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4)

06.

장 대표는 날 데리고 인형 놀이라도 할 심산인 듯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하를 시켜 옷을 보내왔다. 입어 보기는커녕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한 명품 옷들을 가져와 옷장들을 채워 댔다.

그중 하나를 골라 상의에 얼굴부터 집어넣었다. 끝부분을 잡고 몸으로 끌어 내리자, 옷감이 허리와 가슴을 딱 맞게 감싸 왔다. 그가 보낸 옷들은 늘 내 몸에 딱 맞았다. 남자는 단시간에 내 몸에서 빠져나간 지방까지 예리한 눈으로 집어냈다.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치밀함이었다.

옷을 모두 갖춰 입고 이제 그만 나가려고 하는데.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시계가 눈길을 끌어 왔다. 받아 놓고 안 하고 나가면 또 트집을 잡을 테니, 시계까지 손목에 채웠다. 번쩍거리며 제 값을 뽐내는 시계는 내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내 손목에 있으니 남의 걸 빌려다 채워 놓은 듯 그저 어색하고 이상하기만 했다. 차갑고 무거워서 손목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다는 이물감만 느껴졌다. 족쇄를 채운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 오늘은 유니폼 말고 제대로 된 옷 차려입고 와요. 내 손님으로 함께 칠 테니까.

그렇게 일방적으로 스케줄을 통보한 뒤 전화를 끊었던 장 대표는 클럽하우스에 김미란과 함께였다. 저 여자를 만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는데. 순간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 두 사람이 사업 얘길 나누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해 낼 수 있었다. 김미란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사뭇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 그들이 내 인기척을 느낄 수 있게끔 최대한 천천히 걸어갔다. 김미란이 날 먼저 눈치채고, 두 눈으로 날 위아래로 훑었다. 여자가 음흉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애한테서 돈 냄새가 솔솔 나는데.”

김미란이 꼬고 있던 다릴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무슨 졸부 같다, 얘.”

장 대표가 김미란의 말에 날 돌아보았다. 내 손목에 닿은 그의 두 눈동자가 일순 그의 꺼먼 가죽 지갑처럼 번쩍였다. 퍽 즐거운 기색이었다. 졸부. 남자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든 듯했다.

함께 라운지로 나아갔다. 채비를 마친 캐디는 고객들을 맞아들였다. 서비스 교육을 잘 받은 그는 VIP들을 향해 나란히 고갤 숙였다.

난 환하게 웃어 보이는 캐디를 보며 입매를 빳빳하게 굳혔다. 그 놈이었다, 내 돈을 훔쳐갔던 새끼.

오늘따라 유난히 뜨거운 볕이 이마와 뺨에 들러붙었다.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잔디들이 반짝거리는 빛들을 눈에 쏘아 댔다.

눈이 부셨다. 손으로 가림막이라도 세워 보고자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득해지는 시야. 점점 뒤로 달아나는 정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손가락 끝을 몇 번 까딱거려 보는 게 전부였다.

“…원.”

제어가 되지 않는 몸과 침묵의 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물밑에 깊게 잠겨 있던 정신을 일깨웠다.

“…서수원 씨.”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고갤 퍼뜩 쳐들었다. 장신의 남자가 뜨거운 햇볕을 등진 채, 날 지켜보고 서 있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 합니까?”

“…죄, 죄송합니다.”

장 대표는 면장갑을 벗어 내며 쯧쯔, 혀를 찼다. 그의 큰 체구가 빙글 돌더니 골프채를 캐디에게 넘겨주곤 골프장 카트로 올라탔다. 그의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꽂혀 올까, 얼른 뒤따라 카트에 올라탔다. 앞줄에 앉아 있는 김미란이 날 힐긋 돌아보며 빙글 웃었다.

“뺨 빨개진 거 봐. 그러길래 양산 밑에 있으라니까.”

장 대표의 목소리가 마른 공기를 예리하게 뚫었다.

“정신머리 없기는.”

능숙한 솜씨로 골프 백을 추스른 직원이 마지막으로 카트에 몸을 실었다. 차체가 매끄럽게 초록색 잔디밭 위를 거닐기 시작했다.

“…….”

앉은 자세에서 조금 뒤척거렸다. 원래는 세 명 정도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일반인들보다 어깨가 반쪽이 더 있는 장 대표가 한 켠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탓에,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그의 어깨와 어깰 맞부딪칠 것 같았다.

잔디밭을 일정한 방향으로 누이며 지나가던 카트가 오른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몸도 오른쪽으로 쏠렸다. 난 남자에게 부딪히지 않으려 부단히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장 대표는 내가 혼자서 벌이고 있던 조용한 전쟁을 기민히도 눈치챘다. 그가 한숨처럼 말을 흘려보냈다.

“가만히.”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강아지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그의 시선은 그의 말씨만큼 다정하지 못했다.

의자에서 손을 떼어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다. 난 손톱 밑을 득득 긁어 냈다.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아주 작은 가시가 이곳에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혹은 신발 안에 손톱만 한 돌멩이가 들어가 있어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모두 김미란이 데려온 저놈 때문이었다. 내 돈을 훔쳐 갔었던 놈.

녀석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예쁘장했고, 김미란은 녀석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장 대표는 놈의 얼굴을 보고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으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나뿐이었다.

잔디밭 위를 둘둘 구르던 카트가 마크된 곳 근처에서 멈췄다. 살갗까지 뜯어내도 계속해서 생겨나는 입술 각질처럼 성가신 놈이 김미란의 골프 백을 살뜰히 챙겼다. 미소 짓는 얼굴이 유달리 미끈해 보였다. 내 돈이 저 미소에 일조했을 거라 생각하니 또 심산이 비틀렸다.

난 손안을 가만히 틀어쥐었다. 피부밑을 쿡쿡 찔러 대는 가시를 눌러 잡기라도 하듯.

직원이 표시해 둔 곳에 공을 내려 두곤 골프채를 틀어쥐었다. 자세를 낮추고 땅에서 공을 쳐올리기 위해 하체에 바짝 힘을 주었다. 비싼 옷감이 하체에 착 감겨 왔다.

장 대표의 음습한 눈길이 옷감이 들러붙은 하체를 느릿하게 훑고 지나갔다. 난 입 안으로 혀를 굴렸다.

…참 한결같은 변태 새끼.

공은 딱 내가 날릴 수 있는 거리만큼만 날아가 필드 위에 안착했다. 골프채를 손에 쥔 채로 멍하니 공이 퉁퉁 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성가신 그놈이 다가오더니 내게 두 손을 뻗었다.

“제게 주시면 됩니다.”

고객 대하듯이 깍듯한 그 모습에 난 기계적으로 골프채를 내밀었다. 그놈이 두 손으로 그걸 받아 들며 내게 서비스용 미소를 보냈다. 그린 듯이 짜여진 미소에 난 더 이상 마주 보지 못하고 눈알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허벅지 옆으로 손을 툭 놓았다. 지랄 맞게 비싼 시계가 흘러 내려와 손등 위로 툭 소릴 내며 주저앉았다.

미묘한 신경전이 놈과 나 사이에 계속됐다. 나는 놈이 신경 쓰여 게임에 도무지 집중을 못 했다.

그린 위에 서서 비거리를 재 봤다. 홀컵에 단박에 넣기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장 대표가 내게 홀컵에 바로 넣으면 팁을 준다기에, 만전을 가해 골인시켰다.

약속했던 대로 장 대표의 지갑에 있던 수표가 내 손으로 옮겨왔다.

“…와.”

한켠에 서 있던 놈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러곤 역겨운 미소를 지으며 웬일인지, 칭찬을 다 해 왔다.

“대단하세요.”

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놈 때문에 눈살을 살풋 찌푸렸다.

“서수원 직원님이 일을 잘한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

“남자 직원이 그렇게 팁 많이 받는 건 처음 봐서요.”

혀에 꿀을 바른 듯 술술 내뱉는 말은 절대 칭찬이 아니었다. 의역하자면 너 같은 걸레 새끼는 처음 봤다는 말이니까. 장 대표의 입 꼬리가 상승 곡선을 그렸다. 재밌다는 듯 날 응시하다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골프채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

열 받는 일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중간엔 놈이 내 옷에 끈적거리는 술을 쏟았다. 김미란이 갈증이 난다며 마실 것을 찾자, 놈이 목을 축일 위스키를 준비했다. 김미란에게 한 잔, 장 대표에게 한 잔, 그러고 내게도 한 잔 건네 왔다. 내 앞에 내밀어진 잔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했다. 독이라도 탔을 것 같아 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여기에서 받지 않는다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뻗었다.

“…어!”

그러다 그만 놓쳐버렸다. 내 손에 잔이 닿기도 전에 놈이 놓아버린 탓이었다. 그 덕에 내 손과 옷, 신발만 엉망이 되어버렸다. 놈은 과장되게 사과하며 얼른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 대표와 김미란의 시선이 이쪽으로 달라붙어 왔다. 나는 뺨 안 쪽의 살을 콱 씹었다.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짜증이 났지만, 감정을 표해선 안 되는 자리였다. 나는 목을 깊이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는 놈에게 흐릿하게 지껄였다.

“…괜찮습니다.”

나는 흠뻑 젖어버린 옷을 손으로 털어내며 개수대로 갔다. 비누로 끈적거리는 손을 씻고, 옷을 대강 문질렀다. 하얀 옷에 남은 누런색 자국은 지워지기는커녕 물감처럼 번져 나가기만 했다. 이게 얼마짜리 옷이더라. 모르긴 몰라도 백만 원 대는 호가할 게 분명했다. 개새끼, 가증스럽게 죄송한 척 굴던 놈 때문에 화가 나서 벅벅 옷을 문지르고 있는데.

뒤에서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얼른 뒤를 휙 돌아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놈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날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곤 사라지길래 놈의 등을 노려보다가 등 부분 옷을 잡아당겨 확인해 봤다. 끈적거리는 가래침이 거기 묻어 있었다.

“…하.”

씨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

겨드랑이 밑과 오금 같은 이음새 부분이 끈적거렸다. 고객들만 입장 가능한 샤워실로 들어와 시원한 물로 몸의 찝찔한 액체를 씻어 냈다. 이제는 좀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업가 둘은 날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420호에 모여 사업을 빙자한 도박을 해 댔다. 걸 게 없으니 멀뚱히 앉아 딜러 역할만 하고 있는 나를 마음대로 게임에 끼워 넣었다.

제 패를 들여다보는 김미란의 시선엔 만족스러움이 묻어났고, 장 대표는 여느 때처럼 속내를 읽어 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내 몫의 카드를 끌어와 뒤집어 볼 차례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패는 최악이었다. 노 페어. 게다가 숫자들도 죄다 낮은 편이었다. 이런 곳에서조차 내 운은 비루하기만 했다.

“…….”

“…….”

난 일찌감치 카드를 뒤집어 놓곤 다이를 외쳤다. 테이블 위에서 조용히 베팅과 콜이 오갔다. 무표정으로 콜을 불러 대는 장 대표의 수세에 김미란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김미란이 담배를 피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기, 지금 또 나 갖고 노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여자는 아랫입술을 꼼꼼히 물어 대다 결국 다이를 외쳤다. 장 대표가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패를 뒤집었다. 그제야 남자의 패를 확인한 김미란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게 뭐야.”

노 페어. 가장 높은 숫자라고 해 봐야 5였다. 내 것과 붙였어도 졌을 패였다. 또 남자의 술수에 당한 여자는 쯧, 혀를 찼다.

이번엔 장 대표가 딜러가 될 차례였다. 그가 셔츠 소매를 능히 접어 올리곤 카드를 섞었다. 착착. 그의 손에선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만 하는 카드가 찰진 소릴 내며 배열을 바꿔 댔다.

김미란이 다릴 반대로 꼬고는, 담뱃갑 뒷부분을 허벅지에 대고 툭툭 쳤다.

“자기, 이번 신제품 좋더라.”

장 대표의 입아귀가 길게 찢어졌다. 그린 듯한 그의 미소에 감동하는 김미란과 달리, 난 속으로 조금 딴생각을 했다. 저것도 영업용 미소인 걸까. 직원들이 가면처럼 얼굴에 씌워 대곤 하는 그것 말이다.

남자가 빳빳하니 모서리가 날카로운 카드를 배분했다. 툭, 불거진 그의 손목뼈가 불끈거려 댔다. 셔츠 위로 탄탄하게 드러난 그의 팔 근육이 요동칠 때처럼 위협적이었다.

“현지에서 직접 대는 게 맛이 깔끔하긴 하죠.”

“이제 다른 거 빨면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라니까.”

하도 투명 인간 취급을 해 대길래 날 잊은 줄로만 알았더니. 장 대표는 잊지 않고 내게도 카드를 넘겨주었다. 난 또 패를 확인해 봤다. 패는 어김없이 비루했다. 그러나 좀 전의 상황에 힘입어 이번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콜입니다.”

“수원이 좋은 거 잡았나 본데.”

김미란이 귀엽다는 듯, 내 뺨을 가벼이 꼬집었다가 놓았다. 장 대표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우다 만 담배를 테이블보에 비벼 껐다. 그게 마치 김미란의 손길이 닿았던 내 뺨이라도 되는 듯. 순간 오한이 들어 창문을 흘깃했다. 창문은 생각과는 다르게 단단히 닫혀 있었다.

장 대표가 새로운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새에 끼우곤 불을 붙였다. 그가 지포 라이터를 테이블 위로 던지며 물었다.

“허기가 지진 않습니까.”

“…네.”

장 대표는 연기를 뱉으며 길게 찢어진 눈매를 한 줄로 접어 웃었다. 그마저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미소라 불현듯 섬뜩함이 느껴졌다.

“한참 잘 먹을 때죠.”

남자가 뭐가 먹고 싶냐 물어 왔다. 간헐적으로 삼키고 있는 메마른 타액마저 씁쓸하게만 느껴지는데. 입에 뭘 처넣고 싶을 리가 없었다. 그건 자기 고문이었다.

중의적 의미로 본인 사정에만 관심이 있는 남자는 이런 내 기분 따윈 생각지 않고 턱짓으로 채근해 왔다. 무얼, 입에, 처넣고, 싶으냐니까.

“…간단하게 요기만.”

내 말은 귓등으로도 채 듣지 않는 남잔 육류가 적당할 것 같다고 지껄였다.

“와인을 한 잔 곁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네.”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로 향했다. 프런트에 간단한 요기를 위해 육류와 와인을 주문했다. 게임이 멈춘 때를 틈타 여자는 담배를 말아 피웠고, 장 대표는 손등으로 턱을 괸 채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패를 다시 손에 붙잡았다. 순서가 오가며 무가치한 성냥개비들이 한쪽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갔다.

“…으음.”

김미란이 고갤 비스듬히 갸울였다. 내 의중을 가늠하려는 듯 신중히 표정을 살피다, 이내 다이를 외쳤다. 턴이 장 대표 쪽으로 돌아갔다. 장 대표 또한 패를 내려놓으며 죽었다. 그의 앞에 놓인 패를 본 순간, 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얼른 내 패를 다시 뒤집었다.

난 눈앞에 드러난 패에 입을 아, 하고 벌리고 말았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이건 분명 내 패가 아니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여자는 담배를 끼운 손으로 얼떨떨해 있는 내 뺨을 쓰다듬었다.

“세상에. 기세등등한 이유가 있었네.”

난 고갤 올려 장 대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손가락 끝으로 패를 툭툭 건드렸다.

그가 내 패를 뒤바꿔 놓은 게 맞는 듯했다. 내가 전화를 하고, 여자가 담배를 말고 있을 때를 틈타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김미란이 깼다. 마지막 돛대를 입에 문 여자가 습관처럼 내게 지폐를 건네 왔다.

“수원아, 담배 한 갑만 부탁할게.”

나 또한 습관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흠칫, 몸을 멈춰 세웠다. 장 대표의 시선이 내 손에 있는 지폐에 들러붙어 있었다. 장 대표의 날카로운 턱이 움찔거렸다.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볼 요량인 듯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룸서비스입니다.”

난 일단 문을 열어 줬다. 도둑 새끼가 그 밖에 서 있었다. 놈은 날 못 본 체하며 룸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놓았다. 놈이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 와중에도, 난 지폐를 손에 든 채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장 대표가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남자의 입매가 점점 딱딱히 굳어 갔다. 깨진 유릴 줍기 위해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어 다니던 날 지켜보던 얼굴이었다. 딱 그 표정과 몸짓이었다. 그는 지금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난 조용히 입을 놀렸다.

“…저기.”

내 목소리엔 힘이랄 게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놈은 얼른 손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난 천천히 놈에게로 다가가 지폐를 내밀었다. 놈이 내가 내민 지폐를 내려다보곤, 다시 내게 시선을 맞췄다.

“예, 부르셨을까요?”

놈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튀어 올랐다가, 다시 제자릴 찾아왔다.

“담배 한 갑 좀 부탁드릴게요.”

내 말에 놈의 얼굴 위로 일순 균열이 생겼다가, 다시 사라졌다. 깨진 틈새로 잠깐 떠올랐던 감정은 분명 치욕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아주 낮게 그 말을 지껄인 놈은 내게서 지폐를 두 손으로 받아다 룸을 나섰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이었지만, 난 놈이 내게서 지폐를 받아갈 때 입술을 떨던 걸 눈치챘다.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장 대표가 내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얼른 입에 넣읍시다.”

장 대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참 이상한 데서 흡족해했다. 저건 또 무슨 종류의 성애일지. 성을 연구하는 학자가 그를 데려다 생체 실험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포크로 고길 찍어 입 안에 넣었다.

난 입 안에 담긴 음식물과 함께 좀 전에 일어났던 일을 함께 곱씹었다.

장 대표가 가장 좋은 패로 바꿔 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애초에 제일 질이 낮은 패를 제공한 것 또한 그였다.

***

날씨는 변덕이 죽 끓듯 지랄을 떨어 댔다. 어젠 종일 무덥더니, 오늘은 또 희끄무레 이상했다. 반팔 밑으로 스치는 바람이 유달리 쌀쌀해, 자라목처럼 목이 자꾸만 카라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손등으로 닭살이 돋아난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는데.

콧잔등 위로 툭, 액체 방울이 떨어졌다.

어, 입을 작게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시처럼 가느다란 빗방울이 툭툭 잔디밭을 향해 내리 꽂히고 있었다.

이윽고 빗줄기에 굵기가 더해졌다.

부슬부슬. 빗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필드 위에 서 있던 장 대표도 마찬가지로 하늘을 응시하다가, 옆에 서 있는 놈에게 내 쪽을 눈짓했다. 눈치 빠른 놈은 남자의 불친절한 명령을 용케도 알아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놈이 빠릿빠릿한 손길로 꺼먼 장우산을 들어 올리더니 내 곁으로 와 붙었다. 난 아랫입술을 문 채로 신발의 앞코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시야가 금세 어둑해지고, 신발 주변으로 원형 모양의 그림자가 만들어져 고갤 들어 올렸다. 놈이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곁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놈의 얄팍한 입술이 당장이라도 욕을 뱉을 듯 씰룩거렸다.

