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6)

6. Secret No.1

쿵- 소리와 함께 사내의 육중한 몸이 벽에 처박혔다. 사내의 목을 팔로 가로막으며 벽에 짓누르고 있는 아이작의 눈빛은 날 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사내는 반항하거나 움직임이 없었다. 외려 순순히 항복한다는 뜻을 비치며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을 따름이다. 사내를 바라보는 아이작의 표정은 마치 귀신을 마주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이것 봐. 내가 널 헤칠 생각이었으면 넌 벌써 총에 맞아 바닥을 뒹굴고 있었을 거야. 알잖나. 그러니 우선 팔 좀 치워주게.”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는 못 참겠다는 듯 목을 조르고 있는 아이작의 팔을 탁탁 두들겼다. 그의 얼굴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천천히 팔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캑캑거리며 기침을 토하던 사내는 잠시 후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손바닥으로 쓸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사내가 엄살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이작은 아직도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4년 만인가? 자네도 제법 많이 변했군. 길 가다가 마주치면 알아보기도 어렵겠어.”

“-….”

“그나저나 오랜만의 조우인데 이렇게 복도에 세워두기만 할 셈인가?”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아이작을 훑어보던 사내는 낯짝도 두껍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당당히 요구했다. 잠시 말을 잃어버렸던 아이작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말없이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길을 비켜주었다.

“들어오십시오.”

정중한 말투에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서슴없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다. 금세 고요해진 복도를 의심 어린 시선으로 훑어보던 아이작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물건이라곤 몇 개 있지도 않은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방 안을 둘러보는 중년의 사내에게 아이작은 대뜸 물었다. 평소와 달리 초조함이 잔뜩 묻은 음성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자네가 내게 마지막으로 연락해 부탁했던 것이 4년 전이지.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네를 도왔는데, 자네는 그 후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원망했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아이작은 변명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쯧, 혀를 찬 사내는 쿠션도 없이 나무로 만들어진 딱딱한 식탁 의자를 빼더니 묻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작 역시 묵묵히 그를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렸기에 외국으로 나가버린 줄만 알았네. 제 삼국이라든가 혹은 인지도도 없는 그런 곳 말이지. 그런데 버젓이 미국 땅, 그것도 샌디에고에 머물고 있었다니. 이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한탄하는 사내를 아이작은 한결 가라앉은 시선으로 담았다.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아이작이 묻자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두 번 접힌 종이였다. 그리곤 깨끗하게 접힌 종이를 펴서 아이작의 앞으로 밀었다.

종이 안에는 어떤 사진의 카피가 흑백 잉크로 프린트되어 있었다. 파파라치 사진처럼 필릭스를 정면으로 담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필릭스의 뒤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작이 보였고, 아이작의 뒤에는 토니까지 작게나마 보였다. 부둣가의 배경이 딱 봐도 요트를 타고 망망대해로 끌려 나갔던 날이라는 것을 짐작게 했다. 가만히 사진을 노려보던 아이작은 욕설이 튀어나오는 입가를 주먹으로 꾹 눌렀다.

“난 이걸 보고 필릭스가 자네를 붙잡아 바다에 처넣으러 가는 길이라고만 생각했네.”

퉁명스럽게 말한 스티브는 다른 종이를 건넸다. 이번에는 요트에서 내려 세단으로 나란히 향하는 필릭스와 아이작이 있었다. 밤새 요트 안에서 진탕 구른 뒤 벤자민의 생일파티로 향하던 때였다.

“다음날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사진을 보고 안심했지만, 대체 이게 다 뭔가. 필릭스가 한시도 빠짐없이 체크 당하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라는 걸 몰라서 지금 이러나?”

“…사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이렇게 보란 듯이 이 남자와 같이 다녔다면 끝까지 들통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작을 나무랐다. 아이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필릭스의 곁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빨리 노출될 줄은 미처 몰랐다.

“스티브, 이 사진은 당신만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이미 내부에 퍼진 겁니까.”

깍지 낀 손가락을 초조하게 문지르며 아이작이 물었다. 스티브라고 불린 중년의 사내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아직까지는 내 손에만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얼마나 빨리 퍼져나갈지는 장담하지 못해. 아까도 말했다시피 필릭스는 여기저기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알려주러 직접 오신 겁니까?”

한참 사진을 쳐다보던 아이작이 새까맣게 짙어진 눈을 들었다. 스티브는 탁자에 팔을 기댄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물론 일부러 알려주려 직접 찾아왔지.”

“…….”

“그리고 제안하기 위해 찾아온 것도 있네.”

역시. 거침없이 본론으로 들어서는 스티브를 아이작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자네의 누명을 벗겨주지. 나와 제대로 손잡는 게 어떻겠나.”

“무슨 뜻입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자네를 믿어. 그래서 4년 전에도 이유 따위는 묻지 않고 도와주었던 거고. 그러니 이번엔 자네가 나를 믿고 나를 도와줬으면 해.”

나직한 음성으로 빠르게 말을 뱉어내던 스티브가 문득 목이 타는지 흠, 소리를 흘리며 입을 닫았다. 아이작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는 음식이나 다른 음료수는 없이 생수병만 가득이었다. 차가운 생수 두 병을 꺼낸 아이작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한 병을 스티브에게 내밀고 다른 한 병은 직접 열어 마셨다. 어느덧 자신도 목이 바짝 말라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달라는 겁니까.”

단숨에 물병의 반을 비워낸 아이작이 먼저 물었다. 아이작과는 달리 몇 모금 마시지 않고 병을 내려놓은 스티브가 손에 병을 쥔 그대로 깊이 가라앉은 눈을 들었다.

“증인으로 나서줬으면 좋겠어.”

“증인이라뇨?”

“콜 패트릭스. 그의 비리에 관해선 누구보다도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분명 자네가 신분을 숨긴 채 도망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일 테고 말이야.”

스티브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굳히고 말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스티브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 어떤 소리도 흘릴 수가 없었다. 입술이 들러붙기라도 했는지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자네에게 어려운 일이라는 건 잘 알아. 하지만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네. 그가 저지른 여러 가지의 비리에 관해선 벌써 암암리에 소문이 돌고 있기도 하니까.”

“아니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아이작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스티브는 동요도 없었다. 태연히 물병을 들이마실 따름이었다.

“자네에게 누명을 씌운 게 콜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

“만에 하나 자네가 샌디에고에서 버젓이 지내고 있다는 걸 그자가 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이작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천만에. 말했듯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 일은 금세 퍼지게 되어있어. 필릭스와 보란 듯이 붙어 다닌 것만으로도 자네는 이미 많은 곳에 노출되었으니까. 이쪽에선 다행히 내가 가장 먼저 사진을 입수하긴 했지만, 콜이 이 일을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라는 말일세. 필릭스를 누구보다도 주시하고 있는 건 콜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도망만 다니겠다고? 무엇 때문에?”

칼날처럼 박혀오는 질문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벤자민을 떠올렸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증인이라니…….

“증인으로 나서준다면 자네의 신변 보호는 지금부터 우리 쪽에서 맡겠네. 원한다면 거처도 알아볼 수 있어. 자네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고 쫓기는 일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야.”

“…….”

“물론 누명을 벗은 후에는 복귀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원하는 그 어떤 일이라도 지원해 줄 수 있네.”

스티브의 단호한 눈빛과 말투에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신변 보호는 자신보다는 벤자민이 먼저여야만 했다. 콜이든, 스티브이든, 혹은 그 누구든, 벤자민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자신은 무엇을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보다 더 죽은 듯이 살아야만 한다고 해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숨어있어야 한다고 해도, 벤자민이 무사하다면 참을 수 있을 테다.

하나뿐인 아이가 밝게 자라서 평범하게 학교를 들어가고, 친구를 사귀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자유로워지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위험한 진창에 섣불리 발을 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누명을 벗어보자고 콜에게 불리한 증인을 하겠다고 하면, 그때야말로 콜은 인정사정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지금까지도 언제 어디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 위에서 살고 있었는데, 증인으로 나선다고까지 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한기를 느낀 아이작은 제 팔을 문지르며 이를 씹었다.

“아니요. 안 하겠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다시 숨어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가게도 정리하고 거처도 옮겨버릴 테다. 콜이 알아차리기 전에 재빨리 숨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런 불안정한 생활을 청산하고 싶다는 바람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린 채 아이작은 다짐했다. ‘안정된 삶’ 이전에 중요한 것은 ‘안전한 삶’이었다.

“자네가 숨어 지낸다고 콜이 언젠간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나? 그 작자가 얼마나 집요한지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인가?”

“…….”

