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11/16)

8장.

[……그런 환경 덕분에 독립심이 강한 편입니다. 따라서 귀사의…….]

마우스 커서가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 중간에서 하염없이 멈추어 있었다.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새로운 문장은 만들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노트북의 주인이 키보드가 아닌 다른 곳에 손을 올리고 있던 까닭이었다.

“음……. 흐으, 흐…….”

은찬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딱딱한 검은색 키보드 대신 보드라운 연분홍빛 살결을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가슴살을 뭉그러뜨리는 통에 호흡이 버거웠지만, 습한 숨을 할딱이면서도 손놀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몽정 이후, 혼자 있을 때면 얌전히 취업 준비에 몰두하다가도 어느 순간 홀린 듯 상의를 끌어 올려 제 젖꼭지를 만지게 됐다. 마음을 다잡으며 책이나 노트북으로 온 신경을 쏟아 내 보아도 또다시 난입하는 감각에 도무지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말…… 정말 모유가 터지면 그런 느낌이 날까. 그렇게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야릇한 쾌감에 전율하게 될까. 정신 나간 생각을 하며 말캉한 유두가 꼿꼿이 설 때까지 지속적으로 젖꼭지를 갉작거리게 된 것이다.

“아…… 으, 응…….”

은찬은 꿈에서 나온 이예담의 손길을 흉내 내며 다소 거칠게 돌기를 쥐어짜 냈다. 손가락으로 짓누르고 비틀어 자극을 줄 때마다 큼지막하게 양감을 늘린 젖꼭지는 꼿꼿하게 부풀어서도 도통 젖물을 흘려 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세게 문질러진 뽀얀 살갗에 분홍빛 자국만이 남을 뿐이다.

“아……. 자기소개서…… 끝내야, 응, 하는데……. 흣…….”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머릿속은 온통 잡힐 듯 말 듯 한 쾌감에 대한 욕구로 가득 차 벗어나기 요원했다. 젖꼭지를 만질 때마다 저릿하게 피어오르는 열기에 성감이 고조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보지…… 보지가 달린 걸 보면 모유가 나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쩌면……. 으응…….

은찬은 언젠가부터 감히 쉽게 입에 담지 못하던 저급한 단어도 가감 없이 떠올리며 부드러운 입술을 그렸다. 뜨겁고 촉촉한 점막이 유륜을 앙, 베어 물고 쭉쭉 빨아 대는 모습을 상상하며 젖 자위에 몰두했다.

“하으으…….”

한참 동안 보드라운 가슴을 조물조물 만지며 딱딱하게 부푼 유두를 깔짝거렸다. 두서없이 만져 대는 손길에도 예민한 살점으로 금세 쾌감이 번지면서 아랫배가 콱 조여 왔다. 살짝 공중에 띄워진 발가락이 급히 오므라들며 후으……, 자꾸만 더운 숨이 쏟아졌다.

어느 순간 수축하며 땅겨 오는 허벅지 안쪽 근육에 더는 들끓는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은찬은 붉어진 눈매를 내리깔며 파르르, 긴 속눈썹을 떨었다.

“읏……. 조금만, 흐으, 잘까…….”

첨삭을 생각하면 마감 시간이 촉박했지만 지금 당장 절절 끓어오르는 욕구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한 수면욕을 가장한 은찬이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성욕에 나약한 인간이었나. 그는 꾹꾹, 욕구를 억누르듯 울퉁불퉁한 입천장을 혀로 눌러 대다 아직 남은 열기가 감도는 제 젖가슴을 응시했다.

“…….”

한참 건드려 볼록 솟아난 분홍빛 젖꼭지와 자극에 쪼그라든 더 연한 색의 유륜, 이를 둘러싼 뽀얀 가슴살이…… 제가 봐도 야했다. 특히나 돌기가 팽팽하게 일어서 평소보다 지름이 좁아진 유륜 덕에 야들야들한 살로 이루어진 가슴이 더욱 살집 있어 보였다. 분명히 이예담이 봤더라면 쭈웁, 쫍, 거침없이 뜨거운 입술을 대 살점을 빨아 당기고, 자국을 남긴 가슴살을 주욱 늘어뜨렸을 터였다.

연상되는 음탕한 광경에 자지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아……. 흐응……. 조금만, 아주 조금만 알람을 맞춰 두고 자면 되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보드라운 살점을 짓뭉개던 은찬이 마침내 결론 내렸다. 기대감에 상기된 양 뺨에 홍조가 가득했다. 언제 망설였냐는 듯, 한참 건드리지 않은 노트북을 미련 없이 구석으로 밀고 눈을 감았다.

또 꾸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현실감 없는, 바로 그 꿈을.

* * *

매일같이 반복되는 바쁜 나날들은 여전했다. 과외를 하러 가고, 대외 활동 관련 준비를 하고, 짬을 내어 자격증 시험을 보고……. 눈코 뜰 새 없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신경을 쏠리게 하는 존재 역시 여전했다.

“또 왔을 수도 있잖아. 딱 내역만 확인해 볼까.”

은찬은 과외비 입금 날이 아니면 좀처럼 확인할 일 없는 은행 애플리케이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새 이예담으로부터 또 새로운 연락이 왔을지 궁금해 자꾸만 시선이 향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하……. 아니야.”

더 확인하고 싶어지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차차 잊힐 거라고,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몽정을 기점으로 증상은 더더욱 심해졌다. 눈만 감아도 이예담이 잔잔하게 눈을 휘어 웃는 모습이 떠올랐고, 몇 번이고 그 모습을 곱씹다 보면 또다시 불가항력처럼 애플리케이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예담 생각을 많이 한 날이면…… 그가 어김없이 꿈에 나타나곤 했다. 기실 매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흐, 흐읏……!”

절정감과 동시에 잠에서 깬 은찬이 잔열감에 부르르, 자지러지듯 몸을 떨다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아. 젠장.”

또 꿈이네. 뒤척이던 몸을 바로 하고 숨을 죽였다. 은찬은 입술을 말아 문 채 눅눅해진 속옷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잡아 내렸다.

창문을 투과해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에 번들번들 빛나는 사타구니가 그대로 드러났다. 한 차례 강하게 정액을 쏘아 내고 쪼그라든 남성기와 고환 아래, 흥건하게 게워 낸 애액으로 점철된 보지가 점액질에 엉겨 있었다.

은찬은 아직 열기가 남은 보지 사이를 검지로 신중히 뒤적거렸다. 손가락이 젖은 보짓살을 헤집을 때마다 미끈미끈한 속살에 끈적한 보짓물이 뒤섞이며 찔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들을까 걱정이 될 만큼 고요한 새벽을 가르는 적나라한 소리였다.

“후으……. 하…….”

분명, 분명 꿈속에서는 보지 안이 꽉 찼는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일으키는 자극이 아쉬웠지만, 물은 푸지게도 많이 흘러나왔다. 여린 살점은 살짝 누르기만 해도 으깨지는 연두부처럼 금세 누르는 대로 푹푹 짓쳐지면서 머금은 물을 함빡 터트렸다.

안달 나 옴쭉거리는 구멍에서 잔뜩 고인 애액이 흘러 팬티를 적신 정액을 축축이 뒤덮었다. 흐으응……. 눅눅한 아래를 느낀 은찬이 지그시 음부 속살을 뒤적거리며 신음했다.

