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4/16)

Wonderful day

“토니, 놀라지 말고 들어.”

필릭스가 토니를 서재로 부른 것은 그가 샌디에고의 저택으로 돌아오고 난 이튿날이었다, 물론 필릭스 혼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콜과의 싸움으로 상처를 입었던 아이작과 사건에 휘말려 충격을 받았던 벤자민, 그리고 제시카 파커까지 병원에서 충분한 치료를 받고 퇴원하자마자 필릭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전부 저택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따라서 그들이 도착한 당일에는 여러모로 분주하게 시간이 지나갔고, 토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그럴 경황이 없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필릭스는 필릭스대로, 토니는 토니대로 어수선한 저택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후가 넘은 지금에서야 필릭스는 겨우 토니를 불렀다.

고즈넉한 오후의 서재는 고요했다. 변함없이 커다란 창밖으로는 맑은 하늘 아래로 펼쳐진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길어진 햇살은 방 안을 환하게 비춘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그 어떤 문제도 없을 것처럼 안온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에 선 필릭스는 짐짓 무거운 표정으로 토니를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토니는 치솟는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웬만한 일이 있어도 농담처럼 가볍게 넘겨버리기 일쑤인 필릭스가 저토록 묵직하게 분위기를 잡으니 말을 듣기도 전에 벌써 어깨가 경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은 말이야….”

“말씀하십시오.”

아이작과 벤자민까지 무사히 데려온 후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사람 긴장하게 만들며 뜸을 들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식은땀이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토니가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목구멍 아래로 마른침을 삼켰을 무렵이었다. 필릭스는 긴장한 듯 제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며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벤자민은 내 친자야.”

그러나 몹시도 진지하게 던져진 필릭스의 고백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토니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말을 잃어버릴 지경이었지만, 눈치 없는 필릭스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갈 따름이다.

“아이작이, 내가 지난 4년간 찾아 헤매던 그 썩을-, 흠, 그 오메가였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내 애를 혼자 낳아서 키웠다잖아?! 세상에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바로 곁에 있었는데 나만 몰랐다니!”

“…….”

“놀랐지? 놀랐겠지 물론. 나도 놀라서 자빠질 뻔했으니, 토니 너도 나 못지않게 놀라고 당황스러울 거라고는 생각해. 하지만 그런 줄 알고 받아들여.”

빠르게 말을 마친 필릭스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과 태도로 토니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나 토니는 되레 울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당신 빼고 세상 사람 다 눈치채고 의심하고 있었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는 탓이다.

필릭스 펠리체가 아무리 눈치 없고 눈썰미 없는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미니미라도 되는 것처럼 빼 박은 벤자민이 제 아들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아이작이 4년간 찾아 헤매던 오메가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니. 숱하게 뒹굴었으면서도 같은 인물이라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다니.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 필릭스 또한 속으로는 의심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필릭스 펠리체는 어디 안 갔나 보다. 자신의 기대를 배신하고 박살 내는 그를 보니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군요. 축하합니다.”

그렇다고 제 심경을 함부로 내뱉지도 못할 노릇이 아닌가. 목구멍에 걸리도록 끓어오르는 분과 눈물을 삼키며 토니는 꾸역꾸역 말을 흘렸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콧등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대기도 했다.

벤자민이 그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려고 몰래 유전자검사를 시도하다가 아이작에게 걸려 된통 혼나고 하루 꼬박 근육통으로 앓아누워있던 시간을 생각하자 눈가가 시큰거린다.

“왜 울고 그래? 그래서 미리 말했잖아. 너무 놀라지 말라고.”

그러나 토니의 깊은 심정을 알 길이 없는 필릭스는 쯧쯧 혀를 찰 뿐이었다. 이쯤 되니 토니는 외려 기운이 빠져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어졌다. 어쩌겠는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안하무인에 남의 눈치 볼 일 없이 마이웨이를 달려온 남자를 보스로 모시고 있는 제 탓인 것을.

“그래서 단번에 각인까지 하셨군요.”

끝도 없이 치미는 먹먹한 감정을 가까스로 갈무리한 토니가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그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은 채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아이작이 오메가라는 걸 진즉 알았다면 당장 했을 텐데. 시간 낭비를 했지 뭐야.”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필릭스는 곧 탁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메이드가 가져온 따뜻한 차를 손수 따르며 ‘한 잔 줄까?’하고 태연히 묻는다. 그러나 토니는 다시금 얼빠진 낯이 되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메가인 걸 알았으면 당장 각인했을지도 모른다고? 각인이니 결혼이니 딱 질색하던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예전부터 아이작에게 홀딱 반해있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토록 질색하던 각인까지 앞뒤 가리지 않고 했을 정도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토니는 문득, 며칠 전 뜬금없이 아이작과 각인을 마치고 보란 듯이 목덜미에 표식까지 달고 온 필릭스를 떠올렸다. 그를 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었다. 토니뿐 아니라 필릭스를 어지간히 알고 있는 수하들은 전부 눈을 토끼처럼 뜨고 표식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 정도다.

하나같이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뒤에서는 벤자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이해가 가질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결혼과 각인을 질색하는 것처럼 아이 또한 절대 만들 생각이 없다며 철저하게 관리하던 필릭스가 아닌가.

그런 남자가 벤자민 때문에 아이작과 대뜸 각인까지 했다니, 말이 안 된다. 분명 각인을 새겨야 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필릭스는 단순히 아이작에게 홀딱 빠져서 앞뒤 가릴 것 없이 각인한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아니, 분명 그런 것이리라.

다른 이도 아닌 필릭스 펠리체가 저런 팔불출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기이한 감상만이 떠다닌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여름이 성큼 다가온 더운 날, 맥주나 리쿼도 아닌 평범한 차를 어울리지도 않게 홀짝이는 필릭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토니가 말문을 열었다.

“뭐가?”

“아이작 씨 말입니다.”

“아이작이 그렇게 좋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필릭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토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짧은 한숨을 흘렸다. 멍청한 질문이 맞긴 맞았다.

“이거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반려로군요.”

토니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비로소 확실해진 결론을 중얼거렸다.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필릭스는 제 짝을 찾은 거다. 지난 4년간 그토록 이를 갈던 오메가가 그의 반려였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했지만, 이게 다 인연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상념에 빠져 있으려니 차를 홀짝이던 필릭스가 한쪽 눈썹을 삐죽 올린다. 무슨 헛소리냐고 퉁명스레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듣기 나쁘진 않았는지 날카로웠던 눈매는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보석 세공사나 보석상 아무나 좋으니까 당장 찾아서 데려와.”

뜬금없이 던져진 필릭스의 요구에 토니는 눈을 번쩍 들었다.

“보석상이요?”

“눈치 없기는. 각인까지 했으니 당장 결혼해야 할 것 아냐. 결혼반지 맞추게 최대한 빨리, 최상급으로 가져올 수 있는 놈으로 찾아서 데려와. 아이작의 성격상 화려한 건 싫어할 테니, 심플한 걸로 골라오라고 해.”

“…….”

“아, 대신 다이아몬드는 꼭 하나 들어갈 거야. 다이아몬드도 내가 직접 고르고 주문할 거니까 찾아올 수 있는 놈으로 데려와.”

빠르게 주문한 필릭스는 반도 채 마시지 않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 결혼반지로군요…….”

토니는 이번에도 멍하니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따라 할 뿐이었다. 바뀌어도 180도로 바뀐 필릭스를 따라가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지워지질 않는다.

“그러면 결혼식장은-….”

갑자기 결혼까지 한다니, 얼마나 일이 많고 복잡하려나.

“필요 없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그리던 토니는 그러나 곧 들려온 필릭스의 간단명료한 답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필릭스를 멀뚱히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의아함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필요 없다니?

“아이작이 결혼식 따위 필요 없다고 했거든. 카운티 관공서(County Clerk)에 가서 간단하게 할 거다.”

그러나 필릭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 관공서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관공서라니요?! 차라리 최소한으로나마 결혼식을 하는 편이-.”

“됐어. 귀찮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자신의 결혼에 대해 말하는 필릭스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토니로서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기실 필릭스 펠리체라면 누구보다도 성대하게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대 마피아의 간부를 조부로 뒀을 뿐 아니라, 필릭스 본인만으로도 군부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거대 무기상이었으니까.

그 정도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필릭스의 결혼이라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쩌면 어마어마한 사교 파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싹 무시하고 관공서에서 등록만 하겠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물론, 관공서에서 결혼하는 이들은 많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커플들은 결혼 등록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직접 간략하게 결혼식까지 해버린다.

카운티 관공서는 결혼이나 이혼 혹은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도맡아서 하는 자그마한 오피스인데, 코딱지만 한 오피스 옆에는 대여섯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다. 간략하게 결혼을 진행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었다.

주례, 라고 할 것도 없이 증인이 될 수 있는 시청직원이 간단히 결혼 진행을 하고, 당사자 둘은 결혼서약을 한 후 반지를 주고받으면 끝난다. 말 그대로 결혼서약만 하는 약식 결혼이었다. 그럼에도 결혼식은 결혼식인지라, 당사자들은 웨딩드레스까지 갖춰 입고 소수의 하객을 부르기도 했다.

이렇듯 간편하면서도 간단한 결혼은, 시간이 없거나, 돈이 없거나 혹은 여러 가지 여건상 간략하게 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편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필릭스 펠리체의 결혼이 오피스에서 등록하며 함께 치르는 약식 결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하객은-.”

토니는 파리해진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하객은 무슨 얼어 죽을. 아이작하고 나만 갈 거니까 허튼 소문 흘리지 마.”

“…….”

“아니지, 미세스 파커와 벤자민은 동행할 예정이고, 노아가 따라오겠다며 떼를 쓰던데….”

생각보다 인원이 많았는지 필릭스는 ‘흐음’ 콧소리를 흘리며 까칠해진 턱을 매만졌다.

“펠리체 씨에겐 알리지 않으실 겁니까?”

토니는 넌지시 그의 조부에 관해 물었다. 그제야 필릭스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에겐 나중에 알릴 거야. 식이 끝나고 난 다음에.”

“아마, 노하실 겁니다.”

총애하는 손자인 필릭스의 결혼식을 보는 게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양반에게 결혼 등록만 하고 통보할 거라니, 대체 무슨 경을 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허튼소리 하지 말고 입 다물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러나 필릭스는 지금까지 살면서 대부분 그러했듯, 제멋대로 결정을 내렸을 뿐이었다. 토니는 짤막한 한숨을 흘렸다. 앞으로 펠리체 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토니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필릭스는 식은 차를 단숨에 비우고 책상으로 향했다. 아이작과 관련해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 버린 탓에 미뤄두었던 일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 * *

2층의 복도를 돌자마자 눈앞으로 보이는 광경에 필릭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하게 벤자민의 방 앞이었다. 반쯤 열린 방문 앞에는 웬 정신 나간 놈이 방 안을 훔쳐보고 있었는데, 그 정신 나간 놈이 다름 아닌 제 사촌 노아였으니 말이다.

