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6)

11. Imprinting

쾅, 세차게 문을 닫아버린 필릭스는 형형하게 뜬 눈으로 복도를 걸었다. 욕설이 절로 치솟았다. 아직도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고, 심장은 정신없이 뛰었다.

의심 한번 없이 베타인 줄만 알았던 아이작이 오메가라고? 그것도 4년 내내 이를 갈고 있던 과거의 그 오메가인 데다, 심지어 제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기까지 했다고? 세상에, 벤자민이 자신의 아이라니…. 아직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질 않는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아도 이 정도는 아닐 테다.

지금껏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탓에 스테디한 관계는 일절 없었고, 하룻밤을 상대할 때는 항상 콘돔이나 그 밖에 다른 피임을 했다. 실수한 적은 없었다. 덕분에 자신의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나고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전부 부질없는 자신감이었던 모양이다.

더불어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모친은 아이를 자신에게 데리고 올 거라 여기기도 했다. 아이를 핑계로 한 푼이라도 뜯어내려면 응당 그렇게 해야만 할 테고, 몸을 섞었던 상대 대부분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들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버젓이 제 아이를 홀로 낳아 키우고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계약으로 경호까지 붙이게 했던 벤자민이 제 아들일 줄은…….

“하, 미치겠네.”

감쪽같이 속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머리가 다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복도를 빠르게 걷던 필릭스는 잠시 잠깐 걸음을 멈추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등잔 밑이 어두워도 이렇게 어두울 수가 없었다. 오메가인 아이작과 제 아들이라니.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눈곱만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러대며 혀를 차던 필릭스는 그러나 곧 치솟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허무하게 웃고 말았다. 4년 전, 오만하기 짝이 없던 오메가에게 노팅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 탓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노팅이라고는 해도, 단번에 이성을 잃게 한 오메가가 하필 히트사이클이었으니 충분히 임신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 오메가가 한 짓이 하도 기가 막혔기에 노팅에 관한 일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아이작이었고 그 일로 벤자민이 태어났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환장할 노릇이로군.”

필릭스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날의 일을 하나씩 떠올리자, 자신을 후려친 오메가의 어두웠던 인상이 아이작의 얼굴로 천천히 덧씌워진다. 얼굴뿐 아니라 체격과 몸짓과 신음까지 전부 아이작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극기야, 히트사이클로 오른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 아래에서 헐떡이던 오메가가 아이작의 모습으로 또렷해진다.

낮은 신음이 절로 목구멍 아래로 흘러나왔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오메가는 아이작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비로소 깨닫는다. 아이작이 아니라면 또 어떤 이에게 그토록 흥분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나치게 흥분해 저도 모르게 노팅까지 하게 만들었던 유일한 오메가가 아이작이 아니면 또 누구겠는가.

아마 아무도 없을 테다. 그 누구도 아이작처럼 자신을 미칠 것 같은 흥분에 휩싸이게 만들지는 못할 테다. 뒤늦은 깨달음에 필릭스는 또다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분노는 눈처럼 녹아버리고 없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작,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은 그에게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인연이 분명했다. 내 것이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래, 그러니… 참고 기다려.”

등에 돌려 메고 있던 기관단총을 손에 쥔 필릭스는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음 속으로 뛰듯이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페로몬으로 뒤범벅되어 각인되고 있는 아이작을 떠올렸다. 지금껏 살며 생각해 본 적도, 원한 적도 없는 각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게 만든 아이작이…….

한시가 급했다.

* * *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르고 혼란했던 정신을 가다듬은 필릭스는 가장 먼저 토니에게 연락해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했다.

“콜을 발견하면 무조건 생포해서 내게 데려와. 절대 죽여선 안 돼, 알아들었겠지?”

다급하게 외치는 필릭스에게 곧장 알아들었다고 대답하는 토니는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는 즉시 사살하라고 했던 처음과는 달리 무조건 살려둬야 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자세한 일까지 설명할 여력은 없었다.

콜의 사저는 서서히 점령되어가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밀렸고 장비와 전문성으로도 밀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콜이 부리는 용병들 또한 대다수가 죽거나 도망쳤기에 남아있는 놈들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은 아직 아수라장이었다. 총소리와 날카로운 비명,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끝도 없이 울려댄다. 그 소리를 무심히 들으며 복도를 걸어 나간 필릭스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들도 명심해. 콜은 사살금지야. 산 채로 잡아.”

날카롭게 명령한 필릭스는 곧장 계단을 뛰어내렸다. 간간이 마주치는 놈들은 가차 없이 쏴버리며 지하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성급하기까지 했다.

“노아, 벤자민의 위치 전송해.”

지체없이 내달리던 필릭스는 노아에게 말했다. 그의 귀에는 콜이 착용하고 있던 것과 비슷한 이어폰이 달려 있었고,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노아와 끊어짐 없이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따라서 노아 역시 필릭스와 아이작의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겠지만, 죽은 듯이 조용하기에 잠시 잠깐 그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건넸지만, 노아는 여전히 대꾸도 없이 침묵을 일관하고 있었다.

평소 필릭스를 놀리기 좋아하고 남의 사생활 캐는 취미까지 있는 노아답지 않을 정도라 필릭스는 툭, 이어폰을 건드렸다.

“듣고 있는 건가?”

앞에 있지도 않은 상대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까지 던지면서. 그제야 이어폰 너머로 ‘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듣고 있어. 너무 잘 들려서 탈이지.>

“그런데 왜 대꾸가 없어?”

필릭스가 대뜸 신경질을 부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노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벤자민과 제시카 파커의 위치는 예상했던 대로 지하라는 것을 확인했어. 5분 전에 그쪽에 도착한 녀석들의 카메라로 확인한 사실이야. 하도 경비가 험난해서 시간이 걸렸는데도, 아직 그들의 신변을 완전히 확보하진 못한 것 같아. 대치 중이야.>

“아직도?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처음부터 지하에 있을 거라는 예측은 했었잖아.”

초조하게 묻자 노아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이 정도면 빨랐던 거야. 추측만 했었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뭐, 마무리 중인 것 같긴 한데…….>

“헬기 준비해.”

<이미 준비되어 있어. 네 머리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평범한 중년 여성과 어린아이에게 좋을 것 하나 없는 몹쓸 전쟁터에서 그들을 한시라도 빼내려면 헬기가 필요했다. 지하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라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필릭스.>

복잡한 머리로 상황을 떠올리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내려갈 무렵이었다. 문득 자신을 부르는 차분한 목소리에 필릭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내 조카 무사히 잘 데리고 나와라.>

“미친, 그럼 내가 무사히 잘 안 데리고 나갈 줄 알았어?! 그리고 뭐가 네 조카라는 거냐!”

<내 조카지! 넌 꼴 보기 싫지만 내 조카는 보고 싶다고!>

“좀 닥쳐.”

울음마저 섞여 있는, 노아의 감상에 젖은 목소리에 필릭스는 지금 상황도 잊어버린 채 눈살을 구겼다. 하필 이어폰이 연결된 것까지 잊어버린 바람에 모든 비밀이 터져 나온 그 순간의 대화들을 이놈 또한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열이 치솟는다.

<씨발, 미친 새끼. 흑흑, 네놈 인성이 썩은 줄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지 애를 만들어 놓고도 모를 정도였다니. 내 조카가 여태 어디서 어떤 고생을 했을지……. 개새끼! 내가 할아버지한테 당장 이를 거다, 이 나쁜 새끼야.>

질질 짜는 노아를 참지 못한 필릭스는 끝내 이어폰을 꺼버리고 말았다. 가뜩이나 부글거리는 속이 더 뒤집혔다. 이래저래 심란함만 더해져 분풀이 하듯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때였다.

“보스, 저쪽인 것 같습니다.”

뒤를 따라오던 호위 중 하나가 바짝 경계하며 기관단총을 눈에 대고 앞으로 나섰다. 필릭스는 상념에서 깨어나 날카로운 시선을 들었다. 그의 말처럼 계단을 끝까지 내려서자마자 좁은 복도에서 바짝 긴장한 채 문 하나를 겨누고 있는 놈들이 멀리서 보였다.

복도 곳곳에는 핏자국이 흥건했고 총에 쓰러진 놈들 또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얼마나 총질을 해댔는지 메케한 화약 냄새가 가득해 숨 쉬는 것도 고역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대충 감은 왔다. 지하까지 밀고 들어선 아군이 콜의 용병들을 기세 좋게 몰아낸 모양이었다. 덕분에 놈들은 밀리다 못해 목표물인 벤자민과 제시카 파커를 가둬두었던 방 안으로 도망쳐버린 듯했다. 복도에 남아있는 건 일제히 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아군뿐이었다.

필릭스는 이맛살을 구겼다. 어쩌면 더 짜증 나는 상황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놈들이 아직 인질을 붙들고 있는 것이 확실했고, 인질이 있으면 이쪽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도망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들에게 다가가 상황을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예상과 한치도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미 놈들이 숨어버린 철문은 단단히 잠겨있었다.

문 안쪽에서는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질 않았고, 꽉 닫힌 문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용병들은 묵묵히 필릭스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기만 했다. 인질을 붙들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곤란한 탓이었다.

“콜은?”

단단히 잠긴 문을 노려보던 필릭스는 대뜸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직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쥐새끼 같은 새끼가….”

여기저기 상처 입은 놈이 쉽게 이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리는 만무했다. 어딘가 숨어 있다가 벤자민을 인질로 붙잡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외에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문, 부숴.”

짧게 생각을 마친 필릭스는 빠르게 지시했다. 바짝 긴장한 채 필릭스의 명령을 기다리던 놈들이 의외라는 뜻을 드러냈지만, 팀 리더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손짓하자 누군가가 다가와 소형 폭발물을 설치하고 부착했다. 철문에 대고 총질해 봤자 열리기 어려우니 아예 손잡이 부분을 날려버리려는 거다.

“베타인 놈들만 엄호해. 나머지는 문 열리는 동시에 내게서 떨어지는 편이 좋을 거다.”

폭발물의 설치가 끝나고 일제히 뒤로 물러섰을 때, 필릭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히 말했다. 그의 경고가 끝난 것과 동시에 펑- 소리가 울렸다. 손잡이의 잠금 부분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고, 굳게 잠겨있던 철문이 끼익- 소리를 흘리며 조금씩 열렸다.

“물러나.”

필릭스가 이사이로 나직한 한마디를 뱉은 것은 문이 채 열리기도 전이었다. 순식간에 필릭스의 알파 페로몬이 묵직하게 바닥 위로 깔리듯이 퍼져나갔다. 자욱했던 화약 냄새가 마치 강풍에 쓸려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 사라지고, 대신 필릭스가 내뿜는 숨 막히는 페로몬이 일대를 안개처럼 물들이기 시작했다.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해버리는, 사나운 노기로 가득한 최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마주할 수 있는 알파는 없었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곁에 있던 알파들은 전부 입가를 틀어막으며 도망치기 바빴고, 예민한 베타들 또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손잡이가 부서진 문을 퍽-, 발로 차서 열었을 무렵에는 이미 지하 전체가 누구라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짙은 페로몬으로 물들어 있었다. 끝내 그의 곁에 남아 엄호하던 베타들마저 짧은 신음을 내지르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였다.

