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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 shower

보너스 트랙

flower shower

유온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테이블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벌써 한 시간째였다. 눈앞에 있는 종이에는 무언가를 썼다 지웠다 한 흔적이 가득했고, 그 주위로 낙서가 드문드문 보였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골똘히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그 고민의 결론은 종이 위에 흩뿌리듯 쓰인 세 글자였다. 어, 쩌, 지? 물음표 언저리는 더더욱 낙서로 가득했다. 소용돌이, 꽃, 별, 집, 구름(인지 뭔지 모를 것…….), 유온의 복잡한 머릿속을 그대로 종이에 옮겨 놓은 듯했다.

연필로 끄적끄적 네모 칸 몇 개를 더 그리고 색칠하다, 유온은 아예 연필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고민이 끝나질 않았다. 아예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무엇을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가 하면……, 며칠 후가 두 사람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생일도 생일이지만 결혼기념일은 다른 의미로 특별하다. 아주 굉장한 걸 해 주고 싶은데 그 아주 굉장한 게 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도 마음에 안 내켰다. 온전히 자신이 생각해서 서경이 감동할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소용돌이, 꽃, 구름. 의미 없는 낙서를 재개했던 유온은 이내 낙서에도 수많은 선물 목록에 그랬던 것처럼 연필로 취소 선을 직직 그었다.

지워진 선물 목록엔 이런 게 있었다. 서경이 태어난 해의 포도주. 너무 식상하고 결혼기념일보단 생일선물 같아서 탈락했다. 정장. 서경은 맞춤복만 입고 전속 테일러가 따로 있어서 비밀로 할 자신이 없다. 그럼 반지? 반지는 이미 몇 개나 있는데.

그러면 또 뭐가 있을까, 윤서경의 취향에 맞추어 도색한 요트(로 같이 크루징을 가는 것), 놀이공원 빌리기, 그가 좋아하는 오래된 레코드판 희귀품 찾기……. 이것저것 떠올리다가 전부 이미 윤서경이 자신에게 해 줬던 일임을 깨달았다.

‘혼자서는 남한테 뭘 해 줄 줄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우울에 빠질 뻔한 유온은 재빨리 그 늪에서 기어 나왔다. 유온이 저도 모르게 늪으로 빠져들 때면, 서경은 항상 유온을 휙 들어 올려 그 안에서 꺼내 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늪은 물이 그렇듯이 자신이 긴장하고 의식하면 머리부터 가라앉고 마는 곳이라는 걸 조금은 체득했다.

우울해하는 대신 유온은 자신이 혼자서는 남에게 뭘 해 주는 게 어려운 이유를 생각했다. 할 수 있는 한 남의 탓으로. 자신은 남에게 제대로 무언가 해 주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누구도 유온에게 뭔가를 준 적이 없기에. 또한 유온 역시 그럴 기회가 없었기에.

그나마 윤서경이 있어서 이만큼이나 성장한 거였다. 유온은 마음에 심어진 다정한 씨앗을 어루만지듯 제 가슴을 토닥이고는 다시 종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유온은 고민이 생기면 종이에 써 보는 버릇이 있었다. 낙서도 하고, 쓸데없는 말도 적다 보면 언젠가 정답과 마주친다.

“음…….”

머릿속에서 온갖 잡생각이 맴돌았다. 어제 먹은 저녁 메뉴부터 정원에 심은 꽃, 그리고 있는 그림, 며칠 전 만난 퍼스널 쇼퍼와 나눈 대화까지. 우연한 기회에 고객의 사유지인 화원에 가게 되었는데, 정말 아름답게 꾸며 놨더라는……. 그 화원이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고 했지.

여기서 다시 한번 유온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첫 결혼기념일인 것도 있지만, 유온을 더 고민하게 만드는 건 윤서경이 줄 선물이 무엇인지 이미 알기 때문이다. 생일 선물로 화원을 주는 것도 대단했으나 서경이 준비한 선물은 그보다 더 대단하고 엄청났다.

몰디브에 새로 개장할 부경 호텔 그룹의 리조트.

지금까지 그는 유온이 상상도 못 해 본 기상천외한 선물을 많이 해 주었다. 그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스페인의 고성이었는데, 이번 선물이 그걸 뛰어넘었다. 윤서경은 딱히 기념일 당일까지 숨길 생각도 없었는지, 완성을 거의 앞둔 리조트의 조감도를 보여 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때요?’

‘어, 어떠냐고요?’

솔직히 리조트 조감도를 앞에 두고 어떤지 물으면 대답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감상을 원하는 건지, 의견을 원하는 건지. 그저 얼떨떨해져서 조감도를 바라보기만 했다. 울창한 열대 우림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섬을 빙 두른 바다 위의 빌라. 객실은 104개로 전 객실이 스위트였으며, 유명 건축가가 설계하여 문외한인 유온이 봐도 훌륭하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멋져요. 나중에 완공되면 가 보고 싶어요.’

‘다행이네요. 결혼기념일 선물이라서, 당신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

그 말엔 정말이지 멍하니 윤서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서경 씨는 가끔 선물이 너무…….’

‘과합니까?’

‘……네.’

‘어쩔 수 없죠. 당신이 익숙해져야지.’

그렇게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윤서경이 뺨에 입 맞추는 걸 얌전히 받아 주고는 ‘결혼기념일 선물’이 될 리조트 부지 사진과 조감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볼 따름이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말 멋져요밖에 없었고, 머릿속에도 정말 멋지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니 뭘 준들 그것과 비교나 할 수 있을까.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온은 얼른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현관문 앞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며 들어온 윤서경은 나갈 때와 똑같이 흐트러짐 하나 없는 채였다. 습관대로 유온은 두 팔을 뻗으며 서경에게 폭 안겼다. 윤서경의 손이 자연스레 올라와 유온의 등을 두드린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일상의 인사와 함께 익숙한 향이 물씬 풍겼다. 언제나 서경의 체향은 유온을 안정시키고,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니, 체향이 아니라 윤서경이라는 사람 자체가 유온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다. 유온도 살그머니 자신의 체향을 내보냈다. 서경이 유온의 목덜미에 코를 묻는다. 입술이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기분 좋아…….’

유온은 팔을 올려 서경의 목을 끌어안으며 한껏 발돋움했다. 윤서경이 몸을 숙인 상태였기에 입술은 쉽게 닿았다. 입술이 부리라도 된 것처럼 내밀고 쪽, 쪽 두세 번 맞대었다가 떨어지자 몸이 둥실 떠올랐다. 서경이 유온을 한 팔로 안아 든 것이었다.

입맞춤은 금방 진해졌다. 소파에 가방을 대충 던지고 유온의 엉덩이를 받쳐 안정적으로 안아 올린 서경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술을 맞댔다. 빈틈이 없을 만큼 깊은 키스였다. 허락을 구하듯 이 끝을 살살 문지르는 혀끝에 유온은 저항 없이 입을 벌렸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었던 연인의 입술은 달콤하고 뜨거웠다. 숨을 쉬지 못하게 될 때까지 달라붙던 서경이 떨어진 순간, 유온은 아쉬움에 혀를 내밀었다. 아마도 유온에게 숨 쉴 틈을 주려고 했을 윤서경은 빨갛게 나온 혀끝에 다시 자제력을 잃고 그 혀를 빨아들였다.

