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2)화(3권) (8/18)

2 (2)

“인호……요? 정인호……?”

“네. 기억하시네요!”

이정윤이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겨우 몇 년 전 일인데 기억을 못 할 리 없었다. 몇 년도 유온의 기억을 기준으로 해서였고, 이 시점에서는 1, 2년 정도밖에 안 지난 일이다. 정인호는 유온의 짧은 대학 생활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인연이었다.

정인호의 얼굴과 동시에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씨발, 진짜 이상한 애다.’

유온은 그가 멀어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 연락은 완전히 끊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온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유온은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더 확연하게 알게 되었다. 소극적으로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며칠, 길어야 한두 달만 지나면 모두 멀어졌다. 정인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인호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고 했다는 것 같다.

얼떨떨했다. 정인호는 대학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대하기 편안했고, 유온에게 잘해 준 동기였다. 유온의 성격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딱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이리저리 데리고 다녀 주었다. 하지만 끝은 좋지 못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그를 그렇게 화나고 질리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 후로 그는 학교 안에서 유온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하나둘 다가왔던 사람들이 멀어진 끝에 정인호와의 관계까지 그렇게 되자 더는 학교에 나갈 용기가 없었다. 가족들도 유온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길 바란 건 아니었기에, 결국 입학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저랑 정말 연락하고 싶대요?”

“네, 유온 씨가 원하면요.”

이정윤의 선에서 정인호는 해를 끼칠 인물로 보이지 않았던 듯했다. 드물게도 유온의 고민이 빠르게 끝났다. 유온은 그를 만나고 싶었다. 유온에게 그는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고, 영문을 모른 채 멀어진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뭔가 화가 났던 거겠지만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다. 그게 무엇이든 기회가 생긴다면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이제 유온은 학교도 그만두었고, 연락이 끊어졌으니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다가올 줄은 몰랐다.

물론 그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다닐 때 이미 유온이 집안에 비하여 얻어 갈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려졌다.

부모님과 형들이 돈이 많은 거지, 유온이 돈이 많은 게 아니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형이 특히 더 유온을 엄하게 대해서 몇 만 원을 쓸 때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항상 돈이 없다 보니 형편이 별로 좋지 않은 것 아니냐며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기도 하다가 우연히 집안이 화명이라는 게 알려졌다. 그 후 왜 화명 아들인데 저러고 다닐까, 이상하다, 하는 소문 속에서 딱히 유온의 집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심지어 자퇴할 때까지 유온이 어느 집안인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리 누구든 알아보려고 하면 유온이 윤서경의 약혼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전에 유온을 알던 사람들이라면 지나치면서 뉴스만 한 번 보고도 알아차릴 것이다. 혹시나 유온을 통해서 윤서경에게 무언가 얻어 낼 수 없을까 탐색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터였다.

“저기, 만약에 인호 때문에 서경 씨한테 혹시라도…….”

“괜찮아요! 그분은 베타기도 하고, 대표님도 지금은 유온 씨가 누구든 가까운 사람을 더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이정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유온의 말을 ‘혹시 그를 만나는 걸 윤서경이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정도로 알아들은 듯했다.

“혹시라도 서경 씨한테 안 좋은 영향이 가면……. 그게 걱정돼요.”

“유온 씨도 참. 그게 저희 일이잖아요. 왜 비서가 세 명이나 있겠어요? 이미 다 확인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혹시 다른 마음을 먹고 왔어도 나중에 다 쳐 낼 수 있어요. 안 그래도 유온 씨 옛날 동창의 사돈의 팔촌까지 비서실로 연락 들어오는데, 그중에서 대표님 선까지 이름 올라가고, 유온 씨한테 전달된 건 정인호 씨 하나예요.”

특유의 유쾌한 목소리로 쏟아진 말에 유온은 입을 벌린 채로 버릇처럼 끄덕거렸다.

“유온 씨 아는 사람 진짜 많더라구요. 제일 웃겼던 건 4년 전에 유온 씨랑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 커피 사서 나눠 마시면서 대화했었는데, 그때 전화번호 받은 걸 잃어버려서 연락했다는 사람이었어요. 아……, 혹시 진짜로 그런 기억 있으신 건 아니죠?”

농담을 이어 가던 이정윤이 퍼뜩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편의점에서 직원 말고는 누군가랑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젓다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게 웃는 유온 옆에서 이정윤은 그 원 플러스 원 커피가 회사 안에서 소소한 유행어가 되었다며 깔깔거렸다.

“참. 그럼 정인호 씨는 어떻게 할까요? 저희가 일단 전화번호는 받아 두었고, 유온 씨가 원하는 대로 하시면 돼요. 먼저 연락하셔도 되고요. 아니면 그분한테 유온 씨 쪽으로 연락하라고 번호 전달해 드릴게요.”

“음……. 제가 해 볼게요.”

“그럼 번호 여기 적어 두고 갈게요. 필요하시면 휴대폰에 입력하세요.”

“네.”

그 뒤 몇 마디 더 잡담을 나눈 뒤 이정윤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유온은 그녀에게 받은 메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끔한 글씨체로 쓰인 연락처가 낯설었다. 대학 때 쓰던 것과는 다른 번호인 듯했다.

휴대폰과 메모지를 한참 번갈아 본 끝에 유온은 메시지 함을 열었다. 가장 상단에 윤서경의 메시지가 있고, 그 아래로도 이런저런 사람들과 주고받은 연락이 가득했다. 가득 찬 메시지 함이 새삼스러워서 스크롤을 몇 번 내려 보다가 새로운 창을 불러냈다.

메모에 적힌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입력한 뒤 내용 란으로 넘어갔다. 키패드 위에서 한참 동안 손이 머뭇거렸다. 깜빡거리는 커서는 옆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간신히 글자 몇 개를 눌렀다.

백스페이스와 글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기를 거의 30여 분, 유온은 간신히 내용을 써서 전송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30분을 고민한 결과치고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구구절절 장황하게 편지를 썼다가, 쓸데없는 내용 같아서 다 지웠다가, 인사말만 남겼다가, 둘의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늘어놓았다가, 어떻게 지내는지 긴 문장으로 물었다가…….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선택한 게 저 내용이었다.

문자를 전송한 뒤에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 후 항상 그렇듯 후회스럽고 초조한 마음으로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제가 보낸 내용이 이상하진 않은지(그걸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짧은 내용이긴 했다), 오타는 없었는지 메시지 창을 켜 놓은 상태로 계속 들여다보면서. 1분이 한 시간처럼 지나는 사이 3분이 흐르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유온은 위잉 소리에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보았다. 정인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열었다.

[이유온! 잘 지냈어? 연락돼서 좋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때 내가 미안했어. 진심으로.]

[너 괜찮으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유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정인호와의 만남은 생각보다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문자 몇 번을 나눈 뒤 유온은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짜증스러운 눈빛이며 말의 이유를 만나면 알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는 유온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떠나 버린 건 상처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만나면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문자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하니 더더욱 어떻게 된 건지 신경 쓰였다.

이정윤한테 그렇게 전하자 그녀는 문제없으니 언제든 시간만 알려 달라고 말했다. 정인호는 오늘 당장이라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그날 늦은 오후 유온은 호텔 라운지에서 정인호를 만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동선이었기에 유온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빨리 나왔다. 조금 더 늦게 나올 걸 그랬나, 게임기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후회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 초조한 시간을 20분이나 혼자 있으려니 뭘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휴대폰 화면의 시간 표시가 16분에서 17분으로 바뀌는 걸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유온?”

“아…….”

정인호가 편안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도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듯했다. 그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온 것 같은데, 반대로 유온은 그를 본 순간 긴장해서 혀끝이 빳빳해졌다. 우물대는 목소리로 간신히 안녕, 하고 말한 뒤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래도 한동안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며 이렇게까지 굳어 버린 적이 없는데……. 약속은 없었던 일로 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조금만 긴 말을 하려 하면 멍청하게 더듬거릴 제 모습이 떠올라 불안해졌다.

하지만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자 정인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 괜찮아? 어디 아파?”

“아니, 괘, 괜찮아.”

“그래……. 뭐, 너 안 좋으면 바로 데리고 갈 것 같더라고. 나 여기 들어오면서 몸수색도 했다.”

“몸수색?”

“응. 근데 뭐, 예민하겠지. 윤서경이랑 결혼할 사람인데. 다짜고짜 찾아와서 미안해.”

유온은 얼른 머리를 저었다. 몸수색이라니, 그런 것까지 한 모양이다. 여기는 비즈니스 미팅용 공간으로 라운지에서 복도를 한 번 더 지나 들어와야 했고, 가까운 곳에 이정윤과 성한영도 있었다. 그쪽에선 여기가 보이기 때문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들어올 거라고도 말했다. 여기에 몸수색이라는 말까지 듣자 괜히 정인호를 범죄자 취급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안, 아마 그런 뜻은 아닐 거야, 그냥…….”

“그건 괜찮고, 유온아. 나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

“……사과? 무, 무슨 사과?”

“그날 그런 말 하고 연락 끊은 거.”

“…….”

유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한 채 불안한 눈으로 정인호를 보았다. 옆에 윤서경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바짝 붙어 있으면 긴장이 풀려서 정인호가 하는 말을 좀 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랬는지 짐작 가는 거 있어? 조금이라도.”

“어, 내, 내가 답답하고……, 어둡고…….”

“미안해.”

“…….”

“그때 내가 오해했어. 너 잘못 없어. 이상하지도 않아. 답답한 거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야. 그때는……, 하. 이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너한테 말 안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들어 줘. 얼굴 보면서 이 말 하고 싶어서 왔어. 전화나 문자로는 잘 안 와닿을까 봐.”

정인호의 태도는 진지했다. 유온은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분명 싸늘하게 떠났던 얼굴이 그날 이전, 쾌활한 친구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간이 갑자기 또 그날 전으로 돌아가 버린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죽고 나서 돌아왔을 때도 어떤 전환점도 없이 눈을 깜빡이자 형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그것처럼 지금도……. 불안한 마음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날짜까지 표시되는 시계는 유온이 알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유온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받아 달라는 뜻으로 한 사과는 아니었어. 어휴, 네가 너무 높은 사람 되는 바람에 또 만나자고 하기도 미안하다. 갑자기 시간 빼앗은 것도 미안. 오늘은 이만 갈게. 내키면 또 연락해.”

“이, 인호야.”

“미안하다 말고는 당장 할 말이 없네. 그래도 그때보다 얼굴 좋아져서 다행이다.”

진짜 간다. 그 말만 남기고 정인호는 유온에게 손을 흔들곤 가 버렸다. 거센 바람이 지나간 것 같다. 유온은 멍하니 앉은 채 정인호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그때 일은 미안했다고. 자신의 오해였다고. 그리고 유온이 원한다면 다시 연락을 주고받자는 말까지 했다.

무엇을 오해했을까?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오해에 대해서도 서로 확실하게 알 수 있을까. 그가 그렇게 떠나 버린 건 자신의 탓이 아니었던 걸까. 유온의 얼굴이 희미하게 상기되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이정윤이 고개를 내밀곤 벽을 똑똑 두드렸다.

“유온 씨, 이만 올라갈까요?”

“아……. 네.”

라운지 옆으로 난 긴 복도를 걸으며 이정윤이 말했다.

“다행이에요, 너무 갑작스럽게 만나는 거라서 걱정했거든요. 어색하실 수도 있어서 별일 없으면 용건은 짧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막상 만나면 싫으실 수도 있잖아요. 아무 일 없으셨죠?”

“네. 없었어요.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싶었다. 항상 바란 일이긴 했다. 떠나간 친구가 다 오해였다고 말하며 돌아오는 일. 하지만 일어날 리 없는 일 아닌가. 한참 머뭇거리던 유온은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에야 이정윤에게 물었다.

“혹시……, 혹시요, 인호, 서경 씨가…….”

“네. 대표님이?”

“서경 씨가 절 만나라고 보낸, 그러니까 인호는 별로 워, 원하지 않았는데 서경 씨가…….”

또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다 끝맺지도 못한 말에 이정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대표님이 일부러 유온 씨 만나 주라고 보낸 거 아니냐구요?”

너무 시원스럽게 돌아온 물음에 유온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정윤은 좁은 엘리베이터 안이 울리도록 웃었다.

“악, 웃어서 죄송해요. 근데 유온 씨 진짜 게임 캐릭터 같아요. 행복 지수 엄청 낮춰 놓은 게임 캐릭터. 아무튼 정인호 씨는 대표님이 아주 면밀하게 검토를 하고 통과시킨 분이긴 한데요, 일부러 보낸 건 아니에요. 그리고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그런 열성을 들일 정도로 유온 씨가 사랑받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사랑……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놀랍도록 새로운 관점이었다. 최상층에 도착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빠져나가며 이정윤이 말을 이었다.

“그 친구분 유온 씨한테 뭔지 몰라도 사과하러 온 거 맞죠? 전 예전에 헤어진 친구가 사과하러 찾아온 거나, 남편이 내가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친구 찾아내서 나한테 보내 주는 거나, 둘 다 나름 기쁠 것 같은데. 아무튼 대표님이 일부러 그 사람 수소문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끝까지 활달한 목소리로 말한 뒤 이정윤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자신이 한 말에 농담과 웃음으로 대꾸하는 건 이유연과 비슷한데, 이상하게 이정윤의 말은 조금도 마음에 남지 않고 오히려 유온에게까지 유쾌함이 옮겨 왔다. 자신의 음침한 사고방식을 아프지 않게 정돈해 주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조금 편해진 채로 유온은 이정윤에게 손을 흔들었다.

윤서경의 향으로 채워진 거실에 잠시 서 있다가 소파에 털썩 앉은 뒤 유온은 휴대폰을 꺼냈다. 정인호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한참 화면과 눈싸움을 하다가 드디어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조심해서 가]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너도! 오늘 반가웠어, 진짜야]

또 한참 고민한 끝에 답장을 보냈다.

[응 나도… 계속 연락해도 돼?]

[당연하지ㅠㅠ]

정말 다시 친구로 지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가슴이 잘게 뛰었다. 메시지가 오고 간 화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답했다.

[고마워]

[야 지금 네가 고맙다고 말하면… 내가 진짜 쓰레기 같잖아ㅠㅠ…]

“…….”

유온은 당황해서 이런저런 말을 마구 적어 넣었고, 정인호의 답을 받으면서 점점 두 사람의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마지막엔 마치 예전처럼 가볍게 다음에 언제 연락할지 말을 나눈 뒤 대화가 끝났다. 유온은 휴대폰을 꼭 쥔 채로 소파에 털썩 누웠다. 나눈 대화 목록을 올려 보다가 고마워, 에서 멈췄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윤서경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줄이라고.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리고 지금도 사람은 버릇처럼 그 두 가지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정인호를 만나고 나서 조금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 * *

달갑지 않지만 만나야 하는 방문자가 많은 날이었다. 로비에서 이중권 회장이 올라온다는 말을 들은 후 윤서경은 서류철을 덮고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에는 대략 20년 분량의 진료 기록과 처방전 목록이 떠올라 있었다. 이유온의 기록이었다. 한 해에 많으면 200건이 넘기도 했으니, 이틀에 한 번씩 병원을 다닌 적도 있는 셈이다.

