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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가 자꾸 같은 시각에 멈췄다.
오후 7시 22분. 우연이라기엔 기묘했다. 세 번째로 시계가 멈췄을 때 윤서경은 이걸 꽤 이상한 일이라 판단했다.
그나마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드레스 룸의 시계 수납장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혹은 자신이 움직이는 동선이 뭔가 이상하거나.
그래서 우선은 시계 수납장의 위치를 조정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차를 바꾸고, 업무하는 자리를 바꿔 보았다. 역시 똑같았다. 식사하는 곳도 달리 해 보았다. 심지어 이한영이나 다른 비서들과 떨어져 있어 보기도 했다. 여전히, 시계는 며칠에 한 번씩 7시 22분이 되면 멈춰 버렸다.
무슨 조화인 건지 의아했다. 그러나 그런 일에 신경을 기울이기에 윤서경은 바쁜 사람이었기에, 예비용 시계를 어디에나 준비해 두고 멈추면 바꿔 차는 방법을 택했다.
이유온을 처음 만난 건 시계가 멈추기 시작하고 며칠 후였다. 어느 국회의원 때문에 뜻하지 않던 자리에 가야 했다. 지루하지만 대강 사람들을 상대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저 구석에 오메가 하나가 얌전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누가 보아도 자리를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얼굴은 예뻤고, 몸은 호리호리했고, 키는 중간 정도였다. 얼굴만큼 몸의 선도 예뻐서 슈트의 라인이 눈을 잡아끌었다. 문제는 그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윤서경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벌 떼처럼 달라붙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따라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멍하니 있던 그는 순식간에 주위에 사람이 늘어나자 놀라더니 이내 당황했다. 그리고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벽처럼 주위를 에워싼 인파를 헤치고 나가기엔 너무 힘이 없어 보였다. 몸도 마음도. 밀어낼 팔 힘이 없고 비켜 달라는 말은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 듯했다.
보다 못해 다가가서 도와주었다. 윤서경은 남에게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일에서 도와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 앞에 서서 등을 감싸고 나갈 길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유온은 얼핏……, 아주 짧게 웃었다.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곤 급하게 사라졌다. 순간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실없는 생각을 했다. 두고 간 유리 구두 같은 건 없나?
그래서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웃는 얼굴 때문에, 그게 누구인지 샅샅이 뒤져 결국 찾아내서 그가 참석한다고 하면 별 쓸데없는 행사에도 기웃거리게 된 건.
심지어 윤서경은 그의 뒷조사까지 했다. 유리 구두는 없지만 행사에 참석한 사람의 명단이 있고 얼굴도 보았다. 오메가라는 것까지 알았으니 구두가 아닌 신분증을 떨어뜨리고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한영이 다른 업무 보고의 막간을 이용해서 조사 결과를 이야기했다.
“혼외자라는 소문이 조금 있는데, 워낙 지하에서만 도는 말이라 진위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느 쪽.”
“모친이요. 그래서 더욱 불확실합니다. 다만 이유건 부사장은 동생을 꽤 아낀다는 것 같습니다.”
모친 쪽 혼외자라. 그러면 정말 화명의 안주인이 부정을 저질러서 낳은 아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건 당연했다. 부친의 혼외자보다 숨기기 수월하니까. 아이의 생김새가 명백하게 다른 유전자가 아닌 이상은 그랬다. 이유온의 얼굴은…… 그 집에서 월등하다는 걸 빼면 ‘다른 유전자인가’ 하는 질문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낀다고…….”
윤서경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툭툭 쳤다. 이유온의 모습을 보면 가족에게 그리 사랑받은 것 같진 않았다.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건 어느 정도가 천성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가족이다.
“공적인 자리에 자주 나오는 편인가?”
“다른 가족에 비해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행사에만 참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우선 이유온이 참석한다는 행사는 다 알아봐.”
“…….”
이한영이 잠시 입을 다문 채 윤서경을 보았다.
“왜?”
“대표님, 드디어 결혼 생각이 드셨습니까?”
“뭐?”
“원한이 있어서 찾으시는 건 아니지 않으십니까.”
“…….”
결혼, 결혼이라. 윤서경은 지금이 딱 적령기였다. 주위 이곳저곳에서 혼처를 들이밀지만 전혀 관심이 없을 뿐이다. 들어오는 혼처는 검토조차 한 적이 없고 맞선 권유가 들어오면 딱 잘라 거절했다. 가족들이 딱히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정말 결혼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잠깐 스쳐 지나간 수준인 오메가를 애타게 찾고 있으니 이한영이 그렇게 묻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아니, 딱히 이야기도 제대로 나눠 본 적 없는 상대랑 결혼을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네……. 우선 리스트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
결혼 같은 걸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 후로 윤서경은 이유온이 참석한다는 행사에는 대부분 얼굴을 내밀었다.
대체로 이유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윤서경이 온 걸 알면 몰래 흘끔거렸다. 신기해서 그러는지 처음 만난 날 도와준 걸 계속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쳐다보면서 자신이 모를 줄 안다는 게 퍽 재미있었다.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몇 번 더 그와 같은 행사에 참석해 본 건데, 정신을 차리자 화명에 혼담을 넣은 뒤였다.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이유온의 정략혼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터무니없는 상대였다. 게다가 지켜본바, 이유온을 아낀다는 이유건의 태도도 역시 어딘가 애매했다.
그래서 자신이 이유온과 결혼하겠노라 말했다. 안 그래도 어두운 그 얼굴이 쓰레기로 소문난 늙은이 옆에서 더더욱 어두워지는 건 윤서경에게 불쾌한 일이었다.
화명의 입장에선 부경의 중심이자 유력한 후계자인 윤서경을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막대한 건 둘째 치고, 애초 화명은 부경을 거스를 주제도 배짱도 되지 못했다.
혼담을 넣고 곧바로 이유온을 불러냈다. 실상 혼담은 이유온의 의사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부모를 통해 사실이 귀에 들어가기 전에 그에게 말이나마 해 두려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전에 그는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라운지 카페로 들어왔다. 비밀스러운 만남이라도 가지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았을 때, 우선 청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더 빨리 해야 했었는지도 몰랐다. 이유온은 누군가에게 맞아서 부은 뺨을 머플러로 어설프게 가리고 있었으니까.
이유온은 정말 이상했다. 솔직히 말해 윤서경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체 왜 사사건건 남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세상 모든 일을 자기 잘못으로 돌린단 말인가.
정말로 사고 구조 자체가 달랐다. 길 가다 쓰레기를 밟아도 앞을 제대로 안 본 제 탓, 천천히 걷지 않은 제 탓이라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심지어 쓰레기를 버린 인간이 왜 남의 쓰레기를 밟느냐고 다그치면 쩔쩔매며 사과할 것 같았다.