“…….”

“…….”

난 적대감이 넘실거리는 놈의 시선을 조용히 받아쳤다. 장 대표의 시야에서 벗어난 후에야 불쾌감을 표출하는 좀도둑 따위,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단지 한 가지, 조금 찝찝한 부분이 있었다.

캐디들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있는 사무실은 고객들 비위 맞추는 데엔 선수였다. 그런 곳에서 손님과 트러블이 있었던 직원을 반나절을 함께 있어야 하는 캐디로 붙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데.

순간 가설 하나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장 대표, 혹시 저자가 이 새낄 직접 지명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장 대표가 입술을 뗐다.

“이제 좀 편해요?”

놈은 장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얼굴 표정을 잽싸게 바꾸곤 우산을 조금 높게 들어 올렸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우산 아래로 장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편하냐고? 내 속이 온종일 뒤집어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느긋할 뿐이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장 대표가 눈썹 한쪽을 비뚜름하게 추켜올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여간에 예쁘게 구는 법이 없지.”

장 대표가 못 말린다는 듯 과장되게 고개를 내저었다. 손에 틀어쥔 골프채로 잔디밭을 툭툭 쳐 균일하게 만들더니, 이내 완벽에 가까운 어드레스 자세를 취했다. 남자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팔뚝을 감싼 셔츠 부분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그가 힘껏 채를 휘둘렀다. 하얀 공이 하늘에 뜬 햇무리를 반으로 가르며 날카롭게 날아갔다.

장 대표의 두 눈이 공의 궤적을 좇아 갔다. 난 공을 바라보는 대신, 남자의 굴곡이 짙은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장 대표는 둔한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기민했다. 그의 앞에선 상대가 누구든 속내를 저 밑바닥까지 들키고 말았다. 장 대표가 그러도록 만들었다. 이자는 그런 치였다. 상대의 속살을 발라 기어코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야 마는.

그런 자가 이놈과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이 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놈이 암만 기를 써 대 봤자, 별 소용은 없었다.

장 대표가 공에서 시선을 떼어 내 내 쪽을 바라봐 왔다. 그가 진하게 웃었다. 결과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번에 친 공도 물론 좋은 샷이었지만, 그는 좀 전의 샷보다 더 근사한 샷을 무수히 쳐 왔었다. 그럼에도 저딴 식으로 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 남자의 구둣발에 밟혀 사그라드는 낙엽처럼 신음했다. …미친 새끼.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저렇게나 재밌을까.

빗줄기는 계속해서 굵기를 불려 나갔다. 더 이상의 진행은 무리라 판단, 필드에서 철수했다. 예견 없이 쏟아붓는 비를 피해 그늘막에 있는 파라솔 밑으로 기어들어 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장 대표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운치 좋네요.”

난 뜬금없는 남자의 운치 타령에 잠깐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골프장은 운치를 찾기엔 너무나도 을씨년스러워 보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그의 말에 얼른 동조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지랄맞은 남자의 성미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네.”

문득 옆얼굴로 시선이 느껴졌다. 난 천천히 앞으로 고갤 돌렸다. 장 대표와 시선이 맞부딪쳤다. 남잔 비 오는 골프장 대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는 돌연 불쾌해했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선이 굵직한 양쪽 눈썹이 홱 추켜 올라갔다. 그러잖아도 인상 사나운 남자가 작정하고 인상까지 쓰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가히 험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장 대표의 표정에 순간 흠칫, 했던 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찮은 두 눈알로 본인의 존안을 바라본 걸 사과해야 하나, 속으로만 빈정대고 있는데.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던 장 대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더니, 한 켠에 서 있던 놈에게 지시했다.

“위스키 한 병 주겠습니까.”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놈이 준비해 온 아이스박스에서 위스키 한 병과 얼음 바스켓을 꺼냈다. 테이블 위에 양주 두 병과 빈 잔들을 준비해 놓곤 뒤로 물러났다.

장 대표의 적당한 굵기의 목이 독주를 거침없이 꼴깍꼴깍, 삼켜 냈다. 그는 독한 술을 안주도 없이 즐기는 걸 좋아했다. 선명하게 자리 잡은 그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걸 바라보며 난 입 안에 고이는 침을 남몰래 삼켰다. 보기만 해도 속이 역겨웠다.

이제 장 대표는 예전처럼 술을 강요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사람을 앞에 두고 손가락이나 꼼지락거리고 있어 봐야 내 손해였다. 난 말주변이 없었고, 양주는 비싸 보였다. 뒤집어져 있는 잔을 가져와 내 바로 앞에 내려놓자, 남자는 의외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별일입니다.”

그가 따라 준 한 잔을 입 안에 머금고, 필사적으로 목 안으로 술을 삼켜 넣었다. 단박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찌나 쓴지, 생리적인 눈물까지 맺혔다. 손등으로 입가를 쓸자, 장 대표는 고갤 기울여 재밌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장 대표가 얼음을 채워 넣고 있는 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껄였다.

“이제 그만 가 봐도 됩니다.”

놈이 알겠다고 답하며, 마지막 정리를 했다. 골프 백을 어깨에 메곤 장 대표에게 묵례를 해 보였다. 장 대표가 팁을 주려는 듯, 평소처럼 지갑을 꺼내다가 잠시 행동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갤 돌려 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수원 씨가 고생시켰는데.”

장 대표는 뜬금없이 내 이름을 거론했다. 난 잠시 눈만 껌뻑거렸다. …왜 나한테.

“우산 들어 줬지 않습니까.”

넓은 그늘막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정적에 둘러싸여 서로의 저의만 재고 있는 상황. 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장 대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저치는 돈을 아끼는 자가 아니었다. 고작 팁 몇 푼을 일일이 셀 남자가 아닌데.

“…….”

이 상황을 얼른 마무리 짓기 위해선 장 대표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만, 난 놈의 손엔 한 푼도 쥐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눈빛으로 느긋하게 채근했다. 말 들어요, 좋은 말로 할 때. 꼭 그리 말하고 있는 듯했다.

천천히 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난 주머니 안에서 장 대표의 예전 지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가 내게 이걸 버리고 간 이후로 내가 들고 다니고 있었다. 별 이유는 없었고, 그저 주머니에 지폐들을 쑤셔 박고 다니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나을 것 같아 한 행동이었다.

가죽을 깊게 파고든 잇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는 지갑엔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담배를 사고 남은 천 원짜리 몇 장이 있었다. 놈에겐 천 원짜리 한 장 건네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상 어쩔 수가 없었다.

“…….”

놈이 입 안쪽 살을 콱, 물었는지 뺨이 일순 깊게 패였다. 각도상 내게만 보이고 있는 놈의 낯빛 위로 모멸감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내 앞에 서서, 내가 건네는 돈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을 못 견디는 듯했다. 난 그제야 장 대표의 의중을 눈치챘다. 그걸 깨닫자, 손이 제멋대로 누르스름한 지폐로 이끌렸다.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놈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놈은 두 손으로 내게서 돈을 받아들였다. 지폐를 움켜쥔 손등 위로 일순 얄팍한 핏줄이 돋아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놈은 내게 묵례를 한 후에 자릴 떴다.

점점 사라지는 놈의 등을 바라보며 난 눈을 천천히 끔뻑거렸다.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장 대표가 날 지나가는 어투로 가벼이 책망해 왔다.

“…사람이 그렇게 나빠서야 되겠어요?”

“…….”

남잔 별일 있었냐는 듯, 어깰 으쓱해 보이곤 양주병에 담겨 있는 술을 내 잔에 끝까지 따라 냈다. 나는 술잔을 꽉 움켜잡고 입 안에 들이 부었다. 독한 양주가 혀끝을 흠뻑 적셨다. 식도가 타들어 갈 것처럼 끔찍했던 술은 평소와 달리, 끝 맛이 조금 달았다.

“잘 마시네.”

“…곧 취할 것 같습니다.”

장 대표는 개의치 않아 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죠.”

“이 이상 마셨다간 실수할 수도 있을 것 같단 얘기였습니다.”

남자가 날과 어울리지 않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지껄였다.

“그 작은 머리로 술 앞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합니까.”

머릴 굴려 인간 한 명의 기분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 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 술로 적신 입술로 웃었다.

“나도 취하면 해결될 문제로.”

남자가 자신의 지갑에 손을 뻗더니, 안에서 작은 통 하나를 꺼냈다. 고작해야 남자의 약지 길이에 조금 못 미칠 것 같은 사이즈였다.

저건 또 뭘까. 난 호기심보단 의심을 담은 눈길로 남자의 큰 손아귀에 붙들린 그걸 주시했다. 장 대표는 미스터리한 남자였고, 그의 사업도 딱 그만큼 비밀스러웠다. 그의 자금들이 어디서 불어나고 있는지 구태여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건 전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저 작은 통만큼은 알아야 할 듯했다. 왠지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 같았다.

“뭔지 궁금합니까?”

“…네.”

“손바닥 내 봐요.”

난 장 대표가 종용하는 대로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남자가 통의 뚜껑을 비틀어 따곤 내 손목을 붙잡아 왔다. 내 손바닥 위에서 통을 거꾸로 뒤집어, 선 하나를 주욱 그려 냈다. 스르륵. 입구로 하얀 가루들이 새어 나왔다.

가루들이 전등불 밑에서 산발적으로 반짝거렸다. 언뜻 보면 깨진 유리 조각 같기도 했다. 현혹당한 듯 가루를 눈에 담고 있을 때. 장 대표가 은근히 물어 왔다.

“빛깔이 어때요.”

“고와 보입니다.”

남자가 이번엔 눈으로 웃었다. ‘멍청한 줄 알았더니 예쁘단 소린 잘 알아듣네요.’ 그딴 말을 지껄였을 때 지었던 표정과 유사했다.

“촉감은.”

주춤거리며 가루로 손을 내뻗었다. 설탕보단 입자가 작았고, 소금보단 손끝에서 구르는 촉감이 거칠었다.

“…부드럽습니다.”

“몸값 비싼 아이입니다.”

남자가 별안간 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내렸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뒤로 물리려고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그가 내 손바닥을 단단히 틀어쥐고 우뚝한 코를 깊게 묻었다. 그가 약을 코로 취하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그에 맞춰 그의 두꺼운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가, 다시 꺼졌다.

“음.”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몸에 퍼져 나가는 약 기운을 느꼈다. 그의 입술 새로 낮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간에 진 미세한 주름. 불그스름해진 눈가와 광대 부근. 그가 절정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취하던 표정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달큰하네.”

그가 느른히 만족스러워했다. 순간 꼬리뼈에 미약한 파동이 은근히 울렸다. 왠지 다리 사이가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다릴 꼬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몸에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술에 취한 걸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없는 공간으로 가 숨을 크게 내쉬고 싶었다. 마침 술병에 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걸 발견해 장 대표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대표님.”

그가 잔을 기울이다 말고, 날 바라봐 왔다.

“술을 좀 더 가져 오겠습니다.”

남잔 그러라고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안에 있는 응접실로 향하는데, 술을 입 안에 삼켜 넣은 남자가 뒷말을 덧붙였다.

“지금 기분 아주 끝내주는 상태니까.”

구태여 설명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을, 술을, 이름 모를 감각에 휩싸여 낯설어하는 나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그가 번뜩이는 눈으로 경고했다.

“내 이런 기분을 망칠 만한 짓거린 하지 말아요.”

어쭙잖게 도망가거나 하지 말란 소리였다. 난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등을 돌려 달아나는 심정으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에선 조용한 빗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천천히 발을 구르던 뭔가를 발견하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복도 끝에 누군가가 창가에 기댄 채로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다. 그 인영의 옆엔 익숙한 골프 백이 놓여 있었다. 짙은 검은색의 저건 장 대표의 것임이 확실했다.

“야.”

줄담배를 피워 대고 있던 놈이 날 불렀다. 난 조용히 놈을 응시했다. 손안에 흐르는 피가 싸늘히 식는 기분이었다.

놈이 꾸깃꾸깃하게 구긴 뭔가를 내 얼굴로 내던졌다. 피할 수 있는 속도였으나, 난 그대로 그걸 맞았다. 툭, 내 얼굴을 때린 종이 뭉치는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만 원짜리 지폐였다. 내가 놈에게 건넸던. 놈이 욕지거릴 해 댔다.

“니 드러운 돈 안 받아, 씨발.”

카악, 퉤! 놈이 내 발치에 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드러운 걸 봤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꼽고 등을 홱 돌렸다.

평소라면 그냥 보냈을 일이었다. 그러나 난 뒤늦게 올라온 취기에 각성 비스무리한 게 되어 있는 상태였다. 입술이 제멋대로 들썩거렸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새에 단어들이 입 밖으로 쏟아 내어졌다.

“그것도 다 내가 그 짓거리 해서 받은 건데.”

내 목소리가 복도를 울려 댔다. 분명 들릴 게 분명한데도, 놈은 못 들은 척 제 갈 길을 가다가 다음 말에선 발걸음을 뚝 멈췄다.

“니 새끼가 훔쳐 갔던 돈.”

놈이 얼굴을 휴지 조각처럼 구겨 대더니,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놈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복도 안을 울려 댔다.

“…또 그 소리네, 씨발.”

난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훔쳐봤었지.”

놈이 날 가만히 바라보다, 뺨 안쪽을 혀로 길게 훑어 올렸다. 후우, 입으로 바람을 불더니 잇새로 말을 씹어뱉기 시작했다.

“…그래 씨발, 까놓고 말해서 나 니 새끼가 돈 끌어모아다가 산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거 봤어.”

놈이 신랄하게 덧붙였다.

“너 장 대표 좆집 됐다고 소문 파다하게 퍼진 거 몰라? 여기 안에 있는 쥐새끼도 네 구멍 더러운 거 알고 있을걸?”

“…….”

“그런 새끼가 밤마다 자꾸 산속으로 기어들어 가네? 어느 새끼가 그걸 안 궁금해하겠어? 신분증도 어디서 조잡하게 야매로 떼 와서는.”

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놈이 하는 이실직고를 들었다. 역겨움에 몸서리가 쳐질 것만 같았다.

“잘하면 한탕 치겠다 싶어서 들어가 봤지, 근데 씨발.”

놈이 한 템포를 쉬더니, 목소릴 낮췄다.

“좆 빠지게 산을 뒤졌는데, 십 원짜리 한 장 못 찾았어.”

한 발짝을 더 내딛더니, 내 앞에 얼굴을 딱 붙여 왔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의 틈만 남겨 놓고 놈이 지껄였다.

“알겠어, 씨발아?”

“…….”

“난 아니라고.”

놈의 씩씩대는 숨결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역한 담배 냄새를 연신 뿜어 대는 놈 때문에 허벅지 옆에 툭 놓여 있던 주먹이 절로 꽉 쥐였다. 당장이라도 놈의 멱살을 잡아다 그날처럼 피떡을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믿든 말든 네 좆대로 해. 근데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간 진짜 뒤질 줄 알아.”

“…….”

“드러운 새끼가, 재수 없게.”

놈은 속에서 불결한 걸 한껏 끌어모아 올렸다. 뺨을 씰룩여 뭔가의 형태를 빚어 내더니 이내 바닥에 탁, 하고 그걸 내뱉었다. 놈이 벌침처럼 쏜 타액이 대리석 바닥 위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경멸 어린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터벅터벅. 놈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자릴 빠져나갔고. 뒤에 혼자 남은 난 점점 작아지는 놈의 등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신경을 건드리는 놈의 목소리가 뇌성처럼 메아리쳤다. ‘난 아니라고.’

“…….”

난 뺨 안쪽을 콱 씹었다.

그 말을 내가 믿을 줄 알고? 도둑놈들 중에 본인의 범죄 사실을 시인할 새끼가 몇이나 될까. 능히 그럴 새끼였다면 애초에 훔치지도 않았으리라.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던 센서가 불을 완전히 꺼트렸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어둠 한 켠에 서서 놈이 이미 사라진 복도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착. 별안간 복도 끝에서 센서 등이 켜졌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일정한 템포를 갖고 땅을 박차는 구두 굽. 한 번이라도 서두르거나 지체되는 법 없이 일정했다.

착, 착, 착. 남자의 발걸음을 따라 복도의 센서 등이 연달아 켜졌다. 이젠 내 뒤통수 바로 위에 있는 센서 등이 켜질 차례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리고, 머리 위에 있는 센서 등이 밝았다. 거구의 그림자가 나타나 내 발치에 붙어 있던 그림자를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난 조금 공포스러워, 천천히 뒤로 고갤 돌렸다.

내 등 뒤. 장 대표가 그곳에 서 있었다.

“…….”

장 대표의 두 눈이 놈이 한쪽에 남겨 놓은 흔적에 닿았다.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흔적을 가늠했다. 그러곤 마치 날 심문하듯 물어 왔다.

“무슨 짓거릴 하고 있었지?”

그의 눈이 날 목표물처럼 겨냥했다. 꺼먼 두 눈동자가 매섭게 빛나며 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 행위에 열중하면 열중할수록, 깎아 놓은 듯 날카로운 턱의 각도가 점점 비틀렸다.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마침내 입술을 뗐다. 그는 내 상태를 한마디로 진단 내렸다.

“혼란스러워 보이는데.”

확신이 들어찬 어조였다. 난 더 이상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자꾸만 장딴지와 발뒤축에 움찔움찔, 힘이 들어갔다. 무심코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남자라는 문을 열고 달아나 어디론가 튀어 나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

“누가 이렇게 흔들어 놨지.”

장 대표가 한 발짝을 내디뎌 왔고, 난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물론 성미 더러운 남자는 내 뒷걸음질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내 팔뚝을 기민하게 낚아채 왔다. 난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남자에게 이끌려 갔다. 피가 통하지 않고 있는 듯한 머릿속에서 단어가 소릴 내질러 댔다. 아파!

“내가 묻잖아, 지금.”

장 대표의 눈동자가 답을 촉구했다. 누가, 이렇게, 흔들어 놨지. 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었다.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머리칼이 삐쭉 서고 있는데도, 이 두려움의 감정이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써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내 목뒤에 흐르는 땀을 식혔다. 온몸에 오한이 들어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봐도 이건 겁먹은 얼굴인데, 말이야.”

남자가 이번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 수원 씨는 왜 겁을 먹은 걸까.”

그의 매끄러워 보이는 혀가 몸을 비틀어 대며 문장을 구사했다. 순간 남자의 혀 끝부분이 뱀처럼 삼각형 모양으로 잘린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흔들고 다시 들여다보자, 남자의 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날렵하고 미끈한…. 남자는 그 요사스러운 세 치 혀로 지껄였다.

“내가 무서워요?”

“…아, 아닙니다.”

