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6)

4. Birthday Party

새까만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반듯한 코와 날카로운 턱선, 육감적인 입술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게다가 반짝이는 블론드에 큰 키, 다부진 체격, 명품 브랜드로 휘감은 세련된 옷차림까지, 무엇하나 눈에 띄지 않는 점이 없었다.

할리우드 거리에 나선다고 해도 번쩍 눈에 띌 만한 남자가, 세 살 아이의 왁자지껄한 생일파티에 갑작스레 등장했으니 부모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새끼들 꼬락서니 하고는.”

넓은 뒷마당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요란스러운 광경에 필릭스는 쯧, 혀를 찼다.

사실 파티가 진행 중인 뒷마당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장난감을 이리저리 내던지는 아이, 케이크를 멋대로 손가락으로 찔러 먹는 아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 그러다가 넘어져 구르는 아이. 우는 아이.

정신이 하나도 없는 광경을 필릭스는 질린다는 투로 쳐다보았다. 그보다 한걸음 뒤떨어진 곳에 선 아이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 왜 굳이 따라와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밤새 요트에서 지내고 아침이 되어 부랴부랴 선착장에 내릴 무렵이었다.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자신의 뒤를 태평하게 따라오는 필릭스를 아이작은 불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디까지 따라오실 생각입니까?’

끝내 길을 걷다 말고 휙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음? 생일파티 간다며. 나도 갈까 하는데?’

그러자 필릭스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왜요? 라는 직접적인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던 아이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안 오셔도 됩니다만…….’

‘굳이 안 가도 되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가 보고 싶어졌어.’

‘…….’

‘왜? 내가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그러자 그는 태연히 되물었다. 물론,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아이의 생일이란 많은 이들이 축하해주면 좋은 것이고, 또 벤자민을 경호해주는 것은 필릭스이기도 했으니 굳이 말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점점 더 곤란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해 아이작은 턱만 긁적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데리고 가기 싫다고 눈치를 줘봤자 알아듣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나오는 필릭스를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차를 얻어 타고 라호야에 있는 집으로 향하면서도 대체 이게 뭔 짓인가 속으로 한숨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생일파티에 왜, 굳이 따라오겠다고 하는 건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차가 빠르게 달리면 달릴수록 아이작은 휙휙 지나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심란해했지만, 필릭스는 반대로 즐거워 보일 뿐이다. 태블릿을 툭툭 두들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누가 보면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겠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넓은 정원을 바라보는 순간, 필릭스는 인상을 팍 구겼다. 아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그는 설마 아이의 생일파티라는 것이 이런 아비규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다.

그의 뒤에 선 아이작은 새까만 선글라스 아래로 드러난 입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불편한 표정을 감췄다. 벌써부터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서 있는 필릭스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과 불안도 잠시. 정원 한쪽 구석에서 풍선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동물이나 꽃, 칼, 등을 만들어주던 풍선 아티스트 앞에 쪼르르 줄을 서 있던 벤자민이 아이작을 알아보곤 큰 소리로 부르자, 모든 상념이 사라지고 만다.

“아빠!”

아이는 손을 크게 흔들며 계속해서 아빠를 불렀다. 오랜만에 본 아이작에게 달려오고는 싶은데 풍선은 받고는 싶고,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며 난리다.

왔다 갔다 제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신나서 방방 뛰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작은 여전히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다른 손으로 작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자신을 알아보고 저토록 반가워하는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손으로 가려진 입매는 이미 길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 벤자민이 나를 알아보는데?”

한걸음 앞서 있던 필릭스가 여지없이, 눈치 없게, 벤자민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벤자민!”

거기에 더해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자, 아이작은 흠칫 어깨를 굳히며 그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봐야만 했다. 벤자민은 아이작을 향해 아직도 방방 뛰며 ‘아빠!’를 불러댔지만, 아직도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든다고 착각한 필릭스는 환하게 웃으며 ‘벤자민~’ 하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댈 뿐이다.

모든 이의 이목이 주목되었다. 벤자민과 똑같이 생긴 필릭스가, 누가 봐도 아이의 아빠라고 생각할 만한 생김새의 필릭스가 신나서 손을 흔들자 다들 ‘벤자민의 아빤가 봐’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당황스럽기만 하다.

“봐, 벤자민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남의 속도 모르고 필릭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랑하듯 아이작을 뒤돌아보았다. 그렇진 않을 거라는 말이 목구멍 위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차마 사실을 고할 수가 없어 꾹 참아내야만 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시선을 회피하며 아이작이 희미하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필릭스는 여전히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한 것이 뿌듯했는지 싱글벙글할 따름이다.

“좋아, 호박에게 선물을 준비한 보람이 있군.”

“…선물? 호박이라뇨?”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뜬금없는 소리에 아이작은 놀란 눈을 들었다. 새까만 선글라스에 가려져 눈은 드러나질 않았지만. 필릭스는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음, 생일이라고 해서 어젯밤에 준비했거든. 서프라이즈로 주려고 했는데 미리 말해버렸네?”

“아니, 그 전에… 지금 벤자민을 호박이라고 부른 겁니까?”

“어.”

남의 속은 모르는 채 당당하게 대꾸하는 필릭스가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선글라스 아래에 감춰진 눈매가 절로 올라갔다.

“아니, 왜 남의 아이를 멋대로 호박이라고-.”

“호박이 어때서? 머리가 노르스름한 게 잘 익은 호박 같잖아.”

대부분 노란색을 보면 병아리를 떠올리지 않던가? 남의 귀한 아이를 호박이라고 당당하게 부르는 그의 작태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호박처럼 둥글둥글하게 크면 좋은 거지.”

말이나 못 하면.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버린 필릭스를 보고 있자니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자 아이작을 내려 보던 필릭스의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삐죽 올라갔다.

“왜 그렇게 노려봐? 키스하고 싶게.”

선글라스에 감춰진 시선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필릭스가 삐딱하게 중얼거렸다.

“대금은 오늘 아침까지 충분히 받아간 것 같은데요.”

“꼭 그날이어야만 키스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날이어야만 키스할 수 있는 편이 좋겠습니다.”

“…재미없기는.”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삐졌는지 삐죽거리는 필릭스의 입이 한층 더 튀어나온다. 그래 봤자 아이작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벤자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사이, 벤자민은 아빠를 잠시 잊은 채, 눈앞에서 풍선 아티스트가 긴 풍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강아지도 만들고 꽃도 만드는 모양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발갛게 홍조를 일으킨 통통한 볼과 반쯤 벌어진 입술, 친구들 머리 사이로 열심히 풍선을 쳐다보는 귀여운 모습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작은 벤자민을 보고 또 봤다. 오늘이 지나면 또 며칠이나 아이를 쉽게 볼 수 없는 점이 아쉽기만 했다. 그렇다고 다른 부모들처럼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도 없으니…….

“그래서, 갑자기 무슨 선물을 준비하신 겁니까.”

아쉬워지는 감정을 억지로 지워내려던 아이작은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물었다. 한걸음 떨어져 있던 필릭스는 과장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보면 알아.”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는 폼이 나름대로 신경을 쓴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 만에 생일선물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는데……. 뜻밖의 세심함이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아이작은 복잡해지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벤자민의 생일파티라고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잠시 잠깐 후회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얼렁뚱땅 넘기려 했다면 필릭스는 답을 알아낼 때까지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이 뻔하니, 이래저래 상황은 같았을 테다.

“분명 벤자민이 좋아할걸?”

“벤자민의 취향도 모르시는 분이 어떻게 장담합니까.”

“왜나면 모든 어린이는 좋아한다고 들었으니까. 물론 나도 어려서부터 아주 좋아했고.”

어떤 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필릭스는 확신에 찬 얼굴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곤 팔짱을 낀 오만한 자세로 벤자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고 있으니 정말로 제 자식을 자랑스럽게 쳐다보는 아버지 같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아이작은 의식적으로 눈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한참이나 줄을 서서 제 차례가 되길 기다린 벤자민은, 마침내 풍선 아티스트가 만들어준 소방차 모양의 풍선을 받고는 싱글거리며 뛰어왔다.

“아빠! 이거, 소방차!”

신난다고 손에 풍선을 꼭 쥐고 뛰어오던 벤자민이 철퍼덕, 거나하게 넘어진 것은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르륵 잔디 위로 대자로 뻗은 아이는 당연하게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으앙! 아빠! 피 나! 피 나!”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놀란 아이작이 단숨에 뛰어가 벤자민을 안아 들었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탓에 아이의 여린 무릎이 까져서 붉어졌지만, 다행히 잔디밭이었던 터라 피가 나지는 않았다. 으레 다칠 때마다 피가 난다고 생각하는 벤자민이 놀라서 소리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아이의 가벼운 상처를 살피는 아이작은 안타깝기만 했다.

“괜찮아, 피 안 나. 봐, 피 안 나지?”

아이작은 다정하게 아이의 등을 두들기며 달랬다. 그사이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더니 곧 벤자민의 무릎을 들여다보며 약을 발라주신다. 벤자민은 그녀를 보자마자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할머니, 피 나….”

“울지 마. 약 바르고 밴드 붙이면 다 나으니까-.”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아이작의 어머니가 아이를 달랠 무렵이었다.

