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10화 (10/16)

9. Pitch-Black Night

4년 전.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던 것은 예상보다 적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예상 표적은 서른 안팎이어야 했다. 작전 전 건네받은 정보와 자료에는 분명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배치된 팀은 고작 스물뿐이었다.

나중에 지원팀이 더 따라붙을 예정이긴 했으나 사실 지원팀이라고 해봤자 정보를 수집하는 쪽에 가까웠고, 실전은 스무 명으로 치러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처리해야 하는 목표는 테러집단에 조력하고 있다고 판명된 무기상의 비밀 무기고였고, 지키고 있는 병력은 서른 안팎이라는 것이 상부에서 내려온 정보의 골자였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작은 전투가 될 예정이었기에 팀 내에는 긴장감조차 서려 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찰했을 때조차 무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의 주변은 한산했고, 병력 또한 말 그대로 서른 미만인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모든 정황은 미리 건네받은 정보와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남미의 외딴섬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무기고를 감시하는 것뿐이라고 하더니, 정말이지 허술하기만 했다.

문제는 무인도에서 무기고를 감시하는, 할 일 없어 보이는 놈들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무기고의 주인인 필릭스 펠리체가 오늘 직접 둘러보러 온다는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시각에 아이작의 팀을 비롯, CIA 놈들까지 합세해서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팀에 직접 내려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입혀야 하는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막상 섬에 도착하고 전투를 진행하자 상황은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필릭스 펠리체는 머리카락조차 보이질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난 건지 적의 병력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놈들은 엄청난 장비로 무장한 채 반격해왔다.

아무리 특전사 팀이라고 해도 이쪽은 겨우 스물뿐이다. 그런데 상대는 말도 안 되는 병력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라도 전혀 다른 반응에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몇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대원의 반 정도가 쓰러졌고, 결국 후퇴밖에 답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이작은 남은 대원들을 끌고 몸을 숨기려 했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섬이었다. 섬의 크기가 작지는 않다고 해도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도망가거나 숨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무전으로 지원 병력과 구조요청을 끊임없이 보내도 답변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전파가 잡히지 않는 것처럼 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허무한 소리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뭔가 이상하잖습니까! 어떻게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될 수가 있는 겁니까?!’

누군가가 고함쳤다. 아이작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뭔가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주로 작전이 세워지려면 정밀한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착오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해도 어려운 임무들이 태반인데, 아예 정보와 다른 상황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은 이쪽에서 선공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대처하는 움직임이 그랬고 준비된 무기와 병력이 그랬다. 아이작은 이를 씹었다. 정보가 새어 나간 거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제길, 조금 전부터 지끈거리던 두통이 점차 심해져 갔다. 콜이 자신에게만 비밀리에 맡긴 임무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젠 생각할 것도 없이 불가능한 임무였다. 남아있는 팀원들 전부를 데리고 구조를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 다른 임무까지 진행할 수는 없었다.

숨을 죽인 채 생각을 정리하던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탈출하는 게 우선이다. 항복을 하든, 뭘 하든 일단 살아야 했다.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다. 결심한 아이작은 팀원을 이끌고 내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더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심상치 않게 지끈거리던 두통, 서서히 전신으로 번져가는 미열, 얼마 뛰지도 않았건만 턱까지 차오르는 숨결까지.

평생 베타로 살다가 19살에 갑작스레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로 처음으로 나타난 히트사이클이었다.

* * *

히트사이클의 열기에 뒤범벅이 된 시간을 보내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뜨기 전의 새벽녘이었다. 어두컴컴한 주위를 흐릿한 눈으로 돌아보던 아이작은 일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낡은 농기구, 짚더미와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 깨지고 뿌연 창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흐릿한 빛이 전부인 창고에는 습하면서 외설적인 냄새가 가득했다.

땀과 정액과 체액이 뒤범벅된 끈적이는 냄새, 거기에 더해 눈앞이 아찔해지는 최우성 알파의 짙은 페로몬과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한 옅은 오메가 페로몬까지. 난잡하기 짝이 없는 냄새가 온통 뒤범벅되어 코끝을 찔러댄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발과 옷자락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널브러져 있던 몸은 여기저기 삐걱거리며 통증을 일으켰다. 허리 아래로는 감각조차 무뎠다.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는 아직도 끈적이는 정액으로 흠뻑 젖어 있기까지 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상황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던 아이작은 그제야 밤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었는지 기억해낼 수가 있었다. 목구멍 위로 신음이 흘렀다. 그러자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등 뒤에서 긴 숨소리가 들려왔다.

‘……!’

소스라치게 놀란 아이작이 휙 고개를 돌렸다. 넋이 나가 있던 바람에 깨닫지 못했는데, 모로 누워있던 자신의 등 뒤에는 곤히 잠에 빠진 사내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것도 제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아이작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돌려 빠져나오고 말았다.

전신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조차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홀딱 벗고 있는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이작의 얼굴에는 절망이라는 감정만이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밤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도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지만, 새삼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으려니 또다시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봐도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있는 사내는 이곳에 오기 전에 숱하게 보았던 사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한 화사한 금발, 눈을 감고 있어도 시선을 앗아가는 조각 같은 얼굴, 벗은 몸조차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체격. 바로 이 섬과 무기고의 주인이자, 콜이 자신을 따로 불러 암살 명령을 내리며 던져준 파일 속 인물, 필릭스 펠리체였다.

맙소사, 아이작은 이마를 짚으며 개탄했다. 예기치 못했던 적의 반격에 후퇴하며 구조요청을 하던 중 닥쳐온 히트사이클도 최악이었지만, 하필이면 죽을 것 같았던 히트사이클의 열기를 잠재워준 알파가 콜이 비밀리에 암살을 지시했던 대상인 필릭스 펠리체라니. 이것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또 있을까.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며 참담해하던 아이작은 곧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봐야만 했다. 위급했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몰랐고, 팀원들의 생사 또한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히트사이클을 가라앉혀야 했던 아이작은 무작정 이곳으로 도망쳐왔으니 말이다.

대충 옷을 입고 제 물건을 챙긴 아이작은 그때까지도 깊이 잠들어 깨어날 생각도 않는 사내를 흘끔 내려보았다. 이런 환경, 이런 시국에 참 태평하게 잘도 잔다. 하긴 생각해보니 지난밤에도 전쟁터인 밖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저 사내는 홀로 창고에서 유유자적 남아있었다. 덕분에 히트사이클은 어느 정도 가라앉긴 했지만…….

쯧, 혀를 찬 아이작은 차라리 상대가 저토록 위기감 없이 태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방에서 로프를 꺼냈다.

그가 깨어나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주위가 어두운 데다가 위장용 크림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덕분에 자신의 얼굴은 확인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그에게 붙들리기라도 한다면 빠져나갈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재빨리 그의 양 손목을 묶고 난 후 다리까지 묶었을 무렵이었다. 그제야 깊이 잠들어 있던 사내가 눈을 들었다. 깜박깜박 긴 속눈썹이 흔들리더니 곧 그 아래에 잠긴 눈이 서서히 드러난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푸르스름한 여명 속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깨어났을 때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공주를 바라보고 있는 왕자 또한 이런 심정이었으려나? 뜬금없이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괜스레 심장 부근이 저릿하게 울렸다.

‘이것 봐. 난 묶이면서 하는 취미는 없는데. 내가 널 묶는 건 또 몰라도.’

그러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눈부신 얼굴과는 정반대로 음산하고 살벌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려왔다. 그제야 번득 정신을 차린 아이작은 눈을 들었다. 바닥에 누운 그대로 사지를 묶인 필릭스의 선뜩한 시선이 제게 꽂혀 들고 있었다.

말투는 느긋했지만, 기실 그의 눈빛은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 같지 않게 날카롭기만 했다. 빈틈을 보이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꺾어버릴 것처럼 흉흉하다. 홀로 숲을 거닐다가 마주친 굶주린 맹수의 눈빛과 비슷한 것도 같았다. 저도 모르게 무기에 손을 대게 만드는 그런 살기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양손을 묶인 데다가, 끈을 트렉터에 연결까지 해두었기에 쉽사리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아이작은 까끌거리는 목구멍 아래로 마른침을 삼켰다.

‘발정 난 걸 기껏 가라앉혀줬더니 돌아온 대가가 고작 이건가?’

필릭스가 어이없다는 듯 씨근덕거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울컥한 그의 비난은 듣지 못한 것처럼 시계만 내려봤다. 벌써 새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재빨리 저 사내를 해치우고 밖으로 나가봐야 했다.

‘미안하게 됐군.’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건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필릭스 펠리체를 암살할 기회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사실 히트사이클이 터지기 전만 해도 후퇴하며 구조 요청하기 급급해서 콜의 지령은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있지 않았던가.

손끝으로 허리춤에 찬 단도를 만지작거리던 아이작은 스륵, 서슴없이 단도의 손잡이를 쥐고 검집에서 검을 반쯤 뽑아냈다. 서슬 퍼런 칼날이 새벽녘의 어둠 속에서도 음산하게 빛을 발한다. 정사의 향이 가득했던 창고 안에는 어느새 묵직한 살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아이작의 손끝을 바라보던 필릭스는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곧,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뚜렷이 느낄 수 있는 비웃음이었다.

‘이거야 원, 오메가치곤 제법 냄새가 마음에 들어서 예뻐해 줬더니 발톱을 세우네? 귀엽기도 하지.’

그의 심드렁한 중얼거림에 아이작은 일순 손을 멈추고 말았다.

‘경고하는데, 그 단검에서 손 떼는 게 좋을 거야.’

‘꼼짝없이 묶인 주제에 지나치게 거만한 태도 아닌가.’

이럴 때조차 오만한 사내의 태도에 아이작이 혀를 찼을 때였다. 문득 필릭스는 킥, 소리 내어 웃었고, 아이작은 의아함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동시에 목을 꽉 조이는 농도 짙은 페로몬이 머리부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목을 움켜쥐었다. 컥, 막힌 숨이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너, 오메가잖아. 냄새는 옅긴 했지만 그래도 오메가인 네가 최우성 알파인 내게 감히 반항하겠다고? 헛소리하기는.’

등등하게 중얼거린 필릭스는 푸른 눈을 번득였다. 밀도 높은 페로몬이 한층 더 심하게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게워낼 것처럼 속이 확 뒤집혔고, 눈앞은 핑 돌았다. 덜덜 떨리는 사지엔 기운이 빠져갔다. 매달 억제제를 복용해오던 열성 오메가였던 아이작으로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끔찍하게 강력한 페로몬이었다.

‘알파를 누르는 것도 쉬운 일이지만 말이야, 오메가는 더 쉽다는 걸 알아야지.’