난 본능적으로 남자의 말을 부정했다. 어깰 잔뜩 움츠리고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해 댔다. 마치 그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라는 듯. 남자는 입술을 길게 찢어 웃었다. 물론 그의 눈은 여전히 오싹한 기운을 간직한 그대로였다. 지나치게 짙어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일말의 웃음기도 내비치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과 입이 만들어 내고 있는 소름 끼치는 그 간극에 오금이 다 저렸다.

“또 거짓말.”

장 대표는 나조차도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에서 스스로 답을 구해 냈다.

“늘 두려워하고 있으면서.”

…누가 이렇게 흔들어 놨지. 본인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남자는 자신을 점찍었다.

“난 서수원 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수원 씨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난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얼음처럼 몸을 굳힌 상태로 남자를 응시했다. 장 대표는 별안간 혀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꼭 입맛을 다시고 있는 듯했다.

그가 돌연 각도를 꺾어 얼굴을 내려 왔다. 이를 세워 내 귓불을 콱 물어 왔다. 혀보다 작은 그 살점을 조각낼 듯 잘근잘근 씹어 댔다. 남자가 립을 발라내어 먹던 장면이 눈앞에 재생되었다. 남자는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뼈를 깨끗이 발라 접시 위로 내던졌었다. 뼈도 못 추린다는 말이 저런 거겠지, 싶었다.

“…윽, 흐읏.”

남자의 입술이 귀 뒤를 따라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남자의 입술은 점점 영역을 넓혀 나갔다. 난 쥐새끼처럼 벽 쪽으로 내몰려, 그의 어깨 너머로 어둠을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눈을 꽉 감았다. 머릿속을 유랑하던 놈의 목소리가 귀에 메아리쳤다. ‘…난 아니라고!’

“…우윽.”

장 대표가 손가락으로 내 양 뺨을 터뜨릴 듯 눌렀다. 윽, 소릴 내며 벌어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어 왔다. 긴 손가락이 입 안을 휘젓고 다녔다. 지문으로 잇몸을 죄다 쓸다가, 혀를 잡아 당겨 댔다.

“내가 묻는 말엔 답도 주지 않으면서.”

“…….”

“이딴 살덩어린 왜 달고 다니는 겁니까.”

남자가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이걸 그냥 잘라.”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잡아당겼다. 진짜로 내 혀를 뽑아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으윽!”

혀뿌리에서 얼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에 눈물까지 매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눈앞이 눈물 때문에 희뿌연 탓이었다. 속눈썹 끝에 뱅그르르 맺혀 있던 눈물이 마침내 방울로 떨어져 나갔다. 툭, 뺨 위로 차가운 액체 방울이 떨어졌다.

그제야 남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광기가 득실득실 도사리고 있는 남자의 눈이 시야로 들어왔다. 약에 취해 평소보다 빨리 통제력을 잃은 듯했다.

그는 내 눈을 마주치자마자, 내 턱을 부여잡곤 혀를 삼켜 왔다. 그의 혀가 목젖을 칠 듯 입 안을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어찌나 흉포하게 구는지 혀가 있는 모양 그대로 뺨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손으로 뽑아내려고 했던 내 혀를 자신의 미끄덩한 살덩이로 휘감아 왔다. 눈도 감지 않은 채로 말이다.

“…윽!”

장 대표가 내 몸을 뒤로 홱 뒤집었다. 넓고 거친 손바닥이 내 뺨을 창문에 대고 마구 짓눌렀다. 빗방울이 시리도록 차가운 창문으로 투둑투둑 소릴 내며 부딪쳤다. 뺨으로 그걸 생경하게 느끼고 있는데.

금방 밑이 휑해졌다. 남자가 내 바지와 속옷을 무릎까지 끌어 내린 거였다.

“…대표님, 누가 올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차게 내 말을 비웃었다.

“그러니까 굳이 여기서 하려는 거잖아.”

가소롭단 듯 픽 웃더니 거침없이 제 바지춤도 풀어냈다. 얼크러져 있는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더니 제 좆을 꺼냈다. 남자의 귀두는 크게 부풀어 있었고, 기둥은 빳빳이 고갤 쳐들고 있었다.

“…….”

남자가 흉악한 범죄에 무기로 사용될 법한 좆을 손으로 틀어쥐었다. 그가 뺨 안을 씰룩거렸다. 입술을 약간 벌리더니 그 새로 타액을 흘려보냈다. 은색의 실이 그의 좆 위로 툭, 떨어졌다. 그가 도자길 빚어 내듯 손으로 귀두와 기둥을 문질러 댔다. 젤이 없으니 타액을 대신 묻히고 있는 듯했다.

장 대표가 내 뒤로 노는 손을 뻗어 왔다. 그의 손이 엉덩이 한쪽을 움켜잡고 벌렸다. 적막감이 흐르는 가운데 구멍이 작게 쩍, 소릴 내며 벌어졌다. 물기 젖은 소리에 절로 수치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흘려보냈다.

“진짜 이거….”

탄력을 가늠하듯 엉덩이를 차지게 철썩, 내리쳤다. 그러곤 가운데 손가락으로 구멍을 후벼 댔다.

“좆질 당하고 싶어서 질질 싸고 있었지.”

남자가 숨 한 번 쉬지 않고 한숨에 긴 문장을 쏟아 냈다.

“제발 박고 싸 달라고 엉덩이라도 흔들며 애원할까 봐 도망갔어요?”

“흐윽….”

그러곤 구멍에 대고 손가락을 좆질하듯 쑤셔 넣다가, 내게 되물었다.

“응?”

남자가 좆을 채찍처럼 휘둘러 내 둔부를 후려쳤다. 철썩, 차진 소리가 빈 복도를 울렸다.

“서수원 씨가 그리 원한다니, 당연히 그렇게 해 줘야죠. 난 친절한 사람이니까.”

드디어 정신을 놓았는지 미친 소릴 지껄이더니, 불쑥 좆을 덜 풀린 구멍으로 반쯤 밀어 넣었다. 안이 빠듯하게 남자의 것으로 찼다. 내 뒤에 흘레붙은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나른하게 조임을 느꼈다. 심취한 듯 나직하게 신음까지 내쉬면서.

“…진짜 끝내주게 조이네.”

번쩍, 창밖에서 뇌성이 쳤다. 남자가 내 턱과 목을 동시에 꽉 움켜쥐었다.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기폭제였다. 남자가 짐승처럼 안을 박아 대기 시작했다. 허릴 앞뒤로 흔들며 목뒤에 코를 묻곤 헉헉 신음을 뱉었다.

“으흥, 학!”

“…음.”

“…흐읏, 흐응, 하!”

안팎의 온도 차로 뿌옇게 변해 버린 창가에 내 코와 입술이 마구잡이로 비벼졌다. 후우, 후우! 하고 내뱉는 숨으로 뿌옇게 변했다가, 다시 그 위로 내 이목구비의 형상이 새겨지곤 했다.

“…흐읏, 하아, 하앗! 으응, 읏!”

“…하아, 후우.”

“흐으윽, 흣!”

장 대표는 원래 체위를 두세 번 정도는 바꾸는 걸 좋아했다. 워낙 몰아세우는 타입이다 보니, 그가 체위를 바꾸는 틈을 타서야 간신히 숨을 돌리곤 했었는데. 그는 날 전시하듯 창문 앞에 세워 두곤 쉴 틈 없이 박아 왔다. 앙상한 뼈만 남긴 채로 날 잡아먹을 것처럼 집요하게 굴었다.

내벽이 찢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걸 버텨 냈다. 윤활제가 부족한 탓인 걸까. 오늘따라 남자의 좆이 더 생생하게만 다가왔다. 눈앞에 그의 귀두 모양이 저절로 그려졌다. 검붉은 색을 띠는 데다 굵직하기까지 한, 그 상스러운 것이 안을 쑤시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자, 자세. 자세 좀 바꿔 주세요.”

남자가 내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곤 창틀 위에 올려놓았다. 난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남자의 걸 받아들였다. 창문에 손바닥을 댄 채로 남자의 허리 짓을 도와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허벅지에 힘을 바짝 주고 남자의 삽입을 도왔다.

정신 나간 사람마냥 넋을 놓고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지금 이곳엔 지나치게 현실 감각이 없었다. 여긴 오직 섹스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남자가 내 자지를 손으로 부여잡더니, 창문에 대고 마구 비벼댔다. 뿌옇게 서려 있던 김에 투명한 원이 하나 만들어졌다. 난 차가운 감각에 몸서릴 쳐 댔다. 요도에서 찔끔찔끔 새어 나온 투명한 쿠퍼액이 창문에 묻어났다.

귀를 씹어 대며 남자가 지껄였다.

“…후우, 안에다, 싸 달라고, 헉, 해 봐.”

“…흐읏, 흐응, 학!”

“흐음, 아주 찢어, 발겨 줄 테니까.”

달뜬 신음 소리만을 버겁게 내뱉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여 댔다.

“…흑, 흐읏, 안에다, 안에다, 싸 주세요.”

남자가 엉덩이를 꽉 움켜잡았다. 사정이 가까워졌는지, 남자의 신음 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후우, 하!”

“으응, 흐읏, 흣, 하윽!”

남자가 거세게 내 하체를 쳐올렸다. 이 이상 버텼다간 딱 죽겠다 싶을 그 순간. 드디어 구멍 안에서 뜨끈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오르가즘을 느낀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쩍, 뇌성이 쳤다. 일순 눈앞이 한낮처럼 밝아졌다. 남자의 밑에 아래를 고스란히 내놓은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거리며 떨었다. 강렬한 감각에 사로잡혀 난 몸을 흔들어 댔다. 번개라도 맞은 양, 그렇게 한참을 몸을 잘게 떨어대고 있었다.

…몸이 이상했다. 아니, 이건 비단 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남자가 날 고장 내 놓은 듯했다.

괴이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자 또한 뭔가 더럽혀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적 없었던 기묘한 빛을 얼굴에 띠더니, 좀 전까지 새된 신음을 뱉던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 지껄였다.

“…이걸 진짜 씹어 먹어 버릴 수도 없고.”

남자의 손이 턱에서 빠져나갔다. 남자는 구멍 안에 좆을 삽입한 채로 날 창가 위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남자는 날 대리석이 내깔린 차가운 복도에 내려놓았다. 난 엎드린 자세에서 엉덩이만 들어 올려 남자의 걸 받아 냈다.

엉덩이가 남자의 샅에 탕탕, 부딪히며 자꾸 뒤로 밀려났다.

“으흐윽!”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은 그 깊숙한 삽입을 참지 못하고 한 발을 더 뽑아 냈다.

“…다 쌌으면 다시 엉덩이 흔들어.”

극도로 민감해진 상태로 허릴 흔들어 댔다.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는 남자의 것이 지나치게 안쪽까지 삽입되어 몸에 부담이 많이 갔다. 그럼에도 남자는 더 깊숙이 자신의 것을 내 안에 묻으려는 듯, 자꾸만 허릴 움직였다.

남자가 내 허벅지를 매만졌다.

“이렇게 뽀얀 피부에 붉은 멍까지, 후우, 달아 놓고 있는데.”

“흐윽, 하아, 흑!”

“어느 사내새끼가 환장을 안 해, 후우.”

내벽이 아쉬운 듯, 구멍을 빠져나가는 좆 기둥에 달라붙어 딸려 나갔다. 남자는 손끝으로 그 내벽을 문질러 댔다. 난 구멍을 크게 조이며 신음을 내뱉었다. 내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가 목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흣, 하아!”

난 여타 다른 잡생각 따윈 하지 않고, 오직 하나만을 향해 나아갔다. 머릴 하얗게 날려 줄 오르가즘을 향해.

“으흥, 하읏, 하아!”

“크윽.”

등 뒤에서 남자가 짐승처럼 신음했다. 콰광, 다시 한번 뇌성이 울렸다. 넓은 창문에 드리운 빗줄기를 커튼 삼아 남자와 생식기를 맞부딪쳤다. 빗소리와 뇌성이 성욕에 지배당한 채로 내지르는 신음을 부디 숨겨 주길 바라며.

***

한번 물꼬가 트인 비는 쉬이 멈추는 법이 없었다. 땅을 체벌하듯 쏟아지는 빗줄기는 계속해서 굵기를 키워 나갔다.

복도에 흐르는 써늘한 공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남자가 뒤에 달라붙어 목을 물어뜯다 말고, 자신의 이마를 내 뺨에 붙여 왔다. 후욱, 후욱. 내뱉는 호흡이 거칠었다. 약 기운이 몰려오고 있는 듯했다.

남자가 약간 균형을 잃고 휘청댔다. 난 얼른 남자를 부축했다. 나보다 10cm가량 큰 남자를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으려니 버거웠다. 눈치를 살피며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대표님.”

약에 완전히 정신을 잠식당한 장 대표에게선 들려오는 답이 없었다. 나는 그를 어깨에 이듯이 해서 복도를 빠져 나왔다. 그늘막 입구로 나가자, 전신으로 비가 들이닥쳤다. 카트로 이동해 필드를 가로지르는 내내, 남자는 내 어깨에 머릴 기대어 연신 밭은 숨만 뱉고 있었다. 뒤를 뚫린 고통을 이기며 그를 운반한 나는 몇 번이나 그를 카트에서 밀어버리고 싶단 충동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런 날에 버리고 가면 아무리 그라도 다음 날 익사체로 발견될 테니까, 자비를 베풀었다.

나는 아주 힘겹게 그를 룸까지 데려다 놓았다. 그를 침대에 내팽개치자, 남자의 육중한 몸이 매트리스 위로 퍽, 소릴 내며 떨어졌다.

손등으로 턱을 따라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온몸이 온통 비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뒤에서 뭔가가 다가와 손목을 낚아챘다.

난 남자에게 딸려가, 그의 팔 밑에 깔렸다. 너무 놀라 억 소리도 지르지 못한 난 조용히 숨만 죽이고 있었다.

…설마 그새 깬 건가?

쾅쾅 천둥이 하늘을 두 쪽 냈다. 갑자기 훤해진 시야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남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은 잠에.

“…….”

나는 그의 밑에서 빠져나가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댔다. 소릴 최대한 죽여 안간힘을 써댔다. 그러나 별 소용은 없었다. 체격 차이가 제법 나는 탓에 몸을 축 늘어뜨린 장 대표를 내 몸 위에서 치워 내는 건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비를 맞아 몸이 눅진눅진한 데다가, 그가 몸 안에 뚫어 놓은 통로가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러 대는 통에 더 어려웠다.

색이 짙은 남자의 얼굴 위로 새벽빛이 드리웠을 때쯤. 나는 결국 그의 밑에서 전신에 힘을 쭉 뺐다. 이 이상 뒤척였다간 그가 깨고 말 것 같았다. 이내 밀려들어 오는 잠기를 이기지 못하고 쪽잠에 들었다.

그마저도 그리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신경을 아주 첨예하게 곤두세우지 않는 이상 거의 느낄 수 없는 남자의 인기척에 난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만 일어나지 그래요. 어설프게 자는 척하기는.”

그의 말에도 난 시트를 손으로 꽉 잡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찌나 필사적이었는지, 눈가가 파들거리고 떨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거두어지는 법이 없었다. 장 대표는 날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난 마지못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시트가 스르륵 소릴 내며 몸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다가 옷이 죄다 벗겨져 있는 걸 눈치채곤, 몸을 확 움츠렸다. 스스로 벗은 기억은 없으니, 답은 하나였다. 뻑뻑한 시야로 등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내 옷을 벗긴 장본인이 분명한 장 대표는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여느 때처럼 검은색 셔츠를 택해,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여미고 있었다. 윤기 나는 고급 셔츠가 그의 굵직한 목덜미를 감쌌다. 그다음 탄탄하게 올라붙은 가슴 근육, 촘촘하게 짜인 복근, 두텁지만 날렵한 선을 그리는 흉통이 차례대로 모습을 감췄다. 난 조용히 목울대를 꿀꺽, 울렸다. 정말이지, 언제 봐도 위협적인 몸이었다.

남자가 픽 웃으며 손등으로 내 뺨을 밀었다.

“어딜. 시선 안 치웁니까.”

그의 무정한 손짓에 밀려난 순간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허벅지에 뭉쳐 있던 시트가 몸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에 허벅지 안쪽이 그에게로 고스란히 내보였다. 허벅지의 은밀한 안쪽을 눈에 담은 남자가 쯧쯔, 혀를 찼다.

“멍이 남을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럴까요?”

남자는 답지 않게 눈으로 웃었다. 뒷덜미에 순간 드는 오싹한 기운에 목을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있는데. 남자가 거침없이 시트를 헤집고 내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얼굴 기색 하나 바꾸지 않고 여린 피부를 꽉 힘껏 움켜잡았다가 다시 놓아주었다.

두근두근. 그가 주무르고 지나간 부근에서 홧홧한 열감이 퍼져 나갔다. 이제 이곳엔 백 퍼센트의 확률로 멍울이 질 거였다. 붉게 남은 울혈을 바라보던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난 욕을 씹어뱉었다. 미친놈. 장 대표가 내 옷가지 사이를 뒤졌다. 무덤 따위를 긁어 파는 도굴꾼처럼 헤집다가, 꺼먼 지갑 하나를 바지에서 빼 들었다. 꺼먼 가죽 지갑을 손으로 쥐곤 치아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는 부분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래도 이는 다 났네.”

그리 말하는 남자의 뉘앙스엔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기특해하는 것 같기도, 가소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평소 남자의 언행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전자일 가능성은 전무했다.

남자가 지갑을 열어 지폐들을 찔러 넣었다. 미련 없단 듯 지갑을 덮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남자가 지갑을 다시 열어 들더니, 안쪽에 넣어 두었던 명함을 꺼냈다. 그가 인상을 쓴 채로 물었다.

“누구한테 받았습니까.”

난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대표님 직원분이요.”

남자의 눈썹이 매섭게 추켜 올라갔다.

“내 부하가 들어와 말을 붙였어요?”

그의 어조에선 ‘감히?’라는 뉘앙스가 풍겼다. 미간엔 구김살이 간 데다가, 입매는 싸늘히 굳어졌다. 남잔 불쾌해 보였고, 난 그 기색을 놓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애꿎은 시트 자락을 매만졌다. 내가 뭐라 말해야 남자가 기분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을까.

“…건실한 회사라고 하시던데요.”

남자가 지갑을 툭 소리 나게 접더니, 협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난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남잔 유쾌한 농담을 했다는 듯 시정잡배처럼 픽, 조소했다. 난 그를 따라 마지못해 비굴하게 웃었다. 법 없는 나라에서 사는 그를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지옥보다 더한 생지옥일 게 분명했다.

까마귀처럼 까만 차림을 한 남자가 손바닥으로 매끈한 이마를 쓸어 올리더니, 마지막으로 재킷 단추를 여몄다. 여느 때처럼 넥타이핀까지 채운 완벽한 모습이었다.

지금 나가면 언제쯤 돌아올까. 꼭 돌아와야만 하는 걸까. 언제 돌아오냐고 묻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질문이었다. 난 그의 귀환 시간을 짐작하기 위해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가세요?”

