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6)

5. Date Night - 1

무료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늘 그렇듯 꽃가게는 한가했고 날씨는 따사로웠다. 그러나 지나치게 조용한 시간은 지루할 정도였다. 어쩌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렸던 필릭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울 거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필릭스는 일주일이 넘도록 가게에 찾아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따로 연락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감감무소식일 뿐이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계약 날짜인 월요일이 훌쩍 넘어가고 말았다.

지난주는 미리 받아갔다고 해도, 이번 주 월요일은 이미 지나쳐버렸다. 어떻게든 꼬박꼬박 받겠다고 으르렁거리던 필릭스를 떠올리면, 다음번엔 연달아 이틀을 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경호원이 들고 있던 단검이 탄도 단검인 건 어떻게 알았어?’

문득 필릭스의 중저음이 떠올랐다.

벤자민의 생일 파티가 있었던 지난주 토요일, 어머니의 집에서 저녁까지 먹은 후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필릭스가 뜬금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아이작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동차 뒷좌석에 느긋하게 등을 기댄 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잠이 안 올 때 케이블 TV를 돌리다 보면 흥미로운 방송들이 많이 나옵니다.’

‘TV라.’

‘무기를 하나씩 테스트하고 성능을 비교 분석하는 프로그램인데, 제법 유익하더군요.’

무심히 대꾸하자 필릭스는 ‘하긴.’ 하고 중얼거리더니 말을 멈추고 태블릿에 집중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야경이 스산하게 비치고 있었다.

‘저에게 마킹을 하셨다고요.’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툭 던진 질문에 필릭스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아이작을 향했다.

‘이런, 들켰네?’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아이작은 눈을 들었다. 태블릿을 무릎에 얹어둔 채 턱을 괴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짙은 푸른 눈동자에 심장이 조여진다. 아이작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겁니까.’

‘내 것이라고 표시해본 건데, 왜?’

‘내 것이라니…….’

말도 없이 마킹을 한 일에 대해 그가 사과할 거라고는 눈곱만치도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토록 당당하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아이작이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필릭스는 손을 뻗어 아이작의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뒷목을 간질이듯 긁어내린다.

흠칫, 그 단조로운 움직임에 아이작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순간이었다. 필릭스의 손에 힘이 실리는 것과 동시에 아이작의 목덜미가 그대로 끌어당겨졌다. 기우뚱 상체가 기울었고 그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조금만 움직이면 코끝이 맞닿을 것만 같아 아이작은 숨까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 아직도 모르겠어?’

조곤조곤 속삭이는 그의 숨결이 코끝과 입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내며 그를 마주했다.

‘뭘 말입니까.’

‘넌, 내 것이 맞아.’

싱긋 웃는 얼굴이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 앞에선 그토록 선량한 척, 예의 바른 귀공자인 척 굴던 사내는 이미 온데간데없다. 정말이지 천하의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을 터였다.

‘제가 당신의 것이라고요? 언제부터 그런 결론이 나온 겁니까?’

‘네가 계약서에 사인한 후부터.’

따지듯 물었지만 되레 당당하게 대꾸하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억울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딱히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에 입술만 씹고 말았다.

‘네 아파트 앞이야. 내려야지?’

여전히 목덜미를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필릭스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아이작은 마른침을 목구멍 아래로 넘겼다.

‘내릴 수 있게…. 손을 치워주시죠.’

갈라진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을 건네자 필릭스의 진득한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 제 입술 위였다.

‘아, 그래. 치워주긴 해야지.’

‘…….’

‘그 전에.’

몰랐다는 투로 중얼거린 필릭스의 목소리가 낮았다.

‘굿나잇 키스는 하고.’

계약서는 필요 없다고 했던 건 자신이었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던 것도 자신이다. 그리고 필릭스가 낯짝 두꺼운 데다 거절을 모르는 사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도, 자신이었던 것 같다.

난감해하던 아이작은 반쯤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채 벌어지기도 전에 목덜미를 쥐고 있던 필릭스의 손이 확 당겨졌다. 동시에 부드러운 열감을 가진 필릭스의 입술이 거칠게 맞물렸다.

거침없이 파고드는 열기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질끈 눈을 감은 채 아이작은 필릭스의 어깨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옷자락에 주름이 가도록 꽉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필릭스는 오후에 그랬던 것처럼 희열을 일으키는 키스를 퍼부을 따름이었다.

‘아-.’

