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호가 온다고 한 날은 그다음 주의 일요일이었다. 그걸 뒤늦게 안 준영은 결국 동아리 총회에 참석했다. 앞으로 자주 나오라는 격려성 협박과 함께 보낸 술자리는 그럭저럭 앉아 있을 만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속에 휩쓸려 휴대폰 번호도 많이 교환했다. 그래봤자 생각 없이 앉아 있었던 탓에 다음 주 내내 새로 등록된 휴대폰 번호와 사람들의 얼굴을 매치하느라 고생했다. 길 가다 마주쳤을 때 한껏 반가워하는 상대방을 실망시키기 싫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주말의 끄트머리에서야 준영은 승호를 만나러 갔다.
일요일 낮에는 고시원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 하얗게 드러난 뒷목을 주무르며 길을 걸었다. 여전히 밖은 날씨가 좋았다.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을 스쳐 준영은 지하철역 앞으로 갔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 잠깐 기대서 있으려니 문자가 왔다. 바로 옆 프랜차이즈 카페에 이미 들어와 앉아 있다는 승호의 문자였다. 고개를 들어 찾아보자 항상 지나치기만 하던 카페가 보였다. 번화가라 그런지 무슨 카페가 4층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승호는 그중 가장 꼭대기인 4층에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귀찮은 마음에 털레털레 계단을 올라가자 약간은 텁텁한 실내의 공기가 느껴졌다. 열리는 창문은 없고 전면 유리로 벽을 둘러놨으니 그럴 만했다. 다른 사람들은 오다 지쳐 자리 잡았는지 테이블마다 자리가 비어 한가했다.
그중 구석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후드 티까지 덮어쓴 남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승호인 것을 알아본 건 다른 사람 중 승호라고 여길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맞은편에 앉는데도 승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가락을 들어 야구 캡의 딱딱한 부분을 툭툭 두드리며 인사했다.
“뭐 해. 나 왔어.”
“어.”
“고개 들어봐. 왜 그래?”
승호는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천천히 두꺼운 후드 티의 모자를 벗었다. 야구 모자 아래로 드러난 왼쪽 턱 아래쪽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준영은 새카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걸 보다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어디 싸웠냐?”
“어쩌다 보니까.”
“제대로 맞았네. 뭘 하고 다닌 거야.”
“아. 몰라.”
승호는 신경질을 내며 이미 다 마신 음료의 빨대를 쪽쪽 빨았다. 준영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음료를 시키러 다시 내려갔다. 어디서 얻어맞고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쪽팔려하는 것 같으니 모르는 척해 줄 생각이었다.
음료는 늘 시키는 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올라왔다. 라테는 텁텁하고 시럽이 들어가는 음료들은 너무 달았기에 자주 먹는 메뉴였다. 준영이 음료를 받아 들고 4층까지 다시 올라왔더니 승호는 다 마신 음료의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얼음을 씹어 먹고 있었다. 그걸 보고 준영은 안 그러기로 한 것을 잊고 놀렸다.
“얼음 남은 거 먹을 게 아니라 멍든 데 대야 되는 거 아냐?”
“야. 아이 씨. 그런 거 아니야.”
“얻어맞기만 했냐.”
“이준영. 아니라고 했다.”
“그래. 아니라고 하자.”
아니라며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승호를 보며 준영은 목울대 안으로 숨죽여 웃었다. 승주와 묘하게 닮은 얼굴이 맞은편에서 다양한 감정의 색채로 일그러졌다. 전체적으로 승주보다 애 같은 면이 보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눈, 코, 입과 같은 이목구비나 분위기가 닮았다기보다는 얼굴형이 닮아 있었다.
준영은 그것을 깨닫고 작게 아 소리를 내며 탄식했다. 그동안 어느 구석이 닮은 느낌을 주는지 이해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차이가 인식되었다. 서늘한 눈매라든가 고집이 묻어나는 입매와는 달랐지만 그래도….
말을 멈추고 자신을 쳐다보는 준영의 눈빛에 승호는 이빨로 으적으적 씹던 얼음을 삼켰다. 큰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에 고정된 것을 알고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씨발 놈들.”
“어?”
갑작스러운 욕설에 준영은 눈을 깜빡이며 황당하게 쳐다봤다.
“왜 욕이야.”
“다 씨발 놈들이야.”
“너 팬 놈들?”
“아 존나, 미친.”
승호는 무슨 대답을 않고 야구 모자를 테이블에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발작 같은 행동들을 보며 준영은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동자를 가늘게 했다. 준영의 입술에서도 욕설이 나오기 전 승호는 쥐어뜯던 머리를 놓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나도 무에타이나 할걸.”
“무에타이?”
“응.”
“승주 형 할 때 같이하지 그랬냐.”
“그 인간이랑 같은 도장 다니느니 그냥 죽을래.”
“쯧쯧.”
무슨 말은 하지 않고 몸만 뒤틀어 대는 모습에 준영은 혀를 차며 아메리카노를 쪽 빨았다. 곰처럼 커다랗게 생긴 놈이 자꾸 욕을 해 대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달라붙었다. 어디서 시비 붙어 온 게 많이 억울한가 보다 싶을 뿐이었다. 묻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저러면 더욱더 궁금해지는 법이었다.
“술 먹다 시비 털렸어?”
“아니. 아 이준영. 너는 왜 술도 못 먹냐.”
“왜 나한테 시비야. 먹거든?”
“세 잔 먹으면 시뻘겋게 되는 게.”
“그래도 더 먹을 수 있잖아.”
“됐어. 얼굴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이 되잖아. 넌 왜 술도 못 먹어서. 아오. 무슨 말을 할라 해도 이런데서 봐야 해요. 훤한 대낮에 맨정신으로 카페에서 커피나 먹어야지.”
답지 않게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준영은 다시 아메리카노를 빨았다. 권승호가 오늘따라 미친놈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모르는 승호는 다른 날과 다른 소리를 하나 더 얹었다.
“준영아.”
“왜 임마.”
“너 소개팅 안 할래?”
뜻밖의 제안에 준영의 긴 눈매 끄트머리가 이지러졌다. 방금 들은 말에 대한 반응도 있었지만 찬 음료를 연달아 들이켜다 보니 관자놀이 부근에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금세 지워졌다. 요즘 들어 줄기차게 듣고 있는 제안이었다.
미팅 낄 생각 있냐. 소개팅 할 생각은 있냐. 원래 1학년 때 많이 들어오는 제안이라는 것을 건너 들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들을 때마다 완곡하게 거절의 말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귀찮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생각 있는 사람이 있다고 둘러대 버리고야 말았다. 그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라 준영은 제가 말하고도 혼자 상처 입은 표정을 짓다 말았다. 그제야 동아리에서는 권유가 줄어들었다.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 보다 하는 소문도 암암리에 돌면서 말이다.
오늘도 항상 입에 올리던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
“됐어.”
“왜?”
“나 매일 뭐 먹을지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
“숨 쉬는 건 안 잊어버리고 있지?”
“아마도.”
“연애를 좀 해 봐야 세상의 아름다움도 느끼고 그러는 거지.”
“나중에.”
“…….”
“하고 싶으면 말할게.”
더 이상 말 붙일 곳 없이 대답하는 입 모양을 보고 승호는 다시 얼음을 으적으적 씹었다. 입 안에서 이빨이 깨지는지 얼음이 깨지는지 모를 소리가 울렸다. 준영은 제 이가 시린 듯한 느낌에 눈을 또 찡그렸다가 폈다. 오늘따라 승호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래서 막나가는 이런 질문도 던졌다.
“권승호 너 약했냐?”
“미친 소리 하네.”
“자꾸 이상한 소리 하니까.”
“어떤 스타일 좋아해.”
“귀찮게 진짜.”
“예쁜 애? 귀여운 애?”
“몰라 임마.”
“얼굴이랑 돈만 보는 거 아니다 준영아. 심성. 성품. 이런 게 더 중요해.”
“너나 그러세요.”
어디 모델 출신이네 아이돌 출신이네 하는 여자애들에게 사족을 못 쓰는 권승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인스타나 페이스북에서도 딱 그런 애들이랑만 대화를 했다. 승호도 준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금세 알아채 입을 다물었다.
이가 부서져라 얼음을 씹던 승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준영에게 고시원으로 안내해 달라고 말했다. 일어선 큰 키가 테이블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준영은 오늘따라 별나게 구는 승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빨리 보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별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통에 다 마신 일회용 음료 컵을 분리수거해 넣고 두 사람은 걸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지나고 학교 근처 알록달록한 가게들을 지나 학교 정문도 지나치더니 편의점을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 안에서 건물 몇 개를 지나자 시멘트를 대충 발라 만든 좁은 마당이 나왔다. 주차하기에도 부족해 보이는 앞마당이었다.
그리고 우뚝 서 있는 고시원 건물이 있었다. 승호는 준영이 멈춰 선 건물을 올려다봤다. 철 지난 자주색 대리석을 바른 건물이었다. 주변은 벽돌로 지어진 빌라나 원룸 건물들만 많았다. 높은 건물들은 아니었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어 햇볕 들 새가 없었다. 승호가 인상을 구기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준영은 팔짱 끼고 있던 팔을 풀며 손짓해 불렀다.
“권승호. 외부인 못 들어가.”
“왜?”
“왜긴 왜야. 원래 그래.”
“너 몇 층이야?”
“4층.”
“어느 방.”
“내 방은 창문 없는 안쪽이라 안 보여.”
“그래?”
승호는 물끄러미 고시원의 건물만 올려다보다 발끝으로 시멘트 바닥을 툭툭 찼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물었다.
“살 만해?”
“다른 사람들도 사는데 나도 살 수 있지.”
“집들이 선물이라도 사 주려고 했는데.”
“다음에 사 줘.”
“뭐 사 줄까.”
“스팸 세트.”
생각해 보지 못한 선물의 종류라 승호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다른 선물을 사는 것보다야 그게 준영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스팸을 말하는 얼굴이 꽤 진지해 웃기기도 했다.
“참치 세트도 사 줄게.”
“너 사람 됐구나.”
“내가 인간성은 누구보다 훨씬 낫지. 간다.”
“데려다줘?”
“징그럽게 왜 이래. 연락 잘 받아. 요즘 왜 이렇게 답장이 느리냐.”
불만 어린 말투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바빴고 고시원에 들어오면 혼자만의 생각에 틀어박히기 바빴다. 무엇보다 매번 휴대폰을 열어 보는 것도 지쳤다. 와 있는 연락을 훑고, 승주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것이 지겹고 힘들었다. 지겹다는 감정과 힘들다는 감정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요즘 들어 처음 깨닫는 것이 참 많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골목 끄트머리까지 걸어가는 승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다리가 길고 어깨가 넓은 체격이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좀 더 여유로운 걸음걸이이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연상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골목의 끝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 승호가 마지막으로 몸을 틀어 손을 흔들었다. 보고 있던 준영도 손을 들어 마주 인사하고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승호를 보고 자꾸만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미안하게만 느껴졌다. 승호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자신의 복잡한 마음에게도 할 짓이 아닌 것을 알았다.
준영은 몸을 돌려 고시원 안으로 들어갔다.
올라간 고시원의 주방에는 누군가 요리를 하고 있는지 라면 냄새가 풍겼다. 배고플 법도 하건만 다른 의미로 가슴속이 허전했다. 그는 방문을 닫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반듯이 누웠다. 복도 쪽으로 난 내창이 침대 위 높은 곳에서 바깥의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침대와 몸 위로 드리워진 빛을 보고 창문을 약간 열고 간 것이 기억났다. 일어나 창문을 닫을 기력도 없이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지친 정신이 잠깐 잠에 빠져들었다.
***
잠이 들었다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정신이 잠깐 끊겼다 다시 이어 붙었다.
바깥의 발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다시 눈을 떴다. 어설프게 잠들었던 몸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그 와중에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함께 잠이 들 때마다 옆에서 몸을 쓸어 오던 손길을.
도톰한 아랫입술을 윗니로 깨물었다 놓으며 기억을 잊으려 애썼다.
눈을 떠 의미 없는 무늬가 나열된 천장을 바라봤다. 어둡긴 하지만 어렴풋한 바깥의 빛 때문에 보였다. 그 무늬를 세다가 어깨를 움직여 바로 누웠다. 내뱉는 숨이 다시 길어졌다. 돼먹지 못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움찔거리는 손을 막을 수 없었다. 가슴을 타고 올라온 손이 목덜미에서 머뭇거리다가 입술 선을 따라 손가락을 굴렸다. 작은 자극에도 숨이 가빠질 것 같았다.
매끈한 면을 더듬던 손가락이 입술의 가장 도톰한 면을 누르고 밀려 들어갔다. 치열을 더듬던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며 흰 몸이 움찔거렸다. 열기가 점점이 퍼져 가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들썩였다. 티셔츠 한 장에 얇은 청바지가 움직이는 몸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지금껏 눌러 참아 오던 성욕이 옅은 잠기운을 틈타 온몸을 잠식했다.
가빠오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기울여진 뺨이 베개에 눌리고 어두컴컴한 와중에 흰 목덜미가 길게 드러났다. 관계를 가질 때마다 수없이 입술이 닿던 곳이었다. 이빨로 잘근거리며 핥아 올 때마다 준영은 애원과 닮은 어투로 속삭이곤 했다. 자국 남으면 안 돼요. 안 돼요 형, 이렇게.
승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연한 살갗을 적당히 빨아들이다 멈추곤 했었다. 그리고 나면 도착적인 시선이 전신을 훑어 내렸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받는 몸은 긴장감과 미약한 공포로 굳곤 했다. 하지만 역으로 쾌감에 예민해지기도 했다.
입 안의 따뜻한 점막을 더듬던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와 가슴 사이로 자리 잡았다. 가볍게 뛰는 심장을 누르며 손을 더듬어 아래로 내려갔다. 바지 안으로 느릿하게 파고드는 손을 느끼며 다리가 움찔 떨렸다. 자신의 손으로 더듬어 가는 걸 알면서도 흐릿한 머릿속은 다른 상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묵직한 몸이 온몸을 지배하듯 짓누르는 것을, 그렇게 닿고 손길이 지나간 모든 부분이 뜨거워지는 것을, 뜨거운 입술이 가슴을 빨고 올라와 입 맞추는 것을 상상했다. 다른 한 손으로 걸리적거리는 옷을 끌어 내리고는 성기를 쥐자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기억 속의 손이 거칠게 성기를 압박하듯 쥐며 아픔과 쾌감 사이의 경계에서 악력을 멈췄다. 몇 번의 제모 후 체모가 아직 나지 않은 피부가 아직 만질만질했다. 연한 색의 성기를 감싸 쥐고 엄지로 끄트머리를 누르자 허리가 움찔할 정도의 쾌감이 몰려왔다. 그런데도 아직 부족했다. 부족해서 자꾸만 목이 탔다.
학습하고 기억한 쾌감이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걸 알아 속에서부터 들끓는 열기가 식도를 바짝 태우도록 올라왔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도록 눈을 감아 내리며 성기를 쥔 손을 바쁘게 오르내리도록 움직였다. 다른 손은 옷자락을 비집고 들어가 가슴 근처의 피부를 더듬었다. 솟아 오른 유두를 쥐어뜯듯 매만지며 신음을 토했다.
“아… 아. 으.”
조용한 신음을 흘리자 붉게 달아오른 성기의 끄트머리에서 희뿌연 사정액이 흘렀다.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르는 액체가 흘러 회음부 사이로 배어들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그 궤적을 따랐다. 잔뜩 예민해진 회음부를 손가락으로 더듬다 불쑥 아래의 입구로 향했다. 적지 않은 관계를 가지며 자극에 익숙해진 입구가 움찔 떨렸다. 거기서 잠깐 행동을 멈췄다.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검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껏 익숙해진 굵기에 비하면 얇은 자극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몸이 잘게 떨렸다. 뜨거운 점막이 침입한 손가락에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준영은 늘 듣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울리는 것을 느꼈다.
‘좋아서 바싹 무네.’
혼자만의 대답으로 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릎을 굽혀 다리를 세우고는 그 사이로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항상 듣던 말이 맞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의 침입을 환영하듯 내벽이 단단히 물고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차마 세 개를 쑤셔 넣지는 못하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목울대가 두드러지도록 고개가 젖혀지며 한숨 같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읏, 형… 안 돼요. 아….”
그들 사이에서는 안 돼요 라는 말이 하나의 허락이었다. 발바닥 아래로 죽 밀리는 얇은 시트를 느끼며 준영은 가슴을 꼬집던 손을 다시 내렸다. 아랫배 근처를 어루만지다가 다시 성기를 꽉 감싸 쥐었다. 다소 아플 만큼 쾌감이 와야 해방감이 큰 것을 알고 있었다.
발갛게 변해 움찔거리는 구멍에 세 개째 손가락을 밀어 넣자 절정이 다시 다가왔다. 그러나 길이가 부족해 더 깊은 곳을 만질 수가 없었다. 애가 탔다.
더 안쪽에, 찢어발길 정도로 깊은 충족감은 아직 오질 않았지만 벌려진 구멍의 감촉이 기꺼웠다. 다시 사정액이 울컥 흐르고 몸이 천천히 늘어졌다. 세워진 다리가 천천히 내려지며 준영은 가볍게 헐떡였다. 천천히 숨이 돌아오고 손끝의 떨림이 멈춰 왔다.
몸을 지배하던 졸음기가 성욕과 함께 가시자 진한 후회가 몰려왔다. 좁아터진 방에서 혼자 뭐 하는 짓인지. 있지도 않은 사람을 상상하면서. 탈력감이 가시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움직이다가. 몸을 일으키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방 안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느슨하게 이완되었던 몸이 긴장으로 움츠러들 만큼 놀랐다. 동시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까지 푹 젖어 있던 성감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준영은 다리를 그러모으며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목을 뒤로 돌렸다.
침대 위 작고 높은 창문은 손가락 두세 마디가 들어갈 정도로 열려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를 통과해 들어오는 빛과 달리 파리한 형광등 불빛이 틈으로 보였다. 열려 있는 창문을 응시하다가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닫았다. 작은 틈마저 닫히고 방은 완전한 밀실이 되었다. 바깥의 자잘한 생활 소음도 묻혔다.
그런 창틀을 물끄러미 보며 그는 왼손으로 다른 쪽 팔을 문질렀다. 아직도 소름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팔꿈치 아래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차게 식은 손등을 덮어 감쌌다.
방금 전까지 누가 있었던 걸까.
이제는 닫힌 창문을 보는 짙은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누군가 봤냐고 되묻는다면 확신하기에도 애매한 정도의 의심이었다. 왠지 그랬던 것 같다, 라는 생각.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하던 순간이라 더 그랬다.
방 안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 그게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뭔가,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
그 순간 옆방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고시원은 서로 다른 방에 있는데도 마치 한 공간에서 다함께 살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며 준영은 천천히 손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창문의 잠금 장치도 내려 잠갔다.
남자만 있는 층인데 들여다봤을 리가 없겠지. 불안감을 애써 털어 내며 결론지었다. 잠깐의 그림자는 누군가 지나가면서 만든 잔상일 게 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마 주방을 가려고, 아니면 주방 너머 세탁실을 가던 사람일 거라고.
앞으로는 문단속을 제대로 하고 다녀야겠다 생각했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일지도 몰랐다. 방금 전은 자신의 부주의가 맞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동 구역에서 창문이 열린 줄도 모르고 그런 짓을 하다니. 잠시 제가 미쳤다는 생각을 하며 준영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매트리스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는 흔들림이 멈췄다.
긴장감이 물러가자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명치 부근의 어딘가가 쿡쿡 쑤시는 것을 느꼈다. 마른 손으로 명치께를 문지르며 그는 오래도록 침대에 앉아 있었다. 지속된 스트레스가 몸을 축나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에든 매달리고 싶을 만큼. 방금 떠올린 생각을 지우며 준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정도 외로움은 익숙했다. 승주와 함께 있던 그 순간이 특별한 것이지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외로움이었다. 늘 그랬듯.
***
승주는 손아귀의 싱글 몰트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리다 얼굴 가까이 들어올렸다. 알코올 향보다 앞선 오크 향이 먼저 끼쳤다. 그것을 음미하고는 단숨에 호박색 액체를 입 안으로 넘겼다. 잔을 내려 두자 묵직한 색의 나무 테이블과 부딪히는 소리가 컸다.
요 근래 음주량이 늘어난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자제할 정도가 아니었기에 그저 당기는 대로 술을 찾아 마시는 중이었다. 퇴근이 이르면 바를 찾았고 퇴근이 늦으면 거실의 진열장에 있는 양주를 꺼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갈 생각은 없어 언제나 변두리를 맴돌았다. 주말을 피한 평일의 바. 그중에서도 날이 좋아져 유행하는 루프 탑 바는 피하고 이전부터 발길을 향했던 장소들을 주로 찾았다.
오늘도 사람이 많지 않은 바 안에서 승주를 향한 시선이 몇 번 오갔다. 지금껏 말을 붙여 보려 해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에 다들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길까지 아예 거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향하는 남자 한 명이 또다시 바 안의 시선을 끌었다.
승주는 제 앞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는 얼굴이기는 해서 다른 이들이 말을 붙여 올 때만큼이나 무심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런 태도에도 칵테일 잔을 들고 온 남자의 목소리는 명랑하기까지 했다.
“형. 오랜만이다.”
“무슨 일이야.”
“나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요즘 술만 먹는다며? 다른 사람들이 말 걸어도 다 무시하고.”
“별로.”
살가운 상대방의 태도에도 승주는 별생각 없는 듯 다시 위스키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권태로워 보일 정도로 느린 손놀림을 보던 남자는 궁금증을 오래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형. 요즘 안 놀아?”
