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6)

7. Who is who?

<……그렇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필릭스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봤자 토니로서는 자다가 봉창을 두들기는 격인지라 심드렁할 뿐이었다.

“뭐가 그렇습니까, 야? 당장 튀어가서 아이작 데려와.”

<네,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니 오전 중으로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보스도 그때까진 조금 더 잠을 청하면서 컨디션을 조절하는 편이-.>

“닥치고 일어나라?”

결국, 이를 씹으며 으르렁거리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히 부스럭거리며 이불을 젖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모양이었다. 게을러 빠져서는. 본인은 평생 이른 아침에 일어났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음에도 필릭스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토니의 한숨 어린 목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왔다.

“당연히 그래야지.”

드로즈만 입은 나신으로 넓은 방 안을 서성이던 필릭스는 비로소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러트가 시작하려는 조짐을 보이며 약간의 미열이 끓고 있으니 오늘 내로 페로몬이 터져 나올 터였다. 주체할 수 없는 성욕 또한.

평소에는 미친 종마처럼 날뛰게 되는 러트를 질색하던 필릭스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푸른 눈을 반짝거렸다. 짧으면 이삼일, 길면 일주일, 마음껏 아이작을 데리고 뒹굴 수 있다는데 어떻게 기대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필릭스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해가 온전히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이었건만, 벌써 기운차게 샤워실로 향하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필릭스의 들뜬 기대가 박살 난 것은 오전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새벽같이 저택의 사람들을 전부 깨워 일으킨 그는 일찌감치 아침을 먹었다. 그 사이 저택의 고용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해가 뜨기도 전부터 집안 대청소를 해야만 했다.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이 도착하기 전에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하라고 닦달한 탓이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 탓에 피트니스 룸에서 한두 시간가량 운동하고, 샤워를 다시 한 다음, 평소보다도 더 신경 써서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머리를 세팅하고 아끼는 시계까지 찼다. 누가 보면 어디 근사한 곳에 가서 데이트라도 하려나 보다 싶을 정도다. 실상은 아이작이 도착하자마자 침대에서 뒹굴 생각만 잔뜩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기대에 부풀어 쓸데없는 단장까지 하며 아이작을 기다렸건만, 예상과는 달리 시간은 길어지고 있었다. 그를 데리러 간 토니와 잭에게서도 감감무소식이다. 11시쯤 되자 배만 고파졌다. 필릭스는 슬슬 짜증을 부리며 일찌감치 점심을 먹기 위해 또 다이닝 룸에 앉아야 했다.

정오도 되기 전이었건만 스테이크를 썰며 그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의 단축키를 눌렀다. 그러나 전화는 길게 울리기만 할 뿐, 응답이 없었다. 대신 전화를 받았어야 하는 당사자, 토니가 급히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보스!”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그를 노려보던 필릭스는 툭, 휴대폰을 식탁 위로 던졌다.

“너, 뭐하다가 지금껏-.”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연락도 없이 늦게 온 주제에 감히 제 말까지 자르는 괘씸한 작태의 토니를 바라보는 필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허둥지둥거리는 토니는 필릭스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지 못한 듯 숨을 헐떡이며 뻘뻘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내기 바빴다.

“숨넘어가겠네. 무슨 일인데 그래? 아이작은 어딨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기다리던 아이작은 코빼기도 비추질 않는다. 토니의 뒤를 따라 잭이 들어왔을 뿐이다. 험악한 인상이 되어버린 필릭스가 탁, 성질을 부리며 나이프를 탁자 위로 내려놓았을 때였다.

“보스, 아이작이라는 플로리스트 새끼가 아무래도 튄 것 같은데요?”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뚱한 한마디를 던진 건, 다이닝 룸으로 이제 막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은 잭이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필릭스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고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던 토니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저놈은 대체 도움이 안 된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잭의 퉁명스러운 보고를 들은 필릭스의 눈빛은 이미 돌변해 있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등허리가 오싹할 정도로 낮은 저음이 울린다. 잭을 노려보는 푸른 동공은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어, 그게. 지금까지 뒤졌는데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니까요?”

그제야 쭈뼛한 잭이 다가오다 말고 도로 슬슬 뒷걸음질을 치며 중얼거렸다.

“보이질 않아?”

“아파트가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벌써 이틀 전에 집을 비웠다고 하더군요.”

안광이라도 내뿜을 것 같은 기세에 토니는 보다 못해 필릭스의 앞으로 다가서며 빠르게 설명했다. 러트도 슬슬 시작했다는데, 저러다가 성질머리가 터지기라도 하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남아나질 못할 수도 있었다. 생각하니 아찔해진 토니는 초조하게 입가를 쓸었다.

“자세히 말해.”

잭에게 꽂혀있던 푸른 동공이 천천히 토니에게로 옮겨져 온다.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시선에 토니는 빠르게 설명했다.

“짐을 정리하고 집을 비운 것이 이틀 전이라고 합니다. 꽃가게는 다른 이의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있기에 아직 정리되진 않은 모양이지만, 역시 이틀 동안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감쪽같다니까요? 자동차는 다운타운 근처에서 발견되긴 했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귀신처럼 몸뚱이만 사라졌다구요. 이게 튄 거지 뭡니까?”

잠시 잠깐 주눅 들어 있던 잭이 다시금 토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열변을 토했다. 아이작의 아파트, 가게, 그 밖의 샌디에고 다운타운 주변을 새벽서부터 뒤져야 했던 불만을 고스란히 필릭스에게 던지는 거다.

“잭, 함부로 말하지 마. 아직 밝혀진 건 없어.”

“일언반구 없이 사라졌는데 튄 게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토니는 끄응, 신음하며 잭을 노려봤지만, 그의 눈치 없음은 필릭스보다 한술 더 떴다. 결국, 둘은 옥신각신 말다툼을 시작했다. 필릭스는 자기들끼리 싸워대는 토니와 잭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무심히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하게 점심을 먹는 것만 같았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고기를 써는 자태는 여느 때와 같이 한없이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다만, 섬뜩한 기운이 풀풀 넘쳐나는 탓에 스테이크를 써는 건지 누구를 잡아놓고 써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라는 점이 평소와 다를 따름이었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둘의 말싸움이 끊이질 않자 기어이 한마디를 던진 필릭스는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와 포크를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제야 둘은 딱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다이닝 룸에는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았다.

필릭스는 고요함 속에서 두어 점 먹고 난 스테이크 접시를 앞으로 밀어버리기까지 했다. 밥맛이 떨어졌다는 뜻일 테다. 토니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이어가는 필릭스의 행동을 잔뜩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억제제 가져와.”

그러자 마지막으로 물 잔을 들고 우아하게 물을 마신 필릭스가 낮게 명령했다. 토니와 잭의 눈이 동시에 토끼처럼 동그래진다. 억제제가 마치 사약인 것마냥 기피하던 필릭스가 먼저 억제제를 찾으니 그럴 수밖에.

“러트 억제제, 말씀입니까?”

“지금 러트 시작됐다고 말 안 했어?”

“그러긴 했지만, 차라리 다를 때처럼 베타라도 부르면-.”

“누굴 불러? 아이작 말고는 안고 싶은 놈들도 없는 데다가, 지금 다른 놈들 부르면 송장 치울지도 모르는데.”

여상한 얼굴로 살벌한 말을 던지는 필릭스에게선 알파 페로몬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러트와 더불어 심기가 뒤틀려 생겨나는 페로몬 탓에 베타인 토니마저도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 정도였다.

토니는 잭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잭은 허둥지둥 움직여 억제제를 들고 뛰어왔다. 그것을 받아든 필릭스는 물도 없이 와작, 씹더니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사라졌다고? 말도 없이?”

어찌나 낮게 울리는지 한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토니와 잭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딱히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필릭스는 아드득, 아드득 억제제를 씹으며 허공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정리해 보자면, 아이작이 지금 계약위반을 한 거네? 그렇지?”

그러더니 억제제를 씹다가 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토니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아이작은 내 러트를 책임지기로 했는데, 말도 없이 사라졌단 말이지. 그러면 계약위반이 맞잖아?”

“아, 그러니까…. 그런 것 같군요.”

“와우, 이거 어쩌나. 계약위반이라네?”

마치 앞에 아이작이 있는 것처럼 필릭스는 정면을 노려보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아이작, 넌 이제 진짜 끝났어.”

눈을 번득이며 히죽거리는 모습이 미친놈 저리 가라다. 아이작이 나타나질 않아 외려 신난 것 같은 모습에 토니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아무리 저 남자가 악명 높은 필릭스 펠리체고, 제 보스라곤 하지만 저토록 인정머리 없을 수가!

“보스.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아무리 이 남자가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마인드를 가졌다고는 하나, 사람이 없어졌다는데 계약 위반했다며 대놓고 고소해하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않나 싶었다.

“무슨 걱정?”

그러나 토니의 은근한 질타에도 필릭스는 눈 한번 깜박이는 법이 없었다.

“그놈이 작정하고 도망친 거면 어쩝니까?”

옆에서 잭이 또 불쑥 끼었다. 토니는 고개를 돌려 잭을 강렬하게 노려보았지만, 잭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나중에 방을 나가면 교육 좀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찰나였다.

“아이작이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 일이 있었나 보지.”

길길이 난리를 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태평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토니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그런 토니와 잭을 한심하다는 투로 쳐다보았다.

