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6/18)

3

유온은 눈을 깜빡였다. 윤서경의 말을 소화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 나를?

왜?

의아하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자, 윤서경이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유온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자 예민해진 다른 감각을 통하여 윤서경이 느껴졌다. 입술에는 입술의 감촉이, 코끝엔 그의 체향이, 귓가에는 느리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온몸이 윤서경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갑자기 자신이 안락한 성 안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는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한참 동안 입을 맞춘 끝에 윤서경이 유온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며 떨어졌다.

“궁금한 건 없습니까?”

“아…….”

윤서경의 말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궁금한 것이야 수도 없이 많았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추문을, 제 가족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를. 이런저런 의문이 떠오르다가 문득 윤서경이 했던 말에서 걸리는 부분을 찾아냈다.

‘당신이 기억하는 것과 달리.’

무슨 뜻일까. 처음 진수식에서 마주쳤을 때 이후 지금까지? 그렇다고 하기엔 의미가 더 깊게 느껴졌다. 유온이 흔들리는 눈으로 윤서경을 보자 그가 말했다.

“전에 내가 방에 들어올 때 당신이 연주하던 곡, 기억납니까?”

“그건……, 네, 기억나요.”

“무슨 곡이었죠?”

“저도, 제목은 잘……, 하지만 가요였던 것 같아요.”

제목도 어디서 들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그랬다. 윤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요는 맞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2년 후에야 나올 노래죠.”

“…….”

그럼, 그걸……, 윤서경은 왜 알고 있지? 유온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저도 모르게 잘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데도 유온은 이 현상을 아직 어느 정도는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윤서경이 하는 말은 꼭…….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기억하는 것과 다를 거라고.”

꼭 유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아니.

“우린 한 번 결혼했었고, 3년 동안 같이 살았죠.”

마치 그도 같은 일을 겪은 듯한.

“결혼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온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설마 하던 생각에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처음 큰형에게 뺨을 맞으며 깨어났을 때 이상의 혼란이 순간 유온을 흔들었다.

“서, 서경 씨, 무슨 말인지, 잘…….”

더듬더듬 부정을 하려 했다. 뭘, 왜 부정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 자신이 한 번 죽었었다는 것? 아니면, 윤서경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아니, 윤서경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것? 두 손이 갈 곳을 잃은 채 무릎이며 허벅지 위, 소파를 불안하게 오가며 몇 번이나 쥐었다 펴졌다. 시선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딸과 함께 부른 다음 곡이 더 큰 인기를 끌었죠. 그 해에 다음 올림픽 개최지가 모스크바로 결정되었고요.”

“…….”

두 가지 다 맞았다. 유온도 지금 이렇게 듣기 전까진 잊고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어때요. 조금은 믿을 마음이 듭니까?”

“……서, 서경 씨를 못 믿는 게 아니에요…….”

믿지 못하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아직도 얼떨떨한 게 잠이 덜 깬 듯한 기분이었다. 유온의 시선이 흔들리자, 윤서경은 그런 유온을 달래듯 두 손을 다시 꼭 쥐고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유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확신으로 가득 찬 담대한 얼굴이 있었다. 선명한 얼굴의 윤곽과 짙은 눈썹, 그 아래 곧게 뻗은 두 눈과 입매. 신화 속에서 인간을 이끌던 강건한 신 같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오늘을 두 번째로 맞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맞는, 오늘…….

유온은 이제야 반복된, 되돌아온 시간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꿈, 환상, 기억, 미래, 그 무엇으로도 다 설명하기 어렵던 상황을 윤서경이 그 한 마디로 깨끗하게 정리했다. 아직도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허덕이는 유온과 달리 완벽한 해석까지 해놓은 것이다.

두 번째 오늘은 첫 번째와 많이 달랐다. 과거, 혹은 미래의 오늘에 자신은 뭘 하고 있었더라. 명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같은 상황이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어쩌면 그때 이 시간에는 창고에서 형에게 맞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유온이 오늘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자신에게 너무나 좋은 방향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깨어나 처음 윤서경을 만났을 때, 이 상황이 유온이 겪지 못한 좋은 일을 겪게 해 주기 위한 마지막 꿈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시간을 돌아와 다시 윤서경과 함께한다. 그것도 좋은 관계로?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기엔 너무 행복하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일은 좋은가 싶으면 금세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윤서경의 청혼을 받았을 때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불행한 일을 겪고 과거로 돌아왔고, 과거를 알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다정한 윤서경과 함께 같은 시간을 한 번 더 살게 된다니. 이건 굳이 부정적인 성격의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닌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그런 유온을 앞에 둔 채 윤서경은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알게 되었으니 당신도 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쉽게 물을 수는 없더군요. 혹시 아니라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요.”

“…….”

“그러다 당신이 친 곡을 듣고 확신한 겁니다.”

그 곡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마지막 구절까지 아는 곡이어서 연주했을 뿐이다.

“그게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확신을 얻었겠죠.”

윤서경의 말에 유온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정말 어떻게든 알았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걸 감수하고 직접 물었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물어볼까, 하는 마음조차 먹은 적이 없다.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무서웠으니까. 게다가 스스로도 한때나마 현실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을 뿐 온전히 확신하진 못한 상태가 아닌가.

유온은 물끄러미 윤서경을 보았다. 단단하고, 남의 시선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그 얼굴에 선명했다. 유온에게 그런 강인함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그런 굳은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윤서경은…… 역시 자신을 답답한 바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아직 그 말의 여운이 고여 잔향을 퍼뜨리고 있었다. 귀에 담고 마음에 담으면서도 유온은 그 말을 온전히 삼키지 못했다. 이것이 이유온의 진짜 가난이고 결핍이었다. 달콤한 말을 온전하게 품지 못하는 것.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 물에 젖은 화로는 불씨를 꺼뜨리기만 한다. 분명 나중에 곱씹고 곱씹으며 들은 그 순간 충분히 기뻐하지 못한 걸 아깝게 여기겠지. 제 무릎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던 유온은 이어진 윤서경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유온 씨.”

“……네…….”

작은 소리로 대답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유온의 눈에 옅은 빛이 깜빡이듯 지나갔다. 겁먹은 듯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마음은 달랐다. 사랑한다는 말에 이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윤서경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해서였다.

“뉴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봐요.”

그가 휴대폰을 들어 조금 전 유온이 보았던 포털 사이트를 보여 주었다. 실시간 검색어에는 윤서경이나 부경, 유온의 이름 같은 건 한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어 윤서경이 유온의 무릎을 꼭 쥐었다가 일어나서 소파 맞은편 벽 쪽으로 다가갔다.

벽장이나 장식장처럼 생긴 틀을 당겨 열자 안에서 TV가 나왔다. 소파로 돌아온 윤서경이 TV를 틀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며 뉴스, 연예 프로그램, 저속한 케이블 방송까지 둘러보았지만 유온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증거도 없는 루머 수준이었고 이미 다 해결했습니다. 나갔던 건 다른 일 때문이었어요. 검색어 건은 굳이 내가 가야 할 정도로 대단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윤서경은 유온에게 바짝 붙어 앉아 유온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몸이 키스할 때처럼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우리는 해야 할 말도, 들어야 할 설명도 많습니다. 3년 동안 우리 둘 다 혼자 있었어요. 그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유온의 머리를 쓰다듬은 윤서경이 몸을 조금 뗐다. 시선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다. 깊은 두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3년, 두 사람이 한집에서 살았던 기간이었다. 그 3년을 윤서경이 말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하나하나 천천히, 이야기해요. 시간은 많습니다.”

마치 잘 짜인 리얼리티 쇼의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저 얼떨떨하다. 현실감이 너무 멀어서 오히려 차분하게 있을 수 있었다. 윤서경이 유온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몸을 당겨 뺨에 입 맞추고, 다시 유온을 보았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은 나도, 당신도 기억합니다.”

“그…….”

그런 일은 없었다, 당신은 나한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려던 유온의 입을 막기라도 하듯이 윤서경이 입술에 입을 맞췄다가 떼었다.

“그런데 내가 잘했던 일은 기억이 안 납니다. 당신도 기억에 없을 겁니다.”

이 말에 유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서경 씨는 저랑, 밥도 같이 먹어 줬고, 음, 부부 동반 모임에 데리고 가 주기도 했고, 또……, 그리고…….”

“……내가 정말 많이 잘못했군요.”

왜인지 윤서경은 심란한 얼굴을 했다. 분명 그가 잘해 준 일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결혼 생활 중에도 몇 번씩이나 그는 유온에게 친절하게 대해 줬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살면서 겪은 그 어떤 일보다 기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저한테 청혼해 주셨잖아요…….”

“…….”

한참 말이 없던 윤서경이 유온의 몸을 아예 끌어당겨 제 위에 앉히고 끌어안았다. 그대로 오래도록 안고 있으면서 머리카락과 뺨, 귀, 입술이 가는 곳 어디에든 입을 맞췄다. 유온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이대로 심장이 멈추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유온의 목덜미며 등, 튀어나온 견갑골을 한참 어루만지던 윤서경이 불쑥 말했다.

“몸이 왜 이렇게 딱딱합니까?”

“네? 아……, 원래 조금…….”

원래 어깨나 등 같은 곳이 잘 뭉쳤다. 팔다리가 뻐근하게 아플 때도 있었다. 몸 어딘가가 항상 긴장한 상태로 있어서 연결된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딱딱하다는 말을 듣자 공연히 더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몇 번 더 유온의 등을 만지던 윤서경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유온을 품에 안은 채였다. 그대로 거실 전화기로 다가간 그가 수화기를 들고 숫자 하나를 누르더니, 통화도 하지 않은 채 끊었다.

어린애처럼 달랑 안겨 의아해하는 사이 윤서경은 침실로, 침실에서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욕실과 마사지 룸이 있는 쪽이었다.

침실 욕실은 둥근 형태의 전면 유리창으로 바깥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당연히 바깥 어디에서도 욕실 안쪽이 보이진 않았다. 윤서경은 사람이 두셋은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욕조 옆쪽 공간에 앉아 벽의 버튼을 조작했다. 넓은 욕조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윤서경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전에 청소 직원 부탁으로 당신이 여기 침실에 물건을 가지러 들어온 적이 있었죠.”

유온이 퍼뜩 굳었다.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뻣뻣해진 몸을 윤서경은 달래듯 다시 손으로 쓸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당신한테 화를 낸 게 아닙니다. 그 직원 때문에 어이가 없었던 거죠. 감히 누가 여기서 내 약혼자에게 잔심부름을 시킵니까.”

“아, 아니에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요.”

“뭐든. 같이 왔던 지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윤서경은 도톰하게 깔린 수건에 유온을 앉히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을 때 그는 웃옷을 벗어 셔츠에 바지만 입은 차림으로 작은 나무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욕조의 물은 거의 채워졌다. 다시 다가온 윤서경이 유온의 옷을 쉽게 벗겼다. 그리고 욕조 테두리를 톡톡 만지는 손끝에 유온은 슬금슬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물이 몸을 적셨다.

힐끗 본 트레이 위에는 이국적인 모양의 유리병 두 개와 스팀 타월, 장식으로 보이는 플루메리아 세 송이가 있었다.

유온을 욕조에 넣어둔 채 자신도 씻고 온 윤서경이 욕조 가까이로 몸을 붙여 앉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더 가까이 와서 돌아앉아요.”

유온은 그의 말에 따랐다. 윤서경이 팔을 멀리 뻗지 않아도 손이 닿을 거리까지 가자, 갑자기 강한 향이 훅 퍼지더니 어깨에 미끄러운 감촉이 닿았다.

“저기, 서경 씨.”

“네.”

“이게 뭐…….”

“물에 풀어서 쓰기도 하는 오일이니 몸이 젖어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빼듯 웅크렸다. 그러자 어깨에 이어 드러난 등 아래쪽까지 윤서경의 손이 길게 피부를 쓸며 내려갔다.

“아니, 제, 제가 할게요.”

“어떻게? 생각보다 유연한가 보군요.”

윤서경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긴장해 있는 사이 커다란 손은 부드럽게 유온의 등과 어깨, 목을 어루만졌다. 뭉친 근육을 누르는 엄지손가락의 마디가 단단했다. 몸이 자연스럽게 점점 풀어졌다. 그러다 손끝이 귓불을 살짝 건드렸다. 유온이 움찔하자, 윤서경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극진히 대하는 일에 익숙해져요. 앞으론 그게 당연해질 테니까.”

“…….”

“그날 방에 들어왔던 두 사람은 해고했습니다.”

“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러나 윤서경은 당연한 일이라고만 반복한 뒤 계속 유온의 등과 어깨를 마사지할 뿐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에 이리저리 몸을 뒤틀던 유온이었으나 온몸을 감싸는 페로몬과 욕조의 따뜻한 물, 오일에서 나는 달콤한 아몬드 향은 차츰 그를 녹였다. 윤서경이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 줄 때쯤 유온은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있었다.

커다란 수건으로 유온을 감싼 윤서경은 새 옷을 꺼내 와 입혔다. 유온의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잠이 올 때처럼 나른했다. 온몸이 따끈하고 노곤해진 유온을 욕실에서 안고 나온 그가 침실과 창가 사이에 선 채 물었다.

“잠깐 쉴까요. 어느 쪽이 더 좋습니까?”

창가와 침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유온은 흘끗 창가를 보았으나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전 다 좋아요. 서경 씨가 원하는 곳으로…….”

그러나 유온의 눈이 짧은 순간 창가를 향한 걸 윤서경은 놓치지 않았다. 옷장에서 예비용 이불을 꺼낸 윤서경은 그것으로 유온을 돌돌 말아 안고 창가로 향했다.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 그대로 안고 넓은 창틀에 앉는다.

아무리 단열이 잘되어 있어도 이 계절에 커다란 유리창 앞은 싸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몸을 감싼 이불과 등 뒤에 바로 느껴지는 윤서경의 체온에 추위는 조금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윤서경은 한동안 말을 걸지 않고 자신의 팔과 체향으로 유온을 감싸기만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에 유온이 멈칫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 아마도 호텔 직원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와서 창가 옆 간이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바로 옆인데도 사람이 왔다 갔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조용했다.

간이 테이블에 손을 뻗은 윤서경이 작은 포크에 딸기를 찍어서 유온의 입가에 댔다. 눈을 굴리면서도 유온은 순순히 입을 벌렸다. 과즙과 향이 입 안에 퍼졌다. 느릿하게 과일을 먹여 주고, 가끔 꽃향기가 나는 허브티를 주었다. 이불 속에 두 팔이 묶여 있어서 직접 먹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당신이 준 꽃병을 깨뜨린 적이 있죠.”

“…….”

윤서경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그가 꽃병을 깨뜨린 기억은 당연히 선명했다. 서러웠던 모든 순간이 그렇듯이. 그의 손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물건처럼 낙하한 꽃병과 깨진 유리 때문에 못 쓰게 된, 공들여 고른 꽃.

“그때……, 다치진 않았습니까?”

유온은 반사적으로 아니라 말하려 했다. 유리가 깨지긴 했지만 다치진 않았다고. 하지만 불쑥 그 순간 느꼈던 충격이 치밀어 올랐다. 발끝이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작은 유리 조각이 박혔을 뿐인, 대단치도 않은 상처였는데 아픔이 유난히도 느껴졌었다. 발끝을 꾸물거린 유온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조금이요…….”

“어디.”

“발이요.”

윤서경이 손을 뻗어 이불 속에 감춰진 유온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발목과 발뒤꿈치, 발목, 발가락 하나하나. 그의 손이 엄지발가락에 닿은 순간 유온은 움찔거렸다. 생기지도 않은 상처인데 아픔이 떠올랐다. 그 반응에 유온이 다친 자리를 짐작한 윤서경이 조심스럽게 그곳을 매만졌다.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았다. 그냥 입 다물고 넘겼으면 될 일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게 덧붙였지만 윤서경은 유온의 귓가에 입을 한 번 맞췄을 뿐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크고 따뜻한 손가락이 상처가 없는 상처를 어루만진다.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워진 유온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저, 딸기…….”

깨진 화병 이야기를 계속하느니 딸기를 먹여 달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말에 이 화제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읽었는지 윤서경이 접시로 손을 뻗었다. 그 후로는 조용했다. 유온의 입으로 차와 과일이 가끔 들어올 뿐이었다.

유온이 배가 부른 한숨을 작게 내쉬자 윤서경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귀에 그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검진을 하러 가야 하는데, 언제가 좋겠습니까.”

“언제든 괜찮아요.”

“그럼 모레로 하죠.”

고개를 끄덕인 유온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이 야경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언제나 똑같이 아름다웠다. 질리지도, 무덤덤해지지도 않는다. 적당히 부른 배와 따끈따끈한 몸, 몸을 감싼 이불과 윤서경의 품이 점점 더 유온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유온은 그대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윤서경은 유온이 잠든 후에도 한참 더 창가에 앉아 그를 안고 있다가, 그가 선잠을 자는 게 아니라 완전히 푹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아 들어 침대로 돌아왔다. 이불에서 꺼내자 유온은 조금 추운지 몸을 짧게 떨었다. 더는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품에 꼭 껴안고 이불을 덮어썼다.

* * *

검진 당일. 원래는 윤서경이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예정이었지만,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 덕분에 유온은 예전에 문자 메시지로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이정윤과 성한영이었다.

“경호실장 성한영입니다.”

“비서실장 이정윤입니다!”

성한영은 커다란 걸 넘어 거대한 덩치였다. 팔뚝이 유온의 머리 크기는 되는 것 같았고 목과 얼굴의 굵기가 비슷했으며 키는 거의 2미터쯤이었다. 얼굴이 무뚝뚝한 상인데도 묘하게 선량해 보였다.

이정윤은 정장에 넥타이를 갖추어 입고, 머리는 위로 하나로 묶은 평범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 때문인지 키도 체구도 한참 작은데도 성한영과 존재감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한영 실장님이랑 이름이 같아서 헷갈리시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을 것 같아요.”

지극히 평범한 체구와 인상을 가진 이한영과는 이름이 아니라 성까지 똑같아도 헷갈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장이라는 직위가 참 많기도 했다.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이름을 부르셔도 되고, 이 실장, 성 실장이라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서경 씨의 비서분이랑 경호원분이신가요……?”

그러자 두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께는 따로 비서실과 경호실이 있습니다. 저희는 사모님 쪽을 담당합니다.”

“사, 사모님.”

그 호칭에 유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장인 윤서경과 결혼하니 맞는 말이지만 조금 부끄럽고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도 이따금 그렇게 불렸고, 유온을 전담하는 비서실과 경호실이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윤서경은 유온이 불편해해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가족의 압박 때문이었다. 큰형은 당장 없애라 화를 내고, 작은형은 너 참 잘난 사람이라며 웃고, 부모님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니 도저히 거스르지 못했다. 딱히 필요한 게 아니었기에 고집하지도 않았다.

그때도 이 사람들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다. 얼굴도 이름도 처음 보는 이들이다. 이정윤에 이어 성한영이 말했다.

“팀원들도 조만간 같이 인사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아직은 사모님께 안정이 필요하다고, 대표님께서 인사를 미루셨거든요.”

“저……, 그 호칭…….”

“네?” 

“호칭……, 다른 걸 써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불편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어떤 호칭이 괜찮으실까요?”

윤서경의 배우자니까, 어떤 호칭으로 해야 할까. 사모님은 너무 낯이 간지럽고 제게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눈을 도록도록 굴리던 유온이 겨우 대답했다.

“그냥 이름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당연히 유온 님이 편하신 쪽으로 해야죠.”

하지만 경호실은 그렇다 치고 비서라. 게다가 이정윤 혼자도 아닌 듯했다. 유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한테 비서가 필요할까요? 그것도 여러 분이나…….”

유온은 하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잠을 자고 책을 읽고, 농장 키우기같이 단순한 게임을 좀 하고, 형들의 말상대를 하고, 그러는 게 전부였다. 할 일이 정 없는 시간엔 멍하니 눕거나 앉아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학교도 사실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고등학교는 최소한의 출석 일수만 겨우 채우며 거의 돈으로 졸업하다시피 했고 대학교는 수능을 쳐서 붙은 학교에 띄엄띄엄 나가다가 자퇴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떻게 합격했나 싶을 만큼 명문대였으나, 괜히 사람을 많이 만나 나쁜 물만 들고 온다며 이유건이 학교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온은 가뜩이나 아무것도 없는데 대학 졸업장조차 못 받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나마 친구라고 사귀었던 사람들은 유온이 얼마나 다루기 불편하고 답답한 사람인지 알게 되면서 질려 떠나갔다.

학교도 가지 못하게 할 정도인데 다른 외출은 더더욱 기회가 없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히는 걸 좋아하는 유온이었지만 가끔은 밖에 나가고 싶었다. 그럴 때면 이유건과 부모님의 눈치를 보아 가며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이따금 밖에 나갔고, 가족 중 다른 사람이 가기엔 격이 떨어지지만 빠지기엔 애매한 자선 파티 따위에 가기도 했다. 그것 말고는 그저 게으르게 살 뿐이었다. 뭔가를 할 의지가 하나도 없고 나태하다고 형에게 몇 번이나 혼났지만,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어땠는가 하면, 당연히 유온이 의무적으로 나가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윤서경의 배우자였으니까. 그것 때문에 처음엔 비서실과 경호실이 조금 움직였지만 점점 그마저 하지 않게 되었다.

“네, 팀이라고 해도 절 포함해 세 명이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 아직은 하는 일이 많진 않아요. 유온 님 혼자 참석하게 되실 일정 조정이나 수행, 들어오는 선물이나 메시지 확인, 직접 하실 필요 없는 커뮤니케이션 같은 걸 대신하는 정도니까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저희가 꼭 필요해지실 테니 미리 인사드리는 겁니다.”

이정윤이 말을 마치고 확인해 주듯 끄덕였다. 올려서 묶은 긴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놀고먹기만 하는 자신에게 세 명이나 되는 비서가 필요할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으나 유온도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검진을 받으러 이 과, 저 과 돌아다니는 동안 두 사람은 보호자처럼 옆에서 따라왔다. 식당에서 만난 후로 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때 형이 화가 많이 나 있었던지라 오픈된 장소에 나오는 게 조금 무서웠다. 어딘가에서 형이나, 형이 보낸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하지만 윤서경이 보내 준 두 사람이 옆에 붙어 있고 누가 와도 물려 줄 거라는 생각에 불안이 다소 가셨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검진은 꽤나 고된 일이었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며 어디에서도 기다린 적이 없다는 것, 그 과정을 사람들이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안내를 해 준다는 것은 유온으로선 상당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온몸을 탈탈 털다시피 하는 과정까지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사를 끝내고 유온은 겨우 풀려나 병실로 올라갔다. 아직 한 가지가 남긴 했지만 그건 병실에서 할 거고, 오늘 바로 볼 수 있는 검사 결과가 정리될 때까지 쉬라는 것이었다. 병실이라 해도 호텔 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대가 환자용일 뿐.

눕는 걸 도와주겠다는 성한영을 우물쭈물 거절하고 침대에 누웠다. 두 사람은 유온에게 인사하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다른 곳에서 기다리겠다며 나갔다.

피곤한 몸이 축 늘어져 침대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혼자 남은 유온은 괜히 침구를 만지작거렸다. 환자용 침대인데도 침구는 유온이 본가에서 쓰던 것보다 고급품이었다.