“왜.”
“지난주에 놀다가 조재우 마주쳤는데 걔가 그랬어. 권승주가 요즘 놀지도 않고 별거 아니라고.”
오랫동안 듣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승주는 복잡한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다시 상기해 봤다. 이미 관계를 정리한 사람들 중 하나인 게 용케 기억났다. 몸은 말랐고 말하는 것마다 고분고분 듣는 게 괜찮아 어느 정도 만났지만 이준영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정리했던 사람. 몇 번 더 연락이 오길래 무시하고 넘어갔더니 연락도 오지 않은 걸로 기억했다. 그렇게 잊혔던 이름이다.
별거 없는 기억이 떠오르자 승주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폈다. 무슨 말을 바로잡을 기분도 들지 않았다. 괜히 떠올렸다가 그 관계를 정리한 이유가 떠올라 불쾌한 기분만 짙어졌다. 자신의 자제심을 과신하던 때였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과거건만 벌써 그때가 아득할 지경이다.
그리고 그에 이어 준영에게 몰아세우듯 선택하라고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서도 제 앞에 서서 도망치지 못하던 모습까지. 길고 곧은 다리나 도드라진 쇄골 뼈 같은 것들도 기억났다. 제 몸에 손을 드는데도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매달리던 온기도.
기억을 잊기 위해 일부러 질문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너 승주 형이 안 자 줘서 그래? 하고 물었지.”
그 대답을 듣고는 승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조재우는 자신이 잘나가는 편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항상 괜찮은 상대를 찾고 그런 사람들과 쿨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기 있는 나라는 자의식에 빠져 있던 그런 부류의 사람. 그런 사람에게 눈앞의 남자가 한 말은 자존심에 제대로 스크래치를 내는 말이었을 게 뻔했다.
“그렇게 대답했어?”
“나 그 새끼 안 좋아해. 한지석 만날 때 뺏어 간 게 그 놈이잖아.”
“그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굴더니.”
사실 ‘쿨하고 인기 있는 나’라는 자의식에 빠져 있기로는 승주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 승주의 무성의한 질문에 그는 비웃듯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나도 내가 한지석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어.”
“이제는 인정하나 보네.”
“어쩔 수 없더라. 내가 좋아할 인간을 선택할 수는 없더라고.”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나왔고 그 대답을 들은 승주는 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남자가 칵테일 잔의 빨대를 들고 칵테일을 빨아 마시는 동안 잠깐 움직임이 없었다. 손안의 술을 마시는 것조차 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불과 한 달 전의 권승주라면 들은 척도 안 할 이야기였다. 흘려듣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이야기.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의도하고 생각한 방향대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어떤 종류의 감정, 어떤 방향의 감정이라 해도 말이다. 준영과 얽혀 있던 모든 것들을 놓치고 나서야 어렴풋이 깨닫는 중이었다.
승주에게 있어 누군가에게 약해진다는 것은 기실 하나의 패배와도 같았다. 누군가 이러한 말을 듣는다면 모자란 생각이라 비웃을 것을 알았다. 흔치 않은 기회를 잡은 양 조언을 하려 들지도 몰랐고. 그렇게 하더라도 큰 감명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감정의 자락을 넘겨주면 그게 패배인줄 아는. 승주의 깊은 눈매를 응시하던 남자는 빨고 있던 빨대를 뱉어 내며 말했다.
“형 진짜 이상하네. 실연이라도 당했어?”
“아니.”
거기에 대해서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실연이라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의욕이 없었다. 모든 것은 느리고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 기분만이 지속되었다. 집 안 전체에 드리워진 무거운 기분은 승주가 어디를 가든 그 뒤를 밟아 따라왔다. 회사든, 차 안이든, 그리고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소음이 함께하는 바에서도. 목이 졸리던 파트너들이 늘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마저도 했다.
생각보다도 심상치 않은 상태를 보며 남자는 칵테일 한 잔을 더 주문하고 바로 앉았다. 지금의 권승주는 뭐라고 할까, 단 한 번도 그런 표현을 해 볼 생각을 못 했지만 무기력해 보였다. 늘 정제된 느낌을 주던 콧날과 턱은 그대로인데도 단단하게 묶어 두던 타이마저 느슨하게 풀어낸 모습이 생경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찔러보기가 쉬웠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파트너랑 지냈지.”
“누구랑 놀기는 했구나. 자랑하는 놈이 없길래 은퇴한 줄 알았네.”
그 말에는 굳히고 있던 입매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다시 내렸다. 자신의 취향에서 은퇴할 날이 오기는 할까. 이준영에게도 손을 올리던 자신이. 스스로도 궁금했다.
“놀았어.”
“뭐 했어?”
“별거 없어.”
“형이 별거 없는 게 다른 사람 별거 없는 거랑 같나.”
“손만.”
“손으로만 때렸어? 형이 그게 충족이 돼?”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남자는 손바닥을 펴 보이고 쥐었다 폈다만 반복하며 다른 제스처를 취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자신의 뜻을 전해 보려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는 남자의 팔을 보며 승주는 다시 옅은 미소를 띠웠다가 지웠다.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세세하게 플레이를 짤 수 있는 파트너의 경우에는 아예 호텔방 문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되기도 했었다. 머리채를 쥐어 무릎걸음으로 질질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고, 울어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도 세이프 워드를 말하지 않으면 주저할 게 없었다.
자기가 버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울고 있는 파트너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자극의 강도를 올렸다. 그렇게 나가떨어질 때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상대가 보이는 절박함에서 오는 통제권. 그것이 승주가 언제나 쥐고 있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준영에게는 그게 안됐다.
집 안에 끌어들인 것 자체가 문제일까 싶었다. 그라고 해서 집에 들인 사람을 24시간 내내 통제하고 휘두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이해되지 않던 점은 자꾸 질문을 해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 줬다는 것이었다. 할 말 있냐고. 말 안 할 거냐고. 도구를 써도 된다는 허락도 진작 받았지만 그저 옷장 깊숙한 곳에 박아 넣고 꺼낼 생각을 안 했다.
말랑한 엉덩이를 내려치고, 빨갛게 열이 올라 손자국이 남기 직전이 되면 일부러 안아 올려 엉덩이를 받쳐 들곤 했었다. 더 때렸다가는 다음날 쓰라릴까 봐. 자국이 남는 것은 때린 자국보다 울혈이 남도록 물고 빨아 깨문 것이 더 많았었다.
그렇다고 이준영에게 거친 섹스를 하는 게 싫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울기 직전인 눈매를 핥고 본능적으로 버둥거리는 허리를 누른 채 밀어붙이는 것이 좋았다. 벅찬 듯 헐떡이는 숨소리도 좋았고. 열이 오른 채 빠르게 심장이 뛰는 소리도 환장하게 좋았다. 한참 시달린 준영이 쾌감에 절어 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아침에 이불 속에 푹 묻혀 있는 뒤통수를 간질이듯 쓰다듬는 것도 좋았었다.
엎드려 자는 습관이 있는 준영의 뒤통수를 간질이듯 쓰다듬고 등을 매만지다가 손을 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 또 기억이 떠올랐다. 승호에게 온 전화를 받고 있으려니 졸음에 겨워 고개를 들던 모습이.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내밀던 모습도.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이 기억에 더 깊이 남았다.
“충족되던데.”
“별일이야.”
“그냥 쓰다듬고. 그런 것도 괜찮았어.”
그 말을 끝으로 승주는 얼음이 녹아 묽어진 잔 안의 액체에 다시 위스키를 추가했다. 이번에는 향을 음미할 틈도 없이 바로 삼켰다. 자신을 개의치 않고 있는 승주를 물끄러미 보던 남자는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을 그대로 했다.
“그럴 거면 뭐 하러 플레이했어. 그냥 연애하지.”
순간 굳은 듯 멈춘 승주의 반응을 보며 그는 뒤늦게 제 말을 되짚어 봤다. 주제넘은 참견은 아니었을지. 하지만 뒤늦게 들려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럴 걸 그랬나.”
지금껏 권승주의 앞에서 그런 단어를 말하던 사람도 몇 있었다. 그때는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해 본 적 없는 관계라 몰랐었다. 연애라는 길이 있음을. 그 역시 명백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왠지 이준영에게는 그게 더 어울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통제와 주도권, 가학적 성향과 괴롭힘보다는 다른 모습의 무언가를 했어야 했는데. 그랬던 게 아닐까. 연애라는 바탕에 다른 색을 섞었다면. 그랬다면….
뒤늦은 생각을 깨달은 승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짤막한 인사조차 없이 바를 나갔다. 남은 위스키마저 덩그러니 남겨 놓고 나간 뒷모습을 보며 말을 걸었던 남자는 짜증을 냈다.
애초에 같이 온 사이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조금 달라졌다 해도 예나 지금이나 남 생각 못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했다. 다가와 남은 술을 킵하겠냐는 바텐더의 질문을 듣고는 마셔 치워 버리겠다는 대답을 했다.
***
시험 기간이 끝난 대학교는 다시 정상적인 사이클을 찾았다. 밤새도록 자리가 나지 않던 도서관은 이제 여유가 생겼고 오히려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한산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끈을 완전히 놓고 돌아다녔다.
모두가 여유로웠다. 그렇게 각자의 일에 몰두하며 공부와 학점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었다. 미팅이나 소개팅, 술자리, 한강 나들이, 놀이공원까지 그 종류도 많았다. 다들 자기의 색깔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색을 띠고 있을까. 준영은 쓸데없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이것을 고민했다.
더울 정도로 볕이 잘 드는 강의실 창가에서 잔디밭을 돌아다니는 색색의 사람들을 보며 골몰했다. 분홍색으로 긴 머리카락을 물들인 여학생이 지나가자 청 재킷에 청바지를 갖춰 입은 남학생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다들 기운차 보이기만 했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자신과 달리.
시간이 남자 부쩍 잡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시험 기간인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얼굴을 보기만 해도 떠오르는 게 있어 승호의 연락은 잘 받지 않았다. 그 사이 스트레스는 시시각각 몸을 잠식해 들어갔고 명치 근처의 통증은 점점 익숙해졌다. 가끔 허리를 펴지 못할 만큼 깊숙이 통증이 쑤시기도 했다.
강의 자체도 한없이 늘어지고 단조로웠다. 심지어 시험이 끝났다는 핑계로 10분 일찍 끝나기도 했다. 교수님이 나가고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는 학생을 거슬러 친구가 다가왔다. 일찍부터 와 창가 자리를 차지한 준영과 달리 강의가 시작하기 전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친구는 꼼짝없이 비어 있는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집중해야 했다. 책상 앞에 서서는 창 너머를 멀거니 보고 있는 준영을 기다렸다. 다시 시선을 강의실 안으로 두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물었다.
“이준영. 너 무슨 일 있냐?”
“왜?”
“정신 빼 놓고 다니는 거 같으니까 그렇지.”
“아니야.”
“선배가 과장 보태서 너 곧 쓰러질 거 같대.”
어느 선배가 그랬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준영은 흐리게 웃어 보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삶에 의욕이 없었다. 매일의 시간은 알아서 흘러가고 지나갔다.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한 채. 세상은 이렇게나 밝은데 자신은 햇볕 한 번 못 받은 식물처럼 비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 알았다. 하지만 극복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아 친구의 걱정에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권승주도, 혼자만의 걱정도. 요즘에는 남이 권하는 술자리에 가서도 술을 먹지 않았다. 감정이 왈칵 터져 손가락이 실수할까 무서웠다. 승주에게 전화라도 잘못할까 봐. 그리고 악다구니를 쓸까 봐.
그래도 요즘에는 나아진 편이었다.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매주 알 수 있었다. 그 전 주를 돌이켜 볼 때마다 어떻게 그런 감정을 견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아마 그럴 것이라고 추측했다. 가슴을 꽉 메우던 둔통도 이제는 간헐적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고민은 스스로도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긴 강의실 복도를 걸었다.
“동아리 안 가?”
“안 가. 고시원 들어가 봐야 해.”
“왜 임마.”
“요즘 누가 들어와서 뭘 만지는 거 같아.”
뜻밖의 말에 친구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없어진 거 있어?”
“아직 모르겠어. 그냥 느낌이 그래.”
“문 안 잠그고 다녀?”
“잠그고 다니는데. 모르겠어.”
“마음 편히 잠이나 자겠냐. 고시원 옮겨. 거기 별로잖아.”
“할인해 주는 대신에 이번 학기까지는 살기로 했었거든.”
“그쪽 사정 챙기기 전에 너부터 챙겨.”
“오늘 CCTV 물어볼 거야. 주인아줌마가 오늘 카운터에 계신다고 해서.”
이런 이유인 줄 몰랐던 친구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준영의 등을 두드리다가 손을 뗐다. 준영이 화들짝 놀란 듯 한 걸음 떨어지는 바람에 괜히 머쓱했다.
“힘내라.”
“응. 그럴게.”
딱히 힘낼 생각이 없으면서도 준영은 그렇게 대답하며 고시원으로 향했다.
고시원으로 접어드는 길은 아직 밝은 낮인데도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둑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짐을 한 아름 들고 내려오는 여자를 비켜서고는 다시 올라갔다. 4층 카운터에 가자 주인아주머니는 아직 없이 팻말만 덩그러니 올라 있었다. ‘잠시 부재중’ 이라고 쓰여 있는 간단한 팻말이었다.
준영은 그것을 보고 카운터에 기대서 기다리다가 다리가 아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쇠를 꽂아 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 위에 들고 온 가방과 책을 올리고 침대가에 앉았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꽤 큰 편이었기에 방 안에 있더라도 아주머니가 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침대가에 앉은 그는 목을 길게 빼 좁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제자리에 물건이 다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낌이 달랐다. 책상 위에 뒀던 책의 각도가 약간 틀어져 있다던가, 아니면 접어 두고 갔던 이불이 구겨진 느낌이 든다던가. 그럴 때마다 애매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기시감이 무엇인지도 모르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번 창문의 틈이 열린 걸 본 그 순간과 같은 기분들. 좁은 방 안에 부유하는 불쾌함을 이해하자마자 어떻게든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잠겨 있는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오는 것인지.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열쇠를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은 일반적인 방문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안쪽 손잡이의 동그란 잠금 버튼을 누르고 닫으면 그대로 잠기는.
버튼을 누르고 방문을 눌러 닫자 그제야 알았다. 문을 잠근 뒤 확인하기 위해 손잡이를 돌려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잠긴다고 생각했으니 그랬었다. 나갔다 들어오면 잠긴 문을 열기 위해 바로 열쇠를 꽂아 돌렸고. 준영은 얼어붙은 듯 문 앞에 서 있다가 열쇠를 왼손에 넘겨 쥐고 오른 손으로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려 봤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손잡이가 돌아간다. 탕, 하는 소리가 손잡이 안에서 울리며 잠금 버튼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휙 잡아당기자 문이 열렸다.
경첩에서 희미한 금속성의 마찰음이 울렸다. 열리는 문이 옅은 바람을 일으켜 준영의 이마에서 앞머리를 옆으로 치웠다. 멍청하게 그것을 보고 있다가 입에서 탄식 같은 소리가 흘렀다.
한번도 확인해 볼 생각이 없었다. 일단 이 고시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다. 그동안 준영이 안에 있으면 문을 열어 보는 사람도 없었고.
계단 아래에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급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아주머니는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올라오는 중이었다.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신발장 옆에 서 있으려니 아주머니는 준영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휴대폰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응. 전화 또 할게. 그래. 학생 무슨 일 있어?”
“안녕하세요. 방문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어요.”
“문? 왜?”
“지금까지 잠기는 줄 알았는데 안 잠겨요. 잠가도 밖에서 열면 그냥 열리더라구요.”
“그래? 언제 그랬지. 봐봐.”
아주머니는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앞서 방을 향했다. 문을 당겨 열고는 안쪽에서 잠근 뒤 돌려 열기를 몇 번 반복했다. 저항감 있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열리는 문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네. 고치기는 고쳐야겠네. 이 방만 이러나. 학생 뭐 없어진 거 있어?”
“아직은 없어요.”
준영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없어진 게 있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확실하게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하지만 아직 없어진 물건은 없었고 뚜렷한 확증도 없었다.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 그 점이 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고칠 거 있으면 우리 아저씨가 고치는데 지금 시골 내려가 있거든. 없어진 거 없으면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다른 방도 고칠 거 없나 확인하고 한꺼번에 고쳐야겠어.”
“아….”
“최대한 빨리 알아보고 할게. 미안해서 어쩌나.”
“언제쯤 될까요?”
“연락해서 알아볼게. 문 때문에 무슨 일 있었어?”
아주머니의 질문에 잠깐 그는 눈을 깜빡이며 말문이 막혔다. 밖에서 누군가가 들여다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입 밖에 내기가 거북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차마 말할 낯이 서지도 않았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고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확인해서 한꺼번에 하겠다고 하는데 거기서 더 재촉을 하기 어려웠다. 준영은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키가 작은 아주머니는 눈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활짝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다른 거 불편한 건 없지?”
“네. 살 만해요.”
“고칠 거 혹시 또 있으면 말해 줘. 이번에 확인할게. 콘센트나 전등 같은 거 말이야.”
“네. 빨리 고쳐 주세요.”
“응. 우리 아저씨 언제 들어오는지 물어봐야겠다.”
아주머니는 휴대폰을 다시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며 바쁘게 걸어 나가려는 뒷모습을 보며 준영은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질문이 겨우 떠올랐다. 다급한 목소리로 불러 세우자 아주머니는 멈춰 서서는 상체만 뒤로 틀며 그를 바라봤다.
“저기요. 하나 더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응?”
“복도에 cctv 있나요?”
“안에는 없어. 건물 들어오는 데랑 4층 입구에는 있는데. 왜?”
“…아니에요.”
당연하다는 듯한 아주머니의 대답에 준영은 입을 다물었다.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무슨 말을 하려던 아주머니는 휴대폰 너머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신발장을 지나며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내용이 고시원에 울렸다.
“응. 지금 뭐 해? 언제 올라올 수 있어? 아니, 고시원 문 때문에….”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건물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울리며 점차 발음이 뭉개져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 구분할 수 없이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콧잔등을 찌푸리고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냥 돌려서 빼고 고치면 안 되나. 당장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디다 말을 하기도 그랬다. 이 문에 맞는 손잡이를 알아서 구해 와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한 번 더 말씀을 드려야 할지.
엄마에게 전화를 해 볼까. 이런 생각을 작은 머리통에 잠깐 떠올랐지만 금방 지웠다. 다 큰 아들이 되어서 이런 것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큰일이 아니면 엄마에게 말할 생각도 못하는 게 그의 원래 성격이었다. 이런 것을 대신 들어주던 사람은 머릿속에서 얼른 밀어냈다.
이제는 잘 지내고 있을 권승주를 떠올리는 게 스스로도 싫었다.
***
건조하고 마른 대기가 지속됐다. 그 끝에 다다라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낮부터 잿빛 구름에 뒤덮여 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온 세상을 두드렸다.
신호에 걸려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멈춰 있는 검은 세단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간의 먼지를 씻어 내리려는 듯 비가 쉼 없이 내렸다.
승주는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앞을 지나갔다.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걷는 사람, 머리를 무언가로 가린 채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람들. 다들 제멋대로였지만 지킬 것은 지키고 있었다. 주어진 신호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초록 불이 들어오자 승주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켜 방향을 잡았다. 그가 머무르는 빌라가 아닌 본가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요즘에 그에게 있어 본가의 연락과 그 구성 인원들은 하나의 걸림돌과도 같았다. 시간을 잡아먹는 맞선을 들이밀며 어떻게든 장남을 정상 궤도 위에 돌려 보려는 부모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정말 승주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공을 근거 삼아 권위를 휘두르려는 아버지의 노쇠해 가는 아집이 싫었다. 온 동네에 자신을 자랑하고 들이밀려 하는 어머니의 설레발도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을 하는 중이었다.
몇 번의 맞선 제의 중 거절했다가는 부모의 면이 서지 않는 자리에만 골라 나가는 정도. 하지만 그 시간은 지독히도 무미건조해서 승주에게 섣불리 연락하려는 여자들조차 없었다. 맞선은 그가 가족에게 발휘하고 있던 사회성 중 가장 중요한 축이었다. 그것마저도 집어치운 지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차는 탁 트여 넓은 광화문의 도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경복궁을 오른편에 두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높은 지대를 지나 주택가에 접어드는 길이 나왔다.
차는 산 중턱 너머까지 고급 주택이 들어선 부암동에 도착했다. 높은 담장을 끼고 오르던 중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와 한 저택의 담장 옆에 차가 멈췄다. 승주는 이 집으로 가족이 이사하던 날 분가를 해 완전히 갈라섰다. 회사가 멀다는 것이 핑계였지만 말 그대로 핑계일 뿐이었다.
차의 시동이 꺼지자 거리는 비에 젖어 차분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각자의 조형미를 자랑하는 저택들만이 즐비한. 대문까지의 짧은 거리에 우산을 쓰기 귀찮았던 권승주는 어깨가 젖는 것을 개의치 않고 대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키가 큰 조경수가 양 옆을 지키고 서듯 드리워져 있고 그 사이로 두꺼운 유리를 끼운 현관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중년을 넘어선 여자가 어깨에 긴 숄을 걸치고는 나왔다. 그녀는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승주의 어깨를 가볍게 털어 내며 말했다.
“차는 왜 담장 옆에 뒀니?”
“식사 하고 곧 가 봐야 하니까요.”
“무슨 일 있어?”
“회사 일이죠.”
승주는 어머니의 물음에 간단한 대답을 하며 홀을 가로질렀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 크게 달라진 면은 보이지 않았다. 굴곡마다 매끄러운 빛을 발하는 콘솔 위를 풍성하게 장식한 생화만이 바뀌어 있었다.
