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6/16)

Halloween Day

“Trick or Treat!”

아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아이작은 준비해둔 커다란 호박 모양의 바구니에 가득 담긴 사탕과 초코바 캐러멜 등을 한 움큼씩 꺼내 제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의 가방에 담아주었다.

제각각 사탕이 든 가방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 쥔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정신 사납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아이작은 모처럼 환한 표정으로 모이를 뿌리면 달려드는 병아리 같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퍼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틈에는 벤자민도 있었다. 발그레한 뺨,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여간 신난 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평소엔 이도 썩고 밥도 잘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탕과 초콜릿을 잘 받지 못했는데, 이토록 많은 사탕과 초콜릿이 제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 가득가득 차니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벌써 볼이 볼록해지도록 롤리팝을 물고 있는 벤자민을 보며 아이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택의 뜰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할로윈 파티가 한창이었다. 파티에 초대받은 아이들의 코스튬은 가지각색이었는데, 여전히 인기가 식지 않는 엘사, 안나를 비롯해 각종 요정과 히어로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와 세트로 맞춰 입은 가족도 있다.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가족이 눈에 띄었지만, 케첩과 마요네즈, 햄버거와 핫도그 세트인 귀여운 가족도 눈길을 끈다.

올해 벤자민의 코스튬은 놀랍게도 미키마우스가 아닌 캡틴 아메리카였다. 말문을 막 떼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미키마우스를 끼고 살던 아이는 학교에 다니면서 슬슬 히어로 물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전에는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 미키마우스 인형에서 캡틴 아메리카 방패로 바뀌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작년까지 고집하던 미키마우스 코스튬을 거부하고 캡틴 아메리카를 선택한 거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더불어 아이가 커간다는 증거이기도 했기에 아이작은 묘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벤자민은 캡틴 아메리카 옷을 입고 마냥 즐거워할 따름이었다.

이제 겨우 제 무릎까지 오는 세 살 반 아이는 캡틴 아메리카 코스튬과 가면을 쓰고 방패를 손에 들며 위엄 있는 포즈를 취하기도 했으나, 기실 위엄은커녕 얼마나 깜찍하고 귀여운지 저택 사람들을 쓰러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 봤자 벤자민은 자신이 빵야빵야 입으로 소리 내며 쏜 장난감 총에 사람들이 쓰러졌다고 믿는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며칠 전부터 코스튬을 입고 뛰어다니던 벤자민은 할로윈 당일이 되자 우르르 모여든 친구들과 함께 사탕을 받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코스는 간단했다. 저택을 중심으로 이웃에 있는 주택 몇 군데를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고, 아이들의 가드로 곰돌이 푸우 복장을 한 잭과 호랑이 티거 복장의 토니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행렬의 마지막에는 흰옷에 붉은 피가 잔뜩 묻은 미치광이 의사 코스튬을 한 노아가 벤자민을 봐야겠다며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노아는 평소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코스튬이라는 지적과 함께 아이들에게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미치광이 의사를 택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의 보호를 자처한 필릭스의 몇몇 수하가 멀리서 경호하기도 했다.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필릭스의 수하들이 에워싼 경호를 받으며 ‘Trick or Treat!’을 외치고 다닌 아이들은 이제 막 저택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아이작에게서 사탕을 받은 후 뒤뜰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저택의 뒤뜰은 아이들을 위해 아기자기한 할로윈 파티 장소로 뒤바뀌었다. 탁자 위에는 박쥐와 거미, 고스트 모양의 쿠키와 케이크가 쌓여있고, 주위에는 귀여운 호박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벤자민의 반 친구들을 초대한 파티는 딱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맞게 귀엽고 앙증맞은 장식들로 가득했다.

사실 할로윈 파티를 집에서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학교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보낼 때 필릭스는 마땅치 않아 했었다. 그의 저택이 보통 저택은 아니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저택 지하에는 웬만한 정보기관 뺨을 후려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시설의 정보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무기고까지 있다. 겉으로는 멀쩡한 저택이었지만, 까놓고 보면 하나의 요새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곳에서 아이들을 위한 할로윈 파티라니.

아이작은 아직 그런 사실을 모르기에 태연히 벤자민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자고 했지만, 사실 필릭스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런저런 설명을 다 해주기도 어려웠다. 결국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한 탓에 아이작을 말리지는 못했지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편해하는 필릭스를 토니는 은근하게 다독였다. 아이들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뒤뜰에서 잠시 놀다 갈 건데 상관없지 않겠냐면서. 사실 아직도 정부 놈들이 사방에서 감시를 붙이고 있는 와중에, 아이들을 초대해 파티까지 열면 확실히 평범한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절대 자신은 할로윈 파티에 참석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일거양득의 효과가 될 거라고 장담하며 토니는 아이작의 편을 들었다. 자신이 벤자민의 할로윈 파티를 보고 싶은 건 아니라고 재차 강조하면서.

토니를 노려보다가 고심하던 필릭스는 못 이기는 척 아이작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두었고, 결국 그의 고풍스러웠던 뒤뜰은 현재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고 울고 나자빠지는 아비규환의 할로윈 파티가 한창이 되었다.

가뜩이나 정신없는 서너 살의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탕과 쿠키, 초콜릿과 주스 등의 당분을 과다하게 흡수해 더욱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뛰어다녔고, 한쪽에서는 요란한 불빛과 아이들 취향의 유치한 음악이 시끄럽게 울려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벤트는 또 뭘 그리 준비했는지, 한쪽에는 풍선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주는 아티스트도 있었고, 풍선 터뜨리기, 공 던지기 같은 간단한 게임도 마련되어 소란스러움을 한층 더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평소 하는 짓과는 정반대로 귀여운 디즈니 캐릭터 코스튬을 입은 덩치가 산만 한 그의 수하들은 어울리지도 않게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사진을 찍어주기까지 한다. 가끔 그 사이로 미치광이 의사인 노아가 어디선가 튀어나오면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넓은 뜰은 마치 유원지라도 된 것처럼 북적거렸고, 즐겁고 흥겨운 소리는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 속에 아이작도 있었다. 파티의 호스트인 그는 벤자민 친구의 부모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다과를 즐기기도 했다. 파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부족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으며,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노는 벤자민을 돌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파티에 참석하는 대신 2층 서재의 창가에서 뒤뜰을 내려다보는 필릭스의 푸른 동공에는 불쾌감이 번져가기만 했다.

“아무래도 저건 너무 야한데.”

혼잣말을 내뱉는 목소리가 불퉁하다. 아이들 사이로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고 있는 아이작은 벤자민이 캡틴 아메리카 다음으로 좋아하는 히어로인 스파이더맨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복장이 지나치게 몸에 달라붙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스파이더맨의 복장이 원래 전신 쫄쫄이마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는다고는 하지만, 고작 코스튬 주제에 영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냔 말이다. 하지만 아이작이 입은 코스튬은 어떤 미친놈이 만들고 어떤 개새끼가 사 온 건지 영화 속의 복장과 몹시 흡사했다.

즉,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달라붙는 쫄쫄이는 아이작의 늘씬한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매끈한 종아리와 탄탄한 허벅지, 탄력 있게 올라붙은 둥근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 군살 하나 없이 납작한 배와 조각 같은 가슴, 넓은 어깨와 잔 근육으로 채워진 팔까지 어디 한 구석 드러나지 않는 곳이 없다. 어딜 봐도 야해 빠진 몸이었다. 그런데 저런 꼴로 저 많은 사람 앞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필릭스는 손에 든 와인을 물 마시듯 벌컥벌컥 목구멍 아래로 넘기며 눈을 부라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풀풀 풍기다 못해 살기까지 감돌기 시작한다. 뭐하나 잘못 걸리면 반쯤 죽여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자신이 흉악한 기를 흘리며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아이작은 돌연 역삼각형의 홀쭉한 허리에 손을 얹더니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검은 머리카락을 부스스 손끝으로 흩트렸다.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이 어지간히 갑갑했던 모양이었지만,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진 필릭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스크를 벗고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행동이, 긴 숨을 내뱉으며 아이들을 향해 나른하게 웃음 짓는 단정한 얼굴이 몹시 유혹적이다. 아니, 유혹적이라기보단 야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타구니에 피가 몰려 욱신거릴 만큼.

