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그다음 날. 병원에 가기 위해 바지를 갈아입다가 그새 또 살이 빠져 허리가 더 가늘어져 있음을 눈치챘다. 성의 없는 한 끼를 차려선 허기를 대충 달랬다. 입맛은 없었으나 억지로라도 속에 욱여넣었다. 혹여라도 엄마가 깨어난다면 멀쩡한 꼴로 마주하고 싶었다.
“…….”
병실에서 다시 만난 엄만 여전히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침대를 지키고 있었다. 야트막한 눈두덩이 주변 가득히 파리한 기운이 가득했다. 수분기 없이 바짝 마른 게, 꼭 마른 장작만 같았다.
메말라서 각질이 내려앉은 입술을 떼선 중얼거렸다.
“…어젠 참치 회를 먹었는데.”
“…….”
“비싸서 그런지 맛있더라고요.”
나중에 함께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침묵이 이어졌다. 눈꺼풀이 닫혀 있어 괜찮게 살고 있다 보여 주려 입고 온 코트도 별 소용은 없었다.
곧 간병인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 병실에서 빠져나오는 길. 복도 끝에 있는 전화 부스 앞에서 서성대다가, 안으로 들어가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역시 삼촌의 전화는 휴대폰이 끊겨 있다는 안내 메시지만 남겨 놓고 끊겼다. 예상한 대로라 실망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전화기를 도로 있던 자리에 내려놓는데. 투명한 벽으로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엄마가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분이 간병인이신 걸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주치면 친척이라 둘러댈 예정이었는데, 운 좋게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점심시간이라지만 어떤 일로든 잠시 들를 수도 있는 거였는데 말이다.
석연찮은 찝찝함을 남기는 행운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와선 집 안을 쓸고 닦았다. 날이 제법 푹하길래 몸을 씻고 나와선 손빨래한 속옷과 옷을 건조대에 널어놓았다. 이런 날씨에 베란다에 빨래를 널었다간 몽둥이처럼 땅땅하게 굳기 십상이라, 건조대를 질질 끌어다가 집 안에 들여다 놓았다.
모델 하우스처럼 형색이 휘황찬란한 집 한구석에 의류 수거함이 차려졌다. 일부러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선 가상의 인기척들이 쏟아졌다.
“…….”
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할 것들을 찾아 나섰다. 걸레 밀대를 잠깐 창문에 기대어 세워 두곤, 손바닥을 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영락없이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아주 커다란 독방에 갇힌 수감자가 된 기분이었다. 따로 잠금 장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 나갈 때조차 시선이 따라붙었다.
“…….”
조용한 집에 있으려니 오만가지의 생각들이 머리에 스쳤다.
빚은 지금 얼마나 갚지 못한 상황인 거지. 남은 원금에 이자가 붙어 저희들끼리 새끼를 쳐선 또 계속해서 다달이 몸을 불리고 있을 거였다. …이러다가 빚쟁이들이 병원으로 찾아오기라도 하는 날엔 문제가 복잡해질 텐데.
하아, 한숨을 푹 쉬었다. 삼촌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건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릴 가득 메웠다. 정적이 발톱을 세운 괴물이 되어선 내 머리 안을 잔뜩 헝클이고 할퀴고 지나갔다.
“…….”
남잔 오늘도 늦는다 싶더니,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원래 골프장에서 살던 남자이니까. 또 거기서 눌러앉고 있는 거겠지, 싶었다.
밑이 궁해지면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제때 성욕을 풀지 않으면 돌아 버리는 남자이니 그렇게 머지않은 시일 내에 돌아올 거라 멋대로 판단했다.
그러나 남잔 그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 주가 흘렀다.
***
어딘가 삐걱삐걱, 불안정한 소리가 나는 나날들이 연달았다.
날이 밝으면 무기력하게 방에서 기어 나와 거실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틀어 놓곤, 붙박이장을 뒤적거려 캔을 따서 푹 꺼진 뱃가죽을 부풀리고 있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반응하듯, 자연스레 시선이 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휘이잉, 바람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그저 바람이 부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러고 일식집을 나온 지 이 주째. 밤이든 새벽이든 시간 불문하고 들이닥치던 남자에게선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아주머니도 남자의 부재 이후론 더 이상 집을 찾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집에 오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었던 날엔 남자의 직원이 음식만 건네곤 바로 집을 떠났다.
“…….”
전자레인지에서 꺼내 온 음식을 포크로 찍어 먹었다. 덜 데워졌는지 미지근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씹었다. 두 눈은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데스크 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시사거리들을 줄줄 읊었다. 모두 나와는 동떨어진 시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오늘의 날씨를 알려 드립니다.”
화면이 전환되더니, 기상 캐스터가 저녁부터 비가 내릴 거란 말을 전했다.
…비가 온다고?
포크를 내려놓곤 창문으로 다가갔다. 고갤 꺾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회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어둑했다. 창문에 손바닥을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소용돌이가 빈 공터를 한 번 휘감고 날아갔다.
창문엔 그새 손바닥이 다닥다닥 찍혀 있었다. 모두 내가 이 아래를 내려다보려 만든 자국이었다. 하얀 손바닥들을 마주 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가로질렀다. 이번에야말로 남자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상당히 그럴싸한 의심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한 기운이 명치 부근을 스쳤다. 손가락들이 저절로 안으로 곱아들었다. 나는 창문에 주먹을 댄 채로 혼란스러워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
어둑한 날 때문인지 오늘은 휠체어를 몰며 산책하는 사람들도 모두 병원 입구 근처만 맴돌고 있었다. 병실로 향하는 복도가 온통 잿빛에 물들어 있었다. 하얀 건물 안에 울적한 기운이 가득했다.
엄마의 병실로 들어와 코트의 끝자락을 정리해 의자에 앉았다.
생기라고는 없는 얼굴 때문에 얼른 호흡기부터 확인했다. 호흡기가 불투명해졌다가, 다시 투명해지길 반복했다. 미약하지만 분명 호흡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마스크에 하얗게 번지는 연약한 숨을 지켜보다가 창문을 응시했다.
거동이 힘든 환자들이 바깥 구경을 할 수 있게끔 일부러 크게 내놓은 창문 너머로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빠르게 몰려왔다.
“저녁에 비가 온대요.”
“…….”
“…천둥도 칠 거라 그러던데.”
톡톡.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창문에 빗발이 와서 부딪혔다.
허락된 시간을 모두 사용한 후, 병실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습관처럼 전화 부스로 향해선 전화기를 집어 올렸다. 숫자들이 적혀 있는 버튼 위에서 손을 놀리곤 힘없이 전화 부스 벽에 등을 기댔다.
철렁, 철렁. 공중 전화기가 동전들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곧 송신 음이 울렸다. 뚜르르, 뚜르르.
“…어?”
당연히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올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른 등줄기를 펴고 서선 전화선을 붙들었다. 일 초가 일 분처럼만 느껴지는 시간들이 지나고.
뚝. 송신 음이 끊겼다.
“…삼촌?”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을 본 난 얼른 말을 덧붙였다.
“…삼촌.”
- …….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잠적을 탄 줄 알았었다. 후우,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매운 내가 나는 호흡이었다. 담배를 태우고 있는 듯했다.
“전 지금 서울이에요. 전에 있던 병원에서 삼촌이 엄마 병원을 이쪽에 옮겨 놓았다고 들었어요….”
보호자명도 삼촌의 이름 석 자로 적혀 있는데. 왜 그간 나타나질 않았냐. 내가 보냈던 돈들로 아버지의 빚을 갚고 있었던 건 맞냐.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건 실제로 만난 다음에 행해야 했다. 일단은 삼촌이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삼촌, 지금 어디세요.”
잠자코 답변을 기다렸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한껏 곤두세운 귓가엔 아주 작은 인기척만 들릴 뿐이었다. 툭,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이내 사아악, 소리가 났다. 담배꽁초를 발로 으깨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주세요.”
부탁하는 말에도 정적뿐이었다. 난 다시 한번 힘겹게 애원했다.
“…제발.”
- …….
이러다간 전화가 끊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벌컥 들어, 다시금 부르려던 때였다.
“삼….”
- 으아아아악!
수화기 저 너머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끝 음이 여러 갈래로 쫙쫙 찢어져 흩어졌다. 누군가가 담배를 오래 피운 이들 특유의 목소리로 목이 터져라 외쳐 대고 있었다.
아악!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가 도끼처럼 귓전을 패다가 갑자기 뚝, 끊겼다. 누군가가 가위로 중간을 잘라 놓은 것처럼 그렇게 뚝! 말이다.
곧이어 뚜, 뚜, 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끊긴 전화기를 붙든 채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벌렸던 입을 차마 다물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방금 그건 뭐였지. 음성에서 시큼한 내가 나는 게 꼭 삼촌의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했다. 그건 분명 삼촌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얼른 다시 전화를 걸어 봤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삼촌이 전활 받기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송신 음만 갈 뿐, 받는 이가 없다. 몇 번이나 다시 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싸한 불안감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현실 감각을 완전히 잊은 채. 플라스틱 벽으로 만들어진 작은 공간 안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달라붙어 온다. 날 이상하단 눈으로 슬쩍, 바라보곤 천천히 제 갈 길을 간다.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혼자만 정물처럼 멈춰 있다.