“벤자민을 내가 지키고 있는데 아이작이 도망간다고? 그가 벤자민을 두고 잠적할 것 같아? 천만에. 부성애가 어찌나 깊은지 제 새끼가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잠시 몸을 숨겼다고 해도 다시 올 수밖에 없으니까, 벤자민이나 잘 지켜.”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토니는 반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곧 떠오르는 다른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더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말없이 잠적할 사람도 아니니 실종된 것 아닙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수도 있는데, 조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지켜봐 온 아이작은 상당히 고지식한 편이었다. 척 봐도 남에게 피해 입히는 일 없이 선량하게 사는 소시민이 아닌가. 그토록 모범적인 사람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뭔가 일이 있다는 뜻이 된다.

“무슨 일?”

그래 봤자 이번에도 필릭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되물을 뿐이다. 토니는 가늘게 한숨을 흘렸다. 불현듯 파파라치 사진처럼 요트로 향하는 필릭스가 찍혀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정보기관에 흘러 들어간 사진에는 아이작의 얼굴까지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설마, 보스의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고 납치한 건 아닌지…….”

제가 떠올린 시나리오에 지레 겁먹은 토니가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필릭스는 여지없이 그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쯧, 혀를 찰 따름이었다.

“네놈들 눈깔이 장식이야? 아이작이 호락호락 아무에게나 당하고 다닐 사람 같아?”

“네?”

“네?”

이어지는 필릭스의 질문은 토니와 잭을 동시에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둘은 똑같이 멍한 얼굴이었다. 꽃집 청년이 아무에게나 당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어이가 없네. 네놈들이 그래놓고 애들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군.”

“무슨-.”

“아이작이 보통 사람인 줄 알았어? 척 보면 몰라? 얼마나 단련된 몸인지 안 보여? 체격이나 근육도 그렇고, 손에 박인 굳은살도 그렇고, 오지게 싸워본 실력자잖아. 웬만해선 당하고 오진 않을 거야.”

탁, 탁 손끝으로 식탁을 두들기며 짜증을 내는 필릭스를 토니와 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어딜 봐서 아이작이 실력자라는 걸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동네 꽃집 청년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는데.

사람을 잘 살피지도 못하는 데다가, 눈치 없기로 유명한 필릭스를 둘은 대놓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지금껏 그가 보여준 행적이 얼만데 갑자기 예리한 척한다고 믿음이 갈까. 그러자 필릭스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확 일그러뜨렸다.

“아이작의 몸에 자잘한 흉터가 많거든. 대부분 칼자국이었고, 경미하긴 해도 총상도 허벅지에 하나 있는 걸 봤지. 물론 너희들은 죽었다 깨나도 못 볼 자국이지만, 있었다는 것만 알아둬.”

“칼자국과 총상이요?”

아이작은 늘 긴 팔에 긴 바지였다. 슬슬 더워지는 날씨였건만 한 번도 살갗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본 적이 없었다. 즉, 아이작의 나신을 물고 빨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인 필릭스만 그의 흉터와 자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뜻인데…….

아무리 필릭스라고 해도 자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장님은 아니니 그의 말이 틀리진 않을 테였다. 그렇다면 정말 아이작이 필릭스의 말마따나 숨어 있던 실력자라는 건가?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온몸에 자잘한 칼자국이나 총상에 의한 흉터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었다.

아이작에 대한 생각들을 빠르게 나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필릭스는 혼란스러워하는 토니가 가소롭다는 듯 툭 한마디를 던졌다.

“지난번에 벤자민의 경호원이 어수룩해서 아이작에게 단도를 뺏겼다고 생각해? 틀렸어. 아이작이 그놈보다 실력이 있었으니 쉽게 뺏은 것뿐이지.”

토니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들으면 들을수록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다. 잭 또한 토니와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는지 ‘말도 안 돼’라고 신음처럼 혼잣말을 흘린다.

그도 그럴 것이 벤자민을 지키는 경호원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자들로 엄선했다며 자부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벤자민의 생일파티에서 멍하니 있다가 아이작에게 탄도 단검을 뺏겼다는 경호원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일이었다.

어수룩하게 제 무기를 뺏긴 놈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정도 실수를 한 놈에게 필릭스는 겨우 ‘근신’으로 봐줬다는 것도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단지 필릭스가 꽤 기분이 좋았기에 쉽게 넘어간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그런 이유가 숨어있었던 건가. 이거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보스는 아이작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싸움질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뿐일까요? 아니면 제 신분을 숨기고 있는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처음, 늦은 밤 우연히 그의 꽃가게에 들렀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작은 그때에도 대뜸 필릭스를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기민하게 알아차린 자신이 놀라웠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진 빛이긴 했지만, 아이작은 분명 필릭스를 알아보고 난처해했다.

그 때문에 잠시나마 필릭스의 뒤를 캐고 있는 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었지만, 단순히 필릭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놀랐다는 그의 말을 믿어버리고 말았다. 알면 알수록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내라고 치부했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경찰이었겠지, 아니면 FBI.”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필릭스는 단언하듯 대꾸했다. 토니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필릭스를 쳐다봤다. 생각하니 필릭스가 가장 음흉하다. 아이작이 심상치 않은 사내라는 것을 감지했으면서도 지금껏 모르는 척 그를 안아왔다는 건가. 속이 시커먼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스럽기만 했다.

“거기까지 짐작하고 있었던 겁니까?”

“보이는 성격이 그렇잖아. 아무리 몸을 좀 험하게 다뤘다고 해도 단순한 양아치 같은 분위기는 아니니까.”

잭이 옆에서 ‘와아’ 감탄을 내뱉었다. 필릭스의 보기 드문 예리함에 토니 역시 감탄하기는 마찬가지긴 했지만, 잭과는 약간 포인트가 달랐다.

평소의 필릭스는 주위 사람들이 스스로의 가슴을 내리치게 만들 정도로 눈치 없고 답답하긴 하지만, 일에 관련되거나 제 신상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짐승처럼 예민한 감각을 자랑하는 사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평탄하지 않은 무기 사업을 이 정도로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득이 될 만한 일이 있을 때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잡아챘고, 위험이 있을 때마다 귀신처럼 감지하고 빠져나갔다. 다만 사람에게는 무관심한 탓에 눈치가 없다고밖에 볼 수 없이 굴었는데, 아이작에게는 또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이 필요한 일과 사람에 대해서만 신경이 예리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런 점마저도 참으로 오만하지만, 필리스다웠기에 토니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보스 정말 대단하네요. 그놈을 그렇게까지 간파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근데 왜 여태 모르는 척하셨습니까?”

매사에 답답하게 굴던 필릭스가 모처럼 예리한 척하는 모습에 잔뜩 놀란 잭이 입을 반쯤 벌린 채 물었다. 그러자 필릭스가 시큰둥한 시선을 그에게 두었다.

“아이작이 숨기고 싶어 했으니까.”

“허…….”

잭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해져 있을 무렵이었다. 난데없이 필릭스는 식탁에 놓아두었던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손에 쥐더니 잭에게 집어 던졌다. 휙, 빠르게 날아간 나이프는 정확하게 잭의 목덜미 옆을 지나 그의 뒤에 있는 문 위에 퍽-, 살벌한 소리를 울리며 꽂혔다.

눈 깜박할 사이에, 예고 없이 일어난 일에 토니도, 잭도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는 잭의 뒤에는 스테이크용 나이프가 문에 박힌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보, 보스…?”

하얗게 질린 잭이 가까스로 말을 더듬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 이 새끼. 어디서 감히 이놈 저놈이야? 아이작이 네 친구야?”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네 수하라도 돼?”

“아닙니다.”

“나이도 아이작보다 어린 자식이 건방지게. 함부로 까불지 마라. 다음부턴 아이작을 부를 땐 무조건 ‘Mr.’ 붙여. 대답은 Sir. 이다.”

“미, 미스터요?”

“아이작의 입에서 너에 대한 불만이 한마디라도 나오는 날엔, 그날로 네 모가지가 비틀어질 테니까. 알아들었어?!”

새파란 눈을 부릅뜬 필릭스에게선 순식간에 주위를 얼려버리고도 남을 한기가 흘렀다. 잭은 그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말도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가봐. 노아에게 일 좀 빨리하라고 전하고.”

노기를 풀풀 흘리는 필릭스는 몸을 돌려 식탁 앞에 반듯하게 앉았다. 식어 빠진 스테이크는 치워버리고 다른 음식을 가져오라고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주문하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토니는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아직도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잭을 끌고 다이닝 룸을 빠져나왔다.

탕,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길게 숨을 내쉰 토니는 대뜸 잭의 우람한 등짝을 퍽,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악! 왜 때려요!”

등짝을 얻어맞은 잭이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다.

“이 눈치도 없는 놈아, 작작 좀 해라, 응?”

“내가 동네북이지! 다들 나한테 왜 그래요?!”

입을 삐죽 내미는 잭의 등짝을 한 대 더 패려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던 토니는, 그러나 금세 움찔해서 어깨를 움츠리는 불곰 같은 잭을 보며 제 가슴만 퍽퍽 내려치고 말았다.

가뜩이나 러트가 시작되어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데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작마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필릭스가 다 뒤집어엎지 않고 참았던 것은 그나마 아이작이 ‘드디어’ 계약위반을 했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라면 어림없는 일이었고, ‘계약위반’이라는 히든카드가 이젠 없을 테니 앞으로도 이런 운은 없을 테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제대로 눈치 없게 굴었던 잭은 제 머리통에 나이프가 꽂히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 했건만, 도리어 정신 못 차리고 입만 쭉 내밀고 있었다. 비 맞은 중처럼 구시렁거리는 잭을 흰 눈으로 바라보던 토니는 답답한 한숨을 흘렸다.

