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6)

8. Dear Benjamin

헉, 숨을 들이켠 아이작은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거친 숨을 흘리던 그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가 누워있는 곳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한눈에 낡아빠진 모텔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모양새에 그제야 지난밤 이곳에 들어온 것을 떠올렸다. 들어오자마자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던 것도.

긴 한숨이 절로 흘렸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아마 쫓기고 있는 탓에 긴장한 탓이리라.

불편한 눈을 감았다가 뜬 아이작은 여기저기 불편한 통증을 일으키는 상체를 억지로 일으켰다. 시계를 확인하니 꽃가게가 총격을 당하고 필릭스에게서 차를 빼앗아 나온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나 있었다. 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깬 모양이었다.

시계를 툭 탁자 위에 던지고 나서 끈적이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사실 땀뿐만이 아니라 말라붙은 피의 얼룩까지 지저분하게 묻어있기도 했다. 콜에게 잡혔던 이후 며칠째 갈아입지도 못한 탓에 먼지와 얼룩이 뒤범벅된 티셔츠는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일으킨다.

가만히 제 옷을 응시하던 아이작은 그제야 티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바지와 속옷도 한 번에 벗어던진 후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씻지도 못하고 며칠 동안 버틴 것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샤워기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들어간 아이작은 한참이나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덕에 여기저기서 욱신거리고 따가운 통증이 일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뜨거운 물로 오랜 시간 샤워를 하고 나오자 상태는 한결 나아져 있었다. 뒤숭숭하게 남아있던 꿈의 잔상도 어느 정도 지워졌다. 머리의 물기를 말리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대충 붙이고 났더니 비로소 허기가 진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공허한 공간 위로 시끄럽게 울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우선은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텔에 들어오기 전, 근처에 보이던 작은 상점에서 대충 고른 흰 티셔츠와 바지를 걸친 아이작은 재빨리 짐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샌디에고에서 고작 이백 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소도시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내륙 특유의 건조한 기후는 프리웨이를 달려올 때만큼 심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도 변함이 없다. 콜에게 잡혔던 그 날 이후, 며칠 사이에 제 삶은 온통 뒤죽박죽 바뀌어 있었지만, 세상은 한결같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흘렀다.

과연, 짧았지만 평온했던 샌디에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아이작은 답은 얻지 못한 채,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 * *

아이작은 손에 쥔 서류봉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 굶은 탓인지 잘 삼켜지지 않는 음식을 조금 먹자마자 찾아온 곳은 은행이었다. 그의 손엔 마침내 스티브와 콜이 서로 넘기라고 했던 서류가 쥐어져 있었다.

“…이게 다 뭐라고.”

오래전, 처음 이것을 손에 넣었을 때는 복잡하고 허탈한 심정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자신이 살고자 훔쳐냈던 이유도 있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으로 얽혀있었기에 일단 닥치는 대로 손에 들고 나왔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제법 달라졌다. 누구에게든 상관없으니 이걸 넘겨주고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만 싶었다. 자신을 이대로 내버려 두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이 제시했던 것처럼 누명을 벗고 예전의 신분과 자리를 되찾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정의로운 일에 목숨 걸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현재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상대는 벤자민이 유일했고, 그 외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콜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들어줄 의향이 없는 모양이었다. 서류를 되찾을 뿐 아니라 자신 또한 그의 곁으로 되돌릴 심산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죽여도 상관없다는 투다. 지난밤, 꽃가게를 전부 박살 냈던 것을 보면 그랬다. 자신이 그 안에 있건 말건 상관없이 쏘라고 명령했던 것이 분명할 테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죽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면서도 속으로는 죽이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잘 모르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콜의 속내를 파악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니까.

두툼한 서류봉투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방에 쑤셔 넣고 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어지러운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떠돌아다녔지만, 역시 가장 쉬운 방법은 그에게 연락하는 것밖에 없었다. 결심을 마친 아이작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리를 걸었다.

상황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콜은 버거운 상대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되도록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려면 조력자가 필요하다. 스티브가 말한 그대로였다.

되도록 피하고만 싶었는데……. 낮게 한숨을 흘린 아이작은 착잡한 얼굴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거리 위에 푸른색의 낡은 공중전화가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아이작은 복잡한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곧 결심을 마친 듯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눈앞으로 공중전화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심장이 빨리 뛰기도 했다. 부디, 벤자민에게 아무런 해가 가지 않고 일이 마무리될 수 있었으면.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를 꾹 씹으며 걷는 그의 표정은 긴장감에 굳어 있었다. 한없이 길게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공중전화 앞에 선 아이작은 수화기를 낚아채듯 손에 쥐었다.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껏 여러 차례 머릿속에서 눌러보길 반복하던 번호였다.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지역 번호를 포함한 전화번호의 마지막 번호를 꾸욱, 순간이었다. 불현듯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공중전화로 걸었던 번호가 제 휴대폰이었던 것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이작은 놀라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번호야말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번호였으니 말이다. 등록된 이름도 제 이름이 아닌 데다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번호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급하게 써야 할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두었을 뿐인데, 어떻게 전화가 울리는 건지 영문을 몰랐다.

귀신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아이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다른 손에는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아직 들고 있는 채였다. 공중전화 너머로 이제야 이어진 전화의 신호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명처럼 들리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며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기계로 무작정 돌리는 스팸 전화이길 바라며 번호를 확인했지만, 액정에는 수신인이 드러나지 않고 unknown으로 찍혀있을 뿐이었다. 아이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찰나의 순간 이대로 끊어버릴까 고민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심장이 쿵쿵 울리며 불안하게 날뛴다. 가만히 액정판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끝내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전화를 연결하는 버튼을 미끄러뜨렸다. 그러고도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 상대가 먼저 말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전화를 받았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잠시 후, 상대는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했는데, 그의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심장은 어쩔 수 없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눈앞이 하얗게 바랜다. 목구멍이 콱 막혀와 더더욱 어떤 말도 흘릴 수가 없었다.

<케이, 내가 말했지? 이미 네 모든 것을 파악해놨다고. 지난 사 년간은 어디에 박혀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손 놓고 있었지만 말이야. 이미 한 번 발견했는데 넋 놓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싸늘한 식은땀으로 눅눅해진 손으로 휴대폰을 꽉 움켜쥔 아이작은 가늘게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너를 잡아 오라고 명령하기 전부터 며칠 동안은 네 주변을 감시하고 정보를 알아내기 바빴지. 그 정도 준비는 해야 너를 잡을 수 있다는 걸 알거든.>

“…….”

<하지만 봐, 그렇게 해도 너는 기어코 도망치고 말았잖아? 정말로 어려운 녀석이라니까.>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 살갗 위로 소름이 끼쳐 올랐다. 아이작은 뻣뻣하게 굳은 그대로 숨도 내뱉지 못했다. 쿵쾅거리던 심장은 이제 목구멍 위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며칠 동안 주변을 감시했다고? 하지만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런 낌새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맙소사, 그동안 자신은 정신이 나갔던 것일까 아니면 콜의 실력 좋은 수하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인 것일까. 과연 알아낸 것은 어디까지일까. 머릿속에서는 따라잡기 어려운 생각들이 빠르게 맴돌았다.

“하…….”

저도 모르게 입술 끝에서 짧은 한탄이 흘러나왔다. 다른 쪽 손으로 쥐고 있는 공중전화 수화기 너머로 ‘여보세요’ 낮은 중저음이 흘러든 것은 그 무렵이었다. 방금 전만 해도 서류를 넘겨주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마음먹었던 스티브였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아이작은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양손에 각각 휴대폰과 공중전화를 쥔 채 마른침을 삼켰다. 흔들리는 동공이 불안정한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케이, 아니면 아이작이라고 불러줄까?>

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콜의 더욱 낮아진 목소리가 경고를 던졌다. 이름을 듣는 순간 아이작의 어깨가 아예 얼어붙은 것처럼 경직되고 말았다. 어깨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회전하기를 멈추고 굳어버린다.

그의 말마따나 그들이 지금껏 자신의 주변을 관찰하고 어슬렁거렸다면 신분을 알아차리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다. 그리고 콜은 제 이름을 부름으로써 정확히 그것을 입증했다. 아이작은 찢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아랫입술을 씹었다.

<아이작 싱클레어. 그동안 네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몰랐지 뭐야.>

“…….”

<뭐, 네 이름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지. 사실 그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니까.>

자신의 모든 것이 까발려진 탓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아이작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지금쯤 서류 찾았겠지?>

아이작은 입안이 바싹 말라버린 것처럼 까끌거렸다. 다른 손에 쥐고 있는 공중전화 수화기 너머로 ‘케이? 설마, 자네인가?’ 다급히 묻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스티브의 질문에도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이작은 축축하게 식은땀이 배인 손에 힘을 주었다. 자칫 양손에 든 전화기들을 모두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긴말은 안 하마. 서류 가지고 이쪽으로 와. 내가 머무는 곳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휴대폰 너머의 콜은 일순 냉랭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스티브에게 넘겼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만에 하나 넘겼다고 하면 되찾아야 하는 건 네 몫이 될 테니까.>

“내가 왜…….”

