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Epilogue
콜에게 방아쇠를 당긴 아이작은 샤워를 다시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고 나서야 병원으로 향했다. 벤자민과 제시카 파커는 여러 가지 검사를 이미 마쳤고, 특별한 외상이나 증상은 없다는 의사소견을 받았다. 그럼에도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며 아이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한 아이작은 초조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특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의 손에는 어머니에게 드릴 화사한 봄꽃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꽃다발이 쥐여 있었다. 그리고 곁에는 필릭스가 섰는데, 그가 들고 있는 선물은 눈을 휘둥그레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 손에는 아이가 쥐면 날아갈 것 같은 커다란 미키마우스 풍선이 종류별로 있었고, 다른 한 팔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미키마우스 인형이 들려 있었다. 벤자민의 두 배쯤 되는 거대한 크기에 아이가 외려 겁을 내고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아이작이 조용히 충고했지만, 필릭스는 아랑곳없었다.
그 외에도 초콜릿 케이크까지 어떻게든 다 들고 걷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은 어머니에게 드릴 꽃다발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에는 풍선이 뽀작뽀작 맞부딪히며 울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거대한 선물을 짊어진 필릭스를 흘끔 쳐다봤다.
“몰라. 떨려서 죽을 것 같아.”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잘도 하십니다.”
“사실이야.”
답지 않게 긴장감을 역력히 드러낸 필릭스는 정면에 보이는 숫자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뻣뻣하게 선 그는 시선을 들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벤자민이 날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난데없이 아빠라고 하면 당황할 거 아냐.”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어머님은 날 좋아하시려나? 마피아랑 연관되어 있다는 말은 안 했겠지?”
“하면 또 어떻습니까.”
“안 돼. 나를 뭐로 보겠어? 난 되게 선량한 시민인데 괜히 오해하신단 말이야.”
‘그러니까,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선량한 시민이 다 죽지 않는 이상 당신은 결코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없다니까요.’ 속으로만 대꾸한 아이작은 애써 무심한 표정을 가장한 채 그를 살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필릭스는 초조해했다. 손에 한 아름 선물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손톱이라도 씹고도 남았을 기세다. 끝내 아이작은 애써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필릭스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고, 그와 동시에 아이작은 필릭스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말캉한 입술은 언제나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체향과 페로몬이 뒤섞여있는 숨결 또한 취할 정도로 달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달래듯 키스한 아이작은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그제야 눈을 들고 아쉬운 입술을 뗐다.
“긴장할 것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멋진 아빠예요.”
필릭스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은 아이작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한 필릭스 역시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복도 위를 한 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토니와 그의 수하들을 마주친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엇-.”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흘린 것은 토니였다. 아이작과 필릭스를 마주하자마자 충격을 받은 듯, 토니의 눈이 한껏 커졌다.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풍선과 커다란 인형, 케이크를 어울리지도 않게 들고 있는 필릭스를 경악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아이작과 필릭스의 목덜미에 보란 듯이 찍혀있는 표식을 발견하고는 경악에 찬 비명을 다시 한 번 짧게 내지른다.
“길 막고 서 있지 말고 비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딱 벌린 그대로 뻐끔거리기만 할 뿐, 말도 내뱉지 못하는 토니를 필릭스는 가차 없이 툭, 치워냈다. 토니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잽싸게 달려왔다.
“그,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 아니, 풍선은 제가 들겠습니다.”
“됐으니까 나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들을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는 토니의 곁을 필릭스는 무심히 지나쳤다. 토니는 이번엔 잽싸게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진 죄가 있는 아이작은 그저 멋쩍게 그를 회피하며 지나칠 따름이었다. 나중에 어찌 된 영문이냐며 달달 볶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벤자민이 더 급했다.
특실로 향하는 복도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부분 병원이 그렇긴 하지만, 병실 앞에 깔린 토니의 시커먼 수하들이 개미 떼처럼 진을 치고 있으니 분위기는 더더욱 삭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를 지나 병실로 들어서던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슬쩍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가리기도 했다. 표식이 새겨진 제 목덜미에 일제히 박혀드는 시선이 생각보다 따가운 탓이었다.
그런 아이작과 달리 필릭스는 잔뜩 긴장한 채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데 여념이 없었다. 주위의 술렁이는 분위기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한 것만 같았다. 긴장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 남의 눈치는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니 애초에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벤자민?”
어찌 되었든, 모든 이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병실 문을 열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선 아이작은 먼저 벤자민을 불렀다. 호텔처럼 넓고 쾌적한 병실엔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서 할머니와 함께 장난감 트럭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흘끔 고개를 돌린다.
“아빠?”
“벤자민, 아빠 왔어.”
“와! 아빠! 아빠다! 아빠!”
아이작을 발견한 벤자민이 푸른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그 작은 몸으로 잽싸게 침대를 내려오더니 다다다 달려와 아이작에게 폴짝 안긴다. 양팔을 벌려 달려온 아이를 품에 꽉 끌어안은 아이작은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벤자민의 어깨에 코를 묻고, 사탕처럼 달콤한 냄새를 맡고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에 뺨을 비비자 비로소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돌아왔다. 드디어 내 아이 곁으로 돌아왔다.