승주는 그것을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성공에 대한 과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디 못 보던 그림이라도 하나 더 걸려 있을 줄 알았건만. 자신의 예상이 어긋난 것에 대해 혀를 한 번 찼다.
이윽고 맞은편 문을 열자 넓은 식당이 나왔다. 이 저택의 반대편인 식당은 한쪽 면을 전면 유리로 둘러 바깥의 정경을 내다보도록 해 두었다. 특히 높은 지대인데다가 부암동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덕에 유리 너머는 저 멀리 종로와 광화문 그 일대의 야경을 담았다. 하지만 자랑할 만한 야경이 오늘은 안개로 인해 희뿌연 빛만 흩뿌리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에 묻힌 흐릿한 빛을 승주는 시간을 들여 응시했다.
식탁 위에는 그릇마다 정갈한 요리가 담겨 있었다. 그 가짓수를 보며 승주는 아버지의 맞은편에 자리해 앉았다. 그 옆에는 이미 승호가 반찬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승주가 들어온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머니마저 남은 자리에 앉자 승주는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이루어지던 중이었다. 피로한 기색이 보이는 승주에게는 말을 붙이기 어려웠는지 어머니는 맞은편에서 휴대폰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둘째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식사 중에는 휴대폰 좀 내려 둘 수 없니.”
“내가 지금 형이랑 밥 먹고 싶겠어?”
“얘는. 안 그래도 이야기 좀 하라고 승주 들어오라고 한 거잖아.”
“할 말 없어. 나 멍 빠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어릴 때도 안 싸우더니 왜 다 커서 싸움이야.”
“안 싸운 게 아니라 형이 나 신경도 안 쓴 거겠지.”
자신이 포함된 대화에도 승주는 묵묵히 반찬을 집어 그릇에 올려 두었다. 식사를 한다기보다는 정해진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았다. 반찬을 옮기고, 밥 위에 올려 입 안에 넣어 기계적으로 씹는 움직임의 반복. 승호는 지난날 제 주먹질을 받아내던 승주의 왼손을 유심히 보다가 다시 휴대폰 액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삐끗한 구석이라도 있길 바랐건마는 젓가락질하는 손이 아니니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또 준영이랑 문자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승호와 승주 둘 다 멈칫했다. 승주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국을 수저로 저었다. 승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대답했다.
“요즘 답장 안 와.”
“싸웠어?”
“아니. 왜 안 오지. 쫓아가서 걷어차 줄까.”
“너는 준영이랑 제일 잘 놀았으면서 왜 공부는 같이 안 했어. 대학도 같은 데 가지.”
“몰라. 나 학벌은 못 사 줘?”
다소 철없는 질문에 그녀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가 식사 중인 자신의 남편을 눈짓했다.
“아버지께 여쭤보렴. 유학이라도 다녀와야지 원.”
“영어 못해서 가기 싫어. 준영이한테 학벌 팔아 달라고 하면 안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그것도 걔가 노력으로 획득한 자산 아냐? 그런데 왜 못 파는 거야.”
다소 철없는 소리를 듣던 승주는 움직이던 수저를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들은 척도 않던 장남이 고개를 들자 온 시선이 쏠렸다. 승주는 되는 대로 말을 하던 승호를 바라봤다. 싸늘한 눈빛에서 탐탁지 않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승주는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옆에서 준영이가 얼마나 고생하며 공부했는지 알면서도 개소리를 지껄이는 게 특히. 친구라는 놈이 저런 소리나 주워섬기다니.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찌를 듯한 시선을 거두는 동안 승호는 도대체 제가 뭘 잘못한 것인지 머리를 굴렸다. 괜히 밥을 먹다 성질을 내는 권승주에 대한 욕설도 내뱉어서 어머니에게 타박을 들었다.
그런 분위기를 지켜보며 반주를 들던 아버지는 긴 식탁의 너머로 권승주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많이 바쁜가 보구나.”
“항상 그랬죠. 요즘 더 그러네요.”
“나가야 할 자리도 안 나가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각오한 질문이었다. 승주는 밥알을 느긋하게 씹어 삼키며 눈앞의 아버지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 않으려 해도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지긋지긋했고 마침표를 찍어야 할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의미 없는 자리를 나가 는 것도 상대에게는 큰 실례인 법이다. 그리고 궁금한 점이 있기도 했다.
“나가서 쓸데없는 자리를 뭐 하러 나갑니까.”
“쓸데없다니. 다음 주 영산 막내딸 자리는 잊지 말고 나가거라.”
그 순간 머릿속에 영산이라는 자리가 어느 자리인지를 기억해 보려 한 것은 순전한 호기심 중 하나였다. 서점 가판대에서 팔리는 잡지에도 오르내리는 이름임을 기억해 내는데 시간이 걸렸을 때 승주는 자신이 나사 한두 개 정도 빼 놓고 살다시피 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갤러리에서 시작된 사업을 다양한 문화 쪽으로 뻗어 나가려는 예술 재단으로써 요 근래 가장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었다. 맞선 자리로써도 그럴 게 뻔했다.
승주는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의 얼굴을 무례하지 않을 만큼 응시했다. 세월로 흐릿해져 가고 있기는 했지만 분명 자신과 닮은 얼굴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주름이 내려앉고, 성공의 반복으로 고집이 서린 얼굴을 보았다. 자신이 온전히 맞다고 생각하는 고집. 승주 그 자신도 가지고 있는 성격 중 하나였다. 마침내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폐부의 공기를 짜내 질문했다. 마침 물어보기에 기회가 좋았다.
“제게 맞선을 대는 집들은 자기 딸들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집들인지. 아니면 제 소문에 대해서도 못 들을 만큼 아는 게 없는 집안인지 그게 궁금하군요.”
스스로 잔을 채워 들던 남자는 제 장남이 내뱉는 말에 들던 잔을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양옆에 앉아 모르는 척 식사 중이던 승호와 어머니 역시 그랬다. 핏기가 가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승호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 뒀다. 항상 묻어 두고 있는 이야기였기에 들을 기회를 놓쳐서는 안됐다. 이 집안의 장남이자 제 형인 권승주의 취향에 대해서.
승호는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었다.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니 아버지가 애지중지 아끼던 난 화분이 죄다 깨져 거실에 흩어져 있었다. 형은 제 등으로 내려쳐지는 골프채가 다 휘어질 때까지 묵묵히 그 매를 맞고는 집을 나갔었다. 울다 지쳐 실신할 뻔한 어머니를 부축하느라 승주를 쫓지 못한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부터 권승주는 집 밖을 나돌기 시작했다. 시간이 나면 비행기 티켓을 끊어 어디 남들이 가지 않는 나라를 떠돌았고 한국에 있을 때는 집에서 자고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말레이시아로 훌쩍 떠나 있기도 했고 내전 지역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오기도 했다.
깊게 벌어진 가족 간의 골이 봉합된 것은 승주가 제정신을 차린 듯 멀쩡한 회사에 취업을 하고 절제된 삶을 시작한 후였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들어오지 않는 형에게 늘 손을 내밀기 바빴다.
술잔을 내려 둔 남편이 장남을 바라보는 눈길에 분노가 어리려 하자 어머니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달래 보려는 듯 입을 뗐다.
“승주야. 그때는 그랬어도 이제는….”
“어머니. 지금도 같아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동자를 보며 명료하게 말했다. 더 이상 다른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그녀는 입술을 움찔거리다 말았다.
그때와 바뀐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한 자괴감도 무게를 얹어 괴롭히고 있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마저 건드렸다는 자괴감. 승주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가족들의 시선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하다 못해 의뭉스러운 표정의 아버지,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 그리고 아직도 혼란이 남은 듯한 승호까지. 이러지 않아도 충분히 피곤했다.
승주라고 해서 자신의 성향을 냉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버텼다. 쓸데없이 온갖 것을 배우고, 학업 따위에 집중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도장마다 돌아다니며 뭐든 꺾고 두드려 패기 바빴다. 그렇게 외면하다가 인정한 성향이었다.
나름의 선을 긋고 취향을 다듬어 나가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고 숨기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몇 년 전 맞선 자리에 처음 나온 여자에게 그는 대뜸 제 성향을 밝히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변명하고 납득시켜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태영이 기억하시죠.”
“태영이?”
“주성 둘째아들이요. 제가 몇 번 어울렸었던.”
“너 설마. 아직도 어울려?”
여기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제 아들인 권승주에 비할 데가 아닌 놈이었다. 주성은 식품 사업으로 간장이나 고추장 같은 기본 식재료를 생산하는 정도였지만 그 역사가 오래돼 부동산을 안 뻗어 둔 곳이 없는 집안이었다. 경기에 타격을 받는 사업도 아니어서 사업 규모에 비해 꽤나 쳐주는 집안이기도 했고.
그 집 둘째아들의 악명은 이미 어릴 때부터 자자했다. 미성년자 시절부터 술 먹는 정도는 문제라고 할 것도 아닌 그런 놈. 그렇게 대학을 가서 갑자기 얌전해졌다가 결혼하고는 다시 온 사방에 난리를 치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 꼴을 못 본 여자 쪽에서 결국 이혼을 입에 올렸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승주도 오랜만에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 역시 친분을 아직까지 유지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녀석도 마음잡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잖아요.”
“너도 참. 비교할 데에 비교를 해야지.”
“사람은 바뀌지 않아요.”
그랬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 것처럼 자신의 취향은 다른 이유가 없이 이런 것뿐이었다. 승주는 그러한 생각을 더 확고하게 굳혀 가고 있었다. 마음을 잡은 줄 알았던 망나니는 그저 망나니일 뿐이었고 사회 속에 섞여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든 취향을 다듬고 절제하던 자신은 결국 그걸 못 참아 이준영에게 손을 뻗었다. 갈 곳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내민 손을 못 뿌리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괴감으로 점철되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차마 연락을 할 수도 없을 만큼.
가족들의 맹렬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승주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응시했다. 더 이상은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그 후에 식사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안에서 끝났다. 승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자 식사에만 집중했다. 자신의 아들을 오랫동안 주시하던 아버지는 불편한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건을 던지거나 큰소리를 내기에도 이미 케케묵은 주제였다. 그런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 뒤를 어머니가 쫓았다. 가족의 절반이 사라지고 식사 시간이 끝나자 사용인이 들어와 식당의 접시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승주는 거의 손대지 않은 음식이 치워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식욕이 있어 삼키던 음식이 아니었다. 승호는 그런 형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어차피 망한 분위기인데다 사람의 눈이 있다고 해서 안 물을 건 아니었다. 승호 역시 권승주를 자주 보고 사는 입장은 아니었기에 이런 날이 기회였다.
“형.”
“왜.”
“지난번에 나 팬 거.”
“아니라고 했어.”
“형.”
단칼에 자르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전 고민으로 점철된 표정과 달리 이 순간만큼은 옛날의 권승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준영은 그냥 있다 나간거야.”
“…….”
그럼 둘 다 정상적으로 굴기나 하지. 승호는 온갖 욕설을 목 안으로 삼키며 제 형을 노려봤다. 둘 중 한 명만 지랄이면 속아 줄 수라도 있지 두 사람 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지랄을 떨어 대는데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런 쪽으로는 둔한 자신이 알 정도이니 부모님은 오죽할까 싶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얌전했던 형의 행동들. 그리고 이준영이 나간 뒤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타이밍까지.
재빠르게 형에게 고삐를 씌우려 했던 부모님도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준영의 반응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은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권승주가 술과 담배, 운동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과부하를 걸기 시작하자 그 반대급부처럼 이준영은 무기력의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혀 둬도 같은 자리에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는 게 눈에 선해서. 도대체 이 둘이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것인지 모르겠는 승호는 짜증스레 물을 마셨다. 이준영과 무슨 사이였냐고 운을 띄워 봤지만 형은 그래 놓고 아니라고 잡아뗐다. 그것이 지난 싸움의 시작이었다. 웃기지 말라며 대들었다가 얼굴에 주먹이 날아오자 맞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자신도 손을 뻗고 있었다.
도대체 이걸 어쩌려고 이런단 말인가. 승호가 무슨 말이라도 한 번 더 하려는 순간 사용인이 가까이 다가와 승호에게 말을 걸었다.
“작은 도련님. 사모님께서 잠깐 와 보시래요.”
“나? 형 말고?”
“네.”
형 말고 자신을 찾는 이유가 왠지 이준영 때문일 것 같다는 느낌에 승호는 괜히 짜증이 더 났다. 이건 죄다 형 때문이었다. 이준영이 대체 뭘 안다고. 그리고 형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냥 다 이 인간이 잘못한 것만 같았다. 애꿎은 의자를 걷어차고는 식당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승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식탁을 지나쳐 지나가려다가 문득 보인 것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손을 뻗어 그것을 들었다. 승호가 방금 전 두고 간 휴대폰이었다. 지문 인식은 당연히 될 리가 없었고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숫자 패드가 액정에 표시됐다. 승주는 엄지를 움직여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생년월일. 집의 예전 전화번호 뒷자리. 몇 번 조합해 보기도 전에 비밀번호가 풀렸다. 액정이 비추는 불빛이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그는 어떤 아이콘을 눌러 들어갔다.
***
“네. 엄마. 괜찮아요. 학기 끝나고 옮기려구요.”
- 그때까지? 세상에. 그 아줌마는 대체 무슨 생각이라니?
“제가 말할게요. 안 고쳐 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높은 음으로 올라갔다. 그런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그저 어색하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방에 누가 들어온 거 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문이 안 잠긴다는 데에서 엄마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저 웃으며 넘어가려는 아들의 목소리에 기세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늦은 밤 준영은 고시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전 편의점 앞을 서성이며 그저 네, 네 하고는 대답을 했다. 고시원 내부는 전화를 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벽이 두껍다지만 방음이 완벽한 건 아니다. 옆방 남자의 큰 소리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나 알람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가끔 혼자 웃는 소리가 들리면 왜 저러나 싶을 때도 있었는데 요즘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혼자 이어폰을 꽂고 영상을 보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그런 곳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높일 목소리는 다 높인 듯 잠잠해져 말했다.
- 승주 집에 있을 때는 이런 걱정 할 것도 없었는데 어휴.
“잘 지냈었죠.”
엄마의 이 말도 건성으로 대답하며 준영은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환한 편의점 내부를 살폈다. 삼각김밥이 남아 있는지 들여다보는 중이다. 이 시간에 들어가서 주방에서 뭘 찾아 먹는 것도 귀찮았다. 매대에 포장된 햄버거 따위밖에 없는 것을 보고 그는 고시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말고 옆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어둑한 주택가 골목이었지만 여길 통과하면 다른 편의점이 하나 더 있었다.
“엄마. 저 이제 끊을게요.”
-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전화하고.
“네.”
- 언제 고쳐 준대?
“아저씨 오시면요.”
- 그래. 잘 지내는 거 맞지.
“네. 그럼요.”
늘어난 건 거짓말 밖에 없다. 그래도 그 와중에 묻고 싶은 진심은 하나 있었다.
“엄마. 잘 지내요?”
- 응. 엄마는 잘 지내. 네 걱정만 빼면.
“다행이다.”
- 다행이라니. 네 걱정은 아직 남았어.
“그런 뜻은 아니구요.”
준영은 가끔 생각했다. 행복을 총량으로 계산할 수 있다면. 엄마만이라도 행복하다면 자기가 감당하고 있는 약간의 불행 정도는 괜찮은 것 같다고 말이다.
괜스레 울적한 기분을 달래며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멀리 가기도 전에 천천히 멈춰 섰다. 그리고 방금 전 지나친 차를 돌아봤다. 새카맣고 크기가 큰 세단 차량이 골목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 잘못 본 줄 알았던 차의 번호판으로 눈길이 천천히 떨어졌다. 번호판을 확인하자마자 가던 길을 돌아서 그 앞에 바로 섰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못 본 척 여기서 걸음을 떼야 할지. 하지만 그게 어려웠다. 한 걸음이라도 옮기면 이상하리만치 먹먹한 감정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둑한 골목에 주차된 차는 잊었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그 예전, 아직 혼자만의 감정에 갈팡질팡하던 시절. 자신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고 승주가 한 걸음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그때. 아파트 단지 앞 키가 큰 나무 아래 세워져 있던 차의 모습과 지금이 똑같아서. 이상한 그리움 같은 것이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준영은 매끈한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렸다. 손끝이 아릿했다.
어두운 내부를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뒷좌석 창가에 기대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각 잡힌 셔츠와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거기서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승주가 기대앉아 있는 면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차의 손잡이를 당겨 열자 묵직한 문이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차의 가죽 시트 냄새와 술 냄새가 섞여 풍겼다. 문이 열리고도 차 안쪽은 조용했다. 차의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고는 문을 닫았다.
다소 경직된 자세로 무릎을 모아 앉은 준영은 승주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술에 취해 잠든 모습에도 크게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 반듯하게 앉아 있던 자세에서 왼편으로 허리가 기울어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길게 되풀이되는 숨소리를 들으며 마른 손이 승주의 무릎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알코올 때문에 체온이 올라갔는지 얇은 천 아래가 뜨거웠다.
“형.”
“…….”
“승주 형.”
부르는 목소리에도 승주는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숨에 섞여 나는 알코올 냄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춘 얼굴을 바라보며 준영은 천천히 몸을 가까이 했다. 움찔거리던 손가락이 헤매다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는 승주의 손등을 건드렸다. 더 이상 가까이 닿을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좋았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손마디의 굴곡진 부분을 느끼며 준영은 천천히 눈을 감고 차 시트에 기댔다. 잠깐이면 됐다. 아주 잠깐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준영도 연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연애할 사람이 생긴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친구들이 연애하느라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선생님께 질질 끌려 나갈 때 그 뒷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하던 생각이었다. 그렇게나 좋을까.
학원도 빼먹고 헤어진 여자 친구 집 앞 놀이터에서 땅을 파던 승호를 쫓아가 하던 생각도 있었다. 할 일은 좀 하지, 라고. 그런 고민이 있는 사랑을 할 줄 알았는데.
승주를 보고 있던 준영의 얼굴이 쓸쓸함으로 젖었다. 자신의 어리숙함이 싫었다. 잘해 준다고 홀랑 빠져서는 흔들리는 자신이 마치 차창 밖 가로수가 바람에 휘청이는 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나무뿌리처럼 가슴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순수한 사랑일까. 그렇게 묻는다면 스스로도 대답이 어려웠다. 모든 긍정적인 감정이 한데 뭉쳐 배배 꼬인 채 드리워져 있었다. 권승주는 이준영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철없던 시절 품었던 경외부터 허덕이는 사랑. 그리고 가장 내밀한 욕구까지 닿아 있던 그런 사람. 구석구석 뒤섞여 이제 와 도려내려니 남는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권승주를 도려내고 나니 삶에 남는 감정이 한 줌밖에 없었다.
“형. 안 일어날 거예요?”
그래도 대답이 없이 고요했다.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을 떼고 준영은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 다가가는 입술이 떨렸다. 잠들었으니까 이번 한 번만. 떨리는 손은 차마 승주의 몸에 대지 못하고 입술만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뜨거운 체온을 예민한 입술로 느끼며 코끝이 스쳐 닿았다. 준영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눈을 감자 그곳은 비좁은 차 안이 아니었다. 높은 천장과 긴 창이 햇볕을 드리우는 논현동의 집. 그 침실 안이었다. 그곳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승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승주가 내뱉는 숨마저도 아깝다고 생각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던 때가 있었다.
잠깐이 지나 입술과 입술이 떨어지고 준영은 차 시트에 주저앉았다. 잠결에 움찔거리는 승주의 어깨를 보며 소리조차 내지 않고는 손을 뒤로 뻗었다. 휘젓는 손에 차 문이 닿다가 손잡이를 어떻게든 찾았다. 차 문을 밀어 열자 바깥의 공기가 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준영은 그제야 얼굴이 달아올라 터져 버릴 것 같다는 걸 알았다. 승주를 이대로 두고 가도 되나 걱정스러웠지만 결국 차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소리가 날까 조심스럽게 눌러 닫았다. 그 옆의 담벼락에 기대서서는 자기 얼굴에 차가운 손등을 대었다 떼어 내기를 쉴 새 없이 반복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도 붉어진 얼굴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불어오는 밤바람에 얼굴을 식히느라 한참을 기대서 있었다.
새벽이 되도록 차 근처를 맴돌던 준영은 결국 자리를 떠나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승주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막상 그가 일어나면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할 지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하나하나 옮겨 가며 고시원의 계단을 올랐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서도 준영은 오랫동안 눈만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잠이 죄다 달아나 정신이 맑았다.
이상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도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몸을 모로 누워 고개를 숙였다.
***
행복과 불행을 오가는 것은 쉬웠다.
준영은 저녁이 돼 고시원에 들어가려다 그 앞 편의점에 들어갔다. 살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아 500ml짜리 생수를 냉장고에서 꺼내 와 결제했다. 카드를 내밀기 민망할 정도의 금액이었지만 계산하고 나서야 알았다. 편의점을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정면에서 왼쪽을 힐끗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항상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 밤에는 익숙한 검은색 차가 담벼락 가까이 주차되어 있었다.
항상 술에 취한 채 올 리는 없으니 이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영은 자꾸 움직이려는 시선을 애써 보도블록으로 돌렸다.
처음 승주가 왔던 날은 행복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들도 기쁨을 가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승호가 알려 준 걸까. 무슨 일이었을까. 혹시, 조금이라도 내 생각이 들었던 걸까 하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기쁨이 저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갈색 벽돌이 쌓여 만들어진 담벼락 아래 검은색 차가 보이지 않자 바로 그랬다. 감정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아 현실을 일깨웠다.
