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01.
마을버스가 낡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끼익, 소릴 내며 멈춰 섰다. 쪽잠에서 화들짝 깨, 주변을 홰홰 둘러보았다. 시선이 닿는 족족 새파란 산이거나 논밭이었다.
버스 기사가 룸 미러로 내게 시선을 맞추며 눈치를 줬다.
“학생, 종점이에요.”
단출한 짐을 챙겨 부랴부랴 버스에서 내렸다. 정류장에 서서 멀어지는 버스를 길 잃은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느려 터진 고물 덩어리는 곧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 허물어져 가는 의자로 터덜터덜 걸어가 가방을 내던지고 풀썩, 주저앉았다.
인적도 드물고 지나다니는 차량도 거의 없다시피 한 곳. 삐이, 삐. 풀벌레 소리만이 귀를 울렸다. 영락없는 촌 동네다.
“…후우.”
말도 안 되게 높은 급여에 반신반의하다, 결국 갈 데가 없어 이곳까지 찾아왔다. 역시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곳에서 장기 매매단에 납치라도 당한다면. 씨발, 그거 완전 좆 되는 거 아니야. 두 손으로 머릴 감싸고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였다.
♩♪♬
얼핏 음악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잘빠진 차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독수리처럼 쏜살같이 달려와 내 앞에서 끼익, 소릴 내며 멈췄다. 앞문이 덜컥, 열리고 젊은 남자 한 명이 내렸다. 키가 크고 늘씬해 절로 시선이 이끌리는 남자였다. 남자가 얼굴을 반쯤 가린 선글라스를 코끝까지 끌어 내리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서수원 씨!”
넋을 놓고 있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날 찾아온 게 맞았구나. 얄팍한 가방을 품에 꽉 끌어안고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요?”
“…네, 조금.”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차의 윗부분을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얼른 출발하자고요.”
가방을 다시 한번 고쳐 쥐고는 보조석에 올라탔다.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입가에 걸치더니 뒤따라 운전석에 탔다.
차가 매끄럽게 비포장도로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가사를 알 수 없는 팝송에 리듬을 맞추며 몸을 가벼이 흔들어 댔다.
“…….”
“…….”
나는 티 나지 않게 차 안을 훑어봤다. 처음 타보는 외제 차의 내부는 외관만큼이나 새끈했다. 마른침이 절로 꿀꺽 넘어갔다. 남자는 내가 자신의 차를 훑어보든 말든 관심 없어 보였다. 그저 손에 들려 있는 이력서를 한 번, 다시 내 얼굴을 한 번 번갈아서 들여다볼 뿐이었다.
“왜 사진을 이런 걸로 올려놨어요?”
동네 사진관에서 되는 대로 급하게 찍은 거라, 자신이 보기에도 무척이나 쪽팔린 사진이다. 남방은 사진사의 아들 거를 빌려다 입었고,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얼굴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남자는 이력서를 와작 구기더니, 창문 밖으로 그걸 내던졌다. 그러곤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실물이 훨씬 나은데요.”
남자의 밝은 염색 머리가 열린 창문으로 곁들어 오는 바람에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부드러운 눈매가 나부끼는 머리칼 사이에서 휘어졌다.
“난 진석이에요, 이진석.”
남자는 즐거운 듯 웃으며 음악의 볼륨 소리를 더 높였다.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귀를 쨍쨍하게 울려 댔다. 이젠 음정조차 헤아릴 수 없는 노랫소리 사이로, 기어들어 가는 내 목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데리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지 못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남자가 전방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로 눈썹을 한 번 추켜올렸다가, 다시 원위치했다. 난 약간 어색하게 호칭을 덧붙였다.
“…사장님.”
“…으음?”
남자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사장 아니에요.”
약간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선 내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여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나도 수원 씨처럼 그냥 일하는 사람인데.”
…남자 또한 캐디라고? 난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 한낮 캐디가 이런 외제 차를 몰다니. 그러다가 모집 공고에 적혀 있었던 급여를 떠올리곤 이내 납득했다. 하기야 그 정도의 급여라면 이런 외제 차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만 잘하면 인센티브도 더 챙겨 준다고 적혀 있었으니.
남자는 콧노래를 부르며 엑셀을 더 세게 짓밟았다. 잘빠진 외제 차 한 대가 꾸불꾸불하게 난 길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이런 일은 처음 해 보죠?”
“네.”
안 해 본 운동 없다지만, 골프만큼은 낯설었다. 골프는 장비며, 라운딩비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돈 나가는 것들 천지였다. 소위 돈 있는 자의 전유물이라, 캐디가 정확히 뭘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몰랐다.
“그냥 다른 서비스업이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다른 골프장이랑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이곳 캐디들은 맡은 일이 조금 다양하다는 정도?”
“…아, 네.”
고갤 작게 주억거리자, 남자가 뒷말을 이었다.
“초청받은 분들 대상으로만 운영하는 거다 보니까 보통 스케줄이 널널해요. 스케줄 있는 날보다 잡일하는 날이 더 많을 거예요.”
핸들을 손으로 리드미컬하게 툭툭, 건드리던 남자가 룸 미러의 각도를 꺾어 제 미모를 확인했다.
“잡일 정도야 그냥 일반인들 데려다 쓰면 확실히 인건비가 줄 텐데.
불현듯 뺨에 시선이 달라붙어 왔다. 고갤 돌려 날 향해 있는 눈을 마주보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뒷말을 이었다.
“사장님이 직원들 용모를 좀 많이 보셔서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어쨌든 일하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급여도 높고, 날씨 때문에 스케줄 펑크나는 날에도 급여는 착실히 나오니까. 고객들이 VIP 중의 VIP라 좀 까다로우신 것만 빼면요.”
남자가 입꼬릴 유려하게 올리며 웃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더 달렸을까. 아직까지도 도로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물음표들이 쉴 새 없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말 이런 곳에 골프장이 있긴 한 걸까, 역시 이 미끈한 남자는 내 장기를 목적으로 하는 놈이 맞았던 걸까. 이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인 걸까. 이미 싹이 터 있던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순간.
저 멀리에 있는 거대한 건물이 시선을 확 이끌어 갔다.
차가 그 건물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난 그것의 엄청난 크기와 자본 냄새를 술술 풍기는 외관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건물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주차장에서 차가 멈췄다. 떡 벌어지게 차려진 골프장의 입구가 두 눈으로 뛰어들어 왔다.
“이제 내리면 돼요.”
입을 멍청하게 벌린 채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는데. 이진석이 그런 날 일깨웠다. 먼저 내리는 그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지잉, 위잉. 앞서가는 이진석의 재킷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네, 사모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입구로 들어간 난 본격적으로 골프장 안을 구경했다. 시선이 가서 닿는 곳 족족 돈 냄새가 났다. 건물이 그러했고,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이렇게 구석진 곳에 이런 건물이 세워져 있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눈으로 사람과 건물을 구경하느라 바쁜 와중에, 전화를 끊은 진석이 말했다.
“나 손님이 와서 그러는데, 잠깐 인사만 하고 바로 나올게요.”
“…아, 네.”
진석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난 건물 가운데에 있는 분수를 물끄러미 지켜보기 시작했다.
화려한 분수는 다채로운 빛깔을 뿜어 댔다. 그 중간에서는 섬세하게 빚어진 조각상들이 물줄기를 내뿜어 댔다. 혼을 빼고 분수를 지켜보다가, 천장에도 일일이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목을 한껏 뒤로 꺾고 그림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그만, 지나가던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이건 명백히 멍청하게 굴고 있던 내 잘못이었다. 난 얼른 사과하고 나섰다.
“죄송합니다.”
“…뭐야.”
젊은 여자는 눈을 흘기며 곁을 지나쳤다. 그러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릴 내며 멀어졌다. 차려 이은 하얀색 유니폼 등판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로열 골프’
이진석이 오는 길에서 설명해 줬었다. 국내에서 크기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이 골프장엔 총 서른 명이 넘는 직원들이 몸담고 있다고 했다. 일 년 치 회원권만 해도 억 단위라, 고객들도 모두 이름만 대면 알 정도의 VIP라고 들었다.
건물 내부를 대충 훑어본 뒤엔, 한쪽 벽에 등을 대고 가만히 서 있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이다. 이따금씩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이 시선을 빼앗아 갔다. 대부분 이진석처럼 잘난 외모와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외양을 과시라도 하듯, 하나같이 유니폼을 몸에 꽉 끼게 입고 있었다.
“수원 씨.”
이진석이 용건을 끝냈는지, 위층 계단에서 얼굴을 불쑥 내보였다. 그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래 기다렸죠? 같이 올라가요, 내가 사장실에 데려다줄게.”
함께 계단을 올라, 번쩍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진석이 가장 꼭대기 층, 5층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올라가는 층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진석이 비밀 얘기를 해 준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사장님이 조금 강하게 생기시긴 했는데.”
이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너무 겁먹거나 하진 말아요.”
“…아.”
난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애매한 감탄사만을 내뱉었다.
“기본적으론 좋으신 분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띵.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췄다. 긴 복도를 지나 ‘사장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 멈춰 섰다. 똑똑. 이진석이 두 번 문을 노크했다.
“사장님, 수원 씨 오셨습니다.”
문 안쪽에서 “그래, 들어와.”라고 말하는 중년 남성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석이 내게 문을 열어 주고 자신은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들어가요.”
사장실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사장실은 한쪽 벽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 유리창으로 드넓은 파란 필드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장은 그 압도적인 풍경을 바탕으로 꺼멓고 큰 의자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뒤돌아 앉아 휴대폰만을 붙들고 있었다. 그의 굵직한 손목에 둘러진 시계가 번쩍거리며 빛났다.
“…어, 뭐, 그런 셈이지.”
해묵은 담배 냄새가 나는 목소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습관인지, 수화음을 아주 크게 틀어 놓아 상대방의 목소리가 내게도 들릴 정도였다.
“정장쟁이들 그거, 괜히 엘리트들이 아니야. 술자리에선 빳빳하게 굴던 놈들도 뒤로 몰래 돈 조금 찔러 넣어 주니까, 흔적도 없이 일처리를 해 주더라니까. 아주 유능해. 박수 쳐 주고 싶어.”
계속되는 통화에 이진석을 살짝 눈짓했다. 무표정을 하고 있던 이진석이 빙그레 웃어 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얼굴이었다.
“…어, 저기 뭐야. 나 지금 우리 직원 하나가 새로 들어와서. 내가 좀 이따 다시 전화하지.”
마침내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을 내린 사장이 천천히 의자를 돌려 왔다. 난 서둘러 묵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오야. 아가, 이리 와 봐라.”
사장은 체격이 좋고. 얼굴이 넙데데한 사람이었다. 혈색은 술기운이 도는 사람처럼 붉었고, 콧방울이 두꺼웠다. 전체적으론 누가 봐도 ‘아, 이 사람 어딘지는 몰라도 한자리는 맡고 있겠다.’란 느낌을 주는 자였다.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사장이 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훑어 올렸다. 두터운 눈지방으로 덮인 눈이 냉철하게 빛났다. 내가 자신의 사업 수단으로 적합한지를 평가하고 있는 거였다. 사장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지껄였다.
“실제로 보니까 더 훤칠하네. 키가 몇이라고 했지.”
“181입니다.”
“음, 나쁘지 않네.”
사장은 만족한 눈치로 고갤 느긋이 끄덕거렸다.
“감사합니다.”
난 기계적으로 답했다. 사장이 권위적으로 이진석에게 명령했다.
“아가한테 잘 곳 어딘지 안내해 주고, 진석이는 다시 내 방으로 와.”
“알았습니다, 사장님.”
이진석이 재빠르게 문을 열곤 내게 복도를 눈짓했다. 사장에게 마지막으로 묵례한 후, 사무실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타 손을 한 번 쥐었다, 풀었다. 손바닥 안이 긴장감으로 배어난 땀으로 축축했다. 이진석이 뒤따라 올라타선 로비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엄청 마음에 드신다고 하네요.”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등급으로 매겨진 듯했다.
“내일부터 이 주간 교육을 받을 거예요. 어려울 건 크게 없습니다. 서비스 매니저님도 좋으신 분이니 열심히만 하면 무리 없이 잘 해낼 거예요.”
“네.”
“그럼, 사장님도 뵀겠다. 이제 숙소만 안내해 주면 될 것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내가 머무를 숙소는 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304호’라고 써진 룸 앞에 멈추더니 이진석이 도어 록을 열었다. 방 구경은 단 1초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캡슐 형식으로 된 작은 공간 안에 침대 하나가 들어가 있는 게 전부였다. 방의 임시 비밀번호를 알려 준 이진석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화장실은 여기 중앙에 있는 공동 화장실 쓰면 돼요. 식사는 직원 식당이나, 아님 구내 편의점에서 하면 되고요.”
“네.”
“다른 건 이제 차차 알아 가는 걸로 하고, 오늘은 그만 쉬어요.”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이진석이 방을 떠나고,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선반 위에 가방을 턱,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작은 방 안에 쥐 죽은 듯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딸려 있는 창문 하나 없으니 숨이 조금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간만에 편한 곳에서 두 다리 뻗고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간 누적됐던 피곤이 한 번에 몰려왔다.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측면 시야로 남루한 바지에 감싸여 있는 다리가 보였다. 나는 갑자기 등장한 두 다리 때문에 흠칫 몸을 떨었다. 눈을 소매로 벅벅 비비고, 재차 그쪽을 바라보자 환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저게 여기까지 쫓아왔을 줄이야.
