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목덜미로 시선이 와 닿았다. 그걸 알아챈 순간, 절로 머리털이 거꾸로 곤두섰다.
‘설마…?’
고개는 차마 돌리지도 못했다. 곁눈질로만 뒤의 동태를 살펴봤다.
모자의 챙 때문에 시야가 가려 한 쌍의 구두만 눈에 보였다. 뒤에 서 있는 자의 발은 척 보기에도 상당히 컸다. 남자 평균 사이즈인 내 발보다 20mm는 족히 클 것 같았다. 바윗덩어리 같은 두 발이 아무 장식 없는 수제화에 감싸여 땅을 점령하듯 딛고 서 있었다.
신발 끝에 붙어 있는 기다란 그림자로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남자는 발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압도적으로 컸다. 가슴팍이며 어깨가 문짝처럼 널찍해 가히 위협적이었다.
…저런 실루엣을 가진 남자를 안다. 내가 알기론 저렇게 독보적인 체형을 지닌 남자는 단 하나뿐이다.
중추에서 아드레날린을 분수처럼 뿜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안으로 곱아들어 갔다. 손목 안에서 정맥이 심장처럼 둥둥 낮은 파동을 일으키며 뛰었다. 두근두근. 두근거림이 혈류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곧 몸 전체에서 뛰놀았다.
도저히 올려다볼 자신이 없어 아직도 시선은 남자의 그림자에 못 박혀 있는 채였다. 눈이라도 함부로 깜빡였다가는 그게 방아쇠가 되어 ‘남자’가 발포될 것 같았다.
작은 마당을 큰 그림자로 모두 덮을 것처럼 서 있는 남자와 나.
“…….”
“…….”
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하고도 싸늘한 정적은 한동안 계속됐다. 납덩이만치 둔중한 적요가 몸을 짓눌렀다.
솨아아, 오로지 바람만이 소리의 공백을 메웠다. 솨아아, 소슬한 음풍이 마당 안을 흩뜨려 놓았다. 마루 위에선 봉투들이 흩날렸고, 사진들은 바람에 떠밀려 낙엽처럼 저 멀리로 날아갔다.
푹 눌러 쓰고 있던 모자도 챙이 몇 번 들썩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휙 뒤집어 까져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 길어서 시야를 가리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이제 머리칼 사이로만 엿보던 어둠 속의 얼굴이 두 눈에 선명히 담겼다.
장 대표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랜만이네요.”
“…….”
살면서 이보다 공포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머리론 도망쳐야 한다는 걸 분명 알고 있는데. 다리에 힘이 쫙 풀려 주저앉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장 대표가 먼저 한 발자국을 내디뎌 왔다. 난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그가 큰 보폭을 내디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그에 난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시위가 당겨진 활처럼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고 도망쳤다.
달아나는 등 뒤에서 을씨년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잡아 와.”
난 마루를 뛰어오르며 뒤를 살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남자들이 문간을 넘어오고 있었다.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유일한 출입구인 창문을 열었다. 얼른 창틀을 넘어가려는데, 뒤쫓아 온 남자들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목 뒤가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정들이 내 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틀어잡더니 날 질질 끌고 마루로 나왔다. 새를 잡듯 내 뒷덜미를 손으로 꽉 눌러 날 마루에 눕혀 놓았다. 난 마루 위에 배를 깔고 누워 한껏 발버둥 쳤다. 으아아악! 팔과 다리를 파들짝 내두르며 괴성을 내질렀다. 꼴이 영락없이 거미줄에 잡힌 먹잇감이었다.
아악! 벌린 입에서 타액이 흘러나와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가만 안 있어?”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쳐 댔다. 팔꿈치로 왼편에 있는 놈의 얼굴을 퍽 하고 치고,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그자는 신음을 뱉으며 손목을 흔들어 날 떨어트렸다.
욕지거릴 뱉더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얼굴을 구둣발로 콱 짓밟았다.
“으윽…!”
차가운 마루에 뺨을 대고 얼굴을 짓밟힌 채로 눈을 부릅떴다. 시야로 굴곡진 장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장 대표가 일면식이 있는 수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하가 얼른 두 손으로 무언가를 주었다. 장 대표가 허공에서 그걸 휘두르자, 척 소리가 나더니 서슬 퍼런 날이 드러났다.
구두가 저벅저벅 소릴 내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이프를 위로 추켜올리더니 그걸 가벼이 휘둘렀다. 휙, 하는 소리가 나기에 얼른 질끈 눈을 감았다.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고 있는데, 되레 얼굴을 짓밟고 있던 구둣발이 떨어져 나갔다.
날 발로 밟고 있던 놈이 제 종아리를 손으로 쥐고는 옆으로 물러섰다. 종아릴 움켜쥔 손가락 틈새로 시뻘건 액체가 줄줄 쏟아졌다.
“…선 넘지 마.”
장 대표의 말에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부하의 종아리를 칼로 그어 낸 장 대표는 허릴 숙여 땅에서 무언갈 주워 들었다. 그러곤 그걸 내 앞에 툭 던졌다. 얼굴 바로 옆에서 철그덕 소리가 났다. 구태여 보지 않아도 묵직한 소리로 시계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손목에 채웠던 바로 그 시계 말이다.
“목줄까지 풀어 놓고 도망갈 줄이야.”
장 대표가 긴 다릴 휘적거려 다가오더니 내 옆에 다릴 꼬고 앉았다.
“물론 언젠간 그러리라고 예상은 해 두고 있던 터라. 나름 진을 쳐 두고 있긴 했었습니다.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지만.”
셔츠 단추를 가벼운 손길로 툭툭 풀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 조막만 한 두뇌 굴리느라 머리 좀 아팠겠던데요.”
그러곤 재킷 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매끈한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물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잿빛 구름이 피어났다.
“덕분에 죄 없는 내 직원들만 좆뱅이를 쳤었죠.”
그가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대고 뿜었다. 눈시울이 시큰거리고 코가 매웠다.
“몸값에 비해 과도한 화대를 받고 있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그가 손을 흔들자, 내 몸을 잡고 있던 자가 뒤로 물러났다. 장 대표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뒷덜미를 올가미처럼 옭아매 왔다. 무지막지한 힘. 한 손에 붙들려 있는 잭나이프. 도망치고자 했던 마음이 거세되었다.
“모든 사업엔 투자 비용이 뒤따릅니다. 지금 당장의 이해타산엔 맞지 않더라도 일단은 앞날을 위해 자본을 투자해야 하죠.”
“…….”
“근데 초기 자본을 회수하기도 전에 계약자, 아니 사업이 그대로 뒤로 내빼 버렸네.”
그가 비틀린 입술로 지껄였다.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말투였지만, 난 문장 전체에 깔려 있는 싸늘한 분노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감히.”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짙은 왼쪽 눈썹 끝이 휙 추켜 올라갔다. 그는 같은 자리를 천천히 맴돌며 손가락 끝으로 눈썹을 툭툭 쳤다. 가연성인 화를 억누르려는 것 같았다.
그가 손등으로 내 턱을 잡아 올렸다. 아랫입술이 찢어졌는지 순간 아릿했다.
“출자가 부족했습니까? 날 화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화대를 올려 달라 말하는 게 좋았을 텐데.”
“…….”
“기껏 정성 기울여 길들여 놨는데. 그렇게 내빼 버리는 바람에 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가 내 쪽으로 고갤 기울였다.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 내며 음산한 목소리로 뱉었다.
“내가 너 때문에 씹질을 며칠이나 못 했는 줄 알아?”
내 턱을 잘 영근 사과처럼 붙든 손에 힘이 가해졌다. 상악과 하악의 선이 비틀린 턱에서 으득 소리가 났다. 힘이 약간이라도 더 보태졌다면 그대로 으스러졌을 거였다. 다행히 남잔 완급 조절에 능한 자였다. 그는 날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까지 고민 중인 듯했다.
“이걸 어떻게 찢어발겨 놔야 내 이해타산에 맞을까, 줄곧 고민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서수원 씨.”
그가 부러 한 템포를 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다. 이제 서여원 씨라 불러야 하나.”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내 진짜 이름 석 자에 발끝까지 소름 끼쳤다.
“내내 서여원 씨 생각뿐이었죠.”
내용만 놓고 보면 연인에게나 할 법한 달콤한 고백 같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들은 지독히도 잔인해 바지춤이 다 뜨끈해질 정도였다.
“여러 가지 선택지들 중에서 말이에요.”
“…….”
“이 뺨을 얇게 포 떠서 회 접시 위에 올리는 게 가장 괜찮아 보였습니다. 뽀얗고 야들야들하니 그 어떠한 최고급 회보다 별미일 테니까요. 근데 그러면 이 예쁘장한 얼굴이 망가지네. 그래서 일단은 보류했습니다. 내 쪽에서 투자한 게 있으니 돌려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릿하지만 명료하게 날 벌할 뜻을 내비쳤다. 진심인지, 아니면 그냥 날 겁주기 위한 계교로 뱉은 말이었는진 알 수 없었다. 뒤에서 창백한 달빛이 쏟아지고 있어 장 대표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의 표정까진 볼 수 없었다. 난 그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가 담배를 모두 피웠는지, 꽁초를 바닥에 버려 구둣발로 비벼 껐다. 그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두고 있던 잭나이프를 손아귀에 잡으며 말했다.
“일단 경고 차원에서 손가락은 자르겠습니다.”
눈앞에 꿈속의 장면이 재생되었다. 내 위에 올라타선 톱을 위로 추켜올리고 있는 남자. 난 그의 밑에 깔린 채로 발버둥 치다 결국 손가락을 잃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이래 봬도 꽤 잘 드는 칼입니다. 금방 끝날 거예요.”
난 얼른 내 뒷덜미를 누르고 있는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난 마구잡이로 고갤 흔들어 댔다. 난 꿈에서처럼 도움을 요청하며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대표님, 잘못했습니다.”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다. 자꾸만 사타구니에서 힘이 풀렸다. 이러다간 바지를 적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실은 꿈보다 더한 공포를 주었다. 심지어 지금은 지문이 다 어그러져 있는 상태였다. 남자가 이걸 보았다가는….
“여원 씨는 늘 이런 식이었잖아요.”
“…….”
“고분고분한 척하며 예쁜 짓 조금 해 주다가 기회 엿봐선 또 도망가려고요?”
쯧, 남자가 혀를 찼다. 제 큰 손바닥으로 내 주먹을 감싸더니 힘껏 쥐어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 으윽. 난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내게 와서는 속눈썹 새로 날 바라보며 약을 먹어 달라 했었죠. 그렇게 새침을 떨어 대던 게 고작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니.”
하아, 그의 입술 새로 나온 탄식이 찬 공기와 맞닿아 하얗게 번져 나갔다. 그가 다시 한번 손아귀에 힘을 주고 내 주먹을 잡았다가 놓았다. 턱을 잡았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세기의 힘이었다.
“…윽!”
“난 원래 일이 엉기려는 싹이 보이면 그걸 아예 잘라 버려야 한다 여기는 사람이었어요. 서여원 씨의 경우엔 일단은 두고 보자는 마음이 컸었고요. 그러다가 뒤통수를 처맞았죠. 그래서 지금 화가 아주.”
“…….”
“화가 아주 많이 난 상태예요.”
그가 입가 근육을 당기며 입꼬릴 비틀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아 그 둘이 만들어 내는 간극이 날 소름 끼치게 했다.
“이 이상 날 화나게 하지 맙시다. 이 주먹만 한 뒤통수 보자마자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던 충동 억제하고 이렇게 서여원 씨를 참아 주고 있지 않아요.”
으흑, …으윽. 그가 잭나이프의 뒤축으로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던 손가락들을 끝까지 펼쳤다. 난 몇 번 더 반항하다가,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칼끝이 하얗게 빛나는 걸 보곤 이내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핏줄이 새파랗게 도드라질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눈을 질끈 감자, 속눈썹에서 눈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으흑, 흐으윽.”
지문을 덮고 있는 피딱지들이 그의 시선 아래에 고스란히 놓였다. 한동안 침묵이 지속되었다. 내 속 안에서만 들끓고 있다가 입술 새로 흘러나온 흐느낌만이 정적이 주는 공백을 메웠다.
얼굴 위로 서늘한 물음이 떨어졌다.
“누가 이래 놨습니까.”
난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그가 뭐라 하든 간에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얼른 다시 주먹을 쥐고자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손이 내 손가락들을 쥐고 있는 탓에 손끝만 간신히 까딱거릴 수 있었다.
“묻잖아.”
“…….”
“어떤 새끼가 네 몸에 손을 대 놨냐고.”
그는 내 얼굴을 쥐곤 답을 종용했다. 좀 전에 턱을 잡았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힘의 크기를 가해 왔다. 내 얼굴의 형체를 그대로 무너뜨릴 듯 말이다.
그러다 남자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
“설마 직접?”
아으, 아으. 그가 얼굴을 틀어잡고 있는 통에 말이 형체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어눌하게 뭉뚱그려졌다.
남자가 내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손을 물리더니 물었다.
“왜요.”
“흐으…, 윽.”
“왜 또 지문을 고문했어요.”
난 아우, 아으 꺽꺽대며 울었다. 처음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생리적인 현상으로 터진 것이었는데. 종전엔 명치에 똬리를 틀고 묵직이 앉아 있던 무언가가 폭발한 탓에 둑 무너진 댐처럼 눈물을 흘려보냈다.
시야로 장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남잔 숨죽이고 우는 나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날 응시해 왔다. 알 수 없는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덧그려져 있었다. 잭나이프를 쥔 손엔 힘이 조금 빠져 있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난 그 생각을 머릿속에 그려 냄과 동시에 지워 냈다. 날 곤죽 상태로 만들려던 남자이다. 고작 우는 모습 따위에 동요할 남자가 아니었다.
장 대표의 빈틈을 잡아낸 나는 그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양 손목이 모두 남자에게 붙잡혔다. 난 그에 흠뻑 젖은 뺨을 남자의 바지춤에 문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검은 정장 바지의 중앙이 더 새카맣게 물듦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부피를 키워 나갔다. 그간 좆질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맞는 듯했다.
“또 이런 식이지.”
“…….”
“이번엔 이걸로 봐주지 않습니다. 답은 무조건 들을 거예요. 무슨 수단을 쓰든지 간에.”
그가 일어나서 마루 위로 잭나이프를 집어 던지더니, 거침없는 손길로 벨트를 풀었다. 철컥, 차가운 금속성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그의 직원들은 등을 돌렸다.
남자가 지퍼를 내리자 발기된 좆이 퉁 하고 튕겨져 나왔다. 내 입 안으로 그걸 처넣더니, 허릴 움직여 댔다.
“…아아, …흐.”
“…후우.”
장 대표는 눈을 감고 내 목구멍의 조임을 느끼며 신음했다. 무식한 살덩어릴 미처 다 삼키지 못해 불룩하게 솟아난 뺨을 엄지로 꽉꽉 눌러 댔다. 빠른 허리 짓에 좆이 입 밖으로 퉁 하고 튕겨 나왔다.
넓직한 손으로 기둥을 방망이처럼 틀어잡곤 내 뺨을 철썩, 쳐 왔다. 정신이 얼떨떨해 눈앞이 새하얘졌다. 감각이 돌아오자, 육중한 쇠파이프가 뺨을 내려치고 지나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으흑!”
“…하아, 하아….”
이젠 목과 쇄골 사이에 발기한 좆을 넣고 비벼 대기 시작했다. 표면은 매끈하나 빳빳하기만 한 좆이 사정없이 얇은 피부를 문질러 댔다.
뺨엔 음모가 거칠게 비벼졌다. 사삭사삭. 사포로 매끈한 대리석 바닥 따위를 사정없이 문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안간 남자의 구둣발 옆에 놓여 있는 은색의 무언가가 두 눈으로 빨려 들어왔다. 난 젖은 속눈썹 사이로 그걸 바라보았다. 시계였다. 버클이 잠겨 있을 때면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쉬이 구분 지을 수 없는 그것. 우연처럼 중간 부분이 꼬여 있기까지 해 난 불현듯 그게 꼭 뫼비우스의 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순간에 모든 고리가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저 착각에 불과했음을 우매한 난 그제야 깨달았다.
장 대표가 문을 두드리듯 좆으로 내 입술을 쿡쿡 찔렀다. 입을 약간 벌려 혀를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검붉은 색 귀두를 내 혀에 비벼 왔다. 눈물 젖은 내 얼굴에 대고 비벼 댄 탓인지 샅이 축축했다. 눈으로 쏟아 낸 눈물이 다시 혀를 통해 몸으로 흡수된다는 게 뭔가 기묘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남자가 내 머릴 자신의 다리로 꽉 짓눌렀다. 좆이 매서운 기세로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머리 위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탄성을 자아냈다.
“…아아.”
별 기술 없이 혀로 빨고 있는 게 전부인데도 남자는 기꺼워했다.
눈을 감고 내 입 안을 음미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음영 진 얼굴에 짙게 떠올라 있는 쾌감 덩어리를 본 순간,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 살 몽둥이를 이대로 치아로 잘라 버리고 싶단 충동이 일었다.
그때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입꼬리가 날렵한 뺨에 긴 선을 그어 냈다. 냉정한 얼굴에 떠오른 비릿한 비소. 그건 허튼수작일랑 부릴 생각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난 보란 듯이 얼굴의 각도를 비틀었다. 귀두 바로 밑, 껍질 위로 드러난 매끈한 부분을 핥았다. 입 안에 있는 귀두가 움찔움찔 경련하더니, 프리컴을 주륵 쌌다.
“후우….”
그 찐득거리는 액체는 침과 뒤섞이지 못한 채로 입 안을 둥둥 떠다녔다. 코에 정제되지 않은 비릿한 냄새가 났다. 별안간 토기가 일었다.
네 발로 엎어져선 마룻바닥을 손으로 짚고 헛구역질을 해 댔다.
“…우욱.”
벌린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엎어진 상태로 고갤 들어 앞을 응시했다.
남자의 다리 사이로 직원들의 등이 엿보였다. 총 세 명이었는데, 동일한 복장을 갖춘 데다가 비슷한 분위기를 뿜고 있어 누가 누군지 쉬이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분명 들릴 텐데도 하나 같이 요지부동인 상태였다. 사건 현장에 쳐 놓은 바리게이트마냥 그 자릴 떡 지키고 있었다.
장 대표가 무릎을 굽히자, 시야가 가렸다. 그의 음영 짙은 얼굴이 두 눈 가득 자리 잡았다.
“지금 내 좆 빨다가 다리 사이로 뭘 보고 있는 겁니까.”
당장이라도 ‘감히?’라고 운운할 것만 같은 어조였다.