권승주가 앞으로 살아갈 삶과 거기에 동떨어진 자신을. 그렇게 비실거리고 있다 보면 다시 검은색 차가 보였다. 그날은 습관적으로 돌아봤던 담벼락 아래 익숙한 차의 뒷모습이 자리 잡고 있어 깜짝 놀랐다. 놀라서 그대로 고시원 안으로 달려 들어가다시피 했다.
차가 주차되어 있기를 오늘이 세 번째. 이준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짜증이 났다. 그는 방금 산 차가운 생수의 뚜껑을 열어 따고 물을 몇 모금 마셨다. 감정이 요동쳤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지쳤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어쨌든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어 어둠이 내려앉은 듯 새카만 차에 가까이 다가갔다.
보조석 옆으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매끈한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두드리기 전 온갖 감정이 뒤범벅된 자신의 표정이 유리창에 비치는 것을 보고 뒤늦게 차라리 물러날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차 문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유리창을 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한 준영과 달리 승주는 아예 몸을 길게 뻗어 보조석의 문을 열어 줬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열린 보조석을 보고 준영은 말문이 막혔다. 승주는 뻗고 있던 손을 거두며 그런 준영을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아래에서 봐도 마른 기색이 여실했다. 안 그래도 갸름하던 얼굴에 볼살이라고는 볼 게 없었다. 정작 문을 열어 준 사람이 별말 없자 준영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려 어색하게 입 모양을 움직였다.
“승주 형.”
“오랜만이네.”
“네.”
“잘 지냈어?”
잘 지냈냐는 그 질문에 준영은 모호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게 최선이었다. 전혀 잘 지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바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승주의 눈동자에는 다양한 감정이 들어찼다. 스스로도 생경하기까지 한 감정이었다. 그리움. 안타까움. 처음 담는 감정의 색채가 스며들었다.
“다행이네. 시간 있으면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왜 와서 아무 말을 안 해요?”
왜 와서 지켜만 보고 가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승주는 작은 목소리로 내뱉는 그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네가 날 보자마자 달려 들어가 버렸고. 오늘은 나가서 잡으려고 했는데 왔네.”
“…….”
그 대답을 천천히 곱씹어 보니 준영은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돌이켜 보면 맞는 말이었다. 지난번 승주가 술에 취했을 때에는 자신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고 바로 며칠 전에는 혹여 눈에 띄었을까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은 편의점을 들어갔다 나오자마자 바로 승주의 차로 향해 걸어온 것이 자신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준영의 표정에 승주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다시 권유했다.
“잠깐 앉아 봐.”
순간 자신을 부르는 승주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을 했다. 준영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렇게라도 믿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한심해하며, 그러면서도 차 안으로 다리를 디뎌 들어갔다. 몸을 감싸 안는 가죽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머지 다리 한쪽마저 올려 넣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
차 옆을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거리와 반대로 적막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앞만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꼴이 우습게 느껴진 승주가 먼저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올곧아 보이는 입매를 다문 채 준영은 고집스럽게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얇아진 목덜미가 품이 낙낙해 보이는 옷 안의 선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나가겠다고 안달을 하길래 내보내 줬건만 함께 있을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파리한 기색마저 보이는 안색에 승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온기가 싸늘한 목덜미에 닿았다. 손바닥 아래서 경직되는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고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바로 떼는 것이 더 어색하게 느껴질 것을 알았다. 시선을 어디 둬야 할 지 모르는 태도에 결국 손을 거두기는 했다. 목덜미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손을 보며 준영은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전에 없이 다정한 승주의 태도가 자꾸 감정을 부채질했다.
그래. 다정함이 항상 문제였다. 준영은 제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왜 왔어요?”
“잘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형. 하고 싶어서 왔어요?”
자신을 똑바로 본 준영이 만들어 낸 문장을 그는 제대로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정보가 나오는 말과 정반대였기에 그랬다. 시선을 맞추느라 살짝 들린 턱 끝이 긴장으로 굳어질 만큼 이를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단단해 보였지만 반대로 잘못 건드렸다가는 바로 균열이 생길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말과 비언어적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승주는 미간이 깊게 패이도록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뭐?”
정말 못 들어서 묻는 게 아니라 다시 기회를 주는 마음으로 반문했다. 방금 한 말을 없던 일로 하고 다른 말을 한다면 그렇게 넘어가 주겠다는 그런 뜻으로. 그로써는 대뜸 들이밀어진 무례한 질문을 어떻게든 피해 주려는 의도였다. 그럼에도 준영은 목울대를 움직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에요? 아직 다른 사람 없어요?”
하고 싶어서. 이준영이 내뱉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승주는 잠깐 말을 잇지 못하고 간격을 뒀다. 속이 타 당장이라도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담배를 꺼내고 싶은 심경이었다. 생경한 반응에 그는 답답함을 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게 무슨 반응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아 오히려 화가 안 났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요?”
“왜냐면 파트너가 아니라 해도 걱정은 되니까.”
여기에서는 준영이 의아함을 품고 말을 안 했다. 아직 이해가 부족해 보이는 반응에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우리가 파트너를 그만뒀다고 해서 과거로 못 돌아갈 이유는 없잖아.”
과거. 준영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지난번 승주의 차를 처음 마주했을 때 밀려오던 과거에 대한 감정. 그것을 말하는지 알면서도 이상하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기분이 안 좋은 이유를 스스로도 알지 못할 정도로. 잘게 떨고 있던 입술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그런 걸 다 하고서 과거로 돌아가요?”
“준영아. 그 뜻이 아니잖아.”
“형은 모르겠지만 나는 안 돼요. 나는, 그걸… 그냥… 없었던 일로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의 타래가 뒤엉켰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끊임없이 내뱉어지는 말을 따라잡으며 승주는 모든 것을 귀담아들으려 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쏟아지는 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만큼 복잡한 마음을 뱉어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말을 전달하려는 말랑한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가 귓불과 뺨을 쓰다듬자 준영은 하던 말을 멈추고 멍하게 승주를 바라봤다. 다시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가 싶더니.
“나는 없던 일로 못하겠어요. 그래서… 그냥 갈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 나가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준영아.”
분명하게 부르는 소리에도 뒤로 뻗으려는 손을 보며 승주가 다급해졌다. 뺨을 만지고 있던 손을 등 뒤로 뻗어 끌어당겼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려는 손을 잡아당겼다. 좁은 차 안에서 걸리적거리는 게 많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잡히는 몸을 끌어안으려 했다. 끌려와 안겨서도 도리질 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반응이라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생경한 반응 중 하나였다.
“왜 이렇게 화났어.”
“화난 게 아니라. 그러니까….”
“말해 봐.”
아. 정말로 과거와 다를 게 없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의 의미를 알자 안겨 있던 몸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단단한 가슴팍에 문질러진 이마가 뜨끈했다. 다소 불편한 자세로 끌어안긴 자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했다. 그제야 울컥 올라오던 말들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준영은 승주가 한 말을 다시 되뇌었다. 화가 났다. 그렇게 말해 주니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감정이 슬픔과 우울함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마주치니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아니요. 화난 게 아니라.”
“그래.”
“이거 놔 봐요.”
“나가려고 하잖아. 차라리 여기서 말을 해.”
팔을 뻗어 빠져나가려 애쓰느라 검은 머리가 헝클어졌다. 자꾸 몸부림치는 품 안의 몸을 안고 있던 승주는 약간 힘을 풀어 느슨하게 했다. 강제로 붙잡고 있는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틈이 생기는 대신 어깨부터 타고 내려온 손이 손목보다 조금 윗부분의 팔을 단단하게 쥐었다.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쉽사리 빠지지는 않았다.
준영은 가까이 다가온 승주의 재킷 깃 어딘가에 시선을 박고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눈가가 뻑뻑해질 때까지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버티는 걸 보고 승주가 짧게 한숨 쉬었다. 다시 담배가 당겼다. 유독한 연기라도 필요했다. 답답한 준영의 반응 때문에. 그렇다고 다그치고 싶지는 않아서 이상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몰아세우거나 강압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했지만 도망갔던 과거를 보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준영아. 나 좀 봐.”
“…….”
“뭐든 좋으니까 말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강하게 당기거나 흔들지는 않으면서 자꾸 되물으니 눈동자를 굴리던 준영은 고개를 모로 돌려 창밖과 핸들의 어딘가에 시선을 던지고 입술을 달싹였다. 섬세한 얼굴이 전보다 선이 가늘어지고 턱이 도드라져 있었다. 승주는 눈앞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도착적이기까지 한 시선이었다. 이제 조금이나마 살 것 같아서 더 그랬다. 손에 잡히는 거리에 이준영이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형이 와서요.”
“내가 그렇게 싫어? 말 한마디 하고 나가 버리고, 이제 얼굴도 보기 싫을 만큼?”
짧은 문장에 이번에는 승주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가 낮았다. 사납지만 조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준영은 그제야 천천히 승주를 다시 마주했다. 앉은키도 차이가 나는 탓에 약간 올려다봐야 했다. 미미하게 일그러진 눈가와 눈빛에 목소리에서도 드러나던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다시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표정.
“오면 안 되잖아요.”
“왜. 나가는데 잡지 않아서? 연락을 안 해서? 그건….”
도망치듯 나간 네 탓도 있지 않냐, 라고 말을 할 뻔한 승주는 말끝을 잠깐 흐렸다. 무엇이든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 어린데다가 뭣도 모르고 끌려왔던, 그리고 안 본 사이 이미 감정에 시달리고 지쳐 보이는 이준영에게. 그냥 다 제 탓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나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게 아니라. 형. 맞선 보잖아요.”
“뭐?”
“맞선, 보니까. 그러면 안 됐던 거 아니에요? 그럴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죠. 이제 이렇게 됐으니 그만하자. 그렇게 말했으면. 내가 알았다고 하고 생각할 수 있었잖아. 정리할 시간을 줘야지. 매달릴까 봐 그랬어요? 내가 그걸, 다른 사람 입에서 듣고, 내가.”
뒷부분은 다시 문장이 흐트러졌다. 속의 말을 토해 내듯 늘어놓는 단어들에 승주는 표정을 구겼다. 단순히 못마땅한 기색이 아니라 진심으로 화가 나 이를 악물고는 한숨을 크게 토해 냈다. 도대체 뭔가 했더니. 이제야 이상한 모양으로 조각나 있던 퍼즐을 맞출 수가 있었다. 상처는 다 받은 표정으로 제게 끝내자 말하고 도망 나갔던 이준영. 그 인과 관계가 이제야 맞아 떨어졌다.
“어디서 들었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누구 하나라도 손에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듯한 기색을 보고도 준영은 목소리를 높였다. 무서웠다. 핏줄이 푸르게 선 손등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났다. 꼴사납게 눈물이 날 것 같아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다그쳤다.
“맞죠?”
“아니야. 나가서 생각 없다는 말만 하고 왔어.”
“그래도 나갔잖아요.”
“나가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들어오기만 했어. 원래 그랬었고. 들어 봐.”
“내가 왜 들어야 해? 왜?”
거기서 눈물이 터졌다. 준영은 넘쳐흘러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안 했다.
“형이 나랑 잤는데, 그러고도 맞선을 봤다는데 왜 내가 이해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잠깐 몸을 섞는 사이였고, 승주가 그런 자리에 나가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말도 이해를 했다. 그저 사회의 시선에서 용납할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영은 그게 도저히 감정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이성적으로 잣대를 대 보면 영 틀린 게 아니라 더 화가 났다. 화를 내는 자신이 어리숙하고 멍청한 것만 같아서.
준영은 눈물을 손등에 문질러 닦고는 몸을 휙 틀었다. 승주가 잠깐 놓친 사이 준영은 잡히는 대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거센 힘으로 밀어 연 차문이 담벼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거기에 멈칫하다가 골목 안쪽으로 도망치듯 걸었다. 쏟아지는 말에 아무 말을 못하던 승주도 차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걸어가는 준영의 뒤를 쫓았다.
차에서 뛰쳐나온 인영이 눈물을 닦으며 어두운 골목을 향해 들어갔다. 밝은 길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엉망인 얼굴을 하고서는 어디 갈 곳이 없는 걸 알았기에 어떻게든 어두운 길을 걸었다.
멀리 가지는 못했다. 담벼락에 한 손을 올리고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는데 바로 뒤에서 발소리가 쫓아온 것을 알았다. 승주는 뒤에 서서 숨을 헐떡일 때마다 들썩이는 어깨를 멍하게 바라봤다. 숨통이 콱 막힌 듯 아무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답답함에 입술을 짓씹다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기도 했다. 답답했다. 너무 답답해서 가슴이 조여 아프기까지 했다. 준영은 뒤를 힐끗 보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이번에는 의식하기도 전에 승주가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았다. 준영은 돌려 세우려는 팔을 뿌리치며 제 자리에 섰다.
“준영아. 알았어. 울지 말고.”
“됐어요. 지금은 가요.”
“네가 이러는데 어떻게 두고 가.”
“나중에 좀…!”
준영은 다시 다가오는 팔을 보고 손목을 잡아 치우듯 휘둘렀다. 눈물이 어려 모든 것이 어른거렸기에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어두운 골목 안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과 거기에 맞춘 윤곽밖에 보이질 않았다.
과하게 힘을 주고 치워 내다가 팔을 담벼락에 휘둘렀다. 따끔한 아픔이 왔다. 거친 단면에 부딪히고도 힘을 자제 못해 죽 긁힌 엄지가 찢어진 듯 화끈했다. 놀랐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승주는 담벼락에 대고 긁힌 손등을 느끼고도 눈썹을 까딱하고는 말았다. 오히려 휘두른 준영이 놀랐다.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구고는 자기가 쥐고 있는 승주의 손을 뒤집어 손등을 바라봤다. 울퉁불퉁한 단면에 긁힌 손가락의 마디마다 깊게 패여 피가 고이는 것이 보였다. 손등마저 긁혀 만신창이였다. 다른 손을 들어 손을 받쳐 들듯 감싸 쥐고는 승주를 불렀다.
“형, 손….”
“이제 그쳤네.”
제 손등이 찢겼는데도 승주는 오히려 후련해 보이기만 했다. 실제로 그랬다. 열이 뻗쳐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는데 차라리 피가 줄줄 흐르니 혈압이라도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일단 이준영은 우는 것을 멈췄고 제 손을 부여잡고는 도망가지도 않고 있었다.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으니 차라리 이게 나았다. 당황해서는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준영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준영은 승주가 다가와도 도망치지 않고 다친 손만 붙들고 있었다. 흐르는 피가 손목을 넘어 셔츠 소매를 적셔 가기 시작했다. 승주는 다른 손으로 준영을 끌어안고는 잡혀 있던 손은 빼내 피를 털듯 흔들었다. 턱 밑에서 바르작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손. 병원 가야죠, 형. 아니, 사람들 보는데. 좀 떨어져야….”
“잠깐만 있자.”
어두운 골목이라지만 대학가 근처였기에 골목마다 자취방과 원룸들이 빽빽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 수는 없었다.
지나가는 남자가 이쪽을 주시하다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승주는 안고 있는 머리를 품 안에 더 깊게 묻어 숨겼다. 풍겨 오는 샴푸 냄새와 따뜻한 체향이 익숙했다. 이제야 살 것만 같았다.
품 안의 몸이 불안한지 자꾸 움찔거리는데도 승주는 그런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생각 못한 방향으로 튀어 나가는 이준영이.
그리고 그 반응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는 것도 어려웠다. 매번 피를 보고 멈추게 할 수도 없고. 헛웃음을 짓다가 피가 방울져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승주가 다시 팔을 들어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검붉게 패인 부분마다 아린 통증이 전달됐다. 그런 손을 돌아보며 준영이 승주의 팔꿈치 부근을 붙잡고 다시 한 번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가까운 데 대학 병원 있어요.”
“그냥 씻고 묶어 두면 돼.”
“안 돼요. 그럼 편의점 가서 구급약품이라도.”
그 말을 듣고도 솔직히 말해서 귀찮았다. 다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오지로 여행을 갔다가 정강이에 깊게 살점이 파여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가 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대충 소독약을 뿌리고 습한 숲속을 돌아다녔다. 지나친 추위에 딱딱하게 언 설원에 손을 잘못 디뎌 일어나다가 손이 만신창이가 된 적도 있었고. 그런 때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매달리니 다시 거절할까 싶다가도.
“알았어.”
“편의점 이쪽이에요.”
자신이 도망가기라도 할까 팔꿈치에 팔짱을 끼듯 부여잡고 앞장서는 준영의 모습을 보자니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줘도 될 것 같았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려웠다. 하기 싫은 것을 하게 되는 경우라니.
늘 먼저 앞장서 나아갔기에 걸음도 어색했다. 그래도 딱히 제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을 밟아 나아가는 동안 승주는 그것을 고민했다. 차 옆을 지날 때 당당하게 앞장서던 준영이 잠깐 자신을 돌아보자 그것도 기다려 줬다. 무슨 말을 할 게 있는지 우물쭈물하는 게 답답했지만 그냥 기다렸다.
“형. 저 아까. 차….”
“차?”
“차 문. 벽에 찍은 거 같아요….”
“알았어.”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뭐라고 눈치를 보는 준영의 머리를 다른 손으로 쓰다듬었다. 자신의 손등을 긁었을 때보다 더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생각도 했다.
밤이 깊어 다른 가게들은 다 닫은 시간이었다. 승주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아 기다렸다. 편의점의 유리문이 열리고 준영은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와 승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플라스틱 테이블에 쏟아 놓는 것을 보고 승주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가 다시 평소의 눈매로 돌아왔다.
그 난리를 치더니 사온 게 물티슈와 반창고였다. 네모난 반창고의 상자를 보고 조용히 있으려니 흰 손이 다가와 승주의 다친 오른손을 당겼다. 이끄는 대로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손을 내밀어 줬다. 물티슈의 포장을 이로 뜯으며 준영도 나름의 변명의 말을 했다.
“붕대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어요. 물티슈면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며 조심스레 팔뚝을 잡고 핏자국을 닦아 갔다. 드러나는 팔의 윤곽을 따라 물티슈를 문지르는 걸 보고 그는 별다른 말을 안 했다. 차갑게 식은 자리에 다시 피부가 닿을 때마다 뜨거웠다.
이윽고 준영은 상처 근처를 조심스럽게 찍어 누르듯 핏자국을 지웠다. 찢어지고 열기로 부어오른 자리를 집중해 보는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승주는 무슨 말을 걸 수 없었다. 이윽고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상처 물티슈로 닦아도 돼요?”
“괜찮아.”
소독약이나 다른 것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붉게 물든 물티슈를 치우더니 이제는 반창고 포장을 뜯어다 어떻게든 붙일 자리를 고심하는 게 보였다.
양손으로 반창고의 끝을 잡고 이리저리 각도를 대 보던 손길이 길게 찢긴 상처 가까이 다가가며 다시 한 번 승주에게 물었다.
“이거 이렇게 붙여도 될까요?”
“알아서 해.”
찬찬히 끄덕여지는 승주의 고갯짓을 보며 준영은 최대한 예쁘게 모양을 잡아 밴드를 붙였다. 나머지 밴드도 뜯어 빈틈을 메우기 시작했다. 손등을 빽빽하게 채우기 시작하는 밴드를 보며 승주는 혀를 찼다. 접착 면을 상처에 붙이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별다른 말을 안 했다.
그 대신 움직이는 손가락이나 집중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 같은 곳을 봤다. 깨끗한 피부를 보니 어디 상처가 난 적도 별로 없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온몸을 벗겨 눕혀 뒀을 때도 몸 어디에 흉터 같은 것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제가 붙이고도 모양이 영 이상한지 준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살폈다.
“붕대로 감는 게 나을까요.”
“집에 가서 하자.”
“네?”
집이라는 단어에 준영은 멀거니 승주를 바라봤다. 그런 의아한 표정을 마주하고도 승주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했다.
“집에 가자.”
짧은 문장이었지만 감정의 높낮이를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준영은 점점 더 입을 크게 벌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항상 이게 문제다.
“형. 어린 왕자 이야기 알아요?”
“갑자기 그 책은 왜.”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안 떠오르는데 그거 있잖아요. 책임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
사실을 말하자면 준영도 읽어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주워들었던 이야기로 뱀이니 모자니 하는 것이 나온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그 와중에 떠오른 것은 장미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 모르는 듯 말이 없는 승주 때문에 준영은 속에서 화가 북받쳤다.
“형.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요.”
격한 감정 때문인지 내뱉은 말에 다소 비약이 있음을 스스로도 알았다. 자기가 말하고는 입을 딱 다물고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며 승주도 눈썹을 구겼다 폈다. 단정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거라는 말을 내뱉는 이준영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싶었다. 그래서 아직 어렴풋한 이해에도 일단 대답했다.
“책임질게.”
그 말에 준영은 더 기가 막혀 반문했다.
“지금 무슨 말인지 알아요?”
“알아.”
“알기는.”
“있는 그대로 책임질 테니까 들어와.”
“무슨 말인지 확실히 모르잖아요.”
“준영아. 말 좀 듣자.”
무슨 말인지 하려던 준영은 어르는 듯한 말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붉어진 얼굴로 몇 번 더 손짓을 하며 무슨 말이든 하려 했다. 그걸 기다렸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말을 듣기는 뭘 들어요. 잘 가요.”
“뭐?”