이중권이 오기 조금 전에 이유온의 이전 주치의, 강현석이 다녀갔다. 도살장에 끌려온 것 같은 얼굴로. 그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거나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유온의 가족들과 달리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내원했을 때는 아주 정상적인 상태였는데 여러 이유로 신체 기능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지금은 모든 내외적 요인에 취약한 상태가 된 거지요.’

‘여러 이유라는 게 어떤 겁니까?’

‘우선 가족 분들이 이유온 씨의 건강 상태에 좀 예민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을 찾으셨고, 약 처방도 많이 받아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점점 복용해야 할 약물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당신이 돈을 받고 그 집안사람들 하는 짓을 도왔다는 건 잘 압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더 늘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 낭비니까요.’

어떻게든 가족들 탓으로만 돌리고 빠져나고 싶은 기색이던 강현석의 얼굴이 흐려졌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지금까지 이유온 씨가 어떤 질환을 많이 앓았는지, 가족들이 병원에 데리고 오면서 어떤 태도였는지, 지금까지 처방받은 약은 어느 정도 되는지, 그런 것들입니다.’

‘지, 질환이라고 할 것도 없이 가벼운 것들이었습니다. 감기나 위염, 알레르기, 심각한 거라 해도 폐렴 정도였고요. 또 처방은 몸 상태에 맞춰서 때에 따라…….’

‘그게 답니까.’

‘예. 그리고 기분 조절 문제가 좀 있었는데 이건 따로 정신과를 통해서…….’

‘외상으로 찾아온 적이 있을 텐데요.’

‘…….’

강현석이 입을 다물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다닌 병원이다. 사람이 평생 한 번도 안 다칠 수는 없다. 알파인만큼 다른 사람보다 단단한 몸을 가진 윤서경조차 이런저런 사고로 병원에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외상이라는 말만으로 저렇게 당황한다는 건, 그 외상의 이유가 평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폭력으로 인한 외상 말입니다. 그것도 꽤 자주.’

쐐기를 박는 말에 강현석은 눈을 비굴하게 굴렸다. 관자놀이에 솟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름지고 번들거리는 피부가 경련처럼 몇 번 들썩이더니, 한참이 지나 겨우 입이 열렸다.

‘회장님과 부사장님이 워낙 엄격한 성격이라 체벌을 조금 하시긴 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수준의 폭행은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제가 진작 신고했을 겁니다. 멍이 좀 들거나 살이 쓸린 정도였고, 그럴 때는 항상 부사장님이 직접 이유온 씨를 데리고 왔는데 옆에서 계속 미안해하며 달래 줬습니다. 정말로, 폭력이라고 말할 만큼 심한 게 아니었습니다. 정형외과나 외과에 추가로 방문할 정도도 아닌…….’

‘어쨌든 있긴 있었다.’

‘…….’

축소해 말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싸늘해지는 윤서경의 분위기에 강현석은 위기감을 느낀 듯 재빨리 말했다.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어요. 이유온 씨를 아주 어릴 때부터 봤는데, 항상 딱하다고 생각했지만 일개 의사가 화명 정도 되는 기업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주치의라고 해도 제 병원은 그렇게 큰 규모도 아니고 화명에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 문을 닫아야 합니다.’

‘…….’

‘그리고 이유온 씨를 위해서, 부사장님이 원하지 않는 약을 설득해 처방하기도 했습니다. 부사장님은 그 약이 처방된 걸 보고 마음을 좀 진정시켰을 거고, 그 덕분에 이유온 씨도 안전했을 겁니다.’

‘그 약이 뭡니까?’

‘……피임약입니다.’

하……. 윤서경은 헛웃음을 쳤다. 그 개 같은 새끼. 얼마나 이유온에게 집착하는 게 보였으면 의사가 피임약을 주며 경고한단 말인가. 그건 이유온에게 ‘혹시나 하는 일이 생기면’ 먹으라고 준 것인 동시에, 이유건에게 ‘내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니 자제하라’는 의미에서 준 물건이었던 것이다.

‘가지고 있는 진료 기록 넘기세요. 이유온 씨가 처음 방문한 날부터 전부.’

그러자 강현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USB를 꺼내 내밀었다. 윤서경은 그것을 받아 내려다보았다. 작은 플라스틱 안에 이유온이 어떤 고통을 겪으며 성장했는지, 그 일부가 들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현석을 내보낸 뒤 곧바로 컴퓨터에서 기록을 불러냈다.

일단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눈에 띄는 기록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음 페이지를 클릭하던 손이 ‘고막 파열’이라는 소견에서 멈췄다. 뺨을 맞은 건가 했으나 원인은 소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도 갑작스럽고 큰 소음. 경미한 수준이어서 따로 치료는 하지 않았다.

큰 스피커 앞에 서 있기라도 했었던 걸까. 그것 말고 더 자세한 사항은 적혀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록을 계속 읽다 보니 비슷한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을 것 같지도 않은데.

따로 알아봐야겠군. 윤서경은 그 부분에 메모를 남겼다. 건강 검진에서 청력이 정상이었던 걸 보면 다행히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는 듯했다.

검진 결과를 보며 이유온의 몸이 원래 약했던 줄로만 알았다. 날 때부터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 진료 기록과 대조해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회복 자체는 빠르게 되는 모양이었다. 특히 호르몬 쪽은, 이렇게 학대를 당하고도 지금 윤서경의 체향을 맡고, 정상적인 수준의 히트 사이클이 올 정도로 조금은 기능을 되찾았다.

윤서경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모든 게 늦어 버리기 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거꾸로 지나쳐, 그에게 불행했던 결혼 생활도 뛰어넘고, 청혼했던 그 순간으로. 시작점으로 온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더 빨랐다면 어땠을까. 돌아온 게 어릴 때였다면 집안을 통해 약혼을 신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유온의 가족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테니까. 어린 그를 돌보고, 아니……, 아예 집으로 데리고 왔다면. 유년기를, 학생 시절을, 대학교를 원하는 대로 다니게 해 주고,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접촉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그랬다면 이유온은 지금보다 더 많이 웃고 있었을 텐데.

어차피 부모님도 이유온을 마음에 들어 한다. 자신과 가족들은 어떤 면에서 호불호가 정확히 일치하니, 윤서경이 그를 사랑하고 부모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만큼 형과 누나도 호감을 가질 터였다. 지금은 이유온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 만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진료 기록을 절반도 채 보지 않았을 때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이중권 회장이었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온 그는 이유연과 달리 들어오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와 상석에 앉았다. 곧바로 비서가 차를 내왔다. 찻잔 두 개가 테이블에 놓이고 비서가 나간 후 윤서경도 소파로 다가갔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느긋한 윤서경의 말에 이중권이 무섭게 표정을 구겼다. 중요한 회의라도 하는 것처럼 잘 차리고 나타났지만 그 얼굴이 좋을 리 없었다. 지금 화명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주가는 폭락했고 투자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자금을 회수했으며, 은행은 대출 만기 연장을 거부했다.

기업 하나가 도산하는 건 순식간이다. 이제 이들은 단순히 어디에 가서 창피를 당하는 수준이 아니라 생활 자체에 실질적인 위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유체동산 압류 또한 시간문제고.

“윤 대표,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말씀하시죠.”

“화명의 상황은…… 당연히 자네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본론부터 말하자면, 자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하네. 자네가 말 한 마디만 해 주면 다 해결될 문제 아닌가?”

주가와 투자란 누군가의 한 마디 말에 출렁거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윤서경이 어딘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화명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한 마디만 한다면 곧바로 상황은 가라앉을 것이다. 윤서경이라는 사람은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화명을 그렇게 만든 게 다름 아닌 윤서경이었다. 그 사실을 이중권도 짐작하고 있다. 그는 지금 말 한 마디의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그 요청을 가장해서 윤서경에게 화명을 공격하는 걸 멈춰 달라 돌려 부탁하는 것이었다.

윤서경은 피식 웃었다.

“이 회장.”

“…….”

장인어른도, 회장님도 아닌 호칭에 이중권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이 회장이 직접 오면 내가 예의를 지킬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

나이 든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점점 벌게졌다.

“온 가족이 와서 무릎 꿇는 성의 정도는 보이지 그래요.”

말문이 막힌 남자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눈알이 툭 튀어나온 게 혈압이 꽤나 오른 모양이었다.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윤서경은 비서를 불렀고, 남자 비서 둘이 들어와 이중권을 정중하게 안내했다. 이중권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나가다가, 문 앞에 서선 뒤를 돌아보았다.

“윤 대표. 우리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게.”

윤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핏줄이 무섭긴 했다. 하는 말이 이렇게까지 똑같다니. 책상으로 돌아간 윤서경은 진료 기록을 다시 살피려다 시선을 돌려 책상 위의 캔들을 응시하곤, 유리 뚜껑을 한 번 쓰다듬은 뒤에야 화면을 보았다.

* * *

이중권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내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장인이고 한참 어른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라니.

‘애당초 이게 목적이었나?’

어쩐지 이유온에게 청혼을 한 것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모자란 자식이었다. 자신을 안 닮은 건 당연하지만 제 엄마와도, 형들과도 완전히 피가 안 섞인 것처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무엇 하나 봐 줄 구석이 없고 멍청하고, 자신의 집안에 운 좋게 굴러들어 오지 않았더라면 빈곤층으로 비참하게 겨우겨우 살아갔을 주제였다.

윤서경이 그런 멍청한 새끼와 결혼한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좋은 집안의 특출한 오메가를 수도 없이 만나 봤을 윤서경이 그런 평범을 넘어 볼품없는 인간을 들이려 할 이유.

그가 집안에 청혼할 가능성이야 꽤 높게 봤다. 그러나 상대는 이유온 따위가 아닌 막내, 이유연이었다. 이중권의 머릿속에서 이유온이 이씨 집안 가족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에게 아들은 두 사람뿐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문제를 떠나, 이유온에게 윤서경이 가당하기나 한가? 

그래, 처음부터 화명을 무너뜨리려는 계략이었다면? 자신의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거만한 인간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온 같은 걸 눈에 담을 리 없다.

부경 같은 거대 기업에게 회사 하나에 손을 대는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행동하면 이상한 시선을 받을 테니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간에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윤서경의 약혼자는 가족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고, 그것 때문에 부경이 화명을 치우려 한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고작 이유온 때문에 윤서경이 이런 수고를 할 리 없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 이유온은 대외적 이유를 만들어내기 위한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이중권은 휴대폰을 들었다. 이유온이 결혼까지 사칭하면서 데리고 있을 가치가 있는 방패막이라면…… 그걸 없애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윤서경이 화명을 공격할 명분도 사라진다.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하며 집에 돌아오자 다행히도 이유건이 있었다. 집안의 대소사는 이중권과 이유건이 함께 결정하곤 했다. 물론 성민희와 이유연의 의견 또한 다분히 들어갔다.

하지만 아내와 둘째 아들은 몸이 좋지 않았다. 둘이 쇼핑을 나갔다가 신용 카드가 정지된 것으로 나와 창피를 당했다는 듯했다. 며칠 전 카드 결제일에 공교롭게도 잠시 현금이 막혀 결제가 늦어진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최근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이 일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힘없이 자리에 앉은 채 가족회의에 참석했다. 아직도 파리하게 질린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보며 이중권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투자자를 찾느라 하루에 채 대여섯 시간도 집에 못 붙어 있는 이유건 역시 피로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이유온 한 명 때문에 온 가족이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야기가 잘 안 된 것 같네요.”

이유건이 말했다. 이중권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터였다. 이중권은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 팔걸이를 탁 쳤다.

“윤 대표가 말이 전혀 안 통하는 상태더구나. 완전히 마음을 먹은 게 틀림없어.”

“대체 왜요? 왜 그런대요? 아버지나 형, 윤 대표한테 뭐 밉보인 거 있어요?”

이유연이 발칵 소리를 지르듯 나섰다.

“정말 이유온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닐 것 아녜요.”

그의 말이 맞았다. 이유온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그때 납치 운운하면서 윤 대표를 건드린 게 너무 경솔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부경의 이미지를 직접 공격한 것 아니냐. 그것 때문에 더 강하게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윤 대표는 이미 심기가 상했고 그 자존심에 이미 시작한 일을 멈추진 않겠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중권은 소파 팔걸이를 쓰다듬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윤 대표의 명분은 유온이의 본가를 치워 버린다는 거다. 유온이를 위해서 말이야. 참, 어디서 그런 소문이 퍼지는지.”

“우리가 그 애한테 못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성민희가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이었다. 고작 사생아를 받아들여서 좋은 집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게 하며 키웠다.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사생아 중에 유일하게 좋은 대우를 받은 게 그 아이였다. 고아원에서 자라 밑바닥 인생을 살았어야 할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그 멍청하고 모자란 습성을 생각하면 지금도 윤서경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답답하게 굴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이유온이 윤서경에게 진지하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온은 그들에게 그런,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노예 제도라는 게 있었을 때 사람들은 노예를 부리면서 그들을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였다. 성민희가 외도로 아이를 임신했을 때, 당연히 중절을 해야 했다. 이미 알파 아들이 하나, 오메가 아들이 하나 있는 상황이니 아이가 더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임신 초기를 놓치고 주위 사람들에게 배가 불렀다는 걸 들키는 바람에 낳을 수밖에 없었다. 성민희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버린 자신의 혈육을 짜증스러운 걸림돌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한 집안에서 부정의 결실은 치명적 약점이자 남들이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칼날이 된다. 외부에 드러나면 집안 전체의 오점이다. 그러나 내부에서만 존재하면 칼자루는 부정을 바라보는 자에게 쥐여졌다. 이유온과 조금도 피가 섞이지 않은 부친이 그랬다.

성민희의 집안은 대형 항공사로, 식음료가 주 분야인 화명 이상으로 부유하고 탄탄했다. 하지만 이유온이 태어난 이후, 그의 존재 때문에 성민희는 이중권 앞에서 이전처럼 제 부모님을 들먹이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유온을 싫어했고, 철저하게 무시했다. 세상의 모든 핏줄이 따뜻한 의미를 가지는 건 아니었다.

부친은 제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이 유산이나 집안 재산에 감히 눈독을 들이지 않길 바랐고, 모친 또한 꼴 보기 싫은 약점이 두 아들의 것을 탐내는 게 싫었다. 그들의 결론은 이유온을 집안사람들에게 거스르지 못하게, 욕심이라는 걸 가지지 못하게 기르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이유온이 간신히 걸어 다닐 때부터 가해진 온갖 학대였다.