“영 정신 못 차리네, 이거.”
남자가 별안간 내 상의의 목 뒷부분을 꽉 움켜잡아 왔다. 그러곤 가공할 만한 힘으로 날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난 어미에게 목덜미 물린 새끼 늑대처럼 그대로 그의 손에 딸려 갔다. 반항하며 문틀을 잡고 버텨도 보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당해 낼 만한 힘이 아니었다.
등 돌려 서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문간을 넘고 집을 나섰다. 잭나이프에 종아리가 베인 직원이 절뚝거리며 나가는 걸 마지막으로 끼익, 철문이 닫혔다.
난 그의 손길에 의해 거실 한구석에 쓰레기봉투처럼 내팽개쳐졌다. 장판 대신 펼쳐 놓고 살던 이불 위로 내던졌는지, 바닥을 짚는 손바닥에 부드러운 천이 느껴졌다.
저벅저벅. 남자가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들어왔다. 일반인들보다 반쪽이 더 붙어 있는 어깨를 털어 내더니 재킷을 벗어 냈다.
“벗어.”
“…….”
일어서서 허릴 꽉 조이고 있던 벨트를 풀어 하의를 한꺼번에 내렸다. 발목에서 바지와 속옷이 똬리를 틀었다. 허릴 숙여 그걸 벗어 내자, 위에 입고 있던 점퍼가 하체를 조금 가렸다.
남자가 위를 올라타 왔다. 그에게서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 방금 피워서 그런지, 손님 접대를 위해 늘 뿌리고 다니던 향수 냄새를 덮을 만큼 조금 냄새가 강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뇌리와 폐부에 정확히 박혀 있는 향이었다.
남자가 내 목덜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입을 벌려 예전처럼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던 남자가 내 목 부근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별안간 내 눈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풋내.”
꺼먼 눈동자에 차가운 조소가 깃들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로 바투 붙여 왔다. 그의 날카로운 성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우뚝한 코와 내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자리에 놓였다.
“이것뿐만 아니라 네 냄새가 집 안 전체에서 진동해.”
말없이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집 안 전체를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리려다 간신히 참아 냈다고.”
“…….”
“돌아올 데가 있어야 서여원 씨가 능히 기어들어 올 테니까.”
장 대표에게서 모든 알들을 입 안으로 꿀꺽 삼켜 넣고 둥지 안에서 새를 기다리며 요요히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대체 왜.”
이 남자는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 남자라면 하룻밤 상대야 돈 쓰지 않고도 유혹해 낼 수 있을 거였다. 근데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뇌리에 가득히 떠오른 물음들은 예고 없이 닥쳐온 고통에 깡그리 묻혀 버렸다.
“…으흐윽! 아흣!”
남자의 좆이 귀두부터 생살을 찢고 들어왔다. 꽤 오랫동안 원래의 제 기능만 수행해 오던 주름들이 구멍을 파고 들어오는 좆에게 자릴 내어 주기 위해 공간을 늘려 댔다. 바람 불어 넣은 풍선처럼 구멍 안이 부풀었다.
남자가 허벅지를 누르며 종용했다.
“힘 빼.”
난 고집을 부리며 둔부에 바짝 힘을 주고 있었다. 남자가 중지와 약지를 붙이더니 내 입 안으로 밀어 넣어 왔다. 손끝이 내 목젖을 치든 말든 상관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가락들을 넣었다가, 다시 뺐다. 마치 펠라를 시키는 듯했다.
목구멍이 막히니 자연스레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침을 줄줄 흘려 대며 캑캑거리자 남자가 종용했다.
“숨 쉬고 싶으면 힘 빼.”
그의 고압적인 명령을 따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호흡이 딸려 머리가 슬슬 아프기 시작하던 나는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밀어 올렸다. 그러나 구멍은 반 이상의 진입은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안이 미친 듯이 좁고 뻑뻑했다.
“…흐읏, 으윽!”
원래 삽입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기에 구멍에선 그 어떠한 윤활제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인성 나쁜 장 대표는 신경질을 내듯 다시 한번 허리 짓을 했다.
“…하으윽, 흐응, …흑!”
오히려 몸이 수축되며 구멍이 한층 더 오므라들었다. 내 등에 치인 엄마 화장대 위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병이 하나 데구루루 굴러와 바닥 위에 떨어져 있던 내 손에 맞았다. 옆 눈으로 보니 엄마가 쓰던 로션 통이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 그걸 쥐어 들더니, 뚜껑을 돌려 땄다.
“참 까다롭기도.”
그가 내 허벅지 한쪽을 무릎으로 꽉 누르더니, 다른 쪽 발목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곤 내 다리 사이를 활짝 벌렸다. 다물려 있던 구멍이 한층 더 벌어졌다. 그에 이상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장 대표가 뚜껑을 열더니 듬뿍 뿌렸다. 민감한 곳에 차가운 액체가 닿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바로 싸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하.”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크게 부은 좆이 로션을 타고 들어와 구멍 안에서 자리 잡았다. 남자의 좆이 배 안에 가득 들어찼다. 배 안이 갑갑했다. 두께 굵은 구렁이가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오래 참았다는 듯,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허릴 움직였다.
“하아, 후으, 하….”
“으응, 흐윽, 흣, 흐으응….”
그의 걸 도로 뱉어 내려 안간힘을 써 대던 구멍은 곧 예전의 기억을 되찾아 냈다.
“으응, 흐읏!”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걸 반가워하며 안으로 끌어당겼다. 밑에서 찰박찰박하는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씨발?”
“…으흐, 으으, 흐으응!”
안을 치댈 때마다 발가락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박아 주면 좋아 죽겠다고 까무러칠 거면서.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굴어요.”
수치스러운 말에도 난 귀 끝까지 물들인 채로 신음했다. 오랜만에 일깨워지는 감각에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간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흐응, 흐윽!”
“서여원 씨 내가 묻잖아요. 하아, 그동안은, 어떻게, 처리했냐고.”
그가 민감해진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물었다.
“공사장 인부들한테 옷을 빨아 줄 테니 뒤를 쑤셔 달라고 했나?”
난 그의 어깨를 꽉 붙든 채로 도리질을 쳐 댔다. 안을 쑤셔 오는 쾌감을 이기지 못해 고갯짓을 해 댄 건지, 아님 그의 묻는 말에 대답을 한 건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시야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하체가 흐물흐물 녹고 자꾸만 눈동자에 힘이 풀렸다. 곧 눈이라도 뒤집어 깔 것 같았다.
“아님 윗집 사는 그놈한테 구멍 간지러우니 따 달라고 했어요?”
윗집에 사는 그놈이라면…. 내가 보고 놀랐던 그 중년의 남자를 말하는 거였다. 검은 옷을 입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랐던…. 장 대표는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문 몇 장 둔부 밑에 깔아 두고 손가락으로 쑤셔 댔나? 아니지, 그깟 신문지로는 어림도 없었겠네. 우리 서여원 씨가 물을 좀 싸야지.”
찰박찰박, 물기 어린 소린 계속됐다. 그의 좆이 쑤시고 지나간 배꼽 아래에선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머리가 자꾸 하얘졌다. 이대로 가다간 딱 죽을 것 같았다.
“이거 몸 떠는 거 보니까 곧 싸겠는데.”
그의 손에 잡혀 있는 발목을 빼내려 안간힘 썼다. 남자는 성가신지 이마에 인상을 썼다가, 내 발목을 아예 자신의 어깨 위에 걸쳐 올렸다. 자연적으로 하체가 들어 올려져 그의 것이 한층 더 깊게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공격은 계속됐다. 안을 푹, 푹 찍어 댔다. 싸늘한 공간 안에 헉헉대는 두 개의 신음 소리가 얽힌 채로 울려 퍼졌다.
“…아흐으, 응!”
결국 난 장 대표의 밑에서 발작하며 오르가즘에 올랐다. 눈앞이 새하얗게 날아가더니, 몸이 일순간 돌처럼 굳었다. 이윽고 남자에게 박히며 섰던 자지의 선단 끝에서 정액이 후두둑 쏟아졌다.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나는 그의 굵직한 팔뚝을 부여잡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 했어요?”
남자는 빠르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내 구멍에 대곤 좆질을 이어 나갔다. 빠르고 강하게 안을 푹푹 쑤셨다. 방금 사정을 한 터라 한참 민감해져 있던 나는 몸을 바르르 떨어 댔다.
“아, 그만… 으흑, 그만.”
물론 장 대표는 이런 부탁 따윌 들어줄 남자가 아니었다. 제멋대로 맘껏 안을 들쑤시다가 한순간 모든 동작들을 멈췄다. 남자가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동시에 구멍 안에서 뜨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으읏, …흐응!”
울컥, 남자의 요도에서 뿜어져 나온 정액이 구멍을 척척하게 적셨다. 민감해진 구멍은 그 자극에도 쾌감을 느꼈다. 남자가 정액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안에다가 배출하려 허릴 흔들어 대자, 또 한 번 오르가즘이 들이닥쳤다.
“아흐응… 아흑!”
“하아, 흐….”
머리로 콸콸 붓는 쾌감에 완전히 휩싸였다. 사지를 버둥거리며 바르작거렸다. 여운에 손끝이 다 바들거리며 떨렸다.
눈을 뜨자, 마찬가지로 쾌감에 두 눈이 혼탁하게 얼룩져 있는 장 대표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더럽게도 빠르네.”
장 대표가 두어 번 허리 짓 하자, 사정으로 발기가 풀렸던 남자의 좆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내 집으로 옮길 겁니다.”
“…흐으, 흣”
“거기에선 주는 밥이나 먹으면서, 입혀 주는 옷 입고, 쑤셔 넣어 주는 돈 받으면서, 구멍이나 벌려 주며 살아요.”
“으흐, 흐으읏!”
안에서 물기 젖은 대걸레를 땅에다 대고 푹푹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기 젖은 땅을 양발을 번갈아 가며 연신 짓밟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라도 딴생각 품었다가는, 서서히 죄어 들어가선, 종내엔 오줌 질질 싸며, 내 다리 사이로 돌아오지 않고는, 한 시도 못 견디게 해 줄 겁니다.”
“…하으, 하, …흐으응!”
장 대표와 한차례 더 배를 맞췄다. 헐떡거리는 숨을 뱉으며 개처럼 붙어먹었다. 남자가 내 골반을 손으로 잡아 왔다.
“…흐윽, 흣.”
“…후우, …하.”
둔부에 정장 바지가 쓸려 따끔했지만. 인간의 몸은 원래 한 번엔 하나의 고통밖에 느끼지 못하게끔 설계되어 있는 터라, 남자의 걸 배 안에 넣고 있는 상황에선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미 두 번의 사정을 한 탓에 세 번째엔 사정에 이르기가 쉽지 않았다. 힘겨워서 밭은 숨을 내쉬며 얼른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하읏, 흐응, 하아…!”
“…흐으, 후우, 하….”
둔부가 남자의 샅과 맞닿아 철썩철썩, 하는 소리를 냈다. 몸이 빠르게 들썩들썩거렸다. 세 번째 오르가즘은 날카롭고 강했던 좀 전의 것들과는 달리 부드럽고 길게 날 덮쳐 왔다.
공중에서 헛바퀴를 돌던 자지가 까딱거리며 남자의 셔츠 위로 마지막 정액을 뿜어내는 것까지 보고 바닥 위로 쓰러졌다. 철근처럼 육중한 무게를 가진 장 대표의 커다란 몸이 내 위로 쌓였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벽에 걸려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워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촐하게 구색을 맞추려 찍은 부모의 결혼식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 몸을 빚어낸 자들의 네 개의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남자와 몸을 섞었다. 이상하리만큼 뜨끈한 공기와 남자에게서 나는 수컷의 냄새가 별안간 치욕스러웠다.
수치를 모르는 남자는 픽 웃더니 조금 쉰 목소리로 지껄였다.
“어머니가 미인입니다.”
…미친 새끼.
장 대표가 그때까지도 내 안에 들어와 있던 좆을 뒤로 물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탁으로 손을 뻗더니,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하나 가져왔다.
자신의 옷에 묻은 내 정액을 대충 문질러 닦아 내곤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왔다. 그에 난 당연히 다리를 오므리려 들었다. 남자는 그 특유의 고상한 말투로 지랄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 다릴 강압적으로 벌리더니 허벅지에 묻어 있는 자신의 정액을 문질렀다.
허벅지에 머물러 있던 손길은 둔부를 타고 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남자의 무심한 손길이 닿자,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구멍이 제멋대로 벌름거렸다. 입 안에선 제멋대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남자가 턱을 꽉 물더니 음산하게 지껄였다.
“또 따이고 싶은 거 아니면 입 다물지.”
난 아랫입술을 꽉 물고 신음을 참아 냈다. 남자는 한껏 예민해져서 부어 있는 곳을 휴지로 문질러 대다가, 이내 제 손가락을 안에 넣어 쑤셔 댔다.
“…으흐읏.”
깊은 곳을 자극당한 구멍이 멋대로 장 대표의 손가락을 조였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안에 있던 정액이 바깥으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안을 들쑤셔 대던 남자는 손가락을 빼서는 신경질적으로 정액이 묻어난 휴지를 뭉쳐 바닥에 버렸다.
“씨발.”
상스러운 욕을 지껄인 남자는 돌아가선 찢어질 때까지 박아 댈 거라 지껄였다. 그러고선 날카롭게 찢어진 눈으로 날 내려다봐 왔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이에요.”
“…….”
“내가 옷도 입혀 줘야 하나.”
난 그때까지도 사지를 늘어뜨린 채 누워 있다가, 남자의 말에 퍼뜩 어깨를 떨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바지를 껴입고는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난 당장이라도 풀썩 쓰러질 것 같은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남자가 쯧쯔, 혀를 차더니 내 몸으로 손을 뻗어 왔다.
“갓 태어난 사슴 새끼처럼 벌벌 떠네.”
순식간에 몸이 바닥에서 부웅 떠올랐다. 남자가 나를 바닥에서 번쩍 들어 올린 거였다. 좀 전까지도 힘을 써 댄 남자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날 안은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루를 내려와 마당을 가로지르더니 집 밖을 나왔다. 그러더니 날 한 번 고쳐 엎고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이 상황이 지나치게 현실감 없어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계단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끈한 검은색 세단 하나가 계단 밑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 마을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하얀 가스를 연신 내뿜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까 본 직원들 중 하나가 차 옆에 서 있었다.
직원은 장 대표를 발견하자, 자세를 고쳐 잡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남자는 그 차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난 남자에게 산송장처럼 안겨서는 딸려 갔다. 동네 사람들이 봤다면 새벽에 어느 미심쩍은 사내가 시체를 운반하고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는 장면이었다. 만약 남자가 날 그대로 트렁크에 실었다면 필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갈 거였다.
그러나 장 대표는 날 뒷좌석에 실어다 놓았다. 날 안으로 밀어 넣은 남자가 올라타자 탁, 문이 닫혔다.
차는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잘 빠진 차가 매끄럽게 마을을 빠져나갔다.
마을 위로 달이 창백한 빛을 내뿜으며 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걸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몸에 힘을 풀고 천천히 시트에 고갤 댔다. 피곤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만큼.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 뜨는 힘과 몇 번 힘겨루기를 해 보다가, 이내 패배를 인정하곤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곧 희미하던 정신이 까무룩 저편으로 날아갔다.
***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몸에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난 손을 휘둘러 그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쟁반처럼 차갑고 널찍한 손은 내 손을 올가미처럼 휘어잡곤 내 몸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훑었다.
난 미약하게 몇 번 더 의미 없는 저항을 해 보다가, 다시금 수마의 세계로 인도되었다.
***
천천히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먹색의 천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아직 잠에서 덜 깨 흐릿한 정신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맞춰 나갔다.
“…아!”
그러다가 매트리스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난 뭔가를 찾기 위해 머릴 흔들며 방 안을 홰홰 둘러봤다. 이 커다란 방 안엔 그 크기가 무색할 만큼 침대와 옷장 같은 가구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구조는 남자가 머물던 골프장 펜트하우스와 비슷했지만, 인테리어나 가구의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랐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던 나는 곧 이곳이 원래 그가 살던 곳임을 눈치챘다. 시선이 벽 한쪽에 놓여 있는 금고로 빨려 들어갔다. …설마 저건? 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금고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있던 비밀번호를 입력해 넣었다. 금고에서 띠리릭. 전자음이 들리더니 도어 록이 풀렸다. 역시나 호텔에 있었던 내 금고가 맞았다. 난 얼른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안엔 검은색 가죽 지갑만이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난 천천히 손을 내뻗어 지갑을 손에 쥐었다. 가죽 지갑에 난 잇자국…. 지폐 칸을 열어선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 담겨 있던 지폐를 빼 들어 액수를 셌다. 액수가 내가 갖고 있던 것과 딱 맞아떨어졌다.
“…….”
비밀번호는 금고에 달려 있던 CCTV로 알아낸 거겠지. 참 지독한 남자였다, 여러모로.
불현듯 철렁, 손등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 이질적인 느낌에 아래를 홱 내려다보았다. 어슴푸레한 시야로 손목에서 은색의 무언가가 번뜩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다음 차례로 손가락들 끝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들이 들어왔다. 마감 처리가 섬세한 게, 아무래도 전문의의 도움을 받은 듯했다.
게다가 옷 또한 새것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정액 특유의 찝찝함과 윤활제를 대신해 안에 넣었던 로션의 불쾌한 감촉 또한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몸을 아예 씻긴 듯했다.
몸에 손을 대는 와중에도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잠이 들어 있었던 거였다. 진짜 제정신인가…? 자괴감에 두 손에 얼굴을 푹 묻었다.
“…하아.”
몇 시나 되었을까. 맞은편 벽에 난 직사각형의 창문을 노려보았다. 바깥 하늘은 옅은 먹물빛으로 어두웠다. 눈을 감기 바로 직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색감이었다.
몸이 뜨끈한 걸 보니 고작 몇 시간 잔 건 아닌 것 같고. 하루를 꼬박 잠으로 때운 듯했다. 불면증에 극강의 체력 소모까지 더해져 몸이 완전 만신창이였었다.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그래서 부드러운 고급 차 시트에 몸을 대자마자,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잠이 들었었다.
…어차피 장 대표가 모든 걸 알아챈 마당이니 체념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핏줄이 새파랗게 불거질 정도로 팽팽히 당기고 있던 신경 줄은 잠시 놓고, 눈꺼풀을 덮어 버린 건지도. 눈앞에 닥친 상황을 잠시라도 외면하고 싶어서. 하, 헛웃음이 터졌다. 언제 잡힐지 몰라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지냈는데. 이렇게 잡혀 오니 아이러니하게도 차라리 불안이 덜했다.
