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4
윤서경은 꿈을 꿨다.
어린 유온이 나오는 꿈이었다. 열한 살쯤 되었을까. 그 어린아이가, 집 마당으로 쫓겨나 잠옷에 맨발로 서 있었다. 하늘에선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다가 점점 강해지고, 그렇게 눈이 오는데도 따뜻하게 불을 밝힌 집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온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유온은 바로 곁에서 자고 있었다. 꿈이었군. 다행이다. 한숨을 내쉬자 유온이 부스스 눈을 떴다. 따스한 겨울 햇살이 유온의 잠기운 서린 얼굴에 맺혔다.
“음……. 일찍 일어났네요, 서경 씨…….”
문득 꿈 생각이 났다. 윤서경은 유온의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유온 씨, 혹시 어릴 때…… 부모님이 겨울에 마당에 세워 놓은 적도 있습니까?”
“으응? 네……. 그런 건 멍이 안 남으니까…….”
잠이 덜 깬 유온은 술술 대답했다. 윤서경은 말없이 유온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이틀 후, 유온을 안고 잠이 든 윤서경은 또다시 꿈을 꾸었다. 눈을 뜨자 자신의 방이었다. 지금 쓰는 안방이 아니라, 본가에서 지내던 방. 무심코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자 지금보다 훨씬 어린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꿈이라는 건 바로 알았다.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거울 속 자신은 대강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스물이라는 나이를 짐작하고 나니 며칠 전 꿈에 나타났던 어린 이유온이 떠올랐다. 마르고 자그마해서 더 어리게 보이긴 하지만, 대략 열한 살 정도였다.
처음 시간이 돌아간 걸 알았을 때 윤서경은 생각했다. 기왕이면 더 어릴 때로 돌아가면 안 됐던 건가. 이유온을 아예 그 가족으로부터 데리고 나와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 줄 수 있게.
지금 꿈에서나마 그 바람을 이룰 수 있는 걸까.
윤서경은 곧바로 튀어 나가 어머니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른 아침부터 업무를 보고 있던 어머니가 어쩐 일이냐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으면 해요, 어머니.”
“뭐?”
어머니의 얼굴이 기괴해졌다.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머니는 순간 막내아들이 미친 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면 뭐 어떤가. 어차피 꿈이다.
“화명그룹 막내아들인데,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들었어요.”
어머니는 내내 미심쩍은 기색에, 사실이라 하더라도 데리고 오는 것까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듯했으나 역시 꿈은 꿈인지 윤서경이 밀어붙이자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한겨울, 눈 예보가 있던 날. 이유온은 표독한 표정을 한 제 엄마의 손을 잡고 윤서경의 집으로 찾아왔다.
“신기한 꿈이네요.”
마주 앉아서 아침을 먹고 있던 유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꿈은 대문이 열리고, 어린 유온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끝났다. 유온의 어머니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어린 당신을 우리 집에서 키웠다면 어땠을까.”
“어쩌다 그런 생각을…….”
빵을 뜯던 유온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시간이 돌아왔을 때 말입니다. 기왕 돌아갈 거 더 좋은 시점으로 가면 안 되나, 했던 거죠. 내가 욕심이 좀 많잖아요?”
유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상황에도 충분히 감사하는 유온과 달리 윤서경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가능했다면 유온을 아예 다른 집에 태어나게 하고 싶었다. 뭐, 태를 바꾸는 거야 불가능하니 막 태어난 걸 훔쳐서 아이가 귀한 다른 집에 데려다 놓는다거나.
어쨌든, 두 사람 다 그때까지는 이 꿈을 그저 재미있는 일로 치부했다.
“몸에 큰 이상은 없다는구나. 그런데 확실히 가정 폭력은 있었어. 아직 안 나은 멍이 어찌나 많던지.”
“보셨어요?”
“환자복 사이로 살짝. 그리고 또래 애에 비해서 너무 얌전하고. 넌 도대체 그 아이 사정을 어떻게 안 거니? 그리고, 어쩌고 싶어서 데리고 오자고까지 했어?”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윤서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결혼하려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신이 나갔구나?”
“……왜요.”
“몰라서 묻니, 이 철면피 도둑놈아.”
제가 생각해도 스무 살의 자신이 열한 살의 오메가를 데리고 와서 미래의 결혼 상대로 점찍어놨다고 하면 쓰레기, 미친놈, 파렴치한 새끼로 낙인찍을 것 같다. 하지만 윤서경의 입장에선 과거로 왔을 뿐 이유온은 미래의 제 배우자가 맞았다. 만나는 시점이 열한 살일 뿐이지……. 물론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인 건 변하지 않지만…….