그리고는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을 휙 돌려서는 달리는 만큼이나 빠른 걸음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아직 앉아 있던 승주는 단숨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짜증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하자는 대로 다 해 줬는데도 진전된 게 없어 성질이 뻗쳤다. 하는 말도 다 듣고 알겠다고 했는데 더 이상 뭘 어쩌라는 건지.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려 쥐었던 주먹에서 살이 벌어지는 느낌에 움직임을 멈췄다. 연고 하나 바르지 않고 밴드만 붙여 둔 손에 핏기가 다시 어리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으면 모를까 물티슈로 문지르고 온갖 곳에 밴드를 붙여 둬 상처가 더 벌어진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병원이 있는지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던 승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준영이 사라진 골목 가장 안쪽의 고시원 건물을 잠깐 노려보고는 뒤돌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들어가서 끌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마음을 접고 기어코 걸음을 돌린 것은 그래서야 이전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대신 조급한 마음을 늦췄다. 책임이라. 마지막 대화를 생각하며 차로 다가가던 승주는 운전석 문을 열기 전 할 일을 생각해 냈다. 왼손으로 천천히 재킷 안의 휴대폰을 꺼내들고는 저장되어 있는 휴대폰 번호를 찾아 눌렀다. 길고 긴 신호음이 가고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자 그와 닮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 뭐야.
“너 어디야.”
- 뭐?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가 순간 말을 잃었다. 승주가 다시 한 번 물으려는데 대답이 들려왔다.
- 나 어디냐고? 그걸 형이 궁금해 한 적 있었어?
“지금껏 알 필요가 없었고 지금은 알아야 하니까.”
- 왜?
“어디냐고.”
- 형 이준영 만났어?
“집?”
- …아니. 제주도.
목소리가 대답하는 말도 안 되는 장소에 그는 운전석을 열고 몸을 낮춰 들어가며 씹어뱉듯 말했다.
“진짜 제주도에 던져 버리기 전에 말해.”
***
샤워를 하느라 푹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준영은 침대 매트리스에 걸터앉았다. 성인 남자의 무게에 맞춰 깊숙이 내려가는 매트리스가 몸을 받쳐 지지했다. 앉기에 편한 곳은 아니지만 책상 앞 의자를 빼 거창하게 앉기에는 귀찮아 늘 이 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멍하게 있는 사이 좁은 방 안에서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울렸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울리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를 더듬어 이불을 들춰 보니 알림이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액정에는 뜨는 승호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갱신되었다.
「이준영 전화좀」
「안보냐?」
「너 우리 형 봤음?」
「저기요 살려주세요」
영문 모를 문자가 쌓여 가는 것을 보고 준영은 다시 휴대폰을 뒤집었다.
젖어 들어가는 목덜미를 느끼며 다시 수건을 들어 물기를 털었다. 이런 순간이 그동안 빈번하게 있어 왔다. 승호를 보는 것만으로도 미약한 죄책감이 드는 순간들.
오늘처럼 벼락같은 일이 벌어진 날에는 특히 더 그랬다. 애초에 한 프레임 안에 이 두 형제가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아 다행이지만 이렇게 연속적으로 보는 것은 심적인 부담이 컸다.
진동은 곧 잠잠해졌고 준영은 그제야 머리에 덮어쓰고 있던 수건을 치우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쌓여 있는 승호의 문자에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유리알처럼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휴대폰의 액정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한 번호를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화면에서 머뭇거리기도 했다. 저장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번호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은 쉽지 않아서였다. 옆으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샤워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상처에 물티슈를 문지르고 반창고를 붙이다니. 무슨 멍청한 짓이었나 하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지금 떠올려 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을 남의 손에다 해 놓은 꼴이었다. 걱정되기도 하고. 준영은 반질반질한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미쳤네.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까 울고 난리를 치던 것까지 떠올라 등 쪽에 구겨져 있던 이불을 천천히 끌어다 온몸을 둘러쌌다. 엄마에게도 해 보지 않은 투정이었다. 투정보다는 좀 더 격한 감정 다. 준영은 길게 뻗은 몸에 이불을 둘둘 말듯이 감고 다리를 구부려 발끝까지 모두 감췄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가를 비비니 짧은 한숨이 나왔다. 승주의 앞에 있으면 멍청한 짓을 많이 한다지만 오늘은 특히 더했다. 책임이니 뭐니 했던 말은 대체 왜 했을까. 이제야 창피함이 몰려왔다. 이대로 침대 밑으로 꺼져 두 번 다시 못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창피함에 몸부림치다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까 담벼락에 거하게 박아 버린 문짝. 승주는 됐다고 했지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닐 것만 같았다. 차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지만 외제차가 더 비싸다는 기본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 문을 살살 여는 것도 기본 상식인데 어쩌다가 그런 것인지. 이제는 약간 울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손가락을 겨우 액정에 갖다 대 전화를 걸었다.
전화 버튼을 누르고 나자 다시 마음이 초조해졌다. 차라리 승주가 안 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손톱만큼은 있었건만 전화는 연결되고야 말았다. 일단 전화를 걸었으니 다시 끊어 버릴 수도 없어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대고는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해도 옆방에 통화 소리가 들릴까 걱정됐다.
“형. 집이에요?”
- 이제 들어가.
그게 빈말은 아닌지 딱딱한 바닥과 구두 굽 부딪히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익숙한 음의 높낮이가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짚어 낼 수 있도록 선명하게 들렸다. 그 모든 것을 연상하듯 따라가며 집에 들어서는 승주를 생각했다. 손잡이를 잡는 손은 괜찮을까.
“병원 다녀왔어요?”
- 아까 감아 줬잖아.
낮은 목소리가 담담하게 말하는 것을 듣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거 그대로에요? 형. 생각해 봤는데 밴드는 아닌 거 같아요.”
- 왜?
“아닌 거 같으니까 그렇죠. 병원 가요.”
- 내일 갈게. 어차피 내일이면 떨어질 것 같으니까.
이 말을 하며 승주는 어두운 집의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현관의 센서 등은 곧 꺼졌고 거실은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들었다.
리모컨을 만지거나 TV를 틀어 볼 생각이었던 그는 대신 다친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 두고 시선을 내리깔아 살폈다. 네온사인이나 조명이 다 꺼진 밖에서 훤하게 들어오는 것은 달빛뿐이었다. 테라스 밖에서부터 길게 들어온 빛이 벌린 다리 한쪽에 드리웠다. 승주가 다른 말을 안 하자 준영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차 이야기를 꺼냈다.
- 형 그리고 차요.
“차?”
- 네. 그거 어쩌죠.
“어디 또 긁었어?”
그 말에 진저리치듯 아니라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승주는 미소를 슬쩍 그렸다가 지웠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 죄송해요. 저 용돈 모은 거 있어요.
“얼마나.”
- 지금 확인해 볼까요.
“됐어. 이야기나 계속 해 봐.”
- 무슨 이야기요?
“뭐든지.”
- 그러니까 어떤 거요.
“지금 하던 대로.”
승호가 도대체 뭐라고 한 것인지 알려 준다면 제일 편하겠지만 그것은 뒤로 미뤘다. 대충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알 법했다. 의미 없는 맞선 자리에 대해 알고 있는 이준영. 그리고 전화를 하자 이미 눈치 좋게 도망친 권승호.
지금 당장 본가로 쫓아가 털어 볼까 했지만 이미 도망치고도 한참 남았을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 집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아마 주말쯤이면 기어 들어올 것이 예상됐다. 하루 이틀이면 안심하고 들어올 그 안일한 뒷덜미를 어떻게 낚아채 줄까. 뻔한 행동 패턴을 그려 보니 급할 것도 없었다. 급하지는 않았지만 되도 않게 말을 흘리는 버릇은 이번 기회에 도려내 줄 생각이었다.
승주는 이런 행동을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진저리치도록 싫어했다. 뭣도 모르면서 말하는 사람들. 자신의 허물은 생각지도 않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 태도. 승주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깊게 뿌리박힌 테두리에 들어오려는 이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동안 이 테두리 안에 들인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 뭐든지요?
“응. 문짝 값 대신이라고 하자.”
혹시 할 말이 없다고 뺄까 봐 승주는 미리 조건을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영의 목소리가 급작스럽게 조용해졌다. 무슨 말을 하겠다고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생각이 많아지면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것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도 그러고 있겠지. 그런 것을 떠올리면 괜히 귀엽게 느껴졌다. 늘 준영을 나이보다도 더 어리게 보는 습관은 이 순간에도 여전했다. 그에게는 늘 그랬다. 키보다도 훨씬 작아 보였고 아무리 먹여 놔도 그저 마르게 보이기만 했다.
- 형 나 졸린데.
“그럼 하다가 자.”
- 네?
“하다가 끊지 말고 잠들어. 내가 끊을게.”
어두운 와중에 희미한 빛이 윤곽만을 남긴 책장을 보다가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순간 두 사람 모두 말이 멈췄다. 승주는 자신이 내뱉은 문장에 굳어 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간지러운 문장이었다. 졸린다고 핑계를 대기에 퇴로를 막으려 한 말인데 나온 말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문장이라 소름마저 끼쳤다. 말을 잊은 듯 숨소리만 색색 들리는 휴대폰에 대고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벌써 자?”
- 아, 아니요. 어. 그럼. 뭐부터 이야기하지.
“승호부터 할까.”
- 승호요? 어떤 거요?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 승호에 대해서도 좋고. 네가 요즘 나가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괜찮아.”
- 뭐부터 이야기하지. 진짜 차 괜찮아요?
“그 이야기는 그만.”
그는 다친 손을 들어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말을 끊었다. 차 이야기는 제외하고 무엇이든 듣고 싶었다. 이준영을 한참 어렸을 때부터 봤으며 그 시간은 길었지만 자주 만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만날 때마다 텀은 길었고 아직 학생이던 준영은 그저 승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대화의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상하리만치 초조했고 기갈을 견디지 못해 일단 준영을 안았다. 준영이 급변하는 관계에서 적응하려 허덕이는 것을 모르는 척하던 그때가 후회스러웠다. 늘 웃고 있던 표정이 언제부터인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가라앉은 표정들로 바뀌어 갔다. 그랬었다. 이제는 궁금했다. 이준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 아까 그 편의점이요. 삼각김밥을 먹고 싶은데 남아 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진짜 아무 말이나 시작하는 것을 들으며 승주는 천천히 소파 등받이에 등을 깊게 파묻으며 고개를 젖혔다. 천장은 여전히 어둠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번져 나가는 목소리가 있어 어둠을 신경 쓰지 않았다.
***
머리 위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베개 밑에 파묻어 두고 있던 팔이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손에 닿았던 휴대폰이 밀려 침대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준영은 온 힘을 다해 몸을 한 바퀴 굴렸다.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알람은 제때에 울린 것이 맞았다. 이 피곤은 지난밤 너무 늦게 잠든 것이 문제였다.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졸리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빠져나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결국 잠이 들었고 깨어 보니 알람이 울리는 지금이었다.
길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려던 몸이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왔다. 휴대폰을 켜 다시 시간을 확인해 보려는 찰나 승주의 문자가 온 게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비췄다. 새벽 다섯 시 오십분. 아마 출근에 맞춰 일어난 시간인 듯했다. 어쩌다 다시 이렇게 된 것인지. 의문에 빠지기에도 너무 졸려 준영은 뻑뻑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는 눈을 부릅떴다. 사위가 흐릿한 가운데 문자가 보였다.
「어제 몇 시에 잤어.」
「몰라요. 말하다 그렇게 잤는데.」
문자의 답장은 금방 왔다. 깜빡 다시 잠에 들 뻔했건만 가슴위에 올려 둔 휴대폰의 진동 덕분에 다시 깨어났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답장을 확인했더니 영문 모를 소리가 있었다.
「어제 다시 안 일어났어?」
「네 지금 일어났어요」
이번에는 문자가 다시 오는데 텀이 있었다. 다시 잠들었다가는 못 일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샤워를 하고 들어왔다. 휴대폰에는 문자가 또 도착해 있었다. 그 위에 새벽 동안 온 승호의 문자는 무시했다. 오늘 저녁에 한 번에 답장하거나 전화로 때울 생각이었다. 그는 빠져도 될 만한 강의가 있는지 기억해 보며 문자를 읽었다.
「오늘 밤에도 전화해. 끊지 말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있는 문자를 보고 준영은 불안해져 물었다.
「왜요?」
「그냥」
짧은 단답형의 문자가 바로 돌아왔다. 이준영은 어제부터 손발이 오그라들어 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재빠르게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 버리고는 움찔거리는 손을 주체 못하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주의 행동이 민망하고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학교는 가야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빠질 만한 강의가 없었다.
***
묵직한 전공 책을 팔에 끼운 뒤 문을 닫고 나왔다. 의미 없는 일임은 알지만 습관적으로 문을 잠그고 눌러 닫았다. 신발장 근처 방에서 나온 남자가 문 쪽을 향해 있는 준영의 등을 스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면 쥐 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였지만 아침이 되자 여기저기에서 작은 인기척들이 들렸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복도의 공기는 꿉꿉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다양한 냄새와 습기가 섞여 옷감의 굵은 올에도 인이 박일 것만 같았다. 준영은 신발장 위에 전공 책을 잠깐 올려놓고 운동화를 찾아 신으며 생각했다. 역시 기간을 채우면 고시원을 옮겨야겠다고. 하다못해 외창이 있는 방으로라도 옮기는 것이 맞을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은 도대체 언제 고치는 것인지.
막 신발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익숙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부터 계단을 타고 왕왕 울렸다. 한 층을 내려와 보니 아주머니는 3층을 나서며 여학생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돌아서는 중이었다. 준영은 그 뒤에서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잠시간 기다렸다. 막 이야기를 마치고 몸을 돌리던 아주머니는 번듯하게 서 있는 준영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살갑게 인사했다.
“학생. 안 그래도 말해 주려고 했어. 이번 주말에 우리 아저씨 고치러 올라온대.”
“그래요? 다행이다.”
“지금 고칠 거 다 찾는 중이야. 그동안 고생시켜서 미안해.”
팔꿈치 부근을 툭툭 두드리고는 올라가는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건물을 울렸다. 준영은 계단 난간의 틈새로 위를 돌아보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신경 쓰이던 것 중 하나가 해결이 된 게 어디인가 싶었다.
그리고 골목을 통과해 편의점 앞을 지나칠 때, 비어 있는 담벼락 옆의 골목을 보고는 학교로 걸음을 빨리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줄지어 늘어서 있는 작은 카페 중 하나에 들어갔다. 습관이 되어 버린 아침밥 때문이 그 역시 귀찮기도 했었다. 안 먹던 때에는 배고픈 줄도 몰랐다지만 한번 먹기 시작하니 아침마다 자꾸 무언가를 찾게 되었다. 이 역시 승주와 함께 살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커피 대신 바나나주스를 고르고 음료를 받기 전 카운터 앞 테이블에 잠깐 가방을 올려놓고 전공 책을 어떻게든 밀어 넣으려 애썼다. 손에 들고 가기에는 역시 팔이 아팠다. 가방에서 다른 정리할 것이 없나 살펴보다가 결국 휴대폰 하나만을 손에 들고 주스를 받아 들었다. 나오면서 그제야 승호의 문자에 답장을 쳤다.
「왜그래」
문자를 보내고 바나나주스를 단숨에 빨아 먹는데 그사이 답이 왔다.
「너 우리형 다시만남?」
그 문자에 답장을 보내는 손가락의 물기가 액정 위에 묻어 나와 자꾸 오타가 났다. 그래서 긴 말은 포기하고 짧은 문자를 보냈다. 준영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그걸 다 미뤄 두고 보낸 문자였다.
「ㅇㅇ」
「아이런ㅅㅂㅁㅊ」
다른 학생들과 섞여 들어가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다시 안 물어도 뻔한 욕설이 있는 문자를 보고 물기 어린 손가락을 옷에 슥슥 문질러 닦고는 답장을 보냈다.
「ㅗ」
그리고는 휴대폰을 꼭 쥐고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권승주가 왔고 그래서 얼굴 좀 봤다고 갑자기 욕먹을 이유는 없다는 게 준영의 생각이었다. 아직 졸음으로 멍한 머리가 더 깊은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오전의 첫 강의가 단조롭게 흘러갔다. 필수 교양 중에서도 대단위 강의실에서 많은 학생들을 데리고 하는 강의는 그 성격상 수업 참여도가 클 수 없었다. 출석 체크도 그저 지정석에 앉으면 됐다.
준영은 원형 강의실의 중간 정도의 자리에 사람들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휴대폰을 계속 만졌다. 다른 학생들도 각자 볼펜으로 쓸 단어만을 끄적거리거나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어차피 수업 자료는 학교 홈페이지에 PPT형식으로 다 올라올 예정이었다.
그래도 준영은 예의를 갖춰 강의에 집중하던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더 바쁜 일이 있어 그러질 못했다. 손가락은 볼펜을 쥐기보다 휴대폰 액정 위를 오가기 바빴다. 무시하고 다른 일을 하려 해도 승호가 자꾸 문자로 물고 늘어졌다.
「아무리생각해도 아닌거같음」
「내 문자 보고있냐?」
「다른 인간도 아니고 우리 형을?」
「그인간 나잡히면 집 대문앞에 걸어버린다고 협박하고있ㅇ어」
순식간에 몰아닥치는 문자들을 보며 준영은 쓰던 문자를 자꾸 쓰고 지웠다. 슬슬 짜증이 오르고 있었다.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쏟아 내기만 하는 승호의 문자는 누구든 짜증 나게 할 법 했다. 무엇보다 승주를 한 번 만났다고 이렇게까지 온갖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대체 뭘까.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 순간, 준영은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인식하기도 전에 손아귀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놓쳤다. 휴대폰 귀퉁이가 책상에 부딪혔다. 낮게 들고 있었기에 휴대폰의 다른 면은 아직 손에 걸렸다. 툭, 하고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준영은 온 강의실의 소음이 자신에게 몰아닥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만큼 예민해졌고 소름이 돋았다. 호흡이 멈추고 차게 굳어 가는 손가락을 구부려 휴대폰을 다시 집었다. 그 와중에 크게 뛰는 심장이 아직 남은 둔통을 혈류마다 퍼트리고 있었다.
왜 승호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웃음이 입가에 걸려 숨소리와 작게 섞여 나왔다가 사라졌다.
아무리 승주와 가까웠다 해도 가족만큼 가까울 수는 없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의 곁에 잠깐 있었다고 사고 체계가 어떻게 된 것만 같았다. 가족과 멀다 해 봤자 남보다는 가까운 법인 것을. 화이트 노이즈처럼 깔린 강의실의 잔잔한 소음이 귀에 들리고 준영은 다시 휴대폰을 똑바로 잡았다.
그사이 새로 온 문자는 없었다.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래 봤자 머릿수가 많은 강의실이라 공기가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승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이것은 승주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가족들이 그의 취향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남자를 만난다고 아는 것인지. 아니면 내밀한 취향까지 아는 것인지. 묻기 거북한 주제였지만 이대로 지금 승호에게 무슨 질문을 던져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로 열이 오른 듯한 이마를 문지르다가 손을 내려 명치께를 눌렀다. 몸이 발작 같은 반응을 내뱉고 있었다. 다시 문자를 무시하려는데 마지막 문자가 눈길을 잡아당겼다. 검은 동공이 문자를 뚫어지도록 보다가 잘게 흔들렸다.
「너 첫연애가 우리 형이라 감이 안오는거 아님? 다른사람만나보면나을지도」
이 문자만은 차마 넘기지 못하고 대답을 했다. 이미 자신의 형이 남자 만나는 것 정도는 승호도 아는 것 같은데 숨길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승주형이랑연애한적없어」
마지막 답장을 끝으로 그의 엄지손가락이 전원 버튼을 꾹 눌러 껐다. 준영은 천천히 꺼져 가는 휴대폰 액정을 보다가 내려놓고 다시 손을 명치 근처에 가져갔다. 빈속이 아닌데도 쿡쿡 쑤셔왔다. 아까 찬 주스를 마신 탓인가 싶었지만 아니라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쿡쿡 쑤시다가 오그라드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책상에 상체를 기댔다가 허리를 폈다. 다른 의미의 묵직한 피로감이 양 어깨를 짓눌렀다.
***
“형.”
- 응?
“저 계속 말해요?”
- 계속해.
변함없는 목소리가 변함없는 대답을 했다. 그 대답에 침대가에 앉아 있던 몸이 허리를 길게 빼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자마자 온 전화는 정말 자기 전까지 이어질 생각인지 끊이질 않았다. 허벅지 위에 늘어뜨리고 있었던 한 손을 들어 등과 허리를 툭툭 쳤다. 주먹이 꼬리뼈 부근을 두드리자 일정한 소리가 났다. 승주는 그것을 캐치하고는 물었다.
- 뭐 해.
“허리 두드려요.”
- 이제 자. 늦었네.
“형은요?”
- 곧.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종이 팔랑거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준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했다. 직접 안 봐도 뻔했다. 오늘도 할 일이 남은 모양이었다. 같은 집에 있을 때 자주 보던 모습이었다. 승주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 마지막으로 안착하는 곳은 침실 침대의 옆 사이드 테이블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권승주는. 이미 주어진 것이 많은데도 그보다 배의 노력을 쏟는 사람. 서류를 훑어보고 내려놓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준영은 찬찬히 상체를 침대 위에 눕혔다. 무릎은 아직 굽혀진 채 침대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희게 드러난 발을 까딱이듯 움직였다. 천장의 전등을 멍하게 응시하며 준영은 입을 움직였다.
“아까는 승호랑 문자 했었는데요.”
- 혹시 승호 어디인지 들었어?
“아니요.”
- 다음에 들으면 알려 줘.
“왜요?”
- 할 일이 있어서.
할 말도 아니고 할 일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낮에 승호가 문자로 했던 말을 떠올리려 눈동자가 움직였다. 줄줄이 이어지던 말들에 밀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떠올리기는 깔끔하게 포기 하고 목소리를 다듬고는 물었다.
“승호가 형이랑 저 만나냐고 물었어요.”
- 승호가?