옷매무시를 매만지던 남자가 거울로 날 마주 봤다. 난 눈을 내리깐 채로 그의 답변을 선고처럼 기다렸다.

“지금 내 목적지를 묻고 있는 거예요?”

“…….”

“아님 버릇없이 드디어 나가 주는 거냐고 묻는 거예요.”

남자가 미려한 눈썹을 찌푸렸다. 후자라고 답했다간 목이라도 졸라 올 것 같았다. 난 이불에 나체의 몸을 깊게 숨기며 우물쭈물 답했다.

“어디를 가시는 거냐고 여쭤봤습니다.”

앞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소매에 달린 커프스단추를 채워 툭 불거진 손목뼈를 감추던 남자는 날 싸늘히 응시해 왔다. 그가 딱 시선만큼 냉랭한 어조로 지껄였다.

“내가 그런 것까지 서수원 씨에게 알려야 해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만을 남겨 놓고, 남잔 미련 없단 듯 룸을 빠져나갔다. 끼익, 쾅. 문이 잔인한 소릴 내며 닫혔다.

저벅저벅. 곧 그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흐트러진 모양새 그대로 침대 테두리를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던 난 천천히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가 떠났다. 난 단박에 얼굴을 굳혔다. 한껏 끌어 내리고 있던 눈꼬리엔 바짝 힘을 주고, 멍청해 보이게끔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은 꽉 다물었다.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침대를 가로질러 금고 쪽으로 향했다.

능숙한 손길로 금고의 도어 록을 풀어 냈다. 어두컴컴한 사각의 틀 안에 갇혀 있는 돈다발을 꺼내, 품 안에 감췄다.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 지폐를 셌다. 빳빳했던 지폐들은 이미 내 손때가 묻을 대로 묻어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었다.

“…….”

이미 머리로 계산해 둔 것과 액수가 동일했다. 여기에 남자가 오늘 건넨 돈까지 합치면, 대략….

도망이 머지않았다.

도망. 그 한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심장이 가슴 밑에서 두근두근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어젯밤부터 물조차도 마시지 않은 주제에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해 대고 싶었다. 웩웩거리고 위액까지 뱉고 나면, 벌끈거리며 뛰는 뻘건 심장이 변기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가 이리 불안한 건지. 왜 이리 초조한 건지. 난 옹송그리고 앉아 머릴 움켜잡았다. 차가운 철문 뒤로 까만 정장에 숨긴 너른 등을 감추던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남잔 어떤 얼굴을 하고 이 방을 나가고 있었을까.

아스스한 느낌을 자아내는 검은 눈동자만큼이나, 늘 차려입는 꺼먼 정장만큼이나. 그의 정체며, 속내며 온통 암흑 속이었다.

머리 뒤에서 또 비명이 울렸다. ‘난 아니라고!’

머릿속이 온통 개죽처럼 뒤죽박죽이었다.

***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비어 있는 전화 부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감추는 게 많은 탓일까. 자꾸만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갤 홱홱 돌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몇 번이나 그러고 나서야 동전 몇 개를 넣은 뒤,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엄지로 꾹꾹, 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마지막 숫자 위에선 손가락이 한참을 겉돌았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체념한 듯 숫자를 눌렀다.

뚜루루,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난 상대방이 얼른 전화를 받아 주기만을 갈망하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뚝. 사이렌처럼 머릴 울려 대던 신호음이 끊겼다. 이윽고 삼촌의 음성이 고막을 때려 왔다.

-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냐!?

삼촌은 벌컥 역정을 냈다.

“…죄송합니다. 저기 삼촌, 드릴 말이….”

- 마침 연락 잘 했다. 저기 말이야, 내 말 좀 들어 봐라.

삼촌이 큼큼, 헛기침을 내뱉더니 두서없는 말을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바로 용건을 꺼낼 요량으로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난 합죽이처럼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삼촌에게 실제로 전화를 걸기까지 난 몇 번이나 다짐을 새로 잡아야 했었다. 그 모든 다짐을 단번에 무력화시킨 삼촌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 요즘 잔챙이 같은 놈 하나가 굴러들어 왔는데. 뭐 하는 놈팽이인지는 몰라도 이놈이 글쎄, 폭부처럼 돈을 술렁술렁 내보낸다니까. 형님, 형님 하면서 따르는데….

이런 실없는 얘기로 시간 때울 때가 아닌데. 초조함에 다리 한쪽이 절로 벌벌 떨렸다. 애꿎은 아랫입술의 메마른 각질을 뜯어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내 쪽에 눈길을 한 번씩 주고 지나갔다. 얼굴을 죄 가린 채로, 덩그러니 떨어진 전화 부스에 서 있는 게 수상해 보였던 듯했다.

- 엣헴, 나야 뭐. 술잔 몇 번 같이 기울여 주고 주머니 두둑이 한몫 챙기면 그만이니까.

난 후드 티 안으로 얼굴을 더 깊숙이 가렸다. 그러곤 신발 앞코로 땅을 툭툭 쳐올렸다. 죄 없는 진흙이 잔해를 흩날리며 벌러덩 뒤집어 까졌다. 관짝을 넣을 구덩이를 파는 심정으로 땅을 긁어내다가, 한쪽에 봉분처럼 쌓여 있는 진흙을 신발 밑창으로 꽉꽉 눌러 다시 평평하게 만들었다. 분풀이에만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 삼촌의 부름이 정신을 일깨웠다.

…원아.

간만에 듣는 내 진짜 이름. 난 고장 난 듯 일순 몸을 굳혔다. 이 작자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부탁할 것이 있거나, 혹은…. 삼촌이 다시 내 이름을 불러 올까, 난 질겁하고 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 또 장에 나가려면 판돈이 필요해. 곧 배로 불려 줄 테니 보내거라.

“삼촌.”

…이 씨발 놈아.

“그 돈이.”

난 이마를 유리 벽에 쿵 찧으며 지껄였다. 입술 새로 한숨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 돈이 어떤 돈인 줄 알고요.”

- 글쎄, 따고 있다니까!

내가 무슨 더러운 짓거릴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리 만무한 작자가 씩씩댔다. 설령 알게 된다 해도 눈썹 한 오라기 꿈쩍하지 않을 치가 뇌까렸다.

- 이것만 잘되면 느이 엄마, 아무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살 수 있다.

전화기를 쥔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분노에 몸에 한기가 돌고 눈앞이 핑 어지럽기까지 했다.

- 군말 말고 돈이나 보내 놔라. 나 없으면 판이 안 돌아간다고 지금도 들어오라 아주 난리야, 난리.

뚝, 그러고 전화는 끊겼다. 난 전화 부스의 유리에 이마를 쿵, 소리 나게 찧었다.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은 전하지도 못한 채로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개.”

개새끼.

그 돈이 어떤 돈인 줄 알고. 그걸, 그것마저 노름질로…. 이젠 노름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 눈시울이 절로 다 화끈거렸다.

난 화를 삭이기 위해 날숨과 들숨을 빠르게 반복해 쉬었다. 가슴이 제멋대로 씨근덕거렸다. 돈 따위 다신 삼촌의 손에 쥐여 주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전화길 다시 집어 올려 삼촌에게 전화를 걸던 난 흠칫 손을 멈췄다. 또 그 망할 새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아니라고!’

꼭 놈이 내게 주술이라도 걸어 오고 있는 듯했다.

난 홀린 듯 전화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늘상 가던 루트대로 ATM 기계 앞에 우뚝 섰다. 지폐를 추려 투입구에 넣자, 기계가 빠르게 지폐를 셌다.

입금자명을 입력하라는 칸이 나왔다. 빈칸엔 딱 여섯 글자까지만 써넣을 수 있었다. 난 일부러 세 번을 나누어 입금했다.

첫 번째 순서엔 입금자명에 무언가를 부탁하는 문장을 써넣었다.

두 번째엔 지역명을 써넣었다.

세 번째엔 숫자와 글자를 조합해 빈칸을 채웠다.

이윽고 화면 위에 창 하나가 떴다. 입금 완료했습니다. 난 텅 빈 지갑을 손에 꽉 움켜쥔 채로 바깥으로 나왔다.

난 다시 천천히 고갤 주변으로 돌렸다.

이제야 주변이 달리 보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은 내 쪽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좀 전에 그들의 눈과 귀가 그들의 몸만큼 커져 꼭 내 쪽을 향해 쫑긋 서 있는 것만 같았던 장면은 온데간데없었다. 모든 건 그저 감출 게 많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피해망상일 뿐이었다.

“…….”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근두근. 심장이 다시 한번 가슴팍 안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 이유 모를 불안증 또한 부디.

그저 기우이길 바랐다.

***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릎을 가슴팍으로 끌어다 감싸 안았다. 그 상태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두 눈을 껌뻑, 껌뻑할 때마다 피 칠갑을 한 남자가 시야에 담겼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참 기가 막히게도 내가 한없이 약해져 있을 때를 잘 알고 찾아왔다.

창문 너머에선 잿빛 구름이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하늘이 비구름처럼 어둑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새 또 밤이 온 거였다.

철컥. 기계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장 대표는 지겹지도 않은지 또 날 찾아왔다. 침대에 기대어 있는 날 보곤 소파로 척척 다가와 긴 다릴 꼬고 앉았다. 그가 어조 없이 물었다.

“울었어요?”

남자의 어깨 너머로 구석을 흘깃했다. 분명 좀 전까지 피 칠갑을 한 몸뚱어리가 저기에 서서 날 노려보고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의 말을 부정하고 나서기엔 뺨이 지나치게 건조한 상태였다. 남자가 고요하게 의문을 표했다.

“왜.”

“…아닙니다.”

고갤 조용히 가로저었다. 남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운 이유를 스스로 간파해 내겠다는 듯 뜸지근하게 비스듬한 시선으로 날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침대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얄팍해진 지갑을 손에 붙들었다. 공중으로 지갑을 낮게 던져 올렸다가, 다시 가뿐히 받아 냈다.

“애인이 씀씀이가 많이 헤픈가 봐요.”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종적을 감춘 지폐의 행방을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실체 없는 가상의 애인을 만들어 내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장 대표가 손바닥을 위로 해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의 긴 손가락이 우아하게 공중을 유영해 날 불러들였다. 이리 와 봐요.

시트를 거두어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에서 쑥 빠져나온 유령처럼 힘없이 그에게 걸어갔다. 그가 손으로 허릴 잡아 왔다. 그는 재단사처럼 내 허리둘레를 가늠했다.

“우리 수원 씨는 이렇게 매일 허리가 얄팍해져 가고 있는데.”

그러곤 내 뺨을 감싸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안에서 싸구려 니코틴 냄새가 풍겨 왔다.

두 손으로 벌이고 있는 짓거리에 비해 몸 내음만은 깔끔한 남자였다. 늘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 오곤 했는데. 지금 장 대표의 정장엔 익숙지 않은 냄새가 진득이 묻어 있었다. 구석구석에 알코올 냄새가 담배 냄새 따위와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것들을 직접 취했다거나 한 건 아닌 듯했다. 모든 냄새가 남자의 취향에 비해 지나치게 싸구려였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매정하답니까.”

그가 재킷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더니, 담뱃갑 하나를 꺼냈다. 평소 즐겨 피우던 것이 아닌, 흔히 볼 수 있는 값싼 국내산이었다. 남잔 익숙한 듯 그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물고 값비싼 가죽 라이터로 불을 피웠다.

“그 돈이 어디 쉽게 번 돈인가. 그 새끼도 봐야 할 텐데 말이에요. 수원 씨가 어떤 얼굴을 하고 내 밑에서 좆을 빨곤 하는지 말입니다.”

후우, 남자가 연기를 내뱉었다.

“무슨 개 자지라도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끔찍하단 표정을 짓고 있잖습니까. 그걸 보는 내가 무슨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고.”

“…….”

“내 소유지에 딱 서수원 씨의 몸뚱이만 한 구덩이를 파고 싶을 만큼 좆같습니다.”

뜻을 헤아려 보면 섬뜩하기만 한 말을 남잔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 댔다.

“한편으론 두피가 뜯길 만큼 머리채를 잡아당겨서 목젖까지 쑤셔 넣어 주고 싶기도 하지.”

하얀 막대를 문 그의 입술이 그린 듯한 선을 자아냈다. 그 입술 새로 뿌연 연기와 함께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죽여 버리고 싶진 않았습니까?”

죽여 버리고 싶진 않느냐고.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날 시험에 들게 한 자는 유유히 웃고 있었다. 난 중력에 이끌리듯,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그에게 실토했다.

“매 순간마다요.”

“…매 순간.”

남자가 혀를 굴려 발음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는 그 모든 순간마다.”

죽여 버리고 싶었고, 죽고 싶었다. 살아오는 매 순간,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뇌로 사고란 것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래 왔다. 장 대표는 깊은 유감을 표했다.

“저런.”

그의 거친 손바닥이 답지 않게 상냥한 손길로 내 눈가와 뺨을 어루만졌다.

“편해지고 싶진 않아요?”

“그럴 순 없을 것 같아요.”

“또 단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지를 추스르더니 무릎을 굽혀 내게 시선을 마주해 왔다. 그가 얼굴 위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별안간 그가 사업가처럼 웃고 있단 생각을 했다. 그는 까다로운 바이어를 회유하듯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서수원 씨는 그냥.”

“…….”

“아직 방법을 못 찾은 것뿐이에요.”

방법. 나라고 한들 뭐든 강구해 보지 않았을까. 친척, 학교, 경찰서.

그 어느 곳에서도 탈출구는 찾을 수 없었다. 하나 있는 친척이라곤 아픈 외동아들 돌보며 살기에도 바빴던 데다가, 다니던 시골 학교는 부모님의 은혜엔 무조건 고갤 조아리라 가르쳤던 곳이었다.

비명 소릴 견디다 못해 옆집이 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마저 애비란 작자와 고등학교 동문이었다. 제복쟁이들은 엄마와 내 얼굴에 달린 멍을 보고도 모른 체했다. 가장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기가 죽지 않는다는 헛소리나 해 댄 후 경찰서로 돌아갔다.

물론 머리가 조금 더 큰 후엔 얼마든지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홀로 남아 있는 엄마였다. 그렇게 몇 번이나 떠나자고 했었는데 불쌍한 양반이라며 곁을 지키겠다고 고집부렸다. 그리고 결국엔….

기다림이란 자비를 베풀던 남자는 미소를 점점 거두어들였다. 남자가 넥타이의 매듭을 잡고 끌어 내렸다. 단추마저 위에서부터 몇 개를 풀어냈다. 까만 셔츠에 넥타이를 하지 않은 남자는 이제 완전히 그쪽 계통의 사람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비밀을 꺼내 놓기가 무척 힘든가 보네요.”

“…….”

“그럼 수원 씨. 내가 내 비밀을 하나 먼저 말해 줄게요.”

장 대표가 허릴 추켜세웠다. 뱀처럼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 그의 팔 근육에 난 몸을 수축시켰다.

남자가 샤워할 때마저도 빼놓은 적 없던 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반지가 떠난 자리엔 붉은색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실 따위로 억지로 기운 듯한 흉터가 나 있었다. 이미 색소 침착이 진행된 피부 조직이 우둘투둘하게 손가락을 빙 둘러 덮고 있었다. 손가락에 두고 있던 눈동자를 옮겨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봉합 상태가 엉망이죠.”

“…….”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의사 하나가 사짜였습니다. 입에선 역겨운 술 냄새도 나더군요.”

남자가 목 주변에 걸쳐 있던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의 손길에 따라 흘러내려 간 넥타이는 땅으로 떨어져 똬리를 틀었다.

“난 원래 지게꾼이라 불리는 운반책이었어요. 매번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운반만 하다가, 어느 날 반짝거리는 가루가 눈길을 끌어 가만 들여다봤었죠. 그러고 있다 보니 탐심이 스물스물 절로 자라나더군요.”

“…….”

“고아원에선 그런 걸 볼 기회가 통 없었으니까.”

남자가 음률 없이 덧붙였다. 그리 말하는 남자의 어조는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어, 다른 이가 들었다면 그가 신문지의 한 켠을 읽고 있는 거라 오해할 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한 번 왔었어요. 함께 하던 놈 하나가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며 자릴 비웠었거든. 운반차에 혼자 남은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후우, 그의 입술이 회색 구름 하나를 새로이 토해 냈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로 싸구려 향이 나는 매캐한 연기를 음미했다. 그가 즐겨 피우는 것보다 훨씬 더 조악한 냄새가 나고 있는데도. 목 넘김을 느끼는 그의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은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익숙한 걸 받아들이는 자의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기회를 엿봐 두 손 가득 봉지를 집어 들었죠. 누가 볼까 얼른 품에 숨겨 달아났어요. 물론 얼마 못 가 붙잡혔죠. 돈 한 푼 없는 열여섯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라곤 고작 사흘뿐이었습니다. 놈들은 괘씸한 날 벌하겠다며 내 사질 묶어 놓고 두 손가락을 톱으로 슥슥 썰었습니다.”

남자가 가만히 날 응시했다. 순간 손가락에 아릿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난 흠칫 놀라 손가락들을 안으로 말아 쥐어 숨겼다. 그러곤 당신의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듣고 있었단 뜻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자, 잔인합니다.”

“이쪽에선 그게 체벌입니다.”

그의 시선을 힘겹게 받고 있다, 이내 눈을 바닥에 붙였다. 정말이지, 이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남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람의 뼈란 생각보다 단단한 거여서 잘 벼린 톱으로도 몇 번을 썰어야 했습니다. 그때 중지와 약지가 같이 잘려 나갔어요. 돌팔이 의사는 중지를 먼저 기웠고, 약지를 그다음 차례로 수술했습니다. 어찌나 외졌는지, 마취제도 변변치 않아서 약지는 거의 맨정신에 기워야 했어요.”

그가 무감동한 얼굴로 자신의 약지에 깊이 남은 흉을 바라보며 지껄였다.

“눈 까뒤집으면서 입에 거품 물고 있으려니까 그제야 물에 내가 훔쳐갔던 약을 타선 입에 쑤셔 넣던데.”

속이 메스꺼웠다. …제발 더 이상은.

남자가 외면하려는 내 턱을 꽈악 부여잡았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 이제 남자는 완벽히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나지막이 읊조려 왔다.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될 둘만의 비밀을 속삭인다는 듯 아주 은밀하고도 은근하게.

“뒤지게 아픈 와중에도, 혀끝에 남는 알갱이들이 이상하게 달더군요. 아둔한 난 그때 깨달았죠.”

“으….”

“난 놈들이 내가 훔쳐 갔다는 그 사실에 화가 나 내 손가락들을 자른 줄 알았는데.”

“…으윽.”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남자가 턱을 틀어쥔 손에 압력을 더했다. 얼굴에 열이 들끓어 올랐다. 남자가 꾹 다문 잇새로 말을 씹어뱉었다.