“엄살은.”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낮은 중저음이 흐른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눈을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필릭스가 근엄하게 벤자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를 알아본 어머니는 동그래진 눈으로 필릭스를 살피다가 곧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벤자민과 똑같은 생김새를 한 사내가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서 있으니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필릭스와 벤자민을 번갈아 보는 어머니에게 아이작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어머니는 짧은 심호흡을 하며 벤자민을 일으켜 세웠다.

“벤자민, 보렴. 피도 안 나고 밴드를 붙이니까 하나도 보이질 않지?”

다정한 할머니의 목소리에 벤자민은 기특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닭똥 같은 눈물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가슴도 크게 들썩인다. 그러나 곧 무서운 분위기로 서 있는 필릭스의 눈치가 보였는지 아이는 히끅거리면서 팔을 들어 눈가를 슥슥 닦아내기도 한다.

가만히 벤자민을 주시하고 있던 필릭스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 조금 씩씩해 보이네. 뚝 그치면 생일선물을 주마.”

“……선물?”

서럽게 울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순식간에 울음을 멈춘 벤자민이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아이의 코를 닦아주던 아이작 또한 벤자민과 똑같이 고개를 들고 필릭스를 올려본다.

“네 생일파티니 당연히 생일선물을 가지고 왔지.”

아이의 호기심이 쏠린 것을 알아차린 필릭스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그를 바라보던 아이의 푸른 눈이 단번에 기대로 반짝였다.

“선물!”

“보고 싶냐?”

“네!”

오만하게 서서 아이를 응시하던 필릭스가 불쑥 벤자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적은 편인 벤자민이 덥석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러자 필릭스는 단번에 아이를 안아 올려 제 목에 목마를 태워 앉혔고, 벤자민은 언제 울었냐는 듯 신난다고 꺅꺅거리기 시작했다.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 나는데?”

“아니야!”

“아니긴. 내기할까? 네가 과연 몇 살에 똥꼬에 털이-.”

“펠리체 씨!”

차마 못 들어줄 말을 지껄이는 필릭스를 노려보며 아이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럭 고함까지 지르는 아이작의 기세에 필릭스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상대가 누구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곤 짧은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

“흠, 작작하세요.”

“내가 뭘.”

울컥했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완곡한 표현으로 말했음에도 필릭스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내민다.

“이제 세 살 된 애한테 똥꼬 털이 뭡니까.”

“그게 어때서? 맞는 말이잖아.”

그러나 지적을 해줘 봤자 필릭스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일 뿐이다.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들 앞에선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남자는 알아듣지 못할 것만 같았다.

“됐습니다.”

아이작이 빠르게 포기하며 고개를 가로젓자 필릭스는 흥, 콧방귀를 뀌더니 벤자민을 목마를 태운 그대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성큼성큼 걷는 뒷모습이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어디에 가십니까?”

그의 등에 대고 물었지만, 필릭스는 ‘선물 주러’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말 따름이다. 끝내 벤자민을 데리고 뒷문으로 향하는 필릭스를 지켜보던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닮은꼴의 작은 어린아이 하나와 다 큰 어린아이 하나가 붙어있는 기분이 든 탓이다.

“혹시, 벤자민의 아비인 거니?”

옆에서, 작은 소리가 울린 것은 필릭스가 완전히 뒷문 밖으로 빠져나갔을 무렵이었다. 아이작은 흘끔 시선을 돌려 어머니를 향했다. 작은 체구, 단아한 얼굴, 회색의 머리칼을 가진 중년의 베타 여성이었다. 어딘지 자신과 닮은 이목구비를 마주한 아이작은 불안한 듯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아닙니다.”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하더니 한적한 나무 그늘에 멈춰 섰다. 여전히 햇살은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고,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게 뛰어다니는 활기찬 오후였다.

아이작은 어머니의 곁에 한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평온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평온과는 전혀 다르게 가슴은 무겁기만 했다.

“생긴 게 똑같더구나. 벤자민하고 그 남자.”

“…….”

“아니라고 부정하려면 적어도 얼굴이라도 다른 사내를 데려왔어야지.”

“어머니.”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이작은 이마를 짚었다. 눈썰미가 유달리 좋은 어머니에게는 애초에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직감하고 있기는 했다.

게다가, 그녀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어떤 거짓말을 해도 항상 알아차리곤 하셨다. 자신의 전부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무표정으로 가장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려서는 그런 어머니의 예리한 눈썰미가 늘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벤자민이 생기고 나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벤자민이 짓는 표정,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지, 대부분은 절로 파악이 된다. 아이의 성격을 꿰뚫고 있는 데다, 항상 주시하고 관심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어머니 역시 자신에게 그런 관심을 쏟으며 일거수일투족 모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어려서도, 그리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지금도.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아직 그 남자는 벤자민이 제 아들인 걸 모르는 것 같던데, 그건 너무한 일 아니니?”

“…….”

“물론 제 새끼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사람이 있지만……. 여기까지 따라오고 벤자민에게도 저토록 친절히 구는데 끝까지 숨길 수만은 없지 않겠어? 자기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에게 못 할 짓이야. 벤자민에게도 마찬가지고.”

한숨처럼 흘리는 그녀의 충고에 아이작은 질끈 눈을 감았다 들었다.

“어머니. 그는 벤자민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작은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이를 꾹 씹었다.

“단 한 순간도 아이가 생기길 바랐던 적도 없는 사내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벤자민은 그의 아이가 아니에요.”

“정말로 아닌 거니?”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아이작은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다.

“벤자민의 아버지는 접니다. 그 외엔 누구도 없어요.”

못 박듯이 던지는 결론에 그녀는 비로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약간 불편한 적막이 짧게 흘렀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을 무렵이었다.

“벤자민 할머니, 방금 그분이 벤자민 아빠인가 봐요? 어쩜 부자가 정말이지 똑같이 생겼네요!”

문득 하이톤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슬쩍 눈을 돌리자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가 어머니에게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벤자민의 어린이집 친구의 엄마로 보이는 오메가였다. 베타 남성보다는 뼈대가 얇고 어딘지 중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흐르는, 대다수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오메가 남성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덜미에 시선을 두었다. 사내의 길고 흰 목덜미 위에는 적나라하게 각인의 표식이 찍혀있었다. 평범하게 혼인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의 알파와 오메가들이 서로의 반려자에게 만드는 각인이었다.

베타는 할 수 없는 그들만의 특징이기도 했고, 열성 오메가라고는 해도 오메가로 살아갈 생각이 없는 아이작 또한 관계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드님이세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대놓고 물었다. 아까부터 굉장히 궁금해하는 눈빛의 부모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긴 했지만, 이렇게 대뜸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어머니는 그를 향해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하! 아드님이 아니면 사위 되는 분이구나! 벤자민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아빠를 빼 박았네요~.”

그러나 멋대로 관계를 인식해버린 그가 크게 떠들었다. 어머니는 난처해하며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좋을 대로 말할 뿐이었다.

“뭐 하는 분이에요? 너무나 잘생긴 분이 분위기도 엄청나던데요.”

호기심 어린 그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이작이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한 걸음 발을 뗀 순간이었다. 불현듯 우아아- 아이들의 함성이 쏟아지는 바람에 아이작은 어머니와 오메가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부모들의 시선도 일제히 한곳으로 쏠린다. 어머니를 붙들고 이것저것 묻던 오메가는 ‘세상에!’ 감탄을 흘리기까지 한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아이작 역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무의식적으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뒷문을 통해 벤자민과 필릭스가 나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정확하게 벤자민은 흰색의 멋들어진 조랑말을 타고, 필릭스는 말고삐를 잡은 채 느긋하게 정원으로 향해온다. 살아있는 진짜 말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린아이용 안장에 앉아 허리띠를 착용한 벤자민은, 머리엔 카우보이모자까지 쓰고 잔뜩 흥분한 얼굴로 안장 앞에 불쑥 솟은 손잡이를 꼭 붙들고 있었는데,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꺄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조랑말이라니….”

아이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무거워지는 심정은 아랑곳없이 필릭스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벤자민이 앉은 말의 고삐를 끌며 정원을 빙 돌기만 할 뿐이다. 게다가 말이라는 것은 처음 타는데도 불구하고 벤자민은 익숙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 등 위에 앉아 즐기고 있었다.

깨끗한 흰색의 조랑말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오자 아이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개중에는 무섭다며 제 부모에게 달려가 버린 아이도 있고 울어버린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자기도 태워달라고 아우성이다.

정원 위는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어버렸다. 벤자민이 좋아할 거라며 확신한 필릭스의 말은, 정확했던 셈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작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밤새 저런 조랑말을 어디서 구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물론 아이가 까무러치도록 좋아할 선물은 확실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말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저것을 관리할 능력도 없다. 마구간을 빌리고 말을 관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가격과 노력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며 필릭스와 조랑말 위에 앉아있는 벤자민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아이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저런데도 벤자민의 아버지는 너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옆에서 어머니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정원을 돌고 있는 둘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아이작 못지않게 심란해 보였다. 아이작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무겁고 무거워 바닥 깊숙이 가라앉아가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었다.

* * *

토니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제 늦은 오후부터 필릭스에게 달달 볶이며 ‘흰색의, 우아하면서, 족보까지 있는’ 조랑말을 구하느라 잠 한숨 잘 수도 없었기에 그의 두 눈 아래에는 어두운 다크 서클까지 생겨버린 참이었다.

