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6)

10. Secret No. 2

공항에서 빠져나와 택시를 향해 걷는 아이작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필릭스는 기내에서보다 더 불편한 기색이었다. 막상 아이작을 콜에게 보내려니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의 이런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한 걸음으로 택시가 줄 서 있는 곳으로 나갈 뿐이었다. 끝내 참을 수 없어진 필릭스는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왜 붙잡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마주한 필릭스는 여전히 그의 손목을 꽉 붙든 채 다른 손을 들어 그의 입가의 상처를 매만졌다. 까칠한 감각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자 알게 모르게 심장이 쿵쿵거리며 뛴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다. 살아오면서 실패에 대한 걱정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두려울 것이 없었고, 무슨 일을 하든 기고만장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질 못한 것이 기이했다. 난생처음으로 느끼는 불안함, 긴장, 초조를 어쩌지 못한 필릭스는 머리칼을 흩트리며 한숨을 흘렸다.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이작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필릭스를 조용히 응시할 따름이었다. 마치 그는 평소처럼 길을 가는데 자신이 난데없이 붙들고 유난스럽게 걱정하며 살피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나치게 대조되는 분위기에 자신이 외려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끝내 필릭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니’라고 씁쓸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아쉬운 감정은 억누른 채 움켜쥐고 있던 아이작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아이작은 흘끔 눈을 내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는 필릭스의 손을 응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필릭스는 식은땀마저 배어난 손을 들어 아이작의 턱을 붙들고 들어 올렸다. 아래로 향해 있던 아이작의 마른 얼굴이 훤히 눈앞으로 비추었고 새까만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필릭스는 고개를 숙여 그의 상처 난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아-….”

탄성이 섞인 아이작의 낮은 신음 소리가 증폭제처럼 귓가를 자극한다. 이성이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서늘했던 입술은 맞물리기가 무섭게 뜨거운 열기로 물들어 갔고, 겹쳐진 입술 사이에서는 젖은 소리가 흘렀다.

아이작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당황으로 가득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키스가 확실했는지 눈이 동그랗게 커지기도 한다. 그러나 멀거니 서 있기만 할 뿐, 밀어내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필릭스는 고개를 꺾어 그의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얼마만의 키스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지나치게 오랜만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드는 감각은 변함이 없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자극적인 체향, 상처가 남아있어 까끌거리긴 해도 말캉한 입술의 감촉과 달다 못해 녹아날 것 같은 타액과 매끈하게 휘감기는 혀까지.

새삼스럽게 아이작과의 키스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깨달은 필릭스는 허기진 사람마냥 혀를 감고 입술을 빨았다. 하지만 미칠 것 같은 허기는 좀처럼 가라앉질 않고 외려 심해지기만 한다. 어쩌면 아무리 물고 빨아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인지도 몰랐다.

아이작의 뺨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퍼붓는 키스가 멈추질 않고 이어지자 질척이는 소리가 점차 외설적으로 흘렀다. 격렬하게 핥고 빠는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습한 숨결이 뒤섞인다. 정신이 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길 한가운데라는 건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 하아, 피, 필릭스-!”

끝내 아이작은 놓아줄 생각도 없이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드는 필릭스의 어깨를 다급히 두들겼다. 숨결까지 빼앗아가는 격렬한 키스 탓에 그의 가슴은 크게 들썩였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헉헉거리며 내뱉기도 했지만 필릭스는 좀처럼 그를 놓지 못했다. 가까스로 잊은 척 참고 있던 달콤한 자극을 다시금 맛보니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다.

“으, 흐읍, 그만-….”

“아이작, 아, 젠장!”

숨이 차올라 입을 크게 벌리는 아이작의 입안 깊숙이 두꺼운 혀를 밀어 넣고 점막 곳곳을 훑던 필릭스가 짜증 섞인 소리를 짧게 내질렀다. 그제야 겨우 떨어진 입술은 번들거릴 정도로 타액에 젖어있었다. 아이작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닦아냈다.

“대체 이게 뭡니까?!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이게 무슨-.”

“아이작, 내가 지금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너는 모르겠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심장이 죽을 것처럼 불안하게 날뛰어. 기분 나쁜 예감이 사라지질 않아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란 말이야!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널 데리고 샌디에고로 다시 날아가고 싶을 정도라고!”

한 번도 드러낸 적 없었던 불안을 쏟아낸 필릭스는 긴 한숨을 흘리며 제 뺨을 문질렀다. 이게 다 뭔지. 정작 아이를 빼앗긴 아이작보다 더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이렇게나 멍청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으면 아이작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예감에 불안해지는 심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다. 두 번 다시 그를 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제기랄, 치솟는 욕설을 삼키며 필릭스는 사납게 이를 씹었다.

“젠장, 내가 이럴 줄은 나도 몰랐어.”

고작 감정조절을 못 해 흔들리는 꼴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필릭스는 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 한시라도 제 아들을 구해내고 싶어 초조해하는 아이작을 잘 알기에 더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지만, 여전히 기이하게 날뛰는 심장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는다.

“필릭스…….”

이름을 부르는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기도 전에 입술 위로 더운 열기가 맞부딪혔다. 흠칫 어깨가 떨렸다. 그 어떤 소리조차 흘리지도 못했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도 못했다. 춥, 젖은 소리를 흘리며 제 입술을 핥는 감각이 오싹한 전류를 일으킨 탓이다.

한쪽 팔로 필릭스의 목덜미를 감고 감미로운 입맞춤을 전하는 아이작의 뺨 위로 약간의 홍조가 번졌다. 필릭스는 멀거니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아이작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침없이 혀를 밀어 넣고 입안을 훑어내리자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리고 말았다.

와락,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서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혀가 얽혔고 섞인 타액을 목구멍 아래로 넘겼다. 감미롭고 달콤하면서도 아찔하기까지 한 키스가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세상에 단둘만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욕심껏 물고 빤 입술이 붉게 부어올랐을 정도로 키스는 오래도록 이어졌음에도 아직 떼어내기 아쉽다는 듯 필릭스는 아이작의 젖은 입술을 쉽게 놔주지 못했다. 계속해서 쪼는 듯한 입맞춤을 퍼부으며 낮은 한숨을 흘린다.

“잊었습니까? 당신에게 저를 온전히 주기로 계약했잖습니까?”

그러자 아이작은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채 조용히 말했다. 열정적인 키스 끝에 던져진 질문은 허탈하기까지 했다. 필릭스는 아이작의 허리를 끌어안고 코끝을 마주한 그대로 쓰게 웃었다.

“그래, 그랬지.”

“그러니, 찾으러 오세요.”

“…물론 그럴 거야.”

나직하게 속삭이는 음성은 다디달았다. 덕분에 더더욱 떨어지지 않는 손을 필릭스는 억지로 들어야만 했다. 그러자 아이작은 마지막으로 춥, 소리가 나도록 필릭스의 아랫입술을 빨아당기더니 서슴없이 등을 돌렸다. 대기하고 있던 택시로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인하게 느껴졌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그대로 택시를 탄 아이작은 뒤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빠르게 사라지는 택시를 눈으로 좇고 또 좇았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담아두려는 것처럼.

차들 사이로 아이작을 태운 택시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졌을 때까지 장승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던 필릭스는, 주머니 안쪽에서 울리는 휴대폰의 신호음에 비로소 짧게 혀를 차며 손을 들었다. 발신자는 예상했던 인물이었고, 역시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말해.”

전화를 받는 음성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필릭스, GPS 가동했어.>

“아아.”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놓질 못했대? 답지 않은 짓을 잘도 저지르네.>

울분마저 치솟는 자신의 심경과는 정반대인 노아의 발랄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울려왔다. 필릭스는 그제야 날카로워진 푸른 눈을 들었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쫓기나 해.”

<지금 해변 쪽으로 향하는 프리웨이를 탔어.>

노아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아이작에게 GPS를 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먹은 음식에 소량의 수면제를 탄 다음, 잠시 잠에 빠지길 기다렸다가 위내시경을 하는 것처럼 식도에 튜브를 꽂아 캡슐을 밀어 넣었으니까.

물론 그에게 동의를 구했다면 편하기도 했을 테지만, 그것보다는 아이작 본인도 모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괜스레 그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더불어 그는 잠이 필요하기도 했다.

창백하고 초췌한 낯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투로 버티는 그를 두고 보는 것은 자신이 더 괴로운 일이었다. 아무리 데브그루 내에서 무수면 훈련을 해온 데다가 며칠 밤은 꼬박 새워도 버틸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굳이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콜, 그 새끼의 거처는?”

이곳으로 날아오는 기내에서 있었던 일들을 잠시 떠올리던 필릭스는 금세 상념을 접어버린 다음 화제를 돌렸다.

<전부 파악 끝났지.>

“스티브라는 친구에게 우선 서류 전달해.”

마지막으로 말을 전한 필릭스는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투로 전화를 꺼버렸다.

“개새끼를 그냥 끌어내리기만 하면 재미없지. 이참에 아주 완벽히 죽여 없애야 속이 풀릴 것 같거든.”

화근을 뿌리 뽑지 않고 내버려 두면 언제 어디서 또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4년 전, 그때 없애버렸다면 지금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제 와 뼛속 깊은 후회를 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후회가 됐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죽여 없앨 테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일찌감치 치워버리는 것이 가장 명확한 답이니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그대로 음산한 빛을 흘리고 있으려니, 그때까지도 묵묵히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토니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고용한 용병들은 준비가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미 콜의 사저를 포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잘됐네. 실수하면 가만 안 둬.”

필릭스가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던 순간이었다. 때마침 눈앞으로 검은색의 세단이 멈춰 섰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차를 향해 걸었다.

“보스, 그런데 말입니다.”

토니가 마른침을 삼키며 어렵사리 말문을 연 것은 필릭스가 세단의 문을 벌컥 연 것과 동시였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토니를 돌아본 필릭스는 그가 입도 벙끗하기 전에 손을 들어 말을 가로막았다.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해. 지금은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냉랭한 음성은 단호했다. 난처한 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토니는 결국 가까스로 결심한 것도 무색하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졌다. 한숨이 절로 흘렀다. 그러나 곧 짧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수석에 앉았다. 필릭스의 말마따나 지금은 때가 아닌지도 몰랐다.

“…콜, 당신이 그토록 아껴 마지않는 양아들, 내가 확실히 되찾아 주지.”

등 뒤에서부터 서늘한 혼잣말이 들려온 것은 토니가 먹먹한 가슴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안전벨트를 채울 무렵이었다. 토니는 사이드미러로 비치는 필릭스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잘생긴 얼굴은 사악하게 비틀린 채 선뜩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천사 같은 얼굴이 무색하도록 그 누구라도 붙들리면 살아남지 못할 악귀 같은 표정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진 토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 * *

“케이시드!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냐?!”

모든 물건을 내려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검한 후에 사저로 들어서자마자 콜은 양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러나 아이작은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콜을 대할 때면 항상 팔을 뒤로 돌린 열중쉬어 (at ease)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있어야만 했다. 집에서나 군에서나 그의 앞에서는 그에게 소속된 군인이었다. 단 한 번도 편하게 마주했던 적이 없었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콜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도 아이작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인사말이나, 혹은 변명, 아니면 애원 따위도 일절 없었다. 그러자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콜이 불현듯 손을 올렸다.

철썩, 소리와 함께 고개가 꺾인다. 이를 꽉 물고 있지 않았다면 입안의 점막이 터졌을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뺨이 붉게 부어올랐다.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은 아이작은 천천히 꺾였던 고개를 바로 들었다.

“이 배은망덕한 놈이! 네가 끝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나?!”