“…후우.”
짙은 한숨을 내쉬곤 몸을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렇게 나는 자다 깨다를 계속 반복하며 골프장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
이튿날부터 교육에 투입됐다. 본인을 서비스 매니저라고 소개한 남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날 가르쳤다. 운동 신경이 좋아 골프의 전반적인 룰이나 이기기 위한 필승법은 척척 깨우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비스 교육에선 번번이 지적을 받았다.
“미소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요.”
“어깨가 너무 뻣뻣합니다.”
“음, 그렇다고 가슴을 그렇게 앞으로 쭉 빼란 얘긴 아니었는데.”
부드럽게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수업을 받을 땐 골치까지 아팠다. 매니저가 입술을 벌려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자, 거울을 보면서 한 번 웃어 보세요. 김-치.”
사무실 한쪽에 달린 거울로 모습을 비추며 웃어 보였다. 김-치. 창백한 남자가 피에로처럼 웃으며 날 마주 바라봤다.
“그리고 따라 해 볼까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긋한 말투를 사용하는 자신은 괴상한 로봇 같았다.
“아니, 입꼬리는 좀 더 자연스럽게 올리고, 눈썹은 좀 내리구요.”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 얼굴 근육을 고쳤다. 입꼬리가 고장 난 것처럼 움찔거렸다.
“자, 다시. 입꼬리랑 눈꼬리, 릴랙스.”
매니저는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내 표정을 매번 손봤다. 시간이 지나자, 처음엔 어색하기 짝이 없던 내 표정에도 점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업 차수가 두 자리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제법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기계적으로라도 친절한 말씨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이 주간의 속성 캐디 교육은 끝이 났다. 직원 사무실에서 몸의 치수를 일일이 재 가더니, 곧 유니폼과 두께 두툼한 파일첩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파일첩엔 캐디들이 참고할 수 있게끔 회원들의 간략한 정보가 나와 있었다. 상장처럼 옆구리에 끼고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 막 한 걸음 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첫 출근 날. 유니폼을 처음 입어 본 난 크게 당황했다. 옷이 굉장히 타이트했기 때문이었다. 몸에 맞춘 듯 엉덩이와 가슴에 쩍 달라붙는 유니폼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캐디 라커 룸에서 어색한 걸음으로 나오다가, 우연히 이진석을 마주쳤다. 그 또한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유니폼 잘 어울린다.”
그의 말에 입은 옷을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옷이 지나치게 가슴팍에 달라붙는 데다 얇았다. 유두가 거의 내비칠 지경이라고 하면, 말 다 한 거지 않은가. 이너라도 입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옷이 너무나도 몸에 딱 맞아 그런 걸 받쳐 입었다간 몸에 맞지 않을 거였다.
이진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얼굴이 하얘서 그런가.”
그러곤 물어 왔다.
“피부 관리 따로 해요?”
“아니요, 그냥 선크림만….”
내 피부는 햇볕에 조금 약했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고서는 볕 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뻘건 고구마가 되어 허물이 벗겨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신경 잘 써 줘요, 예쁨받을 테니까.”
…예쁨? 의아한 눈으로 이진석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진석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환하게 웃으며 반기느라 바빴다. 매니저가 그토록 강조하던 서비스용 미소를 만면에 띠고 얼른 회원님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누님, 일찍 오셨네요.”
이진석의 상대는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출근하기 전 미리 받았던 정보에 따르면 저 여잔 분명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인 K 회사 회장의 새끼 마누라, 박진경이었다. 여자의 눈길이 내 쪽에 닿아 오자, 난 얼른 목을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우아한 헤어스타일과 차려입은 옷에서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여자가 새빨간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
“못 보던 애네.”
“우리 신입이에요.”
“귀엽다, 자기보다도 어릴 것 같은데?”
이진석이 수려한 눈썹을 찡그렸다. 묘하게 애교 있어 보였다.
“누님.”
“어머, 자기야.”
여자는 이진석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이진석의 뺨에 입술을 댔다. 쭙, 노골적인 소리가 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만 껌뻑이고 있는데. 둘은 개의치 않고 서로의 혀를 문지르고 빨기 시작했다.
“…….”
연인 사이였던 걸까. 난 시선을 딴 곳에다 두며 딴청을 부렸다. 이쪽으로 오던 직원은 두 사람이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못 본 척 지나갔다. 바로 눈앞에서 민망한 소리를 내며 낯 뜨거운 짓을 벌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가 숨이 찬 목소리로 이진석에게 은근히 물었다.
“자기야, 좆 단단해졌다. 누나가 쭉쭉 빨아 줄까?”
이진석이 웃음을 잃지 않은 채로 은근하게 말했다.
“누님, 신입이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는데요.”
갑자기 내 얘기가 두 사람 사이로 툭 튀어 나왔다.
“…저, 저는 얼른 가서 회원님 골프 백을 가져오겠습니다.”
얼른 발걸음을 돌려 프런트로 향했다. 등 뒤에서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귀로 꽂혀 왔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프런트로 다가가 안내 직원에게 말했다.
“김미란 회원님 골프 백 찾으려고 하는데요.”
“네, 직원분 성함이요.”
“서수원입니다.”
“카드 확인하겠습니다.”
직원들에게만 제공되는 카드를 프런트에 전달했다. 직원이 카드를 받아 리더기에 긁은 후, 내 신분을 확인했다.
“네, 확인되셨습니다.”
직원이 카드를 돌려주며 키 하나를 내게 건넸다. 라커 룸에서 회원의 골프 백을 꺼내 어깨에 메고선, 첫 고객을 맞기 위해 골프장으로 향했다.
진석과 여자는 한쪽에 마련된 파라솔에 앉아 있었다. 민망할 정도로 딱 달라붙어 있는 둘 때문에 또 한 번 시선 둘 곳을 잃고 있을 때. 큰 선글라스를 낀 여자 한 명이 입구로 나왔다. 내가 처음으로 담당할 사람이었다. 이름은 김미란, 직업은 잘나가는 골프 의류 업체의 대표였다. 나이는 미상이지만 겉보기론 마흔 줄 초반으로 보였다. 골프 백을 내려놓고 얼른 다가가 첫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함께할 서수원이라고 합니다.”
“어, 못 보던 애네.”
김미란이 명품 백을 파라솔 아래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얼굴도 예쁘고, 몸 관리도 잘했고. 원래 운동했었니?”
“네, 전공이 원래 이쪽입니다.”
골프 백 앞부분에서 하얀색의 고급 장갑을 꺼내 김미란에게 건넸다. 여자가 장갑을 끼며 두 눈으로 내 위아래를 훑었다.
“땡큐, 그래서 새로 온 예쁜인 나이가?”
“스물셋입니다.”
“스물셋?”
여자의 눈이 토끼 눈처럼 크게 뜨였다.
“이거 완전 범죄네, 범죄야.”
그렇게 말하는 어조엔 즐거운 기색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굳이 범죄랄 것까진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여자가 그때까지도 진석과 끈적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는 박진경에게 말했다.
“진경아, 그만 주물럭거리고 일어나. 애 고추 터지겠다.”
박진경이 킬킬거리고 웃으며 진석의 바지춤을 쪼물락대던 손을 거둬들였다.
***
티그라운드에서 김미란이 내게 드라이버를 건네받아 자세를 취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자세였다. 탕, 김미란이 친 공이 둥근 궤적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다. 툭, 투둑. 공이 페어웨이 위를 데구르르 굴러 제법 괜찮은 위치에 떨어졌다.
“굿 샷.”
진석은 애교 있게 칭찬을 했고, 난 말없이 박수를 쳤다. 김미란은 운동 센스가 좋은 여자였다. 굳이 코치를 해 주지 않아도, 눈으로 라인을 재며 제가 원하는 곳에 공을 곧잘 올려놓았다. 다음 순서를 받은 박진경이 티 샷을 날릴 준비를 마쳤다. 진석이 박진경의 몸을 뒤에서 감싸 안으며 박진경의 자세를 고쳤다.
“누님, 길게 치셔야 하니까, 공을 약간 앞에 둬 볼까요?”
“응, 고마워, 진석이.”
진석이 얼른 뒤로 물러서고, 박진경이 있는 힘껏 골프채를 휘둘렀다. 샷이 제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박진경은 이마를 찌푸리며 투덜댔다.
“노인네랑 배 맞춰서 그런가,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야.”
담배 케이스에서 하얀색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술에 문 박진경이 진석에게 물었다.
“장 대표가 내일부터 들어온다고 했지?”
골프채를 갈무리하던 진석이 얼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박진경의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네, 여자 캐디들 엄청 신났던데요.”
“하긴, 나였어도 열심히 뻗대 봤겠다. 미혼에다 섹시하겠다, 씀씀이도 크니까.”
박진경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좆도 크고.”
전동차에 올라타던 김미란이 신랄하게 박진경을 나무랐다.
“너 꼭 본 것처럼 얘기한다.”
“장 대표 팔뚝이랑 허벅지 두께 봐, 언니.”
박진경이 두 손으로 장 대표란 사람의 허벅지를 가늠했다. 그렇게 벌어져 있는 두 손의 거리가 거의 박진경의 허리둘레만 해서 그리 신뢰가 가진 않았다. 김미란은 바로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남자 자지는 벗겨 보기 전까진 아무도 몰라.”
“장 대표 그 몸매에 이쑤시개 꼬치면, 아우 씨팔. 그게 무슨 조화야.”
박진경이 끔찍한 상상을 했다는 듯, 손사래를 쳐 댔다. 김미란은 어깨를 가벼이 들썩였다가 놓았다.
“왜, 허벅지가 너무 굵어서 눌렸을 수도 있잖아.”
“말도 안 돼. 그럼 그 소문들은 다 뭐야.”
“돈으로 뻥튀기 안 되는 것들이 어디 있겠어.”
여자들은 듣는 귀들이 있는 앞에서도 거리낄 게 없었다. 수위 높은 얘기들은 멈추는 법 없이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새에 귀가 무뎌진 난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캐디들이 지켜야 할 수칙 중 가장 상단을 차지하고 있던 걸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면서. ‘수칙 1. 고객들의 사생활을 보장할 것.’
“그래도 장 대표 꼬치라니까, 그걸로 이 쑤셔 보고 싶긴 하다.”
“저거 진짜 미친년.”
박진경의 음담패설에 김미란이 차에서 내리며 욕지거리로 대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껏 야한 얘기로 떠들던 여자는 샌드 샷에 이어 퍼팅을 위해 채를 짧게 잡았다. 한 번에 홀 안에 넣기엔 약간 거리감이 있었다. 거리를 재던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 이거 애매한데.”
옆에 서 있다가 말했다.
“공을 스탠스 왼쪽으로 두고 약간만 힘을 줘서 빨리 치시면 들어갈 것 같습니다.”
“내가 이거 할 수 있을까, 예쁜아?”
“네,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김미란이 채를 여러 번 고쳐 잡곤 내가 일러 준 대로 따랐다. 공이 약간 휘며 홀로 가서 붙었다. 김미란의 고개가 공을 따라 휘어졌다.
“설마, 설마, 설마.”
도로록 굴러간 공이 화살이 꽂혀 있는 홀로 쏘옥 들어갔다. 탕, 탕. 공이 비좁은 공간을 울리며 나는 호쾌한 소리에 진석이 웃으며 박수쳤다.
“나이스.”
김미란에게로 다가가 골프채를 대신 들며 말했다.
“어려운 샷이었는데 잘 치셨어요.”
입술의 끝을 올려 살짝 웃었다. 김미란이 까만 인조 속눈썹을 붙인 눈을 깜빡거렸다.
“얘 슬쩍 눈웃음치는 거 봐. 예쁜이가 칭찬해 주니까 이모야 기분 좋아서 사악 녹겠네.”
박진경이 껴들었다.
“이모는 무슨, 누나지.”
김미란이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욕지거리를 했다.
“어머, 진짜 정신 나간 년.”
원래부터 가까운 사이라던 둘은 투닥거리며 말싸움을 해 댔다. 한쪽에 비켜서 있던 진석이 내게 몰래 미소를 보내왔다. 꽤 만족스러워하는 눈치로.
그날의 우승은 김미란이 가져갔다. 박진경은 진석의 몸을 주무르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다음 날엔 한 쌍의 중년 커플을 상대했다. 그 둘은 경기보다는 애정 행각에 관심이 있었다. 날 한 켠에 세워 두고는 파라솔 밑에서 서로의 몸을 주물럭대고 있었다. 금실 좋은 부부 같아 보였다. 숏컷을 쳐서 목선을 드러낸 여자의 엉덩이를 주물거리던 중년 남자가 손짓으로 날 불러들였다. 난 그의 부름에 얼른 파라솔 밑으로 들어갔다.
“여기 위스키 두 잔 좀 갖다주지.”
“네, 알겠습니다.”
빠릿하게 몸을 움직여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위스키 한 잔씩을 건넸다. 둘은 잔을 짠, 소리 나게 부딪치곤 시원한 위스키로 목을 축였다. 그날 나는 팁으로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받았다.