“보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게 좋아. 아이작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너만 골 아파질 테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인데요?”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잭에게 대답하는 대신 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잭을 끌고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가만 보면 이놈이야말로 눈치 없기로는 최고다.

“됐다. 그런 줄이나 알고 있어.”

“왜요? 뭔데요?”

설명하는 것도 귀찮은데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며 잭은 끈질기게 묻는다. 결국, 토니는 잭을 흘끔 노려보았다.

“뭐긴 뭐야? 아이작은 하룻밤 놀고 내다 버릴 상대가 아니라는 거지. 무려 보스가 연애한다며 들떠있는 상대란 말이다. 그런 사람을 네깟 놈이 ‘이놈 저놈’ 하는데, 기분 좋을 리가 있겠냐? 나 같으면 나이프를 네 목에 꽂았을 거다, 이 눈치 없는 놈아.”

“네? 연애요? 연애? 보스가 말입니까? 그 플로리스트랑? 설마!”

나이프가 날아왔을 때보다도 더 파랗게 질린 잭은 그아악, 괴성마저 질러댔다. 그러나 토니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노아를 확인하기 위해 지하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 * *

놈들은 제법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사설의 용병이 분명하다. 하지만 완벽할 정도로 전문적이진 않았다. 웬만큼 싸움도 하고 무기도 다룰 줄 아는 마피아나 갱단의 수하들을 연상하게 하는 놈들일 뿐이다. 콜이 부리는 놈들이기에 신중히 지켜봤지만, 싱거울 뿐이었다.

아이작은 이틀 넘게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두들겨 맞기만 했던 사람 같지 않게 반듯한 자세로 실내를 거닐었다. 그러나 예전만 못한지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이틀 잠이 들지 못했던 것보다는 심각하게 구타를 당한 탓에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짧게 숨을 고르며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자 우득, 뼈마디에서 소리가 울렸다. 눈썹을 찌푸리던 아이작은 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내뱉었다. 입은 다 터져 있었다. 침을 뱉을 때마다 핏물이 섞여 나왔고, 입술은 잔뜩 찢어져 피딱지가 앉아있었으며, 한쪽 눈은 부어올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손목은 저릿저릿했고, 퍼렇게 피멍이 들어있을 것이 뻔한 복부도, 허벅지와 정강이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어났다. 부러진 곳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감정하기만 했기에 그를 돌아보지 않으면 다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피가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슥 쓸어내린 아이작은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그러다가 시선을 내렸다. 물건이 파손되고 피가 튀어있는 바닥에는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피떡이 되어 정신을 잃어버린 세 명의 사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작을 납치한 후 폭행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지켜보던 놈들이었다.

그들을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던 아이작은 서슴없이 컨테이너의 끝부분에 있는 문을 향해 걸었다. 이곳으로 끌려온 지도 이틀이 지났고,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만 싶었다.

운이 좋게도 콜은 지금 당장 시간을 빼기가 어려운지 이곳까지 직접 움직이는 대신 근본도 없는 놈들만 세워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이틀 동안 허름한 창고 같은 곳에 꼼짝 못 하게 묶어두었던 그들이 얼마 전, 아이작을 데리고 이동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먼저 창고에서 컨테이너로 옮겨졌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수갑이 채워진 손목은 또다시 의자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쉽사리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단정했기 때문이었는지 창고에서처럼 다리와 몸까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묶인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주위를 돌아보니 컨테이너 안에도 TV와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 안의 상황은 아마 실시간으로 콜에게 전송이 되고, 콜은 원할 때마다 모니터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인 것 같았다. 혹은 스피커로 말만 전할 수도 있을 테다.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피는 사이,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콜이 직접 움직이기 어려우니 이대로 끌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를 직접 마주치면 상황이 곤란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눈을 감은 채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아이작은 의자에 고정된 주먹을 움켜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결심을 마친 눈을 들어 올리고 자신의 맞은편에 느긋하게 앉아 사과를 베어 물고 있는 사내를 향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비치지 않았던 섬뜩한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툭. 발끝으로 널브러진 사내를 치워낸 아이작은 걸음을 옮겼다. 트럭은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상황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운전사가 차를 세우고 뛰어들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운전사는 바닥에 널브러진 세 놈 중 하나가 되고 말았을 뿐이다.

덕분에 컨테이너에서 빠져나가기는 더욱 쉬워졌다. 만에 하나 컨테이너가 잠겨 있었다면 그거야말로 곤란한 상황이었을 테니까. 아이작은 컨테이너 문의 손잡이를 피에 절은 손으로 쥐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부터 스피커의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케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다급했다. 그와 동시에 캄캄하던 모니터 위로 사내의 얼굴이 크게 드러났다. 자신을 이곳으로 붙잡아 협박한 사내이자, 무작정 끌고 가던 장본인, 콜이었다.

<어딜 가는 거냐! 네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이제 아무 데도 없다고 말했잖아! 내게 돌아오는 것밖에 네게 허락된 것이 없다고!>

발작하듯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아이작은 몸을 돌려 콜의 얼굴을 가득 담고 있는 모니터로 향했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를 일으키며 되돌아오는 아이작의 모습에 사내는 긴장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이미 네 신상은 전부 파악했어. 도망가 봤자 너는 잡힐 거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그러니-. 케이!>

화면 너머로 허리를 굽힌 채 다급히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아이작이 대뜸 모니터에 연결된 스피커를 떼서 내던져버린 탓이었다. 사내가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고함을 질러댔지만, 그 어떤 소리도 더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으로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지껄임이었다.

- 후회하게 될 거다.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아이작은 아무런 말도 없이 다리를 들어 올렸다. 퍽- 힘껏 내지른 발길질에 모니터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모니터를 발로 차버리고 싶다는 바람을 이제야 이루고 나니 속이 한결 후련했다.

콰당- 거나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른 모니터 속에서는 아직도 사내의 얼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직, 지직 선이 올라가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화면을 내려 보던 아이작은 다시금 발을 들었다.

콰직, 모니터 위에 달려있던 카메라가 부서졌다. 두어 번 사내를 비추고 있는 모니터에 발길질을 이어가자 모니터는 기어이 산산조각이 났다. 조각조각 부서진 화면 너머로는 마침내 그 무엇도 보이질 않게 되었다.

그제야 사나운 발길질을 멈춘 아이작은 부서진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그를 붙잡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엉망으로 다친 얼굴을 한 아이작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유히 프리웨이 갓길에 세워진 컨테이너 트럭에서 빠져나갈 뿐이었다.

* * *

새벽의 샌디에고 다운타운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높은 빌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무실의 퇴근 시간이 지나면, 다음 날 아침이 출근 시간이 될 때까지 이렇듯 삭막하게 잠겨버리고 만다.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버린다.

오후의 트래픽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뻥 뚫린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던 차는 마침내 어느 한 지점에서 끼이익, 급한 브레이크 소리를 울리며 멈춰 섰다. 상태가 썩 좋은 것 같지 않은 운전자는 아이작이었고, 차를 멈춘 곳은 그의 꽃가게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아이작은 잠시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엉망으로 헤져있는 옷차림과 머리부터 발까지 피에 절은 모습은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온통 뒤집어쓴 피가 전부 그의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찢어진 얼굴이나 부어있는 입술과 눈가의 상처는 제법 심각해 보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지나가는 다른 이가 그를 본다면 놀라 자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간이 절뚝거리면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걷던 아이작은 철문까지 내려져 있는 꽃가게 앞으로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곧장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 들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를 여는 그의 관자놀이 위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초조해서인지 자꾸 비켜간 탓에 자물쇠를 여는 시간은 더뎠다. 아이작은 이를 꾹 씹으며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마침내 손끝 아래에서 찰칵, 소리가 울리며 자물쇠가 풀린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그는 철문을 위로 올렸다. 드르륵, 큰 소리가 고요한 새벽 거리를 짧게나마 뒤흔든다.

그때였다. 철컥, 철문이 올라가는 요란한 소리에 묻힌 희미한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고 해도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권총의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였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긴장감에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는다.

컨테이너에서 도망쳐 나온 지 고작 서너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뒤쫓아 온 건가. 생각하니 목구멍이 칼칼하게 막혀왔다. 가게도 이미 알아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빨랐다.

“아이작, 너 어디 갔다 왔어? 그 꼴이 다 뭐야?”

그러나 음산하게 울리는 중저음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것이었다. 놀란 마음에 머리 위로 올리고 있던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휙,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장난을 치듯 글록 18C를 손에 쥐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필릭스의 찌푸려진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그제야 총을 장전하는 소리만 냈던 것임을 깨달은 아이작은 허탈한 숨을 흘렸다.

“하, 사람을 놀라게 해도 정도껏-.”

“함부로 상하게 하지 말랬지? 어디서 구르다 왔기에 이 지경이야?”

지나치게 사람을 놀라게 만든 그에게 불만 섞인 한탄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가라앉은 음성은 아이작의 말을 대뜸 잘라버리고 말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무섭게 굳어가고 있었다. 어찌나 사나운 욱기를 흘리는지 메마른 목구멍 아래로 마른침이 절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어떤 새끼야? 누가 감히 널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어?”

손을 들어 땀과 피에 젖은 아이작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올리던 필릭스가 으르렁거렸다. 그 모양새가 마치 어린아이가 어디서 맞고 오면 ‘누가 내 새끼 때렸어?’라고 외치는 부모처럼 보였기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기운 빠진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별일 아닙니다.”