그러다 불현듯, 눈동자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시선이 층계참과 이어지는 복도 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 검은 유령처럼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실루엣이 움직였다. 지인과 도란도란 얘길 나누며 길을 걷던 이가 부주의로 그 실루엣과 그만 어깨가 엉켜 버렸다.
“아, 죄송합….”
“…….”
뒤돌아서 검은 인영의 얼굴과 마주한 이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검은 인영이 내게 점점 가까워졌다. 바윗덩어리처럼 크고 단단한 몸. 나무 기둥처럼 굵직한 몸.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 풍기는 분위기가 누가 봐도 그쪽 계통에 몸담고 있는 자였다.
장 대표의 직원이 적당한 거릴 두고 내 앞에 섰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손수 찾으러 온 듯했다.
“이만 가시죠.”
그는 부러 손목시계를 흘깃했다. 본인이 바쁜 몸이란 걸 내게 알리고 싶은 듯했다. 매일 점심시간, 이 직원은 날 이곳으로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데려다 놓는다.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있으나 짜증이 날 게 분명했다.
꽉 붙들고 있던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발을 질질 끌어 전화 부스를 빠져나왔다. 장 대표의 뒤를 따르는 내 꼴은 포승줄만 없다 뿐이지, 죄인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툭툭. 작은 노크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투명한 액체 몇 방울이 복도를 따라 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소린 금방 더 크고 빨라졌다. 투둑투둑! 꺄악, 창문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미끄러운 빗길을 달리던 차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뒷좌석에서 흐르듯 빠져나와 빗줄기를 뚫고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길어 봐야 1미터 남짓한 거리였는데 금방 물에 빠진 쥐새끼 꼴이 되었다.
몸이 후들 추웠다. 얼른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단 생각이 머릴 지배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곤 따뜻한 물 안으로 들어갔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코와 뺨이 흐물흐물 녹았다.
가운을 걸치고 나와선 흠뻑 젖은 옷은 리빙 박스에 처박아 버렸다. 날큰하게 풀려 무거워진 몸으로 갈아입을 옷을 찾아 나섰다. 건조대에 남자의 셔츠와 내 바지와 속옷이 함께 걸려 있었다.
“…….”
남자가 사 준 옷들 대부분 아직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았다. 들고 온 그대로 옷장에 걸려 있었다. 택도 뜯지 않아 당장 들고 가서 환불을 요구해도 될 정도였다. 물론, 이미 이 주가 지나 실제로 그걸 행하는 건 불가능했다.
건조대에서 셔츠를 걷어 내곤, 가운의 끈을 풀어냈다. 마저 가운을 벗으려다, 흠칫하곤 고갤 뒤로 돌렸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천장에 붙어 있는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 시선을 가로채 갔다.
…이젠 지켜보지 않고 있겠지.
마음 놓고 가운을 벗었다. 살갗에 스치는 찬 기운이 싫어 얼른 옷들을 벗은 몸에 걸쳤다.
“…….”
촉감 좋은 옷이 몸에 착 감겨 왔다. 암만 고급 소재여도 입고 자고 뒹굴다 보니 옷감이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주저앉듯,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앉았다. 몸에 맥이 탁 풀려선 나른했다. 습기를 머금어 축축하게 늘어진 가죽에 뺨을 댔다. 이불보에 안겨 있는 듯 포근했다.
쏘아아.
비 오는 창밖을 내다봤다. 1월은 밤이 이르게 찾아왔다. 더구나 개떼처럼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점령하고 있는 탓에 다른 때보다 날이 더 어둑했다.
쏘아아, 비가 쏟아진다. 아니, 퍼부어진다. 집 안 전체가 물결치는 바다의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음마저도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가벼이 묻혀 버렸다.
바깥에 물벼락이 내리치고 있는데도 왠지 고요하다 느껴졌다. 저 거대한 투명한 벽이 바깥으로부터 날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
혼자만의 시간에 갇혀 아까 삼촌과 전화했던 상황을 천천히 복기해 본다. 엄지를 잘근잘근 물어뜯자, 오래되어 누래진 붕대가 사과 껍질처럼 풀려선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삼촌이 여태까지 전화를 받지 않은 게 아니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라면?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그 서늘한 인기척. …그건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빚쟁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그들인 걸까. 금방 고갤 내저었다. 아니, 그러지는 않을 거였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돈. 삼촌을 빌미로 내게서 돈을 뜯어낼 용건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끊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촌은 이래저래 적이 많은 인간이었다. 길 가다가 칼에 찔려 죽어 다음 날 사체로 발견돼도 그리 놀랍지 않았을, 그런 치였다.
“…….”
아무래도 삼촌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듯하다. 그러나 설령 조각조각난 연민이라도 들지 않았다. 그게 아주 작은 편린일지라도 삼촌에겐 그저 사치였다. 죽어 마땅한 새끼니까.
관자놀이가 지끈, 울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잡생각들이 머릴 채우다 못해 범람했다. 누군가가 머리 안으로 손을 넣어 뇌의 주름을 마구잡이로 늘였다가 줄이기를 반복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에 푹 잠겨 있던 나는 홀린 듯이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향했다. 그러곤 선반 밑에서 설탕 병을 가져와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사르륵, 기울어진 병 안에서 약 가루들이 부드러운 소릴 내며 쏠렸다.
나는 손에 병을 꽉 쥔 채로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이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볼 생각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힘겹게 잠에 들었다.
느긋하게 날 덮쳐온 수마가 나를 과거의 세계로 질질 끌고 갔다. 바깥엔 아직도 빗줄기가 매섭게 땅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
다시 한번 눈꺼풀을 내렸다가, 밀어 올렸다.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불을 걷어 냈다.
방 밖에서 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원아!’
불 앞에 서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엄마가 날 돌아보았다. 뜨거운 콩나물국을 한 국자 가득 퍼선 국그릇에 옮겨 담고, 그걸 밥상에 내려놓았다.
엄마가 내게 웃는다.
‘이것 좀 안에 들여놓을래? 아버지 약주 드시고 오셔서 시원하게 콩나물국 끓였어.’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가 손을 올려 내 뺨을 문질렀다. 손끝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엄마의 하얀 얼굴엔 잘 익은 복숭아의 것 같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인데. 왠지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땡초를 먹은 듯 코끝이 찡했다.
‘빨리 안 내와! 서방이 대가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는데!’
부엌 밖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엄마가 얼른 들고 가라며, 내 엉덩이를 툭툭 쳤다.
뒷머릴 벅벅 긁으며 나타난 삼촌을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밥상 앞에 둘러앉았다.
‘으으, 씨이벌.’
밥상 앞에 앉은 아버진 험악한 인상으로 계속해서 십 원짜리 욕지거릴 뱉었다. 씨이펄, 씨이펄. 숙취 때문에 자꾸만 골을 움켜쥐었다. 그 때문에 자꾸만 위축되었다. 여기에서 깨작거리기라도 했다가는 바로 귓방망이를 얻어맞기 때문에 열심히 젓가락질을 했다.
노름판에서 밤을 새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기어들어 온 듯했다. 들어오자마자 아침에 일 끝나고 돌아온 엄마에게 술국을 내놓으라 또 행패를 부렸겠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언제 얻어맞을지 몰라 두려움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한편, 자꾸만 아버지 쪽을 흘깃하게 됐다.
…역시 그간 있었던 일은 다 꿈이었던 걸까. 어쩐지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더라니. 너무나도 긴 악몽이었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아버진 허공을 응시한 채로 계속해서 쉰 목소리로 욕을 퍼부어 댔다.
‘…이런 개좆같은!’
‘여보, 요 앞에 나가서 약이라도 좀 사 올까요?’
그러나 아버진 마당의 그 어딘가를 응시한 채로, 계속해서 욕만 퍼부어 댈 뿐이었다. 엄마가 내게도 눈치를 줬다. 여원아, 얼른 한마디 거들어. 그러고 있다가 또 불호령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씨이이벌!’
거친 욕설이 귓전을 때렸다.
‘이런 육시럴, 개좆같은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들이 아버지의 입술을 통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아, 아버지.’
듣지 못했는지, 아버진 여전히 마당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엔 이상하리만큼 표정이 없었다. 아버지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눈동자가 과하게 한쪽으로 쏠려 왼쪽에 붙어 있는 게, 아마도 계단 밑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걸 깨닫자마자, 등줄기로 오한이 내달렸다.
얼른 고갤 홱 돌려 눈앞에 있는 아버지를 응시했다. 아버진 어느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동자가 쟁반처럼 커다래서 난 흠칫 무서워져 옆에 앉아 있는 엄마의 소매를 붙들었다. 어깰 한껏 움츠린 채로 흐릿하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싸한 정적이 흘렀다. 난 손에 딸려 온 엄마의 소매를 한층 더 꽈악 붙잡았다.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입 구멍이 꼭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아버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돌연 아버지의 정수리에서 팟, 소리가 나더니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뜨거운 액체 줄기가 콸콸 흘러선 아버지의 빈 눈구멍과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악!!’