잠에서 깨며 끊겨 버린 쾌감이 아쉬워 이리저리 손가락을 놀리자 다시금 뜨거워진 숨결과 함께 절정에 닿을 듯, 말 듯 애매한 감각이 지속되었다. 삽입에 길든 몸이 고작 은찬의 손가락 정도로는 반응하지 않게 된 탓이었다.

“미치겠네. 하아……. 이럴 바엔 다시 돌아가는 게 낫지. 뭐 하는 짓이야. 이게.”

감질나는 자극에 은찬이 보지를 헤집던 손을 꺼냈다. 움찔움찔 조여 드는 질 벽을 헤치고 나온 손가락에 한가득 배어 있는 물기가 조르륵 손등뼈를 타고 흘렀다.

사춘기 중학생도 아니고 잠든 아버지 몰래 욕실로 엉망이 된 옷을 가져가 빠는 게 진절머리 났다. 매번 이성이 돌아올 때마다 스스로가 한심해 한숨이 터지면서도, 돌아서면 또다시 정신을 못 차리고 저도 모르게 이예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

이렇게 미련을 품고 있는 건 무릇 저뿐일지 몰랐다. 그간 애써 외면하고 있던 통장 입출금 내역을 막상 확인하면, 처음 이후론 더 이상의 새로운 내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여 기껏 외곽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불편하게 과외를 이어 오던 것이 무색하게 자취방 앞에도 저를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결론으로 이어지곤 했다.

하긴. 이예담 정도 되는 놈이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갑자기 연락을 끊은 저를 오매불망 기다린다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진작부터 혼자 한 원맨쇼나 다름없을지도.

“…….”

그러면서도 은찬은 섣불리 은행 애플리케이션을 다시 열어 확인하는 시도는 할 수 없었다. 진실을 확인하고 상처받는 것이 두려웠던 까닭이었다.

개강에 맞추어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깨달은 씁쓸한 현실에 달아오른 몸도 금세 가라앉았다. 결론 내린 은찬이 쓱쓱, 대충 젖지 않은 파자마 끄트머리에 손을 닦았다.

상념을 멈추자 그제야 아까부터 울려 퍼지던 시끄러운 고성이 인지됐다. 은찬은 소란해진 창가로 눈을 돌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으로 다가가자, 어슴푸레한 어둠 속, 밝게 헤드라이트를 켠 차를 앞에 두고 한 인영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번듯한 주차 공간이 따로 주어지지 않은 이 동네는 퇴근 시각이면 주차난으로 인해 늘 골목이 시끄러워지곤 했다. 특별할 것 없는 광경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침대로 돌아가려던 순간.

“어……?”

갑작스레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를 본 은찬이 불쑥 창문 가까이로 몸을 기울였다. 뿌연 창문을 재빠르게 닦아 내며 가뜩이나 큰 눈을 더더욱 크게 치떴다. 설핏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이예담……?”

말도 안 됐다. 이예담이 여길 어떻게, 왜.

나름 건물에서 가장 높은 4층에 위치한 곳에 세 들어 있는지라 아래에서 보일 리 없는데도 은찬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응시했다. 혹여 운전석에서 내린 이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가슴을 졸이며 상황을 지켜봤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운전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흘끔 제가 있는 창문 쪽을 올려다보는 듯하자 지레 놀란 은찬은 흠칫,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몸을 웅크린 채 벽에 기댔다.

“…….”

귀를 바짝 세워 봐도 딱히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은찬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창가를 짚고 재차 내려다본 아래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어둠뿐이었다.

“하아……. 가지가지 한다.”

이젠 꿈을 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헛것까지 보이나 보지. 워낙 놀란 탓에 차종을 확인하지도 못했으면서 왜 이예담이라고 생각했을까. 스스로가 한심해 쓰게 웃었다.

먼저 연락을 끊어 놓고 왜 이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지. 구질구질하게 남은 미련을 덮듯, 미처 치지 않은 커튼을 쳐 창문을 가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올 턱이 없는 밤이었다.

* * *

이제는 햇살이 없어도 제법 날이 따듯했다. 3월을 목전에 두고 길어진 해가 사라진 어느 날 저녁, 은찬은 한결 얇아진 패딩을 걸치고 목적지를 맴돌고 있었다. 힐끔힐끔 가게 안을 쳐다보다 이내 다시 멀어져 가길 반복했다.

“진짜 싫다…….”

개강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제 기준 매우 불편한 자리에 오게 된 은찬이 미간을 왈칵 구긴 채 재차 가게 안을 훑었다. 왁자지껄한 테이블 사이사이로 익숙한 얼굴 몇몇이 보였으나…… 역시나 거기에 낄 만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아……. 쉽사리 무리에 끼어들지 않고서 출입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담당 교수의 호출로 신입생 환영회에 왔지만, 눈도장만 찍고 나면 오래 있지 않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늦게 합류한다는 수민을 생각해 조금은 더 머물러 보려 했으나, 잠시간 시끄러운 무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역이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으니 관찰하지 않으려 해도 섞여 앉아 있는 동기들과 신입생, 선후배의 얼굴까지 낱낱이 살펴보게 됐다. 뭐, 시간을 죽이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은찬은 흥미와는 거리가 먼 표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늘 이후로 다시 캠퍼스에서 만난대도 기억하지 못할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전체를 훑어나가던 와중, 일순 은찬의 숨이 멈추었다.

“뭐야……. 말도 안 돼.”

처음엔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하며 눈을 비볐다. 외면하려 했지만 그간 매일같이 떠올린 탓에 이런 순간마저 눈에 보이는 거라고 되뇌면서, 거칠게 눈두덩을 비비다 못해 뺨까지 찰싹찰싹 때렸다. 그래도 은찬의 눈앞에 나타난 환영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실재했다.

“…….”

은찬은 섣불리 말을 걸지 않은 채 계속해서 한 사람만을 응시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던 상대가 내리뜬 눈을 바로 했다. 그 순간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은찬이 서 있는 출입구까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주변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남자는 넓은 어깨를 감싼 라운드 니트에 어두운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니트 아래, 잘 짜인 근육으로 감싸인 체형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기억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은찬이 끔뻑끔뻑, 멍한 눈꺼풀을 움직이며 그의 전신을 한 번 훑는 사이, 몸에 뒤지지 않게 수려한 얼굴에 자리한 입술이 급히 열렸다.

“선…….”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수능…… 생각보다 잘 못 봤다고 했잖아.”

이예담이 제 앞에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새내기의 신분으로.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예담이 온화하게 웃었다. 예의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였지만, 코트 소매를 따라 쭉 뻗어진 손가락이 무언가를 참아 내듯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호흡도 조금 더 거칠었다.

“…….”

대답 없는 은찬에도 불구하고 예담은 부드러운 어조로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심경과는 달리 퍽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갑자기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고 싶은데 장소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

* * *

거의 다 됐다고 생각했다. 조만간 깨달은 제 마음을 조심스레 밝히면 긍정적으로 봐줄 여지가 있을 거라고. 아니, 적극적으로까지는 아닐지언정 최소한 주변에서 머무를 순 있으리라 판단했었다. 그런데 유은찬은 별안간 말도 없이 사라져선 방학 내내 사람 피를 말렸다. 달라진 제 마음을 눈치채서 피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이곳은 보는 눈이 많았다. 예담은 당장이라도 굳어 있는 남자의 손목을 끌어와 다그치고 싶었다. 그렇게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냐고, 갑자기 숨어 버릴 정도로 티가 난 마음이 역겨웠냐고. 늘 해 왔듯 그냥 좀 받아 주면 안 되냐고.