“네 꼴이 이 지경이 됐는데 별일이 아니라고? 혼날래?”

필릭스는 분통이 터지는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아이작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두며 주변을 살피기만 했다.

차도 몇 지나다니지 않는 새벽의 도로는 한적했다. 가게는 모두 닫혀있었다. 필릭스는 가드도 없이 혼자 나왔는지 주변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질 않는다. 심지어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토니나 잭조차 보이질 않았다.

“설마, 혼자 나오신 겁니까?”

아이작은 도리어 그 점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필릭스를 마주 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작의 상처를 훑어보다 말고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였다.

“왜, 혼자 나오면 안 되는 법 있어?”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놈들이 대체 몇인지나 알고는 있는 겁니까?

따져 묻고 싶은 질문이 목구멍 위에서 돌덩이처럼 걸린다. 아이작은 잔뜩 찢어진 제 입가를 쓸며 한숨을 흘렸다. 그러다가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필릭스의 팔을 움켜쥐고 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길거리에서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 들어온 필릭스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필릭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을 뿐이었다. 덕분에 말이 가로막힌 필릭스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당신이,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 건지 제가 먼저 묻고 싶습니다.”

아이작은 냉랭하게 되물었다. 밖에서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엉망이 된 아이작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가 다시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드러나는 아이작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잠시 석상처럼 서서 말없이 아이작을 노려보던 필릭스는 끝내 포기한 듯 짧은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너, 계약 위반한 건 알고 있어?”

그러더니 어이없는 말을 툭 내뱉는다.

“무슨 말씀입니까?”

“정확하게 어제 새벽에 내 러트가 시작되었거든. 그런데 네가 사라졌지 않겠어? 덕분에 난 질색하는 억제제를 먹어야 했다고.”

“…….”

“네가 러트를 책임지기로 했는데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 엄연히 계약위반이 아니고 뭐야.”

거들먹거리는 필릭스를 멀거니 바라보던 아이작은 긴 숨을 흘리고 말았다. 예기치 못하게 콜에게 잡혔다가 이틀, 거의 사흘 만에 겨우 탈출해 나오자마자 필릭스가 계약위반이라며 꼬투리를 잡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월요일까지만 어떻게든 그를 보면 될 줄 알았는데, 러트가 있었다니. 이거야말로 복병이다.

“그래서 절 기다리기라도 한 겁니까? 이런 시간에, 문 닫힌 가게 앞에서, 혼자 절 기다리셨다고요?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필릭스는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아이작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래, 네가 사라졌다고 하니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누워서 뒤척이다 보니 여기서 지키고 있으면 널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더군.”

그의 태평한 대답에 더더욱 망연해지고 말았다. 이제 보니 눈치만 없을 뿐, 타고난 감은 기가 막히게 좋은 사내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혼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으면 어쩝니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오호, 그런 꼴을 하고 왔으면서 나부터 걱정하는 거야? 사람 감동시키는 재주도 있었네?”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비꼬는 그의 모습에 아이작은 또다시 한숨만 흘릴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속 좁은 남자가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할 말은 많은데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입술만 달싹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필릭스가 손을 들어 아이작의 입술 끝을 훑었다. 찢어져 아직도 핏물이 배어 나오는 입술을 살짝 건드리는 손은 비아냥거리던 말투와는 달리 조심스러웠다.

“이제 말해봐. 대체 뭘 하다가 이 지경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는지, 누가 널 이따위로 건드려놨는지. 말해.”

명령조에 가까운 음성은 한층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상대방의 이름을 내뱉기만 하면 그는 당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살인 청부라도 시킬 기세다. 서늘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흐르는 기분에 아이작은 숨을 멈췄다.

노루를 피하려다 범을 만나는 격이라고 했던가. 지금 상황을 정확히 대변해주는 것 같은 스티브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빙빙 떠다닌다.

“사적인 일입니다.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사적인 일? 신경 쓸 게 없어? 넌 나를 뭐로 보고 그따위 말을 해?”

으르렁거리며 다가서는 그의 표정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절로 시선을 피하고 뒷걸음질을 치게 만든다. 말 그대로 사납게 달려든 맹수에게 잡힌 토끼가 된 것만 같았다. 불을 켜지도 못한 탓에 밖에서 비치는 불빛이 전부인 어두컴컴한 실내의 기온이 자꾸만 낮아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필릭스-….”

아이작은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든, 혹은 변명이든 내뱉어야만 했는데 쉽사리 말이 나가질 않는다. 그 점이 괴롭다는 듯 제 목을 쓸어내릴 때였다.

가게 밖, 새벽녘의 고요한 차도 위에서 끼이익- 자동차 타이어 긁는 소리가 거칠게 울려왔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 아이작은 눈을 들고 가게의 유리문 너머로 날카로워진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아이작이 가게 앞 길가에 세워두었던 자동차 뒤쪽에서 환한 헤드라이트를 켠 SUV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모양새가 시야로 들어온다.

타이어 긁는 소리를 울릴 정도로 급정거를 해봤자 소용없는지 SUV의 속력은 좀처럼 늦춰지질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미친 듯이 내달리던 차량은 곧장 아이작이 타고 왔던 차를 힘껏 들이받았다.

쾅- 차의 범퍼 부서지는 소음과 함께 받친 차는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제야 SUV는 가까스로 정지했다. 정확하게 아이작이 차를 세워놨던, 가게 문 앞이었다.

“하, 미친 새끼 아냐? 술을 처마셨으면 대리운전이나 부르지 못하고-.”

필릭스가 버럭 성질을 내며 문 앞으로 한 걸음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아이작은 그의 팔을 붙들고 가게의 안쪽, 카운터 뒤편으로 내달렸다.

“뭐야?!”

“머리 숙이고 앉아요!”

필릭스의 머리를 꾹 누른 아이작은 그와 함께 카운터 뒤쪽으로 허리를 웅크리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탕, 탕, 탕- 벼락같은 소리가 일어나더니 유리문과 창이 와장창 부서진다. 정말이지 생각보다도 빠르고, 무모하게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가게를 아예 벌집을 만들기로 작정한 듯, 권총도 아니고 자동소총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정신 나간 놈들 덕분에 유리 파편은 여기저기 튀었고, 총알은 사방에서 빗발쳤으며, 박살 난 화초와 꽃과 흑, 물 등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아수라장이었다.

“저 새끼들 뭐야!”

그 가운데에는 당황한 필릭스의 거친 욕설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러더니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뒤춤에 꽂아둔 글록을 빼서 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권총이면서도 연사가 가능한 글록 18C의 끝에서는 불이 연달아 튀었고 귀가 얼얼할 정도의 소음은 실내를 가득 메웠다.

필릭스가 놈들과 맞서 총질을 해대는 사이, 아이작은 몸을 낮추고 가게의 깊숙한 쪽, 커다란 화분들이 빼곡히 놓여 어수선한 공간으로 빠르게 자리를 옮겨갔다. 카운터 뒤에서는 필릭스가 뭐하는 짓이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총소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일대를 울리고 있었다. 꼭 전쟁터의 한복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머릿속을 얼얼하게 울려대는 그 소리에 잠식당한 듯, 아이작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만 갔다.

민첩하게 가게의 가장 안쪽으로 기다시피 들어간 아이작은 화분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무의 흙을 감싸고 있는 플라스틱 임시 화분과 그것을 담고 있는 큰 화분 사이에 숨겨져 있던 것은 온갖 종류의 무기였다. 그것도 화분 하나가 아니라 거의 모든 화분에 하나씩 들어있었다. 무기를 담을 수 있는 가방도 나온다.

권총 및 단도, 탄창 등을 꺼내 바지에 하나씩 밀어 넣은 아이작은 나머지 무기들을 전부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백을 꺼내 곧장 열었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소음기가 장착된 기관단총이었다.

“하, 설마 MP5SD까지 가지고 있던 건가?”

말도 없이 이동하는 아이작을 엄호하던 필릭스가 단번에 기관단총을 알아보곤 허탈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시선조차 돌리는 일이 없었다. 재빠르게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기관단총을 손에 쥐자마자 탄창을 채우고 준비를 마친 아이작은 어느새 눈을 대고 조준하고 있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고, 총을 다루는 손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철컥, 울리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진압용, 대테러에 주로 쓰이는 무기가 익숙하다 못해 제 몸처럼 다루는 아이작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필릭스의 눈앞으로 불현듯 베레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엉겁결에 받자, 아이작은 눈도 돌리지 않은 채 ‘엄호하세요.’라고 외쳤다. 글록의 탄창이 빈 것을 귀신같이도 알아차렸다.

필릭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빠르게 안전핀을 푼 다음 양손으로 그립을 쥐었지만, 아이작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조준하고 있는 기관단총, MP5SD 끝에선 이미 불이 튀고 있었다. 소음기가 장착되어있는 모델인 탓에 생각보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소리는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SUV에서 내리지도 않고 가게 안을 쏘아대던 놈들의 사지가 총알을 맞고 퍽퍽 터져나가자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아이작의 사격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타깃을 노려보는 눈빛은 매서웠고, 손끝은 흔들림이 없었다.

