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2. Flower Shop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어둡고 한산했다. 늦은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 시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작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가게를 돌아보며 나갈 채비를 했다.

샌디에고 다운타운의 가게들은 9시만 되면 일제히 문을 닫는다. 주말에는 8시만 되도 불이 꺼지고 문이 닫히곤 했다. 낮에는 번잡하고 바쁘기 그지없는 곳이었지만, 빌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무실들의 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토록 한산하기 짝이 없어진다.

그에 비하면 아이작은 제법 늦게까지 가게를 열어두고 있던 셈이었다. 물론 아이작 역시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9시쯤이면 바로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은 밀린 주문이 꽤 있었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급하게 작업하는 건 그의 성격과 맞지 않은 탓이었다.

다음날 오전 중으로 배달해야 할 꽃바구니 및 화분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그가 마침내 가방을 손에 쥐었을 때였다. 딸랑-. 문에 달아둔 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이작은 무심코 눈을 들었다. ‘저희 문 닫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건장한 사내 셋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아이작의 조용한 목소리가 묻혀버릴 정도로 소란스러운 사내들이었다.

“이것 봐. 내가 뭐라고 했어? 아직 연 곳이 있을 거라고 했지?”

선두로 들어온 사내가 킬킬거렸다. 아이작은 다시금 ‘문 닫았습니다’라고 알려주려 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소란스러운 사내들의 대화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 시간까지 오픈한 가게가 있을 줄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로군요.”

“있을 수 없는 일은 무슨, 자자, 얼마씩 걸었더라? 내놔.”

처음으로 들어온 사내는 아이작에게 뒤따라 들어온 두 명의 덩치들을 향해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다른 손을 내미는 사내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살짝 상기된 뺨엔 취기도 엿보였다. 술 냄새도 슬슬 짙어진다.

취객이라니. 곤란하게 됐다. 아이작은 손에 쥐었던 가방을 내려놓고 뺨을 긁적였다. 그사이 취객은 뒤따라온 덩치 둘에게 각각 100불짜리 지폐를 기어이 빼앗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자아, 돈도 벌었으니 귀여운 아가씨에게 줄 꽃다발이나 사볼까.”

취객이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더니 아이작이 서 있는 카운터를 두 손으로 짚었다. 밝은 불빛이 떨어지는 아래에 선 취객의 얼굴이 그제야 한눈에 들어온다.

엉클어져 있긴 하지만 눈에 뜨이도록 밝은 블론드, 짙은 프러시안 블루의 눈동자, 오뚝한 콧날과 도톰하면서도 육감적인 모양의 입술. 할리우드 배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거기에 더해 상대를 압도하는 큰 키와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 두어 번 대충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나는 팔뚝의 근육 또한 보통이 아니다.

“꽃다발이-.”

“죄송하지만 영업시간이 지났습니다.”

잠시 취객의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던 아이작은 비로소 영업시간을 똑똑히 알렸다. 말을 가로막힌 취객이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대책 없는 자식이네, 이거? 손님을 뭐로 보고! 지금까지 불 켜고 문 열어놓고 있었으면서 뭐가 영업시간이 지났다는 거야? 엉? 이 코딱지만 한 가게, 오늘 작살 나는 거 보고 싶어?”

100불을 빼앗겨 인상이 일그러져있던 덩치 하나가 불쑥 취객과 아이작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사납게 소리쳤다. 정말 곤란하게 됐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는 것은 알아차렸지만, 막무가내로 꽃다발을 만들라고 소리치는 덩치를 보니 한숨만 나온다.

“잭.”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지나치게 잘생긴 취객은 으르렁거리며 협박하는 덩치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뒤로 물리게 했을 따름이었다. 단조로운 손짓 하나에 눈알을 부라리던 덩치가 딱 입을 닫는다. 취객은 아이작을 향해 빙긋 웃었다. 이곳에 널린 꽃들처럼 화사하고 매혹적인 미소였다.

“이것 봐, 플로리스트. 이런 건 어때? 꽃다발 만드는 값, 두 배로 쳐주지. 야근수당이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야.”

“…….”

“100불짜리 꽃다발 하나 만들어와. 200불 쳐 줄 테니까.”

취객은 방금 가게를 들어오면서 두 덩치들에게 갈취했던 200불을 카운터 앞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의 뒤에서 덩치들의 한숨 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른다. 카운터 위에 올려진 지폐 두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작은 속으로 짧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나.

“원하시는 꽃을 고르시죠.”

고민하던 아이작이 마지못해 대꾸하자 취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알아서 만들어.”

“데이트용입니까?”

“그래. 갈색 곱슬머리가 귀여운 아가씨이지. 아, 아무리 그래도 빨간 장미는 질색이니까, 다른 거로 해.”

아이작이 장미 쪽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던 취객은 손사래를 쳤다. 장미를 뽑으려던 손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그러나 곧, 백합과 리시안셔스, 유색 카네이션 및 몇몇 꽃들을 진중하게 선택해 뽑아 든 아이작은 화사한 꽃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작업대로 돌아섰다.

그때까지 아이작이 선택하는 꽃들을 지켜보던 취객은 어느새 문가로 다가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작에게 으르렁거렸던 잭이라는 불곰 같은 사내 역시 그를 따라 얌전히 뒤따른다. 흘끔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묵묵히 꽃을 다듬기만 했다.

혼자서 작은 꽃가게를 운영하다 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마주치곤 한다. 늦은 시간, 문을 닫기 직전에 들이닥친 취객은 특이한 케이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작으로선 대단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원래 그렇게 무뚝뚝해?”

되도록 취객과 덩치들에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꽃을 다듬고 있을 무렵이었다. 취객이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이작은 눈만 돌려 그를 향했다. 질문의 요점을 모르겠다는 눈빛과 표정이었다.

“일종의 서비스직이잖아, 이것도. 그러면 손님들에게 사근사근하게 말도 걸어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장사하는 요령이 없네.”

취객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받친 채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바다처럼 짙푸른 눈동자가 무섭도록 날카롭다. 절로 긴장하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글쎄요. 말주변이 좋질 못해서.”

아이작은 눈을 돌려 핑크와 옅은 퍼플의 포장지를 꺼냈다. 그리고 미리 잘라놓은 포장지로 다듬은 꽃다발을 포장하는 데 열중하려니 취객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손님을 어떻게 끌어?”

“꽃을 기차게 잘 만지나 보죠, 뭐.”

아이작이 대꾸하기도 전에 잭이라는 사내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취객은 ‘시끄러워’라고 간단히 주의를 시켰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아이작은 말이 없었다. 바스락바스락 열심히 포장하는 소리는 요란했지만, 그에 반면 핑크와 퍼플, 그리고 레이스로 감싼 꽃다발을 핑크 리본으로 마무리하는 손은 살짝 둔했다. 꽃다발 포장은 늘 어려웠다. 특히 촉박하게 만들 때는 더더욱 그랬다.

“다 됐습니다.”

한참 만에 카운터 위로 커다란 꽃다발을 내려놓은 아이작은 ‘카드가 필요하십니까?’ 기계적으로 물었다. 대부분 꽃다발을 사가는 사람들은 간단한 메시지를 적거나 카드를 꽃다발 옆에 같이 꼽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카운터 위에는 여러 종류의 카드도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취객은 고개를 가로저을 따름이다.

“그딴 걸 줘서 뭐 한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취객이 커다란 꽃다발을 한 손에 쥐었다. 흐음, 콧소리를 흘린 취객은 무례할 정도로 꽃다발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둘러보았다.

“꽃은 예쁜데…….”

그러더니 휙 꽃다발을 든 손을 내리고 아이작을 빤히 쳐다본다. 아이작을 마주한 그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포장이 형편없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참 신기한 플로리스트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장사해서 먹고살아? 무뚝뚝한 데다가 포장도 못 하고.”

취객은 신랄하게 지껄였지만, 꽃다발 포장 실력이 썩 좋지 못하다는 건 아이작 본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뭣하면 돈을 돌려줄 생각도 떠올렸다.

문을 닫고도 남을 시간에 갑자기 밀어닥친 놈들에게 시간을 뺏긴 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있나. 수틀리면 가게를 통째로 부서뜨리고도 남을 놈들이니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환불을 바라십니까?”

아이작은 꽃다발에 대한 설명도 없이 간단히 물었다. 환불이면 차라리 낫다. 다시 만들어 오라고 강짜라도 부리면 그게 더 곤란했다.

100불짜리 지폐 두 장은 아직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었다. 취객은 지폐에 가볍게 손가락을 얹었다. 역시 돈을 도로 가져가려나. 무심코 생각했을 때였다. 슥, 손가락이 아이작 앞으로 밀려왔다. 그 밑에 있는 지폐들도 함께였다.

“돈은 잘 챙겨둬. 나쁜 놈이 맘먹고 도로 훔쳐 가면 어쩌려고? 장사도 어려워 보이는데 도둑까지 맞으면 억울하잖아.”

“…감사합니다.”

뜻밖의 말을 던진 취객은 툭, 꽃다발을 불곰 같은 덩치에게 던지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예기치 못했던 반응에 얼떨떨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카운터 한쪽으로 미뤄두었던 노트들 사이로 빼꼼히 빠져나온 카드 하나가 돌아서 나가는 취객의 팔을 슬쩍 긁었다. 자연스레 취객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Dear Benjamin."

그의 보기 좋은 입술 끝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정한 글씨체네?”

멍하니 서 있던 아이작은 그제야 바짝 정신을 차리고 취객이 읽어 내린 카드를 급히 손에 쥐었다. 취객의 시선이 아이작의 손끝으로 자연스레 따라온다. 아이작이 골랐다고 하기엔 괴리감이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카드를 유심히 바라보던 취객이 피식, 소리 내어 웃는다.

“애인? 첫 문구가 제법 다정해. 생긴 것답지 않게.”

“개인적인 일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하긴.”

취객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지만,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덩치는 경고라도 하듯 흉악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를 못 본 척한 아이작은 카드를 서랍 아래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던 취객이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라고 묻기도 전이었다. 그가 비스듬히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독특한 플로리스트 씨는 섹스할 때도 그렇게 무뚝뚝한 얼굴인가?”