물론 단단히 잠겨있던 문 안쪽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다. 바닥으로 묵직하게 깔린 페로몬이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방 안의 공기마저 빠르게 물들여버린 까닭이었다. 그 속에서 제대로 버티고 있는 놈들은 없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놈들과 구토와 발작을 일으키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몇몇 베타와 우성 알파는 가까스로 총을 들고 겨누기도 했지만, 초점이 흐린 눈과 벌벌 떨리는 손으로 위태롭게 그립을 쥔 놈들보다는 필릭스가 당연히 빨랐다. 탕, 탕, 탕-,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렸고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우스울 정도로 싱거운 싸움이었다.

기실 페로몬을 쓸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전투와 싸움에 있어서 알파와 우성 알파들이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식으로 폐쇄된 공간에서는 더더욱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시간에 이토록 많은 이들을 쓰러지게 만드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이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알파 또한 흔하지 않았다.

달리 최우성 알파가 아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필릭스는 유유히 실내로 들어섰다. 물론 그로서도 방대한 양의 페로몬을 단번에 노출한 일이 만만치만은 않았는지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등허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은 빠르게 뛴다. 그러나 여전히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총을 조준하며 실내를 훑었다.

시체처럼 바닥을 뒹구는 놈들 사이에서 어린아이나 중년 여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찾아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골탕 먹이고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누르며 필릭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찬찬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침대 반대편으로 희미한 자국이 엿보였다. 석벽이 약간 어긋나 있는 모양새였다. 재빨리 다가가 힘껏 발로 차자 묵직한 석벽이 스륵, 낮은 소리를 울리며 움직인다.

“미친놈이 별짓을 다 해놨네.”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내뱉은 필릭스의 미간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오래된 고성을 본떠 만든 저택이니만큼 여러 가지 장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노아가 언뜻 지나가는 말로 경고하기도 했지만, 막상 다른 통로로 연결된 비밀 문을 보니 이가 갈린다.

하긴, 콜 패트릭스가 마지막 열쇠가 될지 모르는 인질을 단순히 방에 둘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런 상황을 예측했기에 그토록 두려워하며 제게 직접 벤자민을 찾아오라고 부탁한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 나는 새끼였다.

어두컴컴한 통로로 무작정 뛰어든 필릭스는 재빨리 콜트를 뽑아 장전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통로가 대체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지 모르는 탓에 재빨리 이어폰을 켰지만, 지하 깊이 들어온 까닭인지 혹은 전파를 차단하는 무언가가 있는지 노아와 연결조차 되질 않는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지직거리는 잡소리뿐이었다.

콜, 이 망할 개새끼.

어쩔 수 없이 이어폰을 다시 꺼버린 필릭스는 진저리를 치며 욕설을 혀끝으로 흘렸다. 그러나 아무리 욕을 해도 시원치가 않았다.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겠다고 새삼스럽게 다짐한 필릭스는 걸음을 빨리했다.

분명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다. 콜 본인도 상처를 입은 데다가 중년 여성과 아이까지 끌고 가려면 아무래도 더뎌질 수밖에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이제 와 놓칠까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외려 가뜩이나 제정신이 아닌 놈이 정말 정신을 놔버리고 인질들을 해칠까, 그 점이 가장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긴장과 압박은 극대화될 테고, 그러다 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누구도 모르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

초조하게 어두컴컴한 통로를 따라 걷으며 필릭스는 이를 짓씹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소리 내며 뛰었다.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귓가를 스치는 희미한 소리에 필릭스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 분명한 소리는 좁은 통로 위를 윙윙 울리고 있었다. 아이의 훌쩍이며 우는 소리, 여자의 다그치는 소리, 그리고 바짝 날 선 기세로 성질을 부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벽에 등을 대고 선 필릭스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에서는 어느새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있었다.

“시끄러워! 그만 좀 처울라고 했지!”

사내는 바짝 차오른 숨을 헉헉거리며 성질을 부렸다.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인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말투와 목소리에 담긴 분노와 살기는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잖습니까! 아이가 뭘 안다고 그렇게-! 악-!”

“닥쳐! 닥치라고 했잖아?! 귓구멍이 막혔어?”

사내에게 따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한층 커지기가 무섭게 철썩,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뒤이어졌다. 당연히 아이의 울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고 발광하는 콜의 고함 또한 커진다. 중년 여성에게 함부로 손을 올린 놈의 행패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필릭스가 으득, 이를 씹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건드리지 마!”

여자가 새된 비명을 질렀고, 아이는 자지러지는 울음을 내뱉었다.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하게 된 필릭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힘껏 내달렸다.

조금 전만 해도 단시간에 주위를 짙은 페로몬으로 물들인 탓에 지친 기색이 드러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외려 서슬 퍼런 노기를 흘리는 그에게서는 날카롭게 날이 선 페로몬이 선뜩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콜, 그 지저분한 손, 당장 떼!”

사나운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살기 어린 필릭스의 음성이 좁은 통로를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콜이 고개를 휙 돌렸다. 필릭스가 모퉁이를 뛰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과 정확히 맞물린 시간이었다.

“너, 네가 어떻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인 콜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벌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멈춰 선 필릭스는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콜의 손 위로 날카로운 시선을 두었다.

그는 울고 있는 벤자민의 목을 움켜쥔 채였다. 밝은 노란 머리칼을 한 아이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캑캑거리는 소리도 채 흘리지 못했고, 땅에서 떨어진 발은 바동거리기 바쁘다. 찢어진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제시카 파커는 아이 못지않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콜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내려놓게 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네 아들놈의 목이 꺾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기가 막힌 모습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을 때였다. 콜이 발악하듯 큰소리로 외치며 벤자민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네놈이 이토록 죽고 싶어 환장하는 놈인 줄 미처 몰랐는데 말이야.”

콜을 노려보며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내뱉는 필릭스의 목소리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 또한 견딜 수 없을 정도다.

“내가, 내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했었지.”

잠시 잠깐, 아이를 끌어당기던 제시카 파커가 ‘내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내뱉는 필릭스를 놀란 듯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당황한 시선을 필릭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죽일 듯이 콜을 노려보는 그의 푸른 눈이 짙어지다 못해 시꺼멓게 변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크, 커헉-!”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비웃음을 머금은 콜이 입을 놀렸을 때였다. 순식간에 필릭스에게서 내뿜어지는 강렬한 페로몬이 해일처럼 일어 콜을 집어삼켰다.

전기충격이라도 가해진 것처럼 사지를 부들부들 떨던 콜은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이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은 기운을 잃고 툭, 떨어진다. 그제야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아이를 제시카 파커가 다급히 끌어안고 흐느꼈다.

“으앙-! 할머니, 할머니! 아빠아아-!”

그러자 귓가에 할머니와 아빠를 모두 찾으며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혀들었다. 엄마를 모르니 아빠인 아이작을 찾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벤자민의 ‘아빠’라는 소리가 가슴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눈을 돌리자 가뜩이나 퉁퉁 부어 붉어진 눈으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벤자민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어린아이의 금발은 성인보다 더욱 색이 옅다. 벤자민의 머리칼 역시 은발에 가까운 밝은 금빛이었다. 물론 필릭스 본인도 어린 시절에는 저렇게나 밝은 금빛이었다.

은발이라고 불러도 좋을 머리카락, 금세 홍조를 일으키는 말캉하고 하얀 뺨, 짙푸른 눈과 선이 곧은 콧날까지. 아직 제 눈에는 아이작을 빼 박은 벤자민이긴 했지만, 펑펑 우는 모습이 사실 낯설지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자신과 어딘지 닮은 것 같다는 생각 또한 언뜻 스치고 지났다. 얼마 전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떠올린 필릭스는 거대한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홉뜨고 말았다.

맙소사, 자신과 아이작의 아이라니. 정말 내 아들이라니.

아이작이 갑작스레 폭로한 비밀을 듣고도 제대로 실감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놀랐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피붙이라는 존재가 막연하게만 느껴진 까닭이었다. 하지만 막상 벤자민을 눈에 담고, 자신과 닮은 부분을 찾아내자 알량하게도 감정은 한순간에 뒤바뀐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온갖 종류의 감정이 전부 뒤섞여 거대한 폭우처럼 쏟아졌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이한 감정이 하나하나 가슴에 박혀 따끔한 통증을 일으킨다. 필릭스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자칫 신음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아직도 얼떨떨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저 작은 아이가 자신의 피붙이라고 확신하자 가슴이 흔들린다. 아니, 그것보다도 심장이 쿵, 쿵 터질 것 같은 거친 파열음을 울리고 있었다.

아이작이 내던지듯 제 아이라고 소리쳤을 때만 해도 어안이 벙벙할 뿐 딱히 와 닿지는 않았는데……. 막상 마주하고 있으려니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간지러우면서도 들뜬 감상은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컥컥거리던 콜이 갑작스레 달려들어 제시카 파커와 벤자민을 뒤에서부터 빠르게 낚아챈 탓이다. 벤자민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감상에 빠져 콜을 잊고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

벤자민을 안고 필릭스에게 다가오던 제시카의 비명이 짧게 울렸다. 그러나 필릭스가 달려들기도 전에 콜은 제시카를 퍽, 소리가 울리도록 총의 그립으로 후려치고 기어이 벤자민을 빼앗아갔다. 아이의 가는 목을 사납게 움켜쥔 콜에게 제시카는 다급히 소리 지르며 매달렸지만, 이번에도 콜은 그녀를 가차 없이 발로 차 넘어뜨릴 뿐이었다.

제시카는 힘없이 돌바닥 위로 널브러졌고, 그와 동시에 탕-, 귀를 얼얼하게 만드는 총소리가 울렸다. 모든 것은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마!”

아직도 총소리가 이명처럼 울리는 가운데 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까스로 비껴간 총알은 제시카의 카디건을 찢어놓고 말았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가늘게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벤자민은 경기라도 일으킬 것처럼 크게 울었고, 그들에게 뛰어오다 말고 움직임을 멈춘 필릭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특전사를 이끄는 해군 중령에 우성 알파라는 콜을 얕봐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실수였다.

“필릭스, 나 역시 우성 알파라는 걸 알아야지. 네놈이 아무리 강한 페로몬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정도쯤은 견딜 수 있거든.”

피에 젖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콜은 거만하게 지껄였다. 그러나 상처 입은 몸으로 움직인 것이 무리가 되긴 했는지, 그 역시 가슴을 들썩이며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쉰다. 관자놀이를 타고 피가 섞인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아닌 척해도 흔들리는 동공과 땀에 젖어 미끄러지는 총을 자꾸만 고쳐 쥐는 꼴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려준다. 콜의 검게 죽어가는 낯을 빤히 바라보던 필릭스는 말없이 혀를 차기만 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놈은 총을 흔들며 소리쳤다.

