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eal
아이작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지도 몰라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필릭스는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벤자민과 네 어머니가 지금처럼 평온히 라호야에서 지내길 바라는 거잖아. 안전하게. 그리고 너는 최대한 그들 가까이에서 가족이라는 걸 티 내지 않고 지켜보길 바라는 거고.”
제법 명료하게 알아들은 그에게 아이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의 입술 끝이 자신 넘치는 호선을 그린다.
“첫째, 차라리 네가 꽃가게를 가끔 옮겨. 라호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주기적으로 옮겨 다니면 그것만으로도 널 찾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원한다면 명의나 자리도 알아봐 줄 수 있어.”
“…….”
“둘째, 내가 벤자민과 네 모친에게 개인 경호를 붙여주도록 하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놈들을 그림자처럼 붙일 거야.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연락이 오겠지.”
어때? 필릭스는 의기양양하게 물었지만 아이작은 별다른 반응조차 보이질 않았다. 외려 골똘히 상념에 잠겨있는 모습이 사람 김빠지게 할 정도다.
“아이작.”
참지 못하고 필릭스가 그를 불렀다. 심연처럼 깊이 잠긴 어두운 눈이 그제야 필릭스를 향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아이작은 대답 대신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필릭스는 함부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절이나 동정보다는 오히려 철저하게 짓밟고 빼앗아오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런 남자가 타인인 자신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저도 모르는 이유가….
수많은 상념과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런 아이작의 의심을 이해한다는 듯 필릭스는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우선은, 네게 지은 죄가 있어서.”
“…….”
“그리고 네게 호감이 있으니까.”
제법 달콤한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필릭스를 아이작은 여전히 무심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그가 자신에게 호감과 관심이 있다는 것은 지난번에도 고백했던 적이 있었기에 별다른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흘리더니 다시금 생각에 잠겨버리는 아이작의 반응에 필릭스는 짧게 한숨을 흘렸다. ‘재미없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경호를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닙니다만.”
그러자 아이작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필릭스의 푸른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런데?”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곧 무덤덤한 아이작의 대꾸에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대체 널 쫓는 놈들이 뭔데 그래?”
따지듯 던지는 질문에 아이작은 필릭스의 짙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얽혔다.
“만약 그런 이유로 저를 도와주고 싶으시다면….”
아이작은 그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조용히 다른 말을 꺼냈다.
“경호원은 적어도 벤자민과 어머님께 각각 둘 이상.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무조건 보호하며 자리에서 도망치고, 가장 먼저 제게 알려야 합니다. 맞서 싸울 생각은 애초에 그만두게 하세요.”
“이거야 원, 내 수하 놈들을 되게 무시하는 발언인데?”
빠르게 내뱉는 제안이 마땅치 않았는지 필릭스가 삐딱하게 말했지만 아이작은 계속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늘어놓았다.
“경호원은 당신의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웬만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지만, 만약 나타나야만 한다면 당신의 사람이라는 것이 한눈에 보였으면 합니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당신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걸 뚜렷하게 알려주세요.”
“내 비호라.”
“만약 딜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제가 어디로 떠나든 상관하지 말아 주십시오.”
“디일?”
명료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나자 필릭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쪽 눈썹을 쭉 당겨 올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마주할 뿐이었다.
“당신 또한 제게 원하는 것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타인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분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사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니 차라리 딜을 하는 게 편하겠습니다.”
“제법 그럴듯하게 말은 잘하네.”
“…….”
“그래서,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이라. 그게 뭔지 알고는 있고?”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필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속해보라는 투다. 아이작은 바싹 마른 목구멍 아래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가만히 벤자민을 내려보았다.
아삭아삭, 평소엔 그렇게 많은 쿠키를 손에 쥘 수 없는 아이는 신난다고 쿠키를 씹고 있었다. 쿠키에 정신이 팔려버린 아이의 귀를 두 손으로 꽉 붙든 아이작이 긴장한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서비스 대금은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목소리는 여상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그의 시선 끝에 필릭스의 아름다운 얼굴이 박혀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절 걸레로 만들어도 좋습니다.”
* * *
토니는 엄지손가락으로 눈썹을 문지르다가 낮게 침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제 아들 지키려고 경호를 붙이는 줄 알겠는데요.”
“아들 맞지 않아?”
“아니라던데?”
“아니긴! 얼굴이 증건데. 저토록 눈에 띄게 화려한 얼굴이 어디서 또 나오겠어? 게다가 저렇게 보란 듯이 경호까지 붙이면 지나가는 개도 제 자식 지키려 하는 건 줄 알겠다.”
부하 놈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들의 소란스러운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며 토니는 묵묵히 상념에 잠겨 들었다.
생각할수록 참 머리가 좋은 놈이다. 상대가 누구든 벤자민은 무기상 필릭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리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아이는 누가 봐도 필릭스를 연상시킬 만큼 빼다 박았다. 백이면 백, 모르는 놈들은 벤자민을 필릭스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그럴 경우, 누가 감히 벤자민을 건드릴 수가 있을까. 아무리 필릭스가 곳곳에 적을 두고 있기도 하고, 그에게서 무기를 뜯어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천지에 깔렸다고 해도 직접 필릭스에게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배짱을 지닌 놈들은 없다. 그건 정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필릭스의 아들을 건드린다? 그놈들은 제 목숨과 제 가족의 목숨과 제 이웃의 목숨까지 전부 내놔야 할 테다. 그게 진짜 그의 아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벤자민을 교묘히 필릭스의 아들처럼 보이게끔 했다. 누구도 감히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장치를 해놓은 거다. 필릭스의 이름을 건 경호원들을 보란 듯이 깔아놓은 것으로 말이다.
여러 가지로 묘한 사내였다. 이 정도의 바리케이드를 쳐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인물에게 쫓긴다는 것도 그렇고, 필릭스가 어떤 인물인지 뻔히 알면서도 대담한 요구를 하는 태도도 그랬다. 가장 이상한 점은 뒷조사를 해도 아무것도 나오질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태어난 마을, 출신 학교, 잠시 다녔던 직장. 모든 것이 그린 것처럼 깨끗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살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평범했기에 도리어 의심을 사게 한다.
“그런데, 혹시 보스에게 누나나 여동생이 있었나요?”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사내놈 중 하나가 뜬금없는 질문을 옆의 사내에게 던졌다. 덕분에 아이작에 관한 상념이 깨지고 말았다. 토니는 흘끔 눈을 들어 대화를 나누는 놈들을 주시했다.
“보스, 외동아들인 거 몰라?”
거대 마피아 간부를 조부로 둔 필릭스는 유복한 집의 외동아들로 자랐다. 거기에 최우성 알파라는 성질까지 더해져 누구보다도 귀하게 자란 남자였다. 집안 내력이 그 지경이라 성격은 오지게 삐뚤어졌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귀티가 줄줄 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사촌은?”
“글쎄다. 먼 사촌까지 치면 있기도 하겠지만 모르겠는데. 왜?”
“그 애가 보스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잖아. 정말 보스의 아이가 아니면 친척 애라도 되나 싶어서.”
놈들의 시답잖은 대화를 흘려듣고 있던 토니가 그제야 손을 내저었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자리로 돌아가. 그 아이에 대한 일은 이제부터 함구한다.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면 그것도 문제라는 거 모르나.”
엄하게 던지는 말에 사내들은 어깨를 굳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 말이 없는 토니지만 한 번 그에게서 명령이 떨어지면 불복할 수가 없었다. 필릭스의 최측근, 오른팔, 또는 가장 신뢰하는 조력자라는 토니는 말 그대로 조직 내에서 필릭스 다음으로 힘을 가진 인물이니까.
바싹 긴장해서 자리로 되돌아가는 놈들의 뒷모습을 보며 토니는 쯧, 혀를 찼다. 옆에서 잭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형님이 한 번 눈을 부라리면 애들이 식겁해서 질질 싸는 거 알면서 또 그러죠.”
“그건 보스가 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고.”
“보스는 두말할 것도 없고, 형님도 만만치 않단 말이죠.”
잭이 입에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들었다.
“그나저나 보스는 진짜 무슨 심경의 변화래요. 사내놈 후장 한 번 따먹어보겠다고 이게 무슨 난리래.”
“…….”
“어차피 한 번 놀고 나면 갖다버릴 거면서, 되게 신경 쓰는 척하기는.”
구시렁거리는 잭을 토니는 흘끔 쳐다봤다. 안됐다는 뜻인지, 한심하다는 뜻인지 묘하게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너도 가만 보면 보스 못지않게 눈치가 없단 말이지.”
“악! 무슨 그런 심한 욕을 해요? 세상에 보스처럼 눈치 없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토니의 무심한 질책에 잭은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방방거리며 날뛰었지만, 토니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찰 따름이었다.