가까스로 흘러나간 목소리는 제 것인지 모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네가 왜 그래야 하냐고?>

목구멍이 말라붙어 차마 끝까지 내뱉지 못했던 말을 콜은 태연히 이었다.

<그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아?>

“무슨 뜻입니까.”

<이런, 답답하게 굴기는. 말했잖아. 난 너에 대해 모든 조사를 마쳤고, 내게서 빠져나갈 여지를 주지 않을 거라고. 더불어 오늘 오전에 네 이름과 더불어 상당히 놀라운 소식까지 손에 넣었거든. 정말이지 놀란 것을 떠나 어이가 없던 소식이었지.>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심장은 귓가에서 울릴 정도로 쿵쿵 크게 뛰기 시작했다. 뭐냐고 차마 묻지도 못했다. 불길한 예감은 끝도 없이 심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콜은 귀찮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잠시 후면 내 수하들이 샌디에고에 도착할 거야. 넌 곧장 내게로 달려와야 할 거고.>

“콜…….”

<아, 그런데 너와 관련된 이번 일을 진행하다 보니 갑자기 코드명을 붙여주고 싶어졌지 뭐야.>

농담을 하듯, 장난을 치듯 콜은 가벼운 투로 지껄였다. 공중전화 쪽에서는 계속해서 자신의 다른 이름을 부르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명처럼 웅웅거리는 것도 같다.

<내가 과연 무엇으로 지었을지 궁금하지 않아?>

대신 콜의 웃음기를 머금은 소름 끼치는 음성은 더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아이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농담은 이제 그만 하시죠.”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외친 순간이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코드명은 말이지-.>

“콜-!”

<디어 벤자민.>

오싹한 한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졌다. 아이작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허공을 노려보기만 했다. 휴대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를 악다문 아이작은 끝내, 쾅- 소리가 나도록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메마른 입술 끝에선 거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바로 오늘 오전에 전해진 놀라운 소식이었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 절대 가만 안 둬.”

낮아진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가늘게 떨렸다. 휴대폰 너머로 콜의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심장을 쥐어뜯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작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눈을 들었을 때는 땅바닥에서 뿌연 먼지가 일어나도록 뛰고 있었다.

<나도 너를 화나게 만들 생각은 없거든. 그러니 너 역시 나를 더 이상 화나게 만들어선 안 되겠지? 그래야 공평하니까. 뭐, 그건 그렇고 네게 아이가 있다니 정말 놀랄 일이지 뭐야. 대체 아이 엄마는 누구지?>

“건드리지 마. 아이는 절대 건드리지 마!”

파랗게 질린 아이작이 소리쳤다.

<답지 않게 흥분하기는.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도록 하지. 서류 가지고 되도록 빨리 오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지금껏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널 기다린 탓에 초조해졌거든. 더는 시간 낭비하지 않게 해야 할 거야.>

제 할 말을 마친 콜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질 않는 휴대폰을 움켜쥔 채 아이작은 한산한 거리를 미친 듯이 뛰어야만 했다.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하얗게 먼지가 쌓여버린 검은 세단 앞까지 한달음에 뛰어온 아이작은 곧장 운전석에 앉았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켜자마자 타이어 긁는 소리가 나도록 내달렸다.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무슨 일이 있는지 그녀는 받질 않는다. 그 점이 더더욱 아이작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이틀 전 이곳으로 왔던 프레웨이를 고스란히 되돌아 달려야 하는 상황에 힘껏 액셀을 밟을 따름이었다.

* * *

필릭스는 태블릿을 던지듯 책상에 내려놓고 눈을 들었다.

“답변이 왔다고?”

“네, 미세스 파커가 승낙했습니다.”

“아하, 드디어.”

토니의 간결한 대답에 필릭스는 톡톡 탁자를 두들겼다. 비스듬히 입술을 비틀어 올린 그의 표정은 비열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인질을 잡아들이는 악당 같은 표정이다. 하지만 그나마 나아진 표정이기도 했다. 아이작이 총으로 위협하며 차를 ‘강도짓’ 해간 새벽이 지난 이후, 가라앉은 필릭스의 심기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저택에는 긴장감이 사라지질 않고 맴돌았다. 필릭스가 걸어 다니는 폭탄이 따로 없는 분위기를 하고 있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건드리면 누구 하나 모가지가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덕분에 그의 주변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일 수밖에 없었다.

“공손히 모셔.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했다간 뼈도 못 추리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토니는 간단히 대답하며 필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날 선 분위기는 조금쯤 누그러진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푸른 동공 위로 서려 있는 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며칠 전, 아이작이 사라져버린 새벽에 필릭스는 대뜸 아이작의 어머니와 벤자민을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덕분에 토니는 해가 뜨기가 무섭게 아이작의 어머니에게 이사를 요청했지만, 상황을 전혀 모르던 그녀는 의아해하며 생각해보겠다는 답을 전할 따름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얼굴 한 번 본 적이 있다고 해도, 누군지 알고 남의 집으로 선뜻 이사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이작과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니 더더욱 의심하고 불안해했으리라.

따라서 그녀의 거절을 전하는 토니도, 답변을 들은 필릭스도 딱히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다정한 척, 신사적으로, 집요하게 요청했을 뿐이다. 되도록 안전하게 모시기 위함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 사흘이 지난 오늘, 마침내 제시카 파커는 필릭스의 사저로 거처를 옮기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생각보다 빠른 결정이었다. 아이작이 사라지고 나니 벤자민이 걱정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집요하게 구는 필릭스를 견디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답변을 받기가 무섭게 토니는 수하들을 그녀가 살고 있는 라호야로 보내 짐을 옮겨오라고 지시했고, 필릭스에게 달려와 상황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공손히 모셔오라고 대꾸한 필릭스는 무심히 창밖을 주시했다. 토니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제시카 파커가 금세 승낙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필릭스는 아이작을 붙잡을 때까지 시베리아의 한파 같은 냉기를 풀풀 풍기고 앉아있었을 테니까.

“그밖에는 준비한 대로 처리할까요?”

토니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필릭스는 대답이 없었다. 턱을 기댄 채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상념에 잠겨 있을 따름이다. 답이 없자 토니는 그가 시선을 두고 있는 창밖으로 따라 눈을 돌렸다.

필릭스의 사저는 제법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탓에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림 같은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특히 그의 서재의 한쪽 벽면은 전부 유리로 되어있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전경이 전면으로 펼쳐져 있었다.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면 바라보고 있기 안성맞춤인 풍경이었고, 지금 필릭스에게 꼭 필요한 풍경이기도 했다. 저토록 평화롭고 잔잔한 전망을 보며 화기를 다스릴 필요가 다분하니 말이다.

“미세스 파커를 도와줄 메이드와 유모도 당장 출근하라고 연락해.”

가라앉은 눈으로 바다 너머를 응시하던 필릭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제야 토니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눈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따로 부탁한 요청사항은 없고?”

창문 너머에 두었던 시선을 돌린 필릭스가 물었다.

“집이 바뀌면 벤자민이 불안해해서 혼자 자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이 침대를 방에 같이 놔달라는 부탁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 아, 가구는 가져올 필요 없다고 전했겠지?”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사는 간단할 겁니다.”

사실 필릭스는 이사할 때 짐이 많으면 번거롭다며 제시카 파커가 이사를 오겠다고 승낙하기도 전부터 이미 전망이 가장 좋은 방 두 개를 비우고 침대와 아이 침대, 그밖에 여러 가지 가구들을 새로 들여놓기까지 했다. 특히 아이 방은 어찌나 근사하게 꾸며놓았는지 휘둥그레질 정도다.

모든 준비는 성격 급한 필릭스의 지시대로 이틀 만에 끝났다. 제시카 파커의 거절은 애초부터 생각지도 않은 독단적인 계획이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준비가 마무리되자마자 이사를 오겠다고 답변했다. 딱 맞춘 타이밍이었다.

덕분에 그녀가 들고 올 물건이라고는 입고 있는 옷과 아이의 장난감, 그밖에 필요한 몇몇 개인용품뿐이었다. 그녀가 쓰던 물건 중 버릴 것은 알아서 버리게 할 것이고, 혹시나 남겨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퍼블릭 스토리지를 빌려서 넣어두면 그만이다. 그야말로 간단한 이사였다.

빠짐없이 준비되었는지 하나하나 곱씹어보던 필릭스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렇게나 기다리던 제시카 파커와 벤자민이 곧 이사를 온다는데 어딜 가려는 건가, 토니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볼 무렵이었다.