눈을 부릅뜬 채 이를 씹는 콜의 모습은 그의 말마따나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이작은 대꾸도 없이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제 사십 대 후반인 그는, 외관상으로 4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짐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이 슈트를 빼입은 콜 패트릭스는 우성 알파에 중령이라는 직급을 단 군인답게 체격이 좋았고, 외모 또한 훤칠했다. 지금은 저렇듯 눈을 부라리며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있지만, 저런 본 모습을 가린 채 가면 같은 웃음을 지으면 매력적인 사내처럼 보이곤 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이 사내에게 빠졌던 것일까. 문득 저런 사내와 파트너가 된 아버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있어선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어려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에게서 흐르는 분위기와 페로몬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가 하는 말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었다. 어려서부터 세뇌당한 머리와 몸이 반사적으로 그를 두려워한 탓이었다.

그러나 4년 만에 마주한 그는 낯설다고 느낄 정도로 달랐다. 비단 생김새의 문제가 아니었다. 외향은 전혀 달라짐이 없었지만,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눈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어려서 알던 두렵고 위협적이던 사내와는 달라도 많이 달라 보였다.

더 이상 그가 하늘을 다 가리도록 커다랗지 않고, 한 대 후려치면 저만치 나가떨어지게 만들던 주먹도 이젠 제 것보다 작고 약해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4년 전만 해도 이런 감상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는데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째서 이런 중년의 사내를 두려워했던 거지? 라는 의문마저 일었다.

콜은 이미 마흔 후반이었다. 아직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체격이 단단하다고는 하나 곧 쉰이 되는 사내를 이제 서른하나에 특전사로 잔뼈가 굵은 자신이 제압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4년 전 그때까지 이 작자를 두려워했었다.

“하아, 내가 감정이 격해졌구나.”

처음 보는 상대를 마주한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직시하기만 했다. 그러자 콜은 일순 픽,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아이작의 팔을 붙들고 어딘가로 걷기 시작한다. 아이작은 군말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콜이 데려간 곳은 다이닝 룸의 식탁 앞이었다.

식탁 위에는 벌써 간단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팬케이크와 베이컨, 해쉬브라운과 과일이 담긴 접시는 먹음직스러웠다. 마치 따뜻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기도 했다. 위화감마저 일어나는 광경을 멀거니 내려보고 있자, 콜은 직접 의자까지 빼주며 아이작을 앉혔다.

“아침 식사는 아직 안 했겠지?”

공항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어둑어둑하던 하늘은 이젠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진 창밖의 정경을 흘끔 바라보던 아이작은 다시금 눈을 돌려 콜을 쏘아보았다.

“식사는 됐습니다. 본론부터 얘기하시죠. 벤자민과 어머니는 어디 있습니까?”

“아니, 먹어. 내가 아직 식사를 못 했어.”

“그러면 혼자 드십시오.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음식을 먹을 생각이 없으면 네가 아침에 즐겨 마시던 오렌지 주스라도 한 잔 마시든지.”

강압적으로 말하면서도 콜은 짐짓 다정한 척 빈 잔에 갓 짜낸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었다. 쪼르르, 소리를 울리며 찬이 채워졌으나 아이작은 여전히 손끝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콜의 사저로 들어온 이상 이곳에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고, 주스나 음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케이시드.”

그러자 콜은 베이컨을 포크로 찍다가 말고 낮게 이름을 불렀다.

“네가 도착할 시간까지 예상해서 준비한 내 성의를 무시할 셈인 거냐?”

“…….”

“마셔.”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 기괴했다. 자신으로선 인질이 잡혀있으니 뭐든 해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강압적으로 나오는 콜을 보니 확신이 간다. 저 오렌지 주스 안에 뭔가를 넣었다.

아이작은 이를 씹었다. 주스에 무엇을 탔는지는 모르겠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의심 많은 네가 순순히 마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 하지만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섣불리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있으려니 콜은 쯧, 혀를 차며 주머니 안쪽에서 작은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간단히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다이닝 룸 한쪽 벽에 걸린 TV가 켜졌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화면을 주시했다. 그와 동시에 차분함을 유지하던 검은 동공은 어쩔 수 없이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CCTV로 찍고 있는 것이 확실한 작은 방의 상황이 크게 비추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와 벤자민이었다.

감옥을 연상케 하는 작은 방 안에는 침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조차 없다. 지하실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곳에서 어머니는 잠든 벤자민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 곤히 자는 벤자민과는 반대로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지난밤 내내 잠 한숨 못 주무신 게 분명했다.

“네 생모와 아들이라고 하니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었거든. 저녁과 아침도 부족하지 않게 차렸고, 침대와 이불까지 신경 썼다.”

콜은 대단히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납치, 감금이라는 죄를 자행했음에도 유세를 떠는 그의 작태에 이가 갈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그를 마주했다.

“원하는 서류는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와 벤자민은 이만 풀어주십시오.”

최대한 담담히 말문을 열었지만, 콜은 듣는 척도 하질 않고 오렌지 주스를 아이작의 앞으로 밀었다.

“그 얘긴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우선 마셔.”

“저들을 무사히 보내주면 마시겠습니다.”

“그럴 수야 있나. 저들을 보내고 나면 네가 어떻게 나올지 미지순데. 그나마 네가 얌전히 앉아있는 이유가 저들 때문이라는 걸 내가 모를까.”

아이작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콜은 조소했다. 그러나 느슨해 보이는 그의 태도와는 달리 팽팽하게 날이 선 기가 고요한 허공 위에서 얽혀들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디까지 이 작자의 말을 듣고 앉아있어야 하나.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며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아이작을 뻔히 알고 있다는 듯, 콜은 쯔쯔 혀를 찼다.

“케이, 네 가족을 왜 보여줬다고 생각하나? 단순히 그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

“여자의 머리에 총구멍을 들이대는 꼴을 보여주면 말을 들으려나. 아니면 아예 총구멍을 내는 것이 좋을까, 고민이 됐거든.”

무심히 던진 한마디에 아이작은 눈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콜은 ‘안으로 들어가’라고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그제야 마이크까지 연결되어있는 작은 무선 이어폰이 그의 한쪽 귀에 꽂혀있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온다.

아이작은 굳은 얼굴로 휙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화면에 가득 차 있는 방의 한쪽 구석에서 벌컥 문이 열리더니 장신의 사내가 권총을 손에 쥔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비췄다. 그와 동시에 숨죽인 채 누워있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당황한 아이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나 급히 움직였는지 콰당, 의자가 뒤로 거나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귀가를 얼얼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만두시죠.”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움켜쥔 아이작의 목소리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콜은 어디까지나 여유로운 태도로 커피를 들어 마실 따름이었다.

“앉아.”

“그만하라고!”

“네 처지를 망각하고 내 명령에 불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젠 잘 깨달았겠지? 마지막으로 말하마, 마셔.”

낮게 울리는 명령에 아이작은 으득, 이를 씹었다. 그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내리꽂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가 입만 뻥긋해도 저 방 안의 사내가 총을 쏠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힘줄이 불거지도록 움켜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던 아이작은 끝내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인 손을 뻗어 주스 잔을 쥐었다. 주스는 단숨에 비워졌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목구멍 아래로 삼킨 아이작은 쾅- 빈 진을 식탁 위로 깨뜨릴 듯이 내던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노기를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게 진즉 말을 들었어야지.”

커피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콜은 만족스럽다는 투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화면 속의 사내를 향해 ‘나가 있어’라고 명령했다.

사내가 방에서 사라지자 어머니는 안도한 듯 어깨를 무너뜨렸다. 그녀의 모습에 아이작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차마 더는 볼 수가 없어 손을 들어 눈가를 덮자 차갑게 식은 손끝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눈가를 식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나씩 할 테니까 넌 고분고분 따라오기만 하면 돼. 마지막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저들을 풀어줄 테니까.”

“…약속하십시오.”

어느 정도 진정한 아이작은 눈가를 덮고 있던 손을 내리고 한층 싸늘해진 시선으로 콜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커피잔을 들고 있던 콜이 픽, 웃는다.

“약속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내게 필요한 건, 저들이 아니라 ‘너’니까. 네 어미와 아이는 데리고 있어봤자 귀찮아질 짐이야. 말 그대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짐’ 말이지.”

“…….”

“자, 그러니 이제 가지고 온 서류는 탁자에 놓고 자리에 앉아.”

여차하면 인질을 해치겠다는 뜻을 명백히 담은 콜이 낮게 명령했다. 아이작은 순순히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지금은 뭐든 그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식사하면서 서류를 확인해야 하다니 어지간히 불편한 시간이로군.”

콜은 팬케이크를 잘라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몹시 귀찮은 일을 떠안는 것처럼 투덜거렸다. 그런 콜을 노려보던 아이작은 묵묵히 가방을 열고 서류 뭉치를 콜의 앞으로 내밀었다.

두꺼운 서류는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지만, 콜은 펜케이크를 자르던 나이프로 종이를 아무렇지 않게 뜯어낸 후 내용물을 모두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빠진 것이 없는지 하나씩 들춰보며 확인하는 그의 표정은 신문이나 책을 읽는 것처럼 천연스럽기만 했다.

“필릭스는 아무 말 안 하던가? 네가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지 않았을 리는 없을 테고.”

불현듯 콜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별말은 없었습니다.”

“그래? 의외로군.”

호록, 커피를 마시며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한 콜은 확인이 끝난 묵직한 서류들을 아무렇게나 옆으로 치워두었다. 서류들이 딱히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태도였지만, 기실 콜뿐 아니라 비리에 연관된 장교들의 이름과 가담한 행위까지 적나라하게 적혀있기에 서류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다.

“제가 마신 주스에 무슨 약을 탄 겁니까?”

서류를 밀어두는 콜의 손끝에서부터 시선을 든 아이작은 그제야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별건 아니야.”

콜은 어깨를 으쓱이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콜은 아이작의 속내를 잘 아는 것처럼 뚫어지게 응시하며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낯이었다.

“별것 아닌데 그렇게 마시라고 강요했습니까?”

“음, 별건 아니지만, 네게는 큰일일 수도 있겠지? 네가 지금껏 빠짐없이 복용했을 것이 뻔한 억제제를 중화시키는 약이니 말이야.”

태연히 지껄이는 콜을 마주한 아이작은 순간 숨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아니,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듣긴 들은 것일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 뭐라고…….”

“케이시드. 네가 오메가인 걸 내가 모를 것 같았나? 필릭스의 아이까지 낳아놓고 아니라고 변명하면 어떻게 해?”

“그게-….”

“오메가인 네가 여태 베타인 척할 수 있었던 건 억제제를 꾸준히 복용해가며 네 페로몬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겠나. 그 말인즉 넌 우성 오메가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겠지. 우성 오메가였으면 겨우 약을 먹는다고 해서 페로몬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아이작은 어떤 대꾸나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콱 막혔다. 도무지 소리 내어 말을 뱉어낼 수가 없다.

“게다가 아이가 좀 필릭스를 닮았어야지.”

콜의 지적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화면에 보이는 벤자민을 향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이는 아직도 잠에서 깰 생각도 없이 곤히 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천사처럼 예쁜 얼굴, 밝은 금발과 푸른 동공까지. 한 눈에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라는 것을 더는 부정할 수가 없다.

누구든 보스와 벤자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부자지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문득 토니의 단호한 음성이 귓가를 윙윙거리며 맴돌았다. 맙소사. 그의 말이 맞았다. 필릭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벤자민을 본 순간 필릭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텐데… 지나치게 안이했다. 무감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지만 생각할수록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기만 한다.