“그 약들, 설탕 가루였더라구요.”

“…흑.”

“그 새끼들 말이에요. 언감생심, 도망이란 단어는 머리 한 켠에도 수납해 놓지 못하게 경고한 거예요.”

“도망말이에요.”

남자가 잇새로 끊어내듯 같은 단어를 되풀이했다. 기분 탓일까. 유독 ‘도망’이란 단어에 힘이 실려 있는 듯했다.

“…으흐윽.”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내던 남자는 한 템포를 쉬었다.

“당시엔 그게 개좆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야. 이봐요, 온갖 더러운 꼴 다 봤더라도 어쨌거나 지금 위에 서 있는 건 나잖아.”

“…으윽, 으흐윽.”

“내 비밀을 풀어 놨으니 이젠 네가 말할 차례야. 마지막 기회니까 머리 똑똑하게 굴려.”

장 대표가 한 음절씩 잘라내어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울었지?”

남자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난 그의 눈빛으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거란 걸 육감적으로 깨달았다.

그의 얼굴 위로 그가 처음 스폰을 제안해 왔을 때의 장면이 겹쳤다. 남자는 그때도 날 벼랑 끝에 세워 두었다. 그러더니 이젠 진실까지 요구하며 날 벼랑 밑으로 밀어 내려 하고 있었다.

벼랑 끝엔 뭐가 있을까. 뭐가 있을진 몰라도 끝을 알 수 없는 늪만이 펼쳐져 있을 게 분명했다.

입술 사이를 조금 벌리자, 남자가 내 하관에 두 눈을 모았다.

난 남자의 약지를 벌린 입에 삼켜 넣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남자의 두 눈이 평소보다 약간 크게 뜨였다. 난 손가락을 빠는 일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우둘투둘하고 흉한 살을 혀로 핥아 올리곤, 반지에 눌려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혀로 따라 그려 냈다.

뚝뚝. 바닥을 짚은 손 위로 액체 방울이 떨어졌다. 근원지는 내 눈가였다. 이유를 알 수 없게 흐르는 메마른 눈물이 바닥 위로 뚝뚝 떨어졌다.

장 대표는 제 손가락을 빨던 날 지켜보았다. 이내 고갤 내젓더니 말없이 탄식했다.

“…아아.”

남자의 입술 새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큼지막한 손등이 내 얼굴을 뒤로 쭈욱 밀어 내었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싶었는데.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은 그보다 더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뺨은 평소보다 조금 하얗게 질렸고, 눈동자는 당황한 빛에 감싸여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평정심을 잃은 듯했다. 바늘조차 피부를 뚫지 못할 것 같던 냉혈인이 무려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당황했다는 건, 최소한 불쾌하진 않다는 거겠지. 그렇게 제멋대로 판단한 난 물러서지 않고 그의 손을 따라갔다.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입술 밖으로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길게 핥아 올렸다. 조용한 공간에 추웁, 춥 물기 젖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의 매끈한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날렵한 관자놀이에도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졌다. 굵직한 목 중간에 있는 울대는 꿀꺽, 소릴 내며 울렸다.

그의 바지춤은 성인 남자의 양쪽 주먹을 붙여 놓은 사이즈만큼 부풀었다. 미끈한 윤이 나는 가죽 벨트로 손을 뻗어, 엉성한 손길로 후크를 풀어 냈다. 지퍼를 지익 내리자, 크게 부푼 꺼먼색 드로어즈가 엿보였다.

기가 질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남보다 두꺼운 팔뚝을 갖고 있는 만큼 이것의 굵기 또한 남달랐다. 이게 또 안을 휘저어 올 거라 생각하니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아직 덜 아문 구멍이 절로 뜨끈해졌다.

입을 크게 벌려 남자의 걸 입 안으로 삼켰다. 굵직한 데다 길이까지 길었다. 뿌리까지 삼켜 넣으려 안간힘을 써 댔지만, 한참 역부족이었다.

뺨에 힘을 주고 훅, 숨을 들이마셨다. 거대한 좆이 순식간에 입 안으로 빨려 들어와 울대를 쳤다.

“욱, 우욱!”

코끝이 찡해진다 싶더니, 시야가 흐릿해졌다. 볼썽사납게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거였다.

“…윽.”

불필요할 만큼 자극당한 남자가 나지막한 신음을 뱉었다. 내 머리 정도야 두부처럼 우습게 으깰 것 같은 큰 손으로 내 머리채를 끌어 쥐더니, 뒤로 홱, 잡아당겼다.

“너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니까.”

머리챌 잡힌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말을 씹어뱉었다.

“이게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잖아.”

“…그냥.”

눈꼬리는 최대한 아래로 내리고, 입가 근육은 한껏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억지로 지은 미소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남자의 얼굴은 더욱 싸늘하게 굳었다.

문득 서비스 매니저에게서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 수업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거울 속의 난 괴상한 미소를 띤 광대 같기만 했었다.

남자가 야차 같은 눈을 하고 날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 아래로 보이는 흰자가 희번덕 빛났다. 서슬 퍼런 안광에 섬뜩해져서 등줄기로 식은땀이 다 흘러내렸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자신의 치부를 내게 내보이는 걸로도 모자라, 이젠 내 것의 패를 하나 더 뒤집으라 한다.

대체 왜.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저 하던 대로 처박기나 했음 싶은데. 팔뚝만큼 무식하게 두꺼운 좆으로 안을 밀고 들어와 제가 원하는 만큼 흔들어 대다가 정액이나 오줌을 털듯 털털 털고 나갔음 싶었다.

이런 불필요한 신경전은 시간만 잡아먹을 뿐이었다.

“…그딴 놈한테 돈 털리고 나니까 조금 공허해서요.”

남자가 약간 벌리고 있던 입술을 고집스럽게 꾹 다물었다. 잇새를 꽉 물고 있는지, 깨물근이 씰룩거렸다.

“잘 쑤시던 놈이었는데. 여기 온 이후로 못 본 지 오래됐거든요.”

직사각형의 공간에 싸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후욱, 후욱. 장 대표의 거친 숨소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깔렸다. 그의 두꺼운 광배근과 가슴팍을 둘러싼 셔츠는 평소보다 약간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폐부가 팽창과 수축을 빠르게 반복하고 있었다.

이윽고 억센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통째로 뜯길 것만 같았던 두피가 자유로워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래요?”

“…네.”

고갤 주억대며, 남자의 허벅지에 대고 뺨을 지그시 눌렀다.

남잔 어느새 그 특유의 매정한 표정을 얼굴에 달고 있었다. 아니, 분명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으나 두 눈동자엔 분명 화기가 들끓고 있었다. 매섭게 몰아치는 소요를 두 눈에 매단 채로 그가 말을 씹어뱉었다.

“그럼 어디 잘 빨아 봐요.”

“…….”

“이러다간 곧 뒤지겠다고 엉엉 울어 제낄 때까지 쑤셔 줄 테니까.”

입 안으로 좆을 넣고 빨아 댔다. 침까지 바닥으로 뚝뚝 흘리며 목 안을 좆으로 채워 댔다. 목에 힘을 꽉 주고 좆을 빨아 당기자, 바닥을 짚고 선 그의 구둣발이 들썩거렸다.

“…후우.”

그가 턱을 잡곤 제게로 끌어 올렸다. 좆 때문에 입을 한계까지 벌린 채로 씨익 웃어 보였다. 남자가 눈썹을 까딱대더니, 험악한 표정을 해 보였다. 저러다간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오겠다싶더니, 남잔 타액 대신 상스러운 욕지거릴 뱉었다. 씨발. 그러곤 폭군처럼 명령했다.

“엎드려.”

허릴 묶고 있는 끈을 스르륵 풀어냈다. 가운을 채 벗기도 전에, 남자가 내 몸을 홱 뒤집었다. 그러더니 발기한 좆을 곧장 구멍에 꽂아 왔다.

“…으흐윽!”

안을 후려치는 고통에 발이 제멋대로 바닥을 박찼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울 게 분명한 남잔 신음을 목 안으로 삼켜 냈다. 그러곤 연신 삽처럼 구멍을 파 댔다.

남잔 아예 날 땅에 묻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두 번 사정하는 내내 난 땅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양쪽 두 손이 모두 등 뒤로 가 그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수갑 같은 것에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흑, 아흐윽, 으으윽!”

“…후우, 하아!”

평소라면 적어도 서너 번은 해 댔을 남자는 고작 두 번만으로 내게서 몸을 떼어 냈다. 사정을 한 이후엔 미련 없다는 듯 구멍에서 자신의 좆을 빼냈다. 안을 꽉 메우고 있던 좆이 비켜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으윽!”

장 대표는 메마른 손길로 기둥을 훑어 내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 등 뒤에 싸질렀다. 그러곤 내 가운 자락에 자신의 좆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정장 바지까지 추슬러 입곤 벨트를 다시 여몄다.

그가 여느 때처럼 테이블에서 지갑을 들어 올렸다. 무정한 손이 한 움큼 지폐들을 꺼내 내 입에 그것들을 모두 물렸다. 난 입 안에 쑤셔 넣는 그것들을 문 채로 러그 위에 뺨을 대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한참 위에 머리가 있는 남자가 빈 손가락에 반지를 다시 끼워 넣었다. 저벅저벅. 남자의 구둣발이 문으로 향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텅 빈 룸에 울려 퍼졌다.

난 대리석 바닥 위에 덩그러니 혼자 누워 있다가, 입에 물려 있는 지폐들을 퉤 뱉어 냈다. 지폐들과 함께 멀건 위액이 바닥 위로 쏟아졌다.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남자는 날 영락없는 변기 취급했었다. 내 몸에 지폐를 쑤셔 넣는 이 짓거린 초반엔 종종 했었다. 금고를 들여놓은 이후부터 금고나 지갑에 넣어 주기 시작한 거였다.

…진작 이럴 것이지. 역시 이쪽이 훨씬 간편했다. 그건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주륵. 남자가 무자비하게 싸질러 놓은 정액이 구멍 안에서 흘러내렸다. 비릿하고 시큼한, 그런 원초적인 냄새가 나는 액체. 그건 딱 그의 몸만큼 뜨끈한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기분이 벌컥 불쾌해졌다.

***

네 발로 기다시피 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어놓곤 손가락으로 안을 쑤셨다. 그가 속에 싸질러 놓은 정액이 손가락을 따라 주륵 흘러나왔다. 미친 듯이 쓰라렸으나 이미 익숙한 고통이었다.

창가에 기대어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땅거미가 지고 나서야 룸 밖을 나섰다. 복도엔 길을 따라 창문들이 여러 개 나 있었다. 그중 가장 끝에 있는 창문의 레버를 내리곤,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밀어 냈다.

밖으로 목을 쭉 빼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밤이 이슥하게 들어선 새벽. 오직 가로등만이 골프장 로비로 이어지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온통 어둠인 가운데 저 혼자서만 주황색 빛을 내뿜어 댔다.

“…….”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저 길 말고 다른 경로를 알아내야 했다. 뒷산으로 향하는 길이 확실히 외지긴 한데, 숙소에 있는 직원들의 눈에 뜨일 가능성이 있었다.

…예전처럼.

엄지를 잇새에 넣고 깨물었다. 잘근잘근. 윗니가 입 안으로 들어온 그걸 습관처럼 괴롭혀 댔다. 필터를 씹던 맛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였다. 알싸하게 입 안과 목 안을 함께 감싸 주던 그 매캐한 향.

머릿속으로 담배를 그려 내고 있을 때.

유니폼을 입은 직원 두 명이 길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바퀴 달린 커다란 파란색 쓰레기통 하나를 함께 질질 끌고 있었다. 오늘 자 잡일을 맡은 직원들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길은 다시 텅 비었다. 그럼에도 난 창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 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머리 바로 위에 있는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

“…….”

몸을 돌려 승강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와 니코틴과 함께 생각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저벅저벅. 텅 빈 복도에 내 것의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리고 곧 등 뒤에서 발소리가 하나 더 들려왔다. 저벅저벅. 두 개의 발소리가 삐거덕삐거덕 불협화음을 이루어 냈다.

난 문득 무언가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이 열린 소리가 들렸었나. 아무리 곱씹어 본다 한들, 그런 거라곤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승강기의 부름 버튼을 눌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사이 도착한 승강기에 재빨리 몸을 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양쪽으로 열려 있던 문이 다시 완벽한 하나가 되기 바로 직전. 덜 닫힌 문틈으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난 흠칫 놀라 걸음을 조금 뒤로 물러섰다.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문을 다시 열었다. 촤악. 문밖엔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손 전체가 꽈악 짓눌려 제법 고통스러울 텐데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승강기 안으로 들어왔다. 남잔 나한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승강기가 로비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시선이 자연스레 남자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난 티 나지 않게 곁눈질로 남자를 살폈다. 분명 처음 보는 자였지만, 복장만큼은 확실히 낯이 익었다. 온통 시커메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절로 직업을 의심케 하는 까만 정장 차림.

띵. 승강기가 로비에서 멈춤으로써 관찰의 시간은 끝났다. 난 남자의 동태를 살피며 그가 먼저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남자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먼저 내렸다.

남자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 즈음, 발소리를 죽여 로비로 향했다. 밖에는 싸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출입구로 이어지는 복도 위로는 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오랫동안 요지부동했다. 안에 있는 누군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 누구도 내려오는 법이 없었다.

뭘까.

난 발소릴 죽여 계단을 통해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 불도 켜지 않은 상태로 창문으로 다가갔다. 닫혀 있는 커튼 새에 눈을 묻고,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꺼먼 인영은 그때까지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돌부처처럼 정자세로 서 있던 자가 휴대폰을 꺼내 귀에 갖다 붙였다. 강직한 어깨가 이따금씩 들썩거렸다. 누군가와 전화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난 이끌린 듯 협탁에 놓여 있는 전화기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집어 올리곤 버튼을 하나하나 꾹꾹 눌렀다. 신호음도 걸리지 않고, 곧바로 여자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 상대방이 통화 중입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 주시길….

수화기를 붙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검은 정장의 남자 또한 전화를 마쳤는지 귀에서 휴대폰을 뗐다. 이윽고 방 안에 벨 소리가 울려 댔다. 발신자는 장 대표일 거였다. 타이밍이 참 약속이라도 한 듯 칼처럼 떨어졌다. 그에 난 조각조각 난 퍼즐을 하나씩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장 대표는 분명 내게 있던 모든 일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나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단 느낌을 받아 왔고. 그 좆같은 느낌은 주변에 있는 누구 하나 내게 시선을 붙이고 있지 않을 때도 계속됐다. 그래서 그저 착각이라 치부했던 적도 있었다. 심증은 있으나 형체가 없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그 형체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니까 저 새끼가. 저 새끼가 장 대표의 눈과 귀였구나.

띠리리. 띠리리.

붉은색으로 깜빡거리던 전화기가 일순 발광을 멈췄다. 검은 정장의 남자는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 고갤 푹 숙이곤 하얗게 빛나는 화면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다. 그러더니 저벅저벅. 발걸음을 돌려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어두운 방 안을 서성거리고 다녔다.

여태껏 기척 한 번 내지 않고 내 뒤를 밟은 자다. 왜 갑자기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이유는 한 가지로 모였다. 그러니까 저건 일종의 경고일 거였다. ‘지켜보고 있다.’ 그런 아주 강한 메시지를 담은 경고 말이다.

저자는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타난 걸까. 문이 열렸다 닫힌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호텔 룸에서 나온 건 아니다. 그러면 비상구 계단뿐인데. 내가 룸 밖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날 뒤쫓아 왔다. 설마 24시간 날 감시하고 있는 건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장 대표의 눈을 속이고 저자의 감시망을 피해 달아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게임이었다.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마음속 심지가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날카로운 촛대 위에서 한 발로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휘.

창문 밖에서 황량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슬슬하게 골프장 전체를 흔들었다. 울타리처럼 필드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은 검붉은 색 이파리들을 정신없이 떨어 댔고, 넓은 부지를 뒤덮은 잔디들은 평소보다 짙은 빛깔을 띠었다.

눈을 올려 산 너머를 응시했다. 잿빛 구름이 산 윗부분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 비가 올 듯했다.

창문에 비치는 허연 얼굴이 생각에 잠긴 듯 침잠했다.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생각의 늪에 몸을 푹 담그고 있던 나는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내일이라면….

***

호텔에서 조식을 서비스하는 시간까진 아직 두세 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입술에 내려앉은 메마른 각질 따위를 뜯어내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벅지 위로 뜨끈한 햇볕이 드리웠다.

7시.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됐다. 곧장 전화길 들어 프런트를 호출했다. 수화음이 흐르다가, 직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A 세트 가져다주세요.”

- 네, 음료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그냥 물이면 됩니다.”

- 입맛을 돋울 수 있는 죽과 수프 중, 어느 것을 가져다드릴까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건초처럼 메마른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무거나요. 서빙 직원은 이혜원 씨로 부탁드립니다.”

-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문의 도와드리겠습니다.

달칵. 수화기를 잠시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려 댔다. 오늘처럼 날씨가 영 좋지 않은 날엔 스케줄이 줄줄이 취소되니까, 이혜원 또한 스케줄이 비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윽고 직원이 20분 정도 후에 룸서비스를 올리겠단 말을 했다. 전화를 끊고 호텔에 준비되어 있는 펜을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내와 그 위에 펜촉을 꾹꾹 눌렀다. 머릿속에 써 보며 미리 정리해 둔 문장들을 적어 내렸다.

지폐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둘까 하다가, 장 대표나 김미란, 박진경이 늘 지갑 안에서 돈을 꺼냈던 걸 기억하곤 지갑을 꺼내 왔다. 잇자국이 깊이 남아 값어치가 떨어지긴 했으나 어쨌거나 어설프게라도 명품이었다.

이혜원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며 펜 뒤축으로 지폐들을 툭툭 쳤다. 초조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이혜원이 룸 문을 노크했다. 똑똑.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문을 열었다. 음식을 가져온 이혜원은 환한 얼굴로 웃었다.

“안녕하세요.”

생글 웃는 얼굴엔 여느 때처럼 그늘이 없어 보였다. 지나치게 밝아 어딘가 께름칙한 느낌을 주는 여자가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몸을 뒤로 물려 이혜원에게 안으로 들어갈 공간을 내어 주었다. 또각또각, 여자가 트레이를 밀며 룸 안으로 들어갔다. 여잔 티 나지 않게 두 눈을 굴리며 룸 안을 살펴 댔다.

그런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어 열린 틈새로 바깥을 엿보았다. 승강기로 나아가는 복도 끝. 비상계단 근처에서 같은 자릴 맴돌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쾅, 문을 닫고 룸 안으로 돌아왔다. 여자는 잘 교육 받은 손길로 접시를 테이블 위로 하나씩 올려놓았다. 난 한 켠에 가만히 서서 여자의 등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와인 잔에 적당량의 생수를 붓고 나선 여자는 고갤 숙여 묵례까지 해 보였다.