세계 유명 브랜드 자동차의 리미티드 에디션을 구해오라고 하면 차라리 쉬웠을 텐데, 이건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도 난감한 흰색의 족보 있는 조랑말을 찾아오라니. 밤새도록, 아니 오늘 오전과 정오까지 피가 말라도 바싹 말랐던 토니였다.

하지만 필릭스의 오른팔 토니가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든, ‘당장’ 흰색의 조랑말을 구해오라던 필릭스의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요구사항을 기어이 맞추고야 말았다. 조랑말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잠도 한숨 자지 못한 채 밤을 꼬박 지새우긴 했지만, 일단 구했다는 연락을 기어이 받아낸 거다.

다음날이 되어서는 벤자민의 생일파티 뒤편에서 조랑말이 한시바삐 도착하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려야만 했다. 초조하게 서성이는 토니의 등허리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벤자민의 집 뒤뜰에 필릭스가 요구했던 흰색의 조랑말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순간, 토니와 그의 부하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감에 굳어있던 어깨를 늘어뜨릴 수가 있었다. 그중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은 놈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노랗게 뜬 얼굴이었다.

조랑말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필릭스는 본인의 미니미라도 되는 것 같은 벤자민을 목말까지 태운 채 느긋한 걸음으로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토니와 그의 수하들이 잠 한숨 못 자고 말을 찾아 헤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고 태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는 그의 폭탄 같은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는 토니는 필릭스를 마주한 순간 다시금 긴장해 주먹을 꽉 움켜쥐어야만 했다. 불가능한 것을 어렵사리 구해왔는데, 설마 마음에 안 든다고 다짜고짜 총질을 하진 않겠지. 벤자민도 있는데…….

내심 걱정하며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멀리 있는 조랑말을 슬쩍 바라본 필릭스의 보기 좋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만족을 드러낸다. 그의 표정에 비로소 이 말도 안 되는 생일선물이 마무리되었구나,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여기 경호 담당하는 놈 누구야.”

필릭스의 보기 좋은 입술 끝에서 매서운 소리가 칼날처럼 날아들었고, 토니는 다시금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경호 담당, 앞으로 튀어나와.”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다시 한 번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토니는 불안한 눈초리로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 라호야의 아담한 저택과 벤자민의 경호를 맡은 팀은 말 그대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엇 하나 실수할 일이 없는 놈들이었고, 아직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점이 거슬렸는지, 자신을 거치지도 않고 다짜고짜 경호팀의 팀장을 직접 부르는 필릭스의 냉랭한 분위기에 솜털이 바짝 곤두설 지경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불벼락 같은 명령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팀장이 재빠르게 그의 앞으로 달려와 섰다.

다른 이도 아닌, 필릭스가 직접 호명한 탓에 잔뜩 긴장한 경호 팀장은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여기저기 연락을 넣어 ‘흰색의 우아하고 족보 있는’ 조랑말을 구해야 했던 토니와 그의 부하들보다 더 노랗게 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불려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 더더욱 불안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이 새ㄲ…… 흠, 아니, 너.”

평소처럼 험한 말을 아무렇게나 꺼내려던 필릭스는 문득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바꾼다. 목말을 태우고 있는 벤자민을 의식하는 듯, 고개를 돌려 아이를 확인하며 어색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아이를 신경 쓰는 모습에 토니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러나 얼이 빠져있는 토니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필릭스는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며 경호 팀장을 노려보았다.

“너, 네놈이 이곳 경호 팀장이냐?”

“네, 그렇습니다!”

바짝 졸아 있던 그가 큰 소리로 대답한 순간이었다. 필릭스는 난데없이 벤자민의 다리를 툭, 두들기더니 반대편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오, 벤자민! 저기 봐라, 새가 날아가네?”

“응? 깍깍이? 어디?”

벤자민이 필릭스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아니, 주위에 모여 있던 모두가 잠시 잠깐 긴장도 잊은 채 필릭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뻑-, 뼈 부러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읍, 신음을 참는 소리도 함께 울린다. 순식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그제야 전부 흠칫 어깨를 굳히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면을 향해 선다.

경호 팀장이라던 사내가 한쪽 다리를 붙들고 시뻘게진 얼굴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들려왔던 살벌한 소리는 필릭스가 그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놈들은 딱딱하게 어깨를 굳히고 말았다.

그러나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꾹 삼킨 경호 팀장은 곧바로 허리를 펴고 정자세로 필릭스의 앞에 죄인처럼 서야만 했다. 필릭스의 사나워진 시선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가 경호팀 팀장이라고? 그런데 잔디 관리를 그따위로 해?! 애가 뛰어오다가 넘어졌잖아! 여기 무릎 봐, 보여? 지금 애 무릎이 까져서 약 바르고 밴드까지 붙이고 있지? 넘어져서 이 지경이 됐다고! 애가 더 크게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네가 그러고도 경호팀장이야? 똑바로 안 해?!”

“잔디요?”

“귓구멍 안 씻어? 내가 지금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드,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잔디, 관리 제대로 하겠습니다!”

사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열심히 대답했고,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은 점점 더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토니는 더더욱 그랬다.

맙소사, 차마 뱉어내지 못한 신음을 삼키며 토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대고 말았다. 설마 잔디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이런 수난을 당할 줄을 누가 알았느냔 말이다. 말마따나 잔디를 깎는 것은 그들의 일도 아닌데…….

“애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게 네 임무잖아, 틀려? 경호원이라며?”

“마, 맞습니다.”

“눈 똑바로 뜨고 지켜, 애한테 한 번만 더 이따위 상처가 생겨봐, 뒈질ㅈ…… 흠, 고래 밥으로 만들어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아.”

……고래 밥.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토니를 비롯하여 이곳에 모여 있는 놈들이 전부 흰 눈이 되기도 했다. 죽이겠다는 말을 참 위신 없게도 표현하니 그럴 수밖에.

“고래 밥 주는 거야?”

필릭스의 목에 앉아있는 벤자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필릭스는 태연히 ‘그래’라며 아이에게 맞장구를 쳐준다. 아이는 ‘고래 밥?’ 계속해서 말하며 까르륵 웃었다. 분위기는 점점 착잡해져만 갔다. 참으로 살벌하고 오싹한 말이 오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해맑기만 하다.

“애한테 상처 하나 생기지 않게 제대로 지켜. 그게 네놈들 임무고 비싼 연봉을 주는 이유니까. 알아들었어?”

낮게 으르렁거리는 필릭스의 목소리엔 살기가 흘러넘쳤다. 고래 밥 따위에 꺾일 위신이 아니었음을 상기하며 토니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에도 참 모호했다.

아이가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 임무가 맞긴 하지만, 정원의 잔디 상태까지 알아둬야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딱히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에 토니는 그저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제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바라고 또 바라며 경호 팀장에게서 시선을 회피했다. 저 녀석에겐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줘야겠군. 속으로 생각하면서.

“깍깍이 없어. 선물은 어딨어?”

감히, 필릭스의 어깨에 태연히 앉아 발을 동동거리고 있던 아이가 문득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래 밥의 약발이 식었는지 금세 지루해진 표정이었다.

“이런, 새가 안 보였나 보군.”

“응…….”

아이는 필릭스의 금빛 머리칼을 손으로 쥐었다 놨다, 헝클었다, 멋대로 갖고 놀던 것도 이제 재미없는지 입을 삐죽 내민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대신 진짜 생일선물을 받아볼까?”

“네!”

처음 벤자민을 봤을 때보다는 한결 친절해진 말투였다. 적응도 참 빠르기도 하지. 토니가 절로 흐르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던 순간이었다. 필릭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져와.”

묵직하게 흐르는 중저음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이번에야말로 실수하면 누군가가 진짜로 고래 밥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토니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이 배어 있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빨리 조랑말을 가져오라고 눈짓하자 사내 중 하나가 잽싸게 달려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랑말을 끌고 왔다.

“벤자민, 말 좋아하나?”

“우아아아-!”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가까이 다가서는 조랑말을 본 아이는 대답 대신 비명을 질러댔다. 두려움이 아닌, 환호하는 소리였다.

“와! 말! 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손뼉을 치고 좋아하는 아이를 훌쩍 안아 든 필릭스는, 어린이용 안장이 얹어져 있는 말 등에 벤자민을 앉히고 꼼꼼하게 안전띠까지 채웠다. 마지막으로 자그마한 카우보이모자까지 아이의 머리에 씌워주자 아이는 신나서 함박웃음을 짓는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필릭스는 직접 말고삐를 손에 쥐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뒷문으로 향했다. 토니는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제가-.”

“됐으니까 비켜.”

그래 봤자 필릭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삐를 잡은 그대로 느긋하게 걸을 따름이다. 따각따각 말굽을 울리며 걷기 시작하자, 말 등에 앉은 아이는 겁도 없이 좋다고 소리를 지르며 발을 흔들었다.

“급하게 구해오느라 수고했어.”

믿기 어려운 한마디가 들린 것은, 그가 벤자민이 탄 말을 끌고 정원의 뒷문을 열었을 무렵이었다.

토니가 멍해져 있는 사이 필릭스는 조랑말을 끌고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아이들의 환호성이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러나 토니는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서 한참이나 움직이지도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오랫동안 모시던 필릭스 펠리체가 아닌 것만 같았다. 어린아이에게 선물한답시고 하루 만에 조랑말을 구해오라고 닦달하질 않나, 아이가 다쳤다고 경호팀장의 정강이를 깨질 않나, 아이가 들을까 말조심하기까지 하더니 이젠 수고했다는 말까지 들었다.

