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Date Night - 2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저가 아닌 호텔로 곧장 향한 필릭스는 호텔 주위의 화려한 야경과 그와 반대로 어두컴컴한 바닷가를 둘러보았다. 토니를 닦달해 예약한 호텔은 코로나도 섬에 위치한 Hotel del Coronado라는, 샌디에고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이자 유명한 관광지였다.
북미 태평양 연안에서는 가장 큰 리조트인 호텔은 비치 빌라지와 호텔 건물로 나뉘었는데, 필릭스가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짐을 내던진 곳은 비치 빌라지였다. 말 그대로 한 채 한 채 따로 지어진 개별 건물이지만 실내는 일반 호텔의 스위트룸과 같았다.
해변과 연결된 패티오를 갖추고 있는 아담한 빌라지는 마치 별장이나 개인 집을 연상시킨다. 패티오와 이어지는 거실엔 키친과 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그랬다.
필릭스가 수많은 고급 호텔 중에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오래된 명성을 자랑하는 호텔답게 대통령이나 온갖 유명 인사들이 묵어갔다고 하니 자신도 한 번쯤은 머물러 주겠다는, 오만하면서도 유치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고운 백사장이 침실 너머로 펼쳐져 있는 빌라지의 분위기가 꽤 로맨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흰색의 목조 건물에 빨간 지붕, 고운 모래가 깔린 패티오도 나름 괜찮아 보였다. 사진으로는.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썩 마땅치가 않다.
“유명하다더니 개뿔, 뭐 이런 코딱지만 한 룸이 다 있지? 이거 스위트룸이라며?”
빌라지 내부를 휘둘러보던 필릭스는 대뜸 신경질을 부렸다.
기실 필릭스는 세계 곳곳에 여러 채의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이탈리아 남부 지방과 지중해의 섬에는 지상낙원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장관인 풍경과 더불어 웬만한 장원 부럽지 않은 넓고 화려한 별장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스위트룸이라고 해도 그곳에 비하면 지금 다락방 수준밖에 되지 않으니 속이 쓰린 것은 당연했다.
차라리 아이작을 데리고 지중해를 갈 것을. 아니면 자신의 사저로 부를 것을! 이 주 만에 만나는 건데 겨우 다락방같이 생겨먹은 곳에서 자야 한다니, 열이 뻗친다.
“넌 왜 나 안 말렸어? 내가 이런 다락방을 예약하라고 하면 네가 말렸어야지!”
극기야 불똥은 토니에게 튀었다.
어제 강도에게 당한 이후, 심적 충격으로 끙끙거리며 몸져누워 있던 토니는 이마의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짧게 심호흡을 했다.
아이작을 데려오라는 명령에 직접 가는 대신 잭을 보낸 일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악착같이 자신을 불러낸 필릭스에게 감히 말대꾸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작을 데리러 갈 걸 그랬다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도 샌디에고의 명물 아닙니까.”
“명물 좋아하네. 다 낡아빠진 건물 가지고. 얼마나 오래됐다고 했지? 120년?”
“130년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건물로 지정이 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정말 오래된 목조 건물은 옆에 건물이고, 이 빌라지는 그리 오래된 건물도 아닙니다만…….”
초조해진 토니가 열심히 필릭스를 다독이려고도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다. 씩씩거리며 주위를 돌아보던 필릭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쪽 벽면이 전부 통유리와 프렌치 도어로 만들어져 거실에서도 그림처럼 펼쳐진 바다와 해변을 감상할 수 있는 구조였지만, 아쉽게도 이미 어두컴컴해진 탓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철썩철썩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리긴 해도 새까만 바다는 음침할 뿐이었다.
“볼수록 엉망이로군.”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올리며 필릭스는 이를 씹었다.
“지금은 어두워서 바다가 보이질 않지만, 아침에 해가 뜨면 장관일 겁니다.”
“토니, 저기 태평양이거든? 서쪽에서 해 뜨는 거 봤어?!”
“흠흠, 바다 위에서 해가 뜨진 않아도, 일단 날이 밝아지면 바닷가의 경치만으로-.”
“시끄러우니까 닥쳐.”
으드득 이를 갈며 노려보자 토니는 그제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성격 뭣 같기로 유명한 필릭스가 저토록 짜증을 부릴 때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젠장, 연애 한번 하기 더럽게 어렵네.”
그러나 곧 이어지는 필릭스의 혼잣말에 토니는 몸이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네? 뭐라고요?”
“몸 상태 안 좋다더니 귓구멍도 막혔어?”
“아니, 지금 연애라고 해서-.”
“원나잇이 아니라 계속해서 얼굴 보고 몸 맞추면 연애하는 거잖아.”
기함해서 되물었지만, 거만하게 다리를 꼰 자세로 턱을 괴고 있던 필릭스의 불퉁한 시선이 떨어졌을 따름이었다.
토니는 기가 막혔다.
연애라니. 연애라니! 아니, 지금까지 저 남자는 본인이 아이작과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인가! 계약이니 뭐니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고 강제로 몸을 강탈하고 있으면서? 그게 연애라고?!
어이가 없어진 토니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눈치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개념도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상태가 좋지 못해 파랗게 떠 있던 토니의 낯이 이젠 아예 죽상이 되어버렸다.
“보스…….”
그러나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던 입을 달싹였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필릭스에게 그와 아이작의 관계를 제대로, 정확히, 어떤 욕을 처먹더라도 알려주려고 했던 토니는 끙,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해? 초대한 손님이 온 것 같은데, 문 열지 않고.”
“아니, 그 전에 드릴 말씀이-….”
“내가 열어?”
잽싸게 머리칼을 정돈하고 옷매무새를 매만지던 필릭스가 눈을 부라렸다. 살기등등한 필릭스의 기세에 토니는 끝내 그에게 명확한 사실을 알려주기를 포기한 채 현관으로 향해야만 했다.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울 수가 없었다.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내뱉으며 토니는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한결같이 무심한 표정의 아이작이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를 마주하니 복잡한 심경은 더더욱 복잡해져 헤어날 길이 없어진다.
어쩝니까? 보스는 당신이랑 연애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친데요.
“토니? 몸져누웠다고 들었는데, 여기 계셨던 겁니까? 몸은 괜찮습니까?”
눈으로 아이작에게 속내를 털어놔 봤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토니의 안부를 물을 뿐이었다.
“네, 별일 아닙니다. 엄살떨지 말라고 해서 끌려 나왔을 정도지요.”
“음… 다행이군요.”
필릭스에게 쌓여있던 불만을 슬쩍 토하자 아이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그를 마주하던 토니는 속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토니, 잭, 그만 가 봐.”
그러자 눈꼴이 시리다는 듯 둘을 노려보던 필릭스가 당장 축객령을 내렸다. 덕분에 토니는 몸을 돌려 아이작에게 길을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필릭스의 올가미에 걸려버린 아이작은 순순히 빌라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토니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 잭과 함께 빌라지를 빠져나왔다.
“형님, 얼굴이 더 안돼 보이는데 괜찮수?”
옆에서 잭이 물었지만 들리지도 않았다. 오늘처럼 아이작이 불쌍한 순간이 없었다. 아니, 연애를 글로만 배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필릭스가 더 불쌍한 건가. 누가 되었든,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 * *
아이작은 서먹하게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이 주 만에 만나는 그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잭이 단언했던 것처럼 이탈리아에서 날아 왔다면서도 피곤한 기색조차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늘 단정하게 정돈되어있던 화사한 금발이 오늘은 약간 흐트러져있다는 것뿐일까.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오랜만에 봤으면 반갑다고 안아주진 못할망정.”
고작 이 주간 보지 못했을 뿐인데 어쩐지 실감이 나질 않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필릭스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아이작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숙여 필릭스에게 단단히 잡힌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반갑다고 안아줄 만한 사이가 됩니까.”
플라워 숍에서 잭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필릭스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섹스밖에 더 있겠냐고 했던…….
정확한 지적이었다. 잠시 제 상황은 잊어버린 채, 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보자고 한 전언에 알게 모르게 흔들렸던 스스로를 다잡게 해준 지적이기도 했다.
“너와 섹스하고 키스하는데, 반갑다고 안아주는 사이가 안 된다고? 그럼 누가 되는데?”
뭔가 미묘하게 틀어진 것 같은 질문에 아이작은 미간을 슬쩍 접었다.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뜬금없는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필릭스는 불시에 고개를 숙여 아이작의 입술을 훔쳤다.
“…….”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빨아당긴 가벼운 키스에 눈이 번쩍 뜨인다. 지난번처럼 정신을 쏙 빼놓는 키스가 이어질까 어깨를 움츠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작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그러면서도 관능적인 움직임으로 핥고 빨던 필릭스는 의외로 금세 허리를 곧추세우고 아이작을 직시했다.