“그 일에 연루되었던 놈들 모두가 죽거나 실종됐어. 무슨 말인지 알아? 살아있는 건 자네뿐이고, 언젠간 콜이 자네를 찾아내고 말 거라는 뜻이지. 그래서 자네를 알아보자마자 이렇게 달려온 걸세.”

높낮이 없이 울리는 목소리가 음울했다. 아이작은 차마 스티브의 회색 눈동자를 마주할 수가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만약, 자신에게 지켜야 할 벤자민이 없다면……기꺼이 증인으로 나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목숨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 생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된다. 이런 자신이 몹시 비겁하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비참하게 죽은 자신의 옛 동료를 배신하는 행위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무리입니다.”

목구멍에 덩어리가 걸린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의 안전을 지켜달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기에 아이작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과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가장 큰 비밀이었으니까.

비록 눈앞에 앉아있는 사내가 예전에는 믿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예전은 예전일 뿐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결의를 다지듯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으려니 스티브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자네가 종적을 감췄을 때 증거서류를 가져갔다는 소문을 들었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스티브, 어디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은 화제에 아이작은 순간 냉랭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길게 들을 것도 없는 화제였고, ‘가정’이었다. 스티브가 살짝 난색을 비췄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저를 증인으로 채택하길 원하셨다면 더더욱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스티브는 잠시 그대로 눈싸움이라도 하듯 아이작과 시선을 얽혔다. 팽팽한 긴장감이 어느새 두 사람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곧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고 말았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일단은 물러설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콜은 녹록한 사람이 아니고, 쉽게 물러날 사람도 아니니까.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넘어갈 사람이 아니잖나.”

“…….”

“어쩌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낮게 중얼거린 스티브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명함은 두고 가지.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게 되면 연락하게.”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전부 마쳤다는 듯 스티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아쉬움이 가득하기만 했다. 아이작은 모르는 척 그를 따라 일어섰다. 순간 스티브는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네 편에 서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좁은 공간 위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대답이 없는 아이작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듯 스티브는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현관을 향해 걷는 스티브의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서슴없이 문의 손잡이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곧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문을 열다가 말고 흘끔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대체 필릭스 펠리체와는 어떻게 해서 같이 붙어 다니게 된 건가? 자네가 일부러 그에게 접근했을 리는 없을 테고, 설마 필릭스가 알고 찾아오기라도 했나?”

“아닙니다. 그는 저를 모릅니다.”

“하, 그것참.”

스티브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사정과 이유가 있겠지만, 필릭스와는 되도록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 좋아. 척을 지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지만.”

“…….”

“노루를 피하려다 범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게.”

그가 복잡한 심정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작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모두 옳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던 콜보다도, 도움을 요청하고 손을 잡게 된 필릭스가 더 지독하고 무서운 범일 수도 있었다.

생각하려니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는 탓에 아이작은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그러자 스티브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인간관계가 참 우습게 돌아가지 않나? 하필이면 자네가 필릭스 펠리체와 함께 있다니 말이야.”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상념에서 깨어난 아이작은 설핏 불안한 눈으로 상대를 직시했다. 당장이라도 아파트를 빠져나갈 것처럼 문 앞에 바짝 서 있던 스티브가 돌연 아이작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콜이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비밀리에 맡겼던 임무가 뭔지 알고 있거든.”

낮은 목소리는 여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척추를 타고 내리는 한기를 피할 수가 없었다.

“자네에게만 오롯이 내려졌던 임무.”

“스티브 그만-.”

“필릭스의 암살이었지?”

밑바닥 깊이 묻혀있던 비밀을 꺼내는 스티브는 눈으로 경고를 전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질책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나무라는 눈이었다.

아이작은 마른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것만 같았다.

* * *

시간은 고요히 흘렀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한 강물처럼 흐르기만 한다. 그러나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로는 거친 물살이 세차게 흘러가는 것이 강물 아니던가.

자칫 잘못해서 수면 아래로 깊이 빠져버리기라도 한다면, 거센 물줄기에 휩쓸리게 하는 것이 강물이었다. 그런 강가에 자신은 위태로운 모양새로 서 있는지도 몰랐다.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딱, 장미 줄기를 가위로 자르다가 말고 아이작은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 틈에 가시에 찔렸는지 손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몽글몽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핏방울을 슬쩍 닦아내곤 다시금 손을 놀려 장미 다발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던 손님의 얼굴엔 마땅치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할 뿐이었다. 미안하게도.

마지못해 꽃다발의 가격을 지불하고 가게를 빠져나가는 손님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멍하게 들렸다.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되도록 빨리 가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또다시 스쳤다.

그래, 정리를 해야겠지. 시간이 없었다. 스스로를 다독인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티브가 다녀간 지도 일주일이었다. 그동안 아이작은 어느 정도 주변을 정리해 두기도 했다. 워낙 한곳에 오래 머물렀던 적이 없었기에 정리할 것도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사생활이 노출될만한 물건들은 모두 없애버렸다. 서랍 안에 쌓아두기만 했던, 벤자민에게 쓴 카드들 또한 전부 버려야만 했다.

그사이에도 스티브는 연락을 해왔고, 아이작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의 명함을 이어붙일 수도 없을 정도로 잘게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번호까지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새겨 넣은 그의 번호를 하루에도 몇십 번씩 떠올리며 고민에 고민을 더한다. 그럼에도 섣불리 스티브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남은 문제는 필릭스였다. 아무런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하루아침에 자신이 사라진다면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눈앞에서 그려지는 것도 같았지만, 아이작은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모습을 지워내려 했다.

생각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답은 보이질 않고 머리만 지끈거린다. 아이작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딸랑, 상념을 깨뜨리는 방울 소리에 감겨있던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기실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반갑지 않은 상태라 일부러 문을 닫아놓고 있던 중이었다. 문이 닫혀있으면 가게가 열렸는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탓에 굳이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조금 전의 손님도 그렇고, 이번에도 굳이 닫혀있는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물론 closed 사인으로 돌려놓진 않았으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손님의 자유겠지만, 이번엔 또 누가…….

“날씨도 좋은데 문은 왜 처닫고 있어?”

들어서기가 무섭게 투덜거리는 사내를 아이작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순간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다. 방금 전까지 떠올리고 있던 사내가 마치 제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눈앞으로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성큼성큼 다가서는 필릭스를 멍하니 쳐다보던 아이작은 목을 손으로 그러쥐고 말았다. 습한 나무 냄새와 꽃향기만 가득한 가게였건만, 순식간에 숨 막힐 정도로 짙은 그의 페로몬이 내부를 꽉 채우고 자신을 뒤덮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 탓이었다.

과연 그것이 착시인지, 혹은 정말 그가 들어오자마자 알파 페로몬을 흘리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몸은 자연스럽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를 눈으로 담는 것만으로도 엉덩이 안쪽이 눅눅하게 젖어간다. 조금 전까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던 문제들은 이미 전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순식간에 백치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설마, 이 정도로 길들어 있었던 건가. 난처함을 숨기지 못한 아이작의 검은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어느새 카운터 앞까지 바짝 다가온 필릭스가 아이작을 빤히 내려다봤다.

“너, 뭐 하고 있었어?”

아이작을 훑어보던 필릭스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황한 아이작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거칠면서도 서늘한 감촉을 지닌 그의 손이 대뜸 뺨을 감싸 쥔다. 그리곤 다짜고짜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아-!”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통째로 삼켜질 것 같은 키스가 이어졌다. 아랫입술을 물고 빨던 그는 쉽사리 아이작의 입을 벌리곤 마음껏 타액을 섞고 점막 곳곳을 혀끝으로 문지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 그랬듯이, 사납고 탐욕스러운 키스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입을 벌려 그를 반길 뿐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적막한 공간 위로 울렸다. 아이작의 뺨을 한 손으로 쥔 채 혀를 감고 빨아당기는 필릭스의 표정은 격정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이작은 목구멍을 울리며 낮게 신음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에게 키스하며 흥분하는 필릭스의 모습에 고양감마저 일어난다.

조금 더 매달리게 만들고 싶어진다. 조금 더 자신에게 탐욕을 드러내고 게걸스러운 키스를 퍼붓고 이성이 날아가게 만들고 싶다는 음험한 바람이, 저도 모르는 사이 떠오른다.

미쳐가기라도 하는 건가. 처음으로 일어난 욕구에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아이작은 망설임 없이 크게 입을 벌리고 그의 혀를 빨며 타액을 삼켰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카운터를 짚고 있는 팔이 가늘게 떨렸다.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침대 위도 아닌데, 색기를 줄줄 흘리면서 쳐다보면 어떻게 해?”