달라도 지나치게 다른 필릭스의 모습에 혼돈마저 일어난 토니는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설마, 죽을 때가 된 건 아니겠지. 아니면 뭘 잘못 먹었다든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몹시 심란한 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 * *

아이들은 줄을 서서 말을 타기 바빴다.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난 벤자민이 내리지 않겠다고 떼쓰는 것을 간신히 달래야만 했지만, 파티에 모인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타겠다고 아우성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어졌다.

벤자민이 내린 이후로는 필릭스의 부하 중 하나가 달려와 아이들을 태우고 정원을 한 바퀴 돈 다음, 내려주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만날 무기만 만지던 사람이 분명한 듯 생김새는 우락부락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아이들에게 말을 태워주는 일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필릭스가 데리고 있는 사람 중에는 잭같이 아이들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정원은 더욱 정신 사나워졌지만, 아이들은 즐거운 기색이었다. 꼭 유원지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다.

말을 또 타겠다고 떼를 부리던 벤자민도 어느새 다른 아이들 틈에서 비눗방울을 만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딜 돌아봐도 즐겁고 화기애애한 모습에 아이작의 입꼬리도 희미한 호선을 그린다.

그러나 잠시 후, 서늘한 나무 그늘에 서서 활기찬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슬쩍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갔다. 가족이 있는 곳에서 오랫동안 노출되는 것도 꺼려졌지만, 심란함이 가시질 않고 앙금처럼 쌓여있는 탓에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잠시 자리를 비운 필릭스가 돌아왔을 때 어떤 얼굴로 그를 마주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전한 말이 계속해서 뇌리에 맴돌며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저런데도 벤자민의 아버지는 너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나직이 묻는 말에 아이작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벤자민의 아버지는 자신뿐이어야만 했다. 다른 누가 또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 역시 밝혀져야 할 테니 말이다.

지금껏 베타로 살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을 오메가로 대하고 쳐다볼 알파의 시선 또한 참을 수 없을 테다.

언제까지 베타로 남아있고 싶었다. 아니, 베타인 척 오메가가 아닌 척 그렇게 평범하게 꽃가게를 운영하며 벤자민과 어머니와 살고 싶은 것이 지금 아이작의 유일한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범한 삶을 꿈꾸는 자신의 뿌리가 서서히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베타로 남아있길 바라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흔드는 것은 다름 아닌 필릭스라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필릭스가 내미는 손을 뿌리치고 계약서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필릭스가 강압적으로 나온 이상 자신에겐 거절할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당장은 그의 능력이 필요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애초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자신이었고, 이미 발을 빼기 어려운 늪에 발을 담가버렸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하다. 거기에 더해 벤자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고민해야 할 정도라니. 기함할 노릇이었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생각을 억지로 떨쳐낸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더 이상은 약해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테다. 지금껏 쌓아온 것이 얼마인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다짐에 다짐을 더하며 이를 꾹 씹었다. 무작정 걷고 있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불현듯 시야로 들어온 잭의 뒷모습이었다.

잭은 그 큰 덩치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정원에서 집 밖으로 이어지는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있었다. 뭔가 좋지 못한 예감에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고 숨을 죽였다.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듯 잭은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갔다.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듯이 구는 사내가 왜 저렇게 주위를 의식하며 몰래 빠져나가는 걸까. 무슨 일이기에.

아이작은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며 뒷문 가까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리고 문틈으로 밖을 주시했다. 잭은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곧장 그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를 향해 다가섰다. 담배 연기가 메케하게 흘러드는 것으로 보아 상대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 가져왔어?”

잭의 덩치에 반쯤 가려진 인물이 물었다.

“얼마나 힘들게 구한 건지, 알죠?”

잭이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으스대며 속삭였다. 상대는 콧방귀를 뀌었다.

“틀리면 안 되는 건 알지?”

“염려 마시라니까요? 봐요, 봐. 이 색을. 이런 색이 흔하지 않은 거 형님이 더 잘 알잖아요.”

잭의 널찍한 등짝에 반쯤 가려진 사내는 잭에게서 무언가를 받아간 듯했다. 짧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작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잭이 상대에게 대체 무엇을 넘긴 건진 알 수 없지만, 불길한 기운이 풀풀 흘렀다.

설마 제집 앞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정원 옆에서 마약 거래를 한다든가, 불법 무기를 거래하는 건 아니겠지.

의심은 끝도 없이 치솟는다. 그런 아이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들은 잠시 동안 머리를 맞댄 채 뭔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찾는 물건이 맞았는지 상대는 잭에게 건네받은 무언가를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사람 거는요?”

잭이 물었다.

“준비됐어.”

“하긴, 지난밤 내내 있었으니 한결 쉬웠겠네요.”

“보스에겐 절대 비밀이니까 입조심 해.”

“안다니까 그러네. 그나저나 이제 검사 결과만 나오면-.”

‘검사 결과?’ 빨라지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아이작이 점점 더 깊어지는 의혹을 참아내지 못하고 조금 더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잭에게 가려져 있던 상대가 흘끔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은 재빠르게 몸을 벽에 붙인 채 기척을 죽였다.

잠시 의아한 듯 이쪽을 살피던 상대가 잭의 어깨를 툭, 쳤다. 다른 쪽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둘은 곧 아이작이 몸을 숨기고 있던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이쪽에 누가 있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아이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안에서 놀던 아이가 나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안심과는 반대로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던 잭과 그가 건넨 이상한 물건, 그리고 상대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자신이 있던 방향을 짧게나마 쳐다보았던 인물은, 다름 아닌 토니였다.

* * *

집 안, 응접실로 들어선 아이작은 푹신하게 꺼지는 소파에 등을 푹 묻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러댔다. 조금 전에 들은 잭과 토니의 대화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주고받은 것일까. 검사 결과라는 건 또 뭔지. 무슨 꿍꿍이속이기에 토니는 그의 보스인 필릭스에게까지 절대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를 한 건지. 아이작의 손끝이 초조하게 소파의 팔걸이를 두들겼다.

그들이 뭔가 이상한 짓을 꾸민다고 필릭스에게 알려야 하는 걸까. 고민했지만, 끝내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증거도 없이 말을 꺼내봤자 필릭스의 최측근인 잭과 토니가 발뺌한다면 자신만 웃기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어쩌면 자신과 관계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들의 내부적인 문제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깊은 생각에 잠길수록 불안해지기만 했다. 이유도 몰랐지만, 감이 그랬다.

필릭스에게 알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결론을 내린 아이작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소파에 머리까지 묻고 눈을 감아버렸다. 잭과 토니에 대한 생각은 여기서 접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혼자 고민한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눈을 감고 긴장했던 사지의 근육을 이완시키자 갑작스레 피곤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하긴, 어제부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된 긴장 속에서 신경을 바싹 조이고 있긴 했었다.

필릭스와 함께 있을 땐 으레 그랬지만, 어제는 예고 없이 바다 한가운데까지 끌려갔던 탓에 더했다. 아직도 속이 불편해 아무것도 먹질 못하고 있었으니 말 다했지.

사지가 천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파 아래로 푹 꺼져간다. 게다가 벤자민을 보느라 잠시나마 잊고 있었는데, 어젯밤에 무리했던 허리가 묵직하게 울려오기도 했다. 아이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낮게 신음했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몸을 내어주다간 허리가 작살 나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예감마저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뻐근한 허리와 둔부의 통증을 애써 잊어버린 채 선잠이 들려고 했던 찰나였다.

아이작은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건지 금발의 화려한 사내가 반쯤 열린 문가에 기대어 선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선 장대하면서도 탄탄한 체격의 그를 눈에 담아내고 있으려니 심장 한쪽 구석 위로 작은 동요가 일어난다.

필릭스…….

“…깜빡 졸고 있었습니다.”

아이작은 가만히 필릭스를 응시하며 사실대로 말했다. 서슴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던 그가 피식, 입술을 당겨 웃는다. 부드럽게 접히는 눈과 시원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눈에 박히듯 들어와 아이작은 차라리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선물은 어땠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필릭스가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그제야 그의 ‘생일선물’이 떠올라 아이작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래, 그것도 남아있었지. 생각하려니 불편한 심정이 배로 증폭한다.

“벤자민은 마음에 들어 하더군요.”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아이작은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내가 뭐라고 그랬어? 아이들은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좋아한다니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필릭스에게 아이작은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많은 아이들이 좋아한 것은 사실이고 벤자민은 두말할 것도 없이 흥분했었으니까. 하지만…….

“과분한 선물입니다.”

아이작은 처음 조랑말을 본 순간부터 전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꺼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던 필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과분한 선물이라는 게 세상에 어디에 있어?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인데, 주면 받으면 되지.”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당신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니라, 말을 관리하는 것도 힘들고-.”

“내가 선물로 말을 주면서 덜렁 말만 가져가, 라고 할 것 같아?”

되도록 돌려 말하는 아이작의 이유는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필릭스는 단칼에 잘라버렸다. 어쩐지 살짝 토라진 표정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하려던 말을 잃고 눈만 깜박거렸다.