어느덧 필릭스의 알파 페로몬이 서서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매혹적인 향기에 또다시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페로몬 탓일지도 몰랐다. 몸에서 끓는 듯한 열이 퍼져갔다.

거친 숨을 내뱉던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리고 필릭스의 혀를 반겼다. 제 입안을 멋대로 휘젓는 입맞춤이 이어질수록 눈앞이 아찔해진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리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온몸이 달아올라 저도 모를 신음을 흘리기만 했다.

어쩌면 뱀처럼 혀를 감고 자신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것처럼 맹렬히 달려드는 필릭스의 키스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의 페로몬에 저도 모르게 중독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솔직한 반응을 일으키는 제 몸뚱이는 거짓을 고하지 못하게 했다.

‘하아, 필릭스-!’

자신의 입술을 씹는 외설적인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새 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필릭스는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그렇게 야한 얼굴로, 그렇게 꼴리게 부르면, 너 여기서 못 내려. 아니면 아예 네 아파트로 들어가 버릴까?’

‘그래도 괜찮겠어?’ 웃음기 섞인 경고에 그제야 눈이 번쩍 떠졌다. 필릭스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내리고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를 바라보는 아이작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 나른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신과는 반대로 여유롭기까지 한 그의 표정은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허우적거리고 발버둥 쳐봤자 어차피 그에게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완벽하게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표정이기도 했지만, 매번 그의 키스에 흐물흐물 녹아버리니 할 말은 없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울렁이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아이작은 몸을 돌렸다. 필릭스가 말했던 것처럼 어느새 세단은 그의 아파트 앞에 멈춰있었다.

‘다시 보려면 일주일이 넘어야 할 거야.’

‘…그렇군요.’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턱을 괸 그대로 나른하게 훑어보는 필릭스의 시선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아이작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싸늘한 바람이 정신을 일깨웠다. 자신을 감싸던 진득한 알파 페로몬까지 모조리 씻기는 기분에 크게 숨을 들이켰다.

펠릭스의 세단은 조용히 제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점차 작아지는 세단의 불빛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아이작은 한참 후에야 걸음을 돌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필릭스의 손바닥 안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은 씻어내질 못했다. 과연 이런 상황과 관계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려는 건지, 착잡하기만 한 밤이었다.

톡, 톡, 지난 일을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던 아이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자책하던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꽃가게보다 유난히 나무가 빡빡하게 놓인 가게 안쪽으로 걸어간 그는, 좁은 틈으로 옮겨 다니며 나무들을 하나씩 돌보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녹색의 잎이 우거진 나무들의 잎을 닦아내기도 하고 물을 주기도 하면서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한다.

적막한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나무들을 돌보는 아이작의 손길만이 단조로운 시계 소리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 *

탁, 문을 닫고 나오는 토니의 얼굴은 비장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봉투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단단히 밀봉된 봉투 위에는 의뢰인의 이름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서류나 자료는 전부 파기해달라고 요청했으니 이 봉투 안에 들어있는 서류만이 유일한 결과물이 될 터였다.

초조함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진정시키며 토니는 복도를 걸었다. 당장 뜯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낸 그는 복도를 걷다가 비상구로 들어섰다.

혹시 몰라 수하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필릭스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진행한 검사였기에 비밀은 철저하게 지켜져야만 했다. 때마침 필릭스는 조부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터라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에 수월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도 어려워 비상구로 들어선 토니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1층의 비상구 문을 열기 직전, 봉투를 찢었다. 이 결과를 보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었는지. 벌써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필릭스와 아이작의 머리카락은 둘이 요트에서 밤을 보낸 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문제는 벤자민이었다. 경호원에게 말하면 쉽게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눈치 빠른 경호원이라면 토니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리고도 남을 일이었기에 남에게 시킬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직접 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머리카락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애초에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갈 만한 일이 없었거니와, 하필이면 아이의 생일 파티라 지나치게 많은 아이들이 섞여 정신없이 뛰어놀기 바쁘니 더더욱 그랬다.

하는 수 없이 토니는 잭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잭은 아이들에게 말을 태워주는 수하와 같이 돌아다니다가 어렵사리 벤자민의 머리카락을 가져왔다. 혹시나 했는데 제법 손쉽게 일을 마무리한 셈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았고, 필릭스는 아이작에게 집중하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데다가(그 정도로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아니기도 했고), 아이작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자료를 입수한 토니는 그것을 곧바로 유전자 검사 연구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쥔 이 봉투 안에는 필릭스, 아이작, 벤자민의 친자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의 결과가 들어있었다.