필릭스는 제 조부가 사람을 파리처럼 죽인다고 투덜거렸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퍽, 퍽, 살과 피가 튀어 쓰러지는 놈들을 바라보는 아이작의 얼굴에선 그 어떤 동요나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치 사람이 아닌 물건, 혹은 단순히 표적 판을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기계적으로 기관단총을 쏘아댈 따름이었다. 아무리 소름 끼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린다고 해도 눈썹 한 번 까딱하질 않는다. 조준하는 탓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만 했을 뿐, 심지어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필릭스 역시 살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총질을 해왔고, 옆에서 총질하는 놈들을 수없이 보기도 했지만, 저토록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무감정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괴성을 지르고 분노를 드러내는 무장 괴한들이 더 인간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났다.

엄호하라고 던져준 베레타를 그러쥔 채 필릭스는 한참이나 아이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엄호 따위도 필요가 없었다. 아이작이 순식간에 SUV 한 대를 벌집으로 만들고 안에서 총질을 하던 정체불명의 괴한들을 전멸시켜버렸으니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의 반격이 이어지지 않고 고요해지자, 아이작은 MP5SD에 눈을 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발견되는 즉시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듯, 바짝 날이 선 기세였다. 그에게서 흐르는 섬뜩한 한기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아이작은 딱딱하게 굳은 채 자리에 앉아있는 필릭스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움켜쥐었다. 그의 어깨에는 이미 무기를 잔뜩 챙겨 넣은 가방까지 빠짐없이 들려있었다.

“시간 없습니다. 뛰어요.”

박살 난 유리 조각을 짓밟으며 아이작은 필릭스를 데리고 재빠르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총알받이가 된 차량은 너덜너덜했다. 그 안의 상황은 더 참담했다. 신음조차 들려오질 않는다. 살아남은 놈이 없다는 뜻이었다.

정적이 감도는 길 너머로 어느덧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총성이 이토록 크게 다운타운 전체를 뒤흔들었는데 경찰이 달려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테다. 아이작은 정체불명 괴한들의 SUV가 들이받은 탓에 반파되어버린 그의 차를 살펴보다가 곧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차, 어디에 두셨습니까?”

필릭스는 ‘이쪽’이라고 대꾸하며 아이작을 끌고 조금 더 앞으로 뛰었다. 그러자 부서진 차의 몇 미터 앞에 새까만 세단 한 대가 보였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필릭스의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이 근방에서 저 정도의 고급 세단을 쉽게 찾아보기는 어려웠으니까.

“운전은 제가 합니다.”

세단을 발견한 아이작은 곧장 운전석으로 내달렸다.

“이것 봐!”

“지금은 제 말을 들으세요.”

필릭스가 뭐라고 불평하려는 듯 소리치긴 했지만, 아이작은 아랑곳없이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다. 열쇠를 가진 필릭스가 가까이 다가온 것만으로도 문은 저절로 잠금장치를 해제했기에 차 문을 열고 타는 것은 수월했다.

아이작이 운전석 문을 열고 앉아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앉으면서도 필릭스는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필릭스를 못 본 척하며 아이작은 곧장 시동 버튼을 눌렀다. 역시 키를 따로 꽂지 않아도 낮게 엔진음이 울리고 계기판엔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아이작은 다시금 모든 불을 꺼버리고 다급히 액셀을 밟았다.

성능 좋은 세단이 급하게 튀어 나간 덕분에 안전벨트도 차마 채우지 못했던 필릭스가 뒤로 넘어지긴 했어도, 차는 다시금 고요해진 도심을 유유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들어 평온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험난하고 긴박한 새벽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끼이익- 드리프트라도 하는 것처럼 타이어 긁는 소리를 일으킨 세단이 멈춘 곳은 필릭스의 사저 앞이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던 필릭스가 벤자민을 납치해왔을 때 단 한 번 와봤던 곳이었지만, 아이작은 내비게이션도 필요 없이 정확하게 찾아와 멈춰 섰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작의 현란하면서도 거친 운전을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던 필릭스는 차가 무사히 멈춰 서자 비로소 짧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곤 한층 피곤해진 기색을 내비치며 아이작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아이작의 얼굴은 여전히 처참했다. 붓고 찢어진 눈과 입술, 피가 줄줄 흐르다가 말라버린 이마, 그밖에 자잘한 멍 자국이 노란 등불 아래에서 선명하게 비춘다.

“설마 이 정도로 당했을 줄은 몰랐는데…….”

엉망으로 뭉개진 아이작의 얼굴을 배회하던 푸른 동공이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아이작이 핸들을 붙든 그대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필릭스의 한숨 소리가 무겁게 흩어졌다.

“그 새끼들 누구야? 누군데 널 이따위로 만들어놔?”

“…….”

“아니, 너, 뭐하던 놈이야? SWAT(미국 경찰 특수 기동대)에라도 있었어? 기관단총 다루는 솜씨가 꽃다발 만드는 솜씨보다 훨씬 낫잖아?”

대뜸 던지는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작은 시선조차 돌리질 않는다. 표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하기만 했다. 조금 전 기관단총을 놈들에게 쏘아댈 때보다는 조금 풀어진 인상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감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필릭스는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끝내 아이작은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피곤함이 역력히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엉망으로 터진 상처도 상처였지만, 움푹 들어간 눈이라든가 까칠해진 뺨이 그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었다.

전혀 마음에 드는 답변은 아니었지만, 필릭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숨을 흘렸다. 아이작을 심문하고 싶은 것도 아니거니와, 그럴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에게는 치료와 안정이 더 급했다.

“알았어, 네 사정이 뭔지 캐묻지 않을 테니까 우선 내려. 상처부터 어떻게 좀 하자고.”

달칵, 필릭스가 조수석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아니요. 저는 당신만 내려주고 가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차는 당분간 빌리겠습니다. 키는 두고 가세요.”

운전석에 앉은 아이작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차 문을 열다가 말고 움직임을 멈춘 필릭스는 어이없다는 투로 아이작을 쳐다봤다. 차를 강도질하겠다는 말을 참으로 당당하게 내뱉는 태도도 어이없었지만, 저 꼴을 하고 굳이 이대로 가겠다는 결심은 더더욱 어이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만 보면 과연 어떻게 기관단총을 들고 놈들을 전멸시킨 다음 여기까지 운전을 하고 올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만 할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를 악으로 버티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내리지 않겠다니. 이거야말로 똥고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괜한 고집을 부리는 아이작을 일렁이는 푸른 눈으로 노려보던 필릭스는 분을 삼키느라 눈을 질끈 감았다 들었다.

“제정신이야? 그런 꼴을 하고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당장 내려. 아니면 내가 널 강제로라도 끌고 내릴 테니까.”

그러나 화를 가라앉히려는 노력도 무색하게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뭐라고 해도 이대로는 안 된다. 아이작이 당장 어디로 가려 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몇 마일 채 가기도 전에 기절해버릴 것 같은 모양새라는 건 더 큰 문제였다.

한숨을 푹 내쉬다가, 주름 잡힌 이마를 손끝으로 문지르기도 하며 화를 삼킨 필릭스는 더는 듣지 않겠다는 결심을 내비치며 몸을 돌렸다. 이대로 내리면 사실 끝이긴 했다. 세단의 키는 자신이 갖고 있었고, 키가 멀어지면 차는 저절로 잠기고 말 테니 말이다.

“키, 두고 내리세요.”

그러나 필릭스는 더는 움직일 수가 없어졌다. 철컥, 귓가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반자동 권총의 슬라이드가 뒤로 당겨지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아이작은 베레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조금 전,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에게 기관단총을 쏘아댔을 때와 마찬가지로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총구는 정확히 필릭스에게 향해 있다. 아이작과 그가 쥐고 있는 베레타를 번갈아 노려보던 필릭스의 눈매가 일순 험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소름 끼칠 정도로 낮아진 필릭스의 목소리가 자동차 안에 가득 찼다.

“내리세요. 저는 알아서 가겠습니다.”

“아이작. 내가 누군지 알고 총을 겨누는 건가?”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게 맞겠죠. 그러니 내리세요. 내리지 않으면 쏩니다.”

아이작은 예의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시선으로 필릭스를 마주했다. 그러나 필릭스 역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작, 이대로는 못 보내.”

“지금은 제 말을 따르세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치료만 받으라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필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처절한 심정이었다. 지금 이대로 손을 놔버리면 두 번 다시 쥘 수 없을 것만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이런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담담하게 마주할 뿐이었다.

“준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게다가 당신과 이 이상 엮여봤자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당신에게나 저에게나.”

“네가 처한 상황이 뭔지 말해. 내가 해결해줄 테니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등줄기를 오싹하게 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번득이는 푸른 눈동자 역시 사납기 그지없다.

“아니요.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일이고, 당신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지급해야 하는 계약은 어떻게든 메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시간을 주세요. 개인사를 마무리할 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을 해도 아이작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의 개인사에 얽히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 명확하게 느껴지는 탓에 순간 필릭스는 더더욱 열이 치솟고 말았다.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벽을 세우는 이유가 뭔지. 필릭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아이작-!”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단언하건대, 저는 당신에게 장애를 입히는 것은 피하면서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총상을 입힐 겁니다. 몇 날 며칠 침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지내고 싶지 않다면, 지금 키 두고 내리십시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총구는 허벅지 안쪽을 향했다. 대퇴골을 비껴서 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의 말마따나 장애가 되진 않겠지만 총알에 살이 터져 오랫동안 고생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필릭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움직이질 않았다. 알게 모르게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그러자 탕-,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작은 방아쇠를 당겼다. 고막이 터져나갈 것 같은 총성에 머리가 얼얼하게 울린다.

필릭스의 다리는 아직 멀쩡했다.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간 총알은 차의 문짝에 박혀있을 따름이었다. 필릭스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망가진 문짝을 눈에 담고 있는 사이, 총구는 더 정확히 필릭스의 다리로 향했다.