밖에 나갈 때 입는 옷이며, 큰 가구 같은 건 유온도 좋은 물건을 썼다. 하지만 사소한 부분에서 부모님은 형들의 것과 유온의 것에 차이를 두었다. 이게 집에서 네 위치라고 못을 박는 것처럼.

용돈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다. 이건 외출을 거의 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방에서 고양이를 키울 때 말고는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이따금 형이 사다 주는 걸 제외하고 유온이 가진 것 중 값어치가 있는 물건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집에서 그런 대우를 받는 것도. 큰형처럼 능력이 있고 듬직하거나, 작은형처럼 사랑스러워야 부모님도 돌볼 마음이 생기는 거니 그저 죄송한…….

‘…….’

……죄송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유온의 손이 이불을 꼭 쥐었다. 마음이 수런거렸다. 가족 생각을 하자 짓눌리는 것 같던 가슴이, 막힌 듯 쉬어지지 않던 숨이 그 말을 떠올리자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을 조금 웅크리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흠칫해서 고개를 들자 노크한 사람이 말했다.

“유온 씨.”

윤서경이었다. 유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네, 하고 대답했다. 병실 문이 소리도 없이 느리게 열리고 코트 차림의 윤서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합니다. 서둘렀는데도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검사는 괜찮았습니까?”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미안한 기색의 윤서경이 다가와 유온의 뺨을 손으로 감싸곤 입 맞췄다. 뺨과 입술에 한 번씩 닿은 입술의 감촉을 멍하니 좇는데 윤서경이 말했다.

“심리 검사는 한 시간 후로 미뤘습니다. 잠깐이라도 쉬어요.”

“아, 괜찮아요, 그럼 검사하는 선생님이 귀찮으신 거…….”

“확인하니 그 정도는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유온이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윤서경은 유온의 등과 팔을 감싸서 침대에 도로 눕혔다.

“서경 씨…….”

이불을 유온의 턱밑까지 끌어 올려 덮은 윤서경은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이불 위에서 토닥토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기를 재울 때 하는 듯한 손길에 유온이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자장가도 불러 줄까요. 노래를 잘하진 않는데.”

“…….”

얼른 고개를 저은 유온이 눈을 감았다. 커다란 손은 천천히 몸을 토닥였다. 주위를 감싼 윤서경의 체향이 짙어졌다. 피부에 내리는 기분 좋은 온기에 유온은 졸린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그대로 조용히 잠들었다.

* * *

한 시간 후 유온은 이마에 살짝 닿는 입술에 잠에서 깨어났다. 가만히 눈을 뜨자 윤서경이 곁에 앉아 있었다.

“조금 더 잘래요?”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 때문에 윤서경이 자신을 깨운 건지 바로 떠올린 유온은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한참을 기다렸을 텐데 더 시간을 끌 순 없었다. 유온이 벌떡 일어나서 앉자 윤서경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곤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벌써 사람이 도착해 있었던 모양이다. 유온은 더더욱 미안해져서 허둥거리며 가운 차림의 검사자를 맞았다. 손에 큰 플라스틱 케이스를 든 여자는 무척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이유온 씨?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녀가 침대 옆에 앉더니, 플라스틱 케이스를 들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어떤 검사인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설명해주는 그녀를 잠시 보고 있던 윤서경은 곧 자리를 피해 주었다. 유온은 시험지 같은 여러 장짜리 종이를 받았다.

문제가 있고, 주관식으로 답을 고르는 것도 시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항 수가 몇백 개로 많긴 했지만. 유온은 성의껏 답지 칸을 채워 나갔다.

그 후엔 데칼코마니 같은 카드를 보기도 하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주관식으로 덜 만들어진 문장을 채우는 것도 있었다. 검사가 한창이던 도중에, 유온은 흘끗 검사자를 보았다.

“힘드시죠? 조금만 더 하면 끝나요.”

“아…….”

그런 의미로 쳐다본 건 아니었다. 유온이 지금 하는 건 심리 검사였다. 정신적인 문제가 심해졌을 때 간단하게 상태를 보려 검사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건 처음이었다.

이 정도로 자세한 검사라면 분명 제 생각이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유온은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이 해의 이 날을 이미 한 번 겪었다. 윤서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번째로 맞이하는 오늘이었다. 죽었다가 되살아나 겪고 있는 날.

그런데 만약에 심리 검사 결과에서…… 전부 자신의 망상이었다는 게 드러나면? 윤서경의 반응까지도 말이다. 그는 기억과 똑같이 차가운데 자신이 그의 반응을 머릿속에서 멋대로 바꾸어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면.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선은 시간이 3년 전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부터 소설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윤서경이 자신도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후에도 불현듯 ‘정말 현실일까?’라는 생각은 치밀어 올라왔다. 아니, 오히려 윤서경이 그렇게 말한 후 더욱 그런 것 같다.

하루 24시간의 매분 매초가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머리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불쑥 생각하게 된다. 이러다 갑자기 깨어나면 어쩌지. 눈을 떴더니 자신의 방이고 큰형이 문을 두드리고 있거나, 아니면 넓은 집 어딘가에 화가 난 윤서경이 있고, 자신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서성이는 중이라면.

혹은 작고 갑갑한 유골함 안에서 뼛가루가 된 채 의식이 남아 있다가 잠시 꿈을 꾼 것이라면. 이건 몇 번쯤 해 본 상상이었다. 죽은 후에 시신이 다 부패되거나 태워져 작은 항아리에 남은 후에도 만약 영혼이라는 게 남아 생각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 잠깐이나마 안식을 찾기 위해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유온은 어릴 때 그렇게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래서 유골함 속의 시야도 쉽게 상상이 가능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섬뜩했다.

또는 그런 게 아니어도, 사실 그날 자신이 죽진 않았지만 미쳐서 내내 환각을 본다거나, 그 죽음 자체가 환각이었거나. 무수한 부정적 사고가 머리를 떠돌았다.

“이유온 씨?”

“아……, 네.”

부드러운 목소리에 유온은 정신을 차리고 빈칸을 마저 채웠다. 문항은 낯설었다. 단어와 표현은 알기 쉬웠지만, 자신의 어설픈 지식으론 망상 속에서도 만들어 내기 어려울 문장들이었다. 어쨌든 이 검사의 결과가 나오면 그걸로 자신이 미쳤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도 들었다.

답안의 몇몇 개는 자신이 한 번 죽었고, 과거로 시간이 돌아온 것 같다는 내용을 조금씩 솔직하게 넣었다. 심리 검사는 미친 척하는 사람과 미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을 테니, 만약 자신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라면 그렇게 말해 주겠지. 또 만약에, 미친 게 아니라면…….

유온은 긴장한 채로 연필을 내려놓았다.

“고생하셨어요. 오늘은 건강 검진 결과 먼저 듣고 가신다고요?”

“네.”

“심리 검사는 사흘 후에 결과가 나올 거예요. 담당의 선생님과 제가 같이 찾아뵐 예정입니다.”

“네…….”

대답하면서 유온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으론 이런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진 시간이 더 오래 걸렸는데. 물론 여긴 부경 병원이고 윤서경의 일가가 병원 재단의 오너이니, 윤서경이 빠른 결과를 바랐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검사자가 나가고 난 뒤 윤서경이 교대하듯 들어왔다. 검진을 한 결과도 벌써 나왔다는 것 같았다. 어느새 윤서경이 챙겨 온 겉옷을 입고 진료실로 내려갔다.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유온은 다소 긴장했다.

역시 병은 여전히 몸에 도사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원래 몸 이곳저곳이 이유도 없이 아팠었다. 속이 안 좋거나 어디가 욱신거리거나, 쓰리거나. 하지만 그런 아픔에 익숙한데도 두통이 너무 심해서 가족들 몰래 다른 병원을 찾았을 정도였다.

두통을 느낀 시점에서 이미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시 깨어난 후 지금까지 그런 두통은 오지 않았고, 또 무엇보다…… 유온은 옆에 있는 윤서경을 흘끗 보았다. 그의 호텔에서 지내게 되고 나선 가족을 만나며 잠깐씩 무서웠던 걸 빼곤 모든 게 괜찮았다. 결혼생활을 할 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슬픔이 없으니 발병의 계기도 없다. 슬픔은커녕, 오히려.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윤서경도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필요한 거라도 있습니까?”

유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진료실 앞이었다. 한 번 본 적 있는 의사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은 없었다. 만약 심각한 병이 있었다면 조금은 더 수심 어린 표정을 했겠지. 꾸물꾸물 의자에 앉아 검진 결과를 들었다.

대체로 정상, 빈혈과 위염이 심하고, 그 외에는 장기며 신경계의 기능이 약하다는 정도였다. 윤서경은 위염이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유온의 귀에는 무척 건강하다는 말로 들렸다. 걱정할 만한 문제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약은 지난번에 드린 것과 동일한 종류로 몇 가지 처방하겠습니다. 잠이 많이 올 수 있는데, 그냥 푹 주무시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으로 영양 보충을 충분히 해 주세요.”

검사 결과지와 컴퓨터 모니터를 번갈아 보는 의사의 얼굴은 약간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사실 이유온의 검진을 하러 오면서 손에 꼽히게 무서운 얼굴을 한 윤서경 때문에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윤서경은 예비 배우자가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걱정하듯 음울한 태도였다.

비쩍 마른 이유온을 보며 그녀도 그가 어딘가 큰 병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그 나이 대 오메가보다 허약하고 여기저기 잔병이 있을 뿐 그리 안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극심하고 약물에 다소 의존 기미가 있어서 신체 기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인데, 휴식하면서 약을 조절하면 천천히 나아질 겁니다. 지금도 생활이 조금 불편하시지요?”

의사의 물음에 유온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불편한 건 없는 것 같다. 몸은 으레 무거운 거고, 위나 머리, 피부, 근육 여기저기, 원래 어딘가 한두 군데는 항상 아프기 때문에 그에 익숙해졌다. 의사는 유온의 괜찮다는 고갯짓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이 환자는 아픔이 체화되어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가급적 배우자분의 페로몬에 계속 접촉하게 해 주세요. 음……,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 것 같지만.”

의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유온의 시선이 조심스레 윤서경을 향했다가 자신의 손끝으로 돌아왔다. 호텔 곳곳에서 윤서경의 향을 느끼곤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윤서경의 호텔에 와서 매일매일 달고 살던 그 많은 약을 하나도 먹지 않게 된 건 그의 체향 덕분일 것이다.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당장 약을 먹어야 한다는 불안감이나 조급함이 흐릿해졌다. 이따금 유온은 손바닥 가득 약을 담아 삼키거나, 약이 탁하게 녹은 물에 머리부터 잠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높은 곳의 창밖을, 멀리 떨어진 땅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윤서경과 함께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단한 문제가 없었기에 검사 결과와 면담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윤서경은 또 직접 차를 운전해서 온 듯 직접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윤서경이 유온의 무릎 위를 슥 보았다. 처방받은 약이 올라가 있었다.

한 손에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약 봉투를 집은 윤서경이 그걸 뒷좌석으로 옮기고, 대신 담요를 들어서 유온에게 주었다. 언제부터 차에 담요가 있었지……. 유온은 네이비색 체크무늬에 안쪽은 복슬복슬한 양털로 된 담요를 잠시 관찰했다.

히터가 돌아가 따뜻하긴 하지만, 그래도 유온의 몸은 차가워서 담요의 온기가 필요했다. 고맙습니다, 짧게 인사한 유온이 담요를 펴서 무릎에 덮었다. 옷 너머로도 양털의 보들보들하고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양털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큰길로 빠져나오자 곧바로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딱 퇴근 시간이었다. 저 멀리까지 이어진 차량의 행렬은 주차장처럼 멈춘 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10분 동안 몇 미터도 채 가지 못하는 정체가 이어졌다. 앞 유리를 흘끗 본 윤서경이 말했다.

“잠깐 쉬었다가 갈까요.”

어디로 가자는 뜻인지 몰라 유온은 눈만 깜빡였다. 윤서경은 간신히 몇 미터쯤 더 전진한 곳에서 차를 돌려 좁은 길로 들어섰다. 양옆에 주택가를 낀 언덕길을 이리저리 틀며 가다가 도착한 건 한강공원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으로 고요하게 흐르는 한강과 왼편의 커다란 다리,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가로등이 보였다. 이따금 개를 데리고 산책하거나, 러닝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돗자리를 깔고 앉은 일행도 있었다.

“어차피 퇴근 시간이 지날 때까지 도로에 갇혀 있을 겁니다. 차라리 여기에서 차가 빠지길 기다리는 게 덜 피곤할 거예요.”

“네…….”

꽉 막힌 길은 확실히 운전하는 사람이나 같이 있는 사람이나 지치게 만든다. 고개를 끄덕였을 때, 갑자기 창밖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니 후다닥 뛰어가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왜 그러는 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투둑투둑, 차체를 잘게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온은 시선을 들었다. 선루프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온다고 했었나.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앞 유리를 흐리게 적실 정도로 요란한 빗물이 쏟아졌다. 옆 창으로도 구불구불 물길이 생긴다. 고요하고 따뜻한 차 안에 빗소리만 울렸다. 한강의 조명은 비에 습하게 번졌지만 여전히 밝았다.

유온은 선루프를 보았다. 밤하늘에 선을 그으며 쏟아지는 빗줄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머리 위로 쏟아져 온몸을 적실 것 같은데, 단단한 차체가 안전하게 비를 막아 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온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부터 한 마디도 오가지 않고 있다.

“나, 날씨가, 따, 따뜻한가 봐요. 눈이 아니네요…….”

비록 급하게 말하느라 더듬거리긴 했지만. 윤서경의 눈이 차내의 온도 표시를 흘끗 보고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어색하게 눈을 굴린 유온이 따뜻하다는 제 말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창문을 조금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창을 열자마자 맹렬하게 차가운 강바람과 빗방울이 후드득 밀어닥쳤다. 날리는 머리카락을 붙들며 다급하게 도로 닫고, 창이 다 올라갔는데도 창문 버튼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썰렁하게 감돌던 바깥바람이 히터의 온기에 밀려 금세 누그러졌다. 윤서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뻗더니, 담요를 유온의 가슴께까지 올려 덮었다.

“…….”

“졸리면 자도 됩니다.”

“아니에요…….”

“정말 자장가라도 불러 줄까요?”

“아, 아니요.”

드물게 유온은 빨리 대답했다. 윤서경이 부르는 자장가……, 듣고 싶기도 했지만, 왠지 절대 들으며 잠들 수 있는 노래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유온의 거절에 윤서경이 조금 웃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

유온은 담요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누구한테 불러 줬을까.

“어릴 때 사촌동생 재운다고 불러 줬는데 울더군요.”

아, 사촌동생……. 어릴 때. 이런 말에 안심해 버리는 자신이 조금 바보 같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안심하니 또 꾸벅꾸벅 잠이 쏟아졌다. 윤서경의 향이 좋았다.

* * *

스콜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눈에 띄게 가늘어졌다. 정체가 가장 심할 시각도 지나갔다. 주행 시동을 걸려 하던 윤서경은 낮게 울리는 진동에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통화 버튼부터 눌렀다. 잠든 유온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조심스레 차 문을 열고 나가 확인하니 이한영이었다.

―대표님, 이번 루머 유포에 화명 쪽 자금 개입 확인했습니다.

윤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이리저리 자금 경로를 꼬아 놓았지만, 애초에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그들밖에 없다. 윤서경은 차 안에서 잠든 이유온을 흘끗 보았다.

이유온의 가족을 처리할 방법은 나름대로 고심했다. 끔찍한 일이지만 그들은 사회적으로 이유온의 본가고 가족이었다. 게다가 전쟁 통도 아닌데 사람 몇을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어떻게 죽이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일단 자료는 보관해 둬.”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윤서경은 몸을 조금 적신 빗방울을 털어내며 차 안으로 돌아왔다. 이유온은 윤서경이 나름 고심해 고른 담요를 가슴까지 덮은 채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물기 어린 조명에 비친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아침부터 검사를 한다고 이리저리 끌려다녀 피곤할 것이다. 최대한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푹 자길 바랐지만 예민한 이유온은 차가 움직이자마자 눈을 떴다. 움찔하며 상체를 일으킨 그의 몸에서 담요가 스르륵 떨어졌다. 그러자 한기를 느꼈는지 얼른 다시 끌어 올려 덮는다. 남색 타탄체크가 이유온에게 잘 어울렸다. 하긴 검은 바탕에 빨간 도트무늬가 들어간 것인들 안 어울리겠냐마는.

“이제 금방 도착할 겁니다.”

“네…….”

유순하게 대답한 유온은 잠을 자다 깨어난 상황이 어색했는지 고개를 돌리려 하다가, 윤서경에게 시선을 멈췄다.

“서경 씨, 비 맞았어요……?”

그 잠깐 사이에 물기와 비 냄새는 귀신같이 알아챈 듯했다. 이유온은 자기 일에 답답할 정도로 둔하고 남의 일에 마음이 아플 정도로 예민했다.

“중요한 전화가 와서요.”

“아…….”

그것 때문에 차에서 나가 통화했다는 말을 그는 금방 받아들였다. 차가 천천히 강변공원을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보고 있던 이유온의 고개가 갑자기 앞으로 기울었다. 곧 창에 이마가 닿을 것 같았다.

“왜 그래요?”

“밖에 고양이가 있어요.”

“……고양이?”

“비 오는데…….”

이유온의 목소리에 걱정이 서렸다. 윤서경은 잠시 차를 세우고 그가 보는 방향을 같이 보았다. 가랑비는 어느새 다시 줄기가 굵어졌고, 이유온이 말한 고양이는 회색 털을 흠뻑 적신 채 처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나마 나무 그늘에 있어 비를 덜 맞지만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가서 안고 돌아올 마음은 없는 듯했다. 그냥 어쩔 줄 모른 채 안타깝게 보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얼마 후 한 남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표정을 보니 실수로 놓치거나 해서 고양이가 뛰쳐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주인을 본 고양이가 차 안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리치며 두 남녀의 몸을 앞발로 마구 두드리다가 아예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무서웠다고, 안아 달라는 말하는 몸짓이었다. 남녀는 그런 고양이의 젖은 털을 마구 쓰다듬고,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몸이며 발이 싹 젖어 진흙투성이임에도 소중히 안은 채 사라졌다. 이유온의 시선이 그것을 죽 따라갔다.

“버려진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네……. 다행이에요.”

이유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양이 좋아합니까?”

“네, 좋아하고……, 어릴 때 키웠는데 금방 죽어서요.”

고양이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인 듯했다.

“오래 키웠나요?”

“아뇨. 잠깐이요……. 사료랑 화장실 모래가 비싸서 용돈을 모았어요.”

“용돈을 모아요?”

용돈을 모아야 할 정도의 일인가? 또 설명을 점프한 건가 해서 묻자 이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비싸더라구요. 그리고 계속 필요하고…….”

“……고양이가…… 그렇게 많이 먹습니까?”

다소 당황스러워서 물었다.

“아, 아니요,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아요.”

윤서경의 집에서는 고양이든 개든 길러 본 적이 없지만, 양육에 화명 정도 되는 집안의 아들이 용돈을 모아야 할 만큼 비용이 드는 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세상에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테니까.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이유온이 용돈을 모아서 겨우겨우 고양이를 먹여 살린 이유는 한 가지였다. 용돈의 액수가 아주 적어서.

이제 그 정도는 놀랍지도 않다는 게 욕이 나올 일이었다. 이유온은 심지어 집안 형편에 비하여 터무니없는 제 용돈의 액수에 별다른 의문조차 없는 듯했다.

“그런데 침대 위에서만 놀아야 했던 게 미안했어요.”

“침대 위?”

“바닥에서 뛰어다니면 발소리도 나고요, 침대 말고 다른 곳에 있으면 형이 싫어해서…….”

“……가족이 다 같이 키운 게 아닌 모양이군요.”

“네. 제 방에서만 있었어요.”

그렇게 말한 이유온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봤어요. 고, 고양이는 넓은 공간을 좋아하고,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장난감도 많이 있어야 하고. 제가 목욕도 자주 시켰는데, 목욕도 싫어한다고. 제가 한 짓은 학대였대요…….”

“…….”

거기서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고양이가 금방 죽었다고 말했다. 침울한 모습을 보니 죽은 고양이가 자신 때문에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글쎄, 이유온은 동물을 괴롭게 하자는 작정조차 못 할 성격이었다. 어쩌다 죽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이유온의 잘못은 아닐 터였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몰랐기에 섣불리 뭔가 말하자니 조심스러웠다. 어차피 보여 줄 거면 이유온이 태어난 순간부터 전부 보여 줄 수도 있는 것 아니었나? 그랬다면 그가 이러는 이유도 곧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고양이나 강아지를 기르자고 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이유온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으로도 벅찼다. 키우던 고양이가 죽은 게 자기 탓이라고 철석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새로운 동물을 안겨 주는 건 그에게 별로 좋지 못했다.

호텔로 돌아와 씻기고 나자 이유온은 또다시 금방 나른해했다. 검진이 어지간히 고되었던 모양이다. 침대에 집어넣어 재운 뒤 윤서경은 사용하지 않는 다른 침실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호텔 서비스 안내 책자 위로 이젠 없는 호텔 직원의 네임택이 달린 작은 케이스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날 직원이 올라와 이유온에게 가지고 나와 달라 말했던 그 물건이었다. 일반 객실에서도 청소하며 물건을 두고 나갔다고 들어와서 손님에게 꺼내 오라고 말하는 건 징계 사유였다. 그게 스위트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물건을 두고 나가는 건 실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방에 들어가 뭘 가지고 나오는 간단한 일이라 해도 VIP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물론 그뿐이었다면 징계의 수위가 해고까진 가지 않았겠으나……. 윤서경은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고체 형태의 방향제가 들어 있었다. 케이스를 닫아 두면 향이 진하게 퍼지진 않지만 작은 틈이 있어서, 손에 들면 냄새가 옮고 주위로도 미세하게 퍼진다. 이유건의 체향이었다. 향료에서 그의 체향과 비슷한 걸 사용해 조향하게 만든 물건이다.

만일 윤서경이 호텔 방 전체를, 이유온이 쓰는 입욕제 하나까지 제 향으로 채워 놓지 않았더라면 이유건의 체향이 지워지지 않고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향은 윤서경의 것보다 훨씬 약했고, 곧바로 눌려 없어졌다. 상자가 방에서 사라진 순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유온이 방에 들어왔다 나간 건 아주 옅게, 향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남은 그의 기척만으로 알았다. 그때는 왜 들어왔었느냐는 대답에 핏기가 죄다 사라진 듯 창백해지는 이유를 몰랐지만.

이유건은 대체로 이런 수단을 사용했겠지. 신혼여행을 시작으로 그의 체향을 이유온에게 묻혀 윤서경의 비위를 상하게 해 온 것이다. 이번처럼 직원을 매수하거나, 이유온을 불러들여 체향으로 절여 놓거나 하는 식으로.

그의 계획이 맞아떨어졌다면 물건을 손에 쥐었던 이유온에게서 당연히 이유건의 향이 났을 것이다. 심지어 그 향이 윤서경의 침실에서도 비슷하게 돌고 있으면, 사정을 모를 땐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러나 헛된 시도는 이유건의 생각보다 강하게 깔려 있던 윤서경의 체향과, 이유온이 윤서경의 체향을 바탕으로 조향하게 한 입욕제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잔 덕분에 물거품이 되었다.