그게 신경이 쓰였다. 점점 이유온을 보고 있으면 초조해졌다. 그가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기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불쌍해서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정말 상상조차 못 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유온은 조금이나마 안정이 되어 갔다. 그걸 보는 윤서경의 기분도 괜찮아졌다. 이유건은 틈만 나면 호텔 로비에 나타나 이유온을 찾으며 발작했고, 윤서경이 없을 때 이유연까지 한 번 다녀갔다는 듯했다. 당연히 둘 다 걱정해서 찾는 기색은 아니었다. 특히 이유건은, 그는 아내를 빼앗긴 인간처럼 굴었다.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시계는 여전히 7시 22분에 멈췄다. 아예 고장 나는 건 아니고,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다시 가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시계의 수리를 맡겼으나 업체에선 아무 이상이 없다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고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도 같은 시간에 멈춰 대니 나중엔 무뎌져서 곧바로 시계를 바꿔 차는 걸로 끝냈다.
시간이 흘렀다. 겨울은 깊어 갔다. 그나마 익숙해졌는지 몸을 잔뜩 옹송그려 앉진 않게 된 이유온이 마음에 들었다. 자꾸 멈추는 시계를 바꾸고, 거의 들어가지도 않던 호텔에 틈만 나면 얼굴을 내밀고, 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준비한 걸 이유온에게 내밀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유온의 변화를 흥미롭게 보았다. 볼수록 청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중에 갑작스레 러트가 찾아왔다. 예상보다 일렀고, 제대로 준비도 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우선 어지러운 정신으로 호텔에 왔다. 원래부터 여기는 러트 때 혼자 있기 위해서 자주 찾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호텔에 비틀대며 들어온 순간까지 잊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유온이 있었다.
발정한 알파의 눈에 그가 비쳤다. 그 예쁘고 새하얀 오메가는, 당장 그를 쓰러뜨려 제 냄새를 잔뜩 묻히고 여린 안쪽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충동을 격렬하게 키워 놓았다.
하지만 이유온은 러트의 알파를 당해 내기엔 너무 연약해 보였다. 그래서 한 번은 욕구를 으깨듯 짓누르며 그를 피하려 했다. 그 손이 제 옷자락을 잡기 전까지는.
결국 윤서경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혹은, 이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유온은 제 몸 아래 깔려서 울고 신음하고 황홀한 향을 쏟아냈다.
잠든 이유온을 안은 채 윤서경은 선잠을 잤다.
눈을 뜨고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자신이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뛰는 것에 가까웠고, 너무 서둘러서 그답지 않게 팔을 뭔가에 부딪치기까지 했다. 그를 본 모두가 놀랄 만큼 서둘렀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렇게 다급하게 걷는 건 학생 때 이후 처음이었다. 어쩐지 사나운 꿈자리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처음엔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겨우 알았다. 병원이었다.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곳곳에서 통곡이나 비명으로 바뀌어 가고, 그 사이를 황망히 가로질렀다.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윤서경은 높게 울리는 기계음을 들었다.
누군가가 불쾌하게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혹은 사형장의 바닥이 꺼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목이 매달린 것도 윤서경 자신이었다. 일정한 높이로 이어지는 음이 온몸을 납처럼 차갑게 굳혔다.
몸을 휩쓴 불안과 두려움이 일시에 마비되었다. 역치를 넘어 신경이 끊어져 버린 것에 가까웠다. 윤서경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정면을 보았다.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한 사람이 축 늘어져 누워 있었다. 침대 옆으로 쥐면 부러질 듯 마른 손목이 툭 떨어졌다. 옷을 잘라 내 드러난 가슴은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말랐고 CPR의 흔적으로 멍투성이였다. 얇은 살 아래 뼈는 분명 부러진 채일 것이다.
푹 꺼진 눈이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다가 한순간 저를 향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윤서경은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인지도 알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건 착각이었는지도 몰랐다. 이미 그의 심장은 멈춘 뒤였으니까. 깜빡임도 없이 응시하던 눈동자는 이내 완전히 까맣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윤서경은 그리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렇게까지 작고 말랐었나?
손을 뻗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미약한 심장 박동을 끌고 오려 애쓴 의사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유감입니다, 대표님. 이유온 씨는…….’
의사는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그의 말이 질 낮은 농담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7시 22분, 늦은 오후였다.
거기서 시점은 또다시 이동했다.
자신은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이 장소는 당연히 잘 알았다. 이유온에게 직접 혼담을 말하기 위해서 호텔 라운지로 나와 달라고 했고, 짧게나마 답을 받았다.
그러나 나타나야 할 이유온은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 시간을 넘기고 좀 더 기다려 보다가 자리를 떴다. 기억과 다르게 흘러갔으나, 여느 꿈이 그렇듯 머리는 이쪽을 자연스럽게 현실로 받아들였다. 라운지를 나서 차로 가면서 그야말로 의아했다.
천하의 윤서경이 바람을 맞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뭐든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으나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이유온은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이유온이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혼자 밀어붙여 결혼하는 것에 가까웠으니. 정략혼이라고 생각한 그 개뼈다귀 늙은 놈과 함께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않나.
윤서경의 요구로 양가 부모님만 참석해 가진 상견례에서 이유온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혼담을 넣기 전까지 이유온과 제대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나마 직전에 얼굴을 자세히 보긴 했지만, 그때도 말을 나누진 않았다.
혹시 말을 잘 못 하는 사람인가 생각할 정도였다. 신상에 대해 보고를 받을 때 그런 내용은 없었기에 아닌가 보다 했을 뿐이다. 상견례는 무난하게 끝났다. 이유온은 부모님과 함께 돌아갔고 윤서경은 그날 일정에 맞추어 움직여서 업무에 복귀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다만, 그때부터 이어진 결혼 준비는 순탄치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고? 또?’
이한영이 다소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하이 주얼리 브랜드의 책자가 들려 있었다. 다른 예물, 예복에 이어, 벌써 몇 번째 퇴짜였다.
이유온은 그 후로도 윤서경의 식사 제의부터 식장과 예물을 보러 가자는 말까지 전부 응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엔 답이 없었다. 집안을 통해 연락해도 거절은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물건은 윤서경의 눈을 한 차례 거쳐 추려지고, 그걸 이유온에게 전해 결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윤서경이 고른 물건 가운데서 뭔가를 선택한 적이 없었다. 항상 전혀 상관없는 모델을 골랐고 그걸 이유건이 전달했다. 새로운 후보를 보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물건이 마음에 든다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오늘 거절당한 건 반지였다. 적어도 반지는 더 깊게 상의를 할 줄 알았건만 돌아온 건 윤서경이 골랐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디자인의 물건이었다. 이쯤 되면 정말 결혼하기 싫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파혼할 마음이 안 든다니 저도 이상한 놈이었다.