“…….”
이제 탈출은 거의 포기한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엄마의 행방을 찾는 게 더 우선이었다.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전화기로 시선이 쏠렸다. 수화기를 집어 올려 귀 옆에 붙이고는 붕대 감긴 손끝으로 숫자 ‘1’을 먼저 두 번 눌렀다. 이제 그 바로 옆에 있는 숫자 ‘2’만 누르면 되는 상황인데. 손가락이 종착지에 착륙하지 못하고 공중에서만 자꾸 겉돌았다.
…제복쟁이들. 그 어리석은 놈들이 과연 엄마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러다 딱 죽겠지 싶어 다급히 이 번호로 신고했을 때. 놈들이 어떻게 굴었더라? 늑장을 부릴 대로 부리다가 술에 취한 아버지가 곯아떨어진 이후에야 출동했지 않았던가? 폭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엄마와 내 얼굴을 보고도 그대로 돌아갔었잖아. 그날 술 깬 아버지에게 엄마와 난 다시금 얻어맞았다. 도움을 요청해 봤으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역시 놈들을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재수 없으면 나만 걸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들어가 버리면 엄마는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도는 단 하나.
“…….”
이번엔 시선을 닫혀 있는 문으로 돌렸다. 이 안과 마찬가지로 정적만이 흐르는 바깥을 짐작해 보다가,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가 펼쳐졌다. 복도 저 끝에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저기에 장 대표가 있는 듯했다. 육감이 그렇게 말해 왔다.
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달칵 소리에 바닥 위의 그림자가 동요했다. 내 인기척을 눈치챈 듯했다. 천천히 발을 굴렀다.
이 복도 끝에 있는 저 남자는 나의 모든 걸 절대자처럼 꿰뚫어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내가 도망쳐 나간 곳을 끈질기게 캐냈으며, 내 본명까지 알아차리고, 내가 원래 살던 집을 점령하고 있었다. 내가 마치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진절머리가 난다.
손가락 마디처럼 짧고 주름진 내 인생을 가벼운 희극쯤으로 여기는 장 대표에게 거부감을 아주 강하게 느꼈었다. 이건 아주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새가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뱀을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거였다.
직접 두 발을 움직여 남자에게 향하고 있는 지금도 확신이 없었다.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뒤에 낭떠러지를 두고 있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에게 향하는 것뿐이었다.
나의 모든 걸 알아내 내 숨통을 바싹 조여 온 남자이니, 그 누구보다 확실히 찾아내 줄 거였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벽을 끼고 돌자, 남자의 커다란 등이 보였다. 그가 내 쪽은 보지도 않은 채로 나직이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습니다.”
깨어난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어조였다. 그럼에도 방치해 두었다는 건 내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했던 거일 터. 내가 실컷 고민하고, 흠씬 괴로워하다, 결국은 자기 뜻대로 내가 몸을 움직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겠지.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술과 담배를 양분으로 삼는 것 같은 남잔 우두커니 앉아 한 손엔 잔을, 다른 손엔 담배를 붙들고 있었다.
난 그의 앞에 가서 섰다. 그의 써늘한 두 눈이 내 얼굴을 타고 내려가 목을 훑고 허리를 매만졌다가, 허벅지께에 닿아 왔다. 내가 입은 셔츠의 끝자락이 끊기는 부근이었다. 그의 옷을 입혔는지 셔츠는 제법 길게 내려와 허벅지를 덮었고, 바지는 바닥에 끌렸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물러야 할 조무래기가 제 발등을 찍고 도망쳤으니 분노가 극에 달했을 거였다. 그런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난 한참을 손가락 끝만 꼼지락거리다가 운을 뗐다.
“…대표님.”
그가 미려한 눈썹을 휙 추켜올렸다가 다시 놓았다. 어디 말해 보라는 듯이.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장 대표가 하아, 낮게 조소하더니 턱을 느긋이 기울였다. 그가 내 턱을 잡아당기며 지껄였다.
“이젠 부탁까지. 서여원 씨 참 뻔뻔하네.”
“…….”
“목줄까지 풀어 놓고 도망가 뒈지게 성가시게 해 놓곤 이젠 부탁을요.”
그가 술병을 기울여 잔에 액체를 따르며 비아냥거렸다. 신랄한 어조가 뺨을 후려쳐 왔다.
“맹랑한 게 대단하네, 아주. 이번엔 또 내게 무얼 해 주려고요. 이젠 바지춤에 손 뻗어 오는 걸로는 모자라지 않나.”
“…도와주세요.”
내 메마른 입술 새로 흐릿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종전에는 여러 갈래로 찢어져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지만 남자는 분명히 들은 듯했다. 그는 잡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으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내가 왜 배은망덕한 서여원 씨를 도와야 합니까.”
난 좀 전보다 조금 더 명확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신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내가 서여원 씨의 뭘 믿고.”
“…더 이상 도망칠 데가 없습니다.”
“더 이상 도망칠 데가 없어서 날 찾아온 거라고.”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휘어졌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분위기가 조금 유해질 법도 했지만, 오히려 날 둘러싼 긴장감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하얀 손가락 끝으로 셔츠의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하얀 뼈들이 불거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와 붙는 게 느껴졌다. 시선엔 여전히 분노가 서려 있었지만, 난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닿아 왔다는 것만으로도 일말의 용기를 얻었다.
“…대표님, 제 손가락들. 왜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다 하셨죠.”
그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 얘기 해 드린다면…. 도와주실 건가요?”
툭, 툭, 툭. 그가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영겁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날 애태우는 시간마저 그의 계산속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조금 뜸 들인 그가 재 묻은 음성으로 지껄였다.
“어디 한번 들어 보고 결정하죠.”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여태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는걸요. 대표님 같은 분께 말씀드리는 건 더더욱이 위험한 일입니다.”
그가 날 꿰뚫어 볼 듯 직시했다. 그러다가 물었다. 이유가 뭐냐고.
“제가 대표님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이름 석 자 정도가 전부이니까요.”
그마저도 장 대표의 부하가 명함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였다. 보통은 고객을 맡는 캐디들한텐 간단한 정보라도 전달되기 마련인데, 그는 회원 명부에서조차 ‘장 대표’였다. 다른 인적 사항들 또한 대부분 공란으로 남겨져 있었다. 김미란과 같은 VIP들 또한 그의 실명을 입에 담지 않았다. 초반엔 그 이유를 몰랐으나, 후반에 가서는 자연히 알아챘다.
권력의 발호로 쓰이고 있는 골프장. 그곳은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이자를 공급책으로 삼고 있는 VIP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한편, 훗날에라도 꼬리가 잡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를 안개 속에 있는 인물로 두었다. 그 때문에 회원을 관리하고 있는 사무실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남기지 않고 있는 거였다.
그 결과로 난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전무했다. 이름 석 자와….
“…그리고.”
난 장 대표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흘깃했다. 저 반지에 얽힌 남자의 과거 빼고는. 남자는 내 시선으로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긴밀하게 눈치챘다. 그가 내게로 손을 올리더니, 손등으로 내 턱을 쓸어 왔다. 차가운 금속의 물질이 피부에 닿아 오자 뒤 목에 한기가 느껴졌다.
“좋습니다. 단,”
부러 한 템포를 쉬는 그 때문에 난 잠시 숨을 멈췄다.
“서여원 씨가 하는 말에 한 치의 거짓부렁도 없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을 말한다거나, 숨긴 구석이 발견된다면 이 일은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난 결연하게 고갤 끄덕거렸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물었다.
“부탁은…. 그 어떤 거라도 괜찮은 건가요?”
“그럴 리가.”
아하, 그의 입술이 낮은 파열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두꺼운 그의 흉부가 들썩였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세 치 혀가 문장들을 매끄럽게 빚어냈다.
“나라고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낸다거나 하는 건 할 순 없지 않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에게 미지의 세계를 설명해 주는 친절한 어른인 양 굴다가, 잔을 기울였다. 비율 좋은 입술로 술을 양껏 취했다. 남자가 술잔을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려놓을 땐, 얼굴에 덧그려져 있던 거짓 미소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그가 술로 젖어 한층 더 깊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다른 이가 한 말이었다면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터지만. 지금은 발화자가 그 누구도 아닌 이 남자였다. 나는 그가 쏟아 낸 모든 문장들을 내 골수에 새겼다. 장 대표라면 엄마를 찾아줄 거라는 확신이 이제 아주 제대로 섰다.
난 몇 번을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대다가, 힘겹게 운을 뗐다.
“…이건. 그러니까 이건, 제가 내몰려서 스스로 해 놓은 짓거리입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내 말을 되풀이했다. 내몰려서.
“무엇에 내몰렸길래.”
“…….”
남자가 물었다. 난 또 한참 동안이나 말을 머뭇거렸다. 이미 물꼬를 틀어 놨음에도 내가 지금 이 말을 입 밖으로 뱉어도 되는 게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남자는 가라앉은 눈으로 날 잠자코 기다리고만 있었다.
마침내 입술이 트였다.
“…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속내 아주 깊은 곳에다가 묻어 두는 걸로도 모자라, 그 위에 흙을 덮어 아주 견고한 무덤을 빚어 놓았던 그 얘기를. 너무나도 속을 짓눌러 가끔씩은 삽으로 뭉텅 퍼내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었던 그 얘기를 남자의 앞에서 시작했다.
“대표님이 오셨던 판잣집엔 총 네 명이 부쳐지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삼촌, …그리고 저.”
장 대표가 느지막이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지나치게 검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이 날 직시해 왔다. 늪 같은 눈동자 안에서 내 얼굴이 출렁거렸다. 난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아 남자의 축축한 눈을 피했다.
“아버지며 삼촌이며 둘 다 술과 노름에 미쳐 사는 인간들이라 집은 등한시했습니다. 그래도 삼촌의 경우엔 조금 나았어요. 일 년에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더듬더듬 한 글자씩 말을 이어 나가는데. 이젠 반쯤 덮인 눈꺼풀 위로 남자의 시선이 닿아 왔다. 돋보기로 모은 햇볕 밑에 놓인 듯 눈자위가 뜨거웠다. 내 눈은 속눈썹에 가려진 채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자주 집에 들어왔습니다. 엄마가 조금씩 벌어 근근이 먹고 사는 형편인데도 수치를 모르는 아버지란 인간은 집에 있는 거면 동전 한 닢까지 강탈해 갔습니다. 엄마가 거부할 때면 영락없이 매질을 행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 날엔 마을 사람들이 오늘이 판잣집 닭 잡는 날이라 불렀어요.”
내 두 눈동자는 집요한 시선을 피할 길 없어 정처를 잃고 공중을 헤매다가, 장 대표의 어깨 너머에 있는 벽에 종착했다.
“엄마 비명 소리가 닭 잡는 소리랑 비슷하다고 해서.”
벽엔 그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드리워져 있었다. 산줄기처럼 우뚝하게 솟은 코에 눈길이 이끌렸다. 가늘고 긴 막대 끝이 입술에 붙어 있다가 떨어졌다. 후우, 그가 뱉는 잿빛 숨이 예민하게 곤두선 내 귓가로 빨려 들어왔다.
“그래도 제가 머리 굵어지고 나서부턴 폭력이 서서히 줄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 머리가 굵어졌는데요.”
후우, 그의 그림자가 다시금 입술로 연기를 뿜었다. 까만 입술 끝에서 연기의 그림자가 풍선처럼 몸을 부풀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고등학생 때부터요. 어릴 땐 내내 앞줄에만 앉을 정도로 작았다가 그 이후로 급격히 컸습니다.”
장 대표가 담배를 물고 있어 불분명한 음성으로 혼잣말했다.
“그거 완전 애새끼였겠네.”
“…그래도 아버지도 나이가 드니까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습니다. 쩌렁쩌렁 고함치던 목소리엔 묵은 가래가 껴서 2절까진 하지도 못하고 쿨럭댔고, 힘이 약해지니 자연스레 폭력의 빈도도 줄었습니다. 그래서 곧 죽어도 가족은 모여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 말 따라 같이 살았습니다. …어떻게 어영부영.”
정말 어영부영이었다.
늙는 바람에 일용직 일에서도 밀려난 아버진 남아도는 시간을 몽땅 노름하고 술 퍼마시는 데에 썼다. 하우스가 그의 집이었으며, 일터였다. 술에 쩔어 도박장을 전전하는 늙은 살점. 사기도박 일당의 목표로 그보다 더한 안성맞춤이 없었겠지.
사기도박 일당은 초반엔 일부러 게임에 져 주었을 거였다. 돈에 눈이 먼 아버진 옳다구나 싶어서 신나서 배팅을 걸어 댔겠고, 일당들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질 몰락시켰겠지. 아버진 순식간에 잃은 돈을 복구하려 발버둥 치다가 일주일 만에 삼천 가까이 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자는 매달 백만 원. 빚쟁이들은 지독했다. 약속했던 날짜가 되면 이자를 꼬박꼬박 받아 갔다.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고 있는 나와 엄마는 그들에게 보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일이 터졌습니다. 상하차 일을 하고 있을 때 병원에서 전화가 한 통 왔었어요. 엄마가 위급하니 얼른 병원으로 오라고.”
그날도 딱 오늘처럼 기온이 싸늘했었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의 노름빚과 다음 학기 등록금을 충당하려면 미리, 미리 일해 둬야 하니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휘이잉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묵직한 상자들을 들어다가 트럭에 싣고 있는데.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었다. 지잉, 위잉. 지잉, 위잉.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울려 대는 통에 난 문득 불쾌한 기운을 느꼈다. 이만하면 보통 일이 있어 못 받겠거니, 하면서 연락을 기다리기 마련인데. 그땐 정말 쉼도 없이 울려 댔었다.
난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휴대폰을 확인했었다. 부재중 전화가 다수 찍혀 있었다. 모르는 번호들은 빚쟁이들이라 여겨 넘긴 뒤, 눈살을 찌푸리며 가장 최신 기록으로 떠 있는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요구할 게 있는 거겠지.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패악질을 부릴 게 분명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웅성대는 소음이 들려오더니 삼촌의 시큼털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어디냐.
난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
‘…저 지금 알바하는 중이에요.’
- 얼른 제일 병원으로 와라.
이맛살을 팍 찌푸렸다. 갑자기 병원은 왜. 술 마시고 자빠지기라도 했나 보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는 와중에. 삼촌이 뜻밖의 말을 꺼내 왔었다.
- 네 어미 때문에 지금 병원에 와 있다.
그렇게 말하는 발음이 불분명했다. 게다가 상당히 무미건조해 난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 네 어미 머리 깨져서 병원에 와있다고. 잔말 말고 얼른 와!
고함을 내지른 후,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그 이후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가쁜 숨을 내쉬며 어지러운 응급실 안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곡소리를 내는 사람들 사이를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침대 근처에 서 있는 삼촌의 벌건 얼굴을 발견했다. 잠시 멈칫했던 나는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자,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애써 부정해 봤지만,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건 분명 엄마였다. 송장이나 다름없는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얼른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까 엄마가 머리 깨진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머릴 부딪혔다고 들었어요.”
곁눈으로 장 대표가 내게로 손을 뻗쳐 오는 게 보였다. 그가 내 턱을 틀어쥐더니 제게로 고정 시켰다. 내가 제가 아닌 딴 곳에 눈을 두고 있는 걸 더 이상은 용납해 주지 않을 거란 손짓이었다. 남자의 인내심이 바닥난 듯했다. 고작 담배 한 개비 만에.
정신을 반쯤 잃은 채로 벌벌 떨고 있으려니까, 뒤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타났다. 난 소매로 눈가를 닦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엄마의 상태를 물었다.
‘저희 엄마 지금 상태가 어떤가요?’
의사는 대답을 하는 대신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 왔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어 상황이 꽤 심각함을 느꼈었다. 심장에 무거운 닻이 덜컹 내려앉았다.
의사는 진료실에서 맞은편에 앉은 내게 CT 사진을 보여 줬다.
뇌의 어느 부위를 펜으로 동그라미 치며, 여기 부분에서 피가 흘렀다고 했다. 딱딱한 무언가에 머릴 부딪혔을 거라고 말하며, 수술을 한다 해도 예후는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난 주먹을 꽉 쥐며 그래도 수술은 무조건 받을 거라 했었다. 의사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병원 측에서 수술 비용이라고 고지해 준 게 천만 원에 가까운 액수였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당연 수술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런 돈이 그때의 내겐 없었다는 거였다.
‘…….’
급한 대로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등록금을 돌려받았다. 통장에 있는 돈까지 벅벅 끌어다 모아 봤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삼촌 새끼는 어차피 가망 없는 일이라며 마지막 인사나 하라고 중얼거리다가, 내 서슬 퍼런 눈빛에 흠칫하곤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꼬깃거리는 돈을 꺼내 내게 내밀었었다. 오만육천 원. 그게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 사실상 남과 다를 바 없는 친척에게도 도움을 요청해 봤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런 일이 있었냐며 측은한 시선을 보내 올 뿐, 실상 도움을 주진 않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비라곤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고군분투하는 사흘 동안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병원비다, 입원비다 해서 이천만 원 정도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아버지란 작자는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어요.”
장 대표가 낮게 읊조렸다.
“이천만 원.”
“…여기저기에서 돈을 끌어다 왔습니다. 그래도 부족해서 일수를 써 볼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빚이란 게,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삽시간에 산더미처럼 불어나 버리는 거니까. 최대한 제 손에서 해결해 보려고 했어요. 결국 친척에게서 부족분을 받아 수술할 수 있었어요….”
수술 날짜는 점점 가까워져 갔다. 난 매일같이 친척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녔다. 그에 친척들은 이거 받곤 다신 찾아오지 말라며 내게 적선하듯 돈을 내던졌다.
불필요하게 엿가락처럼 설명을 늘어트렸다. 말 사이로 내뱉는 호흡이 불안정했다. 남자 또한 그걸 느꼈는지, 턱을 비스듬히 눕혔다.
“엄마는 무사히 수술받았습니다. 근데 예후가 좋지 않아서 그때부터 병원 신세를 져야 했어요. …누워 있는 엄마 옆에서 간호, 간호하다가.”
갑자기 손가락 끝에서 불쏘시개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신음을 참아 내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손이 습관처럼 지문을 찾아 나섰다. 손가락들이 흉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못살게 굴었다. 손끝을 이용해 강박적으로 매듭을 득득 긁어내자 남자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간호하다가.”
남자가 내 두 손목을 한꺼번에 확 채어 왔다. 포승줄에 두 손목이 묶인 죄인처럼 그에게 고스란히 손을 내준 상태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어느 날 집에 돌아갔는데. 당연히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집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어요.”