그들은 이유온을 무작정 학대하고 괴롭히지 않았다. 때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사랑을 주고, 생일이 되면 항상 챙겨 주고, 성과에 대해서 이따금 기대하거나 칭찬해 주기도 했다. 그것으로 이유온은 가족이 저를 학대하는 이유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며 사실은 자신도 어느 정도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집안에서 유일하게 체벌을 당하면서도 ‘형들은 뭐든 잘하는데 나는 못하니까’라는 이유를 스스로 들 정도로.

가족들은 습관적으로 이유온을 학대했다. 이유온이 어리고 작을 땐 그나마 덜했다. 하지만 그가 자라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체벌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점점 원래 목적을 잃었고 체벌을 위한 체벌이 되었다.

손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이유온을 때리고 괴롭히는 건 더 쉬워졌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온갖 짜증이나 화, 답답한 일, 그 울분을 물건을 깨뜨리면서 푸는 것처럼 그들은 이유온을 괴롭히며 풀었다. 이유온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가만히 맞고 있다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하며 빌었다.

사람은 점점 무뎌진다. 처음에 그들은 그래도 ‘사람인 이유온’을 학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사람이라는 생각은 흐릿해지고 화가 나 깨뜨려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 물건, 마구 찢어발겨도 곧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종이,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때리고 학대하면서도 저항 한 번 없이 순종적으로 사과하며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는 건 그들에게 우월감과 전능감 따위를 선사했다.

사람이자 물건. 말하고 울고 웃고 생각하지만 자신들이 원할 때 항상 납작 엎드리는 사람.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살아 있는 도구. 보통 사람은 가지지 못할 재산. 이유온이 태어나 23년 동안 차근차근 쌓인, 집안에서의 그의 위치였다.

이유온이 학대당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듯, 가족들도 그를 학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이중권이 말했다.

“윤 대표가 분명히 화명에 불만이 있어. 그래서 지금 저러는 건데, 유온이를 방패로 삼고 있는 거다. 진짜 이유는 남들한테 말하기 곤란한 게지. 같잖은 결혼 핑계 같은 걸 댈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그렇게 물건 취급하던 이유온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걸 이들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노예가 갑자기 왕궁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가 왕이나 왕비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들의 집안엔 이유연이 있었다. 이유연을 제치고 이유온이 윤서경의 배우자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은 물건과 결혼하지 않는다.

“아버지 말이 맞아요. 윤 대표가 걔랑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것부터 이상하잖아. 누가 그딴 거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해? 걔는 지가 윤 대표 꼬신 줄 알고 신나 있겠지만. 지가 뭐라고? 웃겨, 진짜.”

웃음을 터뜨리는 이유연의 얼굴엔 희미한 초조함이 떠올라 있었다. 동생에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이유건이 말했다.

“그럼 역시 유온이를 떼어내는 게 좋겠네요.”

이유건 역시 윤서경이 이유온에게 청혼한 순간부터 이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안의 이득을 생각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뿐.

원래는 이유온을 통해서 윤서경의 정보를 빼내거나, 어느 쪽으로든 그에게 악영향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 두 사람이 이혼해 위자료를 받거나…… 윤서경의 몸이 안 좋아져 이유온에게 유산이 돌아오거나. 그렇게 되는 게 최상의 결말이었다. 이유온이라는 편리한 패가 있는 이상 사실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서경이 갑자기 이유온을 보호한다는 양 굴기 시작하며 가족들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했다. 지금도 메시지 하나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계획도 전부 어려워진다. 굳이 결혼을 밀고 나갈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이유온을 윤서경이 자신의 호텔로 데리고 들어가 내보내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이유건은 적극적으로 파혼을 주장했다.

“떼어내는 정도로는 약하다. 좀 더 확실하게 해야지.”

“확실하게요?”

“지난번만큼 쉽게 덮을 수는 없는 일로 건드리는 거다.”

이중권이 뱀 같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어 말했다.

“부경이랑 결혼할 사람이 마약을 했다고 하면 조용히 넘어가진 못하겠지.”

부친의 말에 이유건의 시선이 계단 위쪽 2층으로 향했다. 그때 호텔로 가지고 갔던 약 외에, 예비용으로 그것과 똑같은 약이 여러 통 있었다. 그중에 향정신성 약물만 몇 개나 된다. 가지고 있는 다른 약과 섞으면 부인할 여지도 없는 마약이었다.

이유온의 앞으로 처방된 약물은 아주 많았다. 딱 법에 걸리기에 아슬아슬한 수준이었다. 그게 여전히 쓰던 방에 쌓여 있었고, 호텔에도 이유건이 가져다준 약이 있을 테니 증거는 충분했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단순 처방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아무리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약이라도 그게 한 번 ‘마약’으로 보도된다면 이유온이 처방전과 진단서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현행범으로 잡히고, 다른 증거까지 있으면 못 빠져나간다. 유건이 너는 쓸 만한 사람 좀 알아봐라. 질이 나쁜 놈들로. 괜찮은 장소도 찾아보고.”

윤서경과 약혼하면서 대중에 조금씩 공개된 이유온의 이미지는 순진함이었고, 윤서경은 그런 약혼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며 친근하고 보기 좋은 이미지를 쌓았다.

이유온이 너절한 클럽에서 알파들과 뒤엉켜 마약을 했다는 뉴스가 나간다면 두 사람이 밝고 행복한 모습을 드러내며 좋은 점수를 얻었던 만큼 더더욱 타격이 커진다.

“근데 아버지, 정말 이대로 윤 대표랑 척지고 끝낼 거예요?”

이중권은 그 물음에 둘째 아들을 보았다. 첫째든 둘째든, 아들들을 볼 때 그의 얼굴엔 얼핏 애정이 어렸다.

“우선 기사 나가기 전에 우리가 막고 윤 대표한테 갈 거다. 상대가 부경인데, 그래도 결혼은 유지해야지.”

이유연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남은 건 진 회장인데, 어차피 그쪽이야 두 사람 중 한 명만 데리고 갈 수 있다면 만족할 것이다. 마약 소문이야 암암리에 퍼지긴 하겠지만 진 회장은 별로 개의치 않을 사람이다. 오히려 더 제멋대로 할 수 있어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 이유연을 데리고 가면 깍듯하게 배우자 대접을 해 주기로 했지만, 이유온은 아니니.

심지어 난잡한 소문까지 있다면 첩으로 둘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그래도 진 회장과의 관계는 이어지며 아들 하나를 내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로 아귀가 잘 맞는 계획이었다.

“그럼 난 예쁘게 있으면 되겠네?”

이유연이 분위기를 풀듯 애교를 부렸다. 성민희는 그런 아들이 사랑스럽다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족 간의 사이는 더없이 좋았다. 은혜를 주고 키운 물건 하나, 공동의 적이 있었기에 더욱.

하지만 이들 모두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우선 유온이를 불러내야 할 텐데, 윤 대표가 죄다 틀어막고 있으니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자신들이 걷어차건, 무엇을 하건 고분고분 순종만 하던 물건이 멀쩡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이제 자신들보다 아득히 높은 위치로 올라가 버린 사람.

“엄마가 아프다고 해.”

그러나 외면했다. 필사적으로.

가족들이 성민희를 보았다.

“갑자기 쓰러져서 위독하다고 하렴. 뉴스에도 내보내고. 그럼 그 애도 소식 한 마디는 접하겠지. 설마, 아무리 윤 대표라도 그 정도는 전하지 않겠니?”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곧바로 하면 의심 살 거야. 상황 봐서 며칠 후쯤에 하는 걸로 하자.”

그렇게 해서, 며칠 후 성민희는 이유연과 함께 있다가 명동 한복판에서 그림처럼 쓰러졌고, 그녀가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뉴스와 신문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 * *

유온은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심각한 얼굴로 여행용 스페인어 회화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윤서경이 자신이 스페인어를 할 줄 아니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몇 마디 정도는 알고 가고 싶었다. 얼마인가요, 맛있네요, 고맙습니다. 단순한 말인데 영 생소한 언어에 발음도 어려워서 계속 중얼중얼 소리 내 말하며 연습했다.

한참을 작은 책에 매달려 있던 유온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앞으로 내려왔다. 소리를 줄인 채 켜 놓은 게임기 화면 안에서 수확을 기다리는 나무열매와 빵, 우유 같은 것들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하나씩 수확하고 낚싯대를 챙겨 낚시터로 총총 가려고 하다가, 게임기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날짜도, 일정도 다 정해졌고 웨딩플래너와 사진작가도 여러 번 만나서 어떤 옷을 입을지 까지 상의가 끝났다. 중간에 잠깐씩 스페인 관광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윤서경과 여행이라니…… 그것도 웨딩 사진을 찍으러, 사진 속의 그 예쁜 고성으로. 믿을 수 없고 실감이 안 나는 나머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갈 수 있는 걸까? 출발하기로 한 날 갑자기 윤서경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급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비행기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스페인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못 가게 되면, 그것 말고도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떠올랐다.

그런 일이 안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지. 유온은 턱을 괸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유온이 현관으로 향했다. 윤서경이 막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유온의 얼굴을 보고는 부드럽게 웃더니 다가와 허리를 안으며 이마에 입 맞췄다.

“좀 늦었죠. 갑자기 처리할 일이 좀 생겨서.”

“괜찮아요…….”

“그리고 스페인 말인데.”

“…….”

이마에 닿는 입술에 마음을 놓았던 유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역시 못 가게 된 걸까? 눈을 깜빡이며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유온의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서경은 유온의 귀에도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조금 앞당겨서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네? 오, 오늘이요? 오늘 저녁?”

놀라 되묻는 유온에게 윤서경이 미안하다는 듯 덧붙였다.

“네. 너무 급하게 말해서 미안합니다. 일이 조금 생겨서, 일정이 8일인 건 똑같고 가고 오는 날짜만 바꾸는 거예요. 괜찮습니까?”

“아, 저는 상관없는데…….”

윤서경의 일정에 맞추는 건 좋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 당장이라니, 짐을 뭘 챙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 여행 가방도 없었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는 뜻을 알아차린 듯 윤서경이 이번엔 뺨에 입을 맞췄다.

“중요한 것만 챙기면 됩니다. 다른 건 가는 동안 그쪽에 미리 준비하게 할 테니까요.”

“중요한 것…….”

“약, 휴대폰, 여권, 음…… 그리고 게임기?”

윤서경의 시선이 흘끗 테이블 위로 향했다. 화면이 켜진 게임기 안에서 유온의 캐릭터가 낚싯대를 든 채 연못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매일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인 듯해서 약간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이긴 했지만…….

“저녁 아직 안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천천히 준비하고 출발하죠. 10시 20분에 출발하니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군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유온은 그 말에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저녁 6시였다. 그래도 두 시간쯤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 게 아닌가? 가족들은 항상 그때쯤 도착해서 공항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이곳에서 공항까지 한 시간 반은 걸릴 테고. 저녁을 먹고 준비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윤서경이 여유가 있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유온은 속으로 시간을 조금 신경 쓰면서도 그의 말을 믿었다. 외국에 나갈 것이니 저녁으론 한식을 먹자는 말에도 끄덕거렸다.

식사를 한 후에 짐을 챙겼다. 여행 가방은 없었고, 옷이나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안 챙겨도 된다는 말에 결국 작은 가방에 약과 휴대폰, 게임기, 충전기만 담았다.

지금은 드레스 룸으로 쓰고 있는 예전 침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다가 액세서리 서랍장의 유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짧은 고민이 지나갔지만 결국 서랍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혹시나 해서 둘러보았지만 그것 말고 달리 챙길 건 없었다. 스페인이 아니라 근처에 잠시 외출하는 듯한 가방이었다. 유온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가방을 응시하다가 윤서경에게 물었다.

“……정말 이것만 가지고 가도 괜찮아요?”

“충분합니다.”

심지어 윤서경은 노트북과 태블릿이 들어 있는 서류 가방만 하나 들었을 뿐이었다.

“갈까요.”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문 바로 앞에 검은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이한영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곤 운전석에 올라탔다.

“바로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이한영의 말과 함께 느리게 출발한 차는 한강을 따라 달리다가 인천공항이라고 쓰인 도로 표지판 아래를 지났다. 아직 공항고속도로에 진입하기도 전이었지만 출발한다는 게 조금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시내를 한참 더 가로질러 인천대교로 들어섰다. 높게 뻗은 주탑에 불빛이 반짝거리고, 언덕처럼 경사가 진 커브를 따라 차량이 줄을 이어 오갔다. 검게 펼쳐진 바다를 구경하는 사이 차는 금세 기나긴 교량을 지나 공항 근처로 들어섰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는 또다시 새로운 세계였다. 아무리 좋은 티켓을 산다고 해도 공항에서 기다림은 필수였다. 하지만 윤서경은 이한영을 보낸 뒤 익숙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고, 출국 심사를 거쳐 여러 번 공항에 왔으면서도 처음 보는 길을 지나자 공항 안의 면세 구역이었다.

거기서 곧바로 주기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 유온은 비행기가 돌아다니는 구역에도 따로 도로가 있다는 걸 새삼 알았다. 유리창 밖으로 차가 지나다니는 걸 보았고, 이동용 버스를 타고 비행기까지 간 적도 있었으나 이렇게 평범한 차에 탄 채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차가 도착한 건 처음 보는 도색의 비행기였다. 지금까지 본 어느 항공사의 것도 아니었고, 아무런 마크도 없었다. 문에서 바닥으로 내려진 계단 양쪽에 호텔의 것과 비슷한 유니폼 차림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승무원으로 보였다.

비행기 계단은 약간 가팔랐다. 한 걸음 앞에 선 윤서경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높은 계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절은 하지 않았다.

계단에서 이어진 육중한 문 앞에도 친절하게 웃는 모습의 승무원이 둘 있었다. 인사를 받으며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유온이 잘 아는 비행기 내부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일등석과 비슷하지만 더 넓은 좌석 몇 개를 지나 벽 안쪽으로 들어오자 업무용 책상과 회의를 할 때 쓰는 듯한 테이블, 기체가 흔들려도 떨어지지 않도록 폐쇄형으로 만들어진 책장이 있었다. 거기서 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보인다.

그제야 전용기라는 걸 알았다. 하기야 윤서경 같은 사람이 다른 승객들 틈에 섞여서 체크인을 하고, 일등석이라도 공유 공간에 올라타 비행하는 건 이상하게 보이긴 했다.

승무원은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서 천장부터 바닥까지 닿는 두꺼운 커튼을 쳤다. 유온을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간 윤서경이 직접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밖에서 볼 때는 전용기라고 생각도 못 했을 정도로 기체가 컸다. 그만큼 실내 역시 넓어서 침실은 호텔 방 하나를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옆에 난 창의 모양으로만 겨우 비행기 안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금방 출발할 겁니다. 승무원들은 부르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을 거고요. 앉아요.”