그 후 결혼식, 신혼여행, 흐름 자체는 부드러웠다. 이유온은 마찬가지로 윤서경의 의사는 들어가지 않은 흰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을 입고 나온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의 의사는 썩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유온은 누구나 보고 홀릴 만큼 예뻤다. 예식장을 화려하게 꾸민 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옷이나 장식만 보면 과한 느낌이 있는 예복인데도 그걸 이유온이 입으니 그의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기능에 그저 충실할 뿐이었다.
결혼식에서 부부는 바쁘다. 손님을 맞고, 식을 올리고, 피로연에서는 또 손님들을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인사해야 했다. 이유온과 윤서경은 내내 붙어 있었으나 대화할 틈이 없었다. 예복을 입은 그의 모습을 진득하게 보지도 못했다.
예식과 그 후의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자 이유온은 피곤한 데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꾸벅꾸벅 졸았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비행기 안에서도. 내리깔린 긴 속눈썹이 계속 움찔움찔 떨리는 게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라 생각해서 굳이 깨우지 않았다.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건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서였다. 짐을 미리 숙소로 보내 놓은 뒤 그에게 물었다.
‘식사는 시내에서 하고 들어갈까요.’
리조트에서 공항이 있는 시내로 나오려면 상당히 번거로웠다. 미리 알아봐 둔, 현지인에게 유명한 레스토랑이 시내에 있었기에 그렇게 묻자 이유온은 잠이 조금 덜 깬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좋아요.’
그렇게 레스토랑에 데려갔으나 그의 입맛은 현지인과 달랐다. 그는 해산물과 소극적인 영역 싸움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손톱만큼 가져가서 입에 넣고, 얼굴이 흐려지고, 또 입에 넣고 얼굴이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보다 못해 다른 식사를 시켰더니 그건 또 잘 먹었다. 그러다 산더미처럼 쌓인 해산물을 먹어야 할 것 같았던지 또 싸움을 시작했지만. 더 먹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가 드물게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일어났다. 그렇게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될 텐데.
그 후에 해변을 산책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이유온도 기분이 좋아 보였고, 차츰 서로의 몸이 가까워지며 노을이 지는 해변을 걸었다. 신혼여행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이 다소 까다롭긴 했으나 적어도 앞으로는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며 살 테니 나아지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이유온의 기분도 꽤 괜찮은 듯하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이유온에게서 무의식중에 체향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이유온의 것일 줄 알았으나, 그건 알파의 향이었다.
그의 형, 이유건의 체향. 피부 아래에 짙게 고여 사방으로 번지는 향기는 페로몬이 몸속에 쌓일 정도로 끈질기게 묻혀야 날 법한 수준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제가 결혼한 오메가에게서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돌았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남으려면 결혼식을 하기 직전까지 바짝 붙어 있으며 체향을 쏟아부어야 했다. 조금 전까진 느끼지 못했으니 스스로의 체향처럼 조절이 가능할 정도로 오래, 익숙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오메가가 자신의 것이 아닌, 몸속에 있던 다른 알파의 체향을 흘린다는 건 곁에 있는 알파가 불편하다는 의미였다. 이 향을 맡고 멀리 떨어져 달라는.
한없이 불쾌해졌다. 이 사람은 친형의 페로몬을 묻힌 채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도 이런 상태로 결혼한 상대 옆에 서 있는 건가?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왜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선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을까. 윤서경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유온은 왜…….
결국 윤서경은 이유온을 따로 보냈고 리조트에서도 멀리 떨어진 방을 사용했다. 다른 알파의 냄새를 흘리는 오메가와 한방, 한 침대를 쓰는 취미는 없었다. 신혼여행 기간 동안엔 커튼을 쳐 놓고 방에서 일만 했고, 이유온이 뭘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내내 그가 없는 것처럼 지낸 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그럴 수도 있었지만, 결혼반지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반지 디테일 하나가 주문한 것과 미세하게 다르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윤서경은 무심코 끼고 있던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이유온이 혼자 고른 반지. 당연히 주문과 디테일이 어떻게 다른지는 모른다. 디자인화를 그렇게 유심히 보지도 않았고.
그럼 디테일이 다르다는 연락을 한 건 이유온이겠지. 아무리 방이 떨어져 있다고 해도 같은 빌라 안이다. 찾아와서 상의 한 마디라도 하려면 할 수 있었을 텐데. 한숨을 삼키며 이한영을 이유온에게 보냈다.
반지 디테일에 대한 대답을 듣고 올 줄 알았더니, 이한영은 다소 찌푸린 낯으로 뜻밖의 말을 했다.
‘그게, 반지 디자인을 결정한 건 이유건 부사장이라고 합니다. 디테일이 다르다는 연락도 그쪽에서 간 것 같다고…….’
‘뭐?’
정말로, 어이가 없다 못해서……. 윤서경은 끼고 있던 반지를 신경질적으로 빼, 책상에 내려놓았다. 정석적인 디자인의 결혼반지가 그의 손에 탁 덮였다가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한국에 돌아왔다. 윤서경은 바로 출근했고 결혼이 없던 일인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함께 신혼집에 들어온 이후, 이유온은 조용했다. 들어온 당일도, 그다음 날도. 어찌나 조용한지 하루 종일 뭘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따금 윤서경이 있을 때 잠깐씩 나와 서성거리긴 하지만 곧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게 차라리 나았다. 이유온이 있던 자리에는 종종 이유건의 체향이 남곤 했으니까.
한집에 사는 신혼부부였으나 관계는 그냥 집을 공유하는 사이만큼 데면데면했다. 이유온은 그런 중에도 꼬박꼬박 제 본가에 찾아갔다. 아니, 그런 중이어서 자주 간 건지도 몰랐다.
부모님, 형제들과 사이가 좋아도 본가에 가는 건 귀찮게 생각하는 윤서경으로선 이상할 따름이었다. 단순히 아직 어려서 가족의 품이 그리운 것일 수도 있었으나 그의 본가엔 이유건이 있었다.
동생에게 집요하게 향을 묻혀 두고, 결혼반지를 대신 고르는 형. 물론 그들은 친형제였고 사실 느껴진 페로몬도 성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배우자로서 아주 무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집에 다녀오면 여지없이 이유건의 체향이 이유온에게서 돌았다. 오메가가 제 몸에서 다른 체향이 나는 걸 모르진 않을 터였다. 증거로 이유온은 집에만 다녀오면 평소보다 더 윤서경을 피했다.