“이제 좀 낫네.”
“…….”
“이탈리아에 있는 내내 네게 키스하고 싶어서 혼났다고 말하면 믿겠어?”
“아니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무뚝뚝한 성격이 어디 가나.”
필릭스의 눈가가 가늘게 접힌다. 사람 홀리려고 작정한 것 같은 눈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점이 더 꼴린단 말이야. 만약 네가 다른 놈들처럼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다면 네 모가지를 부러뜨렸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매력적인 입술 끝에선 살벌한 말이 여과 없이 튀어나온다. 그와 함께 아직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아이작의 손목 안쪽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여린 살갗을 가볍게, 그러면서도 몹시 외설적인 느낌으로 문질러 대는 감각이 오싹하게 전해진다. 그의 눈웃음 때문인지, 아니면 손목 안쪽을 간질이는 탓인지 슬슬 몸 안쪽에서 열이 지펴지는 것만 같았다.
당혹스러움을 드러내며 아이작은 손목을 빼려고 했다. 그래 봤자 더 단단하게 틀어쥐는 악력에 통증이 일어날 따름이었다.
“저녁은?”
“…아직요.”
“나도 아직 안 먹었거든. 우선 저녁부터 먹지.”
“저녁을요?”
처음 제 아파트에 찾아왔을 때처럼 다짜고짜 관계를 요구할 거라고만 예상했던 아이작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손목을 붙든 그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푹신한 소파에 앉힌다. 아이작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자리였다.
“룸서비스를 시키는 게 좋겠어? 아니면 나가서 먹을까. 여기가 그래도 제법 유명한 호텔이라 레스토랑도 여러 가지 있다던데. 뭐가 좋겠어?”
호텔의 레스토랑과 바의 간략한 소개가 들어있는 안내 책자를 들여다보며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뺨을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그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트에서도 계속해서 뱃멀미하느라 기껏 준비했다던 음식은 손도 대지 못했고, 라호야의 어머니 집에서는 어머니와 벤자민과 함께했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니 속이 꽉 조여드는 기분마저 든다. 스트레스성 위염이라도 생긴 건지 모르겠다.
“이번 주, 지나간 월요일의 대금을 받으러 온 거 아니었습니까?”
쓰린 속을 애써 무시하며 묻자, 안내서를 둘러보던 필릭스가 짙푸른 눈을 들었다.
“당연히 받아야지.”
새삼스럽게 뭘 묻느냐는 투였기에 아이작은 그렇겠지, 라고 속으로 대꾸하며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어졌다.
“그러면 지금-.”
“배고파. 일단 먼저 먹고.”
잔뜩 긴장한 채 저녁을 먹느니 매도 빨리 맞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작의 말을 가로막는 목소리가 심통 맞다. 또 뭔가에 삐진 어린아이처럼 입을 쭉 내밀기도 했다.
이번엔 왜 또 저러는 건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아이작은 긴장감에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 위로 문질렀다. 그러자 필릭스는 쯧, 혀를 찬다.
“아이작,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매정하네?”
“무슨 말입니까.”
“그렇잖아. 이제 막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데다가 저녁도 안 먹었는데 좆질부터 하라고 등 떠밀면 어째. 오랜만에 날 봐서 몸이 달아오른 건 아주 반가운 일이지만 나도 사람이거든. 좆질을 해도 우선 밥부터 먹고 하자고.”
노골적인 그의 투덜거림에 당장 뺨에 열이 오르고 말았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사람을 이렇게 당황하게 만들다니. 민망해진 아이작이 시선을 피해버렸지만 필릭스는 언제나 그렇듯 천연한 얼굴로 아이작을 빤히 직시할 따름이었다.
“자, 어떻게 할까? 호텔 룸서비스를 부를까, 아니면 나가서 먹을래?”
나 배고파. 뒷말을 덧붙인 필릭스는 대답을 종용하듯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 톡 두들겼다.
아이작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필릭스 펠리체라면 뭐든 원하는 대로 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룸서비스를 시키든, 나가든,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면 그만인 사람이 어째서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필릭스를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필릭스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고르라니 별수 있나.
“그러면, 나가서 간단히 맥주와 가벼운 음식 몇 가지를 먹겠습니다.”
가뜩이나 폐쇄된 공간에 단둘이 남겨져 신경이 곤두서있던 아이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밥까지 먹으라고 하면, 한 입 씹어 삼키기도 전에 체해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가서 가볍게 먹고 덤으로 맥주까지 한잔하면 숨 막힐 듯한 긴장이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맥주와 간단한 음식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아이작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필릭스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탄탄한 체격에 장신인 그가 일어서자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공간이 비좁아 보인다. 그만큼 그에게서 흐르는 분위기가 위압감이 넘치기 때문이었지만.
“이곳이 꽉 차 보이는군요.”
재킷을 집어 든 필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작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자 흘끔 눈을 돌린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이곳이 이따위로 좁아터졌는지 몰랐거든. 유명하다고 해서 예약해봤는데 들어와서 보니 이 지경이었단 말이지.”
변명하듯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아이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여긴 ‘호텔 델 코로나도’잖습니까. 샌디에고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을 두고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음?”
호텔 델 코로나도는 익히 잘 알고는 있었지만 와 볼 일은 없었다. 비싸기도 했거니와 이런 리조트에 머무를 만한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잭이 차를 이리로 운전하는 것을 보고 어째서 필릭스가 자신을 이곳에서 보자고 했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조금 들뜬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잭의 지적을 들은 후로 묵직하게 가라앉아있던 감정이 조금쯤 풀어지기도 했다. 화려한 건물과 하얀 모래사장, 근사한 야경과 비치 특유의 경쾌한 분위기, 밝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좋았다.
지금껏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삶에 찌들어있던 자신에게도 모처럼 여유가 생긴 것만 같았는데, 필릭스는 어째서 투덜거리고 있는 건지 아이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무랄 데 없이 좋습니다.”
“…그래?”
아이작의 담담한 대답에 필릭스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진다.
“네. 패티오까지 있는 빌라지라니 근사하군요. 이런 곳은 처음이지만 꼭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분위기네요. 날이 밝으면 바다가 펼쳐진 해변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모래사장 위, 긴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이고 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는 건 광고에서도 흔히 나오는 장면 아니었던가. 밤이면 패티오에 있는 화덕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곁에서 느긋하게 와인을 마셔도 좋을 것 같았다.
리조트에 어울릴 만한, 여유롭기 짝이 없는 장면을 떠올리며 아이작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새까맣게 잠겨있는 하늘과 드넓은 바다도 좋았고,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도 정감 있어 좋았다. 당장 곁에는 필릭스가 있고, 밤새 그에게 녹초가 되도록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사실마저도 잠시나마 잊어버릴 정도였다.
만약 자신에게 약간이라도 심적인 여유가 있다면 패티오에 앉아 바닷바람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저녁을 먹을 테지만, 아무래도 필릭스가 곁에 있는 건 불안하니…….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네가 마음에 든다니 할 말이 없어지지만.”
옆에서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이작은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입술이 삼켜졌다.
고개를 꺾은 채 맞물린 입안으로 필릭스의 혀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여유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키스였다. 대체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눈을 질끈 감고 필릭스의 어깨를 붙들며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입안 구석구석을 혀끝으로 문지르고 아프도록 입술을 깨무는 난폭한 키스가 정신없이 퍼부어졌다. 순식간에 사지에 기운이 쭉 빠져버려 자칫 잘못하다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 하아, 대체, 왜…….”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아이작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그의 입술과 턱, 뺨을 온통 젖은 입술로 문지르고 핥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강하게 끌어안고 있는지 거칠어진 호흡으로 들썩이는 가슴이 필릭스의 가슴에 짓눌린다. 아무리 키스를 허락했다고는 하지만 마주칠 때마다 이런 키스를 퍼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려울 정도다.
“젠장, 조금 느긋해 보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잖아! 웃는 얼굴까지 꼴리게 생겨 가지고 사람을 흔들지, 아주.”
거대한 대형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얼굴을 온통 축축하게 만든 필릭스가 가까스로 몸을 떨어뜨렸다.
“나와. 아니면 저녁이고 뭐고 너부터 먹어치우게 생겼으니까.”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그가 휙, 급하게 몸을 돌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아이작은 그대로 서서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화가 난 듯 성큼성큼 실내를 가로지르는 그의 모습이 눈에 박히듯 들어온다.
치솟는 욕정을 억지로 잠재운 필릭스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더니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훅,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눈부신 금발을 흩트렸다. 살짝 찌푸린 미간, 자신을 노려보는 짙어진 푸른 눈동자, 그 위로 흩날리는 금사 같은 머리칼까지.
