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튿날, 장 대표를 따라나섰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는 본격적으로 이슥한 길로 접어들었다. 덜컹덜컹, 비포장도로의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몸이 뒤흔들렸다. 바퀴 밑에 놓인 자갈 하나, 모래알 하나가 차체를 통해 생생히 전달됐다.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의문 담긴 시선을 남자에게 던졌다. 돌아오는 건 미심쩍은 미소뿐이었다.
“가 보면 압니다.”
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 도착한 곳은 한 야산 앞이었다. 인적이 드물어 제대로 된 이정표 하나 없는 곳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직원이 얼른 다가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남자를 따라 차에서 내려 산을 올려다봤다.
“…….”
“…….”
비가 막 그치고 난 이후라 산은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정승처럼 초입을 지키고 있는 검은 나무들을 홀린 듯 올려다보고 있다가, 뒤처질세라 얼른 장 대표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남자는 긴 다리로 저 멀리까지 앞서 있었다. 흑표범의 뒷다리처럼 치밀한 근육으로 짜진 긴 다리가 휘적거리며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발을 재게 움직여 얼른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어둑한 숲은 무성한 풀과 가시가 돋친 나무들로 이뤄진 커다란 동굴 같았다. 정처 없이 공중을 떠다니던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텁텁한 데다 묵직했다. 빗물 때문에 질퍽질퍽해진 흙을 짓밟으며 부지런히 위로 올랐다.
“…….”
“…….”
장 대표가 발을 내딛자 나뭇가지가 우적, 소릴 내며 둘로 부러졌다. 가지를 발톱으로 꽉 움켜잡고 있던 산새가 화들짝 놀라 푸우우, 울며 날아갔다. 머리 위로 새가 햇무리를 반으로 가르며 사라졌다.
남자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를 팔로 밀어 올렸다. 그러자, 덤불에 모습이 감춰져 있던 비닐하우스가 눈에 보였다.
이런 곳에 저런 큰 비닐하우스라니.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비닐하우스 입구 근처에 서서 담배를 태우던 직원 하나가 남잘 발견하곤, 얼른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그러곤 잘 벼린 칼처럼 딱 떨어지는 각도로 허릴 숙여 왔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통나무처럼 굵은 어깨와 목엔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별안간 장 대표의 직업이 한 번 더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제 직원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지나친 장 대표가 비닐하우스의 입구를 손으로 들춰 냈다. 들어가기 직전, 그가 내게 물었다.
“손님맞이할 준비를 못 해 놔서 꼴이 엉망일 텐데. 그래도 들어가서 볼 겁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얼른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에는 기대하던 푸른 밭 대신 누런색 장판이 깔려 있었다. 풀색 담요들이 붉은색 카드 패들과 어지러이 섞여 있었고, 술병과 말라비틀어진 음식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한때 도박이 흥하던 장소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비닐하우스에 불과한 이곳은, 일명 하우스라고 불리는 불법 도박장이었다. 남자를 따라오면 삼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저 끝에서 직원 둘이 무언갈 지키고 서 있었다.
“…….”
“…….”
그들의 몸 뒤로는 언뜻 철장 같은 게 눈에 보였다. 가축을 안에 넣고 기르는 뜨장 같았다. 안으로 들어올수록 역하게 풍기던 냄새의 진원지가 바로 저것인 걸까.
장 대표가 가까이 다가가자, 개장을 지키고 있던 장정 둘이 비켜섰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난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음장처럼 쩍 굳어 버렸다.
“……!”
안에는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삼촌’이 들어가 있었다. 고기 망치 같은 걸로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얼굴이 처참히 반죽되어 있었다. 그건 인간의 형체를 띤 완자에 더 가까웠다. 메리야스 티셔츠에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속옷엔 오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20kg은 몸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힘껏 비틀어 짠 걸레처럼 말라비틀어져선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 아래로 보이는 오목눈이라든지, 두꺼비 같은 손은 분명 삼촌의 것이었다.
개장 앞엔 개밥인지 뭔지 모를 꿀꿀이죽이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었다. 저런 거나 주워 먹인 뒤엔 배변 활동조차 자유로이 하게 놔두지 않은 듯했다. 뜨장 밑으론 말라비틀어진 오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 덜 마른 오줌도 있었다. 풍겨 오는 지린내가 역했다. 얼굴이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그렇게 겁에 질려 있을 바엔 손으로 눈이라도 가리는 게 어떨지 싶은데.”
뒤에서 능청스러운 장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박 빚을 안 갚고 내뺐지 뭐예요.”
충격적인 광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는데. 장 대표가 철제 의자를 하나 끌어와, 삼촌의 옆에 턱 하니 앉았다.
남자가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자, 직원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선 손을 모으더니 불을 붙였다. 그에 전화상으로 후우, 뿜어지던 호흡이 상기되었다. 삼촌에게서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요즘 잔챙이 같은 놈 하나가 굴러들어 왔는데. 뭐 하는 놈팽이인지는 몰라도 이놈이 글쎄, 폭부처럼 돈을 술렁술렁 내보낸다니까. 형님, 형님 하면서 따르는데….’
휴대폰은 삼촌의 몸 밑에 깔려 있었다. 저 휴대폰으로 들리던 그 인기척은 이 남자의 것이었겠지. 하얗게 질려 있는데. 장 대표가 자상한 남자인 척, 차가운 내 뺨에 입술을 짓누르며 지껄였다.
“다시 한번 말해 두지만 우연입니다.”
남자의 손끝에 맞닿아 있는 피부를 중심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쭉 찢어진 눈이 별안간 섬직했다.
넥타이 없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쳐서인지, 장 대표는 유달리 상스러워 보였다. VIP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수트와 향수로 감춰 두고 있던 천박함을 여감 없이 분출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죄수를 지키는 교도관 같기도 했고, 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세 개 달린 개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만한 자세로 담배를 뻑뻑 피우던 남자가 용건을 보라는 듯, 내게 삼촌을 턱짓해 보였다.
“…….”
“…….”
고갤 다시 천천히 삼촌에게로 돌렸다. 두 번 봐도 정말이지, 끔찍한 몰골이었다. 헤, 하고 벌어진 입에선 침이 연신 줄줄 새어 나왔다. 절대로 적응되지 않을 것 같은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삼촌을 팽팽히 노려보았다. 제 조카를 돈 뱉는 호구로 본 작자이다. 피를 둘로 나눠 가진 핏줄이라고 달리 볼 리 없었는데. 그래도 의지하고 싶었던 걸까. 엄마가 침대에 누워 있는 지금 상황에선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였으니까.
내 마지막 믿음을 배신한 자에게 묻고 싶었다. 그간 대체 뭐 하며 살았냐고.
“…삼촌.”
시체처럼 늘어진 몸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삼촌,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담배 한 대를 모두 피워 낸 장 대표가 꽁초를 떨어트리며 지시했다.
“깨웁시다.”
직원 하나가 얼른 다가가, 개장의 입구를 열었다. 철컹, 철컹! 오랜 시간 동안 기름칠 되지 않은 문고리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직원이 삼촌의 머리채를 억세게 부여잡고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삼촌의 몸이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철창 자국들이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석쇠에 달궈진 불고기 같았다.
직원은 갈색의 고무 대야 앞에서 삼촌을 내팽개쳤다. 삼촌의 머릴 그대로 집어 올려 물속으로 처박는다. 물에 부글부글, 공기가 차올랐다. 시체처럼 퍼져 있던 두 팔이 서서히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삼촌의 두 발이 미친 듯이 땅을 긁어 대며 괴로움을 토해 냈다.
“…끄으억!”
물 밑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제야 한참 처박혀 있던 삼촌의 얼굴이 물 밑에서 끌려 올라왔다.
직원이 삼촌의 몸을 땅에 내팽개쳤다. 삼촌은 개구리처럼 네발로 땅에 납작 엎드려 푸학, 푸우학! 하는 소릴 내며 고래 등처럼 물을 토해 냈다.
삼촌의 입으로 구정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거의 내장까지 촤르륵 바닥 위로 흩뿌려졌다.