반짝반짝 주위를 밝히고 있는 조명 아래에서의 아이작은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하다. 평소에는 그토록 무뚝뚝하기만 하면서, 오늘은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렇게 풀어진 얼굴인지. 다정한 눈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만약 그의 곁에 다른 이가 있었다면 어이없는 눈으로 필릭스를 쳐다보며 혀를 찼겠지만, 아이작에게 단단히 미쳐있는 필릭스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미간을 구길 뿐이었다. 한참이나 아이작을 눈으로 좇던 필릭스는 타는 듯한 갈증을 식히려 와인 잔에 입술을 댔다. 하지만 그에게 꽂힌 시선은 식지도 않고 외려 점점 더 진해지기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잡아 와 산채로 씹어 먹을 것처럼 이글거리는 시선이었다.

“저런 발칙한 스파이더맨이라니. 혼 좀 나야지, 안 되겠네.”

와인으로 젖은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린 혼잣말이 적막한 공간 위로 흩어졌다. 마지막 남은 와인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입안으로 삼킨 필릭스는 탕, 빈 잔을 던지듯 탁자에 올리며 몸을 돌렸다. 슬슬 할로윈 파티에 참석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아이작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긴 숨을 내뱉었다. 난생처음으로 입어보는 할로윈 코스튬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특히 스파이더맨 슈트가 전신으로 붙는 스타일인지라 고스란히 드러나는 몸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무리 스파이더맨 코스튬이 몸에 달라붙는 디자인이라고는 해도, 이상한 점은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이렇게 딱 달라붙는 코스튬은 없는데, 자신이 입고 있는 스파이더맨 옷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몸에 붙으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사탕을 받으러 나갔다 왔을 땐 데드풀도 봤다. 데드풀 역시 몸에 달라붙는 슈트였지만, 코스튬용으로 나온 옷은 무리하게 달라붙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왜 유난히 달라붙는 건지, 사이즈가 작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답답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아이작은 끝내 마스크를 벗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엉클어진 머리칼을 부스스 털어낸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리 없이 걸음을 돌렸다.

할로윈 파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고작 서너 살 먹은 아이들을 위한 파티였기에 짧게 끝나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 씻고 잘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러니 조금 일찍 코스튬을 벗어도 문제는 없을 테다. 스파이더맨이 사라졌다고 벤자민이 크게 아쉬워하며 울지도 모르지만, 밖에는 스파이더맨 외에 푸우와 티거가 있지 않은가. 아이들의 공포심을 유발했던 미친 의사도 있다.

주위를 돌아보던 아이작은 눈에 띄지 않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조용했다. 밖이 왁자지껄한 탓에 상대적으로 더 조용한지도 모르겠다. 키친 쪽에서는 메이드와 시종이 파티를 위해 바쁘게 오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키친에서 곧바로 뒤뜰로 이어지는 뒷문을 사용하고 있기에 거실은 빈집처럼 고요한 게 당연했다.

유난히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리는 넓은 거실을 가로지른 아이작은 곧장 계단을 향했다. 1층은 메인 거실을 비롯해 손님을 맞이하고 미팅할 수 있는 회의실과, 자그마한 응접실, 키친, 다이닝 룸이 있지만, 개인이 쓰는 방은 전부 2층에 있었기에 옷을 갈아입으려면 2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집이 너무 넓어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하나 밟았다. 그때였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핏, 작은 소리를 울리며 현관 쪽 불이 꺼졌다. 아이작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있나? 싶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질 않는다. 그러면 정전인가? 주위를 돌아봐도 넓은 거실 중 현관 쪽 불만 꺼졌을 뿐, 다른 곳은 그대로였다. 등이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옷을 갈아입고 와서 사람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작은 다시 계단을 밟았다.

그러자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에는 키친으로 향하는 복도의 천장 등이 꺼졌다. 아이작은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비로소 긴장이 등을 훑고 지났다.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넓은 거실의 등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속적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등은 아이작이 서 있는 계단 위의 등불뿐, 주위는 깜깜한 암흑이었다. 덕분에 어둠 너머를 살피기조차 어려웠다.

이거야 원, 곤란하게 됐다. 속으로 혀를 찬 아이작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장난이라면 고약한 장난이었고, 정말 좀도둑이라도 든 것이라면 그것 또한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필 아이들의 할로윈 파티가 한창이었으니…….

사실 미국 내에서 가장 범죄가 가장 자주 일어나는 날이 할로윈이었다. 누구든 가면을 쓰고 나다닐 수 있어 신분을 숨기기가 쉽고, 파티가 여기저기서 있다 보니 술과 약에 취해 충동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한 탓이다.

덕분에 경찰이 가장 보안에 집중하는 날이 할로윈이기도 했지만, 그 범죄 중 하나가 필릭스의 저택에서 일어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어떤 간덩이 부은 강도가 필릭스의 집을 털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단단히 작정하고 필릭스에게 덤비는 놈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건이 있으면 나와.”

아이작이 어둠을 향해 담담히 말을 건넨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몸은 까맣고 머리는 흰 가면. 지나가다 봤으면 놀라서 기절했을 법한 귀신의 몰골. 바로 유명한 ‘스크림’ 가면이었다.

뭉크의 절규를 가면으로 표현한 코스튬은, 할로윈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상품 중 하나였다. 영화 스크림 덕분에 더 유명해진 것도 있는 고전적인 귀신 가면인데, 그걸 쓰고 나타나셨다?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자신을 공격한 희멀건 귀신이 스크림 가면을 쓴 작자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귀신은 정말 귀신처럼 휙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일이 좀 커질 것 같은데. 예감을 떠올리며 긴장한 순간이었다.

문득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방어했지만, 상대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더 빨랐다. 빠를 뿐 아니라 힘과 기술까지 완벽한 공격을 무차별적으로 퍼붓는다. ‘읏-.’ 튀어나오지 못한 신음이 입안에서 흩어졌다. 뻗어오는 주먹은 흐트러짐 없이 정확했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피한 아이작은 등허리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제법 오랫동안 이런 상대를 만나지 못했는데, 의외다. 만만하게 볼 좀도둑이 아니었던 건가?

의아해하던 아이작은 이를 씹으며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퍽, 퍽- 서로에게 휘두르는 주먹과 발차기가 매섭게 이어졌다. 불빛이 남아 있던 계단에서 격투가 시작되었는데, 어느새 둘은 어두컴컴한 거실로 자리를 옮겨 싸우고 있었다. 시간도 꽤 흘렀다. 그럼에도 막상막하인 둘의 격투는 좀처럼 결판이 나질 않고 격렬해지기만 한다.

서로 주먹을 내지르고 방어하며 치고받고 있긴 했지만, 둘의 싸움은 누가 봐도 프로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움직임 하나하나가 절제되어 있었다. 공격은 날카로우면서도 빠르고 정확했고, 방어 또한 완벽했다. 도무지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아이작의 관자놀이 옆으로 땀이 흘렀다.