자신이 오메가인 사실을 콜에게 쉽게 들킨 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인데, 거기에 더해 억제제를 중화시키는 약이라니. 이곳으로 오기 전, 부러 부서진 가게까지 들려가며 몇 알을 통째로 씹어 먹은 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우성 알파인 콜의 앞에서, 억제제의 약효까지 지워진 채 고스란히 오메가로서 노출된다면……. 그야말로 치명적일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닥뜨린 아이작의 심장이 쿵쿵, 거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알게 모르게 떨린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곧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까발린 것보다 더한 소리가 콜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가 제 아들이라고 필릭스가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믿지 못했을 거다. 웬만한 알파보다도 우월했던 네가 오메가라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잖아.”

이번에야말로 머릿속을 거나하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던 아이작의 낯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왜? 설마 필릭스가 내게 그런 얘기까지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나?”

“필릭스가…… 자기 아들이라고 했단 말입니까?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주 당당하게 지껄이더군. 제 아들을 건드린 실수를 했다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까지 질렀지.”

건방진 자식, 뒷말을 씹으며 콜은 분에 겨워 씨근덕거렸다.

파랗게 질려있던 아이작의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갔다. 누군가가 목을 틀어쥐는 것처럼 숨이 거칠어진다. 손끝으로 모든 힘과 기운이 모두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쓰러져 바닥을 뒹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덕분에 몹시 당황했지 뭐야. 네 아이인 줄 알고 데리고 왔더니 필릭스의 아이라고 하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까. 아이를 구분하지 못해 잘못 데리고 왔나 싶었지만 금세 알겠더군. 네가 필릭스의 아이를 낳은 오메가였다는 걸.”

콜은 지루한 투로 중얼거리며 베이컨을 씹었다. 아이작은 점점 더 망연해지고 말았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콜에게 들킨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얼얼해질 정도였는데, 벤자민이 제 아들이라는 사실을 필릭스가 알고 있다고까지 하니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필릭스가…….”

정말 필릭스가 알고 있었단 말인가? 벤자민이 제 아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기색은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어떻게 된 노릇이냐고 따져 물었던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콜에게는 직접 자기 아들이라고 했다는 건가? 어떻게…?

뒤죽박죽 뒤엉킨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질 않는다. 뇌가 움직이길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혹은 누군가가 커다란 막대기로 머릿속을 마구 뒤섞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끝내 아이작은 눈을 감고 어깨를 무너뜨렸다. 도무지 똑바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네가, 필릭스 펠리체의 암살을 지령으로 받았던 네가 암살은커녕 그의 아이까지 낳았다니,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전혀 모르겠군.”

“…그래서, 어쩔 셈입니까?”

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지껄였다. 아직도 믿기 어려운 사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이작은 어금니를 꾹 씹었다. 시나리오에 들어있지도 않았던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린 아이작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어쩔 거냐고?”

커피로 입가심을 한 콜이 그제야 포크를 내려놓고 눈을 들었다.

“솔직히 나 역시 필릭스의 아이를 건드릴 생각은 없어. 대신 그의 사업에는 약간의 영향이 미치도록 손을 써두었지. 앞으로 미군에서 그의 무기를 사들이는 양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될 거다. 더불어 이것저것 덧붙이기도 했고.”

“…….”

“지금쯤이면 필릭스도 노티스를 보고 있겠군. 머리 아픈 일이 폭탄처럼 터질 텐데 어쩌나.”

시계를 흘끔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한 그는 한쪽 다리를 꼰 자세로 거만하게 지껄였다

“그의 사업엔 제법 큰 타격이 될 거다. 너도 알다시피 미군에서 사들이는 무기의 양은 어마어마하니까. 그 와중에 아이까지 잃어버리면 충격이 심할 테니, 그 정도는 봐줘야지. 그래도 숨 쉴 틈은 만들어주는 게 도리 아니겠나.”

많이 봐줬다는 얘기처럼 들렸지만, 기실 필릭스는 콜이 함부로 건드릴 만한 위치가 되지 못했다. 4년 전 그토록 타격을 받았으면서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던 건 괜한 이유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필릭스의 무기를 단번에 끊어버리지 못하고 납품율을 줄이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던 게 분명했다. 그 이상 건드렸다가는 그들에게 되레 해가 미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제 아이라고 못 박은 벤자민까지 건드린다면 말 그대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필릭스는 군부뿐 아니라 정부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그의 조부 또한 마찬가지다. 마피아라는 조직 자체가 때론 뒤에서 정부와 손잡고 일을 꾸미기도 하지 않던가. 게다가 그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규모가 큰 마피아였다.

그토록 여기저기 곳곳에 인맥이 뻗어있고, 어디에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내인 필릭스를 함부로 건드린다면 관련된 모든 이들이 언제 어디서 비명횡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따라서 콜은 하나의 틈을 남겨둘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필릭스의 사업을 흔들어 그를 정신없게 만들면서 뒤로는 선심 쓰는 척 아이를 풀어주겠다는 건데……, 전부 제 살 구멍은 만들어 놓겠다는 수작이었다. 그런다고 먹혀들지는 미지수였지만.

아이작은 불안하게 날뛰는 심장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필릭스가 직접 벤자민이 제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힌 이상 콜 역시 벤자민을 붙들고 있거나 다치게 하진 못한다. 그가 밝힌 그대로, 아무리 저런 작자라고 해도 필릭스의 아들에게는 쉽사리 손대기는 어려울 테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아이작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조금 전 잔뜩 당황했던 것과는 달리 차분하게 잠겨 있었다.

“그렇다면 되도록 빨리 풀어주는 게 좋을 겁니다. 필릭스가 당신에게 직접 제 아들의 안위를 물었다면 말이죠.”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그 전에…….”

콜은 한결 침착해진 아이작을 빤히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식탁을 돌아 다가오는 콜의 시선은 아이작의 드러난 목덜미를 배회하고 있었다.

“넌 아직 각인되지 않은 모양이지? 목덜미에 아무런 표식이 없다니, 의외라고 해야 하나.”

“…각인?”

아이작은 뜻 모를 말에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나 콜은 여전히 아이작의 목덜미를 샅샅이 훑으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제 아이까지 낳은 오메가인데 각인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한 번 쓰고 버리겠다는 뜻이었나 보군. 나로서는 잘된 일이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콜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경직된 자세 그대로 앉아있기만 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필릭스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전혀 떠올리지 못한 문제였다.

각인 자체를 모르고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굴었던 필릭스의 태도를 의아해하기만 했을 뿐, 자신을 오메가로 대하거나 각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그를 의아해하진 않았는데…….

막상 콜의 조소 어린 지적을 듣고 나자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만다. 열기로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찾으러 오겠다며 다짐하던 그의 모습이 눈앞으로 어른거렸다. 그 순간에도 그는 오메가나 각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더불어 과거의 일 때문에 오메가라면 치가 떨린다던 그가 떠오르기도 했다. 혹시 자신이 그때 그 오메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메가를 싫어하다 보니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은 아예 덮어두려고 했던 것인가. 필릭스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다만 이 와중에도 확실히 느낀 것은, 필릭스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가슴 한구석이 쓰라리다는 사실이었다.

“하긴, 필릭스라면 호색한으로 유명한 사내이니 놀랍지도 않지.”

잠시 이성적인 판단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던 아이작을 일깨운 것은 콜의 비아냥거림이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바짝 긴장한 채 눈을 들었다. 그러자 별안간 콜은 허리를 숙여 아이작의 뺨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그의 코와 입술 끝에서 퍼지는 습한 숨결이 살갗에 닿자 소름이 죽 끼쳐 오른다. 자신의 페로몬을 확인하려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켜쥐고 있는 주먹만 가늘게 떨려올 뿐이었다.

“케이.”

돌연 이름을 부른 콜은 손을 뻗어 아이작의 검은 머리칼을 움켜쥐고 뒤로 젖혔다. 윽, 짧게 신음한 아이작은 목이 꺾인 그대로 미간을 찡그렸다.

“어쩔 거냐고 했나? 간단해. 내가 널 각인시킬 생각이다.”

여전히 머리칼을 사납게 움켜쥔 채 콜이 눈을 번득였다. 그의 짙은 회색 눈동자 안에는 육욕으로 가득했다. 등허리가 절로 서늘해지는 빛이었다.

“…뭐라고?”

“아직 이해가 안 돼? 내가, 널 각인시켜주겠다고 했다.”

음침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결코 장난이나 농담이 서려 있진 않았다. 애초에 농담 따위를 할 사내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지껄인 말을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다.

“미친 거 아닙니까? 난 당신의 파트너였던 키스의 아들입니다! 법적으로 당신의 아들이라고!”

끝내 참을 수 없는 감정에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작을 콜은 따라잡지도 않은 채 탁해진 눈으로 좇았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태도였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더 흥분되기도 하고 말이야. 네가 베타였을 땐 흥미로울 것도 없었지만, 오메가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 난 오메가의 페로몬을 환장하게 좋아하는 알파고, 또 내 오메가를 길들이는 데는 더더욱 환장하는 사람이니까.”

“뭐…….”

“물론 종마처럼 날뛸수록 더 좋아. 길들이는 재미까지 있거든. 딱 너처럼. 게다가 법적인 아들, 양자라니 배덕감마저 더해지잖아?”

“당신… 단단히 미쳤군.”

소리 없이 웃으며 콜은 천천히 다가왔다. 여전히 그의 눈빛은 미친놈처럼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난 내가 기른 강아지를 놔줄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어. 네가 어디로 도망친다고 해도 기어이 잡아 올 거니까. 물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시간 낭비가 많을 테니 차라리 어디 한 곳을 망가뜨릴 생각도 하고 있었지.”

“하…….”

“하지만 생각해보니 네가 망가지게 되면 써먹기가 모호해지겠더군. 그런 와중에 네가 오메가라는 걸 알게 돼서 얼마나 기뻤는지 아나? 오메가인 너를 각인시켜버리면 애초에 내게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야.”

미친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는 콜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그와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 작자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각인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발상이었다.

“그 전에 내가 당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아이작은 이를 씹으며 여과 없는 살기를 드러냈다.

“내가 저들을 풀어주기 전까진 넌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다.”

“내게 각인을 시킨다면 그 즉시 당신을 죽여버릴 겁니다.”

그러자 콜은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

“케이, 넌 오메가이면서 오메가에 대해 아는 게 없나 보군.”

콜은 빈정거리며 흐트러짐 없이 매고 있던 타이를 풀어 의자 위로 툭 내던졌다. 그의 단조로운 행동은 등줄기가 오싹해질 만큼 위협적이었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런 아이작을 핥듯이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한 번 알파에게 각인된 오메가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맡거나 반응할 수 없게 되는 건 알겠지. 대신 제 알파의 페로몬에 중독되어버리거든. 싫든 좋든 제 알파에게 달려들고 매달리게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란 말이야.”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지껄여….”

“그런데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외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될 거다. 내 페로몬을 맡을 때마다 발정 난 고양이처럼 구멍에서 액을 줄줄 흘리며 엉덩이를 내밀게 될 거라고. 한 번이라도 더 박아달라고 애원하면서 말이야.”

그가 미친 소리를 음탕하게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네 아비가 창부처럼 내게 매달렸듯이, 너도 그렇게 될 거라고 장담하지.”

그러자 콜은 또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라는 말에 아이작은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라니, 무슨 헛소리를-….”

“흠, 넌 몰랐겠지만, 키스는 늘 나를 죽이고 싶어 했거든. 하지만 몸뚱이는 어쩔 수 없이 내게 매달리며 엉덩이를 흔들어댔지. 가련하게도.”

거만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콜은 킬킬거렸다. 아이작은 일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대체 왜 이 작자와 파트너가 되었는지 간혹 의심하기는 했었지만, 실제로 그를 죽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기억하는 아버지는 콜이 말하는 것처럼 색욕에 환장해 엉덩이를 흔드는 창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외려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직 CIA 요원이었던 그는 중성적인 외모에 금욕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진 사람이었다.