“…커허, 억.”
끔찍한 소릴 내며 발작하던 그는 장 대표에게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초점이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다. 내 존재는 미처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자, 장 대표. 살려 주시게.”
“사장님, 액수가 자그마치 삼천입니다. 정해진 기일도 이미 두 달이나 지났잖습니까.”
“…갚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갚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삼촌이 장 대표의 다릴 목숨 줄처럼 움켜잡았다. 남자는 눈매를 가늘게 떠서 웃더니 삼촌의 얼굴을 구둣발로 밀어 냈다.
난 가느다란 숨처럼 말을 뱉었다.
“…삼촌.”
삼촌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이어서 썩은 동태 눈깔이 내게로 향해 왔다.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여, 여원아!”
오래된 철문을 손톱으로 득득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귀를 후려쳤다. 삼촌이 내 쪽으로 기어 오려고 하자, 장 대표의 관자놀이에 새파란 핏줄이 솟았다. 그는 삼촌의 등을 사정없이 구둣발로 내려찍었다. 내게로 향해 오던 몸이 무너진 굴뚝처럼 풀썩, 꺼졌다.
“대표님.”
남자가 말하라는 듯, 턱을 비스듬히 눕혔다.
“…잠시만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요.”
내게 고정되어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눈매 안에서 반 바퀴를 휙 돌아 삼촌에게로 향했다. 그의 서늘한 눈매가 고민으로 가늘어졌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음, 목을 울리던 남자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직한 그의 무게를 덜어 낸 철제 의자가 삐그덕 신음했다.
“한 계절 만에 만났으니까 할 얘기가 많겠네요.”
직원이 개 목줄처럼 보이는 쇠사슬을 가져와 삼촌의 목에 채웠다. 다른 쪽 고리는 개장에 걸어 두곤, 시험해 보듯이 몇 차례 잡아당겨 봤다. 챙챙 금속성의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저벅저벅. 남자가 구둣발로 장판을 짓이기며 밖을 나서자, 나머지 직원 둘도 사라졌다.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있던 삼촌은 기다렸다는 듯 소릴 낮춰 애원했다. 가까이에서 내뱉어지는 호흡마다 끔찍한 냄새가 났다.
“…어, 얼른 경찰에 신고해 다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모양새는 크게 다르지만, 어쨌거나 나도 감금당해 있는 처지라서.
“…어, 얼른, 얼른!”
삼촌이 내게로 손을 마구잡이로 내뻗어 왔다. 철컹, 철컹! 3cm 정도를 두고 손끝은 매번 좌절당했다. 삼촌이 앞으로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쇠사슬이 그의 몸을 힘껏 잡아당겨 댔다. 앞으로 돌진해 오려 하는 힘이 클수록, 그의 몸만 크게 요동쳤다.
“…엄마 병원까지 데려다 놓으시곤 왜 연락 한 통 없으셨어요.”
“그래, 내가, 내가 다 잘못했다, 여원아. 제발 여기서만 나가게 해 다오….”
삼촌이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엄마 통장은 어디 있어요?”
삼촌이 도리질을 마구 쳐 대며 뻣뻣한 혀로 지껄였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도 모, 몰라…. 이럴 시간이 없어. 저 인간 탈을 쓴 짐승 새끼가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뿐인 줄 알아? 너도 위험해진다고!”
…이 와중에 모르는 척을. 삼촌은 목줄을 풀어내려 손으로 미친 듯이 잡아당겼다. 개장에 걸려 있는 고리 또한 풀어 보려 했지만, 쇠사슬이 너무 튼튼해 별 소용은 없었다.
목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이 안을 계속 빙빙 돌았다. 미친 새끼처럼 본인의 살길만 찾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말씀해 주셔야 나가는 거 도와드릴 거예요.”
“난, 나는 진짜 몰라…. 모른다고 저 새끼한테도 이미 몇십 번, 몇백 번, 몇천 번을 말했…!”
돌연 삼촌이 으윽, 신음하며 명치 부근을 손으로 짚었다. …뭐지? 나는 경계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또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삼촌의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놀라서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자, 삼촌이 제 티를 둘둘 말려 올렸다. 그렇게 바깥으로 드러난 속살은 엄청나게 끔찍했다.
“저 새끼가 준 술을 먹고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려 봤더니, 내가 폐병원 수술대 위에 있었다. 그 씹새끼들이 내 배를 가르곤….”
얼기설기 조잡하게 꿰맨 흉터 자국이 가슴을 가로질러 나 있었다. 벌어진 흉터로 피가 육즙처럼 줄줄 뿜어져 나왔다. 저대로 놔둔다면 얼마 못 버티고 뒤질 게 분명했다.
“그거 다 삼촌이 자초하신 일이에요.”
아아아악!! 광기 어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 이 으라아질….”
철컹, 철컹! 신경을 곤두세우는 금속성 소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개보지 같은 새끼!”
광기에 찬 삼촌이 내게로 와락 달려들려고 했다.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버리려는 듯, 두 손이 내 목덜미를 향해 뻗어 나왔다. 철컹, 철컹! 쇠사슬 줄이 팽팽하게 늘어지더니, 삼촌의 몸이 다시 뒤로 튕겨져 나갔다. 저 줄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삼촌의 밑에 깔려 있을 거였다.
철컹, 철컹! 개장의 네 다리가 박혀 있는 장판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저대로라면 바닥에 박혀 있는 개장이 뜯겨져 나올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 순간, 상상은 실제가 됐다.
대못이 장판을 뚫고 나오자마자, 개장은 바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
삼촌은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난 그 어떠한 방어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삼촌의 밑에 깔렸다. 삼촌은 쇠사슬 줄로 내 목을 눌러 댔다. 사지를 비틀며 발버둥 쳐 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이미 위치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어째 이상하다고 했더니….”
“…으흐, 흐윽.”
삼촌의 광기 어린 힘을 감당하지 못해, 짧은 손톱으로 삼촌의 손등을 득득 긁어 댔다. 독기에 찬 삼촌은 정말 죽이겠다는 각오로 내 목을 졸라 댔다.
“…윽!”
비명을 내지르면 달려올 사람이 밖에 있는데, 입 밖으로 목소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기도가 좁아져 제대로 호흡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너 저 새끼한테 뒷구녕을 내줬지?”
삼촌의 벌린 입 새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점액질이 길게 늘어져 눈가로 떨어졌다. 속눈썹에 달라붙어 눈뜨기가 쉽지 않았다. 흐릿해진 시야로 비닐하우스의 입구가 들리는 장면이 들어왔다.
“이 개보지 같은 년, 진작 씹창을 내놨어야 했는데!”
크고 까만 인영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싶더니, 삼촌의 몸이 발로 걷어차였다. 목을 압박하던 힘이 사라졌다. 난 네 발로 엎어져서 목을 부여잡곤 켁켁, 댔다. 숨을 헐떡거리며 부족했던 산소를 폭음했다. 머리 바로 위에서 장 대표의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씹창을 내놔? 씨발, 감히 누구를….”
장 대표는 구둣발로 삼촌의 몸뚱어릴 걷어찼다. 삼촌이 컥, 소릴 내며 허릴 접고 나자빠졌다.
“어디 하늘 같은 조카도 못 알아보고 개보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아무리 제정신 아닌 상태라고 그래도 제 조카는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후욱, 후욱. 장 대표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남자의 두 눈이 내 목으로 달라붙어 왔다.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에 나는 흠칫 놀라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이마 위로 흐트러져 내려온 머릴 손으로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곤 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웠다. 남자의 입술 새로 연기와 함께 끔찍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술 담배에 망가진 몸이어도 안에 있는 것들 싹 다 털어 내면 못해도 팔백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누가 들을까 무서운 소리를, 장 대표는 한 치의 거리낌 없이 줄줄 쏟아부어 냈다.
“하체는 잘라다가 뒷산에다 던져 줄 겁니다. 발정 난 멧돼지 새끼한테 시간당하든 물어뜯기든 하겠지.”
“…대표님.”