유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곧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항과 천천히 가까워지는 활주로의 모습은 평범한 비행기를 탈 때와 다르지 않았다. 길게 뻗은 활주로 조명의 빛을 따라서 비행기가 이륙했다. 땅 위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얼마나 걸려요……?”

“열네 시간쯤.”

긴 시간이었지만 비행기 안에는 구경할 것도 가지고 놀 것도 많았다. 책장에 꽂힌 건 대부분 유온이 좋아하는 장르의 소설책이었다. 윤서경도 비행기를 탈 땐 똑같이 심심해서 이런 책을 많이 읽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할 일이 있다고 책상에 앉은 윤서경을 방해하지 않도록 유온은 조용히 책을 골라서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도 구경할 건 많았다. 호텔과 거의 비슷하지만, 높은 고도나 하중을 고려하고 잦은 흔들림에도 대비하기 위해서 특이한 게 많았다. 서랍이 전부 꾹 눌러야 열리는 식이라거나, 물건이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도록 가림막이나 받침대가 있다거나. 선반이 전부 빌트인이기도 했다.

잠시 침실을 서성서리며 여기저기 구경하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한 권을 거의 다 읽어 갈 때쯤엔 자정을 훌쩍 넘겼고, 희미하게 들리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유온은 꾸벅꾸벅 졸다가 깜빡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침대 위에 있었다. 주위는 간접 조명만 켜 두었는지 어두웠다. 어렴풋이 밝은 곳이 보여서 시선을 돌리니 윤서경이 침대 옆의 작은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누워서 눈만 스르르 떴을 뿐인데, 깬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어요? 마침 곧 일출 시간입니다.”

그 말에 유온은 창밖을 보았다. 아직은 검푸르게 어두울 뿐이었다. 이제 얼마 후 밤이 단번에 낮으로 바뀌는 것처럼 해가 높이 떠오를 것이다.

“마실 거라도…….”

윤서경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그가 보고 있던 태블릿 화면이 깜빡거렸다. 화면을 흘끗 본 그가 눈을 좁혔다. 중요한 연락이 들어온 듯했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그 옆에 있는 게 냉장고니까 뭐라도 마시고 있어요.”

“네…….”

그는 한 걸음 만에 책상에서 침대까지 훌쩍 다가와 유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일출을 같이 보았으면 했기에 조금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이 문을 닫고 나간 후 유온은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가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침실에 혼자 남고 10분쯤 지나서 분홍빛의 긴 직선이 하늘을 갑자기 반으로 가르듯 내리뻗었다. 한순간에 주위가 밝아지고, 빛에 드러난 구름이 수채화처럼 옅게 물들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유온은 휴대폰을 찾아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윤서경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얼마 후, 일출이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인 후에 윤서경이 돌아왔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 휴대폰을 쥐고 있던 유온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서경 씨, 저…… 해 뜨는 거 사진 찍었는데, 보실래요?”

괜히 귀찮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했지만 윤서경은 곧바로 유온의 휴대폰을 보았다. 잠깐 사이 찍은 사진이 꽤 많았다. 흐린 분홍빛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하늘의 색상과 바다처럼 펼쳐진 구름의 모양은 눈으로 본 것만큼 예쁘게 담기진 않았다. 뒤늦게 쓸데없는 일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이니까 몇 번이나 보았을 텐데.

“사진으로라도 보니 좋네요. 남겨 줘서 고마워요.”

윤서경은 그렇게 말하며 유온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사실, 일하느라 창밖을 볼 틈은 별로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면 아침이 되어 있거나, 해가 져 있으니까요.”

“네…….”

뺨이 따끈해졌다. 괜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스르륵 사라졌다. 요즘은 윤서경의 칭찬이나 고맙다는 말이 몸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예의상 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문득 휴대폰을 향해 있던 윤서경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뭘 보는지 따라 시선을 옮긴 유온은 괜히 손을 치웠다. 휴대폰을 드느라 위로 올린 팔 때문에 소매가 내려가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윤서경은 유온이 내린 손을 따라가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 위에 예물을 보던 날 윤서경이 사 준 팔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팔찌와 손목을 천천히 만지다가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 맞췄다.

“잘 어울리네요.”

손을 빼고 싶어 움찔거리면서도, 손등 바로 위에 닿은 입술이 좋았다. 유온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가 사 준 후로 밖에 하고 나오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뭔가 아까운 마음에 방에서만 몇 번 해 보고 말았다. 금속이면 닦으면 되겠지만, 가죽이라서 혹시나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금속이면 금속인대로 어디 긁힐 것 같아 못 했겠지만.

그러다 오늘 처음으로 차 보았다. 일부러 소매 안쪽에 넣어 두었는데 뜻하지 않게 보인 게 멋쩍었다. 사이즈를 가장 작게 조절한 팔찌는 끈이 나풀거릴 정도로 남았다. 윤서경은 그 끈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유온에게 입을 맞추고, 품에 안았다.

남은 비행시간 동안은 더 자지 않았다. 중간에 식사를 한 번 한 후로는 창가에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니 까마득한 아래로 육지가 보였다. 이렇게 먼 상공에서 보아도 한국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 후 비행기가 하강을 시작했다. 느리게 고도를 낮추는 기체를 따라서 산맥 사이사이 자리 잡은 이국의 풍경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늘을 크게 선회한 비행기는 세비야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다른 공항에 비해 작은 규모의 공항에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 올라 곧바로 세비야 시내를 지나서 고성으로 향했다. 고성은 윤서경이 말하길 산자락에 있었고, 시내에서 차로 40분쯤 더 달려야 했다. 어디를 가나 오렌지나무가 풍성한 상아색의 고즈넉한 도시는 시내에도 외곽에도 차량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호텔을 나와서 이십여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의 정문 바로 앞까지 차량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정돈된 낮은 언덕이 있었다. 운전기사가 내려 차 문을 열었다. 내리자마자 유온은 눈앞의 고성을 올려다보았다. 성 둘레를 넓게 두른 성벽 위로 첨탑과 긴 아치가 이어진 회랑이 보였다. 그 주위로는 수면이 햇살로 반짝이는 호수, 성 너머엔 자작나무 숲이 있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도 더 근사했다.

“안으로 들어갈까요.”

윤서경의 말에 열린 성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보아도 사진 촬영을 하고 며칠 묵으러 온 게 아니라 입장권을 사서 들어온 관광 유적 같았다.

양쪽에 난 회랑 옆으로 바닥에 깔린 직사각형의 긴 연못과 그걸 따라 심은 잎이 반들반들한 관목이 보였다. 회랑 천장과 벽에 걸린 등잔은 모양만 살리고 안은 촛불 대신 전구로 바꿔 놓은 듯했다.

성의 메인 홀로 들어가자 반듯한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서 있었다. 안쪽은 모양을 맞추어 짜 넣은 바닥의 대리석과 아치를 따라 조각한 장식 때문에 더더욱 유적……도 아니고 거의 문화유산으로 보였다. 이런 곳을 호텔로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을 보수하긴 했으나 그것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가 안 날 만큼 정교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숙박용 구역으로 향했다. 옛날에 이 성의 성주가 쓰던 공간이라는 듯했다.

여기 또한 말할 것도 없이 화려했다. 사진은 이 성의 호화로움을 절반도 채 담아내지 못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부 발을 대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번쩍거렸다.

“유온 씨, 이쪽으로 와요.”

윤서경이 앞서서 걸어가더니 창문 앞에서 유온을 불렀다. 얼른 따라가자 그는 창을 열었다. 동시에 들어온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에 유온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다음 순간 유온은 눈을 크게 뜨며 창틀에 손을 얹고, 바깥쪽으로 몸을 뺐다. 눈앞에는 탁 트인 호수와 호수 둘레를 따라 낮게 내려오는 산자락이 펼쳐져 있었다.

“저 산에는 조명을 설치했어요. 밤이 되면 켜지고, 무척 예쁠 겁니다.”

“아……. 등산로 같은 게 있나 봐요. 밤에 올라가는 사람이 많아요?”

“짧은 산책로는 있죠. 조명은 조망용으로 설치한 겁니다.”

“그, 그래요? 근처에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요…….”

저런 산이라면 정부나 지자체에서 설치해 준 것일 텐데, 몇 안 되는 사람을 위해 그런 걸 해 주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스페인은 원래 그런가.

“사유지니까요. 땅 소유주가 하는 겁니다.”

“와…….”

“성은 마음에 듭니까? 호수랑 저 산은? 아직 숲엔 안 가 봤지만.”

“네, 너무 예뻐요. 정말 좋아요.”

유온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말한 그대로 너무 예쁘고, 정말 좋았다. 윤서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유온은 그대로 굳었다.

“다행이네요. 당신 건데, 마음에 안 들면 큰일이죠.”

“…………네?”

잘못 들었나? 

“저 산까지요. 매입 절차가 꽤 복잡하더군요.”

“…….”

몇 초 동안 얼어 있던 유온은 이내 농담인 줄 알고 작게 웃었다. 하지만 윤서경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농담이시죠……?”

“아닙니다.”

“농담…….”

“농담 아닙니다.”

“아……. 네…….”

유온은 멍하니 서 있다가 눈앞의 커튼을 만지작거렸다. 가장 겉면의 길이가 짧은 장식 천과 가장 안쪽 얇은 레이스까지 네 겹으로 이루어진 실크 커튼이 휘황찬란했다.

짙은 녹색과 금색 커튼에 맞춘 창틀의 적갈색 칠이며, 차분한 덩굴무늬가 그려진 벽, 깊은 색조의 새 카펫, 네 개의 기둥과 천개와 휘장이 달린 침대, 다리가 고양이 발처럼 동그랗게 구부러진 모양의 가구……. 벨벳 소파, 대리석 조각상, 유채 풍경화, 촛대와 양초, 풍성하게 장식된 생화…….

이건 그러니까…….

“거, 거짓말…….”

“정말입니다.”

쓰러지고 싶어졌다.

놀라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 하는구나, 라는 걸 알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면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그냥 망연해질 뿐이었다. 성이라니? 성…….

역사가 느껴지는 성과 호수, 산을 일반인이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것이었던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윤서경은 일반인이 아니라는 걸 퍼뜩 떠올렸다. 그가 운영하는 호텔 체인의 고급 호텔이 이 스페인에만 해도 세 개나 있었고 여기까지 올 때 탄 전용기는 중형 여객기였다.

고심한 끝에 한 번만 더 물어보려 윤서경을 보자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웃는 걸 보니 역시 농담이었던 게 아닐까?

“이제 욕실이랑 식당, 거실을 보러 가죠. 서재는 거실에 같이 만들어 뒀습니다. 급하게 매입하고 정돈한 거라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와 봐요.”

아닌 것 같다. 유온은 정신적 충격 속에서 비틀거리며 윤서경을 따라갔다. 욕실부터 거실 겸 서재에 이르기까지 화려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거실은 높게 튼 천장 위가 유리로 되어 있었고, 그 높은 층고의 벽 가득히 책을 꽂아 두었다. 사다리가 있긴 했으나 제일 위까지 닿지 않는 걸 보면 어느 층 이상부터는 장식용 책만 있는 듯했다.

여긴 서재나 거실이 아니라 잡지에서 사진 촬영을 할 때 이용할 법한 스튜디오에 더 가까웠다.

“거주 공간 말고는 아직 보수가 덜 끝난 부분도 있습니다. 성이 조금 넓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이걸 ‘조금’ 넓은 거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윤서경은 태연하게 유온을 이끌고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몇 군데 더 안내해 주었다.

작은 저택 하나 규모 정도는 될 법한 생활용 공간 외에는 깨끗하게 청소만 했을 뿐 관광지처럼 고성의 구조와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두었다. 곳곳에 카메라나 휴대폰을 든 관광객들이 있을 것 같은데 아무도 없고, 이따금 유니폼 차림의 직원이 지나갈 뿐이었다.

호텔로 꾸며 놨다는 말을 했을 때 성에서 다른 사람을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객실이 하나뿐이라기에 당연히 그것 때문에 손님이 두 사람밖에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설마 이런 의미일 줄이야.

저녁은 영화에서나 보던 길쭉한 식탁에 차려졌다. 가벼운 음식으로 식사를 마친 뒤, 물에 적셔도 되는 건가 싶은 섬세한 문양의 앤티크풍 욕조에서 씻고 나오자 기둥이 네 개 달린 굉장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유온은 따뜻한 목욕물과 배부르게 먹은 식사, 긴 여정으로 잔뜩 나른해진 상태였다. 할 말을 채 생각해 보기도 전에 눈이 깜빡깜빡 감겨왔다. 윤서경은 그런 유온을 침대에 밀어 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토닥였다.

다음 날 정오가 다 되어서야 깨어난 유온은 성 이야기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물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씻고 나와서 휴대폰을 확인하니 이정윤과 정인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잘 도착했느냐는 것과, 뭘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각각 답장을 보내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고성의 사진도 첨부했다. 뭐라고 더 메시지를 덧붙이려 했으나 윤서경이 부르는 소리에 후다닥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웨딩 촬영을 해 주기로 한 사진작가는 세비야 시내에 살고 있었는데, 유온과 윤서경이 너무 갑작스럽게 온지라 오늘과 내일은 시간이 안 난다는 듯했다. 그래서 원래 촬영 후에 잡아 두었던 관광 일정을 앞으로 당겼다.

“오늘은 뭘 할까요. 시내에 나가 볼까요?”

“네, 그런데 서경 씨 바쁘신 거…….”

시차 때문에 날짜가 달라지긴 했지만 체감하기로 어제 이 시간에는 한국에 있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온 만큼 바쁜 윤서경의 일은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되었다. 용무가 생겨서 일정을 바꾼 거라고 해도, 원래 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많이 바쁘지 않습니다. 일부러 일정까지 바꿔서 온 건데, 바쁘면 안 되지요.”

“그, 그럼 다행이구요.”

어딜 갈지 대강만 정한 뒤 아침을 먹고 곧바로 시내로 나왔다. 윤서경은 직접 운전을 했다. 한국과 표지판도 교통 법규도 다 다를 텐데도 전혀 불편해하거나 주춤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조수석에 앉은 유온은 그런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며 윤서경을 흘끔흘끔 보았다.

차에서 내려 본 시내는 어제 지나치며 보았던 것보다 훨씬 볼 게 많았고, 색이 다채로웠다. 어디를 가나 있는 오렌지나무에 주홍색 열매가 가득 달려 있었고 건물 벽이나 간판의 채도가 높았다.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그런 색채는 선명한 푸른 하늘 아래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관광객이나 현지인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곳곳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사진을 찍으려 여기저기 멈춰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유온도 같이 들뜨는 것 같았다.

이슬람 양식의 유명한 관광지를 보고 나와 예전에 어느 배우가 CF를 촬영했다던 광장으로 왔을 때, 윤서경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중요한 연락이 온 듯했다.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아치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성큼 다가왔다.

“안녕! 어디서 왔어? 한국? 일본?”

