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Track - P.S.
결혼 등록을 하게 된 날은 예상보다 한참이나 늦어진 어느 날이었는데, 미뤄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크리스토퍼라고 했던 보석상에게 주문한 다이아몬드와 반지, 그 외의 보석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늦게 도착한 데다가, 반지가 도착하고 나서는 잡다한 일이 줄줄이 이어졌고, 지난주에는 필릭스가 갑자기 출장을 가기도 했었다. 덕분에 결혼 등록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만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젯밤, 일주일 만에 사저로 돌아온 필릭스는 느닷없이 새벽에 눈을 번쩍 뜨더니 곁에서 자고 있는 아이작을 흔들어 깨웠다. 그의 얼굴은 단호한 결의에 차 있었다.
“아이작, 일어나 봐.”
아이작으로서는 대단히 유난한 새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든 필릭스 덕분에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밤새 헐떡이며 울어야 했는데, 이젠 반쯤 기절해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마저 억지로 깨우니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아이작은 무겁게 감겨있는 눈을 힘겹게 깜박이며 나른한 숨을 흘렸다. 아침잠도 많은 남자가 새벽부터 대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러나 필릭스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안 되겠어. 결혼하러 가자.”
뚱딴지같은 그 한마디에 넋이 나간 아이작은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잠은 덜 깬 데다가 머리는 멍했으니 제대로 된 생각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필릭스는 굳은 결심을 꺾지 않고 아이작을 들볶아 기어이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 말았다.
그 후,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간단히 아침을 먹은 그들은 밖으로 나섰다.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기저기가 삐걱거리는 데다가,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노곤하기만 한데 다짜고짜 결혼하자며 끌려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누가 필릭스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필릭스는 기어코 칼같이 아침 9시에 도착해, 관공서가 오픈하자마자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 곁에는 환한 얼굴의 제시카 파커와 꼬마 신사처럼 귀여운 정장을 입고 있는 벤자민이 그녀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물론 노아도 오긴 왔다. 다만 필릭스보다 아침잠이 더 많으면 많았지 절대 뒤지지 않는 그는, 노랗게 뜬 얼굴을 하고 시체처럼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일 뿐이었다. 더불어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주워입고 왔다고 알려주듯 매치 되지 않는 옷차림에 필릭스의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꿋꿋하기만 했다.
그 속에서 필릭스는 홀로 신중하게 결혼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늘 오만한 태도와 느긋함을 유지하는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에 비해 지난 새벽까지 난잡하게 몸을 섞은 탓에 노곤하기만 한 아이작은 그의 곁에 서서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진중하게 모니터를 두들기는 필릭스의 손끝이 단정했다. 손톱을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깔끔하게 정리된 모양새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아이작은 곧, 자신이 지나치게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러다가 필릭스가 알아차리면 딴청 한다고 나무랄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 본인의 결혼신청을 작성하는 건데도 이토록 집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지경이었다.
마치 자신의 결혼신청이 아니라 낯선 타인을 보는 것만 같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기 때문인가. 의문을 떠올릴 무렵이었다. 어느새 서류 작성이 끝났는지 필릭스가 눈을 맞추며 해사하게 웃었다.
“간단하네?”
아이작은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사이 서류가 접수되고 직원 중 하나가 따라오라며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넓지 않은 방의 벽 아래에는 하객들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와, 자그마한 단상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떨떨하게 주위를 돌아보고 있으려니 간단히 가운을 입고 단상 앞에 선 직원이 간략한 결혼식을 이어갔다.
서로의 반려로 맞이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반지를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마지막으로 증인이 된 직원이 둘의 결혼을 인정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식은 끝이 났다. 생각보다도 더, 지나치게 간단하고 빠른 결혼식이었다.
십분 남짓했던 짧은 결혼을 지켜보던 세 명의 조촐한 하객이자 가족들은 밝은 얼굴로 축하해주었고, 벤자민은 아이작과 필릭스에게 작은 꽃다발을 건네주기도 했다. 물론 제시카 파커가 준비한 것이긴 했지만, 꽃은 예뻤고 결혼이 뭔지도 모르면서 마냥 들떠있는 벤자민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여전히 정신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서 일렁였다. 이제 정말 법적으로 필릭스와 파트너가 된 건가. 아직 실감조차 나질 않아서인지 머릿속으로 의문이 떠다니기도 한다.
필릭스 펠리체가 앞으로 남은 평생을 같이할 파트너라니. 물론 각인도 하고 같이 살고 있기도 했지만, 서류등록을 마치고 결혼증명서를 손에 쥐고 있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아이작은 무의식적으로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이런 자신의 심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필릭스가 눈을 맞춰왔다. 새파란 바다 같은 동공과 시선을 얽히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이 남자가, 최우성 알파이자 악명 높은 무기상인 필릭스 펠리체가 자신의 반려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와닿는다.
“그러고 보니 내 파트너에게 정식으로 키스도 못 했잖아?”
그의 프러시안 블루의 동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홀린 듯 바라보고 있기만 하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필릭스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시원한 코오롱 향이 섞인 익숙한 체취가 코끝을 간질인다. 아이작은 필릭스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눈을 접었다.
