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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권과 이유건은 아직 구치소에 있었으나 집행 유예로 풀려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윤서경은 생각했다. 감옥 안이 가장 안전할 거라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뭐, 자신으로서는 그들이 모르는 편이 나았다. 알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병원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 후 뉴스가 연달아 터지면서 그들은 항상 여유롭던 얼굴이 흙빛이 될 만큼 언론과 대중에게 시달렸다. 직후 화명의 임원은 대거 구속되었다. 거기에 회장과 부사장이 포함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구속된 후 성민희와 이유연은 신변의 위협이라도 느꼈는지 인천에 있는 다른 사람 명의의 아파트로 조용히 도망쳤다. 실질적으로 성민희의 소유였으나 그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안전하리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이틀 전 이유연은 그 집을 나와 진 회장에게 갔다. 계속되는 연락에 이어, 진 회장의 부하들이 근처를 서성거리자 무서움을 견디지 못한 듯했다.
결혼을 위한 건 물론 아니었다. 진 회장은 화명이라는 배경이 없는 이유연과 약속대로 결혼할 만큼 제대로 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일단 이유연이 갈 곳이 없으니 결혼을 예정했던 연도 있고 하여 한동안 머물게 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게 첩으로 들이겠다는 뜻인 걸 모를 사람은 없었다.
성민희는 진 회장이 찾아온 걸로 보아 그 집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곤 화명만큼이나 위태로운 본가로 돌아갔다. 화명은 제일의 항공사에 기내식을 공급하는 등 연관이 많았고, 또한 성민희의 본가라는 이유로 이번 일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 제일 또한 부도는 면할 수 없다.
그런 집안에서 성민희를 제대로 챙겨 줄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이제라도 성민희를 떨어뜨리면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지 제일은 그녀를 외면했다. 지금 성민희는 갈 곳을 잃고 학생들이 주로 사는 오래된 원룸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제일 또한 부도 위기라고 하나 아직 아파트 한 채를 사 줄 돈조차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하다못해 본가에 머물게 할 수도 있었다. 그걸 보란 듯이 허름한 곳에 보내는 건 다분히 윤서경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쓸데없는 짓.’
이제 와서 그런 짓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건지.
윤서경은 천천히 움직이는 시계 초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업 종료 시간이 지나갔다. 정각을 기점으로, 화명은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 * *
다음 날 유온은 오후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윤서경은 출근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나간 뒤였고, 식탁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자는 사이 씻겼는지 불편한 곳은 없었지만 하체가 이곳저곳 욱신거렸다. 그렇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픔이 상처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이사한 집은 호텔과는 가구의 모양도 다르고 장식이 적어서 훨씬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바닥에 앉아도 불편하지 않도록 푹신한 러그와 쿠션이 놓여 있었고, 거실은 천장까지 유리로 된 넓은 테라스와 연결되어서 그곳에 나가 시간을 보내기도 좋았다.
식사 후에 테라스 쿠션에 누워 한참 창밖을 구경하던 유온은 문득 몸을 일으켰다. 한창 바쁘게 돌아갈 시간의 풍경을 보고 있어서인지 밖에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정윤은 쉬는 날이어서 성한영에게 연락했다. 유온이 거의 집에만 있기 때문에 비서와 경호원들도 모두 같은 건물의 레지던스를 사무실처럼 쓰고 있었다. 가까운 카페까지 산책을 가고 싶다는 말에 성한영은 곧바로 올라오겠다고 대답했다.
유온은 바깥 날씨를 확인한 뒤 옷을 걸쳤다. 해가 길어진 것도 그렇고, 기온도 그렇고 겨울은 이제 끝나 가는 모양이었다.
목적지인 카페까지는 유온의 걸음으로 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성한영은 바로 옆에서 유온과 속도를 맞추어 걸어왔다. 직장 동료로도, 커플로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조합이 신기한지 가끔 지나치는 사람들이 흘끔거렸다.
“그저께 쉬는 날이셨다고…… 푹 쉬, 셨어요?”
“아, 네. 아는 동생이랑 만났습니다.”
“동생이요?”
“네. 대학 때 만난 친굽니다.”
“대학이면 경호…….”
“네.”
짧고 무뚝뚝하지만 쌀쌀맞진 않은 대답이었다. 성한영의 입에서 아는 동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신기했다. 그 후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몇 마디가 더 오갔다. 용기를 내서 말을 건 보람이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사면서 성한영의 커피 취향도 알게 되었다. 그는 한겨울에도 커피는 꼭 차갑게 마신다는 것 같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커피를 받아 드는 그를 보며 유온은 자신이 그동안 성한영에게, 그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남에게 신경을 쓰는 것과 관심을 가지는 건 다르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만 생각했지, 남을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유온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잠시 서 있었다. 병원에 다녀온 후부터 가족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윤서경에게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않고 싶다고 말한 게 오히려 의식 속에 부모님과 형들의 얼굴, 목소리를 새겨 놓았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그 생각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유온의 시선이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깔끔한 거실은 곳곳에 자연스럽게 소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중 한 유리장에는 유온이 만든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유온과 윤서경이 스페인에 있는 사이 옮겨진 이삿짐에 포함되고 만 물건이었다. 버리자고 하자 윤서경은 비싼 장신구를 버리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의아한 얼굴을 했다.
유리장을 보며 서 있던 유온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다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갔다. 목적하던 물건은 금방 찾았다. 새 노트와 펜을 가지고 나온 유온은 다시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윤서경과 의사가 종종 유온에게 시키는 일이 있었다. 어떤 주제를 두고 그게 타당한 이유와 타당하지 않은 이유를 죽 써 내려가는 것.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걸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터무니없는 자기 비하나 헛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혼자서 그걸 해 보기로 했다. 주제는 간단했다. 가족들이 잘해 준 일, 못해 준 일.
하지만 몇 글자도 쓰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야 했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글씨로 쓰려 하자 수많은 일들이 와르르 몰려와 머리를 덮쳤다. 먼저 떠올려달라고 말하는 듯이.
크게 다치거나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다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당장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일이 많았다.
큰형은 유온의 몸에 흔적이 남아선 안 될 때엔 쿠션에 얼굴을 파묻거나 물에 집어넣었다. 또 몸을 헐겁게 묶은 채로 오래 방치하면 피부에는 고작해야 희미한 멍만 남지만 온몸이 뻐근해지고 머리까지 깨질 듯 아파 왔다.
얼굴만 아니면 어디든 흔적이 남아도 될 땐 좀 더 직접적이었다. 이유건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때렸다. 창고에는 그가 좋아하는 물건이 전부 갖추어져 있었으니, 내키는 걸 손에 드는 쪽에 가까웠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울고 빌면 이유건의 기분이 풀릴 때쯤 풀려날 수 있었지만 가끔은 그게 통하지 않기도 했다. 정말로 자신이 맞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그럴 때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고 더 심한 체벌을 받아야 했다. 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큰형의 심기를 거슬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창고에서, 자신의 방에서, 이유건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적었다. 폭력의 기억이 되살아나 피부 아래로 떨림을 전달했다. 펜 끝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힘을 꾹 주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에게 혼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이유건의 잦은 폭력보다 더 두려웠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아버지가 음악을 듣기 위해 만들어 둔 작은 감상실이 있었다.
이따금 유온은 그곳에 끌려 들어가곤 했다. 형들과 어머니는 자신들이 원하는 음악을 듣고 싶을 때 그곳을 사용했다. 그러나 유온은 한 번도 그곳에서 즐겁거나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유온이 기억하는 그곳의 소리는 오로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의 높은 비명 소리, 사이렌, 파열음 같은 것들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귀를 다치지 않을 정도의 음량으로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신경을 무섭도록 곤두서게 만들었다. 수십 분에서 길면 몇 시간. 소음에 무뎌지지 않도록 소리는 불특정한 간격으로 끊어졌다가 이어지길 반복했고, 그곳에 조금만 있어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십여 분이면 벌써 구역질이 올라왔고 조금 더 지나면 귀에 대못을 박는 듯한, 머리를 쇠로 조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비명을 질러도 바깥에 들리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감상실로 들어가기 전에는 신체적인 폭력도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몸에 멍을 남기는 큰형과 달리 아버지는 절대 눈에 띄는 곳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때리는 건 옷을 벗어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 곳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 감상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몸이 아픈 것 따위는 머릿속에 남지도 않았다. 그게 정신적인 고통인지 육체적인 고통인지 아직도 구분할 수 없다.
어머니와 작은형은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뺨을 때리고, 차 같은 것을 쏟아붓거나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언어도 물리적인 것만큼의 고통을 주었다.
생각난 걸 전부 적지도 않았는데 벌써 잘해 준 일의 몇 배나 되는 양이 종이에 남았다. 손끝이 차가워져서 펜을 놓고 몇 번이나 쥐었다 펴야 했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몸이 더 아플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당해 온 일을 마주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당시의 아픔이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이제 와 서럽고 비참해서일까.
유온은 결국 펜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커피의 얼음이 녹아 달그락거렸다. 물방울이 맺힌 컵 표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온은 당황해서 얼른 노트를 덮었다.
“다녀왔습니다, 유온 씨. 조금…….”
일찍 끝나서, 라는 말이 다 끝맺어지지 못했다. 윤서경은 유온의 얼굴을 보더니 단번에 표정이 얼어붙었고, 동시에 성큼 다가와 유온을 끌어당겨 안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무슨 일 있었어요?”
말이 빨랐다. 조급한 것처럼 들렸다. 윤서경은 당장 깨지는 물건이라도 품에 안은 듯이 조심스럽게 유온을 다뤘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고 서늘했지만 몸을 안은 팔과 목소리에서 당황이 느껴졌다. 자신의 표정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이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 하나 때문에. 차가웠던 손끝이 조금 따뜻해졌다.
“무슨 일이에요.”
윤서경이 다시 물었다. 유온은 숨을 크게 쉬었다. 언제부터인가 답답하게 막혔던 숨통이 어느새 트여 있었다. 아마 윤서경이 돌아온 직후부터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종이에 써 봤어요. 부모님이랑 형들이, 저한테 잘해 준 일…….”
“잘해 준 일?”
“……네. 그리고 못해 준 일도…….”
윤서경의 손이 등을 어루만졌다. 올라온 날개뼈를 쓸고 마른 등을 쓰다듬는다. 아이를 달래는 손길 같았다.
“그게 다예요.”
“그래요…….”
이번엔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길게 내쉬는, 안도가 담긴 한숨이었다. 팽팽해져 있던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유온은 익숙한 체향을 맡으며 윤서경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한참 후 윤서경이 물었다.
“괜찮아요?”
“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는 몸을 떼더니 유온의 뺨을 만지며 살피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디 한 군데 자신이 놓친 문제가 있진 않은지 찾는 것 같았다. 유온은 그가 내키는 만큼 자신을 살필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윤서경의 눈은 조금 일렁거리고 있었다. 괜한 걱정을 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서경 씨…….”
“……내가.”
어쩐 일인지 윤서경은 대답하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유온이 쓰던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저걸 좀 봐도 되겠습니까?”
* * *
유온이 두통으로 다른 병원을 찾았던 건, 자신의 몸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임에도 걱정이 될 정도로 엄청난 아픔 때문이었다. 주치의가 가족과 먼저 상의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유온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주치의의 눈이 희미하게 웃는 것 같다고.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본능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아픔으로 주치의가, 가족들이 기뻐할 일이 있다. 그럴 만한 일은 유온이 생각하기론 임신뿐이었으나 임신이 되었을 리 없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다른 의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아버지와 형을 거역하는 일이었지만 두통의 정체에 대한 공포가 폭력의 공포를 이겼다.
병명을 듣고 나서는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주치의는 왜 자신에게 이걸 알려 주지 않은 걸까, 의문스러웠다. 어쨌든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가족들에게 제 입으로 전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치의에게도, 병원에도 가지 말걸, 하고 자괴감에 빠졌다. 후회를 멈춘 건 어차피 죽으면 모두가 알게 되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누가 슬퍼할까? 아마, 아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좀 더 잘해 줄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일을, 빈약하고 헐거운 옛 기억을 힘겹게 끄집어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줄 물건을 직접 사 왔던 기억, 큰형이 게임기를 비롯해서 유온이 좋아하는 걸 이것저것 사 주었던 일, 작은형이 유온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걸 축하한다면서 케이크를 사 주었던 것,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칭찬해 주었던 어느 날……, 그런 애정이 유온을 이날 이때까지 버티게 했다.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현실을 짊어진 채 살아가기에 생은 너무 길고 세상은 너무 넓었다. 유온은 그런 외로움을 온전하게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애정들 속에서 유온을 가장 기쁘게 했던 사람은 윤서경이었다.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친절은 비참하게 메마른 마음에 작은 물기를 떨어뜨렸다. 어설픈 사랑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쩌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 몰래 흘끔거리는 것밖에 못하는 주제였지만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직접 만날 일은 적어도 그의 소식을 들을 방법은 많았으므로 홀로 품은 마음은 쉽게 커졌다.
그렇게 훔쳐보며 사랑하던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가 먼저 청혼했다. 유온조차 어리둥절할 만큼 갑작스럽게. 이유온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있었다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도둑질 같은 사랑은 그렇게 기적처럼 맺어졌다가 당연한 수순인 듯 시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온은,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면서도 제발 그의 곁에 머물 수 있기만을 매일 기도했다.
이유건은 유온을 병원에 두고 윤서경을 부르는 짓을 자주 했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윤서경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유온은 눈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두 번, 세 번 불러낼 때까지도 그는 걱정스러워했다.
그 걱정이 차츰 지워지고 환멸로 바뀌어 가던 순간순간. 그의 변해 가던 눈빛, 나날이 딱딱해지던 표정, 점점 싸늘해지던 분위기, 유온은 그 일이 반복될 때마다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 입술이 굳어 가던 모양까지 전부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러니 병원에 다녀왔다는 말에 그런 반응을 하는 건 당연했다.
머리가 아팠다. 배도, 가슴도, 손끝과 발끝도, 온몸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죽어서 전부 끝내고 싶었다.
죽으면…….
유온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짓누르던 아픔이 물에 녹듯이 사라지고, 주위는 기분 좋은 향과 편안한 공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따뜻하다. 가만히 고개를 들자 바로 곁에 윤서경이 잠들어 있었다.
꿈이었다. 아니, 이쪽이 정말 현실이 맞을까? 유온은 머뭇머뭇 손을 들어 윤서경의 턱 끝을 조심스레 만졌다. 닿은 것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소극적인 움직임이었으나 윤서경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눈꺼풀이 열렸다. 잠이 완전히 깬 건 아닌 듯 검게 가라앉은 눈이 유온을 바라보다가 등을 안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마와 정수리에 차례로 입술이 닿고, 잠결로 느린 손이 등을 토닥였다. 윤서경이 자신을 재울 때 늘 하는 행동이었다. 자신은 꿈을 꾼 게 맞았다. 윤서경의 손길에 이게 현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꿈의 여파에 긴장해 있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다시 잠들진 않았다.
꿈에서 본 건 자신이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때 죽고 싶다고 생각했었나?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병에 걸린 게 실감이 나지 않고, 조금은 억울하고, 멍하고……. 그렇게 선명하게 죽음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어쩌면 원했는지도 몰랐다. 그때는 몰랐을 뿐. 어쩌면 그 전에도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다. 내내 가시에 찔린 채 있으면 그게 아픈 것임을, 그 가시가 없을 땐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알지 못한다.
유온은 윤서경에게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두통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도 아프지 않다. 심지어 마음조차도.
낮에 유온은 가족들과 있었던 일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쓰는 내내 힘든 기분이었다. 그때의 일이 비참하기도, 울적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생각하니 누구에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창피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윤서경이 노트를 봐도 되겠느냐고 했을 때 망설였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만 가득한 내용을 그에게 보여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윤서경은 조금도 재촉하지 않고 유온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결국 유온은 조심스럽게 노트를 그에게 주었다.
사실은 누구나 원한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주기를. 그게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할지라도.
윤서경이 노트를 받아 들었을 때 자신이 품은 비참함의 일부가 그에게 넘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윤서경은 노트를 받고는 그걸 넘겨준 게 엄청나게 잘한 일이라는 듯 칭찬을 쏟아 주었다.
기쁜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남에게 마음을 쏟아 주는 건, 그도 자신의 기력을 소모하는 일일 텐데 힘들지 않을까. 자신이라면 못 할 일이었다. 역시 윤서경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자신도 무엇이 되었든 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는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없다. 답답했다. 유온은 조심스레 상반신을 일으켜 윤서경을 보았다.
