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딥블루上 (1/5)

이준영은 제 삶이 이렇게 된 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시작은 자연스러웠고 연속된 사건은 적절했다. 그래서 결과가 이렇다는 걸 스스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

여덟 살, 처음 학교를 간 순간. 학교에 다녀온 뒤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밖에 나가고 싶은 욕심은 커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집에 다른 가족은 없고 애완동물도 없었다. TV의 프로그램들은 늘 비슷한 것을 방송해서 아이의 흥미를 끌기 어려웠다.

12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의 지루한 삶. 그것이 이준영이 엄마와 함께 하는 삶이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밖을 나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중에 그나마 좋은 친구를 만났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친구인 승호와 놀이터에서 놀고, 승호가 학원에 갈 시간이 되면 헤어지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 때 승호는 준영을 데리고 제집에 갔었다. 준영은 거기에서 TV로만 보던 삶의 모습을 보았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 햇살이 잘 드는 넓은 거실. 몇 개인지 모를 많은 방. 그리고 다정한 엄마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까지.

식탁에 승호와 앉아 접시에 한가득 깎아 준 사과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약간 주눅이 들었다. 아이에게는 별세계 같은 집이었다. 마치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를 보고 승호의 어머니는 악의 없는 질문을 하나씩 던졌다. 어디 사는지, 아버지는 뭘 하시는지.

이어지는 준영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나가는 아줌마를 불러 세워 아이들에게 줄 다른 간식거리는 없나 물을 뿐이었다.

그때 현관 열리는 소리가 나 준영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이 더해진다면 불편함이 더 옥죄어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익숙지 않은 상황 때문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다. 큰 키의 남자 한 명이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의 식탁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살짝 그을린 피부에 어린 준영이 올려다보기에도 훤칠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넓고 단단해 보이는 가슴과 반팔 소매 아래로 시원스레 뻗은 팔에는 근육이 잡혀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사과 하나를 집어 먹자 승호가 투정을 부렸다.

“형은 형 꺼 먹어!”

“시끄러워.”

“엄마! 형이 우리 꺼 먹어!”

“또 줄 거야. 승주 오늘 빨리 왔네. 웬일이야.”

“휴강이라. 승호 친구?”

그 말을 하며 남자의 큰 손아귀가 준영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꾹 눌러 왔다. 준영은 그때 심장이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남자 어른의 격의 없는 접촉은 드물었기에 더 그랬다. 남자는 그런 준영의 마음도 모르고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제 동생을 타박했다.

“너도 이렇게 조용하면 얼마나 좋아.”

“엄마! 형이!”

“이름이 뭐야.”

“이준영이요.”

“승호랑 얘랑 바꾸면 안 되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 먹었어?”

“네.”

권승주는 준영의 동그란 머리통에 올려 둔 손을 거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보폭이 큰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 닫히는 소리가 다소 크게 울렸다.

그때의 준영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과를 볼이 미어터져라 밀어 넣었다. 그래서 권승주의 방이 그 집의 많은 방들 중 어느 방인지 몰랐었다. 승호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그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고 나서야 차츰 알게 되었다. 자신의 머리를 습관처럼 쓰다듬고는 들어가는 그의 방을.

승호와 다르게 차분하고 얌전한 편이었던 준영을 가족들은 반기곤 했다. 승호가 다른 친구들을 데려왔다가는 한창때 초등학생 남자애들이 뛰어노느라 집안 꼴이 난장판이 되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서로의 어머니끼리도 한두 번의 교류가 오간 후, 승호와 준영은 더욱 친해졌다. 준영이 승호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다. 권승주는 승호를 놀리기 위해서라도 준영을 귀여워했다. 그 나잇대 애답지 않게 조용하고 하얗고 눈이 동그란 남자아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끔 격식 없는 질문도 던졌다.

언젠가 한번 승주는 준영에게 물었었다. 너는 책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거실에서 승호가 읽지 않아 흠집 없이 반질반질한 표지의 동화책을 꺼내 읽던 준영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엄마가 장난감을 사 준 적이 없어서 옆집에서 책만 빌려 읽었다고 말이다. 준영은 다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고 권승주는 뜻밖의 대답에 자리에 앉아 말이 없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준영이 집에 가기 전 작은 손바닥 위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 줬다. 받지 않겠다며 주먹을 접지 않으려는 준영 때문에 승주는 짜증을 내며 승호를 소리 내 불렀다. 고작 만 원짜리 한 장 가지고 귀찮게 이게 뭔가 싶기도 했다.

승호에게도 결국 그 지폐 한 장을 쥐여 주었다. 그제야 준영은 제 손 위의 만 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뒤에도 승주는 자기 방에 있는 것들 중 무엇이든 쓸 만한 것은 준영에게 들려 보내곤 했다.

그러나 승주가 준영에게 다시 용돈을 쥐여 주지는 않았다. 용돈만큼은 기어코 받지 않으려 해서 그랬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 준영은 엄마가 새 교복과 가방을 사 줄 돈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 정도의 집안 사정이었다. 학용품과 운동화는 친척들이 준 용돈으로 새것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적에 문제가 생겼다. 초등학교 때는 어떻게든 교과서로 해결되던 공부가 문제집을 풀지 않자 다른 아이들에 비해 처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화 사지 말고 문제집을 살걸. 중학교 1학년 1학기의 성적을 받아 든 준영이 한 생각이었다. 같은 학교였지만 반이 갈려 하교할 때만 만나던 승호는 침울해진 준영의 성적을 듣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 내 성적 들어 볼래?”

“미안.”

“하긴. 넌 공부 잘했지. 우리 집이나 가자.”

떡볶이를 함께 사 먹고 준영은 승호와 함께 승호의 집으로 갔다. 그날은 놀러 가서도 멍청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새로 산 게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몇 마디 더 달래 주던 승호가 귀찮은지 만화책을 보겠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준영은 넓은 거실에 혼자 남아 TV를 보았다.

그때 권승주가 집에 돌아왔다. 주춤거리며 일어나던 준영은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해 보였다. 그리고 바로 승호를 따라 방에 들어가려 했다.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항상 밝은 표정을 하던 준영이 그날따라 숫기 없이 굴자 승주가 붙잡아 세웠다.

“오늘 왜 기운이 없어.”

“아니요.”

“성적 잘 안 나왔어?”

거기서 준영은 퍼뜩 고개를 들고 승주를 올려다보았다. 순진한 반응에 승주는 옅게 웃음 지었다.

“엄마가 오늘 승호 가만 안 둔다고 벼르고 있었거든. 성적 때문이구나.”

“네.”

공부를 안 하니까 그렇지. 라고 말하려던 권승주는 준영의 집 사정이 기억나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방으로 들어갔었다.

그다음 권승주와 마주쳤을 때, 준영은 권승주가 준 중학교 문제집을 가방에 터지도록 밀어 넣은 채 집에 돌아갔다. 준영은 죄송해서 받을 수 없다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승주는 막무가내였다.

이미 샀고 이걸 승호에게 줘 봤자 쓸데없다고 말이다. 승호에게 쓸데가 없다는 것은 준영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고 문제집을 받아 들고 집에 들어왔다.

책상머리에 앉아 밤새 공부를 하는 준영을 보며 엄마는 스탠드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아들이 공부를 한다는데, 하는 데까지는 해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준영은 승호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준영은 이번만큼은 승호와 같은 학교를 못 다닐 줄 알았다. 승호의 성적이 워낙 간당간당해서 그랬다. 승호가 준영과 같은 고등학교를 들어갔을 때 권씨 집안은 잔치를 할 뻔했다. 고작 그런 걸로 잔치를 열어서는 동네 창피할 뿐이라며 말리는 승주를 빼고는 잔치 기분이었다.

그들은 승호에게 아예 카드를 쥐여 주었다. 나중에 크게 후회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랬다.

준영은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몇 개월이 지나서야 휴대폰을 하나 샀다. 약정을 걸면 제일 싼값에 주는 휴대폰이었다. 승호에게 가장 먼저 휴대폰 번호를 알려 준 날 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었다.

「준영아 이 번호 저장해 둬.」

「누구세요?」

문자에 답장은 없었다. 짚이는 곳이 있어 승호에게 물어보니 역시 권승주였다. 준영은 자신을 챙겨 주는 권승주에게 고마워 작게 미소 지으며 휴대폰 번호를 저장했다.

나중에 그가 독립을 해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유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그리고 휴대폰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승주와 연락을 하는 사이라는 것도.

준영은 승호의 집에 이전처럼 자주 놀러 가지 않게 되었다. 중학생과 달리 고등학생은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았다. 하루 일과가 다 끝나 가는 늦은 시간 남의 집에 놀러 가는 것은 민폐고 이준영은 그런 민폐를 저지르지 않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 승호와 학교 후문 옆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이었다. 막힌 목을 위해 콜라를 빨아 마시며 승호에게 말했다.

“나 너희 집 안 간 지 오래됐다.”

“응. 그래서 우리 엄마가 심심하대.”

“진짜? 매일 갔던 것도 아니잖아.”

“엄마가 요즘 다 찾아. 나 늦게 오니까 너도 안 오지. 형도 독립해서 없지.”

“아아.”

“형은 집에 살 때도 거의 안 들어왔는데 새삼스럽게 그러신다.”

“승주 형 집에 자주 안 왔었어?”

“언제부터인가. 잘 모르겠어. 요즘 엄마 아빠랑 사이도 안 좋아.”

준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자튀김을 주워 먹었다. 준영은 항상 집에 없는 엄마를 생각했지만 아무 말을 안 했다. 외로웠던가. 잘 알 수 없었다. 늘 없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있다가 없으면 외로울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마도.

“밤에 간식 줄 때마다 뭐라고 해. 형이 전화해도 안 받고 어쩌다 받아도 말을 길게 안 한다고.”

“그래?”

“어. 우리 형 내가 문자하면 답장도 안 한다.”

“바빠서 그런가 보지.”

이렇게 얼버무리며 준영은 다시 콜라를 마시려 빨대를 물었다. 승호는 의심 없이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학원에 다니기 귀찮아 과외를 하는데 딴짓을 못하니 죽을 지경이라는 한탄이었다. 승호의 큰 목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앞니로 빨대를 지그시 물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남다르게 대해 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래. 아마 남이라서 더 잘해 주는 거겠지. 준영은 그렇게 매일 주고받는 승주와의 문자를 생각했다.

그때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다. 자신이 권승주에게 있어 남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상하다고 지적하거나 거부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감히 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준영은 원래부터 성인 남자에게 약했다. 권승주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담임 선생님이 적당한 나이의 남자인 경우 더 어려워하며 곧이곧대로 말을 들었다. 없는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었을까. 이런 의문도 한참 후에나 가졌다.

그래서 권승주에게 빠지는 줄도 모르고 젖어 들었다.

권승주는 가끔 본가에 들어올 때면 준영에게 먼저 연락을 해 약속을 잡았다.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준영은 그때마다 안 나간 적이 없었다.

기껏 큰아들을 불렀더니 항상 밥을 먹고 들어온다며 그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타박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녀도 말을 듣지 않는 승주에게 점점 익숙해져 먼저 물었다. 오늘도 밥 먹고 올 거지? 라고. 그렇게 물으면 권승주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준영을 만났다.

만나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권승주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챙겨 둔 선물을 준영에게 주었고 준영은 승주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밥을 먹었다. 조금은 제멋대로이고 가르치려는 면도 없잖아 있는 그의 말을 말이다.

준영은 그때마다 승주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길고 커다란 손. 깨끗하게 다려진 셔츠. 일이 끝나고 편안한 자리였기에 항상 타이는 풀어 재킷 주머니든 어디든 넣어 둔 모습이었다.

얇은 셔츠는 그 안의 다부진 몸매를 여실히 드러냈다. 옅은 향수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앞에 앉혀 두고 별말을 다 하던 권승주는 멍한 준영의 눈빛에 가끔 정신이 돌아왔다.

“뭘 그렇게 봐.”

“그냥요.”

준영이 그렇게 말하면 승주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승주의 말을 듣는 준영은 늘 바르게 앉아 더할 나위 없이 집중하는 표정을 짓곤 했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의 권승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듯한 표정으로.

사실은 정말 못 알아들을 소리라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회사의 직급은 어려웠고 승주가 출장을 나갈 때마다 한다는 일들은 알아들을 수 없게 더욱 어려웠다.

승주는 그런 준영의 표정을 귀여워했다. 엄마의 얼굴을 빼닮아 희고 곱게 생긴 남자애는 짙은 피부색과 운동을 즐기는 그와 달리 뼈대가 가늘고 작아 보였다.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인 승호와도 체격 자체가 달라 신기했다. 가끔 승호를 다른 집에 던져 주고 준영을 동생 삼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큰일 날 뻔했다.

***

그때의 권승주는 생각했다. 준영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들을 보는 마음이지 않을까 하고. 같은 나이의 동생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으면서 왜 준영에게만 그랬는지가 문제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매사에 선을 긋고 하는 일마다 당위성을 찾던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문제가 될 것을 알아서 일부러 생각을 피했던 것이었을까.

준영과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어린애가 말도 잘 알아듣고, 가끔 힘든 일이 있어 기색을 내비치면 서툴게 둘러말해서라도 어떻게든 그의 편을 들어 줬다. 사 주는 것도 잘 먹었고 작은 선물도 기뻐했다. 고작 이 정도를 해 주는 자신이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눈빛이. 맹목적인 애정이 어린 눈동자가 기꺼웠다. 가끔 가슴이 뜨끈해질 만큼.

그는 어느 날 밤 준영을 집 앞까지 태워다 주고는 잠깐 차에서 내렸다. 준영이 집에 들어가고 나면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들어갈 생각으로 그랬었다. 그러다 옆에 선 준영의 키를 가늠해 보다가 남자애치고 가느다란 손목을 보았다. 그때 갑자기 몸무게가 궁금해졌다.

“준영아. 몸무게 몇이야?”

“저 65kg요.”

평소에 뭘 먹는 건지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남의 집 사정을 그렇게까지 참견하는 건 할 짓이 아니다 싶어 그랬다. 가끔은 애를 두고 돌아다니는 준영의 엄마가 탐탁지 않았지만 말할 권리는 없었다.

승주는 준영이 이렇게 잘 자라고 있는 데에 자신의 덕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남은 남인 법이었다. 순간 담배를 물고 싶었지만 그 대신 준영에게 손짓했다. 영문을 모르고 가까이 다가오자 약간 무릎을 숙이고 남자애치고 가는 허리에 팔을 둘렀다. 비누 향과 남자애다운 땀 냄새가 옅게 스쳤다.

팔 안쪽에 닿는 준영의 허리와 등이 잔뜩 경직된 것을 느끼며 번쩍 들어 올려 봤다. 순식간에 몸이 붕 뜬 준영은 승주의 어깨를 짚고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이런 식으로 들어 올려진 적이 없어 순식간에 얼굴이 발개졌다. 밤이라 해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아파트 로비라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민망한 마음에 발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혹시 제 신발이 승주의 옷을 망칠까 많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형. 뭐, 뭐 해요?”

“확실히 가볍네. 내려 줄게 가만있어 봐.”

준영의 발이 금방 바닥에 닿았다. 승주는 정말 무게감이 궁금해 들어 올려 본 것뿐이었다. 애 같아서 언제 자랄까 궁금하기도 했고. 막상 들어 올려보니 그래도 남자애라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무거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뿐히 내려 줬다.

준영의 얼굴은 귓가까지 달아올라 새빨갛게 되었다. 사내애가 뭐 그렇게 부끄럼이 많냐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준영은 인사만 자그맣게 내뱉고 계단으로 달려 올라가 버렸다. 권승주는 괜히 건드렸나 싶어 손바닥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로비에서 나와 재킷을 뒤적여 담배를 찾았다. 백금색의 지포 라이터를 손안에 굴리다가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깊게 빨았다. 한 대. 두 대. 세 대.

이상하게 입맛이 당겼다. 아까 품에 꽉 들어차던 준영의 몸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손을 잡게 되었는지 두 사람도 잘 알 수 없었다. 시작이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스킨십이 늘어나던 중 생긴 일이었다.

권승주는 가끔 맹랑한 소리를 하는 준영의 볼을 꼬집었고 그걸 말린다고 준영은 손을 잡아떼었다. 그때 손을 깍지 껴 꽉 잡았다. 승주가 손에 힘을 세게 주니 흰 손에 손자국이 남았다. 자존심이 상한 준영이 자기 손을 어루만지며 아닌 척하길래 일부러 더 손을 잡아 장난을 쳤다.

승주는 그렇게 사람들이 없는 차 안에서 가끔 준영의 손을 찾아 잡았다. 승주는 제 손에 잡혀 있는 준영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어린 고등학생이라지만 그렇게 좋은 감촉도 아니었다. 차라리 핸드크림 냄새가 나고 말랑말랑한 여자 손이라면 이해라도 될 텐데. 손톱은 짧았고 마디는 길었지만 볼펜을 항상 잡아 굳은살이 박인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준영은 항상 모르는 척 잡힌 제 손을 빼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만질 때마다 열이 올랐다. 홧홧하게 올라오는 열을 그렇게 무시했다. 무엇인지 몰라서.

권승주와 이준영은 하늘에 맹세컨대 이 이상의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냥 가끔 손을 잡고. 손을 만지작거리다 놓고. 그게 전부였다.

준영은 답답했지만 무슨 말을 할 용기가 없어 승주가 가져다주는 문제집을 풀었다. 밤마다 다른 생각을 하기 싫어서 더 공부에 매달렸다. 이렇게 해도 학원과 과외로 점철된 다른 학생들을 제치지는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어딘가 도피처가 있다는 것은. 아주 가끔, 승주 형이 차라리 자기에게 무언가 다른 것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확실히 무슨 감정인지 알 수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권승주의 얼굴이 떠오르면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었다.

짙은 색의 피부, 시원하게 트였지만 날카로움이 맺히는 눈매. 높은 콧대에서 입술로 솟았다가 턱으로 내려가는 선까지 빠질 게 없었다. 거기에 능력도 차고 넘치는 권승주가 자신에게 다른 감정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다.

이때쯤 권승주는 준영에게 해 주고 싶은 많은 것들을 참고 있었다.

해 주고 싶은 많은 것들. 바쁜 시즌이 되어 공항으로 출근해 표를 받아 비행기의 탑승 게이트를 향해 걸어갈 때도, 보고서의 말도 안 되는 부분을 되짚고 있을 때에도 늘 생각이 났다. 해 주고 싶은 것들이 말이다. 좋은 곳에 가서 밥을 사 주고 싶고 문제집을 하나하나 사다 주기 보다는 자기 손으로 사고 싶은 걸 사도록 카드를 쥐여 주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가는 준영이 질색하며 거절할 게 뻔해서 권하지도 않았다. 가끔 부모님이 동생인 승호도 좀 챙기라고 해도 승호는 챙겨 줄 게 없어서 안 챙겨 주는 것뿐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들. 친한 남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들만 해 줬다.

그리고 밤이 되면 울컥 욕구가 치밀었다. 어린 남자애에게 해서는 안 될 그런 일들이 말이다. 특히 남보다 그러한 욕구가 험악하던 권승주는 가끔 파트너의 얼굴에서 준영을 겹쳐 보다 애써 그 얼굴을 지웠다.

***

검은색 가죽 벨트를 풀어내 손아귀에 두 겹으로 단단하게 그러쥐었다. 뻣뻣한 셔츠와 정장 바지는 그대로였다. 호텔방의 불은 은은했고, 그의 앞에는 다른 남자가 맨몸으로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흰 피부에 남자치고는 선이 부드러웠다. 그래도 명백하게 남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뒷모습이었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에는 손자국이 발그스름하게 올라왔다. 권승주는 왼쪽 무릎을 침대에 기대며 그런 남자의 엉덩이를 다른 손으로 주물렀다.

엎드린 남자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나오자 벨트를 든 손을 높게 치켜 올렸다. 주저 없이 손이 내려갔다. 짜악, 하는 소리가 울리고 맞은 남자의 몸이 펄떡 뛰었다.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서 버텼다. 그러나 세 번이나 연달아 같은 자리에 내리쳐지자 엎드려 있던 남자가 바짝 무릎을 세우고 기듯이 앞으로 도망쳤다. 옆으로 벨트를 던지고 발목을 꽉 잡아끌어 내리려는 권승주를 향해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헐떡이는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항복. 항복.”

연속되는 단어를 들은 권승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남자는 아직 꽉 잡힌 발목을 당기며 권승주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달랬다. 평소에는 무뚝뚝한 정도지만 플레이 중에는 약간의 잔혹성마저 엿보이는 것을 알기에 바로 뿌리치지 못했다. 기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며 엎드린 남자의 등이 가벼운 공포에 움찔거렸다.

“항복이라고 말했어, 권승주 씨.”

“벌써?”

“힘 조절이 안 되잖아. 뭘 더 해.”

승주는 말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쥐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세이프 워드를 말했으니 멈추기는 해야 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그 잠깐 사이 남자의 발목에 미약하게 자국이 남았다.

남자는 엎드려 있던 몸을 바르게 돌려 앉으려다가 엉덩이 피부가 쓸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흥미가 떨어진 승주는 창가로 걸어가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엎드려 누운 남자가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권승주에게 불평했다.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엉덩이 터지는 줄 알았네.”

“없어.”

“항상 그렇게 말하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권승주는 손에 들린 와인병만 만지작거렸다. 묵직한 와인병은 탁한 색이라 내용물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차를 운전하려면 한 잔도 마시지 않는 게 나을까 싶었다. 그 기색을 읽은 남자가 천천히 일어나 옆에 떨어트려 뒀던 샤워 가운을 몸에 두르고 물었다.

“안 자고 갈 거야?”

“됐어. 너 자.”

“알았어. 다음에는 기분 풀고 와. 나 다른 애들이랑 논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권승주에게 더 이상의 불평은 하지 않고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다른 불평을 더 하다가 권승주가 다른 파트너를 찾는다면 제 손해였기 때문이다. 이 바닥에서 이 정도 되는 남자를 만날 일은 흔치 않았다.

어차피 호텔도 자기가 예약해 놨으면서 안 잔다고 하니 늘어지게 즐기다 나가면 될 일이었다. 욕실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에 잠깐 눈길을 준 권승주는 다시 와인병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남자치고 얇은 뼈대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서 열이 올랐다.

권승주는 벨트를 다시 갖추고 욕실의 물소리를 들으며 호텔의 문을 열고 나왔다. 발끝에 걸릴 것도 없는 낮은 문턱을 넘자 다시 사회의 영역이었다. 카펫이 깔려 발소리조차 죽은 복도를 여유 있는 걸음으로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는 내리려는 여자를 위해 비스듬히 비켜섰다가 탑승했다. 로비에서 다시 탑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주차장에 내려가 차를 끌고 호텔을 다시 나갈 때까지 잘생긴 얼굴에는 구김 하나 없었다.

차가 별로 없는 도로는 부드러운 엔진 소리가 낮게 깔려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렇게 나와 차를 운전해 가던 중 신호에 걸려 정지했다. 그는 핸들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힘을 줘 잡고 있던 탓에 손등과 팔뚝까지 핏줄이 섰다. 생각을 비우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예의 없이 업무에 대해 와 있는 문자들을 읽고 다른 연락이 없음을 확인했다.