한 번 놀고 나면 갖다버린다고? 하긴, 자신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언제부턴가 비슷한 생김새의 사내놈들만 보면 눈이 뒤집혀 박아대면서, 또 다음날이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의 괴상한 행동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이작에게 경고하기도 했었다. 잡혀서 망가지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도망치라고.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벤자민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들었던 순간 알 수 있었다. 잭이 지적했던 것처럼, 필릭스가 원했다면 그를 잡아 들여 어떻게든 제 욕심을 취했을 테다. 벤자민이라는, 아이작이 연모하는 사람을 몰래 잡아 오라고 하는 것 대신.
그런데 필릭스는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이작에게 미움받기 싫었던 거다. 끝내는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말았지만, 필릭스가 다른 사람 때문에 이 정도로 신경 쓰고 노력한다는 점이 가상할 지경이었다.
되돌아보면, 쓸데없이 가게를 들락거리며 필요도 없는 꽃다발만 매번 비싸게 사다가 여기저기 던져뒀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아이작이 좋아한다는 양란 화분을 사서 기어이 가지라며 안겨주었을 때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토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옆에서 담배만 뻑뻑 빨던 잭이 뭔 소리냐는 투로 돌아보았지만, 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 뿐이었다.
설마 평생 누구에게도 없었던 진심 어린 애정이 난데없이 아이작에게 생긴 건가,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잘됐다는 생각도 어느 한 편으로는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기분이 더했다. 다름 아닌 아이작이 지나치게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까닭이었다. 거기에 더해 필릭스의 미니미 벤자민까지…….
아이작은 끝까지 벤자민이 자신의 아이라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애초에 최우성 알파인 아이의 부체가 베타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아이작이라는 남자의 뒤를 더 캐야 할 것만 같다. 더불어 유전자 검사도 시급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벤자민과 필릭스, 아이작까지 전부. 그렇게 하면 과연 누가 진짜 벤자민의 부체인지 나타날 테니 말이다.
제 씨를 함부로 뿌리는 짓을 질색하던 필릭스였다. 간혹 제 애를 뱄다는 베타 여성이나 오메가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죽일 듯한 살기를 내뿜으며 유전자 검사를 해야 인정할 테니 낳은 후 데리고 오라고 단단히 못을 박기가 예사였다. 물론 데리고 온 아이의 검사 결과 제 아이가 아닐 시에는 아이가 고아가 될 거라는 협박도 잊지 않고 덧붙여서.
결국, 그렇게 해서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은 없었다. 제 목숨은 누구에게나 귀한 법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그의 사생아가 나타난 거라면, 그 사생아를 무슨 이유에서든 아이작이 키우고 있는 거라면…….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던 토니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부디 벤자민이 우연히 필릭스와 닮은 아이기만을 바랄 수밖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그는 몸을 돌렸다. 담배를 피우다 말고 어리둥절해진 잭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토니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세단에 올라탈 따름이었다.
* * *
‘겨우 일주일에 한 번. 너를 걸레로 만들 수 있게 해주겠다고?’
‘네.’
‘와, 생각보다 내가 많이 불리한 딜이네?’
‘도와주신다고 처음 제안을 했던 건 당신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사기 같은 딜인 건 맞잖아.’
턱을 괸 채 필릭스가 싱긋 웃었다. 사기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재미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분명 그가 불리한 조건으로 딜을 던진 건 자신인데, 어떻게 된 건지 그는 ‘갑’이고, 자신은 몹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을’처럼 느껴진다.
아이작은 칼칼해진 목구멍 아래로 마른침을 삼켰다. 침이 넘어가며 목구멍 점막 위로 따끔거리는 감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딜이 성립되지 않으면 제가 어디로 떠나든 상관하지 말아 주십사, 하고요.’
‘벌써부터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얼굴을 하기는.’
툭툭, 노크하듯 탁자를 두들긴 필릭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익,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흘렸다. 이어 느릿하게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한 아이작은 벤자민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아이가 작게 칭얼거렸다.
‘난 금방 질려버리기도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거지?’
어느새 제 등 뒤로 선 필릭스가 어깨 위로 가볍게 손을 올리며 묻는다. 묵직한 손길로 온 신경이 쏠리며 어깨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담담한 투로 아이작은 대답했다.
‘그때도 마찬가집니다. 당장 그만두시면 됩니다. 단, 저는 대가를 이미 지불한 거니 제가 종적을 감출 때까진 보호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정리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약았어.’
살짝 길어진 뒷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헤집으며 목덜미를 슥 훑는 움직임에 솜털마저 바짝 일어섰다. 움찔거리는 반응을 알아차렸는지 필릭스의 손끝은 부러 애태우듯 목의 척추를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자칫 신음이라도 흘릴 것만 같았다.
‘그거 알고 있나?’
‘…….’
‘난 손해 보는 장사, 싫어하거든.’
나직하게 귓가를 울리는 낮은 음성은 유혹적이었다. 언젠가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떨리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작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허리를 굽힌 필릭스는, 아이작이 벤자민에게 했던 그대로 그의 머리칼 위로 가볍게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일주일에 한 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시트를 힘껏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턱 아래로 땀방울이 뚝, 떨어진다.
엎드린 자세로 이마를 시트에 처박은 채 엉덩이만 한껏 치켜들고 있는 아이작의 벌어진 입술 끝에선 희미한 교성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입술을 짓씹기도 하고 제 손으로 막아보기도 하지만 소용이 없다.
“으… 흣…….”
제 허리를 붙들고 끊임없이 내부를 쑤셔대는 발정 난 알파, 필릭스 때문에 이미 몸은 만신창이였다. 흉악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성기가 구멍에 박힐 때마다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액이 찌걱거리며 흘러나왔다. 엉덩이를 흠뻑 적시고 허벅지로 줄줄 흐르는 모양새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정확하게 일요일 밤 자정, 월요일이 되자마자 필릭스는 아이작의 아파트 문을 두들겼다. 꽃가게를 월요일에 쉬니 되도록 월요일에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긴 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려고 누워있던 시각, 자정을 딱 넘기자마자.
필릭스와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딜을 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도망가는 편을 택할 걸 그랬나 뒤늦게 고심하기도 했다.
그런 제 불안함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필릭스를 보고 있으려니 허탈해진다. 아이작은 한참이나 눈만 깜박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 앞에 장승처럼 서 있는 사내가 필릭스 펠리체가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어떻게 이곳을 찾았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러자 필릭스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아이작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격정적이면서도 조급한 키스였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젖은 소리가 흘렀다. 통째로 삼켜버리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혀를 감고 입술을 빨아대는 필릭스의 키스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얼마나 욕심 사납게 빨아당기는지 타액과 숨결마저 몽땅 약탈당하는 것만 같았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제대로 내쉴 수가 없어 헐떡거리는 순간, 쾅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제멋대로 현관문을 닫아버린 필릭스는 어느새 거친 손길로 옷을 벗겨내고 있었다.
말릴 수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계약은 계약이었고, 자정을 넘긴 순간 걸레로 만들어도 좋다고 자신이 먼저 제시했던 월요일이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 하루는 필릭스가 무슨 짓을 해도 반박할 수가 없다. 좋든 싫든 그에게 몸을 내주어야만 했다. 그러니 눈 딱 감고 버티는 수밖에.
체념한 아이작은 제 목덜미를 빨며 옷을 벗기는 그의 탄탄한 어깨를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옷과 브리프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자려고 누워있던 참이었기에 가벼운 파자마를 걸치고 있긴 했지만, 어찌나 능숙하게 남의 옷을 벗겨내는지 기가 찰 정도였다. 그러나 어이없어했던 건 한순간뿐이었다.
격렬한 키스를 퍼붓고 드러난 맨살을 손끝으로 새기려는 것처럼 매만지던 필릭스는 그대로 성큼성큼 침대로 걸었다. 정신없이 그에게 끌려간 아이작은 어느덧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젠장, 매일같이 생각했어. 너를 안으면 어떤 기분일까, 너는 과연 내 아래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이작을 가두듯 양손으로 침대를 짚은 채 내려보는 짙푸른 눈동자가 새까맣게 잠겨 든다. 무섭도록 강렬한 정욕을 감지한 아이작이 무의식적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목울대를 울린 순간이었다. 필릭스의 단단한 손이 아이작의 한쪽 허벅지를 힘껏 잡아 벌렸다.
‘샤워하고 나왔어?’
활짝 벌어진 아래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침대 옆 스탠드만 켜두었기에 그다지 밝은 불빛이 아닌 게 다행일 정도다.
‘…네. 잘 시간이니까요.’
‘비누 냄새가 나쁘지 않아.’
민망함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하자 필릭스는 어쩐지 더 민망해지는 말을 흘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아이작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돌렸다. 그 사이 필릭스는 주머니에서 젤을 꺼내 입구 위로 쏟아부었다. 차갑고 낯선 느낌에 허리가 흠칫, 떨린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선 감각이 이어졌다. 그의 매끈한 손가락이 젤을 펴 바르며 입구를 문질러 대는 탓이었다. 자신도 만질 일이 없는 부분을 타인이 꼼꼼히 매만지는 느낌은 실로 기이했다. 저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이를 꽉 깨물기도 했다.