“즐거운 식사 되세요.”

난 온도가 거의 없는 눈으로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사이에 간격을 두고 앉아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편의점에서 함께 끼니를 때운 적이 있었다. 삼각 김밥, 방부제 처리가 되어 있는 퍽퍽한 빵, 몇 갑을 합쳐도 박진경의 담배 한 개비 값도 되지 못하는 싸구려 담배.

속 안에 그런 걸 채워 넣는 시간을 분명 공유한 적이 있었는데.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입술이 그새 또 메말랐는지 혀끝으로 이물감이 느껴졌다. 혀로 열심히 아랫입술을 문대 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분 탓인 듯했다. 할 일을 모두 마친 여자가 손에 트레이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난 얼른 여자를 불렀다.

“저기.”

“…네?”

손에 꽉 쥐고 있던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지갑 안을 뒤적거리고 있는 손등에 문득 끈적한 시선이 은밀하게 와 닿았다. 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척, 안에 있는 걸 꺼내 건넸다.

“팁입니다.”

“감사합….”

지폐에 적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이혜원의 얼굴로 의아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눈으로 글자를 읽어 내린 여자가 날 바라보았다. 이게 뭐냐는 눈빛이었다.

“…이게 무슨.”

“다섯 장을 넣어 놨는데. 액수가 맞는지 세어 봐 주시겠어요?”

여자가 지폐를 넘겼다. 다음 지폐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룸 안에 카메라가 있으니까 대답은 눈짓으로만 해 주세요. 위험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이에요. 부담되신다면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돼요.

지폐가 한 장이 더 넘어갔다.

하지만 도와주겠다고 하시면 사례하겠습니다.

여자의 두 눈이 아래로 옮겨 갔다. 두 눈은 그곳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바로 액수가 적혀 있는 대목이었다. 하얗고 작은 손이 이윽고 마지막 장에 적힌 문장들을 읽어 내렸다.

이틀 후 새벽. 제가 타고 나갈 차편을 골프장으로 가져다주세요.

난 손을 허벅지 옆으로 툭 떨어트렸다. 손목을 수갑처럼 감싼 묵직한 시계가 철컥, 소릴 내며 손등에 부딪혔다. 장 대표에게 보여 주기 위해 종종 착용했으나, 여전히 남의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은 무게감이었다.

여자의 시선이 소리의 진원지인 시계에 닿았다가, 다시 내 얼굴로 옮겨 왔다.

“다섯 장이 맞습니다.”

여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수지타산이 맞는지 계산하려는 듯했다. 그러곤 부탁에 대한 승낙이나 거절을 내비치는 대신 하얀 뺨 위로 미소를 그리며 물어 왔다.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으실까요?”

더 필요한 건 없느냐고. 조용히 입 안을 굴려 음절 하나하나를 신중히 끊어 냈다. 이혜원 또한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눈으로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룸 클리닝 서비스를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이 호텔의 모든 투숙객들이 클리닝 서비스를 받고 있는데, 내 룸만 직원들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고 있었다.

장 대표가 그렇게 하도록 손 써 두었을 터. 이유는 대충 예상이 갔다. 모든 게 다 안개 속에 있는 것만 같던 남자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날 제 소유물로 여기고 있으니 다른 이의 손을 타지 못하게끔 한 거겠지.

“시간대는 언제로 해 드릴까요?”

“제가 있으면 불편하실 테니까, 자리 비우고 있을 때요. 이틀 후 저녁 시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스케줄을 살펴본 후에, 문의 사항에 대해 다시 답변 드리겠습니다.”

이혜원은 그러고선 트레이를 밀며 룸에서 나갔다.

답을 받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다음 날, 이혜원이 방문을 노크했다.

“룸서비스 왔습니다.”

엄지 옆에 난 거스러미를 물어뜯고 있다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당장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이혜원이 트레이를 옆에 끼곤 문 앞에 서 있었다.

“네.”

이혜원이 건네는 트레이를 받았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문을 닫고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트레이에서 들어 올리자, 그 밑에 깔려 있는 메모지가 눈에 보였다.

짊어져야 할 부담이 생각보다 커서요. 위험 수당으로 두 배는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두 배나? 입 안쪽을 콱, 짓씹었다. 이미 무리를 한 참이었는데. 두 배라면 너무 액수가 컸다.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전화길 손에 집어 들었다. 뚜루루, 신호음이 가더니 프런트 직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룸 클리닝 서비스를 부탁드렸었는데요.”

- 네,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진행해 달라 전해 주세요.”

전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곤 팔을 엑스 자로 교차해 티셔츠의 끄트머리를 말아 올렸다. 바지까지 벗어 내곤 그걸로 금고의 렌즈를 가려 놓았다.

속옷 차림으로 금고로 다가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금고 안에 있는 지폐들을 몽땅 끌어내 침대 시트로 둘둘 감싸 놓았다. 그러곤 보따리째로 다시 금고 안에 넣어 놓았다.

***

이틀 내내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혹여나 남자가 미리 눈치채고 추궁이라도 해 오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잔 그날 이후로 날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러다 이혜원과 약속한 당일이 되었다.

소파에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손톱만 물어뜯고 있다가. 뭔가에 이끌린 듯 창문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창문을 짚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검은 세단이 호텔 주차장 입구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저벅저벅. 구둣발이 연달아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박찼다. 그 고요한 울림이 한껏 예민해진 귓가로 파고 들어왔다.

그자다.

제멋대로 발동한 오감이 상대를 특정 지었다. 발소리에 따로 이름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등줄기를 순식간에 타고 오르는 전율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그자라고.

그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평소라면 내가 있는 문을 열고 들어왔을 거였다. 그러나 남잔 그대로 날 지나쳐 바로 옆 룸으로 사라졌다.

“…….”

고갤 돌려 금고를 눈에 담았다. 왠지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기분이었다. 기분 탓이 맞기는 한 걸까. 진짜로 저 손톱만 한 렌즈를 통해 날 지켜보고 있는 중일지도.

프런트에 연락해 술과 음식들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직접 장 대표에게로 전달할 테니, 내가 있는 룸 앞에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직원은 이번에도 20분 정도가 소요될 거라 답했다.

그러고 나선 몸을 씻었다. 긴장한 몸을 달래기 위해 피부가 아릴 정도로 차가운 물 밑으로 들어와 한참을 서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 순간부터 손끝이 연신 벌벌 떨리고 귀에선 희미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이제 진짜 그날이 왔다. 눈앞에 닥쳐온 현실을 곱씹을수록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그대로 늑골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달음박질쳤다. 크기도 고작해야 주먹만 한 장기가 몹시도 심신을 괴롭혀 댔다.

천천히 손을 올려 샤워기를 껐다.

“…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찬물에 노출되어 있던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룸으로 나와 옷장에서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이 유니폼도 몸을 감싸 오는 느낌이 제법 나쁘지 않았다. 그저 남자가 옷장에 꽉 채워 놓은 옷들에 비해 촉감이 거칠고 마감이 허술하기만 할 뿐.

옷장 앞에 있는 거울을 마주 봤다. 사각형의 거울 안에서 창백한 남자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비틀었다. 이진석의 말대로 피부가 하야니 잘 받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저런 귀한 명품 옷들보단 내겐 이쪽이 더 어울렸다.

룸 밖을 나서자, 복도에 주문했던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트레이를 밀고 장 대표의 룸 앞으로 가선 문을 마주했다. 주먹을 쥐고 노크를 하려다가, 그 상태로 잠시 멈춰 있었다. 주먹 쥔 손이 점점 밑으로 낙하했다.

“…….”

장 대표가 내 뜻에 따라 행동해 줄지에 대해선 솔직히 말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워낙 예측 불가능한 남자이다 보니 어디서 변칙이 생길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장 대표가 내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니 내가 울었던 이유에 대해 물었던 거겠지.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될 자신의 과거까지 내게 드러내면서. 나는 반지 밑에 숨겨져 있던 그의 손가락 흉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숨 호흡을 크게 했다.

그러곤 주먹을 고쳐 쥐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룸서비스 왔습니다.”

이윽고 벌컥 문이 열렸다. 남잔 아직 재킷도 벗지도 못한 채로 날 맞았다. 가라앉은 어두침침한 눈이 날 지켜봤다.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남자가 말없이 등을 돌리더니,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난 마지막으로 비상계단 쪽을 눈짓했다. 그 근처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그림자를 확인한 후에,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과 함께 먹을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먼저 세팅하고, 그가 즐겨 마시던 술병들을 그다음 차례로 놓았다. 안에 담긴 액체가 찰랑, 찰랑. 묵직한 소릴 냈다.

남자가 재킷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더니, 꺼먼 지갑을 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난 얼른 그에게로 손을 뻗어 재킷을 받아 들었다. 저번처럼 담배 냄새와 더불어 케케묵은 내가 났다. 옷장에 넣는 대신, 옷걸이에 걸어 한쪽에 놓인 목재 행거에 걸어 두었다.

“…….”

천장에 붙어 있는 샹들리에가 테이블 위로 창백한 빛을 뿜었다. 빛을 그대로 이어받은 접시와 유리잔들이 희뿌옇게 반짝거렸다.

장 대표는 하얗게 발광하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여느 때처럼 머리칼, 차려입은 수트, 목을 느슨하게 죈 넥타이 모두 지나치게 새카맸다. 그는 빛이라곤 우습다는 듯이 모두 그대로 흡수해 내며 느긋이 술을 고르고 있었다. 머리칼과 비슷한 색채를 이뤄 홍채와 동공의 경계선이 거의 없는 검은 눈동자가 트레이 위를 요요히 움직였다.

“데킬라.”

난 얼른 술병을 따 그의 술잔에 따랐다. 그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걸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는 마셨고, 난 계속해서 술잔에 술을 따랐다. 찰랑, 찰랑. 액체 소리만이 대화의 공백을 메웠다.

“대표님.”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내게 닿아 왔다. 감정 없는 그의 눈동자에 흠칫 놀랐다가, 얼른 말했다.

“저도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그가 음, 목을 울리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든지.”

남자가 지갑에서 돈을 몇 장 추려, 내 유니폼 안쪽으로 그걸 욱여넣어 왔다. 난 가슴팍에 그가 처넣은 지폐들을 매단 채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선이 아가릴 쩍 벌린 채로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지갑으로 이끌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버클로 고정되어 있는 작은 약통으로 두 눈이 쏠렸다.

난 꿀꺽, 목을 울렸다. 그러곤 조심스레 남자의 지갑으로 손을 뻗었다.

“저번에 봤던 약통이네요.”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냉한 눈으로 내가 하는 짓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얼굴에선 불쾌한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그에 난 지갑의 버클을 열고, 약통을 꺼내기에 성공했다. 새끼손가락보다 약간 얇고 작은 약통. 그건 온기 없이 차가웠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투명한 통 안에 담긴 하얀 가루들이 사르륵 소릴 내며 조금씩 아래쪽으로 쏟아졌다. 마치 모래시계인 것만 같았다.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매초마다 알려 주며 재촉해 오는.

“…이걸 마시면 어떤 느낌인가요?”

“두개골에서부터 작은 소동이 일어납니다.”

남자는 설명을 돕기 위해 자신의 두개골 대신 짧은 손톱으로 글라스 잔을 툭툭 쳤다. 손짓에 밀린 글라스 안에선 황금색의 파도가 미약하게 일어났다. 파도가 연신 유리 벽을 철벅철벅, 두드려 대다 부서지길 반복했다.

“관자놀이가 뻐근하게 울리고 나면 다음 차례론 눈에 이상이 나타나죠. 바로 목전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양쪽 귀에선 뇌성이 연달아 터지고, 몸은 바람을 팽팽하게 불어 넣은 풍선이라도 된 것처럼 붕 떠오르고요.”

“…네.”

“이 단계에 이르면 이제 이성 따위는 거추장스러워집니다. 불필요한 것일랑 한 켠에 제쳐 두고, 완전히 본능에만 충실하게 되죠.”

“…….”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체처럼 쓰러져 잠에 빠져들게 되고요.”

약통을 집어 뚜껑을 천천히 돌려 땄다. 한 손엔 통을, 다른 손엔 통과 분리된 뚜껑을 들고 있는 내게 남자가 지껄였다.

“날 중독자로 만들 셈이에요?”

“이 정도론 중독되지 않으실 분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안에서 검은 눈동자가 내 쪽으로 스르륵 굴러왔다.

“중독성이 강한 녀석입니다.”

“…….”

“내가 그렇게 제조하라 지시했어요. 그래야 날개 달린 듯 술술 팔려 나갈 테니까.”

날 향한 검은 눈동자가 순간 번들거렸다.

“근데 그걸 나더러 삼키라고?”

장 대표는 입술을 휘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본인이 왜 내 뜻에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단 자의 미소였다. 남자는 본인의 여유를 과시하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더니 팔짱을 꼈다. 겹친 두툼한 팔뚝들이 가히 위협적이었다.

“함께 취해 준다고 하셨으니까요.”

그의 딱딱하게 굳은 입술에서 딱 그만큼 냉랭한 말이 떨어졌다.

“그땐 확실히 그랬었죠.”

“…….”

“근데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인데요.”

당연히 술과 함께 약을 취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너무나도 어이없게 예측이 빗나갔다. 긴장감에 손에 땀이 축축이 배어났다. 허벅지에 땀을 연신 닦아 냈다. 새액, 새액. 호흡이 자꾸만 제멋대로 엉켰다.

이러면 안 되는데. 또 남자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었다. 남잔 이런 종류의 심리 게임에 능했다. 이자가 카드 게임에서 늘 승기를 가져갔던 것도 단순한 운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남자가 심리 싸움에서 상대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에 시선을 붙였다. 여느 때처럼 은색의 반지가 그의 손가락 뿌리를 감싸고 있었다. 늘 속내를 알 수 없던 남자의 가장 밑 부분을 슬쩍 엿볼 수 있었던 게 불과 이틀 전이다. 그의 입술을 통해 쏟아진 말은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었다. 중지에 있는 흉터 자국이 아니라면 꿈이었겠지, 라며 그저 그렇게 가벼이 치부했을 것이었다.

내가 훨씬 더 불리한 상황인 건 맞았다. 그렇다고 이자에게 아예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여태까지 쌓아 올린 부는 모래 위에 쌓인 위태로운 성일뿐이었다. 더구나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가장했다. 입 꼬릴 끌어 올려 유유히 웃고 있는 그에게 제안했다.

“그럼 저와 게임을 해 주시겠어요?”

작은 통을 들어 올려 그대로 잔으로 밀어 넣었다. 퐁, 병이 글라스 안으로 다이빙했다. 열린 뚜껑 틈새로 가루들이 새어 나와 황금색 술에 사르르 녹았다.

그러곤 수없이 연습했던 대로 미소 지었다. 눈매는 부드럽게 접었고, 입술엔 힘을 풀어 뺨에 호선을 그려 냈다. 남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날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어떤.”

“카드 게임이요. 지는 쪽이 마시는 걸로 하는 건 어떨까요?”

남자가 검지로 툭툭, 미간을 두드렸다.

“처음을 이걸로? 고열이 나는 건 물론이고 재수 없으면 장기 하나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다짐을 마친 난 물러서지 않고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이 게임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야 제가 지면 재밌는 장면을 보게 되실 테니까요.”

…재미라. 목을 울리던 남자가 순간 눈을 빛냈다.

“…인(In).”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로 향했다. 술병들이 전시되어 있는 장식장을 열고 안에 있는 빳빳한 카드를 내왔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패를 섞었다. 긴장한 탓인지, 손가락 끝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다. 어설픈 눈속임 따윈 하지도 못했고, 그의 앞에서 할 자신도 없었다. 그저 패를 돌리며 제발 내게 유리한 패들이 손에 붙들려 오기만을 바랐다.

두 명이서 하는 카드 게임으론 블랙잭이 적절해 보였다. 룰은 간단했다. 두 플레이어 중 카드의 합을 21이나, 그 이상을 만들어 내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패가 조용히 테이블 위를 오갔다. 처음엔 비등비등하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세가 점점 기울어졌다. 속으로 그와 나의 승패를 점쳐 볼수록 한기가 점점 몸을 파고 들어왔다.

“…….”

“…….”

그리고 마침내 승패가 결정났다.

얼음처럼 단단한 정적이 룸 안에 흘렀다. 우레마저 숨을 죽인 가운데. 똑딱똑딱. 남자의 손목에서 시계의 초침이 움직였다.

패를 앞에 내려놓은 장 대표가 엄지로 약지에 끼어 있는 반지를 밀어 뺐다. 남잔 망설임 없이 그 반지를 내 술잔에 담갔다. 퐁당. 금속류의 작은 물건이 옅은 호박색을 띠는 술잔의 밑바닥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난 침전하는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의 끈질긴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뭐 합니까, 마시지 않고.”

이제 더 이상 뜸 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손으로 술잔을 감쌌다. 손끝이 절로 바들거리고 떨렸다. 마약이라곤 해 봤을 리 없었다. 동네에 있는 아이들이 뒷산에 모여 본드나 니스를 묻힌 휴지에 코를 대고 불 때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나같이 눈을 회까닥 뒤집곤 괴상한 소릴 해 대곤 했었는데.

목 안으로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잔에는 반지만 남겨 놓고 액체는 몽땅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입 안 전체에 싸한 감각이 감돌았다. 차마 목 안으론 삼켜 넣지도 못한 채로, 그 상태로 머금고만 있었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나까지 마약에 취할 것 같아, 얼른 남자의 굵직한 목을 팔로 감쌌다. 내 돌발행동에 남자의 두 눈이 평소보다 조금 크게 뜨였다. 그의 우뚝한 코와 얽히지 않게끔, 각도를 비틀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혀를 이용해 약간 벌어져 있는 그의 입술 새로 입 안에 담겨 있는 술을 흘려보냈다.

“…음.”

이윽고 그가 목울대를 울려 댔다. 꿀꺽, 꿀꺽. 액체가 입술 틈에서 새어 나와 턱을 타고 질질 흘렀다. 그러자, 남자가 혀로 내 턱을 핥아 올렸다.

“흐, 하아….”

점점 호흡이 딸려 와 입술을 떼어 냈다. 전혀 봐줄 생각이 없는 남자는 내 턱을 부술 것처럼 쥐어 잡곤 제게로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흐읏!”

그가 날 강한 힘으로 끌어당겨, 허벅지에 앉혔다. 엉덩이로 두툼하게 발기한 그의 좆이 느껴졌다. 혀를 섞으며 성기를 마주 비벼 댔다. 후우, 그가 짐승처럼 신음하며 내 뒷덜미로 얼굴을 묻어 왔다. 난 그의 굵은 목에 팔을 두르곤, 위협적으로 벌어진 어깨 너머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바깥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 대표가 입 안으로 내 입술을 모두 빨아들였다. 남자는 그 질깃한 살덩어리를 진짜 먹기라도 할 건지, 입 안에 넣곤 잘근잘근 잘도 씹어 댔다.