또다시 이유온이 집에 다녀온 날이었다. 일정 하나가 취소되어 윤서경은 일찍 돌아왔다. 물을 꺼내러 주방에 갔는데 싱크대 앞에 이유온이 있었다.
‘거기서 뭐 합니까?’
‘……!’
이유온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놀라서 손이 미끄러졌는지 뭔가가 떨어져 개수대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말을 걸었을 뿐인데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몸 앞쪽으로 조리대 위에 놓인 물병이 보였다. 열려 있는 걸 보니 이유온이 떨어뜨린 건 물병의 뚜껑인 것 같았다.
가사 도우미가 준비해 두고 간 걸까. 건강에 좋다고 차 같은 걸 냉장고에 넣어 두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유온은 윤서경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물병을 팔로 밀듯이 쳐서 개수대로 떨어뜨렸다. 옅은 색의 물이 죄다 쏟아졌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이유온은 허둥거리며 물을 틀어 쏟아진 액체를 정리하고, 병을 대강 씻는가 싶더니 아직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병과 뚜껑을 움켜쥐었다.
‘병이, 깨, 진 것 같아요. 제, 제가 가져다 버릴게요……. 푹 쉬세요, 서경 씨.’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유리병은 멀쩡했다. 그리고 이유온에게서는 또 빌어먹을 알파 냄새가 났다.
* * *
‘윤 대표가 이해 좀 해 주게.’
이유온의 본가 거실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윤서경은 평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화가 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대우였다.
원래 형제 사이가 각별했네. 아직도 유온이는 어린애가 엄마한테 붙듯이 하고, 유건이는 품 안의 자식 다루듯 하니, 윤 대표와 있을 시간을 빼앗을 수도 있어. 유온이가 아직 정 붙일 곳이 없어서 자꾸만 형을 찾는데 유건이도 유온이를 워낙 예뻐해서 어쩔 도리가 없군.
윤서경의, 이유건이 불편하다는 말에 대한 이 회장의 답이었다.
윤서경과의 결혼 생활이 싫어서 이유온이 형에게 자꾸 달라붙는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와 이유건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기도 했다.
배우자가 가족 중 누군가와 과하게 친밀하다. 그 사실이 기분 좋진 않았다. 윤서경은 이유온과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 만큼…… 그 말에 속이 뒤틀렸다.
평소라면 자리를 뜨며 관계를 끝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윤서경은 참았다. 이들이 이유온의 가족이었기에.
그리고 얼마 후 2층에서 이유온이 제 형과 함께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도 체향이 느껴졌다. 윤서경은 이유온의 것보다 이유건의 체향을 더 빨리 알게 되었고 원치 않게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그게 말할 수 없이 기분 더러웠다. 이 가족은 죄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건가 싶었다. 이유온을 포함해서.
돌아오는 길에 이유온이 드물게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았다. 윤서경은 그를 무시했다. 이유온은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창을 통해서 그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생전 처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데, 이유온의 저 모습을 보자 어깨를 쓸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깨를 쓰다듬을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이유온은 늘 침울한 얼굴을 한 채 윤서경의 시선을 피했다. 그저 이유건과의 관계가 문제였다면 해결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은 점점 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본색을 드러낸 거라고 해야 할까?
애초 화명이 도덕적인 인간들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이유온과 결혼한 후 어떻게든 이용하고 기생할 기회만 노리리라는 것도.
과연, 그들은 곧 손을 뻗었다. 우선은 집에 들어오는 물건부터 시작이었다. 이유온을 통해서, 혹은 그 가족으로부터 전해지는 것들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성분을 알 수 없는, 몸이 나른해지는 향 같은 건 귀여운 수준이었다. 도청기가 나왔을 땐 이한영이 이혼해야 한다고 말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도청기도 한두 번 나온 게 아니었다. 조악한 것부터 정교한 것까지, 특히 이유온과 함께 온 거실 피아노에 설치되어 있었던 건 헛웃음이 나올 만큼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원래는 신혼집 거실에서 윤서경이 중요한 손님을 많이 맞이할 예정이었으니 의도는 들어맞았다고 볼 수 있었다. 집에 손님을 초대하지 않게 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나.
피아노는 그대로 폐기처분했다.
도청기 이야기는 이한영만 아는 것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혹시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이유온이 이혼당해 쫓겨나는 건 물론이고 아예 그 일가족이 한국 땅을 밟지도 못하게 될 수 있으니.
즉 그 지경이 되도록 윤서경은 이유온을 놓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이유온과 한 침대에 눕지 않는 것 정도가 윤서경의 최선이었다. 그 또한 웃기는 일이긴 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여러 면에서 버티는 것에 가까운 결혼 생활을 이어 갔다.
분명 윤서경의 감정은 이유온에게 호감을, 호감 정도가 아니겠지. 애정이라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결혼하려 하는 거냐는 이한영의 물음에 아니라고 답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감정은 깊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것 같다는 말에 대뜸 청혼부터 할 리 없었다.
그러나 번번이 배신으로 돌아오는 애정을 누가 고르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버티는 만큼 애정은 실망과 분노로 덧칠될 뿐이었다.
몇 년의 시간은 길지만 한집에 사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온전히 알기 위해선 부족한 시간이었다. 지붕만 공유하지 한 사람은 화가 나 있고 한 사람은 우물쭈물 눈치만 보는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차라리 결혼 전이 더 온화했다.
단 한 번도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 실망이 오래 이어진 적도, 기대를 배반당할 일도 없고, 불행도 고통도 분노도 그저 스쳐 갈 뿐이었던 삶이었다. 불가능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며 안 되는 일은 되게 하면 그만이었다. 제 능력과 배경으로 세상에 하지 못할 건 없었다. 이유온 하나만 제외하고.
윤서경은 같은 일을 두 번 실패해 본 일이 드물었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두 번째에 안 되면 세 번 하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유온은 윤서경에게 끊임없는 실패였다. 이번엔 괜찮을 거라 생각해서 용서하면 배신하고, 한 번 더 용서하면 두 번, 세 번 배신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화를 내고, 또 화를 내고, 그러면 이유온은 서러운 얼굴을 하면서 주춤주춤 물러나고, 또 용서할 수밖에 없게 되고……. 감정은 돌이킬 수 없이 으깨져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이라는 향기의 흔적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오래도록 오염된 사랑의 향은 악취였다.
이유온은 윤서경에게 모든 걸 거절당하고도 질리지 않았다. 집 안의 눈이 닿는 곳엔 그가 사다 놓은 꽃이 놓여 있었다. 꽃을 볼 때면 생각하는 것이다. 이 꽃으로 또 내게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장식해 둔 꽃이 예쁘다고.