나는 거의 끊어질 것 같은 음성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기도가 다친 건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색색대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힘겹게 말을 하고 나자, 머리가 어질거렸다. 목을 졸려 공기가 뇌로 전달이 안 됐던 탓이 컸다. 제자리에서 휘청거리자, 장 대표가 반도 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곤 삼촌의 목덜미를 잡아다가 개장 안에 던져 넣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구둣발로 삼촌의 배를 한 번 더 걷어찼다. 커억! 두 팔로 배를 끌어안은 삼촌이 쿨럭, 쿨럭 힘겹게 기침을 뱉었다.
“…크윽.”
자물쇠를 걸어 잠근 그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선 진득한 피 냄새가 훅 풍겨왔다. 생경한 그 냄새에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는데, 남자가 피 묻은 손으로 내 손목을 꽉 잡고는, 입구로 나를 끌어당겼다.
바깥엔 어느새 밤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
여느 날과 같은 하루들이 남자와 나 사이를 가로질렀다.
장 대표는 여전히 본인 꼴릴 때 출근해, 아무 때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건 아주 이른 새벽이기도 했고, 달조차 잠이 든 밤이기도 했다. 그사이 나는 손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하얀 천은 이제 손이 아닌 다른 곳으로 위치를 옮겼다.
오늘 남자는 저녁에 퇴근했다. 날카로운 얼굴엔 피곤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건조한 손길로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바로 샤워실로 직행한다.
나는 그에게서 재킷을 받아, 옷장에 넣어 두었다. 목재 옷걸이는 더 이상 방에 있지 않았다. 남자가 귀찮은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며, 목 부분을 잡아다가 테라스에 딸려 있는 수납장에 처박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나올 동안, 나는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했다. 부글부글, 인덕션에 올려놓은 찌개에서 끓는 소리가 나길래 얼른 불을 껐다.
잠시 후 편안한 차림이 된 남자가 식탁으로 나왔다. 방금 막 찌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참이었다. 쿠킹 장갑을 손에서 벗고, 남자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
“…….”
식사 시간은 고요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목에 닿아 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앞에 눈길을 주자, 역시나. 장 대표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평소처럼 서늘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붕대의 꺼끌꺼끌한 촉감이 와 닿았다. 다물려 있던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목덜미가 하얘서 붕대가 잘 보이지 않으니까, 고갤 뒤로 젖혀 봐요.”
“…….”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고압적인 명령.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 의자에서 일어나 장 대표에게 다가갔다.
타인의 힘에 의해선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꺼운 허벅지가 내게 그 틈을 허락했다. 나는 순순히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 남자의 몸에 붙어 섰다.
뼈마디가 굵은 손이 내 목덜미를 그러쥐어 왔다. 고갤 뒤로 바짝 꺾어, 남자에게 목을 완전히 내보였다. 식탁 위로 주황빛을 내뿜던 전등이 두 눈 가득 담겨 온다.
눈부셔….
그의 손에 의해 붕대가 스르륵 풀려 나갔다. 흉이 고스란히 남자의 시선 아래에 놓였다. 남자는 값비싼 술병 다루듯, 세심하게 내 목의 각도를 이리저리 돌려 봤다.
“…음.”
“…….”
답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이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그가 조금만 손에 힘을 가해도 내 목뼈는 연필심처럼 뚝 부러지고 말 테니까. 이윽고 큰 손이 미끄러지듯이 목덜미에서 물러갔다. 그러고는 상의 안을 슬그머니 파고 들어왔다.
“티 올려 봐요.”
천천히 가슴 위까지 티를 말아 올렸다. 장 대표의 시선이 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붉고, 노랗고, 파란 멍이 곰팡이처럼 군데군데 피어 있는 몸을 말이다.
“하얀 데다가 살결도 고와서 멍이 들면 딱 내 마음에 들 거라 생각했는데.”
건조하게 뱉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질이 나빴다. 핀트 나가면 몸에 멍을 남기겠다는 소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파렴치한 남자의 손이 뭉근하게 내 피부 위를 덧그렸다.
“…아.”
허리 주변을 배회하던 손길이 기어코 멍을 짓누른다. …아! 아파서 어깨를 둥글게 말자, 남자는 순순히 나를 놔줬다.
“이건 뭐, 내가 내놓은 게 아니니까.”
툭, 툭. 그의 손끝이 식탁을 두드렸다. 불쾌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나는 손짓이다. 나는 티를 내리고, 앞에 서서 눈치를 살폈다. 장 대표의 팽팽하게 당겨진 턱을 보며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어쩌지. 지은 죄가 없는데, 왠지 벌 받는 기분이 들었다.
“…….”
“…….”
삼촌을 만나고 온 이후로 장 대표와 나 사이에 더 이상 그 일에 대한 얘기는 오가지 않았다. 남자와 나는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혀를 섞고, 배를 맞추면서도 정작 그 일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회피하고 있는 걸 남자도 느낀 듯했다.
멍이든 흉이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나을 것들이니까…. 반 푼에 불과하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이 고요한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목과 벗은 몸을 보며 종종 무서운 얼굴을 짓곤 하던 장 대표 때문에 움찔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해 왔었다.
아무래도 내내 눌러 담고 있던 화가 결국 터진 듯했다. 이 상황을 어떡하면 좋을까.
화를 풀어 줘야 할 것 같은데. 당최 방법을 모르겠다. 머릴 이리저리 굴려 보다가 묘안이라고 하나 떠오른 게….
갈색 목덜미로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뚝, 식탁을 두드리던 장 대표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에게로 바짝 붙어,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세밀한 근육으로 치밀하게 짜인 남자의 허벅지가 내 몸을 단단히 받쳐 온다. 마치 조각상 따위를 깔고 앉아 있는 듯했다.
장 대표는 짧은 찰나,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전기 충격기에 쇼크라도 받은 것처럼. 남자의 소슬한 동공이 제게 바짝 붙어 있는 나를 올려다본다.
“…뭡니까.”
장 대표의 유려한 미간 사이가 사나워졌다. 나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 무릎 위에 앉아서 술을 마실 거냐고 묻던 남자가 떠올라서 벌인 짓인데. 역시나 돌아오는 반응은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다. 남자의 피부에 닿은 손끝이 민망함에 차가워졌다.
남자가 내 자릴 턱짓했다.
“가 봐요.”
나는 새붉어진 얼굴로 팔을 천천히 풀어내 남자의 다리 위에서 일어났다. 쪽팔려서 목뒤가 다 화끈거리는 순간이었다. 얼른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손이 빠르게 뻗어 와선 내 팔뚝을 휘어잡아 왔다. 몸이 단박에 뒤로 홱 돌아갔다.
“…아!”
장 대표가 내 턱을 부여잡아 왔다. 그러곤 별안간 난폭하게 키스를 퍼부어 왔다. 혀가 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내 입 안을 무식하게 치댔다. 혀를 뿌리째 뽑아낼 듯 힘껏 쪽쪽 빨아들이곤, 목구멍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가 뒤로 빠졌다. 씹질을 연상케 하는 그것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남자의 손이 찢어발길 듯 거칠게 내 티를 벗겨 냈다. 성마른 손으로 내 가슴과 허리를 제 것처럼 주물거렸다. 나 또한 남자의 지퍼에 손을 뻗어 바지를 내렸다. 퉁, 하고 튀어나온 남자의 좆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검붉은 좆은 금세 한계까지 부어올라 프리컴을 줄줄 뱉었다.
나는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뒤에 두고 의자 위에서 남자를 받았다. 활활 몸을 태울 듯이 불을 지펴 오는 열락에 뇌수가 흐물흐물 녹았다. 잿빛 연기로 타오르지 않기 위해선 남자의 몸을 꽉 붙드는 수밖에 없었다.
의자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장 대표는 얼룩덜룩 멍든 내 피부를 잘근잘근 씹고, 축축하게 핥아 댔다. 사나운 눈을 하고선 목을 핥길래 소름이 확 끼쳤다. 좆이 미친 듯이 구멍으로 박혀 들었다. 그가 크기를 넓히려 손가락으로 구멍을 쑤실 때완 다른 느낌이었다. 비교도 안 되게 굵은데다가, 너무 길어서 반만 넣어도 내장이 휙휙 뒤집혔다.