밝은 빛을 내뿜는 휴대폰 액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속이 답답해 옆자리에 강하게 내던졌다. 푹신한 시트에 튕겼다가 차 문에 부딪혀 떨어졌다. 그것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갈 곳 모르는 분노가 가슴속에 갇혀 맴돌았다. 아니, 분노는 아니었다. 난생처음 겪는 기갈에 초조함만 자꾸 늘었다. 안 될 것을 아는데도.

***

준영이 고3이 된 여름밤이었다. 무더운 열기는 밤이 되어 가셨지만 아직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늦은 저녁 아파트 단지를 걸어 들어오는데 입구의 바로 앞에 주차된 차가 있었다. 아스팔트에 그려진 하얀색 주차 칸에 바르게 들어간 차들의 앞을 막고 길게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준영은 그 차를 지나치려다 익숙한 검고 커다란 모양에 설마 하는 마음에 차 보닛 앞으로 가 번호판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는 번호였다.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확인한 준영이 조수석의 차 문을 열었다. 그간 연락이 없다 갑자기 찾아온 권승주 때문에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형 언제 왔어요?”

“방금. 지나가다가 잠깐 들른 거야.”

“연락했으면 더 빨리 왔을 텐데.”

“지금도 학교 끝나고 바로 온 거잖아.”

조수석의 차 문이 닫히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차 안에 감돌았다. 준영은 차 안의 시계를 보았다. 10시 34분. 학교에서 옆길로 새지 않고 바로 온 시간이 맞았다. 단지 승주가 기다리는 것을 알았다면 걸음이라도 빨리 했을 거라는 아쉬움이었다.

여유롭게 서류를 넘기던 승주는 파일을 갈무리해서 뒷좌석에 두었다. 그리고 그 옆에 뒀던 쇼핑백을 집어 들어 준영에게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넘겨주는 쇼핑백을 받고 준영이 머뭇거렸다. 자주 선물을 받는다지만 아직 문제집을 받을 때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빳빳한 재질의 흰색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고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승주는 고갯짓했다.

“생일 선물 미리 주는 거야.”

“아! 생일. 네. 감사합니다.”

“다음 주는 출장이라.”

부담감이 다소 지워진 준영은 쇼핑백 안에 담긴 상자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다가 잘 여몄다. 스포츠 브랜드의 상표가 둘러 그려진 종이 상자는 딱 봐도 운동화 상자였다. 생일 선물로 이 정도면 비싸긴 해도 감사하다고 받을 만한 수준이었다.

준영에게는 선물을 받는 것도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너무 비싼 물건은 염치없이 받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거절할 때면 주는 승주의 기분이 상할까 걱정이었기 때문에. 이유를 듣고 나서야 마음 편하게 기뻐하는 준영을 보고 승주는 무릎 위에 올려 뒀던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받은 선물을 다시 살피느라 기울여 숙인 옆선이 매끄러웠다. 부드럽게 뻗은 콧대와 적당히 도톰한 입술. 매끄럽게 이어지는 턱선과 솜털이 아직 남은 귓가까지. 손을 뻗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다가 문득 말하고야 말았다.

“나 줄 거 없어?”

“네?”

“답례로.”

퍼뜩 고개를 든 준영은 승주와 눈을 마주쳤다. 장난인지 아닌지 가늠되지 않는 검은색 눈동자가 또렷했다. 눈길을 마주하다가 진심으로 당황해 생각이 빨라졌다. 뭐든지 다 가진 권승주에게 뭘 줄 수 있을까. 승주의 생일은 겨울이었기에 아직 준비해 둔 것이 없었다.

승주는 눈에 띄게 당황한 준영이 늘어놓기 시작하는 변명을 들었다. 생일 때 드리려고 했다, 오늘은 가진 게 없는데 혹시 밥이라도 먹겠느냐. 되는 대로 나오는 준영의 말을 듣고 승주는 낮게 웃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재밌어 장난처럼 말할 수 있었다.

“뽀뽀.”

“네?”

“가족끼리 하는 거.”

“어. 어…. 그래요?”

물론 권승주는 가족 중 누군가가 자기에게 뽀뽀랍시고 입술을 들이민다면 가족 관계를 그만둘 의사도 있었다. 하지만 당황한 준영을 놀리며 뻔뻔하게 표정을 유지했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거지, 라고 말하며. 짓궂음 아래에는 약간의 진심이 깔려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은 바닥에. 여기에서 준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나치게 태연한 승주의 표정에 속았다. 당황과 초조만큼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기울여 눈을 감은 승주를 보고 준영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이대로 심장이 터지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도망칠까. 이 쇼핑백을 그냥 두고. 하지만 그러는 것이 더 유난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당황하는 것이 승주에게 이상한 마음을 품은 자신만의 문제인 줄 알았다.

심지어 가족끼리라고 하고. 물론 권승주는 절대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만큼이나 자신을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엄마보다 더 의지가 되는. 그런 사람. 그래서 가족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고 밀어낼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 준영은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가져갔다. 거기서 잠깐 고민도 했다. 뺨에 살짝 가져다 대고 떼려 했지만 눈을 감고 기울인 고개의 각도가 입술에 더 가까워서. 승주의 얼굴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대로 닿았다가는 코끼리 부딪힐 것 같아 각도도 약간 틀었다. 눈을 꾹 감고 입술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짧은 접촉이었다. 숨이 서로 닿기도 전에 입술의 살결만 닿았다가 떨어졌다. 권승주는 느릿하게 눈을 뜨고 떨어지는 준영을 봤다.

입술에 잠깐 닿았던 감촉이 열기처럼 번졌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준영은 오늘 즐거웠다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남기고 훌쩍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 쇼핑백은 꽉 쥐고 내린 것이 다행이었다. 승주는 말리지 않고 닫히는 차 문과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얕은 계단을 두다다다 뛰어올라서는 아파트 로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쁨과 긍정적인 것들로 부풀었던 권승주의 마음이 천천히 꺼졌다. 기쁨은 산발적이었다. 그는 차 시트에 길게 기대앉아 핸들 위 어딘가를 응시했다. 문득 손을 들어 입술을 꾹 눌렀다 떼어 냈다. 이제야 답답함이 가셨다. 그리고 더 막막해졌다. 도대체 뭘 하자고 이러는 것인지.

그날부터 권승주는 준영에게 오지 않았다. 가끔 준영이 먼저 문자를 해도 프로젝트니 출장이니 늘 바쁘다는 말만을 남겼다. 승호에게 물어도 사실이 그렇다 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승주는 수능 전날도 시험 잘 보라는 짤막한 문자만을 남긴 채 오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도 준영은 불안과 후회로 점철된 고민을 반복했다. 그날 내가 뭘 잘못했었나. 혹시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내렸던 것이 문제일까. 아니면… 덜덜 떨고 있던 내 마음을 승주 형이 알아챈 것일까.

하나씩 늘어 가는 준영의 문자를 보면서도 권승주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가까웠던 형 동생 사이로는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

길었던 단절 끝에 먼저 연락을 한 것은 준영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넘기고 새해 인사마저 문자로 하고 난 후였다. 자연스럽게 멀어졌기 때문에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승주가 없는 일상이 허전하지만 나름대로 익숙해지기도 했다. 수많은 고민과 좌절 끝에 익숙해진 것이었지만.

하지만 승주에게 연락할 만한 일이 생겼다. 갑자기 외식을 하자며 준영을 데리고 간 어머니가 식사가 끝날 때 최대한 평범한 이야기인 척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재혼에 대해서. 준영은 물컵을 들려다가 멍하게 다시 물었다. 짧은 머리에 요즘 유행처럼 굵은 웨이브를 넣은 엄마의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그제야 눈에 밟혔다.

“재혼이요?”

“응. 재혼. 엄마가 너 수능 볼 때까지는 마음 쓰게 안 하려고 아무 말 안했는데 이제 대학도 들어가고 슬슬 말해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재혼이요. 재혼…. 만나는 사람 있었어요? 몰랐어요….”

“엄마 일 다니던 곳에서 만났어. 이제 너도 다 키워 뒀으니 같이 살자고 하네. 괜찮겠니?”

“네. 그렇죠. 네… 엄마 결혼인걸요. 축하드린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해 주면 고마워.”

준영이 넋을 놓고 있자 그녀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놓았다. 당황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아들이 기특하고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모자는 음식점에서 사이좋게 걸어 나왔다. 준영은 엄마에게 다녀올 곳이 있다고 말하고는 길을 걸었다. 이럴 때 쉽게 나오는 이름이 승호였다. 승호를 보러 간다는 준영의 말에 그녀는 별 의심 없이 알겠다고 하고 집으로 향했다. 준영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꺼운 코트를 걸친 엄마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반대로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외식을 한다고 들뜬 마음이 복잡해졌다.

재혼. 혼자의 몸으로 준영을 키우는 게 힘들었을 엄마에게 좋은 일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스스로의 생각이 이기적인 것인지 당연한 것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길거리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적당히 친한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할 기분은 아니었다. 승호를 만나는 것이 제일 편하고 알맞은데 승호는 지금 한국에 없었다. 대학에 합격한 기념으로 해외여행을 나간 게 지난주였다.

아직 돌아오려면 남아도 한참 남은 일정인 게 기억났다.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열어 ㄱ부터 차례로 훑어 내려갔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권승주 형. 금세 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이름이기도 했다. 준영은 찬 바람에 시려 오는 손가락을 오므리다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대화가 하고 싶었다. 혹시 오늘도 권승주가 바쁘다면 더 우울해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짧은 하루해 탓에 벌써 거리는 어둑해져 자동차 불빛마저 눈부셨다. 준영은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신호음을 오래 기다렸다.

끊어야 하나 생각했을 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준영은 그제야 자신이 전화한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소에는 일단 문자를 보내 바쁜지 묻곤 했었다. 바로 입을 떼지 못하는 준영 대신 승주의 목소리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 전화했네.

“네. 형. 안녕하세요.”

- 무슨 일이야.

“아니요. 그냥이요. 바쁘세요?”

- …….

애써 밝음을 유지하는 준영의 목소리에 승주는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자리를 옮기는 듯 발소리가 작게 울리며 다시 대답했다.

- 별일 없어. 만날까?

“어… 저 어디로 갈까요?”

흔쾌히 보자는 승주의 말에 준영은 우물쭈물했다. 이렇게 쉽게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름이 지나고 뜸하던 연락을 생각해 보면 특히 그랬다. 승주는 준영의 집 근처 사거리를 대답하고는 짧은 통화를 끝냈다.

권승주는 익숙한 사거리의 갓길에 차를 주차해 놓고 묵묵히 생각했다. 눈빛이 깊게 잠겨 들었다. 마침 준영을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한 차에 잘됐다고 여겼다. 안 본 지가 어언 육 개월이 지났고 이제는 마음을 다잡았다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했다. 괜찮을 거다. 몇 번을 다짐하고 생각을 비우던 중 조수석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준영은 차에 앉아 문을 단단히 닫았다. 권승주는 그런 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눈을 감는 잠깐의 순간에도 모습이 선명했다. 그럴 법도 했다. 권승주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준영을 봐 왔던가. 눈에 익어 인이 박이다시피 한 모습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이마에 흩어졌고 뛰어왔는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숨이 가빠 보였다. 흰 볼이 찬 바람을 맞아 붉기도 했다. 까맣고 하얗고 빨갛고. 마른 몸을 감싼 검은색의 롱코트마저도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준영은 말이 없는 승주를 응시했고 잠시 뒤에 남자의 다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뛰어 왔어?”

“네. 기다릴까 봐요.”

“별로. 손 줘 봐.”

다짐은 덧없었다. 승주는 내밀어진 준영의 손을 한 손으로 잡았다. 손등은 바람을 맞아 찼지만 손바닥 안쪽은 뛰어오느라 체온이 올라 따뜻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들을 돌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인사말을 생각하던 준영은 그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일부러 아무 말을 안 하고 앞을 응시했다. 차는 이전까지 향하지 않던 방향을 향해 달렸다.

준영은 뜨거운 체온 때문에 움찔거렸지만 승주는 손을 더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왜. 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까. 돌이켜 생각하는 것 마저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다짐이 덧없도록.

이제는 참고 외면하는 일이 지긋지긋했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지키며 달렸다. 준영은 조수석에 앉아 달리는 차 밖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형. 어디 가요?”

“내 집.”

뜻밖의 대답이었다. 승주가 어디 사는지 들은 적은 있었다. 회사 근처의 고급 빌라로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왼손으로 운전하던 권승주는 꼼지락거리는 손을 계속 놓지 않았다. 준영은 손이 잡힌 채 한 번씩 승주에게 불안한 시선을 돌렸다. 굳건해 보이는 옆모습 때문에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아까의 뒤숭숭함이 또 다른 당혹으로 덮였다.

그러는 사이 차는 익숙하지 않은 길을 계속 달렸다. 달리다가 깜빡이를 켜고 가장자리의 차선을 타기 시작했다. 준영은 문득 지나치는 길의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매끄럽게 좌회전한 차는 높고 긴 담장을 끼고 천천히 멈췄다. 어둑한 골목은 주차된 차도 별로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준영은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흰자와 명백하게 대비되는 동공이 어둠으로 확장되어 새카맸다. 무슨 일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적막을 깨고 승주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준영은 분위기상 일단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권승주는 그 대답에 다른 말을 않고 준영에게 몸을 약간 기울였다.

“준영아.”

“네.”

“지금 키스할 건데.”

“네?”

“밀어내려면 밀어내.”

더 이상 긴 말은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권승주를 밀어내려 올린 손은 가슴팍에 닿았다. 강하게 밀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손을 올린 채 입술이 겹쳐졌다. 입 안을 헤집고 다니는 살덩이 때문에 준영은 바짝 굳었다. 들숨마다 짙은 체향이 몰아쳐 더 긴장했다. 움츠러든 등에 팔을 둘러 안으며 승주는 깊게 입을 맞췄다. 이제야 허덕이던 기갈이 채워졌다.

준영은 차마 팔에 힘을 주지 못하고 손끝을 오므렸다. 애초에 권승주가 하는 일에 반항해 본 일이 없어 밀어내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

엄마의 재혼 문제와 승주의 갑작스러운 제안까지. 이런 상황에서 선택을 등 떠밀다시피 한 사건이 있었다. 준영의 거취 문제였다. 준영은 어머니와 한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갈비집에서의 식사를 묵묵히 견디고 일어나야 했다. 결혼식을 따로 할 생각은 없지만 아저씨와 함께 지내고 싶다며 말하던 엄마는 식사 내내 연신 웃는 낯이었다.

준영은 엄마의 생소한 표정을 보다가 찬물을 마셨다. 먹은 음식이 위에서 내려가질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몇 번 얼굴을 봤던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였다. 그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더 긴장했을 텐데 말이다.

생각보다 길었던 엄마와 아저씨의 만남을 들으며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수능 보는 데에 신경 쓰이게 할까 숨겨 왔다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일말의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해도 엄마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걸 알았다면 신경 쓰였을 게 뻔하다. 특히 수능 전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고민도 많았던 시기이니….

여기까지 생각하던 준영은 속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에 다시 물을 마셨다. 이제 친구를 만나러 가 보겠다는 준영에게 엄마는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게 있다며 말을 꺼냈다.

“준영아. 집 말이다.”

“전 따로 나와 살게요.”

“따로? 그래도 그건 엄마가 마음이 불편하지.”

“아니에요. 아저씨 집은 멀 텐데 자취하는 게 낫죠.”

방금 내뱉은 문장에서 아저씨라는 단어가 걸리적거렸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어색한 호칭을 붙이는 것은 싫었다. 아들의 흰 얼굴에 어린 단호한 거절에 엄마는 남자와 한 번 눈길을 나눴다. 이젠 미성년자도 아니고 청년이라 해야 하는 아들이기에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는 어려웠다. 어색해하는 기색도 뻔히 보였고.

“정말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이만 가 볼게요. 말씀 나누세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져야 하는 거잖아요. 준영은 뒷말을 어렵사리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먹었냐는 그들의 말에 있는 힘껏 웃으며 대답도 했다. 그리고 눅눅한 장판에서 내려와 운동화를 구겨 신고는 갈비집을 나섰다.

근방에서 깔끔한 편인 음식점이지만 반찬마다 조미료 맛이 그득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음식도 맛없었다. 입맛이 없어 그랬던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게 느꼈다.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지 않은 아파트들이지만 하늘을 메우기에는 충분했다.

좁고 네모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준영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엄마만이라도 행복해진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물론 자신도 딱히 불행해질 일은 없었다. 수능 성적은 충분히 잘 나왔고 대학에도 합격했다. 앞으로는 어떻게든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었고 그만큼 성장했으니까. 그리고 정 기대고 싶다면….

준영은 여기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시선의 끝에 운동화의 끄트머리가 걸렸다. 의지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입술을 몇 번이고 겹쳤던 그날, 그는 준영에게 마음의 준비가 되면 연락하라고 했다. 마음의 준비.

그것에 대해 자기는 이미 다 끝났다고 말하면서. 준영은 더듬거리던 손을 외투의 주머니 속에 밀어 넣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준영은 권승주에 대한 원망의 말을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두 개의 선택지를 손에 쥐여 준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승주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잠식되든가, 아니면 완전히 잘라 내고 모르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든가. 이런 양자택일이라니. 준영이 여기서 어떤 선택지를 선택할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긴 손가락으로 휴대폰 액정 위에서 천천히 문자를 찍어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집으로 와’ 라고. 걷는 걸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볍다고 생각했다. 결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준영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주소로 찾아갔다. 지난번에는 승주의 차에 실려 간 곳을 이번에는 직접 찾아가려니 잠깐 길을 헤맬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맞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대로변에서 한 블록 뒤인 골목길은 사방이 고요했다. 높은 담장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거리의 왼편에는 고급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계단을 올라서기 전 건물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물의 단면은 은은한 상아색의 대리석이 매끄러워 보였다. 긴장감으로 부푼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유리문 옆의 키패드에서 302라는 숫자를 꾹꾹 눌렀다. 호출음이 조용히 울리더니 곧바로 유리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적막한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에 도착해 내릴 때까지 사람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302호라는 문패가 붙은 검은색 현관문을 마주했을 때 긴장감은 더 가파르게 치솟았다. 순간 돌아갈까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미 아래서 호출을 했으니 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결국 떨리는 손끝을 천천히 벨에 가져다 눌렀다. 벨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현관은 지금껏 주저하던 준영의 마음을 비웃듯 쉽게 열렸다. 그 틈새로 익숙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빛을 등지고 선 권승주를 보다가 준영은 입술만 달싹거리고 말을 않았다. 방금 샤워를 마쳤는지 가운을 걸친 몸이 나른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표정 없이 담담한 얼굴을 보고 준영은 순간 자신이 잘못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했다. 심란함과 세상 고민을 다 끌어안은 듯한 준영을 내려다보며 권승주가 천천히 몸을 비켜섰다. 준영은 만들어진 공간 사이로 걸음을 디뎌 들어왔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준영이 운동화를 벗는 사이 승주는 천천히 그 옆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거실은 어둑했고 소파의 맞은편은 서재처럼 책이 많았다. 처음 봤던 순간부터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소파에 길게 기대앉은 승주를 따라 옆에 앉자 낮은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어디 다녀왔어?”

“엄마랑 만나시는 분 뵙고 왔어요.”

“바로 왔겠네.”

“네. 형은….”

어떻게든 말을 이어 나가려는 준영의 매끈한 미간으로 검지가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며 눈을 감는데 부드럽게 눌리는 접촉으로 끝났다. 천천히 눈을 뜨고 바라보자 승주가 가벼운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마음 정리하고 오라고 했더니.”

“그게.”

“생각이 이렇게 많아서.”

“아니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줘?”

“…….”

“대답.”

손가락이 미간에서 떨어지고 두 사람은 온전히 마주 앉았다. 준영은 대답을 기다리는 승주를 응시했다. 의지, 의지하고 싶은 것뿐인데 승주는 그 이상의 감정을 바랐다.

준영이라고 그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 스무 살이 되었고 무엇이든 붙잡고 싶은 이준영은 특히 그랬다. 그 상대가 권승주라면 더더욱. 명백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한 감정이다.

준영의 입 모양이 ‘네’라는 대답을 확실하게 만들어 내자 승주는 웃었다. 지금까지의 가벼운 웃음이 아닌 진득한 감정을 드러내는 미소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는 눈짓으로 뒤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씻고 와.”

“저 엄마한테 집에 간다고 하고 왔는데….”

미약한 반항에 승주는 오른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보였다.

“휴대폰 줘. 말씀드릴게.”

“뭐라고 하게요?”

“내가 재우고 데리고 있다가 보내겠다고.”

“아.”

여기서 더 이상 변명이 나오지 않았다. 준영이 권승주와 자주 본다는 것은 이미 엄마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믿고 준영이 돌아다니는 것에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다. 준영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승주의 손 위에 올려 뒀다.

따뜻한 실내인데도 손끝이 차게 식어 움직이기 어려웠다. 정말 전화를 걸기 시작하는 승주를 보며 준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씻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뒤돌아서기 전에 승주는 이미 신호음이 가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통화가 시작되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준영은 얼굴을 붉히며 화장실로 달리듯 들어갔다. 샤워 부스를 갖춘 욕실이었다. 문을 꽉 닫고는 떨리는 손끝을 움찔거렸다.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막한 감정에 한숨을 푹 쉬고는 수도꼭지를 열어 손을 씻었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손을 찬 물에 벅벅 문질러 씻었다.

욕실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버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준영은 희뿌연 김이 서린 샤워 부스에서 나와 몸을 닦았다. 구석구석 깨끗이 씻은 몸을 수건으로 천천히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다리에 바지를 꿰어 입고 입고 왔던 티를 다시 걸치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그랬더니 정말 나가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어졌다. 머리카락에서는 물기마저 말라 가는 중이었다.

나가기 전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아직은 청년이라 말하기 어려운 앳된 얼굴이 거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얼굴을 왼쪽으로 돌려 보았다. 엄마를 닮아 고운 편인 얼굴임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고백도 몇 번은 받아 봤고.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연예인 못지않게 잘 생기거나 웬만한 여자보다도 예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낯부끄러운 생각을 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핑계를 찾기 위해서였다. 승주 형이 내게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모르겠어서 준영은 기분이 더 복잡했다. 명백한 이유가 눈에 보인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었다.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권승주가. 승주 형이. 왜 그러는 건지 안다면 차라리 아무 생각 하지 않았을 텐데.

천천히 문을 열고 나왔더니 거실은 어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일러 주듯 욕실 대각선의 문 하나가 열려 방 안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스탠드를 켜 뒀는지 환한 불은 아니었다. 천천히 그 문 앞으로 다가간 준영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밀어 열었다.

거슬리는 소음 하나 없이 문이 열렸다. 승주는 침대 너머 넓은 창가에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아 손짓했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는지 종류별로 분류된 보고서가 좁은 테이블 위에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준영이 이끌리듯 그 앞에 다가가 서자 승주의 손이 준영의 허리를 당겨 몸을 가까이 했다. 얼떨결에 승주를 내려다보게 된 준영은 시선을 턱 끝에 맞추고 피했다. 앉은키라고 해도 권승주의 키가 크다 보니 눈높이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천천히 몸이 밀착되듯 끌어 안겼다.

상의가 들춰지고 틈으로 뜨거운 손바닥이 맨살을 어루만졌다. 다리 사이에 가둬지다시피 한 자세라 준영은 어쩔 줄 모르고 움찔 떨었다. 예민한 반응을 살피던 승주가 천천히 웃옷을 끌어 올려 쇄골 근처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준영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물고 있어 봐.”