“그러게요.”
작게 속삭이는 것과 동시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둘은 가볍고 감미로운 키스를 나눴다. 다시금 주위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고, 아이작은 아쉬움을 남기며 고개를 들었다.
“Love you.”
그와 동시에 아주 작고 작은 고백이 환호하는 소리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이작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그렇습니다.”
다정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이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손을 꽉 쥐고 그제야 오피스를 빠져나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마저도 행복했다. 부드러운 미풍이 부는 살짝 더운 날씨마저 마냥 기분 좋게 느껴지기만 한다.
“아, 필릭스.”
뒤따라오던 노아가 불현듯 필릭스를 불러 세운 것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한가운데서였다.
생각보다 감정이 풍부한 노아는 그들의 결혼식 내내 남몰래 눈물을 훌쩍이다가도 열렬히 박수치며 축하를 해주었는데, 그들이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필릭스를 불러 세운 거다. 멋쩍어하는 표정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왜?”
방금 결혼했다고 과시라도 하고 싶은지 아이작의 손을 놓지도 않고 꼭 쥐고 있던 필릭스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노아는 음, 목을 울리며 입가를 쓸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냐.”
“뭐가? 너 또 무슨 사고 쳤어?”
“아니. 할아버지가 당장 오래.”
겸연쩍은 낯으로 노아는 필릭스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필릭스는 대뜸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노아의 말대로 필릭스의 조부는 간략한 문자를 보내왔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당장 오라는 명령이었다. 물론 아이작과 벤자민도 함께.
“노아….”
문자를 읽은 필릭스가 대뜸 눈을 치켜뜨고 노아를 노려보았다.
“그게…. 동영상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
그는 시선을 회피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제 잘못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기분 좋게 결혼 등록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칼부림이라도 낼 것 같은 날 선 분위기에 아이작은 급히 필릭스의 팔을 붙들었다.
“인사드리러 가봐야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언제까지 말씀을 미루려고 했습니까?”
조용히 따져 묻자 필릭스는 곤란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했어.”
“저와 벤자민을 숨기고 싶었습니까?”
“설마!”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작은 무심히 허를 찔렀다. 아니나 다를까, 필릭스는 펄쩍 뛰며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주차장을 향해 먼저 걸어가던 제시카 파커 역시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보았고, 벤자민은 그녀의 손을 흔들며 아이작과 필릭스를 번갈아 보았다.
본의 아니게 가족들 앞에서 말다툼한 모양이 되었다는 생각에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흘렸다. 차라리 우선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필릭스는 다급히 아이작의 손을 움켜쥔 채 말문을 열었다.
“아이작.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할아버지 성격에 미리 말씀드렸다간 화려함과 사치의 극치를 맛볼 수 있는 결혼식을 당장 준비할 것 같아서 미뤘던 것뿐이지.”
“…….”
“게다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다 모아놓을 건 뻔하고, 그렇게 되면 기간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거고, 결혼식을 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래서 먼저 결혼을 해버리려고 했을 뿐이야. 난 한시가 급했으니까.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취향까지 전부 맞춰주며 기다릴 여유가 없었으니까.”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투로 필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맞는 말이라며 옆에서 노아가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노아 씨가 잘 보여드린 것 같군요. 이른 시일 내로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하세요.”
“…멀어서.”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자꾸 뒤로 미루는 어린아이처럼 필릭스는 이번에도 희미하게 변명을 내뱉는다. 시선마저 회피하는 모습이, 말 그대로 철없는 어린아이 같기만 하다. 평소 그에게서 볼 수 있는 위압감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르겠다.
아이작은 투박한 그의 손을 꾸욱 눌러 잡았다. 조금 아플 정도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하기 싫은 일일수록 먼저 끝내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달래듯 담담히 말하자, 그는 긴 한숨을 흘렸다.
“넌, 정말 괜찮겠어?”
“뭐가요?”
“할아버지가 조금, 음…. 성격이….”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싶었는지 필릭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사이, 옆에서 노아가 ‘괴팍하시지, 몹시’ -라고 잽싸게 덧붙인다. 필릭스의 눈썹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상관없습니다. 지금껏 군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해왔는데, 그중에도 괴팍한 사람들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간단히 인사만 드리고 오죠.”
아이작의 결심에 필릭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홀가분해진 아이작이 그의 손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담담히 말하는 아이작의 목소리에 위안이 되었는지 필릭스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 네 말이 맞군.”
별일이야 있겠어.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다시는 자신의 가족을 위협할만한 위험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두지도 않을 테니까. 이렇게나 행복한 지금 이 순간처럼, 앞으로도 변함없이 손을 마주 잡고 걸어 나갈 수 있겠지. 앞으로도 또 앞으로도 오래도록.
달콤한 시간을 꿈꾸며 필릭스는 아이작과 함께 걸었다. 언제나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길을 걷게 될 파트너에게 사랑한다고 다시 한번 속삭이면서 눈부신 햇살 아래로 나아갔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