“좋은 말로 할 때 총 내려놓고 물러서. 이 자리에서 둘 다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지라고!”

“…내려놔.”

“전부 네놈 탓이야. 모든 게 다 엉망이 되고 말았어, 네놈 때문에!”

눈을 부라리며 고함치던 콜이 철컥, 총을 장전시켰다. 그 꼴을 고스란히 보고 있어야 했던 필릭스는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에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꽉 움켜쥐었다.

“콜, 네가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양손을 들어 올린 필릭스는 손에 쥐고 있던 콜트를 툭 바닥으로 내던졌다. 묵직한 소리를 울리며 떨어진 콜트가 빙글 돌며 저만치 떨어진다. 잔뜩 긴장한 채 바닥 위를 구르는 콜트를 눈으로 확인한 콜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간과하고 있다니, 뭘 말이지?”

“난 최우성 알파고, 우성인 널 언제든지, 얼마든지 짓누를 수 있다는 사실이지.”

담담히 대꾸하자 콜의 시커멓게 죽어가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아니! 그렇게는 못 할 거다! 네 페로몬은 날 억제할 수 없다는 걸 보지 않았나?!”

“물론 내가, 내 아들에게 정신을 판 사이에 네가 운 좋게 한 번쯤은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해도…….”

필릭스는 무심히 말문을 열었다. 등허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중저음은 머리털이 쭈뼛해질 정도의 위기감을 자아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콜은 욕설을 내뱉으며 벤자민의 목을 틀어쥐고 바짝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르게 필릭스의 페로몬이 그의 머리 위로 사납게 쏟아져 내렸다.

“절대 이곳에서, 내 손에서 빠져나가진 못할 거다.”

“으, 크아악-!”

“넌 내 사람과 내 아들을 건드리는 실수를 했고, 난 절대 넘어가지 않을 작정이거든.”

한꺼번에 들이 부어지는 페로몬을 견디지 못한 콜의 코와 입에서 왈칵 피가 튀었다. 눈은 찢어질 듯 크게 벌어졌고, 사지는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주먹을 움켜쥔 필릭스는 자리에서 빠르게 튀어나가 그의 앞으로 내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이 빠져버린 콜은 벤자민을 툭 떨어뜨리며 눈을 뒤집고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필릭스는 떨어지는 아이를 다급히 낚아채 품에 안았다. 작은 아이가 가슴 안으로 푹 감싸인다.

“하…….”

필릭스의 양팔에 힘껏 안긴 아이는 서러움이 폭발한 듯 목덜미에 이마를 처박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 목덜미 위로 아이의 습한 숨결과 눈물 콧물 침이 마구잡이로 스며들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맙소사.

“…울지 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잠시 멀거니 서 있던 필릭스는 천천히 새털같이 부드러운 아이의 머리에 코끝을 비비며 작게 속삭였다. 벤자민의 작은 등을 커다란 손으로 조금씩 도닥이기도 한다.

언젠가 아이작이 벤자민을 끌어안고 그렇게 했던 것을 흉내 내 본 것뿐이지만, 아이 특유의 베이비 파우더와 비슷한 냄새가 코끝으로 흐르자 저도 모르게 아이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끌어안고 말았다.

“괜찮으니까, 울지 마.”

나직이 벤자민을 달랜 필릭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제시카 파커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파랗게 부어오른 얼굴과 찢어진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면서도 차분히 필릭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두려움과 불안한 빛이 역력히 드러나는 표정이긴 했지만, 애써 담담히 움직이는 모습이 새삼 아이작을 닮았다는 감상을 떠올리게 한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라며 필릭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필릭스! 네가, 네놈이 감히-!”

콜이 악에 받쳐 고함을 내지른 것은 그때였다. 페로몬에 뇌가 잠식되어 고통스럽게 바닥을 구르면서도 콜은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고함을 치고 험한 말을 쏟아냈다. 코뼈가 주저앉고 입가는 터진 데다가 팔과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몰골로 필릭스에게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는 콜은 악귀보다 더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원했던 대로 벤자민을 제 품에 안고. 제시카 파커를 데리고 나가려던 필릭스는 바닥을 기면서도 정신 나간 것처럼 소리 지르는 콜에게 냉랭한 시선을 떨어뜨렸다.

“닥쳐. 애 앞에서 더러운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손수 가르쳐 줘야 알아들을 거냐?”

너클을 낀 주먹을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필릭스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서웠는지 벤자민이 오들오들 떨며 작은 몸을 더욱 작게 웅크리며 흐느낀다. 그 모습에 필릭스는 살기를 흘리며 들어 올렸던 주먹을 천천히 내려야만 했다.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제 어린 아들 앞에서 폭력을 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가뜩이나 충격이 큰 아이가 더 겁먹고 울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직은 널 손 볼 때가 아니긴 하지.”

끝내 필릭스가 혼잣말에 가까운 소리를 흘리며 손을 거두자, 돌연 콜의 눈빛이 광적으로 번득였다.

“하, 하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제야 내가 한 말을 이해한 모양이지? 그것 봐! 케이는 이미 내가 가졌다고 말했지? 넌 날 죽일 수 없-. 크, 크아악-!”

“닥치라고 했잖아.”

그를 쉽사리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콜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총을 꺼내 그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내리누른 필릭스는 대신 콜의 머리부터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콜의 입가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네가 좋아하던 놀이 아니던가? 페로몬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짓거리 말이야.”

벤자민이 놀라지 않도록 양팔로 작은 몸을 꽉 끌어안은 필릭스는 낮게 조소했다.

“허억-, 그, 그만-….”

“이젠 네가 당할 차례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필릭스의 페로몬이 가혹할 정도로 퍼부어졌다. 벌벌 떨며 바닥을 기는 콜의 입가에서 피가 섞인 침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부릅뜬 눈은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같은 알파라고 해도 상대의 정신을 짓누르고 점령할 수 있는 것이 상위 알파였다. 최우성은 극히 드물다 보니 우성 알파인 콜이 지금껏 오메가는 물론이고 일반 알파나 우성 알파까지 기고만장하게 눌러댔을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베타는 재미없다고 지껄인 것도 그런 이유였을 테니까.

“네가 지금껏 한 짓거리가 어떤 기분인지 너도 궁금하지 않던가? 내가 친절히 깨닫게 해 줄 테니까, 즐겨보라고.”

필릭스는 여전히 가늘게 떨고 있는 벤자민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콜에게 무심히 말했다. 그래봤자 콜은 아무것도 알아듣지도 못한 채 숨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리며 바닥을 뒹굴 뿐이다.

처참한 모습을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던 필릭스는 불현듯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이작을 홀로 두고 나온 후로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각인이 마무리되지 않아 페로몬에 절어 있을 아이작을 떠올린 필릭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통로 뒤쪽으로 어느새 이곳까지 따라온 토니와 수하들이 소총을 콜에게 조준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했다면 놈들은 가차 없이 콜을 저격했을 게 분명한 모양새였다.

물론 토니는 필릭스가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수하들이 섣불리 나서지 않게 지시를 내렸을 터다. 그리고 이 자리에 토니가 직접 찾아와 수하들을 부리고 있다는 건, 저택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확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필릭스는 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토니에게 간단히 손짓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다가왔다.

“헬기 준비되어있으니까 여기서 나가는 즉시 미세스 파커와 벤자민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 저놈은 일단 어딘가 처박아두고. 아, 아직 죽으면 곤란하니까 입에 재갈이라도 물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택 전부 비워. 지금, 당장.”

토니는 제시카 파커를 부축하다 말고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빛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필릭스는 더는 말이 없었다. 다급한 걸음으로 통로를 빠르게 빠져나갈 따름이었다.

* * *

“으, 흐읏, 흑…….”

터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아이작은 멈출 수가 없었다. 더운 숨은 멋대로 흘러넘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필릭스가 페로몬을 뒤집어씌운 후 한참 동안 속이 뒤집히고 근육이 잘게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던 것뿐이다.

내부에 가득 차 있던 콜의 페로몬과 그것을 뒤덮은 필릭스의 페로몬 덕분에 속이 뒤집혀 신물을 토했고, 코피가 절로 터져 나왔으며,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지독한 두통에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끔찍한 고통이었다. 오한이 일어나는 몸을 끌어안고 찢어진 입술을 깨물어 터뜨리면서도 기절하고 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콜의 페로몬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누그러졌지만 대신 숨 막히게 짙은 필릭스의 페로몬이 제 몸을 휘감는다. 그뿐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페로몬에 몸이 멋대로 반응하며 내부에서 열꽃을 퍼뜨린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몹시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4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었던 히트사이클. 잊을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자극이었던 그것과 똑같은 열기와 똑같은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 말도 안 돼.”

하필이면 왜 또 이런 곳에서 히트사이클이 터지려고 하는 건지. 의문을 떠올려봤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이 몽롱하고 어지러울 뿐이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여보기도 하고 셔츠의 앞섶을 쥔 채 펄럭거리며 바람을 일으켜보기도 했지만, 망할 몸뚱이는 대책 없이 열을 뿜어내기만 한다.

“흐읏…… 아, 젠장!”

아이작은 짜증과 분을 견딜 수가 없어 주먹으로 소파를 정신없이 내리쳤다. 그러나 먼지만 자욱이 일어날 뿐 변하는 것은 하나 없다.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던 아이작은 끝내 셔츠의 단추를 쥐어뜯었다.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진 단추가 여기저기로 굴러가는 소리가 선연했다.

콜에게 맞아 파랗게 올라온 멍 자국이 드문드문 보이는 배와 가슴과 젖꼭지를 제 손이 멋대로 더듬어댔다. 그러다가 기어이 바지 지퍼를 내리고 손을 사타구니로 내렸을 때는 누워있던 허리가 절로 휘기까지 했다.

맙소사, 대체 이게 무슨 짓거리인지. 눈앞이 캄캄했지만, 손은 이미 의지를 배반하고 빳빳하게 서버린 성기를 쥐고 문지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샅을 아무리 손으로 쥐고 흔들어봤자 더운 열기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눈앞이 핑 도는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아이작은 몸을 뒤집어 소파에 이마를 비벼댔다. 잔뜩 열이 오른 이마와 뺨, 드러난 가슴을 소파에 문지르기도 했다. 그대로 엎드려 엉덩이만 치켜든 자세로 터질 것처럼 딱딱해진 성기를 정신없이 흔들었지만, 끓어 오르는 열은 좀처럼 사그라지질 않는다. 가시지 않는 갈증에 애가 타 눈시울이 붉어질 따름이었다.

물론, 제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억울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엉덩이 안쪽은 벌써 질질 흘러나오는 체액에 축축해진 지 오래였고, 속옷이 젖어가는 감각 또한 끔찍하리만큼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었으니까.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엉덩이를 쑤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것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어 반쯤 벗겨진 셔츠만 잘근잘근 이로 씹으며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이럴 때가 아닌데, 어머니와 벤자민이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전해 듣지도 못한 와중에 발정이라니. 어떻게든 참아보려 아이작은 맞아서 터진 입술을 또다시 세차게 깨물었다. 그러나 핏물이 왈칵 터져 나오기만 할 뿐 이미 시작된 히트사이클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으, 아아악!”