“…….”

내용에 어울리지 않게 잔잔한 목소리였다. 준영은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천을 이 사이로 사리물었다. 남자의 단단한 손마디가 천천히 피부 위를 거슬러 올라갔다. 옆구리에서 아랫배를 쓸어 올리고 올라간 손이 심장이 있을 듯한 부분을 눌렀다. 빨라진 박동이 미약하게 느껴져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준영은 윗입술을 떨며 승주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반응에 승주의 손길이 가슴팍을 주무르듯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유두를 손가락으로 굴리듯 만지작거렸다. 히끅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준영의 몸이 한 번 흔들렸다. 한 것도 없는데 이미 눈가가 붉어지려 하는 준영을 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천천히 바지의 버클을 풀어 내렸다.

“생각은 다 정리했어?”

“…….”

“고개만 흔들어.”

그 말에 제 웃옷을 물고 있는 작은 머리통이 위아래로 한 번 움직였다. 승주는 그사이 바지를 끌어내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짙은 색의 드로어즈 위로 보이는 성기의 윤곽을 꽉 그러쥐자 몸이 다시 휘청했다. 그 바람에 준영은 입에 물고 있던 옷을 놓쳐 윗옷이 드러내고 있던 상체를 가렸다.

승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윗옷을 다시 끌어 올렸다. 이번에는 아예 머리를 통과해 옷을 벗겼다.

준영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사이로 시야가 흐려져 휘청거렸다. 그때 준영의 허리에 감긴 팔이 그의 몸을 인도해 그대로 끌려가 앉았다. 승주의 단단한 허벅지에 앉아 품에 기댔음을 알고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엉덩이 아래로 맨살과 흐트러진 가운의 경계가 느껴졌다. 그런 준영의 다리 사이로 다시 손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속옷의 안으로 들어간 손이 성기를 어루만졌다. 안절부절못하는 준영의 이마를 한 번 쓸어 주고는 다시 손안의 성기와 그 아래 고환까지 만지작거렸다. 준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승주를 불렀다.

“형, 승주 형.”

“왜.”

“저. 손.”

“손?”

짓궂게 손아귀에 힘을 주자 준영의 몸이 매달리듯 승주에게 기댔다. 헐떡이는 숨이 목덜미에 닿자 승주도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속옷을 손아귀에 잡고 끌어 내리자 다시 미약한 발버둥이 있었다.

매달리며 우는소리를 내는 게 하지 말라는 건지 더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맨몸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 저만. 창피해요.”

“내 가운도 벗겨 봐.”

“아니요. 그게.”

“빨리.”

흥분이 오른 승주의 목소리도 잠겨 들었다. 눈에 힘을 주며 말하는 승주 때문에 준영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차마 허리에 매인 매듭부터 풀 생각은 못 하고 벌어진 앞섶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아까 승주가 하던 대로 뜨거운 피부를 어루만지며 등까지 손을 넣고 둘러 안았다. 가슴과 맨얼굴에 닿은 승주의 피부가 뜨거웠다. 가만히 있는데 움찔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준영은 익숙한 체취를 꽉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덜덜 떨리는 팔과 정반대로 기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품에 안겨 든 준영을 고쳐 안으며 승주는 얼굴을 마주 비볐다. 열 오른 피부가 아직 앳돼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웠다. 말랑한 귀를 이빨로 물었다 놓고는 입술을 찾아들었다. 틈이 맞물리고 입술의 연한 살을 빨아 올렸다. 지난번의 경험도 나름의 경험이었는지 준영은 턱에 힘을 빼고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혀를 씹고 잇몸을 훑을 때마다 승주를 꽉 안고 있는 팔이 흔들렸다. 입술이 문질러지고 떼어지자 준영은 숨이 부족해 멍한 표정으로 무너졌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승주의 손이 천천히 엉덩이 아래의 허벅지와의 경계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괜히 놀리고 싶었다.

“준영아. 지금까지 키스 몇 번 해 봤어?”

“어. 지난번에… 몇 번 했죠.”

“차에서 한 번. 올라와서 한 번 하고. 세 번 더 했나.”

“그럼 이제 여섯 번째.”

“그래.”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리던 손이 엉덩이를 주무르듯 만지자 품 안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승주는 귀 끝까지 벌게진 것을 혀로 한 번 핥고는 물었다.

“섹스는.”

“그건….”

“그건?”

“아직.”

“그리고 오늘 할 거야.”

“아.”

준영은 차마 다른 말을 못하고 고개만 느리게 끄덕거렸다. 순진한 반응을 내려다보던 승주의 손끝이 천천히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차마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곳에 닿는 손길에 준영의 마른 등이 한 번 떨렸다. 승주는 혀로 건드리던 귓가를 강하게 빨아 당기고는 속삭였다.

“내게 다시 오면. 걷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했잖아.”

“네.”

“오늘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고.”

“…….”

“그래도 왔으면. 제대로 벌려야지.”

“형, 할 건데….”

대답이 길어질 것 같자 승주는 손을 높이 들어 엉덩이를 내려쳤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으로 얻어맞은 피부가 금세 달아올랐다. 준영은 대답하려던 말을 다 못하고 잔뜩 굳었다. 움츠러든 몸을 살살 어루만지며 승주가 다시 속삭였다. 다시 손을 쓰고 싶었지만 반대로 안쓰러워서 그러질 못했다.

“잘 할 거지?”

“…형.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얌전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더니 오히려 반문이 나왔다. 승주는 준영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침대에 올려 눕히고는 그 다리맡에 앉아 하얀 발등을 쓸었다. 푸른 핏줄이 은은히 비칠 정도로 하얗고 피부가 얇아 보였다.

다리를 모으려는 것을 간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웃었다. 승주의 대답은 따로 없었지만 말을 계속해도 들어 줄 기세라 준영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뭐가.”

승주는 몸을 더 바싹 대고 세운 탓에 둥근 모양을 한 무릎에 이를 세웠다. 그다음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어딘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을 보며 준영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떤 걸 물어봐야 할까. 나에 대해서? 아니면 취향에 대해? 후자로 마음이 기운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지금 당장 준영이 겪게 될 일이었으니까.

“형이 이러는 거요.”

“섹스 취향?”

“네, 그거.”

“좀 됐지.”

“…….”

알고 지내던 길고 긴 시간 동안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불안하게 깜빡거리는 눈꺼풀 때문에 숱 많은 속눈썹이 자꾸 흔들린다. 승주는 다리를 놓고 준영의 몸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눈앞까지 다가온 승주의 얼굴에 호흡이 흔들렸다. 긴 손가락이 그런 준영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눈을 맞췄다.

“괜찮아. 위험한 건 안 해.”

“…….”

“조금 간지럽고, 기분 좋은 정도만 할 거야.”

여기까지 말하고 준영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천천히 눈매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피부 위를 움직이는데도 솜털만을 건드리듯 섬세한 손길이었다. 목 안이 간질거리는 듯한 감촉에 준영의 콧잔등에 미미한 주름이 잡혔다 펴졌다. 승주의 손이 깜빡거리던 눈을 완전히 덮었다.

“무서워?”

“아뇨. 아직은.”

대답하는 입술 위로 입술이 겹쳐졌다 떨어졌다.

“키스는 좋아해?”

“…….”

“좋아하는 걸 말해 줘야 내가 해 주지.”

“그냥 하면 안 돼요?”

“그럼 나만 좋을걸.”

깜빡깜빡. 눈 위에 덮인 손바닥에 힘이 실리지 않았기에 준영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긴장한 나머지 숨을 내쉬는 걸 기억하지 않으면 호흡하는 법도 잊어버릴 것 같았다.

권승주만 좋은 일이라.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불안한 말이었다. 그래서 준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했다. 긍정적인 고갯짓에 승주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 도톰한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놨다. 그리고 입가를 혀로 축이듯 문질렀다. 부드럽고 축축한 감촉이 자꾸 입술을 간질이자 아래에 깔린 하얀 몸이 움찔거렸다.

시각이 가려져 감촉이 더 예민하게 내달렸다. 할짝대는 소리와 간지러움을 견디다 못해 말을 하려 입을 벌리자 입술이 틀어 막혀 그 안에서 혀가 움직였다. 흐읍. 신음을 먹으며 혀가 엉켰다. 욕심껏 혀를 물고 빨던 승주가 물러서며 시야를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워 줬다.

젖은 눈을 하고 저를 보는 준영을 보자 속에서 열이 확 올랐다. 승주는 가운을 천천히 벗어 내렸다. 이것도 시켰어야 하는 것인데. 역시 준영에게는 자꾸 물러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손을 뻗어 첫 번째 서랍을 당겨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뒤지니 길쭉한 원통형의 젤이 잡혔다. 뚜껑을 돌려 열며 침대에 누운 준영을 바라봤다. 달뜬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 있었다. 준영이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해도 막상 권승주의 나신을 마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무릎으로 준영의 다리를 툭 건드리며 승주가 말했다.

“다리 벌려.”

“어떻게요.”

“무릎 아래 손 넣고. 활짝.”

듣는 순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이었다. 적나라한 요구에 준영은 천천히 손을 아래로 뻗었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 무릎 아래를 잡기는 했는데, 차마 다리를 벌리지를 못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흐를 듯 울상인 얼굴을 보고 승주는 손아귀의 젤을 꾹 쥐었다. 표정이 위험했다. 권승주는 안타깝게도 가학적 취향이 남들보다 두드러졌고 이렇게 애달픈 표정을 봤을 때 감싸 안아 주고 싶은 욕구가 별로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울리고, 괴롭혀서 기어코 눈물이 터지게 하는 것이 취향이었다.

그래도 처음이니까. 몇 번 자고 나면 효과가 없어질 다짐을 하며 한 손으로 준영의 발목을 꽉 감싸 잡았다. 그리고는 복숭아뼈 근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표정이었다.

“준영아.”

“승주 형.”

“조금 더 벌려 봐.”

“…이렇게요?”

승주의 말에 준영이 제 다리를 좀 더 끌어안으며 다리를 벌렸다. 애매하게 벌어진 각도 사이로 납작한 아랫배와 옅은 색의 성기가 보였다.

그 아래 짙은 색의 회음부까지. 질척하게 훑는 시선에 준영은 이를 악물며 무릎 뒤쪽을 부여잡았다. 승주가 잡고 있던 발목을 나긋하게 간질이며 말했다.

“내가 다리 사이에 들어가서 네 위에 올라탈 수 있을 만큼 벌려야지.”

적나라한 말에 준영은 멍하게 있다가 승주와 마주하던 시선을 다시 피했다. 눈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꽉 짜인 복근과 그 아래 곧추선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몸 안으로 파고들듯 흉흉한 기세의 성기를 마주하며 준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승주는 준영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벌어지는 다리 사이로 다시 시선을 뒀다. 힘겹게 벌려지는 다리는 처음 취하는 자세가 어색한지 잘게 떨린다. 이 정도면 나머지는 힘으로 벌려 밀어붙일 수 있겠다 싶었다.

다리 사이로 질척한 젤을 짜냈다. 차가운 젤이 성기와 회음부에 고이자 몸이 움찔 떨렸다. 고였던 젤이 엉덩이 사이 구멍까지 스며드는 것을 보며 승주는 손에 든 것을 뒤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세심한 손길로 회음부를 건드렸다.

다시 다리가 움츠러들려 하자 몸을 숙여 가슴에 입술을 맞추고는 손을 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구멍 사이로 검지가 디밀어져 들어갔다. 준영은 천장을 응시하며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결국 다리가 다물리려 할 때 몸무게를 실은 승주에 짓눌려 끌어 안겼다.

“승주 형. 형.”

“응?”

부름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낮은 저음에 섞인 질척한 소리에 준영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넓게 벌려져 허벅지 안쪽이 땅겨 아팠지만 말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데일 듯 뜨거운 권승주의 성기가 준영의 성기와 문질러지다가 허벅지 안쪽의 연한 살을 문질렀다. 젤에 적셔진 살에 비비자 매끈하게 문질러졌다.

승주가 상체로 준영을 짓누르며 구멍에 넣고 움직이던 검지를 깊게 넣었다. 손바닥이 회음부를 짓누르도록 깊은 삽입에 준영은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을 살피던 승주가 그 입술 위에 짧게 입 맞추며 말했다.

“소리 내.”

거기에 준영은 눈까지 꽉 감으며 도리질 쳤다. 어디까지 버티나 싶어 깊게 넣은 손가락으로 내벽을 간질이자 입가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겉을 문지르고 있던 중지마저 입구를 통과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물기에 젖은 내벽이 뜨겁게 조여들었다. 승주는 손가락을 조이는 감촉에 일부러 질척이는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손끝에 걸리는 여린 살갗이 억지로 비틀어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생소한 감촉과 고통으로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이마를 응시하다가 길게 드리워진 앞머리를 입술로 치웠다. 점점 속도를 올려 살 부딪히는 소리가 방을 울리는데도 준영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참았다.

“괜찮아?”

“흣, 네.”

목덜미까지 벌겋게 되어서는. 승주는 눈물이 고이려는 눈꼬리를 길게 핥으며 손가락을 천천히 물렸다. 처음 키스할 때부터 승주는 자신이 준영에게 영 무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몸을 겹치니 더욱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어딜 때려서라도 입술을 열게 만드는데, 갑갑하면서도 적당히 봐주게 되었다. 이런 감정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손가락 세 개를 밀어 넣었다. 손놀림이 다시 섬세해졌다. 이물감과 벌어지는 느낌이 낯설게 몸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 감각을 견디다 못한 준영이 결국 손을 들어 승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 저 아파요.”

“이 정도로?”

준영의 말에 의문형으로 대답하며 세 개의 손가락을 깊게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뭘 하는 것인지 알아챈 준영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움찔거렸다.

맞닿은 가슴부터 얽혀 든 다리까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살짝 부어오른 듯한 입구를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잠깐 몸을 떼어 냈다. 준영의 다리를 다시 들어 가슴 근처까지 접어 올렸다. 적나라하게 벌려진 자세에 저항하려 다리에 힘을 주자 승주가 눈짓하며 말했다.

다리 잡으라고. 그 말에 준영은 이를 악물고는 다시 무릎 아래를 부여잡아 다리를 벌렸다. 익숙지 않은 자세에 떨리는 몸을 밀어붙이며 승주가 성기를 회음부에 가져다 대 문지르기 시작했다. 준영은 구멍을 당장이라도 뚫고 들어올 듯 닿았다가 미끄러지는 성기에 기절할 것 같았다. 손가락 정도로 익숙해질 것이 아니었다. 흥분으로 경직된 승주의 목덜미를 보면서도 애원의 말이 나왔다.

“승주 형, 저. 못하겠어요. 죄송… 아.”

“괜찮아.”

“아니요, 형. 아아…. 흑.”

붉게 달아오른 구멍에 귀두를 갖다 대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몸부림치려는 기미가 보여 허리의 가는 부분을 붙잡아 끌어 내렸다. 강렬한 압박감이 성기를 옥죄며 물어뜯었다. 고통이 느껴질 정도라 힘으로 눌러 삽입하던 승주도 미간을 구겼다.

준영은 몸이 갈라지는 듯한 감각에 발끝을 오므려 덜덜 떨었다. 바짝 힘이 들어간 정강이를 손으로 만지며 다시 무게를 실어 삽입했다. 성기가 반쯤 틀어박혔다.

“준영아. 힘 빼야지.”

“아. 아파. 승주 형… 흐으….”

“조여 물면 너만 아파. 마음대로 해.”

스스로의 고통도 상당했지만 일부러 이렇게 말하고는 상체를 숙여 준영을 끌어안았다. 무게에 실려 성기가 결국 안쪽 깊은 곳까지 완전히 삽입되었다. 준영은 닿아서는 안 될 곳까지 성기가 닿자 울며 발버둥 쳤다. 부어오른 내벽이 성기의 굴곡까지 생생하게 전달했다. 승주는 그런 몸을 꽉 끌어안으며 눈앞에 드러난 목덜미를 짓씹었다.

눈앞이 흐려질 만큼 쾌감이 강렬했다. 단순히 삽입을 하고 섹스를 해서가 아니라 이준영을, 안 가져 본 것 없는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두고 보고 있던 이준영을 이제야 아래에 눕힌 데에 대한 정신적인 쾌감이 같이 몰려왔다.

버둥거리는 허벅지가 권승주의 장골과 허리를 문질렀다. 아래에 깔린 몸이 울음을 내뱉느라 헐떡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눈을 내려 보았다. 온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동그란 이마는 땀에 젖었고 상기된 뺨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그제야 준영이 입으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들렸다.

“안 돼요. 형. 나 못해…. 안 할래.”

그러면서도 밀어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겨 들었다. 이마를 승주의 어깨에 문지르며 안겨 들다가 털썩 침대에 누웠다. 승주는 천천히 입술을 내려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눈썹 끄트머리와 콧방울, 그리고 떨리고 있는 입술까지. 옆을 짚고 있던 손 안에 잡히는 침대 시트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울며 애원하는 모습이 미치게 좋았다. 아래에서 잘라 버릴 듯 조여 물고 있는 준영의 몸 안도. 고통으로 움찔거리는 몸의 모든 구석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다정한 척 준영의 등 뒤에 팔을 둘러 고쳐 안았다. 무게가 더 실려 성기가 깊숙이 눌려 들어갔다.

고환이 엉덩이에 문질러지도록 결합이 깊어지자 준영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나왔다. 안 된다는 말이 입술 위에서 뭉개졌다. 그런 몸을 끌어안으며 천천히 승주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움직임에 휩쓸리던 몸이 울음 섞인 신음을 뱉어 냈다.

준영은 제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배 아래 어딘가로 자꾸 파고드는 성기에 쭈뼛 소름이 돋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럴 때면 박혀 든 성기의 모양새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자꾸 눈물이 흘러 닦아 내다가 나중에는 아예 승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삼켰다. 등을 둘러 안고 휘감긴 팔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놓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박자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자 준영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빌었다.

“아, 안 돼. 아, 하지 마… 형, 나… 아!”

하체가 침대 매트리스에 깊게 묻히도록 밀어붙여졌다. 맞물린 하체가 난잡하게 붙다가 승주의 성기가 안쪽까지 깊게 들이밀며 사정했다. 준영은 안에서 뜨끈한 액을 쏟아 내며 줄어드는 성기에 기겁했다. 호흡이 불안정해 딸꾹질마저 나왔다.

히끅거리는 몸을 끌어안으며 승주는 후희를 즐기듯 허리를 움찔거렸다. 가슴을 답답하게 옥죄어 오던 것이 어느 정도 해소된 듯 개운했다. 저린 여운을 남기는 몸도 마음에 들었고.

커다란 손이 준영의 엉덩이를 쓸어내리다 주물렀다. 아직 안에 박혀 든 성기가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또 흔들었다. 입술에 짧게 입 맞추며 손을 들어 준영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쾌감이 오르는지 아랫배가 오목해지도록 힘을 주고는 움찔거렸다.

그런 귀두 끝을 엄지로 짓이기듯 문지르자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아직 준영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던 승주의 성기도 같이 자극을 받았다.

“저, 이제… 아. 놔주세요… 흐읏, 읏.”

“그냥 싸.”

“아니… 싫어.”

“자꾸 싫다고만 하네.”

부끄러운 듯 피하려고만 하자 일부러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며 손의 움직임을 빨리했다. 준영의 눈이 꽉 감기더니 속눈썹마저 바르르 떨릴 정도로 위축되었다.

버티다 못 견디겠는지 승주의 손에 쥐어진 성기가 사정액을 흘렸다. 기운이 빠져 늘어진 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승주는 간격을 더 가까이 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느껴지는지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기운 없이 감아 내렸다.

탈력감에 순종적인 얼굴을 보던 승주는 준영의 입술을 더듬어 물었다. 가볍게 입술을 서로 문지르다가 입술을 억지로 벌려 열고 키스했다. 입 안을 가득 메우는 키스에 준영은 눈을 살짝 뜨고 눈앞의 얼굴을 바라봤다. 흥분으로 열이 오른 남자의 얼굴을.

몸 안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단단해져 가는 성기가 부담스러웠지만 키스는 좋았다. 얽히는 혀와 나누는 숨결도. 애정 어린 행동이라 좋았다.

혀를 빨아올릴 때마다 매달려 오는 몸을 도닥이며 승주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준영은 다시 다리를 모아 가지런히 했다. 그런 행동을 보며 승주가 손을 내려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싫다고만 하면 안 되지.”

“하지만.”

“싫다고만 할 거면 섹스를 왜 해.”

“…….”

듣는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엄하게 말하는 승주의 표정은 진심인 것만 같았다. 그 표정에 준영은 종잡지 못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전에 섹스를 해 본 적이 있어야 알 텐데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쉽게 승주의 말에 말려들었다. 준영이 대답을 못 하고 우물거리고 있자 승주는 일부러 더 진지하게 밀어붙였다.

“혼나자.”

“…네?”

“앞으로 안 그러게. 혼나야지.”

그러고는 누워 있는 준영의 몸 옆에 길게 기대앉았다. 승주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던 준영의 팔이 잡혔다. 그리고 그 팔에 끌려 몸을 다시 가까이 붙였다. 엎드려서. 누우라고.

자세를 갖추고 보니 준영은 승주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배를 대고 엎드린 모양새가 되었다. 옆구리에 느껴지는 승주의 성기는 아직도 델 듯이 뜨거웠다.

승주는 자신의 허벅지에 얌전히 엎드려 누운 준영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날개 뼈 부근을 어루만졌다. 햇빛을 보지 못해 그런지 잡티 하나 없이 흰색이었다. 손에 닿는 감촉도 단단하지만 부드러웠고. 자꾸만 손이 가는 감촉이었다.

내려간 손이 허리를 어루만지고 꼬리뼈를 지나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로 향했다. 그 사이가 마찰로 발갛게 변해 있었다. 손가락으로 틈을 벌려 보자 흰 점액질이 묻어나는 구멍이 손가락이 쉽게 들어갈 정도로 벌어진 채 도톰하게 부어 있었다. 거기서 승주는 열이 돌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나치게 야했다.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듯 만지자 아래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엉덩이를 한 번 꼬집으며 승주가 목소리를 다잡고 말했다.

“몇 대 맞을래.”

“진짜 맞아요?”

작게 물어보는 목소리에는 아직 확신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여기서 얌전히 얻어맞아야 하는지. 아니면 반항을 해도 되는지. 승주는 손을 들어 준영의 뒷목을 꾹 잡아 눌렀다. 위협으로 인식하고는 흰 등이 경직되었다.

“몇 대.”

“…열 대요.”

“고작 그거?”

“그럼… 스무 대.”

“엉덩이 치켜 올리고. 소리 내면 다시 처음부터 때릴 거야.”

마치 지각한 학생을 혼내려는 학생 부장의 목소리처럼 사무적이었다.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준영은 내심 참을 만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시트에 이마를 대고 기다렸다. 긴장감이 잠깐 흘렀다. 승주는 약간 치켜 올려진 준영의 엉덩이를 보고 손을 높게 치켜 올렸다.

답지 않게 곱게 섹스한 탓에 손바닥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힘을 다해 손을 엉덩이로 내려 붙였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엎드려 있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아!”

“소리.”

“네? 아픈데….”

“다시.”

생각보다 큰 아픔에 엉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준영은 눈앞에 어지러울 정도로 어금니를 꽉 물고 힘을 줬다. 철썩, 하고 다시 엉덩이에 손이 내려앉았다. 몸이 살짝 밀릴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듯 움찔거리는 등허리를 누르며 승주는 연신 손을 내리쳤다.