〈암만 감정 없이 욕구 푸는 게 목적이라 해도 과하니까 공부에 해가 된 거 같다.〉

정말 말했던 것처럼 우리 사이는 그게 다였냐고…….

“…….”

애원하듯 다시 은찬을 부르자, 그간 그렇게 매달려도 들려주지 않던 그리운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것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네가…….”

예담은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을 총동원해 치미는 모든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꽉 깨문 어금니에 이어진 교근이 뻐근하게 불거져 갔다. 더 뚫어지게 바라봤다간 벌어진 입술 사이를 함부로 맞물릴 것 같아, 도톰한 입술에 맴돌던 시선을 억지로 끌어 올려 울망울망한 눈매로 향했다.

“……네가 여기에 있는 모습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생각보다 수능 성적이 좋지 않다며, 원서만 쓰고 다시 과외라도 할까, 내뱉던 말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만남이었다. 한국대에서도 손꼽히는 경영대 신입생 환영회라니. 머릿속을 번잡하게 만들며 갖은 경우의 수를 가져다 대 봐도 말이 안 됐다.

“아…….”

날카롭게 쏘아 대는 말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예담이 낮은 탄성을 터트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란 손으로 연신 입가를 매만지면서 신중히 말을 골랐다.

〈과외 필요하다 하지 않았어요? 원서만 넣어 놓고 다시 과외 할까요, 우리. 나랑 다시 하면 되잖아요.〉

왜인지 과외만을 고집하는 유은찬의 선택지를 분산시키려 우회적으로 던진 미끼였다. 추후 그가 빌어먹을 과외가 아닌, 재단 장학생 쪽을 선택하면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털어놓을 생각에 가벼이 던진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하아…….”

예담이 매끈한 미간을 찌푸렸다. 그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이 역력히 어린 낯이었다.

“……그것도 그렇겠네요. 일단 나갈까요.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면 선생님도…….”

[아아, 한국대 경영 여러분. 마이크 테스트 좀 하겠습니다.]

갑작스레 공간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음성에 소란하던 장내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힐끔, 소리가 난 방향을 확인하니 오늘 은찬을 이곳으로 부른 교수가 마이크를 건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과 신경이 한곳으로 쏠린 틈을 타 은찬이 몸을 낮춰 작게 읊조렸다.

“네 자리로 가.”

“이야기가 먼저예요.”

“가라고. 일단.”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않는 이예담의 고집에 은찬이 흠씬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꽤나 단호한 모습이었다.

“혼자 사라지면 안 돼요. 응?”

예담은 은찬과 눈을 마주치며 몇 번이고 대답을 채근했다. 엄마에게 버림받을 걸 염려하는 아이처럼, 대답하기 전엔 가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시간을 지체시키는 통에 결국 은찬은 짜증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니까 이따가 이야기해.”

이예담은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았다. 돌아서 인파로 향하는 뒷모습마저 그 주변만 채도가 다른 물감으로 덧칠이라도 한 듯, 확연하게 눈에 들어와 몹시도 성가셨다.

“하아……. 진짜 이게 뭐야.”

장소를 통째로 대관해 가게 안은 한국대 경영학과 관계자와 학부생들로 가득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올 듯한 이예담의 기세에 은찬은 결국 낯익은 동기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로 향했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교수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지 않으면 기껏 온 의미가 없었다.

학년별로 나누어진 테이블 덕에 은찬과 예담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은찬은 부러 그를 지켜볼 수 있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기 틈에 합류했다.

“네가 웬일이야? 이런 자리를 다 나오고.”

개강 전에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보니 신입생을 제외한 재학생은 환영회를 기피하거나 일정상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런 자리에 도통 참여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은찬이 있으니 꽤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경영학과 금수저 군단에 들지 않아 종종 편하게 지내던 동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냥……. 김동희 교수님 때문에.”

“아. 아까 김동희 차 얼핏 보긴 했는데. 저기에 있었네.”

“넌?”

“나야 뭐…….”

자진해서 온 건 아니라는 게 빤했다. 동질감을 느낀 동기가 어깨를 으쓱이다 은찬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은찬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오늘 전수민은 안 와?”

이런 공적인 자리에 나타날 때면 늘 대동하던 수민이 보이지 않자 궁금했나 보다.

“조금 있다 온다던데.”

“그래? 나도 천상호가 늦게 온다고 해서. 너랑 나랑 오늘 완전 동병상련이네.”

천상호? 대강 얼굴만 떠올랐지만 몇 번 둘이 붙어 다니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은찬은 그의 말에 대충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비워지는 잔에 다시 술을 채워 주며 무르익는 분위기에 편승하려 노력하였다.

“있잖아. 우리 학교…… 혹시 기부 입학, 그런 거도 받아?”

“어? 너 설마 잔디 깔아 주고 들어오는, 뭐 그런 이야기 말하는 거야? 아니면 특기자?”

“아니. 그거 말고 정시…….”

“국립대잖아. 그런 짓 했다간 당장에 대서특필되지.”

“소위 말하는 금수저들이 외국 안 나가고 여기 들어오는 케이스를 봐. 돈만으로 쥘 수 없는 트로피,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그지……. 그렇지…….”

은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예담은 정시 준비를 했는데……. 저뿐만 아니라 동기들의 상식으로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고뇌하다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어김없이 이예담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고개를 들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제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불안한 것처럼 굴어 댔다.

“……그런데 그런 소문 있더라. 이번 신입생 중에 KBB 건설 손자 있다는 얘기.”

“헐. 설마. 진짜?”

“학과장이 굽신거리는 거 봤다는 말이 돌던데.”

“와씨. 친해지면 바로 신입 채용으로 가는 거 아니야? 하다못해 인턴이라도 좀!”

“교수한테 잘 보일 게 아니라 걔를 찾아서 인사해야겠네.”

“모르지 뭐. 또 뜬소문일지도. 우리 입학하던 때에는 HS전자 손녀가 입학했다고 난리 났던 거, 기억 안 나냐?”

“아. 맞다. 생각난다. 그거 완전 헛소리였지.”

제아무리 탄탄한 재력을 갖춘 집안에서 많이 진학한다 한들, 재계 유명 인사 핏줄이 한국대로 진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은 보통 외국에서 석·박사까지 마무리 짓는 것이 관례였기에, 이 또한 종종 있어 왔다는 헛소문의 일환일 게 분명했다. 뭐, 사실이라 해도 저와 엮일 일이 있을 리 만무했고.

금세 대화 주제에 흥미를 잃은 은찬이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전수민

나 진짜 딱 10분 뒤에 도착!!!! 먼저 가지 마?ㅠㅠ 오후 19:34]

“10분…….”

슬쩍 눈을 치켜뜨고 확인하니 교수 몇몇이 이예담이 자리한 테이블 근처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은찬은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인사를 할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바깥으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익, 열렸던 문이 다시 한번 열리면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예담일 터였다.

“선생님.”

“…….”

“우리 아까 하던 얘기 이어서 해요.”

“……해.”

“오래 못 봤잖아요. 제대로, 자리 잡고 해요. 얼굴 보면서.”

“하라고. 여기서. 여기서 하면 말이 안 나와?”