“앞장서. 가서 살펴볼 테니까.”

재킷을 집은 필릭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옆으로 몸을 돌려 길을 비켜섰던 토니는 휘둥그레 뜬 눈을 껌벅였다.

“벤자민에게 직접 가시려고요?”

“그래. 초대했으니 마중이라도 나가봐야지.”

“그래도 굳이-….”

“집안 정리나 제대로 시켜. 도착하기 전까지 다시 한번 방 정리해놓고, 식사 준비하라고 해. 낯선 곳에 와서 불편해하지 않게.”

굳이 나갈 필요가 뭐가 있냐며 의아해하는 토니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잘라낸 필릭스는 성큼성큼 서재를 걸었다. 잠시 얼이 빠진 사람처럼 필릭스의 탄탄한 어깨와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토니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뒤따라 움직였다.

이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하는 것조차 어렵기만 하다. 다만, 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필릭스의 답지 않은 행동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는 예감은 진득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 * *

세단이 라호야의 주택가로 매끄럽게 들어가기 시작하자 필릭스는 창문을 내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난번, 벤자민의 생일파티가 있었을 때 왔던 동네는 변한 것이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벤자민의 집으로 들어서는 길 바로 앞집엔 흰개미가 들어왔는지, 집 전체를 서커스장마냥 색색의 천으로 뒤집어씌워 놨다는 것뿐이었다. (Termite - 대부분 미국의 개인 주택은 나무로 지어져 있어서 흰개미들이 종종 들어오는데, 흰개미는 나무를 갉아먹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집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집 전체에 천을 씌우고 약을 뿌린 채 2-3일 동안 두어 박멸한다.)

긴 시간도 아니었으니 변한 것이 있다면 외려 이상하겠지만, 조용하고 안락한 동네이다 보니 이런 것마저 크게 보이긴 했다. 필릭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집 전체에 뒤집어씌운 천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맙소사, 길의 첫 번째 집에 흰개미가 들어왔다는 건가?! 이렇게 극악한 상황에 아이를 키우다니, 말이 돼? 저 약이 얼마나 독한데. 애한테 해롭다고, 안 그래?”

필릭스는 혀를 차며 과장되게 말했다. 그의 모습이 더 어이가 없어진 토니가 그를 노려봤지만, 필릭스는 자신의 결정이 타당했다는 것을 굳이 내세우고 싶었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사를 해야지, 암. 내 집은 얼마나 공기가 좋은데. 바다도 훤히 보이지, 깨끗하고 아늑하지, 게다가 얼마나 안전해? 누가 감히 내 집에 쳐들어올 수나 있나? 애 키우기 그만한 곳이 어디 있겠어.”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돌아보던 필릭스는 언제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채 며칠이나 심통 맞게 굴었는지 잊어버린 듯, 평소의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인이 내린 결정을 몹시 뿌듯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양새를 옆에서 지켜보던 토니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바로 옆집에서도 천을 씌우고 약을 뿌리기도 하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이 정도 거리면 약이 바람을 타고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옵니다.”

토니가 사실을 내뱉자마자 필릭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박혀 들었다.

“뭐야? 지금 넌 독한 약을 이렇게 대놓고 치는데 아이에게 영향이 없다고 말하는 거냐? 엉?”

“그렇게 유난스럽게 굴지 않아도 아이에게는 전혀 문제가-.”

“토니.”

유난도 정도껏 하라고 투덜거리던 토니는, 그러나 한층 낮아진 필릭스의 음성에 입을 다물고 눈을 들었다. 광선처럼 뿜어지는 새파란 눈빛을 마주한 토니는 그제야 제 입을 손끝으로 꾹 누르며 시선을 회피해 버렸다. 역시,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법이다.

“너 지금 벤자민과 미세스 파커가 여기보다 좋은 환경에서 지내는 게 아니꼬워서 시비 거는 거지?”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갈까? 응? 벤자민과 미세스 파커가 내 집에서 지내는 걸 마음에 들어 해야 아이작을 붙잡았을 때 눌러 앉힐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입술을 비스듬히 올리며 툭툭 토니의 어깨를 손끝으로 두들기는 필릭스에게선 어느새 사나운 욱기가 슬슬 흘러나오고 있었다. 토니만 아니었으면 주먹이라도 날아왔을 기세였지만, 토니는 외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필릭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세상에, 그런 생각도 하신 겁니까?”

“뭐가? 아이작을 붙잡아오겠다는 거?”

“아니요, 눌러 앉히겠다고 방금…….”

“그러면, 그따위로 근본도 없는 새끼들한테 처맞고 다니게 내버려 두라는 건가? 나도 아까워서 손을 못 대고 있는데 감히 어디서 아이작을 개 패듯이 두들겨 패? 썅놈의 새끼들 같으니라고.”

새삼 떠올리니 열이 받는지 필릭스는 잔뜩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씨근덕댔다. 토니는 다시금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래서 아예 같이 살겠다고요?”

멍하니 되묻는 토니를, 필릭스는 자꾸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구냐는 투로 노려봤다.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가 몹시 멍청했다고 느낀 토니는 고개를 탈탈 털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필릭스가 쯧, 혀를 차며 대꾸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나도 좀 안심이 되겠지. 아이작은 아이작대로 꿈에도 그리던 벤자민과 같이 살 수 있으니 좋을 테고. 흠, 이 생각을 왜 진즉 못 했는지 모르겠네.”

떠올린 생각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필릭스는 턱을 쓸며 씩 웃었다. 토니는 더더욱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었다.

“차라리 결혼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간 순간이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필릭스가 토니를 곁눈으로 노려보며 볼멘소리로 되물었을 때였다. 뒤에서부터 거친 자동차 엔진음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돌리자 뒤에서부터 검은 자동차가 맹렬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주택가의 제한속도는 대부분 25마일 미만이었지만, 저 차는 이미 4, 50마일은 훌쩍 넘었다.

토니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필릭스 역시 의아한 듯 눈을 돌린다. 그와 동시에 느긋하게 주택가를 달리고 있던 필릭스의 세단을 검은 자동차가 급히 추월해서 지나쳤다. 필릭스가 앉은 쪽 창문 너머로 쏜살같이 달리는 차량이 시커멓게 비췄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어-!”

필릭스가 짜증을 부리려는 찰나, 토니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필릭스의 말마따나 정신 나간 것처럼 주택가에서 질주하는 세단이 상당히 낯익은 탓이었다. 게다가 운전자 또한…….

“빨리 달려!”

토니는 저도 모르게 운전사에게 고함쳤고, 필릭스는 넌 또 왜 그러냐며 나무랐다.

“아이작, 아이작이었다고요!”

“무슨 소리야.”

“지금 저 차, 아이작이 가져갔다는 그 세단 아닙니까!”

어째서 당신은 이런 순간마저 눈썰미가 없냐고 속으로 탓하며 토니는 운전사를 두들겼다. 그제야 운전사는 허둥지둥하면서 속력을 올렸지만, 이미 아이작이 몰고 있는 세단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게 정말 아이작이었다고?”

“그렇다니까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필릭스에게 버럭 소리를 친 토니가 다시금 운전사를 두들기려는 찰나였다. 뚜르르, 주머니에서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 토니는 자동차의 정면에 둔 시선을 들지도 않은 채 휴대폰을 낚아채 ‘뭐야’라고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큰일 났습니다, 형님! 난리가 났어요! 갑자기 시커먼 복면한 괴한들이 쳐들어 와서는 벤자민을-! 윽, 씨발! 야, 안 돼! 놓치지 마!>

잭의 헐떡이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크게 울려왔다. 주변 소리까지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섬뜩한 비명도 이따금 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제대로 된 설명을 전하지도 않은 잭의 전화가 뚝, 끊겨버린 탓이다. 토니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휴대폰을 쥔 채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벤자민과 제시카 파거의 이사를 돕기 위해 먼저 가 있던 잭에게서 이런 전화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이작을 죽이려고 했던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기어이 벤자민과 제시카 파커를 납치해 가려 밀어닥친 게 분명했다. 뒷목을 서늘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잭이 전화를 걸었다는 건 상황이 몹시 불리한 데다가 잭 또한 크게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웬만한 상황이면 그가 알아서 처리할 테고, 한참 싸우는 상황이라면 연락하는 것보다 벤자민과 제시카 파커를 경호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을 테니 말이다.

휴대폰을 손에 쥔 그대로 토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머릿속이 정신없이 돌아간다. 방금 전 미친 듯이 달려가던 아이작, 그리고 불안한 소리를 잔뜩 흘리던 잭의 전화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여들었다. 그런 토니의 눈을 번쩍 들게 만든 것은, 옆에서 음산하게 울리는 필릭스의 중저음이었다.