아래에서 히익거리는 숨소리가 점점 커졌다. 열다섯 대쯤 되었을 때 새빨갛게 되어서는 떨고 있는 엉덩이의 살갗을 눌렀다. 숨을 삼켜 넘기는 소리가 컸다. 일부러 새빨갛게 부어오른 부분을 꼬집으며 준영에게 말을 걸었다.

“소리 냈어?”

도리도리. 말을 했다가는 다시 셀까 무서운지 준영은 소리를 죽여 고개만 저었다. 승주는 열이 오른 엉덩이를 다시 벌려 보며 미소 지었다. 숨 삼키는 소리도 이렇게 크면 보통 다시 세야 하지만, 역시 준영에게는 물러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늘 처음 다리를 벌려 본 애한테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려웠다. 등을 다시 내리누르며 승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섯 대 더.”

천천히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손을 내리 붙였다. 철썩, 철썩. 다섯 번의 소리가 연달아 나고 치켜 올라갔던 엉덩이는 승주의 허벅지에 걸쳐진 채 부들부들 떨렸다. 잔뜩 굳은 어깨를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승주가 준영을 침대 위에 내려 두고 일어났다. 소리 내도 돼. 허락이 떨어지자 엎드려 있던 몸이 움츠러들며 울음 같은 소리를 토했다.

“아. 하아. 아파….”

“괜찮아. 잘 맞았어.”

엎드려 있는 몸 뒤로 올라탄 승주가 늘어져 있는 준영의 아랫배로 손을 밀어 넣고 들어 올렸다. 상체는 엎드린 채로 무릎을 세우고 엉덩이만 들어 올린 모양이 되었다. 덮쳐누르듯 올라탄 승주가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 골 사이로 문질렀다. 들어갈 길을 찾듯이. 아픈 엉덩이가 짓눌리며 다시 삽입할 기세를 보이자 준영이 도리질 쳤다.

“형. 안 돼. 나 이제 못 해, 아. 아! 다음에….”

“또 혼난다. 스읍.”

등 뒤에서 승주가 준영의 목덜미를 깨물며 강하게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몸이 맞물리자 단단하게 일어선 승주의 성기가 벌린 지 얼마 안 된 구멍을 찾아 깊게 파고들었다.

방금 전의 사정액이 구멍과 성기의 좁은 틈새로 스며 나왔다. 허리를 내려 피하려 할 때마다 몸을 추어올리는 손을 느끼며 준영은 몸부림쳤다.

배 안쪽을 두드리는 둔통과 간지러운 감촉이 이상했다. 천천히 허리를 돌리다가 깔린 몸에서 나는 신음을 듣고 승주가 그쪽으로 움직임을 깊게 했다. 아프면서도 배 안쪽의 열기가 뭉쳐 간질거렸다. 시트에 얼굴을 묻고는 소리 높여 울었다.

우는소리에도 승주는 들쑤시는 움직임을 늦추지 않으며 준영의 머리채를 가볍게 그러쥐어 들었다. 두피가 당겨 눈물로 젖은 얼굴이 치들렸다.

“아응, 아… 아파. 흐으… 앗, 아아.”

“준영아. 괜찮아. 자. 좋은 데도 있잖아.”

그러고는 박아 넣을 때마다 잘게 떨리는 부분을 뭉근하게 돌려 눌렀다. 성기에 짓눌려 움직이는 내벽이 자극적이라 승주도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자제했다.

여기서 더 나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끌어안고 있던 손을 준영의 성기에 가져가 다시 쥐고 흔들어 줬다. 반쯤 선 성기가 움찔거리며 손아귀에서 젖은 액을 뱉어 냈다. 준영의 턱을 꽉 잡아 뒤로 돌리며 승주가 볼을 비비고 말했다.

“너도 섰네.”

“하아, 읏, 아니… 야. 아… 아읏.”

“입 벌려 봐.”

후배위로 흔들리던 몸이 잠시 멈추며 입술이 맞물렸다. 혀를 받으며 준영은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을 천천히 늘어트렸다. 조여 오는 내벽의 열기를 느끼며 승주는 사정을 빨리하기 위해 일부러 허리를 거세게 흔들어 털어 내듯 사정했다.

울컥 정액이 들어오는 몸을 느끼며 준영은 잘게 떨었다. 아직 키스 중인 입 안으로 신음이 웅웅 울렸다. 코로 힘겹게 숨을 내쉬며 혀를 얽다가 쓰러지듯 시트 위로 무너져 내렸다. 승주도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고 몸을 물렸다.

구멍에서 천천히 성기를 뽑아내자 진탕으로 쏟아 낸 정액들이 줄줄 흘러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렸다. 다시 열이 오르려는 성기를 애써 진정시키며 늘어진 몸을 끌어안았다. 한계 이상으로 시달린 탓에 기절하려는 듯한 준영의 눈가에 짧게 입술을 눌렀다. 그런 행동에 안심하듯 눈을 감으며 고개가 툭 기울어졌다. 정액으로 젖고 늘어져 있는 몸을 보며 승주는 다물린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이제야 살 것만 같았다.

***

새벽이라 아직 어둑한 침실은 햇볕이 다 들지 않았다. 간밤에 있었던 일은 흔적도 남지 않았고 고요한 안락함만이 남았다. 이불 사이에 파묻혀 잠들다시피 했던 준영은 문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에 눈썹을 움찔거렸다.

정신이 얕게 깨어나자 간밤에 있던 일이 기억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넓은 침대에는 준영 혼자만이 남겨져 있었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남색 이불을 끌어 내리고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시트에 닿은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그러니까 가벼운 속옷조차 입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몸 안에 남은 이물감과 삐거덕거리는 몸 때문에 침대 아래로 내려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목 안도 칼칼했다. 간밤에 울었던 눈도 부어 옅게 져 있던 쌍꺼풀마저 풀린 상태였다.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들을 들으며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지금은 새벽이고 방학인 자신과 달리 권승주는 출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지만 그 욕심을 힘겹게 밀어냈다. 일어나서 같이 나가야 했다. 집주인이 없는 집에 누워 있기에는 눈치라는 게 있었다. 옷을 찾아 방 안을 눈으로만 두리번거리는데 천천히 방문이 열리며 빛이 새어 들어왔다.

칼로 잰 듯한 바지와 크림색 셔츠까지 갖춰 입은 승주가 한 손에 커다란 머그 컵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젯밤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권승주를 마주하고 준영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보자마자 바짝 얼어 버린 준영의 태도에 별 반응을 안 하며 승주는 침대가로 가까이 다가왔다. 준영은 훤하게 드러난 맨가슴이 기억나 이불을 다시 목 근처까지 끌어 올렸다. 승주는 그것도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준영에게 들고 있는 컵을 내밀었다.

매끈한 도자기 재질의 머그 컵은 김이 나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자 손안에 온기가 어렸다. 안에 들어 있는 스프를 한 모금 넘기자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준영은 눈을 들어 승주를 보았다.

“이게 뭐에요.”

“스프. 나가기 전에 아침은 챙겨 먹이려고.”

“감사합니다.”

승주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양손으로 머그 컵을 붙잡은 흰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고작 그거 가지고 인사는.”

“그래도요.”

집에 있어도 거의 챙겨 먹지 못하는 아침 식사였기에 더욱 그랬다. 어젯밤의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권승주를 마주하며 준영은 입 안에 다시 스프를 머금었다. 따뜻한 눈길은 지금까지의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아픈 몸 상태만 아니었다면 준영은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저 아는 형 집에 놀러 왔고 잠들었다가 꾼 지독한 악몽. 하지만 없던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지 않았다.

말없이 스프만 넘기는 준영의 태도를 보며 승주가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대뜸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에 준영은 눈을 크게 뜨고 움츠러들었다. 승주는 여상한 태도로 다물린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다쳤나 확인하는 거야.”

“안 다쳤어요. 저 괜찮아요. 형. 저….”

“가만.”

방금 전까지 따뜻하던 눈동자에 온기가 가시는 것만 같았다. 준영은 머그 컵을 부서져라 부여잡으며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손을 느꼈다. 성적인 의미가 없는 손길이 살결을 쓸고 지나갔다.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그 사이 다물린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할 때에는 정말 얼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별일 없다는 듯 손을 다시 거둬 가는 권승주를 보며 준영은 마음을 다잡았다. 꿈을 꾸기는. 현실이었다. 권승주와 간밤에 섹스를 한 것은. 준영은 다급하게 컵 안의 스프를 삼키고는 말했다. 눈에 띄게 빨라진 행동을 승주는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형. 저 옷.”

“그냥 자.”

“저 나가야죠.”

“어제 그렇게 아프다고 울어 놓고 벌써 괜찮아?”

“그건 아니지만.”

“더 자고 일어나서 냉장고에 있는 거 뭐든 꺼내 먹어.”

“집에 가야 할 거 같아요.”

“너희 어머니 집에 며칠 안 계실 거야. 어제 재혼하실 분 집에 가서 준비할 거 준비하신다고 말씀하셨어.”

“아….”

준영은 느릿하게 대답을 뱉어 냈다. 어제 승주와 전화 중이었을 때 엄마가 그런 것까지 전해 달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불편한 마음을 숨기려 작게 미소 짓는 입가를 보며 승주가 물었다.

“너도 가?”

“아저씨 집이요? 아니요.”

“그럼 집은.”

“그냥… 학교 앞에 자취하지 않을까요.”

천천히 나오는 준영의 대답들을 들으며 승주는 뒤집히는 속을 달랬다. 남의 가정에 참견하는 것이 예의가 아님을 알았지만 이 집은 말 잘 듣는 자기 아들은 지나치게 방치했다. 물론 이준영의 어머니가 혼자 일을 하고 아들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러니까 저 같은 놈이 애를 이렇게 건드리고야 만 것 아니겠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눈앞에서 굳어지는 표정을 보고 자기는 괜찮다며 자그맣게 말하는 준영의 입술을 보며 승주는 말했다. 반쯤 충동에 가까웠다.

“여기서 학교 다녀.”

“그건 너무 죄송해서 안 될 거 같아요.”

“뭐가 죄송해. 네가 있으면 더 좋은 건 난데.”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는 준영의 표정을 보며 승주가 작게 한숨 쉬며 손을 뻗었다. 아직 어리둥절하기만 한 준영의 뒷덜미를 끌어당겨다가 입술을 겹쳐 혀를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준영은 벌린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고 혀를 받았다.

타액이 섞이며 한동안 키스하던 승주가 담백하게 물러나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멍하던 준영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거기에 대고 승주는 명확하게 말했다.

“이런 것도 하고.”

“아. 어. 음….”

“회사 다녀올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 입학식은 언제야.”

“아마 곧.”

“신입생 엠티는.”

“확인해 봐야죠.”

“너 수강 신청일은 알아?”

“아직….”

마치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되어 준영은 목을 움츠렸다. 승주는 거기서 다시 한 번 뻗치는 성질을 참지 않고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나 들으면 알 법한 명문대를 들어간 아들인데도 집에서는 영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어이없었다.

권씨 일가의 둘째 아들께서 저 대학을 들어갔다면 부모님은 열쇠 세 개를 대령해 일정을 매일같이 외우고 다녔을 텐데. 저래서야 이준영이 학교 입학 전 무슨 모임이나 다른 일정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권승주는 준영이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빼앗듯 들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준영에게 일단 누워 있으라는 말을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는 밤에 이야기하자는 말도 덧붙이면서. 준영은 정말 누워도 되는 것인지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몸을 침대 안으로 눕혔다.

따뜻한 집은 옷을 입지 않고 침대에 누워도 충분히 따뜻했다. 밖에서 몇 번의 발소리가 더 들리더니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권승주는 그렇게 준영을 두고 출근했다.

긴장으로 움츠리고 있던 몸이 유연하게 펴지고 이불 안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준영도 꼭 집에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을 텐데. 보일러도 돌리지 않아 춥겠지. 몸도 불편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는 권승주가 있었다. 지난밤 침대 위에서는 제멋대로였지만, 그렇긴 하지만…. 준영은 방금 전 승주가 물었던 질문들을 다시 되새겼다. 입학식이나. 엠티. 수강 신청. 엄마가 신경 쓰지 못하고 넘어갔던 일정들.

준영은 엄마에게 결코 섭섭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 관심을 가져 준다면 기쁜 것이지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는 엄마에게 섭섭해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늘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익숙지 않은 관심이 따뜻했다.

기대고 싶을 정도로. 권승주에게 더 기대려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준영은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이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승주의 욕구를 받아들여 주는 만큼. 딱 그만큼만 기대야 한다고 되새겼다.

준영은 점심이 다 되어 가는 느지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뎌 섰다가 한 번 휘청이고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말할 수 없는 부위가 자꾸 욱신거리고 아팠다.

제자리에 서서 아픔이 가시길 기다리다가 거실로 나왔다. 넓은 거실의 창 밖에는 테라스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공원인 듯 나무와 잔디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붉은 벽돌로 지어 올린 옆 저택의 정원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려다 아직 벗은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침실로 다시 들어갔다.

어제 벗은 옷은 다행히 창가 옆 의자 위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옷을 갖춰 입고 거실로 다시 나왔다. 바닥의 까끌까끌한 카펫의 감촉을 느끼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천장이 높아 집 안에만 있는데도 답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정말 여기에 더 있어도 되는 것일까. 편안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따끔거렸다.

조용하지만 낯선 집 안에 갑자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깨어난 양 준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어제 권승주에게 넘겨준 휴대폰이 높은 다리를 가진 대리석 테이블 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들고 보니 엄마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 승호의 이름이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껄끄러웠다. 이곳이 다름 아닌 승호의 형인 권승주의 집이고, 그러니까. 깊어지는 준영의 고민과 달리 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고 받아 들자 밝은 승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 야! 전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뭐 했냐?

“다른 일 좀 하다가.”

말하는 준영의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어서 승호가 대뜸 물었다.

- 어디 아파?

“아니. 왜.”

- 목소리가 이상하잖아 짜샤. 나 없는 동안 잘 있나 싶어서 연락했지.

“그냥….”

- 뭐야. 진짜 뭐 있어?

“아니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괜히 잠겨 들었다. 준영은 그래서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 말을 계속했다. 휴대폰을 통해 넘어오는 승호의 목소리가 가슴을 예리하게 긁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뭘 했냐는 물음에 자꾸 말을 돌렸다. 잘못 건드려지면 줄줄 고백해 버릴 것만 같았다.

나 너희 형이랑 잤어. 승호야. 그런데도 그 집에서 안 나가고 있고.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죄악감이 이제야 몰려왔다.

***

이준영은 하루를 인적 없는 집에서 막막한 감정 속에 잠겨 보냈다. 해가 지고 오래지 않아 권승주가 들어왔을 때에도 일렁이는 감정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도 현관문이 열리고 센서 등이 켜졌을 때 준영은 들어오는 사람을 맞이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하게 다가와 다녀왔냐는 인사를 중얼거리는 준영을 보고 승주는 별말을 안했다.

있으라고 말했으면서도 혹시 가 버렸을까 싶어 하루 종일 문자도 하지 않았었다. 준영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남아 있을지, 아니면 먼저 가 보겠다는 쪽지 한 장만 어딘가에 남기고 나가 버렸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안색을 하고 권승주를 향해 보이는 미소가 익숙했다. 늘 괜찮다는 말을 달며 보였던 미소들. 이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집 안에 남아 있는 것이 기특했다. 손에 들린 쇼핑백은 거실 옆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에 내려 뒀다. 그리고는 아직 제자리에 서 있는 준영을 불렀다.

“밥 먹어. 오늘 뭐 먹었어?”

“그냥 있었어요.”

“말을 안 듣네. 혼나려고.”

준영은 조심스레 식탁 앞 의자에 앉다가 승주가 한 말에 괜히 찔렸다. 어젯밤 침대에서 계속 들었던 말이다. 혼나야 된다고. 아픔이 가셨다고 생각한 엉덩이가 다시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 기색은 알아차리지 못한 승주가 정갈하게 포장된 음식들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전복이 듬뿍 들어간 전복죽과 잘게 다진 밑반찬들이 나왔다. 손에 쥐어진 숟가락을 들고 준영은 죽의 윗부분을 살살 긁어 떴다.

방금 포장해서 가져온 것인지 아직 김이 났다. 숟가락을 움직이는 흰 손을 보며 승주는 자기 몫의 죽도 포장을 뜯어냈다. 조용한 집 안에 두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승주는 가벼운 일상을 묻듯 말했다.

“집에서 뭐 했어.”

“잤어요. 자고. 쉬었어요.”

“고작 그거 하고 그렇게 늘어져 있으면 어떡할 거야.”

“그게… 고작 그거는 아니죠.”

“아니긴.”

가볍게 넘기는 말에 준영은 억울한 듯 입을 다물고 승주를 봤다. 뭘 봐, 라고 묻는 승주의 말에 다시 죽을 떴다. 모르겠다. 다 모를 일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야동 이야기, 연애 이야기들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이 이제와 아쉬웠다.

아는 게 없었다. 섹스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몸을 섞고 어떤 분위기가 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 건지. 말할 수 없는 어색함에 혼자 잠식되어 가는데 여기서도 살살 넘어가는 준영의 기색을 읽고 승주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하겠어?”

“오늘 밤이요?”

죽을 뜨던 손이 덜컥 멈췄다. 불안감으로 깜빡이는 준영의 눈을 보고도 말은 거침이 없었다.

“안 하면 뭐 할까.”

“…….”

“입으로 빨래?”

“…입이요?”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해 멍청하게 말을 따라 했다. 승주는 뜨거운 죽을 불어 먹느라 은은하게 붉어진 준영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도톰하고 말캉한 게 성기를 물려 두면 잘 빨 것 같았다. 이전에는 하는 것만으로도 죄악감이 들어 금세 지워버렸던 생각이었다.

키스할 때 입 안이 예민했으니 잘 느끼겠지. 울면서도 시키는 대로 오물거릴 것 같다는 생각에 승주는 들끓는 쾌감을 일단 누르고 다시 죽을 뒤적이며 말했다.

“내 성향에 대해서는 말했잖아.”

“네.”

키스를 처음 했던 그날. 준영은 그날을 떠올리며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남성을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제는 처음이었으니까 가볍게 한 거고.”

“가벼워요?”

“가벼웠지. 내가 뭘 했다고.”

“때렸잖아요.”

“나머지는 다 허락했지. 묶지도 않았고.”

입맛은 딱히 없었다. 눈앞에 이준영이 앉아 있는데 음식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뒤늦게 승주의 말을 이해한 준영도 반쯤 먹은 죽을 더 이상 뜨지 않았다. 낯부끄러운 생각에 머릿속에 가득해 목이 넘어가질 않았다.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갔다.

“씻어야겠다. 너도 들어와.”

“저요? 저는 그냥 따로….”

“어차피 다 본 건데 들어와.”

이미 결론이 난 듯 일회용 반찬통의 뚜껑을 눌러 덮는 승주를 보며 준영의 숨이 다시 가빠 왔다. 집에 가야 할까. 이제라도 빠지는 게 나을까. 생각이 복잡했다. 입으로 하라니. 설마 그걸 하라고? 무슨 결심이 서기도 전에 승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손으로 한 번 잡아당기자 실크 넥타이가 사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풀려 나갔다. 집에 들어와서 애 밥 먹일 생각에 다른 건 아예 잊고 있었다. 아직 집에 있을지. 혹시 아무것도 손을 안 대고 있을지. 그런 생각이다가 막상 얼굴을 보니 일어나는 감정은 달랐다. 무슨 짐승 새끼가 된 것 마냥 욕정에 손이 떨려왔다. 갸름한 얼굴에, 그리고 수저를 잡고 움직이는 손목에.

넥타이를 식탁 의자에 대충 걸쳐 놓고는 준영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잡힌 팔이 느리지만 천천히 끌려 왔다. 두 사람의 몸이 욕실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

한 번 벗겨 본 옷이라 그런지 어제보다 벗기는 게 더 빨랐다. 승주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준영을 샤워 부스 벽에 밀어붙여 기대게 만들고는 옷을 벗겼다.

몸을 가리고 있던 천들이 욕실 바닥 타일에 쌓여 갔다. 그리고는 물을 틀었다. 준영은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구석에 기대섰다. 불안감으로 젖은 얼굴이 성감을 더 돋우게 만들었다. 승주는 셔츠 단추를 풀다가 아래 몇 개는 쥐어뜯듯 풀고는 옷을 벗었다.

단단하다 못해 위협적으로 보이는 상반신을 드러내고 승주가 바지의 벨트까지 풀자 준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양을 보고 승주는 풀어낸 벨트를 손에 꽉 그러쥐었다가 바닥에 던졌다. 미련이 남았지만 아직은 일렀다. 둥근 광대를 따라 입술을 문지르고 다리 사이를 벌리게 하고 싶었다.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지. 한쪽 다리의 무릎을 굽혀 위로 젖혀 들게 하고 저 허벅지 안쪽이 부어서 다리를 오므리지 못할 정도로 때려 주고 싶었지만, 그리고 그 상처를 핥아 울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일렀다. 성기만 디밀어도 울려고 하는 이준영에게는 아직.

승주는 갑갑하게 옥죄고 있던 드로어즈를 벗어 던지고는 샤워 부스로 같이 들어왔다.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남자 둘이 들어가기에는 복작했다. 준영의 몸을 가리고 샤워기의 물을 맞던 승주는 물 온도를 천천히 맞춰 따뜻하게 했다. 그리고 잔뜩 굳어 구석에 몸을 구겨 넣은 준영에게 눈짓했다.

“샤워하자니까.”

“샤워. 네. 그렇죠. 샤워.”

“바디 워시, 그 옆에 그거야.”

그러고는 준영의 바로 옆 유리 선반에 손을 쑥 뻗었다. 준영이 자기 팔을 스쳐 지나가는 승주의 손에 몸을 휙 피했다. 그것을 흘깃 내려다보고는 사무적인 태도로 바디 워시의 비눗물을 꾹꾹 눌러 짰다. 대여섯 번을 펌핑하자 승주의 손 안에 불투명한 비눗물이 그득히 고였다. 그 손을 천천히 준영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희고 점성 있는 비눗물이 가슴과 유두에 진득하게 걸려 흘러내렸다. 가슴을 꾹꾹 누르며 만지작거리던 승주가 속삭이며 준영의 몸 구석구석에 비누칠을 했다.

“가슴에 싸 놓은 거 같네.”

“아, 형. 제가. 아, 거기….”

밀어내려는 손이 물기와 비눗물 때문에 미끄러졌다. 준영은 승주의 품 안에 꽉 안긴 채 몸 곳곳을 씻겨졌다. 손길이 닿아서는 안 될 곳에 자꾸 닿았다. 목덜미와 날개 뼈 부근, 겨드랑이 사이와 성기까지. 나중에 엉덩이 사이까지 손가락이 들어와 부은 입구를 마구 문지르고 통과했다. 여기서는 우는소리도 냈지만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의 소리에 삼켜졌다.

자신도 씻겨 달라며 몸을 들이미는 승주 때문에 준영도 손을 들어 어떻게든 그의 몸을 문질렀다. 물을 흠뻑 맞고 뽀얗게 된 몸을 승주가 들쳐 안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왔다. 안에서 더 이상 뭘 하기에는 준영이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라 어디든 눕혀서 더 해야 할 듯했다. 물기를 대충 닦은 몸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던지다시피 내려 뒀다.