“…대, 대표님.”
장 대표의 굵직한 허리를 다리로 감자, 퍽 좆이 안으로 쳐들어왔다. 나는 힉 소릴 내며 위로 튀어 올랐다.
“…흐, 흐응, 화내지, 마세요, 윽!”
남자의 무자비한 손길에 엉덩이가 양쪽으로 확 갈라지고, 엉덩이 사이로 좆이 급하게 쳐들어왔다. 안을 퍽퍽퍽 쳐댔다. 고환이 뺨을 치듯 엉덩이를 때려왔다. 나는 남자의 상체에 얼굴을 묻곤 눈을 꽉 감았다. 이윽고 눈앞이 하얗게 부서졌다.
***
총 두 차례의 격정이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나는 장 대표의 침대 위에서 그의 가슴팍에 등을 맞댄 채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등을 타고 대리석처럼 매끈한 남자의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따뜻한 체온에 점점 눈이 감기고 있을 때.
협탁 위에서 장 대표의 휴대폰이 새붉은 빛을 뿜어 대어, 잠에서 깼다. 곧 뒤에서 무쇠 같은 남자의 팔이 길게 뻗어 나왔다. 그러곤 어렵지 않게 휴대폰을 집어 올렸다.
“…어, 말해.”
낮게 쉰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웅웅,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현듯 남자의 시선이 내 뺨에 닿아 온다. 그답지 않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듯했다.
장 대표가 상체를 일으키자,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운의 끈을 조이며 문을 나서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나는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남자가 빠져나간 문을 지켜봤다. 방금 그건 뭐였지. 일부러 자릴 피한 느낌이었다. 어딘가 싸한 기운이 목덜미를 사악 훑고 지나간다.
“…….”
침대를 빠져나와 바닥을 두 발로 짚고 섰다. 툭, 툭. 구멍 사이에서 남자의 좆물이 덩어리째 떨어진다. 밑이 지독히도 쓰라렸지만, 서둘러서 가운을 챙겨 입고 부랴부랴 방을 나섰다.
장 대표는 테라스에 서 있었다. 약간 열려 있는 문틈으로 소슬한 바람이 곁들어 왔다. 휘이익. 막 잠에서 깬 탓인지 몸이 후들 떨렸다. 손으로 양팔을 끌어안고,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남자가 뻑뻑 피워 대며 뱉는 담배 연기가 검게 그물거리며 공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뒷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섬직했다. 불안한 기운이 심장을 가로질렀다.
돌연 남자가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 내더니, 뒤를 돌아봐 왔다. 그의 두 눈이 기민하게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를 포착해 낸다. 나는 흠칫 놀라 몸을 조금 떨었다.
“…….”
달칵, 장 대표의 손이 테라스의 문을 밀어 닫는다. 나직하게 들려오던 음성마저 유리창에 막혀 차단됐다.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는 걸까. 어둑한 구름 아래에 서 있는 남자에게선 자꾸만 조마조마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애써 그런 척, 가장된 평화가 깨지려고 한다. 남자는 내 뒤에서 무언갈 꾸미고 있었고, 나는 그런 남자 때문에 자꾸만 무섭고 불안했다.
장 대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테라스를 나섰다.
“왜 나와 있습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또 악몽을 꿨냐고 물어 온다. 가만히 고개를 내젓자, 남자의 눈매가 의심에 가늘어졌다. 남자의 손이 내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다. 파렴치한 손은 확인해 보듯이 내 사타구니를 더듬거렸다.
사정한 탓에 아직까지 물기에 조금 젖어 있는 내 음경을 문지르고, 부풀었다가 축 늘어진 내 고환을 인절미처럼 주물럭거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제 그만 만지라, 몸을 비틀어 댔다. 남자는 기어코 내 엉덩이를 벌려 구멍에 본인의 가운뎃손가락까지 밀어 넣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안을 휘젓자, 질척한 정액이 주르륵 쏟아졌다.
“쌌잖아.”
장 대표가 제 가운에 손가락을 문지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지랄했다. 아무 데나 오줌을 싸 놓은 애완견을 나무라는 어조라, 나는 순간 울컥했다.
“…이거는 아까.”
당신이 싸 놓은 거잖아. 뒷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묵혔다. 남자는 픽 웃으며 조소했다.
이제 다시 잠자리에 들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방으로 돌아와선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 앉아 남자의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
“…….”
고객을 접대한다거나 업무를 보러 가는 건 아닐 것 같았다. 장 대표는 그럴 때마다 늘 머리를 뒤로 넘기고 나갔었는데, 지금은 먹물처럼 색 짙은 머리가 그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는 최소한의 채비만 하곤 현관 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를 들어 봐야 내가 알 리 없지만, 왠지 지금은 꼭 물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들썩였다.
“…어디 가세요?”
쓸데없는 말은 잘도 지껄이던 남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저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잠시 응시하고 있다가, 이내 말없이 돌아섰다. 비밀로 온몸을 무장한 채 집 밖을 나선다.
대체 어딜 가는 걸까.
혼자 남은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창문에 붙어 섰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로비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남자가 등장했다. 차에 타려던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50층 위에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그의 긴 몸이 미끄러지듯이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윽고 남자를 태운 차가 내 시야에서 종적을 감췄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장 대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초조한 나날이 흘렀다.
마른침을 삼키며 엄지를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하루하루 날이 지고 다시 새올 때마다 신경줄이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며칠이 지나자, 기다리던 남자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기에 얼른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남자의 재킷에선 바람 냄새가 물씬 났다. 재킷 밑으로 보이는 양손에는 못 보던 검은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말꼬리를 흐리며 남자를 불렀다.
“…대표님.”
장 대표의 손에 붙들려 있던 검은 봉지 하나가 내 앞으로 떨어졌다. 투욱, 묵직하지만 어딘가 날 서 있는 소리가 바닥을 둔탁하게 울린다. 형편없는 모양새로 바닥을 나뒹구는 검은 봉지를 내려다보다가, 남자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장 대표는 말없이 그걸 턱짓했다. 직접 확인해 보라는 것 같았다. 그에 나는 무릎을 스르르 굽혀 검은 봉지로 손을 내뻗었다. 무시무시한 이빨을 세운 사나운 짐승에 손을 뻗듯이, 느릿하고 신중한 손길로 봉지 입구를 파헤쳐 봤다.
“……!”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적갈색 벽돌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얼른 봉지에서 손을 뗐다.
벽돌엔 군데군데에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번개 모양으로 깨진 부분에서 이걸로 꽤 단단한 걸 팍 내리쳤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게다가 머리칼 몇 가닥이 모서리 부분에 뒤엉겨 있었다. 설마, 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걸 어디서?”
저 높은 곳에 있던 남자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직원한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우스 있는 산 근처에 트럭이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그래서 거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
“화물 트렁크에 그대로 놓여 있던데요.”
“…예전에는 분명 못 찾았다고 했었는데.”
혀끝이 떫었다. 평소엔 문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되다가, 그날엔 아버지의 머리로 향했던 적갈색의 벽돌.
분명 아버지의 몸 근처에 떨어트렸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삼촌이 없어졌다고 했었다. 발이 달려서 스스로 도망치지 않은 이상,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현장에서 빼내지 않은 이상, 그게 사라질 일은 없었는데. 그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던 삼촌이 그렇게 말해, 나는 그저 그런 거라 치부했었다.
“일부러 숨긴 거겠죠. 서여원 씨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려고. 그래야 제 말에 순종할 테니까.”
“…….”
“서여원 씨 가치가 없어졌을 때 즈음, 이웃 주민들 눈에 일부러 띄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남자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안에 뭐가 더 있던데.”
검은 봉지엔 더 이상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장 대표가 그걸 눈치챘는지, 장갑 낀 손으로 직접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통장이었다.