“…….”

잡상인이었다. 스페인어긴 해도 회화 책에 나온 단어라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잡상인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주의사항을 몇 번이나 읽었기 때문에 유온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뭐 하러 왔어? 저 사람은 남자 친구? 아니면 남편? 신혼여행?”

이 말에 무심코 잡상인을 보고 말았다. 친화력과 넉살이 뛰어난 잡상인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계속 말을 붙였다.

“이거 어때? 귀엽지? 좋은 물건이야. 럭키, 럭키 포 유.”

잡상인은 일부러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단어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뒤의 말은 영어였다.

“싸, 2유로. 로우 프라이스. ‘한국 돈 2천 원.’”

‘한국 돈 2천 원’은 심지어 한국어였다. 2유로는 2천 원이 아니지만 유온은 삼개 국어를 넘나드는 잡상인의 말에 이미 정신이 다 기울어져 있었다.

“‘행복이 준다’, 근데 ‘2천 원.’ 어때? 좋지?”

‘행복이 준다’는 건 아마도 ‘행운을 준다’는 뜻인 것 같았다. 잡상인이 파는 물건을 내려다보자 동글동글하게 생긴 귀여운 목걸이였다. 2유로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잡상인의 말이 재미있었고, 또 행운을 준다고 한다.

“귀여우니까 싸게. 1유로만 줘.”

반쯤 홀려 있었지만 그런 모습이 망설이는 걸로 보였는지 잡상인이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했다. 유온은 지갑에서 1유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 헤브 어 나이스 트랩!”

목걸이를 준 잡상인은 손을 휘젓고는 재빨리 떠나갔다. 목걸이를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린 유온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윤서경의 시선에 흠칫 놀랐다.

“아……, 일 다 끝나셨어요?”

“네.”

짧게 대답한 윤서경이 유온이 든 목걸이를 보았다. 유온도 자신의 손에 있는 목걸이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윤서경에게 내밀었다. 애초에 그에게 주려고 산 것이었다.

“행운을 주는 목걸이래요.”

“흠, 행운……. 그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게 낫겠군요.”

“제가요?”

“네. 당신한테 행운이 오면 나한테도 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갈까요, 잠깐 쉬면서 차라도 한 잔 마시죠.”

“네? 네.”

유온은 목걸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에 쥔 채 그를 따라갔다. 광장 둘레의 카페 테라스석으로 온 윤서경은 자리에 앉아 유온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 정도야 단어 몇 개만 외운 스페인어와 영어로도 충분히 고를 수 있었다. 따뜻한 라테를 고르자 윤서경이 가서 주문을 한 뒤, 음료 두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유온은 목걸이를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쟁반을 내려놓으며 앉던 윤서경이 유온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슥 보았다.

“아…….”

뒤늦게 치울 생각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윤서경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곤 훌쩍 자리를 떠났다.

그의 자리에서 커피만 따뜻한 온기를 피워 내고 있었다. 어딜 가는 건지, 검은색 얇은 트렌치코트 차림의 뒷모습을 가만히 따라가자 그는 광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잡상인 중 한 명에게 다가갔다.

……역시 내가 사기를 당했나?

그래서 따지러 간 건가. 하지만 고작 1유로인데.

윤서경은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유온이 산 것과 똑같은 목걸이를 사 들고. 유온은 멍하니 그가 든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저도 모르게 그 위에 제가 산 목걸이를 내려놓자, 그도 유온의 손을 잡아 똑같이 생긴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서로 사 주는 걸로 하죠.”

“네…….”

유온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똑같이 나누어 가진 목걸이는 조악한 물건임에도 무척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광장을 구경하며 차를 마시고 쉬다 보니 오히려 피곤해졌다. 중요한 건 다 봤으니 이만 돌아가자는 윤서경의 제안이 반가웠다. 그렇게 그날은 오후에 성으로 돌아와서 좀 더 쉬다, 어제 보지 못했던 호수와 자작나무숲을 잠시 둘러보러 나갔다.

성 안쪽이 사람이 꾸민 우아한 화려함이라면 숲과 호수는 자연이 조형한 엄숙한 아름다움이었다. 호수는 고요한 물소리를 내며 저 멀리 산자락까지 뻗어 있었고, 성의 뒤편에 넓게 자리한 숲은 한참 고개를 뒤로 꺾어야 할 만큼 높게 자란 자작나무가 그림처럼 빽빽했다.

숲에 들어오고 얼마 후 하늘로 뻗은 하얗고 매끈한 나무줄기를 따라 석양이 붉게 물들었다. 주홍색에서 빠르게 검푸른 색으로 색을 바꾼 태양이 완전히 가라앉아 주위가 어두워진 후, 땅바닥과 나뭇가지 곳곳에 장식한 미등이 희부옇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이 되자 호수에서 불어오는 젖은 바람 때문에 꽤나 쌀쌀해졌다.

“일단 들어갈까요. 피곤할 테니 내일 저녁에라도 다시 보러 나오죠.”

고개를 끄덕이자 윤서경은 유온의 손을 잡고 숲을 빠져나갔다. 똑같이 생긴 자작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길을 헤맬 것 같기도 했지만, 산책로가 있고 길을 따라 조명을 놓아두어 그럴 염려는 없을 듯했다.

숲을 빠져나가 성으로 들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꽉 잡은 손의 온기가 선명했다. 주위가 추워서 더 그런 건지도 몰랐다.

가벼운 식사 뒤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향긋한 물로 목욕을 하자 하루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쌓인 피로가 녹아내렸다. 유온은 따끈따끈해진 몸에 옷을 걸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들어올 때마다 머뭇거리게 되는 방이었다. 지내던 호텔 스위트룸도 현대적인 인테리어에 이런 고딕 양식을 가미한 느낌이었지만, 당연히 이렇게 본격적이지 않았다. 수백 년 전으로 시간 이동이라도 한 느낌을 받으며 유온은 창가로 다가갔다.

침실의 커다란 창에선 호수 수면에 섬세하게 반사되는 달빛과 산길을 따라 걸린 레몬색 조명이 잘 보였다. 창가의 카우치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윤서경이 씻고 나온 듯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조금 젖은 머리를 한 채 다가왔다. 체향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그는 창틀에 한 손을 올리곤 몸을 숙여 입 맞췄다. 유온은 눈을 감으며 두 팔을 뻗어 윤서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맞춤을 하던 윤서경은 유온을 안아 올리며 자신이 카우치에 앉았다. 그의 무릎에 올라타게 된 유온은 그에게 체중을 맡기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두 손이 자연스럽게 옷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만졌다. 동시에 강해진 체향과 체온 안에서 유온도 스르르 향을 흘렸다. 윤서경은 유온의 목덜미에 코끝을 대고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옷을 벗겼다.

오랜만에 찾아온 히트 사이클을 보낸 후로 몇 차례 몸을 맞댔다. 조금은 이 행위에 익숙해진 것도 같았다. 물이 점점 차오르듯 몸이 달아오르다 몰아치는 감각에. 그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고 다급하고, 머리가 어지럽고, 또 달콤했다. 유온은 맨살이 드러나는 순간의 낯섦을 발끝을 움츠리는 것으로 달랬다.

윤서경의 손이 몸을 더듬으며 내려와 그 발을 쥐었다. 다른 한 손은 머리를 감쌌다. 늘 그렇듯 따뜻한 손이었다. 배가 따끈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아래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키스하는 것만으로 젖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키스는 몸속의 열띤 물기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실내의 공기는 호수의 물기 때문인지 차분하고 촉촉했다. 그렇다고 지나칠 정도로 습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한밤의 촉감에 두 사람의 체향이 섞였다. 유온은 커다란 손이 맨살을 감싸 쓸어내리는 감촉에 그저 가만히 입을 벌렸다.

그가 아래를 더듬어 넓힐 때도, 질척질척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드나들 때도, 심지어 발기한 물건이 좁은 안을 조금씩 비집고 들어올 때조차 이제 두려움은 없었다. 몸이 딱 들어맞도록 겹쳐지는 순간은 언제나 약간의 고통과 열기, 그리고 쾌락으로 가득했다.

유온은 배 속이 뜨겁게 들어차는 느낌에 떨고 신음했다. 윤서경의 입술 사이에서도 가쁜 숨결이 쏟아져 뺨에 닿았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을 그에게 기대자, 그는 유온의 체온을 전부 받아 주며 한쪽 다리는 카우치 팔걸이에, 다른 한쪽 발은 창틀에 닿도록 하여 다리를 크게 벌렸다.

윤서경이 허벅지 아래쪽과 엉덩이를 쥐어 유온의 몸을 완전히 받치고 있었기에 몸의 무게 때문에 그 자세가 힘들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 상태로 몸속을 채운 성기가 쉼 없이 꿈틀거리고, 몸이 뒤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깊은 곳까지 들어온 압박감은 버겁고, 둥근 귀두로 안의 민감한 부분을 비벼 문지르듯 할 때마다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으, 으응……, 읏, 하, 아…….”

그는 추삽질을 하는 대신 그대로 성기를 끼워 넣은 채 계속해서 안에 성기를 꽉 누르고 문질렀다. 다리가 온통 그에게 끌어안겨 있었기에 어디로 도망을 갈 수 없었다. 잠깐씩 몸을 뒤로 물렸지만 그럴 때마다 윤서경이 다시 자신을 끌고 가서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함부로 움직이면 몸이 홱 뒤로 넘어가 머리와 어깨부터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아……!”

윤서경이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굵고 뜨겁고, 젖어 있는 성기가 물소리를 내며 내벽을 거칠게 짓누르고 들어왔다. 안을 문지르는 것으로 잔뜩 예민해졌던 유온은 그 한 번에 신음을 터뜨리며 절정을 맞았다. 윤서경은 정액을 툭툭 쏟아내는 유온을 보면서 한숨을 터뜨리더니 사납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헐떡이는 숨소리가 울렸다. 방금 느낀 절정으로 한껏 민감해진 유온은 성기가 안을 급하게 쑤셔 대는 걸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아, 흑, 자, 잠깐만, 요, 서경 씨……. 지금, 지, 지금…….”

사정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몸에서 가장 유약한 부분을 찌르는 성기는 유온을 정신없이 몰아세웠다. 윤서경 또한 반쯤 정신을 잃은 듯 유온의 머리와 얼굴에 미친 사람처럼 키스하다가 입술로 내려와 도톰한 입술을 깨물고 빨며 허덕였다.

윤서경도 유온의 안에 사정할 때까지 그 열락은 이어졌다. 몸속에 쏟아지는 뜨거운 정액에 유온은 몽롱한 눈을 한 채로 어깨를 떨며 중얼거렸다.

“아, 조, 좋아, 이거…….”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다. 유온은 배를 손으로 덮으며 알파의 정액이 몸을 흠뻑 적시는 것에 열락을 느껴 머리가 멍하니 부유하는 걸 느꼈다.

“좋아요?”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유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를 덮은 두 손 위를 윤서경의 손끝이 매만지고, 그 손이 다시 올라와 가슴을 쥐었다. 살도 거의 없는 가슴이 커다랗고 축축하게 젖은 손 위에 올라왔다.

“아, 잠시만, 저, 아……, 으으, 응……!”

손가락이 유두를 세게 튕기고 꽉 쥐었다. 가슴부터 옆구리까지 문질러 누르는 손길에 배 속이 다시 바짝 굳으며 꿈틀거렸다. 성기를 빈틈없이 감싼 젖은 점막이 움찔대며 조여들자 윤서경도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앗, 아……, 아!”

그는 두 손으로 유온을 잡고 가슴을 만져댔다. 예민하게 곤두선 유두가 손 아래에서 문질러지며 속절없이 쾌감을 온몸에 퍼뜨렸다. 유온의 발끝이 구부러지고, 허벅지와 아랫배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때문에 몸속에 고여 있던 액체가 흘러나왔다. 윤서경은 잠시 가슴만 문지르며 있었지만 결합부 둘레를 축축하게 적시는 정액을 느끼곤 허벅지에 힘을 주어 몸을 올려쳤다.

“아아!”

찌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틈새로 정액이 흘러나오자 그는 좀 더 잘게 허벅지를 움직였다. 배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한 채 하체를 흔들 뿐인데도 아래에서 위로 찍어 올리는 힘은 지나치게 강했다. 유온은 휘청거리다 두 다리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체중 때문에 몸이 가라앉으면서 결합이 더욱 깊어졌다.

“으응, 흑……, 아, 아, 서경 씨…….”

울먹이듯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윤서경은 유온의 귓가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아래는 멈추지 않았다. 마구 흔들리는 아래가 젖은 비닐을 문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철벅거리고, 성기가 맞물린 둘레로 정액이 비어져 나와 거품을 일으켰다. 분명 방금 사정했는데 윤서경의 것은 전혀 크기가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아, 으응, 힘들, 어, 아…….”

무심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제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고, 오늘도 돌아다닌 것 때문인지 목욕으로 지워진 듯했던 피곤함이 슬며시 되살아났다. 평소엔 그래도 지쳐 힘들긴 하지만 서너 번 하는 정도는 괜찮았는데, 분명 기분이 좋음에도 힘든 건 힘든 것이었다.

그래도 조용히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유온의 말에 윤서경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 아니, 에요,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얼른 수습하려 했으나 윤서경은 이미 유온의 말을 들었다. 그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유온의 귀를 몇 번 아프지 않게 잘근거리다가 성기를 빼냈다. 굵은 성기가 내벽을 누르며 빠져나갔다.

“미안해요.”

“아니, 저 정말……, 으응…….”

정말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안에서 물컹물컹하게 덩어리진 액체가 툭툭 떨어졌다. 성기가 빠져나가고 이어 정액까지 쏟아지는 감촉에 유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르르 떨었다. 윤서경은 열에 들뜬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유온을 안아 창을 보며 무릎으로 앉게 했다.

“조금만, 너무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참기……, 어려워서.”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다리를 벌리려 하는데 윤서경은 유온의 골반을 쓰다듬었다.

“조이고 있어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번인가 해 본 행위였다. 유온은 다리를 모아 좁히며 두 손으로 창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윤서경이 뒤에서 유온을 끌어안고, 성기를 양쪽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안에 넣을 때와 달리 수월했다.

부드러운 허벅지 살 사이에 성기를 넣은 윤서경은 잠시 숨을 고르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에 넣는 것보다는 훨씬 몸에 부담이 가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 몸을 휩쓸었다. 구멍 입구부터 회음, 성기 아래쪽까지 굵고 단단한 성기가 짓누르며 왕복하는 움직임이 느릿하게 절정을 불러들였다.

“아……, 아, 으응…….”