은찬이 짜증스레 고갯짓하며 대꾸했다. 하아……. 예담이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바라봤다. 이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수능 성적 이야기했던 게 있는데 여기 있어서 당황했죠. 우선 그것부터 해명할게요. 그러니까…… 생각한 것보다 한국대 경영 커트라인이 높지는 않아서요.”

예담 스스로 생각해도 구차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다른 놈이랑 놀아날까 걱정돼 과외 하는 게 싫었다고, 편하게 장학생으로 선정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거짓말이었다고 섣불리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당장에 유은찬이 연락을 끊은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데 도박하듯 제 마음을 드러냈다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그것도 매몰차게 거절당할지도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수능을 준비하면서 내심 수능 만점이라도 맞길 바랐던 거 같아요. 그러다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았고……. 조금 실망해서 과하게 말했어요.”

“그런데 원서를 접수하니 결과가 좋았다, 이거야?”

“합격하자마자 선생님한테 바로 알려 주고 싶었는데 연락이 안 닿아서……. 내내 계좌로도 연락하긴 했는데.”

과외용 통장. 우연히 입출금 기록을 통해 이예담의 연락을 확인한 뒤로 내내 외면해 왔던 수단이었다. 그렇게까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말을 전달하려 했다면 일단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에 더는 딴지를 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그날 들었던 이야길 다시 화두로 꺼내서 되물을 차례였다.

“아. 그럼 너…….”

“예담아? 오래 걸려?”

은찬과 예담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을 향해 돌아갔다. 예쁘장한 여자애 하나가 가게 출입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저렇게 금세 여자가 꼬이는 놈인데 우연히 네 진짜 심경을 알게 돼서 상처받았다고 말해 봐야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일 터였다. 어디까지나 이예담은 저와 마음이 아닌 몸을 맞댄 거였으니까.

“……지금 얘기 중이라서. 자리 좀 비켜 주면 좋겠는데.”

다시 은찬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예담은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매끈한 미간을 꾹꾹 엄지로 누르며 무심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였다.

“후. 선생님. 아까 하던 말 계속해요.”

“……아니야. 내가 의도적으로 널 피한 건 아니었어. 나 때문에 수능 망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자괴감이 들어서…… 그냥 잠깐 칩거랄까, 그런 거 한 거야.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도 그간 연락 안 하고 지냈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었다. 그동안 유은찬 주위를 맴돌며 보낸 나날이 얼마인데. 새로 맡은 과외며 모임이며, 예담은 은찬이 저를 제외하고는 거리낌 없이 만나고 돌아다니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나타나면 기겁이라도 할까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있었지만.

“…….”

하지만 여기서 이 말도 안 되게 늘어놓는 소리를 인정하고 받아 주게 되면 유은찬이 저를 피해 다닐 이유는 깔끔하게 사라질 수 있었다. 더는 댈 핑계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래요. 그럼 다행히 다 해결됐네요. 그럼 이제 연락 잘 받아 주세요. 선생님 덕에 후배로 입학까지 했는데.”

“아…….”

그게 그렇게 되나. 교묘하게 넘어가 버린 주도권에 은찬이 곤혹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네?”

대답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대로 서 있을 것처럼 진득한 시선이 꽂혀 들었다. 하아.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은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아!”

이제야 도착했는지 지척에서 수민의 음성이 들려왔다. 수민은 은찬을 부르자 동시에 함께 뒤돌아보는 예담을 발견하고는 은찬이 그랬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헉. 이예담? 예담이야? 너, 네가…… 왜 여기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수민이 예담과 은찬을 번갈아 살폈다. 기어코 남의 학교 행사까지 따라와서 은찬과 말을 트려고 시도하냐는 듯, 경악이 어린 눈초리였다.

“아……. 이야기하려면 긴데. 천천히 설명할게요.”

기다란 눈을 휘어 접은 이예담이 들어가자는 듯 가게 안으로 고갯짓했다. 입을 벙긋거리는 수민이 부릅뜬 눈으로 의문을 표해 왔지만 은찬 또한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다.

은찬은 얼떨결에 어깨를 감싸 오는 예담에게 떠밀리듯 가게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수민 역시 함께였다.

* * *

그날 이후, 은찬은 어쩔 수 없이 차단해 둔 이예담 연락처를 풀고야 말았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물밀듯 연락이 쏟아졌다. 은찬은 그때마다 제 속마음을 숨긴 채 이예담에게 반응해 주었다. 어떻게든 만남은 피했지만 연락을 끊지는 않으니 이예담 역시 서운함은 드러내도 억지로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끝끝내 돈을 돌려줄 계좌는 알려 주지 않았지만.

“하아……. 또 학교네.”

마침내 개강이었다. 은찬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교문 안을 바라보았다.

같은 캠퍼스 내 어딘가에 이예담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가 해외로 가는 결말만 떠올려 봤지 다른 학년일지언정 같은 과 학생으로 재학한다니,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제 어디에서건 이예담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이예담은 그들 사이에 결코 짧지 않은 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까지 살을 맞댄 것처럼 여전히 다정다감했다. 그건…… 잠시간 자리를 비운 것조차 참지 못하고 따라 나온 여자애만 봐도 알 수 있듯, 저 아닌 타인에게도 적용되는 여상한 친절함일 게 분명했다.

결국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타심을 오해한 제 잘못이었다. 은찬은 더는 그가 하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거고, 그에 따라 마음 다칠 일 또한 없을 터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괜찮을 거야.”

은찬이 크게 숨을 들이켜며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인파 사이를 씩씩하게 헤치며 목적지를 향했다.

“영화와 사람! 1달에 1번씩 단체로 영화 관람하는 티켓 지원합니다.”

“춤 좀 추시는 분들, 잠시만 들러 보세요!”

“각종 알바로 힘들어하는 당신을 구원해 줄…….”

캠퍼스 안은 개강 첫 주답게 사람들로 가득했다. 은찬은 각종 동아리를 홍보하는 부스를 지나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부스들 사이로 기대하지 않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흠칫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선배님!”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듣지 못한 척하며 묵묵히 걸었다. 이 구간만 지나면 잡는 걸 포기할 것이다. 성큼 발을 뻗어 나가던 순간, 발 대신 손목이 붙들렸다.

“아!”

“하아, 하아. 못 들으셨어요? 불렀는데.”

정말 몰랐다는 양, 은찬이 어색하게 웃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에 기다렸다는 것처럼 승원이 마주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 숙였다. 각종 사념으로 인해 피곤하단 이유로 피한 것이 미안해지는 밝은 미소였다.

“어……. 사람이 많아서 못 들었나 봐. 동아리 홍보 중이었어?”

“네. 이제 제가 2학년이잖아요.”

비교적 늦게 동아리에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승원은 동아리에 꽤나 애정이 많아 보였다. 거의 매일같이 출석하는지 갈 때마다 동방에서 만나는 것 하며, 제법 귀찮을 동아리 홍보 부스 운영에다, 최근엔 주식 투자 대회에도 대표로 나간다고 한 것 같았다.

“아……. 그렇지. 이제 후배 맞이할 때네? 너도 좋은 시절 다 갔다.”

“하하. 그러게요? 오늘 저녁에 동아리 모임에 잠시 얼굴 비치실 수 있으세요? 잠깐만 들렀다 가세요. 졸업한 선배들이 저녁 사 주신대요. 수민 선배님도 온다고 하셨거든요.”

졸업한 선배들이면 취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듯했고, 과에서 진행되는 행사도 아니니 아예 모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불편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머리 좀 비울 겸 가 볼까. 은근히 관심이 갔다.