찌익, 봉투를 찢는 소리가 텅 빈 비상구 위로 날카롭게 울렸다. 토니는 잔뜩 긴장해서 축축해진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손에 쥔 순간이었다. 스윽, 목에 닿는 서늘한 감각에 토니는 움찔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분명 3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내내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었다. 게다가 텅 비어있는 비상구에서는 작은 소리라도 크게 울리기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면 반드시 알아차리게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인영은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이 어느새 제 뒤로 다가와 목덜미에 섬뜩한 기운의 칼날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토니는 움직임을 멈춘 그대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건가? 아니면 모르고 이러는 건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토니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흘끔 시선을 돌리자 새까만 장갑으로 감싼 손이 보였다. 그의 손끝에는 역시나 날 선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손바닥 정도 길이의 나이프는 얇고 매끈했다. 양날의 블레이드와 검은 코딩, 아래쪽은 톱니처럼 파진 모양이 Gerber Mark II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려준다. 제법 전문적인 나이프였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조용히 묻자 사내는 툭, 토니의 허리춤을 두들겼다. 지갑을 꺼내라는 뜻임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토니는 선선히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두고 있던 지갑을 꺼냈다. 사내는 서슴없이 지갑을 갈취했다.

“이봐, 내가 누군지 모르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라면, 대단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야.”

“…….”

“만약에 알면서도 이런다면, 감당하지 못할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거라고 말해두지.”

낮게 깔리는 토니의 음성에는 어느덧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말 한마디 없이 툭, 토니의 왼팔을 두들길 따름이었다. 이번에도 토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시계와 반지를 풀어 내밀었다.

몇만 불이나 하는 명품 시계와 다이아가 박혀 있는 반지를 가뿐히 빼앗아간 강도는 마지막으로 토니가 손에 꼭 쥐고 있던 봉투마저 휙 낚아챘다. 토니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사내는 그게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뺏고 보자는 심보인 것 같았다.

“이보게, 그건 별로 비싼 것도 아니니-.”

한숨처럼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토니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나이프를 쥐고 있는 사내의 손목을 내리쳤다. 아니,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사내는 한발 먼저 피하더니 되레 토니의 손목을 거센 힘으로 쳐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토니는 팔목을 한 번 문지르다가 곧바로 다른 손을 휘둘러 반격했다.

지금은 나이가 있어 실무에서 한발 떼고 있다고는 해도,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이쪽 세계에서 일해 온 탓에 잔뼈가 굵었다. 감히 누구 하나 토니의 앞에선 함부로 나대지 못할 만큼 실력 또한 출중했다.

노장이라고는 하나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자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토니였다. 그런 토니가 연속적으로 빠르게 내지르는 주먹을 가까스로 팔을 들어 방어한 강도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토니는 이를 씹으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나이프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방어만 할 뿐이다. 애초에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못 공격했다간 오히려 붙들리기 십상이니 그럴 수도 있었고, 애초에 칼을 잘 쓰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일 수도 있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아니면 칼은 그저 위협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건가.”

한 손에 봉투를, 다른 손엔 나이프를 쥔 사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의 틈도 없이 새까만 옷을 두르고 있었다. 검은 터들넥, 검은 바지, 검은 장갑, 검은 군화, 그리고 머리엔 까만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눈이나 코, 혹은 입술,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는 법이 없었다.

정말이지 철저한 자였다. 하긴, 강도짓을 하는데 허술하게 제 신분을 노출시키는 멍청이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지나칠 정도로 꽁꽁 싸맸다. 마치 새까만 기둥이라도 되는 것 같은 사내를 물끄러미 훑던 토니는 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네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빠져나갈 거라고 생각하진 마라.”

토니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을 때였다.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봉투를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바지 뒷주머니에 꽂더니 휙, 나이프를 돌렸다. 칼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라는 제 생각을 비웃듯이 위험천만한 무기가 손에 달라붙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검이 손에 익을 대로 익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손안에서 나이프가 돌아가는 모양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토니가 다시금 주먹을 말아 쥐고 자세를 고쳤다. 그러자 강도는 불쑥 허리춤의 검집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하나둘 주름이 잡혀있는 토니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강도는 주먹을 움켜쥐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휙,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로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주먹은 토니의 턱을 피해갔지만, 그 위력을 절감한 토니는 눈을 부릅떴다.