‘긴장 풀어.’
긴장감에 딱딱하게 경직되어있는 아이작에게 필릭스가 달래듯 속삭였다. 동시에 젤에 흠뻑 젖은 손가락이 구멍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고작 손가락 하나뿐이건만 몸은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는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필릭스의 손가락은 멋대로 내부를 휘저을 따름이었다.
길쭉하면서도 마디가 툭 튀어나온 투박한 손가락이었다. 보기에도 야하게 생긴 손가락이 구멍 안쪽 깊이 들어갔다 빠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점막 곳곳을 문지르던 손가락의 개수가 하나씩 더해졌다. 몇 개까지 들어온 건지 셀 수가 없었다. 한껏 벌어질 만큼 벌어졌다는 느낌에 숨이 탁 막혔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필릭스는 외려 손가락의 끝을 구부려 내벽을 긁어내린다. 한껏 문지르고 휘젓던 탓에 예민해진 점막 안쪽으로 저릿저릿한 전류가 흐른다.
‘아, 흐읏-!’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아이작은 허리를 들썩이며 짧은 신음을 토했다. 그러자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깨문 필릭스는 내부를 휘젓던 손가락을 확 빼냈다. 내부를 꽉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한 번에 빠져나가자 또 한 번 몸이 튄다.
‘진짜 환장하겠네!’
짧게 욕설을 뱉어내며 허벅지를 움켜쥔 필릭스의 손끝에서 녹아버린 젤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지독스레 외설스러웠다. 아이작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그의 손가락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순간, 흉기 같은 성기가 빡빡한 입구를 가르며 푹, 파고들었다. 갑작스럽게 그가 몸을 가르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하던 주위가 희게 바랜다. 다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벌어진 입에선 소리 없는 비명이 맴돌았다.
그러나 한 번 내부를 침범한 필릭스는 곧장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봐주는 기색도 없이 쑤셔대기 시작했다. 퍽, 퍽 흉흉한 성기가 박힐 때마다 배 속이 얼얼하게 울렸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지도 못하고 꺽꺽거렸다. 내장이 모두 짓이겨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게 휘두를 거면서 긴장 풀라는 말은 참 잘도 했다. 이를 씹으며 아이작은 애꿎은 시트만 쥐어뜯어야 했다. 죽을 것 같은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필릭스는 인내라고는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몸짓으로 정신없이 몰아세울 뿐이었다.
평소에는 느물거리며 말도 많던 사람이 어떻게 된 건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추삽질에만 몰두한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흐, 으흣- 제발, 처, 천천히…….’
울먹이며 애원하는 소리까지 흘렸지만 필릭스의 몸짓은 더욱 사나워지기만 한다. 자신을 내려보는 광기 어린 표정에 더럭 두려움마저 일었다. 일주일에 하루, 걸레로 만들어도 좋다고 했던 자신을 책망할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도 꺼내지 말걸. 차라리 도망가 버리고 말걸.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리던 아이작이 허리를 비틀며 흐느꼈을 때였다.
‘아, 진짜! 어떻게 돼먹은 거야, 넌!’
치솟는 욕정에 스스로를 진정시키기가 어려운 듯, 버럭 소리를 내지른 필릭스는 불현듯 허리 짓을 멈추고 탐욕스럽게 입을 맞췄다. 밭은 숨만 가까스로 내뱉고 있는 아이작의 입술을 씹어 삼키려는 사람 같다. 아니, 아예 아이작이 내쉬는 숨결까지 전부 먹어치우려는 건지도 몰랐다.
입술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거칠게 빨고, 깨물고, 타액을 게걸스럽게 핥아대며 입안을 점령해버린 그에게 아이작은 입을 잔뜩 벌린 채 고스란히 내어주어야만 했다. 얽힌 혀가 비벼질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외설스럽게 흘렀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숨을 헐떡이던 아이작은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필릭스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던 필릭스가 낮게 목구멍을 울리더니 푹, 깊숙이 성기를 박아 넣는다.
‘으흣-!’
뭍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아이작의 허리가 반사적으로 움찔 튀어 올랐다. 어찌나 거센 움직임이었는지 배 속을 둔기로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얼얼한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아이작의 무릎 아래로 팔을 넣고 몸을 반쯤 접은 자세를 만들더니 그대로 추삽질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단단한 그의 페니스가 뿌리 끝까지 박혀 들었다가 뽑혀나가고, 다시 박혀 들기를 반복했다. 퍽, 퍽, 소리가 선연히 울리도록 내벽을 때려 박을 때마다 아이작의 몸은 사정없이 위로 밀려 올라간다. 끝내 침대 머리까지 밀려가 머리가 부딪칠 정도가 되자 필릭스는 그의 허리를 붙들고 단번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곤 다시 거센 허리 짓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탓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입술을 꽉 깨물며 그가 드나드는 입구에 불이 날 것처럼 화끈거리는 감각을 참아내는 찰나, 내부에서부터 뜨거운 감각이 해일처럼 번져왔다.
움직임을 멈춘 필릭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제야 그가 사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지를 늘어뜨렸다. 그의 목에 감고 있던 팔도 툭, 침대 위로 떨어진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숨이 거칠었다. 온몸은 이미 땀에 절어 있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제야 숨을 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작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른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한 번 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릭스는 제 엉덩이에 처박고 있는 성기를 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외려 안에 꽂혀있는 그대로 점차 단단해지며 배 속을 다시금 압박하기까지 하자 아이작은 경악으로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흣-…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벌써 쉬어버린 목소리로 묻자 필릭스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픽, 웃었다.
“끝나? 시작도 안 했는데 끝났냐고 물으면 곤란하잖아.”
“그러면…… 적어도 좀 쉬었다가…… 으윽-!”
차마 말이 끝까지 나오질 못했다. 퍽, 입구를 찢어먹기라도 할 것처럼 필릭스의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밀려 들어온 탓이었다. 숨이 탁 막혔다. 아이작이 가늘게 어깨를 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필릭스는 땀에 젖은 아이작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며 짐짓 다정하게 속삭였다.
“오늘 하루는 걸레로 만들어도 좋다고 하지 않았어?”
“아, 으읏-.”
“너, 아직 멀쩡해.”
기가 막힌 한마디를 던진 필릭스는 작지 않은 체격의 아이작을 가볍게 뒤집어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아이작의 엉덩이를 움켜쥔 그대로 짧게 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작정한 듯 박아대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사정없이 쑤셔대자 안에 고인 정액이 새어 나오며 음탕한 소리를 흘렸다. 제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낯설기 짝이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작은 어지러운 눈을 감았다.
하긴, 필릭스는 다름 아닌 최우성 알파였다. 화려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도 유명하지만, 체력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는 사내다.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한 아이작은 체념 어린 한숨을 흘렸다.
그때는 어땠더라……. 벌써 4년이나 되어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섹스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어쩐지 지금껏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눈앞으로 선명하게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날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아이작.”
과거와 현실의 장면이 겹쳐지려는 찰나, 필릭스가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아이작이 눈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필릭스가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아이작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쾌감이라고는 느끼지 못하고 있던 터라 축 늘어져 있던 성기를 크고 단단한 손이 꽉 움켜쥐고 문지르자 움찔, 허리가 튀어 올랐다.
“흐읏-…. 왜….”
발갛게 물든 눈으로 아이작은 뒤를 돌아봤다. 저토록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내가 타인의 성기를 손에 쥐고 흔들다니. 제 욕구만 채우면 끝일 거로 생각했는데, 이거야말로 의외였다.
“사실 지금 이대로도 네 뒷구멍 맛이 좋아서 환장할 지경이긴 한데 말이야, 네 얼굴이 조금 더 쾌락에 물들어서 우는 걸 보고 싶어졌거든.”
“아-….”
“그렇게 아파서 우는 거 말고, 흥분해서 자지러지게 만들고 싶은데, 어디가 좋아? 네 좆을 문질러주면 좋겠어? 응?”
귓불을 깨물며 ‘말해 봐’ 라고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등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제 성기를 감싸 쥐고 손끝으로 귀두의 갈라진 부분을 문지르자 오싹한 전류가 흐른다. 발가락이 곱아 들 정도였다.
아이작은 대답 대신 신음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필릭스의 노련한 손길이 이어지자 속수무책으로 성기가 부풀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손가락으로 희롱하는 귀두 끝에서는 어느덧 미끈거리는 프리컴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도 했다.
“좋아? 여기?”
집요하게 물으며 필릭스는 아이작의 목덜미를 핥았다. 아직도 엉덩이 사이에 처박아둔 채 빼지 않고 있는 성기를 가볍게 튕기듯 추어올리기도 한다. 격렬한 움직임이 아닌, 짧고 가벼운 추삽질과 손으로 자위하듯 문지르는 움직임이 동시에 더해지자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읏, 그, 그만…….”
