을 태워 근육을 온몸에 치덕치덕 붙였다.

이 건물에서 주민들을 위해 마련한 편의 시설 센터는 자본의 집성체, 그 자체였다. 그 안에 있는 수영장은 정말 웬만한 곳보다 시설이며, 청결 같은 부분에서 월등히 좋았다.

돔 모양으로 된 수영장을 머리 위에 두고 양쪽에 돌덩이를 얹은 어깨가 널리 활개를 치며 투명한 물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그가 만드는 큰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운동을 끝내기까지 나는 이렇게 멍하니 선베드에 앉아서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는 밤에 하는 수영을 즐겼다. 그리고 수영을 할 땐 날 굳이 한쪽에 앉혀 놓았다.

왜 이런 음습한 시간대를 선호하나 했는데. 남자는 인간들이 북적대는 곳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고객들을 끊임없이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니 인간 군상이라면 물릴 대로 물린 듯했다.

레일을 순식간에 오고 간 장 대표가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한 팔로 타일을 딛고 물에서 나왔다. 매끈한 전신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오는 남자에게 타월을 건넸다. 남자가 타월로 뺨을 닦으며 지껄였다.

“앞에 놀이터라도 다녀오지.”

“…….”

“애들이 안 놀아 줬어요?”

나는 어딘가 상한 것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애들이 놀아 주든 말든. 출입구 쪽으로 눈길만 줘도 온갖 지랄을 떨어 댈 거면서.

나는 또다시 외출할 기회를 거의 박탈당했다. 장 대표의 허락 없인 나는 아무 곳도 가지 못했다. 이젠 병원조차 가지 않으니 핑곗거리가 전혀 없었다.

주인의 허락과 목에 매어 주는 목줄 없이는 집 밖으론 나가지 못하는 애완견들과 다를 바 없는 꼴이었다. 남자의 허락과 그의 감시 단원들이 아니면 집을 나서지 못하는 내 꼴이 차라리 더 한심해 보였다.

이미 한차례 충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 집에 넣어 두고 기르려는 장 대표의 뜻은 변함없어 보였다. 남자는 여전히 날 감시했다. 어디까지고 남자의 시선이 날 따라붙었다.

의식주, 거기다 수면까지. 모두 남자의 손길에 달려 있었다. 남자가 그 모든 걸 빠짐없이 채워 주고 있기 때문에 따로 돈을 벌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내 태도였다. 예전엔 남자가 날 무작정 휘두르려고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이게 남자의 애정 방식이라 생각하니 그냥 견디자는 마음이 들었다.

남자가 곁에 없는 게 더 괴롭다는 사실을 너무 깊이 체감한 이후라 숨은 막힐지언정, 이 편이 낫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 상태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남자 밑에 빌붙어 있다가는 지금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남자와의 스폰 관계를 청산하려면 자생 능력을 갖춰야 했다.

일단 그러려면 남자와 타협점부터 찾아야 했다.

언제쯤 말을 꺼내야 하나 타이밍을 노리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보통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데, 조금이라도 제 성미를 건드리면 지랄을 하고 나섰다. 날 제 옆에 두려고만 하는 자니까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아 할 게 분명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며 빨래를 갰다. 빨래라고 해 봐야 옷들은 드라이클리닝에 전부 맡기니 대부분 타월이었다. 햇볕에 잘 마른 냄새가 솔솔 나는 타월을 하나씩 접고 있는데. 무료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얼굴에 닿아 왔다. 처음엔 모르는 척하려다가,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어쩔 수 없이 물어봐야 했다.

“왜 그러세요?”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며 지껄였다.

“어디 살림이라도 차렸나 보지?”

나는 불붙은 성냥처럼 순식간에 타올랐다. 뺨이며 목까지 순식간에 붉어졌다. 가지런하게 접고 있던 타월을 움켜잡으며 고갤 내저었다. 분명 빈정대는 어조인데, 입꼬린 올라가 있었다. 무슨 의도로 묻는 걸까.

“아니에요.”

“뭐가 아니에요.”

남자가 내 팔뚝을 부여잡곤 제게로 끌어당겼다. 억센 손길에 내 몸은 자석처럼 이끌려 가 그의 몸에 철썩 달라붙었다.

“지금 누가 봐도 살림 차린 꼴 하고 있으면서.”

“아니….”

남자가 날카로운 투로 비아냥댔다.

“아닌 척하면 다예요? 이 정도면 장래 희망이 애첩이었나 싶을 정도인데.”

남자가 내 손에서 타월을 빼앗아 빨랫감들이 고이 개켜져 있는 곳에 툭 던져 놓았다. 공들여서 쌓아 놓은 타월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다가 허벅지 위에 올리고 어깨를 한껏 접었다. 남자가 내 아랫배를 뭉근하게 더듬었다.

“…….”

“이렇게 된 거 애도 하나 배지 그래요.”

“저는 남자라 못 배요.”

국어책을 읽듯 어조 없이 지껄였다. 쉬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으음, 목을 울린 남자가 내 갈비뼈의 생김새를 더듬어 보듯 매만졌다. 뜨끈한 체온을 가진 손이 허리를 훑고 올라와 가슴에 닿았다. 순식간에 젖꼭지를 잡아채 오는 손길에 힉, 소릴 내며 몸을 뒤로 빼고자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럼 젖꼭지는 왜 이렇게 부풀었어요.”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와 젖꼭지를 만졌다. 새벽까지 남자가 지분거려 놓은 탓에 탱탱하게 부어 있던 젖꼭지는 금세 딱딱해졌다. 살짝만 잡고 튕겨도 따갑고 아팠다. 휘어지는 눈이 꼭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자의 눈이라 나는 섬직한 기분을 느꼈다.

“이미 밴 거 같은데.”

“…….”

“내가 아는데. 개들도 새끼 밴 놈들만 젖꼭지가 이렇게 부풀던데요.”

이거 봐, 남자가 잔뜩 부어오른 젖꼭지를 손끝으로 튕기면서 입 꼬릴 찢어 웃었다.

“이건 대표님이 만져서 부은 거잖아요.”

“아, 내가 만져서.”

남자가 또 헛소릴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임신시킨 거네.”

기이하게 부풀어 있는 젖꼭지를 주물거렸다. 남자의 가슴팍에 달려 있는 갈색의 그것과는 달리, 내 건 붉은 색소가 실수로 더 들어간 듯 연하게 붉기만 했다. 남자가 그걸 세게 쥐고 뭉그러뜨리자, 이상한 쾌감이 들었다.

“내가 더 조심히 쌌어야 했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울어 보지 그래요.”

“…….”

“내 새끼가 여기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데, 나는.”

장 대표의 뜨끈한 손이 내 배 위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나는 배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가 본인이 직접 검사해 보겠다며 내 몸을 뒤집어 놓았다. 나는 밥그릇처럼 엎어져서 그에게 밑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엉덩이 아래로 들어온 남자의 큰 손에 자지가 잡혔다.

“허리 흔들어 봐.”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 뜨끈한 그 손에 대고 허릴 흔들었다. 남자의 큰 손이 내 걸 무지막지하게 조여 왔다.

“하앗, 읏…!”

자지 끝으로 피가 몰렸다. 사정감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발정 난 강아지 새끼처럼 마구 허리 짓을 해 댔다. 그동안 남자는 내 뒤에 붙어서 귀를 씹어 댔다. 혀로 귀를 반으로 접고는 한 입에 삼켜 넣고 제멋대로 씹어 댔다.

“…응!”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하얀 정액을 그의 손에 쏟아 냈다. 그 정액으로 제 좆을 문지른 남자는 곧이어 내 뒤에 붙어 왔다. 사정의 여운조차 아직 다 가시질 않아서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데. 남자가 이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숨을 몰아쉬며, 제 것을 쑤셔 넣어 왔다.

“흐으, 흐, 하!”

“…하.”

뿌리까지 단박에 처넣은 남자가 잠시 숨을 골랐다. 곧이어 크게 부푼 좆 머리가 내 내장을 절구 찧듯 퍽 쳤다. 죄 없는 몸속 장기들이 한데 뭉쳐 위로 밀려 올라갔다. 큰 손이 내 배를 더듬거려 오더니, 뒤에서 신음 소리가 한결 격해졌다.

“이렇게 불룩해졌는데.”

“하윽, 읏….”

“임신이 아닙니까?”

남자가 허릴 뒤로 빼니 내장들이 다시 거꾸로 곤두박질쳐 내려왔다. 그의 손가락이 내 젖꼭지를 으깰 듯이 굴었다. 뿌리까지 처박고 있는 접합부에선 쿨쩍, 쿨쩍 소리가 났다. 저러다간 살갗이 까지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조만간 젖도 나올 것 같은데.”

남자가 잘근잘근 물어 댄 탓에 젖꼭지는 붉은빛을 띤 채로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침 뱉어 봐.”

그가 시키는 대로 엉성하게 침을 뱉었다. 투욱. 질척한 액체가 길게 늘어져 내 유륜 위로 툭 떨어졌다. 남자가 그걸 내 가슴에 펴 바르자, 찰진 소리가 났다. 이윽고 퍽, 퍼억 추삽질이 다시 시작됐다.

***

인격이 개수 구멍에 낀 때만치 더러운 장 대표는 그래도 섹스를 하고 난 후엔 그나마 유해졌다. 밑이 아픈 티를 내며 안기면, 남자는 기꺼운 듯이 날 제 품에 품었다. 어르고 달래는 행위는 없었지만, 날 제 품에 가둬 두곤 일반인들의 발가락 굵기만 한 굵은 손가락으로 내 구멍을 헤집었다. 엉덩이 사이로 남자의 손가락이 드나드는 통에 나는 작게 흐느끼면서 그를 불렀다.

“대표님.”

남자가 말하라는 듯 눈썹을 추켜올렸다.

“저 학교에 다시 가고 싶어요.”

미간이 처참히 찌그러졌다. 태풍에 지붕 무너지듯 일그러진 남자의 표정에 나는 몸을 털실 공처럼 옹송그렸다.

“이유는?”

“…이대로 있다가는 계속 이 관계에서만 머무르고 있을 것 같아서요.”

“이 관계?”

남자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얼굴에 꽂혀 왔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코끝으로 남자의 뺨을 쿡 찔렀다.

“기분 좋게 두 발 빼서 상태 딱 좋았는데.”

그가 묵음 처리 한 뒷말이 읽혔다. 왜 괜히 입을 열어 내 기분을 좆같이 만들지.

“제가 대표님한테서 돈 받는 관계요. 제가 당당하지 못한 기분이 들어요.”

“그게 문제면 내 호적 밑으로 들어오든가요.”

“…….”

“장여원 씨?”

장 대표가 입술에 힘을 빼고 픽 웃었다. 미친 새끼. 남자는 담배 한 개비를 더 빼물었다. 완벽한 비율을 이루는 입술 새에 물려 있는 게 맛깔스러워 내게 달라고 하자, 남자는 새 걸 피우라 했다.

“…이게 맛있어 보여요.”

날 바라보는 눈빛은 꼭 머리 까맣고 영악한 짐승을 바라보는 그것이었다.

“…저 주세요.”

“…애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네.”

입술을 살짝 벌리자, 그가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담배를 내게 가져왔다. 나는 연기를 불어 내며 남자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안쪽에 뺨을 비벼 대며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는, 눈꺼풀을 닫았다. 그리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일단 오늘은 운을 띄운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남자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가는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으로 운전대를 쥔 남자의 창문 뒤로 불빛들이 쏟아졌다. 여러 번 차로 이동해 봤지만, 그가 직접 차를 모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와 함께 가로지르는 거리는 어딘가 감각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도착한 곳은 한 연극장 앞이었다.

남자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개의 샹들리에가 밤길 위로 희붐한 빛을 뿜어 대고 있었다. 극장은 직원 몇몇을 제외하면 사람이 거의 없어 아주 조용하기만 했다. 연극장 앞엔 내가 요즘에 읽고 있는 책 제목과 동일한 제목의 연극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나는 남자와 안쪽으로 들어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어떻게 된 게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이 많은 좌석들을 죄다 빌린 걸까. 돈지랄도 이만하면 로열 골프장 사장이 감격할 지경이었다.

붉은색 커튼이 장대하게 걷히고, 막이 올랐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열연을 펼쳤다. 처음 보는 연극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옆을 바라봤다. 남자가 따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문화생활 즐기세요?”

처음에는 퇴폐 문화에만 빠져 있을 것처럼 생긴 남자가 이런 고급 문화도 즐길 줄 안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낯설고 이상했다. 남자는 의외로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다. 고상한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채워 넣었을 지식이 이젠 남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랬을 리가.”

남자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담배나 피우고 싶단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예상대로였다. 굳이 돈까지 들여 이곳으로 온 이유는 역시 나 때문인 거겠지. 입술이 바싹바싹 탔다. 앞에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고 있는데도, 곁에 있는 남자 때문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좌석이 좁은 것도 아닌데. 남자의 체구가 너무 커 어깨가 맞닿을 것 같았다.

남자의 긴 팔이 내 의자 등받이를 감싸 왔다. 느지막이 한숨을 쉬며 손등으로 턱을 괸다. 여전히 남자의 두 눈동자엔 권태만 일렁거렸다. 그 지독히도 무료하단 얼굴에 나는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남자의 숨결이 너무 가까워서 어찌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서여원 씨.”

“…네.”

“지금 뒷덜미에 닭살 돋았는데.”

남자의 손끝에 뒷덜미가 은근히 문질러졌다. 전율이 온몸으로 느껴져 나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신발 안에 있는 발끝이 다 오므라들었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픽 웃고는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날 제 것 취급하는 행위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숨결이 다 닿을 간격이라 숨 쉬는 것조차 불편했다.

남자의 손이 슬금슬금 안을 타고 와 젖꼭지를 만졌다. 좌석이 너무 높이 있어 들킬 위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러고 있으려니 불안감이 선뜩 들었다.

남자가 내 손을 자신의 하체로 가져갔다. 그러곤 부푼 자신의 하체를 쥐게 만들었다. 손에 닿는 뜨끈한 하체에 나는 왠지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걸 몇 번 문질러 주자, 한결 더 크게 부풀었다.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 무대 위 배우들은 아직도 열연 중이었다. 이쪽엔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저쪽에게 그렇듯이.

주름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훑어 올리곤 남자의 좆을 본격적으로 위아래로 흔들었다. 조금만 손댔다가는 팽팽하게 불어난 풍선처럼 팍! 하고 터져 버릴 듯이 발기했다.

“아래로 내려와서 빨아.”

의자 아래로 타고 내려가 남자의 걸 입 안에 넣고 빨았다. 기둥까진 역시 너무 커서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의 성기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프리컴을 주욱 내뿜었다.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이걸로 내 뒤를 찢고 들어왔을 거라 생각하니까 두려움이 덜컥 드는 반면, 묘한 흥분감이 들었다.

내내 지루하단 얼굴을 달고 있던 남자가 제 셔츠를 매무시하곤 그제야 관람하는 척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저 주연 배우보단 서여원 얼굴이 더 볼만하네.”

남자가 내 뒤통수를 꾹꾹 짓눌렀다. 나는 목 안까지 좆을 빨아들이곤 억억댔다.

“더 세게.”

“…으윽.”

한껏 낮춘 목소리들이 오갔다.

“뺨 홀쭉해질 때까지 숨을 헉 들이쉬어 봐요.”

남자가 시킨 대로 숨을 참고 좆을 빨아들이자, 성기가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내 목 안을 타고 들어왔다.

“그 상태로 목 안까지 넣고 있는 거예요.”

목구멍 안이 남자의 성기로 팽팽하게 늘어났다.

“어때.”

“숨 막혀요.”

나는 남자의 성기에 의해 목이 틀어 막힌 채로 어눌하게 말했다. 돈을 쓴 그 어떠한 보람도 없이, 연극 내용은 머리에서 완벽히 날아갔다. 앞으로 이 제목이 쓰인 책 표지도 못 들여다볼 듯했다. 연극장에서 저지른 추태가 떠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게 분명했다.

03.

짧은 휴식기를 마친 남자는 다시 바빠졌다. 골프장은 보통 봄과 가을이 가장 호황기인데, 이런 성수기와 맞물리니 남자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더니, 며칠은 외박을 했다.

시계를 자꾸 확인했다. 이 큰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남자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는 늦는다고 말을 안 할 뿐더러, 구태여 그가 내게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 주인의 귀가 시간을 모른 채로, 그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개 꼴이었다.

새벽 5시가 다 된 시간. 오늘도 안 오겠다 싶어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퍼뜩 잠에서 깨어 집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와 조우했다. 근 이틀 만의 귀환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잔뜩 흐트러져 있는 넥타이를 목에서 뽑아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무표정으로 중무장을 해 놓은 얼굴. 언뜻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간 곁에서 남자를 지켜봐 온 나는 그의 낯에 일어난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약간 까칠해진 피부, 묘하게 찌푸려져 있는 미간, 꽉 닫혀 있는 턱. 저건 최소 피로로 세수를 한 자의 얼굴이었다.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의 재킷을 갈무리해 옷장에 넣었다.

“…아.”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남자가 골이 땡기는지, 셔츠를 벗다 말고 팔로 세면대를 지탱하고 섰다.

“이리 와 봐.”

“이것만….”

재킷을 옷걸이에 걸려는 그 짧은 찰나도 참지 못하고, 장 대표는 기어코 내 팔을 잡아다가 제 앞에 끌어다 놨다. 바투 서 있는 남자에게서는 술자리에서 나는 그 특유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역한 술 냄새, 매캐한 담배 냄새, 여러 사람의 향수 냄새. 온갖 복잡한 냄새가 났다.

“벗겨 봐.”

나는 술통에 빠져 있다가 온 듯한 남자의 단추를 마저 풀었다. 단추를 제거해 나갈수록 셔츠에 감춰져 있던 남자의 몸이 조금씩 엿보였다. 셔츠의 허리춤을 잡고 바지에서 끌어 올리자, 남자가 날 몸으로 덮쳐 왔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곤 코로 힘껏 냄새를 빨아들였다. 나는 살갗에 훅 끼쳐 오는 숨결에 소름 돋아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음, 살냄새.”

미약한 힘으로 그를 밀어 내며 씻고 오라 종용했다. 몸이 돌덩이 같은 남자는 내 손짓엔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아 오는 뜨거운 체온에 손끝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거렸다.

“얼른 씻고 오세요.”

“씻기 전에 한 발 뺄 생각인데.”

“…하아.”

남자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샅이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

“…….”

“넣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장 대표의 가죽 벨트를 풀어내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남자 또한 내 바지를 끌어 내렸다. 고무줄 바지라 한 번에 쑤욱 내려갔다.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던 탓에 가뜩이나 하얗던 내 피부는 이젠 실핏줄이 비칠 만큼 창백해 보였다. 남자가 허벅지에 귀두를 붙이고 비비기 시작했다. 남자는 제 귀두로 내 허벅지 안쪽을 밀어붙이며, 나를 제 반찬으로 삼았다.

남자는 이윽고 사정했다. 멀건 정액을 내 허벅지에 토해 내며, 귀두를 허벅지 안쪽 살갗에 문지르면서 마지막 정액 찌꺼기까지 모두 배출했다.

남자는 이내 씻으러 들어갔고, 나는 방 안에 놓여 있던 티슈로 남자의 정액이 튄 허벅지를 문질러 닦았다. 그러곤 남자가 화장실 앞에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여느 때처럼 대수롭지 않게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려 빨랫감을 한데 추스르고 있는데. 셔츠에 남은 뭔가가 눈길을 이끌어 왔다.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부분에 붉은색 오염이 묻어 있었다. 크레파스로 문댄 듯한 자국이었다. 남자가 여태껏 있었던 장소를 고려하면, 이건 차라리 립스틱 자국이라고 해야 좀 더 그럴듯했다. 나는 셔츠에다가 코를 붙이고 냄새를 맡아 봤다. 여러 가지 향수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서 나는 독한 냄새 가운데, 은은한 장미 향 하나가 신경을 건드려 왔다.

“…….”

립스틱이 여기 묻었을 정도라면 꽤 밀착을 해야 했을 텐데. 나는 조금 씁쓸해진 심경으로 그 얼룩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바지 양쪽을 걷어 올리고 베란다 한쪽에 쭈그려 앉았다. 비누 케이스에 놓인 둥근 비누를 집어 그 부근에 대고 비벼 댔다. 명품 아니면 안 입는 남자의 값비싼 셔츠가 내 무신경한 손길에 의해 이리저리 늘어났다. 대충 빨래 바구니에 던져 놓았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자, 당연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가 침대에서 내게 팔을 뻗어 왔다. 나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침대로 누웠다.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침대에 모로 누웠다. 뒤에서 남자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 빼서 그런지 목소리가 나른했다.