“늦어서 미안. 아픈 곳은 없지? 괜찮은 거지?”
뒤늦게 아이작은 벤자민을 여기저기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벤자민은 씩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나 하나도 안 아파!”
“그래, 장하다. 아주 기특해.”
아이작은 아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지만 벤자민은 제 아빠를 만난 것이 그렇게나 좋은지 까르륵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달콤한 웃음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제 아이를 다시 품에 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족했고 모든 것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미키마우스! 풍선!”
한참이나 아이작이 품에 안은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고 있을 무렵이었다. 문득 벤자민이 고개를 들더니 필릭스가 들고 있는 미키마우스 풍선을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제일 좋아하는 미키마우스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풍선으로 만들어져있으니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아이는 풍선을 향해 짧은 팔을 열심히 허우적거렸다.
아이작의 뒤에 서서 묵묵히 벤자민과 아이작을 지켜보던 필릭스는 비로소 긴장한 표정으로 풍선을 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필릭스가 끌어안고 있던 대형 미키마우스를 발견한 벤자민이 악! 비명을 내지르며 아이작의 어깨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무서워! 으헝!”
그리곤 오돌오돌 떨며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 저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미키마우스 인형, 심지어 쥐꼬리까지 달린 인형을 아이가 무서워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흘끔 필릭스를 돌아보자 그는 가뜩이나 긴장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냉큼 문을 열어 거대한 미키마우스 인형을 냅다 복도 밖으로 휙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잽싸게 다시 문을 쾅 닫는다.
“흠, 자 아무것도 없어. 봤지?”
자신의 빈손을 내밀어 보여준 필릭스가 초조하게 말문을 열었다.
“인형… 커…….”
여전히 훌쩍훌쩍하며 겁에 질려 고개도 들지 못하는 아이에게 필릭스는 천천히 한 걸음 다가왔다.
“그건 네가 무서워해서 내쫓았어. 봐, 풍선밖에 없어. 아니군, 케이크는 남아있네. 네가 초콜릿 케이크를 좋아한다며?”
“……초코케이크?”
초코케이크라는 말에 혹한 벤자민은 동그란 눈을 빼꼼히 들었다. 거대 미키마우스 인형은 무섭지만 풍선과 케이크는 갖고 싶었는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자. 선물.”
필릭스는 벤자민에게 풍선 줄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그제야 벤자민은 쭈뼛거리며 작은 손을 내밀어 풍선 줄을 꼭 쥐었다. 그리곤 눈을 돌려 아이작을 한 번 쳐다보고 이번엔 할머니를 한 번 쳐다본다. 가져도 되냐고 묻는 행동이었다.
“고맙습니다, 인사해야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제시카 파커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고, 벤자민은 수줍게 웃으며 할머니를 따라 ‘고맙습니다’라고 어눌한 발음으로 인사말을 던졌다.
“…천만에.”
필릭스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고 답을 하며 벤자민을 빤히 보았다. 그를 지켜보던 아이작은 제시카 파커의 안부를 물으며 그녀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었다.
“필릭스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어쩜, 예쁘기도 하지. 고마워요.”
며칠 전에 비해 한결 밝아진 안색을 한 제시카 파커는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 정식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파트너가 될 사람이자 벤자민의 아버지입니다.”
그때였다. 아이작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가른다. 꽃을 안은 채 웃음 짓던 제시카 파커는 일순 크게 뜬 눈으로 아이작과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필릭스 펠리체라고 합니다.”
필릭스는 긴장한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놀랄 정도로 완벽한 태도였다.
“역시, 그랬군요.”
잠시 어리둥절하게 아이작과 필릭스를 번갈아 보던 제시카 파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필릭스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그녀의 반응에 외려 놀란 필릭스는 잠시 뻣뻣하게 굳어있기도 했지만, 이내 작은 체구의 제시카 파커가 팔을 둘러 등을 도닥여주자 허리를 굽혀 그녀의 포옹을 반겼다.
제시카 파커와 인사를 마친 필릭스는 아이작에게 안긴 채 풍선을 꽉 쥐고 아이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벤자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도 아이작은 아이의 뺨에 입술을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벤자민, 이제 아빠가 둘이 될 거야.”
“아빠가 둘?”
“그래. 네 아버지야. 그러니 인사해야지?”
아이작의 설명이 이해가 되질 않는지 벤자민은 저와 똑 닮은 필릭스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지금 날 모르는 척할 거면 그 풍선 도로 내놔’ -라고 말하고도 남을 위인인 필릭스 역시 말없이 벤자민을 응시하기만 한다.
“…안녕하세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혹은 아이도 뭔가를 느낀 건지, 벤자민이 작은 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왜 아빠가 둘이냐며 싫다고 떼 부리며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얌전히 인사하는 아이를 필릭스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는 벤자민과 아이작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벤자민을 마주했다.
“안녕, 벤자민.”
살짝 긴장한 목소리가 알게 모르게 떨렸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마냥 기쁘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다시 한번 ‘안녕’하고 인사했고, 필릭스는 투박한 손으로 다정하게 벤자민의 뺨을 쓰다듬었다.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진 순간을 아이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