혀뿌리가 저릿할 정도로 세게 혀를 빨리고, 입술을 깨물리다 자신도 지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똑같이 돌려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유온은 윤서경처럼 능숙하지 못하다.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언제나 서경은 신기할 만큼 금방 적응하며 능란했고, 유온은 언제까지고 그가 만들어 내는 파도에 휩쓸리기 바빴다.

물론 그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윤서경이 자신을 마음대로 휘둘러 주는 게 좋았다. 그의 커다란 몸 아래 깔려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신음하고 울고 쾌감에 지배되는 것이 유온의 일상이자 일탈이고 행복이었다. 그런 순간에 서경 역시 평소의 여유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것 역시, 좀 이상한 표현이겠지만, 유온을 즐겁게 했다.

“……음, 으응…….”

혀가 얽히며 입 안 깊숙이 들어올수록 몸이 달아올랐다. 그동안 수도 없이 몸을 섞었는데, 아직까지도 키스가 조금만 농밀해지면 벌써 아래가 미끈하게 젖어 버린다. 실내복을 적실 정도로 젖는 건 아니지만, 한층 짙어지는 체향에서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또 윤서경은 이미 유온이 그만큼 열락에 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으, 응…….”

속절없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윤서경은 한 팔로 유온의 하체를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는 등줄기를 은근하게 더듬었다. 척추의 마디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몸이 움찔거렸다. 유온은 문득 자신이 너무 밝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문란하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두 손으로 서경의 가슴을 짚고 밀어내자, 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그게…….”

“창피해요?”

“…….”

대뜸 정곡을 찌르는 통에 유온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윤서경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벌써 여기가 이렇게 젖어서?”

“아……!”

그의 손이 옷 위에서 유온의 다리 사이를 만졌다. 아직 조금 젖었을 뿐이지만 미끌미끌한 느낌은 윤서경의 손에도 분명히 전해졌을 터다. 유온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경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치고는 그에게서 내려오려 했다.

“어딜 가요.”

서경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유온의 몸을 고쳐 안았다. 그 바람에 하반신이 서로 맞닿았다. 순간 유온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더욱 새빨갛게 물들였다.

“유온 씨만 흥분한 줄 알았어요?”

“저, 저기, 저…….”

저 좀 내려 주세요, 저 안 할래요, 두서도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말로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당황했을 뿐. 옷을 밀치며 단단하게 발기한 물건이 마주 닿으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뭐 어때요, 유온 씨. 당연한 겁니다.”

“그래도……, 그게…….”

“우리 신혼이잖아요.”

신혼. 더 빨개질 수 없을 것 같던 얼굴이 이제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이러다 펑 하고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신혼…….”

“그래요. 신혼.”

윤서경은 유온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다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가 자신을 한없이 예쁘게, 소중하게, 애지중지 대하는 게 느껴질 때면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유온은 괜한 저항을 멈추고 서경에게 푹 안겨 들었다.

* * *

유온은 숨을 길게 내쉬며 자신의 두 팔에 얼굴을 기댔다. 욕실 천장 아래로 길게 난 창에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 욕조의 뜨거운 물에 열이 오른 몸을 식혀 주었다.

윤서경이 돌아온 게 오후 6시였는데 어느새 새벽이다. 꽤나 오랜 시간을 침대 안에서 달라붙은 채 보냈다. 신혼부부다운 일을 하자고 꼬드기는 서경에게 넘어갔다가 결국엔 그만하자고 울면서 그를 밀어냈다. 해서 유온은 같이 욕실에 들어온 지금도 한 욕조에 앉은 남자를 곁눈질로 보며 이상한 낌새가 보이지 않는지 경계하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 대여섯은 들어가도 될 널따란 욕조에서 두 사람은 마치 모르는 사이처럼 떨어져 있었지만, 윤서경은 여유롭게 웃으며 꼬리를 바짝 세운 유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치 아닌 대치가 5분이나 채 이어졌을까. 서경이 물살을 만들어 내며 느릿하게 유온에게로 다가왔다. 유온은 바짝 몸을 움츠리곤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젖은 머리를 넘겨 주며 하는 말에 유온은 입술을 내밀었다.

“전에도 안 한다고 그랬으면서 했잖아요……, 욕실에서…….”

흠. 빙긋 웃은 서경이 유온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지나간 일은 잊어요. 아무튼 오늘은 당신도 정말 지쳤고, 더는 안 할 겁니다. 씻겨 줄게요.”

“……진짜 안 할 거죠?”

“내가 그렇게까지 당신한테 강요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윤서경이 조금 서글픈 표정을 했다. 축 내려간 눈꼬리에 유온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농담을 하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전에는 그야말로 유온을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다루던 그였으니까. 지금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다. 과보호가 많이 덜해졌다는 의미였다. 이제 유온에게는 그런 과보호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는 오늘도 바쁘셨어요?”

“늘 똑같죠. 이한영 실장이 비서실 사람들한테 꽤 진지하게 그만두고 싶다고 상담하고 있더군요.”

“네?!”

이래저래 신뢰가 깊은 이한영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놀라 돌아보자, 윤서경은 한쪽 눈을 가볍게 감았다 떴다.

“별일 아닙니다. 주기적으로 그러니까. 휴가 한 번 주면 금방 나아져요.”

갑자기 이한영이 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부적값은 비용 처리하라고 했다던……. 서경의 비서실은 사람을 아무리 뽑아도 항상 바빴다. 고용주인 윤서경이 워낙 바쁘게 일하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실장인 이한영은 한층 더 일이 많겠지. 안쓰럽다는 생각에 유온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유온 씨.”

“……네?”

“나도 걱정해 줘요.”

“에?”

갑작스러운 말에 ‘예?’도 ‘네?’도 아닌 이상한 물음이 나가고 말았다. 윤서경은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물론 장난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하긴…… 이한영이 그렇게 바쁜데 서경은 어떻겠는가. 그가 매일 6시에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건 그만큼 일을 몰아서 하기 때문이고, 집에 돌아와서도 유온과 시간을 보낸 후 새벽에 못다 한 일을 마치고 나서야 잔다는 걸 알고 있다.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바쁘죠, 서경 씨…….”

유온은 윤서경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 주세요.”

설마 유온이 그렇게 진지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서경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지자 곧 옅은 주름을 만들며 눈웃음 짓는다. 유온은 서경의 이 눈웃음이 좋았다. 고개를 숙여 윤서경의 눈가에 키스했다. 서경 역시 유온의 뺨에 입 맞췄고, 가볍고 다정한 입술이 서로를 향해 몇 차례 오고 갔다.

“유온 씨는 오늘 어떻게 지냈어요?”

“음, 오전에 운동하러 다녀오고요. 오후에는 책 읽었어요. 전에 서경 씨가 추천해 준 추리 소설이요.”

“재미있었어요?”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이 추천해 주는 책은 전부 유온에게도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서경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추측해 보는 것도 즐거웠고…….

“읽으면서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

“왜 그렇게 놀라요?”

“저도 서경 씨가 그 책 읽을 때 무슨 생각 했는지 알고 싶었거든요…….”

“똑같이 느꼈네요.”

