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유온이 집에서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말에 평정을 유지할 재주 같은 건 윤서경에겐 없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게 아니었고, 태아도 무사했다. 모든 검사를 꼼꼼하게 마치고 잠든 상태라는 유온을 들여다보며 윤서경은 긴 숨을 내쉬었다.
병원 침대에 이렇게 누운 유온의 모습은 되도록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전부 정상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면 자신도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기분 탓인지 창백해 보이는 유온의 뺨을 쓰다듬었을 때였다. 유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유온 씨.”
안도하며 이름을 부르던 윤서경은 곧,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
“유온 씨?”
“제, 제가 또 병원에, 죄, 죄송, 죄송해요.”
“…….”
멍하니 뜨였던 이유온의 눈이 초점을 찾은 순간, 그 눈에 담긴 건 두려움이었다. 윤서경은 곧바로 일어나 의사를 찾았다.
* * *
“기억 상실이라고요?”
“정확히는 기억 혼란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MRI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큰일은 아닐 겁니다.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아무 문제도 없는데 기억 혼란이 왜 옵니까!”
화를 내는 윤서경을 진정시키듯 의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드문 일이 아닙니다. 사고 순간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기억을 잠시 잠재워 버리는 거라고 할까요.”
“계단에서 구르는 게 그렇게 충격적입니까? 정말 뇌에 문제가 있는 건.”
“어떤 사고가 되었든, 임신 중이시니까요. 심하게 놀라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뭐라 더 말하려던 윤서경은 입을 다물었다. 임신까지 한 유온이다. 주치의가 어지간히 꼼꼼히 검사했을까. 또 사고 순간을 잊기 위해 일시적으로 기억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윤서경도 자주 들었다.
다만 문제는 유온의 기억이 다소 특이하다는 것에 있었다. 유온은 윤서경과 함께 죽은 뒤 과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반응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의 기억은 죽기 전으로 가 버린 듯했다.
윤서경과 어떤 소통도 되지 않고 한없이 외롭기만 하던 그때로.
가슴이 답답했다. 윤서경은 의사와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뒤 병실로 돌아왔다. 침대를 세운 채 멍하니 앉아 있던 유온이 깜짝 놀라 윤서경을 보았다.
“죄, 죄송해요, 제가,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압니다. 죄송하다고 하지 말아요.”
윤서경은 유온의 머리를 쓸어내리려 했다. 손을 뻗은 순간 유온이 온몸을 움찔거리지 않았더라면. 멈칫했으나, 이대로 손을 거두는 것도 이상했다. 유온이 더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머리를 쓸어 주었다. 유온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도 일어났다는 듯이 윤서경을 보았다.
젠장, 대체 어떻게 대했길래 이래.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답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때린 기억은 없는데…… 아마 맞을까 봐 놀란 건 이유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유온의 이 겁먹은 태도에 제 탓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사 말로는 기억 장애라고 하더군요.”
“기억…… 장애요?”
“네. 어디까지 기억납니까?”
윤서경은 유온이 더 겁을 먹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는 윤서경 본인도 혼란스러운지라 표정까지 완전히 풀리진 못했지만, 다행히 유온은 약간이나마 긴장이 누그러진 듯도 했다.
“어, 오늘이 4월 5일인 거…….”
“오늘은 11월 8일이에요.”
유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윤서경이 손짓했다.
“계속 말해 봐요.”
“그, 그리고 내일 주치의 선생님 만나고, 형도 보고 오기로…….”
4월 5일, 주치의. 윤서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작은 표정 변화에 유온은 또 금세 주눅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윤서경이 얼른 표정을 풀고 다정하게 물었다.
“혹시, 요새 머리가 아픕니까?”
“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머리가 아픈 건 계단에서 넘어진 상처 때문입니다. 다른 병이 있는 게 아니라.”
가만히 설명하며 윤서경은 유온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먹을 쥐었다. 하필이면 돌아간 기억이 최악의 때였다. 유온이 죽기 얼마 전. 윤서경에 대해서 가장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때. 윤서경은 차분히 설명했다.
“잘 들어요, 유온 씨. 당신과 나는 결혼식을 다시 올렸습니다. 당신 가족들은 외국으로 나가서 당신과 다신 만나지 않기로 했고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임신 중입니다.”
“…….”
유온은 순식간에 멍해졌다. 대답도 한 템포 느렸다.
“……네?”
“우리가 제대로 된 부부가 되었고, 당신은 우리 아이를 임신한 상태입니다. 오늘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태아는 아주 안정적이라고 하고요.”