피곤한지 깊게 잠들어 있다.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자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문 채 얼굴을 기울였다. 입술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완전히 닿기 전에 멈칫했다. 차마 입술을 맞댈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혼자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유온은 몸을 다시 일으켜 꾸물대며 윤서경의 품속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곤 입술 대신, 뒤척이며 닿은 것처럼 살짝 그의 셔츠 자락에 닿을 듯 말 듯 입 맞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 * *
이유온이 써 내려간 학대의 기록은 담담했다.
기억을 볼 때 사람으로 대하지도 않는 것처럼 악랄하던 폭력도 그의 동그랗고 단정한 글씨 안에서는 그 강도가 훨씬 약하게 표현되었다. 그럼에도 정말로 지독했다. 분명 이유온의 가족들은 이 폭력을 즐기고 있었다.
재미로 동물을 학대하는 것과 같다. 그 대상이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동물보다 가까이 있고, 언제든 손을 휘두를 수 있고, 들킬 염려가 없는.
가족들이 잘해 준 일이라고 쓰인 건 대여섯 줄 정도였다. 어머니가 옷을 사 왔다, 침구를 바꿔 주었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황당할 지경이었다. 이 집안사람들은 쇼핑하는 걸 좋아해서 대부분의 물건을 직접 나가 사곤 했다. 그런 집에서 이유온의 옷이나 물건을 사다 주는 건 굳이 ‘잘해 준 일’에 적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는 뜻이다.
자신이 보고 온 기억 속 이유온의 방은 언뜻 보기엔 괜찮지만 하나하나 살피면 허름했다. 그가 평소 입고 다니던 옷은 그 집의 사정에 걸맞은 고급 브랜드였던 걸 생각하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은 일부러 질이 안 좋은 물건을 고른 것이었다. 이유야 당연히 드러내 놓고 차별하기 위해서였을 테고.
그 외에도 전부 잘해 주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유온이 이전에 고양이 이야기를 했었다. 자세한 내용이 노트에 있을 것 같아서 찾아보았으나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제 방에서만 조용히 기르던 고양이. 이유온은 고양이가 죽었다고만 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 때문에 고양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아팠는데 병원에 가지 못했다거나, 창밖으로 나가 버렸다거나. 하지만 그렇게 죽은 것이라기엔 고양이를 떠올리던 이유온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형이 싫어해서. 윤서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양이를 싫어했다는 건 이유온에게 직접 그렇게 말했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키우지 말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이유온이 계속 끌어안고 있었던 그 고양이를 이유건이 과연 가만히 놔뒀을까?
그 고양이는 이유건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유온의 관심이 고양이에게 기울어지거나, 기르지 말라고 말하는데도 기르고 싶다고 하거나, 이유건은 그런 하찮은 이유로 동생이 애지중지 기르는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이다.
노트 한 바닥을 가득 채운 기록을 윤서경은 여러 번에 걸쳐 읽었다. 전부 읽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고, 또다시 돌아갔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 작고 약한 몸으로 어떻게 스무 해가 넘도록 이 모든 일을 견뎠는지.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아직까지도 그렇게 선량하고 다정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가 가족을 만나고 올 때면 어김없이 이런 일을 당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멍을 숨기고, 혹은 겉으로 남는 어떤 흔적도 없이 몸속이 곪은 채로 그는 더 맞게 될 걸 알면서도 집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돌아온 자신과 그, 두 사람의 집에서 그가 항상 가장 먼저 본 건 혐오가 섞인 차가운 눈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의 방, 그가 살아 있을 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그곳에서 이유온은 혼자 아픔을 참으며 밤을 보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윤서경을 더욱 괴롭혔다.
노트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어두웠다. 이 짓을 한 이유온의 가족들에 대한 분노만큼 자기혐오가 치밀었다. 가슴이 짓뭉개지는 것 같았다.
윤서경은 노트를 조심스레 덮고 열쇠가 달린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다른 물건을 다 치웠기에 서랍에는 노트 한 권만 덩그러니 놓였다. 서랍을 잠그고 사무실 문으로 시선을 올렸다. 닫힌 문 밖, 비서들이 계속 오가거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에 성민희와 이유연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서 있었다.
일부러 불러들인 건 아니다. 제 발로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윤서경이 이유온의 노트를 가지고 출근한 오늘. 이중권과 이유건의 보석 신청 때문일 것이다. 성민희야 찾아가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 안달 난 상황일 테고, 이유연도 감금을 당한 건 아니니 움직이기엔 자유롭겠지. 합세하여 찾아온 게 결국 이곳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보석으로 나오면 그들을 가장 위험하게 할 자신에게, 보석을 도와달라고 찾아오다니. 저들에게나 구치소에 있는 두 사람에게나 지금 상태가 그나마 가장 안전할 텐데.
무릎을 꿇려 놓은 것도 아닌데 이따금 비서가 전하는 말이나, 그들이 오고 가며 문이 열릴 때 얼핏 보이는 건 모욕을 참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벌써 두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저 자리에 서 있었으니 힘들기도 힘들 텐데 자존심 때문에 버티는 모양이었다. 윤서경은 내선을 연결했다.
―네, 대표님.
“진 회장한테 연락해서 집안사람 데리고 가라고 해. 성민희는 여기 남겨 두고.”
* * *
벌써 얼마나 여기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연은 귀가 뜨겁게 달아오른 채 다른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지 않도록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다리도 허리도 아팠다. 왜 자신과 어머니가 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할까. 먼저 찾아온 건 사실이지만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세워 둘 줄은 몰랐다.
윤서경의 사무실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열리지만 자신들을 들일 마음이 없어 보였다. 데스크에 앉아 있거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비서들은 자신과 어머니를 무시했다. 가끔 흘끗 시선이 닿아 올 때면 그대로 가서 머리채를 잡고 싶어졌다. 다들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해도 속으로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그로부터 또 시간이 얼마쯤 흐른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또 어떤 손님이 온 건지.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겠지. 얼굴을 알 테니 저게 무슨 꼴들인가 호기심을 가지거나 우습게 볼 테고, 여길 빠져나가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퍼뜨리며 낄낄거리겠지.
요즘 인터넷에는 온통 그런 소리들뿐이다. 가당찮게 이유온이 불쌍하다느니 어쩌니, 그 멍청한 것을 한껏 추어올리면서 자신을 비롯한 어머니나 형, 아버지는 비난하고 비웃어 댄다. 대부분 부경에서 조작한 의견이겠지만 볼 때마다 속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다. 윤서경과 이유온이 친근한 척 꾸며 내 찍은 사진이 보란 듯이 올라올 때면 화가 나 머리가 돌아 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또 누가 등장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새삼 모욕감으로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다음 순간 숨을 삼켜야 했다. 뒤쪽에서 훅 느껴진 건 며칠 사이 익숙해진 체향이었다. 이유연은 순식간에 파랗게 질린 얼굴을 홱 돌렸다.
역시 엘리베이터가 열린 자리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알파답게 키가 크고 멀끔하지만 뭐라 말할 수 없이 비열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그는 이유연과 성민희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더니 슥 다가왔다.
“아이고,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장모님? 왜 저 바쁜 사람이 나한테 연락을 하게 하세요.”
“회, 회장님.”
이유연은 금세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성민희도 뭐라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전엔 그래도 이 정도로 그에게 눌리진 않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진 회장은 두 사람 앞에서 완벽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을 한 진 회장이 좀 더 가까이 왔다. 얇은 입술만 비틀어 올렸을 뿐인 웃음은 가늘어진 눈이 뱀 같아서 징그러웠다. 그가 이유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더니 사뭇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에 가야지. 윤 대표 귀찮게 하지 말고. 장모님도 가시죠. 모셔다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 아니, 저는, 회장님.”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윤서경의 얼굴도 못 보고 갈 수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어 멈칫멈칫 말하자, 진 회장이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콱 집어넣었다. 몸이 휙 그쪽으로 젖혀졌다. 동요를 보이지 않는 직원들조차 일순 당황해 두 사람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악……!”
“유연아!”
성민희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말 나오지 않게 집에 처박혀 있으라고 했지. ……내가 윤서경한테 그딴 전화를 받게 해? 밖에서 문 잠가 놓은 거 아니라고 네가 멋대로 돌아다녀도 되는 위치 같아?”
말 나오지 않게, 라니. 마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처럼 말한다. 그랬다면 비서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이런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진 회장이 밖에 나오지 말라는 식으로 경고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경호원을 두어 감시하거나 문을 잠가 놓진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고, 진 회장은 오늘 바쁜 일이 있다고 했고, 성민희와도 시간이 맞았다.
기회는 오늘 뿐이라고 생각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다. 설마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다. 진 회장이 말하는 걸 보면 윤서경이 연락한 듯했다.
진 회장은 윤서경을 싫어했다. 거만하고 위아래를 모르는 놈이라고. 눈에 보일 정도로 명확한 열등감이었다. 안 그래도 감정이 안 좋던 게 이유온이 이번에 진 회장이 아닌 윤서경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더욱 자극을 받은 듯했다. 그는 이제 윤서경의 이름만 들어도 얼굴을 일그러뜨릴 정도였다.
이유연은 살짝 비서들 쪽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 상황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미친 인간이 그나마 얌전한 건 이유연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유온보다 어떻게 보아도 훨씬 나은 상대니까. 그러나 애초 결혼하기 전 했던 약속과 달리 그는 이유연을 제 집에 들이지도 않고, 함부로 취급했다. 순간 화가 치민 이유연이 입술을 깨문 순간이었다. 진 회장은 이유연의 어깨를 놓곤 팔을 거칠게 움켜쥐어 잡아끌었다. 이유연이 맥없이 끌려갔다. 그나마 여기서 머리채를 잡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진 회장이 아들을 그렇게 데려가려는 것 같자 성민희도 급하게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이르기도 전에 따라온 비서에게 붙잡혔다
“성민희 님은 남으시라고 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 없다고 전해요.”
“남아 계시라고 하십니다.”
“윤 대표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이야기 나누고 오시죠.”
진 회장은 태연하게 이유연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쳐 넣고, 벽에 등을 부딪친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곧 층수 표시가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비서를 홱 째려보았던 성민희가 그를 앞질러 사무실로 향했다. 윤서경이 무서워 차마 먼저 열지 못하고 있던 문을 열자, 그는 무감한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를 내오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못한……, 차라리 차를 내오면 쳐다보기라도 할 것이다. 진 회장에게 끌려간 아들이 신경 쓰여 뒤쪽을 흘끔거리고 있는데 윤서경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려고 불렀습니다.”
“…….”
“유온 씨가 당신 친자가 맞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성민희는 인상을 찌푸리다 대답했다.
“그래요, 맞아요. 내가 낳아 줬고, 이날 이때까지 키워 줬어요.”
자신이 품고 있다가 낳은 자식이 맞았다. 그래서 그 아이가 싫었다. 그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잘된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열 달 동안 고생하고 출산할 때 몸이 아팠던 것마저 전부 미움의 이유였다. 이후로 자신이 예전만큼 건강하지 못한 걸 보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서 뭔가를 잔뜩 빼앗아 간 것만은 분명했다.
성민희는 항상 이유온이 제 형들의 것까지 빼앗아 갈까 전전긍긍했다. 그 애 때문에 집안에서 동등하던 권력이 남편에게 넘어간 것도 불쾌했다. 남편과의 사이는 좋았지만, 사소한 결정권이나 재산 소유권은 감정적인 관계와 또 다른 문제였다.
“그 애는 지금까지 부족한 것 없이 컸다고요.”
내다 버릴 수도 있던 아이를 키워 줬는데. 성민희는 인상을 더욱 찡그렸다. 어느 정도 자라면 사람 구실을 하면서 키워 준 은혜는 갚을 거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길러 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왔는가. 윤서경은 자신들이 그 아이에게 대단한 잘못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대체 왜? 어떻게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을 수가 있지?
진 회장에게 끌려간 둘째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유온의 탓이었다. 그 자리에 왜 둘째 아들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 아이가 그 자리를 떠넘겼기 때문이다.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새 윤서경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부하에게 말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가 봐요.”
“뭐……!”
그때 말을 끊듯이 내선 신호음이 울렸다. 윤서경이 수화기를 들자 곧 목소리가 넘어왔다.
―대표님, 로비에 이유온 님 와 계십니다. 모시고 올라갈까요?
공교롭게도 성민희는 귀가 밝았고, 실내가 고요했고, 안내 데스크 직원이 조금 큰 목소리로 말을 했기 때문에 이유온이라는 이름을 어렴풋이 들었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챈 그녀는 귀신처럼 눈을 번뜩이더니 재빨리 돌아서서 뛰쳐나갔다.
윤서경은 그 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온이 회사로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든 그가 찾아온다면 막을 생각이 없지만, 하필이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아직 연결된 내선을 통해서 성민희가 1층에 내려가자마자 붙잡으라는 말을 하고 로비에 있는 직원이나 손님을 일단 내보내든 다른 층으로 보내든 하라고 전했다.
자신도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 난데없이 바빠졌을 로비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막 문이 닫히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성민희가 타고 가 버린 듯했다. 윤서경은 난감한 듯 선 비서를 지나쳐 그대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로비에 도착했을 때 아직 소란은 없었다. 1층으로 가까워지는 붉은 숫자를 보며 윤서경은 안내 데스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유온이 이정윤과 성한영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나가고 싶다는 기색이었다. 윤서경이 다가가자 그는 안도하더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어쩐 일이에요.”
“아, 그게, 지나가다가……, 한지영 씨를 만나서요, 들어갔다가 가라고 해서…….”
한지영은 윤서경의 비서실 인원이었다. 오늘은 외근을 나갔던 것으로 아는데, 회사 앞에서 마주치곤 별생각 없이 이유온을 안으로 떠민 듯했다. 어쨌든 그가 회사로 찾아온 건 나름대로 기념할 만한 일이었으나…….
“이유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얼어붙었다. 윤서경이 혀를 찼다. 더 빨리 어디로 데리고 들어가든, 나가든 했어야 했는데. 성민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곧바로 보안 요원에게 붙잡혔으나 이유온을 향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윤서경은 유온을 끌어당겨 안았다. 하지만 품으로 들어오기 직전 그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엄마한테, 너 벌 받을 거야! 천벌 받는다고!”
윤서경도 고개를 돌렸다. 이유온의 머리를 가슴에 푹 묻으며 본 성민희의 눈은 시뻘겋게 뜨인 게 섬뜩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저런 걸 본 이유온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제 실수였다. 가족과 절대 마주칠 일 없게 해 주겠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성민희가 뭐라 소리치며 더 날뛰었으나 윤서경은 조용히 이유온의 귀를 막고 보안 요원에게 눈짓했다. 양쪽에서 팔을 붙들린 그녀는 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다가 뒤쪽 비상문을 통해 밖으로 끌려 나갔다.
미리 사람을 물려 두었기에 넓은 로비에는 보안 요원과 이정윤, 성한영밖에 없었다. 저 패악을 들어도 입을 확실히 다물 사람들뿐이었다는 뜻이다. 소란이 잦아든 뒤 윤서경은 이유온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약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정윤이 말했다. 윤서경은 위로 올라오라고 말하듯 엘리베이터 쪽을 눈짓하고, 유온을 어린애 안듯 안아 든 채 자신도 걸음을 옮겼다.
대표실로 들어가 푹신한 소파에 앉히곤 약을 먹였다. 다른 사람을 모두 내보낸 후 품에 안은 채 한참 동안 체향으로 감싸고 있자, 15분에서 20분쯤 지났을 무렵 이유온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뒤 눈을 마주쳤다. 이유온은 물기가 조금 어리고 가라앉은 눈으로 윤서경을 마주 보았다. 눈이 흔들리는 게 갑자기 마주친 어머니 때문에 무척 놀란 것 같았다.
“괜찮아요?”
“네…….”
“미안합니다.”
사과에 이유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왜 서경 씨가 사과하세요.”
“마주치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못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제가 멋대로 찾아와서.”
“어느 쪽이든. 내가 빨리 돌려보냈어야 했습니다.”
찾아온 성민희와 이유연을 밖에 세워 둔 건 자신이었다. 괜한 짓 말고 곧바로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설마 이유온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윤서경은 약을 먹고 한결 진정된 이유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찾아와줘서 기쁩니다. 어쩐 일이에요?”
“그냥, 밖에 나오고 싶어서요……. 이 앞을 지나가다가 한지영 씨랑 만났어요. 여, 연락도 없이 죄송해요.”
“한지영 씨랑 안 마주쳤으면 그냥 지나가려고 했습니까?”