“제가 쏘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보여드린 겁니다. 두 번째는 빗나가지 않게, 제대로 쏠 겁니다.”

“그만둬.”

“내리세요.”

조금도 굽히지 않는 태도에 필릭스는 끝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제 다리를 조준해서 쏠 테였다. 흔들림 없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눈빛이었다.

조수석의 문을 벌컥 열자 차가운 새벽의 바람이 훅 불어왔다. 그제야 자동차 내부를 가득 메우던 메케한 화약 냄새가 희석된다.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필릭스는 주머니에서 세단의 키를 꺼내 지금껏 앉아있던 조수석 의자 위로 툭 던졌다.

“이제 만족하나?”

탕, 거칠게 차 문을 닫아버리기까지 한 필릭스는 사납게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지만, 벤자민을 잘 부탁드립니다.”

필릭스의 살기 어린 눈빛을 고스란히 마주한 아이작은 그제야 베레타를 자동차 키 옆으로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하, 짧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와중에도 벤자민을 걱정할 여유가 남아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넌, 내게 엄청난 빚을 진 거야.”

“압니다.”

“이 빚은 이자까지 쳐서 고스란히 받아낼 거다.”

“…알겠습니다.”

아이작은 순순히 대답했다.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투였기에 필릭스는 비스듬히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가봐.”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자세로 필릭스는 오만하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핏물이 말라붙어있는 손으로 세단의 기어를 바꾸고 차를 급히 출발시켰다. 헤드라이트도, 야간 등도 모두 꺼버린 세단은 금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습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필릭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세단의 잔상을 쫓으며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금사 같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눈은 욕심 사나운 빛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작, 내게 진 빚에 이자까지 치면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내게 줘야 할 거야. 물론 난 빠짐없이 전부 받아낼 거고.”

한참 만에 가까스로 내뱉은 속삭임은 차가운 새벽바람보다 더한 한기와 노기를 품고 있었다. 어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필릭스는, 주먹을 힘껏 움켜쥔 채 가까스로 몸을 돌렸다. 지금껏 살아온 시간 중 최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참담한 새벽이었다.

* * *

벌컥, 문을 젖히고 들어서자마자 안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새벽이었건만 ‘보스!’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허겁지겁 나무 바닥이 울리도록 뛰는 소리가 온 저택을 뒤흔든다.

필릭스는 가라앉은 심기를 갈무리하지 않은 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놈들을 무심히 쳐다봤다. 토니와 잭을 비롯한 저택의 집사와 몇몇 수하들은 한결같이 하얗게 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도 없이 늦은 밤, 혼자 저택을 빠져나갔다가 왔으니 놀랄 만도 했으리라.

“세상에! 이 시간에 감쪽같이 사라지면 어떻게 합니까!”

“나가실 일이 있으면 누구라도 불러서 같이 가셔야지 혼자 불쑥 나가버리니 난리가 나잖습니까.”

“실종신고 낼 뻔했습니다. 대체 어디에 가신 겁니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살기 어린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놈들은 뚝,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소란스럽던 주위는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필릭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비로소 감지한 토니와 잭, 그밖에 저택의 집사와 수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지나치게 흥분했던 자신들을 탓해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홀을 가로지르는 필릭스를 살피며 뒤따라오던 토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서늘한 한기를 흘리기만 할 뿐, 필릭스는 대꾸도 없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토니는 뺨을 긁적이며 난감함을 드러냈다.

“노아, 지금 어딨어.”

필릭스가 굳게 다물고 있던 말문을 불쑥 연 것은 홀을 반쯤 지나서였다.

“지하에 있을 겁니다.”

“아직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 건가.”

가늘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필릭스는 야차처럼 보일 정도였다. 토니는 어깨를 움츠리며 한숨을 나직이 흘렸다.

“단서가 없다고 하더군요.”

노아는 못 해 먹겠다며 성질을 부리지, 필릭스는 감쪽같이 사라졌지, 난리도 아닌 새벽이었다.

“단서? 그놈이 언제부터 단서가 필요했다고? 해킹에 관해선 세계 최고라고 콧대 높이면서 자랑하던 새끼 아니야?”

“네, 그게 그랬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곤혹스럽기만 한 토니가 말을 얼버무리자 필릭스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앞장서, 노아에게 갈 테니까.”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더 풀어내더니 목을 좌우로 움직여 뚜둑, 소리를 울리게 하는 필릭스는 굳이 묻지 않아도 노아를 족치러 가는 분위기였다.

“보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다그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토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필릭스는 눈동자만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다그치지 말라고? 벌써 며칠째인데 이러고 있어? 내가 지금 뭘 보고 겪고 왔는지 알기나 해?”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겁니까? 말을 해주셔야 알죠.”

토니도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쾅쾅 내려치며 개탄했다.

“그러니까, 아이작이-!”

빠른 걸음으로 지하를 향해 내려가던 필릭스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금세 입을 꾹 다물고 이를 씹었다.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아이작과 그의 꽃가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토니에게 설명하기 위해 떠올리다 보니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열이 다시금 확 치솟는 탓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가 절로 갈렸다.

네가 감히 나에게 총을 겨눠? 얼마나 기다리던 러트였는데 난데없이 사라져 계약도 위반한 데다가, 멋대로 잔뜩 다쳐오기까지 했으면서, 상관하지 말고 차 키나 두고 내리라고?

자동차를 뺏기고 쫓겨나기까지 한 초유의 사건에 뒷목이 뻣뻣해지도록 분통이 터졌다. 혈압이 올라 뒤로 넘어가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다. 하지만 더 분통이 터지고 미칠 것 같은 일은 따로 있었다.

건방지게도 제 차를 강도질한 다음 튀어버린 아이작이었건만, 지금쯤 그런 꼴을 하고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중간에 쓰러지진 않았는지, 상처는 제대로 치료할지 걱정되어 심장이 울렁거린다는 점이 억울할 따름이었다.

“아이작 씨에게 문제 있습니까?”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필릭스를 빤히 바라보던 토니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였다. 그제야 아이작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던 필릭스가 흘끔 눈을 들었다.

“문제가 있지. 있고말고.”

광적인 빛을 번득이는 푸른 눈은 음산하기만 했다. 쭈뼛 소름이 돋는 기분에 토니는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작 덕분에 족칠 놈들이 생겼거든.”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그의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토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릭스는 비스듬히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주, 뼈까지 갈아버릴 놈들이 말이지.”

나직이 중얼거리는 중저음이 서늘하게 울리는 것과 동시에 필릭스는 어느새 도착한 지하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안에서부터 짜증이 가득 묻어 있는 신랄한 욕설과 땅이 꺼져라 내뱉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의 지하는 필릭스의 비밀 기지나 마찬가지였다.

넓은 공간에는 어느 기관의 정보실을 연상시킬 정도로 셀 수 없는 모니터와 컴퓨터 시스템이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시스템들은 빛을 번쩍이며 분주하게 돌아간다. 그 앞에는 두엇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기도 했다.

정보는 무기상인 필릭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일 중 하나였다. 특히 그 어떤 정보라도 가장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는 신조를 지닌 필릭스로서는 이토록 엄청난 설비를 갖추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밖에도 이곳에는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연구소와 공장, 판매업에 대한 각종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물론 회사의 헤드쿼터는 엄연히 다른 지역에 존재했고, 그곳의 CEO는 총괄적인 업무를 대외적으로 맡아서 진행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필릭스의 사저에서 관리하는 정보들은 성격이 약간 달랐다.

일반적인 비즈니스 업무보다는 기밀 사항이 많다는 점이 우선 다르다. 대부분 군정부와 관련된 일이었다. 말 그대로 그의 사업의 핵심부나 마찬가지였는데, 필릭스는 그것을 비밀리에 저택의 지하에 차려놓고 관리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휴양지 같은 샌디에고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유유자적 놀고먹으며 사업에서는 잠시 손 뗀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겉으로는 한량처럼 보이게 하면서 뒤로는 빠짐없이 정보를 캐고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느라 좀처럼 쉴 틈이 없다. 지하까지 직접 내려올 필요는 없다고 해도, 저택 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그의 업무량은 대부분 상상을 초월하곤 했다.

어찌 되었든 지하 전체를 넓히고 개조해 정부와 관련된 정보를 캐고, 무기 사업의 관제탑처럼 쓰고 있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필요에 따라 불법 해킹이 멋대로 이뤄지고 있고, 그 본거지가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불법 해킹을 주로 주도하는 인물, 세계에서 톱으로 손꼽히는 해커가 지금 눈앞에서 미친놈처럼 긴 머리카락을 흩트린 채 책상에 엎어져 욕설과 한숨을 번갈아 내뱉는 중이었다.

“드디어 미치기라도 했나?”

아니지, ‘드디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저놈은 원래부터 미쳐있었으니까.

필릭스는 인사도 없이 찌푸린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키보드 앞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사내는 노아 펠리체였다. 바로 필릭스의 사촌이자, 컴퓨터와 기계에 미쳐있는 자이자, 세계 최고의 해커이자, 위험한 정보를 캐내며 오르가슴을 느끼는 변태이자, 필릭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측근이자, 최우성 오메가인 또라이.