서경이 웃으며 코끝을 맞댔다. 같이 웃다 보니 그가 퇴근하기 전에 끄적거리던 종이 생각이 났다. 정확히는 그 종이의 내용. 고민을 해결하는 법은 간단하다. 직접 묻는 것이다. 서경 씨는 결혼기념일에 뭘 받고 싶어요? 하지만 그걸 묻는 게 쉬웠다면 오늘까지 고민이 이어졌겠는가.

물어볼까, 말까. 찰나의 고민을 윤서경은 놓치지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걱정 있어요?”

어떻게 알았지……. 정말 그는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뭘 숨기는 게 가능하긴 할까. 숨길 생각도 없긴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유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걱정 없어요. ……고민은 있는데, 나중에 말해 드릴게요.”

“그래요.”

윤서경은 재촉하지 않았다. 만일 이게 심각한 문제였다면 유온이 모르는 방법으로 무슨 고민인지 알아내 해결했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그도 안다. 또 그런 문제는 유온도 감추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그런 신뢰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포근해졌다. 유온은 서경을 끌어안고 따뜻한 물속으로 가만히 잠겨 들었다.

* * *

말레 국제공항에서 유온과 서경을 환대한 건 환한 인상에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인 직원이었다. 무척 친절하고 활달했지만, 수상 비행기 터미널로 가는 십여 분 동안 두 사람에게 공연한 말을 붙이진 않았다.

“이쪽이 라운지입니다.”

복잡한 터미널 한쪽에 부경의 리조트 이름이 쓰인 나무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직원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내부 장식이 고급스러운 라운지가 나타났다. 공항 밖으로 나와서는 채 땀을 흘릴 새도 없었다.

라운지까지 이동하는 차량은 리조트 로고가 붙은 소형 승용차로, 모든 투숙객이 개별 이용한다고 한다. 공항에 도착한 후부터 단 한 순간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게 윤서경이 잡은 이 리조트의 콘셉트였다.

유온이 얼떨결에 리조트 소유주가 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경영을 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런데도 윤서경은 자신이 직접, 혹은 이정윤을 통해 리조트 건설의 진행 상황이며 제반 문제를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유온의 것이니 유온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이 거창한 결혼기념일 선물은 신문에까지 실렸다. ‘부경 호텔 그룹 대표 윤서경, 배우자에게 몰디브 초호화 리조트 선물’, 이런 기사가 인터넷 지상을 도배했다. 주위에서 그 관련된 말을 들을 때마다 유온은 어쩔 줄 몰랐다. 특히 윤서경의 누나는 저 나무토막 같던 놈이 갑자기 사람이 됐다며 깔깔 웃다가 기어코 윤서경에게 한 마디를 듣고 말았다.

바리스타가 상주하는 라운지에서는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났다. 하루 두 번, 아침과 오후에 리조트에서 라운지 전용으로 만들어 오는 핑거 푸드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고, 냉장고에는 가격대가 높은 종류의 음료와 물을 자유롭게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비치해 두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서버와 바리스타가 현지어로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선 아주 희미하게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련한 전문가들이지만 오늘 처음으로 손님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리조트 오너 부부를.

리조트는 아직 정식으로 개장하기 전이다. 유온 부부가 닷새를 보내고 간 뒤, 다시 사흘 동안 정비를 거쳐 투숙객을 받을 예정이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앞으로 한 달분 객실을 오픈했고, 오픈한 지 10분 만에 104개의 객실이 풀 부킹되었다. 몰디브의 고급 리조트 중에서도 객실료가 최고 수준이었기에 매출도 어마어마했다. 정말 이 정도 규모의 매출이 발생하는 리조트를 자기 소유로 둬도 되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윤서경은 유온을 데리고 천천히 라운지를 둘러보았다. 조명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아서 쾌적했고, 작은 접시에 하나씩 담긴 음식도 모두 고급스러웠다. 한 바퀴 돌아보고 푹신한 소파에 앉자 서버가 큰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진열되어 있던 핑거 푸드를 한 종류씩 전부 가지고 온 것이었다.

차가운 커피와 히비스커스 꽃을 띄운 음료도 함께 나왔다. 서버가 명료한 한국어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하고 물러나더니 신경은 쓰이지 않을, 하지만 부르면 바로 올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섰다.

핑거 푸드는 열 종류나 되었지만 크기가 작아서 유온도 하나씩 전부 맛볼 수 있었다. 유온이 마지막 음식인 코코넛 새우를 삼키자, 윤서경은 조금 큰 접시에 따로 나온 열대 과일을 유온 쪽으로 밀어 주었다.

“어때요?”

“다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하나하나 빠질 것 없이 맛있었다. 리조트의 음식도 이 정도 수준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식사가 기대될 정도였다.

음식 외에도 라운지에는 책자와 태블릿 PC로 진행하는 쇼핑 서비스, 레저 예약, VOD 감상 등으로 시간을 보낼 거리가 충분했다. 지연이 잦은 수상 비행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렇게 비행기가 지연되어 리조트에 늦게 도착하면 시간에 따라 레이트 체크아웃이나 부경의 다른 호텔 숙박권을 제공했다.

윤서경에게서 그런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새 수상 비행기를 탈 시간이었다.

“라운지는 어땠습니까.”

“좋아요. 비행기가 지연 안 된 게 아쉬울 정도예요.”

“그럼 합격이군요.”

둘이 동시에 웃었다. 무사히 수상 비행기에 올라 40분쯤 갔을 때, 멀리 드넓은 라군에 둘러싸인 부경의 리조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몰디브에서도 상당히 큰 섬으로, 빌라 한 채 한 채의 간격이 하늘 위에서 보기에도 다른 리조트에 비해 넓었다.

비행장에 내리자 전담 버틀러와 포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짐을 싣는 포터의 옆에서 윤서경이 덧붙였다.

“사실 투숙객이 들어올 때마다 담당 직원들이 모두 나와서 환영 인사를 하지만…….”

유온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이랑 마주치는 건 별로…….

“당신이 별로 안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네……. 저는 별로…….”

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비행장에서 체크인하는 로비를 지나, 짐은 먼저 객실로 보내 두고 리조트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리조트는 메인 건물 안에만 식당이 여덟 곳, 카페가 세 곳, 지하에는 볼링과 당구 같은 스포츠 센터와 쇼핑 아케이드가 있었다.

섬 안쪽에 조성된 숲과 해안선을 따라서도 또 식음료와 기념품 가게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쇼핑을 제외한 식음료와 크루징, 액티비티, 물품 대여 같은 건 전부 숙박료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숙박료를 자랑하긴 하지만.

처음엔 들뜨고 설레는 기분으로 윤서경의 안내를 따라 리조트를 돌아보던 유온이었으나, 네 번째 인도 식당에 들어갔다 나온 후부터 급격히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인도 식당에서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받은 이후부터였다.

‘……안 되는데.’

메시지는 이정윤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전용기로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게 얼마나 되었다고, 유온은 연착이라는 크나큰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좋기만 하던 기분이 크게 흔들렸다. 이정윤의 도착이 늦어지면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자신은 이미 이렇게 굉장한 선물을 받고 말았는데.

그때부터 유온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좀 쉬다가 보러 나오죠. 오늘 노을이 예쁠 거라고 하더군요.”

“네…….”