아예 이유온의 방 어딘가에 저걸 숨겨 놨다면 속았을까? 글쎄, 그땐 기억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으니 역한 냄새 때문에 찾아내고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겠지만, 그도 직원들에게 정황을 묻고 CCTV도 확인하면 밝혀졌을 일이다.

지금은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때는 몰라서.

윤서경은 체향을 짙게 흘렸다. 방향제에서 떠돌던 역한 냄새가 순식간에 그에 눌려 눈이 녹듯이 사라졌다.

* * *

도와주세요.

유온은 열에 들떠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자신이 뭐라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힘들어요…….

뭔지 모를 약물에서 깨어날 때의 기억이었다. 유온은 고통에 익숙했다. 폭행을 당하면서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을 뿐 이렇게 간절하게, 어떻게든 지금 당장 벗어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온몸을 촘촘한 바늘로 찌르고 불에 태우는 것 같았다. 독한 산을 목에 직접 쏟아 붓고, 그대로 위에서 돌덩어리가 몸을 으스러뜨릴 듯 짓누르는 것 같았다. 뒤집힌 속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했다.

그만하고 싶어요. 힘들어요. 돌아가고 싶어요.

한 번만, 데리러 와 주세요…….

그러나 끝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지 않았고, 유온은 식은땀에 젖은 채 흐리게 풀린 눈으로 약 기운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몇 번이나 얻어맞은 머리는 몽롱했고 배와 등에는 멍이 가득했다. 약물이 완전히 몸속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지독한 고통은 이어졌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토해 낼 게 없었는지, 반사적으로 벌어진 입에선 타액이 툭 떨어질 뿐이었다. 바르르 떨린 몸이 그대로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대로 쓰러질 줄 알았더니 뭔가에 걸린다. 단단한 팔뚝이 유온의 가슴을 끌어안아 지탱하고 있었다.

형이 안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곧 머리채를 붙잡히고 질질 끌려갈 것이다. 형, 잘못했어요. 신음과 함께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움츠렸지만 예상한 폭력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너른 품이 자신을 끌어안고 가슴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꿈을 꾼 겁니다. 괜찮아요.”

“…….”

꿈?

“괜찮아요, 여기가 어디인지 봐요.”

유온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단단히 안고 있는 두 팔과 그 너머 커다란 창으로 반짝이는 야경이 보였다.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괜찮아.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갑옷처럼 단단하고 녹을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유온의 시선이 느리게 어두운 실내를 돌아보았다. 형은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여긴 집이 아니라 유온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윤서경의 공간이었다. 가쁘던 숨이 차츰 느려졌다. 온몸에 돋았던 소름이 가라앉고 떨림이 멎었다.

“……서경 씨…….”

자신에게도 안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윤서경은 그렇게 작은 목소리도 알아듣고 대답해 주었다.

“내가 어디로든 데리러 갈 테니까, 울지 말아요.”

울면 싫어할 텐데. 유온은 참을 수 있다면 한계까지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한번 울음이 터지기 시작하면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울지 말라는 말에 더 눈물이 났다. 윤서경은 셔츠 가슴팍이 유온의 눈물 때문에 다 젖고 있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그칠 때까지 몇 번이고 머리에 입을 맞추고, 등을 쓸어 줄 뿐이었다.

* * *

사흘 후, 유온의 검사 결과를 들고 찾아온 건 유온을 검사했던 검사자와 나이가 지긋한 담당의였다. 응접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윤서경은 유온의 옆에 앉았고, 호텔 직원이 차를 내온 후 곧바로 상담이 시작되었다.

스스로 보기에도 검사 결과가 나타난 그래프는 정상이 아니었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낮고, 어떤 것은 거의 그래프 끝까지 솟아 올라간 채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상한 면을 고스란히 듣는 건, 심지어 윤서경이 옆에 있는 상태에서 듣는 건 유온을 한층 우울하게 만들었다.

“우선은, 결과에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천천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의사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부분이라는 말에 유온은 움찔했다. 그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지금 유온의 상태를 먼저 해설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크게 좋지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제 주치의가 정신적 질환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비난조는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 병에 걸렸으며, 그 병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차근차근 말해 줄 뿐이었다.

유온은 중간중간 윤서경을 흘끔거렸다. 정신과 약물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윤서경도 배우자 될 사람이 정신병이 있다고 하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한다 해도 최소한 어딘가 모자란 것으로 보이겠지. 어쩔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는 현실감을 유지하고 계시지만, 다소 혼란이나 괴리감을 느끼신다고 해야 할까요. 으음……, 우울함이 심해지거나 생각, 상황이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되면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간절해지죠. 그 방법이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상상을 믿게 되기도 하고, 그걸 현실이라 여기게 되기도 해요.”

어렵게 느껴지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듣던 유온은 그 말에 멈칫했다. 부정적인 상황을 상상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 아, 역시 전부 상상이었을까. 우울증도 모자라서 이젠 망상증까지.

어쩌면 지금 이 상황도…… 사실은 유온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인 걸 수도 있다. 윤서경과 함께 의사를 맞이하고 있는 건 맞지만, 유온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미쳤는지 보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표정도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을지도. 유온의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의사는 그런 유온을 잠시 보다가 말을 이었다.

“환자분이 믿는 모든 게 진실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기분이 나아져도 그런 상상이 계속되는지 지켜봅시다. 감정이 정리되면 생각도 정리될 거고, 차차 해결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

“환자분은 지금 어떤 기분이세요?”

“저, 저는.”

의사의 물음에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제 표정은 곧 죽을 사람처럼 어두웠다. 눈만 깜빡이다가 빨리 대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간신히, 잘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윤서경을 보았다.

“음,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보호자분이 옆에서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짧게 대답하는 윤서경을 잠시 보았다. 지난번 병원에 갔을 때에 이어 보호자분이라는 말이 간지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곧 결과를 전부 전달한 뒤 유온을 두고 윤서경만 그들과 나가 무언가 대화했다. 오도카니 혼자 남아 있다가 무료함에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데 곧 윤서경이 돌아왔다.

유온의 옆자리에 다시 앉은 윤서경은 뭔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 곁에서 유온은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라고 말할까, 그런 병에 걸리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유온의 머릿속에서 음울한 생각이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 윤서경이 고개를 들었다.

“유온 씨.”

“네……, 네.”

깜짝 놀란 유온은 몸을 움찔하다가 눈앞의 컵을 넘어뜨렸다. 목이 타는 것 같아서 다 마셔 버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테이블을 다 적실 뻔했다. 쨍그랑 소리에 윤서경도 놀라 손을 뻗었다. 유온의 시선이 컵받침에서 떨어져 데구루루 구르는 찻잔을 따라가는 사이, 윤서경은 유온을 끌어당겨 안아서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의사가 한 말이 신경 쓰입니까?”

“…….”

상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유온이 동요했음을 그는 알아차린 듯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환자에게 당신이 본 그건 전부 현실이라고 말해 버리면, 실제 망상증 환자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말에 더 신경을 써 봐요. 당신은 현실감을 유지하고 있고,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네…….”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압니다.”

시야가 조금 높아지고, 윤서경과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물러나려 했으나 윤서경의 손이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전부 상상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것도 알고요. 그러니 이야기를 좀 하죠.”

“이야기…….”

“당신이 이 일을 완전히 현실로 믿게 될 때까지요.”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유온은 자신 없는 얼굴로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손이 유온의 머리를 한 번 쓸어내렸다.

“언제부터, 어떻게 기억합니까?”

“……라, 라운지에서 서경 씨랑 만나기, 조금, 전에…….”

어색한 화제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유온은 더듬거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시, 시간이, 돌아간 것처럼…….”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런 것 같습니까?”

“죽…….”

죽었을 때. 그렇게 대답하자 윤서경의 얼굴이 흐려졌다. 유온은 제가 더 당황해서 허둥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감쌌다. 가만히 유온을 마주 본 윤서경이 유온의 손 위에 손을 겹치고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귀 아래서 팔딱팔딱 뛰는 맥박 위에 따뜻한 입술이 닿아 꾹 눌렸다. 심장이 뛰는 걸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온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유온이라도, 윤서경이 자신의 죽음을 괴롭게 여긴다는 건 의심하지 못했다.

“저기, 서경 씨, 저……, 그게…….”

윤서경이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은 여전히 목에 닿은 채였다. 입술의 온기가 얇은 피부를 넘어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괜, 괜찮아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고, 아프지도, 않았고……. 쓰러졌던 것 같은데……, 그리고 바로 그렇게, 됐잖아요.”

“바로는 아닙니다. 며칠 동안 혼수상태였으니까.”

“아……. 그럼, 아, 고, 고생하셨, 죄송해요…….”

“…….”

윤서경이 침묵했다. 유온은 그 침묵을 여러 의미로 혼자 해석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얼마 후, 윤서경은 유온의 허리를 안아 자신과 똑바로 마주 보게 하며 말했다.

“다그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궁금한 것뿐이니까, 천천히 대답해 봐요. 충분히 생각하고 말해도 됩니다. ……뭐가 죄송한 겁니까?”

“…….”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뭐가 죄송한가 하면, 윤서경은 자신 때문에 병원에 오는 걸 귀찮고 성가시게 생각했다. 그런데 쓰러지자마자 바로 죽은 것도 아니고 며칠이나 의식이 없는 채 병상을 붙들고 있었다면 얼마나……. 하지만 윤서경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어둡다 못해 참혹하기까지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이, 당신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음……, 제 탓도 없는 건 아…….”

“아닙니다.”

아팠던 걸 온전히 제 탓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죽은 직후 눈을 뜨고 나서 형에게 맞았을 때는 한순간 머리가 멍해질 만큼 억울했다.

하지만 병에 자주 걸리고 아픈 건 자신이 모자란 탓이다. 같은 집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가족들은 멀쩡한데 혼자서 여기저기 아픈 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유온은 어디가 아플 때마다 가족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언제나 한순간 억울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다시 생각해 봐요. 당신이 뭘 했습니까.”

“저는…….”

“병에 걸리겠다는 목적으로 뭘 한 적이 있어요?”

유온은 몸을 움츠렸다. 내용만 들으면 얼핏 추궁 같지만, 윤서경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혹시나 유온이 무서워할까 조심스러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프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고개를 가로젓자, 윤서경은 칭찬하듯 뺨에 입을 맞췄다.

“말로는 조금 알기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윤서경이 유온을 안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종이와 펜을 챙겨 유온이 평소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의 무릎 위에 앉은 채 유온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윤서경이 유온의 앞에 종이와 펜을 내려놓았다.

“써 봐요. 당신이 지금 상상이 아닐까 생각하는 게 뭔지.”

“네…….”

우물쭈물 펜을 든 유온은 종이 위에 글자를 적었다.

―시간이 3년 반 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으음…….”

―그런 기억이 있다.

―내일 뉴스나 날씨가 어떨지 알았다. 여러 번….

―죽는 순간이 너무 선명했다.

―꿈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길다….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조금씩 다르다)

유온은 자신이 죽는 순간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했던 건 잊고 끄적끄적 이유를 써 내려갔다. 쓰다가 더는 떠오르는 게 없어서 손을 멈추자 윤서경이 말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근거도 써야죠.”

그러자 진짜라고 생각하는 근거를 쓸 땐 술술 움직이던 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고민한 끝에 유온은 한 줄을 썼다.

―말이 안 되는 일.

또 고민하다가 한 줄을 더 썼다.

―좋은 일만 너무 많이 일어난다.

“…….”

윤서경의 시선이 그 글에 지그시 머물러 있다가 유온을 향했다. 채 숨기지 못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있었다.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면 더 사실이라고 믿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네? 어떻게……. 그,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자 윤서경은 한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이내 한숨을 참는 기색이다. 또 무슨 말을 잘못했나 기가 죽어서 눈을 내리깔자, 윤서경이 종이를 톡톡 쳤다.

“계속하죠. 아니라는 근거를 더 써 봐요.”

역시 잘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혼자 생각할 때는 모든 게 자신의 망상 같았다. 아니라는 근거가 수도 없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해도 헛것과 환청이 아닐까, 미친 게 아닐까 하는 결론으로만 흘러갔다. 그런데 이렇게 쓰려고 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두 개가 제일 큰 이유인데…….”

“첫 번째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어난 일이잖아요. 세상에 누군가는 우리 말고도 미래를 살다가 온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이미 겪은 이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 겁니다.”

“하,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요…….”

“어떻게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알았다면 벌써 기술 개발을 시작했겠죠.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해서 비행기가 움직이는 원리를 다 알게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유온은 윤서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신과 윤서경은 생각하는 방식이 정말로 달랐다. 자신도 윤서경처럼 단단한 심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아마……, 아마 훨씬 나은 결혼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윤서경이 허리를 감쌌던 손으로 유온의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다.

“두 번째는……. 읽어 보세요. 소리 내서.”

“조, 좋은 일만 너무 많이 일어난다.”

말하고 나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좋은 일만 일어나서.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말이긴 했다. 소리 내서 말하니 정말 황당한 헛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 좋고 행복한 일이라곤 없었는데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행운이 찾아온 걸 어떻게 믿겠는가.

“적어도 지금 상황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군요.”

“네…….”

그야 당연했다.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일들뿐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의 머리가 지어낸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좋은 일만 일어나니까 이 일이 전부 상상이 아닐까 의심한다고요.”

말하는 도중에 윤서경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맞붙고 손가락은 부드럽게 얽혔다. 유온의 시선이 잠시 그리로 향했다. 손의 온기는 또렷했다. 이곳에 오고 나서 겪은 일 모두 어느 하나 선명하지 않은 게 없었다. 첫 번째로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의 기억이야 3년 반이라는 시간 속에서 저절로 일부가 흐릿해졌지만, 죽는 순간과 다시 눈을 뜬 순간부터는 줄곧 현실과 똑같이 느껴졌다.

윤서경이 말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느 한 때에 몰려서 일어날 때도 있는 겁니다. 좋은 일이 몰려 일어나면 좋은 거죠.”

“……그게……,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조금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금방 훨씬 나쁜 일로, 돌아와요. 전……, 저는.”

“당신은?”

“그게 무서워요.”

무섭다, 그 말 그대로였다. 정말로 두려웠다. 유온에게도 좋은 일은 있었다. 친구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거나,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하거나, 또 윤서경이 자신 같은 사람에게 청혼을 해 주거나. 그리고 그 모든 일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다가왔던 친구는 욕설을 남긴 뒤 멀어졌고 대학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윤서경과의 결혼 생활은 서글펐다.

그래서 이 상황이 차라리 자신의 꿈이나 상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상이었다면 지독한 상실감과 아쉬움을 안은 채 꿈에서 깨어나듯 체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일 망상이라면, 지금 이 이 시간에도 윤서경은 자신을 보며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할 게 아닌가. 미친 사람이 차가운 눈길을 받으며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다고.

시선을 떨어뜨리자, 윤서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까지 아니었어도.”

몸을 뒤에서 감싸 안은 채 그렇게 보자 시선이 비스듬히 마주친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유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럴 겁니다. 나쁜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좋은 일이 압도적으로 많을 거예요.”

“…….”

그런 게 가능할까……. 하지만 다정한 위로였다. 그 목소리가 너무 견고하고 강인해서 유온은 음울한 제 생각을 잠깐이나마 잊었다.

“그러니까 빨리 익숙해져요.”

윤서경이 뺨에 입을 맞췄다. 사실은 자신이 과연 익숙해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 순간순간의 다정함과 말랑거리는 스킨십, 지금까지 윤서경의 태도, 자신이 있는 공간, 여기서 일어난 모든 일, 너무 행복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이게 망상이 아니라면 현실감을 빨리 되찾고 싶었다. 이렇게 벅차게 기쁜 순간을 제대로 누리고 싶었다. 순간 조바심이 일었다. 유온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윤서경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몸이 옆으로 조금 돌아가고 키스가 따라왔다.

입술이 깊게 맞물렸고, 윤서경이 유온의 아랫입술을 연달아 빨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잡히듯 들어간 여린 살이 조금씩 부어올랐다. 그러다 윗입술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문 윤서경은 이어 혀끝으로 입술 안쪽을 핥더니, 안으로 깊게 들어왔다.

뜨거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유온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윤서경의 가슴팍을 붙잡았다. 몸에 딱 맞게 입은 셔츠가 옷을 제대로 쥐지 못하여 가슴을 긁어 대는 손끝에 구겨졌다. 결국 유온의 손은 툭 떨어져서 윤서경의 허리에 감겼다.

손이 닿자 옆구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근육이 멈칫했다. 한 번 옷 아래 이 몸통이 얼마나 굵고 단단한지, 갑옷처럼 묵직하게 만들어진 근육이 얼마나 잘고 유연하게 움직이는지 보았다. 얇은 셔츠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건 없습니까?”

“…….”

말을 하면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윤서경이 물었다. 유온은 얼굴을 약간 물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 그런 걸 생각해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었다.

“한 가지씩 생각해 봐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무슨 과일이 먹고 싶다, 그런 정도라도 좋으니 말해요. 오늘부터 하루에 하나씩.”

“어, 없어요. 정말 없어요.”

“읽고 싶은 책을 말하는 정도여도 괜찮아요. 아니면 다른 차 종류를 마시고 싶다거나, 새로운 취미용 도구가 필요하다거나.”

윤서경은 유온이 물러난 만큼 따라왔다. 결국 입술을 거의 맞댄 채 이야기했고 중간중간 키스가 이어졌다.

“처음엔 나도 조금 믿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주가부터 뉴스까지, 여러 가지를 확인했어요. 이건 현실이 맞습니다.”

“…….”

“어서 받아들여요. 같이 오늘을 살아야죠.”

“서경 씨…….”

“아까 의사가 물었을 때는 잘 모른다고 했죠. 그럼 지금 기분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윤서경의 체향이 짙게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피부와 혈관에 사락사락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향이 수선스럽게 뛰는 심장 박동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아까는 말하기 어렵던 제 기분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유온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단단한 팔 안에 안겨서 체향에 감싸인 채로.

“지금은……, 좋은 것 같아요.”

“그래요.”

나지막하게 속삭인 윤서경은 유온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입술이 머리카락과 정수리, 뺨……, 곳곳에 닿았다.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온몸이 말랑말랑하게 늘어져 갔다. 따뜻한 물속에 잠긴 듯 허벅지도 팔뚝도, 발끝까지도 녹아내렸다. 윤서경이 아이를 재울 때 하듯 등을 토닥였다.

“지금은? 아직도 상상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유온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이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 망상이라는 느낌이 신기하게도 누그러졌다. 머릿속에서 정신 차리라고, 네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외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잠잠했다. 영영 물러간 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적어도 지금은 괜찮다.

“잘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윤서경이 칭찬을 했다.

“앞으로 또 상상 속으로 끌려갈 일이 많겠죠. 그때마다 내가 데리러 갈 테니, 같이 돌아옵시다. 현실로요.”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은 다시 긴 키스를 했다. 유온의 몸은 더더욱 녹아내렸다.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두 팔이 혀끝이 얽히며 윤서경의 숨결이 흘러 들어온 순간 움찔 움직였다. 그리고 자석에 끌리듯 주춤거리며 올라가, 윤서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키스에 유온은 다음을 예감했다. 등을 안은 윤서경의 손이 천천히 옷 위에서 피부를 쓸며 내려와 스웨터를 걷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올 것을. 하지만 점막이 맞물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리도록 입을 맞추면서도 윤서경은 가만히 등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겨우 그의 몸에 감겼던 유온의 팔이 움찔거렸다. 이대로 팔을 치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견갑골에 살짝 닿는가 싶던 윤서경의 손이 휙 떨어졌다. 입술도 멀어지고, 유온은 아쉬움에 입을 꼭 다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윤서경이 흘러내린 유온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단정하고 흰 이마를 손끝이 매만졌다. 그는 키스로 뜨거워진 입술로 유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 이상 할 생각은 없는 걸까……. 유온은 키스로 달아오른 몸을 신경 쓰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몸에서 체향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단속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향을 억제하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 당연하고 몸에 밴 일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걸 못하고 있었다. 윤서경과 밤을 보낸 이후부터인 것 같았다. 방심하면 주위로 향을 흘리고 만다.

그때 마침 작은 진동 소리가 울렸다. 윤서경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지만, 도착한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더니 곧 풀어졌다.

“예복 가봉을 해야 하는데, 괜찮으면 지금 올라오게 할까요.”

“네……, 좋아요.”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다. 늘 그렇듯이. 하지만 윤서경은 그런 유온의 대답이 정말 좋은 건지, 어쩔 수 없이 하는 대답인지 가늠하듯 이리저리 유온을 살펴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유온의 뺨은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가벼운 호선을 그린 입술과 빛이 담긴 눈동자가 달콤했다. 그는 유온의 머리를 손빗으로 빗어 내리곤 또 한 번 이마에 키스했다.

바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번보단 조금 간소한 의복과 도구, 사람들이 올라왔다. 아마 호텔에 도착해서 연락을 하고 윤서경이 기다리라 말했으면 기다리고, 오늘은 어렵다 했으면 돌아갔을 것이다. 완벽하게 윤서경과…… 자신에게 맞추어 돌아가는 스케줄이었다.

김현주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생기가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한 뒤 가지고 온 예복에 대해 설명했다.

“이렇게 보니 조금 이상하시죠? 두 분의 몸에 맞춰서 형태를 잡은 후에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갈 거예요. 지금은 옷의 모양과 크기만 보시면 됩니다.”

그녀가 가리킨 몸통만 있는 마네킹 두 개는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마네킹이 유온의 것, 그 곁에 있는 커다란 쪽이 윤서경의 것이었다. 조금 이상하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봉할 때처럼 천 조각을 이어 붙이기만 한 것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세세한 장식이 없을 뿐 그냥 보면 평범한 옷이다.

둘 다 남성인 알파와 오메가가 결혼할 때의 예복은 베타 남성의 턱시도보다 훨씬 장식이 많이 들어갔다. 유온이 예전 결혼식에서 입은 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색으로 된,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의상이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다.

다행히 이번에 고른 옷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윤서경과 김현주의 주문으로 이것저것 단추며 자수며 치장이 추가되었지만.

“그럼 입어보시겠어요?”

그날 윤서경의 옷은 유온의 옷에 디자인을 맞추는 것으로만 이야기가 끝나서 보지 못했다. 간이 탈의실에 들어가서 유온은 커튼 너머를 흘끔거렸다. 윤서경도 다른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가봉 단계라 장식이 거의 없는데도 단추가 많은 재킷과 바지를 입고 나오자 윤서경은 이미 나와 있었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윤서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옷도 기본적인 형태는 유온의 옷과 비슷했다. 하이칼라에 일반 정장 재킷보다 조금 긴 기장, 셔츠가 드러나는 형태로 재단된 옷깃과 소매까지.

다른 건 윤서경은 커머밴드가 있고, 유온은 재킷 허리를 뒤에서 리본으로 조이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는 세트로 제작된 옷임을 곧바로 알 수 있도록 디테일이 비슷했다.

그 옷을 입은 윤서경은 눈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근사했다. 이제 정확한 형태를 잡을 뿐인 옷이라서 화려하지도 않았는데, 평범한 정장에선 볼 수 없는 예복의 모양이 시선을 끌었다. 그는 장식이 없어도 저 옷을 완벽하게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게……, 자신과의 결혼식을 위한 옷이다.