당황한 아이작이 필릭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엉덩이를 앞으로 빼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필릭스의 단단한 손은 잔뜩 발기한 제 성기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섹스를 시작하면서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내부에 박혀있는 성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아이작을 당황하게 만든 건 자위하듯 문질러져서 오는 쾌감이 아니었다. 외려 제 뒷구멍에 꽂혀있는 필릭스의 성기가 좀 전과는 달리 가볍게 튕기며 예민한 부분을 찔러댈 때마다 번져가는 희열 탓이었다.
“아, 아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필릭스의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신 사정과 함께 새된 신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극, 열기가 내부로 뜨겁게 번졌다. 그의 성기를 물고 있는 구멍 안쪽이 움찔움찔 경련하듯 떨리기까지 한다. 잔뜩 구겨진 시트에 이마를 비비며 아이작은 갑작스레 전신으로 번지는 쾌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반응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필릭스가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씹었다. 동시에 참을 수 없다는 듯 가늘게 떨리는 아이작의 허리를 꽉 움켜쥐고 끌어당기더니 거친 추삽질을 이어갔다. 퍽, 퍽- 무자비하게 때려 박는 움직임에 아이작은 다시금 시트를 움켜쥐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 달랐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쾌감에 엉덩이가 절로 흔들린다. 필릭스의 흉악한 물건을 더 안쪽으로 깊숙이 빨아들이고 싶은 욕구에 입구를 조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쾌감을 쫓는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기분도 들었다.
“아이작, 아이작……, 너, 정말 상상 이상이야. 환장하겠어. 대체 이게 다 뭐야. 내 걸 물고 놓지를 않잖아? 제기랄, 이것 좀 보라고. 네 야해 빠진 구멍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엎드린 채 엉덩이만 치켜든 자세로 그의 성기를 물고 있는 아이작의 구멍을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필릭스가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작은 아무것도 들리질 않았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기만 했다. 갑작스레 반응하기 시작하는 아이작이 놀랍다는 듯 필릭스는 혀를 찼다.
“평소에는 목석처럼 무뚝뚝하기만 하더니, 이 얼굴은 또 다 뭐고? 닳고 닳은 창부가 온다고 해도 너처럼 색기가 넘쳐흐르진 않겠어.”
맙소사, 낮게 신음한 그가 못 견디겠다는 듯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에 맞춰 아이작 역시 엉덩이를 들썩였다. 쾌감에 절어가는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헐떡이는 숨만 연신 내뱉고 있던 반쯤 벌어진 입가에서는 침이 흘렀다.
“아, 아아, 아…. 좀 더……. 필릭스…… 거기-.”
자신도 모를 말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짐승처럼 제 엉덩이에 성기를 처박아대는 필릭스가 짧게 욕설을 흘렸다. 뒤엉킨 나신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열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발정 난 짐승의 교미가 따로 없었다. 아이작은 뒷구멍을 쑤셔지는 것만으로도 또 한 번 사정했다. 이번에는 필릭스의 손길조차 없었다.
“fuck! 진짜, 미치겠잖아!”
필릭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눈앞이 아득해지는 쾌감에 교성을 흘리던 아이작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절망하고 말았다.
아무리 베타인 척해도, 억제제를 먹고 페로몬을 없애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오메가인 거다. 알파가 흥분해서 쑤셔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반기고 만다. 내부에 싸지른 정액에서 흐르는 페로몬이 온몸으로 퍼지자 억제제를 먹었음에도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교성을 흘려댄다.
지금까지 모르는 척, 괜찮은 척 덮어두고 있던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 나자 우습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창부처럼 엉덩이를 흔든다.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처럼 쾌락에 젖은 몸은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버렸다.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런 혼란도 잠시였다. 자신이 제시했던 것처럼, 처음 그가 말했던 것처럼, 걸레로 만들려 작정을 한 듯 필릭스는 끊임없는 정욕을 드러내며 밤새 뒤흔들었으니 말이다.
또다시 그날의 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의 새벽 또한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러나 모든 상념은 금세 지워지고 말았다. 필릭스가 이끄는 대로 아이작은 울고 또 울었을 뿐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던 긴 밤이었다.
* * *
샌디에고의 대부분 날씨가 그렇듯 오늘도 맑고 화창했다. 파란 하늘에는 깨끗한 흰 구름이 조금씩 떠다니고 있었고, 햇빛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작은 날씨와 상관없이 벌써 며칠째 풀리지 않는 근육통 탓에 이따금 움직일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나흘 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필릭스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던 월요일이 지나 화요일이 되어 가게에 나왔을 때는, 차라리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셨고 허리는 제대로 펼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그의 흉악하기 짝이 없는 물건을 머금었던 입구는 열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려 앉아있기도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을 닫고 돌아가고 싶다고 고민하던 것과는 달리, 버티고 버티다가 두 시간 일찍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나온 것이 전부였다.
후유증이 지나치게 컸다. 일주일에 한 번, 걸레로 만들어도 좋다고는 했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최우성 알파를 얕본 모양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라면 어떻게 버틸까. 생각하면 할수록 암담해지기만 해 아이작은 저도 모를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그나마 일주일에 두 번이 아니라 한 번인 것이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아이작은 카운터 뒤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요즘 가게에서 꽃을 돌보는 시간보다 이 자리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날씨가 지독하게 맑고 좋았다. 바다가 가까운 탓에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좋았고, 햇볕도 따뜻하니 좋으니 그럴 수밖에.
샌디에고는 겨울이라고 해도 눈도 내리지 않는 데다, 낮에는 반 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마저 흔히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온화한 기후의 도시였다. 덕분에 뜨거운 여름을 제외하고는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인 모양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랬고 따끈한 햇살이 그랬다.
이런 날은 벤자민의 손을 잡고 발보아 파크에 가서 피크닉을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잔디밭을 뛰어놀고 점심과 간식을 먹고 아이들을 위한 행사도 참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마음 놓고 벤자민과 나다닐 수 없는 현실이 아쉽고 애석했다. 커가는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마음 놓고 외출 한 번 못 하니……. 생각하니 깊은 한숨이 절로 흐른다. 새삼스럽지만 아이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그런 평범한 일상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까. 당장은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를 떠올리며 아이작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다가 탁 소리가 나도록 제 무릎을 쳤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카드라도 써야겠다. 분위기 가라앉는 생각만 이어갈 수는 없으니까. 자신뿐 아니라 벤자민을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야만 했다. 뻐근한 허리를 애써 무시하며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운터 옆에 진열해 놓은 카드 중 미키마우스 카드를 한 장 골라 손에 쥐었다.
요즘 벤자민은 미키마우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작 또한 늘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카드를 고르기 일쑤였다. 밝게 웃고 있는 미키마우스를 쳐다보던 그의 입술 끝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민다.
Dear Benjamin.
여지없이 같은 문구를 카드 위에 정성껏 적었을 무렵이었다. 탁탁,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구두가 아닌 운동화나 스니커즈 같은 소리였다. 펜을 손에 쥔 채 다음 문장을 골똘히 생각하던 아이작은 흘끔 눈을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뜻밖의 인영이 서 있었다. 아니, 뜻밖의 인영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익숙한 인물이긴 했다. 그러나 그의 차림새가 지나치게 뜻밖이었기에 시선을 떼지 못할 따름이었다.
“뭐야, 이젠 손님이 왔는데 인사도 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건가? 너무 건방진데?”
세상에서 건방지기로 둘째라면 서러워해야 마땅할 남자가 태연히 지껄이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은 필릭스의 모습에 찰나의 순간 넋이 나가 있던 아이작은 펜을 손에 쥔 그대로 눈을 깜박였다.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대부분 어두운색의 캐주얼 정장을 입고 다니던 필릭스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밝고 경쾌한 차림새를 하고 있으니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하다.
흰색의 반 팔 폴로셔츠에 아이보리색 면바지, 스니커즈와 비슷하지만, 끈이 앞에만 짧게 있는 가벼운 요트 신발, 어깨에는 그의 눈동자 색처럼 새파란 스웨터를 두르고 있는 그는 요트에서 찍은 화보 속에서 쏙 뽑혀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반짝이는 금색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시선을 맞춰왔다. 괜히 멋쩍어진 아이작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필릭스는 그가 쓰고 있던 카드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또 벤자민에게 카드 쓰고 있었어? 이번엔 미키마우스네?”
묻는 목소리가 샐쭉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흘리며 카드를 접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써놓고도 보내지 못한 카드와 편지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벤자민이 미키마우스를 좋아해서요.”
“그래? 디즈니랜드라도 데리고 가야겠네.”
퉁명스럽게 던지는 말에 아이작은 대꾸하지 못했다. LA 근교에 있는 디즈니랜드는 샌디에고에서 고작 두세 시간 정도 운전해서 올라가면 그만인 곳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저 형편상 갈 수 없을 뿐이다. 바로 옆에 있는 발보아 파크 한 번 갈 수 없는 것처럼.
가까스로 잊고 있던 우울이 새삼스레 떠올라 아이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필릭스가 툭툭 카운터를 두들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대로 전해주지도 못하면서 쓰기만 하면 뭐해.”