억울하고 분했다. 그중에도 제가 원한 것도 아니건만 난데없이 찾아온 히트사이클에 온몸이 근질거리는 정욕을 참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억울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의지를 배반하고 타오를 뿐이었다.

허리를 둥글게 만 채 아이작은 벌벌 떨었다. 식은땀이 핏방울에 섞여 턱 끝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쥐어뜯던 셔츠가 기어이 찢어지고 말았다. 가느다랗게 신음하며 제 몸을 더듬던 아이작은 끝내 한줄기 남아있던 이성을 놔버리고 손을 뒤로 가져가 댔다.

흥건히 젖은 입구를 손끝으로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꽉 조인다. 가슴이 들썩이도록 밭은 숨이 토해져 나오기도 했다.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핥으며 아이작은 제 구멍을 잡아 벌렸다.

“하, 하아, 아, 필릭스…….”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무의식의 흐름이었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빨던 아이작은 뺨을 소파에 대고 흐느꼈다. 어이없게도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손가락으로 아무리 뒤를 문지르고 쑤셔 넣어도 해소될 수 없는 갈증에 목이 바짝바짝 타오른다.

이런 게 아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니라 조금 더……. 단단하고 힘있게 자신의 뒤를 쑤셔대는…….

“필릭스, 아, 하아, 젠장, 제발…….”

저도 모를 소리가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르작거리는 제 모습이 민망하면서도 원하는 것을 당장 가질 수가 없으니 애만 탄다.

“아이작, 네가 언제 나를 부르는지 기다리다가 터질 뻔했잖아.”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흠칫, 어깨를 움츠린 아이작은 붉게 물든 눈을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열린 문가에 기대 서 있던 필릭스가 느긋하게 걸어오기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소리도 기척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어, 언제…….”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이, 필릭스는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아이작이 엎드려 있는 소파 앞까지 다가왔다.

“네가 욕하며 셔츠를 뜯어버렸을 때부터?”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지만 흐트러진 아이작을 훑어보는 시선은 오싹하리만큼 짙었다. 그러면서도 아이작의 터지고 찢어져 피가 묻어 있는 입술을 쓰다듬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하다. 기이한 괴리였다.

“맙소사…… 그런데, 왜 보고 있기만 했습니까?”

그런 꼴을 고스란히 보였다고 생각하자 가뜩이나 열이 올라있던 얼굴이 아예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아이작은 민망함과 더불어 내심 번져가는 서운함을 들킬 것만 같아 눈을 피하며 물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예상외의 대답을 던졌다.

“네가 나를 언제 부르나 보려고.”

태연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대꾸에 어이가 없어진 아이작은 그를 멀거니 올려보고 말았다.

“하, 하아, 내가……. 당신을 부르지 않았다면요?”

“기다렸겠지? 보아하니 콜의 페로몬도 어느 정도 가신 것 같으니까.”

그래 봤자 필릭스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아이작의 목덜미를 날카롭게 살필 따름이다.

아이작으로서는 볼 수 없는 곳, 왼쪽 귀 뒤의 목덜미에 새겨져 있던 콜의 표식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반대편인 오른쪽 귀 뒤에는 필릭스가 새기려고 하는 표식이 흐릿하게나마 떠올랐다.

그것을 확인한 필릭스는 말없이 웃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 두기만 했다는 필릭스를 불만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그렇게 색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면 곤란해. 가뜩이나 터질 것 같다고 경고했잖아?”

필릭스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욕정을 드러냈다. 제멋대로 구는 필릭스를 마주한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아이작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길 따름이었다.

“저 때문에 화가 났던 건……. 조금 가라앉았습니까?”

아이작은 열이 오른 얼굴로 그를 올려보았다. 잊고 있던 것을 그제야 떠올렸는지 필릭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 것이 있었지. 젠장, 이래서 억울하다니까. 네 야해 빠진 얼굴만 보면 마냥 흥분하게만 되니, 원. 손해를 봐도 보통 보는 장사가 아니야.”

억울하다고 투덜거리는 것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방을 빠져나가기 전, 극도의 두려움마저 일게 했던 분노는 깨끗하게 잊어버린 것처럼 아이작을 내려보는 시선 또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이작은 내심 한심하며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를 텐데? 화풀이는 고스란히 갚아주겠다고 장담했던 건 기억하거든.”

“…얼마든지요.”

아이작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묻은 채 속삭였다. 머리 위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번진다. 듣기 좋은 중저음 탓일까, 아니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길 탓일까. 가뜩이나 내부에서 번지기 시작한 열기가 자글자글 타오른다.

미칠 노릇이었다. 생김새와는 달리 투박하고 거친 그의 손이 당장 살갗을 만지고 눅눅하게 젖어버린 아랫도리를 만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토록 간절히 일어나다니.

그러나 낮게 신음하며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던 움직임은 오래가질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가있던 아이작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눈을 번쩍 들었다. 근질거리는 열기 때문에 잠시 잠깐 잊고 있던 벤자민과 어머니가 떠오른 탓이었다.

“어머니는… 벤자민은……. 어떻게 됐습니까?”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벤자민이 눈앞으로 어른거리자 히트사이클의 열기까지 일순 가라앉아버렸을 정도로 긴장하게 된다. 물론 필릭스가 돌아왔다는 건, 어찌 되었든 일이 일단락났다는 뜻이라는 걸 안다.

게다가 평소와 다름없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를 보니 벤자민과 어머니는 무사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필릭스의 답을 기다리는 아이작은 초조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가 걱정할 건 없어. 바라던 대로 내가 직접 벤자민과 네 어머니를 찾은 다음 헬기까지 태워 병원으로 보냈으니까.”

“병원이라니……. 설마 다치기라도 한 겁니까?”

차분한 필릭스의 대답에 겨우 한시름을 놓던 아이작은 병원이라는 소리를 듣곤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미세스 파커가 약간의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크게 다친 건 아니야. 벤자민은 많이 놀라서 안정이 필요할 뿐이고.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콜은?”

“일단은 살려뒀다고 해야겠지. 아직 각인이 끝난 게 아니라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라서.”

필릭스는 제법 자상하게 설명했다. 불안해하는 아이작을 안심시켜주고자 나름 노력한 것이기도 했지만, 실은 마땅치 않은 기색이 은연중에 섞여 있었다. 아이작이 벤자민의 모친이라니 아이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는 해도…….

“이 와중에도 어머니와 벤자민밖에 생각나질 않나 봐? 대단한 정신력이라고 해야 할지, 엄청난 가족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무슨… 뜻입니까.”

필릭스의 투덜거림에 아이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여전히 더운 숨을 빠르게 내쉬는 그를 바라보던 필릭스가 혀를 찼다.

아이작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어야 마땅했다. 반쯤 각인이 진행된 탓에 그의 전신은 페로몬에 절어있었고, 그 와중에 히트사이클까지 일어났으니 들끓는 성욕과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널브러져야 정상인 상태다.

기실 필릭스가 이곳으로 되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는 반쯤 이성을 놓고 자위하고 있지 않았던가.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안달하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가족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열기를 가라앉힌다.

다른 놈들 같았으면 이미 우글우글해진 머리와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을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들었을 텐데, 아이작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손끝 하나 내밀지 않는다. 온몸이 불덩이 같은데도 불구하고 제 상태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어머니와 벤자민이 더 걱정되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아이작이 필릭스로서는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말했잖아, 넌 네 상태나 신경 쓰라고. 쇼크로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태로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신경질 나네. 질투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직한 혼잣말을 흘린 필릭스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아이작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고, 피가 말라붙어있던 뺨과 입술을 닦아주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질투라니요?”

초조해하던 아이작은 그제야 눈을 깜박이며 필릭스를 마주했다. 여상한 태도와는 반대로 붉게 물든 눈가가 지독히도 색정적이라 당장 물어뜯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젠장, 욕설을 혀끝으로 삼킨 필릭스는 아이작의 턱을 손에 쥐었다.

“네가 그토록 걱정하는 네 가족마저 질투하게 생겼어. 어딜 가나 네 가족 생각뿐이잖아, 넌.”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필릭스를 아이작은 놀란 듯 바라보았다. 필릭스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의외였다.

“그야-…. 제 가족이니까요. 유일하게 남은, 제 가족이니까요.”

“난 내 가족을 그토록 걱정하진 않거든.”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하는 아이작의 턱을 매만지며 필릭스는 쓰게 웃었다. 난처해진 아이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짧게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사람마다 가족을 대하는 감정과 태도는 전혀 다른 법이니 말이다.

“전……. 가족이라고는 아버지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신 후에는 늘 혼자였죠. 언제나,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만 같았는데……. 벤자민이 내게 왔어요. 그리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어머니를 다시 찾았습니다.”

뜨끈해진 이마를 짚으며 아이작은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굳이 이런 속내까지 털어놓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지만, 변명 같은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늘어놓게 된다. 단순히 열이 오른 탓에 말이 많아진 건지, 아니면 필릭스가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세상에 혼자 남아있는 게 아니라고 깨닫게 해주는 가족이, 내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를 나무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필릭스와는 별개로 어머니와 아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발갛게 물든 얼굴로, 더운 숨을 흘리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으려 힘겹게 대답하는 아이작을 내려보던 필릭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게 사실이긴 하지. 난 가족에 대한 네 깊은 감정은 잘 모르니까.”

“…….”

“하지만 앞으로 슬슬 알아가 보려고 하거든. 네가 그토록 마음 쓰는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싶기도 하고 말이지.”

‘언제까지나 질투만 하다가 끝날 순 없잖아?’ 필릭스는 태연히 뒷말을 덧붙이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작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멍해진 눈만 깜박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아이작을 내려보던 필릭스는 불현듯 고개를 숙여 아이작의 입술을 덮어 눌렀다. 상처 난 입술을 가볍게 빨던 그는 아이작의 턱을 쥐고 능숙하게 입을 벌리게 만들더니 곧장 혀를 감아올린다.

숨 막힐 정도로 깊은 키스가 퍼부어졌다. 입술뿐 아니라 입안 전체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필릭스는 사나운 포식자 같았다. 그러나 아이작은 외려 기다렸다는 듯 턱이 빠듯해질 정도로 입을 벌리고 기꺼이 그의 키스를 반길 뿐이었다.

질척이는 소리를 흘리며 제멋대로 혀를 비비고 타액을 삼키는 격정적인 키스에 가뜩이나 열이 올라 허덕이던 몸이 기름이라도 부어진 것처럼 확 타오른다. 머리가 다 녹아버리기라도 했는지 아무 생각도 만들어내질 못했고, 눈앞은 지독한 열기로 새까맣게 번져갔다.

숨을 헐떡이던 아이작은 팔을 뻗어 필릭스의 목덜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러자 혀끝으로 점막 곳곳을 문지르고 핥다 못해 목구멍까지 훑던 필릭스는 문득 혀를 살짝 빼며 나직이 웃었다.

