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1)화 (7/18)

2 (1)

유온은 물속에서 깨어났다. 정확히는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 순간, 귓가에 따뜻한 수면이 닿을 듯 말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머리가 곧바로 단단한 무언가에 받쳐지더니 조심스레 들렸다. 느리게 시선을 든 유온이 정면을 보았다. 한밤의 야경이 창문 가득 펼쳐져 있었다.

몸이 물에 들어와 있는 걸 감안하더라도 따뜻하고 편안했다. 머리를 갸웃한 유온은 한발 늦게 창을 통해서 자신이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윤서경이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깼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무겁게 몸을 감싸고 있던 졸음이 물에 녹는 것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유온은 자신을 꽉 틀어 안은 윤서경의 팔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작게 꾸물거렸다. 유온의 움직임에 커다란 욕조 위를 떠다니던 모슬린 티백 두 개가 둥실둥실 움직였다. 욕조를 채운 물의 향기와 윤서경의 체향이 부드럽게 섞여 욕실에 가득했다.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을 겁니다.”

윤서경이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뺨을 맞댔다. 그의 말대로, 아까 발작처럼 성욕이 덮쳐들었을 때의 격렬한 갈증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몸속이 간질거렸다. 히트 사이클이라면 얼마나 가는 걸까, 특히 자신처럼 몸이 정상이 아닌 상태라면. 급하게 삼킨 약 두 알보다 윤서경이 쏟아 준 체향과 체액이 급한 불을 가라앉혔다.

예전에 드물게 히트가 왔을 때는 짧으면 하루에도 끝났다. 길어야 이틀, 사흘. 약을 잔뜩 먹고 열에 시달리며, 무심코 쏟아 낸 향이 자신의 방문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를 기도하며 조마조마하게 보낸 히트는 이번과 너무 달랐다.

“저, 어, 얼마나 있어야 끝날까요……?”

“글쎄요……. 짧으면 사흘, 길면 일주일까지.”

윤서경이 유온의 몸을 물에 어깨까지 담기도록 끌어내렸다. 따뜻하고 향긋한 물이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 일주일. 그 내내 윤서경이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출장으로 포항까지 간다고 했고……. 까지 생각한 뒤 유온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서경 씨, 출장은요?”

“가던 길에 돌아왔습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오길 잘했죠.”

“그, 그럼 일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유온 씨 히트가 끝날 때까진 옆에 있을 겁니다.”

“…….”

또다시 ‘그럼 일은…….’이라는 말이 흘러나오려 했지만 유온은 입술만 우물거리고 말았다. 평소라면 자신 때문에 굳이 옆에 있어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 지금은 그보다 기쁜 마음이 앞섰다. 혹시나 사양하는 말을 하면 윤서경이 한 번에 받아들이고 일을 하러 갈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비교적 당신도 나도 제정신이라서 묻는 건데, 유온 씨. 아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유온은 조금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아이라니, 아이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윤서경과 살면서 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으나 그 또한 막연하게 그려 본 게 전부였다.

오히려 아이는……, 주치의가 처음 피임약을 줄 때 몇 번이나 강조했다. 혹시 모를 경우를 위해 가지고 있으라고. 이 혹시 모를 경우 또한 깊게 생각한 적이 없으나 약을 받은 그때부터 유온에게 아이란 생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 윤서경이 원할지 어떻지 알 수 없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면 어린애를 제대로 돌봐 줄 자신이 없었다. 작고 연약한 아기를 자신이 과연 키울 수 있을지, 밥을 먹이고 재우고 안아 주는 기본적인 일조차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이전에 키우던 고양이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괴롭게만 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동물을 데리고 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생각 끝에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래요. 우선 테스트기를 가지고 왔으니 확인하죠.”

“아, 테, 테스트요…….”

오메가용 임신 테스트기는 두 종류가 있었고 그중 하나는 몇 시간 만에 결과가 나왔다. 써 본 적은 없지만 방법은 알고 있었다. 안쪽의 체액으로……. 유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만.”

윤서경이 욕조 사이드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었다. 작은 사각형의 임신 테스트기였다. 포장은 이미 뜯어져 있었다.

혼자 가서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윤서경은 유온을 돌려 앉혔다. 그대로 가볍게 일으켜 허벅지 위쪽까지 물 밖으로 나오게 하곤, 눈앞에 보이는 아랫배에 입을 맞추며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아…….”