집에 남아있는 시간보다 집을 비운 시간이 더 많았을 만큼 늘 바빴고, 무뚝뚝한 편이기도 했지만, 간혹 마주할 때마다 다정히 끌어안아 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줄 줄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죽이고 싶은 사람에게 각인되어 어쩔 수 없이 매달렸다니…….

이곳에 온 이후로 콜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비밀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렵다. 아이작은 탁자를 한 손으로 짚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전부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두 사라지고 없을 꿈이었다면.

벤자민과 필릭스, 그리고 자신의 비밀과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남김없이 까발리는 콜을 마주하는 것이 힘겹기만 했다.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뿐이니 더더욱 그랬다. 허리를 굽힌 채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때도…, 아버지에게도, 당신은 강제로 각인을 했던 건가?”

질문을 던지는 음성이 알게 모르게 떨렸다. 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저래 상황이 있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아, 키스 또한 너를 끔찍이 걱정하기도 했지. 지금 네가 그렇듯이.”

“그러니까, 당신은…. 아들인 나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에게 각인한 거로군. 그리고 내게는 내 아들을 인질로 잡고 똑같은 짓을 저지르겠다?”

기가 막힌 사실을 확인하려 말을 내뱉는 턱이 덜덜 떨렸다. 콜은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공황에 빠져있는 아이작에게 느긋한 태도로 걸어올 뿐이었다.

“내게 반항하고 죽일 듯이 눈을 부라리면서도 박기 시작하면 질질 싸며 우는 게 내 취향이라서.”

“이 미친 변태 새끼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쥔 채 아이작은 제 앞에 바싹 다가온 콜을 노려보았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에는 혐오감만이 가득했다. 그러자 콜은 손을 뻗어 아이작의 턱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그건 알고 있나?”

“…….”

“오메가만 각인된 알파의 페로몬에 중독되는 게 아니지. 알파 또한 마찬가지로 각인된 오메가의 페로몬과 구멍에만 환장하게 되거든. 다른 오메가는 돌아볼 수 없게끔 말이야.”

아이작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점차 손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희게 질려가는 것도 같았다.

“덕분에 러트 때 조절을 못 하는 바람에 각인된 오메가가 미치거나 죽어버린 일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사고라 치고.”

억지로 턱을 움켜쥐고 시선을 맞춘 콜이 비릿하게 웃었다. 소름 끼치는 속삭임과 눈빛을 마주한 아이작은 일순 눈앞이 깜깜해지고 말았다.

이 작자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같은 질문만 빙글빙글 떠다닐 뿐, 좀처럼 제대로 된 사고를 만들어내질 못한다. 머리가 밀랍으로 뒤덮인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설마, 러트 때 죽었다는, 각인된 오메가가 아버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다독였지만, 심장은 불길하게 뛰고 있었다. 어디 한 곳 아프지도 않고 건강한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이 고등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때에도 아이작은 크게 놀라워하지도 않았었다.

그의 직업이 직업인지라 언제나 그의 죽음에 대한 불안을 끌어안고 살아온 탓이었다. 여기저기를 다니며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는 CIA 요원들의 비명횡사는 셀 수조차 없는 일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 아니던가.

그 때문에 아버지의 사고사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만에 하나 아버지의 사망 원인이 콜이 지껄인 것처럼 러트를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아니, 그건 지나치다. 아버지가 강제로 각인 당했다는 것만 해도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는데, 그의 죽음마저 처참했다면…. 그것도 이 작자에게 당한 것이라면-….

“그만큼 널 예뻐해 주겠다는 뜻이니 고마워해야지. 다른 알파, 그것도 다름 아닌 필릭스의 애새끼까지 낳은 너를, 내가 거둬주겠다는데!”

“…….”

“케이! 듣고 있는 거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울컥 속이 뒤집히는 가정에 몸서리를 치며 서 있을 무렵이었다. 넋이 나가 있는 아이작이 듣거나 말거나 멋대로 지껄이던 콜이 별안간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작이 고개를 들었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콜을 쳐다보는 시선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어. 당신이…, 당신이 아버지를 죽인 거야. 그렇지?”

직선적인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며 질문을 던지자 언성을 높였던 콜은 흥분을 가라앉힌 듯 흠, 목을 가다듬었다.

“말했잖아. 사고였다고.”

그러나 그의 입술 끝에서 흘러나온 답은 태연하기만 했다.

“어……. 어떻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설마 했었다. 아니겠지, 아버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겠지. 하지만 끝내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부정하지 않는 대답은 머리와 심장을 온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으득, 이를 씹은 아이작은 앞뒤 가리지 않고 빠르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당장 벤자민과 어머니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몰랐던 아버지의 비밀,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그의 죽음까지 알게 되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진다.

퍽-, 정확하게 들어맞은 그의 턱에서는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크게 울렸다. 갑작스레 달려든 아이작을 미처 피하지 못한 콜은 뒤로 주춤거리며 나가떨어졌고, 아이작은 곧장 달려 또다시 주먹을 내뻗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콜은 정확하게 복부에 꽂히는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콰당- 거나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네가, 그러고도 잘도 나를!”

이를 씹은 아이작은 형형한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이 자리에서 놈을 때려죽인다고 해도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퍽, 퍽, 퍽,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콜의 코가 부러지고 입에서 핏물이 튀어 바닥 위로 흩뿌려졌을 때였다.

“케이, 이 망할 놈이! 어디서 함부로-!”

노기를 드러낸 콜이 소리친 것과 동시에 눈에 보일 듯 짙은 페로몬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힘껏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서 일순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컥-!”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지는 정제되지 않은 알파 페로몬은 지독했다. 코를 마비시킬 것 같은 짙은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고, 눈앞이 캄캄해졌으며 사지는 경련하듯 벌벌 떨렸다.

강렬하게 퍼부어지는 우성 알파 페로몬을 열성 오메가인 아이작으로서는 도무지 이길 재간이 없었다. 콜에게 덤벼들 생각조차 할 수 없어진 아이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죽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구나! 아니면 당장이라도 네 어미와 자식을 쏴 죽여줄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콜은 이를 갈며 다리를 들어 아이작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퍽, 뒤로 나가떨어진 아이작은 고개를 털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주춤주춤 떨리는 팔로 식탁을 붙들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헉, 헉, 대체……. 뭐가…….”

최우성 알파인 필릭스가 페로몬을 쏟아냈을 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르다. 사람마다 다른 페로몬을 갖고 있으니 받아들이는 감각 또한 당연히 다르긴 하겠지만, 뭔가 이상했다.

4년 전 처음 있었던 히트사이클 때를 제외하고 이 정도로 알파 페로몬에 반응했던 적이 없었다. 특히 일반 알파나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날것의 알파 페로몬이 피부와 폐부로 곧장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스며든 페로몬이 세포 하나하나를 녹여버리는 것 같은 지독한 감각에 아이작은 쓰러지듯 탁자를 짚고 허리를 굽혔다. 금세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사지에선 기운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건지 떠올리지도 못했다.

“젠장, 약 효과가 이제 나타난 모양이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탁자를 움켜쥔 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아이작의 뒤에서 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문을 열었다. 콜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주저앉은 코와 터진 입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와 보기에도 끔찍했지만, 정작 그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셔츠 소매로 대충 문질러 닦고 만다. 그러면서도 아이작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의 낯은 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네게 마시게 했던 약이, 네가 복용하는 억제제를 클리어시키는 중화제라고 말했었지? 베타인 척 네 페로몬을 억제하던 약 기운이 가셨으니 이제부터 넌 오메가 본연의 성질을 드러내게 될 거다.”

이를 씹으며 사납게 말한 콜은 슈트의 재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며 다가왔다.

“하, 하아, 이 개새끼가-.”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아이작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눈앞이 안개가 서린 것처럼 흐렸다.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려보려고도 해봤지만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희미하긴 했지만 네 오메가 페로몬이 슬슬 흘러나오던 건 몰랐겠지? 덕분에 피가 몰려 참기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피까지 봤더니 이젠 정말 못 참겠군.”

피에 절은 낯으로 적나라한 욕정을 드러내는 콜은 악귀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제 본성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노골적인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끈적하게 달라붙자 진저리가 쳐진다.

“가까이 오지 마….”

“물론, 감히 주인을 물려고 했던 벌도 받아야 하고 말이야.”

아이작은 꺾일 것 같은 무릎에 힘을 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약에 푹 전 것처럼 풀어진 눈으로 중얼거리는 아이작의 목소리는 조금 전 살기를 드러냈던 것과는 정반대로 기운조차 서려 있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콜에게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아이작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에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였던 아버지와 자신이 똑같이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네가 얼마나 흥분되는 꼴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거울이라도 비춰주고 싶은 심정이야.”

그런 아이작을 비웃으며 콜은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어 접어 올렸다. 그리고는 곧장 다가와 정신을 잃어가는 아이작의 머리칼을 확 움켜쥐었다. 사나운 손길에 고개가 꺾인 것도 잠시, 욕설을 뱉어낸 콜은 그대로 아이작의 머리를 식탁에 처박았다.

쾅- 이마가 부서질 것처럼 식탁 위로 내동댕이쳐지는 것과 동시에 콜은 아이작을 식탁 위로 밀어 눕혔다. 덕분에 음식을 담은 접시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릇과 물잔 등이 깨지는 소리는 요란했다. 하지만 마치 물속에 잠겨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웅웅 흐리게만 들려왔다.

식탁에 등을 대고 누운 아이작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천장을 올려봤다. 그 곁으로 욕정에 물든 낯을 하고 제 다리를 잡아 벌리는 콜의 모습이 들어온다. 바지의 단추를 허겁지겁 풀어내면서도 그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사타구니를 허벅지 안쪽에 비벼대고 있었다.

선연한 감각이 일었고, 혀끝으로 욕설이 절로 스쳤다. 전부 꿈인 것만 같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상황이 거짓처럼 일어난다. 물리적인 폭력은 충분히 예상했지만,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 작자가 미친 개새끼였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탓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일조차도 전혀 모른 채 놈의 사냥개가 되었던 자신이 만든 상황일 수도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좌절감에 아이작은 덜덜 떨리는 이를 깨물었다. 바지의 버클을 풀어내는 소리는 그때까지도 변함없이 울리고 있었다.

“제기랄, 케이, 케이! 네게서 풍기는 오메가 페로몬이 얼마나 단 줄 알아? 정말 사람 미치게 하는 냄새로구나! 네 아비보다 더 농익은 냄새를 갖고 있었으면서 여태 숨기고 있었던 거냐?!”

미친놈처럼 소리치던 콜은 다급히 아이작의 목에 코를 묻고 정신없이 살갗을 빨아댔다. 목덜미에서 흐르는 페로몬을 제멋대로 들이마시는 그는 이미 후안무치의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작은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헐떡였다. 눈앞은 몽롱했고, 근육은 잔뜩 이완되어 시체처럼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바르작거릴 때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알파 페로몬은 눈앞을 까맣게 전멸하게 했다. 오메가를 페로몬에 절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콜은 능숙하게 페로몬으로 아이작의 몸뚱이를 짓눌렀다.

“네 구멍은 얼마나 또 달까, 기대돼서 미칠 지경이야.”

사납게 목덜미를 씹고 핥던 그는 아이작의 셔츠를 밀어 올려 옆구리를 더듬었다.

“변태… 개새끼가…….”

“뭐든 마음대로 불러도 상관없어.”