더러운 바닥에 알몸으로 누운 채 묶이기까지 했으면서도 필릭스는 전혀 위축되는 기척도 없이 비아냥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페로몬으로 사람의 정신을 억누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니 뭐가 두려울까. 그 증거로 지금 아이작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최우성 알파의 짙은 페로몬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저었다. 이대로라면 일, 이 분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벌써부터 눈이 뒤집힐 것 같았고, 컥컥거리며 간헐적인 숨을 내쉬는 입가에선 침이 흘렀다.

끝내 풀썩, 무릎이 꺾인 아이작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승리자마냥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필릭스의 푸른 눈동자와 흐릿해진 시선이 마주쳤다. 환멸감마저 느껴지는 시선에 눈앞이 번쩍였다. 제가 원하지도 않았건만 이미 정해진 채 태어나게 되는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능력의 차이라니. 견딜 수 없는 부당함에 으득,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아이작의 손에 쥐고 있던 단도가 번득이는 빛을 흘리며 뽑혔고, 이어 푹- 살벌한 소리가 페로몬으로 가득 찬 공간을 갈랐다. 섬뜩한 적막이 내려앉는다.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 하아-.’

아이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페로몬이 그제야 끊긴다. 단검의 손잡이를 있는 힘껏 움켜쥔 아이작의 손은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단검의 날카로운 날에 베인 필릭스의 목덜미에선 희미한 선혈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필릭스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이작을 올려보기만 했다.

‘너…… 어떻게 움직인 거지?’

필릭스는 제 목의 상처 따위는 깨닫지도 못한 채 멍하니 물었다.

대부분 알파의 페로몬에 젖어버린 오메가는 이성을 놓치기 마련이었다. 전신의 근육까지 뻣뻣하게 수축되어 제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다. 미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메가들은 알파를 두려워했고, 또 알파들은 본인보다 등급이 높은 알파들을 두려워한다. 특히 손에 꼽을 정도로 수가 적다는 최우성 알파인 경우에는 베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다 보니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금, 열성 오메가인 아이작이 최우성 알파인 필릭스의 페로몬에서 벗어나 단검을 휘둘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한 필릭스는 멍한 얼굴을 숨기지도 않고 아이작을 쳐다봤다.

‘개수작 부리지 마.’

그러자 아이작은 가슴을 들썩이도록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을 찍어 내린 단검을 뽑았다. 단 한 끗 차이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필릭스의 목을 꿰뚫었을 단검은, 그의 살갗을 그어 핏물만 살짝 비치게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필릭스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그나마 목을 꺾지 않은 건 네 허리 짓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둬.’

단검을 뽑아 든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페로몬에 젖어 있는 터라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만약 다시 한번 페로몬이 쏟아진다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망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필릭스의 왼팔을 묵직한 군화로 짓밟았다.

‘무슨 짓이야!’

필릭스는 그제야 위기감을 느꼈는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껏 태연하기만 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잔뜩 일그러진 눈에는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다.

‘감히 나를 페로몬 따위로 흔들려고 했던 대가라고 해두지. 더불어 나를 뒤쫓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를 갈며 필릭스가 소리쳤지만, 우둑- 기어이 뼈 부러지는 소리가 적막감이 감도는 공간 위로 퍼져나갔다. 필릭스의 비명이 뒤이어 울렸다.

‘그래도 오른팔은 피해줬잖아?’

아름다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신음하는 필릭스를 내려다보던 아이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크흑, 너, 이 망할 오메가 새끼, 네가 이러고도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등 뒤로 필릭스의 악에 받친 소리가 따라왔다. 그러나 비틀거리는 아이작의 걸음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래,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도망쳐 보든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노기가 가득 찬 고함이 한층 더 커진다. 아이작은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창고를 빠져나왔다. 쾅- 등 뒤로 낡은 창고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나마 팔이 부러진 필릭스가 제 분을 못 이겨 발악하는 소리도 흩어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이작은 다급히 나무가 무성한 숲으로 뛰어들기만 했다.

* * *

그를 죽이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감정이었을 뿐이었다. 단검에 손을 얹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목을 가르려 마음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숨 막히는 알파 페로몬을 잔뜩 뒤집어썼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단검의 날이 그의 목덜미 옆을 비켜난 후였다.

어째서 선뜻 죽이지 못했을까? 밤새 몸을 섞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오메가로서 맛본 사내였기 때문에? 아니면 혼자서는 어쩌지 못했던 히트사이클을 가라앉혀줬기 때문일까?

설마. 그런 유치한 이유는 아닌 게 분명했다. 겨우 하룻밤 몸을 섞어 히트사이클의 열기를 가라앉혔다는 이유로 처음 본 사내에게 정이 생겼을 리는 없다. 답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그저 변덕이었다는 가정이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이유인 것 같았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잠깐 일어났던 충동적인 변덕이었다고.

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난생처음으로 있었던 ‘콜이 비밀리에 지시한 임무를 이행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슬금슬금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고에서 도망쳐 나온 지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수색대가 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수색대의 눈을 피해가며 나무가 우거진 섬을 뒤졌지만, 팀원이나 정보팀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무전기로 연락되는 팀원도 없었다. 어쩌면 지난밤 자신이 필릭스의 아래에서 헐떡이던 사이에 팀원들은 이미 섬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무단으로 팀을 이탈한 자신 때문에 팀원들이 곤경에 처했다면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무슨 벌을 받든 그 벌은 자신에게 돌아와야만 했다.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던 아이작은 섬의 하단, 절벽 아래로 기어 내려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멀리서부터 자신을 찾는 것이 분명한 필릭스의 사병들의 고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기필코 찾아내겠다며 고함치던 필릭스의 번들거리는 동공이 눈앞으로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허리가 오싹해진 아이작은 애써 고개를 털어내고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기억할 이유도 없는 모습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그렇게 할 테였다. 다짐한 아이작은 차근차근 움직였다.

그제 새벽, 이곳에 침투했을 때 절벽 아래의 동굴 안쪽으로 숨겨두었던 여러 가지 물품과 고무보트는 아직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누구도 이곳까지 들어왔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쩐지 불안해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 버린 아이작은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멀거니 올려보며 짧은 한숨을 흘렸다.

섬을 홀로 빠져나간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될 테였다. 망망대해를 고무보트로 가로질러야 한다는 건 사실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모터가 달려있다고는 해도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대륙까지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에 한 번에 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섬에서 섬을 거쳐 가며 이동해야 한다. 대부분은 무인도일 테니 정비를 하고 다시 움직이는 방향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한 무인도에서 운이 좋게 구조요청이 닿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시각각 제 뒤를 바짝 쫓아오는 필릭스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아이작은 파도 소리가 사납게 들려오는 절벽 아래에서 눈을 감은 채 조금 더 짙은 어둠이 밀려오기만을 바랐다. 해가 지는 순간 보트를 띄울 것이다.

지금껏 전쟁터가 삶의 터전이었던 만큼, 수도 없이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렸고, 위기 속에서 살아왔었지만, 이번만큼 어렵다고 느낀 적도 드물었다. 과연 이곳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난 후에 본부에 연락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는다면 어떤 답변을 받을지. 그리고 콜은 팀을 무단으로 빠져나갔던 데다가 임무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자신에게 어떤 비난을 던질지…….

이곳에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앞으로 닥쳐올 일들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불합리한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나하나 처리해나가야 하는 수밖에.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잠시 그대로 앉아 머릿속을 정리하던 아이작은, 서서히 날이 저물고 하늘이 붉어졌을 때 기어이 보트를 밀었다. 파도가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럽게 철썩였다. 불안감을 배로 가중시키는 소리였다.

그렇게 새까만 바다를 가로질러 여러 섬을 전전한 끝에 가까스로 본국으로 돌아온 것은 무려 한 달이 넘은 후의 일이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바다 위에서 사경을 헤매던 아이작은 체력저하와 더불어 한동안 여러 가지 증상과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해군 대위였던 그가 바다라면 진저리가 났고, 불빛 하나 없는 새까만 밤이 두려워졌으며, 평생 없던 뱃멀미까지 생겼다. 그러나 그토록 고생하며 본국으로 돌아간 아이작에게 펼쳐진 모든 일은 분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했다.

팀 리더가 팀원을 버리고 도망간 바람에 팀이 전멸했다는 오명과 더불어 군사 비리에 개입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해군 대위직에서 박탈되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그 모든 일이 그간 믿고 따랐던 새아버지, 콜 패트릭스가 세운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가 막힐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이었다.

* * *

아이작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눈앞에는 4년 전 한순간의 충동으로 사살 명령을 어기고 살려두었던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이를 갈며 뒤쫓던 오메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알지 못하는 사내는, 변함없이 열기가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청량감 도는 프러시안 블루의 동공을 아이작은 언제나 피하지 않고 마주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렵기만 했다. 짙은 시선에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과거를 마주하게 된 탓인지도 모른다.

“네가 누굴 죽인다고 해도 무혐의로 빼달라는 소리인가?”

방안을 맴돌던 적막을 깨뜨린 것은 필릭스였다. 아이작은 단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콜 패트릭스를 말하는 거라면, 물론. 빼내 주고말고.”

“알아보셨습니까?”

아이작은 콜의 이름을 언급하는 필릭스를 놀랍지도 않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벤자민의 존재까지 쉽게 알아낸 필릭스라면 자신의 과거 역시 언제든 파헤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자신이 함구한 채 덮어두기만 했던 모든 비밀 또한 금세 밝혀질지도 모른다.

만약 필릭스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얼굴을 하고 또 어떤 말을 할까. 저도 모르게 질문을 떠올린 아이작은 묵직해지는 가슴을 슬쩍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나 역시, 그의 반응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래. 네가 콜 패트릭스를 죽여야 한다면, 나로서도 굳이 말릴 이유는 없지. 나도 그 새끼한테 쌓인 게 좀 있거든.”

필릭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꾸벅인 후 한 걸음 움직였다.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필릭스를 지나치는 순간, 강한 손아귀에 팔이 붙들리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필릭스의 새파란 동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나 거래는 공정해야지.”

“…제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히 묻자 필릭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누굴 죽이든, 어떻게 죽이든 상관하지 않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야.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무혐의로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빠르게 말을 내뱉던 필릭스가 일순 입을 꾹 다물고 아이작을 직시했다. 아이작은 순식간에 빠져들게 하는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문득 갈증이 일었다. 새파란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 한가운데 있어도 물을 마실 수가 없어 목이 타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어진 아이작이 먼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바짝 다가온 필릭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안 돼. 네가 죽어서도 안 돼. 그것만 약속해. 어떤 경우라도 네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조건입니까?”

“그래.”

상당히 의외의 조건이었다. 짧은 숨을 내뱉은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쓸었다. 필릭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목구멍 위에서 삼켜졌다.