“피곤하니까 아양 좀 떨어 봐.”

그의 말을 못 들은 체, 무시했다.

“…차라리 진짜 개를 기르세요.”

“여기 있는데, 왜.”

남자가 내 목에 얼굴을 좀 더 깊게 들이밀어 왔다. 이윽고 목 뒤로 숨결이 쏟아져 내렸다. 후욱, 공기를 들이마시는 남자의 들숨에 내 심장이 들리고, 날숨에 심장이 다시 가라앉았다.

남자를 처음 봤을 때 그의 룸에서 마주쳤던 두 명의 여자. 그리고 김미란과 박진경이 그를 두고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흘러갔다.

‘나였어도 열심히 뻗대 봤겠다. 미혼에다 섹시하겠다, 씀씀이도 크니까.’

박진경이 특유의 깔깔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좆도 크고.’

남자의 품 안에 갇힌 채로 몸을 웅크렸다. 기분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남자가 나를 거꾸로 들어 올려 바닥으로 메다꽂은 기분이었다. 제발 딴 새끼와도 몸을 섞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지 알 수 없었다.

***

남자는 그다음 날에도 늦었다. 늘상 있던 날인데 오늘은 왠지 자꾸 초조해져서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게 됐다. 그러다가 새벽 3시가 넘어가서야, 남자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오늘따라 수신음이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남자는 고객을 상대해야 해서 늘 휴대폰은 ON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쉽사리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 때문에 나는 집 안을 뱅뱅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수신음이 뚝 끊겼다.

- 여보세요?

웬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귀에 붙이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 화면을 확인해 봤다.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한 열세 자리의 번호는 분명 장 대표의 것이 맞았다. 건너편에서 흘러온 낯선 목소리에 나는 순간 벙 쪄서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건네 왔다.

- 대표님 지금 샤워 중이십니다. 어디에서 연락 왔다고 하면 될까요?

샤워 중이라고? 남자는 샤워 중이고, 지금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은 그 대신 전화를 받았다. 둘은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같은 공간 안에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상황은 단 한 가지로 유추될 수밖에 없었다. 일순 눈앞에서 살색 향연의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에 천천히 힘이 가해졌다.

- 여보세요?

여자가 뭐라 말이 없는 나를 재차 불러 오길래, 나는 끊어질 듯 말 듯, 희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전화 잘못 건 것 같아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전화는 끊겼다. 나는 황망한 눈으로 상대방을 잃은 휴대폰을 내려 보았다. 이윽고 손을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그날 새벽,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왠지 악몽을 꿀 것 같다는 불안한 기운이 내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탓인데. 아니나 다를까, 선잠에 들자마자 불길한 꿈이 나를 덮쳐 왔다. 나는 훤한 백열등 밑에서 몸을 팍 일으켰다. 허억, 헉! 밭은 숨을 건조한 공기로 가득 찬 방 안에 연신 뱉어 댔다.

전신을 얼음물에 푹 담갔다가 꺼낸 듯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금이 후들거리며 떨렸다. 후유증이 평소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악몽에 대한 면역력이 그새 없어진 듯했다. 남자가 있어 한동안 잠자리가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몸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말아서는 얼른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손목시계 안에서 흐르는 매초가 나를 매질해왔다.

오늘따라 해가 참 더디게 떴다.

***

남자는 날이 밝아서야 집에 돌아왔다. 방 안으로 곧장 들어와선 다짜고짜 내 품부터 찾아왔다. 나는 솜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축 늘어져서 남자를 받았다. 남자의 헉헉대며 내뱉는 숨결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는 유달리 흥분되어 보였다. 나는 그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남자의 하체로 손을 뻗어 그의 허리에서 벨트를 뽑아냈다. 지그재그로 얽혀 있는 바지 지퍼를 내리자, 남자의 드로어즈가 바깥으로 노출됐다.

“…….”

“…….”

무지막지하게 부푼 드로어즈로 손을 뻗으려다가, 나는 뭔가를 눈치채곤 손을 멈칫했다. 장 대표의 하체는 지금 짙은 검은색의 드로어즈에 감싸여 있었는데. 분명 나갈 땐 다른 걸 입고 있었다. 깔끔을 떨어 대는 남자니까 얼마든지 펜트하우스에서 샤워를 했을 수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갑자기 이 점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걸까.

분명 샤워했다면서. 그게 불과 5시간 전인데. 왜 남자한테선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이렇게 역겹도록 진동하고 있는 거지. 나는 남자에게서 나는 그 냄새가 너무 싫었지만, 그래도 남자의 고간을 핥았다.

남자는 감미롭다는 듯, 고개까지 뒤로 꺾고 내 혀를 느끼고 있다가 내 머리채를 잡고는 허리를 낮췄다.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갤 숙여 입을 맞춰 오려고 하기에 고갤 홱 피해 버렸다. 몸은 섞는 건 그렇다 쳐도, 적어도 입은 맞추고 싶지 않았다. 입맞춤을 거부당한 남자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런 식의 거부는 그로서는 처음이라, 상당히 불쾌한 듯했다.

“왜 지랄이야.”

내가 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거절하고 나서냐는 어조. 나는 한숨을 뱉듯 지껄였다.

“…술자리 냄새 나요.”

“한두 번이에요?”

그에게서 술 냄새가 난 건 정말이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씹질하는 건 되고, 입술은 안 된다고?”

거부당한 남자는 내 아랫입술을 꽈악 물었다. 아플 정도로 씹혔다. 비릿한 맛이 나는 걸 보니 기어코 피가 터진 게 분명했다. 아파서 아, 하고 입을 벌린 사이 남자가 제 혀를 밀어 넣어 왔다. 작은 입 안 가득히 남자의 혀가 들어찼다. 남자는 내 여린 입 안 피부를 쭉쭉 빨아 댔다. 나는 반응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내 혀를 문질러 오는 남자의 혀를 나는 무시했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밀어붙여 왔다.

장 대표는 내 구멍 안에 좆을 넣은 채로 잠들었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어서 빼냈다. 주욱 피와 정액이 넘쳤다. 나는 수건에 물을 묻혀 내 몸을 먼저 닦아 냈다. 그러곤 다시 한번 그 수건을 빨아 이번엔 잠에 빠져든 남자의 몸 또한 닦았다. 셔츠를 벗기고 몸을 구석구석 빡빡 닦았다.

***

남자는 또 몸에 향수 냄새를 치덕치덕 묻힌 채로 돌아왔다. 그에게선 또 플로럴 계열의 향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대체 이 냄새의 정체는 뭘까. 씻지도 않고 내게 달라붙어 오는 그를 밀어 내며 나는 입술을 놀렸다.

“대표님 향수 냄새가 너무 독해요.”

남자가 눈매를 팍 구겼다. 그의 날카로운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향수 냄새?”

“…네, 장미 냄새 나요.”

“나는 꽃 냄새 나는 향수를 뿌린 적이 없는데.”

“…….”

나는 한결 더 가라앉았다. 남자가 꽃 냄새 나는 향수를 뿌린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뱀 눈알을 굴리며 나직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까 새로 온 캐디한테서 그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때 전화를 받았었던 여자가 캐디였던 걸까. 입술을 꾹 다물자, 남자가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불안한 기운이 가슴을 사악 가로질렀다.

“저번에 왜 그렇게 새침을 떨어 대나 했더니.”

장 대표의 얼굴이 승기를 고지에 꽂은 정복자처럼 희열에 젖었다. 남자가 날카로운 코끝으로 내 목덜미를 애무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감각이 남자의 피부가 맞닿고 지나간 궤적을 따라 느껴졌다.

“애첩이 꿈이라면서 본처처럼 질투를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남자가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단박에 속내를 간파당해 버린 나는 귓불까지 시뻘게져서 얼른 입술을 놀렸다.

“오해예요. 저는 대표님이 누구와 뭘 하시든 저와는 상관없는….”

남자의 눈길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이 이상은 말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내가 누구와 뭘 해.”

뭐라 대답을 안 하고 있자, 남자가 재차 물어왔다.

“씹질?”

“…….”

남자가 중지로 자신의 미간을 툭툭 두드리며 지껄였다.

“씹질 재미있지. 여자 둘에 남자도 하나 껴서 하면 더 재미있겠고.”

“원래 남자랑은 안 하시잖아요.”

그때 그 징그럽던 김 사장이 분명 그랬었다. 장 대표가 남자에도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그랬지. 같은 거 달린 새끼한텐 관심 없었으니까.”

근데 또 모르겠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청각을 완전히 곤두서게 만들었다. 뭐가 또 근데 모르겠다는 거지.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얼굴은 목 졸린 것처럼 하얘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입으론 뒤졌으면 좋겠다고 저주하는 새끼 있으면 혹시 모르지.”

남자는 화장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내 쇄골에 얼굴을 묻어 왔다. 나는 그런 남자의 가슴팍을 뒤로 밀어 냈다. 남자는 웬일로 쉽게 밀려나서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며 머릴 매만졌다. 일부러 자신은 지금 이 상황에서 여유롭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거였다. 그에 반해 남자의 말 하나, 손짓 하나에 흔들리고 있는 나는 불안하기만 했다.

“근데 나는 지금 서여원 씨 생활비 벌기에도 좆 빠지게 바빠서 씹질까지 하기엔 너무 바쁜데.”

“…셔츠에 립스틱이 묻어 있었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홧김에 말을 저질러 버렸다. 남자의 턱이 기울어졌다. 그러곤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동선이 얽혀 부딪혔었는데. 그때 묻었나 보네.”

나는 남자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말이 진심일까. 그럼 왜 샤워할 때 그 캐디로 추정되는 여자가 전활 받았던 거지.

“캐디분이 전화 받으셔서는.”

“어.”

남자는 흥미로워하며 눈을 빛냈다.

“조금 이따가 다시 연락 달라고 했었어요. 대표님 샤워 중이시라고.”

남자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 캐디 실수로 술병을 뒤엎는 바람에 바지가 온통 젖었으니까. 같은 공간 안에 그 캐디 말고도 대여섯 명이 더 있었는데. 김미란에 박진경까지 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안으로 그러쥐자 남자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여원.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였다.

“가서 진짜로 실행하고 오기 전에 제대로 말해 봐.”

“…….”

“내가 어떤 새끼한테 씹질하든, 뭘 어쩌겠다고?”

나는 화장대의 모서리를 노려봤다. 벼린 듯 예리하고 날카로운 게 꼭 남자 같았다. 나는 그 부분을 꽉 그러잡았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도 박고 싸고, 입 맞추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왜.”

기어코 왜냐고 물어 오는 남자를 앞에 두고 입술을 머뭇거렸다.

“…싫어서요.”

“왜 싫은데요.”

싫은 데에 이유가 있을까. 그냥 싫은 거지. 남자가 다른 이와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졌다. 상상만으로도 괴로워서 차라리 머리에서 떠나 줬으면 했다.

동시에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너무나도 불합리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남자는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처럼 연인 사이가 아니니까.

“애새끼인 줄로만 알았는데 많이 컸네, 질투도 할 줄 알고.”

“…….”

나는 뭐라 대꾸하지 않고, 남자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 오려고 하기에 얼굴을 피했다. 남자는 낮게 웃으면서 내 뺨을 혀로 할짝거렸다.

“서여원.”

“…네.”

“내 것이라고 말해 봐.”

“…….”

나는 달뜬 숨을 연신 토해 내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주 보는 눈매가 접혀 들었다. 남자는 그의 고객들을 대할 때처럼 날 협박해 왔다.

“내가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면 그땐 어떻게 할 거예요.”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져나갔다. 남자가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느냐고?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나는 힘을 잃고 남자에게 안겼다. 올곧게 서 있던 내 허리가 힘을 주어 구부린 철사처럼 꺾였다. 나는 흐린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대표님.”

내 뒤통수를 끌어안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내가 없던 서여원 씨가 얼마나 무능력했는지 말해 봐요.”

오늘 새벽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가 없는 나는 무능력하다기보단 어떤 무생물에 가까웠다. 분명 여기 존재는 하고 있는데, 생명력이나 활기 따윈 전혀 없었다.

“거의 못 먹고, 못 잤어요.”

“악몽도 계속 꾸고?”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과장되게 탄식했다. 안타깝다는 듯이 입술로는 한숨을 내뱉는데,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마치 알고 있었던 자의 눈빛 같았다. 모를 리 없을 게 분명했다. 내 일거수일투족 모두 남자의 귀로 들어갔을 테니까. 자신의 부재가 내게 불행을 가져왔다는 걸 못 견디게 기꺼워하는 그가 재차 물었다.

“무서워서 어떻게 했습니까.”

“얼른 아침이 밝기를 기다렸어요.”

베개를 부둥켜안고는 무서움에 떨어 댔다. 혹시라도 남자가 올까 봐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사실 아침보다는 남자가 와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정복자의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다짐했다. 그 사실만은 남자에게 알리지 않아야겠다고. 단단히 심지를 굳혔다.

“스물셋 먹고 몽정이나 하고 말이에요.”

“…….”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겠잖아.”

장 대표가 연인에게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는 남자처럼 내 귓불과 귓바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굵직한 엄지로 추근덕대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쏟아 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싸지도 못하지.”

분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남자가 없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턱을 남자에게로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곤 사실을 토로했다.

“…저는 대표님 거예요.”

“그래요?”

기꺼운 듯이 눈매와 입매를 모두 사용해 웃는 남자에게 나는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거려 보았다. 남자는 아주 똑똑한 애완견을 대하듯이, 기특하다는 듯 내 뺨을 어루만져 줬다. 이마로 남자의 입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럼 질투하는 게 당연하지.”

그러곤 만족감을 입술에 매달고 웃는다. 나는 남자의 손에 얼굴을 내맡긴 채로 작게 탄식했다. 내가 했던 게 정말 치졸한 질투였을까.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참이지. 최악이다. 나는 우울감을 베일처럼 머리에 덮고선 입술을 꽉 다물었다.

***

출근해야 하는 새벽에 유독 더 좆같이 굴곤 하던 장 대표는, 오늘만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론 그 기색이 얼굴에 대놓고 드러난 건 아니었다. 그저 눈썹 모양으로도 그의 기분을 알아맞히는 내가 그 미세한 감정 변화를 읽어 낸 것뿐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맵시 있게 매듭짓는 남자의 손엔 평소보다 힘이 약간 더 들어가 있는 데다가, 머릴 매만지는 손길은 유난히 유락해 보였다.

그에 내 우울감은 배가 되었다. 어제의 상황을 곱씹기만 해도 낯이 다 화끈거려 되도록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예전처럼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간 어디로 손을 뻗어 올지 몰랐다. 내 귀가 될 수도, 내 다리 사이가 될 수도….

“…….”

“……!”

발가벗겨진 몸에 시트를 두르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 있다가, 그만 남자와 거울 속에서 시선이 얽히고 말았다.

시선을 공유하기 싫어 고갤 옆으로 홱 돌리자, 나직이 숨을 터뜨리며 내 꼴을 비웃어 왔다. 그 날연한 비웃음에 남자가 뭉근하게 매만지던 귓불에 화악 열감이 끼쳤다. 뒷덜미엔 소름이 돋고 척추엔 찌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어 들어가고 싶어 나는 아예 이불로 얼굴까지 덮어버렸다.

남자가 방을 떠나는 인기척이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침대 헤드에 이마를 퉁퉁 박았다.

남자에게서 나는 낯선 꽃 냄새가, 그의 셔츠에 묻어 있는 립스틱이, 집을 나갈 때와는 다른 속옷이 둘러져 있는 하체가 나를 혼란하게 했다. 계속해서 부정적인 상상들이 나를 휘감아왔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상들엔 박차가 가해졌었다.

…다른 이에게 스폰을 제안하는 장 대표, 다른 이를 밑에 깔아 두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남자의 커다란 몸, 무서운 얼굴로 더 싸보라고 협박하는 남자의 얼굴…….

상상이 계속될수록 추악한 감정들은 한층 더 겹겹이 쌓였다.

그 모든 게 그냥 내 오해에 불과했다니.

장 대표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추한 감정을 느낀 걸로도 모자라, 그걸 남자에게 들키기까지 했다. 쪽팔려서 이불보를 한 움큼 손에 쥐고 꽈악 비틀었다. 진짜 딱 죽고 싶었다.

***

그러고 집을 나갔던 남자는 퇴근 후에 저녁 식탁에서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하얗고 작은 상자였다. 열어 보자, 최신식 모델의 휴대폰이 안에 담겨 있었다. 이게 뭐지. 내 의아한 눈길에 남자가 답했다.

“연락 안 되면 불편하니까 갖고 다녀요.”

집에만 있는데 연락이 안 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군말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져 봐서 낯설기까지 한 최신형 휴대폰을 박스에서 꺼내는데, 안에 뭔가가 더 있었다. 플라스틱 카드 한 장. 이미 일식집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카드였다.

“이게 뭐예요?”

남자의 입술 새로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학교 다시 다니고 싶다면서.”

“…네.”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두 눈만 끔뻑거리자, 장 대표가 여상한 얼굴로 지껄여 댔다.

“등하교는 내 차로만 하고.”

“…….”

“스케줄은 직원이 관리할 테니까 알아 둬요.”

장 대표가 하는 말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가,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학교에 가게 해 준다고? 갑자기 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완고하던 남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워낙에도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이건 나한테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락해 주는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이런 선택을 내린 걸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한텐 너무나도 희소식이었다.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인데.”

“…….”

나는 한참 동안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남자에게 내 일엔 신경 쓰지 말아 달란 식으로 말했던 그날. 남자는 그때 내게 카드를 줄 셈이었던 걸까. 참 지독히도 손발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굴었다간 학교 타령 했던 거 제대로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알아서 똑똑하게 굴고.”

장기주. 남자의 이름이 박혀 있는 카드가 신기해 손가락으로 쓸어보다가, 카드를 뒤집었다. 은색 줄 띠 위에 남자의 사인이 간결하고도 힘 있게 들어가 있었다. 카드를 들여다보는 데에 여념이 없는 내 이마로 남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대답.”

그때까지 카드만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여느 때처럼 날선 눈빛이 날 향해 와 있었다. 나는 입꼬릴 올려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장 대표의 큰 손에 붙잡혀 있던 포크와 나이프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더니, 종전엔 그 끝이 접시에 닿았다.

남자는 말 그대로 묘한 눈빛으로 날 지켜봤다. 나도 모르게 웃느라 반쯤 접혀 있던 눈, 아마도 조금 솟아 있을 광대 부근, 위로 당겨졌던 입술을 차례대로 핥아 내렸다. 무척이나 축축한 시선이었다.

“…왜 그러세요?”

나는 남자가 그만 쳐다봤으면 했다. 더더욱이 그렇게는 그만 봤으면 싶었다. 물음을 받은 남자에게선 별말이 없었다. 그저 갈증이 나는지 아랫입술을 혀로 적시다가, 손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곤 물이 담겨 있는 와인 잔으로 손을 내뻗을 뿐이었다.

꿀꺽, 꿀꺽.

물로 목을 축이는 남자를 앞에 두고 나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의 시선이 흠씬 빨아 대고 지나간 눈가와 광대 부근과 입술이 화끈거렸다. 나는 싸대기를 얻어맞은 듯 뺨에 홍조를 달곤 집요하고도 끈질긴 남자의 시선 아래에 꽤 오랫동안 놓여 있었다.

***

그다음 날, 바로 대학교에 복학 신청서를 냈다. 거의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학교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점 없이 그대로였다. 스쳐 지나가는 이들은 모두 낯선 얼굴들이라, 나는 익숙함과 낯섦을 모두 느꼈다.

용건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백화점이 보이길래 잠시 앞에서 멈춰 달라고 했다. 직원이 백미러를 통해 날 마주 봤다.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백화점 안에서 화려한 장신구들 때문에 눈이 부시는 한 고급 매장으로 들어갔다. 반지가 있는 진열대로 다가가자, 직원이 말을 걸어 왔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반지 보려고 하는데.”

두 눈으로 진열장 안에 전시되어 있는 반지들을 살폈다. 너무 화려한 보석이 올라간 반지는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을 테니 최대한 디자인이 심플한 것으로 눈여겨봤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게 있어 직원에게 가격을 물었다.