시계를 보니 이제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딱 맞다고 생각했다. 자정이 되기 전까지만 섹스하고. 나머지 시간은 재우고. 기대 누워 있는 준영의 발을 잡아 벌리려 하자 힘을 주며 버티려 들었다. 승주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자 손까지 뻗어 밀어냈다.

“저… 아파요. 너무 아파서. 못 하겠어.”

“그렇게 아파?”

“네. 진짜. 아파서… 아직도 안에 뭐가 있는 거 같아. 안 돼. 형이 너무 크잖아요. 못 넣어요.”

여기서 우기고 몸을 깔아뭉갤 수는 있었지만 거의 손을 마주 잡아 빌 기세인 것을 보고 승주는 미간을 좁히며 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발목을 꼬아 고정시켰더니 다시 울 것 같길래 말했다. 그냥 보려고 하는 거라고. 반쯤 선 성기가 당장이라도 어디를 뚫고 들어갈 듯하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준영은 믿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가늠도 못하며 다리를 벌렸다.

완연히 드러난 준영의 하반신을 보며 손가락으로 엉덩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보았다. 드러난 입구가 붉게 부어 아파 보이기는 했다. 여기서 아예 아프게 뚫어야 하는데. 아쉬운 마음에 손가락을 슬쩍 밀어 넣으려 하자 위에서 자지러지듯 울음을 터트렸다. 못 하겠다고.

“쯧, 자꾸 물러지면 안 되는데.”

승주는 혀를 차며 준영의 골반을 꽉 틀어쥐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직 풀이 죽은 성기를 혀로 길게 핥으며 준영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살갗은 촉촉했다.

제 성기에 닿은 숨결을 느끼며 준영은 다시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게 전부였다. 눈만 위로 치켜 뜬 승주를 보며 덜덜 떨고 있는 준영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며 승주가 준영의 성기를 입 안에 넣었다.

“똑바로 배워서 해.”

“아. 안 돼! 아! 형… 읏, 아니… 싫어….”

축축한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성기가 사정없이 조여졌다. 준영은 눈앞이 희뿌옇게 되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꿈틀거렸다. 창피함이 머리끝까지 오르고 죽을 것만 같았다.

권승주가 제 다리 사이에서 성기를 빨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질 않아서. 그리고 성기를 조여드는 감촉에 입을 벙긋거리며 진저리쳤다. 무슨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구멍 앞까지 깊숙이 빨리는 성기가 조이고 풀릴 때마다 다리가 벌벌 떨릴 정도의 쾌감이 왔다. 정신없이 훑어지고 빨리는 동안 준영은 전신을 떨며 사정했다. 다급하게 몸을 물리려는데 승주는 정액을 토해 낸 준영의 성기를 마지막까지 빨아 핥았다.

혀가 예민한 귀두 끝을 파고들듯 핥을 때 준영은 다시 시트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제야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이 다시 들어와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숨이 가빠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가만히 있는 준영의 몸에서 물러나 승주가 들쑤시던 구멍을 다시 들여다봤다. 적당히 벌어진 게 충분해 보였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손을 뻗은 승주가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천장만 가쁜 숨을 내쉬며 올려다봤다. 온몸의 근육이 제멋대로 움찔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 시야 앞에 불쑥 연두색의 동그란 물건이 들어왔다. 승주는 준영의 눈앞에 동그란 원형의 무언가를 흔들어 보이다가 입술 위에 올렸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그것을 천천히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이거 빨아 봐.”

“…….”

방금 전까지 제 성기를 빨던 남자가 입 안에 뭘 밀어 넣으니 쉽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준영은 입을 벌려 입 안에 들어온 동그란 물건을 물었다.

“혀로 굴리고. 물었다 빼.”

말하는 대로 착실하게 입술을 오물거리자 승주는 준영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뭔지도 모르면서 쪽쪽 빠는 것이 볼 만했다. 축축하게 적셔진 플라스틱 구체 끄트머리의 줄을 잡아 빼냈다. 입 안으로 보이는 혀를 보며 승주가 말했다.

“잘 빠네. 좆도 잘 빨 수 있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곧 시켜 보면 알 일이었다. 승주는 준영의 다리 사이 좁은 틈에 동그란 로터를 가져다 댔다. 작은 스위치를 달칵 올리자 작은 진동음과 함께 로터가 울렸다. 준영은 생소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엉덩이 사이로 덜덜 진동하며 파고들려는 물건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승주가 그 물건을 들이미는 것이 더 빨랐다. 타원형의 로터가 순식간에 준영의 구멍을 벌리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입구를 통과해 진동하는 물체에 준영이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다.

“이거 싫어요. 뒤로 안 할 거야. 안 해… 형. 안 할래.”

“이건 안 아픈 거야. 착하지.”

“아냐… 아, 넣지 마… 흐읏.”

달아나려는 준영의 아랫배를 꽉 누르며 승주가 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었다. 손끝에 밀려 올라간 로터가 내벽의 깊숙한 안쪽까지 올라가 자리했다. 이제는 아랫배 밑이 진동하는 듯한 느낌에 준영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반쯤 앉은 자세가 되자 몸 안의 이물감이 더 강렬했다. 어쩔 줄 모르는 준영을 보며 승주는 천천히 침대 헤드에 다리를 길게 뻗고 기대앉았다. 벗고 있는 준영을 주무르는 것도 좋았지만 더 이상은 참기 어려웠다. 승주는 기대앉아 준영의 몸을 끌어당겼다.

힘에 끌려서는 엉금엉금 기어올라 승주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움츠려 피하려는 팔을 힘을 줘 끌어당기자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승주의 사타구니 근처까지 얼굴을 가져왔다. 바로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성기를 보며 움직임이 멈췄다.

몸 안에 진동하고 있는 로터도 문제였지만 눈앞에 들이밀어진 것도 문제였다. 어린애의 팔뚝만 한 성기가 힘을 더할 만큼 더해 곧추서 있었다. 두꺼운 기둥과 굴곡이 큰 귀두까지 보며 준영은 간신히 눈을 들어 올렸다. 승주는 손을 뻗어 준영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이제 빨자.”

“저요, 이건.”

“아. 벌려.”

툭 건드리면 눈물이 떨어질 듯 준영의 숨이 가빠 왔다. 제 다리 사이에 갇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승주의 성기가 더 힘을 받아 꺼떡였다. 안에서 떨리는 진동이 불편한지 엎드려 있는 와중에 엉덩이가 자꾸 움찔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불안감으로 범벅된 얼굴은 자기가 지금 허리를 움찔거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 벌어진 입 안으로 승주의 손가락이 쑥 들어갔다.

여린 입 안의 점막과 잇몸을 손가락으로 들쑤셔 만지작거렸다. 투명한 타액이 다물지 못한 입에서 흘렀다. 더 올라와. 승주의 굳은 얼굴을 보며 준영이 꼼지락거려 몸을 더 가까이 올라왔다. 이제 바로 입 앞에 성기가 들이밀어졌다.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준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승주가 말했다.

“혀만 내밀어 봐.”

“…….”

“또 혼날까?”

그건 싫었는지 준영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혹시나 싶어 기다려도 그만 두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천천히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잡아당겨 입 속에 쑤셔 넣을 수도 있었지만 온 인내심을 끌어모아 작은 움직임을 기다린다. 뻣뻣하게 선 성기의 귀두에 따끈한 혀가 닿았다. 천천히 혀를 미끄러트리며 위를 핥아 오자 승주가 손안에 잡힌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혀 더 내밀어서.”

“…….”

“끝만 입 안에 넣고 빨아 봐.”

혀로 뜨거운 살덩이를 핥아 내자 옅게 비린 맛이 느껴졌다. 준영은 눈을 꽉 감고는 입을 벌려 두꺼운 귀두를 머금었다. 뜨거운 열기가 입 안에 가득 찼다. 움찔거리는 성기를 입으로 물고 실눈을 떴다.

열기에 잠식되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권승주를 한 번 보고 눈을 천천히 내렸다. 머리가 멍했다. 입 안에 지금 뭘 물고 있는 건지. 꿈틀거리는 이게 뭔지.

고이는 타액을 삼키려 입을 우물거리자 성기를 빠는 움직임이 되었다. 가볍게 조이며 움찔거리는 입 안의 감촉에 승주가 얕은 신음을 내쉬었다. 목 끝까지 밀어 넣고 빠는 것도 아닌데 고작 간지러운 자극에 이성이 끊길 듯 아슬아슬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준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만지작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잘하네.”

“음….”

“키스 좋아하잖아. 똑같이 해 봐.”

“…….”

“내 좆에 키스하는 것처럼.”

축축한 소리를 내며 혀를 굴리는 감촉에 승주는 준영의 뒤에 집어넣은 로터의 리모컨을 찾았다. 1단으로 되어 있는 진동을 위로 죽 올렸다. 갑자기 거세진 진동에 준영이 엎드린 채 다리를 움찔거렸다. 안쪽에서 로터가 진탕이 되도록 날뛰었다.

무릎을 세워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고개를 들려 했다.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승주의 손이 준영의 목덜미를 가볍게 잡아 막았다.

힘겹게 눈을 들어 승주를 보고, 열기로 붉어진 시선을 보고는 입 안의 귀두를 다시 빨았다. 승주의 냄새가 입 안에 가득했다. 입으로 귀두만 물고 있어도 어려운 이게 어젯밤 제 안에 들어 왔었다. 지금 몸 안에 들어온 물건이 날뛰는 곳을 마구 짓이기면서.

어젯밤 집요하던 허리 놀림을 생각한 준영은 목이 말라 입 안의 타액을 다시 삼켰다. 또 성기에 매달려 빠는 꼴이 되었다. 몸 안에서 진동음과 함께 울리는 로터가 자꾸 간지럽게 느껴져 앞이 섰다. 준영은 어떻게든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어딜 가야 할지 모르는 손이 배회하다가 승주의 허벅지에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입을 오물거렸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성기가 느껴졌다. 다리가 천천히 벌어지고 물기가 어린 성기를 침대 시트에 비비기 시작했다.

위에서 보자 좆질을 당하는 듯 허리가 움찔움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승주는 옅게 웃으며 준영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멍한 표정도 아파서만 그런 게 아닌 듯 했고.

“준영아. 입 떼서.”

“…네.”

“혀 내밀고, 기둥 아래까지 핥아. 그렇게.”

말랑한 혀가 기둥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 아래를 간질이자 승주는 손에 잡힌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자극으로 느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게 해 얼굴을 마주했다. 쾌감이 어려 풀린 얼굴을 보며 다시 일렀다.

“입 크게 벌리고. 혀를 내밀라고.”

순순히 자세를 취한 준영의 입 안에 다시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디밀었다. 입술을 통과한 성기가 들어차자 준영의 눈썹이 움찔했다.

“입으로 숨 내쉬듯이, 목구멍 열어 봐.”

“으읍, 으….”

“천천히. 다시.”

우물거리며 혀를 길게 내밀자 승주의 성기가 입 안쪽까지 밀려 들어갔다. 목에 걸려 신음성을 내뱉자 승주는 다시 옆에 던져뒀던 로터의 리모컨을 찾았다.

진동 단계를 더 높였다. 잘게 울리던 진동 소리가 더 커지며 준영의 허리가 흔들렸다. 아래에 정신이 팔린 준영의 뒷덜미를 붙잡고 성기를 깊게 밀어 넣었다가 뺐다.

순식간에 목 너머까지 깊게 박혔던 성기가 빠지자 준영은 잘게 기침하며 성기를 뱉었다. 이빨에 살짝 긁힌 고통마저 자극적이었다.

다시 뒷목을 잡아채 입 안에 성기를 디밀었다. 이제 익숙해졌는지 입 안에 물리면 자연스럽게 빨아 왔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성기를 물고 있는 준영의 입 안에서 자꾸 울렸다. 움직일 때마다 각도에 따라 불룩하지는 볼까지. 유순한 얼굴이 되어 남자의 성기를 빠는 걸 보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목 안쪽까지 성기를 깊게 박았다가 물렸다. 이번에는 얼굴이 벌게지면서 참아 냈다. 몇 번을 더 그렇게 반복하자 준영은 허리를 시트에 문지르며 깊게 들어온 성기를 빨았다.

목 너머까지 열지는 못했지만 그 직전까지 틀어박힌 귀두가 목 안쪽을 자극했다. 승주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좁은 입 안에 박고 빼기를 반복했다. 사정감이 올라오자 일부러 참지 않고 사정했다. 목 안에 깊게 사정할까 하다가 뱉어 낼 것을 생각해 혓바닥 위에 귀두를 문지르며 사정했다. 입 안에 끈적한 사정액이 가득 고였다. 입술을 떨며 머금지도, 뱉지도 못하는 표정을 보고 승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삼켜.”

“으으….”

“그리고 다시 빨아.”

뱉어 내고 싶어도 승주는 다시 서기 시작한 성기를 준영의 입 안 이리저리 쑤시며 물러나지 않았다. 입 안으로 성기가 다시 들어올 때마다 희뿌연 정액이 입술 밖에 묻어났다.

다시 크기를 키우는 성기가 목을 들쑤시자 준영은 숨을 삼키려다 정액을 같이 삼켰다. 끈적한 것이 쉽사리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강렬한 냄새도 힘들었다. 다시 반사적으로 성기를 빨며 눈물을 흘리는 준영을 보고 승주가 물었다.

“먹기 싫어?”

끄덕. 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우물거렸다.

“또 쌀 건데. 입에는 하지 말까.”

“으응. 응.”

“알았어. 빨기만 해.”

자비롭게 말하는 권승주를 믿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단 입 안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성기를 빨았다. 그러다보니 입 안에 남은 정액까지 다 삼켜 넘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눈물이 자꾸 어렸다. 벌려진 턱도 아프고 속이 안 좋았다.

허리 아래는 언뜻 쾌감이 올라와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다시 사정할 듯 움직임이 빨라진 성기 때문에 입만 벌리고 있는데 승주가 천천히 물러났다. 준영은 엎드려 얼굴을 처박고 입으로 숨을 헐떡였다. 공기가 폐에 가득 들어찼다. 그런 준영의 뒤로 올라간 승주가 엉덩이 사이를 헤집었다.

천천히 줄을 끄집어 진동하고 있는 로터를 끌어 내렸다. 물기로 젖은 타원형의 물건이 천천히 속살과 딸려 나왔다. 고작 이런 물건을 넣을 곳이 아닌데. 가볍게 몸부림치는 등을 누르며 로터를 입구까지 뽑아내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허리를 틀어쥐어 들어 올렸다. 승주는 빠끔히 벌어진 구멍에 성기를 곧장 가져다 댔다. 준영은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고개를 도리질했다.

“형. 안 돼. 아, 아. 아아! 안 돼… 앗.”

“싸기만 할게. 있어 봐.”

살 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딱 알맞게 부어 있었다. 붓고 뻑뻑한 내벽이 성기를 물어뜯듯 옥죄었다. 승주는 욕설을 삼키며 허리에 힘을 실었다. 퍽 퍽 박혀 오던 성기가 깊게 삽입되고 정액이 안에서 쏟아지듯 나왔다. 준영은 부피를 줄여 가는 성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아팠다. 너무 아픈데. 간지러운 부분이 세게 문질러져 이제야 겨우 답답함이 가셨다. 넋이 나가 다리를 오므릴 생각도 못하는 준영의 몸에서 나가서는 승주가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아프다고 울기만 하던 어제와 달리 쾌감으로 불긋해진 몸이 보였다.

“벌써 좆질 맛을 알겠어?”

“아니요. 아니야.”

“아니긴.”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살짝 때려 올리자 풀려 있던 근육이 잔뜩 긴장하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벌줄 게 없었다. 앞으로 핑계를 차근차근 만들어 가야겠지만.

준영은 그날 어떻게든 제 발로 화장실을 들어가 뒤처리를 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승주의 말대로 맛을 완전히 알게 된 것은 삼 일을 더 길이 들고 나서였다. 정상위로 박혀 들어오는 성기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돌리던 준영은 안쪽에서 울리는 쾌감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 안에 진득하게 사정을 한 승주가 물고 빨려 부어오른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준영아. 집에 갔다 와야지, 라고. 그 말도 한 번에 못 알아듣고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 승주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키스했다.

***

좁은 아파트의 현관이 열렸다. 며칠 동안 사람이 없었던 집은 좁은데도 휑한 느낌을 자아냈다. 사람이 없던 사이 먼지가 내려앉았고 공기는 차가웠다.

준영은 찬 바람이 드는 현관을 꽉 닫았다. 걸쇠를 걸어 잠그지는 않았다. 곧 엄마가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들어오겠다고 한 엄마가 아직 집에 없으니 곧 들어올 거다. 아마도.

운동화를 천천히 벗자 양말과 검은색 바지 사이로 흰 발목이 도드라졌다. 익숙하지 않은 옷의 감촉이 어색했다. 승주는 준영이 집에 있는 동안 여러 벌의 옷을 사다 주었다. 어젯밤 승주가 들고 들어온 근처 백화점의 커다란 쇼핑백 안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춰 입을 수 있는 옷들이 들어 있었다.

기대앉아 감상하듯 응시하는 승주의 눈앞에서 그 옷을 다 갈아입었다. 품은 맞았지만 바지의 길이가 짧아 발목이 드러났다. 상의는 두껍고 넉넉하게 입는 후드 티였기 때문에 손등까지 덮였다. 승주는 딱 맞을 것이라 생각한 옷이 발목이 드러나도록 짧은 것을 보고 준영의 신체 사이즈를 물었다. 키와 몸무게, 치수까지.

승주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키가 컸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훌쩍 큰 그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것보다는 다 자란 성인의 사이즈였다. 그래 봤자 아직 어리게 보일 뿐이었지만. 그렇게 승주가 가져다준 옷을 입고 준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입고 갔던 옷은 쇼핑백에 넣어 가져왔다. 좁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탁기 안으로 옷을 탈탈 털어 넣고는 작은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얇은 코트를 여미며 들어온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보며 방긋 웃었다.

낮은 굽의 구두를 벗으며 들어온 그녀는 인사를 하고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들의 앞에 섰다. 방긋 짓고 있던 미소가 준영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흐려졌다.

“준영아. 무슨 일 있어?”

“아니요. 별일 없는데.”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팠어?”

“어… 네. 잠깐 감기 걸려서 승주 형 집에 누워 있었어요.”

“어휴. 엄마는 그런 줄도 모르고. 전화하지 그랬어. 바로 왔을 텐데. 괜찮니.”

“이제 괜찮아요.”

애교 있게 웃어 보이는 준영을 보고 그녀는 속상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방 문과 화장실 문까지 지나쳐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살펴보다가 따라 들어오는 준영에게 물었다.

“뭐가 없어서 일단 흰죽부터 해 줄게. 방에 들어가서 앉아 있어.”

“저 괜찮은데….”

“빨리 들어가. 준영아, 너 엄마 따라가서 같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며칠 안 봤다고 마른 아들을 보고 속상한 기색이 가득했다. 준영은 분주히 움직이는 엄마를 서서 멍하게 보며 생각했다. 그래. 우리 엄마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 맞아. 그저 여유가 없는 것뿐이었다. 한 번 더 돌아볼 여유가.

그 빈틈을 오랜 시간 동안 메워 온 게 권승주였다. 승주 형. 가장 친한 친구인 승호의 형이자, 이제는 다른 것도 함께하는 사이. 이래도 되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넓은 바가지에 쌀을 붓고 물을 잠기도록 부어 씻는 엄마를 내려 보며 준영은 불쑥 말했다.

“저는… 승주 형이 자기 집에 잠깐 있다 집 구하래요.”

“승주가? 미안하게.”

“집 천천히 구하기 전에 잠깐만 있으라고 했어요. 엄마 재혼도 하고 신경 쓸 거 많지 않겠냐고 하면서요.”

“그래도 쉽게 들어갈 게 아닌데. 일단 너 방에 들어가 있어. 다 되면 부를게.”

두 사람이 서 있기에는 걸리적거릴 만큼 좁은 주방이었기에 준영은 쌀을 씻는 엄마의 손을 보다가 순순히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집은 방문을 닫고 들어와 앉아도 주방의 소음이 선연했다. 쌀을 씻고 물을 다시 붓고, 가스 불을 켜는 소리.

창문이 높고 작아 어둑한 방 안은 그림자가 더 깊었다. 침대 위에 올라가 벽에 기대앉았다. 욱신거리는 몸이 생소했다. 한참 동안 집 안을 돌아다니는 엄마의 발소리를 들으며 눈앞에 벽면을 차지한 책상을 응시했다.

꽂혀 있는 문제집의 대부분이 승주가 선물이라고 안겨 준 문제집들이었다. 그냥 기다리기 심심해서 입 안으로 하나씩 선물 받은 문제집들을 세어 보았다. 그러다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웅크려 고개 숙였다. 막막했다. 어쩌자고 그랬을까. 돌이킬 수 없어진 승주와의 사이가 막막했다.

***

일은 쉽게 진행되었다. 그사이 새아버지가 될 남자는 준영과 몇 번 더 안면을 텄다. 준영만 몰랐지 다른 사람들은 남자를 익숙하게 알아보고 인사했다. 교류가 별로 없던 이모나 삼촌도 남자와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어울렸다. 준영은 정말 자신만 모르던 일 같아 괜히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는 새로운 사람과 혼인 신고서를 제출했고 가족이 되었다. 거기에 이준영도 딸려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치기에는 부족한 게 많았다. 정서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어느 면을 봐도 말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설득에도 준영은 입술만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는 따로 나와 살게요. 라고. 이렇게까지 고집스럽게 나올 줄 몰랐는지 엄마가 당황한 것이 보였지만 그렇다고 알겠다는 대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고집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싫은 건가. 그것도 가늠이 안 됐다.

실제로 새아버지의 집은 준영이 갈 대학교와 멀기도 했다. 그렇다고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가까운 것도 아니라서 준영과 엄마 두 사람이 살던 집은 정리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정을 맞추다 보니 집을 급작스럽게 정리하게 되었다.

좁은 집은 정리했더니 건질 만한 물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오래된 가전과 가구들을 전부 내놓고 자잘한 짐만 챙겨 차에 실었다. 좁은 줄만 알았던 집은 오래된 옷장을 들어내고 청소하자 민낯을 드러냈다. 넓어 보이기까지 했다. 현관에 서서 집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는데 감상에 잠겨 있던 준영보다도 엄마가 먼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준영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는 정말 무언가가 끝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무늬가 그려져 있던 흰 벽지도, 바닥에 인조 대리석을 본뜬 듯한 하늘색 장판도 이제는 끝이었다. 지나간 유년 시절도, 엄마와 살던 과거도.

이웃들에게 인사를 한 두 사람이 내려가니 새아버지는 눈이 부어 내려온 준영의 엄마를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뭐가 그렇게 웃기냐며 눈을 흘겼다. 퍽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며 준영은 모르는 척 빠져 차의 뒷좌석 손잡이를 당기고 차에 탔다. 엄마는 새로운 사람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끼어드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뒤늦게 새아버지와 엄마가 차에 타고 비좁게 주차된 아파트의 주차장 사이를 빠져나갔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엄마가 준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따 승주 집 언제 가니.”

“저녁에요.”

“엄마는 그래도 될 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여행 다녀올 때까지만 잠깐 있어 보면 안 될까?”

“남의 집 가는 것보다야 우리 집에 있는 게 낫지.”