운을 띄우자, 몸이 순식간에 그때의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끌려 두 발이 문간을 넘어섰다. 쩌렁쩌렁,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당 전체를 울려 댔다.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은 이에 대한 분노에 의미 모를 불안감이 사리사리 뒤엉켜선 복잡한 감정을 이루어 냈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까워져 가면 갈수록 정체 모를 불안감은 몸집이 불어났다.
“제 아버지였습니다. 빚쟁이랑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낮 동안엔 엄마의 곁을 지키다가, 새벽엔 일을 나갔다. 중환자실에선 하루에 40만 원이라는 빚이 차곡차곡 쌓여 나갔다. 내가 자릴 비웠을 땐 경희댁이 와서 엄마의 곁을 지켜 줬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어느 날은 여느 때처럼 병원으로 퇴근한 내게 와서 그러셨었다.
‘아가.’
‘…….’
‘오늘은 집에서 좀 씻고 와. 오늘은 내가 병원에서 잘 테니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엄마를 한 번 들여다보았다. 며칠간 잠들지 못한 탓에 사지가 다 뻐근하고 눈알이 뻑뻑했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께 고갤 꾸벅 숙여 인사를 드리곤 집으로 돌아갔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추를 달아 놓은 듯 축축 늘어졌다. 이미 너무나도 지친 상태였다. 내일부터 다시 달리기 위해선 잠이 필요했다.
그러고 집에 두 달 만에 찾아갔었다. 기력 하나 없는 손으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이미 문이 반쯤 열려 있음을 발견했다. 의아해하던 찰나에 ‘…아니, 씨펄. 좀만 더 기다리라고!’ 집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였다. 난 흠칫 놀랐다가, 이내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개새끼. 그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던 작자를 향한 분노가 들끓었다. 전화라곤 모조리 피하다가 이제서야 얼굴을 내비친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문간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의 철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 글쎄! 누가 돈 떼어먹는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아무래도 빚쟁이인 듯했다. 빚쟁이들은 아주 악질이었다. 아버지의 빚들은 대부분 노름질에서 기인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판을 짜고 사람들을 빚더미에 앉게 만드는 족속들이라 들었다.
‘씨이벌, 갚는다니까 그러네!’
휴대폰을 벽에다 내리쳤는지, 파열음이 났다. 굉음에 이어 아버지의 분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씨발.’
아버지는 그 안에서 뭔가를 찾는 듯, 창고 안을 뒤집어 놓았다. 우당탕, 질서 없이 쌓여 있는 물건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열린 문틈 새로 저주를 퍼붓듯 뇌까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매 음절, 음절마다 싸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거리가 제법 있어 정확히 뭐라고 하는 건지 그때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난 왠지 발소리를 죽여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대한 인기척을 죽인 후, 계단을 밟아 천천히 올라갔다.
웅웅거리는 소리로 들리던 목소리가 한결 명확해졌다.
‘…아주 목숨 줄도 질긴 년!’
그러고 보니까. 그러고 보니까 뭔가 이상했다. 평소 우리 가족은 2층 계단엔 잘 올라가지 않았었다. 엄마의 경우엔 다리까지 약해 더욱더 오를 일이 없었다.
물론 몇 번 오르는 걸 본 적은 있었다. 아직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자다 말고 이부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더니 화장대에서 뭔갈 빼내 계단을 올라갔었다. 애비는 또 온데간데없던 날이라 혼자 방 안에 남아 있던 난 어둠에 덜컥 무서워져 엄마를 따라 밖으로 나섰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계단을 내려오는 엄마에게 방금 그건 무엇이냐 물었었다. 엄마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그랬었다.
‘우리 여원이는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엄마처럼…?’
엄마처럼 산다는 게 뭘까. 웅얼대며 묻는 나를 엄마는 그냥 웃으면서 꼭 껴안았었다. 그러곤 아버지에겐 꼭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리 말하는 엄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난 어렸을 때도 아주 귀담아들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입 밖에 그 일을 내뱉지 않았었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다시 한번 귀를 때려 왔다.
‘…아주 목숨 줄도 질긴 년!’
이내 아버지가 창고 안에서 나왔다. 가슴팍 안쪽에 무언가를 밀어 넣으면서. 그러다가 계단에 정승처럼 서 있는 날보곤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여원아.’
난 조용히 아버지를 입에 담았다.
‘아버지.’
내뱉고 나니 스스로 듣기에도 써늘하기 그지없었다. 평소라면 애비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귀싸대기를 얻어맞았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아버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눈길을 피했다. 꼭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여기서 뭐 하세요?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아버지에게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버진 또 한 걸음 도망쳤다. 난 다시 한 걸음 쫓아가며 아버지 품 안을 눈짓했다.
‘그건 뭐예요?’
아버지가 얼굴을 마구잡이로 구기더니, 입술 한쪽을 비틀어 비열하게 조소했다.
‘네 애미가 숨겨 둔 통장이다.’
난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버진 다시 한번 품을 추스르고는 내 옆을 지나쳤다.
‘망할 년, 이런 돈이 있었음 진즉 내놓았어야 할 것이지. 어디 쥐새끼처럼 서방 몰래 이딴 짓거리를 벌이다 걸려, 걸리기를!’
그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기에 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입가를 움직였다.
‘…아버지, 엄마 지금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아버지가 퍼뜩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에 난 짧게나마 안도감을 느꼈었다. 엄마가 현재 아프단 사실에, 그를 동요했단 사실에 서럽지만 안심했었다.
‘뭔가 단단한 거에 머리가 부딪혀서 피가 흘렀대요. 바깥으로도, 그 안으로도.’
아버진 말이 없었다. 당시의 내 쪽에서 볼 수 있는 거라곤 아버지의 뒤통수뿐이었다. 난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제발. 제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기분 나쁘고도 불쾌하기 그지없는 가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근데 경희댁 아주머니가 있죠. 엄마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던 그날. 아버지랑 엄마 싸우시던 소리 듣고 벌벌 떨고만 있다가, 엄마 꽥 소리 지르는 거 듣고는 저러다간 진짜 사람 죽지 싶어 와 봤었대요.’
‘…….’
‘엄마는 계단 밑에 굴러떨어져서는 피 흘리고 있었고, 아버진 이미 온데간데없었다던데요.’
내 희미한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갈랐다.
‘…경희댁 아주머니가 거기까지 말씀하시곤 더 이상 말을 못 이으시던데.’
‘…….’
‘절 바라보던 눈빛이 꼭….’
아이고, 얘 안쓰러워서 어쩌나. 어미는 저렇게 머리 깨져 누워 있고, 애비는…. 애비는. 난 다시 한번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렇게 덧붙이며 아버지의 팔을 잡아당겼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아버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냉혹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그가 지껄였다.
‘원래 명이 짧은 년이야.’
‘…….’
‘여편네나 아들내미 새끼나 가장 알기를 개떡같이 아니까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이지.’
그러고는 카악, 속에서 가래를 끌어다 모아 바닥에 탁, 하고 뱉었다. 마치 불결한 걸 자신의 몸에서 떼어 내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끝에 매달려 있던 액체 방울들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버지가 끔찍하게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어차피 곧 뒤질 년이니까 너도 허튼짓 말고 가서 마지막 인사나 해.’
그러곤 계단을 내려갔다. 난 고갤 돌려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아버지의 무정한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시금 눈앞에 경희댁 아주머니가 날 바라보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고, 얘 안쓰러워서 어쩌나. 어미는 저렇게 머리 깨져 누워 있고, 애비는…. 애비는 어미 죽인 살인자고.
난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때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창고의 문을 고정해 놓은 벽돌이 들어왔다. 땅에서 그걸 주워 든 건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 그걸로 아비의 뒤통수를 힘껏 내려찍은 건 내 안에서 들끓어 오르던 복수심이 한 일이었다.
‘…크억!’
머리에 충격이 가해진 아버지의 두 눈이 날 향해 크게 뜨였다. 그의 육중한 몸은 계단에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아버지가 계단 위를 데굴데굴 구르더니, 맞은편에 있는 벽에 머릴 맞고는 까무룩 쓰러졌다.
울컥, 그의 깨진 머리가 물 뿜는 고래 등처럼 피를 쏟아 냈다. 엄마와 내게 무차별한 폭력을 퍼붓곤 했던 그의 굵은 손가락들이 땅 위에서 부르르 떨렸다.
그날에 대해 설명하는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말꼬리가 희미해져 가는데도 남자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도망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끝맺었다. 난 안도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땀이 배어났는지 손바닥 안이 축축했다. 닦아 내고 싶었지만 남자에게 양손이 잡혀 있는 탓에 고작해야 손끝만 움직여 볼 수 있었다. 붕대에 감겨 있는 손끝들이 해파리 다리처럼 공중에서 너울거렸다.
“삼촌이 지문을 지워준답시고 사포로 득득 문질렀던 바람에 죄다 뭉그러져 있었는데…. 이것도 어쨌든 살점이다 보니까 재생은 되더라고요, 그래서….”
날카로운 눈빛이 날 쏘아봤다.
“그래서 공사장 판에서 훔친 사포 쪼가리로 지문을 문질렀다고?”
이어진 남자의 물음에 나는 목 안으로 쓴물을 삼켜야했다. 사포 쪼가릴 주머니에 쑤셔넣기 전, 혹시 들킬까 싶어 몇 번이나 주변을 살폈었는데. 난 그 순간까지도 남자의 시선 안에 있었다. 말없이 탄식하는 날 앞에 둔 남자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다고 이게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서여원 씨 삼촌은 그렇다쳐도, 서여원 씨는 그걸 몰랐을 리 없을 텐데.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잖아요?”
“…네.”
하얀 손들이 안으로 곱아들어 갔다.
“이건 그 때의 기억이 날 때마다 제 손을 괴롭혀서 남은 상처예요.”
“…음.”
내 손목을 제 손에 붙든 남자가 여상히 목을 울렸다. 나는 벽에 두고 있던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발가락들도 마찬가지로 안으로 한껏 말려 있었다. 이대로 땅 밑으로 꺼지고 싶었다. 정 안 되면 식탁 밑으로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래서?”
어깨를 밀어오는 물음에 되묻자,
“네?”
“계속 말해 보라고.”
더 말해 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어름어름 말을 흐렸다.
“…이게 끝입니다.”
이제야 이야기에 마침표가 찍혔음을 깨달은 장 대표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지.”
담배까지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고갤 내둘렀다. 아니죠, 그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잖아요.”
난 조금 당혹스러워져서 그에게 물었다.
“…어떤.”
“어떤 얼굴을 달고,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말해야죠. 어떤 생각으로 아비를 처리했는지, 어떻게 처리했는지도요.”
“…….”
“그런 중요한 걸 생략해 버리면 이 얘길 굳이 서여원 씨한테서 듣고 있을 이유가 없어져 버리잖아요.”
남자의 나직한 종용에 기억의 밑바닥을 손으로 더듬었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진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 계단 밑에 아버지가 머리가 깨진 채로 대 자로 뻗어 피를 뿜어내고 있는데도 전 손쓸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어요. 한껏 겁에 질려 있다가….”
“그때도 울었습니까?”
고갤 주억거렸다.
“…네.”
“저런.”
입술 새로 비집고 나온 탄식과는 달리, 날 향한 두 눈은 흥미로움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더 자세히 말해 봐요.”
눈을 꽉 감고는 속 안에 있는 걸 토하듯 말했다.
“…갈비뼈 사이로 칼이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섬뜩한 기분에 심장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았어요.”
제발 남자가 이 이상은 물어 주지 않길 바랐다. 제발 그만둬 주기를. 그러나 남잔 멈추지 않았다.
“그러곤 어떻게 됐는데요.”
“…제 휴대폰은 며칠째 배터리 충전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고, 삼촌의 휴대폰은 계단에서 함께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망가진 이후였습니다. 옆집 사는 아주머니는 저희 엄마를 간호하느라 병원에 있었고요….”
그가 날 턱짓했다. 계속하라는 신호였다.
“결국 아버지를 들쳐 업었습니다. 아버지 피 때문에 등이 흠뻑 젖었어요. 발밑에 시뻘건 액체가 흥건했습니다. 정신없이 집을 나서다가 들어오던 삼촌과 마주쳤었습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장 대표는 눈썹을 가벼이 추켜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문간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던 차에 아버지에게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삼촌이 땅에 떨어진 그걸 들더니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이미 두려움이란 감정에 덥석 집어삼켜진 난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정신도 없이 삼촌에게 얼른 도와 달라 말했었다.
“얼른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삼촌은 정신 차리라며 제 뺨을 철썩 내리쳤어요.”
‘이 미친놈의 새끼! 병원으로 가서 뭘 어쩌게. 어미도 누워 있는 상황에 네가 걸려 들어가면 네 어민 누가 돌보라고.’ 덜덜 떨고만 있는 사이 삼촌이 집 안에서 이불과 끈을 가져왔다. 내게 마당에 아버지의 축 늘어진 몸을 내려놓으라 하고는 이불로 감싼 후에 끈으로 칭칭 감았다.
삼촌이 아버지의 하체 쪽을 잡고, 내가 상체를 잡았다. 이불에 감싸여 있어도 이게 아버지의 몸이란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트럭 짐 싣는 곳에 축 늘어진 몸을 태우곤 천으로 덮어 두었다. 삼촌의 트럭은 아버지를 뒤에 실은 채로 뒷산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점점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트럭을 지켜보다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덜덜 떨리는 두 손엔 아버지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여기까지 말을 하곤 한 템포 쉬었다.
장 대표는 저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듯 이렇다 하는 말 없이 침묵했다. 내 두 손목을 틀어쥐고 있는 그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입술 새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자, 그제야 물 밑에 잠겨 있던 그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여상한 어조로 지껄였다.
“그럼 여원 씨를 도울 이가 하나도 없던 건 아니었네요.”
…도울 이. 삼촌을 칭하는 단어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있는 위치가 발각될까 싶어 엄마에게 병원비도 직접 보내지 못하고, 아버지의 빚도 직접 갚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건 삼촌의 손을 거쳐야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게 삼촌이 원하던 건 아니었던 걸까 싶다. 내가 본인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천치가 되어야 날 본인 멋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까.
그러니 삼촌을 도울 이라 칭하는 건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이걸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 남자의 말에 반박하고 나서고 싶진 않았다. 작게 고갤 끄덕이자, 그의 뺨 안쪽이 움푹 들어갔다. 어금니로 뺨 안쪽을 씹은 듯했다. 무언가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라, 분위기만 살피고 있는데. 장 대표가 계속하라고 종용하길래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삼촌이 몇 달 전부터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아아.”
장 대표의 입술 새로 음률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메마르기 그지없는 감탄사였다.
“엄마와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병원 측에서도 어딜 갔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음.”
그가 목을 울렸다. 남자의 얼굴에 별안간 뜻을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쳐 지나갔지만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희미하게 말했다.
“엄마를 찾아 주세요.”
장 대표의 손끝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내 손등을 툭툭 건드려 오는 게 느껴졌다. 그가 시선을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물음을 던져 왔다.
“고작 그게 다예요?”
영문을 알 수 없어 되물었다.
“…네?”
“정말 그걸로 만족하겠느냐고.”
답으로 그 이상으로 바라는 건 없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그거면 된 게 아닐까. 지금 내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는데. 그걸 ‘고작 그런 일’이라고 말하는 장 대표를 응시했다. 언제나 그렇듯 남자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내가 바라는 게 없어야 남자에겐 좋은 일 아니던가. 난 조심스레 고갤 주억거렸다.
“…네.”
시선이 공중에서 뒤엉켰다. 그 상태로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이내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장 대표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더니 남자가 이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로 전활 걸더니 무미건조한 말투로 상대방에게 지시했다.
“사람 하나를 찾아줬음 좋겠는데.”
수화기 안쪽에서 웅웅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듣고 있던 장 대표가 다시금 입술을 뗐다.
“서여원 씨 어머니 말이야. 임선화 씨.”
실수로라도 입 밖으로 낸 적 없었던 엄마의 이름이 남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발 앞이 휑하게 뚫린 느낌이 들어 황망한 눈으로 남잘 바라보고 있는데. 남자가 날 곁눈으로 보곤 진하게 웃었다. 위세를 부리는 자의 미소가 그의 입술에 걸렸다. 부러 엄마의 이름을 언급한 듯했다. 날더러 들으라고. 내가 이렇게 너의 모든 걸 들여다보고 있다고.
장 대표가 전화를 끊고는 테이블 위로 휴대폰을 가벼이 내던졌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너무나도 쉽게 끊겨 버린 전화 때문에 난 당황해서 휴대폰을 지켜보았다. 남자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첨언했다.
“유능한 직원입니다.”
“…아.”
쉽게 들켜 버린 속내에 이 이상은 뱃속을 내보이지 않겠단 뜻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만 들어가서 쉬어요. 내 허벅지 위로 올라올 게 아니라면.”
축객령이 내려졌다.
그러잖아도 집에서 관계를 가진 여파로 지금도 뒤쪽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 들고 있던 참이었다. 장 대표가 그대로 날 품으로 끌어당겼다면 한 번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남자의 말에 목을 가벼이 숙여 인사를 해 보였다. 남자는 날 본체만체하며 술병으로 잔에 술을 부어 넣었다.
그를 뒤로 하곤 복도에서 내걸었다. 발소리가 좁고 긴 통로를 조용히 울렸다. 혼자만의 생각에 머릴 담근 채로 발걸음을 옮기다 일순 등을 뒤로 홱 돌렸다.
장 대표와 단박에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였던 건지. 날 바라보고 있었던 그를 불렀다.
“대표님.”
그가 입술로 물었다. 왜요.
“이것도 대표님이 말씀하셨던 그 투자의 일환인가요?”
남자는 잠깐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내가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도 내게 박고 있었던 눈동자를 잠시 허공에 던졌다.
“아.”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어딘가 께름칙한 느낌을 주는 정적이었다. 다행히 장 대표가 먼저 그걸 깨트렸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성가신 일을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요.”
그의 말대로 그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오로지 자신의 흥미 때문에 귀찮은 일을 부탁받았다. 쉬이 납득하지 못할 이유였으나 어쨌거나 내겐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남자의 흥미를 이끌 수 있다니.
장 대표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이내 다시금 등을 돌렸다. 뒷덜미로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한 번도 돌아보진 않았다. 남자에게 그대로 끌어당겨질 것만 같아서.
“…….”
다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침대로 돌아와선 천장을 보고 누웠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부드러이 감싸 왔다.