어디 한구석 나무랄 수도 없을 정도로 근사한 사내가 시야 가득 들어온다. 당장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네.”
아이작은 뜬금없이 일어난 욕구를 애써 가라앉히며 예의 무감정한 얼굴로 무거운 걸음을 끌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필릭스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젓는 알파 페로몬이 짙게 감겨왔다.
정말이지…….
질끈 눈을 감았다 떠봤지만 여전히 자신을 뚫어지게 직시하는 필릭스의 새파란 동공이 떨어지지 않고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날뛰었다. 이토록 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벌써부터 고심할 수밖에 없어졌다.
* * *
금요일 저녁이었다는 것을 깜박하고 나가서 맥주나 마시자고 제안하다니. 불금을 얕본 제 탓이라며 아이작은 자책했다.
호텔의 바, 그것도 해변 바로 위에 위치한 술집은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말소리, 웃음소리. 그 밖에 여러 가지 잡다한 소리가 한데로 뭉쳐 귓가를 두들겨댄다. 이런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작은 한참이나 주위를 둘러보다 겨우 맥주병을 기울였다.
그런 아이작과는 달리 필릭스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묵묵히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기도 하는 그를 아이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시했다.
어딜 가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남자는 이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포크를 움직이는 손의 움직임이나 말없이 음식을 씹어 삼키는 모습은 단정했다. 어머니의 집에서도 느끼기도 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너가 배어있는 자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평소에는 거침없이 막말을 내뱉고 수하를 휘두르면서도, 이럴 때는 또 몸가짐이 반듯한 귀공자 같기만 하다니. 신기한 사내였다.
“안 먹고 뭘 그렇게 쳐다봐? 내가 잘생긴 건 알지만, 그렇게 계속 보다간 얼굴 뚫어지겠어.”
눈도 돌리지 않은 채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그제야 머쓱해져 맥주를 홀짝였다.
“식사 매너가 흠잡을 데가 없어서 놀랐습니다.”
생각하고 있던 점을 솔직히 말하자 필릭스는 포크로 치킨을 콕 찍다가 말고 눈을 들었다.
“음, 할아버지가 엄격하셨거든. 특히 밥 먹을 때만큼은 인정사정 봐주는 법이 없었지.”
“멋진 분이로군요.”
“전혀. 허구한 날 총질을 해대고 사람을 파리 잡듯 죽이면서도 예의를 따지는 괴팍한 노인네일 뿐이야.”
그의 조부가 이탈리아 거대 마피아의 간부라더니, 확실히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조부의 모습은 아닌 모양이었다. 괜스레 척추를 따라 한기가 흘러내리는 기분에 아이작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래도 할아버지에게 배운 게 많았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러자 필릭스는 뒷말을 덧붙였다.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알게 모르게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조부를 사랑하는 손자의 얼굴이었다.
아이작은 얼굴 뚫어지겠다는 필릭스의 투덜거림도 잊어버린 채 다시금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으려니 마냥 평범하게만 느껴진다. 잠시 시간 내어 만난 친구 같기도 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나저나 이런 공공장소에 오랫동안 앉아있어도 되는 겁니까?”
필릭스에게서 억지로 눈을 돌려 정신없는 주위를 훑어보던 아이작이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일반인들이야 모르겠지만 정부나 군부 쪽에선 늘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필릭스 펠리체였다.
샌디에고 다운타운을 대낮에 활보하는 것도 놀라웠는데 이젠 이토록 번잡한 바에 태평히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기까지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외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안 될 건 또 뭐 있어.”
“당신이 평범한 소시민은 아니잖습니까.”
“평범한 소시민은 아니더라도 선량한 시민은 맞는데?”
선량한 시민이 다 죽지 않고서야 필릭스가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을까. 아이작은 점점 더 가늘어지는 눈으로 그를 살폈다. 이마엔 ‘의심’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시선이 되게 불량하네? 나 진짜 선량한 시민이거든. 얼마 전엔 투표도 하고 왔다니까?”
맥주를 마시던 필릭스가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지만, 의심은 쉽게 걷히질 않는다.
“세금 보고는 했습니까?”
“당연하지. 그놈의 세금을 얼마나 떼어 가는지 아주 빈털터리가 될 지경이라고.”
“그럼 개인 세금 보고는 며칠까지입니까?”
“4월.”
심문하듯 묻자 필릭스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날짜는요.”
“그건 내 CPA가 알아서 하겠지.”
언제나 그렇듯 답을 몰라도 콧대를 세우는 그의 대답에 아이작은 끝내 포기하고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러는 너는? 세금 보고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알고 묻는 건가?”
그러자 필릭스가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반문했다. 말 그대로 죄인을 심문하는 듯한 자세와 표정이었다.
“15일까집니다.”
아이작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놀랍다는 듯 필릭스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린다.
“오호, 제법이야. 쫓겨 다니는 신세라며 세금 보고는 그 와중에 빼먹지 않고 하나 봐?”
픽 입술을 비틀며 빈정거리는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얄미웠다. 그러나 아이작은 어디까지나 무심한 투로 일관하고 있었다.
“저야말로 선량한 소시민이니까요.”
“선량한 소시민이 무슨 죄를 지어서 쫓겨 다니는데? 빚쟁이에게 쫓기는 거야?”
“왜 물으십니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내가 갚아주려고.”
“갚아주신 후에 또 무엇을 요구하시려고요?”
묻자 필릭스는 불쑥 앞으로 상체를 숙이더니 아이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너.”
그리고는 짧게 내뱉는다. 상당히 명료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가벼운 대답과는 달리, 제 얼굴 위에 꽂혀있는 짙푸른 시선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날카롭다. 아이작은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 안쪽이 까끌까끌거렸다.
이럴 때는 과연 뭐라고 받아쳐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주칠 때마다 저돌적으로 부딪혀오는 필릭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네 빚을 다 갚아주면 널 통째로 살 수 있게 해줄 건가?”
뜬금없는 질문에 아이작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단단히 붙들고 놔주지 않는 시선은 격렬한 감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마주하는 타인의 감정은 어렵기만 했다.
필릭스. 그를 부르려 했지만, 굳어버린 혀끝에서 이름이 녹아버렸다. 가슴 안쪽에서는 이유 모를 불편한 통증이 또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적응하기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만 같아 주먹을 꽉 움켜쥔 순간이었다.
“어이쿠-!”
쿠당탕,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테이블 위로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기우뚱, 넘어지는 맥주병은 가까스로 손에 쥘 수가 있었지만, 테이블을 꽉 채우고 있던 접시가 와르르 밀렸고, 바닥으로 떨어진 물 잔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깨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번쩍, 눈을 든 아이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테이블은 엉망진창이었다.
“아하하, 넘어졌네?! 내가 술이 좀 취했나 봅니다아!”
아이작과 필릭스의 테이블 위로 미끄러진 사내는 가까스로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혀 꼬인 발음으로 킬킬거렸다. 딱 봐도 머리끝까지 취기가 올라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내였다. 어딜 가나 이런 사내는 하나둘씩 있기 마련이지만 하필 이럴 때 방해받을 줄은 몰랐다.
“괜찮으니 그만 가보세요.”
아이작은 취한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나 기우뚱거리는 몸을 어쩌지 못해 탁자를 짚은 취한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이작의 코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에게서 역한 술 냄새가 확 끼쳤다.
“거참, 되게 떽떽거리네. 내가 술을 조금 마셔서 발이 꼬여 넘어졌다는데!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노려봐?!”
사과는 하지 못할망정 사내는 되레 큰소리였다. 취한다운 작태에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더는 사내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바의 직원들이 재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직원들이 알아서 취객을 데리고 가겠…….
“이 새끼,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아악-!”
취객에 대한 아이작의 생각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가 비명을 지르더니 아직 음식이 남아있는 접시 위로 코를 박고 무너진 탓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돌리자 턱을 괴고 있는 필릭스가 시야로 들어온다. 태연하게 앉은 그는 탁자를 짚고 있는 취객의 손을 왼손으로 쥐고 있었는데, 그의 새끼손가락은 이미 기이한 모양으로 비틀려 있었다. 필릭스가 취한의 새끼손가락을 무자비하게 꺾어버린 거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내의 비명은 더욱 커져만 갔다.
“시끄럽게 꽥꽥거리긴.”
취객을 노려보던 필릭스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직원이 다가와 울부짖고 있는 사내를 당황한 낯으로 살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보다시피 술에 만취한 이자가 발에 걸려 테이블로 넘어졌거든. 넘어지면서 탁자에 손까지 부딪혔나 보네.”
필릭스는 쯧, 혀를 차며 직원에게 설명했다. 여전히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잘도 뱉는 그의 모습에 아이작은 한탄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손님.”