“1캐럿인데, 가격대 좋게 나왔어요. 사백팔십입니다.”

입 모양을 둥글게 말아 아, 하는 소릴 냈다.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나는 다시 한번 반지를 들여다봤다. 머릿속으로 남자의 굵고 긴 네 번째 손가락 위에 저 반지를 덧그려 봤다. 꽤 그럴싸한 그림이 만들어졌지만…. 현재 그의 손가락엔 직원이 가져 온 반지가 이미 끼워져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최고급으로. 굳이 있는 걸 또 줘야 할 필요가 있나.

어떻게 해야 하지. 한참 동안 고민하며 진열대 앞을 서성거렸다. 그러고서 가게 문을 나왔을 땐 내 손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종이 가방이 들려 있는 상태였다.

다음 날. 출근하겠다고 나서는 장 대표를 신발장 앞에서 붙잡았다. 남자에게 줄 게 있다고 하자, 그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는 백화점 직원이 정성껏 포장해 준 걸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가 그걸 한참 동안 내려다보더니 아주 천천히 포장지를 끌러 냈다.

그러고 드러난 건 새끼손가락만 한 넥타이핀이었다.

“서여원 씨가 웬일로 선물도 다 주고.”

“대표님 카드로 긁은 건데요.”

나는 어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남자는 내 말 따윈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넥타이핀을 내려다봤다. 이미 훨씬 좋은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인간이니까 별거 아닌 거 취급할 줄 알았는데.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제가 해 드릴게요.”

케이스에서 넥타이핀을 빼 남자의 넥타이에 가져갔다. 조금 삐뚤어진 것 같아서 이리저리 매만져 봤지만, 약간 서툴렀다. 남자의 두 눈이 내게로 달라붙어 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또 이것조차 못하냐며 핀잔을 줄까 봐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 보고자 했지만, 역부족했다. 엉성하게 마무리된 넥타이를 손에서 놓고 뒤로 물러났다.

“처음 해 보는 거라서 이상해요.”

구차한 핑계였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입술 끝을 올려서 조금 멋쩍게 웃었다.

“반지 주신 거에 대한 답례예요.”

“나쁘지 않네.”

나쁘지 않다고 지껄인 남자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 어깨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딜 보는 거지. 남자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다. 별 특별할 거 없어 보여서 다시 앞을 향했더니, 어느새 남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를 가둔 두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

“…잘 다녀오세요.”

나는 괜히 겸연쩍어 작게 속삭거렸다. 발끝을 내려다보며 애꿎은 발가락들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몸이 단박에 장 대표에게로 끌려갔다. 곧 널따란 가슴팍이 날 덮쳐 왔다. 나는 포획당한 작은 짐승처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의 품에 갇혀 있었다.

“누구는 서여원 씨 생활비 벌러 로열까지 가는데 말이에요.”

“…….”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거예요?”

태평하게 있지 않으면 내가 어쩔 수 있을까. 의중을 파악할 수 없어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가 입꼬릴 길게 찢으며 답했다.

“어차피 내가 없으면 방문만 바라보고 있을 거면서.”

그는 이미 다 알고 있단 식으로 지껄였다. 그 묘한 뉘앙스에 난 남자를 응시했다. 얼굴에 덧그려져 있는 비소에, 순간 책장에 붙어 있던 CCTV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내 남자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날. 남자는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쳐선 내게 헉헉대며 달라붙어 왔었다. 평소보다 이상하게 흥분해 있다곤 생각했었는데.

…다 알고 있던 거였구나. 나는 허탈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따라나섭니까?”

앞에 툭 놓인 물음에 다시 눈을 떴다. 시야 가득 남자의 얼굴이 담겼다. 남자가 지금 가는 곳이라면 그 골프장일 텐데. 온갖 불쾌한 경험으로 얼룩져 있는 그곳.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남자를 따라나서겠다고 말했다. 남자와 함께하고 싶어서.

***

골프장으로 이동하는 차 안. 창문 밖으로 익숙한 듯 낯선 길들이 이어졌다. 뒤통수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장 대표를 돌아봤다.

“로열이라면 끔찍해하는 줄 알았는데.”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술을 어물거렸다.

“…제가 골프장이 끔찍했던 건 대표님 때문이었어요.”

남자의 입술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시선이 느껴지는 룸 미러에 두 눈을 모았다. 내게 남자의 명함을 건넸던 그 직원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경악에 물들어선, 어떻게 그런 말을 담을 수 있냐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나는 다시 조용히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색 도로의 끝.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건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남자를 마주 봤다. 아직도 그의 미간엔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는 직원 몰래 남자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내 손가락에만 반지가 끼워져 있는 상황인데. 흉터 탓에 남자와 나, 양쪽 모두에게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걸 깨닫곤 작게 웃자, 영문을 모르는 남자가 웃는 이유를 물어 왔다.

<끝>

외전 2. 검은 뱃속

프롤로그

맞닿아 있는 몸이 펄떡거리며 뛴다.

…또 시작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가 램프에 불을 밝혔다. 어둠이 걷히자, 남자는 팔로 몸을 지탱해 옆을 내려다봤다.

“…….”

하얀 뺨을 따라 박혀 있는 솜털에 주황빛이 하나하나 맺혀선 산란했다. 눈가 밑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속눈썹은 옅게 떨고 있었고, 콧잔등엔 미묘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론 끊어질 것 같은 숨이 연달아 딸려 나왔다.

“하, 으흑…, 아….”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는지, 이불보를 움켜잡은 하얀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가늘게 돋아났다.

남자가 여원의 몸을 덮고 있는 시트를 밀어 냈다. 길게 쭉 뻗은 하얀 다리가 시선을 잡아채 갔다. 남자는 한 쌍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머리칼만큼이나 부드러운 음모에 감싸인 안은 축축했다. 사타구니를 뭉근하게 문지르는 손길을 따라 애액이 끈적하게 늘어진다.

스물셋. 몽정을 하기엔 이미 꽉 찬 나이인데.

남자의 손길이 더 안쪽을 더듬거리자,

“아, 아아….”

작게 벌어진 여원의 입술 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몸을 파고들 때나 내던 소리에 남자의 울대가 꿀꺽 울렸다.

길게 뻗은 여원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찾듯이 시트를 긁어 댔다. 갈퀴처럼 손끝을 세워 시트를 득득 긁어 댄다. 자신을 찾는 손길이었다. 그걸 보는 남자의 눈이 서슬하게 빛났다. 지나치게 새카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눈이 광기 어린 희열로 번들거렸다.

남자는 늪 같은 악몽에 빠져 괴로워하는 여원을 옆에 두고 미소 지었다. 손에 넣기 위해 그렇게 애를 먹었는데. 그 값어치를 제대로 해 주고 있으니 그저 기특할 수밖에.

그의 망막 안 쪽에서 여원을 얻기까지 스쳐지나갔던 과거의 일들이 상기됐다.

장 대표라 불리는 남자의 원래 본명은 장기주였다. 그의 태생만큼이나 이름이 지어진 배경에도 조악한 사정이 있었다.

고아원 건물이 있는 길목에 버려졌다가 원장에게 주워졌을 때, 그는 이름조차 없는 상태였다. 원장은 일일이 이름을 붙여줄 만큼 다정한 자가 아니었다. 그에 근처에 붙어 있던 전단지에 ‘장기 주고 팝니다.’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 그대로 남자의 이름으로 와서 붙었다.

그의 나이 열둘에 고아원에서 같은 방을 쓰던 아이가 원아 일지를 훔쳐보곤 떠들어대는 탓에 남자 또한 그걸 알게 되었다.

남자의 이름엔 그의 태생이 있었다. 명백한 흠이었으나, 그렇다고 갈아치우기엔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장 대표’로 불리었다. 성에는 태생이 묻어 있으나, 그 뒤에 딸린 지위는 오롯이 제 두 손으로 얻은 거였다.

제 두 손으로 직접 쌓아 올린 성, 남자는 그곳의 주인이었다.

***

새 물건이 나왔다고 연락을 보내면 냄새를 맡은 고상한 자들이 개떼처럼 모여들어 왔다. 온갖 부패와 무질서가 범람하는 공간. 돈 많고 시간 남아도는 자들이 무료함을 죽이는 곳. 바로 그곳, ‘로열’로 말이다.

“고급이라면 당연히 빛깔 뽀오얀해야 맛볼 맛이라도 나지. 응? 장 대표 물건은 그럴싸하게 겉만 포장된 그, 천박한 것들이랑은 확연히 다르다 이 말이야.”

“하여간에 요즘 물건들은 겉보기에만 그럴듯하고 이 실속이 없어, 실속이.”

“장 대표 최근에 K.O 쪽 물밑 작업 끝냈다면서? 그쪽 하여간에 수완 좋아.”

오직 남자의 손에 들린 물건과 돈에만 관심 있는 자들. 그들은 늘 남자의 피로를 한계치까지 끌어 올리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마찬가지인 하루였다. 고객들을 접대하는 룸으로 쓰는 420호를 빠져나온 남자는 켜켜이 쌓인 피곤을 지우려 술과 약을 함께 했다.

“…음.”

약 기운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남자는 배설을 위해 적당한 상대를 골랐다. 그러고 이어지는 행위엔 어떠한 열락도 없었다. 싸고 흔든다. 그에 대가를 지불한다. 그리고 끝. 애완용 쥐가 쳇바퀴 돌 듯 무료한 일상만 흘러넘쳤다.

이번 해도 그렇게 어느 특별한 일 하나 없이 무료하게 흘러갈 거라 생각했는데.

“세탁물 수거하러 왔습니다.”

룸의 초인종이 눌렸다. 가운을 몸에 두르며 나가 본 밖엔 하얀 몸뚱어리 하나가 서 있었다. 남자는 뱀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처음엔 지난밤에 들이마셨던 마약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가루약처럼 하얀 얼굴에 누군가가 섬세한 붓질로 이목구비를 덧그려 놨다. 눈매를 가느다랗게 빼고, 처마를 그리듯 콧잔등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해 놓았다. 입술엔 제 혼을 불어넣었는지, 핏물까지 배어 있었다. 가느다란 머리칼 사이로 비죽 솟아 나와 있는 귀 끝엔 솜털이 그대로였다.

남자는 그 직원을 보자마자 단박에 알아챘다. 이진석이 지껄여 놓은 그 새끼라는 걸.

‘대표님 취향으로 곧 신입 하나가 들어올 겁니다. 제가 특별히 컨택했어요.’

남자는 신입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다시 한번 훑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체적으론 늘씬했으나 유니폼에 감싸인 몸에선 쉬이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얼른 치우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티를 팽팽하게 올려붙이고 있는 젖꼭지가 남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손톱처럼 연분홍빛이었다. 피부색이 창백해서 그런지 그 작은 살점들도 옅은 색을 띠고 있었다. 남자의 눈이 저속한 흥미를 비추며 번들거렸다. 입술엔 야릇한 비소가 드리워졌다. 순진한 얼굴을 한 주제에 밑은 해질 대로 해져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한편으론 구미가 당겼다. 닳고 닳아서 구멍 사이로 튀어나와 있는 살점도 과연 젖꼭지처럼 옅은 분홍색일지. 오랜만에 맛있어 보이는 것을 발견한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실로 간만에 식욕이 당겼다.

***

“한 잔마다 성냥 한 개씩을 얹어 주겠습니다.”

제 말에 신입은 술 한 잔, 한 잔을 힘겹게 목 뒤로 넘겼다. 쓰디쓴 물을 삼켜 넣는 하얀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이 이상 마셨다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기절할 때까지 버텨 댔다. 테이블을 손으로 잡고 힘겹게 몸을 지탱하다가, 결국 채 한 병을 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길고 늘씬해서 균형이 잘 잡힌 몸이 러그 위로 늘어졌다.

신입의 처절한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남자는 그 몸을 바라보며 쯧쯔,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러곤 술 때문에 뒤로 넘어간 이를 안아 올렸다.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 룸으로 들어와 기절한 이를 침대에 눕혀 두었다. 허옇기만 하던 뺨이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새붉었다. 귀 밑으로 보이는 목도 마찬가지로 손에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쥐 죽은 듯이 곤히 자서 죽은 건가 싶었는데. 가슴팍은 들숨과 날숨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며 미약하게나마 분명 들썩이고 있었다.

남자는 쯧쯔, 혀를 찼다. 기절해 버린 신입을 침대에 두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직원 하나를 시켜 신입의 신분증을 찾아오라 일렀다.

“여기 있습니다.”

직원이 건네는 신분증을 받아 그걸 들여다보았다. 사진이 붙어 있는 모양이라든지, 이름이 박혀 있는 글씨가 조잡했다. 눈썰미가 좋은 이라면 누구든 그리 어렵지 않게 이게 가짜란 걸 알아볼 거였다. 남자는 신분증을 손으로 가지고 놀며, 김중덕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대표님. 전화 받았습니다.

“신원 조회 하나 해 봐. 이름 서수원, 주민 등록 번호는….

얼른 조회해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라는 말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중덕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 대표님, 말씀하신 주민 등록 번호 조회해 봤는데, 이거 없는 신원이라 뜹니다.

없는 신원이라 뜬다고. 분명 신분증엔 제가 준 술을 겁대가리 없이 벌컥벌컥 마시고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이의 사진이 담겨 있는데.

- 더 알아볼까요?

음, 목을 울린 남자는 일단은 됐다고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테이블에 던져 두곤 다시금 신분증을 들여다봤다. 어딘가 어색한 표정, 뻣뻣하게 굳은 목, 남의 걸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한 옷차림. 급하게 찍은 티가 풀풀 묻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신분증을 손에 쥔 채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룸 바닥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크게 불어났다. 저벅저벅, 짐승 같은 형체를 한 그림자가 느릿하게 걸어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한가운데에 시트만큼이나 하얀 몸을 늘여 트리고 있는 자가 있었다. 남자의 죽 찢어진 시선이 신입의 얼굴에서부터 가슴팍까지 훑어 내렸다. 도드라지는 쇄골 뼈, 관리를 잘했는지 탄력 있어 보이는 상체, 그리고 엷은 티로 내비치는 유륜조차 연할 것 같은 유두를 차례대로 주시했다.

남자는 신분증의 날렵한 모서리로 얌전히 잠들어 있는 이의 뺨을 쓸었다. 아주 느릿하고 진득하게. 성적인 욕구가 다분히 내비치는 손길이었다. 카드의 끝이 뭉근하게 귓바퀴를 스치자,

“…….”

“…으.”

신입이 어깨를 작게 말았다. 신음을 터뜨리느라 작게 벌어진 입술 새로 제 좆을 파묻고 한 발 빼도 괜찮겠다 싶은데. 그러면 본 게임에 들어가기에 앞서 흥미를 잃을 것 같았다. 늘 그래 왔으니까. 실로 간만에, 아니 거의 난생처음으로 구미가 당기는 몸뚱어릴 봤으니 최대한 느긋하게 맛볼 참이었다.

남자는 신입이 깰 동안 소파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투욱, 툭. 밖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흠씬 두들기는 빗방울에 남자는 일순 입아귀를 길게 찢었다. 룸 안의 풍경이 제법 운치 있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 물었다.

“….”

“아, 흐윽….”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있을 때. 침대에서 으으, 새끼 짐승이 앓는 것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손으로 깍지를 끼며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했다. 소파에 상체를 늘여 트린 그는 느긋하게 기다림의 시간을 즐겼다.

룸 안이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물들었다. 이내 잠에서 깨어난 이는 넋 나간 얼굴을 달고선 룸 안을 살폈다. 멍청한 눈동자가 이어서 남자를 발견했다. 두 눈이 쟁반처럼 크게 뜨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신입은 그야말로 튕기듯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내 신입을 한켠에 두고 담배나 태우던 남자는 몸을 파르르 떠는 신입에게 스폰을 대 줄 것을 제안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내 무료함을 달래 주면 당신이 도망 나갈 길을 찾아 주는 건 물론.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지급해 주겠습니다.”

신입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은 얼굴을 하고서 속눈썹을 벌벌 떨어 댔다. 이 신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게 다른 이였다면 그저 신입이 지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라고만 생각했을 터. 그러나 남자는 그 속눈썹 밑으로 자신을 향해 오는 눈빛이 민예한 빛을 내는 걸 분명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에 남자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몇 살이나 됐을까. 기껏해야 막 교복을 벗었을 것 같은 얼굴. 인생의 쓴맛이라곤 어제 자신이 주었던 독한 술이 전부였을 것 같은 낯인데, 저 멀건 눈동자 밑에 교묘히 감춰 두고 있는 건 분명히 경계심이었다.

어젯밤 술을 삼키던 기세로는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신입을 룸에 두고 밖을 나서는 지금, 남자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제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역시나 서수원이란 이름으로 제 신분을 위장한 신입은 쉬이 승낙의 뜻을 전해 오지 않았다.

남자로선 이런 진행이 흥미로웠다. 은근히 시선을 내리깐다거나, 입술을 작게 오므렸다 펼치는 모습이나, 둥그렇게 부어서 유니폼을 밀어붙이고 있던 젖꼭지나. 분명 자신을 유혹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신입이 제 발 밑으로 기어들어 오길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대체품들은 차고 넘쳤다. 그중 한 개를 골라 방금 막 사정을 끝낸 남자는 가운을 걸친 채로 테라스에 서서 담배 한 개비로 목을 태우고 있었다. 발정이라도 난 듯 계속해서 싸고 흔들며 며칠을 보냈으나 아직 성욕은 그대로였다. 배에 고인 상태로 켜켜이 쌓여만 가서 이젠 나날이 흉포해져만 갔다. 그의 이런 상태를 대변하듯, 옆에 놓인 재떨이엔 필터까지 태운 꽁초가 수북이 쌓여갔다.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인 남자가 날숨을 내쉬자 연기가 하얗게 뭉쳤다가 흩어졌다. 딱 그 연기만큼이나 하얀 얼굴을 하고 있던 신입이 연상됐다. 남자는 뜨거워지는 목구멍을 느끼며 눈을 내리 감았다. 이번엔 어둑해진 눈꺼풀 안에서 경계심 어린 눈빛을 속눈썹 밑에 감추고 있던 이가 스쳤다.

남자가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기민하게 눈치챘다. 돼지 발정제라도 탄 듯한 자신의 몸 상태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주 정확히 판단 내렸다.

테라스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김중덕을 불렀다.

***

남자를 둘러싼 상황은 늘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남자는 신입이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입술을 벌려 자신의 성기를 삼키는 모든 과정을 눈에 담았다. 안이 좁을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목구멍은 예상보다 더 좁고, 더 축축했다.

“…음.”

하얀 얼굴이 자신의 성기를 입에 문 채로 억억댔다. 단정하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눈물을 뚝뚝 흘렸고, 채 다물리지 못한 입에선 침이 줄줄 새어 나왔다. 이건 뭐, 생각보다 더 볼만했다. 그간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지루해하던 남자는 그제야 입가에 비소를 드리웠다.

진득한 시선이 신입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핥듯이 이목구비를 관찰했다. 참 묘한 감상이 들게 하는 얼굴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속눈썹에 가려진 눈동자는 유약한 곡선을 그렸고, 콧잔등도 그와 같은 궤도로 부드러이 뻗어 나가 섬세하단 느낌을 주었다. 새붉은 핏물이 든 입술은 아무리 크게 벌어진다 하더라도 남자의 걸 다 받아 내지 못했다.

벗겨 놓은 몸은 생각보다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운동하던 몸이라고 하더니. 허리는 한 팔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가느다란데, 허벅지나 엉덩이엔 늘씬한 근육이 붙어 있어 맵시가 있었다. 여러모로 군침이 돌았다.

처음에 뻑뻑하기만 하던 몸은 손으로 몇 번 후벼 주고 나니 제법 유연해졌다. 신입의 밑구멍에 제 좆을 모두 밀어 넣은 남자는 목을 뒤로 꺾고 만족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여태껏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부드러움과 쾌감이 남자에게로 들이닥쳤다.