“아이작, 지금부터 제대로 널 각인시킬 생각이야. 거부하지 말고 따라올 수 있겠지?”

“뭐든……. 좋으니까, 빨리…….”

게걸스러우면서도 달콤하기 짝이 없는 키스를 선사하던 필릭스가 갑작스레 떨어지자 허전함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아이작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며 재촉했다. 뭐든 좋으니 필릭스에게 닿고만 싶었다.

그러나 사람 애간장을 다 태우려 작정이라도 했는지 필릭스는 안달하는 아이작의 벌어진 입술을 내려보기만 할 뿐이다. 정욕이 드글드글 끓는 눈을 하면서도 필릭스가 꼼짝도 하지 않자, 아이작은 초조함에 상처 난 입술을 핥았다. 끄응, 그제야 목구멍을 울리며 그가 눈살을 찡그린다.

“너무 보채지 마,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나.”

“당신이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당당하게 내뱉는 아이작에게 필릭스는 졌다는 투로 혀를 찼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는지 여전히 희미한 표식이 떠오른 목덜미를 매만지기만 할 뿐 움직임이 없다. 끝내 아이작은 손끝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필릭스는 보채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보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들어오기 전부터 미칠 지경이었다. 몸속 구석구석까지 전부 점령한 채 제 것이라고 새기기 시작하는 그의 페로몬과, 그것에 기꺼이 반응한 제 몸뚱이는 히트사이클까지 터뜨렸으니 말이다. 지금껏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한 채 필릭스와 대화를 나누었던 자신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필릭스가 코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의 땀 냄새와 체취까지 뒤섞인 페로몬이 코끝을 자극하는 바람에, 성기는 아까부터 바짝 서다 못해 프리컴마저 줄줄 흘리고 있기도 했다. 앞섶이 전부 젖어버렸다고는 하지만, 사실 뒤는 더했다.

제정신이었다면 보여주기도 민망할 정도로 흐물흐물 녹아버린 지 오래다. 당장 그가 쑤셔주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마치 처음 그를 만났던 그날 밤, 그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똑같은 히트사이클을 겪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어쩐지 과거가 오버랩 되는 기분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필릭스, 어서…….”

하지만 달라진 건 이런 것일 테다. 자신이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남자가 열기를 식혀줬으면 좋겠다. 이 남자만이 제 몸을 열고 멋대로 탐닉해줬으면 좋겠다.

생각만으로도 달아오른 아이작은 유혹하듯 필릭스의 뒷머리칼에 손가락을 넣고 헤집었다. 그의 금사 같은 머리칼이 사락거리며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가 풀려나가는 감각이 오싹하게 번진다.

“각인이 끝나고 여기서 나가면…….”

그러자 아이작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허리를 굽히고 뺨에 입을 댄 필릭스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내 파트너가 되겠다고 약속해줘.”

귓가로 흘러들어온 속삭임은 뜬금없었다. 아이작은 어리둥절해진 눈을 들었다.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운 요구였다.

어차피 각인되면 서로의 페로몬 외에는 그 누구의 페로몬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콜의 말에 의하면 서로의 페로몬에 중독이 되기까지 해 자칫 심각해진다고도 했었다. 그런데 파트너라니. 또 무엇이 남아있었나?

“법적으로 말이야. 내가 네 파트너가 되고, 벤자민의 아버지가 되고 싶거든.”

“…….”

“생물학적으로 내가 부친이라고 해도, 네가 벤자민의 유일한 부모라는 건 잘 알고는 있어. 그러니 내게도 기회를 줘. 벤자민의 진짜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기회.”

아이작이 필릭스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자, 그는 설핏 민망함을 드러내면서도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나도 네 소중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으니까.”

어울리지도 않게 긴장한 필릭스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자신을 향하는 그의 짙푸른 동공은 그대로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롭기만 하다.

아이작은 어지러운 머리를 짚었다. 필릭스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겠지만, 아쉽게도 가뜩이나 멍한 머리가 더 멍해질 따름이었다. 이 와중에, 이런 상황에 참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내뱉는 그가 당황스럽기만 했다.

“설마…. 프러포즈하는 겁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아이작이 붉어진 눈을 들었다.

“뭐, 그렇겠지?”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입니까?”

“안 돼?”

“반지도 없이요?”

아이작은 짓궂게 물었고,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필릭스는 일순 당혹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특히 필릭스가 그랬다.

지금껏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던 자신을 그가 안다면 깜짝 놀라고 말 텐데. 그러나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필릭스는 점차 불안과 당황으로 물들어 갈 뿐이다.

“아…… 당신을 데리고 살려면 속을 많이 썩겠군요.”

끝내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만하고 엉뚱한 데다가 눈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남자가 이토록 귀엽게만 보이다니. 이미 자신은 그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싫어?”

눈에 보일 정도로 심각한 콩깍지가 씌어있는데, 필릭스는 여전히 알아차리질 못했다. 그저 사탕을 받지 못해 실망한 어린아이처럼 눈썹을 내릴 뿐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필릭스를 보니 속에서부터 견디기 어려운 흥분이 치솟았다.

지금 당장 그를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진 아이작은 필릭스의 뒷머리를 꽉 움켜쥔 그대로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기갈 든 사람마냥 그의 근사한 입술을 씹고 빨자 다시금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말캉거리면서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감촉과 향기까지 더해지니 열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눈앞이 까맣게 점멸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 하아…….”

필릭스의 양 뺨을 움켜쥐고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핥고 혀를 감아올리자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습한 숨결이 단번에 섞여들었다. 필릭스의 목에서는 나직한 신음이 흐르기도 한다. 아이작은 그제야 흐려진 눈을 들었다.

“내가, 히트사이클이 시작됐다고 말했잖습니까.”

“그런데?”

“좆질부터 하세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대놓고 말하는 아이작을 필릭스는 어이없다는 투로 바라봤지만, 아이작은 그를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급히 끌어당길 따름이었다.

“프러포즈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얼마나 만족스럽게 잘하는지에 따라 달리할 겁니다.”

“맙소사, 아이작-.”

당황한 필릭스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아이작은 그의 멱살을 잡더니 확 끌어당겼다. 눈 깜박할 사이에 필릭스의 몸이 허공에서 반 바퀴 돌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소파에 거나하게 떨어져 반듯하게 등을 대고 누운 자세가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메치기를 당한 필릭스는 황망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이런 젠장, 이럴 때 기술을 쓰는 건 반칙이잖아?”

필릭스는 삐죽 입을 내밀고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재빨리 그의 허리 위로 올라타 앉았다.

“그럼, 히트사이클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인 저를 부러 내버려 두는 건 반칙이 아닙니까?”

아이작은 성급한 손으로 아직도 입고 있는 그의 방탄조끼부터 벗겼다. 능숙하게 조끼를 벗겨 바닥 위로 던지자 묵직한 소리가 일었다. 이어 그의 셔츠와 바지까지 한 번에 벗겨 이번에도 역시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물론 반쯤 벌어져 있던 자신의 바지 또한 허겁지겁 벗어 그의 옷더미 위로 떨어뜨렸다.

잔뜩 흥분한 아이작이 멋대로 옷을 벗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필릭스는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없이 탄탄한 나신을 드러내게 되자 비로소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이작,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화가 다 풀리지 않았었거든.”

“…그랬습니까?”

필릭스는 다시금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이미 눈앞이 흐려진 아이작은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목덜미를 물고 빠는 데 여념이 없었다. 가뜩이나 흥분과 정욕이 차올라 미칠 것 같은 상태에서 필릭스의 탄탄한 가슴을 손끝으로 더듬고 목덜미에서 흐르는 페로몬을 들이마시자 눈앞이 핑 돌았다. 이대로 취해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그런데, 아까도 말한 것처럼 네가 혼자 흥분해서 네 구멍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걸 보고 있으려니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더란 말이야. 그거야말로 반칙이잖아?”

이젠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인 아이작에게 필릭스는 여전히 삐진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몸을 마음껏 핥고 탐하는 아이작을 멈추게 하진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뜸 들이고 애태운 겁니까?”

자국이 남도록 그의 목덜미와 쇄골을 빨던 아이작은 손을 뒤로해 그의 성기를 손에 쥐고 문질렀다. 겉으로는 느긋한 얼굴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던 것과는 달리 필릭스의 성기는 무섭도록 발기한 상태였다.

한 손으로는 다 쥐어지지도 않을 만큼 커진 데다가 단단하기까지 하니 새삼 겁에 질린다. 이런 게 전에는 어떻게 들어왔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두렵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몸은 벌써 기대에 차서 구멍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괘씸죄라는 건 있지.”

아이작이 그의 성기를 문지르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필릭스는 욕정이 선연한 눈으로 아이작을 올려보며 무심히 대꾸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뜸 들이며 애태운 게 맞다는 뜻이었다.

“물론 발정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네가 벤자민과 어머니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돌변해버리는 바람에 질투가 일기도 했지만.”

“으, 으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핏줄까지 설 정도로 발기했으면서도 필릭스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런 필릭스와는 달리 잔뜩 달아오른 아이작은 그의 귀두 끝으로 입구와 회음을 문지르며 더운 숨을 헐떡였다. 질척이는 소리까지 흐르는 젖은 구멍 위로 당장 넣을 것처럼 가져가 댔을 때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제야 필릭스는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자꾸 멋대로 도발하지?”

으르렁거린 필릭스는 커다란 손으로 아이작의 엉덩이를 터뜨릴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

“난 되도록 천천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부추기기만 하면 어떻게 해?”

“하, 하아, 왜요? 왜 천천히 해야 합니까? 내가 지금 미칠 것 같다고 말했잖아요. 지금 당장 당신 좆을 넣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고-! 윽-!”

왜 빨리 넣지 않냐고 잔뜩 열이 오른 눈으로 따지던 순간이었다. 필릭스는 움켜쥐고 있던 아이작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더니 그대로 콱, 쑤셔 넣었다. 말 그대로 예고도 없이 충동적으로 밀어 넣은 삽입이었다.

“아-…, 아읏……!”

이미 구멍은 풀어질 대로 풀어진 데다가 축축하게 젖어있기까지 했음에도, 흉기처럼 단단한 필릭스의 성기가 팽팽하게 주름을 벌리며 들어서자 압박감에 절로 숨이 멈추고 말았다. 배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반도 들어가지 않은 게 분명한데 제 몸은 이미 한계치까지 벌어진 기분이었다.

“젠장, 아이작! 진짜 혼나려고.”

아이작 못지않게 숨을 헐떡이며 인상을 찡그린 필릭스가 문득 음험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은 흥분에 잠긴 눈을 가까스로 들었다. 그의 좆이 꿰뚫고 있는 구멍은 화끈거렸고 배 속은 얼얼함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타고 흐르는 전류에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게 된다.

“내가 왜 천천히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

“으, 으으읏-….”

그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필릭스는 소름 끼칠 정도로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앉혔다. 순식간에 그의 흉흉한 좆이 내벽 안쪽으로 깊이 처박혔다. 악, 비명이 절로 튀어나온다.