오래전, 이 손으로 이 남자를 죽일 뻔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자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샌디에고의 꽃가게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을 일이 없었을 테니 제 신분이 노출되는 일 또한 없었을지도 모른다. 벤자민과 어머니가 콜에게 끌려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토록 기이한 감정은 평생 맛보지 못했을 거다.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하면서도 심장이 작게 뛰는, 미묘하기 짝이 없는 이런 감정을 모르고 살았을 거다. 자신이 늘 머물러 있던 삭막하고 건조한 사막이 세상의 전부라고만 생각했을 테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사막 안에서 꽃이 피었다. 벤자민이라는 꽃은 자신의 삭막한 세상을 온통 어여쁘고 화사하게 바꾸었다. 그리고 필릭스는….

“제가 당신께 저를 빼달라고 부탁하는 건, 제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에게 이런 감정이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더 괴로운 것 같았다. 아이작은 가볍게 그의 뺨을 쓸던 손을 내렸다.

“벤자민을 홀로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당신 역시.

뒷말을 삼키며 물러서자 필릭스는 쓰게 웃는다.

“그래, 뭐든 좋아. 네가 다치고 죽는 일만 없다면.”

그의 나직하게 울리는 음성을 들으며 아이작은 이번에야말로 단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감상에 젖어 있기엔 일렀다. 한시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이를 꾹 씹으며 애써 아기자기한 미키마우스를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지금 떠날 건가?”

아직도 위태롭게 걷는 아이작을 붙잡는 대신 필릭스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열린 문밖으로 한 걸음 내딛던 아이작이 다시 한번 흘끔 눈을 돌렸다.

“그럴 생각입니다.”

“전용기 내줄 테니까, 타고 가.”

퉁명스럽게 내뱉은 그의 제안은 아이작으로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 *

아이작이 방을 빠져나가자마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가 울렸다. 필릭스는 아직도 아이작의 잔상이 남아있는 허공에 시선을 둔 그대로 휴대폰을 들었다.

“말해.”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휴대폰 너머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묵묵히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필릭스는 문득 살벌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지금 갈 테니 기다려.”

그것으로 끝이었다. 통화는 간단했다. 필릭스는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새 아이작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복도에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를 찾아볼 생각도 않은 채 필릭스는 서슴없이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샌디에고 다운타운 근처의 낡고 허름한 창고였다. 잭은 총상으로 병원에 실려 갔고, 토니에겐 아이작을 공항으로 바래다주라고 지시를 내린 탓에 운전사와 경호원은 다른 녀석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름과 얼굴이 충분히 낯익은 놈들은 차가 멈추자 깍듯하게 필릭스의 차 문을 열어주고 낡은 창고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시간이긴 했지만, 창문이 없는 창고 안은 벌써 밤인 것처럼 어둡기 그지없었다. 낡아빠진 전구 몇 개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공간이었다. 게다가 퀴퀴한 곰팡내와 습기에 더해 피비린내까지 감도는 공기는 말 그대로 역하기 짝이 없었다.

그 안으로 저벅저벅 음산한 구두 소리를 울리며 무심히 들어선 필릭스는 주머니 안쪽에서 리볼버를 꺼내 실린더를 빙글 돌렸다. 가끔 자동권총보다는 이런 클래식한 리볼버가 손에 더 감길 때가 있었는데,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넓은 창고의 안쪽에는 체격 좋은 사내놈들이 주루룩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절은 놈 하나가 의자에 묶인 채 앉아있었다. 그는 이미 얼굴이 온통 뭉개져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눈은 아직 맛이 가지 않았는지 핑그르르 실린더를 돌리며 걸어오는 필릭스를 보자마자 기겁해서 덜덜 떨기 시작했다.

“보스…, 보스…! 살려주세요! 저는 협박을 당했을 뿐입니다!”

피가 섞인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사내는 어눌한 발음으로 외쳤다. 이가 부러진 탓에 바람이 새서 더더욱 어눌한 발음이었다.

사내가 앉아있는 곳에서 한두 걸음 떨어진 지점에 우뚝 선 필릭스는 짧게 혀를 찼다. 지금은 엉망이 되긴 했지만, 사내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제법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있던 작자였고, 이곳에서 돌아가는 사정 또한 웬만큼 아는 놈이었다.

“이것 봐. 죽고 싶지 않았으면 애초에 죽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사내를 내려다보는 푸른 동공은 섬뜩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왜 굳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해? 네 변명을 들어주거나 널 살려주려고? 꿈도 크네.”

“보, 보스…….”

“난 단지 아이작의 정보를 팔아먹었다는 놈의 낯짝이나 마지막으로 구경해보려고 온 거거든.”

필릭스의 냉랭한 음성에 사내는 사시나무 떨듯 사지를 떨었다. 이제는 ‘보스’라고 부를 기운조차 잃었는지 다 찢어진 입술을 뻐끔거리기만 한다. 그런 사내를 노려보는 필릭스의 미간 위로 일순 골이 패었다.

“아, 생각하니 새삼 열 받네. 네가 감히 아이작의 정보를 팔아먹어?”

“그건 정말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핑그르, 빠르게 실린더를 돌린 필릭스가 철컥, 리볼버를 장전했다. 그래도 죽고 싶진 않은 모양인지 여기저기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낯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구역질이 치미는 꼴이었다.

“이 리볼버 안에 총알이 몇 개나 들어 있을까?”

불현듯 서늘한 얼굴로 농담이라도 하듯 중얼거린 필릭스는 벌벌 떠는 놈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두려움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지는 사내는 계속해서 턱을 움직였다. 그래 봤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답은-,”

필릭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그의 손에 쥐고 있던 리볼버의 끝에서 탕, 탕-, 두 발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머리에 총구멍이 뚫린 사내가 축 늘어졌다. 그의 발밑으론 검붉은 핏물이 서서히 고여 가고 있었다. 무심히 그 꼴을 시큰둥하게 내려보던 필릭스는 재킷의 안주머니에 리볼버를 꽂아 넣었다.

“‘다 차 있다’였지. 사람을 죽이는데 총알을 하나라도 비워둘 이유가 없잖아?”

쯧, 혀를 찬 그는 이미 죽은 이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처음부터 콜이 어떻게 그토록 빠른 시일 안에 벤자민에 대해 알아차렸는지 의문이 일었다. 벤자민에 관한 모든 것들은 몇 겹이나 방어해두고 있었기에 웬만해서는 알아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쪽의 정보망이 좋다고는 해도 노아를 능가하는 실력자는 없다.

필릭스는 기절한 아이작을 데리고 오는 차 안에서 정보를 흘린 놈을 내부에서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밖에서 정보를 뚫은 것이 아니라면, 내부에서 흘러나갔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니의 수하들은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놈을 잡아들였고, 자백까지 받아냈다. 다행히 아이작이 떠나기 직전이었다.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저놈이 콜에게 아이작의 정보만 팔아먹지 않았어도 벤자민이 쉽게 노출되진 않았을 거다. 벤자민과 제시카 파커는 무사히 사저로 옮겨왔을 거고, 제 수하가 여럿 죽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물론 아이를 뺏긴 아이작이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이제 와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었지만, 하필 제 밑에 있던 놈 하나 때문에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분이 치솟아 참을 수가 없어졌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놈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칠 때까지 천천히, 최대한 괴롭게 숨통을 끊었을 텐데. 당장 가봐야 하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치워.”

주위에 서 있던 수하들에게 간단히 명령한 그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아이작이 콜을 죽이러 가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한가로이 머물 시간이 없지 않은가. 방금 전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빠르게 창고를 가로지를 무렵이었다.

뚜르르- 어디선가 시끄럽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필릭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장소에서, 그것도 필릭스가 직접 찾아온 이 순간에 배짱 좋게 휴대폰을 켜둘 놈들은 없었다. 적어도 제정신 박힌 놈들은 그랬다.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지만, 필릭스는 우뚝 선 그대로 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죽어있는 사내의 가슴에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쩐지 좋지 못한 예감에 필릭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져와.”

묵직한 명령에 시신을 처리하려고 움직이던 수하들이 우뚝 손을 멈추었고, 그중 한 놈이 잽싸게 아직도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필릭스에게 건네주었다. unknown이라고 찍힌 액정을 내려보던 필릭스는 말없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살짝 짜증 난 투로 ‘왜 이렇게 늦게 받아?’라고 묻는 사내의 목소리가 흘렀다. 예상했던 것처럼, 제법 익숙한 음성이었다.

“아쉽게도 네가 전화를 건 상대는 방금 뒈졌거든.”

묵묵히 상대가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있던 필릭스는 섬뜩한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알렸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는 말을 하려다 말고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필릭스 혹시 자네인가?>

그 역시 단번에 필릭스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필릭스는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우둑,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그제야 조금 시원해진 표정으로 필릭스는 눈을 접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콜 패트릭스 중령. 아니지, 이젠 유아 납치범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려나?”

* * *

아이작이 공항으로 향하던 중간에 들린 곳은 얼마 전에 총격을 받은 자신의 꽃가게였다. 이미 경찰이 정리한 탓에 주변은 깨끗했다. 깨진 유리 대신 겉에는 흰 천이 둘려있고, 그 밖으로 철문이 내려져 있어 내부가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뿐, 나머지는 전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지금쯤이면 이미 사건 현장을 치우고 증거물품은 모조리 걷어갔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의외다.

“조사는 며칠만 미뤄달라고 SDPD에게 요청했습니다.”

의아해하는 아이작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토니가 먼저 설명했다.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하지 않을 게 또 뭐 있겠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토니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그렇군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사이 토니는 자연스럽게 아이작 대신 철문을 열기 시작했다. 언제 가게의 열쇠까지 손에 넣은 건지 모르겠다.

가게 주변을 돌아보던 아이작이 철문을 열고 있는 토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열쇠는 일단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토니는 간단히 열쇠를 돌려 철문을 올렸다. 드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창문 대신 천으로 가려놓은 가게 안은 어두컴컴했다. 이미 해가 저물어버린 시간이었기에 더더욱 어둡게만 보이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화분과 몇몇 개의 가구, 벽 등이 온통 깨지고 박살 난 탓에 당장 귀신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고 음침한 분위기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 안에서 꽃과 나무를 돌보며 소소한 일상을 보냈던 것이 전부 아스라한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곧, 괜한 감상이라고 탓하며 아이작은 어지러운 광경에서 시선을 거두고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자신의 물건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개인적인 물건은 많지 않았지만, 미처 다 들고나오지 못했던 권총 두 자루, 단검, 탄환, 그 밖의 물건들이 몇 남아있었다. 그것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필릭스가 경찰의 수사를 막아둔 것이 다행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필요한 것들을 담는 아이작의 뒤에서 토니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무기라면 저희도 충분히 있습니다만.”

“압니다.”