“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고…. 나를 속였으면서……. 비켜! 손대지 마!”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친 아이작의 젖꼭지를 손끝으로 비틀며 콜은 픽 웃었다. 덕분에 윽,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랬지. 내 오메가였던 네 아비가 멋대로 가버렸으니 아들인 네가 그 자리를 메우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 네 아비 대신 네가 내 오메가가 되어야지!”

“웃기는 소리…….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지.”

눈을 홉뜨며 아이작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말 그대로 차라리 죽어버릴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린 벤자민이 아른거렸다. 더불어 필릭스의 단호한 음성이 귓가로 스쳤다.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안 돼. 네가 죽어서도 안 돼. 그것만 약속해. 어떤 경우라도 네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그의 요구사항이었다. 필릭스……. 이럴 때마저도 그가 생각나는 것이 이상했다. 아이작은 혀를 짓씹으려던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하긴, 여기서 죽어버리기엔 억울했다. 빌어먹을 미친놈이 우쭐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다짐을 하는 사이에도 콜은 멋대로 제 몸을 탐하고 있었다. 브리프와 함께 바지를 벗겨버리고 군침을 흘리며 드러난 하반신을 훑는다. 그의 욕정에 절어 번들거리는 눈알은 끔찍했다. 말라붙은 핏물이 남아있는 탓에 더더욱 기괴하게 보이기도 했다.

“자, 예쁘게 울어보렴. 죽이겠다고 발광하면서 울어. 네 신음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들어봐야지.”

진저리를 치며 기운 없이 늘어져 있기만 하자, 콜은 덥석 아이작의 성기를 움켜쥐더니 터뜨릴 것처럼 조였다. 비명이 목구멍에서 흩어졌다. 머릿속이 터져버릴 지경이었지만, 콜은 아랑곳없었다. 어느새 바지를 성급하게 풀어헤치고는 거무튀튀한 성기를 꺼내 아이작의 성기와 함께 맞잡고 비벼대기까지 한다.

하반신에 비벼지는 뜨거운 열감에 소름이 끼쳤다. 제 목덜미를 빨 때마다 살갗에 닿는 습한 숨결 또한 역겹기만 하다. 그러나 머릿속과 피부로 직접 파고드는 페로몬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만들 따름이었다. 각인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지만, 몸서리 처지게 불쾌하고 역겨운 것은 확실했다.

머리로, 피부로, 맞댄 채 비비는 성기 위로 콜이 인정사정없이 내뿜는 알파 페로몬이 여과 없이 침투해왔다. 자신의 냄새는 사라지고 그의 페로몬으로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한다. 이러다간 몸이 무너지는 것보다 정신이 먼저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구멍이 벌써 벌름거리며 흠뻑 젖었는데, 알고는 있어?”

콜은 아이작의 목덜미를 사납게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아이작의 목덜미에서 빨아 마신 페로몬에 취한 듯 동공의 초점이 잔뜩 풀려 흐느적거리기까지 했다. 아이작은 밭은 숨을 흘리는 것 외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지독한 무력감이 온몸을 짓누른다.

그사이에도 콜은 킬킬거리며 맞물린 성기를 쥐고 흔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샅이 문대질 때마다 흐르는 질척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귓가로 흘러든다. 아이작은 으득, 이를 갈았다.

“씹……, 꺼져…….”

가까스로 말이 새어 나오긴 했지만 헐떡이는 숨에 섞여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미지수였다. 아이작의 목덜미에 상처가 나도록 씹고 빨던 콜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조소했다.

“네가 아무리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야지. 페로몬에 그렇게 절여졌으면서도 아직도 거부하면 너만 힘들 거다. 네 몸에 내 페로몬이 차는 건 너도 느끼고 있지 않아? 조금만 더 있으면…… 그래, 네 구멍 안에 한 번 싸주면 완벽해지겠지.”

젖은 입술을 핥던 콜은 사납게 아이작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그리곤 흉흉하게 선 성기를 구멍 입구에 문질렀다.

“넌, 내 거다. 다시는 도망치지 못해!”

헐떡거리며 소리친 그가 게걸스럽게 목덜미를 빠는 것과 동시에 회음과 엉덩이 입구를 정신없이 문지르던 성기 끝이 주름진 입구를 묵직하게 눌렀다.

“-……!”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아이작은 질끈 눈을 감았다.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스스로가 처참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메가라는 이유로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각인을 당한 채 발정하며 살진 않을 테다. 자신마저 이 작자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지켜주려 했던 아버지를 생각해서도.

아랫입술을 힘껏 씹자 핏물이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숨을 멈췄다. 귓가에서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찢어진 입술에서 흐르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러댔다.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탁자 위로 움직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 * *

필릭스는 이맛살을 구겼다.

“이 새끼가 기어이 해 보자는 거지, 이거?”

방금 토니가 전한 보고서는 속을 뒤집어 놓기 충분했다. 벤자민을 납치해놓고 아이작을 제 발로 들어오게끔 만든 작태만 해도 용서할 수 없을 지경인데, 이젠 사업까지 건드리려고 한다. 아주 제대로 붙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보고된 내용은 이랬다. 얼마 전 계약한 신제품 무기의 성능과 안전성을 핑계로 계약을 파기하며, 앞으로 해군이 사들이는 무기를 일정량 줄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제대로 된 무기 생산을 위해 생산 설비의 감찰을 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통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은, 엿 먹으라는 뜻이었다.

“안 본 사이에 패트릭스 중령이 제법 파워가 생겼나 봐?”

여러 페이지에 걸친 노티스를 확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넣은 필릭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실 저런 통보를 받은 보통의 기업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저기 연락을 넣어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했고,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으며, 감찰에 대해 준비도 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콜이 노린 것 또한 그런 것이 분명하다. 그쪽 일에 신경 쓸 틈조차 없이 굴려보겠다는 뜻인데, 사람 우습게 봐도 한참 우습게 봤다.

“토니.”

필릭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드는 것과 동시에 토니를 부르자 초조하게 서 있던 그가 ‘네’하고 곧바로 대답했다.

“당장 CEO하고 담당에게 연락해. 오늘 이후로 미군에 나가는 무기는 전부 판매 중지한다고.”

“네. 알겠습…… 네?”

“이따위 공지에 순순히 대응할 거라고 여겼다면 날 잘못 본거지. 계약을 먼저 깨뜨린 건 그쪽이니까 계약에 대해선 입 닥치라고 하고.”

“하지만…….”

“아, 이참에 좀 쉬는 것도 좋겠네. 설비 공장 당분간 문 닫아. 미군에겐 다른 회사 찾으라고 하고. 세상에 군수업체가 하나둘은 아니니 알아서 잘 구하겠지.”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필릭스의 결론에 토니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무슨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저 입만 반쯤 벌린 채 말을 잃고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대안이 저따위인지. 아무리 필릭스가 일반인과는 생각 자체가 다른 위인이라고는 하나, 기껏 키운 사업을 하루아침에 접어버리겠다고 말할 줄은 미처 몰랐다.

“정말, 사업을 접으시려는 겁니까?”

토니는 불안한 빛으로 물었다.

“내가 언제 접는다고 했나? 당분간 쉰다고 했지.”

그러자 휴대폰을 눌러대던 필릭스가 눈을 들더니 쯧, 혀를 찼다.

“미군에게 납품 안 하면 내 사업이 망할 것 같아? 천만에. 거래처는 널리고 깔렸어. 내 무기 못 사서 안달 난 놈들이 하나둘인가?”

“그야 그렇지만….”

“어려울 게 뭐 있어. 나를 포함한 전 직원들에게 후하게 휴가를 주면 되고, 정 안 되면 사업을 축소하면 그만이지만, 당장 무기 납품이 오늘부터 막히면 놈들은 어떻게 될까? 새 군수업체를 찾고 계약해서 납품받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다시금 눈을 돌려 툭툭 휴대폰의 액정을 빠르게 눌러댄 필릭스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한테 주려던 엿이나 실컷 처먹으라고 해. 난 그사이에 쉴 테니까. 아이작을 데리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별장이나 다녀오면 딱 맞겠군.”

“하, 하지만-.”

“토니, 너도 괜한 걱정 따위는 잡어 치우고 휴가가 생기면 뭘 할지 생각해 두는 게 어때?”

걱정하는 기색은커녕 외려 유유자적 쉴 생각이나 하고 있는 필릭스를 바라보던 토니는 저도 모르게 오랫동안 가본 적 없는 휴가를 떠올리곤 입을 헤 벌렸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저으며 흠 기침을 토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토니는 다시금 근심 가득해진 얼굴로 한숨지었다. 그래 봤자 만사태평한 필릭스는 빠르게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까짓것 안 되면 사업 말아먹기까지밖에 더하겠나. 그러니까 걱정 따위 개나 주고 따라오기나 해.”

조금 전까지 아이작의 위치를 보여주는 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이번엔 전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왜?>

“노아, 자료전달은 어떻게 됐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노아가 전화를 받자마자 필릭스는 대뜸 물었다. 아이작이 넘겨준 증거서류뿐 아니라 그동안 필릭스 측에서 독자적으로 모아온 콜 패트릭스와 그에게 가담한 장교들의 비리를 빼곡하게 정리한 자료였다.

그것을 군부와 정부뿐 아니라 언론에까지 전부 뿌릴 계획이었고, 예정대로라면 정확히 5분 전에 끝났어야 했다. 물론 빼도 박도 못 할 정도의 명확하고 확실한 자료들이었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들이 매장당하는 것은 순식간이 터였다.

놈들이 자신을 감시하는 동안 필릭스 또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비리의 꼬리를 차근히 밟아왔던 셈이었다. 바로 오늘을 위해서.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런 자료들은 눈가림에 불과했다. 콜 패트릭스가 법정에 서거나 비리 조사를 받는 일은 없을 거다. 어찌 되었든 그는 오늘 죽게 될 테니까. 그것만이 확정된 결과일 터였다.

<전부 돌렸어.>

노아가 호쾌하게 대꾸했다. 그제야 필릭스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이작이 콜의 사저에 들어간 지 삼십 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콜의 사저 쪽 상황은?”

<산 안쪽으로 지어진 별장이라 위치도 아주 좋아. 총질을 마음껏 해도 주변에 피해는 없겠는걸?>

킬킬거리며 대꾸하는 노아의 말을 들으며 필릭스는 걸음을 옮겼다.

“준비됐으면 시작해. 반항하는 놈들은 한 놈도 빠뜨리지 말고 전부 사살한다.”

<이렇게 성급하게? 완전 대낮인데?>

“대낮에 쳐들어가지 말라는 법 있어? 사람을 죽이려면 일 분으로도 충분한 거 몰라? 아이작이 콜의 사저로 들어간 지 이미 삼십 분이야.”

총의 방아쇠만 당기면 끝나는 것이 인간의 목숨이었다. 콜이 무슨 개수작을 부릴 생각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더는 기다려 줄 마음은 없다.

<알았어. 아이작의 위치는 네게 송신할게. 저택의 알람과 전기, 그 밖의 통신은 지금부터 끊어질 거야.>

“알아서 해. 아이작에겐 내가 간다. 다른 팀은 벤자민과 미세스 파커를 찾아내는 데 주력하도록.”

간단했던 대화는 종료되었다. 아이작의 위치는 벌써 몇십 분째 움직임 없이 한 지점에서 멈춰 있었다. 지금쯤 콜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를 떠올리던 필릭스는 검은 장갑의 손목을 꽉 조였다.