“몇 신데? 시간 맞으면 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찰나였다. 휙, 손목을 잡고 있던 서승원의 손이 거칠게 내쳐지더니 그 자리에 등장한 또 다른 커다란 손이 은찬의 손목을 불쑥 그러쥐었다. 다소 서늘했던 서승원의 손과는 달리 뜨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손아귀에 은찬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여기서 뭐 해요.”

난데없이 나타난 이예담은 서승원을 위아래로 훑으며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손마디는 매우 단단하기 그지없어 쉽게 손목을 빼낼 수 없었다. 이예담은 단단히 쥔 손길을 유지하면서 슬슬, 은찬을 제 쪽으로 당겨 오기까지 했다. 살짝 몸을 비틀어 자신의 뒤로 온전히 숨기려는 듯 굴었다.

“네가 왜 여기…… 아.”

바보 같은 말을 할 뻔했다. 왜 여기에 있냐니. 당연히 이예담도 이제 한국대 학생이니까 있는 거지. 거기다 신입생들을 모집하겠다고 잔뜩 모인 동아리 부스들 사이에서 그가 등장한 건 입댈 필요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

갑자기 내쳐진 손등에 기분이 언짢아진 서승원이 예담과 은찬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예담?”

뭐지. 서승원과 이예담이 아는 사이인가.

“…….”

그제야 이예담이 은찬에게 고정했던 얼굴을 느릿하게 돌려 탐색하듯 서승원을 바라보았다. 아까 한참 살펴봐 놓고도 마치 그의 존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것처럼.

“이예담 맞네. 너 나 몰라?”

“……누군데 다짜고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이지.”

느른한 표정을 지은 예담은 비스듬히 눈을 내리깔아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서승원 또한 흔치 않은 키인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이예담이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국제고 45기 졸업생. 서승원이야.”

“아. 들어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이어지는 대화에 언젠가 서승원이 언급했던 동창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국에서 왔고, 수능 당일에 말도 안 되게 성적이 떨어졌던, 원래대로라면 진작 경영대로 진학하고도 남았었을…… 그 동창이 이예담일까.

“흐음.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요?”

이예담은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은찬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서승원이 제 앞에 있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를 배제한 듯한 대화가 이어졌다.

“왜?”

“저녁 식사할 정도는 되죠? 오랜만에 같이 먹으면 좋을 거 같아서.”

저녁은 무슨.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심란했다. 하려고만 들면 당장 섹스하자고 줄 설 사람만 한 트럭일 텐데 왜 굳이 저한테까지 와서 이러는 건지.

“…….”

아니다. 남성기와 여성기가 함께 있는 케이스는 주변을 둘러봐도 저뿐일 테니 희소성으로 따지자면 이해되긴 했다. 거기다…… 자꾸만 감정을 집어넣으며 매번 부들거리는 꼴도 우스웠다. 꼭 고백했다 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복잡한 생각으로 쉽게 대답하지 않는 은찬을 대신해 서승원이 입을 열었다.

“안 될 텐데. 나랑 선약 있거든.”

“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꼭 부러 이예담을 긁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이예담의 눈빛에 은찬이 푹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동아리 모임 가기로 해서.”

“아. 동아리. 무슨 동아리인데요.”

“주식 동아리인데 승원이랑 같은 부원이라 이따 함께 갈 거야.”

“안타깝지만 외부인은 못 오는 자리이기도 하고.”

서승원과 이예담이 서늘한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간 이어지는 냉랭한 기류에 당황한 은찬이 입술을 떼려던 순간, 예담이 먼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입꼬리를 느릿하게 밀어 올렸다.

“그럼 외부인 안 하면 되겠네.”

“뭐?”

“어차피 지금 신입회원 유치 중이던 거 아니었나? 동아리 이름이…… 블루칩이었던가. 전에 말한 적 있는 거 같은데.”

“…….”

“아, 저기에 있네. ‘투자에 대한 모든 것, 블루칩.’ 지금 가입 신청하고 저녁에 만나면 되겠다. 그렇죠? 선생님.”

* * *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창밖이 어두웠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강의동 앞에서 은찬을 기다리고 있던 이예담이 반가운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그에게 다가섰다. 은찬 옆으로 주홍색 가로등이 빚어낸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같이 가요.”

“어? 어…….”

잔잔한 웃음기가 어린 얼굴은 꽤나 들떠 보였다. 신입생이니 뭐든 즐겁긴 할 터였다. 왜 굳이 4학년인 저와 어울리려 드는지 아직도 완벽히 의문을 해소하진 못했지만.

은찬보다 더 길을 잘 아는 듯, 거침없이 동아리 모임 장소로 향한 예담은 가게 안에 놓인 여러 테이블을 휘휘 둘러보다 그를 이끌었다. 머뭇거리던 은찬은 속수무책으로 그가 정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수민이도 온다고 했는데.”

“그래요? 그럼 앞자리 비워 두죠. 뭐.”

수민과 이예담, 그리고 저까지 함께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이예담이 맞은편에 앉고 수민과 동석해 와서인지 이런 구도는 좀체 적응되지 않았다. 은찬은 제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이예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옆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부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면서 가게 안은 서서히 소란해졌다. 개중엔 은찬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김주한과 서승원도 있었다. 은찬이 반가운 마음에 번쩍 손을 흔들며 그들을 불렀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은찬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승원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삐 찾았다. 아마 이예담이 워낙에 커다란 덩치로 비스듬히 걸터 앉아있다 보니 은찬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 여기 계셨네요.”

서승원은 인파를 비집고 은찬과 예담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자연스레 맞은 편 의자를 빼고 앉으려 하자,

“거기 자리 주인 있는데.”

하며 예담이 훼방을 놓았다.

“……여기 누구 다른 사람 오기로 했어요?”

서승원이 미심쩍은 얼굴로 이예담 대신 은찬에게 물어왔다. 어떡하지. 얘들은 아까부터 왜 이렇게 서로 날을 세우는 거야. 은찬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구세주처럼 수민이 등장했다.

“대박. 진짜 예담이 가입했네?”

해맑게 웃으며 제 몫의 의자를 빼던 수민이 안 앉고 뭐하냐는 듯, 서승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야 서승원은 자리에 앉으며 굳은 표정의 이예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결국 묘하게 불꽃이 튀는 서승원과 이예담 때문에 은찬은 자리를 정리하고 먼저 일어났다. 머리가 아팠다. 애초에 목적으로 했던 취업 후기라든가, 기업 분위기 같은 이야기는 다 주워듣긴 했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서로 잘 모르는 것처럼 굴더니 대체 뭐에 핀트가 나가서 저러는 건지, 불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데도 요즘 애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모르는 새 싸우기라도 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번잡스러운 제 마음에는 타인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그들을 중재할 의욕은 솟구치지 않았다.

“선생님. 같이 가요.”

언제 따라 나왔는지 이예담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은찬을 쫓았다.

“너 왜……, 아니다.”

은찬은 어느덧 제 등 뒤에 바짝 붙은 이예담에게 서승원과 관련해 한 마디를 던지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어차피 서서히 거리를 벌릴 텐데 굳이 인간관계까지 간섭할 필요가 있나. 열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이예담이 알아서 하겠지.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사람 설레게.”