끼어들기를 하려는지 차의 깜빡이를 켜며 새아버지가 다시 한 번 넌지시 권했다. 준영은 잠깐 생각했다. 엄마도, 새아버지도 없는 낯선 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게 나을지. 아니면 권승주의 집에 잠깐 있는 게 나을지. 역시 엄마에게 빨리 방을 구해 달라고 하는 게 나았을까. 이렇게 잠깐 후회도 했지만 긴 신혼여행을 예약한 엄마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었다. 안 그래도 대학 등록금이니 뭐니 들어간 게 많았다.

“잠깐 있는 건데요. 일단 다녀오세요.”

여기서 다시 거절하는 준영에게 두 사람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엄마도 새아버지도 아직 적응하지 못해 어색해하고 있는 아들의 반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부담이 될까 밀어붙이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기란 이렇게나 쉬웠다.

세 사람은 늦은 저녁 식사를 했고 준영은 그대로 권승주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길도 헤매지 않고 찾아갔다. 빌라의 현관을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준영은 걸음을 머뭇거렸다. 여기에서 이 계단을 올라가는 게 맞는 일일까. 눈을 깜빡거릴수록 오히려 안구가 뻑뻑해지는 것 같았다.

걸음을 디딘 것은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평상복을 입은 여자가 편의점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는 현관 앞에 먼저 섰다. 그리고 카드키를 툭 대고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기 전에 따라 들어갔다.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앞에 가는 것까지는 또 쉬웠다. 그 앞에서 다시 우두커니 서서 있던 게 몇 분이었을까. 간신히 손가락을 들어 벨을 눌렀다. 안에서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 승주도 방금 들어왔는지 옷차림이 가볍지 않았다. 무슨 인사를 해야 할까 준영이 잠깐 늦는 사이 그는 마치 매일 오던 사람에게 말하듯 말했다.

“늦었네.”

“그래요? 늦었나.”

“밥은.”

“먹었어요.”

이런 대화와 함께 준영의 발이 현관을 넘어왔다. 신발도 자연스럽게 벗고 들어왔다. 승주는 벌써 거실을 가로질러 방문 앞에서 준영에게 손짓했다. 침실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방이었다. 각오를 했다지만 벌써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준영의 긴장감은 더 커져 갔다. 솜털이 선 듯 오싹하기도 했다.

마치 목줄이 잡혀 끌려오는 듯 천천히 걸어오는 준영을 내려다보며 승주는 목덜미를 유심히 살폈다. 목줄을 잡혀 온다, 라. 스스로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목에 뭘 걸어 줘도 어울릴 듯했다. 긴 목이 쇄골선과 이어져서 예뻤지. 전체적으로 선이 얇은 준영에게는 두꺼운 가죽 목걸이가 어울릴 것 같았다. 줄도 걸 수 있는 걸로. 생각은 이래도 띠는 미소는 잔잔했다.

“네 방이야.”

“방이요? 왜요?”

목소리가 높아진 준영을 보고는 방문을 열어 밀었다. 이전에 무슨 물건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방 안은 한 사람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꺼운 매트리스를 얹은 침대가 문의 오른쪽에 있었고 왼쪽에는 책상과 옷장까지 짜여 넣어져 있었다. 방 안은 새 가구에서 나는 나무 냄새가 옅게 풍겼다.

“저 잠깐만 있다 갈 건데 이게 다 뭐예요?”

“잠깐만 있어도. 설마 바닥에서 잘 생각이었어?”

“어디서든 자면 되죠.”

“하긴.”

승주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면 내 침대에서 잘까?”

“…….”

일상적으로 이어지던 이야기가 갑자기 뚝 멈췄다. 말문이 막힌 준영을 보고 승주는 문간에 가볍게 등을 기댔다. 그리고 조르듯 옷깃을 잡고 말했다.

“뽀뽀.”

“왜요?”

“선물 줬잖아.”

“안 돼요.”

싫다는 것도 아니고 안 돼요였다. 당황했는지 애꿎은 침대 끝만 노려보는데 그게 귀여워서 다시 졸랐다.

“뽀뽀만.”

“진짜 뽀뽀만요.”

“응.”

승주는 눈을 감고 양손을 자연스럽게 내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해해 보이기만 했다. 준영은 쭈뼛거리며 다가가서는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승주의 몸에 닿지 않으려 노력하며 겨우 입술만 대고 떨어졌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자 승주는 다시 눈을 뜨고 발개진 얼굴을 내려다 봤다. 뽀뽀만 하기로 했으니까….

준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옆으로 내려 둔 손은 꽉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는 휙 돌아 나갔다.

“짐 두고 나와.”

멀어지는 승주의 넓은 어깨를 보며 준영은 손을 뻗어 문의 손잡이를 당겨 닫았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서 있다가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 뒀다. 손으로 쓸어 보니 부드러운 책상의 단면이 느껴졌다. 이제는 또 다정하게 구는 권승주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

준영은 방 안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더 끌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끌 것도 없었다. 애초에 가져온 짐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옷을 정리해 넣고 침대에 멀뚱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은 조명이 평소보다 조금 어두웠다. 느슨하게 책이 꽂힌 두 개의 책장 사이에 TV에서는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좋은 화질의 TV인데도 영화는 장면마다 요즘 영화답지 않게 흐릿했다. 승주는 그런 영화를 무심히 보며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승주는 소파에 천천히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준영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의 붉고 어두운 색감이 승주의 얼굴에 드리워졌다가 지나갔다.

“중국 영화예요?”

“홍콩. 본 적 있어?”

“아니요.”

“하긴.”

준영이 봤다고 하기에는 한참 전의 영화였다. 승주는 이미 외우다시피 한 영화에서 눈을 뗐다. 어차피 습관처럼 틀어 두는 영상이었다.

“카드 키 식탁 위에 뒀어. 비밀번호도 적어 뒀고.”

“네.”

“집안일 보는 분은 주에 세 번.”

“전에 뵙고 인사했어요.”

준영은 그날의 일이 떠올라 잔잔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폈다. 샤워하고 나오려던 중 밖에서 들리는 현관문 소리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가운을 온몸에 돌돌 말고 문을 열고 나가자 마주친 아주머니는 준영을 보고 더 놀랐었다. 이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처음 본다면서 말이다.

무슨 일인지 알 법한 준영의 표정을 보며 승주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면 안 되는 거 있어요?”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준영이 해서는 안 되는 것.

“마음대로 해.”

그 말에 준영의 눈이 둥그렇게 되면서 옅은 쌍꺼풀이 더욱더 가늘어졌다. 어차피 마음대로 하라고 해도 제대로 손이나 댈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준영이 뭘 손댄다고 해도 승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이 집에서 뭘 휘젓고 다니거나 만져도. 정말 상관없었다. 그러다 생각난 게 하나 있어 말을 덧붙였다.

“대신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

“그건….”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는지 준영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은은하게 붉어진 색을 보며 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 싫다. 그런 말은 안 돼.”

준영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승주와 눈도 못 마주치고는 시선을 턱 끝 어딘가로 고정시킨 후였다. 이것은 승주가 준영을 위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꾸 저항하면 더 손이 올라가는 스스로의 성격을 알았기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가라앉을 듯 바닥에 내려앉을 듯 미묘했다. 승주는 미간 사이를 한 번 문질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도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다. 항상 이쪽 파트너들과는 거리를 뒀다. 시간을 맞춰 연락하고 플레이가 끝나면 일상에는 전혀 섞여 들지 않는 만남들. 호텔 문을 경계로 삼던 플레이가 일상의 인물에 섞여 들어가자 어떻게 선을 그어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만 행동을 통제할지,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을 둬야 할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손을 잡은 거냐고, 밀어붙인 주제에 묻고 싶었지만….

“세이프 워드는 따로 정할 거야. 정말 못 견디겠다 싶으면 말해.”

“어느 정도로요?”

“한계가 오면 말해. 자주 써먹으면 안 들어 줄 거야.”

그랬다가는 준영이 바로 마음을 다잡고 집에서 나가 버릴까 걱정됐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이제야 허덕이던 목마름이 가셨는데 벌써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승주는 퇴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치졸한 생각임을 알아서 하나의 열쇠를 쥐여 주고야 말았다.

“그리고 모든 관계를 끝내고 싶다면….”

여기서 준영은 눈동자를 굴리며 승주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모든 게 끝난다면. 끝내고 싶다면.

“그때 말해. 이제는 그만하자고.”

“그럼 끝나요?”

“글쎄.”

승주도 자신 없는 듯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게 쉽게 될지는 그로서도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회귀점은 될 수 있겠지.”

“…알았어요.”

준영은 승주가 쥐여 준 열쇠를 마음속 깊은 곳에 던져 버렸다. 승주의 깊은 눈매를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눈을 감았다. 어떤 생각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구분 없이 섞이는 시간이 지났다.

***

아직 어두운 방 안의 정적을 깬 것은 휴대폰의 진동음이었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이 떨며 잔잔한 소음을 울렸다.

승주는 천천히 눈을 떠 왼편의 시계를 응시했다. 초침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동그란 시계는 오전 10시를 막 넘었다. 아무리 평소에 업무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온다지만 주말의 오전은 그로서도 달갑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승주의 시선이 침대 오른편으로 향했다.

블라인드의 날 사이로 햇볕이 새 들어왔다. 승주의 옆에 불룩하게 올라온 이불 더미가 움찔거렸다. 그 이불을 한번 들춰 본 승주가 휴대폰을 들었다. 준영은 어젯밤 자기 방에 갈 기운도 없었는지 같은 침대에서 엎드려 잠이 들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듯 만지작거리며 승주가 휴대폰을 받았다. 동생인 승호의 이름이 선명히 찍혔다. 평소 연락도 없던 놈이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싶은 짜증이 깃들었다.

“왜.”

- 형. 준영이 집에 있지?

“없어.”

- 귀찮아하지 말고 바꿔 줘. 오늘 점심에 만나기로 했는데 전화 안 받아서 그래.

새어 나오는 승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있던 준영은 목소리가 하는 말을 듣고 멍하게 생각했다. 약속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주말에 점심을 먹기로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작은방에 있을 자신의 휴대폰을 생각해 보다가 준영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승주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끊을 듯 전화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승주에게 천천히 손을 뻗어 손바닥을 보였다.

“주세요.”

승주는 내밀어진 하얀 손바닥을 내려다보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꿋꿋하게 손바닥을 펴고는 기다렸다. 잠이 덜 깬 듯 멍한 준영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승주는 천천히 그 손바닥 위에 휴대폰을 올려 뒀다. 준영은 핸드폰을 고쳐 쥐고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승호와 통화를 시작했다.

“나야.”

- 전화 왜 안 받아 임마.

“거실에 있느라.”

졸린 눈을 비비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승주는 그런 준영의 말을 듣고는 작게 웃으며 허전한 손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이불 속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어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등을 은근하게 쓸어내렸다. 느긋하게 늘어져 있던 등의 근육이 움찔거렸다. 따뜻한 피부를 만지작거리다가 등의 오목한 곳을 따라 손을 내리니 마른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승호와 전화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승주는 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준영의 배 아래로 집어넣어 들어 올리듯 끌어다 제 몸에 가까이 붙였다. 옆으로 누운 자세가 되고 뒤에 바짝 붙은 승주의 단단한 몸을 느끼며 준영은 다급하게 말을 그만하려 했다. 길고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허벅지가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의미를 알았다. 엉덩이 근처를 뜨겁게 누르고 있는 성기도.

“승호야, 이따 다시 전화할게.”

- 지금 말해. 뭐 먹을 거냐고.

“잠깐만, 아. 읏.”

휘감듯 허리를 감아 온 손이 몸을 끌어당기며 엉덩이 사이로 성기가 문질러졌다. 몸을 쭉 펴고 벗어나기도 전에 딱딱하게 모양을 잡은 귀두가 구멍 안쪽으로 불쑥 들어갔다.

어젯밤의 여파로 삽입하기에는 충분히 부드러웠지만 아직 빡빡했다. 긴 성기가 몸 안에 자리 잡고 들어오자 짙은 열기가 몸 안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뒤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 때문에 헐떡이는 소리가 날 것 같자 급하게 휴대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껐다. 그런 준영의 귀를 빨며 승주가 속삭였다.

“전화 더 해.”

“아. 형. 정말….”

“응?”

낮은 웃음이 귓가에 울리자 준영은 간지러운 감각에 진저리치며 숨을 삼켰다. 승호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흐린 눈으로 그것을 흘깃 보고는 숨죽여 신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승주의 손길에서 겨우 벗어나 화장실로 달려 들어온 준영은 큰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봤다. 혹시나 무슨 자국이 남았을까 싶어서. 다행히 가슴 한두 군데에 울혈이 있는 정도였다. 뒤로 돌아 등과 엉덩이를 비춰 봐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꼼꼼히 목덜미와 뒷목까지 살펴본 준영은 그제야 제 얼굴을 온전히 거울에 비춰 봤다. 졸음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은 표정이 다잡히지 않았다. 갸름한 뺨에 손바닥을 대고 문지르다가 눈을 깜빡이고는 다시 자신의 표정을 살폈다. 노려보듯이.

눈매에 힘을 주고 나서야 얼굴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표정을 애써 잊으려 했다. 졸음이 아니라 성감에 취해 흐물거리던 앳된 남자의 얼굴을. 스스로가 약간 미친 게 아닌가 싶지만 거울 너머의 자신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그 질문을 던지자마자 대답이 떠올랐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승주 형에게 물어봐.

대답을 되뇌며 천천히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승호를 만나러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

승호는 사람이 많은 쇼핑몰의 정문 옆에 기대 서 있었다. 어릴 때에는 비슷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승호의 키는 누가 위아래로 잡아당긴 듯 쭉쭉 늘어났다.

준영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비교하기를 포기했다. 승주도 그런 것을 보면 아마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던 승호는 다가온 준영을 보고는 몇 마디 타박을 하다가 말았다. 그럴 기운도 없었다. 주말의 쇼핑몰은 두 사람의 생각보다 사람이 넘쳐흘렀다.

교통 혼잡 부담금을 납부할 정도로 큰 곳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따뜻한 날씨 탓에 사람의 무리는 훨씬 많았다. 사람들과 함께 쇼핑몰의 안으로 들어가며 승호가 넌지시 말했다.

“그냥 빨리 사고 나가자.”

“그러니까 왜 갑자기 쇼핑이야.”

“이럴 줄 몰랐다. 이거나 받아.”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쇼핑백을 불쑥 준영에게 건네고는 쇼윈도 너머의 남성복을 꼼꼼하게 살폈다. 받아 들고 열어 보자 맨 위에 있는 것은 과자였다. 영어가 포장지 겉면에 빽빽하게 쓰인 과자. 그 아래에는 기념품으로 보이는 엽서. 또 그 아래에도 기념품 같이 보이는 물건들.

그중에서 열쇠고리가 보이길래 손을 뻗어 꺼내 보았다. 작은 은색 열쇠고리의 장식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슬롯머신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쇼윈도를 기웃거리는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라스베이거스 갔어?”

“간 김에 갔다. 금발 예쁜 누나들 개 많아.”

“도박 어때.”

“별로야. 돈 절대 못 따겠더라. 그냥 아무거나 눌렀더니 내 돈 다 먹었어. 그런데 이 마네킹 통째로 벗겨 사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괜찮다.”

승호가 손가락질한 마네킹의 옷을 보던 준영은 큰 생각을 하지 않고 대꾸했다. 넉넉한 품의 맨투맨 티셔츠는 덩치가 큰 승호가 입었을 때 곰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일 게 뻔했지만 어차피 항상 저런 옷만 사는 놈이었다.

예전에 셔츠 같은 것도 추천해 봤었지만 어차피 말을 안 듣기도 했고. 취향이라는 게 대체 뭔지 항상 똑같은 옷을 사면서도 쇼핑을 하겠다고 나서곤 했다. 승호는 잠깐 기다려 보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준영이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기다리고 있자 쇼핑백을 세 개나 들고서 금방 나왔다. 손목에 쇼핑백을 대충 걸치고는 준영을 향해 눈짓했다.

“나가서 햄버거나 먹자.”

“그래. 뭘 그렇게 샀어.”

“마네킹에 있는 거랑 가방 두 개. 넌 뭐 살 거 없냐?”

“여기서는 안 살 거야. 나가자.”

준영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이고는 곧바로 쇼핑몰 밖으로 나갔다. 자꾸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어젯밤부터 무리한 몸이 욱신거리기도 했고. 바깥의 매연 섞인 공기를 마시며 길 건너의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붐비는 인근 가게들에 비해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는 한산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그렇다는 거였다. 두 사람은 쟁반을 들고 창가의 볕 좋은 자리에 앉았다. 햄버거 포장을 벗겨 먹는 준영을 보며 승호는 감자튀김부터 주워 먹고는 말했다.

“살 만하냐?”

“뭐가?”

“우리 형이랑. 어떻게 그 인간이랑 같이 살 수 있지?”

준영은 입 안 가득 햄버거를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승주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이 그런 걸 물어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냥저냥 지냈다. 조용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자꾸 나오는 TV에 익숙해졌다. 승주는 어차피 출장이 잦았다. 준영도 학교에 들어가고는 정신이 팔려 늦게 들어오곤 했었다. 그리고 밤에는 가끔 함께하고. 별말 없이 긍정하는 준영을 보며 승호는 눈썹을 까딱였다.

“지난주에 형 봤을 때 내가 할 말 없어서 물어봤어. 나도 준영이랑 같이 놀게 그 집에 들어갈래, 라고.”

“징그럽다.”

“어쨌든. 형이 뭐랬는지 아냐.”

“뭐라고 했는데.”

대충 예상이 되는 대답에 준영은 벌써부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나가 살고 싶으면 결혼해서 꺼지래.”

“저런.”

“저런? 너도 우리 형 닮아 가냐.”

“내가 승주 형을 어떻게 닮아.”

차분하게 말하는 준영의 말을 듣고 승호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승호가 생각하기에도 이준영은 생긴 것부터가 제 형인 권승주와 영 달랐다. 성격도 양 극단에 선 것 마냥 정반대고. 그때 준영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지난주에 형 집에 갔었어?”

“어. 맞선 보고 엄마 아빠 잠깐 보러 왔나.”

“맞선?”

그 순간 목소리를 가르고 창 너머의 자동차가 길게 경적을 울렸다. 승호는 거기에 잠깐 고개를 돌리느라 준영의 얼굴에 순간 스쳐 간 표정을 보지 못했다. 하얀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승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준영을 봤을 때는 크게 다를 거 없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방금 전과 같이 햄버거를 씹고, 눈을 마주치고는 깜빡였다. 얼굴색이 달라 보이는 것은 햇볕이 강해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며 준영의 반문에 대답했다.

“매주 바꿔서 보는 거 같기도 하고. 여자들은 형 뭐가 좋다고 그럴까. 재수 없는데. 안 그러냐?”

“너만 그렇게 말하잖아.”

“야. 우리 엄마 아빠가 형 말 안 듣는다고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몰라서 그래. 형 한참 미친놈 같았을 때 아빠가 골프채 휠 때까지 팬 적도 있어.”

이어져 나오는 대화에도 준영은 평소처럼 이야기를 들었다. 권승주에 대해서. 개강한 대학 이야기. 승호가 방학 동안 다녀온 미국 이야기까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나자 승호는 빈 콜라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필을 해 오겠다면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승호를 보다가 준영은 천천히 얼굴 근육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평소 같은 표정을 짓느라 근육이 경련할 것만 같았다.

쟁반 모서리에 물티슈가 눈에 들어와서 뜯어 꺼냈다. 그리고는 손을 닦았다. 쉴 새 없이. 그러다가 파르르 떨려 오는 입꼬리를 문질렀다. 매주라고 했다. 언제일까.

승주가 항상 정시 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늦는 날로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승주가 돌아오는 시간들을 하나하나 세 보면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금요일 저녁일까. 금세 콜라를 잔 가득 채워 오는 승호를 보며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를 했다.

승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용케 자리가 났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봤다. 지금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금속성의 손잡이가 차가웠다. 준영은 허한 마음으로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길 바라던 집 안은 거기에 반하듯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승주는 짙은 색 가죽 소파에 깊게 앉아 신문을 읽다가 들어오는 준영에게 눈길을 줬다.

색채가 짙은 피부색과 어울리게 뚜렷한 눈매에는 뿔테 안경이 씌워져 있었다. 승주는 눈이 나쁜 것도 아닌데 가끔 습관처럼 안경을 쓰곤 했었다. 특히 무언가 읽을 게 있을 때 안경을 찾았다. 짙은 암갈색의 눈동자가 유리알 너머로 들어온 준영의 상태를 위아래로 훑었다. 얼굴색이 좋지 않은 게 한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늘어뜨린 손등의 색도 남다르게 창백한 것도 도드라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승호를 보고 와서 이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질문했다.

“무슨 일이야?”

“별일 없어요.”

평소처럼 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는 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향한다. 뒷모습에 달라붙는 시선도 모른 채 준영은 멍하게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를 열고 그 안을 한참 보더니 빈손으로 그저 문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 싱크대 근처로 가 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정수기로 가 물을 따랐다. 물이 넘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오래 물을 받더니 컵을 들고 그 물을 다 마셨다. 보고 있던 승주는 준영이 다시 뒤 돌아 나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손짓했다.

“이리 와 봐.”

그 손짓을 보고 준영은 우뚝 섰다가 승주 앞으로 걸어갔다. 멀뚱하게 서 있다가 그의 옆자리, 소파에 앉기보다는 긴 다리 옆에 무릎을 꿇으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양팔로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는 단단한 무릎에 이마를 대고 기댔다. 그냥 옆으로 오라는 뜻이었는데 발치에 앉아 고개 숙이고 있는 몸을 내려다보며 승주는 들고 있던 신문을 접어 옆으로 내려 뒀다. 허리를 약간 앞으로 기울여 무릎에 기댄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아 다시 물었다.

“준영아.”

“피곤해서 그래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준영은 뒤통수를 차분하게 쓸어 오는 손길을 느끼며 다리에 기대듯 무너졌다.

형 맞선 봐요? 다른 사람 만날 거예요? 돌아오는 동안 수많은 말을 생각해 봤지만 결론을 알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 같았다.

작게 숨 쉬며 발치에 매달린 준영을 내려다보던 눈매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거짓말을 하면서 그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준영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떻게 입을 열게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이름을 소리 내 불러 보았다.

“이준영.”

승주는 다리에 매달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양팔을 당겨 일으키자 준영은 거기에 순순히 일어났다. 그래도 턱을 들어 올려다보는 승주의 눈길은 피하며 말했다.

“내일 학교 일찍 가야 해요. 들어가 볼게요.”

말하는 단어에 따라 오므라들었다가 펴지는 입술을 보며 승주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열린 문 틈새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다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작은 글자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가 답답한 정치 기사에 길게 머물렀다. 구속 영장이 기각된 거물 정치인에 대한 기사였다. 집중되지 않는 기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신문을 펼쳐 들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줬다. 종이의 옆면이 천천히 구겨졌다. 가지런히 신문을 덮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소리 없이 조용한 방문을 한번 힐끗 보았다. 승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것인가. 그 방법을 곧바로 지우며 승주 역시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준영을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막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두 사람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승주의 출근 시간에 맞추다 보니 아침 식사는 늘 이른 편이었다. 굳이 두 사람이 같이 아침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다른 일이 없으면 함께하는 것이 일상으로 굳어졌다.