“그래서 놀랐는데. 생각해 보니까 당연한 거였어요. 형이 어… 그런 성향이면 집이 아예 모를 수는 없지 않을까 하고.”
휴대폰 너머로 승주는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다소 거친 숨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도 준영은 묵묵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딱히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다 아파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감정이었다. 놀라기도 이미 다 놀랐고. 그래서 견딜 만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반응에 승주가 드디어 질문했다.
- 그래서 뭐라고 했어?
“처음에 만나냐는 질문이 그 뜻인지 모르고 그렇다고 했다가 계속 문자 오는 거 보고 알았어요. 처음에는 그냥 형 오랜만에 봤냐고 묻는 줄 알고… 저 잘못한 거예요?”
- 아니야. 잘못은… 그 새끼가 했지.
“다행이다. 약간 긴장했는데.”
- 뭐라고 대답했어?
대답을 재촉하는 질문이 다소 초조했다. 준영은 그냥 있는 대로 대답했다.
“형이랑 그런 식으로 만난 적 없다고 했어요.”
- …….
이번에는 승주가 할 말을 잃었다. 귓가에 전달되는 깊은 숨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다리를 올려 침대에 똑바로 누웠다. 좁은 방 안에는 꿉꿉한 습기의 냄새가 배어 코끝에 감돌았다. 오래된 나무의 희미한 냄새도 섞였다. 그런 의미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기다리자 묵직한 목소리가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목소리와 함께 섞이는 미약한 소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래. 그랬지.
새삼스럽게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준영은 반대편 손을 올려 판판한 가슴의 왼편을 꾹 눌렀다. 제멋대로 조여드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차라리 전화를 끊을까 생각도 했다. 통화 종료 버튼을 찾으려 까딱이던 손가락이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거렸다.
- 그런데.
“…….”
-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오늘도 승주의 말투는 이상하다. 평소와 같이 자신감에 단단하게 벼려진 어투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담은 생소한 감정에 준영은 가슴을 누르고 있던 손을 주먹 쥐었다. 힘을 주고 꽉 쥐었던 손을 다시 느슨하게 풀었다가 심장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사람은 자신의 인식을 바라보는 대상에 투영시키기 쉬웠다. 이준영도 그랬다. 승주의 행동과 말투는 하나의 견고한 이미지가 되어 머릿속에 오랜 시간 자리 잡아 왔다.
자신감, 냉정함, 어른스러움, 승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없이 좋았지만 어려운 사람. 감정의 호수 깊고 얕은 모든 구석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견고해진 이미지 속에서 이러한 대화의 패턴은 익숙지 않아 당황했다.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어떤 게요?”
- 감정이 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 이제 보면 이렇게나 뻔한 건데.
“형?”
말꼬리가 올라가는 질문에 승주는 몇 마디를 더 하다 말았다. 그 말투가 이상하리만치 담담하면서도 듣기에 편안했다. 더 이상 말을 안 하는 승주에게 더 물으려던 준영은 말을 그만두고 심장 근처를 다시 눌렀다.
-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네?”
준영은 오늘따라 대화를 이어 가기가 어려웠다. 대화뿐만이 아니었다. 승주의 감정 변화가 도대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반문하기에 바빴건만 상대는 시원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 전화로 할 건 아니라서. 시간 언제 돼?
“형은 언제 되는데요?”
대답을 하고 나서야 차라리 거절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초에 만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만날 것을 가정하고 시간을 물었으니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말을 하려는 준영보다 승주의 대답이 더 빨랐다.
- 지금이라도 볼까?
“지금이요?”
이미 새벽이라 하는 게 훨씬 맞는 시간이었다. 준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짐작한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 출근해야죠. 저도 학교 가야 하고.”
- 그래. 그럼 주말.
“네. 주말… 알았어요.”
- 그럼 이제 그대로 자.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그 말에 반듯하게 누워 있던 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꽉 닫힌 문과 역시 닫혀 있는 창문을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 밖을 올려다보다가 일어나 밖을 보는 것까지는 그만두고 다시 자리에 천천히 누웠다.
혹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한 말이다. 안 그래도 승주가 왜 이러는 것인지 벌써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고민하는 것까지 막다니. 그건 억울했는지 준영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말했다.
“생각이 제멋대로 나면요?”
- 만나서 이야기할 때까지 멈춰 봐.
“안 멈춰지면요.”
- 다른 생각해.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었으면 진작 그랬을 것이었다. 준영은 베개의 위치를 바로 해 머리를 기댔다. 휴대폰 너머에서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다른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도 희미하게 끼어들자 의아함에 물었다.
“TV 켜 뒀어요?”
- 왜.
“무슨 소리가 들려서요.”
- 대충. 잘 거야?
“네. 진짜 전화 끊지 마요?”
- 두고 그냥 자.
“신경 쓰여서 잠 안 올 거 같은데.”
이미 졸음으로 눈이 뻑뻑했지만 일단은 이렇게 반항해 봤다.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전혀 봐줄 기색이 아니다.
- 지금 보자니까 학교 가야 된다며.
“형도 회사 가잖아요.”
- 난 상관없어.
“…잘게요.”
허리 밑에 깔려 있던 이불을 당겨 빼 몸 위에 덮었다. 이불이 마찰되며 몸을 움직이자 희미한 스프링 소리가 삐걱거렸다. 방의 불을 끄고 아랫배까지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휴대폰에서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자?
그 부름에 일부러 말을 안 했다. 정말 잘 생각이기도 했고 기분이 이상해서. 느릿한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흘러나왔다.
- 아직 안 자면 생각해 봐.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그 말을 듣고 준영은 정말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모로 눕고 베게에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흐트러지도록 머리를 파묻었다. 그러고도 이상한 감정이 수습되지 않아 골반 위에 걸쳐진 이불을 끌어다 머리 위까지 덮어 몸을 숨겼다.
***
적막 속에 소란한 소리가 울렸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던 몸이 바로 누웠다. 뒤척이던 몸은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서늘함을 느끼자 손을 내려 이불을 찾았다. 아랫배 부근에 손을 휘적여 보았지만 그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뜨일 듯 흔들렸다. 정신은 아직 무의식과 수면의 경계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손 하나가 불쑥 다가와 준영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준영은 갑작스러운 체온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시야에 사람의 인영이 잡혔다. 창으로 들어오는 불빛이 남자의 정수리만을 비추며 얼굴 부근에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이 뜨이자마자 다른 손이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갈고리 같은 손이었다. 목울대가 눌려 반사적인 기침에 몸부림치자 남자는 더 힘을 주며 침대 위로 올라탔다. 허벅지 부근을 무릎으로 눌러 올라타서는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줬다. 제멋대로 눌린 몸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숨통이 막혀 몸부림이 잦아들자 매트리스의 삐걱거림마저 줄었다.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숨이 부족할 때 긴 목을 누르던 손이 약간 느슨해졌다.
틈바구니로 숨을 들이쉬며 준영은 눈을 깜빡였다. 아직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가까이 왔다. 한껏 낮춘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조용.”
“…….”
“왜 깼지. 좆 됐네. 씨발.”
초조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준영은 부족한 숨을 들이쉬려 고개를 흔들었다. 몸부림치다가, 다시 목을 인정사정없이 눌러 오는 손길에 숨이 부족해졌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던 팔다리가 다시 이완되자 남자는 손의 힘을 다시 풀었다. 준영은 다시 호흡했다. 죽이려고?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턱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떨려 왔다.
그 와중에 산소가 부족한 뇌가 움직이질 않아 늘어졌다. 눌린 목이 아팠고, 부었는지 벌써 숨 쉬는 것이 힘겨웠다. 몸 위에 올라탄 남자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겨우 알아챘다.
차라리 그냥 가기를. 무기력한 와중에 준영은 목을 길게 빼 호흡만은 어떻게든 해 보려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짓누르는 힘에 버텼다. 그냥 가. 가 버려. 그냥 가면 되잖아.
그렇게 늘어진 몸이 다시 발버둥을 친 것은 남자의 무릎이 골반뼈 부근을 아프게 누르며 덮쳐 왔기 때문이었다. 아랫배에 닿는 천의 질감이 선명했다. 윗옷이 끌려 올라가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인 혐오감이 몸을 뒤틀었다.
다시 요동치는 준영을 붙잡으려 남자가 있는 힘껏 목을 짓눌렀다. 끔찍한 고통이 숨통을 조여 오는 와중에 있는 힘껏 휘두른 손이 남자의 머리에 부딪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손아귀의 힘이 주춤하는 사이 몸을 있는 닥치는 대로 밀었다.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침대 아래로 밀려 떨어졌다.
준영은 힘이 풀린 팔로 어떻게든 몸을 지탱해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내 보려 했지만 잔뜩 부은 목에서는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힘이 풀려 제대로 디디지 못하는 다리를 세워 일어났다. 방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침대 아래로 내려가 밟히는 사람을 지나쳐 문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문을 밀어 열려는 찰나 뒤에서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손이 있었다. 피하기도 전에 힘에 끌려 있는 힘껏 젖혀진 머리가 휘둘리는 대로 문에 쾅 부딪혔다. 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얼굴을 문에 부딪히자 눈앞은 새하얗게 변했다. 하얗다가 새까맣게 점멸하며 시야가 멀어졌다. 몸이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기울어져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런 준영의 뒤에서 남자가 발목을 잡아당겼다. 그 힘에 딸려 준영의 몸이 바닥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뒤로 죽 끌리는 몸을 느끼며 다시 발버둥치려 했다. 뒤에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남자의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렸다.
“씨발, 이게 아닌데. 아이, 미친. 씨발.”
그런 속삭임을 들으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뺨에 느껴지는 바닥이 찼다. 그 와중에 골이 흔들린 듯 머릿속이 멍했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작은 이명도 섞여 울려 댔다.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혈흔을 보았다. 새빨갛고 선명한. 문에 부딪힌 코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렀다. 현실 같지 않은 눈앞의 모습에 깊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가야 하는데. 그 생각도 어지러운 사이에 흐려졌다. 무자비한 폭력이 손발을 굳게 만들었다.
그 순간 옆방에서 신경질적으로 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다시 목소리를 내 보려 몸을 들썩였지만 남자는 재빠르게 등 위로 올라타 입을 막으려 다시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그러다가 혈흔을 보고는 기겁해 손을 털어 내고는, 그래도 어떻게든 준영의 입을 다시 막았다. 아까처럼 코와 입을 모조리 틀어막지는 않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메웠고 준영은 작게 숨을 쉬었다. 남자의 손바닥이 닿는 얼굴 부근이 온통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소름이 끼쳤다. 희미한 목소리만이 손바닥 밖으로 웅웅 울렸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등 위에 남자도 거친 숨만을 내쉬었다.
그 순간 밖에서 무언가 박살나는 큰 소리가 들렸다.
엎드려 누운 몸도, 그 위에 올라탄 몸도 동시에 움찔거렸다. 쾅, 하는 소리가 가시고 얼마 있다 다시 큰 소리가 울렸다.
쾅, 쾅.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소리가 문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멀리서 울리던 소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옆방의 남자가 욕설을 지껄이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그 순간 바로 옆방의 문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벽 너머로 쌍욕이 들렸다. 그 목소리가 다 멈추기 전에 준영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나무 문 틈과 바닥 사이, 작은 틈바구니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남자의 손바닥에 뭉개지고 있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늘 흔들리던 삶이었지만 하나의 구원이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던 교회 사람들이 말하는 신보다 가까운, 같은 위치에. 오히려 자신이 몸을 수그리고 파고들고 싶었던 그런 구원이. 모든 손길이 기꺼운 사람이.
문이 당겨지며 열렸다. 환한 빛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준영은 버티고 있던 고개를 떨궜다. 열린 문이 벽에 부딪히며 쾅, 하는 소리가 벽을 진동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승주는 방 안의 상황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좁고 어두운 방 안의 광경은 적나라했다. 부릅뜬 눈의 흰자위에 실핏줄이 섰다. 순식간에 한 발 내디딘 걸음이 바닥에 엎드린 몸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승주는 그것을 깔고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봤다.
이성이 돌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멍청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남자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승주는 한 발에 무게를 싣고 다른 한 발을 크게 회전해 그대로 걷어찼다.
채찍처럼 뻗어 나간 다리가 남자의 몸을 강타하자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몸뚱어리가 옆의 벽에 부딪혔다. 다시 한 번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두 걸음 더 나아 갔다. 상체를 기댄 채 쓰러지려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어깨부터 팔에 온 힘을 실어 쥐고는 그대로 벽에 들이받았다. 이번에는 더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남자의 가슴팍에 발을 지그시 누르고 체중을 실어 짓밟으려다 고개를 돌렸다. 들리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형.”
그 목소리에 승주는 다시 문간으로 돌아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준영의 얼굴 부근의 바닥에 핏물이 번졌다. 무슨 일이냐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문간에서 뚝 끊길 때까지 승주는 멍하니 준영을 내려다보았다. 겪은 적 없는 고통이 온몸을 지배했다. 심장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불태울 듯 열기로 휩쓸었다가 순식간에 떨림으로 변했다.
무슨 일이 있을까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 억지로 손을 뻗었다. 엎드린 몸을 끌어다 고개를 돌려 숨을 확인하고 핏기를 닦았다. 손바닥 안의 따뜻한 숨결에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팔을 엎드린 상체 아래로 끼워 넣어 일으켰다. 늘어진 몸이 그의 손길에 어떻게든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런 몸을 품 안에 기대도록 어깨를 단단히 잡아 고정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턱을 잡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게 했다. 초점이 남아 있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승주가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준영아.”
준영은 그 모습을 오래도록 올려다봤다. 일그러진 표정을. 유려하고 짙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에 온갖 감정이 범벅이 되어 뒤섞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얼굴에 닿는 숨결이 뚝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기대 안긴 승주의 가슴이 급격하게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촉감으로 알았다.
준영의 눈가에 그제야 눈물이 차올랐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얼굴에 묻은 피와 섞여 흘렀다. 턱가를 타고 줄줄 흐르는 핏물이 방울져 떨어질 때쯤 부어서 꽉 막힌 목의 틈으로 겨우 목소리를 만들었다.
“형. 나. 아파….”
승주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술을 짓씹었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며 늘어진 몸을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문 밖으로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준영을 안아 일으킨 승주가 쓰러진 남자를 노려봤다. 얇은 허리에 단단히 팔을 두르고 준영을 기대 세운 승주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다리를 움직이려 했다.
그 기색을 알아채고 준영은 어떻게든 손을 움직여 승주의 손등 위에 가져다 댔다. 작은 접촉에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던 승주는 준영을 내려다보았다. 핏기에 젖은 입술이 말을 내뱉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 돼. 가요.”
“…….”
“그러다 죽어요.”
그것이야말로 지금 권승주가 가장 바라는 것 중 하나였다.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짓밟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도 있었다. 아니, 정말 순수하게 죽이고만 싶었다. 어떻게든, 가장 고통스럽게. 끊임없는 욕구가 뒷골이 당기도록 속삭였다.
밟아. 더 패. 걷어차 등등. 견딜 수 없는 분노가 다시 눈앞을 가리려 할 때 준영은 어떻게든 승주의 손등을 매만지며 품에 뺨을 비볐다. 울리는 승주의 심장 박동이 거세다는 것을 알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준영의 눈에도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푸르게 핏줄이 올라 힘이 꽉 들어간 손등을 만지다가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듯 약한 힘으로 손을 잡았다. 승주는 감정의 사슬을 억지로 끊어 내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가 상할 정도로 강한 힘으로 이를 갈다가, 결국 다시 준영의 몸을 받쳐 안았다. 맥없이 어깨에 기대 오는 이마를 느끼며 승주는 문간의 사람들을 밀치고 나갔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좁은 복도를 메우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아주머니의 목소리도 귓가에 쟁쟁했다.
“아니. 세상에. 이게 뭐야! 학생 괜찮아?”
“저 괜찮아요. 코피만….”
그 와중에 애써 웃어 보이려는 말을 승주가 잘랐다.
“다들 비켜.”
“아니 이게 무슨 일인지 말은 해줘야.”
“안 비킵니까?”
호들갑이던 아주머니마저도 승주의 무서운 기세에 연신 어쩌냐는 말만 되풀이 하며 걸음을 물렸다. 코피가 번진 얼굴과 턱의 붉은 색이 누구라도 섣불리 잡지 못할 모양새였다. 괜찮냐며 닿으려는 손길을 단호하게 피하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승주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동안 끊임없이 준영을 불렀다.
“준영아. 괜찮아?”
“네.”
나름대로 힘 있게 끄덕이는 머리를 느끼면서도 승주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괜찮을 거라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편의점의 흰 불빛과 가로등의 주황빛 불빛이 교차되는 담벼락 옆자리에 차는 주차되어 있었다. 준영은 보조석에 밀어 넣어졌고 승주도 운전석에 곧바로 올라탔다. 시동을 바로 걸고 급발진을 하듯 차가 출발했다. 안전벨트를 잊고 있던 준영은 순간 차 문의 손잡이를 더듬어 잡고 앞으로 쏠리려는 몸을 지탱했다.
휑한 골목을 빠져나가려 핸들을 급하게 돌리던 승주의 눈길이 잠깐 옆을 향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앞으로 기우뚱하는 몸을 한 번 잡았다. 동시에 천천히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며 속도를 늦췄다. 가슴 부근을 누르던 승주의 손이 떨어지자 준영은 얼굴의 핏기를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속도가 줄었다 해도 차는 거침없이 도로를 달렸다. 준영은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어디 가요?”
“병원.”
딱딱한 목소리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 대답에 준영은 코끝에 손가락을 몇 번 대고 떼기를 반복하고 내려다보았다. 새로 묻어나는 피는 없었다. 콧대를 손가락으로 잡고 눌러 보자 뻐근한 아픔이 코 안을 찡하게 메웠다.
하지만 콧대를 흔들거나 매만져 보아도 뼈에 이상은 없는 듯 했다. 누가 봐도 심각한 꼴로 대면했다는 것이 기억나지만 그래도 일단 만류했다.
“코피만 났고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데는.”
“없어요.”
“없다고?”
다시 준영을 돌아보는 눈길이 싸늘했다. 준영은 자신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침을 한 번 삼켰다. 부은 목 안이 껄끄러워 목소리가 이상했다. 무슨 대답을 못하는 표정을 보고 승주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화를 누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다행히 신호등은 지킬 생각인지 빨간불에 차는 멈춰 섰다. 우물거리던 입 모양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고작 얼굴 한 대 맞았다고 하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목이요.”
“목? 어떻게.”
불쑥 다가온 손이 섬세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움찔했다가 묵묵히 차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턱을 받쳐 들고 흰 목을 유심히 보던 승주는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뜨고는 다시 바라보았다. 어두운 차 안인데다 누적된 피로 때문에 시야가 훤하지 않았다.
중앙선 너머에서 비추는 헤드라이트가 길게 차 안을 비추고 지나가자 흔적이 보였다. 붉은 자국이 목을 길게 둘러 났다. 맞았다고 하기에는 넓고 흐릿한 자국에 꼼꼼하게 살피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를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차 안에 울렸다. 손이 떨어지고 고개를 내린 준영과 눈을 맞췄다. 콧대와 눈썹 뼈 부근이 조금씩 부어오르는 것이 보여 그의 속이 더 뒤집혔다.
“그 새끼가 목 졸랐어?”
“소리 내려고 해서요.”
큰 충격은 아니라는 듯 차근차근 대답하는 준영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승주는 핸들을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그러다가, 스스로의 화가 제어되지 않자 있는 힘껏 핸들을 내리쳤다. 찢어질 듯한 클랙슨 소리가 도로에 길게 울렸다.
승주의 격분한 모습에 놀란, 그리고 핸들이 망가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준영은 어깨를 약간 굽혔다 펴고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두 사람 다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이 신호등의 초록불이 다시 들어왔다. 신호를 한참 지나고서야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승주는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아주 밟아 놨어야 했는데.”
“벌써 밟았잖아요.”
“진단서 떼면 바로 신고하자.”
흥분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는 것에 비하면 상식적인 말이었지만 준영은 거기에도 고개를 저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나오면서 아예 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놓은 듯 쓰러져 있던 남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승주가 처음 걷어찰 때 들렸던 북 찢어지는 듯한 소리도 기억이 났다. 사람의 몸을 타격해서 날 만한 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얼굴을 확인해 보려 해도 벽에 짓이겨진 얼굴의 어딘가가 찢겼는지 피범벅이라 알아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고. 시작은 그 남자였다 해도 승주의 폭력 수위가 높아 불안했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승주가 다시 열을 내려했지만 준영의 말이 빨랐다.
“그놈 다친 거 때문에 형 문제 생길걸요.”
“안 생겨.”
“저도 팼어요.”
“어딜.”
“얼굴 어딘가.”
“그건 말하지 말고.”
드물게 짜증이 깃든 목소리였다. 하지만 준영은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질 않았다. 무슨 일이었는지. 그 와중에 뒤늦게 기억난 궁금증이 있었다.
“형. 어떻게 온 거예요?”
“전화 안 끊었잖아.”
“…아.”
신음성 같은 준영의 목소리에 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분노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드러냈다. 뒤늦은 후회도 따라왔다.
“지난번에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잠깐 문소리만 나고 말았어. 옆방인가 싶어서 바로 나오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젠장.”
“그래도 이렇게 빨리 와요?”
승주의 회사, 집, 하다못해 권씨 집안의 본가를 계산에 넣어 봐도 이렇게 빨리 올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의아한 듯 묻는 준영의 목소리에 승주는 잠깐 말이 없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없이 운전을 하다가 문득 다른 말을 했을 뿐이었다.
“견딜 만하면 큰 병원으로 간다.”
“병원 안 가도 된다니까요.”