그 바로 다음 날, 일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에도 한 쌍의 중년 커플을 상대했다. 내 앞에서도 애정 행각을 서슴지 않는 두 회원들은 같은 반지를 나눠 낀 걸로 보아 부부가 맞았다. 중년 남자가 이번엔 긴 머리 여자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내게 말했다.
“위스키 한 잔.”
미리 준비해 온 아이스박스에서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랐다. 얼음까지 몇 개 띄워 남자에게 건네자, 남자가 팁이라며 내게 십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건넸다. 어제도 왔었던 남자는 아내 모르게 눈 한쪽을 찡그려 왔다. 이걸로 입 다물어 달라는 무언의 사인이었다. 난 손에 쥐여 있는 수표 두 장을 내려다보다가, 얼른 곱게 접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곤 모른 척, 고갤 돌려 바삐 골프채를 닦았다. 나쁜 짓을 한 아이처럼 손이 저렸다.
***
원래 오늘은 공식적으론 스케줄이 비어 있는 날이었지만. 그럼에도 일찍 기상한 건 잡일 때문이었다.
공동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치곤 거울 앞에 서서 어색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깔끔한 차림새와 몸가짐은 이곳의 캐디들이 지켜야 할 수칙들 중 두 번째를 차지했다. 리조트 체크아웃 시간인 열한 시에 맞춰 프런트에서 보조 키를 받았다.
내가 맡은 잡무는 세탁물들을 수거해 빨래방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총 십 층으로 이루어진 룸들을 일일이 초인종을 누르며 돌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꼭대기 층만 남았다. 펜트하우스. 그곳엔 VIP 중에서도 VIP들만 머무르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 ‘로열 골프’에 천문학적인 돈을 날리고 있는 고객들이 있는 곳이었기에,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이제 펜트하우스에서도 가장 안쪽, 1104호만 들르면 오늘 맡은 임무는 끝이 나는 거였다. ‘1104’가 적혀 있는 문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곤 인기척이 들리기를 기다렸다.
“세탁물 수거하러 왔습니다.”
몇 초가 지났어도 안에서는 이렇다고 할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러 봤다. 띵동. 이번에도 무응답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으시면 직접 가져가겠습니다.”
로비에서 미리 받아 온 보조 키로 1104호의 문을 열려고 하던 순간, 안쪽에서 먼저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뒤로 비켜섰다.
“…아!”
여자 하나가 슬립 차림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굽이 바늘처럼 뾰족한 힐을 한 손에 쥔 채로, 실내용 슬리퍼를 직직 끌며 나를 지나쳤다. 흔들흔들, 걸음걸이가 굉장히 불안정해 보인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여자를 넋 놓고 지켜보고 있다가, 시야에서 그 여자가 없어진 이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오후에 다시 온다고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던 사이, 1104호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가운 차림의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장신인 나와도 반 뼘 정도가 차이 날 만큼 체구가 월등히 큰 남자였다. 느슨하게 차려입은 가운 사이로는 갈색의 가슴 근육들이 엿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시멘트 벽처럼 딱딱해 보인다. 하마터면 둔해 보일 수 있는 큰 체구임에도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덕분에 날렵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놀라고 긴장된 마음에 석고상처럼 쩍 굳어 있는데, 스산한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문을 두드렸던 것 같은데.”
얼른 정신을 차리고 목을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얼른 치우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어깨 끝을 한 번 으쓱해 보인 남자가 문을 열어 줬다. 남자는 천천히 걸어가, 룸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룸 안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시트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고, 술병과 와인 잔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심심찮게 널려 있는 콘돔도 눈에 들어왔다. 룸 안에도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소파 위에 다리를 올린 채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난 벽에 최대한 붙어 얼른 시선을 다른 데로 두었다. 그 여자 또한 다리 안쪽, 사타구니가 쓰린지 입에 “씨발.”을 달고선 머리를 뒤로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 여자마저 룸 밖을 나서고 복도에선 또각또각, 킬 힐 소리가 울렸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낀 난 리빙 박스를 얼른 트레이 위에 실었다. 어서 손을 움직인 후에 룸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릴 가득 메웠다. 담배 끝에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던 남자가 내게 질문을 던져 왔다. 지포 라이터를 테이블 위로 내던지는 그의 기다란 약지엔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저자도 기혼자인 건가. 아주 짧은 찰나, 어제 봤던 그 부부가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또 한 번 속이 메스꺼워지는 순간이었다.
“새로 왔어요?”
“네.”
후우, 내뱉은 연기에 잠깐 삭제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눈동자가 내 팔을 훑었다. 홍채와 동공의 구분이 거의 없어 올리브처럼 새카맣기만 한 눈동자였다. 그에 난 왠지 모를 오한을 느꼈다. 룸 안에 돌아가고 있는 에어컨이 너무나도 낮은 온도에 맞춰져 있는 것 같았다. 잇새에 담배를 문 남자가 제 가죽 지갑을 뒤적거리더니, 하얀 수표 몇 장을 추려 자신의 앞에 올려놓았다. 남자는 일부러라도 내게 팔을 뻗는 수고까진 하지 않았다.
“이건 팁이에요.”
수표는 한눈에 보기에도 장수가 많아 보였다. 난 티가 나지 않도록,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인사한 뒤, 남자 쪽으로 몸을 약간 숙였다. 수표를 집어 든 후엔, 얼른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웠다. 기분 탓일까. 남자의 삼백안이 아주 짧은 찰나, 내 목덜미를 훑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남자가 음험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수원 씨가 내일도 있으려나.”
그렇게 묻는 남자의 시선은 내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가늘게 뜨여 있는 남자의 두 눈을 따라 고갤 내렸다. 하얀 유니폼 위로 두 돌기가 작고 동그랗게 서 있었다. 얇은 유니폼은 연한 색상의 유륜을 여감 없이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순간 목덜미가 화르륵 달아올랐다. 룸 안에 흐르고 있는 냉기 때문에 생리적인 현상으로 선 거였지만, 쪽팔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 내일도 일합니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진하게 웃었다. 또 한 번 진득한 오한이 등줄기를 스쳤다.
“그래?”
“예.”
“그럼 그때 보죠.”
“네, 감사합니다.”
수표를 꼭 쥐고는 도망치듯 룸에서 빠져나왔다. 문밖을 나서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한 번에 팍, 터뜨렸다. 손등과 팔뚝에 돋아 있는 닭살을 슥슥, 문질렀다. 뻗쳐오는 기운이 무척이나 불쾌한 남자였다고 생각하며 얼른 트레이를 밀고 자리를 떴다.
***
다음 날 이른 새벽. 땅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젖은 흙길을 걸었다. 습한 새벽 공기가 거미줄처럼 얼굴에 엉겨 붙어 왔다. 불안함이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다가, 편의점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챙겨 온 동전 몇 개를 주화 입구에 넣고 번호판을 눌렀다. 뚜르르, 신호음이 울렸다. 아직 이른 시각이지만 새벽일을 하는 사람이니, 지금도 분명히 전화를 받을 거였다.
예상했던 대로 신호음은 곧 뚝, 끊겼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내 숨도 함께 끊긴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날숨을 크게 뱉은 후, 첫 운을 힘겹게 뗐다.
“…접니다.”
수화기로 녹슨 쇳덩어리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 그동안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사정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 사정?
“…….”
- 너 같은 놈이 지금 사정 운운할 때야? 내 바짓가랑이 쭉 늘어질 정도로 잡고 늘어져도 모자랄 판국에?
수화기를 붙든 손에 꽉 힘을 줬다. 잇새를 힘껏 문 탓에 뺨이 불룩거렸다. 생리적인 혐오감에 무릎이 간헐적으로 들썩거렸다.
“돈 구할 데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2주 정도면 맞춰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2주?
남자는 허, 헛웃음을 쳤다.
- 내가 널 뭘 믿고 또 기다려 줘? 언제 딴맘 먹고 외국으로 튈지도 모르는 놈한테. 아무래도 300만 원으로 올려야겠어.
300? 순식간에 두 배로 불어난 값에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허벅지 옆에 두고 있던 손으로 공중전화 줄을 부여잡았다. 손이 벌벌 떨렸다.
“삼, 삼 백은….”
- 얼굴이 번번하니 빌어먹을 데가 절로 생기지?
“삼촌, 삼촌. 그건 안 됩니다.”
빚쟁이처럼 으르대던 남자는 사실 내 외삼촌이라는 작자였다. 그가 잔인하게 내 말을 칼처럼 도막 냈다.
- 안 돼? 그럼 말고. 나야 잃을 거 전혀 없으니까.
“…….”
- 기한 어기지 마. 나도 내가, 불시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협박으로 짙게 점철된 전화는 긴 여운만을 남기고 그대로 끊겼다. 난 상대방 없는 전화를 속절없이 붙잡고 같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게 돈을 맡겨 놓기라도 한 양, 기세등등하게 으름장을 놓던 삼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연신 공중제비를 돌았다. 골이 띵하게 울리더니, 눈앞이 하얗게 점멸됐다. 나는 몸의 중심축을 잃고 휘청대다가, 전화 부스에 몸을 기댔다.
천천히 호흡을 갈무리하며 엉망으로 흩어진 정신을 한데 모으려 노력했다. 안개 낀 듯 흐릿하던 눈앞이 점점 맑아졌다. 그에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 작자에겐 제 손에 굴러 들어온 돈줄을 어떻게 해서든 이용해 먹는 게 더 남는 장사였다. 훗날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서 제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겠으나, 그게 지금 당장이 되진 않을 거였다. 지금은 내가 착실히 자신의 돈줄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리 쉽게 입을 나불대거나 하진 않을 거였다. 계산에 밝은 자니까.
수화기를 손에서 놓고, 비틀거리며 부스 안에서 빠져나왔다. 300만 원. 그걸로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하루살이 목숨을 연명해 나가야 했다.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까.
순간 세상이 정전된 것처럼 눈앞이 컴컴했다.
***
새벽부터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리는 바람에 스케줄이 통으로 취소되고 말았다. 예측지 못한 비가 찾아온 탓에 김미란, 박진경은 ‘420호’ 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유달리 어둑한 바깥 탓에 스위트룸은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테이블 위에 표면이 거친 담요를 하나 깔고,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포커를 쳤다. 칩을 대신할 물건은 룸에 구비되어 있던 판촉용 성냥이었다.
진석은 아슬아슬한 란제리 차림 위에 가운만을 걸친 박진경의 어깨를 안마하고, 난 술 시중을 들거나 심부름과 같은 잡일을 받아 했다. 두 고객이 피워 대는 줄담배로 룸 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눈과 코가 시렸지만, 심부름 값으로 받는 잔돈들이 제법 쏠쏠해 이를 악물고 그 역함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장 대표 요번에 KO쪽 계약 따냈다던데?”
박진경이 담배를 문 입술 새로 연기를 피워내며 불분명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내뿜는 숨이 지독해 나는 티 나지 않게 주먹으로 코를 막곤 쿨럭, 잔기침을 했다. 김미란은 어수룩한 내가 귀엽단 듯 내 뺨을 꼬집었다. 덕분에 여자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담배 연기가 내 눈으로 들이 닥쳐 왔다.
“거기 사업 확장 때문에 몇 달 전부터 남쪽 부지 사들인단 얘기 있었거든. 장 대표가 그거 알고 일찍이 물밑 작업 들어갔나 봐. 덕분에 중앙 물산 김 사장은 완전 눈 뜨고 코 베였고.”
휘유, 휘파람을 불던 박진경이 킥킥대며 웃었다.
“하여간에 장 대표 돈 냄새 잘 맡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브랜디가 담긴 잔을 홀짝이던 김미란이 은 케이스를 똑 소리 나게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아, 썅. 돛대네.”
그렇게 연장 피워 대더니 금세 바닥이 드러난 것 같았다. 여자가 지갑에서 빳빳한 오만 원 한 장을 꺼내 날 불러 왔다.
“아가, 담배 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돈을 받아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응, 나머지는 우리 예쁜이 팁.”
너구리 굴을 방불케 하는 룸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로 일 층에 도달했다. 현관문을 밀고 나오자, 습기가 축축하게 배어나는 비바람이 얼굴과 몸으로 밀어닥쳐 왔다.
잰걸음으로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가게로 향했다. 몇 갑이라곤 딱히 들은 기억이 없어 세 갑 정도를 손에 집어 들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쳐 룸 문에 대고 똑똑,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와도 된다는 승낙이 떨어졌다. 카드 키로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새로운 인물 하나가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걸 확인하곤 잠시 발이 멈칫거렸다. 낯선 남자의 위협적인 어깨가 날 등지고 있었다. 끈끈이가 붙은 듯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정체는 어제 1104호에서 봤던 의문의 그 투숙객이었다.
테이블 앞에 서서 남자에게 목을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남자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날 향해 왔다. 남자는 뱀 같은 눈으로 이렇다 하는 말 없이 날 바라보았다. 그에 내 시선은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졌다. 왠지 마주치고 있기 버거운 눈이었다. 진석으로부터 패를 받고 있던 김미란이 테이블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내게 말을 붙여 왔다.
“수원이는 장 대표 처음이지?
저 남자가 여자들이 말했던 그 장 대표인 걸까.
“어제 룸을 청소하다 뵀었습니다.”