비아냥거리는 말이었지만 아이작은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필릭스가 나지막한 한숨을 흘리며 머리칼만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린다.
“아이작. 보아하니 가게에 손님도 없는데, 그만 닫고 나와.”
강압적인 말투였다. 당장 이곳에서 끌고 나가기로 작심한 듯 결의에 찬 표정과 눈빛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섣불리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난데없이 나오라니. 이제 겨우 오후 한 시가 되어가는 이 시간에 가게를 보다 말고 대체 어딜 나오라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필릭스는 살짝 미간을 접으며 고개를 옆으로 까닥인다. 지금, 나오라는 뜻이었다.
“아직 가게 문 닫을 시간이 안 돼서-.”
“지금 이후 매상, 내가 평균치의 두 배로 메꿔 줄 테니까 일어나.”
변명하듯 말을 꺼내긴 했으나, 프러시안 블루의 눈을 부라리며 단칼에 잘라버리는 필릭스에게 더는 반박할 수가 없어졌다. 무슨 핑계를 대봤자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고 기어이 자신을 끌고 나갈 태세였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늘 메고 다니는 크로스백을 챙겨 들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딸랑, 방울 소리를 울리는 유리문을 닫고 열쇠로 잠그던 아이작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를 빤히 지켜보던 필릭스는 못마땅한 투로 쯧, 혀를 찼다.
“평소엔 이렇게 목석같기만 하면서.”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아이작이 셔터를 바닥까지 내려 잠그다 말고 눈을 들었다. 그러자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필릭스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갭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평소엔 무뚝뚝하게 구는 놈이 어떻게 침대 위에선 그렇게 야할 수가 있지? 요부가 따로 없던데.”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달았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녹아날 것만 같다. 게다가 얼마나 집요하게 바라보는지 그의 시선이 닿는 피부가 뜨겁기까지 하다. 반사적으로 몸 안쪽에서부터 슬슬 열이 일어나는 기분마저 들어 아이작은 애써 눈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리곤 부러 더 무감정한 투로 재차 물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그에게 휘말릴지도 몰랐다.
“재미없기는.”
“…….”
“가면 알아.”
여전히 무뚝뚝하게 구는 아이작에게 필릭스는 정확한 대답 대신 퉁명스러운 대꾸를 던졌다. 어쩐지, 예감이 썩 좋지 못했다. 그러나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기에 조금씩 번져가는 긴장감을 숨기고 그를 뒤따라 걸었다.
비교적 한산한 오후였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기도 했다. 이런 날은 소풍을 가야 하는데, 소풍은커녕 목적지도 모른 채 위험천만한 사내를 따라가야만 하다니, 좋은 날씨 말짱 꽝이다. 우울한 생각을 떠올릴 무렵이었다.
필릭스는 번잡하지 않은 길가에 주차된 세단 쪽으로 곧장 다가섰다. 오늘은 왜 안 보이나 싶었던 토니와 잭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필릭스가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열린 자동차 문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 삐딱하게 선 필릭스가 턱을 까딱였다. ‘타’라는 한마디와 함께. 무척이나 그답게, 차에 타라는 뜻도 참으로 오만하게 전한다.
타고 싶지 않다고 반박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이작은 살짝 땀이 배어난 손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며 무거운 몸을 뒷좌석에 구겨 넣었다. 필릭스가 곧장 따라 들어와 아이작의 옆에 나란히 앉는다.
서프라이즈 파티도 아니건만 막무가내로 끌려가야 하다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약자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가자고 하면 가는 수밖에. 짧은 한숨을 흘리는 사이, 세단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샌디에고 다운타운을 매끄럽게 가로지른 세단이 도착한 곳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선착장이었다. 샌디에고 자체가 바닷가 도시기 때문에 어디든 바다를 볼 수 있긴 했지만, 온갖 종류의 요트가 줄줄이 정박 되어있는 선착장으로 들어서자 눈이 절로 휘둥그레진다.
“설마 정말 요트라도 타자는 겁니까?”
오늘 옷차림부터가 수상쩍다고 생각했었는데, 기어이 뱃놀이를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간단히 대꾸한 필릭스는 싱글벙글 화사하기만 했다. 반대로 아이작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편하고 불안한데, 아예 아무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자는 건가? 여차하면 바다에 던져버리기라도 할 심산인가?
“코딱지만 한 꽃가게에 만날 처박혀 있다가는 말라비틀어지고 말 테니까.”
“…….”
“가끔은 햇볕도 쐬고 물도 좀 뿌리고 해야 잘 자랄 거 아니야.”
그러나 정작 들려온 필릭스의 뱃놀이 이유는 허탈할 정도였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 바다로 나가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지만.
“전 식물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괜찮긴, 얼굴이 허여멀건 해서는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앉아있으면서.”
슬쩍 반박해보기도 했지만 먹혀들 리는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앞장서서 걷던 필릭스가 혀를 찼다.
“돈 많고 할 일 없는 한량처럼 오늘 하루는 쉰다고 생각해. 오늘같이 날씨 좋은 날 바다 한가운데에 여유롭게 떠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릴 테니까.”
“뱃멀미가 심합니다.”
“약 먹어. 요트 안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겉으로는 드러나지는 않아도 내심 불안해하는 아이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필릭스는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앞장서서 선착장으로 향했다. 앞에는 필릭스가, 뒤에서 잭과 토니가 따라붙은 탓에 아이작은 마치 죄인이 연행당하는 기분으로 요트에 올라야만 했다.
난처함에 뺨을 긁적이던 아이작은 무심코 눈을 들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필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금발이 밝은 태양 빛에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흰색의 폴로셔츠 아래로 슬쩍 비치는 그의 탄탄한 등 근육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섭도록 잘 단련된 몸이었다. 푸른 스웨터를 쥐고 있는 팔 근육 또한 마찬가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구석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한 조각품 같은 남자였다. 정말이지 외모 하나는 타고났다. 아니, 외모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타고난 사람이긴 했지만…….
새삼스레 감탄하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갑판 위까지 도착해 있었다. 아이작은 홀린 듯 필릭스를 담던 눈을 돌렸다. 새파란 바다가 넘실거린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보는 바다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근사했다.
바다라면 치가 떨렸건만 이렇게 보니 아름다운 광경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어진다. 짧은 한숨을 습관처럼 내뱉던 아이작은 요트 갑판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필릭스에게 다시금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 보니 푸른 바다와 필릭스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잔할 때는 한없이 평온해 보여도, 거칠어질 때는 그 무엇보다도 두렵게 만드니 말이다. 게다가 속을 알 수 없는 짙푸른 눈은 바다와 똑같기도 했다.
갑판 뒤쪽에 서서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와 필릭스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시끄럽게 귀를 울리는 모터 소리가 들리더니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흠칫,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어깨가 굳는다. 그러나 요트는 망설임 없이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속력을 올리자 기우뚱, 몸이 흔들린다.
아이작은 휘청거리다 못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손잡이를 꽉 움켜쥔 그의 뺨 위로 짭짤한 바닷바람이 흩어졌다. 비릿한 바다 냄새까지 흠뻑 묻어있는 끈적이는 바람은 솔직히 썩 상쾌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내색 없이 아이작은 자리에 앉아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들이 도착하면 곧장 출항할 수 있게끔 준비되어있던 건지 진행 속도가 빨랐다. 아무리 개인 요트라고 해도 이래저래 준비하다 보면 시간을 잡아먹기 마련인데, 그런 것조차 없이 푸른 바다를 가른다.
정말, 바다 한가운데로 가는 모양이었다. 선착장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착잡해진다. 속이 불편한 것도 같았다. 무감정한 얼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불안감은 점점 더 심해져 가기만 했다.
부하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전한 필릭스는, 요트가 선착장에서 제법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을 직접 마주하지 못하는 게 내심 아쉽다는 생각이 스치듯 일었다.
“미안, 녀석들에게 얘기할 것이 있어서 혼자 뒀네.”
햇살을 등지고 선 그는 아이작의 앞에 가까이 서며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려 짓는 미소 같았다. 사나운 본성을 감추고 그림 같은 미소만 머금고 있다면, 누가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에게 홀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아닙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외모에 감탄하게 되는 아이작은 그러나 애써 무심한 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동시에 요트가 속력을 높인다. 모터 소리가 크게 들렸고, 기우뚱 다시 한번 몸이 기울었다.
윽, 저도 모르게 짧은소리가 입가에서 튀었다.
“이런, 선장 놈이 급하셨나.”
“…….”
“괜찮아?”
아이작이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짚고 허리를 굽힌 필릭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그의 새까만 선글라스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안색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대답 대신 입가를 틀어막았다.
“……약-.”
필요한 말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필릭스의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바지 위로 토사물이 왈칵 쏟아진 탓이었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입매가 굳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점심으로 먹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 * *
어느새 샤워를 하고 나온 필릭스는 아까보다 더욱 편해진 차림새로 아이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반바지에 반팔 폴로 티셔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그를 훑어 내리던 아이작은 그제야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던 상체를 곧추세웠다.