“마구간도 구해놨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고, 말의 관리도 그곳에서 알아서 해줄 거야. 넌 신경 쓸 거 하나도 없으니까, 벤자민이 타고 싶다고 할 때마다 가서 태워주면 돼. 이참에 제대로 승마를 배워도 좋겠지.”

덧붙이는 필릭스의 설명에 끝내 입이 작게 벌어지고 말았다. 하루 사이에 말을 선물로 가져온 것도 놀라운 일인데, 거기에 더해 마구간과 관리인까지 다 알아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더더욱 가슴은 무거워지기만 한다. 감당하지 못할 선물이라는 것도 확실해지기만 했다. 아이작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보다 조금 더 큰 필릭스의 직선적인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아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 어울리지도 않게 큰 선물을 받을 순 없습니다.”

“그러면 조건을 하나 붙이면 되려나?”

조건? 그가 내뱉는 단어가 의미심장했다. 아이작은 경계 어린 눈초리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문득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린 필릭스가 아이작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키스.”

단조롭게 울리는 단어를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점차 짙어지는 알파 페로몬과 매혹적인 미소에 눈앞이 아찔해진 탓이었다. 필릭스는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아이작의 입술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벤자민이 그토록 좋아하는 말과 그에 따른 모든 관리를 해줄 테니까…….”

“…….”

“네게 항상 키스할 수 있게 해줘.”

맙소사. 아이작은 제 입술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필릭스를 멍하니 올려보기만 했다. 조금 전, 멋대로 키스하려는 그를 계약된 날인 월요일에만 하자고 막아 세웠더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점령하려고 작정한 것일까? 조금씩 자신을 옭아매고 빼앗아가려는 건가? 그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비웃어줘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진심입니까?”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

아이작의 입술을 매만지던 필릭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마치 제 모든 것을 사가려는 사람 같군요.”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한 그의 작태를 아이작은 무심한 표정으로 꼬집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눈썹 한 번 깜빡이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 안 돼?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를 통째로 사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는데.”

“…….”

“그랬다간 네가 기겁해서 도망칠까 봐 엄청난 인내를 발휘해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몰랐어?’ 태연자약하게 덧붙이는 그의 대꾸에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딱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이작은 확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내리누르며 눈을 들었다.

“왜요? 저와 섹스하는 게 마음에 들어서입니까? 단순히 그것 때문에?”

따지듯 묻자 필릭스는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새끼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그는 순순히 대답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의구심을 더욱 부추길 따름이었다.

“누구 말입니까.”

“…오만방자했던 오메가.”

혼잣말처럼 흘린 그의 대꾸에 쭈뼛 등허리가 굳었다. 설마…….

“그 자식 이후로 이토록 생각나게 하는 건 처음이라고. 아주 제대로 꼴리게 만들어. 섹스라곤 처음 해본 애송이처럼 온종일 발정 나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지. 어쩌면 이렇게 내 입맛에 딱 들어맞는지, 아주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벗겨 먹어도 모자랄 지경이란 말이야.”

눈을 번득이며 정욕을 드러내는 필릭스에게서 일순 알파 페로몬이 확 끼쳐 나왔다. 그가 지독히 흥분했다는 사실을 전신으로 깨닫게 만드는 향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베타라면 이토록 강렬한 페로몬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어떻게든 무감정한 표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참고 있다니, 기특하지 않아?”

“……필릭스.”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멈추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 정도로 견디기 어려웠던 적은 없었기에 아이작은 다리에 힘을 주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만 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미쳐서 날뛰기 전에 얌전히 따라와. 키스, 하나로 양보해줄 테니까.”

눈앞이 흐려지는 아이작의 머리 위로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하, 아이작은 막혀있던 숨을 토해냈다.

어쩌면 이렇게도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 가며 잘도 써먹는지. 도무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필릭스가 이젠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아이작의 턱을 가볍게, 그러나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악력으로 움켜쥔 필릭스는 광인처럼 번득이는 푸른 눈으로 아이작을 샅샅이 훑었다. 당장이라도 옷을 찢어버리고 다리를 벌리게 만들 것 같은 음험한 시선에 등허리가 떨리기도 했다.

“게다가 벤자민을 서운하게 하는 것도 곤란하잖아?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걸 굳이 빼앗아 갈 일이 뭐가 있어. 내가 해주겠다는데, 안 그래?”

또다. 또다시 이 약아빠진 사내는 벤자민을 볼모 삼아 자신을 흔든다. 아이작은 이를 꾹 씹었다. 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허탈한 심정이었다.

“아이작.”

그가 다시금 낮게 이름을 불렀다. 갈라진 중저음이 귓가를 자극한 순간, 아이작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입술 위로 그의 더운 숨결이 자극적으로 와 닿았다.

“입 벌려.”

불가항력의 명령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이 저도 모르게 반쯤 벌어졌다.

“흣-.”

그와 동시에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칠게 삼켜졌다. 어떤 소리조차 흘리지 못했다. 내지르는 비명과 숨결까지 필릭스가 욕심 사납게 훔쳐간 탓이었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 사이로 무자비하게 파고든 필릭스는 아이작의 입안 곳곳을 혀로 문지르고 맛보고 타액을 마셨다. 혀끝을 휘감고 아프도록 빨아당기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크게 벌어진 입가에선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렀다.

다리가 멋대로 후들후들 떨리고, 눈앞은 하얗게 점멸해간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필릭스는 아이작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른 한 팔로는 허리를 휘감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자세로 붙들린 아이작은 질질 끌려가듯 뒷걸음을 쳐야만 했다. 그러자 곧 쿵, 소리와 함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둔탁한 통증이 일어나는 것도 잠시, 던지듯 몰아세운 필릭스는 아이작의 턱을 옆으로 꺾더니 열십자로 입을 맞물렸다.

“으, 으음-!”

조금 전보다 한층 더 격렬한 키스가 퍼부어졌다. 벽과 필릭스 사이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된 아이작은 입을 잔뜩 벌린 채 난폭하게 입안을 헤집는 필릭스의 키스를 받아야만 했다. 입술을 물고 빨다가 혀를 얽히는 것은 그나마 양호했다.

점막 곳곳을 제 것이라고 새기는 것처럼 문지르던 그의 두꺼운 혀가 불현듯 목구멍에 닿을 것처럼 깊숙이 침범하자, 숨이 콱 막혀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는 뒷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도망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딥스롯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목구멍을 훑는 거친 움직임에 아이작은 끝내 컥컥거리며 기침을 토하고 말았다. 필릭스는 가까스로 젖은 입술을 떼고 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아이작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끼워 넣고 뭉근하게 사타구니를 짓누른다.

“아이작, 제대로 해야지.”

턱으로 흘러내리는 타액을 진득하게 핥으며 필릭스가 소곤거렸다. 숨이 차올라 가슴을 들썩이던 아이작이 흐려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필릭스는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훑더니 아이작의 사타구니를 눌러대고 있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으흣-”

가뜩이나 키스로 흥분해 있던 몸에 직접 자극을 가하자 당장 서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반쯤은 피가 몰려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작의 입술을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혀로 핥으며 필릭스는 눈을 접었다.

웃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 안에 비치는 푸른 눈동자는 등허리가 오싹해질 정도로 사나웠다. 치솟는 정욕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한 눈빛이기도 했다.

“키스 하나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우니 원, 얼마나 물고 빨아야 네가 먼저 안아달라고 매달리려나.”

다시금 고개를 숙여 닿을 듯한 거리 위까지 입술을 떨어뜨린 필릭스가 작게 속삭였다.

“계약에 상관없이 아무 때건 박아달라고 울면, 기꺼이 원하는 대로 해줄 텐데.”

“……그럴 일, 없습니다.”

차오르는 열기를 억누른 아이작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대꾸했다. 되도록 무심히 말하고 싶었지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되레 재미있다는 투로 웃는 그는 열기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과는 달리 여유로워 보이기만 했다.

“하던 거나 마저 하게 입 벌리고.”

턱과 목을 손끝으로 쓸어내린 필릭스는 더 강하게 몸을 밀착해왔다.

“빨아줄 테니까, 혀 내밀어.”

낮게 갈라진 중저음이 아찔할 정도로 귓가를 자극해왔다. 아이작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순순히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혀를 내밀기까지 하자 필릭스는 단숨에 그의 혀를 삼켜버렸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오가는 혀의 움직임이 지독히도 외설스러웠다. 지금까지 한 것은 어린애 장난이었던 것처럼 그는 농염하게 혀끝을 문지르고, 핥고 씹었다. 펠라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능숙한 움직임으로 뱀처럼 얽힌 혀를 빠는 그의 키스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침이 턱 끝에서 줄줄 샜지만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숨은 거칠었고, 가슴은 크게 들썩였다. 덜덜 떨리는 무릎은 당장이라도 꺾일 것만 같았다.

맙소사, 이런 키스도 있었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각은 두려울 정도였다.

“으, 으응…….”

저도 모를 소리가 흘렀다. 입술과 혀와 점막이 전부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사라져 그에게 흡수되어버릴 것만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몽롱한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손도 대지 않은 성기 끝에선 프리컴이 조금씩 새어 나와 속옷을 축축하게 했다. 뒤는 더했다. 내부는 벌써 눅눅한 액에 젖어 녹진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미친 듯이 흥분해버린 것은 자신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확 밀물처럼 흘러드는 알파 페로몬이 코끝을 찔러 폐부 깊숙이 침범하고 들어왔다. 눈앞이 핑 돌 만큼 유혹적이고 관능적인 그 향기에 끝내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흣-.”