여전히 유온은 멍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새카만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조금도 반갑지 않은 한 마디였다.
“죄송해요.”
“…….”
이어 점점 유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 임신이라니……,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라면, 제가…….”
“유온 씨.”
“…….”
“아무런 사정도 없었어요. 유온 씨와 내가 서로 사랑해서 아이를 가졌습니다. 유온 씨의 가족은 합의하에 당신과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했고, 당신이 임신한 일에 가족의 개입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결혼한 것에도 마찬가지고요.”
윤서경은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느리고 부드럽게,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유온에게 현실을 들려주었다. 그래도 좀처럼 유온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이 그날에 머물러 있다면, 말 몇 마디 한다고 쉽사리 믿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제가…….’
다음에 이어질 말은 무엇이었을까. 뭐든 엄청나게 자기 파괴적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선 집으로 갑시다. 퇴원해도 된다고 하니까.”
“네…….”
넘어지며 다친 이마의 찰과상과 무릎, 팔의 멍 말고 다른 상처는 없었다. 다행히 계단을 다 내려와서 넘어진 모양이었다. 기억 혼란 말고 다른 문제는 없으니 퇴원해도 좋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 익숙한 환경에 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집에 돌아온 유온은 더욱 어색한 얼굴을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집은 전생에 살던 그곳이 아니고, 유온에게는 처음 보는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유온은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윤서경은 천천히 다가가 유온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유온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납니까? 아니, 내가 개새끼처럼 굴던 기억만 나나요?”
“개…….”
갑작스런 폭언에 유온이 입을 벌린 틈에 윤서경은 그 입술에도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같이건, 따로건 집에 돌아오면 항상 키스부터 했잖아요. 그것도 기억 안 나요?”
“…….”
이제 유온의 얼굴은 망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넋이 나간 유온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한 번 더 입 맞추자, 눈가부터 시작해 귀와 목까지 물이 번지듯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멍하니 있는 유온 앞에서 윤서경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팔을 내밀었다. 정신이 없는 상태로도 유온은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서 윤서경에게 주었다. 그러곤 제 행동에 스스로 더 놀라 흠칫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정리할게요.”
“우리 옛날에 약속한 게 하나 있는데요.”
“네……?”
“괜히 죄송하다고 한 번 말할 때마다 호텔 직원이랑 5분 동안 대화하기로요.”
“오, 오 분…….”
지금의 유온에게도 어색하게 긴 시간일 터다. 과연 과거의 유온은 얼굴이 파래졌다 빨개졌다 난리를 쳤다.
“원래 늘 이랬습니다. 옷은 내가 들어가서 정리해 두고, 그동안 당신은 먼저 씻고.”
“괘, 괜찮아요. 제 방 어딘지 알려 주시면, 제가 할게요.”
“당신이랑 나는 드레스 룸을 같이 씁니다.”
“드레스 룸을 같이 쓴다고요……?!”
“방도 같이 쓰고요. 당연히 침대도.”
“그…….”
“어서 올라가요.”
윤서경은 유온의 등을 살살 밀었다. 떠밀리듯 계단을 올라간 유온은 안방 욕실까지 죽 들어갔고, 윤서경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옷을 의류 관리기에 집어넣은 뒤 그는 액세서리 수납장에 한 손을 짚고 섰다. 유온의 상태가 불안했다. 저 시기는 유온이 병으로 죽기 직전으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최악이던 상황이다.
휴대폰을 꺼낸 윤서경은 이한영에게 내일부터 모든 일정을 최소화하라고 전달한 뒤 욕실로 향했다. 유온의 사고 소식을 아는 이한영에게서 알겠다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유온은 탈의실에 등을 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고개가 조금 숙여진 채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유온이 저렇게 말없이 서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다가가 어깨를 잡자 유온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요?”
“그게…….”
생각보다 유온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안도한 윤서경의 시선이 살짝 들린 유온의 왼손으로 향했다. 유온은 반지를 쳐다보던 중이었다.
“이 반지…….”
“우리 결혼반지입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윤서경은 얼른 제 왼손을 내밀었다. 누가 보아도 한 쌍인 결혼반지가 두 사람의 약지에서 각각 반짝였다.
“반지는 같이 고른 거고, 예물 시계는 당신이 골라 줬습니다. 시계도 보러 갈까요? 드레스 룸에 있어요.”
“아, 아니에요.”