이건, 확실히,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침대에선 어떤 소리를 내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졌잖아.”

그러나 취객을 마주한 아이작은 여전히 무감정한 표정일 뿐이었다. 과연 성희롱에 가까운, 아니 성희롱이라고 할 수 있는 질문을 듣기는 했는지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작의 단정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취객은, 한참 시간이 지나도 그가 대꾸나 반응조차 보이질 않자 끝내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카운터 위에 놓인 명함 한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가만히 명함을 읽어 내리는 그의 얼굴 위로 짙은 미소가 번졌다.

“플로리스트 아이작 씨, 늦은 시간에 수고했어.”

손가락 사이에 낀 명함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한 취객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딸랑, 그가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처럼 문에 달린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이미 술기운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은 취객은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섰다. 새까만 어둠 속으로 잠겨버린 것처럼 그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신기루 같았던 그가 사라진 자리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이작이 서 있는 카운터 앞으로 또 다른 백 불짜리 지폐 한 장이 소리 없이 내밀어졌다. 그제야 아이작은 상념에 잠겨 있던 눈을 들었다.

세 명의 사내들 가운데 지금껏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던 -처음에 내기에서 져서 황망해 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빳빳한 지폐를 내밀고 있었다.

“팁입니다. 밤늦게 수고하셨습니다.”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사내는 깍듯하게 인사하더니 몸을 돌렸다. 아이작은 당황해서 반쯤 입만 벌린 채 뭐라고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사이, 사내는 빠르게 가게를 빠져나갔고, 금세 가게는 텅 비어버렸다.

아이작은 지폐를 내려보았다. 100불짜리, 라고 하기엔 형편없는 포장이었던 꽃다발 하나를 300불에 판 셈이었다. 이래도 되나, 목덜미를 문지르며 난처해하던 아이작은 곧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말 그대로 야근수당이라고 생각해야지.

예기치 못했던 일을 마주한 덕분에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 시계를 돌아보니 어느덧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야 할 것 같았다.

* * *

작은 가게는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로 빼곡했다. 대부분 꽃가게가 그렇긴 하지만, 아이작의 가게는 유난히 더 그랬다. 화분으로 가득한 자리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사실 아이작은 잘린 꽃송이보다는 나무나 화분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꽃송이는 수명이 다한 것과 마찬가지여서 시들 날만 기다린다. 아무리 곱게 포장을 하고 꾸며도 잠시뿐이다.

그에 반면 화분에 담긴 식물은 생명 그 자체였다. 비록 넓은 마당이 아닌 작은 화분에 옮겨진 식물이라고 해도 살아있었고, 그의 손이 닿으면 파릇파릇하게 자라난다. 정성을 들일수록 초록의 잎사귀는 반짝거리고, 꽃은 화사하게 피었다. 그런 점이 좋았다.

그런 이유로 아이작은 선물 역시 꽃다발보다는 양란 같은 화분을 더 추천하곤 했다. 화분보다는 꽃다발이 어울리는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안녕, 플로리스트 아이작 씨?”

햇볕을 쏘이기 위해 밖에 내놓았던 화분들을 안으로 들여놓다가 말고 아이작은 움직임을 정지했다. 눈앞으로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명품이 분명한 구두에서부터 시작해 청바지로 감싸인 긴 다리를 타고 올라가 얇은 회색의 니트를 걸친 남자의 탄탄한 가슴을 훑은 아이작의 시선은, 잘생긴 얼굴 위에서 마침내 표류를 멈추었다. 비로소 상대를 알아본 그의 표정 위로 난감해하는 감정이 스쳤다 사라진다.

이토록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이 남자가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샌디에고 길거리를 활보하며 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무심코 의문을 떠올린 아이작은 화분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놓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또 오셨군요.”

어쩔 수 없이 던진 인사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흘러내린 금사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말 그대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기억하네?”

“…워낙 잘생기셨으니까요.”

“와, 목석같은 플로리스트 씨에게 그런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남자는 과장되게 양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과연 그것이 진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앞치마를 툭툭 털며 가게 안으로 남자를 안내했다. 남자는 선선히 뒤따라 들어왔다.

잭, 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불곰 같은 사내가 보이질 않았다. 대신 마지막으로 팁을 주고 갔던, 말 없는 사내가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걸 찾으십니까?”

카운터 뒤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철컥, 금속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 옆으로 기분 나쁘게 싸늘한 감각이 전해진다.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낸 아이작은 눈만 돌려 남자를 향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손엔 글록이 들려있었다. 차가운 글록의 총구는 아이작의 관자놀이를 꾹 눌러댄 채였다.

“너, 나 알지?”

빙글 웃으며 던지는 질문이 예사롭지가 않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이작은 눈을 돌려 정면을 향했다. 꽃과 화분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공간이 어수선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필릭스 펠리체라면, 신문을 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작은 순순히 대꾸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둘러대는 게 더 어려웠다.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던 필릭스가 불현듯 풋, 소리 내어 웃는다.

“진짜 알고 있었네? 설마 했는데.”

이번에도 필릭스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아쉬워했다. 다시금 얼떨떨해진 아이작이 눈을 돌렸을 때였다.

관자놀이를 눌러대고 있던 총구가 치워지는 것과 동시에 한걸음 뒤에 서 있던 말 없는 사내가 필릭스의 앞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필릭스는 짧게 혀를 차더니 100불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사내의 손바닥에 탁, 올려놓는다.

“이런 종류의 내기에선 토니에게 이겨 본 적이 없다니까.”

“보스가 심히 눈치가 없으니까요.”

“난 평범한 거고, 네 눈치가 빠른 거겠지.”

투덜거리는 필릭스를 토니라는 남자는 기가 찬다는 투로 쳐다봤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100불짜리 지폐를 지갑에 고이 꽂는다.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쳐다보던 아이작은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총구를 들이밀질 않나, 내기 돈이 오가질 않나…….

자신이 아는 필릭스 펠리체가 이런 남자였던가, 싶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그가 맞긴 했지만, 당최 번화한 거리를 함부로 나다닐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말과 태도 또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니 말이다.

서른 중반의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필릭스 펠리체는 거대 무기상으로 유명한 남자였다. 겉으로는 합법적인 루트를 밟는 척하곤 있지만, 불법 루트로 무기를 개발하고 팔아치우는 사업을 진행시키며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사내다.

위험천만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정도의 수단과 배포가 있는 만큼 마피아 못지않게 잔인하고 위험한 남자이기도 했다. 그의 조부가 이탈리아의 거대 마피아인 코사 노스트라의 간부라는 소문도 있으나 밝혀진 바는 없다.

따라서 그를 쫓는 기관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FBI와 CIA도 있을 텐데, 버젓이 길거리를 나다니는 그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협약이라도 오간 걸까. 지난 4년간 죽은 듯 얌전히 지낸 것 같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행동은 의문투성이였다.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나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필릭스는 긴 손가락으로 아이작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그의 짙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자신을 담고 있는 푸른 눈동자에는 장난기마저 엿보였다.

“그나저나 신문에서는 내 기사가 어떻게 났는지 궁금한데?”

궁금하다면 들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4년 전 남미의 작은 섬에 설치된 당신의 비밀 기지가 탄로 났다고 했었죠. CIA의 주도로 긴급수색을 했지만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당신은 구속되었다가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담담하게 나열하자 필릭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제법 잘 알고 있네. CIA가 나 때문에 된통 물먹긴 했지. 뭐, 그것 때문에 나도 오랫동안 시달렸지만.”

제 일이 아닌, 마치 주간지에 실린 가십을 떠드는 것처럼 필릭스가 키들거렸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의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이 서린다. 둔탁한 통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래서, 그게 다인가?”

“…….”

“나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이, 그게 전부냐고.”

프러시안 블루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이작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물론, 그것 외에도 위험천만한 무기상인 필릭스 펠리체가 주변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최우성 알파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따라서 타고난 능력과 외모가 남다른 탓에 염문이 끊이질 않고 일어나는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것도 안다.

“…전부입니다.”

그러나 아이작으로선 그런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필릭스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고작 신문에 난 기사로 날 알아봤다고?”

“말씀드렸다시피 워낙 눈에 띄는 외모니까요.”

그토록 눈에 띄는 얼굴로 잘도 무기상을 해왔다 싶을 정도인데, 본인은 모른다는 투다. 필릭스는 흠, 침음을 흘리며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아이작을 살폈다.

“내가 누군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그토록 무심하게 굴었다?”

필릭스의 엄지손가락이 입술 바로 아래턱을 살살 문지른다. 간지러운 손길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랬다가는 글록의 총구가 다시 관자놀이에 꽂힐 것 같아서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손님은 손님이니까요.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신기한 놈이네. 배짱이 크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그토록 무감각할 수가 있지?”

“성격이 좀 그렇습니다.”

필릭스의 웃는 낯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어?”

“…일주일 전 늦은 시간에 제 가게에서 꽃다발을 사 가셨지요.”

아이작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필릭스의 짙은 시선이 내부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곧, ‘그건 그렇지’ 중얼거리며 휙 몸을 돌리고 말았다. 단단히 턱을 틀어쥐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아이작이 얼얼한 턱을 문질렀다.

“오늘도 꽃다발 하나 만들어 봐.”

아직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 있던 아이작에게 필릭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주문했다. 턱을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질문은…… 그게 끝입니까?”

“그런데.”

짧게 대답하며 흘끔 눈을 드는 표정이 무구하기까지 해 오히려 아이작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필릭스의 나른한 음성이 이어졌다.

“저기 서 있는 토니, 저 친구가 호언장담하더라고. 네가 날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평소에도 난 못 느끼는 걸 저 친구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곤 하거든.”

“…….”

“그래서 시험 한번 해 봤어.”

본인을 아냐고 살벌하게 물었던 것은 단순히 내기 때문이었던 건가. 고작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무턱대고 총구를 들이대기까지 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웬만한 마피아보다 더 악명 높은 필릭스 펠리체를 상대로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이 과격했다면 사과하지. 평범한 사람이 날 알고 있는 건 드문 일이라 놀라서 말이지.”