소리 없이 그의 뒤로 다가간 필릭스는 제 사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노아는 필릭스가 다가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아지경에 빠져 방 안을 들여다볼 뿐이다.

이 미친놈이 진짜.

속으로 이를 갈며 필릭스는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밖으로 좀 나와 보라고 아무리 말해도 컴퓨터와 온갖 기계로 둘러 쌓여있는 제 작업실에서 붙박이 귀신마냥 눌어붙어 나오질 않는 놈이 대체 여기까진 왜 올라와 저러고 있는 건지.

게다가 그 꼬락서니는 말 그대로 그를 미친놈으로 보이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틀어 올리고, 마른 팔다리를 드러낸 반바지와 헐렁한 박스티에 슬리퍼를 신은 채 벤자민의 방 안을 훔쳐보고 있는 꼴은 변태가 따로 없다. 멀쩡하게 쳐다보는 게 아니라 간간이 훌쩍이기까지 하니 더더욱 그랬다.

제대로 꾸미면 예쁘장하게 보이기도 할 최우성 오메가 놈이 궁색한 행색을 하고 미친놈처럼 남의 방문을, 그것도 제 아들 방 앞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당연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훌쩍이는 노아를 노려보던 필릭스는 성질을 내려 입을 열었다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벤자민의 방으로 눈길을 두었다. 그 순간, 화를 내려던 말문이 도로 닫히고 말았다.

미키마우스로 꾸며진 방 가운데에는 빨간 자동차 모양의 침대가 있었는데, 그 위에 곤히 잠든 벤자민과 아이를 등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아이작이 있었다. 늦은 오후에 잠깐 낮잠이 든 모양이었다.

길게 드리워진 햇살 아래에서 평화롭게 잠이 든 아이작과 벤자민의 모습에 절로 입술 끝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가슴 안쪽을 간질거리게 하는 광경이기도 했다.

필릭스는 노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다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옆에서 허리를 반쯤 굽히고 안을 들여다보는 노아의 훌쩍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아를 돌아보는 눈초리는 다시금 매서워졌고, 미간의 골은 깊이 접혔다.

“너, 지금 뭐 하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제야 노아가 고개를 들고 필릭스를 향했다. 놀란 기색도 없는 표정으로 보아 필릭스가 제 뒤에 있다는 걸 진즉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씨발…… 천사가 따로 없어. 흑, 어떻게 악마 같은 네놈 아들이 저렇게 예쁠 수 있는 거야? 어디서 주워왔…… 냐고 하기엔 생긴 게 똑같으니 할 말이 없지만, 암튼 내 조카가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노아의 투정은 어이가 없었다.

“네놈 성격이 개차반이긴 해도 잘난 외모는 인정한다, 진짜. 너랑 똑같이 생긴 내 조카가 저렇게 예쁠 수 있다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잖아. 제발 너처럼 막돼먹은 놈으로 자라진 말아야 할 텐데. 오늘부터 매일같이 기도할 거야!”

훌쩍거리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노아를 노려보는 필릭스의 표정은 점점 더 험하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그래 봤자 이미 세 살배기 벤자민에게 푹 빠진 노아는 필릭스에게서 눈을 돌려 단잠에 빠진 아이를 한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한 대 쥐어팰까,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던 필릭스는 짧게 한숨을 흘렸다. 그리곤 꽉 움켜쥔 주먹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나른한 오수에 빠져있는 모자가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울컥 짜증이 일었던 마음을 진정시키는 광경이었다.

“……예쁘긴 하지.”

필릭스가 무의식적으로 희미한 혼잣말을 흘렸을 때였다.

“흥, 네놈도 눈이 있긴 있었나 보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노아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필릭스는 노아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이 아이작과 벤자민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입술 위로 미소가 절로 번진다.

밝은 금색의 머리칼을 흩트린 채 입을 반쯤 벌리고 쌕쌕거리며 자는 벤자민도 귀엽긴 했지만, 역시나 제 눈길을 사로잡는 건 아이작이었다. 예쁘다고 혼잣말을 흘린 것 또한 아이작을 두고 한 말임을 노아는 알지 못했다.

아이작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 그대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의 밑에서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며 헐떡일 때와는 천지 차이로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잠들어 있을 뿐이지만, 그런 모습마저 사타구니에 피가 몰리게 한다.

미치겠네.

문가에 기대선 필릭스가 홀린 듯 아이작을 쳐다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벤자민이 불현듯 반짝 눈을 들었다. 아직 졸음이 가득한 푸른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돌아보는 아이는 인형처럼 어여쁘기만 하다.

“아, 깼다, 깼어! 흐읍, 저건 대체 누구 조카냐. 정말이지 예뻐 죽겠네!”

노아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또 꺽꺽거렸다. 저렇게 귀엽고 예뻐도 되냐며 발을 구르는 놈의 등짝을 필릭스는 기어코 한 대 후려쳤다. 발끈한 노아는 가자미눈을 하고 필릭스를 노려봤지만, 금세 벤자민에게 손을 흔들며 팔불출같이 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 봤자 벤자민은 우쭈쭈거리며 손짓하는 노아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다.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인지, 혹은 겨우 몇 번 마주쳤을 뿐인 노아가 아직 낯선 건지, 아이는 섣불리 다가오지 않고 오도카니 침대 위에 앉은 채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자 노아는 비장의 무기를 불쑥 꺼내 들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주머니에서 커다란 막대사탕을 주머니에서 쑥 뽑더니 국기라도 흔드는 것처럼 힘차게 흔드는 게 아닌가. 그의 손에 쥐어진 사탕을 알아차린 벤자민은 그제야 혹한 얼굴로 천천히 침대를 내려와 노아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사탕이 궁금해서 다가오긴 했지만, 가까이 가는 건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 했는지 벤자민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필릭스를 올려봤다. 노아에게 가까이 가도 되는지, 사탕을 받아도 되는지 눈으로 묻는 아이에게 필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삼촌이잖아.”

동시에 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노아가 녹아날 듯한 목소리로 꾀며 눈웃음을 쳤다. 외모 하나는 우수한 집안인지라, 예쁘장한 노아가 생글거리며 웃자 아이는 긴장을 풀고 동그란 눈으로 그를 담는다.

“삼촌?”

어눌한 발음으로 따라 하는 아이의 앞에서 노아는 다시 한번 꺽꺽거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탕을 내밀었다. 벤자민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커다란 막대사탕을 쥐더니 눈을 크게 떴다.

‘사탕…….’하고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벤자민의 하얀 뺨에는 어느새 홍조까지 일었다. 커다란 사탕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벤자민, 사탕 좋아하니?”

노아가 묻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삼촌이 사탕 한 상자 사주마! 사탕뿐 아니라 뭔들 못 사줄까? 또 뭐 좋아하니? 응?”

‘사탕 한 박스라니…, 이 썩어’라고 필릭스가 투덜거렸지만 노아는 못 들은 척하며 눈을 번득일 따름이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기세였다. 그러자 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벤자민이 고개를 기울이며 ‘마알’하고 느릿하게 답했다.

“말? 말이라고 했니? 젠장, 마구간 하나 통째로 사야지, 안 되겠네! 내 조카가 말이 좋다는데!”

“이미 사줬으니까 유난 좀 그만 떨어.”

“이미 사줬다고?! 아냐, 그래 봤자 필릭스, 네 거지 같은 안목으로 또 거지 같은 걸 주워 왔겠지! 삼촌이 더 좋은 명품 말로 사주마! 가자!”

시끄러우니 닥치라고 말하려던 필릭스는 순간 애 앞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올까 봐 제 입을 꾹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사탕과 말로 벤자민을 꼬드긴 노아는 아이의 손을 꼭 움켜쥐고 복도를 걸었다.

낯을 잘 가리지 않는 편인 벤자민은 어느새 신난다며 노아를 따라나섰지만, 어쩐지 그 모양새가 순진한 아이를 사탕으로 꼬드긴 유괴범처럼 보여 필릭스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탕을 준다고 아무나 따라가선 절대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그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필릭스는 복도가 고요하게 가라앉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미키마우스로 꾸며진 방, 벤자민이 빠져나간 침대 위에서 꼼짝 않고 누워있던 아이작은 어느새 눈을 들고 필릭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새까만 흑요석 같은 동공과 시선이 얽혔다. 필릭스는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이 소란이 있었는데 잠에 빠져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잠이 들기나 했을까.

“저러다 버릇 나빠질까 걱정됩니다.”

아이작은 걱정스러운 투로 중얼거렸다.

노아뿐 아니라, 시커먼 장정들만 우글거리던 집안에 인형처럼 귀엽고 자그마한 아이가 왔다 갔다 하니 다들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총상을 입고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잭마저 벤자민을 보겠다고 절뚝거리며 나다니니 말 다 했지.

“겨우 저 정도로 버릇이 나빠질까. 벤자민이 마땅히 받을 애정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만 나와.”

그러나 문제없다며 일축한 필릭스는 문가에 등을 기댄 채 손끝을 까닥였다. 벤자민의 침대 위에 나른하게 누워있던 아이작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벤자민과 같이 자려고 했는데, 틈을 주질 않는군요.”

담담하게 중얼거린 아이작이 필릭스에게 다가왔고, 필릭스는 제 앞에 선 아이작의 살짝 엉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잤네.”

벌써 이곳으로 온 지도 이틀째였지만, 벤자민은 당연하다는 듯 할머니와 함께 잠을 잤다. 모처럼 함께 있게 된 아이작이 하루만 같이 자자고 달래도 벤자민은 완강했다.

아빠인 아이작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아이작과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낸 벤자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하면서도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으레 할머니를 찾았다. 그것은 아이에겐 당연한 일과였고 바뀌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 개월에 한 번씩 거처를 옮겨 다녀야만 했었다. 낯선 환경은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할머니가 불안해하는 벤자민을 달래며 재우다 보니 이제는 으레 할머니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거다.

이제는 상황이 정리되어 마음 놓고 벤자민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아이를 곁에서 재우며 잠들 수도 있었지만, 벤자민은 할머니의 곁에서 자기만을 고집했다. 그런 아이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내심 서운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작은 낮잠이라도 같이 자보려 매일 아이의 곁에 누웠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 살이 넘은 벤자민은 벌써 낮잠을 길게 자질 않는다. 늘 자고 싶지 않다고 도망 다녔고, 어떻게든 낮잠을 재우면 금세 깨기 일쑤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질 않는 법이지만, 벤자민이 아기였던 순간을 놓쳐버린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은 즐기지도 만끽하지도 못한 채 눈 깜박할 사이 지나가고 말았다. 콜에게 쫓기는 상황이었기에 아기였던 벤자민과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그사이 아이는 이미 이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벤자민이 태어나서 자란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내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그러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뺨을 손끝으로 쓸며 쓰게 웃는다. 아, 희미한 소리를 흘린 아이작이 필릭스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그의 표정엔 곤혹이 떠다녔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미 지나간 걸 어쩔 수는 없잖아? 대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시간에는 아쉬운 만큼 더 충실하면 되겠지.”