창밖은 호수와 산밖에 없다. 그런데도 뒤늦게 누가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몸이 떨렸다. 유온은 진저리를 치며 윤서경이 주는 감각에 집중했다. 아랫배가 멈칫멈칫 경련하고 머리는 뜨거웠다. 떨림 같은 절정이 발치까지 얼씬거렸다. 그리고 윤서경이 성기를 서로의 살이 부딪치도록 박으며 목덜미를 세게 깨문 순간 유온은 새된 목소리를 토해냈다. 두 번째……, 세 번째였나?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이었으나 조금도 몸이 둔해지지 않았다.

그때 윤서경이 다시 유온을 돌려 앉히곤, 아예 카우치에 눕게 하며 위로 올라왔다.

“조금만, 삼키기만 해 줘요. 전부 다 삼키지 않아도 되니까.”

“네…….”

멍하니 대답한 유온이 입을 벌렸다. 제 성기를 쥐고 있던 윤서경이 그 입술 사이에 귀두를 얹은 채 숨을 내뱉으며 토정했다. 입 안으로 알파의 정액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부 삼켜 보려 했으나 양이 많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두 번 정도 목을 꿀꺽거린 유온이 잘게 기침하자 윤서경은 몸을 일으켜 유온의 가슴 위에 남은 정액을 쏟아냈다.

“아, 흐윽…….”

입 안에 찬 정액의 맛에 유온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또 한 차례 짧은 절정이 지나갔다. 사정까지 이어지지 않았으나 예민해진 몸에는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얼굴을 새빨갛기 물들인 유온이 떨고 있자 윤서경은 그를 안아 올려 길게 키스했다.

너른 침실이 두 사람의 체향과 숨결, 습하고 뜨거워진 체온으로 가득 찼다. 유온은 숨을 몰아쉬며 윤서경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땀이 밴 몸이 뜨거웠지만, 지금 창을 열면 호수를 스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아직 웨딩 촬영은 시작하지도 않았기에 컨디션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윤서경의 손이 땀으로 젖은 등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온몸이 편안하게 늘어졌다.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에 눈을 가늘게 뜬 유온의 머릿속에 문득, 늘 묻어 두고 지내던 의문이 떠올랐다.

“서경 씨…….”

“네.”

“있잖아요, 예전에…….”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윤서경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예전에, 러트 때 항상 집에, 없었잖아요……. 그때…….”

유온이 ‘예전’ 일을 꺼내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묻어두고 지내면서도 언제나 신경이 쓰이던 일이었다. 러트에 집을 비운 게 자신과 관계하고 싶지 않아서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때 어디에 가서 시간을 보냈는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사실 지금까진 그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웠다. 알고 싶으면서도, 그가 그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보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물어봐 놓고 후회했다. 이제라도 대답하지 말라고 말할까. 짧은 찰나 머뭇거렸으나 윤서경에게서는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혼자 있었습니다. 주로 그 호텔에요.”

“…….”

몸을 안는 힘이 강해졌다. 신기하게도, 내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는 그럴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사정에 대해 생각한 유온의 입에서 과정을 건너뛴 결론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서경 씨, 전 한 번도……, 하, 한 번도 서경 씨한테 나쁜 일 하고 싶었던 적 없어요.”

이 또한 이전 같았으면 속으로 하고 말았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입 밖으로 더듬거리는 목소리로나마 흘러나왔다. 윤서경이 어떻게 들을까, 하는 걱정이 따라붙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윤서경은 이번에도 금방 대답했다.

“압니다.”

“…….”

“예전엔 왜 몰랐나 싶을 만큼 잘 알아요.”

다행이다……. 어느새 긴장했던 몸이 축 늘어졌다. 유온은 두 팔로 윤서경을 꼭 끌어안았다.

* * *

이유온이 잠든 걸 확인한 뒤 윤서경은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주고는 책상으로 향했다. 이곳에 오게 된 건 꽤나 갑작스러웠다. 그만큼 업무를 서울을 비운 채로도 할 수 있도록 조정하느라 비서실 전체와 윤서경 본인은 상당히 수고스러워졌다.

다 화명의 헛짓 덕분이었다. 며칠 동안 얌전히 있나 싶더니, 성민희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명동 한복판에서 쓰러졌다. 그 모습을 촬영한 누군가가 재빠르게 각 언론사에 파일을 보낸 것만 봐도 성민희가 무슨 병으로 쓰러졌는지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창피해서라도 못 할 짓이었다.

뉴스 쪽은 기사가 나오기 전에 전부 차단했지만 어디에선가 파일이 퍼져 나가는 것까지 바로 막을 순 없었다. 윤서경은 그 건이 정리되는 동안 이유온을 아예 한국의 정보로부터 차단하는 걸 선택했다. 일정이 며칠쯤 앞당겨진다고 해도 자신이 좀 바빠질 뿐 큰 문제는 없었으니.

사실 좀 바빠진 정도가 아니라 낮에 이유온과 함께 보내는 몇 시간 말고는 내내 컴퓨터나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 정도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유온은 도착한 첫날에 이 성이 당신 것이라고 말하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머리 위에 만화 같은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어차피 말하자마자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 소유라는 사실에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다음 날 관광을 하러 나와서는, 광장 한복판에서 윤서경이 잠깐 휴대폰을 확인하는 사이에 잡상인에게 붙들려 물건을 강매당하고 있었다. 처음엔 경계하더니 점점 정신을 빼앗기다가 결국 샀다. 윤서경은 그 일련의 과정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그런 걸 진짜로 사는 사람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행운을 가져온다는 물건을 이유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윤서경에게 주려 했다. 어쩌면 그런 물건이 정말 행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겠지. 그럼 그건 자신이 아닌 이유온에게 갔으면 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려 하자 아쉬운 표정을 짓기에, 자신도 결국 그런 물건을 돈을 주고 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제야 밝아지는 얼굴을 보며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깊이 잠든 이유온을 책상 너머로 바라보다가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국에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성민희가 병원 VIP실에서 6인실로 내려갔다는 소식이었다.

대형 병원의 VIP실은 원한다고 해서 쉽게 입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화명그룹의 가족 정도 지위면 지금까지야 당연한 듯 침상이 내어졌겠으나, 이젠 그렇지 못했다. 성민희가 입원한 병원에서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하루 수백에 달하는 입원비를 지불하지 못할 것이며 입원시켜 자신들이 득을 볼 게 없으리라 판단했다.

VIP실은 고사하고 1인실도, 심지어 2인실 금액도……, 그러다 6인실로. 성민희가 정말로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도 곧 병원에서 아예 나오게 될 것이다. 아직 그 정도 병원비야 감당 못 할 수준이 아니나 성민희의 성격에 여러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는 걸 견딜 수 없을 테니.

그들이 살면서 이유온에게 가해 왔던 방식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조롱하고. 그걸 위해서는 판을 만드는 쪽도 꽤나 우스워져야 했다. 치졸한 꼴을 만들려면 치졸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으니까.

물론 윤서경은 배경을 만들어 줬을 뿐 그들이 당한 일은 그간 그들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였으나, 그마저도 꽤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태껏 그런 짓을 하고 살며 즐거워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역시나 이해하지 못하겠다.

윤서경은 태블릿 위에 떠오른 자료 화면을 보았다.

외국까지 나와 있는 사이에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해 버리고 싶었다. 성민희의 본가, 제일그룹은 항공사를 가지고 있는 꽤 큰 기업이었다. 이유온과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을 하던 당시에 그들은 집요할 정도로 윤서경의 정보를 캐내려 했다.

화명의 주력 사업은 식음료, 제일은 항공사와 동아시아, 국내를 중심으로 하는 비즈니스호텔 체인. 양쪽 다 윤서경이 맡은 호텔, F&B, 면세점 사업과 관련이 있었다.

기껏 부경이라는 기회를 잡았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정보를 빼내는 건 물론이고, 그들은 윤서경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극단적으로 가자면 윤서경의 죽음이다. 그러면 윤서경의 재산 일부가 이유온에게 상속된다. 그건 곧 그들 손에 넘어간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이유온도 시간을 두고 역시 죽기를 바랐다. 자식이 없는 이상 이유온이 윤서경으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은 부경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그 가족에게로 넘어갈 테니까.

혹은 이유온만 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내는 약물을 죄다 내버린 윤서경과 달리 이유온은 그걸 꼬박꼬박 먹었다. 그렇게 점점 쇠약해지다 죽으면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겠지. 어떤 병이냐에 따라서 낼 수 있는 목소리의 크기야 달랐겠지만, 아들을 잃은 가족이 그 배우자를 원망하는 것이야 일견 타당하지 않은가.

이유온의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와서 그들이 웃으며 했던 말을 윤서경은 잊을 수 없었다. 갖고 싶던 물건이라도 얻은 것처럼 즐거워하던 이유연의 얼굴도.

실상,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에서 형제나 자매와 재혼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유전자가 같은 만큼 페로몬이 상당히 비슷한 부분도 있기에 사별한 배우자의 빈자리를 형제나 자매가 채워 주는 것이다. 베타와 베타의 관계였다면 손가락질을 당할 일이었지만, 알파와 오메가라면 대체로 사람들은 납득했다.

그렇게 이유연이 윤서경과 결혼하면 정보를 빼내고, 자신들의 사업에 유리하게 도움을 주도록 하는 건 훨씬 쉬워지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유연은 지극히 사랑스럽고, 똑똑하고, 처세에 능하니까. 이유온이 하지 못했던 일을 이유연은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불쑥 구역질이 올라왔다.

화면 안에는 어제부터 터지기 시작한 기사 내용이 표시되어 있었다. 제일그룹, 폐기 비행기 부품 재활용 및 정비사들 상습적 단체 음주 적발.

제일의 회장은 꽤 간사한 사람이었기에 수습할 수 없는 위기라 판단한다면 딸을 모른 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민희가 어떤 말로 빌었는지 화명을 도우려 했다. 그럼 먼저 무너뜨리면 그만이었다.

이어 화명. 윤서경의 입김으로 화명이 뒤흔들리고 있다는 건 증권가를 통해서 이미 전부 퍼져 나갔다. 이제 실질적으로 그들을 무너뜨릴 차례였다. 한국 시간으로 내일 오전에 일제히 기사가 나갈 것이다. 화명이 지금까지 전국의 보육원과 취약 계층 아동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던 식재료가 전부 유통 기한을 한참 넘긴 폐기용 상품이었다고.

비용을 들여 처리해야 하는 쓰레기를 기부하는 척 내주었다는 뜻이다.

식재료 기부는 화명이 이미지 상승을 위해서 기획하고 진행하던 사업이었다. 이유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후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홍보했고, 보육원 아이들이 자필로 쓴 편지를 이유건이 공개하며 훈훈한 미담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생색을 내며 이미지를 잡았던 만큼 이번 기사는 더욱 치명적일 것이다. 그 후에는 재료 원산지 조작, 포장재 유해 물질 검출, 불량 식재료 사용. 식품 회사에 치명적인 이슈가 연달아 터질 예정이었다. 이미 물밑에선 퍼질 대로 퍼진 이야기다.

윤서경은 다시 침대 쪽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이유온은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문득 그가 결혼 생활을 할 때 매일 어떤 기분으로 잠들었을지 생각했다.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마주칠 때면 싸늘한 얼굴만 하는 남편과 살면서.

‘한 번도 나쁜 일 하고 싶었던 적 없어요.’

이젠 알았다. 이유온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를 그렇게 비참할 정도로 상처 입히지 않았을 텐데.

그가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음식, 깨진 유리 화병과 버려진 물건. 유일하게 집에 남아 있는 건 꽃이었고 이유온은 점점 다른 것들 대신 꽃만을 준비했다.

꽃은 이유온이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가족들은 그를 통해서 윤서경에게 좀처럼 수작을 부리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뜻을 거스르는 그를 가족들이 과연 가만히 두었을까. 때리고 닦달한다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겠지.

자신을 의심하고 매몰차게 대하기만 하는 사람을 위해 그 폭력을 전부 감내하고, 그런 괴로움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곁을 떠나지도 않고……. 이유온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따금 그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늦은 밤 멍하니 현관을 나서거나, 2층 발코니에 우두커니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곤 했다. 또는 무언가를 찾듯이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때론 욕실의 수건걸이나 문고리 따위를 빤히 쳐다보았다. 칼과 가위가 정리되어 있는 주방의 수납장 앞에서 생각에 잠긴 채 서 있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자신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고, 뜻 모를 불편함만 느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건 대체로 그가 가족을 만나고 돌아와 윤서경에게 짜증 어린 대우를 받았을 때였다.

지금은 그가 왜 그랬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죽고 싶어 했다. 아마 그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서 방법과 도구를 찾고 있었다. 옆에서 쳐다보거나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로 골똘하게, 눈앞에 있는 물건이나 장소가 그 자신을 어떻게 죽음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로.

지친 나머지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뭘 원해서 이러는 거냐고 소리치고 윽박지른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때 이유온이 원한 건 딱 한 가지였다. 자신을 돌아봐 줄 사람…….

스페인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화명과 관련된 연락을 받고 다시 그가 있는 침실로 돌아가며 새빨갛게 물든 창밖을 보았다. 일출이었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도 일출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새삼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괜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해가 떠오르는 순간도 이유온과 함께 볼 수 있었을 텐데.

다소 아쉬운 기분으로 침실에 들어가자, 이유온은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가 찍어 놓은 일출의 사진이 작은 화면 안에 있었다. 그 순간 어이없게도 눈이 뜨거워질 뻔했다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물한 팔찌를 소중하다는 듯이 차고 있었다. 손목이 너무 가늘어서 팔찌는 사이즈를 최대한 줄여 놓은 상태였다. 남아서 나풀거리는 가죽 끈이 그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 보여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욱신거렸다.

윤서경은 서둘러 일을 마치고 아침이 다 되어 가는 새벽 침대로 들어가 작고 체온이 조금 낮은 몸을 끌어안곤, 심장이 뛰는 소리를 확인하며 잠들었다.

스페인에서는 일주일 하고 하루를 더 보냈다. 지난번 스튜디오 촬영에서 이유온이 피곤해했던 걸 생각해서 이번엔 며칠로 나누어 진행했다.

날씨를 걱정했으나 겨울의 유럽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촬영하는 내내 날씨가 좋았고, 마지막 날 흐리다 빗방울이 날리긴 했지만 사진작가가 이건 이것대로 좋다며 회색 조도에 맞춘 연출을 했다. 결과물은 제법 괜찮았다.

출발하기 하루 전날에는 말라가까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왔다. 잠시 바쁜 것쯤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휴가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집을 옮기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여행을 와 있는 동안 새집에 짐을 정리해 두고 바로 그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인테리어 마무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이유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유온의 몸 상태를 슬쩍 확인한 윤서경은 산책을 제안했다. 마지막 날이라는 게 아쉬웠는지 그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 뒷문으로 나가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공들여 꾸며 놓은 숲은 곳곳에 걸린 등 때문에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호수에서 흘러오는 물안개로 주위가 부옇게 젖어 있어서 더욱.