“아, 하아-… 필릭스…… 너무…, 깊어…….”

눈앞으로 불꽃이 튀었다. 팽팽하게 벌어진 입구와 내벽이 전부 화끈거릴 정도로 단번에 처박은 그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희열로 가득 차버린 자신에게 있었다.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네 오메가 페로몬이, 지금은 뚜렷하게 느껴져서 곤란할 정도란 말이다. 그것 때문에 아까부터 돌아버릴 지경이라고.”

“아-….”

“각인까지 하게 되면, 네 페로몬을 더 깊이 마시게 될 텐데…… 하,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하게 될지 나도 모르겠단 말이지. 조금, 무서울 정도야.”

깊은 바다처럼 새파란 그의 동공이 위험스러운 정욕을 투영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미 끝난 것 같지?”

필릭스는 붉은 입술을 핥으며 가늘게 떠는 아이작을 올려보았다. 굶주린 맹수를 떠올리게 하는 눈빛과 표정에 반사적으로 아이작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필릭스는 손을 뻗어 아이작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힘껏 끌어당겼다.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단번에 끌려간 아이작은 중심을 잃고 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맞댄 자세로 엎어졌고, 필릭스는 가차 없이 아이작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표식이 점차 진하게 새겨지고 있는 자리였다.

“아, 으윽-!”

사납게 세워진 이가 살갗을 찢어낼 것처럼 짓이긴다. 아이작이 짧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필릭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의 목덜미를 물고 빠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억제제의 약효가 중화되는 바람에 온전히 드러난 오메가 페로몬을 전부 약탈해 가려 작정한 것만 같았다.

거기에 더해 목덜미를 사납게 빨아대는 와중에도 필릭스는 격렬한 허리 짓까지 이어가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아이작의 뒷머리를 잡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제 좆을 물고 있는 엉덩이를 움켜쥔 채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그의 내벽을 쑤셔댄다.

철퍽철퍽, 젖은 살갗이 맞부딪히는 음탕한 소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운 필릭스의 가슴 위로 바싹 엎드린 아이작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목덜미와 엉덩이를 고스란히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아, 흣-, 필릭스, 필릭스-, 윽-!”

반듯하게 누워있는 필릭스의 위로 올라탄 건 자신이 분명한데, 어째서 꼼짝없이 붙들려버린 걸까. 누워서 허리를 들썩이면서도 정상위로 할 때와 별다를 바 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그가 의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의문이 일었던 것도 잠시, 금세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바래고 말았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사납게 뒤를 쑤셔대는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무작정 뒤흔들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작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눈앞이 어지러웠다. 필릭스가 목덜미를 아프도록 빨아당길 때마다, 그리고 내벽 안으로 흉흉한 성기를 마구잡이로 처박을 때마다 저도 어쩌지 못한 교성과 신음이 연신 흩어졌고,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선 침이 줄줄 흘러 턱을 타고 내렸다.

“아이작, 젠장! 지금껏 이런 걸 어떻게 숨기고 있었던 거지? 응? 이렇게 미치도록 단 냄새를 어떻게 숨기고 있었던 거야?!”

아이작의 목덜미에 커다란 멍이 생길 정도로 물고 빨던 필릭스는 아쉬워죽겠다는 투로 나무랐다. 그러더니 곧 헐떡이는 아이작의 턱을 움켜쥐고 탐욕스럽게 입을 맞춘다. 차오르는 숨을 견딜 수가 없어진 아이작이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호흡하며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필릭스의 매끈한 혀가 파고들어 뜨거운 점막을 마음껏 휘저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뒤섞인 침이 꼴깍꼴깍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그 어디에서도 해 본 적 없는 외설적인 키스가 분명했지만, 반쯤 넋이 나가버린 아이작은 거부감 없이 필릭스와 혀를 얽혔다. 아니, 거부감이 없다 뿐일까. 달아도 지나치게 단맛에 외려 기갈 든 사람처럼 필릭스의 혀를 빨아당길 뿐이었다.

“아이작, 야해 빠져서는……. 아, 어쩌지? 진짜 돌겠잖아!”

잔뜩 흥분해서 소리친 필릭스는 아이작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유연하면서도 격렬한 움직임으로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퍽, 퍽 살을 짓치는 소리가 한층 시끄러워진다. 그의 가슴 위에서 엉망으로 뒤흔들리던 아이작은 견딜 수 없는 쾌감에 필릭스의 단단한 어깨에 이를 박으며 흐느꼈다.

민감해진 내벽이 들쑤셔지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갈 지경이었는데, 자세 탓에 그의 탄탄한 복근 위로 자신의 성기가 어쩔 수 없이 비벼지기까지 하자 절정은 순식간에 찾아들었다.

“안 돼, 읏…, 쌀 것 같아…….”

“그런데? 참을 일도 아니잖아. 그냥 싸.”

엉망으로 흐느끼는 아이작의 뺨과 턱, 목덜미로 길게 혀를 미끄러뜨린 필릭스는 벗어나려는 아이작을 부둥켜안고 오히려 부추기듯 허리를 튕겼다. 리드미컬하면서도 외설적인 필릭스의 허리 짓이 이어지자,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대고 있는 아랫배 사이로 아이작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비벼졌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자극이었다.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아이작은 허리를 들지도 못한 그대로 사정하고 말았다. 불투명한 정액이 아이작과 필릭스의 겹쳐진 배 위로 길게 튀었다. 정액 특유의 쏘는 듯한 냄새가 아릿하게 코끝을 자극했고, 배와 가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미끈거리는 감각 또한 선연했다.

“아, 하아-… 읏, 필릭스, 잠깐-.”

아이작은 늘어지듯 필릭스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나른한 탈력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아이작이 사정을 하거나 말거나 멈추는 법 없이 뒷구멍을 찔러대는 필릭스의 좆질에 다시 목이 쉬도록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이작,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히트사이클이라며? 그래놓고 약한 소리를 하면 못쓰지. 4년 전에는 어땠는지 생각나게 해줘?”

“흣, 하지만… 아앗-…!”

“게다가 우린 지금 각인 중이잖아? 네 페로몬에 나까지 미치게 만들었으면 더더욱 책임을 져야지.”

아이작을 올려보던 필릭스는 비스듬히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오만하면서도 야비하고 또 한편으로는 허리가 떨릴 정도로 야해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인큐버스라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떠올린 아이작은 타는 듯한 갈증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핥았다.

“이 와중에 다른 생각까지 하면 어째?”

그러자 잠시 다른 생각을 떠올린 아이작을 기민하게 알아챈 필릭스는 쯧, 혀를 차며 그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푹, 그의 흉기 같은 성기가 내벽 깊이 처박혔다. 말 그대로 내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깊이 파고드는 압박감이었다. 눈앞이 핑 돌았다.

“흐, 으윽-!”

“그리고 이제야 하는 말인데. 사실 난 누가 내 위에 올라타는 거, 안 좋아하거든.”

허리를 붙든 그대로 고환이 아이작의 엉덩이에 닿아 뭉개지도록 쑤셔 넣던 필릭스는 문득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던 아이작은 정욕과 쾌감에 범벅이 되어 흐릿해진 눈을 들었다.

“읏, 하아-….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필릭스는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올려주며 눈을 접었다. 지금껏 쉬지도 않고 거친 섹스를 이어온 사람 같지 않게 상큼하기까지 한 미소였지만, 그가 내뱉는 말은 그런 해사한 미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위에서 날 내려보는 걸 싫어해서 말이지. 아무리 섹스하는 중이라고 해도 내 배 위에 다른 놈이 타고 앉는 건 딱 질색이라고.”

“…….”

“내가 싫어하는 체위를 억지로 하게 만들었으니, 뭔가 괜찮은 보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어?”

“당신…. 진짜…….”

성격 개차반이야. 차마 내뱉지 못한 내심을 혀끝에서 삼킨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흘렸다. 그러자 필릭스는 매혹적으로 웃으며 아이작의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았다. 장난이라도 치듯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를 손끝으로 지분거리기도 한다.

“그러면, 당신이 좋아하는 체위는…, 뭡니까?”

저릿저릿한 전류가 퍼져나가는 감각을 참을 수가 없어진 아이작은 필릭스의 손목을 움켜쥐며 질문했다. 아직 한 번도 사정하지 않은 채 깊숙이 박혀있는 필릭스의 성기를 잠시나마 빼고 싶어 슬쩍 엉덩이를 들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체위라.”

그래 봤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골반을 양손으로 단단히 틀어쥐고 움직임을 막을 뿐이다.

“말하면 지금 바꿀 건가?”

“…네.”

가슴이 들썩이도록 거친 숨을 내뱉던 아이작이 대답한 순간이었다. 불쑥 몸을 일으킨 필릭스가 아이작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단번에 뒤집는다. 구멍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성기를 빼지도 않은 그대로 자세가 바뀌었고, 순식간에 소파에 머리를 댄 채 엎드리게 된 아이작은 짧게 경련하듯 허리를 떨며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으, 흐으읏-!”

아이작의 머리와 어깨는 소파에 처박은 채 엉덩이만 한껏 치켜들게 한 필릭스는 땀에 젖은 그의 등을 손끝으로 훑었다. 촘촘한 근육으로 뒤덮인 아이작의 등은 필릭스의 느릿한 손길을 따라 움찔거렸다. 미치도록 외설적인 모습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체위는 이런 건데?”

“이… 짐승 같은…….”

“그래서, 싫어?”

무릎을 세워 앉은 필릭스는 아이작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며 심술궂게 물었다. 아이작은 차마 그래도 좋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얼굴에 열이 몰린다. 몇 번이나 해봤던 체위였지만, 여전히 민망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싫은 눈치는 아닌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린 필릭스는 두 손으로 아이작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퍽, 구멍 안쪽으로 흉기 같은 성기를 깊이 때려 박았다. 곧장 아이작의 새된 교성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건 고작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필릭스가 누워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강도로 그의 성기가 내벽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작정한 듯 박아대는 움직임은 발정 난 짐승보다 사나웠다. 그러나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전류는 아찔하기만 하다.

“아, 그렇지. 좇질 하는 거 보고 대답하겠다고 했던가?”

“흐, 흐읏……. 조금, 천천히-….”

“그런데 여태 몇 번이나 했으면서 몰랐어? 나, 그 짓 진짜 잘하는데. 답은 정해졌겠네?”

* * *

아이작은 연신 터져 나오는 교성을 멈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히트사이클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간과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4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히트사이클을 지나치게 오래 잊고 살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아, 흐읏, 좋아…. 아, 거기……. 조금 더-….”

시간이 대체 얼마나 어떻게 지난 건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체위도 여러 차례 바뀌길 반복했다.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다시금 소파에 얼굴을 묻고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가 된 아이작은 여전히 안달하며 보챌 뿐이었다.

이상했다. 어떻게 된 건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운이 빠지거나 정욕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타오르기만 한다. 게다가 얼마나 민감하고 예민해졌는지 이제는 필릭스가 가볍게 손으로 훑기만 해도 싸버릴 지경이었다.