의사가 돌아가고 윤서경이 내내 되풀이해 들려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행복은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유온은 잠시 밀어냈다. 어쩌면, 어쩌면 아주 밀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결혼 예복. 그 단어를 떠올리며 유온은 시선을 윤서경에게 향한 채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그러자 윤서경을 비롯하여 유온의 앞쪽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순 조용해졌다. 유온은 멈칫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또 이상한 웃는 얼굴을 보였다. 유온이 어색함에 어쩔 줄 모르며 돌아서자, 김현주가 재빨리 다가와 허리의 리본을 묶어 주며 물었다.

“어떠세요?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스퀘어 커트가 조금 딸려 올라갈 정도로 리본을 조인 뒤 김현주가 물었다. 리본이 배까지 감싸는 게 아니라 허리 뒤로만 달린 형태였기 때문에 그 정도 조이는 것으로 숨이 불편해지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몸의 선은 좀 더 드러났다. 거울에 언뜻 자신이 비치자 유온은 고개를 돌렸다.

“유온 씨.”

“네……?”

다시 윤서경을 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립니다.”

갑작스런 칭찬에 눈을 깜빡인 유온은 곧바로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답에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을 느꼈는지 짧게 쓴웃음을 지은 윤서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옷이 좀 더 화려해도 될 것 같은데요.”

“지, 지금보다 더요?”

윤서경은 동의를 구하듯 김현주를 보았다. 단숨에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네! 좀 더 화려하면 너무너무 잘 어울리실 거예요. 저도 이렇게 옷 고르는 보람이 있는 분은 처음이에요.”

“하하…….”

과한 칭찬에 불편해진 유온이 슬쩍 뒷걸음질했다. 윤서경은 유온이 물러난 만큼 다가왔다.

“리본 색이 더 짙어도 되고, 이쯤에 길게 레이스를 다는 건 어때요. 그리고 코르사주는 보석도 같이 장식한 걸 쓰고.”

“아, 아니요, 그건 조금.”

그건 정말 아니었다. 지금도 지나치게 화려하다. 드물게 유온이 고개를 홱홱 저었지만 윤서경은 코르사주를 달 가슴 부분을 만지며 덧붙였다.

“당신이 만족할 만큼 예쁜 보석으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

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보석이 마음에 안 드는지, 너무 화려한 게 싫은지 물을 줄 알았다. 보석에 만족하고 말고는 유온이 고려해 본 적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렇게 말하자 한 번 그의 말대로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어울리겠지만 그게 비웃음을 살 정도는 아닐 거라고. 유온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움츠러들어 있던 유온의 어깨가 조금 펴졌다.

“그럼 라펠 라인이랑 프론트 다트에 너비가 조금 다른 레이스를 각각 사용할까요? 레이스는 제가 잘 아는 수입 업체가 있는데, 패턴은 비슷하면서 질감은 다르게 하면…….”

어려운 설명이 이어졌다. 레이스 말고도 보석이며 옷의 마감 장식, 안감, 바지와 구두의 라인에 이르기까지 유온이 모르는 전문 용어가 쏟아졌다. 윤서경은 먼저 말을 얹진 않지만 김현주의 말에 끄덕이면서, 옷 사진을 손으로 짚어 가며 라펠 라인이 어디이고 프론트 다트는 어디인지 짤막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참, 웨딩 촬영 예복은 어떻게 할까요, 대표님. 전에 두 분이 같이 계실 때 이야기할 거라고 하셨는데요.”

김현주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유온에게로 향했다. 유온은 예물을 든 퍼스널 쇼퍼들이 올라올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을까……. 그야 결혼의 당사자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자신은 안목이 없으니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직접 택하는 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제가 고른 물건을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느라 안절부절못했으니까. 아니. 지금 김현주가 뭐라고 했지?

웨딩 촬영?

유온은 윤서경을 보았다.

“웨, 웨딩 촬영이요?”

“네.”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기대도 안 하던 단어가 나오자 얼떨떨했다. 욕심도 낸 적 없는 좋은 물건을 누군가 갑자기 네 것이라며 쥐여 준 듯한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윤서경이 성큼 다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앗, 서, 서경 씨.”

주위에는 김현주와 웨딩 샵 직원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유온이 당황하자 윤서경은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웨딩 샵에서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합니다.”

누구나 다 하는 건 아닐 것 같았다. 상식이 부족한 유온이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윤서경은 매우 뻔뻔하고 당당했다. 흘끔흘끔 주위를 둘러보자 아무도 이상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긴, 그런가? 결혼 예복을 서로 입어 보는 웨딩 샵은 분명 행복으로 가득 찬 분위기일 테니까. 유온은 윤서경의 말에 그런가? 그런가? 하며 홀랑 넘어갔다.

“그리고……, 이번엔 해야죠. 지난번엔 못 했으니.”

뒤의 말은 유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속삭임이었다.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끄덕여졌다. 결혼을 앞두고 웨딩 촬영은 당연히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웨딩 촬영을 위한 예복 카탈로그가 온 걸 보고 이유연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기 때문이다.

웨딩 촬영을 준비할 무렵 이유연의 혼담도 조금씩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끔찍한 상대와 결혼하라고 하니 이유연은 거의 매일 히스테리 상태였다. 그 와중에 유온의 예복 카탈로그를 본 그는 그것을 다 찢어 버리고 유온을 방에서 끌어내 마구 다그쳤다.

평소 이유연은 유온을 때린다고 해도 뺨을 좀 치고 마는 정도였는데, 그날은 그가 정신이 나가 버린 게 아닐까 무서워질 정도였다. 거실에 장식된 물건이 죄다 날아가고 유온은 머리와 팔에서 피를 흘리며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마침 들어와 난장판을 본 이유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날 늘 그렇듯 유온은 제외한 가족회의가 있었고, 당사자를 빼놓은 의사 결정이 끝난 후 죄인이 끌려오듯 거실에 섰다.

‘웨딩 촬영은 안 하는 걸로 윤 대표한테 연락했다.’

이유건이 말했다. 유온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했다. 작은형이 원치 않는 결혼으로 신경이 예민한데, 심지어 자신을 대신해 결혼하는 건데 그 앞에서 웨딩 촬영 이야기 따위를 하며 눈치 없게 군 것 같았다.

하지만 찢어져 욱신거리는 아픔도, 형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욕심을 넘어서지 못했다. 유온은 늘 그렇듯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주눅이 잔뜩 든 채 이유건을 보았다.

‘……서경, 윤 대표님은 뭐라고…….’

서경 씨라 부르려던 호칭을 얼른 고쳤다. 이유연의 표독한 눈길 때문이었다. 이유건이 대답했다.

‘크게 필요한 절차는 아니니 그쪽도 생략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

‘…….’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확실히 웨딩 촬영 같은 건 필요한 절차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앨범이 남을 뿐이다. 윤서경이 자신에게 청혼해 준 것이긴 하지만 열렬한 연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미건조하게 사진사가 시키는 포즈로 찍은 사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납득을 마친 유온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연이 만족한 듯 웃는 게 얼핏 보였다.

그렇게 지난번에는 웨딩 촬영 없이 결혼식을 했다.

“저, 정말요? 정말 해요……?”

“네.”

“…….”

믿을 수 없게 기쁜 한편 걱정도 되었다. 사진이 안 예쁘게 나올 텐데. 아, 하지만 요샌 보정이라는 게 워낙 좋으니까, 웨딩 화보는 자신의 원래 모습보다 훨씬 볼만하게 나오겠지. 흘끗 거울을 본 유온의 눈매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유온 씨.”

어느새 윤서경의 두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와 있었다. 거울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뒤에 바짝 붙어서 선 윤서경이 보였다. 둘은 같은 모양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장담하는데, 당신이 사진사가 지금까지 찍은 사람 중에 제일 예쁠 거고, 우리가 어느 결혼식장으로 가든 그곳에서 예식을 올린 사람 중에 제일 멋질 겁니다.”

“…….”

농담일까, 했지만 윤서경의 눈은 진지했다. 그가 이렇게 칭찬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보인다. 그럼 눈이 안 좋은 건가?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눈이 안 좋으면 안 되는데, 영양제, 아니, 영양제는 싫고, 다, 당근? 블루베리? 갑자기 들이닥친 엄청난 칭찬에 유온은 혼란스러워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김현주까지 끼어들었다.

“맞아요! 정말 그래요. 전 유온 님만큼 예쁘신 분은 정말 처음 봐요.”

“…….”

울고 싶었다. 아니면 이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모든 예비부부에게 하는 말이란 걸 알아도 눈앞에서 들으니 차라리 누군가에게 혼이 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김현주는 직원들이 예복에서 사이즈에 맞춰 고쳐야 할 부분에 시침핀을 꽂는 사이 두꺼운 카탈로그를 가지고 왔다.

“웨딩 촬영에서는 좀 특이한 색상의 예복도 많이 입으세요. 여기 레몬색 재킷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너무…… 색이 밝아요.”

옷만 동동 떠다닐 것이다. 하지만 유온의 말에 윤서경도 김현주도 정색했다. ‘무조건 잘 어울린다’라는 말이 따라왔다. 이쯤 되니 유온은 어지러웠다. 방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싶다. 칭찬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어떤 장식이 어떻게 어울릴지 설명하면서 내내 칭찬을 들었다.

처음엔 대답할 말도 없고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가봉한 예복을 벗고 앉은 후에도 좋은 소리의 연속이었다. 유온은 어정쩡하게 앉은 채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럴까요, 네, 좋아요, 기계처럼 그 말만 반복했지만, 그런 게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자 놀랍게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런가?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데, 어쩌면 정말 못 봐 줄 수준은 아닌 걸지도. 그런 생각을 하던 유온의 눈에 남청색 짧은 재킷이 들어왔다. 색도 차분하고 허리선 조금 위까지 오는 길이에, 옷과 같은 색상과 재질의 천으로 장식을 만들어 단 게 예뻤다. 유온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그 옷을 가리켰다.

“이, 이런 건…….”

‘어떨까요?’라는 말이 생략되었지만 윤서경도 김현주도 알아들었다. 김현주가 곧바로 탄성을 질렀다.

“너무 잘 어울리는 걸 고르셨네요! 유온 님이 이런 스타일을 하신다면, 세트로 나온 건 이쪽 상아색 예복인데요.”

카탈로그를 한 장 넘긴 김현주가 말했다. 유온이 고른 것과 비슷한 스타일에 조금 더 화려한 상아색 재킷이었다. 유온은 윤서경이 그 옷을 입은 걸 상상했다. 화려한 데다 색까지 밝아서 과할 것도 같은데, 윤서경에겐 생각만으로도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호텔 거실에 작게 꾸며진 웨딩 샵은 그 후로 한 시간을 더 있다가 돌아갔다. 두 사람은 웨딩 촬영에 입을 옷으로 격식을 갖춘 정장에서 가벼운 실크 셔츠, 평상복까지 둘이 각각 일곱 벌씩을 더 주문했다. 커다란 베일의 질감과 짜 넣을 레이스의 종류, 라펠핀이나 행커치프 같은 자잘한 장신구까지 고르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잠시 전화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업무 관련한 전화가 왔는지 윤서경이 휴대폰을 든 채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침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소파에 털썩 앉아 멍하니 어디도 아닌 곳을 보고 있던 유온은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다가가서 보자 보타이였다. 윤서경의 것으로 고른 물건인데 직원이 어쩌다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와인색에 검은색으로 무늬가 들어간 보타이는 검은 턱시도에 맞춘 물건이었다. 유온은 보타이 리본을 양손에 꼭 쥔 채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흘끗 침실 쪽을 보았다. 윤서경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새로 만들어온 거긴 해도 샘플이라 정식으로 사용할 건 아니지만, 조금 전 윤서경이 착용했던 물건이었다. 한 번 더 침실 쪽을 보아 그가 나오지 않은 걸 확인한 유온은 손바닥에 보타이를 올리고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실크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어렸다. 잠깐 만져 보려고 한 건데, 그 매끈매끈함이 기분 좋아서 저도 모르게 심취하고 말았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든 유온은 깜짝 놀라서 보타이를 떨어뜨리고, 그걸 다시 줍느라 허둥지둥했다. 윤서경이 또 책장에 기댄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매, 매번 소리도 없이…….”

“일부러 소리를 내면 더 놀랄 것 같아서요.”

소심한 항의에 지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윤서경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유온의 손에서 보타이를 슥 가지고 갔다.

“새로 만들 필요 없겠군요. 이걸 그대로 쓰죠.”

“하지만 새로 만드는 쪽이 더…….”

“어차피 이쪽도 정성껏 만든 물건입니다. 조잡한 물건은 여기에 가지고 오지 못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은 키스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그가 갑자기 입을 맞춰도 당황하지 않았다. 가만히 입을 벌리거나 혀끝을 내밀 수도 있게 되었다. 적어도 이 한 가지에는,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 * *

“초대 명단에 이름이 없으시네요.”

이유연은 기가 막혀서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오늘 무대에서 게스트로 연주를 하기로 했고, 늘 그렇듯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차였다. 그러나 전용 출입구에서 이름을 대며 들어가려 하다가 가로막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명단 똑바로 확인해요.”

“이유연 님 아니신가요? 어제 초대 목록에서 제외되셨어요. 연락 못 받으셨나요?”

예쁘장한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일그러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어, 유연 선배.”

막 높아지려던 언성이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멈췄다. 이유연은 눈을 새파랗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말끔한 차림으로 서 있는 건 학부 시절의 후배였다. 사사건건 경쟁이 붙었던 악연이고 당연히 이유연은 그를 치 떨리게 싫어했다. 경쟁에서 진 일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결국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그런 만큼 더 싫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뭐 하냐니?”

“오늘 선배 대신 제가 올라가기로 했잖아요. 이사장님이 저한테 직접 연락하셨는데.”

“……이사장님이 너한테 왜 직접 연락을 해?”

“혹시나 대타라고 오해할까 봐 걱정돼서 하셨대요. 처음부터 절 부르고 싶었는데 사정이 좀 안 좋으셨다나. 이제 해결되신 것 같더라고요. 저 좀 늦었으니까 들어가 볼게요. 조심히 가세요, 선배.”

이유연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여 눈만 끔뻑였다. 그때 마침 대기실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유연과 안면이 있는 다른 연주자였다. 그녀가 흘끗 유연을 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돌려 그의 후배에게 인사했다. 저들끼리 퍽 분위기가 좋았다.

수준대로 논다더니. 인사를 나누는 그 둘을 보던 이유연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두 사람이 속닥거린 말이 유연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원래 부르기 싫다고 했잖아요, 질 떨어진다고…….”

그 말에 이유연이 아연해 입을 벌리자, 두 사람은 들릴 줄 몰랐다는 듯 놀라는 시늉을 하다가 킥킥거리더니 두꺼운 문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가에 서 있던 직원도 시간을 확인하곤 이유연에게 고개를 까딱이고 사라졌다. 건방진 태도였다. 태어나서 이런 수모를 처음 겪은 이유연은 황당함에 입을 벙긋거리다가,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홱 돌아섰다.

* * *

“그리고?”

“그 후엔 보안 요원들이 내보냈다고 합니다.”

업무 사이 이한영이 이유연의 움직임을 보고했다. 오늘 대형 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연주회에 게스트로 이유연이 올라올 예정이었다. 윤서경은 직접 재단에 연락해 연주회에서 이유연의 이름을 제외하도록 했다.

사실 윤서경의 개입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대응은 평소 이유연이 쌓아 놓은 것에 따라서 결정될 터였다. 어쩔 수 없게 되었다며 사과와 함께 안타까운 시선을 보낼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내칠지.

예상한 대로 이유연은 상당한 창피를 당했다. 재단 임원, 연주자들, 각자의 교수를 따라온 학생들, 온갖 업계 관계자가 모인 자리에 뛰어 들어가 자신이 왜 무대에 올라가지 못한 것이냐며 길길이 날뛰다가 쫓겨났다.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어떻게 할까요?”

“적당한 선까지 말만 해 두는 정도로 해.”

“알겠습니다.”

그 정도로도 앞으로 예정된 이유연의 연주 일정이 전부 취소될 것은 분명했다. 아니면 관객이 하나도 없는 객석을 앞에 두고 연주해야 하거나.

이유연이 지금쯤 집에 돌아가 사실을 전했을 테니, 그 가족들은 여기저기 연락하며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윤서경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화명이라는 기업 하나를 침몰시키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런 만큼, 빨리 끝내 줄 생각은 없었다.

* * *

“으.”

풍덩 가라앉을 뻔한 몸을 커다란 손이 재빨리 잡아 끌어올렸다. 안 그래도 가벼운 몸이 물 때문에 더욱 둥실 떠올랐다. 바닥에 닿지 않는 두 발을 물속에서 바동거리던 유온이 눈을 깜빡였다. 평소와 달리 윤서경이 자신의 시선보다 낮은 곳에 있었다.

청결한 약품 냄새가 얼핏 코를 스쳤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엔 물소리가 조금씩 울렸다. 벌써 한 시간쯤, 호텔의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물놀이였다.

수영장이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이니 가 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유온은 약간 자신이 없었다. 수영은 고사하고 물에 들어가면 곧바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가족 여행을 가도 비치 체어에 앉아 있거나 발을 담그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수영복도 입고 싶지 않았다.

윤서경은 늘 그렇듯 유온의 문제를 쉽게 해결했다. 수영복 대신 물에 젖어도 되는 재질의 긴팔 상의와 허벅지를 가리는 헐렁한 하의를 주고, 자신도 비슷한 옷을 입은 뒤 수영장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튜브라도 된 듯 유온을 안아 이리저리 물속을 돌아다녔다.

안겨서 넓은 풀을 떠다니고 가끔 두 손을 잡은 채 유온을 끌어당겨서 수영하는 기분도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손을 잡고 가는 것뿐인데도 유온은 몸의 힘을 완전히 빼지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벌써 네 번째였다. 윤서경은 그럴 때마다 유온의 팔을 빠르게 잡아당겨 몸을 안아 올렸다.

물에 들어가면 곧바로 가라앉는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한번 해 보라고 말했던 그는, 유온이 물속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닥을 딛기도 전에 길쭉한 조각상처럼 머리부터 잠기는 모습에 깜짝 놀라서 유온을 건져 냈다.

그 후로는 아기라도 데리고 놀듯 했다. 빠질 위험이 없다는 걸 알자 유온도 조금씩 물에 익숙해졌다. 가라앉아서 죽을 걱정 없이 느끼는 따뜻한 물은 편안하고 기분 좋았다.

“다음엔 튜브라도 가지고 올까요.”

“아, 아니요…….”

젖은 몸을 끌어안긴 채 괜한 부끄러움으로 말을 더듬었다. 물에 뜨는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로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가라앉는 유온을 바로 건지고 뺨과 얼굴을 쓸며 당황하던 윤서경은 유온이 진정된 후 웃었다.

‘이런 일에 웃어서 미안하지만, 귀여워서요.’

설마 물에 빠진 걸로 귀엽다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곧 윤서경은 유온을 안아 든 채 풀의 가장자리, 창가로 다가갔다. 벽면을 통으로 둘러싼 거대한 유리창이 있었고, 물은 그 창가까지 넘실거렸다. 벽 아래는 계단처럼 만들어져서 거기에 앉아 창밖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한겨울의 추위를 생각하여 수영장 내부에는 난방이 세게 돌아갔고, 거기에 윤서경이 두꺼운 수건을 가지고 와 어깨에 걸쳐주기까지 하자 충분히 따뜻했다.

윤서경은 수건과 함께 물 위에 띄울 수 있는 쟁반을 가지고 왔다. 위에는 가벼운 간식과 뜨거운 차, 고블릿 잔에 담은 분홍색의 음료가 올라가 있었다. 기포가 톡톡 터지는 모양으로 보아 샴페인 종류인 것 같았다. 유온은 흘끔흘끔 윤서경의 눈치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서경 씨, 저 술……, 못 마시는데…….”

술을 꺼리지만 억지로 마셔야 할 일은 있었다. 가족들이 다 같이 잔을 드는데 혼자서만 안 들 수 없을 때. 그렇게 억지로 마시면 단 한두 모금으로도 반드시 탈이 났다. 머뭇거리고 있자 윤서경은 자신이 먼저 잔을 들었다.

“레몬에이드예요.”

“……아.”

괜히 걱정한 게 무색해져서 유온은 얼른 잔을 들었다. 두꺼운 크리스털로 된 잔이 손바닥에 차갑게 감겼다. 온수 속에 오래 있었더니 목이 말라서, 약한 탄산이 목을 따끔하게 하는데도 홀짝홀짝 음료를 마셨다.

그리고 따뜻한 차와 한 입에 들어갈 크기의 타르트 몇 개를 주워 먹으며 창밖을 구경했다. 유리에 어떤 처리를 했는지 안과 밖의 온도차가 상당할 텐데도 창에 물기가 맺히거나 부옇게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이는 시내는 방과 다른 각도였다.

천장은 빛이 길게 떨어지는 모양의 조명이 촘촘히 내려와 물그림자를 반사하며 반짝거렸고, 풀 둘레는 얕은 파도가 치는 것처럼 물이 찰랑찰랑 움직였다. 이 호텔의 수영장이 유명하다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찻잔을 비운 유온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피곤해진 것 같다. 윤서경이 팔을 뻗더니 유온을 안고, 다른 손으론 쟁반을 든 채 천천히 물을 빠져나갔다.

“다음 주에 또 올까요.”

“네……. 좋아요.”

유온은 ‘좋아요’, ‘괜찮아요’라는 대답을 많이 했지만 진심인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윤서경과 있으면서 점점 진심으로 대답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몸의 물기만 닦아 낸 윤서경이 유온을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서 안고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래도 물방울이 떨어지긴 했지만. 분명 값비쌀 복도 카펫이 두 사람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조금씩 젖어도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서경 씨……, 카펫…….”

“이 정도로는 티도 안 날 테니 괜찮습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방으로 돌아오자 거실 테이블 위에 두고 갔던 휴대폰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유온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자, 윤서경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유온에게 주곤 욕실로 데려갔다.

“씻어요, 몸 차가워지기 전에.”

그렇게 말하고 윤서경은 다른 욕실로 들어갔다. 젖은 옷을 꾸물꾸물 벗고 마찬가지로 젖은 수건과 함께 한쪽에 정리해둔 뒤 유온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정윤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고, 그냥 잡담이었다. 그날 병원에서 얼굴을 보며 인사한 후로 이정윤은 종종 유온에게 업무와 관련한 메시지를 보냈다. 업무라고 해도 누가 결혼 전에 한번 인사를 하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걸 중간에서 대신 답변하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연락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조금씩 농담이나 사소한 말도 건네기 시작했다.

그러다 며칠 사이 점점 잡담의 비중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귀찮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 이정윤은 신기할 만큼 남을 편해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농담의 수위는 딱 우스울 정도로 적당했고, 잡담도 완전히 그녀의 사적인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유온이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녀와 친해졌다. 호칭도 ‘님’에서 ‘씨’로 바뀌었고, 그걸 따라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호칭을 바꿔 주어 유온은 한결 편해졌다.

누군가 자신에게 이모티콘이 들어갈 만큼 편한 잡담을 보내 주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마 대학교에 들어가서 잠깐 친해졌던 친구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유온은 이 오랜만에 생긴 잡담 상대가 조금 좋았다. 자신은 말주변이 없어서 맞장구를 치거나 대답하는 게 거의 전부인데도 답답하게 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메시지를 보며 웃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유온 씨 이거 아세요?]