난 괴성을 내지르며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엄마가 내 쪽으로 고갤 휙 돌렸다. 아니, 엄마라 생각했던 그건 눈구멍이 움푹 패여 있는 아버지였다.
***
“…아악!”
난 벼락 맞은 사람처럼 경련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동안 무의식의 공간에서 받은 충격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바깥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콰릉! 우레가 뇌를 흔들어 깨웠다. 손바닥 안이 땀으로 축축했다. 금방 좀 전의 그것이 모두 꿈이었단 걸 눈치챘다. 지방이 빠져나가 그만큼 품이 빈 옆구리 사이로 한기가 새어 들어왔다. 팔로 몸을 껴안으며 벽시계를 확인했다.
“…….”
새벽 2시. 여전히 그 큰 집 안엔 나 혼자였다.
콰아앙.
다시 한번 뇌성이 터졌다. 텔레비전 화면이 지직대더니, 스피커를 통해 기괴한 음들이 흘러나왔다. 난 불안감에 사로잡혀 텔레비전을 들여다봤다.
저러다 꺼지기라도 하면….
걱정하는 날 비웃듯 텔레비전은 팍, 단박에 꺼졌다. 집 안에 유일하던 소음이 사라졌단 소리다. 소름 끼치는 정적이 파도처럼 날 덮쳐 왔다. 귀를 짜랑짜랑하게 울리던 소음이 사라지자, 육감이 일깨워졌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복도 끝에 서서 날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잠깐 장 대표인 걸까 의심했다가,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고갤 돌렸다. 피 칠갑을 한 차가운 몸뚱어리가 거기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퓨즈가 탁, 하고 나갔다.
작게 몸을 말고 있던 난, 손에 약병을 쥐고 발길이 닿는 대로 도망쳤다.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와 얼른 문을 걸어 잠갔다. 변기의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약 병이 손에 꽉 붙들려 있었다.
“…….”
이것에 손을 내뻗은 건 충동심 때문이었다지만, 돌려 놓지 않은 건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걸 가져온 걸 알게 되더라도 적어도 손가락은 자르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확신 말이다.
도망치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협박했던 남자다. 실제로 자르려고도 했었고. 그러나 내 지문들에 남겨져 있는 흉을 발견한 장 대표는 어떻게 했던가. 추켜올렸던 나이프를 허벅지 옆으로 떨어트려 놓았다. 되려 손가락을 치료해 놓기까지 했다. 내 몸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병도 내가 가져갔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남잔 날 그저 두고 봤다. 속으론 날 제 손바닥 위에 두고 있다 생각해서 그러는 거겠지.
우스웠다. 개 같은 새끼. 불행해졌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속으로 저주를 퍼부어 댔다.
“…….”
쿠르르릉, 하늘이 다시 한번 지상을 향해 으름장을 놨다.
…그토록 증오하던 장 대표는 이제. 이제 날이 밝아도 오지 않을 거였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계속해서. 갑자기 오한이 내 몸에 혼령처럼 빨려 들어왔다. 난 몸을 푸르르 떨었다.
그토록 원하고 있던 상황인데. 손과 발끝이 칼로 저미는 것 같은 이 써늘한 기분은 뭘까. 다시금 시선을 내려 병을 눈에 담았다. 나는 타월 하나를 꺼내 약을 쏟아 부었다. 번쩍번쩍, 약 가루들이 잘게 쪼개진 유리 조각들처럼 산란해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나는 홀린 듯이 타월에 코를 푹 묻었다. 부드러운 가루들이 코끝을 간질여왔다.
“…….”
장 대표가 내 두 손바닥에 우뚝한 코를 깊게 품고 마약을 담배 연기처럼 빨아들이던 장면이 눈앞에서 재생됐다. 그처럼 숨을 빨아들이자, 코로 약들이 후우욱 빨려 들어왔다.
약 병이 떨어져 땡그랑, 소릴 내며 깨졌다. 타월을 든 손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지고, 일순 눈앞이 핑 돌았다.
몸이 중심을 잃고 타일 위로 쓰러졌다. 난 차가운 화장실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고 네발로 기어 다녔다. 간신히 욕조로 다가가서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난 다릴 몸으로 끌어와 팔로 감싸 안았다. 삐이, 머릿속에서 높고 긴 음이 울리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타일의 선들이 물결치더니, 이내 저희들끼리 엉망으로 엉겼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복도 끝에 있던 아버지의 영혼 떠난 육체가 날 찾아온 걸까. 아버지의 서늘한 육체가 장 대표의 방을 가로질러 다가와선 화장실 문고릴 붙들었다. 덜컥, 덜컥.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했는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곧이어 미친 듯이 문고릴 잡고 문을 흔들기 시작했다. 덜컥, 덜컥, 덜컥, 덜컥, 덜컥. 목재로 된 문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뒤흔들렸다.
“…으흑.”
어디서 흐느끼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바로 내 입술 새로 흘러나오고 있는 거였다. 난 완전한 공포감에 휩싸여선 품에 얼굴을 푹 묻었다.
제발 이것도 꿈이었으면….
덜컹, 덜컹, 덜컹! 직사각형의 공간이 요동친다. 거인이 두 손에 화장실 양쪽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화장실 바닥에 벼락 모양의 균열이 짜르륵, 일어날 것 같았다. 한쪽이 풀썩 꺼져 내려가는 상상에 뒷머리가 쭈뼛 섰다.
쾅! 얇은 유리 장처럼 몸을 떨던 문이 결국 큰 파열음과 함께 열렸다. 잔향이 차가운 공간을 휘감았다.
화장실 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시선을 잡아당겼다. 어둠 속에 묻혀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영 위로 아까 본 괴물을 덧그려 냈다.
“아, 안 돼….”
아버지의 얼굴을 덮어쓴 인영이 차가운 타일 위로 긴 그림자를 흘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안 돼….”
눈을 꽉 감고 연신 고갯짓을 치며 아버지를 뿌리쳐 봤다. 그러나 별 소용은 없었다. 아버진 단숨에 내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난 절망감에 완전히 휩싸여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곁에 서 있기만 하는데도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난 몸을 벌벌 떨며 발끝을 한껏 세워 욕조로 몸을 밀어붙였다. 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선 욕조에 새로운 재료로 스며들기라도 할 것처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악!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싶었지만 출구가 막혀 있었다. 싸늘히 식은 몸이 옆에 서 있다. 두 눈으론 확인하지도 못했는데, 생각만으로도 공포감이 뇌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았다.
“…자, 잘못….”
흐느적거리는 음성이 싸늘한 공기 속을 기어들어 갔다.
“잘못했어요….”
장기들을 거센 힘으로 쥐어짜는 듯했다. 식도가 타는 듯이 쓰렸다. 누군가 담뱃불로 지져 놓은 것 같은 느낌. 혀가 뒤엉겨 자꾸만 발음이 엉키는 데도 계속해서 뇌까렸다.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머리 위에서 내 것이 아닌 음성이 쏟아져 나왔다.
“난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했는데.”
약 기운이 이젠 뇌까지 좀먹은 건지. 귀로 들어온 문장을 전혀 해석해 내지 못했다. 삐이, 하는 이명만 들릴 뿐이었다. …뇌에 화면 조정 시간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멍청해진 난 고장 난 녹음기처럼 연신 토막 난 문장들만 중얼거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눈앞이 흐렸다. 눈구멍에서 연신 무언가가 솟아났다. 턱에 방울져 있다가, 타일 위로 뚝뚝 떨어진다. 밑에서 정체 모를 득득 소리가 났다. 동시에 손 안쪽에서 고통이 수반되었다. 손가락들이 또 제멋대로 흉을 헤집고 있는 듯했다.
손목이 무언가에 붙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아버지가 내 턱을 붙들어 갔다. 부스러뜨릴 것 같은 힘으로 턱을 쥐곤 내 고갤 본인이 있는 쪽으로 틀었다.
“…아악!”
“…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턱을 빼내려 이리저리 고갤 비틀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내 턱을 붙든 손에 의해 망치로 벽에 박힌 못처럼 고개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아버지. 억지로 짜내어 뱉은 마지막 단어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뒤따라 웅웅대는 음성이 들려왔다.
“눈 떠, 서여원.”
안개 속에 있는 듯 불분명하게만 들리던 목소리가 좀 더 제대로 된 형태를 갖췄다.
“눈 뜨라니까.”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고갤 마구 내저어 댔다. 얼굴의 반을 감싸 안은 손이 힘을 과시해 대며 내 턱을 흔들어 댔다.
“…으윽.”
난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결국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눈꺼풀을 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물이 앞을 가려 눈앞에 있는 괴물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감은 눈꺼풀 위로 억눌린 듯한 숨결이 쏟아졌다.