아마도 그랬겠지. 이 근처까진 왔지만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아서 서성거리다가 그냥 돌아가려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몇 번 그랬는지도 몰랐다. 이유온의 동선은 그의 안위와 관련된 게 아니라면, 그가 원하지 않을 경우엔 전부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해 두었으니 이정윤도 굳이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 생각이 맞았는지 이유온이 슬쩍 눈을 피하다가 말했다.
“바쁘시잖아요.”
“바빠도 괜찮습니다. 당신만 괜찮으면 원하는 곳 어디에든 앉아서 하고 싶은 걸 해도 돼요. 당신이 여기 있어 준다면 나야 당연히 좋으니까요.”
이유온이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도, 라고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정말로 윤서경은 그가 여기에 와서 웅크리고 앉아 잠을 잔다고 해도 좋았다. 오히려 고개만 들면 이유온이 보인다니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심지어 무릎 위에 올라와 있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의 성격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뭔가 더 말하려 하던 그가 무심코 책상 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뭘 봤지? 따라서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캔들의 유리병이었다.
“저걸 왜 저기에…….”
“저기가 제일 눈에 잘 띄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유온의 뺨이 꿈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칭찬이나 그 비슷한 말을 들으면 그가 늘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까지 해 주다니’, 혹은 ‘그렇게까지 말해 주다니.’ 같은.
이 사고방식을 황당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행동만 하면 비웃는 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자라서, 남이 자신을 칭찬한다는 것 자체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나마 점점 나아지고 있긴 해도…….
“오늘은 일찍 들어갈 겁니다. 저녁은 집에서 먹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온에게 입 맞춘 뒤 가서 쉬도록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정윤에게서 그가 오래 목욕을 한 뒤 잠들었다는 연락을 받은 뒤에야 마음이 놓였다.
여유가 생기자 성민희의 말이 떠올랐다.
천벌?
미쳤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역시 그 집안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이 자꾸만 윤서경을 찾아오는 건, 윤서경이 이유온과 결혼하고 그를 보호하려 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또 그렇게 계속 찾아오면 무언가가 바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들은 세상의 중심인데, 세상의 중심이 끊임없이 행동하니 주변이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유온과 결혼하는 이유는 그를 사랑해서이고 그들이 아무리 기를 써도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유온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듯, 그들은 자신을 부정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비서, 진 회장 지금 결혼하려는 사람 있는지 알아봐.”
“동운건설 말씀이십니까?”
윤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 회장, 자칫했다간 유온과 결혼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벼운 소문만 들었을 때는 버릇이 좀 안 좋은 정도로만 알았으나 이번에 자세히 조사하니 웬만한 집안에선 결혼을 꺼리는 이유가 있었다. 화명 집안과는 다른 의미로 질이 안 좋은 자였다. 이제 이유연과 정식으로 결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적당히 도움이 될 상대를 새로 찾고 있을 것이다.
곧 정리해 올리겠다는 이한영의 말에 알겠다 대답하곤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 아까 이유온에게 말한 대로 일찍 끝내고 집에 돌아가 같이 식사할 생각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작은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 * *
푹 자고 일어나자 해가 저물어 있었다. 잠에서 깨기 위해 미지근한 물로 얼굴을 씻고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주방에 들어갔다. 가사 도우미가 만들어 두고 간 크림스튜 냄비 뚜껑을 괜히 열어 보고, 오븐에 살짝 데우기만 하면 되는 빵도 바구니의 천을 걷어서 확인하고, 냉장고의 샐러드까지 잘 있나 한 번 들여다보았다.
휴대폰이 울린 건 식탁에 장식된 꽃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화면을 확인하자 이한영이었다. 유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아. 깨어 계셨네요. 다름이 아니라, 대표님이 타고 계시던 차가 작게 사고가 나서요. 조금…….
늦어지실 것 같은데, 라는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단숨에 온기를 잃었다. 전화를 받고 몇 분도 안 되어서 유온은 휘청거리며 집을 뛰쳐나왔다.
다급하게 나오면서도 혼자 밖에 나가지 말라던 윤서경의 평소 당부를 어떻게 떠올려서 이정윤과 성한영에게 연락을 했다. 아직 사무실에 있던 그들은 유온이 1층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침착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유온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윤서경이 부경 병원에 있다는 이한영의 말만 듣고 옷도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걸친 채 나온 차였다.
“그, 그게, 서경 씨가, 사고…….”
“사고요? 대표님이? 진정하세요. 저희한테 연락 들어온 게 없는 거 보면 큰 사고가 아니에요.”
“…….”
이정윤이 자신을 달래려 말하는 건지, 정말인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쳐다보자 그녀는 우선 가 보자고 하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조수석 대신 유온의 옆에 올라탄 성한영이 운전석에 앉은 이정윤과 함께 계속 유온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면서 성한영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연결이 안 되는가 싶더니, 휴대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넘어왔다. 유온이 고개를 홱 들었다.
“그렇군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뭐라 말하는지까진 들리지 않았다. 성한영은 동요 없는 얼굴로 통화를 마치곤 유온을 보았다.
“큰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뒤에서 오던 차가 살짝 충돌했는데 이한영 실장님이 혹시나 해서 병원에 모시고 간 거고, 검사 마치고 나오셨답니다. 유온 씨가 오신다는 말에 걱정하고 계시고요.”
“아……. 저, 정말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병원에 도착하면 알게 될 일을 굳이 거짓말하진 않을 것이다. 이어 성한영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는 곧바로 유온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의아하게 받아 들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온 씨?
“……아.”
윤서경이었다. 순간 눈물이 날 것처럼 눈가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애써 참았다.
―휴대폰 두고 나왔습니까?
“네……? 아.”
그 말에 그제야 품을 만져 보자 휴대폰이 없었다. 이정윤에게 연락한 직후 현관이나 그 앞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휴대폰만 없는 게 아니라 대강 걸친 겉옷은 너무 얇았고, 집에서 입고 있던 티셔츠를 갈아입지도 않았다. 신발을 제대로 신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 그런 것 같아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도착이 그렇게 늦어질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빨리 처리하고 들어가려 했던 건데, 내가 검사하러 들어간 사이에 이 실장이 괜한 연락을 했습니다.
“아니요…….”
윤서경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유온은 네, 아뇨, 하고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만 중얼거렸다. 사고라는 말에 놀란 가슴이 윤서경의 목소리를 들어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사고 소식을 들은 순간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본 어머니는 유온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벌을 받을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말은 대체로 옳았다. 어머니가 너는 시험에서 떨어질 거라고 하면 떨어졌고 어떤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정말로 좋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시켰다. 그래서 이런 형태로 벌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유온은 휴대폰을 꼭 쥐며 윤서경이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와서 확인하면 알 겁니다. 내 차에선 알기도 어려울 만큼 가볍게 부딪친 거고……. 어쨌든 조심해서 와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 말에 유온은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차선 너머 길게 늘어선 건물의 모양과 이름을 머릿속에서 연결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10분 정도면…….”
―그래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간신히 전화를 끊고 성한영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정윤이 속도를 조금 높이는 게 보였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차량은 부경 병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성한영이 웃옷을 벗어 내밀었다. 의아해하다가 제 몸을 내려다보곤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얇은 재킷 하나만 입은 차림이다. 차 안은 괜찮지만 병실까지 올라가는 길에 덜덜 떨며 갈 게 분명했고, 그러면 윤서경은 보자마자 걱정부터 할 터였다.
VIP 통로를 이용해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윤서경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윤서경이 유온을 끌어당겨 안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전화할 걸 그랬죠.”
어느새 이한영도 곁에 다가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사고였어요. 저녁을 같이 드신다고 하셔서, 혹시 기다리실까 봐 연락드린 겁니다.”
그도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유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윤서경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정말 아무데도 다치지 않은 게 맞을까? 조심스레 손을 들어서 슬금슬금,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그의 단단한 몸 여기저기를 눌러 보았다. 윤서경은 유온의 탐색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다 확인했어요?”
“…….”
유온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웃으며 묻는 윤서경을 보니, 몰래 한다고 했는데 이미 알아차린 듯했다. 유온이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는 기색이 보이자 윤서경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곤, 유온의 몸에 걸쳐진 재킷 자락을 슥 들었다.
“이건 뭡니까?”
“아.”
“죄송합니다, 대표님. 추우실 것 같아서 제가 드렸습니다.”
“……그래요. 잘했습니다.”
하지만 몸에 걸쳐진 다른 알파의 옷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유온을 품에 집어넣고는 성한영의 옷을 벗기고, 대신 제 코트를 벗어 유온의 어깨에 걸쳤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체향과 온기로 가득했다.
“너무 놀란 것 같은데, 잠깐 의사를 만나고 갈까요. 수액이라도 맞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유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놀라긴 했으나 그렇게 수선을 피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새 이한영과 이정윤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몰고 나가서 대기실에 유온과 윤서경, 둘만 남았다. 더욱 안심이 되었다. 한참 후 유온을 조용히 토닥거리던 윤서경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럴까 봐 바로 안 알리고, 집에 가서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유온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이한영은 정말 사소하다 생각해서 말을 전한 건데, 자신이 공연히 일을 키워 버린 것 같았다. 괜히 사고 당한 사람을 걱정이나 시키고.
“서경 씨가 왜 미안해하세요……. 사고가 난 건 서경 씨인데.”
“정말 별것 아니었어요. 사실 병원에 올 정도도 아닌데, 이한영 실장이 유난을 피운 겁니다.”
“하필, 하필 지금 사고가 나서. 놀라서요…….”
유온은 늦은 변명을 중얼거렸다. 몸이 싸하게 식으며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과 발끝은 한겨울에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뻣뻣하니 차가웠다. 긴장이 온몸의 체온을 빼앗아 가서 윤서경의 코트를 걸치고 있는데도 한기가 들었다. 그래도 바로 곁에 윤서경이 있으니 얼어 죽진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 무섭지 않았다.
“하필 지금 사고가 난 게 왜요. 운 나쁘게 뒤에서 차가 브레이크를 잘못 밟았을 뿐입니다. 도심에선 사고가 난다고 해도 크게 다치지도 않고요.”
“…….”
집에서 뛰쳐나오기 전 유온이 생각한 건 오래전에 잠시 기르던 고양이었다. 항상 나른하게 움직이며 유온의 손길이 닿으면 그릉그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던 고양이. 이유건은 그 고양이를 싫어했다. 결국 유온 앞에서 고양이를 죽였다.
유온은 어떻게도 하지 못하고 고양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했다. 제 탓이라 생각했다. 형을 거역하고 끝까지 기르고 싶다고 우겼으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학대당하듯 침대 위에서만 갇혀 지낼 일도, 그러다 가여운 방식으로 죽게 될 일도 없었을 거라고.
윤서경과 고양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걸 알아도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소리친 천벌이라는 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갈라진 목소리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그랬잖아요, 벌을 받을 거라고. 그래서…….”
그래서 사고라는 한 마디가 너무 두려웠다. 병원에 가면 싸늘하게 눈을 감은 윤서경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무거운 기계를 매단 채 호흡기에 의지하여, 온몸이 상처에 뒤덮인 채로 의식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두려웠다. 자신이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는 고통을 아는 만큼 더욱.
“벌이요?”
윤서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을 왜 받습니까.”
“…….”
“신경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군요. 유온 씨, 벌은 잘못한 사람이나 받는 겁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적이 없고요.”
“제, 제가 잘못…….”
“아니요.”
단호한 부정에 유온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항상 저는 잘못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걸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너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여서 자신의 생각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먼저 느낀 건 당황이었다. 이어서, 그런가? 라는 말이 떠올랐다.
“유온 씨.”
네,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윤서경과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노트에 적었던 일, 그걸 당신과 가까운 누군가가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
“예를 들면 내가 말입니다.”
자신이 노트에 적은 일들은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걸 윤서경이 당한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유온은 신음했다. 윤서경이 그런 상황 속에 있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어때요. 힘듭니까?”
“……네.”
“벌을 받을 잘못이라는 건 그런 걸 말하는 겁니다. 당신 가족들이 한 일 말입니다.”
“…….”
유온은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당할 때는 고통스럽지만 이렇게까지 심장이 비틀어 짜이는 것 같진 않았다. 이름만 아는 누군가가 당한다고 해도 마음이 안 좋은데, 그게 윤서경이라고 하면. 가슴을 손으로 꼭 누르고 있던 유온은 불현듯 든 생각에 윤서경을 보았다.
“서경 씨.”
“네.”
“서경 씨는 저 때문에……, 슬프세요?”
다른 누군가, 윤서경이 그런 일을 겪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만으로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렇다면 윤서경도 똑같을까. 슬플까?
대답은 금방 나왔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어둠이 깔렸다. 어슴푸레한 어둠 사이로 그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네. 슬픕니다.”
느낀 감정을 또렷하게 만들어 주듯이,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유온은 잠시 그 눈에 시선을 빼앗겨 움직이지 못했다. 주위를 감싼 체향도 질량을 갖추며 젖은 듯 내려앉는다. 깊은 숲의 안개처럼 무거워서 순간 숨을 쉬는 게 불편해질 정도였다.
“말로는 다 하지 못할 만큼 슬픕니다.”
윤서경의 언어가 느리게 끼쳐 왔다. 말, 표정, 눈빛, 체향, 긴장한 온몸의 근육, 희미한 떨림을 담은 목소리, 유온에게 느껴지는 모든 게 그가 느끼는 슬픔을 전달하고 부연했다. 유온은 가만히 윤서경을 보았다. 그의 얼굴과 온몸과, 여과 없는 슬픔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일렁거렸다. 몸 어딘가에 최초로 사랑을 느끼는 기관이 있다면 그건 이미 마비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때까지 쌓인 사랑으로. 하지만 크게 두근거린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기관을 향해서 온기가 넘치는 맥박을 쏟아부었다. 심장과 그 기관이 동시에 같은 박동으로 뛰었다. 손끝까지 두근거리는 것 같다. 유온은 쿵, 쿵, 나지막하게 울리며 떨리는 손을 윤서경의 뺨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제 손과 달리 그의 뺨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사락사락, 따스한 물처럼 번져 차디찬 손을 녹였다. 유온은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서경 씨. 서경 씨……, 좋아해요. 너무 좋아요.”
윤서경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서경 씨가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예전부터, 오래전부터, 당신이 너무 좋았어요. 사랑했어요. 지금도 너무, 당신을. 당신이 좋아요.”
유온의 흔들리고, 겁먹고, 열기로 가득하고, 솔직한 말을 따라서 공기가 덥게 들떴다. 주위에는 윤서경과 유온의 체향이 뒤엉켜 섞이며 두 사람의 체향 자체이자, 조금 다르기도 한 향기가 가득했다. 윤서경은 유온이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 때까지 홀린 듯 몽롱한 눈으로 유온을 바라보다가, 입술이 다물리자 곧바로 머리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키스는 길었다. 목 안쪽으로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던 유온이 점점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버둥댈 때까지 길고도 집요하게 이어졌다. 한참 후에야 윤서경은 유온을 놓았다. 유온은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적시고 있었다. 윤서경은 유온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의미를 가득 담아서 가만히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나도 그렇습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이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조급했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들을 사람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당신을 다시 잃는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유온의 어깨가 멈칫했다. 자신이 죽은 후 윤서경은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직전 보았던 그의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게 어떤 감정을 담은 표정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온은 그의 품 안에서 팔을 뻗어 몸을 끌어안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수천 번을 해도 부족할 것 같았다.
* * *
화명의 임원 중에서 가장 먼저 보석으로 풀려난 건 이중권이었다. 여느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랬듯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나왔다. 물론 그 보석의 배후는 윤서경이었다.
이중권은 어쩌다 갑자기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졌는지 의문을 가지면서도 나오자마자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평소 사용하던 번호가 아니라, 만약을 위해 가족들 모두가 만들어 놓은 비상용 전화였다.
이중권이 없는 사이 진 회장은 앞으로 돌봐 주겠다는 말을 핑계로 이유연을 데리고 갔다. 진 회장과의 결혼은 워낙 예전부터 말이 오가던 일인지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함부로 파혼하기에는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이유연을 보내는 걸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결혼하면 배우자로서 존중하겠다는, 그러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다짐을 듣고 나서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이유온과 결혼할 경우와 달리 조건이 붙은 게 마음에 안 든 듯했지만 그쪽도 수긍했다.
애초 그는 미인으로 알려진 데다 나이도 한참 어린 화명의 두 아들 중 하나와 결혼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대외적으로 결혼 사실이 알려지기만 하면 만족할 터였다. 존중하겠다고 제 입으로 말한 만큼 점잖게 굴 것이고.