오늘도 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준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냉장고를 열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께서 준비해 둔 아침거리가 항상 있었다. 식빵에 잼을 꺼내 바르다가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승주는 푸른 기가 감도는 셔츠를 입고 한 손에 재킷을 들고 나오다가 그런 광경을 봤다. 어젯밤의 반응을 봤을 때 아침 식사를 피할 줄 알았건만 의외였다.

“빵에 잼 바를까요?”

“커피만.”

승주의 대답에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빵에 잼을 바르는 데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내렸다. 맞은편에 앉으며 승주는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려 시선을 깔았다.

흔들리는 앞머리 너머로 부은 눈두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눈의 흰자도 아직 붉은 기가 다 가시지 않은 것이 보인다. 한 면에만 잼을 바른 식빵을 겹쳐 든 준영이 한 입을 베어 물고 씹자 승주가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몇 시에 들어와.”

“저녁 먹고 올 거예요.”

“팀플 할 거 있다며.”

“그 전에 끝날 거 같아요.”

“그래.”

여기서 이야기가 멈추자 승주는 천천히 눈앞의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커피가 씁쓸한 맛을 입에 남기며 식도 너머로 넘어갔다.

준영은 승주에게 물어볼 것을 생각하려 어떻게든 노력했다. 잔잔한 아침의 분위기가 서먹해지기 전에. 하지만 밤새 머릿속을 괴롭히던 생각이 벌써 떠나갔을 리 없었다. 형은 뭐 할 거예요? 오늘도 만나고 올 사람 있어요?

묻지 못할 질문을 빵과 함께 꾸역꾸역 집어 삼키는데 승주의 목에서 감탄과 한숨이 섞인 소리가 울렸다. 결국 물어야 할 걸 묻고야 말았다.

“어제 승호랑 뭐 했어?”

“쇼핑이요. 기념품 받고.”

“어디 갔는데.”

“코엑스요. 사람 너무 많았어요. 햄버거 먹었고. 그렇게 있다가 왔어요.”

“그래.”

“네.”

“그래서. 내게 할 말은 뭐야.”

준영은 그 물음에 씹던 빵을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승주는 잠깐의 기다림을 견뎠다. 차라리 못 알아보게 거짓말을 하면 모를까. 아니, 어차피 준영이 숨긴다 해도 웬만한 기색은 다 알아챌 수 있는 사이였다. 심리적으로 오랜 시간 가까웠고 요 근래에는 육체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사이였다. 답답한 침묵이 가시고 준영은 승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대답했다.

“없어요.”

“그래.”

생각보다 강단 있게 나오는 모습에 다물려 있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 웃음이 불안한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승주는 의미 없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을 하려나 싶던 순간 허리를 숙여 준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움찔하며 물러서려는 얼굴에 손을 올려 입가를 문질렀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고 다정하게 내려다보며 웃었다.

“오늘 무슨 요일인지 알지?”

“오늘… 아아.”

“할 말이 없는지 밤에 보자.”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도 전에 승주는 담백하게 물러나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들었다. 준영은 그것을 보고 있다가 나가려는 것을 알고 의자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준영에게 더 이상의 시선을 주지 않고는 뒷모습이 멀어졌다. 현관이 열리고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먹던 빵을 접시 위에 내려놓자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어두운 집 안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 얽혀 있는 마음을 천천히 떼어 내고 떨어져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권승주가 맞선을 본다고 화를 내고 슬퍼하는 감정 자체가 사치 같아서. 준영은 하루 종일 자신을 괴롭혔던 고민을 그렇게 결론짓고야 말았다.

주방으로 곧장 들어와 냉장고를 열고 찬물을 꺼내 마셨다. 그리고 그 앞에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에서 도어 록의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승주는 주방을 무심결에 지나치려다 우뚝 서 있는 준영을 보고 멈칫했다. 아직도 표정이 멍한 흰 얼굴을 보고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물 마셨어요. 어 형은… 오늘 일찍 왔네요.”

“그래서. 싫어?”

“아니요.”

눈 밑 살이 도톰해지도록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젓는 준영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손에 들고 있던 브리프케이스는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마주 섰다. 고개를 돌리려는 준영의 턱을 가볍게 쥐고 눈을 마주쳤다. 답지 않게 답답하게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오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아무 말 안 할 거야?”

“…네.”

승주는 입술을 움찔거리다 말고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대놓고 부정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턱을 잡고 있던 손을 풀며 말했다.

“오늘 이쪽 방으로 건너와.”

“씻고 갈게요.”

거기에 대해서는 또 긍정적으로 대답을 했다. 딱 그 대답만 하고 준영은 천천히 승주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승주는 손아귀의 힘을 꽉 쥐었다 폈다. 플레이를 한다고 살을 맞대고 살았지만 그동안은 부족한 게 많았다. 준영은 항상 말을 잘 들었고 승주에게 무리를 해서라도 맞추곤 했었다. 그랬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위험할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개처럼 입을 다문 걸 그냥 두고 볼 성미는 못됐다.

준영은 승주의 방문을 밀어 열었다. 꽉 닫혀 있지 않던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려 벽에 부딪히기 전 천천히 멈췄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아직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준영은 문을 당겨 닫고 침대가에 앉았다. 괜히 단단히 여민 가운을 만지작거렸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는 승주가 방금까지 보고 있었는지 보고서가 내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권승주가 회사에서 최연소에 근접한 기록으로 임원 자리에 올라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났다.

정작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 회사에서 영업을 끌어오니 실적이 좋은 것뿐이라고.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아직 회사 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준영이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게 뻗어 나가는 승주의 삶에서 자신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자꾸만 불쑥 고개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준영을 침대에 들이기 시작한 날부터 승주가 가장 먼저 정리한 것들이 있었다. 휴대폰에 등록되어 있던 파트너의 번호였다. 승주가 그것을 요란스레 알리며 정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눈치라는 것이 있어 알 수 있었다. 가끔 걸려 온 전화를 건성으로 받고는 끊어 버리곤 했었다. 그리고 전화가 몇 번을 다시 오더라도 받지 않고 내버려 뒀다.

집에 돌아오던 길에 승주가 빌라 앞 주차장의 입구에 차를 세워 놓고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때 승주의 표정은 본 적 없이 날카로웠다. 온갖 절절한 말을 하는 상대방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 띄기 전에 발걸음을 돌려 건물 뒤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뒤로 어떤 연락도, 승주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정리했던 것들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 파트너를 하고 있는 자신은? 준영은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잠깐이나마 감상에 젖어 있던 순간이 있었다. 어쩌면 권승주에게 있어 자신이 특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 말이다.

여기서 준영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토했다. 왜 이성적으로 생각을 못 했을까. 자신은 승주에게 있어 뭐라고 할까… 잠자리를 하기 가장 편리한 상대였다. 쓰라린 현실이지만 그랬다. 크게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붙잡아 들어앉히기도 쉬웠고. 무엇보다 자신은 승주의 말을 잘 들었다. 지금껏 미뤄 두고 있던 깨달음이 해일처럼 몰려와 잠식했다.

우울이 모든 것을 잠식하기 전 욕실 문이 열리고 승주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며 준영은 이를 악물었다가 힘을 풀었다. 못 박힌 듯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준영의 표정에 승주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할 말 정말 없어?”

“없어요.”

“무슨 고집일까.”

느린 걸음으로 침대가의 사이드 테이블 앞에 선 승주는 서랍을 열었다. 첫 번째 서랍을 약간 열어 두고는 그 아래 두 번째 서랍은 끝까지 잡아당겨 열었다. 부드러운 마찰음이 들렸다. 그 안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아는 준영은 승주의 등을 물끄러미 보며 불안감에 눈가를 떨었다. 다시 표정을 바로 했을 때 그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안 되는 거.”

“저 아침부터 나가야 돼요. 콘돔 써 줘요.”

“그게 다야?”

“네.”

승주의 반문에도 준영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리고 말았다. 서랍 안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던 승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불쾌한 기색을 보고 준영은 마음속에 어긋난 기쁨이 번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라도 발버둥 치고 싶었다. 듣고 싶어하는 말은 입을 다물고, 원하는 반응은 결코 보여 주지 않으면서.

답지 않은 고집으로 똘똘 뭉친 준영을 보고 승주는 콘돔만 침대 위로 툭 던지고는 준영의 앞에 섰다. 동그란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쉬는 한숨이 검은 머리카락 위로 흩어졌다. 승주는 손마디마다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뒷목을 묵직하게 당기는 짜증도 자제를 모르고 내달리려 했다.

왜 이럴까. 이 조그만 머리통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은 기분과 짜증도 몰려왔지만 그보다 앞선 것이 있었다.

버티고 반항하면 자제할 것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가볍게 움켜쥐었다가 뒷목을 잡아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끌려가느라 버둥거리는 다리가 중심을 못 잡았다. 뒷목을 끌어다 엎드리게 한 승주는 나직하게 말했다.

“엉덩이 들고.”

준영은 매트리스에 얼굴이 쓸렸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그러모았다.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올린 정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랫배와 사타구니 사이로 베개가 하나가 끼워 넣어졌다. 얕은 숨을 내쉬며 다시 들어 올리자 뒤에서 가운을 잡아 뜯듯 벗기는 손길을 느꼈다.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마음을 다잡는데 뒤에서 다시 한 번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엉덩이 들라니까.”

거기에 반항심을 섞어 높이 엉덩이를 치켜든 준영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하나의 고집이었다. 뭘 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그런 고집 말이다. 뒤편에서 콘돔 포장지를 뜯는 소리가 들렸을 때 긴장감에 눈을 꾹 감았다 뜨기도 했다.

오래 풀어 주지 않고 괴롭히려는 준비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엉덩이 사이로 차가운 젤이 뚝뚝 떨어지고 거친 손길이 구멍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입 안의 살을 씹으며 불쾌감을 견뎠다.

“세이프 워드는 전에 쓰던 대로 할게.”

“…….”

“대답.”

“알았어요.”

준영은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다른 신음 소리는 꾹 참았다. 가슴 아래부터 울려오는 신음 소리를. 엉덩이를 몇 번 때리더니 바로 골반 위 허리를 잡고 성기를 대 오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를 꿰뚫어 승주가 성기를 디밀어 넣었다. 뜨겁고 뭉툭한 물건이 아직 다물린 입구를 열고 무게를 실어 들어왔다. 여기서는 참지 못하고 울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읏, 으으….”

꺼져 가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움직이던 허리가 거세게 밀어붙여졌다. 두꺼운 부분을 뚫고 지나간 성기가 깊게 틀어박히자 아래의 몸이 잘게 떨렸다. 자꾸 다물어지려는 허벅지를 강제로 젖혀 밀고 허리 짓을 깊게 했다.

성기를 넣고 둥글게 돌리는 행동도 계속했다. 그러고도 혀를 깨문 듯한 신음만 뚝뚝 흘려 대자 결국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준영의 새카만 머리채를 그러쥐어 잡아당겼다. 시트에 이마를 비비고 있던 얼굴이 들어 올려졌다. 뒤에 제자리인 듯 움직이는 성기를 느끼며 준영은 흐느끼는 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를 듣고도 승주는 마음에 차지 않아 성기를 뽑아냈다. 틈 없이 맞물려 있던 하반신이 떨어져 나가면서 거친 손길이 아래의 몸을 뒤집었다. 정자세로 뒤집힌 준영은 시야 안에 잡히는 승주의 얼굴을 보았다. 이내 넓은 손바닥이 가는 목을 압박하듯 감싸 안아 왔다. 다리가 벌려지고, 다시 삽입해 오는 성기를 느끼며 헐떡이는데 승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말 좀 하자.”

열이 오르는지 묻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다. 준영은 그래도 젖혀 열린 온몸의 감각을 느끼며 입술을 다물었다. 들은 척도 않는 태도에 승주는 아래에 깔린 몸의 상태를 훑었다.

“혀 깨물지 마.”

그리고 뒷목을 손가락이 감싸 안으며 숨통을 조이는 압박이 시작됐다. 무게를 실어 누르는 손길에 준영은 고개를 힘껏 뒤로 젖혔다.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이 손길이 끝을 보기 전에는 멈출 것을 알지만… 알지만…. 가빠지는 숨이 차단되면서 온몸이 바싹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흣, 흐으…읏.”

흔들리던 다리마저 굽어 들어가고 시트를 그러쥐었다. 몸 안에 삽입된 성기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느껴질 때, 승주는 천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아래를 꿰뚫린 채 호흡마저 제 손에 맡긴 준영의 모습이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가련하게 떨리는 얇은 목과 가슴팍. 그리고 붉게 열기가 번져 가는 눈가까지. 쥐어짜듯 달라붙는 내벽도 열기와 축축함으로 쾌감이 과했다. 성기에서 당장 콘돔을 벗겨 내 다리를 오므리지도 못할 만큼 범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예 걷지도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안에 내지 말라는 정액을 몇 번이고 싸지르고 쓰레기처럼 대하고 싶었지만….

준영은 젖힌 고개를 흔들며 기도를 확보하려 몸부림쳤다. 숨을 들이쉬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턱 끝을 내렸다. 올라탄 승주와 눈을 맞추며, 다시 조여 오려는 손아귀를 바라봤다. 새카만 동공과 마주쳤을 때 일그러져 있던 입술이 말하는 것을 준영은 흘려들었다.

“할 말.”

“하아, 하. 네?”

“말 안 할 거야?”

“없어요.”

굳건한 대답을 들으며 승주는 다시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얇은 목을 그러쥐듯 잡고 세심하게 호흡을 조절하면서, 숨이 막혀 오는 흰 몸이 천천히 몸부림치며 헐떡일 때 승주는 바싹 조여 오는 내벽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준영의 눈꼬리가 떨려 올 때 쯤 다시 손을 놓고, 몇 번을 반복해 삽입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아래에서 들이밀어지는 성기를 느끼는 준영은 정신이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진저리쳤다.

그래. 차라리 마음대로 써먹어. 정 떨어질 때까지.

슬픔은 자꾸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몰고 왔다. 애원이기도 한 바람이 가슴에 번져 나갈 때쯤 숨통을 조이던 손이 물려진 것을 안 준영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열기에 잠식된 공기가 폐부에 깊게 들이찼다. 어깻죽지를 떨며 손을 더듬거렸다. 뭐라도 쥘 것이 필요한 사람처럼. 저도 모르는 손짓을 보며 승주가 손등 위를 덮고 꽉 쥐었다.

“허억, 후, 하아….”

다짐이 그렇다 해도 거친 잠자리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항상 그랬다. 승주는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서 플레이랍시고 데리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걸 경험하게 한 적은 없었다. 거세게 박아 오던 성기가 아래서 천천히 뽑혀 나가는 것을 느끼며 희뿌연 시야에 눈을 깜빡일 때 그제야 승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이 내려와 맞물렸다가 떨어졌다. 다시 키스할 때 오늘 입술이 처음 닿은 것을 서로 알았다. 질척하게 치열을 훑고 지나간 혀가 입 안을 건드려 왔다. 그것이 인공호흡인 양 준영의 몸이 잘게 떨리다 멈췄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도 입 안에 들어찬 온기가 중요했다. 얽혀 오는 혀를 빨고 입술이 떨어지자 허벅지를 조여 매달렸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에 준영은 천천히 호흡을 돌렸다. 얼굴을 감싸 안는 따뜻한 손길이 체온과 닮도록 익숙해지고 나서야 부르는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준영아.”

“읏, 네….”

“준영아. 정신 차려 봐.”

“네? 네.”

“잠깐만. 힘 풀어 봐.”

“어디?”

“아래.”

이유도 모른 채 반문하며 긴장으로 굳은 몸을 이완하려 했다. 얼굴에 내려앉는 입맞춤을 받으며 들려오는 말소리를 이해했다.

“콘돔 찢어졌어. 안 된다며.”

“아….”

“힘 빼 봐. 착하지.”

다정하게 쓸어 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그제야 말을 이해했다. 방금 전까지 제 몸을 유린하던 남자는 더없이 다정해져 있었다. 허리를 천천히 물리고 빠져나간 승주가 손바닥으로 벌려진 허벅지의 안쪽을 따뜻하게 문지르며 성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긴장을 풀라는 듯이. 애정 어린 듯한 접촉에 준영은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목을 졸려도 나오지 않던 울음소리가 그제야 토해졌다. 간간히 보이는 승주의 다정함이 진저리 쳐지도록 싫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왜 자꾸 오해하게 만드는 걸까.

아래를 헤집어 더듬는 손길을 느끼며 준영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음에 들뜬 가슴팍이 자꾸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했다.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천장이 어룽거렸다.

승주는 준영의 다리를 접어 세우고는 양다리를 넓게 벌렸다. 불량품이었는지 찢어진 콘돔은 뺐지만 혹시라도 안에 문제가 될까 더듬어 보는 중이었다. 충분히 젖지 못한 내벽이 손가락에 빠듯하게 감겨 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빼냈다. 그리고 누워서 자꾸 헐떡이고 있는 준영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팔을 한 손에 잡고 훅 당기자 허리가 접히며 상체가 끌려 올라왔다. 승주는 준영의 젖은 얼굴을 빤히 보다가 목덜미를 살폈다. 턱을 타고 흐른 눈물로 축축했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누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물을 줄줄 흘려 댔다. 흘러넘칠 만큼.

짜증이 가슴속에 끓는 것을 느끼며 승주가 묵묵히 준영을 내려다봤다. 제대로 허리에 힘을 줘 앉는 것을 보고 쥐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얼굴로 손을 뻗어 뺨을 감싸 쥐고 엄지로 눈가를 꾹꾹 훑었다. 그리고 손을 천천히 뒤로 넘겨 머리채를 그러쥐었다. 벌겋게 된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불렀다.

“이준영.”

입술을 벙긋거리던 준영은 간신히 목소리를 만들었다.

“형, 승주 형.”

“너 왜 그래.”

물음에 또 대답이 없었다. 준영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팔을 뻗었다. 승주는 전에 없던 반응들을 보고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돌렸다. 지금 이걸 받아 줘야 할지, 엉망이긴 하지만 플레이 중인데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는 걸 두고 봐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무뚝뚝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준영은 승주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겼다. 뜨거운 체온에 다시 눈물이 녹아 줄줄 흘렀다. 아직 준영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승주가 목덜미에 기대 안긴 준영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손아귀에 힘을 줘 떨어트려 보려 해도 어리광 부리듯 팔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었다. 등에 둘러져 있던 준영의 손이 승주의 날개 뼈 부근까지 올라와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탁 탁 두 번 두드렸다.

“살려 주세요.”

품 안에서 억눌리듯 나온 목소리를 듣고 승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워낙 쓰지 않아서 잊을 뻔한 세이프 워드였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에 입술을 부비며 승주가 속삭였다.

“오늘 왜 그래.”

“…….”

“응?”

“아파서.”

“어디가.”

승주의 따뜻함이 자꾸 감정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을 아끼고 품 안에 오래도록 안겨 있었다.

***

문을 닫고 들어온 준영은 책상을 지나쳤다. 방을 돌아다니는 걸음이 분주했다. 침대 아래의 가방을 뒤지고, 그 안에 찾는 것이 없어서 침대맡의 충전기를 돌아봤다. 충전이 다 된 휴대폰이 초록색 불을 반짝이고 있었다.

침대 위로 올라가 휴대폰을 잡아챘다. 씻고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개의치 않으며 물기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휴대폰의 통화 내역을 내려가자 엄마의 번호가 보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가져다 댔다. 긴 신호음이 들리는 동안 이상해진 목소리를 가다듬는데 곧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준영아. 이 시간에 전화했네?

“네 엄마. 저 할 말 있어요.”

- 뭔데. 뭐 있어?

“저 이제 나가 살래요. 고시원 구해서 나갈까 해요.”

- 아. 그래. 그렇지. 승주랑 잘 있는 거 같아서 엄마가 신경을 못 썼어. 언제 나가게?

“최대한 빨리요.”

고저 없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잠시 침묵했다가 물었다.

- 승주랑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없어요.”

숨 쉬듯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래도 그녀는 낌새를 알아채고 한 번 더 물었다. 전화 온 시간부터 이미 심상치 않았다.

- 가족도 같이 살면 싸우는데 그럴 수 있지. 엄마가 승주에게 고맙다고 따로 전할게. 입금해 둘 테니까 고시원 찾아 봐. 보증금 필요하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찾아보고 말씀드릴게요.”

- 그래. 걱정 말고.

몇 마디 더 다정한 말이 오가고 전화가 끊겼다. 준영은 휴대폰을 꽉 쥐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답답해하는 승주의 얼굴을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답답해할 만도 했다. 승주는 달라진 것이 없었고 자신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 모든 일에서 그저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권승주가 너무 좋아서 가슴이 답답했다. 오로지 자신 만의 문제였다.

***

권승주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을 틀어 두통이 일 때까지 샤워를 했다. 머릿속을 지끈거리게 하는 고민을 잊기 위해 다른 두통을 일부러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유는 크고 작게 중첩되어 있었다. 이준영의 다물려진 입을 열게 하려 했던 어제의 플레이는 실패였다. 실패라는 단어 정도로 설명을 끝낼 수 있을까. 엉망이었다. 그랬다. 그 정도의 표현쯤은 되어야 어제의 실패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타이를 바짝 조였다가 풀며 그는 자조적으로 웃기도 했다. 요즘 그들의 사이를 되짚어 봤을 때 플레이라고 할 만한 게 있지도 않았다. 목에 걸어 보겠다고 샀던 목줄은 가죽 냄새가 빠지지도 않게 포장되어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다. 패들 같은 도구는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마른 몸이라 때렸다가 뼈에 잘못 맞아 아플까 걱정되어서 그랬다.

뭘 얼마나 괴롭혔다고 그렇게 울었을까. 숨이 완전히 막히게 조른 것도 아니었고 지켜 달라는 것은 지켜 줬다. 살이 달아오르도록 때린 곳도 없었다. 기구를 썼나 뭘 썼나.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울었을까.

그는 다시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드레스 룸 밖으로 나왔다. 준영은 전날 아침 앉아 있던 그 식탁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렇게 먹먹한 표정으로 있을 거면 차라리 나오지나 말지.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동그란 눈동자가 천천히 승주를 향했다. 자꾸 비벼 붉어진 눈가가 거슬렸고 기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전날처럼 초조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승주는 일상적인 아침을 만들어 보려 했다.

“목은?”

“괜찮아요.”

“…….”

“저 오늘 늦게 올 거예요.”

“왜.”

“방 보러 가요.”

“방?”

“네.”

생소한 단어가 울렸을 때 승주는 어깨를 굳혔다. 경직된 그의 손을 보며 준영은 천천히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제 그만해요.”

이제 그만해요, 라는 짧은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승주는 그 함의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문장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태롭게 앉아 있는 준영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천천히 그 뜻을 이해했다. 회귀점으로써 인식될 순간. 그게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얕은 두통으로 넘겼던 정보들이 그제야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의자의 끄트머리에 걸치듯 앉아 있는 지금의 태도와 가만히 두지 못하는 입술. 식빵의 끄트머리가 부스러져 가루가 날릴 때까지 만지작거리고만 있는 모습까지도. 그동안 좋지 않던 안색이나 답답하게 굴었던 행동들까지. 모든 걸 그만두려던 징조였던 것인가.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귓가에 들릴 리 없는 경고음 같은 것이 날카롭게 들렸다. 집 안을 잠식하고 맴도는 금속성의 소리가 승주의 귓가에만 울렸다. 마음속의 소리를 덮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물어야 했다. 서늘하고 평온하던 낯이 뒤흔들렸다. 나온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았다.