“좀 나아졌나?”
“…덕분에요.”
온갖 종류의 멀미약을 다 먹은 후에야 멀미는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갑판이 아닌 선실의 소파에 진정될 때까지 기절한 것처럼 누워있어야 했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가라앉아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착잡한 심정을 어쩌지 못한 채 티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물컵을 들어 마셨다.
구토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지 않았다고 해도 구토까지 할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제 몸뚱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기억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멀쩡한 얼굴로 있다가 갑자기 토할 줄은 몰랐지.”
“뱃멀미가 심하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고.”
필릭스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뱃멀미가 심하다는 사람을 다짜고짜 요트로 끌고 와 구토까지 하게 만들었던 게 걸렸는지 아이작의 안색을 살피는 필릭스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무리 뱃멀미가 심해도 필릭스 펠리체의 바지에 온통 토사물을 뱉었다면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바다에 던져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오히려 필릭스는 겸연쩍어한다. 그것만 봐도 자신이 상당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게 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태도는 괜스레 가슴 한구석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좋을 것 하나 없는데.
“그래서, 이곳까지 데리고 오신 이유는 뭡니까.”
아주 조금, 살짝 흔들렸던 감정을 갈무리한 아이작은 평소와 다름없는 딱딱한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긴장을 늦추면 곤란했다. 필릭스와 있을 땐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었다.
상대는 세계적인 무기상이자 마피아인 필릭스 펠리체였고, 그 악명 높은 필릭스가 괜히, 심심해서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할 일 없는 한량처럼 쉬어가라고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과연.
“갑판에 연회준비를 마쳐놨어. 조금 진정 되면 뭐라도 좀 먹겠어?”
그러나 필릭스는 섣불리 본론을 꺼내진 않았다.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흠, 하긴.”
그렇게 토사물을 쏟았는데 위 속에 뭔가를 또 집어넣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필릭스는 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억울했는지 눈썹을 구겼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문을 열었다.
“젠장, 조금 좋은 분위기에서 얘기를 꺼낼까 싶었는데 헛수고잖아.”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힌 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까닥이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토니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봉투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을 꺼낸 필릭스는 티 테이블 위로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서류는 아이작에게 향해 있었다.
“…뭡니까, 이건.”
“계약서.”
단조롭게 내뱉는 필릭스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언제 자신을 안쓰럽게 쳐다봤었냐는 듯 표정 또한 몹시 사무적이다. 거기에 날카로운 눈빛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공기가 바짝 조여든다.
척추를 타고 내리는 긴장감에 새삼 속이 울렁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이작은 군소리 없이 자신에게 내밀어진 서류를 손에 들고 조용히 읽어 내렸다. 그러나 글자 하나하나를 찬찬히 눈에 담고 있으려니 어쩔 수 없이 표정이 굳어지고 만다.
“너와 제대로 된 계약을 하고 싶어서 말이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네가 제시했던 사항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담겨 있어.”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받친 자세로 필릭스가 먼저 운을 뗐다. 아이작은 눈만 들어 그를 바라봤다가 다시 계약서의 글자를 살폈다. 필릭스의 말마따나 구두로 자신이 제시했던 모든 사항이 계약서 안에 꼼꼼히 적혀 있었다. 무엇 하나 틀림이 없다. 한 가지가 덧붙은 것을 제외하고.
하지만 아쉽게도 그 한 가지가 상당히 걸렸다.
“당신의 러트 때마다 같이 있어야 한다고요?”
황당함으로 물든 아이작의 시선이 계약서 너머로 필릭스를 향했다. 그래 봤자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래’ 라고 단조롭게 대꾸할 따름이다.
“저 혼자서 말입니까?”
“당연히 너 혼자서지, 다른 연놈을 또 부를까 봐?”
당황해서 묻자, 필릭스는 도리어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절로 미간에 골이 파였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알파의 러트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대게 삼사일이 지속되는 발정기였다. 일이 많고 귀찮을 때는 억제제를 복용하기도 했지만, 여건이 될 때면 그들은 어김없이 서너 명의 오메가와 베타를 불러 며칠이고 그들을 유린했다.
한 명으로는 턱도 없어서 서너 명을 한 번에 불러놓고 하는데도 다들 초주검이 되어 돌아가는 일이 대다수였던 것을 기억한다. 일반 알파나 우성 알파가 그 정도인데, 최우성 알파는 어떨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사실 러트가 아니었던 지난밤에도 죽을 뻔했는데, 러트까지 찾아온 필릭스를 혼자서 감당하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씹창 나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작은 탁, 소리가 나도록 계약서를 티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날 일을 떠올리려니 이제야 겨우 가라앉은 허리가 뻐근하게 울려오는 것만 같다.
“그럴 일 없어. 어디까지나 네가 좋아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 줄 거니까.”
“설마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작은 그를 노려보았다.
“지난번에도 네가 얼마나, 어떻게 내 밑에서 자지러졌는지 기억 안 나?”
뒤에서 버젓이 토니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필릭스는 낯 뜨거운 말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내뱉었다. 그러나 토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턱을 괸 그대로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번득이는 필릭스의 시선에 몸이 절로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절대 씹창 내서 죽이진 않을 테니까, 사인해.”
눈빛은 새파란 칼날처럼 날카로운데 목소리와 말투는 다정하다. 마치 달콤한 사탕으로 아이를 꾀어내려 하는 사기꾼 같은 작태였다. 아이작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필릭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탁, 무릎을 쳤다.
“아이작, 솔직하게 말할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대뜸 아이작의 옆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그리곤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비스듬히 몸을 돌려 뚫어지게 직시한다. 깊은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제게로 쏟아졌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감겨드는 기분이었다.
“난 사실 네게 기대하는 건 없었어.”
“…….”
“내가 좀 변덕스럽거든. 한 번 자고 나면 흥미가 떨어져서 말이지, 좀처럼 섹스 파트너가 오래가질 않아.”
느릿한 어조로 말문을 연 필릭스의 시선이 아이작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고집스레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을 핥듯이 쳐다보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 아이작은 섣불리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바싹 말랐지만 침도 삼키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네게 흥미가 생기더라고. 넌 섹스할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고.”
“…….”
“아무리 그래도 한 번 자고 나면 흥미가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질 않더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속삭이듯 뒷말을 덧붙이는 그의 중저음의 음성은 지독히도 관능적이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꽉 조여 온다. 가까이 앉은 덕에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알파 페로몬까지 더해지자 더더욱 그랬다. 숨이 절로 멎는다.
“외려, 자꾸만 더 생각이 나서 미치겠거든. 러트도 아닌데 너와 뒹굴 생각만 해대고 있으니, 정상이 아닌 거지.”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필릭스는 고개를 기울여 아이작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가 댔다. 살갗 위로 그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움직인다. 살며시 닿는 숨결에 솜털이 죄다 곤두설 정도였다.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널 안고 싶으니, 큰일 난 것 같지?”
“일주일에 한 번도 버겁습니다.”
“…이런.”
등허리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앉은 채 아이작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직접 만지는 것도 아니건만 이대로라면 금세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알파 페로몬 또한 점점 더 짙어져 갔다.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강렬한 향이었다.
아이작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눈을 깜박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제제를 한 알 더 먹고 오는 건데, 예고도 없이 끌려 나온 탓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 아쉽기만 했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당분간은 계약서대로 일주일에 한 번만 할 테니까, 사인해.”
“아무리 그래도 당신의 러트는 책임 못 집니다.”
“아이작.”
귓가에 입술을 대고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허리가 흠칫 떨렸다. 더워지는 숨을 꾹 내리누르며 아이작은 눈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내가 왜 바다 한가운데로 나왔다고 생각해?”
“…….”
“계약서에 사인 안 하면 너, 못 돌아가.”
명백한 협박을 듣고 있으려니 혀끝으로 욕설이 맴돌았다. 어쩌면 불길했던 예감이 이토록 딱 들어맞는 건지. 인상을 찌푸리자 필릭스는 여전히 빙글거리는 웃음을 머금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난 다음 러트가 오면 반드시 너와 같이 있을 계획이고,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거든. 별도로 원하는 보상이 있으면 뭐든 제시해. 곧바로 계약서를 수정해서 줄 테니까.”
“지금 당장 말입니까?”
“공증을 맡아줄 변호사도 같이 왔다고 말 안 했나?”
안 했습니다, 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그저 완벽한 덫에 걸렸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만 새어 나왔을 따름이었다.
“만약, 조건을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그건 뒷장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작은 계약서를 다시 손에 쥐고 뒤로 넘겼다. 필릭스의 말대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계약서의 가장 마지막 항목으로 계약위반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작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계약을 단 한 번이라도 어길 시, 기간은 상관없이 필릭스 펠리체가 원하는 대로 언제 어디서건 섹스한다…? 뭡니까, 이건.”
기어이 아이작의 무표정한 얼굴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차라리 위약금을 제시하세요.”