그는 이미 무장한 상태로 준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가슴에는 방탄조끼를 착용했고, 어깨에는 돌격용 단총을 둘렀으며, 권총 두 자루는 각 허리와 허벅지에 달려 있었다. 조끼 구석구석에는 탄창으로 가득하기도 했으며 장갑 위로 너클을 끼고 있기도 했다. 말 그대로 제대로 싸울 태세였다. 어쩌면 제대로 잡아 죽이겠다고 몸소 드러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콜, 적어도 곱게 죽고 싶다면 허튼수작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살기 어린 음성이 그의 보기 좋은 입술 끝에서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군홧발 아래에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 * *

콰직-, 작은 기기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과 핏물이 후두둑 튀었다. 식탁 위에 등을 대고 누워있던 아이작은 튀는 핏물에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그러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퍽, 퍽, 포크를 움켜쥔 아이작의 손이 정신없이 휘둘러질 때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제 몸을 짓누르고 있던 콜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작은 이를 짓씹으며 그를 죽일 작정으로 포크를 휘둘렀다. 손에 잡혔던 것이 나이프라면 더 좋았으련만 고작 포크인 것이 아쉽기만 했다.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짧은 포크 끝으로 콜의 귀와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찍어대는 아이작의 새까만 눈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가득했다. 우선 벤자민과 어머니를 지키고 있는 용병에게 연락할 수 있는 마이크와 이어폰을 떼어낼 작정이었다. 무작정 그의 귀를 가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작은 이어폰은 끄트머리가 부서진 채 어딘가로 떨어져 나가자 아이작은 있는 힘을 다해 포크를 내리쳤다. 콜의 광대뼈에 박혔다가 뽑힌 포크는 다시금 뺨과 목덜미에 박혀 들었다. 그러나 포크를 날카롭게 휘두른 것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이작의 공격을 피해 몸을 일으킨 콜은 대뜸 손목을 낚아챘다. 허공에서 붙들린 아이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개새끼, 죽여버리고 말 거다….”

터진 입을 짓씹으며 아이작이 으르렁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가 갈렸다. 아버지의 인생을 망치고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인생까지 망쳤다. 게다가 어머니와 벤자민을 납치하기까지 했다. 이런 놈을 믿고 그의 명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지난 시간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거지?”

아이작의 손목을 움켜쥔 채 씨근덕거리던 콜은 당황한 표정으로 숨을 헐떡였다. 귀와 뺨, 턱이 포크에 깊이 찔려 뼈까지 드러날 정도였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의 상처는 확인할 생각조차 않고 아이작만을 노려보았다.

페로몬에 절여져 각인이 진행되고 있는 아이작이 이렇게 날뛸 수 있을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작은 대답 대신 그에게 붙들렸던 손을 힘껏 빼내 다시금 포크를 휘둘렀다. 부릅뜬 눈은 한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콜 또한 이번에는 호락호락 당하고 있진 않았다. 잽싸게 고개를 돌려 피한 콜은 욕설을 내뱉으며 아이작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기운이 빠져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휘두른 일격이었으니 쉽게 무너지는 것이 당연했다.

“케이, 정신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이렇게 반항할수록 너만 괴롭다는 걸 알아야지!”

단번에 손목이 비틀리자 손에 쥐고 있던 포크가 툭, 기운 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를 씹으며 다른 손을 휘둘렀다. 그래 봤자 이번에도 콜은 여지없이 막아낼 따름이었다. 그리곤 퍽, 소리가 나도록 아이작의 뺨을 후려쳤다. 입안이 터지며 핏물이 왈칵 식탁 위로 흩뿌려졌지만 콜의 주먹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 대, 두 대 연거푸 날아오는 주먹에 아이작의 코와 입가가 순식간에 붉은 핏물로 젖어들었다. 주위가 붉은 피로 물들어가자 콜은 광적으로 눈을 번득이며 주먹을 휘둘러 댔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움켜쥐고 있던 아이작의 주먹이 기어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를 드러내며 욕설을 퍼붓는 콜의 모습조차 보이질 않는다.

“네 목에 이미 표식이 나타난 건 알고 덤비는 거냐? 희미하게나마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내게서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없어!”

“컥-.”

악을 쓰는 콜에게서 다시금 짙은 페로몬이 훅 끼쳐 들었다. 덕분에 울컥, 속이 뒤집힌 아이작은 기어이 자신의 핏물이 흩뿌려진 식탁 위로 토사물을 게워내고 말았다.

지난밤, 필릭스의 개인기 내에서 먹은 미트로프가 몇 점이 전부인 탓에 입가에서 튀어나온 건 묽은 오렌지 주스와 신물이 전부였지만, 그 안에는 기이한 것이 섞여 있었다. 음식물을 토해냈다면 사이에 묻혀서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 아쉽게도 신물 위로 떨어진 그것은 또렷이 형체를 드러냈다.

“뭐야, 이건.”

아이작의 뺨을 후려치며 씨근덕거리던 콜은 작은 알약 같은 물체를 손에 쥐었다. 캡슐에 쌓여있긴 했으나 분명 기계였다. 아이작은 숨만 헐떡일 뿐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러자 콜은 아이작의 머리채를 쥐고 끌어 올렸다.

“이게 뭐냐고 물었어! 설마 도청기인 건가? 아니면 GPS라도 달고 온 거냐?”

미친 듯이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콜에게 아이작은 잠시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다. 눈가가 찢어져 핏물이 들어간 탓에 시야가 흐리기도 했거니와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아쉽게 됐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필릭스는 나를 더 걱정하는 모양이야.”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먹인 누군가가 있다면, 단 한 명뿐이다. 아이작은 흐린 눈으로 그를 떠올리며 피식, 기운 없이 웃었다.

“…필릭스가?”

“알았으면, 꺼져.”

색색거리는 숨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대꾸한 아이작이 퉤, 당황으로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에 핏물을 뱉었다. 그러자 얼굴에 튄 피가 섞인 피를 닦아낸 콜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고작 이까짓 걸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나?! 엉?!”

콜은 다시 한번 아이작의 뺨을 퍽- 소리가 울리도록 후려쳤다. 그리곤 식탁 위로 내동댕이쳐진 아이작을 그대로 둔 채 캡슐 모양의 기계를 바닥에 내던져 분풀이하듯 발로 밟아 깨뜨렸다. 쾅, 쾅, 쾅 마룻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가 사납게 울린다.

캡슐은 금세 가루처럼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치솟는 분을 주체하지 못한 콜은 식탁 위에 널브러진 아이작의 다리를 사납게 잡아 벌렸다.

“필릭스가 지금 온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이미 각인은 진행됐고, 표식도 나타났어! 넌 내 거라고!”

콜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함쳤다. 고막이 울릴 정도였지만, 그의 말마따나 페로몬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아이작은 찢어진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자 콜은 사타구니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아이작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제 성기를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더러운 욕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에 욕지거리가 절로 치솟았다.

“꺼지라고… 했지……!”

회음 안쪽으로 함부로 문질러 대는 성기의 느낌에 또다시 속이 뒤집혔다. 이대로 당하진 않을 거라고 이를 악물며 다짐한 아이작이 탁자 위에서 굴러다니는 나이프를 찾아 어떻게든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픽- 소리와 함께 벤자민과 어머니를 비추던 TV 모니터가 꺼져버렸다. 그와 함께 전기가 끊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린다. 모든 기기가 꺼지는 소리, 알게 모르게 귀를 울리던 기계음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이제 막 밝아진 오전 시간이었기에 정전으로 주위가 어두컴컴해지는 일은 없었지만, 기계가 모두 꺼져버리고 희미하게 울리던 소리마저 잠잠해지자 다른 이유로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아이작뿐 아니라 콜 역시 움직임을 멈춘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뭔가가 이상해도 이상했다.

“뭐야…….”

난처함과 곤란함 그밖에 불안함마저 뒤섞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콜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을 무렵이었다. 밖에서부터 요란한 총소리가 일제히 울려대기 시작했다. 소총의 연발음, 창문이 깨지고 박살 나는 소리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일대를 가득 채운다.

아이작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던 콜이 그제야 내던지듯 아이작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누가 감히-.”

당황한 콜이 이를 씹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악을 쓰며 누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대신, 새까맣게 꺼져버린 TV 모니터 위로 귀여운 캐릭터가 떠오르며 비디오게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흘렸다.

모니터뿐 아니라 모든 기기 위로 방긋방긋 웃으며 뛰어다니는 동그란 토끼 캐릭터 영상으로 바뀌었다. 넋이 빠진 채 입을 반쯤 벌리고 토끼 캐릭터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화면 안을 뛰어다니던 핑크 토끼가 움직임을 멈추고 정면을 향했다.

<콜 패트릭스, 자네 저택은 이미 포위되었다네. 되도록 순순히 항복하고 나오면 기물파손 및 사상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대항한다면 살아남는 자는 없을 거라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물론 자네는 오늘부로 중령직에서 해임되는 것을 미리 알려주겠네. 자네의 비리에 대한 조사는 곧바로 시작될 예정이며 언론사에서는 대서특필해서 뉴스를 내보낼 걸세.>

검붉은 피로 물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콜의 낯은 파랗게 질려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핑크 토끼는 그런 그를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뒷말을 덧붙였다.

<이 나라에선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을 걸세. 물론 자네의 남은 생으로는 형량을 다 마치지도 못할 테지만. 너무 그리 경악할 일은 아닐세. 뭐든 뿌린 대로 거두는 법 아니던가. 자네가 뿌린 씨앗이 이 정도라는 것만 알면 된다네.>

핑크색 동그란 토끼는 노인 같은 말투로 안내방송을 하듯 말을 이어갔다. 누군지 몰라도 악취미였다. 그것을 보고 있던 콜의 인상이 더더욱 사나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는 다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누군가를 호출하기 위함이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과 마이크가 박살 났으니 직접 무전기를 들었지만, 아쉽게도 사저 전체가 정전인 것처럼 기기 또한 먹통이었다. 누군가가 제대로 장난질을 쳤다.

“젠장! 어떤 새끼가-!”

흥분해서 고함치는 콜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란스러운 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완벽하게 포위되고 갇혀버렸다. 그 사실을 깨달은 콜의 낯은 이미 사색이었다.

“케이! 네가 달고 온 놈들이지?! 대체 어떤 놈들과 작당을 한 거냐? 설마, 정말 필릭스가-…?!”

콜은 아이작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며 다그쳤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사이에도 식탁 위에 남아있는 나이프를 손으로 더듬으며 찾아 헤매던 아이작은 어지럽게 흔들리는 탓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필릭스의 아이는 되돌려 주겠다고 했잖아!”

그가 눈을 부릅뜬 채 고함쳤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퍽- 소리와 함께 단단히 닫혀있던 다이닝 룸의 문이 단번에 부서졌고, 그 사이로 문밖에서부터 장신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실내를 가득 울리게 했다. 서두름 없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는 이미 이곳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처럼 숨 막히는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떻게, 네놈이…….”

빈틈없이 무장한 채 들어서는 필릭스를 마주한 콜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직접 나선 적이 없던 그가 이곳까지 몸소 찾아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벌어진 눈이 우스웠다.

“하, 불안하게 GPS까지 끊어지더라니….”

바지가 반쯤 벗겨져 사타구니를 훤히 드러낸 채 식탁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작과 역시 지퍼를 내린 사이로 성기를 꺼내놓고 있던 콜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투로 바라보는 필릭스의 푸른 동공이 순간 위험스럽게 번득였다.

게다가 얼마나 맞은 건지 아이작의 얼굴은 엉망으로 뭉개지고 여기저기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어있기까지 하다. 콜 또한 코가 무너지고 포크로 얼굴이 패이고 주먹으로 얻어맞아 제대로 된 몰골이 아니긴 했지만, 눈에 들어올 리는 만무했다.