유온의 이상한 낌새를 금세 눈치챈 서경이 자연스레 유온을 객실로 데려갔다. 유온은 이미 구경거리가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는 상태였기에 순순히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객실에 들어와서도 여기저기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들었지만, 이정윤이 신경 쓰여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런 유온을 윤서경은 욕실로 이끌었다.

빌라에 딸린 세 개의 욕실 중 하나는 바다 수영을 한 뒤 몸을 씻고 들어올 수 있도록 파빌리온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천장에서 비스듬히 벽으로 연결되는 부분과 바다로 이어진 문에는 유리가 없어 그리로 파도 소리가 들렸고, 축축하고 더운 바람도 들어왔다.

윤서경이 미리 말을 해 놓았는지 이미 욕조엔 장미 꽃잎을 띄운 미지근한 물이 찰랑거렸다. 어린아이 다루듯 익숙하게 유온의 옷을 벗긴 서경이 유온을 안아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특수 유리를 기둥 사이에 덧댄 파빌리온은 바깥만큼이나 더웠기에, 체온보다 조금 높을 물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유온 씨.”

윤서경이 젖은 손으로 장난스럽게 유온의 앞머리를 건드렸다.

“왜 그래요. 유령이라도 봤습니까?”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온이 고개를 홱 들었다. 결국 또 걱정시켰다. 유온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그게……. 하고 말문을 열었다.

“정윤 씨한테 받을 게 있는데,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좀 늦을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이 실장이 여기로 옵니까? 언제요?”

“내일 아침에요.”

말하고 나니 또 조바심이 났다. 사실은 내일 이정윤에게서 물건을 하나 받기로 했다. 결혼기념일에 유온이 준비한 선물은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였다. 하나는 짐 속에 숨겨서 가지고 왔지만, 나머지 하나는 도저히 몰래 가져올 수가 없어서 하루 늦게 이정윤의 손을 통해 받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정윤이 비행기 연착으로 발이 묶였다. 그녀의 손에는 윤서경에게 줘야 할 선물이 있고. 두 개 중에 사실 더 중요한 건 그쪽인데.

“늦으면 많이 곤란한 일이에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정말?”

유온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지만, 심각하다고 난리를 피우면 윤서경이 나서서 도와줄 것 같았다. 그럼 언제나처럼 유온이 생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이 해결될 수도 있으나 그래서야 무슨 의미인가. 기껏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건데.

거푸 괜찮은지 물어보는 윤서경을 달래다시피 하고 나서야 욕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실 윤서경이 한사코 말하려 하지 않는 유온을 봐준 것에 가까웠다.

다행히 유온의 그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환승편 찾아서 지금 타요! 제시간에 갑니다]

이미 탑승 수속이 시작된 게이트 앞에서 엄지를 척 올린 이정윤의 사진이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덕분이었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밝아진 유온의 얼굴을 보고 서경도 일을 짐작했는지 내심 안도한 얼굴을 했다.

오랜 시간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모처럼의 여행을 잠깐이라도 그렇게 망치긴 싫으니까. 윤서경과 함께 바닷가의 데이 베드에서 잠시 낮잠을 자고, 다시 리조트 메인 건물로 나왔다. 리조트의 모든 식당이 영업 중이었다. 유온이 고른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뒤 카페에서 차와 디저트까지 먹고 돌아오자, 낮잠을 잤는데도 꾸벅꾸벅 잠이 왔다.

“일찍 잘까요?”

“으음, 그래도 첫날인데…….”

“첫날에 푹 쉬어 둬야 내일부터 편히 놀죠.”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유온은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얼굴 가득 띠며 서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 * *

“유온 씨!”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한 이정윤이 한 손에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다른 손을 휘휘 흔들며 달려왔다. 유온도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단추를 푼 하와이안 셔츠에 긴 목걸이, 반바지 차림인 이정윤의 모습은 퍽 신선했다.

“여기요!”

유온은 반색하며 그녀가 내민 쇼핑백을 받아 안을 확인했다. 얼마나 반가운지 쇼핑백 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쇼핑백의 내용물은 긴 비행에도 상한 구석 하나 없이 생생했다. 안도한 유온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모처럼 휴가인데.”

“미안하긴요! 휴가 아예 뺏은 것도 아니고 하루 더 주셨잖아요. 게다가 유온 씨 덕분에 여기까지 공짜로 왔는데 저야 그저 감사하죠. 잘 놀다 가겠습니다.”

“일행은요?”

“없어요. 원래 이런 데는 혼자 오는 거예요.”

이정윤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유온의 여행 기간 동안 비서실과 경호실은 모두 휴가를 받았다. 성한영은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간다는 것 같았고, 이정윤도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유온의 부탁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자신도 여행지를 몰디브로 하면 된다며, 흔쾌히 수락해 준 이정윤이 고마웠다.

그녀가 타고 온 비행기에 그대로 올라 돌아간 후 유온도 객실로 왔다. 윤서경이 깼을까 조마조마하며 왔지만, 다행히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혹시 자는 척하는 건가……. 슬그머니 눈 위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으나 긴 속눈썹만 파르르 떨리는 게 정말 자고 있는 듯했다.

그도 무척 피곤할 거다. 이 여행 일정을 빼느라 지난 며칠 동안 무척 무리했고, 어제도 유온이 잠든 뒤에 내내 일하다 새벽에야 침대로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유온은 준비해 온 물건을 조심스럽게 쇼핑백에서 꺼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살 서경의 옆에 두었다.

“…….”

향을 맡았는지 윤서경이 움찔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한 번 깜빡인 눈에 침대에 놓인 물건이 들어왔다. 그의 눈이 조금 커졌고, 내내 그를 지켜보던 유온은 미소를 지었다.

정성껏 만든 꽃다발에는 ‘린 플라워’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유온 씨.”

“이번엔 제가 드리고 싶었어요. ……여기서 산 걸로요. 그때, 못 드렸잖아요.”

윤서경이 작년 결혼식에서 상용화를 앞당긴 덕에 이정윤과 비서실이 바쁘게 돌아다닌 끝에 이 꽃집을 통해서 꽃을 구할 수 있었다. 찾아오지 못했던 꽃. 자신이 죽은 뒤 윤서경이 받아 온, 보라색에서 분홍색으로 연결되는 빛깔의 튤립. 이제야 찾아왔다. 겨우, 윤서경에게 줄 수 있다. 결혼식 날 준 것과는 또 다른, 자신이 직접 준비한 것으로.

서경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눈으로 튤립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유온을 끌어안았다. 잠시 가만히 안겨 있던 유온이었으나, 퍼뜩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그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아, 잠깐만요. 선물 하나 더 있어요.”

“또 있어요? 난 하나밖에 안 줬는데, 미안하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대규모 리조트를 ‘하나’라고 말하는 건 좀……. 장난스럽게 가슴을 콩 때리자 윤서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온은 쇼핑백에 같이 넣어 두었던 선물 하나를 마저 꺼냈다. 익숙한 브랜드의 상자였다.

상자를 연 윤서경이 또 눈을 크게 뜬다.

“자꾸 놀라게 하네요.”

그 말과 함께 입술이 와서 닿았다. 상자에 들어 있던 건 유온과 예물을 볼 때 서경이 개인적으로……, 약혼자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주었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팔찌였다.