덕분에 남아난 곳이 없었다. 필릭스가 물고 빨기를 반복했던 젖꼭지는 빨갛게 부어있었고, 피부 곳곳은 울혈 자국으로 가득했다. 필릭스가 작정하고 박아대는 구멍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작도, 필릭스도 셀 수 없이 사정한 탓에 누가 더하다고 할 것도 없이 정액으로 뒤범벅이 되어있기도 했다.

한 번 사정하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필릭스가 이 정도로 싸질러놨다는 것은 그만큼 둘의 짐승 같은 정사가 오랫동안 멈추지도 않고 이어져 왔다는 뜻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더, 더 깊이……. 아아, 너무 좋아……. 하, 필릭스-!”

왈칵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아이작은 필릭스의 팔을 붙들고 그가 제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기를 종용했다. 한쪽 무릎으로 소파를 짚고 한쪽 무릎은 세운 자세로 아이작을 뒤흔들던 필릭스는 퍽, 꿰뚫을 것처럼 그의 배 속에 성기를 때려 박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히트사이클의 열기와 쾌감에 잠식되어 이성을 놓아버린 아이작을 음험한 빛으로 응시했다. 질펀하게 녹아있는 구멍은 아직도 욕심 사납게 움찔거리며 필릭스의 좆을 물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욕정이 치솟게 만드는, 음란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환장하겠네, 진짜. 아이작……. 4년 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정말이지…. 너무 꼴리게 하잖아? 이래서야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끝낼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알아?”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아무렇게나 닦아낸 필릭스는 느릿하게 허리를 돌렸다. 그의 구멍에서는 필릭스가 싸지른 정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러 천천히 내부를 휘젓듯이 돌리자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정액이 줄줄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다. 누가 보면 윤간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

“으, 으응, 더-… 더 세게… 멈추지 말고, 계속- 아….”

아이작은 닳고 닳은 창부처럼 애원했다. 평소 무덤덤하고 금욕적인 모습과는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그 점이 못 견디게 좋았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아이작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을 쥐어짜려고 아주 작정을 했지.”

가볍게 투정 부리는 말을 흘리긴 했어도, 아이작의 흐트러진 뒷모습을 담는 필릭스의 푸른 동공에는 음험한 정욕이 넘치도록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애태우기로 작정한 듯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아이작의 엉덩이를 잡아 벌린 채 허리를 뒤로 뺐다.

쑥, 뽑혀 나오는 성기와 함께 벌어진 구멍 안에서 또다시 왈칵 정액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제대로 다물리지도 않은 채 빠끔히 벌어져 있기만 하는 구멍 안으로 붉은 속살까지 언뜻 비쳤다.

“…미치겠네.”

눈이 돌아가게 만들 정도로 음란한 모양새를 노골적으로 살피던 필릭스는 낮게 한숨을 흘렸다. 짙어진 동공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진득한 욕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서-… 필릭스-….”

“너무 보채면 곤란하니까.”

잠시 그의 내부에서 성기를 뺀 것도 못 견디겠다는 듯 아이작은 흐느끼며 안달했다. 그제야 아이작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잡아 벌린 필릭스는 퍽, 뿌리 끝까지 성기를 찔러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밖으로 빼냈다가 퍽,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강하게 때려 박는지 한 번씩 샅을 처박을 때마다 아이작이 위로 밀려올라가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가 부딪혔다. 아이작의 엉덩이에서 새어 나오는 정액은 질척이는 소리를 흘리며 사방으로 튀기도 했다.

“아, 아! 이건… 너무……. 으읏-!”

“네가 해달라며.”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아이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성기를 쥐고 문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차례 반복된 사정에 좀처럼 기운이 서리지도 않는다. 필릭스는 대뜸 그의 양 손목을 움켜쥐고 확 뒤로 당겼다. 반사적으로 아이작의 허리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휘었다.

“이제 더 나올 것도 없는데 만져서 뭐해? 드라이로 가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기를 몸속에서 완전히 뺐다가 박아 넣는 움직임 대신 격렬하고 빠른 허리 짓으로 뒤바뀌었다. 철펄철퍽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으흑, 신음하면서도 아이작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전율을 이기지 못하고 발가락을 움츠렸다. 살갗 위로 소름이 죽 끼쳐 올랐고, 허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면서도 미칠 것 같은 희열을 어쩌지 못하고 또다시 흐느끼고 말았다.

“조금 전만 해도 벌어져서 다물어지지도 않던 구멍이 다시 조여드는 건 대체 뭐지?”

“아, 아아, 아-, 그, 그만-….”

“내가 어디까지 미쳐서 날뛰면 만족할 거야? 응?”

뒤로 뻗은 아이작의 양팔을 움켜쥔 필릭스는 사정없이 아이작을 몰아세웠다. 아이작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연신 흔들면서도 허리를 휘며 교성을 내질렀다. 이대로라면 필릭스가 요구했던 드라이 오르가슴까지 쉽게 도달할 것만 같았다.

“아, 아아아아-!”

아니, 그런 것도 필요 없이 당장 이것만으로도 까무러칠 만큼 좋았다. 말 그대로 발정 난 짐승이 따로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떠올리질 못했다. 쾌락과 희열만 좇아가는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맞부딪히는 엉덩이가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필릭스의 움직임이 격렬해지자, 눈앞에서 아찔한 불꽃이 튀었다. 예민하게 부어올라 있는 내벽의 한 지점을 대놓고 자극할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저릿저릿한 전류가 퍼져나가기도 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은 과호흡을 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흩어진다. 정신이 나가도록 사람을 몰아세우는 필릭스를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필릭스… 필릭스…, 그, 그만, 이젠 더는, 으흣-!”

드라이 오르가슴이라고 했던가. 지독한 쾌감에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 아이작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저도 모를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정신없이 흐느끼며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젠장!’ 뒤에서부터 필릭스의 격정에 찬 음성이 들려오는 동시에 흐물흐물하게 녹아있는 내벽 위로 뜨거운 열감이 쏟아졌다. 오싹한 전율을 만들어내는 열감이었고, 이젠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감각이기도 했다.

필릭스가 낮게 신음하며 사정하고 나자 아이작은 일순 방전되어버린 것처럼 몸을 축 늘어뜨렸다. 눈앞이 새까맣게 전멸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털썩, 소파 위로 떨어진 아이작은 그대로 까무룩 널브러지고 말았다. 이젠 정말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 * *

무겁기 짝이 없는 눈꺼풀을 깜박거린 것은 목덜미 위로 간질간질한 감각이 일어났을 때였다.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좀처럼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손길에 아이작은 끝내 눈을 뜨고 말았다.

“……필릭스?”

시야로 어른거리는 인영을 알아본 아이작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흠칫 놀란 아이작과는 달리 필릭스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여유롭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나른하게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그 위로 약간의 긴장과 흥분이 뒤섞여있는 그의 표정은 묘했다. 아이작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되물으려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필릭스는 아이작을 와락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아이작! 맙소사, 아이작!”

“무, 무슨 일입니까.”

필릭스의 격양된 음성에 아이작은 무의식적으로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그러자 누워있는 아이작의 가슴을 내리누른 채 목덜미를 핥던 필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지금껏 정신이 나가버려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말이야.”

귓가를 파고드는 필릭스의 목소리는 흥분해 있었다. 아이작은 아직도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눈을 깜박였다. 필릭스는 그런 아이작이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네 목덜미에, 내 표식이 완벽하게 나타났어.”

“……네?”

땀에 푹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던 필릭스는 마치 비밀을 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귓가로 떨어지는 달콤한 속삭임에 아이작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짐승처럼 뒹굴다 보니 어느새 각인이 마무리된 모양이야.”

아이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목덜미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확실히 필릭스의 말마따나 그의 귀 뒤, 목덜미 위로 손톱만 한 무늬가 보였다. 완벽하게 각인이 끝났는지 검푸른 색의 무늬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각인의 표식인가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매만지던 아이작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겠지?”

“문신보다 더 진한 색이네요.”

“그러게.”

각인이 처음인 건 필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각인에 관해서는 눈곱만큼의 관심조차 없던 터라 아는 것도 사실 많지 않았다. 아이작이나 필릭스나 똑같이 계획에 없던 각인을 갑작스레, 예고 없이 하게 되었으니 누가 더라고 할 것도 없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신기하군요.”

몽롱하게 늘어진 가운데에도 아이작은 필릭스의 목덜미에 나타난 표식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매만졌다. 만지고 또 만지며 각막에 새겨 넣을 것처럼 쳐다봤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다른 이도 아닌 필릭스 펠리체가 정말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자신의 알파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가질 않는다. 멀거니 필릭스의 목덜미를 올려보며 혼잣말을 흘리는 아이작에게 그는 가벼운 입맞춤을 전했다.

“예쁘게 잘 박혔어.”

“……당신도요.”

“와, 이것 참.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네가 내 오메가라니.”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고스란히 읊는 필릭스를 아이작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만족하십니까?”

슬쩍 떠보듯이 묻는 말에 필릭스는 눈썹을 휘며 아이작에게 시선을 두었다.

“만족하냐고? 물론 만족하고말고. 네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지금껏 몰랐던 게 아쉬울 정도니까.”

단호하게 말하는 필릭스의 대답에 아이작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러자 필릭스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짙게 가라앉은 푸른 동공으로 아이작을 빤히 직시했다.

“너는? 너야말로 오메가인 사실을 지금껏 숨기고 살아왔을 텐데,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베타로 살아왔었는데, 이젠 그것도 못 하게 됐잖아. 앞으로 어딜 가나 내 오메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텐데, 괜찮은 건가?”

필릭스의 질문은 잠시 아이작을 멍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음, 그렇군요.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늘 베타처럼 살아왔기에 알지 못했던 일들을 앞으로는 부딪치게 될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달라질 테고, 여러 가지 알지 못했던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특히 필릭스의 오메가라면 더더욱 많은 구설에 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신 당신을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죠. 그리고……. 당신이 곁에 있는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히 대답하자 필릭스는 잠시 놀란 듯 입을 반쯤 벌렸다가 이내 눈을 접으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아이작, 네게 다시 빠지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한 말이었다면, 아주 정확했어.”

그 미소가 어찌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아이작은 새삼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말았다. 저토록 보기 드문 미인을 갖게 되었으니 모든 것을 감내해야지 별수 있겠는가, 다짐하면서.

“자, 그럼 내 오메가. 이제 대답 좀 해 보지?”

녹아날 것처럼 다정하게 아이작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매만지던 필릭스가 여전히 사람을 홀리고도 남을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어떤 대답 말입니까?”

“그래서, 내 좆질은 마음에 드셨나?”

아이작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머리칼을 매만지는 손길은 부드러웠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정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는 짓궂은 질문을 던지니 당황할 수밖에.

“아, 뒤끝 한 번 길군요.”

“그렇게 말한 건 너잖아.”

“물론 그러긴 했습니다만….”

“그럼 대답을 해야지.”

문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피곤하니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보죠.”