“뭐해, 밟아.”

* * *

끼이익- 타이어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차가 길가에 멈춰 서기가 무섭게 아이작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앞이 캄캄했다. 서너 시간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를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도착했지만 이미 집 주변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낸 아이작은 베레타를 손에 쥐고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아직 정원으로 밀려 나오지는 못했는지, 시끄러운 소리는 집안에서만 들리고 있었다. 우당탕 뭔가가 깨지는 소리,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고함, 혹은 비명과 총소리도 간간이 울린다.

바짝 긴장한 아이작은 땀이 배어든 손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며 몸을 숨긴 채 집안을 주시했다. 저토록 소란스럽다는 것은 아직 벤자민을 데리고 나가지 못했다는 뜻일 테다. 만에 하나 상황이 종료되었다면 소란스러울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필릭스가 붙여준 경호원들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더니 그나마 잘 막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직 그들이 어머니와 벤자민을 데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이작은 내심 안도했다. 놈들을 막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뜻이니까. 벤자민과 어머니를 그들이 끌고 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초조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아이작은 주위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이곳에서 놈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야 할까. 아니면 당장 저 아수라장으로 들어가야 하나, 초조함에 이를 씹으며 상황을 주시할 무렵이었다.

일순 와장창- 2층의 창문이 깨지더니 시커먼 인영이 창밖으로 튀어나온다. 누군가가 집어 던진 거다. 유리 파편과 함께 허공으로 내던져진 사내는 순식간에 잔디 위로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나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사내보다는, 창이 깨지며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요란한 소리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평온하기 짝이 없는 라호야의 주택가에서 일어나는 소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뜩한 소리였다. 그 속에는 희미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기도 했다. 귓가로 스치는 그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동시에 깨진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휙, 스치듯 지나가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가 사라진다. 하얗게 질려있는 어머니와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벤자민이었다. 누군가가 끌고 가는 듯, 그녀는 떠밀리는 것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금세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살벌한 소음 사이에서 드문드문 섞여들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한기를 견딜 수가 없어진 아이작은 앞뒤 가리지 않고 집으로 달렸다. 베레타를 양손에 쥐고 앞을 겨눈 채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며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난장판인 실내가 시야로 들어온다.

집안의 물건은 이미 남아난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부서지고 깨진 가구와 물건의 파편 위에서 벤자민의 경호원과 괴한들은 아직도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피가 여기저기 튀어있었고, 한쪽에서는 칼부림이 이어지고 있기도 했다. 주위에는 난투극에 당해 신음하며 널브러진 놈들 태반이었다. 이미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엎어진 놈들도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작은 여전히 손에 베레타를 쥔 채 1층 화장실 문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상황이 맞기는 한 듯, 그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놈들은 없는 듯했다. 각자 싸우는데 바쁠 뿐이다.

하지만 아이작의 신경은 참혹한 광경의 1층보다는 오로지 벤자민과 어머니가 있었던 2층으로 향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직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2층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계단은 거실 한가운데에 있었고, 그곳은 아직도 난투극이 한창이었기에 섣불리 움직이기가 어렵다.

마른침을 삼키며 총을 가슴 바짝 쥔 채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든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마음먹은 순간, 2층에서 한 무더기의 사내들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2층에서의 난투극은 한쪽이 전멸하며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저렇게 조용한 것을 보면 그랬다.

그들은 모두 새까만 복면에 새까만 옷차림을 하고 손에는 각각 권총을 한 자루씩 쥐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가는 체격의 중년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히끅거리며 우는 벤자민은 제 할머니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아이의 반짝이는 금발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런 아이를 힘껏 끌어안고 복면의 괴한들에게 이끌려 계단을 내려서는 제시카 파커는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다리를 덜덜 떨며 걸었다. 그녀가 넘어지지 않고 버티며 내려오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들고 있는 괴한 때문인 듯했다.

아이작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순간 푸슉, 푸슉, 소음장치를 한 총소리가 울렸다. 아이작의 총에서 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2층에서 내려오던 괴한들이 아직 1층에서 싸우고 있는 벤자민의 경호원들을 쏘아대는 소리였다.

끔찍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놈들은 필릭스의 수하들을 남김없이 처리하고 나갈 계획인 것 같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총을 난사해대는 놈들에게서 살아남은 경호원은 없었다.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제시카 파커는 벤자민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총소리에 놀라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이의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거실 가득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사내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거다.

“굼뜨게 굴지 말고 빨리 걸어!”

벤자민을 힘껏 끌어안은 채 파리해진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밟는 제시카 파커에게 괴한 중 하나가 총구로 어깨를 꾹꾹 누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문 뒤에서 베레타를 겨누고 있던 아이작은 이를 씹었다. 당장이고 뛰어 들어가 놈의 턱을 갈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만 하다.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분했다.

짧게 심호흡하며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욱기를 내리누른 아이작은 눈만 돌려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제시카 파커와 벤자민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싸고 있는 괴한은 총 다섯이었다.

그러나 1층의 경호원들이 모두 전멸하자 살아남은 나머지 셋이 주위를 경계하며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한 놈은 다리를 절뚝였고, 또 다른 한 놈의 팔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부상을 입긴 했지만, 다들 그럭저럭 상태가 양호했다. 게다가 모두 칼과 총을 바짝 긴장한 채 쥐고 있기도 했다.

총 여덟. 인질이 없다면 무모하게나마 먼저 공격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칫 잘못하다가 벤자민이나 어머니에게 총이 빗나갈 수도 있었고, 또 놈들이 곧장 인질을 앞세우거나 다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빌어먹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욕설을 목구멍 아래로 삼킬 무렵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앞서 걷던 놈 중 하나가 ‘어’ 의아한 소리를 내며 제 심장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작 역시 놈이 보고 있는 것을 눈에 담았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모양은, 레이저의 빨간 점이었다.

괴한의 심장 부근을 가늘게 맴도는 빨간 점의 실체를 알아차린 순간, 퍽- 소리와 함께 그의 심장에선 길게 피가 튀었고, 사내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이어 쿵, 육중한 울림이 바닥을 울린다. 숨이 탁 막혔다. 뭐지, 라는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면서도 정확한 사격이었다.

그러나 어물거릴 여유도 없이, 창밖에서부터 조준된 저격용 소총의 빨간 레이저 조준점은 정확하게 타깃을 맞춘 후 곧바로 다음 타깃으로 이어졌다. 붉은 점이 심장 부근에서 맴돌기가 무섭게 또 다른 괴한의 가슴이 퍽- 터져나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실수도 없었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연달아 세 번의 사격이 있었고, 눈 깜박할 사이에 세 놈이 가슴이 터진 채 뒤로 넘어갔다. 놈들은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작 또한 갑작스러운 저격에 베레타의 그립을 꽉 움켜쥔 채 긴장하고 말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의문이 떠돌았다.

집 밖에서 저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필릭스의 경호원이 아직 남아있었던가? 설마 필릭스가 스나이퍼까지 데리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스나이퍼가 경호팀에 있을 확률은 낮았다. 경호원들은 대부분 대상의 곁을 지키며 보호하는 것이 임무일 뿐, 저격용 소총으로 견제하지 않는다. 게다가 저 정도 실력으로 소총을 다룰 수 있는 스나이퍼 역시 흔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의아함도 잠시, 아이작은 다시금 이를 꾹 씹으며 눈을 들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세 놈이 급작스럽게 총에 맞고 쓰러지자 실내는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뭐해! 창에서부터 피해! 뒷문으로 차 대기시키라고 해, 지금 당장!”

경호원들을 전멸시켰으니 이제 제시카 파커와 벤자민만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놈들은 예기치 못한 저격에 흥분해서 소리를 내질렀다.

창밖에서부터 총알이 날아오는 탓에 정문 쪽으로 나가는 대신 뒤쪽으로 경로를 바꾼 놈들은 보기에도 잔뜩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가까스로 마무리됐다고 여겼는데 자칫 잘못하면 뒤엎어질 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한 덩어리로 보일 정도로 제시카 파커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은, 그녀의 양옆을 각각 지키는 두 놈을 제외하고는 총알이 날아오는 밖을 견제하느라 대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반자동 베레타가 두 발을 먼저 연사했다. 총알은 그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채 창밖을 경계하던 놈의 어깨와 복부에 박혔고, 그는 맥없이 고꾸라졌다.

“뭐야! 실내에 누가 남아있어!”

창밖에서뿐 아니라 실내에서까지 총알이 날아오자 괴한들은 버럭 성질을 부리며 일제히 총을 들어 올리더니 아이작이 몸을 숨기고 있는 방향을 향해 쏘아댔다. 시끄러운 소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려댔고, 그 소란에 제시카 파커는 비명을 내지르며 벤자민을 끌어안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으아아앙-! 할머니이-!”