사실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몸에 딱 붙는 슈트를 입고 격투기를 하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기도 했다. 상대는 가면을 쓰고 있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자신과는 달리 움직임에 전혀 지장이 없다. 게다가 가면을 치우려 주먹을 휘두르면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게 정말이지 귀신같은 실력이었다. 과연 누구인지 낯짝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죽일 듯이 주먹을 내지르던 둘은 밭은 숨을 흘리며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견제하며 느릿하게 걷는 것을 멈추질 않는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호적수를 만났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아이작은 땀이 밴 주먹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만에 하나 자신이 당하게 되면 곧바로 도망쳐 경호를 부를 계획이었지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는 이 순간이 제법 나쁘지 않은 탓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상대를 가늠하던 아이작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번에는 한 발 내디디며 먼저 공격했다. 슉, 소리와 함께 깨끗하고 빠른 동작으로 주먹이 뻗어 나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듯, 귀신은 짧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기울여 피했다. 그러나 아이작의 연속적인 공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랐다.

피하는 데 여념이 없는 상대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살짝 흐트러지는 균형을 아이작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옆구리를 얻어맞은 귀신이 허리를 굽히며 신음한다. 이어 길게 뻗은 다리가 그의 등을 찍어 내렸다. 바닥을 구를 뻔한 귀신은 탁자를 붙들고 겨우 중심을 가다듬으며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귀신은 상당히 훌륭한 실력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흐트러지고 있었고, 아이작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귀신을 단번에 따라잡은 아이작이 정면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제대로 맞으면 가면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코와 안면이 박살 날지도 모르는 속력이었다. 귀신은 당황함이 역력한 몸짓으로 뒤로 물러서며 칫, 혀 차는 소리를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코끝으로 훅, 강렬한 향이 파고들었다. 짧은 시간 머릿속이 찡하게 갈라지게 만드는 지독한 단 냄새. 눈앞이 아득해지고 전신을 굳게 만드는 향은 기실 향이라기보다는 자극에 가까웠다. 그것도 전류가 일어나게 하는 강한 자극. 익숙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페로몬이다.

어째서?

잠시 잠깐 의문을 떠올린 아이작의 주먹이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자 귀신은 곧장 반격을 가해왔다. 흔들린 팔을 낚아챈 그는 그대로 아이작의 팔을 비틀어 꺾더니 어깨를 쥐고 내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아이작의 머리와 몸이 벽에 처박혔다. 윽,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상대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작의 뒷목을 팔로 누르며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귀신에게 등을 내보인 채 이마와 어깨가 벽에 짓눌리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직도 코끝에서 맴돌고 있는 자극적인 페로몬 탓인지, 어이없이 당했다는 충격이 큰 탓인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사이 스크림 가면의 사내는 재빨리 아이작의 두 팔을 뒤로 교차해 단단히 묶기까지 한다. 작정하고 덤빈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으, 읏-!”

미간을 일그러뜨린 아이작의 질문은 제대로 끝마치질 못했다. 머리에부터 발끝까지 페로몬이 홍수처럼 쏟아 부어진 탓이었다. 페로몬 샤워라고 하던가. 다른 알파를 견제하고 제 오메가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알파 페로몬을 뒤집어씌우는 행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당해본 적 없었던 아이작은 예고 없이 퍼부어지는 페로몬을 감당하지 못하고 발작하듯 몸을 떨어야만 했다.

물론 각인하기 전에도 필릭스가 페로몬을 씌웠던 적은 분명 있었다. 알게 모르게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것도 안다. 하지만 그때는 열성 오메가인 데다가 억제제를 꾸준히 복용해 베타에 가까웠기에 필릭스가 페로몬을 뿌려도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각인한 이후로는 그 무엇도 통하질 않았다. 조금 전처럼 알파 페로몬이 슬쩍 흘러들기만 해도 머릿속이 찡, 하게 울릴 정도인데 이토록 짙은 페로몬을 폭포처럼 쏟아부으면 어떻게 버틸 수가 있을까. 이를 갈던 아이작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무릎이 꺾인다. 그나마 바닥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은 것은 사내가 뒤에서 단단히 받치고 있기 때문이었을 뿐, 이미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가파른 숨이 절로 토해져 나온다. 식은땀은 비 오듯 흘렀다. 그러자 사내는 널브러진 아이작을 가볍게 어깨에 메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거실에서 이어지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커튼이 전부 내려져 거실보다 어두운 룸에는 회의를 할 수 있는 긴 탁자와 의자, 원거리 컨퍼런스 콜을 위한 티브이와 전화, 그 밖에 책과 서류가 꽂힌 낮은 책장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 평범한 회사의 회의실을 떠올리게 하는 인테리어다. 그러나 회의용 탁자 맞은편에는 벽난로가 있고 그 앞에는 푹신한 2인용 소파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어, 제법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스크림 가면을 쓴 사내는 어깨에 짐짝처럼 메고 온 아이작을 소파 팔걸이에 엎드리게끔 내려놓았다.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게다가 얼굴은 소파에 처박히고 아랫배는 팔걸이에 걸쳐져 엉덩이가 들어 올려진 자세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바닥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사내는 아이작의 등과 돌려 묶인 팔을 내리누르며 손쉽게 아이작의 반항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아이작의 엉덩이를 슥, 손등으로 훑었다. 가뜩이나 딱 달라붙는 옷이 엎드리기까지 하자 팽팽하게 당겨져 적나라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길이 진득해진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아이작은 숨을 멈추었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는다. 그런 아이작의 반응을 알아차린 사내는 더욱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이내 터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으흣-!”

저릿한 통증이 일어날 정도의 악력이었다. 페로몬에 절여져 헐떡이던 아이작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아픈 것보다는 몸이 뭉근하게 달아올라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로 숨 막히는 알파 페로몬을 뒤집어썼으니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문제는 페로몬에 있었다. 망할 페로몬. 망할…….

“필릭스!”

아이작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각인된 오메가와 알파는 각인한 상대의 페로몬 외에는 반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필릭스는 보기 드문 최우성이기까지 하다. 그가 아니라면 자신을 이만큼 반응하게 만드는 페로몬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다. 즉, 강도인 척 덤볐다가 힘으로 밀리자 페로몬으로 자신을 짓누르고 결박한 채 성희롱을 서슴없이 이어가고 있는 파렴치한 인물은 필릭스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왜? 평소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남자이긴 했지만, 이번 일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위한 할로윈 파티가 한창인 와중에 다짜고짜 치한처럼 덤비고, 페로몬을 뒤집어씌우기까지 하다니.

미친 거 아닌가 싶기까지 한 필릭스의 작태에 아이작은 페로몬에 절어 붉어진 눈을 들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가면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이작의 엉덩이를 멋대로 주물러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벌써 단단하게 선 성기를 아이작의 허벅지에 대고 문지르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정욕에 눈이 돌아간 짐승이었다.

“미쳤어요?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렇게나 짙은 페로몬을 흘려놓고 모르는 척하려고?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을.

소파 팔걸이에 엎드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아이작이 이를 갈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작의 반항이 우습다는 듯, 뒤로 묶인 팔을 강하게 억누르며 다시금 페로몬을 퍼부을 따름이었다.

큭, 목에서부터 울리는 신음과 함께 아이작은 소파 위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은 둘째 치고 아랫배에서 번져가는 저릿저릿한 자극에 소파 팔걸이에 눌린 성기로 아플 만큼 피가 몰린다. 머릿속이 다 타버릴 것만 같았다.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것처럼 온몸이 예민하게 달아올랐고, 호흡은 가빠졌으며 뒷구멍은 벌써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각인 후 처음으로 당한 페로몬 샤워였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지만, 갑작스레 발정하는 제 몸 상태에 충격을 받은 아이작은 욕설을 삼키며 숨을 헐떡여야만 했다.