춥, 아랫입술을 아프게 빨며 필릭스가 으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아이작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진득하기만 했다.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그래. 널 보자마자 좆이 터질 것처럼 서버렸을 정도로 말이지.”

“이런…….”

“다른 새끼가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어?”

뺨을 매만지던 손길이 목덜미로 떨어져 내린다. 아이작은 고개를 젖혀 그에게 보란 듯이 목덜미를 드러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고 이토록 급작스럽게 흥분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 당신이 들어온 바람에 몸뚱이가 제멋대로 반응해버렸다고, 구멍 안쪽은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어 움찔거리며 안달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필릭스…….”

카운터를 짚고 있던 팔을 들어 필릭스의 어깨를 움켜쥔 아이작이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눈가는 이미 흥분으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꼴리게 쳐다보지 마. 아직 월요일 안 됐잖아.”

제법 깊은 인내를 과시하며 필릭스가 짜증스럽게 대꾸한 순간이었다. 아이작은 카운터를 반쯤 넘어가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토요일이잖습니까.”

“그래서?”

“미리 해요. 여기서.”

당장이라도 카운터를 넘어 덮칠 것처럼 달려드는 아이작을 필릭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니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흐려진 눈으로 먹어달라고 애원하는 아이작을 거절할 정도로 인내심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가.”

문득, 필릭스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납게 일렁이는 짙푸른 눈동자는 아이작에게 고정한 그대로 내뱉는 말에 뒤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그제야 그의 뒤를 따라 잭이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작은 난감해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딸랑, 방울이 한 번 울렸다가 다시금 조용해졌다. 가게 문은 닫혔고, 잭은 밖에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지킬 테였다. 앞으로 몇 시간이 되든 필릭스가 아이작을 놓아줄 때까지 가게 문이 다시 열릴 일은 없었다.

멍한 머릿속에서는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떠돌아다녔다.

호텔 델 코로나도의 해변에서, 자신 때문에 미쳐가는 것 같다고 했었던 필릭스의 말을 기억한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정말 미쳐가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카운터에 엎드린 채 거리낌 없이 필릭스에게 엉덩이를 내어주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분명 그랬다.

바지도 다 벗지 못했다. 밀려 내려간 속옷과 바지를 무릎에 걸친 그대로 엉덩이만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아무 데서나 바지를 내리는 싸구려 창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아이작의 둥근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사납게 치대고 있는 필릭스 또한 옷을 벗지 못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벨트와 지퍼를 내리자마자 아이작을 붙들고 정신없이 그의 구멍에 흉흉한 성기를 쑤셔 넣은 필릭스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정욕에 가득 차, 이성 따위는 날려 먹은 지 오래다. 발정 난 개처럼 붙어버린 몸뚱이는 좀처럼 떨어지지도 않았다. 누가 더 미쳤는지는 굳이 따질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게 안에는 헉헉거리며 내뱉는 더운 숨소리가 가득했다. 필릭스가 허리 짓을 이어갈 때마다 이미 질척하게 젖어 있던 구멍 안에서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도 했다. 필릭스의 허벅지가 아이작의 둔부에 부딪히며 울리는 소리 또한 야하게 섞인다.

“하, 하아, 필릭스, 으으읏-, 거기-….”

카운터 위로 뺨을 대고 있는 아이작의 입가에서는 줄줄 흐르는 침과 함께 쾌감에 젖은 신음이 멋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끝까지 저릿저릿하게 울려오는 아찔한 감각을 도무지 견디기가 어려웠다.

“더, 조금 더, 깊이-.”

팔을 뒤로 돌린 아이작은 필릭스의 좆으로 가득 채워진 구멍을 제 손으로 잡아 벌리며 더 깊이 들어오기를 종용했다. 상체를 비틀어 반쯤 풀린 눈으로 필릭스를 올려보기도 하자, 그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진다.

“fuck! 아이작!”

일순, 참을 수 없다는 듯 필릭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아예 불알까지 집어넣을 작정인지 아이작의 내벽 안쪽으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좆을 힘껏 처박는다. 배 속이 얼얼했다.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었을 정도다.

하지만 통증에 가까운 기이한 감각과 더불어 눈이 뒤집힐 정도로 엄청난 쾌감이 뒤따르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허벅지가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린다. 목을 뒤로 젖힌 채 아이작은 교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바짝 서 있던 성기 끝에서 왈칵, 물이 튀었다.

“아, 아아……!”

뜻하지 않았던 사정까지 더해지자 아이작은 끝내 흐느끼고 말았다.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필릭스가 흘리는 알파 페로몬과 그가 전하는 짐승 같은 쾌락에 중독되어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성욕에 취약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다. 애초에 섹스라는 것에 크게 흥미를 느껴본 적도 없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딱 한 번, 4년 전 그날, 처음으로 히트사이클을 겪었을 때, 머릿속이 녹은 것처럼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지독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어쩌면 히트사이클을 겪고 있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쾌감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는 히트사이클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고, 벤자민을 낳고 나니 성욕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데다가,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까지 처하게 되자 더더욱 섹스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성애자라도 되는 것처럼, 성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이게 다 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변화는 필릭스가 최우성 알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알파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페로몬에 열성 오메가인 자신조차 취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최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베타마저도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릴 정도라고 하니, 아무리 열성 오메가라고 해도 오메가인 자신이 이성을 잃고 녹아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래서 오메가들이 알파들에게 환장을 하고 달려드는 건가,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으로 아이작은 어렴풋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예민하게 부어있는 내벽을 퍽! 소리가 울리도록 때려 박는 필릭스의 움직임에 아이작은 짧은 비명을 흘리며 상념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아이작,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어?”

평소에는 눈치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도 없는 필릭스였지만, 이럴 때는 놀랍게도 귀신처럼 예리해진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아이작은 낮게 신음했다. 그러자 그는 짐짓 다정한 손길로 아이작의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안 되겠네. 이제 진짜 아무 생각 못 하게 만들어줘?”

빙긋 웃는 얼굴이 사나웠다. 저도 모를 긴장감에 아이작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확,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도 높은 페로몬이 쏟아져 내린다.

아이작의 허리가 발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카운터에 널브러진 그대로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어쩔 바를 몰라 했다. 필릭스의 좆을 물고 있는 구멍은 움찔움찔 멋대로 경련하기까지 한다.

“흐윽, 필릭스, 그만-….”

“하, 진짜 환장하게 만드네. 이렇게 예민해서야 원,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라고 해도 믿겠어.”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필릭스의 낮은 목소리에 아이작은 흠칫 어깨를 굳혔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잠시 두려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흘리는 말일 뿐이었는지 필릭스는 곧 아이작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직이 웃는다.

“…네가 오메가라면, 당장 내 것으로 만들어버렸을 텐데.”

웃음기를 머금은 속삭임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도저히 말로 만들어낼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치솟는다.

“그래서 더 안달이 나는 거겠지만.”

그가 혼잣말을 뱉어내기가 무섭게 푹, 구멍 안쪽으로 깊숙이 성기를 처박히더니 곧 배 속이 뜨끈하게 젖어들었다. 점막을 통해 번져가는 페로몬을 견디기가 어려워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 머릿속을 맴돌던 상념이 사라져버린다. 팔과 다리가, 허리와 어깨가 정신없이 떨렸다.

필릭스는 카운터 위에 축 늘어진 아이작을 일으켜 세우더니 거추장스러운 바지를 벗겨버렸다. 그리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무릎 아래로 팔에 끼운 그대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기진맥진해진 아이작은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필릭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끈 떨어진 인형처럼 그에게 기대 있었지만, 필릭스는 가뿐하게 추삽질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내벽에 싸지른 정액이 철퍽철퍽 음란한 소리를 울리며 튀었다. 허벅지를 타고 뿌연 액이 질질 흘러내리기도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희열에 눈앞이 흐렸다.

오메가는 알파 페로몬에 미치는 것도, 중독되기도 쉽다고 한다던데,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부위를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찔러대는 움직임에 아이작은 모든 생각과 상념을 날려버린 채 흐느끼고 말았다.

“좋아? 여기? 네가 늘 자지러지는 부분이긴 했지?”

“으읏, 좋아… 아, 아, 멈추지 말고, 더…….”

아이작은 또다시 이성을 잃어버린 채 교성을 내질렀다. 필릭스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싹한 전율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아무렴 어떨까. 지금 당장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필릭스가 흔드는 대로 따라 흔들리며 그가 선사하는 쾌감에 신음하는 것이 아이작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눈을 들었을 때는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필릭스는 이곳에 올 때마다 늘 앉아서 기다리던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바지를 벗은 그대로, 흠뻑 젖은 다리를 벌리고 필릭스의 맨 허벅지 위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자세였다.