커다란 총소리와 더불어 제 할머니가 주저앉아버리자 그녀의 품 안에서 히끅거리던 벤자민이 경기를 일으키기라도 한 듯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험하게 미간을 구기며 이를 씹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골이 울릴 정도로 시끄럽게 총소리가 사방에서 퍼져 나왔지만, 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벤자민의 울음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린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아이작의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심장이 쿵, 쿵 고막을 두들겨대기도 했다. 초조와 긴장감은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벤자민… 벤자민…….

베레타의 그립을 쥔 아이작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토록 심장이 뛰고 긴장했던 적이 없었다. 사격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고, 총을 겨눌 때는 그 누구보다도 냉철했고 무감정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멈추질 않고 들려오는 지금 이 순간은,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아이작은 이를 씹은 채 휙, 빠르게 몸을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이번에도 똑같이 두 발이 연속으로 나갔고 아이작과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현관 쪽이다! 저기 문 뒤야!”

놈들을 향해 총을 쏜 후에는 또다시 몸을 벽 뒤편으로 돌려 날아오는 총알을 피했다. 벽에 등을 대고 심호흡을 하던 아이작은 놈들의 벤자민을 달래는 제시카 파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은 세 놈들은 아직도 무작위로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총 때문에 아이작이 꼼짝없이 벽에 붙어 있는 사이, 놈들은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제시카 파커를 억지로 붙들어 일으키더니 아이작이 서 있는 현관 쪽에서부터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미리 말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뒷문으로 도망치려는 거다.

간간이 총을 쏘아 견제하며 뒷문으로 향하는 놈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던 아이작은 그들이 부엌 쪽으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뛰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사리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벤자민의 우는 소리는 점차 멀어지기만 한다. 긴장과 초조함으로 식은땀이 흘러 베레타를 쥔 손이 미끈거렸다.

가까스로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서자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던 놈들이 보였다. 뒷마당으로 향하는 부엌문 앞에는 어느새 벤이 대기하고 있었다. 얇은 나무판으로 만들어 놓은 담을 기어이 부수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놈들은 뒷마당까지 들어온 벤의 뒷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제시카 파커를 밀어 넣고 있었다. 벤자민은 여전히 제 할머니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겁에 질려 울기만 했다. 놈들이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르자 아이의 서러운 울음은 더더욱 커진다.

“벤자민…, 벤자민--!”

그 모습에 기어이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벤자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 사람처럼 아이작은 앞뒤 가리지 않고 뛰었다. 이대로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아빠? 아빠다, 으아아앙, 아빠-!”

“멈춰-! 벤자민!”

아이작의 목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벤자민이 흠뻑 젖은 눈을 들고는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자그마한 손을 뻗으며 당장이라도 쫓아오려는 듯 버둥거리기까지 하자 제시카 파커도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놈들은 그녀를 던지듯 기어이 벤 안으로 밀어 넣을 따름이었다.

아이를 안은 그대로 쿵, 벤 안으로 내던져진 그녀가 낮게 신음했고, 벤자민의 울음소리는 한층 크게 울렸다. 울지 마, 벤자민. 울지 마. 곧 갈 테니까. 속으로 외치는 아이작은 가슴이 잘게 찢겨 내리는 듯한 통증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탕, 탕, 아이작은 뛰면서 총을 먼저 갈겨댔다. 그러나 흔들리는 총은 재빨리 벤 안으로 올라타는 놈들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기만 한다. 액셀을 급히 밟아대며 달리기 시작하는 벤 안에서 놈들이 총을 장전하고 아이작을 겨눴지만,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어머니와 그녀의 품 안에 있는 벤자민뿐이었다. 제게 겨눠진 총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드러나는 벤자민의 엉망진창으로 젖은 얼굴만 시야에 들어온다.

벤자민…….

눈물도 콧물도 닦아주고 울지 말라고 다독여줘야 하는데. 꼭 끌어안고 놀라지 말라고 등을 토닥이고 부드러운 금사 같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줘야 하는데. 뒷마당을 빠져나가는 벤과 자꾸만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억울하기만 했다. 아이작은 있는 정신없이 벤자민을 따라 달렸다.

“아이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벤자민의 울음소리에 섞여 이명처럼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필릭스와 닮은 목소리라고 아이작은 은연중에 떠올렸다. 동시에 아이작의 몸이 누군가에 의해 확 떠밀려 나갔다.

탕-, 길게 총소리가 울렸고, 우당탕- 몸은 엉망으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강하게 부딪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린다. 그를 떠밀었던 누군가가 짧은 비명을 흘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가 누구인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코앞에서 멀어지는 벤만 아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 안 돼…. 벤자민… 어머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어지러운 머리는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바닥을 기며 허우적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 틈에 급한 엔진 소리를 울리며 달아나는 놈들은 벤의 뒷문까지 완전히 닫아버리고 말았다. 더는 아이의 우는 모습도 볼 수가 없어졌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베레타를 더듬거리며 손에 쥐었을 때는 이미 놈들의 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총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손뿐만 아니라 팔도 다리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턱이 떨려 이가 딱딱 부딪히기도 했다.

“벤자민, 벤자민! 으아아악---!”

피를 토하는 것처럼 절규하던 아이작은 끝내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하는 것을 느끼며 사지를 늘어뜨렸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그와 함께 기운을 잃은 몸뚱이가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젠장!”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그를 누군가가 급히 끌어안으며 욕설을 터뜨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더는 정신을 차리고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 뺨을 적시고만 있었다.

* * *

필릭스는 턱을 괸 채 무뚝뚝하게 앉아있었다. 옆에서는 주치의가 총알이 비껴가며 찢어놓은 그의 어깨를 붕대로 감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상념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아이작은?”

한참 만에 말문을 연 필릭스가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었다.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싼 주치의는 주변을 정리하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자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고?”

“상처는 제법 있었지만 뼈가 금이 가거나 부러진 정도는 아닙니다. 뇌진탕 때문에 아마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지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며칠 힘들었던 것 같은데, 한동안 식사를 주의하고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치의가 조심스럽게 대꾸하자 필릭스는 손짓으로 나가보라고 일렀다. 그는 말없이 인사를 전하고 가방을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그제야 필릭스는 셔츠에 팔을 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핼쑥한 얼굴로 지켜보던 토니가 부랴부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 상처로 호들갑 떨 것 없어. 잭하고 다른 놈들은 어때?”

셔츠의 단추를 잠그지도 않은 필릭스는 서재의 미니바로 다가가 버본을 스트레이트 잔에 따랐다. 쪼르륵, 잔에 채워지는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잠겨 있는 공간을 가른다.

“잭은 옆구리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지만, 곧 회복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살아있는 놈들은 세 명입니다.”

“나머지는 다 죽었다?”

“…네.”

토니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침울했다. 필릭스는 버본을 한입에 털어 넣고 몸을 돌렸다.

“어떤 새끼들이야.”

“노아 씨 말에 의하면 용병이었다고 합니다.”

“어디 소속.”

“그건 노아 씨가 직접 설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노아에게 가려던 참이었던 필릭스는 서슴없이 서재를 가로질러 복도로 나갔다. 빠르게 걸으며 셔츠 단추를 채우는 그의 움직임은 조금 전 어깨에 총상을 입고 붕대를 감은 사람 같지 않게 평연하기만 했다.

잠시 후,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 필릭스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지난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노아가 고개를 돌리고 그를 향한다.

“어서 와. 총 맞고 왔다며?”

“쓸데없는 농담 따위 할 기분이 아니니까 할 말이나 해.”

질문을 던지는 노아에게 이를 드러낸 필릭스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농담을 하려야 할 수도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를 보며 노아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잖아도 저택의 분위기가 무겁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딱히 농담할 기분도 아니었다.

“농담하려는 거 아니야. 네가 아이작을 구하려고 대신 총을 맞았다기에 놀랐을 뿐이지.”

“할 말이나 하라고.”

옆으로 다가오자마자 필릭스는 칼날 같은 목소리로 노아의 말을 잘라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기분 좋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하 열댓 명이 죽어 나갔고, 벤자민과 제시카 파커는 납치당했으며, 아이작은 충격에 쓰러진 채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걸 보면 네 기분이 나아질지, 아니면 더 나빠질지 잘 모르겠네. 난 존나 흥분했다가 네놈 상황 덕분에 겨우 가라앉혔었는데 말이지.”

그런 필릭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지, 노아는 나름대로 눈치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필릭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듣고 보지.”

퉁명스러운 대꾸에 노아가 툭, 키보드의 버튼을 두들겼다.

“제일 먼저, 지난번 아이작의 꽃가게를 부숴버린 놈들은 쉐도우라는 용역회사의 용병들이었어. 아마 이번에 네 수하를 거의 전멸시킨 놈들도 같은 쪽일 거야.”