창문으로 어둑한 하늘 중간에 떠 있는 달이 눈에 들어왔다. 고도가 비슷하기 때문인 걸까. 판잣집에서 보던 달의 모양이며 크기가 비슷했다. 대체 왜 이렇게 펜트하우스를 선호하는 건지. 참 지독히도 위치에 집착하는 남자라는 생각 따위를 하며 난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몸을 모로 돌려 눕자, 별안간 남자가 헤집어 놓았던 내벽에서 쑤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을 참아 내려 셔츠의 긴 소매에 손등이 덮인 채로 주먹을 꽈악 쥐었다. 손아귀 안으로 남자의 셔츠가 빨려 들어왔다.
오늘 역시도 밤이 길 듯했다.
***
침묵이 흐르는 방 안. 똑, 딱, 똑, 딱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난 멀뚱히 누운 채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종잇장처럼 얇은 선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다시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느리게 끔뻑대는 시야로 세상을 덮고 있던 검은 장막이 서서히 걷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제 막 새벽이 오려는 것 같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우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러다 바깥의 분위기가 묘하게 부산스러워 다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창문엔 어느덧 엷은 여명이 떠올라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두 눈이 문으로 가닿았다. 장 대표가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걸까.
“…….”
침대 밑에 놓여 있던 슬리퍼를 신고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둔부가 바지에 쓸려 쓰라렸다. 둔부 안쪽은 말할 것도 없고 궁둥이 또한 사포로 문댄 듯 쓰라렸다.
방문을 조금 열어 틈새로 바깥을 엿봤다. 서로 다른 높낮이를 가진 두 목소리가 꾸리는 나직한 대화가 들려왔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먼저였고, 장 대표 특유의 낮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전 괜찮습니다. 저 친구는 알아서 나올 때까지 그냥 두세요. 저녁도 준비해 주시고요.”
“네, 알았어요.”
내용을 들어 보니 장 대표와 얘길 나눈 상대는 집에서 일해 주시는 고용인 같았다. 방을 나와 조심조심 복도를 걸었다. 저기 복도 끝, 응접실과 연결되어 있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 중이던 아주머니가 내 인기척을 먼저 느끼고는 화들짝 놀라 했다.
“어! 일어났어요?”
“…네, 안녕하세요.”
“그래요. 얼른 준비하고 나와요.”
“…네.”
두 눈으로 집 가장 안쪽에 놓여 있는 방의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저기에 장 대표가 있는 듯했다. 방으로 다가가 문에 노크를 하려는 순간, 그만 문틈으로 남자와 시선이 맞부닥뜨리고 말았다. 잿빛 셔츠를 큰 어깨에 걸치고 위에서부터 단추를 채워 나가는 중이던 남자가 신랄하게 지껄였다.
“예절 교육 못 받았어요?”
말투 한번 고상한 게 딱 ‘빡통’이란 상스러운 단어를 운운했던 그 어조였다. 다만 얼굴에 띤 표정에 차이가 있었다. 그땐 비틀린 입술로 빈정거린 거였다면, 오늘은 입가 근육이 조금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
“문 닫고 들어와 봐요.”
내가 일부러 문간을 넘지 않고 있었음을 눈치챈 듯했다. 참 빌어먹게도 감이 좋은 남자였다. 조심스레 발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와선 눈으로 빠르게 내부를 훑어봤다.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로 거대한 방이었다. 내가 있던 방을 1.5배 정도 늘여 놓으면 딱 이렇게 될 것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장 대표의 방엔 몇 개의 가구가 더 추가되어 있다는 점 정도였다. 주인의 체격만큼이나 큰 침대 옆엔 짙은 색의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책장 앞엔 원목 책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떡 벌어져서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그 크기만 보더라도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장 대표가 넥타이의 매듭을 매무시하다가 제게로 바투 다가온 날 내려다보았다. 긴 팔을 이용해 뒤에 있는 서재 책상으로 손을 뻗더니, 펜슬 케이스에서 만년필을 꺼내 왔다. 펜 끝을 입으로 물어 뚜껑을 따고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메모지에 펜촉을 대고 휘갈겼다. 슥슥, 경쾌한 소리가 났다. 남자가 메모지를 쭉 찢더니 중지와 검지 사이에 그걸 끼워 내게 내밀어 왔다.
“주소입니다.”
…고작 몇 시간 지났을 뿐인데, 벌써? 내심 놀라며 얼른 메모지로 손을 뻗는데, 남자의 손이 다시금 뒤로 물려졌다. 멀어진 메모지에 당혹스러워져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식사하고 나면 제 직원이 알아서 차로 데려다줄 거예요.”
“괜찮습니다. 저 혼자….”
혼자서 갈 수 있다고 말하려던 찰나, 단박에 말허리가 잘렸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지, 좀.”
얼굴로 내려 쏘이는 눈빛이 매서웠다. 또 어디에서 그의 심기를 건드렸나 알 수 없어 입술을 뗐다 붙였다만 반복하고 있는데. 남자가 그 의문을 풀어 줬다.
“왜요. 이것도 기회다 싶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바쁘신데 괜히 귀찮게 해 드리는 것 같아서….”
얼른 손을 흔들어 오해임을 밝혔지만,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에 있는 의심의 기색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에 어쩔 도리 없이 남자의 뜻에 순응했다.
“그냥 타고 가겠습니다.”
장 대표가 그제야 내게 메모지를 건넸다. 받자마자 그가 제 성미대로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써 낸 활자들을 눈으로 읽어 내렸다.
“서초동 소재 병원입니다. 한 자선 단체에서 병원비를 대 줬대요.”
자선 단체에서…? 난 믿기지 않는 사실에 메모지를 만지작거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엄마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동안, 가장 비참한 경우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밀어 내려고 해도 자꾸만 머리 한 켠을 차지해 오는 불안한 생각에 몸서리치곤 했었는데…. 그래서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기쁜 한편, 얼음을 입 안에 잔뜩 넣고 씹은 듯 얼떨떨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 상황을 쉬이 믿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메모지를 훑어 내리고 있는데, 남자가 부연 설명을 덧붙여 왔다.
“옆에서 간호해 주시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문 간병인이라고 하던데, 점심때 한 시간 정도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요. 그 시간 동안 다녀와요.”
“…네, 감사합니다.”
손안에 들린 메모지를 꽉 움켜잡았다. 내 손목에 채워진 것과 크기만 조금 큰 시계를 제 손목에 채우는 남자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점점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는 남잘 바라보며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그 자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혹여나 남자가 내 몸을 제게로 당겨 갈까 자릴 뜰 수가 없었다.
장 대표가 넥타이에 핀까지 채우고 나서야 내 쪽으로 상체를 돌려 왔다.
“용건 남았어요?”
“…아, 아니요.”
난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아닙니다.”
다행히 행위를 당장 요구해 오지는 않을 듯했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나갈 준비를 마친 남자보다 한 걸음 앞서 현관문 쪽으로 향하다가, 한 가지 고갤 드는 의문점이 있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자선 단체라면, 혹시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문 앞에서 그가 어깨를 가벼이 들었다가 놓았다. 잘 다려진 셔츠에 감싸인 가슴팍이 위로 조금 밀어 올려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미세했지만 시선을 확 잡아채는 움직임이었다.
“그건 병원 측에서 내부 규정상 밝힐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네.”
부엌에서 손을 움직이던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물기 젖은 손을 문질러 닦으며 나왔다.
“가시게요?”
장 대표가 묵례와 눈짓으로 가벼이 답했다. 아주머니가 안전히 잘 다녀오시라 마중 인사를 하고는 다시 제 일을 찾아 부엌 안으로 몸을 숨겼다. 남자는 현관 앞에 그대로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목소릴 낮췄다.
“일주일에 한 번 오셔서 집을 봐주시는 아주머니예요.”
“…네.”
“뭐라 말할 거예요?”
날 자신의 무엇이라 소개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을 조심스레 입에 담아 봤다.
“…지인의 동생이나.”
장 대표의 입술 한쪽이 비틀렸다.
“어떤 등신이 지인의 동생을 집에 데려다 놓을까.”
“…아니면 먼 친….”
먼 친척이라고 둘러대는 건 어떠냐고 말하려다 입을 멈췄다. 장 대표의 앞에선 꺼내서는 안 되는 얘기라는 걸 눈치챘을 땐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남잔 역시나 뒤에 잘려 나간 내 말을 능히 읽어 냈다. 날카로운 눈빛이 이마를 가로질러 오길래 바짝 긴장했으나, 남자는 예상외로 핀트 나간 말을 지껄여 댔다.
“먼 친척이어도 어쨌거나 피는 섞인 관계 아니에요? 난 피 나눈 이랑은 몸 섞는 취미 없는데.”
“…네.”
“아무튼 그건 서여원 씨가 알아서 둘러대고.”
저렇게 싸늘히 반응해 올 거라면 애초에 묻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손가락을 몇 번 꿈지럭거리다가 이제 그만 가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남자에게 묵례했다. 남잔 우습다는 듯 픽 바람 빠진 소릴 내곤 집 밖을 나섰다. 그의 너른 등에서 닫힌 문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다 부엌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갤 홱 돌렸다.
“학생, 얼른 준비하고 나와요.”
“네.”
작게 답한 후, 머물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방에 딸려 있는 옷장도 열어 봤지만…. 안에는 온통 장 대표 옷뿐이었다. 거의 포획당하듯 잡혀 온 탓에 속옷조차 챙기지 못했다. 옷은 입고 있는 옷을 그대로 입으면 된다고 치자. 그럼 속옷은 어떻게 해야 하지.
“…….”
옷장을 뒤적거리니 뜯지 않은 속옷 몇 장이 나왔다. 내 것보다 치수가 커서 맞지는 않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총 세 개의 방과 하나의 거실로 이루어진 이 집엔 화장실이 두 개였다. 하나는 거실에 딸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장 대표의 방에 있었다. 난 개중 거실에 딸려 있는 것으로 들어와 샤워를 했다.
선반에 놓여 있는 클렌저를 손바닥에 푹푹 짜서는 몸을 문질러 닦는데, 코끝에 스치는 향이 어딘가 익숙하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묵직한데 세련된 느낌을 주는 향. 난 불현듯 이것이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란 걸 깨달았다. 그 길로 세면대에 놓여 있는 비누로 몸을 벅벅 씻어 냈다.
“…….”
수건으로 몸에 남아 있는 물기를 제거한 뒤, 남자의 속옷을 하체에 껴입었다. 원래는 몸에 딱 맞게 제작된 디자인인데. 허리 부분이며, 중심을 잡아 주는 부분이며 이상하리만큼 널널해 기분이 이상했다.
옷을 입고 나와선 천천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6인용 식탁에 한 상이 떡 벌어지게 차려져 있었다. 아주머니가 식탁 위로 냄비 하나를 새로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른 와서 따뜻할 때 들어요.”
난 주뼛주뼛 다가가 끝자리에 앉았다. 한식으로 가득한 커다란 식탁 위에서 이질적인 접시 하나가 눈길을 이끌었다. 한쪽에 하얀 소스의 크림 스파게티가 놓여 있었다. 내 시선을 오해한 아주머니는 그 접시를 들어 내 앞에다가 놓아 주었다.
“어린 친구들은 또 이런 거 좋아하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한동안 식탁 앞을 떠나지 않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얼른 한술 떠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난 무릎 위에 손을 올려 둔 채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고만 있었다. 손끝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면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할 텐데.
“그 집안은 하나 같이 다 인물이 훤하네.”
“…네?”
예고 없이 던져진 말에 의아한 감탄사를 냈다. 내 멍청한 얼굴에 아주머니가 작게 웃으면서 답했다.
“조카라 이미 들었어요.”
“…네.”
피 섞인 사람과는 몸 섞지 않는다면서 조카는 또 괜찮은 건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였다.
“편히 들어요.”
“…네.”
아주머닌 그 말을 끝으로 작게 웃으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제 할 일을 하러 떠나신 아주머니의 등이 테라스 너머로 완전히 종적을 감췄을 때, 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꽉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쳤다. 구깃구깃한 메모지가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다.
…이곳으로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
난 다시금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집어 올렸다. 손끝에 붕대가 감겨 있는 탓에 젓가락질이 서툴렀지만, 그래도 열심히 젓가락을 놀렸다.
충분히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었지만, 맘 놓고 즐길 수는 없었다. 입 안이 자꾸만 바짝바짝 메마른 탓에 까끌까끌한 혀의 돌기가 더 잘 느껴졌다.
“…….”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뒷정리를 한 후에, 아주머니께 다리미가 있는 곳을 물어 옷을 다려 입었다. 난 뒷머릴 매만지며 승강기를 타고 로비로 나왔다.
승강기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새에 긴 머리가 이제는 눈을 거의 덮어 버리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아주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엄마를 보기 전에 머릴 자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장 대표가 그걸 허락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띵. 승강기가 로비에서 멈춰 섰다. 입구를 통해 빠져나오자, 차 앞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날 발견하고는 내게 문을 열어 주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장 대표의 수하는 수더분한 척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오랜만이라니. 판잣집에서 남자와 함께 밀어닥쳤던 게 며칠이나 되었다고. 다른 직원들이 이 남자를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 분명 다른 이들보단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듯했었다. 그런 자가 업무 대신 내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게 어이가 없는 한편, 또 한 번 장 대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의례적으로 묵례만 한 뒤,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차가 매끄럽게 타워 팰리스 앞을 떠나기 시작했다. 경비가 삼엄해 보이는 아파트촌의 입구를 벗어나자, 곧 창문으로 번화가의 복잡한 풍경이 들어왔다.
“…….”
빌딩 숲 사이사이로 사람들과 차들이 정신없이 뒤엉켜 길을 오갔다. 빵, 빵. 시끄러운 경적 소리 틈으로 사람들의 욕지거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1초 단위로 휙휙 바뀌는 정신 사나운 장면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난 온통 다른 생각으로만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괜찮으실까.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꽉 메워 왔다. 망막 안에 깊이 새겨져 있던 마지막 모습이 창문에 떠올랐다. 그날 보는 게 마지막이란 걸 알았더라면. 경희 아주머니께 간병인 자릴 내주고 그렇게 떠나진 않았을 텐데.
난 뒷좌석에서 허릴 곧추세우곤, 시계를 찾아 헤맸다. 일순 손목에 채워져 있는 것의 원래 사용 용도를 깨닫곤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8분. 점심시간인 오후 1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잠깐 이 주변에 있는 상점들 좀 다녀와도 되나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장 대표의 수하가 보조 미러로 날 응시해 왔다.
“어디 가시려고요?”
순간 날 흘깃했던 눈동자나 어투로 보건대, 그걸 썩 반기는 기색으로 보이진 않았다. 난 조금 머뭇대다가 답했다.
“…머릴 조금 자르고 싶어서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의외로 흔쾌히 승낙했다.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더니, 골목 사이로 들어가 근처에 있는 미용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혼자 내리려고 하는데, 어느새 남자가 따라 내려선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내 뒤에 달라붙었다. 남자는 미용실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는, 잡지를 펼쳤다. 직원은 곰 같은 덩치로 꺼먼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를 흘깃대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자를까요?”
“목을 덮지 않을 정도로 잘라 주세요.”
사각사각. 가위 끝에서 목덜미를 덮고 있던 머리칼들이 먼저 잘려 나갔다. 그다음 차례로 귓바퀴를 간질이던 머리칼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눈을 거의 가리고 있던 앞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훨씬 가뿐해졌지만 생각보다 머리 길이가 조금 더 짧아져서 어색했다.
얼굴과 목을 스펀지로 툭툭 털어 주고는 목까지 두르고 있던 가운을 벗겨 줬다. 의자에서 일어나 값을 치르기 위해 프런트로 가는데, 뒤따라 왔던 직원이 지갑에서 카드를 불쑥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당혹스러워서 남잘 돌아보는데, 남자는 카드가 장 대표의 것임을 밝혔다.
난 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주변 마트를 들러 엄마가 좋아하는 복숭아와 내가 입을 속옷 두 장을 사고 나서야 차로 돌아왔다. 정차되어 있던 차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병원 주차장에서 멈춰 섰다. 서초동 병원은 이전에 엄마가 머물렀던 병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규모도 규모지만, 외관도 휘황찬란했다. 큼직하게 난 창문들에 햇살이 비쳐 눈을 부시게 했다.
난 혼란스러운 눈으로 잠시 건물을 둘러보다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따라 나 있는 병실들 호수를 눈으로 확인하고 다녔다.
1208호, 1208호, 1208호.
…여기다.
한 병실 앞에 멈춰 섰다. 문 옆에 달린 팻말로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엄마 이름 석 자가 거기에 적혀 있었다.
난 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똑똑 노크를 해 봤다. 남자가 말했던 대로 아무도 없는지,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난 문고릴 돌려 조용히 문을 열어봤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입원실 안이 조금씩 시야로 밀려들어 왔다.
철로 만든 침대 위, 생기라곤 전혀 없어 밀랍으로 빚은 인형 같은 인영이 누워 있었다. 띠, 띠, 띠, 띠. 투명한 호흡기가 엄마의 작은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다. 호흡기에 이어진 긴 호스는 정체 모를 기계에 붙어 있었다.
그 기계 덩어리에 힘을 기대어 가슴팍이 가느다란 숨을 이어 나가기 위해 미세하게 오르고 내렸다. 난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난 눈으로만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 안에서 조용히 혀를 굴려 봤다.
“…엄마.”
입 안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에 속 안에 있던 담이 무너져 내렸다. 쌓이다 못해 썩어가고 있던 감정들이 손쓸 수 없을 만큼 넘쳐서 흘러나왔다.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을 올려 닦을 생각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숨죽여서 울다가, 붕대가 감겨 있는 손을 엄마에게 내뻗었다. 그러나 손은 엄마에게 가서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꺾여서 추락했다.
여기로 오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엄마의 상태가 너무나도 걱정되는 한편, 벌컥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엄만 아직 모르고 계실 거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저질러 놓은 일을 말이다. 지금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황이시니까.
“…….”
마지막으로 봤던 엄마의 얼굴은 좋은 환경에 있어서 그런 건지 혈색은 조금 더 나아 보였지만, 엄마는 여전히 영원한 잠에 든 사람 같았다.
엄마의 손을 잡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손끝에 감겨 있는 너절한 붕대를,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흐릿한 지문을 엄마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에 손으로 꽉 주먹만 쥐고 있었다.
…색이 짙은 후회가 밀려들어 왔다. 일 년 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 멍청했다면 일이 조금 더 순탄하게 풀렸을까. 모르겠다. 돌이켜 본 과거엔 오물 덩어리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한 발치 앞은 안개 속에 있는 듯 희미했다.
“…….”