하지만 이유연이 정식 배우자로 그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이유연은 진 회장에 대해서 소문이 좀 나쁘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는 정도밖에 몰랐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동운건설은 물밑에서 폭력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건설회사가 폭력배인 일이야 드물지 않으나, 동운건설 집안은 선대 회장부터 조직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절대 그런 부분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인간은 떳떳하지 못할수록 더욱 숨기는 법이었다. 그들은 폭력 조직 중에서도 특히 더 질이 안 좋은 부류였다.
진 회장은 이유연과 결혼하면서 첩을 들이게 해 주는 대신 이유연과는 평범한 부부 생활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차라리 그쪽이 나았다. 이유연이 진 회장을 자주 보지 않아도 되는 만큼 더욱.
그보다 한층 나은 건 이유연이 진 회장과 결혼하지 않는 것이었다. 원래 그 자리는 이유온, 그 아이가 가야 할 곳이었다.
원래 이중권은 시간을 끌 수 있는 만큼 끌어 진 회장을 달래면서 이유연을 윤서경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진 회장이 입을 다물 유일한 방법은 이유연이 진 회장도 어쩌지 못할 만큼 대단한 집안, 이를테면 부경과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처가인 자신들도 부경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유온을 마약에 연루시켜 처리하려 했다. 그러다 살아남으면 진 회장에게 주고, 죽으면 죽는 대로 진 회장과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상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게 아니라 죽었다고 하면 진 회장도 강하게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걸까. 이유연은 순식간에 가장 좋지 못한 형태로 진 회장에게 끌려갔다. 뿐만 아니라 화명이라는 거대한 회사는 이제 회생의 여지가 없었고, 자신은 보석으로 간신히 풀려났으나 재판을 앞두고 있다.
우선은 진 회장의 집에서 이유연을 데리고 나오는 것부터 해야 했다. 진 회장이 이유연을 존중하겠다고 말한 건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결혼했을 때였다. 지금은, 당연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유건이라도 있었다면 막았을 텐데.
이중권은 구형 휴대폰으로 초조하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에게, 둘째 아들에게. 그러나 어느 쪽도 연결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건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전화였다. 이런 상황이니 두 사람 다 잊지 않고 간수했을 터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전화 하나 못 챙길 리가 없었다.
가구와 물건마다 압류 통지서가 붙은 거실에 서서 아무리 통화 버튼을 눌러도 헛일이었다. 이중권은 출입 금지 표시를 찢어서 무시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제집의 물건이 아닌 장식품 하나를 내던져 깨뜨렸다.
조바심이 났지만 휴대폰은 차마 던지지 못하고 콱 움켜쥐었을 때, 현관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추심자인가 하고 고개를 들자 번듯한 정장을 갖춘 알파 사내 둘이 있었다.
“이중권 회장님, 윤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
보석이 되도록 한 게 윤서경이었을 테니 만나려 하는 건 놀랍지 않았다. 단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들의 태도였다. 뵙고 싶어 한다고 아니고, 찾는다고?
“뭐, 찾아? 건방진 놈이.”
“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선 바쁘셔서.”
말과 함께 사내들이 이중권을 붙잡았다. 똑같이 알파라 해도 이중권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고, 힘으로도 이 건장한 사내들을 이기지 못했다. 질질 끌려간 그는 중후한 세단 뒷좌석에 밀어 넣어졌다.
차는 고즈넉한 주택가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빠르게 달린 차량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이중권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윤서경이 여기를 알았지?
눈앞에는 잘 지은 2층짜리 단독 주택이 있었다.
이중권이 아무도 모르게 준비해 둔 도피용 집이었다. 딱 네 식구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이곳과 이 일대 토지가 이중권의 소유인 건 땅을 마련한 브로커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재판에서 집행 유예를 받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제 판결이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좋았다. 이중권은 이곳에 몸을 숨기고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도피와 정착을 위한 현금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이 윤서경이 보낸 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순간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각각 앉아 있던 사내들이 내려 문을 열었다. 남이 차 문을 열어 주는 건 이중권에겐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껄끄럽기만 했다.
버티고 있을 수도, 어디로든 도망칠 수도 없다. 이중권은 결국 사내들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제집인 양 오토 록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이중권이 기억하는 그대로였으나 이상하게 스산했다.
사내들이 이중권을 소파 손님석으로 이끌었다. 묶어 놓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알파 둘이 바로 등 뒤에 서서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작 자신을 부른 윤서경은 보이지 않았다.
윤 대표는 어디에 있는지 물으려 했을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이어 문이 열리고 바로 그 윤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인사도 없이 상석에 앉은 윤서경이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당장 뭐라 소리를 치려던 이중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그래도 이중권은 수십 년 동안 기업을 경영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기에서 눌린 적이 없는데, 지금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을 보고 있자니 무거운 위압감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알파가 더 강한 알파를 볼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심이었다. 지금껏 윤서경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것을 누르며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묵직한 공기가 이중권의 나이든 몸을 내리눌렀다.
“지내는 건 편하셨습니까?”
윤서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구치소에서의 생활을 묻는 것이었다. 편했을 리 있겠는가. 불쾌하게 입을 실룩거리자, 윤서경은 미소를 지었다. 호의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당분간 여기서 계시죠. 며칠에 한 번은 집안일할 사람이 들어올 테니 불편하진 않으실 겁니다. 괜히 밖으로 나가실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고요.”
“가둬 두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편할 대로 생각하세요. 얼마 안 있어서 이유건 부사장도 보석으로 풀려날 겁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로 말이 이어졌다.
“당신들 가족을 어떻게 할지 생각은 많이 했었는데, 딱히 내가 손댈 것도 없어 보이더군요. 당신들이 뿌려 놓은 씨앗이 꽤 많아서. 전부 그대로 거두게 하는 걸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 회장은 여기 가만히 앉아서 가족들 소식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자주 전달하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이 품에서 USB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저기에 가족의 안부가 들어 있는 듯했다. 왜 하필 USB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
“마음이 편할 날이 없을 겁니다.”
차분한 목소리에 이중권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 나이가 되어 느껴 보리라 생각도 하지 못한 공포감이었다.
“글쎄……. 죽을 때가 되면 드디어 죽게 됐다고 행복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대체 우리 가족한테 왜 이러는 건가?”
“난 처음부터 이유를 말했는데요.”
이중권이 눈을 부릅떴다. 한순간 공포를 잊고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으나,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즉시 어깨를 짓눌러 제자리에 앉혔다. 어깨부터 몸통이 부서지는 듯했다.
“그 사생아 놈 하나 때문에 이런다고?”
“당신들이 입만 다물고 있었어도 지금보단 나은 결과였겠지.”
윤서경은 테이블 위의 USB를 흘끗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 후에 오죠.”
그렇게 말하고 일어난 윤서경은 흘끗 집 안에 눈길을 줬다.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하시더군요. 여기도 좋은 스피커를 갖춰 두셨고.”
“그, 그게 갑자기…….”
“기왕 사 두신 거 사용하셔야죠.”
윤서경은 뜻 모를 말을 남긴 뒤 휙 떠났고, 그를 따라 이중권을 지키고 있던 알파들도 나갔다. 혼자 남은 이중권은 소파에 앉아 잠시 눈치를 보다가 일어나선 집 1층 곳곳의 창문을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창마다 정원을 서성거리는 감시인들이 있었다. 이중권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온 집 안의 커튼을 쳤다.
밖에 나갈 순 없지만 적어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진 못한다. 이중권은 테이블 위의 USB를 한 번 보고는 거실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가족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우선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1층 서재로 들어간 그는 책장 사이의 붙박이처럼 생긴 협탁을 밀었다.
나무 바닥 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밀린 협탁 자리에, 판자의 선을 따라 정교하게 만들어 둔 문이 하나 있었다. 이중권은 서재의 커튼이 틈 없이 닫힌 걸 확인하곤 조심스레 그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문이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긴장한 채 문을 연 이중권의 안색이 밝아졌다. 문 안쪽에는 자신이 숨겨 놓은 물건이 그대로 있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정리되어 놓인 금과 세탁이 끝난 현금을 보자 마음이 편해지는 동시에 통쾌했다. 분명 이 집을 뒤졌을 텐데, 윤서경이 이걸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협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이중권은 거실로 가서 그제야 USB를 집어 들었다. 가족들의 소식을 이걸로 알려 주겠다니. 금괴를 걱정하느라 잠시 눌려 있던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다시 일어났다.
서재에는 새 노트북도 그대로 있었다. 이중권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USB를 꽂아 넣을 때만 해도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하는 불쾌감 쪽이 더 컸다. 그러나 USB에 들어 있던 영상을 재생했을 때 그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재생된 영상은 어디에서 열린 건지 모를 작은 파티의 모습이었다. 기록 보존용으로 남긴 건지 자세하게 촬영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화면 안에 아들의 모습이 있었다. 진 회장과 가까이 붙어 선 이유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화면으로도 몸이 안 좋은 게 보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저들끼리 뭐라고 소곤거리는 것도. 반면 바로 옆에 선 진 회장은 태연한 모습이다.
이중권은 이유연이 왜 그러는 건지 잘 알 수 있었다. 몸 어딘가에 외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이유로 다친 상처. 생각할 것도 없이 진 회장의 짓이었다. 이유연을 데리고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손찌검하는 버릇이 나온 것이다.
다친 모습을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확신했다. 진 회장이 어떤 사람이던가. 그의 성정은 물밑에선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중권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그 폭력의 대상이 이유연이 되었다니, 이렇게 빨리. 진 회장이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 서둘러 데리고 돌아오려고 했건만, 집에 들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자가…….
정신을 차리고 재생 목록을 보았다. 영상은 하나가 아니었다. 총 세 개, 길이는 모두 짧았다. 두 번째는 이유연이 부경 사옥의 주차장에서 진 회장에게 끌려가는 영상이었다. 이전 영상에 비해 화질이 떨어졌고 음성이 없었으나 이유연이 뭐라고 소리치며 억지로 차에 태워지는 건 알 수 있었다.
주름진 손이 벌벌 떨리며 다음 영상을 눌렀다. 이번엔 음성만 있었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요.
―…….
이중권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집에서 일하던 가사 도우미였다.
―요샌 일자리 찾는 것도 쉬워요. 예전처럼 파출부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고, 일할 집만 잘 찾아가면 편해. 이력서만 등록해 놓으면 금방이라니까.
―……무슨 말이에요?
전화를 받은 건 성민희였다.
―뭐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이쪽 업체에 추천해 줄 수 있는데.
―지금 나보고, 남에 집에 가서 일을 하라는 거예요?
―그게 어때서요. 다들 하는 일인데. 하기야, 그쪽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봤으니 하기 싫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대하는 집이 더 드물어요.
―그렇게 대하다니, 무슨 뜻이에요. 고작 가정부한테 얼마나 더 잘해 주라고요?
―휴……. 어쨌든 생각해 보세요. 나도 큰맘 먹고 전화한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얼굴 아는 사람인데, 길거리에 나앉아서 굶어 죽었다고 하면 마음이 안 좋잖아요.
―고맙지만 아직 그런 일까지 해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네요.
통화가 뚝 끊어졌다. 이중권은 재생이 멈춘 화면을 멍하니 보았다. 지금 아내가 가정부로 일하라는 권유를 받은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화명의 안주인이?
이 세 개의 영상만으로 이중권은 기가 막혀 신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윤서경이 사흘 후에 오겠다고 한다. 다른 소식을 가지고. 그게 이것보다 좋은 소식일 리 만무했다. 넋이 나가 있던 이중권의 표정이 이내 굳어지고, 책상을 쾅 내리쳤다. 책상에 올려놓았단 값비싼 장식품 몇 개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이중권은 곧 정신을 차리고 낡은 휴대폰을 들었다. 저장은 하지 않았지만 외우고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그의 안색은 더더욱 나빠졌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뭣…….”
외국에서 살 집과 여권을 준비해 둔 브로커의 번호였다. 신용이 생명인 자들이라 갑자기 회선을 해지할 리가 없는데, 몇 번이나 다시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을 계속 들으니 단조로운 안내 메시지의 목소리마저 자신을 놀리는 걸로 들렸다.
잠적한 건가? 이런 자들이 맘먹고 숨으면 어디서도 찾지 못한다. 아니……, 일단 돈이 있으면 브로커 따위는 얼마든지 새로 구할 수 있다. 이중권은 침착해졌다. 연락이 안 되는 이상 마냥 기다릴 순 없다. 그쪽에 지불해 둔 돈이 있다 해도, 지금같이 급박한 상황엔 그냥 날린 셈치고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나았다.
진 회장이 아무리 폭력배와 연관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이유연 하나는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도와줄 사람도 찾아야 한다. 이유건이 보석으로 나오고 수사망이 느슨해지는 걸 기다렸다가 외국으로 가자. 윤서경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어차피 흉악범이 아닌 이상 사람들의 관심은 금방 수그러들게 마련이었다. 그건 검찰의 수사 의지도 약해진다는 의미였다. 그때 조용히 도망치면 아무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이유온.
처음부터 그걸 집에서 기르는 게 아니었다. 그게 그토록 눈엣가시에 거슬리던 이유가 있었다. 이런 미래를 예견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쯤 키워 준 은혜도 잊고 윤서경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겠지.
이중권은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그 얼굴을 애써 지우며 새로운 브로커를 찾기 시작했다.
* * *
해가 길어지고 창밖에서 흘러드는 햇살이 한층 맑아졌다 싶더니 어느새 봄이었다. 분명 마른 가지만 있던 가로수에 작은 눈송이처럼 분홍빛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산책을 나왔던 유온은 피어날 준비를 하는 꽃나무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해가 바뀐 게 어제 일 같은데 벌써 겨울이 멀어졌다. 거리 곳곳에 봄의 생기가 돌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유온은 봄 한정 메뉴라며 추천받은 연분홍색 음료를 보았다. 날씨가 따뜻해서 차가운 음료를 들고 있어도 손이 시리지 않았다.
“거기 테라스석 분위기가 정말 좋대요. 이번 주 토요일에 대표님 하루 종일 일정 없으시던데, 같이 가 보시는 거 어때요?”
이정윤의 화제는 언제나 어디서 어디로 흐를지 모른다. 지금도 꽃이 피는 이야기를 하다가 언제부턴가 풍경이나 분위기가 좋은 카페 이야기로 넘어갔다. 서울 외곽,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한다. 기분 전환 삼아 윤서경과 가 보는 게 어떠냐는 말이었다.
딱히 자신은 기분을 전환할 일이 없었지만, 윤서경은 늘 일 때문에 바쁘다. 그가 드라이브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강이든 호수든, 바다든 물을 보는 건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이정윤이 말한 카페 테라스석에서는 너른 강물이 보인다.
자신은 휴일이라고 할 게 없다. 꼭 해야 하는 일이나 활동이 없으니까. 휴일이 없다기보다는 매일 쉰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다 자신은 밖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데, 윤서경은 달랐다. 그는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예전에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엔 취미로 아웃도어 활동을 하러 가는 날도 많았다. 요즘은 전혀 가지 않는 것 같지만.
혹시 그가 쉬는 날에도 집에만 있는 이유가, 자신이 밖에 나가지 않아서는 아닐까? 너무 자기중심적인 생각 같기도 했으나 만약 그렇다면 그에게 미안했다.
“말해 볼게요…….”
“네! 좋아하실 거예요.”
과연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나 꺼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에게 하고 싶던 말도 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생각만 했었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유온은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이 될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 그는 이번 시즌에 호텔 델리에 새로 나온다는 케이크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걸 앞에 두고 차를 마시면서 유온은 우물쭈물 고민하다가 조용히 말을 꺼내 보았다.
“저기, 서경 씨, 정윤 씨가 말해 준 건데, 음……. 혹시 이번 휴일에…….”
“휴일에요?”
“네, 저, 바쁘지 않으시면, 드라이브…… 가실래요?”
망설임과 불안이 무색하게도 윤서경은 유온이 드라이브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눈을 둥글게 뜨더니 그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싶어 어색하게 움찔거리자, 윤서경은 기분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피곤하지 않으면 지금 출발할까요?”
……저녁 9시였다.
“아, 아니요, 지금이 아니라 이번 주 토요일에…….”
“아, 휴일이라고 했죠. 그래요. 몇 시에 갈까요.”
“아무 때나, 서경 씨 편하실 때요.”
“그럼 11시쯤 출발해서 점심 먹고, 근처도 좀 돌아보고 옵시다.”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동안 외출이 많이 하고 싶었나. 역시 자신 때문에 못 간 걸까, 안절부절못하며 올려다보자 윤서경은 유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어디에 가자고 말한 게 기뻐서요.”
“…….”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은 건 뭐든 말해요.”
고작 드라이브를 가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뿐인데 돌아오는 칭찬이 과했다. 괜히 얼굴이 발개져선 윤서경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매만졌다. 윤서경은 그 손 위에 또 입을 맞췄다.