“쉐도우라는 용병? 누가 부린 건데.”

“나도 그게 대단히 궁금하더라고. 어떤 놈이 용병까지 부려가면서 네가 끔찍이 생각하는 아이작을 뒤쫓는지 말이야. 그래서 아주 그놈들 시스템을 전부 까발렸지 뭐야? 그러다 보니 진짜 하나씩 나오긴 나왔는데 말이지….”

노아는 볼펜을 끼운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렸다. 슬슬 눈빛이 거북하게 빛나는 모양새가 뭔가 알아내긴 알아낸 모양이었다.

“너, 내가 지금까지 어디를 해킹했었는지 알아?”

그러나 자신이 알아냈다는 사실을 곧바로 떠드는 대신 노아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여전히 그에게 맞춰줄 기분이 될 수 없는 필릭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할 말은 빨리하라고 다시금 재촉하면서. 그러자 언제 필릭스의 눈치를 봤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듯, 노아는 번득이는 올리브 빛의 눈으로 모니터를 주시했다. 노아 앞에 위치한 여러 대의 모니터 위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JSOC(미합중국 특수작전사령부)라고! Fuck! 믿어져? JSOC라니, 세상에……! 나 이러다 철창신세 지면 네놈이 책임져야 해. 알았어?”

철창신세 운운하면서도 노아는 빠르게 키보드 위로 손을 움직였다.

“너까지 내가 두통에 시달리기를 바라는 건가? JSOC? 거기는 왜 멋대로 해킹해놓고 나더러 책임을 지래?”

만에 하나 JSOC를 해킹한 사실이 걸려 노아가 철창신세를 저야 한다면, 필릭스 또한 철창신세, 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죄를 물어야 할 테였다. 그러니 둘은 절대로 걸려선 안 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중이었지만, 기실 그 누구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됐고, 자리에 앉는 게 좋지 않겠어? 내가 지금부터 네게 알려줄 정보를 듣고 있다 보면 기운이 빠져버릴지도 모르는데.”

어깨를 으쓱이며 거만하게 지껄이는 노아를 필릭스는 가소롭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지 그래.”

“다 너를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무시한다면 어쩔 수 없지.”

“뭔데 그렇게 거들먹거리는 건지 설명이나 해. JOSC의 간부가 용병을 부렸다는 건 아닐 테고.”

필릭스는 냉랭하게 대꾸하며 찌푸린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정답이야.”

하지만 노아는 가벼운 투로 대꾸하고 말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필릭스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필릭스가 반박하기가 무섭게 노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키보드를 툭, 두들겼다. 동시에 화면에는 제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크게 나타났다. 사내를 확인한 순간, 필릭스의 미간이 절로 험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뭐야, 이 새끼…….”

“콜 패트릭스 해군 중령. 너도 익히 알고 있는 놈이지?”

“개새끼 중에서 개새끼인 이놈을 나더러 아냐고 묻는 거냐?”

쓸데없이 과거를 들추기라도 할 작정인가, 왜 이놈의 재수 없는 낯짝을 보여주는 건지……. 옛일을 떠올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를 갈던 필릭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노아를 돌아보았다.

“설마, 이놈이 용병까지 부려서 아이작을 죽이려 한데다가 기어이 벤자민까지 납치해갔다고 말하려는 건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리자 휙 노아를 노려보자, 그는 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도 전보단 눈치가 좀 빨라졌네?”

“이 새끼가 대체 아이작과 무슨 관계이기에-.”

“그놈이 지금껏 네가 찾아보라고 했던 작자니까.”

이어지지 않는 퍼즐의 끝을 붙들고 있는 기분에 멍해지는 순간, 노아는 필릭스의 어지러운 상념을 비웃더니 비틀어지고 꼬인 퍼즐의 답을 던졌다.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아이작의 새아버지라는 놈이, 바로 이 자식이라고. 콜 패트릭스.”

“……뭐?”

일순 귀가 먹먹해지는 것만 같았다. 과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마저 일어나 필릭스는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연관성도 개연성도 없게 느껴지는 인물의 등장이었으니 빠르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시 말해봐. 아이작의 새아버지가 누구라고?”

“콜 패트릭스.”

“미친 개새끼가 확실해?”

못 미덥다는 투로 재차 묻는 필릭스에게 노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에 끼워진 볼펜을 돌리며 툭, 키보드를 다시 두들겼을 뿐이었다. 휙 장면이 전환된 화면에는 다른 이의 모습이 비쳤다. 콜 패트릭스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제복을 입고 있는 젊은이였다. 아쉽게도 그의 모습 또한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누구라고 생각해?”

노아가 픽, 입술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필릭스는 아무런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필릭스가 마른침을 삼키자 노아는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케이시드 패트릭스 해군 대위. 콜의 아들이야. 정확하게는 양자.”

화면 가득 채우고 있는 사내는, 며칠 전 자신에게 베레타를 겨누며 차에서 내리라고 했던 모습과 별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지금은 이마와 눈가를 가릴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지만, 화면 속의 사내는 군인 특유의 짧게 정돈된 머리카락이라는 것과 약간 마른 체형인 지금보다 더 체격이 좋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조금 더 어려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조금도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과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까지 영락없는 아이작이었다. 아, 불과 몇 시간 전에는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기도 했었지만…….

씁쓸해지는 생각을 지워낸 필릭스는 화면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제복 차림의 아이작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익숙하다 못해 눈감고도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였던 아이작이 한없이 낯설게만 보였다.

경찰이나 FIB 더 나아가 SWAT까지만 해도 역시 그랬군,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해군 대위라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게다가 그 콜 패트릭스의 양자라고? 뒤통수를 맞아도 이렇게 맞을 수가 없었다.

“네 말이 맞긴 맞았어. 절대 평범한 꽃집 청년일 수는 없는 사람이었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화면만 응시하고 있는 필릭스는 아랑곳없이 노아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정보를 빼내는 거로는 왜 네 수하들이나 나나 한참 동안 헤매기만 하고 찾지 못했을까? 어째서 네가 하는 그의 이름은 아이작 싱클레어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을까?”

노아의 질문에 필릭스는 이번에도 답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노아는 무릎을 탁, 내리쳤다.

“아이작 싱클레어와 케이시드 패트릭스가 완전히 다른 인물로 등록되어있기 때문이었어! 가짜 신분이 아니라 둘 다 제대로 된 신분이기까지 하다고. 말 그대로 이중 신분을 가진 건데, 그 이유가 또 웃긴단 말야.”

달칵, 소리와 함께 이번엔 낯선 사내의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다. 중성적인 느낌의 인상이 희미한 중년 사내였다.

“유진 싱클레어. 아이작 싱클레어의 친부이자 제시카 파커의 전남편이지. 여기까진 평범하게 밝혀졌으니 다들 아는 사실일 거고. 그런데 유진에겐 다른 이름과 직업이 있었거든. 뭔지 알아?”

필릭스가 섣불리 답하지 못하자 노아는 의기양양하게 눈을 빛냈다.

“CIA 요원이야. CIA 요원일 때의 그의 이름은 키스 벤자민 리. 바로 콜 패트릭스의 파트너지.”

“……기가 막히는군.”

“기가 막히지. 내가 이걸 찾아내느라 CIA까지 뒤졌다고! 어찌나 보안을 철저하게 해놨는지,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을걸?”

노아는 우쭐거리며 콧대를 높였지만, 필릭스는 건조한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기만 했다. 황망함에 그 어떤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푸른 눈동자는 잘게 흔들리기도 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노아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대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유진이 애초에 신분이 두 개다 보니 제 아들까지 두 개의 신분을 만들어버렸어. 바로 아이작 싱클레어와 케이시드 리였지. 그런데 케이시드 리가 콜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케이시드 패트릭스가 되어버린 거야. 복잡하지?”

“말도 안 되게 복잡해.”

짜증스럽다는 투로 필릭스가 중얼거렸지만, 노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이작, 즉 케이시드 리는 열 살에 콜의 양자가 되었어. 그 후 콜은 케이시드를 작정하고 군인으로 키운 것 같아. 제 뒤를 이을 아들을 바랐나 봐? 아무튼, 어려서부터 온갖 무술과 호신술을 익혔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갔어. 성적도 매우 훌륭하더군. 졸업하자마자 탄탄대로를 걸어서 젊은 나이에 대위 직위까지 따냈지.”

자신이 알던 아이작 싱클레어와는 전혀 다른 프로필을 읊고 있는 노아를 바라보던 필릭스는 끝내 끄응, 목울대를 울리며 옆에 있던 빈 의자를 끌어다 털썩 앉고 말았다. 처음 그가 조언했던 그대로 다리에 기운이 빠져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작이 해군 장교라니, 말이 돼? 그는 뱃멀미가 심하단 말이야!”