“필릭스.”

“이제라도 너와 벤자민을 찾아서 다행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다정하게 속삭이며 고개를 숙여오는 필릭스의 희미한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옅은 페로몬이 섞여 있는 체취에 잠시 정신을 빼앗긴 순간 필릭스는 춥,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눈 깜박할 시간에 지나가 버린 베이비 키스였다. 그러나 저릿한 전율은 여지없이 퍼져나간다.

“그리고 생각해 봐. 벤자민이 얼마나 효자인지.”

“으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젖은 입술을 핥으며 속삭이자 어딘지 모를 곳이 간지럽기도 했다. 필릭스는 또다시 살짝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말을 이었다.

“벤자민이 당장 너와 자겠다고 하면, 나는 독수공방해야 하는 처지가 되잖아? 내가 너 없이 혼자 자면 얼마나 쓸쓸하겠어. 안 그래?”

“이런…….”

“효자지, 암, 효자고 말고. 그러니까 넌, 널 더 필요로 하는 내 옆에서 자면 돼. 내가 벤자민보다 몇 배는 더 널 필요로 하거든.”

나른하게 중얼거린 필릭스는 아이작이 반박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단숨에 그의 입술을 삼켰다. 지금까지는 아이들 장난이었다는 듯, 턱이 빠듯해질 정도로 잡아 벌리고 거침없이 살덩이를 밀어 넣는다.

입안의 점막을 녹여 먹기라도 하려는지 샅샅이 훑는 혀의 움직임에 순식간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뒤섞이다 못해 녹아나는 것 같은 타액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아이작은 팔을 뻗어 필릭스의 목을 감았다. 나직한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으, 으응-….”

한 번 각인이 되면 타인의 페로몬은 맡지도 못하고 각인된 상대의 페로몬에 중독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었다. 키스 한 번에 속절없이 몸이 달아오르는 자신을 보면 분명 그랬다.

“아이작,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부추기면 곤란해.”

바닥으로 치닫는 인내심을 끌어올린 것은 필릭스였다. 아이작은 몽롱해진 눈을 들고 그의 짙푸른 동공을 응시했다. 자신을 담고 있는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 금세 빠져들게 만든다.

“먼저 시작한 건 당신입니다.”

“뭐, 그렇긴 하지만…… 너만 보면 절로 손이 움직이는 걸 어쩌겠어.”

“변명이 궁색하군요.”

“변명이라니, 내 오메가가 지나치게 야한 탓이지. 게다가 우리 아직 신혼이잖아?”

짐짓 불만스러운 투로 따져봤자 필릭스는 여유롭게 대꾸할 뿐이었다.

“신혼이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민망해지는 단어에 아이작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뻔뻔하기로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필릭스는 외려 아이작의 귓불을 입술로 물며 속삭였다.

“신혼이 아니면 뭐야, 각인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파릇파릇한 신혼이잖아.”

“아…….”

“게다가 신혼이면 밤낮 가리지 않고 짐승처럼 뒹굴어야 마땅한 거고.”

잘근잘근 귓불을 씹다가 혀끝으로 핥는 그의 외설적인 움직임에 아이작은 참을 수 없는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귓가에 닿는 필릭스의 습한 숨결만으로도 꼬리뼈 부근이 반사적으로 저릿저릿하게 울린다.

거짓 없이 말하자면, 해가 아직 중천에 있건 말건 이대로 그를 끌고 침실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굴뚝같이 일었다. 둘만 있으면 물론 그렇게 하고도 남았겠지만…….

“…부추기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저를 부추기는 건 누굽니까.”

살짝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불평하듯 쏘아보자, 필릭스는 그제야 허리를 곧추세우고 멋쩍게 웃는다.

“그러게. 정말이지 네가 곁에 있기만 하면 자제심이 없어져서 탈이라니까.”

아이작의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필릭스는 눈을 접었다. 해사한 그의 미소에 새삼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또 홀려버린 건지도 모른다. 더 이상 따질 의욕마저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사람을 이렇게나 약하게 만들다니. 이거야말로 반칙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필릭스는 덥석 아이작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한쪽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손은 아이작의 손목을 꽉 붙든 채 걷는 그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따라와. 보여줄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다른 짓만 하게 됐네.”

“보여줄 거라니요? 뭔지 미리 알 수 있는 겁니까?”

“가 보면 알아.”

질문을 던지면서도 답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떠올렸던 아이작은 더는 묻지 않고 순순히 그를 따랐다.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놓고 깜짝 놀라기를 기대하는 악동 같은 모습이 천진하게 느껴진다. 제법 귀엽기까지 하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어차피 가면 알 것 아닌가.

“도착했나 보군.”

얼마 후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응접실 앞이었다. 주로 외부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응접실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손님이라도 왔나, 의아해할 무렵 필릭스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응접실 안에는 토니와 낯선 중년의 사내가 있었는데, 그는 필릭스와 아이작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터. 보석상인 크리스토퍼입니다.”

사내의 행색은 흠잡을 곳 없이 깔끔했고, 인사하는 태도와 표정 그리고 엑센트까지 나무랄 데 없었다. 부유층을 상대하는 상인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보석상이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필릭스를 돌아봤지만, 그는 느긋하게 보석상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간략한 소개를 마친 크리스토퍼는 필릭스의 앞으로 총 세 개의 슈트케이스를 펼쳐 보였다.

펼쳐진 각각의 슈트케이스 내부는 검은색 벨벳이 고급스럽게 깔려있었다. 한쪽 케이스 위에는 온갖 종류의 반지와 보석이 세팅되어 있었고, 또 다른 슈트케이스에는 여성용 목걸이와 팔찌, 반지 세트가 있다. 다른 하나에는 자그마한 팔찌 및 여러 가지 잡다한 액세서리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세련된 디자인에 최상급의 보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함하게 했다.

이런 슈트케이스를 세 개나 들고 오다니. 필릭스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라고 내심 생각하면서도 그의 가드는 어디에 있을지 기계적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보석상이 이 정도의 물건을 가져오면서 가볍게 산책하듯 혼자 오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이작,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반지부터 봐.”

그러자 눈에 띄게 고개를 돌린 것도 아니고 시선만 살짝 돌렸을 뿐인데도 필릭스는 아이작의 기색을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주의를 준다. 평소에는 아무리 눈치를 줘도 알아듣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남자는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빠르다.

“설마 결혼반지를 맞추려는 겁니까?”

아이작은 그제야 수십 개의 반지가 죽 나열되어있는 케이스에 시선을 두며 무심히 물었다.

“당연하지. 반지도 없이 프러포즈했다고 타박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잊지도 않고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이작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늘 생각하지만, 참 뒤끝 한번 긴 남자다.

“음, 그렇다면 끼고 있기 편한 디자인이 좋겠습니다. 지나치게 크지도 무겁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종류로요. 한 번 끼면 빼지 않을 것 같으니,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거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담담히 설명하던 아이작은 빤히 바라보는 필릭스의 시선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 짙었다. 왜, 하고 묻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숙여 아이작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자꾸 그렇게 귀여운 말만 골라서 하면 곤란해질지도 몰라.”

“…….”

“해는 금방 질 거고, 난 네 울음소리를 밤새 들을 의향이 있거든.”

웃음기 서린 습한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는다. 비밀스러운 속삭임은 등허리를 쭈뼛 곤두서게 했다.

“들어본 중 가장 무서운 협박이로군요….”

“들었지? 최대한 착용하기 편하고 단순한 디자인으로 골라봐. 대신 다이아몬드는 하나 박아 넣을 수 있는 거로. 아, 이런 것도 괜찮군.”

아이작의 불평을 못 들은 척 잘라버린 필릭스는 납작한 모양에 가운데 보석을 박아넣을 수 있게끔 디자인된 백금 반지를 집었다. 심플하면서도 테두리에는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역시 안목이 높다고 칭찬하며 반지에 관해 장황한 설명을 이어갔고, 아이작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필릭스가 고른 반지뿐 아니라 진열된 모든 반지는 대부분 고급스럽고 세련된 것뿐이었기에 외려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질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뭐든 괜찮았다. 보석이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던, 플래티늄이나 금, 혹은 은이어도 상관없었다. 필릭스와 똑같은 반지를 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그러니 뭐든 무난하게 종일 끼고 있을 수 있는 디자인이면 상관없었지만 필릭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작은 반지를 고르는 대신 필릭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난한 취향인 자신보다는 필릭스의 안목에 맞추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알지도 못하는 반지와 보석 대신 신중하게 반지를 들여다보며 고르는 필릭스를 보고 있는 게 더 좋기도 했다.

잠시 필릭스를 눈에 담고 있던 아이작은 문득 다른 케이스가 두 개나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저건 뭡니까?”

아이작의 질문에 왼손 약지에 반지를 열심히 끼워보던 필릭스가 눈을 들었다. 그리곤 아이작의 시선이 닿은 케이스들을 돌아보며 아, 짧은소리를 흘린다.

“벤자민에게는 팔찌를 해줄 거고, 미세스 파커, 아니 이젠 어머님이라고 해야겠지? 어머님에겐 보석 세트를 선물해 드리려고. 어머님의 취향은 잘 모르겠으니 네가 추천 좀 해줘.”

대답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으나, 아이작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이작은 슬쩍 미간을 좁히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에게 호사스러운 선물을 바란 적은 없었다. 어머니 또한 저토록 화려한 액세서리를 하고 다니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선물을 드리는 건 내 자유고 내 마음이야, 네가 막을 권리는 없어.”

하지만 필릭스는 강경하기만 했다. 순식간에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를 보며 아이작은 짧게 침음을 흘렸다.

“덧붙이자면, 벤자민의 팔찌에는 GPS가 심어질 거야. 만에 하나, 어디서든 찾을 수 있게.”

“…그건 나쁘지 않군요.”

“어머님께 드릴 선물을 고르기 어렵다면, 내가 알아서 고르도록 하지. 다시 말하지만, 부담스러워 할 필요는 없어. 난 평생 사치하면서 쓰고도 남을 돈이 있고, 이 중 반은 네 것이 될 거니까.”

난데없이 던져진 필릭스의 발언은 아이작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재산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였다. 그러나 필릭스는 언제나 그렇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같이 사는 동안에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먼저 죽어도 재산은 모두 너와 벤자민에게 갈 거다.”

“…….”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우리가 이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내 재산의 반은 네가 갖는 게 맞아. 그러니 내가 네게 뭘 해주든 네 돈을 쓴다고 생각하면 돼. 설마 네 돈을 쓴다니 아까워하는 건 아니겠지?”

필릭스는 농담하듯 가볍게 설명했지만, 아이작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필릭스라면 재산 때문에 결혼이 더욱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스치듯 일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환경의 배우자를 고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이작, 네가 또 허튼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미리 말해주는 건데.”

여러 가지 상념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러자 내심 심란해하는 자신을 알아차린 필릭스는 짧은 숨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뭔가요?”

“넌 굳이 내가 아니라고 해도 이미 재벌이라는 사실?”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만, 재벌까지는-.”