아이작의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주무르며 그의 반응을 지켜보던 사내가 불현듯 주머니에서 포켓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서 번득이는 빛을 흘리는 칼날을 알아차린 아이작이 흠칫 어깨를 굳힌 순간, 그는 정확하게 아이작의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을 갈랐다. 찌익, 어두컴컴하고 적막감이 감도는 공간에서 천이 찢어지는 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음란했다.

가뜩이나 딱 달라붙어 있는 데다 엉덩이를 위로 든 엎드린 자세 탓에 당겨져 있던 얄팍한 천은 손쉽게 찢어져 양옆으로 벌어졌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 위로 직접 닿자, 아이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하고 말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엉덩이만 훤히 드러내고 있을 제 꼴이 어떤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필릭스…, 그만…….”

아이작이 희미하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다량의 흥분제를 먹은 것처럼 페로몬에 취해 움찔거리는 구멍 위로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다. 길고 투박한 손가락은 들어올 듯 말 듯 주름진 입구를 문지르며 질척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이미 미끈하게 젖어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에 아이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딱딱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있을 무렵 그의 손가락은 기어코 입구를 가르며 내부로 파고들었다. 손가락 두 개가 한 번에 파고들었지만, 눅눅하게 젖어있던 구멍은 무리 없이 손가락을 삼켰다. 아니, 단순히 삼킨 것만이 아니라 더 달라고 애원하듯 오물거리며 손가락을 빨아당긴다. 그러자 손바닥이 엉덩이를 감쌀 정도로 깊이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추삽질하듯 넣었다 빼기도 하고 내벽을 대놓고 문지르기도 한다. 간질거리면서도 뭔가 부족한,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은 자극이었다.

“손가락만 넣어도 좋아?”

소파에 이마를 비비며 움찔거리는 아이작에게 그가 낮게 물었다. 지금껏 말도 없이 치한 행세를 던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음성이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 붉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난데없이 덤벼들다가 힘으로 밀리니 페로몬까지 써서 이런 꼴을 만들어요? 너무 치사한 거 아닙니까?”

으르렁거리며 따지듯 묻자 필릭스는 ‘음’ 낮게 목을 울렸다.

“어떻게든 널 넘어뜨려야 했거든. 그리고 난 원래 치사해. 모든 일에선 무조건 이겨야 만족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어떤 치사하고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말이지.”

“그래서, 흐읏…. 내게 이러는 이유는 뭡니까?”

찌걱찌걱,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음탕한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아이작은 밭은 숨결 사이로 질문을 던졌다. 아이작을 빤히 내려보던 스크림 가면 속의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할로윈이잖아. 내 코스튬이 강도 같은 거니까, 일종의 강도 놀이라고 하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변명이라고-!”

“게다가 스파이더맨 엉덩이가 어찌나 탐스럽던지, 온갖 새끼들이 다 쳐다보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결국, 그겁니까? 이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하, 필릭스 펠리체가 악명을 떨치는 무기상답지 않게 치졸하고 유치한 구석이 있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겨우 코스튬 하나로 이런 짓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응. 다 찢어발기고 싶어졌거든.”

‘이렇게’ 뒷말을 덧붙인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짝 뜯어진 옷자락을 우악스레 잡아 벌렸다.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허리에서 허벅지까지 옷이 찢어져 벌어진다. 아직 스파이더맨 옷은 그대로 입고 있는데, 보기 좋게 올라붙은 아이작의 엉덩이만 훤히 드러나는 모양새였다.

“이, 변태 같은-, 윽-!”

아이작은 언성을 높였지만,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필릭스가 아이작의 내부를 휘젓던 손가락을 거칠게 빼내는 것과 동시에 흉흉하게 일어선 제 성기를 무작정 찔러 넣은 탓이었다.

푹,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것만 같았다. 손가락과는 전혀 다른 두께의 성기가 입구의 주름을 팽팽하게 벌리며 단번에 꿰뚫고 들어와 내벽을 짓이긴다. 숨은 탁 막혔고, 눈앞은 새까맣게 점멸했지만, 그럼에도 전류가 오르듯 전신으로 번져가는 쾌감이 미칠 듯이 좋았다. 손가락으로 부족했던 뭔가가 비로소 채워진 느낌이 만족스럽기까지 하다.

“아…, 흐읏…….”

그의 페로몬을 뒤집어썼을 때부터 몸에서 자글자글 끓던 열기가 당겨져 거센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대로 다 타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저릿저릿한 전류에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뒤로 묶인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필릭스의 거대한 성기를 머금고 있는 엉덩이는 제멋대로 움찔거리며 그의 것을 삼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더, 더 깊이, 더 안쪽으로. 더 세게. 머릿속에서 차마 내뱉지 못한 단어들이 빙빙 떠다녔다.

“필릭스, 필릭스-, 아, 흐읏…….”

퍽, 퍽, 퍽, 필릭스가 그의 엉덩이를 손에 움켜쥔 채 사정없이 찔러 넣고 있는 와중에도 아이작은 안달했다.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흘러 소파를 적셨고, 초점은 풀어져 시야가 흐릿하기만 하다. 페로몬에 절은 몸은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민망한 꼴로 엉덩이만 드러낸 채 무작정 박히고 있는데도 마냥 좋았다. 머리까지 페로몬에 눅진하게 눌어붙은 모양이었다.

팔이 묶여있지 않았다면 그의 손을 붙들었을 텐데, 소파에 짐짝처럼 널브러진 채 정신없이 흔들리는 게 고작인 상태가 안타깝다. 이런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필릭스는 추삽질을 하면서도 민망한 꼴로 드러내고 있는 엉덩이를 주무르고 움켜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짝, 소리가 울리도록 엉덩이를 때린 것은 아이작이 저도 모르게 구멍을 조였을 때였다.

“아이작, 그만 조여. 그렇게 흥분해서 멋대로 조여 대면 혼나는 게 아니잖아.”

“으, 으읏-!”

“진짜 끊어먹겠네.”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리면서도 필릭스는 다시금 엉덩이를 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아이작은 거칠게 흔들리는 시야로 멍하니 그를 돌아보았다. 주로 더 조이게 하려고 엉덩이를 때린다고 하지 않던가?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과 하는 행동이 반대다.

어쩌면 필릭스는 단순히 혼내고 싶어서 엉덩이를 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그가 엉덩이 위로 붉은 손자국이 나도록 때릴 때마다 움찔거리며 반사적으로 구멍을 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필릭스는 또 조인다고 성질을 부리며 엉덩이를 후려친다.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악순환이었다.

그런데도 차마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아찔한 쾌감이 손끝까지 저릿저릿하게 번져가는 탓이었다. 투박한 손으로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내려칠 때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발끝이 오므라들도록 저릿한 쾌감이 타고 오른다. 처음으로 느끼는 오싹한 감각은 혹시 자신도 몰랐던 성적 취향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이작, 네 엉덩이가 붉어졌어.”

한참이나 볼기를 후려치며 따라가지 못할 속도로 내벽을 짓쳐대던 필릭스가 문득 느릿한 움직임으로 바꾸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엉덩이가 화끈거린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퉁퉁 부은 것 같은 살갗 위로 열이 오른다. 아이작은 아프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입술만 씹으며 신음을 삼켜야 했다. 그러자 필릭스는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흥건하게 젖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픽, 소리 내어 웃었다.

“설마 혼나는 걸 즐긴 건 아니지? 네 여기가, 완전히 젖었는데.”