“갑자기 왜?”

“네?”

“왜 그러냐고.”

“왜냐니요.”

준영은 사납기까지 한 승주의 표정을 기이하게 보며 대답했다. 혹시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손에 쥐어진 마지막 열쇠. 이것마저 빼앗길 수는 없었다. 비록 자신이 승주에게 흔들리는 어리숙한 인간일 지라도 마지막 탈출구만큼은. 이건 준 거잖아. 내가 등신같이 권승주에게 다른 걸 전부 줬다 해도 이것만큼은.

반발심이 굳은 문장을 만들었다.

“말하면 끝난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말한 건데요.”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길게 서로를 응시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시선을 마주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정보를 해석하고 고민하고도 서로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서로가 왜 이렇게 날을 세우는지에 대해서.

피곤이 울컥 몰려왔다. 승주는 이마를 짚었다. 하라는 말은 안 하고 답답하게 있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거기서 문득 짚이는 게 있어 내리깐 눈을 다시 올려 응시했다. 섬세한 이목구비를 한참 뜯어보다가 나온 질문은 지금까지의 답답함을 대변하듯 날카로웠다.

“안 하고 버티던 게 이 말이었어?”

“네?”

“며칠 전부터 안 하고 있던 말.”

아아. 준영은 작게 입을 벌리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갈 때가 됐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요.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고….”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을 완전히 떼어 놓지 못하고. 그게 너무 아프다. 당신이 내 몸에 욱여넣는 열기가 자꾸 심장을 두드린다. 그 말은 시선을 비스듬히 비켜 가며 숨겼다.

“그만하자고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랬어요.”

문장이 끝맺어지자 조용해졌고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두 사람의 발치를 잠식해 갔다. 대화 사이의 간격치고는 길었지만 할 말이 없던 승주가 새로운 말을 생각해 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혼자 정리하고, 그걸 몰랐던 나는 무슨 말이라도 들어 보자 너를 달랬고.

승주는 이상할 정도로 솟구치는 짜증을 숨겨 보려 일부러 간단하게 대답했다. 싫다는 상대와 더 이상 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알았어.”

“그럼 된 거예요?”

“언제 나가게.”

“구하는 대로 나갈게요.”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승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가는 발걸음은 느렸지만 일정한 보폭으로 현관을 향했다. 기계적으로 문을 열고, 문을 나갔다. 멀어지는 승주의 뒷모습을 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도 남을 시간이 되자 준영은 천천히 고개를 수그렸다. 이런 게 이별일까. 혼자 한 이별을 곱씹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 안으로 걸어들어 간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준영은 커다란 가방에 옷가지를 욱여넣어 들고 나왔다. 책은 몇 권 되지도 않아 품 안에 끌어안고는 집에서 나왔다. 거창한 방을 구하는 것도 아닌데 고시원을 구한답시고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았다.

빨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

학교 앞 고시원의 생김새는 다들 고만고만했다. 같은 학번의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좋은 고시원은 이미 자리가 없었다. 방이 없다는 말에 두 번을 나오고 나서 세 번째로 간 고시원은 방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도 외창이 난 방들은 이미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 나갔다고 했다.

피곤과 권태가 섞인 몸짓으로 아주머니는 준영에게 방문을 열어 보여 주었다. 일반적인 고시원 방이었다. 방문을 열면 문이 열리는 궤적이 바닥 면적의 절반을 덮을 정도였고 어두컴컴했다. 방문 옆의 스위치를 켜자 불빛이 방 안에 꽉 찼다. 문 옆으로 옷장이 있고 그 옆에 딱 붙어 좁은 싱글 침대가 있었다. 침대의 발치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그런 방이었다. 그래도 내창이 복도 쪽으로 나 있기는 했다. 우두커니 서서 방을 보는 준영의 기색이 불안한지 아주머니는 뒤에서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어차피 학기도 시작된 거 방 비워 봤자 쓸데없으니까 학생 들어오면 35만 원에서 좀 까 줄게.”

“그럼 얼마죠?”

“삼만 원 정도면 되겠어? 학기 끝날 때까지 월 32만원.”

“네. 지금 드려야 되죠?”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방을 찾으러 다니고 돌아다닐 정신도 없었다. 위태롭게 들고 있던 책은 책상 위에 올려 뒀고 터지기 직전인 가방은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카운터로 나갔다.

계좌 이체를 하는 동안 고시원의 생활 수칙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4층만 남자 층이니 3층은 가지 말고, 주방에서 너무 냄새나는 음식은 먹지 않도록 하라는 잔소리들이었다. 다소 빡빡한 생활 규칙을 다 듣고는 준영은 긴 복도를 지나쳐 끝 방에 들어갔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도 없었다.

가방 지퍼를 열고 거꾸로 들어 안의 옷을 털어 내듯 침대 위에 쏟았다. 책상 위에 올려 둔 책 몇 권을 가방 안에 넣고는 바로 문을 닫고 나왔다.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찾아 신고 밖으로 나오자 밖은 환했다.

조명이 부족한 고시원 건물 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각자 갈 곳이 있는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든 준영은 학교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그제야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것을 알았다.

항상 수업에 딱 맞춰 학교를 오고 다른 일이 없으면 곧장 집으로 갔기 때문에 몰랐다. 머뭇거리는 걸음을 학생회관의 동아리 방으로 돌렸다. 과 친구들의 권유로 입학하자마자 일단 가입해 뒀던 동아리다. 누가 있을까 긴장하며 동아리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얼굴을 아는 한 학번 선배만이 동아리 방을 지키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과제를 마우스로 클릭 중이던 남자는 들어와 어색하게 인사하며 소파에 앉는 준영을 보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준영이네. 오랜만이다.”

“형 안녕하세요.”

“학교는 다니고 있었어? 휴학했나 했다. 술자리 한 번을 안 나오고. 어?”

“집에 늦으면 안 될 일이 있었어요.”

“들었어. 뭐였더라.”

선배는 기억 속의 무언가를 떠올려 보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말을 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온갖 술자리와 모임이 있을 때 준영은 늘 자리를 먼저 털고 일어났었다. 붙잡는 친구나 선배의 손길에도 항상 반듯한 미소를 띠우며 거절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연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곤란해하니 잡는 사람들이 무안해 손을 털고 보내 주곤 했었다. 집에 무슨 일 있다는데 왜 그러냐며 술에 취해 극성인 선배를 말리기도 하면서.

정작 승주가 빨리 들어오라고 하던 것도 아닌데 준영은 자연스럽게 할 일이 끝나면 그 집에 틀어박혀 있곤 했었다. 승주가 쓰는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죽 재질의 책을 꺼내 펴 보기도 하고. 거실의 소파에 길게 늘어져 누워서는 영화를 봤다.

진열장에는 수많은 영화 DVD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몇 개 좋아하는 영화들이 있었다. 잔잔하고 시끄럽지 않은 영화를 틀어 놓고 그것을 배경 삼아 소파에 기대 잠이 드는 일상. 그리고 깊게 잠이 들기 전 승주가 집에 들어오곤 했었다.

처음 몇 번은 문소리와 인기척에 깼지만 준영이 거실에서 자주 선잠을 잔다는 것을 알고는 들어오는 승주도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승주가 일으켜 깨울 때까지 일어나지도 못했었다. 옅은 잠기운에 기대 끌어안아 일으키는 승주의 품에 더 기대던 순간이었다.

모든 결핍이 충족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준영은 줄줄이 떠오르는 기억들을 무시하고 눈에 힘을 줘 앞을 바라봤다. 포스터를 여러 번 붙였다가 떼어 낸 벽과 유리가 깔린 탁자 위의 배달 음식 전단지들. 그리고 지금 앉아 있는 한쪽이 꺼진 소파. 말을 거는 동아리의 선배까지. 갑자기 이상한 표정이 돼 말이 없는 준영을 남자는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젠 나와 살기로 했어요.”

“오. 나왔어?”

“방금 학교 앞에 방 구하고 올라왔어요.”

“그래. 그럼 동아리 모임도 나와 봐. 올 거지?”

“다른 일 없으면 갈게요.”

닥쳐오는 기억들을 피하기 위해 그는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회의는 엉망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해도 권승주의 탓은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오늘따라 팀원들이 자잘하게 그의 신경을 긁었다.

자리를 비웠다가 지각을 해 보고서도 제대로 읽지 않고 들어오는 사원이 있지 않나, 보고해야 할 자료 중 일부를 두고 왔다며 세팅 중에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리서치 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날이었다. 요 근래 유해졌다는 소문이 도는 그였지만 오늘따라 회의실에서 팀원들을 둘러보는 표정에는 서늘함을 넘어 신경질까지 어려 있었다. 허를 찌르는 승주의 질문에 구석까지 몰린 팀원을 감싸며 대신 말을 받아 준 사람도 있었다.

“권 팀장. 거 다 잘하면 얘가 지금 팀장 자리 올라가 있겠지. 아까 말한 대로 플랜 짜고 일단 퇴근해. 다들 저녁은 먹어야 할 거 아냐.”

같은 팀장급이 나서 말리니 승주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보고서를 그러모아 정리했다. 회의실 중에서도 높은 층에 위치하는 편이라 밖을 내다보기가 쉬웠는데 이미 어둠이 다 내려앉아 있었다. 회의가 끝나는 분위기가 되자 다들 낮은 목소리로 자리를 정리했다. 승주의 말을 막았던 남자가 친근한 척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입사 동기이기도 한 사이라 다른 사람보다 격의 없이 이것저것 권해 오는 사이였다.

“우리 한잔하러 갈 건데 같이 가. 밥 먹고 갈 시간 됐잖아.”

“됐다. 오늘 내가 끼면 밥이나 제대로 넘어가겠어?”

아까보다는 유해진 어투였지만 승주의 말을 들은 회의실 안 사람들은 부산스레 프로젝터 따위를 정리하며 모르는 척했다. 빈말로라도 승주에게 함께 가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특히 한 소리 들었던 신입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남자는 승주에게 한 번 더 권했다.

“알면서 그렇게 애들을 찔러 놨냐. 안 가?”

“먼저 일어난다.”

승주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회의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왼손에 채워진 시계를 내려다보니 여덟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일단 7층으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온 그는 방금 가지고 온 보고서를 자리에 던지듯 올려 뒀다.

평소의 성격처럼 자로 잰 듯 깨끗한 책상 위에는 거슬릴 만한 물건이 없었다. 오늘은 야근을 할 만한 업무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문을 통과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퇴근을 하는 발걸음이 괜스레 분주했다. 퇴근할 생각이 없어 회의를 질질 끌 때는 언제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의 마음은 그새 변덕을 부려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있었다.

집에 이준영이 돌아와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집에 돌아와 주차장의 네모난 선 안에 급하게 차를 밀어 넣고는 집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도어 록을 열고 문을 잡아당기자마자 집 안에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어둑한 집 안이 적막했다. 그는 천천히 집 안으로 돌아와 거실의 소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별일이 없으면 항상 준영이 앉아 있던 자리다. 오른쪽의 끄트머리 팔걸이에 몸을 길게 기대고 앉아서는 졸고 있기 일쑤였다. 그럴 거면 영화는 왜 틀어 두는 건가 싶어 물은 적도 있었다. 적막한 게 싫어 그렇다는 말에 승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었다. 자신도 가끔 습관처럼 영화를 틀어 두는 버릇이 있으니 준영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항상 자리에 앉아 있을 줄만 알았건만 오늘은 휑하게 빈자리만 남았다.

그제야 휴대폰 한번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집에 왔음을 알았다. 재킷 주머니에 대충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보니 밀린 전화와 문자가 많았다. 업무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중 하나가 익숙지 않은 번호였다. 부재중 전화가 한 번 찍히고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를 열어 본 승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권승주 씨. 나 준영이 엄마에요. 준영이가 인사 못 하고 나왔다고 해서 전화하려 했는데 받질 않네요. 직접 만나서 인사해야 할 일인 건 알지만 워낙 바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요. 문자로라도 그동안 감사했다고 전하고 싶어요. 우리 애 그동안 신경 써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하. 승주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졌다. 다른 연락들은 일단 제쳐 두고 익숙하지 않은 번호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기고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 바쁜 줄 알고 문자로 남겼는데 전화 줬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휴대폰을 못 봤습니다.”

- 준영이가 나간다고 말은 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인사를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문자 남겼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내가 신경을 못 쓰는 게 많은데 어릴 때부터 우리 애 챙겨 줘서.

완벽한 마무리 인사였다. 이런 식으로 재빠르게 나갈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승주는 다시 한 번 두통이 가볍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둑한 집이 단순히 사람이 없어 적막한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그런 대화 한 자락으로 끝을 내고 나가 버렸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어디로 도망간 건지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애써 억양을 눌렀다.

“아닙니다. 방을 빨리 구했네요.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는데.”

-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고시원을 바로 들어간 모양이에요. 학교도 편하게 다닐 겸 그러는 게 좋다고 생각한 거 같더라고요. 애가 갑작스럽게 나갔죠. 승주 씨가 이해해 줘요.

이해는 무슨. 부여잡고 있던 휴대폰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에게 결코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준영이 잘 나간 것은 맞았다. 자신의 성향에 질질 끌려오면서 어디까지 관계를 이어 나갈 생각이었을지. 분명 잘 나갔다고 칭찬해 줄 일이 맞았다.

그걸 뻔히 알고도 놓아주지 않고 있던 자신이 문제라는 것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일상에 섞여 든 준영이 승주에게도 곤란할 때가 있었다.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감싸야 하는지, 그리고 선을 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그만해야 할 때가 맞기는 했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갑자기 뛰쳐나가서? 이유를 몰라 답답했다. 대체 왜.

“괜찮습니다. 학교 앞으로 갔나 보네요.”

- 아직 확실히 어딘지는 못 들었는데 그런 거 같아요. 잘 지낼 테니까 너무 걱정 말구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어딘지는 아직 모르시는 겁니까.”

- …그러네요. 학교 앞 고시원이라고만 들었지 상호를 정확하게 안 들었네. 확인해 봐야겠네요. 이렇게 항상 깜빡깜빡한다니까.

“예. 알겠습니다.”

승주는 전화를 끊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갈 데 없는 분노가 치밀어 휴대폰을 소파 앞 테이블로 내던졌다. 둔탁한 소음을 내며 테이블 위를 구르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가 천천히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이마를 쓸어 올렸다. 답답했다. 자신만 준영을 걱정하는 건가 싶어서.

어떻게 자기 아들이 어디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건지. 대체 어디 있는 건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눈두덩이를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부재중 전화나 문자 중 준영의 연락이 하나도 없었던 게 기억났다. 그러나 지금 연락을 한다고 해서 받아 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

가지고 있는 고민이 철없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준영에게는 요즘이 그랬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따뜻하기도 하고 선선하기도 했다. 하늘은 높았고 맑은 햇살이 내리쬐었다. 준영은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학식을 먹고 학교 중앙의 대운동장 옆 계단에 자리 잡아 앉았다. 어차피 통행을 위해 만든 계단이라기보다는 앉아서 시간 때우는 사람이 더 많은 장소였다.

대운동장의 잔디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학생들도 간간히 보였다. 통행을 막기 위해 야트막한 밧줄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다들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날이었다.

강의실로 곧장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동기들은 준영에게 자꾸 와플이라도 하나 먹고 들어가라며 성화였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준영의 손에도 학교에서 파는 와플이 들렸다. 동그란 와플은 생크림과 초코 시럽을 잔뜩 발라 반으로 접혀 있었다. 달지만 맛있기는 했다. 다른 학생들은 다 먹어 본 와플이라는데 이준영만 처음이었다. 쭈그려 앉아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는 그의 어깨를 뒤에서 동기가 툭툭 쳤다.

“이준영. 너도 이번 총회 나와.”

“총회?”

“어. 이번 주 금요일.”

이제 와 가기는 귀찮았기에 됐다는 대답을 하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더 긍정적이었다.

“그러네. 할 일 없지? 나와.”

“나 바빠.”

“뭐가. 너 이제 집 나와서 산다며.”

타인에게서 듣는 사실에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와플을 다시 되새김질해 씹었다. 그랬었다. 승주의 집을 나와 얇은 벽으로 가로막힌 고시원에 들어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좁고 어둑한 고시원은 나름대로 살 만했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 갔다가 숨바꼭질을 하겠다고 기어 들어갔던 벽장처럼 아늑하기도 하고. 햇빛을 보지 못해 시간이 가늠되지 않지만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불을 꺼 두면 어둑한 방 안으로 내창 밖 복도의 불빛이 들어왔고 벽 너머의 자잘한 소음들이 오히려 외롭지 않게 다른 사람의 존재들을 부각시켰다. 자꾸 끼어드는 소음들이 준영을 상념에서 구해 냈다. 그런 날들이었다.

잠깐 생각이 길어지느라 말을 멈췄던 준영은 주시하고 있는 동기들에게 억지로 대답했다.

“할 일 없으면 갈게.”

“또 그 소리. 됐다. 웬만하면 참석해. 너 선배 얼굴 아는 사람이라도 있긴 하냐?”

“이름이랑 얼굴은 다 알아.”

“니가 잘도.”

타박과 같은 말투에도 준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금요일에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주에 문자로 의미 없는 대화를 하던 중 승호가 시간이 되면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승주의 집에서 더 이상 살지 않게 됐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숨겨 봤자 어차피 알게 될 일인데 말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으니까. 그 말을 문자로 찍어 보내자마자 부리나케 전화가 온 것은 준영으로써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자 질문이 쏟아졌다. 차분하게 둘러 대답하며 그냥 잘 안 맞았고 학교 앞에 살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그 정도뿐이었다.

준영의 대답에 승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번 보러 오겠다는 말을 했다. 그게 금요일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다시 와플을 베어 무는 준영을 보고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말수가 없고 웃음만 잔잔한 놈이었는데 요즘은 그게 더하다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었다. 그래도 부탁받은 말은 해야 했다.

“준영아. 너 소개팅 안 할래?”

“소개팅?”

준영은 거기에 콧잔등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늘 잔잔하게 긍정하던 잘생긴 얼굴이 드물게 거부 반응을 보이자 친구는 준비한 멘트를 내뱉기도 전에 머쓱해졌다.

“왜. 여자 친구 있어? 그래서 우리랑 안 노는 거였냐.”

“아니. 연애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라서. 말은 고마워.”

권유해 준 친구에게 너무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그래서 웃어 보이며 친구의 팔꿈치를 툭 치고 다시 와플을 씹었다. 어딘가 붕 떠 있는 듯 가라앉은 준영의 분위기를 보며 친구들은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과제 기한이나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 취업한 선배가 동아리에 술을 사 주러 온다던가, 그런 이야기들. 준영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만 혼자 멀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잊어야 하는걸 알면서도 그게 잘 안 됐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자꾸 승주의 곁으로 온 정신이 쏠렸다. 틈을 보이면 기억이 자꾸 뒷걸음질 쳤다. 서늘한 표정과 달리 높았던 체온을. 길쭉한 다리를 꼬고 앉아 태블릿 PC로 자료를 내려다보던 모습, 그때 이마 위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자신, 길게 시선을 붙이고 있으면 다가오던 얼굴이나 입술, 섞이던 열기와 마른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길 같은 것들이.

현실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이런 것을 고민하는 자신이 철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게 또 아팠다.

***

승주는 지난 일주일 동안 퇴근 후 집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든 반드시 옆길로 샜다. 평소라면 절대 만나지 않을 거래처 사장을 만나 쓸데없는 잡담을 들어 주기도 했고 오랜 시간 발길을 끊었던 바에도 들렀다.

누구를 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아 킵해 뒀던 술만 몇 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없는 일주일이었다. 퇴근할 시간이 되고도 일어나지 않는 그 때문에 다른 팀원들이 눈치를 보며 자리를 보전했다.

무심한 눈길이 책상 위를 둘러보며 다들 들어가 보라며 말을 던졌지만 쉽게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번 퇴근을 늦게 하는 승주를 못 견뎌 이제 다른 팀원들은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 자기 알아서 퇴근했다.

매번 전송 받은 보고서를 검토하고 긴 피드백을 붙여 돌려주었다. 정리된 보고는 위로 올렸다. 매일같이 야근을 찍는 승주를 보고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임원 달 생각이라더니 일에 미친 게 아니냐고. 옆 팀의 팀장인 현석이 뒷이야기를 전해 주며 말을 걸어와도 그는 들은 척을 안 했다. 승진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딱히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문은 거슬렸고 신경은 예민하게 가라앉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감정의 끈을 느슨하게 하려는 데에만도 상상 이상의 노력이 뒤따르고 있었다.

주말이 되자 그는 소파에 길게 기대 누웠다. 준영이 곧잘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깊게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내리깔았다. 짜증이 자꾸 신경을 갉아먹었다. 부산스럽게 자꾸 울리던 휴대폰은 이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덕분에 진동 소리는 죽었다.

본가에서 온 연락을 받고 무슨 말이든 지어내기에는 기분이 저조했다. 눈동자가 의미 없는 TV의 뉴스만을 응시했다. 오전의 햇살이 드리워지려는 거실에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승주는 거실로 들어오는 복도를 빤히 응시했다. 어차피 준영이 아닐 것을 알면서도 봤다. 집안일을 봐 주는 아주머니가 그런 승주의 시야에 잡혔다. 인사를 해 오는 그녀에게 마주 인사하고 그제야 평일 오전에 오던 아주머니가 이번 주만 주말로 날짜를 바꾼 것을 알았다.

승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부산스럽게 방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준영이 있던 작은방의 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 안은 커튼이 길게 내려와 어둑했다. 며칠째 움직이지 않는 이부자리의 모양과 휑한 책상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여기 학생 이제 없어요?”

“왜 물어보시죠?”

“짐이 없어진 거 같아서 치워야 하나 해서요.”

뚫어져라 바라보는 승주의 시선이 적막했다. 그 시선의 범위 안에서 그녀는 인자한 웃음을 애써 유지하며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무언가 잘못 물은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는 했다. 승주의 눈길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그냥 두세요.”

“알았어요. 어휴. 빨래 다 됐나 보다.”

그녀는 하지 않던 혼잣말을 하며 자리를 떴다. 걸음 소리가 세탁기 쪽으로 부산스레 멀어졌다. 승주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안 그래도 갑갑하던 속이 뒤틀렸다. 소파 옆 서랍장에 손을 뻗어 당겨 열었다. 피우다 만 담뱃갑과 은색의 지포 라이터가 빛을 발했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는 동안에도 자꾸 부질없는 고민이 지속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이제 와 예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준영이 그걸 원하기는 할까.

잘 지내고 있을까.

어떤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일까.

이제와 생각해 보자면 승주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준영이 이 집에 함께 있는 것이 익숙했다. 해 주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 주는 것도 편했고 잔잔하게 웃는 흰 얼굴을 보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가끔 TV에 정신 팔린 옆모습을 보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아침에 졸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식탁에 늘 마주 앉아 있는 모습도 기꺼웠다. 모든 게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자리에 있어서도 무리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기억을 복기하는 과정은 그에게 있어 실패를 되풀이해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지점에서 잘못했는지, 그리고 지금껏 했던 모든 행동을 잘못했다고 가정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늘어놓고 보니 뭐 하나 제대로 된 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본래 그런 법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고 부정적으로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그랬다. 모든 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꾸만 되풀이해 질문했다.

결정적 계기. 그것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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