토요일은 금방 다가왔고, 다행히 날씨가 맑았다. 윤서경이 말한 대로 11시쯤 출발해서 카페에 도착하자 유명한 곳인데도 생각만큼 사람이 많진 않았다.
“결혼식 장소는 생각해 봤습니까?”
식사를 마치고, 커피가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윤서경이 물었다. 결혼식은 다시 돌아오는 올해 겨울 외국의 따뜻한 도시에서 올리기로 했다. 어디에서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고, 신혼여행 장소도 결혼식 도시가 결정되면 그와 분위기가 다른 곳으로 하자는 정도로만 애매하게 생각해 두었다.
“음…….”
안 그래도 결정은 어려운 일인데 그게 결혼식과 신혼여행이라는 중요한 장소면 더더욱 곤란했다. 난감한 표정의 유온을 본 윤서경이 웃음을 지었다.
사실, 신혼여행으로 가고 싶은 곳은 있었지만……. 그것도 왜인지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냥 입을 우물거릴 뿐이었다.
“천천히 생각하죠.”
대답을 못 하는 유온을 재촉하지 않고 윤서경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유온은 그의 뒤로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테라스석에서는 강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면서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 왜 답답할 때면 탁 트인 곳으로 놀러 가는지 알 것 같았다. 널찍한 테라스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야의 끝에서 끝까지 강이 흐르고, 하늘과 산자락은 땅에 닿아 있었다. 새삼 세상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땅은 어디로든 연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사는 집으로, 윤서경의 회사로, 유온의 병원으로, 더 멀리 나아가면 자신의 것이 되어 버린 스페인의 고성,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결혼식을 올릴 도시, 신혼여행 장소까지.
가족이 있는 좁은 집에만 한정되어 있던 유온의 세계는 이제 놀랄 만큼 넓어졌다. 그리고 더는 그 넓은 세계가 무섭기만 하진 않았다.
“서경 씨, 저…….”
“네.”
유온은 고개를 들어 윤서경과 눈을 맞췄다.
“부모님이랑 형들을 한 번만 만나 보고 싶어요.”
윤서경이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스스로도 말해 놓고 이상하고 뜬금없게 들리겠다 싶었다.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불과 얼마 전에 제 입으로 말했었다.
하지만 유온도 줄곧 생각한 결과였다. 어머니와 마주쳤던 이후, 윤서경은 가족들에게 별일이 없다고 계속 말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유온은 이제 TV를 피해 다니지 않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버지와 형의 상황이 점점 걷잡을 수 없게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형도, 보석으로 나왔다가 그대로 잠적하고 말았다.
어머니와 작은형의 소식까진 뉴스에서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어렵게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유온이 스무 해 넘게 산 그 집에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게 될 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윤서경은 유온이 가족들에게 빼앗긴 것들을 하나하나 돌려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해하지 못했다. 빼앗긴 게 너무 많아서 자신에게 무엇이 없고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던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대로 만나지 않고 윤서경의 손에 모든 걸 맡겨 둔다면 편할 것이다. 그가 유온을 보호할 수 없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소식을 듣는 일 없이 영원히 멀어진 채 살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보호만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무엇 하나라도 윤서경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 이 물러 터진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 그를 위한 행동이자 자신을 위하는 행동이 되리라는 걸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았다. 그래서 정말로, 너무 두렵지만, 그래도…….
“만나 보고 싶어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윤서경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이상하게 들렸을까, 괜한 말을 했나. 윤서경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유온은 안절부절못하며 다른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릴 생각도 못 하고 제 손끝만 쳐다보았다. 유온의 체감으로 수십 시간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몇 초 동안, 수많은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대부분이 자신의 말을 윤서경이 어떻게 볼까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 유온을 건져 올리듯 윤서경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요.”
“약속이요……?”
“직접 만난다고 해도 쉽게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요.”
용서라니, 낯선 단어에 유온이 몸을 움츠렸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를 보이면 당신의 가족은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용서는…… 당신이 원한다면 마음이 가는 대로 해야겠죠. 하지만 당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걸 분명하게 판단해야 해요.”
고개를 들어 다시 윤서경을 보았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설명하고 있었다. 타이르거나 충고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왜 그러면 안 되는지에 대한 설명. 길게 이어져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그의 말을 유온은 천천히 되새겨서 이해의 회로에 집어넣었다.
“당신 가족들이 억지로 느끼게 만든 부채감이나 죄책감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애초에 그건 당신이 가져야 할 감정이 아닙니다. 과거의 당신이 겪은 일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들을 만나고 마음이 약해지더라도, 정말로 그들을 용서하고 싶은 건지 꼭 다시 생각했으면 합니다.”
“네…….”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가족들을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윤서경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가족들을 만나면 자신은 안 좋았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그들의 품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진 말을 듣든, 다정한 말을 듣든.
억지로 느끼도록 만든 부채감과 죄책감.
그 말 그대로였다. 지금도 유온은 때때로 치미는 죄책감을 애써 누르려 애쓴다. 노트 한 바닥을 가득 채울 정도였던 학대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왜 이렇게 가족에게 얽매여 있을까.
영원히 만나지 않기를 바란 건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도 있었다. 지금도 만약 어머니가 자신을 안아 주기라도 하면 그걸 매몰차게 뿌리치고 빠져나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노, 노력할게요.”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언제나 그렇듯 따라왔다. 하지만 유온은 노력하겠다는 말로 생각을 꾹 눌렀다. 아무리 두려워도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유온의 말에 윤서경이 진중하던 표정을 풀었다.
“그래요. 당장은 어렵고,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윤서경은 그렇게 말하며 유온의 앞으로 디저트 접시를 밀어주었다. 아이스크림과 함께 예쁘게 놓인 브라우니를 보며 유온은 생각했다. 일주일……. 그 안에 해야 할 말을 제대로 정리해 둬야 할 것 같았다.
* * *
조바심 또한 병의 일부였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서두르면 결과가 안 좋아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빨리 처리해 버리려 마음이 급해지는 것.
이유온의 정신적 문제 치료는 아직 극히 초기 단계였다. 이전이 워낙 상태가 안 좋았던지라 눈에 띄게 경과가 좋은 듯 보이지만, 태어나서 이때까지 차곡차곡 쌓인 병증은 고작 이 정도로 나아질 수 없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자는 게 의료진의 의견이었다.
그는 갑자기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아마도, 가족을 만나 뭐든 자기 나름의 매듭을 짓고 싶은 것이다. 최대한 빨리. 불과 얼마 전에 가족과 다신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생각이 빠르게 바뀌어 여기로 왔다.
너무 서두르고 있긴 하지만 아예 피하고 싶어 하던 걸 대면하겠다고 말한 것이니…… 긍정적이지 못한 건 아니다. 게다가 이유온의 가족은 이제 곧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한 번쯤 만나고 싶어 한다면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만나 두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생각하며 창밖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유온이었다.
“네.”
―아, 서경 씨……. 저녁은 드셨어요?
“네, 먹었습니다. 당신은요.”
―으음. 오징어 볶음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다행이네요.”
호텔 룸서비스보다 새로 이사한 집에 고용한 요리사가 이유온의 입에 잘 맞게 음식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저녁 안부를 묻는 대화로 통화를 이어 갔다. 잠깐 통화를 하는 동안 윤서경의 얼굴은 부드럽게 풀어졌고 목소리에서는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일찍 자요. 나는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고, 이따 보자고 말하는 걸 보니 안 자고 기다릴 생각인 듯했다. 이유온이 잠을 안 자야겠다고 버티는 일은 많았으나 대체로 성공한 적은 드물었다. 돌아가면 침대 한쪽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전화를 끊은 후에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윤서경은 좋은 기분을 잠시 유지한 채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8시를 조금 넘겼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자정을 넘길까. 차는 강원도에 있는 윤서경의 별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산자락에 자리한 곳으로 구불구불한 흙길을 한참 가야 하는지라 지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별장 앞마당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주위는 스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말끔한 전원주택은 윤서경이 온다는 말에 켜 놓은 조명등 덕분에 밝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고급스러운 느낌은 집 뒤로 돌아가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 때까지만 이어졌다. 묵직한 철문의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자 초봄 산속의 서늘한 공기를 내몰며 습하고 더운 공기가 훅 밀려나왔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과 벽은 원래 지하 창고임에도 깔끔하게 지어졌지만, 지금은 불이 전부 꺼지고 더운 습기와 악취가 벽과 바닥에 눌어붙어 잠시 서 있기도 불편한 공간이 되었다. 윤서경은 미끄러운 바닥을 망설임 없이 내려갔다.
계단으로 한 층 반을 내려와서 있는 지하 창고는 원래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보관하기 위해 사용했으나 지금은 다른 물건이 들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안쪽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 실내 온도는 더욱 높아졌다.
원래 있던 조명을 전부 끄고 간이로 설치한 전구에 날벌레가 모여들어 탁탁 부딪치고 있었다. 최소한의 바람만 통하도록 틈새가 벌어진 창으로 바깥에서 막 기어 들어온 커다란 벌레가 스르르 미끄러졌다. 창밖의 스산한 바람 소리와 환풍기 소리가 섞여 들렸다.
환기가 안 된 실내에서는 지저분한 냄새가 났다.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공기 때문이기도 했고, 눈앞에 엎어진 남자 때문이기도 했다. 벌써 며칠을 이 더운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악취를 풍기는 게 당연했다.
윤서경은 천장 바로 밑에 붙은 형태의 길쭉한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지하실을 환기할 때만 여는 창은 그리 크지 않았고, 그나마 덧창까지 닫아 두면 창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느슨하게 걸어 둔 자물쇠가 윤서경의 손에 풀어졌다.
창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쓰러져 있던 남자가 찬 공기에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넋이 나간 얼굴은 수염이 엉망으로 자라 보기 싫고 지저분했다.
그자가 머리를 휘적거리며 들었다. 엉망이 된 옷이며 머리, 너절한 행색은 평소는 물론이고 보석으로 막 나왔을 때의 모습조차 상상도 할 수 없게 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구와 연락을 취할 새도 없이 이곳으로 끌려 온 그는 열대처럼 찌듯이 무더운 실내에서 물도 식사도 거의 섭취하지 못한 채로 감금되어 있었다. 알파의 체력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이유건.”
이름을 불렀지만 눈이 탁하게 풀린 게 대화할 상태가 아닌 듯했다. 윤서경은 전화로 어딘가에 짧게 명령을 전한 뒤, 두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서서 기다렸다. 곧 발소리 두 개가 지하실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정장을 입은 체구 큰 남성 둘이 들어오더니 곧바로 움직였다. 한 사람은 커다란 통에 물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주사기를 준비했다.
산속 지하를 흐르던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자 이유건이 헉 소리를 내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의 팔뚝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이유건은 흐릿한 정신으로도 그걸 알아차리고 난리를 쳤으나 알파 두 명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이유건은 저 주사를 보면 일단 난동부터 피웠다. 주사기에 든 약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유온에게 상습적으로 주사하던 약이었다.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고 있으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윤서경도 약물의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유온의 주치의가 털어놓기 전에는.
이 약을 그는 이유온을 폭행하는 동안 정신을 잃지 못하게 하거나, 이유온을 우울감에 빠뜨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다른 약물과 함께 써서 그를 자신하게 의존하게 만들려 시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유온은 지금까지 그런 짓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무섭지만 자신에게 잘해 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목적은 생각만으로도 역겹고 시간도 오래 걸릴 터라 시도하지 않았으나, 약물 덕에 이유건은 벌레가 몸을 기어 다니고, 숨이 막히도록 덥고 습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 환경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고스란히 버텨야 했다. 감정이 몸집보다 거대하게 커져 버리는 듯한 우울감 속에서,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이유건의 눈에 초점이 희미하게 돌아왔다.
“정신 놓지 못하게 하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지옥 같은 시간을 생으로 버티게 하려 쓰고 있는 주사인데 어느새 효과가 반감된 듯했다. 관리자들이 시간을 놓치진 않았을 테니, 이유건이 버티는 시간이 짧아진 모양이다. 윤서경은 산송장 같은 이유건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유온 씨가 당신들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
“일주일 후에 자리를 만들 겁니다. 말은 알아서 조심하면 좋겠군요. 여기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유온이…….”
갈라진 목소리에 윤서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온이는 어떻게…….”
이유건의 얼굴은 멍했다. 넋이 나간 와중에 저게 진심으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걸 왜 당신이 묻습니까.”
“…….”
미친 새끼가 따로 없었다. 이유온이 어떻게 지내는지, 이유건은 그걸 알 자격도 이유도 없다. 윤서경이 여기에 온 건 그에게 유온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리를 만들기 전에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미리 봐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유온이 저걸 그냥 봤으면 얼마나 놀랐겠는가.
일주일 동안 사람 꼴로 만들어 두라고 전한 뒤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다른 가족은……. 이중권은 글쎄, 일주일 후까지 제정신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는 고작 계절이 봄으로 바뀌는 동안 다른 사람처럼 말라비틀어졌고 눈빛은 완전히 죽었다. 그 집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살려고 했는지 음향 장비를 제대로 갖춰 두었기에 마음껏 사용하도록 해 주었다. 소리를 트는 건 이중권 본인이 아니라 바깥에서 집과 그 근처를 통제하는 관리인이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간도 일정치 않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퍽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 봐야 집 전체에 울리는 것이니 소리의 울림도, 크기도 ‘감상실’보다는 훨씬 견딜 만할 텐데.
또한 그에게는 사흘에 한 번씩 다른 가족의 근황이 전달되었다. 지하실에서 죽어 가는 이유건의 모습을 포함하여.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알파 사내에게 자신이 더는 어디에도 영향을 줄 수 없는, 가족이 무너져 가는 걸 바라보기만 해야 할 무력한 인간이 되는 상황은 엄청난 스트레스인 모양이었다. 지켜보는 것밖에 못 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는 윤서경 또한 누구보다 잘 안다.
하루에 대여섯 번씩 서재 협탁을 치우고 그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것만이 구명줄이라는 듯이. 물건은 진짜긴 했지만 이중권이 그걸 쓸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윤서경은 언제쯤 그것을 그 웃기지도 않은 비밀 공간에서 치울지 고민 중이었다.
이중권에게 보낼 영상은 윤서경도 미리 확인하고 있었다. 영상은 그의 가족 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찍은 것이었다.
성민희는 옆집 사람이 음식을 나누어 주자 무슨 뜻으로 이런 걸 주는 거냐고 소리치며 그릇을 내던졌다. 이유연은 이건 내가 당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매일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이유건이야, 말할 것도 없이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그들 자신의 생각이었다. 호의를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떠맡기려던 괴로움이 방향을 바꾸어 자신에게 돌아오자 견디지 못한다. 이유온 한 사람에게 몰려 있던 불행과 고통이 나뉘어 돌아왔을 뿐인데 저들이 대단한 고난 속에 있는 것처럼 굴었다.
역시 그런 가족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직 심하게 불안정한 상태인데, 설마 그들이 이유온에게 갑자기 다정하게 굴어 줄 리는 없고. 아니, 다정하게 군다면 그것대로 문제겠지만.
언제까지 이중권과 이유건을 살려 둘지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온을 만나고 난 후에 처리한다면 나름대로 깔끔한 마무리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유온이 그들을 만나도 정말 괜찮을지. 주치의와 상담사하고도 이야기를 마쳤으나 심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윤서경은 걱정스러운 기분으로 집으로 향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 * *
어릴 때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다.
여러 번 갔었지만 유온이 기억하기로 처음 갔을 때가 가장 강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때 서너 살쯤이었을까. 놀이공원이 너무 넓고 풍선을 주겠다고 달려오는 마스코트 인형이 무서워서 움츠러들어 있었다.
또 누가 같이 갔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어머니와 두 형은 확실하게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막 나왔을 때였다. 두 손에 가득 인형을 끌어안은 작은형의 손을 큰형이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유온의 손을 잡은 채였다. 신이 나서 떠드는 작은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어머니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제 손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갑자기 차가워진 것 같았다. 흘끗 유온을 본 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온이 여기에 두고 갈까?’
‘네?’
‘왜요?’
두 형이 차례로 대답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무서웠다. 너무 싸늘하고 냉정해서 정말 이대로 자신을 두고 갈 것 같았다. 버려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로 유온은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지만, 어머니는 매몰차게 그걸 뿌리쳤다.
‘얄밉잖니.’
웃음기가 실린 목소리가 진심이라는 건 자신을 보는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얄밉다. 어머니가 유온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유온은 손을 더 뻗지도 못하고 움찔거리며 매달리듯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머니. 유온이 놀라겠어요.’