아무렴 무기상을 하는 필릭스인데 무기가 모자랄까. 하지만 무기는 아무래도 손에 익은 물건들이 더 좋았다. 과연 이것들을 얼마나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는 해도. 더불어 이곳을 굳이 들린 다른 이유도 있었다. 대충 가방을 꾸린 아이작은 총알받이가 된 탓에 제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카운터 위에 가방을 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꼭 챙겨가려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억제제였다. 토니가 곁을 지키고 있는 이상 섣불리 억제제를 살 수도 없으니 남아있는 것이라도 손에 넣어야 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그로서는 언제 어디서건 닥칠 수 있는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고,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약통을 꺼낸 아이작은 두세 알을 그 자리에서 뜯어 목구멍 아래로 넘겼다. 그리곤 화장실 거울을 흘끔 들여다보았다.

뿌옇게 흐려진 거울 위에는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비쳤다. 약이 목구멍 아래로 씁쓸하게 넘어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그는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예전부터 표정이 많지는 않았지만, 유난히 딱딱하고 냉랭한 인상이다. 검은 두 눈은 무기질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며칠간 쉬지도 못하며 고된 시간을 보낸 데다가, 끝내 사랑하는 아이와 어머니가 끌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멀쩡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거울 너머로 보이는 제 모습이 심히 낯설어 아이작은 멀거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잠시 후, 짧은 한숨을 흘린 아이작은 남은 약들은 모조리 화장실 변기 아래로 던져버렸다. 물 내려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고, 알약은 빠르게 떠내려갔다. 그런 다음에야 아이작은 옷을 툭 털어버리고 화장실을 나섰다. 이로써 콜을 만나러 갈 준비는 얼추 끝난 것 같았다.

처참하게 망가진 가게로 다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토니였다. 그는 카운터 아래의 서랍을 연 그대로 장승처럼 굳어있었는데,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낯은 몹시 심란하다 못해 얼이 빠진 것만 같았다.

아이작은 부러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곁으로 다가섰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토니는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크게 홉뜬 눈이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빠뜨림 없이 물건을 챙겨갈 수 있는 시간은 지금밖에 없어서 둘러보고 있었습니다만…….”

말을 얼버무리는 토니에게 아이작은 그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물건을 대수롭지 않은 투로 꺼내 내밀었다.

“언젠가는 돌려드리려 했는데 시간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무감정하기 짝이 없는 음성으로 먼저 말문을 연 아이작의 손에는 고급 시계와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언젠가 강도로 위장해 토니에게서 뺏어온 시계와 반지였다. 설마 하던 토니는 제 시계가 확실한 것을 깨닫곤 ‘히익!’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터뜨렸다.

“그, 그럼 그때 그 강도가-!”

하얗게 질려버린 토니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아이작은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들고 무덤덤하게 가게를 가로지를 따름이었다. 한시가 급하다고 알려주는 움직임에 멍하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토니가 후다닥 뛰었다.

“싱클레어 씨! 얘기는 마저 합시다!”

벌써 가게를 빠져나가 운전사가 대기하고 있던 세단으로 걸어가는 아이작을 놓칠세라 토니는 허둥지둥 걸음을 빨리했다. 그 와중에도 잊지도 않고 불을 끄고 꼼꼼하게 문을 잠그기까지 한다. 그래 봤자 아이작은 모르는 척 묵묵히 세단에 오를 뿐이었다.

“공항으로.”

운전사에게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토니가 벌컥 문을 열고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은 여전히 냉담한 시선으로 제 옆자리에 타는 그를 응시했다. 파랗게 질려있던 토니는 이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한 손에는 시계를 꼭 움켜쥔 채 흔들리는 동공으로 아이작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표정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때 그 강도가 싱클레어 씨란 말입니까?”

“…네.”

“설마, 유전자검사결과를 훔치려고 강도로 위장한 겁니까?”

“네.”

돌려 말할 것도 없이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토니에게 아이작은 순순히 대꾸했다. 토니는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퍽, 내려치더니 짧게 욕설을 흘렸다.

“어째서-!”

“그건 제가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째서 제 허락도 없이 제 아이의 유전자검사를 진행했습니까?”

따지려던 토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이작은 차갑게 물었다.

“몰래 벤자민의 머리칼까지 훔쳐서 검사한 이유가 대체 뭡니까?”

아이작의 공격적인 질문에 토니는 곤란한 듯 끄응, 목울대를 울렸다. 더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아이작까지 그가 강도로 위장했음을 실토한 마당이니 자신 또한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싱클레어 씨…. 보스야 원체 눈썰미가 없어서 못 알아봤다고는 하지만, 사실 벤자민은 보스의 아들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 아닙니까? 누구든 보스와 벤자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부자지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토니는 한숨과 함께 실토했다. 그래 봤자 아이작은 눈 한번 깜박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요? 어떤 결과를 기대한 겁니까? 벤자민이 필릭스를 닮았으니 그의 아이가 아닐까 의심했습니까? 만약 그의 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면,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필릭스가 숨겨진 아들을 찾아다니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그게…….”

“왜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제 아들에게 허락도 없이 다른 아버지를 찾아주려고 기를 쓰는 겁니까? 벤자민은 제 아들입니다.”

불편하게 묻는 토니의 질문에 아이작은 냉기가 풀풀 흐르는 음성으로 받아쳤다. 순간 토니는 말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노기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숨이 콱 막혔고, 식은땀은 뻘뻘 흘렀다.

칼날 같은 검은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기는커녕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세상에,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온순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렇게나 선뜩한 기를 뿜어낼 수가 있다니. 해군 대위에 데브그루 특전사 출신이라고 하더니 보통이 아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죄송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 내뱉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꺾어버릴 기세에 토니는 찍소리 못한 채 얌전히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벤자민의 아버지인 아이작 몰래 유전자 검사를 하려고 했던 건 잘못이었으니 말이다.

“당신 눈에는 벤자민이 필릭스를 닮은 것처럼 보여도 엄연히 벤자민의 아버지는 저고, 필릭스는 관계가 없습니다. 토니가 관여할 문제도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지나가는 차들 위로 무심한 시선을 둔 아이작은 못 박듯이 말했다. 묵직하게 어깨를 눌러오는 그의 냉랭한 기운에 토니는 ‘잘 알겠습니다’라고 기운 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필릭스에게는 이번 일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토니도 절대 언급하지 마세요.”

“…물론입니다.”

검사결과는 어떻게 나왔냐고, 정말 벤자민이 필릭스의 아들이 아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더 큰 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호기심과 궁금증은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먹먹한 한숨은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온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모르겠다.

아이작은 강도로 위장까지 해가며 유전자검사결과를 갈취해갔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려고 하지 않으려 철벽같이 방어하는 그의 태도가 점점 더 수상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뭔가가 있다. 필릭스를 똑 닮은 벤자민, 그러나 그의 친부는 자신이라고 못 박는 아이작.

심증은 있지만 정확한 물증은 뺏긴 상황이 답답했다. 하지만 열쇠를 꽉 쥐고 있는 아이작은 결코 입 밖으로 진실을 꺼내놓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이젠 정말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토니는 흘끔 아이작의 눈치를 살폈다.

목석보다도 더 목석같은 아이작은 감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처럼 창밖만 응시할 뿐이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차 안에서 토니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초조하게 입술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 * *

<유아 납치범이라니, 비약이 심하군.>

휴대폰 너머로 사내의 못마땅한 음성이 전해졌다.

“당신이 한 짓거리가 총으로 무장한 용병을 시켜 여성과 유아를 납치한 건데 뭐가 심하다는 거지?”

필릭스는 코웃음을 치며 창고를 걸어 나갔다. 뒤처리는 수하들이 알아서 할 터였다. 이런 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는 놈들이니 딱히 걱정할 것은 없었다. 걱정되는 일은 한가지뿐이다.

<못 본 사이에 손주가 생겼다니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지 않나. 아, 아직 몰랐던 건 아니겠지? 케이는 내 아들이거든. 법적으로.>

잠시 다른 생각을 떠올린 사이, 콜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필릭스는 걸음을 멈춘 채 혀를 찼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는 소리는 이럴 때 하는 것이리라.

“개소리도 가지가지로 하네. 법적인 아버지라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그의 아이를 납치해서 협박까지 하나? 길거리를 지나가는 개들도 당신 같은 짓은 안 해.”

<필릭스, 여전히 건방진 건 잘 알겠지만,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당신이 여전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지껄이는데 내가 어떻게 말조심할 수가 있겠어?”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필릭스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진 후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나쁘지 않았지만, 대화하고 있는 상대는 기분 좋은 저녁 바람을 만끽할 수도 없게 뭉개버린 지 오래다. 통화가 더 길어지다간 불쾌한 감정이 바닥을 칠지도 모른다.

“길게 할 얘기는 없어. 당신에게 정보를 빼준 새끼의 전화가 울리기에 받았을 뿐이니까. 아무래도 당신인 것 같아서 알려주고 싶었거든. 그 새끼는 이미 뒈졌다고 말이지.”

<나인 것 같았다?>

“내가 감이 좀 좋아. 아아, 기왕 당신의 전화를 받았으니 하고 싶었던 말도 해야겠네.”

<필릭스 펠리체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 뭔지 궁금해지는군.>

태연하게 지껄이는 콜의 대꾸에 필릭스는 차의 뒷좌석에 느긋하게 머리를 기대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러나 얄팍한 웃음을 머금는 것과는 달리 푸른 동공은 서릿발처럼 차갑기만 했다.

“콜, 헛수작 부리지 마. 미세스 파커나 벤자민을 건드렸다간,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게 만들어 줄 테니까. 내가 지금 얌전히 꼬리 내리고 있는 척하는 건 너 따위를 무서워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지.”

낮게 울리는 음성은 등허리를 서늘하게 만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그에게서는 숨 막히는 위압감과 더불어 짙은 알파 페로몬이 흘러나와 자동차 앞에 앉은 수하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쥔 사내의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떨린다.

그런 필릭스의 살기 어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콜은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도 하는지 한참이나 침묵하던 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연 것은, 필릭스가 기다리기 지루해하며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였다.

<네놈은 대체 케이와 무슨 관계인 거지?>

의아함이 가득한 질문에 필릭스는 조소했다.

“내 수하까지 매수할 정도로 열심히 뒤를 캐고 다녔다면서 아직 그것도 알아내지 못한 건가?”

<묻는 말에 답이나 해.>

“궁금하다면 까짓거 말해주지 못할까. 당신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서 환장할 정도로 아끼는 양아들을 내가 가졌거든.”

필릭스는 당당하게 속삭이며 눈을 휘고 웃었다. 어찌나 해사한 웃음인지 이 자리에 아이작이 있었다면 또다시 알게 모르게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불편한 신음이 흘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필릭스 네가 내 아들에게 눈독 들이고 있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쉰도 안 된 인간이 늙은이 흉내는 잘도 하네.”

우습지도 않은 양아버지 흉내에 필릭스가 비아냥거렸을 때였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너 같은 놈을 내 아들의 파트너로 허락할 생각이 없는데.>

필릭스 못지않게 냉랭한 어조로 콜이 이를 씹는다. 필릭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 그따위로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을 할 여유도 있었어?”