“돈은 널리고 깔렸는데 내가 뭐하러? 내가 네게서 받을 수 있는 건 네 야해 빠진 몸뚱이밖에 없다는 거, 몰라? 그리고 원래 계약위반은 계약보다 큰 법이야.”
태연자약한 태도로 신랄하게 던지는 필릭스의 대꾸에 아이작은 입을 다시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역시 속이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노골적인 계약서가 아닌가. 유치하기까지 한 문장은 분명 필릭스의 작품이 분명했다. 아니, 저 계약서 자체가 그렇긴 했지만 저 문장은 더더욱.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러대고 있으려니 문득 딜에 관한 대화를 처음 꺼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에도 필릭스는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재미있다는 투로 웃고 있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싫어한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결국 조금도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게 된 셈이다.
목구멍이 까끌거렸다. 그러나 할 말은 없었다. 잘못 걸리면 골수까지 빼 가고도 남는 위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먼저 딜을 제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아이작, 고민할 게 뭐가 있어?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손해 보는 장사가 맞는데.”
“뭐가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필릭스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그렇고 말고. 내가 계약서 제시하면서 ‘뭐든 원하는 대로’ 적으라고 했던 적이 또 있었는 줄 알아? 난 장사꾼이고, 이런 식의 불합리한 계약은 절대 해 본 적이 없어.”
“하…….”
“게다가 네 소중한 벤자민을 나보다 더 잘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생각해? 그것만 해도 넌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잖아?”
“…….”
“설마, 넌 네 자식 목숨보다 중요한 게 또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야비하게 아이작의 약점을 콕 집어 긁어대는 필릭스는 말 그대로 희대의 사기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 있는 아이작으로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벤자민보다 소중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게 부모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다고는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부모가 그랬고 아이작도 그중 하나였다.
비록 몸을 판다는 게 떳떳하지 못한 방식이기에 걸리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상대는 다름 아닌 필릭스 펠리체이기도 하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머릿속을 정리하던 아이작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목덜미를 손가락 끝으로 슥 그어 내리며 필릭스는 반쯤 감은 눈으로 유혹하듯 속삭였다.
“고민할 거 없어. 고작 섹스일 뿐이잖아? 그리고 장담하는데, 넌 어제보다 더 내 아래에서 자지러지게 될 거야. 내가 없으면 안 될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거다.”
“…….”
“내가 널 그렇게 만들 작정이니까.”
아이작은 자신만만하게 속삭이는 필릭스에게 눈을 돌렸다. 다시금 알파 페로몬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실은 반쯤 발기할 것만 같아 이를 꾹 깨물어야만 했다.
두려운 것은 비단 최우성 알파의 러트를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가까이 있는 그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알파 페로몬에 눈앞이 아찔해질 지경인데, 그의 러트 기간 내내 함께 지내게 된다면……과연 억제제를 먹는다고 무사할 수 있을까.
그의 숨 막히는 페로몬에 취해 무슨 짓을 어떻게 벌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어쩌면 히트사이클이 터질지도 모른다.
가끔 올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러트인 알파를 받아들이다가 히트사이클이 터지는 오메가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알파 또한 마찬가지. 히트사이클 중인 오메가와 몸을 섞다가 지나치게 흥분하면 러트가 터진다고도 했었다.
4년 전, 그날 이후로 히트사이클이 다시 찾아왔던 적은 없었지만 아이작은 불안하기만 했다. 과연 최우성 알파에, 이토록 사람을 현혹하는 사내의 러트를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나 있긴 할까.
만에 하나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필릭스는 또 무슨 반응을 보일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불안하기만 하다.
차라리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힐까, 싶기도 했다. 그랬다간 오랫동안 꿈꿔왔던 평온한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려져 곤욕을 치르느니 차라리 미리 밝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민에 잠겨있던 무렵이었다.
“아이작, 내가 너와 러트를 보내고 싶은 이유는, 물론 네 몸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탓도 있지만…….”
아이작의 고민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필릭스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어쩌면 단순히 갈등하는 아이작을 달래보려 꺼낸 말인지도 몰랐다.
아이작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나 그의 짙은 눈을 마주했다. 필릭스는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물컵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방금 전, 아이작이 마시던 것이었다.
“네가 베타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든.”
탁, 컵을 내려놓은 필릭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구멍 위까지 치솟았던 고백이, 순식간에 쑥 내려가고 말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내가…… 베타라서?”
“그래, 난 전에도 말했듯이 오메가라면 딱 질색이야. 게다가 아직 애를 낳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런데 러트 때는 까딱 잘못하다간 임신시키기 십상이거든. 특히 오메가와 있으면 더 그렇지.”
“…….”
“그래서 러트 기간에는 어떤 오메가도 건드리지 않아. 그런 점에서 넌 최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오메가도 아니고 베타 여성도 아니면서 내 취향에 딱 맞는 몸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필릭스의 대답에 아이작은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런 이유가 있다면, 처음부터 계약위반이 되는 셈이지 않나. 그러니 지금이라도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옳았다. 계약하기 전에 말을 꺼내야만 했다. 그러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흔들리는 눈으로 티 테이블 위에 올려진 계약서와 빈 물컵만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볼 무렵이었다. 눈앞으로 만년필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아이작은 무의식적으로 목울대를 울려 희미한 소리를 흘렸다.
“사인해.”
여러 차례 사인하라고 종용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펜을 건네는 그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렇게까지 달래고 어르는데 사인하지 않으면 당장 배에 총구멍을 낸 후 바다에 던져버릴 기세다.
꿀꺽,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킨 아이작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뭐든 제시하라고 하셨죠.”
잠시 필릭스를 마주하던 아이작은 까칠해진 목으로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사인하길 종용하던 필릭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래. 생각난 것이라도 있나?”
그의 질문에 아이작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네. 한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말해.”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은 저와 제 가족을 해치지 않겠다고. 계약서에 항목을 넣고, 약조해주세요.”
손을 들어 변호사를 부르던 필릭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당황한 듯 눈썹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내가 왜 너와 네 가족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지?”
“만에 하나, 경우의 수를 대비한다고 해두죠.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경우라도’입니다. 아무리 제게 화가 나는 일이 있다고 해도, 저와 제 가족을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하, 그것참.”
어이가 없네. 뒷말을 중얼거리던 필릭스가 손끝으로 딱, 소리를 만들었다. 긴장감이 감돌던 공간 위로 손끝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퍼진다. 곧장 변호사와 토니가 다가왔다.
어이없다고 불평한 것과는 달리 계약서는 그 자리에서 수정이 되었고, 필릭스는 제 이름 위에 서명한 후 아이작에게 내밀었다. 양손으로 종이를 쥔 아이작은 한 번 더 꼼꼼히 계약서를 읽어 내린 다음 떨리는 손으로 사인했다.
어차피 계약서엔 아이작이 꼭 베타여야 한다는 사항이 없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계약위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몰래 필릭스의 아이를 갖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이 들통 난다면, 그래서 필릭스가 격노한다면…… 그래도 계약서엔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고 적혀 있으니 손끝 하나 대진 못할 테다.
물론, 정말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가 난 필릭스라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다 뒤집어엎을 위인이 분명했지만, 일단은 이 정도 장치만이라도 해둬야 만족하는 아이작이었다.
“흠, 좋군.”
사인한 계약서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필릭스는 그것을 변호사에게 넘겼다. 변호사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계약서의 사본을 봉투에 담아 아이작에게 되돌려주었다. 아이작은 깨끗한 봉투를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 보기만 했다.
“자, 이제 계약도 완성이 되었으니 말인데.”
옆에서 필릭스가 건네는 말에 그제야 아이작은 뒤숭숭한 감정을 억누르며 눈을 들었다. 지나치게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탓일까, 깨닫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토니와 변호사는 선실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괜히,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핥듯이 쳐다보는 필릭스의 시선에 등허리가 긴장감으로 굳었다. 그의 말마따나 계약도 완성이 되었는데 왜 또 이러시나, 속으로 의아해할 무렵이었다.
“아쉽게도 다음 주엔 내가 일 때문에 샌디에고를 떠나있을 거거든.”
“그래서요?”
“그래서는. 계약한 대금은 미리 당겨서 오늘 받아가려는 거지.”
거창하게 요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온다 싶더니, 계약 외에 이런 것까지 계산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작의 턱을 가볍게 움켜쥔 필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당장이라도 입술이 맞부딪힐 것 같은 거리였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자신을 삼키기 직전, 아이작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미리 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도 사생활이 있으니 양해를 구하셔야죠.”
“사생활?”
마치 네게도 그런 게 있는지 몰랐다는 듯한 말투와 표정에 아이작은 짧은 숨을 내뱉었다.
“내일 벤자민의 생일파티가 있습니다. 전 꼭 참석하고 싶고, 그렇게 할 겁니다.”
“생일파티?”
앵무새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만 말을 따라 하는 그를 아이작은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제야 필릭스는 정신을 차렸는지 칫,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별말 없이 포기하는 태도이긴 했지만, 머리칼을 흩트리며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토라진 아이 같기만 하다.