아이작은 어리둥절한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민망한 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찌르르하니 울리는 둔부의 통증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허리를 무너뜨리고 말았지만.

“네가 기절하는 바람에, 어쩌지도 못했어.”

그러자 머리 위로 나직한 음성이 흩어진다.

“여긴 눕힐 곳도 없잖아?”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괸 자세로, 필릭스는 그의 몸에 기댄 채 늘어져 있는 아이작을 뚫어지게 내려보고 있었다. 맨정신으로는 이런 낯 뜨거운 자세를 견디기 어려워진 아이작은 어떻게든 움직여 그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려 했다.

“좋았어?”

하지만 역시나, 필릭스가 얌전히 내버려 두진 않는다. 그의 팔이 단단히 허리를 휘감아오는 탓에 아이작은 슬쩍 내려오려다 말고 눈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필릭스가 눈을 접고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자지러지며 내게 매달릴 때마다 난 늘 고민하게 돼.”

“무슨, 고민 말입니까.”

되물으려니, 잔뜩 쉬어버린 목이 따끔거렸다. 또, 정신없이 울고 교성을 흘린 모양이었다.

“과연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지. 조금만 이성을 놓으면 한도 끝도 없이 욕심을 부리게 될 것 같거든.”

“이성을 잃지 않은 게 그 정도라는 겁니까.”

아이작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지만, 그는 픽, 입꼬리를 비스듬히 당겨 올릴 따름이었다.

“당연하지. 아니면 지금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네가 정신을 잃어도 난 내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박아댈 수 있는데 말이야.”

다른 놈들에게는 늘 그랬기도 했고. 뒷말을 삼키며 필릭스는 짙어진 푸른 눈으로 아이작을 훑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아이작의 다리를 벌리고 흉기 같은 좆을 쑤셔 넣을 것처럼 일렁이는 눈빛은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지난주에도, 그랬습니까? 제가 정신을 잃으면 기다렸습니까?”

“그래. 이틀이나 뒹굴었는데도 네 몸이 멀쩡한 걸 보면 모르겠어?”

필릭스의 당당한 대답에 아이작은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필릭스는 부드럽게 아이작의 뺨을 손끝으로 훑으며 쯧, 혀를 찼다.

“기절하거나 말거나 내 멋대로 할까 하다, 겨우 참은 이유가 또 있긴 하지.”

제 얼굴을 살피는 시선에 괜스레 목구멍이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뭡니까, 라고 묻지도 못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얼굴이 이게 뭐야.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가?”

눈썰미 없기로 유명한 사내답지 않게 예리하게 알아차린 필릭스의 질문에 아이작은 쉽사리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뺨을 매만지는 손끝에서 번져가는 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끼니를 거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먹고 있습니다.”

“기껏 애지중지 다뤄줬는데, 누가 멋대로 상하게 하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아이작은 다시금 말을 잃었다. 애지중지라니, 언제 그랬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무라는 표정이,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기까지 한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눈을 들킬 것만 같아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재빨리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서자, 필릭스도 더는 붙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지와 속옷이 엉망으로 구겨진 채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붙어먹었는지 고스란히 알려주는 광경에 아이작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연락도 없이 토요일에 오시다니요.”

아직도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옷더미 앞으로 걸어간 아이작이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곤 아직도 눅눅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무시한 채 드로즈에 발을 꿰었다.

자신의 움직이는 모습 하나하나를 새기려는 듯 끈끈하게 달라붙는 그의 시선에 절로 긴장되기도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드로즈를 위로 끌어 올린다. 딱 달라붙는 디자인의 사각 드로즈는 그의 올라붙은 엉덩이와 탄탄한 허벅지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언제 여기 올 때 따로 연락했던가.”

질문을 던진 지 한참 만에 필릭스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속옷을 입는 모습에만 온통 신경을 쏟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심드렁한 음성이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스트립쇼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만 쳐다보시죠.”

“왜? 난 지금껏 어디에서도 이보다 더 자극적인 스트립쇼를 본 적이 없는데.”

“속옷을 입은 것뿐이잖습니까.”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흘리며 불평했다. 그래봤자 필릭스는 드러난 아이작의 허벅지를 타는 듯한 시선으로 핥을 뿐이었다. 말 그대로 느긋하게 스트립쇼를 구경하러 온 한량 같다.

“그러게 말이야. 허벅지 아래로 내가 싼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속옷을 올려 입는 게 이렇게 음란한 광경이 될 줄은 나도 미처 몰랐지.”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마따나, 근육으로 감싸인 매끈한 허벅지에는 군데군데 하얗게 말라붙은 자국이 남아있기도 했고, 아직 마르지도 않은 뿌연 정액이 느릿하게 흘러내리기도 했다. 푸른색의 드로즈는 아랫부분이 벌써 젖어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땅히 씻을 곳이 없었기에 우선 옷을 걸쳐 입긴 했지만, 자신이 봐도 엉망진창에 불쾌한 꼴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 이런 모양새를 보고도 좆을 세울 줄이야…….

아이작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필릭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는 더 못 합니다.”

딱 잘라 말하자 필릭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작은 허리를 굽혀 이번엔 바지를 주워들었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어떤 놈이 지나가는 걸 봤지. 장미 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잔뜩 이마를 구긴 얼굴로 짜증을 부리면서 가더라고. 뭐, 내가 봐도 장미 다발이 엉망진창이긴 하더군.”

여전히 스트립쇼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턱을 받친 채 아이작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필릭스가 문득 뜬금없는 화제를 꺼냈다. 바지의 지퍼를 올리다가 말고 아이작은 그에게 눈을 두었다.

“그 꽃다발을 보니 네가 만들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긴 했지. 어떤 플로리스트도 너처럼 엉망으로 꽃다발을 만들진 못할 테니까 말이야.”

“…….”

“그런데 내가 봐도 오늘따라 정도가 심했거든. 아주 개판이더라니까.”

분명, 그가 들어오기 전에 어떤 손님이 장미 다발을 주문해서 사가긴 했었다. 신경이 온통 다른 곳으로 가 있는 통에 집중하지 못해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태연히 개판이었다고 딱 잘라 말하는 필릭스에게 알게 모르게 맘이 상해 가려는 찰나였다.

“너, 무슨 일이야?”

문득 필릭스가 짙어진 푸른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꽃다발도 그렇고, 날 보자마자 갑자기 난데없이 먼저 달려드는 것도 그렇고, 영 낌새가 수상해.”

“……전혀요.”

아이작은 바짝 타들어 가는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 어디에서도 일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을 유지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가슴이 불안하게 쿵쾅거리는 것만큼은 조절할 수가 없었다.

“아이작, 만에 하나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가 들키면.”

“…….”

“그때는 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내가 씹어 먹어 버릴 거다.”

비스듬히 끌어당겨지는 입매와는 달리 그의 푸른 눈동자는 시린 칼날처럼 차가웠다. 아이작은 바지의 지퍼를 여미지도 못한 채 장승처럼 서 있어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도 숨 막히는 위압감을 흘리는 그에게 절로 시선이 빼앗긴다. 자칫 정신마저 통째로 빼앗길 것만 같았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겠군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긴장을 억지로 삼켜버린 아이작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필릭스는 그제야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래, 열심히 노력해보든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여겼는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그를 보며 아이작은 묵직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야말로 바지의 지퍼를 채워 올린 다음, 맨발로 필릭스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입으세요.”

그의 머리칼을 닮은 옅은 색의 음모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은 성기까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은커녕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필릭스에게 그의 바지와 속옷을 내밀었다. 재미있다는 듯 아이작을 올려보던 그가 순순히 옷을 받아들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입가에 걸치고 있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는다.

“아이작, 그거 알아? 네가 내게 갚기로 한 날은 꼬박 하루란 말이야. 그런데 이제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이잖아?”

“…….”

“게다가 방금, 네가 드로즈를 입는 걸 보고 있었더니 아주 미치겠더란 말이지.”

“…그랬습니까?”

“자, 그러니 말해봐. 어디에서 마저 할까? 네 드로즈가 홀딱 젖어서 입지도 못할 정도로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어 근질거리는데.”

벌써 몇 시간이나 진을 빼다가 끝내 정신을 잃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봐주지 않는 그의 작태에 짧은 한숨이 흘렀다. 그러나 그의 음탕한 속삭임에 아랫배가 꽉 조여들기도 한다. 이젠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러시다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정말, 제대로 미쳤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담담히 대답하자, 필릭스는 짙은 웃음을 흘렸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불빛이 그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드리워지며 더더욱 선을 뚜렷하게 만든다.