“나, 남편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약혼자에서 남편.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 반려자.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러했다. 그리고 그 관계에 붙은 이름은 언제나 유온을 성장시키고, 용감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채워 줘요.”

서경이 왼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굵은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사이즈는 작지도 크지도 않게 딱 맞았다.

“당신 건?”

“…….”

왠지 부끄러워져 주뼛거렸지만 결국 주머니에서 같은 모양의 팔찌를 꺼냈다. 윤서경이 유온의 손목에 조심스레 팔찌를 감았다. 처음 이걸 받았을 때는 남성용 중에 제일 작은 사이즈인데도 한참 남아 줄을 조여야 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단 낫다. 평균 정도로 늘어진 팔찌 끈을 보다 유온의 손목을 어루만진 서경이 말했다.

“그때는 당신 손목을 잡는 것도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부러져 버릴 것 같아서.”

“지금은 살쪘어요?”

“네. 조금이라도 빠지면 혼낼 거예요.”

유온의 체형은 가여울 정도로 말랐던 때보다 훨씬 보기 좋아졌다. 여전히 낭창하고 가는 몸이긴 하지만, 뼈가 도드라질 정도였던 이전보다는 건강했다. 유온이 쿡쿡 웃었다.

“어떻게 혼내시려고요?”

“음……. 이렇게.”

윤서경은 유온을 와락 끌어안으며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유온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두 사람의 웃음소리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소리가 침실을 울리고, 조용해졌을 땐 서경이 유온의 위에 올라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튤립 꽃다발로 손을 뻗은 서경이 꽃향기를 맡더니, 꽃다발 위로 눈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주니 더 특별해요.”

“서경 씨가 준 거에 비하면…….”

서경이 고개를 젓고는 유온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 준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유온이 그것을 가만히 서경에게 내밀었다.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서경 씨.”

“고마워요. 유온 씨도,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꽃다발이 유온에게서 서경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는 잠시 꽃다발을 안고 있다가 말했다.

“옛날에 받았던 꽃은 보존 처리를 해 봤어요.”

“옛날, 아…….”

유온이 찾아오지 못한 꽃. 장례식이 끝난 뒤에 서경이 꽃집에서 온 연락을 받고 찾으러 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존하고 나니 향이 다 사라지고, 색도 살아 있을 때처럼 예쁘지 않더군요.”

“…….”

“이미 기회를 놓쳐서, 꽃 하나도 세상에 잡아 두지 못했던 걸까요.”

“서경 씨.”

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다. 유온은 손을 뻗어 서경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번엔 보존하지 말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뺨은 튤립의 꽃잎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가라앉아 버린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다 해도 상처는 남는다.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는 법을 알고,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유온의 눈에는 놀라울 만큼 강하기만 한 윤서경도 ‘과거’를 생각하고 이따금 두려워한다는 걸 유온은 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필사적인 위로의 말을 찾아냈다.

“보존하지 않아도, 이 꽃이 아니어도, 당신이 좋아하는 꽃으로 항상 우리 집을 채워 줄게요.”

우리 집. 더는 차갑지도 슬프지도 않은 공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 윤서경이 있는 곳을 그가 좋아하는 꽃으로 채워 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었다. ……서경이 그리해 주듯이.

가만히 유온의 말을 들은 윤서경이 말했다.

“난 가끔 당신이 천사로 보여요.”

“……그건 좀…….”

심한 콩깍지가 아닐까. 유온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한발 물러나자 윤서경은 꽃다발을 조심스레 침대 콘솔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천사로 보이고, 작은 동물로 보이고, 세상에 예쁘다고 이름 붙은 모든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이 당신이라서.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말과 동시에 입술이 닿았다. 주체할 수 없어 밖으로 흘러넘쳐 버린 듯한 윤서경의 감정은 입술과 함께 유온의 뺨으로, 입술로, 이마로, 눈가로 쏟아졌다. 간지럽고 창피한 말들이었지만 진심임을 알았다. 때문에 유온도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랑해요, 서경 씨…….”

사랑이라는 말은 어째서 이렇게 가슴을 뛰게 할까. 꾸미지 않고 전하는 그 한마디가 어쩜 이토록 벅차오를까. 모든 가치가 땅에 떨어져도 변하지 않을 단 하나임을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렇게 믿도록 해 준 윤서경 때문일까.

유온은 서경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머리카락, 귀와 목, 너른 등을 두서없이 쓰다듬고 만졌다. 그러는 동안 키스는 입술에 종착하여 점점 깊어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벗겼다. 잠옷인 윤서경에 비해 유온은 외출복이었으나, 늘 그렇듯 서경은 유온의 옷을 벗기는 일에 능숙했다.

“음, 잠깐만요…….”

“기다리라고요?”

칭얼거리는 듯한 유온의 말에 윤서경이 보챔으로 대답했다. 유온이 눈을 가늘게 뜨자, 그는 유온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아래로 가져갔다. 성기가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다. 순간 확 붉어진 유온의 얼굴에 서경은 제 뺨을 가져다 댔다. 워낙 얼굴이 달아올라서 그의 뺨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기다릴까요?”

“그,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그럼 다행이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하기야 언제는 시간을 따졌던가. 윤서경의 말대로, 두 사람은 시, 신혼부부니까. 유온의 빨간 얼굴을 만지던 서경이 천천히 손을 내려 두 팔로 유온을 꽉 끌어안았다. 서로의 체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섞였다. 평온한 충족감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아주 달콤하게 욕정을 불러냈다.

다정한 알파의 입술은 유온의 온몸에 닿았다. 서경이 발끝에까지 키스했을 때 유온은 그대로 녹아내릴 듯 흐물흐물하게 나른해져 있었다. 윤서경은 발긋발긋하게 달아오른 유온의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옴폭하게 들어간 발 안쪽에 입 맞추며 그대로 가느다란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아……!”

놀란 유온이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서경이 그 사이에 자리를 잡는 게 더 빨랐다. 한쪽은 유온의 발목을, 한쪽은 허벅지를 움켜쥔 서경이 두 손을 지그시 침대 위로 눌렀다. 살이 조금 올라 한층 부드럽고 연해진 허벅지 살, 복숭아뼈가 도드라진 발목이 손에 착 감겼다.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한 밀부는 연한 색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서경이 가만히 빠끔거리는 입구를 바라보고 있자 그곳은 재차 왈칵 젖어 들었다. 살짝 벌어진 구멍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모습에 서경은 제 입술을 핥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창피함을 견디지 못한 유온이 호소했으나 서경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한참 더 유온의 아래를 바라보던 서경은 허벅지를 쥔 손을 스윽 미끄러뜨렸다. 새하얗고 여린 살결은 단단한 손끝에 눌리자 저항 없이 자국을 만들며 푹 들어갔다. 보들보들하고 연한 허벅지 안쪽 살의 감촉을 즐기며 지분거리던 윤서경은 그대로 분홍색으로 물든 구멍을 만졌다.

“자, 잠깐, 서경 씨. 잠깐만요…….”

윤서경은 대답하는 대신 유온의 발목을 놓고,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가냘픈 몸이 옆으로 살짝 기울어지면서 손이 서경의 앞섶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서경이 이끄는 대로 옷 위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성기를 손끝으로 만진 유온이 깜짝 놀라 손을 뗐다. 결혼한 지 1년, 몸을 섞은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유온은 매사가 수줍고 창피했다.