손으로 종아리를 꽉 움켜 쥐어다가 어깨에 올려놓고 밑을 쑤시면 좆이 더 깊은 내장까지 파고드는 건 물론이고, 늘씬한 몸이 시각적으로도 즐거움을 주었다. 게다가 몸에선 묘한 살내가 났다. 달큰한 내는 땀을 내면 한층 더 진해졌다. 맛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남자는 신입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뒤에서 흘레붙는 걸 좋아했다. 하얀 엉덩이 사이를 벌리고 좆을 처박으면 내벽이 끝내주게 조여 왔다. 안쪽에 있는 피부가 딸려 나와 남자의 좆을 잡아당기곤 했다. 남자는 제 솥뚜껑 같은 손으로 신입의 뺨을 시트로 밀어붙였다. 이대로 이 하얀 밀가루 반죽 같은 얼굴을 망가뜨려 버리고 싶었다. 꺽꺽 죽어 가는 신입의 신음 소릴 들으며 헉헉댔다. 이토록 황홀한 쾌감을 느껴 본 게 언제인지, 남자는 알지 못했다.

냉기가 목덜미를 얼리던 어느 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운반하던 약의 봉지를 열어 손끝으로 조심스레 약을 탐해 봤을 때조차 이런 끝내주는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남자는 아주 즐거이 신입의 몸을 탐했다. 목덜미를 손에 틀어쥐자, 한층 더 생생하게 뛰는 생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더 빨리 뛰면 뛸수록 몸에서 퍼져 나오는 체향이 한층 더 짙어졌다. 남자는 그 체취를 모두 제 콧속으로 빨아들였다.

***

요즘 남자의 최대의 관심사는 어떻게 서수원이라는 가명을 제 얼굴에 뒤집어쓴 신입을 구워 삶을까였다. 하얀 얼굴이 남자의 앞에서 웃었다. 눈매가 부드러이 휘어지고, 양 뺨이 봉긋하게 솟았다. 새붉고 통통한 살점, 입술에 미소가 고였다.

남자는 그 얼굴을 보며 제 목 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자꾸만 이상하리만큼 조갈증이 느껴졌다. 남자는 건조한 입 안을 혀로 축이다 못해, 술잔을 완전히 꺾어 목을 축였다. 그럼에도 그 갈증은 지워지지를 않고 계속해서 목구멍에 남아 남자를 불쾌하게 했다.

남자는 신입이 제게 선물해 달라던 시계를 제 손아귀에 쥐고 굴리고 있었다. 이걸 요구하며 제게 아래를 내오던 하얀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발목에 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김에 남자는 신입을 알몸으로 모두 벗겨 손목에만 이걸 채워 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룸에 불러들이는데, 이름이 이혜원이라고 했던가. 신입이 그 여자에게 부딪히는 바람에 술병들이 우르르 쟁반에서 쏟아져 나와 깨졌다.

그리고 일이 예상치 못하게 전개됐다.

신입이 이혜원을 뒤로 물려놓곤 대신해서 테이블 밑으로 내려간 거다. 네 발로 땅을 기어 다니는 신입을 보며 남자는 턱을 팽팽히 당겼다. 감히 저 지랄을 떨다니. 그대로 신입의 발목을 제 손에 휘어잡아 침대로 질질 끌어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해야 했다.

원래도 기분이 그닥 상쾌하던 참이 아니었다. 기껏 예쁜 짓한 걸 치하해줄 선물을 준비했더니, 자신에게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신입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던 중이었는데.

“어디서 무릎을 꿇고 기어 다녀요, 기어 다니길.”

신입이 벌서는 아이처럼 남자 앞으로 와서 섰다. 그 겁먹은 얼굴에 돌연 비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다리가 긴데다가 흠잡을 곳 없이 늘씬하니 치마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남자의 머리에 스쳐서였다. 그런 걸 입혀 놨으면 네 발로 기어 다닐 때 한 층 더 봐줄 만했을 텐데.

“잘 아는 사이인가 보네?”

“…아니요.”

요즘 자주 어울려 다닌다기에 이름을 외우고 있던 여자인데. 눈치 잰 신입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는 그 시건방진 얼굴을 가만 주시하고만 있다가, 신입에게 손목시계를 내밀었다. 제가 원하던 걸 손 안에 쥐여 줬는데도 신입은 기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직원들에겐 일상이 되어야 하는 그 흔한 영업용 미소 하나 얼굴에 띄우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자신을 흘깃대며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런 신입을 보고 있노라니, 남자의 심사가 똬리 치는 뱀처럼 뒤틀렸다.

자신이 몸값을 대주고 있으니 제 앞에선 목을 조아리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언뜻, 언뜻 스치는 눈빛에선 늘 딴 뜻이 읽혔다. 남자는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허연 거죽 밑에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나날이 의구심만 더 해가는데.

그러다가 뒤를 지켜보라 했던 직원한테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대표님.”

말하라고 손짓을 보내자, 직원이 보고해 왔다.

“차편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남자는 듣지 못하고 있던 말이다. 차편이라면…. 남자의 입술 새로 차가운 공기가 터져 나왔다. 무슨 뜻을 그 얄팍한 뱃속에 숨기고 있는 건가 했는데. 이 동떨어져 있는 곳에서 외곽으로 나가려면 차편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가서 이혜원 불러와.”

“네, 알겠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남자가 있는 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들어와도 된다고 답하자, 직원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룸 안으로 이혜원이 또각또각,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릴 내며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남자는 부드러이 웃는 얼굴을 응시하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서수원 씨랑 잘 붙어 다닌다고 들었는데.”

이혜원이 순순히 그렇다고 답했다. 남자는 이혜원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긍정의 답에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그 거슬림을 밀어내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넘기며 물었다.

“어때요. 잘 챙겨 줍니까?”

“네. 잘 챙겨 주십니다.”

남자는 이혜원을 가만히 지켜봤다. 만약 서수원, 아니 서여원이 정말 도망갈 생각으로 머리 한켠을 채우고 있는 거라면 이쪽에 손을 내밀 공산이 컸다. 이진석은 이미 신분증 일로 인해 그쪽에다 도움을 요청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 내렸을 확률이 높았다.

“이혜원 씨한테 맡길 일이 하나 있는데.”

“제게 맡길 일이라 하시면….”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던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의 입술 새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서수원, 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서수원, 발음하기엔 좋지만 그 곱상한 얼굴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그간 뒤를 쑤셔 대는 것에만 관심이 있던 남자에게 새로운 감응이 들었다. 그럼 그 몸뚱어리에 원래 붙여졌던 이름은 무엇일까.

남자는 다른 직원을 새로 불러 뒷조사를 시켰다.

정확히 이틀이 지나자, 직원에게서 서수원의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 세 글자가 들려왔다. 남자는 입술로 그 이름 세 글자를 발음해 봤다. 서여원. 그래, 서여원라는 이름이어야 그 몸뚱어리와 부드러이 어우러졌다.

***

서여원의 어딘가 긴장한 듯한 표정과 몸짓이 남자를 계속해서 의심하게 했다. 제 뱃속에 뭔가를 감추고, 그걸 남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듯한 모양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간 평생 입어 본 적 없었을 옷을 입혔고, 비싼 음식을 입에 대주었고, 예쁜 짓 몇 번이면 원하는 것을 내주었다. 남자 입장에선 얻는 것에 비해 흘러나가는 게 너무 과했다. 이토록 매몰 비용이 큰일을 손에 쥐고 있는 건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이런 계산에 능한 자이니 당연히 그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 방도가 없었다.

남자는 치솟는 욕구에 끊임없이 서여원의 몸을 찾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되레 소갈 현상은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욕구가 줄줄 범람해서 자연스레 배출량은 늘어 가는데 점점 뇌가 줄어드는 자신을 느꼈다. 혀끝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그야말로 몸이 달았다.

중독되지 않기 위해 마약에도 흡입 주기를 둘 만큼 절제력이 강한 남자는 점점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니 손해 보는 장사란 걸 알아도 끊임없이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얌전한 얼굴로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서여원의 뇌와 몸을 동시에 조이고 있는 긴장감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이제야 알게 된 남자는 거북한 심기를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남자는 그래서 서여원을 겁박했다.

제 사업장을 낸 이후로 다른 이 앞에선 뺀 적 없던 반지를 빼놓곤 서여원을 협박했다. 이게 내가 배워 온 방식이라면서, 도망치면 손가락을 자르겠노라 언질 줬다. 그러나 서여원은 어떻게 굴었던가. 두 차례 기회를 줬음에도 제 아랫도리에 얼굴을 묻어 오며 멍청하게 굴었다. 난생 처음 선심을 쓴 남자를 배반했다.

잠잠하던 이혜원에게서 소식이 들렸다.

“오늘 룸서비스를 저한테 요청하셨습니다.”

이혜원이 남자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 지폐 몇 장을 놓았다. 남자의 길게 찢어진 눈이 지폐에 적혀 있는 활자들을 읽어 내렸다. 차편을 준비해 달라는 서여원의 목소리가 남자의 귓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남자는 잠시 눈을 내리 감고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격하시켰다. 몸은 뜨거워지는데, 머리는 반대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하나, 고민하며 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이혜원 씨는 일단 서수원 씨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줍시다.”

이혜원에게서 알겠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수고비를 이혜원에게 건넸다. 구두굽 소리가 룸을 떠나고, 남자는 홀로 남아선 테이블 위에 있는 지폐들을 손아귀에 쥐었다. 만약 이대로 도망간다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우회적으로 말했으나 서수원, 아니. 서여원은 영리하니 능히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가 이런 거라니. 남자는 이 예쁘고 멍청한 이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단 심경이 들었다. 남자는 정말 그렇게라도 해야 속을 치미는 이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목구멍이 끝내주게 조여드는 순간, 남자는 그 목 안에 대고 추삽질을 해댈 생각이었다. 잠시나마 제게 쾌락을 선사해 준다면 서여원으로선 본분을 다한 것일 테니. 그런 졸악한 생각들로 머릴 채우고 있는데.

웬일로 서여원이 먼저 남자의 룸을 노크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쳐 보려 하지만 뻣뻣이 굳어 있는 목을 바라보며 남자는 속으로 비웃었다. 겁대가리 없이 약을 권해 오는 여원을 바라보며 남자는 저 목을 손에 쥐고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여원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셈이었다. 마약을 먹고 잠든 뒤, 그 곱상한 얼굴로 그때도 제 옆자리에 파김치처럼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다면 남자는 여원을 치하해 줄 셈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남자는 여원이 입술로 흘려보내는 마약을 제 입 안의 점막으로 취했다. 그날 밤 내내 여원을 품에 안았던 남자는 새벽이 되어 눈을 떴다. 그러곤 텅 비어 있는 제 옆자리를 발견했다. 언제 떠난 건지. 시트는 이미 싸늘하기만 했다.

남자는 싸늘히 말했다.

“찾아와.”

찾는 데에 오래 걸려 봤자 몇 시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한 대로 상황이 흘러갔다. 당연히 이혜원을 통해 본인이 준비한 차를 타리라 생각했던 여원은 그 차를 그냥 지나 보냈다고 했다. 이혜원마저도 믿지 못했던 걸까.

인간의 보폭으론 그래 봤자 거기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서여원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후우, 하고 날린 담배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조막만 한 머릴 이렇게까지 굴려 댔을 거라 생각하니.

“씨발.”

정말이지, 섬뜩할 정도의 분노가 남자의 전신을 휘감았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제 품에 취할 수 있던 이를 잃은 남자는 며칠간 분노에 완전히 잠식당해 있었다.

대강 손가락 몇 개 자르는 것 정도론 그 예쁘장한 얼굴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남자가 사 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벗겨 놓으면 그 하얗고 늘씬하게 잘빠진 몸은 모두 남자가 남긴 울혈로 가득했다. 모두 그가 자신의 이빨로 직접 남겨 놓은 자국들이었다.

자신이 베풀어 준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하게 내뺀 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남자는 고민했다. 제 앞마당에 서여원의 몸처럼 늘씬하고 긴 구덩이를 하나 팔까. 아니, 그 정도로 마음에 드는 얼굴과 몸은 없었으니까 없애는 건 손해다.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던 남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흐르더니 이내 뚝, 끊겼다.

“임 사장님, 잘 지내고 계셨을까요?”

귀에 맞댄 수화기로 임선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긱, 끼긱 오래된 철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미간이 불쾌감에 접혔다. 입술로 뱉는 어조가 단정적이지만 어감이 묘하게 부드럽던 서여원의 목소리와는 정 반대로 뻑뻑 거칠기만 했다.

“다름이 아니고 지금 잠깐 찾아뵐까 하는데.”

- 지금 말이요?

큼, 하고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 내 잠깐 오늘 일정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일정 따위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하우스를 전전하고 다니며 제 조카에게서 받은 돈을 내빼 쓰는 게 전부인 주제. 잰 척하는 임선철에 남자는 턱을 굳혔다. 누구냐고 묻는 주변에 ‘아, 요즘 내가 아는 젊은 사장이 하나 생겼는데….’라며 자랑을 늘어놓는 임선철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눈썹을 긁었다. 인내심이 그리 좋지 않은 남자의 짙은 눈썹이 크게 구부러졌다. 이 치를 상대하고 있는 것도 궁극적으론 서여원 때문이라 생각하니, 남자의 기분이 한 층 더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 오늘 마침 일정이 비네. 조금 이따가 봅세.

“그럼 곧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꼬고 있던 다릴 풀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민하게 재킷을 잡아채 룸을 나섰다. 제 아무리 도망쳐봐야 제 손바닥 안이니 행방을 찾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남자는 아주 천천히 잡아 챌 생각이었다. 손아귀에 넣고 둘둘 굴리며 조금씩 숨통을 조여들다, 공포감에 완전히 젖을 있을 때를 노려 낚아챌 계획이었다. 두 번 다신 도망칠 생각을 그 머리에 심어 놓지 못하도록.

이진석 그 영악한 새끼. 남자는 목 안에서 상스러운 욕을 뱉었다. 자신의 밑으로 대체 뭘 밀어 넣은 건지.

중상

붙잡아 온 서여원이 제 침대에 늘어져 있는 걸 보니 그간 누르고 있던 욕구가 뭉텅이째로 뒤집혀선 사나운 파도처럼 남자를 덮쳐 왔다.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결마다 나는 달큰한 내에 해소되지 못한 성욕이 펄펄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아채, 희연 엉덩이 사이에 좆을 꽂고 흘레붙고 싶었다. 몸내가 가장 짙게 나는 목덜미를 물어뜯으면, 입술 새로 끙끙 대는 야트막한 신음을 흘려낼 거였다.

꿀꺽, 연신 목울대를 울리면서도 자는 서여원을 그대로 둔 건 이 지독한 욕정을 짓눌러왔던 인내의 시간들이 생각나서였다. 간만의 관계이니 더 두었다가, 제정신일 때 제대로 먹어치울 참이었다. 무엇이든 묵혀뒀다가 먹어야 가장 맛있는 법이니까.

남자는 방에서 나와 테이블 앞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곧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을 제대로 자는 법이 없던 서여원이 깨어난 것이다. 술잔을 제 입가로 가져가던 남자가 소리 없이 동요했다.

“…대표님.”

서여원이 남자를 불러온다. 어조가 단조로운 데다가 끝은 희미하기까지 한데, 이상하게 귓전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기묘한 그 감각에 남자는 손끝이 일순 찌릿한 걸 느꼈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남자는 목구멍 안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그대로 여원의 목덜미를 손에 틀어쥐고서 흔들어 버리는 상상이 남자의 머릴 꿰뚫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여원의 말이 아니었다면, 남자는 제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대표님, 제 손가락들. 왜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다 하셨죠.”

남자의 두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이 얘기 해 드린다면…. 도와주실 건가요?”

남자의 뇌가 흥미감에 젖었다. 이미 우승을 거머쥐어 트로피를 껴안듯이 여원을 품에 쥔 남자는 너그러이 그 얘길 들어 주었다. 여원의 입술 새로 들리는 말을 들으며 남자는 그 얼굴이 점점 괴로움에 젖어 가는 걸 지켜보았다.

***

잠이 든 여원을 옆에 두고 침실에서 빠져나가 테라스에 선 남자는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끼웠다. 휠을 굴려 불을 피우는데, 수화기를 타고 김중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임선화 씨 통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트렁크 뒤에서….

남자는 불현듯 시선을 느끼곤 뒤돌아봤다. 길고 늘씬한 인영 하나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어찌나 새하얀지, 어둠 속에서도 램프처럼 홀로 발광했다. 크게 확대된 동공, 잔뜩 얼어붙어 있는 입술.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에 남자는 문을 닫아 소리를 차단했다. 자신의 등으로 박히는 시선이 사뭇 달갑다고 느끼면서.

- …대표님?

“계속 말해.”

- 트렁크 뒤에서 벽돌을 주웠습니다. 근데 이 벽돌에 피가 묻어 있어서 말입니다. 한 번 직접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벽돌이라면. 남자의 머리에 여원이 말한 적 있던 적색 벽돌이 스쳐 지나갔다. 담배를 모두 태운 그는 차를 대기하라 일렀다.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오자, 여원이 다가왔다. 보통 사람의 것보다 색소가 약간 옅은 눈동자가 그에게 닿아 왔다.

“…어디 가세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을 붙잡아 오는 눈길을 등졌다. 하얀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몸뚱어리를 다시 한번 짓누르고 싶었지만, 가 봐야 할 데가 있었다.

남자는 곧장 집을 나서서 차에 올라탔다.

***

그를 태운 차는 새벽길을 내달려 야산으로 향했다. 산의 초입에 한 남루한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 대기하던 김중덕이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왔다.

“오셨습니까.”

김중덕은 제 손에 쥐여 있던 통장을 남자에게 건넸다. 통장은 웬일인지 흙이 엉망으로 묻어 있었다. 남자는 더러워진 통장을 엄지로 한 장, 한 장 넘겨 봤다. 그러곤 적혀 있는 액수에 남자는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

“조수석 박스에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던 벽돌은 트렁크에 있습니다.”

김중덕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시라, 트렁크 쪽으로 제 상사를 모셨다. 거기엔 검은 봉지 하나가 얹혀 있었다. 잔뜩 구겨져 있는 검은 봉다리 안엔 그다지 특별할 거 없는 벽돌이 담겨 있었다. 없어졌다고 하더니, 이걸 그대로 뒤 트렁크에 싣고 다녔던 건가.

혈흔이 진하게 묻어 있는 걸 보니 흔적을 지워 볼 생각을 하지도 않은 게 불 보듯 뻔했다. 형사가 들이닥쳤다면 여원을 범인이라 특정할 게 분명한 상황.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지문을 지우겠단 핑계로 여원의 손을 사포로 득득 문대 놓고는. 왜 벽돌은 이대로 두었을까. 정말 증거를 인멸하려 했었다면 살인에 쓰인 도구부터 없애려 했을 텐데.

사포로 지문을 문댔던 일은 결과적으론 여원에게 죄책감만 심어 주는 꼴을 낳았다. 남자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자가 그렇게 사포로 문댄다고 지문이 없어질 거라 생각한 게 맞는 걸까. 아니, 애초에 증거를 없애기 위해 지문을 문댄 게 맞을까.

답은 임선철만 알고 있을 터.

“…….”

남자는 서서히 등을 돌렸다. 제대로 된 뒤처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가로질렀다. 보나마나 증거들을 줄줄 흘려놨을 거였다. 이걸 그대로 뒤에 싣고 다닌 꼴만 봐도 뻔했다.

***

개장에 있던 임선철을 다시금 찾았다. 정장 바지를 입은 남자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뒤 물었다.

“임 사장님.”

내내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눈을 뒤집어 까고 있던 개장 안의 고기가 이쪽을 바라봐 왔다. 이지 따윈 없는 눈동자는 남자의 얼굴에 닿아있지도, 그렇다고 닿아있지 않지도 않았다. 정신을 반쯤 놓고 있는 상황인데도, 임선철은 남자의 이어지는 뒷말에 몸을 퍼들쩍 휘둘렀다.

“서병진 씨 머리 깨진 그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납니까?”

“나, 난 몰라…. 난 그런 거 몰라!”

기억이 안 난다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임선철을 앞에 두고 남자는 턱을 기울였다. 성가시게 구는 고깃덩어리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권태가 넘쳐흘렀다.

“난 진짜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임선철은 이목구비를 떨쳐낼 듯이 고갯짓을 해댔다. 남자가 미간을 접자, 김중덕이 바로 그의 배를 걷어찼다. 날연한 폭력이 가해졌다. 이미 몸이 약해져 있을 대로 약해진 임선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해당 날짜를 불었다.

“시간은 언제쯤이었습니까.”

“…컥! 새, 새벽 1,2시즈음…….”

남자가 해당 날짜의 CCTV를 찾아오라 지시했다.