‘맞아. 이런 데다 버리고 갔다가 죽으면 어떡해?’
열세 살과 일곱 살, 나이 차이를 생각해도 유온보다 훌쩍 키가 크던 두 형이 차례로 말했다. 자신을 감싸 주는 게, 버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게 기뻐서 얼굴을 붉힌 채로 형들을 보았다.
형들이 말려 준 덕분에 유온은 그곳에 남겨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어린 나이여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유온이 죽는다고 해도 그곳에 두고 오고 싶었다는 걸.
그런 기억이 몇 가지인가 남아 있다. 지금 말하면 가족들은 기억도 못할 테지만 유온에게는 마음 깊게 남은 호의와 친절, 다정함. 생일에는 케이크를 사 주었고 매 계절 옷장을 채워 주었다. 또 자신이 가지고 싶어 하던 걸 큰형은 항상 먼저 알고 선물해 주곤 했다.
게임기며 유명한 화가의 도록이며, 제 용돈으로는 살 수 없는 물건들. 가질 수 없을 게 분명해서 휴대폰으로 검색해 사진을 보는 걸로 만족했던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건이 안겨 주었다.
그저 큰형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생각해서 선물을 주는 게 기뻤다. 또 큰형은 아버지에게 혼이 나러 들어갈 때 여러 차례 구해 주고 감싸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묘했다. 큰형이 선물해 주는 건 언제나 유온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 보았던 물건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공교로웠을까.
정인호에게 자신인 척 문자를 보낸 사람.
그런 일까지 하는데 검색 기록을 보는 게 어려웠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선물을 받을 때마다 느꼈던 고마움과 감동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다른 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결혼 예물…….
지금은 윤서경의 취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예물을 준비하며 받았던 카탈로그의 내용도 기억한다. 물건의 상품 코드까지 아직도 기억할 정도로 카탈로그를 자세히 봤으니까. 하지만 그중에서 무엇 하나 윤서경의 취향인 게 없었다. 예복, 시계, 반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큰형의 취향이지 않았나?
발밑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자신에게 잘해 준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짚어 보니 그 기억은 전부 허상이다. 자신이 살았던 시간 대부분을 함께한 가족들은 자신을 그저 온전히 미워하고, 싫어했던 건지도 몰랐다.
유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느새 차는 이미 유온이 살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다른 장소를 권하는 윤서경에게, 이곳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조급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잘 안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될지,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나 있을지 알 수 없으며 지금은 겁이 나서 다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 한다면 이곳에서 하고 싶다. 이곳은 이유온의 모든 시간과 기록이 떠도는 장소였다. 해가 잘 들지 않고 먼지로 가득한 창고, 아버지와 큰형의 방, 항상 속이 메스꺼워지는 식사를 하던 주방, 편히 쉴 공간은 아니었던 자신의 방.
자신의 사방에는 벽이 있다. 너무 높고 두꺼운 벽이어서 빛을 가리고 편히 앉을 수도 없게 만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자신을 덮치듯 기울어지며 무겁고 버거운 그늘을 드리운다.
켜켜이 쌓인 기억을 여기서 끊어 낼 수만 있다면. 두려움을 새로운 기억으로 얇게나마 덮을 수 있다면, 가족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낼 수 있다면, 그 벽에 작지만 틈이 생길 것 같았다. 그 틈은 자신이 바깥과 연결되어 있고, 언젠가 벽은 무너지리라는 확신을 줄 것이다.
유온은 고개를 들었다. 바로 곁에 윤서경이 있었다. 그는 유온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 주다가 유온의 움직임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손을 감쌌다. 유온은 얽히듯 잡힌 손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이 손은 절대로 차가워지지 않으리란 걸 확신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죠?”
“…….”
가만히 끄덕였다. 집에는 어머니와 두 형이 있었다. 아버지는 움직일 상황이 못 되어서 오지 못했다는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지금까지 자라면서 수도 없이 들어온 말들로 어떻게 자신을 물어뜯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 말도 듣지 말고,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해요. 문 바로 앞에 내가 있을 겁니다.”
“서경 씨…….”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손을 잡은 채로 짧은 키스가 이어졌다. 윤서경의 체온이 전해져 혼자 한겨울로 끌려간 것 같던 몸이 따스해졌다. 가슴에 욱신욱신하게 퍼지는 불안감도 누그러지고, 발끝에 힘이 생긴다. 가만히 그 온기를 받아들이던 유온은 눈을 내리뜨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제 쪽에서 살며시 윤서경에게 입을 맞췄다.
눈이 녹듯 짧은 입맞춤이었으나 윤서경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떨어진 유온의 입술에 재차 입술을 눌렀다. 입술이 가만히 닿아 있을 뿐인 입맞춤이 잠시 이어졌다. 잠시 후 입술을 뗀 윤서경이 말했다.
“갈까요.”
고개를 끄덕인 유온은 윤서경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익숙한 현관문이 보였다. 항상 열 때면 거실에 누가 있을지, 외출했다가 돌아온 자신을 보고 무슨 말을 할지 겁을 내며 서던 문이다. 손잡이를 향하려던 손이 몇 번이고 멈칫하며 움직이지 않다가 겨우 그것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쇠의 서늘한 감촉이 전해졌다. 옆에는 윤서경이 서 있었다. 유온은 문손잡이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남은 윤서경의 온기를 다 지워 버리기 전에 숨을 들이마시며 문을 열었다.
“…….”
중문은 열려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세 쌍의 시선이 일제히 유온을 향했다.
집 안은 따뜻하고 깨끗했다. 회사가 기울어지고 가족들은 정신없는 상황에 놓이면서 집도 어지럽혀지지 않았을까 했는데,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누군가 여기서 지낸다는 말은 못 들었으니 윤서경이 미리 정돈을 해 둔 모양이었다.
두려움이 커졌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초췌해진 가족들은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고 있었다. 조용히 있겠다는 게 아니라, 무슨 말부터 쏟아내 유온을 찢어발길지 생각하는 듯했다. 유온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자, 잘 지내셨어요.”
“……하, 뭐라고?”
가장 먼저 말한 건 어머니였다.
“네가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
“지금 너 때문에 아버지는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형들이랑 엄마는 또 어떻게 사는지 알아? 대체 너 하나 때문에 몇 명이 피해를 보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들어와?”
역시나 쏟아진 어머니의 말에 유온은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눈에 보일 듯 선명한 악의가 쏟아졌다.
“그래, 다 너 때문이야.”
작은형이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가와 뺨이라도 때릴 줄 알고 몸을 움츠렸으나, 일어났던 그의 팔을 큰형이 잡아서 막았다.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을 당하고 있다고! 내가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해? 내가 왜 그따위로 살아야 해.”
그가 진 회장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유온은 진 회장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나이가 조금 많고 얼굴이 무섭고, 화명에 도움을 줄 커다란 회사를 가진 사람이라는 정도였다.
작은형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진 회장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가 하는 말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다. 유온은 또 반걸음 물러섰다. 작은형이 그런 일을 겪고 있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 때문에, 자신이 진 회장과 결혼하지 않아 작은형이 대신 가서…….
“…….”
불안하게 흔들리던 유온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그건 자신 때문인가?
진 회장과의 결혼을 밀어붙인 건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진 회장과 유온의 나이 차이는 아들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 회장의 회사가 워낙 커서, 가장 도움이 될 상대라는 이유로, 돈이 될 테니까, 아버지는 유온이 어릴 적부터 그와의 혼담을 진행시켜 왔다. 아마 이미 받은 도움도 많을 것이다.
유온이 윤서경과 결혼하게 되고 그 혼담은 무산되었다. 원래 결혼하려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집안의 다른 오메가라도 그에게 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진 회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작은형이 저렇게 소리치며 말하는 그의 비참한 상황은 원래라면 유온이 겪어야 했던 일들이었다. 또한 처음부터 부모님이 유온을 진 회장과 결혼시키려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유온이나 유온의 가족과 엮일 일도 없었다.
유온은 한동안 묵묵히 작은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윤서경이 청혼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당했을 일들을. 이전 같았으면 놀라고 당황한 채로 죄송하다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쏟아내며 당장 형과 자리를 바꿔서 진 회장의 집으로 갔을 것이다. 형은 좋은 일만 겪어야 하니까, 불행은 자신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몫이니까.
“유온아.”
작은형이 지친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짧은 침묵이 지나간 후, 큰형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마르고 안색이 안 좋았다. 무심코 어디 안 좋으세요, 하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형이…… 지금 너무 힘들다. 우리 가족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유온이 너도 알잖아. 부모님이 너한테 엄해도 얼마나 널 사랑하시는지. 형들도 그렇고. 유연이도 기분 좀 풀리면 너한테 사과할 거야.”
“…….”
“형도 그래, 유온아. 너도 알지. 형은 가족 중에 네가 제일 안쓰럽고 예뻐.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떨어져서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큰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이따금 유온에게 잘해 줄 때 내는 목소리였다. 큰형이 저렇게 말을 하면 유온은 뻣뻣하게 긴장한 가슴이 사륵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큰형에게 의지하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힘들었을 텐데 형이 몰라 줘서 미안하다. 형은 네가 그렇게 상처를 받았는지 몰랐어. 다신 그러지 않을게. 약속해.”
“…….”
유온은 물끄러미 큰형을 보았다.
“아직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윤 대표한테 말하자. 네가 잘못 알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돼. 그럼 우리 가족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어. 우리 서로한테 많이 잘못했잖아. 사과할 건 사과하고, 이번엔 잘…….”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서로에게, 잘못.
아니.
사랑……. 자신은 대체 이들의 모습 어디에서 애정을 찾았던 걸까. 다정한, 다정하게 꾸민 말 한 마디, 적선에 가까운 생일 케이크와 옷 따위, 비웃음이 담긴 꽃다발, 그 모든 무의미한 것들.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런 걸 사랑이라 부르는 건 사랑에 대한 모욕이었다.
사랑은, 윤서경이 자신에게 주는 그 마음이 사랑이다.
“전 잘못한 거 없어요.”
“뭐……?”
머릿속에서 수없이 정리하고 정제한 한 마디.
반드시 해야 하는 말.
“저는, 저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형들이랑 어머니, 아버지한테……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어요.”
해묵은 죄책감이 말과 함께 비어져 나와 익숙한 거실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도 여전히 발치에 고여 있었지만 내뱉은 순간 온몸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다시는 죄송하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었기에. 그러니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이 이때까지 빼앗겨 온 가치를 되찾을 것이다. 윤서경이 사랑하는 자신의 가치를.
할 말은 그것 하나였다. 말을 내뱉은 순간 후련함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역시나 가족들은 일순 멍해졌다가 뭔가 말을 쏟아내려 했다. 어떤 말을 할까, 얼마나 화를 낼까 무서워 귀를 막고 싶은 심정으로 뒷걸음질했다.
그때 뒤에서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리로 쏠리면서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윤서경에게 향했다. 그는 유온이 두 걸음 정도를 겨우 떼는 사이 가까이 다가와 유온을 품에 안았다. 모든 게 멀어진다. 세상이 윤서경으로 가득 찼다.
“충분합니까?”
나지막하게 묻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이 한 마디만을 하고 싶었다는 걸 그는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도망쳐 나가게 해 주기 위해서 자신을 데리러 왔다.
살짝 들린 유온의 시선이 현관 바로 옆의 창고 문으로 향했다. 그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이제야 자세히 보고 알았지만 문틀과 문 사이에 납작한 잠금쇠까지 덧대 두었다. 아무도 다시는 들어갈 수 없도록, 유온을 개처럼 끌고 들어갈 수 없도록.
“그럼 갈까요.”
유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윤서경은 유온과 함께 집에서 나왔다. 등 뒤에서 집의 현관문이 닫혔다. 안에 남겨진 가족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무슨 말을 할지, 이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모든 감정을 칼로 잘라내듯 내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문이 닫힌 순간, 그 너머에 자신의 음울한 감정을 두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온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벽에 작게 갈라진 틈새를 찾듯이 윤서경의 손을 잡았다.
윤서경의 체향이 가득한 차에 오르자 마음은 더욱 안정되어 갔다. 차가 집을 향해 가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유온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그대로 집에 도착해서 윤서경이 자신을 씻겨 줄 때까지 유온은 가만히 있었다.
그의 손길이 지나는 자리마다 거품과 따뜻한 물로 더러움이 씻겨 나갔다. 어머니와 형들이 자신에게 한 말, 그 집의 공기, 그리고 그곳에서 자란 지난 시간들, 모든 게 흘러내려 물길을 따라서 사라졌다. 머리에 거품이 가득한데도 유온은 가늘게 눈을 떠 보았다. 윤서경이 눈을 마주치더니 웃었다.
“아직 눈 뜨지 말아요.”
말과 동시에 눈에 거품이 들어갔다. 눈이 따끔따끔한데도 그게 왜인지 재미있어서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아마도 거품 때문인 것 같았다. 윤서경은 말없이 물을 틀어 유온의 눈에 들어간 거품을 깨끗하게 씻어 냈다.
그는 유온을 좋은 냄새가 나는 욕조에 앉혀 두고 자신도 몸을 씻은 뒤, 가벼운 옷차림으로 돌아왔다. 유온은 욕조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그림책이라도 읽어 줄까요?”
아이에게 하는 듯 다정한 어투가 귀에서 녹는 것 같았다. 한참 그대로 윤서경을 보던 유온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서경 씨, 있잖아요, 우리…….”
“우리?”
“그러니까……, 서경 씨, 약 먹는 거요. 그거, 아, 안 먹고.”
윤서경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가 먹는 약이라곤 하나였다. 피임약.
“안 먹고…… 해도, 돼요?”
“…….”
“저…….”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유온은 금방 또 안절부절못했다. 지금까지 줄곧 윤서경이 관계 전에 약을 먹고 있었다. 유온이 여러모로 아이를 가질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를 낳는 것과 그에 수반되는 일들에 대한 유온의 끝도 없는 걱정과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오늘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섹스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였다. 지금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몸을 겹치고 있다. 그 행위에, 사랑의 결실을 함께 바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저, 아이……, 이, 임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
여전히 윤서경은 말이 없었다. 역시 그는 별로 원하지 않았나? 괜히 또 혼자 앞서 나간 걸까. 눈을 굴리는데 윤서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움찔하며 그를 보자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스타일링이 풀어져 자연스레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안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그런 말에 흥분하는 건 이상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짐짓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 이상한 놈일 줄은 몰랐네요.”
“…….”
“키스해도 됩니까?”
유온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쌌다. 윤서경이 상체를 둥글게 굽혀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자마자 혀끝이 유온의 아랫입술을 세게 눌렀고, 그것에 맞추어 입을 벌렸다. 잠깐의 틈도 주지 않은 채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점막을 샅샅이 핥았다.
혀뿌리가 당겨져 뻐근한 느낌에 몸을 비틀자 윤서경은 도망가겠다는 뜻으로 생각했는지 더욱 바짝 붙어 왔다. 입 안 가득 서로의 타액이 고였지만 흘러내릴 틈새가 없을 만큼 입술은 깊게 맞물려 있었다.
습한 욕실의 공기는 소리를 민망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지게 했다. 젖은 점막이 촉촉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졌다. 윤서경은 능숙하게 유온의 혀를 꾹 눌러 머금은 타액을 전부 삼키도록 했다. 고개가 뒤로 밀리듯 가볍게 젖혀졌다. 알파의 체향이 담긴 체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한 방울, 두 방울, 몸속에 설탕물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흥분을 부르는 달콤한 약이었다.
점점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유온의 마른 가슴팍이 힘이 들어가 빳빳해지고, 할딱거리는 숨으로 가쁘게 오르내릴 때쯤 윤서경이 잠시 떨어졌다. 혀를 깊게 밀어 넣는 대신 벌써 부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앞니가 그 사이에 입술을 넣고 아프지 않게 우물거릴 때마다 등줄기에 이상한 소름이 번졌다.
윤서경은 숨을 쉬라고 말하듯이 유온의 목 뒤쪽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걸 따라 힘겹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축축한 산소가 머릿속으로 밀려들었지만 도저히 정신이 돌아오진 않았다. 윤서경이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유온의 등과 허벅지를 감싸 안아 올렸다. 유온은 욕조의 넓은 가장자리에 앉은 그의 무릎에 올라타게 되었다.