<농담으로 들렸다니 아쉽군. 그렇다면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지. 케이에게서 손 떼. 내 가족사에 끼어들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망가뜨려 줄 테니까.>

“가족사? 웃기고 있네. 그럼 나도 직설적으로 말해줄까? 콜, 난 법적으로 내 아버지가 될 인간의 사지를 찢어발겨 개에게 던져줄 준비가 되어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피식, 소리 내어 웃은 필릭스는 다시금 느긋하게 시계를 돌아봤다. 콜은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약간 거칠어진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겨우니까 말꼬리는 그만 잡아. 당신은 한 가지만 기억하면 돼. 벤자민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인간 이하의 삶을 맛보게 될 거라는 사실.”

<…….>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 거거든”

한 번이면 족하다. 아이작이 벤자민을 뺏기고 오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단 한 번으로 충분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고, 또다시 그런 일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신기한 일이군. 어째서 케이보다 네가 더 화를 내는 거지? 막말로 네 아이도 아닌데.>

콜은 말 그대로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필릭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트래픽이 가신 프리웨이 위로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 자신과 아이작의 심경과는 다르게 여유롭고 한산한 풍경이었다.

“이것 봐. 내가 널 항상 쓰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뭐?>

“네 말을 뒤집으면, 내 아이가 아니면 세 살짜리 꼬마를 함부로 납치해간 네놈의 행위를 눈감아도 된다고 말하는 거냐? 그래서 넌 아무렇지 않게 무장한 용병을 시켜서 아이를 훔쳐갈 수 있었나 보지?”

<하, 어디서-!>

“네가 윤리와 도덕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쓰레기 짓을 한 놈에게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고, 너 같은 새끼를 개새끼라고 부르는 거다.”

웬만해서는 큰 소리를 내질 않고 거만을 떠는 콜 페트릭스가 이성을 잃었는지 크게 욕설을 내뱉었다. 슬쩍 휴대폰을 귀에서 뗀 필릭스는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모르는 게 또 하나 있거든.”

씨근덕거리며 욕하는 콜을 못 들은 척하며 필릭스는 창문을 내렸다. 창문이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프리웨이의 거친 바람이 밀어닥쳐 반짝이는 금발을 엉클어뜨린다. 거센 바람 소리에 콜의 욕설이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네가 벤자민을 건드리면 안 되는 이유.”

자신의 목소리 또한 콜이 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릭스는 어디까지나 차분하고 단호하게, 콜이 기함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네가 감히 멋대로 잡아간 벤자민, 내 아들이 맞아.”

<무슨 헛소리를-…!>

“당신, 제대로 실수했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필릭스는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달리는 프리웨이 너머로 집어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휴대폰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어둠 속 어딘가로 떨어져 박살 날 것은 분명했다.

필릭스는 후련한 표정으로 창문을 올렸다. 그제야 강하게 불어닥치던 바람이 그치고 시끄러웠던 소음 또한 사라진다. 엉망으로 흩날렸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손으로 쓸어올린 필릭스는 쯧, 혀를 찼다. 마지막으로 콜이 외치던 소리가 귓가로 스쳤다 사라진 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악이 받친 음성이었다. 설핏 당혹감이 묻어있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말이 안 되긴, 앞으로 아이작을 데리고 살면 벤자민은 자연히 내 아들이 될 텐데.”

흥, 콧방귀를 뀐 필릭스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언제 이리 지나갔는지 주위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도착해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늦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약간 초조해지는 감정을 억누르며 필릭스는 무겁게 가라앉는 눈을 감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주는 수하의 음성에 필릭스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이미 도착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건물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낯익은 얼굴을 바라보며 필릭스는 흠, 짧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세단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앞으로 멈춰 섰다.

달칵,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장승처럼 서 있던 사내의 얼굴이 어리둥절하게 변한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초췌해져 버린 모습을 보니 속이 쓰렸다. 그러나 곧, 속내를 알기 어려운 새까만 눈동자가 넋을 잃은 것처럼 제게만 오롯이 집중하자 저도 어쩌지 못할 희열이 번져오고 만다.

“당신이 왜…….”

아이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에게 천연하게 다가선 필릭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대로 싱긋 웃었다.

“아이작, 난 네게 전용기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지, 혼자 보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거든.”

“설마, 같이 가려는 겁니까?”

“물론이지. 널 혼자 보낼 줄 알았어? 꿈도 야무지네.”

아이작은 복잡한 표정으로 필릭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고는 싶은데 내뱉지 못해 입술만 달싹이는 모양새조차 짜증 나게 매혹적이다. 더 이상 두고 봤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필릭스는 잽싸게 그의 팔을 잡아끌며 공항으로 들어섰다.

“시간 없다며. 서두르지 않고 뭐해.”

“하지만-!”

“내가 말했잖아? 넌 앞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도 나와 함께하게 될 거라고.”

언젠가 장담했던 말을 상기시키는 필릭스는 단호했다. 아이작은 반박하려던 말을 삼킨 채 그가 끌고 가는 대로 묵묵히 따라 걷는 수밖에 없었다.

* * *

비행기 내부는 깔끔하면서도 호화로웠다. 제법 넓은 실내는 마치 사저의 집무실을 축소해 놓은 듯한 인테리어였는데, 책상 위에는 온갖 종류의 컴퓨터, 태블릿, 기타 알 수 없는 장비와 서류 등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소파가 따로 놓여 있었다.

한쪽 벽에는 미니바가,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침실이 따로 나오기도 한다. 없는 것 없이 갖춰진 전용기는, 말 그대로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는 작은 호텔이었다.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작은 곧 마주 앉은 필릭스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는 노트북을 탁자에 펼쳐둔 채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간에 골이 패도록 모니터를 노려보는 표정과 간간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손가락이 여느 때와 달리 진지하다.

기실 그의 저택에서 나올 때도 순순히 보내주는 그가 의외라는 생각은 들었었다. 토니가 따라붙기는 했었지만,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도 아니고 위험하니 가지 말고 다른 방법을 마련해보자고 설득하지도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하라며 선뜻 전용기까지 내어주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석연치 않다 싶었는데, 공항으로 직접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말 그대로 희대의 사기꾼이 따로 없는 작태에 처음 그를 봤을 땐 속이 뒤집히기도 했지만, 이제 와 따지는 것도 무의미했다. 더불어 자신으로선 필릭스를 막을 수 있는 힘도 없었다.

쉽게 포기해버린 아이작은 푹신한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쿠션이 어찌나 편한지 몸이 푹 빨려 들어가는 착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다섯 시간은 가야 하니까 한숨 자둬.”

피곤했던 몸에서 저도 모르게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예리하게 눈치챈 필릭스는 노트북의 모니터에서 눈을 들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외려 정신을 차린 아이작은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였다.

목적지는 동부의 노스 캐롤리나였다. 콜이 몸담고 있는 JSOC가 노스 캐롤리나 포트 브래그에 있었고, 콜의 사저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탓이었다.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샌디에고에서 대서양 연안의 노스 캐롤리나까지는 그의 말대로 다섯 시간 정도 논스톱으로 날아가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제법 긴 시간이다. 그 시간에 한숨 잠이라도 자두면 컨디션 조절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쉽지가 않았다. 지나치게 피곤한 탓일까, 눈은 움푹 꺼져드는 느낌인데도 불구하고 잠이 들 것 같진 않다. 벤자민과 어머니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고 초조해진 탓이었다.

“이거라도 마시든가.”

뻑뻑한 눈으로 새까만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작의 앞으로 필릭스는 어느새 얼음이 띄워진 스카치를 내밀었다. 알아차리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물끄러미 얼음과 술이 담긴 잔을 바라보다가 잔을 들고 차가운 스카치를 한 모금 넘겼다. 알싸하면서도 냉랭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린다. 지금 자신의 상태를 봐서는 한 모금 정도의 알코올이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뭐라도 좀 먹는 게 낫겠군. 그러고 보니 식사를 할 시간도 없었잖아.”

움켜쥐면 바삭 사그라질 메마른 풀 같은 아이작을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살피던 필릭스는 토니에게 곧바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제야 아이작은 지금껏 딱히 먹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샌디에고로 되돌아오기 전,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경계에 있던 작은 마을에서 간단히 먹긴 했지만, 그전에도 이삼일 감금당해있던 탓에 계속 굶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지금껏 허기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배고픔도, 고단함이나 졸음도 딱히 느껴지질 않았다. 몸이 무거운 것은 알겠지만 그 외에는 모든 감각이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대로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파리해진 얼굴로 오도카니 앉아있던 아이작은 흘끔 눈을 돌려 작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유리 너머로는 새까만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멀리 보이는 노란 등불들이 빼곡하게 땅 위를 뒤덮고 있는 광경이 가득했지만, 곧 있으면 저런 불빛마저도 없는 광활한 대지 위로 날아갈 것이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하늘이 펼쳐진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이 새까맣기만 한 망망대해와 비슷했다.

하긴, 바다는 하늘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던가. 바다는 딱히 색이 없지만, 마주 보는 하늘을 투영하기 때문에 색을 달리한다고 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빛이 사라지고 달빛마저 없는 새까만 밤하늘,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한밤의 바다.

떠올리는 순간 일순 오싹한 감각이 일어나 아이작은 급히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아버렸다. 아직까지 몸이 기억하고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칠흑 같은 어둠 또한 두려웠다.

“아이작, 무슨 일이야.”

마주 앉아있던 필릭스가 식은땀을 훑어내는 아이작을 뚫어지게 살피며 물었다. 그제야 오한에서 벗어난 아이작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짙푸른 바다색의 동공이 걱정을 내비치며 자신을 담고 있었다. 여전히 지독히도 아름다워 금세 빠져들 것 같은 눈이었다.

“…언젠가, 혼자 바다를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이야기를 제가 먼저 꺼낸 것은.

“혼자?”

“모터가 달려있긴 했지만, 고무보트를 타고 달빛도 흐린 바다를 가로질렀었습니다.”

잠시 잠깐 포비아가 일어났던 것조차 잊어버린 듯 무덤덤한 투로 꺼내는 말에 필릭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죽으려고 작정했어?’라고 혀를 차며 되묻기도 한다.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로 내몰았던 당사자가 당신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그때 이후로 빛이 없는 어둠이 두렵더군요.”

“…….”

“그렇다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포비아가 심한 건 아니지만, 가끔씩 떠오를 때마다 몸서리가 쳐지긴 합니다.”

닫아버린 창문으로 슬쩍 시선을 둔 아이작은 초조한 듯 깍지 낀 손가락을 움직였다. 창문 너머로 펼쳐져 있을 어둠을 떠올리는 아이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금 꼭 그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창문 밖이 어두워서? 그래서 닫아버린 건가? 원한다면 조명을 더 밝게 할 수도 있어.”