제대로 맞았으면 턱이 두 쪽이 나다 못해 가루가 됐을지도 모른다. 식은땀이 절로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이런 긴장감과 위기감은 실로 오랜만의 것이었기에 토니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어깨를 굳히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런 토니와는 반대로 강도는 느긋하기만 했다.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은 그대로 느릿하게 토니의 주위를 도는 걸음걸이도 그랬고, 그의 분위기도 그랬다. 스스로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도였다.

“네 이놈, 정체가 뭐냐.”

이를 씹으며 물었지만, 상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일 뿐이다.

놈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갑과 시계는 그렇다 쳐도 필릭스와 벤자민의 친자확인 결과를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빼앗길 판이니 말이다. 아직 자신도 확인해보지 못한 결과가 만에 하나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필릭스의 노기 어린 푸른 동공이 눈앞으로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절로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다. 친자확인 결과만큼은 어떻게든 저 강도에게서 되찾아야만 하는데. 굳은 다짐을 하며 토니가 축축해진 손을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느릿한 걸음으로 주위를 돌며 토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강도가 갑작스레 달려들었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토니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강도는 불현듯 허리를 낮추더니 오른 다리를 반원을 돌리며 휘둘렀다.

부웅,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낫질하는 것처럼 낮게 휘둘러진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종아리를 맞은 토니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쿠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드는 충격이 몰려왔다. 곧바로 일어서려 했지만 강도의 민첩한 움직임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쾅, 어느새 문이 닫히는 소리가 허무하게 울렸다. 그가 비상문으로 도망쳐버린 거다.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토니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뻗은 그대로 토니는 강도가 사라져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탄 어린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필릭스의 오른팔이라는 자신이 강도를 만나 죄 털렸다는 사실도 쪽팔렸지만, 필릭스의 유전자 검사결과를 빼앗긴 것은 말 그대로 날벼락 맞은 것 같은 기분을 일게 했다.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은 채 토니는 창백해진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하지만 귀신같은 실력으로 강도질을 하고 도망쳐버린 사내를 뒤쫓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토니가 찾아갈 거야. 준비해.>

필릭스에게서 예고 없이 문자를 받은 것은 금요일 오후였다. 두 주일 만에 처음으로 연락한 필릭스의 뜬금없는 문자에 아이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다짜고짜 뭘 준비하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평소처럼 꽃다발을 만들고 화분을 돌보는 것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려 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아무리 화분에 신경을 쏟으려 해도 자꾸만 귓가에서 맴도는 필릭스의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는다. 같은 나무를 벌써 몇 번째 닦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린 아이작은 나지막한 한숨을 흘리며 끝내 손을 놓고 말았다.

왜 이 모양인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이작은 기운 없이 장갑을 벗고 자리로 돌아왔다. 딸랑, 문에 달아놓은 방울이 울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불곰 같은 잭이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토니가 온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의아함에 인사도 잊은 채 중얼거리자 잭은 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난들 여기까지 오고 싶었겠수? 형님이 지금 몸져누워 있어서 대신 온 거지.”

“몸져누웠다고요?”

“어제 조금 다쳐서 돌아왔더라고. 나이는 못 속이는 건지, 세상에 토니 형님이 강도를 만나서 다 털릴 줄을 누가 알았겠어?!”

약간 흥분해서 언성을 높인 잭이 눈을 부릅떴다.

“강도라니…… 괜찮으십니까?”

조심히 묻자 잭은 푹, 한숨을 내뱉었다.

“다리와 팔에 타박상을 조금 입긴 했지만 멀쩡해.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못 일어나는 거지.”

“정신적인 충격?”

“난생처음 당한 일이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 나이는 못 속인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토니 코스타가 강도에게 당하다니 말이나 돼?”

잭은 흥분해서 침을 튀기며 씩씩거렸다. 그러나 곧 묵묵히 서 있는 아이작의 눈치가 보였는지 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접는다.

“뭐, 토니 형님은 그런 줄 알고. 시간 없으니까 얼른 준비해.”

쯧쯧 혀를 찬 잭은 불퉁한 눈으로 아이작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아이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었다.

“대체 뭘 준비하라는 겁니까.”

필릭스도 그렇고 잭도 그렇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뜸 준비하라고만 하니 영문을 모르겠다.

“뭐긴 뭐겠수. 오늘 보스가 도착하는 대로 플로리스트 씨를 만나야겠다고 데려오라시니까 가자는 거지.”

“오늘 도착한다고요?”

필릭스의 일정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아이작이 되물었다. 잭은 ‘그래’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조부를 만나러 이탈리아에 갔었거든.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으니까, 조금 있으면 오겠네.”