계절은 잘도 바뀌었다. 몸을 상하게 하는 독이 너무 달아서 계속 먹게 되는 것처럼 이유온과는 계속 한집에 살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올해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언제나 똑같았다. 결혼하고 매 해 이유온은 해가 바뀌는 순간마다 메시지를 보냈다.
[올해도 고마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윤서경은 답을 하지 않았다.
한집에 있다면 굳이 메시지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매해 12월 31일에 이유온은 본가에 돌아갔다. 그리고 생일을 보낸 뒤에야 집에 왔다. 이유건의 차를 타고.
몇 번의 신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결혼 생활은 3년 차가 되었다.
그 어느 날, 이유온이 문을 두드렸다.
용건은 늘 그렇듯 비슷한 말이었다. 중요한 전화를 하던 중이었고, 지긋지긋하기도, 화가 치밀기도 했다.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어 내쫓자 그는 금세 물러났다. 그대로 통화를 계속했고…….
그로부터 고작 며칠 후, 윤서경은 병원에 서 있었다.
7시 22분이 되었다.
그 순간 꿈속의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깜빡이자 분명 현실로 겪은 몇 년의 시간이 함축되어 진짜 ‘현실’과 뒤엉켰다.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것부터 다르게 흘러간 기억은 생생한 만큼 혼란스러웠다.
윤서경이 아는 오늘은 아직 결혼식도 올리기 전, 이유온에게 청혼한 날에서 해가 바뀌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기억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다. 결말은 불쾌하고 찜찜했다.
두 번이나 본 이유온의 죽음이 온몸을 새카맣게 태우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주위의 감각이 모호하여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아직 꿈속인 듯했다. 악몽 중에서도 질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꿈이라 확언해 주듯이,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바뀌었다.
눈앞을 본 윤서경은 눈썹을 까딱였다. 이유온이 침대에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여기가 이유온의 방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좀 이상했다. 결혼 후 그의 방을 본 적이 있다. 이곳과 구조며 바깥에 보이는 풍경이 같지만 꾸며 놓은 모양이 달랐다.
큰 물건은 비슷한데, 자신이 본 방에서 장식물 같은 것만 싹 빼 놓은 모습이었다. 가구 따위가 비싸 보이는 것에 비해 침구는 이상하게 수수하다. 초라하다고 할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장식 따위가 아무것도 없어서 비즈니스호텔 방과 비슷하게 보일 정도였다.
왜 방을 이렇게 해 놓고 자고 있지.
몸을 말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자는 이유온의 모습은 어쩐지 불쌍하게 보였다. 머리맡에는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서 있는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대로는 무단 침입한 괴한으로 보일 것이다. 설명할 방법을 고민하며 문 쪽으로 일단 몸을 돌렸다. 들어온 건 이유건이었다. 입을 열려던 윤서경은 그대로 다물었다.
그는 윤서경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유령이라도 됐나? 아니면 역시 꿈이라서 그런 건가.
이유건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침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이유온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이유건은 태연하게 그것을 들고, 잠기지도 않은 대기 화면을 풀었다. 거기에 표시된 건 윤서경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유건의 표정이 구겨지더니, 손을 움직였다. 네, 짧은 답을 보낸 뒤 그는 메시지를 삭제하고 번호를 수신 차단했다.
그대로 휴대폰을 다시 던지고 그는 방에서 나갔다. 윤서경은 방금 자신이 본 게 뭔지 생각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 저 짧은 메시지는 이유온에게 청혼하고 그를 불러낸 날 받은 것과 같았다.
그걸 왜 이유건이 입력하고 있지. 게다가 그 외의 연락할 수단을 차단해 두었다. 메시지는 삭제했고. 이유온의 휴대폰을 집으려 한 순간 윤서경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건지 알았다. 자신은 입체적인 화면 앞의 관객이었다. 화면 안으로는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화면은 충실하게 상황을 보여 주었다. 누운 이유온이 살짝 뒤척이면서 이불이 흘러내렸다.
‘…….’
이유온의 얼굴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역시 이건 호텔 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했던 그날이다. 자신은 지금 이유온의 시점에서 같은 기억을 다시 보고 있었다.
머플러와 모자가 이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리긴 했던 모양이다. 자신이 보고 인상을 찌푸렸던 것보다 훨씬 심한 상처였다. 한두 대 맞은 걸로 이렇게 되진 않는다. 베개 옆에 미처 못 보았던 얼음주머니가 떨어져 조금씩 녹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온은 윤서경을 바람맞힌 그날 윤서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만나자는 말에 대답한 건 이유온의 휴대폰을 멋대로 훔쳐본 이유건이다, 이런 뜻인가?
멍하니 이유온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눈을 깜빡인 순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며칠이 흐른 뒤였다. 눈앞은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유건이 있는 걸 보아 그의 방인 듯했다. 이유온은 그 앞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휴대폰 이리 줘.’
제 사생활임에도 이유온은 이유건의 명령에 고개 한 번 젓지 않고 유순히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유건은 이유온의 것과 자신의 것, 양쪽에 어플을 몇 개 설치했다. 전부 해킹용 프로그램이었다.
그 행동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제 집과 방에서 발견된 그런 류의 물건만 몇 개이며, 먹이려 하던 약은 몇 종류던가. 오히려 이전까지 안 하다 새로 설치한 것 같으니 늦게 시작했다는 감마저 있었다.
아니……. 이유온이 결혼해서 집을 나가게 되어서 그런 건가. 이유온은 중요한 일이 아니면 혼자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가끔 이유온의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가 이제야 필요를 느낀 건지도 몰랐다.
‘남이랑 쓸데없는 연락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휴대폰 깨끗하게 써.’
‘네…….’
‘오늘 약은 다 먹었어?’
‘네, 먹었어요.’
‘약통 가지고 와.’
그러자 이유온은 조르르 제 방으로 달려가선 두 손에 들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약통을 들고 돌아왔다. 전부 탈의실 선반에서 보았던 약이었다.
이유건은 그 약을 한 종류씩 책상 위에 쏟았다. 시선이 가볍게 움직인다. 알약의 개수를 세는 것 같았다. 원하던 개수가 맞았는지 이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온이 약을 그러모아 원래 들어 있던 통에 집어넣었다.
‘……약이 너무 많지?’
돌연 이유건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조마조마한 기색이던 이유온의 얼굴이 그에 풀어졌다.
‘아, 아니에요, 제가, 형……,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이리 와.’