남자는 시선은 내게 고정시킨 채로, 크리스털 잔을 들어 브랜디를 비워 냈다. 난 재빠르게 집게로 얼음을 집어 빈 잔 안에 넣고, 노란색 액체를 적당량 부어 넣었다. 잠자코 내가 하는 수발 짓거리를 지켜보던 장 대표가 김미란에게 물었다.
“새로 왔다고 하던데. 누님 전담 캐디였습니까?”
“응, 귀엽지? 얼굴도 예쁜 게 엉덩이도 꽤 토실토실해.”
본인의 패를 들여다보던 박진경은 카드를 뒤집고 포기를 선언했다.
“난 이번 판 죽을래.”
곁에 있던 진석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며, 브랜디로 그녀의 마음을 달랬다. 장 대표는 제 앞에 놓여 있던 성냥들을 전부 테이블 중앙으로 던져 넣었다.
“전부?”
김미란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곤 내게 패를 살짝 보여 주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물어 왔다. 다섯 장의 카드 중 세 장이 숫자 ‘8’로 같은 트리플이었다. 나쁘지 않은 패다. 분위기를 살피려 장 대표의 얼굴을 힐긋했다. 그의 밑에 깔려 있는 패는 형편없었는데, 얼굴엔 의뭉스러운 미소가 입술 끝에 여유롭게 걸려 있었다. 속임수를 부리는 자의 음험한 미소 같았다. 그러나 나와 달리, 김미란은 그걸 승패를 쥔 자의 여유라 해석했다. 여자가 자신의 패를 뒤집어 올렸다.
“나도 죽어야겠다.”
장 대표가 자신의 패를 공개했다. 각기 들쭉날쭉한 숫자들이 적힌 카드들이 얼굴을 내보였다. 우습게도 노 페어였다. 허탈하게 웃던 김미란이 강아지를 부르듯, 내게 손가락을 까딱거려 보였다.
“아가, 얼른 와서 이모 입에 담배 좀 물려 줄래?”
바짓단이 흠뻑 젖는 와중에도 품 안에 넣고 물 한 방울 묻지 않도록 지켜 낸 담뱃갑의 비닐을 끌러 냈다. 내게 우, 하고 내밀린 김미란의 새빨간 입술 사이에 담배 한 개비를 물렸다. 빠릿빠릿하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도 붙여 드렸다. 김미란이 담배를 입 안으로 빨며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세 갑이나 사 왔네. 뭐 남는 거 있었어?”
거의 없었다. 천 원짜리 몇 장뿐. 입맛이 고급인 김미란이 수입 담배를 피우는 탓이었다.
“가만 보자.”
김미란이 테이블 한쪽에 올려 둔 두께 두둑한 명품 지갑을 뒤적거려 지폐 한 장을 내게 건넸다. 곤란하게도 십만 원짜리 수표였다. 현금으로 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손에 들려 있어 봐야 한낱 종잇장에 불과한 돈이었으나, 두 손으로 공손히 받고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김미란이 립스틱이 짙게 발려 있는 입술로 웃으며, 내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이런 걸로 뭘.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돈을 손에 움켜쥔 채로 김미란의 손길을 받고 있는데. 불현듯 시선 하나가 무섭도록 느껴졌다. 진원지는 장 대표였다. 이곳에 온 이후로 잠시 망각하고 있던 감정 하나가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수치심. 돈이 권력이자 계급인 이곳에 감화된 탓에 잊고 있었던 감정을 제삼자의 시선이 내게 다시 일깨웠다. 별안간 귓불이 화끈거렸다.
“이번 판으로 판돈이 죄다 장 대표한테 갔네.”
성냥개비가 모두 소진된 탓에 게임은 이미 끝난 분위기였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는 성냥개비들을 하나씩 주워 들어 원래 있던 곽 안에 도로 넣었다. 마음속으로 세어 본 성냥개비들은 모두 오십이 개였다. 대가리에 빨간색 황 덩어리를 달아 놓은 게 전부인 나무 쪼가리들이, 부자들의 손에서 한 개비당 백만 원이라는 값어치로 다뤄진 거였다.
‘로열 골프’라는 금장이 박힌 뚜껑으로 성냥갑을 덮었다. 그러곤 덧없는 눈으로 그걸 내려다보았다. 꼭 ‘로열 골프’라는 명품 브랜드에서 나온 성냥 같았다. 나처럼 바닥 긁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몇 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가져 볼 수 없는.
“탐나요?”
몇십여 분 만에 오천이백만 원을 손에 쥐어 든 장 대표가 해 온 질문이었다. 난 뒤가 들린 사람처럼 얼른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언감생심. 그런 많은 돈은 꿈에도 꿔 본 적이 없다고, 변명하듯 말을 붙였다. 장 대표는 유유히 미소 지었다.
“누구나 속내에 탐욕 하나쯤은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탐욕적인 인간이니 미안해야 할 필요도 없는 거고요.”
“…감사합니다.”
나 같은 서민의 마음도 헤아려 주다니. 뉴스 채널에서 보던 재벌들처럼 감히 내 돈을 노리는 거냐며 재떨이를 집어 던져 오거나 골프채를 휘두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장 대표는 내가 따른 브랜디 잔을 단숨에 비워 냈다. 독한 술을 들이켠 장 대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술병을 들어 잔에 넘치도록 따랐다. 바닥이 드러난 병 입구에서 노란 액체가 방울져 잔으로 똑똑 떨어졌다.
장 대표는 그 잔을 내게 건넸다. 잔을 두 손으로 받잡고 의아한 눈으로 장 대표를 바라보았다.
“한 잔마다 성냥 한 개씩을 얹어 주겠습니다.”
눈을 내려 잔을 응시했다. 크리스털 잔 안의 호박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얼음 한 조각 담겨 있지 않은 원액이었다. 한꺼번에 다 털어 낸다면 식도가 탈 듯이 괴로울 게 분명하지만. 이 한 잔에 백만 원이라니. 마시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잔을 들어 올린 채로 테이블을 빙 둘러보았다. 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날 흥미로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서커스 단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동물원의 원숭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받는 대우는 그들보다 내가 조금 더 괜찮다는 점이 그 와중에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
“…….”
컵에 입술을 대고, 목을 꺾어 입 안 가득 술을 담았다. 꿀꺽, 액체를 삼키자 식도와 목에 타들어 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오그라드는 것 같은 목구멍에 남은 액체를 억지로 부어 넣은 뒤. 컥, 소릴 내며 목을 붙잡았다.
장 대표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한 잔을 더 따라 내게 건넸다. 망설임 없이 받아들여 한 잔을 더 비워 냈다.
고비는 바로 그다음 잔에 왔다. 액체가 뜨거운 궤적을 남기며 식도 안을 훑고 지나가자 몸의 중심축이 불기둥이 된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눈앞에선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쳤다. 테이블을 팔로 짚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이제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장 대표가 건네는 잔을 손으로 밀어 냈으나.
다시 한번 장 대표가 달콤한 제안을 걸어 왔다.
“이 한 잔엔 다섯 개를 주겠습니다.”
테이블을 짚은 손을 벌벌 떨며 장 대표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장 대표가 내민 잔은 내 손을 엇나갔다. 잔이 카펫이 깔린 바닥을 구름과 동시에, 내 정신 또한 아득히 멀어졌다. 웅웅, 울리는 귓가로 쉭쉭거리는 듯한 음성 하나가 들려왔다.
“미성년자는 아니지?”
***
두통이 후두부를 강하게 때려 왔다. 머리가 두 동강으로 쩍 갈라질 것 같은 기분에 으으,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속에서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미처 이기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켜 토악질을 해 댔다. 우웩, 웩.
멀건 위액까지 실컷 게워 낸 후, 매트리스를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흐릿한 시야로 어두운 색의 러그가 구토물로 엉망이 되어 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러그는 내 누추한 방에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가 어디지.
“다 했습니까.”
저음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려 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기골이 크고 위협적인 인영 하나가 가죽 소파에 몸을 깊이 묻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거구의 정체는 장 대표였다. 어두운 계열의 셔츠와 그 위에 껴입은 타이트한 정장 베스트로도 그 위협적인 몸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입술 사이에 장초를 물고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 눈을 뜬 곳이 장 대표, 그의 방이란 걸 알아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죄하는 사람처럼 손을 앞에 모으고 침대 옆에 섰다. 질척거리는 토사물이 발에 묻어 왔지만, 그런 건 지금 당장 문제되는 게 아니었다.
“…제, 제가 어떻게 여길.”
장 대표에게서 뭔가를 드르륵, 굴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엄지 끝으로 지포 라이터의 톱니바퀴를 느릿하게 돌리고 있었다.
“서수원 씨가 그대로 쓰러져서 자리는 그렇게 흐지부지 정리됐고, 덕분에 난 당신을 이곳까지 옮겨 와야 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과음을 한 탓에.”
“괜찮습니다. 누구나 다 실수는 하는 법이죠.”
장 대표가 오른손에 붙들고 있던 라이터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로 필터를 빨아들인다. 후우, 그의 얼굴이 하얀 연기에 잠시 삭제되었다가 다시 나타났다.
“담배는 좀 피웁니까.”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르친다면 넙죽 엎드려 받겠다는 식의 언사였지만. 장 대표는 담배를 뻑뻑 피우기만 할 뿐, 내게 권해 오진 않았다. 그의 앞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엔 이미 무수히 많은 꽁초가 허리가 꺾인 채 젖은 휴지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저걸 모두 다 피울 동안 계속해서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난 그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입 안이 자꾸 바싹 마르고, 손끝이 벌벌거리며 떨렸다. 크리스털 재떨이에 남자가 이제 막 피운 담배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치이익, 그의 무자비한 손길에 빨간 불이 짓이겨졌다. 담배 한 대를 맛깔나게 피운 장 대표가 돌연 질문을 던져 왔다.
“지문이 다 어그러져 있던데요.”
“…지문은.”
목이 메었다. 누군가가 지문에 대해 묻는다면 꼭 이렇게 답하리라, 같은 대사를 수천 번 연습했었는데. 막상 그 상황이 코앞에 닥쳐 오니 심장이 벌떡거리기 시작했다. 목 안으로 침을 삼켜 넣으며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좀 오랫동안 택배 일을 했었습니다.”
장 대표는 음, 소릴 내며 시선을 기울였다. 애매한 그의 태도에 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문 일그러지는 건 택배 일 하시는 분들한텐 흔히 있는 일입니다.”
말을 뱉고 나서야 내가 조금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실수를 후회하며 남몰래 자책하고 있는데. 장 대표가 천천히 테이블로 손을 내뻗어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광택은 지나치고 박음질은 삐뚤빼뚤한 내 싸구려 지갑이었다. 눈살을 티 나지 않게 찌푸렸다. 내 뒷주머니에 있던 저게 왜 저 남자의 손에 붙들려 있는 거지.
“…….”
“…….”
장 대표는 내 지갑을 추행하듯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러더니 돌연 내 신분증을 빼 들어 앞뒤로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면바지를 붙들고 있던 내 손가락들이 불안감에 안으로 서서히 곱아들었다. 마치 갈퀴가 할퀴고 지나간 것 같은 주름들이 바지 위에 남았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가 지나고, 장 대표가 대뜸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설마 사장이 이런 허술한 신분증에 속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말끝을 떨면서도 끝까지 모른다고 내빼려던 참이었다. 장 대표가 그런 나의 말허리를 가차 없이 잘라 왔다.
“신분증뿐만이 아니지.”
“…….”
“이름, 주민 등록 번호, 집 주소, 하물며 출신 학교까지. 이력서에 적힌 어느 것 하나 진실이 없던데.”
장 대표와 나를 둘러싼 주변의 기온이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섬찟한 기운이 심장을 사악 가로지른다. 어떻게 눈치챈 거지, 대체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던 거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장 대표가 상체를 일으켜 세워, 손가락들을 얽어 깍지를 꼈다. 아주 느긋한 몸짓이었다.
“최 사장은 분명 어딘가엔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눈 감은 걸 겁니다. 참으로 교활한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장 대표가 되물으며 진하게 웃었다. 그의 날카로운 턱뼈가 씰룩거렸다. 난 그에게 마주 웃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의 어깨 너머, 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발끝을 마주 보았다.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의 것처럼 새하얀 피부에 뼈가 도드라진 발이 눈에 들어왔다. 발가락 끝이 질척거리는 주황색의 오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진창에 빠져 있는 지금 내 상황을 단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장 대표는 일부러 한 템포를 쉬며 긴장감을 주었다. 남을 다루는 데엔 도가 튼 남자였다.
“내가 지금 아는 형사에게 연락해, 내 지갑을 훔쳐 갔으니 당신을 면밀히 조사해 보라고 하는 것은.”
눈앞이 컴컴하게 어두워졌다. 두 발로 밟고 있는 원형의 러그만 땅 밑으로 꺼져 버릴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자가 여상히 이유를 물었다.
“왜요.”
“…….”
“좆 됐다 싶어요?”
아니라고 둘러대야 했다. 어떤 이유라도 가져다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한 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남자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 룸의 유일한 문은 수문장처럼 앞을 지키고 있는 장 대표에게 막혀 있었다. 창문을 깨고 이 룸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했다. 장 대표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11층. 머리가 깨져 죽을 게 뻔했다.
“안심합시다. 당신을 짭새들에게 넘길 생각은 없으니까.”
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남자에겐 날 고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날 고발해야 최소한의 유흥거리 정도는 얻을 터였다. 그 또한 아주 찰나겠지만. 그가 두 번째 장초를 입에 물며 말했다.