필릭스가 재빨리 무너지는 아이작의 허리를 휘감고 붙들지 않았으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불현듯 그가 정욕으로 흐려진 눈을 들었다. 그리곤 흐물흐물 녹아날 지경이 되어버린 아이작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이를 세운다.

“아이작, 네게서 나는 이 냄새는 뭐지? 무슨 냄새가 이래? 대체 어떤 향수를 뿌린 거야?”

갑작스레 아플 정도로 목덜미를 씹던 필릭스가 취한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그리곤 마치 체향을 들이키려는 것처럼, 혹은 제게서 흐르는 오메가 페로몬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살갗에 코를 댄다.

흠칫, 그제야 정신이 든 아이작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바위처럼 단단한 최우성 알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어느새 제 몸은 알파 페로몬에 절어있기까지 했다. 사지가 덜덜 떨렸다.

“신기한 냄새네. 맡을 때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야. 아니, 좆이 터져버릴 것 같아.”

머릿속에서 경종이 일어났다. 분명 오메가 페로몬이 흘러나간 거다. 그것 외에는 없었다. 다행히 오메가 페로몬이라는 사실을 필릭스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어제부터 계속 그와 함께 있었던 데다가 난잡하게 몸을 섞고 체액까지 내부에 퍼져 들도록 한참이나 내버려 뒀으니 반응을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자각 없이 돌아다닌 자신에게 자괴감마저 일었다. 태연히 이곳에 앉아 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억제제나 씹어 먹었어야 했다. 뒤늦게 깨달은 순간 머리부터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에 아이작은 이를 꾹 깨물었다.

“비키세요.”

파랗게 질린 아이작이 확 그를 떠밀었다. 방금 전만 해도 녹아날 것처럼 매달려오던 아이작이 갑작스레 정색하고 밀어내자 필릭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에게서 흐르는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진다.

“……뭐?”

“대가는 이미 어제 치렀고 다음 일요일이 될 때까진 함부로 만지면 안 됩니다. 그게 계약이지 않습니까.”

아이작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취한 것처럼 몽롱하던 짙푸른 동공이 점차 또렷해지며 위험스럽게 번득인다. 아이작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뒤로 물러섰다. 벽에 등이 닿아 물러설 곳도 없었건만 계속해서 그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이대로 잡히면 끝장일 것만 같았다.

“아빠!”

벌컥- 방문이 열리더니 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 것은 필릭스가 손을 뻗어 아이작의 목을 쥐려던 순간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벤자민의 등장으로 파삭, 깨져버린다.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하던 아이작이 가늘게 눈을 들었다. 어른들의 신경전은 전혀 모르는 벤자민이 그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한달음에 아이작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필릭스에게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했던 아이작 역시 언제 초조함으로 물들어 있었냐는 듯 환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벤자민에게 두 팔을 벌렸다. 폴짝, 품으로 안겨든 벤자민에게서 베이비 파우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들떠있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해주는 마법 같은 냄새였다.

아이작은 벤자민의 어깨와 머리칼에 코를 비비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저 남자와 있으면 좀처럼 이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아빠, 아빠, 말 타자.”

아이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더니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살거렸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다른 때라면 뭐든 하자고 나갔을 테였지만, 지금은 ‘말’이라는 소리에 기분이 다시 가라앉고 만다.

반사적으로 흘끔, 눈을 돌렸다. 아직도 그 자리에는 장승처럼 선 필릭스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아이작과 벤자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오르듯 일렁이던 정욕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냉랭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갔다 와, 난 누구 씨 때문에 흥분 좀 가라앉혀야 할 것 같으니까.”

툭 던지는 필릭스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차갑고 무심했다. 아이작은 부러 그의 아랫도리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랑말과 말의 관리에 관한 계약서를 또 가지고 오실 겁니까?”

“원한다면.”

시큰둥한 목소리가 괜스레 신경 쓰였다. 아이작은 벤자민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계약서는 괜찮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담담히 전한 아이작은 필릭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렀다. 방 안에는 아이의 조잘거리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가득했다. 어색할 정도의 적막과 침묵에 아이작은 방을 빠져나가는 내내 긴장해야만 했다.

“선물, 감사합니다.”

복도로 나가기 직전, 아이작은 조용히 인사말을 전했다. 여전히 필릭스는 침묵했다. 대신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을 뿐이었다.

* * *

벤자민의 손을 잡고 조랑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내내 아이작은 필릭스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그가 전한 키스, 억제제를 복용했음에도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오메가 페로몬까지. 머리가 뒤숭숭하기만 했다.

“말!”

그런 아이작을 깨운 것은 벤자민의 외침이었다.

어느새 파티는 끝이 났는지, 정원은 텅 비어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필릭스의 부하 몇몇이 정원을 치우고 있는 모습에 아이작은 혀를 찼다. 이런 일까지 수하들을 부려 먹다니. 저도 모르게 불편한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냥 두라고 말하려 했지만, 벤자민이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벤자민을 따라 걸어야만 했다. 조랑말을 묶어둔 곳으로 걷는 걸음은 뛰는 것처럼 빨랐다. 아이는 벌써 폴짝폴짝 자리에서 뛰어다니며 흥분과 기쁨을 표현하기 바빴다.

“벤자민, 말이 그렇게 좋아?”

“응응! 좋아!”

발그레해진 볼과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는 벤자민을 내려다보던 아이작은 쓰게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약아빠진 사내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그리 귀신같이 생각해 내고 사람을 흔드는 건지.

“그래, 다행이네. 생일선물 준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했어?”

묻자 벤자민은 아무렇게나 허공을 향해 ‘thank you, uncle!’ 하고 외쳤다. 삼촌이라니, 그건 또…….

“누가 삼촌이래?”

“아저씨가. ‘엉클 필릭스’라고 했어.”

“…그랬어?”

어이가 없어 헛웃음까지 흐를 지경이었지만 아이작은 입술을 꾹 깨물기만 했다. 가족도 아닌데 난데없이 삼촌이라고 했다니, 이건 또 무슨 사기꾼 같은 발언인지 모르겠다. 쯧, 혀를 찬 아이작은 무거운 걸음으로 조랑말 앞으로 다가섰다.

훈련이 잘되어 있는 듯 조랑말은 온순했다. 아이가 타기에 적당한 말이라는 점에 아이작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하루 사이에 이런 말을 대체 어디서 구해온 것일까. 대단한 능력이었다. 물론 필릭스는 지시를 내렸을 뿐일 테니, 그의 수하들, 특히 토니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벤자민을 말 등 위에 태웠을 때였다. 옆에서 도와주던 사내 하나가 문득 아이작을 살피며 끄응, 신음했다. 벤자민에게 허리띠를 채워주다 말고 아이작은 의아한 눈을 들었다.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사내는 흠, 헛기침을 했다.

“아, 죄송합니다. 베타인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실은 당신에게서 보스의 알파 페로몬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져서 말이죠. 아마 마킹을 한 것 같은데, 알파인 저로서는 조금… 힘들어서.”

뒷말을 흐리는 사내를 보던 아이작은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조금 전, 필릭스가 키스하며 짙은 알파 페로몬을 흘렸던 것은 알고 있었다. 목덜미를 짓씹을 때는 더욱 그랬다. 단순히 그가 흥분해서 질식할 정도로 강렬한 페로몬을 흘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마킹을 했다고?

잠시 잠깐 멍해져 있던 아이작은 사내를 돌아보았다. 알파들은 같은 알파의 페로몬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등급이 높은 알파의 페로몬은 낮은 알파에게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따라서 우성이나 최우성 알파들은 페로몬을 방출해 등급이 낮은 알파들의 정신을 짓눌러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니 최우성 알파인 필릭스가 마킹을 했다면, 평범한 알파인 사내는 지금 아이작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일 테였다.

“…미안하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아이작은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조용히 사과했다.

“아닙니다.”

사내는 외려 멋쩍어하며 급히 조랑말을 묶어둔 끈을 풀고 고삐를 손에 쥐었다. 어떻게든 제게서 멀어지려는 뜻이 역력히 비쳤다. 아이작 역시 뺨을 문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사내의 허리춤에 꽂혀있는 단도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잠깐만요.”

서둘러 조랑말을 끌고 나서려던 사내는 아이작의 부름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시바삐 자리를 뜨고 싶은데 불러 세워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 단도, 제게 주시죠.”

그러나 아이작은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으로 아이작을 바라봤다.

“어째서입니까? 이곳의 경호원인 제게 필요한 무기이고 제 손에 익은 단도라 드릴 수 없습니다.”

그가 조금 전과는 달리 곧장 날 선 목소리로 반박했다. 아이작은 대꾸 없이 손을 뻗었다. 사내가 방어하듯 아이작을 막아섰지만, 아이작이 더 빨랐다. 탁, 사내의 손목을 가볍게 수도(手刀)로 내려치고 반쯤 비틀어 치운 아이작은 손쉽게 사내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단도를 빼냈다.

사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얼얼하게 울리는 손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다른 손으로 문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손에 쥔 단도를 찌푸린 눈으로 살필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뒤에서부터 낮은 중저음이 울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필릭스가 예의 오만한 태도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을 흘리는 그의 등장에 주위는 갑작스레 긴장감이 서렸다.