대체 뭐가 죄송한 거지. 멀쩡한 사람한테 약을 저렇게 처먹이는데. 이유온이 다가가자 이유건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유온의 표정이 더 풀어졌다. 좋은 게 아니라, 안 좋은 일을 피해 마음이 놓인 얼굴이었다.
‘이거 하나만 더 먹자.’
이유건이 서랍을 열고 약 하나를 꺼냈다. 저것도 익숙한 라벨이고, 어떤 용도인지 알고 있다. 형질과 관련된 신경계 질환에 사용하는 약이다.
부작용이 커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처방하지 않는다. 선반에서 그 약을 보았을 때는 최소한 의사가 이유온의 몸 상태를 보고 내준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유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서랍에서 약을 꺼내고 있었다.
이유온은 무슨 약인지도 모른 채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이라는 게 제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미 판단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대량의 약을 매일 먹는다면 약물의 위험이나 부작용에 대한 생각은 흐릿해진다. 몸이 부작용에 적응해 그게 어딘가 잘못된 신호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게 될 정도로.
‘지금 두 알 먹어.’
그렇게 말하며 약통을 이유온 쪽으로 밀고, 물 한 병을 내려놓은 이유건은 이유온이 입을 열어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먹었으면 이리 와. 오랜만에 형이랑 이야기 좀 하자.’
‘네…….’
‘연주회 준비는 잘 하고 있어?’
‘그, 그게…….’
연주회라는 말에 윤서경은 머리를 갸웃했다. 피아노 이야기인가? 이유온이 피아노 연주회 같은 것에 나간 적이 있나. 이 무렵이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
‘왜. 연습하기 싫어서? 아무리 한 곡만 치는 거여도 열심히 해야지. 유연이도 네가 게스트로 와 준다고 해서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데.’
‘…….’
‘괜찮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잖아. 잘 치는 곡이고. 형들도, 부모님도 기대하고 있어.’
이유건의 눈길은 온화했다. 얼핏 보면 다정하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눈동자에 숨은 뱀 같은 악의와 교활함은 목소리와 눈웃음으로 감춰지는 게 아니었다.
‘걱정되면, 이따 거실에서 쳐 볼래? 형이 들어 줄게.’
불안하게 눈을 굴리면서도 이유온은 이유건의 태도에 안심한 눈치였다.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이유온에게로 늪의 습기 같은 것이 느리게 가닿았다. 윤서경은 역한 느낌을 받으며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이유건의 체향이 불쾌할 정도로 쏟아져 이유온에게 덮어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온은 온순하고 멍한 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형의 것이라지만 이 상황에 움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베타조차도 알파가 이렇게까지 페로몬을 내뱉으면 주위 공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터였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무방비하게 있다는 건, 이 공기를 아예 모른다는 뜻이다. 감각을 차단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윤서경은 욕설을 내뱉었다. ……약 때문이다.
이유온이 습관처럼 먹은 형질과 관련된 약물. 그게 페로몬과 관계된 기관 어딘가를 망가뜨렸다.
지나간 몇 년의 기억 동안 이유온의 체향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현실에서도, 호텔로 데려온 후 러트가 오기 전까진 아주 희미하게 맡아 본 게 전부였다. 지금 모든 걸 알며 보는 상황에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당시엔 당연히 짐작도 하지 못했다. 고집스러운 거절로 받아들였을 뿐.
두 사람의 대화는 이유건의 페로몬이 이유온을 질척하게 뒤덮은 상태에서 이어졌다. 내용 역시 그냥 들으면 별다를 게 없었으나 자세히 생각하면 아니었다. 이유온을 꽤나 칭찬하는 것 같았지만 의미를 파악할수록 칭찬을 가장한 개소리였다.
이유건은 꽤 한참 이유온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제 몸에서 어떤 향이 나는지도 모른 채 이유온은 유령처럼 흐늘흐늘 자기 방으로 돌아가선, 저녁에 피아노를 쳐 보라는 부름이 있은 후에야 나왔다.
피아노 앞의 이유온은 기가 잔뜩 죽어 보였다. 이유연이 즐거운 얼굴로 빨리 쳐 보라고 재촉했다. 마지못해 의자에 앉은 이유온이 건반에 손을 올렸다. 희고 검은 건반을 터치하는 손은 매끄러웠지만, 긴장한 게 한눈에 보였고 좀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호텔에서 윤서경이 들인 피아노로 쳤던 곡은 대체로 조용했는데 지금 치려 노력하는 건 꽤 속도가 있는 곡이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빠르고 힘 있는 곡이어도 이유온은 열심히 쳤고, 꽤 잘했다.
그러나 곡이 끝나자마자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이유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온. 연습 한 번도 안 했어?’
‘아니요, 했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
‘형이 너한테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지, 유온아.’
‘……죄송해요…….’
이유연이 끼어들었다.
‘뭐야, 나도 기대했는데. 이건 진짜 아니다. 관객들 있는데,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어떻게 내보내?’
‘너무 뭐라고 하지 말렴. 유온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니. 유연이, 다른 게스트 구해 줄까?’
‘됐어요, 엄마. 이제 와서 누굴 구해. 한 곡 정도는 제가 더 칠 수 있어요. 관객들도 내가 치는 걸 좋아할걸?’
이유연이 치는 피아노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그를 가르친 피아노 강사라면 창피해서 어디에 말도 하고 싶지 않을 솜씨였다. 재능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 그런 그가 이유온을 두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됐다.
그러나 저 분위기를 보니 애초에 이유온이 피아노를 배운 건 이런 상황을 위한 일인 듯했다. 그가 피아노를 치고, 가족들이 그의 실력을 비웃고, 그것으로 이유연을 띄워 주기 위해서.
그 사이에 끼어들어 이유온을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윤서경은 그들 사이에 서 있는 것도, 한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 모든 걸 영화처럼 관람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재생을 멈출 수도 없었다.
포커스는 이유온에게 맞춰져 있었다. 이유연의 연주회 이야기로 금방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한 분위기 속에서 이유온은 피아노 앞에 앉은 채 고개만 푹 숙였다.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이유온이 정말 모친 쪽의 혼외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은 화면 안에 나오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건, 집안에서 이유온은 이유건의 화풀이를 위한 도구이자, 이유연의 자신감을 키워 주기 위한 도구라는 사실이었다.
원래는 그러다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상대에게 팔려가듯 결혼하여 집안을 도울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결혼한 후 이 가족이 이유온을 놓아줄 것 같진 않았다. 온전히 도구로 사용해도 불만 한 마디 없고 눈치만 볼 뿐인 인간을 그리 쉽게 포기할 리가.