허리를 숙여 귓가에 바짝 가면을 대고 속삭이는 한마디에 아이작은 눈을 번쩍 들었다. 아직 벗지 못한 탓에 꽉 막혀있는 코스튬 앞이 필릭스의 말마따나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걸까. 민망함에 뺨이 확 달아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무렵이었다.

문득 필릭스는 지금껏 벗지 않고 있던 가면을 거칠게 빼내어 바닥에 내던졌다. 탕, 소리와 함께 스크림 가면이 바닥을 구른다. 그러나 아이작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가면을 내던지자 비로소 드러난 필릭스의 얼굴에, 그의 새파란 눈에 온통 정신을 뺏겨 눈도 깜박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땀에 젖은 금발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악동처럼 웃는 그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매력적인 알파는 짙어진 눈동자로 온통 자신을 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씹어 삼키고 싶어 죽겠다는, 적나라한 욕정을 드러내면서.

“이거, 묶어둔 손, 풀어요.”

새삼 반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아이작은 거친 숨결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툭, 툭,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던 필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난 아직 화가 덜 풀렸는데.”

툭 내던진 대답은 무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이작은 한숨을 흘렸다. 정말이지 뒤끝 한번 길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소파에 엎드린 자세로 축 늘어진 채 아이작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었다. 그의 손이 다시금 붉어진 아이작의 엉덩이를 쓰다듬는다. 느릿한 동작으로 성기를 깊이 파묻었다가 귀두 끝까지 빼내고 다시 깊이 파묻는 추삽질 또한 잊지 않으면서.

“글쎄. 생각 같아서는 내 페로몬에 절여버리고 싶은데. 네 몸 구석구석에 내 냄새가 배버리게. 네가 어딜 가든, 무슨 짓을 하든 네게서 내 페로몬이 폴폴 풍겨 나올 정도로.”

“……그 전에 죽겠군요.”

“설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데 죽일까? 나한테 미쳐서 개처럼 발정하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지.”

빙긋 웃으며 대답하기가 무섭게 필릭스는 다시 한번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반응은 곧바로 이어졌다. 전신이 덜덜 떨렸고, 교성과 닮은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새까맣게 번지다 못해 빛이 번쩍인다.

“아, 아아-! 필릭스, 이제, 그만…….”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던 몸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무의식적으로 로 제 몸에 처박혀있는 필릭스의 성기를 꽉 조이며 아이작은 흐느꼈다. 몸에 박혀있는 것만으로도 갈 것 같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이를 씹었지만 끝내 옷과 소파에 꽉 눌려있던 성기 끝에서 정액이 터지듯 쏟아지고 말았다.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된 채 쾌락에 잠긴 아이작을 노려보던 필릭스가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맙소사, 아이작, 아이작…… 넌 진짜, 왜 이렇게 야한 거지? 응? 뭘 해도 야하기만 하니, 원. 엉덩이만 내밀고 있으니 더 심하잖아.”

아이작의 검은 머리칼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필릭스는 미소 지었다. 어딜 봐도 제 연인이자 파트너이자 각인한 오메가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행위는 전혀 달랐다. 엉망이 된 아이작의 뺨을 크게 베어 문 그는, 동시에 퍽- 있는 힘껏 제 좆을 아이작의 빠끔히 벌어진 구멍에 처박았다.

짧은 비명을 내지른 아이작이 허리를 휘었다. 그러나 등 뒤에서부터 단단히 끌어안고 있던 필릭스는 아이작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짐승 같은 허리 짓이 이어졌다. 푹, 푹, 찍어댈 때마다 젖은 살갗에서는 질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렀다. 젖은 옷 위로 아이작의 사타구니를 문지르는 손길은 난폭했다. 다른 손으로는 아이작의 턱을 붙든 채 빠듯하게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휘젓기까지 한다.

뜨끈하고 두꺼운 혀는 제집에 들어온 것처럼 아이작의 입안 곳곳을 점령하고 혀를 감고 빨아당겼다. 머리도 몸도, 위도, 아래도, 온몸이 그에게 점령당한 채 범해지고 있었다. 더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입을 내어주고 구멍을 내어준 채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이 전부였다.

발정기의 짐승처럼 난폭하게 박아대던 필릭스는 어느 순간 뜨끈한 정액을 내부에 흩뿌리기도 했지만, 추삽질이 멈추는 법은 없었다. 언제 토정을 했냐는 듯 벌어진 거친 허리 짓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덕분에 살갗이 맞부딪힐 때마다 흘러나온 정액은 사방으로 튀며 더욱 요란하게 찌걱거렸고, 붉게 물든 엉덩이는 더욱 욱신거렸다.

소파에 머리를 처박고 끝도 없이 흔들리고 있으려니 눈앞이 가물가물해진다.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리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게 계속해서 페로몬을 씌우고 또 덮어씌우기를 반복하니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억울한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페로몬에 젖은 몸뚱이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쾌감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답답하게 짓눌려있는 성기는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정액을 쏟아내, 아랫도리와 소파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버리기까지 했다. 필릭스의 혀를 게걸스럽게 빨고 그의 성기를 조이고 풀기를 반복하는 것 또한 자신이었다.

“아, 아아, 필릭스, 거기, 계속, 멈추지 말고, 더, 더-, 으, 으흣-!”

“그거 알아? 아이작, 네가 이렇게 야해 빠진 얼굴로 자지러질 때마다 아주 미치겠다는 거.”

필릭스가 그의 허벅지를 움켜쥔 채 뿌리 끝까지 쑤셔 박았다. 내벽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자극에 아이작은 흐느끼면서도 허리를 흔들었다. 얼마나 거세게 처박는지 필릭스의 허벅지와 철퍽거리며 맞닿은 엉덩이가 점점 더 화끈거렸다. 격렬하게 몰아세우던 필릭스가 문득 탄성 어린 숨을 내뱉으며 불현듯 움직임을 멈춘 것은 아이작이 기어이 지쳐 쓰러졌을 무렵이었다.

한 손으로 그의 볼기를 꽉 움켜쥔 필릭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씹었다. 낮게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깊이 아이작의 내부에 성기를 처박은 그는 잠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또다시 뜨끈한 열기가 내부로 번지고 있었다. 배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선연하다.

여전히 호흡이 진정되질 않아 뭍으로 건져진 물고기가 마냥 헐떡이면서도 이제야 끝이 났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 자신을 꿰뚫고 있다는 듯 등 뒤에서 쯧, 혀 차는 소리가 흘렀다.

“넌, 매번 이러지. 매번 나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 만큼 음탕해져.”

불만을 토로하듯 중얼거린 필릭스는 언제 토정했냐는 듯 방금 정액을 쏟아부은 아이작의 배 속에 퍽, 소리가 울리도록 재차 성기를 꼽았다.

“윽-!”

내심 안도하고 있던 아이작의 벌어진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떨린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검은 동공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쾌락과 정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 이지와 무심함으로 차 있는 것과는 판이한 모양새다.

필릭스는 그의 머리칼을 움켜쥔 채 입을 맞췄다.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 아이작의 턱과 뺨을 핥으며 다디단 제 오메가의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정확하게는 체향에 섞인 페로몬이었다. 폐부 깊이 향을 들이키자 가뜩이나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사타구니에 피가 몰린다. 어디서도 맛보거나 맡아보지 못한 달콤한 냄새에 취한 듯 필릭스는 아이작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며 허리 짓을 이어갔다.

“으, 읏, 필릭스, 팔 좀……풀어줘요.”

맞물린 채 물고 빨리는 입술 사이로 불현듯 아이작의 요구가 흩어졌다. 필릭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팔을 묶어두고 하는 건 처음이라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치게 흥분하긴 했다. 누구보다 강한 사내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두고 휘둘렀다는 데서 생긴 고양감이 제법 큰 탓이었다. 풀지 않고 이대로 제 품에 가둬두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는 것도 이유였지만.