어디에 풀 수도 없는 울컥한 기분에 필릭스는 이마를 짚은 채 언성을 높였다. 그래 봤자 아이작을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노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알게 뭐야. 해군 대위라고 기록이 나와 있으니까 말해주고 있는 것뿐인데.”

그리고는 탁자에 놓아둔 물 잔을 쥐고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타기로는 필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연 기운이 빠져버린 필릭스는 물, 하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뒤에서 필릭스 못지않게 잔뜩 얼이 빠진 채 둘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토니가 황급히 물병을 내밀었다.

물병을 받아든 필릭스는 곧장 뚜껑을 따고 목구멍 아래로 물을 넘겼다. 차가운 물이 청량감 있게 넘어가자 이제 조금 정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며칠 내내 아이작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져 있다가 겨우 튕겨 올라온 기분이었다. 아니, 아직도 올라오지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여서 쫓기고 있는 건데?”

대체 무슨 개인사이기에 해군 대위였다는 작자가 되도 않는 꽃가게를 운영하며 다른 신분으로 숨어 다녔던 걸까. 게다가 새아버지라는 놈은 그를 죽이질 못해 안달하다가 기어코 그의 아들인 벤자민까지 납치해갔다. 알면 알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은 비단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 채 묵묵히 화면을 노려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노아가 턱을 괴고 필릭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번들거리는 동공에는 아직도 흥분이 가득했다.

“필릭스, 아주 좋은 질문이야. 진짜 재밌는 건 지금부터니까 잘 들어.”

짓궂을 정도로 짖게 웃은 노아가 운을 띄웠다. 꿀꺽, 물을 넘기다가 말고 필릭스는 서늘한 시선을 그에게 향했다.

“또 뭐가 남아있다는 건가? 뱃멀미가 심한 아이작이 해군 대위였다는 사실에, 오메가인 전직 CIA 요원인 부친과 지랄 같은 콜 패트릭스 중령이 새아버지라는 것 말고 날 놀라게 할 만한 게 또 남아있다고?”

“그럼, 진짜는 지금부터지. 네가 물었듯이 그가 왜 쫓기고 있는지, 그 이유가 남아있잖아?”

노아는 어울리지도 않게 눈을 휘고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히트사이클 때보다도 더욱 광적으로 흥분한 노아는 의자를 끌어당겨 필릭스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가 해킹을 하는 목적이 바로 모르고 있던 정보, 특히 흥미를 일으키는 썩은 가십을 캐내며 희열을 느끼기 위함이니, 이번 일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흥분을 일으키고 있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아, 나는 이미 과부하상태인 것 같단 말이다. 아이작의 말도 안 되는 정체 때문에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여기서 더하면-.”

“케이시드 패트릭스는 지금 해군에서 직위도 박탈당한 채 지명수배로 올라가 있는 상태야.”

“뭐-?!”

암울하게 투덜거리는 필릭스를 거침없이 잘라버리며 노아가 불쑥 말했다. 순간,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러자 노아는 진정하라는 투로 쉬, 입가를 가로막으며 고개를 젓는다. 제 말이 끝나기 전까지 잠자코 듣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작자가 누군지 알아?”

“콜 패트릭스 개새끼라고 말하지 마라.”

으득, 이를 씹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노아는 손끝으로 딱 소리를 만들어 낼 따름이었다.

“정확했어. 콜이지. 제 양자를 직접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지명수배자로 만들어버렸더군.”

필릭스는 허탈한 신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어서 이젠 말도 나오질 않았다.

“갖다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야. 임무 위반에 기밀유출, 군 이탈, 그리고 가장 큰 건으로 군사 비리가 있었지.”

“군사 비리? 똥 묻은 개가 할 소리인가?”

“그러게 말이야. 케이시드가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콜 만큼은 안 될 거라고 확신하는데.”

듣자 듣자 하니 뒷골이 팍 당겨왔다. 콜 패트릭스에 대해선 웬만큼 알고 있는 필릭스로서는 우습다 못해 기가 막힌 소식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게 전부가 아니야. 재미있는 건 지금부터라고.”

“노아…… 빨리 말해.”

“케이시드 패트릭스의 정확한 소속이 어디인 줄 알아?”

“해군?”

“해군이라는 건 아까 말했잖아, 이 머저리야.”

미간을 와작 구기며 노아는 멍청한 대답을 지껄이는 필릭스를 노려보았다.

“…네이비씰은 아니겠지.”

그러자 필릭스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아는 다시금 키들거렸다.

“네이비씰보다 한술 더 떠. 정확히 데브그루 소속이었어. (DEVGRU 미합중국 해군특수전개발단 - JSOC 직속, 티어1급 특수부대로 미 육군에는 델타포스, 해군에는 데브그루가 있다. 해군의 특전사인 네이비씰 중에서 선발한다. 대테러부대.)”

“젠장,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데브그루라니…….”

망연하게 중얼거리던 필릭스는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가슴 위로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갑갑했다. 아무리 총 쏘는 솜씨가 남달랐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아이작이 대테러를 전문으로 하는 특전사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기실 특전사 중에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전쟁과 피에 미친놈들이 제법 됐다. 간혹 시신파손을 일부러 자행하는 놈들까지 있을 정도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놈이 특전사였다. 물론 멀쩡한 놈도 있기는 할 테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조차 평생 대테러부대에서 총을 들고 싸우며 사람을 쏴 죽이는 직업을 가진 특전사의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있기란 어렵다고 말한다. 전역하고 난 후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놈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멀쩡하고 선량하게 보이는 아이작이 데브그루 소속의 특전사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심하는 그의 눈앞으로 단총을 능숙하게 쏘아대던 아이작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친다. 분명, 제 몸보다 더 익숙하게 다루던 모습이었다. 사람을 쏘는 데서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것도 레드 스쿼드론(대테러 임무 및 사격 부대)에 소속된 팀의 팀 리더라고.”

이마를 짚은 채 흔들리는 눈으로 화면을 주시하던 필릭스의 귓가로 노아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젊은 나이에 대위가 된 데다가 데브그루의 팀 리더까지 맡았다는 것부터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지.”

“그러니까, 아이작을 잘못 건드리면 뼈도 못 추린다는 소리잖아.”

필릭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자 노아의 웃음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무슨, 뼈도 못 추리는 거로 끝나겠어? 넌 그냥 좆 되는 거야. 살인 병기가 따로 없는 데브그루 특전사라니까?”

손끝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까지 덧붙인 노아는 점점 더 가라앉아가는 필릭스와는 달리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입을 꾹 다문 필릭스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못마땅한 표정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더, 훨씬 상황이 괴상하고 어렵게 흘러가고 있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이던 꽃집 청년의 숨겨진 개인사라는 것이 전 해군 대위에 하필 데브그루 소속, 그것도 콜 패트릭스에게 쫓기는 사연일 줄 누가 알았냔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나치게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나질 않을 정도다. 그런 필릭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아는 툭, 손끝에서 굴리던 볼펜을 책상으로 던지더니 돌연 짧은 한숨을 흘렸다. 지금까지 희희낙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필릭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일이 더 좆 되기 전에 아이작에게서 손 떼는 게 너한텐 이로울지도 몰라.”

웃음기를 지운 노아가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그의 한마디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필릭스가 눈살을 찡그렸다.

“예상보다 그의 개인사가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서 손 떼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낮아진 음성으로 끼어들지 말라고 전하는 필릭스를 보며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케이시드의 상황이 좆같아서 하는 말이 아니야. 네 상황이 더 좆같아질 거라서 하는 말이지.”

“무슨 말이야 그건?”

날카롭게 묻자 노아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4년 전 일은 기억하지? 정부에서 너를 테러에 일조한다는 개 같은 이유로 네 무기고였던 섬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사건.”

“기억하다 뿐인가? 그때 이후로 받은 타격에 아직도 몸 사리고 있는데.”

쓸데없는 말을 꺼내는 노아에게 필릭스는 짜증을 부렸다. 그러자 노아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더니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채 쯧, 혀를 찼다.

“그때, 겉으로는 CIA와 FBI의 작전이라고도 했고, 실제로 놈들이 개입하기도 했었지만 사실상 뒤에서 너를 없애는 계획을 꾸민 건 콜 패트릭스였어.”

“알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개새끼라고 하는 거잖아.”

“그런데 콜이 너를 죽이려고 투입 시킨 부대가 바로 데브그루라는 건 몰랐겠지.”

노아가 딱하다는 투로 던지는 말에 필릭스는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를 쳐다보고 말았다. 지금, 그가 알려주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치고 지난다. 설마 싶기만 한 사실이…….

“표정을 보아하니 짐작은 가나 보네.”