필릭스는 그 짧은 사이에 이미 진창이 되어버린 아이작만 바라보며 이를 짓씹었다. 그와 동시에 단단히 쥐고 있던 콜트의 방아쇠를 서슴없이 당겼다. 탕- 귀가 얼얼해지는 소리와 함께 콜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작과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터라 되도록 멀리 쏘려고 했더니 팔을 비껴간 것이다. 쯧, 혀를 차며 필릭스는 다시금 총을 장전했다.

사람 죽이는데 일 분이면 족하다는 건 자신이 한 말이었지만 실제로 아이작이 이런 몰골이 되어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었다. 아니, 상상할 수 없었다. 어쩌면 특수부대 출신인 아이작의 실력을 나름대로 맹신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상하기 싫었던 일이 눈앞에서 버젓이 드러나고 있었다.

“손 떼.”

사납게 으르렁거린 필릭스는 콜트를 겨눈 채 빠른 보폭으로 다이닝 룸을 가로질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총알이 스친 팔을 움켜쥔 콜은 후다닥 아이작을 끌어당겨 제 앞으로 세웠다.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것이 뻔하니 아이작을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수작이었다.

“필릭스,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섣불리 행동했다간 이놈이 대신 죽게 될 거다.”

등 뒤에서부터 아이작을 바싹 끌어안고 목덜미에 팔을 둘러 조이는 콜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은 몰골이었다. 식은땀이 핏물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아이작의 목을 조이고 위협하는 꼴은 이미 갈 곳 없는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보이게 했다.

“콜, 난 지금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거든? 개 같은 짓도 작작하는 게 좋을 거야.”

콜에게 향해 있던 콜트의 총구멍을 바닥으로 내린 필릭스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콜은 전혀 들을 생각조차 없다는 듯, 아이작의 목을 바짝 조이며 뒤로 물러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의 집을 멋대로 침범하면 쓰나. 얌전히 꺼져. 나야말로 기분이 몹시 잡쳐버렸으니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 콜은 아이작을 붙든 그대로 도망치고 있었다. 끝까지 지저분하게 구는 작태에 필릭스는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노기를 어쩌지 못하고 콜트를 쥔 손만 까닥였다. 그사이, 콜은 늘어져 있는 아이작을 끌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한 걸음도 채 움직이기 전에 콜은 비명을 내질렀다. 기어이 나이프를 찾아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아이작이 제 뒤에 서 있는 콜의 허벅지에 나이프를 찍어버린 탓이었다.

푹! 허벅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콜의 새된 비명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필릭스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었다. 피에 온통 젖은 채 기운 없이 숨을 헐떡이는 아이작의 손목을 움켜쥐고 확, 잡아끄는 것과 동시에 콜트의 그립으로 그의 턱을 갈겼다.

“손, 떼라고 했지?!”

뻑-! 그립에 제대로 맞은 콜의 턱에서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울림이 일었다. 우당탕, 거대한 소리와 함께 콜은 바닥으로 나뒹굴었지만, 필릭스는 놓치지 않고 콜에게 곧장 달려가 군홧발로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어차피 오늘을 네 제삿날로 정하긴 했지만 곱게 죽이진 않을 생각이거든. 총알 한 발로 간단하고 쉽게 죽이면 재미없잖아?”

퍽, 퍽-, 필릭스가 죽일 기세로 발길질하며 말했을 때였다. 가까스로 방어하다가 몸을 굴려 피한 콜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입가를 훔쳐내며 눈을 부릅떴다.

“필릭스! 내가 죽으면 케이, 아니 아이작까지 죽게 되는 사실은 알고 있나?!”

순식간에 처참한 꼴이 된 콜의 외마디 소리는 마지막 발악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가락에 낀 너클을 고치며 주먹을 움켜쥐었던 필릭스는 움찔,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말았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괜히 발악해봤자 너만 기운 빠질 뿐이라는 걸 알아야지. 네놈이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미 이 저택은 포위당한 지 오래거든. 그리고 방금 전 방송으로 듣지 않았나? 네 비리는 전부 퍼져나갔다고. JSOC와 NCIS뿐만 아니라 군부와 언론사까지 전부.”

새파랗게 일렁이는 분노를 드러내며 필릭스는 작정한 듯 검은 장갑에 감싸인 손을 폈다 쥐었다 움직였다. 콜은 턱까지 덜덜 떨며 크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다.

“헛소리!”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확인해. 네가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야.”

“필릭스, 네가 기어이!”

“그러게 남의 걸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도덕 공부는 미리미리 해뒀어야지.”

이를 갈며 눈을 부릅뜬 콜을 향해 필릭스는 일순 섬뜩한 살기를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만 같았다. 만에 하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제기랄. 소름 끼치는 상상을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들었을 때였다.

“지금 내가 죽으면 아이작 역시 쇼크로 죽을 거다!”

다급히 내뱉는 콜의 외침에 필릭스의 주먹이 다시금 허공에서 움찔 멈춰버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죽기 싫으니 별소리를 다 하는군.”

콜을 비웃으면서도 필릭스는 쉽사리 내치질 못했다. 너클을 낀 주먹은 여전히 허공에 뜬 채 콜을 향해 있었다. 그러자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주춤주춤 바닥을 기다시피 뒤로 물러선 콜은 비열한 웃음을 머금었다. 벼랑 끝까지 몰렸음에도 마지막 키는 자신이 쥐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양양하기까지 하다.

“내가 각인시키고 있었으니까. 내 오메가로 만들려고 말이지! 벌써 목덜미에 표식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쏟아붓던 페로몬의 주인인 내가 죽어버리면 저놈은 쇼크사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지!”

그러나 피로 범벅이 된 콜의 입에서 튀어나온 발악과도 같은 소리는, 움켜쥔 주먹에서 기운을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그렇게 네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싶었으면 진즉 각인이라고 해놓지 그랬나! 아무런 표식도 없기에 내가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잖아?”

미친 것처럼 킬킬거리는 콜은 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에 필릭스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라니.”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만 해도 놈의 수작질에 머리끝까지 열이 치솟아 방 안에 가득한 알파 페로몬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넓은 다이닝 룸 안에는 짙은 알파 페로몬이 가득했다. 최우성 알파인 필릭스에겐 영향이 미치질 않겠지만, 일반 알파나 오메가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밀도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베타가 아니었던가? 지금 이 작자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인 거지?

엇나간 퍼즐처럼 도무지 맞춰지질 않는 상황에 필릭스는 주먹을 움켜쥔 그대로 시선을 돌려 아이작을 향했다. 콜의 허벅지에 기어이 나이프를 박았던 아이작은 식탁 위에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간헐적으로 떨고 있었다.

깨진 코와 입, 찢어진 눈가에서 흐르는 핏물은 그렇다 쳐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작이 고작 이 정도로 쓰러질 위인은 아니지 않은가. 이틀이나 감금당했을 때도 멀쩡하게 돌아다녔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제 아들을 빼앗겼을 때도 충격으로 잠시 기절했을 뿐, 눈을 뜨고 나서는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보통 이상의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사람인데, 지금 그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아직 사타구니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바지를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늘어져 덜덜 떨고만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오메가……. 콜이 지껄인 말이 일순 강한 충격이 되어 뒤통수를 치고 지났다.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버린 필릭스는 아이작에게 다급히 다가섰다.

“아이작, 아이작!”

피에 젖은 아이작의 뺨을 두들겼지만, 초점이 풀어진 검은 눈은 어지럽게 허공을 방황할 뿐이다. 빌어먹을, 이를 씹으며 필릭스는 아이작의 턱을 쥐고 고개를 돌렸다. 귀 뒤, 머리칼로 덮일 수 있는 부분에 콜의 개소리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희미한 자국이 떠오르고 있었다.

알파에게 각인된 오메가가 갖는 표식이 맞긴 했지만, 진행이 더딘 것은 아직 그의 내부에 페로몬이 뿌려지지 않았던 데다가 아이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필릭스의 눈이 당혹을 넘어 노기로 짙어졌다.

“Fuck! 너, 정말 오메가였던 거냐?! 그런 거야?! 대답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네가 오메가일 수가-, 아이작!”

견딜 수가 없어진 필릭스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아이작의 어깨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반쯤 정신을 잃어버린 아이작은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콜에게 나이프를 휘둘렀을 때와는 또 다르다. 시시각각 정신을 잃어가는 그를 끌어안은 필릭스에게서 형형한 욱기가 흘렀다.

“대체 이게 다 뭐야! 아이작! 얼른 일어나서 대답하지 못해?!”

당혹과 분노로 이성을 놔버린 필릭스는 아이작의 어깨를 쥐고 정신없이 흔들었다. 그러자 아이작이 잠시 잠깐 깨어나 흐릿한 눈으로 필릭스를 향했다. 그 애처로운 시선과 표정에 심장이 쿵, 파열음을 일으키며 떨어져 내린다. 필릭스는 분이 치솟았던 것마저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의 양 뺨을 움켜쥐고 성급히 입을 맞췄다.

“젠장!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래?!”

짧고도 애달픈 키스가 끝나자마자 필릭스는 다시금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작의 뺨을 쓰다듬는 손끝은 알게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찢어진 입술 끝에 또다시 입을 맞추는 입술 또한 가늘게 떨린다.

“벤자민을…….”

“이미 사람을 보냈어. 넌 일단 이곳에서 나가기나 해.”

희미하게나마 정신을 차리자마자 벤자민부터 찾는 아이작을 모르는 척하며 필릭스는 그를 두 팔로 안아 일으켰다. 그가 정말 오메가고 각인이 진행되고 있었다면 콜의 페로몬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한시바삐 빠져나가야 했다. 그다음에 뭘 해도 할 테였다. 우선은 콜의 페로몬이 없어야 한다.

아이작을 두 팔에 안은 그대로 필릭스는 다이닝 룸을 뛰쳐나갔다. 어느새 콜은 도망쳤는지 바닥에 흩뿌려진 핏물만 점점이 남아있을 뿐, 그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콜을 뒤쫓을 여유 따위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베타가 아닌, 오메가라는 아이작이 다른 알파, 그것도 콜에게 각인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억울하고 황당하며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기도 했다. 아이작이 오메가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 뒤통수를 후려치듯 펼쳐졌으니 어떻게 멀쩡히 버틸 수가 있을까.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긴 아이작에게 화가 나는 동시에 지금껏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당장은 화만 내고 앉아있을 수조차 없다. 일단은 이미 진행되어버린 각인을 막아야만 했다. 그것도 콜이 죽기 전에 막아야 한다. 콜이 저주처럼 퍼부었던 것처럼 각인되는 도중 알파가 죽어버리면 오메가에게 쇼크가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콰당- 응접실로 보이는 빈방으로 들어간 필릭스는 긴 소파에 엉망진창이 된 아이작을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식은땀과 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그의 까만 머리칼을 쓸어올렸을 때였다.

불현듯 눈을 뜬 아이작이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필릭스의 손을 움켜쥐었다. 피에 젖은 그의 손은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기만 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구기고 있으려니 아이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필릭스, 벤자민……. 벤자민을 먼저 데려다줘요.”

질식할 정도로 가득했던 콜의 페로몬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 온 탓인지 겨우 눈을 뜨고 필릭스를 알아본 아이작은 희미한 소리를 흘렸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곧이라도 꺼져버릴 듯 약해빠진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갔다고 말했어.”

으득, 이를 씹으며 필릭스는 똑같은 대답을 던졌다. 그러나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당신이 가세요. 꼭 데려오세요. 콜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아이작! 지금 내가 그럴 정신이 어딨어?!”

“당신 아들이잖습니까. 그런데도 다른 놈들에게 맡겨만 두겠다는 겁니까?”

밭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운이 서리지 않아 흐릿한 발음으로도 강하게 묻는 아이작의 질문에 필릭스는 끝내 얼어붙고 말았다.