“손을 부딪치긴! 네놈이- 아악-!”
직원이 곧바로 사과하자 취객은 얼굴이 벌게져 소리쳤다. 그러나 음식을 얼굴 여기저기에 묻힌 채 고함을 내지르던 그는 끝내 말을 마치진 못했다. 어느새 나타난 건장한 사내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으니 말이다. 다시금 테이블 위로 고꾸라진 취객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신음했다.
“나한테 손끝 하나 까딱했다간 내 경호원이 네놈의 팔을 부러뜨릴 텐데? 잘 생각하고 입방정을 떨었어야지. 아무 데서나 똥을 튀기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주사가 더러우면 아예 처마시질 말든가.”
그제야 필릭스의 존재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직원은 하얗게 질린 낯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내뱉었다. 그래 봤자 툭, 툭 취한의 뺨을 두들긴 필릭스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설 뿐이었다.
“그러게 얌전히 사과하고 꺼졌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왜 멋대로 남의 거에 눈독을 들여? 건방지게.”
남의 거?
아이작은 필릭스의 미묘한 발언에 낮게 신음했다. 취한이 자신을 만만히 보고 언성을 높였던 일을 탓하는 게 분명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남의 거’라는 말 한마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남의 거’라는 게 자신을 뜻한다는 사실 또한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필릭스가 이탈리아로 가기 전, 차 안에서 당당하게 던진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지독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필릭스를 비난하지 못했다. 목구멍에 덩어리가 걸린 것만 같아 아무런 소리도 흘릴 수가 없었다. 불쾌함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었다. 착잡하기만 했다. 아마 필릭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제 심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애써 무덤덤하게 필릭스를 바라보는 사이, 그는 음식이 든 접시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취객의 어깨너머로 종업원에게 캐시를 내밀었다. 아이작과 둘이 먹은 음식 값의 배를 웃도는 돈이었다.
“나머지 정리해.”
그리곤 경호원에게 툭 던지듯 말한 뒤 아이작의 팔을 붙들고 일으킨다. 주위가 집중될 정도의 소란 속에서 잠시 넋을 놓고 앉아있던 아이작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그럭저럭 평범하게 이어지던 저녁 식사가, 처음으로 필릭스와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시간이 이렇게 깨져버린다. 어쩐지 아쉬움마저 일어나 아이작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테이블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밥맛 떨어졌어. 네가 입가심 좀 해줘야겠는데, 네 생각은 어때?”
그러자 문득 고개를 숙인 필릭스가 속삭였다. 귓불에 살짝 입술이 부딪혔다.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중저음이 오싹하게 전신으로 번져간다. 아이작은 시선만을 돌려 필릭스를 향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그의 새파란 동공은 명확한 뜻을 담은 채 자신에게 꽂혀있었다. 초조함에 목이 탔다.
“…원하시는 대로.”
가까스로 내뱉은 대답은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섞여들었다. 과연 필릭스가 알아들었을지 모르겠다. 가만히 아이작을 내려다보던 필릭스가 입술을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동시에 손목을 움켜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바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긴 다리로 빠르게 걷는 그를 뒤따르는 아이작은 거의 뛰다시피 했다. 고운 모래가 깔려 있는 해변을, 그것도 구두를 신은 채 어찌 저리 빨리 걸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작 역시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술이 들어가서인지,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 탓인지 걸음이 비틀거린다.
“자, 잠깐만. 조금 천천히-.”
밭은 숨을 내쉬며 따라가던 아이작이 끝내 다급히 요청했다. 취하지도 않았건만 조금 전 취객이 그랬던 것처럼 다리가 자꾸 꼬였다.
휘청거리다가 넘어질 뻔한 것을 필릭스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붙들어 감싼 바람에 겨우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까워진 탓에 그에게서 흐르는 체취와 열기가 한꺼번에 훅 끼쳐온 것이 문제였다. 짭짤한 바닷바람에 섞인 그의 체취엔 알파 페로몬이 짙게 묻어 있었다.
맙소사, 순식간에 피가 하반신으로 몰린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것처럼 입안에는 침이 고이기도 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어두컴컴한 해변에서 아이작은 필릭스의 어깨를 움켜쥔 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짙어진 그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필릭스는 비스듬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아이작, 어쩌면 좋지?”
파도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목소리를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필릭스는 바람에 흩날리는 아이작의 검은 머리칼을 움켜쥐고 뒤로 젖혔다. 절로 입이 반쯤 벌어졌다. 아, 짧은 신음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너 때문에 내가 미쳐가는 것만 같아.”
갈라진 목소리, 미묘하게 당겨 웃는 입술, 어둠 속에서도 선연히 드러나는 번득이는 눈동자. 그 모든 것이 두려울 만큼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 * *
쏴아-. 샤워기의 물줄기가 머리 위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머리에서부터 얼굴로 타고 내리는 물을 맞으며 아이작은 연거푸 밭은 숨을 토했다. 물기에 젖어 미끈거리는 타일 벽에 손을 짚은 채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아이작의 뒤에서는 역시 물에 흠뻑 젖은 필릭스가 격정적인 표정으로 추삽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양손으로 아이작의 젖은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내벽에 흉흉한 좆을 처박을 때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철퍽철퍽, 젖은 소리가 유난히 외설적으로 울리기도 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다.
“흐, 으읏, 필릭스, 제발-….”
쏟아지는 물소리에 제 신음이 묻히기를 바라며 아이작은 억눌린 소리를 간간이 흘렸다. 이대로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아니면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필릭스는 애원하는 아이작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속도를 늦추질 않는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미 한 번 질펀하게 사정했지만 필릭스는 멈추지도 않고 추삽질을 이었다. 견디기 어려워진 아이작이 헐떡이며 허리를 비틀자 필릭스의 손이 철썩, 물에 젖은 둔부를 후려쳤다.
“흐읏-.”
“아이작, 제대로 허리 들어야지. 도망치려고 하면 못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도망치게 두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아이작의 둥근 엉덩이를 꽉 움켜쥔 필릭스는 다시금 거세게 내벽을 때려 박았다. 푹, 푹, 푹, 숨 쉴 틈도 없이 쳐대면서도 그는 딱히 호흡이 가빠지지도 않는다. 외려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허리를 쳐올릴 뿐이다.
“내가 말했던가? 네가 환장하게 예뻐서 물고 빨고 깨물고 싶어 죽겠다고.”
문득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귓가에 진득하니 달라붙었다. 아이작은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대답은커녕 그가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도 않는다.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꼼짝없이 필릭스에게 뒤를 내어준 채 거친 숨을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헐떡이며 바들바들 떨고 있으려니 젖은 등 위로 필릭스의 탄탄한 바위 같은 가슴이 한 치의 떨어짐도 없이 달라붙었다. 뜨거운 열감을 가진 체온에 맞닿은 등이 화끈거린다. 아이작이 낮게 신음하자 필릭스는 대뜸 허리를 굽혀 그의 어깨에 이를 세웠다.
“으읏-!”
따끔한 통증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아이작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혀로 핥다가 이를 세워 깨물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금세 아이작의 뒷목과 어깨는 잇자국과 울혈 자국으로 빼곡하게 물들어갔다. 아예 온몸에 제 것이라고 새겨 넣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르겠다.
필릭스는 아무리 물고 빨아도 모자라다는 듯 멈추지 않고 어깨와 등에 이를 세우면서 손으로는 가슴을 주무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자의 가슴처럼 보드라운 살도 아니건만 손에 힘을 주어 근육으로 채워진 아이작의 가슴을 함부로 문지르고 젖꼭지를 손끝으로 비벼댄다.
덕분에 물은 따뜻했지만 젖꼭지는 이상할 정도로 뾰족이 서버렸다. 그의 손가락이, 손바닥이 스치고 지날 때마다 오싹해진 등줄기가 가늘게 떨리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필릭스가 엉덩이 안쪽에 싸지른 정액에서 퍼져 나오는 알파 페로몬 때문에 벌써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야해 빠져서는, 조금만 만져도 이렇게 젖꼭지를 세우지.”
귓불을 씹으며 던지는 말에 대꾸도 하지 못했다. 벽을 짚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기운이 빠져가는 허리는 자꾸 주저앉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아래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필릭스가 단번에 붙들고 끌어 올리는 바람에 기운 없이 쓰러지던 몸은 억지로 위로 밀려 올라가길 반복했다.
“아이작, 아직 멀었어. 엉덩이 제대로 들어.”
음습하게 속삭인 필릭스는 아예 양손으로 유두를 잡아 문지르고 비틀어댔다. 그의 손끝에서 희롱당하는 젖꼭지는 어느새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따갑다 못해 얼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움찔움찔 허리가 떨리는 전율을 일으키는 것이 이상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하, 읏-…….”