나는 남자에게서 그걸 받아 한 장, 한 장 넘겨 보기 시작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엉망으로 찢기고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대부분의 입금액은 2만 원을 웃도는 것에 불과했다. 많아 봐야 5만 원 언저리였다. 팁으로 받거나 한 돈을 엄마가 아버지 몰래 살뜰하게 모아 저금한 흔적들이 여기에 모두 남아 있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돈을 보며 기뻐했을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쓴 물을 삼킨 듯 명치가 아프고 쓰라렸다.
이제 마지막 장이 되었다. 거기엔 천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통장을 붙든 손끝이 점점 떨리더니, 이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개새끼들. 겨우, 겨우 이것 때문에….
“의지할 놈 하나 있었다는 게 왜 이따위예요.”
“…….”
“이제까지 대체 뭘 의지해서 살아온 건데요.”
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내밀어진 것들을 처참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 남자가 쯧쯔, 가벼이 혀를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대표는 손에 끼워져 있던 장갑들을 벗겨 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러곤 옷장으로 다가가 안에서 새 장갑들을 꺼냈다.
“…대표님.”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집을 나서려는 남자를 말로 막아섰다.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장 대표가 턱을 내 쪽으로 돌려 왔다. 뚜렷한 이목구비 탓에 그의 얼굴엔 음영이 짙게 드리워졌다.
“방금 집에 돌아오셔 놓고.”
돌연 그의 한쪽 입술이 쭈욱 찢어졌다. 그에 불안한 기운이 가슴을 싸악 가로질렀다.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할 일? 새벽 2시면 다른 사람들은 벌써 잠이 들고도 남은 시간이다. 이 남자는 지금 이 시간에 나가서 뭘 하려고 하는 걸까. 어둑하고 고요해서 섬뜩한 이 밤에.
“…가지 않으시면 안 돼요?”
장 대표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어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가지 말라니.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다. 아니, 못 했을 말이다.
“이미 밤이 많이 늦었어요.”
나는 완전히 몸이 달아서 남자의 팔 한쪽을 꽈악 붙들었다. 그러곤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의 두 눈이 내게 붙들려 있는 자신의 팔로 끌려 내려왔다. 시선이 닿은 손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웠다.
“웬일이지, 서여원 씨가 나를 붙들기까지 하고.”
“…하지 마세요.”
목적어를 생략했는데도 남자는 뭘 하지 말라는 건지 묻지 않았다. 그저 음, 하고 목 안을 울리고 있을 뿐.
“…대표님, 하지 않겠다고 해 주세요.”
날 내려다보는 장 대표의 긴 눈매가 별안간 묘한 웃음을 매달고 물결쳤다.
“언제는 죽여 버리고 싶다고 했으면서.”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설마 했는데. 나는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온몸을 휘감아 오는 두려움에 파들파들 경련했다. 등줄기를 후려치는 싸늘함에 얼른 그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목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갈까,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매달렸다.
“대표님, 하지 않겠다고 해 주세요.”
나는 남자의 팔을 아예 두 팔로 껴안았다.
“어차피 다 과거에 있었던 일인데요.”
나만 잊으면 되는 거다. 휴지 조각처럼 모두 와그작 구겨다가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면 되는 일인데.
“…그러다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돌아올 대가가 너무 커요.”
장 대표가 한쪽 눈썹을 예리하게 추켜올린다. 내가 왜 그런 단어를 운운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남자와 나는 전혀 다른 문제를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완전히 다른 온도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절박한데, 남자는 뭔가가 기꺼운 듯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미친 자이니 왜 웃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았고. 당장의 나에겐 어떻게 하면 남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그것만 중요했다.
“어차피 내가 치를 대가인데, 서여원 씨가 왜 그걸 걱정해요.”
남자가 장갑의 끝을 잡아당기자, 긴 손가락이 가죽을 팽팽하게 늘였다.
“너 아닌 척, 모르는 척 잘하잖아.”
“…….”
몇 번이나 하지 말아 달라 애원해 봐도 장 대표는 그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다. 나는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넋을 놓고 있던 사이, 남자는 모든 채비를 마쳤다. 기어코 문으로 향하는 등에 나는 얼른 다가가, 남자의 셔츠를 잡고 그를 끌어당겼다.
“…뭡니까.”
의문을 띤 얼굴이 내 쪽을 향해 오자마자, 남자의 허리에 팔을 감쌌다. 그러곤 그의 어깨에 눈가를 묻었다. 들이마시는 숨을 따라 남자의 짙은 체향이 코로 들어와 폐부 위에 차곡차곡 얹혔다.
“장기주 대표님….”
이름 석 자에 돌덩이처럼 단단한 남자의 몸이 시멘트 벽처럼 아예 쩍 굳었다. 꿀꺽, 목울대가 일렁이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의 눈길이 내게로 향해 왔다. 뱀눈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내가 못 미더워서 이러나.”
“…….”
“버르장머리 없이 이름까지 다 처부르고.”
장 대표는 내 팔을 자신의 허리에서 떨어트려 놓으려고 했다. 난 얼른 다시 힘을 주어 그의 몸을 붙들었다. 그러곤 뒤꿈치를 조금 올려 섬뜩하게 웃는 남자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키스라고 부르기엔 서투르기만 한 혀 놀림이었지만, 남자는 신음하며 내 뺨을 움켜잡았다.
“…흐응.”
살덩어리들이 물기 젖은 소릴 내며 비벼졌다. 장 대표의 단단한 팔뚝이 내 허릴 조여 대며 자신의 몸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남자와 나는 몸을 밀착시킨 채로 한참 동안 혀를 비비적대고 있었다. 남자의 바지 지퍼로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손이 미처 닿기도 전에 남자의 손에 붙잡혔다.
장 대표가 약간 부은 입술로 지껄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흥분에 젖어 있어도 그의 두 눈동자에 비친 차가운 뜻은 견고해 보이기만 했다. 눈앞이 일순 컴컴해졌다. 내가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남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피부로 바짝 와닿았다.
나는 헐떡거리며 입술 새로 말을 흘려보냈다.
“…대표님, 그럼 저도 가게 해 주세요.”
“뭐?”
“……꼭 가셔야 한다면 저도 같이 갈래요.”
그가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나 또한 내가 뱉어 놓은 말을 뒤늦게 곱씹어 보고선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이 흐려지려고 하길래 눈에 힘을 바짝 줬다. 그 와중에도 당장이라도 남자가 그대로 떠나 버릴 것 같아서 얼른 허리를 고쳐 잡았다.
“무서워서 속눈썹까지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뭘. 뭐를 한다고?”
그의 말대로 나는 진득한 두려움에 퍼들퍼들 몸을 떨어 대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너무 공포스러웠다. 무서운 일을 벌이려고 하는 그가, 내가 말리지 못하면 닥쳐올지도 모르는 상황이.
할 수만 있다면 뱉은 말을 모조리 손으로 쓸어 모아 다시 입 안으로 삼켜 넣고 싶었지만…. 이렇다, 저렇다 해도 어쨌거나 남자가 몸을 움직이는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그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뒤로 빠져서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눈동자 가득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아 내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반복했다.
“…갈게요.”
한 번 더 말을 뱉고 나니 복잡하던 마음이 조금 다잡혔다.
그래, 혼자 남아서 초조하게 장 대표를 기다리는 것보단 차라리 함께 가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인 후에 나는 좀 더 분명해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뜻을 전했다.
“저도 갈게요.”
***
산까지 차로 이동하는 내내 나는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는 정적인 도로를 응시하는 와중에도 심장은 아프게 뛰며 명치를 사정없이 두드려 댔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고 차갑게 식은 손바닥을 연신 훔쳐냈다.
그러는 사이, 이미 한 번 와 본 적 있는 산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운전을 맡았던 직원이 랜턴을 들고 앞장섰다. 그 불에만 의지해 장 대표의 뒤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기 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주춤거리다가 간신히 손을 뻗어 남자의 소매를 붙잡았다.
“두려워요?”
장 대표의 고요한 울림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나무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니요.”