“재벌 맞아.”

전직 해군 대위였다. 게다가 만날 목숨 걸고 뛰어다녀야 하는 데브그루 특전사이기도 했던 그의 생명수당은 사실 액수가 컸다. 나라에서는 직업군인에게 온갖 혜택을 주었고, 죽어서도 가족에겐 연금이 나온다.

현재는 군에서 제명당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것도 조만간 정리될 예정이니 딱히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긴 해도, 필릭스가 언급한 ‘재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아이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노아가 조금 털어봤거든.”

필릭스는 살짝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털어보다니요? 뭘 말입니까?”

의아해하는 아이작을 마주한 필릭스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그런 의심을 떠올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러더니 그는 곧 목소리를 낮춰 말을 잇는다.

“콜 패트릭스의 재산이 어떻게 되는지 찾아봤다고 하더라고. 그놈도 어지간히 심심했나 봐. 아니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든지.”

콜 패트릭스라니. 필릭스가 입 밖으로 내뱉은 이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듣고 싶지도 않은 화제였기에 그의 막을 막으려 했지만, 필릭스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내에 있는 그의 전 재산은 군부에서 압수할 거라고 하더군. 당연한 결과야.”

그가 해군 내에서 저지른 비리의 규모가 어마어마한 정도였으니, 그에 책임을 묻고 재산을 전부 압수하는 건 기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예정된 수순일 뿐이니까. 하지만 필릭스가 덧붙이는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스위스 계좌에 숨겨둔 재산이 따로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지.”

“스위스 계좌라뇨?”

“개 같은 짓으로 번 돈은 뒤로 몰래 빼돌려서 차곡차곡 잘 쌓아뒀더군.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뒀는지 모르겠다니까. 널 재벌로 만드는 게 꿈이었나?”

비아냥거리는 필릭스의 말이 쉽사리 와닿질 않는다.

“무슨…….”

“케이시드 패트릭스. 네가 법적으로 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새 까먹었어? 너 외에 콜과 법적으로 얽힌 가족은 아무도 없지. 따라서 네가 콜 패트릭스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상속자가 된단 말이야.”

어지러운 머릿속이 좀처럼 정리되질 않는다. 얼떨떨하기만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콜의 유산이라니. 마른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돈벼락이 마냥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제 손으로 죽인 양부의 유산이라는 점이 마땅치 않았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비리를 저질러 모은 돈이다 보니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도 했고, 찝찝하기도 했다.

“죽어서 죗값을 조금이나마 갚으려고 재산을 모았나 보지. 그렇게 생각해.”

그러자 이번에도 귀신같이 불편한 심정을 알아차린 필릭스가 다정하게 뺨을 쓸어주며 위로했다.

“준비는 노아가 할 거야. 넌 나중에 사인만 하면 돼.”

모두 다 괜찮을 거라고, 네가 충분히 받아도 되는 돈이라고 그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받은 돈은 기부할 수도 있는 거겠죠.”

“음? 그거야 유산을 받을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그렇다면 콜이 망가뜨린 제 꽃가게를 다시 차리는 데 일부를 쓰고, 나머진 기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아이작은 의외로 간단한 결정을 내렸다. 필릭스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의외라는 투였다.

“굳이 더러운 돈을 받을 이유도 없고, 찝찝한 기분을 무시하면서까지 재산을 바라는 것도 아니니까요. 꽃가게를 다시 차릴 돈만 있으면 됩니다.”

“그 정도 꽃가게 내가 못 차려줄까 봐 굳이 콜의 돈을 쓰려고? 정 받기 찜찜하면 전부 기부해.”

“아니요. 가게를 부순 건 콜이었으니, 콜의 돈으로 차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 정도 보상은 받을 수 있으니까요.”

고집스레 말하자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Whatever you want. 담담하게 속삭이면서.

“다시 꽃가게를 차릴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지만.”

덧붙여지는 필릭스의 한마디에 아이작은 계면쩍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제 꿈인 것을요.”

“그래, 뭐든 꿈이 있다면 좋은 거지. 군으로 복귀한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행이네.”

“설마요. 군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해군에 입대한 것도 실은 콜 때문이었으니까요. 콜이 없었다면 사관학교에 들어갈 일도 없었겠죠.”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떠올린 아이작의 얼굴 위로 희미한 그늘이 졌다. 그런 아이작을 환기하려는 듯, 필릭스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쓸었다. 그리곤 눈짓으로 아직 탁자 위에 덩그러니 펼쳐져 있는 반지와 액세서리를 향한다.

필릭스와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들의 맞은편엔 아직 보석상과 토니가 멀뚱히 서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곧 민망함으로 달아오르는 뺨을 손바닥으로 쓸며 흠,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시간을 너무 빼앗고 있었던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담담히 사과하자 크리스토퍼는 ‘아닙니다’ 친절한 웃음을 띤다. 사사로운 얘기는 그만두고 얼른 이 일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잡으며 아이작은 탁자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어차피 반지에 관해선 필릭스에게 맡길 생각이긴 했지만, 적어도 관심 있게 봐주기는 해야 할 테니까.

오늘따라 유난히 즐거워 보이는 필릭스는 곧 반짝이는 시선으로 반지와 그 밖에 여러 가지 보석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의를 보이려 잠시 슈트케이스 안의 보석들을 훑어보던 아이작은 금세 흥미를 잃고 보석을 고르고 있는 필릭스를 눈에 담았다. 그의 푸른 눈이 보석보다 훨씬 더 반짝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필릭스!”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고 있는 사이, 불한당처럼 들이닥친 필릭스가 다짜고짜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탓이었다.

필릭스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긴 후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쓰게 된 것은 고작 일주일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아이작은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현실에 대한 불편함을 종종 느끼곤 했다.

단순히 내 공간을 타인과 나눠 써야 하는 불편함이 아니라, 필릭스의 존재 자체가 불편할 때가 간혹 있었다. 필릭스가 알면 단단히 삐칠 일이긴 했지만 아쉽게도 그랬다.

예를 들면, 아무 생각 없이 옷을 갈아입다가 말고 덮쳐진다든가, 잠시 쉬려고 침대에 누워있었을 뿐인데 격렬한 키스가 퍼부어진다든가, 지금처럼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끌어안겨진다든가…….

“발정 난 짐승처럼 시도 때도 없이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윽-!”

“미안하게도 발정 난 짐승 맞거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는 발정 난 알파, 필릭스는 아이작의 가슴을 꽉 움켜쥐더니 목덜미를 깊이 빨았다. 표식이 새겨진 그 자리였다.

“가뜩이나 발정이 가라앉질 않는 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네 탓도 있겠지?”

아프도록 이를 세우는 그의 목소리엔 장난기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무방비라니, 흣-, 그러면, 샤워하고 나오면서부터 방어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겁니까?”

“긴장을 놓치면 안 되지.”

“그럼 지금 이 순간부터 긴장하고 태세를 전환해도 되겠습니까?”

가슴을 지분거리는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쥔 아이작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러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턱을 쥐고 돌리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젖은 입술을 핥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쉽게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살짝 당황하고 울컥했던 감정을 단번에 잠재워버렸을 만큼 달고 감미로워서 저도 놀랄 정도다.

“아이작, 널 안고 또 안아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환장할 지경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지막하게 밀어를 속삭인 필릭스는 한결 급해진 키스를 퍼부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돌린 아이작의 입술을 진득하게 빨다가, 곧 벌어진 입안으로 서슴없이 혀를 밀어 넣는다. 감미롭게 이어지는 키스는 순식간에 격렬한 키스로 뒤바뀌었다.

노골적인 정욕이 담긴 키스가 이어지자 아랫배에서 뭉근한 열이 피어오른다. 목울대를 울리는 신음 또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다. 어쩌면 이젠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건지도 모른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키스가 시작되는 순간 몸 어딘가에 숨겨둔 스위치가 켜지며 내부에선 열이 끓는 것만 같았다.

열기와 정욕에 취한 아이작이 더운 숨을 내뱉자, 필릭스 역시 맞물린 입술 아래로 낮은 소리를 흘렸다. 습기 어린 숨결이 난잡하게 뒤섞이는 순간이었다. 아이작의 등 뒤에서부터 바짝 끌어안고 있던 필릭스가 그대로 허리를 굽히며 세면대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아이작의 벗은 등에 맞닿은 필릭스의 가슴은 여전히 한 치도 떨어짐 없이 달라붙어 있었다.

필릭스가 가슴으로 묵직하게 등을 눌러대는 압력에 밭은 숨이 잘게 흩어졌다. 아이작은 순순히 세면대 위에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 그를 눈에 담았다. 그러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한쪽 팔을 뒤로 돌려 허리 위로 누르기까지 한다.

“아…, 이건 좀-….”

문득 경찰에게 체포된 용의자들이 대부분 이런 자세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경찰차에 머리를 처박은 용의자의 돌려진 팔에 경찰들은 수갑을 채우곤 하던데…….

주로 적을 잡거나 죽이러 다녔지 잡혀본 적이 없던 아이작은 낯선 자세에 낮게 신음했다. 그런 아이작을 눈치챈 듯, 필릭스는 팔을 잡아누른 자세 그대로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음습하게 속삭였다.

“아이작, 내가 멋대로 굴다가 네가 진짜 실력행사를 하게 될까 싶어 미리 말해두는 건데 말이야. 내가 뭘 하든 얌전히 있었으면 좋겠거든?”

“읏…. 뭔지 모르겠지만, 안 하면 되잖습니까.”

“하고 싶으니까 그렇지.”

따져봤자 필릭스는 얄밉게도 못 들은 척한다. 대체 또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작은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세면대 카운터 탑 위에 가슴과 뺨을 댄 채 입술만 잘게 씹었다.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세면대에서 곧바로 덮쳐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오늘 새벽까지도 진득하게 몸을 섞지 않았던가. 아니, 어디 오늘 새벽뿐인가. 각인한 그 날 이후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진이 빠지도록 뒹굴었다.

그의 말처럼 신혼이라고 하나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건지 의아할 지경이다. 이러다가 몸이 진창이 되어 남아나질 않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젠 조금쯤 느긋하게 침대에서 기다릴 법도 하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필릭스는 날이 가면 갈수록 허기진 짐승처럼 덤벼들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직 닦아 내지 못해 어깨 위에 남아있는 물방울을 핥는 그의 혀는 몹시 게걸스러웠다.

“그거 알아? 너, 억제제를 끊은 후부터 오메가 페로몬이 점점 진해지는 거. 곁에 있기만 해도 이젠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야. 그러다가 누가 네 페로몬을 맡을까 걱정되기까지 한다고.”

젖은 어깨를 자국이 남도록 핥고 깨물던 필릭스는 느릿하게 척추를 따라 움직였다. 잘게 씹기도 하고 키스 마크가 남을 정도로 빨아당기기도 한다. 뜨거운 열기가 살갗 위로 번지는 것과 동시에 아찔한 전류가 온 신경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매일같이 해도 변하지 않는 강렬한 자극이었다.