그날 저녁, 이런저런 검사를 마친 유온이 윤서경의 집으로 왔다. 가족들은 생각보다 스무스하게 낯선 손님을 받아들였다. 과연 꿈인지라 윤서경의 의지가 개연성보다 위에 있는 듯했다.
“방으로 데려다줄……게.”
무심코 존대를 쓸 뻔한 윤서경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열한 살 아이에게 유온 씨라고 부르며 존대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유온의 방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초등학생이 쓰기에 딱 좋은 느낌으로.
어린 유온은 서너 살, 어쩌면 그보다 어릴 때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받은 정황이 있었다. 심리 검사에서도 굉장히 안 좋은 소견이 나왔다. 몸도 아직 크게 망가진 곳은 없지만, 곳곳에 생채기가 있고 건강한 편도 아니었다.
아이가 다닐 학교와 심리 상담센터를 고르고, 정기적인 병원 검사를 잡고, 윤서경의 집안은 본격적으로 유온을 돌봐주기 시작했다.
그날의 꿈은 거기서 끝이었다. 상담 센터에 가는 유온을 배웅하면서.
이렇게 이어지는 꿈을 꾼 건 처음이다. 신기한 기분으로 누워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옆에서 유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윤서경도 놀라서 덩달아 일어났다.
“왜 그래요?”
“서경 씨, 오늘도 그 꿈 꿨어요?”
“그 꿈이요?”
“어린 절 데리고 오는 꿈이요.”
“네.”
그러자 유온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저도 꿨어요! 전 꿈이라는 건 몰랐지만.”
“당신도?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유온은 심리 상담을 가고, 병원에 가고, 마지막에 윤서경의 배웅을 받은 것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둘이 다른 입장에서 같은 꿈을 꾼 것이다. 신기했지만 엄청나게 놀랍진 않았다. 죽었다가 시간을 돌아와서 다시 살고 있는데, 겨우 꿈 하나 같이 꾼 정도로 놀라겠는가.
“신기해요…….”
“꿈에서 기분이 어땠습니까?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죠?”
“네……. 꿈에서…….”
유온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몸을 쭉 뻗어 윤서경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경 씨가 멋있었어요.”
윤서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곤, 역시나 웃음기가 그대로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다행이네요.”
다시 며칠 후. 꿈속에선 시간이 얼마간 흘러 있었다. 이유온이 중학교에 입학했고, 입학식을 전후로 일주일 동안 윤서경은 출장을 다녀왔다. 꿈인데 이런 것까지 현실적인 필요는 없지 않나? 짐을 풀고 있는 윤서경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네.”
문이 빼꼼 열리고 고개를 내민 건 유온이었다.
“들어가도 돼요?”
“그럼. 이리 와.”
윤서경은 습관처럼 두 팔을 벌렸다. 유온도 자연스럽게 와선 윤서경에게 폭 안겼다가 떨어졌다 또래 중학생보다도 한참 작은 체구는 품에 쏙 들어오고, 윤서경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저…… 학교에서 친구 사귀었어요.”
“벌써?”
가족의 학대로 더 심각해지긴 했지만, 유온은 원래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입학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친구를 사귀었다니 기특한 일이었다.
“용돈은 안 모자라고?”
“네. 괜찮아요. 아.”
진동 소리가 들렸다. 유온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친구라고 중얼거렸다. 눈이 반짝이는 걸 보면 친구라는 건 사실인 듯했다.
“저는 나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윤서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온은 방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음 날, 유온은 근처에 사는 친구와 함께 등교했다.
비서에게 알아보게 하니, 유온은 금세 중학교에 적응했다고 한다. 학교생활도 아주 잘하고 있다고. 윤서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현실에서도 가족만 없었더라면 유온은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유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럽니까?”
“꿈에선 친구 사귀는 게 너무 쉬워서요……. 원래는 따돌림당했거든요. 꿈이라서 그런 걸까요?”
윤서경은 가만히 유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닙니다. 당신이 학교 다닐 때는, 당신 형들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던 거예요.”
이유건과 이유연은 여러 방법으로 유온이 학교에서 고립되도록 만들었다. 이유건은 유온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이유연은 유온을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아…….”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다행히 유온은 안도한 듯 웃었다.
“그렇구나……. 전 제가 너무 모자라서 그런 줄 알았어요. 큰형이 늘 그랬거든요. 따돌림은 당할 만해서 당하는 거라고…….”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윤서경은 유온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상황이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지금 얼마나 잘하고 있습니까?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성적도 좋고.”
“그건…….”
유온이 작게 웃으며 윤서경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입가에 뿌듯한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참……. 서경 씨는 꿈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어요?”
“네.”
유온은 꿈인 것도 자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럼, 혹시 또 이런 꿈 꾸면요, 상황이 맞으면, 학부모 참관에 와 주시면 안 돼요?”