“…….”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은찬은 자연스레 제 보폭에 맞추어 걷는 이예담을 힐끔거리며 자취방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 없는 골목길이 나오고, 그쪽으로 들어서자마자 홱, 예담이 곧바로 입술을 맞붙이려 했다.

“……싫어. 이런 건……. 이제 안 할래.”

은찬이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왜요.”

“그냥. 안 한다면 안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거절에 예담은 아쉬운 듯 도톰한 귓불을 입술로 천천히 문질거리다 드러난 그의 목선에 쪽, 입술을 내렸다. 흐읏……. 움찔거리던 어깨가 곧 가느다랗게 떨려 왔다.

“알았어요. 입술은 안 건드릴 테니까 우리 집에 가요.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요? 여기에서 안 멀어요. 1분이면 가니까…… 가서 이야기 좀 해요.”

예담이 습한 숨결을 내쉬며 속삭였다. 달뜬 호흡 속에 욕망과 갈망이 은근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하마터면 그 뜨거운 기운에 녹아들어 저도 모르게 넘어갈 뻔한 은찬은 어렵사리 이성을 잡곤 단호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집도 안 멀어. 그럼 각자 자기 집 가자.”

미련 없이 멀어져 가는 은찬의 뒷모습에 다정하기만 하던 예담의 표정이 일순 굳어 갔다. 제 머릿속 가정이 실제가 되어 가는 것 같아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정말 유은찬이 제 마음을 눈치채고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

그렇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겨우 감정을 깨달았을 뿐인데 상대가 격렬히 거부한다면 어찌해야 하는지, 예담은 배운 바가 없었다.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이 조용히 일그러졌다.

* * *

어떻게 밀어내도 계속해서 부딪혀 오는 이예담 때문에 은찬은 점심시간이든, 도서관에 있을 때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무조건 그와 마주쳤다. 아니, 단순히 그 만남은 ‘마주쳤다.’라는 사전적인 의미만 내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가피하게도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했다.

물론 더 이상 몸을 섞는 일은 없었다. 아주 가볍게 뺨을 쓸거나 어깨를 감싸거나 하는 유의 신체적 접촉이 아니라면 은찬이 매번 강하게 거부했던 까닭이었다. 하나 더는 그에게 있어 섹스 파트너조차 되지 못하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예담은 지속적으로 은찬을 찾았고, 은찬은 그런 그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애쓰는 나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개강 첫 주는 그렇게 지나갔다. 어쩌면 끝끝내 가고 싶지 않은 엠티에 강제로 가게 되어 더더욱 그날이 빨리 다가왔을는지도 몰랐다.

“이 나이에 엠티라니…….”

“대체 어떤 과에서 4학년보고 엠티를 가라고 하냐.”

“경영 A반.”

휴……. 버스 안에서부터 곡소리가 났다. 푹푹 한숨을 내쉬는 4학년과는 달리 버스 앞자리에 앉은 신입생 몇몇에게선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야기 중간중간 낯익은 이름이 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예담이 고의든 아니든 꽤 많은 여자들을 설레게 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 오빠는 2호 차 탄 거야?”

“아니. 아예 자기 차 타고 후발대로 온다더라.”

“와……. 오늘은 어떤 차려나. 볼 때마다 차가 바뀐다며? 같이 오는 사람은 누구야? 알아?”

“글쎄. 일단 내 주변엔 안 보이던데. 동행하는 사람 없을 거 같기도 해. 다정한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좀 쌀쌀맞아 보이기도 하잖아.”

“그게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야?”

킬킬거리는 들뜬 음색을 뒤로한 은찬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저 대화 속에 등장하는 ‘그 오빠’ 이예담이 진작에 자신의 차를 타고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한 참이었다.

“후…….”

학과장은 절대 이런 자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 타입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첫날 저녁에 다녀간다고 했다. 특히나 참여하는 4학년을 대상으로 KBB 건설을 비롯한 대기업 몇몇의 상반기 채용 연계형 인턴 과정에 추천서를 써 준다는 말을 흘려, 은찬처럼 취업이 절실한 4학년 일부는 반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된 셈이었다.

왜 하필 4학년을 콕 집어서…….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연유를 물을 순 없었다. 은찬은 시끄러운 대화 소리를 배경으로 애써 잠을 청했다.

* * *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짐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은찬 역시 부지런히 물건을 날랐다. 제법 양이 많긴 했으나 애써 보면 들릴 법도 한 내용물이 담긴 박스에 손을 댄 순간,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생수 옮기는 거 같이 해요! 무겁잖아요!”

“아. 아영이라고 했나?”

“네! 이아영 맞아요! 기억해 주시니 감개무량해요.”

신입생답게 활기찼다. 주변에 여자라곤 수민뿐이라 새삼 통통 튀는 말투의 아영이 귀엽게 느껴졌다. 여동생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은찬은 그녀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럼 안에 있는 페트병 두 개만 꺼내서 들어 줄래? 나머지는 내가 들게.”

“네엡.”

그간 말을 섞어 본 적도 없었는데 아영은 캠퍼스 여기저기에서 바쁘게 출몰하는 은찬을 주의 깊게 봐 왔는지 그가 도서관에 자주 간다는 것과 학생 식당에 등장할 때면 종종 이예담과 함께 밥을 먹곤 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조잘대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다가 문득 대화 내용에 이예담 이야기 비중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던 순간.

“그래서…… 그러니까 저랑 잘되게 선배님이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선배님 예담 오빠랑 친하잖아요.”

“어?”

“저 그 오빠 마음에 드는데 남신은 쉽게 틈을 안 주더라고요.”

“아…….”

……싫어.

여태껏 아영의 장단에 맞추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던 것이 무색하게 강한 거부감이 치밀었다. 아무리 남들이 보기엔 유난히 친한 사이 정도로 보인다 한들, 어떻게 제 손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붙여 준단 말인가. 싫었다. 말도 안 됐…….

“어……?”

“선배님? 괜찮으세요?”

은찬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얼굴로 제 머릿속에서 상충하는 단어를 더듬거렸다. 갑자기 튀어나와 미처 살펴볼 새도 없었다.

“아니……. 안 괜찮아……. 미안해, 아영아. 나 좀 쉴게. 몸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 그러세요.”

시무룩해진 아영을 뒤로하고 은찬은 가던 방향을 선회해 한 건물로 향했다. 워크숍 용도로 지어진 듯한 펜션은 강당 같은 널찍한 별도의 공간과 더불어 성별뿐만이 아니라 학년으로도 나누어서 잘 수 있을 만큼 많은 방이 있는 독채가 여러 채 있었다. 은찬은 그중 제게 할당된 건물로 들어가 홀로 방 안에 누웠다.

“좋아한다고? 내가…… 이예담을…….”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진작부터 일반적인 사제 관계의 호감은 넘어섰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음에도, 감정을 정의하는 단어의 형체가 확실해지자 여파가 컸다. 심장이 쉴 새 없이 격하게 뛰었다.

후배의 한마디에 불쑥 치민 감정은 치정에 의한 질투에 가까웠다. 일순 머릿속에 방어적으로 떠오른 한 단어도 오롯하게 한 가지 결론을 내려 주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까지 이예담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치를 떤 것도, 지지부진하게 남아 이해되지 않던 감정도 그것 하나면 간단히 설명이 가능했다.

“아…….”

망했다.

같은 남자인 걸 떠나, 하필이면 저를 곧 치워 내려 했던 녀석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다니. 1월이면 정리할 거라고, 뻔뻔하게 말하던 음성이 아직도 생생한데…….