“으음…… 그렇다면, 아무래도 다시 억제제를 먹는 편이 좋겠군요.”

희미하게 중얼거리자 필릭스는 허리 부근을 꽉 깨물었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질 정도로 세게. 윽, 아이작은 짧게 신음하며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자 이번엔 허리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깊게 입안으로 머금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꾸 하지? 지금껏 억제제를 달고 살아왔으면서 또 먹겠다는 소리가 나오나?”

“그럼-. 아-!”

어쩝니까. 라는 말이 입안에서 녹아버린다. 필릭스는 부러 질척이는 소리를 울리며 손가락을 빨았다. 오럴섹스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깊이 머금었다가 혀로 훑으며 빨아올리고,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핥는다.

세면대에 엎드린 채 손과 팔이 보이지도 않는 자세로 손가락을 빨리자 오싹한 전류가 손끝과 발끝까지 번져갔다. 온몸이 다 빨리는 기분이었다. 오싹오싹하다 못해 살갗 위로 소름이 돋는다.

맙소사, 손가락이 이토록 예민한 성감대였던가.

“그러니 네가 조절하는 법을 익혀야지.”

점차 몽롱해져 가는 아이작에게 필릭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잔뜩 열이 올라 더운 숨을 헐떡이기만 하는 아이작의 등을 손끝으로 죽 훑어내린다. 척추의 뼈마디를 세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떨어지는 그의 손가락은 기어코 아이작의 허리에 감겨있는 배스 타월 위까지 당도했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타월을 움켜쥐고 단번에 벗겨냈다. 툭,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타월이 떨어지는 소리가 외설스럽게 울린다.

“페로몬을… 조절하라니…… 윽- 거긴, 필릭스!”

들뜬 숨을 흘리던 아이작이 갑자기 언성을 높인 것은, 불현듯 필릭스가 그의 엉덩이를 이를 세워 깨문 탓이었다. 아니, 비단 엉덩이를 깨문 것만은 아니었다. 필릭스는 노골적으로 그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그 아래로 젖은 혀를 미끄러뜨렸다.

악! 막을 수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필릭스는 아랑곳없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잔뜩 달아올라 예민해져 있는 입구 위를 마음껏 맴돌았다. 절로 흐느끼는 신음이 흘렀고, 어깨는 간헐적으로 떨렸다.

“피, 필릭스, 잠깐-!”

당황해진 아이작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하지만 뒤로 돌린 제 한쪽 팔을 붙들고 있는 손에 악력이 더해지기만 한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은 핏줄이 불거지도록 세면대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지에서 힘이 다 풀려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질척이는 소리는 끊임없이 귓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필릭스가 엉덩이 사이를 빨고 핥는 소리라니. 믿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여길 숱하게 드나들었는데도 아직 먹어보질 못했잖아?”

그러나 곧 필릭스의 갈라진 중저음이 귓가를 파고들자 의심은 단번에 깨어지고 말았다. 그가 속삭일 때마다 뜨겁고 습한 숨결이 은밀한 살갗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주름 하나하나를 뭉툭한 혀끝으로 문지르는 감각 또한 선연하게 느껴진다. 머릿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아, 윽-… 그만…….”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 맛볼 걸 그랬지. 매번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눈이 뒤집히는 바람에 여유가 없었지 뭐야.”

필릭스가 게걸스럽게 물고 빠는 입구 안쪽에서는 저도 느껴질 만큼 축축한 액이 고이고 있었다. 조금씩 새어 나오는 액을 마치 달콤한 꿀이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핥는 그의 행위에 허리가 덜덜 떨렸다. 눈앞이 캄캄했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러면서도 몸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작의 헐떡임이 더 급해졌다. 입구의 여린 살을 전부 녹여버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물고 빨던 필릭스의 혀가 눅눅하게 젖어버린 입구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탓이었다.

“으, 으읏-!”

성기가 들어올 때와는 몹시 다른 느낌이었다. 뜨거운 혀는 달아오른 내벽을 제멋대로 문지르고 휘저었다. 세워진 이는 잇자국이 나도록 살갗을 깨물기도 한다. 난생처음으로 느끼는 기이한 감각이었고, 오싹하다 못해 소름 끼치는 감각이기도 했다. 마치 제 구멍 안에 정체 모를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기분에 비명과도 흡사한 신음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가까스로 바닥을 짚고 있는 다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벌벌 떨린다. 그만하라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 어떤 말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반쯤 벌린 입을 뻐끔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것이 전부다.

거기에 더해 필릭스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은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아이작을 잠식하고 있었다. 각인된 알파, 거기에 더해 최우성 알파인 필릭스의 페로몬은 미치도록 달콤했다. 지독한 흥분제를 다량 섭취하기라고 한 듯, 몸이 달아오르다 못해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한다.

필릭스의 두꺼운 혀가 질척거리며 내벽을 문지를 때마다 발작하듯 허리가 튕겼다. 성기는 이미 배를 향해 꼿꼿하게 선 지 오래였고, 줄줄 흘러내리는 프리컴은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하, 으윽- 필릭스, 제발…….”

여전히 등 뒤로 돌려진 채 필릭스에게 잡혀있는 손을 바르작거렸다. 그럼에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손목을 그가 쉽사리 놔주지 않자, 땀이 밴 손을 쥐었다 폈다 초조하게 움직인다.

“아, 아아-!”

대체 언제까지 하려는 걸까. 아찔한 이 행위가 끝나기 전에 제 구멍이 먼저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필릭스는 그럴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예 처음부터 녹여 먹을 생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외설적으로 질척거리는 소리와 내부를 휘젓는 혀의 움직임, 그리고 경련하듯 움찔거리는 구멍의 움직임이 눈앞에 그려질 만큼 또렷하게 느껴졌다. 지나치게 또렷해서 두려울 정도다.

딱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이런 자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노골적으로 빨아당기며 동시에 빳빳해서 터질 것 같은 성기를 다른 손으로 덥석 움켜쥐기까지 했다. 으윽! 신음과 함께 허리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그러나 그의 손은 가차 없었다. 그대로 사정이라도 시키려는지 성기를 붙들자마자 빠르게 흔들어 댈 따름이었다.

“아, 안 돼, 필릭스, 으흣, 더는, 그만-, 아아아-!”

움츠린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반쯤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는 입가에선 타액이 흘러내렸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선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지독한 자극을 버티는 것도 무리였다. 아이작은 끝내 짧은 교성과 함께 말간 정액을 토해내고 말았다. 확 뿜어지는 뿌연 정액이 음란한 모양새로 세면대와 바닥으로 줄줄 떨어졌다.

정신없이 휩쓸리다가 사정까지 한 탓에 아이작은 벌써 기진맥진해지고 말았지만, 필릭스는 움직임을 멈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정액으로 흠뻑 젖은 손으로 아이작의 성기를 계속해서 문질러댈 뿐이다. 이미 토정한 탓에 성기는 기운을 잃고 말캉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쥐어짜듯 문지르는 손길은 멈춤이 없었다. 물론 구멍 안쪽을 혀로 휘젓는 것 또한 그랬다.

아이작은 사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은 필릭스의 페로몬에 절어버렸고, 그가 빨아먹고 있는 구멍과 내벽은 이미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바래 녹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이러다 견디지 못하고 미치는 건 아닌지 정신없이 헐떡이는 사이로 불안이 스치듯 지났다.

“이상한 일이지? 매일 안는데도 늘 허기져. 너만 보면 이성이 날아가 버리잖아? 정말이지 내가 짐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축축하게 젖은 엉덩이 사이에서 그제야 고개를 든 필릭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잔뜩 갈라진 중저음이 오싹했다. 지독한 정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관능적인 목소리이기도 했다.

축 늘어져 있던 아이작은 느릿하게 눈을 들고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져 초점이 맞지 않는 동공과 발갛게 물든 눈가는 필릭스가 늘 말하던 것처럼 야해 빠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이작, 힘 빼.”

아이작의 몽롱한 시선을 필릭스가 허공에서 붙들었을 때였다. 필릭스의 음성이 한층 더 낮아진다. 아이작은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강한 손길로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잡아 벌린 필릭스가 그대로 흉흉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를 단숨에 푹, 찔러 넣은 탓이었다.

다시금 벌어진 입술 끝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혀로, 입술로 한없이 물고 빨아 당긴 덕분에 입구는 이미 녹진하게 풀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몰아닥치는 압박감은 상당했다. 배 속이 꽉 차는 느낌. 입구의 주름이 팽팽하게 벌어지며 필릭스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감각은 몇 번을 해도 쉽사리 익숙해지질 않는다.

“피, 필릭스…… 아읏-!”

아이작은 세면대를 움켜쥔 채 간헐적으로 떨었다. 이제 시작이건만 눈가는 벌써 눈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입가에서는 애원하는 소리밖에 흘러나오질 않았다. 이미 몸뚱이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페로몬에 취하고 그의 체향과 눈빛, 목소리와 손길, 허리 짓에 온통 취해버린 아이작은 하릴없이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필릭스 또한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작과는 다른 의미로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를 짓씹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도 해봤지만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아직 붙들고 있던 아이작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긴 필릭스는 단번에 허리를 쳐올렸다.

퍽, 까슬 거리는 음모가 아이작의 엉덩이에 맞닿을 정도로 깊숙이 박힌 성기가 아이작의 배 속을 사정없이 찔러댄다. 아이작의 자지러지는 신음을 뒤로하며 필릭스는 느릿하게 뒤로 뺐다가 또다시 푹, 찔러대기를 반복했다.

“아, 아아, 아-, 필릭스…, 그만-…. 그만…….”

그의 성기가 얼마나 깊게 박히는지, 마치 새로운 길을 트는 것처럼 내벽 깊숙한 곳이 뚫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이작이 흐느끼며 고개를 흔들 때마다 땀방울이 뚝뚝 세면대 위로 떨어졌고, 벌어진 입에서는 애원하는 소리가 저도 모르게 흩어졌다.

그러나 필릭스의 허리 짓은 점점 더 사납게 변해가기만 할 뿐이었다. 철퍽, 철퍽 내부를 찔러대는 움직임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격렬해졌고, 살갗이 맞부딪히는 외설적인 소리는 넓은 화장실을 가득 울리게 했다. 아이작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도 못한 채 흐느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이작, 그런 얼굴을 하면 안 되지.”

그러자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릭스가 잠시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으로 시간이라도 하듯 진득하게 바라보던 그는, 땀에 젖어 미끈거리는 아이작의 등허리를 손끝으로 주욱 쓸어 올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누구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 위로 짙은 미소가 그림처럼 번진다.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인 동시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사악함이 묻어있는 미소이기도 했다.

“그렇게 야해 빠진 얼굴로 울면 어떻게 해? 나더러 진짜 발정 난 짐승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밖에 더 되겠어?”