그러나 예정은 윤서경이 이유온에게 청혼했을 때부터 뒤틀렸다. 윤서경과의 결혼이 점점 현실로 닥쳐오기 시작했을 때 집안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이유온의 부모는 이유연을 앉혀 놓고, 네가 원래 이유온이 결혼하려던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연은 말 그대로 패악을 떨었다. 그는 윤서경 주위를 서성이는 수많은 결혼 적령기 오메가 중 하나였다. 설마 진짜로 결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을 테지만……, 생각했다 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정작 윤서경과 결혼하게 된 건 그토록 무시하던 동생이고 자신은 늙은 알파에게 가야 한다고 하니. 오로지 이유연의 시점에서만 생각하면 날벼락이었다. 그 날벼락 같은 일을 이유온에게 당연한 듯 강요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결혼 준비는 진행되었다.
진행 과정을 이유온의 시점에서 보게 된 덕분에 윤서경은 왜 그가 결혼 전에 그렇게 마지못한 듯,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굴었는지 알았다. 왜 제 연락을 죄다 무시했는지도.
윤서경이 골라서 보낸 물건은 이유온의 손에 닿기도 전에 버려졌다. 이유온은 이유건이 고른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나마도 그걸 이유건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선택을 바꿨다. 윤서경의 연락은 결혼식 직전까지 이유온의 휴대폰으로 전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유온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보며 윤서경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의 형이 이미 죄다 막아 놓았다는 걸 모르고.
이유온은, 형이 가지고 온 온갖 팸플릿을 윤서경의 의견이 닿은 것이라 생각하며 신중하게 골랐다. 그나마 자신이 아는 윤서경의 차림새 같은 걸 머릿속에 그리고 떠올리고 되새기면서.
그렇게 결혼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 * *
‘먹였어?’
이유온을 보자마자 이유연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그때 이유온이 주방에서 앞에 두고 있던 유리병을 말하는 것이었다. 엎어서 버리고는 깨졌다는 핑계를 대며 병과 뚜껑까지 챙겨 갔던 그것. 그게 이유연이 건넨 물건이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온을 보며 그는 예상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네가 어디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어쨌든, 그럼 어떻게 했어. 네가 먹었니?’
‘…….’
‘아니면, 버렸어?’
‘…….’
‘버렸구나?’
속삭이듯이 물은 이유연이 곧바로 손을 들어 이유온의 뺨을 내리쳤다.
‘너 정말 못됐다.’
그 소리에 서재 문이 열리고 이 회장이 나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두 아들들에게 물었다.
‘무슨 소란이야.’
‘아빠, 제가 윤 대표 가져다주라고 한 차가 있었는데, 유온이가 전해 주지도 않고 버렸대요.’
이 회장이 이유온을 보았다. 큰아들과 마찬가지로 뱀 같은 눈빛이었다.
‘유온이, 아버지 방으로 들어와라.’
‘…….’
이유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유건에게 끌려갈 때도 똑같이 겁먹고 벌벌 떠는 모습이었지만, 제 부친의 부름엔 더했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도 저런 표정을 짓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회장이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리자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 이유온을 삼킨 채 서재 문이 닫혔다.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작은 비명 소리가 얼핏 들렸을 뿐이었다. 이유연은 닫힌 문을 기분 좋은 기색으로 보고 있다가 소파에 앉아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유건이 집으로 돌아갔다.
‘유온이 와 있어?’
‘아빠 서재에.’
‘어쩌다.’
‘아, 걔가 내가 준 차 버렸대. 윤 대표 안 주고.’
불쑥 화가 난다는 듯 이유연이 말했다. 이유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쯤 들어갔어.’
‘이제 막. 말리게?’
‘좀 이따.’
‘너무 빨리 들어가지 마. 걔가 혼날 짓 한 거야.’
이유연이 입술을 비쭉거렸다. 앞뒤 사정을 모른 채 들으면 순진하고 귀엽게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이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와 이 회장의 서재 문을 두드린 건 30분쯤 지나서였다.
안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나 싶더니 이유건이 이유온의 팔을 잡고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건 없는데 이유온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고, 눈빛은 죽은 듯 탁하게 흐렸다. 다리의 힘이 풀린 것처럼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네 방으로 올라가고, 오늘은 자고 가. 윤 대표한테 연락해 둘 테니까.’
‘…….’
이유온은 머뭇거렸지만 이유건이 한 번 쳐다보자 흠칫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기다시피 하여 계단 난간을 붙잡고 힘겹게 올라가는 그의 곁으로 이유연이 다가갔다.
‘유온아, 못 걷겠어? 형이 잡아 줄까?’
‘괘, 괜찮아요, 형, 정말 괜찮아요…….’
더 안 좋아질 것도 없으리라 생각한 안색에서 한층 핏기가 가셨다. 이유온은 제 몸을 억지로 질질 끌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결혼 전에 지내던 것보다는 조금 번듯해진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침대로 갔다. 앉았다가 아예 누워 버리면서 멈칫멈칫하는 걸 보면 어딘가 맞은 건 분명한데 겉으로 보이는 게 없다. 그렇게 노려 때리는 것이니 더 악질이었다.
침대에 누운 이유온은 곧 소리를 죽여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닦은 이불이 푹 젖을 정도로 우는 동안 바깥으로 새어 나갈 만큼 큰 소리는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러다, 울음소리를 참느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텅 빈 메시지함을 연 그는 번호 하나를 불러냈다. 윤서경의 것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나하나 글자를 찍었다. 이 내용 저 내용, 몇 글자 쓰고 자꾸 지워 버린다. 그러다 겨우 읽을 수 있는 한 단어를 썼다. 데리러…….
하지만 결국 이유온은 그 이상 쓰지 못했다. 글자를 깨끗이 지우고 휴대폰을 덮어 놓고, 웅크렸다. 그는 그날 밤 본가에서 묵었다.
장면은 끊임없이 흘렀다. 몇 시간 이어지기도, 몇 달을 뛰어넘기도 했다. 분명한 건 이게 그 ‘기억’의 뒷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윤서경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서브텍스트.
이전 과거 속 이유온의 모습이나 가족과의 다른 관계는 알 수 없었다. 온전히 호텔 라운지에서 이후 이유온이 어떤 얼굴을 했으며 무슨 일을 당했는지가 보일 뿐이었다. 간섭도 정지도 하지 못하는 긴 영상이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이유온의 가출 후에 이유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익숙하고 지겨웠다. 집에서 재우겠다는 말에 윤서경이 그러라 끊어 버린 뒤, 이유건은 이유온을 보았다. 그는 너무 맞아 눈이 풀려 있었다.
순순히 이유건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면 그 폭력은 그래도 수십 분 남짓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온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까짓 영양제. 그냥 가지고 왔으면 어차피 알아서 버렸을 텐데.