“얌전한 얼굴로 한 번씩 사고 치는 게 진짜 사람 돌아 버리게 하네.”
숨결에 흠칫 몸을 떨었다. 흐린 시야로 눈구멍에 하얀 안구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인 걸까? …그래, 이건 사람이다. 얼른 손으로 내 턱을 틀어쥔 자의 팔을 붙들었다. 두툼한 팔이 두 손에 넘치게 잡혀 왔다. 이불 말리듯 말려 목구멍 안으로 굴러 들어가려 하는 혀를 천천히 움직였다.
“집 안에 괴물이 있어요….”
“…….”
“머리 깨져 죽은 사람이 있어요. 곧 여기로 올 거예요.”
얼른, 도망가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앞에 있는 사람, 장 대표는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상태에선 해석해 낼 수 없는 눈길이 내 얼굴에 닿아 왔다.
별안간 냉기가 온몸을 감쌌다. 추운 기운에 팔다리가 후들 떨리더니, 곧 어금니에서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얼음을 가득 쏟아 넣은 물에 머리끝까지 잠긴 기분이었다.
“추, 추워….”
길고 낮은 한숨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장 대표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 몸으로 손을 뻗어 왔다.
“…하아.”
이윽고 몸이 차가운 타일 위에서 부웅 떠올랐다. 남자가 날 들어 올렸지 싶었다. 남자의 어깨에 걸쳐진 팔 끝에서 붕대 감긴 손가락들이 붕붕 흔들렸다. 무중력 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남자가 날 침대 위에 내려놓더니, 거친 손길로 금고를 열었다. 드르륵, 쾅! 금고가 신경질적인 소릴 내며 열렸다. 남자가 팔꿈치까지 안으로 넣어 휘적거리다 뭔가를 집어 들었다. 흔들리는 시야로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병 하나와 가늘고 긴 막대가 붙들려 있었다.
…추워. 난 차가운 시트에 얼굴을 부벼 댔다.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안으로 말고 날개 부러진 새처럼 날갯죽지를 바르르 떨었다.
“…추워.”
온기를 찾아 손을 내뻗었다. 흐릿한 시야로 침대 앞에 우뚝 서 있는 장 대표가 들어왔다. 그가 긴 막대의 끝을 작은 병에 꽂더니 막대의 뒷부분을 주욱 잡아 뺐다. 병에 담겨 있던 액체가 주사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자는 그 막대를 쥐고선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저것이 무엇인지, 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막대에 달린 길고 뾰족한 바늘은 내게 ‘무언가’를 연상시키게 했고, 나는 그에 지레 겁을 먹고 상체를 벌떡 일으켜 뒷걸음질 쳤다.
“…시, 싫어.”
“입 다물어.”
얼마 못 가 팔이 풀썩 꺾였다. 때문에 그 이상의 후퇴는 좌절되었다. 몸이 이상했다. 분명 내 것인데, 내 통제에 따라주지 않았다. 남자가 내 발목을 잡고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내 몸을 주욱 잡아 당겼다. 너무나도 쉽게 자신에게로 딸려 온 내 상체를 무릎으로 고정시킨 남자가 검지를 막대에 대고 튕겼다.
난 육중한 몸에 깔린 채로 공중으로 연신 밭은 숨을 뱉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물이 어느 것 하나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엉겨 붙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불을 켜 놓지 않아 어둑한 방 안. 돌연 무언가가 시선 끝에 걸려 왔다. 화장실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불빛에 기대어 그게 무엇인지 확인해 봤다.
난 별안간 발작 난 사람처럼 팔다리를 바르작거렸다. 구석에서 분명 무언가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저, 저기에.”
“…….”
“저기에 뭔가가 있어요.”
입술 새로 씨발, 날카로운 욕이 터져 나왔다.
“그거 다 환각이야.”
“…무서워.”
몸을 말고 덜덜 떨고만 있자, 장 대표의 눈이 내 시선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옮겨 갔다. 남자의 산소 탱크가 크게 몸을 부풀렸다가, 다시 꺼졌다.
“옷걸이잖아. 제대로 봐, 네 눈으로.”
“…무서워요.”
“저기에 뭐가 있다는 건데.”
“머리 깨져 죽은 사람이요…. 사실 제 아버지예요, 절 찾아온 걸 거예요.”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뭐?”
어둠에 얼굴을 가린 무언가가 모서리 끝에서 하느작거렸다. 난 헉, 헛숨을 들이켜곤 남자의 앞섶을 쥐고 끌어당겨선 그의 품에 숨었다. 남자가 중심을 잃고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뭔가가 탁,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눈가를 적셨다.
“무서워….”
손끝에서 내 것이 아닌 다른 이의 살가죽과 뼈가 느껴졌다. 혹시라도 손에 잡힌 그 체온을 놓칠까, 힘껏 목을 끌어안고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타인의 체온이 못 견디게 위로가 돼서 상대방의 목덜미에 뺨을 비벼 댔다. 쇄골에 깊게 묻은 코끝에서 익숙한 향이 스쳤다.
분노에 찬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이 애새끼가…!”
성이 난 듯한 장 대표가 내 양 손목을 잡고 침대에 찍어 내렸다. 손의 주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금 날 종용해 왔다.
“눈 떠.”
“…….”
“제대로 눈 떠서 네가 지금 누구한테 안기고 있는지 봐 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 가득 내 것이 아닌 다른 이의 얼굴이 자리 잡았다. 울어서 부은 눈가며, 뺨이며 할 것 없이 열감에 홧홧했다. 약과 열에 취한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군지는 눈 감고도 외울 수 있었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대표님.”
손목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감과 동시에, 남자의 턱이 고집스럽게 다물렸다. 날 향한 꺼먼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서, 매 음절을 끊으며 나직이 물었다.
“죽었으면 좋겠다 기도해 놓곤 내 품에 안겨 들어?”
그의 말대로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가 죽었음 좋겠다고.
…구석에서 꾸물대고 있는 저 괴물은 섬에서 혼자 지낼 때도 날 종종 찾아왔었다. 두려움, 공포감, 불길함. 온갖 불행한 감정들이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악몽에서 깨어날 때마다 다른 이의 온기를 찾아 손을 뻗어 봤지만. 늘 내 곁을 채우고 있는 건 적막뿐이었다. 무기력감과 외로움만이 남아 나와 함께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장 대표가 입술을 움직였다.
“내 이름 말해 봐.”
난 흐린 눈으로 그의 눈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남자의 이름을 발음했다.
“…장.”
“…….”
“…장기주.”
가쁘게 숨을 내쉬는 나와 달리, 남자는 잠시 숨을 멈췄다. 내가 진짜로 자신의 이름을 발음할지는 몰랐다는 듯, 두 눈이 평소보다 조금 크게 뜨여 있었다. 난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남자의 손에서 벗어났다. 남자는 예상외로 순순히 내 손목을 놔주었다.
상체를 들어 올려 장 대표의 굵은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생명줄을 움켜쥐듯 간절하게. 뜨거운 열감을 뿜는 이마를 시원한 목덜미에 부비며 단 호흡을 뱉어 댔다. 맞댄 피부로 숨탄것 특유의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남자가 내 뺨을 틀어쥐더니, 입술을 맞췄다. 늘 그랬듯, 내 입술을 모두 입 안으로 삼켜선 여린 살점을 물어뜯어 댔다. 제 거라는 듯 영역 표시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런 남자의 품에 계속해서 파고들며 괴물로부터 몸을 숨겼다.
달뜬 숨 사이로 그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당신이 불행해졌음 좋겠어.”
입 안 연약한 점막에 거칠게 비벼지고 있는 남자의 혀, 엉덩이에 닿고 있는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 엉덩이 골을 파고 들어올 듯 흉흉하게 발기된 남자의 성기, 목덜미와 허릴 만져 대는 남자의 뜨거운 손….
약 기운에 한껏 도취되어 있는 지금, 그 모든 게 자극제였다. 숨이 가빠 밀어 내려고 해도 끈질기게 붙어 오던 남자의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하아.”
숨을 헐떡대며 장 대표를 올려다보자, 남자가 중지와 약지를 내 입술로 가져왔다. 입술을 벌려 두 손가락들을 모두 입에 머금었다.
장 대표의 밑을 빨듯, 남자의 손가락들을 빨았다. 뿌리까지 넣곤 춥, 춥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들였다. 그의 피부에선 원초적인 내가 났다. 그 짙은 체취가 반지의 비릿한 금속성 냄새와 맞물려 혀를 자극해 왔다. 약 기운 탓일까. 별안간 머릿속이 어질했다.
그는 노는 손으론 내 몸을 만져 댔다. 셔츠를 들춰 내선 제멋대로 몸을 주물럭거렸다.
“…아, …흐읏.”
그럴 때마다 내 입술 새론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발끝이 제멋대로 오므라들고, 허리가 비틀렸다. 그의 손짓에 맞춰 셔츠가 들썩거릴 때마다 젖꼭지가 옷에 쓸렸다. 애가 탔다. 남자의 손끝은 젖꼭지 주변만 맴돌고, 유두엔 닿을 줄 몰랐다. 아프니 제발 그만 만지라 애원해도 결국 제 욕심대로 살갗이 까지도록 만져 댔었는데.