두려움이 절로 일어나는 말과는 달리, 필릭스는 해사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혀 아이작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표식이 새겨진 목덜미를 와작, 깨무는 그에게서는 참아내지 않고 방출하는 날것 그대로의 페로몬이 훅 퍼부어진다. 순식간에 제정신을 잃게 만드는 관능적인 감각이었다. 눈앞이 핑 돌다 못해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필릭스의 성기를 머금고 있는 구멍 안쪽에서 다시금 축축한 액이 왈칵 쏟아져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렀다. 바닥을 가까스로 짚고 있는 발가락이 저도 모르게 오그라들었고, 새된 신음은 벌어진 입가에서 정제되지 않고 튀어나왔다.

“아이작, 이런 반응이 다 뭐야…. 젠장, 진짜 넌-!”

덜덜 떠는 아이작을 등 뒤에서부터 꽉 붙든 필릭스는 이를 짓씹었다. 그리곤 참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그의 내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살이 맞부딪히는 음탕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이성 또한 온데간데없었다. 필릭스에게서 흐르는 페로몬과 그가 전하는 쾌락에 젖어버린 머리와 몸은 이미 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도 좋았다. 필릭스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이 쾌감이 미치도록 좋았다.

아이작은 숨을 헐떡이며 다리를 벌리고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순순히 제 몸을 필릭스에게 내어주며 흐느끼고 신음하길 반복했다. 지금껏 그와 함께 지냈던 밤들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기나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아이작은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였다. 시야가 흐렸다. 어느새 까무룩 정신을 놔버린 모양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다리를 들어 필릭스의 허리를 감고, 팔은 그의 목을 두른 채 보채고 흐느끼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쪼르륵, 물소리를 울리는 것은 필릭스였다. 아이작은 넓은 욕조 안에서 길게 누운 필릭스의 가슴 위에 등을 대고 누워있었는데, 언제 욕조로 옮겨진 건지 전혀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기억장애라도 생긴 기분이었다.

“…물은 언제 받았습니까.”

“방금.”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는 잔뜩 쉬고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태연히 손으로 물을 들어 아이작의 가슴 위로 쪼르륵 떨어뜨리기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러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필릭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 아이작이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서늘한 입술이 뺨 위로 닿는다.

“적당히 하고 싶은데 매번 조절이 안 돼서 곤란하긴 해.”

“변명은…….”

“아이작, 난 평소에도 너만 보면 피가 몰려서 미칠 지경이긴 하지만 말이야, 특히 네가 색욕에 젖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 주체가 안 되거든.”

뺨을 지분거리는 입술 끝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새어 나온다. 아이작은 슬쩍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턱을 단단히 쥐고 있는 필릭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네가 내 정액을 뒤집어쓰고, 구멍은 녹아버린 것처럼 흐물거리면서도 내걸 놓질 않고 물어대면, 거기에 더해 눈까지 풀어진 채 흐느끼면……. 내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어? 봐, 지금도 또 이렇게 얼굴이 붉어졌잖아.”

적나라한 말들을 부끄럼도 없이 쏟아내는 필릭스의 속삭임에, 듣고 있던 아이작이 외려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발갛게 뺨이 달아오르자 필릭스는 그것마저도 먹어치우려는 짐승처럼 길게 혀로 핥았다.

“누가 알파 아니랄까 봐 짐승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요.”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새삼.”

필릭스는 아이작의 귀를 가볍게 이로 물며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물고 빨아댔으면서도 아직 모자라다는 듯이. 끝내 아이작은 온전히 그에게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확실히, 베타에 비교해 본능에 충실한 것이 알파였다. 발정기까지 따로 있을 정도니 확실히 짐승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는데, 필릭스는 그런 알파들 사이에서도 정점을 찍은 최우성 알파였다. 그래서인지 필릭스는 섹스에 관해선 확실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집요했고, 짐승 같은 면도 있었다. 문제는 그걸 자신이 고스란히 혼자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는데…….

아쉽게도 필릭스와 매일 몸을 섞은 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지쳐서 나가떨어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물론 각인까지 했기에 몸을 겹칠 때는 무아지경으로 빠져들며 그에 맞춰 허리를 흔들길 바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기진맥진해진 사지를 움직이기도 어렵다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식으로 매일 섹스하는 건 힘듭니다.”

아이작은 길게 숨을 내쉬며 통보하듯 말했다. 가슴을 지분거리던 그의 투박한 손이 움찔, 멈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롭니다. 지금도 사지를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니까요. 내일도 할 일이 있는데, 이런 식이면 자리를 보전하며 누워있든지 아니면 쓰러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체력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고 장담했었는데 나가떨어질 정도라니, 말 다 했지. 아이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일주일간의 무수면 훈련까지 기본으로 해내던 아이작으로서는 이 정도로 단기간에 체력이 고갈되었던 적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필릭스가 과하게 휘둘렀다는 뜻이었지만, 억울한 점은, 필릭스는 외려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설마.”

필릭스는 그의 어깨에 나른하게 머리를 기대고 있는 아이작을 멀거니 내려보았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우울하면서도 참담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정이었다.

“설마가 아니라 진짜 그렇습니다. 그러니 지금 정하죠. 매일은 도저히 못 해요. 할 때마다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제 몸이 축나는 짓은 더 이상 못 해 먹겠습니다.”

“그러면?”

“사나흘에 한 번 정도로 하죠.”

단호한 결정에 필릭스는 음, 목울대를 울렸다. 우울했던 얼굴은 아예 잿빛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눈도 돌리지 않았다. 몸이 축나면 저만 고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잘 생각해 봐, 아이작.”

잠시 시무룩하게 상념에 잠겨있던 필릭스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아이작은 조용히 시선만 돌려 그를 응시했다.

“매일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무슨 뜻입니까, 그건?”

“네 뜻대로 사나흘에 한 번씩 한다고 쳐. 그러면 그때야말로 쌓여있던 걸 한 번에 푸느라 나도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장담할 수 없을 거란 말이야.”

“겨우 삼사일 정도 참았다고 어떻게 되진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해도 멀쩡했잖…….”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처럼 중얼거리던 아이작은 일순 말문을 멈추고 말았다. 불현듯 일주일에 한 번씩 계약대로 그와 몸을 섞었을 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분명, 일주일에 한 번씩 필릭스는 꼬박꼬박 계약대로 자신을 안았었다. 그때마다 ‘걸레로 만들어도 좋다’라고 내뱉었던 자신의 제안을 아주 기가 막히게 이행하기도 했었다. 말 그대로 하루 꼬박, 쉴 틈 없이 박아댔었고, 다음날이면 으레 가게에 반나절쯤 늦게 나가거나 나가서도 멍하니 앉아있기가 태반이었다.

“정말, 사람을 걸레로 만들었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자 필릭스는 입술을 당겨 웃었다. 몹시 기분 좋은 듯 웃으며 그는 물에 젖은 손으로 아이작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물방울이 이마와 관자놀이를 타고 길게 떨어져 내렸다. 이래저래 참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최우성 알파와 각인하고 파트너까지 되는 일이.

삼사일에 한 번 몰아서 하는 것보단 매일 조금씩 하는 게 나으려나. 멍하니 몸을 늘어뜨린 채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는데.”

필릭스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문을 열었다.

“뭡니까.”

“그때, 계약하자며 네가 제시했을 때 말이야. 왜 하필이면 ‘걸레로 만들어도 좋다’라고 한 거지? 경험도 별로 없었으면서 왜 그렇게 기고만장하게 말했어? 덕분에 처음엔 네가 닳고 닳은 놈인 줄 알았잖아. 막상 안고 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서 또 놀랐지만.”

뜻밖의 질문을 들은 아이작은 그의 짙푸른 눈을 바라보며 음, 목을 울렸다. 자신이 그때 왜 그렇게 말했는지 역시 그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4년 전,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와 시간에 처음으로 히트사이클이 터져 괴로워하고 있었죠. 그런 저를 발견하고 당신은 당장 안았고요.”

“그래, 그날부터 이를 갈고 또 갈았었지. 아주 사람을 제대로 홀려놓고 도망쳐버렸으니까. 그것도 멀쩡한 팔을 분질러 버리고서 말이지.”

아이작을 돌아보는 필릭스의 시선은 제법 날카로웠다. 뒤끝이 길다 못해 끝이 보이지도 않는 이 남자는, 아직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필릭스의 그런 심정은 모르는 척 아이작은 말을 이었다.

“그때, 당신이 날 보며 처음 했던 말이잖습니까. 제대로 붙들라고, 걸레가 될지도 모른다고.”

지나간 일을 회상하며 아이작은 꿈을 꾸듯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랬나? 기억이 안 나는데.”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을 꺼내는 아이작을 내려보는 필릭스는 난처한 듯 미간을 구겼다.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부러 모르는 척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이작은 픽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당신에게 계약을 제시하려고 했을 때…. 왠지 모르지만, 갑자기 그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넌지시 던져봤죠. 혹시 나를 기억할까 싶었던 것도 같습니다. 설령 잊고 있었다고 해도, 당신이 내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면 다시 떠올리지 않을까 싶어서.”

“…….”

“물론 제가 당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건 바로 깨달았습니다. 기억하기는커녕 알아보지도 못했죠.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이작이 설핏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다물자 필릭스의 시선이 물기 어린 뺨에 달라붙는다.

“섭섭했어? 내가 널 곧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그러더니 곧장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작은 이번에도 난감한 투로 뺨을 쓸었다.

“글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반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안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나를 곧 알아차리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하게 되는… 그런 심정이었다고 할까요.”

솔직하게 털어놓는 아이작의 턱을 움켜쥔 필릭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왔다. 물기가 서린 입술은 촉촉했다. 부드럽게 입을 벌리게 하고 입술 안쪽의 여린 살갗을 핥는 혀끝 또한 조심스럽기만 하다.

아이작은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늘어뜨린 채 눈을 감고 감미로운 키스를 음미했다. 정신없이 몸을 겹칠 때마다 떨어지는, 짐승처럼 사납고 외설적인 키스와는 전혀 다르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꿈결처럼 이어진다.

가뜩이나 따뜻하게 온도가 맞춰진 물에 잠겨있는 탓에 노곤하게 풀어져 있었는데, 꿀처럼 다디단 키스까지 계속해서 이어지자 이대로 녹아 없어질 것만 같다. 희미한 신음을 흘리던 아이작은 불쑥 몸을 돌려 필릭스의 가슴에 제 가슴을 맞대고 올라탄 자세를 만들었다.

“아이작….”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아이작은 키스를 이어갔다. 필릭스의 탄탄한 아랫배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를 감쌌다. 필릭스는 아이작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감싸며 바짝 끌어안는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넓고 적막한 욕실 위를 관능적으로 떠돌았다.

“힘들다며 매일은 못 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누구야?”

“그 말이 왜 나옵니까?”

아이작이 부러 퉁명스럽게 묻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엉덩이를 터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 미간이 절로 찡그려진다. ‘아픕니다’ 작게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필릭스의 손은 쉽사리 치워지질 않고 외려 더 꽉 움켜쥐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말이 왜 나오겠어? 잡아먹으라고 코앞에서 밥상을 차려주는 너를 보니까 하는 말이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작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제가 손끝 한 번만 까딱해도 달려들 기세로군요.”