[사진]

[요새 웨딩 촬영할 때 이런 거 유행이래요]

[엄청 귀엽지 않아요?]

우르르 쏟아진 메시지와 사진을 본 유온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화제가 웨딩 촬영으로 튀었다. 유행…… 그 말에 첨부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슬쩍 욕실 밖, 윤서경이 있는 쪽을 보았다. 차마 그에게 이런 걸 해 보자고 말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는다. 유온은 적당히 귀엽다고 맞장구만 치고 그 화제를 그냥 넘겼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들여 씻은 뒤 나오자 윤서경은 이미 침실에 있었다. 그는 유온을 안아 잠시 향을 맡고, 드라이어를 가지고 왔다. 여전히 유온은 체향을 감추는 편이었다. 윤서경이 자신의 향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도, 어쩌면 그래서인지 더욱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다. 별것도 아닌 걸 티 내려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맡을 향이라고 해 봐야 제 체향보다 바디 워시의 향이 더 강할 텐데, 그럼에도 윤서경은 향을 맡았던 자리에 입술을 댔다.

머리를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난 뒤 윤서경이 유온을 돌려 앉혔다. 표정이 진지했다. 늘 진지하지만, 눈동자가 좀 더 깊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윤서경이 말했다.

“유온 씨. 혹시, 결혼식을 미루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유온의 눈이 흔들리자 윤서경은 재빨리 뺨을 쓰다듬곤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는데, 준비할 게 많아 많이 바쁠 겁니다. 지금 당신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지 못하니 무리한 일정이 되지 않을까 걱정돼서요. 1년 정도 여유를 두고 천천히 하는 게 어떨까요.”

“이, 일 년이면, 겨울에 결혼식인데.”

그래도 겨울보다는 늦봄이 좋은 계절 아닐까. 유온의 의견에 윤서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했다.

“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방법도 있어요. 아니면 내년 봄으로 미루는 것도 괜찮고. 그리고 꼭 그렇게 하자는 건 아닙니다. 원래 예정대로 해도 괜찮아요.”

자신과 결혼식을 하는 게 싫은 건 아닐까.

불안하게 윤서경을 올려다본 유온은, 이내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예물과 예복까지 준비했다. 결혼식장도 몇 군데나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윤서경의 마음이 바뀌어 버렸을 리도 없었다.

‘서경 씨는, 그러지 않을 거야…….’

윤서경이 애지중지 유온을 돌본 성과는 나름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음, 음……, 그건, 저…….”

“같이 생각해 보죠.”

유온은 얼굴이 밝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듣고 보니, 올해 5월은 턱없이 금방이고 아직 준비한 것보다 준비해야 할 것이 더 많았다.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좋고, 또 보는 시선이 적은 외국에서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유온은 무거워지는 눈을 깜빡거렸다. 잠깐 물에서 놀았을 뿐인데 얼마 안 되는 체력은 벌써 방전되었다. 상체를 흐느적거리는 유온을 윤서경이 자리에 눕혔다.

몸이 그의 품 안에 푹 안겼다. 체향이 가까이서 밀려왔다. 페로몬에 녹아내리듯 축 늘어지는 몸으로 반쯤 졸면서 유온은 불현듯 의문을 느꼈다.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걸까?

처음 러트를 같이 보내고 시간이 꽤 지났다. 그동안 윤서경은 유온에게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긴 입맞춤이 전부였고, 유온의 맨몸을 보는 것조차 가급적 피하는 것 같았다. 왜?

하지만 묻기엔 부끄러운 일이었다. 유온은 괜히 몸을 움츠렸다.

* * *

며칠 후, 유온과 윤서경이 웨딩 촬영 스튜디오를 보러 가는 장면이 인터넷 뉴스에 올라왔다.

촬영이 있었던 스튜디오는 오래된 성당을 개조해서 만든 곳으로 엄청난 대여료로 유명했고, 전 대통령의 딸이나 해외 유명 인사가 찾기도 했다. 광고 촬영은 물론 내부 심사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돈이 있어도 대여조차 하지 못하는 깐깐한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곳은 윤서경의 눈에 제법 만족스러웠고 사진을 보여 줬을 때 유온 역시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보기 위해 함께 외출했을 때 찍힌 사진이었다.

뉴스에 보도가 나간 건 당연히 윤서경이 의도한 바였다. 그는 유온이 눈을 둥글게 뜰 정도로 그를 내내 품에 넣은 채 시선을 맞추며 다녔다. 애정이 없다고 하면 믿지 못할 태도였다.

평소였다면 유온을 데리고 지나치게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엔 필요했다. 윤서경이 본격적으로 화명을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유온은 햇살이 눈부셔 더욱 아름답던 고풍스러운 성당을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호텔로 돌아와, 뉴스를 보곤 당황했다.

“아, 저, 저기, 이거, 어떻게, 서경 씨…….”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화명과 관련된 일이 벌써 뉴스에 나간 건 아니다. 그가 본 건 그저 다정하게 웨딩 촬영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예비부부, 즉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저기, 저, 이거요.”

“사진이 잘 나왔군요.”

“…….”

제가 생각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일순 얼굴이 멍해지더니, 입술을 달싹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실수를 했나 싶어 윤서경은 난감해졌다. 사진을 내보내도 되겠는지 그에게 미리 묻지 않았다. 많이 싫었는지, 아니면 놀랐는지, 양쪽 다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윤서경은 그를 안심시키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홍보 차원에서 내보낸 건데,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놀랐습니까?”

“아니, 저한테 미안하실 일은, 그게……, 서경 씨가 괜찮은 거면, 저도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이유온의 얼굴은 나아지지 않았다. 긴 속눈썹 아래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왜 그럽니까.”

윤서경은 겁먹은 그를 한참 어르고 달랜 끝에 간신히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뉴스……. 형이랑 가족들이 볼 텐데.”

“그게 왜요?”

“형이 화낼까 봐…….”

“이유건이요?”

유온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건이 아니면 이유연이다. 뜬금없이 이유연은 왜? 아,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한 건 그쪽이었지. 윤서경은 지난번에 웨딩 촬영이 갑자기 취소되었던 걸 떠올렸다. 이유건이 연락해 그렇게 통보했고, 결혼 절차에 반드시 필요한 일도 아니라 생각하여 그러자고 했다.

그때쯤 이유연이 원래 이유온의 혼처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을 것이다. 웨딩 촬영 취소에 이유연의 의견이 다분히 들어갔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했다. 그러니 지금 스튜디오를 보고 온 기사가 작은형의 귀에 들어갔을 거라고 안절부절못하지.

웨딩 촬영을 하자고 했을 때 이유온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던 게 떠올랐다.

이전에, 웨딩 촬영은 안 하고 넘어갈 거라는 말에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상상하면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며 어쩔 수 없이 네, 하고 대답했을지, 아니면 몇 마디 해 보려고 하다가 미친 인간 네 명 중 하나나 혹은 그 전부에게 말로든 손으로든 얻어맞았을지.

그 패악 떨기가 습관이 된 작은형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아마 썩 좋은 상황은 아닐 터였다. 글쎄 아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상황에 가족회의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윤서경의 그 예상은 매우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 * *

컵 하나가 와장창 깨져나갔다. 분을 주체하지 못한 이유연이 식식거리며 컵을 내던진 손을 부르르 떨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민희가 이마를 더 세게 짚으며 타일렀다.

“얌전히 좀 있으렴.”

“……이 상황에 어떻게 얌전히 있어요?”

“지금 속 터지는 거 엄마도 똑같잖니.”

입술을 짓씹던 이유연이 모친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걔네 다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엄마한테 그래, 감히?”

성민희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당한 일은 정말로 태어나 처음 겪는 수모였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디서 소홀한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땠던가.

며칠 전, 이유연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참가하기로 한 연주회에서 내쫓겼고 그 사실을 항의하려 재단 이사장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그쪽이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어차피 재단 이사장의 부인이 참석하는 모임이 있어서 연락은 처음 한 번으로 끝냈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하길 기다리면 기다렸지, 안달 내는 것처럼 여러 번 연락을 거듭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결국 성민희가 모임에 나갈 때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고, 다소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나간 모임 자리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성민희가 한 손에 백을 들고 우아하게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와 있던 사람들의 대화가 일순 멈추고 묘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조금 늦게 모임 자리에 들어갔을 때 시선이 모이는 건 항상 그랬지만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침묵은 명백하게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길었다. 모임 회장이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웃으며 제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성민희는 모르는 척 웃곤 그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눈으로 재단 이사장의 부인을 찾아 곧바로 말을 걸려 했다.

‘잘 지내셨죠? 그런데 지난번.’

‘따님 이번에 대한문화회관에서 연주회 한다면서요? 저희 남편이 재단 주최 행사에 꼭 초대하고 싶다고 하는데, 다음에 기회 좀 주세요.’

이사장 부인은 친근하게 옆자리 사람의 팔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제 말을 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재차 말을 거는 것도 성민희의 자존심은 허락하지 않았다. 모임 시간 내내 성민희는 자신이 무리 안에서 겉돌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니, 연주회 건 때문에 예민해진 거겠지.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을 리 없으니.

가장 황당한 일은 모임이 끝나고 라운지를 나오면서 일어났다. 웃으며 빠져나오려 하는데 직원이 성민희를 잡았다.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계산은 안쪽에서 도와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계산?’

성민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모임의 다른 인원들이 몇 발자국 앞서 선 채로 모두 성민희를 보고 있었다. 이 라운지는 매번 모임에 사용하는 곳으로 한 번도 곧바로 계산을 하고 나간 적이 없었다. 모임이 끝난 뒤 각자 회비를 내고, 그 금액으로 나중에 결제가 되는 방식이었다.

‘뭘 잘못 안 것 같은데요.’

그러나 직원은 그린 듯 친절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왜 계산을 해야 하느냐 윽박지르자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계산을 하고 나면 직원이 잘못된 걸 확인하고 사과할 테니 그때 화를 풀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다른 모임 인원들은 손 놓고 보고만 있는 걸 보니, 저들은 이미 계산을 마쳤는지도 몰랐다. 성민희는 입꼬리가 떨리게 웃으며 직원을 따라갔다.

‘158만 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성민희는 카드를 내밀었다. 이 모임이 한 번 열릴 때 회비가 150만 원 정도였으니 한 사람 분 금액이 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계산했나요?’

‘아, 이번에는 성민희 님만 현장 결제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왜냐고 물어봐야 이 직원이 알 턱이 없었다. 결제를 마친 뒤 직원이 내민 카드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채고 다시 나왔다. 모임 인원들은 밝은 분위기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성민희는 웃는 얼굴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죄송해요, 기다렸죠?’

‘뭘요.’

직원이 엘리베이터 옆에 서서 정중하게 버튼을 눌렀다. 여러 명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게 오늘따라 거북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데, 모임 회장이 성민희에게 말을 걸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요.’

‘네?’

‘알다시피……, 이 모임 회비가 좀 비싸잖아요? 우리끼리 나눠 낸다고 해도 푼돈은 아니고. 혹시나 해서요.’

‘…….’

황당한 말에 성민희가 입을 벌린 사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 멈췄다. 화기애애한 웃음을 남기며 모두가 성민희를 남겨 두고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있던 직원은 웃는 얼굴 그대로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성민희가 멍하니 서서 내리지 않자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말은 마치 성민희가 나중에 모임 회비를 못 낼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고작 150만 원을 못 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모욕적이었다. 그걸 못 낼까 봐 자신 혼자만 여기서 따로 계산을 하게 했다고? 대체, 갑자기 왜?

성민희는 뒤늦게 내려 구두 소리를 울리며 모임 인원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냐 따지려 했을 때였다. 유리문 너머로 차 여러 대가 일제히 도착했다. 모임 회장이 슥 돌아서더니 성민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차 왔네. 조심히 가요.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보고요.’

회장의 눈길이 성민희를 위에서 아래로 슥 훑었다. 앞으로 못 만날 거라는 투가 역력했다. 그대로 모임 인원들은 직원이 열어 주는 문을 통과해 각자의 차에 올라탔다. 성민희의 차는 아직 올라오지 않은 듯했다.

로비에 혼자 남겨진 채 성민희는 노여움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계산부터 지금까지, 모든 과정을 호텔 직원들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화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오자 이유연이 있었다. 이야기를 전하자, 이유연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더니 제가 더 화를 내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에 오히려 성민희는 차분해지는 기분으로 이마를 감싸 쥔 상황이었다.

갈증이 느껴졌다. 물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었던 성민희는 의아함을 느꼈다.

“아줌마 어디 갔니? 뭘 하기에 유리가 깨졌는데도 안 나와?”

“집에 없어요.”

“지금 장 보는 시간 아니잖아.”

“몰라요, 오늘 안 나왔어요.”

“뭐?”

집에는 교대로 세 명의 가정부가 드나들었다. 아침에 나오는 가정부가 돌아간 후 낮 시간을 맡은 사람이 집에 없는 듯했다. 자릴 비운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나도 좀 아까 집에 온 거예요.”

“정말 별 게 다…….”

성민희는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는 갔지만 받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성민희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다.

“지금 어디예요?”

―저 오늘부터 출근 안 할 것 같네요.

“뭐라고요?”

―말 그대로예요. 출근 안 해요.

“뭐 하는 짓이에요? 갑자기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러게 마음을 좀 곱게 먹지 그랬어요.

“뭐…….”

혀까지 쯧쯧 찬 가정부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걸었지만 이번엔 연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앞에서 이유연이 성민희와 똑같이 닮은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유연아, 네 아버지한테 전화 좀 해 보렴.”

그러나 전화를 걸 필요도 없이 문이 열렸다. 평소보다 이른 이중권의 귀가였다. 코트를 벗던 이중권이 인상을 쓰며 두리번거렸다. 가정부가 나와 코트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보, 우선 와서 앉아요. 일이 좀 있었어요.”

“무슨 일. 이건 또 뭐야?”

“그건 제가 그랬어요.”

깨진 유리를 보는 이중권에게 이유연이 말했다. 이중권이 소파에 앉고 성민희는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이유연이 피아노 연주회에서 수모를 당한 것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가족이 겪어 본 적 없는 시련이었다.

짧은 가족회의가 이어졌다. 그 끝에 이중권이 소파 팔걸이를 탁 치며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재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날 때도 있는 법이다. 너무 깊게 받아들이지 말고, 이사장은 내가 회사로 불러서 이야기하마. 일하는 사람이야 새로 구하면 될 일이고.”

“빨리요, 아버지. 나 그것 때문에 쪽팔려서 어디 나갈 수도…….”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본 이유연의 말이 멈췄다. 갑작스런 이상한 기색에 부모 두 사람이 아들을 보았다. 시선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이유연은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다시피 하다가,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화면에 떠오른 건 어느 유명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는 윤서경과 이유온의 모습이었다.

* * *

“……유온 씨.”

나지막한 목소리에 유온은 몸을 뒤척였다. 모로 누운 채 웅크린 몸에는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커다란 손이 마른 어깨를 감싸며 가볍게 흔들었다. 꿈에서 깨어나라고 재촉하는 손길에 유온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꽉 감겨 있던 눈이 스르르 뜨여 앞을 보았다. 윤서경이 있었다.

몽롱한 정신이 일순 얼어붙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정신이, 이곳이 방 안이라는 것과 눈앞에 있는 게 윤서경이라는 사실만을 주지시켰다. 유온은 숨을 들이켰다.

“아……, 죄, 죄송해요, 방에 들어오려고, 했던 게 아니라……. 바, 바로 나갈게요, 죄송해요.”

어쩌다 그의 공간에 들어와 있었을까. 몸이 저절로 바들바들 떨렸다. 침대에서 내려가려 허둥거리는데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유온이 침실이든 서재든 발을 들이는 걸 싫어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윤서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싸늘하게 바라볼 게 분명했다. 또 거짓말을 하느냐는 얼굴로.

변명할 말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의미하게 움직이던 팔다리는 완전히 힘이 빠져 멈췄다. 마음만 조급해져서는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데 윤서경이 손을 들었다. 그대로 때릴 거라 생각해 겁먹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일순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내려와 유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습니까.”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유온은 자신이 아직 꿈을 꾸는 건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젖어 있던 속눈썹이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앞으로 또 상상 속으로 끌려갈 일이 많겠죠. 그때마다 내가 데리러 갈 테니, 같이 돌아옵시다. 현실로요.’

그 말이 윤서경의 지금 표정에 겹쳐졌다. 윤서경은 걱정스럽고 조금 침울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실이었다. 윤서경이 제게 다정한 현실. 안도감이 들었다. 거기서 더 생각을 하면 안도감은 성기게 흩어져 버릴 수도 있지만, 우선은 그것을 두 손으로 꽉 붙들어 마음속에 잡아 두었다. 유온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기억은…… 안 나요. 무, 무서운 꿈이었던 것 같아요.”

기억이 안 난다는 건 거짓말이다. 유온은 가족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버지. 아버지의 체벌은 형처럼 잦지 않았으나, 정신적으로 훨씬 끔찍했다. 귀를 울리다 못해 온몸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진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귀를 만지작거린 유온이 슬쩍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유온의 말이 거짓임을 알아차린 듯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요.”

자리에서 일어난 윤서경이 커피 머신과 차가 있는 쪽으로 가더니 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찻주전자에 허브티 찻잎을 넣고, 잔에는 벌꿀을 넣었다. 그리고 차를 잠시 우려내곤 잔에 따라, 티스푼으로 저은 뒤 가지고 돌아왔다.

“마셔요.”

찻잔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고맙습니다…….”

작게 중얼거린 유온은 잔을 받아 입김을 불어 식히곤 한 모금 마셨다. 허브티의 향과 벌꿀의 달콤함이 금세 몸에 스며들었다.

유온이 잔을 반쯤 비울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던 윤서경이 불쑥 말했다.

“그날 당신이 차라도 마시겠냐고 물었을 때, 속으로 어쩐 일인가 싶었습니다.”

“제가요……?”

고개를 갸웃한 유온은 이내 그게 이 호텔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임을 떠올렸다.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윤서경에게 차를 마실지 물었다. 그러겠다고 하는 말에 기뻐서 쿵쿵 뛰는 가슴으로 열심히 차를 우려 가지고 갔다.

“같이 마시자고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찻잔을 하나만 가지고 오더군요. 조금 황당했습니다.”

“…….”

그러고 보니 쟁반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책상에만 켜 두었다고 생각한 조명이 사실 그 뒤의 티 테이블에도 밝혀져 있었던 걸 얼핏 보았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의미를 알 수 없던 짧은 한숨도 착각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어쩌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특이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처음 봤을 때부터’라는 말이 귀를 붙들었다.

“처음이요?”

“네. 영안조선의 진수식에서 만났을 때 말입니다. 그때 당신은 날 보고 웃었습니다. 기억나요?”

“……네.”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었다. 웃음은 유온에게 미묘한 행위였다. 웃지 않으면 음침하고 불만스럽게 군다고 혼이 났고, 웃으면 웃는 얼굴이 멍청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말들을 신경 쓰다 보니 언제나 웃는 얼굴은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모습이었다. 애초 웃을 일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한눈에 반한 것 같습니다.”

“…….”

“당신이 너무 예뻐서요.”

“그…….”

뭐라도 말하려 하던 유온의 입이 닫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농담인가 했지만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윤서경의 두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어렸다.

“그 후로 행사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 아니, 당신이 간다는 행사는 다 따라다니면서, 당신에게서 눈을 떼 본 적이 없습니다. 왜 당신한테 청혼했느냐고 물었죠?”

“…….”

“그때, 도움 운운했던 것 미안합니다. 내가 도둑놈이라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었거든요.”

“도, 도둑.”

“내 배경을 이용해서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하는데 도둑놈이죠. 대체로 주위에서 그런 반응이었습니다.”

“아니, 하지만…….”

“그런데도 내 청혼이 기뻤다고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읏.”

가슴이 확 시려 왔다. 아니, 시린 게 아니라 뜨거운 건가? 너무 뜨거워서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손을 가슴 위로 올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을 때렸다. 이 소리가 윤서경에게 들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여기서 자신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윤서경의 말은 너무나 다정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이 과연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너무 가슴이 뛰어서……. 유온은 더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윤서경은 유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여, 가슴 위에 얹힌 유온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도 당신 심장 뛰는 게 느껴집니다.”

“…….”

“조금 더 들려줘요…….”

평소의 그답지 않은, 조금 약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윤서경은 유온을 끌어안아 이번엔 가슴에 귀를 댔다. 손등 위로 닿은 귀의 감촉이 이상했다. 잠시 그대로 있던 윤서경이 부드럽게 유온의 손을 끌어당겨 깍지 껴서 잡곤, 눈앞의 사람이 호흡하며 살아 있다는 가장 큰 증거를 귀에 담았다.

윤서경의 손은 너무 크고 마디가 굵어서 깍지를 끼면 손가락 사이가 조금 아플 정도였다. 그럼에도 놓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래도록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던 윤서경이 가슴에 입을 맞췄다.

유온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심장이 뛰는 걸 달갑게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달랐다. 유온은 무심코 손을 들어 윤서경의 머리를 끌어안고 싶은 걸 참았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어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박동이 느릿해지고 있었다. 윤서경의 심장이 뛰는 속도에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유온은 직접 손이나 귀를 대지 않아도 그의 맥박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느리지만 평소보다 빠르다. 심장이 같은 속도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따뜻한 물에 들어온 것처럼 손끝부터 몸이 녹아내렸다. 윤서경이 고개를 들고 유온에게 입을 맞췄다. 저도 모르게 벌린 입 안으로 혀끝이 들어왔다. 키스는 지난 몇 번이 그러했듯 달콤했다.

거기서 무엇이든 행위가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유온은 긴장했다. 그러나 입술이 부어오를 만큼 긴 키스를 하고 난 뒤 윤서경은 유온을 안고 자리에 누울 뿐이었다. 그대로 그의 품속에 누워 눈을 마주쳤다.

유온은 다른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라면 어떻게든 똑바로 볼 수 있으나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눈을 보는 게 어려웠다. 항상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옆이나 바닥, 또는 그보다 먼 곳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굴었다.

윤서경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그는 자신을 늘 차갑게 보았었기에 더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인지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온몸을 적실 정도로 강한 체향을 느꼈다. 이것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고 있는 듯했다.

꽤나 강렬했다. 체향은 닫아 두는 게 내뿜는 것보다 힘이 들지만 이 정도로 내면 그 또한 편치는 않을 터였다. 유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서경 씨……. 체, 체향, 힘들지 않으세요……?”

“갑자기 왜요.”

“오늘따라 더 강한 것 같아서…….”

그러자 윤서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항상 이 정도였습니다. 여길 다 채우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요.”

항상……? 이번엔 유온이 고개를 갸웃할 차례였다.

“그, 그래요?”

“그래요. 당신이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네……? 하지만 못 느꼈는데…….”

입욕제에서 그의 향을 느끼고, 아주 희미하게 스치는 향을 조금씩 맡고, 그가 이곳에 오면 조금 강해진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 후로 점점 짙어져서 지금 정도가 된 거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항상 윤서경의 향에 민감한데.

“이젠 느껴집니까?”

의아한 속에서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이 유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됐습니다.”

“…….”

“당신은 형질 감각이 떨어져서 다른 사람의 체향을 온전히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 확 느끼거나 하는 정도죠. 그때 진수식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체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보단 자주, 잘 느끼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정상 범주는 아닙니다.”