반나절이 채 안 되어서, 김중덕이 돌아왔다. 뒤를 봐주고 있는 형사에게 받은 고속도로 CCTV를 남자에게로 가져왔다.

남자는 로열에 있는 펜트하우스로 가서 그 영상을 확인했다. 소파에 몸을 묻고서 스크린 가득 채워져 있는 화면을 노려봤다. 월중 마을을 빠져 나간 임선철의 트럭이 어둑한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동영 고속도로를 빠져나간 임선철의 트럭은 2시간 후에 대남 IC 고속도로에 달린 CCTV에서 다시 발견됐다.

“…….”

고속도로를 벗어난 트럭은 마지막으로 인근 산으로 향했다. 남자는 직원들에게 그 산을 뒤지게 했다. 거기에서 임선철이 묻어 둔 서병진의 시체가 발견되는 데까진 꼬박 이틀이 걸렸다.

한 번 뒤집어 까인 적 있는 듯한 땅 부근을 파자, 서서히 썩은 내가 풍겼다. 죽음의 냄새였다.

어느 정도 더 깊이 파고들자, 땅을 뒤집던 삽이 뭔가를 푹 찌르는 소리가 났다. 그 주변을 널리 파자, 천에 둘둘 말려 있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중덕이 장갑 낀 손으로 그 천을 걷어 봤다. 시체는 이미 백골화되어 있었다. 원래 살점이 붙어 있었을 이마 부근엔 흠씬 두들겨 맞은 흔적이 잔뜩 나 있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깊이 팬 자국이 더러였다.

“…….”

그 흉측한 자흔들을 바라보던 남자는 뭔가 기묘함을 느꼈다. 분명 서여원은 벽돌을 한 번만 휘둘렀다고 했는데. 왜 서병진의 머리는 이렇게 무수한 자흔을 달고 있는 거지. 날카로운 것으로 여러 번, 그것도 아주 세게 가격 당한 흔적이었다.

“대표님.”

직원 하나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를 불러왔다.

“여기 서병진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이 있습니다.”

“…….”

검은 장갑이 끼워진 남자의 손이 낡은 휴대폰을 받았다. 김중덕이 사체를 눈짓하며 물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위치를 기억해두고 다시 묻어.”

***

남자는 다시 로열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그는 가운을 두르고 나와, 서병진의 휴대폰 전원을 켰다. 직원이 미리 충전기를 구해 살려 놓은 휴대폰에서 불빛이 나더니 화면이 돌아왔다.

깨진 유리처럼 금이 간 액정을 들여다보며 그 날의 증거를 찾던 남자는 전화 기록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수신 장애로 112에 도달치 못하고 끊긴 전화가 있었다.

시간은 새벽 2시 3분.

남자의 목 근육이 팽팽히 당겨졌다. 이 시간이라면 임선철의 트럭이 이미 월중마을을 떠나 동영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이미 서병진이 죽은 이후란 소리이다. 어떻게 이 통화 기록이 남아 있는 걸까.

남자는 임선철이 서병진의 휴대폰으로 걸었을 수도 있겠다는 가설을 세워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아닐 거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직접 시체를 운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포장된 시체를. 임선철, 본인 또한 살인에 가담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게다가 임선철로선 이 일로 서여원의 약점을 잡은 거니 제 발로 굴러들어 온 복을 차진 않을 거였다.

그럼 이 전화는 누가 건 것일까. 남자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일순 그의 뇌리에 서병진의 머리에 남아 있던 자흔들이 스쳐지나갔다. 서여원은 분명 벽돌로 머릴 내리쳤다고 했는데. 그 상흔들은 벽돌 같은 둔탁한 무기로 쳐서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아다리가 맞지 않았다. 그런 흔적들은 좀 더 끝이 벼린 걸로 내리쳤다고 해야 맞았다.

“…….”

뒤처리를 하기 위해 그날의 흔적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던 남자는 예상치 못하고 있던 상황과 맞닥뜨렸다. 석연치 않은 감이 들었다. 불쾌한 감정이 남자의 명치 부근을 득득 긁었다.

남자는 정지시켰던 고속도로 CCTV 영상을 다시 틀었다. 화면이 어두웠으나, 때가 새벽이라 차량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에 30분 정도가 지나 다시 나타난 임선철의 트럭을 남자가 잡아낼 수 있었다.

차량이 적어 한껏 속도를 낸 다른 몇몇 차들과는 달리, 임선철의 트럭은 점점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곤 아예 고속도로 갓길에 잠시간 정차했다.

…뭐하는 거지? 남자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지나치게 어둑해서 화면상으론 잘 보이지가 않았다. 임선철의 트럭은 그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삼십 분 정도가 지나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가 허둥지둥 운전석을 찾아들더니, 얼른 그 자릴 빠져 나갔다.

남자는 그 영상을 다시 한 번 재생해봤다. 그리고 뭔갈 발견하곤 한 번 더 재생해봤다. 어떠한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본 남자가 어느 장면에서 화면을 정지시켰다. 퍼들쩍, 검은 그림자가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있었고, 그 손끝에서 무언가가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남자는 이번엔 직접 차를 운전했다. 임선철이 잠시 차를 멈췄던 고속도로로 향한 남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임선철은 동영 고속도로에서 대남IC까지 2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남자가 직접 운전해본 결과, 30분 남짓하게 걸릴 뿐이었다. 중간에 시간이 지나치게 붕 떴다.

“…….”

영상에서 봤던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영상에서 봤던 길을 되짚던 남자는 허지 가장자리에 있는 밑이 푹 꺼진 공간을 발견했다. 배수로였다. 남자는 구둣발로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그의 손이 수풀이 우거져 있는 곳으로 향하더니, 거기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거꾸로 뒤집힌 삼각형을 이루는 철 덩이에 목재 손잡이가 붙어 있는, 삽이었다. 철덩이 끝엔 무언가가 오래되어 퇴색된 듯한 검붉은 흔적들이 마구 묻어 있었다.

그래, 서병진의 두개골에 빼곡히 나 있던 상흔들은 벽돌로 만들어진 거라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좀 더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도구여야 했다. …이를테면, 삽말이다.

서여원은 우발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제 아비의 머리를 내리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 이상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서여원은 남을 죽일 만한 천성을 타고나지 못한 이이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제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들을 천천히 재조립해 보았다.

CCTV 두 개 사이에 1시간 반 정도 있던 공백. 그저 시체를 파묻다가 묻었다기엔 지나치게 다량의 혈액이 묻어 있는 삽. 시간상으론 분명 동영 고속도로를 벗어났을 때인데 휴대폰에 남아 있는 전화 기록. …만약 그 때까지 서병진이 죽지 않았던 거라면?

***

남자는 김중덕 없이 홀로 임선철을 찾았다.

“임선철 씨.”

남자는 개장 앞으로 찾아온 삽을 내던졌다. 철덩이가 챙그랑 소릴 내며 작은 공간을 울렸다.

“서병진 씨 시체 발견된 산 근처 배수로에서 찾아낸 건데 말이에요.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의 손에서 굴러 떨어진 게 무엇인지 확인한 임선철은 두 눈을 쟁반처럼 크게 뜨곤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역시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이미 말했잖아,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남자는 이런 자들의 다물린 입을 손쉽게 벌리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협박이 해답이었다. 그래서 임선철의 흉부 쪽으로 남자는 그 삽을 들이밀었다. 한 번 복부가 개복된 적 있던 임선철은 공포감에 젖어 으아악, 새된 비명을 내질러댔다. 개장 끝까지 내쫓겨 삽에 묻어 있는 검붉은 자국들에 바들바들 떨던 임선철이 마침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오, 오줌이 마려워 잠깐 차를 세웠을 뿐인데.”

말을 듣고 있던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차를 세웠을 뿐이라면 동영 고속도로에서 사라졌던 그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차를 세웠을 뿐인데?”

“분명히 죽은 줄 알고 있던 놈이…!”

“…….”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다니 날 덮쳤어.”

임선철이 두 손으로 개장의 사슬을 부여잡곤 악다구니를 써댔다.

“뒤에서 내 목을 조르더니 날 도리어 죽이려고 했다고, 내 천만 원을 노리고선…!”

벼락처럼 비닐 하우스 안을 울리던 괴성 후엔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써늘한 적막감이 남자와 임선철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갇힌 채로 개와 다름없는 시간들을 보냈던 임선철이 이를 딱딱 부딪히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이로제에 걸린 듯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임선철이 개장을 네 발로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내,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삽으로 머릴 내리쳤다고.”

이제야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던 퍼즐들이 제 자릴 찾아갔다. 맞춰진 퍼즐들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서병진을 죽인 건 서여원이 아니다.

제 조카를 돈줄로 삼으려 여태까지 사실을 숨겨 온 임선철 때문에 여원은 아직도 공포 속에 살았다. 가끔은 어둠에 숨어 울기도 했다. 밤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던 여원을, 몸을 맞대고 자던 남자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남자는 여원이 고통받는 걸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숨죽이고 기다렸다. 얼른 자신의 아가리로 들어오기를.

그러나 여원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굴지 않았다. 위태로워서 손만 갖다 대도 부서질 것 같은 주제에, 지독히도 뻗댔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허물어지겠지 싶었는데. 그러다가 손을 내뻗는다는 게, 자신이 아닌 약이었다. 약에 취한 여원은 저기 괴물이 서 있다며 흐느꼈다. 그러면서 남자의 몸에 벌벌 떠는 몸을 안겨 왔다.

남자는 그제야 여원을 득득 갉아 먹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건 제 아비의 목숨을 제 손으로 사그라들게 했다는 죄책감에서 기인한 피해망상이었다. 그건 차라리 공포라 이름 붙이는 게 더 잘 어울렸다.

만약 이 사실을 여원에게 말한다면, 여원의 죄책감을 덜어 줄 수 있으리라. 거짓말 말라며,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이 증거들을 보여 줘서 믿게 하면 됐다.

그러나 남자는 여원에게 통장과 벽돌을 가져다주면서도 정작 이 사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장기주 대표님.”

집을 떠날 채비를 하던 남자는 자신을 불러오는 여원의 목소리에 뒤돌아봤다. 제 허릴 끌어안고 작게 부르면서 올려다봐 오는 눈길이 축축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에 남자는 몸을 멈췄다. 일순 시야가 아찔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여원이 별안간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서투르기만 한 입맞춤에도 남자는 능히 흥분했다. 아랫도리가 동해 당장이라도 이 새붉은 입술을 찢고 싶었다. 감미로운 입 안에 제 하체를 묻고 안을 우악스럽게 쑤셔 대고 싶었다. 웩웩, 토악질을 해 대며 눈에 눈물을 매달고 자신을 올려다보면 그만한 즐거움이 없을 거였다.

“…음.”

이 얼굴에 대고 진실을 토한다면, 여원은 제자릴 찾아들 거였다. 제 어머니도 찾았겠다,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도 사라졌겠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갈 거였다. 결국 완벽한 자유를 찾아 또 도망갈지도. 그렇게까지 생각이 가지를 뻗쳐 나가자, 남자의 거죽 밑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에게서 도망쳤던 여원이 사지 멀쩡한 채로, 발목 하나 잘리지 않은 채로 서 있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트라우마에 양 발목이 붙잡혀 있는 여원은 사람들 사이에 잘 섞여 들지 못했다. 남과는 쉬이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제게 다가오려는 사람이 있으면 털을 곤두세우곤 달려들 것처럼 굴었다가, 재빨리 달음박질쳐 본인이 도망쳤다.

제게도 그러던 이가 이제는 아이처럼 먼저 자신의 품을 파고들어 왔다. 제게 입술을 맞춰 오며 가련한 눈으로 남자의 체온을 요했다. 몸은 분명 성한데, 하는 짓거리로만 보면 절뚝절뚝 걷는 절름발이와 다름이 없었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그래서 남자는 여원을 그냥 두었다. 한 번 제게서 도망쳤던 전적이 있지만, 정신 세계가 비틀려 있으니 여원은 제게 품을 내어 주는 자신에게서 쉬이 벗어나지 못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

그런데 그 트라우마를 이제 제거할 수 있다고? 그 얘기인즉슨, 여원이 예전의 생활을 되찾아 간다는 말이 됐다. 그 말인즉슨, 여원이 또 머리 한 켠에 도망의 씨앗을 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건 남자가 필요에 의해 여원의 발목을 잘라야 한다는 말이 됐다. 도망가지 말라 겁박하며 내리눌러야 한다는 뜻이 됐다.

그러면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올려다보는 이 눈도, 그에게로 뻗어 오는 이 팔도 더 이상 없을 거였다. 여원은 오직 두려움에 젖어서 남자를 대하겠지.

남자는 그런 건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손을 뻗어 안겨 오는 여원은 생각보다 더 큰 희열감을 남자에게 가져다주었다. 마주쳐 오는 시선은 중추 찌릿한 쾌감이 들게 했고, 서투르게나마 응해 오는 혀는 감미로웠다.

이대로 진실을 털어놓기엔 그는 뼛속까지 사업가였다. 사업가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제 손에 굴러들어 온 행운을 놓치지 않는다. 제가 원하는 건 손에 넣고 만다.

“…….”

그래서 남자는 임선철을 죽일 뜻을 품었다. 여원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일의 몫을 갚아 주고, 임선철만 간직하고 있는 그 비밀을 영원히 묻어 두기 위해서였다. 그 두 가지라면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남자가 현장에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끼우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여원이 뜻밖의 소릴 해 왔다.

“…대표님, 그럼 저도 가게 해 주세요.”

“뭐?”

“…꼭 가셔야 한다면 저도 같이 갈래요.”

남의 분위기를 보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여원이 낌새를 읽은 듯했다. 창백한 얼굴로 따라나선다기에 남자는 여원이 직접 복수를 하려는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여원이 톱을 가지고 임선철의 배를 가를 거라곤 기대치 않았다. 그 일에 대해 떠올리기만 해도 벌벌 떠는 이니까. 그래서 남자는 판을 깔았다. 여원의 손에 톱 대신 카드를 들렸다. 좋은 패를 밑에서 빼 줘도, 여원은 계속해서 죽기만 했다. 남자는 그런 여원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서여원이 이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어차피 임선철은 오늘 죽어 나갈 거였다. 그게 남자의 계획이었다.

“대표님, 하지 마세요.”

여원이 제 앞을 막아서는 건 남자의 계획에 없던 일이다. 남자는 제 일이 틀어지는 걸 눈뜨고 볼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손을 거둬들였다.

그를 향한 유리처럼 반질거리는 눈동자엔 눈물이 성에처럼 맺혀 있었다. 남자는 그 눈을 통해 여원의 공포와 마주했다.

트라우마에 완전히 몸을 담그고 있는 여원은 이 일까지 더해진다면 완벽히 무너질 거였다. 남자는 그 상태도 나쁘지 않았지만, 최소한 여원이 이지를 갖고 있는 정도는 됐음 했다. 그래야 그 눈으로 제게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그 입술로 제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 올 테니까.

그래서 남자는 계획을 늦췄다. 여원은 까무룩 기절한 자신을 업고 내려온 남자에게 부탁을 해 왔다. 제발 자신의 삼촌을 병원에 보내 달라고.

“…저 벌 받을 거예요.”

여원은 제 몸을 한껏 웅크리며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미약해서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쳐 버리고 말 그런 음성이었다. 남자가 되물었다.

“벌?”

“벌을 집행한다던 그 신 말이에요.”

여원은 강박적으로 방구석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저한테도 벌줄 거예요.”

“…….”

여원은 벌을 내리는 신에 대해 남자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 끝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남자는 젖어 가는 큰 눈망울을 내려다보며 꿀꺽, 목을 울렸다. 우는 얼굴을 앞두고 있는 남자의 명치를 중심으로 기이한 감각이 피어 나간다.

“나도 한 짓거리들이 있어서 어차피 혼자서 벌 받진 않을 텐데.”

“…….”

“그래도 무서워요?”

눈물에 젖은 뽀얀 얼굴이 자신을 향해 왔다. 큼지막한 두 눈은 경계 하나 없이 제 공포심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연약한 자신의 배 속을 모두 내보여 주고 있었다.

…아, 남자는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혀로 욕을 곱씹었다. 씨발.

양가적인 감정이 남자를 거칠게 옭아매 왔다. 손에 여원의 목을 우악스럽게 틀어쥐고 부러뜨리고 싶은 감정이 하나, 입술로 목을 애무해 쾌락에 전 신음 소릴 내뱉는 걸 보고 싶은 감정이 하나.

남자가 여원의 뺨을 문지르며 눈물을 훔쳐 주자, 곧 여원이 안겨 왔다. 남자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여원을 두고 난잡한 상상들로 머릴 채웠다. 흐느끼는 울음을 뱉는 여원의 혀를 치아로 우득우득 씹고 싶었다. 보드라운 살점을 잇새에 두고 잘근잘근 씹으면 여원의 몸이 움츠러들곤 했었는데. 혹여나 어금니를 세워 잘라 내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도 쾌감을 느끼는 게 남자의 손끝에 짜릿한 감각이 들게 했다. 남자는 여원의 길고 가느다란 목을 물어뜯고, 손가락으로 밑을 거칠게 쑤시고 싶었다.

“…….”

그러나 남자는 광폭하게 날뛰려는 제 성욕을 눌러 잡았다.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든 여원을 내려다보며 남자는 성기를 여원의 허벅지에 대고 비볐다. 안에다 쑤셔 넣고 허릴 맘껏 흔들어, 아프다고 우는 여원을 달래며 박는 상상을 하면서, 남자는 여원의 허벅지에 사정하는 것으로 족했다.

남자는 눈앞이 하얗게 점멸되는 드라이 오르가즘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 본 적 없던 새로운 종류의 성적 쾌감이 남자를 흔들어 왔다. 좁고 축축하고, 따뜻한 구멍에 파고들면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쾌감이 들이닥칠 테지만…. 지금은 이미 정신적 쾌감만으로도 중추가 저릿했다.

손바닥으로 다리 사이를 훔치자, 여원이 뒤척거리며 새끼 짐승처럼 칭얼거렸다. 남자는 건조하기 그지없는 손길로 여원의 등을 토닥거렸다.

“…….”

그는 여원의 밑을 파고드는 대신, 여원을 품에 안은 채로 곁을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오늘 밤 충만했다.

그다음 날. 남자는 김중덕에게 일러 개장에 쑤셔 박혀 있을 임선철을 병원에 입원시키라 일렀다. 이 사실을 여원에게 알리자, 여원은 더욱더 기가 막힌 말을 해 왔다.

“…이 이상은 삼촌에게 손대지 말아 주세요.”

남자는 여원의 혀를 짓씹었다.

“…흣,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니까.”

“…….”

“야, 약속해 주세요….”

여원의 길고 가느다란 목을 물어뜯고, 손가락으로 밑을 거칠게 쑤셨다.

“대표님….”

쾌감에 신음을 뱉으면서도 애원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렇게 하죠.”

남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여원은 당연히 남자가 제 말을 들어주겠다고 알아듣곤 눈을 내리감았다. 그제야 안심하고 남자가 주는 쾌감에 오롯이 몸을 내맡겼다.

***

그렇게 조용한 몇 주가 흐르고 남자의 귀에 임선철 소식이 들려왔다. 건강이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자, 그새를 못 참고 하우스를 전전하고 다닌다고 전해 왔다.

임선철을 근처 병원에 감금하듯 입원시킨 남자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삼촌에게 손대지 말라고 애원하던 여원에게 그러겠다고 말했다. 여원은 당연히 남자가 제 뜻을 따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테지만….

남자가 입 밖으로 내뱉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은 조금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임선철을 죽일 뜻을 품고 있었다. 그의 결정은 얼음처럼 견고하고 또 차가웠다. 그깟 대가가 무서워 일을 저지르지 않는 거라면,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르면 되었다. 트라우마 때문에 누군가를 또 해할 생각 따윈 머리에 수납하지 못하는 여원의 복수를 대신해 주고, 그를 영원히 제 품에 가둬 둘 생각이었다.

남자는 서여원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간병인에게 일부러 여원을 아는 척을 하라 일러두었다. 그는 간병인이 여원과 함께하고 있을 때를 노려 일을 치를 참이었다. 그렇게 해야 여원에게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시체가 발견될 현장에도 임선철이 서병진을 죽인 범인이라는 증거들이 널려 있을 거였다. 살인 도구가 주변에서 발견되고, 거기에 흠뻑 남은 지문과 혈흔도 임선철이 범인이라는 걸 지목하겠지. 어떻게든 살인 동기를 짜 맞춰야 하는 검찰 쪽에선 임선화의 통장에 있는 천만 원을 갖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다 일어난 우발적인 살인이라 단정 지을 거였다.