아직도 부어 있는 게 분명한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오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윤서경은 달래듯 유온의 배에 몇 번 더 키스하곤 안에 고여 있던 체액을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양이 많지 않은 걸 보면 전부 안으로 스며들었거나,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윤서경이 빼낸 듯했다. 윤서경의 손바닥 위로 흐른 건 몇 방울 정도였다. 그래도 테스트에 쓰기엔 충분했다. 윤서경이 테스트기로 시선을 돌린 사이, 유온은 슬그머니 다시 앉았다. 그 앞에서 테스트기에 체액을 묻히고 가만히 살폈다. 테스트 결과가 뜨는 칸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게 보였으나, 임신이면 바뀌어야 할 종이의 색이 바뀌지 않았다.

안도와 비슷한 감정으로 유온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길면 일주일을 간다고 했는데, 노팅을 몇 번이나 할 텐데, 아무리 임신이 잘 안 될 거라고 하지만 괜찮을까. 그러나 호르몬 조절제와 달리 피임약은 지금 몸 상태에 치명적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혼란스럽게 굴러가는 유온의 눈을 본 윤서경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조금 전에 먹었으니까.”

“네? 뭐, 뭘요?”

“피임약이요.”

“왜…….”

“내가 먹으면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하, 하지만 몸에 안 좋다고 하잖아요.”

“마찬가지죠. 그리고 당신이 지금 남의 몸을 걱정할 땝니까.”

윤서경이 눈매를 좁혔다. 그야 윤서경의 몸과 자신의 몸을 비교한다면 자신은 거의 시들시들한 지푸라기에 가깝긴 했다……. 하지만 유온은 무언가 해가 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자신이 맡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 죄라도 지은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며 윤서경을 보았지만, 그는 뭐라 대답하는 대신 테스트기를 물기가 닿지 않을 곳에 내려놓고 유온을 끌어안았다. 배스 티 티백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금빛 물이 찰랑거렸다. 윤서경은 흘끗 고개를 드나 싶더니, 유온을 안은 채 물속에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앉은 방향이 바뀌면서 유온의 눈에 다시 반짝이는 야경이 보였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 저 멀리 지상에 있어 닿지 않음에도 들리는 듯한 차량의 통행과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시계의 초침처럼 일정하고 낮은 심장 소리. 그런 상태로 윤서경의 품에 안겨 있자 방금 눈을 뜬 것임에도 점점 나른해졌다. 유온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젖은 어깨에 뺨을 얹은 채로 유온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웨딩 촬영을 하는 날은 놀라울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예보도 없던 비가 내리더니, 새벽이 되면서 차츰 구름이 걷히고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비가 쏟아진 다음 날 특유의 청명함과 예년에 비하여 훨씬 따뜻한 기온으로 정원에서 사진을 찍기에도 완벽했다. 사진작가가 이렇게 좋은 날은 오랜만이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촬영을 앞두고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갈아입은 유온은 아직 준비 중인 윤서경을 기다리며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은 촬영 직전에 한 번 더 정리를 했는지 빗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깨끗했다. 맑은 햇살에 성당의 우아하게 세월을 머금은 벽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였다.

춥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이렇게 봄날처럼 따뜻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금색 테를 두른 것처럼 환한 날이 될 줄은 몰랐다. 유온은 구름의 모양이 예쁜 하늘을 보다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촬영에 쓸 커다란 꽃 장식이 정원 곳곳에 놓여 있었다.

유온은 바닥으로 흘러넘치는 모양의 장미 화환으로 다가갔다. 줄기의 길이를 다르게 하여 구름처럼 풍성하게 모양을 잡은 색색의 장미였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꽃잎을 만져 보았다. 작게 시든 곳 하나 없는 꽃잎이 벨벳 같았다.

그중에 덜 꽂은 건지, 일부러 모양을 낸 건지 혼자서 불쑥 삐져나온 꽃이 한 송이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가시가 깨끗하게 제거된 줄기를 살짝 만지는데 꽃이 뚝 떨어졌다. 당황한 유온은 얼른 몸을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제자리에 다시 꽂으려 했는데 다른 꽃들의 모양이 완벽하게 잡혀 있어서 원래 어디서 떨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꽃을 든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마침 플로리스트가 다가왔다. 유온은 더더욱 당황하여 그녀를 보았다.

“아, 안 그래도 덜 꽂힌 것 같아서 보러 왔는데 떨어졌네요. 혹시 가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다 제거를 하긴 했는데, 수작업이다 보니 한두 개쯤 남아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이, 이거 제가 떨어뜨려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음, 화환에는 다시 꽂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들고 찍으셔도 예쁘지 않을까요?”

“네…….”

플로리스트는 아직 바쁜지 유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남겨진 유온은 바쁘게 움직이는 주위 사람들을 흘끔거리다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꽃의 향기를 맡았다. 요즘 나오는 장미는 향이 약한 게 많은데, 이건 얼굴 가까이 가져가기도 전부터 느껴질 정도로 선명했다. 복숭아와 닮은 신선한 향이었다.