“그럴 리…….”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다 유온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런가? 다른 알파나 오메가와 대화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한 번도 이상한 걸 깨닫지 못했다. 두 형이나 부모님의 체향은 가족이라 못 느끼는 거라 생각했고.

“당신은 타인의 체향을 어떤 식으로 느낍니까.”

“가, 가끔 확…… 강하게 느껴져요.”

“원래 체향은 체취와 조금 다를 뿐 비슷합니다. 어딜 가나 자연스럽게 타인의 향이 느껴지죠.”

“…….”

생각해 보면, 형질이 불안정해서 먹는 약만 해도 몇 종류였다. 그런 종류 약의 가장 명확한 작용도 부작용도 타인의 체향에 둔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향에 민감한 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윤서경의 향에 있어서는 더욱. 왜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호텔에 처음 온 날 불편한 옷을 입고도 오래 잠들었던 게 떠올랐다. 그 후로 묘하게 편안했던 것도, 습관처럼 먹던 약을 며칠 동안 아예 잊고 지냈던 것도. 그게 다 윤서경이 풀어 둔 체향 때문이었다면 이해가 갔다.

“고, 고마워요.”

“고마워할 일이 아닙니다.”

윤서경이 유온을 추슬러 안았다. 가벼운 몸이 쉽게 그에 딸려가 그와 더욱 밀착했다.

“……아니, 고마우면 당신 향을 맡게 해 줘요.”

그의 말에 유온은 당황으로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체향 같은 걸 맡아서 뭐가 좋을 게 있다고……. 고맙다는 인사치고는 이상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니 안 들어줄 수도 없었다. 유온은 늘 닫고 있어서 풀어내는 쪽이 더 어색한 체향을 조금 흘렸다. 윤서경이 멈칫했다. 향이 이상해서겠지. 그래서 안 내보내겠다고 한 건데.

조금 풀이 죽으며 향을 다시 거두려 했지만 윤서경은 고개를 젓곤 유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마치 즐기기라도 하듯이 코끝을 누르며 혀를 내밀어 가볍게 핥기도 했다. 입을 열어 입술 사이로, 또는 이로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정말로 유온의 향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사랑해서 이런 향이라도 좋아해 주는 걸까. 향을 내보이는 게 너무 부끄러웠지만 윤서경이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그만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 유온은 얼굴을 붉혔다.

“…….”

한참 동안 목덜미를 핥던 윤서경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떼고, 유온의 뺨이며 턱, 입술, 콧등과 이마, 귀에 입맞춤했다. 어느새 몸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유온의 머리를 쓸어내린 그가 물었다.

“이정윤 씨나 성한영 씨와는 친해졌습니까.”

“아……. 이, 이정윤 씨랑은 조금……. 성한영 씨는 만날 일이 별로 없어서요…….”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일 관계로 오래 만나야 할 테니, 천천히 친해져 봐요. 당장 하라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밖에 나가지 않으니 성한영과는 사이가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지만(원래 무뚝뚝한 사람 같기도 했다) 이정윤과는 사적인 메시지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협소하기 짝이 없던 인간관계가 한 뼘 정도나마 넓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서경 씨, 정말 저한테 비서가 세 명이나 필요할까요……?”

경호원은 그렇다 쳐도 비서는 과연 필요한 건가 싶었다. 그것도 세 명이나.

“필요할 겁니다.”

“전에도 금방 없어졌는데.”

이전에도 윤서경과 결혼할 때쯤 안주인이 할 일을 수행하기 위해 비서가 여럿 붙었다. 그러나 점점 윤서경이 유온이 자신의 배우자로서 대외적인 자리에 나가는 걸 원치 않았고, 자연스럽게 비서도 필요 없게 되었다. 유온의 말에 윤서경이 순간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와는 다를 겁니다. 그땐……, 미안했습니다. 이번에도 비서실은 외부 행사 관련 일정을 주로 다룰 거고 최대한 당신이 노출되지 않도록 일정이나 동선을 조절할 거지만, 그때와는 이유가 다릅니다. 나와 결혼하면 어쩔 수 없이 사람과 교류하고,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야 할 일이 생겨요. 그걸 당신이 소화할 수 있는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팀입니다.”

“아…….”

“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알아서 일하고 있을 겁니다.”

유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이 그렇게까지 설명하고, 일자리 이야기까지 하는데 더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정윤 씨랑은, 조금 친해진 것 같아요.”

“잘됐군요.”

뭐라도 긍정적인 말을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자 윤서경이 곧바로 답했다.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죠. 잘했습니다. 이정윤 씨도 당신과 가까워져서 기쁠 겁니다.”

“그, 그럴까요…….”

정말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유온은 눈을 굴렸다. 이정윤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말할까 말까, 짧은 순간에 엄청난 고민이 지나갔다. 보통 이렇게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땐 하지 않는 게 나았다. 하지만 입이 멋대로 벌어졌다.

“이, 있잖아요, 서경 씨. 요새, 웨딩 촬영…….”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은 짧은데도 뒤로 갈수록 흐릿해지고 소리가 잦아들었다. 끝까지 다 말하기도 전에 후회가 밀려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윤서경은 유온이 그대로 넘어가도록 두지 않았다.

“요새 웨딩 촬영? 요새는 특별한 게 있다고 합니까. 나도 웨딩 촬영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군요. 이정윤 씨한테 들은 모양인데, 말해 봐요. 말 못 하겠으면 이정윤 씨에게 물을 테니까.”

“…….”

가끔 그는 지나치게 예리했다.

“손목에 레이스 리본을 매 주고 찍는 사람들이……, 많대요…….”

“레이스 리본?”

말하고 난 뒤 유온은 또 후회했다. 온몸을 버둥거리며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저런 걸 하자고 조르는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아니,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이정윤이 보내 준 사진 속,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리본을 맨 여러 쌍의 손목이 떠올랐다. 그게 부러워서 말해 본 건데…….

“예쁜 레이스로 골라야겠네요. 리본은 잘 묶습니까?”

“아…….”

그 대답에 유온은 물끄러미 윤서경을 보았다. 그의 눈매가 희미하게 휘어지며 장난기를 띠었다.

“나는 잘 묶는 편은 아닌데.”

유온의 손이 꾸물거리며 제 가슴 위로 올라왔다. 유온은 거절당하는 것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상대가 좋다고 말해 주면 뛸 듯이 기뻤다. 하물며 이렇게 큰일에 스스럼없이 좋다고 해주니 마음이 말랑말랑해질 수밖에 없었다.

윤서경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손가락으로 뺨을 쓸었다. 큼직한 손과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목에 자신이 리본을 매는 상상을 했다. 너무 달콤하고 행복한 일이라서 그날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 취소되거나 흐지부지되거나…….

“무슨 생각 합니까.”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자요.”

유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정말 웨딩 촬영을 할 수 있을까, 로부터 시작하여 온갖 부정적 상상이 머리를 채웠지만 예전처럼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윤서경이 유온의 머리를 조금 들어 팔베개를 했다.

머리가 무겁게 닿으면 그의 팔이 아플 것 같아서 거의 들고 있다시피 했다. 힘을 주고 있느라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늘어졌다.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유온은 윤서경의 팔에 머리를 댄 채 누웠고, 거기서 또 몇 분쯤 지났을 땐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 * *

“어, 이사……요?”

“네. 언제까지 호텔에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점심을 먹고 얼마 후 윤서경이 돌아왔다. 직원이 올라와 차와 케이크를 내주고 간 후 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슬슬 이사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신혼집은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G호텔 레지던스로라도 옮기면 어떨까 합니다.”

G호텔은 부경의 호텔 체인 중 하나로 지금 머무는 호텔만큼 높은 층수를 자랑했다. 거리도 여기서 가깝고, 다른 건 레지던스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였다.

“여기 부, 불편하세요?”

“아무래도 집이라는 느낌은 덜 들지 않습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하지만.”

윤서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부경의 주력 사업 중 하나인 호텔 체인을 맡아 경영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수백 개의 호텔을 가진 사람이 말하기엔 이상한 것 같기도 한데, 오히려 그런 그이기에 더 집과 호텔을 명확히 구분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전 어느 쪽이든 좋아요…….”

유온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호텔이든 레지던스든, 좁은 원룸에서 지낸다고 해도 윤서경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다 좋았다. 윤서경에게 작은 원룸 같은 건 엄청나게 안 어울리긴 했지만. 좁디좁은 원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윤서경을 상상하다 말할 수 없는 어색함에 입꼬리를 우물거리고 있는데, 윤서경의 손이 눈앞으로 뻗어왔다.

눈을 둥글게 뜬 순간 윤서경은 유온의 터틀넥 목을 슥 잡더니 끌어내렸다. 유온은 놀라서 윤서경의 손을 잡을 뻔하다가 겨우 멈췄다.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손이 움찔움찔 머뭇거렸다.

목은 어제 윤서경이 입맞춤한 흔적으로 얼룩덜룩했다. 정작 빨리고 있을 땐 축축하다, 저리다, 기분 좋다, 그런 것만 느끼느라 미처 몰랐건만 남은 자국이 상당했다. 입술과 혀만으로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딱히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 자국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게 왠지 부끄러워 거의 턱까지 올라오는 터틀넥을 찾아 입은 차였다.

윤서경의 지긋한 시선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국 위를 더듬었다. 유온은 그의 손을 밀어내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점점 뻣뻣해지는 몸에서 힘을 빼려 노력했다. 긴장으로 거칠어질 것 같은 숨결을 고르는 것도 힘들었다.

“……집은 같이 보러 가겠습니까. 상황에 따라선 1년 정도는 살게 될지도 모르니 당신도 봐 두는 게 좋겠죠.”

이내 윤서경이 그 분위기에서 빠져나가듯 몸을 물리며 말했다. 유온은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긴장을 털어내고 터틀넥 목을 가다듬어 다시 옷깃이 턱까지 올라오도록 정돈했다. 그러고 난 후 윤서경의 질문 내용을 떠올렸다.

“아, 저, 전 아무 데나 괜찮아요. 보러 가지 않아도 돼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유온은 어디라도 괜찮았다. 정말로, 해가 들지 않는 단칸방이라도. 아니면 어딘가 어두침침한 동굴이나 바다를 떠도는 배 위라도. 다만 그곳이 윤서경에게 어울리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자신은 아무리 초라한 곳이라도 괜찮지만, 윤서경에겐 최소한 이 호텔 정도로 화려한 곳이 아니면 안 된다.

하지만 ‘서경 씨에게 어울리는 곳이면 좋겠어요’라는 말도 왜인지 조심스러웠다.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자 윤서경이 가볍게 말했다.

“그럼 G호텔로 하죠. 매번 룸서비스 음식만 먹는 것도 질리지 않습니까. 그쪽엔 음식 하는 사람을 따로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1년 정도 거주하기엔 괜찮을 거예요.”

“네…….”

“사진이 있는데, 보겠습니까?”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이 휴대폰을 몇 번 만지더니 유온에게 내밀었다. 지금 있는 호텔의 스위트룸보다 장식이 적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윤서경이 말한 것처럼 확실히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틀러나 컨시어지는 그쪽에도 있으니 그 부분에서 불편은 없을 겁니다.”

또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가족 여행을 갈 땐 이곳처럼 버틀러 서비스가 딸린 스위트룸으로만 갔지만, 유온이 그런 서비스를 이용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어떤 것까지 부탁해도 되는 건지 몰랐었는데 여기서 지내는 몇 달 동안 그래도 익숙해진 듯했다.

게다가 이정윤을 비롯한 비서까지 있으니 정말 제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전 같았으면 그게 너무 불편하고 몸 둘 바를 몰랐을 텐데 사람이란 정말 좋은 것에 빨리 익숙해진다. 심지어 윤서경은 유온이 그들에게 무언가 일을 부탁할 때, 처음에 이한영이 가져온 취미 생활 용품 중에서 재료를 좀 더 가져다 달라고 말하는 단순한 부탁만 해도 유온을 칭찬했다.

사실 칭찬은 그뿐이 아니었다. 유온이 한 번도 자신이 잘한 일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애초에 이유온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그리 후하게 내린 일은 단 한 번도 없긴 했으나)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를 들면 대체로 남기는 편인 식사를 깨끗이 비운다거나, 수영장에서 잠깐이나마 물에 뜬다거나. 그 외에 어설픈 솜씨로 만들어 놓은 입체 퍼즐과 소이 캔들 같은 걸 마치 진심인 것처럼 잘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우리 호텔 체인으로 가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테니까요. 그쪽이 이곳보다 보안도 철저하고요. 또 당신은 야경 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기보다 고층이니 더 괜찮을 겁니다.”

“네……. 좋아요. 저, 그,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에요.”

“마음에 든다면 다행입니다.”

윤서경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이 스위트룸도 이미 호텔에서 가장 높은 층인데 이곳보다 높으면 조금 현기증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흘끗 창밖을 보던 유온은 이어진 윤서경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조금 늦을 겁니다. 9시쯤 돌아올 것 같으니, 피곤하면 먼저 자고 있어요.”

“9시요…….”

아무리 그래도 9시에 자진 않는다. 그래도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곤 나가는 윤서경을 배웅했다. 현관문이 닫힌 뒤 돌아서자 햇살로 가득한 거실이 보였다. 한낮에 보이는 풍경도 밤과 느낌은 다르나 아름다웠다. 유온은 차 한 잔을 끓여서 너른 창틀에 앉아 오가는 차량과 점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을 구경했다.

일주일 후에는 윤서경과 외출하기로 했다. 외출이라고 해야 할까, 유온의 안에선 상당히 중요한 행사였다. 성당을 개조해 만든 스튜디오에서 실내 웨딩 촬영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외국으로 나가 야외 촬영을 할 예정이었다.

스튜디오에는 정원이 있고 그곳에서의 촬영도 예정되어 있지만, 만약 날씨가 너무 추우면 다시 생각한다고 했다.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유온은 그날 부디 날씨가 춥지 않기를 기도했다.

* * *

화명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나날이 퍼져 가고 있었다. 부도까지 예측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었다. 더하여 윤서경이 곳곳에 압력을 가해 둔 덕분에 그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던 것들, 예를 들면 모자란 실력으로 연주회에 초대되는 것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 크고 작은 선물을 받는 것까지 전부 딱 끊어졌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아들이 윤서경과 약혼한 사이이니 그들은 부경의 친인척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도움을 주는 건 고사하고 묘하게 부추기는 듯한 느낌까지 보였다. 때문에 화명의 상황은 악화 일변도인데, 약혼자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추측과 소문은 자연스럽게 ‘화명 일가와 막내아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쪽으로 번졌다. 만일 평소에 가족이 화목한 모습을 보였다면 올라오다가도 설마, 하고 사라질 소문이었다.

그러나 윤서경만 해도 처음 만난 이후 이유온을 관찰하며 무언가 이상한 가족이라 생각했다. 더 오래, 자세히 본 사람들이라면 가족 안에서 이유온이 붕 떠 있다는 걸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윤서경은 책상의 전화기 옆을 보았다. 낮은 유리병에 담긴 캔들이 그곳에 있었다. 온통 필요한 물건만 있는 사무실 안에 드라이플라워로 장식한 캔들은 놀라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유온이 만든 물건이었다. 그는, 본인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손재주가 좋았다. 피아노도 잘 치고 머리도 좋고 아무튼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대표의 사무실에 캔들 같은 게 있다는 사실 자체에 경악하던 비서와 임원들도 슬슬 익숙해졌다. 입단속을 시킨 것도 아닌지라 약혼자가 만든 캔들을 그 윤서경 대표가 책상에 장식해 뒀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내렸다.

이런 식으로 윤서경은 약혼자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몸이 약한 약혼자 때문에 병원 의료진과 호텔 조리실도 직접 관리하고, 그와 있을 시간을 빼기 위해 스케줄을 여러 차례 조정하고, 어쩌다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약혼자의 전화를 받을 때 완전히 달라지는 목소리까지, 홍보팀에서 꾸며 낸 이미지라고 하기엔 많이 세심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약혼자는 보호하고 화명을 공격하려 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 화명의 막내아들과 결혼하려고 한 것부터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집안끼리의 결합은 무엇이든 양측에 이득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부경과 화명이 사돈으로 묶였을 때 부경은 아무것도 득 볼 일이 없었다.

그 전에 윤서경이 그의 기준으로 쓸데없는 자리에 들락거렸는데, 거기에 항상 이유온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캐치해 수군거렸다. 그에 이어 이런 일이 일어나니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곧바로 이유를 짐작했다.

‘윤서경이 약혼자의 본가를 아예 치워 버리려 할 정도로 가족 사이가 험악하다.’

상당히 맞는 말이었기에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증권가에는 소위 말하는 지라시가 매일 떠돌았고, 메신저로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소문에서 화명은 이미 도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사람들의 입을 탔다. 그 뒤에 부경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화명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캔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괜히 뚜껑을 열어 봤을 때였다. 내선이 들어오며 전화기가 깜빡거렸다. 사무실 밖에 앉아 있는 비서실 부실장이었다.

“네.”

―대표님, 로비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미리 약속은 없으셨다고 합니다.

“누굽니까?”

―화명 이유연 씨입니다.

윤서경은 캔들 뚜껑에 올라가 있던 손을 내렸다.

“이유연이 여긴 왜 찾아왔지?”

―죄송합니다, 그것까진 말씀을 안 하셔서…….

“로비에 와서 뭐라고 하던가요.”

―본인이 왔으니 대표님께서 만나지 않을 리 없다고요. 대표님께 그대로 전달하라고 하셔서 말씀드립니다.

코웃음이 나왔다. 만나 주지 않을 리 없다는 자신감이 어처구니없었다. 윤서경 자신도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상황과 상대는 파악하는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 약속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와 들여보내 달라 어깃장을 놓을 정도는 아니다.

“돌려보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서류를 읽으며 윤서경은 흘끗 전화기를 확인했다. 이유연이라면 절대 그냥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다시 내선이 들어왔다.

“네.”

―대표님, 죄송하지만 이유연 씨가…….

“못 가겠다고 버팁니까?”

―네. 왜 제대로 전달하지 않느냐고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스크 직원들이 괜한 수고를 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은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간다. 엘리베이터가 붐비는 걸 피하기 위해 조금 일찍 내려가는 직원들도 많으니, 이유연은 그 시선에 노출된 채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올려 보내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제대로 전달을 안 한 거야. 날 안 만나겠다고 할 리가 없어. 그런 생각을 하며 즐거운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있을 이유연이 떠올랐다. 윤서경이 파악한 이유연은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그 자신감은 상당 부분 이유온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찾아가서 누군가를 불러낸다는 건 떠올리지도 못할 이유온을 생각하니 심사가 말할 수 없이 뒤틀렸다. 윤서경은 서류를 읽던 시선을 멈추고 책상 위의 캔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비서가 이유연의 도착을 알렸다.

“대표님! 바쁘신데 죄송해요. 잘 지내셨어요?”

이유연은 한껏 꾸민 모습으로 나타났다. 화사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목소리에도 윤서경은 시선을 흘끗 들 뿐이었다. 사무실 문은 열린 채였고, 이유연은 들어와서 앉으라는 말을 기다리며 문가에 서 있었다. 윤서경이 서류에만 시선을 둔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분위기는 차츰 어색해졌다. 열린 문 너머에서 비서들이 언제 차를 가지고 들어가면 될지 가늠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대표님?”

살짝 뒷짐을 진 이유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거절당해 본 적 없이, 예쁘고 쾌활하다는 평가만 듣고 살아온 티가 났다. 이유온과 다르게.

“아버지가 식사나 같이하자고 하세요. 유온이 본 지도 오래됐구요. 이번에 어머니가…….”

그리 궁금하지 않은 말이었다. 윤서경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분위기가 명백한데도 이유연은 기죽지 않고 소파 쪽으로 다가와 앉으려 했다. 윤서경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앉으라고 말했던가요?”

“…….”

이유연의 얼굴이 웃는 표정 그대로 굳었다.

“사실 원래 아버지가 오시겠다고 했는데, 제가 간다고 말씀드렸어요. 대표님이 아버지보단 제가 더 편하실 것 같아서요.”

경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연은 곧바로 웃음을 지으며 소파 옆을 서성거렸다. 윤서경이 책상에 있으니 자의로 앉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이. 그러나 시선이 흘끗 열린 문 밖을 향했다. 자신에게 안 좋게 집중된 이목이 편치 않은 듯했다.

“저 목마른데, 차도 안 주세요?”

윤서경은 아직도 사근사근한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문 밖을 향해 눈짓했다. 재빨리 다가온 비서가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유연의 눈가가 다시 떨렸다. 손님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해서였다.

“용건이 뭡니까.”

“그냥 얼굴이나 뵈려고 온 거예요. 제 동생이랑 결혼하실 분인데, 인사도 못 드리나요. 그날 식사 자리에서 분위기가 좀 안 좋았잖아요. 마음에 걸렸어요.”

“아, 그때.”

그러고 보니 얼굴을 직접 보는 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생각할수록 대단했다. 그 자리가 마지막 만남이었는데 이런 태연한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니.

“이유연 씨.”

“네?”

“내가 만나 줄 거라고 생각하고 왔습니까?”

“……당연하죠. 안 만나 주실 이유가 없지 않나요?”

“당신 집안사람들 염치는 내 약혼자가 전부 가지고 온 모양입니다.”

“…….”

“그래서 용건은.”

이유연의 귀가 붉었다. 모욕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듣는 게 처음일 것이다. 용건이야 뻔했다. 화명이 흔들리는 원인이 윤서경이라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살피러 왔겠지. 이전과 달리 이들은 이유온을 이용해서 수작을 부리지 못했다. 또 부경이 어쩔 수 없이 화명을 돕지도, 주가를 올려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서서 무너뜨리고 있다.

하지만 드러내 놓고 파혼을 요구했으면서 일이 이렇게 되니 어떻게 된 일인가 득달같이 달려오는 꼴이 우스웠다. 그때는 기억이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이유온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그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꺼낸 파혼이라는 말에 화가 치밀었다.

“요새 별로 안 좋은 소문이 돌잖아요, 대표님. 들으셨죠?”

“안 좋은 소문이라면?”

“유온이랑 저희 집안에 대해서요. 무척 불미스럽던데요. 유온이가 들으면 충격이 클 거예요. 또 유온이한테도 좋을 게 없고요.”

“나쁠 것도 없죠. 유온 씨한테 돌아올 타격이 있다면 내가 알아서 제어할 거고.”

“집안 사업이 흔들리는 게 유온이한테 좋진 않을 것 같은데요?”

“이유연 씨.”

“…….”

윤서경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이유연을 보았다.

“내가 당신들 가족이랑 유온 씨를 연결해 생각하고 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대표님.”

“내가 내 귀중한 약혼자의 가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할까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유연에게서 눈을 돌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내선을 누르자 곧바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안내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이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차는 고사하고 소파에 엉덩이조차 못 붙인 불청객을 비서가 정중하게 바깥으로 안내했다. 이유연은 멍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자존심이 있어서 거기서 더 버티지 못하고 분노로 새파랗게 질린 채 비서를 따라 나갔다.

볼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이유연에게선 괜한 오기도, 불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이 거절당할 리 없다는 생각으로 부친을 대신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이유온의 사고 구조도 이상하지만 이유연은 한층 이상했고 남에게 피해까지 주는 종류였다.