몸의 물기가 윤서경의 옷을 적셨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진 물이 그의 어깨에 방울방울 흔적을 남겼다. 옷이 젖는다고, 몸을 닦고 나서 하자고 말하기도 전에 키스가 이어졌다. 유온은 하려던 말을 금세 잊고 입맞춤의 감각에 취해서 목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윤서경이 두 손으로 유온의 머리를 감쌌다가, 계속 각도를 바꾸어 입 맞추며 손을 천천히 내렸다. 유온이 조금만 움직여도 집요하게 따라오는 듯한 입술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손은 매끈한 목선을 지나 도드라진 척추를 더듬고, 양쪽 날개뼈를 어루만지며, 얇은 살 아래 드러난 늑골을 지나서 날씬한 허리를 두 손으로 쥐었다. 윤서경의 손은 크고 유온의 몸은 말랐기에 손 안에서 허리는 많이 남지 않고 딱 잡혔다.
입욕제가 섞인 물로 젖은 몸은 윤서경이 몸을 수월히 더듬도록 하기 위한 것처럼 미끄러웠다.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뼈가 툭 튀어나온 부분을 매만지며 내려간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고 그대로 벌렸다. 유온이 몸을 움찔했다. 벌어진 틈새로 순간 미지근하고 미끌미끌한 액체가 주룩 흘렀다.
손끝이 꼬리뼈와 엉덩이 골을 더듬어 내려와서 구멍 입구를 만졌다. 키스와 몸을 더듬는 것만으로 아래는 젖어 들었다. 윤서경의 손끝이 습하게 흘러나온 애액을 걷어 내듯 근처를 눌렀다. 예민한 입구가 자극되는 느낌에 유온이 움찔했다.
두 손의 손가락이 하나씩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엉덩이까지 움켜쥔 채 소리가 나도록 구멍을 벌리곤 질컥질컥 빠르게 안을 드나들었다. 이물이 들어와 안을 문질러 대는 느낌에 몸은 애액을 울컥거리며 쏟아냈다. 윤서경의 손이 자꾸만 젖었다.
손가락은 급하게 늘어났다. 귓가에 느껴지는 윤서경의 숨결이 거칠었다. 임신을 해도 될 것 같다는 게 그렇게 흥분을 자극할 만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자 묘하게 평소보다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유온은 점막을 문지르는 손가락에 휘청거리며 신음했다.
평소보다 조급한 손길에 아래는 금세 벌어졌다. 단단하게 발기한 윤서경의 성기 기둥이 입구에 문질러졌다. 충분히 벌어지고 젖긴 했지만, 바로 넣을 수 있는 정도일까. 흘끗 고개를 돌렸던 유온은 언제나와 다름없는 크기에 작게 신음하며 윤서경을 보았다.
“유온 씨…….”
“아, 아……!”
그건 아무래도 역효과였던 듯했다. 유온은 온몸을 굳힌 채 바들바들 떨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윤서경의 눈동자에 확 열이 오르더니 탁해졌고, 곧바로 그는 성기 끝을 구멍에 맞춘 뒤 힘을 실어서 퍽 소리가 나도록 유온의 몸을 내려앉혔다.
뿌리 부분만 조금 남고 거의 다 들어온 것 같았다. 유온이 아으, 아, 하고 떨리는 신음을 흘리는 사이 윤서경은 숨을 고르다가, 유온의 몸을 조금 들곤 다시 제 몸 쪽으로 거세게 끌어당겼다.
“흑, 아으……, 아, 아…….”
이번엔 정말 끝까지 들어왔다. 두툼하고 미끈거리는 성기 끝이 몸속 깊은 곳, 아기집이 있는 입구까지 들어와 있었다. 윤서경의 탄탄한 배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몸속에서 성기가 사납게 꺼떡거렸다. 그의 허벅지 양쪽으로 늘어진 유온의 다리가 파득거리며 떨렸다. 배 속이 꽉 차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을 내리자 납작하던 배가 희미하게 융기해 있는 것이 보였다.
유온은 숨도 쉬지 못하는 채로 윤서경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손톱이 살을 꽉 누를 만큼 강하게. 축축한 숨결과 신음이 윤서경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가 유온이 눈을 깜빡이자 후드득 떨어졌다.
“우, 움직이면, 안 돼요……, 아, 아…….”
간신히 그렇게 부탁한 뒤 몸을 움찔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굵은 성기가 배 속을 무겁게 압박했다.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기둥은 윤서경이 움직이지 않아도 꿈틀댔다. 둥글게 튀어나온 귀두 모양과 힘줄이 불거진 형태까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고 열기로 가득했다.
제 점막도 분명 똑같이 온도가 올라 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덥게 느껴질까. 파르르 떨린 몸속에서 애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와 윤서경의 성기를 적셔 대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조이려 하지 않아도 구멍은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그 주위 근육까지 바짝 잡아당기는 듯했다. 내벽이 꿈틀꿈틀 경련한다. 성기를 우물거리듯 조이는 젖은 속살에 윤서경이 숨을 내뱉었다. 유온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유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고 몸의 힘을 풀기 위해 애썼다. 얼마쯤 지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아으, 앗, 아!”
기다렸다는 듯 윤서경은 유온의 양쪽 골반을 움켜쥐곤 아래에서 위로 몸을 쳐올렸다.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향이 강한 편인 입욕제의 냄새를 멀리 밀어 버릴 만큼 윤서경의 체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어느새 자신도 체향을 흘리고 있었다. 뒤엉킨 몸처럼 두 향기가 섞여 들었다. 몸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윤서경은 앓는 신음을 뱉으며 유온의 배 속을 자신으로 꽉 채워 댔다.
“으응……, 흐, 윽, 아아, 아……!”
어지러움은 점점 온전한 열이 되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가 열기에 밀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욕실의 레몬색 조명이 점멸하는 것 같았다. 아찔한 절정이 배 속을 짓누르듯 전신으로 내달려 퍼졌다. 눈앞이 희부옇게 되었다. 절정으로 힘이 들어간 몸은 윤서경의 성기를 와락 조였고, 이어 깊게 삽입한 상태로 그가 정액을 쏟아냈다. 평소보다 빠른 사정이었다.
넘쳐날 듯 양이 많은 알파의 정액이 몸속으로 쏟아져 스며들었다. 절정의 여운에 휩쓸린 두 사람의 정신은 욕실의 더운 공기 속을 부유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윤서경이었다. 그는 벽으로 손을 뻗어 부드럽고 두툼한 샤워 가운 두 개를 잡았다. 몸을 닦으려면 옆에 있는 타월이 나을 텐데, 바로 옆에 아직 뜨거운 물도 있고.
그러나 유온의 생각은 틀렸다. 윤서경은 샤워 가운을 바닥에 던지듯 깔았다.
“어…….”
얼빠진 소리를 내던 유온의 몸이 들렸다. 유온은 안을 가득 채웠던 성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신음을 터뜨렸다. 윤서경은 그런 유온의 뒷덜미와 어깨에 쪽쪽 입을 맞추곤 그대로 샤워 가운 위에 유온을 엎드리게 했다. 아무래도 그는 정신을 차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호텔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재질의 샤워 가운은 하나만 깔아도 푹신할 만큼 두꺼웠다. 두 겹이 겹쳐지자 욕실의 딱딱한 대리석 바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문제는 자세였다. 팔다리를 바닥에 댄 채 엎드린 유온의 뒤에 윤서경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빤히 구멍과 허벅지를 향해 있었다. 방금 안에 쏟아진 정액이 빠끔 열린 구멍 밖으로 줄줄 쏟아졌다.
애액과 섞여 더욱 질척해진 정액은 희끄무레한 색으로 유온의 몸에서 얼마 되지 않는 말랑말랑한 살을 타고 흘렀다. 윤서경은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두 손으로 다시 유온의 엉덩이를 벌렸다. 안쪽에 그가 쏟아낸 정액은 그대로 한참을 더 흘러내릴 만큼 많았다.
아무리 수도 없이 몸을 겹친 사이라 하더라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었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정액이 흐르던 게 멈추자 윤서경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유온의 허벅지 안쪽을 살짝 쳤다. 아이를 귀여워할 때 톡톡 치는 정도로 약한 손길이었으나 그것에 힘이 쭉 풀어졌다. 허벅지를 친 그대로 여린 살을 쥔 윤서경의 손에 정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유온은 어쩔 줄 모르고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도망치려 했다. 당연히 윤서경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유온의 몸 위로 엎드리고는, 아직 충분히 풀어지고 흐물흐물한 구멍으로 다시 성기를 집어넣었다. 등 위로 윤서경의 체온이 느껴지고 그가 완전히 몸을 겹쳤다. 헐떡이며 신음하는 유온을 끌고 가듯이 삽입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노팅을 할 때까지.
“으, 응……!”
거친 움직임을 멈춘 윤서경이 손을 꽉 쥐어 왔다. 동시에 배 속에서 알파의 성기가 조금씩 부풀기 시작했다. 기둥 모양을 하고 있던 물건이 점점 둥글게 모양을 바꾸는 것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단단하게 부푼 성기가 내벽을 죄다 압박했다. 이대로 배도, 등도 짓눌려서 어떻게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언제나 낯설고 무섭고, 아프고,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기분 좋았다.
알파의 노팅을 더욱 달콤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안쪽이 더욱 젖었다. 애액보다 진한 액체가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와 섞여 배 속의 온도를 끌어 올렸다. 윤서경의 살에 부딪쳐 새빨갛게 된 허벅지로 뜨겁고 말간 애액이 물처럼 흘러 샤워 가운을 축축하게 적셨다.
숨을 멈췄던 윤서경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온 또한 신음하고 있었기에 이제 숨결이 누구의 것인지,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서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차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다.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서로 매달리듯 키스하기 시작했으므로. 입술 사이로 모든 열기가 한데 뒤엉켰다. 키스는 부푼 성기가 유온의 배를 둥글게 채우고 있는 내내 계속되었다.
한참 후, 변형되었던 성기 끝에서 진한 정액이 터져 나왔다.
몸의 가장 깊은 곳으로 정액이 흘러 들어오는 느낌에 유온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순하게 처진 눈매가 바르르 떨렸다. 히트 사이클도 돌아왔고, 의사도 몸이 많이 안정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임신이 될 확률은 높지 않았으나 이상한 고양감이 들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던 목, 어깨, 불편할 정도로 벌리고 있었던 다리와 골반, 팔, 온몸이 아팠다. 그러나 역시 그 아픔이 괴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온은 다시 뒤를 돌아보며 키스를 졸랐다. 곧바로 와서 닿는 입술은 끝없이 뜨겁고 다정했다.
유온이 몸을 움츠리자 윤서경은 유온을 똑바로 눕히곤 평소에도 자주 아파하는 골반 언저리를 손으로 살살 주물러 주었다. 뻐근해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던 다리가 그 손에 조금씩 풀어졌다. 축 늘어지듯 눕자 샤워 가운의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윤서경은 유온의 몸에 멍이 든 곳은 없는지 한참 살핀 뒤에 유온을 끌어안았다.
“이대로 조금만 누워 있다가 다시 씻을까요.”
나른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든 곧바로 처리하는 윤서경이 유일하게 게으름 아닌 게으름을 피우는 게 섹스를 하고 난 후였다. 그는 땀이 아직 식지 않은 몸으로 누워 오래도록 그 공기를 느끼는 걸 좋아했다. 유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몸을 덮은 알파의 몸을 끌어안았다.
* * *
이유연은 사과를 깎고 있었다. 시대에 안 어울리는 종이 신문을 든 진 회장은 무척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혼처를 구하는 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듯했다. 그와 결혼해 집에 들어올 사람은 그의 본처였다.
자신은 그가 가진 번듯한 2층 저택이 아니라 그곳보다 작고 오래된 다른 집에 있었다. 집에 들어올 본처와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툭툭 떨어지는 사과 껍질을 보는 이유연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진 회장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르는 척했다. 그는 잠시 이유연을 바라보다가 크게 혀를 찼다.
“이건 얼굴이 괜찮기를 한가, 하는 짓이 얌전하길 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밑지는 장사였는데.”
“…….”
“안 그래? ……대답 안 해?”
진 회장이 가까이 와 이유연의 팔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과도의 날이 손을 스치며 살갗이 베였다. 툭툭 떨어지는 핏방울을 본 이유연의 눈에 점점 기이한 빛이 담겼다.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닌데. 나는 윤서경의 집에 있어야 하는데……. 이 천박한 남자한테 어울리는 건, 얻어맞고 비참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자리를 빼앗고 날 여기에 밀어 넣은…….
“쯧……, 아무리 봐도 네 동생이 훨씬 나았어. 얼굴이든 뭐든.”
“…….”
그 한 마디가 이유연의 아슬아슬한 신경을 툭 무너뜨렸다.
이유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 회장을 보다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원룸은 욕실을 통해 넘어오는 담배 냄새와,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를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다. 성민희는 올라가기도 싫은 낡은 매트리스 옆에 앉아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 떨어져 앉고 싶으나 바로 옆이 싱크대인 좁은 구조라 자리가 없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친정에서 이런 집을 내주었을 땐 잠깐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내버려 두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친정이든, 남편과 아이들이든 자신을 데려갈 거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던 중에 부모님은 회사가 부도 처리되면서 성민희를 둔 채 자취를 감췄다. 남편과 큰아들 역시 연락이 안 된 지 오래였다. 심지어 둘째 아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는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카드는 모조리 정지되었고, 현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곳에 왔을 때는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으나 먹을 음식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다가 결국 통화 기록을 열었다. 며칠 전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번호가 아직 남아 있었다. 번호를 띄우고도 한참 망설인 끝에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나, 나예요.”
―어머……, 사모님.
이전에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였다. 성민희의 입이 조금 열렸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의 집 집안일을 해 주러 간다고? 자신이? 안 될 말이었다. 성민희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자 허기가 밀려들었다. 식사를 못 한 지 벌써 이틀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배고픔이 체면을 이기지는 못했다.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나을 것이다.
갈증까지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물도 없다. 수도를 틀어 한쪽 손에 물을 받아 몇 번 마신 후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쳐다보던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에 신음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굶주림은 분노를 동반하는 감각이었다.
‘그때…….’
그때, 기회가 있었을 때, 아니면 언제든 기회를 잡아서라도…… 그 애를 죽였어야 했는데. 그래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직접 낳은 자식이기에 더욱 치열한 원망이 온몸을 덮었다. 끝도 없는 분노와 울화가 치밀어 어떻게도 해소되지 않았다. 다 그 애 때문에. 성민희는 결국 스스로의 몸만 태우고 찌르며 끝날 격렬한 악감정 속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요란했다.
* * *
이중권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오늘 또 새로운 영상이 왔다. 이제 윤서경이 직접 찾아오진 않았지만, 그 부하가 꼬박꼬박 USB를 던지고 갔다. 사흘에 한 번 영상이 오는 날, 그날만은 하루 종일 집 안이 조용했다. 벽과 천장에 매립한 형태의 스피커에서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영상이 오는 날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은 영상이 온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상을 보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내용이 있을지. 그러나 가족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영상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중권은 끼어들 수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말라 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정은 참혹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에게 굽실거리던 그 많던 사람들은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았고, 연락이 된다 해도 막대한 빚 때문에 자신 쪽에서 피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도울 방법이 없다.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언제나 운은 자신의 편이지 않았는가. 심지어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사업을 경영하면서도 늘 운이 좋았다. 혹은 스스로 운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분명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선……, 우선은 금고를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루에 두세 번은 하는 일이었다. 세상은 돈이 있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금고에 숨겨둔 그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가족들을 구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중권은 그 얼마 사이 수십 년은 늙은 듯 시커먼 얼굴로 비척대며 서재에 들어갔다. 협탁을 밀어 치우는 팔도 짧은 사이 여위어 작은 힘을 사용하는 것임에도 벌벌 떨렸다.
헐떡이며 금고의 문을 연 이중권은 그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
금고는 텅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앞에서 집이 불타는 것이라도 본 듯이 시퍼렇게 질려 아무런 말도 못 하던 이중권이 금고 안으로 다급히 기어 들어갔다. 금고에는 지폐 한 장이 그를 놀리듯 떨어져 있을 뿐, 매일 그에게 희망을 주던 금과 현금은 모조리 사라진 채였다.
이제 완전히 노인으로 보이는 사내의 입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상 속 아내와 두 아들의 모습이 지나갔다. 이 돈이 없으면 그들을 구해 내지도 못하게 된다.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사라지고야 만다.
언제, 언제 들켰을까. 윤서경이 언제 알았던 거지? 이제 모든 가망이 꺾여 버렸다. 윤서경은 언제까지고 괴로워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영상을 전달할 거고,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면 그걸 봐야만 했다.
“으, 으어, 어……, 내, 내 돈…….”
먼지 쌓인 바닥을 더듬고 기어 다니며 찾아봐야 사라진 물건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금고의 좁은 공간에 엎드려 추한 눈물을 떨어뜨리던 사내는 비실비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집 안을 헤매고 다니다 다용도실 구석에서 빨랫줄을 찾아냈다. 그걸 들고 다시 서재로 들어가, 작은 의자를 놓고 그 위로 올라간 순간, 묵직한 발소리 여러 개가 들이닥쳤다. 바깥에 있던 감시인들이었다.