“학부모 참관?”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알겠어요, 가겠습니다.”
유온이 웃으며 윤서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학부모 참관에 아무도 온 적 없는 것도 아니고, 좋은 기억이 없다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가족이 유온의 학교에 가서 무슨 행패를 부린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좋은 기억으로 덮어 주고 싶었다.
다시 꿈.
이유온은 고등학생이었다. 많이 자라서 지금과 비슷한 얼굴이다. 윤서경은 어머니, 누나와 함께 그의 학부모 참관 수업에 가고 있었다.
교실에 도착해서 뒤쪽에 서자 자기 부모가 왔는지 확인하느라 흘끔대는 학생들 사이로 유온의 얼굴이 보였다. 세 사람을 확인한 유온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진다.
수업은 순조로웠다. 유온은 자기 몫의 발표를 잘했고 친구들과 조금씩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담임 선생님과 면담이 있었다. 유온에 대한 평가는,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급우들과도 잘 어울리고…… 등등, 좋은 것들뿐이었다.
그대로 잠에서 깨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눈을 깜빡이자 시간이 이동한 것에 가까웠다. 12월 31일, 유온의 성년을 앞둔 밤이 되었다.
결국 성인이 될 때까지 꿈이 이어지다니. 윤서경은 제 방에서 술을 한잔하며 느긋하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손님이 문을 두드린 건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형.”
유온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리 들어와.”
반갑게 맞이한 윤서경은 유온에게 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유온은 어딘가 어색한 기색으로 거기에 앉았다. 윤서경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유온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성인이네.”
“…….”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였다. 윤서경은 새 유리잔을 꺼내 유온의 앞에 놓아 주고, 냉장고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찾아왔다.
“성인 된 기념으로 조금만 마실까.”
유온은 아예 술을 못 마셨었지만, 몸이 회복된 지금은 한두 잔 정돈 괜찮았다. 지금은 꿈속이고 유온이 훨씬 건강하기도 하니까 더욱. 그렇게 무사히 성인이 된 걸 기념해 주고 싶었다.
째깍, 자정이 되었다. 윤서경은 유온의 잔에 술을 아주 조금 따랐다.
“유온아, 축하…….”
“형.”
“……응?”
“저 이제 성인이니까…….”
“…….”
“회장님한테 들었어요. 형, 저랑 결혼하려고 데리고 온 거라고요.”
어머니, 애한테 무슨 말을 하신 거예요.
당황해서 굳어 버린 윤서경에게 유온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윤서경의 무릎 위에 앉았다.
“유온…….”
“형, 좋아해요.”
“…….”
“형……. 서경 씨.”
서경 씨라니. 아찔해진 윤서경이 유온을 떨어뜨리며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서경 씨……, 서경 씨.”
“…….”
눈을 뜨자 가장 익숙한 유온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꿈에서 깼군. 여러 의미로 아찔한 꿈이었다. 윤서경은 유온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서경 씨, 혹시…….”
“네?”
“꿈에서…… 아무것도 안 했죠?”
“안 했습니다.”
딱 잘라서 말하자 유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더 빨리 깼습니까?”
“비슷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화낼 뻔했어요.”
“화?”
“꿈속이라도 그건 제가 아니잖아요. 아니, 제가 맞긴 하지만, 뭐랄까…….”
윤서경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요, 제법 심각하게 화가 났던 모양인 유온이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여전히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설마, 당신이 있는데 내가 그럴 리 있습니까. 난 그저……. 당신을 그렇게 어릴 때부터 데리고 와 돌봐 줬다면 당신이 더 행복했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꿈도 꾼 거고.”
“…….”
“당신 말대로, 꿈에 나온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요.”
“……바람피우면 안 돼요.”
“그럼요.”
“그런데…… 제가 꿈에선 다르게 불렀잖아요.”
“그랬죠. 색다르더군요, 당신한테 들을 일이 없는 호칭이다 보니까.”
꿈에서 유온은 윤서경을 형이라고 불렀다. 냅다 결혼부터 한 데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유온이 그를 형이라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품에 안겨 있던 유온이 우물쭈물하다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형.”
“…….”
“……서경이 형.”
“이런.”
윤서경은 곧바로 유온의 몸을 끌어안고 뒤집어 그 위에 올라탔다. 형이라고 불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몰렸다. 유온은 손을 뻗더니 윤서경의 뺨을 어루만졌다.
“덕분에 학교를 다시 다닌 것 같아서 즐거웠어요.”
“글쎄요, 내 덕분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도요……. 그리고.”
유온이 두 팔로 윤서경을 끌어안았다.
“전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윤서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네,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유온의 입술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