아이작은 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각막에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그를 훑었다. 이유 없이 불안하면서도 초조해지는 감정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가슴 한구석에서 맴돌고 있었다.

* * *

“보고 싶어. 잘 자. 좋은 꿈 꾸고.”

수화기를 꼭 쥔 그대로 속삭이자 귓가로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화기에 입을 가까이 대고 있는지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숨소리도 또렷하게 들린다.

<응, 아빠도 잘 자.>

씩씩한 목소리를 들으니 절로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아이작은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 없이 웃었다.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

“많이 사랑해, 벤자민. 세상에서 제일 많이.”

<나도나도~. 아빠 사랑해.>

굿나잇 뽀뽀까지 쪽쪽 소리 내어 전해준 벤자민은 자기가 전화를 끊겠다고 신나서 말했다. 그러더니 ‘그래’ 하고 말하는 아이작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어진다. 종료버튼을 누르는 법을 배운 이후로 통화하다가 끊을 때쯤 되면 자기가 끊을 수 있다며 버튼을 눌러버리는 탓이었다.

지금은 인사라도 나눴지, 말하는 도중 뚝 끊어버리는 일도 빈번했다. 그럼에도 픽, 웃음이 절로 흘러나오기만 한다. 옅은 미소를 지우지도 못한 채 아이작은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떨어뜨리질 못했다. 아직 수화기 너머로 벤자민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벤자민과 통화할 때는 매번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비로소 어깨가 싸늘하게 식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작은 그제야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제법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밤이었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심한 지역이니 당연하겠지만, 오늘은 유난히 춥게만 느껴진다. 짧은 한숨을 내쉰 아이작은 야구모자의 챙을 깊이 눌러 내렸다.

차도 많이 다니지 않는 늦은 밤, 야구 모자와 그 위로 덮은 후드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굽힌 자세로 인적도 드문 길을 걷는 모습이 동네의 흔한 양아치처럼 보이게 했다. 평소 반듯하고 건실한 플로리스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가 걷고 있는 어두운 길이 부랑자들이나 떠돌아다닐 것처럼 황량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길 위로는 드문드문 버려진 쓰레기가 뒹굴었고, 건물 아래와 담벼락 밑에는 노숙자들이 담요를 둘둘 만 채 웅크리고 있다. 번쩍거리는 빌딩이 즐비한 다운타운의 외곽은 이렇듯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다른 세계가 등을 맞대고 있는 것만 같다.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아이작은 조금 더 어깨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길을 걸었다. 그가 제법 거리가 있는 다운타운 외곽까지 걸어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매번 어머니에게 전화할 때에는 휴대폰 대신 공중전화를 이용했는데, 아파트 근처에는 공중전화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요즘엔 너 나 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아파트 근처뿐 아니라 어딜 가도 공중전화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만약 아파트 근처에 공중전화가 있다고 해도 쉽게 이용하진 않았을 테다.

한참 나와야 하는 수고를 하더라도 아이작은 꼭 거리가 먼 곳의 공중전화를 사용했다. 전화를 거는 장소도 매번 바뀌었다. 어머니와는 그 어떤 연관성도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물론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필릭스는 귀신같이 벤자민의 존재를 알아내고야 말았지만.

덕분에 불안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기어코 자신을 찾아온 스티브를 만나고 나서는, 제대로 잠을 잘 수도, 밥을 먹거나 쉴 수도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벌써 일주일도 넘은 시간이었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는지.

고심하던 아이작은 결국 얼마 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되도록 빨리 짐 정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라호야의 집 또한 렌트를 주고 있던 것이니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이작이 살고 있던 아파트는 오늘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나온 참이었다. 우선 자신이 먼저 몸을 숨긴 다음, 어머니와 벤자민의 새 거처를 알아볼 예정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렸던 가게 또한 곧 닫힐 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가 가장 되었던 필릭스에게는 어떻게든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갈 생각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으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마음에 아이작은 길을 걷다 말고 멈추어 섰다. 고개를 들고 새까만 하늘을 올려보자 짙은 구름에 가려진 달이 노르스름한 빛을 구름 사이로 퍼뜨리고 있는 이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제 마음만큼이나 뿌옇고 답답한 풍경이었다.

구름 뒤에 숨어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노란 달빛이 꼭 벤자민의 머리카락 같아서 저도 모르게 빙긋 웃음 짓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가에 걸쳐져 있던 미소는 서글프게 사라지고 말았지만.

벌써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더더욱 보는 게 어려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벤자민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가 품에 안아보고 싶을 뿐이다.

“하아-.”

조금 전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벤자민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다가 긴 숨을 내쉬며 억지로 한 걸음을 떼었다. 부러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세워둔 차까지의 거리가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떠올렸을 무렵이었다.

인적도 드문 밤거리에서 문득 빠른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뺐다. 하지만 철컥, 금속성의 소리가 한 발 더 빨랐다.

“손 머리에 올려.”

낮은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사이로 퍼져 들었다. 어둠 속에서 사내가 겨누고 있는 총은 정확히 제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었다. 아이작은 괴한이 요구한 대로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 * *

툭, 보고서를 책상 위로 집어 던진 필릭스는 버본이 든 잔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얼음이 달가닥거리며 유리잔에 부딪힌다. 그러나 바로 마실 생각은 없는지 기계적으로 잔을 흔들고 있기만 했다.

“웃기는 새끼들 같으니라고. 지들이 파파라치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그가 책상에 던진 서류에는 사진 카피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아이작이 스티브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은 사진이었다. 요트에 오르는 필릭스와 아이작, 그리고 다음날 요트에서 내려 차로 향하는 필릭스와 아이작.

“내 꽁무니를 뒤쫓는 데 세금을 낭비하다니, 할 짓 더럽게도 없는 건 여전하다니까. 망할 미국 놈들 같으니라고.”

투덜거리던 필릭스는 한참 손에 쥐고 흔들던 버본을 홀짝였다. 토니는 사진을 바라보다가 흘끔 필릭스에게 시선을 두었다. 본인 또한 그렇게 욕하는 망할 미국 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그러나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법이 없는 토니는 속으로 혀를 차고 말뿐이었다.

“아이작까지 제대로 잘 찍혔네.”

시큰둥하게 사진을 바라보던 그는 가소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내버려 둬, 당분간 지들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필릭스는 언제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게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아무리 내 주위를 빙빙 돌아봤자 나오는 거 하나 없어. 있어도 어떻게 못 하는 걸 뻔히 알면서 저러지. 머저리 같은 것들이.”

“그렇죠.”

“그나저나 이번 러트는 왜 이렇게 안 와?”

보고서를 탁, 덮어버린 필릭스는 대뜸 성질을 부렸다. 그러자 그의 빈 잔에 버본을 채워주던 토니가 문득 동그래진 눈을 들었다.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괴상한 표정이었다.

“러트를 기다리는 겁니까?”

“할 때가 지났는데 안 하잖아.”

잔을 낚아챈 필릭스는 조금 전과는 달리 얼음이 다 녹이기도 전에 잔을 기울였다. 토니는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필릭스가 평소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번 몇 개월에 한 번씩 러트가 찾아올 때마다 귀찮아서 죽으려고 하던 사내였다. 멋대로 몸이 흥분하는 것도 싫고, 짐승처럼 이성이 날아가는 것도 싫고, 시간 없고 바쁜데 좆질을 해야 하는 것도 싫다며 투덜거리지 않았던가.

덕분에 러트가 다가올 때쯤 되면 가뜩이나 뭣 같은 성격이 더 예민해져서는 수하들을 달달 볶는 것은 예사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억제제를 복용하는 건 또 극도로 싫어하는 까닭에 웬만해서는 약을 먹지도 않는다.

애먼 베타 남성만 여럿 데려와 화풀이하듯 며칠이나 굴려대고 나서야 겨우 진정하는 탓에, 그의 러트는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환영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외려 러트가 안 온다며 성질을 부리니, 이거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아닌가. 아니면 귀신도 안 잡아갈 거라던 필릭스 펠리체가 죽을 때가 되기라도 한 건가. 토니는 어리둥절해져 뺨을 긁적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들었다.

“그 플로리스트가 그렇게 마음에 드신 겁니까?”

“보면 몰라? 생각 같아선 지금이라도 다시 아이작을 데려다 놓고 울리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설마 해서 물어본 질문에 후루룩, 물 마시듯 잔을 비워버린 필릭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지난 주말엔 이틀 내내 호텔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말입니까? 잭의 말에 의하면 엊그제도 붙어 먹었-… 흠, 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고작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아니, 그러니까. 매주 월요일에 보고 있잖습니까.”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필릭스는 누군가와 원나잇 스탠드 이상의 관계를 갖는 것을 꺼려 했었다. 덕분에 한 상대를 여러 차례 상대했던 적이 드물었다. 길어봤자 서너 번이 고작일 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필릭스가 아이작을 대하는 태도가 하도 심상치 않은 탓에 이번엔 진심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래로는, 과연 몇 번이나 더 만나고 나면 질려 할까 의심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필릭스의 대답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토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도 남았다.