“아아, 흣….”

일순 혀끝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기어코 피를 본 듯했다. 남자는 상처가 난 부위에 혀를 대곤 쭉, 피를 빨아들였다. 아릿함에 고개를 뒤로 내뺐다. 그러나 남잔 좆같이 막무가내였다. 그는 내게서 정기를 다 앗아 갈 작정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미친놈처럼 집요하게 굴 리 없었다.

“…후우, 하아….”

그가 단단한 팔로 내 허릴 꽉 붙들어 매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난 떨어지지 않으려 반사적으로 남자의 목에 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필연적으로 명치 부근이 남자의 가슴팍과 밀착되었다. 검은 셔츠에 감싸인 남자의 큼지막한 산소 탱크가 크게 들썩거렸다. 그의 피부와 맞닿아 있는 손바닥을 타고, 그의 목덜미 밑에서 울리고 있는 박동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평소보다 속도가 조금 빨랐다. 남자의 몸에 약 기운이 퍼져 나가고 있는 듯했다. 듣던 중 좋은 소식이었다.

“…….”

“…….”

남자는 성큼성큼 발을 옮기면서 날 내려다봤다. 양쪽 눈동자가 유달리 검붉었다. 며칠간 포도주에 푹 담가 숙성해 뒀던 것처럼.

소파 앞에서 남자의 거침없는 발길이 멈췄다. 그는 날 소파 헤드 위에 거꾸로 걸쳐 놓았다. 하체는 그에게 고스란히 내보인 채로 머리를 땅에 처박은 자세가 되었다. 생소한 자세에 손으로 소파를 꽉 붙잡고 있는데. 날 종용하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벗지 않고 뭐 해요?”

허리를 죄고 있는 벨트를 풀러, 하의를 모두 끌어 내렸다. 하의를 허벅지 중간까지 내렸음 즈음, 고압적인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다 벗지 말고 발목에 걸쳐 놔요.”

그의 말대로 하의를 발목까지만 내렸다. 발목에서 바지와 함께 뭉쳐 있는 속옷을 내려다보는데, 왠지 굴욕적인 기분이 들었다. 애써 외면하곤 그 상태로 다시 소파 헤드에 허리를 대고 누웠다.

벗은 하체를 고스란히 그에게로 내맡겼다. 얼굴에 뜨끈한 열이 올랐다. 취한 자세 때문인지, 아님 순전히 머리에 피가 쏠려서인지. 쉬이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남자가 이미 한계까지 발기한 좆을 삽입하기 시작했다. 발끝으로 서서 으으, 소릴 내며 몸을 떨었다. 무식한 그게 안을 밀고 들어오는 감각은 항상 도가 너무 지나쳤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

장 대표가 근육이 처발려 있는 엉덩이를 유연하게 돌렸다. 굵직한 좆이 안을 묵직하게 휘저었다.

“잘 쑤신다는, 그 새끼보다, 후우, 괜찮나 모르겠네. 내가 보기엔, 좋아 죽고, 있는 것 같은데.”

“…으흑, 흐윽, 하아!”

“흐음….”

그가 잘 단련된 복근의 힘을 이용해 안을 퍽퍽 들이쑤셨다. 머리에 피가 내몰렸다. 전두엽을 중심으로 두개골 전체가 광광 울려 댔다.

“하아, 후흐….”

“흐응, 흐읏, 흣!”

난 소파에 고갤 처박고 속절없이 박혔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손톱 끝으로 소파를 득득 긁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기울어진 몸을 버티고 있던 손바닥이 서서히 안으로 곱아들어 갔다.

“아, 아아…!”

그가 내 목을 움켜쥐곤 스퍼트를 올렸다. 아랫배에 멋대로 힘이 들어가더니, 내벽이 그의 걸 끔찍하게 조여 댔다. 이미 그가 주는 폭력적인 쾌락에 익숙해진 몸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 대표님…! 그, 그만!”

몸이 사시나무처럼 경련했다. 퍽, 퍽. 안에서 뭔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다못해 덜덜 떨리고 있는 다리 한쪽을 소파 헤드 위로 올렸다. 무릎을 굽히고 그에게서 몸을 물려 앞으로 기어 나가려고 했다.

머리가 눈치를 채기도 전에, 몸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해 달아나려던 거였다. 그런 내 움직임을 포착했는지, 남자의 허리 짓이 일순 멈췄다. 그가 아주 낮고 깊은 울림으로 말했다.

“…이게 또, 이러네.”

뭘 하려는 거지. 얼른 고개를 뒤로 홱 꺾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흠칫 놀랄 정도로 차가운 눈을 하고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핏줄이 성난 듯 불거져 있는 그의 손등이 목을 감싸고 있는 넥타이의 매듭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매듭이 느슨해지자, 그는 굵직한 목에서 넥타이를 쭉 잡아 뺐다.

한 줄이 된 넥타이를 양손에 쥐곤 탁, 탁! 구김살을 펴 댔다. 실크 재질의 부드러운 넥타이도 그의 손에 들려 있으니 꼭 채찍인 것만 같았다.

남자가 내 목젖 부근에 넥타이를 대곤 한 바퀴를 빙 감쌌다. 넥타이의 끄트머리 양쪽을 한 손으로 꽉 틀어쥐었다. 난 목줄을 찬 개가 된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왜 낯에 그딴 표정을 달고 날 바라보는 겁니까.”

“…….”

“내가 구둣발로 서수….”

…내 이름을 발음하려던 것 같았는데. 남잔 잠시 입을 멈췄다. 날 똑바로 응시하며 하던 대로 신랄하게 지껄여 댔다.

“네 얼굴을 밟길 했어, 아님 네 뺨에 담뱃재를 비벼 끄길 했어.”

남자가 허리 짓을 재시작하며 입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넣어 왔다. 굵직한 손가락이 혀를 무자비하게 꾹꾹 눌러 댔다. 목젖까지 넣을 참인지, 뿌리까지 넣고 안을 들쑤셨다.

“아흑! 으흣…!”

남자가 넥타이를 쥔 손에 바짝 힘을 줬다. 목이 뒤로 팍, 꺾여 상체가 힘껏 당긴 활시위처럼 휘었다. 얇게 말린 실크가 날카롭게 목을 파고 들어와 고통스러웠다.

“고작 이딴 게 고통스러워요?”

“흐흑! 으흐흣!”

그가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하듯 내 뺨을 엄지 끝으로 어루만졌다. 휴지장처럼 엷은 눈꺼풀을 그려 내듯 매만졌다가, 콧잔등을 느릿하게 쓸어 왔다. 내 얼굴 모든 곳에 지장을 찍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현듯 든 생각에 오한이 몸을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그사이 남자의 엄지가 인중을 타고 입술로까지 내려왔다. 그가 고갤 내려 자신의 입술을 내 뺨에 바짝 붙여 왔다. 입을 맞춰 올 거라 생각했던 그는 입술을 조금 열어 그 새로 말을 흘려보냈다.

“지금도 말이에요.”

장 대표는 일부러 한 템포를 쉬었다. 긴장감에 목 안으로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켜 넣었다. 동시에 창밖에서 번쩍, 천둥이 쳤다. 우르르 쾅, 소름 끼치는 뇌성이 정적을 깨부쉈다.

남자가 자신의 커다란 손아귀 안에 내 손을 가둬 넣었다.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오므리자, 내 손은 자연스레 주먹을 쥐게 되었다.

“지금도 날이 이럴 때면 수술했던 부위가 쓰라리곤 합니다. 벌써 몇십 년이나 지난 일인데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인 양 생생히 뇌리에 박혀 있어요.”

그가 서서히 손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번쩍, 다시 한번 천둥이 쳤다. 이윽고 쏴아아, 비가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피부의 얇은 층을 파고들 때. 그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를 겁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딴 멍청한 선택 따윈 내리지 않을 거예요.”

음성이 지나치게 낮았음에도 입술 밖으로 내뱉는 단어 한 글자, 한 글자가 귀에 매섭게 파고 들어왔다.

남자의 두 눈이 섬광처럼 번뜩거렸다. 그는 완전한 광기에 사로잡혀선 파괴적인 쾌락으로 날 몰아넣었다. 넥타이에 그대로 목이 조여 죽을 위기에 놓인 나 또한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악, 흐윽….

우르르 콰앙, 다시 한번 번개가 섬광탄처럼 터졌다.

***

시선이 뒤흔들렸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정신을 간신히 가다듬어, 남자의 목덜미를 꽉 붙잡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손목에 걸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남자가 약을 취한 지 어느덧 두 시간가량이 흘러 있었다. 슬슬 기절한 듯이 잠에 빠져들어야 하는데. 남잔 웬일인지, 아직까지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내게 허리 짓을 해 대고 있었다.

“아흐응! 흐으, 흑!”

남자가 날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 내더니, 곰 발바닥 같은 손으로 내 가슴팍을 짓누르며 좆질을 해 댔다.

“후우! 하…!”

밭은 숨이 연신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내 얼굴 옆을 손바닥으로 짚고 무차별적으로 허리 짓을 해 대던 남자의 팔꿈치가 별안간 팍, 꺾였다. 그러다가 장 대표의 육중한 몸이 일순 휘청댔다. 그가 관자놀이를 부여잡더니 작게 목 안을 끄응, 울렸다.

“으윽….”

“으응, 흐윽, 하, 하아, 흑!”

남잔 좆을 구멍에 넣었다가 빼는 행동을 계속했다. 서서히 속도가 느려지더니 남자가 결국 풀썩,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내 가슴팍에 맞닿아 있는 남자의 두꺼운 가슴팍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느지막이 꺼졌다. 그를 조용히 불렀다.

“…대표님.”

묵묵부답이었다. 그에 그의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 봤다. 잘 벼린 칼날처럼 신경이 예민한 남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남자의 쫙 펼친 부채처럼 넓은 손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드디어 잠들었다…!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팍을 힘껏 밀어 냈다. 내 손짓에 밀린 그의 묵직한 몸이 반 바퀴를 굴렀다. 삐그덕, 무자비하게 짓눌린 스프링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버티고 있는 양발이 후들거렸다. 갓 태어나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느릿느릿,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눈앞이 어질거렸다. 아예 삼킨 건 아니었지만, 입 안에 담고 있던 탓에 약이 소량이나마 점막으로 스며든 듯했다.

“…….”

흩어진 정신을 한데 모아야 했다. 나는 손목 안을 손톱으로 득득 긁는 방법을 택했다.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 때마다 고통이 몰려들었지만, 동시에 흐릿하던 정신이 예리하게 일깨워졌다. 좀 전보다 명징해진 눈으로 빠르게 룸 안을 훑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쿵, 뛰었다. 가슴팍을 뚫고 뛰쳐나가려는 심장을 간신히 거두어 잡았다. 맘대로 날뛰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일단 계획했던 대로 남자가 갖고 있던 그 섹스 영상을 찾아야 했다.

이 안에 놓인 가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고 해 봐야 몇 군데 없을 거였다. 난 일단 TV가 놓여 있는 장식장을 먼저 뒤져 봤다. 모든 서랍들을 일일이 열어 보고, 혹시 몰라 서랍 밑까지 손을 넣어 확인해 봤다. 여기엔 없는 듯했다.

다음은 장식장이었다. 손으로 병들을 전부 만져 본 후에, 놓인 자리에서 들어 보기까지 했다. 이곳에도 없다.

그리고 이젠 책상이었다. 몇 개의 형식적인 장식품들만 올려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들을 모두 열어 봤다. 첫 번째 서랍, 두 번째 서랍, 세 번째 서랍이 모두 부드럽게 열렸다. 안이 모두 텅 비어 있었다.

“…….”

이제 마지막 서랍을 열 차례였다. 얼른 손을 내뻗었다. 덜컹, 모든 서랍이 열려 있는데, 마지막 서랍만 잠겨 있었다. 촉이 날카롭게 섰다. 여기다. 시선이 오른쪽 상단에 붙어 있는 키 홈으로 향했다. 이걸 열려면 키가 있어야 하는데.

키가 있을 만한 곳이 어딜까. 손끝으로 서랍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영상에는 나뿐만 아니라 장 대표, 본인도 담겨 있었다. 의심이 많은 자이니 직원이 청소를 위해 오가는 룸에 놓는 대신, 몸에 지니고 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남자가 매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남자의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지갑을 거꾸로 들고 털털 털었다. 남자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는 빳빳한 명함이 먼저 쏟아져 나오고, 플라스틱 카드들이 그 뒤를 이었다. 더 거세게 잡아 흔들자, 안에서 뭔가 툭 소릴 내며 떨어졌다.

새끼손가락만 한 키였다.

얼른 그걸 가져와 서랍의 문을 열었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키 끝이 자꾸 홈을 빗나갔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서랍을 손으로 꽉 붙들곤 다시금 키 홈에 꽂아 넣고 돌렸다.

스으윽, 서랍이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돈뭉치였다. 난 그 사이에 손을 넣곤 안을 무작정 헤집어 댔다.

그러다 손끝에 무언가가 걸려 와 얼른 그걸 꺼내 들었다. 차 키 모양으로 된 USB였다. 난 희열감에 차서 속으로 소릴 내질러 댔다.

‘이거다!’

얼른 TV 쪽으로 향하기 위해 굽히고 있던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는데.

뭔가 시선을 확 잡아채 오는 게 있어 뒷걸음질 쳐 서랍으로 돌아왔다. 오만 원권으로 이루어진 지폐들이 눈에 들어왔다.

룸 안엔 금고가 뻔히 있었다. 왜 멀쩡한 금고를 놓고 여기에다 돈을 보관한 걸까. 그냥 순전히 남자의 취향일 수도 있는 거인 데다가, 지금 이럴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난 께름칙함에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지폐들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뭔가가 시선에 빨려 들어와, 손을 천천히 그쪽으로 내뻗었다.

“…….”

구깃구깃하게 구겨진 지폐를 쥐고 들여다보았다. 지폐를 만진 손끝엔 뭔가 까슬거리는 게 묻어 왔다.

후두둑, 갈색 알갱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갈색의 작은 알갱이들.

“…흙.”

그래, 마치 흙처럼 보였다. 머릿속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난 아니라고!’ 손안의 지폐를 형편없이 찌그러트렸다.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눈동자만 굴려 남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노려보았다.

좀도둑놈한테도 그답지 않게 유한 태도를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본인이 손해 볼 짓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는 남자인데. 돈을 뜯긴 걸로도 모자라, 팁까지 놈의 손에 건네서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야 그 찝찝하던 일의 실마리가 풀렸다. 그놈이 자신을 대신해 오해를 사고 있으니 일이 생각보다 더 재밌게 돌아갔겠지. 구태여 캐디로 불러들여 내 옆에 붙여 놓았던 것도 본인의 유흥을 위해서였을 테다. 제 앞에서 놈을 향해 적대심을 표출하는 날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를 향해 고요하고 차가운 분노를 표출했다.

“…씨발 새끼.”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거나, 크게 절망하진 않았다.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남자가 그랬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애써 머리에서 밀어 내 버리려고 했던 걸 지금에서야 눈으로 확인했을 뿐이었다.

지폐를 휴지 조각처럼 구겨 버린 뒤, TV 장식장으로 다가가 빔 프로젝터에 USB를 꽂았다. 제목 없는 영상들 중, 가장 최근의 것을 선택 재생시켰다.

지이익, 지이익. 화면이 잠시 흔들리더니 화면에 장 대표와 내가 나타났다. 이윽고 포르노에서나 들릴 법한 신음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난 볼륨 버튼을 시계 방향으로 홱 돌려 소리를 크게 틀어 놓았다.

“흐으응, 하아!”

“…후우.”

“…하아, 흐응!”

“…후우, 후.”

혹시나 영상의 소리 때문에 남자가 깨지는 않을까, 다시 한번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아직까지도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난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내 미련 없이 등을 홱 돌려 테라스로 나아갔다.

투둑, 투두둑. 비가 사납게 쏟아지고 있는 창문을 열었다. 그새 굵어진 빗줄기가 얼굴과 몸으로 치달아 왔다.

창가에 걸터 선 채로 테라스 밑을 살폈다. 밑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곤 얼른 난간 앞에 섰다. 무게 중심을 서 있던 난간에서 옆쪽으로 옮기는데, 순간 비에 발이 미끄러졌다.

“……!”

휘이잉, 비바람이 나무들을 뒤흔들었다. 공중에 매달린 채로 나무들과 함께 휘청휘청대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옆방 테라스로 홱, 넘어갔다.

창문으로 초조하게 안을 서성대고 있던 이혜원이 보였다. 창문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자 이혜원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창문을 열어 줬다.

난 얼른 금고로 다가가, 안에 있는 시트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곤 이혜원이 룸 안으로 끌고 온 트레이로 몸을 날렸다. 이혜원이 그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숨죽인 채로 내 품에 안겨있는 시트를 눈에 담으며 지껄였다.

“얼른 약속했던 돈부터 주세요.”

말갛기만 했던 눈이 탐심에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차에 타기 전까진 안 돼요.”

이혜원이 입술을 짓씹었다. 시선이 공중에서 팽팽히 맞붙었다.

그때 똑똑,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이혜원과 내 몸이 동시에 흠칫, 튀어 올랐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혜원 또한 그걸 느꼈는지, 얼른 트레이의 손잡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난 돈 꾸러미를 품에 꽉 안은 채로 트레이 속의 여러 개의 쓰레기통들 중 하나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역겨운 내가 코를 찔러 왔다. 이미 술로 뒤집어진 속이 메스꺼운 냄새에 역류를 해 내려고 하기에, 명치 부근을 꽉 그러잡고 그걸 버텨 냈다.

그러다 머리 위로 뚜껑이 얹혔는지,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주 좁고 어두운 곳에 갇힌 채로 이혜원의 손길에 내맡긴 채로 운반되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트레이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막 문밖을 나선 듯했다.

얇은 플라스틱 면 너머에서 이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곧이어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신, 빈방에서 뭐 하는 거요.”

난 직감으로 그가 내 뒤를 쫓던 감시자임을 알아차렸다. 난 너무나도 놀라 숨을 멈췄다.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동시에 틀어막았다. 이혜원은 끝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회원님의 룸을 청소하던 중이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나에게로까지 전해져 왔다.

“누구 허락을 맡고.”

“직접 고객님이 요청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옆방에 틀어 놓은 영상 속의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으읏, 아!”

“…하아, 하아.”

“…흐응, 흐응!”

“…흐.”

남자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큼, 가래 낀 목을 긁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혜원이 말했다.

“다음 스케줄이 차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잠시 정적이 들렸다. 밖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나도 조용해 그때까지도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에서 초침이 울리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똑딱, 똑딱. 난 그 소리가 혹시라도 새어 나갈까, 얼른 시계를 다른 손으로 틀어잡았다.

아주 짧은 찰나가 억만년의 세월처럼 흘러가던 그때.