장미향을 조용히 맡고 있는데 성당 쪽에서 준비를 마친 윤서경이 나왔다. 유온은 꽃을 두 손으로 쥐며 윤서경을 보았다. 밝은 남청색 예복을 입은 그는 햇살 속에서 더욱 근사하게 보였다. 곧은 등과 쭉 뻗은 어깨, 선이 단단한 조각 같은 얼굴까지,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유온을 보고는 곧바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유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막 나왔어요.”

“그 꽃은…… 누가 주고 갔어요?”

“아니요, 제, 제가 실수로 여기서…….”

유온이 손가락으로 장미 화환을 가리키자 윤서경은 그것을 슥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랐던 재주가 있네요.”

꽃을 몰래 빼내는 재주……? 왠지 열없는 기분으로 꽃줄기를 만지작거리는데, 윤서경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따가울 정도로 강한 시선이었다. 유온이 고개를 들자, 그는 만개해 흘러넘친 장미를 등지고 선 채 미소를 지었다. 정오의 햇살이 흘렀다.

“안에서 주려 했는데, 여기가 더 기억에 남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새하얀 우단을 씌운, 윤서경의 손 안에선 꽤나 작게 보이는 상자였다. 유온의 시선이 곧바로 그리로 쏠렸다.

윤서경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세팅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마음에 들면 좋겠습니다.”

“…….”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할 때 겁이 나거나 긴장했던 적이 없는데……. 지금은 목소리가 떨리진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다만, 올려다본 눈가는 조금 굳어졌고 둘레가 붉었다. 뺨도 한순간 희미하게 움찔댄 것 같았다. 그런 윤서경이 정원의 햇살과 색채 속에서 말했다.

“결혼해 주겠습니까?”

한순간, 세상의 소리가 다 사라진 듯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돌아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새하얀 꽃잎이 일제히 날리듯이.

결혼……. 눈앞에 있는 보석의 빛과 꽃의 향기가 모두 그 말 안에 있었다. 유온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색채 속에서 해야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실감이 안 나거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입이 굳어 나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냥 순수하게 눈이 부실 뿐이었다.

“무릎을 꿇을 걸 그랬나요.”

윤서경은 조금 어색하다는 듯이 말했다. 반지 상자를 연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평소와 달랐다. 그를 수식할 거라 생각한 적 없던, 긴장했다거나, 멋쩍다거나……, 쑥스럽다거나,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유온의 시선이 반지를 향해 내려갔다. 지난번에 호텔에서 함께 보고, 윤서경이 다이아를 더해 다시 세팅하자고 말했던 그 반지가 가만히 들어 있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딱 맞을 반지는 꿈속의 물건 같았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자신과 윤서경이 함께 고른 반지였다.

한참 그 반짝이는 물건을 바라보던 유온은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꿈이나 환상 속이 아니라 현실의 물건이었다. 윤서경이 손을 뻗어 유온을 데리고 나온 이 현실에서 반지는 맑은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어떻게 입을 열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윤서경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집안을 통해 들어왔던 그의 청혼만으로 충분히 기뻤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해 주었다. 손에는 반지 상자를 들었고 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은 그답지 않게 긴장해 조금 굳었다.

유온은 간신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이전의 3년 동안 언제나 하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청혼을 수락하자, 윤서경은 고개를 기울여 유온에게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었으나 유온에게는 충분했다. 눈가가 순식간이 붉게 물들었다.

“울지 말아요.”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눈가에도 입술이 닿았다. 속눈썹이 윤서경의 입술을 스쳤다. 울지 말라고 하면 울컥 더 눈물이 쏟아질 때가 있는데, 윤서경이 눈물을 가지고 가기라도 한 듯 거짓말처럼 울음이 그쳤다.

“두 분, 준비되셨으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촬영 보조가 다가와서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윤서경이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유온의 손을 잡았다. 반지가 왼손 약지 끝에 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감싸며 끼워졌다. 유온은 무심코 왼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반지는 생각만큼 손 위에서 붕 떠올라 있지 않았다.

윤서경이 반지 하나를 더 꺼냈다. 유온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좀 더 굵은, 그의 반지였다. 윤서경은 상자를 오른손에 쥐고 손을 내밀었다. 유온의 손끝이 반지를 향해 가면서 조금씩 멈칫거렸지만, 그래도 잘 잡아 윤서경의 손에 끼웠다.

“결혼식에서 다시 할 거지만,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요.”

“네…….”