“내가 내거는 제안만 받아 준다면 말이죠.”
…제안?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내 무료함을 달래 주면 당신이 도망 나갈 길을 찾아 주는 건 물론.”
담배에 불을 붙인 장 대표가 유유히 숨을 내쉰다. 그가 내뿜는 연기가 몸을 부풀려 룸 안을 빈 공간 없이 메웠다.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지급해 주겠습니다.”
두둑한 돈에다, 도망칠 길까지 만들어 준다고.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어 꿈결과도 같은 말을 그는 잘도 지껄였다. 분명 장 대표에겐 그럴 힘이 있어 보였다. 그의 정체도, 하물며 그의 이름 석 자 하나 난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날고 긴다 하는 기업의 새끼 마누라며, 잘나가는 의류 업체의 대표까지 그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이 이상의 더 확실한 증표가 있을까.
내가 만약 그들처럼 장 대표가 혹할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주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궁지에 몰린 쥐새끼 꼴이니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철석같이 매달려야 하니까.
“전 가진 게 없습니다.”
“입이 있잖습니까.”
“…….”
“주기적으로 배설하는 구멍도 분명 있을 테고.”
배설하는 구멍. 눈매를 좁혀 그의 의중을 살폈다. 그가 입 밖으로 낸 말은 자칫하면 성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바에서 단기 알바를 할 때, 동성끼린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단 얘길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주저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장 대표가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몸값을 낼 테니, 그에 응당히 몸을 내게 내놓으란 얘깁니다.”
장 대표는 뜻을 좀 더 명확히 했지만, 나는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장기를 내놓으란 말을 제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 걸까. 차라리 그쪽이 더 설득력 있을지도. 남자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미심쩍습니까?”
난 침묵했다.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장 대표는 이해한다는 식으로 길게 말을 이었다.
“이해합니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겠죠. 나만큼의 재력을 가진 이가 겨우 섹스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그 정도의 수고를 감행한다는 것 자체가 말입니다.”
장 대표는 제안이 가진 모순 때문에 내가 품은 의문점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그가 높낮이가 거의 없는 어조로 설명했다.
“이곳에선 불법적인 일이 빈번하게 행해집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자도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일을 회개할 줄 모르죠.”
회개. 장 대표는 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주제에, 퍽 안타깝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법조망은 그들에게 닳고 닳은 후장처럼 느슨한 데다, 법은 마더 테레사처럼 관대하고, 법조인들은 말 잘 듣는 개나 다름없으니까요. 소위 말하는 가진 자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도 그런 자이니.”
“…….”
“이 퇴폐적인 곳에서 행할 수 있는 온갖 부류의 불법들을 자행해 왔습니다. 이 이상 어떤 짓을 한대도 그 어떤 자극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수없이요.”
잠깐 멈춘 말 사이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빗소리가 흘러내렸다.
“현재의 내게 자극제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장 대표의 말인즉 그러했다. 삶이 무료하니 나더러 자신의 장난감이 되라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 장 대표는 수를 모르는 게임에 지나치게 큰 배팅을 걸고 있었다.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된 건 물론이고, 나와의 섹스가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내겐 남을 즐겁게 해 줄 만한 재주가 없을뿐더러, 남자는 물론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 경험 또한 없었다. 목석이나 다름없는 내게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뭘까.
“…대표님이 지나치게 밑지는 장사인 것 같습니다.”
“아니, 이건 서로 얻는 바가 확실한 계약입니다.”
“혼란스러운 얼굴이네요.”라고 중얼거린 장 대표가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진 손으로 제 바지춤을 느릿하게 만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정장 바지 위로 발기한 그것이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크고 굵었다. 팔뚝을 연상케 하는 그것에 꿀꺽, 침을 저절로 삼켰다. 기가 질렸다.
“나와 하는 씹질은 지독하고 무자비하고, 변태적일 겁니다. 내가 스톱을 외치는 그 순간까지 행위가 끝날 일은 없을 거고요.”
장 대표는 말을 잇는 도중에도 제 좆을 문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밀도가 아주 높은 정적이 룸 안에 흘렀다. 툭, 툭. 창에 맞는 빗방울들만이 청각의 공백을 메웠다. 그사이 좆은 점점 부피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남 앞에서 자신의 좆을 만지고 있는 성인이라. 우스워 보일 만도 했다만, 그 짓을 행하고 있는 자가 다름 아닌 장 대표라 그저 위협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험악한 분위기라든가, 무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이 위압적인 느낌을 주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매번 섹스를 할 때마다 오백만 원을 주겠습니다. 기한은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겨울까지.”
하룻밤에 오백만 원이면 네 번만 해도 이천만 원이란 소리였다. 지나치게 높은 액수에 오히려 현실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남자의 서늘한 눈동자가 흘깃, 침대 옆에 있는 협탁으로 향했다. 그가 흥분한 탓에 한층 더 낮아져 음험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저건 약속했던 팁입니다. 사흘의 시간을 줄 테니, 그동안엔 저 돈을 가지고 얼마든지 도망쳐도 됩니다.”
장 대표는 제 바지춤을 문지르는 짓을 멈추고, 소파에서 재킷을 챙겨 일어났다. 팔에 걸쳐 놓은 재킷으로 바지춤을 교묘히 가린 채로 말이다.
“오늘은 내 침대에서 자도록 해요.”
“…….”
“난 이 끝 방에 머물고 있을 테니 언제든 마음이 동하면 문을 노크하고.”
“…예.”
“그럼 이만.”
장 대표는 망설임 없이 룸을 빠져나갔다. 뚜벅, 뚜벅.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곧 거리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문이 열리고, 곧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허억, 급하게 몰아쉬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천천히 꺼졌다. 저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장 대표는 위압감으로써 사람의 목을 졸랐다.
호흡을 고르다,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주민 등록증을 두 눈에 담았다. 얼굴 부분이 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다. 장 대표가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었다. 천천히 손을 내뻗어 주민 등록증을 집어 들었다. 장 대표의 말대로 이름, 주민 등록 번호, 집 주소, 하물며 발급 일자까지 어느 것 하나 진실인 게 없었다. 엄지손톱 끝으로 탄 부분을 득득 밀어 보았다. 회생시켜 보고자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미 타들어 갈 대로 타들어 가 있었다. 이렇게 한번 타들어 간 자국은 쉬이 없어질 줄을 몰랐다. 마치 지금의 내 모습처럼.
주민 등록증은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고, 그 대신 돈뭉치를 끌어다 품에 안았다.
이 돈들과 함께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도망쳐 나가고 싶었다. 그가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어 경찰에 신고라도 하는 날엔….
“…아.”
품 안 가득 돈다발을 끌어안은 채로 한눈에 보기에도 아늑해 보이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곤 침대 밑, 아주 깊숙한 곳에 돈다발을 숨겨 놓았다. 그러곤 그걸 지키듯 침대 옆에 털썩 앉았다. 어둠을 이불처럼 덮어 몸을 더욱 옹송그렸다.
콰앙, 땅을 뒤흔드는 뇌성이 관자놀이를 쑤셨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머리를 고통스럽게 죄어 오는 두통에 굴복해 눈을 서서히 내리감았다. 혼란과 두려움이 얽히고설킨 새벽이 밀려오는 잠기에 덮였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퍼뜩 선잠에서 깼다.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라 침대 시트에 지폐들을 쓸어 담았다. 문밖의 직원이 다시 한번 실례해도 되겠냐고 물어 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자, 잠시만요.”
돈을 담은 시트를 보따리처럼 끌어안고 룸을 나섰다. 장 대표의 부름을 받고 왔을 직원은 그런 나를 못 본 체하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매뉴얼에 적혀 있는 대로 일을 진행하는 거였다. 아침에 VIP 고객을 맞닥뜨렸을 경우, 못 본 체하기. 직원이 내가 토를 해 놓은 자국이 여실히 남아 있는 러그를 들어 올렸다. 그런 직원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 도망치듯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그, 만, 그만!”
죽을 것 같아! 복도에 여자의 높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눈으로 펜트하우스 1104호를 응시했다. 새벽부터 이어지던 비명이 낮까지도 끊길 줄 몰랐다. 심지어 한두 명의 목소리도 아닌 듯했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저런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걸까. 일순 머릿속에 장 대표가 사람들의 목에 모두 목줄을 걸어 제 애완견처럼 질질 끌고 다니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풍기는 분위기로 보건대, 그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발걸음을 돌려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다. 땅을 구르는 속도에 점점 박차가 가해졌다. 일 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 앞을 서성거렸다. 천천히 올라오는 걸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선형의 계단은 마치 소용돌이에 빨려 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도주하듯 호텔을 빠져나갔다.
***
420호. 여자 회원들은 그곳에 모여 네모난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마작을 치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드린 후, 담배 연기 때문에 너구리 굴처럼 뿌연 룸 안으로 들어섰다. 날 보며 김미란은 눈을 껌뻑거렸고, 박진경은 내 사타구니 쪽을 대놓고 주시했다.
“너 멀쩡하네.”
그 노골적인 눈빛에도 난 동요하지 않았다. 격식은 차리되, 무감정한 얼굴로 그들을 응대했다. 정말이지, 겨우 한나절 만에 그랬다. 가운 차림새인 박진경이 앞섶을 여미며 지껄였다.
“오랜만에 장 대표 발정 난 짐승처럼 밤새 떡 치길래, 상대가 넌 줄 알았더니.”
김미란 또한 침묵으로 박진경의 말에 동의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섹스할 땐 신음이 요란하구나, 했었지.”
박진경이 말을 마치고, 이번엔 김미란이 주사위를 돌리며 한마디를 보탰다.
“꼭 장 대표 취향이잖아. 얼굴은 몽달귀신처럼 하얘서 얌전 떠는 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보던 박진경이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너 혹시 성병 있니?”
“아닙니다. 골프장 직원들에게 질병은 없습니다.”
박진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영문을 알 수 없단 얼굴을 해 보였다.
“그거 이상하네.”
가십거리는 금세 열기가 식었다. 흥미를 잃은 박진경은 여느 때처럼 진석의 허벅질 주물거렸고, 김미란은 담배를 뻑뻑 피워 댔다. 두 여자의 얼굴엔 하나같이 표정들이 빛바래 있었다. 박진경의 손길은 더 이상 색정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공중으로 연기를 후우후우, 내뱉는 김미란의 얼굴은 무감동해 보였다. 이들은 꼭 권태라는 감정으로 만들어진 늪에 빠져 있는 듯했다.
아가, 김미란이 음률 없는 목소리로 날 불러 왔다.
“술 한 잔 주겠니?”
“네.”
응접실로 다가가 집게로 얼음을 하나씩 집어 유리잔에 넣었다. 쨍그랑,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혔다. 일련의 행동을 반복하며 난 점점 현실감을 잊어 갔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이 뒤로 물러나고, 그 공백을 장 대표의 음성이 메웠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뇌성처럼 머릴 울린다.
‘현재의 내게 자극제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이지 않습니까.’
나지막한 음성이었으나 몸체를 잡고 뒤흔들 만큼의 힘이 있었다. 분명 땅을 두 발로 딛고 서 있는데, 몸이 중심을 잃고 조금 휘청대는 느낌이었다.
…자극제가 없다고. 금방 고갤 내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어. 밤새 복도를 울려 대던 그 신음 소리를 분명 들었는데. 장 대표에겐 나 말고도 노리개들이 아주 많을 게 분명했다. 그러리라 확신했다. 화대가 아주 값비싼 노리개들이 널리고 널렸을 텐데. 왜 굳이 내게. 혼란에 빠져 있는 날 일깨운 건 김미란의 목소리였다.
“아가야.”
“…아, 네, 죄송합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빈 잔에 얼른 술을 붓고, 김미란의 앞에 내놓았다.
“우리 담배 좀 사다 줄래?”
“네.”
박진경에게서 딴 돈인 듯, 김미란이 허벅지 밑에 깔려 있던 지폐 몇 장을 내게 건넸다. 그 돈을 받아 바로 로비로 내려왔다.
편의점 직원은 이제 내 얼굴만 봐도 담배의 종류와 개수를 척척 알아맞혔다. 품 안에 담배 두 갑을 챙겨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고객들을 위해 마련된 휴게실 앞에서 잠시 멈췄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주변의 눈치를 기민하게 살폈다. 주변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휴게실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문을 살짝 닫은 뒤, 잠금장치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벽면 한쪽엔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곤 그 앞에 앉았다. 다음 행선지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두 눈이 화면에 적혀 있는 활자들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외딴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몸을 숨길 수만 있다면.
***
일정이 모두 끝났다. 나는 저녁도 거른 채로 방에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다. 곧 창문 밖으로 어둠이 내렸다. 한창 부산스럽던 복도가 조용해지더니, 어느새 말을 맞춘 듯 건물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고도 한참 시간이 지났다. 나는 그제야 침대에서 내려와 그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낮에 김미란이 팁으로 줬던 돈들이 꾸깃꾸깃 뭉쳐 있었다. 모두 품에 숨겨 안고 나와 복도를 살폈다. 그러다가 은밀히 숙소를 벗어났다. 별안간 고갤 뒤로 돌려 숙소를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는데, 커튼 하나가 급하게 닫혔다. 그걸 유심히 바라보다, 터벅터벅. 낡은 스니커즈로 버려져 있는 땅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발걸음은 계속해서 어둠을 찾아 들어갔다. 산으로 향하고 있는 거였다.