“제가 FBI나 CIA쯤 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까?”

“그 외에 다른 종류일지도 모르고. 넌 플로리스트치고 꽃다발을 더럽게 못 만들잖아.”

의심스럽게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무례한 말을 뱉어낸 필릭스는 짙어진 시선으로 아이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말투 못지않게 무례한 그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낸 아이작이 한숨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제가 플로리스트로 가장해 당신을 쫓았던 사람 같습니까?”

“그건 모르지.”

태평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천연덕스러웠다.

“아직은 그냥 꽃다발을 지지리도 못 만드는 이상한 플로리스트 같다고 할까. 어쩌면 이것저것 연관 없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일 수도 있지만.”

“꽃다발 포장을 어려워하는 평범한 플로리스트는 맞습니다.”

“그야 두고 보면 아는 거고.”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선 필릭스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매혹적인 미소는 백만 불짜리가 맞았지만, 아이작은 점점 더 긴장될 따름이었다.

그가 의심하는 것처럼 정체를 가장해서 필릭스에게 접근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필릭스에게 접근할 배짱은 없을 테고, 자신은 악명 높은 무기상과는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이 먼저 접근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엄연히 문을 닫으려는 가게에 들어와 억지를 부린 건 필릭스 쪽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굳이 설명하려 들지는 않았다. 두려움에 덜덜 떨며 구구절절 이러이러하다고 늘어나 봤자 필릭스는 본인이 수집한 정보만을 보고 듣고 믿을 테니 말이다.

“두고 보면 아시겠죠.”

아이작은 그의 말을 덤덤하게 따라 하는 것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넌, 네가 평범한 플로리스트이길 바라는 편이 좋을 거야.”

“이미 그렇기 때문에 딱히 더 바랄 수가 없군요.”

필릭스의 눈썹이 슬쩍 구겨졌다. 아이작을 노려보듯 빤히 바라보던 필릭스는 곧 ‘꽃다발이나 만들어’ 라고 재차 주문했다.

“제 꽃 포장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이작은 급격한 피곤함을 느끼며 뺨을 쓸었다.

“평범한 플로리스트라는 사람이 꽃다발을 심각하게 못 만드니까 연습이라도 시켜야지.”

“…….”

“아, 이번에는 조금 더 고상한 꽃으로 골라.”

데이트할 거 아니야. 뒷말을 덧붙인 필릭스는 태연히 카운터 위에 얹은 팔에 턱을 괴었다. 말 그대로 평범한 손님 같은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어진 아이작은 꽃바구니가 있는 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가 정신 사납네. 뭐가 이렇게 어지럽게 늘여져 있어.”

허리를 살짝 굽혀 턱을 괴고 있던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카운터 주위는 어지러웠다. 여러 가지 노트와 카드 등이 정돈되지 않고 흐트러져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일정한 순서가 보인다는 것이 묘했다. 무심히 어지러운 카운터를 살피던 필릭스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고정되었다.

“Dear Benjamin.”

필릭스의 근사한 입술 끝에서 나른한 소리가 흩어졌다. 지난번과 똑같은 말이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카드의 첫 문구이기도 했다. 꽃을 고르다 말고 급히 카운터 뒤로 돌아간 아이작은 이번에도 재빠르게 카드를 낚아채서 서랍에 넣었다.

“누군데 이렇게 매번 다정하게 카드를 써?”

“…….”

“장거리 연애라도 해? 그러면 편지를 써야지 왜 카드야?”

턱을 괸 그대로 싱글거리는 필릭스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이작은 말없이 꽃을 고르기 위해 몸을 돌릴 따름이었다. 그의 등 뒤로 필릭스의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벤자민, 이라. 정말 연인이야?”

“색은 핑크 계열이 좋을까요, 아니면 베이지 계열이 좋을까요.”

“남자 이름이 분명한데, 넌 베타잖아. 그럼 게이?”

“고상하고 우아한 취향이라면 베이지와 옐로우 계열이 좋긴 하겠군요.”

“설마 오메가는 아니지?”

맞지 않는 질답이 이어지던 순간이었다. 꽃을 고르는 아이작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오메가라면 아주 치가 떨리거든.”

필릭스는 누가 봐도 홀릴 만한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오늘 카라가 무척 예쁘고 싱싱합니다. 카라를 주로 해서 꽃다발을 만들어드리죠.”

아이작은 빤히 그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필릭스의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른 말도 오가지 않는다. 가게 안에는 긴장된 고요가 떠돌았다.

아이작이 작업대에 있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필릭스는, 꽃다발이 완성되었다고 알리자 비로소 눈을 들었다.

“정말이지 포장은 엉망이네. 이러니 네 정체를 의심하게 하지. 차라리 꽃만 들고 가는 편이 낫겠군.”

혹평을 서슴없이 던지면서도 필릭스는 100불짜리 지폐 두 장을 내놓았다.

“너무 많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포장이라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아이작은 그가 내민 지폐를 받지 않았다. 받지 않으려 했다. 그래 봤자 필릭스는 탁, 소리가 나도록 카운터 위에 올릴 따름이었다.

“내가 주문한 거야. 형편없다고 해도 꽃값과 수고비는 줘야지. 내가 겨우 꽃다발이나 삥 뜯을 놈으로 보여? 게다가 연습용이라고 미리 말했잖아.”

“…….”

“꽃값이 얼마든, 나머지는 팁이니까 알아서 계산하고.”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내밀고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필릭스는 꽃다발을 손에 든 채 몸을 돌렸다. 별다른 인사말은 없었다. 딸랑, 방울 소리를 울리며 문이 열렸고, 그는 그대로 나가버렸을 뿐이다. 토니라는 사내 역시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필릭스를 따라 문을 나서기만 했다.

완벽한 고요가, 그제야 찾아들었다.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어있던 아이작의 어깨가 무너지듯 풀렸다. 혹시 백일몽이라도 꾼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카운터 위에 덩그러니 놓인 100불짜리 지폐 두 장만이 지금 일어났던 일들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필릭스 펠리체라는 사내는 평온하던 아이작의 일상에 느닷없이 던져진 돌멩이 같았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크게 물방울을 튀게 하고 수면 전체를 진동하게 한다. 그것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흔들림이었다. 부디 다시 그를 보는 일이 없었으면, 속으로 바라며 아이작은 까칠해진 뺨을 쓸었다.

* * *

카드의 서두는 한결같았다. 그러나 늘 다음이 어려웠다. 펜을 쥐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보면 결국 일이 생겨 잠시 놓아두게 된다. 그렇게 틈틈이 쓰는 탓에 카드를 완성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리곤 했다. 어떨 때는 하루에 다 쓰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고심해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우선 벤자민, 이라는 이름을 쓰는 순간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서 한숨을 푹 내쉬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어떤 즐거운 인사말을 적어볼까 고민하다가 시간이 가버리고 마는 거다.

“보고 싶네….”

아이작은 이마를 양손으로 짚고 눈을 감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눈앞으로 어른거렸다. 카드엔 아직 한 자도 적지 못한 상태였다.

“누가 그렇게 보고 싶어? 설마 나를 생각하고 있었어?”

문득 머리 위로 장난기 섞인 중저음이 흘러들었다. 카운터에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이마를 짚은 자세로 서 있던 아이작은 화들짝 놀라 눈을 들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었는데 어느 틈에 눈부신 블론드의 남자가 제 앞에 서 있었다.

이토록 체격이 장대한 남자가 그 어떤 소리도 흘리지 않고 다가왔다는 사실에 오싹한 한기마저 느껴진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무리 정신이 팔려 있었다지만 문에 달아놓은 방울 소리도 없었는데?

의아해하며 흘끔 돌아보았다. 문은 이미 활짝 열려있었다. 아…, 그제야 아이작의 입술 끝에서 당혹스러운 한숨이 흘렀다. 간혹 문이 닫혀있으면 가게를 아예 닫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후에는 주로 문을 열어놓고 있는데, 그 때문에 방울 소리도 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언제 문을 열어놨는지 까맣게 잊고 있던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앞의 남자에게 불퉁한 시선을 두었다. 이젠 이삼일에 한 번꼴로 들락거리는 필릭스 펠리체는 오늘도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자세로 어지러운 카운터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이 쓰던 카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작은 슬그머니 알록달록한 카드를 거두어 서랍에 넣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태연함을 가장해 물으면서도 아이작은 그에게 시선을 두지 못했다. 벤자민을 떠올리며 카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일까. 저도 어쩌지 못한 동요가 가슴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 불안한 감정을 들킬 것만 같아 아이작은 필릭스에게 눈길을 두는 대신 오늘도 변함없이 필릭스의 뒤를 따라 들어온 토니를 돌아보았다. 마흔을 훌쩍 넘긴 것처럼 보이는 그는 손님용 의자에 익숙하게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신경한 투였지만 필릭스의 가드답게 이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그 안에 넣어둔 카드들 말이야. 제대로 마무리해서 보내고 있기는 한 건가?”

뜬금없는 질문이 토니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필릭스를 마주했다. 그와 동시에 손끝으로는 탕, 소리가 나도록 서랍을 닫았다.

“물론 제대로 보내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 Dear Benjamin, 이라는 구절까지만 봤지 그 이후로 뭔가를 적은 건 보질 못해서 궁금하더라고.”

필릭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봤자 친절히 대답해줄 아이작도 아니었다. 그런 무뚝뚝한 반응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필릭스 역시 더는 캐묻지 않았다.

벌건 대낮 샌디에고 다운타운을 평범한 소시민인 것처럼 마음껏 활보하고 있는 위험천만한 무기상인 필릭스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바랐던 것도 벌써 이 주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필릭스는 그 후로 뻔질나게 가게를 들락거렸고, 올 때마다 꽃다발을 비싼 값으로 사 갔다. 매번 포장이 엉망이라는 혹평을 빠짐없이 던지면서도 굳이 꽃다발을 주문한다. 연습이나 하라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주문이긴 해도 아이작은 불평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손님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니까. 돈이 아까운 건 저 남자일 테지만, 사실 고작 일이백 불 돈이 아까울 남자도 아니었다.

“오늘은 어떤 꽃다발을 원하십니까.”