“정신 못 차리게 예쁜 몸을 꼴랑 일주일에 한 번 안으려니 감질나서 더 쌓이잖아! 아주 쌓이다 못해 터질 지경이라고.”

애가 타서 죽겠다는 듯 탁자를 손끝으로 두들기는 필릭스를 바라보던 토니의 턱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필릭스가 저런 말까지 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라고 이제야말로 확신하는 토니였다.

“러트라도 와야 마음 놓고 물고 빨 수 있을 텐데. 빌어먹을 러트 같으니라고! 기다릴 땐 안 오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안기는 것도 아이작으로서는 고된 일일 게 뻔한데, 필릭스는 뻔뻔하게 러트가 오지 않는다며 성질을 부린다. 게다가 언제부턴가는 마음껏 페로몬을 개방하기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아무리 베타라고 해도 최우성 알파의 강도 높은 페로몬에 노출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필릭스는 양심의 가책 따위는 일절 없이, 작정하고 페로몬을 흘려댔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페로몬에 절어버린 아이작은 최음제에 취한 것처럼 쾌감과 열락에 흐느끼며 매달렸고, 필릭스는 마음껏 그를 감상하고 탐닉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예상했던 바였고, 또 원하던 바였다.

다만, 페로몬에 취해 요부처럼 허리를 흔들던 아이작이 눈앞에서 계속해서 아른거린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외려 자신이 그에게 중독되어버린 것처럼, 쾌락에 젖어 제 밑에서 자지러지던 그가 지워지질 않고 끝도 없이 떠오른다.

결국 토요일까지 참고 참다가 모든 일을 집어 치워버리고 당장 달려가기까지 했다. 아이작에게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게다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아이작이 먼저 흥분해서 매달리기까지 하니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있을까.

“젠장, 보고 싶어 죽겠네.”

필릭스는 혀끝으로 술잔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때는 무감정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꽃집 청년이지만, 안기만 하면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색기를 줄줄 흘리는 요부로 돌변한다. 그 갭이 미친 듯이 좋았다.

단정한 얼굴이 색욕으로 젖어, 허리를 잘게 떨며 제게서 떨어지질 못하던 아이작을 떠올릴 때마다 절로 사타구니에 피가 몰려 괴로울 정도다. 미치겠다. 이젠 입맛만 높아져서 다른 놈들은 눈에 차지도 않는다. 이렇게 아이작만 찾게 되니…….

“나 정말 연애하나 봐.”

끄응, 목울대를 울리며 필릭스는 한탄했다. 그러자 곁에서 그의 혼잣말을 흘려듣던 토니가 눈을 부릅뜬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토니가 한눈에도 몹시 불편해 보이는 탓에 필릭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나가서 편하게 볼일 봐.”

손짓까지 하며 남아있지 말고 나가라고 일렀지만, 토니는 화장실보다 더 급한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필릭스의 맞은편 책상을 짚더니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다른 조직을 때려잡자며, 결의에 찬 눈빛으로 제안하던 조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이 왜 또 이러나. 술잔을 기울인 필릭스가 의심쩍은 시선으로 토니를 마주했다.

“뭐야, 할 말 있어?”

묻자, 크게 심호흡한 토니는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보스가 플로리스트 씨를 생각보다 더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확실히 알겠지만 말입니다. 연애는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무슨 헛소리야?”

“아무리 그가 마음에 들어도 말이죠, 서로, 쌍방이, 그러니까 보스와 플로리스트 씨가 같이, 합의 하에, 서로를 좋아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연애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탁자를 탕탕 두들기며 토니는 열변을 토했다. 그래 봤자 필릭스는 알아듣지 못한 듯 토니를 빤히 올려보며 얼음 섞은 버본만 호로록 마실 뿐이다. 토니가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내리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 아이작이 나를 안 좋아한다는 거냐?”

필릭스는 이해 못 하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좋아하고 말고 따질 만한 사이 자체가 못되잖습니까.”

“왜 못 돼?”

“그러니까, 그게, 아이작에게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요. 어떻게 압니까, 아이작이 보스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토니는 되도록 열심히 돌려 말했다.

“날 안 좋아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는데?”

그러나 코끝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오만한 필릭스의 대꾸에 토니는 순간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안 좋아하는 놈이 왜 없겠습니까. 저도 있고 잭도 있고 전에 잔디 관리 못 했다고 정강이를 까인 경호 팀장도 있고 그 밖에 수두룩하게…….

“내가 인물이 없어, 돈이 없어, 권력이 없어? 그렇다고 좆질을 못해? 아니잖아. 누가 날 안 좋아하는데?”

감히. 건방지게. 뒷말을 덧붙이는 그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건방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제야 토니는 눈치도 없고 개념도 없는 이 남자의 연애관을 포기하고 말았다. 말이 통하질 않는 사내였다는 것을 깜박하고 있던 제 탓이었고, 이런 사내를 상대해야 하는 아이작만 불쌍하다는 결론만 나올 뿐이었다.

“……네, 그렇겠죠.”

의기소침해진 토니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대꾸했다. 그리고 기운 없이 몸을 돌렸을 무렵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하고, 아이작의 새 아버지라는 놈은 어떻게 됐어?”

등 뒤로 비수같이 날카로운 음성이 꽂혀 들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찔끔한 토니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게, 조금….”

“조금 뭐?”

말하기가 껄끄러워 미적거리자 필릭스는 대뜸 눈을 부라린다. 토니는 곧바로 정자세를 하고 보고할 수밖에 없어졌다.

“사실, 조금 이상합니다. 아이작의 아버지인 유진 싱클레어가 아이작과 함께 워싱턴으로 간 것은 맞는데, 재혼한 기록은 나오질 않습니다.”

“혼인신고 없이 동거일 수도 있잖아.”

필릭스는 따지듯이 물었지만 토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누구와도 같이 살았다는 흔적 자체가 없습니다. 유진과 아이작 둘뿐이었습니다. 유진이 사고로 죽었을 때까지요.”

며칠 내내 쥐 잡듯이 뒤지고 조사를 해봐도 나오는 것은 하나 없었다. 아이작은 분명 알파였던 새아버지가 있었다고 했지만, 서류상으로는 나오는 것이 없으니 기이할 수밖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 같은 위화감과 더불어 아이작에 대한 의심이 점차 커져 갔다. 하지만 토니와 그의 수하들은 결국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무리되지 못한 상황을 보고하려니 목구멍은 따끔거렸고, 머리는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이런 일이 드물었기에 더더욱 불편하기만 했다.

“노아 어딨어.”

그러자 필릭스는 대뜸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토니의 눈이 또다시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지금 노아를 찾는 건가?

“…그, 노아 씨, 말입니까?”

“노아가 그 노아 말고 또 있겠나? 그런 새끼가 또 있으면 세상은 이미 지옥일 텐데.”

필릭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떠올리기도 싫다는 투였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대뜸 노아를 찾는 그를 토니는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지금쯤이면, 지하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대답했다.

“지하? 웬일로?”

아니나 다를까, 먼저 그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쪽 눈썹을 삐죽 올린 필릭스가 고까운 투로 묻는다.

“그야, 보스가 명령한 일을 처리하다가 막혀버린 탓에…… 흠, 노아 씨가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만, 분명 보스는 싫어하실 테니까 비밀리에 이곳으로 모신-.”

“그거 잘됐네. 내려가.”

열심히 설명하는 토니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린 필릭스는 곧장 서재를 가로질렀다. 성큼성큼 빠르게 걷는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먼저 찾는 것도 모자라 직접 보기까지 하겠다는 건가. 토니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필릭스가 매번 진저리치는 노아 펠리체로 말하자면, 필릭스의 사촌이자, 불알친구이자, 기피 대상 일 순위로 웬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얼굴 맞대려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노아를 필릭스가 먼저 찾다니, 이거야말로 놀랄 놀 자다. 어쩌면 그 정도로 급해진 건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요즘 들어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필릭스를 토니는 다시 한번 초조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정말로 죽을 때가 되기라도 한 건가. 짧게 떠올리기도 했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부디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괜스레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떨쳐버리며 토니는 바라고 또 바랐다.