반지의 효과는 꽤 좋은 듯했다. 유온의 얼굴이 제법 풀어졌다.
“어지러울 수 있으니까 씻겨 주겠습니다.”
뜨거운 물을 맞았다가 갑자기 현기증이라도 일으키면 곤란했다. 당연히 씻겨 줄 생각으로 옷을 벗으라고 하자, 유온은 한참 우물거리다가 겨우겨우 셔츠를 벗곤 한 팔로 몸을 가리며 웅크렸다.
“……유온 씨?”
몸을 감추려는 듯한 그 움직임에 의아했다가, 곧 깨달았다. 이맘때쯤 유온은 이유건을 만나고 왔다. 아직 제 몸에 멍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온 씨.”
“…….”
“잘 봐요. 멍은 없습니다. 당신 형을 최근에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 다신 만나지 않을 거고요.”
유온은 모르지만, 이유건은 죽었다. 죽은 사람이 무슨 수로 와서 유온을 괴롭히겠는가.
“자. 괜찮으니까 봐요. 아무것도 없어요.”
유온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멍은 넘어져 다친 곳 말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유온은 다른 것에 놀랐다. 유온의 손이 느리게 올라와 제 배를 덮었다. 작고 동그랗게 부푼 아랫배를.
“아, 아이는……, 정말 괜찮아요?”
“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건강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그제야 제대로 깨달은 듯했다. 안도의 한숨이 작은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이 태명은 소리입니다. 어머니가 태몽을 꿨는데, 꿈에서 들은 소리가 너무 예뻤다고 해서.”
“소리…….”
윤서경은 유온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긴장 때문인지 손이 평소보다 차가웠다.
“임신한 게 싫습니까?”
“아, 아뇨!”
확실히, 싫은 게 아니라 믿을 수 없다는 눈이었다. 아이를 가진 게 그렇게 놀라운가…… 싶다가도 그때의 현실을 떠올리면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유온에겐 결혼식에서 손을 잡고 짧게 입 맞춘 기억 외엔 없을 게 아닌가.
멍하니 있던 유온이 갑자기 사과했다.
“죄…….”
“호텔 직원은 여기 없지만, 집안일 하는 사람들이 별채에 있습니다. 지금의 유온 씨에겐 초면일 텐데, 이리로 부를까요?”
윤서경은 빠르게 유온의 말을 끊었다. ‘직원이랑 대화 5분’을 상기한 유온이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윤서경은 상황도 잊고 웃을 뻔한 걸 참았다.
여기서 왜 사과를 하려고 하는지, 옛날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유온과 결혼해 함께 살며 과거 그의 사고가 어떤 식으로 돌아갔었는지 이해한 덕이었다. 지금은 유온도 그땐 왜 그렇게 생각했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이를 가지려면 우선 섹스를 해야 한다. 그 섹스를 제 가족이 무슨 계략을 부린 걸로 생각하고 있을 터다. 윤서경이 합의하에―합의라 말하는 건 애정이 느껴지지 않아 불편했지만―생긴 아이라 아무리 말해도 믿지 못한다.
유온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히 자신이, 폐를 끼치는 일을, 거기서 더 나아가면…… 이대로 사라져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겠지. 그 시기 유온은 그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윤서경은 유온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애정을 가득 담아서.
“이리 와요. 씻겨 줄게요.”
“괜찮아요, 호, 혼자 씻을 수 있어요.”
“내가 걱정돼서 그럽니다. 오늘 계단에서 구른 사람을 어떻게 혼자 씻게 합니까. 머리까지 다쳤는데요.”
윤서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온의 옷을 마저 벗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앉혀 놓고 따뜻한 물을 틀자, 유온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윤서경이 너무 익숙한 손길로 몸 여기저기를 씻기자 안정이 되기는커녕 점점 더 눈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그 모습이 귀여운 한편으로 과거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이런 것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게, 매사 불쌍할 만큼 눈치를 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다친 곳에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씻기면서 촉촉, 입술이 닿는 곳에 입을 맞췄다. 유온은 그때마다 움찔거렸다.
하지만 유온에게서 체향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친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페로몬 기관이 마비된 거라고 하지만, 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마저 과거로 돌아간 듯해 기분이 묘했다. 윤서경은 대신 제 페로몬을 넘치게 흘려 유온을 뒤덮었다. 유온은 그조차 느끼지 못했다.
유온을 다 씻기고 침실에 데려다 놓은 뒤 자신도 씻고 나왔다. 유온은 침대에 앉혀 머리를 말려 주었던 그 자세 그대로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집 안 구조는 기억납니까?”