사실대로 답하면 귀찮으니 바깥에 남아있으라고 할 것만 같았다. 벌벌 떨리는 내 입술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명확해졌다.
“그럼 알겠습니다.”
장 대표가 하우스 안으로 사라지고, 나는 크게 숨을 내쉰 다음 그의 뒤를 따랐다. 안에는 이전보다 한층 더 고약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하우스 저 끝, 개장 안에 갇혀 있는 삼촌이 보였다. 그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모래주머니라도 차 놓은 듯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애써 발을 다잡았다.
“…….”
가까이에서 본 삼촌은 말 그대로 개죽 그 자체였다. 게거품을 물었는지 입가엔 허연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장 대표가 바지를 추스르곤, 개장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개장을 발로 마구잡이로 차 댔다. 삼촌은 몸을 파들 떨더니 이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임 사장님.”
“크흐윽….”
엉망으로 자라난 삼촌의 때 낀 손톱이 철장을 부여잡았다. 마구잡이로 철장을 흔들어 대는 소리가 저러다가 또 빠지면 어쩌지. 불안해서 다리가 고정되어 있는 자리를 확인했다. 한 번 빠진 적 있던 못은 이젠 아예 시멘트로 굳혀져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삼촌의 두 눈이 쟁반만큼 크게 뜨였다. 마지막 기회라니. 저게 무슨 말이지? 갑작스러운 말에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표정을 볼 수 없으니 의중을 파악하기 더욱 어려웠다. 삼촌은 얼른 무릎걸음으로 철장에 달라붙어 왔다.
“…그으.”
오랜만에 인간처럼 목을 울려 보는지. 삼촌에게선 커어억,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게 정말인가?”
“뭐가 좋을까요.”
장 대표는 고민하는 척, 턱을 기울였다. 남자의 뇌 속에는 이미 모든 판이 짜여 있을 게 분명했지만, 모든 총기를 잃어버린 삼촌은 그에게 애원했다. 기이할 만큼 크게 뜨여 있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홀쭉하게 패인 뺨을 따라 땟국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뭐라도 좋으니 제발 기회를 주게나.”
애걸복걸하는 삼촌을 앞에 두고 장 대표는 담배 한 대를 피웠다. 담뱃불이 하얀 막대의 길이를 짧게 태워 나갈수록, 삼촌의 심정 또한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담배를 연이어 두 대를 피우고 나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감탄사를 낮게 뱉었다.
“아, 도박으로 인생 종 치셨으니까.”
남자가 선연하게 웃는다.
“도박이 좋겠네.”
“…도, 도박?”
몸에 달고 살던 알코올 때문에 늘 검붉은 색을 유지하던 삼촌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아연실색하는 삼촌에게 남자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왜요, 싫습니까?”
“아니, 아닐세! 하겠네, 하겠어. 내가 실언했네.”
삼촌은 장 대표가 제안을 물릴까 싶어 얼른 말을 철회하고 나섰다. 남자가 직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뒤에 물러서 있던 직원이 품 안에서 재킷 하나와 펜을 꺼내 들었다.
“자, 임선철 씨.”
직원은 깨끗한 종이 한 장을 바닥에 깐 다음, 펜을 삼촌의 앞으로 떨어트렸다.
“여기에다 쓰십쇼.”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있던 삼촌이 펜을 손에 쥔 채로 직원을 올려다봤다.
“도박 빚 때문에 하루하루 사는 게 좆같아서.”
뭘 시키려는 건진 알 수 없지만 게임에서 이기면 살려 주겠다는 남자의 말에 삼촌은 일단 손을 움직이고 봤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쥐어 보는 손은 힘 조절을 못 하고 중간중간 종이에 구멍을 내거나, 찢어발겼다. 그럴 때마다 직원은 삼촌의 몸을 구둣발로 걷어차면서 새로운 종이를 안겼다. 깨갱거리며 바닥을 나뒹굴던 삼촌은 수차례의 시도 끝에 문장을 완성시켰다. 도박 빚 때문에 하루하루 사는 게 좆같아서. 직원이 뒷말을 이었다.
“먼저 갑니다.”
동시에 허억, 나는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안 돼!”
삼촌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이목구비를 모두 떨어낼 듯, 격하게 도리질을 쳐 댔다. 허벅지를 팔로 움켜잡고 매달리자, 직원은 욕지거리를 뱉어 댔다.
“아, 씨벌. 다 늙은 새끼가 드럽게 보채 싸네.”
퍽, 퍼억! 직원은 성질이 난다는 듯 삼촌의 배를 발로 가격했다. 제대로 들어갔는지, 삼촌은 배를 움켜잡고는 엎어졌다.
“임 사장님, 지금 기한이 지나고도 한참 지났는데요. 저희 대표님이 넓은 아량을 베푸셔서 한 번 더 기회 드리겠다는데 이렇게 협조를 안 해 주셔야 되겠어요?”
삼촌은 폭력에 견디다 못해 결국 펜을 손에 쥐어 들었다. 직원이 삼촌의 발목을 잘근잘근 밟아 대며 마지막 문장을 적기를 종용하자, 삼촌은 결국 굴복했다. ‘먼저 갑니다.’ 마지막에 점까지 찍은 후에야 구둣발 밑에 깔려 있던 삼촌의 팔이 자유가 됐다.
“판 깔아요.”
장 대표의 말에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원형 테이블을 직원이 가져왔다. 장 대표가 가장 먼저 중간 자리에 앉고, 직원이 삼촌을 왼쪽 의자에 앉혔다. 그때까지도 남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테이블을 주시하면서 서 있었다. 남자가 내게 빈 의자를 눈짓해 보였다.
“앉아요.”
“…….”
“임선철 씨가 진 빚이 있으니까 여원 씨한테도 복수할 기회는 있어야죠.”
카드 게임. 몇 번 해 본 적도 없는데다가, 좋은 결과를 거둔 적도 극히 드물었다. 딱 한 번. 장 대표가 패를 바꿔 줬을 때 이긴 게 전부였다. 그런 내가 이 게임을 해서 이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상 판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다가가 빈 의자에 앉았다.
“게임은 여기 있는 서여원 씨가 할 겁니다.”
남자의 말에 삼촌의 눈동자가 내게로 붙어 왔다. 미묘한 화색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장 대표인 것보단 나인 게 훨씬 수월할 거라 판단한 듯했다. 실제로도 그렇고 말이다.
삼촌은 비굴한 눈빛을 내게 보내 왔다. 분명 시선은 날 향해 있는 게 맞는데. 초점이 너무나도 흐리멍덩해 보였다. 이지를 완전히 잃은 눈…. 그건 인간의 눈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눈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그 눈으로 말없이 애원해 왔다.
‘제발 이 삼촌 좀 살려다오, 여원아….’
아직 내 목에 남아 있는 흔적이 아직 미처 다 낫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못 본 척, 시선을 테이블로 내리 깔았다. 모래를 한움큼 입 안에 털어 넣은 듯 속이 까끌거렸다.
남자는 칩으로 쓸 걸 찾아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담배 두 갑을 거꾸로 뒤집었다. 손가락으로 뒤축을 툭툭 치자, 담배 개비들이 모두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칩은 이걸로 갈음하고 카드는 내가 섞겠습니다.”
삼촌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며들었다. 그의 직원이 카드 패를 남자에게 건넸다.
“그런 말은 없었지 않았나.”
남자가 하얀색 카드들을 능숙하게 섞으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왜요,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10분 후가 정확히 5시 정각이니까, 그 때까지 승패 못 내면 임 사장님이 패한 걸로 알겠습니다.”
담배 총 마흔 개비를 두고 먼저 상대의 칩을 다 따는 쪽이 승리하는 룰이었다. 스무 개씩 나눠 갖자, 남자가 삼촌에게 먼저 한 장을 건넸다. 삼촌은 제 앞까지 카드를 끌어다가 눈으로 몰래 패를 확인했다. 주변을 이리저리 힐끔거리다가 얼른 패를 내려놓았다.