한 시간에 못 미치는 시간. 지난 일 년간의 공백을 메우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난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확인하곤 어렵사리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지금쯤에는 나가야 간병인과 불필요하게 마주치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의자 한쪽에 놓여 있는 검은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새카맣게 존재를 잊고 있던 그걸 집어 올려 한쪽에 딸려 있는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그 흔한 음료수병 하나가 없었다. 그간에 왔다 간 이들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었다. 난 검은 봉지를 차마 안에다가 넣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병실 밖을 나섰다.
침대 팻말 위. 보호자 명을 적는 란에 익숙한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그걸 눈에 담고서는 마음속으로 한 내일도 오리라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
집으로 돌아와서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술자가 잠깐 집에 와 천장에 CCTV를 설치하고 나갔다. 기술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집 안 이곳저곳 천장에 카메라를 달고 다녔는데, 발길이 닿지 않은 유일한 곳이 있었다. 바로 남자의 침실이었다. 호텔에 있을 때처럼 남자는 자신의 공간엔 CCTV를 두지 않았다. 당연했다. 어느 누가 제 모습이 녹화되고 있는 걸 반길까. 한쪽 벽 천장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어찌나 치밀한지, 일부러 텔레비전과 마주하게 둬 화면을 보는 내 얼굴이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텔레비전에서 소음들이 흘러나왔다. 얼굴만 보면 다들 알 법한 배우들이 대사를 읊고 있음에도 모두 웅웅대는 소음으로만 들렸다. 생각들이 달동네 전깃줄처럼 질서 없이 얽힌 채로 뇌리에 꽉 들어차 있어, 소음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없었다.
…병실에 찾아온 이가 아무도 없었다니. 원래도 살가운 적 없었던 친척들은 그렇다 치자. 삼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입 안에 손을 넣곤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간 수십 번 물에 닿고 내가 손 뻗는 사물에 닿았으며 내 윗니에 괴롭힘 당했던 붕대는 헤질 대로 헤져 있었다.
날 물밑에서 끌어 올린 건 승강기가 도착했다는 전자음 소리였다. 재빨리 벽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다섯 시. 장 대표가 돌아오기엔 꽤 이른 시간대지만 찾아올 이가 그뿐이었다.
그대로 앉아 있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마중을 나가기도 웃긴 상황. 결국 거실 중간, 애매한 위치에 서서 남자를 맞았다.
“오셨어요.”
제 방으로 향하며 재킷을 벗길래 조용히 다가가 그걸 받아 들었다. 구김이 가지 않게 옷걸이에 걸어선 방 안 한쪽에 있는 원목 스탠드 행거에 걸어 놓았다.
장 대표는 방에 딸려 있는 화장실로 앞에 서서 옷가지들을 벗어 내기 시작했다. 넥타이의 매듭을 흔들어 쭉 뽑아내곤 한 손으로 능숙하게 단추를 풀어냈다. 여전히 남자의 두 눈은 내 목 부근에 못 박혀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묘한 기분이 들어 손바닥으로 휑한 목을 문질러 댔다. 덥수룩하게 귀와 목을 덮고 있던 머리칼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모습에 생각보다 조금 더 짧게 잘렸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본인의 모습에 어색해서 목 뒤를 문지르고 있자, 미용사가 요즘은 다 이렇게 자른다고 말했었다.
“머리 잘랐네요.”
“…네.”
“아주 목덜미가 다 보이는데.”
장 대표가 시선을 비스듬히 기울이곤 벨트까지 허리춤에서 풀어냈다. 목덜미라. 모가지라 표현 안 해 준 걸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걸까. 지익, 남자에게서 지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광대 부근에서 홧홧한 열감이 퍼져 나갔다.
남자는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지, 곧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놓여 있는 남자의 옷가지들을 집어 올려 빨아야 할 옷들은 리빙 박스에 넣고, 드라이클리닝 맡겨야 하는 옷들은 한쪽에 정리해 두었다.
반쯤 열려 있는 화장실 앞에 서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부엌으로 향해 인덕션 위에 있는 스테인리스 웍에 불을 올렸다. 아직 이른 저녁이니 남자가 식사를 하고 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미리 준비를 해 둘 참이었다.
“…….”
난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골프장 직원으로서 서비스했던 것처럼, 딱 그만큼의 마음가짐으로 준비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양문형 냉장고 안에서 반찬 통들을 꺼낸 후, 접시들을 준비해 두었다. 솜씨 좋은 아주머니가 남자를 위해 성의껏 만들어 놓은 음식은 냄새며, 색이며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것 없이 완벽했다.
장 대표의 값비싼 옷에 국물이 튈 수도 있으니 한쪽에 잘 개어져 있는 앞치마를 집어 올렸다. 옷을 가린 뒤, 허리에 끈을 느슨히 묶어 두었다. 약간 긴 소매가 거추장스러워 끝부분을 둘둘 걷어 올렸다. 이미 한차례 제 옷을 적셨다고 지랄 떨었던 전적도 있으니까 더욱이 조심해야 했다.
“…….”
행위에 열중하느라 주변의 상황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어 올려 싱크대 위에 딸려 있는 작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 뒤에 꺼먼 인영이 서 있었다. 난 흠칫 놀라서 얼른 뒤를 돌아봤다. 언제부턴지 남자가 벽에 기대어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헐렁하게 걸쳐 있던 가운의 허리끈을 조이며 내게 다가왔다.
“누가 이딴 일 하라고 시켰지?”
“…대표님 육류 좋아하신다고 오전에 아주머니가 해 놓고 가셨어요.”
“옷은 내 옷을 껴입고는.”
순식간에 팔과 옆구리 사이로 남자의 두꺼운 팔이 들어왔다. 남자의 팔이 내 허릴 단단히 붙들고는 날 제게로 끌어당겼다. 등이 벽처럼 단단한 남자의 가슴팍에 탁 부딪히자, 남자가 내 목덜미에 자신의 우뚝한 코를 깊게 묻어 왔다. 목덜미로 남자의 숨결이 훅 와 닿았다. 낮에 맡았던 샤워 코롱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그건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속살은 훤히 내놓고 말이에요.”
장 대표의 손이 손쉽게 바지 안을 밀고 들어왔다. 허리춤이 넉넉한 탓에 바지는 남자에게 쉽게 틈을 허락했다.
“속옷으론 무얼 입었어요.”
남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 바질 벗겼다. 아래가 금세 휑해졌다. 남자가 내 둔부를 제 손에 붙들었다. 파렴치한 시선으로 내 하체를 감싸고 있는 싸구려 속옷을 들여다봤다.
“내 거 꺼내 입지, 왜.”
만약 장 대표와 몸을 섞게 된다면, 필시 내 속옷을 내보여야 할 상황이 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 온 속옷으로 갈아입고, 남자의 건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장 대표가 내 가운데 부분을 제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아, 사이즈가 안 맞았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앞치마 안으로 기어들어 와선 셔츠 단추 사이를 헤집었다. 맨살에 남자의 뜨끈한 손이 닿아 오자 몸서리가 쳐졌다.
“어머니 만나 뵙고 오지 않았어요?”
“…네, 감사했습니다.”
“근데 얼굴은 왜 죽상이에요. 또 가서 질질 짜고 왔나 보지?”
난 뭐라 답하지 못하고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남자가 다정한 척, 어투를 꾸며 물어 왔다.
“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요.”
난 자꾸만 가빠진 호흡을 갈무리하며 운을 뗐다.
“…대표님, 혹시.”
입 안에서 흘러나오려는 신음 때문에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남자가 목을 울렸다. 혹시?
“…하아, 혹시 병원에 중년 남성은 온 적 없다고 하던가요?”
뱀의 것을 닮은 서늘한 눈동자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가 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발음했다.
“글쎄, 중년 남성 얘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요. 중년 남성이라면 사라졌다는 그 삼촌을 말하는 건가?”
“병원 수송을 삼촌이 시켰다고 들었거든요. 병원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못 찾았습니다.”
“그래요.”
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느긋하게 가슴 주변을 배회했다. 장 대표의 엄지가 유두를 버튼처럼 누르자, 감도가 오를 대로 오른 유두는 금세 부풀어 올랐다. 내 몸 상태를 비웃듯 픽 바람 빠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속상한가 봐요?”
“아니요, 그냥 찾을 게, …아아.”
남자는 손가락을 집게처럼 이용해 여린 살을 집어선 시계 방향으로 돌려 댔다. 난 가슴 부근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에 몸을 조금 수축시켰다.
“그냥 찾을 게 좀 있었어요.”
“찾을 게 뭔데요.”
“…토, 통장이요.”
그가 내 말을 되짚으며 유두를 튕겼다. 난 흐읏, 소릴 내며 남자의 팔목을 붙들었다. 동시에 허리춤에 딱딱한 뭔가가 닿아 왔다.
“통장?”
“…네, 엄마 통장이 있었는데….”
“아아, 여원 씨 어머님 통장이.”
“…네, 하아.”
헐떡대는 숨을 장 대표의 입술이 잡아채 갔다. 남자와 나는 게걸스럽게 혀를 문질러 댔다. 그의 재빠른 손에 밑이 금세 휑해졌다.
남자는 내 바지만 벗겨서는 날 거실에서 취했다. 자신은 소파에 앉아서 다리를 벌린 채로 앉아 있었고, 난 그의 바로 앞, 러그 위에 엎드려서는 개처럼 허릴 흔들어 댔다.
“…아, 아흐, 아흐으! 으읏!”
느슨하게 묶어 놓았던 앞치마 끈은 이미 풀어진 지 오래였다. 끈만 목에 걸려서는 내가 엉덩이를 흔들 때마다 공중에서 너울거렸다.
남자의 성기가 안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뿌리 끝까지 닿아 내벽을 압박해 올 때면 몸에 전율이 돌았다. 남자가 내 하체 부근을 덮고 있는 셔츠를 밀어 올리더니 둔부를 터뜨릴 듯 움켜쥐었다. 손안 가득 말랑대는 피부를 넣고 주물럭거리다가, 만족스럽다는 신음을 흘려보냈다.
“흐음, 하아….”
부은 눈시울로 장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쾌감에 젖어 있는 눈이 마찬가지로 내게로 향해 왔다. 남자가 내 쪽으로 얼굴을 숙이더니, 입술로 내 숨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남자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서투르게나마 혀를 움직였다. 남자의 매끈한 입 안쪽을 혀로 핥자, 남자가 내 혀를 치아로 잘근 씹어 왔다. 그 아릿한 통증에 몸에 힘을 주자, 뒤쪽에 자극이 갔는지 남자가 이마에 인상을 쓰곤 신음을 흘렸다.
“윽….”
“…흐응, 하아!”
허억, 헉.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붙어먹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마구잡이로 체위를 바꿔 대며 미친 듯이 몸을 섞어 댔다. 쿠션감 없는 바닥이 허리에 무리를 줬는지, 허리가 아파 허릴 잡고 몸을 웅크렸다. 장 대표가 쯧쯔, 혀를 차며 아이를 대하듯 날 안아 올렸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결합부에서 찌덕거리는 소리가 나서 목덜미가 다 화끈거렸지만, 남자는 별로 상관치 않는 듯했다. 남자는 자신의 침대로 날 내려놓았다. 마지막은 정상위로 행해졌다.
장 대표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내 뺨 위로 뚝 떨어졌다. 내 것과 마찬가지로 붉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로 이따금씩 새어 나오는 한숨 같은 신음에 입 안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으음….”
“하아, 으응, 아아!”
남자는 내 안에서 사정했다. 구멍 안에서 퍼지는 뜨뜻한 감각에 나 역시도 사정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한차례 더 정액을 쏟아 냈다. 남자의 육중한 몸이 내 몸 위로 쏟아졌다. 남자와 난 한동안 가슴을 맞댄 채로 숨을 골랐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차차 제 속도를 되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건 남자의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땀과 정액에 끈적거렸지만, 그날 밤만은 연단 사정의 기운에 쉽사리 잠이 들 수 있었다.
***
별안간 사지가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누군가가 내 이마를 발로 딛고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은 잰걸음으로 내 머리 위에서 뛰놀기까지 했다. 손으로 후두엽을 꽉 쥐었다 놓는 것 같은 두통이 느껴지는 건 덤이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 상태. 가위에 눌린 건가 싶었다. 예전에도 기가 허해질 때마다 이렇게 종종 가위에 눌리곤 했다. 난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눈뜨기에 성공했다.
“…….”
또 새벽이었다.
무언가가 어둑한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그런 새벽.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자 등줄기에 한기가 스쳤다.
육감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뒤 목에 난 털끝 하나까지 곤두세운 채로 방 안을 살펴봤다. 이런 상황에서 상상력은 두려움을 한층 더 증폭시켰다. 옷이 걸려 있는 옷걸이가 머릴 풀어 헤친 여자의 형상으로, 옷장의 덜 닫힌 문틈이 어둑한 동굴의 입구로 보였다.
수면, 그 자체가 고픈 건 둘째 치고 이렇게 나 홀로 깨어 있는 새벽은 인간을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새벽빛은 지평선 너머에 웅크린 채로 몸을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이 오려면 이 상태로 몇 시간은 더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불현듯 방 안에서 내가 내쉬는 것 말고도 다른 호흡 하나가 더 느껴졌다.
…후우, 후우. 내 것보다 좀 더 묵직하고 나직했다. 몸을 잔뜩 말곤 경계심을 곤두세웠다가 곧 그게 장 대표임을 깨달았다.
이 공간에 나 말고 숨 쉬는 자가 하나 더 있다는 걸 자각하니, 이 고요가 조금 덜 두려워졌다. 공중으로 내뱉는 호흡이 서서히 차분해져 갔다. 난 조용히 장 대표의 옆모습을 시야로 담다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천천히 등을 돌렸다.
“…….”
장 대표에게 팔 한쪽이라도 좋으니 잡게 해 달라 부탁할까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성기를 구멍 안에 쑤셔 넣고 별 짓거리를 다 했음에도, 고작 팔 한쪽 내게 내달라 하기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지금 이 순간, 남자의 존재로 안정감을 찾은 자신이 무척이나 이해되지 않았다. 용납되지 않았다는 게 조금 더 맞는 표현이었다.
난 그를 외면한 자세로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웠다. 후우, 후우. 등 뒤에서 남자가 규칙적으로 들이마시고 내뱉는 호흡이 내내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
아침이 밝자, 장 대표는 채비를 하곤 문 밖을 나섰다. 난 가늘게 뜬 눈으로 방을 나가는 그 널찍한 등을 확인했다가, 이내 베개에 뺨을 더 깊게 푹 묻었다.
밑이 휑해 기분이 이상했다. 벗어 놓은 속옷과 바지는 식탁 주변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을 거였다. 어제 저녁에 차리다가 만 음식 또한 그대로 놓여 있을 거고. 지금쯤이면 표면이 모형처럼 딱딱해져 있지 않을까 싶다.
…얼른 치워야 하는데.
몸이 자꾸만 버드나무 잎처럼 축 늘어졌다. 허리며, 무릎이며 어디 한 군데 콕 집어 말할 수 없이 온몸이 저리고 아팠다.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남자가 주는 충격을 그대로 흡수했던 탓이 컸다.
기운이 딸리니 몸이 잠을 요구해 오는 건지…. 새벽엔 그렇게 잠을 설치더니, 해가 뜨고 나서야 눈이 감겼다. 보이지 않는 손이 눈꺼풀을 연신 쓸어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굴복해 잠깐 눈을 감는다는 게.
그만 선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냉장고 문이 여닫히고, 간간이 물소리도 들려왔다. 소리로 읽히는 행동엔 군더더기랄 게 없었다. 아무래도 장 대표인 것 같았다.
남자가 방으로 돌아왔다.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곧 허리에 수건을 맨 채로 나왔다. 샤워를 했는지, 젖은 머리칼에서 물기가 뚝뚝 흘러 남자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난 그때까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누워 있었다. 별안간 시선이 느껴져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날 내려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상체를 일으켜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았다.
장 대표가 셔츠 단추를 채워 가며 날 돌아보았다. 두 눈이 내 한쪽 뺨에 닿아 왔다. 베개에 짓눌려 있던 탓에 빨갛게 부어 있을 거였다. 남자의 시선이 내 목을 타고 내려가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어루만지더니, 하체를 덮고 있는 이불로 와 닿았다. 난 그가 내게서 이불을 빼앗아 갈까 무서워 얼른 이불을 쥔 손 안을 꽉 움켜쥐었다.
장 대표가 불현듯 기껍게 웃었다.
“밑이 아픈가 봐요?”
“…네.”
“그거 안타깝네.”
입술로는 탄식했지만,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넥타이의 매듭을 정리하는 남자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오늘은 접대가 있어서 늦을 거니까, 병원 다녀와서는 얌전히 집에 있어요.”
난 허공을 응시한 채로 조용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곧이어 남자가 방을 빠져나갔다. 밖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낮은 파열음이 들리자마자, 난 거실로 나왔다. 바지를 주워 입고 식탁을 치우기 위해서였다.
바지와 속옷은 어제 벗어 두었던 대로 식탁 다리 밑 근처에 있었다. 얼른 헐벗은 하체에 그걸 껴입고는, 식탁에 올려져 있는 접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곤 손을 멈칫했다. 싸늘히 식어 있어야 할 접시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딱딱하게 굳어 있어야 할 표면엔 차르르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가 새로 준비해 놓은 것들이었다.
순간 장 대표 말고 집에 누군가가 왔던 적이 있었나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그 남자가 차려 놨단 얘기인데….
난 조용히 그걸 식탁 위로 다시 내려놓았다.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내가 머물던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금고에 박혀 있는 작은 렌즈가 날 노려봐 왔다. 난 철저히 외면해선 렌즈에서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각도로 틀어 앉았다.
***
오늘은 어제와 다른 직원이 날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혹시라도 날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근처 상점에서 모자를 하나 사서 눈까지 깊게 눌러썼다. 조용히 병실로 들어와선 한쪽 의자에 앉아 엄마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띠, 띠, 띠. 일인 병실 안에 전자음만이 울려 퍼졌다. 복작거리던 예전 병실보다야 시설이며 의사진들이며 훨씬 훌륭했지만,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가면 엄만 때때로 이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어야 할 거였다. 그런 생각들로 머릴 채우며 아랫입술을 꽉 물고만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난 흠칫 놀라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하얀 유니폼을 차려입은 간호사가 열린 문으로 들어왔다. 엄마 앞에 앉아 있는 날 보더니 가벼이 묵례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다행히 확인차 들른 간호사였다. 날 친척쯤으로 여기고 있는지, 별 대수롭지 않아 하는 듯해 보였다. 기계 덩어리에 떠 있는 숫자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가져온 파일철에 적고는 다시 내게 묵례를 한 후에 병실을 떠났다.