“싫은데.”

악동처럼 짙은 미소를 지으며 필릭스는 크게 허리를 휘둘렀다. 목울대를 울리는 신음을 흘리던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필릭스를 향했다. 얼마나 흐느꼈는지 아직도 발갛게 젖어있는 눈에는 전에 없던 애원마저 담겨 있었다.

“…팔이 조금, 아픕니다.”

“이런, 너무 오래 묶어둔 건가?”

하지만 아이작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속삭이는 순간, 필릭스는 당황한 태도로 곧장 포켓 나이프를 찾았다. 그리곤 주저 없이 아이작의 팔을 묶어둔 끈을 끊어버렸다. 이렇게 간단히 풀어줄 줄은 몰랐는데. 아이작은 툭, 허물처럼 바닥 위로 떨어지는 끈을 멀거니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럼에도 소파에 엎드린 그대로 팔을 늘어뜨리기만 할 뿐 금세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오랫동안 뒤로 돌려져 있던 탓에 팔 전체가 저려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찮아?”

엄살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아이작이 일어나지 못하고 늘어져 있자 필릭스는 그의 팔을 천천히 문지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히 혼내주겠다며 새로운 플레이를 해보려다가 사람 잡는 건 아닌지. 안절부절못한 채 아이작을 살피는 필릭스의 표정이 어두웠다. 잠시 숨을 고르던 아이작은 느릿하게 움직여 팔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요.”

짧은 대답이 불퉁하게 흘렀다. ‘아직도 아픈가?’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아이작은 휙 몸을 돌리더니 순식간에 필릭스의 멱살을 쥐고 소파 위로 집어 던졌다. 푹신한 쿠션이 크게 흔들리며 지금껏 아이작이 엎드려 있던 소파 위로 필릭스가 내리꽂혔고, 멱살을 잡은 그대로 아이작은 그의 허리에 올라탔다. 눈 깜박할 상황이 뒤바뀌자 필릭스는 넋이 나간 듯 멍한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그러게 왜 알면서 방심했습니까.”

아직도 거친 호흡을 흘리며 가슴을 들썩이면서도 자신을 완벽하게 짓누르고 있는 아이작을 올려본 필릭스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기승위 체위처럼 제 배에 올라탄 아이작의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조금 전만 해도 정신 못 차리고 허리를 흔들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순식간에 이렇게 말짱해져? 페로몬까지 뒤집어썼으면서. 몇 날 며칠 침대에서 뒹굴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며칠씩이나 뒹굴 일이 있습니까.”

아이작은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보통 오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 오메가이면서 알파 페로몬을, 그것도 최우성 알파인 자신의 페로몬까지 거부하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전에는 그나마 열성 오메가에 약을 복용했다는 변명이라도 통했지만, 각인까지 한 지금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물론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하게 페로몬에 반응하기는 한다. 다른 이의 페로몬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페로몬에만 반응하고 약간의 향이 스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깨어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이렇듯 순식간에 이성을 되찾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만큼 정신력이 강하다는 건가. 수많은 오메가를 봤지만, 아이작 같은 오메가는 본 적이 없기에 필릭스는 매번 놀라게 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구분하기도 모호했다. 알파 페로몬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아이작에게 새삼 반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점이 억울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조금 더 네가 흥분해서 자지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하아, 지금껏 그랬잖습니까.”

“모자라.”

사실 아직도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작의 눈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폭우처럼 퍼부었던 페로몬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긴 어려운지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이를 깨물고 있는 모습이 위태롭기도 했다. 하지만 필릭스로서는 여전히 억울했고, 여전히 부족할 뿐이었다.

“아이작, 난 조금 더 너와 개처럼 뒹굴고 싶거든.”

필릭스는 느긋하게 입술을 핥으며 아이작의 드러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러나 아이작의 표정은 냉랭했다.

“페로몬, 쓰지 말아요.”

“왜? 페로몬 샤워가 싫었어?”

“싫습니다. 약물에 중독되는 것 같은 기분이, 정말 싫어요.”

딱 잘라 말하는 아이작을 보니 한 번만 더 페로몬 샤워를 했다가는 후환이 두려워질 것 같다. 필릭스는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곧 무슨 좋은 수가 생각이 난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억울하면 네가 나한테 하든가.”

“오메가인 내가 당신에게 페로몬 샤워를 할 수 있습니까?”

“왜 안 되는데? 네 페로몬을 씌우면 되잖아. 네 알파라고 알려. 네 거라고 당당하게 까발려 봐.”

필릭스는 눈을 빛내며 아이작을 부추겼다. 어쩐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그러나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작은 끝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됐습니다. 도끼로 내 발을 찍는 격이겠지요. 당신을 여기서 더 발정 나게 해봤자 고생하는 건 난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퉁명스러운 대꾸에 필릭스는 실망한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렵다니까. 꼼수가 통하질 않는 어려운 상대였다.

“네 페로몬이, 네 냄새가 온몸에 씌워지면 분명 기분 좋을 텐데 말이지.”

아이작은 턱도 없는 소리 말라는 태도였지만, 필릭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자 아이작은 그의 금사 같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헤집으며 허리를 굽혔다.

“지금도 충분히, 정말 충분히, 당신은 발정 난 개 같습니다. 이보다 더 개 같아지면, 내가 못 견뎌요. 그러니 내게 페로몬을 씌우지도, 당신에게 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살짝 붉어진 얼굴, 땀에 젖은 머리카락, 달큰한 냄새를 흘리며 냉랭하게 대답하는 아이작을 바라보던 필릭스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네.”

필릭스는 매혹적인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토록 단호하게 나오니 더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보이는 눈빛이었다.

아이작은 그의 허리에 올라탄 그대로 그를 살폈다. 가끔 어이없을 정도로 치졸하고, 치사하고, 유치한 데다가 제멋대로 괴상한 일을 벌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한마디에 이렇게나 정직하게 반응한다.

팔이 아프다고 하면 풀어주고, 더 이상의 페로몬은 안 된다고 하니 곧바로 포기한다. 간혹 어린아이처럼 심통을 부릴 때면 자신의 애원은 귓등에도 안 듣기도 하지만, (특히 몸을 겹치고 있을 때) 그 외에는 제 의견에 늘 귀 기울이고 감정 상하지 않게 배려해주는 남자였다.

그래서 가끔, 정말 가끔 화가 나면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 남자에게 한없이 약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약점을 잡힌 것 같다고 생각을 떠올리며 아이작은 고개를 숙였다.

“음?”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필릭스의 눈부신 얼굴이 쏟아지듯 가까워졌다. 바짝 허리를 굽혀 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맞댄 아이작은 무작정 그의 보기 좋은 입술을 훔쳤다. 다분히 충동적인 키스였다. 이토록 유치하면서도 귀엽고, 괴팍하면서도 상냥한 사내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대로 행했을 뿐이었다.

할짝거리는 소리와 함께 혀끝이 그의 입술을 훑고 지났다. 절로 벌어지는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점막 곳곳을 문지르고 탐하자 필릭스는 목울대를 울리며 눈을 감았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짙어지고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자극에 아이작은 더운 숨을 흘렸다. 몸에서도 또다시 뜨끈한 열을 뿜는다.

아무래도 위험한데. 생각한 순간, 와락 필릭스의 단단한 팔이 뱀처럼 휘감아 왔다. 터뜨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강하게 휘감는 그의 팔에서 도무지 빠져나갈 재간이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비로소 눈앞으로 스치고 지났다.

“먼저 도발한 건 너야.”

“겨우, 키스 하나로 말입니까?”