아무래도 남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눈치챈 대로, 난 아주 간절히 그곳에 남자의 손길이 스치길 원하고 있었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춥.
입을 크게 벌리며 고갤 뒤로 물렸다. 장 대표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은색의 실이 가늘게 이어지다가, 시트 위로 떨어졌다. 남자의 굵직하고 긴 손가락들은 번들거릴 정도로 젖어 있었다. 왠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
“…….”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남자의 손가락은 내 유두로 향해 왔다. 붉게 달아오른 작은 돌기를 손가락에 끼우고는 퉁, 퉁 튕기며 가지고 놀았다. 여린 살점이 뭉개지는 찌릿찌릿함에 나는 목을 잔뜩 움츠리곤 끙끙 앓았다.
“…흐, 읏….”
새빨개진 손끝으로 셔츠의 밑자락을 허벅지까지 둘둘 말아 올렸다. 그러곤 그를 등져 네 발로 엎드렸다.
장 대표는 내 각도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손으로 내 무릎 사이를 좀 더 벌려 놓았다. 몸이 한층 더 납작 엎드렸다. 머리로 피가 내 쏠려 점점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뒤따라올 행위를 기대해서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약 기운 때문인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 으응!”
자연스레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들어왔다. 다물려 있던 주름을 열고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데, 내장까지 닿을 기세였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엉덩이를 떨며 가늘게 신음했다. 남자의 손가락은 내 신음에 힘입어 한층 더 거칠게 날뛰었다.
“…읏, 하아! …아, 아!”
손가락만 꽂고 있는데도 쾌감이 엄청났다. 허리와 골반이 마구 비틀렸다. 엉덩이가 멋대로 들썩거리며 남자의 손가락을 조였다가 풀어 댔다. 아직 무언가가 부족했다. 더 자극적인 게 필요했다. 이 갈증을 해갈해 줄 만한…. 엉덩이는 그대로 남자에게 내맡긴 상태로 고개만 뒤로 꺾었다.
흐릿한 시야로 지퍼 부분을 크게 늘이고 있는 남자의 중심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난폭하게 아래를 쳐 대고 있는 남자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손등으로 둔부를 때려 가며 안을 쑤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난 흐느끼면서 남자에게 거의 애원했다.
“…아, 아아! 그만.”
색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이 날 응시해 왔다. 적나라하게 비치는 정욕에 기가 죽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가 약간 쉰 음성으로 지껄였다.
“이대로 넣어 달라고? 찢어질 텐데.”
그리 말하는 입술은 길게 올라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 밑을 찢어 올 것처럼.
“…괘, 하아, 흑, 괜찮아요.”
“…….”
장 대표의 입술에 걸쳐 있던 미소가 얼굴에서 밀물처럼 싹 빠져나갔다. 잠시 평정을 잃었던 그가 짐짓 여유로운 체했다.
“그럼 네가 해 보든지.”
몸에서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갔다. 탈력감에 구멍이 바르르 떨렸다. 남자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셔츠를 벗어 내곤 침대 위로 누웠다.
상체를 탈의한 그는 한층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무릎걸음으로 다부진 어깨를 드러낸 남자에게로 기어갔다. 그의 허릴 묶고 있는 가죽 벨트를 풀어헤치자, 남자의 굵은 목울대가 울렸다. 꿀꺽. 그 짧은 장면에도 자극당했는지, 다리 사이가 간지러웠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남자의 좆이 기다렸다는 듯 퉁, 하고 튀어나왔다. 한숨이 흘러나올 정도로 무식하게 커다랬다.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걸 매만졌다. 뜨거운 데다 단단하기까지 했다. 위아래로 몇 번 훑어 내리자, 울퉁불퉁한 핏줄이 불거지더니 굵기가 한층 더 굵어졌다.
“…아.”
장 대표가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는 남자를 보고 있는데. 문득 배 속이 간지러웠다.
좆은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한계까지 발기했다. 딱딱하게 발기된 좆을 손으로 잡은 채 남자의 배를 손바닥으로 짚고 올라탔다. 남자의 부푼 귀두를 입구에 대고 비벼 댔다. 덜 적셔진 탓에 귀두가 주름에 문질러지는 감각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눈앞이 아찔했다.
“…으읏.”
안이 덜 풀린 탓에 좀처럼 삽입이 잘되지 않았다. 성급한 마음에 귀두만 넣은 채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정신 나간 짓거릴 하고 있음에도, 수치심이 든다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이성은 날개를 달고 도망쳐 나간 지 오래였다. 얼른 이걸 몸에 넣어야겠다는 원초적인 본능만이 머릿속에 남아선 내 몸을 작동시켰다.
엉덩이 짓에 따라 기둥이 안으로 점점 빨려 들려왔다. 기둥이 끈적하게 살점에 붙어 왔다. 근처에서 끄응, 목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응…!”
분명 윤활제도 부족했고, 전희도 짧기만 했는데…. 내장을 모두 밀어 내고 자릴 잡은 것 같은 남자의 좆이 못 견디게 황홀했다.
어떠한 리듬감 없이 남자의 걸 뒤에 꽂고 흔들기만 하는데도, 고통 대신 쾌감만 충만했다. 곧 허벅지 부근이 뜨뜻해졌다.
“…흣!”
사정감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빠르게 좆을 물었다 놓는 구멍에 장 대표가 허리를 아래로 빼더니, 단박에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눈앞에서 펑펑, 폭죽이 터졌다.
“…아, 아아, 아! 아흑!”
“…하아, 윽.”
장 대표가 내 셔츠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는 바로 작은 살점을 찾아 나섰다. 민감한 부위에 메마른 남자의 손끝이 닿자, 허리가 벌벌 떨렸다.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하아, 발딱 세우기나 하고….”
남자가 내 셔츠를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단추가 투욱, 소릴 내며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내 셔츠를 팔꿈치까지 벗겨 내곤, 젖꼭지를 엉망으로 뭉갰다. 과할 정도로 잡아당기고 비틀어 댔다. 그 무자비한 손길에도 내 몸은 민감하게 반응해 댔다.
“…아, 아아!”
구멍의 입구를 틀어막은 귀두가 안에서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뜨뜻한 액체를 토해 내며 힘을 꺼트렸다. 찰박찰박, 결합부에서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났다.
“하…, 으응!”
장 대표의 손이 내 엉덩이를 틀어쥐곤 옆으로 벌렸다. 구멍을 메우고 있던 남자의 정액이 애액처럼 뚝뚝 흘러 남자의 복근과 사타구니를 적셔 댔다. 축축하게 물들어 평소보다 색이 짙어진 남자의 음모에 얼굴이 불에 달군 듯 발개졌다.
이번엔 남자가 날 엎어 놓았다. 힘이 풀렸던 좆은 허리 짓 몇 번에 구멍 안에서 금세 다시 발기했다. 눈앞이 흐릿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닦을 생각도 못 하고 흔들리고만 있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얼굴을 내려선 내 눈가를 빨았다. 까끌거리는 혀로 내 눈알을 핥았다.
“흑, 아, 아흑, 으응!”
“하…, 후우, 후….”
난 그의 몸 밑에 깔린 채로 헉헉거리다가, 딱 죽을 것 같아 장 대표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 그만! 아, 아아!”
“그만?”
남자의 허리 짓이 일순 뚝 멈췄다. 아래를 막고 있던 기둥이 쑤욱 뒤로 빠져나갔다. 갑작스레 빠져나간 남자의 좆에 난 안달이 났다. 초조함까지 들었다. 고공 위에서 낙하산 하나 없이 그대로 뒤로 떠밀린 기분이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눈가를 그의 팔 안쪽에 문질러 댔다.
“빼라면서요.”
거친 호흡 새로 내뱉어진 냉정한 말에 난 사타구니를 시트에 문질러 대다가 신음했다.
“으흥….”
남잔 여전히 새카만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서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속눈썹에 걸려 있던 눈물들이 방울져서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닦아 냈다.
“…으, 어, 얼른.”
애가 타서 엉덩이를 바짝 위로 추켜올렸다. 그러곤 장 대표의 단단한 허벅지에 엉덩이 골을 비벼 댔다. 구멍 안에 있던 남자의 정액이 주륵 흘러나와선 남자의 바지에 치덕치덕 펴 발렸다.
“…씨발.”
남자가 내 허릴 한 손으로 부여잡곤, 골반께에 걸쳐 있던 정장 바지를 허벅지 중간까지 끌어 내렸다. 행위를 방해받은 난 그 짧은 새도 참지 못하고 바르작거리며 흐느꼈다. 닦아 낸 보람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남자는 성급한 손길로 내 엉덩이를 잡고 벌렸다. 그러곤 내 정신 나간 허리 짓을 돕기 시작했다. 단단한 근육이 쩍쩍 갈라져 있는 남자의 갈색 맨허벅지에 주름이 비벼졌다. 남자의 팔에 뺨을 묻은 채로 신음을 흘려 댔다.