그가 불에 덴 것처럼 손을 오므리자 서경이 웃더니 옷을 벗었다. 이른 아침인데 두 사람 다 알몸으로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니. 물론, 집에서도 가끔 있는 일이지만……. 바다가 보이는 방향의 벽이 전부 유리라서 더욱 부끄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유리인 건 알지만, 그래도.

서경의 손이 다시 아래를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젖은 입구 주변만 만지작거리다가 유온의 몸에서 힘이 풀어진 순간 불쑥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온다. 유온은 몸을 흠칫 떨었다. 처음 서경의 신체 일부가 안에 들어오는 순간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야릇한 쾌감이 아랫배에 고여 뭉근하게 끓기 시작했다. 유온도 손끝으로 서경의 성기를 더듬어 만졌다. 힘줄이 불거진 성기는 프리컴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단단하고 뜨거웠다.

“뜨거워요.”

“당신도요.”

무심코 내뱉은 말에 대답이 돌아오는 바람에 유온의 얼굴은 더더욱 빨개졌다. 그런 유온을 가만히 본 윤서경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온의 몸을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랄 틈도 없이, 유온은 탄탄한 알파의 몸 위에 거꾸로 올라가 있었다. 내려가려 버둥거리는 유온의 허리를 윤서경이 안았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 여기 사진으로 찍어서라도 보여 주고 싶으니까.”

“……!”

당황으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 눈앞에는 흉흉하게 발기한 윤서경의 것이 있었다. 그리고 뒤는 완전히 그의 눈에 노출된 상태였다. 이런 자세는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창피함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지경이었다. 유온이 비틀거리자, 서경은 유온의 허벅지를 끌어안고는 대뜸 아래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읏, 아앗!”

촘촘하게 주름진 입구에 입술이 거세게 눌렸다. 서경은 몇 번 입술로 아래를 빨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도 입으로 해 줘요.”

“…….”

유온은 드물게도 원망 섞인 눈으로 서경을 노려보았지만, 제 몸에 가려져 제대로 그를 보기 어려웠다. 거의 울먹거리는 것에 가까운 상태로 유온은 서경의 성기 끝을 입에 넣었다. 입술 사이로 매끈한 귀두를 물어 할짝대며 빨자 서경도 다시 유온의 아래를 빨기 시작했다. 구음을 하면서 동시에 아래를 빨리는 건 이상한 감각이었다. 몸이 움찔움찔, 주체할 수 없이 튀었다.

“읍……, 흐, 응……, 후으…….”

아래쪽에서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점점 구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윤서경은 일부러 이렇게 소리를 내며 빨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무해, 창피해, 그런 생각이 마구 머릿속을 맴돌았다.

“으, 우……, 서, 서경 씨, 못 하겠…….”

결국 포기하고 입을 떼며 웅얼거린 순간 몸이 뒤로 끌려갔다.

“아, 아……!”

윤서경은 그대로 유온을 자신의 얼굴 위에 앉혔다. 동시에 혀가 구멍 안으로 들어온다. 입술까지 안으로 살짝 들어오는 감각에 유온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터뜨리며 휘청거렸다. 배 속에서부터 머리까지 꿰뚫는 듯한 절정이 온몸을 때렸다.

뒤에서 왈칵거리며 애액이 쏟아져 윤서경의 입술로,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벌벌 떨었다. 몸을 떼려 해 보아도 아래에서 서경이 단단히 허벅지를 틀어쥐고 있어 꼼짝할 수 없다. 요동치는 쾌감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리는 듯했다.

“하으윽, 으……, 아…….”

휘청거린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결 좋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흔들리면서 체향이 더욱 퍼진다. 절정에 이르렀음에도 윤서경은 유온을 놓아주지 않았다.

“자, 잠깐, 그만, 그만할래요, 저…….”

대답 대신 윤서경은 유온의 부드러운 살을 살짝 깨물었다. 그 자극에도 움찔움찔 몸이 떨렸다. 유온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떨기만 하다가 다시 한번 얕은 절정을 맞았다.

“흐으, 응, 읏…….”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눈앞에 귀두가 불거진 알파의 성기가 보였다. 저절로 혀 밑에 침이 고이는 듯했다. 유온은 느릿느릿 몸을 완전히 굽혀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래에서 서경이 꿀꺽, 뭔가를 삼키는 게 느껴졌다. 제 몸에서 나온 애액일 거라 생각하니 등줄기를 타고 짜릿함이 화르륵 번졌다.

유온은 검붉게 번들거리는 성기를 입에 물고 천천히, 조금씩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작고 좁은 입 안이 꽉 들어차서 벌써 숨이 막혔다. 그래도 끙끙거리며 성기를 삼키고 또 삼켰다. 목에 채 닿기도 전에 빼내기를 반복하면서 식도 안쪽까지 그것을 물자 묘한 만족감이 일었다.

“욱…….”

금방 견디지 못하고 구역질하며 입을 떼고 말았지만. 다시 입에 물려 하는데 갑자기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윤서경이 유온을 침대에 눕힌 것이다.

“……당신 때문에 정말 미칠 것 같아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서경은 유온을 옆으로 끌어안았다. 입술과 입가가 미끄러운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외설적인 모습에 유온이 입을 뻐끔거린 순간, 서경은 유온을 꽉 틀어 안고 흐물흐물하게 풀린 구멍에 제 것을 단번에 집어넣었다.

“아……! 아, 아, 아읏, 흑……!”

뿌리까지 완전히 들어온 성기가 안을 빠듯하니 채웠다. 내벽이 짓눌려 파들파들 떨리고, 배가 그 모양대로 불룩 튀어나와 있다. 유온은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서경의 손을 만나 매달리듯 그를 붙잡았다. 서경이 온몸으로 유온을 휘감아 안는다. 녹진하니 풀린 구멍은 갑작스러운 삽입에도 무리를 호소하지 않았다.

“유온 씨……, 유온아, 유온아.”

“으응……. 네…….”

서경은 유온의 귀에 대고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속삭였다. 유온 역시 똑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느릿하고 완만한, 그리고 모든 걸 충족시키는 섹스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 * *

깨어나자 유리창 밖으로 서서히 노을이 내려앉으려 하고 있었다.

“10분 정도만 있으면 아주 예쁘겠네요. 발코니로 나갈까요. 아니면 해변은 어때요?”

“해변이 좋겠어요. 모래도 밟고 싶고.”

“좋아요.”

태양이 수평선에 가까워질 때까지 잠깐 동안 어제 피곤해서 못 한 빌라 구경을 했다. 층고가 높은 빌라는 전면 유리창을 통해 바다가 시원하게 보였고, 침실에서 곧바로 발코니로 나갈 수 있었다.

자쿠지와 그늘막, 해먹, 비치 체어가 마련된 발코니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고, 계단 바로 옆에는 조각배가 얕은 파도에 흔들렸다.

전자 제품에서 와인 잔이나 티스푼까지 전부 최고급으로, 올인클루시브에 포함된 와인 셀러의 와인 역시 상당한 가격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어메니티도 부경이 이 리조트를 시작으로 최상급 호텔에만 공급하기 위해 명품 브랜드와 합작해 새로 만들어 낸 것으로, 지금은 이곳에서밖에 쓸 수 없으며 앞으로도 판매 예정은 없다고 한다.