시계를 들어보며 잭이 중얼거렸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시간이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는 이 시각에 이탈리아에서 날아왔으면서 당장 보자고 했다니. 피곤하지도 않나.

“여독이 있을 텐데 쉬고 나서 봐도 될 것을….”

난감한 투로 혼잣말을 흘리자 잭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흘끔 눈을 들었다.

“여독? 이봐, 보스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해?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고 전 세계 여기저기를 동네 마실 다니듯 나다니던 사람이라고. 덕분에 따라다니는 우리만 죽어날 지경이긴 했지만-…. 흠, 아무튼, 보스한테 평범한 사람과 같은 일상을 기대하면 안 돼. 지금이야 잠시 쉰다며 느슨하게 있지만, 타고난 성질과 체력이 어딜 가겠어?”

최우성 알파가 어디 안 가겠지. 아무렴. 달리 최우성 알파인가. 콧방귀를 뀌는 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작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담담하네?”

그러자 잭이 신기하다는 투로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 봐. 보스가 플로리스트 씨를 왜 당장 보자고 하겠냐고.”

“…….”

“당신 만나서 떡 치는 거 말고 할 게 또 뭐가 있나?”

답답하다는 듯 툭 내뱉는 말에 아이작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그제야 현실을 깨닫곤 짧은 한숨을 흘렸다.

하긴, 그건 그렇지. 필릭스가 자신을 보자고 한 이유가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지나가 버린 월요일을 비로소 떠올린 아이작은 필릭스와의 계약관계를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있던 자신을 책망했다.

어떻게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을 수가 있는 건지. 갑자기 보자고 한 그의 말에 자신은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괜히 입맛이 썼다. 카운터를 짚은 채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아이작을 가자미눈으로 쳐다보던 잭이 누구 못지않게 눈치도 없다며 혀를 찼다.

“내가 충고할 만한 입장은 못 되지만 말이야.”

잭의 걸걸한 목소리가 웅웅 귓가를 울렸다. 아이작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웬만하면 제대로 준비하고 가는 게 좋을걸.”

“뭘 말입니까.”

묻자마자 측은한 눈빛이 되돌아왔다.

“보스가 이탈리아에선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비행기가 뜨기도 전부터 당신을 찾는 걸 보면 어지간히 쌓여있다는 뜻 아니겠어? 관장을 하든, 손가락으로 풀든, 뭐라도 준비하라고.”

“…….”

“이미 해봐서 알겠지만, 보스가 만만하진 않잖아? 지금껏 보스를 상대하다가 몇 명이나 실려 나갔는지 알면 플로리스트 씨도 그렇게 태연히 있지만은 못할 텐데.”

상당히 노골적으로 말하는 그를 아이작은 이번에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확실히, 그 보스에 그 부하다. 저런 낯 뜨거운 설명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하다니.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아이작은 급격한 피곤을 느끼며 마른세수를 했다.

“딱히 필요하진 않을 것 같지만……. 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화장실은 다녀와야겠습니다.”

“얼마든지.”

잭은 알아서 하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며 으레 필릭스가 이곳을 찾아올 때마다 기다리던 문가의 의자로 다가갔다. 그를 등 뒤로 한 아이작은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와 변기가 전부인 작은 공간에 들어가 문을 잠그자마자 기운이 빠져버린 듯 문에 등을 대고 섰다. 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관장약이 어디 있더라.

멍한 머리로 떠올린 아이작은 필릭스와 계약한 이후로 준비해둔 관장약을 서랍에서 꺼냈다. 그러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니의 낯 뜨거운 말에 알게 모르게 뺨이 붉어져 있었다. 늘 거울에 비치던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정신 차리려는 듯 뺨을 툭툭 두들기다가 이번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다른 상자를 열었다. 아무런 글자도 그림도 없이 밋밋한 상자 안에는 작은 알약이 쌓여있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꾸준히 복용하고 있는 억제제였다.

이번 달에도 당연히 한 알 먹긴 했지만, 오늘 밤 당장 필릭스를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난 아이작은 단번에 알약 두세 개를 뜯어 물도 없이 삼켜버렸다.

제발, 이번에는 오메가 페로몬이 새어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아무리 알파 페로몬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절어버린다고 해도, 그의 정액이 제 내부를 꽉 채우고 전신에 뿌려진다고 해도, 부디 멋대로 반응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아이작은 손에 쥐고 있던 관장약을 뜯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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