다시 적막이 흘렀다. 난 눈으로 다시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손목시계 속 분침은 이제 막 숫자 ‘9’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곧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시 장 대표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약간 식어 있는 접시엔 손도 뻗지 않은 채로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빈 접시들은 씻어서 싱크대에 정리해 두고 손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이제 다시 정적이 큰 집에 찾아왔다.
뭐라도 시간을 죽일 게 필요했다. 무얼 하면 좋을까 싶어 고민하다가, 남자의 방 안에서 봤던 책장이 불현듯 생각나 남자의 방을 찾았다. 눈으로 천천히 책들을 훑었다. 대부분 경영 경제 분야의 것들이었다.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이 보이는 책 하나를 골라 머무르던 방 안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가 싶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 그냥 습관처럼 읽게 됐다.
이러다가는 정적에 질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길로 책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프로그램은 그 어떤 거라도 좋았다. 아무거나 틀어 놓고 멍한 눈길로 다시 책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책을 잠시 덮어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뺨을 댔다. 화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책날개를 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책날개가 픽 덮이는 소리가 들렸다.
“…….”
띠. 얄팍한 잠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퍼뜩 깼다. 이어서 띠, 띠, 띠 총 세 번의 번호 키 소리가 더 들렸다. 띠리리,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난 얼른 소파에 뺨을 대곤 다시 눈을 감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진 모르겠다. 그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충동적으로 자는 척했을 뿐.
거실로 다가오던 장 대표의 발걸음이 일순 멈춰 섰다. 옆얼굴로 시선이 느껴졌다. 한쪽에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자, 복도에 켜져 있던 센서 등이 꺼졌다.
불현듯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잠시 후 소파의 옆 부분이 푹 꺼졌다. 재킷에 묻어 있는 바람 냄새가 후각을 먼저 건드려 오더니, 익숙한 체취에 진득한 술 냄새가 뒤섞인 묘한 향이 그 뒤를 따랐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던 책의 무게감이 사라졌다. 근처에서 사르륵,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보는 듯했다. 이윽고 바닥이 탁, 소릴 내며 울렸다. 바닥으로 책을 내던진 것 같았다.
옆에서 치익, 불붙이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남자가 후우, 숨을 뱉었다. 매캐한 향을 품은 연기가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
“…….”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별안간 복숭아뼈에 손길이 와 닿았다. 소름이 끼쳐 자칫하다가는 몸을 움찔 떨 뻔한 순간이었다. 난 자는 척에 충실하기 위해 어금니를 좀 더 꽉 깨물었다. 손끝은 복숭아뼈 근처를 배회하다가, 종아리를 느릿하게 타고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손길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달팽이가 남기는 점액질처럼 끈적거리는 무언가를 뒤에 남겼다.
잠든 내 얼굴을 바라보며 담배를 뻑뻑 태우고 있는 남자. 이자의 머릿속을 한 번 해부해 보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있는 건지. 차라리 바질 벗겨 온다면 반응이라도 할 텐데. 추행이나 하면서 지켜보고만 있으니 내 쪽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가슴팍을 가로질렀다.
“…….”
“…….”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가운데, 등 안쪽으로 팔이 들어왔다. 단단한 팔이 내 몸을 소파에서 떼어 놓더니, 다른 쪽 팔이 무릎 안쪽으로 들어와 내 몸을 안아 올렸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장 대표의 발걸음이 내가 머무르는 방이 있는 쪽으로 향하다가, 일순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다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이 방향으로 가면 남자의 방이었다. 난 뺨 안쪽을 짓씹었다. 내 늑골에 닿아 있는 남자의 흉통이 일순 몸집을 크게 부풀리더니, 이내 숨을 크게 뱉었다.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알겠네.”
음색 짙은 목소리가 내 뺨을 두드렸다. 혼잣말이라기엔 목소리가 너무 분명했고, 다른 이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라기엔 너무 나직했다. 혹시 들킨 건가 싶어 가슴 졸여 하고 있는데, 장 대표가 가소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는 척을 하려면 숨을 쉬어야죠. 하려던 게 죽은 척이 아니었다면.”
너무 놀라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곧이어 몸이 푹신한 침대 위로 내려갔다. 난 가늘게 눈을 떠서 어둠을 마주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남자가 재킷 안에서 담배와 지갑을 차례대로 꺼내더니, 이내 재킷까지 벗어 침대 한쪽에 던져 놓았다.
“서여원 씨 가증스럽네, 아주.”
허공을 응시했다. 드레스 룸 쪽 센서 등이 켜져서 남자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 지친 기색이 깃든 얼굴이 날 마주했다.
“어머님은 뵙고 왔어요?”
“네.”
“차도가 보이시던가요.”
…차도가 보이냐고.
난 순간 정말 의아해져서, 하마터면 당신이 그런 건 왜 묻냐고 물어볼 뻔했다. 그냥 평소처럼 내 바지나 벗겨다가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하체나 휘두르면 되는 거 아닌가.
뭐라 답이 없자, 의아한지 눈썹 한쪽을 휙 추켜올렸다. 그러다가 침대 위에서 담뱃갑을 집어 올려 하얀 막대 한 개비를 꺼냈다. 입에 물곤 지포 라이터를 향해 손을 내 뻗길래, 내가 먼저 그걸 손에 집어 들었다.
“뭐 하는 짓….”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주먹 하나 간신히 드나들 것 같은 간격을 두고 멈췄다. 그의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 끝에 대고 라이터의 휠을 휙 굴렸다. 장 대표가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자 주황색 불이 치익, 하고 피어났다. 여릿한 불빛이 방 안을 밝혔다.
장 대표가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내 턱을 잡아 왔다. 그러곤 고갤 기울여 필터 대신 내 입술을 빨았다.
머리칼 사이로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와 안을 마구 헤집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장 대표의 입술에 막혔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CCTV가 없는 남자의 방 안. 남자가 날 목도해 왔다.
정사가 휘몰아치고 간 방 안. 적막이 흘렀으나 방 안에 남아 있는 끈적한 기운은 그대로였다. 묘한 냄새가 공중을 부유하고 다녔다.
난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얼마 못 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반대편으로 고갤 홱 돌렸다. 십 분 남짓한 그사이, 잠깐 든 잠에서 악몽에 시달렸다.
“…….”
난 팍 눈을 떴다. 몸이 후들 추웠다. 찬 기운이 전신을 내달렸다. 자칫하다간 덜덜 떨리는 손끝이 온기를 찾아서 남자에게로 닿을 것 같아 양팔로 자신의 몸을 껴안았다. 잠귀가 귀신처럼 밝은 남자는 그 작은 몸짓에도 신음 소릴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음.”
협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검정 가죽 지갑이 눈에 들어오던 참이었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장 대표의 손이 무언가를 찾고 다니는 게 느껴졌다. 서슴없이 매트리스 위를 더듬고 다니더니, 이내 손끝이 내 몸뚱어릴 발견했다.
순간 깬 건 아닌가 싶어 석고상처럼 얼어붙어 있는데, 이내 장 대표의 호흡 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행히 잠결에 한 행동 같았다. 자다가 무의식적으로 베개를 끌어당기곤 하는 것처럼.
난 남자의 동태를 살피다가 다시 뒤로 고갤 돌렸다. 지갑을 눈에 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안에 버클로 고정되어 있었던 차가운 병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예민한 남자도 저 작은 병 하나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엔 쥐죽은 듯 잠들곤 했었는데….
“…….”
“…….”
충동적으로 오른손을 협탁 쪽으로 내뻗었다. 아까와 달리 장 대표가 뒤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지갑에 손끝이 간신히 닿을 듯 말 듯했다. 한 끗 차이에 이를 악물고 팔을 좀 더 길게 내뻗자, 손끝에 지갑이 걸려 왔다. 손끝에 힘을 주고 내 쪽으로 끌어 왔다. 지갑을 양옆으로 펼치곤 최대한 인기척을 낮춰 버클을 끌러서는 병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다.
고작해야 새끼손가락 길이만 한 것이 손에 착 감겨 왔다. 손에 넣고 한참 만지작거리다 고갤 슬쩍 돌려 남잘 눈여겨보았다. 툭 불거져 나온 눈썹 뼈 아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가만히 닫혀 있었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고 일어나선 발을 한쪽씩 바닥으로 내렸다. 이제 매트리스에서 엉덩이를 들어 올리려던 찰나.
‘…헉!’
불쑥 튀어나온 손에 팔뚝이 확 채였다. 흠칫 놀라서 돌처럼 굳어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초점이 약간 흐릿한 눈동자가 상황을 가늠하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그러는 동안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졌다. 남자가 잔뜩 쉰 목소리로 물어 왔다.
“…쥐새끼처럼 어딜.”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요.”
용건을 불었음에도 내 팔뚝을 붙든 장 대표의 손아귀에선 힘이 빠져나갈 줄을 몰랐다. 의심 많은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벗어요.”
“…네?”
그는 새벽의 열기가 그대로 녹아 있는 거친 음성으로 되풀이했다.
“벗고 다녀오라고.”
50층 높이에 달하는 펜트하우스에서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다고 벗으라 하는 건지. 발 앞에 떨어진 싸늘한 명령에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몸에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 냈다. 셔츠가 몸을 타고 매끄럽게 내려가 사르륵 소릴 내며 바닥 위로 떨어졌다.
남자의 두 눈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몸에 닿아 왔다. 시선이 내 몸을 구석구석 핥아 왔다.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게 들킬까 순간 오한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난 한층 더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내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다녀올게요.”
등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차박차박, 대리석 바닥에 맨발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방 안쪽에 딸려 있는 화장실에 불을 켜고 안으로 들어와선 세면대에 물을 틀어 두었다. 쏴아아, 굵직한 물줄기가 하얀색 도기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변기 뚜껑을 덮고는 그 위에 앉았다. 주먹을 서서히 펴서는 여기까지 꽉 붙들고 온 작은 병을 내려다보았다. 병을 조금 기울이자, 하얀 알갱이가 스르륵 소릴 내며 한쪽으로 쏟아졌다.
지금 당장 취하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타월을 넣는 선반의 문을 열어 타월에 감싸 두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침대 모서리에 붙어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떨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문득 내게 어울리는 위치라는 생각이 뇌리를 가로질렀다.
***
드레스 룸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던 장 대표가 돌연 욕지거릴 뱉었다.
“…씨발.”
마저 매듭을 짓다 말고, 손으로 꾹꾹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어젯밤 풍기는 술 냄새가 유독 진하다 싶더니. 다른 때보다 폭음을 해 숙취에 시달리는 듯했다. 결국 넥타이를 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휴지를 말듯 실크 넥타이를 손에 둘둘 감아선 리빙 박스로 던져 넣었다. 다소 신경질적인 손짓이었다.
장 대표 못지않게 나 또한 어젯밤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선 팔 하나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이 와중에 공중에 떠다니는 냄새가 자꾸만 코를 예리하게 찔러 왔다. 땀 따위가 정액과 뒤섞여 나는 냄새였다. 출처마저 역겨운 내가 진동을 해 대는 탓에 관자놀이가 다 얼얼했다. 욕지거리가 절로 났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 방에서 기어 나가고 싶었지만. 난 일단 눈만 가늘게 떠서 남자의 등을 눈으로 좇는 중이었다.
“…….”
“…….”
남잔 이제 머릴 매만지고 있었다. 이자는 늘 뒤로 넘긴 머릴 고집했는데, 그게 그로 하여금 한층 더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는다 해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꺼먼 머리칼 한 줄기가 대열을 벗어나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장 대표는 인상을 살풋 찌푸리며, 이마를 손으로 훑어 올렸다. 그 가벼운 움직임에도 셔츠에 감싸인 날갯죽지는 야단스럽게 요동쳤다. 널찍한 삼각형을 이루는 활배근이나, 근육으로 빈틈없이 촘촘히 짜인 등은 그래도 벗고 있을 때보단 무언가를 위에 걸치고 있을 때 덜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고 안전하단 느낌을 주는 것도 절대 아니지만.
별안간 장 대표가 몸을 빙글 돌렸다. 살짝 엿보인 남자의 옆얼굴에 난 지레 놀라 얼른 눈을 감았다.
“…….”
“…….”
어둠 속에서 장 대표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그가 만드는 나른한 인기척이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서걱서걱. 옷감이 저희들끼리 부딪쳐 나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이서 들리는 게, 아무래도 내 쪽으로 오고 있는 듯했다.
닫힌 눈꺼풀 너머로 내 쪽으로 손길이 뻗어 오는 게 느껴졌다. 날 향해 마수를 뻗쳐 오던 손은 바로 옆에서 멈췄다. 지갑이 올려져 있는 협탁 부근이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남자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뺨과 귀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죽 찢어진 눈매 안에 담긴 눈동자로 침대에 늘어져 있는 날 내려다보고 있을 거였다. 난 몸통에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조립해 놓은 로봇 같은 모양새로 남자의 시선을 받았다.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혹시 벌써 눈치챈 걸까. 내가 자신의 약을 훔쳤다는 사실을?
“…….”
“…….”
현관문이 닫히며 나는 파열음이 빈 복도를 울렸다. 그에 난 불현듯 눈을 떠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방 안에 딸려 있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타월을 넣어 놓은 선반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장 대표가 가장 위에 놓여 있던 것만 꺼내어 사용했던지, 그걸 제외하곤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롤 케이크처럼 돌돌 말려서 쌓여 있는 타월들 안쪽으로 손을 깊숙이 넣었다. 가장 안에 놓여 있는 걸 꺼내 들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키친타월처럼 둘둘 말려 있는 걸 펼치자, 안쪽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작은 병이 밖으로 드러났다. 내가 새벽에 넣어 놓은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었다.
“…아.”
변기 위에 앉아선 탄식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병원에 도착해서도 스스로 저질러 놓은 짓에 대한 후회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몸을 닦으면서도 간간이 말없이 탄식했다.
너무 큰 짓을 저질러 버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잔 내가 약을 훔쳤단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분명 응징할 거였다. 불안감에 엄지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잘근잘근. 혀끝에서 떫은맛이 났다. 오래된 붕대에서 나는 맛이었다.
악몽은 늘 나를 한계치로 밀어붙이곤 했다. 가위처럼 날을 예리하게 세워선 얄팍한 뇌막을 푹 찌르고 안으로 들어와 사고 회로를 뚝뚝 잘라 토막 냈다. 특히나 애비의 깨진 머리통이 나오는 악몽은 내게 실로 파괴적인 위력을 행사했다.
새벽엔 딱 그런 꿈을 꾸고 난 이후였다. 그때의 나는 칼로 단단한 겉껍질을 까 놓은 밤과 같은 상태였다. 여린 속껍질로만 간신히 속내를 보호하고 있는 그런. 길 잃은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모습이었다.
“…….”
섬에선 늘 혼자여 왔다. 도움을 구해 본들, 아무도 들어 주는 이 없어 공허한 외침만 감돌던 악몽에서 깨어나면 매번 숨 막히는 정적이 날 반기곤 했다. 운이 없는 날엔 꿈에서 깨어나서도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차가운 영혼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건 몸 없이 영혼만 남아 지상을 떠도는 아버지였다. 그럴 때면 난 몸을 주먹처럼 작게 말곤 얼른 이 새벽이 날 떠나 주기만을 빌었었다. 그 오 평 남짓한 작은 방은 철저히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장 대표가 옆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매정한 남자에겐 손을 뻗어 봤자 찬 비웃음만 살 게 분명했고, 그런 겁약해진 상태로 남자에게 먼저 손을 내뻗는 것 자체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의 몸 대신 이것을 붙잡았다. 지독히 예민한 남자 또한 이거 하나면 쥐죽은 듯 잠들곤 했으니까.
그렇게 충동적으로 한 선택이 내 손에 칼을 쥐게 만들었다. 근데 이게 내 목을 내려칠 칼이란 게 문제였다.
“…하아.”
길고 낮은 한숨을 뱉으며 병원 침대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었다.
***
단두대 앞에 서 있는 기분으로 반나절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다가, 불현듯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제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누구지.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장 대표가 귀가했다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 때였다. 그간 이 집에 들린 자는 아주머니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아주머니도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 올 뿐이니까. 아주머니는 아닐 테고….
멈칫대고 있던 사이,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대표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심부름. 장 대표에게선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는데. 난 경계심을 세우곤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새로 문 너머에 있는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총 둘이었는데, 판잣집에서 봤던 그 직원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문을 활짝 열어 놓곤 스토퍼를 걸고는 잠시 모습을 감췄다. 남자들이 왜 이곳을 찾은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던 난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손끝만 괴롭히고 있었다.
잠시 후에 직원 둘이 거대한 무언가를 끌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멍청하게 서 있던 나는 얼른 뒷걸음질 쳤다. 직원들은 그걸 끌곤 장 대표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정 둘이 들기에도 무거운지 끙, 하는 신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제 할 일을 마친 직원 둘은 손을 털며 현관문으로 나와선 날 본체만체하며 집 밖을 나섰다. 그들은 장 대표가 시키는 일만을 수행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 있다가 천천히 장 대표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치게 뭐가 없어 썰렁하단 느낌을 주던 방 안에 새로운 가구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바로 책장이었다.
“…….”
책장 안엔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온통 경영 경제 분야의 것들이던 기존의 것과는 달리, 여러 분야의 것들이 칸별로 나뉘어 꽂혀 있었다. 꼭 서점의 베스트셀러 매대를 그대로 옮겨 온 것만 같은 책장이었다.
갈색의 가구들만 몇 개 덜렁 놓여 있는 와중에, 방 안에서 저 혼자만 밝은 하얀색이라 묘한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높이를 균일하게 맞춘 다른 책장들보다 이것 하나만 이상하게 한 칸이 낮았다.
그게 하필이면 딱 내 시선 높이와 얼추 맞았다. 그걸 눈치챈 순간, 불편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렸다. 우연일 테지만 목에 낀 가래처럼 불편했다.
장 대표가 곧 집에 도착한다고 연락해온 건 그로부터 약 3시간 후였다. 약통을 두고 내내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나는 눈에 띄게 초조해졌다. 이제는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나는 인덕션 밑 선반에서 설탕 통을 꺼내와 남자의 방으로 갔다. 설탕 통의 뚜껑을 열어 세면대에 반쯤 부었다. 그러곤 새 타올을 꺼내 나머지 설탕을 그 위에 쏟아 부었다.
“…….”