마주칠 때마다 심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단골, 필릭스에게 매번 하는 질문을 똑같이 던졌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짝다리를 짚은 그가 오늘따라 유난히 껄렁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마주했다.

“벤자민이라는 네 연인이 그렇게 보고 싶어? 듣는 사람 가슴까지 울렁이게 만들 정도로?”

꽃다발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는 것 대신, 그는 잠시 잊고 있던 일을 기어이 끄집어냈다. 처음부터 그런 식이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개인사를 침범하려는 그의 작태가 마땅치 않다.

“네, 보고 싶습니다.”

필릭스의 얼굴 위로 예기치 못했던 동요가 스쳤다. 매번 대답을 회피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선선히 대꾸하는 아이작이 놀랍다는 듯이.

“하…… 그래?”

“그래서, 오늘은 어떤 걸 원하십니까.”

세 번째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대답은 금세 이어지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어색하게 흘렀다. 대부분 제가 하고픈 말이라면 안하무인 격으로 거침없이 해대기 일쑤인 남자가 무슨 일인지 의아해질 무렵이었다.

“네 취향은 뭐야?”

뜬금없는 질문이 대신 들려왔다. 어리둥절해진 아이작은 ‘네?’ 하고 반문했다.

“네가 좋아하는 꽃다발 취향은 뭐냐고.”

“…전, 꽃다발보다는 화분을 더 좋아합니다.”

“화분?”

“네.”

간단히 대꾸하자 필릭스는 ‘흐음’ 짧은 침음을 흘렸다.

“그래? 어디 보자. 이거 화사하고 예쁘네. 이런 거 어때? 취향에 좀 맞아?”

그가 고른 것은 짙은 꽃분홍의 양란이었다. 때마침 꽃이 화사하게 피어 우아하면서도 한없이 화려하다. 미인, 유혹이라는 꽃말과 같았다. 어떻게 보면 필릭스라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남자와 딱 어울리는 꽃과 꽃말이기도 했다.

“네,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럼 그걸로 포장해.”

얼떨떨한 주문이었지만 아이작은 말없이 화분을 포장지로 두르고 리본을 달았다. 한참 묵묵히 그가 하는 것을 바라보던 필릭스는 이번에도 역시 배에 웃도는 값을 지불하고 화분을 안아 들었다. 오늘은 이대로 얌전히 나가는 건가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받아.”

불쑥 그가 화분을 도로 들이민다. 아이작의 눈이 황망함으로 크게 떠졌다.

“받으라고. 네 취향의 꽃이라며.”

“왜 제게 주는 겁니까?”

어리둥절해진 아이작이 묻자 필릭스는 화분을 카운터 위로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예의 근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왜긴 왜겠어? 네게 관심이 있으니까 꼬셔보려는 거지.”

아, 잠시 전에 떠올렸던 꽃말과 딱 떨어지는 말을 할 줄이야. 미인, 유혹. 두 단어를 곱씹으며 아이작은 곤란한 듯 뺨을 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갑작스레 이런 말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왜 하필 접니까.”

“글쎄. 네가 자꾸 생각나기는 하는데, 나도 이유를 모르겠거든.”

“…….”

“그래서 가게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잖아. 네 그 형편없는 꽃다발을 매번 웃돈 주고 사면서.”

눈치도 없기는, 필릭스는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환심을 사보려고 하면서도 혹평은 서슴없이 해대는 남자를 아이작은 다시금 곤란하게 쳐다봤다. 저래서 지금껏 어떻게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를 한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 안하무인처럼 구는 걸까.

의아해하던 아이작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상대는 다름 아닌 악명 높은 무기상 필릭스 펠리체다. 저 외모에, 저 권력과 부에, 저 악명에, 누가 감히 거절할 수 있었을까. 싫든 좋든 수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 여자를 떠나 저 남자의 성격과 태도가 본래 저렇게 생겨 먹은 것이 분명했다.

“호감은 감사하지만, 정중하게 거절하겠습니다.”

어쩌면 펠릭스에게 있어 처음일지도 모르는 거절을, 아이작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릭스의 한쪽 눈썹이 쭉 올라간다. 마치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그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보니 가슴 위로 묵직한 돌덩이가 올라간 듯 갑갑했다.

“이유가 뭔데? 벤자민이라는 작자 때문에?”

그러나 아이작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필릭스가 대뜸 물었다. 그의 표정과 눈매는 시시각각 사나워져 가고 있었다.

“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아이작은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보아하니 장거리 연애 같은데, 계속 만나. 만나지 말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대신 내가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은 나를 만나면 되잖아?”

“양다리는 취향이 아닙니다.”

“그럼 벤자민을 잘라내든지.”

“안 됩니다.”

단호한 대꾸에 다시 한번 필릭스의 눈썹이 당겨져 올라간다. 이번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행동도 이어졌다.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나는 팔뚝의 힘줄이 팽팽하게 땅겨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는 처음 당하는 거절에 제법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더불어 제법 많은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를 거절한 사람, 네가 처음이라는 거 알아?”

필릭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심히 짜증 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목소리였지만, 아이작은 외려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요즘엔 삼류 소설에도 그런 대사는 안 한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마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물론 그를 쉽게 거절했을 사람이 없었을 거라 예상하긴 했어도, 저토록 당당하게 ‘네가 처음이야!’ 라니. 이제 보니 참 아이같이 유치한 면도 다 있다. 무례하고 안하무인에 능글맞기까지 한 사내의 내면을 엿본 기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딱히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도 거절한다?”

필릭스는 고개를 삐뚜름하니 기울이며 입술을 삐죽였다. 딱 토라진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생각해 봐. 나 거절하면 후회할 거야. 침대에서 누구보다도 널 자지러지게 만들어 줄 수 있거든.”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유치찬란하게 으쓱이는 그가 한순간 귀여워 보인 것은 아무래도 저 얼굴이 상당히 마음에 든 탓인지도 모른다. 필릭스를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아이작의 입술 위로 희미한 호선이 그어졌다. 그 표정을 주시하고 있던 필릭스의 눈매 또한 묘하게 풀어진다.

“어쨌든 선물은 선물이니까, 양란은 잘 보관하고 있어.”

“아니-….”

“원한다면 생각할 시간을 주지. 하지만 다음에 볼 땐 제대로 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생각보다 집요한 구석이 있거든.”

제 할 말만 뱉어낸 필릭스는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휙 몸을 돌렸다. 아이작은 입을 꾹 다문 채 빠르게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척도 없이 조용히 의자에 앉아있던 토니가 어느새 아이작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또 팁을 남기시려는 거라면 필요 없습니다.”

돈은 이제 내지 말라는 뜻을 전했지만, 토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라면, 당장 도망갈 겁니다. 도망간다고 해도 금세 잡힐 거라는 데에 내기 돈을 걸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보스는 당신 같은 외형의 사내를…… 몹시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섹스파트너로 삼더군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나직이 덧붙이는 뒷말은 일순 등허리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섹스파트너로 삼아 걸레가 되도록 굴린다는 뜻이겠지. 성미 한번 고약하다.

섬뜩한 경고를 전한 토니는 내지 말라는 말도 무시한 채 100불짜리 팁을 두었다. 토니까지 가게를 떠나고 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소리소문없이 들이닥쳤을 때처럼 아이작은 이마를 양손으로 짚은 채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 필릭스가 우연히 가게에 들어왔던 그 순간부터 잘못됐던 거다. 마주쳤던 그 날 당장 짐을 싸 들고 도망쳤어야 옳았다. 필릭스라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자신의 실수였다.

뒤늦게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 없었지만, 해일처럼 밀려드는 후회는 어쩔 수가 없다. 아이작은 피곤한 눈을 감았다. 가슴이 한없이 묵직했다.

매끈한 세단의 뒷좌석에 몸을 실은 필릭스는 이를 짓씹었다. 평생 살며 단 한 번도 자신을 거절했던 사람을 만나본 적 없던 그로서는 이 상황이 짜증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가 손을 내밀면 기꺼이 다가왔다. 손 내밀지 않아도 어떻게든 눈에 띄고 가까워지려 안간힘을 쓰던 놈들이 태반이었다. 덕분에 하룻밤 상대든, 스테디한 상대든 원하는 대로 고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놈이 나를 깠어? 꽃다발도 지지리 못 만드는 주제에?”

뿌득뿌득 이를 갈고 있으려니 눈앞으로 무뚝뚝한 인상의 사내의 얼굴이 스친다. 항상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표정 하나 없던 그의 얼굴 위로 희미한 웃음이 수채화처럼 번졌었다. 이 주 넘게 들락거렸지만 처음 보는 미소였다.

젠장, 그게 또 감질나게 예뻤단 말이지.

아이작이 처음으로 보여준 옅은 미소를 떠올리려니 순식간에 하반신으로 피가 몰리기까지 한다. 망할, 필릭스는 머리를 짚은 채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잭이 불현듯 허리춤에서 불쑥 베레타를 꺼내 들며 비장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처리하고 올까요?”

“그걸로 뭘 어쩌려고?”

관자놀이를 눌러대던 필릭스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제 총을 점검하기 바쁜 잭은 필릭스의 표정이 어떤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꼴에 보스를 물 먹였으니 죽여도-.”

“닥쳐.”

의기양양하게 총을 매만지는 잭의 뒤통수로 퍽, 돌돌 만 신문이 날아들었다. 화들짝 놀란 잭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눈을 돌리자,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필릭스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뭐가 어쩌고 저째?”

흉흉한 눈빛과 날 선 표정에 소름이 죽 돋는다. 꿀꺽, 잔뜩 긴장한 잭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혼자 길을 가다 맹수를 만난다고 해도 이 정도로 섬뜩하진 않으리라.

잭은 온몸의 솜털마저 쭈뼛 서게 하는 필릭스의 살기에 눌려, 잽싸게 몸을 돌리고 정자세로 핸들을 붙들었다. 그래 봤자 훤히 드러난 뒤통수 위로 필릭스의 시선과 욕설이 따가울 정도로 꽂혀들 따름이었다.

“눈치는 더럽게 없어 가지고.”

“와……. 보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세상 다 산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닥치랬지.”