필릭스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제안하는 말은 제법 다정했다.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밖이 어두운 것보다, 벤자민이 곁에 없어서 생긴 포비아일 테니까요.”

자신의 상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불안감, 두려움, 초조와 긴장은 비단 어둠에 대한 포비아가 떠올라서만은 아니었다. 애써 담담한 척하려고 해도 이 상황 자체에서 오는 극심한 긴장감이 섞여든 탓이다.

“아이가 곁에 있을 때는 아무리 어두워도 두려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벤자민이 품에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거든요.”

“…….”

“신기한 일이죠. 어쩌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저 벤자민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서 두려움마저 잊어버리게 한 건지도 모릅니다.”

품 안에 쏙 들어와 꼬물거리는 아이, 향긋한 베이비파우더 냄새를 흘리는 금사 같은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있으면 어지러운 상황마저도 다 잊어버린 채 마냥 실없는 웃음을 흘리곤 했다.

아이가 환하게 웃거나 어눌하게 한마디씩 뱉어낼 때, 혹은 떼를 쓰고 우는 그 순간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웠고, 저도 모르게 매 순간 자신보다는 아이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벤자민이 없는 삶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고 몹시 고민하며 낳아야 할지 지워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던 과거의 자신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지 오래다. 벤자민을 낳고 품에 안는 순간부터 생각과 감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갔다.

아이를 낳은 것에 대한 후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외려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직도 자신은 새까맣게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헤매고 있었을 때와 별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벤자민은 자신의 어두컴컴한 삶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으니까.

어둡고 삭막했던 삶에 유일한 희망이고 빛이었던 아이를 뺏기고 나니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다시금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 든 것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벤자민을 되찾지 못하면 이런 삭막한 어둠에 다시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그 안에 갇혀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벤자민이 제 곁에서 사라진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일어나는 바람에 아이작인 손을 들어 팔을 문질러야 했다.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아이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새삼스러운 다짐을 하며 주먹을 꽉 움켜쥔 아이작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빤히 직시하고 있던 필릭스와 단번에 시선이 얽혔다. 깊은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프러시안 블루의 동공은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해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어쩐지 엄청난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잖아.”

필릭스는 뜻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금세 무언가를 떠올린 듯 흠, 소리를 작게 흘린다.

“아무래도 이상하네. 4년 전, 그곳에 있었다면서…. 그 후엔 콜에게 배신당하고 해군에서 퇴출당한 채 쫓겨 다녔으면서 대체 언제 어떻게 애를 만든 거지? 쫓기기 전에 만나던 여자라도 있었던 건가? 어떤 여자야?”

얽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필릭스가 미간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결혼이나 약혼을 했던 기록도 없이 워커홀릭처럼 계속 파병만 나가 있었던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아이작은 짧게 숨을 토했다. 아무래도 필릭스는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캐낸 모양이었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알아내셨습니까?”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필릭스를 불안하게 쳐다보던 아이작은 대답 대신 날카롭게 되물었다. 필릭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알만큼은 알았다고 해야 하나? 네 다른 신분이 케이시드 패트릭스 해군 대위고, 데브그루 소속인 데다가 콜의 양자라는 건 알아.”

알 만큼 안 게 아니라 속속들이 파헤친 게 분명했다. 아이작은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며 그를 살폈다.

“그것이 알고 계신 전부입니까?”

“대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는 모습엔 거짓이 없었다. 적어도 뭔가를 숨기며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필릭스의 성격 자체가 그토록 음흉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작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필릭스가 자신의 가장 깊이 숨겨둔 진실까지 밝혀내진 못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던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알게 모르게 쿵쿵 소리를 울리며 뛰는 심장을 억지로 가라앉힌 아이작은 긴장감에 메말라 있던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그럼 저에게도 알려주시죠.”

“뭘?”

“4년 전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아이작은 그가 불쑥 꺼내 당황하게 만들었던 벤자민에 관한 화제를 은근슬쩍 돌렸다.

“뭐든.”

다행히 필릭스는 알아챈 기색 없이 오만하게 대답했다. 과연 무엇을 물어볼지 흥미로워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지금껏 궁금해 왔던 일들을 떠올렸다.

오래전부터 콜과 필릭스는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관계였다. 정상적이라면 세계적인 무기상인 필릭스와, 그의 무기를 쓰는 해군 중령인 콜이 사이가 나쁠 이유는 없었지만 둘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도 대략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몰랐다.

“콜이 당신의 회사에서 납품되는 무기를 빼돌렸지요. 빼돌린 무기는 불법으로 제삼국에 팔아치웠습니다. 그 누구도 몰랐던 일이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죠. 저 또한 4년 전 그에게서 내쳐지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무기 밀매가 해군 장교와 연관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돌아다니는 무기들이 당신 회사 제품이라는 것만 보고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테러리스트에게 조력하는 행위라면서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건의 전말을 빠르게 읊자 필릭스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비스듬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콜은 무기 밀매뿐 아니라 여러 곳의 군수업체에서 뇌물을 받기도 했지만, 다방면에 걸쳐진 콜의 비리에 가담한 장교들 또한 하나둘이 아니다 보니 무기 밀매에 관한 일은 당신에게만 불리하게 돌아갔을 겁니다.”

“…….”

“당신의 무기고를 FBI와 CIA에서 터는 것처럼 꾸미고 뒤로는 특수부대를 보내기도 했고요.”

“생각보다 더 잘 알고 있네?”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필릭스가 마시라고 내어주었던 스카치 잔의 얼음은 많이도 녹아내려 있었다. 아이작은 목이 타는 감각을 참을 수가 없어 물처럼 연해진 스카치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나 목이 칼칼하게 잠기는 것은 여전했다.

“그래서, 네가 알고 싶은 게 뭐지?”

물방울이 맺힌 스카치 잔을 내려놓자 필릭스가 물었다. 아이작은 다시 그를 빤히 바라봤다.

“당신이 정말 콜과 손을 잡고 무기를 밀매한 겁니까? 그러다가 관계가 틀어져서 죽을 뻔한 건가요?”

어쨌든 확실한 건 콜이 필릭스의 무기를 밀매했다는 사실이었고, 필릭스 쪽에서도 콜에게 동조하여 무기를 납품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필릭스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며 밀매에 가담한 것인지,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우선, 내가 제삼국에 불법으로 무기를 팔아치운 건 맞아. 세금이 지나치게 과했거든. 정말이지 세금 내다가 거덜 날 뻔했으니 말 다 했지.”

흠, 소리를 흘리며 턱을 매만지던 필릭스가 퉁명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작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설마 했는데 불법유통을 한 것이 사실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필릭스는 어디까지나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 판 경우고.”

“…그러면 콜은-.”

아이작이 설핏 미간을 접었을 때였다. 필릭스는 손을 들어 아이작의 말을 막았다.

“아이작, 나는 기본적으로 사업가야. 장사꾼이라고 하지. 돈 버는 걸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살았던 사람이라고. 그런데 내가 내 무기를 누군가에게 싸게 팔아치워서 그놈이 이득 보는 꼴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아?”

아니요. 속으로 대답하기가 무섭게 필릭스 역시 ‘천만에’라고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제삼국에 팔면 팔았지 누군가가 내 물건으로 이득 보게 하는 짜증 나는 짓은 안 해.”

물론 그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런 일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는 건 분명했다. 정확하게 필릭스다운 대답을 듣고 있던 아이작은 마른세수를 했다. 콜의 비리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이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유통 또한 그 못지않게 큰 문제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당시 납품 쪽 담당자가 비밀리에 콜과 손을 잡고 무기를 빼돌렸지. 몇 개월에 걸쳐서 야금야금 쥐새끼처럼 남의 물건을 잘도 팔아치웠더군.”

“당신은 전혀 몰랐던 일이로군요.”

“맞아. 하지만 끝내 덜미를 잡힌 놈이 손을 떼게 되니 콜은 낯짝 두껍게도 내게 직접 연락을 해왔어. 제법 그럴듯한 제시를 던지면서 말이야.”

필릭스는 어디까지나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이작은 살짝 찌푸린 눈을 들었다. 그의 입술 끝에서 콜의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등허리를 꼿꼿하게 펴기도 했다.

“콜이 당신에게 제시를 했단 말입니까?”

“그래, 해군 쪽에서 내가 파는 무기 납품률을 늘려줄 테니 뒤로는 자신과 무기 밀매를 같이 해보자는 건데, 개소리였지. 제까짓 게 뭔데 남의 물건으로 자리에 앉아서 돈을 벌려고 해?”

필릭스는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난다는 듯 소파 팔걸이에 올리고 있는 손끝을 툭툭 두들겼다.

“그래서 콜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까? 콜의 말대로 군에 납품량을 늘려주고 그 밖에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을 텐데요. 반대로 거절하면 불이익이 쏟아졌을 텐데-.”

“차라리 내가 직접 불법유통을 하면 했지 그딴 새끼가 저지르는 비리에 가담하는 짓은 안 해. 그동안 쥐새끼처럼 남의 물건을 털어간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직접 연락까지 해 온 꼬락서니라니.”

“그 때문에 콜에게 미운털이 박혔군요.”

아이작은 마주 잡은 양손을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아마도. 그 후로 콜이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거든. 테러리스트에게 조력한다는 어쭙잖은 소리를 해대면서 내 무기고를 박살 내려고 덤벼들더란 말이야. 콜이 부추기자 이래저래 내가 돈 버는 걸 아니꼬워하던 놈들이 가담해서 작정하고 내 무기고를 치려고 한 건데…….”

팔짱을 낀 자세로 손가락을 톡톡 움직이던 필릭스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연줄이 좀 좋거든.”

나직이 던지는 한마디에 선뜩한 오한이 일었다. 말인즉, 군정부가 자신을 치려고 계획한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때 섬의 무기고를 지키던 놈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반응이었다. 만발의 준비를 마치고 그의 섬을 침투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팀원들만 전멸하고 말았다.

한쪽에선 필릭스의 무기고를 없애버리라고 군을 보냈지만 다른 한쪽에선 필릭스에게 미리 귀띔한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그 사이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은 명령에 따라야 하는 대원들일 뿐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도 않았다. 감정이 전부 소진됐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가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분노할 만큼의 기운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벤자민을 구해야 하는 지금 자신의 상황만 해도 벅차니 말이다.

“나도 그땐 상당히 열이 받아있던 탓에 주위에서 말리는 소리를 듣지 않고 과격하게 대응한 것도 인정해. 덕분에 아직도 얌전히 지내는 척하고 있기는 한데……. 어쨌든 너에겐 미안하게 됐어.”

잠시 침묵하던 필릭스는 나직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아이작은 사뭇 놀란 눈을 들었다. 그 섬에서 일어났던 일을 필릭스가 사과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의외였다. 그러나 자신을 직시하는 필릭스의 짙푸른 동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불현듯 목구멍이 타는 기분마저 일어 아이작은 다시 얼음이 거의 녹아버린 스카치 잔을 들어 마셨다.