밤이 이슥했다. 지나치게 어두워 지금 내가 들어가고 있는 곳이 숲 속인지, 동굴 안인지, 고래 입 안인지도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였다. 랜턴 불 하나에 의존해 한참을 산을 오른 후에, 도착지를 찾아냈다.
워낙 산속이 험준하다 보니, 위치는 돌로 표시해 두었다. 돌이 놓여 있는 곳으로 향하기 전, 등을 홱 돌려 주변을 살폈다.
서슬 퍼런 눈이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괴괴한 숲 속이 으스스한 노랠 불러 댔다.
손으로 잡초들을 이리저리 쓸어 내고 돌을 들어내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눅눅히 젖은 흙들이 내 손길에 뒤집혔다.
품에 안고 왔던 걸 땅속에 넣었다. 돈은 이처럼 틈이 날 때마다 산에 묻고 있었다. 통장은 위험했다. 복도로 직원들이 오가는 숙소의 침대 밑은 임시 저장소일 뿐이었다. 땅속이 가장 안전했다. 땅은 오고 간 흔적이 남지 않았으며, 남에게 발견될 확률도 가장 적었다.
생명이 있는 건 땅에 묻으면 싹을 틔우기도 했다. 그러나 돈엔 생명이랄 게 없었다. 그저 그 자체로 내 생명 줄이기만 할 뿐.
봉분처럼 솟아오른 땅 위를 발로 자근자근 누른 뒤 돌을 올려놓았다.
숲 속을 빠져나와 다시 숙소로 향했다.
“…….”
도망갈 생각을 접은 건 아니었다. 그가 했던 협박이 순간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내가 지금 아는 형사에게 연락해, 내 지갑을 훔쳐 갔으니 당신을 면밀히 조사해 보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그 말을 뱉었을 땐, 정말이지 머리털이 거꾸로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허리춤에 축축이 땀이 난 손바닥을 문질러 댔다.
경찰에 알릴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난 후에도 그가 그 생각을 고쳐먹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내 신분이 가짜라는 걸 장 대표가 알게 된 이상,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장 대표가 내게 준 기한은 사흘. 그 마지막 날 새벽, 골프장에서 대 주는 봉고차를 타고 이곳을 떠나리라 다짐했다. 교통편은 이미 결제를 끝냈다. 그 전까진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더 끌어모을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주머니를 불린 후에 이곳을 벗어난다. 그러곤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사람이 적은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현재 상황에선 그게 최선의 계획으로 보였다.
그러나 난, 몇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여태껏 기회가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와 준 적이 있었던가. 이미 떠나보낸 기회가 내게 다시 찾아와 준 적 있었던가.
…아니. 내게 기회란 게 왔던 적은 있었던가.
***
그다음 날. 스케줄 소화를 하기 위해 얼굴과 몸을 단정하게 하고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반대편에서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올라오고 있었다. 뭔가를 속닥거리던 그들은 날 보더니 이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재빨리 자릴 피하는 그들의 등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난간을 노려보았다.
저들 중의 하나는 장 대표의 룸을 치우러 들어왔던 그 직원이었다. 소문이 난 걸까. 났다면 어떻게 난 거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의심은 수없이 많은 잔가지를 뻗쳐 나갔다.
“…하.”
그러다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쓸데없이 예민했다. 저들은 평소에도 잘 뭉쳐 다니던 무리였다. 평소처럼 VIP의 사생활을 나불거리다 제삼자를 발견하곤 입을 다문 거겠지. 쓸데없는 의심이었다. 숨긴 게 많은 자는 이토록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법이었다. 목뒤를 타고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불쾌감을 애써 지워 내며 라운지로 향했다.
***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회원들의 스케줄을 수행하기 위해 미리 간 사무실에서 오늘 자 일정은 취소됐으니 쉬어도 좋다는 얘길 해 왔다. 기본급은 그대로 나온다고 해 왔지만, 웃을 수 없었다. 아쉬움이 남았다. 고객이 없단 얘긴 오늘 수익도 없단 얘기였으니.
“아.”
그래도 발걸음을 돌려 가려다가 무언가가 생각나서 다시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서비스 매니저가 무슨 용건이냐고 묻길래. 장 대표 회원님의 정보를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회원들의 간략한 정보가 담겨 있는 파일을 건넸다.
“…….”
천천히 파일첩을 넘겨 보다가, 장 대표의 회원 정보가 적혀 있는 페이지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그는 회원 명부에서조차 실명 대신 ‘장 대표’라 적혀 있었다. 게다가 다른 인적 사항들 또한 대부분 공란이었다. 이게 뭐지. 파일첩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한 쪽에 서있던 매니저와 시선이 부딪혔다. 얼른 떠나주십사, 하는 얼굴을 달고 있길래 도로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석연찮은 마음을 애써 지워 내며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데. 마침 사무실로 들어오던 이진석과 문 앞에서 마주쳤다. 그대로 묵례를 하고는 지나쳐서 가려던 참이었다.
“수원 씨.”
이진석이 등 뒤에서 날 불러 왔다. 멍청하게도 아직까지도 낯선 이름에 하마터면 돌아보지 못할 뻔했다. 이진석이 “예?”라고 반응한 내게 허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랑 같이 420호 갈래요?”
“…네?”
그가 되묻는 내게 설명했다.
“VIP 모임이 있어요.”
“…….”
“완전 귀빈층들만 모여 있어요.”
…귀빈층이라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적으로 장 대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남자 또한 거기에 있는 걸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이진석이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이는 내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싫으면 얼마든지 거절해도 돼요.”
가벼운 말투였다. 구태여 강요하지 않겠다는. 시선이 흔들렸다. 머릿속에선 삐이이, 경고 알림이 울렸다. 무엇을 향한 경고일진 알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의 신경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곳에 가선 안 된다고. 그러나 입은 머리와는 다른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아니요, 가겠습니다.”
이진석이 입술을 둥글게 해 “오.”라는 감탄사를 내보였다. 평소보다 크게 뜨인 두 눈이 의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멍청하게는 굴지 마요. 알다시피 예민하신 분들이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꽉 물며 말을 짓씹었다.
“네, 유념하겠습니다.”
호텔 주방에서 룸에 서비스할 트레이를 받아왔다. 이진석과 함께 묵직한 트레이를 밀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안에 올라타자, 이진석이 양쪽으로 입을 쩍 벌린 문 앞에 서서 내게 일렀다.
“곧 따라 갈 테니까 트레이 갖고 먼저 올라가 있어요.”
“네.”
“잘 부탁해요.”
반들거리게 웃는 얼굴 앞에서 문이 닫혔다. 1, 2, 3…. 천천히 숫자를 하나씩 더 해가는 계기판에 박혀 있던 두 눈이 트레이 위에 올려 있는 푸드 커버로 가닿았다. 꿀꺽, 목울대가 저절로 울렸다. 모르긴 몰라도, 저 아래에 깔려 있는 게 음식이 아닐 거란 것 정돈 잘 알 수 있었다.
층수가 천천히 올라갔다. 고산에 오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점점 가빠 왔다. 장 대표는 흡사 도깨비였다. 이곳을 꿰뚫고 있는 이진석마저도 그에 대해서만은 아는 바가 없었다. 장 대표는 정체가 불분명했다. 김미란과 박진경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가 만만치 않은 존재란 건 이미 알고 있다. 장 대표가 있는 곳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는 꼴이라니.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는 악어 앞에 발을 들이미는 심정이 들었다.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먹칠 당할 대로 먹칠 당한 인생인데. 이 이상 더 최악인 일이 뭐가 있으리라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트레이를 밀고 나가 420호 앞에 서서 문을 노크했다. 곧 문이 열리더니, 앞을 막고 서있던 가드가 내 명찰과 유니폼을 확인했다. 그가 이내 고갤 끄덕거렸다. 들어가도 좋다는 신호였다. 홀을 빠져나가자, 나체로 뒤엉켜 있는 인사들이 눈에 보였다. 그중엔 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박진경이 그 사이를 비집고 나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뭔가에 지독히도 취해 있는 듯한 박진경은 내 몸을 휙 밀쳐 내더니, 트레이를 빼앗아 직접 밀며 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휘청휘청대는 박진경은 꼭 행사 풍선 같았다. 여자가 중간에 놓인 테이블에 큰 접시를 내려놓곤, 푸드 커버를 들어 올렸다. 안에 담겨 있는 건 머핀들이었다. 박진경은 맨손으로 머핀을 집더니 마구잡이로 입에 쑤셔 넣었다. 부스러기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 손길이 답지 않게 거칠었다.
뒤따라온 이진석이 그녀의 허릴 감아 들었다.
“누님, 그러다 체하셔요.”
박진경이 꼬인 혀로 지껄였다.
“본 게임 하기 전엔 애피타이저를 먹어 줘야지.”
이진석이 자신이 가져온 트레이에서 하얀 가루들을 펼쳐 놓았다. 박진경은 한쪽 코를 틀어막곤 그걸 콧구멍으로 흡입했다. 일순 박진경의 허리가 뒤로 팍 꺾이더니 그녀의 눈알이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이진석의 혀가 박진경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박진경은 눈을 뒤집어 까며 높은 신음을 내질렀다. 둘은 혀를 날름거리며 입을 맞추다가, 식탁 위로 엎어졌다. 제 치마를 걷어붙인 여자가 남자 위에 올라타선 흘레붙었다.
“…와하하.”
질척거리며 맞붙는 두 생식기에 주변에 있던 자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까악, 까악. 웃는 소리가 까마귀 울음소리만치 날카롭게 들렸다. 흥분에 차서 위로 추켜 올린 잔들이 흥취에 흔들리는 몸에 맞춰 출렁거렸다. 헛구역질이 나올 듯 속이 울렁거렸다.
약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한 고객은 그새 텅 비어버린 트레이를 더듬다가, 얼른 더 가져오라 내 등살을 떠밀었다. 자두처럼 새빨간 두 눈으로 지갑을 열더니, 지폐를 잡히는 대로 빼선 내 가슴팍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지폐의 모서리가 내 맨 피부를 지익 긁었다. 흠칫 놀라 트레이를 밀고 나가려는데. 이번엔 다른 고객이 쿠당, 넘어져 트레이 위로 엎어졌다. 깔깔깔, 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사색이 돼서 얼른 바퀴를 돌려 룸에서 빠져 나오기에 성공했다.
쾅, 닫힌 문에 등을 대곤 숨을 골랐다. 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귀를 우웅우웅 울렸다.
“…하, 아아.”
여느 범인이 그렇듯, 이렇게 마약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불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
가슴팍 안으로 손을 넣어 지폐를 펼쳤다. 대충 접어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곤 트레이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
흥분감은 점점 더 고조됐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트레이로 손을 뻗어 약을 코와 입안의 점액으로 흡입했다. 약 성분에 취해서 내뱉는 달뜬 숨이 룸 안을 부유했다.
파티는 반나절 간 쉼 없이 계속되다가, 땅거미가 내렸을 즈음에야 그 기세가 꺾였다. 약에 완전히 잡아 먹혀진 고객들은 살갗들을 맞댄 채로 좀비처럼 흐느적거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들은 무기질처럼 보였고, 술에 젖은 입술들은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이상한 단어들만 늘어놨다.
거의 끝까지 남아 서빙을 보던 나는 그제야 진창이 된 파티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약에 취한 그들 중 몇몇은 내게도 손을 뻗어 왔었다. 내 허벅질 더듬고, 심하면 내 중심 부위를 만져 오려고도 했다. 나 하나 빠져나온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호텔 안은 혼잡했다. 난잡하고도 요란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지내야 했던 달동네의 뒷골목보다 추저분했다.
헉, 헉. 계단을 내달렸다. 품 안엔 지폐들이 가득했다. 재벌들은 씀씀이가 헤펐다. 약에 취하면 더 그랬다. 눈을 까뒤집고 주머니와 셔츠 안으로 돈을 꽂아 넣어 줬다. 이거면 됐다. 이거면. 방에 있는 돈들만 되찾으면 바로 이곳을 나갈 예정이었다. 발이 이성보다 더 빨리 돈을 찾아 헤맸다.
“허, 허억…!”
발걸음은 계속해서 어둠을 찾아 들어갔다. 산으로 향하고 있는 거였다. 랜턴 불 하나에 의존해 한참을 산을 오른 후에, 도착지를 찾아냈다.
시선 끝에 돈을 묻어 두었던 장소들이 걸려 왔다. 그 장소로 다가가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두 눈이 믿을 수 없단 듯이 크게 뜨였다.
“이게 대체….”
머릴 부여잡은 채로 혼란에 빠졌다. 구덩이들이 모두 파헤쳐져 뒤집혀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댔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몸이 쭈욱 미끄러져 아래로 내려왔다. 땅 위에 무너진 채로 좌절했다.
…어느 놈이지. 대체 누가 가져간 걸까. 드문드문 끊어진 필름들을 어지러운 머리로 되짚었다. 깨져서 샅샅이 흩어진 기억들을 한 조각씩 주워 들어 직접 확인해 봤다. 내게 직접 방을 내어준 이진석? 숙소 복도를 거닐던 옆방 직원? 순간 눈앞에 오늘 아침 시선이 얼핏 스쳤던 직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 대표의 부름을 받고 룸을 치우러 들어왔었던.