나는 두 장 모두가 내 앞에 놓이기를 기다렸다가 패를 뒤집어 봤다. 각각 숫자 ‘7’과 ‘K’였다. 꽤 준수한 카드였다.
“콜.”
삼촌 쪽에서 다섯 개비로 콜이 들어왔다. 긴장한 탓인지, 얼굴에선 하염없이 땀이 흐르는 데다가 목은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손에 들린 패가 그리 썩 좋은 패는 아닌 듯했다.
이제 내 차례였다. 총 네 개의 눈이 내게로 달라붙어 왔다. 장 대표와 삼촌. 그 둘은 각각 눈동자에 다른 색채를 띠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두 개 더.”
첫 판이다 보니 판이 그리 크지 않았다. 몇 번의 베팅이 오가고, 테이블 위에도 세 장의 카드가 펼쳐졌다. 카드는 각각 ‘A’, ‘3’, 그리고 마지막은 ‘K’였다. K원페어라면 베팅을 해도 꽤 승산이 있지만,
“…폴드(포기).”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긴장감에 기묘하게 비틀려 있던 삼촌의 입꼬리가 위로 크게 휘어졌다. 본인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 했다. 손톱에 때가 마구 낀 손이 방금 자신이 막 따낸 담배 개비를 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판돈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판은 압도적으로 삼촌이 우세하게 끌고 갔다. 내가 매번 좋은 패를 손에 들고도 조금만 판돈을 올리다 포기를 외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새 패를 끌어다가 확인해 봤다. 각각 ‘10’과 ‘Q’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카드들이 깔렸다. A, K, J. 아직 까볼 카드가 두 장이 남아 있는데 벌써 패가 완성되어 버렸다. 장 대표와 여자들이 게임할 때도 한 번도 본 적없던 패를 손에 쥐고 나는 눈동자만 돌려 장 대표를 응시했다. 그는 마치 내게 무슨 패가 온지 안다는 듯 의뭉스럽게 웃었다.
“…….”
시선을 천천히 옮겨 삼촌을 주시했다. 삼촌은 일부러 눈꼬릴 한껏 끌어 내리고 있었다. 두 눈엔 애처로움을 덕지덕지 매단 채로. 거짓되게 꾸민 표정이란 건 어렵지 않게 캐치할 수 있었다. 삼촌 또한 만만찮게 좋은 패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
나는 담배 두 개비만을 테이블 가운데로 던졌다. 터무니없이 낮아진 베팅 크기에 삼촌의 얼굴에 기묘한 화색이 돌았다. 내게 낮은 패가 있을 거라 섣불리 판단 내리고, 판돈을 올렸다.
“…자아.”
삼촌이 담배 다섯 개비를 테이블 앞으로 내왔다. 나는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안으로 말아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불현듯 이번이 마지막 게임이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섯 개비들을 손에 움켜쥐어 테이블 위로 던졌다.
“…….”
베팅이 몇 번 더 오가고, 카드가 하나 더 공개됐다. 그에 삼촌이 승부수를 걸어 왔다. 자신에게 있던 담배 개비들을 모두 쓸어 내게 넘겨 온 것이다. 올인. 손에 좋은 패가 들려 있는 데다가,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또 포기를 외칠 거라고 예상한 듯했다. 목숨이 달려 있는 판이라 삼촌의 얼굴에선 땀이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폴.”
또 포기를 외치려는 찰나, 장 대표에게서 과장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아.”
길게 이어지는 한숨 소리에 나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차마 ‘드’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대로 얼음장처럼 굳어만 있었다.
“재미없게 뭐합니까, 지금.”
장 대표의 상체가 테이블로 바투 붙어 왔다. 남자가 내게 카드를 눈짓했다.
“까 봐.”
“…….”
고갤 옆으로 돌려 장 대표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빛은 분명한 뜻을 내비추고 있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는 무슨 이유로든 삼촌에게 위해를 가할 거였다. 그는 그저 내게 선택권을 준 것뿐이었다.
…복수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대로 패를 깐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내가 이 게임에서 이기게 될 거다. 장 대표가 내게 밀어 넣은 카드와 삼촌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내 뜻과는 정반대로 게임이 흘러와 버렸다.
내내 삼촌이 이 게임에서 이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플레이한 나는 흔들리는 시선을 테이블 위로 떨어트렸다. 눈앞이 흐렸다. 어쩌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안 까 봐요?”
“…….”
뭐라 말이 없자, 장 대표가 쯧쯔 혀를 찼다. 똑딱똑딱. 손목에 채워진 시계에서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시계를 확인해 봤다. 남자가 약속했던 5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폴드.”
시간에 쫓겨 포기를 외쳤다. 픽, 장 대표에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길고 굵은 팔뚝이 테이블을 가로지르더니, 성마른 손이 얼마 남아 있지 않던 내 담배개비들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올인.”
뭐하는 거지 싶은 순간, 장 대표가 삼촌의 패를 먼저 까뒤집었다. 각각 ‘2’와 ‘3’이라,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만들어졌다.
그 다음은 내 패를 뒤집었다. 갈색 손등 아래에서 드러난 내 패에 땀을 분수처럼 내뿜고 있던 삼촌의 얼굴 위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족보 중에 가장 높은 패였다.
“임 사장님, 지셨네요.”
장 대표는 카드 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지껄였다. 마치 까기 전부터 삼촌에게 어떤 패가 쥐어져 있는지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삼촌은 완전 사색이 되선 목을 울렸다.
“…저, 저쪽에서 포기했지 않은가!”
판돈을 올리면서 베팅한 것도 아니기에, 룰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어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장 대표의 뜻은 확고했다.
“어차피 내가 세워둔 꼭두각시니까 마지막 선택은 내가 하는 겁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아랫입술을 터뜨릴 듯 깨물었다. 직원이 바로 삼촌의 목뒤를 찍어 내렸다.
“아아아악!”
삼촌이 발버둥 치는 바람에 테이블이 벌러덩 뒤집혔다. 삼촌은 네발로 기어서 장 대표에게로 가 그에게 매달렸다.
“장 대표, 제발,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갚을 테니까.”
삼촌이 남자의 구두를 핥기 시작했다. 주변에 담배꽁초가 놓여 있든 말든 간에 개의치 않고 바닥을 핥아 댔다. 남자는 아래에서 무슨 개짓거리를 하고 있든 개의치 않고 나만 주시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를 남자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애는 돈 한 푼 벌어 보겠다고 별짓을 다 하고 있는데. 정신 못 차리고 도박이나 하고 다니니까 이 꼴 나는 거 아니에요.”
어디선가 실톱이 등장했다. 직원 둘이 삼촌의 사지를 붙잡곤, 장 대표가 삼촌의 손가락을 무시무시한 톱 끝으로 짓누르려 했다. 아아아악! 삼촌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골을 깨트릴 듯 울렸다.
“…으, 으으.”
전신을 후들겨 패는 공포감에 치를 떨어하고 있는데, 삼촌의 손끝이 한껏 내펼쳐져서 내게로 향해왔다.
“살려, 살려다오…!”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는 시야로 입으로 울컥울컥 신물을 뱉는 삼촌의 얼굴이 들어왔다.
“애비 죽인 새끼가 제 하나뿐인 삼촌까지 죽게 만들려고?!”
애비 죽인 새끼. 끔찍한 과거의 편린들이 순식간에 머릴 꿰뚫어왔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다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톱이 위로 추켜올려졌을 때야 퍼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아악!”
얼른 달음박질쳐 장 대표에게 가선 엉겨 붙었다. 옆으로 통이 넓은 허리를 꽉 붙들고는 널따란 등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호흡을 짧게 여러 번 끊으며 애걸복걸했다.
“대, 대표님……. 이러지 마세요.”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등에 숨을 완전히 내맡긴 채로 나는 거의 흐느꼈다.