“콜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 나를 밟아버리겠다며 보냈던 특수부대가 네가 속한 데브그루인 줄은 전혀 몰랐지. 아니, 애초에 그 일에 얽혀있는 너와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화가 나는 듯, 혹은 불안한 듯, 반짝이는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던 필릭스는 아이작이 반쯤 마셔버린 스카치 잔을 빼앗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묽어진 술이 싱거웠는지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깨끗하게 비운 잔을 내리며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팀이 전멸하고 남은 생존자는 너 하나라는 얘기를 오늘 들었어.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다.”

필릭스는 손바닥으로 입가를 쓸며 씁쓸하게 말했다. 아이작이 짧은 숨을 토했다.

“전쟁이었잖습니까.”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 전쟁이었다. 이쪽에서 볼 땐 뭔가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던 전쟁이었지만, 어쨌든 자신들은 전쟁에 패했다. 제 무기고와 목숨을 지켜야 했던 필릭스로서는 당연한 반격이었을 테다. 죽고 싶지 않으면 죽여야만 한다.

“그리고 팀이 전멸한 건…… 제 탓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군인이 전쟁 중 팀을 이탈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팀 리더였던 자신이 팀을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이었다.

“자책할 건 없어. 네가 그때 당시 무슨 일을 겪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너를 보면 안 봐도 상황이 그려지니까. 전멸한 건 내가 과한 반격을 했기 때문이야. 네 탓이 아니야. 날 탓해. 전부 내 탓이고, 원망은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필릭스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잘게 씹었다. 답지 않게 고뇌에 빠진 것도 같았다. 저도 몰랐던 과거에 아이작과 지독한 악연으로 얽혀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길, 평범한 꽃가게 점원이 개인사가 있고 쫓기는 상황이라고 하기에 빚쟁이쯤 되는 놈들에게 쫓기는 줄 알았지, 설마 콜 패트릭스에게 쫓기는 전직 해군 장교인 줄 알았나. 그것도 나와 전쟁까지 치른 사이기도 하고 말이지.”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숨겼습니다.”

“너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잖아.”

그의 말대로 과거의 인연이 썩 좋은 편이 아닌 탓에 처음부터 속사정을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필릭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필릭스의 말마따나 죽고 죽이는 적대 관계에서 믿고 의지해야 하는 상호관계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꽃가게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일이라는 게 정확하겠지만.

아이작은 버석한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초췌한 얼굴 위로 드리워진 그늘이 한층 짙어졌다.

“상관없어. 이제 와 지난 일을 따져서 뭐 하려고. 설령 네가 사실대로 털어놨다고 해도 뭐가 달라졌을까? 나는 변함없이 너를 안고 싶어서 안달이었을 거고, 무슨 수를 써서도 안았을 텐데.”

“…….”

“장담하는데, 결과는 같았을 거다. 네가 복잡한 과거사를 먼저 말했든, 하지 않았든, 난 네게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한층 짙어진 동공으로 아이작을 담던 필릭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감미롭게 울리는 목소리에 아이작은 순간 말을 잃어버린 채 필릭스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답지 않게 민망해졌는지 필릭스는 소파 뒤로 등을 푹 묻으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네가 콜의 양자건 해군 대위건 나와 싸우던 놈이건 알게 뭐람. 중요한 건 내가 너한테 발정한다는 사실일 뿐이잖아.”

슬쩍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어쩐지 커다란 강아지를 떠올리게 한다. 뭔가 잘못해놓고 제 주인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는 허스키 같은 대형견. 문득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에 아이작은 무의식적으로 보일 듯 말 듯 입술 위로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서로의 과거가 어떻든 저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러고 보면 인연이란 것이 참 기이했다.

“…그렇군요. 결과는, 변함이 없었겠군요.”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짐이 조금쯤은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웃지 말랬지? 이런 상황에서도 꼴리게 만들면 어떻게 해?”

못 참겠다는 듯 그는 이마를 짚으며 끄응, 신음했다. 그리고는 ‘콜, 그 개새끼를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살벌하게 혼잣말을 흘리더니 흘끔 눈을 돌려 아이작을 노려본다.

“벤자민을 데리고 오는 즉시, 미뤄놨던 계약은 빠짐없이 이행할 거야. 각오하고 있는 게 좋아, 아이작. 네 계약위반은 잊지 않고 새겨뒀으니까.”

난데없이 뜬금없는 말을 던진 필릭스는 아이작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토니가 식당 쪽에서부터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멀거니 그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들어와 늦은 저녁 식사를 차리는 토니도 토니였지만, 필릭스가 ‘먼저 먹어’라고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건방진 오메가 새끼는 죽었겠네.”

두어 걸음 떼다 말고 필릭스는 불현듯 휙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날카롭게 빛나는 새파란 동공에 붙들린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등허리에서 서늘한 한기가 퍼진다.

“너는 혹시 알고 있으려나?”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던진 필릭스의 질문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순간이었다.

“아니. 됐어. 쓸데없는 잡념이었으니까.”

그는 곧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다시 몸을 돌려 걸었다. 아련히 사라지는 필릭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작을 일깨운 것은 어느새 탁자 가득 차려진 음식 냄새였다.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에 정신을 차린 아이작은 짧은 숨을 토했다. 아직 고백하지 않은 진실 한 가지를 숨기고 있는 심장이 알게 모르게 쿵쿵 소리를 내며 불안한 듯 뛰고 있었다.

* * *

필릭스는 한참이나 돌아오질 않았다. 그사이 아이작은 제 수프를 비우고 아스파라거스가 곁들어진 미트로프를 우물거렸다. 다진 고기를 야채와 빵을 같이 넣고 양념해 덩어리로 구운 후 잘라낸 미트로프의 식감은 부드러웠다.

고기가 덩어리로 나왔다면 거북했을 테지만, 이 정도면 조금쯤 넘어갈 것도 같았다. 그러나 사실 음식의 맛을 음미하지도 못했다. 억지로 입안으로 음식을 욱여넣고 있는 것도 앞으로의 시간을 대비해서였을 뿐, 딱히 허기를 느껴서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계적으로 씹고 있을 무렵, 그제야 필릭스가 말없이 다가와 앉았다. 아이작은 상념에 잠겨있던 눈을 들었다. 따뜻했던 수프는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다.

“……샤워하셨습니까?”

“아아.”

화장실에 간 줄 알았는데 제법 시간이 지난 후 돌아온 필릭스의 머리칼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옷도 다른 옷인 데다가 언제 봐도 근사한 얼굴은 샤워 후의 상큼함까지 더해졌다. 그러나 다친 어깨는 어쩌고 샤워를 했냐는 뜻의 질문에, 필릭스는 무심한 소리를 흘리며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가뜩이나 쌓여있는데 네가 꼴리게 웃으니까 참을 수가 없어졌잖아.”

식은 수프는 아예 치워버리고 곧바로 포크를 들어 미트로프를 툭 건드리던 필릭스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포크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자위라도 했습니까?”

직설적으로 묻자 그가 아직도 열기가 감돌고 있는 짙푸른 눈을 똑바로 들었다.

“그래.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금욕한 것도 처음이고, 성인 된 후로 자위한 것도 처음이니까 그런 줄만 알아.”

“제가 갚아야 할 빚이 또 늘었나 보군요.”

필릭스가 미트로프를 포크로 푹푹 찍어대며 으르렁거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다시금 포크를 움직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의 눈초리가 한층 사나워졌다.

“당연하지. 네가 당장 죽을 것처럼 우울하고 초췌한 얼굴만 하지 않았어도 넌 벌써 침대로 끌려갔을 거야.”

“이런.”

이번에도 감정이라곤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흘리며 아이작은 고기를 씹었다. 필릭스가 발끈한 듯 눈을 치켜떴지만 그것뿐이었다. 아이작의 무심한 태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뱉으며 미트로프를 입안으로 욱여넣는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데?”

평소 귀공자처럼 음식을 먹던 식습관은 어디에 갖다버렸는지 필릭스는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불만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계획 같은 건 없습니다.”

접시 위에는 음식이 반이나 남아있었지만 아이작은 달칵, 포크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필릭스의 짙푸른 동공이 다시금 칼날처럼 날카롭게 박혀왔다.

“없다?”

“콜이 원하는 대로 뭐든 해줄 생각입니다. 우선 가져오라던 서류를 전해주며 얘기를 해봐야겠죠.”

“서류라. 보기보다 태평하네?”

필릭스의 짙은 눈썹 한쪽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의외라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벤자민과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뭐든? 놔주는 대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차가운 물을 들이마시는 아이작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필릭스의 표정이 와작 구겨졌다.

“그것참, 마음에 안 드는 계획이로군.”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는 그를 마주한 아이작은 탁, 물컵을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이를 씹었다. 아닌 척해도 초조하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젠 믿을 사람이 눈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밖에 없었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과 부, 지위까지 갖춘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하다. 그러니 이 남자를 붙잡는 수밖에.

그 대가로 이 남자가 이번엔 무엇을 요구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상관일까. 벤자민과 어머니를 무사히 데려오고, 앞으로 콜에게서 벗어나 평화롭게 가족과 살 수만 있게 해준다면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괜찮았다. 아이작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이건 콜이 당장 가져오라고 요구한 서류입니다. 벤자민과 제 어머니를 납치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가방을 열어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민 아이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굳어있었다. 고기를 씹다 말고 서류봉투를 돌아보는 필릭스의 시선은 여전히 불쾌함이 가득했다.

“그게 대체 뭔데? 콜의 약점이라도 잡혀있는 서류야?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더럽고 치사한 짓까지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

“그가 당신 회사 관계자와 작당해서 무기를 빼돌린 후 제삼국에 밀매한 증거자료입니다. 판매 매출, 일시, 유통까지 전부 들어있고, 관계된 장교들의 리스트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물건이 나갈 때마다 콜이 직접 사인한 결재서류가 있습니다.”

아이작의 설명이 끝나자 그들 주위에는 한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답답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필릭스였다. ‘fuck.’ 희미하게 욕설을 내뱉는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만 했다.

“콜이 저를 내보내지 않는다면, 서류의 카피를 스티브에게 전해주세요.”

“스티브? 그건 또 누군데?”

그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제 친부의 친우이자 제 은인입니다. 전직 CIA 요원이기도 했고, 현재는 NCIS(미해군 범죄 수사대)의 부국장이기도 하며, 콜의 군사 비리를 조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제 보니 제법 괜찮은 인맥도 있잖아?”

필릭스는 놀랍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꼬리가 길었으니 밟힐 때도 됐지.”

그리곤 서류봉투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벌리며 중얼거렸다. 봉투 안을 대충 훑어보던 그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마치 악당처럼 보이기도 했다. 악당이라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악당일 테지만.

“만약 콜이 저를 잡아둔다고 해도…….”