아이작에게 단도를 뺏긴 사내 역시 바짝 어깨에 힘을 주고 정자세를 한다. 그사이 아이작의 곁으로 자연스레 다가온 필릭스는 아이작이 손에 들고 있는 단도를 주시했다.

“그건 뭔데?”

아이작은 말없이 그에게 단도를 내밀었다. 검집에 담긴 단검은 평범해 보였지만, 손잡이 위로 툭 튀어나온 버튼이 일반 단검과는 달랐다.

“아이를 지키는 경호원이 쓰는 무기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탄도 단검은 이미 판매가 중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손잡이에 버튼이 달린 탄도 단검은 구소련의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에서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무기였다. 간단히 버튼만 누르면 블레이드가 총알처럼 날아가 박히는 특이한 성능을 갖고 있지만, 불안전성과 위험성으로 이미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판매와 소지가 중지되기도 했다.

무기상인 필릭스가 탄도 단검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사내가 불법으로 탄도 단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모를 수가 없을 테다. 아이작이 내민 단검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툭툭 두들기던 필릭스가 문득 짙푸른 눈을 들었다.

“탄도 단검이라.”

“오, 오랫동안 손에 익어있는 무기라-.”

“이름이 뭐야?”

하얗게 질린 사내가 변명하듯 말을 꺼냈지만 필릭스는 듣지도 않고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제임스입니다.”

“제임스? 너 뭐 하는 놈이야. 경호원이라는 놈이 제 무기를 이렇게 쉽게 뺏겨? 그래 가지고 애를 어떻게 지킬 건데?”

“그, 그건-….”

아이작에게 묻어있던 알파 페로몬 때문에 정신이 흐려져 있었다는 변명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른 오후에 경호팀장이 잔디가 잘못되어 아이가 넘어졌다는 이유로 정강이가 깨지지 않았던가. 겨우 그 정도 이유로 경호 팀장은 정강이가 깨졌는데……. 생각하던 사내의 얼굴에서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게다가 무기상인 내 밑에서 일하는 놈이 불법무기 소지라. 어처구니가 없군.”

마피아와 연관되어 불법으로 무기를 팔아치우는 남자의 낯짝은 참으로 두껍기만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필릭스에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손에 익은 단검이기도 하고, 지금껏 전혀 사고가 없었기에 그만.”

제임스는 사색이 되어 사과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듣는 둥 마는 둥 검집에서 단검을 뽑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잡이의 버튼을 툭, 눌렀다.

푹- 블레이드가 쏜살같이 튕겨진 것은 눈 깜박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난치듯 움직인 필릭스의 손끝에서부터 날아간 검은 제임스의 발에서 1인치 정도 떨어진 잔디 위에 박혀 있었다.

주위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까딱했으면 제 발등 위에 단도가 꽂혔을 제임스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덜덜 떨고 있었고, 아이작은 사내의 발 옆에 꽂힌 단도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벤자민만이 다리를 흔들흔들 움직이며 ‘마알….’ 하고 칭얼거렸다.

“웁스.”

고요를 깬 것은 필릭스였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네?”

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내뱉은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툭, 손잡이만 남은 단도를 제임스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손잡이를 받은 제임스가 눈을 들었다.

“이래도 사고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가?”

“죄, 죄송합니다.”

“제임스, 고래 밥 되고 싶지 않으면 멋대로 굴지 마.”

낮게 경고하는 필릭스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동시에 그들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아이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래 밥이라니, 저건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말 등 위에 앉아있던 벤자민은 이미 알고 있는 듯, 신난다며 ‘고래 밥 언제 줘?’ 천진하게 물었다. 덕분에 제임스는 더더욱 사색이 되어 꿀꺽, 목울대를 울렸다.

“그 단검은 토니에게 반납해.”

“…알겠습니다.”

“넌 당분간 근신이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뱉은 필릭스의 결론에 제임스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물론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만 해도 엄청나게 운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었지만.

아이작은 초조해지는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필릭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빙긋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벤자민에게 다가서더니 능숙하게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조랑말을 끌고 갈 따름이었다.

마침내 조랑말이 움직이자 벤자민은 마냥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런 벤자민을 데리고 필릭스는 가벼운 걸음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그의 느긋한 움직임을 아이작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파티가 무사히 끝나고 정리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자 정원은 금세 한가롭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늦은 오후의 길어진 햇빛이 쏟아지는 고요한 정원은 평화로울 정도다. 어쩌면 왁자지껄했던 아이들의 소음이 사라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늘한 나무 그늘에 선 아이작은 팔짱을 끼고 무덤덤한 얼굴로 필릭스와 벤자민을 지켜보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조랑말을 타는 벤자민은 잔뜩 신이 나 있었고, 필릭스는 그런 벤자민의 말을 군소리 없이 끌어주고 있었다.

이쯤 탔으니 그만하자는 말 한 번 꺼내질 않는다. 아이가 질릴 때까지 말을 태워주기로 작정을 한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외의 행동임은 틀림없었다.

“저녁은 먹고 가야지?”

필릭스와 벤자민에게 시선을 둔 채 곰곰이 상념에 잠겨 있는 아이작의 옆에서 단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였다. 그녀의 얼굴엔 벤자민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은 노동이다. 그런 것을 연세도 있으신 어머니에게 오롯이 맡기고 있으니 아이작은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알면서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씁쓸하기만 하다.

더욱이 오늘처럼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 파티조차 손수 준비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기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더불어 벤자민에게도 할머니뿐 아니라 부모가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든 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이작?”

“아. 아닙니다. 힘드실 텐데 저녁은 괜찮아요.”

새삼스레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고민을 거두며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기는 해도 되도록 빨리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자 늘 그렇듯, 어머니는 ‘그래도’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당신이 피곤한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한 끼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거다.

“벤자민이 오랜만에 널 봐서 즐거워하잖니. 저녁 정도는 먹고 가렴. 괜찮으면 필릭스도 같이.”

그녀의 제안에 아이작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어졌다. 처음 필릭스와 함께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인사만 시켜드렸을 뿐인데, 어느새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둘이 따로 인사라도 했던 건가, 아니면 어머니는 진심으로 필릭스가 벤자민의 아버지라고 믿고 있으신 건가. 알 수가 없었다.

괜스레 치솟는 불안감에 짧게 숨을 내뱉은 아이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뿐 아니라 필릭스까지 함께하는 저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곧 가야 해서-….”

“난 너랑 저녁 먹고 갈 건데?”

기껏 저녁 이야기를 먼저 꺼낸 어머니가 속상해할까 조심스레 거절의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뒤통수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이작은 흠칫, 어깨를 굳혀야만 했다. 저렇게 체격도 좋은 사내가 어떻게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건지, 매번 놀라고 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아이작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잠들어버린 벤자민을 제법 능숙한 자세로 안고 있는 필릭스가 눈에 박히듯 들어온 탓이었다.

여자를 안듯 양팔로 들어 올린 자세라서 능숙해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필릭스는 꽤 안정적으로 잠든 아이를 안고 있었다. 벤자민 역시 편하게 안긴 채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쉰다.

“제가 안겠습니다.”

아이작은 곧바로 벤자민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됐다고 말할 뿐이었다.

“자고 있는데 내버려 둬.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퉁명스러운 말투에 아이작은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와 잠이 든 벤자민의 금사 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웃었다.

“벤자민이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아침부터 파티를 한다고 들떠 있었거든요. 게다가 낮잠 잘 시간이 한참 지나기도 했지.”

“말 등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에 안아주니까 바로 자더군요.”

“정말 다정하네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벤자민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필릭스는 상당히 공손한 투로 말했다. 아이작은 이번에도 놀라고 말았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로 일관할 거라 여겼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외려 깍듯한 데다가 기품까지 더해진 태도를 보여주는 필릭스를 아이작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누가 저 남자를 무기상이자 마피아와 연관된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얼핏 보면 말 그대로 잘 배우고 잘 자란 부잣집 도련님 같기만 하다.

그렇기에 아이작의 눈에는 필릭스가 더더욱 희대의 사기꾼처럼 보일 지경이었지만, 아쉽게도 어머니는 이미 저 사기꾼에게 녹아버린 분위기였다. 환해진 표정과 반짝이는 눈이 딱 그랬다. 속이 거북한 건 아이작밖에 없었다.

“필릭스, 괜찮으면 저녁도 같이 먹고 가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기어코 필릭스에게 저녁을 제안했다. 아이작이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어머니, 전-.”

“초대해주신다면 기꺼이 응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난감해하며 거절하려는 아이작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필릭스는 예의 해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름다운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아이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남자는 자신이 이런 미소를 지으면 상대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똑똑히 아는 게 분명했다.

“어머나, 멋지기도 해라. 그러면 저녁을 먹고 가는 거로 해요. 벤자민도 좋아할 거예요. 아이작, 그렇지 않겠니?”

어머니는 발그레한 얼굴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무기상을 하지 않았다면 카사노바로 명성을 날렸을 것이 확실한 필릭스의 작태에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별다른 반박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요.”

“아이작 너까지 환영해준다면 정말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군.”