터미널 라운지에서 객실까지 얼마나 꼼꼼하게 정성이 들어갔는지, 그래도 근 2년쯤 서경이 일하는 걸 지켜보고 계열 호텔에도 많이 가 보아 눈이 높아진 유온에게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첫 번째 투숙객들이 다녀가고 나면 오너라 하더라도 이 리조트의 공실은 좀처럼 구할 수 없게 되겠지.

조금 아쉬운 기분이다. 벌써 또 오고 싶어졌기에. 그러자 윤서경은 놀랍게도 유온의 생각의 흐름을 순식간에 파악하고는 말했다.

“이 객실은 우리만 쓰는 게 어떻습니까?”

“네? 우리만?”

“그래요. 1년 내내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올 수 있도록.”

“그, 그래도 돼요?”

“당신이 싫다면 어쩔 수 없고요.”

유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요?”

“네. 당신이 오너니까, 당신 허락이 없으면 안 되죠.”

“아.”

그랬다. 이 리조트는 유온의 것이었다……. 왜 서경이 직접 나서서 이렇게까지 꼼꼼하고 아름답게 꾸몄는지 알 것 같았다. 얼굴이 약간 붉어진 유온은 잠시 고민하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뭘요.”

또 어린애들처럼 장난스럽게 킥킥거리다 해변으로 나섰다. 빌라에서 해변까지는 낮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노을이 지는 해변에 도착하자 발에 밟히는 산호모래의 따뜻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유온은 서경과 손을 잡고 천천히 해변을 걸었다.

조용한 파도 소리, 미지근하고 습한 바람, 탁 트인 하늘. 얕게 밀려온 파도가 발을 적셨다. 하루 종일 뜨거운 햇빛을 머금은 바닷물은 그리 차갑지 않아서 기분 좋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수평선 근처는 짙은 분홍빛으로, 하늘은 보랏빛으로. 새털구름과 야자수의 그림자가 하늘을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만들어 놓았다. 주홍빛이 햇살이 해변까지 파도를 따라 밀려와 마치 무지개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한참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았다. 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해가 사라진 후에도 하늘은 여전히 다채롭게 아름다운 색이었다. 겨우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윤서경을 바라보자, 그는 언제부터였는지 이미 유온을 보고 있었다.

“…….”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유온은 붉어진 얼굴을 석양 탓으로 돌리며 주뼛거리다가, 발끝으로 서경의 드러난 발목에 물을 툭 끼얹었다. 충동적인 장난이었다.

서경이 눈썹을 치켜뜨며 웃더니 똑같이 발로 물을 튕긴다. 하지만 유온이 끼얹은 양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유온도 똑같이 물을 발로 찼다. 거기서 시작된 물장난은 두 사람이 다 바닷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둘 다 물속까지 들어간 상태에서 어영부영 끝났다.

어느새 해는 다 저물어 주위가 어두웠다. 윤서경은 물기에 젖은 유온의 뺨을 감싸고 입 맞췄다. 입술에 묻은 짭짤한 바닷물 맛이 느껴졌고, 해가 저물었는데도 여전히 온기 있는 바람이 불었다. 야자수 잎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파도 소리, 멀리 리조트 본관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밤을 맞이하며 켜진 조명이 별빛 같았다.

따뜻하고, 행복했다. 이제 눈은 전부 녹았다. 지상에는 총총한 별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꽃비가 내리는 듯한 봄이었다.

보너스 트랙

윤영인, 5세. 또래보다 많이 똑똑하고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주위 어른을 걱정시키는 어린이. 이 어린이는 지금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결혼기념일.’

영인은 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3살 때 알았다. 처음엔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는 날인 줄 알았지만, 4살이 되었을 때 아빠들의 대화를 듣고 그게 두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날임을 깨닫게 되었다. 윤영인 어린이는 고민하다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겨연기념일이 뭐에요?’

4세 1개월 아동에게 아직 결혼이라는 발음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은 쉽게 그 말을 알아듣고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영인이 부모님이 결혼식 하신 날을 기념하는 하루야.’

‘영인이는 아빠들 겨연 못 봤는데. 영인이 빼고 했어요?’

‘아니. 그때는 아직 영인이가 안 태어났었대.’

그렇구나. 영인은 아빠들이 결혼하고 몇 년 후에 태어났다. 유온 아빠가 몸이 많이 약해서 영인을 낳을 준비를 하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이 몇…… 몇 번째 결혼기념일이라고 했더라? 영인은 조막만 한 손으로 숫자를 셌다. 헷갈린다. 아무래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 일이라서 그런가.

태어나기 전이란 뭘까. 자신은 분명 여기에 있는데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시간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이 고민을 어른들에게 말했을 때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유온 아빠는 ‘그러게…….’ 하며 같이 고민해 주었고, 서경 아빠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아빠가 아직 안 태어났을 때도 세상은 잘 굴러갔어. 어쩌면 그때도 이상한 일이 많았었는지도 모르지.’ 하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또 할머니는 ‘너 정말 유온이랑 생각하는 게 똑같구나!’ 하며 깔깔 웃으셨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은 질문의 실증(實證)(윤영인은 며칠 전 두꺼운 책에서 이 단어를 배웠다)보다는 현실에 당면(이 단어도)한 문제가 더 중요했다.

‘아빠들 결혼기념일 선물.’

이걸 생각하게 된 것은 고모가 보낸 선물이 조금 이르게 집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는 화환과 와인이었다. 유온 아빠가 화환의 꽃을 거실에 장식하는 걸 보면서 영인은 생각했다. 나도 아빠들한테 결혼기념일 선물을 줘야지!

근데 뭘 주지?

몸보다 큰 머리를 조그마한 손으로 괴고 테이블에 앉은 채 영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앞에는 곰돌이 노트와 아빠가 깎아 준 연필이 있었다. 노트에 쓰인 내용은 카네이션, 로봇 펭귄 타요핑, 책, 반지였다. 그중에 카네이션과 로봇 펭귄 타요핑, 책에는 취소선이 직직 그어졌다.

카네이션은 어버이날에 드리는 것이다. 로봇 펭귄 타요핑은 아빠들보단 자신이 가지고 싶은 물건이었다. 책은 집에 많고, 책 관리해 주는 누나가 알아서 좋은 책을 가지고 온다. 마지막에 남은 건 반지였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윤영인 어린이는 아빠들의 허락하에 전체 관람가인 영상 매체를 접하곤 했다. 아직 5세였기에 얼른 8살이 되어 8세 이상 시청가 프로그램을 보는 게 작은 소망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반지를 나눠 가지지 않는가. 이미 아빠들은 반지가 여러 개 있지만, 음…… 그래도 영인이가 준 반지는 없잖아.

한참 고민한 후 영인은 반지에 동그라미를 치고 별표까지 땡땡 그렸다. 아마 유온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는 아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선물을 결정한 영인은 쪼르르 제 방으로 올라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영인이 받은 용돈이 든 작은 하늘색 목걸이 지갑이 있었다.

‘영인이는 돈 많아.’