반지가 윤서경의 손가락에 꼭 맞게 들어갔다. 유온은 제 손을 한 번, 윤서경의 손을 한 번, 오래도록 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반지를 평소라면 다른 손으로 가렸을 텐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윤서경이 고개를 조금 돌리더니 손짓했다. 다른 촬영 보조가 와서 반지 상자를 받고, 대신 좀 더 큰 상자를 내밀었다. 뚜껑이 열린 채인 상자 안에 레이스 리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실크, 벨벳, 시폰, 레이스로만 된 것, 천의 종류도 색깔도 가지가지였다. 윤서경은 그 안에서 유온의 흐리게 하늘색이 도는 예복과 어울릴 청록색 리본을 골랐다.

유온은 그보다 좀 더 오래 고민하다가 같은 재질의 청회색 리본을 집어 들었다. 둘 다 오늘의 하늘과 어울리는 색이었다.

윤서경이 먼저 손목을 내밀었다. 유온은 예복과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손목에 리본을 감았다. 손목이 너무 조여지지 않도록 한 번 묶고, 신중하게 나비 모양 매듭을 만들었다. 사실 웨딩 촬영 전부터 게임도 다른 취미 생활도 줄이고 열심히 연습했다. 성과가 있어서, 윤서경의 손등 아래쪽에 그럴듯한 모양의 리본이 생겼다.

윤서경의 차례였다. 그도 잘 못 묶는다고 말했으면서 결과물은 훌륭했다. 유온의 손을 만지며 이리저리 둘러본 그가 큰 비밀을 말하듯 귀에 속삭였다.

“연습한 보람이 있네요.”

“여, 연습하셨어요?”

“네.”

“저도요…….”

그러자 윤서경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누구랑 연습했습니까?”

“네? 혼자……, 꽃병에다 했어요.”

“아.”

마치 안심했다는 듯, 치켜 올라갔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 모습에 유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누구랑 했는지 묻는다는 건, 그건, 그러니까, 윤서경은 다른 누군가에게…….

“서, 서경 씨는요? 누구랑 연습하셨어요……?”

“혼자 했죠. 내 직원들은 내가 그런 짓을 하면 현실을 못 받아들이고 기절할 겁니다.”

“아…….”

시원한 해명이었다. 유온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윤서경이 다른 누군가의 손목에 리본을 매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다가, 이내 그게 윤서경의 농담이었다는 걸 깨닫고 한 발 늦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멈칫하고 입을 손으로 가렸을 때, 윤서경이 그 손을 치우곤 입술에 키스했다.

“이만 시작해야겠어요.”

유온은 일순 멍하니 윤서경을 보았다. 거기서부터 촬영을 마칠 때까지는 정말로 반짝이는 시간이었다.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고 그중 한 번은 바닥까지 길게 끌리는 베일을 썼다. 반투명한 베일과 레이스를 통해 보이는 윤서경은 더욱 찬란했다.

어쩌면 이 베일 덕분에 윤서경에게도 자신이 조금은 좋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윤서경이 손을 뻗어 베일을 걷고 안으로 들어와 그 안에서 단둘이 되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새하얗고 얇은 베일의 감촉을 뺨으로 느끼며 손을 잡은 채 경건하고 긴 입맞춤을 나눴다. 성당에서 하는 촬영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오를 때까지 유온은 몽롱한 기분이었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차가 출발하고 윤서경이 물었다. 정오 무렵 시작한 촬영은 중간에 쉬긴 했지만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유온의 체력으로는 다소 무리였다. 피로로 손끝이 조금씩 떨릴 정도였지만 유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워요.”

“괜찮아요.”

유온은 늘 그렇듯 사양했고, 윤서경은 사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압적이지도 않은 손길이 유온을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에 눕혔다. 앞좌석에서 이한영이 운전을 하는 중이었기에 그쪽이 신경 쓰여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윤서경은 유온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머리카락에 손을 올렸다.

오늘 사진을 찍으며 이리저리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이 윤서경의 손에 자연스럽게 흐트러졌다.

남의 무릎을 베고 눕는 건 익숙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윤서경이 처음이었다. 어릴 땐 작은형이 어머니의 무릎에 눕는 게 부러웠었는데, 그 후론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윤서경과 같이 있게 되면서 평생 못 해 본 수많은 처음을 다 겪어 보는 것 같다.

“해외 촬영은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야겠군요.”

“해외……, 그런데, 괜찮으세요? 바쁘신데…….”