“…벤자민이 내 아들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머릿속을 누군가가 다 지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기만 했다. 오메가라는 아이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릭스는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아이작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아이작은 초조함이 역력한 표정을 드러냈다.

“벤자민이… 당신 아들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다시금 묻는 아이작에게 필릭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의 짙푸른 바다 같은 동공은 그저 황망하게 벌어진 채 깜박이지도 않는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이작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당신도, 알고 있다고……. 콜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다고……. 콜이 분명…….”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낯설 정도였다. 필릭스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아이작을 바라보기만 하던 필릭스는 짧게 욕설을 흘리며 머리칼을 엉클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도무지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내가 콜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건-…. 아니, 아니. 아이작, 다시 말해. 벤자민이 내 아들이라고 했나? 오메가인 네가 내 아들을 낳았다고? 대체 언제……. 맙소사, 아이작 제대로 말해.”

충격을 받은 것은 아이작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으로 필릭스를 올려보기만 했다.

“대답해!”

넋이 나가버린 듯한 아이작에게 필릭스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고함쳤다. 그제야 아이작은 마른침을 삼키고 파랗게 질린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턱 끝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당신,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겁니까? 내가 오메가고, 벤자민이 당신 아들이라는 걸…….”

“제대로 대답하라고 했어. 아이작, 네가 오메가인 것도 지금 알았어! 미친 콜 새끼가 말해서 이제 알았다고!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을 낳기까지 했다는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애를 낳았다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금 같은 질문을 던지며 다그치는 필릭스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눈앞이 새까맣게 밀려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필릭스가 알고 있던 게 아니라니. 콜이 지껄인 말들은 다 뭐였지? 머릿속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았다.

“4년 전, 당신의 섬에서 히트사이클이 터졌던 오메가가…… 접니다. 당신은 그때 내게 노팅을 했고…, 난 당신의 아이를 낳았어. 그게 벤자민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가서 벤자민을 내게 데려오라고!”

정신을 잃고 죽어가던 아이작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소리를 내지르며 필릭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필릭스는 더더욱 얼빠진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4년 전, 그 오메가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신 아이란 말입니다! 당신 아들이라고. 그러니까……. 당신이 구해줘요. 부탁이니까…….”

기어이 필릭스의 팔을 붙든 채 아이작은 흐느끼고 말았다. 으득, 이를 씹는 필릭스의 푸른 동공이 무섭도록 짙어진다.

“이것 봐!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네가 그 지랄 같았던 오메가라는 것도 숨기고, 벤자민이 내 아들이라는 것까지 숨겼다고?! 지금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건 나뿐이라고?! 이게 말이 돼?!”

필릭스는 귀가 얼얼하도록 소리쳤다. 절로 몸에 한기가 서리는 노기를 고스란히 마주하고 있던 아이작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섬뜩한 한기가 폐부를 뚫고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만 같았다. 격노한 그가 무슨 짓을 할까 더럭 두려워질 정도다.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계약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아이작은 본능적으로 뒤로 도망치며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기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정확히 깨닫지도 못했다. 머릿속은 이미 진창이었다. 잠시 잠깐 공기 위로 적막이 내려앉는다. 아이작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러자 새까맣게 가라앉은 필릭스의 푸른 동공과 시선이 부딪혔다.

“하, 설마 그 뜻이 네가 그때 그 오메가였다는 사실이 들통날 때 쓰기 위한 장치였던 건가?! 내가 이렇게 화를 낼 줄 뻔히 알면서 숨기고, 대신 계약서에 조건으로 달았다고?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그에게서 흐르는 욱기와 거친 페로몬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소파의 팔걸이가 등에 닿아 도망갈 자리조차 없었음에도 자꾸 몸을 뒤로 밀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습게도 필릭스의 팔을 붙들고 있는 손을 치우지도 못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분노하고 있는 필릭스가 두려우면서도 쉽사리 놓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까지 치달았다고 해도, 그가 자신이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을 떠나 단순히 죽일 것처럼 쏘아보는 그의 시선에 알게 모르게 상처받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비겁하고 저열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움켜쥐고 있는 손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다.

“그래요…, 그랬습니다. 당신이 모든 걸 알게 되는 순간 당신이 느끼게 될 감정보다는……. 내 안위밖에 생각하지 못한 것이 맞습니다. 모든 것이 전부, 내 탓입니다. 나중에, 얼마든지 당신의 화풀이를 받아줄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잠시만 참아줘요.”

“아이작!”

“다른 계약도 있었잖습니까……. 벤자민과 어머니를 먼저 구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했잖습니까.”

차마 눈도 들지 못했다. 콜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필릭스가 자신과 벤자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이 모든 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는 걸 뻔히 알기에 미안한 마음은 배로 커졌다. 하지만 모르는 척, 뻔뻔하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 지경이 된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fuck!”

움켜쥔 주먹이 퍽, 소파의 등받이를 내리쳤다. 푹 꺼졌다 올라오는 쿠션에서 먼지가 가볍게 일어 공기 위를 떠돌았다. 아이작은 그때까지도 필릭스의 팔을 붙든 채 놓지 못했던 손을 미끄러뜨렸다. 툭, 소파 위로 떨어진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화풀이는 나중에 하라고? 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화를, 네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데?”

그러자 아이작의 턱을 사납게 움켜쥐고 들어 올린 필릭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억지로 눈을 들게 만든 탓에 피할 수도 없이 쏟아지는 새파란 분노를 마주한 아이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으윽……. 필릭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아이작.”

“필릭스-! 읏-….”

“그래, 네 말대로 빌어먹을 계약이었지. 너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못하는 것도, 네 아들과 어머니를 먼저 구해달라고 한 것도. 전부 계약은 계약이니 들어줘야겠지.”

낮게 가라앉은 음성은 소름 끼칠 정도로 냉랭하다. 아이작은 그의 손아귀에서 턱을 빼지도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잔뜩 구겨진 아름다운 얼굴이 한층 가깝게 떨어진다.

“그리고 난 무엇보다도 네가 먼저가 되어야 한다고 했어.”

“아……?”

“벤자민이 내 아들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네가 먼저야. 그리고 지금 넌 당장이라도 쇼크사할 수 있는 상태고. 밖에선 누가 콜 그 새끼를 사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알아? 그러면 네가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필릭스는 사납게 이를 짓씹었다. 아이작이 4년 전, 섬에서 제 팔을 꺾고 도망친 오메가라는 사실과 그 일로 벤자민을 낳았다는 사실은 일단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당장 화가 치밀고 분이 솟구치는 것도 억눌러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아이작의 상태였고,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제기랄! 아주 엉망진창이야!”

타는 듯한 눈으로 아이작을 쏘아보던 필릭스가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아이작의 턱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작은 멍한 눈을 그에게 둔 채 움직이질 못했다.

“네가 멋대로 내 아들을 낳았으면서도 내 앞에서 모르는 척했던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물을 거다. 분풀이를 전부 받아주겠다고 했던 네 말은 반드시 지키게 될 거야.”

필릭스는 여전히 날 선 눈빛을 하고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더는 다그치질 못한다.

각인이 진행되다 만 것은 섹스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이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라리 완전히 각인이 끝났다면 콜을 죽여버리고 끝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이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어중간한 상태다. 이러다가 콜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아이작에게도 문제가 생길 게 뻔하니, 당장 조처를 해야만 했다.

“명심해.”

필릭스의 불같은 노기에 다시금 기운을 잃고 푹 고개를 떨구는 아이작의 뺨을 필릭스는 투박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조금 전 턱을 틀어쥐었던 것처럼 사납고 우악스러운 손길은 아니었다. 조금 더 조심히, 언뜻 애틋하기까지 한 움직임으로 뺨을 문지른다.

“너, 내 개가 되겠다고 했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아이작이 놀란 눈을 들었다.

“필요 없으니 내 오메가가 되겠다고 해. 내가 콜의 페로몬을 걷어내고 내 것으로 뒤덮을 테니까, 지금 당장, 내 오메가가 되겠다고 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필릭스의 음성은 아직 사나웠다. 그러나 뜻밖의 제안은 거짓이 아닌 듯 그의 푸른 동공은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이, 내게 각인이라니…….”

아이작은 혼란스러운 듯 제대로 된 답변을 잇지 못하고 파리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아이작을 필릭스는 서늘하게 응시하기만 했다.

콜이 먼저 아이작에게 각인을 시도했고 표식까지 흐릿하게 나타난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콜에게 각인을 마무리하게 한 후 완성되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것. 물론 그 꼴을 눈 뜨고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음으로는 콜보다 강한 페로몬을 가진 알파가 콜의 각인이 완성되기 전에 새로운 각인으로 덮어버리는 것. 다행으로 필릭스는 우성 알파인 콜보다 강한 최우성 알파였고 당장이라도 시도할 수 있었다. 아이작이 제대로 버틸 수만 있다면.

“싫어?”

“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또한 내게 각인되는 건데… 그건-.”

떨리는 입술 끝으로 겨우 질문을 던진 찰나였다. 필릭스는 덥석 아이작의 입술을 덮어 눌렀다. 욕심 사납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당연하다는 듯 혀가 침범해 들었다. 타액이 섞이고 혀가 비벼지는 사이 알파 페로몬이 예고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콜의 페로몬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숨 막히도록 짙은 페로몬이었다. 폭우처럼 격렬하게 쏟아지는 페로몬에 순식간에 머릿속이 마비되었고, 사지가 덜덜 떨렸으며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으, 으흐읏-!”

몸 안에서 두 개의 다른 페로몬이 뒤엉키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손끝뿐 아니라 사지 또한 경련하듯 떨렸다. 새까맣게 짙어진 시야로는 더 이상 필릭스의 모습조차 보이질 않는다. 온몸이 잘게 찢어지는 것 같은 지독한 감각이었다.

“참아.”

뇌를 짓이기는 페로몬에 헐떡이던 아이작의 코에서 기어코 피가 터져 나왔다. 필릭스는 다시금 강하게 입을 맞췄다. 여과 없이 몸 안으로 침범해 드는 페로몬에 몸을 비틀고 신음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이작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헐떡이며 필릭스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필릭스, 벤자민을… 꼭…….”

이 와중에도 벤자민을 찾는 아이작을 보며 필릭스는 끝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벤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아이작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필릭스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견딜 수 있겠어?”

던진 질문에 아이작은 오한이 일어 떨리는 몸을 웅크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는 손을 들어 아이작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콜의 표식은 조금씩이나마 흐려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그의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자신의 표식이 나타날 거다. 그때까지 아이작이 미치지 않고 제대로 버티기만 한다면.

“아이작, 넌 지금껏 내게 거짓말을 했고 감쪽같이 속였지. 당장 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만큼 화가 났지만, 약속대로 네겐 손끝 하나 대지 않을 거다.”

“으, 읏-….”

“그러니 네 계약은 네가 지켜. 넌 내 거고, 내 오메가야. 명심해.”

사납게 아이작의 찢어진 입술을 빨아당긴 필릭스는 다시 한번 짙은 페로몬을 퍼부었다. 이번에도 아이작은 어김없이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자신의 표식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그 전에 벤자민의 무사를 확인해야만 했다.

아이작을 소파에 눕혀둔 그대로 필릭스는 빠르게 걸음을 돌렸다. 아이작이 홀로 남은 작은 응접실에는 질식할 만큼 밀도 높은 필릭스의 페로몬이 가득했다.

사납고 날 선 페로몬은 그 어떤 알파나 심지어 베타마저도 견딜 수 없게 만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강렬하고 섬뜩한 페로몬은 아이작을 빼곡히 둘러싼 채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다. 페로몬의 주인인 필릭스 외에는 감히 발을 디딜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