* * *

머리에 씌워져 있던 천이 벗겨지자 밝은 빛이 쏟아졌다. 빛에 적응되지 않은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아이작은 시린 눈을 깜박이며 낮은 한숨을 흘렸다. 뒤로 돌려진 자세로 묶여있는 손목은 저렸고, 딱딱한 의자와 함께 꽉 묶인 가슴은 갑갑했다. 다리 역시 발목이 단단히 묶인 채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인 제 모습을 흐릿한 시야로 확인한 아이작은 낮게 한숨지었다. 이렇게 빨리 당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상대를 간과한 모양이었다.

아니, 단순히 한발 늦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아파트는 정리했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마친 후 차를 타고 내달리면 그만이었으니까. 어쩌면 그 길도 뒤쫓아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간발의 차로 잡힌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케이.>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누군가의 거친 손이 아이작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덕분에 아이작은 원하지 않아도 제 앞에 놓인 모니터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 안에는 한 사내가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렇지?>

중년의 사내는 마치 엊그제 보고 헤어졌던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작은 그에게 맞춰줄 여유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만 있으려니 사내는 한쪽 다리를 꼰 상태로 손목시계에 시선을 두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 모습에 비로소 지금이 몇 시쯤 되었을지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도무지 가늠되질 않는다. 붙잡힌 후로 한참이나 차를 타고 옮겨져 오기까지 했으니 제법 시간이 지난 것도 같았다. 천천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화면 속의 사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4년 만인가? 오랜만의 조우인데 화면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게 유감이로군. 지금은 도무지 샌디에고까지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이 없거든.>

늦은 밤, 혹은 새벽이라고 불러야 좋을 시간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사내는 멀끔한 제복을 빼입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쩌면 그가 있는 곳은 동부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동부라면 시차가 3시간이 앞서니, 아마 저쪽은 이른 아침일 터였다. 아니면 아예 해외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시차가 제법 있는 먼 곳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작은 사내와의 거리를 떠올리며 내심 안심했다. 그의 말마따나 당장 이곳으로 달려올 리는 만무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무감정한 표정에는 그 무엇도 드러나는 법이 없었다.

<그동안 도망 다니느라 힘들었겠어. 어디에 있었기에 그토록 잡기 어려웠는지 정말 궁금하다니까.>

“…….”

<말수가 적은 건 여전하군. 뭐, 좋아. 나도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얘기하지.>

꼬고 있는 다리 위로 손을 올린 사내는 희미하게 머금고 있던 웃음기를 지웠다. 화면 너머로 아이작을 노려보는 눈빛이 순간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변한다.

<그 서류 어디에 뒀어.>

다짜고짜 던지는 질문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하, 막힌 숨을 터뜨렸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냉랭하게 대꾸하자 상대가 천천히 상체를 모니터 쪽으로 기울였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젠 안 돼. 네가 내 방에서 가지고 나간 거, 다 알고 있어.>

“…그러면 직접 찾으면 되잖습니까.”

<말장난하지 마. 그따위 소리나 들으려고 널 4년이나 추적한 거로 모자라 기껏 산 채로 잡아 온 게 아니니까.>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느릿하게 뒤로 젖히며 상대는 반듯한 미간을 찡그렸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표정까지, 그는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4년간 변한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을 테지만.

“제게 누명까지 씌우며 몰아내게 하고, 발 디딜 곳조차 없게 만들었으면서 고작 한다는 말이 서류를 달라는 것뿐입니까?”

아이작은 차오르는 분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씹었다. 사내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기계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를 먼저 배신한 건 너지. 네게 내렸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도망쳐버렸잖아? 덕분에 팀이 전부 박살 나기도 했지.>

“당신이 내린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만, 팀이 박살 난 건 제 탓이 아닙니다.”

<네가 내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이탈하는 바람에 팀이 전멸했는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딱딱하게 말을 끊어버리는 사내에게 아이작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애초에 저자는 자신의 말을 들을 의향조차 없었을 테니까.

자신을 그곳으로 내몰았을 때부터, 아니 비밀리에 필릭스의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겼을 때부터 모든 것은 결말이 정해져 있었다. 자신은 배신자로 몰릴 예정이었고, 모든 일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계획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그랬고, 덕분에 저자의 계획에도 금이 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상일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작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 이제 대답해 봐. 네가 훔쳐간 서류는 어디에 있는지.>

아이작이 과거를 짧게나마 회상하는 것조차 기다려줄 수 없다는 듯, 사내는 재촉했다. 아이작은 서늘한 눈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제가 대답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유? 넌 내게 서류를 건네지 않는 이상 그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하게 될 텐데, 그래도 이유를 따지고 싶은 건가?>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사내의 말을 따라 하며 아이작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협박 한번 짧고 간략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로 만들지도 모르지. 어차피 난 네게서 듣고 싶은 답만 들으면 그만이고, 넌 팔다리가 전부 없어진다고 해도 말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만약 제가 당신이 원하는 서류를 넘겨준다고 하면요? 그때는 살려주기라도 할 겁니까?”

아이작은 조소했다. 이미 등을 떠밀어 벼랑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었던 자였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불안해서 못 견디는 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얌전히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해서 자신을 살려둘까? 어림없는 바람이었다.

<그래, 죽이지는 않아. 그건 약조하지.>

“대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픽, 입꼬리를 당기며 묻자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잖아?>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로 만든다고 벌써 장담을 했는데, 내가 왜 서류를 당신에게 줘야 합니까?”

<케이, 말장난할 시간 없다고 했어.>

사내는 초조한 듯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모습에 아이작은 외려 더 느긋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제게 회유가 아닌 협박을 하셨으니, 이번엔 제 차례로군요.”

아이작은 냉정히 말문을 열었다.

“콜, 저는 지금껏 조용히 숨어 살았습니다. 만에 하나 서류로 무언가를 하려고 했었다면 진즉 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야?>

“지금까지처럼 제가 세상에 묻어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면 저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사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젠 상관없으니까요. 굳이 상관하고 싶지도 않고.”

상대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아이작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화면 너머로 마주하고 있었음에도 등줄기로 서늘한 한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익숙하게 그를 마주한 채 할 말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 언제까지나 당신을 모르는 척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한다면 저 또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죠.”

<너-.>

“규칙적으로 연락하는 곳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제게 연락이 끊기면 서류는 곧장 상부와 언론으로 동시에 퍼져나갈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 요구사항을 들어준다면 서류를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입을 달싹이는 사내의 말을 끊으며 아이작은 빠르게 내뱉었다. 사내는 아이작에게 시선을 둔 그대로 반듯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가락이 톡, 톡 규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정지화면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감에 목이 바짝 조여 왔다. 급격히 갈증이 일기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사내는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큭, 그래, 제법이야. 잘했어. 네가 과연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어서 던져봤는데, 제법 재미있는 답을 해주는군.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네가 멍청하게 당하고 있었다면 꽤 화가 났을 거야.>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짝짝, 손뼉까지 치는 그의 모습에 아이작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이게 무슨 연극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가르친 보람이 있지.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네 주인에게 발톱을 세우는 짓은 적당히 해.>

“…….”

<네가 얌전한 강아지인 척 꼬리 내리고 있었던 걸 잘 알고 있어. 언젠가는 내게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 것도 짐작하고 있었지. 그런데 난 그런 개새끼는 봐주고 싶지 않거든.>

사내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이작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저를 내친 겁니까? 언젠가 당신에게 대들 것 같아서 미리 내쳐버린 겁니까? 난 지금껏, 당신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일은 뭐든지 했습니다. 말 그대로 당신이 키우는 개새끼처럼 말이죠. 이렇게 내다 버릴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당신을 곧이곧대로 따랐단 말입니다.”

사나워진 눈으로 사내를 쏘아보자, 그는 비스듬히 입술을 말아 올린 채 시선을 마주쳐왔다. 마치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그의 동공엔 호기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아이작은 가만히 심호흡하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전 언제나 궁금했었습니다. 대체, 왜, 오랜 시간 당신을 무조건 믿고 따랐던 나를 몰아내려 한 건지, 지난 사 년간 목숨 부지하기 위해 도망 다니면서도 늘 묻고 싶었습니다.”

<케이…….>

“이렇게라도 얼굴을 뵙게 되었으니 묻겠습니다. 대체 왜 저를 내치신 겁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정말 내가 당신에게 반기라도 들까 미리 잘라낸 것입니까? 그런 겁니까?”

질문을 던지는 아이작의 짙은 눈동자가 사납게 번득였다. 그러나 사내는 곤란하다는 투로 턱을 긁적였다.

<이런, 그렇게 귀여운 말을 지껄이면 내 가슴이 아프잖아.>

그러나 나직하게 웃음 짓던 사내는 돌연 ‘흠’ 소리를 흘리며 턱을 괸다.