통장에서 돈을 뽑아 쓰려다가 비밀번호를 몰라 실패했던 임선철의 얼굴이 atm 기계가 놓여 있는 은행 CCTV에 모두 찍혔을 테니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도박과 술에 미쳐 사는 인간들이었으니까 스토리를 짜내긴 더 쉬울 테다.

통장을 손에 넣은 임선철은 도박장을 전전하며 살다가 결국 빚을 이기지 못해 본인도 목을 매달아 죽는다.

계획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 일이 비틀어지리라는 계산은 남자에겐 없었다. 그는 김중덕에게 임선철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

남자는 서병진의 시체가 발견됐던 곳에 서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밑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임선철이 얼굴엔 검은 봉지를 뒤집어 쓴 채로, 직원 둘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왔다. 몸이 완전히 압박되었음에도 버둥버둥 난리를 쳐대는 그의 몸을 직원이 구둣발로 찍어 눌러 격하시켰다.

김중덕이 임선철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검은 봉지를 뜯어냈다. 허억, 임선철이 숨을 뱉었다. 그러다가 남자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하곤 꽤액, 새된 비명을 내질러 댔다.

“하늘같은 조카 등쳐 먹으면서 고작 한다는 짓이 카드 놀음.”

싸늘하게 식은 음성이 휘이잉, 몰아치는 바람 사이를 갈랐다.

“…조카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데.”

쯧쯔, 남자는 안타까웠던 얼굴을 허공에 덧그리며 임선철에게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그의 구두 굽 밑에서 낙엽이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임선철은 바지에 지릴 듯이 겁에 먹은 표정을 지으면서 점점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두 눈이 임선철이 파카 사이로 숨기고 있는 손에 가 닿았다.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까.”

“너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씨발!!”

왜 이러냐고? 남자의 입아귀가 길게 위로 찢겨 올라갔다.

“이 더러운 새끼들, 너 서여원과 배를 맞췄지?”

배를 맞췄다라. 남자는 그 애매모호한 표현에 웃었다.

“배를 맞췄다 뿐이겠습니까.”

남자는 네 조카의 뒤를 오늘 낮까지 따고 왔다는 말을 구태여 했다. 뒤에 돌부리가 박혀 있었는지, 임선철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럼에도 임선철은 네발로 기면서까지 남자에게서 벗어났다. 남자의 긴 다리가 점점 빨라졌다. 그는 구둣발을 추켜들어 임선철의 발목을 콱 내리찍었다. 임선철은 도끼에 찍힌 나무처럼 뒤로 홱 몸을 젖혔다. 남자는 그의 가슴팍을 발로 콱 짓밟았다. 구둣발 밑에서 나뭇잎을 밟았을 때나 나던 사그락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파카 안에 도박에서 딴 푼돈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남자가 그에게로 눈높이를 낮췄다.

“임선철 씨는 본인이 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죽는다는 말에 아아악, 임선철이 발광하며 괴성을 내질러 댔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라 누가 들을 일은 거의 전무했다. 만에 하나 산 밖에서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겐 산짐승의 포효처럼 들릴 것이었다.

남자의 입술 새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여원의 아버지, 서병진이 죽었던 그날 말입니다.”

음성이 괴괴한 공기를 파고들었다. 서병진. 그 이름 세 글자에 임선철의 이목구비가 단단하게 굳었다. 지방 낀 눈두덩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감정은 분명히 ‘공포’였다.

“서병진을 직접 야산으로 가서 묻었죠?”

“…….”

“여원과 둘이 처리했으면 쉬웠을 일인데 굳이 혼자 가겠다고 한 건.”

남자가 부러 말의 템포를 늦췄다. 임선철의 목울대가 꾸울꺽, 울렸다.

“통장 때문이었습니까?”

남자는 담배를 피워 댔다. 하얀 연기가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에 날아가는 속도보다 임선철의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남자는 금세 일곱 번의 연기를 뱉고는 한 개비를 더 꺼냈다. 임선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담뱃불이 꺼지면 자신의 목숨도 사그라들리라는 것을.

“장 대표.”

그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차가운 땅에 고정하고 있는 남자의 다리를 팔로 끌어안았다.

“미안하네, 나 정말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 자신 있어. 여원이에게도 내가 했다고 이실직고하겠네.”

뭐? 임선철의 말을 연기 날려 보내듯 보내고 있던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말한다고?”

기묘하도록 축축한데다 스산한 음성에 임선철의 뒤 목에 닭살이 피어올랐다. 그건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이 동굴 안이라고 해도 믿게 할 법한 목소리였다. 이토록 남자가 동요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임선철은 이번이 기회라는 듯, 더 애달픈 목소리로 애원했다.

“여원이에게 다 털어놓겠네, 죗값도 받겠어. 그러니까 제발….”

“…음.”

“그러니 제발 살려 주시게.”

임선철이 남자의 구두를 핥기 시작했다. 주변에 담배꽁초가 놓여 있든 말든 간에 개의치 않고 바닥을 핥아 댔다.

“제발, 제발 이렇게 빌 테니 살려 주십시오.”

끝까지 하대하던 자가 그제야 말을 높이며 빌빌 기었다. 임선철의 눈가를 타고 구정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임 사장님.”

남자가 임선철의 시선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산처럼 저 멀리 위에 있던 남자가 시선을 맞춰 오자, 임선철은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달빛에 놓인 눈동자엔 싸늘한 적요만이 감돌고 있었다.

남자는 표정 따윈 전혀 읽어 볼 수 없는 눈동자로 임선철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무척이나 곤란하지. 그걸 말한다면 서여원이 자신에게서 또 도망치려 할 텐데. 남자는 톱으로 임선철의 배를 갈라버리고 싶단 욕구를 재어하곤, 뒤로 물러섰다. 김중덕이 임선철에게 다가가 그의 목에 밧줄을 매달았다.

“대표님, 제발 한 번만 선심을…….”

밧줄이 임선철의 목을 단단히 조였다. 몇 주 전까지 하고 있던 개목줄 대신 밧줄을 새로이 목에 채운 임선철이 눈에서 구정물을 뽑아대며 제발 살려 달라, 난리를 쳐 댔다.

“으아아악!”

김중덕이 나무 밑에 사다리를 놓더니,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명령했다.

“올라가.”

그런 말이 들릴 법 없는 임선철은 계속해서 기를 쓰고 발버둥쳤다. 직원 둘은 개의치 않고 임선철의 목에 채운 밧줄을 나무에 매달았다. 그들이 밧줄을 쭈욱 당기자, 임선철의 몸이 위로 떠올랐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 임선철이 제 목을 틀어쥐곤, 피가 통하지 않아 붉어진 얼굴로 켁켁 댔다. 그의 두 눈에 공포심이 엄습했다.

“컥, 커허억!”

올라서라고 할 땐 발버둥만 치던 임선철은 마지막 호흡을 위해 사다리에 까치발만 간신히 대고 섰다. 퍽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숨이 딸리는지, 연신 제 자신에게로 펼쳐오는 손끝을 남자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김중덕이 그의 가슴팍에 유언장을 꽂아 넣었다. 그러곤 임선철의 발을 받치고 있던 사다리를 발로 퍽 차버렸다. 사다리가 와탕, 소릴 내며 뒤집어졌다.

“…으윽, 큭…….”

기도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한 층 더 강렬해졌는지, 임선철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연신 몸을 꿈틀거리는 임선철을 눈앞에 두고 남자는 그 자리에 고목처럼 서 있었다. 발끝부터 경직되어 가는 임선철의 몸을 가라앉은 두 눈으로 확인했다.

서슬 퍼런 바람이 훼에엥, 소름끼치는 소릴 내며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이윽고 임선철의 목, 팔다리가 한꺼번에 축 늘어졌다. 나무에 볼썽사납게 매달린 임선철의 몸이 데룽데룽 느리작거리며 흔들렸다.

임선철은 자신이 서병진의 몸을 묻었던 바로 위 나무에 목매단 채로 숨졌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임선철이 서병진의 몸을 묻을 때 사용했던 삽을 일부러 근처에 버려 두었다.

“…….”

그렇게 자릴 떠나는 남자의 입술엔 만족감이 고여 있었다. 이로써 여원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땅 위에서 사라졌다. 이제 진실은 영원히 매장됐다.

***

그는 근처 무인 모텔로 들어왔다. 장갑과 옷을 벗어 내 온몸을 씻어 냈다. 남자는 세면대를 두 팔로 지탱하고 서선 호흡을 갈무리했다. 명치 끝을 저미는 정신적 쾌락과는 별개로 남자는 퍽 피곤한 상태였다. 여원을 품에 안고 허연 목덜미에 코를 팍 묻고 잠들고 싶었다. 그 달큰한 살냄새를 마약을 들이키듯 흠뻑 들이마시며 점막으로 취하고 싶었다.

남자는 김중덕이 준비해 온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당연지사 입고 있던 옷과 장갑을 불태워 버렸다.

“…후우.”

그러고 남자는 새벽에서야 집으로 향했다. 차가 이제 막 새벽빛이 깔리기 시작한 어슴푸레한 길을 내달렸다. 남자는 이 길 끝에 기다리고 있을 허연 몸뚱어리를 머리로 그려 내며 마지막 축배를 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달콤하고 짜릿하리라.

여원은 자지 않고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찮은 일을 처리하고 온 남자는 트로피를 떠안듯 여원의 몸을 제 품에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뒤로 밀려났다. 순간 뇌수가 들끓어 오를 만큼 불쾌한 감각이 남자의 전신을 내달렸다.

남자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자, 여원의 입술 새로 예상치 못하던 말이 들려왔다.

“…적어도 엄마 병실에는 그러지 마셨어야죠.”

여원이 눈을 치켜뜨고 남자를 노려봐 왔다.

이건 남자가 예상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또 계획에 없던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자의 계획을 망치는 건 늘 서여원이었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감시당한 걸 알고 있었는데. 고작 엄마 병실에 보냈던 화분에 카메라가 붙어 있었단 사실에 여원은 분노했다. 마음에 든다는 듯 어루만져 줘 놓고는. 부드럽게 접히던 눈매, 봉긋하게 솟아오르던 광대,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가는 입술 새로 보이는 작은 치아는 제법 볼만했었다.

그러나 며칠간 남자에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

남자는 며칠간 신경을 날카로이 벼리고 있었다. 제 신경을 건드리는 여원 때문이었다.

여원은 자신의 손에 몇 번이나 멀건 액을 토해 내면서도, 남자가 잠든 기색이 보이면 언제 살갗을 맞대고 있었냐는 듯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물론 남자는 여원이 곁에 있는 모든 순간, 잠이 든 적이 없었기에 그걸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일만 끝내면 완전히 제 손에 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남자에게서 등진 몸뚱어리, 그건 명백한 거부를 표했다. 보상처럼 따라왔어야 할 여원의 시선이, 입술에 작게나마 고이곤 했던 미소가, 그 입술로 부르곤 했던 제 이름이 모두 없다.

자신 없이는 잠조차 들지 못하는 아이처럼 굴면서. 남자는 제 손에 잡히지 않는 여원을 차라리 찢어발겨 버리고 싶단 심경을 억눌러야 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제 계산에 넣지 않았던 상황까지 맞닥뜨렸다.

***

똑똑. 고객과의 미팅 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들어오라 말하자, 김중덕이 간결하게 미팅을 방해한 이유를 밝혔다.

“대표님, 연락이 왔습니다.”

남자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드리워졌다. 평소라면 제 선에서 처리했을 텐데, 중간에 들어온 걸 보니 뭔가 일이 생긴 듯했다. 남자가 고객에게 묵례를 해 보인 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420호에서 문을 닫고 나오자, 한쪽 손에 남자의 휴대폰을 쥐고 있던 김중덕이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검찰 쪽입니다.”

남자의 두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검찰? 손을 뻗어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수화기에서 자신을 어디 지부, 무슨 검사라 소개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장기주 씨, 본인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듣던 남자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는 검사에게서 DNA를 채취해야 하니 검찰 쪽으로 출두를 부탁드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분명 모든 상황을 제 통제하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임선철의 목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된 건 남자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남자의 머리에 자신의 구둣발 근처를 핥으며 목숨을 구걸하던 임선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턱이 팽팽하게 굳었다.

임선철의 목에서 나온 담배에 묻어 있는 DNA, 그건 남자의 것과 일치했다.

“담배는….”

검사를 마주한 남자는 일부러 말의 속도를 늦췄다. 그가 검사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하우스 근처에서 줄담배를 태우곤 했습니다. 임선철 씨가 저와 같은 걸 피우던데. 제게서 몇 번 빌려 가기도 하셨고요. 주변에 담배를 살 마땅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니까?”

“제가 피우다가 버린 꽁초를 태우다가 잘못 삼키지 않았나 싶은데요.”

꽁초를 피우다가 잘못 삼켰다니. 상당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보다 꽁초가 목구멍에서 나온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시나리오도 없었다. 얇은 뿔테 안으로 보이는 검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비닐하우스 근처엔 CCTV가 없으니 증거랄 게 없었다. 그러니 남자의 진술을 최우선으로 하고 검사의 사고 흐름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검사를 앞에 두고 있는 남자는 혀로 씨발을 읊고 있는 중이었다. 일이 이렇게 성가시게 굴러가다니. 그러나 남자는 한편으론 차라리 이 상황이 잘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임선철 목에서 나온 담배에 묻어 있던 게 자신의 DNA가 아니었더라면….

검사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안 걸까 했는데. 도박장에 있던 이들이 임선철이 한 묘령의 젊은 사업가에게 막대한 도박 빚을 졌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카드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쫓기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던데.”

남자가 가벼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땀을 뻘뻘 흘리고 정신없이 머릴 흔들면서 작은 기색에도 크게 놀라곤 했답니다.”

그 어디에서도 남자의 그림자를 찾지 못했을 검사가 뜻밖의 장소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밝혔다.

남자의 앞으로 사진 하나가 내밀어졌다. 남자의 두 눈이 사진에 가서 닿았다. 하얀 얼굴에, 옆으로 쭉 부드러이 뻗어 있는 눈매.

“…서여원 씨와 아는 사이입니까?”

검사가 서여원의 사진을 들이밀며 그를 아느냐고 물어 왔다. 내내 여유를 부리던 남자의 손끝이 처음으로 차갑게 굳는 순간이었다. 그는 겉으로나마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로 침묵했다. 검사는 그에게 CCTV 영상을 하나 내밀었다. 노트북 화면 가득찬 영상은 임선철이 있던 병원의 CCTV였다. 입구로 들어서는 서여원의 뒤에 함께 서 있는 건 분명 김중덕이었다. 좆같이 굴러가는 상황에 남자가 혀를 굴려 건조한 입 안을 적셨다. 그리고 검사가 명함 하나를 내밀어 왔다. 바로 남자의 이름이 박혀 있는 명함이었다.

“제 명함이군요.”

“…….”

“아무 데서나 못 구하실 텐데.”

이걸 어디서 구했냐 묻자, 예상 밖의 답이 들려왔다.

“서여원 씨 옆집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가 주시더군요. 서여원 씨는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으니까, 이 병원으로 가 보라면서 위치를 알려 주던데요.”

남자는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제 속내를 숨기기에 능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검사의 예리한 눈길에 그 기색을 들켰을 거였다.

“서초동 소재에 있는 그 병원이라면 웬만한 일반인들은 출입조차 쉽게 못 할 텐데. 그 달동네에 있는 집만 보더라도 두 모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처지가 빤히 보이는데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좋은 병원에, 그것도 1인실에 모시고 있는 거냐고 물었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임경희 씨가 무슨 자선 단체에서 나와서 도왔다고 하던데요.”

남자와 검사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싸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음.”

남자가 돌연 입아귀를 팽팽히 끌어 올렸다.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미소에 검사가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서여원 씨라면 당연히 알고 있죠.”

당연히? 그 단어에 검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에 남자는 검사가 그 어디에서도 여원과 자신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찾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남자가 느지막이 입술을 뗐다.

“내 직원이니까.”

“…직원이라 하면?”

검사의 말에 남자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검사의 입술이 더 먼저 열렸다.

“장기주 씨 앞으로 된 JKJ를 말하는 겁니까?”

남자는 고개를 가벼이 내저었다.

“아니요. 제가 작게 부업을 하나 하고 있는데.”

“…….”

“…로열이라고.”

노트북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던 검사의 손이 멎었다.

“로열이라면 그 고급 골프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자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쪽은 최평택 사장이 이끄는 곳이라 알고 있었는데요.”

“VIP 상대하면 귀찮은 일이 어디 한두 가지입니까.”

남자가 손에 깍지를 끼우며 의자에 깊이 그 큰 몸을 묻었다.

“제가 최평택 사장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원래 최평택은 사업을 늘리기 위해 자본을 긁어모으다가 남자에게 차용증을 썼던 자였다. 이자가 나날이 불어 나가자, 남자는 그에게선 도저히 돈 빼먹을 게 없을 거라 추측했다. 그래서 그에게 로열의 사장으로 있을 것을 제안했다. 능히 VIP들을 한군데로 모이게 할 만한 장소로 골프장만 곳이 없을 것 같아 로열을 세웠다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커져 꽤 성가셨던 참이었다.

최평택은 이미 한차례 실패를 겪었으나, 원래 사업 수완은 나쁘지 않은 자였다. 바지사장이나, 명예욕이 대단한 작자라 그런 표면적인 자리임에도 만족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계약 당사자들, 딱 이 둘뿐이었다. 이 말인즉슨, 여태까지 남자가 이렇게 전면에 나서는 거 이번이 처음이라는 얘기였다.

“이제 스물셋 먹은 직원이 일을 빠릿빠릿하게 잘하는 데다가 눈치도 좋아서 꽤 예뻐했습니다. 듣자 하니까 어머님 몸이 안 좋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도움을 조금 드리고자 했고요.”

제 옆에 한가득 파일을 쌓아 놓은 검사가 노트북에 무언가를 작성해 나갔다. 타닥, 타닥. 키보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남자는 오직 검사의 눈만을 직시했다.

“한사코 그냥은 안 받겠다 하길래 자선 단체라 하고 떠넘겼습니다.”

남자가 쯧쯔, 혀를 차며 턱을 기울였다.

“그걸 진짜로 믿을 줄이야.”

검사는 로열에 대해 더 자세히 물었다. 남자는 거리낌 없이 술술 답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더러운 짓이 성행하고 있는 곳이나, 표면적으론 그저 고급 골프장일 뿐이라 문제될 게 없었다. VIP들은 고상한 자들이다 보니 알아서 제 뒤는 잘 닦고 다녀, 엄하게 꼬투리 잡힐 일이 전무했다. 하나 같이 콧대가 높아 다루기 까다로우나, 이런 점에선 그들을 고객으로 두는 게 편리했다.

“조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는 그 길로 검찰청에서 빠져나왔다. 동시에 내내 입가에 걸쳐져 있던 미소가 거둬졌다. 싸늘히 굳은 얼굴로 준비되어 있던 차에 올라타자, 차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운전대를 잡은 김중덕이 룸미러로 뒤를 힐끔거렸다.

“어떻게 할까요.”

검찰에서 뒤에 꼬리를 붙였다. 남자는 건조한 눈가를 쓸었다. 일이 생각보다 더 귀찮게 돌아갔다. 그에 여태껏 제 선택을 되돌아본 적 없던 남자는 난생처음 후회했다. 그 씨발 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토막을 내는 거였는데.

***

검찰 쪽에서 자신과 여원이 엮여 있는 관계란 걸 안 이상, 여원을 다른 곳에 보내 놓는 건 남자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와중에 여원까지 엮인다면 일이 두 배로 복잡해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남자는 여원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집에 달린 카메라로 여원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자신을 밀어 내더니, 영상으로 보는 얼굴은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 갔다. 눈동자는 까맣게 죽어 있었다. 퍼들쩍 놀라서 깨는 밤이면 여원은 제 몸을 끌어당겨 흐느끼며 울었다.