유온이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요.”
넓은 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 자신이 출근한 후 곤란할 것이다. 윤서경은 유온을 일으켜 손을 꼭 잡았다. 또다시 유온이 움찔했다.
“여기가 우리 부부 침실입니다.”
“부, 부부……, 침실.”
“왜요?”
“한 번도 써 본 적 없어서……, 아. 서, 서경 씨 탓한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허둥지둥 사과한 유온에게 5분을 들이밀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유온이 고작 부부 침실에 감격하는 것도 제 탓이다. 책상과 침대, 꺼진 휴대폰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유온의 방을 떠올리니 가슴에 서늘한 것이 내려앉는 듯했다.
두 사람은 1층으로 내려와 주방과 다용도실, 거실, 유온의 작업실과 테라스로 통하는 선룸, 손님방들을 보았다. 제 작업실을 보는 유온의 눈은 미묘했다.
“이, 이걸 다 제가 만들었어요?”
“네. 당신은 못하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
기왕 이렇게 된 거 칭찬 감옥에 가둬 줄 생각이었다. 순식간에 죄수가 되어 버린 유온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윤서경의 서재와 안방에서 연결되는 드레스 룸, 그 외의 방 몇 개, 마지막으로 미리 만들어 둔 아이 방으로 들어섰다.
놀이방은 1층에 따로 만들 생각이어서 아기 침대와 모빌, 인형 같은 것만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방이었다.
방에 들어온 유온이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짚었다. 천천히 문지르는 모양이 기억을 잃기 전과 똑같았다. 기억을 잃어도 습관은 남는 모양이었다. 아까 겉옷을 윤서경에게 내민 것도 그렇고.
“이제 쉴까요.”
“…….”
유온은 말없이 윤서경을 따라와서는, 당연하지만 하나뿐인 안방의 부부 침대를 보고 깊게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동자가 침대 끝에서 끝으로 가는 걸 보니 ‘그래도 침대가 넓어서 다행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물론 윤서경은 그 넓은 침대를 몹시 좁게 쓸 생각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말과 함께 거의 떨어질 듯 침대 가장자리에 가 달라붙은 유온의 몸을 팔로 휘감아 연행해 왔다. 유온이 살짝 버둥거렸다.
“유온 씨.”
“…….”
“혼자 잘 땐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
대답이 곤란했는지 유온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때 유온은 온갖 정신적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공황도 그중 하나였다. 자신이 서재나 제 방에 틀어박혀 유온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을 때에, 유온은 발작을 일으키며 막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윤서경은 유온을 불편하지 않도록 품에 꽉 끌어안았다. 몇 년 동안 살을 붙이고 산 부부의 몸은 서로 튀어나오는 곳 없이 꼭 들어맞았다. 이상할 정도로 편안한 느낌에 유온은 뻣뻣이 굳어 있던 몸을 점점 풀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우린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부예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
“당신을 괴롭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서, 서경 씨 잘못이…….”
진심으로 유온은 그게 윤서경의 잘못이 아니라 말한다. 그 맹목적인 사랑이 또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윤서경은 유온의 이마에 키스했다. 느낄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데도 페로몬을 퍼부었다. 유온의 커다란 눈이 이내 깜빡깜빡 감기더니, 곧 안정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윤서경도 그 숨소리와 심장 박동을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일시적일 거라던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유온의 상태에 변화가 없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어지럽거나 속이 안 좋거나, 어쨌든 몸 상태가 평소랑 다르면 바로 말해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 싶은 것도 말해요. 알겠죠?”
“네.”
유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의 유온은 온몸이 아픈 것에 적응되어 있다. 이마와 팔다리의 상처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퇴원하면서 주치의는 현기증이나 복시, 구역, 뭐든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연락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본인이 아픈 걸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다른 사람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유온은 자신이 아픈 걸 놀랍도록 잘 숨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서, 서경 씨. 그런데…….”
“네.”
“혹시 저…… 외출하면 안 되나요?”
“외출?”
“아, 안 되면 집에 있을게요.”
“아닙니다. 대신 이 실장이랑 성 실장하고 같이 나가면 좋겠어요. 밖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유온을 가둬 둘 수도 없으니 외출을 막진 못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무슨 정신으로 업무를 봤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일을 끝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에 손을 서두르고, 평소보다 이른 귀가를 했을 때. 거실에 있던 유온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뭔가를 제 몸으로 감췄다.