우연찮게 들려온 이야기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던 순간을 상기하자 다시 한번 그날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올라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쁜 놈. 그걸 그리 쉽게 이야기하다니……. 그렇게 기억 속 장면을 다시 한번 곱씹다 은찬은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1월?”

문득 날짜를 되짚었다. 이예담이 보란 듯이 예고했던 때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연락을 끊고 지냈던 기간만큼 유예를 둔 것도 아닐 텐데.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가정에 머리가 얼떨떨했다. 여태 정립해 온 생각을 다시 더듬던 은찬은 달칵,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모로 누웠던 몸을 바로 했다.

“여기 있었네. 전화를 안 받아서 한참 찾았어요.”

이예담이었다. 타이밍 한 번……. 은찬은 한껏 촉촉해지던 눈시울을 비비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 조금 졸려서…….”

“어디 아파요?”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예담이 서슴없이 다가와 그의 이마를 짚었다. 다급히 다가선 동작과는 달리 손길은 잘못 만지면 깨어지는 유리를 대하듯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좀 피곤했어.”

“버스 타고 와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러게 내 차 타고 오지. 올라갈 땐 같이 가요. 응?”

아……. 감정을 깨달아서일까. 여상한 말을 내뱉는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제가 들었던 대화 따위 모른 척하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었다. 한때는 상성이 맞지 않는다 생각할 만큼 학을 떼기도 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예담은 늘 미온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제게 다정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그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는데…… 겨우 딱 한 번, 담벼락 너머로 들린 이야기에 지나치게 반응한 건 아닐까.

“어……. 고마워. 신세 좀 질게. 그럼.”

은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오자 예담의 눈동자에 자못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렇게 쉽게 응할 거라 짐작하며 한 제안이 아니었는데. 조부를 통해 학과장에게 넌지시 4학년을 이 빌어먹을 엠티에 참여토록 의도한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 *

“무슨 말이야?”

예담이 얼굴에 어리던 부드러운 웃음기를 서서히 지워 갔다. 어느덧 표정이 사라져 냉랭함마저 엿보이는 얼굴을 살짝 드러냈다가, 곧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동기들의 기색을 파악하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선배……. 오빠랑 친한 사이 아니었어요? 친해 보이던데. 아까도 챙겨 주러 가셨잖아요.”

“그냥 번호만 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진짜 친해지고 싶어서요.”

“그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수줍은 얼굴이 귀엽기보다는 골치 아팠다. 순수한 호기심을 경쟁으로 받아들이는 제가 치졸했지만, 관계 자체를 부정해 얼씬거릴 틈도 내어 주지 않는 게 제일이었다.

“……어쩌지.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야.”

“네?”

“아까 숙소에 유은찬 선배 때문에 들어간 거 아니라고. 이렇게 같이 엮일 만한 사이가 아니야. 그 선배가 아프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과하게 인 감정 때문에 무심함을 넘어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어투였다. 어쩐지 긴장감이 느껴지는 기류에 위축된 여자 동기가 말을 잃자, 예담은 곧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말하자면 그만큼 안 가까운 사이라는 거야. 너넨…… 굳이 4학년한테 눈을 돌려야겠어? 너희 정도면 앞으로 미팅이며 소개팅이며 기다리고 있는 건수가 한둘이 아닐 텐데.”

지그시 눈을 마주치며 상냥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그 황홀한 미소에 조잘대던 동기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며 사위가 고요해졌다. 누가 봐도 끝내주는 미인이 여자 친구일 것 같은 남자의 말이라 신빙성이 있었다.

예담은 그럼, 하고 짧게 웃으며 무심히 자리를 벗어났다. 멀리서 자신을 발견한 은찬이 반갑게 다가오다 들려오는 제 이름에 급히 몸을 숨긴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던 소음의 원인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은찬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 저런 식으로까지 말할 건 없잖아.”

꼭, 예전에 이예담 집에 갔다가 원치 않게 듣게 된 제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재조명하는 것만 같았다. 저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처럼 분명하게 선을 긋는 태도가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

이번엔 눈가가 뜨거워지지도 않았다. 다만 가슴이 차게 식을 따름이었다. 이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또다시 이예담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 주고 정신 차리지 못했을 게 뻔했다. 학습 능력이 왜 이렇게 떨어지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나가자. 나가.”

은찬은 잘못도 없이 숨어 있는 제 꼴이 우스워 크게 숨을 들이켠 다음, 부러 발을 굴려 큰소리를 만들며 복층 계단을 내려왔다.

“어디 있었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 피곤하다고 했잖아요.”

그새 다시 마주친 예담이 나긋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어떤 계기에서인지 은찬이 제게 다시 곁을 내어 주는 듯해 살짝 들뜬 기분이 고스란히 비친 얼굴이 밝았다.

“……저리 가.”

“응? 뭐라고요?”

얼핏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아까의 분위기는 마치 멀어지기 전과 비슷하게 친밀했으니까. 예담이 은찬에게 외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되물었다.

“아……. 저리 가라고 했잖아!”

은찬이 꽥 소리를 지르며 예담을 노려봤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예담이 당혹감이 서린 낯으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춰 왔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격해진 그를 달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나 은찬은 이예담과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너는 몇 번이나 나를…… 됐어. 설명할 것도 없다. 같이 있기 싫다고 했잖아. 비켜.”

예담이 밖으로 나가려던 은찬을 빠르게 막아섰다. 그러자 문 앞에 자리한 커다란 몸에 가로막혀 있는 대로 화가 난 은찬이 불퉁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선생님. 아직 해 떨어지면 쌀쌀해요. 컨디션도 안 좋잖아요. 차라리 제가 나갈 테니까……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

그러라지. 은찬은 저를 달래듯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 * *

학과장은 정말 작정이라도 한 건지 술자리에 들러 참석한 4학년 전체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명단까지 가져오는 치밀함을 보였다.

마침내 그가 떠나자 눈치를 보던 망아지들이 고삐가 풀린 것처럼 안주와 술을 마셔 대기 시작하며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은찬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긴장감이 해소되어 마구 마시는 이들과는 달리 다른 이유로 참여하게 된 술자리지만, 부단히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워 갔다.

미웠다. 몇 번이고 저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걸 들키는 이예담이. 그리고…… 분수 모르는 마음에 매번 널뛰는 저 자신도.

그렇게 자리에 없는 이를 떠올리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인지 주량을 다 채우지 않았는데도 쉽게 눈앞이 흐릿해졌다. 과하게 올라오는 취기에 은찬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공기가 고파졌다.

“나 속이 안 좋아서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은찬아. 같이 갈까?”

은찬은 함께 자리에 일어나려던 수민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녀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술기운을 가라앉힌 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기도 했고.

“혼자 다녀올게.”

건물 밖은 고요했다. 색색, 제가 숨 쉬는 소리 외에는 정적만이 흐르는 주변에 어쩐지 조금 무서워진 은찬은 당초 계획을 수정해 멀지 않은 숙소까지만 걸으려 마음먹었다. 반대쪽에 사람이 있는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짙어져 갔다.

“아…….”

은찬이 다가가자 숙소 앞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인영이 곧장 일어나며 물고 있던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시커먼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술 많이 마셨어요?”

센서 등 하나 달려 있지 않은 공간이라 여전히 어두컴컴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나 지금은 피곤해서.”

“……하. 나만 보면 그런 말밖에 안 나오죠.”