뻔뻔하게 중얼거린 필릭스는 이번에도 오만한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그의 곁에 나란히 선 어머니는 필릭스와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든 벤자민을 살피며 옅은 기대감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야 원. 낮게 한숨을 내뱉은 아이작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안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저녁을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집 안의 현관문을 열어주던 어머니는 불현듯 저녁 메뉴를 떠올리며 고민했다.

“미세스 파커, 전 가리지 않고 잘 먹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게다가 홈메이드 음식인데 뭐든 맛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차기의 카사노바, 필릭스는 여전히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어머니를 안심시킬 따름이었다.

“어머, 어쩜.”

벤자민에 이어 어머니마저 필릭스의 번드르르한 외모와 화술에 넘어가 버렸는지 한참이나 밝게 웃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어머니는 저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이작은 이제 두통까지 일어나려고 하는 이마를 꾹꾹 눌러댔다.

벤자민이 말을 타는 것만 보고 곧바로 돌아가려던 계획은 이렇게 수포가 되고 말았다. 제발 별일은 없어야 할 텐데.

어머니를 따라 당당하게 집으로 향하는 필릭스를 근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아이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무거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 *

아이작은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제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수다스럽기는커녕 지나칠 정도로 말수가 적은 사내였다.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탓에 필릭스는 굳이 그의 사생활을 묻지 않았다. 물어본다고 해도 아이작이 알려줄 리가 없으니 말이다. 대신 뒷조사는 조금 했다. 따라서 웬만한 인적 사항은 아이작 본인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딱히 캐물을 만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이 몰랐던 아이작을 발견하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건, 정말이지 귀엽군요.”

필릭스는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고추를 드러낸 채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린 아이작이었다. 당연하게도, 어린 시절의 아이작은 지금처럼 무뚝뚝하지도 않고, 무표정하지도 않았다. 사진으로 보니 더더욱 벤자민과 흡사한 생김새의 어린 아이작은 해맑고 순진무구해 보일 뿐이었다. 평범한 어린아이다.

필릭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아이작의 어머니, 제시카 파커가 가져온 사진첩을 샅샅이 살폈다. 모처럼 느긋하게 가정집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 과일과 따끈한 차를 마시며 아이작의 어린 시절을 구경하는 것은 근래 들어 한 일 중,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건만, 아이작의 어린 시절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물론 지금도 볼 때마다 예뻐서 물고 빨고 깨물고 싶은 욕구가 가득하긴 하지만, 아이작의 어린 시절은 특히나 귀엽고 예뻐서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풀어진 눈으로 사진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진은 열 살쯤에서 멈춰있었다. 앨범의 뒷장을 넘기다가 텅 비어버린 페이지를 발견한 필릭스는 아쉬운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청소년기의 아이작은 어땠을지 궁금했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마지막 사진을 바라보던 제시카 파커는 쓰게 웃었다.

“아이작이 열 살 때 이혼을 했지요. 전 남편이 아이를 놔주지 않겠다고 해서 두고 올 수밖에 없었고요. 재혼한 후에도 아이작을 간간이 보러 가긴 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이작의 아버지가 아이작을 데리고 워싱턴 D.C 근처로 이사를 가버렸어요. 덕분에 보는 게 여의치 않아졌죠. 전 그때 시애틀에 있었거든요.”

제시카 파커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 낮잠을 자고 깨어난 벤자민이 저녁을 먹은 후 다시금 잠투정을 하자 아이작은 아이를 씻기고 재우겠다며 2층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비운 중이었다.

그사이, 그의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어린 시절의 앨범까지 보게 되어 상당히 들떠있던 필릭스는 어느새 가라앉은 눈으로 제시카 파커를 쳐다보았다.

“가끔 전화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것도 아이작이 미들스쿨을 들어가면서부터 뜸해졌어요. 하이스쿨을 들어간 후로는……아예 연락이 닿질 않았죠. 그리고 삼 년 전까지, 전 아이작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살았답니다.”

제시카 파커는 짧은 한숨을 쉬며 사진 속의 아이작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시절이 그립다는 듯, 혹은 아쉽다는 듯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잠시 잠깐 흔들렸다. 필릭스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작의 아버지가 벌써 오래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이작은 제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날 찾아오지 않고 혼자 살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하는 말이, 재혼한 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제시카 파커에게 그런 속내를 전했을지 선연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필릭스는 말없이 잔을 들어 따뜻한 차로 입술을 적셨다. 한숨을 흘리던 그녀의 이야기가 재차 이어졌다.

“그 애의 깊은 생각과는 달리 전 오래전부터 아이작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말이에요.”

“…….”

“하지만 아이작의 행방을 알아내진 못했어요.”

낡은 앨범을 끌어당겨 눈에 담던 제시카 파커는 조용히 앨범을 덮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엔 늦은 후회와 죄책감마저 엿보였다.

“아이작을 찾아낼 수 없었는데, 삼 년 전엔 어떻게 다시 만난 겁니까?”

갑자기 떠오른 의문을 던지자 제시카 파커는 그제야 감정을 갈무리한 듯 고요한 얼굴로 입술을 말아 올렸다.

“아이작이 저를 찾아왔어요. 예기치 않게 갓난아이를 안고 나타나긴 했지만,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벤자민과 아이작과 함께 지내는 지금이 꿈만 같아요. 이젠 더 바랄 것이 없죠.”

“그래서 last name이 다른 겁니까?”

다시금 이어진 필릭스의 질문에 제시카 파커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작의 성은 싱클레어였다. 아이작 싱클레어.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제시카 파커. 벤자민의 성은 역시 어머니의 성을 딴 파커로 되어 있었다. 얼핏 봤을 땐 아이작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성이었다.

가족관계를 세밀하게 조사하지 않는 한, 누가 봐도 남으로 보이는 이름이기도 했다. 물론 서류상으로도 그들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제 성은 재혼한 남편의 성으로 바뀌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몇 년 전에 먼저 가버리긴 했지만……. 그런데도 아이작은 벤자민에게 제 성을 붙여달라고 부탁했어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어 보였기에 묻지 않고 그렇게 했답니다.”

앨범을 조용히 서랍에 넣은 그녀가 벤자민의 성에 관해 설명했다.

필릭스는 찜찜한 감정을 지워내지 못한 채 턱을 문질렀다. 아이작과 벤자민의 성이 다른 건 일찌감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벤자민의 모친을 따른 것이 아니라 아이작의 모친, 그것도 재혼해서 바뀐 성을 따른 것이라고 하니 뭔가 꼬인 기분마저 든다.

“그러면 벤자민의 모친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단조로운 질문을 들은 제시카 파커는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아이작이 열 살 때 헤어졌다가 삼 년 전 다시 만났을 때까지 그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도 모르시겠군요.”

“네,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평범하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일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설명에 필릭스는 눈썹을 살짝 접었다. 토니가 조사한 아이작의 신상명세에도 그렇게 나와 있긴 했었다. 특출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하게 파트타임을 하다가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가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삼 년 전, 갑자기 회사를 때려치운 그는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 갓난아이와 함께 제 모친을 찾아왔다. 샌디에고 다운타운 한구석에서 허름하고 조용한 꽃가게를 운영하고, 형편없는 꽃다발을 만들면서 누군가의 추적을 피해 숨죽여 살고 있는 플로리스트라니.

지금껏 깨닫지 못했었는데, 제시카 파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되게 수상하네….”

무슨 사연이 그렇게나 많은지.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을 쌓아두고 있는 아이작을 떠올리던 필릭스는 못마땅한 심정으로 차를 들어 마셨다.

“아이작이 어려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무뚝뚝하고 표현도 잘 못 하고 그래요. 그래도 알고 보면 참 다정한 성격이랍니다.”

그러자 제시카 파커는 제 아들을 두둔하려는 듯 말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 함함하다고 하지 않던가.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제시카 파커도 제 아들인 아이작의 좋은 점만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필릭스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겠죠.”

아이작이 무뚝뚝하고 무감정한 거야 유명한 사실이 아니던가. 물론 침대에서 자지러질 때는 그렇지도 않지만. 새삼 일어나는 음험한 생각을 숨기려 필릭스는 부러 짙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아이작이 샌디에고로 내려온 후 처음으로 집까지 데려온 친구예요. 아니, 지난 삼 년간 처음으로 만난 친구인 것 같군요.”

“…….”

“늘 일과 벤자민밖에 없었어요. 제가 힘들까 봐 여러 가지로 신경 쓰기도 하죠. 정말 착한 아이랍니다.”

“…압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데다가 여러 가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기이한 사내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이작은 누구보다도 선량한 시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어머니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과거와 벤자민의 모친에 대한 일도 함구하고 있는 와중에 쫓겨 다니는 이유까지 말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필릭스, 아이작을 잘 부탁해요.”

어딘지 아이작을 닮은 제시카 파커가 조용하게 말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필릭스는 낯선 위화감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 순간, 2층에서 내려오던 아이작과 시선이 맞부딪혔다. 어두운 밤하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시선이었다.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과 제시카 파커가 마주 보고 앉아있는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사진 속의 어린아이와는 전혀 딴판으로 자란 그를 빤히 직시하던 필릭스가 조용히 웃었다.

아이작, 너는 대체 비밀을 몇 개나 숨기고 있는 거지? 그것들을 하나씩 까발려주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벌써부터 치솟는 기대에 등허리가 오싹해질 정도였지만, 필릭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다가오길 기다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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