여기까지 말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태도에 준영은 다른 말을 않고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 창밖을 봤다. 깊은 새벽의 도로는 어두워 내다볼 것이 없었다.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속도감으로 바깥의 풍경이 휙휙 바뀌기에 바빴다. 가벼운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준영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말을 많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피곤했다.
***
응급실의 자동문은 사람의 기척이 닿기도 전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문 안은 새벽 시간대와 어울리지 않는 환한 조명이 어느 구석하나 놓치지 않고 밝혀져 있었다. 막상 걸음을 들였다가 준영은 제 옷차림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주워 입은 회색 트레이닝복의 무릎이 늘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가 줄줄 흐른 상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제 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이제야 창피함이 생겨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입술을 오므렸다. 응급실의 분위기는 한산했다. 술 취한 사람이 난동을 부리거나 급박한 분위기일 거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병원 특유의 질서 있는 적막함 사이로 다양한 목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침대 사이를 가려 둔 흰 커튼을 잠깐 바라보았다. 옆 침대에 그와 비슷한 자세로 걸터앉은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지나오면서 언뜻 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매 없는 옷을 입어 드러난 팔마다 멍 자국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무런 의욕도 없는 듯 여자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호자인지 모르겠는 남자는 그 옆에 정물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승주와 함께 다가왔다. 피곤에 찌든 듯 거뭇한 눈가를 한 의사는 해야 할 질문을 하며 상처를 살폈다. 준영은 아까 승주에게 말한 폭행의 종류들을 읊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목이 졸리고 코를 부딪혀 코피가 났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긴장이 휩쓸고 지나가 손발이 저릿한 것만 뺀다면. 얌전히 눈을 감고 의사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긴 준영을 보며 승주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밝은 조명 아래 보이는 모습이 더 적나라했다. 그런 분위기에도 의사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타박상입니다. 뼈에 이상은 없네요.”
“엑스레이로 봅시다.”
“저 괜찮은데….”
“CT도 확인하면 좋겠습니다만.”
승주의 말에 끼어들던 준영은 매섭게 오는 눈초리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의사는 연속되는 승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 별말이 없었다. 진료를 더 하겠다는 보호자를 말릴 이유는 없어 보였다. 잠시 뒤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승주의 굳어 있던 눈매가 느슨해졌다. 진단서에 대해 묻는 동안 준영은 따뜻한 찜질 팩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축적된 피곤이 자꾸 정신을 갉아먹었다.
현실감 없는 밤이었다.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얻어맞고, 끌려 나와서는 응급실이라니.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듯 현실감이 부족했다. 팩을 쥐고 있는 손의 새끼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진단서는 일주일 정도 걸리니 다시 내원해 주세요.”
“지금 되는 거 압니다.”
“…절차가 그러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주가 의사와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것은 준영이 침대에 쓰러져 졸기 직전이었다. 약 먹은 닭처럼 고개를 늘어뜨리고 허리를 둥글게 만 것을 보고 승주는 천천히 자세를 낮춰 준영을 보다가 팔을 뻗어 허리에 감았다. 허리에 감아 오는 손을 느끼며 준영은 느리게 반응했다. 잠결에 흐릿해진 눈동자가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자 승주가 속삭이듯 말했다.
“가자.”
“어디요?”
“집에.”
어느 집을 가자는 것인지 물으려던 준영은 말을 멈췄다. 잠깐의 주저 끝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갈 만한 용기는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돌아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짐도 들고 나오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인지.
혹시 그놈이 먼저 승주를 신고한 것은 아닌지 앞서는 걱정들도 머릿속에서 엉켰다. 하지만 예민하게 가늘어져 있던 정신 줄이 뚝 끊인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생각하려 하면 피곤한 뇌가 생각을 멈췄다. 준영은 눈앞에 보이는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기댔다. 경직되는 어깨에 기대 온기가 전달될 정도가 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폭행에 주거 침입까지 있어. cctv는 내일 볼 거야. 나? 많이 안 팼어. 아니라니까. 진단서는 나오는 대로 받아 둘게. 당장 쓰라고 하려다 말았지. 그래.”
성마르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욕실 문 안쪽까지 울렸다. 안에는 cctv가 없는데. 이 생각을 하던 준영은 목소리를 듣다가 다시 물을 틀어 머리 위의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데일 듯 뜨거웠던 물이 이번에는 미지근하기보다 차가웠다. 빈손을 들어 다시 샤워기의 물 온도를 맞췄다.
피어오른 수증기는 조용히 돌아가는 환풍기에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로 인해 물이 흘러 떨어지는 흰 나신이 가릴 것 없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그런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손을 들어 젖어 내려온 앞머리를 치웠다.
전에 비해 부피감이 줄어든 몸을 훑어보다가 가슴팍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물줄기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미 몇 번이고 샤워 젤을 문질렀던 몸은 물기를 머금어 매끄러웠다. 그러다가 콧대 중간에 부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고는 다시 손을 뗐다. 아픔이 가신 줄 알고 한 행동이었지만 멍이 들려는지 아릿한 아픔만 줬다. 눈썹 뼈 부근에서부터 이마까지 멍 자국도 점점 진해지는 것을 보자 한숨만 나왔다.
“학교 못가겠네.”
진단서를 받아야 할 이유가 확실해졌다. 어디 한 군데만 다쳤으면 대충 가려서 해결을 봤겠지만 눈에 띄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바깥의 목소리가 끊기고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자 샤워기의 물을 끄고 들어올 때 입었던 옷을 찾았다. 어디에 뒀더라. 황망하게 욕실 안을 둘러보다가 준영은 문득 제 뒤를 보았다. 벗었던 옷이 아무런 생각 없이 던져져 있었다.
축축하게 물을 먹은 옷을 발가락에 걸어 들어 보려다가 그만 뒀다. 묵직한 무게의 옷은 이미 입지 못할 꼴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목욕 가운을 몸에 걸치고는 꼼꼼하게 허리의 끈을 둘러 묶었다. 한 번 묶고는 그 위에 겹쳐 매듭을 지어 마무리하고 욕실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 길게 욕실의 조명이 들어오면서 정면에 앉아 있는 승주를 비췄다. 전화를 끊고도 다 가시지 않은 분노로 들끓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빛을 등지고 나오는 준영의 실루엣을 뚫어지게 쫓았다. 문을 닫거나 불을 끄지도 않은 채 걸어 온 준영은 승주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한참 씻었네.”
“전화하길래 그랬죠.”
사실은 그저 욕실 안에서 정신 줄을 놓고 있었을 뿐이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짓던 미소도 잊고는 고개를 숙였다. 희게 질린 귀 아래 검은 머리카락이 끝나는 지점에서 붉은 자국이 시작되었다. 목덜미를 옭아매듯 길게 이어지는 붉은 자국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 준영도 승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깨끗한 얼굴은 핏기가 가셔 희다 못해 희미한 살색이었다. 대조적으로 붉게 멍이 되려는 자국은 천천히 번져 가고 있었다. 번져 가는 색채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다시 열기가 어렸다. 낙인처럼 찍힌 흔적에 대한 분노가 앞장섰지만 외설적이기도 한 분위기가 그를 압도했다.
“왜요?”
“멍 들겠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데도 준영은 그 말에 그냥 담담하게 다시 시선을 내렸다. 턱을 타고 내려간 시선이 잘 여며진 샤워 가운의 사이로 들어갔다가 급격히 떨어졌다. 무릎이 동그랗게 드러나고 그 아래로 긴 다리가 뻗어 바닥을 디디고 있었다.
훑어보는 시선을 본능적으로 의식했는지 발목과 발목을 교차시키며 다리가 모아졌다. 종아리의 길고 매끈하게 잡힌 근육이 발목 부근에서 가늘어지며 복숭아뼈와 섬세한 발 모양을 만들었다. 이성을 잠식하려는 생각에 승주는 쓴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감정이었지만.
그런 마음을 숨기며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 방은 그동안 닫아 둬서 먼지가 많아.”
“그래도 갈게요.”
“됐어.”
그렇게 대답하며 승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뻣뻣한 목을 돌려 근육을 풀다가 시계를 돌아보니 네 시를 지난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창밖의 어둠이 내몰릴 시간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돌려 뒤돌아 나가려는 것을 보고 준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승주의 팔을 잡았다. 잡힌 팔을 보며 승주가 뒤를 돌아보자 당황이 어린 준영의 표정이 보였다.
“형 어디 가게요.”
“잠깐 할 일.”
이런 시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못 알아챌 것이라는 생각에 대답을 했건만 어림없었다.
“제가 나가서 잘게요.”
“됐어. 얼른 자.”
“형이야말로 내일 출근할 거잖아요.”
“너는 학교 가야지.”
“학교 안 가요. 진단서 나중에 따로 낼 거예요.”
거기서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준영은 아예 승주의 앞에 서 몸을 밀어내려 했다. 서 있는 몸을 밀어붙이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는 했다. 그래도 곤란한 듯 붙박이처럼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준영이 다시 채근했다.
“형이 여기서 자요. 같이 자든가.”
“준영아.”
“네?”
“이리 와 봐.”
이미 가까워져 있는데 뭘 더 다가가야 하나 멈칫하자 승주가 부드럽게 팔을 뻗어 그런 몸을 안았다. 품 안에 안긴 몸은 샤워 가운에 싸여 포근했다. 두꺼운 천의 재질 때문에 끌어안고도 몸의 윤곽이 제대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갑자기 감싸 안긴 몸 때문에 준영은 다리를 움직이려다 승주의 발등을 밟았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지는 승주의 얼굴 때문에 준영은 얼굴을 물리려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 허리와 등을 받치고 있는 손 때문에 멀리 물러나지 못하고 버티다가, 눈가에 닿는 날숨에 힘을 꽉 주고 눈을 감았다.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입술이 이마 부근을 어루만지자 그제야 천천히 얼굴의 경직된 힘을 풀었다.
문지르듯 닿는 살결이 천천히 멍이 든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미간 사이에 닿은 입술이 미끄러져 도톰하게 올라온 콧대의 중앙 부근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안겨 있는 몸이 경직되었다가 부드러워졌다.
생각도 못해 본 부드러운 접촉에 준영은 눈을 살며시 떴다가 다시 감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입술에 핏기를 돌게 했다. 코끝의 날렵하지만 둥근 부분을 입술로 가볍게 빨고 떨어지고 잠깐 얼굴이 멀어졌다. 그제야 눈을 온전히 떴다가 이번에는 입술을 맞출 듯 각도를 비틀어 다가오는 승주 때문에 다시 심장이 떨어졌다. 벌어진 윗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고는 속삭였다.
“혀 내밀어 봐.”
갑작스러운 요구라 해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떨리던 입술이 천천히 벌려지고 혀를 내밀자 승주가 다시 다가왔다. 야들한 살덩이를 입술 사이에 물고 천천히 빨아 당기자 안겨 있는 몸이 가늘게 떨렸다. 뜨거운 입 안에 빨려 들어간 살덩이가 이빨에 긁히며 농락당하자 준영은 허리를 움찔거리며 발끝을 오므렸다.
색색 숨을 내쉬며 무너지려는 몸을 받쳐 들듯 안고 승주가 잠시 떨어져 나갔다. 같은 침대에서 잔다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알려주려 한 건데 자제가 안 됐다. 넓게 편 손바닥으로 받쳐 안은 엉덩이를 주물거리다가 급하게 주먹을 쥐고 다시 손을 허리로 올렸다. 아직도 착하게 벌려진 입 안의 가지런한 치아를 보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지배하고 있던 피로가 날아가고 그 자리를 음탕한 욕망이 대신했다. 다소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럴 건데 같이 자자고?”
“형.”
“응?”
“나도.”
“무슨….”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준영이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당황으로 벌어진 입술을 간지럽히려는 듯 우물거리고는 떨어진 얼굴이 승주의 목덜미로 천천히 파고들어 문질러졌다. 쇄골을 문질러 오는 얼굴과 숨결에 승주는 한숨을 내뱉으며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안고 있는 몸을 차마 밀어내지는 못했다. 품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던 준영은 가만히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같이 자면 안 돼요?”
“나를 얼마나 쓰레기로 만들려고.”
무슨 말인지 짐작 못할 말은 아니었다. 아랫도리에 느껴지는 열기와 부피감을 애써 무시하며 준영은 최대한 입술을 끌어 올려 웃어 보였다. 활짝 펴지는 안면의 미소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못 알아챌 사람은 없었다.
“왜 쓰레기에요.”
“알잖아.”
“그냥 이렇게.”
다시 한 번 품 안에 기대 오는 머리를 느끼며 승주는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보송보송한 샤워 가운이 그나마 두 사람 사이의 쿠션 역할이었다. 손바닥 안에 감도는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며 그는 머릿속의 상상을 몰아냈다. 이미 가득해서 덜어내고 나면 아무 생각도 없이 텅 비어 버릴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려 오는 마음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어서.
그런 복잡한 마음을 준영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이렇게 그냥 자요.”
“그게 될 거 같아?”
끄덕하고 움직이는 고갯짓을 느끼며 승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기어코 원하는 대로 해야 될 모양이었다. 팔에 힘을 풀고는 품 안의 몸을 먼저 침대 쪽으로 밀었다. 준영은 침대에 눕히는 손길에 얌전히 따라 올라가며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다. 그런 모습을 한껏 심란하게 내려다보던 승주는 결국 침대에 따라 몸을 눕혔다. 눕자마자 옆에 붙은 준영은 웅얼거리듯 중얼거렸다.
“피곤하면서 뭘 하겠다고.”
“너랑 할 힘은 남아 있지.”
겁을 주려 마지막으로 해 본 말인데 준영은 못 들은 척 승주의 팔 한쪽을 품에 안고는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천장의 여백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무거웠다. 편안하게 누워 있다고 하기에는 걸리는 게 많은 모습으로 승주는 다리를 길게 뻗었다. 옆에 붙은 몸은 그것도 모르고는 더 가까이 밀착해 왔다. 승주의 다리 위로 허벅지까지 드러난 다리가 얹힐 듯 말듯 움직이다가 결국 옆에 내려왔다.
준영을 돌아보자 고개를 수그려 팔에 파묻다시피 한 자세가 보였다. 복잡한 마음도 모르고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더 심란해졌다. 특히 준영이 끌어안다시피 잡고 있는 팔의 감촉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샤워 가운으로 인해 맨살에 닿지는 않았지만 뻗은 손끝이 허벅지 사이에 닿아 있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알 만했다.
그래도 떼어 놓지는 못하고 반대편 팔을 들어 정수리를 쓰다듬듯 문지르고는 말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진다.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감촉을 더듬다가 놓고는 질문했다.
“내일 뭐 할 거야.”
“…글쎄요.”
“뭐 하지 말고 일단 집에 있어. 짐 가져올게.”
“짐이요?”
“거길 다시 들어가려고?”
여기서 준영도 차마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는지 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겠다고 한 것도 아니라 답답한 마음은 더 가중될 뿐이었다. 제대로 보고 물어보려는 마음에 승주는 잡혀 있는 팔을 약간 빼내려 했다. 따뜻한 온기에 감싸여 있던 팔이 움직이고 준영은 고개를 문득 들었다. 그렇게 들어 올린 눈과 마주친 승주는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이미 잠기운에 흐릿한 것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심지어 억울해 보이는 기색까지 있었다.
“왜 빼요.”
“내 팔이야.”
“그래도.”
“그래. 마음대로 해라.”
포기한 듯 팔을 내주며 승주는 다른 말을 미뤘다. 그로서는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맞은 부분은 정말 괜찮은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그리고 그 비좁은 방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버무리고 넘어간 부분에 대해 끔찍한 상상들이 자꾸 자제 없이 내달렸다. 별다른 소리가 안 났으니 큰일은 없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래도 불안감이 들었다. 특히 차 안에서 물었을 때 회피하듯 자꾸 그냥 들어왔을 뿐이라는 대답을 하던 준영의 태도가 걸렸다.
대뜸 신고하겠다고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되는 대로 변호사를 끌고 와 사건을 재구성해 볼 예정이었다. 혈기에 앞뒤 못가리던 시절도 아니고 될 수 있는 한 다각도에서 걸고넘어져 인생을 짓밟아 줄 생각을 했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살아가며 터득한 방법 중 하나였다. 혹시라도 폭행이 문제가 된다면 개인적인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든 되갚을 생각이었고. 어쩌면 그게 더 확실할 수도 있었다.
이때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던 준영은 자세를 고쳐 움직이며 승주에게 말을 걸었다.
“형,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뭔데.”
“아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왔어요?”
“…….”
“온 거는 전화 안 끊었으니까 알겠는데. 아 내 휴대폰… 두고 왔네. 어쨌든. 어떻게 빨리 온 거예요?”
“자. 내일 휴대폰 가져다줄게.”
“네?”
“자야지.”
고개를 들려는 준영의 머리를 다시 억지로 쓰다듬으며 승주는 모르는 척 천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라고 아예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덮어 주기도 했다. 몇 마디 더 묻던 준영은 전혀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승주 때문에 포기하고 결국 혼자만의 결론을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와 있었어요?”
“…….”
“그랬구나….”
입가를 미미하게 굳힌 승주는 다른 의미로 피곤하게 만드는 이준영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며칠을 못 자고 있는 것보다도 이게 더 피곤했다. 묻는 건 대답을 안 하고, 손도 못 댈 상황이라 나가겠다고 해도 안 내보내 줘. 그리고 이제는 말하기 싫은 것도 알아서 잘 캐서는 결론을 내렸다. 그나마 옆에서 점점 느려지는 숨소리가 하나의 위안이었다.
물을 걸 다 물은 준영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팔을 붙들고 있는 힘이 느슨해진 것을 느끼고 승주는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로 누워 있는 몸의 선이 완만한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긴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몸을 보며 승주는 천천히 자신의 팔을 빼냈다. 그리고 옆으로 누워 있는 자세를 바르게 해 주었다. 어깨를 천천히 눌러 바르게 눕히고 불편한 자세로 비틀어져 있는 허리도 똑바르게 돌려 다리를 가지런히 했다.
동그란 무릎 아래로 길게 뻗은 종아리에 다시 눈이 가려는 것을 애써 위로 향했다. 단단히 묶어 둔 샤워 가운의 매듭을 뚫어지게 보다가 시선을 더 위로 했다. 가운의 옷깃 안으로 가슴 부근의 살결이 보였다. 목에 희미한 붉은 자국을 보며 승주는 그것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스탠드 불빛이 비추고 있을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 봤자 멀리 가지도 못해 침대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수그렸다. 며칠을 못 잔 피로는 별것 아니었다. 체력적으로도 아직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묵직한 피로감과 혼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준영에게 곤두선 날카로운 신경이 큰 피로를 안겨 주고 있었다. 하염없이 전화를 붙들고 잠들지 않던 순간까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잠들지 않는 긴 밤 동안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를 자문자답하며 의미 없는 반복을 거쳤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았다. 쓰러져 있던 몸을 들쳐 업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오고 피멍이 번져 가는 얼굴을 보자 이제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 나사 빠진 듯한 행동을 보는 것도 지나치게 거슬렸다.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무슨 말 하나를 해도 꼼짝을 못하고 예민해지는 자신이 생소하고, 이렇게 휘둘리는 것이 성질에 맞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다 집어치우고 윽박지르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 어떤 놈인 거냐.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십 번을 털고도 남았다.
승주는 여기서 작게 신음성을 삼키며 관자놀이 부근을 힘주어 눌렀다. 심지어 하고 싶은 짓마저 그런 종류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뱉은 승주가 양다리에 힘을 주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묵직한 무게가 덜어졌지만 두꺼운 매트리스는 미동 없이 잠들어 있는 몸을 받치고 있었다. 방을 걸어 나가려던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춰 뒤돌아섰다.
늘 간결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던 침실이었다. 짙은 색의 침대는 구김이 없었고 벽에 걸린 모노톤의 사진이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승주의 취향을 반영했고 또한 삶을 반영하기도 하는 장소였다. 그 중앙에 전혀 다른 색채로 눕혀져 있는 준영의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스스로가 눕혀 놓고도 하나의 불규칙으로 인식되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발밑에서 자라났다. 변화를 거부하고 타성에 젖은 이성이 자꾸만 그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그만 둬. 다시 고민할 거야? 이제야 찾은 안정을 버리고? 이준영에게 휘둘리겠다고?
스스로가 돼먹지 못해 부정적 생각이 자라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힘없이 웃으며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갔다. 다리 사이에 준영의 모아진 다리를 가두고 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올라탔다.
커튼 밖에서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이 잠든 준영의 얼굴에 궤적을 남기며 방 안을 가로질렀다.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은 명료한 선이 그려져 이목구비를 그려 냈다. 거기에 깊은 색으로 번져 가는 자국들이 있었다. 다시 목이 말라 오는 기분에 승주는 침대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목덜미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죽은 듯이 잠이 든 몸뚱이는 어디를 건드려도 무기력했다.
지금이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승주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넓게 벌려 목을 감싸 쥐었다. 뜨끈한 체온이 손안에 달라붙었다. 엄지와 가까운 손바닥에 목울대의 도드라진 부분이 느껴졌다. 뒷목까지 감싸 쥔 손가락을 움찔거리다가 차츰 손에 힘을 실었다. 팔의 근육의 모양이 선명하게 올라올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뿐이었다. 손아귀를 조이지도 못하면서 덧없는 노력이었다. 말랑한 피부는 눌리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잔잔하게 잠든 얼굴도 그대로였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저 확인의 과정일 뿐이었다. 스스로가 이준영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상황에 대한 확인. 답답함에 짓씹던 입술을 놓고 그는 천천히 몸을 수그렸다. 떨리는 손을 살며시 풀고 다시 더듬어 쓸어내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드러운 명치 근처에 이마를 대자 한숨이 나왔다. 자조적인 웃음도 같이 새어 나왔다. 이제 정말 등신 새끼가 된 것만 같아서.