“안 돼.”
아이작이 아무리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흘리며 애원해도 필릭스는 단칼에 말을 잘라버릴 뿐이었다. 그리곤 제 욕심껏 아이작을 점령해 나간다.
젖꼭지를 문질러대던 손끝이 불현듯 아이작의 둥근 엉덩이를 사납게 움켜쥐었다. 통증과 전율이 교차하던 기이한 자극은 사라졌지만, 대신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사정없이 쳐대는 추삽질이 이어지자 아이작은 정신없이 흐느낄 수밖에 없어졌다.
얼마나 탐욕스럽게 내부를 꿰뚫는지 필릭스가 쑤셔댈 때마다 아랫배 위로 그의 성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짐승처럼 눈을 번득이며 달려드는 필릭스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지도 몰랐다.
“아, 젠장!”
퍽, 퍽, 거친 소리를 울리며 박아대던 필릭스는 문득 이를 씹더니 아이작의 턱을 쥐고 고개를 뒤로 꺾었다. 덕분에 뒤에서부터 허리를 뺀 자세로 박히고 있던 아이작은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거친 호흡을 내뱉어야만 했다.
“으, 흐윽-.”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필릭스가 젖은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아이작의 붉은 혀를 덥석 물어버렸으니 말이다. 퉁퉁 부은 입술을 게걸스럽게 물고 빨던 필릭스가 입안 가득 혀를 밀어 넣고 휘저어대자 닫히지 못한 입가에서는 물줄기와 함께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물까지 섞여 더더욱 질척이는 소리를 흘리는 키스는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좆질만 거친 것이 아니라 키스마저도 야만스러웠다. 아이작은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고 필릭스의 두꺼운 혀를 빨며 신음했다.
필릭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짧게 목을 울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푹, 소리가 나도록 성기를 뿌리 끝까지 아이작의 엉덩이 안에 처박은 그는 일순 움직임을 정지했다.
어찌나 깊이 쑤셔 박았는지 배 속에 거대한 둔기가 박힌 것만 같다. 악,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동시에 왈칵 뜨거운 감각이 내벽으로 쏟아졌다. 그가 사정한 것을 쉽게 깨닫게 만드는 열기였다.
이제 잠시 멈추려나. 얄팍한 기대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점막을 통해 확 번져가는 알파 페로몬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졌다. 아무리 해도 이것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기어이 무릎이 꺾인다. 벽을 짚은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이작의 허리를 끌어안은 필릭스 또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곤 네발로 기다시피 욕실 바닥에 엎드린 아이작의 등을 내리누르더니 아예 한쪽 무릎을 세우고 위로 올라탄다.
“아이작, 바닥이 더 편하다면 기꺼이 봐줄 테니까, 엉덩이 들어.”
“하, 하아-… 더는…… 내가…….”
“말했잖아, 벌써부터 약한 소리 하면 곤란해. 지난번처럼 환장하며 내게 매달리게 만들어줄 테니까, 얌전히 엉덩이 들고 구멍 벌려.”
필릭스의 입꼬리는 비스듬히 올라가 있으나 푸른 눈은 광적으로 번득였다. 내뱉는 목소리 또한 섬뜩하다. 아이작은 지친 듯 긴 숨을 내쉬다가 허벅지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빌라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미친 것처럼 덤벼든 필릭스였다. 정욕에 눈이 멀어버린 사내처럼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아이작의 입술을 사납게 빨며 거추장스럽다는 듯 옷을 벗겨버리기도 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아이작이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며 샤워를 먼저 하겠다고 말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필릭스는 거의 끌고 가다시피 아이작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싶으면 같이 하자면서. 물론 그와 샤워까지 같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필릭스는 이번만큼은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대부분은 멋대로 행동하는 필릭스였지만, 평소에는 다정하게 굴기도 했다. 제법 예의 바르게 행동할 때도 있다. 제 눈치를 살피다가 아이작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이처럼 토라져 입을 빼죽거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욕에 사로잡혔을 때는 달랐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난폭했고 본능에 충실히 움직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처음에도 그런 말을 했었다.
‘어쩌나. 난 짐승처럼 거친 플레이를 좋아하는데.’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의 취향은 지금도 변함없이 없는 모양이었다.
체념한 아이작은 순순히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곧장 뜨거운 열기를 가진 필릭스의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 엉덩이에 닿았다. 제대로 닫히지도 않아 뿌연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구멍 위를 문질러대는 살덩이는 지나치게 뜨거우면서도 외설적이었다.
바로 사정한 탓에 그의 성기는 살짝 수그러져 있었지만, 회음부와 입구까지 몇 번 길게 문지르다가 구멍 입구를 탁탁, 소리가 나도록 두들기기도 하자 금세 단단해지고 만다.
눈에 보일 정도로 부피를 더해가는 성기가 엉덩이골을 지분거리자 아이작은 잔뜩 긴장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괜히 억울했다. 토정한 게 맞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어째서 이토록 금방 또 세울 수 있는 거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그런 아이작의 원망 따위는 알지도 못한 채 필릭스는 미끈거리는 입구에 욕심껏 귀두를 비벼대기에 바빴다. 그러더니 곧 푹, 소리가 나도록 사정없이 밀어 넣는다. 제대로 빠져나오지도 않아, 구멍 안쪽에 고스란히 담겨 있던 정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흣-!”
내장이 다 밀려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아이작은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자세가 바뀐 탓일까, 아니면 내벽을 타고 몸 안으로 퍼지는 알파 페로몬 탓일까. 조금 전과는 몸의 반응이 미묘하게 다르다.
필릭스가 거칠게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그의 성기를 물고 있는 구멍이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내부에서는 내액이 흘러 진득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비록 정액과 물에 섞여 확연히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작은 제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곤 입술을 깨물었다.
성기 끝에선 프리컴이 줄줄 새어 나오기까지 했다. 아이작 또한 이미 두 번이나 사정을 한 탓에 얼마 동안은 다시 세우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는데, 정액으로 가득 찬 내부를 필릭스의 흉흉한 성기가 쑤셔대니 또다시 흥분해버린 거다.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눈앞이 핑 돌았다.
“아, 젠장! 아이작! 네 구멍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멍하니 엎드린 채 흔드는 대로 흔들리고 있으려니 필릭스가 격정적인 소리를 내지르며 아이작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리곤 발정 난 개처럼 쑤셔대기 시작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음탕하게 욕실을 가득 채웠다.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 내벽은 이미 자신의 의지를 배신한 채 사납게 쳐대는 필릭스의 성기를 기꺼이 반길 뿐이었다.
“아, 아아, 아-!”
입술 끝에선 교성이 흘렀다. 본능적으로 필릭스의 성기를 머금고 있는 구멍을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필릭스가 전하는 쾌감에 허벅지가 덜덜 떨린다. 모든 상념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고, 머릿속은 전부 흐물흐물 녹아버린 것만 같았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뒤집혔다. ‘더, 더, 으읏, 거기… 아, 좋아….’ 젖은 욕실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아이작은 저도 모를 말을 내뱉었다.
“하, 미치겠네. 이게 어디서 튀어나온 요부야?”
이성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는 후안무치의 짐승처럼 때려 박던 필릭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푹, 성기를 내벽 깊숙이 처박는다. 숨이 콱 막히도록 번져오는 쾌감에 아이작은 흐느끼며 허리를 벌벌 떨었다.
“더, 더 쑤셔줘. 엉망이 되게. 아아…, 좋아…….”
닳고 달은 창부처럼 엉덩이를 흔들자 필릭스 또한 격렬한 추삽질을 이었다.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딱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세상에 이런 희열과 쾌감이 있었던 건가, 싶었다.
잔뜩 벌리고 있는 허벅지가 제멋대로 경련하듯 떨리더니, 아이작은 일순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고꾸라졌다. 어느새 손도 대지 않은 성기 끝에서 뿌연 정액이 왈칵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맙소사. 아이작은 망연히 그 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욕실 바닥으로 흩뿌려진 반투명한 정액은 금세 물줄기에 금세 씻겨 나가 흔적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멍하니 하수도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를 쳐다보던 아이작은 허무한 한숨을 흘렸다.
비로소 필릭스에게서 흘러나온 알파 페로몬이 좁은 샤워부스를 가득 메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제 몸에도 가득 채워진 정액, 그리고 필릭스가 여과 없이 흘려대는 알파 페로몬.
약을 두세 알 씹어 먹어봤자 소용없는 노릇이라는 사실도 이제 알았다. 이 정도로 짙어진 페로몬에 미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미쳤는지도 모른다. 제 몸뚱이는 이미 통제에서 벗어나 필릭스의 좆에 달라붙어 있지 않은가.
