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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한국보다 훨씬 따뜻한 작은 나라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친지들만 간소하게 참석했지만 어김없이 기자가 몰려들었다. 물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성일 뿐 접근하지는 못했으나 둘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두 사람이 어떤 예복을 입을 것인지에 대한 추측에서 결혼 선물로 이유온이 받은 고성을 비롯한 여러 것들의 가격, 결혼반지 브랜드, 그 외 짐작해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뉴스로 떠다녔다.
유온은 그런 관심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예전처럼 무섭진 않았다.
눈앞에 꽃으로 장식한 긴 아치가 있었다. 바닥에는 넘치도록 꽃잎이 깔렸고, 양쪽 하객석에는 윤서경의 부모님과 형, 누나, 유온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위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앉았다.
몇 번 만나 본 윤서경의 가족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전 상견례 자리에서 의례적 칭찬으로 받아들였던 말들이 진심이어서 조금 놀랐다. 그들 모두가 하객석에 앉아서 다정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은 사람들은 저런 표정을 하는구나. 유온은 뜨거워지려 하는 눈가에 힘을 꾹 주었다. 아직 주례의 앞에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울 수는 없었다.
눈을 내리깐 채 깜빡이고 있자, 손에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윤서경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 유온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모양의 예복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흰 장갑을 낀 모습을.
그의 품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결혼반지가 들어 있을 것이다.
윤서경이 손을 더 힘주어 잡은 순간 음악 연주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걸음으로 천천히 꽃잎이 덮인 길을 걸었다. 아치의 라일락을 투과하여 맑은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쏟아졌다.
한 걸음, 한 걸음, 푹신한 꽃잎은 구름 같았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면 푹신할 거라고, 그 위에 누워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름은 사실은 작은 물방울 덩어리라서 아무리 푹신하게 보여도 누울 수 없다. 행복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예쁘고 포근해 보이지만 너무 멀고, 몸을 기댈 수는 없는 것. 그러나 지금 유온은 윤서경과 함께 구름 위에 있었다.
주례는 윤서경의 대학교 시절 은사라는 분이었다. 그분은 짧은 주례를 마치고 부부를 장난스러운, 또는 기특해하는 눈길로 한 번 보았다.
결혼 서약이 이어졌다. 언제까지고 서로를 사랑하며, 믿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것을. 윤서경이 먼저 대답했다. 맹세합니다.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리고 자신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네.”
맹세합니다, 까지 말해야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유온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가 다시 들자 주례도, 윤서경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결국 거기서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주례는 다정하게 웃으며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반지를 교환해야 했다. 윤서경은 조심스럽게 유온의 장갑을 벗기고, 벌써 1년도 전에 맞춘 결혼반지를 다시 꺼냈다. 웨딩 촬영에 사용했지만 결혼식을 미루면서 잠시 보관해 두던 반지였다. 그동안 손에 착용한 적은 없다. 결혼식에서 다시 처음 끼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왼손 약지에 딱 맞는 크기의 반지가 끼워졌다. 윤서경은 반지를 끼워 놓고 잠시간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온도 그의 장갑을 벗기고 그 손에, 그 역시 유온과 같은 이유로 한동안 끼우지 않던 반지를 끼웠다. 한 쌍의 디자인으로 된 반지가 두 사람의 손 위에서 반짝거렸다.
이어 입맞춤할 차례가 되었다. 윤서경은 햇살을 받으며 오래도록 유온을 바라보다가, 유온이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인 순간 입 맞췄다. 영원을 맹세하는 키스는 그 이름만큼이나 믿을 수 없도록 달콤했다.
그 후에 유온은 눈물을 닦고 울었던 흔적도 멋쩍게 웃으며 정돈했다. 잔뜩 찍은 결혼사진 중에서 한 장은 멀리서 서성이는 기자들에게도 제공되었다. 두 사람이 라일락을 늘어뜨린 아치의 시작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 작은 꽃잎이 하늘하늘 날리고, 금빛 햇살이 두 사람의 윤곽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었다.
사진을 먼저 본 유온은 조금 놀랐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간절한 눈으로 윤서경을 보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찍힐 때 유온은 온통 그의 눈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신이 본 그의 눈빛은, 이 사진 속 자신의 눈빛과 똑같았다.
기자들은 곧바로 포털 사이트에 사진을 올렸고 실시간 검색어 같은 곳에 두 사람의 이름이 열심히 오르내렸다. 한국에서 얼마나 소란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행복한 부부는 결혼식과 작은 피로연을 마치고 몰디브로 향했다.
“피곤하죠, 유온 씨. 오늘은 바로 쉴까요?”