가까이 다가서자 노아는 얼굴을 뒤덮고 있던 엉클어진 긴 머리칼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래 봤자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야, 이 씨발놈아…….”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마른 몸 위로 헐렁하게 낡은 박스티와 느슨한 반바지를 걸쳐 입고 있는 노아는, 필릭스를 보더니 대뜸 욕설부터 내뱉었다. 그러나 그 욕설 또한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는 그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이 흐리멍덩하다. 올리브그린의 눈깔까지 탁해진 게, 맛이 가긴 간 모양이었다.

“아이작의 새아버지를 알아보라고 했더니, 그게 그렇게 어려워? 퇴물 다 됐다고 광고하는 거냐?”

필릭스는 코끝으로 노아를 비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너 이 새끼, 유령이라도 만나고 다니는 거야? 나오는 게 하나도 없잖아! 내 평생 이렇게 희한한 건 처음 본다고!”

언제 문어처럼 흐느적거렸나는 듯 노아는 벌떡 일어나 눈을 번득이며 쏘아댔다.

“아이작 싱클레어, 그리고 그의 부친인 유진 싱클레어. 아주 깨끗해. 완벽해서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단 말이야. 그의 부친은 이혼 후 누군가를 만난 기록이 하나도 없어!”

“그건 토니가 조사했을 때도 나타났던 결과야. 그래서 널 불렀잖아.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내가 뒤져도 마찬가지였어! 조사할 수 있는 기록은 그게 전부라고. 게다가 토니가 워싱턴으로 직접 사람을 보내서 뒷조사까지 시켰는데도 아무것도 나오질 않아! 아이작이라는 놈이 널 교란하려고 거짓말이라도 한 거 아니야? 아니면 조작된 기록이라든가!”

다그치는 그의 말에 필릭스는 눈을 가늘게 접고 말았다. 아이작이 거짓말을 할 위인은 못 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있었겠지, 부러 거짓을 지어내어 말할만한 성격은 아니다.

그런 그가 제 입으로 어려서 새아버지가 있었고, 알파였다는 말을 흘렸다. 그렇다면 분명 새아버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필릭스는 가만히 아이작의 무감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확신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그 무엇도 나오질 않는다. 노아가 조사해봤자 똑같이 평범하게 학교에 다녔고 직장을 다닌 기록밖에 없다니, 괴상한 노릇이긴 했다.

“네 말대로 조작됐겠지.”

필릭스는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순간 노아는 대뜸 눈썹을 기이하게 휘었고, 등 뒤에 서 있던 토니는 목구멍 위로 낮은 소리를 흘렸다.

“평범한 플로리스트라며 어떻게 장담해?”

단순히 사람에 대해 눈치 없는 필릭스를 잘 알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들은 소문이 있어서인지, 노아는 대뜸 의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필릭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쯧, 혀를 찼다.

“아이작이 기록상이든 뭐든 마냥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일 수가 없으니까. 평범하게 학교를 나와 평범한 회사에 다니다가 꽃가게를 차렸다? 웃기는 소리. 내가 바로 전에, 그가 MP5SD를 무서운 실력으로 쏴대는 걸 목격하고 왔는데.”

“MP5SD? 소음기 달린 기관단총? 그리고 바로 전이라니, 너 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할아버지가 얌전히 근신하라고 하셨잖아!”

노아가 입을 딱 벌린 채 필릭스를 올려봤다.

“닥쳐. 어디서 할아버지 운운하는 거냐. 그리고 내가 아니라 아이작을 뒤쫓는 놈들이었어.”

어? 필릭스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노아는 어벙한 소리를 흘리며 눈을 끔벅였다.

“노아, 너 관공서 해킹하는 거 좋아하지?”

그러거나 말거나 필릭스는 대뜸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노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다 뿐이야? 아주 환장을 하지. 하지만 웬만한 곳은 다 해봐서 재미없어.”

“일단 경찰서 먼저 쳐봐.”

필릭스는 노아의 앞에 있는 모니터를 툭툭 두들겼다.

“경찰서라니?”

“몇 시간 전에 샌디에고 다운타운에서 총격전이 일어났거든. 평화롭기 그지없는 샌디에고에서 어떤 미친 개새끼들이 자동소총을 난사해서 아이작의 꽃가게를 벌집마냥 쑤셔놨다고. 믿어져?”

“허어?”

멀거니 필릭스를 바라보던 노아뿐 아니라 뒤에 서 있던 토니가 대뜸 이상한 소리를 흘렸다. 그의 말대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는지 둘의 표정은 똑같이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덕분에 그의 꽃가게는 개판이 되었고, 하마터면 아이작과 내 몸에 총구멍이 너덜너덜하게 날 뻔했지. 아이작이 곧바로 기관단총을 들고 놈들을 전멸시키지 않았으면 분명 그렇게 됐을 거다.”

필릭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분위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문을 열지도 못했다.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에서 총격전이라니. 게다가 아이작이 기관단총을 들고 대응했다니 누가 쉽사리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눈을 번득이며 살기를 흘려대는 필릭스는 결코 농담 따위를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눈앞에 일을 사주한 놈이 보이기만 하면 당장 모가지를 비틀 것처럼 섬뜩한 표정일 뿐이다.

“그 새끼들 어디 소속인지 찾아내. 아주 개작살을 내줄 생각이니까.”

팔짱을 낀 채 눈을 번득이는 그에게선 오싹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감히, 소총을 들고 아이작의 가게를 아작 내? 그것도 내 눈앞에서? 절대 가만 안 둬. 노아, 당장 뒤져서 신원 파악해. 토니, 애들 준비시켜. 노아가 찾아내는 즉시 쳐들어가게.”

빠르게 명령하는 필릭스를 바라보던 노아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필릭스, 네가 말한 게 사실이면 단순히 경찰 관할이 아니라 FBI로 넘어갈 확률이 커. 뭐, FBI까지 뒤져야 한다면 나야 신나는 일이긴 하지만……. 넌 대체 어떤 녀석을 만나고 다니는 거냐.”

갑자기 따지듯이 묻으며 노아는 필릭스를 훑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딱 저 같은 것을 만났나보다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어디서 만나도 그런 해괴한 인간을 만난 건지. 노아의 혼잣말은 누구나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아무리 신원조회를 해봐도 털려 나오는 것도 없는 데다가 심상치 않은 무기를 다루기까지 했다니. 대체 뭐야? 진짜 유령이라도 돼?”

비아냥거리는 노아에게 필릭스는 짙어진 눈을 돌렸다.

“처음으로 같은 생각을 하는군. 나도 그가 유령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거든. 평범한 꽃집 청년인 줄 알았는데 의심스러운 개인사를 잔뜩 갖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보통이 아니라는 예상은 했지만, 능수능란하게 총질까지 하는 모습은 기대하지 않았단 말이야.”

필릭스가 어지러운 심정을 고스란히 내비치자 노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그런 사람을 선택한 네 탓이지.’라고 중얼거리면서.

“확실한 건, 유령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인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야. 기관단총에 순식간에 탄창을 끼워 넣고 어둠 속에서도 정확하게 사람을 쏴서 죽이는 일반인은 드물 테니까.”

“뭐, 확률은 적긴 할 테지만 단순히 무기에 빠진 사람일 수도 있어. 신원이 깨끗한 것도 그런 이유일 수도 있고.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믿지 못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노아는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세상엔 무기를 사랑하는 놈들이 수두룩했고, 그들은 온갖 종류의 무기를 사들여 어떻게든 테스트를 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 놈들은 대부분 합법인지 불법인지 상관하지 않고 멋대로 사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일반인들도 무기에 빠져서 콜렉트하는 놈들은 허다하니까. 하지만 숱하게 무기를 다뤄본 전문가와 단순히 무기를 좋아해서 콜렉트하고 시험하는 놈들과는 기본자세가 달라.”

“당연히 그렇긴 하겠지만…….”

“말했듯이 아이작은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소총을 갈겨대던 괴한들과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대치했어. 그렇게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흔들림 없이 놈들에게 반격할 수 있는 일반인은 없어. 덧붙이자면, 사람을 한두 번 죽여 본 솜씨도 아니야. 아주 숱하게 죽여 없앤 분위기였지.”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일을 회상하는 필릭스의 푸른 눈은 한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면서도 믿기가 어려울 정도니, 보지 못한 노아나 토니는 더더욱 믿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일말의 감흥조차 없을 정도로, 마치 표적 판을 맞추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놈들의 대가리를 터뜨려 죽였으니까.”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어느덧 갈라져 있었다. 생각할수록 노아의 말처럼 유령이라도 만난 기분이 들었다. 혹은 자신이 알던 아이작 대신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만난 기분마저 일어난다.

“세상에…….”

잠자코 필릭스의 말을 듣고 있던 토니가 한숨처럼 흘리는 소리가 울렸다.

“와우, 대단한 놈이네.”

물끄러미 필릭스를 바라보던 노아 또한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였다.

“혹시 마피아나 갱단은 아니고? 갱단도 갱 나름이라 요즘엔 정말 무섭다고. 놈들끼리 세력다툼 하는 걸 수도 있잖아.”

필릭스는 다시 눈을 들고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기실 마피아 간부인 조부나, 무기상을 하는 필릭스 자신이나 무기는 손에 익을 대로 익은 사람들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 대부분이 그렇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온갖 무기와 무기를 쥔 사람들에게 익숙해 있었지만, 그들과 아이작은 뭔가 다르게만 느껴졌다.

마피아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운 필릭스야 무기를 빠삭하게 잘 안다고는 해도 직접 손에 쥐고 쓸 일이 많지 않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부나 자신의 수하 중에서도 아이작 같은 태도와 분위기를 가진 놈을 본 적이 없었다.