“흐으…, 흣….”
“눈은 풀려 가지고… 어?”
“…대, 대표님, 흐읏.”
초점 잃은 내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던 장 대표가 돌연 허릴 부여잡고 다시 들입다 박기 시작했다. 사정 따윈 봐주지 않겠다는 듯, 폭주 기관차처럼 거세게 밀어붙였다. 찰박찰박, 한껏 부푼 음낭이 내 둔부를 사정없이 때려 왔다. 그 거친 허리 짓에 내 구멍은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걸 조이며 버텨 냈다.
한 번에 빠져나갔다가, 단박에 안을 밀고 들어왔다.
“아, 아아… 으흥!”
밑이 뜨끈해지더니,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기어코 찢어진 듯했다. 남잔 구멍이 찢어진 사실에 한결 더 흥분했는지, 더 광폭하게 날뛰었다. 무자비하게 굴려 대고 있는데도, 몸은 모든 행위를 쾌감으로 흡수했다. 남자와 연결되어 있는 밑부터 시작해 몸 전체가 녹고 있는 것만 같았다.
쾌감이 철철 흘러넘쳤다. 몇 번인지도 모를 사정이 이어졌다. 남잔 허리 짓을 멈출 줄 몰랐다. 좁진 구멍에 대고 허리를 움직여선 안을 밀어붙여 왔다. 난 절벽 끝에서 매달리는 심정으로 남자에게 매달렸다.
“…하, 으응, 흑… 아, 안 돼!”
없는 손톱을 세워 장 대표의 팔을 긁어 댔다.
“…안 돼?”
남자가 또 허리 짓을 서서히 늦추길래 도리질을 쳐 댔다.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들이 시트 위로 흩뿌려졌다. 이대로 멈출 바엔 더 아프게 해 달라 매달리고 싶었다. 별안간 남자의 얼굴이 돌연 사나워졌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 입술이 제멋대로 내뱉은 듯했다.
“…아아!”
남자가 허리 힘으로 내 밑을 눌러 찍어 댔다. 푹, 푹 안을 공격해 대는 탓에 난 입도 다물지 못하고 남자의 걸 받았다. 열린 입으로 침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러다 요도에서 울컥,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하얀 오줌이었다. 이건 끈적거리는 정액과는 느낌이 달랐다. 색도 없고, 냄새도 없는 이건 남자에게 박힐 때마다 한 발씩 흘러나왔다. 난 하얀 물을 밑으로 줄줄 싸며 흐느꼈다. 남자가 내 엉덩이 밑을 손으로 확인해 보다가 시트가 흥건히 젖었음을 확인하곤 쯧쯔, 혀를 찼다.
“위로는 울고, 아래론 싸고….”
응? 내 눈가에 남은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 내며 남자가 되물었다. 난 잔뜩 풀린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시트 위로 풀썩 쓰러졌다.
장 대표가 자신의 좆을 손으로 부여잡곤 내 구멍에서 꺼냈다. 희뿌연 시야로 남자의 귀두가 들어왔다. 검붉은 그것엔 새붉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내 구멍에서 묻어난 피일 거였다. 남자가 내 턱을 잡더니, 내 입으로 자신의 귀두를 밀어넣어 왔다. 귀두에 닿은 혀끝에서 쇠 맛이 났다.
찝찝함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걸 거의 목구멍까지 넣고 빨아 대고 있었다. 남자가 날 다시 제 밑으로 깔았다. 이번엔 정상위였다. 침이 젖어 번들거리는 남자의 좆이 이미 정액과 피로 엉망이 된 구멍을 다시 찾아 들어왔다.
내 얼굴 옆을 짚고 있는 남자의 두꺼운 팔뚝으로 언뜻 어둑한 형체가 보였다. 남자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남잘 끌어당겼다. 그의 견고한 가슴팍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아직도, 있어요?”
숨을 헐떡대며 고갤 주억거렸다. 그 약한 고갯짓에도 토기가 나올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말에 장 대표가 구석을 흘낏하다가, 괴물 보란 듯이 날 취했다. 그는 이미 육체를 잃은 것에도 소유욕을 과시하고 있었다.
“…으, 으응.”
난 흐느적거리는 다릴 움직여 남자의 허릴 감싸 안아, 그를 끌어당겼다. 몸을 한껏 둥글게 말곤 커다란 동굴에 숨어들듯 그의 품에 숨어들었다.
남자의 어깨에 뺨을 맞댄 채로 흐물거리는 허릴 움직여 남자의 허리 짓에 응했다. 남자의 커다란 몸과 내 몸이 한 덩어리처럼 빈틈없이 맞물렸다. 그와 살갗을 맞댄 채로 벌써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 없는 오르가즘을 향해 내달렸다.
입 안으로 불구덩이를 통째로 삼켜 넣으면 이럴까. 열 기운은 떨어질 줄 모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극심해져만 갔다. 몸에서 하얀 김이 쉬익 피어오를 것 같았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남자가 아까 봤던 주사기의 몸통을 손가락 끝으로 퉁퉁 튕기고 있었다. 그가 바늘 끝을 넥타이로 단단히 묶여 있는 내 팔로 꽂아 넣었다.
“…아아.”
사지가 축 늘어진다. 반쯤 뜨고 있던 내 눈꺼풀을 누군가가 손으로 감겨 주었다. 수마인가 했더니, 장 대표였다. 난 힘없이 그의 손길을 따라 눈꺼풀을 닫았다.
곧 수마가 매섭게 날 덮쳐 왔다.
***
사위가 어두운 공간, 장 대표가 등장했다. 남자는 내가 자신의 걸 훔쳐 간 벌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는 입을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그의 말이 들렸다. 그게 참 괴상해서 바로 눈치챘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단 사실을.
남자가 날 제 밑에 찍어 누른 채로 입을 크게 벌렸다. 꿈인데도 벌컥 두려움을 집어삼킨 난 약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목구멍 안으로 손을 넣어 약을 모두 토해 내겠다고 했다.
남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손가락들을 제 입 안에 처넣고 씹어 먹었다. 와그작와그작, 그의 단단한 턱뼈가 내 손가락뼈를 부서뜨렸다. 그의 허벅지 밑에 깔린 내 사타구니가 뜨끈해졌다. 그의 것도 마찬가지로 발기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그가 하고 있는 게 추삽질인지, 식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가 지금 부리고 있는 욕심이 성욕인지, 식욕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난 누군가를 애타게 찾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표님, 대표님, …대표님!’
그러다가 도움을 청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 완전히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자의 밑에 깔려선, 그자를 불러 대고 있는 상황이라니. 무척이나 아이러니했다.
난 팔을 길게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날 집어삼키는 그의 품에 안겨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악마처럼 입술을 길게 찢어 웃고 있는 남자의 귓가에 입술을 붙여 부디 불행하라고 저주하자, 남자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찌그러졌다.
그러자 웃기게도 묘한 안식이 날 사로잡아 왔다.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
“…아아.”
마른 입술로 신음을 흘려보냈다. 누군가가 내 목 밑으로 팔을 넣어 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벌려진 입술로 미지근한 물이 흘러들어 왔다. 난 입 안을 적셔 주는 그것이 반가워 허겁지겁 물을 삼켰다. 꿀꺽, 꿀꺽.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불에 달군 듯 벌떡대던 심장을 잠재웠다.
입 안을 작게 다시며, 눈꺼풀을 밀어 올려 떴다. 가장 먼저 장 대표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그는 손에 붙들고 있던 컵을 협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시야가 어슴푸레했다. 방 안은 안개처럼 푸르스름한 새벽빛에 적셔져 있었다. 땀에 젖은 온몸이 축축했다. 특히나 하체는 정말 푹 젖어 있었다. 밤새 실수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남자의 허벅지 부근을 흘깃했다. 어느새 남자는 집에서 입는 편한 긴 바지를 하체에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허벅지와 힙 부분도 마찬가지로 젖어 있었다.
“…….”
“…….”
난 빠르게 머릴 굴렸다. 내 엉덩이와 맞닿아 있는 시트까지 흥건히 젖은 걸 보니 남자의 바지에 묻어 있는 저 애액 또한 내 몸에서 나온 것일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남자가 날 제 품에 안고 있다가 같이 젖은 듯했다.
수치심에 시트를 꽉 부여잡았다. 입 안쪽의 살점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꾹꾹 물어 댔다.
남자가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왔다. 다릴 딱 붙여서 그의 손을 거부해 보고자 했지만, 남자의 뜻이 너무 강경해 별 소용은 없었다. 남자의 손은 허벅지 안까지 깊숙이 밀고 들어와 축축이 젖은 살갗을 매만졌다. 그의 손끝에서 끈적한 점성을 가진 액체가 치덕치덕 소릴 내며 허벅지에 넓게 펴 발렸다.
“싸면서 날 부르던데.”