다행히 바퀴가 돌돌돌 소릴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이혜원은 빠르게 발을 옮겼다. 트레이가 코너를 돌더니, 덜컹, 바퀴가 들어 올려졌다.

드디어 승강기에 오른 듯했다. 곧 스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위에서 이혜원이 휴우,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한고비 넘긴 건가, 나 또한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아아!”

이혜원에게서 흠칫 놀란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곤 스르륵, 승강기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말이요.”

아까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이혜원이 당황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그에 남자가 멋쩍은지 큼, 목안을 울리며 말했다.

“거기 안 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흐읏, 하아, 흐응…!”

여전히 복도엔 적나라한 신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깥과 정반대로 승강기, 이 직사각형의 공간 안엔 불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바깥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며칠 전처럼,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닫히는 승강기 문틈 사이로 제 손을 깊게 밀어 넣어 온다. 남자는 승강기 앞을 막아서고 이혜원에게 뚜껑을 열어 보라 종용한다.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직감으로 뭔갈 눈치챈 눈빛을 하고 있다. 그에 이혜원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 보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

이내 츠읍. 맞닿아 있던 입술이 어렵사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매 음절에 힘을 주고 분명하게 물었다.

“왜 이러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이럽니다.”

“…하아.”

여자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회원님이 그렇게까지 요청하시니 마지못해 해 준다는 느낌이었다. 작게 뱉은 한숨이지만, 남자에게도 들렸을 게 분명했다. 이윽고 덜컹, 바로 옆에서 쓰레기통의 뚜껑이 열렸다.

“이건 그냥 회원님들의 룸에서 나온 쓰레기를 모은 쓰레기통일 뿐이에요.”

다시 싸한 침묵이 흘렀다.

“…음.”

남자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거친 사포로 뭔갈 득득 문대는 소리가 들렸다. 머쓱함에 남자가 제 짧은 머릴 벅벅 긁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는 것도 한번 열어 봅시다.”

…씨발. 눈을 꽉 감았다. 남잔 장 대표만큼은 아니지만 덩치가 제법 컸다. 암벽 같은 그를 뚫고 지나가기 위해선 순간적인 힘이 필요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려 보았다.

여자가 뚜껑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남자를 힘껏 밀친다. 남자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진다. 그 틈을 타 난 힘껏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날린다.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질주한 끝에 드디어 입구에 도달한다.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입구에 서 있는 또 다른 까만 정장의 남자와 마주한다.

한 명일까. …두 명? 혹은 다수일지도 모른다.

빗물에 축축히 젖은 온몸에 싸늘한 전류가 흘렀다. 좌절을 직시한 난 팔 사이로 머릴 묻었다. 어디든 도망갈 데가 없다.

머리 위로 이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흠, 남자가 석연치 않다는 듯 목을 울렸다. 여자는 자신의 거절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열심히 입을 놀렸다.

“무슨 이유에서 이걸 보시고자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건 그냥 회원님들의 의류들이 담겨 있는 리넨 카트입니다.”

“그냥 옷이 담겨 있는 거라면 보여 줘도 상관없지 않아요?”

남자는 당최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수상한 냄새를 아주 짙게 맡은 듯했다.

…휴우. 이혜원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한숨은 좀 전의 것보다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지금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걸 더 이상은 숨길 뜻이 없어 보였다.

“여성 회원분들의 개인 용품들도 함께 들어가 있어서요. 확인이 불가능하실 것 같아요.”

조용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둘이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저 멀리서 제3자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번뜩 불안해져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눈길을 홱 돌렸다.

누구일까.

머리가 빠르게 답을 몇 가지로 추려 냈다. 직원, 같은 층에 머무르고 있는 투숙객, 또 다른 꺼먼 정장의 사내. 이 모두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만 남아 있다.

…그 남자.

난 완전히 공포스러워져서 속눈썹 한 올까지 벌벌 떨었다. 일순간 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직도 남자의 넥타이가 목을 깊게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목에 한층 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벅저벅. 이제 단 두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난 몸을 좀 더 밀도 있게 웅크렸다. 손으로 꽉 눌러 잡고 있는 시계에서 똑딱똑딱. 초침이 흘렀다. 매초가 손아귀 안에서 아프게 뛰었다. 얼른 이 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그 순간.

“안녕하십니까.”

이혜원의 예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로 난 상대가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장 대표는 아님을 직감했다. 그럼 대체 누구인 걸까.

“여기 안 내려가요?”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말투를 보아하니 같은 층에 묵고 있는 투숙객인 듯했다. 난 극렬하게 날뛰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꽈악 짓눌렀다.

이혜원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혹여 분실한 귀중품이나 물품이 있으신 거라면, 저희 직원 프런트로 문의 주십시오. 친절히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혜원의 말엔 설득력이 있는 데다가, 장 대표의 룸 안에선 신음 소리가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심지어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좀 전보다 더 극적으로 들렸다. 거기다 기다리고 있는 VIP 고객까지.

“…….”

저벅저벅. 뒤로 물러나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결국 뒤로 물러나는 걸 택한 거였다. 상황을 알 리 없는 회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사람 다 있네.”

스으윽. 드디어 차가운 철문이 금속성 소릴 내며 닫혔다. 위이잉. 승강기가 로비로 빨려 내려갔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날카로운 구두굽 소리가 텅 빈 공터를 울렸다. 입구를 벗어난 이혜원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트레이를 내몰았다. 그러다 지나가던 직원과 마주쳤는지, 일상적인 대화도 나눴다.

“혜원 씨, 아직 퇴근 안 했어?”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말투를 들으니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이진석이었다. 이혜원은 당황한 기색 없이 매끄럽게 받아쳤다.

“네, 뒷정리만 더 하고 들어가려고요.”

“그래, 수고해.”

비교적 매끄러운 길을 내달리던 트레이가 덜컹, 소릴 내며 문간을 통과하더니, 이번엔 울퉁불퉁한 길 위를 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거친 굴곡을 모두 몸소 느낀 후에야 트레이가 멈췄다. 머리 위로 달빛이 새어 들어온다 싶더니, 이혜원이 뚜껑을 위에서 아예 들어냈다.

“CCTV 사각지대예요. 이제 나와도 돼요.”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던 난 그제야 접힌 부채처럼 웅크리고 있던 몸을 쫙 펼쳤다. 갈바람이 목덜미에 배어난 땀을 식혔다.

유니폼이 땀과 비에 흠뻑 젖어 엉망이었다. 찝찌름한 거야 이 상황에 아무래도 좋았지만, 문제는 유니폼 등판에 커다랗게 적혀 있는 상호였다.

팔을 엑스 자로 교차해 상의를 벗어 내고, 리넨 카트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들 중에서 아무거나 걸쳐 입었다. 빠른 손동작으로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을 때, 여자가 입술을 뗐다.

“여기 길 따라 걷다 보면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올 거예요.”

난 고갤 끄덕거리며 시트로 감싸 놓았던 꾸러미를 옷들 속에서 꺼냈다. 그러곤 미리 추려 놓았던 돈을 이혜원에게 건넸다. 여자가 액수가 맞는지 지폐를 일일이 세어 보았다. 그동안 난 두 눈으로 누가 오는 건 아닌지 계속해서 살피며,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냈다.

“저기요, 그 시계. 저 주시면 안 돼요?”

“…아니요, 이건 안 됩니다.”

여자는 흐응, 소릴 내며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그냥 가벼이 던져 본 질문인 듯했다. 마침내 철컥, 시계의 후크가 풀렸다. 머리채를 휘어잡듯 시계를 손아귀에 움켜잡았다. 아주 짧은 찰나, 여자와 시선이 얽혔다.

“…….”

“…….”

여자와 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여자의 구두 굽 소리와 땅을 힘껏 박차는 내 발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뤄 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발소리가 장단에서 빠져나갔다.

탁, 탁, 탁.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헉, 허억. 밭은 숨을 내뱉었다. 쉼 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헉, 허억.”

등 뒤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골프장은 크기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달려나가도, 달려나가도 어느새 뒤에 바짝 붙어 와 있었다. 내 머리 위에 군림하며 날 아주 무겁게 짓눌렀다.

난 그것으로부터 추적당하고 있는 사람처럼 도망쳤다. 아주 필사적이었다.

마침내 도로에 도달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난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갓 정신 병원에서 탈출한 환자의 몰골로 저 멀리서 하얀 헤드라이트를 뿜으며 다가오는 차를 지켜보았다.

검은색 승용차가 이제 막 머리꼭지를 보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 나타난 차. 이혜원이 준비하기로 한 그 차가 틀림없었다. 칠흑 같은 검은색이라. 불길했다. 이젠 검은색이라면 보기만 해도 몸서리를 절로 칠 만큼 끔찍했다.

“…….”

내가 먼저 이혜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쨌거나 그 여자도 로열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 대표에게 넘어가 내 계획을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저 차는 이대로 보낼 계획이었다.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시계가 툭, 도로 한쪽에 떨어졌다. 방금 막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자본 덩어릴 버렸는데도 마음속엔 아쉬움 한 자락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금고에도 그 지랄을 쳐 놓았는데. 시계라고 안 해 놓았을 리 없으니 말이다.

도로를 질주해, 어둠 탓에 꼭 하나의 거대한 짐승 같아 보이는 야산 속을 파고 들어갔다.

“…흑,…하아.”

제 아무리 나지막한 산이라지만, 불빛 한 점 없는 밤이라면 또 얘기가 달랐다. 비에 젖어 축축한 목초가 신발 밑창에 마구잡이로 엉겨 오는 데다, 온갖 나뭇가지들이 진로를 방해해 왔다. 난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냈다.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다.

드디어 우거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도로가 보였다. 희열에 가득 차서 빠르게 산을 타고 내려오다, 비에 흙이 쓸려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에 발목이 꺾여 넘어졌다.

“…윽!!”

아픔은 그걸 느낌과 동시에 금방 잊었다. 얼른 다시 일어나 도로로 뛰쳐나갔다,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데 저 멀리서 하얀 빛이 번쩍거리며 다가오는 게 눈에 보였다. 순간 시야가 한낮처럼 밝아져 팔로 눈을 가렸다가, 다시 내렸다.

내 바로 앞에 한쪽으로 픽 쓰러질 것 같은 낡고 허름한 트럭 한 대가 털털 소릴 내며 버티고 있었다. 난 얼른 왼쪽 문을 열고, 다이빙하듯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날 태운 트럭은 곧바로 도로 위를 질주했다.

익숙하지만, 절대 불쾌하지 않을 수 없는 냄새가 코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나던 것보다 한결 더 역한 내가 진동을 해 댔다. 머리가 광광 울리고, 폐부를 꽉꽉 짓눌러 댔다.

몇 계절을 지내고 다시 만난 삼촌의 눈동자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 댔다. 뒷머리가 다 쭈뼛 섰다. 피부밑으로 다리가 수십 개 달린 지네들이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두꺼비 같은 손이 오토 스틱을 놓고, 내게로 다가왔다. 손등에 난 수세미 같은 털이 뺨과 광대에 문대졌다. 딱 차 안에 가득 들어찬 냄새만큼 불쾌한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 왔다.

“넌 여전히 때깔이 좋아 보이는구나.”

난 바짝 얼어붙은 채로 천천히 눈동자를 삼촌에게로 굴렸다. 지방으로 덮인 눈 아래에서 삼촌의 눈동자가 징그럽게 번들거렸다. 삼촌이 엄지손가락처럼 두꺼운 입술을 달싹거려 내 이름을 발음했다.

여원아. 서여원이.

지방에 깊이 묻혀 있는 삼촌의 두 눈이 내 목에 닿아 왔다. 품 안에 끼고 있는 시트 보따리를 발견한 안광은 희번덕한 빛을 뿜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려 보따리를 보호했다.

수염 자국으로 주변이 새파란 삼촌의 입에선 호오, 하는 괴상한 감탄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그제야 목에 남은 울혈을 의식했다. 얼른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이미 대강 상황을 파악한 삼촌은 쇳소리를 내며 웃었다. 끼익, 끼익. 기름칠하지 않은 철문에서 날 법한 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어왔다.

젖은 몸 때문인지, 아니면 생리적인 혐오감 때문인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벌레처럼 기어 올라왔다.

“어릴 때도 제 어미 닮아 얼굴 하난 반반했었지.”

삼촌의 역겨운 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살결을 따라 얼굴을 어루만지곤, 끝이 사포처럼 거친 엄지로 귓바퀴를 지분댔다. 꽤 오랫동안 말이다.

난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아 손으로 허벅질 꽉 쥐어 잡았다. 시선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새하얗게 질린 손등 위에 오돌토돌한 닭살이 새순처럼 돋아나 있었다.

“…….”

살심이 들끓어 올랐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만 삼촌의 손이 닿았던 부근만 얇게 포 썰어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을 뿐. 난 그 어떠한 반격도 하지 못했다. 등줄기를 꼿꼿이 편 채로 석고상처럼 쩍 굳은 채로 끔찍한 손길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삼촌은 뺨을 한 번 진득하게 꼬집고 나서야 물러났다.

“어딜 가더라도 능히 잘 빌어먹고 살 거라 생각했다.”

“…….”

“그래서 이젠 어디로 갈 테냐.”

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곤 그에게서 시선을 옮겨 운전석과 보조석 가운데에 있는 작은 수납함 쪽을 눈짓했다. 영수증처럼 생긴 종이 쪼가리들 세 장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에 입금자명 옆에 적혀 있는 문구가 눈을 이끌었다.

제게와주세요

내가 돈을 입금하며 적어 보낸 글자였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영수증엔 골프장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무의미한 눈길로 그걸 바라보다, 이내 삼촌을 등져 시선을 창문에 붙였다. 바깥엔 아직도 물난리가 한창이었다. 삼촌도 진짜 궁금해서 던진 질문은 아닌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뭘 뒤적거리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삼촌이 가슴팍 안쪽에서 담뱃갑을 꺼내 입에 담배를 꼬나물었다. 이윽고 싸구려 담배 냄새가 코끝에 스쳐 왔다.

후우, 후우.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내뿜는 천박한 날숨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

창밖을 응시하던 나는 문득 장 대표를 떠올렸다. …지금쯤 깨어났을까. 이미 날 찾고 있을지도. 생각만 해도 속에 납덩어리가 앉은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에잇, 씨팔.”

삼촌의 거친 욕설과 함께 찌그러진 담뱃갑 하나가 내 발 아래로 떨어졌다. 안이 텅 비어 있는 빈 갑이었다. 담배가 떨어졌음을 깨닫곤 제 분에 못 이긴 듯했다. 담뱃갑에 조잡한 글씨체로 적혀 있는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

왜 의식의 흐름이 장 대표에게로 흘러간 걸까 했는데. 삼촌에게서 나던 씁쓸한 담배 냄새가, 장 대표가 아주 이슥한 새벽 돌아와 품에서 꺼내 피우던 담배 냄새와 같아서였다.

…지긋지긋한 새끼. 아무리 뇌리에서 떨쳐 내 보려고 해도 쉽지 않다. 이미 망막 안쪽에 깊이 새겨져 있어, 신발 밑창에 들러붙은 껌처럼 시도 때도 없이 걸리적거렸다. 난 고갤 마구 털어내며 남자의 생각을 지워 내려 애썼다.

몇십 분이고, 몇 시간이고, 트럭은 계속해서 어둠의 도로를 질주했다. 그럼에도 망막에 드리워지는 장면들은 계속해서 동일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바깥. 찬비가 빗자루처럼 창문에 잔뜩 끼어 있던 물때를 쓸어 내고, 또 쓸어 냈다.

무슨 저주에라도 걸려 동일한 장소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걸지도. 난 왠지 그 작은 공간 안에 영원히 갇힐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

시간이 지나자, 하늘을 점령하고 있던 짙은 먹구름 새로 꼭두서니 빛이 머릴 조금 내밀었다. 창문에 드리워지던 빗발 무늬 또한 한결 옅어졌다.

트럭 차가 골골대는 노인의 곡소릴 내며, 아치형의 여객선 터미널 입구를 그대로 통과했다. 트럭이 한숨을 쉬듯 콧방귀를 뀌더니 적당한 곳에서 멈췄다.

보따리를 상의 안으로 넣어, 불룩해진 배를 안고 보조석에서 미끄러지듯 내렸다.

휘이, 차가운 새벽바람이 몸을 감쌌다. 뺨을 두드리는 바람을 느끼며 고갤 위로 쳐들었다. 항구가 물안개에 감싸인 채로 두 눈으로 뛰어들어 왔다. 두근두근. 손목 밑의 정맥이 정신없이 날뛰었다. 그제야 탈출을 제대로 만끽했다. 난 환희에 가슴이 조금 부풀어 한 발짝을 내딛었다.

“여원아.”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접었다가 뒤를 돌았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교복처럼 낯선 내 이름을 부른 삼촌은 다 허물어져 가는 트럭 앞에 서 있었다.

“다신.”

“…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다신 돌아올 생각도 없는 데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없었다. 난 등을 돌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삼촌에게 경고했다.

“병원비 밀리지 않고, 이자 제때 갚겠다고 약속만 해 주시면요. 계속 노름판에 헛돈 날리셨다가는, 더 이상은 저한테서는 일절 받지 못하실 거예요.”

그가 매캐한 냄새로 떡칠된 혀로 지껄였다.

“그런 걱정은 마라.”

그러곤 다시금 누런 이로 킬킬, 웃었다. 난 그 역겨운 얼굴을 뒤로하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등 뒤에서 드르릉, 다시 트럭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뒤돌아 보진 않았다.

가장 먼저 물을 담은 비닐장갑으로 파리를 내쫓고 있는 주변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튼튼한 비닐 봉투를 하나 샀다. 그러곤 지린내가 진동하는 화장실 칸 안으로 숨어 들어왔다. 티를 위로 들쳐 숨겨 왔던 보따리를 꺼내 봉투에 넣고 입구를 잘 묶었다.

그걸 품에 잘 안아 들곤 매표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매표소 직원으로부터 악천후로 당연히 취소될 거라 생각했던 배가 뜬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한 장을 달라 하곤 값을 치렀다.

한쪽 의자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바다는 잔물결 빼곤 그저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XX섬으로 가는 여객선이 곧 출발할 예정이니, 탑승객들은 미리 탑승하시어….”

방송을 듣고 의자에서 일어나 여객선으로 향하는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원체 오가는 객들이 적다 보니, 여객선 자체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 아무렴 좋았다. 의자로 들어가 앉는 대신, 바깥으로 나와 난간 앞에 섰다.

부아앙, 곧이어 배가 출항했다.

배가 바다를 뒤로 밀어내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갤 돌려 수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붉게 타오르는 여명이 물결치는 바다 위로 햇볕 부스러기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매 순간. 놓으려야 차마 놓을 수 없었던 그 단어가 내게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자유다.

난 순간 감격스러워서 고갤 밑으로 떨어트렸다. 뺨을 타고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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