“필릭스…….”
아이작은 덜덜 떨리는 팔로 가까스로 바닥을 짚고 눈을 들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자 필릭스는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작의 턱을 움켜쥐고 사납게 입을 맞췄다.
아이작은 기꺼이 입을 벌려 그의 혀를 빨았다. 물기가 섞인 혀를 다디단 꿀이라도 되는 것처럼 핥자 필릭스는 흥분해서 낮게 목울대를 울렸다. 정신없이 입술을 빨고 혀를 섞기도 한다. 한참 만에 겨우 짐승처럼 덤벼드는 필릭스에게서 벗어난 아이작은 숨을 헐떡이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
흐려지는 발음에 필릭스가 의아한 눈을 들었다.
“침대로…… 가요.”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알파 페로몬에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뭐든, 원하는 대로.”
싱긋 웃으며 필릭스는 손을 뻗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던 샤워기의 물줄기가 멈췄다.
* * *
눈꺼풀이 무거웠다. 들어 올리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을 정도다.
시간을 들여 가까스로 눈을 뜬 아이작은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주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낯선 방안은 고요했다. 들리는 것은 제 곁에서 엎드린 채 잠이 들어있는 필릭스의 고른 숨소리뿐이었다. 잠시 몽롱한 눈으로 잠든 필릭스를 쳐다보던 아이작은 침대에서 일어서려 몸을 움직였다. 이대로 있다간 등이 들러붙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머리를 조금 끄덕이다가 만 수준밖에 되질 않았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간 탓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사지는 철근이라도 된 듯 무겁기만 하다.
최근 들어 이 정도로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아이작은 이마를 구기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결국 일어나기를 포기해버린 채 다시 얌전히 누웠다. 필릭스와 나란히 누워있으려니 어쩔 수 없이 치솟는 민망함에 슬쩍 등을 돌리면서.
그렇게 숨죽인 채 누워있으려니 불현듯 지난밤 일이 주마등처럼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울며 흐느꼈던 기억이었다. 필릭스가 내뿜는 알파 페로몬에 푹 절여져 이성을 잃고 계속해서 신음하며 쾌감에 몸을 떨었던 자신이 있었다. 색정에 미친 것처럼 계속해서 박아달라고 그를 조르는 모습도 있었다.
“아-….”
귓가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신음이 이명처럼 들려오는 것만 같아 아이작은 손을 들어 입가를 틀어막고 말았다.
말도 안 된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황망함에 눈을 깜박이던 아이작의 목구멍 아래에서 한탄이 절로 흘렀다. 그 순간, 불쑥 단단한 팔이 아이작의 허리를 휘감는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흠칫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일어났으면 모닝 키스라도 해줘야지.”
아직 잠에 취해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아이작은 뻣뻣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그러자 필릭스는 허리에 팔을 감은 그대로 아이작을 확 끌어당긴다. 순식간에 벗은 등에 필릭스의 가슴이 딱 달라붙었다. 갑작스레 그의 품에 안긴 아이작은 짧게 숨을 멈춰야만 했다. 맞닿은 피부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음, 일어나자마자 네가 옆에 있는 것도 제법 괜찮네.”
여전히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아이작은 따끔거리는 목구멍 아래로 마른침을 삼켰다. 제법 괜찮다고 말하는 필릭스와 반대로 긴장되어 죽을 것 같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니 말이다.
“……돌아가 봐야 할 때 아닙니까?”
가까스로 질문을 내뱉는 순간, 잔뜩 쉬어있는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작은 손끝으로 목을 더듬었다. 얼마나 울고 소리쳤기에 목소리가 이 지경으로 가버린 걸까.
“괜찮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어제 아닙니까?”
위화감이 들어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등 뒤에서 필릭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아이작, 무릉도원에 있다 나온 것 같지 않아?”
“무슨…….”
“어제가 아니라 그제야. 이틀이 지났거든.”
아이작은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어젯밤이 아니라 그제 밤이라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시간이 대체 어떻게 지나간 거지?
“그 시간 내내… 당신과 뒹굴었다는 겁니까?”
“물론.”
“어떻게…….”
“네가 매달렸으니까.”
필릭스는 당당하게 대꾸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눈만 깜박이고 있으려니, 문득 어떤 질문이 귓가를 스치듯 지났다.
‘아이작, 이미 하루가 꼬박 지나갔는데 어떻게 할래? 어차피 내일모레, 월요일이면 네게 또다시 받아야 할 페이가 있는데, 지금 갚겠어? 아니면 월요일로 미룰까?’
나른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필릭스가, 분명 그렇게 물었었다.
그러니까, 지난밤이었다. 지지난밤 욕실에서부터 시작된 섹스가 하루를 이어갔고 그때까지도 알파 페로몬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던 아이작은 필릭스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질 못했었다.
‘지금, 지금 해요. 으흣, 안 돼, 빼지 마….’
아이작은 고개를 흔들며 멈추지 말라며 울었다. 자신의 엉덩이에 처박고 있던 샅을 빼려고 하는 필릭스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매달리기도 했다. 더 해달라고, 빼지 말고 계속해서 박아달라고, 안에 싸달라고 조르기도 했었다.
……미쳤구나.
메마른 입술을 틀어막으며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섹스를 즐기는지 미처 몰랐지 뭐야.”
필릭스가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 끝에서 흩어지는 습하고 더운 숨결이 살갗에 닿자 당장 오싹한 감각이 척추를 따라 흘렀다.
아이작은 흠칫, 어깨를 굳히며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의지로 필릭스를 떼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 버둥거리다가 금세 지쳐버린 아이작은 끝내 필릭스의 팔 위로 자신의 팔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즐기지 않습니다.”
그가 여과 없이 흘린 알파 페로몬이 지나치게 강력한 탓이었다. 자신을 베타라고 알고 있으니 조절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지난밤엔 도가 지나쳤다. 그 정도라면 아무리 베타라고 해도 이상이 오게 마련이다.
만에 하나 오메가인 자신이 억제제를 세 알이나 챙겨 먹지 않았다면, 히트사이클이 터졌거나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을지도 몰랐다. 알파 페로몬이 오메가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과할 경우 미치게 만드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니 말이다.
더군다나 필릭스는 알파들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최우성 알파가 아닌가. 그의 알파 페로몬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새삼 떠올리려니 한기가 감돈다.
“즐기지 않는데 그렇게 울면서 매달려? 아이작, 나는 러트가 와도 괜찮겠다고 내심 안심하고 있었거든. 네가 걱정하던 것처럼 씹창 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하…….”
“봐, 이틀이나 박히고도 멀쩡하잖아? 되레 내가 그만둘까 안달하기도 하고 말이야. 귀엽게도.”
쪽,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필릭스는 코끝으로 아이작의 살 내음을 맡는 것처럼 킁킁거렸다. 덕분에 오싹한 감각이 목덜미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 아이작은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그거 알아? 지난밤부터 네게서 좋은 냄새가 나. 땀 냄새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체취가 좋아. 그게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단 말이야. 오메가도 아니면서, 냄새로 사람을 홀리려고 하다니. 만에 하나, 네가 오메가였다면…….”
문득 목의 여린 살갗을 빨던 필릭스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휙 고개를 돌려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러자 한참 즐겁게 놀던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마냥 필릭스가 인상을 구겼다.
“왜? 아프게 깨물지도 않았는데.”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시렸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오메가 페로몬이 흘러나간 것을 알아차린 아이작은 그에게서 몸을 떼려 했다. 그러나 쉽지가 않았다.
엄청난 근육통과 구멍 안쪽에 열상이라도 입었는지 화끈거리는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허리를 감고 있는 필릭스의 팔이 풀리질 않은 탓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아이작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틀 내내 나와 개처럼 뒹굴었던 요부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모르겠네.”
“…….”
“뭐, 낮과 밤의 차이가 극심해서 더 좋은 거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매몰차게 굴면 섭섭하단 말이지.”
쯧, 혀를 찬 필릭스는 순순히 팔을 풀어주는 척 움직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침대에 걸터앉은 그대로 움직임이 없었다. 사실, 좀처럼 다리에 기운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을 짚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기도 했거니와, 이대로 필릭스를 두고 일어서면 어떤 후환이 생길지 두렵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음 주 월요일 분까지 전부 값을 치른 것이군요.”
“아쉬워? 원하면 한 번 더 할 수도 있고.”
“사양합니다.”
딱 잘라 거절하자 필릭스는 다시금 입을 삐죽거렸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 왜 굳이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고 있으려니 필릭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 아이작 싱클레어겠지.”
아이작은 문득 기이한 표정으로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풀네임으로 부른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위화감이 든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왜?”