그의 말에 꿈에서 부르짖었던 이름이 상기되었다. 대표님, 대표님. 칼로 쭉 찢어 놓은 듯한 눈매가 부드러이 휘었다. 날 향해 있는 검은 눈동자는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난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악몽, 악몽을 꿨습니다.”
“…….”
아끼는 도자기 만지는 양, 내 허벅지와 엉덩이를 어루만지던 남자의 손길이 뚝 멈췄다. 꿈에 당신이 나와선 날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고백하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끔찍했습니다.”
그의 맵시 좋은 눈썹이 휙 추켜 올라갔다. 붓으로 잘못된 획을 휙, 갈겨 놓은 것처럼 사정없이 구부러졌다. 미간엔 미세한 주름이 꼈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꽉 다물린 그의 턱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허벅지를 제 맘껏 추행하고 있던 남자의 손에 서서히 힘이 가해졌다. 남자의 눈이 새벽빛을 맞고 푸르게 빛났다. 제 성미에 못 이겨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내 뺨과 목을 어루만졌다. 남자의 손이 스치고 간 자리에 닭살이 오소소 피어올랐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솜털이 다 섰을까.”
장 대표가 혀로 내 뺨을 핥았다. 바짝 곤두선 솜털들을 하나하나 핥으며 제자리에 눕혔다. 대형 고양잇과 동물이 제 어린 짐승에게 하듯이 혀로 애무했다. 귓바퀴를 뭉근하게 문지르곤, 귓불을 잘근 씹었다. 남자의 큰 손이 축 늘어진 내 음낭을 손등으로 쓸었다.
“여기 솜털은 다 젖었고.”
그의 은밀한 손길에 음경이 조금 부피를 키웠다. 내 손으론 어찌할 수 없는 생리적 반응이었지만, 그럼에도 좌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턱을 돌려 장 대표의 시선을 외면하는데, 남자가 반쯤 일어선 내 가운데를 그러쥐었다. 데일 듯한 남자의 체온에 난 흠칫 놀라 몸을 바르작 떨었다. 다른 손은 엉덩이 밑으로 들어와선 안을 휘적거렸다.
찢어졌던 탓에 잔뜩 부어오른 입구가 문질러졌다. 남잔 무신경한 손놀림으로 안을 능숙하게 휘저었다.
“살점이 좀 튀어나온 것 같은데.”
“부은 거예요.”
“…….”
그는 사실이야 어찌 됐든 별 상관없단 얼굴로 내 부은 살점을 어루만졌다. 붉게 부어 있는 살점을 엄지로 비벼 대며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엉덩이 사이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약 기운이 조금 풀린 나는 아릿함에 한숨을 쉬었다. 턱을 돌려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필이면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남자의 허벅지였다. 허벅지 옆 부분이 내 몸에서 나온 체액 때문에 한껏 젖어 있었다. 꿈에서 봤던 남자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식욕을 부리는 건지, 성욕을 부리는 건지 알 수 없던….
혹여나 또 삽입한다고 할까 무서웠는데. 장 대표는 다행히 손가락만 안에 넣고 흔드는 것으로 행위를 그쳐 주었다.
“…흐응!”
이미 한차례의 사정으로 한창 민감해져 있던 몸은 금방 또 사정해 냈다. 남자의 배 부근이 내가 뱉어 낸 정액으로 엉망이 되었다. 남자가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옷가지를 하나둘 벗어 냈다. 자질구레한 생채기가 이리저리 나 있는 남자의 다부진 갈색 몸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
“…….”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남자가 내게도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팔꿈치에만 걸쳐 있던 셔츠가 벗겨졌다. 그가 날 침대에서 들어 올렸다. 난 떨어질까 무서워 남자의 목덜미를 꽉 부여잡았다. 그 덕에 바짝 곤두선 젖꼭지가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비벼졌다.
장 대표는 날 잠시 욕조 틀에 앉혀 놓곤, 욕조에 물을 받았다. 어느 정도 물이 채워지자 날 안은 채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노곤한 몸이 뜨끈한 물에 담겼다. 열에 달떠 오른 몸을 부드러이 감싸 안는 수면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남잔 젖은 몸을 타월로 닦곤 날 다시 침대 위로 옮겨 놓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느릿하게 여닫는 눈꺼풀이 인두로 지진 듯 뜨거웠다. 어렴풋한 시야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남자는 여느 때처럼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내 손가락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시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지더니, 이내 머리에서 밀려 나갔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기울어진 이후였다. 퍼붓던 장대비가 그쳤는지 주변이 조용했다. 따스한 노을의 기운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머린 어딘가 멍했고, 목 안은 칼칼했다. 감기 기운에 한창 시달리다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의 증상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체에서 느껴지는 고통 정도였다. 그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칼침을 뒤에다 꽂고 있는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몽롱한 눈동자가 누군가를 찾아 방 안을 헤매고 다녔다.
장 대표는 편안한 차림으로 서재 옆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긴 다릴 꼰 채로 큰 손으로 들고 있는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구겨진 휴지들이 침대 주변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내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 거겠지. 새벽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얼른 넣고 흔들어 달라며, 남자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발딱 선 젖꼭지를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비벼 댔었다. 얼굴에 다시금 열감이 올랐다. 뭉툭한 끝으로 시트를 긁어모아 주먹을 쥐었다. 쪽팔려서 딱 죽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들이 누에고치처럼 새 붕대에 감겨 있었다. …남자가 해 놓은 걸까. 괜히 손가락들을 움직여 봤다.
혹사당한 목을 쥐어짜 말을 뱉었다.
“더 이상.”
“…….”
“더 이상은….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그건 원망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담담히 내뱉는 서술에 지나지 않았다. 엉망진창으로 갈라진 목소리에 남자가 책을 덮었다.
“도망친 쥐새끼 하나 잡으려고 3개월을 좆뱅이 쳤는데. 고작 2주 만에?”
“그건 제가 도망친 거였고, 이번엔…. 제가 방치, 방치당한 거라.”
날 트로피 여기듯 여기는 남자이니, 집에 들여다 놨다는 사실로 만족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었다. 방치, 장 대표가 내가 내뱉은 단어를 한 번 발음해 봤다. 그는 어감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버려진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딴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니.”
책을 손에서 놓은 그가 침대로 다가왔다. 슬리퍼가 바닥에 스쳐 사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빚 받아 내야 할 곳이 있어 잠깐 바빴습니다.”
그가 침대 맡에 앉았다. 머리맡이 그의 무게감으로 움푹 꺼졌다. 그에게 빚 독촉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동정심이 느껴졌다.
“내가 이틀간 시트를 몇 번이나 갈았는지 알아요?”
“…….”
“성인이 돼선 몽정이나 하고 말이에요.”
“악몽이었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정정에 장 대표의 뺨 한가운데가 일순간 푹 패여 들어갔다. 그의 만면을 덮고 있는 무표정에 일순간 금이 갈 뻔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별안간 진하게 조소했다.
“어쨌든 질질 쌌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
“내 품에서 도망쳐 나가 있던 때도 그런 꿈꿨던 적이 있었습니까.”
난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원하는 답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눈치 빠른 장 대표는 내 침묵에서 능히 답을 구해 냈다.
“그럼 진짜 도망친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난 시야를 내리깔았다.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와 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의 윤곽 짙은 얼굴에서 미소가 걷혀 나갔다. 여느 때처럼 여상한 얼굴을 한 장 대표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 괴물은요.”
시선이 불가항력적으로 방구석으로 이끌렸다. 그곳엔 새벽 내내 푹 꺼진 눈구멍으로 날 노려보던 괴물 대신 목재 옷걸이가 서 있었다. 위협적으로 너울거리던 괴물의 양팔은 남자의 까만 재킷에 달린 소매 부분이었다. 골이 멍해지는 허탈감이 밀려들어 왔다. …밤새 날 괴롭혀 대던 괴물의 실체가 저거였다니.
“…그냥 가끔.”
힘없이 말꼬릴 흐렸다. 이 남잔 나를 어디까지 내보여 줘야 만족을 하려는 걸까. 베개의 끄트머릴 부여잡았다.
“그 일이 꽤 큰 잔상을 남겼나 봐요. 약에 취해선 헛것까지 보고.”
“…….”
“뭐가 그렇게 공포스러웠습니까. 들킬까 봐?”
그의 말대로 들킬까 봐 전전긍긍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혹여라도 남이 일정 이상의 관심을 내게 보이는 것 같으면, 공격당한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려 어딘가로 숨기에 급급했다. 내가 장 대표에게서 도망쳤던 몇 개의 이유들 중 하나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를 향한 남자의 관심이 점점 비이성적으로 몸을 불리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단순히 들킬까 봐 공포감에 떨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복잡한 감정을 그렇게 단적으로 풀어내기엔 생략되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았다. 난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럼?”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덕분에 남자와 나 사이에 공간이 붕 떴다. 장 대표는 그게 용납이 되지 않았는지, 한 번 더 물어 왔다.
“서여원 씨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딴 걸로 이렇게까지 시달리는 겁니까.”