으드득, 이가는 소리가 재차 이어졌다. 이번에야말로 잭은 입술을 꾹 닫고, 찍소리도 못한 채 차를 몰았다. 덕분에 도심을 지나 프리웨이로 달리기 시작하는 차 안은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해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창밖으로 살기 어린 시선을 두고 있던 필릭스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세단이 저택 앞으로 멈춰 섰을 때였다.

“그놈, 잡아 와.”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명령에 잭과 토니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정확하게 누구를 잡아 오라는 건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다짜고짜 누굴 잡아 오라는 겁니까.”

잭이 불퉁하게 물었다. 별안간 필릭스의 푸른 눈이 광인처럼 번들거렸다.

“플로리스트가 쓰는 편지의 주인공이지 누구겠나? 벤자민이라고 했었지. 그가 누구든 상관없어. 그 자식 잡아다 내 앞으로 데려와.”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말이 떨어지자 그들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보스, 아무리 그래도 납치는 좀…….”

“아니, 플로리스트 놈을 쑤셔보고 싶었으면 그놈을 잡아 오라고 해야지 왜 그놈이 편지 보내는 상대를 잡아 오라고 합니까.”

둘이 이구동성으로 반박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단호했다.

“닥치고 잡아 와.”

한 번 더 강조해서 명령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저택으로 향하는 필릭스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기 짝이 없었다. 차 안에 남은 두 사람의 한숨만 무겁게 흘렀다.

* * *

4년 전, 필릭스는 남미에 있는 외딴섬에 거대한 무기고 및 개발에 필요한 연구소를 만들려는 계획에 열이 올라있었다.

한참 혈기왕성할 무렵이었고, 실패를 겪어보지 않아 기고만장했으며, 살아온 배경과 최우성 알파라는 특성이 더해져 오만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냐 하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지만, 어찌 되었든 그때의 필릭스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젊은 마피아이자 사업가로 무서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필릭스로서는 합법적으로 무기를 팔아봤자 비싼 세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제약에 걸려 제가 원하는 대로 사업 진행이 되지 않는 현실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거대 마피아의 간부였던 조부의 힘을 이용해 무기를 팔아치우는 사업을 점차 크게 늘려가기 시작했는데, 우스운 점은 정부가 불법유통을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뒤로 또 다른 세금과 뇌물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법유통, 어느 정도 봐 줄 테니 너희도 그 정도만큼은 돈을 내. 라는 것인데, 이것 또한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릭스는 제3국에서의 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남미의 작은 섬을 통째로 사들여 무기고를 만들었고, 자체적인 무기 개발을 확장하기 위해 연구소도 건설했다.

마피아가 뒤를 대고 있었고, 필릭스의 사업 자체가 어느 정도 이미 덩치가 커져 있던 터라 어려운 것은 없었다. 문제는 거대한 돈줄을 들고튀는 것을 아니꼬워하던 정부였다. 더불어 필릭스와 개인적으로 부딪힘이 있었던 군부도 있었다.

그들은 불법무기 개조 및 판매 유통을 들먹이며 필릭스의 기지를 폐쇄하려 했다. 그러나 언제나 걷는 놈 위엔 뛰는 놈이,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는 법. 보이는 손 외에 안 보이는 손도 잡고 있던 필릭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해 처음부터 비슷한 섬을 하나 더 사들여 위장할 수가 있었다.

덕분에 특수부대가 턴 것은 위장한 섬이었고, 당연하게도 불법적인 물건은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 필릭스를 아니꼬워하던 정부 및 군부 놈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 거다. 하지만 필릭스 또한 타격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세무 조사하듯 만날 시간 예약하고 창고 조사를 하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위장으로 만들었던 건물과 무기들이 전부 박살이 나거나 몰수당했고, 심야의 급습에 인명피해 또한 상당했다. 그 후에도 바짝 열이 오른 군정부의 간섭에 제대로 사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진 필릭스는 끝내 두 손을 들고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해야만 했다.

그 모든 것이 다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그중 가장 짜증 나는 일은 따로 있었다.

* * *

“그래서, 찾았다는 거야, 못 찾았다는 거야?”

땀에 젖은 몸을 일으키자 침대가 흔들렸다. 필릭스는 신경질적으로 물으며 아직 제 허리에 감겨있는 누군가의 다리를 툭 치웠다. 널브러진 사내의 긴 다리가 기운 없이 침대 위로 떨어져 내린다.

사내는 엉망이었다. 새까만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어 이마와 뺨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었고, 건장한 몸은 얼룩덜룩했으며, 다리 사이는 땀과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정신을 잃은 지도 오래였다.

시체 같은 사내를 뒤로한 채 침대에서 내려선 필릭스는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아내다가 말고 제 앞에 정자세를 하고 선 토니를 흘끔 노려보았다. 토니는 어쩐지 곤란한 얼굴이었다.

예의 플로리스트처럼 가면 같은 얼굴은 아니라고 해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편이 아닌 토니의 성격으로 보아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땀을 닦아내던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필릭스는 물병을 따서 그대로 입에 댔다.

“음, 그게, 직접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토니는 눈을 피하며 그렇게만 대답했다. 콸콸 입안으로 쏟아붓던 물이 턱 아래로 흐르자 필릭스는 손등으로 슥 닦아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을 보니 뭔지 되게 재미있는 일인 모양이네?”

“…….”

“재미없는 일이면, 알아서 해.”

서늘하게 대꾸한 필릭스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나신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조각 같았다. 그러나 흠잡을 데 하나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짜인 뒷모습을 바라보는 토니의 표정은 점점 더 곤란함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샤워하고 나올 테니까 침대에 있는 저 새끼 치워. 진짜 입맛만 버려서는.”

작게 투덜거리던 필릭스가 욕실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토니는 기절한 채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 마른 듯하면서도 잔근육이 잡혀있는 탄탄한 체격, 작은 얼굴에 검은 눈동자. 필릭스는 딱 저런 사내들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박아대기 일쑤였다.

저런 외모에 오메가라고 하면 더했다. 몇 날 며칠을 붙들고 놓지를 않는다. 무슨 원한이라도 맺힌 사람마냥 인정사정없이 유린한다. 그나마 오메가 중에는 그 정도로 건장한 체격이 드물었기에 다행이지, 남아나는 오메가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한 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후에는 다시 보는 일이 없었다. 완전히 질렸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생김새의 사내를 찾는 일 또한 어느 정도 가라앉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필릭스의 악질적인 취향은 변하질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올해로 4년째였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엉망이 된 침대를 둘러보던 토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곧 방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던 놈들을 불렀다. 곧바로 시체 같던 알몸의 사내가 실려 나갔고, 메이드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침실이 깨끗하게 정돈이 되었을 때, 욕실 안쪽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멈췄다.

필릭스의 개떡 같은 성향에 대해 한탄할 여유가 없었다. 앞으로 닥칠 일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가 당장 고민이었으니까.

오랫동안 필릭스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처럼 어려웠던 순간이 없었다고 장담한 토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필릭스가 의기양양하게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토니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섰다.

* * *

그 시간, 잭은 골똘히 상념에 잠겨있었다.

눈앞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인물은 신기했다. 딱 봐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는데, 그게 참 곤란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넌 뭐라고 생각하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잭이 옆에 쭈그리고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마돈나요.”

부하 놈이 서슴없이 대꾸한다. 잭의 한쪽 눈썹이 삐죽 산을 그리며 올라갔다.

“마돈나?”

“왜, 예전 마돈나가 딱 이렇지 않았어요? 눈부신 금발. 뽀얀 피부. 아, 아니면 마릴린 먼로, 라든지.”

어린 게 참 오래된 배우들만 떠올린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눈앞의 인물은 말 그대로 클래식한 여배우들처럼 백옥 같은 피부에 반짝이는 금사의 머리칼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딱 누군가처럼…….

잭이 그 누군가를 다시금 떠올릴 무렵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시커먼 장정들이 한 무더기로 들어선다. 그 맨 앞에는 방금 떠올린 ‘누군가’가 성난 얼굴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잭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마돈나, 혹은 마릴린 먼로와 언뜻 비슷한 면도 엿보이는 아름다운 남자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잭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는 지금껏 잭이 바라보고 있던 인영에게 고정되었다. 그러니까,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에게 말이다.

“뭐야, 이건.”

필릭스는 대뜸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낮게 물었다.

“분부하신 대로 잡아 온 사람입니다.”

“…내가 언제 애새끼를 데려오랬는데?”

“벤자민, 을 잡아 오라고 하셔서, 정말, 정말! 어렵사리-!”

“이게 그 ‘벤자민’이라고?”

잭의 과장된 표현을 뚝 잘라먹으며 필릭스가 으르렁거렸다. 짙푸른 눈동자는 새까맣게 가라앉아있었다. 지독하게 화가 치밀어 올라있음을 알려주는 눈빛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목덜미에 핏대가 서기까지 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벤자민이 맞습니다.”

필릭스의 뒤에서 토니가 한숨 섞인 대답을 이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시선 한 번 돌리는 법이 없었다. 칼날 같은 그의 눈동자는 자고 있는 아이에게 박혀있을 따름이었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 하얗고 매끈한 피부, 사랑스러운 홍조를 띠는 양 뺨과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아이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천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한 번 눈에 담으면 한없이 쳐다보게 될 정도로 어여쁘다.

“씨발, 어디서 이런 호박 같은 애새끼를 데려와서는.”

필릭스의 눈에는 천사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자세히 설명해. 어째서 잡아 오라고 했던 플로리스트의 벤자민이 이런 애새끼인 건지.”

이를 가는 사나운 목소리에 토니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설명은 복잡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보내는 카드 몇 개를 빼돌려 주소를 추적한 결과 편지의 주인공은 이 아이라는 결론이 나왔을 뿐이다.

조사한 바로, 올해 세 살이 되는 벤자민은 부모 없이 조모와 함께 라호야(La Jolla)라는 샌디에고의 북쪽 도시에서 살고 있었고, 무슨 연유인지 아이작은 아이에게 꾸준히 편지와 카드를 보내는 중이라고 한다.