여원은 분명 자신을 찾고 있었다. 남자는 여원이 안팎으로 죽어 가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남자는 영상을 통해 우는 여원을 바라보며 벨트를 풀었다. 검은 음모 사이를 뚫고 터질 것처럼 발기된 좆이 튕겨져 나왔다. 남자는 자신의 좆을 손으로 틀어쥐곤 거칠게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자신의 좆을 여원의 입으로 쑤셔 넣는 상상을 했다. 그 부드럽고도 축축한 입에 넣고 허리를 흔들어 댄다. 여원의 조막만 한 머리가 앞뒤로 흔들린다. 여원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사방으로 날린다. 그걸 손아귀에 틀어쥐고 두피를 뜯어낼 듯 세게 움켜잡자, 여원의 눈길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긴 눈꼬리 끝에 눈물이 맺힌다. 그런 얼굴 모양새로 얼른 자신의 입 안에 싸 달라고 재촉한다.

‘대표님.’

“…흠, 하아.”

‘입 안에 싸 주세요.’

제 넓적다리 사이를 조여 대며 몸을 움찔거리는 하얀 몸을 상상하며 좆을 흔드는 남자의 손길이 한층 더 빠르고 거세졌다.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던 남자의 좆이 이내 팍, 하고 좆물을 내뱉었다. 여원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사건은 임선철을 맡았던 병원 측이 배에 나 있는 수술 자국이 맹장 수술 자국이라 진단 내리면서 끝이 났다.

여원은 그제야 남자의 품에 스스로 안겨 들어왔다. 그 어떠한 겁박도, 위협도 없었다. 남자는 제 품에 안겨드는 여원을 받아 들었다. 큰 손으로 여원의 조막만 한 얼굴을 덮곤 입술을 취했다.

이로써 비로소 자신의 손에 떨어졌다. 그의 한 손엔 여원의 복수가, 다른 한 손엔 여원이 안겨 왔다. 이보다 더 남자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사실은 없었다.

중간에 계획이 조금 틀어지는 일도 있었으나, 어쨌거나 끝엔 모든 게 제 뜻대로였다. 남자는 최대한 느긋하게 이 성취의 순간을 만끽하고자 했다. 그는 느릿하게 심호흡하며 여원의 냄새를 취했다. 코로 밀려 들어와 폐부에 쌓이는 쾌락을 음미했다.

중하

남자는 도취감에 취했다. 이제 여원이 자신에게서 떠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여원이 무너지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여원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던 여원을 보내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완벽히 제 통제 아래에 놓인 상태로 학교에 오가는 여원은 무리에 그리 썩 잘 섞여 들진 못했다.

주변인들이 과도하게 다가올라치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 버리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려 하면 할수록, 여원이 도망치는 거리는 더 멀어졌다. 그래서 남자는 여원이 입술에 이름을 담아주고, 몸을 끌어당겨도 순순히 딸려오는 건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는 특권이라 생각했다. 마약 없이도 그 사실만으로 남자는 극치감을 느꼈다. 정신적 쾌락이 남자의 전신을 내달렸다.

그래서 최근에 들린 소식이 남자에겐 의외였다. 과제를 함께 해야 하는 수업을 듣다가 조금 가까워진 여자 후배가 있다고.

평소보다 회의를 이르게 마친 남자는 직접 여원이 있는 학교로 향했다. 여원의 또래로 보이는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남자의 검은 세단을 힐끔거리며 안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을지에 대해 점쳐 보며 수군거렸다.

“…….”

남자는 그 인파 속에서 어렵지 않게 여원을 찾아냈다. 긴 몸이 깔끔한 남방에 면바지를 걸치곤 고고히 걸어오고 있었다.

뒤에서 앳된 얼굴 하나가 달음박질쳐 와, 여원의 가방끈을 잡아챘다.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 본 여원의 얼굴이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

나란히 선 둘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제 또래와 함께 서 있는 여원을 보고 있자, 남자에게 신선한 감상이 끼쳐 들어왔다.

저렇게 여자아이와 세워 두니 키 차이가 거의 한 뼘이다. 여원을 올려다보는 멀건 얼굴엔 딱 그 나이 때의 싱그러움이 넘쳐흘렀다. 두 눈동자엔 질척한 욕망보다는 순수한 동경만이 담겨 있었고, 웃는 입가엔 즐거움이 매달려 있었다. 저 아이 눈에 비친 여원은 그저 평범한 남학생일 뿐일 거다.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데다가, 분위기가 독특해서 눈길이 좀 더 끌리는….

“…….”

별안간 여원이 미소 지었다. 길게 뻗은 눈꼬리가 유려하게 물결치고 새붉은 입술이 위로 휘었다. 얄팍한 가슴이 들썩이는 걸 보니 소리 내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여원이 터뜨리는 낮은 파열음을 상상해 봤다. 화면은 있는데 소리가 없으니 꼭 웃긴 무성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창문을 내렸다.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가락이 꽁초를 밖으로 투기했다.

여원이 불현듯 제3자의 시선을 느낀 건 그때였다. 얼굴을 굳힌 채로 주변을 홱홱 둘러보다가, 남자의 차를 발견했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두 눈이 놀란 토끼 눈처럼 크게 뜨였다.

나 그만 가 볼게, 여원의 입술이 그리 달싹였다. 긴 몸이 제 또래를 뒤에 남겨 두고 빠르게 다가와선 조수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며 숨이 약간 찬지, 호흡을 짧고 빠르게 뱉는다.

“어떻게 오셨어요?”

큰 두 눈이 남자를 향했다. 양 뺨에 번진 붉은 홍조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가만히 웃었다. 밑을 씹창 내 놓기엔 아직 때가 이르니까.

***

남자의 차가 도착한 곳은 한정식집이었다. 여원은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이런 담백한 한식을 잘 먹었다.

여원이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입 안으로 작게 자른 음식물을 넣었다. 가지런한 하얀 이들이 음식물을 잘게 부수면 매끈하고 붉은 혀가 그걸 목구멍 쪽으로 인도했다. 뭘 눈앞에 갖다 대도 처먹지 않아 점점 말라 가더니. 이젠 제법 뺨이 차올랐다.

2년 동안 얼굴이 거의 그대로였다. 바뀐 점이라고 해 봐야 조금 깊어진 눈매 정도일까.

“…….”

“…….”

원체도 말이 그리 많지 않은 여원은 먹을 때에도 역시 조용했다. 젓가락을 내리는 순간조차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생각해 보니 얌전 떤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은데. 어쨌든 이게 원래 남자가 아는 여원이었다.

남자의 눈앞에 아까 봤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툭툭. 제 생각에 빠진 남자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자, 그의 얼굴로 의아한 눈길이 와서 붙었다.

“…안 드세요?”

남잔 그 이상 음식물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티슈로 제 입가를 닦으며 남자는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새로운 물음을 던졌다.

“학교는 다닐 만해요?”

학교 얘기에 젓가락을 쥔 여원의 손에 잠깐 힘이 가해졌다. 새붉은 입술이 약간 굳었다가 이내 부드러이 풀린다.

“네, 대표님 덕분에….”

그러고 대화는 끊겼다. 여원은 힐끔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여원이 손에서 젓가락을 놓는 걸 기다렸다가 함께 나왔다.

왜 자꾸 흘깃거려서 사람 신경을 건드리나 했더니. 차에 둘만 남자, 여원이 입술이 뗐다. 정적 사이로 서여원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다음 주에 시험이 있어요.”

시험이 있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듯했다. 여원을 힐긋했다. 멀건 얼굴에 티끌 하나 없는 눈동자. 체육교육과라고 들었다. 선생이 되려고 했던 걸까. 교복을 입혀 놨으면 한 치의 의심도 않고 곧 기말고사를 치를 학생이라 해도 믿었을 텐데.

“선생보단 고등학생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음률 없이 중얼거린 말을 끝으로 잠시간 대화에 공백이 생겼다.

“졸업은 할 텐데, 다른 걸 찾아볼까 해요.”

구태여 할 필요 없는 말인데. 본인의 학비를 내고 있는 게 남자라서, 그래도 남자에게만은 말해야 한다 생각했던 걸까.

“왜?”

여원의 하얗고 긴 손이 안전벨트를 꽈악 움켜쥐었다. 뭐라 말이 없자, 변명처럼 지껄인단 말이 가관이었다.

“…도덕적으로 좀.”

지나가는 차가 헤드라이트를 뿜었다. 길게 뻗어 나오는 노란 불에 여원의 뺨에 조밀하게 붙어 있는 작은 솜털들이 하나하나 찬란한 빛을 내었다. 남자는 기가 찼다. 저런 얼굴을 달고 도덕 운운하는 게.

“도덕적으로 왜. 서여원 씨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이에요?”

“…….”

“같은 남자한테 다리 벌리는 게 도덕까지 운운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창문을 약간 내리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막대 끝에 불을 당기고 숨을 빨아들이자, 매캐한 연기가 목 안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마침 신호가 걸렸다. 남자가 턱을 돌려 조수석을 응시했다. 어느새 내린 어둠이 하얀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다. 그새 눈가엔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깃들어 있었다. 속눈썹 사이로 반쯤 모습을 감춘 눈동자는 축축이 젖었고, 아랫입술은 바르르 떨렸다. 저런 얼굴은 보통 그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달고 있곤 했다.

참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낯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털가죽이 발가벗겨져 벌건 속살을 그대로 내놓은 채 사람들 속에 내동댕이쳐진 어린 짐승처럼 구는 게 참 볼만했다.

남자가 꽁초를 창문 밖으로 튕겨 냈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선생님, 목에 그게 뭐예요. 혹시 같은 남자한테 다리 벌리는 새끼예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여원이 꽉 물었던 탓에 핏물이 잔뜩 맺힌 입술로 묻는다.

“…그게 얼굴로 티가 나나요?”

이번엔 다른 이유로 커다란 동공이 약간 겁에 질렸다. 군침이 절로 도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나죠.”

지금 네 얼굴에서도 지랄 맞게 티 나고 있는 것처럼. 남자가 말을 끝맺고 입술을 다물자, 여원의 얼굴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사색이 됐다.

별안간 휴대폰이 울려 댔다.

“네.”

- 대표님.

남자가 오른손에 있던 휴대폰을 왼손으로 옮기곤, 여원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부채처럼 커다란 손은 여원의 무릎을 단박에 덮고도 남았다. 남자가 손아귀에 무릎뼈를 단단히 틀어쥐고 꽉꽉 누르자, 여원의 다리가 제자리에서 퉁퉁 튀어 올랐다.

- …….

수화기를 통해 뭐라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남자는 여원의 허벅지를 더듬거리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살결이 연한 데다가 점성까지 좋아 손바닥에 찰지게 달라붙어 오는 허벅지를 습관처럼 주물럭거렸다. 그 파렴치한 손길에 여원이 다릴 비틀어 댔다.

“…아!”

그 미약한 움직임이 같잖아서, 남자는 손으로 찍어 눌렀다. 이윽고 움직임이 멎었다.

더 안쪽으로 파고들려고 하자, 손목이 덥석 붙들렸다. 그에 남자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정면을 응시하던 남자의 턱이 다시 옆을 향했다. 여원은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을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색소가 약간 옅은 머리칼 사이로 끝이 살짝 뾰족한 귀가 엿보였다. 고작해야 남자의 새끼손가락만 할까. 그렇게 작은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새붉어진 얼굴, 마찬가지로 달아오른 콧방울, 쥐를 찢어발겨 먹은 것 같은 입술. 여원의 얼굴에 못 박혀 있던 남자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하강했다. 그에 따라 여원이 제 다리 위에 올려두고 있던 가방을 한 번 더 세게 움켜쥐었다.

완전히 할 말을 잃은 남자는 귓가에서 휴대폰을 떼어 냈다.

- 대표님?

수화기에서 김중덕이 뭐라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

“…….”

남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방 치워 봐요.”

-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

여원의 도톰한 입술 아래로 드러난 앞니가 아랫입술을 터뜨릴 것처럼 꽉 깨물었다. 새하얀 앞니들은 고작해야 새끼손톱만 한 크기였다. 뺀찌로 잡고 약간의 힘만 주어도 허무하게 툭툭 뽑혀 나올 듯이 여려 보였다.

실제로 행했다간….

가학적인 상상이 남자의 머릴 꿰뚫었다. 굵직한 목 가운데에 툭 튀어나온 울대가 꿀꺽 울렸다. 실제로 행한다면 보드라운 잇몸만 남아선 어디서도 남자의 걸 윗구멍으로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냥 놔두는 건 어디까지나 저 가지런한 치아들이 제법 봐줄 만해서였다.

“치워 보라니까.”

가방을 틀어쥔 여원의 손등에 파르란 핏줄이 가늘게 돋아났다. 제법 필사적인 그 손길에 남자가 웃었다.

“…….”

“…응?”

남자가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회유하는데도, 여원은 몸을 움츠렸다.

“창문 내리기 전에 말 듣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협박이 먹혔는지, 여원의 얼굴에 두려움이 깊이 깃들었다. 이리저리 고갤 돌리며 사방을 살핀다. 밖에 보일까 봐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남자는 멍청한 이를 앞에 두고 가늘어진 눈매를 했다. 두려워하는 대상이 단단히 틀렸다. 지금 경계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옆에 있는 본인이어야 하는데.

“바지 내리고 다리 벌려 봐요.”

여원이 천천히 속눈썹을 밀어 올리며 남자를 응시해 왔다. 견고한 얼굴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결국 여원은 남자의 종용에 못 이겨 바지를 벗었다. 면바지를 끌어 내려 발목에 수갑처럼 채워 놓곤, 한쪽 무릎을 세웠다. 불편한 자세로 여원이 자신의 둔부 밑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윤활제가 없어 힘든지, 여원의 이마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아….”

길고 하얀 손가락이 제 구멍을 푹푹 찔러 댔다. 찰박찰박 소릴 내며 흔들리는 구멍이 자극적이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 넣었다고 여원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원래 표정의 변화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데, 유독 섹스에 관련된 거라면 반응이 컸다. 좀 심하게 몰아세우면 울어 주기도 했다.

- 장 대표님?

영화로 치자면 이제 막 클라이맥스가 나올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남자는 휴대폰의 전원을 끄곤,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그는 여원의 솜털 난 사타구니에 귀두를 대고 비벼 댔다. 거친 부분이라곤 없는 여원의 엷은 체모가 남자의 좆머리를 부드러이 감싸 왔다. 삽입은 단박에 이뤄져야 했다. 안이 원체 좁은 데다가, 조이는 힘도 워낙 좋아서 허리에 힘을 꽉 주고 한 번에 꿰뚫어야 했다. 서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하얀 엉덩이 사이로 좆이 드나들었다. 찐득하게 조여 오는 내벽 때문에 허리를 흔들 때마다 황홀했다.

“하읏, 흐응, 아, 아… 아아….”

구멍을 한 번씩 쑤실 때마다 내뱉는 교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붉은빛을 띠는 젖꼭지가 공중에서 흔들렸다.

하얀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선 수치심에 울었다.

어머님이 무슨 도내 미인 대회 출신이라고 했었지. 조막만 한 얼굴이나 새치름한 눈매나 콧대가 어머님을 쏙 빼닮아 미인형이었다. 뼈대는 틀어진 곳 없이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군살 없이 매끈하게 달라붙은 근육 때문에 전체적으론 늘씬해 보였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바라봐 오는 눈동자는 갓 껍데기를 깨고 나온 새끼 짐승의 것이었다. 그런 눈을 달고선 오르가즘에 오르고 싶어 허릴 흔드는 꼴이 가관이었다.

“…흐으.”

엉덩이를 흔드는 여원은 본인도 모르는 새, 제 아랫입술을 터뜨릴 듯 깨물었다. 눈가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붉었고, 눈엔 초점이 불분명했다. 쾌락에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남자는 그런 여원의 윗니를 엄지로 매만졌다. 이대로 힘을 주어 죄다 무너뜨리고 싶다는, 그런 불온한 욕구가 치솟았다. 새하얀 이를 뽑아낸 잇몸은 태초의 것 그대로 부드럽고 촉촉할 텐데. 남자의 그런 섬뜩한 속내를 알 리 없는 여원이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더니, 남자의 엄지를 혀로 빨기 시작했다. 달뜬 얼굴이 새붉고 통통한 살점으로 남자의 거친 피부를 할짝거렸다. 자신을 흘리는 그 장면을, 남자는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추읍.”

이어서 서여원의 손가락들이 남자의 뺨을 감싸 왔다. 하얀 데다가 길쭉한 손가락이 얼굴에 가벼운 무게를 남겼다. 역시 손가락을 자르지 않길 잘했다. 남자는 온통 창백해서 복사뼈 부근만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발목도 힐긋했다. 저것도 이왕이면 붙어 있는 꼴이 낫겠지. 서여원.

“서여원.”

남자에게로 여원의 시선이 달라 붙어왔다. 얼굴에 열꽃이 핀 듯 군데군데가 붉었다. 남자는 다릴 잘리고 싶지 않으면 계속 예쁘게 굴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구태여 입술 밖으로 말을 흘려보내진 않았다. 여원이 자신의 가슴팍에 양 손바닥을 대곤 허리를 돌리는 게 무척이나 색스러웠다.

“…대표님.”

자신의 반지를 끼운 손으로, 자신의 목에 팔을 둘러 오는 여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자는 사랑스럽다는 게 뭔지 깨달았다.

“아까 그 여학생은….”

“흐읏, 과 후배예요….”

“날 뭐라고 소개했어요.”

여원의 뺨에 제 얼굴을 맞댄 남자가 음산하게 들리는 음성으로 지껄였다.

“좀 있으면 곧 내 아래를 씹창 낼 사람이라고?”

여원이 도리질을 쳐 댔다. 입술 새로 흐느끼듯이 말을 흘려보내며 도리질을 쳐 댔다.

“…아니요.”

“그러면.”

“삼촌이라고 했으려나?”

부드럽고 따뜻한 여원의 몸 안을 발기한 성기로 퍽퍽 쑤시면서 남자는 목을 긁으며 신음했다. 여원의 길게 뻗은 다리가 허리를 감아 왔다. 이럴 때면 남자는 속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발목을 잡고는 아래를 들이 처받았다.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려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거기로 가서 붙었다. 휴대폰 화면에 찍혀 있는 번호는 분명 집 전화번호였다. 남자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로 여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대표님.

남자는 자신을 부르는 여원의 목소리에 습관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늦췄다.

- 아주머니랑 근처에 있는 마트에 다녀와도 될까요?

“7시까지 집으로 돌아가요.”

시계를 확인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고분고분하게 알았다고 답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자는 오므려졌다 벌려지며 음성을 쏟아 내고 있을 새붉은 입술을 상기했다.

- 혹시 오늘은 몇 시에 오세요?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 아니요, 무슨 일이랄 건 없고….

여원이 말꼬리를 흐린다. 남자는 룸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흘깃해 오는 김중덕의 시선을 느꼈다. 그에 남자는 엄지로 새어 나오는 여원의 목소리를 틀어막았다. 한층 작아져 남자에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여원이 말했다.

- 그냥 저녁 같이 먹고 싶어서요.

오늘 저녁엔 접대가 있었다. 남자가 답을 않고 룸미러를 응시하자, 김중덕과 딱 시선이 부딪혔다. 김중덕이 넥타이를 매만지는 척하며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선약이 있습니다.”

- 그러면 해 놓을게요.

돌아와서 드세요. 흘리는 듯 귓가에 달라붙어 오는 숨소리에 남자는 뺨 안쪽을 콱 씹었다. 그러곤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

로열에 마련된 호텔 룸 420호에서 나온 남자가 넥타이를 목덜미에서 끌러 냈다. 시야가 어지러이 비틀렸다. 내뱉는 숨마다 술내가 진득했다. 남자는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며 차가 대기하고 있는 입구로 향했다.

여간해선 잘 취하는 법 없는 남자인데, 오늘은 취기가 밀려 올라왔다. 술에 탄 약이 과했던 탓이다. 남자가 뒷좌석에 올라타자, 검은 가죽 시트가 그의 몸을 부드러이 감싸 왔다.

운전대를 잡은 김중덕이 룸미러로 남자의 기색을 살펴 왔다. 몇 번이나 입술을 들썩거리며 뜸을 들이다가 한껏 예의를 차려 제안해 왔다.

“대표님, 내일 스케줄 생각하셔서 로열에서 주무시는 것은….”

대한민국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로열에서 서울 중심가에 놓인 남자의 펜트하우스까진 힘껏 밟아도 족히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내일 일정을 생각해서라도 로열 호텔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창문으로 턱을 돌린 남자는 뭐라 답하지 않았다. 그를 힐끔거리던 김중덕은 이내 차를 움직였다. 상사의 너른 뜻을 이해하기에 자신은 아직 십 년은 멀었다고 생각하며.