***
치열한 밤이 지났다. 특히 누군가에게 더 치열하던 밤은 긴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던 승주는 커피를 연속으로 내리 마시며 출근을 준비했다. 가벼운 피로가 어깨를 눌러 왔지만 차라리 마음은 잔잔해졌기에 괜찮았다. 며칠 간 발걸음을 하지 못했던 피트니스 센터에 갈 궁리를 하며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두고 나갔던 서류를 챙겨 들고 커튼을 더 단단히 여며 닫는 동안 그의 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반쯤 눈을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준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는 동안 몸에 반쯤 걸쳐 두었던 이불은 방금 전의 움직임으로 끌려 내려가 있었다. 승주는 그 옆에 앉아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그리고 턱을 가볍게 쥐고 양옆으로 가만히 돌려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멍든 부위의 색이 짙어져 있었다. 할 말을 잊고 그것을 보고 있는 승주의 표정에 준영은 깜빡이던 눈에 힘을 줬다. 잠에 취해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얼굴. 안 좋아 보여요.”
“피곤해서 그래.”
“아닌데….”
그래 봤자 캐물을 기운도 없이 스러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승주는 작게 웃었다.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따끈한 볼을 쓸어내리다가 긴 속눈썹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어루만졌다. 계속 닿는 손길에 다시 잠들려 했던 눈이 살며시 뜨여졌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듯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승주는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다물려 있던 입술이 다시 말을 걸었다.
“왜요.”
“일어나면 밥 챙겨 먹어.”
“네.”
“대답만 하지 말고.”
“네.”
그래 봤자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래도 당부하는 말은 계속됐다.
“감기 안 걸리게 옷 챙겨 입고.”
“…….”
“그리고 어디 나가지 마.”
“왜요?”
그 말에 준영은 이불 안에 묻어두다시피 했던 손을 꺼내 어떻게든 얼굴을 더듬거렸다. 많이 부었는지, 아니면 멍 자국이 심한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일어날 생각은 전혀 없는지 손가락만 더듬거리다 마는 모습을 보며 승주는 피식 웃었다. 휴대폰을 안 가져왔으니 나갔다가 연락이 안 될 수도 있고, 혹은 준영이 생각한 대로 얼굴이 영 못 볼 꼴이라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살살 눈이 감기려는 모습을 보고 못 들을 것이라 확신한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갔다 왔는데 없으면 보고 싶을 테니까.”
“…응?”
“다녀올게.”
다시 뜨려는 눈을 손바닥으로 살며시 내리 감겨 주고는 짤막하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말과 함께 뒤도 안 돌아보고 멀어지는 등을 보던 준영의 눈이 다시 힘없이 감겼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묻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몸이 녹아나는 듯 피곤했다.
***
적막한 방 안의 조용함은 가벼운 숨소리마저 들릴 듯했다.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온 집 안은 고요했다. 간간히 들리는 미약한 전자음이 간혹 귓가를 스치고 스러진다. 준영은 그런 방 안에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파묻고는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긴 시간 축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승주가 나가기 전 했던 말을 생각해 보겠다고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려 했던 것도 잠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랬던 그가 겨우 눈을 뜬 것은 멀리서 현관의 도어 록을 누르고 들어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천천히 뜨여진 눈꺼풀이 깜빡이며 눈동자의 초점을 찾는 동안 바깥의 돌아다니는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벌써 저녁인가 싶어 창밖을 보려 해도 커튼이 쳐져 들어오는 빛이 없었다.
준영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몇 번 꾸벅거리며 졸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시계를 찾았다. 희미한 빛에 보이는 시계는 아직 낮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들와서는 안 될 사람이 들어온 걸까. 순간 긴장으로 뒷목이 서늘해졌다가 금세 발소리의 주인을 생각해 냈다. 가볍고 좁은 보폭의 소리가 청소하러 오는 아주머니의 발소리와 많이 닮아 있었다. 팔을 머리 위로 뻗어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눕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청소하러 들어올 아주머니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승주가 나가기 전에 뭐라고 했는지를 떠올려 보려 애썼다. 밥은 아직 생각이 없고, 옷은 챙겨 입어야 했다. 샤워 가운만 달랑 입고 돌아다니기에는 아직 얼굴이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마지막 말은… 준영은 손을 들어 괜히 간지러운 뒷목을 긁고는 다시 떠올려 봤다. 들은 말이 맞는 건지 기억이 희미했다.
아직도 가닥가닥 끊기려는 정신 줄을 붙잡아 보아도 확실하지 않았다. 내용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승주가 할 만한 말이 아니라 더 확신하기 더 어려웠다. 생각이 복잡해지자 준영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작은 마찰음이 울리는 동안 얕게 깨어나는 정신을 바로잡고는 겨우 침대에서 벗어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욕실을 향하려다가 어제 젖은 옷을 떠올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꼼짝도 않고 서 있던 몸이 방향을 틀어 침실의 방문을 밀어 열었다. 거실은 오후에 알맞은 햇살을 가득 품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훤한 빛에 준영은 느긋하게 풀려 있던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시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나가려던 걸음을 선뜻 떼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는데 빨랫감으로 보이는 것을 한가득 안은 아주머니가 서재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품 안에 안긴 천 색깔을 보고는 서재에 놓인 쿠션을 생각할 때 그녀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는 준영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에 봤음에도 살가운 태도는 팔이 자유로웠으면 어깨라도 두드려 줄 기세였다.
“학생 나 때문에 깼나 보네. 많이 시끄러웠어?”
“안녕하세요. 아니요. 그냥 깼어요.”
“아이고.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어… 아. 계단에서 굴렀어요.”
시간이 될 만큼 되었으니 일어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난 것이었다. 재빠르게 변명하고는 잔잔히 웃는 준영의 입 모양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그녀는 고갯짓으로 등 뒤의 아직 어두컴컴한 침실을 가리켰다.
“더 자. 큰도련님이 침실은 손도 대지 말라고 연락 왔었어.”
“저 때문에요? 괜찮아요.”
“어휴. 됐어. 들어갔다가 무슨 소리를 듣게. 들어가서 자. 나는 조용히 있다 갈 테니까.”
손목을 팔랑거리며 손사래를 친 뒤 총총 걸어가던 아주머니가 목을 길게 빼 준영을 돌아보았다. 멍하게 서 있던 준영은 다시 정신 줄을 붙잡고는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샤워 가운을 더듬거려 만졌다. 약간이나마 드러나는 가슴팍의 사이 부분을 여며 노출을 최대한 줄이는데 그녀는 어물어물 이야기를 꺼냈다.
“학생 그럼 이제 다시 여기서 살아?”
“…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바로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아서 이렇게 얼버무렸다. 대답을 주저하는 기색이 완연한 준영의 표정을 보고 아주머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저 뒤의 다른 방문을 눈짓했다.
“아니, 학생 살면 오늘 작은방도 청소하고 가려고 했지. 내가 알아서 할게. 들어가서 자.”
“방이요?”
“말도 마. 건드리지도 말라고 해서 내가 그날 이후로 방문도 못 열어 봤잖아.”
문득 말문이 막힌 준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그녀는 그저 대화가 끝난 것으로 여기고는 거실을 가로질러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 덱을 밟는 슬리퍼의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선의 끝에 다다른 것은 준영이 이 집에 살 동안 쓰던 작은방이었다. 틈 없이 맞물려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하게 손끝이 저릿하고 심장이 죄었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뒷걸음치려던 발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방문 앞에 다다랐다. 자신이 쓰던 방, 익숙하게 열던 문 앞에서 준영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잠시 머뭇거렸다. 매끄러운 금속성의 손잡이를 붙들고 서 있는 동안 준영의 등 뒤로 아주머니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한 번 주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준영이 그 문을 연다고 해서 승주가 뭐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방을 쓰던 사람이기도 했고.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던 아주머니가 지나쳐 가는 것을 느끼자 준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방 안의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준영은 검은 망막에 비추는 방 안의 풍경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한 발을 안으로 디뎠다.
바로 어제까지 방에 있었던 것처럼 바뀐 것이 없었다. 어중간한 모양으로 빼 놓은 의자나 침대 위에 자신이 주름을 펴 뒀던 이불의 모양까지. 그리고 책상 위에 두고 갔던 소설책까지. 서재에서 관심을 보이자 승주가 읽어 보라며 들려 준 책들이었다. 책상 곁에 서서는 쌓여 있는 책의 표면을 쓸어 보다가 멍해졌다.
켜켜이 쌓인 책의 책등에는 다양한 제목들이 각자 어울리는 폰트로 쓰여 있었다. 법의학을 기반으로 한 미스터리 추리물, 사회 과학 서적, 그리고 권승주의 서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행 가이드북까지.
꼬리를 물고 따라오려는 추억을 피해 표지를 쓸던 손을 들어 올렸다. 대신 그 옆의 옷장을 열어 젖혔다. 빽빽하게 옷가지가 차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벌이 옷걸이에 걸려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준영은 그 옷들을 하나하나 만져 보며 옆으로 밀어 넘겼다. 손에 잡히는 옷마다 옷감이 두꺼워 지금 계절에는 맞지 않았다. 애초에 준영이 남겨 두고 간 이유도 그런 이유였다. 계절에 맞지 않아 남겨 두고 갔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승주가 가져다준 옷이라는 데 있었다.
옷 하나마다 괜히 많은 생각이 드는 게 싫어 그다음 손에 잡히는 회색 후드티를 바로 옷걸이에서 빼냈다. 옷장의 아래 서랍을 열어 뒤적거리지도 않고 속옷과 바지를 꺼내 들었다. 단단히 묶인 매듭을 푸느라 낑낑거리고는 겨우 샤워 가운을 벗어 옷을 갈아입었다.
품이 남는 후드 티의 모자를 뒤집어쓰며 준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옷은 항상 나던 섬유 유연제 냄새마저 가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섬유에 밴 냄새가 가실 만큼의 시간이었다. 자신이 이 방을 비운 것은. 그런데도 달라진 것 없는 방을 둘러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걸어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서다가 무엇에 이끌리듯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린 준영은 이내 후드를 거칠게 벗어 내고는 머리를 쥐어뜯듯 만지작거리다 놓았다. 얇아서 차분하게 늘어져 있곤 하던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일어나 흐트러졌다. 그런 머리카락을 정돈할 생각조차 않고 준영은 방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답답함으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기대해서는 안 되는데 자꾸 기대하려는 스스로의 마음이 답답했다.
이제는 차라리 뭐가 되더라도 결론을 내자는 생각마저 들었다.
***
좁은 도로를 들어온 차는 속도를 낮추며 헤드라이트를 켰다. 촘촘히 박힌 가로등과 간판의 불빛이 즐비한 도로에 비하면 빌라에 접어드는 길은 어두운 편이었다.
헤드라이트가 길게 늘어져 길을 밝히다가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전, 방금 로비에서 나온 뒷모습 하나가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승주는 앞 유리 너머로 그 인영을 확인하고는 지하 주차장의 가장 가까운 곳에 차를 주차해 넣었다. 네모난 칸 안에 차를 밀어 넣는 데에는 몇 번의 움직임과 후진만으로도 충분했다. 시동을 끄고 내리기 전 승주는 몸을 틀어 뒷좌석을 돌아봤다.
오른쪽 창가에 양복이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늘 깨끗한 뒷좌석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무거운 책 더미와 상자에 꽉꽉 밀어 넣은 옷가지까지 부드러운 가죽 시트를 짓누르고 있는 중이다. 짐을 일단 가지고 올라갈지 생각하다가 고심하던 표정을 지우고 맨몸으로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뒤로 부드러운 기계음이 울리며 차 문이 잠겼다. 빌라로 들어가는 문을 등지고 그는 주차장 밖으로 나가는 차도를 걸어 올라갔다. 방금 전 걸어가던 준영의 뒷모습이 어디로 향했을지 가늠하며 그는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렇게 잠깐 서 있으려니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다가오는 이준영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후드를 푹 눌러써 앞이 제대로 보이기는 하는지 걱정일 정도였다. 어딜 다녀오냐고 물어보려던 승주는 바나나우유를 빨아 마시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그저 웃었다. 하나는 빨대를 꽂아 쪽쪽 빨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늘어뜨린 손에 꼭 쥐고는 걸어오고 있었다.
몇 걸음 앞까지 가까워지고 나서야 준영은 승주를 알아본 듯 턱을 치켜들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드러난 준영의 얼굴에 승주의 웃음이 약간 흐려졌다. 가까이 다가온 준영은 승주에게 바나나우유를 내밀며 물었다.
“형 꺼도 사 왔어요.”
“그거 사러 나왔어?”
“네. 그리고 산책하게요.”
하루 종일 볕도 안 보고 잠이 들어있었는지 뽀얗게 부은 얼굴을 보며 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이 들고 있던 나머지 바나나우유가 승주에게 건네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나란히 했다.
높은 담장을 끼고 골목을 한 번 도는 동안 준영이 물고 있던 바나나우유는 빈 통이 되었다. 빨대로 빨아들여도 바람 소리만 울린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세워져 있는 쓰레기봉투에 다 먹은 우유통을 두고 오더니 다시 승주의 옆에 섰다. 무슨 말이 없이 제 할 일만 하는 준영을 보며 승주는 손안의 우유를 만지작거렸다. 준영은 퍼뜩 고개를 들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막상 승주의 눈을 마주치고는 멈췄다. 옅은 피로가 느껴지는 승주의 눈매를 뚫어지게 보다가 이내 눈길을 피하고는 물었다.
“늦었네요?”
“짐 가져오느라.”
“무슨 짐이요.”
“네 짐. 고시원에서 다 빼 왔어.”
예상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아예 생각도 안 해 본 소리는 또 아니라 준영은 작은 탄식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승주는 단지 그것만을 이야기하고 더 이상의 말을 숨겼다.
고시원의 문을 걷어차다시피 해서는 들어가 주인을 만난 것, 그리고 하루 사이 짐을 빼 도망간 사람이 있는지 물은 일, cctv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문을 고친 것이 고작 오늘 오후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 어떤 행동과 협박을 했는지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자꾸 다른 소리만 하는 아주머니를 밀치다시피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듣게 된 내용이었다. 문조차 잠기지 않는 방이었다는 것을. 승주는 오랜만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렇게 일어난 일들을 묻지도 않는데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영은 자세히 묻지 않고 넘겼다. 짧은 한숨이 나온 것은 무르게 넘어가려는 준영에 대한 걱정과 그런 애를 내보냈던 자신에 대한 자책이 섞여 있었다. 요 근래 그는 평생 쉴 한숨을 다 쉬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승주의 마음을 모르는지 준영은 승주를 향해 완전히 뒤돌아섰다. 앞길을 가로막듯 선 준영을 보며 승주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왜 그래.”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니 순간 말이 나오질 않는다. 준영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아래로 향했다. 붕대로 감아 둔 손이 보였다. 준영은 그 손을 뚫어져라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손은 괜찮아요?”
“괜찮아. 다 나았어.”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듯 승주는 손등을 둘러 감아 둔 붕대를 한 번 힐끗 보고 말았다. 버텨 봤지만 밴드는 떨어졌고 그 자리에는 새 붕대가 자리 잡았다. 준영은 제가 긁어 둔 그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형.”
“응.”
“물어볼 게 있어요.”
“어떤 거.”
턱을 약간 치켜들고 눈에 힘을 준 표정을 보며 승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준영은 하려는 말이 자꾸 옆으로 새는 것을 막았다.
이전에도 말을 잘 들어 주기는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이런 말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승주는 무언가를 놓은 사람 같았다. 어느 정도의 체념도 엿보였고. 그것이 단순히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빈틈이야말로 질문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준영은 수없이 되풀이하던 질문을 이제야 말했다.
“형은 꼭 그렇게 해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어요?”
“그렇게 해야만?”
“취향이요. 사귀던 사람 중에 그걸 안 한 사람은 없어요?”
바로 대답을 하려 했건만 물어보는 표정이 꽤나 절박해서 승주는 천천히 머리를 굴려 봤다. 그 사이 골목을 지나가는 차는 두 사람을 비추고는 저 멀리 사라진다. 기억을 헤집고 고심하는 동안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바나나우유의 윗부분에 빨대를 꽂아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육감적인 입술이 빨대를 무는 장면은 마치 담배를 가져다 문 듯 외설적이었다. 몇 모금으로 우유를 다 빨아 마신 그가 손에 남은 우유통을 저 멀리 쓰레기봉투가 있는 곳에 던졌다.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봉투 위에 떨어지는 모양을 곁눈질로 보다가 대답했다.
“이야기하자면 긴데. 일단 그렇게 안 하고 만났던 사람 자체가 없어. 제대로 만난 사람도 없었고.”
생각보다 더한 대답을 곱씹어 보던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예상하고 있었던 대답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있었다, 라는 대답에는 나름의 마음의 준비를 해 뒀었다. 한 명쯤은 소중한 사람이 있었겠지 하고. 혹여 제대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는 대답을 듣는다 해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러한 성향이었고 애초에 제대로 만난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운이 다 빠진 준영을 보자 승주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지만 어둑한 골목의 한복판에서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성향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문제는 아닐 거야. 나도 안 그러려 해 봤던 적이 있었고….”
“그래서요?”
“실패했어.”
실패를 입에 올리는 권승주 역시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허물어졌던 입매는 다시 단단해졌고 준영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고민해야지.”
“네?”
“준영아.”
“네.”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전혀 좋지 않아?”
오늘은 제가 질문할 것만 생각해 뒀기에 준영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제자리에 멈춰 선 준영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선 승주는 재촉하는 다른 말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숱 많은 속눈썹이 깜빡이는 것만 멍하게 보고 있던 준영은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천천히 생각했다. 전혀 좋지 않다는 표현은….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어느 정도는. 설명이 어려운데. 갑자기 왜요?”
“중요하니까 묻는 거야.”
“왜요. 왜 중요해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대답하는 승주의 태도에 이번에는 울컥했다. 왜 항상 자신만 흔들리는 것 같은지. 억울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게 준영은 뒤죽박죽으로 섞인 머릿속에서 오늘 하려 벼르고 있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수십 번을 어떻게 꺼내야 고민하던 말이었다. 적막해진 거실에 해가 길게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생각보다 늦는 승주의 귀가를 기다리며 몇 번의 연습을 거쳤건만 결국 이런 식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맥락에도 맞지 않고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길거리에서. 하지만 더 이상은 혼자 참을 수 없었다.
“형. 저는요. 형 좋아해요.”
“…….”
“형이 이런 걸, 누구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래요. 저는 형이 좋고. 좋아서…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다소 놀란 듯 가만히 서 있는 승주를 보며 준영은 멀쩡하게 하고 있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더듬어 하던 말이 결국 마지막에는 기어들어 가듯 목소리가 작아졌고, 눈가가 경련하듯 떨리다가 점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입술을 굳게 깨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뜻밖의 말에 눈만 깜빡이던 승주가 한 걸음 다가섰다. 다가오는 걸음에도 준영은 바닥만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고개를 들 자신이 없어서.
차마 마무리하지 못한 뒷말은 하기도 무서웠다. 아니면 차라리 잘해 주지 말라고. 그 말은 끝내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비참하기까지 했다. 왜 항상 승주에게 휘둘리기만 해야 하는 걸까.
정작 그런 준영을 바라보는 승주는 손을 올렸다가 어디를 짚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게 달아오른 귀를 어루만져야 할지, 아니면 손이라도 잡아야 하는지.
배회하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움직이다가 결국 손을 잡았다. 이제는 아무렇게나 손을 대기도 어려웠다.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이준영을. 정적 끝에 한 번 소리 내 불렀다.
“준영아.”
가늘게 떨다시피 하는 모습에 영문 모를 기시감을 느끼던 그는 천천히 가슴 속에 번지는 깨달음을 이해했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순간의 두려움, 그로 인해 나타나는 초조함의 표현들까지. 오늘 새벽 혼자 미쳐 가던 자신의 모습과 지나치게 흡사하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벼락같은 깨달음이었다.
그 순간 승주는 잔뜩 긴장한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손을 잡았다. 뒤로 빠지려는 준영의 손을 붙잡아 손가락의 뜨거운 마디마다 깍지를 껴 잡았다.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지도 모르는 연인의 손을. 이제야 온전히 맞잡을 수 있었다.
멀고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내밀어진 정답에 잠깐 든 자조적인 감정을 걷어치웠다. 이런 정답을 먼저 말하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한 감정을 실어 물었다.
“그래서 지금 묻잖아.”
“아.”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까. 알려 줘.”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가 치켜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눈앞까지 와 있는 승주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짙은 색의 피부가 그리는 얼굴의 형태를, 그리고 진중하게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의 선명한 색깔을.
질문을 곱씹었다. 곱씹고 다시 이해하며 그의 행동과 일치시켰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멀고 먼 과거부터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순간이라는 것을. 준영은 울음으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다잡으며 말했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어도.
“정말요?”
“응.”
“다른 사람은 만나지 마요.”
“그래.”
“어떤 이유라도….”
“알았어.”
“그리고. 그리고….”
결국 물기가 어리고 눈동자가 떨궈지자 승주는 남은 한 손으로 준영을 끌어안았다. 이를 악물고 숨을 삼키는 듯 헐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달래듯 두드리다가 그 자신도 고개를 숙였다. 준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사위가 어두운 길인 줄만 알고 헤매던 과거였다. 헤매고 다른 길을 에둘러 걷다 이제야 제대로 된 길을 짚었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 서서. 이제야 검푸른 새벽의 기슭에 도착했다. 끝이며 시작인 순간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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