어쨌든 preschool(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를 몰래 데리고 오느라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잭은 과장을 심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하도 울어서 재우느라 어린이용 베나드릴(알레르기 약. 부작용으로 잠이 온다.)을 먹였다며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 필릭스는 미간을 확 구겼다.

당연히 어린이집에서 가족이 아닌 다른 이가 납치를 했으니 더 물을 것도 없이 범죄였다. ‘벤자민’이라는 사내를 잡아 오라고 시킨 그 명령 자체가 범죄이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쯤이면 조모, 그리고 아이작에게도 연락이 갔을 거다. 그 정도로 이 아이에게 신경 쓰고 있었다면 연락을 받지 않을 리가 없다. 조만간 amber alert(유괴경보)가 온 동네방네 뜰지도 모른다. 난감했다. 세상에 아이작이 허구한 날 편지를 써대는 주인공, 벤자민이 세 살배기 어린아이일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아이작이 이 애의 아빠라는 거야?”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뒤져도 아이의 아빠라고 나오지 않습니다. 가족인 것 같다는 심증만 있을 뿐이죠.”

“심증?”

필릭스의 눈썹이 당겨져 올라갔다. 계속해보라는 투로 턱짓을 하자 토니는 흠,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네. 살펴보면 볼수록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가족관계가 전혀 없다고 하지만 꾸준한 서포트를 하고 있으니까요.”

“서포트까지?”

“네.”

생활비와 양육비 또한 불규칙적이긴 해도 매번 송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벤자민이나 아이의 할머니가 아이작과 전혀 관계가 없는 점이었다. 게다가 송금하는 이름 또한 전혀 다른 이름과 계좌를 통해서 나간다. 제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수를 부린 거다.

웬만한 사람들은 결코 알아차릴 수도 없을 정보였고, 그것만 해도 아이작이 벤자민과 관련해 보안을 철저하게 해왔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사실을 캐낼 수 있었던 건, 필릭스의 측근 중 하나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해커인 데다가, 기가 막힌 정보팀 또한 사설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알면 상당히 열 받을 일이 분명했다.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미혼인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 가족등록은 하지 않은 채 모친 쪽에서 키우고 플로리스트가 양육비를 지급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조심스럽죠.”

토니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턱을 문지르며 아이를 노려보던 필릭스가 짜증 섞인 한숨을 흘렸다.

“후원일 수도 있잖아. 부모 없는 아이라며.”

“후원이라고 하기엔 아이의 집이 좋습니다.”

“하긴, 라호야에 산다고 했던가.”

라호야라고 하면 샌디에고에서도 알아주는 부촌이었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동네는 아기자기하면서도 부자들 특유의 돈 냄새가 난다. 집이나 길거리를 봐도 돈 냄새가 나는 동네였다.

그런 땅값 비싼 부촌에서 산다는 것만 봐도 돈 없는 고아는 아닐 텐데. 어째서 실력도 변변찮아 코딱지만 한 꽃가게를 겨우 운영하는 아이작이 돈을 보낸다는 것일까. 오히려 아이작이 후원받아야 하는 쪽 아닌가?

꽃다발도 못 만들어, 서비스업을 하면서도 무뚝뚝해, 가게 렌트비는 내고 있는지 염려스러울 정도인데 말이다.

“그리고 단순한 후원을 한다면 이토록 보안을 철저하게 하진 않을 겁니다.”

“음…….”

“이런저런 정황으로 플로리스트가 이 아이의 아빠나 가족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제법 사연이 있는 관계 같습니다.”

필릭스는 침음을 흘렸다. 설명을 듣고 나니 더더욱 기가 막혔다. 아이작에게 숨겨둔 아이가 있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토록 온 정성을 다해 쓰는 편지가 세 살배기 아이에게 쓰는 편지였다니. 길을 걷는 중에 모르는 새끼가 뒤통수를 후려쳤다고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닐 거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새끼한테 Dear Benjamin이 뭐야 대체!”

참을 수가 없어 버럭 성을 내지른 순간이었다.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주위 모든 놈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술에 손가락을 댄 채 ‘쉬! 쉬!’ 어이없는 소리를 흘려대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미쳤나. 무슨 짓거리야.”

필릭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놈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곁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던 아이가 깜박깜박 졸음이 가득한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히익-!’ 시커먼 사내들이 파랗게 질려 후다닥 뒤로 물러선다. 누가 보면 천하에 무서운 악당이나 유령이 등장한 줄 알겠다.

그때였다. 삐익, 삐익, 삐익-! 휴대폰이 일제히 울려대기 시작했다. 밀폐된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놈들의 모든 휴대폰이 한꺼번에 울려대니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고막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필릭스는 거칠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Amber Alert 유괴경보였다. 신고가 들어오면 일제히 휴대폰으로 문자를 전송하는 시스템이다. 툭, 정보를 누르자 아이를 실었던 차량 번호가 나온다. 그사이에도 사색이 된 사내놈들은 어떻게든 시끄러운 소리를 줄여보려 온통 난리였다. 그래 봤자 경보음은 꺼지지도 않았다. 한참 울리다 알아서 사라졌을 뿐이었다.

“이거 토니, 네 차 번호냐?”

“아니요.”

“…제가 몰고 있는 찹니다.”

토니 대신 옆에서 잭이 쭈뼛거리며 대꾸했다. 으득, 이를 씹으며 한 대 쥐어박으려 주먹을 움켜쥐던 찰나,

“으아아아앙----!”

사방팔방 울리던 휴대폰의 경고음보다 더한 소리가 빼액, 울려 퍼졌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울음소리에 필릭스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토니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고, 다른 사내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으며, 잭은 잽싸게 뛰어가 울기 시작한 아이의 앞에서 재롱을 떨어댔다.

“착하지? 착하지? 이쁜 아기가 왜 울까? 까꿍~ 까꿍~ 삼촌이 까까 주까? 우유 주까?”

저놈이 드디어 실성했나. 필릭스는 커다란 불곰이 재주부리는 꼴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커다란 불곰 같은 잭이 제 다리 한 짝보다 작은 아이의 앞에서 아무리 교태를 떨며 달래고 얼러도 한 번 울음이 터진 아이는 막무가내다. 눈을 꽉 감은 채 양 주먹을 움켜쥐고 목이 터져라 울기만 한다. 머리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래서 자는 애는 깨우면 안 된다니까요.”

토니가 낮게 한숨지었다. 귀를 막고 있던 필릭스가 못 참겠다는 듯 저벅저벅 울고 있는 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찌나 살벌한 욱기를 내뿜는지 시커먼 기운이 풀풀 흘러 주위를 어둡게 물들이는 착시마저 일어날 지경이었다. 인정사정없는 필릭스가 흉기 같은 주먹으로 아이를 때리진 않을까, 사색이 된 토니와 잭이 동시에 달려나가 그를 가로막은 순간이었다.

“뚝 그쳐.”

아이의 앞에 우뚝 선 필릭스가 냉랭하게 명령했다. 움찔 떨릴 정도로 한기 어린 음성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아이는 끅끅 서럽게 울며 고개를 들었다.

잔뜩 울어 눈물 콧물로 흠뻑 젖은 얼굴, 눈물이 그렁그렁한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로 필릭스를 빤히 올려보는 모습에 주위 장정들이 ‘헉’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억지로라도 울음을 멈추려는 아이의 얼굴이 마주 선 필릭스와 찍어 놓은 것처럼 닮은 탓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과 또렷한 이목구비, 거기에 더해 프러시안 블루의 눈동자까지, 아이는 놀라서 까무러칠 정도로 필릭스와 똑같았다. 아이를 ‘유괴, 납치’해 오면서도 닮은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마주 놓고 보니 아예 판박이가 아닌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는 필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아이작을 닮은 것 같진 않은데?”

그러나 그의 입술 끝에선 어이없는 한마디가 툭 튀어나올 뿐이었다.

…장난하시나. 토니는 흰 눈으로 필릭스를 바라봤다. 기실 아이작은 필릭스의 가학적인 취향에 딱 들어맞는 사내였다. 작지 않은 키에 마른 듯하면서도 탄탄한 체격.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아이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걸 그토록 뚫어지게 쳐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리다니. 저 눈은 대체 예쁜 것 외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토니는 속으로 혀를 찼다.

“토니, 이 호박 같은 게 누굴 닮았다고 생각해?”

필릭스는 울먹거리는 아이에게서 눈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토니는 이번에도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게…….”

“마릴린 먼로, 좀 닮지 않았어? 마돈나, 라든가.”

“…….”

“흠, 그럼 아이의 엄마가 마돈나와 마릴린 먼로를 닮았다는 건가.”

아이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필릭스의 모습에 토니는 어두운 낯이 되었다. 주변 사내들 또한 토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저 눈썰미 없고 눈치 없기로 유명한 남자가 어디 안 가지. 아이가 본인과 닮았다는 생각은 쥐뿔만큼도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알아봤다간 무슨 날벼락이 어떻게 터지게 될지 모르니까.

반면 아이작에 대한 의심은 어쩔 수 없이 커져만 간다. 혹시 필릭스도 모르고 있던 그의 사생아를 아이작이 돌보고 있었던 건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 아이와 아이작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이와 필릭스와의 관계는 뭔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고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닮는다. 그것이 유전자의 힘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남자아이는 그의 부(父)가 필릭스라고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에게서는 벌써부터 뚜렷한 알파의 기가 흘렀다. 그것도 필릭스 못지않은 최우성이다.

알파는 베타 간의 부모 사이에서도 희박한 확률로 나올 수 있었지만, 우성 알파는 알파만이 낳을 수 있었다. 부체가 우성 알파일 경우 우성 알파를 낳을 확률은 당연히 더 높았다. 베타 여성보다 오메가가 낳으면 확률은 더더욱 높아진다.

그리고 최우성 알파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만 나왔다. 최우성 알파와 최우성 오메가일수록 확률은 올라간다. 필릭스를 제외한 모두가 머리가 어지럽다고 느끼고 있는 이유였다.

한마디로, 베타로 알려진 아이작이 최우성 알파의 기운을 갖고 있는 벤자민의 부모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최우성 알파인 필릭스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모체는 누가 되는 것일까? 어떤 오메가가 낳았다는 거지?