“이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삼촌은 겨우 천만 원이 안 되는 돈을 얻기 위해 엄마를 기만했다. 쌓인 분노가 한계치를 넘어서니 삼촌에 대한 감정은 모두 새카만 분노로 치환됐다. 자다가도 그 역겨운 얼굴만 생각나면 이가 바득바득 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도박 빚에 목숨을 잃는다니. 이건 정말 아니다.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원래 이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던 장 대표가 이렇게까지 손을 쓰는 건 내가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장 대표는 3천이란 액수에 이런 귀찮은 일에 나설 남자가 아니었다.
오롯이 제 것이어야 할 내게 손을 댔단 이유로 삼촌을 응징하려하는 장 대표를, 그의 뜻대로 하게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릴 지배했다. 그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이끌었다.
“제발 그만하세요.”
더듬더듬 말을 잇자, 장 대표의 두 눈이 내게 내리꽂힌다.
“…삼천만 원이라면 제, 제가 갚을게요.”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내비치고 있었다. 소용돌이처럼 한 데 어우러져 휘몰아치는 것들에 나는 남자의 재킷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다. 오줌을 지렸는지, 극도로 치닫는 공포감에 절여진 삼촌의 바지춤에서 역겨운 내가 났다.
“…무서워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톱이 들려 있는 장 대표의 팔을 품 안에 껴안았다. 팔에 힘을 주고 매달리자, 남자의 옷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곧이어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톱이 장 대표의 손에서 낙하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커억, 큭.”
삼촌의 벌어진 흉에서 화산처럼 폭발해 피가 육즙처럼 콸콸 쏟아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못해 우웩, 웨엑 토했다.
“…으흐, …윽.”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내게 걸어온 장 대표가 나를 짐짝처럼 어깨에 걸쳐 놓았다. 나는 빨래처럼 그의 어깨에 널려서 산길을 내려왔다. 팔다리가 공기를 허우적거렸다. 살짝 뜬 희미한 시야로 꺼먼 산길이 보였다. 까아악, 까악. 산새들이 소름 끼치는 소릴 내며 밤중 하늘을 둥글게 돌다가, 날아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그 상태로 기절했다.
***
주변에 악취가 떠다녔다. 희끄무레한 시야로 카드 패들이 놓인 테이블이 들어왔다.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가 내게 살려 달라는 눈길을 보내 왔다. 난 그걸 마주하며 무의식에서 팍 깼다.
“허억!”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부족한 산소를 가득 끌어다가 폐부에 급하게 채워 넣었다.
나는 파들거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 머리맡에 앉아 있던 장 대표와 시선이 얽혔다. 그가 협탁으로 긴 팔을 뻗더니, 무드 등을 밝혔다. 머지않아 주황색 불이 방 안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적색 등이 남자의 얼굴을 요요하게 밝힌다.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운 남자가 날 응시해 왔다.
난 산에서 어떻게 내려온 걸까.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거지. 이 남자는 언제부터 여기에 앉아서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끊임없는 의문이 들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분명한 게 없었다.
나는 그를 작게 불렀다.
“…대표님.”
잘게 떨리는 음성이 정적 속을 파고 들었다.
“저 어떻게 내려왔나요.”
“내가 안아서?”
장 대표가 어깨 끝을 으쓱하며 가벼이 대꾸했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고요?”
“하루를 깨지도 않고 꼬박 잤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여기 있으셨어요?”
“몸을 씻고 나온 이후부터.”
기절하기 전에 봤던 장면이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검은 장갑을 손에 끼운 장 대표가 삼촌의 몸을 내리찍는 장면.
“…삼촌은요?”
“그대로 산에.”
나는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다가, 쓴물을 토하듯 말을 뱉었다.
“…무사한 거 맞죠?”
“그렇게 기를 쓰고 손대지 말라했잖습니까.”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망막에 선명히 찍혀 있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벌어진 수술 자국 사이로 피가 철철 흐르던 삼촌. 이런 소슬한 밤에 인적 없는 산에 그대로 두면 죽을 게 분명했다.
“…대표님, 삼촌 좀 병원에 데려다 주시면 안 될까요?”
“…….”
장 대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두꺼운 목엔 바짝 힘이 들어가고, 입아귀는 잔인하게 비틀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의 얼굴에 떠오른 스산한 표정에 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대로 두면 죽을 거예요.”
누군가의 목숨을 사그라들게 만든다는 건 너무나 많은 후유증을 안겨 주는 일이었다. 후유증은 꿈자리는 물론이거니와 나약해져 있을 때도 들이닥치곤 했다. 매 순간 어떻게 나를 옥죄어 올지 아무도 몰랐다. 내가 직접 끊은 목숨이 꼭 내 목을 스치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벌 받을까 봐 무서워요.”
평소보다 조금 쉰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
“벌을 집행한다던 그 신 말이에요.”
나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강박적으로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댔다.
“저한테도 벌 줄 거예요.”
“…….”
나는 별안간 구석을 힐끔 거렸다. 옷걸이가 놓여 있던 자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저기에 지금도 과연 아무것도 없는 게 맞는 걸까. 그러나 제대로 눈여겨보기도 전에, 부채처럼 크고 넓은 손바닥에 시야가 차단됐다. 그에 고갤 돌려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여원.”
그의 입술이 내 이름 석 자를 또렷하게 발음했다. 나를 이 악몽의 여운에서 끌어올려 주겠다는 듯.
“…네.”
“그런 게 진짜로 있을 리….”
장 대표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웬일인지, 마주보던 남자가 차차 흐려졌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시야가 조금이나마 또렷해졌다.
뚝뚝. 시트 위로 액체 방울이 떨어졌다. 땀인가 했더니 눈물이었다.
“…윽.”
흐윽. 나는 또 그의 앞에서 울었다. 두려움 때문에 수치심을 완전히 발가벗고선 아이처럼 흐느꼈다.
돌연 뺨에 다른 이의 손길이 와 닿았다. …어? 의아해져서 눈물을 매단 상태로 턱을 올리는데. 남자가 손등으로 내 눈가를 한 번 더 쓸어 왔다.
“나도 한 짓거리들이 있어서 어차피 혼자서 벌 받진 않을 텐데.”
“…….”
“그래도 무서워요?”
건조한 말투로 지껄인 장 대표가 다시 한 번 내 뺨을 문질러 왔다. 서투르기만 한 손길. 그건 남자와 나, 양쪽 모두에게 익숙지 않은 손짓이었다. 그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다가, 허리에 감겨 있는 시트를 걷어 냈다. 그러곤 무릎걸음으로 침대를 가로질렀다. 천천히 그에게 기어갔다.
그의 목을 껴안고는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댔다. 남자는 그제야 팔로 내 허리를 감싸안아 왔다. 마침내 자신에게로 온 내 수고로움을 치하하듯이.
“…….”
“…….”
장 대표의 품에 안긴 채로 기우는 달처럼 옆으로 스러졌다. 내 몸은 그대로 침대에 안착했다.
나는 남자의 품 안에 갇힌 채로 심장 박동을 들었다. 두근두근. 낮게 울리는 그 파동에 벌떡거리며 뛰던 내 심장이 서서히 템포를 맞춰 나갔다. 남자의 손은 내 뒤통수와 뺨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에 점점 눈이 감겼다. 나는 잠기에 취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요.”
입술이 짓뭉개져 발음이 불분명했지만, 남자는 들었다는 듯이 목을 울렸다.
“으음.”
그리고 의식이 반절 정도 날아갔을 때쯤. 내 뺨과 맞닿아 있는 따뜻한 피부에서 나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못 견딜 것 같으면 차라리 잊읍시다.”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밀어 올려 남자를 마주 봤다. 심연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근데 내게 안겨 있는 이 감각만은 무조건 기억하는 겁니다.”
그는 매 음절을 내게 각인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내게 분명한 효과를 발휘했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여, 홀린 듯 그의 부름에 응했다.
“…네.”
날 보는 눈이 가느다랗게 찢어졌다. 그는 이처럼 가끔 이유를 알 수 없게 미소지었다. 한때 이 남자는 웃는 얼굴도 참 악귀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생각엔 이견이 없었다.
나는 독사 같은 남자의 품에 얼굴을 내리고, 몸을 완전히 묻었다. 이윽고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