위치로 보면 소파 테이블이었다.
“왜 그래요?”
“아. 저……, 오, 옷 안 갈아입으세요?”
“갈아입긴 할 건데, 뭘 감춘 겁니까?”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추궁으로 들렸는지 유온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더 묻지 않을 생각으로 2층으로 향하려 했을 때, 유온이 한숨과 함께 돌아서면서 그가 감추고 있던 게 보였다. 노란색 꽃이 담긴 화병이었다.
윤서경이 계단을 올라가는 걸 확인한 유온은 화병을 숨기듯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손을 씻던 윤서경은 직감했다. 저건 버리려는 거다. 물기를 닦고 주방으로 따라가 바로 뒤에 서자 유온이 기절할 듯 놀랐다.
“왜, 왜요?”
“버리려고요?”
“아, 죄송……, 싫어하실 것 같아서.”
“왜 싫어합니까.”
“…….”
유온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윤서경은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유온이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하면 무척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이런 윤서경은 너무나 낯설었다. 다정한 태도가 싫은 건 절대로 아니다. 그저……, 그저 너무 생소하고, 왜 그러는 걸까 싶어 초조하고, 불안할 뿐.
그래서 일상적인 행동을 하면 좀 나아질까 하고 외출하고 싶다고 말하니 선선히 허락해 주었다. 일상적인 행동이라고 해 봐야 꽃을 사다 꽂는 정도였다. 멀리 가진 못하고 근처 꽃집에서 꽃을 조금 사다가 화병에 꽂고 나니 갑자기 후회가 들었다. 마치 자신이 이 낯선 집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꽃을 장식하다니. 왜 그랬을까, 생각하며 버리려던 찰나 윤서경이 돌아온 것이다.
자신은 윤서경이 유일하게 내버리지 않는 생화를 집에 자주 장식했다. 하지만 지금은, 윤서경의 태도가 이상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유온이 중얼거렸다.
“저……, 기억, 금방 돌아올 거예요.”
윤서경은 짧게 찌푸렸다가 유온이 알아채기 전에 표정을 풀었다. ‘기억’이라는 주어가 왜인지 사람을 지칭하는 걸로 들린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유온의 ‘기억’이 아니다. ‘기억을 온전히 가진 이유온’이다.
“꽃이 예쁘군요.”
“…….”
“당신도 나한테는 똑같이 이유온 씨입니다. 내 배우자이고. 결혼했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나마 유온이 제 나이를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햇수로 따진다면 유온이 죽는 건 사실 반 년 후니까, 유온이 기억하는 것과 달리 나이가 한 살 어리다. 한 살이 많다면 모를까 기억 장애에 나이가 어려졌다면 위화감을 느낄 터다.
“하지만…… 잘해 주실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요.”
“그건 기분이 이상한 게 아니라 좋다고 하는 겁니다.”
“…….”
유온은 버리려 했던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가을비가 예보된 바깥 날씨는 흐리고 칙칙했지만 노란 꽃은 그 분위기를 날려 버리듯 화사했다.
“저, 저한테 잘해 주지 않으셨으면…….”
주뼛거리는 유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했다.
“왜요? 잘해 줄 겁니다. 죽을 때까지.”
“…….”
“못 믿겠어요?”
하긴, 고작 3일은 너무 짧았다.
“믿지 못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윤서경은 그렇게 말하며 유온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유온이 손에 힘을 주었다가, 손가락 사이에 꽃잎이 있다는 걸 알고 멈칫하며 풀었다. 화사한 노란 꽃이 가득 꽂힌 화병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동시에 윤서경은 페로몬을 짙게 풀었다.
유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의 유온에게는 낯선 어떤 감각이 희미하게 피부 아래를 스치며 무언가를 깨웠다. 깊이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음…….”
윤서경은 화병을 한 손으로 들어 싱크대 위에 두고, 유온의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유온이 움찔하며 몸을 떼려 했다. 진한 키스에 아래가 조금씩 젖어들어서였다. 하지만 윤서경은 유온을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며 내려 달라고 부탁하려 했을 때였다. 윤서경이 한발 먼저, 미안합니다, 하고 속삭였다.
“미, 미안하다니요…….”
“내가 파렴치한 인간이라서요.”
말하며 윤서경은 성큼성큼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폭신한 침대에 등이 닿자, 윤서경은 유온의 몸 위로 올라와 겉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손을 뻗어 협탁 서랍을 열었던 그가 혀를 찼다. 가져다 둔 콘돔이 마침 다 떨어졌다.