윤서경은 캔들을 보며 이유온을 생각했다. 파는 물건처럼 잘 만들었으니 회사로 가져가도 되는지 묻자 그는 일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다가 원한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만든 물건이 남의 눈에 보이기 부끄러운 쓰레기라도 된다는 듯한(이런 표현은 미안하지만 정말 그것 말곤 설명할 말이 없었다) 얼굴이었다.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아니, 같은 집에서 자라서인가.

오늘 이유온은 외출을 하기로 했다. 윤서경이 아니라 비서와 경호원만 데리고 하는 외출이었다. 윤서경과 함께 호텔로 오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그에게 붙여 놓은 비서와 경호원 여섯 명은 윤서경이 꽤나 고심해서 고른 인력이었다. 이전엔 이한영이 추리는 인물을 적당히 붙였을 뿐이었지만, 이번엔 직접 면접을 봤다.

원래 운명이고 뭐고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 윤서경은 요즘 운명, 경우의 수, 우연, 이런 단어를 꽤 생각한다. 두 사람은 그날 호텔에서 만난 것, 그 하나로 모든 게 엇갈렸다. 그 일이 없었을 때 윤서경은 이유온과 가족들의 문제를 지금만큼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때의 만남으로 이유온의 뺨을 때린 게 누구인지 찾아보기 위해 상견례 자리에 그의 두 형도 참석해 주기를 요구했다. 분명 첫 번째로 상견례를 했을 땐 식사 메뉴에 무화과가 없었다. 아마 이유건이나 이유연의 취향을 미리 고려해서 추가되었을 것이다.

그게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또 먹으려 하는 이유온과, 그걸 전혀 알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며 그를 무작정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삶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때로 이렇게 사소하다.

시간이 돌아갔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었으나 이미 일어났으니 현실이다. 처음엔 관련 주식이나 개발 분야에 투자를 할까 했지만 그런 걸 진지하게 연구하는 기관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미래성이 불투명했다.

그리고 타사의 경영이나 개발될 특허, 주가, 그런 건 딱 자신이 미래를 보고 돌아왔다는 걸 알아차릴 만큼의 정보만 머릿속에 남아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굳이 그런 정보가 있어야 경영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상관없었으나.

윤서경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채 한 번 끝나기도 전에 이한영이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유온 씨는?”

―잘 계시다고 합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묻는 것이라서인지 이한영은 약간 질린 기색이었다. 하지만 윤서경으로선 이럴 법도 했다. 외출도 거의 안 하던 사람이 오늘은 자신도 없이 밖에 나갔으니. 물론 이유온이 멀쩡한 어른이고 조금 소심할 뿐 바보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캔들을 좀 더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 * *

윤서경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유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바빴다. 커다란 온실 벽 위로 드리워진 덩굴식물, 유온이 끌어안아도 반조차 다 감싸지 못할 굵은 나무, 그 아래 동글동글하게 자란 선인장이며 키가 작은 관목, 구불구불 엉킨 채 위아래로 뻗은 나무줄기. 전국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식물원이었다.

“앗, 유온 씨. 저것 좀 보세요. 바나나.”

바나나……? 아무리 온실이라도 서울에서 바나나라니. 놀라서 이정윤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정말로 높은 나무에 바나나가 매달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아래를 지나며 웃거나 사진을 찍었다. 심지어 성한영도 고개를 든 채 심각한 얼굴로 바나나를 보고 있다.

며칠 전 윤서경이 갑자기 외출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와 같이 나가는 건 줄 알았더니, 비서와 경호원만 데리고 가라는 말이었다.

나가기 하루 전날까지 유온은 긴장했다. 윤서경과 함께도 아니고 목적지인 식물원을 통째로 빌린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없고 한적한 시간으로 골랐다지만 유온의 대인기피 성향은 상당했다. 가족들과 살 때, 특히 대학을 자퇴한 후로는 제대로 된 외출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그날 윤서경을 만나러 나갈 땐 정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몸이 먼저 움직인 거였다.

외출의 목적을 윤서경은 유온이 활동 반경을 조금 넓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활동 반경을……. 어쩐지 보호하던 야생동물을 자연에 풀어놓을 때 같은 표현이었지만…….

자신에게도, 윤서경에게도 걱정스러운 외출이었으나 막상 나오자 익숙한 사람 둘이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인지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평온했다.

덕분에 유온은 식물원이라는 걸 처음 제대로 구경했다. 유온의 가족들은 여행을 자주 갔다. 세계에서 가장 크거나, 아주 희귀한 나무가 있다는 식물원도 갔었다. 어느 한 군데 자세히 본 곳은 없지만. 유온이 기억하는 건 그중에 바닥의 돌 색깔이 유독 예쁜 곳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저 선인장은 밖에서 살 수 있대요. 사 갈까요?”

“아, 아니요, 잘 못 기를 것 같아서…….”

기르기 쉬운 식물이라도 제 손을 타면 금방 죽어 버릴 것이다. 선인장은 누구나 기를 수 있다고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하고 아쉬운 기색을 보이는 이정윤과 함께 나무 하나를 막 지나쳐 가려 했을 때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기분 탓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게. 유온은 흠칫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누가 자신을 쳐다보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시야는 성한영과 이정윤에게 가려졌다. 자신이 식물을 구경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누가 쳐다보려 하면 두 사람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온 씨 얼굴을 알아보고 신기해서 쳐다보는 것 같아요.”

“…….”

“사실 저라도 유온 씨 지나가면 쳐다볼 것 같아요. 사인해 달라고 했을 걸요?”

이정윤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사인이라니…….”

“유온 씨 유명해요! 원래 은근히 유명했는데, 전에 웨딩 촬영 스튜디오 사진 나온 후로 더 그래요.”

“…….”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명하다니,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가시로 된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유온이 소리도 없이 끙끙거리자 이정윤이 재빨리 말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

“제가 본 것도 다 칭찬하는 말들이었는걸요. ‘저 정도는 되어야 윤서경이랑 결혼한다’ 같은 거? 지금 쳐다본 사람들도 신기해서 그런 거예요. 길 가다가 유명한 사람을 마주친 거잖아요.”

“유명한…….”

“유명하죠! 예쁘고, 집안도 좋고. 대표님이 잘생기지 않았으면 도둑놈이라고 난리 났을 걸요?”

윤서경도 자기 자신을 도둑놈이라고 칭한 게 갑자기 떠올랐다. 도둑이라니, 말도 안 되고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윤서경은 유온의 구원자면 구원자였지 절대 도둑 같은 게 아니었다.

“……저, 이, 이만…….”

유온이 웅얼거렸다. 또 누가 쳐다볼 것 같아서 조용한 차 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온의 말에 성한영이 먼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에 또 올까요? 아직 저쪽에 절반 정도 남았는데, 거기가 여기보다 신기한 식물이 많대요. 나중에 거기도 보러 가요.”

이정윤의 말에 유온이 출입구로 가려던 발을 멈췄다. 지금까지 본 식물도 처음 보는 게 많았는데 그보다 신기한 식물들이라니. 잠시 타인의 시선과 식물 구경 사이에서 갈등하던 유온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오늘 보고 갈게요…….”

“정말요? 와.”

이정윤은 자신에게 무척 좋은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손뼉을 짝 치더니 유온을 다음 온실로 안내했다. 성한영도 말없이 따라왔다. 나머지 절반엔 이정윤이 말한 대로 정말 신기한 식물이 잔뜩 있었다. 여기에 정신이 팔렸다가, 저기에 정신이 팔렸다가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식물원을 나서며 이정윤이 다시 선인장이나 다육식물을 사 가겠느냐 물었지만 유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호, 호텔에 가서 먹을게요.”

식물원에서 거의 네 시간을 있었다. 유온의 체력으론 제법 힘든 일이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유온은 외투를 벗어 옷장에 걸어 두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오래도록 몸을 씻고 나자 몇 시간 동안 걸어 다닌 피로가 조금 녹아내렸다. 샤워 가운을 걸친 뒤 입고 나갔던 옷을 세탁물로 내놓기 위해 나왔을 때 유온은 또다시 깜짝 놀랐다. 윤서경이 또 소리도 없이 들어와서 서 있었다.

“매번 놀라네요.”

웃음을 짓는 윤서경을 향해서 당신이 너무 소리 없이 나타나는 거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온이 입을 열기 전에 윤서경은 성큼성큼 다가와 유온을 안아 들었다.

“식물원은 재미있었습니까? 기념품이라도 사 오지 그랬어요.”

“살 게 없었어요…….”

기념품으로 있는 건 작은 화분 여러 종류와 볼펜, 연필, 메모지 같은 조잡한 문구류, 그리고 식물원과 조금도 상관없어 보이는 원석 팔찌와 목걸이 따위였다.

“나가기 전에 잠시 들렀습니다. 지금 바로 포항으로 출발해야 해서요.”

“네.”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기로, 포항에도 큰 규모의 호텔이 있었다. 그곳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듯했다. 윤서경이 일 때문에 바쁜 건 늘 있는 일이었지만, 포항까지 간다고 말하니 어쩐지 거리가 많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쓸쓸했다.

“바다 좋아합니까?”

“네……. 좋아해요.”

탁 트인 바다도 넓은 들판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윤서경은 샤워 가운 차림의 유온을 안아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요.”

“같이하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네요. 저녁 맛있게 먹고, 머리 잘 말리고 자요. 이번엔 일정이 촉박하지만, 다음에 여유가 있을 때 같이 가 보도록 하죠. 호텔에서 보이는 풍경이 나쁘지 않습니다. 바다도 가깝고.”

어린아이에게 하는 듯한 말을 한 뒤 윤서경은 유온에게 짧게 입 맞추곤 외투를 갈아입고 다시 나갔다. 그의 체향이 남은 침실에 홀로 남겨진 유온은 그가 말한 대로 저녁을 남기지 않고 먹고, 머리카락도 꼼꼼하게 말린 뒤 자리에 누웠다.

푹신한 베개를 베고 누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윤서경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신경이 쓰였다. 러트 때를 생각하면 그의 성욕은 보통 사람과 똑같은 듯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이상한 기분이다. 꼭 예전에 결혼 생활을 할 때 같았다. 그때와는 윤서경의 태도가 너무나 다르긴 하지만…….

미열이 조금 있었지만 약을 찾아 먹는 대신 일찍 잠들기로 했다. 오늘 외출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힘들어서인지 오히려 눈이 감기지 않았다. 미등 하나만 켜 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한참 뒤척거리던 유온은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러나 그 잠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잠이 안 와 뒤척이던 시간만큼도 자지 못한 채 유온의 눈이 뜨였다. 피부에 얇게 땀이 배어 있었다. 미열 수준이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단순한 열이 아니었다. 유온은 잔뜩 당황해선 입을 벌린 채 벌떡 일어나려 하다가 휘청였다. 몸이 빠르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오랜만에 오는 것이라도 이게 무슨 증상인지 모를 리 없었다. 히트 사이클이었다. 황망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온은 침대에서 툭 떨어지듯이 빠져나왔다. 약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먹기 위한 약이 몇 종류나……. 그러나 침실을 다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주치의가 처방했던 약은 윤서경이 전부 버렸다.

‘아냐, 새로 받은 약…….’

그중에 비슷한 약도 있었던 것 같다. 유온은 멍한 정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새 약을 어디에 보관했는지 떠올리고 침대 옆 서랍장을 열었다. 거세게 열린 서랍 안에서 약이 달그락거렸다.

다행히 찾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호르몬 조절제와 억제제를 겸하는 약이었다. 유온은 약 뚜껑을 열었다. 여러 알을 한꺼번에 쏟아 넣고 싶은 걸 참으며 한 알만 꺼내 물을 찾았다. 약을 삼킨 뒤 사이드테이블에 물병과 약통을 올려놓고 도망치듯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들어가도 서늘하던 평소와 달리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이 꽉 조여졌다가 천천히 풀려나는 것 같았다. 머리는 몽롱해지고 손발은 차갑고, 체온이 널을 뛰었다. 차라리 미지근한 물로 씻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약효가 돌 때까지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참았다. 배 속이 간지럽고 허벅지에는 힘이 자꾸 들어가는데,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져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맥박이 뛸 때마다 머리가 같이 울리는 듯했다. 열이 올라 어지러웠다. 내쉬는 숨이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데 자꾸만 오한이 들었다. 이불과 침대보가 피부를 스치는 것조차 이상하게 느껴진다.

10분, 20분, 시간이 흘러갔다. 30분이 지나도 약은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사이드테이블로 뻗어 더듬거렸다. 약병을 간신히 손가락 끝에 걸었으나 떨림이 심해져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떠밀린 약병은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저 멀리 어디론가 굴러갔다.

젖은 눈을 깜빡거린 유온이 힘겹게 다시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약을 더 안 먹으면 이 괴로움이 언제까지 갈지 몰랐다. 비척비척 기다시피 해서 약을 찾았다. 약은 윤서경이 평소에 일을 하는 책상 밑까지 굴러가 있었다.

곳곳에 물이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온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을 매달리듯 붙들어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달그락거리며 약병을 열어 약을 꺼냈다. 한 알, 그래도 효과가 들지 않으면 한 알 더. 정해진 용량은 그랬다.

하지만 오랜 세월 정량 이상의 약을 먹는 것에 익숙해진 유온은 자꾸만 손바닥에 쏟아지는 대로 그것을 삼키고 싶었다. 약물이 제 살과 고통을 한꺼번에 잘라 가기를 바랐다. 약병이 기울어지고 하얀 알약이 쏟아졌다. 손바닥이 움찔거렸다. 입술 사이로 약을 삼키기 직전이었다. 그 손을 멈춘 건 머릿속에 남은 윤서경의 목소리였다.

약을 먹지 말라고 하던 목소리. 그 약들 때문에 걱정스러워하던 얼굴. 축축하게 가라앉은 머리로 그가 한 말을 생각했다. 유온은 손바닥에 쌓였던 약을 털어 내고 한 알만 남겨 삼켰다.

책상 벽에 기댄 채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제 침대까지 갈 기력도 없었다. 제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윤서경은 포항까지 간다고 했으니 오고 가는 시간만 따지더라도 벌써 한참이었다. 그가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돌아오면?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유온의 몸을 별로 원치 않는 것 같은데, 히트 사이클이 온 자신을 눈앞에 두면 어쩔 수 없이 손을 뻗게 될 것이다. 윤서경에게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작은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건 어떨까. 그 정도로는 소용없었다. 문틈으로 페로몬이 새어 나갈 테니까. 유온은 앓는 소리를 냈다.

시트를 매일 교체하는 침대보다 책상에서 윤서경의 냄새가 더 많이 났다. 유온은 책상 벽에 뺨을 문질렀다. 약 기운이 왜 돌지 않는 건지 의아했다. 역시 용량이 너무 적은 걸까, 이전엔 체향이 새어 나가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손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먹었으니까. 점점 더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어려워졌다.

윤서경이 돌아와 주면 좋겠다……. 알파가 몸을 만져 주었으면 했다. 아무런 경험이 없을 때도 가끔 히트 사이클이 오면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윤서경에게 안긴 후로는 그 행위가 얼마나 뜨겁고 달콤한지 알게 되었다. 아래가 미끌미끌했다. 얇은 옷이 젖어 들어 살에 달라붙고 있었다.

배 안쪽이 꽉 차던 감각이 선명했다. 좁은 안이 빠듯하게 벌어지고 부드러운 내벽을 거세게 때리던, 그것으로 끌려 나오던 열기가. 점점 축 늘어지던 유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손을 다리 사이로 가지고 갔다. 허벅지를 지나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은 순간, 아직 완전히 날아가지 않은 이성이 그 손목을 붙들었다.

덕분에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완전히 멈출 순 없었다. 유온의 손끝은 옷 위에서 입구를 가만히 눌렀다. 그것만으로 몸이 간질간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주춤거리며 손으로 위를 더듬었다. 짧고 희미한 감촉은 성욕을 더욱 부채질하기만 했다.

여전히 약은 몸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조금만 더 참고 안 되겠으면 한 알을 더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늦은 시간에 잠시 올라온 건가 싶었다. 그러나 식사 시간이 아닌 이상 유온 혼자 있을 때 직원은 아무런 연락 없이 멋대로 문을 열지 않는다. 아니면, 자신이 시계를 잘못 본 건지도 몰랐다. 아직 윤서경이 돌아올 시간은 되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직원이 올라온 것이기를 바랐다. 이 모습을 윤서경에게 보여 주기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바람을 저버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침실을 향해 가까워졌다. 현관을 열 땐 분명 평소와 같은 속도였다. 그러나 침실 가까이 왔을 땐 거의 뛰다시피 했다.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유온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신음을 참았다. 문이 열리는 그 진동에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유온 씨.”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문을 닫았고, 이번엔 느리게 다가왔다. 침대를 확인하는지 그 근처에서 발이 한 번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책상 앞에 섰다. 유온은 제 몸이 책상 의자에 가려지기를 바라며 고개를 들었다.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이를 꾹 물어야 했다.

당연히 의자는 유온을 가려 주지 못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윤서경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림자와 함께 유온의 몸을 덮는 희미한 체향. 알파가 책상에 한 손을 짚고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발정해 어쩔 줄 모르는 건 자신인데 그의 눈까지 습하게 젖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인 게 아니라…….

유온은 소리를 참기 위해 손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윤서경의 손이 뻗어 와 유온의 입에서 손을 떼어냈다. 시선이 잠시 빨갛게 잇자국이 난 손등을 향하더니 그대로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엉망이 된 손등이 그의 입술 사이로 숨겨졌다.

“약은 몇 알이나 먹었습니까?”

손등에 입술을 댄 채 하는 물음은 발음이 조금 뭉개졌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말을 하며 입술과 치아, 혀가 손등의 살을 누르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두, 두 알밖에, 안…….”

“잘했어요.”

몸이 끌려갔다. 윤서경이 유온을 당겨 품에 안았다. 유온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알파의 체향이 느껴진 순간부터 머리는 점점 더 녹아 갔다. 이제는 정말로 일말의 이성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윤서경의 앞에 엎드려 어떻게든 해 달라고 빌게 될지도 몰랐다.

유온은 윤서경을 밀어내며 책상 안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윤서경이 곧바로 붙잡았지만, 유온이 계속해서 몸을 비틀자 손을 놓았다. 유온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을 뒤로 뻗어 주춤주춤 물러났다. 책상 벽이 금방 등에 닿았다. 더는 도망칠 수 없음을 인식한 유온이 멍하니 윤서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도망칠 길이 없다는 걸 알고 유온을 놓아준 듯했다. 가쁜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윤서경의 체향이 온몸을 옭아매는 듯했다. 향이라는 게 이렇게 실질적인 무게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유온은 처음 알았다. 너무 괴로웠다. 아니, 괴로운 게 맞나.

지금 난 괴로운 걸까?

가느다란 신음이 샜다. 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아래가 젖어 있었다.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두 다리가 힘없이 벌어진 채였고, 윤서경의 시선은 유온의 온몸에 닿아 있었다. 좁은 공간 안에서 대치 아닌 대치가 이어졌다. 짧은 숨을 내뱉은 그가 유온의 한쪽 발을 붙잡았다.

발을 쥔 손이 델 듯이 뜨거웠다. 자신의 발이 너무 차가운 것이긴 하겠지만, 그걸 생각해도 열이 선명했다. 그 손이 발의 우묵한 부분을 느리게 문지르며 발끝으로 가 발가락 사이를 눌렀다. 아무것도 아닌 동작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윤서경은 그대로 유온의 발끝을 입에 머금었다.

“아, 더, 더러워요.”

간신히 웅얼거렸지만 윤서경은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혀끝이 발의 날을 길게 핥으며 내려가 뒤꿈치까지 갔고, 그대로 입을 벌려 깨물었다. 혀나 손가락과는 다른 감각에 유온이 발을 빼내려 했다. 윤서경은 놓아주는 대신 한 손으론 발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론 유온의 반대편 허벅지를 눌렀다. 두 다리가 크게 벌어졌다.

젖은 하의가 윤서경의 눈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리가 벌어지며 상체도 조금 끌려 내려간 유온이 어떻게든 몸을 제대로 하려 애썼다. 하지만 윤서경의 두 손 아래에서는 작은 발버둥밖에 되지 못했다.

발을 핥은 윤서경은 유온의 바지 아랫단을 슥 걷어 올렸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다리가 드러났다. 종아리를 길게 쓸어내린 윤서경이 또다시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유온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바닥에 머리를 찧을 뻔했지만 당겨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이 등을 감쌌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울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창피하거나, 괴롭거나, 답답하거나 간지럽거나, 뜨겁거나…….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이 미친 듯이 몸속에서 날뛰어 댔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은 눈앞의 이 알파에게 매달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을 맞은 오메가는 본능에 거스르지 못했다. 미약한 손길이 윤서경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윤서경은 그대로 유온을 안아 들고 일어섰다. 침대까지 갈 줄 알았더니, 곧바로 등이 책상에 닿았다.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 벗기는 손길에 유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여, 여기, 서경 씨 일하는…….”

그가 일할 때 쓰는 책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옷이 벗겨졌다는 사실에 유온은 당황했다. 그러나 윤서경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게 왜요.”

“…….”

“침대가 아니면 싫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침대까지 못 가겠어요.”

언뜻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달랐다. 뒤의 말은 투정으로까지 들렸다. 목 아래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게 욕정이라는 걸 알아차린 유온의 가슴이 세게 뛰었다. 윤서경은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른한 얼굴로 유온을 내려다보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 순간 그의 혀가 닿은 자리에 유온이 또다시 버둥거렸다. 다리 사이, 푹 젖었으나 조밀하게 다물린 입구에 윤서경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집어넣는 용도의 기관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혀와 입술이 이런 식으로 닿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 잠시만, 서경 씨, 잠시만…….”

유온의 저항에 윤서경은 아래를 빠는 소리를 더 크게 내는 것으로 대답했다. 입술이 입구와 회음을 고루 누르고 혀끝이 그곳을 짓누르듯 핥았다. 푹 젖은 채로 다물어진 아래를 혀로 벌리는 것 같았다. 아래에서 흘러나온 애액을 전부 핥아서 삼키려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그 행위는 작은 자극에도 벌벌 떨 만큼 흥분하고 예민해진 몸을 말 그대로 녹여 버릴 듯했다.

“아……!”

기어이 혀끝이 밀부 안쪽까지 들어왔다. 손끝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얕은 곳을 혀가 느릿느릿 핥았다. 맞닿으리라 생각도 못 해본 점막이 서로 얽혔다. 혀는 노골적으로 안을 만졌고, 안은 움찔대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래가 더욱 젖으며 벌어졌다.

달아올라 있던 몸은 금세 절정을 불러왔다. 배가 따끔할 정도로 간지럽다고 느낀 순간, 온몸이 확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성기 끝에서 쏟아진 액체에 아랫배와 가슴이 축축하게 젖은 건 물론이고, 밀부도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유온이 절정에 달해 바들바들 떠는 순간에도 윤서경은 유온의 허벅지를 끌어당기고 아래에 바짝 달라붙어 구멍을 빨고 있었다.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유온은 할딱이는 숨을 내뱉으며 허공에 들린 다리를 버둥댔다. 그래도 집요하게 붙은 밀착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절정은 짧게 끝나지 않고 파도처럼 몇 번이나 오가며 유온의 입에서 신음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 여파가 간신히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순간, 윤서경이 손가락으로 유온의 아래를 크게 벌렸다. 그의 손 위로 희멀건 액체가 툭툭 쏟아졌다.