“언제는 안 그랬던가? 아주 오래전부터 난 네가 손끝 한 번만 까딱여도 달려들 수 있었거든.”

“그랬습니까?”

아이작은 젖은 손을 들어 필릭스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래’ 필릭스가 입을 쭉 내밀고 토라진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어디 한 구석 빠지지 않고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아이작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런 얼굴로 매달리는 이 남자에겐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사실만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은 정말 힘드니까, 키스만.”

다정하게 속삭이며 아이작은 고개를 숙였다. 대답 대신 필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하게 자신을 감싸고 반겨왔다. 감미롭게 입술을 빨다가, 익숙하게 혀가 감기고 타액이 섞였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맞물려진 입술 사이에서도 젖은 소리가 드문드문 새어 나온다.

언제나 그렇듯 순식간에 녹아나게 만드는 키스에 열렬히 응답하며, 아이작은 아무래도 키스만으로는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프론트 직원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설은 좋지만 비싸기로 유명한 pre-school(어린이집) 중 하나인 이곳에서 근무한 지 근 일 년. 그사이 많은 학부모를 만나봤지만 저런 사내는 처음이었다.

동네 자체가 워낙 부촌이었고, 그런 갑부들에게 맞춰 호화스럽게 운영되는 어린이집이었기에 이곳에 오는 부모들은 자연히 비슷비슷하게 돈 많은 부자들이 대다수였다. 직업도 한결같이 내세울 만한 것들이었다. 사장 교수 변호사 회계사 의사 기타 등등.

하지만 지금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 같은 사람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거기에 화사한 블론디, 검은 선글라스 아래로 드러나는 조각 같은 콧날과 턱선을 가진 사내는 할리우드 배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였다.

그러나 화사하고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공기가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위압감이 대단한 사내였다. 연노랑의 폴로 반소매 셔츠와 카키 반바지를 편하게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 막힐 정도로 느껴지는 압박감에 프론트 직원은 저도 모르게 히끅,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그뿐인가, 그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사내는 대놓고 우악스러운 모습이기까지 했다. 엄청난 체격과 키, 우락부락한 얼굴과 사나운 눈매로 실내를 주욱 돌아보는 모습이 사냥감을 찾는 불곰 같다. 먼저 들어온 아름다운 사내가 한 팔로 어린아이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당장 경찰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아이를 안고 있는 눈부신 사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똑같이 화사한 금발의 머리칼과 눈에 띄는 이목구비가 판박이였으니 누가 모를 수 있을까. 아이를 데려다주러 온 부모가 분명했다.

“어, 어서 오세요.”

잠시 넋이 빠져 그들을 바라보던 프론트 직원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아이를 안은 금발의 사내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문을 열었다.

“등록은 마쳤다고 하던데, 오늘부터 다니기로 했고.”

“그러시군요. 아이 이름이……?”

“벤자민 파커.”

이름을 답한 필릭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아직 아이작과 혼인신고도 하지 못했고, 가족관계 또한 정리되지 않았기에 벤자민의 last name은 변함없이 할머니인 제시카 파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 탓이었다.

모든 일이 제대로 정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때때로 벤자민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불만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제 아들인데 아이작의 성도 아닌, 피조차 섞이지 않은 외조모의 재혼한 파트너 성을 따르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빨리 정리를 해버려야지 원.

“아, 네. 벤자민은 오늘부터 등원하기로 되어있네요. 안녕, 벤자민?”

괜한 짜증을 억누르며 다짐하고 있으려니 컴퓨터를 두들기던 직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벤자민을 향해 환하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필릭스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출석부에 아이를 데려다주었다는 확인을 위한 사인을 하고 벤자민을 돌아보았다.

“벤자민, 새 학교에 왔네? 들어가서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한 번 볼까?”

그러나 언제 미간을 찌푸리기라도 했었냐는 듯, 솜사탕 같은 벤자민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필릭스의 목소리는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그에게서 흐르는 위험천만한 분위기와는 판이하다. 목소리만 들으면 제 아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팔불출 아버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프론트 앞에 서 있는 직원의 눈이 커졌다. 놀랍다는 듯 필릭스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갈무리한 다음 아이들의 교실로 이어지는 복도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시겠어요? 교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처음엔 부모님이 데려다주면서 잠시 교실을 둘러보며 아이의 불안을 덜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무르는 건 권장하지 않아요. 어차피 부모와 떨어져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익혀야 해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우선 교실로 안내해 주시죠. 우리 벤자민이 지낼 곳이 어떤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녀의 친절한 설명을 시큰둥하니 잘라낸 것은 필릭스의 뒤에 서 있던 잭이였다. 아직 총상이 다 낫질 않아 목발을 짚은 잭은 구시렁구시렁 입안에서 불만을 씹고 있었다. 제 딴에는 거의 다 나았다며 멋대로 돌아다니기 일쑤인 잭은 벤자민이 첫 등교를 하는 날만큼은 놓칠 수 없다며 기어코 따라나섰다.

물론, 노아 역시 벤자민이 잘 가는지 봐야겠다고 난동을 부렸으나, 결국 버럭 성질을 낸 필릭스를 이기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덕분에 경호원으로 따라오게 된 잭만 더 의기양양해졌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벤자민이라면 노아 못지않게 팔불출이 되어버리는 잭이 던진 시큰둥한 말 한마디에 직원은 움찔 놀라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잭을 쏘아보며 ‘학부모 외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며 잭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일순 멍해졌던 잭은 어째서 들어갈 수 없느냐, 아이의 경호원이니 안을 들여다봐야겠다, 등등 열심히 따졌지만 그녀는 단호했고, 잭은 끝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벤자민과 필릭스를 보낸 후 프론트 앞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들어오시죠.”

친절하게 필릭스를 돌아본 직원은 벤자민이 지낼 곳이라며 교실을 안내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눈에 띄지 않는 점이 의아해 물어보자, 그녀는 일찌감치 도착한 아이들은 따로 모여 놀고 있다는 대답을 전해주었다.

건물 자체는 크고 넓었으며 시설 또한 훌륭했다.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 건지 교실도 곳곳에 많았는데, 색색으로 화사한 페인트와 그림, 사진으로 장식된 벽과 장난감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공간은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필릭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칠 따름이었다. 어딜 보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저 모든 것이 다 못마땅했다. 교실을 한 바퀴 돌아본 필릭스가 그제야 벤자민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이는 이곳이 낯설었는지 필릭스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벤자민?”

조용히 묻자 벤자민이 동그란 눈을 든다.

“이제 내려서 돌아볼까?”

“……”

“왜? 보고 싶지 않아? 친구들도 많다는데?”

질문을 던졌지만 벤자민은 필릭스의 어깨에 뺨을 대고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벤자민이 지난번 라호야에서 다니던 어린이집에서는 문제없이 잘 다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아예 학교에 발을 디딜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학교를 알아보느라 한 달 이상 집에서 쉬게 했더니 그새 낯선 곳이 싫어졌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콜에게 납치되었던 일도 겪었고, 그 덕에 병원도 꾸준히 다니며 심리치료도 받고 있는 아이니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필릭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다가 다시 아이를 내려봤다. 첫 등교를 하는 벤자민이 보고 싶은 탓에 아이작 대신 자신이 직접 벤자민을 데리고 등원시키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데리고 나왔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벤자민?”

다정한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필릭스는 아직도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벤자민을 안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이의 등을 도닥이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으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기어코 벤자민은 와앙- 크게 울음을 터뜨렸고, 필릭스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 * *

한 달 전쯤이었다. 꽃가게를 다시 차리겠다는 결심을 내비치기가 무섭게 필릭스는 저택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가게를 소개해 주었다. 주변은 번화하면서도 깨끗했고, 가게의 크기도 적절한 곳이었다.

커다란 창에서는 화창한 햇살이 가득 쏟아져 환한 내부 또한 마음에 들었기에 아이작은 망설임 없이 계약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꽃가게를 차릴 준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은 많았고 아직 내부는 어수선했지만, 차곡차곡 준비하는 과정은 즐겁기만 하다.

오래전부터 소소하게 꽃가게를 운영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것이 꿈이었는데, 비로소 제 꿈이 완전히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쫓길 필요 없이 자유롭게 가게를 운영할 수 있다. 게다가 벤자민도 어머니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다. 아이의 부친인 필릭스까지 모두.

혹시 백일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토록 행복한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창밖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상념에 잠겨 있던 아이작은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부지런히 화분을 옮겼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가게 안에서 그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음악 소리와 어우러지는 것도 같았다.

더워진 계절 탓에 벌써 땀방울이 관자놀이 위로 맺히고 있었지만, 제법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누군가가 기척도 없이 가게로 들어와 아이작을 뒤에서부터 확 끌어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느닷없이 강한 힘이 어깨를 휘감더니 몸이 뒤로 기울어다. 순간 사내의 팔을 움켜쥔 아이작은 허리를 굽혀 사내를 앞으로 내던졌다. 반사적으로 이어진 행동이었고,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콰당-, 거나한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엎어치기를 당한 사내가 바닥에 누워 아이작을 멀거니 올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고통을 호소하듯 설핏 찌푸려진다. 그를 확인한 아이작은 일순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필릭스?”

“이거야 원, 장난도 못 치겠네.”

끄응, 소리를 흘린 필릭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작은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붙박은 듯이 서서 옷을 툭툭 털어내는 그를 바라봤다. 세상에, 강도처럼 기척도 없이 다가와 낚아채는 사람이 필릭스인 줄 누가 알았겠냔 말이다.

“방어하지 그랬습니까.”

아이작은 제 머리칼을 부스스 흩트리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반사적인 행동이긴 했지만 바닥에 냅다 집어 던져버렸으니 미안하기도 했다.

“공격하려고 덤빈 게 아니었는데 그럴 새가 어딨어.”

“그러면 평범하게 들어오든지요. 치한처럼 이게 뭡니까.”

“놀라게 하려고 그랬는데……. 알았어, 이젠 안 할게.”

아이작의 기세에 필릭스는 양손을 들고 순순히 항복했다. 그제야 아이작은 짧게 한숨을 흘렸다. 아침부터 이게 다 뭔지.

가끔 필릭스는 기이할 정도로 완벽하게 기척을 숨길 때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든다. 놀라울 정도다. 직업이 직업이었던 터라 누군가가 아무리 숨을 죽이고 기색을 감춘다고 해도 예리하게 알아차렸었는데, 필릭스는 도통 모를 때가 잦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래서 그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지나치게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도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거라……. 그렇게 기척을 감추고 다가오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잘못했으면 팔을 부러뜨릴 뻔했잖습니까.”

“팔이 부러지는 건 한 번으로 족해.”

필릭스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오래전 아이작이 그의 팔을 부러뜨리고 도망쳤던 일은 그에게 제법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저런 반응인 것을 보면.

멋쩍어진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곧 떠오른 생각에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아, 벤자민은 어땠나요? 별 탈 없이 프리스쿨에 데려다줬습니까?”