그가 되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작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싱겁긴. 그나저나 뭘 했기에 몸에 자잘한 상처가 많아?”
모로 누운 그대로 머리를 받치고 있던 필릭스가 아이작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주욱 쓸며 물었다. 아이작은 시선을 내려 그가 보고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체격, 적당한 근육이 촘촘히 채워진 몸 군데군데에는 필릭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적도 없었고, 숨길 수 있는 상처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필릭스가 이제야 알아차린 것은, 매번 옷을 벗었을 때마다 발정 난 짐승처럼 몸을 뒤엉키기 바빠 피부의 자잘한 흉터까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거칠게 놀았죠.”
“운동은 그렇다 쳐도, 네가 거칠게 놀았다고? 의외네.”
필릭스는 재미있다는 투로 눈을 휘었다.
“운동을 하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됐었습니다. 철이 없기도 했고 어리기도 했었죠.”
간단히 대답한 아이작은 이번에야말로 침대에서 내려가려 몸을 틀었다. 그러자 이번엔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이어졌다. 아직 움직이지 말라는 뜻을 알아차린 아이작은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운동을 했는데?”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작의 곧은 등을 어루만지며 필릭스는 느긋하게 질문했다. 그러면서 투박한 손가락을 아이작의 척추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뜨린다. 오싹하면서 간지러운 감각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까지 더해지자 입안이 바싹 마른다.
“응?”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신경을 빼앗긴 아이작이 대답을 못 하고 있으려니 필릭스가 부추기듯 되물었다. 그러나 아이작의 촘촘한 근육으로 뒤덮인 등과 잘록한 허리를 매만지는 손길은 점점 더 진득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관능적인 손길이었다.
“…여러 가지였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은 순간, 필릭스의 커다란 손바닥이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아이작의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그냥 쥔 것이 아니라 터뜨릴 것처럼 꽉 움켜쥔다. 읏, 짧은 신음이 목구멍 위로 튀어나왔다.
“어려서 이혼한 부친을 따라 워싱턴으로 갔다며?”
그러나 필릭스는 어디까지나 태평하게 다른 질문을 던질 따름이었다. 지금 이 시간과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네.”
둔부를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던 필릭스의 가운뎃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침대와 엉덩이골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은 천연스럽게 입구 주위를 꾹꾹 눌러댄다. 아직 다 빼내지 못한 정액이 조금씩 새어 나와 축축해진 살갗을 지분거리자 오싹한 전류가 허리를 타고 오른다.
“거기서 운동을 배우고 거칠게 놀았다는 거야?”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마치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이어지는 질문에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 필릭스를 향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것만으로 눈가가 발갛게 변해버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필릭스는 가늘게 숨을 헐떡이는 아이작을 빤히 보며 웃었다.
“네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로 며칠 동안 생각이 났거든. 원하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당장이라도 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을 것처럼 지분거리면서도 말은 술술 잘도 내뱉는다. 아이작은 제 엉덩이를 희롱하는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질퍽하게 젖은 입구를 문지르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춘다.
“제가, 대답하지 않으면 뒷조사를 하려고요?”
“와…… 이제 나에 대해 제법 잘 아는 것 같잖아? 좋은데?”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사내였다. 빙글거리며 웃는 그를 가만히 노려보던 아이작은 손 좀 빼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렸다. 딱히 필릭스의 얼굴을 마주하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메가였습니다.”
“오메가?”
필릭스의 짐짓 놀란 듯한 목소리가 뒤따랐지만, 아이작은 제 이야기를 마저 이어가기만 했다.
“베타인 어머니와 이혼한 후, 저를 데리고 알파였던 새아버지와 재혼을 했죠. 그분을 따라 워싱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둘이었군.”
“그런 셈입니다.”
“그래서?”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개인사를 묻는다. 아이작은 짧게 심호흡했다.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오메가였던 아버지가 사고사로 돌아가신 것밖에.”
“흐음.”
“그 후 자립해서 나왔죠. 새아버지와는 딱히 접점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작은 거기까지라고 잘라내듯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움직이기가 무섭게 필릭스의 다른 손이 허리를 붙들고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왜-.”
왜 이러냐는 말이 가로막힌다. 엉덩이에서 떼지 않고 있던 손가락이 기어이 구멍 안으로 푹, 미끄러져 들어온 탓이었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의 손가락이 단숨에 파고들자, 아이작은 허리를 둥글게 굽히며 낮게 신음했다.
아직도 흐물거리는 내벽으로 파고든 손가락은 가위질하듯 입구를 벌렸다. 그러자 왈칵, 고여 있던 정액이 덩어리 채 쏟아졌다. 그 기이한 느낌에 아이작은 몸을 더욱 딱딱하게 굳힌 채 이를 씹었다.
“와, 이것 참. 내가 봐도 질리게 싸놨네.”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정액을 빼내는 그를 아이작은 차마 막지 못했다.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고 어깨를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내벽을 휘젓던 손가락이 마침내 빠져나가자 아이작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얼마나 쏟아져 나왔는지 침대 시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 샤워하러 가도 되겠습니까?”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아이작은 조용히 물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 몇 분 전이건만, 벌써 진이 다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든지.”
필릭스는 흠뻑 젖은 손을 시트에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으며 대꾸했다. 그제야 아이작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운이 서리지 않아 덜덜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 욕실로 향하고 있으려니, 태연히 그 모습을 관망하던 필릭스가 ‘아이작’ 하고 이름을 불렀다.
욕실 앞에 다다른 아이작이 고개를 돌렸다.
“배고픈데 뭐 좀 먹어야겠지?”
그러자 뜬금없는 질문을 툭 던진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아이작은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룸서비스로 부탁드립니다.”
“원하는 대로.”
뒷머리를 팔로 받치고 베개에 상체를 기대고 있던 필릭스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해변 위로 쏟아지는 밝은 빛보다 더 해사한 미소에 홀릴 것만 같아 아이작은 억지로 눈을 돌려야만 했다. 욕실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왠지 무겁기만 했다.
쏴아, 물소리가 들리자 비로소 필릭스는 사이드 테이블 위로 팔을 뻗었다. 그가 손에 쥔 것은 브런치를 위한 룸서비스 메뉴판과 휴대폰이었다. 눈으로는 메뉴를 훑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켜고 전화번호를 누른다. 신호음은 길게 울리지도 않았다.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신원조회 해봐.”
<갑자기 또 누굴 말씀입니까?>
대뜸 할 말을 전하자 전화기 너머로 토니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의 아버지. 그리고 새아버지.”
욕실에서부터 들려오는 물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필릭스는 느긋하게 메뉴를 뒤적였다.
<새아버지요?>
“아이작의 친부가 오메가였다더군. 새아버지는 알파였고. 찾아.”
얼떨떨해하는 토니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툭, 통화를 종료시킨 그는 메뉴판에 고정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휴대폰을 조용히 있던 자리 위로 내려놓았다.
잠시 후 샤워의 물소리가 그쳤다. 필릭스는 톡, 메뉴를 손끝으로 두들기며 눈을 들었다. 프러시안 블루의 동공은 샤워를 마치고 나올 아이작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식사를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는 이미 브런치인지 점심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시간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커피와 함께하는 오믈렛은 상당히 맛이 좋았다.
사실 샤워도 겨우 하고 나왔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못했기에 룸서비스를 주문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과적으론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이곳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그려보았던, 햇살 가득한 패티오 아래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필릭스는 어느새 제 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늘어지게 앉아 맥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샤워한 후 대충 말려 엉클어진 금발, 검은 선글라스와 그 아래로 드러나는 오뚝한 콧날, 맥주병을 물고 있는 탓에 보기 좋은 윗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간 모습까지, 잘생긴 한량이 따로 없다.
“식사예절은 제대로 배우셨다면서요.”
한쪽 무릎 위에 다른 쪽 발목을 얹은 채 반쯤 누운 자세로 늘어져 있는 필릭스를 보며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빼죽 눈썹을 치켜세운 그가 아이작을 향했다.
“다 먹었잖아.”
“전 아직 먹고 있는 중입니다만.”
“…너, 지금 되게 우리 할아버지 같았던 거 알아?”
“그랬습니까?”
되물었지만 필릭스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빌라지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란도란 수다 떠는 소리, 멀리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파도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섞여들었다. 파라솔 아래에 앉아 오믈렛을 우물거리던 아이작은 하염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왜 또 그런 표정이야? 뭐가 못마땅해?”
그러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옆에서 퉁명스러운 질문이 들려온다. 아이작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필릭스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니요. 벤자민이 있었으면 즐거워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모래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거든요.”
“누가 애 아빠 아니랄까 봐, 이럴 때마저도 애부터 생각하는 건가.”