…그러고 보니 그때. 두 손이 정신없이 옷 안을 헤집었다. 모든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그래, 민증. 민증을 두고 왔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순간적으로 마주쳤던 두 눈은 분명 내가 안고 있는 보따릴 수상히 여기고 있었다.
낡은 스니커즈로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옷 안에 돈을 품은 채로 숙소로 내달렸다. 놈의 방으로 향해, 방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나와, 나오라고!….”
곧 놈이 방문을 열곤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의아한 얼굴의 놈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신발장으로 눈이 이끌렸다. 하얀색 스니커즈 밑창에 언뜻 진흙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냐, 내 어깨를 밀쳐오는 놈의 손을 뿌리치고 그 신발을 들어 올렸다. 약간 질퍽거리는 진흙이 우르르 덩어리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골프장에서 이 정도의 진흙이 묻을 곳은 딱 한 군데였다. …바로 뒷산!
“뭐 하는 새끼야, 이거!”
“네가 가져갔지?”
나직하게 묻자, 그놈은 애먼 사람 잡지 말고 당장 꺼지라고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뭘 말하는 건지부터 물을 텐데. 어제 돈을 묻으러 갈 때 불 켜진 방 안에서 분명 커튼이 들썩였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그냥 기분 탓이라 여겼었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나는 놈을 뒤로하고, 놈의 방을 온통 뒤졌다. 침대를 무너뜨리고, 화장실 변기의 물탱크도 열어 보았다. 돈을 숨길만 한 곳이라곤 모두 뒤져 보았다.
“뭐 하는 새끼야!”
놈이 먼저 제 방을 샅샅이 뒤지는 내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놈에게 달라붙었다. 때려눕히고 침대 밑도 뒤져 보려 하는데, 놈이 어느새 뒤에 달라붙어 내 목을 졸라 왔다. 나는 놈과 함께 뒤엉켜 방 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방 안에선 쾅, 쾅 소리가 났다.
연락을 받은 매니저가 가드들과 함께 찾아와 우리 둘을 떼어 놓기 전까지 몸싸움은 계속되었다. 퍽, 퍽. 내 주먹질에 의해 놈의 얼굴이 점점 피 떡이 되어 갔다. 같은 층의 직원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날 지켜보았다. 밀가루 반죽 치듯 놈의 얼굴을 때리는 내 모습을.
곧 매니저까지 들이닥쳐 나를 말렸고, 내게 계속 미소 짓기를 종용했던 매니저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 왔다.
“서수원 씨,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
호흡이 제멋대로 씨근덕거렸다. 핏발 선 눈으로 내가 때리던 놈을 노려보았다. 그게 뭔 줄 알고, 그게 대체 뭐라고 생각해서 가져간 걸까.
“숙소로 돌아가세요, 당장.”
가드들이 내 양팔을 한쪽씩 잡곤 날 끌어당겼다. 감옥에 수감되듯 방 안에 갇혀 몸을 옹송그렸다.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품 안에 갖고 있는 게 전부였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돈들이 사라지다니. 희망의 사형이나 다름없었다.
***
나는 이틀 내내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쭈그려 앉아만 있었다.
내 인생은 늘 좆같았다. 독립하기 전까지 살던 집은 다 허물어져 가던 것이었는데, 가파른 경사를 따라 비뚜름하게 지어진 그 집은 모든 불행의 시초였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벽은 칠이 다 벗겨져 오줌 지린내가 났다. 그리고 집 안에선 늘 피비린내가 났다.
불행한 집이 늘 그렇듯, 아버진 술만 마시면 엄마와 내 목을 잡아다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그러면 코가 뜨끈해졌다. 그 오줌 지린내 나는 판잣집에 희망이란 없었다. 모든 건 돈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돈이 고팠다.
…골프장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감내했던 이유는 단 하나, 돈 때문이었다. 팁 몇 푼에 불륜도 못 본 척했고, 상류층들이 연 마약 파티도 묵인했다. 그중 몇몇이 풀린 눈으로 몸을 더듬어 와도 눈을 꾹 감고 참아 냈다. 오로지 돈 때문에. 얼른 돈을 모아 이 좆같은 곳에서 벗어나자는 일념 하나로 그 모든 것들을 참아 낸 건데.
한 달간의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걸로도 모자라, 수중에 있던 돈도 모두 없어졌다. 나는 가슴팍에 무릎을 붙이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삼촌에게도 돈을 보내야 하는 말일이 당장 다음 주였다. 그것도 이번 달부턴 300만 원이었다. 다짜고짜 통보해 온 액수지만, 나는 삼촌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가 으름장을 놓은 대로 자칫 마음이라도 고쳐먹었다가는, 나는 그대로 수렁덩이에 빠지고 말 거였다.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이젠 어쩌지.
가슴 안쪽과 더불어 머리가 완전히 텅 비어 버렸다. 나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목숨이 끊긴 사람처럼 미동 한 번 하지 않고 있었다. 필라멘트가 끊긴 듯, 사고의 흐름이 완전히 정지되었다. 돌연 백지가 된 머리 안에 장 대표의 목소리가 울렸다.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지급해 주겠습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폈다.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그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걸까.
…그래, 그 모든 일을 겪어 놓고서 이제 와 몸뚱어리 내주는 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 몇 번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사고의 흐름을 억지로 다른 쪽으로 이끌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흐느끼듯이 신음했다.
그러다가 튕기듯 무너져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몸을 닦았다. 특히나 뒤를 깨끗이 닦았다. 아까의 싸움으로 몸이 군데군데 찢겨 있는지 따끔거렸다. 다행히도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유니폼 대신 한 벌 있던 셔츠와 면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러곤 방을 나섰다. 다리 한쪽을 다친 환자처럼 휘청휘청 걸어 호텔로 향했다. 참담한 심경이었다.
그렇게 향한 곳은 420호 앞. 이미 이틀이나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룸 안에선 여러 명의 신음 소리가 개밥처럼 뒤죽박죽 뒤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허벅지 옆에 놓아두었던 손을 안으로 말아 주먹을 쥐었다. 그러곤 뭔가를 결심한 듯 문을 노크했다. 똑똑.
여전히 안은 지나치게 시끄러웠고, 그에 반해 내 노크 소린 터무니없이 작기만 했다. 과연 이 소리가 들릴까 싶을 정도였다. 다시 한번 문을 노크하려고 했을 때. 벌컥 소리가 나더니 문이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엔 장 대표가 가운 차림새로 서 있었다. 손을 위로 올린 그대로 서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허리 근처에 묶여 있는 끈은 지나치게 느슨해 조금이라도 더 풀리면 장 대표의 고간을 그대로 내보일 것만 같았다. 깊은 눈에 정염이 묻어 있는 장 대표가 내게 고압적으로 명령했다.
“들어와.”
그리 말하는 목소린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몸이 흠칫 튀어 오를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남자의 뒤를 따라 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방 안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모두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상태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듯한 장 대표는 소파로 다가가 장초를 입에 물었다. 눈이 회까닥 뒤집힌 듯한 남자 하나가 네 발로 러그 위를 기어 장 대표에게 다가갔다. 장 대표는 그의 뺨을 슬리퍼로 밀어 냈다. 남자는 침을 질질 흘리며 장 대표의 슬리퍼 밑창을 혀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장 대표는 그 남자에겐 눈짓도 주지 않고 갈 곳 잃은 내게 물어 왔다.
“용건은.”
용건. 용건이라. 두 눈이 갈 곳을 잃고 룸 안 이곳저곳을 헤맸다.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가 어지러이 뒤엉켰다. 시공간이 제멋대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낄낄낄. 키득키득.
“…용건.”
분명 여기까지 찾아온 건 목적이 있어서였다. 이렇게 멍청히 굴려고 두 발로 찾아온 게 아니었다. 두 눈동자가 표적을 향해 굴러다녔다. 모두 옷을 벗고 있으니 한 덩어리처럼 여겨졌다. 모르는 얼굴들 틈에서 아는 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김미란. 눈이 풀린 상태로 날 보며 히히 웃고 있었다. 마약에 취해 있는 듯했다. 김미란의 앞에 무릎 꿇었다. K 그룹 회장의 새끼 마누라라 들었다. 사실 이 여자가 누구든지 간에 아무래도 좋았다. 이 시궁창에서 날 끌어내 줄 수만 있다면.
“…….”
“…….”
여자가 내 머릴 부여잡곤, 자신의 다리 사이로 날 내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갖다 대려고 하는데. 뒷덜미가 들리더니 몸이 공중으로 부웅 떴다. 콰당. 옆구리에 고통이 느껴져 몸을 새우처럼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이 의자 다리 근처를 나뒹굴고 있었다.
장 대표는 손등을 들어 내 뺨을 후려쳤다. 코에서 뜨끈한 감각이 퍼졌다. 코피가 터진 듯했다. 내 뺨을 후려갈긴 남자는 여상한 얼굴로 물어 왔다.
“…울었어요?”
어릿어릿한 눈동자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무릎을 굽혀 내 앞에 앉았다.
“왜.”
“…돈이.”
남자의 양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그는 너그러이 내 뒷말을 기다려 주었다.
“돈이 모두 사라졌어요.”
으음, 목을 울린 남자가 필터까지 피운 장초를 내 손가락 사이에 비벼 껐다. 치이익. 손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났다. 남자의 얼굴이 연기에 삭제되었다가, 금세 다시 드러났다. 장 대표가 낮게 목을 울리며 뇌까렸다.
“그 돈 사라지면 죽을 눈빛 하고 있더니.”
“…….”
“왜 안 죽고 찾아왔어요.”
왜 안 뒤졌냐고.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장 대표의 시선과 마주했다. 뱀눈이 날 지켜보았다. 관찰했다. 나의 불행을 목도했다. 남자는 내 뺨을 후려쳤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내 뺨을 느릿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쓸어 주기도 했다.
“이미 약속한 기간도 끝났잖아.”
“…….”
“내가 그렇게 쉬워 보이던가?”
“…….”
“어? 서수원 씨.”
장 대표의 구둣발에 차였던 남자가 장 대표에게 다시 엉겨 붙어 왔다. 남자는 뇌하수체가 녹은 인간처럼, 흐느적거리며 장 대표의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아아.”
장 대표가 낮게 탄식했다. 굽히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더니,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창문의 레버를 내려 남자의 몸을 열린 창문에 대고 기울였다. 장 대표는 여상한 얼굴을 하고서 그를 그대로 창문 밖으로 밀어 버릴 것처럼 굴었다. 약에 취한 남자는 계속해서 장 대표의 목에 매달릴 뿐이었다. 자신이 현재 붙잡고 있는 게 썩은 동아줄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장 대표가 묻는다.
“이 새끼 왜 이러는 줄 알아요?”
그의 고개는 아직까지도 창문을 향하고 있었지만, 난 그게 나를 향해 던진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어물거리고만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장 대표가 고갤 돌려 날 응시해 왔다.
“돼지 발정제 처먹더니 어젯밤부터 이 지랄이에요.”
장 대표의 손아귀에 잡힌 남자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장 대표는 그대로 창가 밖으로 그의 몸을 밀어 버렸다. 곧이어 창가 밖에서 큰 비명 소리가 울렸다. 서늘한 공기를 찢는 그 소름 끼치는 고함에 약에 취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깔깔깔.
눈앞이 컴컴해졌다. 지금 남자가 떨어진 이곳은 4층이다. …죽었을까? 얼른 창문 밖을 내다봤다. 남자의 몸은 다행히 밑에 있는 나무에 걸려 있었다. 한쪽 팔과 다리 한쪽을 제법 굵은 나뭇가지에 건 채로 거의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돈 때문에 제 몸 찢어지는지도 모르고.”
남자를 손에서 털어 낸 장 대표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난 문득 웃는 그가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장 대표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난 그가 좁혀 오는 거리에 맞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뒤에 있던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뒤집어진 밥그릇처럼 엎어져 있는 내게 남자가 손등을 내렸다. 내 뺨을 채찍처럼 후려쳤던 그 손이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그 무자비한 손등에 천천히 뺨을 묻었다. 손은 뜨거운 데다가 끝이 거칠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의 손등에 뺨을 비비자, 시뻘건 피가 그의 손등에도 묻어났다. 채 온기가 식지 않았을 뜨거운 피. 장 대표는 혀로 그 피를 샅샅이 핥아 냈다.
“…….”
“…….”
장 대표가 널리 다리를 벌렸다. 크게 솟아 있는 가운데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하얗게 질려서 잠시 주춤대다가,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가 자릴 찾아 들었다. 직접 본 그의 좆은 그야말로 아이 팔뚝만 했다. 아직 반쯤밖에 발기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버섯 모양을 이루는 귀두며, 흉측한 핏줄이 마구 돋아 있는 기둥이며 상당히 크고 굵었다. 저게 그 구멍으로 들어간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팽팽히 당겨져 강철처럼 단단해 바늘마저도 쉬이 뚫지 못할 것 같은 허벅지를 손으로 틀어쥐곤, 입을 크게 벌려 장 대표의 좆 끄트머릴 입에 넣었다. 그러곤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혀 놀림으로 장 대표의 좆을 빨았다. 남자는 여전히 무감동한 얼굴을 달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 조바심이 났다. 그에 장 대표의 것을 목구멍 안까지 깊숙이 넣었다. 입 안에선 컥, 컥 소리가 나고 눈에선 생리적인 현상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으음.”