“잠깐만 기다려요.”
욕실로 가서 콘돔을 가져오자 유온은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니 긴장으로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아, 그, 그런데 저, 이, 임신……, 했다고. 괜찮아요……?”
“콘돔을 쓰고, 너무 거칠게 자주 하지 않으면요. 가끔은 관계를 가지는 게 더 좋다고 하더군요.”
“…….”
“싫으면 안 할게요.”
윤서경은 가져온 콘돔을 머리맡에 놓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온 역시 한창때의 오메가였다. 임신하고 나서 며칠에 한 번씩은 빼먹지 않고 관계를 가졌는데 다친 것 때문에 며칠 미뤄졌으니 윤서경만큼이나 몸이 달았어야 했다.
그걸 가만히 둔 건 유온이 페로몬 문제로 베타에 가까운 몸이 되어서였으나……. 이제 아니었다. 유온에게선 분명 화사한 체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며칠 내내 페로몬 샤워를 시킨 보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커다란 손이 유온의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옷을 벗겼다. 유온이 움찔하면서도, 그가 옷을 벗기기 쉽게 몸을 들어 준다. 둥글고 축축한 눈동자에 어린 건 분명 기대였다.
유온은 마치 처음 해 보는 사람처럼 긴장한 채 윤서경의 손이 몸을 만질 때마다 움찔거렸다. 기억이 없으니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윤서경은 하얀 몸을 팔베개해서 모로 눕히고 아래를 건드렸다. 그 잠깐 사이 아래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응, 으응…….”
유온이 낑낑대는 신음 소리를 냈다. 임신 후의 섹스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최대한 충격이 가지 않게, 체위도 몇 가지로 정해서, 너무 깊거나 거칠지 않게. 그렇게 한정적인 섹스임에도 한 번도 만족감을 못 느낀 적은 없었다. 상대가 이유온이니까. 유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윤서경의 손가락이 완전히 젖었다. 윤서경은 콘돔 하나를 찢어 성기에 끼우고, 미끌미끌한 윤활액이 발린 성기 머리를 입구에 문질렀다. 몇 번 미끄러지나 싶던 성기는 금세 제 자리를 찾아가듯 유온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
다른 곳을 만질 때 잔뜩 긴장했던 것과 달리 아래는 윤서경의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압박감이며 통증은 있겠지만, 몇 년 동안 제 것의 모양대로 길이 난 그곳은 기다렸다는 듯 애액을 흘리며 내벽으로 성기를 쫀득하게 조였다. 윤서경은 유온의 몸이 많이 흔들리지 않도록 꽉 안은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살짝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들어가자 유온은 할딱할딱 신음했다. 절정은 동시에 찾아왔다.
“…….”
갑자기 유온이 두 팔을 뻗어 윤서경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지금까지와는 어딘가 느낌이 다른 포옹이었다. 윤서경은 고개를 들어 유온을 내려다보았다. 유온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소리 아빠요.”
“그리고?”
“제…… 남편.”
기억이 돌아왔다. 기뻐지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윤서경은 유온의 얼굴에 닥치는 대로 키스했다.
“놀라게 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지금까지의 ‘죄송하다’와는 완전히 다른 사과였다. 뜻도 모른 채 그저 괴로움을 피하고 싶어서 애처롭게 내뱉던 사과와는.
“더 안아 주세요, 서경 씨……. 아직 기억이.”
“옛날 기억 말입니까.”
“네……. 그게 너무 선명해요.”
유온의 몸 위로 서늘한 체향이 짙은 안개처럼 쏟아졌다.
“전부 다 기억납니까? 지난 며칠.”
“네. 무슨 생각 했는지도.”
이런. 별로 좋지 못했다. 며칠 동안 가장 괴로웠던 시기로 날려갔다 온 정신은 한동안 후유증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알죠?”
“알아요……. 서경 씨가 있으니까. 이제 걱정 안 시킬게요.”
페로몬을 흘리며 윤서경이 살짝 웃었다. 후유증이 있다고 해도…… 금방 좋아질 것이다.
“수명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그럼 안 되는데…….”
유온도 웃으며 윤서경의 뺨에 입 맞췄다.
안도감. 그리고 행복. 유온은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제집의 향을 실컷 맡았다. 두 사람의 체향과 온기로 가득했다. 이제 슬픔은 다 지나간 일에 불과했다. 유온은 자신의 현실에게 부드럽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