그 후로도 몇 번 이유온은 가족에게 반항했다. 한 번도 거스르려 한 적 없었던 그의 갑작스런 반발은 그들의 심기를 제법 상하게 했다. 폭력은 점점 집요하고 지독해졌다.
윤서경은 단 한 번도 이유온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했다. 옷을 한 번 걷어 봤으면, 아니, 걸어가는 걸 자세히 보기만 했어도 알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모든 상황은 이유온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다.
집에 다녀온 이유온이 무슨 일인지 윤서경을 찾아왔을 때 윤서경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강한 체향을 맡았다. 이유건의 것이었다. 순간 눈앞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제 것임을 주장하는 듯 지독하고 질척거리는 다른 알파의 체향. 자신과 결혼한 오메가에게서, 이유온에게서.
그 불쾌감, 모멸감, 거북함, 혼란과 신물, 모욕, ……질투, 모든 걸 참을 수 없게 되어 이유온에게 나가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미적거리는 그의 행동을 기다리느니 자신이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뒤에 버려두고 혼자 집을 나섰다.
이유온은 윤서경이 떠난 자리에 혼자 서서 울었다.
부어 오른 손목을 옷 아래 감추고, 아픈 걸 호소하고 싶은데 호소할 사람이 없어서, 윤서경이 야속해서 울었다. 참아도 흘러나오는 흐느낌을 막지 못한 채로. 그러곤 병원에 가는 걸 포기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약을 잔뜩 먹고 누웠다. 밤새 손목이 아파 끙끙거렸다. 윤서경은 그 눈물의 흔적이 다 지워지고 금이 간 그의 손목이 다 나은 뒤에야 집에 돌아갔다.
긴 시간 동안 그는 집에선 윤서경의 싸늘한 태도와 짜증스러운 눈길을 받았고, 본가에서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맞았다. 윤서경은 존재조차 몰랐던 대량의 약물을 계속해서 먹었고 몸은 나날이 약해졌다. 정신은…… 더 약해질 것도 없었다.
가족들이 제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유온은 몰랐다. 그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이유온은, 네가 이런 취급을 받는 건 너 자신 때문이라는, 그게 당연하다는 소리를 계속해서 들었다.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반복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유온은 그걸 옳은 말로 받아들였다. 학대를 그는 제가 잘못하였으니 당연히 받아야 하는 체벌이라 여겼다.
지켜보는 윤서경은 알 수 있었다. 가족들은 이미 무슨 말을 해도 잘못했다고 빌기만 하는, 쉽고 편리한 존재를 사람이 아닌 특별한 재산처럼 여겼다. 온 가족이 한 핏줄답게 악독했다. 이유온은 그런 가족들의 폭력에 힘들어하다가도, 조금만 잘해 주고 웃어 주기만 하면 그 온기에 매달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 아니면 돈 때문이었는지 이유건은 자신이 아는 신문사를 통해 이유온에게 결혼 생활에 대한 인터뷰를 하도록 했다.
이유온은 오랜만에 반항했다. 두 번, 세 번 그럴 순 없다고 말한 결과는 비참했다. 이유건은 녹음기를 든 알파 기자 앞에서 이유온의 옷을 벗기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해 약을 먹였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채를 움켜쥐어 끌고 가, 받아 둔 물에 머리를 처박았다.
차가운 물 때문에 새파래진 채 끌려 나온 이유온은 원하는 대답을 할 때까지 머리를 연달아 얻어맞았다. 그다음은 등이었고, 다음은 배였다. 작은 몸을 때리는 소리가 참혹하게 온 방을 울렸다. 이유온이 벗은 채 휘청거리는 모습을 기자라는 알파는 실실거리며 구경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다 이유건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약이 대체 어떤 종류였는지 약 기운이 물러날 때쯤 이유온은 쇼크로 떨었다. 혀를 찬 이유건이 이유온의 주치의를 불렀다. 링거를 맞으면서도 이유온은 끊임없이 구역질하고, 경련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했다.
그렇게 해서 포털 사이트에 이유온이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그 자체는 덮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한영에게서 소식을 들은 순간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유온을 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형 덕분에 내가 천하의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으니, 어때요. 기분이 좋습니까?’
‘…….’
이유온이 저런 표정이었다는 걸 윤서경은 몰랐다.
형 때문이었냐는 말을 들은 순간 이유온은 고개를 확 들었다. 그 눈에 기대가 깃들었다. 발끝이 조금 움직여 윤서경에게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찰나였다.
‘이유온 씨, 제발……. 내가 당신한테 청혼했던 걸 더 이상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요.’
티끌처럼 작은 기대는 그에게 막대한 절망으로 돌아왔다. 이유온의 입술 사이에서 가느다란 숨이 새어 나왔다.
생명이 내뱉는 마지막 숨결처럼 느껴졌다.
그를 매몰차게 외면한 윤서경의 시야 밖에서 이유온은 쓰러질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가족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폭력의 한복판에 있을 때도,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표정이었다. 뼈가 시릴 정도의 슬픔이고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외로움이었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봐 주지 않았다. 그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어야 할 윤서경조차. 이유온은 혼자였다.
아…….
윤서경은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결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걸 관람하고 있다는 건 맞았다.
그러나 꿈도 무엇도 아니다. 이건 일어난 일이었다. 과거다.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었다.
이유온이 내민 음식을 바닥에 쏟고, 그가 준 물건을 눈앞에서 깨뜨리고, 피아노를 내다 버리고, 머뭇머뭇 방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내쫓고, 단 한 번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전화 너머에서 상대가 뭐라고 말했다. 자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온이 방에 찾아왔다.
알 수 있었다. 여기였다.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구간.
지치고 외로운 얼굴의 이유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병원에 다녀왔다고. 그때는 병원이라는 말도 진력이 났다. 그 식구들이 꾀병으로 윤서경을 오라 가라 한 게 벌써 수십 번이었다. 윤서경은 지긋지긋한 얼굴로 이유온의 말을 잘랐다.
‘그걸 내가 알아야 합니까?’
이유온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불이 꺼지듯, 그의 얼굴은 가라앉았다. 어둡고 캄캄하게. 그를 둘러싼 무언가가 이 순간에 모조리 끊어졌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가 돌아섰다.
이대로 가게 하면 안 된다. 이유온을 이렇게 보내면 안 되었다. 여기서 붙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유온은. 윤서경은 눈앞의, 과거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멍청하게 있지 마.
말해,
가서 미안하다고 말해.
당신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그러나 불쾌한 얼굴로 선 자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유온은 힘없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무언가 쿵 넘어지는 듯한 소리에 통화 중이던 자신이 고개를 들었다.