고개를 든 윤서경의 얼굴이 입술부터 뺨까지 반들반들하게 젖어 있었다. 무엇 때문에 젖었는지 바로 알아차린 유온이 귀까지 새빨개졌다. 윤서경은 몽롱해진 눈으로 유온을 바라보다가, 유온의 가슴에 묻은 정액 위로 손바닥을 기울였다. 제 안에서 나온 액체가 가슴으로 떨어졌다.

“아……, 으…….”

윤서경이 유온의 가슴에 손을 얹어 한데 떨어진 정액과 애액을 문질렀다. 뒤섞인 액체가 가슴에 온통 퍼졌다. 미끌미끌하게 발라진 액체가 그 자체로 열을 품은 것 같았다. 아니……, 뜨거운 건 윤서경의 손인가? 곧 유온은 답을 알게 되었다. 윤서경이 젖은 손으로 유온의 허벅지를 쓸어내리다 콱 움켜쥐었을 때였다. 제 허벅지를 쉽게 붙드는 커다란 손은 데일 듯 뜨거웠다.

숨결이 닿는 모든 곳에 윤서경과 자신의 체향이 꽉 차 있었다. 취할 듯 기분 좋은 향의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인 것 같았다. 습하게 차오른 두 사람의 체향이 피부에 스며들고 모든 감각에 덮쳐들었다. 향기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후각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윤서경은 유온을 안은 채 바닥에 앉았고, 그와 시선이 맞았다. 그의 새카만 두 눈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축축했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공기가 일렁일렁 바뀌었다. 체향이 촘촘하게 얽혔다. 부옇게 흐려진 눈은 평소의 또렷함을 잃었다. 이전에 러트가 왔을 때와 똑같이 열에 들뜬 얼굴이었다. 멍하니 윤서경을 쳐다보는 사이, 그가 유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자신이 남겨 놓은 자국 위를 잘근잘근 깨물고 핥고 빨았다. 얼룩덜룩한 멍 위로 새로운 멍이 더해졌다.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소리에서 유온은 윤서경도 제정신이 아님을 알았다. 러트 주기가 겹친 건가? 설마 출장을 간다고 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을까? 아닌 듯했다. 윤서경은 발정기가 된 유온의 체향에 촉발되어 이성이 흩어진 것이다.

목덜미를 무는 힘이 강해졌다. 잇자국이 새겨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아, 아파요…….”

몸을 비틀자 윤서경은 숨을 내쉬며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입술이 떨어졌을 뿐 그의 손은 유온의 등을 짚었다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반신으로 내려갔다. 손끝이 꼬리뼈를 짚더니 천천히 그 아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잔뜩 젖은 아래가 그의 손에 덮였다.

윤서경은 애액이 묻어 젖은 손으로 유온의 한쪽 무릎을 안아 재차 끌어당겼다. 젖은 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미끄러졌고 두 다리가 정장을 말끔하게 갖춰 입은 윤서경의 허벅지 위로 완전히 올라갔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짚으며 윤서경을 보았다. 그의 몸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평소에도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로 체격의 차이가 분명했다. 그가 온몸으로 자신을 누르던 기억을 떠올리며 유온은 조금 겁먹었다. 굶주리고 거대한 짐승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유온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윤서경은 안심시키듯 유온의 이마와 뺨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입술과 함께 체향이 더욱 강해지자 발끝부터 온몸이 물에 적신 설탕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몸이 더 끌어당겨졌다. 정장의 매끄러운 천이 허벅지 아래를 스치고, 다리 사이에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유온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옷 너머에서 느껴진 성기의 모양 때문이었으나 윤서경은 유온이 눈을 돌린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턱을 잡고 제게 시선을 맞추도록 들어 올렸다.

굵은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온은 벌어진 다리 사이에 맞추듯 들어온 성기의 모양에 몸을 움찔거렸다. 몸은 이미 이것의 감각을 알고 있었다. 배 속이 간질간질하고, 폐를 시작으로 온몸에서 잔거품이 이는 듯했다. 열기가 담긴 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향을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점점 눈앞이 흐릿해졌다. 아지랑이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시야도, 감각도. 윤서경이 유온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간지러움이 더더욱 심해졌다.

자신에게 이런 욕구가 있었다는 게 생소하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부끄러움도 잊어버리고 지금 당장 윤서경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안을 꽉 채우고 문지르며 갈증을 해소해 주고, 노팅해서 그의 정액을 쏟아주었으면 했다. 그 욕구 하나하나, 열기 하나하나가 낯설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도 이성은 본능을 이기지 못했다. 농밀하게 쏟아진 두 사람의 체향이 서로 촘촘히 달라붙어 하나의 짙은 향이 되어 갔다. 숨구멍을 막고 뇌에 직격하는 듯한 황홀한 향기였다.

유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바닥에 내던지다시피 한 두 손을 들어 간신히 윤서경의 허리춤을 잡았다. 목을 끌어안을 정도의 힘은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손과 팔이 떨리다 못해 몸까지 덜덜 흔들릴 정도였다. 허리를 잡자, 윤서경은 두 손을 내려 유온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그대로 벌렸다.

힉, 하고 유온이 놀란 신음을 흘렸다. 억센 손아귀 힘에 엉덩이가 세게 쥐어지고 구멍까지 벌어졌다. 안에서부터 질금질금 흘러나온 애액이 윤서경의 옷을 다 적시고 있었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천의 감촉이 아래를 살살 긁었다. 그리고 벌어진 구멍에는 단단하게 일어선 윤서경의 성기가 닿았다.

“으, 응…….”

옷에 눌려 있는데도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양감이었다. 유온은 윤서경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유온의 뺨에 입을 맞춘 윤서경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풀어 줘요.”

모호한 말이었으나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윤서경의 옷 앞섶이 아파 보일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할 수 있을까, 흘끗 아래를 내려다본 유온은 두 손을 주춤거리며 내렸다. 간신히 지퍼를 내리자 속옷 안에서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속옷까지 헤쳐 성기를 꺼냈다. 툭 튀어나온 성기는 손으로 겨우 감쌀 수 있을 만큼 크고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손으로 감싸 쥐자 아득하니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몸에 들어올 수가 있지. 그러나 동시에 목이 말랐다. 그의 성기를 적시고 있는 물기가 제 갈증을 달래줄 것 같았다. 유온은 물기가 도는 눈으로 윤서경을 보았다. 그가 눈을 마주친 채로 유온의 다리 사이에 성기를 끼워 넣었다. 굵은 기둥이 성기 아래에서 회음과 구멍을 질척하게 짓눌렀다.

“으……, 흐으, 아, 아……! 아!”

타액으로 질척한 입이 맥없이 벌어지며 신음이 쏟아졌다. 이미 한껏 예민해졌다 생각했던 감각은 아직 채 눈도 뜨지 않은 것이었다. 프리컴으로 젖은 성기가 아래를 문지르자 그것만으로 온몸이 저릿하고 배 안쪽이 근질근질했다. 팔과 허벅지에는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느릿하게 아래를 문지르던 윤서경이 그대로 유온을 안은 채 일어났다.

시야가 바뀐 것에 채 놀라기도 전에 다시 책상이 등에 닿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역시 윤서경이 앉아서 일을 하던 공간이다. 흘끗 본 옆에 호텔의 메모지와 펜이 놓여 있었다. 그 일상적인 물건은 윤서경의 억센 손길에 쓸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경 씨…….”

유온은 우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자거나, 여기선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윤서경이 침대까지 갈 여유가 없듯이 유온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그의 것을 안에 넣고 싶었다. 배 속의 간질거림은 이제 괴로울 지경이었다. 유온은 땀이 잔뜩 배어난 팔을 뒤채며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등진 채 내리꽂는 듯한 시선으로 유온을 보고 있었다. 윤서경의 몸 주변에 아른거리는 체향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는 러트가 왔을 때보다 더 흥분한 듯 보였다.

“저, 아, 아……!”

다음 순간 유온은 자신이 뭐라 말하려 했는지도 잊었다. 책상에 한 손을 짚은 윤서경이 유온의 한쪽 오금을 휘감아 안고, 그대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반짝였다. 납작하고 얇은 배가 바들바들 떨렸다. 충격으로 길게 뻗은 다리가 경련하고 발끝은 구부러졌다. 상체를 앞으로 숙인 윤서경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은 제대로 소리가 되지도 못했다. 유온은 온몸을 젖힌 채 몸속을 둔중하게 꽉 채운 감각에 적응하려 애썼다.

갑작스러운 삽입의 충격이 전류가 되고 물기가 되어 몸을 머리끝까지 뒤덮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무의미한 신음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납작한 가슴팍이 한껏 젖혀져 가쁘게 오르내리며 떨렸다. 윤서경은 그런 유온의 가슴을 입술로 세게 빨았다. 잠깐 입술에 물었다 뺀 것만으로 유두가 바짝 곤두서고, 유륜은 붉게 물들었다.

“으, 으응……, 아, 가, 가슴, 하지 말……, 흑……!”

거세게 애무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삽입의 충격도 아직 감당하기 어려웠다. 유온은 제 옆에 놓인 윤서경의 팔을 저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굵고 탄탄한 팔은 힘이 잔뜩 들어가 근육의 모양이 선명했고, 뜨겁게 배어난 땀 때문에 미끌거렸다.

윤서경이 유온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허리를 살짝 움직였다. 그의 것으로 빠듯하게 들어찬 배 속이 일렁거리듯 떨렸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 내벽은 물결이 치듯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아……, 흐, 으……, 읏…….”

유온은 파들파들 떨며 손에 힘을 주어 윤서경의 꿈틀대는 팔뚝을 몇 번이고 긁었다. 대부분 땀 때문에 미끄러졌지만 손톱이 걸려 가느다란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두 사람 다 그런 잔상처의 감각 따위는 깨닫지도 못했다. 젖은 공기 속을 어지럽게 울리던 격렬한 호흡은 일순 멈췄다. 두 사람 다 숨을 참은 채 격랑에 휘말린 채였다.

흉흉할 정도로 발기한 알파의 성기가 배 안쪽을 작은 빈틈도 없이 꽉 채우고 있었다.

“하, 아…….”

유온이 간신히 가느다란 숨을 내뱉었다가 곧 멈췄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내벽이 진동해 삽입된 것의 질량을 재차 실감하고 만다. 벌어질 수 있는 만큼 가장 넓게, 넣을 수 있는 만큼 깊게, 안의 빈 공간은 버겁도록 가득 채워졌다. 평소 얌전히 닫혀 있는 부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렸다.

그렇게 바라던 알파의, 윤서경의 성기가 만족스러울 만큼 안으로 들어왔다. 유온이 원하던 부분까지 완전히 채우곤 맥을 따라서 쿵쿵 울리고 있었다. 한계치까지 벌어진 내벽은 성기가 휘어진 모양과 귀두의 뭉툭하고 튀어나온 굴곡, 불거진 핏줄 하나하나까지 생생히 느꼈다. 유온은 윤서경의 한쪽 팔을 끌어안고 색색거리며 신음했다. 고통과 압박감과 쾌감, 충족감이 뒤엉켜 머리를 펄펄 녹였다.

다음 순간 다시 몸이 들렸다. 가늘게 뜨고 있던 유온의 눈이 벌어졌다. 책상에 닿아 있던 등이 떨어지고 안쪽에서 성기가 위치를 크게 바꿨다.

“아, 아, 자, 잠깐, 앗……!”

유온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눈앞에 보이는 것을 끌어안았다. 윤서경의 몸이었다. 그가 자신을 들어 올린 것이다. 아래는 깊게 연결된 채였다. 떨어질 것 같다. 힘이 빠지고 땀에 젖은 두 다리가, 그에게 매달려 있으려 해도 자꾸만 툭툭 떨어졌다. 다리가 그의 굴곡진 허리와 골반, 허벅지를 타고 미끄러질 때마다 몸의 각도가 조금씩 바뀌며 성기가 안을 푹푹 찔렀다. 스스로 찔리고 싶은 자리를 찾아서 몸을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진저리를 친 유온이 싫어, 싫어, 하고 아이처럼 웅얼대며 매달리자 윤서경은 아이라도 어르듯 두 손으로 유온을 단단히 안았다.

“안 떨어뜨릴게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유온은 마음을 놓았다. 그가 안 떨어뜨리겠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뜨리지 않을 것 같았다. 떨어뜨릴 이유도 없었다. 그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유온이 상체의 힘을 빼며 그에게 더욱 매달렸다. 윤서경은 그 상태로 아래를 세게 쳐올렸다.

“아……!”

종아리에 닿은 윤서경의 허벅지가 더욱 단단해졌다. 그가 몸을 밀치듯 쳐올릴 때마다 다리가 휘청휘청 윤서경의 하체를 휘감거나 발끝으로 밀며 떨어졌다. 발바닥에 감기는 옷 아래 허벅지는 힘이 잔뜩 들어가 돌덩어리를 딛는 것 같았다.

“아, 흑, 아……, 아…….”

유온은 울음 섞인 신음을 흘렸다. 아래에서 흐른 물 때문에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윤서경의 옷은 발끝에 닿는 무릎 언저리까지 젖어 있었다.

“으응, 너, 너무, 아……, 아…….”

마찰되는 입구와 내벽은 무서울 정도로 예민해져서 성기가 점막을 짓이기며 드나들 때마다 온몸으로 끈끈한 열기를 퍼뜨렸다. 가쁘게 따라오는 감각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몸이 열 속의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자신의 신음 소리 사이로 윤서경의 신음이 녹아들고 있었다. 체향이 서로 섞이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나의 감각을 두 사람이 완전히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생생했다.

지지대 하나 없이 윤서경의 팔에만 매달려 있었다. 온몸이 거세게 흔들릴 때마다, 그가 떨어뜨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순간순간 무서워서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밀착한 몸은 뜨겁고, 짐승처럼 숨을 씨근거렸다. 또한 그가 모든 감각으로 온전히 유온에게 빠져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기는 계속해서 거칠게 안을 짓치며 드나들었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은 푹 젖어서 흐물흐물했지만 작은 틈도 없이 성기를 조였다. 포악할 정도로 굵고 힘줄로 울퉁불퉁한 성기가 푹 찔러들고 빠져나갈 때마다 새빨개진 안쪽의 살이 그에 달라붙어 맥없이 딸려 나갔다. 한 번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여린 살은 더욱 붉어지고, 붓고, 예민하게 떨렸다. 넘쳐흐른 애액이 접합부로 뚝뚝 떨어졌다. 윤서경의 성기 기둥이 밖으로 빠져나올 땐 그 기둥을 따라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질질 흐를 정도였다.

“앗, 으, 흐윽, 아, 아, 아……!”

유온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잘 젖었고 쾌감에 약했다. 약 때문에 이런 기질을 몰랐던 걸까, 아니면 상대가 윤서경이라서일까……. 왜인지 윤서경이라서인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제 몸을 이런 식으로 만지고 열어젖힌다고 생각하면 우선 두려움이 밀려든다. 윤서경의 손길이 닿는다고 생각했을 때의 그 간지러운 기대감과 기쁨은 조금도 없었다.

“하으윽……!”

그 짧은 다른 생각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윤서경이 거세게 성기를 찔러 올렸다. 유온이 퍼뜩 몸을 굳히자 그는 유온의 양쪽 다리를 누르며 한층 거세게 그를 몰아세웠다.

“아, 아, 아……! 저, 아, 자, 잠깐, 너, 너무 빨, 라요, 앗……!”

“하아, 아…….”

“으으응……!”

윤서경이 거친 숨과 신음을 내뱉으며 유온의 안을 마구 파고들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몸과 폭죽처럼 체내에서 터지는 감각에 유온은 고개를 젖히고 비명에 가까운 신음만 질렀다. 눈물이 계속 맺혀 얼굴 옆으로 뚝뚝 떨어졌고, 입가에선 타액이 흘렀다. 순식간에 또 절정이 찾아들었다. 배를 뻐근하게 하는 가장 격렬한 감각은 씨앗은 몸이 흔들릴 때마다 부풀어지듯 몸집을 키워서, 종래에는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아……, 아윽, 아, 흣……! 아! 아, 아앗!”

몸의 모든 걸 녹여 버릴 듯한 절정은 너무 세차고 버거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극점의 쾌감이 손끝과 발끝까지 모조리 퍼져 이성을 마비시켰다. 절정을 맞았는데도, 몸속에서 체액이 후드득 후드득 쏟아졌는데도 윤서경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흐윽, 아, 자, 잠깐만, 요, 으응, 그만, 그, 그만…….”

도망치고 싶다. 절정에 다시 절정이 겹치는 것만 같았다. 퍽, 퍽, 하고, 성기는 여전히 거칠게 안을 때리고 있었다. 유온은 으으응, 흐윽,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윤서경 또한 정제되지 않은 신음을 연달아 유온의 귓가에 흘렸다. 낮게 갈라진 그 목소리는 또 하나의 흥분제였다. 유온이 바르르 떨며 저도 모르게 귀를 가까이 대자 윤서경은 그 귀에 입을 맞추곤, 온몸에 힘을 주며 유온을 끌어안았다.

아직 옷을 입고 있는데도 윤서경의 온몸에 오른 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열이 펄펄 끓는 이마 같았다.

이어 윤서경은 유온의 귓불을 입술로 잘근잘근 물며 안쪽에 사정했다. 흥분한 몸속에 쏟아지는 알파의 체액은 지나치게 고양된 열기와 정욕을 잠재우는 약물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랜만에 온 히트 사이클이라서인지, 몸이 고장 나서인지, 안쪽을 뜨거운 정액이 때리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절정도 애매하게 지나간 듯 만 듯한 채 계속해서 날이 서 있는 감각에 유온은 울먹였다.

“조, 조금만 더…….”

흐느끼는 목소리에 윤서경은 유온에게 입을 맞췄다. 키스에도 유온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느 때와 다른 난폭한 키스였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들어올 뿐인데 감각은 아래가 맞물릴 때와 다르지 않았다.

윤서경이 혀를 깊게 밀어 넣어 유온의 입천장 안쪽을 핥고 혀뿌리를 세게 빨았다. 혀가 말려 들어가고 기침이 올라왔으나 윤서경의 입술에 막혀 그의 입 안으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고개가 조금 젖혀지고 윤서경의 타액이 넘어왔다. 유온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삼키며 그의 혀를 입술로 물어 조이고, 어설프게 혀끝을 내밀거나 입을 벌렸다.

부은 입술을 거세게 빨리는 느낌까지 흥분을 자극했다. 윤서경은 성기를 빼내지 않은 채로 유온을 고쳐 안고 걸음을 옮겼다. 힘없이 떨어진 유온의 다리가 흔들렸다. 윤서경의 목적지는 침대였다.

유온이 누워 있었던 침대는 흐트러진 채였다. 딱 유온의 체구만큼 들린 이불 아래에 유온을 눕히며 윤서경은 뒤늦게 옷을 벗었다. 재킷과 베스트를 내던진 그가 넥타이 매듭에 손을 집어넣었다. 실크 넥타이가 스륵, 유독 크게 들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풀어졌다. 풀어낸 넥타이도 거추장스럽다는 듯 던져 버린 뒤엔 셔츠였다. 거의 잡아 뜯다시피 단추를 푼 그의 굵은 팔뚝을 따라 흰 셔츠가 벗겨져 휙 날아갔다. 유온은 여전히 갈증을 느끼며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옷을 벗자 땀에 젖고 단단한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과 탄탄한 가슴, 유온의 두어 배는 될 듯이 굵은 팔, 잘 만들어진 근육 사이로 팬 골에 땀이 맺혀 있었다. 유온은 흐려진 눈으로 할딱이며 그를 보았다. 윤서경이 다시 유온의 머리 옆에 손을 짚었다. 다리가 휙 들렸다.

“읏…….”

땀으로 미끄러운 다리가 들리고, 윤서경은 귀두 근처까지 빼냈던 성기를 다시 거세게 박아 넣었다. 유온이 높은 신음을 터뜨리며 몸을 떨었다. 거기서 다시 수차례 어지러울 정도로 몸이 흔들렸다. 등이 시트 위에서 미끄러져 베개보다 아래에 있던 머리가 침대 헤드까지 밀려 올라갔다. 유온이 침대 헤드에 머리를 부딪치기 전에 윤서경이 손을 뻗었다. 머리가 손에 감싸이는 동시에 아래쪽으로 몸이 끌려갔다. 깊어진 삽입에 유온이 신음했다.

“서, 서경 씨, 서경 씨……, 아, 아…….”

“네…….”

그 와중에도 윤서경은 이름을 부르면 곧바로 대답했다. 몸이 다시 세게 떠밀렸다. 크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윤서경이 유온의 골반을 움켜쥐며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무리한 자세 때문에 골반도, 허리도 다리도 아팠다. 목도 따끔거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쾌감 하나에 뒤덮였다.

이미 윤서경이 안에 쏟아놓은 정액과 넘칠 듯 흐른 애액이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거품을 일으켰다. 아래는 이제 물에 젖은 천이라도 주무르듯 민망한 소리를 냈다. 몸은 그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을 삼켜 열기로 뱉어냈다. 눈앞은 번뜩였고 머릿속이 몽롱하게 가라앉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유온은 입이 열릴 때마다 신음하고 윤서경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시 몸에 전류가 퍼졌다. 심장이 세게 뛰고 숨통이 조여드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부분만 남겨두고 모두 제거된 것처럼, 그 부분을 손으로 사납게 움켜쥐고 흔드는 것처럼 열과 쾌락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는 건 윤서경이었다. 유온은 자신을 안고 있는 알파에게 매달렸다. 더 해 주세요, 더, 죽을 것 같아요,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서경이 잠긴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었다.

“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리를 쳐대던 윤서경이 유온의 다리를 바짝 잡아 허벅지가 제 골반에 닿도록 올렸다. 몸속에서 성기가 조금씩 부피를 달리 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팅해 주길 기다렸는데 막상 닥치자 겁이 났다. 배가 둥글게 부풀어 오를 만큼 커지는 성기가, 더는 없을 정도로 밀착된 결합이.

유온이 몸을 빼려 하자 윤서경은 신음인지 무엇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유온의 두 팔을 잡아 머리 위로 눌렀다. 손목을 쓸며 올라와 손을 겹쳐 잡는 손길에 유온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유온의 손을 잡느라 상체를 푹 숙인 윤서경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온 씨……, ……유온아.”

“으응……!”

몸속에서 성기가 빠른 속도로 부풀었다. 유온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맞잡고 있는 손은 누가 더, 라고 할 것도 없이 땀으로 축축했다. 긴 속눈썹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곧 유온의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노팅하는 알파의 페로몬에 이끌려 오메가가 느끼는 가장 강렬한 절정이 들이닥쳤다.

윤서경이 유온의 손을 놓고 대신 몸을 끌어안았다. 떨림도 울음도 전부 그의 품으로 흘러 들어갔다. 몸 가장 깊은 곳, 아이를 품는 기관까지 알파의 정액이 쏟아졌다. 20여 분 동안 유온과 윤서경은 빈틈없이 서로를 안은 채 서로가 주는 격렬한 절정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 후 몸속의 압박감이 차차 옅어졌다. 완전히 성기가 원래 모양으로 돌아간 뒤 윤서경이 몸을 물렸다. 벌어진 아래에서 뭉글뭉글하게 뭉친 정액이 왈칵 쏟아졌다. 툭 떨어진 유온의 다리 사이가 젖어 들었다. 아직도 배 속에 윤서경이 있는 것처럼 감각이 이상했다. 유온은 멍하니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유온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여운이 후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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