장 대표는 끄응, 소릴 내며 목을 울리더니 내 코를 빨래집게처럼 틀어쥐었다. 숨이 콱 틀어막혔다. 남자의 허벅지를 잡고 있는 손에 자연히 힘이 빠득 들어갔다.
“…윽, 컥, 커어억.”
장 대표가 내 뒤통수를 부여잡곤 내 입에 제 좆을 처묻었다. 좆이 내 뒤통수를 뚫을 듯 안을 박아 왔다. 내 입 안의 여린 살들은 핏줄이 벌겋게 선 기둥에 의해 처참히 짓뭉개졌다.
“숨, 숨을 못 쉬겠….”
그는 그제야 날 놓아주었다. 채 다물지 못한 입으로 타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침 군데군데 역겨운 내가 나는 체액이 섞여 나왔다. 좀 전까지 내 목구멍 안을 헤집고 있던 남자의 샅 또한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누가 질질 흘리라고 했습니까.”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음성에 몸이 퍼뜩 떨렸다.
“핥아요.”
“…….”
“깨끗이.”
혀를 세워 장 대표의 음모 끝에 갖다 붙였다. 예민한 혀끝 감각에 까슬거리는 그의 음모가 닿아 왔다. 그가 내 머리채를 잡더니 자신의 좆에 내 머리며 눈가를 비벼 대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겠습니다.”
장 대표는 애피타이저를 음미하듯 담배 필터를 빨곤 기쁜 듯 웃었다. 그러더니 낮게 뇌까렸다.
“재미있네.”
“…….”
“…재밌어, 아주.”
나는 그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체벌을 앞에 둔 아이의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가 내뱉는 연기를 모두 얼굴에 맞으면서. 눈과 코가 따가웠지만 함부로 표정을 찌푸리거나 할 순 없었다.
마침내 담배 하나를 끝낸 장 대표는 내게 침대 위에 누워 보라 종용했다. 이미 침대 위는 엉겨 붙어서 그 짓거릴 하고 있는 사람들로 진을 치고 있었다.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타 헉헉대며 허리 짓을 하던 새끼의 옆자릴 파고들었다.
바지를 벗고, 다릴 넓게 벌린 상태로 젤을 바른 손가락을 입구에 가져갔다. 장 대표는 제법 흥미롭단 얼굴로 날 관망했다. 쑤욱, 손가락 하나가 진입에 성공했다. 내벽이 손가락 마디를 잘라 낼 듯 꽉꽉 물어 댔다. 구멍 안에선 깔짝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 대표는 입 안이 마르는지, 목을 낮게 그르릉 울리며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매트리스에서 씹질 중이던 남자 새낀 눈이 회까닥 돌아 내 가슴팍까지 더듬어 왔다. 장 대표가 손을 내리더니 그 새끼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매트리스에 찍어 내렸다. 그 새낀 숨이 막힌다며 장 대표의 손등을 퍽퍽 내리쳤다.
장 대표가 가드에게 눈짓했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가드들이 그의 몸짓에 반응했다.
“다 끌고 나가.”
가드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끌려 나갔다. 꽥 하고 쓰러져 있던 새끼 또한 가드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장 대표는 그사이 허릴 묶고 있던 끈을 풀더니, 가운을 벗어 던졌다. 밝은 백색 등의 빛 아래 그의 몸이 전시장에 놓인 검은 조각상처럼 빛났다. 시선이 절로 음모 아래에 놓여진 좆에 가서 붙었다. 정장을 입고 있을 때조차 저 가운데 부분에 시선이 모였었다. 숨겨져 있는데도 그 묵직한 기운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장 대표의 몸이 내 시야를 까맣게 덮었다.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지독한 밤의 시작이었다.
장 대표가 구멍을 꿰뚫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 구멍에 좆을 찔러 넣은 그는 목을 그르렁거리며 짐승처럼 울었다. 그의 울대가 전등을 받아 일순 반짝거렸다.
“…씨발.”
그대로 배 안이 들쑤셔졌다. 그는 채 벌어지지도 않는 구멍 안을 들쑤시기 위해 허릴 크게 움직여 안을 푹푹 찔러 왔다. 난 충격에 입도 다물지 못하고 그에게 뚫렸다. 장 대표의 좆이 배꼽 부분을 뚫고 그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의 좆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안을 휘저었다.
생경한 통증에, 구멍이 침입자의 무자비한 출입을 방해하며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그 탓에 그의 것을 꽉꽉 조였다. 장 대표가 들썩였다. 그러고는 내 머리채를 움켜잡더니 뒤로 휙 꺾었다. 그러곤 귓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이 씨발 새끼가, 조이는 게.”
“…으흐, 으흐, 어허헉.”
장 대표가 내 머릴 시트로 처박았다. 그러곤 구멍 안으로 자신의 좆을 빠르고 세게 처박아 왔다. 입 안으로 시트가 처들어왔다. 하얀 시트가 입 안으로 들어오는 족족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타액들로 젖어 갔다. 눈앞에 번개가 쳤다.
“어디서 얼마나 굴러먹다 왔어, 응?”
“…처음, 처음입니다….”
그의 날카로운 욕지거리가 귓구멍을 파고 들어왔다. 그가 손을 내려 내 젖꼭지를 긁어 왔다. 판판하던 유두가 그의 단정하게 잘려 있는 손톱에 득득 긁혀 발기한 듯이 부었다.
“얼굴만 하얀 게 아니라 여기도 새빨간 게 아주.”
“…으허억.”
장 대표가 혀를 꺼내더니 내 유두를 핥아 올렸다. 예민한 곳에 까슬한 혀가 닿자 허리가 펄쩍 튀어 올랐다.
“이 걸레 같은 새끼가. 감히 내 가랑이 사이가 어떤 덴 줄 알고, 어?”
장 대표의 좆이 안을 콱 짓눌러 왔다. 꼬리뼈를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이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이것도 묶여서 처맞은 자국이지?”
“아악!!!!”
장 대표는 우악스러운 세기로 내 옆구릴 눌렀다. 침대 다리에 채여 울혈 자국이 남은 옆구리가 그의 손길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눌렸다. 그러나 뒤를 꿰뚫리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입엔 저절로 게거품이 물리고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허벌 구멍 될 거 각오하더라도 돈맛이 보고 싶었어?”
“…죄송합니다.”
난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장 대표의 귀두가 척추를 타고 구불구불 올라와 위장까지 내찌를 듯했다.
“얼마가 필요하길래 그래요, 대체.”
내 머리채를 휘어잡은 장 대표의 손아귀에 실린 힘이 한층 더 거세졌다. 두피가 모양 그대로 뜯겨져 나갈 것 같았다. 그는 노는 한 손으론 내 젖꼭지를 잡아당기며 짐승처럼 목을 울리며 사정했다. 구멍 안으로 뜨끈한 감각이 새어 나갔다.
***
손이 털썩 침대 위로 떨어졌다. 모든 힘이 빨려 나간 듯했다. 구멍에선 계속해서 뭔가가 흘러나왔다. 안을 채우다 못해 허벅지에 흘러나온 것들은 말라붙었는지 더 이상 끈적거리진 않았다.
간신히 벌리고 있는 눈 사이로 장 대표의 탄력 있게 올라붙은 히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 켠에 딸려 있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생수로 목을 축였다. 그러곤 좆에 체액을 가득 묻힌 채로 내게 다가와 내 입에 자신의 좆을 찔러 넣었다.
“빨아.”
그의 걸 뿌리까지 삼키려면 상체든 목이든 힘을 줘야 하는데 그는 내 얼굴 위로 올라타 제 걸 내 입에 넣었다.
“좆 빨라고.”
장 대표는 내 몸을 제멋대로 반으로 접더니 이미 잔뜩 부어 있는 구멍 안으로 제 굵은 손가락을 찔러 넣어 왔다. 손가락으로 피스톤질하듯 그렇게 안을 쑤셨다. 그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꿰뚫은 탓에 성이 나 있던 구멍이 아우성을 내질렀다.
“우으윽.”
그의 좆을 입에 넣은 채로 안간힘을 줬다. 고통에 괄약근이 저절로 조여들었다. 장 대표가 나직이 물어 왔다.
“왜.”
말없이 흐느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이건 반사적으로 나오는 흐느낌이었다. 장 대표가 그런 내게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싫어요?”
“아니, 아닙니다.”
그의 걸 입에 문 채로 얼른 도리질 쳤다.
“그만둘까?”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뒷말을 덧붙였다. 실제로도 내 입에서 자신의 좆을 빼내려고 했다. 난 얼른 그의 허벅지를 팔로 감싼 뒤 내 입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 그의 좆이 내 목구멍 안을 깊게 찌르고 들어왔다. 목젖이 눌려 컥컥 소리가 나왔다.
“어쩔 수 없네요. 우리 서수원 씨가.”
장 대표가 부러 힘을 주어 내 ‘이름’을 발음했다. 그의 눈매가 길게 접혔다.
“입 구멍에 그렇게 씹질을 당하고 싶다는데.”
장 대표가 내 입 안에 쑤셔 박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더불어 내 구멍을 찌르는 손길도 속도를 점점 빠르게 했다. 구멍 안에선 찰박찰박 물기 젖은 소리가 났다. 그가 싸질러 놓은 정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남자는 기어코 내 입 안에 사정했다. 그는 내 턱을 들어 올려 마침내 그걸 삼키게 했다. 토악질이 나왔다. 웩웩, 실제로도 토하려 했지만 그는 내 입을 틀어막아 그마저도 못 하게 했다. 그는 생수병을 거꾸로 뒤집어 내 얼굴 위로 쏟아 냈다. 입을 크게 벌려 물을 들이마셨다.
“뒷구멍 안 쑤셔져 봤다더니.”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해? 장 대표가 잔뜩 상한 목으로 중얼거렸다.
“없습니다, 진짜 없습니다.”
“그럼 여자에게 박혔나?”
아니요, 아니요. 고갤 내저었다. 그러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입가가 만족스럽다는 미소로 시원스럽게 찢어졌다.
“간수 잘해. 조금이라도 허벌 됐다간.”
그날로 구멍 찢어 버릴 테니까. 그는 그렇게 경고하며 내 얼굴에 좆을 비벼 남아 있는 정액을 처리했다. 그러곤 가운을 챙겨 입더니 지갑을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지폐를 꺼낸 장 대표는 내 허벅지를 한 손으로 잡곤 구멍을 널찍이 벌려 왔다.
“…으으.”
마찬가지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이상 박았다간 몸은 더 이상 제 기능을 못 하고 망가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장 대표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잔뜩 벌어진 구멍에선 남아 있던 장 대표의 정액이 주륵 새어 나왔다. 장 대표는 혀를 끌끌 찼다.
“좆집 아니랄까 봐 뒤로도 줄줄 싸네.”
장 대표는 그 구멍으로 지폐를 쑤셔 넣어 왔다. 지폐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안을 찔러 왔다. 눈썹 사이를 찡그렸지만, 장 대표는 개의치 않다는 듯 가운을 챙겨 입고 룸 밖을 나섰다.
룸에 남아 장 대표가 뒤에 남긴 정적과 함께 천장을 마주했다. 그의 정액이 입 안에 남은 타액을 타고 헤엄쳐 다니는 기분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난 더 이상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다. 웩웩거리며 멀건 위액까지 모두 토해 냈다.
광대 부근과 뺨엔 장 대표의 정액을 묻힌 채로 입가엔 토 자국을 단 채로 넋을 놓고 허공을 응시하다, 손을 뒤로 뻗어 지폐를 꺼냈다. 백만 원짜리 수표가 모두 열 장이었다. 지폐들 끝엔 허연 정액들과 더불어 시뻘건 핏물이 배어 있었다.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어디까지 치닫나 했더니 강간까지 당했다. 그러곤 몸값으로 화대를 받았다. 구멍과 입을 한 번씩 대어 주고 받은 돈이 천만 원이라니. 하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
이렇게 쉬운 일을 그토록 어렵게 돌아왔다니. 가슴팍이 들썩였다. 서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에 팔목으로 눈가를 가려 버렸다. 백열등 아래에 그대로 노출된 낯과 몸이 부끄러웠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귀를 적셨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울며 웃었다.
***
장 대표와의 악랄했던 관계는 끔찍한 후유증을 낳았다. 온종일 배를 끌어안고 끙끙대며 침대 위를 굴러다니다가, 뛰어 들어간 화장실에서 가히 지옥을 맛봤다.
그리고 이틀 뒤, 장 대표와 함께 의사가 하나 룸에 찾아왔다. 그는 날 침대 위에 눕혀 둔 채로 내 구멍 상황을 살폈다. 나는 시체처럼 누운 채로 무릎을 접어 올려 고스란히 남에게 밑구멍을 보이고 있어야 했다. 의사는 장 대표에게 구멍은 이미 상처를 입을 대로 입어 한동안 다시 들쑤시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장 대표는 혀를 쯧쯔, 찼다. 입 안 또한 불어 터질 대로 터져 밥도 거의 씹어 넘기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장 대표는 내 입 안에 넣고 좆질을 해 댔다. 뒤를 뚫어 오지 않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배려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