입국장으로 나오며 윤서경이 말했다. 유온은 공항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한 번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질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곳의 호텔에서 하루 종일 푹 쉬긴 했지만 그 후 다시 여기까지 비행기로 한참을 오느라 피곤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 긴장이 풀려서 더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한적한 수상 비행기에 올라 기울어지는 금빛 햇살에 감싸인 산호섬의 바다를 구경했다. 거기서 내려 버기를 타고 섬 안에서도 안쪽에 있는 커다란 워터 빌라까지 가고 나니 한층 더 몸이 축축 늘어졌지만, 주위로 보이는 파스텔톤의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서 힘든 걸 잊어버리게 되었다.
두 사람이 버기에서 내리고 직원은 인사와 함께 돌아갔다. 온통 바다에 둘러싸인 건물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윤서경이 왜인지 문을 등진 채 서서 유온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요……?”
“안에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준비해 둔 거요?”
“마음에 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진 향기에 유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선하고 깨끗한 꽃 냄새. 튤립 향이었다. 향기에 이어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방 안은 온통 꽃으로 가득했다.
청보라색에서 분홍색으로 명암이 진, 몽환적인 색상의 튤립이었다.
“이, 이거…….”
유온은 당황해서 윤서경을 보았다. 이 꽃은 유온도 잘 알고 있었다. 꽃의 이름을 안 순간 꼭 구해서 윤서경에게 주고 싶었다. 그가 받아 줄지 어떨지도 모르는 결혼기념일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지금 시점에서는 2년은 지나야 나올 품종일 텐데. 윤서경이 웃음을 지었다.
“원래 상용화는 개발 후에도 한참 지나야 되는 경우가 많아서요. 계속 알아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결혼식 시기에 맞춰서 찾았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튤립뿐이었다. 비단처럼 섬세한 꽃잎을 가진 꽃들은 지금 커다란 창 너머로 바다를 향하여 흐르기 시작한 석양과 똑같은 색을 가지고 있었다.
가슴이 무언가로 꽉 차는 느낌이었다. 멍하니 꽃의 바다를 바라보는데, 윤서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온에게 꽃다발 하나를 내밀었다.
“자. 이건 당신이 나한테 주세요.”
“…….”
튤립 꽃다발이었다. 꽃의 개수는 윤서경의 나이만큼. 자신이 준비하고 찾아오지 못했던, 그 꽃다발일까. 유온은 물끄러미 윤서경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제가 이거 주문해 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꽃집에서 연락을 받고요.”
그때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귀찮았을까,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어쩌면 슬펐을까. 아니, 분명 슬펐을 것이다.
유온은 어느새 품에 안은 꽃다발의 향기를 맡았다. 단정하게 꽃을 장식한 포장이 어쩌면 자신이 죽은 후 그가 받았던 그대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혼자 남겨진 절망, 아마 자신이 그때껏 느낀 슬픔 그 이상의 고통을.
유온은 꽃다발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윤서경에게 내밀었다.
지난 생에는 주지 못했던 꽃이었다.
그리고 긴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에게 내밀게 되었다. 윤서경은 유온과 한 쌍인 반지를 낀 손으로 꽃다발을 받았다. 표정이 조금 흔들리던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추는 입술이 평소보다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입술이 거의 닿아 있는 상태에서 유온이 말했다.
“서경 씨, 우리 내일은 해변에 산책하러 나가요.”
“……좋습니다.”
“기대돼요…….”
나도 그렇습니다. 윤서경이 속삭였다.
당연히 찾아올 행복한 내일.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손에는 어느새 꽃과 반지와 수많은 기쁨이 찾아와 있었다.
유온은 해변을 생각했다. 여린 파도 소리, 모래의 온도, 햇살의 감촉. 곁에 있는 윤서경의 모든 것. 따뜻하고 부드러운 백사장을 윤서경과 함께 맨발로 걸을 것이다. 긴 발자국이 두 사람을 따라올 것이고, 두 사람은 서로의 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맡을 것이다.
창밖은 어느새 푸른 밤하늘이 석양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벌써 떠오른 별들이 조용히 반짝거렸다. 뭔가를 원하는 것조차 못했던 삶에 내려올 무수한 환희. 이제부터 있을 삶을 비출 불빛. 아무것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원한 유일한 사람, 가지지 못한 게 없었던 사람이 간절하게 원한 유일한 사람.
유온은 고개를 들어 자신이 먼저 윤서경에게 입을 맞췄다. 아무런 거절도 없이 입맞춤이 돌아왔다. 입술이 잠깐씩 떨어질 때마다 유온은 윤서경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하염없이 속삭였다. 윤서경 역시 같은 말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꽃의 향기만큼 진동하는 사랑의 말들이 두 사람을 감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복이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찬란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돌아와서 말하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