약통을 숨겨 놓았던 타올을 꺼내선 텅 빈 설탕 통에 약을 부어 넣었다. 스르륵, 하얀 알갱이들이 작은 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약통엔 설탕 가루를 부어 넣었다. 설탕이 든 약병은 내 주머니에 넣고, 약이 든 설탕 병은 손에 쥐어 들었다. 다시 부엌으로 나와 설탕 병을 선반에 놓으려고 하는데.
띠리릭.
현관문에서 들리는 번호 키 소리에 흠칫 놀라 모든 행동을 멈추고 있다가, 허릴 굽힌 엉거주춤한 자세로 장 대표를 맞았다. 등으로 꽂혀 오는 시선에 고갤 뒤로 홱 돌리자, 날 지켜보며 서 있던 남자와 그만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러다 장 대표의 시선이 설탕 통을 붙들고 있는 내 손으로 와 닿아서야 퍼뜩 정신 차렸다. 나는 얼른 설탕 통을 얼른 선반에 집어넣곤 상체를 일으켰다.
남자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타이밍이 조금만 빨랐어도 좋지 못할 꼴을 볼 뻔한 상황이었다. 난 니트에 연신 손을 문질러 닦으며 희미한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다녀오셨어요.”
쥐어짜 낸 말에 남자는 침묵했다. 제발 저 입술로 뭔가라도 말해 줬으면 싶은데…. 남잔 입은 다문 채로 눈으로만 내 행색을 훑어 내릴 뿐이었다. 난 초조하게 남자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남자의 표정은 읽어 낼 수 없었다.
지나치게 묵직한 침묵이 몸을 짓눌렀다. 영겁과 같은 찰나의 순간이 흘렀다.
“…….”
“…….”
별안간 장 대표의 이맛살이 흉악하게 구겨졌다. 뭔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빛이 눈동자에 떠올랐다. 그에 뭔가를 감지한 나는 아랫입술을 꽉 물곤 닥쳐올 상황에 대비했다.
남자의 입술에서 비난의 어조가 터져 나왔다.
“…꼴이 그게 뭡니까.”
남자는 예상과 달리 내 행색을 짚어 냈다. 그의 말에 난 고갤 숙여 입고 있는 옷을 들여다봤다.
샤워 후, 입고 있던 셔츠는 손으로 빨아 버렸다. …원체 땀이 잘 나지 않는 편이라 며칠 입고 있었다고 해서 불쾌한 내가 난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관계할 때조차 벗지 않고 있던 터라 상당히 찝찝했었다. 그걸 빨아 버리니 입을 옷이 없어 이곳으로 올 때 입고 왔던 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섬에선 늘 이런 차림이었는데. 이 꼴로 남자의 앞에 놓이니 별안간 행색이 더 초라해 보였다. 니트는 목 부근이 늘어나 있었고, 소매 부분은 추레하게 헤져 있었다. 옆구리 부분은 팔과 마찰되어 올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청바지는 무릎 부근이 하얗게 바래 있었다. 오염될까 걱정되어 앞치마 따위로 옷을 덮을 필요도 없었다. 남자의 집에 있는 앞치마가 내 상, 하의보다 더 비쌀 테니까.
난 다시 고갤 들어 올렸다. 넥타이 없이 단추를 풀어 놓은 셔츠 사이로 남자의 길고 굵직한 목과 곧게 뻗은 쇄골이 엿보였다. 그가 목을 울리자, 목 중간에 있는 울대가 요동쳤다.
“안에 갈아입을 옷이 많았을 텐데.”
…그건 모두 당신 옷이잖아. 혀끝에서만 말이 맴돌았다. 남자의 옷은 내겐 어깨선도 맞지 않았고, 팔이며 다리며 기장이 너무 길었다. 품질도 지나치게 좋았다. 여러모로 내게 맞는 옷이 아니었다.
장 대표가 재킷을 어깨 한쪽에서 벗겨 냈다. 나는 인덕션의 불 세기를 낮추곤 그에게로 다가가 재킷을 받아 들었다.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단 듯 내게 재킷을 건네곤 날 내려다보았다. 난 남자에게 시선을 맞추며 작게 말했다.
“…씻고 오세요.”
장 대표가 능숙한 손길로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물었다.
“머리가 젖어 있는데. 어느 화장실에서 씻었습니까.”
“…방 안에서요.”
남자가 눈썹 한쪽을 까딱거리더니, 방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옷가지를 하나둘 벗어 낸 남자는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남자의 재킷을 손에 붙든 채로 하얀 빛깔을 띠고 있는 책장을 붙여 세운 벽면을 눈에 담았다.
남자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저 책장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제 손으로 이 안에 들여놓고는. 다시 고갤 천천히 돌려 화장실 문을 응시했다. 안에선 아직까지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재킷 주머니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고 있던 약병을 꺼냈다. 사아아, 병 안에 채워져 있는 설탕 가루들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나오기 전에 그걸 얼른 지갑의 버클 안에 채워 놓았다.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 스탠딩 행거에 잘 걸어 둔 후, 기계적으로 재킷의 어깨를 털어 냈다. 그러곤 화장실 앞에 떨어져 있는 옷을 정리했다.
방문을 닫고 나와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다시 장 대표의 식사를 준비했다.
***
장 대표가 어딘가 이상하다곤 생각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날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예전과 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다.
가장 먼저 그의 말투에서 변화를 눈치챘다. 남자는 더 이상 날 두고 저속한 단어들을 사용치 않았다. 창놈, 빡통과 같은, 그런 단어들 말이다. 그렇다고 남자의 태생부터 함께 했을 것 같은 혀끝의 칼이 어디로 간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예전보단 끝이 묘하게 무뎌진 느낌이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날 향해 오는 눈빛이 예전보다 유해졌단 걸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고압적이긴 했으나, 돈벌레보다 하등한 걸 보듯 날 바라봤던 눈길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종적을 완전히 감췄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 거지. 물음표가 쉴 새 없이 머리를 가로지르는 와중에 안 하던 짓거리까지 해선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뜬금없이 책장을 집에다 들여다 놓은 거였다. 그것도 내가 책을 읽다가 잠들었던 날 며칠 이후에.
“…….”
…설마. 설마 나 때문에 들여놓은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을 잠깐 해 보다 얼른 손을 흔들어 그 잡스러운 생각을 머리에서 밀어 내었다. 구마 의식과도 같은 손짓이었다. 악귀와 심성이 별다를 바 없는 남자는 절대로 남을 위해 그딴 걸 들여놓을 인간이 아니니까.
애써 밀어내려던 의심이 다시 풍선처럼 몸을 부풀렸다.
하얀 책장은 지금까지도 장 대표의 지문 한 번 묻혀 보지 못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문은 고사하고, 그 특유의 싸늘한 눈길조차 몇 번 받아 보지 못했다. 못해도 몇백은 들였을 텐데. 남자는 그런 목재 덩어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사실 남자는 책 따윈 읽을 엄두도 못 낼 만큼 너무나 바쁜 인간이었다. 평일, 주말 할 거 없이 새벽 시간대에 나가 저녁에나 돌아왔다. 이따금씩은 접대 때문에 늦는 날도 있었다. 그럼 대체 왜 책장을 들여다 놓은 걸까.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내게 준 게 맞는 거겠지.
죽어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이전보다 친절해졌단 사실을 말이다. 생각의 가지가 여기까지 뻗쳐 나가자, 등골이 절로 오싹했다.
“…….”
성인 네다섯 명이 함께 살아도 넉넉할 정도로 큰 방인데. 책장 하나 들여놓았다고 왜 이리 속이 누름돌 얹어 놓은 듯 갑갑한지.
돈을 들인 티가 나는 고급 책장이었으나, 지금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 값만 하더라도 그런 책장을 몇 개는 살 수 있을 거였다.
그러나 피부를 짓누르는 무게는 책장 쪽이 훨씬 육중했다. 그도 그럴 게, 남자에게서 부탁하지 않은 것을 받은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남자에게 요구를 했어야 시혜받을 수 있던 거였는데.
…게다가 분명 얼마 못 가 들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아직까지 약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
***
병원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입구를 벗어나자, 햇볕이 이마와 콧잔등으로 강하게 내리쬐었다. 눈이 부셔서 손등으로 볕을 가리며 차가 주차되어 있던 길가로 향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뭔갈 발견하곤 천천히 발걸음 속도를 늦췄다.
타고 왔던 차 앞에 그와 비슷한 색상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선팅이 짙게 되어 있는 세단의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안에 앉아 있던 인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장 대표의 눈이 날 포착해 왔다. 보기 좋은 입술이 내게 명령했다. 어서 타.
시발, 입 안에서 혀를 굴리곤 발을 질질 끌어 남자가 탄 차로 향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날 뒷좌석에 태운 차가 향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볼품없는 니트에 패딩을 걸치고 있던 나는 잔뜩 기가 죽어선 입구 앞에만 서서 머저리처럼 주뼛대고만 있었다.
“…….”
“…….”
장 대표는 검은 정장 바지를 감싼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며 백화점 안의 매장들을 눈으로 훑었다.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한 마네킹 앞에서 멈춰 섰다. 남자는 마네킹에 걸려 있는 옷을 통째로 벗겨 내게 그것으로 갈아입고 나오라 말했다.
군말 않고 장 대표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백만 원으로 몸을 감싸고 탈의실에서 나오자, 남자가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날 관찰하던 남자의 울대가 불현듯 가벼이 울렸다. 꿀꺽. 같은 인간을 눈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남자에게 팍 기가 질렸다.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백화점에서 장소를 옮겨 한 고급 일식집으로 향했다.
한눈에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종업원이 룸 가장 안쪽 자릴 안내해 줬다. 예약을 해 두었는지, 테이블엔 빈자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접시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막 준비를 해 놓은 듯, 음식들에서 하나같이 광택이 줄줄 흘렀다. 중앙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선분홍색 참치 회가 저희들끼리 옆구릴 겹친 채로 누워 있었다. 살결이 야들야들해 보이는 게, 혀 위에서 살살 녹을 것 같았다.
“술은요.”
…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장 대표가 기꺼운 티를 숨기지 않으며 웃었다. 그가 상냥한 척, 목소릴 꾸며 날 얼렀다.
“나도 저녁에 선약이 있어서 많이 할 생각은 없어요.”
천천히 고갤 주억거리자, 남자가 종업원을 불러 위스키를 주문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다시 룸 안으로 들어왔다. 짧고 굵은 갈색 병 하나와 얇은 유리잔 두 잔을 방에 주고는 간결한 움직임으로 문을 닫고 떠났다.
장 대표가 맛깔스러운 빛깔의 액체를 잔에 따랐다. 황홀한 빛을 품은 황금색 액체가 두 잔을 채웠다. 하나는 내 쪽으로, 나머지 하나는 장 대표 앞에 머물렀다.
남자가 먼저 술잔을 비우기에, 그 뒤를 따라 술잔을 꺾어 입 안에 액체를 쏟아부었다. 도수 높은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고 지나갔다. 눈에 눈물이 맺혀선 시야가 다 일렁거렸다. 남자는 재밌다는 얼굴로 이 모든 장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난 눈물을 약간 매단 눈으로 그런 남자의 시선을 받아쳤다.
불현듯 장 대표가 날 더러 물었다.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마실 생각은.”
…부디 입을 닥쳐줬음 했다. 눈을 천천히 내리깔곤, 애꿎은 아랫입술만 괴롭혔다. 거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니 차라리 땅으로 꺼져 버리고만 싶은 심경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날 앞에 두고 남자가 별안간 무례하게 웃었다.
“그럴 거면 왜 그런 얼굴로 쳐다봅니까.”
내가 대체 뭘 어떻게 쳐다봤다는 건지. 손목을 끌어당겼다면 어쩔 수 없이 허벅지 위로 올라가야 했겠지만. 남자는 다행히 날 제 맞은편에 그냥 두었다. 일단 두고 보자는 심산인 듯했다.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묵언의 신경전이 행해졌다. 장 대표가 대뜸 이상한 질문을 던져 와선 그 묘한 침묵을 깨트렸다.
“오늘은 뭘 하고 시간을 보냈어요.”
뜻밖의 질문에 내심 당황했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냥…. 아주머니와 아침을 먹고 텔레비전을 봤어요.”
저번에 이어 오늘도 크림 파스타가 식탁 중앙에 놓여 있었다. 조용히 그걸 내려다보고만 있으니까 아주머니가 작게 웃으며 말했었다. 사장님이 학생 이거 잘 먹는다고 그러더라고. 굳이 듣지 않아도 됐을 말이었다.
“병원은 잘 다녀왔습니까.”
“…네.”
물어봐 놓곤 별 관심 없단 얼굴을 짓고 있던 남자가 재킷 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시선이 저절로 지갑 안쪽에 딸려 있는 클립에 이끌렸다. 여느 때처럼 병이 끼워져 있었다. 저게 내가 넣어 놓은 그게 맞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남자는 지갑 안에서 카드를 꺼냈다. 직사각형의 플라스틱 카드 끝으로 테이블 위를 툭툭 치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천천히 눈을 올려 마른 장작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인간 흉내를 내는 남자를 응시했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이 남자의 얼굴에 씌워져 있었다.
“그렇게 오래 누워 계시다가 운 좋게 깨어나는 경우도 분명 있다고 들었습니다.”
꼭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듯한 말투였다. 병원 측에 직접 물어본 걸까. 왜 굳이 그런 수고를. 관계랄 게 전혀 없는 사람인데.
“…저희 어머니는 왜.”
운을 띄우자, 테이블을 두드리던 장 대표의 손짓이 조금 느려졌다.
“왜 궁금해하시는 걸까요?”
남자의 손에 붙들려 있던 카드가 테이블 위에 누웠다. 남자가 턱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내가 궁금해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굳이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불필요한 관심과 불쾌한 친절을 내보이는 남자 때문에 차라리 창놈 취급을 받을 때가 더 편할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남자에게 동정을 사고 싶진 않았다.
“이건 그냥,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일이니까….”
흐린 말끝에 남자의 음성이 따라붙었다.
“개인적인 일?”
싸늘한 물음에 찬물을 끼얹어 놓은 듯, 룸 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써늘하게 식었다. 난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얼음장처럼 냉랭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 얼른 말을 이었다.
“바쁘시니까 불필요하게 제게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남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그러니까 그거네. 개인적인 일이니까 넌 상관 말고 하던 대로 구멍 쑤시기나 하라고?”
어조는 상당히 달랐지만, 결국엔 그 얘기였다. 정곡을 찔린 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서여원 씨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지.”
…내가 뭐냐고.
“뚫린 입이라고 잘만 지껄이더니 왜 말이 없어요.”
“…….”
“네가 뭐냐니까.”
내가 무엇이냐고. 글쎄. 남자에겐 기껏해야 예쁜 옷 입혀 놓는 마네킹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걸 입 밖에 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올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장 대표는 넥타이의 매듭을 잡고 흔들며 입 운동을 했다.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고, 뺨이 간헐적으로 씰룩거렸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남자 때문에 나는 뺨 안쪽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설마 내가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해요?”
“…….”
“입으론 도망치지 않겠다고 지껄여 놨어도 그 조막만 한 머리엔 온통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는 거,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한 건 아닐 테고.”
장 대표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입술이 바짝 탔다.
“개는 주인 하기 나름이라고, 예뻐해 주면 좀 착하게 굴 줄 알았더니. 하던 대로나 하라니.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치게 나직해 음산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친절하게 다시 골프장에 처박아 주기라도 해야 하나?”
남자가 입술로 픽 웃었다. 눈엔 웃음기가 전혀 없어 더 무서워 보였다.
순식간에 냉각된 분위기에 룸 안엔 싸늘한 침묵만이 흘렀다.
장 대표의 뒤에 있는 창호지 문으로 몇 개의 그림자들이 흘러갔다. 불현듯 그것들이 먹구름 떼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남자의 뺨이 씰룩거렸다. 삽으로 한 뭉텅이를 파낸 것처럼 뺨 한가운데에 구덩이가 움푹 팼다. 미려한 눈썹을 찌푸린 채, 길쭉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다. 분을 삭이고 있는 듯했다. 본인 허벅지 위에 올라와 술을 마실 거냐 물었을 때완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귀찮은 일일랑 신경 끄고 본인 좋아하는 씹질이나 하라 말한 게 저렇게 열 받을 일인 건지. 지랄 맞기는. 이 남자 앞에선 내로라하는 지랄견도 혀를 내두를 거였다. 그런 생각들로 뇌를 채우며 지랄견들 대신 속으로만 쯧쯔, 혀를 차고 있는데.
지잉, 윙.
순간, 낮고 긴 진동이 무거운 기류 속을 파고 들어왔다. 난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흠칫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휴대폰을 집어 올리며, 싸늘한 조소가 도사리는 뱀 눈깔로 날 흘긋했다. 실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눈초리였다.
“…어.”
휴대폰에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경직된 목소리가 다음 스케줄을 알렸다. 남자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앉은 채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가는 등을 측면 시야로 좇았다. 닫혀 있던 문이 그의 손길에 의해 차르륵! 신경질적인 소릴 내며 열렸다.
“…….”
“…지금 나가고 있어.”
통화를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난 테이블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연어의 흐벅진 살점들이 몇 점 삭제되지도 못한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옆엔 주인을 잃은 카드 한 장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열린 문으로 룸 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갤 돌려 보니 남자의 부하가 거기에 서 있었다. 날 찾으러 온 듯했다. 유령처럼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둔 코트를 빼서 입었다. 룸을 나서려다, 멈칫하곤 뒤를 돌아봤다.
“…….”
“…….”
남겨진 것들이 발목을 채 왔다. 괜한 찝찝함에 미적대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룸을 빠져나왔다. 뭐, 내 알 바인가.
밖엔 코끝이 땡해지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래도 몸만은 이불 안에 있는 듯 뜨뜻했다. 남자가 사서 입힌 모직 코트 덕분이었다. 이틀 만에 솜이 푹 죽은 후줄근한 점퍼보다 두께는 현저히 얇았는데, 몇 배로 보온력이 뛰어났다. 돈맛에 혀끝이 떫었다.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다른 차를 타고 이동한 건지, 차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내 몸을 태운 차는 어둑한 거리에 헤드라이트로 노란 불을 쏘며 내달렸다. 이대로 골프장으로 향하는가 싶었는데. 다행히 날 집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것도 그 마귀 같은 남자가 아량 넓게 베푸는 친절의 연장선인 듯했다.
“…….”
혼자 있는 집. 침대에 누워선 온기 없이 서늘한 시트를 덮어다 몸을 꼼꼼히 덮었다. 혹시라도 남자가 늦게라도 돌아오진 않을까. 들어와서 이불을 들춰 내 몸을 만져 대진 않을까. 밤새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다행히도 그날 밤, 남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