예담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까 왜 화낸 건지만 알려 줘요. 선생님 눈에 거슬린 게 있었다면 앞으로 조심하려고.”

“…….”

꽤나 속이 탔는지, 예담이 아랫입술을 연신 혀로 쓸어내렸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찬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무슨.”

“네가 나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쯤은 잘 알아. 그래도…… 그렇게까지 사람 바보 만들 건 없잖아.”

예담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말에 하아, 낮은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아까 네가 애들한테 하는 말 다 들었어.”

“어떤……. 아.”

말끝을 흐리다 그제야 짚이는 데가 있는지 작게 탄식이 터졌다.

그 대화를 그가 듣고 있을 거라곤 단연코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어떻게든 은찬에게 접근하려는 여자들을 막아 내려던 제 검은 속내를 들킨 순간이었다. 남들한테까지 영향을 미친 부분이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그렇다면……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마음 약한 유은찬이 흔들릴 수 있게, 인정에 호소하는 선택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이 선생님한테 접근하는 거 싫어서 그랬어요.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졸렬한데, 당시엔 그 생각밖에 안 나서.”

“뭐? 누가 나한테 접근을 해?”

은찬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양, 눈을 좁혔다가 치뜨며 물어 왔다. 변명을 할 기회를 줬더니 뚱딴지같은 소리만 해 대 갑갑했다.

“들었다면서요. 선생님 번호 달라고 하는 거 주기 싫어서, 내가 헛소리 한 거.”

“…….”

분명히 이예담이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전, 어렴풋이 여자 목소리가 먼저 들려오긴 했었다. 거리가 멀어 내용까지 파악할 순 없었지만.

“…….”

예담은 멍해진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은찬을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눈을 굴리며 넌지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조그마한 얼굴이…… 이런 순간조차 눈치 없이 사랑스러웠다.

이러니…… 더는 제 마음을 감추고 있을 도리가 없었다.

“질투한 거 같아요. 우습게도.”

“질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야. 난 네가 전에 친구들이랑 나눴던 이야기도 알고 있는데. 사람 가지고 놀지 마.”

“친구들?”

“수능 성적표 나오고서 너희 집 갔다가 우연히 들은 거야. 1월이면 끝난다, 연애 아니라는 말도 나왔잖아. 막…… 시시덕거리면서.”

예담은 연이어 덧붙여진 설명에 그제야 뒤늦게 감을 잡았다. 아…….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고선 고개를 젖혔다. 그 상태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거 선생님 이야기 아니에요.”

“나한테 연애할 거 아니라고 했었잖아. 그러면 그런 말 또 한 적 있다고 이해하면 돼? 매번 나한테 싸게 군다고 하더니 싸게 구는 건 너였네.”

“하. 그게, 그런 게 아니라…….”

껄끄러운 기억을 더듬는 듯, 예담이 입천장을 혀로 뾰족하게 긁어 대면서 한쪽 눈을 찌푸렸다. 한참 적당한 말을 고르다 덧붙였다.

“집안에서 합병 이슈로 엮은 애가 있어요. 원래대로라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걔랑 같이 미국으로 가야 했는데, 그게 끝났다는 이야기지 맹세코 선생님에 대한 말은 아니에요. 연애…… 그것도 예전에 걔한테 한 말이었고. 내가 뭣 하러 남한테 선생님 이야길 해요.”

혼자 보기에도 아까운데. 고작 이름을 입에 올린 것만으로도 유치하기 짝이 없게 구는데.

일순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으로 예담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급격히 밀려오는 초조함에 잠시도 평온한 척,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의미 있게, 낭만적으로 들리게끔 고백하려 타이밍을 재다간 말라죽을 것 같았다.

“선생님 문제에 있어서는 앞뒤 재지를 못해요. 늘 이렇게…….”

쪽, 가벼이 입술이 포개졌다 떨어져 나갔다.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미처 입술을 방어하지 못한 은찬이 흠칫, 뒤늦게 손바닥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힉,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생각할 겨를 없이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예담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는 은찬과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후회하긴커녕 더더욱 갈망하게 돼요. 이제 더는 못 참겠어요.”

그제야 제가 생각하던 방향과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은 은찬이 입술만 달싹였다. 예담은 그런 그를 조용히 응시하다 손끝으로 제 미간을 짚었다. 커다랗게 드리운 음영에 눈이 가려져 감정을 읽어 낼 순 없었지만, 일련의 동작 끝에 미처 가려지지 않은 양 뺨이 발긋했다.

“이런 기분 나만 느끼는 거겠죠. 연애할 거 아니라고 하던 놈이…… 이런 말 해서 안 믿길 거 알아요.”

“…….”

“그래도……. 선생님은 그간 단 한 번이라도…… 내 생각 한 적 없어요?”

단정한 입술 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늘 갖추고 있던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은찬 또한 덩달아 초조해졌다.

“……화가 났는데……. 그래도 자꾸…… 생각나서, 방학 동안 네 생각이 안 멈춰서, 생각하기는 했는데…….”

“…….”

은찬은 문득 지나치게 조용해진 사위에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예담이 연신 아랫입술을 축이며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불안한 듯 경청하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대로 이예담에게 고백이라도 할 셈인가. 앞으로 정말 어쩌려고……. 삽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습을 위해 어떤 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마주한 입술이 먼저 열렸다.

“좋아해요.”

“어……?”

은찬의 입술을 가리고 있던 손이 부드러이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들썩이는 손목을 결박하듯 움켜쥔 예담이 한결 더 가까이 다가가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아…….”

결코 잘못 들었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읊조리는 문장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좋아해요. 정말로.”

천천히 얼굴이 내려오면서 마침내 입술이 다시금 포개졌다.

이번엔 맞물린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삼키며 자연스레 따라 감긴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으응, 응…….”

부드럽게 맞물렸던 입술은 점차 진득하게 얽혔다. 예담은 그간 해갈하지 못한 갈증을 해소하듯 느릿하게 밀어 넣은 혀가 자리를 잡자마자 입 안을 난잡하게 헤집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은찬의 몸이 움찔움찔 튀면서 그를 자극해 댔다.

“으음…….”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는 어느새 목덜미로 옮겨 갔다. 제멋대로 혀를 섞고 입술을 빨 때마다 절로 딸려 오는 가녀린 고개를 지탱해 주기 위함이었는데, 그 때문에 쉽사리 떼지 못한 손바닥을 유지하며 반대편 손으로는 갈급하게 그의 몸 곳곳을 훑어 내렸다.

후으……. 오싹한 열감이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 솟아올랐다. 나누는 숨결이 아득할 만큼 뜨거워 머리가 어찔했다.

“좋아해요. 정말.”

츄읍,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재차 이어지는 고백에 은찬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게,”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망설이자 쪽, 기습적으로 재차 입술이 겹쳐졌다가 떨어져 나갔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을 고르는 은찬을 내려다본 예담이 옅게 웃었다. 이제는 완연히 낯에 어렸던 긴장이 지워진 채였다.

“대답한 거죠. 들린 것도 같은데.”

말을 하면서도 둘 사이를 이은 침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번들번들한 타액으로 뒤범벅된 통통한 입술이 어쩔 줄 몰라 달싹이는 모습에 예담은 픽,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렸다. 쪽, 가벼이 입술을 내렸다 떼며 몽롱한 눈빛을 확인하고는 몇 번이고 대답이 들릴 때까지 계속해서 쪽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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