“네 키스가 얼마나 음탕하고 야한지 알면 그렇게 말 못 할 텐데?”

설마. 뭘 했다고 야하고 음탕하다는 건지. 속으로 따져보기도 했지만, 다른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하게 하려는 수작으로 필릭스가 급히 입을 맞추는 탓에 아이작은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외설적이고 격렬하면서도 달콤한 입맞춤이 또다시 이어졌다. 필릭스의 흥분한 성기가 가만있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끈적끈적하게 젖어있는 성기로 녹진하게 풀어진 아이작의 입구를 문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미끈하게 내부를 침범한다.

페로몬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일까. 힘줄마저 불거진 그의 성기가 내벽을 짓이기며 들어오자 새삼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 번진다. 자신의 팔은 더 이상 묶여있지 않았으나 대신 그의 팔 안에 단단히 감싸인 아이작은 억눌린 신음을 터뜨렸다. 배 속이 터져나갈 것처럼 묵직하게 차오르는 감각이 아찔했다. 그러나 그 기이한 감각에 희열마저 일었다.

“이제, 그만 하기로, 흐읏…. 한 거, 아니었습니까?”

필릭스의 가슴에 엎드린 아이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질문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미룬 채 불쑥 상체를 일으키더니 느닷없이 자세를 바꿨다. 예고도 없이, 그것도 격렬하게 추삽질을 하다가 말고 그대로 움직인 탓에 기우뚱 몸이 기울었고,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매달리고 말았다.

“말했듯이 이번엔 네가 먼저 도발했거든.”

그에게 매달리는 꼴이 된 아이작의 목덜미를 빨아당기며 필릭스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달래려는 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아쉽게도 아이작의 내부에 처박혀있는 성기는 목소리와는 달리 거칠게 내부를 꿰뚫고 있었다.

“아, 아, 그러면 조금만, 멈췄다가, 아니, 천천히 으윽-.”

“어쩌나, 그럴 여유가 없는데.”

철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필릭스는 벌써 두 번이나 빼지도 않고 싸질렀고, 아이작 역시 옷도 벗지 못한 채 수차례 토정한 탓에 맞물려 있는 하반신 전체가 흥건하게 젖어 찌걱거린다. 그러나 필릭스는 처음 섹스를 시작한 것처럼 정신없이 아이작을 탐할 따름이었다.

점차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허리 짓은 격렬해졌다. 그의 위로 올라탄 탓에 자신의 무게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깊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 뱃가죽 아래로 그의 성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조금, 천천히-. 아, 아아-, 필릭스!”

골반 전체가 얼얼할 정도로 쳐대는 필릭스의 어깨를 움켜쥔 아이작이 고개를 내저었을 때였다. 착하게 아이작의 외침을 들어주기라도 하려는 건지 돌연 움직임을 멈춘 그가 눈을 들고 아이작의 뺨을 어루만졌다. 젖은 손이 뺨과 턱, 목덜미로 따라 느릿하게 내려온다. 무슨 생각을 하며 매만지는 건지 느낌이 기이했다.

겨우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아이작은 바싹 마른 목구멍 아래로 침을 삼켰다. 얼마나 교성과 신음을 내질렀는지 침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따끔하다. 그사이에도 필릭스의 손끝은 얇은 코스튬으로 감싸인 아이작의 가슴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아직도 엉덩이만 내놓고 있었네.”

야하게. 뒷말을 덧붙이는 그를 따라 아이작은 고개를 숙였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몰랐는데, 그의 말대로 스파이더맨 코스튬은 아직 그대로 몸에 달라붙어 있는 그대로였다. 처음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타구니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것뿐일까. 아, 물론 변태처럼 엉덩이만 찢어져 있는 것도 그랬지만.

“이따위 거지 같은 옷, 아주 갈기갈기 찢어서 태워 버리려고 했는데 말이야.”

새삼 잊고 있던 분이 치밀었는지 필릭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뒤끝 길기로는 이 남자를 따라올 이가 없을 테다. 이런 스타일의 코스튬인지 모르고 입었던 아이작으로서는 자다가 봉변당한 격이었지만, 필릭스는 아이작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코스튬이 죽을죄를 지은 대역죄인인 것처럼 노려보고 또 노려봤다.

아이작은 뭐라고 해야 하나 고심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찌익- 옷자락이 찢어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마치 슈퍼맨이 옷자락을 찢어내듯, 필릭스가 아이작의 코스튬을 쥐고 양쪽으로 찢어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슈퍼맨과 다른 점은 그는 벌어진 옷 사이로 슈트에 새겨진 S가 드러났지만, 아이작은 맨 가슴 위의 젖꼭지가 드러났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작은 얼빠진 얼굴로 드러난 가슴을 내려보다 눈을 들고 필릭스를 향했다.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릴 심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 되니 그의 빤히 보이는 음험한 속내에 기가 막힌다.

“와, 야해라.”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노출된 가슴을 핥듯이 쳐다보던 필릭스가 만족스럽다는 투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이작은 혀를 차고 말았다.

“아래도 찢어볼까? 네 걸 제대로 만지지도 못해서 억울한데.”

“차라리 다 벗겨요.”

“싫어. 이게 더 보기 좋아.”

“당신, 진짜…, 변태였군요.”

아이작이 질린다는 투로 중얼거렸지만 필릭스는 듣는 둥 마는 둥 곧장 뾰족하게 선 젖꼭지를 덥석 입으로 물었을 따름이었다. 갑작스레 축축하고 더운 습기가 가슴 위로 달라붙자, 저릿저릿한 전류가 척추를 타고 올랐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유륜과 젖꼭지를 몽땅 입안 가득 머금고 잘근잘근 씹는 감각이 못 견디게 오싹한 탓이었다.

“필릭스, 자, 잠깐-!”

평소와 달리 몸서리쳐지는 감각에 당황한 아이작은 필릭스의 머리를 치우려 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등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가슴과 젖꼭지를 게걸스럽게 빨아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잠시 멈추고 있던 추삽질까지 다시 시작하자 사지가 벌벌 떨렸다.

평소에도 젖꼭지가 헐도록 물고 빠는 일이 종종 있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의아할 정도로 예민했다. 젖꼭지를 혀로 굴리거나 이를 세워 씹을 때마다 전신으로 번지는 날카로운 쾌감에 그렁그렁 눈물마저 차오른다. 계속해서 덧씌워졌던 필릭스의 페로몬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 아, 잠깐, 잠깐만…. 흐읏, 으흐윽-….”

아이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필릭스의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헤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필릭스는 평소보다 더 예민한 아이작의 반응을 즐기듯, 질척이는 소리를 흘리며 보란 듯이 가슴을 빨아당겼다.

끝내 젖꼭지와 유륜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빨린 아이작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흐느끼고 말았다.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가슴을 빨며 내벽을 쑤셔대는 격렬한 행위에 눈앞이 점멸했다.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빨면 유즙이라도 나오려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 윽, 필릭스!”

그러나 가슴에 달라붙은 필릭스는 멈출 생각도 없이 집요하고 게걸스럽게 젖꼭지를 빨아댄다. 끝내 울음을 토한 아이작이 허리를 둥글게 굽혔다. 일순 사타구니가 다시금 축축하게 젖어 들며 정액 특유의 비릿한 냄새 또한 코끝을 훅 찔렀다. 옷을 벗지도 못한 탓에 성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손도 대지 못했건만, 또다시 정액을 토한 거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작은 기운을 잃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필릭스가 그의 어깨를 도닥이며 제게 기대게 한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었지만 아이작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긴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알아차리지도 못했는데, 필릭스 역시 파정한 모양이었다. 배 속이 뜨끈하게 차는 느낌이 이제야 전해진다. 그러나 필릭스가 빨던 가슴이 욱신거리며 저릿한 감각이 사라지지도 않고 맴도는 탓에 아직 제 몸에 박혀있는 그의 성기를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젖꼭지 빠는 게 그렇게 좋았어? 언제부터 그렇게 예민해졌지?”