아이작의 질문에 끙, 신음하며 엄살을 떨던 필릭스가 움찔 어깨를 굳힌다. 그리고는 제대로 답하는 대신 음……. 길게 목을 울렸다. 길게 늘여놓을 변명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지금 벤자민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지 못했다는 겁니까?”

앞치마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아이작이 재차 물었다. 음성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무덤덤했지만, 자신을 담는 검은 눈동자가 제법 매서워져 있었기에 필릭스는 시선을 회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애가 울면서 떠는데 어떻게 해.”

곤란한 얼굴을 하고 대답하는 필릭스를 응시하던 아이작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어머니와 있었을 때는 멀쩡하게 잘 다녔기에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필릭스가 벤자민을 보내지 않았을 줄은 미처 몰랐지만.

필릭스라면 제법 엄한 아빠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엄하기는커녕 아이가 울면 어쩔 줄 몰라 하는 팔불출이라는 점을 깨달을 때마다 아이작은 매번 놀라곤 한다.

“만약 제가 벤자민을 데려다줬다면, 분명 아이가 운다고 해도 매몰차게 두고 왔을 겁니다.”

가만히 필릭스를 바라보던 아이작이 말문을 열었다.

“매정하네. 그렇게 안 봤는데.”

필릭스가 농담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뭐든 다 해주고 싶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지만, 확실히 자신은 어떤 면에선 매몰찬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저처럼 냉정하지 않아서요.”

“왜 이래, 나도 아주 냉정한 사람이거든?”

흥, 콧방귀를 뀌는 필릭스를 돌아보며 아이작은 ‘그래요’라고 흘려버리기만 했다. 다른 곳에서는 누구보다도 냉정한 남자가 분명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벤자민에게 만큼은 그렇지 않죠.”

“그야, 애니까….”

곤란한 투로 얼버무리는 필릭스를 보며 아이작은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전 예전에, 벤자민이 처음 학교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가고 부모와 떨어지면 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습니다. 하루 이틀은 울었다고 했지만 차츰 나아졌죠. 그렇게 조금씩 서로에게서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작년, 벤자민을 처음 학교에 데려다 준 날을 떠올린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흘렸다. 우는 아이를 떨어뜨리고 나오기는 했지만, 착잡한 심정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후에는 제 처지가 신경 쓰여 아이를 제대로 데려다 줄 수도 없었다.

매몰차게 떨어뜨리고 나오면서도 미안했던 심정을 되새기고 있으려니 필릭스의 혀 차는 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애가 겁먹고 우는데 억지로 떼어놓고 올 이유가 뭐가 있겠어. 어차피 더 크면 있으라고 해도 곁에 안 있게 될 텐데. 안 그래?”

필릭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자신과는 상당히 다른 의견을 말하는 그를 아이작은 많은 생각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슴 한구석이 기이하게 간질간질 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렵다.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많은 인내와 노력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 어디에도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필릭스의 대꾸에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이런 시선으로 아이를 볼 수도 있구나, 싶었다.

“너무 규율 규칙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preschool에 조금 늦게 보내면 어때. 어차피 집에는 벤자민을 돌봐주고 싶어서 안달인 놈들이 수두룩한데.”

물론 필릭스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홀로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는, 자신과는 다른 필릭스와 함께 고민하다 보면 더 좋은 결론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줄 테니 말이다.

“당신이 있어서, 좋군요.”

아이작은 문득 고백이라도 하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알았어?”

벤자민을 학교에 두고 오지 못했다고 눈치를 보던 사람이 누구였냐는 듯 의기양양해진 필릭스가 코끝을 높이며 말했다. 평소의 오만한 사내가 이제야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아이작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처음이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집에서도 군인같이 굴었던 양아버지 콜의 기억이 큽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벤자민에게 강압적으로 굴 때가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입술 끝에 걸쳐져 있던 미소는 씁쓸하게 변해갔다.

“제가 간혹 강압적으로 굴어도 당신이 지금처럼 부드럽게 벤자민을 타일러주세요.”

“아이작.”

“아이를 키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아이작이 허탈하게 웃자 필릭스는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게 말이야.”

필릭스는 위로하듯 말했지만,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아이 아빠가 되어버린 그는 자신보다 더 어렵고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색 없이 벤자민을 애정으로 대하고 있었다.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는 필릭스의 손길을 느끼며 아이작은 말로 뱉어내기 어려운 상념들을 이어갔다. 앞으로 배워야 할 일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을 것 같았다. 필릭스와 함께 배워나가야 할 일들이.

“그래서, 벤자민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단단한 손에 살짝 기댄 채 생각들을 갈무리할 무렵이었다.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묻자 필릭스는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던져주었다.

“차에. 잭이랑 놀고 있어.”

아이작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집에 두고 온 게 아니라 여기에 있다고요?”

“네가 보고 싶다고 하기에 데려왔지.”

벤자민도 같이 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려주는 필릭스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아이작은 후다닥 더러워진 앞치마와 장갑을 벗어 던졌다. 화분들을 들여놓으며 정리하고 있던 참이지만, 무슨 상관일까. 어수선한 가게를 빠져나간 아이작은 금세 필릭스의 차를 알아보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 아이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필릭스는 다시금 혀를 찼다. 간혹 매정하게 굴 때도 있다고는 해도, 벤자민의 이름만 들으면 언제나 그렇듯 만사 제치고 달려 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필릭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급히 벤자민을 찾으러 달려갈 뿐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세단의 창문은 어둡게 틴트가 되어있었다. 잘 보이질 않는 차 안을 허리 굽혀 들여다보자 잭이 재빠르게 창문을 내렸다. 그 사이로 벤자민은 빼꼼 얼굴을 내밀며 ‘아빠!’ 하고 소리쳤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해맑은 얼굴이었다.

“벤자민!”

아이작은 문을 열고 벤자민을 냉큼 들어 안았다. 마른 눈물 자국이 뿌옇게 남아있는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부비자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언제 들어도 가슴을 들뜨게 만드는 소리였다.

“오늘 많이 울었어?”

다정하게 아이를 끌어안은 아이작이 달래듯 물었다. 자신이 울었다는 게 부끄러운지 벤자민은 으음, 희미한 소리를 흘리더니 ‘조금’하고 대답한다. 아이작은 나직이 웃었다.

“그랬구나. 우리 벤자민 울지 말라고 재미있게 해 줘야겠네. 맛있는 것도 먹고.”

아이의 작은 등을 쓰다듬으며 비밀을 말하듯 속삭이자 아이가 신이 나서 소리를 높인다. 뭘 먹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조잘조잘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 무렵이었다.

“발보아 파크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벤자민을 데리고 소풍 가고 싶다고 했었잖아. 디즈니랜드도 가고 싶다고 했었지?”

불쑥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필릭스의 질문에 아이작은 설핏 놀란 눈을 들었다. 언제였을까. 제법 오래전에 지나가는 말로 흘렸던 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네. 그랬었죠. 몸 사리지 않고,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벤자민과 평온하게 소풍을 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필릭스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겨버린 후, 집 근처 공원으로 종종 산책하러 나가곤 했지만, 필릭스는 필릭스대로 아이작은 아이작대로 일이 밀려 있었기에 아직 발보아 파크나 동물원, 그 밖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테마파크 등을 여유롭게 다녀보진 못했다.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면 가봐야지 했던 게 벌써 몇 주가 지나버린 거다.

이거야 원. 돌이켜보니 자신은 참 부족한 부모인 것 같아 입안이 썼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어쩔 수 없어서, 이젠 바빠서 못 가고 있다니.

“지금 가지.”

필릭스가 대뜸 던진 제안은 뜻밖이었다. 아이작은 벤자민을 품에 안은 그대로 굳은 것처럼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작을 마주한 필릭스는 눈을 휘며 해사하게 웃는다.

“벤자민, 저어기 큰 공원에 놀러 갈까?”

그리곤 허리를 굽혀 벤자민을 마주하더니 상냥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누가 봐도 자상한 아빠의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응! 갈래!”

벤자민은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아빠와 있게 된 것이 마냥 좋은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여전히 멀거니 필릭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워낙에 바빴던 사람이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보내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일정이 다 차 있었던 건 아닙니까?”

“그거야 토니가 알아서 하겠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필릭스는 늘 그렇듯 토니만 불쌍해지는 대답을 던질 따름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태평하게 굴 수 있는 건지. 아이작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토니를 속으로 위로하며 짧은 한숨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필릭스의 옷차림 또한 어딘가로 놀러가기 딱 좋게 가벼운 차림새다. 아이작은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지만,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뭐해? 얼른 가게 닫고 나오지 않고.”

“정말, 지금 당장 가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또 뭐가 있는데? 시간 날 때 가면 그만인 거지. 기왕 나간 김에 근사한 곳에 가서 브런치를 먹으면서 데이트도 하고.”

아이작에게서 벤자민을 옮겨 안은 필릭스는 재빨리 뒷좌석의 카시트에 아이를 앉혔다. 발보아 파크가 뭔지도 모르는 벤자민은 그저 어딘가 간다는 말에 신이 나서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면서 아직 어린이용 카시트가 익숙하지 않은 필릭스에게 벨트 채우는 법을 대신 설명해주기까지 한다.

“아냐, 이건 여기에 끼우는 거야. 여기.”

“이거?”

“응. 맞았어!”

아빠인 필릭스를 칭찬하는 벤자민의 당찬 목소리를 듣고 있던 아이작은 피식,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가게, 문 닫고 오겠습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쓰는 사람인 필릭스가 시간이 난다는데, 자신이 반박할 말은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을 떠나면 그만이다.

“그래. 얼른 와.”

필릭스는 아이작에게 가볍게 대꾸했고, 벤자민은 카시트 위에 앉아 ‘얼른 와’, 하고 필릭스를 따라 하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있으니 정말로 똑 닮은 부자가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닮아간다. 이제는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저도 모를 미소가 번져갔다.

화창하게 맑은 날씨처럼 발걸음 또한 한없이 가벼웠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꽃가게도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치고 개장한다. 벤자민은 건강하고 해맑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고, 어머니도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필릭스가 곁에 있다.

소중한 가족이 곁에 있고, 그 어떤 위협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평화로운 삶이었다. 아이작은 평생 지금처럼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고 장담했다. 인생의 정점에 선 기분. 꿈결 같은 시간을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는 그런 기분. 설마 백일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 볼을 꼬집어 보기까지 하는 그런 시간.

아이작은 가게 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린 후 고개를 돌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에 그림처럼 선 필릭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새파란 눈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아이작’ 입 모양으로 이름을 부른다.

그의 모습을 꿈꾸는 것처럼 바라보던 아이작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걸음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러나 곧 땅을 박차고 나가기 시작하자 걸음은 저도 모르게 빨라진다.

문득 거리에 즐비해 있는 어느 가게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흘러나왔다.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굵직한 목소리, 느릿한 재즈 선율, 그리고 행복이 가득한 가사.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행복을 노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햇살같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이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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