…그딴 거?
지금 남자의 표정과 말투만 놓고 보면 길 가다 어쩌다 짓밟은 잡초 정도를 두고 얘길 나누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난 속에서 뭔가 울컥, 하고 터지는 걸 느꼈다. 온몸이 뇌수까지 차게 식었다.
남자가 고작 그딴 거라 가벼이 치부한 아버지의 죽음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로 앗아 가기도 한 거였다.
“…고작 그딴 거요?”
장 대표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남자의 뜻엔 변함이 없어 보였다. 고작 잡초 정도의 인생을 빼앗은 게, 뭐가 그리 잘못된 거냐.
“…아직도 감각이 생생해요. 아버지의 피가 제 손에서 흐르던 감각이요.”
두 손을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하얀 붕대가 골무처럼 손가락 끝에 끼워져 있는 손 위로 토마토 육즙처럼 시뻘겋고, 페인트처럼 끈적하게 늘어지는 피가 덧그려졌다. 속이 불편했다.
“사람 피가 그렇게 뜨끈한 건지 몰랐어요. 맞닿아 있는 내 피부는 차갑게 식어 가는데, 방금 막 몸에서 분수처럼 뿜어 나온 피는 엄청나게 뜨끈했어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그게 내 몸속에서도 흐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가슴 한 켠이 시끄럽게 술렁거렸다. 속이 메스꺼웠다. 남잘 뒤로 밀쳐 내고 속 안에 있는 걸 모두 게워 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남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달고선 묻는다.
“천하에 둘도 없는 개새끼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 대표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네, 개새끼였는데….”
남자의 말마따나 아버진 개새끼였다.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죽어 마땅한 새끼였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가슴 한편에 남은 이 끈적거리는 불쾌한 감각은 도저히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건 알량한 죄책감이었다. 내 살과 뼈를 빚어 낸 이의 목숨을 내 손으로 끊었다는 죄악감이었다.
장 대표는 별안간 내 속눈썹을 어루만졌다. 끝에 달려 있던 투명한 액체가 기다렸다는 듯 열매처럼 방울져서 떨어졌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 또 한심하게 울고 있던 거였다. 어떠한 흐느낌도 없이 그저 건조하게 터진 눈물이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난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손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남자는 내 얼굴에서 손을 떼어선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나직이 날 불러 온다.
“여원 씨.”
“…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 거라 생각해요.”
난 남자의 말에 봉제 틀로 입술이 꿰매진 듯 입을 다물었다.
“변변한 빽 따위 하나 없던 내가 어떻게 한 자리 떡하니 차지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느냐고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장 대표가 마약을 흡입한 자처럼 입술에 힘을 풀고 픽 웃었다. 그에 석연찮은 기운이 가슴팍을 스쳐 갔다. 남자의 입술은 길게 뻗어서 뺨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눈만은 무감정, 그 자체의 것이라 불길한 느낌을 줬다. 어딘가 미심쩍은 비소였다.
“그럼 내 손가락 잘랐던 놈들. 그놈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여상하게 던진 물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파문이 제법 컸다. 난 무겁게 고갤 저었다.
“그놈들 아주 악질이라,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내게 손찌검을 했었습니다. 어떤 날은 바닥에 머릴 조아리게 시키더니 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손을 잘근잘근 밟았던 적이 있었어요. 내 눈빛이 재수가 없었다나.”
제아무리 어렸을 때라지만, 장 대표가 남 밑에 깔려 있는 장면은 도저히 연상이 되지 않았다. 평생 남의 머리 위에서만 군림해 왔을 것 같은 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주변이 조용했었습니다.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었죠. 밑을 보니까 한 녀석이 얼굴이 곤죽이 되어선 기절해 있더라구요. 물론 섹스가 아닌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과거를 무심한 어조로 읊고 있던 남자가 재미있는 농담을 던졌다는 듯 느릿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녀석들은 날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날 한껏 두려워하는 눈을 달고선. 덕분에 며칠간 편히 지냈습니다. 월말에 급여가 나왔는데 평소보다 액수가 괜찮더라구요.”
“…….”
“거래처가 우릴 부리는 사장한테 삯을 주면, 사장이 일정 금액을 떼고 윗놈부터 차례대로 할당받는 식이었는데. 기수보단 무리 안에서의 서열을 우선 쳐 주는 분위기라 녀석의 몫이 나한테 들어와 있던 거였습니다. 그래 봤자 담배 두 갑 정도 더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치이익, 남자가 꽁초를 비벼 끄더니 담배 한 개비를 새로 입에 물었다.
“어쨌거나 그때 처음 맛봤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서 따 먹는 과실의 맛을요.”
세모난 눈이 흥미에 번뜩였다. 그건 인간의 피부 껍질 너머, 그 속까지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는 뱀의 눈이었다. 장 대표의 과거 속에 등장하는 그놈들 또한 남자의 이 뱀눈을 두려워한 게 아닐까 싶었다.
마주하고 있기 힘든 눈이라 교묘히 시선을 피했다. 벽에 드리워져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힘을 기르기 시작했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위로 오를수록 손에 들어오는 성과는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윗분들한테 소문이 났는지 개인적으로도 일이 들어오더라구요. 손에 들어오는 일이라면 거르지 않고 모두 받아 했습니다. 수입이 꽤 짭짤했으니까.”
“…….”
“서여원 씨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그런 더러운 일들을 저지르면서도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죄책감 따윈 모르고요.”
장 대표의 그림자가 검은 연기를 공중에 뱉었다. 몽롱한 눈으로 그걸 지켜보던 난 문득 연기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나도 있는데, 왜 서여원 씨가 그딴 조악한 감정에 시달려 합니까.”
어딘가에서 쾌쾌한 내가 났다. 볕 들지 못했던 그의 과거에서 나는 냄새였다.
“여원 씨는 그저, 벌을 집행하는 신 대신 그 개새끼를 벌한 것뿐인데 말이에요. 그것도 아주 상냥한 방법으로.”
그의 그림자가 내 뺨으로 손을 뻗어 왔다. 손끝에서 코끝이 아릿한 담배 향이 났다. 향수 향은 그새 날아가 버렸는지, 남자에게선 욕실에서 맡았던 샤워 코롱 냄새만 은은하게 풍겨 왔다.
“그런 새낄 벽돌로 머릴 깨 단박에 처죽여 줬다니, 너무 상냥한 처사였지 않아요?”
“…….”
“물론 법에는 저촉되는 행동이었으나.”
이번엔 남자의 두 손이 내 눈가를 훑었다.
“법조문은 나와 합의되어 있는 사항들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서여원 씬 잘못한 게 없습니다.”
어린 짐승 다루듯 날 어르고 달래던 손길이 날 떠났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눈길이 남자의 손을 좇아 가자, 자연스레 고개가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마주한 남자의 두 눈동자엔 오롯이 나만이 담겨 있었다.
남자의 말인즉슨, 법이고 뭐고 제 뜻에만 따르면 내겐 문제가 없다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론 도저히 생각해 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문장이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그런 터무니없는 소릴 뱉은 주제에, 날 향해 있는 눈빛만큼은 날카롭고 진득했다.
“…….”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꿀꺽, 남자가 울대를 울렸다. 동시에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에 파도가 일렁였다. 저 중간에 있는 움푹한 부근에 코끝을 묻으면, 힘차게 뛰는 남자의 맥박이 얇은 살갗을 울려 오곤 했다.
“…….”
“…….”
방 안에 가득한 몽롱한 기운 때문인 걸까. 짧은 찰나였으나, 어쩐지 꽤 긴 시간 그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마주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얼핏 청년 하나를 봤다. 또래보다 체구는 월등히 크나 눈매엔 치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싸늘하게 굳은 눈매와 입매가 나이를 쉽게 짐작지 못하게 하지만, 그래도 덜 자란 이 특유의 앳됨은 숨길 수 없었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자, 남자는 본래 자신의 모습대로 돌아와 있었다.
불현듯, 장 대표의 목덜미를 팔로 끌어당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상상에 그치고 현실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남자와 난 지독히 시선만 나누고 있었다.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웬일로 남자였다. 그가 감탄사를 뱉으며, 방 안에 흐르고 있던 기묘한 정적을 깨트렸다.
“…아.”
지나치게 음률이 없어 어딘가 어색하단 느낌을 주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가 마지막 꽁초를 비벼 끄더니, 말을 이었다.
“병실에서 봤냐고 물었던 그 중년 남성 말이에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잠시 머리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가, 아는 이름이 나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삼촌이라고 했었지. 임선철 씨.”
“…네, 임선철 씨.”
임선철이라면 내 삼촌의 이름이었다. 순간, 통화상으로 들었던 끔찍한 비명이 머리 안을 가로지르고 사라졌다. 남자가 왜 내 삼촌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의문 어린 시선을 던지자, 남자가 미간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좀 우연찮은 곳에서 발견했는데.”
“우연찮은 곳이요?”
남자는 대답 대신 의뭉스럽게 웃었다. 지금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로 보건대, 절대 우연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