깨끗하게 정돈한 길을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걸었다. 호숫가 쪽으로 가까이 가자 바람을 따라 호수의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쥐고 있는 손이 서늘했다. 윤서경은 그 손을 더 세게 잡으며 말했다.

“피아노 말인데.”

“네.”

“새집으로 옮길까요, 아니면 그대로 호텔에 둘까요.”

“…….”

입을 다문 이유온이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서경 씨가 싫지 않으면…….”

“내가요?”

“저, 전에, 도, 치우셨잖아요. 시끄러워서 그러신 줄 알고.”

“이번엔 내가 들여놓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 그땐 예전 기억이 없었으니까.”

말이 조금 더듬는 투였다. 긴장하고 만 듯했다. 윤서경은 엄지손가락으로 이유온의 손등을 가만히 쓸었다.

“집에선 거의 치지 않았잖아요.”

피아노를 들여놓고 나서 이유온이 그걸 연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친 흔적조차 거의 없었기에 피아노가 취미라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그 피아노에서 도청기가 나왔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는 눈에 띄지 않도록 물건을 숨기기에 적격이었다. 집에는 피아노 조율사도 한 번 다녀간 적이 없기에 처음 들일 때부터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유온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고 그대로 치운 뒤 폐기했다. 이유온이 사라진 피아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않았기 때문에 그가 동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겁이 나서 물어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건 모르고.

“싫은 건, 아닌데, 취미가 아니어서……. 잘 치지도 못하고,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잘 치지 못하는 건 뭡니까? 충분히 잘 치던데요.”

이유온이 눈을 둥글게 뜨다가 웃었다. 윤서경은 이제 이유온의 표정을 꽤 잘 읽게 되었다. 이건 고맙긴 하지만 조금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표정이었다. 예의상 하는 말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칭찬하는 건 아니지만 나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 준다’라고.

“정말이에요. 당신 형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이유온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

이번엔 윤서경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돌아간 시간을 포함해 25, 6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호텔에 피아노를 들여놓았을 때도 형이 자신보다 잘 친다고 하긴 했지만.

하기야……. 이유온이 말한 건 아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대학교에 가서 겨우 생긴 친구는 이유건의 수작 때문에 멀어졌다고 했다. 이유온에게 그를 편들어 주는 사람이 생기는 걸 그 가족들은 기를 쓰고 막았다.

“당신이 당신 형보다 훨씬 더 잘 칩니다. 내 말을 곧 믿게 될 거예요.”

그러나 이번에도 이유온은 어색한 얼굴을 하다가,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는 건 좋다는 쪽으로 말을 돌렸다.

“레슨도 받겠어요? 괜찮은 선생님을 구해 줄까요.”

“아, 아니에요, 그렇게까진…….”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온 앞에 멈춰 섰다. 그가 갸웃하며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뒤로 몰자 두 걸음 정도 뒷걸음질한 그가 자작나무에 등을 대며 서게 되었다.

올려다보는 얼굴에 입을 맞췄다. 이유온은 조금 놀라는 듯하다가, 곧 자작나무에 두 손을 짚은 채로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머리 바로 위에는 등불이 걸려 있었다. 높게 뻗은 자작나무 사이로 쏟아질 듯한 별이 반짝이고 물기 어린 바람이 불었다. 윤서경은 여전히 나무를 짚고 있는 차가운 두 손을 쥐었다.

맞닿은 입술과 손을 통하여 서로의 체온이 솔직한 속삭임처럼 조용히 오갔다.

* * *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잠이 모자라서 꾸벅꾸벅 졸던 이유온은 출발하자마자 침대에 파묻혀 잠들어, 창 아래로 한국이 보일 때쯤에야 깨어났다. 그에게 가벼운 식사를 먹인 뒤 윤서경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유온에게 먼저 설명을 해 두는 편이 나았다.

“유온 씨, 당신 집에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집이요……? 부모님이랑 형들이요?”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조금 문제가 생겼다는 말로는 설명이 어려웠다. 성민희와 이유연은 실종 상태, 이중권과 이유건은 구속 수사 중이었다.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식품 회사로서는 치명적인 일이라 경영자들이 조사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어머니랑 작은형은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잠시 집을 떠나 있고요. 언론에서는 실종 상태라고 할 텐데,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윤서경이 말을 하는 도중에 이유온은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렸다.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였다. 가족들이 경찰 조사를 받거나 실종 상태라는 말에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특히 이유온 같은 사람은.

이유온과 그 가족의 관계는 건강하지 못했다. 학대하고 학대를 당해 왔으나, 일방적으로 괴롭히기만 한 게 아니라 이따금 애정으로 가장한 감정을 주었다. 그게 이유온을 얽맸다.

불안한 얼굴을 하는 그의 머리를 쓸었다.

“구속 수사는 금방 끝날 겁니다. 실종도 말이 그렇지, 잠시 눈에 안 띄는 곳에 머물고 있을 뿐이고요. 위치도 내가 파악하고 있어요. 금방 끝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물론 끝나는 방향은 그들에게 좋지 못할 것이나…….

한국에 가서 다른 경로를 통해 들으면 너무 놀랄 것 같아 미리 말한 건데도 이유온은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사실 뉴스가 터질 때 윤서경은 한국에 있는 편이 나았다. 일단은 그들과 인척 관계로 묶여 있으니까, 불필요하게 자리를 비우면 여기저기에 괜한 먹잇감을 던져 줄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스페인으로 떠난 건 이유온의 귀에 괜한 소식이 들어가 그를 심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민희가 길바닥에서 쓰러졌다는 말은 뉴스를 다 막아도 어딘가에 흘러들듯 이야기가 들릴지도 몰랐다. 이유온은 당연히 그걸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를 게 분명했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뉴스를 터뜨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빨리 이유온을 스페인으로 데리고 가서 다른 소식을 들을 여지를 차단한 뒤 한 번에 터뜨리고 사태를 수습하는 게 나았다.

화명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필연적으로 그들과 이유온의 관계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이유온이 모르게 그걸 전부 덮을 생각이었다. 일주일이면 시간은 충분했다.

이유온에게 잠시만 혼자 있으라고 말한 뒤 거실로 향했다. 여행 내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동행하고 있었던 이한영이 책상 옆에 서 있었다.

“보도용 정보는 이대로 진행할까요?”

이한영의 물음에 윤서경은 서류를 확인했다. 빠르게 읽어 내려간 내용 안에서 몇 가지를 체크해 다시 이한영에게 내밀었다.

“이건 수정해. 화명이랑 이유온은 어디까지나 ‘사이가 조금 나쁜 가족’이어야 해. 약혼한 후로 그쪽이 반복해서 거액을 요구했다는 쪽에만 집중시켜.”

“알겠습니다.”

화명과 이유온의 관계가 안 좋다는 말은 이미 퍼졌다. 하지만 그 이유에 이유온이 가족들에게서 지속적인 폭력을 당했다는 말은, 절대로 어디에도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폭력을 당했는지 틀림없이 누군가는 소비하려 들 것이다. 그의 형이 알파인만큼 더욱. 흥미를 위해 사람을 물어뜯는 이빨에 이유온을 노출시킬 마음은 없었다.

연애 결혼한 아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려 한 가족으로 충분하다. 그러다 회사의 부정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이런 면에서는 그들이 이유온에게 회사 일에 조금도 관여하지 못하게 한 게 다행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행사나 파티에 잠깐씩 불려가 구석에 서 있다 오는 게 전부였기에 화명이 저지른 도덕적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곧 비행기가 착륙 태세에 들어갔다. 윤서경은 재차 공항에 내려서 새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누구에게도 이유온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 * *

그들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건 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이었다.

상세 불명의 어지럼증 따위의 병명을 억지로 붙여 VIP실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으나, 와야 할 연락이 오지 않았다. 분명 쓰러지는 장면을 녹화해 각 언론사에 보내고 인터넷에도 퍼뜨리도록 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화명이라는 회사의 안주인이 실신하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TV를 하루 종일 틀어 두었지만 어느 한 곳 그 소식이 흘러나오는 곳이 없었다.

얼굴조차 안 내미는 배은망덕한 아들을 기다리길 하루. 그렇게 하면 이유온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듯 정말 찾아온 손님이 없는지 간호사를 무섭게 닦달했으나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럴 리 없었다. 이유온은 가족들에게 약했다. 우선 모두를 무서워했고, 순종적이었고, 조금만 정을 주면 꼬리를 흔들었다. 또 가족 중 누군가가, 특히 성민희가 아프다고 하면 걱정에 어쩔 줄 모르며 약이며 먹을 것 따위를 사 들고 알짱거렸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감감무소식이라니. 이상한 일이었다.

소식이 전해지면 이유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오거나 최소한 전화를 할 터였다. 만나기만 하면, 직접 이야기할 기회만 생기면 그 아이를 붙잡아 둘 수 있는데, 만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윤서경이 아무래도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이유온에게 메시지 한 통 넣지 못해서 이런 방법까지 사용했다. 왜 그가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건 명백하게 월권이었다. 이유온은 화명의, 이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올렸다 하더라도 이유온이 이씨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성민희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간호사가 슥 얼굴을 내밀더니, VIP실에 중요한 환자가 들어올 예정이니까 병상을 비워 달라고 말했다.

곁에 있던 이유연이 곧바로 무슨 소리냐고 따졌으나 이중권도 이유건도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거부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간호사는 뒤로 쏙 물러나더니 원무과장과 험악하게 생긴 병원 시큐리티를 불렀다.

무슨, 병원에서 난동이라도 부리려는 사람 취급이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그 앞에서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라 끌려가다시피 내려가야 했다.

게다가 1인실도 2인실도 자리가 없으니 6인실로 들어가라고 하는 게 아닌가. 6인실이라니, 성민희도 이유연도 발을 들이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공간이었다. 병문안으로도 가 본 적 없는 곳에 입원이라니.

병원에 있는 것치고 많은 짐을 가지고 6인실로 들어서자 간호사는 흘끗 두 사람을 보곤 인사도 없이 다른 침상들을 한 번 돌며 불편한 건 없는지 묻고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VIP실에 있을 땐 따갑게 훈계를 해도 아무 말도 못 하던 게. 고개를 돌리자 수다를 떨고 있던 환자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혹시나 자기들 이야기가 아닌지 귀를 기울였지만 틀어놓은 TV 소리에 묻혀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TV에서는 유치한 연속극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참다못한 이유연이 가서 TV를 꺼 달라고 말하자, 다들 보고 있어서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날이 서지도 공격적이지도 않았으나, 이유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리모컨이 있었다면 그냥 꺼 버렸을 텐데 누가 가지고 있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돌아선 이유연이 성민희가 있는 침대로 돌아오자, 모여 있던 이들은 쯧쯧 혀를 차며 저들끼리 떠들었다. TV가 한순간 조용해진 틈에 젊은 사람이 참 쌀쌀맞다는 말이 들렸다. 이유연은 짜증스럽게 침대 커튼을 쳐 버렸다.

“아빠는? 계속 전화 안 받아요?”

성민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VIP실에서 내려오면서 계속 전화를 걸고 있지만 이중권도, 이유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침상 머리맡에 통화를 자제해 달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으나 둘 다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성민희는 10여만 원짜리 비타민 수액이 매달린 링거 거치대를 끌고 이유연과 함께 힘없이 산책로로 나왔다.

“엄마, 윤 대표가 왜 그러는 거야? 엄마는 짐작 가는 거 있어요?”

“글쎄다. 그런 사람 생각을 어떻게 짐작하겠니.”

모자는 윤서경이 이해할 수 없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자신들의 발밑에 있으면서 편리하게 사용할 거라 생각했던, 자신들보다 열등한, 모자란, 태생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윤서경과 이유온이 웨딩 촬영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사진을 보았을 때 이유연은 휴대폰을 부수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꼴 같지 않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어쩌다 운이 좋아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서서는, 그게 제 자리라도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이유연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자리를 빼앗은 이유온은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을 해선 안 되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윤서경이 다짜고짜 그를 데리고 간 이후로 울화는 쌓이고 쌓였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써도 그것을 해소할 길이 없어서 가족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화근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고.

“지금쯤 실컷 우리 비웃고 있겠죠? 윤 대표가 예뻐하는 것 같으니까 혼자 신나서 잘난 척하면서……, 엄마, 지금까지 안 좋은 일 있었던 것도 다 걔가 윤 대표한테 살랑거리면서 부탁한 거 아냐?”

“그래. 워낙 옛날부터 속을 모를 애였으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사고를 가졌으리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다시 그 병실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산책로를 서성거릴 수는 없었다. 한숨과 함께 돌아가려 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불렀다.

“어머니, 유연아.”

이유건이었다. 이유연이 반가운 얼굴로 얼른 뛰어갔다.

“형!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고.”

“볼일이 좀 있어서. 회사 이제 괜찮아. 투자자 찾았어. 대출도 연장될 거고. 그런데 둘 다 얼굴이 왜 그래. 어머니, 무슨 일 있었어요?”

이유연이 울상을 한 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았다. 간호사가 자신들을 질질 끌고 갔다느니, 6인실의 다른 환자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며 비웃었다느니, 지어내고 부풀린 소리였으나 이유건은 심각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병실부터 다시 옮기자. 가서 짐 챙기고 있어. 원무과 다녀올 테니까.”

“응!”

이유건은 불편한 얼굴로 원무과로 향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원무과에서 그는 더더욱 굳어져야 했다.

“정지된 카드네요.”

“……그럴 리 없는데요.”

“다른 카드 없으신가요?”

다른 카드야 여러 장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내밀어도 전부 사용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결제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해서 방금 다른 사람이 결제를 마치고 간 창구로 갔으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갑에 있던 수표로 지금까지의 병원비 840만 원을 수납했다.

“그리고 병실이 6인실로 이동이 되었던데, 착오가 있었습니까? VIP실로 다시 이동하고 싶은데요.”

“죄송하지만 빈 병상이 없어서요. 2인실은 가능할 것 같지만 나머지 병원비는 지금 선납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

얼굴이 벌게졌다. 지갑에 있던 돈은 100만 원짜리 수표 9장이 전부였다. 2인실이라도 대학병원에 2, 3주 정도 입원해 있으려면 적어도 천만 원은 필요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 저번에 한 번 그랬을 때도 금방 풀어졌는데……. 문제는 지금 당장이다.

“……일단 퇴원하죠.” 

돈이 없어서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 겪는 수모였다. 이유건은 짐짓 선택지가 있었던 척,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 * *

“이거, 선물.”

유온은 스페인에서 사 온 포트와인과 과자를 내밀었다. 정인호가 눈을 둥글게 뜨며 쇼핑백을 받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런 걸 다 사 왔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새집으로 이사한 지 닷새. 유온은 오랜만에 외출했다. 오전에는 정인호를 만나고, 그와 헤어진 후에 병원에 갈 예정이었다.

“스페인은 재미있었어?”

“응……. 예쁜 것도 많았고, 사진도 잘 찍었어.”