필릭스를 빤히 보고 있던 탓일까. 목이 타는 기분에 물을 들어 마시던 아이작이 젖은 입술을 핥으며 말문을 열었다. 서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류를 살펴보던 필릭스가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였다.

“잡아둔다고 해도?”

“당신은 저를 찾으러 오겠죠.”

아이작은 다시금 가라앉은 눈을 들고 그를 직시했고, 필릭스는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잘 아네.”

“물론 장사꾼인 당신이 놓치지 않고 그 대가를 요구할 것도 압니다.”

이번에도 틀린 말이 아니었는지 필릭스는 묵언으로 수긍했다. 아이작은 타는 듯한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목구멍 아래로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벤자민과 어머니의 안위를 먼저 부탁드립니다.”

“아이작-.”

“언제나 거래는 공정해야 한다고 하셨죠.”

눈썹을 찡그리며 필릭스는 불만을 토로하려 했지만, 아이작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 마지막 계약을 제시할 시간이었다.

“벤자민과 어머니를 무사히 되찾고, 이 일과 콜에게서 저를 완전히 빼내 준다면,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뭐?”

필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이작의 평연한 음성은 고저 없이 흘러나왔다.

“당신의 개가 되어드리죠.”

* * *

콜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필릭스가 당당하게 벤자민이 제 아들이라며 실수했다고 이를 갈았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고용한 용병들이 데리고 온 세 살배기 아이를 확인한 순간 등허리가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뭘 어쩌지도 못할 만큼 필릭스를 빼다 박은 아이였다. 눈부신 금발, 새하얀 피부와 짙푸른 눈동자, 오똑한 콧날과 입술까지. 누가 봐도 필릭스의 아들이지 아이작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외모가 아닌가.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흘끔흘끔 콜을 올려보다가 겁에 질려 제시카 파커의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를 노려보는 콜의 표정은 시시각각 사납게 변해갔다. 꽉 움켜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린다. 필릭스가 아이작의 아들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정보를 흘린 놈이 눈앞에 있었다면 총을 꺼내 쏴버렸을지도 몰랐다.

으득, 이를 씹은 콜은 실내를 왔다 갔다 빠르게 걸었다.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도 아닌 필릭스의 아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벌일 수가 있을까! 눈앞이 캄캄하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세계적인 무기상이자 거대 마피아 간부를 조부로 둔 필릭스를 정부 측도 아닌 개인적으로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사실을 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4년 전, 그때 이후로 필릭스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긴 했어도 섣불리 건드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견제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다행히 필릭스 또한 지금껏 잠잠하게 지내고 있었기에 이렇다 할 접점 없이 묻어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머리카락 한 올 드러내지 않고 잠적했던 아이작이 필릭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함할 노릇이었다. 둘이 나란히 있는 사진을 봤을 땐 제 눈을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젠 아이작의 아들인 줄 알고 데려왔던 아이가 필릭스의 아들이라고까지 하니 더 이상은 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기에 암살 명령을 내린 상대와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필릭스와는 되도록 피하려고만 했는데 이런 식으로 얽힐 줄은 미처 몰랐다. 악연은 악연인 모양이었다.

이마를 짚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콜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제시카 파커를 돌아보았다. 이제 와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니 어떻게든 풀어내야만 했다.

“미세스 파커. 당신과 당신의 아들, 아이작이 내 말을 얌전히 따라준다면, 그 아이와 당신은 무사히 돌려보낼 겁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의 앞,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콜은 애써 분을 가라앉히고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바싹 긴장한 채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중년의 여자가 눈을 치켜떴다.

“뭘 바라는 겁니까? 아이작이 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러는 겁니까? 이 아이는 고작 세 살이에요! 어린아이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언성 낮추는 게 좋을 겁니다. 난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다그치는 여자에게 콜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가뜩이나 아이작의 아이가 아닌 필릭스의 아이를 데려왔다는 사실에 치솟는 분을 참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마디만 더 떠들어 심기를 건드린다면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는 본인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제시카 파커는 눈치 빠르게 입술을 꾹 씹으며 입을 다물었다. 짧게 정적이 내려앉자 콜은 그제야 노기를 감추고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은 내가 묻는 말에 답만 하면 돼.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아이를 다른 곳에 따로 둘 겁니다. 이곳은 독방이 제법 많고, 애가 악을 쓰고 울어봤자 소리가 들리지도 않거든.”

“…….”

“우선 당신, 아이작의 친모가 맞습니까?”

존대와 반말을 섞어가며 위협하는 콜을 노려보던 제시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아이를 독방에 보내는 일 따위를 막고 품에 안고 있으려면 순순히 말을 듣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테니까.

“그러면,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지?”

불현듯 의아한 생각이 일었다. 아이작의 친모가 어째서 필릭스의 아이를 저토록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유모라고 보기엔 유대감이 상당해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알고 데려왔던 것 아닌가요? 아이작의 아들입니다.”

“아이작의 아이가 맞다고?”

“네.”

제시카 파커의 확고한 대답은 의아함을 가중하기에 충분했다. 콜은 다시금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이의 노란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의 칼날 같은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벤자민은 작은 어깨를 움츠렸고, 제시카는 힘껏 아이를 끌어안으며 등을 도닥여주었다.

“필릭스는? 필릭스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건가?”

“모릅니다. 얼마 전 친구라고 데리고 왔을 뿐입니다.”

“그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그래요.”

콜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짚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한참이나 자그마한 벤자민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콜은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시카 파커에게 더 물어봤자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아들이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데다, 해군 대위였던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여자가 아닌가. 그 말인즉, 아이작이 제 어미에게조차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그다웠다.

“음식을 가져다줄 테니 먹고 쉬십시오. 말했듯이 당신을 해칠 생각은 딱히 없으니까.”

한층 가라앉은 투로 말한 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인 특유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방을 가로지르는 그의 머릿속은 걸음걸이와는 달리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건드린 대가를 치를 거라며 으름장을 놨던 필릭스, 뭐든 할 테니 아이를 돌려달라고 했던 아이작, 필릭스를 빼 박은 아이와 그런 아이가 아이작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제시카 파커까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턱 끝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채 걷던 콜이 우뚝 걸음을 멈춘 것은 문 앞에 다다라서였다.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가정 하나에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콜은 뻣뻣한 목을 돌려 제시카 파커가 달래고 있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부신 금발의 아이는 아직도 할머니에게 기댄 채 훌쩍이고 있었다. 필릭스와 빼다 박기는 했지만, 언뜻 아이작의 모습도 보이는…….

“…오메가.”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는 콜의 목소리에 제시카 파커가 눈을 들었다.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을 마주했을 때,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확신이 서고 말았다.

“오메가였던 거군. 그의 아비처럼 그 역시 오메가였던 거야. 그동안 감쪽같이 속였던 거였어.”

맙소사. 희미한 한탄이 절로 흘렀다.

키스 벤자민 리. 오메가였던 케이의 아버지처럼 케이 또한 오메가였고, 필릭스의 아이를 낳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까맣게 숨기고 있었다니! 이제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사실을 깨달은 콜의 눈이 한껏 커졌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오메가가 된 것일까? 십 대 후반, 해군사관학교의 기숙사로 떠나기 전까지 함께 지냈던 케이는 제 아비와는 달리 시시하기 짝이 없는 베타였다. 그런데 언제 오메가로 발현했던 거지? 그 사실을 어떻게 지금껏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을까?

특성상 군대에는 알파가 우글거렸다. 오메가는 손에 꼽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부분의 오메가는 베타보다 떨어지는 체력과 체격을 가진 탓에 군대에 자원하는 이는 드물었다. 게다가 알파의 러트나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이 터질 때마다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군에서도 웬만해선 오메가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케이는 멀쩡하게 지내왔다. 멀쩡하다 뿐인가, 웬만한 알파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출중한 실력을 지니기도 했다. 베타라고 알려졌었지만, 그에게는 감히 알파도 함부로 대들지 못했고, 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대원들은 늘 조심했었다. 그런데 오메가였다고?

말도 안 되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콜은 내심 번져가는 희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키운 강아지가 시시하기 짝이 없는 베타인 줄 알았더니, 오메가라? 이거야말로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타구니로 피가 몰린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필릭스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렇다면 필릭스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으로 잘만하면 꼴 보기 싫은 필릭스까지 눌러버릴 수도 있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콜은 제시카와 아이를 바라보며 피식, 비릿한 웃음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빠르게 문을 열고 나섰다.

성큼성큼 복도 위를 걷는 그의 얼굴 위로는 기이하게 비틀린 웃음이 진해지고 있었다. 이토록 자신을 들뜨게 만든 양자가 곧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케이시드, 너를 더욱 귀여워해 줄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 것 같지 않아?”

허공을 향해 광적으로 눈을 번득이던 콜은 조금 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요한 공간을 일깨우는 음산한 소리였다.

* * *

아이작이 눈을 들었을 때는 동부 시간으로(미서부와 동부는 3시간의 시차가 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미트로프를 조금이나마 먹은 후 간단히 샤워를 하고 상처도 돌아본 다음 앉아있었는데 그새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언제 잠들었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깬 아이작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실내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비행기의 엔진음 소리만 들렸고, 조명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조절되어 있었으며, 무릎 위에는 부드러운 감촉의 담요까지 덮여 있었다. 필릭스 또한 맞은편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

살짝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묵직하다. 옆방으로 들어가면 침대도 있으니 편히 누워도 될 것을, 자신 때문에 기어이 저러고 앉아서 선잠이 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자 멋쩍어지기도 하고, 불편해지기도 한다.

아이작은 필릭스가 깰까 싶어 미동도 없이 앉아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전용기의 기체가 살짝 흔들리더니 착륙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노스캐롤라이나 샬롯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그제야 꽉 닫혀있던 창문을 올리며 아이작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잠시나마 두려움을 일으켰던 새까만 하늘은 어느새 짙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는 찬란한 빛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림처럼 번져가는 여명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제 삶의 빛이 되어 준 벤자민을 떠올렸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잠은 잤을까. 밥은 먹었을까. 많이 울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생각할수록 가슴 위로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어나 아이작은 끝내 손을 들어 눈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부디 무사히 있었으면. 눈을 감고 있어도 크게 소리 내어 울던 아이의 모습은 변함없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되새기며 아이작은 이를 씹었다.

그와 동시에 비행기의 고도가 급격히 낮아지며 귀가 얼얼해지는 감각이 일어난다. 불안으로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게 만드는 따끔한 통증에 아이작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들었다.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는 창밖을 향하는 그의 새까만 동공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무감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안함이나 초조함 따위는 이미 찾아볼 수조차 없다. 차갑게 굳은 얼음처럼 서늘한 한기가 감돌 뿐이었다.

“…반드시 찾아내서 꼭 안아줄 테니까.”

울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멀리 있는 벤자민에게 전하듯, 혹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속삭이며 아이작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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