<여기까지 왔으니 허심탄회하게 말해볼까?>

“무엇을 말입니까.”

<난, 단 한 번도 너를 내쳤던 적이 없어.>

단호한 그의 말에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해가 가질 않을 뿐 아니라 기가 막히기까지 했다.

뱀의 혓바닥 같은 세 치 혀로 능숙하게 거짓을 내뱉는 그를 아이작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내의 눈빛은 진지했다. 지나칠 정도로 진지해서 도리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충견이 필요했지. 언제까지고 내 뒤를 지켜줄 나만의 충견 말이야. 그런 점에서 나를 믿고 따르던 너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어. 그래서 나 역시 너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기도 했지. 너도 알다시피.>

사내는 아이작이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아랑곳 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넌 내 이상에서 엇나가기 시작했거든. 그게 무척이나 속상하더군.>

아쉽다는 듯,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내의 낯은 여상했다. 아이작은 눈을 감았다. 그를 더 마주하고 있다간, 속에서 들끓는 분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마 그 일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였을 거야, 네 눈빛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지 않나?>

“…….”

<넌 언제나 나를 따랐다고 했지만, 전혀. 이미 넌 언제나 내게 반기를 들고 있었어.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 네 본심을 내가 모를 것 같았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질문에 아이작은 이를 씹었다. 그의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이 자신을 휘감아오는 것만 같았다. 밧줄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껏 내뿜는 알파 페로몬에 꼼짝도 못 하게 된 것 같은 기이한 기분마저 들었다.

“콜…….”

<네가 스티브와 연락을 주고받은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다면, 그거야말로 오산이야.>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자 살갗 위로 소름이 돋는다. 아이작은 어떻게든 들끓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길게 호흡했다. 다행히 화면 너머로부터도 느껴지는, 숨 막히는 위압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내는 쯧, 혀를 차더니 시계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목구멍을 조이고 있던 끈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에 아이작은 낮게 심호흡했다. 그러자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내는 말을 이어갔다.

<화가 났었지. 아무래도 너를 재교육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약간의 트릭을 써본 것뿐이야. 너는 나만을 듣고 믿고 바라봐야만 하니까. 이렇게 오랜 시간 네가 숨어버릴 줄은 미처 몰랐지만.>

“그 트릭이라는 것이 내 등을 떠밀고 누명을 씌운 짓거리를 말하는 겁니까?”

<주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낑낑거리는 강아지가 귀여운 법이잖아?>

그는 점잖게 웃으며 미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참으려고 했지만 으득, 이가 갈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 시시콜콜한 여담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

<서류 가져와. 그러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전부 묻어버리고 네 원래 자리, 내 곁에 앉혀줄 테니까. 얌전히 서류 가지고 내게 돌아와.>

화면 속의 사내는 그가 원하는 결론을 정확히 내뱉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소름 끼칠 만큼 집요하다.

“당신의 비리가 들통 나는 게 두렵다면, 차라리 날 죽이십시오. 그게 더 간단할 겁니다.”

되도록 무심한 투로 아이작은 꾹 깨문 이사이로 말을 뱉었다. 그러자 사내는 별안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맙소사! 내가 널 어떻게 죽일 수 있겠어! 지난 사 년간 네가 숨바꼭질을 하는 바람에 보고 싶어 죽을 뻔했는데 말이야! 이제 겨우 찾은 내 귀여운 강아지를 내 손으로 죽이라고? 설마, 농담도 지나치잖아.>

상체를 굽히며 화면으로 얼굴을 가까이 한 그의 광적인 눈빛은 오롯이 아이작을 향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서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훑어내리는 그의 시선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긴말은 하지 않으마. 서류 가지고 돌아와. 네 자리는 내 곁이고, 넌 그 어디도 갈 수 없어. 그게 결론이야.>

살기 어린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하는 그에게 아이작은 아무런 대꾸도 던지질 못했다. 목구멍이 자글자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또다시 내 명령을 거역한다면, 그땐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거다. 내게 반기를 들지 마. 넌 그저 온순한 강아지처럼 나를 따라오면 그만이야.>

그것 외엔 다른 결론이 없다는 투로 던져진 말은 거만했다. 제 할 말을 마친 사내는 시계를 확인하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 자리를 떠나야 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아이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들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서류는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신이 제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저 역시 순순히 서류를 넘겨드릴 겁니다.”

사내에게 협상을 제시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구사항이라. 그래, 뭐지?>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을 받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내는 가볍게 되물었다. 그러나 그를 똑바로 직시하는 아이작은 한없이 무거워진 목소리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했다.

“두 번 다시 당신 곁으로 돌아갈 의향은 없습니다.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저를 찾지 않을 거라고 약속한다면, 전 마지막으로 당신을 믿고 서류를 보내드릴 겁니다.”

<…….>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 마음껏 살 수 있는 자유를 원할 뿐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드러내며 던진 요구는 혀끝을 쓰게 만들었다. 저 사내가 과연 자신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려나. 긴장감에 뒤로 묶인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면 너머의 사내도, 묶은 채 앉아있는 아이작도 누구 하나 섣불리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편한 침묵이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다시금 시간을 확인한 사내는 짧게 혀를 차더니 아이작을 빤히 직시했다.

<서류는 당연히 돌려받을 생각이야. 물론 네 입을 억지로 열다 보면 네가 다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정도는 상관없어. 내가 충분히 돌봐줄 수 있거든.>

“콜-!”

<하지만 널 보내는 일은 없어.>

흔들림 없이 말을 내뱉은 사내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지금은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금세 사내는 화면 밖으로 사라졌고, 텅 빈 자리만 남아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정지해버린 것 같은 화면을 아이작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장 저 모니터를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할 말만 멋대로 지껄이고 사라진 그의 빈자리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뒤집힌다. 안타깝게도 의자에 단단히 묶여있는 줄을 쉽사리 풀어낼 수는 없었지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며 억지로 분을 삭이는 것만이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짧은 시간이었다. 갑작스레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쇳덩이 같은 주먹이 복부에 꽂혀 든 탓이었다. 쿨럭,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기침을 토하고 말았다.

의자에 묶여있는 탓에 허리가 제대로 굽혀지지도 않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그대로 아이작은 한참이나 격렬한 기침을 토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지금껏 묵묵히 아이작을 감시하고 있던 사내들은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왈칵, 토기가 올라오기도 했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쉴 새 없이 폭력을 휘둘러 대자 삽시간에 아이작의 눈가와 입술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폐쇄된 공간 위로는 땀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진동했다.

시간이 어떻게, 얼마나 지나가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아이작은 꼼짝없이 묶인 상태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구타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끝내 아이작은 정신을 잃고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놈들의 무자비한 폭력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 * *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깬 필릭스는 익숙한 불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흘끔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창문 너머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보였다. 아침이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탓에 웬만해서는 이토록 이른 시간에 깨어나는 법이 없었지만, 오늘은 도무지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무심결에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역시, 평소보다 뜨끈한 체온이 느껴진다. 손끝으로 미열을 감지한 필릭스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술만 비스듬히 당겨 올렸다.

“와, 이런 씨발……. 러트네?”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음습했다. 그러나 서늘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머금은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때는 잠옷은 걸치지 않는 습관 덕에 드로즈 한 장만을 입고 있는 필릭스의 나신이 새벽의 어두컴컴한 공간을 일깨운다.

잔 근육으로 감싸인 어깨와 가슴, 군살이라고는 하나 없는 복근과 매끈한 등허리, 올라붙은 엉덩이 그리고 탄탄한 허벅지까지, 어디 한 곳 빠짐이 없었다. 두려울 정도로 단련이 된 나신은 그가 팔고 있는 날렵한 무기를 연상시킬 정도다.

필릭스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리드미컬하게 따라 움직였다. 상념에 잠긴 표정으로 습관처럼 근육을 이완시키고 목을 좌우로 돌리며 아직 어두컴컴한 침실을 거닐던 필릭스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쥐고 빠르게 눌러댔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단축키를 누르고 신호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른 시간에도 토니는 지체 없이 필릭스의 전화를 받는다. 늘 그렇듯이.

필릭스는 살짝 잠이 묻어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대뜸 미친놈처럼 킬킬거렸다.

“토니, 나 러트가 시작된 것 같거든?!”

어디 한 곳 흠잡을 곳 없는 신체를 가진 삼십 대 중반의 성인 남자는, 대뜸 어울리지도 않게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성욕에 갓 눈뜬 십 대 애송이 알파가 처음으로 러트를 겪는 것처럼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잔뜩 물들어있는 표정이기도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