필릭스는 작게 투덜거리며 다시 맥주병을 기울였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켜면서도 낯빛조차 변함이 없다. 누가 보면 스파클링 워터를 마시는 줄 알겠다.
“벤자민이 있었으면 네가 이틀 동안이나 자지러지지도 못했을 텐데?”
아이작이 아직 남아있는 오믈렛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였다. 노골적인 말을 내뱉은 필릭스는 악동처럼 입술을 비스듬히 당겨 웃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겠죠. 당신이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무심히 맞받아치자 필릭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끝내 쳇,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 그는 말없이 맥주만 들이켤 뿐이었다.
또다시 토라진 아이 같은 모습에 아이작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럴 때만큼은 정말이지 벤자민과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감상이었다.
“리조트나 해변에서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입니다.”
푸른 바다 너머로 시선을 돌린 아이작이 말문을 열었다. 화제를 바꿔보려고 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솔직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랬어?”
처음으로, 캐묻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아이작을 필릭스가 의외라는 투로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먼저 말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한 손에 포크를 쥔 그대로 파도가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바다에 시선을 둔 채 잠시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필릭스는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맥주병을 기울이며 아이작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따름이다. 마침내 아이작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어려서는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족여행을 갔던 기억은 없습니다. 부모님이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분들이 이혼한 후에는 더더욱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죠.”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마치 다른 이의 과거를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도, 표정도 건조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다정하긴 했지만 늘 바빴고, 여유가 있다고 해도 저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커서는 내가 살기 바빴기에 틈이 없었고요. 그러다 보니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여행 한 번 제대로 해보질 못했습니다.”
“그런 점은 또 비슷하군.”
나도 그랬으니까. 필릭스는 시큰둥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부모가 바쁘면 아이들도 여유가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지금껏 못 해봤다면 앞으로 열심히 해보면 되는 거지.”
순식간이 비워버린 맥주의 빈 병을 퉁, 탁자 위에 내려놓은 필릭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게다가 난 네가 아무것도 못 해봤다는 게 오히려 상당히 마음에 들거든.”
“무슨 뜻입니까?”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앞으로 나와 하게 될 테니, 얼마나 좋아.”
농담을 하듯 어깨를 으쓱이는 필릭스를 아이작은 빤히 주시했다.
“앞으로, 제가 처음 접하는 모든 것을 당신과 같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가볍게 말한 필릭스와는 달리 아이작이 진중한 투로 물었다.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연하잖아. 네가 지금껏 못 해본 일들을 나 말고 또 어떤 새끼랑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까?”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
당당하게 되묻는 질문에 아이작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어졌다.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저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건지.
“당신이 불리할 텐데요.”
“내가 왜?”
“전 해보지 못한 일들이 해 본 일보다 훨씬 더 많으니까요. 그 모든 것을 저에게 맞춰서 함께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별말을 다 하네. 시간이야 만들면 그만인걸.”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연애를 할 시간이 어디 있겠냐는 뜻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지만, 늘 그렇듯 필릭스가 예리하게 눈치채는 법은 없었다. 아이작은 내심 당황해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만에 하나…….”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면 그땐 이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질문을 던지려던 아이작은 곧 정신을 차리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뭔데 말을 하다가 말아?”
필릭스가 새 맥주의 뚜껑을 돌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싱겁긴.”
집요하게 캐묻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는 픽, 웃으며 맥주병을 기울였다. 꿀꺽꿀꺽 맥주가 시원하게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목울대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아이작은 조용히 응시했다.
지금이야 자신에 대한 흥미가 가시질 않아 이런 시간도 나눌 수 있겠지만,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특히 필릭스라면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본인의 입으로도 사람에게 싫증을 빨리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었으니까.
필릭스에 대한 상념을 이어가고 있으려니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눈가를 어지럽힌다. 아이작은 손으로 머리칼을 걷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에 파라솔의 그늘이 조금씩 비껴져 머리 위로 눈부신 햇살이 작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선선한 탓인지 덥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기분 좋은 열감이었다. 잠시 잠깐 일어났던 불온한 감정과, 복잡한 생각마저도 서서히 날려버리는 온화함에 취한 듯 아이작은 밝은 햇살 아래에서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에 기댔다.
어찌나 포근한지 이대로 있다간 깜박 잠이 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옆에 앉아있는 심술궂은 남자는 아이작이 쉽사리 잠들게 내버려두진 않았다.
문득 뜨겁고 밝은 햇볕이 사라진다 싶더니, 서늘하면서도 축축한 감각이 입술 위에서 번졌다. 말캉한 입술이 맞물린 채 움직일 때마다 젖은 소리를 흘리기도 했다. 아이작은 가늘게 눈을 들었다. 제 입술을 탐욕스럽게 핥고 있는 필릭스의 조각 같은 콧대와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필릭스는 마치 아이작의 입술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핥고 빨았다. 쪽쪽, 울리는 소리가 자극적이다.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체향과 시원한 코오롱의 향이 가슴을 들뜨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작은 군소리 없이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점차 익숙해져 가는 키스를 반기며 입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필릭스의 혀가 입안 깊숙이 침범해 마음껏 점막을 휘저었다. 필릭스가 마시던 쌉쌀한 맥주 맛이 가득 번진다.
느릿하고 감미롭게 움직이다가도, 돌연 기갈 든 사람처럼 사납게 혀를 빨고 입술을 비비는 필릭스의 키스에 마냥 취해있을 무렵이었다.
“아이작,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넌 내 거고, 앞으로 네 모든 시간은 나와 함께 하게 될 테니까. 감히 다른 새끼가 끼어들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아이작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아이작은 목구멍이 콱 막히고 말았다.
꼭 저와 연애라도 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고픈 말이 턱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는 못했다. 그저 필릭스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끌어당겼을 뿐이다.
오만하게 웃음 짓던 그가 아이작의 요구대로 순순히 끌려와 입을 맞췄다. 해변의 햇살을 닮은, 뜨거우면서도 서늘하고, 또 달콤하기까지 한 키스는 끊이질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 * *
해가 뉘엿뉘엿 져갈 무렵이 되어서야 아파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필릭스의 자동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아이작은 제 입술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차가 멈춰 서기 직전까지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입술이 살짝 부어 아릿하기까지 했다.
“내리자마자 매정하게 닦아버리면 보고 있는 내 기분은 어떻게 되겠어?”
그러자 어느새 제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뒤에서부터 필릭스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작은 흘끔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물고 빤 탓입니다만.”
“아니지. 네 입술이 빌어먹게 맛있어서 그런 거지.”
내려진 창문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 있던 필릭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아이작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그를 무감정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제야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음 주 월요일에 봐.”
-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 전에는 안 오십니까?”
충동적인 질문은 생각보다 먼저 튀어 나갔다. 내뱉고 나서야 괜한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망해졌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못 보면 내가 보고 싶을 것 같아? 그러면 기꺼이 찾아가고.”
필릭스의 키들거리는 모습을 보려니 단단히 실수했다는 생각에 아이작은 목울대를 울리고 말았다.
“딱히 월요일이 아니더라도 가게에 종종 찾아왔었으니까요.”
“알았어. 네가 그토록 보고 싶다고 하면 평일에도 찾아가야지. 얼마나 멀다고 거길 못 갈까?”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변명하듯 대답했지만 필릭스의 접힌 눈은 펴질 줄을 몰랐다. 끝내 냉정한 인사말로 대화를 종료해버린 아이작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로 필릭스의 끈적이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작은 뒤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게이트 안으로 들어설 따름이었다.
아이작이 안전하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 세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멀어지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게이트 문 안쪽으로 기대 서 있던 아이작은, 주위가 완전히 고요해지고 나서야 느릿하게 걸음을 옮길 수가 있었다. 괜히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의 대부분 아파트가 그렇듯 이곳도 2층의 목조 건물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이작의 아파트는 2층이었다. 이곳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건만, 오늘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다리가 유난히 무거웠다.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 또한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필릭스와 함께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피로감이 이제야 한꺼번에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2층에 올라서서 복도를 걸을 때에는 발을 끌다시피 해야만 했다. 이래서 내일은 가게를 오픈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벌써 이틀이나 문을 닫아놨는데…….
꽃가게를 생각하려니 한숨만 흘렀다. 뭘 믿고 가게를 매일 닫아놓는 건지, 저도 모를 일이었다.
자책하던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열쇠를 뒤적여 꺼냈다. 그리고 열쇠 구멍에 열쇠를 가져가 댄 순간, 꺾어지는 모퉁이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에 아이작은 시선만 움직여 조용히 소리가 울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케이.”
시선이 향해진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낯선 이름을 부르는 묵직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동시에 아이작은 재빠르게 사내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