실제 가족들이 윤영인에게 떼어 준 재산이 얼마인지는 물론 알지 못하는 영인이다. 해서 이는 다른 의미로 진실이었으나, 영인이 말한 ‘많은 돈’은 명절이나 생일에, 또는 뭔가 잘한 일이 있었을 때 다른 아이들처럼 받는 지폐 몇 장이었다.

하늘색 지갑에서 지폐를 꺼낸 영인은 그것을 책상에 펼쳐 놓고 한 장씩 세어 보았다. 돈을 받으면 아빠들이 주기적으로 영인의 통장에 입금해 주기 때문에, 지금 가진 건 만 원짜리 열 장과 오만 원짜리 두 장이었다. 이, 이십만 원!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이 정도면 아빠들이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 끼는 그 엄청 반짝반짝한 반지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여타 재벌집 아이들과 달리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영인의 금전 감각과 기준은 딱 5세 아동의 그것이었다. 통장에 더 돈이 많이 있는데. 엄청, 엄청 많은데. 그 통장은 유온 아빠가 가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

가서 달라고 하면 주겠지만, 어디에 쓸 거냐고 묻겠지? 그럼 대답할 말이 없을 거고. 영인은 거짓말을 잘 못한다. 사실 거짓말해 본 적도 몇 번 있는데 매번 들켜서 혼이 났기 때문에 안 하기로 했다.

무려 이십만 원이 든 지갑을 들고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온 영인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이정윤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년에 유온 아빠가 서경 아빠와 상의해서 사 준 소중한 휴대폰이었다. 영인의 손으로도 잡고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자그마했다.

―네, 이정윤 실장입니다.

“윤영인입니다.”

혀 짧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정윤이 전화 너머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야, 영인아?

“누나, 영인이 밖에 나가야겠어요.”

―밖에? 왜, 어디 가려고?

“비밀인데…….”

―누나한테도 비밀이야? 비밀이면 누나가 같이 못 가 주잖아.

그렇다. 비밀인데…… 같이 나가 줄 정윤에게는 말을 해야 한다. 또 같이 나갈 경호원에게도. 눈알을 굴리던 영인은 다짐했다.

“그럼 만나서 말할래요. 그리고 한영이 형아도 같이 갈래요.”

한영이 형, 성한영 실장. 그는 형아라는 호칭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영인에게 ‘성 실장님’이라는 발음은 너무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경호원이 따라와야 하는 거, 자신이 제일 잘 아는 두 사람과 가는 게 나았다. 그렇게 당차게 두 사람을 불러들인 영인은 얼굴을 보자마자 당부부터 했다.

“아빠들한테 비밀이에요! 비밀로 하고 나갔다 와요!”

“그럼 안 되는데.”

“안 돼.”

이정윤과 성한영이 동시에 말했다. 영인은 답답해하다가 손짓발짓까지 해 가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빠들의 결혼기념일이다. 선물을 사고 싶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다. 설명 끝에, 두 사람은 한참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가 결국 허락했다.

“반지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벨트 매요, 아기 도련님.”

“영인이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 싫어요.”

“그러니까 벨트 매라고. 반지?”

운전대를 잡은 정윤이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성한영이 영인을 끌어당겨 뒷좌석 벨트를 맨 채 앉혔다.

“영인이, 돈 많아?”

“돈 많아요. 영인이 돈…… 이십만 원 있어요.”

“우와, 진짜 많다.”

정윤은 재빨리 룸미러를 통해 성한영과 눈을 마주치곤 눈빛을 교환했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당연히 영인이 무슨 반지를 고르건 이십만 원만 지불하고 신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집안의 교육 지침과 어긋나는 일이었고 영인이 바라는 바도 아닐 터였다.

“응?”

뭔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주위를 슬슬 둘러보며 운전하던 이정윤의 눈에 우연히도 작은 간판이 들어왔다.

[프리저브드 플라워 반지 원데이 클래스]

“……!”

이정윤은 핸들을 스르륵 꺾어 물 흐르듯 간판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부동산과 편의점 사이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꽃집. 통유리창 안쪽은 긴 책상과 동그란 의자 여러 개가 놓여 있고, 솜씨가 각기 다른 작업물이 장식되어 공방 느낌이 났다.

“영인아, 저거 어때? 꽃반지래.”

“좋아요!”

영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빠들은 모두 꽃을 좋아한다. 꽃반지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영인은 이정윤과 성한영 사이에 끼어 쫄랑쫄랑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저 수업은 혹시 언제 진행하나요?”

“어서 오세요. 꽃반지 수업 말씀이세요?”

“네.”

꽃집 주인이 영인의 얼굴과 지갑을 야무지게 움켜쥔 두 손, 반짝거리는 눈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가능해요. 부모님이신가요?”

“아니요, 사촌 동생이에요. 이 애 부모님이 며칠 후에 결혼기념일인데,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아, 귀여워라. 이쪽으로 앉으세요.”

원데이 클래스는 재료비까지 포함해 3만 원, 반지 두 개를 만든다고 하니 5만 원이었다. 영인은 이정윤과 성한영에게도 수업을 권했으나 두 사람 모두 정중하게 거절한 뒤, 의자에 앉아 영인이 반지 만드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을 유온과 서경에게 보여 주기 위해 동영상으로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2시간 정도 지났을 때, 영인이 와 소리를 내며 손을 들었다. 옆에서 꼼꼼하게 가르쳐 주고 있던 꽃집 주인이 짝짝 박수를 쳐 주었다. 영인의 앞에는 귀여운 꽃반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반지의 모양은 조금 서툴렀지만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꽃집 주인은 서비스라며 꽃다발까지 하나 만들어 영인의 품에 안겨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의 유명한 과자 가게 앞에 셋이 같이 줄을 서서 케이크와 쿠키를 샀고, 이제 남은 건 두 아빠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영인은 숫자 초 대신 산 귀여운 동물 모양 초 세 개를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신중하게 꽂고는 직접 그릇까지 꺼내어 쿠키를 세팅하고, 꽃다발을 놓고,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손수건을 깐 뒤 그 위에 꽃반지를 놓았다. 반지는 매듭으로 크기를 조절할 수 있으니 두 아빠의 손가락에도 꼭 맞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결혼기념일은 이보다 며칠 후였으나, 그때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해 주고 싶으니 오늘 해 버리자는 마음이었다. 영인의 배려심은 유온을 닮았다. 유온과 다른 건, 그렇게 배려할 때 자신을 뒤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른들은 영인의 아이답지 않은 배려심을 걱정했지만, 사실 그 배려는 영인 자신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이 방에서 노는 것보다 저 방에서 노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더 좋다면, 저 방에서 노는 쪽을 선택하는 것뿐.

영인은 테이블 앞에 턱을 괴고 앉아 발끝을 까딱거리며 아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루 종일 자신을 따라다녀 준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귀여운 모습을 보며 돌아선 이정윤과 성한영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이정윤은 유온에게, 성한영은 윤서경에게. 케이크의 크림이 녹아 버리기 전에 두 아빠는 꼭 집에 돌아와야 했으니까.

케이크와 꽃을 보고, 그리고 꽃반지를 보고 깜짝 놀랄 두 사람이 떠오르자 이정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 진짜 행복하겠다.”

문을 닫고 나오며 이정윤은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의 행복이 옮아와 자신까지 잔뜩 뿌듯해진, 그런 얼굴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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