“그 일에 아이작이 관련됐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물론 나도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아쉽게도 네 예상이 맞아. 4년 전, 섬으로 투입된 데브그루는 케이시드가 이끌던 팀이었고, 그 팀은 전멸했지.”

“하-….”

“네가, 감히 네게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며 온갖 최신식 무기를 동원해서 깡그리 박살 냈던 놈들이 바로 케이시드의 팀이었단 말이야.”

맙소사. 목구멍 위로 가늘게 신음이 흘렀다. 머릿속이 핑 돌았다. 이제는 정말, 더는 듣고 싶지 않아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을 때가 나았다. 그러나 노아는 아랑곳없이 결론을 내뱉었다.

“네 무기고를 공격했던 데브그루 팀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바로 아이작이라고.”

끝내 필릭스의 흔들리는 눈이 절로 감기고 말았다. 누군가가 목을 조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런 필릭스를 빤히 바라보던 노아는 한숨과도 같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와 엮이면 좆 될 거라고 했는지, 이제 알아듣겠어?”

* * *

2층의 복도는 조용했다. 저택 자체가 초상집이긴 했지만, 2층의 공기는 유난히 고요하고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필릭스는 저벅저벅 울리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침실 문을 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침실에 눕혀놨던 아이작은 노아에게 가기 전까지만 해도 깊이 잠든 채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로 간 건지 침대 위가 텅 비어있다. 이불이 젖혀진 그대로 훤히 드러난 침대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듯, 구겨진 시트와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쓸어본 필릭스는 곧장 몸을 돌렸다. 복도를 따라 몇 걸음 더 걷다 보니 나직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낮고 단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필릭스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방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아담한 방에는 지고 있는 해의 노란 빛이 들어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넓은 창에는 언덕 아래로 펼쳐진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보였다. 한쪽 벽면에는 미키마우스와 친구들이 그려져 있었고, 빨간 미키마우스의 자동차 모양의 침대가 그 아래에 자리 잡혀 있다. 심지어 이불 커버도 미키마우스다. 다른 쪽에는 온갖 아동용 책이 진열된 책장과 장난감이 빼곡했다.

그곳이 필릭스가 준비했던 벤자민의 방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아이작은 그림자처럼 어두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필릭스에게는 등을 보인 채, 전화를 받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해드릴 겁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지금 누구와 통화하고 있는 건지 쉽게 예측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그의 목소리는 평연했다. 욱기도, 살기도 드러나질 않는다. 그저 덤덤히 상대방에게 대꾸할 뿐이다. 마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언제까지 가면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한 가지만 약속하세요. 절대로 벤자민과 어머니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침착한 아이작의 목소리에 필릭스는 외려 한기를 느끼고 말았다. 다른 이도 아닌, 제 어머니와 목숨처럼 여기는 아이를 뺏긴 상황이었다. 늦은 오전이었던 그때만 해도 오열하며 소리치다가 정신을 잃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무심히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무리 오후가 다 가도록 깨지 못하고 잠에 빠져있다가 일어났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에 외려 의아함이 일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저토록 냉정하고 침착하게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약 자신이었다면 저렇게 덤덤히 상대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있을까. 아니, 못했을 테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해 길길이 날뛰고 노기를 드러냈을 것이 뻔했다.

필릭스는 내심 혀를 차며 아이작의 어두운 뒷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멀거니 그를 담고 있는 사이, 전화는 끊어졌다. 아이작은 마치 일상적인 전화를 주고받다가 끊은 사람처럼 전화를 주머니에 꽂아 넣은 후 천천히 몸을 돌려 필릭스를 향했다.

순간, 그에게서 느껴지는 오싹한 한기에 필릭스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아이작의 표정은 기이했다. 전화로 대화를 주고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 어떤 살기나 욱기를 비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차갑게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는 오싹하기만 했다. 무섭도록 날이 서 만지기만 해도 손이 벨 것 같은 검날을 떠올리게 하는 동공이었다.

“여긴… 벤자민의 방으로 꾸미신 겁니까?”

긴장한 필릭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주시하기만 하자,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 벽에 그려진 미키마우스와 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필릭스는 ‘그래’라고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어머니와 벤자민을 이곳에서 지내게 하려고 했었거든. 내 집에 머무르는 편이 아무래도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

‘조금 늦어버렸지만.’ 아이작이 물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괜스레 찔리는 기분에 필릭스는 변명 같은 한마디를 흘렸다. 찬찬히 주위를 돌아보던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방이군요.”

아이작은 무심한 투로 말했다.

필릭스는 벤자민이 미키마우스를 좋아한다는 아이작의 말을 기억했다. 그때의 아이작은 어울리지도 않는 귀여운 미키마우스 카드를 손에 들고 꿈을 꾸는 것처럼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질 않고 잔상처럼 떠다녔기에 방도 미키마우스로 꾸미게 했고, 심지어 미키마우스의 빨간 자동차 침대를 손수 고르기도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좋아할 벤자민과,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을 아이작을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 대신 이런 좆같은 상황을 마주하다니…… 속이 쓰리다 못해 갈려 나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전, 지금껏 벤자민에게 이런 방을 만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오래 머물지 못하고 항상 거처를 옮겨 다니는 처지였으니까요.”

필릭스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아이작은, 언젠가 꽃가게에서 미키마우스 카드를 펼쳐놓고 펜을 쥐고 있던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로 읊조렸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던 얼굴은 이제 감정이 전부 소진되어버린 것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필릭스는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입안이 지독히도 썼다.

“이런 귀여운 방 한 번 꾸며주지 못했고, 제대로 놀아준 적도 없었죠. 해준 것은 하나도 없는데 끔찍한 일에 휘말리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무감정한 목소리에는 자책이 담겨 있었다. 필릭스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목이 멘 것처럼 쉽게 소리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그저 아이작의 고해 같은 이야기만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샌디에고에 오기 전에는 외국에서 전전했었습니다. 힘든 삶이었죠. 그나마 이곳에 와서 몇 개월간 평온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처지를 잠시 잊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아이작.”

“평온한 삶에 물들어 해이해진 거겠죠. 그 탓에 어머니와 벤자민을 위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당신은 저 때문에 다치기도 했죠. 당신의 수하도 많이 다치고 죽은 것을 압니다.”

문득 필릭스의 어깨로 시선을 둔 아이작이 짧은 한숨을 흘렸다. 셔츠 아래로 감춰진, 붕대에 감긴 상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작은 정확히 필릭스의 다친 어깨를 응시하고 있었다.

필릭스는 의아함이 서린 눈을 들었다. 분명, 그 순간의 아이작은 자신이 그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납치당한 벤자민과 어머니를 쫓아가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어이 따라잡지 못한 차량이 황급히 도망쳐버렸을 때는 그의 무감정하기만 하던 표정이 무너지더니 엉망으로 흐느껴 울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금세 이성을 되찾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일까.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겁니다.”

“…별로.”

의아해하던 필릭스는 아이작의 사과가 마땅치 않다는 듯 혀를 찼다. 딱히 사과나 감사의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생각지도 않은 말을 꺼내는 아이작을 보고 있으려니 외려 가슴이 먹먹해질 뿐이다.

“집 밖에서 놈들을 저격한 것도 당신이었겠죠.”

아이작은 이번에도 무심한 투로 예리하게 물었다.

“생각해보니 그 자리에 소총을 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는 당신밖에 없을 것 같더군요.”

“마침 새로운 무기가 있어서 시험해봤을 뿐이야. 네가 신경 쓸 것 없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작이 그런 일까지 일일이 마음에 둘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로서는 아이와 어머니를 잃어버린 상황만으로도 벅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껏 당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정당하게 한 계약이었잖아. 그리고 따지자면 네 어머니와 벤자민을 완벽하게 지켜주지 못한 내 책임이 더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내가 어떻게 너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필릭스의 단호한 대답에 아이작이 문득 눈을 들었다. 조금 전보다는 날카로운 한기가 가시긴 했지만, 여전히 등허리가 오싹할 정도로 냉랭한 동공이었다. 그를 마주한 필릭스는 한숨이 흐르는 것을 겨우 참으며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이런 말을 하는 제가 뻔뻔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당신의 말대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

뭐든,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테니까.

터지고 갈라진 입술을 씹으며 잠시 머뭇거리는 아이작에게 속으로 답했을 때였다.

“당신의 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마치 비밀을 묻는 것처럼 한껏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필릭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지기도 했다.

“능력? 내가 가진 지위와 부를 말하는 거라면, 어디에 어떻게 쓸 건지 먼저 알아야지.”

직설적으로 묻는 그에게 필릭스 또한 거침없이 되물었다. 아이작은 여전히 속내를 알기 어려운 무감정한 얼굴로 필릭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여 답했다.

“만에 하나, 제가 제법 높은 지위의 누군가를 죽인다고 해도…… 저를 빼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순 필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은, 확실히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질문이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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