“나중에 보여 줘.”

유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웨딩 촬영에서 찍은 사진은 스스로 보기에 조금 괜찮았다. 적어도 남에게 보여 주는 게 못 견디게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정인호도 세비야와 톨레도에 가 본 적이 있어서 스페인 이야기를 한참 했다. 또 스페인이 마음에 들었다면 포르투갈도 좋을 거라는 말에 궁금해지기도 했다. 언젠가 윤서경이 시간이 날 때 같이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정인호가 갑자기 찾아왔던 이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데, 계속 메신저를 나누고 오늘은 공통의 화제도 있었던 덕분인지 더듬는 일도 없이 대화가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병원 예약 시간보다 서너 시간 빠르게 만났고, 그 전에 일찌감치 헤어질 줄 알았더니 이야기는 의외로 길어졌다.

“3시까지 가야 한다고 했지?”

정인호가 시계를 확인했다. 2시 30분이었다. 병원까진 여기서 10분 정도 걸리니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해야 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정인호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왜인지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유온이 고개를 갸웃하자, 정인호가 한숨을 쉬더니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말했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말해 주겠다고.”

“……응.”

유온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때 내가 어느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기로 했는데. 이거 알고 있었어?”

“아니…….”

“그래. 어쨌든 학비에 생활비까지 나오는 장학금이었어. 그때는 내가 집이 많이 어려웠거든. 근데 갑자기 장학금이 취소되었다는 거야. 여기저기 문의하고 있는데 네가 문자를 보냈더라. 너 며칠 학교 안 나오던 때였어.”

대학에 다닐 때 며칠 학교에 못 간 적은 많았다. 대부분 이유건에게 맞아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였다. 하지만, 정인호의 장학금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무슨 문자?”

“네가 학비랑 생활비 줄 테니까 장학금은 더 불쌍한 사람한테 양보하자고.”

“뭐?”

“내용은 그랬어도 네 번호로 온 문자고, 말투도 너랑 똑같았어.”

무슨……. 그런 문자는 보낸 적이 없었다. 남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정인호가 장학금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어쨌든 친구 사이에 내 형편이 어려우니까 도와주겠다는 투였는데, 솔직히 별로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어. 전화로 이야기하려고 걸어 봐도 안 받았고.”

정인호가 자신에게 싸늘한 말을 뱉고 사라진 건 갑작스러웠다. 겨우 걸어 다닐 정도로 몸이 회복되어 학교에 갔을 때, 얼굴을 보자마자 그랬기에 유온은 막연히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는데, 한동안 연락까지 안 되니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학교를 쉬는 동안 정인호에게 그런 연락을 한 기억은 당연히 없었다.

“네 얼굴 보고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하면 좋았을걸.”

“…….”

유온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물어봐 주기라도 했다면……. 하지만 대답했다고 믿어 줬을까. 자신의 번호로 문자가 갔는데, 말투까지 비슷했는데 자신이 보낸 게 아니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된 일인 건지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을 흉내 내서 보낸 거라면 목적은 그에게서 유온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오래된 진실에 유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낸 건 아니니 자신의 휴대폰을 만질 수 있는 다른 누군가가 보냈겠지.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큰형.

그때 휴대폰은 형이 가지고 있었다. 형은 항상 자신이 대학에 다니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렇다고 해서 설마 그렇게까지.

‘설마’일까?

병원에 갈 시간이 다 되어 일어나면서 정인호에게 인사할 때 뭐라 설명하긴 어려운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정인호가 사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분명 그의 행동이 고마웠으나 잔가시 같은 따끔함이 마음 어딘가를 희미하게 찌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정인호에게 강한 거절을 당한 순간의 충격이 남아 있는 건지도 몰랐다.

생각에 잠긴 채 병원으로 향했다. 이제 의사는 집으로 찾아오지 않고, 유온이 직접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다. 지난주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의사가 반가운 얼굴로 유온을 맞이했다.

“좀 어땠어요?”

“음……. 좋았어요.”

사실 의사의 어땠냐는 질문에는 이것밖에 할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문득 정인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학교에 가지 못하는 동안 유온은 대부분 창고에 있었다. 이유건은 유온이 학교에 가는 걸 싫어했고, 늘 자퇴를 종용했다. 너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목적이었다면 합격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과 함께.

유온이 공부를 하고 학교에 간 건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가족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대학 자체에 다니고 싶었다. 어째서 형이 그렇게까지 학교를 싫어했던 건지 알 수 없다.

창고에 있는 동안 당연히 휴대폰을 볼 틈 같은 건 없었다. 그동안 이유건은 유온의 휴대폰으로 정인호와 연락을 했던 듯했다. 정인호가 곧바로 정이 떨어져 떠나가 버릴 내용으로.

윤서경에게서 가족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이 지났다. 그는 형과 아버지는 구속 수사 중이고, 어머니와 작은형은 조용한 곳에 있다는 소식만 알려 준 뒤로 조용했다. 상황이 바뀌면 바로 알려 주겠다는 말을 들은 게 마지막이다.

비행기 안에서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충격을 받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윤서경의 말을 생각하며 진정했다. 별일 없을 거라고. 그날 이후 그에게서 더 들은 건 없었으나, 유온은 먼저 뉴스를 찾아보거나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묻지 못했다.

윤서경이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또는 묻기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물론 그 탓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보다…… 알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그냥 모르는 척 있고 싶었다.

거리란 신기한 것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그렇게 부모님과 형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기분을 신경 쓰고, 혼나거나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담담하기까지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건 굳이 좋은 감정일 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손발을 꽁꽁 묶고 있던 줄이 풀린 느낌이다.

그러던 중에 정인호에게서 대학 때 이야기를 듣자 한층 더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말에 의문과 함께 그때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고, 그것이 시작이 되어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잇따라 불이 피어오르듯 떠올랐다. 얻어맞고, 매몰찬 무시를 당하고, 차갑게 다루어졌던 수많은 기억들.

……왜였을까?

가족들은, 자신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했을까.

“저는…….”

안 들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작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의사는 계속 말해 보라고 하듯이 유온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친구가 말해 줬는데, 형이, 옛날에 제 휴대폰으로 친구한테, 연락을 했다는 것 같아요……. 아, 안 좋은 내용으로요. 그 친구는 그것 때문에 저한테 화가 나서, 그 후로 저를 안 봤고, 어, 얼마 전부터 다시 만나기 시작한 건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갑작스럽고 두서없는 말이었으나 의사는 이미 유온과 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다. 대강 앞뒤의 내용도 짐작했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뭔가……, 잘 모르겠어요. 형이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의사는 다시 가만히 유온을 보았다.

“제가 보기엔, 유온 씨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유온이 시선을 들었다.

“다만 그 이유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

의사의 말이 가슴을 차갑게 누르는 것 같았다.

그 이유. 지금까지 외면하던 사실. 가족들은 자신에게 차갑다. 그건 자신이 못나서였다. 늘 잘못하고, 모자라고, 가족들이 원하는 만큼 해내지 못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더 자신을 탓했고 가족들의 틈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왜일까. 왜 그렇게 해도 안 될 만큼, 그렇게까지 자신을,

싫어할까.

언제나 그건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들의 마음을 충족하지 못해서라고. 열심히 하면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줄 거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왜 가족들이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하는지, 사실은…… 믿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알고 있었다. 가족들은 자신을 싫어했다. 자신이 무엇을 해도 가족들은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을 것이다. 유온은 이미 진작 그 사실을 깨달았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이 어떤 형태인지 유온은 잘 안다. 바로 자신의 가족들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

자신은 가족의 예쁜 액자 밖에 있는 존재였다.

“유온 씨.”

생각에 잠긴 유온을 의사가 불렀다. 그는 모니터에서 아예 시선을 뗀 채 유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처럼 가족들이 유온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괴로운가요?”

“…….”

유온은 의사를 마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족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지금이나마 인정한 건, 그걸 인정하는 게 예전만큼 고통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으리라 확신한 것과 싫어한다는 걸 인정하는 일은 달랐다. 확신은 체념과 슬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인정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가족들을 이해할 수 있나요?”

이해. 유온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또한 달랐다.

“그럼 이해하지 마세요.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니까요.”

명쾌한 대답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해하지 말라니.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변하지 않고 변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자신 한 사람을 그토록 미워하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해하지 말아야 할,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그동안 자신은 얼마나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가. 그 이해가 되지 않아 지금까지 헤맸던 건지도 몰랐다. 이해란 곧 정신적인 만남이고 연결점이었다. 서로를 알아 가며 긴 길을 걷다가 마침내 마주치는 순간이다.

그러나 유온은 가족을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 길을, 사실 가족들은 이미 멀리 떨어져 유온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 번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볼까요. 새로 사람을 많이 사귀고 있다고 했죠? 그 사람들은 어때요?”

“아,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잘해 주고.”

최근 다시 만나게 된 정인호나, 이정윤과 성한영이나, 아직 좁은 인간관계였지만 그들은 모두 친절하고 다정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눠도 한 번도 유온을 부정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런 인연을 자신이 먼저 찾아내 이어진 건 아니었으나, 최소한 그들과 평범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때리지도 모욕하지도 않고 사소한 일에도 칭찬을 해 주었다. 윤서경이 아닌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배려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여전히 그들이 혹시 제 말에 심기가 상하지 않을까, 속으로 화를 참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 때문에 자신을 때리진 않을 것이다.

“오늘 친구랑 만나고 온 건 어땠어요?”

유온은 상담실에 들어올 때 자신의 표정이 분명 어두웠으리라는 걸 자각하고 손끝으로 뺨을 만지작거렸다.

“인호,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그 얘기를 듣는 바람에 조금 놀라서…….”

“그럼 다행이네요. 아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지는 건 좋은 일이에요. 사람을 만나는 이상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겠지만, 사실 그런 것도 건강한 관계의 일부니까요. 보통 사람들은 당신이 인지도 못하는 실수 하나를 했다고 해서 당신을 죽을 만큼 미워하지 않아요.”

“…….”

“그럼 다시 가족 이야기를 좀 해 볼게요. 지금 유온 씨는 가족을 어떻게 생각해요? 애써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나요?”

“이해를……, 아니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해는 고사하고 가족을 떠올리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자꾸만 생각이 나고 만다. 그렇게 가족에게서 도피하려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옳은가, 가족들이 항상 말한 것처럼 나약하고 이기적이어서 그러는 걸까, 그런 비관이 따라왔다.

“말씀드렸다시피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요. 사람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거든요. 그렇다고 가족 문제를 당장 털어 버리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잘라내듯 털 수 있다면 아무도 여기에 오지 않겠죠?”

“…….”

“천천히 생각하기로 해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더 떠오르겠지만, 너무 깊게 들어가서 파묻히지는 않도록 합시다. 생각이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정신이 분산되는 다른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세요. 알겠죠?”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흘끗 심플한 디자인의 시계를 보곤 말했다.

“시간이 거의 끝나 가네요. 대표님이 지금 바깥에 와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일찍 마칠까요?”

“아……, 네.”

대답하는 목소리에 반가움이 담겼다.

유온은 예전처럼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길 간절하게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이 세상에 가족들만이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 말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약 처방을 받은 뒤 진료실에서 나오자 윤서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짙은 회색 정장에 그보다 옅은 색의 코트 차림이었다. 유온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뛰다시피 해서 품에 안겼다. 몸을 기대자 윤서경은 곧바로 두 팔을 들어서 유온을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왜냐하면, 윤서경이 자신을 데리러 오기 때문에.

병원에 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전부 어둡고 무거운 생각이었다. 그게 윤서경의 체향을 맡자 스르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서경 씨…….”

“네.”

대답하는 목소리는 낮은데도 상냥했다. 유온은 그의 품에 안겨서 한참 체향을 맡은 후에야 움직였다. 그 사이 말없이 유온을 안고 있던 윤서경은 이한영을 먼저 보내고 직접 운전석에 앉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며 보자 창밖이 생각보다 밝았다. 아직 5시도 안 된 시간이긴 했어도, 해가 슬슬 길어지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선생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

드물게 윤서경이 의사와 한 대화 내용을 물었다. 상담이 끝날 때쯤 데리러 오는 일은 많았지만, 도중에 도착해 일찍 마치자고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상담이 어떤 내용인지 묻는 일도. 어쩌면 정인호가 그런 말을 한 걸 이미 알고 신경을 쓰는 건지도 몰랐다. 유온은 조금 더듬거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인호가 한 말부터 먼저 꺼냈다. 거기서 가족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그에 대해 의사가 뭐라고 말했는지, 천천히 말하는 동안 불안과 닮은 어두운 감정이 다시 거미줄처럼 올라와 가슴을 덮었다. 가족을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지에 대한 혼란과 죄의식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오늘은 일찍 끝났어요.”

윤서경이 오기 전 했던 이야기까지 다 한 후 말을 마무리하자, 윤서경은 룸미러를 통해서 유온을 보았다.

“다 이야기한 겁니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하고 유온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윤서경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말해 봐요.”

“…….”

“어서요.”

그는 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슨 말을 하지 못했는지 묻고, 끝내 들어준다. 유온은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서, 서경 씨, 저…….”

“네.”

“……가족들이랑 안 만나고 살고 싶어요…….”

말하고 나자 역시 죄책감이 확 올라왔다. 부모님과 형들의 얼굴이 머리를 채웠다. 지금까지 겪은 모든 모진 행동 위로 한 번 뺨을 쓰다듬어 주고, 옷매무새를 고쳐 주거나 칭찬해 주던 모습이 더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다. 항상 가족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은혜는 고사하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윤서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을 하면서 표정이 왜 그래요.”

“그야……, 이런 생각…….”

“이런 생각이라니.”

“하, 하면 안 되는 생각이잖아요. 어떻게 가족한테.”

“하면 안 되는 생각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럽니까. 당신 가족들이 다 같이 죽거나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네……?”

차선을 바꾸며 아무렇지도 말하는 목소리에 유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정말로 상상도 못 해 본 말이었다.

“생각은 죄가 아닙니다.”

“그,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대답조차 바들바들 떨려서 나왔다. 윤서경은 룸미러를 보던 시선을 다시 유온에게 돌렸다.

“가족들이 영원히 사라지길 바란다 하더라도 당신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에요.”

“아니에요, 그런 게……, 그런 게 아니라, 그, 그냥 만날 일 없이, 가족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차가 차도를 벗어나 집에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윤서경이 말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신 만날 일 없을 겁니다.”

단단한 목소리에 유온은 마음을 놓았다. 윤서경이 말하면 그게 무엇이든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그랬다. 처음 유온을 데리고 왔을 때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고, 그대로 되었다. 몇 번이고 같은 걸 물어도 그는 한결같이 대답해 준다.

부모님, 형들…….

유온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오늘은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란 오래 할수록 마음을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매몰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당장은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진 못한 새집에 돌아가, 윤서경과 끌어안고 있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 윤서경이 실제로 이유건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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