“…아이작. 그러다가 아예 안 재우는 수가 있어.”

부러 등을 돌리려 몸을 움직이자 귓가로 음산한 음성이 흐른다. 어깨를 살짝 움켜쥐는 손끝에는 위험스러운 힘마저 서려 있었다. 지금 당장 제대로 된, 혹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던지지 않으면 정말 잠도 재우지 않을 분위기를 알아차린 아이작은 간질거리는 가슴을 슬쩍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어떤 대답을 할 거라 예상했습니까?”

웃음을 참으려고 하는 입가가 실룩였다. 마피아와 연관된 무기상,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사내가 이토록 어리광과 보챔이 심한 어린아이 같은 성격일 줄을 누가 알았을까.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그러나 필릭스는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 투덜거릴 뿐이다. 이래서야 원, 눈치 없기로 유명한 필릭스 펠리체가 맞긴 한 모양이었다.

더는 짓궂은 장난을 치기가 어려워진 아이작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뺨을 손바닥으로 쓸다가 매혹적인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뻔하지 않습니까.”

속삭이듯 되물으며 아이작은 필릭스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손끝에 살짝 힘을 주어 눌렀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입술을 달싹이는 필릭스를 저지한 행동이었다. 도톰한 그의 입술과 그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더운 숨결이 손끝을 간질였지만, 아이작은 쉽게 손을 떼지 않았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

“‘yes’. 그것 외에 제가 준비한 대답은 없습니다.”

담담한 대답이 흘러나가자 짙푸른 바다 같은 그의 두 눈이 가늘게 흔들린다. 그러나 곧 기쁜 듯이 곱게 접히는 눈을 보고 있으려니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남자에겐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겠다는 예감이 은연중 떠오르기도 한다.

“이제, 조금은 자게 해주시죠. 발정 난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인 줄 알았습니다.”

길게 말을 이어나가는 사이에도 필릭스는 짙어진 동공을 제게서 떼지 않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괜스레 멋쩍어진 아이작은 필릭스의 입술을 누르던 손을 들고 다시 등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가슴을 내리누르고 있는 바위 같은 사내가 없었다면.

“맙소사. 그거 알아? 지금껏 살면서 가장 두근거린 순간이었어.”

몸을 옆으로 돌리지도 못하게 붙든 그는 아이작의 귓불에 이를 세워 가볍게 씹으며 속삭였다. 귓가에 직접 전해지는 습한 숨결은 오싹한 전율을 일으켜 목덜미를 움츠리게 했다. 반사적으로 아랫배가 꽉 조이는 흥분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직 히트사이클의 열기가 내부에서 완전히 가시지도 않은 데다가, 격렬했던 섹스로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미미한 자극에도 쉽게 반응하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애써 모르는 척 눈을 돌렸다.

“…그랬습니까?”

“아이작, 한 가지 놀랄 만한 사실이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필릭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의뭉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또 뭐가 남아있습니까?”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분위기에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되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근사한 미소를 머금은 필릭스가 아이작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뿐 아니라 턱과 콧날, 입술 위까지 쪼는 듯한 키스를 퍼붓는다. 덕분에 히트사이클의 흥분과 열기가 전부 가라앉지 않은 몸에서는 또다시 미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 아무래도 러트가 시작되는 것 같거든.”

그러나 귓가로 달짝지근하게 전해지는 말은 기가 막혔다. 아이작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봤다.

“설마…….”

“네 페로몬에 심하게 반응했나 봐.”

길게 목덜미를 핥으며 속삭이는 필릭스는 확실히 조금 전보다 뜨끈한 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아이작이 황망하게 중얼거렸지만, 그는 아이작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붙들 뿐이었다.

“너 역시 히트사이클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잖아. 이거야말로 완벽한 궁합이 아니고 뭐겠어? 그렇지 않아?”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도 마냥 해맑기만 한 필릭스를 마주한 아이작은 딱딱하게 어깨를 굳히고 말았다. 그래 봤자 필릭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아이작에게 입을 맞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이작은 결국 포기한 채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다정하면서도 탐욕스러운 키스는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끌어안은 그들의 몸에서는 좀처럼 멈출 수 없는 열기가 똑같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 * *

공허한 공간 위로 철컥, 살기 어린 소리가 이어졌다. 자동권총에 탄창을 밀어 넣고 안전장치를 풀고 총알을 장전하는 일련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아이작의 손놀림을 바라보던 필릭스는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웬만해서는, 아니 절대로, 저 남자를 열 받게 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새삼스러운 다짐을 몇 번이나 되새기면서.

총을 들고 상대를 겨누고 있는 아이작은 무감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총을 쥐고 있는 손은 흔들림조차 없었고, 상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심해처럼 깊었다. 지나칠 정도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은 외려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쾌감에 잠겨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제 아래에서 헐떡이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마저 일어날 지경이다.

격렬한 섹스가 끝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눈을 뜨고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각인을 새기기 시작한 날로부터 이틀이 훌쩍 지난 뒤였다. 아이작의 히트사이클과 더불어 돌연 터져버린 필릭스의 러트까지 뒤섞인 탓에, 발정기라는 말 그대로의 시간은 난잡하게 흘러갔다.

누가 더 미쳤었다고 비교조차 할 수도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쳐있었고 서로의 페로몬에 홀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발정기를 보냈을 뿐이니까. 물론 처음으로 각인이 새겨진 터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흥분했던 것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굶주린 짐승처럼 섹스만 해대며 이틀이라는 시간을 보낸 아이작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장 먼저 콜을 찾았다. 이성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벤자민과 어머니에게 뛰어갈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걸리는 요소가 남아있으면 불안합니다.’

어째서 벤자민보다 콜을 먼저 보려고 하는지 의아해하는 필릭스에게 아이작은 명료하게 대꾸했다.

‘제 손으로 놈의 숨통을 끊어야 조금이나마 후련해질 것 같기도 하고요.’

바지 허리춤에 필릭스가 빌려준 콜트를 쑤셔 넣으며 덧붙이기도 했다. 결국, 필릭스는 아이작이 원하던 대로 콜이 감금된 곳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총격전이 있었던 그 날, 필릭스는 호화롭고 드넓은 콜의 저택을 전부 폐쇄했다.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으며 들어오지도, 연락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각인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아이작과 몸을 겹쳐야 했고, 그러다 보면 컨트롤 할 수 없는 페로몬이 사방으로 흩어질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결론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아이작의 페로몬을 맡고 흥분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은 까닭이었다. 물론 자신이 내뿜는 알파 페로몬을 거스른 채 접근할 수 있는 놈들은 없을 테지만, 세상엔 어떤 미친놈이 있을지 알게 모르는 법이지 않은가. 필릭스는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미친놈들에게 여지를 남겨놓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과도한 필릭스의 질투 덕분에 폐쇄된 저택은 음울하기만 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데다 텅 비어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곳에 아이작과 필릭스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콜 역시 저택의 지하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감금된 상태기도 했다. 굳이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저택 내에 가득 퍼져있는 자신과 아이작의 페로몬을 유일하게 맡을 수 있었던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콜이 되었다. 생각할수록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어차피 뒈질 놈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겨우 불쾌감을 가라앉힌 필릭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콜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감옥을 연상케 하는 지하의 방, 악취가 진동하는 밀실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사지는 바닥에 못 박아 움직이지 않는 의자에 꼼짝없이 묶여있었다. 여기저기 다친 상처는 치료도 없이 방치한 탓에 벌써 곪아서 썩어가기 시작했으며, 제정신이 아닌 듯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는 썩은 생선처럼 탁했다.

그러나 아이작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탁한 눈은 대뜸 그를 알아보곤 천천히 벌어졌다. 아이작의 목덜미에 뚜렷하게 새겨진 각인으로 시선이 떨어졌을 때는 엉망인 낯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도 했다.

음험하면서도 노기 서린 콜의 눈빛을 알아차린 필릭스는 아이작보다 먼저 총을 뽑아 놈의 눈알에 대고 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가라앉혀야만 했다. 하지만 분노와 불쾌감을 확연히 드러내는 필릭스와는 대조적으로 아이작은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총을 장전할 따름이었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죽인다고 했었지.”

콜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묵묵히 그를 노려보던 아이작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탕-, 귀를 아릿하게 만드는 총소리가 갑작스레 퍼졌다. 총알은 콜의 무릎을 관통했고, 재갈이 입에 가득 차 있던 콜은 억눌린 비명을 터뜨렸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팔짱을 낀 채 문가에 기대 서 있던 필릭스마저 움찔, 놀라 어깨를 굳혔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어떤 말도 없었다. 꾹 다문 입과 냉랭한 눈빛으로 한쪽 무릎이 박살 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콜을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내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내 가족에게 저지른 네 죗값치고는 지나치게 약할 수도 있겠지만….”

고통에 정신을 잃어가는 콜을 노려보던 아이작이 희미하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소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이미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 콜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두 번 다시 너 같은 놈 때문에 내 가족이 힘겨워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족해. 아이작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필릭스조차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혼잣말을 흘렸다.

싱겁고도 허무한 죽음. 그것이 전부였다. 문가에 팔짱을 낀 채 기대있던 필릭스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 같았으면 저토록 쉽게 죽이지 않았을 텐데, 혀를 차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일 뿐, 아이작은 아이작이 원하는 끝을 본 것일 테다.

이런 상념을 이어가고 있는 사이, 아이작은 어느새 총을 집어넣고 필릭스에게 다가왔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나, 방아쇠를 당겼을 때나, 조금도 변함없이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아이작을 살피던 필릭스는 안색을 갈무리하곤, 수하에게 전화를 걸어 뒷정리하라고 일러두었다. 지하의 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까지 아이작은 무거운 침묵을 이어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담담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마침내 들려온 것은, 그들이 지하를 빠져나가 저택의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무렵이었다. 필릭스는 흘끔 눈을 돌려 아이작을 향했다. 그는 제법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삼 키스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감정이 들끓게 하는 표정이었지만, 필릭스는 그의 손을 가만히 마주 잡기만 했다.

“천만에."

선선한 바람이 맑게 불어오는 날이었다.

아이작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필릭스는 이미 콜을 사로잡았던 이틀 전 그의 사망보고를 올렸다. 처음부터 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니 살아있다고 보고할 필요조차 없었던 거다. 세간에는 콜이 스스로 저지른 수많은 비리가 발각되자 두려움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알려졌지만, 그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콜뿐 아니라 해군 내에서 그와 연관되어 비리를 일삼아왔던 장교들 또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 한동안 모든 언론이 해군 장교들의 비리에 대한 기사를 대서특필하며 크게 화제가 되는 바람에 온통 어수선하기도 했다.

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비리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다시금 안정되어 갈 무렵, 케이시드 페트릭스 대위에게 씌워졌던 누명은 깨끗하게 벗겨져 복귀가 허용되었다는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하지만 특전사였던 과거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샌디에고 다운타운의 꽃가게를 다시 오픈한 아이작은 무심히 편지를 찢어버리고 말 뿐이었다.

이 모든 결과는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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