제게 매달리는 아이작의 등을 어루만지며 필릭스는 나른하게 물었다. 아이작은 대답 대신 입술을 씹으며 상념에 잠겼다. 필릭스가 뿌린 페로몬이 아직 가시질 않아 몸이 예민한 것도 분명 있긴 있었지만, 이건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손을 들어 가슴을 만지자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가슴과 젖꼭지가 아예 뾰족하게 선 것 같다. 유륜은 살짝 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 더 강했다. 가슴 전체가 뭉근하게 잡히며 잔뜩 신경이 곤두선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다. 탄탄한 가슴 근육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려니, 필릭스가 아이작의 뺨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너, 임신 한 거 아냐?”

“…농담합니까.”

아이작이 눈을 번득였다.

“아니면 말고.”

역시 농담이 맞았는지 필릭스는 키들거리며 웃었지만, 아이작은 그를 따라 웃지 못했다. 순간 머리를 스치듯 찜찜한 기운이 있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못했다. 걸리는 것도 있었다.

“지난번에 노팅…….”

아이작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필릭스가 ‘어?’ 하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두어 달 전에 노팅이 있긴 있었다. 처음 필릭스와 얼굴도 모른 채 몸을 섞었던 4년 전 그 날 이후, 지금껏 히트 사이클이 와도 싫다며 거부하던 노팅을, 필릭스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했던 날이 있었다. 미스터 펠리체, 즉 필릭스의 조부가 왔을 때, 그때, 그 일이 생기면서.

“음, 그때?”

필릭스는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아이작이 고개를 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요즘 피곤이 가시질 않았던 것도 같았다. 오한이 나기도 해서 몸살 기운인가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설마…….

“일단 씻어야겠습니다.”

언제 흥분해서 벌벌 떨었었냐는 듯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당장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무릎으로 소파를 짚고 허리를 일으키기가 무섭게 그의 구멍에서는 왈칵, 덩어리진 정액이 쏟아져 내린 탓이었다.

소름끼치는 감각을 견디기가 어려워 아이작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사지가 가늘게 떨리기도 해, 필릭스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은 채 낮게 신음했다. 지금껏 제대로 빼지도 않고 싸고 또 싸지른 탓에 내부에 고여있던 정액은 질릴 정도로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음, 조금 과했네. 빼 줄 테니까 그대로 있어.”

천연한 얼굴로 중얼거린 필릭스는 다물어지지도 않는 아이작의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벌리자 또다시 왈칵 쏟아진다. 내벽을 긁을 때는 그의 손을 타고 줄줄 떨어지기도 했다. 붉어진 눈가를 찡그리며 아이작은 짧게 호흡을 멈췄다.

“이런 것까지 야하다니까.”

민망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이어가면서도 필릭스는 즐겁다는 투다.

“얼른…….”

아이작이 견디지 못하고 재촉했다. 그러자 내부를 들쑤시던 필릭스는 그의 눈앞에서 뾰족하게 솟아있는 젖꼭지를 길게 혀로 핥았다. 조금 전 물고 빨았던 가슴의 반대쪽이었다. 그러나 이쪽도 마찬가지로 소름 끼칠 만큼 오싹해 아이작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전에 없던 감각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이하다. 조금 더, 의심이 짙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병원을 가봐야겠습니다.”

필릭스를 냉정하게 치워내며 아이작은 가늘게 떨리는 다리로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지러운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다니는 탓인지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금껏 잊고 있었는데, 뒤늦게 노팅했던 일이 떠오르자 더더욱 그랬다.

“맙소사 아이작, 지금 밤이야. 병원 다 닫았다고.”

어리둥절해진 필릭스가 사실을 알렸지만, 아이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레짝처럼 변한 불운의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벗어 던졌다.

“내일 아침 일찍 가려면 지금 좀 씻고 자야죠. 밤새 당신이랑 뒹굴었다간 또 시간을 놓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밤새 울릴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지금껏 몇 시간이 지나도록 빼지도 않고 싸질러댔지만), 나가버리려 하는 아이작을 붙든 필릭스는 양심은 갖다 버린 채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저만치 던져둔, 필릭스의 코스튬이었던 시커먼 로브를 매끈한 맴 몸 위에 두른 아이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흘끔, 커튼이 드리워진 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할로윈 파티도 이미 다 끝났을 거고…….”

절로 한숨이 푹푹 나오는 상황이었다. 벤자민도, 할로윈 파티도 끝까지 챙겨주지 못했는데 정신 놓고 필릭스와 뒹굴기나 하다니. 게다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반응까지 나타나자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파티는 토니가 알아서 마무리했을 거고, 벤자민은 어머님이 벌써 데려가서 재우고 있을 거야.”

여전히 양심도 없이 시큰둥하게 대꾸한 필릭스는 머리를 소파에 기댔다. 삐죽 입을 내민 모습이 삐져도 단단히 삐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겨 문을 벌컥 열었다. 머리가 눅눅해질 정도의 욕정과 흥분, 열기와 페로몬으로 가득 차 있던 방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덕분에 희뿌옇던 머릿속이 점차 맑아진다.

“만에 하나, 내일 병원에 가서 임신이라는 확정을 받기라도 하면…….”

밖으로 나서기 전, 아이작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소파에 기대고 있던 필릭스가 소스라치게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네가 임신이면, 모유가 나오기도 하나?”

왜 여직 그 생각을 못했지? 이제야 떠오른 생각에 필릭스는 눈을 번득이며 아이작의 가슴에 시선을 두었다. 벌써 음흉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일 정도라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당분간 섹스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유에 대한 대답 대신 청천벽력 같은 통보가 떨어졌고, 필릭스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말았다.

“아이작! 그런 게 어딨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화난 곰처럼 다가오는 그를 아이작은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당신이 자초한 일 아닙니까. 노팅도 당신이 했고, 임신도 당신이 시켰다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죠.”

“아니, 책임은 당연히 지는 건데, 그게 왜 섹스와 연관되는 거냐고?”

“아이를 원했으면 아이를 위한 책임도 있는 겁니다. 자세한 건 내일 의사에게 들어보자고요.”

냉담하게 말한 아이작은 쌩하니 몸을 돌렸다. 파티는 오래전에 끝났고, 일하던 사람들까지 전부 돌아가 텅 빈 저택의 거실을 가로지르는 아이작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빨려가듯 사라진다.

망연자실한 채 문 앞에 서 있는 필릭스만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아쉬움에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를 원한 것도 사실이고, 본의 아니게 노팅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만약 임신이 확실하면 노섹스라니, 대체 언제까지?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루라도 그를 안지 못하면 입에서 가시가…… 아니, 거시기에서 가시가 돋을 지경인데. 앞으로는 없다니? 다른 건 다 참아도 그건 못 참는다. 차라리 밥을 굶고 말지, 어떻게 아이작을 옆에 두고 안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저렇게 야해 빠진 내 오메가를!

“아이작! 얘기 좀 다시 해!”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필릭스는 사색이 된 얼굴로 부리나케 아이작이 사라진 어두운 거실로 뛰었다. 쿵쿵거리는 요란한 발소리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저택을 흔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금세 깊은 새벽의 저택은 다시금 고요로 뒤덮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즐거웠던 할로윈이 지난 다음 날, 11월이 시작된 첫 날에 저택은 기어코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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