가끔 밥보다 초콜릿과 과자를 더 많이 먹는 벤자민에게서 과자를 빼앗으면 저런 얼굴이 되곤 하는데…….
벤자민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릭스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필릭스가 뚱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빤히 직시했다.
“약속한 날은 매주 월요일로 하세요. 만약 월요일이 되지 않을 때는 제게 먼저 물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아이작은 살짝 풀어진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일은 말씀드린 것처럼 벤자민의 생일파티가 있습니다. 오후까진 참석하고 싶으니 만약 오늘 하고 싶으시면 지난번처럼 과격하게는 하지 말아주-.”
되도록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찰나였다.
덥석 아이작의 뒷목을 움켜쥔 필릭스가 그대로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단단히 붙든 그대로 허겁지겁 입을 맞추는 필릭스에게서 다시금 강렬한 알파 페로몬이 흘렀다. 아이작은 흐려지는 눈을 감고 입을 벌려 그의 키스를 반겼다.
혀뿌리가 아릿할 정도로 휘감긴다. 까끌거리는 혓바닥이 외설적으로 비벼졌고, 입술은 아프도록 빨렸다. 점막 구석구석을 문지르기도 하다가 치열을 훑기도 하는 키스가 멈추지도 않고 이어지자 벌어진 입가에서 타액이 흘러내렸다.
“으, 흡-.”
아이작은 숨을 헐떡이며 반사적으로 필릭스의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그제야 거친 키스를 함부로 퍼붓던 필릭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턱까지 차올랐던 숨을 몰아쉬는 바람에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아이작, 뭐든 네가 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흘러내린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낸 필릭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이작은 정신을 쏙 빼놓는 키스와 그에게서 흐르는 알파 페로몬에 몽롱하게 잠겨있던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새끼들 앞에선 그렇게 웃지 마.”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던 필릭스는 경고하듯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아이작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웃었다니…… 그랬던가?
아이작은 어리둥절했지만,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필릭스는 조급한 손놀림으로 그의 옷을 벗겨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번에도 눈 깜박할 사이에 티셔츠가 벗겨지고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벗겨져 바닥 위로 떨어졌다.
아이작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만든 필릭스는 제 웃옷을 급히 벗어 던졌다. 툭, 아무렇게나 웃옷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곧이어 지익, 바지의 지퍼가 내려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긴장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도 아이작은 긴 소파에 반듯하게 누운 채 필릭스의 육감적인 상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일 오후까지, 무사히 벤자민의 생일파티에 데려다주도록 하지.”
그러자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를 문지르며 필릭스는 입술을 핥았다. 도무지 믿음이라곤 눈곱만치도 가지 않는 사기꾼 같은 모습이 여전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이작은 체념한 채 짐승처럼 덤벼드는 필릭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직도 눈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햇빛이 선실의 작은 창문 너머로 비췄지만, 선실은 이미 어두운 밤 시간 못지않은 관능적인 열기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 * *
어둑어둑해진 시간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정신없이 뒤흔들리고 신음하고 널브러지길 반복하다가 눈을 드니 이미 시간은 늦은 밤이다. 게다가 자리가 옮겨져 있기도 했다. 선실 소파 위에서 몸을 섞기 시작을 했던 것 같은데, 눈을 뜨고 보니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 널브러져 있다. 아이작은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윽,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엉덩이와 허리는 물론이고 사지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필릭스가 붙들고 있던 양 손목은 얼얼했고, 허벅지엔 빨간 손자국도 남아있었다. 얼마나 빨렸는지 젖꼭지는 아직도 뾰족이 솟은 채 쓰라리기까지 하다.
겨우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또 이 지경이라니. 이래서 내일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푸념 조로 혼잣말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흘끔 주위를 돌아봤지만, 필릭스는 이미 침실 밖으로 나간 듯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방 옆에 붙어있는 욕실도 조용했다.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아이작은 도로 푹신한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닦아내지 않아 끈적거리는 몸이 찝찝했지만, 지금 당장은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적당히 하라니까.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바랄 걸 바랐나 싶은 심정뿐이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아이작은 내부에 고여있던 정액이 엉덩이 밖으로 줄줄 흘러나오는 감각을 애써 무시한 채 고르게 호흡했다. 오랫동안 시달린 탓인지, 또다시 잠이 오는 것도 같았다.
“자는 거야?”
낮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이작이 깜빡 잠에 빠져든 순간이었다. 흠칫, 놀란 아이작은 눈을 덮고 있던 팔을 내리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 바람에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있던 필릭스가 들고 있던 컵에서 물이 넘쳐 그의 바지를 적시게 했다.
“이것 참, 하루 두 번씩 바지를 버리게 하다니.”
“아…….”
선잠에서 깨어난 아이작은 아직도 상황을 깨닫지 못한 듯 눈을 깜박였다. 잠깐 사이에 식은땀이 흘렀는지 그의 까만 머리칼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악몽이라도 꿨어? 뭘 그렇게 놀라.”
젖은 바지를 툭툭 털어내며 필릭스가 물었다. 그는 또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멀끔한 모습이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 흰색의 반팔 티셔츠와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를 마친 사람 같기도 했다. 잠시 그의 모습을 눈에 담던 아이작은 그제야 굳어있던 어깨에서 힘을 빼고 긴 숨을 내뱉었다.
“…혼자 자는 버릇이 있어서요. 누가 잘 때 말을 걸면, 놀랍니다.”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아이작은 덤덤히 말했다. 필릭스는 엎지른 탓에 반이 비워진 물컵을 아이작에게 내밀었다.
“물이니까 일단 마셔.”
목이 잠겨있던 참이었기에 아이작은 기꺼이 그가 내민 컵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비로소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빈 컵을 손에 쥔 아이작이 문득 말문을 열었다. 어느새 아이작의 옆자리로 다가와 한쪽 팔을 베개에 올리고 머리를 받친 필릭스가 ‘뭔데?’ 하고 되물었다. 길게 모로 누운 그를 쳐다보던 아이작이 짧게 심호흡을 했다.
“오메가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겁니까?”
질문을 던지자 필릭스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떠올리기 싫은 것을 떠올렸다는 듯이.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굳이 하지 않아도-.”
“전에는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싫어하는 편도 아니었지.”
괜한 질문을 했다 싶어진 아이작이 손을 내저었을 때였다. 필릭스는 멋쩍어하는 아이작을 가로막으며 말문을 열었다.
“간혹 작정하고 덤비는 오메가들이 흘리는 페로몬은 싸구려 같아서 딱 질색이긴 했지만, 가끔은 즐길 만했으니까.”
“…그런데요?”
“4년 전에 어떤 오만방자한 오메가를 만났거든.”
허공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가던 필릭스의 눈빛이 돌연 사나워졌다. 그를 떠올리는 것마저도 이가 갈린다는 듯 움켜쥔 주먹에 힘줄이 솟는다. 아이작은 괜스레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였지. 어쩔 줄 모르는 놈의 발정을 내가 아주 친절하게도 밤새 잠재워주기까지 했다고.”
“그랬… 습니까?”
“그런데 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오메가 녀석이 내가 깜박 잠든 사이에 날 묶어놨지 뭐야? 기가 막혀서.”
낮게 가라앉은 필릭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음습해져 갔다. 아이작은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더는 듣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필릭스는 아랑곳없이 한번 시작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러면서 그 새끼가 뭐라고 한 줄 알아?”
이젠 으득으득 이가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왔다. 아이작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나마 목을 꺾지 않은 건 네 허릿짓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둬.’라고 지껄였다고! 그 건방진 새끼가! 감히, 나한테!”
“…….”
“그뿐이 아니었지. 그렇게 멋대로 지껄인 오메가 새끼는, 기어이 내 왼팔을 작살 내기까지 했어! 가차 없이 밟아서 부러뜨렸다고! 놈을 뒤쫓아 가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야!”
퍽-, 열이 뻗친 필릭스가 침대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도톰한 이불이 훅 우그러들며 먼지가 일었다.
“기껏 발정 난 걸 가라앉혀줬더니 그따위로 엿을 먹여?! fuck! 그러면서 아주 많이 봐줬다는 듯이, 부러 오른팔은 피해줬다고 지껄이기까지 했지.”
분에 겨워 못 참겠다는 듯, 필릭스는 끝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거렸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래도 괜한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그 새끼가 나를 아주 많이 봐줘서 왼팔을 부러뜨렸다는데-.”
살기를 풀풀 내뿜은 필릭스의 푸른 눈이 광인처럼 번득였다.
“난 왼손잡이거든.”
“……이런.”
당장 눈앞에 그 오메가가 나타난다면 목을 비틀어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한 필릭스가 비스듬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한 채 아이작은 손으로 메마른 입가를 문질렀다. 어느새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그러자 소름 끼칠 정도로 살기 어린 목소리가 나직하게 귓가에 흩어졌다.
“그 새끼, 잡히기만 해봐. 양팔을 다 꺾어버리고 목까지 따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