“갱처럼 하찮은 놈들은 아니야.”

갱이나 마피아가 아니라는 대답에 실망했는지 노아의 몸이 다시금 문어처럼 흐물흐물 의자에 푹 파묻힌다.

“말한 대로 우선 오늘 총격전을 일으켰다가 전멸당한 놈들의 소속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봐. SDPD (San Diego Police Department)건 FBI건 다 털어. 우선 공격한 놈들이 누군지 알아내는 게 먼저여야 될 테니까.”

“일이 생각보다 꼬이고 있잖아.”

노아는 툭, 툭, 키보드를 성의 없이 두들기며 투덜거렸다.

“그다음에 아이작에 대해 다시 조사해. 이대로 얌전히 넘어가진 않을 거다. 아무래도 뭔가 있어. 제대로 캐내, 그가 누군지, 그의 새아버지는 누구였는지,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고로 죽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내.”

“젠장, 말은 쉽지.”

“네놈이 세계 제일의 해커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으면 실력을 보여야 할 것 아냐.”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줬잖아! 게다가 해커가 흥신소 일을 하는 건 아니라고.”

노아는 억울하다는 투로 반박했지만 필릭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다 뒤져. 어딜 뒤져도 상관없으니까.”

엉클어진 머리를 부스스 흩트리며 모니터를 노려보는 노아의 얼굴은 초췌했다. 대체 뭘 해 먹던 자식이냐며 끊임없이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려던 필릭스는 입이 삐죽 나온 노아를 돌아보며 쯧 혀를 찼다.

“이번 일만 제대로 도와주면 나도 네게 제대로 된 선물을 해줄 테니까, 일해.”

시큰둥한 목소리였지만 노아의 올리브색 눈이 번쩍 빛을 발한다.

“뭐? 뭐 해줄 건데?”

“네가 늘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온갖 장치가 다 달린 메가 딜도.”

“오…… 그거, 입맛 당기네.”

시큰둥한 필릭스는 아랑곳없이 노아는 금세 눈을 빛내며 군침을 흘렸다. 벌써 갖고 싶어 죽겠다는 뜻을 역력히 드러내는 얼굴에 필릭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최우성 오메가이면서 알파의 페로몬 냄새를 싫어하는 노아는 알파 혐오자였다. 그렇다고 베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서 나는 체취 자체가 싫은 거다.

덕분에 그는 언제나 사람보다는 기계장치와 딜도, 그밖에 섹스 토이에 매달렸는데, 그러면서도 색욕은 누굴 닮아 그리 강한지 그의 엉덩이에 뭔가가 박혀있는 날이 박혀있지 않은 날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어쩌면 지금도 뭔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즉, 변태 중에 상 변태라는 뜻이다.

그런 노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필릭스는 슬쩍 미간을 접었다. 필릭스가 오메가를 썩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4년 전 그의 팔을 부러뜨렸던 건방진 오메가가 크게 한몫하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 보아온 최우성 오메가인 노아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했다.

“잊지 말고 꼭 사 와라? 네 팔뚝만 한 걸로 골라 와야 해!”

언제 문어처럼 흐느적거렸냐는 듯 노아는 싱글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일이나 똑바로 해.”

그래 봤자 필릭스는 할 말은 다 했고, 더는 얼굴 마주하기 싫다는 감정을 역력히 내비치며 냉랭하게 등을 돌렸을 뿐이었다.

토니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필릭스를 따라 걸으며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꽃가게를 벌집처럼 쑤셔놓은 무장 괴한에 대한 정보를 따로 알아보라고 한 지시와 더불어 조만간 그놈들을 치러 갈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지시였다.

어수선했던 지하실을 빠져나가 계단을 오르던 무렵이었다.

“벤자민 지키는 경호원, 두 배로 늘려.”

필릭스의 화가 묻어 있는 음성이 툭 던져졌다. 예상치 못했던 명령에 내심 놀란 토니가 눈을 들었다. “네?” 저도 모르게 되묻는 말이 튀어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놀랄 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아니지. 아예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편이 낫겠군. 벤자민과 아이작의 모친까지 전부, 극진히 모셔와. 이곳에서 머물게 하는 편이 ‘가장 안전할’ 테니까.”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의아해진 토니가 묻자 계단을 오르던 필릭스는 고개를 돌리더니 불현듯 서늘한 웃음을 머금는다.

“아이작이 ‘벤자민을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거든. 그러려면 내 집처럼 안전한 곳이 또 없잖아?”

“…….”

“게다가 아이작을 다시 잡아 오려면 미끼가 있어야 하니까. 미끼 중에 가장 확실하게 물 만한 미끼는 벤자민과 그의 모친이고 말이지.”

입술을 비틀어 올리는 그의 표정은 야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토니는 이번에도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대체 아이작이 무슨 짓을 어떻게 했기에 필릭스가 이토록 이를 갈며 섣불리 말을 걸기도 두려울 한기를 흘리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고.”

음산한 한마디를 흘린 필릭스는 다시 몸을 돌려 빠르게 계단을 밟고 올랐다. 뚜벅뚜벅 울리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흘려들으며 토니는 심란한 심정을 감추고 따라 걸어야만 했다.

* * *

눈부신 햇살에 뻑뻑한 눈이 절로 들어 올려졌다. 퉁퉁 부은 눈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눈동자만 움직여 주위를 돌아보던 아이작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필릭스에게서 빼앗은 세단의 운전자석에 앉은 상태였다.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엎드린 자세이기도 했다. 이러고 몇 시간을 까무룩 자버린 거다. 한탄하며 허리를 곧추세우자 온몸이 뻐근하게 울려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세단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필릭스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그가 던지고 간 키와 베레타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뒷좌석에는 꽃가게에서 챙겨왔던 무기를 담은 가방도 있다. 지난밤 일이 전부 꿈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명백히 알려주는 증거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속이 쓰릴 따름이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아이작은 차에서 내렸다. 햇빛은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지만, 아직 오전 시간인 탓에 바람은 싸늘했다. 샌디에고의 동쪽 내륙으로 달리는 프리웨이 위의 휴게소는 텅 비어있기에 더더욱 휑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미국 전역이 그랬다. 큰 도시를 빠져나가면 이렇듯 허허벌판이 펼쳐진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긴 프리웨이 주변엔 돌산과 드넓은 광야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고, 바닷가 방향이 아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더 심했다.

휴게소 또한 마찬가지다. 황무지 위를 달리는 프리웨이 옆에 덩그러니 마련된 것이 휴게소였다. 따라서 휴게소라고 해봤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주차장과 화장실, 간단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벤치와 자판기 몇 개가 전부였다. 어떤 곳은 자판기마저 없다. 길고 긴 프리웨이를 달리다 보면 화장실이 필요하니 볼일을 보고 잠시 스트레칭이나 하다가 가는 곳이다.

아이작은 평일 오전이기에 더더욱 인적이 드문 황량한 휴게소를 저벅저벅 걸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간단히 세수하며 핏물과 쌓여 있던 먼지를 대충이나마 닦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모양새는 처참하기만 했다. 어쩌면 하루 이틀이 지나버린 탓에 더 심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곳에는 으레 그렇듯, 깨지기 쉬운 진짜 거울 대신 잔뜩 낙서가 되어있는 스테인리스 거울이 달려있었다. 그 위로 흐릿하게나마 제 모습을 비춰보던 아이작은 혀를 찼다. 그러나 곧 상처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가게에서 챙겨온 휴대폰을 들어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조금 더 달려야 했다. 대략 한두 시간 더 달리다 보면 작은 소도시가 나온다. 아이작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의 지역 은행에 맡겨두었던 물건을 찾아올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완벽히 짜인 것은 아니었지만, 먼저 해야 할 일부터 하자고 마음먹은 아이작은 한 번 더 손을 닦은 후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습기라곤 조금도 없는 사막기후의 건조한 바람이 젖은 얼굴과 머리칼을 금세 마르게 했다. 발밑에서는 모래와 흙이 부서지는 소리가 삭막하게 울린다.

바다를 끼고 있는 샌디에고에서는 이 정도로 건조한 바람이 불지는 않지만, 내륙으로 조금만 이동해오면 이렇듯 메마른 사막기후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 펼쳐진 황무지보다 더 건조한 얼굴을 한 아이작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길을 걷기만 했다.

세워둔 세단 앞으로 다가서자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때문이었는지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필릭스를 떠올렸다. 지난 새벽, 차에서 억지로 내리게 하자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모습. 화를 내면서도 걱정하고 초조해하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푸른 눈동자까지.

눈앞으로 아른거리는 그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단순히 무거워지는 것뿐 아니라 시큰하게 저린 감각마저 퍼져갔다. 과연 이 기이한 통증이 뭔지 알 수가 없어 반사적으로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단지 필릭스를 떨치고 도망쳐왔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황무지처럼 메마른 감정이 가슴 안쪽에서부터 번져가기 시작한다. 심장이, 온 가슴이, 온통 사막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버석거렸다.

“필릭스…….”

머리 위로 뜨거운 태양 빛이 작열하고 있었다. 언젠가 필릭스와 함께 호텔의 리조트에서 느긋하게 만끽했던 햇살과는 달리 제 온몸을 통째로 태워버릴 것처럼 뜨겁고 삭막한 빛이었다. 어쩌면 푸른 바다와 닮은 필릭스가 곁에 없기에 느껴지는 차이인지도 모른다.

문득 그에게서 느껴지던 청량감이 그리웠다. 어디에서도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쉽고 또 아쉬운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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