두 시간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을 내달려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그간 술기운이 완전히 남자의 전신에 퍼져 있었다. 술기운이 벌레처럼 남자의 뇌를 후벼 파고 들어왔다.

남자가 문을 열자, 집 안쪽에서 희붐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을 거울에 대고 큰 몸을 지탱하며 구두를 벗었다.

안쪽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원이 나왔다. 제법 몸짓이 빠릿빠릿했다. 마치 남자가 곧 도착하리라는 걸 알고 있던 것 같은 몸짓이다,

“다녀오셨어요.”

여원은 남자의 옷 수발을 들며 눈치를 살펴 왔다. 어깨에서 재킷을 드러내던 남자의 두 눈이 좀 전까지 여원이 앉아 있었을 곳에 닿았다.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 한쪽에 책이 쌓여 있었다. 곧 졸업반이 되는 여원의 책들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급히 책을 덮고 나온 흔적이 남아 있었다.

“…괜찮으세요?”

남자가 눈동자를 굴려 여원을 응시했다. 마주봐 오는 눈동자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술에 취한 남자는 그 얼굴을 말없이 마주 봤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여원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이 기민하게 감을 세우던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눈앞에 있는 이가 자신을 염려하는 이 상황이 일순 너무 가소로워서, 조소를 금하지 못했다.

여원은 비틀린 비소를 짓는 남자를 응시하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중덕 형한테 연락받고 미리 목욕물 받아 놨어요.”

남자는 셔츠를 뜯어낼 듯 단추를 풀어냈다. 벨트를 풀어내는 그의 손길에선 취기라곤 조금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내뱉는 숨결마다 술내가 진득이 묻어 있어, 남자 스스로도 그걸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신이 된 남자는 욕조 안으로 제 몸을 쑤셔 넣었다. 여원이 한쪽에 앉아선 남자의 상체를 문질러 왔다. 자신을 뚫을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은 묘하게 비끼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남자의 눈이 습기에 축축이 젖어 평소보다 더 풍성해 보이는 여원의 눈썹을 응시했다. 남자의 손이 급작스럽게 여원의 턱을 틀어쥐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놀란 토끼 눈을 뜨는 여원을 마주하며 입을 맞췄다. 남자의 벼린 듯한 치아가 여원의 여린 두 살점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물었다. 그건 차라리 물어뜯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잘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남자는 여원을 한껏 입으로 취하고 나서야 놔주었다.

“…하아.”

여원의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얼굴과 목덜미는 붉게 달아올랐다. 밑구멍에 대고 씹질할 때나 보이던 얼굴을 지으며 여원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잔뜩 상기된 얼굴에 남자는 생각했다. 죽여 버리고 싶다고.

“…네?”

그리 되물으며 여원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왔다. 두려움에 젖은 듯한 얼굴. 속으로 생각한다고 한 건데. 취기에 입 밖으로 내 버린 걸까. 남자는 굵은 엄지로 자신의 타액이 묻어 있는 여원의 입술을 문질렀다. 작고 도톰했다. 살점이 통통하게 올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오늘은 뭐 하고 지냈어요.”

좀 전에 상대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뱉은 남자는 이제 여원의 일상을 물었다. 여원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더듬더듬 말했다.

“…학교에 다녀와선 아주머니와 장을 보고 왔습니다.”

과실 같은 입술 새로 이미 알고 있는 여원의 하루가 짧게 흘러나왔다. 참 많은 게 생략되어 있는 보고라는 걸 남자는 알았다.

서여원은 학교에서 여자 하나와 점심을 먹었고, 서점에선 이십여 분을 망설이다 전공 책을 두 권을 샀으며 집으로 와서 과제를 하다가 오후쯤에 마트에 가 육류 중심으로 장을 봤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선 저녁을 준비해 놨다. 10시까지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혼자 저녁을 먹었다. 2시간 동안 힘을 쓴 갈비찜엔 거의 손을 뻗지 않았다. 여원은 육류는 즐기지 않았다. 소화를 잘 못 시키는 듯했다.

남자는 여원의 목 티를 끌어 내렸다. 새하얀 얼굴 아래로 보이는 목엔 붉은 울혈들이 빼곡했다.

“함께 점심 먹은 친구가 묻진 않았습니까?”

여원의 두 눈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의문을 띄었다.

“왜 늘 목 티 차림이냐고.”

“…감기에 잘 걸리는 체질이라고 했습니다.”

…하, 남자는 헛웃음을 내쉬었다. 물 안에 잠긴 그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걸 믿던가? 남자는 자신의 천박한 잠자리 사정을 숨기려 허둥지둥 변명을 꾸며 냈을 여원을 상상했다. 늘 희여멀건하던 뺨과 목덜미가 화악 달아올라 지금처럼 먹음직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였다. 그런 여원을 눈앞에 둔 여자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세상에 있는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언어들을 생각하던 남자는 다시 한번 제 뜻을 밝혔다.

“죽여 버리고 싶다고 했지.”

“…….”

여원의 입이 조개 입이 다물리듯 꾹 닫힌 건 그때였다. 눈동자가 차양 같은 속눈썹에 반쯤 덮였다. 옅은 핏빛을 띄는 아랫입술이 심경을 대변하듯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남자는 여원의 뒤통수를 제 좆으로 끌어당겼다. 검은 음모를 뚫고 나온 좆은 터질 듯 발기해 있었다. 남자는 여원을 죽이고 싶다 말한 순간부터. 아니,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이 하얀 몸뚱어리를 영상에서 본 순간부터 이 상태였다.

이 중심이 서 있는 걸 여원이 모를 리 없었다. 여원은 순종적으로 끌려와 남자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새하얀 얼굴이 물에 푹 잠겨 들었다.

여원의 분홍빛 혀가 자신의 귀두를 핥는 걸 보며 남자는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당장이라도 뒤통수를 더 끌어당겨 여원의 목구멍 깊이 제 것을 처묻고 싶었다. 온갖 난잡한 말을 해 대며 밑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여원이 남자의 배를 두 손으로 짚고 위를 올라탔다. 매끈한 선으로 떨어지는 허리가 남자의 팔에 착 감겨 왔다. 여원은 두 눈을 꼭 감고는, 입술 새로 야트막한 신음을 내질렀다.

“아, 아아.”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가 남자의 예민한 청각을 파고들었다. 남자의 허벅지 위에서 허연 몸뚱어리가 흔들릴 때마다, 밋밋한 가슴팍에 달려 있는 붉은 유두가 같이 흔들렸다. 남자는 여원의 허벅다리 아래로 손을 넣어 다리를 한층 더 넓게 벌리게 했다. 작은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져선 남자의 걸 벌름벌름 조일 때마다 남자는 아래가 빠질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남자는 손에 여원의 목을 쥐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여원의 목에 손을 뻗었다. 능히 긴 목을 한 손에 쥔 손에 힘이 서서히 가해졌다. 취기에 취한 남자는 제힘을 컨트롤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 대표님.”

간신히 여원의 입술 새로 터져 나온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저 숨 막혀요.”

여원의 목을 닭목 비틀어 잡듯 제 손에 쥐고 있던 남자의 손에서 급히 힘이 빠져나갔다. 여원은 켁, 켁 소릴 내며 남자의 좆을 빠듯하게 조였다. 남자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점멸되는 걸 느꼈다. 하마터면 사정으로까지 이어질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여원의 목에 남은 손자국을 허겁지겁 제 입에 취했다. 빨고 핥으며 이미 온통 제 흔적뿐인 여원의 몸을 취했다.

“이걸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여원의 눈동자가 남자에게 닿아 왔다. 여원의 입술이 춥 물기 젖은 소릴 내며 열렸다. 딱 그 입술만큼 젖어 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때문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메마른 침을 삼켰다. 또 갈증이 치밀었다. 이 욕조를 채우고 있는 물을 모조리 들이마시고 나야 조갈증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싶었다. 남자는 목을 태우다 못해 제 뇌를 좀먹고 있는 이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들이마셔야 할 게 이 욕조 물인지, 아니면 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여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괴로우세요?”

되바라진 소리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퍽, 모욕감을 느꼈다.

“…저도 괴로웠어요.”

여원은 남자에게 치밀어 오르는 양가적인 감정을 자신도 이해한다는 듯한 눈을 달고 있었다. 그런 눈동자를 달고선 여원은 남자의 가슴팍에 제 뺨을 갖다 붙여 왔다. 남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제 품에 안겨 있는 이의 옅은 갈색 정수리가 보였다. 그러고 남자는 픽 조소했다. 자신의 감정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구는 여원이 우스워서. 여원은 모르는 게 있었다. 남자가 귀찮은 일을 해 가며 무얼 숨기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대표님이 곁에 없으셨을 때 저도 그랬어요.”

여원이 반지를 끼운 손가락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감싸 왔다. 남자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이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남자는 그간 운동으로 단련한 허벅지에 힘을 주고 허리를 튕겼다. 여원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남자는 여원의 주먹만 한 뒤통수를 손안에 쥐고는 헉헉대며 고지를 향해 내달렸다.

“…아, 흑! 대, 대표님, 하앗! 흑, 대표님.”

자신의 손자국을 목에 달곤, 자신을 부르는 단어를 신음처럼 내뱉어 대는 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광폭하게 허리를 휘두르며 여원의 귀를 빨고 목을 핥고, 가슴팍에 달려 있는 젖꼭지를 입에 머금었다. 한껏 부풀어서 예민해진 젖꼭지를 짧은 손톱으로 긁자, 여원의 신음 소리가 한결 더 높아졌다. 타일 벽에 부딪혀서 여러 번 울리는 그 신음을 들으며 남자는 한층 더 흥분했다.

손가락 하나 넣고 쑤시기에도 좁기만 한 입구를 크게 벌리면서, 남자는 여원의 안에서 사정했다. 큰 여운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헐떡거리는 가슴을 맞대고서 둘은 입술을 맞췄다.

극치를 느끼게 하는 오르가즘이 끝났는데도, 늑골 안에 가둔 심장은 한참 동안이나 크게 박동했다.

입을 맞추느라 눈을 내리감고 있던 여원이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이윽고 속눈썹이 밀려 올라가더니 천천히 눈이 뜨였다. 남자는 물기를 가두고 있는 여원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두 개 떠 있는 걸 응시했다.

“장기주 대표님….”

처음 여원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을 때 전신을 후려쳤던 그 전율이 다시금 남자를 덮쳐 왔다.

그에 남자는 정말 불현듯 깨달았다. 여원이 제 이름을 처음 불렀던 그 날부터, 자신은 그 이상 이 허연 몸뚱어리만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여원이 내뱉는 숨과, 머릿속에 품는 생각들과, 늑골 안에 담고 있는 마음이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남자는 자신의 코끝으로 여원의 작은 콧방울을 쓸었다. 성적인 행동은 아니었으나, 그나저나 열감 때문에 달아올랐던 여원의 두 뺨이 확 붉어졌다.

여원이 남자의 턱을 감싸 왔다. 남자는 그 손을 내려, 여원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남자가 여원의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더니, 다시 둘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욕조에서 첨벙첨벙, 물이 흘러 넘쳤다.

남자는 이전보다 더 느긋하게 사정까지 도달할 셈이었으나, 잇따른 사정 탓에 민감해진 여원의 밑이 제 걸 조여 대는 통에 또 계획대로 풀리진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안을 느끼며 남자는 자신을 좀먹는 여원을 맘껏 취했다.

“…아, 씨발.”

관계를 끝내고 잠들었는데, 격렬한 숙취가 남자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남자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으며 욕설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허리춤에 감겨 있던 이불이 밀려 나갔다.

“이거요.”

남자는 자신의 앞에 내민 컵을 응시했다. 유리잔엔 노란 액이 희석된 물이 담겨 있었다. 평소보다 더 험악해 보이는 남자에게 여원이 더듬더듬 변명했다.

“…아주머니가 가져오신 꿀물이에요.”

“…….”

“술 마신 다음 날 들이켜면 좋다고 하셨어요.”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자, 여원이 조심스레 내밀었던 손을 물렸다. 여원은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컵을 올려놓았다.

“여기에 두겠습니다.”

여원이 도망치듯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남자의 어지러운 시야로 당장이라도 방을 나갈 듯이 구는 몸이 들어왔다. 단정하게 잘린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목덜미는 손바닥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새붉었다. 남자는 여원이 등을 돌리기 전 흘깃했던 제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한데 뭉쳐 있는 시트 위로 거뭇한 음모가 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픽 웃으며 근육이 겹겹이 쌓여 있는 팔을 내밀어 여원의 팔을 잡았다. 그러곤 휙 잡아당겼다. 여원이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남자는 제 위에 올라타 있는 여원을 느긋이 올려다봤다. 아래에서 보는 여원은 늘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늘 시선을 내리깔고 있느라 남자가 강요하지 않으면 눈동자를 잘 볼 수가 없는데, 이 위치에서는 여원의 눈코입이 아주 잘 보였다. 남자는 침대 헤드에 두 팔을 걸쳐 놓곤 여유로이 그림을 구경하듯 여원의 이목구비를 천천히 감상했다.

“…왜 이러세요.”

분명 나신의 상태인 건 남자인데.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하는 건 여원 쪽이었다. 남자는 여원의 티 위로 드러난 목을 재밌다는 듯 바라봤다. 이렇게 붉을 수가 있나.

“밤새 본 사이인데 이게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여원은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꿀물 얼른 드세요.”

남자는 협탁으로 손을 뻗어 여원이 보는 앞에서 컵에 입술을 대고 목을 꺾었다. 단맛을 그닥 즐기지 않는 남자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컵을 내리자,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여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원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찌개를 올려놨어요.”

정말인지, 부엌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여원은 남자의 위에서 일어나, 얼른 방을 벗어났다. 건조한 손바닥으로 남자는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곤 자신이 술김에 여원에게 내뱉었던 말을 상기했다. 분명 죽여 버리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여원은 하루 만에 그 일을 잊은 듯이 행동했다. 남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신에 가운을 걸쳤다. 그러곤 부엌으로 향했다.

길고 늘씬한 인영이 사부작대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살림이라도 차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남자의 눈길을 이끌어 왔다.

에필로그

계절이 그새 한 바퀴를 돌아, 새로운 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부지런히 내달린 시간은 여원을 첫 번째로 맞는 어머니의 기일로 데려다 놓았다. 여원은 검은 재킷을 차려입고 납골당을 찾았다. 눈매를 그대로 닮은 제 어머니의 사진 옆에 꽃다발을 놓곤 고갤 살짝 숙여 묵념했다. 그 덕에 검은 재킷 위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남자는 조용히 지켜보고 서 있었다. 여원은 제 아비와 제 삼촌의 앞에서도 잠시 시간을 보냈다. 친척들과 같은 보는 눈들이 있어 차마 다른 곳에 둘 수가 없었다. 줄담배를 피우며 여원을 기다리던 남자는 돌아 나오는 여원의 뒤를 따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여원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해 두고 있었다. 두 눈동자엔 여느 때처럼 고요함이 드리워져 있었고, 아랫입술은 차분하게 다물려 있었다. 남자는 그 옆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여원은 씻는다고 말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서재에서 서류를 보던 남자는 샤워실로 눈길을 줬다. 벌써 몇십 분이나 안에서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균일하고도 일정하게. 남자는 서재 책상 앞에서 일어났다.

“서여원.”

안에서는 그 어떠한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나직이 종용했다.

“문 열어.”

“…….”

“이 문 부수는 건 나한테 일도 아닌 거 알 텐데.”

이 정도 경고를 줬으니 그냥 부수고 들어갈까. 남자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딸깍 문이 열렸다.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문틈 새로 여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게 싫은지,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서 있었다. 눈가가 시뻘겠다. 물 틀어 놓고 아이처럼 몰래 울고 있었을 이를 생각하니 남자는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왜 울었습니까.”

물기는 닦았으나, 여전히 잔뜩 감정을 묻히고 있는 얼굴에 남자는 쯧쯔 혀를 찼다. 여원은 답이 없었다. 속눈썹에서 미처 다 떨궈 내지 못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나왔다. 여원이 제 손등으로 황급히 훔쳐 냈으나 이미 남자에게 걸린 이후였다. 물꼬가 트였던 눈물샘은 다시금 그 문을 열었다. 남자는 여원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제 것이 아닌 죄를 두 손에 짊어지고 있는 이의 귓불을 어루만졌다.

“벌 받을까 봐?”

품 안에 있는 이가 고개를 미세하게 내저었다. 여원의 발개진 코끝이 남자의 가슴팍에 비벼졌다.

“아니요.”

“뭐가 또 그렇게 무서워서.”

응? 남자는 매끈한 세 치 혀로 제 품 안에 있는 이를 위로했다. 귓불을 혀로 애무했다. 작고 민감한 귀를 혀로 슬슬 쓸다가, 목을 타고 내려와 여원의 가슴팍을 입 안에 머금었다. 유륜을 꺼끌한 혀로 연신 쓸고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었다.

여원은 집요히 자신을 몰아세우는 행위에 지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짧게 잠이 들었다했더니, 그새 악몽에 이끌려 가버렸다. 이렇게 악몽을 꾼 건 실로 간만이었다. 납골당에 다녀왔던 낮의 일이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었다.

여원을 내려다보다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여원의 몸 위로 크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위를 올라탄 남자가 딱 맞붙어 있는 여원의 둔부를 손으로 벌렸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살점이 숨기고 있던 구멍이 남자에게로 드러났다.

남자는 제 옷을 끌어 내려 좆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구멍으로 제 걸 밀어 넣었다. 이미 삽입당해서 한차례 씨물을 뱉어 냈던 여원의 구멍은 남자의 좆을 빠득하게 안으로 끌어당겼다. 남자는 악몽을 꾸는 여원의 위에 올라붙어 흘레붙었다. 안타까운 이의 몸을 제 몸으로 덮곤 빠르게 추삽질했다.

“아아!”

마침내 두 눈이 천천히 뜨였다. 잠에서 깨어난 서여원이 몽롱한 눈으로 남자를 마주했다. 멍청한 두 눈동자에 천천히 이지가 들어찼다. 곧 제 다리 사이가 축축하다는 걸 눈치챘다. 뺨과 콧잔등이 붉게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성인이 되어 갖고.

“또 쌌어요?”

여과 따윈 없는 단어 선택에 섬세한 눈코입이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제 이불보 하나 관리 못 한 서여원은 낯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속눈썹을 바르르 떨어대며 아랫입술을 터뜨릴 듯이 꽉 물었다. 숨을 구멍을 찾는지, 젖은 눈동자로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남자의 시선에서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도망을 포기하곤 남자의 쪽으로 팔을 뻗어 왔다. 허물어져서 안긴 몸은 평소보다 체온이 높았다. 땀에 축축이 젖은 피부가 남자에게 철썩 달라붙어 왔다. 남자가 조금 젖은 여원의 앞머리를 넘겨 주자, 이마를 따라 난 솜털들이 드러났다.

남자는 고갤 꺾어 안겨 온 서여원의 뒷덜미를 핥았다. 솜털이 혀끝을 간질여 온다.

“…흐응.”

방금 막 사정을 끝낸 몸은 이깟 혀질 몇 번에도 예민하게 털을 세웠다. 세밀하게 곤두선 엷은 솜털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땀방울을 빨아 냈다. 이 하얀 몸에선 땀에서도 달큰한 내가 났다.

“…아아!”

잔뜩 몸을 움츠린 서여원의 몸 뒤로 침대 주변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이 눈에 보였다. 정신을 빼고 벗어 던진 탓에 검은 재킷 두 개가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죄송합니다.”

뭐라 답이 없자, 선뜩 불안해진 서여원이 남자를 불러 왔다.

“…대표님?”

불안감이 깃든 얼굴. 남자가 여원의 머리에 새길 듯이 매 음절을 끊어서 물었다.

“네가 누구의 것이라고?”

…자, 장기주 대표님. 달뜬 숨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흘려보내는 얼굴에 남자는 조금 웃었다. 그래, 이만하면 몽정하기 적당한 나이지.

남자는 자신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여원의 손을 제 입 안에 머금었다. 거친 사포로 문댔던 탓에 특히 지문 쪽이 아기 피부만큼 보드라웠다. 이 지문에 얽힌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을 이가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니. 아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오롯이 제 손에 굴러떨어진 이가 선사하는 충만감에 남자는 여태껏 느껴 보지 못한 진득한 쾌감을 느꼈다. 드디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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