웨딩 사진은 국내 스튜디오에서 한 번, 해외에 나가서 또 한 번 찍기로 했다. 신혼여행지에서 스냅을 찍는 건 들어보았어도 일부러 해외까지 가서 찍는 건 처음 들었지만, 윤서경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기에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다. 나중에 이정윤이 놀라는 걸 보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야 물론 속으로 기뻤으나 윤서경이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그는 바쁜데 외국에 나가는 일정을 추가해도 괜찮을지. 자신 때문에 안 그래도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지 않은가.

“이 정도 시간은 쓸 수 있습니다. 결혼 준비인데요.”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도 모르게 룸미러를 보았다. 비서인 이한영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곧바로 시선을 알아챈 이한영이 룸미러를 통해 유온과 눈을 마주치더니 빙긋 웃었다. 미리 그와는 이야기를 다 마쳤는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유온 씨.”

“네?”

윤서경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고성(古城) 좋아합니까?”

이번엔 눈을 깜빡여야 했다.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전에 만들었잖아요.”

첨탑이 부서진 그 모형 성을 말하는 듯했다. 그건 아직도 아크릴 상자에 어색하게 담긴 채 호텔의 장식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직원들이 올라와서 빈틈없이 놓인 다른 장식품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기까지 했다.

“아, 그건 그냥 눈에 보여서……. 하지만 좋아해요.”

싫은지, 좋은지를 따지면 좋아했다.

웨딩 촬영을 어디에서 할지에 대해 윤서경은 이렇게 가끔 유온에게 의견을 묻곤 했다. 바다가 좋은지, 얕고 따뜻한 해변과 바위벽이 뻗은 검푸른 바다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아니면 산이나 초원이 좋은지, 이것저것 물었으나 유온은 그때마다 대답을 우물거렸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느 한쪽을 바로 고를 수가 없었다. 직접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너무 어려웠다. 특히 그게 식당 메뉴나 여행지처럼 명확하게 결과가 나오는 일일 경우에는 더더욱. 가족 여행을 가서 자신 때문에 여행을 망친 일이 몇 번이나 되기에 되도록 윤서경이 정해 주었으면 했다. 자신은 윤서경이 정한 일이라면 설령 몇 시간 동안 산을 올라가야 한다고 해도 괜찮았으니까.

“스페인에 괜찮은 고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호숫가에 있고, 뒤쪽은 자작나무 숲이라고 합니다. 시가지에서 아주 먼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은 사진을 몇 장 보여 주었다. 고성이라고 해도 아담한 저택 정도 규모인 곳도 많은데, 이곳은 정말 본격적인 성이었다. 호수와 면하여 세워진 모양이 무척 위엄 있다. 자작나무 숲도 아름다웠다.

“와……. 좋아요. 예뻐요.”

유온은 뭐든 괜찮다고 말하는 게 습관이었지만 사람이니만큼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는 드러났다. 노곤한 기색이 돌던 눈동자가 사진을 본 순간 반짝거렸다.

“일부는 호텔로 개축해 둬서 며칠 머물 수도 있고요.”

“여기서 자요……?”

“당신이 불편하지 않다면요. 객실은 하나뿐이고, 성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을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

그 하나뿐인 객실 사진도 이어졌다. 객실은 사진으로 보기에도 넓었고, 벽지부터 샹들리에까지 정말로 옛 성을 옮겨와서 깨끗하게 다시 채색해 놓은 것 같았다.

“가 보고 싶어요.”

사실 내일이라도 가능하다면 가고 싶었다. 사진 속 고성은 순식간에 유온의 마음을 빼앗았다. 윤서경은 그런 모습에 만족한 듯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끝으로 유온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 찍은 사진 말인데, 몇 장은 홍보팀을 통해서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진을요?”

“네. 많이 불편합니까?”

전에 스튜디오를 보고 나갈 때 찍힌 사진에 유온이 반응한 걸 신경 쓰는 듯했다. 유온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단지 , 오늘은 화장도 하고 좋은 옷도 입었고, 예쁜 곳에서 전문가가 찍은 사진이니 그래도 덜…… 우습게 보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괜찮아요, 하고 작은 소리로 대답하자 윤서경은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듯이 유온의 턱을 살짝 들어 입 맞췄다. 이한영을 신경 쓰며 또 꿈틀거리자 금방 떨어졌지만.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좀 자요.”

막 정체가 시작되려는 시간이었다. 윤서경이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한층 어두워진 시야에 손을 치우려 두 손으로 잡아 보았지만, 그 위에 입술이 내려오는 바람에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잠들지는 말자고 눈을 부릅뜨며 버텨 보았다.

그러나 윤서경의 곁에 있을 때 언제나 그렇듯, 그 결심은 쉽게 부서졌다. 유온은 목동 옆의 새끼 양처럼 무력하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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