“괜한 생각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회장님.”
이중권을 끌어 내린 사내 하나가 말했다. 회장님이라는 호칭이 지극히 모멸적으로 들렸다. 고개를 든 이중권은 그제야 천장 구석에 숨겨진 CCTV를 발견했다. 눈치채고 나서 보니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저, 저거…….”
“이제 아셨습니까? 이 집 안에 설치된 것만 100개가 넘습니다. 행동 조심하셔야 할 걸요. 그리고 이제 하루에 두 번씩 USB를 전달해 드릴 겁니다. 영상에서 소리가 더 잘 나오게 신경을 써 두셨다고 합니다. 아, 이제 음악 감상도 시간제한을 안 두고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고 하고요. 대신 영상을 보고 계실 때는 저 스피커를 꺼 둘 테니, 영상에 집중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사내의 목소리 위로 천장에서 번들거리는 CCTV의 렌즈가 보였다. 매립된 스피커에서 끼익, 하고 잡음 같은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이중권은 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 * *
이유온은 이제 막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여, 무엇이든 손으로 만지고 입에 넣어 보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그를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강박에서 간신히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성장의 과정이자 모든 걸 알아 가는 단계였다.
위험한 것에도 무작정 손을 뻗는 건 곤란하지만 사실 그것 또한 성장의 일부였다. 고작 몇 달의 결과치고는 제법 대단했다. 알파의 체향이 불안정한 오메가에게 안정제 역할을 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안락한 둥지에 돌아와 몸을 둥글게 말고 쉬는 새와 같다.
때문에 오히려 적절한 보호가 필요했다.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나, 아이를 가져도 좋겠다고 말했을 때처럼.
이유온의 그 말에 머리가 확 뜨거워질 만큼 흥분하긴 했지만 다행히 이미 윤서경은 약을 먹은 뒤였다. 유온이 어떤 의미로 말한 건지 알았기에 그때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가족을 만나는 것과 달리 임신 문제는 천천히 설득할 수 있었다. 그는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태긴 했지만 해도 좋은 상태인 건 아니었다.
차분해진 후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게는 먹지 않겠다고 말하고 자신이 계속 몰래 약을 먹는 것, 약을 안 먹는 것, 그를 설득하는 것, 세 가지 중에 가장 나은 건 마지막 선택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몸 상태와 앞으로의 일들을 들어 지금은 임신을 피하는 게 좋은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자, 그는 처음엔 조금 실망하는 기색이다가 곧 이해했다.
침울해지고 실망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가 괜찮은 척만 하는 건지, 정말 괜찮은 건지 예민하게 살펴야 했다. 다행히 그는 약간 풀이 죽었을 뿐이고, 그것도 윤서경의 설명을 완전히 납득하면서는 풀어져 금방 괜찮아졌다.
―그래서……, 한영 씨 친구분도 다음에 한번 만나 보기로 했어요. 좋은 분이래요.
“그래요?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네요.”
―음, 한영 씨랑 비슷한 성격이라는 것 같아요.
이유온은 늘 그렇듯 오늘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늘어놓고 있었다. 성한영의 친구를 만날 예정이라는 듯했다. 경호학과 동기라는 그 친구에 대해선 프로필을 대강 보고 받았다. 어지간히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면 인간관계가 넓어지는 건 좋은 일이었다. 정인호 같은 경우도, 옛날에 한 짓을 비롯해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당장 만나서 해보다는 득이 많았기에 유온에게 다가오는 것을 그냥 두었다.
그의 목소리를 집중해 들으며 흘끗 눈앞을 보았다. 악취가 풍기는 바닥에 한 남자가 멍하니 윤서경을 올려다보며 상체만 겨우 일으키고 있었다. 그, 이유건의 모습은 유온을 만나기 위해 잠시 사람 꼴을 갖추고 나오기 전보다 훨씬 더 피폐하고 너저분했다.
이유온을 만난 날 이 가족은 예상한 것과 똑같이 굴었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유온……, 혹시나 가족들이 구질구질하게 매달렸을 때 그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면 그 후로 그의 가족들을 처리하는데 제약이 생길지도 모르니. 하지만 그가 해낸 말은, 윤서경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단단한 말이었다.
형이 제 고양이를 죽인 것조차 제 잘못이라고 말하던 그가 자신은 가족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과거에 매듭을 짓는 말이 아닌가.
성민희와 이유연은 각자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고, 이유건도 다시 별장 지하실로 끌고 왔다.
아무래도 이 별장은 나중에 지하실을 정리한 후 매각해야 할 듯했다. 가지고 있으면 이유온과 올 일도 많을 텐데, 그를 데리고 오기엔 너무 지저분해졌다.
통화 음량을 높여 두었기에 고요한 지하실에서 유온의 목소리는 그에게도 그대로 들릴 것이다. 재잘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이유건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한참 후 윤서경은 집에 돌아가서 만나자는 다정한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이유건은 탁한 눈으로 윤서경을 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유온이는, 그런 목소리……, 한 번도…….”
말을 하는 것도 힘겨워 보일 만큼 갈라진 목소리였다. 이제 와 한다는 소리가 그것이었다. 전화 너머 이유온은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말투가 조금 느리긴 하지만 편안하고 기분이 좋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온화하게 풀어진 목소리를 이유건은 들어 본 적이 없겠지. 그의 앞에서 유온이 편했던 날은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
이유온에게 필요했던 피임약. 주치의가 먼저 알아차릴 정도로 선명했던 이유건의 감정. 소유욕과 통제와 억압으로 점철된 폭력적인 그것을, 이유건 같은 사람은 어쩌면 애정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본인의 감정에 도취된 착취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유온의 다감한 목소리에 이 남자는 곧바로 표정이 흐려졌다. 마치 절망하거나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역겨운 얼굴이었다.
유온은 얼마 전까지 자신이 타인의 체향에 민감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건 이유건의 은근한 교육 때문이었다. 그는 유온에게 제 체향을 쉴 새 없이 내뿜어 댔다. 수많은 호르몬 계통 약물 때문에 감각이 흐릿해진 유온은 체향을 간헐적으로만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도 빈번히 이유건의 향을 느꼈을 테니, 그에 대해 위화감을 가지지 않게 하려면 유온에게 ‘너는 원래 민감한 거다’라고 인식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많은 약을 먹이고 체향을 뒤집어씌운 목적은 물론 유온을 완전히 지배하고 싶다는 욕구와, 또 제 딴에는 유온의 호르몬을 억눌러 자신이 손을 뻗는 것까진 막겠다는 알량한 의지였다.
아니……. 그런 안전장치를 해 두었다는 자신에 대한 변호라고 하는 게 맞다. 나는 이렇게까지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유온이 그렇게 태어나 자신을 자꾸만 흔들리게 했으니까. 난 할 만큼 했지만 알파의 본능은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혐오스러운 변명.
만약 이유온이 가족의 원래 계획대로 진 회장에게 갔으면 어땠을까. 그는 이 가족만큼이나 쓰레기 같은 작자였다. 결혼한 오메가에게서 형의 페로몬이 풍기면 그걸 즐겁게 학대의 빌미로 삼고도 남을 자. 오히려 이 둘이 손을 잡았을지도 몰랐다.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일이었다. 그랬다면 유온은 지금보다 훨씬 괴롭고 가혹한 삶에 내던져졌을 것이다.
진 회장은 화명의 여파가 가라앉았을 때 조용히 처리할 작정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가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를 하나하나 알아보아 파혼을 권했다. 동운건설이라는 이름값에 결혼을 고민하던 이들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그가 어쩌면 유온과 결혼을 했을지도 몰랐다.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긴 했으나 이유온이 어릴 때부터 그를 어떤 눈으로 쳐다봤을지 생각하면 분노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다만 화명의 여진이 가라앉은 이후에 하기 위해 잠시 미뤄 두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은 굳이 윤서경이 나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윤서경보다 먼저 진 회장에게 칼을 들이댄 사람이 있었다. 말 그대로 칼을.
이유연은 그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진 회장의, 너는 네 동생보다 못하다는 말에 눈이 뒤집혔고 결국 그를 칼로 찔렀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윤서경도 놀랐다. 당연히 그가 칼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말은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과 뉴스 보도는 지병이 위중하게 악화되었다는 것으로 나왔다.
그자가 사경을 헤매든 말든 윤서경은 알 바 아니었다. 직접 손을 쓴 것보다 그자에게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왔으니 족하다. 그쪽 또한 뿌린 대로 거둔 게 아닌가. 그러나 이유연이 그를 찔렀다는 사실은 덮었다.
지금도 이유온과 연을 끊은 가족들이 모습을 감췄다는 사실만으로 가끔씩 괜한 관심을 받는데, 이유연에 대한 사실이 보도라도 되면 진 회장까지 조명될 것이다. 그러면 관심은 폭증할 게 분명했다. 그건 피해야 했다.
이유연은 아직 병원에 있었고, 거기서 나와 어디로 갈지는 윤서경도 알지 못했다. 제 어머니를 찾아갈지, 도망쳐 나와서 길바닥을 전전하며 살아갈지. 진 회장을 찔렀으니 동운 건설의 손에선 어쨌든 도망쳐야 할 테니까. 윤서경이 신경 쓸 것은 그가 쓸데없이 이유온을 언급하며 언론 어딘가에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지 여부 정도였다.
윤서경은 지저분한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이유건을 내려다보았다. 후텁지근한 실내에서 윤서경은 혼자 찬 바람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한 점 흐트러짐도 없고 차분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유건은, 수염이 덮인 얼굴은 흙빛이고 옷에 피며 바닥의 축축한 때, 곰팡이 같은 게 묻어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내가 유온 씨를 데리고 갔을 때, 갑자기 파혼을 주장하면서 나왔죠.”
“…….”
“결혼한 후에도 이유온을 마음대로 다룰 생각이었는데 그게 어려울 것 같아졌으니까. 아닙니까?”
이전 생의 결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유온을 제 손 밑에 둔 채로, 페로몬을 이용해 윤서경에게서 멀어지도록 하고 멋대로 이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한 번 저지른 일을 이번 생에서도 똑같이 저질렀으리라는 건 그들의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몇 번을 살아도 악인은 똑같이 악인이다.
만일 이전 생에서든 지금이든 이유온이 진 회장과 결혼했다면 그는 어떤 폭력에 노출되어도 그저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며 살았겠지. 괴로운 삶……. 이유온에게는 남을 찌를 수 있는 칼이 없다. 아무도 그에게 칼을 주지 않았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면 그 칼로 상대를 찔러야 한다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순종만 하도록 길들여졌다.
“유, 유온이는, 내…….”
“당신 어머니는 닷새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하더군요.”
“…….”
“아버지는 당신들 가족이 쥐새끼처럼 숨어들려고 하던 집에 금이며 현금 같은 걸 숨겨 놨습니다. 매일 몇 번씩 그걸 확인하면서 헛생각을 한 모양인데…… 그것까지 치웠더니 정신이 나간 모양입니다. 목을 매달려고 하는 걸 감시하던 사람이 들어가서 막았죠.”
윤서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벌써 죽으면 곤란합니다. 당신한테 전하는 건 이게 마지막 소식이 되겠지만. 가족 중에 누가 죽어도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인데, 매일 부모나 동생이 죽은 건 아닐까 걱정하며 사는 것도 꽤 괴롭지 않겠습니까.”
셋 다 벌써 여러 번 시도를 하고 있다. 윤서경은 그걸 전부 막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보내 주겠는가. 이유건이 윤서경을 보았다. 눈가가 시뻘겠고 눈물이 맺혀 있었다.
“대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우리는, 유온이는…….”
“처음부터지.”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태어났을 뿐인 이유온을 네 사람이 둘러싸고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사용할지 각자의 생각을 했을 때부터. 윤서경은 입구 쪽으로 손짓했다. 체격이 큰 알파들이 그곳에 서 있다가 다가왔다. 손에는 은색 트레이박스가 각각 들려 있었다. 안에 든 것은 수백 개는 될 주사제 약병과 주사기였다.
이유건이 죽을 때까지 천천히, 전부 주사할 생각이었다.
공포에 질린 이유건의 눈이 약병을 향했다.
“지금까지 당신이 유온 씨한테 먹인 약의 주사제입니다. 당신이 먹인 만큼 준비했어요.”
“…….”
“쇼크가 올 때를 대비해서 의사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약을 준비하며 새삼 생각했다. 이 많은 약물에 휩쓸린 채 살아야 했던 이유온의 지난 삶을. 트레이에 꽉 찬 약병을 보자 이유온의 몸에 흐르는 피를 제 것으로 바꿔 주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 쉽게 죽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윤서경은 돌아섰다. 주사를 들고 다가가자 발작하듯 소리치는 이유건의 목소리가 경멸스러웠다. 지하실을 나와 차에 오른 윤서경은 기사에게 집에 가기 전 호텔에 잠시 들르라고 말했다. 호텔에서 몸을 씻고, 집에서 나올 때와 똑같은 디자인의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곳의 덥고 축축한 공기, 이유건이 내뱉은 숨결을 집까지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다.
“서경 씨.”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 있었는지 곧바로 이유온이 마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부터 풀어졌던 윤서경의 얼굴이 더더욱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는 웃으며 이유온에게 다가가 머리를 감싸고 늘 하듯이 키스했다.
몸을 씻고 왔지만 그러지 않은 척 유온과 함께 욕실에 들어가고, 따뜻하게 데운 아로마 오일로 여전히 뭉치곤 하는 유온의 어깨와 팔을 풀어준 뒤에 거실로 나왔다. 머리를 말린 뒤 유온은 차를 끓여 주겠다며 간이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에선 차를 끓이는데 사용하는 간이 주방의 모습이 잘 보였다. 이유온은 여러 개의 티 캐디를 가만히 보며 고심해서 차를 고르곤 제 몫으로는 우유와 설탕, 윤서경의 몫으로는 메이플 시럽을 약간 준비해서 가지고 나왔다.
윤서경은 보통 차에 아무것도 넣지 않지만 피곤한 날엔 설탕이나 시럽을 조금 섞었다. 얼굴이 꽤나 피곤해 보였던 모양이다. 유온이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럽은 그냥 가지고 와 봤어요…….”
“고맙습니다.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그, 그냥.”
고맙다는 말에 유온의 뺨이 약간 빨개졌다. 작은 물고기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할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이었다. 이런 사람을 그렇게 괴롭힐 수 있다니 신기하기까지 한 인간들이었다.
이제 윤서경은 그들을 지금만큼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망을 시도했다거나 죽을 뻔했다거나, 혹은 죽었다거나, 그 정도의 소식만 받을 것이다. 당연히 죽어도 유온에게 알리지 않는다. 이유온은 그들에게 하고 싶던 말을 했다. 더는 정말로 그들과 엮일 필요가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차차 잊어 갈 것이다. 그들이 먼 곳으로 떠나 살고 있다고 알면 그걸로 충분하다.
유온은 지금도 제 가족들이 어딘가에 가서 죽어 버리면 좋겠다든가, 비참한 최후를 맞으면 좋겠다, 밑바닥의 밑바닥을 기며 살았으면 한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식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잘 살기를 바란다.
고작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쁜 생각을 했다고 죄책감을 가지는데, 거기에 대고 내가 하는 나쁜 생각은 그들을 모두 죽여서 시체도 못 찾게 하고 싶다는 거라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제 쓸모를 다했다. 그저 이유온의 과거를 중화하기 위한 발판, 도구. 그들이 유온을 취급했듯, 찢어도 되는 종이, 깨뜨리기 위한 도자기로. 이제까지 이유온에게 해 오던 그 짓의 거울. 재기의 여지조차 없다. 외국으로 도망칠 길도 막혀(외국에 간다고 해서 찾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죽는 날까지 쫓기고 굶주리고 남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씨, 서경 씨.”
“…….”
윤서경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유온이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자신이 듣지 못한 모양이다.
“차 식어요…….”
“아. 미안합니다, 잠깐 뭘 좀 생각했어요.”
달콤한 시럽을 넣은 홍차는 입에서 부드럽게 넘어갔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자 정작 차가 식는다고 말한 유온의 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우유를 섞지도 않아서 맑은 다홍색 그대로였다.
“당신은 안 마셔요?”
“아.”
그제야 유온이 제 잔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경 씨. 저,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요…….”
“네.”
“사실, 저 신혼여행으로 가고 싶은 곳 있어요.”
“그래요? 어디요.”
묻자, 유온은 물끄러미 윤서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