토니는 그동안 필릭스가 안았던 오메가를 떠올렸다. 그가 오메가를 싫어하는 탓에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부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과연 벤자민은 필릭스의 아이일까? 우연히 쏙 닮기만 한 아이일까?

토니가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그와는 달리 아이의 성질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필릭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를 향했다.

“호박, 너 진짜 이름이 벤자민이냐?”

울음을 잠시 멈춘 세 살배기 아이의 앞에 허리를 짚고 선 필릭스가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낯선 곳으로 끌려와 잔뜩 겁먹고 있는 아이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굴어도 모자랄 판국에 대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기특한 아이는 자신을 닮은 필릭스를 빤히 올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커먼 장정들 사이에서 환하고 아름다운 얼굴, 아이와 무척 닮은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몇 살이야.”

“세 살!”

고사리 같은 손을 어물거리며 이상한 모양으로 편 아이가 크게 대답했다. 자신의 나이를 말할 수 있는 스스로가 몹시 뿌듯한 모양이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여기저기서 감탄 어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아빠는?”

“아빠…. 가게.”

“가게? 네 아빤 무슨 일 하는데?”

“으응, 꽃! 예쁜 꽃이 이마아안큼 있어요!”

울음을 멈춘 아이는 갑자기 아빠 얘기가 나오자 환한 얼굴이 되었다. 양팔을 쫙 펼쳐 보이며 제법 씩씩하게 대답하기도 한다. 언제 빽빽거리고 울었냐는 듯 목소리도 밝았다.

인형처럼 어여쁜 데다가 울음을 멈추고 똘망똘망 대답하기까지 하자 시커먼 장정들은 신기한 생물을 보듯 넋을 잃고 쳐다보기 바쁘다. 아이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한마디 뱉어낼 때마다 우쭈쭈거리는 꼴이, 잘하면 기립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필릭스는 마땅치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네 아빠 이름이 아이작, 맞아?”

“아빠는 아빠야.”

아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호박이 사람 말을 알아듣질 못하는군. 중얼거린 필릭스가 됐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엔 엄마에 관해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벌컥- 문이 열리더니 시커먼 사내들로 꽉 차 있는 방 안으로 숨을 헐떡이며 땀을 비 오듯 쏟고 있는 사내가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천사 같은 아이 덕분에 한껏 풀어져 있던 사내들은 반사적으로 총을 뽑아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에게 일제히 겨누었다.

철컥, 철컥, 안전장치를 푸는 클릭 소리가 귀를 따갑게 울린다. 대체 어떤 놈이, 어떻게, 감히 필릭스의 사저에 멋대로 침입해 들어올 수 있던 건지 영문을 몰랐다. 의아함이 반, 놀람이 반 뒤섞인 사내들은 섣불리 누구 하나 말문을 열지도 못했다.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필릭스는 느릿하게 눈을 돌렸다.

“아빠!”

그와 동시에 심문하듯 앉혀놨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전광석화처럼 사내에게 달렸다. 누구도 잡아채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아이가 저렇게 잽싼지. 입만 반쯤 벌리고 있는 사이, 문을 박차고 들어선 사내에게 냉큼 달려가 폴짝 안긴 아이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 홀로 있다가 아빠를 보니 서러움이 폭발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씩씩하게 질문에 답을 하던 아이가 말이다.

“벤자민-!”

아이작 역시 아이의 등허리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무릎을 굽힌 채 아이를 품에 안은 그는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하느님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우는 아이를 다독이는 목소리가 떨렸다. 감동할 정도로 애틋한 부자 상봉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들 틈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까지 이어졌다.

누가 보면 구박하고 괴롭힌 줄 알겠다. 물론 멀쩡한 아이를 납치해온 것 자체가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범죄이긴 했지만. 필릭스는 난처해진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을 번쩍 치켜뜬 아이작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필릭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자, 필릭스는 움찔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순간, 다른 사람을 본 건가 싶었다. 언제나 무감정하기 짝이 없는 사내가 아니었다. 심연처럼 어두운 눈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흘렸고, 표정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아이를 얼마나 힘껏 끌어안고 있는지, 그의 양팔 위로는 힘줄이 솟기까지 했다.

아이작이 어떤 심정으로 이곳까지 뛰어 들어왔는지, 아무리 눈치 없는 필릭스라고 해도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하긴, 작은 동물들조차 누군가가 제 새끼를 데려가려 하면 무섭게 털을 곤두세우지 않는가. 지금 아이작의 모습이 딱 그 꼴이었다. 새끼를 뺏긴 어미 같은 모습.

그를 찬찬히 살피던 필릭스는 흠, 짧게 침음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그랬어?!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랬지? 왜 멀쩡하게 잘 있는 애를 멋대로 데려와? 유괴가 얼마나 무서운 건 줄 알아?! 애 아빠가 저렇게 놀라서 달려왔잖아!”

그리고는 갑자기 버럭 언성을 높인다. 주위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지금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잡아 오라고 시킨 건 본인이면서 이렇게 덤터기를 씌우나? 하나같이 속이 쓰렸지만, 감히 따지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필릭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시커먼 사내들을 재빨리 내쫓았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부하 놈들은 입술을 죽 내민 채 우르르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좆 같은 일이었다.

그 와중에 토니만이 필릭스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이 단단히 화난 걸 알아차리고 발뺌하는 태도가 야비하지만 신속하다. 눈치라고는 생전 없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내심 감탄 아닌 감탄을 하던 토니는 이번엔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는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필릭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플로리스트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평소엔 눈곱만큼도 없던 재치를 순간적으로 발휘했다는 건데…….

이렇게 보니 대단한 건 아이작이 아닌가. 아이작을 새삼스럽게 살피는 토니의 눈이 반짝였다.

“넌 왜 안 나가?”

그러나 토니의 감탄은 길게 가지 못했다. 당장 축객령을 내리는 필릭스의 불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토니는 어깨를 움찔였다.

“저도 나갈까요?”

“아이작이랑 할 말 있어. 나가서 기다려.”

“…알겠습니다.”

토니는 군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놓칠세라 벤자민을 꽉 끌어안고 있는 아이작과, 태연함을 가장한 채 아이작을 의식하고 있는 필릭스의 모습이 신선하기까지 하다.

솔직히 저런 필릭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한낱 플로리스트 하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무기상 필릭스 펠리체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일이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희귀한 광경을 놓칠세라 한 번 더 뒤돌아보던 토니는 문득 떠오른 의문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베타 플로리스트는 과연 어떻게 필릭스의 사저인 이곳까지 멀쩡하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의아해하던 토니는 아무래도 고용인들이 문제인 것 같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이쪽으로는 눈길도 두지 않는 필릭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탕, 토니가 마지막으로 방을 빠져나간 후 조용히 문이 닫히자 어색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덕분에 아이작의 가슴에 푹 안긴 아이의 훌쩍거리는 소리만 더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소리였다.

필릭스는 난처함을 숨기지 못하고 뺨을 긁적였다. 솔직히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작이 매번 꿈이라도 꾸는 듯한 얼굴로 쓰는 카드의 주인공, 벤자민이 세 살배기 아이일 거라고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당연히 아이작의 연인이라고만 생각한 필릭스는 그를 조용히 불러 헤어지라고 권유할 작정이었다, 라는 것은 물론 변명일 뿐이고… 실은 잡아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떨어져 나가게 만들 심산이었다. 단호하게 벤자민을 포기할 수 없다고 대답한 아이작에게 오기가 생겨 다른 수단을 생각한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비틀어질 줄이야.

필릭스는 초조하게 서성였다. 아이작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도 한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다니…….

“아이작, 이번 일은 사과하지. 내 부주의고 내 탓이야. 미안하다.”

그러나 결국 낮은 한숨을 흘리며 사과를 전해야만 했다. 토니나 잭 혹은 그를 아는 그 누구라도 지금 필릭스를 봤다면 까무러치고도 남았을 테다. 곧 죽어도 남에게 사과 따위는 하지 않는, 안하무인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필릭스 펠리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의심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죄질이 나쁜 일을 저질러도 사과 따위를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무기상이자 마피아라는 뜻은, 그만큼 악독하고 질 나쁜 인간이라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필릭스는 그런 악명과 충분히 잘 어울리는 사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악명 높은 필릭스 펠리체가 답지 않게 잔뜩 긴장해서 사과를 전해도, 단단히 화가 난 아이작은 눈길 한 번 두질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일도 아닌 아이를 건드렸는데 어떤 멀쩡한 부모가 금세 화를 풀 수 있겠는가.

“…아이작.”

더더욱 초조해진 필릭스가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간 순간이었다. 울음을 가까스로 멈춘 벤자민의 등을 다정하게 다독이던 아이작이 아이를 품에 안은 그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릭스의 불안하던 걸음이 일순 뚝 정지했다.

“어떤 이유라고 해도 이번 일은 심했습니다. 당신이 누구라고 해도 해선 안 될 일이 있는 겁니다. 세 살밖에 안 된 아이를 유괴라니요.”

세상 모든 범죄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를 건드리는 짓은 최악이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어린아이를 향한 범죄를 혐오하는 필릭스가, 아무리 몰랐다고는 하나, 아이작의 아이를 납치해왔으니 체면이 구겨지고 자존심도 상하고 이래저래 형편없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알아. 몰랐다곤 하지만 내 잘못이라는 거, 인정해. 그래서 이렇게 네게 사과하는 거다.”

까칠해진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며 필릭스는 참담하게 중얼거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랄 뿐입니다.”

“물론이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가게에도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감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북녘의 겨울바람처럼 냉랭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급해진 필릭스가 그의 팔을 반사적으로 붙들었다.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아이작이 필릭스를 마주했다. 그의 가슴에 푹 얼굴을 묻고 있던 아이도 흘끔 눈을 든다.

문득, 둘을 번갈아 보던 필릭스는 크게 부푼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픽,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닮았군.”

그리곤 뜬금없는 말을 던진다.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은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닮았다니요?”

“아이가 너를 제법 많이 닮았어.”

“저를 말입니까?”

고개를 기울이는 아이작의 표정엔 의외라는 감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필릭스는 입술 끝을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래. 머리칼 색이나 눈동자 색이 달라서 처음엔 전혀 못 알아봤지만, 눈매와 얼굴형이 너와 똑같잖아. 정말 신기하게 닮았네.”

나직이 말을 이어가던 필릭스는 아직도 자신이 아이작의 팔을 힘껏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재빨리 손을 들었다. 괜히 제 손이 민망해 주머니에 찔러 넣고 흠, 목을 가다듬기도 한다. 잠시 멍해져 있던 아이작은 그제야 짧은 한숨을 흘렸다.

“벤자민이……. 저를 닮았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처음 듣는다고? 이렇게나 닮았는데?”

“…….”

“네가 만났던 사람들은 전부 눈깔에 백내장 걸린 병자였나 보네.”

당당하게 대꾸한 필릭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아이작이 살짝 당황하는 틈을 타 의자를 끌어다 놓곤 자신은 먼저 탁자 맞은편에 않았다.

“잠깐 앉아. 벤자민도 이제야 울음을 그쳤잖아.”

자리를 권하는 필릭스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없이 진지했다. 짙은 프러시안 블루의 동공은 심해처럼 깊었다.

“얘기 좀 해.”

“…아니요. 이만 가보는 게 낫겠습니다.”

아이작은 아무것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겠다는 듯 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불현듯 품에 안은 아이가 탁자를 향해 불쑥 손을 뻗으며 ‘까까!’ 호기롭게 외쳤고, 덕분에 아이작의 움직임이 움찔 멈추고 말았다.

돌아보니 필릭스가 손끝으로 두들기고 있던 탁자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쿠키와 우유가 올려져 있었다. 아이가 깨어나서 울기라도 하면 달래주려고 잭이 준비해둔 간식인 모양이었다. 비록 당장 울기 시작하자 당황해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했는데, 아이는 귀신같이 쿠키를 알아보고는 달라고 떼를 쓰는 거다.

필릭스는 묵묵히 쿠키 하나를 들어 벤자민의 앞으로 내밀었다. ‘까까!’를 외치던 벤자민의 고사리 같은 손이 제 손보다 훨씬 큰 쿠키를 덥석 쥐었다.

“먹이고 가. 쿠키라면 많으니까.”

아이에게 어필하려는 것처럼 필릭스는 쿠키 그릇을 앞으로 슥 밀었다.

“밥도 제대로 안 먹었을 텐데 쿠키부터 잔뜩 먹으면 곤란합니다.”

“…그런가.”

필릭스가 머쓱해하며 턱을 쓸었다. 쿠키 그릇을 도로 치워야 하나 어려운 고민도 들었다. 물론 아이는 욕심 사납게 눈을 빛내며 쿠키 그릇을 노리고 있었지만, 아빠가 안 된다는데 어쩔 수 있나.

시무룩해진 필릭스가 쿠키 그릇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작은 짧은 한숨을 흘리며 아이를 안은 그대로 필릭스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자 아이는 이때다 싶었는지 탁자를 기어 올라가다시피 몸을 일으켜 쿠키 그릇으로 손을 쭈욱 뻗었다. 아직 반도 다 먹지 못한 쿠키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또 다른 쿠키를 찾는다.

안 돼, 아이작이 말하기도 전에 필릭스는 새로운 쿠키를 내밀었다. 아이는 양손에 하나씩 쿠키를 쥐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제 아빠의 다리에 얌전히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삭아삭 아이가 쿠키를 씹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제 아들이 쿠키에 욕심을 부리는 모양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아이작이 쯧, 혀를 찼다.

“정말, 네 아들이야? 뭐, 얼굴을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턱을 받친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필릭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네’ 하고 간단히 대꾸했다.

“애 엄마는?”

“……없습니다.”

“싱글 파더라고? 그런데 왜 따로 살아?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같이 살지 않는 이유라도 있어? 심지어 가족등록도 안 되어있는 것 같던데.”

“그것도 알아보셨습니까?”

대답 대신 되묻는 아이작의 얼굴은 어두웠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도 않는 상대의 감정 기복을 필릭스는 이번에도 기민하게 알아차리곤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내가 시킨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토니가 이것저것 조사한 것 같더라고……. 흠, 어찌 되었든 기분 나쁘겠지. 이 점도 사과할게.”

당황해서 재빨리 대꾸하는 필릭스에게 아이작은 ‘네’ 간단히 대답할 따름이었다. 어두웠던 얼굴도 그때뿐이었다. 무감정한 표정도 여느 때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기실, 아이작은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허점을 드러낸 거다. 눈을 가만히 감았다가 떴지만, 머릿속에서는 어지럽게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내셨습니까.”

아이작의 질문에 필릭스는 어깨를 슬쩍 올렸다가 내렸다. 별것 아니었다는 뜻이었지만, 자세히 설명하기 전까지 아이작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필릭스는 조금 전에 토니가 알려주었던 정보를 고스란히 읊어주어야만 했다.

아이작은 놀라거나 불안해하거나 혹은 화를 내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 모습이 외려 의아함을 부추긴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말 안 해줄 셈이야?”

필릭스는 입술 주위에 초콜릿과 쿠키 가루를 잔뜩 묻히고 있는 아이에게 우유 컵을 내밀며 물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컵을 엎질러도 우유가 세지 않는 플라스틱 병에는 알록달록 이상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쿠키를 꼭 쥐고 놓지 않은 채 우유병을 주먹으로 쥐고 들어 마셨다. 그의 하는 모양새를 기가 찬다는 투로 살피던 필릭스는 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욕심도 사납긴. 쿠키 내려놓고 우유를 마시면 되잖아. 지금 여기서 네 과자 뺏어갈 사람 하나도 없어.”

중얼거리는 말을 아이가 알아들을지는 미지수였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사방팔방 쿠키 가루를 퍼트리며 먹고 있는 벤자민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던 필릭스의 머리 위로 아이작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필릭스는 흘끔 눈을 들었다. 아이작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그 모습이 마땅치 않아 필릭스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를 날카롭게 직시했다.

“제대로 말해. 가족사야?”

“가족사는 아닙니다.”

“그러면?”

입을 열어야 하는지, 끝까지 닫고 있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아 아이작은 잠시 주저했다. 타인이나 마찬가지인 필릭스에게 자신이 숨기고 있는 개인사까지 밝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작은 끝내 짧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실은, 쫓기고 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는 듯, 필릭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쫓긴다고? 왜? 누구한테?”

“…거기까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제 개인사니까요. 하지만 그 때문에 벤자민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돼서 가족등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같이 살 수도 없습니다. 제 어머니 역시 서류상으로는 저와 연관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벤자민을 어머니에게 맡긴 겁니다.”

간단히 설명하는 아이작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타인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감정한 얼굴은 위화감을 일으킬 정도다. 필릭스는 쯧, 혀를 찼다.

“만에 하나 널 쫓는 놈이 널 발견한다고 해도 벤자민과 네 어머니는 숨길 수 있게 하려고?”

당연한 것을 묻는 말에 아이작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관계는 없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어 뒷조사를 당한다고 해도 아무도 없이 홀로 고립된 것으로 나와야 마땅했다. 벤자민과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힘들고 괴로웠지만, 언제 어떻게 상황이 나빠질지 모르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필릭스는 귀신같이 벤자민이 제 아들인 것을 알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납치해오기까지 했다. 그 뜻인즉, 그들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외려 필릭스가 한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그들은 벤자민과 제 모친을 납치할 거다.

떠올리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밀려와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벤자민을 끌어안았다. 쿠키와 우유에 넋이 나가 있던 아이가 끄응, 강아지 같은 소리를 흘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제가 지나치게 강한 힘으로 벤자민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리고 팔을 놓았다. 그러나 불안은 쉽사리 가시질 않는다.

뺏길 수 없다. 만에 하나 그들이 벤자민을 데리고 간다면, 필릭스처럼 얌전히 제게 넘겨줄 리가 없다. 무슨 짓을 어떻게 벌일지 모른다. 아이작은 사그라지지 않는 한기에 어깨를 가늘게 떨고 말았다.

혹시나 가족관계가 들킬까, 집에 자주 들르지도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를 볼까 말까 했고, 정 보고 싶을 때면 멀리서 지켜보다 돌아오기도 했다. 함부로 사진 같은 걸 걸어두거나 가지고 다니지도 못했다. 그리운 마음에 매일같이 편지를 썼지만 보낼 수도 없었다. 필릭스가 제대로 편지를 보내고 있냐고 물었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대부분 모아두기만 했을 뿐이다.

적어도 6개월에 한 번씩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물론 벤자민과 어머니 또한 비슷하게 옮겨 다녔다. 어찌 되었든 재빠르게 자신이 돌아볼 수 있는 곳에 있는 편이 그나마 안심이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거처를 옮겨 다니기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올해 Preschool(어린이집)에 등원하기 시작했고 2년만 더 있으면 Kindergarten(유치원)에 들어가게 된다. 어머니 또한 연세가 있어서 자주 거처를 옮겨 다니는 것이 무리다.

차라리 혼자 자리를 옮길까, 진지한 고민이 일었다. 그러자 이번엔 필릭스가 걸렸다. 예고도 없이 제 인생에 끼어든 필릭스가 이유 모를 호감을 적나라하게 내비친 탓이다. 토니는 도망치라고 말했지만, 벤자민까지 잡아 들일 정도로 기이한 집착을 드러내는 필릭스에게 말도 없이 도망친다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도 벅찬 상황에 필릭스까지 적으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필릭스를 온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간략하게 쫓기고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말았지만 이래서 뭘 어쩔까 싶기만 하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벤자민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우유 냄새 같기도 하고, 베이비 파우더 냄새 같기도 한, 아이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불안한 마음을 위로하듯 퍼져 들었다.

“아빠, 하지 마아.”

벤자민은 귀찮은지 킥킥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때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뺨과 코끝을 간질였다. 저도 모르게 다정한 미소가 입가에 걸쳐진 순간이었다.

“내가 도와주지.”

턱을 괴고 마주 앉아있던 필릭스가 심드렁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작과 벤자민이 노닥거리는 꼴이 아니꼽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은 불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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